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도시 9-2
5. 혼돈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요즘 들어 그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져 있다는 것은 청와대 안은 물론 전 내각, 정치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선거가 5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당정(黨政)이 충력을 기울여도 상대 후보가 버거운 판에 경제 문제가 거대한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정부 발표는 말할 것도 없고 연구기관이나 여론조사 기관의 낙관적인 경제전망을 국민은 믿지 않았다. 선거 전에 내놓는 갖가지 정책과 전망이 선거가 끝나면 눈도 깜박하지 않고 지워지고 뒤집혀지는 꼴을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서민들의 피부에 와닿는 물가는 이미 두 자리 숫자로 뛰어올라 있었다. 그는 경제 장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의 총수 모두에 대해서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들은 전혀 비관적인 보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월에는 하반기에 수출이 회복되어서 성장률이 작년보다 2퍼센트 높은 8퍼센트가 된다고 했어.」
대통령이 앞에 앉은 이태준과 경제 부총리 윤동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장관들은 몇 달 앞도 내다보질 못한단 말인가? 경제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잠자코 있던 윤동선이 머리를 들었다.
「수출은 연말에 몰리는 경향이 있느니만큼 현재의 5퍼센트 수준에서 작년 수준인 6퍼센트까지는 달성할 수 있습니다, 각하. 하지만‥‥」
「하지만 뭐요?」
「실업률과 물가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무래도‥‥」
대통령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에게 경제 동향과 여론의 심각성에 대해서 보고를 해온 것은 한국 국제문제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그의 사설 기관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싱크탱크(Think Tank)인 것이다. 경제 장관 회의에서는 한 번도 비관적인 보고를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대통령은 격노했고 장관들을 불러 확인했을 때 그것이 사실인 것을 알자 더욱 화가 북받쳐 올랐다. 그는 자신이 비관적인 보고에 짜증을 내면서 잘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가 윤동선을 쏘아보았다.
「대선이 문제가 아니오, 부총리. 경기부양책을 시급히 만들어 시행해야 되겠소. 민생이 우선이란 말입니다.」
「예, 각하. 곧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부총리가 말한 근대리아로의 투자이민 규제는 내가 검토해 보겠소.」
「시급합니다. 통상 장관이 그 일로 각하께 직접 보고드리겠다고 합니다만.」
「내용을 알고 있으니 내가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선 윤동선이 방을 나갔다. 이태준이 문 앞까지 그를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대통령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테이블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머리를 들었다.
「악재가 겹치는군. 공산당 놈들에 이어 강우진이도 우리 목줄을 죄고 있어. 국제문제연구소의 보고로는 지금 추세로 나간다면 올해 안에 근대리아로의 남한 이주민이 백만 가깝게 될 것이고 중소기업의 10퍼센트가 빠져나간다는 거야.」
정부 측 예상보다 2배나 많은 숫자였다.
「경제수석은 경쟁력이 없는 기업이나 공해산업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라 오히려 한국 경제를 정화시킬 계기가 된다고 합니다만.」
이태준이 말하자 대통령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2년이 넘게 그자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항상 잘 된다고 했어. 그리고 한 번도 자신의 대책이 틀렸다고 한 적이 없어. 그자가 있는 동안 부총리가 두 명, 경제 장관들이 각각 두 번이나 책임을 지고 물러났는데도 말이야.」
「그자의 달콤한 이야기만 들은 나도 책임이 있어.」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도 북한보다는 근대리아가 말이 통하고 체제도 비슷해. 어차피 근대리아의 뿌리는 한국이니까. 강우진이 우리 정부에 반감을 품고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어깨를 늘어뜨린 대통령이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이태준을 바라보았다. 수없는 난관을 극복하고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그는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처신술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자네가 강우진을 만나야겠어, 정동민과 함께 말이야.」
폭탄주를 3잔 마시고 나자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으므로 함종일 중장은 폭탄주용 맥주잔을 치웠다. 그와 대작하고 있는 사내는 수경사령관 최무섭 중장이었는데 그는 아직 미진한지 폭탄주 잔을 놓지 않았다.
「이봐, 함장군. 오늘 술자리도 보고사항에 들어가나? 이 방에 어디 녹음장치라도 끼워져 있는 것 아냐?」
최무섭이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는 함종일의 육사 2기 선배로 대위 시절에 같은 연대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거의 떨어져 지내왔다. 더구나 함종일은 장군 진급이 1년 빠른데다가 기무사령관을 2년째 맡고 있는 군의 실세였다. 오늘은 한 달 전에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최무섭을 환영한다는 의미의 술좌석이다.
「물론이지, 감시용 카메라까지 장착되어 있어.」
함종일이 위스키 잔을 쥐었다.
「내 앞에서 행동 조심하라구, 최장군.」
「망할 자식, 네가 기세를 부리는 방법을 알았다.」
「그런 식의 선입견이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드는 거야. 난 기세부린 적 없어. 상대방이 만들어 주었을 뿐이지.」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 들어가는 장군은 너밖에 없어.」
2군 참모장으로 있던 최무섭을 수경사령관으로 추천한 사람이 함종일이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보다도 함종일을 신뢰하고 있는 대통령이 그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최무섭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라 말투는 거칠었지만 표정이 부드러웠다. 다시 폭탄주 한 잔을 자작해 만든 최무섭이 단숨에 들이켰다. 맥주잔에 맥주와 위스키를 반씩 섞어 만든 술이다.
「이제는 중소기업의 엑서더스 현상이 일어나고 있더군. 몇 년 전에는 대기업의 탈출이 일어나더니.」
술잔을 옆쪽으로 밀어놓은 최무섭이 함종일을 바라보았다.
「대기업의 탈출은 정부가 강력하게 통제하더니만 중소기업은 내버려 두는 걸 보면 근대리아와 사전 조율이 있었던 모양이지?」
「난 경제는 몰라. 관심도 없고.」
「이제는 군 장교들이 예편하고는 근대리아의 경비대로 들어가는 상황인데, 관심 없다면 직무유기다.」
그러자 함종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해, 최형은.」
「최형이라니, 나 아직 예편 안 했다. 장군 소리 좀 더 들어야겠다.」
최무섭은 연대장 시절에 연대에서 대형 사고가 2번이나 터지는 바람에 장군 진급이 3차례나 누락되자 한때 예편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가 장군이 된 것은 능력이 있는데도 진급에 불운했던 고참 대령들을 구제해 주는 마지막 심사에서 겨우 합격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함종일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최형은 이번 대선에서 누가 될 것 같아?」
「이것, 본론이 나오는군.」
상체를 세운 최무섭이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무사령관이 이유 없이 술을 살 리가 없지.」
삼청동의 비밀요정이어서 주위는 조용했고 사람을 물리친 터라 방 안에는 둘뿐이다. 함종일이 상 위로 상반신을 숙였다.
「어때? 여당 후보가 될 것 같아?」
「네 임기는 올해 말로 끝나지 아마?」
최무섭이 묻자 함종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 돌리지 말아.」
「이대로 가면 정동민은 안 돼. 이대현이 유력해.」
「정치, 경제, 사회가 온통 위기 상황이야. 아니, 그것은 야당이 표현하는 어휘니까 그만두고 환멸과 무관심의 상황이다.」
정색을 한 최무섭이 위스키를 한 모금에 삼켰다.
「군은 이미 소외된 지 오래니까 예외로 치더라도 말이야.」
「‥‥‥‥‥」
「널 만난 김에 이야기하려고 했어. 누구는 이 환멸과 무관심을 선거투표율만으로 계산하는 모양인데 투표율이 낮을 테니 사오십 대의 보수층을 공략해야 한다고. 기가 막힐 일이다. 나는 근대리아로의 엑서더스 현상이 보통 일로 보이지 않아.」
「국가관, 나아가서 애국심, 또는 민족의 자존심까지 잃고 난 마당에 새로운 탈출구를 찾은 거야, 근대리아로.」
잠자코 있는 함종일을 향해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휴전선이 조용한 것이 다행이긴 하지. 거기까지 시끄러웠다면 사면초가가 되었을 테니까, 정권이.」
「근대타운은 완벽한 소비도시지요. 이쪽 중국인 거리의 변두리에는 아직도 빈 대지가 많습니다. 이곳도 가능성이 많은 지역이오.」
박기동이 손끝으로 탁자 위의 지도 한 부분을 짚었다.
「우선 도착하면 살펴보시고 행정청에 신청을 하세요. 대지부터 확보해야 하니까.」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성공 가능성을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곳은 노력한 만큼 얻는 땅이오.」
그의 앞에 앉은 40대의 세 사내는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다. 박기동은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가 근대리아의 투자 자문회사를 차린 것은 한 달 전이었으니 정부가 근대리아의 투자이민 규제를 해제한 직후였다. 근대리아 대표부에서 멀지 않은 빌딩에 자리 잡은 그의 사무실에는 자문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비고 있었다. 그는 근대리아의 대형광고 옆에 조그맣게 자신의 투자 자문회사 광고를 넣었는데 얼핏 보면 대표부 공인 자문회사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만큼 근대리아의 사정에 밝은 기업인도 드물었으므로 하루의 자문료만 해도 500만 원이 넘는 실정이다. 왼쪽에 앉은 사내가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술집이 너무 많다고 하던데, 술집은 한물간 사업 아닙니까?」
「허어, 선생님도 참.」
박기동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대표부의 담당 직원은 안 해줄 겁니다. 모르기도 하구요. 근대타운의 인구가 지금은 70만인데 일 년 전만 해도 40만이었어요. 일 년 사이에 배 가깝게 된 겁니다. 그것이 올해 말에는 백만이 돼요. 거기에다 연간 관광객이 사백 만입니다. 내년에는 칠백만으로 잡고 있어요. 돈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그는 소리 내어 한숨을 뱉었다.
「내가 김상철과의 세력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클럽을 늘리고 있었을 겁니다.」
투자 자문료는 시간당 50만 원이었으나 자료가 알찬데다가 박기동이 세밀한 부분까지 지도해 주었으므로 근대리아로 떠난 사람들이 한국의 친구나 친척에게 그를 추천해 주는 형편이었다. 박기동은 근대리아의 조직에도 환했고 그들을 이용하는 방법에서부터 여자를 구하는 법, 마약에 관한 것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1시간에서 5분을 더 채우고 사내들이 나가자 여비서가 방으로 들어섰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안인석 씨라고.」
「응? 그래?」
박기동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곧 머리를 끄덕였다.
「다음 상담은 15분 후에 시작하기로 하고 이리 모셔 와.」
잠시 후에 안인석이 들어서자 그는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이게 얼마 만이오? 그동안 신수가 좋아지셨는데, 안형.」
안인석도 따라 웃었다. 밝은색의 산뜻한 양복 차림의 그는 표정이 밝다.
「지나다 들렀는데 여전하시군요.」
「나야 대개 입으로 먹고 살았으니까.」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래, 나야 이렇게 지금도 근대리아를 팔아먹고 살지만 안형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소?」
근대리아에서 나란히 추방당한 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안인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부친의 병원을 관리하고 있었지요. 신경 쓸 곳이 많아서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럼 근대리아 사정은 토옹‥‥」
「잊고 지냈지요.」
「난 하루에 한두 번씩 근대리아와 연락을 합니다. 일 관계도 있고 해서.」
「그렇다면 김상철 씨의 부인이 한국에서 사고로 죽은 것도 모르시겠는데.」
안인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박미정이 말입니까? 한국에서요?」
「예,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
「한국 언론에는 두 줄짜리 기사로만 보도되었지만 근대리아에서는 국장(國葬) 같은 장례식이 치러졌지요. 그 일로 김상철은 지금 한국에 와 있습니다.」
의자에 등을 기댄 박기동이 입맛을 다셨다.
「김상철은 박미정이 계획적으로 살해당했다고 믿는 모양이오. 얼마 전에 시바다의 부하 25명이 모두 몸이 벌집처럼 구멍이 난 시체가 되어서 근대리아의 강미현에게 보내졌습니다. 김상철과 강미현의 싸움은 지금 절정이오.」
「‥‥‥‥‥」
「그리고 한국 정부는 김상철을 잡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고.」
박기동이 안인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건 시간당 백만 원은 받아야 할 이야긴데 투자자들한테는 쓸모가 없었지요.」
김상철과 이대현은 물론 초면이다. 노(老)정객인 이대현으로서는 30대 초반의 김상철에 대하여 뭔가 과장된 분위기로 둘러싸인 운 좋은 젊은이라는 선입견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40년 가깝게 현실정치에 부대끼다 보면 신화도, 영웅도 모두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수없이 겪어 본 때문이다.
늦은 밤이다. 신림동의 새로운 번화가인 전철역 부근 카페에서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밀실이었으므로 바깥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이대현의 옆에는 장남 이성훈이, 김상철의 옆자리에 심재택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은 보좌역할이다. 가급적 말을 삼가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대현이 입을 열었다.
「심과장한테서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지난번의 사고에 조의를 표합니다. 잔인무도한 놈들입니다.」
잠자코 머리를 숙여 보인 김상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근대리아 내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이젠 조국을 위해 김사장님의 역량으로 우리를 도와주셨으면 해서 뵙자고 한 겁니다.」
김상철이 힐끗 옆자리의 심재택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김사장님이 빼내오신 비밀 합의서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현 정권이 매국행위를 했다는 명백한 증거지요.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을 공개하려고 했던 심과장의 기도가 좌절되었어요. 이제는 관련자들이 모두 연금상태가 되어 있고 언론은 감시가 강화되어서 그 방법을 사용하기 불가능한 상황이오. 그래서 말인데, 내가 김사장께 부탁드리려고 한 것은‥‥」
그는 물컵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중요한 대목을 강조할 때의 그의 버릇이었다.
「김사장님께서 그것을 근대리아에서 터뜨려 주셨으면 해서, 외국의 통신사가 대부분 근대리아에 지사를 두고 있는 데다 한국의 언론도 마찬가지로 파견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
「총재님, 저는 이제 대한민국 사람이 아닙니다.」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방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 나라가 북한의 괴뢰 국가가 되건 침탈을 당하건 간에 저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한테 조국을 위하라는 말씀은 맞지 않습니다.」
김상철이 노정객을 향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니 다른 조건을 제시하여 주시지요.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대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가 멈춰졌다. 그리고는 그도 따라 웃었다.
「정치꾼은 가끔 틀에 박힌 뻔한 말로 수사(修辭)를 늘어놓지요. 그것이 필요하기도 한데. 이젠 내 애국심이나 국가관을 말해도 필요가 없을 테니 협상을 합시다. 김사장께서 조건을 제시해 주시오. 내 생각엔 의중(意中)에 품고 계신 생각이 계실 테니.」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총재님이 보시기엔 아주 하찮은 일이지요.」
방 안의 사내들이 모두 김상철을 바라보았고 이대현의 얼굴에도 이미 웃음기가 가셔져 있었다. 이미 선입견은 없어졌고 연륜과 입장의 차이도 잊은 얼굴이었다. 오직 협상에 몰두한 자세였는데 이것이 이대현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는 몰두한 순간에는 진실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카지노 앞에 몇 명이나 있어?」
자리에서 일어선 변순태는 양쪽 허리춤에 베레타를 1정씩 찔러 넣었다. 1정에 장전된 탄알이 16발이니 2정이면 32발이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그만하면 탄창을 교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십여 명 됩니다, 형님.」
전기창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변순태의 심복으로 금방 리조트 시티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변순태가 앞장서서 방을 나가자 이미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10여 명의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사무실의 현관 밖에는 이미 10여 대의 차량에 30여 명의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변순태가 벤츠에 오르자 차량의 대열은 일제히 사무실 빌딩 앞을 떠났다. 밤 11시 30분이었다. 타운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무실이어서 모든 조직의 정보원들에게 샅샅이 노출되고 있겠지만 변순태는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조트 시티는 본래 이한이 관리하던 지역이었지만 그가 한국으로 떠난 이후로 변순태가 대신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승용차의 대열이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변순태가 전기창을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 연락을 받고 흩어졌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다시 나타날 겁니다.」
마약 소매상에게 리조트 시티는 목이 좋은 곳이었다. 그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갖가지 종류의 마약을 팔았는데 리조트 시티의 고객들은 대부분 고급 품질의 코카인을 산다는 것이다.
「이 개자식들, 사장님이 이곳을 비웠다고 함부로.」
변순태가 이를 악물었다. 김상철과 이한이 있을 적에는 북한의 마약상인들이 리조트 시티에 감히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예 몇 놈을 죽여서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 애들에게 전해라. 소매상이 보이면 한두 놈씩 잡아 죽이라고.」
「형님, 그것보다도 경비대에 인계하는 것이.」
「내 말대로 해.」
소리치듯 변순태가 말하자 전기창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마약이 통용되고는 있었지만 삼합회는 중국인을 상대로, 마피아는 러시아인을 상대로 장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서만 장사를 하더니 지금은 전 지역으로 시장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공급하는 각종 마약은 질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물량도 풍부했다. 그러니 가격도 저렴해서 시장이 급격히 확산되는 중이었다. 그들의 행렬이 리조트 시티의 번화한 호텔 거리에 들어섰을 때는 새벽 1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마약 소매상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무렵, 이제는 인구 70만의 대도시가 되어 있는 근대타운의 서쪽 변두리 도로에 한국산 중형자동차 1대가 멈춰 섰다. 이곳은 중국인의 밀집 지역으로 갓 이주해 온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린 변순태는 2명의 경호원을 뒤에 달고는 곧장 길가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어두운 골목길을 헤쳐나가던 그가 들어선 곳은 허름한 단층 시멘트 가옥 안이다. 현관에 앉아 있던 사내 한 명이 그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을 밝히지 않은 집 안은 어두웠으나 간간이 여자의 신음소리와 비명이 어우러져 들려오고 있었다. 싸구려 색시집인 것이다. 부하들을 마당에 세워 둔 그가 다가가자 사내가 정중히 허리를 꺾었다.
「안에 계십니다.」
중국인 복장이었는데 한국말을 한다. 변순태는 잠자코 벽을 돌아 마주 보이는 나무 문을 열었다. 안은 10평쯤 되어 보이는 사무실이었다. 밝은 불빛 아래 소파에 앉아 있던 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이곳도 최태호가 세운 사업장의 하나인 것이다. 그는 타운에만 3개의 색시집에 음식점 1곳, 사채업을 하는 사무실 1곳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변순태가 대뜸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오? 총독이 요즘 느슨하게 풀어놓으니까 아예 근대리아를 마약으로 빚을 모양이지?」
최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앞으로 북한 마약 상인을 보면 쏘아죽이라고 했다면서요?」
「사실이오.」
그러자 정색을 한 최태호가 머리를 저었다.
「말려들지 마시오.」
「말려들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 전쟁이라도 할 테니까.」
「김사장님의 소식은 듣고 있소?」
「그건 왜 묻습니까?」
최태호가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들더니 잔에 술을 채웠다.
「마약 판매를 확산시키는 바람에 나도 꽤 재미를 보고는 있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소.」
그는 변순태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당 조직이 강화될 예정이오. 곧 평양에서 편성된 당 조직이 근대리아에 옵니다. 그리고 호위총국에서 선발한 인민군 정예를 모아 근대리아의 무장세력을 증강시킬 거요.」
술잔을 쥔 변순태가 머리를 끄덕였다.
「박기환의 세력이 커지겠군.」
「박기환은 32호실 소속이오. 이번에 호위총국의 부대가 파견되면 박기환은 감찰업무만 맡고 부대의 총지휘는 김정일이 임명한 지휘관이 맡게 될 겁니다.」
「‥‥‥‥‥」
「근대리아의 북한 체제도 이제 골격이 완전하게 갖춰집니다. 당과 행정과 군, 그리고 사찰기관으로. 거기에다 근대리아 정부의 은근한 비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오. 이런 시기에 일을 일으켰다가 양쪽의 공격을 받아 무너질 수도 있소. 장호성이 마약 소매상들을 당신들의 지역으로 내몬 것도 심상치가 않단 말이오. 그자는 계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놈이오.」
한 모금에 보드카를 삼킨 변순태가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더러운 놈들. 소문으로는 위조 달러를 돌린다고 하던데, 당신은 알고 있소?」
「글쎄, 그건 장호성의 소관이라.」
「마약 판매 대금으로 한 달에 이천만 달러씩을 평양으로 보낸다던데.」
「그것도 장호성의 소관이오, 변형.」
의자에 등을 기댄 최태호가 술잔을 들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난 북한 쪽 가게에서 흘러나온 달러는 받지 않으니까. 꺼림칙해서 말이오.」
「김사장께 이 상황을 알려드리는 것이 나을 거요. 어차피 나와 당신들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입장이라 말해 주는 거요.」
마약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경비대의 보안국장 장동택이 모를 리가 없다. 이제 경비대는 5만 병력으로 늘어나 있었는 데다 각종 첨단장비로 무장되었고 정보조직도 단단했던 것이다. 경비대는 본부 휘하에 25개의 경비서가 있었고 각 경비서는 구역마다 경비소를 두어 관리하는 체제였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 시간이다. 장동택은 보안국 소속의 마약 단속 책임자인 강진남과 사무실에서 허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강진남은 그가 아끼는 부하로 이번에 과장으로 진급을 했다. 본부 과장이면 지방 경비서의 서장급이다.
「이틀 전에 변순태가 리조트 시티의 호텔 거리로 긴급 출동을 했습니다. 북한 마약 상인들을 잡는다고 갔지만 이미 놈들은 도망친 후였지요.」
강진남이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다분히 시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변순태는 무모한 자가 아닙니다.」
「총독은 북한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아직도 마약사범 검거는 보류다.」
이맛살을 찌푸린 장동택이 담배 연기를 길게 뱉었다.
「북한 덕분에 한국에서 투자이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다. 한 달 사이에 한국 이주민이 이십만 가깝게 늘었고 근대리아에 투입된 자산이 삼십억 달러야. 총독은 작은 건 놔두고 큰 걸 잡으려는 생각이다.」
「장삿속으로 말하면 한국, 북한, 근대리아 삼국(三國) 중에서 근대리아가 월등할 겁니다.」
강진남이 탁자 위에 펼쳐놓았던 서류를 덮었다.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근대리아가 마약 천국이 될 겁니다. 이젠 미국과 유럽에서까지 마약 관광을 오는 실정입니다. 공항에서 매일 몇 십 건씩 마약 반출자가 색출된단 말입니다.」
「위조 달러 문제도 있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끈 장동택이 강진남을 바라보았다.
「놈들은 근대리아를 보물 창고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아사(鐵死) 직전의 북한 경제를 지금 근대리아가 되살려 놓는 중이니까. 한 달에 사업장 이익금과 이주민한테서 걷는 세금, 마약과 위조 달러 유통으로 얻는 엄청난 돈이 흘러들어갈 테니까.」
「그렇다면 장사 수단이 총독보다 나은 것 아닙니까?」
「놈들은 장사꾼이 아니야. 장사꾼은 신의와 신용이 생명이다. 놈들은 도적이야.」
갑자기 장동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열심히 살기는 하지, 위쪽 근대리아에서는 도적질을 하고 남쪽 한국에다는 등을 치면서 말이야.」
남쪽 한국의 서울, 소공동의 반도호텔 라운지에 있는 밀실에 주한 미국 대사 제임스 터너와 청와대 안보수석 신형목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오후 12시 30분, 테이블 위에는 요리접시들이 놓여져 있었지만 별로 손을 댄 흔적이 없다. 터너가 포크를 내려놓고는 포도주잔을 쥐었다.
「신수석, 아직 미국과 한국은 동맹관계이고 주한 미군이 35,000명이나 주둔해 있어요. 그리고 한국군도 미군 사령관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유의해 주시오.」
그의 말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시선은 곧았다. 한 모금 포도주를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남북 간의 협상에 미국이 소외된다는 것에 대통령께서는 상당한 우려를 표시하고 계셨습니다. 공화당 일부 의원은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어요.」
신형목이 잠자코 물잔을 쥐더니 한 모금을 마셨다.
열흘쯤 전에는 워싱턴에서 국무장관 러셀이 주미 한국 대사를 불러 강한 유감의 뜻을 보인 바가 있다. 그리고 공화당의 의원 몇 명이 남북한의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이유로 미군 철수를 거론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일종의 위협이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정부가 있는 것이다. 터너가 웃음 띤 얼굴로 신형목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알기로는 한국은 북한과 근대리아 양쪽의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선거 전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그들은 손발을 맞춰가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도울 일이 있을 겁니다.」
신형목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고맙군요, 터너 씨.」
「그렇다면 지난번 협상과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말해 주시지요.」
「근대리아에서 발표한 내용 그대롭니다.」
그러자 입맛을 다신 터너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평양 주재 미국 대표부에서 들은 정보로는 비밀 합의서가 있다더군요.」
「그런 건 없어요, 터너 씨.」
그렇다면 평양 주재 미국 대표부를 시켜 북한 정부에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고 할 입장이 아니다. 터너의 말대로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며 미군 사령관이 한국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북한과는 다른 입장이다.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터너가 입을 열었다.
「4강(四强)에 둘러싸인 남북한의 구도는 뻔한 이야기니 생략합시다. 신수석 앞이니 낯뜨거운 평화공존이네 유지네 하는 말은 생략하겠소. 하지만 근대리아가 변수요.」
그는 이제 정색을 한 얼굴로 신형목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한국이 근대리아를 대책도 없이 속국 취급을 했다가 무참한 꼴을 당했고, 우리 미국도 공산화를 염려하여 들어섰다가 러시아군에 밀려났지요. 이제는 북한이 그들을 타고 이주민을 밀어 넣으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어요.」
잠자코 있는 신형목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또한 요즘엔 한국의 이주민이 쏟아져 들어갑니다. 아마 한국 정부가 근대리아 정부와 모종의 합의를 하신 모양인데. 처음에 우리는 남북한 어느 한쪽이 근대리아를 흡수할 것인가로 분석을 했습니다. 일본 측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오. 연초에 북한 이주민이 몰려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말이오. 그땐 근대리아가 곧 북한의 세력권에 들리라고 추측했습니다.」
어느덧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신형목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오. 거꾸로 근대리아가 남북한을 흡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대리아가 어느 한쪽만을 흡수해도 나머지 한쪽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이미 남북한 양국은 근대리아에 단단히 물려 있단 말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그건 망상입니다.」
신형목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근대리아가 완충 역할은 하겠지만 절대로.」
「그 완충 역할을 다시 우리에게 맡기시오.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터너가 자르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은 독자적으로 북한이나 근대리아를 상대할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신수석도 잘 아시다시피.」
터너와 헤어진 신형목이 강남의 라이온호텔 라운지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밀실로 들어선 그는 자리에 앉자 길게 한숨부터 쉬었다. 터너는 외교상의 수식어나 간접화법을 일절 생략하고는 양국의 이해를 솔직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미국이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했던 구도는 근대리아의 한국화였다. 그렇게 되면 남북 간 분할의 현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근대리아를 조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가 김상철의 반란과 러시아군의 진주로 무산되면서 세웠던 차선책이 3국의 분할이었다. 각자가 벽을 쌓고 독립된 영역으로 지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북한의 적극적인 진출로 곧 무너졌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좋다. 차차선이었지만 북한이 근대리아를 흡수한다면 경제가 부흥되고 정치가 안정되어 최소한 남북한 양국의 분할 구도는 유지될 수 있었다. 신형목은 쓴웃음을 지었다. 근대리아의 남북한 흡수라니, 그것은 망상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미국은 서쪽 지근거리에 거대한 세력과 직면하게 된다. 러시아는 근대리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3강(强)은 아주 호전적인 강자와 등과 배를 붙이게 될 것이었다.
신형목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시 10분이었다. 야당의 대선후보 이대현의 만나자는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지만 찜찜한 기분이었다. 비서실장 이태준에게 보고를 하고 나온 터여서 아마 대통령도 이번 면담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문이 열렸으므로 신형목이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머리를 들었다. 낮선 사내 둘이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 젊었고 앞장선 사내는 장신에 우람한 체격이었다. 밝은색 양복을 단정히 입은 그는 종업원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오?」
사내가 앞에 와 서자 신형목이 물었다. 이대현이 보낸 사람으로 안 것이다.
「난 김상철입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한 사내가 그의 앞쪽 자리에 앉았으나 신형목은 한동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시라고?」
「근대리아의 김상철입니다.」
그제야 신형목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더니 두 손이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그 순간 조금 뒤쪽에 서 있던 사내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쓰윽 꺼내 들었는데 총신에 소음기를 끼운 권총이다.
「한 발에 쏘아죽이기 전에 앉아라, 이 개자식아.」
얼굴이 희고 부릅뜬 눈의 흰 창에 검은 눈동자가 섬뜩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난생처음으로 이런 무지막지한 대접을 받은 신형목이었으나 사내의 기세에 눌렸다. 팔을 내려놓은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내 아내의 사고에 대해서 말해 주셔야겠습니다.」
신형목은 눈을 깜박이며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차츰 진정되어 가는 중이다.
「당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우리하고 관련이 없습니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그런 사고를 내어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당신이 한국에 오리라는 보장도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 정부에는 그런 일을 기획할 사람도 실행할 사람도 없습니다.」
「근대리아의 강미현한테서 연락을 받으셨을 텐데.」
「그 일과는 관계없는 일이었소.」
「말해 주시오.」
힐끗 이한 쪽을 바라본 신형목이 긴 한숨을 뱉었다.
「그것은 시바다라는 일본인과 그 일행의 체류 편의를 봐달라는 것이었소.」
「‥‥‥‥‥」
「물론 우리는 당신이 안기부 사람들과 함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래서 당신을 수배한 거요. 당신 부인 일은 정말 유감이오. 내 말을 믿어 주시오. 현장에 있던 책임자의 보고에 의하면 사건은 분명히 계획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사건 수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사과드립니다. 내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는 거요.」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신형목이 말을 멈췄다.
「당신이 만나려는 사람은 옆방에 가둬두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두 손을 테이블에 짚은 그가 신형목을 내려다보았다.
「당신 말을 믿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꼭 밝혀질 거요.」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소. 그 사건에 관한 일이라면.」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 분쯤 후에 옆방으로 가보시지요. 그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불안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몸을 돌린 김상철이 사내와 함께 방을 나가자 신형목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긴 숨소리를 냈다.
「목숨 아까워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부랑자나 마찬가지요. 나는 그자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심재택이 말했다.
「시바다가 한 짓이 아니라면 당연히 신형목의 사주를 받은 자가 저지른 짓이오.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그들이 탄 차는 국립묘지 앞의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다. 오후 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승합차여서 그들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다. 김상철을 마주 보고 앉은 이한이 입을 열었다.
「잡아서 껍질을 벗겨야 했습니다. 끌고 와야 했어요. 간단히 대답할 놈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자는 정부의 고급 관리야. 설령 그자가 사주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김상철이 자르듯 말했다.
「나는 그자를 직접 만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신호가 바뀌자 차는 국립묘지를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가 밀리고 있었으므로 진행 속도는 느리다. 신형목으로부터 강미현이 시바다를 시켜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 확인된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박미정을 살해하면 자신이 한국에 올 것이라는 계획은 억지로 짜 맞춘 느낌이 있다. 물론 자신은 그녀를 만나기 위하여 근대리아를 떠났지만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측근의 부하들은 물론 오다나 이대각까지도 함정을 염려하여 출국을 말렸던 것이다. 김상철이 심재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난 근대리아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셔야지요.」
머리를 끄덕인 심재택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출국 감시가 심해서 신경이 조금 쓰이는데요. 김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몽고 여권으로는 세관을 통과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이유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에 아직도 붉은 태양이 걸려 있었지만 빌딩들의 반대쪽은 모두 그늘에 덮여 있었다. 8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무렵이라 이제 아침저녁의 날씨는 서늘해졌다. 근대리아는 8월 말이면 눈이 내린다. 두 달 동안의 짧은 여름이 끝나고 곧장 겨울로 돌입하는 것이다.
LA에 머물던 그녀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이틀 전이다. 시바다의 일당이 김포공항에서 몰사를 해서 근대공항에 실려왔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은 근대타운의 변순태였다. 그는 이유미가 시바다의 정보를 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전화를 받자 이젠 안심하고 귀국해도 좋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서류의 결재를 마치고 그녀가 회사를 나왔을 때는 오후 6시 반이었다. 회사에서 세 블록 떨어진 센튜리 호텔까지는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러시아워였다. 그녀가 호텔의 라운지에 들어섰을 때는 7시가 되어 있었다. 창가의 자리에 앉은 안인석이 보였다. 그가 근대리아에서 추방당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서로 연락한 적도 없다. 오늘 아침 그의 전화를 받은 이유미는 조금 생소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그동안 안인석을 잊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리에 앉은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동안 얼굴이 좋아졌어. 몸도 불어난 것 같고,」
「그런가?」
안인석이 입술만 올리면서 웃었다.
「하긴 마음이 편하니까. 진즉 때려치우고 돌아왔어야 했는데.」
종업원에게 차를 시킨 그들은 잠시 어색한 듯 제각기 시선을 비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유미였다.
「박미정 씨 사건 들었어?」
「음, 박기동 씨를 찾아갔다가‥‥」
그가 힐끗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더군. 그 사람은 모르는 일이 없는 모양이야.」
「김상철이 서울에 와 있다고도 하더구만.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중이래.」
이유미가 종업원이 가져다 놓은 커피잔을 들었다.
「날 보자고 한 건 무엇 때문이야?」
「뭐, 특별한 이유는 없어. 굳이 말하자면 근대리아에는 발을 붙이지 못할 상황이 된 너나 추방당한 내 입장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위로나 주고받으려고. 네가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했고.」
「난 아버지 병원을 관리하고 있어. 놀고먹는 일이라 이렇게 체중이 느나 봐.」
「인석 씨는 많이 달라졌어.」
정색을 한 이유미가 말하자 안인석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나도 지난날의 내가 진저리가 나도록 싫었으니까.」
「좋은 점도 있었어.」
이유미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석 씨 바탕은 착한 사람이야. 내가 알아.」
「마음이 약한 탓에 이제까지 이용만 당해 왔지. 인석 씨 주위 환경이 너무 험했던 것 같아.」
「그것, 모욕적인 말인데.」
얼굴을 굳힌 안인석이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악당이라는 말보다 더 치욕적이다.」
이유미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인석 씨 얼굴만 보려고 온 거야. 다음에 다시 시간을 내서 만나.」
「알았어.」
선선히 자리에서 따라 일어난 안인석이 생각난 듯 바라보았다.
「시바다 이야기도 들었어. 서울에서 모조리 당했다고.」
그러자 힐끗 그를 올려다본 이유미는 잠자코 몸을 돌렸다
식품이 가득 든 비닐봉지를 쥔 남용배는 옆에서 걷는 김봉만을 바라보았다.
「이봐, 빨리 좀 걸어.」
이제 나까무라는 김봉만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아직 동료들과는 서먹한 사이였다. 원래 말수가 적고 붙임성이 없는 김봉만이다. 오늘도 주택가 아래쪽의 슈퍼마켓에 남용배와 동행하는 동안에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남용배는 성격이 괄괄하고 직선적이다. 김봉만의 입장이야 뻔히 알고 있었지만 접어두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걸음을 늦추는 김봉만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녁 8시경으로 주택가의 일차선 도로에는 짙은 어둠이 덮여졌고 오가는 행인은 드물었다. 가끔씩 라이트를 켠 승용차가 지났으므로 그들은 옆쪽으로 비켜섰다. 남용배가 마악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김봉만이 그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뒤에 두 놈이 따라오고 있어. 돌아보지 마라.」
얼굴을 굳힌 남용배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슈퍼에서부터 따라왔어. 왼쪽으로 가자.」
그들의 앞쪽에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는데 저택은 오른쪽이다. 남용배가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자신은 알아채지 못했다는 수치심으로 분통이 터진 것이다. 그들은 잠자코 왼쪽 길로 꺾어져 들어섰다.
「뛰자.」
꺾어지자마자 김봉만이 소리쳤고 그들은 단숨에 30미터쯤을 달려 옆쪽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사람 둘이서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았지만 길게 펼쳐져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골목을 달린 그들은 앞쪽에 나타난 큰길을 보았다. 그들이 걸어 올라왔던 일차선 도로였다. 골목 안쪽의 벽에 붙어선 남용배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택의 이한에게 보고를 하려는 것이다. 그가 이한에게 상황 보고를 마악 마쳤을 때였다. 바깥쪽을 바라보던 김봉만이 놀란 듯 몸을 세웠다.
「이봐, 놈들이다. 아래쪽에서 세 놈이 뛰어오고 있어. 아까 두 놈과 일행인 모양이야.」
남용배도 슈퍼마켓 쪽에서 뛰어오는 세 명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드문드문 지나던 행인들이 놀란 듯 길가로 비켜설 만큼 사나운 기세로 달려오는 중이다.
「거처가 탄로 난 모양이다.」
김봉만이 남용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어서 연락해, 위험하다.」
「그렇다면 그곳을 중심으로 수색한다. 식품을 사갈 정도면 분명히 그 근방이다.」
서태영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쳤다. 그는 안기부의 대공 과장으로 김상철의 수사를 전담하고 있었다.
「요원들을 모두 그쪽으로 집결시키도록, 나도 현장으로 간다.」
몸을 일으킨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밤 9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안기부장 이근복에게 보고를 하려는 것이다. 단서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마리는 근대리아와의 전화 추적에서 잡힌 것이다. 요즘은 서울과 근대리아 간의 통화가 하루에도 수만 번 오가는 상황이다. 그것을 일일이 감청하거나 추적하기는 불가능했으므로 서태영은 공중전화 부스만을 집중 체크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운이 좋았다. 수만 개의 공중전화를 모두 체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근에 근대리아와 통화기록이 있는 부스를 추렸고 그중에 통화 횟수가 많은 곳을 선별했는데 봉천동의 한 부스는 최근 일주일간 3회로 그중 많은 편에 들었으므로 요원을 파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인 결과 슈퍼마켓에서 낯선 청년들이 하루에 한 번씩 대량의 식품을 구입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오늘 저녁이었다. 미행을 눈치 챈 놈들은 재빠르게 도망쳤지만 그것으로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보고를 마친 서태영이 차를 달려 봉천동의 슈퍼마켓 앞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이미 요원들은 주변 도로를 거의 봉쇄한 상태였고 주택가의 곳곳에 배치된 기동 요원들은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에게로 박동식 계장이 다가왔다.
「슈퍼를 중심으로 삼백 미터 반경에 요원들을 모두 배치했습니다. 위쪽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꺾어진 길에 슈퍼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놈들이 조심하느라 일부러 아래로 내려왔을 수도 있으니까요.」
40대 초반의 그는 간첩과 운동권 수배자를 잡는데 대단한 성과를 올린 사내였다.
박동식이 말을 이었다.
「사 간 식품의 영수증을 보았는데 이십 인분이 넘습니다. 일주일 전쯤에도 와서 그만큼을 사 갔다는데 많이 사 간 사람이라 기억하고 있더군요.」
「이십 인분이라고 해도 세 끼면 칠 인분이고 이틀간 먹으면 삼 인분이야. 매일 사 간 것도 아니니까 그것으로 계산할 수는 없어.」
「일주일 전에는 청산소주를 스무 병이나 가져갔습니다. 그게 세 사람 몫이겠습니까?」
그러자 서태영이 그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김상철의 일당이 틀림없는 것 같다.」
청산소주는 알코올 농도 50도짜리의 독한 술이다. 양조회사는 한국의 보드카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만 한국인의 취향에 맞지 않는 모양으로 판매량이 극히 저조했다. 그러나 김상철의 일당은 보드카에 익숙한 놈들인 것이다.
아래쪽에서 경고등을 번쩍이며 경찰의 순찰차가 올라오고 있었다. 순찰차가 슈퍼마켓 앞에서 멈추더니 경찰 간부 한 명이 요원의 안내를 받고 서태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경찰청의 한경위올시다. 본청의 지시를 받고 왔는데 책임자 되십니까?」
톨게이트의 넓은 입구로 들어서자 심재택이 상반신을 앞쪽으로 내밀고는 게이트를 둘러보았다.
「우측으로, 우측 두 번째로 가.」
김상철의 눈에도 게이트 건너편에 나란히 서 있는 경찰들이 보였다. 밤이 되어서 차량의 통행이 줄어들고 있었으므로 하행선 게이트는 대여섯 개밖에 열어놓지 않은 것이다. 우측 두 번째는 트럭 전용의 게이트였다. 운전사가 트럭 뒤에 차를 붙이고는 긴장한 듯 핸들을 움켜쥐었다. 그는 심재택의 부하로 40대의 전직 안기부 요원이다. 그들이 탄 승용차 앞에는 트럭 세 대가 멈춰 서 있었는데 한 대가 빠져나가자 두 대가 되었다.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승합차의 핸들을 잡고 있는 것은 김봉만이다. 그의 옆에는 이한이 앉았고 뒷자리에는 여섯 명의 부하가 타고 있었다. 트럭이 앞에 한 대 남았을 때 심재택이 혀를 찼다. 경찰관 한 명이 이쪽 줄로 다가선 것이다. 아니 매표구에 가려져 있어서 그가 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트럭이 떠나고 운전사가 티켓을 뽑아 매표구를 나서자 경찰관이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가로막았다. 검문하는 경찰은 모두 다섯이었고 오른쪽의 게이트 사무실 앞에는 M-16을 치켜 든 전경 1개 분대쯤의 병력이 늘어서 있었다.
「면허증 좀 보십시다.」
그러면서 경찰관은 차 안을 휘둘러보았다. 의심이 가득 찬 시선이었다.
「차 안의 불을 켜요.」
「이봐, 우리 지금 시간 없어.」
심재택이 소리치듯 말하고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경찰관 앞에 서더니 주머니를 뒤져 신분증을 꺼내 주었다.
「난 안기부 수사관이야. 지금 수원으로 요원들과 출동 중이야.」
그가 자르듯이 말했지만 힐끗 시선을 준 경찰관은 플래시로 신분증을 꼼꼼히 비춰보더니 턱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전경 분대가 서 있는 곳이다.
「확인할 때까지 저쪽에서. 죄송합니다, 수사관님.」
「좋아, 근무 자세가 마음에 들었어. 빨리 확인해 줘.」
이쪽을 바라보느라고 차들을 그냥 보내던 뒤쪽의 경찰관이다
「검문이 철저하군.」
전경 분대 앞에서 나란히 차가 멈춰 서자 김상철이 말했다. 운전사와 옆자리에 앉은 남용배는 몸을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앞쪽에서 심재택은 경찰관과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경찰은 전경 한 명의 도움을 받아 플래시로 심재택의 신분증을 비추게 하면서 무전기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김상철이 다시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김봉만과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두 명 모두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손가락이 총의 방아쇠에 걸려 있을 것이었고 뒤쪽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시 후 앞쪽의 경찰관이 심재택을 향해 경례를 올려붙이는 것이 보였다. 심재택이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시계를 내려다보면서 심재택이 바쁘게 다가오더니 차 안으로 들어섰다.
「자, 가자.」
차가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속력을 내었을 때 김상철이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안기부원 신분증이 아직도 유효합니까?」
「가명으로 만들어 두었던 비밀 요원 신분증입니다. 본부 컴퓨터는 이 코드 번호를 통과시키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긴장했던 모양인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비밀 요원이 열 명의 대원을 인솔하고 경부선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삼십 분쯤 후에는 당직이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비밀 요원 안상호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완벽해요. 당직은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안상호의 작전명령이 기록되지 않은 것도 비밀 요원의 작전이니 당연합니다.」
그는 시계를 내려다보았으므로 김상철도 따라 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시간마다 본부 당직이 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지요. 그러면 발각이 됩니다. 부장은 비밀작전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심재택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황을 체크해야겠어요, 안기부도 비상이 걸렸는지를. 만일 그랬다면 우린 시간이 없습니다.」
서태영이 본부 당직으로부터 비밀 요원 안상호가 요원 10명을 인솔하여 경부고속도로를 내려갔다는 보고를 들은 것은 12시 5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부장에게 확인하기도 전에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아직도 슈퍼마켓 앞의 임시 수색본부에 진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 난 비밀 요원 안상호를 내려보낸 적 없다. 그리고 그런 놈이 있는지도 모른다.」
안기부장 이근복이 소리치듯 말했다.
「안기부를 사칭하고 비밀 요원의 코드 넘버까지 알고 있다면 놈은 심재택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김상철과 그 일당이야. 잡아라.」
「예, 부장님.」
서태영이 뱉듯이 말했다. 놈들은 이미 이 동네를 떠난 것이다 수화기를 부서져라 내려놓은 그가 옆에 앉아 있는 박동식을 쏘아보았다.
「이봐, 열한 시에 톨게이트를 빠져나갔어. 한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은 천안쯤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과장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수원이나 기흥, 오산이라면 벌써 고속도로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런 곳을 가려고 고속도로를 타지는 않아!」
그가 버럭 소리를 치자 박동식이 입을 다물었다.
「고속도로상의 모든 톨게이트에 수배해! 경찰청에 연락을 하고.」
차 안에 다시 서태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처 완료했습니다.」
박영수가 말하자 보안국장 이윤재는 잠자코 전화를 끊었다. 경찰청의 상황실 안이다. 당직사령인 형사국 심사과장 안총경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봐, 박 경정. 지금쯤 대전을 지날 시간인데, 호남고속도로로 내려갈지 경부를 그대로 탈지 알 수가 없군.」
그리고 수원이나 오산으로 이미 빠져나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경부는 말할 것도 없고 호남고속도로의 모든 톨게이트에 검문 경찰을 1개 소대씩 배치했으니 통행 차량들은 전쟁이 났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의자에 등을 기댄 박영수가 팔짱을 끼고는 안총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박영수보다 10년쯤 연상으로 내일모레가 정년이다.
「안과장님은 퇴직하면 근대리아로 가신다고 했지요?」
「허, 이거, 벌써 소문이 나버렸네.」
안총경이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통신관리관실의 조경정처럼 사표 내고 떠나진 않아 그러니 소문이 날 테면 나라고 해.」
「지원서는 내신 모양이군요.」
「이미 받아준다는 연락도 받았어.」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앞자리에 앉았다.
「조건도 통보받았고. 과장급 대우라는데 직급이 한국의 경무관급이더군. 그런데 대우가 그만이야. 백 평형 단독주택이나 아파트가 무상 지급되고, 자식들의 학비 일체가 보조되는 데다 월급이 만 달러야. 그리고 노망이 들 때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거야.」
「축하합니다.」
「근대리아에 가면 지방 서장으로 나갈 거야.」
경찰 간부뿐만이 아니다. 행정부나 연구기관, 교육계에다 현역 군인까지 근대리아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판 엑서더스이다. 정부는 가급적 공무원의 근대리아 이주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투자이민을 허용한 상태였다. 사직원을 내고 출국을 하는데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상황실 직원이 바쁘게 다가왔다.
「경정님, 안기부 전화입니다.」
당직사령이 있었지만 김상철 사건의 지휘자는 박영수인 것이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의 수화기를 들자 곧 연결이 되었다.
「보안국 박 경정입니다.」
「난 안기부 서과장입니다.」
볼륨을 높였는지 그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서태영과는 서너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었지만 만난 적은 없다. 그가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천안 휴게소에 놈들의 차가 버려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어요. 승용차와 승합차 두 댑니다. 우리 요원이 찾아냈습니다.」
「‥‥‥‥‥」
「놈들은 차를 바꿔 탄 겁니다. 톨게이트에 모든 차량을 정밀수색하라고 지시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철저하게 검문만 하면 놈들은 잡힙니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영수가 안총경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천안 휴게소에 차를 버렸답니다. 차를 바꿔 탄 것 같다는데요.」
「그렇다면 정밀수색이군.」
안총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 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영수는 부산하게 각도 경찰국에 지시 전문을 보내는 안총경에게로 다가갔다.
「난 헬기로 고속도로에 나가볼 테니까 상황을 연락해 주십시오.」
안총경이 머리를 들었다.
「물론이지. 이곳 걱정은 말고.」
6. 싹트는 음모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 빗방울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고 습기가 베인 게양대의 태극기는 바람에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전 9시경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이태준이 머리를 돌렸는데 지친 표정이었다.
「이남호가 어제도 전화를 해왔어. 어떻게 되었느냐고 은근히 묻는데 북한 측의 독촉을 받고 있다는 암시를 주더구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교활한 놈들이야, 북쪽이. 놈들은 이런 식으로 근대리아의 입장을 강화시켜 준단 말이야.」
예컨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근대리아로의 이주민 폭주 사태에 정부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의 알맹이는 모두 근대리아로 옮겨 놓고 근대리아를 통합하겠다는 북한 측의 계산이었다. 만일 한국에 첨단산업과 서비스산업만이 남게 된다면 기간산업이 붕괴된 경제가 며칠이 못가 붕괴될 것이라는 것은 이태준도 알고 있었다. 공동(空洞)화 현상으로 실업자가 폭등하고 물가가 치솟을 것이다. 그리고 곧 도시는 폐허가 된다. 압구정동과 신촌을 오가던 노랑머리와 마른 다리의 남녀들은 아사(餓死)의 위협을 겪게 될 판이었다.
이태준이 머리를 들었다.
「각하께서는 지금 심각하게 근대리아로의 투자이민 규제령을 검토하고 계셔. 중소기업의 탈출을 막고 공무원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선데 야당의 주장에 따라가는 입장이 되어서 조금 꺼림칙하군.」
「우리가 먼저 발표하면 됩니다. 야당에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어차피 한국에서 동거해야 할 사람들이니까, 누가 정권을 잡건 간에 쓰레기만 남은 경제를 인수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말은 쉽지만 앞으로의 일이 첩첩산중인 것이다. 투자이민을 허용한 것은 근대리아의 압력 때문이었다. 약점을 쥔 근대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현 정권은 이런 사태가 올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판 엑소더스였다.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 공무원, 학자, 군인에 이르기까지 대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신문의 사설에 의하면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국가 자체에 대한 환멸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주권을 가진 국가를 갖는다. 4강의 압력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의 장난에도 의연한 그들의 새로운 국가는 근대리아였다.
「근대리아가 잠자코 있을까요?」
혼잣소리처럼 신형목이 입을 열었다.
「북한과 공모해서 다시 일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선거가 오 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인데.」
「그래서 말인데.」
머리를 든 이태준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근대리아로 가야 할 것 같아. 정동민 씨하고. 물론 1박 2일 아니면 길어야 이박 삼일의 일정이야. 극비회동이지.」
「그것이 가능할까요?」
「근대리아 정부는 비밀을 보장하겠다고 했어.」
「북한 측한테도 말입니까?」
「그건 알 수가 없지만 그쪽은 상관없어.」
제일 상관이 있는 쪽은 한국의 국민과 언론이다. 더욱이 지난번 비밀 합의서가 유출된 바람에 단단히 홍역을 치른 다음인 것이다. 이태준이 긴 한숨소리를 냈다.
「신수석도 이번에 가야 되겠지만 국내문제가 시끄러워서, 김상철이 아직 잡히지도 않은 상태이고 말이야.」
지금은 고속도로의 톨게이트가 경찰로 덮여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잡았을 때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언론을 통제하고 기관을 장악하여 지휘할 사람은 자신뿐이다.
신형목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곳은.」
부산 톨게이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는 굵지 않았지만 바람과 함께 흩뿌려지고 있어서 비닐 우의가 바람에 펄럭였다가 피부에 달라붙기를 되풀이하는 중이다. 박영수는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씻어내었다. 오전 10시 반이었다.
「차가 지금 얼마나 밀렸지요?」
그가 묻자 옆에 서 있던 오경정이 고속도로 쪽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그는 부산 지방청의 보안과장으로 박영수와 같은 계급이었지만 이쪽은 본청 소속에 지휘 책임이 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아마 삼 킬로쯤 밀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간 엄청나게 밀리겠는데.」
박영수가 톨게이트 주변을 둘러보았다. 헬기로 부산에 도착한 것은 오전 6시 반이었다. 빗발이 뿌리는 톨게이트는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5개의 출구를 모두 막은 경찰이 모든 차량을 예외 없이 수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승객의 신원을 일일이 컴퓨터로 조회하는 것은 물론 트렁크를 수색했고 트럭의 짐칸을 뒤졌다. 전경 2개 소대 병력이 양옆으로 집총하고 도열한 무시무시한 분위기여서 죄 없는 시민이라도 빠져나올 때에는 안도의 숨을 쉴 정도였다. 가끔 항의하는 시민이 있을 때에는 북한의 게릴라 색출 훈련을 하고 있다고 설명을 했다.
박영수가 오경정에게로 몸을 돌렸다.
「오경정님, 오른쪽 차선의 컨테이너 트럭은 그냥 통과시킵시다. 봉인까지 붙인 것을 뜯어내고 내부를 조사하는 건 너무 심한 것 같으니까.」
오경정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자 모자에 쌓인 빗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러지요. 통과시키겠습니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지시한 지휘자의 책임이다. 오경정이 소리쳐 지시하자 곧 오른쪽에 길게 늘어서 있던 컨테이너 트럭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전사의 신원만 체크하고 봉인만 확인하면 통과시키는 것이다. 그러자 검정색의 값진 비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부산지구 안기부 과장이었다.
「아니, 이것 보시오. 컨테이너 트럭은 왜 그냥 보내는 거요?」
나이도 비슷한 연배였고 부산지구 과장이면 낮은 서열도 아니다. 그의 뒤에는 서너 명의 안기부 요원들이 곱지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박영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봉인을 떼고 들어가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컨테이너 트럭을 수색하는 건 시간 낭비요.」
「봉인 만드는 건 쉬운 일이오. 수색해야 합니다.」
그도 만만치 않았다. 허리에 두 팔을 걸친 그가 턱을 들었다.
「다시 지시해 주시오. 컨테이너 트럭도 수색하라고 말이오.」
「이런 씨발놈이.」
눈을 부릅뜬 박영수가 으르렁대듯 말했으나 말소리는 똑똑하게 들렸다. 그가 한 걸음 사내에게로 다가가 섰다.
「난 목을 걸고 이 일을 한단 말이다, 이 새끼야. 청와대에서 내 목을 쥐고 있단 말이여.」
기세에 눌린 사내가 몸을 굳히고는 눈을 껌벅였다. 오경정이 침을 크게 삼켰다.
「항의가 들어가도 목이 잘리는 건 나고, 놓쳐도 잘리는 건 내 목이야. 김상철이 수사를 처음부터 맡고 있는 것이 나란 말이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마라.」
「아니, 이 새끼가.」
하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사내가 한 걸음 나섰다.
「어디다 대고 욕이야, 욕이. 이 새끼야.」
「어허.」
그러면서 오경정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거 왜 이러시오? 점잖으신 분들이.」
그때에는 박영수의 부하들이 물려와 있었고 혈기 왕성한 부산 지방청의 경위급 간부는 권총집에 손을 얹고는 안기부 요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오경정에게 등이 밀린 과장은 그 자리를 떠났다. 빗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수경사령관 최무섭 중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빗줄기가 뿌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예하 부대인 제50공수여단의 여단장실이다. 이윽고 앞자리에 앉은 강석호 준장이 들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북한과 비밀 합의를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남북한의 비밀 합의서 사본이다.
「이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군요.」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아, 비밀 합의는 여러 번 이루어진 모양이다.」
다리를 편 최무섭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린 허수아비였어. 존재가치를 상실한 채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이것을 가져온 이정훈 국장은 수배 중인가요?」
「그렇다고 하더군.」
최무섭은 대한일보 펀집국장 이정훈과 고교 동창이다. 최무섭이 3년 선배였는데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보니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이정훈이 난데없이 그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최무섭은 수배 중이라는 그의 말에 놀랐지만 은밀하게 만나 상황을 듣고 합의서 사본을 받아온 것이다. 최무섭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입맛을 다셨다.
「얼마 전에 기무사령관을 만났는데 그놈은 대선 이야기만 하더군. 이 일을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야.」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령관님.」
강석호가 눈으로 탁자 위의 합의서를 가리켰다
「이것을 갖고 계시는 건 안전핀 빼낸 수류탄을 쥐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저도 보았으니 같은 입장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이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놈이 기대한 건 군이 일어나는 걸까?」
그러자 강석호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얼굴이 다시 굳어져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그 사람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최무섭이 턱으로 합의서를 가리켰다.
「그렇지. 하지만 이것을 우선 오십일에게 보여줘, 자네가 갖고.」
「그렇게 하지요.」
강석호가 서류를 접어 가슴 호주머니에 넣었다.
「수류탄을 저에게 넘기시는군요.」
「둘이서 상의한 다음에 오십이에게 보이든지 말든지 결정해라.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손을 권총처럼 만들더니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야 나는. 죽을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그저 군인답게.」
오늘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안보회의가 있는 날이었지만 갑자기 내일로 연기되었기 때문에 안기부장 이근복은 사무실에서 기무사령관 함종일을 맞았다. 그들은 한 달에 두어 번쯤 만나는 사이였으므로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는 자리에 앉았다. 함종일의 오늘 방문은 일정에 없었지만 뜻밖의 일은 아닌 것이다. 여직원이 녹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함증일이 입을 열었다.
「주로 군의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인데, 남북 간 비밀 합의를 했다는 겁니다. 여당 대선후보를 밀어주기로 했다는 내용이오.」
녹차 잔을 든 함종일이 웃음 띤 얼굴로 이근복을 바라보았다.
「정치권 일각에서 의도적으로 소문을 흘린 낌새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원지를 찾기가 어려워요.」
이근복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요즘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젯밤 고속도로 전체의 비상 상황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김상철은 살인 혐의로 진즉 기소된 놈입니다. 모두 여섯 명을 살해한 혐의인데 기소가 풀려진 것이 아닙니다.」
이근복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고 죄가 없어질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전(前) 부장 권준규 씨가 연금된 일과 전(前) 과장 심재택이 수배된 것은 무엇 때문이지요? 그리고 언론인 칠팔 명이 24시간 감시를 받고 있는 일도 말입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함종일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청와대에서 대검과 경찰청의 보안국장으로 이어지는 핫라인을 우리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부장님은 알고 계실 겁니다. 기무사의 역할이 지금은 대폭 축소되어 있지만 전(前) 정권 때 만들어진 기능이 있으니까요. 현 정권은 아마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근복이 쓴웃음을 지었다. 군사정권 시에는 기무사의 전신 보안사가 검경의 작전까지 체크하고 확인했던 것이다. 현 정권은 그것을 가동시키지 않았을 뿐이지 기무사의 기능은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보고는 기무사령관 선에서 종결되어 왔을 것이다.
「그자들은 유언비어 날조 혐의를 받고 있어요.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권준규 씨까지 말씀입니까?」
「그래요.」
함종일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웃음기가 사라지고 정색을 한 얼굴이다.
「일국의 안기부장이었던 사람이 말입니까?」
「그래요.」
「유언비어 내용이 뭡니까? 시중의 소문과 같은 남북 간의 비밀 합의에 대한 것이겠군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입맛을 다신 항종일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비밀 합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난 모릅니다.」
한동안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던 함종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것, 갑자기 찾아와 폐를 끼쳤습니다. 이만.」
승용차가 안기부의 청사 정문을 빠져나오자 말없이 앞쪽을 바라보고 있던 함종일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군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있군, 이 사람들이.」
옆자리에 앉은 참모장 현창복 준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지 않으시던가요?」
「모른다는 거야. 그저 유언비어 날조 혐의라는군.」
차 안에 다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기무사의 주요 업무는 군의 쿠데타를 방지하는 것이다. 고위층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기무사 업무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공터에 들어선 컨테이너는 꽁무니를 담장 쪽으로 돌리고는 멈춰 섰다. 전에는 공장이었던 모양으로 시멘트 건물이 옆쪽에 있었지만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두 사내가 굵은 빗줄기를 맞으며 컨테이너 뒤쪽으로 오더니 곧 봉인을 뜯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사내들이 밖으로 쏟아지듯 뛰어내렸다. 김상철은 빗물이 고인 공터를 뛰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습기에 배인 건물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비는 새지 않았다. 부서지고 녹슨 기계가 한쪽에 쌓여 있는 걸 보면 폐업한 지 오래된 공장이었다. 컨테이너 트럭을 보낸 심재택이 다가왔다. 트럭의 운전사는 김상철로부터 만 달러를 받았던 것이다. 두 딸을 두었다는 50대의 그는 만일 발각이 된다면 위협을 받았다고 말해 달라는 조건으로 승낙을 했는데 현금 만 달러는 선금으로 받아 넣었다. 물론 그의 옆에는 심재택의 부하가 앉아 있었으므로 위협은 위협이다.
「자, 가십시다.」
심재택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오가 되어가고 있었다.
「박영수를 믿긴 했지만 십 년은 감수했습니다. 복선도 없이 행동하기는 처음이오.」
그들은 둘씩 셋씩 무리를 지어 공터를 나왔다. 심재택이 알려준 동래의 은신처로 출발하려는 것이다. 김상철은 심재택과 동행이었는데 그들의 뒤를 남용배가 바짝 따라왔다. 심재택이 근처 가게에서 우산을 사 왔으므로 그들은 우산을 함께 쓰고 있었다. 큰길로 나온 그들은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박영수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들이 마악 집을 나섰을 때였다. 그는 안기부에서 봉천동의 주택가로 병력을 집중 투입하는 중이라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시가 지난 후에 다시 톨게이트를 빠져나간 것이 탄로가 났다고도 말해 주었다. 컨테이너 트럭에 옮겨 탄 심재택이 박영수에게 연락은 했지만 가슴을 졸인 것은 김상철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언제 도청당할지 모르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택시가 멈추자 그들은 차에 올랐다. 어쨌든 한 고비는 지난 것이다.
그들 일행이 해운대의 민박집에 모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가 되어 있었다. 민박집은 해수욕장에서 가깝기는 했지만 시설이 낡은 데다 지저분했다. 더구나 8월 중순이어서 손님들이 뜸해지는 시기에 비까지 오는 판이다. 손님이 한 명도 없던 차에 열 명이 넘는 손님이 방 네 개를 모두 채우자 주인의 얼굴은 희색으로 가득 찼다. 김상철의 방으로 이한이 들어섰다.
「형님, 전화한 놈을 찾았습니다.」
온돌방이었으므로 그는 문 앞에 선 채로 말했다. 눈을 치켜뜨고 있어서 흰 창이 더욱 넓게 드러나 있다.
「민용길입니다. 그놈이 심부름을 나간 길에 공중전화 부스에서 네 번이나 근대리아로 전화를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민용길이라면 이한이 데리고 온 부하로 하얼빈 태생의 중국계 조선인이었다. 박영수는 안기부에서 봉친동으로 수사망을 좁힌 이유도 말해 주었던 것이다.
이한이 김상철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타운에 있는 제 애인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계집이 아프다는군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형님.」
「내버려 두어라.」
김상철이 말하자 이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됩니다. 그놈 때문에 하마터면 우리 모두가 당할 뻔했습니다. 내버려 두면 기율이 잡히지 않습니다.」
「뉘우친다면 내버려 두어라.」
정색을 한 김상철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네가 용서해 주란 말이다. 꼭 벌을 준다고 기율이 잡히는 건 아니야.」
「손가락 하나라도 잘라야 …」
그러던 이한이 김상철의 시선을 받고는 입맛을 다셨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한이 방을 나가자 이제까지 잠자코 앉아 있던 심재택이 몸을 일으켰다.
「항구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국적선을 알아보려는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소리쳐 김봉만을 부르자 곧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네가 심선생을 따라갔다 오너라. 넌 일본 여권을 갖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을 테니까.」
「저기, 두 놈이야. 그 뒤쪽에 있는 두 놈은 감시를 맡고 있어.」
장석규가 턱으로 가리킨 곳은 엘레인호텔 옆쪽의 슈퍼마켓 앞이었다. 저녁 8시경이어서 리조트 시티의 호텔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슈퍼마켓 앞쪽은 더욱 혼잡했다. 장석규가 가리킨 네 사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슈퍼마켓 안을 기웃거렸다가 거리를 둘러보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거리에 서 있는 두 사내가 든 슈퍼마켓의 종이봉투에 든 것은 마약인 것이다.
「옳지, 한 놈이 나타났다.」
장석규가 소리치듯 말했지만 홍대영도 이미 한 사내가 그들 두 명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곧 옆쪽의 골목으로 들어섰고 슈퍼마켓의 입구 쪽에 서 있던 두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잘 짜여진 팀워크다. 장석규와 홍대영은 그들과 대각선 방향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수십 대의 차량이 인도에 붙여 세워져 있었으므로 차 안의 사람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장석규가 잇새로 말했다. 이곳은 엄연히 이한의 구역으로 예전에는 마약 소매상이 얼씬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봐, 어디 가려고 그래?」
장석규가 차문을 열자 당황한 홍대영이 소리쳤다.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이야, 내버려 두라구.」
「건드리지는 않겠어. 쫓아낼 거야.」
장석규가 밖으로 나갔으므로 찌푸린 홍대영도 뒤를 따랐다. 그들은 행인들을 헤치며 슈퍼마켓 앞으로 다가갔다. 골목으로 들어간 두 사내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슈퍼마켓 입구에 서 있던 감시자들은 이미 장석규들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그들이 10미터쯤 앞으로 다가가자 몸을 돌리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잘 됐다, 이 새끼들.」
장석규가 뱉듯이 말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넣은 권총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주머니의 밑창을 트고 소음기가 부착된 긴 총신을 찔러 넣은 것이다. 그들은 서둘러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호텔의 뒷문 쪽으로 나 있어서 행인들이 꽤 많았는데 네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장석규의 시선이 골목 안의 가게들을 분주하게 쓸어 내려갔다. 한쪽은 담장이어서 반대편에만 올망졸망한 선물 가게와 세탁소 등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이 어느 한 곳에 들어간 것은 확실했다.
「애들을 불러, 골목 출구를 막으라고 해.」
장석규가 다급하게 말했다. 네 놈이 등을 보이고 골목을 빠져나갔다면 내버려 둘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변한 것이다. 갖고 있는 마약을 뺏고 두들겨 준 다음에 보낼 작정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흥대영이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장석규가 처음 들어선 곳은 선물 가게였다. 손님을 맞고 있던 주인이 무작정하고 안으로 들어선 그를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안은 비어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연락을 끝낸 홍대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봐, 놈들은 도망친 모양이다. 일 만들지 마라.」
「놈들은 이곳에 있어.」
주머니 속의 권총을 움켜쥔 채 장석규는 세탁소 안으로 들어섰다. 다림질을 하던 세탁소 주인이 눈을 치켜뜨고는 그를 맞았다. 놀란 표정이 아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퍼뜩 긴장한 장석규가 머리를 돌렸을 때 그는 걸려 있는 옷더미 속에 서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등에 거센 충격을 받은 그는 휘청거리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칼이 박힌 것이다. 그는 기를 쓰고 권총을 빼내다가 총신이 주머니에 걸리자 방아쇠를 당겼다. 다리에 뜨거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장석규는 의식을 잃었다. 세탁소 앞에 서 있던 홍대영은 뛰어나온 사내로부터 정면으로 칼을 받았는데 가까운 거리였지만 몸을 돌린 덕분에 칼이 옆구리에 찍혔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 허리춤에 찔러 넣은 권총을 빼내고는 달려드는 사내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몸에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정통으로 심장이 뚫린 사내가 세탁소의 벽에 등을 부딪치며 쓰러지는 순간 홍대영은 요란한 총성을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이마가 뚫린 그는 뒤로 넘어지며 숨을 멈췄다.
「비상 사태입니다 김상철이가 있다면 이야기가 통하겠지만 그레고리와 변순태는 말이 잘 먹히지가 않아요. 특히 그레고리 파트킨은 골칫거리올시다.」
수화기를 쥔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심각합니다. 북한 측도 조직원들을 모으고 있는데 이러다가가는……」
「이봐, 서일한테 연락을 해.」
이남호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서툰 짓 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리고 저쪽 그레고리한테도. 일을 만든다면 가차 없이 진압하고 연대책임을 묻겠다고 전해.」
이대각이 힐끗 앞에 앉은 장동택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렇게 전했습니다, 청장님. 하지만 변순태는 북한 측에 제 부하를 죽인 세 놈을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네 놈이었는데 하나가 죽었으니 세 놈이라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제 놈이 무슨 판관이라도 된단 말이야?」
「글쎄 저희끼리 하는 수작이라.」
「절대로 일이 일어나선 안 돼. 강경책을 쓰서라도 막아.」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대각이 장동택을 향해 웃었다.
「변순태는 치밀한 놈이야. 거기에다 그레고리는 산적 출신이라 뒤를 치는 걸 좋아하지. 나도 한때 그놈에게 야습을 당해 포로가 된 적이 있어. 둘 다 정면 대결은 안 할 거야.」
「마약 거래의 현장을 잡고 덮치려다 당한 겁니다. 더구나 그쪽은 김상철의 구역입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경비본부의 본부장실 안이었다. 밤 10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경비대는 비상대기 상태인 것이다. 장동택이 말을 이었다.
「내일 한국에서 VIP가 밀행(密行)하여 오는 상황이니 청장님도 신경이 쓰이시겠군요.」
「그것들한테 신경 쓸 건 없어. 무슨 부탁이나 하러 오는 모양이니까.」
청와대 비서실장 이태준과 여당의 대선후보 정동민의 비밀 방문은 극비사항이었다. 그들의 방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근대리아 정부 내에서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경비대의 고위층인 이대각과 장동택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다섯 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한국의 귀빈들을 공항에서 곧바로 총독의 관저로 모셔갈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김사장이 잡히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만일 잡혔다면 한국 관리들의 경호도 몇 배나 더 힘이 들었을 테니까요.」
장동택의 말에 이대각이 코웃음을 쳤다.
「관리들 경호뿐만이 아냐. 그렇게 되었다가는 강미현도 경호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상황에 자네와 내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중무장한 병력이오. 모두 최근에 북한에서 데려왔는데 편제도 인민군식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근대타운에 있는 최태호의 색시집 안이다. 그 사이에 색시집은 담을 헐어 옆집까지 규모를 넓혔고 색시도 세 배쯤으로 불어나 있었다.
「지휘관은 송무용이란 자로 호위총국의 중장 출신이오. 이제 얼마 안 가면 근대리아의 경비대도 그들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변순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을 해볼 테면 해보라지. 아예 김정일까지 오라고 하든지, 금방 결단을 내줄 테니까.」
「이봐요, 변사장. 변사장은 북한 군대를 몰라서 그러는 거요. 그자들은 잘 훈련되어 있단 말이오.」
「개새끼들처럼 말이지.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무는.」
밤이 깊었지만 색시집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8월 중순으로 아직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전이어서 주민들의 문밖출입이 잦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의 사건도 북한 측이 도발한 기미가 있습니다. 이미 타운과 근대리아에 호위군이 배치되어서 준비를 갖추고 있어요.」
최태호가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잔을 쥐었다. 그는 한때 근대리아에 진주한 북한 세력의 이인자었지만 지금은 타운의 사업장 몇 개를 관리하는 관리자 신세로 전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자본주의에 눈을 떠 개인 재산으로 계산하면 근대리아의 북한인 중에서 제일가는 자본가가 되어 있다. 물론 이 사실이 탄로 나면 총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보드카를 한 모금에 삼킨 그가 변순태를 바라보았다.
「난 고급 정보에는 소외된 형편이 되어서 높은 놈들이 무슨 꿍꿍이셈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들, 김사장님 세력이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오, 북한 정부와 근대리아 정부가 더욱 밀착되는 것에 반비례한단 말이오.」
「경비대가 김사장님에게 호의적이기는 해도 총독이 몇 명만 자르면 그만이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대로 섣불리 나서지 마시오. 덫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잠자코 그를 바라보던 변순태가 팔짱을 끼었다. 시선은 최태호를 향해져 있지만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놈들이 신중하군.」
송무용이 부리부리한 시선을 들고 박기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김정일의 호위를 맡은 호위총국 1국 2부장 출신으로 김정일의 만경대학원 동기였다. 따라서 김정일의 호위부대 중대장으로 시작한 그는 지금 출세 가도의 정점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근대리아의 호위군 사령관 직책은 곧 북한의 인민군 총사령관 이상의 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근대려아는 북한의 미래가 걸려 있는 땅인 것이다. 그가 탁자 위로 가죽 장화를 신은 두 발을 올려놓았으므로 구두 밑창이 박기환을 향해 펼쳐졌다.
「이미 저쪽은 미끼를 물었어. 기회는 지금인 것 같은데,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김상철이 현재 한국에서 쫓는 중이고, 근대리아와 우리 공화국 정부와의 관계는 최상입니다. 저도 기회가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기환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비대를 사전에 제압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경비대와의 전쟁이 됩니다.」
「그렇지. 총독에게 말해서 경비대를 눌러두라고 할까?」
「아니면 강미현에게 부탁하든지.」
「사령관 동지, 지금 강미현은 근신 중입니다. 총독과도 만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대표에게 총독을 만나라고 하지. 골칫덩이를 제거할 테니 경비대를 움직이지 말라고 말이야.」
박기환이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북한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오던 송무용이다. 김정일 외에는 두려운 사람이 없었던 그는 이런 식으로 명령을 했고 그것이 실행되어왔다. 독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명령에 익숙해지고 그와 비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짧아지는 법이다. 따라서 명령도 단순해지는데 그것을 수행하는 아랫사람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 맞추려다 보니까 거짓 보고를 하게 된다.
「서 대표에게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사령관 동지.」
「총독의 짐을 덜어 주는 거요. 강미현이 시바다를 시켜 김상철을 서울로 유인해 처치하려고까지 했던 모양인데 무참하게 실패하지 않았소? 김상철이 근대리아에 돌아오면 총독 일가는 잠도 제대로 못 잘 거요.」
「곧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만.」
그러자 송무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힘들 거요, 남조선의 수사기관이 찾지 못하면 우리 공작원들이 찾을 테니까.」
「동무는 이곳에서 모르고 있었겠지만 이미 삼 개조가 파견되어 있었소. 김상철이 들어가기 전부터 말이오.」
「김상철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입니까?」
「그것보다도 대남공작의 차원이지. 우리 공작부의 우수한 두뇌들은 위대하신 지도자 동지의 교시를 받아 거시적인 작전을 수행하고 있소. 대통령 선거 하나로 대가리가 터져라고 싸우고 있는 남조선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오.」
「공항과 항구의 감시가 철저합니다. 경찰은 물론 안기부 병력까지 대거 투입되어서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해운대의 바닷가 모래사장에 박영수와 김상철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앞쪽은 짙은 어둠뿐이었다 서너 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별빛인지 배의 등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파도 끝이 흰 거품만을 내보이며 그들의 발끝까지 밀려왔다가 물러가고 있었다.
「러시아 국적선 주위에도 해경 순시선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가능성을 체크하고 있어요.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박영수가 길게 숨을 뱉었다
「내가 무슨 애국자도 아니고 큰일을 일으킬 만한 위치도 아닙니다, 그럴 만한 배짱도 없고. 나도 이젠 이곳에 미련이 없습니다. 난 마음을 정했어요.」
담배를 모래 위에 찔러 끈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정권을 누가 쥐건 북한과 무슨 협상을 했건 간에 이제는 관심이 없어요. 다만 분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죽은 내 아내를 생각하면 말이지요.」
「‥‥‥‥」
「고리키 호가 내일 출발할 예정인데 어떻게든 그 배를 탈 작정입니다. 선장하고는 계약이 되었어요.」
박영수가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심재택 씨도 같이 갑니까?」
「아니, 그분은 이곳에 남습니다.」
「그분도 위험해요. 안기부에서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중입니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심재택이 맞추어서 다가왔다. 김상철의 옆에 앉은 그가 서둘렀는지 호흡을 가누었다. 그는 서울에 연락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서울에서는 일이 꽤 진행되고 있더군요. 소문도 무성하지만 여러 사람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검찰에 잡혔을 때를 생각해서 그럽니다.」
그가 접촉했던 언론인 대부분이 잡힌 것도 그가 자백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를 쓰고 근대리아의 북한 측 소스인 박기환을 불지 않은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심재택은 그들의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영수가 일어나 엉덩이의 모래를 털었다.
「그럼 난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김상철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나도 곧 근대리아로 떠날 거요. 마누라한테 말했더니 펄쩍 뛰며 좋아합디다. 집주고 월급을 세 배쯤 많이 받을 거라고 했더니.」
「그런 직장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손을 잡은 김상철이 말하자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난 경비대에 가고 싶습니다. 김사장이 추천이나 해주시지요.」
「전준장은 다혈질입니다. 정권을 당장이라도 뒤집어버리자는 군요. 청와대 앞에서 총에 맞아 죽더라도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준장은 51 공수여단장 전종택을 말하는 것이다. 수경사령관 최무섭은 팔짱을 끼고 서서 50여단장 강석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여단의 사격장으로 앞쪽에 가로로 세워진 수십 개의 표적들이 총성과 함께 눕혀졌다가 다시 올라갔다. 제아무리 도청 기술이 발달하여 있다고 하더라도 총알이 날아오는 전방에서 입놀림을 카메라로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52 여단의 김준장은 따라옵니다. 사령관께서는 2군사령관을 움직여 보시지요.」
2군사령관 한기영 대장은 사단장 시절에 최무섭이 연대장으로 모시고 있던 상관이다. 총성이 그치기를 기다려 최무섭이 입을 열었다.
「어제 들은 정보인데 쌀값을 이번 달 말까지 주기로 했다는 거야. 그래서 청와대는 대기업으로부터 대선자금을 미리 받으려고 동분서주한다는 거다.」
「‥‥‥‥」
「그런데 오성이 거절했다는 거야, 십일월에나 주겠다고. 그래서 청와대는 사색이 되어 있다는군. 다른 재벌그룹들도 하나같이 뒤로 빼는 바람에.」
「역적놈들 같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그 일당들은 제일 먼저 도망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놈들부터 쏴 죽여야 합니다.」
옆쪽에 선 사격 통제 장교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선에 나와 있는 중대장과 사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령관과 여단장이 명중도를 점검하듯 표적을 바라보며 있었기 때문이다. 구령 소리와 함께 사격을 마친 소대가 물러갔고 다른 소대가 엎드렸다.
「오성그룹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 그래서 핑계를 대고 미룰 거야. 그러고 전(前) 안기부장 권준규도, 몇 명의 핵심 언론인들도 알고 있었다가 검찰에 붙들렸다. 하지만 정부는 그들을 공식적으로 다루지를 못했지. 여파가 두려워서 말이야.」
최무섭이 표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2군 참모를 하나씩 만나보도록, 믿을 만한 사람들만. 죽을 각오를 해라.」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사령관님.」
「쿠데타가 아니야. 자주 정권을 뒤에서 지원한 다음 우리는 군으로 돌아온다. 길어야 일주일, 빠르면 삼사 일이다.」
「당연하지요. 저도 국회의원 될 생각은 없습니다.」
갑자기 최무섭이 팔을 들어 강석호의 어깨를 쳤다. 뒤에 서 있는 통제 장교와 중대장들의 눈에는 사격이 훌륭하다는 격려의 표시로 보였다.
「난 이미 죽을 각오를 했다. 군인으로 이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을 테니까.」
「군인으로 이 일에 등을 돌리는 놈은 군인 자격이 없습니다. 아니, 역적이지요.」
몸을 돌린 최무섭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0시 5분이었다.
10시 정각에 근대시 외곽에 위치한 총독 관저에서 근대리아와 한국 정부와의 비밀회담이 열렸다. 근대리아 측에서는 총독과 행정청장 이남호 둘이었고 한국 측은 여당의 대표이자 대선후보인 정동민과 대통령 비서실장 이태준 두 명으로 네 명의 회담이다. 그러나 접견실의 상석에 총독이 앉고 좌측에 정동민과 이태준, 우측에 이남호가 앉은 좌석 배치였으니 대등한 위치의 회담은 아니다.
어젯밤 자정 무렵, 근대리아 총독의 전용기를 타고 홍콩에서 날아온 한국 측 대표들은 총독 관저 옆에 세워진 영빈관에서 묵고 나온 참이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정동민이 헛기침을 했다.
「각하, 이대로 간다면 한국 정부는 파탄입니다. 국가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충격적인 발언이다. 이남호가 눈을 크게 떴고 총독이 턱을 조금 들었다. 정동민이 말을 이었다.
「북한은 정권의 약점을 쥐고 여차하면 터뜨릴 위협을 하는 데다가 여야는 극단적인 대립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쟁취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결사적인 생각뿐입니다.」
「‥‥‥‥」
「더구나 경제는 말이 아닙니다. 언론으로 호도하고 있지만 이 추세로 나간다면 선거 전에 물가와 실업자 폭등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정동민이 총독을 바라보았다.
「근대리아로의 투자이민이 폭주하는 것이 현실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이 새로운 조국을 찾아 떠나는 것이지요. 실제로 한국의 위기올시다.」
그러자 이남호가 헛기침을 했다.
「정 대표님, 말씀을 이해는 하겠는데, 요점이 무엇입니까? 설마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지요? 물론 우리가 책임을 느낄 입장도 아닙니다만.」
「도와달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조국이 폐허가 되는 것을 막아주십사고. 우리 민족이 오천 년 일궈왔던 땅이올시다.」
힐끗 총독에게 시선을 준 이남호가 입맛을 다셨다.
「정치하시는 분이셔서 그런지 말씀을 돌려하시니 저는 아직도 요점을 모르겠습니다만.」
「근대리아와 한국과의 경제 연합입니다.」
그러자 총독이 늘어진 눈시울을 조금 들어 올렸다. 이남호는 묵묵히 정동민을 바라보았고 이태준은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곧 정동민이 말을 이었다.
「한국은 투자이민을 더욱 활성화시켜 근대리아의 발전을 돕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조국에 대한 희망을 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부패와 부정이 발을 딛지 못하는 땅에서 한국민이 자긍심을 되찾도록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말씀입니다.」
「‥‥‥‥」
「두 번째가 정치연합이지요. 곧 국가연합입니다. 근대리아의 기반은 한국인데도 북한이 노동력을 빌미로 이곳을 속령(屬領)으로 삼으려는 기도를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근・한이 통합되면 자연히 북한도 우리에게 흡수될 것입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이남흐가 이제는 아예 총독을 향해 돌아앉더니 빤히 바라보았다. 말씀을 하시라는 태도였다. 총독이 다시 무거운 눈시울을 내렸다.
「이 청장, 조건이 무어냐고 물어봐라.」
이남호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물론 정동민과 이태준도 다 들었다. 마치 왕이 말단의 관리에게 하문할 적에 옆에 부복한 승지를 시켜 묻는 모양이었지만 이남호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듯이 이태준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조건이 뭡니까?」
「이번 대선을 도와주십시오.」
이남호가 총독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대선을 도와 달라는데요.」
「어떻게 말인가?」
「어떻게 말입니까?」
이건 정동민에게 묻는 말이다.
「근대리아와 한국과의 경제연합에 대한 합의를 했으면 합니다. 이것은 양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쌀 지원 문제인데 근대리아가 조정역할을 맡고 있었으니 근대리아가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선거 전에 갚겠습니다.」
이번에는 긴 내용이어서 이남호는 잠자코 총독을 바라보았다. 정동민과 이태준도 긴장한 표정으로 총독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이윽고 총독이 입을 열었다.
「과연 교활하군, 정치꾼들이란.」
「말은 그럴듯한데 제 손으로 내놓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손해 볼 것도 없지.」
「‥‥‥‥」
「인간의 허영심과 권력욕, 거기에다 민족애까지 포함된 멋진 상품이야. 근 · 한의 국가연합이라, 그것을 발표하면 표가 쏟아지겠지. 석 달쯤 이주민을 억제시켜 놓고 선거 후에 이주시킨다면 아마 사오백만 표는 거저 들어오겠지.」
「‥‥‥‥」
「쌀 대금 4억 달러를 우리더러 대납해 달라는 얘긴데 우리 역할을 높여 주는 것 같지만 은근한 위협이군. 아마 이주민을 억제시킨다든가 아니면 근대리아 진출 대기업에 갖가지 불이익을 주거나 하겠구만.」
총독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자문위원회에 통보해서 득실을 계산하도록 해라, 현실적인 것으로만 말이다. 허황된 이야기는 삭제시키고.」
「예, 각하.」
머리를 돌린 총독이 늘어진 눈시울을 더욱 내리며 정동민을 향해 웃었다.
「텔레비전이나 보시면서 그동안 쉬고 계시오, 즐겁게.」
그날 정오 무렵, 영빈관에서 TV를 보고 있던 정동민과 이태준이 거의 동시에 몸을 굳혔다. TV에서는 사형집행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장소는 근대시 교외의 평원이었다. 평원은 아직 푸르렀지만 앞쪽에 펼쳐진 산맥은 이미 흰 눈에 덮여 있었다.
웅대한 자연의 경관이다. 그러나 풀밭에 세워진 여섯 개의 나무 기둥으로 카메라가 옮겨지면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형자 중 두 명은 살인범이었다. 살인강도 행위를 저지른 그들은 중국인들로 화면에 얼굴과 인적 사항이 나타났다. 다음의 한 명은 러시아인으로 중국 여자를 강간한 후에 살해한 혐의였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난 것이 러시아계 고려인이다. 그는 마약을 제조 판매한 혐의였는데 그가 제조한 마약을 마시고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정동민과 이태준은 제각기 쓴 것을 삼킨 듯한 표정이 되었다. 공개처형을, 더욱이 TV로 방영한다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북한이 자주 공개처형을 한다는 정보는 들었지만 그들도 TV로 선전하지는 않는다.
이맛살을 찌푸린 이태준이 마악 리모컨을 들었을 때 나머지 두 명이 화면에 나타났다. 각기 3, 40대의 동양인 모습이었다. 아나운서의 설명이 들렸다. 그들은 행정청의 간부급 직원이었다. 본적이 서울인 40대의 사내는 이주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관광국의 대리였는데 허가증 발급을 미끼로 약 8천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한 명은 경기도 이천 출신의 환경국 계장이다. 그는 각 공장에서 배출하는 폐수를 정화시키는 정화소의 책임자였다. 아나운서의 말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자는 공장으로부터 폐수를 먼저 처분해 준다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화소의 용량이 모자라자 폐수를 평원에 버렸다고 자백했습니다.」
정동민과 이태준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뇌물 8천 달러를 먹은 죄는 한국에서 따진다면 잘하면 시말서였고 못 되면 사표를 내거나 집행유예감이다. 폐수 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총살형인 것이다. 여섯 명의 사내가 기둥에 묶여지는 장면이 화면에 나왔을 때 이태준이 TV 스위치를 껐다.
「이걸 보라고 총독이 텔레비전 운운했군.」
혼잣소리처럼 정동민이 말하자 이태준이 입맛을 다셨다.
「총독은 한국 정부의 관리들에게 감정이 많았지요. 그 분풀이를 하는 모양이오.」
정동민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도청을 염려하는 시늉이었다
「완전히 전제왕권 시대 같군.」
그들은 이쪽만을 말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처형을 한다면 관리들이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것인가는 생각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남조선 놈들은 씀씀이가 대단하지요. 백 달러짜리 지폐를 뿌리는 걸 보면 통이 큽니다.」
설렁탕에 든 고기를 씹느라 최태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타운 변두리의 조그만 음식점 안이다. 근처에 클럽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주 이곳에 들르는 편이었는데 음식점의 주인은 중국계 조선족이었다.
「돈이 있어야 돈을 버는 게지요. 이런 식으로 장사했다가는 음식이 아무리 맛이 있어도 큰돈은 못 법니다.」
최태호가 음식점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으므로 이금철도 그를 따랐다. 점심시간이어서 손님들이 차 있었지만 테이블이 채 여섯 개밖에 되지 않아서 손님은 십여 명 정도였다. 최태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개인영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률이 오르지요.」
북한은 이미 7만 명 가까운 이주민을 근대리아로 보냈지만 대부분이 공장으로 나갔고 나머지는 대성무역 소속의 각 사업장에 고용되어 있다. 대성무역은 32호실 관할이므로 근대리아의 모든 북한 측 사업장은 32호실이 관리하는 셈이다. 따라서 북한 이주민으로 개인영업을 하는 사람은 없다. 월급의 30퍼센트 가량을 의무적으로 대표부에 바쳐야 했으므로 돈을 모을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투자이민을 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금철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당신은 빽이 단단하더구만. 감찰부의 감사에서 당신은 합격 판정을 받았어.」
감찰부는 수시로 간부급 파견자들의 동향을 조사했는데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에 물들면 안 된다는 김정일의 엄격한 지시 때문이었다. 한푼이라도 뇌물을 먹었거나 공금을 축낸 자는 가차 없이 추방을 당했고 심한 경우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을 했다.
공장이나 사업장에 고용된 이주민이 성금이라고 불리는 월급의 30퍼센트를 내지 않거나 그 일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보이면 해당 세포조직에서 고발되어 병신을 만들거나 해서 본국으로 추방시키는 것이다.
최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야 근대리아 북한 사업장의 창립공신 아닙니까? 위에서 인정을 해주시는 거지요.」
「‥‥‥‥」
「하지만 요즘 공장과 사업장에서 탈주자가 많아진다는데요. 감찰부가 그것 때문에 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
탈주자는 밀입국자 숙소로 숨어들어 한국계나 중국계 사업장에 다시 취직을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돈을 모으는 것이다.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물을 삼킨 이금철이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난 이달 말에 귀국하도록 명령을 받았네. 이제 근대리아 생활은 그만이야.」
「‥‥‥‥」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 생각도 들어.」
「위원장 동지.」
얼굴을 굳힌 최태호가 식탁 위로 상반신을 숙였다
「이렇게 추방당하실 수는 없습니다.」
「추방이 아냐. 강계의 제10 군단 사령부로 전속이 되었어. 다시 군으로 돌아간 것이지.」
「이곳에서 돌아간 동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위원장 동지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전속은 거짓말입니다. 아마 국경을 넘자마자 체포되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지실 겁니다.」
「‥‥‥‥」
「위원장 동지의 반발을 걱정해서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러자 이금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조국을 배신할 수 없어, 최동무.」
「설령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말이야. 그리고 실제로 나는 자본주의에 오염이 되었었어. 내 자신을 다시 정화시킬 필요도 있다. 동무 같은 사람이 있으면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그렇다고 동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야. 동무는 적응력이 강해서 아마 남조선의 어느 장사꾼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나는 지도자 동지의 교시를 끝까지 따르는 사람이 되겠어. 그러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야.」
의자에 등을 기댄 이금철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저 꿈만 같군. 김상철과 함께 마피아 보스를 제거하던 일도, 동지가 되었다가 원수가 되었다가 했던 지난날들이.」
고리키 호는 7천 톤급의 화물선으로 본래 니호트카와 유지노사할린스크를 왕복하던 구소련 해운국 소속 선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에게 불하되어 동해를 무대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날랐는데 근래에는 부산항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었다. 선력(船歷) 30년으로 꽤 노후한 배였지만 지금도 20노트의 속력을 낸다고 했다. 오후 5시경이 되자 남항에 정박해 있는 고리키 호 주위가 조금 한산해졌다. 세 시간 동안 통선이 두 번이나 오고 갔는데 그때마다 산더미처럼 실은 물건을 배로 옮겨 싣느라 소동이 일어났고 물건 상자가 바다로 떨어지기도 했다.
고리키 호에서 동쪽으로 1킬로쯤의 해상에 해경 순시선 한 척이 떠 있었다. 회색 빛깔로 미끈한 몸체의 순시선은 느긋하게 정박해 있었는데 가끔 해경 두어 명이 갑판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
「바다에서 잡히면 끝장이야. 숨을 곳도 없어.」
남용배가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며 말했다.
「아무르강에서 수영훈련을 받긴 했지만 난 물은 싫어.」
그의 옆쪽 바위에 앉은 김봉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닷가의 바위 위에 앉아 제각기 낚싯대를 쥐고 있었다. 옷차림도 물론 낚시꾼 차림이었고 어구도 있다. 그들의 앞쪽 3킬로쯤의 해상에 떠 있는 고리키 호는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다. 옆쪽에서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낚시에 고기가 걸린 모양이었다
「바다 쪽에서 접근해도 순시선의 레이더에 걸릴 거야. 저렇게 불어 있으면 잠수해서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김봉만은 턱으로 순시선을 가리켰다. 순시선은 24시간 감시를 하는 종이었다. 근처에 정박하고 있는 네 척의 배가 모두 러시아 화물선인 것을 보면 감시하기 쉽도록 한곳에 모아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항구에는 수백 척의 배가 떠 있었지만 순시선도 수십 척이다. 바다와 육지에서 그들은 철저하게 탈출 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세 시간이 넘도록 바다를 살피고 난 그들은 낚시도구를 챙겨 숙소인 민박집으로 향했다. 민박집은 해변가를 걸어 약 30분쯤의 거리에 있었다.
「난 근대리아로 돌아가면 식구들을 불러올 작정이다. 어머니와 누이가 둘에다 딸린 가족이 다섯이야.」
낚싯대를 어깨에 맨 남용배가 옆을 걷는 김봉만을 바라보았다. 거친 용모였지만 대범한 성격의 그는 김봉만을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고 짝이 되어 일을 맡는 일이 많았으므로 둘은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누이는 채소 장사를 하고 있어, 매형하고 같이. 어머니는 반찬 장사를 해, 김치 솜씨가 좋거든.」
남용배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어머니는 근대리아에서도 김치 장사를 할 작정이야. 장사가 잘될 거야.」
그들이 민박촌의 입구로 다가가자 길가의 가게 안에 앉아 있던 유재성이 눈으로 아는 체를 했다. 그의 보초 순서가 된 모양이었다. 민박집으로 들어선 그들은 방에 앉아 있는 김상철에게 보고를 했다. 보고를 마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밤 열두 시에서 한 시까지 한 시간 동안 순시선 27호가 위치를 떠날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 고리키 호에 탄다.」
그는 요즘 들어 수척해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경찰과 안기부가 부산지역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야.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빅토르 카가비치가 나호트카의 출입국 관리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6시 반이었다. 그는 40대 후반으로 수염투성이 얼굴의 거인이다. 관리사무소장 이고르 이바노비치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빅토르, 한국 차 성능이 좋더군. 마누라가 대단히 좋아하고 있어.」
자리에 앉자 이고르가 보드카 병을 들어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차를 갖더니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바람에 이젠 그것이 골치야.」
빅토르는 나호트카의 마피아 보스이다. 그는 지난달에 이고르에게 한국산 중고 승용차를 선물했는데 5만 킬로밖에 주행하지 않아 신형이나 마찬가지였다. 보드카 잔을 든 빅토르가 수염 사이의 입 안으로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고르, 부탁이 있어.」
「뭐야? 또 임시출국증을 떼달라는 건가?」
「아니, 이번에는 입국이야. 딱 열 명인데 한국에서 배를 타고 올 거야.」
「밀입국이군.」
이맛살을 찌푸린 이고르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빅토르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대머리에 왜소한 체구여서 체격이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건 조금 복잡한데. 한국인이야?」
「근대리아 국적이야. 그중에는 러시아 국적도 있고. 모두 고려인이지만.」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군.」
빅토르가 양복의 가슴 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두툼한 뭉치를 꺼내어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만 오천 달러야. 만 달러는 자네 몫이고 오천 달러는 담당자 몫으로, 이만하면 되겠지?」
그러자 이고르가 손을 뻗쳐 봉투를 쥐었다.
「해보지, 빅토르. 그런데 무슨 배로 언제 도착이야?」
어느 사이에 돈뭉치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져 있었다.
「고리키 호야, 도착은 14일 오후 5시라는군.」
술잔을 내려놓은 빅토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부탁하네, 이고르. 나도 보스의 지시를 받은 일이니까 상당히 중요한 일이야.」
신호에 걸렸으므로 박영수는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오후 6시경이었지만 아직 주위는 환했다. 러시아워여서 한남대교의 북단부터 서행하던 차량들은 신사동 사거리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근대리아는 교통체증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다녀온 친구한테서 들은 말이었다. 근대시의 도로는 한쪽 차선만 20차선이라니 마치 비행장의 활주로 같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운전석 옆의 창으로 다가왔으므로 박영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사내 한 명이 신분증을 꺼내 들더니 유리창에 붙여 보였는데 안기부 요원이다. 반대쪽에도 사내 한 명이 서서 허리를 숙이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도의 한복판이었으니 뒤차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박영수가 유리창을 내렸다.
「무슨 일이오?」
「박영수 경정이시죠? 잠깐 저희들하고.」
사내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40대 초반쯤으로 입은 웃었지만 눈빛이 차가웠다.
「날 왜?」
「저의 부장께서 급하게 뵙자고 하십니다.」
「그건 연락받지 못했는데.」
「아, 저희가 거짓말하겠습니까?」
신호가 풀리면서 앞차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저쪽 문 좀 열어 주시지요. 저희들이 타겠습니다.」
「저쪽으로 따라와요.」
박영수가 턱으로 사거리 건너편을 가리켰다.
「당신들 태우는 건 싫으니까.」
브레이크를 풀고 사거리를 건너면서 박영수는 어금니를 물었다. 백미러를 올려다보자 검정색 승용차 두 대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분쯤 후에 박영수는 안기부 요원들과 함께 논현로 뒤쪽에 있는 밝은 3층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안내된 곳은 2층의 사무실이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 두 명이 일제히 머리를 들었다.
「박 경정님, 이렇게 모셔서 의아하셨겠습니다. 난 서태영입니다.」
그중 나이 든 사내가 일어나더니 그에게 손을 내어밀었다. 전화 통화를 주고받은 사이여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부장님이 찾으신다니.」
박영수가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방은 30평쯤 되었는데 벽 쪽에 설치된 대형 통신장비 앞에 서너 명의 사내들이 모여 서 있었다.
서태영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곳이 우리들의 강남지역 통신본부지요. 경찰 간부로는 박 경정께서 처음 오시는 겁니다.」
7. 궁지에 몰리다
밤 11시 반이었다. 순시선 27호의 선장 백길용 경감은 조타실로 들어서자 부하가 건네주는 무전기를 받았다. 파도가 조금 높아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창가에 붙인 받침대를 한 손으로 쥐었다.
「예, 27호 선장 백경감입니다.」
「여긴 본부사령 흥경정이다. 27호는 열두 시 정각에 B-24 해역으로 이동할 것, 임무교대다.」
「알겠습니다.」
가끔씩 있는 일이었으므로 백길용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닻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현재 위치에서 27호는 사흘간을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밀수선과 내통할 가능성이 많다고 본부에서는 판단하고 있었다. 항해장 임경위가 조타실로 들어섰다. 닻을 끌어올리는 쇠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선장님, 이쪽 구역으로는 누가 옵니까?」
「그건 알아서 뭐 해? 우리 구역만 알면 되지.」
닷새 동안의 해상근무로 백길용은 짜증이 나 있었다. 반면에 임경위는 휴가를 보내고 오늘 오후에 승선한 것이다.
「하긴 그렇지요.」
임경위가 타륜을 잡고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붙임성이 많은 사내였다.
「상륙하면 제가 한잔 사지요, 선장님.」
먹을 칠한 것 같은 밤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들은 제각기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시계(視界)는 거의 제로상태로 흐린 날씨에 바람이 세었다. 뱃머리에 부딪힌 파도가 물보라가 되어 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덮었으므로 이미 김상철은 흠뻑 젖어 있었다. 모터보트는 10인승이었지만 승객은 조종사를 포함하여 12명이었다. 그것은 김상철의 일행 외에 심재택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김상철이 고리키 호에 승선하는 것을 확인하고 보트와 함께 돌아갈 예정이었다. 다시 덮쳐온 물보라에 얼굴이 흠뻑 젖었으므로 김상철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조종사는 젊었지만 파도에 익숙했다. 어둠 속에서 파도의 흰 끝을 보고는 익숙하게 배를 조종했으므로 옆으로 흔들리는 롤링은 없다. 김상철이 옆에 앉은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심과장님, 여러 번 폐를 끼칩니다.」
파도와 엔진 소음 때문에 소리치듯 말하자 그가 김상철의 손을 쥐었다.
「김사장은 내 은인이오. 날 구해 준 사람입니다.」
「아직 병원에 내 아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없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배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치솟는 피칭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득하게만 보였던 배들의 불빛이 가까워졌다. 네 척의 화물선이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정박해 있는 것이다. 김상철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2시 10분이었다. 모터보트는 북쪽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곧장 남진해 왔던 것이다.
고리키 호 선장 안들 볼리바르는 함교에 나와 서서 어두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좌측의 부교는 아래쪽으로 내려졌고 끝부분에 등을 매달아 놓아서 승선 준비는 마쳤다. 갑판장 쿠스코가 옆으로 다가오자 그에게서 역한 술 냄새가 맡아졌다.
「선장, 순시선을 사라지게 한 걸 보면 대단한 놈들입니다.」
그는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어느 쪽에서 오는 겁니까?」
「그건 상관할 것 없어.」
볼리바르는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지중해에서 반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는 나호트카의 마피아 보스인 빅토르 카가비치가 지급으로 해온 부탁을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심기가 좋지 않았다. 잘못되면 선장의 면허가 취소되는 것은 물론 배까지 억류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 저기 선장, 저쪽이오.」
갑자기 쿠스코가 소리치며 손으로 가리킨 쪽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가 없어졌다. 배의 좌현 쪽이다. 안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객들은 이미 선실로 들어가 있었으므로 밖에 나와 있는 것은 선원들뿐이다. 다시 불빛이 보이자 안들은 브리지를 내려갔다. 어쨌든 그들을 맞으려는 것이다. 부교의 내려진 부분이 50미터쯤 앞으로 다가오자 파도는 더욱 거칠어졌다. 커다란 화물선의 선체가 파도를 되받아쳐 오기 때문이다.
김상철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2시 3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사장님, 근대리아에 가시면 꼭 부탁합니다.」
심재택이 소리쳐 말했으므로 김상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습니다.」
「도와주시오. 근대리아에서 먼저 터뜨리는 것을 계기로 우리도 손을 쓸 테니까요,」
「연락을 드리지요.」
근대리아에서 남북 간 비밀 합의에 대한 내막을 폭로해 달라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언론에 폭로하면 당연히 그 여파는 한국에도 온다. 아무리 언론을 통제하더라도 지금은 수억의 인터넷 가입자가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는 상황이다. 북한이라면 모를까 한국은 금방 그 여파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부교가 10미터쯤 앞으로 다가오자 앞쪽 열에 앉아 있던 이한이 소리쳤다.
「부교를 잡아라. 잡아서 보트에 매.」
맨 앞 열에 앉아 있던 부하 두 명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트는 파도에 흔들리며 와락 화물선으로 다가갔다가 쑤욱 밀려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잡았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곧 보트는 흔들림을 멈췄다.
「자, 보트를 매어라.」
이한이 소리쳤다.
「그리고 앞 열부터 일어나.」
뒷 열에 앉아 있던 김상철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보트는 엔진을 끈 상태여서 이제는 파도가 뱃전을 두들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보트가 부교에 묶여졌고 앞 열에서부터 부하들이 부교로 올라가는 때였다. 갑자기 옆쪽에서 대낮같이 환한 불빛이 보트로 비춰졌고 밤하늘을 울리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발포한다!」
그리고는 총성이 여러 발 울렸다. 머리를 돌린 김상철은 불과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비춰지는 불빛을 보았다. 순시선이다. 그리고 다른 한 척의 순시선이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하고 소리친 것은 이한이다. 부교의 중간쯤에 서 있던 그가 보트 안의 김상철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형님!J
김상철이 이를 악물었다.
「끈을 풀어라!」
그리고는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모두 뛰어내려라! 여기서 떠난다!」
심재택은 넋을 잃고 있는 조종사의 어깨를 쳤다.
「시동 걸어」
조종사가 시동을 걸었고 부교에 이미 올라가 있던 대여섯 명의 부하들이 서두르며 보트로 뛰어내렸는데 한 명은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움직이지 마라!」
다시 확성기 소리가 울리면서 이제는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탄이 쏟아졌다. 총탄에 맞은 듯 부하 두어 명이 부교와 보트 위에서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김상철의 바로 앞쪽에 앉아 있던 남용배가 어느 틈에 꺼내 들었는지 칼라시니코프 기관총을 들어 쏘아 제끼기 시작했다. 그의 앞쪽 부하 하나가 금방 뒤를 따랐고 또 다른 부하도 탄창이 비도록 쏘아 갈겼다. 갑자기 보트가 기우뚱거리더니 화물선의 옆구리를 좌측으로 들이받고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면서 앞쪽의 부하 두어 명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보트는 속력을 내었다. 서치라이트가 분주하게 보트 위를 다시 덮었으나 누군가의 총탄에 맞자 산산조각이 나면서 불이 꺼졌다. 다른 한 척의 순시선은 사각(死角)에 가려 불빛이 이쪽으로 오지 않는다.
「한아!」
김상철이 물보라를 뒤집어쓰며 소리쳤다.
「한이 어디 있느냐?」
「부교에서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앞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듯 말했을 때 다시 총탄이 보트를 덮었다. 불을 켠 화물선 옆을 지나면서 순시선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상철이 조종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돌아가자!」
이제 그는 가방 안에 든 러시아 군용 AKS74U 기관총을 꺼내 쥐고 있었다.
「안 됩니다.」
옆에서 들리는 심재택의 목소리에 그는 몸을 돌렸다. 심재택은 몸을 뱃전에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그냥 가셔야 합니다. 돌아가면 안 됩니다.」
다시 총탄이 날아왔으나 모두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그들은 표적을 놓친 것이다. 한 시간 가깝게 달려 보트가 도착한 곳은 북쪽의 인적 없는 해안가의 바위틈이다. 보트는 바위틈에 세게 부딪히면서 금방 물이 새어들어 왔으므로 그들은 배를 버렸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물론 이한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섯 명 중에서 두 명은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용배와 심재택이 증상이었고 김상철은 총탄에 어깨가 벗겨진 상태였다. 20대 후반의 조종사는 옆구리를 총탄이 스치고 지났지만 경상이었다.
그들이 겨우 바위 위에 올라와 앉았을 때는 새벽 2시가 되어 있었다. 파도가 점점 더 거칠어졌고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짙은 어둠 속이어서 조종사가 갖고 있던 플래시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는 상황이었으니 치료의 속도도 느릴뿐더러 상처를 입은 사람도 내색을 않는 것이다. 이리저리 뛰듯이 다니면서 응급처치를 하던 김봉만의 얼굴도 잠깐 스치고 지난 플래시의 빛에 피투성이인 것이 드러났다. 본인은 총탄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김상철은 눕혀져 있는 남용배의 옆에 앉았다. 그는 가슴과 배에 두 발의 총탄을 맞은 것이다. 김봉만이 다가와 플래시로 얼굴을 비추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널 지금 병원으로 데려가겠다.」
「아닙니다.」
그는 입술 끝으로 웃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떠나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저는 안 됩니다.」
그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저, 부탁이 있습니다.」
김상철이 그의 손을 쥐자 그의 손에도 힘이 실려졌다.
「제 어머님 이름이 김옥분이올시다. 제 누이 이름이 남순희이고, 저, 서류가 모두 사무실 장덕호한테 맡겨져 있습니다.」
「‥‥‥‥」
「꼭 살아 돌아가셔서 제 가족들을 근대리아로 불러주시면, 저는 그것으로.」
「용배야, 그건 염려 말고.」
갑자기 김봉만이 그에게로 바짝 다가앉더니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걱정 마. 걱정말고 가.」
남용배의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 김상철이 플래시의 불을 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덮여졌고 그들에겐 잠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김사장님.」
심재택의 부르는 소리에 김상철이 몸을 돌렸다. 그도 배에 관통상을 입은 중상이다.
「곧 해변을 수색할 겁니다. 떠나십시다.」
그는 기를 쓰고 상반신을 세우고는 바위에 등을 기대었다
「국도가 멀지 않을 겁니다. 우선 차를 잡고 ……」
「제가 가지요.」
김봉만이 나서자 조종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저,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근처에 있던 비닐 가방 한 개를 찾아 그에게로 건네주었다. 그는 심재택이 고용한 사내로 이런 일을 겪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 이십만 달러가 들어 있어요. 이걸로 배 값이나 하시오.」
머뭇거리던 사내가 가방을 받아들었다.
「자, 갑시다.」
김봉만이 사내의 어깨를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다시 주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10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이제 김봉만과 자신 둘뿐이다. 김상철은 이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놈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겁니다. 도망친다고 조준사격을 할 수는 없는 거요.」
이윽고 심재택이 입을 열었는데 고통으로 숨을 허덕였다.
「박 경정이 어떻게 된 것 같습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오전 9시경이다. 청와대의 안보수석실에는 안보수석 신형목과 안기부장 이근복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근복은 곧장 이곳으로 출근한 셈이었는데 잠이 부족한 듯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밝고 목소리에는 생기가 흘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김상철의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바닷속에 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열 명 중에서 여섯 명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신형목이 다시 치하를 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충직한 관료를 꼽으라면 이근복이 우선이다. 그가 운용했던 검경 라인은 엉망이었다. 검찰의 고광식 차장이 병가를 내고 탈락된 데 이어서 경찰의 박영수가 배신을 한 것이다. 그는 김상철과 심재택에게 수사 곁과를 모두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탈출을 도왔고 나중에는 해양경찰청의 간부까지 매수를 했다. 안기부가 박영수의 핸드폰 통화를 도청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김상철은 러시아를 향해 항해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근복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신형목을 바라보았다.
「순시선에는 저희 요원들을 승선시켰기 때문에 선장 등 몇 명만 입조심을 시키면 언론에 노출될 리는 없습니다. 바다와 해안가에서 발견된 시체들은 일단 사고사로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어차피 한국에는 가족도 없는 놈들이니까 문제 삼을 사람은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번 문제는 특히.」
「보고하셨습니까?」
「출근하신 즉시 보고드렸지요, 부장님의 노고를 치하하셨습니다.」
「박영수는 심재택이 사건의 핵이라고 하더군요. 그놈을 경호실에서 놓치지만 않았더라도 사건은 더 간단해졌을 겁니다.」
그러자 신형목이 쓴웃음을 지었다.
「부장님은 잘못 알고 계십니다. 심재택은 경호실에서 놓친 것이 아니오. 대검의 수사관들이 방심하다 놓친 겁니다.」
「대검 수사관들은 경호실에서 놓쳤다고 하던데, 분명히 경호실 요원들에게 인계하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 사건에 경호실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이근복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모양입니다. 책임 회피를 하려고.」
「고차장은 나한테 대검 수사관들이 놓쳤다고 했습니다. 부장께서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오.」
이맛살을 찌푸린 이근복이 말머리를 돌렸다.
「정대표와 이실장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그건 자세히 모릅니다. 하지만 곧 오시겠지요.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형편이니까요.」
정동민과 이태준의 근대리아 방문은 극비사항이었지만 안기부장에게도 비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안기부 요원의 삼엄한 경계를 받고 김포를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근복이 식은 커피잔을 들었다가 곧 내려놓았다.
「남북 간 비밀 합의를 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놈들이 있는 모양인데, 심재택을 중심으로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간 야당 쪽에 기회를 줄 수가 있어요.」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는 신형목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도 기무사령관이 나한테 와서 소문의 진위를 물었습니다. 고급 장교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있다고, 그리고 전(前) 안기부장 권준규의 연금과 언론인들의 24시간 감시 이유를 묻더군요. 그는 청와대의 대검과 경찰로 이어지는 핫라인까지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
「나도 내용은 모른다고 했습니다만 군에까지 소문이 확산되면 곤란합니다. 사령관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함장군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혼잣소리처럼 신형목이 말하자 이근복이 머리를 끄덕였다. 함종일은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신형목이 이근복을 바라보았다.
「각하께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소문은 곧 잠잠해질 겁니다. 그것을 과대포장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형목과 헤어져 청와대를 나온 이근복은 빗길을 달려 광화문으로 들어섰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췄을 때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팔을 뻗쳐 수화기를 쥐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서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과장, 심재택을 호텔로 데리고 왔다는 대검의 수사관들을 다시 조사하도록. 경호실은 심재택을 인계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근복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검에서 놓치고 청와대 핑계를 대는 것 같다. 필요하면 고차장을 불러 물어도 된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상예보에 이번 비는 태풍을 동반하고 온다는 것이다. 태풍은 제주 남쪽 해상에서 북진하는 중이었는데 중국과 일본을 제쳐놓고 한국이 목표가 되어 있었다.
그가 서태영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부장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서두르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 이근복은 턱을 들고는 어깨를 폈다. 긴장할 때의 그의 버릇이다.
「말해.」
「대검의 고광식 차장이 사흘 전에 근대리아로 떠났습니다. 예, 가족과 함께.」
「‥‥‥‥」
「투자이민을 간 것입니다. 재산까지 모두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한발 늦었군.」
「예?」
「떠들 것 없다. 서과장만 알고 있도록.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사관들 조사는 어떻게.」
「그자들은 고광식에게 인계하고 떠났다고 하겠지, 아마.」
「그렇습니다, 지난번에도.」
「경호실 요원은 그곳에 없었어.」
「내색하지 말고 확인만 하도록.」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근복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이것은 북한과는 전혀 다른 유형인 근대리아의 압력이다. 청와대에서 운용했던 핫라인의 핵심이 모두 배신을 한 것이다.
4시간에 걸친 수술을 끝낸 조기욱 박사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후 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술은 끝냈지만 당분간 움직이는 건 위험합니다.」
그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김상철을 바라보고 섰다.
「그렇다고 내 병원에 입원시킬 수도 없고, 경찰에 쫓기고 계시다니 말이오.」
조기욱은 경주 시내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외과 전문의였다. 3층 병원 건물의 3층에 살림집을 차려놓아서 출퇴근 걱정이 없는 데다 입원환자를 수시로 돌볼 수가 있어서 좋았는데 오늘 새벽 같은 경우는 병원 안에 살림집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아침 5시면 새벽이다. 일반 병원은 10시에 개진을 하고 그의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5시에 병원에 들어온 세 사내는 간호사를 앞세워 살림집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사무장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이마에 흰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은 오늘 아침에 당직을 맡고 있던 중 상황을 모르고 버티는 바람에 김봉만의 총자루에 맞아 이마가 깨진 것이다.
「선생님, 교통사고 환자가 왔는데요,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조기욱이 김상철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병원 직원은 간호사 셋에 사무장 하나였고 다섯 개의 입원실이 있었지만 갈비가 부러진 중년 사내 한 명이 입원해 있을 뿐이었다. 그들과 엇갈려 김봉만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김상철은 어깨의 벗겨진 상처를 꿰맨 후에 옷을 걸쳐서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그는 관자놀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러나 조박사의 옷으로 갈아입어서 깔끔해진 차림이다.
「간호사들에게 오천 달러씩, 사무장한테는 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으므로 그가 충혈된 눈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입막음용으로 준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남은 돈이 얼마냐?」
「미화가 이십만 달러 정도 남았고 한화는 약 천오백만 원 정도입니다, 사장님.」
이한이 가져온 돈도 있어서 자금은 여유가 있었는데 나머지는 혼란 통에 바다에 빠뜨렸을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어. 좁은 바닥이라 발각되기 쉬울 것이다.」
김봉만이 한 걸음 다가섰다.
「사장님,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쪽은 제가 잘 알고, 밀항 소스도 곧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근대리아로 가시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것도 제가‥‥」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서울로 간다.」
「예, 사장님.」
「서울에서 근대리아로 가겠다.」
김봉만은 두말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는 병원 경비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레고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변순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긴장한 듯 눈을 크게 뜨고는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레고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보스는 고리키 호에 타려다가 습격을 당했어. 지금 고리키 호에는 이한과 유재성이 두 명뿐이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리키 호 선장이 나호트카로 연락을 해왔어. 보트에서 마악 고리키로 옮겨 타려는데 한국 순시선이 기습해 왔다는 거야. 엄청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당한 것은 우리 쪽이야.」
「사장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얼굴을 굳힌 변순태가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이한은 바다에 떨어졌다가 순시선이 보트를 쫓는 사이에 고리키 호에 탔어. 하지만 아직 보스의 행방은 모른다.」
「중요한 시기에 이것 야단났다.」
오후 2시경이었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가는 시기였다.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겨우 자라나 있던 풀잎은 두 달간의 전개(展開)를 마치고 순식간에 시든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변순태가 머리를 들었다.
「이번에도 강미현이 압력을 넣었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보스는 한국 정부의 적이야. 남북한 간의 비밀 합의서가 보스의 손에서 나온 것을 그들은 알고 있어.」
그레고리가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이었다
「보스는 심재택한테 말려들었어. 그자는 남북관계에 별로 관심도 없었던 보스를 끌어들인 거야.」
「그럼 우리는 이렇게 앉아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한이 돌아올 때까지.」
어깨를 늘어뜨린 그레고리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그 안에 보스와 연락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 시간에 북한 대표부의 대표실에는 서일과 송무용, 장호성과 박기환 네 사람이 모여앉아 있었다. 근대리아의 북한 조직을 움직이는 실세가 모두 모인 것이다.
「이미 그자들은 떠났으니 할 수 없는 일이고 문제는 회담의 내용이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말한 서일은 쓴 것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곧 평양에서 지시가 내려오겠지만 총독한테 뒤통수를 맞은 것 같군.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고.」
한국의 여당 대표이자 대선후보인 정동민과 대통령 비서실장 이태준이 근대리아를 비밀 방문하여 총독과 만난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국이야 궁지에 몰려 있으니 무슨 짓이야 못할까 했지만 근대리아에 대해서는 배신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한국과의 협상에 근대리아를 참석시켜 위상을 높여 주었고 한국 측에 영향력을 행사하게까지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박기환이 헛기침을 했다. 정동민과 이태준이 총독 저택에서 회의를 마치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그가 지휘하는 감찰부였다.
「양곡값 지불 기간이 며칠 남지 않았는 데다 남조선 내부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북경의 정보원이 전하는 말을 들으면 남북 간 비밀 합의를 했다는 소문이 남조선 내부에 돌고 있다고 하니까요.」
그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박기환이 소속된 32호실은 각국에 요원을 파견하고 있다. 그는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이다.
「김상철과 근대리아 사정을 잘 아는 심재택이 주동이 되어서 소문을 흘린 것이지요. 더구나 김상철은 합의서 사본을 빼내 갔으니 수백 장 복사를 해서 돌렸을 겁니다.」
「‥‥‥‥」
「돈은 기업에서 걷어야 되는데 분위기를 알아챈 약삭빠른 기업들이 돈을 내려고 하겠습니까? 남조선 정부는 지금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빌리러 왔나?」
그렇게 물은 것은 송무용이다. 의자에 등을 기댄 그가 찌푸린 얼굴로 서일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우리한테 숨기고 남조선 대표를 만난 총독은 우리를 배신한 거요. 항의해야 됩니다.」
「‥‥‥‥」
「남조선 놈들한테도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쯤은 간단한 일이지요.」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송무용이 말을 멈췄다. 서일이 수화기를 귀에 대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으므로 나머지 세 사내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서일이 일어나 전화를 받는 상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지도자 동지인 것이다. 몸을 꼿꼿하게 세운 서일이 한동안 '예' 소리만 연발하더니 늘어진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사내들도 따라 앉았다. 그리고는 잠자코 서일을 바라보았다. 지도자의 전화를 직접 받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격(格)이 붙는 것이다. 서일은 단숨에 대표의 위신을 회복했고 송무용은 기가 꺾였다. 서일이 다시 어깨를 폈다.
「내색하지 말라는 지도자 동지의 지시오. 과연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
「대업(大業)이 걸려 있는 곳이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박기환은 가늘게 숨을 뱉었다. 남북한은 물론 근대리아까지 제각기 대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대업에 나머지 양국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 있다. 따라서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김상철이 한국에서 실종되었어.」
돌아가는 차 안에서 송무용이 불쑥 말했으므로 박기환이 머리를 들었다.
대표부를 나온 그들은 근대시 외각에 위치한 조선무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조선무역은 5층 빌딩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 무역상사는 한 개 층만 사용할 뿐이고 나머지는 근대리아의 북한 호위대 본부였다.
「러시아 화물선을 타려다가 기습을 받았는데 여섯 놈이 죽었어. 그런데 김상철이와 이한이는 보트로 도망친 것 같아.」
「언제 일입니까?」
「오늘 새벽 한 시 경이야.」
송무용이 쓴웃음을 지었다.
「김상철은 근대리아로 돌아오기 힘들 거야. 한국 기관이 철저하게 막고 있으니까.」
이것은 조금 전에 대표실에서 박기환이 한국의 분위기를 전한 것에 대한 송무용의 대응이다. 32호실 요원들의 정보보다 한수 높은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과시였다.
「경찰 간부 한 놈이 김상철을 도왔다가 체포되었어. 그래서 밀항 계획도 탄로가 난 것이지.」
「그렇습니까?」
「김상철에 대해서는 북남이 공동작전을 펴는 셈이야. 우리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그놈은 없어져야 돼.」
「그렇겠군요.」
「사면초가야, 그놈은. 근대리아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난 삼층의 조박사 살림집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총알이 관통한 배를 온통 붕대로 감고 침대에 반듯이 누운 심재택이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 얼굴이 빛바랜 백지 색깔이 되어 있었고 눈이 움푹 패어져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이를 조금 드러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애국심에 호소했지요. 날 밀수꾼이나 강도쯤으로 알았던 모양이오. 도와주겠답니다. 입원실은 경찰이 수색할지 모른다면서 삼층으로 가자더군요.」
말을 그친 그가 피로한 듯 눈을 감았다.
「김사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내가 만나려고 했는데, 이 꼴이 되어서.」
「대한일보 편집국장 이정훈을 만나 주세요. 그가 지금 혼자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수경사령관도 동조 세력으로 끌어들였다고 하더군요. 명분은 충분하니까 아마 군인 모두가 들고일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쿠데타는 안 돼요.」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으므로 김상철이 수건으로 땀을 찍어내었다. 그러자 심재택이 눈을 떴다.
「이정훈에게 말해 주세요, 군인은 배후에 있어야 한다고. 내가 그들을 만나면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정세를 아는 군인이면 그렇게 할 것이고.」
「‥‥‥‥」
「김사장님.」
김상철을 부른 심재택이 시선을 마주하더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 미련이 없으신 것을 압니다.」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분이라는 것도.」
「부인의 사고가 한국 정부의 짓이라고 내가 우긴다는 느낌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건 김사장을 내 동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짓이지요. 한국은 내 조국이오. 썩었다고 버릴 수가 없습니다.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시도하지도 않고 떠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난 목숨을 걸고 시도하기로 한 겁니다.」
「이제 그만하세요.」
온 얼굴이 다시 땀으로 젖었으므로 김상철이 닦아 주었다.
「이정훈 씨를 만나지요. 심과장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심재택이 눈을 감았다.
「고맙습니다. 이제 안심이 됩니다.」
「아마 나는 아버지의 세금 횡령 사건이 내가 한국에 미련을 남기지 않게 된 이유가 될 겁니다. 그런 나에게 근대리아는 이상적인 곳이었지요.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곳이 희망의 땅이라는 것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난 근대리아에 돌아가서도 심과장님과 약속한 대로 할 겁니다.」
심재택은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는데 잠이 든 모양이었다. 병실을 나온 김상철은 원장실로 들어섰다. 지친 듯 앉아 있던 조기욱이 머리를 들었다.
「간호사들이 그 방에 들어가려고 하지를 않아서 내가 가려고 했는데.」
그가 김상철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길게 이야기하시지 말아요.」
대통령은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댄 채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정동민과 이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꽤 긴 정적이 흘렀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가라앉아 갔다. 저녁 무렵이어서 창문의 반쯤이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나는 때로는 이 정권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그는 지친 표정으로 두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구는 업적을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해대지만 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어. 지난 오 년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각하처럼 청렴하신 대통령이 없었습니다.」
이태준이 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북한과의 비밀 합의는 경솔한 짓이었어. 그 합의서를 작성해 남긴 것도.」
입맛을 다신 대통령이 의자에서 몸을 떼었다.
「그 합의가 없었다면 한국은 북한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을 것이고,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미국이 참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정역할만 맡아 줄 것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까?」
「알 리가 없지요, 각하.」
대답한 것은 정동민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남북한 양국에 대사관과 대표부를 설치해 놓은 미국은 이제 효과적인 견제 장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북한이 침공을 해도 일방적으로 한국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한미 방위조약은 이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도록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흘, 길어야 일주일 전쟁으로 서울과 대전 등 남한의 북부지방을 점령하고 미국과 중국, 또는 러시아와 일본 등에 중재를 요청할 것이다. 그러면 4강(强)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설 것이고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 난다. 이제는 동서냉전의 시대가 아니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이미 구소련의 붕괴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었다. 한국은 더 이상 동북아시아의 미국 전초기지가 아니다. 다만 남북이 어느 쪽으로든 통일이 되면 막강한 군사력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일본과 보조를 맞춰 현 상황을 유지시킨다는 것이 미국의 정략이었다.
대통령이 머리를 들었다. 냉엄한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들과 그저 정권욕에 사로잡힌 야당 세력은 그저 자주국방, 자주외교 등의 선명(鮮明)한 구호만을 외쳐 국민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근대리아가 쌀 대금을 해결해 주기로 했으니 급한 불은 껐군.」
그는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투자이민을 더 활성화시키기로 했으니 한국 경제가 걱정이야.」
근대리아는 경제 연합의 합의는 거부했던 것이다. 그들은 쌀 대금 4억 달러를 8월 말까지 북한 측에 지급해 주기로 합의했는데 한국 정부가 11월 말까지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이태준이 입을 열었다.
「각하, 구월쯤 북한과 만나 대책을 협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제 4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도 한국의 현 정권이 지속되는 것을 바라고 있을 테니까요. 만일에 야당의 이대현 씨가 정권을 잡게 된다면 북한 정권도 기로에 서게 됩니다.」
옆자리의 정동민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둘이는 이미 말을 맞춘 모양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이며 쓰게 웃었다.
「그래야겠지, 일이 년만 쌀공급을 끊는다면 난리가 날 테니까. 아마 그땐 새로운 정권도 그자들과 합의를 하게 될 것이야.」
「김용복 소장도 합류하기로 했다.」
최무섭이 말하자 참모장 안병석 준장이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들은 사령부의 연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아직도 병력이 모자랍니다. 저희의 3개 공수여단에 보병사단 하나, 그리고 최소장의 제7기갑사단이면‥‥」
「전투 병력이라면 공수여단만으로도 서울을 장악할 수 있어.」
머리를 저은 최무섭이 힐끗 뒤쪽을 바라보았다. 전속부관 박 소령이 오 미터쯤 뒤쪽을 따라올 뿐이다.
「쿠데타군과 진압군으로 나뉘어져서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일 생각은 없으니까. 서울에 무혈입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동두천과 파주의 15와 19사단이 내려올 것입니다. 기무사가 교란작전을 펼 것이고 전투는 일어날 것입니다, 사령관님.」
안병석은 그의 심복으로 작전통이다. 그는 소령 시절에 미국의 정보학교에 3년간 유학을 다녀왔는데 기이하게도 그 유학기간에 자신이 반미주의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가 최근에야 최무섭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군사령관은 언제 만나실 겁니까?」
「오늘 밤.」
짧게 대답한 최무섭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6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앞쪽에 도열해 서 있는 군수참모와 장교들이 보였다.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는데, 사령관이 불시 점검을 한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장교들의 뒤쪽으로 대령 계급장을 단 마른 몸매의 사내가 다소 느슨한 자세로 서 있었다. 기무사의 수경사 파견대장 백대령이다. 성격이 깐깐하고 차가워서 그와 같이 지냈던 모든 부대장들이 진저리를 내는 사내였지만 원칙과 업무에 철저해서 약점이 없다. 최무섭은 어깨를 펴고 군수참모 앞으로 다가갔다. 각 단위부대와 참모들을 긴장시켜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날 밤, 주한 미군 사령관 올리버 카튼 대장이 주최하는 가든파티가 카튼 대장의 숙소인 이태원의 저택에서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한미 연합군의 작전회의가 끝나면 미군 사령관이 파티를 개최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석자는 물론 한미 양국군의 수뇌부들이었는데 한국군은 군단장급 이상이었고 미군은 사단장급 이상이다. 8시에 시작된 파티는 10시가 되자 절정에 이르렀다. 카튼 대장은 소탈한 성격에다 호주가였으므로 대부분의 장군들은 그를 따라 마시다가 술기운이 올라 있었다. 그는 한국식 파티에 익숙해서 여러 차례 건배를 제의했고 폭탄주도 세 번이나 돌렸던 것이다.
2군사령관 한기영 대장은 6피트가 넘는 키에 체중이 90킬로 가깝게 되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게다가 머리도 검고 피부도 팽팽해서 40대로 보이는 호남이었지만 겉과는 대조적으로 곡절을 많이 겪은 사람이다. 영관급 때는 전방으로만 돌아다니다가 세 번째에야 별을 달았는데 소원이었던 사단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군사정전위의 유엔군 측 대표가 되면서 소장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 측이 한국군 장성이 대표가 되어 있는 정전위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1년 반 동안 한 번도 회의에 참석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소장으로 예편되려는 그를 구제해 준 것은 대통령이다.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대통령은 중장 진급과 함께 1군단장에 임명했고 지금은 대장에 2군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한기영은 정원 옆쪽의 화장실로 다가갔다. 정원은 꽤 넓었으므로 화장실로 가는 동안 두 명의 미군 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뒤쪽의 파티장에서는 한국인 초대 가수가 밴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술에 취한 걸음으로 다가오던 수도군단장이 그를 보더니 자세가 곧아졌다.
「제가 좀 취했습니다, 사령관님.」
「나도 오바이트하러 가는 참이야.」
한기영이 화장실로 들어서자 손을 씻고 있던 최무섭이 거울을 통해 시선을 주었다.
「난 이제 폭탄주가 안 받아.」
소변기 앞에 선 한기영이 말했다.
「차라리 물컵으로 양주 마시는 게 나아.」
화장실은 파티용으로 미군 공병이 지은 5평쯤의 임시 건물이었지만 거울은 물론이고 향수에 크림까지 놓여져 있었다. 그들은 같이 화장실을 나왔다.
「저기 기무사가 오는군.」
바지 혁대를 고쳐매면서 한기영이 눈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사람들 사이로 기무사령관 함종일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한기영이 빠르게 말했다.
「이봐, 난 할 테다. 다시는 이곳에서 폭탄주도 안 마실 테다.」
그들이 정원으로 다가가자 함종일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오바이트 하셨습니까?」
「이제 안 할 거야.」
「그게 뜻대로 됩니까?」
이를 드러내고 웃은 함종일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안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특히 저 친구를 말이야.」
한기영이 다시 말했다
「난 이 일이 끝나면 개인택시 운전이나 할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차는 시속 120킬로로 속력을 떨어뜨렸다가 차량이 뜸해지자 다시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대전 톨게이트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차는 경부와 중부고속도로의 갈림길에 다가가고 있었다. 중부보다는 경부 쪽을 타는 것이 강남지역에 일찍 닿는다. 한국 사정에 환한 김봉만은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한이가 살았다니 다행이다.」
자는 줄만 알았던 김상철이 갑자기 입을 열었으므로 김봉만이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근대리아가 걱정되었는데 돌아가고 있다니 다행이야.」
그가 저녁 무렵에 근대리아로 연락을 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와의 통화를 마친 그는 어두운 표정이 조금 가셔져 있었다.
「내 무모했던 행동 때문에 여러 명이 죽었다.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김상철의 목소리가 다시 차 안을 울렸다.
「의식불명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참을 수가 없었어. 죽기 전에 옆에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어. 나 때문에 파란이 많았던 여자다. 속아서 결혼을 했고, 이혼, 그리고 삼합회의 해결사에게 끌려가는 시련도.」
「‥‥‥‥」
「나하고 살면서도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강미현과 결합했다면 그렇게 견제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내 아내는 항상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따뜻한 곳으로 휴가를 가기로 했는데.」
김봉만이 차의 속력을 줄이고는 손에 배인 땀을 바지에 닦았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 분위기가 아니다. 김상철과 같이 생활한 지 겨우 열흘이 되었을 뿐이었는 데다 그의 가족과 같았던 장인규 등 십여 명을 몰살시킨 장본인이다.
김봉만이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시바다는, 아니, 저회는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사장님.」
「알고 있다. 너에게 한 소리가 아니다.」
「알게 되겠지, 누구 짓인가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김상철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김봉만은 차에 속력을 내었다.
남대문시장은 전보다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혼잡했고 소란스러웠다. 오후 2시경이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옷 도매 빌딩의 계단을 올라 3층으로 들어선 김상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평도 안 돼 보이는 가게들이 가득 늘어서 있는 안쪽은 의외로 한산했다. 손님보다 가게 종업원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좌측의 좁은 통로로 들어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나아가자 곧 앞쪽에서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사십 대쯤의 나이에 남방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똑바로 바라보는 김상철의 시선을 잠시 받더니 곧 머리를 돌리고는 스치고 지나갔다. 좌우의 매장에 앉아 있던 종업원들은 대부분이 여자였는데 한눈에 손님이 아닌 것을 알아본 모양으로 아무도 김상철을 부르지 않았다. 반대편 계단으로 나온 김상철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마악 내려다보고 났을 때 조금 전 스치고 지나갔던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김상철의 앞에 멈춰선 그가 입을 열었다.
「김상철 씨 맞습니까?」
「이정훈 국장이십니까?」
대답 대신 되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해서. 스파이들은 어떻게 접선하는지 모르지만 꽤 힘들더군요, 장소 정하기가.」
그들은 계단 옆의 창가로 다가가 섰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컸지만 그것이 오히려 대화의 부담을 덜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심과장은 총에 맞아 움직이질 못합니다. 병원 전화를 쓸 수도 없는 상황이고 해서 내가 온 겁니다.」
그간 상황을 전화로 간략하게 말한 터이라 이정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 문제의 김상철 씨를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심과장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서너 명의 남녀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올라왔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췄다.
김상철이 그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심과장은 될 수 있는 한 쿠데타는 막아달라고 하더군요. 이국장께서 이제 주동을 맡으신 입장이니 그것을 분명히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글쎄, 힘이 있어야 일을 하지요. 언론은 이미 철저하게 장악이 되어있는 데다 설령 언론이 터뜨린다 해도 일회성에 그칠 확률이 큽니다. 결집된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력(武力)이 되었건 민력(民力)이 되었건.」
그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길게 뱉고 난 그가 말을 이었다.
「이미 총은 발사된 상황이라고 할까요? 군이 벌써 움직이고 있어요. 난 수경사령관과 접촉하고 있는데 주도권은 그쪽으로 넘어간 상태요. 다만 다행인 것은 심과장이 우려한 적극적인 쿠데타 형식보다 군의 결집된 힘을 배후에서 나타내는 것으로 현 정권에 압력을 가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오늘 오후에 근대리아로 전화를 했었는데 사흘 전에 한국에서 정동민 씨와 이태준 실장이 극비리에 다녀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정훈이 눈을 치켜떴다.
「또 북한과 비밀협상을 했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근대리아와 비밀협상을 했어요.」
「북한 측에게도 비밀로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아무리 비밀로 하려고 해도 근대리아에서는 우리 정보망을 벗어날 수 없지요. 전(前) 안기부 요원들이 조직의 정보관리를 맡고 있으니까요.」
「무슨 내용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김상철이 들고 있던 비닐 가방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여기 오천만 원입니다. 조금 전에 달러를 바꿨지요. 피해 다니시느라고 여유가 없으실 것 같아서.」
「아니, 이런.」
이정훈의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왜 돈까지 주십니까?」
「존경하는 뜻에서 드리는 겁니다.」
김상철이 입술 끝만 올리며 웃었다
「심과장께 드리려고 했는데 움직이지 못하는 형편이라.」
「고맙습니다.」
두 손으로 가방을 받은 이정훈이 머리를 숙였다.
「돈이 필요했었습니다.」
계단 아래쪽에서 김봉만이 이쪽에 등을 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정훈이 그를 바라보았다.
「곧 군의 지휘관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김사장께서도 참석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들도 환영할 겁니다.」
8. 끝없는 전쟁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이유미는 구석에 주차시켜 둔 자신의 흰색 벤츠로 다가갔다. 퇴근 시간이었다. 지하실의 습기가 배인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느껴졌고 자신의 발자국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대여섯 대의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을 뿐 주차장은 한산했다. 벤츠로 다가간 이유미는 원격조종 스위치로 차 문을 열고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사장님.」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놀란 이유미는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눈과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의 뒤에 바짝 다가와 서 있는 사내는 나까무라였던 것이다. 얼굴이 석고처럼 굳은 이유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차의 동체에 등이 닿았다. 놀란 나머지 말도 떨어지지 않는다.
「잠깐 저하고 가실 데가 있는데요.」
그가 한국말을 하는 것을 들은 것도 처음이다. 숨까지 멈추었던 이유미의 가슴이 이제는 터져나갈 듯이 두근거렸다. 그는 시바다의 심복으로 잔인무도한 살인자인 것이다. 김봉만이 한 걸음 다가오자 이유미의 시선이 흐려졌다. 초점이 잡히지가 않는 것이다.
「김사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예, 김상철 사장님께서.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김사장님과 같이 있습니다. 예, 시바다는 죽었지요. 저는 살았습니다.」
김봉만이 멋쩍은 듯 웃으며 한 손으로 뒷머리를 만졌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저는 김사장님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본래 저는 조센징으로‥‥」
잠시 후 그들은 벤츠에 나란히 앉아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핸들을 쥐고 있는 것은 이유미이다. 이제 납득은 했지만 그렇다고 홀가분한 기분은 물론 아니어서 이유미는 잠자코 차를 몰았다. 러시아워여서 기분이 더욱 엉켜지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 때문인지 카페 안은 조용했다. 논현동 뒷골목에는 수십 개의 그만그만한 카페와 단란주점이 늘어서 있었는데 이곳도 그중의 하나였다. 특징도 없고 깨끗하지도 않은 조그만 카페였지만 밀실은 세 개나 된다. 그 밀실의 한 방에 김상철과 이유미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양주와 안주가 테이블 위에 벌여 놓아졌으나 아직 술병의 마개도 따지 않았다. 김상철이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진주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여전히 화사한 자태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렸는데 길고 긴 속눈썹이 금방 그늘을 만들었다.
「현실적으로 말하지. 날 도와주면 그만한 대가는 주겠어. 근대리아에 여행사도 다시 운영하게 해주겠고 고객들도 몰아주지. 아마 당신 능력으로는 순식간에 여행사를 키울 수가 있을 거야.」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예전의 가게는 물론 돌려 줄 것이고, 새로운 사업을 원한다면 밀어주겠어.」
「물론 내가 근대리아로 살아 돌아간다면 말이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에도 날 돕는 대가는 주겠어.」
갑자기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바다와 비슷한 경우가 되겠는데, 나도 이곳에서 자금이 필요해. 근대리아에서 돈을 보낼 텐데 당신이 받아줬으면 해서. 10퍼센트의 수수료를 주지.」
「위험한 일이니 비율을 올려도 좋아.」
이유미가 머리를 들었다. 차분한 표정이었다.
「10퍼센트면 좋아요.」
「시키실 일은 그것뿐인가요?」
「우선 내 숙소 문제가 있고.」
「제가 알아보지요.」
「다른 일도 있을지 몰라.」
「그땐 말씀하세요.」
「그때마다 거래를 하도록 하지.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으니까.」
「시바다의 전철은 밟게 되지 않으실 테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이유미가 입술 끝만 올리며 웃었다.
「상황이야 비슷한지 모르지만 조건은 전혀 다르니까요.」
경제 부총리 윤동선과 통상 장관 진양근이 대통령을 만난 것은 보름 전이었다. 그동안 경제장관 회의가 두 번이나 열렸는 데다 윤동선이 경제정책을 발표하는 등 경제부처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대통령과는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기는 했는데 그것은 경제수석 현정호를 통해서였다.
오전 10시였다. 집무실 책상에 앉은 대통령을 마주 보며 윤동선과 진양근, 현정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이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세 주역인 것이다.
「투자이민을 규제할 수는 없어요.」
대통령이 자르듯 말했으므로 방 안에 긴장감이 덮여졌다. 임기가 4개월밖에 남지 않은 때문인지 그는 요즘 들어 언론에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서슬 푸른 권위는 그대로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경제의 공동(空洞)화 현상이라고 하는데 경쟁력이 없는 산업을 근대리아로 이관시킨다고 생각하면 돼요. 구멍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근대리아가 구멍을 채워 주는 것이지, 전화위복이야. 아니면 일거양득이라고 할까.」
「각하.」
참다못한 진양근이 대통령이 숨을 고르는 사이에 끼어들었다.
「각하께선 이제까지 낙관론만 듣고 계셨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정부 기관의 통계는 전부 조작된 것입니다. 그들은 국민뿐만이 아니라 각하까지 속이고 있습니다.」
진양근은 죽을 각오를 한 사람처럼 보였다. 대통령의 취임 이래로 이처럼 격렬한 태도로 나선 장관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경제수석 현정호가 입을 달막거렸으나 기세에 눌린 듯 말을 못했고 대통령도 잠자코 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대리아로 옮겨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이미 투자 의욕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 의욕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고비용으로 경쟁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행정규제에 진저리를 내는 형편이고 정치에 환멸을 느낀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북한의 위협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업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를 버리는 현상입니다, 각하. 우선 투자이민 규제를 해서 탈출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전면적인 재조정을 시작해야 됩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각하.」
그러자 대통령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진장관은 다혈질이오.」
「진즉 이러지 못한 것을 땅을 치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각하.」
「근대리아와 한국이 경제 연합을 한다면 어떻겠소? 근대리아와 한국을 공동체라고 생각해 보시오. 한 해의 예산을 함께 편성하는 관계가 된다면 말이오.」
진양근이 눈을 껌벅이며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일인 것이다. 대통령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것은 아직 발표할 단계는 아니오. 하지만 여기 세 분이 주축이 되어서 그 청사진을 만들어 보시오. 오늘 세 분을 모이게 한 것도 그것 때문이오.」
의자에 등을 기댄 대통령이 긴 숨을 뱉었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전혀 달라질 거요. 물론 난 경제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말이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일을 모색하고 있었어요. 그, 국민들이 혐오하는 정치권에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대통령이 다시 웃었다. 그러나 이제는 쓴웃음이었다.
이근복은 안기부 3차장에서 부장으로 진급한 사내로 여당의 대선후보 정동민의 라인이다. 그러나 성품이 곧고 충성심이 강한데다 통솔력이 뛰어나 난세(難世)에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대통령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국가의 안보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적일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 심재택과 김상철은 역적이었다. 국가의 전복을 기도한 천인공노할 국사법이다.
여의도의 중국요릿집에서 정동민과 점심 식사를 마친 이근복은 요릿집의 후문에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로 다가갔다. 8월 하순의 청명한 날씨였으나 가을의 문턱에 앉은 때문인지 바람결은 서늘했다. 경호원들이 분주히 앞뒤쪽의 차로 갈라서는 것을 보면서 그는 차에 올랐다. 뒷자리에 않아 있던 서태영이 펄쩍 물러앉는 시늉을 했다.
「이대현 씨는 연일 선거 대책 회의를 열고 있지만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차가 움직이자 서태영이 말했다.
「그쪽도 대선자금을 모으려고 후원회가 하나둘씩 열리고 있기는 합니다.」
「열심히 운동하라고 해.」
이근복이 뱉듯이 말했으므로 서태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문 이근복이 길게 연기를 뱉었다.
「그것보다도 K 작전을 서둘러야겠다. 대선 기간에 맞춰야겠어.」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대선 기간에 맞추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지.」
「대선 직전까지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말이야.」
이근복이 재를 떨었으나 재가 재떨이에서 빗나갔다.
「그때까지 확실하게 기반을 굳혀놓아야 돼. 조직원 수는 계획대로 십만 명 수준으로.」
「‥‥‥‥」
「대선 전에 자금이 나오기로 되었으니까 그때까지는 우선 우리 자금을 쓴다.」
「알겠습니다.」
「이주민 백이십만 중에 십만의 조직원이면 근대리아 제일의 세력이 될 것이다. 북한이 먼저 발을 디뎠지만 우리의 자금력을 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서태영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K 작전은 근대리아 작전의 약칭이다. 안기부 주도로 극비로 진행 중인 이 작전의 내용은 근대리아 내부에 한국 세력을 조직화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을 처음 기안한 것은 전(前) 부장 권준규와 심재택이었는데 근대리아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들은 친한(親韓) 세력인 김상철을 기반으로 조직을 만들어갔지만 정부 전복의 기도를 함으로써 계획 전체가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이근복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나 이번의 K작전은 보다 폭넓고 독자적인 작전이다. 현재 제방이 무너진 듯 근대리아로 쏟아져 들어가는 이주민 속에 조직원을 섞어 보내는 방법은 북한과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쪽은 막강한 자금력이 있다. 이쪽 조직원은 대부분 안기부에서 자금을 투자한 투자이민의 모습을 갖춘 기업가와 그 고용원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직 공무원, 관료, 경찰과 군인 등으로 근대리아의 요직을 차지할 사람들이다. 본질적으로 근대리아 행정부는 전직 한국인 관리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던 만큼 북한은 안팎으로 몰리게 된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이근복이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계획을 입안했던 권준규 등은 근대리아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의 K 작전은 아니다. K 작전의 목표는 근대리아의 한국화인 것이다.
밤 9시가 되었을 때 2군사령부의 사령관 관사에서 지프 한 대가 나왔다. 바퀴 폭이 좁은 구형 지프로 범퍼의 흰 페인트 번호를 보면 전속부관의 차였다. 사령관의 관사 앞에는 장교클럽이 있었는데 그 한쪽이 기무사 요원의 대기실이다. 지프가 지나는 것을 확인한 신기환 상사가 수화기를 들었다.
「2547호, 아홉 시에 관사 출발.」
짧게 보고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자 의자에 길게 늘어져 있던 이대위가 머리를 들었다.
「이봐, 신상사. 대장님한테 연락 온 것이 없어?」
「없습니다.」
2군사령부의 기무사 파견 대장은 정인철 대령이다. 파견대 본부는 사령부의 옆쪽 건물에 있었는데 정인철이 아직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대위가 입맛을 다셨다. 이곳은 퇴근 후의 사령관 동태를 체크하는 장소였고 그것을 사령부의 장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제기, 오늘 동창회 모임이 있는데.」
이대위가 들고 있던 잡지를 탁자 위로 던졌다. 전속부관이 떠났으니 이제 사령관은 잠잘 일만 남았을 뿐인데 언제 대장이 점검해 올지 몰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프는 속력을 내어 밤길을 달려 나갔다. 에어컨이 없었으므로 앞쪽 유리창을 열어놓았는데 후덥지근한 바람이 휘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한 시간쯤 후에 지프가 도착한 곳은 청담동의 5층 빌딩 뒤쪽이었다. 차에서 뛰어내린 박소령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사복 차림의 한기영 대장이 차에서 내렸다. 그가 곧장 어두운 빌딩의 후문으로 들어서자 박 소령은 지프에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한기영이 들어선 2층의 사무실에는 이미 세 사내가 앉아 있었다. 20평쯤 되어 보이는 사무실에는 대여섯 개의 책상과 의자가 놓여졌고 책상 위에는 서류와 사무집기가 정연하게 진열된 것이 보통 회사의 사무실과 다른 것이 없다. 그를 맞아 소파에서 일어선 사내들은 수경사령관 최무섭과 대한일보의 이정훈 국장, 그리고 김상철이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한기영이 먼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일의 기폭 역할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나이 차이가 20년이 넘게 나는 데다 현역 육군 대장의 관록이 있다.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심과장이 부상을 입었다니 유감이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제가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하나는 군의 유혈 충돌을 될 수 있는 한 피하도록 말씀드리라는 것과 또 하나는 제가 근대리아에 돌아가 비밀 합의서를 언론에 폭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기영이 담담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잘 알았소. 심과장은 군사정권의 탄생을 염려하는 모양인데 우린 그럴 생각 없으니 되었고, 그리고 유혈을 피하려고 이렇게 만나는 거요. 거사의 성공만을 따진다면 여기 있는 수경사령관의 부대만 움직여도 됩니다. 우리는 압력만으로 거사를 이루려고 하는 겁니다.」
그가 최무섭을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도 치밀하게 작전을 하겠지만 진압기술도 고도로 발달되어 있어. 모두 지난 군사 정권의 쿠데타로 갈고 닦여진 솜씨들이어서 말이야.」
최무섭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무사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일차 장애는 기무사지요.」
「수도군단도 마찬가지야. 15와 19사단이 움직이면 서울은 전쟁터가 돼.」
말을 그친 한기영이 이정훈과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우리끼리 잠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군 작전 문제라서.」
「저희가 비켜 드리지요.」
이정훈이 재빠르게 일어서며 말했다. 그들은 창가로 다가가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옆쪽 빌딩의 어두운 벽면만이 보일 뿐이다.
「2군사령관은 거사를 마치는 즉시 군복을 벗겠답니다. 개인택시 운전사가 되겠다는군요.」
낮은 목소리로 이정훈이 말했다. 그는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럴 만한 사람이지요. 내 생각이지만 무사고 운전경력이 틀림없이 모자랄 테니 아마 일반택시 운전사가 될 겁니다.」
「난 근대리아로 갈 겁니다. 그곳에 내가 일할 만한 데가 있겠습니까?」
김상철이 마침내 따라 웃었다.
「다 떠나면 되겠습니까? 이곳에 남아서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지요.」
8월 하순, 근대리아에 첫눈이 내린 날 오전이었다. 앞 범퍼에 꽂은 인공기를 펄럭이며 검정색 벤츠 한 대가 근대리아의 행정청으로 들어섰다. 근대리아의 북한 대표부 대표 서일이 행정청장을 공식 방문한 것이다. 그는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외무국 소속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곧장 8층의 청장실로 들어섰다.
청장은 외무국장 유영현과 그를 맞았는데 서일은 조금 찌푸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근대리아 측의 결례(缺禮)를 지적하려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 필리핀 대표부의 대표가 청장을 방문하였을 때 외무국 과장이 현관에서 맞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장급이 현관에서 대표를 맞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장과 외무국장은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첫눈과 날씨 이야기를 마친 행정청장이 정색을 했다.
「올해도 북한은 흉작이라지요?」
「아닙니다. 풍년입니다.」
서일이 머리까지 저었다.
「남조선의 허위보도를 보신 모양이군요. 올해도 대풍년입니다.」
「그렇다면 쌀이 먹고도 남을 텐데요.」
「남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한국의 쌀 대금 4억 달러를 우리가 책임졌는데 내년쯤에 드려도 되겠군요. 물론 이자는 드리지요.」
그러자 서일이 눈을 치켜떴다. 이남호가 여러 번 만났지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얼굴을 굳히고 입술 끝을 가볍게 떨던 서일이 겨우 쉰 목소리를 내었다.
「안 됩니다. 도대체 이런 결례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인민공화국을 뭘로 보고 이러시는 겁니까?」
「미룰 수가 없단 말씀이지요?」
「절대로 안 됩니다.」
이남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어쨌든 오늘은 그 일로 오시라고 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앞으로 북한 이주민을 받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서일이 어금니를 물었다. 오늘 청장과의 회담에서 그가 독촉할 사안이었다. 지금도 평양에서는 30만 명 가까운 이주 예정자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투자이민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이라서요. 노동 인력은 며칠 전 필리핀, 방글라데시, 몽고 대표들을 만나 얼마든지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신음소리 같은 헛기침을 한 서일이 이남호를 쏘아보았다.
「청장 각하, 어쨌든 쌀 대금은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근대리아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유영현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이남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우리는 북한 정부에서 인정해 준 조정자 입장입니다. 우리는 지금 조정하고 있는 중이오.」
「조정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조선에서 직접 받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군요? 우리와 교류를 단절한다고 해석해도 될까요?」
어느덧 정색한 얼굴로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만일 우리가 북한과 국교를 단절한다고 합시다. 총독은 아마 당장이라도 그러실 것 같은데, 그 결과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를 악문 서일은 그를 쏘아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남호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 호위댄지 뭔지 군사 놀음하는 놈들을 무더기로 데려와 있는 데다 마약을 전국에 퍼뜨려서 마약 판 대금이 월간 수천만 달러씩 북한으로 송금된다고 들었소. 오만 근로자의 임금 30퍼센트가 또 송금되는 데다가 사업장의 이익까지 합하면 연간 18억 달러가량이 들어가지요. 자, 우리가 피땀 흘려 세워놓은 이 땅, 근대리아에 당신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이남호의 두 눈도 부릅떠져 있었다.
「우리가 한국 같은 줄 아시오? 근대리아가 당신들 손아귀에서 놀 줄 알았느냔 말이오. 그래, 결례를 다시 한번 합시다, 난 외교 격식 같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당신들은 강도단이오. 국가라고도 볼 수가 없어. 좀 부끄러운 줄이나 아시오, 양심이 있다면 말이오.」
「말씀 다 하셨소?」
얼굴이 하얗게 된 서일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우리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발언을 하셨소. 책임을 지셔야 될 거요.」
「그대로 전해요. 그러라고 한 말이니까.」
이남호가 유영현을 바라보았다.
「유국장, 이제 당신이 말해요.」
유영현이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는 한국에서 외무부 과장으로 정년퇴직한 사람이다. 그는 줄도, 요령도, 그렇다고 운도 따라주지 않아서 과장으로 퇴직을 했는데 이제는 근대리아의 외무장관이다. 그가 서류를 들더니 또박또박 읽었다.
「호위총국 출신 송무용 중장 이하 1,257명은 오늘 저녁 여섯 시까지 근대리아에서 철수할 것. 여섯 시에 출발하도록 특별열차를 배정시켜 두었습니다.」
그는 힐끗 서일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실 때 명단을 가져가십시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빠져 있다면 근대리아 법에 의해 처벌하겠습니다.」
「‥‥‥‥」
「곧 아시겠지만 근대리아 경비군 5만이 총동원되었고 러시아 국경에는 2개 사단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면 근대리아 내에 있는 북한 측 모든 사업장은 문을 닫게 될 것이고, 5만 근로자는 해방을 시켜 줄 것입니다. 둘째, 오늘 이 시각부터 마약 거래자는 현장에서 사살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약은 물론 그 대금까지 모두 압류할 작정입니다.」
유영현이 서류를 내려놓자 이남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리고 남한의 쌀 대금 4억 달러도 보류요. 그건 차후에 우리와 다시 상의하기로 합시다.」
「배신당한 거요.」
송무용은 이제 고하(高下)를 가리지 않았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막말을 했다가 경어로 되돌아오곤 했는데 정신이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빌딩 밖에는 송무용이 대책 없이 불러 모은 2, 3백 명의 호위대가 웅성거리고 있어서 분위기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송무용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기껏 협조해 주었더니 이젠 남조선과 손을 잡고 우리 공화국을 내모는 거요. 당장에 행정청으로 치고 들어가서 ‥‥」
「이것 보시오!」
이맛살을 찌푸린 서일이 버럭 소리쳤으므로 송무용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서일이 송무용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오. 평양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잠자코 있어요.」
서일이 가져온 1,257명의 명단에는 송무용을 포함한 호위대의 간부급 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송무용이 상기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우리 조직 중에 첩자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세하게 골라낼 수가 없어.」
그가 이제는 방 안에 모여 앉은 사내들에게로 칼끝을 돌렸다.
「배신자가 있어.」
「중장 동지, 진정하시오.」
그렇게 말한 것은 이금철이다. 그가 눈꼬리를 꼿꼿하게 세우고는 송무용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분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그리고 호위대원의 내부 관리는 전적으로 중장 동지가 맡고 있었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소.」
박기환이 차가운 표정으로 송무용을 바라보았다.
「나도 조금 전에 이 상황을 지도자 동지께 직보했습니다. 중장 동지는 지시를 기다리시오.」
오후 2시가 넘었다. 방 안에 모인 간부들은 두 시간이 넘도록 평양의 지시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회의실에 모인 사내들은 십여 명이 넘었는데 모두 북한 측의 간부들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대리아 정부와 북한은 밀착된 관계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근대리아 정부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서일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 자신도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현은 김상철을 견제하기 위해서 북한 세력을 끌어들였지만 이제 김상철은 없다. 그리고 근대리아를 북남관계의 조정자로 내세워 남조선을 협공하려던 계획이 결국은 근대리아에 좋은 일만 시켜주고 만 셈이 되었다. 그들은 남조선을 위협하여 투자이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가차 없이 이쪽에 등을 돌린 것이다. 지난번의 근대리아와 남조선과의 비밀회담 때부터 이 계획이 추진되어 왔던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근대리아는 남조선과 연합을 했다.
이윽고 벨이 울렸을 때는 2시 반이었다. 서일이 튕기듯이 일어나 수화기를 귀에 대면서 부동자세를 취하자 사내들도 따라 일어섰다. 그는 한참 동안 대답 소리만 연발하더니 이윽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방 안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러갔다. 누군가가 소리 죽여 기침을 했다가 멈췄다. 서일이 입을 열었다.
「송동무는 1,257명 전원을 데리고 여섯 시 열차에 타도록 하시오.」
얼굴이 시멘트 벽돌처럼 굳어진 송무용은 뻣뻣하게 선 채 대답하지 않았다.
「고난 끝의 결과가 더 달다고 지도자 동지께서 말씀하셨소. 천하의 명언이오.」
그는 지친 듯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 송동무는 어서 준비하시오. 그리고 나머지 동무들은 각자 돌아가시도록.」
간부들이 제각기 흩어져 방을 나갈 때 서일이 머리를 들었다.
「이금철 동무는 남으시오.」
이금철이 그의 테이블 앞에 섰을 때는 방 안에 남은 사람은 그들 둘뿐이었다. 서일이 지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무의 귀국은 보류되었소. 동무가 남아 남은 조직들을 재정비하라는 지도자 동지의 특별지시가 내렸소.」
「‥‥‥‥」
「동무는 근대리아 창립 초기부터 일해 온 터라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소.」
「저 자식들은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을 텐데 웬 짐이 저렇게 많아?」
이대각이 차창 밖을 내다보며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저놈은 돌아가서 술장사를 할 모양이군. 술병을 한 짐 짊어지고 가는 걸 보니.」
「체크하는데 시간이 걸리겠는데요. 벌써 다섯 시가 넘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장동택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근대역의 정문 옆쪽에 주차시킨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역 앞에는 10개 중대의 2천 명 가까운 경비대원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북한인들은 십여 개의 임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경비대 간부들에게 확인을 받은 다음 특별열차로 보내지는 중이었다.
장동택이 무전기를 들고는 스위치를 켰다.
「난 보안국장이다. 송무용은 지금 어디쯤 왔나?」
「예, 지금 고속도로 상에 있습니다. 십 분쯤 후에는 역에 도착합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대부분의 부하들은 역에 도착했는데 송무용과 몇 명의 간부급들이 늦는 것이다.
「이번에는 대북 관계를 야무지게 처리했어. 총독이 아직 노망이 들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이대각이 말하자 장동택이 웃었다.
「솔직히 이런 때에 근대리아에 온 보람을 느낍니다. 외무국장은 서일과 헤어진 다음 방에 돌아와 울었답니다.」
「울긴 왜 울어?」
「그 양반, 한국에서 외무부 과장일 때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참석했었답니다. 말석에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북한 측의 공갈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렇군.」
「어쨌든 이번에 1,257명을 족집게처럼 집어냈으니 서일의 간이 서늘해졌을 겁니다.」
장동택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송무용과 호위대 전원의 인적 사항을 변순태로부터 받은 것이다.
「당분간은 잠잠하겠지만 이대로 물러날 놈들이 아냐.」
그 순간 두 대의 승용차가 그들의 차 옆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역의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잠시 후 차에서 내린 것은 송무용과 그의 측근들이다.
「남아 있는 놈들 중에서 거물급은 배웅나오지 않았군요.」
그들을 바라보던 장동택이 말했다.
「어쨌거나 저놈은 패자(敗者)입니다. 제 놈은 분하겠지만 말이지요.」
이유미가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김상철은 등을 보이고 창가에 서 있었다. 몸을 돌린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녀는 들고 온 가방을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수표와 현금으로 섞어서 오억을 찾아왔어요.」
소파에 앉은 이유미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7시경이었다. 이곳은 강남의 역삼동에 위치한 빌라였다. 이유미의 이름을 빌려 비어 있던 집에 세를 들어 입주한 것으로, 가구라고는 소파 한 조와 TV 세트 하나뿐이다.
「김봉만 씨는 어디 갔나요?」
「심부름 보냈어.」
그는 소파에 앉았다. 50평형 빌라였는데 가구가 없기 때문인지 더욱 크게 보였다.
「며칠 내로 근대리아에 돌아가야겠는데 비행기 편은 어려울 것 같고.」
김상철이 이유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중국을 거쳐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그쪽은 감시가 덜할 테니까.」
「배편을 알아보지요. 내일 중으로 알아볼 수 있어요.」
「밀항해야 되니까 여객선 스케줄을 알아볼 필요는 없어.」
「그럼 화물선요?」
「아마, 선장과 직접 거래를 해야 되겠지.」
이유미는 흰색 터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목에 건 가는 금줄에 진주알 하나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절 믿지 못하세요?」
불쑥 그녀가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유미가 먼저 비켰다
「거래관계가 있는 한은 믿을 수 있겠지, 지금처럼.」
김상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하지만 당신한테 특별하게 기대하는 건 없어. 사람들은 거의 비슷하단 이야기야.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의지가 아주 강했는데도 고문을 당하자 동료들을 모두 불었어. 놈들은 자백제를 썼다고 하더군.」
「‥‥‥‥」
「하지만 한 사람의 이름은 끝까지 숨겼다는 거야. 약을 맞기 전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고 했어.」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그렇게 할 자신이 없는데 남에게 바란다는 건 억지야.」
응접실의 구석으로 다가간 그가 양주병을 들고 돌아왔다. 잔도 없고 안주는 더욱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병째로 양주를 서너 모금이나 마셨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은 그가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한국도, 근대리아도 이제는 애착이 가지 않아. 맹렬하게 살아왔던 내가 우스울 때도 있고, 그리고 기운이 떨어져.」
다시 병을 쥔 그가 꿀꺽이며 술을 삼켰다. 더운 숨을 뱉은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적개심의 상대를 잃어서 그런 모양이야. 표적을 잃은 짐승처럼 그냥 허망하단 말이야.」
민정길이 방에 들어서자 신형목이 머리를 들었다.
「이봐, 고광식이가 배신을 했어. 그놈은 가족을 데리고 근대리아로 들어가 버렸다.」
신형목이 어금니를 악무는 시늉을 했다.
「심재택을 놓친 것이 아니라 풀어 준 거야. 김상철과 짜고서 말이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 9시경이다. 앞자리에 앉은 민정길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검찰과 경찰의 핵심이 모두 배신을 했군요.」
「야단났다. 각하께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지 난감해. 이건 안기부장이 알려준 일이야.」
「안기부장이 각하께 직보하지는 못하겠지요.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수석님 지휘하에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실장님께는 보고하셨습니까?」
「했어.」
「그럼 그 선에서 놔두시지요. 실장님이 알아서 하실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각하께 보고해서 직격탄을 맞지 말라는 뜻이다.
민정길은 40대 초반으로 10년이 넘게 야당의 정치지망생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지난번의 대선 때 현 대통령의 선거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안보수석의 보좌관이 된 사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사건을 심각하게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당면해 있는 중대 사안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실장님께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시지요, 침소봉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신형목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 말을 들으니 위로는 되지만 내가 책임을 진 일이 이렇게 되어서 말이야.」
「어쨌든 심재택과 권준규가 주도한 정부 전복 기도는 무산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수석님의 공(功)이올시다.」
그러자 신형목이 쓴웃음을 지었다.
「공은 무슨, 쓸데없는 말로 분위기를 현혹시키지 마라.」
말은 그랬지만 그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이 눈에 띄었다.
「이봐, 구월 중순에 남북한 대표회의를 근대리아에서 열기로 했다.」
신형목이 말머리를 돌렸다.
「참석자는 정동민 씨와 이실장, 그리고 내가 될 거야.」
「저도 갑니까?」
「수행원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다가올 대선에 대비한 남북한의 선거 대책 회의인 것이다. 8월의 쌀대금 문제를 근대리아에 떠맡기긴 했지만 어쨌든 북한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다. 이제는 북한이 대선에 협조를 해야 할 차례였다
「지난번에 정후보님과 실장님이 가셨을 때 근대리아 측과 어떤 합의를 하신 겁니까?」
민정길이 묻자 신형목이 머리를 저었다. 어느새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글쎄, 그건 나도 몰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 모양이야.」
「내가 할 일도 태산인데 상관없는 일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어.」
「그렇지요.」
한・근의 비밀회담 후에 근대리아는 북한에서 파견된 호위대를 대거 추방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이제까지 밀월을 유지해 오던 근 · 북의 관계가 일거에 냉랭해졌다. 9월 중순의 남북회담이 예정되어있는 것만으로도 한국 측은 성과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안형, 야단났어, 이대로 가다가는 일이 날 거야.」
박기동의 얼굴은 이미 술기운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서초동의 룸살롱 안이다. 박기동은 안인석과 단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이젠 중소기업인들 뿐만이 아냐. 공무원, 의사, 학자에다 군인까지 근대리아로 물려가고 있어.」
덩달아서 그의 사업이 호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박기동의 표정은 침울했다.
「언론은 일시적인 현상이네 어쩌네 하지만 선거 끝나면 나라가 폭삭 무너질 것만 같단 말이야.」
「돈 좀 모았을 테니 떠나면 될 것 아니오? 다른 나라로 말입니다.」
「근대리아 아니면 안 가. 그냥 이곳에 있든지.」
박기동의 말에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근대리아에 어떻게 간단 말이오? 추방당한 처지에.」
「가능성이 있긴 한데. 김상철이 이곳에서 끝장나는 것, 그렇게 되면 나뿐만이 아니라 안형도 해방이 되지.」
「난 상관없으니 괜히 날 끌어들이지 말아요.」
안인석이 양주를 한 모금 삼켰다. 양주가 큰 병으로 두 병째 비워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안인석이 한잔 사겠다면서 박기동을 불러낸 것인데 지난번에는 박기동이 술을 샀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두고 보라구, 곧 근대리아에 갈 테니까.」
술잔에 술을 채운 박기동이 건배하자는 듯 잔을 들었다.
「현 정세를 봐도 김상철이 발을 디딜 곳이 없어. 그놈의 운세는 끝났단 말이야.」
술자리가 끝났을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 있었다. 박기동과 헤어진 안인석은 곧장 택시를 타고 청담동의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혼자 사는 몸이었지만 집 가까운 곳에 35평형 아파트를 얻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늦은 밤이어서 아파트의 입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8월 말의 서늘한 밤기운이 달아오른 얼굴에 부드럽게 닿았다.
「안선생, 잠깐만.」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안인석은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사내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파트의 정문 안이다. 희미한 가로등 빛을 받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성(姓)만 알고 있는 고씨였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갑자기 웬일로.」
안인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내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잠깐 저쪽으로 가십시다. 조용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아파트 근처의 카페 안이다. 손님이 두 테이블밖에 없는 카페 안은 조용했다 구석 쪽의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들은 맥주와 마른안주를 시켰다. 고씨가 안인석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안선생의 말씀대로 시바다 겐지를 밀고한 것은 이유미였소. 그 당시 이유미는 갑자기 출국했는데 시바다 일당이 몰살당한 다음에 귀국했습니다.」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띠었다.
「김상철에게 밀고한 것이지요. 안선생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맥주잔을 든 안인석이 서너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나만큼 그 여자를 잘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말한 대로 시바다는 짐만 되었지 효용가치가 없었으니까.」
고씨가 테이블 위로 상반신을 굽혔다.
「그렇다면 이유미와 김상철이 지금도 연락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안인석의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더 이상 날 개입시키지 말아요. 당신들 마음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서는.」
「우리 마음대로라니요?」
고씨가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박미정을 처리한 것은 우리의 작전입니다. 하지만 안선생이 우리에게 협조한 것도 그러기를 바란 것 아니었습니까?」
「난 그렇게까지 할 줄은‥‥」
「상상쯤은 했겠지요.」
「죽이고 싶다는 상상 말이오.」
술잔을 든 고씨가 건배를 하자는 듯 앞으로 잔을 내밀고는 벌컥이며 술을 삼켰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어쨌든 그 일로 김상철은 한국 정부와 원수지간이 되었소. 시바다를 잡아 족쳤을 테니 그 일을 저지른 것은 한국 정부라는 것은 알게 되었겠지. 한국 경찰이나 안기부는 이유미가 김상철과 내통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야. 하긴 김상철에 의해서 추방당한 여자였으니까.」
의자에 등을 기댄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안선생을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려야겠소.」
그는 북한의 공작원이다. 김상철에 대한 원한은 있으나 행동은 물론 말도 표출하지 못하고 있는 안인석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에게 한국에 와 있던 박미정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 준 것은 안인석이었다. 그만큼 박미정과 그 주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유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흰색 벤츠는 경인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깊은 밤이다. 차량의 통행이 뜸해져 있었으므로 이유미는 가속기를 밟아 차에 속력을 내었다. 옆자리에 않은 김상철은 등받이에 온몸을 기대고는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엔진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뿐 차 안은 조용했다. 인천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유미가 굳이 자신이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둘이서 떠난 것이다. 조금 전 고속도로 입구의 검문소를 지났는데 운전하는 이유미의 면허증만 체크한 경찰은 차를 통과시켰다. 부유층 남녀의 호사한 나들이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전혀 이유미답지 않은 행동이다. 발밑에 기관총을 내려놓고 있던 김상철은 경찰에게 태연하게 응대하는 이유미를 보자 조금 놀랐던 것이다. 김봉만을 데려왔다면 총격전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이유미가 힐끗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집에 계시겠어요?」
「내일 누구 좀 만나고.」
말을 얼버무린 김상철이 상반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반대 차선을 지나는 차의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가 지워졌다.
「조금 전에 내가 발각되었으면 어쩔 계획이었어?」
이유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계획 없었어요. 난생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은 김상철이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흘 후에 홍콩 화물선 해광호가 홍콩으로 떠난다. 그는 화물선 선장과 10만 달러에 계약을 했던 것이다. 새벽 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앞쪽에 차가 밀리고 있었으므로 이유미는 속력을 줄였다.
「하지만 위험수당을 주시겠다면 받겠어요, 얼마든지.」
김상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 안에 정적이 흘렀고 불빛이 그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쳤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