정채봉(1946~ 2001)
가시
가장 무서운 감옥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림
기도
길상사
꽃과 침묵
꽃밭
꽃잎
나그네
나의 기도
나의 노래
나의 또 다른 얼굴
내 마음의 고삐
냉이꽃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노란 손수건
눈 오는 한낮
눈을 감고 보는 길
당신의 정거장
들녘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지요
만남
맛을 안다
면회 사절
몰랐네
물가에 앉아서
물새가 되리
무지개
미안해
바다에 갔다
바보
빈터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사랑에 대한 나무의 말
사랑은 참 이상합니다
사랑을 위하여
삶에 고통이 따르는 이유
새 나이 한 살
샛별
생명
세상사
수건
수도원에서
술
슬픈 지도
슬픔 없는 사람 어디 있으랴
쌍둥이
알
어느 가을
엄마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오늘
오늘 내가 나를 슬프게 한 일
용현향암기(龍延香庵記)
이해의 손길
인연
중환자실에서
지울 수 없는 말
참깨
첫 길들이기
첫 마음
콩씨네 자녀교육
통곡
풍선
하늘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해 질 무렵
행복
흰 구름
가시
정채봉
장미 나무에
숯불덩이 같은 꽃이 얹히는
아카시 나무에
팝콘 같은 꽃이 확 퍼져 있는
찔레나무에
아기 손톱 같은 꽃이 앙증스럽게 손짓하는
오월
나의 나무는
꽃은 없고
가시만 돋아
가장 무서운 감옥
정채봉
그는 캄캄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벽이었습니다.
문도 없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창이라도 있을 법한데 창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는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주먹으로 벽을 쳐보기도 하고 발로 차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리로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감옥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아아."
그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졌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나오너라."
그는 대답했습니다.
"어디로 나갑니까? 사방이 벽인데요."
"네가 둘러친 벽이면서 뭘 그러느냐?
그러므로 벽을 허무는 것도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언제 이런 감옥을 지었단 말입니까?
나는 결코 이런 무서운 벽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 감옥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라는 감옥이다.
지금 너는 '나'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란다."
"어찌 이런 감옥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너 자신만 아는 너의 이기주의 때문이지."
그는 갑자기 슬퍼졌다.
그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한참 울다가
눈을 떴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광명천지에 우뚝 앉아 있는 자기를 보았다.
그땐 왜 몰랐을까
정채봉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붙들었어야 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림
정채봉
산사의 돌확에
물이 넘쳐서
포갠 하늘조차
넘쳐흐르네
너를 기다리는
지금
기도
정채봉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길상사
정채봉
다닥다닥 꽃눈 붙은 자 나뭇가지를
길상사 스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퇴근하면서 무심히 화병에 꽂았더니
길상사가 진달래로 피어났습니다
꽃과 침묵
정채봉
제비꽃은 제비꽃으로 만족하되
민들레꽃을 부러워하지도
닮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디 손톱만한 냉이꽃이
함박꽃이 크다고 하여
기죽어서 피어나지 않은 일이 있는가
싸리꽃은 싸리꽃대로
모여서 피어 아름답고
산유화는 산유화대로
저만큼 떨어져 피어 있어 아름답다
사람이 각자 품성대로
자기 능력을 피우며 사는 것
이것도 한송이의 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꽃밭
정채봉
하늘나라 거울로 본다면
지금 내 가슴속은
꽃으로 만발해 있을 것이다
너를
가슴 가득 사랑하고 있으니…
꽃잎
정채봉
새한테 말을 걸면
내 목소리는 새소리
꽃한테 말을 걸면
내 목소리는 꽃잎
나그네
정채봉
집에 있어도 집게 가고 싶다
함께 있어도 함께 있고 싶다
떠나지 않아도 떠나온 것 같은
해 질 무렵
나의 기도
정채봉
아직도
태초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
바다를 내게 허락하소서
짙푸른 순수가 얼굴인 바다의
단순성을 본받게 하시고
파도의 노래밖에는
들어 있는 것이 없는
바다의 가슴을 닮게 하소서
홍수가 들어도
넘치지 않는 겸손과
가뭄이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여유를 알게 하시고
항시 움직임으로
썩지 않는 생명 또한
나의 노래
정채봉
나는 나를 위해 미소를 띤다.
나는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나는 나를 위해 꽃향기를 들인다.
나는 나를 위해 그를 용서한다.
나는 나를 위해 좋은 생각만을 하려 한다.
나의 또 다른 얼굴
정채봉
그 전시회의 초대글은 독특하였다.
'당신의 영혼 얼굴을 보고 싶으시거든 오십시오.'
전시회장의 입구에는 깊은 산속 옹달샘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잃어버린 얼굴' 이었다.
그 다음에는 수도 없는 가면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주워 놓은 나날' 이었다.
그 다음 곁에는 마네킹들이 발가벗겨 버려져 있는 그림이 있었고,
그 그림의 제목은 '지금' 이라고 되어 있었다.
2층에는 한 인간의 그림자가 인간을 향해 항의하는 대형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의 제목은'독재자 육체에게 영혼의 저항' 이었다.
그리고 출구에는 거울이 하나 걸려 있었고
그 거울 아래에는
'당신을 보고 있는 신의 표정' 이라고 되어 있었다.
내 마음의 고삐
정채봉
내 마음은
나한테 없을 때가 많다.
거기가면 안된다고
타이르는데도 어느새
거기가 있곤 한다.
거기는 때로
고향이기도 하고
쇼무대이기도 하고
열차속이기도 하고
침대위이기도 하다.
한때는
눈이 큰 가수한테로
달아나는 내 마음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아침이슬에 반해서
챙겨오기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저녁노을
겨울바다로 도망한 마음을
수습하는데도 애를 먹었다.
이제 내 마음은 완전히 너한테 가 있다.
네 눈이 머무는 곳마다에
내 마음 또한 뒤지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의 고삐인 것이다.
네가 자갈길을 걸으면
내 마음도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때가 많을 것이다.
네가 가시밭에 머물면
내 마음도 가시밭에서 방황할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서도
푸른 초원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거기에 있어야 한다.
너는
내 마음의 고삐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냉이꽃
정채봉
어디 손톱만한 냉이꽃이
함박꽃이 크다고 하며
기 죽어서 피지 않는 일이 있는가..
싸리꽃은 싸리꽃대로
모여서 피어 아름답고
산유화는 산유화대로
저만큼 떨어져 피어 있어 아름답다
사람이 각기 품성대로
자기 능력을 피우며 사는 것
이것도 한 송이 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다운 자기 꽃을 지닐 때
비로소,
그 향기가, 그 열매가 남을 것이 아닌가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노란 손수건
정채봉
병실마다 밝혀 있는 불빛을 본다
환자들이 완쾌되어 다 나가면
저 병실의 불들은 꺼야 하겠지
감옥에 죄수들이 없게 되면
하얀 손수건을 건다던가
병실에 환자들이 없게 되면
하늘색의 파란 손수건을 걸까
아니, 내 가슴속 미움과 번뇌가
다 나가서 텅 비게 되면
노란 손수건을 올릴까 보다
눈 오는 한낮
정채봉
그립지 않다
너 보고 싶지 않다
마음 다지면 다질수록
고개 젓는 저 눈발들
눈을 감고 보는 길
정채봉
내가 지금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듯이
누군가가 또
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세요?
그 사람 또한 나처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가슴에
잔잔한 파도결이
일지 않던가요?
사랑은 참 이상합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어지게 하거든요.
당신의 정거장
정채봉
우리는 정거장에서 차를 기다린다.
기다리던 사람을 맞이하기도 하고 아쉬운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거장은 우리들 눈에 보이는 정거장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정거장을 통해 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정거장에 나가 맞아들이고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을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
희망, 보람, 도전을 맞아들인 사람은 탄력이 있다.
절망, 권태, 포기를 맞아들이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한테는 주름으로 나타난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레일에서 기쁨은 급행이나 슬픔은 완행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찬스를 실은 열차는 예고 없이 와서 순식간에 떠나가나,
실패를 실은 열차는 늘 정거장에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정거장에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돌아오지 못한다. 누구이건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택하여야만 한다.
행복이냐, 불행이냐, 기쁨이냐, 슬픔이냐, 성공이냐. 실패냐.
그러나 모두들 행복과 기쁨과 성공을 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에 열차는 왔다가 탄환처럼 사라진다.
어떠한 순간에도 정신을 놓치지 않는 사람,
꽃잠이 오는 새벽녘에도 깨어있는 사람,
작은 꽃 한 송이에도 환희를 느끼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맞이할 수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정거장은 수평선이나 지평선 너머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현재의 당신 가슴 속에 있다
들녘
정채봉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지요
정채봉
스님, 하늘빛과 물빛이 시릴 만큼 푸른 가을날의 아침입니다.
이 맑음 속에서 안녕하옵신지요?
지난여름은 저한테 빈 계절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냥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들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서늘바람이 겨드랑 밑을 파고들자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녘에 내려와 있습니다. 가을 해변의 길손이 되어 한 며칠 떠돌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해수욕객들이 떠나 버린 쓸쓸한 해수욕장에 들렀습니다. 한 번쯤 빨래를 했으면 싶은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있자니 모래능선에 빈 목을 내놓고 있는 소주병이 허무한 옛사랑인 양 외로워 보이는군요. 저는 눈을 돌려 좀더 먼데를 봅니다.
아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만일 어떤 선사께서 절더러 이 바닷가에 온 뜻을 말해 보라면 저는 저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을 가리키고 싶습니다. 저 바위섬에 파도결이 내놓은 수많은 상흔처럼 저 또한 세파에 부딪치면서, 그리고 더러는 자해에 의해 빗금져 있는 마음의 상처를 소금물에 적시고 싶어 왔노라고요.
스님, 정말이지 저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섬을 닮고 싶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찾아주셨던 병상에 있었을 때 저는 참 많이도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었지요. 때때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이제야 솔직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병실에, 그것도 중환자실에 있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얼마나 생각 자체가 괴로운 것인지를.
생각으로 죽음을 짓고 생각으로 지옥을 이루기도 합니다.
생각에 의해 이별을 하며 눈물짓고, 생각에 의해 오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이런 번뇌가 잠을 쫓아 버린 새하얀 날밤의 고통은 육신의 아픔보다도 더하더군요. 그러기에 사람들은 생각의 빈 집인 마음을 숨겼다고도 하고, 마음을 빼앗겼다고도 하며 마음을 잃었다는 표현도 하는 것이겠지요.
스님, 언젠가 저는 아흔 살이신 피 선생님을 찾아뵙고 이런 속내를 펴보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제 마음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
그러자 평생 그만큼 순수하게 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던 선생님께서 "정 선생,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 줄 수가 없어서 그렇지 천사의 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위섬에 파도 자국이 없을 수 없듯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빗금 하나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처럼 아린 상처나 덧나지 않게 소금물에 씻으며 살 수밖에요.
오늘은 제 넋두리가 길어졌습니다. 소슬한 가을바람 탓이라고 생각하시고 미소로써 저의 무안을 씻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내 청안 누리시기를 빕니다
만남
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맛을 안다
정채봉
눈물 젖은 밥맛을 안다
잠깐 눈을 붙인 단잠 맛을 안다
혼자 울어 본 눈물 맛을 안다
자살을 부추기던 유혹 맛을 안다
1분, 1원, 그 작은 단위의 거룩한 맛을 안다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사람 맛을 안다
면회 사절
정채봉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오지 마라
내 이대로 너를
사모하게 하라
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나의 수의는 너의 사랑
한 벌이면 된다
아직은 절망하기 싫다
아직은 소유하고 싶다
면회사절을 할 수 있는 것도
살고 싶기 때문이다
꿈길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지 마라
나는 지금 너에게로 가는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몰랐네
정채봉
시원한 생수 한 잔 주욱 마셔보는 청량함
오줌발 한 번 좔좔 쏟아보는 상쾌함
반듯이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보는 아늑함
딸아이의 겨드랑을 간지럽혀서 웃겨보고
아들아이와 이불 속에서 발싸움을 걸어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클어져서 달려보는
아, 그것이 행복인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네
이 하잘것없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깊고도 깊은 말씀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네
무지개
정채봉
첫눈이 듣던 날
받아먹자고 입 벌리고 쫓아다녀도
하나도 입 안에 듣지 않아
울음 터뜨렸을 때
얘야,
아름다운 것은 쫓아다닐수록
잡히지 않는 것이란다
무지개처럼
한 자리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어 보렴
쉽게 들어올 테니까
나이 오십이 되어
왜 그날의 할머니의 타이름이
새삼 들리는 것일까
물가에 앉아서
정채봉
나 오늘 물가에 앉아서
눈 뜨고서도 눈 감은 것이나 다름없이 살았던
지난날을 반추한다
나뭇잎 사운대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었고
꽃잎 지는 아득한 슬픔 또한 있었지
속아도 보았고 속여도 보았지
이 한낮에 나는
마을에서 먼 물가에 앉아서
강 건너 먼데 수탉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나처럼 지난 생의 누구도 물가에 앉아서
똑같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강 건너 먼데 수탉 우는 소리에
귀 기울였을 테지
나처럼 또 앞 생의 누구도 이 물가에 앉아서
강 건너 수탉 우는 소리에
회한의 한숨을 쉬게 될까
바람이 차다
물새가 되리
정채봉
내가 죽어서
다음 몸을 받는다면
물새가 되겠다
흙한테는 미안하지만
물에서 하루치를 벌어
하루를 사는
단순한 노동자가 되고 싶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오늘의 작은 만족에 훨훨 날며
비록
겨울날 맨발로 얼음위를 걸으며
부리로 얼음을 쪼지만
그 누구를 원망도 시기도 하지않는
하얀 물새가 되고 싶다
그리움이야 멀리 바라보며 피우는 꽃
강 건너 흙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나는
죽어서 다음 몸을 받는다면
기꺼이
물새가 되겠다
미안해
정채봉
장끼가 까투리를 만났다.
둘은 이내 사랑에 빠졌다.
장끼는 까투리와 함께
새들의 사제인 올빼미를 찾아갔다.
장끼가 말했다.
"저희는 결혼하고자 합니다.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올빼미가 물었다.
"둘이 다투어 본 적이 있는가?"
장끼와 까투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올빼미를 쳐다보았다.
"심하게 다투어 본 적이 있느냐고?"
장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투다니요?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니까요."
올빼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진정으로 한바탕 다툰 일이
있은 다음에 둘이서 다시 오게.
그때 가서 자네들의 결혼을
허락할 것인지 결정하겠네."
까투리가 대답했다.
"다투면 헤어지는 거지,
결혼은 왜 합니까?"
장끼와 까투리가 떠나고 난 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산비둘기가
올빼미한테 물었다.
"왜 다투어 보고 나서 오라고 하십니까?
결혼은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사제 올빼미가
먼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못지 않게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지.
함께 사는 데는
'사랑해'라는 말보다도
'미안해'라는 말이 더 중요하다."
바다에 갔다
정채봉
바다에 가서 울고 싶어
결국 바다에 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서 있는 것처럼
그냥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정채봉
잠든 아기를 들여다본다
아기가 자꾸 혼자 웃는다
나도 그만 아기 곁에 누워 혼자 웃어 본다
웃음이 나지 않는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웃음이 나지 않는다
빈터
정채봉
훌잎 기우는
소리조차 듣는 것은
널 향한 내 가슴이
빈터이기 때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정채봉
모든 사람들을 좋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셔요
노력해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해야 한다는
욕심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지 마셔요
모든 이가 당신을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랍니다
내가 마음을 바꿀 수밖에는
사랑에 대한 나무의 말
정채봉
소녀가 나무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들려다오."
나무가 말했습니다.
"꽃 피는 봄을 보았겠지?"
"그럼."
"잎 무성한 여름도 보았겠지?"
"그럼."
"잎 지는 가을도 보았겠지?"
"그럼."
"나목(裸木)으로 기도하는 겨울도 보았겠지?"
"그럼."
나무가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나의 대답도 끝났다."
사랑은 참 이상합니다
정채봉
내가 지금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듯이
누군가가 또 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세요?
그 사람 또한 나처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가슴에 잔잔한 파도결이 일지 않던가요?
사랑은 참 이상합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어지게 하거든요.
사랑을 위하여
정채봉
사랑에도
암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
삶에 고통이 따르는 이유
정채봉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밖에 없다.
새 나이 한 살
정채봉
한 살
새 나이 한 살을
쉰 살 그루터기에서 올라오는
새순인 양 얻는다
썩어 문드러진 헌 살 헌 뼈에서
그래도 남은 힘이 있어
올라온 귀한 새싹
어디 몸뿐이랴
시궁창 같은 마음 또한 확 엎어 버리고
댓잎 끝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 받아
새로이 한 살로 살자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벌거숭이
그 나이 이제
한 살
샛별
정채봉
고요히 한강을 건너는
전철의 맑은 불빛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아직 샛별은 스러지지 않았다
전철을 타러 부지런히 강둑 위를 걷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 별빛이 잠시 앉았다 간다
전철을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샛별에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눕는데
간호사가 또 내 피를 뽑으러 온다
내 피야 미안하다
나를 사랑했던 내 피야 잘 가라
나를 용서하고
저 새벽별의 피가 되어 쉬어라
생명
정채봉
비 갠 뒤
홀로 산길을 나섰다
솔잎 사이에서
조롱조롱
이슬이 나를 반겼다
"오!" 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만 이슬방울 하나가
툭 사라졌다
세상사
정채봉
울지 마
울지 마
이 세상에 먼지 섞인 바람
먹고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세상은
다 그런 거야
울지 말라니까
수건
정채봉
눈 내리는 수도원의 밤
잠은 오지 않고
방안은 건조해서
흠뻑 물에 적셔 널어놓은 수건이
밤사이에 바짝 말라버렸다
저 하잘것없는 수건조차
자기 자신 물기를 아낌없이 주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켜켜이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송이도 되지 못하고
수도원에서
정채봉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
개울가에 앉아 있었네
개울물은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쉼도 없이 앞다투지 않고
졸졸졸
길이 열리는 만큼씩 메우며 흘러가네
미움이란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술
정채봉
내가 미워서
술을 마셨다
내가 다시 불쌍해
술을 마셨다
남몰래
울며 잠든
밤이 많았다
슬픈 지도
정채봉
사랑하는가?
눈물의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슬픈 지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백두산 천지에서
정채봉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쌍둥이
정채봉
사랑이 일어나자
고통이 일어났다.
사랑이 주저앉자
고통 또한 주저앉았다.
사랑이 눕자
고통도 누웠다.
사랑이 살며시 일어났다.
고통도 살며시 일어났다.
사랑이 참다못해 말했다.
"제발 날 따라오지 마. 너 때문에 내가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듣는단 말이야."
고통이 대답했다.
"너와 나는 쌍둥이인걸.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너도 포기해야 하는 거야."
둘은 인간마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사랑을 맞아들인 사람들의 가슴은 이내 고통에 일그러졌다.
어떤 사람은 고통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아예 사랑 맞기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직
사랑의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사람한테서만
사랑이 완성되었다.
알
정채봉
지구는 알이다
사랑이 낳은
알
그래서 모든 사랑의 알들은
둥글다
지구처럼
어느 가을
정채봉
물 한 방울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 아침에는
새하얀 서리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엄마
정채봉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불었다가
간간이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오늘 - 사랑의 이삭줍기 노래
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밤하늘에 별들을 세워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오늘 내가 나를 슬프게 한 일
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못했네.
목욕하면서 노래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운 사람을 생각했었네.
좋아서 죽겠는데도
체면 때문에 환호하지 않았네.
나오면서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용현향암기(龍延香庵記)
정채봉
그 벼랑에 있는 바위를 가리켜 '자살바위'라고 불렀다.
사연 많은 사람들이 그만 사연을 중단하고자
그 바위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곤 했던 것이다.
어느날 깊은 상처를 가진 젊은이가 이 바위를 찾아왔다.
젊은이는 바위 위에 않아서 마지막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젊은이의 눈에 휴지 한 장이 띄었다.
젊은이는 휴지를 주워 들었다.
그것은 어떤 책의 낱장으로 이런 대목이 적혀 있었다.
'이빨고래류 가운데 향유고래가 있지.
이고래는 소화가 잘되지 않아서 평생을 앓고 사는데
바로 이 때문에 죽을 때는 용연향(龍延香)이라는
기막힌 향을 남기고 죽는 거야.'
"평생을 앓고 사는 고래...
용연향을 남기고 죽는 고래..."
마침내 젊은이는 발길을 돌렸다.
후일, 이 '자살바위'에 스님 한 분이 와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스님은 '자살바위'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되돌려 보내는 일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벼랑의 바위는 그대로 있으나
'자살바위'라는 이름은 없어졌다.
대신 아담한 암자가 한 채 전해져 오는데
그 암자의 이름이 '용연향암'이다.
이해의 손길
정채봉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쉬울지도 몰라요.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하여서는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을 읽어 주셔요.
그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당신의 따뜻하고 참된
'이해의 손길'이
어둡고 가팔진 산길에서도
사랑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길눈'이 되어 줄 거예요.
인연
정채봉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없어진 것도 아닌
행복한 것도 아닌
너와 나는 다시 약속한다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중환자실에서
정채봉
탁자 위
맑은 유리컵에 담긴
물이 자꾸 먹고 싶어
입을 벌리다가
나는 내 육신이 불쌍해졌다
주인을 잘못 만나
이 무슨 고생인가
나는 내 육신에게 진정 사과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울 수 없는 말
정채봉
마술사로부터 신기한 지우개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이 지우개로는 어떠한 것도 다 지울 수 있다. 딱 한 가지만 빼고는."
그는 지우개를 가지고 신문을 지워 보았다
세계의 높은 사람들 얼굴을
그리고 말씀을
그러자 보라 정말 말끔히 지워지고 없지 않은가
그는 신이 났다
그림책도 지우고
사진첩도 지웠다
시도 지우고
소설도 지웠다
그는 아예 사전을 지워버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지우개로 아무리 문질러도
다른 것은 다 지워지는데
한 단어만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문지르고 문지르다
마침내 지우개가 다 닳아지고 말았다
그와 그 지우개가
끝내 지우지 못한 단어는 이것이다
"사랑"
참깨
정채봉
참깨를 털듯 나를 거꾸로 집어들고
톡톡톡톡톡 털면
내 작은 가슴속에는 참깨처럼
소소소소소 쏟아질 그리움이 있고
살갗에 풀잎 금만 그어도 너를 향해
툭 터지고야 말
화살표를 띄운 뜨거운 피가 있다
첫 길들이기
정채봉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창을 열고 푸른 하늘빛으로
눈을 씻습니다.
새 신발을 사면
교회나 사찰에 가는 길에
첫 발자국을 찍습니다.
새 전화기의 녹음은
웃음소리로 시작합니다.
새 볼펜의 첫 낙서는
'사랑하는'이라는 글 다음에
자신의 이름 써봅니다.
새 안경을 처음 쓰고는
꽃과 오래 눈맞춤을 합니다.
첫 마음
정채봉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 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 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콩씨네 자녀교육
정채봉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콩 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다.
통곡
정채봉
죽음을 막아서는
안타까운 절규
"안 돼!"
온몸을 던져서 막아서는
여인
그러나 죽음은
그 어떤 사정도
명령도 듣지 않고
무표정히
갈 길을 간다
풍선
정채봉
불어야 커진다.
그러나 그만.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옆 사람보다 조금 더 키우려다가
아예 터져서
아무것도 없이 된 신세들을 보라.
하늘
정채봉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진리도 낮은 데로 흐른다
하늘이 높은 데 걸린 것은
최고의 낮은 터이기 때문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정채봉
쫓기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꼭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해 질 무렵
정채봉
바람에 몸을 씻는 풀잎처럼
파도에 몸을 씻는 모래알처럼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헹구고 싶다
지금은 해질 무렵
행복
정채봉
행복의 열쇠는
금고를 여는 구멍과 맞지 않고
마음을 여는 구멍과 맞습니다.
흰 구름
정채봉
오는 줄 모르고
오고
가는 줄 모르고
가고
천천히
바래어져 버린
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