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상(1903~1982)
가고파
가람의 무덤을 찾아
가윗날에
갈림길에서
감로수(甘露水)
강둑에 주저앉아
개나리
거울 앞에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黑雲吐嶺)
계월송(溪月頌)
고석정(孤石亭)
고전(古殿)의 밤
고지가 바로 저긴데
고통과 부활
고향 생각
곡성첩(哭城堞)
공초 먼 길을 가다
관덕정(觀德亭)
관음사(觀音寺)
구정(球庭)
귀해심(歸孩心)
그대 대답하시오
그리움
그리워
그 집 앞
근심 없는 마을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을 바라보며
금강귀로(金剛歸路)
기도는
기봉(起峰) 위에 서서
기원(祈願)
길이 끝났네
꿈 깬 뒤
나무의 마음
나발 부는 사나이
나의 조국 나의 시
낙화
낙화암
내수점로중(內水岾路中)
노돌(鷺梁津)
농부된 어부
눈보라 치는 밤에
달
달맞이꽃
답우(答友)
당신과 나
대
돌아오지 않는 다리
동해의 아침 해
두견새와 다람쥐
땅의 자서전
마지막 드리는 노래
마천루
만월대
만폭동팔담가(萬瀑洞八潭歌)
맑은 시냇가에서
매월당의 예각을 보고
매화
매화사(梅花詞)
맹서(盟誓)
멱
못 깨는 생각
물과 피
박연(朴淵)
밤
밤비 소리
백결선생을 읽고
백로의 낙원
백비(白碑)
배사장의 발자국
봄 처녀
비로봉(毘盧峰)
비봉폭
비 속의 능선
사랑
산 언덕을 넘으며
산(山) 위에 올라
산전(山田)을 지나며
산 철쪽, 산 난초
삼개에서
삼월
삼태동(三台洞)을 지나며
새 농막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새 지도를 그려본다
서시(序詩)
선죽교(善竹橋)
설마령(雪馬嶺)
설야음(雪夜吟)
성불사(成佛寺)의 밤
소경 되어지이다
수렴동
스승과 제자
슬픈 행장
신록 속에 서서
신의 체온
쓸쓸한 저녁이다
아레스! 멀리 가라
양산가의 고장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옛 강(江)물 찾아와
옛 동산에 올라
옛 38 경계선 비문
오륙도(五六島)
오수(午睡) 아닌 오수(午睡)
옥녀봉
옥류동(玉流洞)
웃고 피는 도라지꽃
원혼들의 호소
유방 고지
이 마음
일기
인생(人生)
임진강(臨津江)을 지나며
자하동(紫霞洞)
장안사(長安寺)
저주의 서해
절름발이
젊은 넋들
제물의 자서전
좁은 산길
죽음의 강 나루터
지구촌
진달래
천지송
칡꽃 마을 이야기
태자궁지(太子宮址)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판문점
편양선사전(鞭羊禪師傳)을 읽고
포은구거(圃隱舊居)
푸른 하늘의 뜻은
한 겨울만 더 지나면
한밤과 새벽의 어귀에 서서
할미꽃
해골과 구두짝
해당화
향로봉 위의 기도
화원(花園)
횡보천고(橫步千古)
6월의 회상
가고파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든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데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나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處子)들 어미 되고 동자(童子)들 아비 된 사이
인생(人生)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 들어 죄없은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福)된 자(者)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夕陽)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거나 깨끗이도 깨끗이
가람의 무덤을 찾아
이은상
옛집에 옛 뜻을 지녀 옛 사람처럼 사옵다가
세상이 지루턴가 눈을 문득 감더니만
흙이랑 풀이랑 쓰고 얼굴마저 가렸구려
집 뒤 아기 대밭 대밭 너머 무덤이라
잠깐 뒷방으로 옮겨 누우신 건가
이따금 기침이라도 하면 귀를 돌릴 자리에
님 심은 산수유 백목련 앙상한 가지 끝에
봄바람 불어오면 꽃 피고 잎 퍼지리
저 뒷날 찾아오는 이 슬픈 생각 더 하리
가윗날에
이은상
가을 들 마르는 풀 바람에 흔드는데
반계(半溪) 단풍(丹楓)은 석양에 타는구야
천리객(千里客) 이내 상혼(傷魂)을 뉘게 말씀하리오
북산(北山)에 홀로 올라 누누중총(累累衆塚) 바라보니
가위라 군데군데 곡(哭) 소리 슬프도다
우리 님 누우신 산(山)을 멀리 그려 우노라
유자(遊子)의 돌아감이 기약조차 없노왜라
천리(千里) 향사(鄕思)를 남산(南山) 어이 가리는고
타산(他山)에 뿌리는 눈물 더 쓰린 줄 아소서
뫼와 물 바랄수록 자란 마슬 보고지고
세파(世波)에 불릴수록 님 그리움 쌓이건만
이제야 어느 분 뫼려 옛 땅 찾아가리오
님은 가오시고 기억(記憶)만 남기도다
정녕히 못 오시면 기억(記憶)마저 걷으소서
철철이 더한 쓰림을 어이 몰라 하신고
동봉(東峯)에 달이 솟아 마슬길을 비취나다
중추(中秋) 야흥(夜興)을 사람마다 겨워할 제
어떠타 외로운 한 사람은 눈물 못 금(禁)하나니
아실 이 누구신고 이 가슴 내 진정(眞情)을
천행루(千行淚) 만곡가(萬曲歌)론들 어이 능(能)히 표할손가
상월(霜月)이 죽창(竹窓)에 드니 잠 못 이뤄하노라
시름 잊자 취(醉)한다니 못 믿을 말이로다
잊으려 잊을진댄 님 여의다 슬플 것가
낙엽(落葉)이 어즐은 밤은 더 못 잊어하노라
산(山) 마슬 깊은 밤을 뜰에 가득 달이로다
마음을 둘 데 없어 사립 열고 나와 선 제
귀뚜린 누구를 그려 저대도록 우나니
머문 곳 이러이러 갈 곳은 어드메오
석화(石火) 일생(一生)이 어이 이리 괴로운고
삼경(三更)에 비가(悲歌)를 불러 만리한(萬里恨)을 붙이노라
갈림길에서
이은상
체온도 지탱하기 어려운
이 음산한 고난의 땅
역사의 실패한 땅에서
일어서야 할 민족이기에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찾아
우리 갈 길을 가야 한다
인류의 역사 위에
수많은 의인들이 걸어간
거룩한 피와 눈물이 밴
진리와 아름다움의 길
그 길이
너무도 또렷이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 재산
기원과 봉사와 희생
거기 영생의 길이 있네
험하고
가파로와도
오직 그 길만이 사는 길!
너와 나, 식어져버린
가슴 속의 사랑의 피
그 피 다시 끓이면
거기 화사한 장미꽃 피고
눈부신
부활과 영광의 길
우리 앞에 열리리라
감로수(甘露水) - 마의태자가 이 물을 마셨다고 전한다
이은상
우리 님 이 물에 와서 타신 입을 축이시다
천년에 또한 후손 같은 입을 적시노라
감로수 아니 마름이 유심한가 하노라
감로수 차고 단들 타고 쓴 입 고치올까
행여나 어떠하리 마셔보나 부질없다
이보다 더 찬물 없다니 그를 설워 하노라
미워라 감로수야 우리 님을 속였으리
애닯다 감로수야 오늘 또한 날 속여다
두어라 시절로 난 병이니 넌들 어이 하리오
강둑에 주저앉아
이은상
문득 보니 미국 병정
총 들고 길 앞을 막네
미군의 담당구역이라
통행증을 보이라 하네
남한 쪽
분계선 안에서마저
자유 없는 이 지역!
산도 내 산이요
강도 내 강인데
날더러 그 누구 앞에
무슨 증표 뵈란 말요
강둑에
주저앉아서
목을 놓고 울어버린다
지지리도 못난 주인아
네 강산 보기가 부끄러우냐
정녕 부끄럽거든
고개 숙이고 지나가렴
말 없이
돌장승처럼
눈 내려감고 서 있는 사람
언덕에서 내려다 뵈는
악마의 골짜기 군사분계선
옛날엔 남북으로
기차 다니던 정거장 자리
레일은
우거진 잡초 속에
가로누운 채 잠들었고
녹슨 레일 위에
괴물 같은 저 기관차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울어
이 적막한 하늘 못 흔드느냐
지금 곧
북으로 북으로
냅다 한 번 달리자꾸나
개나리
이은상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거울 앞에서
이은상
나는 분명(分明)히 나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자(者)다. 슬픔이 있어도 기쁜 듯이. 괴롬이 있어도 편한 듯이. 못나고도 잘난 듯이. 약(弱)하고도 강(强)한 듯이.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어도 이것 저것이 다 범상(凡常)한 듯이. 이리하여 가련(可憐)한 나의 삶이 나를 끄을고 간다. 그러나 다만 한때―벽(壁)에 걸린 거울을 보는 그때 만은 내 얼굴 내 마음 내 그림자가 너무나 소연(昭然)하여 속이지 못하는 정직(正直)한 내가 되는 것이다.
거울 속 저 사람아 바로 뵈는 저 사람아
잘나나 못나나 간에 이제야 바로 너로구나
무삼 일 너 아닌 너로 너인 듯이 사나니
저와 남 다 속이는 이런 곳에 왜 사는고
안 속고 안 속이는 그런 세상 어디온지
있다면 천리만리(千里萬里)라도 거기 가서 살과저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黑雲吐嶺)
이은상
이름조차 험한 산 고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구름이 장막처럼 몸을 휩싸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세기의
종말을 고하는
선지자의 선언과도 같이
진실! 진실을 잃어버리면
거기는 캄캄한 지옥
허위의 얼굴을 대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지구가
온통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는 오늘이다
여기 불타고 말라 죽어
잎사귀 하나 없이 헐벗은 나무
인간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고 서 있는 것 같아
경건히
그 십자가 아래 서서
속죄의 기도를 올린다
방향을 잃은 인간들
허위적거리는 발등에
차라리 이 순간
뇌성벽력이라도 쳤으면 싶다
주춤 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올려다보는 심정이여!
계월송(溪月頌)
이은상
뒷시내 흐르는 물 여흘여흘 옥(玉)소리를
네 소리 들을 제면 만단고(萬端苦) 쓸리나니
꿈에도 들리오시라 부대 들리오시라
맑은 물 흰 돌 위에 희영청이 밝으신 달
내 가슴 덮은 그늘 다 열어 주시나니
꿈에도 비치오시라 부대 비치오시라
하늘 땅 온갖 것이 다 흩어져 없어지고
나마저 쉴지라도 청계명월(淸溪明月)은 남기과저
만고(萬古)에 흐르고 밝아 긏지 마으시라
고석정(孤石亭)
이은상
아름다 와라 절경 한 구역
예부터 이름난 고석정
물은 깊어 검푸르고
골은 돌아 몇 굽인데
3백 척
큰 바위 하나
강 복판에 우뚝 솟았네
위태론 절벽을
다람쥐? 기어올라
갈길도 잊어버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뜻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총 닦고 칼 씻던 곳이라기
소석정 외로운 돌아
오늘은 아직 너 쓸쓸하여도
저 뒷날 많은 사람들
여기 와 평화의 잔치 차리는 날
낯 익은
시인은 다시 와서
즐거운 시 한 장 또 쓰고 가마
고전(古殿)의 밤
이은상
삼궁(三宮) 가오신 뒤에 몇 세월이 지내연고
봄바람 좌전에 불고 밝은 달 우각에 드네
지금에 이집 주인은 너이인가 하노라
춘당을 바라보니 봄빛은 왔건마는
경춘전 닫힌 창엔 거미줄만 얽혔구나
화랑을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옛꿈을 잊자하여 명정문 벗어나니
옥천교 밤바람에 마음 다시 구슬퍼라
고전도 꽃속에 든 양 우수 더욱 깊더라
* 고전(古殿) ; 여기서의 고전(古殿)은 창경궁을 말함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고통과 부활
이은상
이 고통 아프다 말라
차라리 값진 고통이다
발로 짓밟고 눈 얼음 쌓여도
새 싹 움트는 밀알과 같이
믿어라
의심치 말고 믿어라
우리에겐 분명히 부활이 있다
길이 끝났다 말라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길
철조망 장벽 앞에서
우리 갈 길을 보았다
열어라
살육의 광야에서
부활의 길을 뚫어라
통일과 사랑 이뤄지는 날
자유와 평화 도로 찾는 날
탁류에 휩쓸려 가는
인간의 양심 회복하는 날
거기에
민족과 인류가 되살아나는
영광의 부활이 있다
고향 생각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 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 가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개를 수그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요
배 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기뭉기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곡성첩(哭城堞)
이은상
어져 이 토석(土石)아 무삼 일 서 있더니
풍마(風磨) 우세(雨洗)로 부질없이 삭단 말가
흙덩이 발끝에 채어 마저 깨어지더라
백악(白岳)에 높이 올라 만보장성(萬步長城) 둘러보니
분주(奔走) 반천년(半千年)이 한가(閑暇)한 꿈이로다
꿈이야 꿈일지언정 우일 꿈을 짓다니
공초 먼 길을 가다 - 시인 공초 오상순 형의 영 앞에
이은상
고독은 그의 지기 공허는 그의 동반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침묵의 법문 외우면서
영원한 미소를 띠고 공초 먼 길을 가다
칠십 년 인연 집착 단숨에 뱉어버리고
해달과 별들 빛나는 금보장 세계를 찾아
신비의 궁전 속으로 공초 먼 길을 가다
운무 자욱한 속에 주인은 간 곳 없고
"아시아의 밤" 시지 조각 바람에 펄럭일 뿐
달려와 빈상을 만지며 선화한 공초를 그리다
관덕정(觀德亭)
이은상
관덕정 올라서니 자남산에 낙엽인데
해 지는 황성 위에 까마귀만 나는구나
호화턴 전조풍류는 어느 곳에 남은고
관음사(觀音寺)
이은상
나월봉 솔밭 넘어 지는 달빛 푸르른데
저 속 어느 골서 냇물 소리 들려오네
옛절에 잠못 이는 손이 혼자 배회하노라
새벽 찬달 아래 정향 없는 이내 걸음
임천 석로에 영자 아니 쓸쓸한가
날 끄어 지팡이 소리 깊은 골로 들더라
* 관음사 : 북한산 일선사의 옛이름
구정(球庭)
이은상
수우피(水牛皮) 봉(棒)을 들고 마류구(碼瑠球) 치올 적에
장전(帳殿) 소고(簫鼓)는 천지를 흔들랏다
백마(白馬)의 미쳐 나는 양을 보는 듯이 느껴라
채의(彩衣)를 떨쳐입고 행구(行球)하던 저 무사(武士)야
광명동(廣明洞) 흐르는 물 물따라 어이 간고
황천(黃泉)에 누워 있어도 예 못잊어 하리라
창검(槍劍) 부러지고 향등(香燈)도 꺼진 뒤에
남북(南北) 구정(球庭)이 이랑이랑 밭이 되어
석양(夕陽)에 찾아온 손을 울려 돌려보내더라
귀해심(歸孩心)
이은상
길가에 두세 아이 소꼽질에 즐기나다
무심코 지나든들 마음 이리 아프리오
옛날이 눈앞에 보여 발 머물고 서노라
가든 길 돌아서서 그 문 앞에 다가서니
돌밥에 사긔ㅅ국이 고기도곤 부러워라
어드메 누구 살림이 저만하다 할소냐
다시는 저런 살림 차려보지 못할런가
풍우(風雨) 삼십 년(三十年)을 울어보나 부질없다
이 봄도 또 간다 하니 눈물겨워하노라
그대 대답하시오
이은상
가물에 시들어진 옥잠화(玉簪花) 두어 잎새
물 주고 비 나리면 다시 살아날 것이오
아이는 물 뜨러 보내고 나는 하늘 바라오
저보 바람결에 파초(芭蕉)닢 찢기었소
찢어진 저 잎사귀 붙이는 풀 없는지요
처져서 마르는 반(半)닢 어이할 길 없구료
외롭고 쓰린 내 맘 어느 것에 비기올꼬
시들은 옥잠(玉簪)이랄까 찢어진 파초(芭蕉)랄까
아니오 나는 모르오 그대 대답하시오
그리움
이은상
누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백천(百千) 길 바다라도 닿이는 곳 있으리만
님 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수록 깊으이다
하늘이 땅에 이었다 끝있는 양 알지 마소
가 보면 멀고 멀고 어늬 끝이 있으리오
님 그림 저 하늘같애 그릴스록 머오이다
깊고 먼 그리움을 노래 위에 얹노라니
정회(情懷)는 끝이 없고 곡조(曲調)는 짜르이다
곡조(曲調)는 짜를지라도 남아 올림 들으소서
그리워
이은상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 님은 아니 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가슴엔 그대 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매다 가네
그 집 앞
이은상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읍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 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갑니다
근심 없는 마을
이은상
여기 한 고요한 마을이 있다 이름을 물으니 『무수촌(無愁寸)』!
동구나무 아래 그넷줄 매고 마을 아이들 그네를 뛴다
무수촌! 근심 없는 나라 근심 없는 세계가 그립다.
그 곁에 풀밭 잔디 하 좋아 막대 던지고 발 뻗고 누워
흰 구름 둥실둥실 떠흐르는 하늘 바라보느라니
포근히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잠이 들 것만 같다.
자연은 인간의 어머니 그 품에서 나고 자라고
자연은 인간의 무대 그 속에서 일생을 살고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고향 그리고 돌아가는 곳
인간은 잠깐이지만 자연은 영원한 것
저기 무슨 사심이 있나 무슨 사욕이 있는가
아무런 거짓도 꾸밈도 없어 그래서 자연은 영원한 것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과 하나가 되라
그것만이 인간을 살리는 길 파멸의 현대를 건지는 길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배반하여 죄악의 세계를 만들었기에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이은상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운무(雲霧) 데리고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홍진(紅塵)에 썩은 명리(名利)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 몸이 스ㅣ어진 뒤에 혼(魂)이 정녕 있을진댄
혼(魂)이나마 길이 길이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생전(生前)에 더러인 마음 명경(明鏡)같이 하과저
금강(金剛)을 바라보며
이은상
금강(金剛)이 저기로다 구름 밖에 저기로다
꿈인지 상해[眞]런지 그림인지 실상(實相)인지
알고도 모를 것이야 금강(金剛)인가 하노라
바쁜 양 몸은 아직 먼 곳에 있건마는
마음은 언제 벌써 금강(金剛) 중에 들었구나
만이천(萬二千) 구구층층(區區層層)이 낯익은 듯하여라
금강귀로(金剛歸路)
이은상
금강(金剛)이 무엇이뇨 돌이요 물이로다
돌이요 물일러니 안개요 구름일러라
안개요 구름이어니 있고 없고 하더라
금강(金剛)이 어드메뇨 동해(東海)의 가이로다
갈 제는 거길러니 올 제는 흉중(胸中)에 있네
라라라 이대로 지켜 함께 늙자 하노라
기도는
이은상
요란한 거리에서도 눈 감고 듣느라면
당신의 음성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이 아침 우유빛 구름 너머로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움 속에 자리잡은 당신은 나의 여신상
그러나 나는 언제나 당신과 만납니다
기도는 어머님과 만나는 단 하나의 통로외다
기봉(起峰) 위에 서서 - 햇볕 아래 오르고 비 속에 돌아오다
이은상
정방산(正方山) 가운데 두고 이백리(二百里) 두른 벌판
벼 향기 무륵무륵 향적불국(香積佛國) 여기로다
이게 다 내 것 아닌가 왜 모르고 울던고
벌 건너 하늘 밑에 월하산(月下山)이 아득한데
아! 장(壯)할시고 비 몰려 오시는 경(景)
어서 와 날 뿌려 주소 먼지 씻어 주시오
이 좋은 기봉(起峰) 위에 장막들을 지어 두고
양식(糧食)에 주린 이 자연(自然)에 주린 이들
번갈아 모시어다가 배부르게 하과저
기원(祈願)
이은상
가난한 내 마음 집에 오직 한 개의 보배
오, 내 사랑 - 내 거룩한 임의 초상
그이밖에 내 생명 직혀줄 이 없고
그이밖에 내 생명 던져 위할 이 없네
그러길래 내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다만 그이 앞에 바치고 맹서하노니
임이 내 몸과 마음 다 써주신다면
참으로 저 하늘보다 내 영광 더 높으겠네.
그러나 어이하리 내 사랑 내 생명의 길에
의심과 욕과 불행한 운명이 가로막아
거미줄 같은 근심이 가슴에 얽혀
그를 내게서 멀리 가게 하랴나
새벽하늘에 기우는 달빛 우르러
저 깊은 숲속에서 울어새는 버꾸기같이
언제나 꿈속에서도 그로 인하야
내 가슴엔 피와 함께 슬프 눈물 고이네
가벼운 물거품 같은 내 목숨이기
힘없이 그대로 곧 꺼지랼 때,
내 사랑의 고갯길 너무 험하야
지치어 어이 넘으랴 돌아설 때
어느 땐 스스로도 원망스러이
그토록 저도 몰래 사랑의 채찍에 맞아
돌아서던 걸음 되돌아서 앞으로 더 빠른 줄을
오직 내밖에 보는 이 없고 아는 이도 없네.
외로운 기러기 푸른 강 갈밭머리에 나려
마시도 먹고 않고 호올로 근심에 여위듯이
창머리에 직혀앉아 내 사랑 그리움에
슬픈 생각 겹겹이 쌓여 눈물지다도
때때로 자른 막대에 몸을 맡기어
이 강물 저 언덕 곳곳이 고요한 곳 찾아
임 향한 나의 사랑 다시금 불태움도
오직 내밖에 보는 이 없고 아는 이도 없네
먼바다를 떠도는 구름같이, 무심한 구름같이
한세상 저구름같이 떠가려 하다가도
구지 내 생각에 임이 날 꾸지심 같해
포구로 돌아오는 배처럼 임의 품으로 찾아들고
물가에 난 이름 없는 풀잎같이
돌아보는 이 하나 없어도 맑은 물만은 스쳐 가듯
나는 약하고 어리석고 볼 것 없어도
임의 사랑에 내 몸 적시움 그만이 소원
마르는 나뭇잎같이 저 누른 나뭇잎같이
근심에 조여 타는 듯 잦아드는 가슴
임의 사랑 내 몸에 배여들지 못하도록
서리라 찬바람 두 사이 칼질하여도
저 구름 뒤에 숨겼으나 없어지지 아니한
언제나 제자리에 빛나는 금성과도 같이
보면 분명 거기 있는 내 하나뿐이신 님
손들어 날오라 고요히 부르시네
바늘 우에 누운 듯 찌르는 나의 잠자리
그리고 서고 앉아도 핍박의 가시
그믐밤 보다도 더 어두운 내 다니는 길이
그러나 다만 임 생각하면 거기마다 내 편안히 쉴 곳
내가 그를 탐탐히 그리고 사랑할제
조약돌 가시밭보다 더 쓸쓸한 마음 동산에
송이송이 노래와 우슴의 꽃 피어나고
범나비 넘노는, 전에 못 본 행복의 나라 열리네
황혼이 그날그날 시간을 삼킬 적에
내 자른 목숨 도막도막이 빼앗기고
거기 산도 물도 세상의 온갖 것이
따로나 들지 않는 것 없을지라도
그러나 다만 내 생명의 어느 시간, 그 시간이
사랑과 믿음과 바람으로 찾을 적에
그 시간의 토막만은 뉘라서 악아가랴
영원히 어디서나 야광주보다 빛나는 내 생명의 구슬이매
아침에 산에 오르면 솔잎마다 맺힌 이슬
그 이슬 임의 눈물 내 손에 받아
먹음어 힌 포도주같이 거기 취하야
<나는 임의 것>이라 호올로 외오치고
밤이면 염주 들고 수없이 헬 때
알알이 임의 음성, 또 거기 보이는 임의 얼굴
손모이고 바치는 내 사랑의 기원
그것은 오직 <잘되거라> 비는 애타는 생각
내 사랑의 불꽃 나를 태우고
재 되어 임의 앞에 제물로 내 몸 놓일 적에
내 영혼은 오히려 그 재 속에서 노래하리니
내 즐겁고 꽃다운 일생 노래하리니
길이 끝났네 - 동해안 휴전선 철조망 마지막 말뚝을 붙들고
이은상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꿈 깬 뒤
이은상
임술년(壬戌年․1922) 5월 한양(漢陽)에서 병(病)을 얻어 마침내 어느 병원(病院)의 구석방에 외로이 앓는 몸을 누이게 되었다. 입원(入院)한 지 삼주간(三週間)이 지난 6월 5일의 밤 기이(奇異)하고도 고마운 꿈은 오히려 깬 뒤에 더한 적막(寂寞)을 남기고 사라졌다.
온 날을 앓은 몸이 잠을 겨우 이뤘는데
꿈속에 어인 님이 진달래를 병에 꽂아
상(床) 맡에 가만이 놓시고 웃고 돌아가누나
누은 몸 문득 놀라 그 보고 하온 말이
당신이 누구완대 이 꽃을 내게 주오
병실(病室)을 잘못 드셨소 나는 아니오이다
내게는 이런 이 없소 있을 리(理)도 없으니다
외치다 깨어 보니 혼자 던져 누웠구나
눈 돌려 꽃 찾는 마음 더욱 쓸쓸하여라
나무의 마음
이은상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 쉬고 뜻이 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꺾으면 눈물 흘리죠
꽃 피고 잎 퍼져 향기 풍기고
가지 줄기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은 찾아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쳐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고 자라나
집집이 기둥 들보 되어주지요
나무는 사람 마음 알아주는데
사람은 나무 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은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나발 부는 사나이
이은상
새벽마다 뒷산에 올라 나발 부는 사내가 있다
마을을 내려다 보며 나발 부는 사내가 있다
아침내 그칠 줄 모르고 안타까운 곡조로
가시밭에 불을 질러 옥토를 만들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가자고 넘어야만 한다고
마을을 내려다보며 나발 부는 사내가 있다
나의 조국 나의 시
이은상
나는 가난한 사람
그러나 나는 가멸한 사람
누가 날 가난하다는고
내 가슴 속은 보지 못하고
내게는
보배가 있다
나의 조국
나의 시
낙화
이은상
지난 밤 드샌 곳이 개화산 밑 마을인데
오늘 아침 건너는 곳 낙화진 나루라네
인간의 흥망 성쇠도 하룻밤 사이로구나
지난 날 이 지역 낙화진 전투에서
남북한 젊은 군인들 죄 없는 몇 천 명이
꽃보다 아까운 청춘을 낙화처럼 떨구었었네
남쪽마을 북쪽마을 꽃들 천 송이 이천 송이
때아닌 폭풍우에 물에 지고 들에 지고
구트나 어느 마을 꽃이더냐 그건 물어 무엇하오
낙화암
이은상
낙화암 벼랑 위에 서면 무늬져 흐르는 숨소리
금빛 햇살 아래 저 모래톱아 백마강 물아
네 살갗 찰싹 맞닿으면 두근거리는 내 가슴
산유화 남은 가락이 바위 틈 어디 젖어 남아
향긋한 풀 내음 같은 상기도 가시지 않은
애틋한 백제의 입김 맡아지는 게 있다
청옥배 술잔같이 나라 쟁강 부숴지던 날
삼천 궁녀 제비처럼 날아 강하늘을 수 놓던 모습
그거사 한 폭 명활네 오늘도 그 빛깔 안 바랬네
옛 사람과의 대화야 절벽처럼 굳어졌어도
역사야 휘휘츤츤 칡 덩굴인 양 엉겼구나
물따라 어제는 가도 내일이 또 물 따라 오네
뱃전에 지혀 앉아 강물을 찰싹이면
떨어져 손에 잡히는 고란사 쇠북소리
치보면 오월의 새 버들빛 눈이 부시네 눈이 부시네
내수점로중(內水岾路中) - 백화담(白華潭)을 넘어서며
이은상
물 모여 소이 되고 소이 넘어 내이로다
청류를 좋이 여겨 발 못 떼고 섰노라니
계풍이 행인을 불러 유곡으로 들이더라
노돌(鷺梁津)
이은상
차중(車中). 차(車)가 한강철교(漢江鐵橋)를 지나자 어느 한 분이 바깥을 가리키며 `저기가 노돌이오' 하매 다른 한 분 놀라 보며 하는 말 `아! 역사(歷史) 깊은 노돌이지' 하는지라.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나 나는 문득 이 노래를 속으로 읊어 드렸다.
노돌이 여기란다고 놀라 보는 저 길손아
오백년(五白年) 옛 풍류(風流)를 어느 곳서 찾으리오
모래요 강물뿐이니 그냥 지나가시소
농부된 어부
이은상
철조망 바로 안에서 논갈이하는 농부가 있네
본시는 철조망 바깥 강마을 어부였더니
억지로 쫓겨 들어와 서투른 쟁기를 들었다 하네
「배를 버리라기에 언덕 넘어와 논을 갈지요
찔레꽃 가물에 모내기조차 어렵구료
오늘도 옛 강이 그리워 철조망 밖을 내다본다오」
철조망 바깥 강마을 옛집 몇 십 년 풍우에 터만 남았고
언제나 돌아갈는지 기약조차 모르면서도
밭 가에 새로 얽은 농막에 정든 그물 그대로 걸어두었네
바라보니 산과 산들 피어오른 연꽃송인 듯
강물은 포도주같이 맑고 푸르게 넘쳐 흐르네
자연이 이리도 아름답기에 사람들 죄가 더 미워지네
눈보라 치는 밤에
이은상
내 방도 차건마는 여기는 방인 것이
그 어린 거―지들 어데서 이 밤을 새노
따뜻한 물 한 그릇이나마 못 먹었으면 어이나
옥(獄) 속에 갇힌 이들 이 밤 어이 지나시노
찬 마루에 눕는 몸이 매맞지나 않사온지
눈보라 창 치는 소리에 가슴 덜렁하여라
달
이은상
그 언제 님의 아호 "月"자 넣어 지어 주고
지금도 달을 바라면 그 님 생각합니다
소식이 끊이오매 안부를 알 길 없어
저 달로 점 치는 줄은 님도 아마 모르시리
흐린 달을 보면 무삼 걱정 계시온가
내 말도 깊은 구름에 싸이는 줄 압소서
하마 밝아졌나 창밖을 보고 또 보고
새벽만 환하시오면 그제 안심합니다
어느 땐 너무 밝아 너무 밝음 밉다가도
그 기쁨 생각하고서 다시 축복합니다
달맞이꽃
이은상
여기 이슬 머금은 샛노란 달맞이꽃
극락이 이런 데러냐 너무도 화사하구나
자연은 포도주 같은 것 뒤에사 알았다
답우(答友)
이은상
길에서 고우(故友)를 반가이 만난지라 내 부끄러움 없이 우거(寓居)하는 토실(土室)로 뫼셔 왔더니 그이 돌아가 후일(後日)에 글을 보내어 내 토실(土室)의 좁고 누(陋)함을 심히 근심하여 주기로 내 이에 두어 장(章) 노래를 적어 그에게 답(答)하니라.
세존(世尊)은 거리 돌아 걸식(乞食) 아니 하셨는가
인자(人子)도 한 평생을 머리 둘 곳 없었나니
내 이제 드는 데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강산(江山)을 둘러보소 내 집 없는 아우 형(兄)들
등 지고 서로 헤쳐 가시는 양 보옵시오
해 진 뒤 돌아올 곳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당신과 나 - 조국에 바치는 노래
이은상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쩌면 이리도 조용할까요
수정 같은 하늘에
달도 졸고 있습니다
이 밤도
나는 엎디어
당신의 이름을 외웁니다
당신은
내 면류관이요
내 기도요
내 노래입니다
그리워 바라보다
다시 보면 내 자신입니다
이 순간
당신과 나는
분명 둘 아닌 하나입니다.
대
이은상
대숲에 바람 부는 소리
한밤에 눈 지는 소리
백운산 찬 달 아래
거닐다 문득 서서
대처럼
굽히지 말자
다짐하던 옛 기억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이은상
판문점 언덕 아래 길게 놓인 다리 하나
기구하게도 가운데를 끊어 분계선이 지나갔기에
절반은 남쪽 것이요 다른 절반은 북쪽 것일레
이 다리를 건너만 가면 다시 못 오는 다리이기에
다리 이름조차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으로 끌려간 8만여 명 울며 건너간 갈랫길!
이 다리를 건너면서 흘리고 간 숱한 대화들
가슴에 사무친 원한 녹음처럼 새겨져 있어
지금도 귀에 들리는 쓰리고 아픈 목소리들!
깨어진 지층 위에 너, 내던져버린 공간이여
다람쥐들이 씹다 남긴 너, 지워버린 시간이여
역사의 비바람 속에 말라가는 해골이러냐
애타게 그리면서 못 만나는 것 사람뿐이랴
민족의 큰 소원, 큰 경륜 인류의 큰 평화, 큰 행복
꼭 굳이 이 다리 위에서 그 모두를 만나야 한다
여기 이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까 왜 망설이나
참과 거짓의 마찰과 충돌 멸망과 구원의 대립과 대결
눈물이 해일처럼 넘쳐 이 다리를 떠내려 보내자
동해의 아침해
이은상
어둠은 아직 짙다 하여도 새벽이 오면 동은 트고야 말리
동햇가 미명의 언덕 위에 발돋움하고 바라보며
더 멀리 더 높은 곳을 향해 새 증언을 기다리는 마음!
아직은 짙은 안개와 구름으로 머리 위를 무겁게 누르는 하늘
빛 속에서 어둠을 보듯이 어둠을 뚫고 빛을 보는 눈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황금빛 햇살을 받아들이자
살육과 공포에 사로잡혀 무덤속 같이 어두운 여기
이 인욕의 땅에 부활의 종소리 들려 오려나
평화를 잉태한 새 날의 언약인가 돋아오르는 저 아침햇살!
동해는 푸른 바다 아침 햇빛 눈부신 푸른 바다
흰 갈매기 날개조차 물에 잠기면 푸른 물 들고
혈관 속 돌아가는 피조차 푸른 물결로 변할 것만 같네
푸른 물결이 호흡과 함께 몸뚱이 속으로 드나들어
내가 동해 속에 있고 동해가 내 속에 들어와
탐욕에 그을고 시달린 창자마저 깨끗이 빨아야지!
썩지 않는 진리의 말씀 젖줄기처럼 받아 마시며
차라리 호사스런 낙원보다 괴로운 내 조국 더 사랑하고
한 마음 오직 고지식하게 태양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수평선 위를 바라보라 눈부신 영광의 아침해
오색 찬란한 광채를 놓으며 위대한 영웅처럼 돋아오른다
환희에 휩싸인 순간 내 입에선 새 노래가 흘러 나온다
『동해의 해돋이는 이 땅 겨레의 상징이다
우리들의 정열과 의기로 철조망 장벽을 불태우고
승리를 찬양하는 붓으로 인류의 자서전을 다시 쓰자』고
두견새와 다람쥐
이은상
뺏고 빼앗기며 강물처럼 흘렸던 피들
오늘은 자취도 없이 다 말라버린 기다란 능선
나 혼자 높은 재 바위 끝에 서서 싸우던 벌판 둘러본다
구름 엉긴 깊은 골짜기 천년 역사를 지닌 옛절터
물은 흐르고 길은 있는데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치열한 산악전에서 불타버린 폐허다
큰 스님들 1천년 전통 어디 가 물어볼꼬
사자후 외치던 설법 바람 소리뿐 들을 길 없고
숲속에 두견이 울며 제 울음소리나 듣고 가라네
「대덕들 아침 저녁 무상한 진리 외쳤건마는
중생들 미련하여 깨닫지 못하기로
이렇게 폐허를 만들어 보여까지 주시니라」고
또 한 곳 바라보니 저긴 옛날의 요정자리
분냄새 풍기던 기생아이들 노래하고 춤추던 곳에
오늘은 늙은 농부 한 사람 소 몰고 와 풀을 뜯기네
비단 치맛자락 잘잘 끌고 다니던 넓은 뜨락
여인들 아양 떨던 모습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다람쥐 마른 나무 등걸 타고 숨바꼭질을 한다
땅의 자서전
이은상
신은 사람을 지어 신의 입김을 불어 넣었다
사람은 땀을 흘려 땅을 숨쉬게 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고동 소리 들린다
뜨거운 햇볕 비와 바람 구슬 같은 땀에 젖어
땅은 언제나 부푸는 꿈과 보람
풀 나무 온갖 곡식들 땅의 자서전이다
마지막 드리는 노래 - 외솔 최현배 박사 영 앞에
이은상
고난도 파란도 많은 이 땅에 오셔 칠십칠 년
얼, 말, 글, 겨레의 성벽 한 몸으로 지키시더니
붓 놓고 입 다무시고 어디로 멀리 가시옵니까.
바람 찬 거친 들에 뚜벅뚜벅 걸어간 자취
사람은 가고 없어도 발자국만은 뚜렷하구려
이 길로 가야 한다고 일러 주신 노정표외다.
나라 잃은 그 시절에도 조국의 말과 글과 같이 살았고
원수의 발에 짓밟혔어도 불사조처럼 되살아났소
그 이름 겨례의 역사 위에 금글자로 새기오리다.
총칼이 물불이 못 굽히던 님의 지조
애타시던 그 고생 대신 영광을 받으옵소서
관 위에 태극기 덮고 꽃이랑 얹어 보내옵니다.
해마다 솔씨 떨어져 자라난 다복솔 보소
생전엔 외솔일더니 인제는 외롭지 않소
새 솔밭 돌아다보며 웃고 가시옵소서
마천루
이은상
서울 거리에는 마천루 고층 건물
방방이 절벽이요 위아랫층이 딴 세계다
모두들 누구를 위해 무슨 비밀을 짜는고
오늘 따라 차가운 북풍 살을 에일 듯하이
그늘진 뒷골목으로 떨며 지나가는 가난한 선비
상 찡긴 겨울 하늘이다 눈이 내리지 싶다.
만월대
이은상
어허 옥루금궐 그 장엄 어떻드니
장엄을 묻지마소 섰든지 안 섰든지
우습다 만세기초가 그만이고 말드니
제왕은 어느분고 장상은 누구이니
궁아 옥안은 어느 산에 흙이 된고
반천 년 지극한 영화 물을 곳이 없애라
봉련 다니신 길에 구르나니 낙엽이오
생가는 끊어지고 바람만 암아 부네
행인아 공대추초를 헤쳐 무엇 하리오
만폭동팔담가(萬瀑洞八潭歌)
이은상
우서(右序)
흐르고 맺히고 감돌고 굽이치고
솟고 질리고 고이고 넘쳐나고
꺾이어 만번도 더하니 만폭동인가 하노라
우흑룡담(右黑龍潭)
일곡은 어드메오 꼬리치는 저 흑룡아
이 좋은 운산에서 너만 혼자 놀단말가
물어도 대답이 없이 제 흥 겨워 하더라
우비파담(右琵琶潭)
이곡은 어드메오 비파의 맑은 소리
선악을 듣고 서서 청흥을 겨워할 제
천인에 수만송백도 우줄우줄 하더라
우벽하담(右壁霞潭)
삼곡은 어드메오 벽하가 나는구나
담 아래 앉았으니 인간 만사 잊을소다
날 같은 번뇌객들은 부디 왔다 가시소
우분설담(右噴雪潭)
사곡은 어드메오 분설하는 양이로다
무슨 일 눈을 뿜어 그칠 줄을 모르는다
한 많은 손의 가슴을 식혀주려 하노라
우진주담(右眞珠潭)
오곡은 어드메오 진주를 굴리시네
백진주 청진주 오색진주 예 있으니
세상에 그까짓 부귀야 흙에나마 비기리
우귀담(右龜潭)
육곡은 어드메오 고개든 돌거북이
천만 년 청계성에 취토록 취하고서
그나마 흥을 못 채워 취하려 하나니
우선담(右船潭)
칠곡은 어드메오 돌에 잠긴 돌배로다
이 경개 버려두고 어디가 뜬다하리
내 뜻도 그런 줄 아오메 아니 뜰가 하노라
우화룡담(右火龍潭)
팔곡은 어드메오 화룡이 소리친다
동천이 하좋으니 창해를 잊었구나
행인도 광흥을 못 이겨 바위치며 가더라
맑은 시냇가에서
이은상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가슴 스미는 맑고 찬 기운
이리도 깨끗한 여기서 피비린내를 풍기다니
아무리 무자비한 전쟁이기로 이런데서야 왜 싸우던고
친함도 성김도 없이 은혜도 원수도 없이
싸우다 말고 총 서로 놓고 냇물에 발 담그고 앉아
손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바꿨어야 할 여기서
수정보다 더 맑은 시냇물 졸졸 꽐꽐 흐르는 냇물
가슴 속의 울분과 원한 이 냇물에 흘려 보내고
이 순간 다만 빈 가슴으로 시냇물 소리만 듣고 앉았다.
산굽이 감도는 시내야 피 흘려 싸우던 그 시내지만
물은 오늘 따라 새로 흐르는 맑은 냇물
가슴도 어둡던 그 가슴이지만 생각은 보람찬 새 생각일레
나는 시냇물처럼 내 길을 가고 싶다
강 되어 절벽을 만나면 떨어졌다가 다시 솟고
여울목 백 번 만나도 백 번이고 굽이쳐 가고
매월당의 애각을 보고
이은상
백룡담 바윗돌이 굳해 어이 붉읫한고
님 여읜 피눈물이 방울방울 배었나니
피 고인 눈으로 보니 더욱 붉어 뵈더라
매월의 예든 길이 어디어디 어디런고
바위에 새긴 글만 비바람에 들어 있어
그날의 한 깊은 뜻을 혼자 지녀 있더라
매화
이은상
늙고 묵은 등걸 거칠고 차가와도
속 타는 붉은 뜻이 터져 나온 한두 송이
열사의 혼이라기에 옷깃 여미고 본다.
매화사(梅花詞)
이은상
1
바람이 상기 싸늘해 다정한 햇살이 그립다
차라리 애처로와 가지를 꼬옥 잡아 보면
어느새 혈관 속으로 배어드는 백매향
2
보면 차가와도 심장이 더운 꽃이다
전생의 기억 몽롱해도 예서 만날 걸 기약했던가
귀 대고 긴긴 이야길 들어 보는 홍매화
3
내 가슴 슬픈 이랑에 한 그루 심어 놓고
달빛 흐르는 밤이면 조용히 서 보는 마음
청매자 한 알을 따서 입에 물고 거닌다.
맹서(盟誓)
이은상
자비(慈悲)가 님의 뜻이 희생(犧牲) 또한 님의 뜻이
내 몸은 죽사와도 남 도와 사올 것이
님께서 이 길로 예시오니 나도 따라 가오리다
썩어질 몸이어늘 영화안락(榮華安樂) 무엇이뇨
불의(不義)엔 침 배앝고 향기(香氣)로이 살았어라
내 일생(一生) 이 뜻을 지켜 님의 뒤를 이으리다
멱
이은상
닭은 쭉지를 털며 모래에 멱을 감고
까마귄 날아 올라가 바람에 멱을 감고
사람은 인정과 사랑에 멱을 감는가 보다.
못 깨는 생각
이은상
자다가 문득 일어 그 이 생각 부질없다
잠은 깨옵는데 이 생각은 왜 못 깨나
못 깰 줄 알았더라면 본시 아니 들 것을
그 양자 보이며는 눈감고 지나옵고
그 소리 들이올 젠 귀 가리면 그만이나
머리에 이는 생각은 무엇으로 막을꼬
물과 피
이은상
강 따라 거슬러 오르면 남북 마을 겨우 2천 미터
건너다 보니 북한 군인들 바위 깨고 동굴 파고
애닯다 얼마나 싸우려는가 언제까지 싸워야 하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건만 피보다 진한 것 사상일런가
사상 앞에는 부자도 없고 형제도 없다하네
그래서 울며 싸웠고 싸우면서 울었더니라
이 강을 오르내리던 고기잡이배들 다 어디 가고
배 한 척 그림자도 얼른거리지 못하는 곳
지난 날 여기 있던 어촌 집들 쓸어버린 듯 다 없어졌네
사람 없는 빈 강이라 물고기야 살찌건마는
강을 잃은 주인이라 사람들은 여읜다 하네
이것이 누구 죄러냐 쓰다 달다 말아라
남을 탓하기 전에 제 살 꼬집으며 울어야 한다
우는 것만으로 끝나잖는 일 입술 깨물며 다짐해야지
진실이 승리하는 날까지 고난과 시련 달게 받자
박연(朴淵)
이은상
불타는 홍엽(紅葉)길에 분별 없이 취(醉)한 몸이
청애(靑靄)로 깨고 나니 앉은 곳이 범사정을
어느새 그리던 선경(仙境)을 저도 몰래 들었더라
성거산(聖居山) 가을 저녁 검고 붉고 누르러고
산(山) 넘어 긴 하늘은 쪽 푼 듯이 푸르른데
떨어진 흰 빛 한 줄기 박연(朴淵)이라 하더라
눈을 날리시나 구슬을 굴리시나
바람을 이루시고 구름을 피우시나
안개와 연기에 싸여 아무 그ㅣㄴ 줄 몰라라
암학(岩壑)에 나린 폭포 선악(仙樂)을 아뢰올 제
유인(遊人)은 소매 들고 사장(沙場)에 나리놋다
송백(松栢)도 풍류(風流)를 알아 그냥 섰지 못하더라
물 나린 푸른 벽(壁)에 위태히 선 저 노송(老松)아
어드메 땅이 없어 구태 거기 심겼느뇨
우리도 심산절경(深山絶景)을 찾아왔소 하더라
야폭경(夜瀑景) 더 좋으이 오르는지 나리는지
우렁찬 물소리도 우에선지 아래선지
다만지 천도용궁(天都龍宮)이 이로 이어졌더라
지화자 달이로다 구룡산령(九龍山嶺)에 달이로다
물만도 족(足)한 것을 달이조차 오르시네
구을다 송림(松林)에 앉으며 같이 놀자 하더라
이 폭포(瀑布) 은하(銀河)라니 아마도 옳은 말이
바위에 올라 앉아 고모담(姑姆潭) 굽어보니
명월(明月)도 은하(銀河)를 못 잊어 함께 내려 왔더라
물 아래 저 용낭(龍娘)아 옥(玉)저 부는 님 데리고
달 밝은 이런 밤에 나와 논들 어떠하리
아마도 진객(塵客)을 끄는가 하여 돌아갈까 하노라
이 승지(勝地) 찾아 들며 바삐 오던 저 사람아
돌아서 가는 걸음 어이 저리 더딘게오
청형(淸馨)이 성관(城關)에 남았기로 넘지 못해 그리노라
밤
이은상
검은 박쥐떼같이 밤은 날개를 펴고
회한은 파도같이 일어 가슴 기슭을 부딪는다
수묵색 짙은 안개 속에 외로운 나의 항로여!
옥문인 양 닫혀진 가슴 적막은 빙산처럼 쌓이고
추억이란 한 모금 한 모금 쓰디쓴 약맛 같구나
바위냐 고목 등걸이냐 멍하니 앉은 모습이여.
산에는 이 한밤에도 부엉이가 밤을 샐거다
우리도 쪼그리고 앉았다 나랑 겨울밤이랑
모두 다 잠을 잃어버린 슬픈 족속들이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설움에 두 눈을 그예 적시고야 마나
세월의 파편을 안고 밤이 역겨워 내다본다
지금쯤 산 너머 어디 태양이 솟고 있을거다
밤비 소리
이은상
천하(天下) 뇌고인(惱苦人)들아 밤비소리 듣지 마소
두어라 이 한 줄밖에 더 써 무엇하리오
백결선생을 읽고
이은상
옛날에 백결선생 낭산 아래 막을 매고
아내와 마주앉아 굶주리고 살면서도
즐거운 거문고 소리 끊일 줄이 없더니라
앞집은 방아찧고 뒷집에선 다듬이질
있다는 그네들은 근심 걱정 도로 많아
이 세상 어이살까나 한숨 못 꺼 하더니라
풋나물 입에 넣고 괴로워 마올 것이
누더기 몸에 걸고 부끄러워 마올 것이
진실로 마음 곧 편하면 무얼 부러 하리오
백로의 낙원
이은상
뱃머리 북으로 돌려 강 기슭 타고 오르노라니
사람은 못 들어가는 분계선 강 복판에
백로들 몇 만 마리가 깃들여 사는 섬이 있다.
울창한 푸른 숲에 눈빛 같은 백로떼들
이 나무 저 나무 가지마다 앉아 날고
미움도 거짓도 없는 저기 태고의 세계가 있다.
총소리 끊어진 곳에 자유와 평화의 나라
순결한 사랑의 세계 백로의 낙원이 있다
여기서 피 흘린 이야길랑 잊어버리고 말자.
백비(白碑)
이은상
보련산 깊은 산골에 벙어리 성자가 있다
흔들며 물어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영원한 침묵의 설법을 가슴으로 듣고 간다
백사장의 발자국
이은상
언덕 밑 바닷가에는 저녁 조수 밀려들고
백사장 여기저기 조그마한 발자국들
아침에 아랫마을 아이들 게 잡으러 왔더라네
이윽고 총 멘 병정 놀라 달려와 꾸짖는말
여기 함부로 들어가 발자국을 내면 안 돼
어떻게 간첩들 발자국과 분간한단 말이냐
제 마을 바닷가에서 게 한 마리도 못 잡는 여기
아무도 없는 빈 백사장에 아이들조차 못 노는 여기
두 뺨에 쏟아지는 눈물 거둘 길이 없구나
요만한 자유마저 뺏어간 자가 누구냐
이, 조그마한 평화조차 못 누리는 우리들이
누구랑 큰 자유 큰 평화를 무슨 염치로 의논하랴
적막한 강 위의 분계선 배 한 척도 못 다니는 곳
오늘 밤 조수가 밀리면 저 발자국마저 쓸려 버리고
차가운 별빛과 바람만이 어둠 속을 방황하리라
봄 처녀
이은상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비로봉(毘盧峰)
이은상
비로봉(毘盧峰) 오르는 길은 `금(金)서들'이라 부르는 푸른 이끼 앉은 돌무더기와 `은(銀)서들'이라 부르는 흰 이끼 앉은 돌무더기로 되었는데 `서들'이란 말은 `뢰(磊)'의 뜻이며 혹 이를 `사다리'라고도 하니 이는 `서들'의 와(訛)일 것이나 밟고 오르는 층계(層階)라는 뜻으로 보면 그 역(亦) 무방(無妨)하다.
금(金)길 은(銀)길 밟고 올라 상청궁(上淸宮)에 높이 서니
일성(日星) 운한(雲漢)과 벗하는 오늘이라
천풍(天風)은 무수(舞袖)를 날리며 몸 가으로 돌더라
백운대(白雲臺) 여기로다 청벽(靑壁)을 만지노라
팔황(八荒) 운물(雲物)이 발 아래 다 깔리니
내 몸이 어디 섰는지 분별(分別) 못해하노라
비봉폭
이은상
태초에 하느님이 옥류 청계 만드시고
짓궂이 외봉을 내려 동천을 맡기시니
그 봉이 제짝을 그려 다시 날아 오르더라
오르다 돌려 보곤 하 좋아 못 떠나고
떠 있어 울어 천만년에 폭포가 되옵더니
사람이 그 소문 듣고 와 비봉이라 이르더라
비 속의 능선
이은상
흩뿌리는 궂은 비 맞으며 고개를 넘고 골을 건넌다
논도 밭도 모두 풀이요 마을도 오늘은 우거진 풀 숲
발 끝에 채는 것이라곤 임자 없는 해골들!
험상궂은 능선과 골짜기 흩어져 있는 백골 동강들
원기들 비오는 날이면 더 흐느껴 운다는데
오늘 밤 나도 여기서 저들과 함께 울며 새울까
지난 날엔 적이었기에 방아쇠를 당겼었는데
오늘은 비를 맞으며 흩어진 해골 곱게 거두어
제 손수 묻어 주는 병정 뒤 따라 나도 흙 한 줌 얹어 주었다
고이 묻어 주는 흙무덤 속에서 가느단 목소리로 들려 나오는 소리
「육체의 숨쉬는 것을 생명으로 착각하지 말라
자유와 평화와 사랑 그것이 생명의 참모습이니라」고
살아선 무슨 원수로 우리 죽이러 왔던 그들인데
그가 죽어선 우리들의 슬픔 속에 들어와 깃드는가
오늘은 저 죽음 속에서 인생의 진실을 들여다본다
피를 먹은 능선과 능선 아우성 삼킨 골짜기들
안개는 저기 몇 번 덮이고 흰 눈은 저기 몇 번 쌓이던고
오늘은 비 속에 엎딘 산들 슬픈 행장을 씻는다
사랑
이은상
꽃은 진다 하고 달도 이즌다네
어즈버 님 날 사랑은 대일 곳이 없세라
졌던 꽃 다시 피고 이즌 달도 되둥그네
사랑 곧 이러할진댄 끊여 섧다 하리오
산언덕을 넘으며
이은상
거친 산 언덕 강 기슭에 묵은 역사는 가로 누웠고
여기 민족의 계명을 일러 주는 해와 달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내려다 보는 지역이여!
깜깜한 방속같이 혼의 등불이 꺼졌느냐
마취제 속에 잠겨서 취하여 넘기는 그날그날
지향도 신념도 잃어버린 몽유병자 같은 세대여!
역사의 경사지에서 몸을 뒤쳐 일어서라
정녕 살려거든 천 길을 솟구쳐 보려무나
제 힘이 제게 있는 줄 모르는 그게 더 안타깝다
현실의 먼지바람이 이리떼처럼 덮쳐온대도
나는 오히려 바위보다도 더 오만한 자세로 서고
오뉴월 황소 걸음처럼 뚜벅뚜벅 걸어본다
산(山) 위에 올라
이은상
안개 싸인 산(山)을 헤히고 올라선 제
새소리 들리건마는 새는 아니 보이오
안개 걷고 나니 울던 새 인곧 없고
이슬만 잎사귀마다 방울방울 맺혔소
산전(山田)을 지나며
이은상
산전(山田)에 저 농부(農夫)야 빈고(貧苦)를 울지 마소
세상에 허다우부(許多愚夫) 마음 팔아 낙(樂)을 사오
넋 없는 허수아비들 웃어준들 어떠리
산철쭉 · 산난초
이은상
험준한 산맥을 타고 오르고 내리는 고지마다
날마다 몇 천 발 포탄을 던져 불과 연기만 가득 찼던 곳
오늘은 이 어인 산철쭉 피어 너무도 눈이 부시다
피로 젖었던 산굽이마다 웃고 피어난 산철쭉
산철쭉 꽃나무 곁에 졸고 잇는 총 멘 파수병
우습다 전쟁, 평화, 삶과 죽음이 한 곳에 같이 엉겼네
다시 보니 풀숲 속에 백옥보다 더 고운 산목련
못 피고 간 청춘의 넋이 저 꽃 되어 피어난 건가
보는 이 없는 산골에서나마 실컷 한 번 피려무나
어디서 들려오는 탁목조 소리 아픈 가슴을 더 찔러주네
가다가 길 가 풀섶에 향기 놓는 산난초 두어 포기
진종일 상한 가슴을 저것이 어루만져 주네
바람결에 머리 서로 비비며 정답게 피어 있는 꽃송이들
황량한 산고개 위에서 보는 지극히 순결한 창조의 본성
가다가 발 머물고 꽃송이 곁에 내 얼굴 맞대어보는 동심!
삼개에서
이은상
찾으니 장강(長江)인데 강(江) 건너 은(銀)모랫벌
벌 지나 뫼이온데 뫼 넘어 구름일네
천지(天地)에 봄바람만이 불어 왕래(往來)하더라
돌길이 좁고 험(險)해 홑몸도 어려워늘
무거운 세상 시름 지고 안고 무삼 일고
강문(江門)에 다 부려 두고 몸만 돌아 들까나
푸른 물 검은 돌에 흰옷 빠는 저 아씨들
옷 치는 방치 소리 뱃노래에 절로 맞네
이따금 아미를 고치는지 장단(長短) 흐려지더라
바위벽(壁) 돌아드니 한마당 백사(白沙)로다
거니는 이 발자옥 물이 밀면 쓸리려니
진객(塵客)에 더러힌 자취 남겨 무삼하리오
물새의 노래 듣소 이 분명 거문고를
흰구름 물에 드니 이 정녕 그림일사
소리 빛 한데 모이니 승경(勝景)인가 하노라
봄바람 노는 양을 이 강(江)에 와 보완제고
가벼운 노(櫓)소리를 붙여 함께 듣노매라
사람은 승지(勝地)를 찾아 멀리로만 가더라
청류(淸流)에 낚시 던져 놀이하는 저 분들아
고기야 네 것이냐 취적(取適)이나 하올 것이
어조(魚鳥)도 봄을 아나니 같이 논들 어떠리
언덕에 올라 앉아 봄바람에 눈물 지고
돌아서 새소리에 혼자 웃는 내 모양을
저 물도 흘러가나니 전할 뉘를 몰라라
해는 지려 하고 애는 더욱 끊이랴ㄹ제
한가락 미친 노래 석벽(石壁) 넘어 들려오네
저분은 무슨 한(恨)으로 목에 피를 올리나니
두세 돛 강풍(江風)을 띄어 포구(浦口)로 바삐 드네
석양(夕陽)에 돌아서니 진환이 고대로다
강두(江頭)에 취객(醉客)이 모여 오락가락 하더라
삼월
이은상
여기 잔디밭이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 하늘로서 오는 신비한 소식을 들으려고
메마른 풀잎 풀잎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참새 두세 마리 그 뾰족한 혀끝으로
삼월을 구슬마냥 아침내 굴리고 갔습니다
파아란 세계를 그려 보는 고요한 순간입니다.
삼태동(三台洞)을 지나며
이은상
삼태동(三台洞)은 고향(故鄕) 합포(合浦)에서 서(西)으로 칠십리(七十里)를 나가 있는 곳이다. 1925년 7월 2일 내 그 산촌(山村)을 지나다가 서숙(書塾)을 찾아 강선생(姜先生)이란 이와 인사하고 이 노래를 지어 드리고 가다.
삼태산(三台山) 깊은 골에 먼지 없는 이 마슬은
차움의 세상 밖에 따로 베푼 평화(平和)동산
내 길이 바쁘건마는 쉬다 갈까 하오
고목(古木)선 우물가에 물 긷는 저 아가씨
동이를 이기 전에 한 모금만 마셔 주오
타는 목 그 생명수(生命水)로 축여 볼까 하오
옷 벗은 아이들아 천사(天使)의 후신(後身)들아
풀 한 줌 흙 한 줌을 쥐고 옴은 무삼 일고
옳아 참 상처 난 내 몸에 그 약(藥) 발라 다오
새 농막
이은상
능선을 돌아내리면 널따란 폐허 일대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피난민들 도로 돌아와
하나 둘 여기 저기서 새 집들을 짓는다
고향! 고향이란 것 애수 섞인 목가만은 아니다
4천년, 3천년 전 아브라함, 모세에게는 새 땅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 우리에게는 제 고향 밖에 갈 곳 어디냐
정든 내 고향으로 옛집터 찾아 돌아온 이들
오직 하나 삶에의 의욕 죽음 앞에서 삶을 배웠다
제 손수 제 행복을 만드는 새 출발의 식구들!
남편은 비를 맞으며 나무 토막으로 움막을 짓고
아내는 물을 길어다 저녁 밥솥에 불을 지피고
아들은 소 몰고 풀 한 짐 지고 언덕길을 넘어오네
검고 굵은 손마디 괴로운 인생살이의 대변
그러나 저 거친 손엔 무쇠보다 든든한 신념
다음 대 자손들 청에는 잘 살라는 축복과 기원!
오너라 토막을 지어라 힘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기적은 원하지 마라 네 고장 정사를 엮어라
찬 땅에 던지는 더운 입김 게서 분명 장미는 피어나리라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이은상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새 지도를 그려 본다
이은상
인간의 역사란 묘표도 없는 옛 무덤
폐허의 남은 지역마저 산불처럼 타고 있다
어디서 조종소리라도 들려 올 것만 같다.
산도 끝났네 물도 다했네
다만 빈 하늘 빈 바다 빈 마음
시인은 막대 끝으로 새 지도를 그려 본다
서시(序詩) = 이은상 시조집 기원 서시
이은상
여기는 아시아의 동방 고난의 역사를 딛고 선 우리
애원과 기도소리에도 아물지 않는 금 간 국토
동해의 파도소리만 계시와도 같이 들리는 나라
지금 우리들의 행진이 세기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얼굴을 스쳐가는 시간이 너무도 차갑구나
빙하의 어느 한 구역인 양 서로의 체온조차 아쉽다
사탑 같은 역사를 안고 회한을 반추하는 겨레
지진도 없이 갈라진 이 저주의 땅과 가슴 위에
오늘도 숱한 눈물과 분노만이 궂은 비처럼 흩뿌리고
할배 아배 때부터 혀에 익혀 온 착한 말들을
나날이 잊어버려 가는 세대라 우리의 신은 노여웠는가
차라리 참회의 방망이로 아프도록 때리옵소서
그러나 나는 다시 역사의 신 앞에 항변한다
미련한 소마냥 농사 짓고 착한 비둘기처럼 자식들 낳고
여기는 그렇게 어진 백성들 오천 년 살아 온 땅이기에
한 뼘 가슴 속에 산만한 심장이 띈다
다섯자 몸뚱이 속에 강줄기만한 혈관이 흐른다
이 심장 이 혈관 속에 가득 찬 것은 오직 기원!
우리 원하는 자유 산산이 조각이 나고
우리 구하는 평화 갈갈이 찢겨졌기에
울분이 용광로처럼 불타오르는 분계선!
너와 나 가슴과 가슴 사상과 사상의 장벽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침략과 항쟁의 장벽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고 고귀한 피를 흘리고
선과 악, 강함과 약함 사랑과 미움의 장벽
빼앗고 빼앗기는 아픔 얻음과 잃음의 장벽
민족과 인류의 온갖 비극이 여기서 일어나는 것!
지열이 식지 않은 조국의 땅 지열보다 더 뜨거운 심장의 피
시련은 끝나지 않고 도전은 갈수록 치열하여도
빙벽은 채질해 오르는 기사마냥 끝없이 솟구치는 의욕!
지금 내가 왜 굳이 험하고 어려운 이 길을 가나
역사를 넝마조각처럼 찢어놓은 분계선 가시철망
구름도 거기 찔리면 피가 흐르는 길인데!
그래도 나는 가야지 가시철망 내 앞길 가로 막으면
나는 거기서 시를 읊고 노래가 끝나면 통곡하고
하늘 끝 땅 끝까지 들리라 슬픈 소원을 외치련다
선죽교(善竹橋)
이은상
충신(忠臣)의 남긴 뜻이 돌에 스며 붉었으니
하마배(下馬拜) 하온 이들 몇 만(萬)인지 모르리만
돌아가 행(行)하신 이는 몇 분이나 되는고
충신(忠臣)의 타는 넋이 홍엽(紅葉)에 배어들어
용수(龍岫) 송악(松岳)에 두루 심겨 천만수(千萬樹)를
유객(遊客)이 헛보고 지나니 그를 설워하노라
설마령(雪馬嶺)
이은상
여기는 험준한 절벽 설마령 깊은 골짜기
자유의 십자군 영국 군대 8백여 명
중공군 인해전술에 비참하게도 전멸된 곳!
그대들 여기 와 왜 싸웠던가 싸워 얻은 것 무엇이더냐
남의 땅 먼 나라에 와서 그 귀하고 아까운 목숨 던져
이 산에 젊은 원혼들 된 것 그것이 그 싸움의 결론이더냐
아니다 그대들 죽음이 어찌 헛되이 끝날 것이냐
평화의 씨를 뿌린 것이라 열매 맺을 날 오고야 말리
새 역사 새 태양 속에 월계관 쓰고 나타나리라
기념비에 새겨 놓은 UN기와 여왕의 왕관
다른 나라 사나이들의 붉은 피로 물들여 놓은 지도
시인은 정성껏 두 손 모으고 그날 오기를 빌고 간다
설야음(雪夜吟)
이은상
삼경(三更)이 넘어서야 거리를 벗어나서
눈빛에 길을 찾아 산(山) 마슬로 돌아오니
등잔불 그무는 저기 내 집인가 아닌가
눈보라 휘불리어 얼굴을 치는구나
찬 뺨에 흐르는 물 눈녹음만 아니오나
이 한밤 외진 산길에 어느 분이 알리오
지게에 다달아서 언 고리 잡다 말고
타는 애 끌 길 없어 되나서 산모루로
송림(松林)에 눈비 맞으며 돌아올 줄 몰라라
성불사(成佛寺)의 밤
이은상
성불사(成佛寺)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主僧)은 잠이 들고 객(客)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댕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인 젠 또 들리라 소리 나기 기다려져
새도록 풍경 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소경 되어지이다
이은상
뵈오려 못 뵈는 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수렴동
이은상
대수렴 저 속에는 시비가 찍혀 있고
소수렴 그윽한 속에 가인이 앉았으리
석담에 천향수 고였으니 목욕처인가 하노라
주렴을 드리우고 앉아 있는 저 각시야
언제나 발을 걷고 님 마중 하려느뇨
하계에 내 냄 없으매 발 걷을 날 없으리
스승과 제자
이은상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에서 만나보다니
두 손목
서로 붙들고
어루만지다 이야기하다
산협길 멀고 험하고
해조차 뉘엿이 기울건마는
차마 서로 못 나뉘어
손목을 놓았다 잡았다
헤어져
산모퉁이 돌 때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슬픈 행장
이은상
피를 먹은 능선과 능선
아우성 삼킨 골짜기다
안개는 저기 몇 번 덮이고
흰 눈은 저기 몇 번 쌓이던고
오늘은 비 속에 엎딘 산들
슬픈 행장을 씻는다
신록 속에 서서
이은상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 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신의 체온
이은상
끝없이 열린 바다 한 아름 쓸어안아 본다
인정이 차가울수록 신의 체온이 그리워서다
사랑과 정열을 뿜어 이 파도를 끓이고 싶다.
쓸쓸한 저녁이다
이은상
쓸쓸한 저녁이다 산으로 오를꺼나
올라서 마른 나무랑 나란히 서 볼꺼나
석양에 여윈 그림자 안고 실컨 울어 볼꺼나
문 닫고 꿇어 앉아 옷깃을 바로 하고
노래를 읊을꺼나 어려운 글 찾아볼까
뒤끓는 온갖 시름을 쓸어 눌러 볼꺼나
철없는 어린 것이 달려와 웃는구나
오냐 네 눈에는 내 괴로움 왜 보이나
껴안고 얼굴 돌리니 마음 더욱 아파라
아레스! 멀리 가라
이은상
사방으로 험한 산고개 병풍처럼 둘러친 곳
대야처럼 패어진 분지 한 옛날 운석 떨어진 구덩이라네
옛 마을 불탄 재조차 찾을 길 없이 비바람만 불어친 폐허!
포연과 죽음의 아우성만 가득 찼던 격전지에
새 마을 세우는 사람들 뜨거운 햇빛을 받아
이마에 왕관보다 더 찬란한 진주알 같은 땅방울!
멎을 줄 모르고 쉴 새 없이 퍼붓던 풍우에
허물어진 구덩이 고르고 메우고 밭을 일구려
삽 들고 괭이 들고 나서서 새 흙 퍼나르는 사람들!
「큰 칼 팔아 황소 사고 작은 칼 팔아 송아지 사고
그 소 몰고 와 논밭 갈자」고 우리 조상들 이야기했네
그처럼 피 흘리는 전쟁 싫어하고 언제나 평화를 원했더니라
한국 전쟁에서 희생된 미군 미국 독립전쟁 때보다 5배!
그들의 피만도 아니면서 그러고도 못 이룬 한국의 평화
평화는 피로써 못 사는 것 오직 사랑만이 평화의 통로!
모진 풍우 무릎쓰면서도 바른 길 찾아가는 이정표
지도 위에서 길을 못 찾도록 먹칠해 놓은 자가 누구냐
아레스! 전생의 신아 너, 이곳을 떠나 멀리 가라
양산가의 고장
이은상
천년 전 옛 영웅 피 흘린 싸움터가
오늘은 들국화 가을 바람에 나부끼고
발 아래 강물 소리만 들려오는 곳일레.
양산가 슬픈 자락 어느 적에 끊어지고
여기가 어떤 덴지 그조차 아는 이 없네
흠운의 거룩한 한 마디 큰 글자로 써 두세.
* 양산가(陽山歌) ; 신라 태종 무열왕 때, 655년에 화랑 김흠운이 백제 땅 양산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지어 부른 노래.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음.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이은상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모래 위를 거니노라
밀물을 피(避)하는 걸음 깨달으니 초제(草堤)로다
무심(無心)코 풀 위에 앉을 제 반디 놀라 날더라
청도암(淸濤岩) 밤 물결에 띄우노라 조각배를
시원한 바람 따라 흘리노라 백마도(白馬島)로
새벽만 넘는 달빛에 갈밭 돌아 오리라
빈 배에 몸을 맡겨 달 더불어 누웠거늘
어즐은 세상 일을 생각하여 무삼하리
밤고기 뛰는 소리에 그만인가 하노라
옛 강(江)물 찾아와
이은상
옛 강(江)물 그리워서 봄 따라 나왔더니
물도 그도 다 가시고 봄도 그 봄 아니온데
호을로 아니 간 것은 내 맘인가 하노라
물 건너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같이
뭉쳤단 바람 따라 헤어지고 마는 것을
지금도 고개 돌리니 곁에 선 듯하여라
그 옛날 이 모래 위에 서로 쓴 두 이름은
흐르는 물에 씻겨 길이 길이 같이 예리
몸이야 나뉘시온들 한(恨)할 줄이 있으랴
옛 동산에 올라
이은상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 시인(詩人)의 허사(虛辭)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팽이 더저 짚고 산(山)기슭 돌아나니
어느 해 풍우(風雨)엔지 사태(沙汰)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옛 38 경계선 비문
이은상
여기는 옛날 38 경계선 이곳에 있던 주둔군들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비석을 세워 표해 두고자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로 그때 써준 나의 비문
「여기는 38 경계선 피로 얼룩진 지역
내 국토 안에서 무엇 때문에 군대의 주둔이 필요했던가
오늘은 슬픈 역사를 이 빗돌에 쓰고 가지만」
「저 뒷날 통일을 이뤄 남북이 하나 되는 날
내 손으로 새 글을 지어 굳이 나란히 이 비석 곁에
또 하나 평화의 새 비석을 다시 세우고 가리라」
「비록 내 손으로 그 새 비문 못 쓴다 해도
반드시 새 비석 세워야 할 통일의 그날 오고야 말리
이곳에 새 비석 서는 날 넋이라도 여기를 찾아오리라」
오륙도(五六島)
이은상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五六島라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먼바다라
오늘은 비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그 엣날 어느 분도 저 섬을 헤다 못해
헤던 손 내리고서 五六島라 이르던가
돌아가 나도 그대로 어렴풋이 전하리라.
오수(午睡) 아닌 오수(午睡)
이은상
안두(案頭)에 놓인 책은 저대로 펴어 있고
나는 나대로 눈감고 앉았으니
이 사이 무한(無限)한 고요를 어느 뉘가 알리오
이윽고 눈을 떠서 깨달으니 황혼인데
아이는 내 그 동안 졸은 줄만 알았든지
대야에 물 떠놓으며 세수하소 하더라
옥녀봉
이은상
옥녀봉 지난 밤을 어느 선녀 놀다 간지
세분에 고인 물은 향기 아직 품어 있고
봉두에 어여쁜 구름이 헤락뫼락 하더라
천녀의 세두분에 얼굴 씻어 고으려고
위암 절벽을 약한 몸이 내려간다
여인의 흠미하는 마음이 저러한가 하노라
향분에 웃고 노는 지상 옥녀 보완제고
백우의 펄럭이니 네 분명 옥녀로다
취하여 바라고 서니 옥경 온 듯 하여라
옥류동(玉流洞)
이은상
옥석을 씻어 나려 옥류(玉流)가 되옵든가
옥류(玉流)로 닦아 내어 옥석(玉石)이 되옴인가
두 옥(玉)이 씻고 닦이니 어느 그ㅣㄴ 줄 몰라라
금강(金剛) 계상석(溪床石)이 다토아 희올 적에
백석담(白石潭) 저 바위야 참으로 희옵도다
희고서 아니 검으니 그를 좋아하노라
옥류(玉流)면 옥류(玉流)이오 옥석(玉石)이면 옥석(玉石)이지
구태어 이 동(洞)안에 향(香)내는 어디선고
앞선 이 한 곳을 가리키며 천화대(天華臺)라 하더라
웃고 피는 도라지꽃
이은상
강 건너 들 밖으로 오늘 해도 져버리는가
상처투성이 강산이라 차마 보기 어려워서
솔가지 휘잡아 당겨 눈을 짐짓 가린다
언덕을 내려서는 가슴 아픈 나그네와
밀물과 저녁해가 모두 근심에 잠겼는데
길가에 자주빛 도라지꽃만이 바람결에 웃고 피었네
구름 엉긴 하늘 가에 황혼이 짙어온다
어둠 속 뚫고 가는 이 시대 조국의 고난
시인은 마을 늙은이들과 이야기로 밤을 지샌다
원혼들의 호소
이은상
앞도 산 뒤도 산 산에서 산으로 돌고
소라고둥 돌듯이 산을 못 벗어나고
나마저 산의 분신이 되었나보다 하 깊은 산골이어서
넘어도 다시 산고개 돌아가도 또 산고개
일천 미터 험한 몇 고개 고개마다 피 흘린 역사
산새들 우짖는 소리 저게 모두 원혼들인가
그대들의 부모 형제 그대들의 처자 동지들
그대들 잃어버리고 울며 애태우는 가슴들
그 가슴 언제나 비어 있다 혼이라도 찾아오길 기다리며
젊은 청춘의 꿈 무지개처럼 사라졌기에
방황하는 원혼들 저리도 애타게 지저귀는가
밤엘랑 그리운 사람들 꿈 속에 자주 들어가 쉬려무나
유방 고지
이은상
여기 여자의 유방같이 쌍으로 솟은 두 고지
야릇하게도 젖가슴 복판을 분계선이 지나갔기에
하나는 남방에 있고 다른 하나는 북방에 있네
전쟁도 사상도 이기는 대자연의 사랑을 보라
민족의 쌍둥이기에 고움도 미움도 없이
젖가슴 쪼개고 찢어서라도 같이 먹이시는 자비여!
고마우신 어머님 풍요한 조국의 젖가슴
남북의 형과 아우 고루 먹이시는 사랑이신가
피 묻은 이 고지 전쟁 기록은 지워버리고만 싶다
이 마음
이은상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松林)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나무에 몸을 지혀 눈감고 섰노랄 제
뒤에서 나는 소리 행여나 그대신가
솔방울 떨어질 적마다 돌려 보는 이 마음
인생(人生)
이은상
차창(車窓)을 내다볼 제 산(山)도 나도 다가드니
나려서 둘러보니 산(山)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나가니 인생(人生)인가 하노라
일기
이은상
아내가 심은 버드나무라 가보처럼 아끼는 건데
난데없는 폭풍에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어쩐지 불길한 징조다 무슨 일이 있으려나.
저녁이 다 되도록 아무런 일이 없었다
밤에도 이슥토록 등불 아래서 글을 읽었다
이 날 밤 꿈 속에 만난 그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임진강(臨津江)을 지나며
이은상
임진강(臨津江) 밤 물결이 달 아래 굽이치며
여대(麗代) 풍류(風流)를 아뢰려 드는구나
송경(松京)이 남아 있으니 잠잠한들 어떠리
대(對)하여 말할 뉘 없고 조수어별(鳥獸魚鼈) 다 자는 밤에
강월(江月) 강풍(江風)이 빈 하늘에 깨어 있어
한(恨) 품은 나그네 하나 지나감을 보더라
자하동(紫霞洞)
이은상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은 예같이 흐르는데
중화당(中和堂) 삼한국로(三韓國老) 그들은 어디 간고
자하곡(紫霞曲) 남은 장단(長短)만 추풍(秋風) 속에 들었더라
장안사(長安寺)
이은상
장(壯)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興亡)이 산중(山中)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悲感)하여라
저주의 서해
이은상
바라보면 아침 구름 북으로 잇달아 날고
굽어보면 저녁 조수 남쪽으로 밀려 들거니
여기는 망망한 서해 산도 끝나고 물도 다한 곳
분계선 서해의 끝섬 이름도 짓궂이 「보름섬」이라
한 번 가면 물길이 험해 보름 만에야 돌아온다네
그래도 돌아올 수나 있지 가면 못 오는 데가 있네
하늘과 땅이사 무슨 경계랴 사람이 국경을 가른 것이지
그래도 돛 한 번 달면 어디라도 갈 수 있는데
도리어 제 나라 손 닿은 곳을 못 가는 데가 있네 그려
달려가 강 건너 북쪽 산들 와락 껴안아 보고 싶건만
타다 남은 여백의 땅에 가로 막힌 저주의 서해
모세의 지팡이를 다오 이 바다를 갈라 보리라
오늘 우리에겐 그같은 기적이 없는 것일까
「저산아 내게로 오라 네가 안오면 내가 가리라」
애닯아 마호메드의 말을 나도 한 번 외어 본다
절름발이
이은상
길 가다 문득 보니 어이한 절름발이
절―룸 절―룸 빈정대며 걸어가네
세상이 아니 고름을 비웃는 것 같구려
젊은 넋들
이은상
바라뵈는 언덕 머리 중세 고려의 이십팔 왕능
생전에 영화 누리며 우줄거리던 그들이언만
오늘은 봄바람에 피는 진달래 한 포기만 못하구나
여기서 까닭없이 싸우다 이름도 없이 쓰러져
바윗길 조약돌길에 뼈만 뒹구는 어린 군인들
차라리 풀잎의 아침이슬이 인생의 목숨보다 더 길구나
저기 뒹구는 뼉다귀들 저것이 누구 죄러냐
저주를 받아야 할 전쟁을 일으킨 자여
네 귀엔 젊은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쟎느냐
뻐꾸기 숲에서 우네 젊은 넋들 골에서 우네
우리사 아무 죄 없소 죄 없이 죽었을 뿐이외다
이 골짝 저 골짜기에서 젊은 넋들 구슬피 우네
문득 발 아래서 푸드덕 날아가며
산꿩 날개 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파수병 하나
등 돌려 날 바라보며 계면쩍어 웃는다
재물의 자서전
이은상
분계선 철조망 안에 잡초만 길길이 우거졌고
여기 저기 벽돌 무더기 동강난 기와 조각들
그렇지! 여기가 바로 큰 고을 있던 자리로구나
돌 한 덩이 첩놓이지 않은 집 한 채 없는 폐허 속에
저 어인 콘크리트 건물 기둥들 몇 개 우뚝 서있나
물으니 지난 날 이 고을 은행에 있던 금고였다네
어허 재물의 자서전인가 수전노의 초상화러냐
탐욕의 기념탑이 저주의 들에 우뚝 섰구나
하늘이 「롯」의 아내 소금기둥을 여기 또 하나 세우니라
재물! 재물만 있으면 만능인 줄 아는 인간이기에
여기 타다 남은 기둥이나마 세워 두어
모두가 이렇게 되느니라고 일러 주는 설교일러냐
금을 모래알처럼 보라시네 보석을 넝마조각처럼 보라시네
금보다 보석보다 귀한 잃어버린 인간의 사랑 찾으라시네
돌아가 마음과 마음 서로 잇는 건널다리부터 놓으라시네
좁은 산길
이은상
인류의 가는 길 왜 이같이 골목길들만 많으냐
좁고 어둡고 소란스럽고 공포만이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여기 쓰러져 주저앉을 수는 없다
코 앞이 탁탁 부딪는 이 답답한 골목길도
가고 가노라면 저기 어디 뚫린 데가 있을 게다
저 좁은 구멍 밖으로 밝은 햇빛이 보이쟎느냐
그대들아 저길 보아라 저기 성문이 뚫려 있구나
저 성문턱 넘어서기만 하면 우리 원하는 그 길
통일과 자유와 평화의 넓고 큰 길에 맞물릴 거다
단념은 안 될 말 그건 자살의 절벽
값싼 향수와 애상 그건 어린이들의 동화
우리는 행진이 있을 뿐 저 뚫린 성문을 향해!
역사는 주정꾼처럼 비틀거리며 지나간대도
오직 옳다고 믿는 것 그것 때문이라면
죽음도 오히려 찬미가처럼 노래 부르며 뛰어들리라
숨가쁜 울분이 파도처럼 벅차 올라도
피 흐르는 가시밭 고개 참고 견디며 넘어간다
의욕의 밑바닥에 불을 붙여 내일을 향해 절정을 간다
죽음의 강 나루터
이은상
옛날엔 숱한 사람들 건너 다니던 강나루터
오늘은 강물만 흐를 뿐 배도 없고 사공도 없고
강둑에 분계선이란 철조망까지 쳐놓고
그도 모자라 총 멘 병정 강언덕 위에서 지키는가
그래도 강을 뚫고 자유를 찾아 넘어오다가
가엾다 거센 물살에 시체되어 떠내려오고
여기가 죽을 곳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물살에 밀려 죽고 총 맞아 쓰러져 죽고
슬프다 죽음의 연쇄극이 연출되는 무대러냐
생명처럼 고귀한 것 신비한 것 또 어디 있나
벌레나 새 한 마리도 얼마나 귀엽고 아름답더냐
인간의 값진 생명을 왜 저렇게 버려야 하나
지구촌
이은상
구름 안개 몸을 휘감는 여기 높은 재 위에 올라선 지금
하늘과 땅이 한움큼이요 삶과 죽음이 한 순간일레
남북이 한 뼘도 채 안되는데 이걸 가지고 피를 흘렸나
우주에서 내려다 본다면 점 하나 찍은 듯 작은 지구
개미집 같은 지구촌에서 서로 싸우는 미련한 인간들
우습다 신이 보기에는 비극이기보다 가증하리라.
그러나 우주가 넓고 커도 지구는 필경 인류의 보금자리
여기 생명을 붙이고 역사를 누리며 살아온 곳
우리 왜 하나뿐인 보배를 우리 손으로 깨뜨리려나
무자비한 칼 거침없이 휘두르는 강대국의 횡포
능멸의 그물, 유린의 발굽 못 벗어나는 약소민족의 아픔
이것이 지구를 더럽혀 온 인류의 비참한 역사다
애타게 두들겨도 열리지 않는 평화의 장벽
불러도 응답이 없이 대화조차 끊어진 적막
이 순간 텅 빈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꼬.
진달래
이은상
수집어 수집어서
다 못 타는 연분홍이
부끄러워 부끄러워
바위 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천지송
이은상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 해가
홍비단 무늬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보석 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 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칡꽃 마을 이야기
이은상
시인은 막대 끌고
또 한 고지에 올랐더니
파수 서 있는 병정 한 사람
산 밑 마을 가리키며
겪어 온
기구한 사연
들려주는 이야기--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칡꽃마을이 내 고향이죠
저기 약수터가 있어
거기 가 빌면 소원성취 한다기
약속한
처녀랑 하냥
아침저녁 같이 다녔죠'
'그러다 전쟁이 터져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모두들 죽고 흩어지고
나는 뽑혀서 군인이 되고
처녀는
마을을 못 벗어나
비참하게도 숨져버리고'
'나는 전투부대 따라
이곳저곳 옮아 다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이 고지 감시대 파수병이 되어
날마다
칡꽃마을 내 고향
내려다보며 섰지요'
'저기 있는 약수터도
영험이 없나 봐요
그렇게도 빌었었는데
소원성취 못하고서
옛 처녀
그려 보면서
명복을 빌며 살지요
태자궁지(太子宮址)
이은상
혹자왈(或者曰) `마의초식(麻衣草食)한 이가 무슨 정(情)에 궁(宮)을 세웠겠느냐. 이는 전설(傳說)이요 사실(史實)은 아니라'고 한다. 답왈(答曰) 그는 잘못이다. 궁이 반드시 화려굉대(華麗宏大)를 뜻함이 아닐지니 일간두옥(一間斗屋)도 태자(太子)가 거(居)하시매 사람들이 말하되 궁(宮)이라 하였으리라.
마의(麻衣) 초식(草食)하되 님이시니 님인 것이
님이 계오시니 막이라도 궁(宮)인 것이
높으신 그 뜻을 받들어 섬기올까 하노라
풀이 절로 나고 나무가 절로 썩고
나고 썩고를 천년(千年)이 넘었으니
유신(遺臣)의 뿌린 눈물이야 얼마인 줄 알리오
그 모른 외인(外人)들은 경(景)만 보고 지나가네
뜻 품은 후손(後孫)이라도 해만 지면 가는 것을
대대(代代)로 예 사는 새들만 지켜 앉아 우나니
오늘은 비 뿌리고 내일은 바람 불어
계오신 대궐은 터 쫓아 모를노다
석양(夕陽)에 창태(蒼苔)를 헤치니 눈물 앞서 흐르네
궁(宮)터를 홀로 찾아 초석(礎石)을 부드안고
옛날을 울어내어 오늘을 조상(弔喪)할 제
뒷시내 흐르는 여울도 같이 울어 예더라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이은상
물이 질벅거리는 풀숲 헤치고 미친 듯 달려 들어가
철조망 마지막 말뚝을 잡자 강력한 전류에 감전된 듯
손발과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어찌하랴
그래 이것이 피어린 155마일 마지막 쇠말뚝이냐
이것 하나 잡아보려고 예까지 허위허위 달려왔던가
끝 없는 동해의 파도소리만 가슴 속으로 파고드네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이 말뚝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울다 말고 눈물 어린 눈으로 북쪽 산천을 바라본다
바라보다 말고 몸이 움칫 가슴 치밀어 오르는 생각
그 누가 내 앞을 막을 것이랴 철조망 걷고 넘어가 볼까
총이냐 법이냐 총과 법이 무슨 권세로
내 땅에서 내가 가는데 내 가는 길 어이 막으랴
육로론 못 넘어간다면 바다로 나가 저어 가리라
나 혼자 이 철조망 넘어간다고 민족의 소원 풀릴 것이랴
이 말뚝 하나 뽑는다 해도 인류의 낙원 이뤄지지 않으리
돌아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미움과 죄악의 장벽』 먼저 헐어야!
판문점
이은상
자유 공산 평화의 천막 아래서 휴전협정 맺은 판문점
원수라면서 한 마당에서 옷깃 스치는 판문점
하루도 스물네 시간 잠자지 않는 판문점!
휴전이란 제목 아래 안 싸우는 날 없는 판문점
날마다 세계의 나그네들 찾아왔다 가는 판문점
역사의 수레바퀴는 진흙 속으로만 빠져들고
여기서 기르는 비둘기들 남들 보라는 평화의 상징
구역질 나는 얄미운 짓이여 평화를 파는 자 여기뿐이랴
분 바른 위조품 평화로 서로 속이고 서로 속고
밖에는 양의 머리를 걸고 안에선 개고기를 팔듯
아침 저녁 평화를 외치면서 살인무기 만드는 강대국들
세계는 그들을 일러 위인이라 추켜 올리고
모두들 하는 말, 반말이언만 속으면서도 행여나 귀기울이고
이 세상 누구 입에서라도 참말 한 마디 듣고 싶구나
여기서 내 가슴 쏟아 놓고 누구랑 더불어 이야기할꼬
이제 인류의 역사는 다 읽은 책장처럼
몇 장 밖에 남지 않은 얄팍한 말세러냐
사탄의 지혜를 빌어 자폭을 구상하는가
편양선사전(鞭羊禪師傳)을 읽고
이은상
홍연에 사여 들어 분주히 오고가니
그 모른 속부네는 우습다 하는구나
두어라 대은의 일이니 어느 뉘가 알리오
양치는 저 머슴아 어인 방심 그러하여
일모가 거의거늘 돌아갈 줄 모르는고
방초원 깊은 생각에 깰 길 없어 하노라
대동문 바람 찬데 남루군 데리고서
법문을 설하는 이 그 양자 어여쁘다
어즈버 영산회상이 거기런가 하노라
「연순우」 거리 살림 쓰다않고 맛보더니
님의 집 찾은 날에 「제후천」을 보았도다
법열을 알 이 없기로 혼자 미소 하더라
나의 송식으로 운림에 누었으니
세음 끊인 곳에 이도성 뿐이로다
봉두에 해 넘다하니 달을 또한 보리라
포은구거(圃隱舊居)
이은상
계옵던 옛 집터를 절하고 굽혀 드니
벽상(壁上) 영정(影幀)이 사신 듯 말하실 듯
맞추어 울 밑 황국(黃菊)이 서리 속에 섰더라
묻노라 저 읍비(泣碑)야 네 눈물 얼마완대
이토록 흘리고서 상기 아니 마르나니
만고한(萬古恨) 맺힌 눈물이니 그칠 날을 몰라라
푸른 하늘의 뜻은
이은상
우리 옛 조상들은 땅 위에 살면서도
푸른 하늘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언제나 하느님과 천사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뒤에 인간들은 푸른 하늘을 잃어버렸다
욕심과 질투와 온갖 죄악으로 눈이 어둡고
손발에 땀을 흘리느라 머리 들 겨를이 없었다.
인간들은 어느 결엔지 하늘의 방언을 잊어버렸다
유한한 몇 마디 말을 혀 끝으로 굴릴 뿐
하늘을 바라보고도 대화의 길이 막혔다.
지구 위엔 봄가을이 몇만 번이나 바꾸이고
인간의 무상 나라의 흥망 눈물이 강을 이뤄도
다만 저 푸른 하늘의 뜻은 「영원한 불변」인 것을.
오늘 아침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하늘과의 대화의 길을 다시 트고 싶어서다
땅 위에 하늘의 뜻을 이루고 싶어서다.
한 겨울만 더 지나면
이은상
고갯길 아래 돌 한 덩이 설화희생 순국기념비
전쟁에 나가 죽는대도 원통한 청춘인데
밤 사이 높은 산 눈사태로 몇 십 명 군인들 묻히다니
버들꽃 날릴 때 일선에 와서 찬 눈을 몇 번이나 맞고
한 겨울만 더 지나 버들꽃 날리면 돌아간다고
손꼽아 눈 녹기만 기다리던 그런 군인들도 있었다 하네
그대들 마지막 호흡 끼쳐진 산 기슭에
눈얼음 쌓였다 녹기 몇 번이나 하였던고
올해도 버들꽃 펄펄 날리는데 그대들 숨소린 들리지 않네
한밤과 새벽의 어귀에 서서
이은상
어디서 쫓겨온 사람처럼 헐떡이며 동햇가에 와 섰다
화상 입은 공간을 헤치고 차디찬 땅 끝에 와 섰다
시인은 사랑과 정열을 뿜어 이 파도를 끓이고 싶다
갈가리 찢긴 헛된 시간 걸레조각보다 더 값싼 유물
이같이 욕된 시간이 왜 인류의 역사를 더럽히는가
누가 날 이 시궁창 같은 시간 밖으로 돌팔매처럼 날려다오
사나운 포수에게서 쫓겨 허덕거리는 사슴처럼
거센 물살에 밀려 잠방거리는 조각배처럼
갈수록 죽음에 직면한 인간들의 가련한 모습!
노아 홍수의 전날밤인 듯 굳어져 있는 인간들의 표정
우주전쟁을 예약하는 공포의 문명 구원의 문을 두들기건만
아무도 열어주는 이 없이 오직 심판을 기다릴 뿐!
분노한 예언자들은 『바다조차 타서 재가 되리라
인간들은 그 재 속에서 영원한 화석이 되리라』고
여기서 듣는 파도소리는 구슬픈 조종소리만 같다
한밤과 새벽의 어귀에 서서 어두운 바다를 내다본다
해일처럼 억세게 넘치는 가슴 속에서 치솟는 새 힘
심장의 피를 기름삼아 횃불 켜들고 밤을 밝히자
함정 속으로만 떨어져 가는 인류의 걸음을 어찌 막을꼬
눈물 젖은 노래로 내 노래가 끝날 수는 없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밤을 지새고 새 태양을 맞이하리라
할미꽃
이은상
겉보고 늙다 마소 속으로 붉은 것을
해마다 봄바람에 타는 안 끄지 못해
수심에 숙이신 고개 알 이 없어하노라
해골과 구두짝
이은상
풀숲 헤치고 내려가 보니 여기 저기 뒹구는 해골들
그 곁에 혁대랑 군화짝 운동화 고무 밑바닥
저것이 인간의 생명보다 더 오래 가는가 보다
나는 언덕을 넘고 냇물을 건너면서도
내 입에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구두 짝 그런 게 차라리 인간의 생명보다 더 오랜건가」
천하를 주고도 못 바꾸는 값지고 귀한 생명인데
우습다 헌신짝 보다도 더 값싸게 던져버렸나
비웃듯 들사슴 한 마리 껑충껑충 앞산 언덕을 넘어간다
해당화
이은상
푸른 동햇가에 흰 모래 붉은 해당
보라빛 풍정이 부채살같이 퍼져 오른다
사랑과 그리움의 제단에 추억의 향을 피우고 간다.
향로봉 위의 기도
이은상
가장 높은 향로봉 산마루 부슬비 맞으며 올라선 지금
아! 장하다 아름답다 말없이 둘러보는 남북강산
시인은 하늘 향해 두 손 모아 간절히 드리는 기도
「지금 저 해를 붙들어 공전하는 시간 멈춰 주소서
불안과 초조 속에서 다만 슬픔을 되씹으며
바람에 흰 머리카락 날리면서 헛되이 늙게 하시나이까」
「피보다 더 진한 눈물 우리 눈에서 쏟아지도록
고백하는 참회와 맹서 우리 입에서 술술 나오도록
녹슬고 마비된 양심을 채찍으로 일깨워 주옵소서」
「형벌과도 같은 시련과 고통 너무도 오래 되었나이다
이 땅에 통일과 자유와 평화 비 내리듯 꽃 피우듯 부어 주소서.
거기서 단 하루만이라도 그 땅에서 살게 해 주옵소서」
「자유는 우리 깃발 우리 승리 풍우 속에서 나부끼는 생명의 군호
피를 마신 전쟁의 신이 취하여 쓰러진 오늘
평화가 수의를 벗고 옥문 밖으로 뛰쳐나오게 하옵소서」
화원(花園)
이은상
화원(花園) 터 어드매오 왕자공손(王子公孫)은 누구시오
팔각전(八角殿) 화초 향기 끊인 적이 오랜 이제
빈가(貧家)에 낙엽(落葉)져 날리니 아무덴 줄 몰라라
횡보천고(橫步千古) - 옛벗 횡보(橫步) 염상섭 형의 영 앞에
이은상
문성이 빛을 거두자 동산이 고요해졌네
사십 년 사귄 정이 한 오라기 향연이런가
이윽고 창 밖을 내다보매 다만 산이요 물이로다.
올핼랑 몇 친구 모여 옛 정을 풀자더니만
가난과 병이 하 겨웁던가 봄은 오는데 저는 가는군
이 나라 말과 글과 하냥 그대 이름 길이 남으리.
인생을 엇걸어가던 취선이 이제 잠들었네
뚜벅뚜벅 폐허 위에 제가 끼친 발자욱을 베고
예원의 꽃그늘 아래 평안히 쉬게 평안히 쉬게.
6월의 회상
이은상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그 유월의 악몽과 회상
건망증 환자같이 어느 결엔지 잊어버렸나
그래도 밀항자 마냥 두근거리는 가슴.
신록도 우리에겐 이국의 풍경화같이
눈물 어린 눈에 명멸하는 서글픈 환영
이마에 역사의 배신자라는 낙인 찍힌 무리들.
피를 머금고 우는 뻐꾸기 소리 들리는 곳
우리 집 뒷산이 곧 「노아」의 「아라라」산
홍수의 예언과도 같이 날카론 소리 들린다.
온갖 죄와 악을 아편과도 같이 씹으면서
시기와 질투와 속임과 살륙으로
해마다 이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것이냐.
다만 한 가닥 정기의 물줄기를 타고
어두운 세기 복판을 운하 마냥 뚫고서
말없이 저어 가리라 기다리는 그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