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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9-1

Bollnow 2024. 3. 6. 07:52

9

 

1. 운명

그레고리 파트킨이 북한 대표부에 들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금철, 최태호 등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대표부의 부책임자라는 장호성은 초면이었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장호성은 얼굴에 웃음은 띠었지만 긴장한 듯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이제까지 말씀만 들었는데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장호성이 말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유창했다.

사업이 잘되신다고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고리가 마주 보며 웃었다.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전 10시경이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북한 대표부를 방문한 그레고리가 대표와의 면담을 요청하자 대표부는 어수선해졌다. 그리고는 대기실에 그레고리를 앉혀두고 회의를 한 끝에 서일 대신 장호성이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미리 연락을 해주셨다면 대표님을 만날 수 있으셨을 텐데, 유감입니다.

장호성이 직원이 가져온 차를 권하며 말했다.

김상철 사장께서도 안녕하시지요?

, 덕분에. 김사장께서 대표께 안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바빠서 서로 적조했습니다.

그렇지요.

장호성은 손끝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그레고리가 어떤 인물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무장강도단 시절의 그레고리는 시베리아에 진출해 있는 북한의 벌목사업소를 피신처로 자주 이용할 만큼 좋은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김상철의 심복으로 거대한 운송회사를 거느린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레고리가 허리를 폈다.

대표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부대표라도 상관이 없겠지요.

, 그럼요, 상관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제 보스의 부인을 억류시키고 있어요. 여권을 압류해 버려서 근대리아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

그것을 북한 측이 해결해 주셨으면 해서, 한국 정부는 당신들 말이라면 두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겁니까?

글쎄, 그건 복잡한 이야기라서.

그레고리가 손바닥으로 턱수염을 문질렸다.

생략합시다, 그 이유는.

이건 대표께 보고를 드려야, 저로서는 .

당연하지요. 보고드릴 때 만일 우리 보스 부인이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는 앞으로 한국 정부의 관리들은 근대리아가 무덤이 될 것이라는 말도 전해주시오. 오는 족족 죽여 없앨 테니까.

「‥‥‥‥」

장관이건 총리건 모조리 죽일 테니까. 회담인지 지랄인지를 한다면 회담장을 폭파해 버릴 겁니다.

장호성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전하지요, 그레고리 씨.

그리고 또 있습니다.

상체를 숙인 그레고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당신들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남북 간의 비밀 협상 내용을 알고 있어요. 합의서 사본을 갖고 있단 말입니다. 만일 사흘 안에 우리 보스의 부인이 근대리아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 사본을 일만 장쯤 복사해서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언론기관에 보낸다고 해주시오.

합의서 사본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소?

얼굴을 굳힌 장호성이 묻자 그레고리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마 한국 정부는 그것 때문에 이러는 모양이오.

부인을 보내준다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합의서 문제는 잊는다고 해주시오. 교환이고 뭐고 지랄 같은 수작은 부리지 말라고도 해주시고.

 

김상철은 유장석의 생명을 구해 준 놈입니다. 이대각도 마찬가지이고, 그쪽에서 정보가 새었을 수도 있지요.

이금철이 말하자 서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강미현의 생각도 그런 모양이야. 어쨌든 안기부 세력을 근대리아에서 내몰려고 한 것뿐인데 심재택의 심문 과정에서 비밀 합의 이야기가 나오자 한국 정부는 기절초풍을 했어.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장호성과 박기환, 이금철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심재택은 합의서 사본을 김상철한테서 받았다는 거야. 김상철은 유장석한테서 얻었을 것이고.

이대각이 갖다주었을 수도 있지요.

장호성이 말하자 서일이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우리도 골치 아프게 되었어. 김상철 이놈은 은근히 우리를 협박하고 있단 말이야. 합의서가 공개되면 한국 정권은 뒤집힐 가능성이 많아. 야당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여론을 배경으로 우파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어. 그렇게 되면 북남간의 합의는 물론 우리 체제도 위험해진다.

서일은 대외정보 조사부장 출신으로 첩보활동의 베테랑이다. 그가 강미현에게 근대리아의 안기부 활동에 관한 정보를 주어서 한국 정부로 하여금 그들을 견제토록 한 것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안기부장의 목이 잘리고 근대리아의 실무책임자였던 심재택은 체포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김상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박기환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김상철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까요?

우선 남조선 정부의 진행 상황을 알아봐야겠어.

다시 입맛을 다신 서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평양에서도 김상철에게 합의 내용이 알려졌다는 것에 긴장을 할 것이 틀림없어. 강미현도 자체 단속을 하겠지만 우리도 기밀누출에 대해서 각별하게 주의해야 될 거야.

우리는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어깨를 편 박기환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보는 근대리아에서 새었습니다.

서일은 기밀사항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관리하는 인물이다. 이번의 안기부 제거 공작도 대표부 안에서 알고 있었던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서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쨌든 강미현과 김상철의 서로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김상철은 강미현의 정보에 의해서 지원 세력인 안기부가 제거된 것으로 믿을 것이고 강미현은 근대리아 정부 깊숙이 침투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김상철의 존재를 재확인했을 테니까.

 

눈을 뜬 심재택은 다시 자신이 깨어나기 전과 똑같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자 절망했다. 이곳은 수원 근처의 개인주택으로 대검 공안부의 특수팀이 안가로 사용하는 장소일 것이다. 지하실 안에는 시계도 없었는데다 주위의 소음이 일절 차단되어 있었으므로 이제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한 팔로 상체를 버티고는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저도 모르게 앞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순간 그의 몸은 머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쪽으로 넘어졌는데 다행히 침대의 끝에 몸이 걸렸다. 약 때문이다. 놈들이 사용하는 자백제는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CAT 3가 틀림없었다. 중동의 어느 과격단체가 마약과 합성해서 만든 이 약은 정신을 명료하게 하면서 의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효력이 있었는데 그 대신으로 육체가 오래 견디어내지 못한다. 그는 십 년쯤 전에 이 약의 시험 결과를 읽은 적이 있었다. 머릿속을 억누르고 있던 것일수록 먼저 풀려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두 손을 짚고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가슴이 무섭게 고동을 쳤고 눈에 보이는 사물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방은 다섯 평쯤으로 창문도 없고 오직 앞쪽에 나무문이 하나 있을 뿐이다. 방 안의 가구는 자신이 앉아 있는 침대와 플라스틱 의자 두 개뿐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는 한 번만 더 약을 맞았다가는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CAT 3는 세 번 이상 주입하면 죽는다는 시험 결과가 나와 있었는데 자신은 벌써 네 번을 맞았던 것이다.

방문이 열리면서 이씨와 조씨가 들어섰으므로 그의 가슴이 다시 거칠게 뛰었다.

일어날 기력이 아직 남은 모양이군.

이씨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의지력이 대단해. 덕분에 수사가 급진전되고 있지만 말이야.

그가 빈손으로 들어선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심재택은 안도감과 실망감이 뒤섞인 감정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CAT3의 중독성 때문이다. 설령 맞고 죽더라도 머릿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빛나며 박동하는 강한 쾌락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일주일 후에 정식으로 기소할 예정이니까 이제 진술서를 써야겠어.

이씨가 눈짓을 하자 조씨가 한 묶음의 서류를 꺼내어 심재택의 옆에 놓았다.

당신은 곧 빼내 줄 테니 걱정 마라. 참고로 당신이 쓸 내용을 요약해 왔어.

흔들거리는 머리를 애써 가누면서 심재택이 서류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심문은 끝난 것이다. 자신의 자백으로 권부장은 물론 김상철과 십여 명의 요인이 정부 전복의 음모를 계획한 것이 드러났다. 근대리아에서 다음번 남북회담이 열릴 적에 김상철을 행동책으로 북한 대표단을 살해하여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조작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있지도 않은 남북한의 합의서를 조작하여 한국 정부가 비밀리에 북한에게 엄청난 양의 경제원조를 해주기로 했다는 것을 언론에 퍼뜨린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극우파가 주도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 최종목표라는 내용이었다. 서류를 든 심재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쓰지. 하지만 부탁이 있어.

이씨와 조씨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이 공안부의 수사관인지 아니면 경찰청의 조사관인지 아직 확실치는 않다. 이윽고 자신을 이씨라고 소개했던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뭔데? 말해 봐.

약을 한 번만 더 맞을 수 없겠나?

이 자식, 중독이 되었군.

이씨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건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오늘 저녁에는 맛있는 요리를 보내주지.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이 방을 나가자 심재택은 다시 머리를 벽에 기대었다. 그들이 사건 그대로를 발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합의서를 조작하여 언론에 퍼뜨리기로 언론사 간부들과 공모했다는 내용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복선이다. 설령 합의서가 노출되더라도 조작한 것으로 치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심재택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CAT 3의 약효를 알고 있던 터이라 주사를 맞기 전에 차 안의 장면을 눈앞에 떠올렸고 차에 들어와 자신에게 합의서 사본을 건네준 자가 김상철인 것으로 모습을 떠올렸다. 김상철이 사본을 건네주며 말했다. '합의서 사본이오, 심선생.' 마치 컴퓨터의 지난 그림을 지우고 새 그림을 그려 넣듯이 자신의 말도 만들어 내었다.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박기환은 김상철뿐만 아니라 한국의 안보에도 크게 이용 가치가 있는 거물이다. 그는 박기환 하나만은 지워야겠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것은 이루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심재택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죽을 작정이었는데 이놈들이 CAT 3의 치사 한계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보수석 신형목은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그것, 김상철이의 여자는 보냅시다. 지금 그놈이 터뜨리면 만사휴의오.

그의 말투에는 짜증기가 베어져 있었다.

근대리아에 있는 놈입니다. 여자를 잡고 있는다고 해도 우리 손이 닿기가 어려워요.

사건의 핵이 그놈이야. 그놈을 중심으로 안기부가, 다른 떨거지들이 붙어 있어.

이태준이 충혈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재택의 자백 내용을 듣고 난 후부터 그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아침, 신형목은 강미현으로부터 김상철의 통첩을 전달받았다. 근대리아 북한 대표부의 서일이 강미현에게 한국 정부에 연락을 하도록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급박한 상황이 겹쳐오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합의서 사본을 그놈이 갖고 있단 말인가?

사본은 복사만 하면 열 놈이 갖고 있을 수도 있지요. 어쨌든 그놈이 사본을 빼낸 놈이니 갖고 있을 확률이 많습니다.

도대체 북한 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놈 하나 처치하지 못하고.

그러자 신형목이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돌렸다. 당치 않은 푸념이었던 것이다. 근대리아의 북한 세력은 김상철을 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이태준이었다.

내보냅시다. 놈이 통고한 기간은 사흘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이 지나야 사건을 맞추어 발표할 수가 있습니다.

「‥‥‥‥」

여자를 억류시킨다고 해도 김상철을 잡을 가능성도 적고, 사건이 발표되어서 언론이 여자를 추적하면 오히려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셔.

혼잣소리처럼 이태준이 말했다.

그 영웅심만 가득 찬 소인배 놈들은 각하를 정권욕이 가득 찬 인물로 치부하는데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는 꼭 후세에 평가받으실 거야.

그러자 신형목이 소리 내어 한숨을 뱉었다.

어제저녁에 터너 대사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대현 씨가 자주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걱정된다는 겁니다.

대안도 없이 선동만 하는 자야, 그자는.

이태준이 정색을 했다.

남북관계가 논리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기 위주의 발언만 하고 있단 말이야.

 

개인적인 문제라고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이성훈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테헤란로에 있는 이성훈의 사무실 안이다. 벽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백근수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만년필로 휘갈기듯 써서 탁자 위로 밀어놓았다. 이성훈이 수첩을 집자 그는 입을 열었다.

취직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요. 실은 제 후배가 복직이 안 되어서.

수첩을 들여다본 이성훈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백근수가 다시 수첩을 집더니 몇 줄을 썼다.

유능한 후배인데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글쎄요, 원체 난데없는 말씀이셔서.

다시 수첩을 들여다본 이성훈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지만 말은 받는다. 20분쯤 후에 그들은 지하 주차장의 옆쪽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거대한 보일러실 안은 인적이 없었고 입구는 한 곳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왔습니다. 지금 청와대 주도로 언론사의 간부들이 조사받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백근수가 서두르듯 묻자 이성훈이 머리를 저었다.

금시초문이오. 그런데 백기자님이 이국장을 숨겨 두고 있다는 건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국장의 부탁으로 이선생을 뵈러 온 겁니다.

저를 왜.

백근수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국장께서 남북한의 비밀 합의서 사본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

제가 복사해서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이제는 이성훈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얼굴로 빈 보일러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주십시오.

쓴웃음을 지은 백근수가 주머니에서 서류 한 통을 꺼내어 그에게로 내밀었다. 전쟁터만 전문으로 돌아다녔던 바람에 대한일보의 람보라고 불리우는 백근수도 긴장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성훈이 서류를 읽는 동안 그는 초조한 듯 담배를 피워 물었다.

국제신문의 하주간, 한일신문의 조국장, 그리고 KNS 방송의 강국장이 동조하기로 했는데 일이 틀어졌습니다.

이성훈이 서류를 접자 백근수가 빠르게 말했다.

주동자는 안기부장 권준규 씨와 그의 심복 과장인 심재택 씨, 그리고 대한일보의 이국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부장이 이총재님께 상황을 대충 보고드렸다고 들었습니다만. 탄로가 났으니 막막합니다. 지금 하주간이나 조국장 등은 회사에 출근을 하고 있지만 곧 어떤 조처가 내려지겠지요. 하지만 권준규 씨와 심재택 씨는 실종상태 입니다. 아마 안가에서 조사를 받고 있겠지요.

이성훈이 서류를 접어 가슴 호주머니에 넣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저 서류를 받으신 것으로 됐습니다.

백근수가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물론 저도 한 부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서류가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총재님께 보여 드리고 태우든지 하십시오. 복사본은 많으니까요.

분하군요. 저는 자세한 진행 사항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국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말할 것도 없고, 이국장은 미처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고 하더군요.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끈 백근수가 그에게로 손을 내어밀었다.

, 이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보일러실을 나가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찰청 외사과에서 나왔다는 두 명의 사내는 인상도 좋았을 뿐 아니라 태도도 공손해서 이여사는 금방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사양하는 그들 앞에 오렌지 주스잔을 내려놓았다.

여권을 다시 만들어 주신다니 고맙군요.

저희들 잘못이었습니다. 지난번 파리에서 납치당하셨을 적에 컴퓨터에 여권번호를 입력시켜 놓았던 것이 그만 …….

선임자로 보이는 30대 후반쯤의 사내가 힐끗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부랴부랴 확인을 하는 동안 담당자는 어설프게 다른 핑계를 대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 주셨다니 고맙군요.

이여사가 말하자 사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상부로부터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근대리아의 김사장님께서 항의를 하셔서요.

「‥‥‥‥」

이틀 후에는 제가 직접 여권을 만들어서 가져오겠습니다. 지난 여권은 담당자가 무효 도장을 찍은 바람에 그만‥‥」

어쨌든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이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박미정이 머리를 들었다.

그림 제가 근대리아로 전화해도 되겠군요. 이틀 후에 근대리아로 출발한다고 말예요.

사흘 후에 출발하시면 안 될까요? 이틀 후에 여권 가져오는 건 확실합니다만 시간이 ‥‥」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겠어요.

, 감사합니다.

사내들은 주스에 입도 안 대고는 아파트를 나갔다. 둘이 남게 되자 이여사가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사흘 후라니? 그게 정말이야?

머리를 끄덕인 박미정이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는 그녀를 바라보던 이여사가 소리죽여 한숨을 뱉었다.

실수를 했다면 당연히 와서 사과해야지, 집에 찾아와서라도 말이야.

박미정의 이야기를 들은 김상철이 대뜸 말했다.

여권이 나오는 대로 비행기를 타. 가능하다면 어머니를 모시고 와도 좋고.

박미정이 이여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임신 8개월의 몸이다. 근대리아에 훌륭한 시설을 갖춘 병원들이 많았지만 어머니가 옆에 있으면 든든할 것이었다.

그렇게 할게요. 어머니도 가겠다고 하시니까.

배가 더 부르기 전에 식을 빨리 올려야 되겠는데.

이제 김상철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섞여져 있었다.

급한 것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박미정은 공항에서 출국금지 당한 것을 그들 말대로 오해나 실수라고 생각할 만큼 둔한 여자가 아니다. 김상철은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그들 말대로 실수라고 했지만 그녀는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경찰의 말대로 김상철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국 정부에 항의까지 한 것이다.

, 내일 아버님께 인사하러 내려갔다 오겠어요.

박미정이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럼 다시 연락해. 내가 아버님께도 말씀을 드릴 테니까.

김상철의 목소리도 밝아져 있었으므로 박미정은 가벼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넌 왜 집에 안 가?

이한이 소리치자 세탁해 온 옷가지를 접던 동연교가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굳어진 표정이었다.

아홉 시가 지났어, 집에 돌아가.

동연교는 매일 아침 7시에 집에 찾아와서는 이한에게 아침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저녁 7시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간다. 이곳은 스키장의 빌라로 버스 노선도 없는 곳이다. 그녀가 택시로 타운에서 7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까지 오고 갈 리가 없었으므로 이한은 부하 중의 누군가가 차량 편의를 제공해 준 줄로만 알았었다. 그래서 부하들을 무섭게 다그쳤다가 곧 그 제공자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김상철이었다. 김상철이 차와 운전사를 동연교에게 붙여준 것이다.

동연교가 옷가지를 추려 들고는 일어섰다.

눈에 거슬린다면 옆방에 들어가 있겠어요. 며칠간 집에 안 가도 되니까요.

퍼뜩 눈썹을 치켜뜬 이한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날 가볍게 보지 마라. 네가 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이 거슬린단 말이야.

어머니는 고향에 가셨어요, 이모 식구들을 데리러.

당신이 준 돈이면 큰 식당을 차릴 수가 있으니까요.

널더러 종노릇 하라고 준 돈이 아니야.

받은 사람의 입장은 달라요. 당신이 무시하지 말라고 했듯이 나에게도 기회를 줘요.

조그마한 중국년이 말은 잘하는군.

그러자 아랫입술을 깨문 동연교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갈보한테 가지 말고 저를 가져요. 그렇다고 당신하고 같이 살자고 안 할 테니까.

「‥‥‥‥」

아마, 그러면 내가 거슬리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넌 기술이 없어서 안 돼. 난 목석같은 계집은 딱 질색이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입맛을 다신 이한은 머리를 돌렸다.

이건 도대체.

술상 봐 드려요?

시끄러!

이한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버럭 소리쳤지만 아까보다는 억양이 조금 낮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탁물을 내려놓은 동연교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술상을 준비하려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유장석은 비서실장 이남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총독 비서실장은 서열상으로는 행정청장 아래였지만 때로는 총독을 대리하여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본래 근대그룹에 있을 때부터 상하관계에 익숙하게 배어있는 사이였다. 유장석은 지금도 이남호를 자연스럽게 상관으로 대하고 있었다. 직원이 날라 온 녹차를 두어 모금씩 마시고 났을 때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내가 보자고 한 건 그, 합의서 문제 때문인데.

남북한 비밀협상의 합의문서가 누출되었다는 것은 이미 유장석도 알고 있었다. 총독이 주재하는 회의 석상에서 강미현이 그것을 보고했던 것이다. 이남호가 유장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청장, 당신은 그것이 어디에서 누출되었다고 생각하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두운 표정의 유장석이 입맛을 다셨다.

김상철과 제가 인연이 있다고 해서 혹시 실장님은 이쪽에서 ……」

이쪽과 북한 둘 중의 하나야.

이쪽은 제 금고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저 외에 손을 댄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분위기가 살벌해. 김상철의 부인이 출국금지 조처를 당하고 있어.

그것도 이대각이한테서 들었습니다. 나뿐 자식들 아닙니까? 여자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잡습니까?

유장석이 입가를 비틀면서 웃었다.

합의서가 어디서 누출되었건 간에 한국 정부의 행태를 보면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우리야 근대리아 주민이지만 솔직히 한국 정부의 지도자들이 국민을 우롱하고 속이는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구역질이 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합의서가 누출되었다고 해서 근대리아에 아무런 영향도 오지 않습니다.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난 자네가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이남호가 찻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네 말도 맞아. 우리하고는 그 일이 별 상관이 없네. 하지만 총독께서 걱정을 하고 계셔.

총독이 아니라 강미현 씨가 그러는 것 아닙니까?

유장석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팔짱을 꼈다.

제가 알기로는 김상철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한국 정부에게 안기부의 활동 상황을 고발했습니다. 그 와중에 합의서 문제가 터져 나왔지요.

「‥‥‥‥」

물론 강미현 씨는 북한과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 공동의 적이 김상철이 되어 있으니까요.

이봐, 유청장. 그것은 모두‥‥」

근대리아의 장래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평소와는 다른 유장석의 태도였으므로 이남호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김상철은 근대리아의 적이 아닙니다. 그건 실장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주적(主敵)은 북한입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북한과 연합해서 김상철을 치려고 하다니요?

허리를 편 유장석이 이남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아십니까? 강미현 씨는 질투에 눈이 멀어서 근대리아를 망쳐먹을 여자라고 한답니다.

이봐, 말조심해.

안색이 변한 이남호가 꾸짖듯 말하자 유장석이 긴 한숨소리를 냈다.

제동을 거실 분은 실장님뿐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처음에 총독님이 의도하신 대로 김상철은 북한의 견제 세력으로 양성되어야 합니다. 북한은, 자체 이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족과 고려인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놔둔다면 근대리아는 곧 적화된단 말씀입니다.

 

유장석의 신경이 예민해졌군.

창가에 선 총독이 화창한 햇살 아래 펼쳐진 근대시를 내려다보았다. 행정청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도로 위를 갖가지 차량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활기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모르고 있다.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김상철이지 김상철의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미현이도 같은 생각이야.

몸을 돌린 총독이 소파에 맞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김상철이 있어야만 그의 조직이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이실장 자네까지 말이야. 김상철이 없더라도 그의 조직은 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키울 테니까.

총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조직을 유장석이나 이대각이 맡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보안국장으로 있는 장동택이 적격일지도 모른다.

총독 각하.

이남호가 서두르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김상철이 하나만 제거해서 되는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의 간부급 부하들은 모두 …….

김상철이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단 말이지?

총독이 그의 말을 잘랐다.

사업체까지 모두 나눠 주었다고 들었다. 대단한 놈이야. 나는 돈 욕심이 없는 놈이 제일 무섭다.

다시 말을 하려던 이남호가 입을 벌린 채로 총독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랜 경험상 총독이 결심을 바꾼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김상철을 제거 대상으로 굳혀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직을 친위조직으로 흡수할 계획인 것이다. 총독이 다가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자고로 이 인자는 일인자의 견제 대상이었고 역사를 봐도 대업을 이룬 일인자가 이 인자를 키워준 예가 거의 없다. 그것은 부자간에도 마찬가지였어.

그는 이남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이인자가 정상에 오르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힘으로 일인자를 누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엎드려서 처분만 기다리는 것인데 그동안의 인고의 세월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고 들었다.

너는 실질적으로 근대그룹에서부터 근대리아에 이르기까지 이 인자 역할을 해오면서 한 번도 외부에 이 인자로 나선 적이 없었다. 비서실장으로 만족하면서 내 그림자나 분신처럼 일을 해주었다. 너와 나 사이는 형제나 부자간 이상이야. 속속들이 서로를 잘 안다. 그래서 너와 나 사이는 이 인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젠 너도 밖으로 나갈 때가 된 것 같다. 행정청장을 네가 맡아라. 유장석이는 한국의 근대 건설 회장으로 보낼 테다. 그쯤 하면 별 불만은 없을 게야.

총독 각하.

피부가 팽팽해지도록 긴장한 이남호가 상체를 반듯이 세웠다.

두 눈을 한껏 치켜뜬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정부가 흔들립니다. 더욱이 유장석은 근대리아 창립의 일등공신입니다.

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행정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와 손발이 맞는.

근대리아는 총독께서 세우셨지만 유장석은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였습니다. 그를 해임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제2의 건국을 하는 거야. 너는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총독이 다시 창가로 다가가더니 등을 보였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표시였다. 창밖을 바라본 채 그가 말했다.

나도 팔을 잘라내는 것같이 아프다. 더 이상 입을 열지 말아라.

 

다음 달이 산월 아니냐?

김영환 씨가 묻자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 한 달 남았어요.

지난달에 결혼식을 올리겠다더니 아직 연락이 없어. 준비를 해놓고 있었는데 말이야. 상철이가 바쁜 모양이지?

, 조금.

그들은 앞마당의 나무 그늘 밑에 놓인 평상에 앉아 있었다. 7월 중순으로 한여름이었지만 능선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풀냄새가 섞인 공기는 맑았다. 점심때가 지난 오후 3시경이어서 아래쪽의 축사도 조용해졌다. 두 명이 축사의 그늘에 앉아 무엇인가를 손보고 있었는데 한가한 모습이었다.

그동안에 내가 이름을 지어 놓았는데, 네 자식 말이다.

김영환이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았다.

사내아이면 완이라고 짓고 딸이거든 은이라고 해라. 완전할 완()에 은혜 은()이다.

, 아버님.

외자 이름이여.

김 완, 완이, 좋은 이름이네요.

그러자 김영환이 턱을 들고 웃었다.

은이도 좋지 않느냐? 딸 생각도 해두거라.

, 하겠어요.

네가 어머님하고 같이 간다니 안심이 된다.

김영환의 얼굴은 밝았다.

곧 애비가 될 상철이 그놈은 일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안채에서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박미정이 평상에서 일어섰다.

제가 받겠어요, 아버님.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의 마루에 오른 박미정은 안방의 문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서둘렀으므로 조금 숨이 찼다.

여보세요.

미정아, 나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네 여권을 가져왔어, 방금.

알았어요, 어머니. 내일 아침에 서울로 출발할 테니까 어머니도 준비하세요.

꼭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하니? 하루쯤 쉬었다가 모레 가면 안 돼?

넉 달이나 쉬었는데 또 …….

박미정이 짜증을 냈다.

엄만 가기 싫으시면 그만두세요.

얘는 정말, 알았다 준비하고 있을게.

수화기를 내려놓자 김영환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디 전화냐?

서울 어머니한테서요, 아버님.

그는 여권은 물론 아무것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가 무슨 전화냐고 묻지 않았으므로 박미정은 마음을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김영환 씨가 마당으로 내려섰을 때 농장 앞쪽의 샛길을 달려오는 한 대의 승용차를 보았다. 검정색의 대형 승용차는 농장의 열려진 정문으로 들어와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근처의 농장 직원들과 차 안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곧 직원 한 명이 손을 들어 이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승용차가 엔진소리를 울리며 이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박미정도 마당으로 나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서울에서 사돈어른이 차를 보내셨나 보다.

김영환이 말하자 박미정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승용차가 마당 아래쪽에서 멈추면서 차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내렸다.

어머나.

박미정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앞장선 사내는 조태광이었던 것이다.

허어, 저 사람.

김영환 씨도 조태광을 알아보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지난번에 김상철과 함께 농장에서 묵고 간 사내인 것이다. 조태광이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절을 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어르신.

그래, 여긴 웬일로?

, 사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잘 왔어. 식사들은 했나?

, 했습니다.

김영환이 박미정을 돌아보았다.

그럼 준비하거라. 난 축사에 내려가 있을 테니.

축사로 김영환이 내려가자 박미정이 조태광을 바라보았다.

한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며칠 되었습니다.

조태광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준비하시지요. 오후 세 시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근대리아행은 네 시 반이던데요.

오사카 들르셨다가 가셔도 됩니다.

힐끗 조태광을 바라본 박미정이 몸을 돌렸다. 온 지 며칠 되었다면 그동안 주변을 돌고 있었을 것이다. 오사카부터 들른다는 것도 김상철의 지시일 테니 이유를 알 것도 없다.

김영환과 작별한 그들이 농장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인 930분경이었다. 승용차는 렌터카였는데 조태광을 포함한 사내 세 명에 박미정까지 탑승자는 모두 넷이다. 농장을 벗어난 차는 왕복 2차선의 도로를 속력을 내어 달렸다. 아직 아침시간인 때문인지 국도에는 차량의 통행도 드물었다. 옆자리에 앉은 조태광이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는 제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힐끗 운전사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모두 해결이 되었으니까요.

차가 두 대가 따라옵니다.

백미러를 바라보던 운전사가 말했다.

농장 근처에 있던 그 차들 같은데요.

박미정이 뒤쪽 창문으로 머리를 돌렸다. 승용차 2대가 50미터쯤의 거리에서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다. 조태광이 얼굴을 굳혔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국 경찰일까요?

박미정이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 사모님 그럴 겁니다.

조태광이 손을 뻗어 운전사의 어깨를 쳤다.

서둘 것 없다. 속력을 줄여, 놈들은 그냥 따라오는 것뿐일 테니까.

 

수화기를 건네받은 김상철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1010분이었다.

김상철입니다.

, 이유미예요.

그래, 웬일이시오?

이유미란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부하의 전갈을 받았을 때부터 그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근대시에 있는 사무실 안이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이유미가 목소리를 높였는데 주위의 소음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시바다 겐지가 서울에 있어요.

퍼뜩 고개를 든 김상철의 귀에 다시 그녀의 말소리가 울렸다.

제가 요즘 시바다를 만나고 있어요. 그가 저를 찾아왔기 때문에.

언제 말입니까?

열흘이 넘었어요.

그 사람은 박미정 씨가 서울에 와 있는 것도 알고 집도 알아요. 부하들을 시켜 매일 돌아보고 있어요.

목적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한국 정부도 자신을 돕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강미현 씨도. 그 여자하고는 자주 연락을 하는 것 같아요.

김상철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떼었다.

고맙습니다, 알려주셔서. 그럼 시바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월슨 호텔 천오백십오 호실, 아니면 청담동 진주 아파트 팔 동 칠백삼 호실, 여긴 제 집이예요. 그는 매일 밤 제 아파트에 와요.

이유미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이만 끊겠어요. 지금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전 당분간 한국을 떠나려고 해요. 이 소용돌이에서 빠지려고.

잘 생각했습니다.

그 전에 말씀드려야 했는데 겁이 났어요. 그래서.

이해합니다.

해결되어야 돌아올 것 같아요. 그럼.

이유미는 공항에서 전화를 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다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015분이었다. 지금쯤 박미정은 조태광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고 있을 시간이었다.

 

시바다 겐지의 서울 주소가 월슨 호텔 천오백십오 호실이라니.

후가쿠 차장은 앞에 서 있는 동북아 과장 노구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실종된 몬도의 후임이다.

밤에는 청담동의 진주 아파트 팔 동 칠백삼 호로 간다는데 집주인이 도망쳤으니 오늘 밤에는 눈치를 챌지 모르겠군.

노구치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전 1040분이다. 근대리아의 오다 센자부로한테서 연락을 받은 지 20분이 지났다.

이즈모와 고바야시가 오후 두 시에는 현장에 도착할 겁니다, 차장님.

노구치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사사끼는 이미 호텔로 출발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다니 강미현이 영향력을 발휘한 모양인데.

한국의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환하게 알고 있는 후가쿠이다. 시바다가 한국에서 활보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후가쿠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안기부의 음모를 알려준 것은 강미현이야. 한국 정부는 강미현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강미현에게 정보를 전해 준 것은 북한일 것입니다. 안기부가 김상철의 조직을 구축해 주는 것에 북한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강미현과 북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지. 김상철은 그들의 공동의 적이다.

행정청장이 갈렸으니 다음 차례는 경비대가 되겠는데요.

그러자 후가쿠가 길게 연기를 뱉어내고는 입맛을 다셨다. 바로 어제, 근대리아 총독은 전격적으로 행정청장을 경질했다. 유장석이 한국 근대건설의 회장으로 발령을 받고 그 후임에 비서실장 이남호가 임명된 것이다. 이남호라면 유장석보다 비중이 무거운 거물이어서 행정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볼 수가 있었지만 유장석은 근대리아의 창립 공신이다. 유장석으로서는 좌천이었다

아마 유장석은 이대각과는 다르게 한국으로 떠날 것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성격이 아니야.

이대각은 반발할 것입니다. 그 귀추가 주목되는데요.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긴장을 했다. 후가쿠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후가쿠 차장입니다.

사사끼올습니다, 차장님.

서울의 요원이다. 후가쿠가 힐끗 노구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었어?

시바다는 노무라라는 이름으로 투숙하고 있습니다. 지금 방은 비어 있습니다.

체크아웃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기회는 오늘뿐이다. 명심해라, 사사끼.

후가쿠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이즈모와 고바야시가 요원들을 데리고 떠났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사사끼.

 

오전 1050, 승용차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원주 인터체인지를 지나 곧 여주가 20킬로 앞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뒤쪽의 승용차는 50미터쯤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따라오고 있었는데 운전사가 가끔 백미러를 바라볼 뿐 차 안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 풀어져 있었다.

, 알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문득 박미정이 조태광을 향해 말했으므로 차 안의 사내들이 모두 긴장을 했다. 조태광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말씀하십시오, 사모님.

일주일이 넘게 마음고생에다 육체적인 피로가 쌓인 그의 얼굴은 꺼칠해져 있었다. 오사카에서 서울로 날아온 이후 박미정의 아파트를 지켰으나 그것은 외곽 경계일 뿐이었다. 한국 기관원들이 24시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주위만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출국금지가 되었던 것은 행정착오가 아니었죠? 그이와 한국 정부와의 문제 때문이었죠?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사모님.

안기부장이 사임한 일과도 관계가 있죠?

사모님, 저는‥‥」

저기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 안기부 요원들은 아녜요, 그렇죠?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도.

조태광이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박미정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절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 다 알아요. 하지만 윤곽은 알고 있어야 덜 걱정이 됩니다. 안기부 요원들이었다면 저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밝혔겠지요. 그이와의 관계도 있고 하니까. 제가 이렇게 출국하게 된 것은 아마 그이가 어떤 협상을 했을 거예요, 한국 정부와. 그렇죠?

저는 잘 모릅니다, 사모님.

조태광이 굳게 입을 다물었으므로 그동안 그를 바라보던 박미정이 이윽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부른 배 위에 두 손을 덮었다. 차는 완만한 경사길을 달려 올라가는 중이었다. 차량의 통행이 늘어나 있었으므로 운전사는 추월선으로 들어서서는 가속기를 밟아 차에 속력을 내었다. 오후 3시 출발의 비행기였으니 시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이곳에서 서울까지는 한 시간 반, 김포까지 한 시간 반을 잡아도 오후 2시에는 도착할 것이었다. 어머니는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아마 아버지하고 같이 나와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 박미정은 앞쪽에서 달려 내려오던 트럭이 일차선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곧장 이쪽으로 덮쳐왔는데 놀란 그녀가 입을 딱 벌리는 순간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녀에게는 짙은 어둠이 덮여졌다.

아앗.

하고 소리친 것은 앞자리에 타고 있던 운전사와 조수사관이다. 그다음 순간 차 안의 네 사내는 요란한 충돌음을 들었고 부서진 자동차의 파편이 날아와 차체를 두들겼다. 운전사가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잔뜩 밟았으므로 차체가 앞으로 기울더니 곧 옆쪽으로 비틀려졌다. 그리고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진 앞쪽 승용차의 한 부분을 들이받으면서 멈췄다. 그다음 순간 머리끝이 저절로 솟아오를 만큼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음이 들리더니 차 안의 사내들은 충돌음과 함께 앞쪽으로 몸이 튕겨졌다. 뒤를 따르던 차가 부딪친 것이다.

아이구.

뒤쪽 문이 찌그러져 열리지가 않았으므로 박영수 경정은 부서진 유리창으로 상반신을 떼내면서 아우성치듯 소리쳤다. 유리 파편인지 무엇인지에 이마가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른 비명이 아니다.

차 안의 사람을! 어서!

앞좌석의 운전사와 조수사관이 거의 동시에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박살이 난 차체 안에 사람의 형체가 보이고 있었지만 참혹했다. 모두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아아, 이런.

몸을 돌린 박영수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트럭은 이미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찾았지만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차 안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구해내라! 어서! 구조대에 연락을.

악을 쓰듯 소리친 박영수는 가슴에 찬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미친 듯한 형상이다. 그는 반대 차선으로 뛰어가 권총을 치켜들고는 다가오는 승용차 한 대를 가로막았다. 사고 때문에 차량들은 서행하는 중이어서 차가 멈춰 섰다. 젊은 남녀가 나란히 타고 있는 차였다.

내려라! 어서! 차 좀 빌리자!

운전석으로 다가간 그가 권총의 개머리판으로 유리창을 쳤다. 젊은 사내가 힐끗 그를 올려다보더니 불쑥 가속기를 밟았으므로 차는 그의 몸을 스치고는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이를 악문 박영수가 승용차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는 2발을 쏘았다.

! !

승용차는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더니 휘익 돌면서 도로에 가로로 멈춰 섰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간 박영수가 운전석의 문을 열어 제쳤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모양으로 사내는 입을 쩍 벌린 채로 상처를 한 손으로 누르며 앉아 있었다. 여자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를 내며 운다. 박영수가 권총의 손잡이로 사내의 얼굴을 찍자 사내의 얼굴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내의 멱살을 잡아 길바닥에 내팽개친 박영수는 운전석에 올랐다.

너도 내려!

그가 악을 쓰자 여자가 문을 열었다. 여자가 미처 두 발을 땅에 딛기도 전에 박영수는 차를 발진시켰으므로 여자는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런, 빌어먹을.

가속기를 밟아 맹렬하게 경사길을 내려가면서 그가 소리쳤다. 트럭은 계획적으로 박미정이 탄 차와 충돌한 것이다. 놈들은 정확하게 이쪽의 진행 경로와 위치를 알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 원주 인터체인지까지 왔지만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에 더욱 속력을 내었다. 도주한 트럭과 같은 방향으로 달리던 차량들이 트럭을 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뺑소니는 그렇게 잡혀 왔던 것이다.

 

이대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오후 2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리조트 시티의 사무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유장석의 해임으로 긴장하고 있었던 김상철이다.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그가 묻자 이대각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소파의 앞자리에 앉은 이한이 눈을 껌벅이며 김상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김사장 좋지 않은 소식인데, 마음 단단히 먹어.

다른 사람 같은 이대각의 목소리였다. 얼굴을 굳힌 김상철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무슨 소식 입니까? 말씀하세요.

조금 전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어.

「‥‥‥‥」

한국 경찰청장이 직접 나한테 연락을 해왔단 말이야. 박미정 씨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네. 조태광이와 다른 두 명과 함께.

교통사고야. 영동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정면충돌을 해서, 박미정 씨는 아직 의식이 없다는 거야. 다른 세 명은 죽었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뱉은 김상철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대각이 서두르듯 말했다.

트럭은 도주했는데 뺑소니 사고라고 했어. 경찰청장은 전 수사기관을 총동원해서 ‥‥」

병원이 어딥니까?

서울 강남의 성신병원이야.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따라 일어선 이한이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잠자코 사무실을 나서자 한동안 눈을 껌벅이며 서 있던 이한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1시간 후에 김상철은 근대공항의 대합실에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이미 상황을 알게 된 그의 부하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2. 태풍 상륙

상태는 어떻습니까?

박영수가 묻자 김호영 과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이다. 허리를 편 그가 박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생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미 가족에게 알려드렸는데요.

그들은 박미정의 침대 옆에 서 있었는데 산소 호흡기를 댄 박미정은 인공호흡으로 심장박동이 유지되고 있을 뿐으로 뇌사상태였다.

병실에서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만.

김호영이 말하자 박영수가 와락 눈을 치켜떴다.

이거 왜 이래?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똑바로 해, 이 자식아.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박영수가 멍한 얼굴이 되어 있는 김호영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섰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양복 자락에 검게 말라붙어 있었고 이마에는 붕대를 감은 살벌한 모습이다.

호흡기를 떼면 죽는단 말인가?

당신 도대체.

그러자 가슴에 찬 권총집에서 권총을 빼든 박영수가 총구로 김호영의 배를 짤렀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이 새끼야.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경비원 둘이 들어섰고 간호사가 깍 하고 비명을 질렀는데 경비원들은 제각기 허리에 찬 가스총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들의 뒤로 세 명의 사내가 들어서더니 불문곡직하고 경비원을 잡아 방 안에 내동댕이쳤으므로 간호사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경비원들이 방 안에 엎드리고 자빠져서 신음소리를 내는 사이로 박영수가 다시 물었다.

호흡기를 떼면 죽나?

, 죽습니다. 이미 뇌는 정지한 상태요.

이 상태로 얼마나 가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주일, 아니면 그 이하가 될지도, 하지만.

하지만 뭐야?

태아는 죽습니다.

고분고분해진 김호영이 눈으로 박미정의 불룩한 배를 가리켰다.

태아라도 살리려면 지금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확률이 적지만 시도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태아는 아직 살아 있어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자분의 부모 되시는 분들께 말씀을 드렸는데.

어깨를 늘어뜨린 박영수가 권총집에 권총을 꽂았다.

그래서요? 뭐라고 합디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술이 끝나면 여자분은‥‥」

죽는단 말이오?

그렇게 됩니다.

뇌사상태라 시간이 급한데 야단났습니다. 남편 되는 사람이 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이분 부모는 남편 이름을 대지도 않는군요.

부하들이 경비원들을 끌고 나갔으므로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동안 김호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박영수가 생각난 듯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5시 반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장이 조종실로 들어선 김상철을 맞았다. 김상철에게 옆쪽 자리를 권한 그는 무선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서울에서 급한 연락입니다.

조종실 안에는 기장까지 세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한국 항공기여서 승무원은 모두 한국인이다. 김상철이 전화기를 귀에 대었다.

김상철입니다.

아아, , 저는 한국 경찰청의 보안과장 박영수입니다. 상황이 급해서 이렇게 연락을 드립니다.

「‥‥‥‥」

부인께서 뇌사상태이신데 이대로 시간만 지났다가는 태아까지 위험하다고 합니다. 병원 측에서는 보호자의 결단이 있다면 태아만이라도 살려보겠다고 합니다만.

조종실 안은 조용했는데 무선전화기의 출력을 높인 때문인지 그의 말소리가 크게 울렸다.

김사장님, 듣고 계십니까?

, 듣고‥‥」

시간이 급합니다. 병원에 환자의 부모가 계시지만 두 분이 결정하실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아이를, 그렇다면 아이를.

목이 막힌 김상철이 침을 삼켰다.

아이는 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만 부인께서는‥‥」

시간이 급합니다. 이대로 둔다면 아이까지 사망하게‥‥」

제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을까요? 내 아내가 말입니다.

글쎄요, 그것은.

수술을 하라고 할까요?

, 그렇게 ‥‥」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김사장님, 그럼.

전화가 끊기자 조종실 안은 정적에 덮였다. 엔진의 소음이 은은하게 들려왔지만, 옆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이다. 이윽고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기장과 부기장이 몸을 따라 일으켰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조종실을 나온 김상철은 허리를 펴고 섰다. 스튜어디스 한 명이 다가오더니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화 끝내셨어요?

그녀는 돌처럼 굳어져 있는 김상철의 안색을 살피고는 잠자코 시선을 돌렸다. 비행기는 구름층을 지나는 모양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려 왔다.

 

보안국장 이윤재는 옆을 걷는 박영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경찰청의 무전실을 나와 이층의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난 대검에 들어가 봐야 돼. 긴급 호출이 왔어.

박영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데없이 강원도의 목장에 내려가 박미정의 감시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박영수이다. 이윤재는 사건의 내용도 말해 주지 않았다.

대검 누구한테 가십니까?

박영수가 묻자 그는 입맛을 다셨다.

고차장.

고광식 차장은 대검찰청의 실력자로 곧 서울지검장의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인물이다. 이층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이윤재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박영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대검의 낌새가 이상해. 대검 수사관들이 극비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청와대의 지시로 말이야.

그는 박영수에게로 바짝 다가와 섰다.

정보국의 김총경 그놈이 대검과의 연락을 맡고 있는 모양인데 말이야. 그놈은 알 거야.

경찰청 정보국에서 총경급 간부가 청와대로 파견되어있는 것이다. 박영수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보안국의 5과장 직무대리로 이윤재의 심복이다.

박미정의 사고와 연관된 일일까요? 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그토록 철저하게 감시하라는 지시를 이해 못 했습니다.

그건 아직 모른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이윤재가 시간이 남은 모양인지 소파에 앉았다.

어쨌든 사건을 내놓으려면 우리를 통해야 할 테니까 곧 알게 되겠지.

김상철이 도착하면 또 감시를 붙여야겠지요? 마누라도 그토록 감시를 시켰으니.

고차장이 곧 알려 주겠지.

박영수가 그의 앞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치밀하게 계획된 사고였습니다. 트럭을 몰아간 승용차들의 운전자에 의하면 트럭은 원주 인터체인지 입구를 가로막아 추격하던 차들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옮겨타고 도망친 겁니다.

김상철은 근대리아의 거물이야. 그렇다고 마누라를 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 만일 계획적인 사고였다면 말이야.

김상철을 유인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 작전은 성공한 셈이군. 지금 달려오고 있으니.

시계를 내려다본 이윤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김상철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리도 없지. 앞으로 꽤 바빠지겠군.

따라 일어선 박영수가 입맛을 다셨다.

저는 다시 병원으로 가보겠습니다. 지금쯤 수술을 시작했을 테니까요.

 

그 시간에 근대리아 행정청장 이남호는 총독실에 앉아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두 팔을 의자 팔걸이에 올려놓은 총독의 표정은 굳다. 이윽고 총독이 방 안의 정적을 했다.

시바다 겐지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누가 그랬단 말인가?

그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공연히 시바다를 비호한 우리 쪽이 혐의를 뒤집어쓸 공산이 크다.

각하, 김상철을 유인하려는 한국 정부 측의 소행일 수도 있습니다.

처를 죽이면 김상철이 한국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하지만 어쨌든 김상철은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각하.

김상철은 비밀 합의서로 한국 정부를 협박했습니다. 한국 정권으로는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각하.

총독이 시선을 들어 벽에 걸린 산수화를 바라보았다. 공허한 표정이었다.

미현이가 시킨 일이 정말 아니란 말이냐?

자문관은 그토록 잔인한 성격은 아닙니다, 각하.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난 잘 모른다. 내 피를 받았지만 이젠 알 수가 없어.

자문관도 놀라고 있었습니다.

직접 지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시바다가 마음을 읽고 저질렀을 수도 있다.

「‥‥‥‥」

너도 알다시피 나도 간혹 그런 경우를 겪었으니까.

의자에 등을 기댄 총독이 긴 한숨소리를 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깨어진 독이야. 내막이야 꼭 밝혀지겠지만 미리 수습 준비를 해두는 수밖에.

예상 밖이야.

총독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훌훌 털고 떠나다니, 김상철이 말이다. 한국 정부나 시바다가 서울에서 노리고 있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말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이대각이 공항까지 달려가 만류했는데도 뿌리치고 떠났다는군요.

어리석은 놈.

낮은 목소리로 말한 총독이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문득 머리를 들었다.

미현이에게 일러라, 앞으로 시바다와 연락을 끊으라고. 만일 내 지시를 어겼을 때는 호적에서 빼내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근신하고 있으라고 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각하.

허리를 편 총독이 강한 시선으로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한국 정세는 수시로 보고하도록. 태풍이 그쪽으로 옮겨진 것 같으니 말이야.

 

커피숍으로 들어선 고바야시는 곧장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이즈모에게로 다가갔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놈들이 눈치를 챈 것은 아닐 텐데 말이야. 아직까지 한 놈도 방에 들어오지 않았어.

앞자리에 앉은 고바야시가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의 땀을 닦았다. 이미 호텔에 투숙한 12명의 야쿠자 신원을 알아낸 것이다.

키도 모두 갖고 나가는 바람에 언제 나갔는지 알 수가 없어.

김포와 김해, 제주 공항에 요원들이 배치되었고 항구도 지키고 있어. 시바다 이놈은 한국에서 잡는다.

이즈모가 머리를 들어 길 건너편의 월슨 호텔을 바라보았다. 호텔 주위에도 7, 8명의 요원이 배치되어있는 것이다.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커피를 시킨 고바야시가 초조한 듯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즈모와는 대조적으로 급한 성격이다.

이거, 오늘 중으로 잡지 못하면 여자가 도망친 걸 눈치채 버릴 텐데.

혹시 고속도로에서 일을 마친 다음 도망친 건 아닐까?

아직 출국한 흔적은 없어. 이젠 신원이 파악되었으니 어디로 날아가건 곧 잡는다.

이즈모의 가슴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췄다. 이즈모가 핸드폰을 귀에 대었다.

이즈모야.

계장님, 호텔에 두 명이 들어왔습니다. 곧장 객실로 들어가는데요.

바짝 긴장을 한 이즈모가 건너편의 호텔을 바라보았다.

두 명 뿐이야?

, 계장님.

더 올 것이다. 지원해 줄 테니까 철저히 감시만 하도록. 나도 그곳으로 갈 테니 지하 일층 계단에서 만나자.

이즈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바야시, 넌 이곳에서 연락을 맡아라. 난 호텔로 간다. 두 명이 들어 왔어.

알았어.

사사끼는 요원들을 이끌고 이유미의 아파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니 시바다는 곧 덫에 걸릴 것이었다. 이즈모가 서둘러 커피숍을 나서자 고바야시는 안쪽의 공중전화 부스로 다가갔다. 요원들에게 연락을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고속도로의 사건을 들었고 그것을 시바다의 소행으로 믿고 있었다. 시바다를 잡는 것에 의미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수화기를 쥔 그는 서둘러 다이얼을 눌렀다.

 

저녁 85분 전에 근대시를 출발한 대한항공 418기는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관광객들 사이에 낀 김상철과 두 명의 부하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온 것은 830분이다.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헤치고 곧장 대합실의 밖으로 나왔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였다. 짙은 습기를 품은 대기에 닿은 피부는 금방 끈적이는 느낌이 왔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택시 정류장을 향해 다가갔다.

세 놈뿐이군.

대합실의 유리문 옆에 선 안호길이 말하자 서인규가 무전기를 귀에 대었다.

, 이봐. 잠깐만.

안호길이 어깨를 쳤으므로 서인규가 머리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에 세 명의 외국인이 서둘러 김상철의 뒤를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곧 김상철의 일행을 불러 세웠다.

저것들은 뭐야?

서인규가 물었으나 곧 그 답이 나타났다. 검정색의 대형 캐딜락 두 대가 그들 앞을 스치고 지났는데 앞쪽의 깃봉에서 펄럭이는 깃발은 러시아 국기였다.

러시아 대사관에서 나왔다.

당황한 안호길이 서인규를 바라보았다.

이거 어떻게 하나?

이제 김상철의 일행은 러시아인들과 함께 차에 오르는 중이었다. 손을 쓸 여지도 없다. 서인규가 무전기를 귀에 대었다.

차로 앞을 막아라. 러시아 대사관 차다. 사고 난 것처럼 해!

소리치듯 그가 말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끗거렸다. 안호길은 핸드폰을 꺼내어 다이얼을 눌렀다. 그 사이에 지프 한 대가 속력을 내어 그들을 스치고 지나더니 캐딜락 앞쪽에 정차하려는 듯이 비스듬히 인도 쪽으로 머리를 틀었을 때 뒤를 따르던 승용차가 지프의 뒤쪽을 받았다. 그러자 다른 승용차 한 대가 이제는 뒤쪽 캐딜락의 뒷부분에 바짝 붙어서 멈췄으므로 캐딜락 두 대는 자형의 안쪽에 갇힌 모양이 되었다.

러시아 대사관 차야?

박영수가 소리치듯 묻자 안호길은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 과장님, 두 대가. 그들은 지금 차 안에 타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할까요?

보내라. 하지만 병원까지 따라가. 그곳에서 잡는다.

알았습니다.

서인규가 다시 무전기에 대고 소리치자 뒤에 붙어 섰던 승용차가 뒤로 후진했다. 차 밖으로 나와 뭐라고 소리치던 러시아인 두 명이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싸우는 시늉을 하던 지프와 승용차의 운전사가 제각기 차 안으로 들어가자 마쓰모도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 경찰도 연극을 꽤 하는군.

그는 길 건너편에서 관광객들과 함께 서 있었는데 그도 목에 카메라를 매단 관광객 차림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대사관 차를 끌고 갈 수는 없지 .

옆에 선 오제끼가 잠자코 핸드폰을 들었다. 그들은 시바다의 출국을 감시하는 입장이었지만 김상철의 입국도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병실에 들어선 김상철을 제일 먼저 맞은 사람은 이연희 여사였다. 그녀는 소리 내어 울면서 와락 그의 옷깃을 잡았다. 박남호 씨는 그녀의 뒤쪽에 서 있었고 아버지 김영환 씨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서너 명 둘러서 있는 침대 위에 박미정이 누워 있었다.

이 사람아, 이 일을 어떻게‥‥」

박남호 씨가 겨우 떼어놓았지만 이여사는 소리치며 흐느껴 울었다. 김상철은 박미정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산소 호흡기도 떼어낸 그녀는 자는 듯 누워 있었다. 그러자 김영환 씨가 옆으로 다가와 섰다.

조금 전에 떠났다.

손을 들어 올린 그가 조금 망설이더니 김상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이는 살았다. 사내아이여.

다시 이 여사가 목을 놓아 울었다. 나이든 의사가 김상철에게로 몸을 돌렸다.

사고 이후로 고통은 없었습니다. 의식도 없었고, 편안히 가셨다고 생각하십시오.

김상철이 그를 향해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박미정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생기 있던 검은 두 눈동자는 이제 덮여져서 가지런한 속눈썹만 솟아 있었다. 굳게 다문 그녀의 붉고 단정한 입술을 내려다보던 김상철은 이윽고 두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옆에 서 있던 김영환 씨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박미정의 얼굴은 차가웠다. 두 손에 힘이 들어 있었던지 그녀의 입술이 조금 열렸고 흰 치아가 드러났다. 그리고 치아에 번져 있는 피가 보였다. 이여사의 흐느낌 소리가 작아진 대신 이제는 박남호 씨가 악문 이 사이로 울음소리를 내었다. 김상철은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시트를 끌어당겨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몸을 돌린 그는 이여사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을 열었다가 발을 떼어 병실을 나섰다. 다시 이여사의 울음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병실 밖으로 김영환 씨가 따라 나왔으므로 그들은 어두운 앞마당에 나란히 섰다. 응급실 앞에 세워진 구급차의 경고등이 번쩍이고 있는 것이 환자를 날라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우두커니 선 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김영환 씨가 머리를 들었다.

장지는 어디로 할 거냐? 우리 선산에 .

근대리아에 묻어야지요, 아버지.

어깨를 늘어뜨린 김영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기운을 내거라, 상철아.

김상철이 팔을 들어 김영환의 어깨를 안았다.

이제 들어 가십시다, 아버지.

 

뭐가 어째? 행방을 감췄어?

버럭 고함을 친 고광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앞쪽에 앉아 있던 이검사가 몸을 굳히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봐요, 이국장. 당신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아니 그래, 병원에서 그자를 놓쳤단 말이오?

고광식이 소리치듯 말하자 이윤재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공항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 대사관 차에서 러시아인을 끌어낼 수는 없지요. 그리고 병원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김상철이 변소에 간 줄로만 알았다는데……」

이것 보시오, 지금 변명할 상황이 아니오. 즉시 전국의 경찰에 수배하시오.

글쎄 죄명이 뭡니까?

그러자 고광식과 이검사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보안법 위반혐의로 해요. 자세한 내용은 상의한 다음에 알려드릴 테니까.

고광식의 말에 이윤재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김상철은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어요. 한국의 보안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한테 맡기시고.

고광식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턱을 든 얼굴로 이윤재를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위험인물이오.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한국에 들어온 이상 말이오. 이건 청와대의 지십니다. 그쯤 아시고.

이윤재가 방을 나가자 이검사가 입을 열었다.

사건을 비공개로 결정했다면 김상철의 공개 수사는 무리 아닐까요? 언론이 쫓아갈지 모릅니다, 차장님.

이명규는 심재택을 직접 심문한 검사로 대검의 공안부장이다. 고광식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제 저녁 김상철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로 줄곧 청사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어. 잡고 나면 언론을 따돌리는 수밖에. 그나저나 청와대에 어떻게 보고할지 난감하군. 그 둔한 경찰청 놈들 때문에 말이야.

고광식이 어금니를 물었다. 심재택과 이정훈 등의 기소 준비를 끝냈을 때 갑자기 청와대는 사건을 비공개 처리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김상철이 북한 대표단을 살해해서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남북 간의 비밀 합의서를 조작하여 극우파가 정권을 탈취하도록 한다는 각본에 허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선이 겨우 5개월 남은 시점이다. 이 사건이 야당의 대선후보인 이대현에게 조작된 내용 그대로만으로도 호재를 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남북문제는 미묘한 사안이다. 더구나 사건을 공개했을 때 북한이 또 다른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쪽의 약점을 잡고 늘어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김상철의 체포를 경찰청에 넘기는 것이 아니었어. 대검 수사관들에게 시켰어야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선 고광식이 말했다.

한 계단 내려가면 금방 느슨해진단 말이야.

김상철이 눈치챈 것 아닐까요?

따라 일어선 이명규가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그놈은 알고 온 거야. 그리고는 우리 허점을 찌르고 도망친 거야.

 

한남동 주택가의 안쪽. 깊은 밤이어서 일차선의 좁은 도로에는 인적이 끊겨진 지 오래여서 깊은 정적에 덮여 있었다. 불이 꺼진 저택들의 대부분이 2, 3층의 건물로 담장 밖으로 정원수가 뻗어 나온 고급 양옥이다. 언덕바지에 세워진 3층 양옥은 그중에도 전망이 좋았는데 2층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2층은 저택의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일본 정보국의 동북아 과장 노구치는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시바다는 아직 한국에 있다. 이제 사용하고 있는 여권을 알아낸 이상 잡는 건 시간문제다.

앞쪽에 앉은 이즈모는 잠자코 시선을 내렸다. 시바다는 다시 도주한 것이다. 그는 호텔에도, 이유미의 아파트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호텔에 들어왔던 부하 2명은 지금 아래층의 지하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지만 시바다는 물론이고 나까무라의 행방도 모르는 그저 잔심부름이나 하는 부하들이었다.

노구치는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만 부하 앞에서의 허세로만 보였으므로 이즈모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제각기 머리를 들었다. 깊은 정적에 잠긴 밤이어서 유난히 벨소리가 컸다. 노구치가 수화기를 집었다.

여보세요.

나야.

후가쿠 차장의 목소리였다. 새벽 2시가 되어가고 있었으나 도쿄의 후가쿠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이다.

김상철이 병원에서 행방을 감추었다. 금방 한국 경찰이 전국에 지명수배를 했어.

노구치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아니, 그렇다면.

죽은 아내의 얼굴만 보고 사라진 거야. 내 추측이지만 한국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김상철이 잠자코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시바다의 소행으로 알고 있을까요?

한국 정부의 소행일 수도 있어. 그도 우리와 생각하는 것이 같을 것이다.

시바다 겐지가 근대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후로 일본은 김상철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것은 근대리아 정부가 북한과 밀착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현상이다.

노구치, 당분간 너는 그곳에 머물러야겠다. 내가 인원을 증원시켜 줄 테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바다의 행방에 대해서 짜증을 내던 후가쿠였는데 지금의 목소리는 생기가 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

시바다도 시바다지만 한국 정부의 정세를 면밀히 감시하도록. 정보원을 최대한 활용해라.

.

김상철의 행적도 마찬가지야. 노구치, 우리도 이곳에서 전 채널을 열어놓겠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노구치가 이즈모를 바라보았다.

태풍이 불 모양이군, 이곳에.

 

다음 날 아침, 권준규는 운동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아직 햇살이 퍼지기 전의 이른 시간이다.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져 내릴 것처럼 보였지만 공기는 맑았다. 과천에 있는 그의 저택은 관악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 하나와 가까웠으므로 매일 아침 가벼운 등산을 하는 것이 일과인 것이다. 등산객도 없는 호젓한 산길을 걸어 목적지인 약수터에 도착했을 때는 65분 전이었다. 오늘은 25분이 걸렸으니 보통 때보다 3분쯤 늦다.

그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전씨와 황씨라고 성만 알고 있는 대검의 수사관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안기부장을 사임한 후로 그는 이틀간 안가에서 조사를 받은 다음 자택에 돌아왔지만 연금상태였다. 대검의 수사관 6명이 24시간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옆쪽의 나무 그늘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그는 머리를 들었다. 사내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신사복 차림이었다.

아니.

권준규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의 얼굴이 낯이 익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아니, 댁은.

김상철입니다.

김상철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수염을 깎지 않아서 얼굴이 꺼칠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권준규는 김상철과 초면이었지만 사진으로 얼굴은 안다. 그가 다시 아래쪽을 바라보자 김상철이 먼저 바위 위에 앉았다.

따라오던 사람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권준규가 바위에 앉았다.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도대체 여긴 웬일입니까?

제 처가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아니 뭐라구요?

눈을 치켜뜬 권준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고로 말입니까?

바깥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던 권준규였다. 김상철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가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말을 마친 김상철이 꺼칠한 얼굴을 들었다.

시바다 겐지일 수도 있고 한국 기관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한국 기관의 지휘계통이오. 부장님은 알고 계실 겁니다.

보복을 하시려고?

낮은 목소리로 권준규가 물었으나 김상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권준규가 다시 아래쪽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비서실장 이태준과 안보수석 신형목이오. 대통령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소.

「‥‥‥‥‥」

그다음이 대검찰청의 고광식 차장이고. 심재택을 취조한 것은 공안부장 이명규일 테니 그들이 실무자들이지.

「‥‥‥‥‥」

이번 사건은 근대리아의 총독 자문관 강미현이 청와대에 안기부의 근대리아 활동을 폭로한 것이 발단이 되었고, 그 취조 과정에서 남북 간의 비밀 합의서 문제가 터진 거요.

권준규가 몸을 일으켰다.

청와대는 이 사건을 비공개로 처리할 모양이오. 그럴수록 위법 사례가 늘어나겠지.

그는 생각난 듯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야당 후보 이대현 씨가 이 일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회는 잃은 것 같소. 관련자 대부분이 파악되어서.

 

내가 이것을 내보인다 해도 그 사람들은 정치공작이라면서 날 잡아 가두려고 할 것이다. 우린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이대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합의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엄청난 일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이성훈이 머리를 들었다.

이제까지 저희는 안기부 주도의 폭로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로만 일관해 왔습니다.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도해야 된단 말이냐?

쓴웃음을 지은 이대현이 머리를 저었다

북한은 물론 근대리아 정부도 부정할 것이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저들의 수단에 말려들어 역효과만 일어난다.

아직 출근 전의 아침 시간이다. 그들은 중학 1년생인 이성훈의 딸 방에 들어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도청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1년 전에 집 안의 내장을 완전 개조하다시피 시멘트 덧칠을 하고 방음벽을 만들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면초가야. 미국과 일본도 지금은 잠자코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결정적일 때에는 현 정권과 여당을 돕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남북한 간의 현 상황을 유지하려고 할 테니까.

「‥‥‥‥‥」

잘못하면 쿠데타 음모가 돼. 덫에 걸리면 그나마 얻은 표도 다 달아난다. 중산층과 기득권층은 변화를 원치 않아. 겉으로는 대북관계에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떠들지만 북한을 자극하지 말기를 내심 바라고 있어.

엄연한 매국 행위의 증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역공세를 걱정하여 갖고 있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믿을 사람도 없다. 각계의 동조자를 모으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졌고 야당의 힘을 결집시킨다고 해도 사법권은 물론 언론을 장악한 현 정권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류를 집어 든 이성훈이 봉투에 담고는 딸의 책상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애초에 이쪽은 내용도 모르고 있었던 일이다. 그는 애써 미진한 기운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김상철이가 안됐습니다. 죽은 부인의 얼굴만 보고는 종적을 감춘 모양인데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져 있어요.

 

박미정과 조태광 등의 시체를 실은 관은 근대리아 공항에 도착하자 곧장 장지로 옮겨졌다. 서울에서 김영환 씨와 박남호 씨가 따라와 상주가 되었고 이쪽에서는 그레고리 이하 백여 명의 간부급이 그들을 맞았는데 외빈만도 삼백여 명이 되었다. 김상철이 한국에서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침울하고 비장한 분위기의 장례식이었다. 근대리아 정부 측에서는 총독이 조화를 보내왔고 행정청장 이남호가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대각과 장동택의 얼굴도 보였다. 아직 서울로 출발하지 않은 유장석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북한 대표부의 대표 서일과 장호성, 박기환, 이금택 등에다가 삼합회의 홍기천, 이나카와회의 오다 센자부로가 간부급 부하들을 거느리고 몰려 서 있다. 거기에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날아온 마피아 보스 마르첸코가 볼코프 소장과 함께 있었으므로 근대리아 역사상 내외부의 거물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김상철의 새로 세워진 저택의 바로 옆쪽, 대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박미정의 장지였다. 조태광과 두 명의 부하는 조금 아래쪽으로 자리를 잡아 먼저 식을 치렀으므로 사람들은 박미정의 장지에 몰려서 있었다. 마르첸코가 다가와 그레고리의 손을 잡았다. 무덤 안으로 관은 이미 내려졌고 사람들은 꽃을 던지는 중이다.

그레고리, 단속을 잘해야 할 텐데. 북한 세력이 너무 커져가고 있어.

그가 낮게 말하자 그레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소, 마르첸코.

마르첸코가 떠나자 홍기천이 다가와 섰다.

그레고리 선생, 김사장님과 연락이 닿거든 홍기천이 깊이 슬퍼하고 있다고 꼭 전해 주시오.

말씀드리지요, 홍선생.

이번에는 오다 센자부로가 다가왔다.

그레고리 씨, 김사장께 서울 일본 대사관의 요시노 영사를 찾으라고 말해 주시오.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맙소, 오다 씨.

무덤 안에 꽃을 던진 서일이 김영환 씨와 박남호 씨에게 인사를 한 다음 이쪽으로 다가왔다.

비극이오, 그레고리 선생.

그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말하고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우리가 깊은 조의를 표한다고 김사장께 전해 주시오.

고맙소, 서선생.

근대리아의 7월은 푸른 하늘에 풀잎이 돋아나는 여름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푸르렀고 짙은 풀냄새를 담은 바람이 장지의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너 명의 인부들이 무덤 위로 흙을 덮기 시작하자 조문객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있었다.

이대각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레고리, 그놈더러 당장에 돌아오라고 해. 미친 짓 말고.

눈을 부릅뜬 이대각의 시선과 마주치자 그레고리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것이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유장석과 이대각은 제각기 머리를 반대쪽 차창으로 돌린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혼자 돌아가려는 유장석을 이대각이 끌다시피 해서 자신의 차에 태운 것인데 유장석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는 행정청장에서 물러난 후로 몸가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업무 인수인계 관계로 이남호와는 자주 만나고 있었지만 이대각과는 어울리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도 이대각이다.

형님이 합의서를 빼내지 않았다는 건 내가 압니다.

그는 유장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님은 분하지도 않으시오? 근대리아를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누명을 뒤집어쓰고 돌아간다는 것이 말이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이맛살을 찌푸린 유장석이 힐끗 운전사 쪽을 바라보았다.

조직 생활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는 금물이다. 서로 불행해져.

공자님 나섰군.

너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난 한 차례 겪었소. 조직이고 나발이고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걸 명심하고 있지요. 난 형님과 다릅니다.

그의 형님 호칭은 자연스러웠다. 한동안 정적이 다시 흐른 후에 이대각이 입을 열었다.

상철이를 생각하면 피가 끓어올라 정신이 돌 지경이오. 이럴 수가 없소.

아직 우연한 사고인지, 또는 누가 했는지도 분명치 않아. 괜히 흥분부터 하지 마라.

시바다 겐지 아니면 한국 정부가 저지른 짓이오.

박미정 씨를 죽인다고 해서 득이 될 것이 무어야? 그렇게 생각하면 이유가 분명치 않아.

마악 입을 열려는 이대각에게 유장석이 덮어씌우듯이 말했다.

속단하지 말란 이야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대각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이는 아직 병원에 있다고 합디다.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모양인데.

잘못하면 애비까지 잃고 고아가 되겠다, 이대로 나가다간.

쉽게 당할 놈이 아니오, 그놈은. 한국 경찰은 공항에서 잡으려고 했다가 러시아 대사관 사람들이 마중 나온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고 합디다. 조금 전에 볼코프한테서 들었소.

이대각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점점 이곳에 미련이 없어져 갑니다. 형님 다음 순서는 바로 나일 테니까 나도 이미 준비는 해놓았습니다.

넌 아냐.

창 쪽으로 머리를 돌린 유장석이 말했다.

내가 청장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널 이동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총독에게서 직접 말이야.

넌 성격이 격하지만 대의(大義)도 강한 놈이다. 네가 근대리아에 필요한 놈이라는 것은 총독도 잘 알고 있어.

어느덧 차는 근대시의 진입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김상철은 말하자면 난세에 태어난 영웅 같은 놈이야. 대단한 운세를 지닌.

고광식이 생선회를 집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쨌든 장례식은 대단했다는군. 근대리아의 거물들이 모두 모였다는 거야. 행정청장 이남호도 총독을 대리해서 참석했고.

사흘 전에 권준규의 감시 요원 두 명을 친 것도 김상철인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이명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기습해서 시간을 번 다음 권준규에게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날 아침 숲길에 쓰러져 있는 그들을 발견한 것은 권준규였다. 이명규는 수상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느냐고 권준규에게 물었다가 면박만 당했을 뿐이다. 입안의 것을 삼킨 고광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놈이 알고 있는 라인은 심재택과 권준규뿐일 테니까.

권준규는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만.

설령 만났다고 해도 그건 문제가 아냐.

고광식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기부의 이부장은 지금 한국에 일본 정보국 요원들이 수십 명 들어와 있다는 거야. 아마 시바다 겐지를 잡으려는 목적이겠지만 김상철을 도와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하지만 모두 독 안에 든 쥐야. 이부장이 일본 대사관과 직원들의 동향까지를 감시하고 있으니까.

안기부의 이근복 부장은 권준규의 후임으로 3차장에서 일약 승진된 인물이다. 그는 철저한 여당 라인으로 이제 고광식과 손발을 맞춰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어서 바깥의 홀은 부산했지만 그들이 마주 앉은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광식이 조금 여위어 보이는 얼굴을 들었다. 40대 후반으로 승승장구해 온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승진에 누락되거나 기회를 놓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사건은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야, 이부장. 난 아침에 청와대에 그렇게 보고했네.

그는 엽차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우린 대단히 운이 좋았어. 심재택의 취조 과정에서 대역 음모를 밝혀내었단 말이야. 청와대에서도 그것을 높게 평가해 주었어.

얼굴에 웃음을 띠운 그가 식탁 위로 상반신을 굽히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일이 진행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구. 정부는 순식간에 전복되었을 수도 있었어.

그렇지요.

더구나 김상철까지 우리 품 안에 들어와 주었단 말이야. 아직 잡지는 못했지만 이건 우리에게 운세를 더해 준다는 증거라고 생각돼. 난 낙관적인 사람이야.

허리를 편 그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그 마무리만 하면 돼. 굴러들어온 것을 잡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사무실로 들어온 고광식은 자리에 앉자 곧 수화기를 들었다. 이미 김상철의 수배 지시는 전국의 검경은 물론 안기부에도 하달되어서 체포는 시간 문제인 것이다.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면서도 그는 업무에는 치밀했다. 조직을 당해낼 사람은 없다. 그는 경솔하게 한국에 들어온 김상철을 가없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수화기를 들었으므로 그는 긴장을 했다.

신형목입니다.

수석님, 저 고광식입니다.

, 고차장. 그래, 어떻게 되었소?

전 경찰력이 동원되었습니다. 그자가 한국에 있는 한, 곧 잡힙니다, 수석님.

고차장은 너무 자신만만해.

신형목의 말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김상철과 대한일보의 이정훈이 남아있지만 이미 공작 계획은 수포가 되었으니 체포작업만 남은 셈입니다.

언론이 나서지 않도록 이쪽에서도 손을 쓰겠지만 고차장도 알아서 단속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광식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신형목은 대통령의 측근이자 여당의 대선후보인 정동민의 오른팔이다. 그의 지시는 대통령의 지시나 마찬가지였고 또한 이번 일로 정동민은 하마터면 나락에 떨어질 뻔했던 자신을 구해낸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직통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 고광식입니다.

난 김상철이오.

깜짝 놀란 고광식이 상반신을 세웠다.

당신, 뭐라고 했어?

김상철이라고 했어.

사내의 말소리는 굵고 낮았는데 어딘지 섬뜩한 느낌이 왔다.

김상철이라고?

몇 번 말해야 알겠나, 고광식 씨.

이봐, 전화 끊어라. 난 이따위 전화를 받을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고동민이를 죽여주마. 자동차에 넣고 깔아 죽일 테니까.

뭣이라고?

얼굴이 하얗게 된 고광식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나 아직 실감이 오는 것은 아니다.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나한테.

기생충 같은 놈. 고동민이를 바꿔 줄 테니 기다려라.

김상철이라고 자칭한 사내가 뱉듯이 말하더니 곧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저 동민이예요.

그러자 눈을 부릅뜬 고광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분명한 자신의 외아들인 동민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동민이, , 어떻게, 그곳이 .

아버지.

고광식은 엄하게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래서 동민은 제 어미의 끔찍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때문인지 법대 2학년이 된 지금도 아직 철부지였다. 고동민이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 이 사람이 막.

? 때려?

저도 모르게 고광식이 그렇게 물었을 때 다시 김상철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자리에서 당장에 죽여 없앨 수도 있다. 네 뜻에 따라서 말이야. 어때? 국가와 네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서 네 자식을 희생시키겠다고 말해라. 나와 흥정하지 않겠다고. 그 세 마디면 된다. 어서 말해.

칼끝처럼 찔러오는 김상철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광식은 다리를 떨었다. 이것은 전혀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저녁 무렵이었다. 어둠이 덮여오는 시가지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는데 상가 지역의 네온사인은 이미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서서 창밖을 내다보던 총독이 몸을 돌렸다. 눈꺼풀과 입가의 근육이 늘어져 있어서 마치 우울한 불독처럼 보이는 얼굴이다.

북한의 추가 이주민은 당분간 보류한다. 내가 이청장한테 북한 측이 납득하도록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강미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약속 이행이네 계약이 어쩌네 하는 불평은 한국한테나 하라고 해. 만일 불평을 한다면 아예 백지화시켜 버릴 테니까.

속이야 끓겠지만 대놓고 불평을 할 입장의 북한 정부가 아니다. 근대리아는 북한 정부의 붕괴를 막을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강미현이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어요.

널더러 나서라는 말이 아냐. 이젠 이청장이 북한 관계의 일을 맡는다. 앞으로는 이청장의 결재를 받고 일을 하도록. 나한테 직접 가져오거나 네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

기업이나 고금의 역사를 보면 창업(創業)과 성업(成業)의 역할이 다르고 공신도 다르다. 내가 이만큼 이루어 놓은 것도 내 창업의 역할을 뒷받침해 주는 성업 공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미현의 앞자리에 앉았다.

김상철은 내가 보기에도 위험한 존재였다. 놈은 급속히 성장했는데 운도 따랐지만 난세를 헤쳐나가는 능력이 있는 놈이었다. 이백 개 가까운 사업장을 모두 부하들에게 배분해 주고 훌쩍 사지(死地)로 건너간 그놈의 배포는 가히 따를 사람이 없다.

강미현이 초조해 보이는 눈빛으로 총독을 바라보았다. 총독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결론적으로 이제 너는 덕을 쌓는 성업의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피투성이의 창업 과정도 이제 끝나가는 것 같으니 말이다. 나머지 마무리는 내가 맡겠다.

현 상황에서 김상철의 귀국은 극히 불투명한 실정이었다. 한국의 전 경찰력이 동원되어 김상철을 찾고 있는 중이다. 총독은 이미 김상철을 제외한 근대리아 경영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강미현은 인터폰을 들었다. 오후 75분 전이 되어 있었다. 인터폰을 내려놓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박태현이 서둘러 들어서고 있었다.

자문관님, 시바다는 한국을 떠나겠다고 하는데요.

테이블 앞에 바짝 붙어선 그가 말했다.

그런데 공항이나 항구에 일본 정보국 요원들이 배치되어있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강미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날더러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한국 정부에 부탁해서 나올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한국은 검경에다 안기부, 군의 기무사 병력까지 총동원되어 김상철을 찾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

머리를 든 강미현이 그를 쏘아보았다.

박미정을 트럭으로 부딪친 건 정말 시바다가 저지른 일이 아니겠지?

그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김상철과는 원수지간인 마당에. 농장 근처에는 부하를 보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박미정이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인질로 잡고 김상철을 끌어들일 계획이었다는 말을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번 연락이 왔을 때 박태현을 시켜 확인해 본 터였지만 다시 묻는 것이다.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 경찰이 김상철을 대외적으로 수색하는 마당에 이제 시바다의 효용가치는 없다.

 

들스크 호가 중앙 부두에 닻을 내리자 배 안에 타고 있던 백여 명의 승객들이 갑판 위로 몰려나왔다. 모두 러시아 상인들로 부산에서 물건을 사가는 보따리장수들이다. 빗방울이 한두 점씩 떨어지는 흐린 날씨였으나 바닷바람이 서늘했으므로 이한은 난간을 잡고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부산은 처음이다.

근대리아를 출발한 것은 사흘 전이었으니 박미정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않고 떠난 것이다. 그레고리를 통해 러시아 여권을 다시 만들고 헬기로 근대리아를 비밀리에 떠나 하바로프스크로, 그곳에서 아에로플로트 편을 이용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데는 7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보따리장수들이 세낸 화물선 들스크 호는 부산까지 이틀이 걸린 것이다. 그의 옆으로 백차남이 다가와 섰다. 그는 이한이 데려온 여섯 명의 부하 중에서 선임자였다.

형님, 카닌스키가 부산역 앞의 국제호텔까지 물건을 배달해 주겠답니다.

이한이 백차남의 어깨 너머로 카닌스키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카닌스키는 마피아의 일원으로 이한에게 무기를 판 것이다. 한국을 상대로 소량의 무기 밀매를 해오던 그는 이한의 제의를 받자 입을 딱 벌리면서 대번에 승낙을 했다. 물량도 많은 데다가 가격도 부르는 대로 주겠다는 것이며 더구나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다. 더욱이 이한이 한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피아의 동업자 노릇을 하던 송길수의 형제이며 근대리아의 보스인 페로프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카닌스키는 제 일처럼 나서고 있었다.

상륙 허가가 났는지 배에서 부교가 내려졌을 때 이쪽으로 카닌스키가 다가왔다. 그는 50대의 배가 튀어나온 비대한 체격으로 헐렁한 셔츠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니콜라이, 먼저 나가십시오. 우린 저녁 여섯 시에 나갑니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한의 러시아 여권 이름이 니콜라이 트로비치였다.

국제호텔에서 쉬고 계시면 물건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대금은 그때 주시지요.

괜찮겠소? 카닌스키.

이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카닌스키가 이제는 턱을 들고 웃었다.

우리는 세관원의 호위를 받고 이곳을 나갑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부교를 건너 항구에 내린 이한은 곧 보따리장수들의 사이에 끼였다. 본부 세관을 통과하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는데 이한의 여권을 펼쳐 본 세관원은 잠자코 스탬프를 찍었다. 이한이 손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으므로 뒤쪽에 서 있던 세관원이 손짓으로 가방을 가리킨다. 그가 가방을 건네주자 지퍼를 열어본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는 시선을 들었다. 1만 달러 뭉치가 5개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거 오늘 텍사스촌 돈 꽤나 들어오겠는데.

사내가 옆에 선 세관원 동료에게 말했다

만 달러 뭉치를 든 손님들이 많아.

부하들도 제각기 2,3만 달러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에게서 가방을 받아든 이한은 세관을 나왔다. 이제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그의 감개는 이곳이 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김상철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3. 대탈출

남용배는 러시아계 고려인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이다. 채소 장사를 하는 부모는 32녀의 자식을 낳았는데 막내로 태어난 그는 위의 형 둘이 어려서 죽는 바람에 장남이 되었다고 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그가 구소련 연방군에 지원 입대를 한 것은 순전히 배고픔 때문이었다. 부친을 닮아 뼈대가 굵고 힘이 좋았던 남용배는 규칙적인 생활에 끼니를 거르지 않는 식사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장기복무를 자원했다. 그는 러시아의 최정예 부대인 극동군 공수특전대에 차출되어 그곳에서 8년을 보냈는데 제대하고 나올 때의 계급은 중사였다.

김상철이 행정청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그 날 새벽, 눈 덮인 근대리아의 평원에 낙하산으로 뛰어내린 러시아 공수부대원 중에 남용배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근대리아에서 철수하기 직전에 남용배는 제대를 하고 김상철의 부하로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되었다. 8년을 군대에서 보냈지만 아직 나이 스물다섯이다. 그는 근대리아에 주둔하면서부터 자신이 뿌리를 내릴 곳이 근대리아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공수부대 복장을 한 남용배가 찾아와 일자리를 부탁했을 때 김상철이 선뜻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다.

저녁 무렵,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은 머리에 검게 탄 얼굴의 남용배는 시청 뒤쪽의 선진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수수한 무늬의 남방셔츠 차림이었는데 넓은 어깨와 굵은 팔이 드러나 있어서 운동선수처럼 보이는 모습이다. 해는 졌지만 아직 어둠이 밀려오기 전의 어스레한 그늘에 덮여 있는 시간이었다. 주차장에는 수십 대의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으므로 입구에 멈춰선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구석 쪽에 주차된 차의 뒷문이 열리더니 사내 한 명이 상반신만 밖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 후 남용배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사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도 사내 한 명이 핸들 위에 팔을 올려놓고 앉아 있었지만 이쪽으로는 머리도 돌리지 않는다. 사내가 노란 서류 봉투 한 개를 남용배에게 건네주었다.

새 여권을 가져왔소. 사진도 조금씩 변형시켰으니 사진에 맞춰 얼굴을 만들도록 하시오.

그는 러시아 대사관의 고려인 직원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몽고 여권이고 여권에는 이상이 없소. 공항의 컴퓨터에도 입력이 되어 있고. 당신들은 이제부터 몽고인이오.

서류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넣은 남용배가 사내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장님은 당분간 연락을 끊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사관 입장이 불편해지실 것 같다고.

그렇게 전하지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냐고 위에서 물으시던데.

40대의 그는 아직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았고 남용배도 묻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남용배가 머리를 저었다.

그건 나는 모릅니다.

그렇게 전하지요.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가볍게 말을 받은 사내가 다시 머리를 들었다.

볼코프 소장이 안부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김사장께 말이오. 그는 매일 대사관에 연락을 해옵니다.

김사장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남용배는 곧장 주차장을 나왔다. 이미 어둠에 덮인 거리에는 행인들의 왕래가 더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서울은 인구 천만이 넘는 대도시인 것이다. 그는 곧 행인들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봉천동의 달동네는 이제 옛말이 되어서 산비탈에는 번듯한 양옥집들이 들어섰고 아래쪽은 아파트 단지가 세워져 있었다. 산비탈의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로 이주해 내려간 것이다. 남용배가 산비탈에 세워진 이층 양옥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한적한 고급 주택가가 되어 있어서 가끔 승용차가 비탈길을 오고 갈 뿐으로 인적도 드문 곳이다. 그는 닫혀진 철문 옆쪽의 쪽문을 열쇠로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그의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늦었어, 남형.

정원에 서 있는 사내는 동료인 유재성이었다. 그는 나이가 남용배보다 세 살 위인 28세로 바이칼호 근처의 이르쿠츠크 태생이다. 남용배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새 여권을 가져왔습니다.

탁자 위에 봉투를 내려놓은 남용배가 그의 앞에 섰다.

근대리아에 연락을 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님 두 분은 오늘 아침에 서울로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행정청장 이남호 씨와 북한과 러시아, 일본 대표부에서 조문객이 왔고 외부 손님만 해도 삼백 명이 넘었다고‥‥」

고광식한테 보낼 선물이 있다.

김상철이 말을 잘랐으므로 남용배는 몸을 굳혔다.

, 사장님.

지하실에서 징징대고 있는 자식 놈의 머리를 박박 밀어서 머리카락을 보내라, 지금 당장.

, 그런데 어디로.

집으로. 마누라한테 보내.

알겠습니다.

집 근처에 맡겨놓고 찾아가라고 해라. 그리고 고광식한테 한 시 정각에 집으로 전화할 테니 기다리라고 해.

군대식으로 부동자세를 취해 보인 남용배가 방을 나가자 김상철은 탁자 위에 놓인 위스키병을 들었다. 호화로운 가구에 벽쪽 선반에는 고급 양주가 가득 놓여진 이 저택의 주인은 근대리아에서 김상철의 조직을 도와주고 있는 전직 안기부 요원 양성훈의 동생이다. 그는 김상철에게 저택을 넘겨주고는 어제 오후에 가족과 함께 근대리아로 떠났다.

병째로 위스키를 몇 모금 삼킨 김상철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고광식에게 다시 전화를 하기로 한 것은 오늘 오후 3시 정각이었는데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벽을 쏘아보던 김상철은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그것은 승낙도 거부도 아닌 현실로부터의 도피 행위일 뿐이다. 그는 곧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이었다.

우리 동민이는 여행을 갔는데요?

안숙명 여사가 수화기를 들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같이 있다니 댁은 누구신데.

, 이년아. 내가 누군지 알아서 뭘 해.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으므로 안숙명의 얼굴이 금방 하얗게 되었다. 수화기를 잠깐 귀에서 떼었다가 붙인 그녀의 두 눈썹은 이미 곤두서 있었다.

아니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난 네 아들을 납치하고 있어, 이년아. 여행은 무슨, 내가 시켜서 그렇게 전화를 한 것이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숙명은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도 신발공장을 운영하는 그의 부친은 부산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이다. 어렸을 적 납치를 염려하여 부친이 경호원을 붙여 준 적도 있었지만 검사의 아내가 된 후로는 그런 걱정을 잊고 지내왔던 것이다.

사내가 퍼붓듯이 말을 이었다.

네 남편하고 상의하는 건 좋지만 다른 놈에게 말했다가는 당장에 놈의 목을 따겠어. 그 증거로 네 새끼의 선물을 놓고 간다. 네 집에서 가까운 강남고등학교 사거리에 세일이라는 커피집이 있어. 고광식 검사 앞으로 남겨둔 선물을 찾아가.

, 여보세요.

네 남편에게 연락해. 새벽 한 시 정각에 전화를 할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애를 죽인다고.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허겁지겁 커피숍으로 달려간 안숙명이 조그만 상자 하나를 넘겨받은 것은 그로부터 20분도 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자 종업원이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안숙명은 그냥 커피숍을 나왔다. 길가에 세워둔 차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상자를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파출소를 찾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어깨를 늘어뜨린 그녀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커피숍 앞에 세워진 고급 승용차 옆을 지나던 한 쌍의 젊은 남녀는 운전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미친 듯이 차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목이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으므로 그들도 깜짝 놀라 멈춰 서서는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차 안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쌍년, 미쳤나 봐.

그러자 갑자기 저만큼 달려가던 여자가 멈춰서더니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본 그의 여자 친구가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다음 날 아침, 마악 아침 식사를 마친 오종환은 응접실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대선이 5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남들처럼 그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정치면이다.

에이, 다 그놈이 그놈이지. 젠장.

여야 대변인의 공방 기사를 읽던 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신문을 던진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 오종환입니다.

, 고차장이야.

오종환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고광식이 이곳 안가로 직접 전화하는 것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 차장님.

심재택이 지금 움직일 수 있어?

, 건강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논현로의 오션호텔로 데려와. 내가 812호실에 있을 테니까.

지금 말씀입니까?

한 시간 후인 아홉 시 삼십 분까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오종환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가 두 명의 대검 수사관과 함께 오션호텔 812호실에 들어선 시간은 925분이었다. 고광식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혼자였다. 심재택의 아래위를 훑어본 그가 턱으로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심과장.

심재택은 수갑을 채운 위에다 옷가지를 덮고 있었다.

이봐, 수갑을 풀어.

평소에도 그렇지만 오늘따라 고광식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하게 느껴졌으므로 오종환은 서둘러 심재택의 수갑을 풀었다. 고광식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오종환에게로 머리를 들었다.

수고했어, 당신들은 돌아가도 돼. 안가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

그러자 오종환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 그러면.

청와대에서 나와 있어, 옆방에. 그러니 당신들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 나아.

, 알겠습니다.

사태를 금방 눈치챈 오종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청와대 고위층이 이쪽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서둘러 동료 두 명과 함께 방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자 동료 한 명이 그를 바라보았다.

청와대에서 직접 신문할 모양이군요?

그런 모양이야.

엘리베이터가 로비에서 멈추자 그들은 곁눈질도 하지 않고 곧장 현관으로 나왔다. 로비에서 얼쩡대는 사내들이 모두 청와대 경호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종환이 방을 나가자 고광식이 길게 한숨소리를 냈다. 팔목의 수갑 찬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던 심재택이 시선을 들었다. 이제는 약의 후유증이 가셔졌지만 가끔씩 현기증이 난다.

청와대에서 직접 나왔다면 이제는 당신들 검찰도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군.

고광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져 있었다.

심과장, 일어나시오.

심재택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으로 내려가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요. 김상철이 보낸 사람인데 .

가시오.

당신이 날 풀어 준단 말이오?

다시 현기증이 났으므로 의자를 잡고 선 심재택이 눈을 치켜떴다.

이거 혹시 날 함정에 넣으려고.

김상철이 내 자식을 잡고 있어.

이를 악문 채 고광식이 말했으므로 웅얼대는 소리였지만 심재택은 알아들었다.

김상철이 당신 자식을.

그렇소. 김상철을 만나거든 이젠 그 애를 풀어주라고 하시오.

갑자기 목이 메인 고광식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떴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는 동작이다.

만일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가는, 내가‥‥」

심재택이 다리에 힘을 주고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고광식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놈이 그 애의 머리카락을 몽땅 잘라서는 제 어미한테 보내왔소. 어디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문고리를 잡은 심재택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고광식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다. 그를 향해 반쯤 입을 열었던 심재택은 다시 입을 다물고는 문을 열었다. 이제 갇힌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뭐야? 심재택이 도망쳤다고?

신형목이 상반신을 번쩍 세웠다. 수화기를 고쳐 쥔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지만 그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다.

도대체 왜? 어떻게 된 거야?

제가 심문할 것이 있어서 오션호텔로 데려오라고 했었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광식이 말했다.

그런데 수사관 셋이 호텔 안까지는 데려왔는데 로비에 사람들이 많아서 헤치고 나가다가 갑자기 심재택이 뛰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따지는 듯한 말투로 신형목이 묻자 고광식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뛰다 보니 심재택이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답니다. 그러다가 놓친 모양입니다.

도대체 당신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경찰에 수배 지시를 했습니다.

그놈이 일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미 음모는 좌절되었으니까요. 어디에도 손을 뻗칠 수가 없습니다, 수석님.

각하께 보고드려야겠어, 어쨌든.

제가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수석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광식은 한동안 앞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손을 뻗쳐 인터폰을 눌렸다. 이명규가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5분도 되지 않았다. 이맛살을 찌푸린 이명규는 앞쪽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야단났습니다, 차장님. 그놈을 찾을 길이 막막합니다.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찾도록 해야지.

도대체 청와대 경호원 놈들은 사람 하나 감시도 못 한단 말입니까? 높은 분만 모시고 다니다 보니까 콧대만 높아져서 기합이 빠진 겁니다.

화가 북받쳐 오른 이명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광식은 이명규한테는 오션호텔의 방 안에서 청와대 경호원들이 감시하는 중에 심재택이 도망쳤다고 했던 것이다. 청와대와 대검을 잇고 있는 것은 고광식 한 사람이다. 말단 수사관인 오종환이 청와대에 연락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안보수석 신형목이 오종환을 찾아 사건을 물을 리도 없다. 고광식이 길게 한숨소리를 냈다.

청와대에서도 담당 경호원들을 인사 조치 시킬 모양이야. 물론 사건을 표면에 내놓지 않고 은밀하게 처리하겠지만.

그거야 당연하지요.

이명규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심재택이 김상철과 합류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고광식이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그러나 절대로 그 두 놈을 묶어서 수배하지 말도록. 언론이 눈치채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서울 주재 근대리아 대표부의 대표는 정대윤으로 근대 계열사의 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60대 초반으로 30년이 넘게 직장생활을 했지만 이제까지 지각 한번 한 적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830분 정각에 테헤란로의 대표부로 들어섰다.

대표부는 꽤 널찍한 5충 건물이었는데도 요즘은 좁은 느낌이 들었는데 밀려드는 이주 신청자들 때문이었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대표부의 1층 로비와 대기실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모두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다. 2층의 사무실에 들어선 그는 자리에 앉자 우선 어제의 이민 신청자 명단을 들춰 보았다. 1,427명이었다. 그중에서 중소기업을 옮기겠다는 사업자가 189, 100만 달러 이상의 투자이민 신청자가 68, 그리고 50만 달러 이상이 235명이었고 10만 달러 이상이 372, 나머지가 10만 달러 이하의 이민 신청자였다. 서류를 덮은 정대윤은 옆쪽의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러시아의 동북쪽에 붉은 선으로 그려진 근대리아가 뚜렷이 드러났고 그 아래쪽에 혹처럼 튀어나온 반도가 한국이다. 남북한과 일본의 면적을 합한 것보다 큰 근대리아 땅에는 아직 인구가 천만 명도 되지 않는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는 머리를 돌렸다. 비서가 들어서고 있었다.

대표님, 근대건설의 유회장님이.

?

깜짝 놀란 정대윤이 눈을 크게 떴다.

유장석 씨 말이야?

, 지금 응접실에 계시는데요.

정대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장석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잠시 후 그들은 응접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서울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정대윤이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장석이 그의 윗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제 왔습니다.

아아, 제가 원체 바쁘다보니, 나가 뵙지도 못하고.

아니 천만에요.

유장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요즘 근대리아로 이주민이 부쩍 늘어나고 있던데 바람직한 일입니다.

모두 청장님께서 닦아놓으신 덕분에.

국민들의 마음이 한국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정대윤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 정부가 투자이민 규제를 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민들이 정치와 외교, 안보에다 갖가지 행정규제 등에 극도의 불안과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한국민들에게 근대리아는 한민족의 새로운 땅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북한 주민의 대량 탈북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순서가 바뀔 것 같군요.

하지만 한국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내버려 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유장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선이 5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지금 이주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 겁니다.

날라 온 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여기에 온 겁니다. 우리한테 한국 정부는 이주 절차를 간소화시킨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그것은 말뿐입니다. 제각기 이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부처 이기주의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땐 대표께서 직접 나서서 해당 관청을 치세요. 안보수석 신형목에게 직보해서 담당자 목을 자르라고 대들어도 됩니다. 목이 몇 개 날아가면 이놈 저놈 손을 떼겠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정대윤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대충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간소화시킨다고 했지만 이주민이 출국하려면 열두 개의 관청을 거쳐야 하고 약 삼백칠십 개의 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내버려 둔다면 일 년도 넘게 걸리는 일이지요. 그래서 각 관청마다 대표부의 직원을 파견했고 실무자급에는 뇌물을 먹였습니다. 뇌물 액수만 해도 30억이 들었지요.

정대윤이 잇몸을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제 이민 신청을 한 이주민의 재산 총계만 해도 오천억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민 신청을 하면 우리가 나서서 일주일 만에 한국 정부의 출국 허가를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다음 날 출국을 시키지요. 우리 근대리아 정부는 도장 다섯 개만 찍으면 되니까요.

대표께선 이미 손을 쓰셨군요.

이 나라의 행태를 알고 있으니까요.

둘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유장석이 근대리아 대표부에 들렀습니다.

신형목이 숭늉 그릇을 들면서 말했다. 청와대의 식당 안이다. 수석 비서관급 이상만 사용하는 2층 식당에는 오후 3시가 넘었기 때문인지 그와 이태준 둘뿐이다.

합의서 누출의 책임을 지고 행정청장에서 해임된 사람입니다. 이젠 우리가 단속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수저를 내려놓은 이태준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를 잡아넣기라도 해야 되나?

위험한 사람입니다, 실장님.

이태준이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어제 근대리아의 이남호 씨한테서 연락이 왔네. 유장석을 잘 부탁한다고 말이야.

유장석은 근대리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라고 하더군. 양국의 관계에 도움을 줄 인물이라고도 했고. 그자들은 우리가 유장석을 단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이남호와 총독의 생각이 다른 것 아닙니까?

그럴 리는 없어.

의자에 등을 기댄 이태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국(難國)이야. 선거도 선거지만 다음 달에 사억 달러를 만들어야 할 일이 급선무다.

북한에 쌀 100만 톤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 다음 달인 8월이다. 지난번에는 선거 직전인 11월에 주기로 합의했으나 이번에 어선과 어부들을 넘겨받으면서 8월로 당겨진 것이다. 근대리아에서 내외신 기자들에게 남북 간의 우의와 협력관계를 과시하고 한국의 대북한 외교정책이 결실을 맺고 있다면서 요란한 개가를 올렸지만 그 이면에 이런 비밀 합의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오성이 말을 듣지 않아. 그 작자들이 나서지 않으니까 다른 재벌들도 덩달아서 눈치를 보고 있단 말이야.

이태준이 식은 숭늉을 한 모금 마셨다.

근대리아에서 김상철이나 다른 소스를 통해서 소문을 들은 모양이야. 그래서 돌아가는 상황만 살펴보는 것 같아.

망할 자식들,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신형목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 놈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재벌기업으로부터 대선자금을 얻는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것은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도 마찬가지였는데 공식적인 후원회를 통한 후원금 뒤에 몇십 배의 비자금이 오가는 것이다. 이태준은 재벌기업으로부터 받은 대선자금을 떼내어 북한의 쌀 구입 자금으로 보낼 작정이었다.

계열사 한두 개를 골라 세무감사를 시키면 정신이 들겠지.

혼잣소리처럼 말한 이태준이 신형목을 바라보았다.

요즘 근대리아로의 이민이 폭주하는 것 같은데, 경제 부총리는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중소기업이 흔들린다는 거야. 특히 영세업체일수록 근대리아로 몰린다고 하는데.

경제는 권한 밖이었고 전문가도 아니었으므로 신형목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인건비와 운영자금, 고금리에다 담보 없이는 절대로 대출해 주지 않는 일제시대의 은행 관행, 거기에다 갖가지의 행정규제에 시달려온 영세 사업자들에게 근대리아는 천국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우선 공장 부지와 건물, 전기와 수도가 무료로 제공된다. 거기에다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노동력은 3D현상을 기피하는 한국 사람들과는 달리 근면했고 인건비는 3분의 1 수준이었다. , 근대리아 정부가 운영하는 국영은행은 사업 규모에 따라 무한대의 신용대출을 해주고 있었는데 대출에 필요한 시간은 5시간이었고 담보는 주민증 한 장만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행정규제라는 것이 없다. 있다면 환경심사가 있을 뿐으로 행정청의 관리는 주민이나 사업자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이다. 요즘 매일 한국의 10대 일간지에 전면으로 광고되는 내용이었다. 한 중소기업인의 사례가 광고된 것을 신형목도 읽은 적이 있다. 근대시 외곽의 공단에 가방공장을 설립한 그는 종업원 35명을 행정청에서 주선해 준 북한 사람들로 채웠다고 했다. 임금은 한국에 있을 때의 3분의 1수준인데다 수도, 전기료, 임대료가 없다. 더구나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물류비용도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인데다 만 하루면 도착했으므로 운송도 문제가 없다. 운영자금이 급해서 신용대출을 딱 두 번 받았는데 소요 시간은 첫 번째가 4시간 반, 두 번째는 자신이 바빠서 공단의 행정청 직원에게 부탁한 바람에 5시간 반이 걸렸다. 그래서 그 일로 행정청 직원은 상관에게 시말서를 썼다고 했다. 신형목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근대리아 쪽에도 이미 합의를 한 사항이고, 그리고 폐수나 버리는 이차산업은 이미 한국에 설 땅이 없을 것 같은데요. 물론 전자나 자동차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은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여서도 안 되지만 말입니다.

이태준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당면 문제는 쌀값이고 대선이다. 따라서 경제나 이주 문제를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몸짓처럼 보였다.

 

영등포에 있는 가야호텔 뒤쪽은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술집과 음식점, 노래방과 단란주점 등으로 언제나 북적대는 곳이다. 오늘 밤도 다름없이 휘황하게 불을 밝힌 거리의 네온사인 아래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오성그룹의 비서실장 조영규는 인파를 헤치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다가 곧 붉은색 네온이 켜진 파도 단란주점의 간판을 찾아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정장 차림이었으므로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의 땀을 닦았다. 단란주점 앞에 멈춰선 그에게로 종업원이 다가왔다.

사장님, 분위기가 좋습니다.

주위를 둘러본 조영규는 잠자코 단란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어두웠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종업원이 일어섰다.

혼자 오셨습니까?

내 일행이오.

갑자기 안쪽의 홀에서 사내 한 명이 다가왔는데 심재택이다.

가십시다.

심재택이 그의 소매를 잡고 안내해 간 곳은 반대쪽의 비상구였다. 심재택과는 안면이 있던 터이라 조영규는 잠자코 그와 함께 뒷문으로 나왔다.

제가 잡혔다가 빠져나온 것은 모르셨지요?

뒷문을 나오자 앞쪽은 좁은 골목이다. 앞장서서 걷던 심재택이 물었으므로 조영규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잡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나오셨다는 건 모르고 있었어요.

골목 끝은 대로였다. 그들은 길가의 주차선 안에 세워진 승합차로 다가가 차에 올랐다. 앞좌석에 앉은 두 사내는 그들이 안에 오르자 잠자코 차를 발진시켰다.

이거 미안합니다, 고생을 시켜드려서.

심재택이 담배를 꺼내더니 그에게로 권했다.

제가 전국에 수배당하고 있어서요.

그런데 어떻게.

김상철 씨가 수단을 썼지요. 저를 탈출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담배연기를 앞쪽으로 뿜었다. 차는 혼잡한 영등포 거리의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서 있었다. 심재택이 연락을 해왔을 때는 오후 6시경이었다. 그는 비서를 시켜 쪽지를 전달했는데 쪽지를 가져온 사람은 안기부 요원이라고 했다.

실장님은 요즘 상황을 대충 알고 계시지요?

심재택이 그를 바라보았다. 전보다 야위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강했다

근대리아 오성으로부터 들으셨겠지만 제가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심재택이 빠른 말투로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조영규는 담배연기만을 내뿜었다. 근대리아의 오성은 김상철과 상호 협력관계에 있다. 오성은 근대리아 정부와 북한의 세력에 대한 대비책으로 김상철에 의존하고 있는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심재택이 머리를 들었다. 그가 김상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는 것은 조영규도 알고 있었다.

합의서를 폭로하여 현 정권의 매국적인 행위를 심판받게 하는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지금 손을 쓴다고 해도 이미 언론이나 재야단체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어서 불가능합니다.

심재택이 말을 이었다.

저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가택연금이 되었거나 다른 이유로 꼬투리를 잡혀 구속되었어요. 다만 대한일보 이국장만 도피 중이지요.

심과장님, 그럼 나한테 바라시는 것은 뭡니까?

담배를 차 바닥에 비벼끈 조영규가 물었다. 조금 초조한 듯한 표정이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와 김상철 씨와는 협력관계지만, 근대리아에서 말이오. 하지만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가 도와 드릴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럴 능력도 없고 말입니다.

우리를 도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청와대에 대선자금을 지원하지 않는 일이오. 그 자금을 북한의 쌀값으로 줄 테니까.

차는 이제 올림픽대로에 들어서 있었지만 차들이 밀려 서행하고 있었다. 다시 심재택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아마 곧 청와대에서 대선자금을 독촉할 겁니다. 쌀값을 만들려고 말이오. 한국 정권이 북한의 괴뢰정권화 되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오성이 대선자금을 내지 않으면 다른 재벌기업도 뒤를 따를 겁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를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현 정권은 무리수를 두겠지요. 북한과의 합의는 지켜야만 할 테니까.

「‥‥‥‥」

그러면 금방 노출됩니다.

목표가 현 정권의 전복입니까? 그래서 야당 후보 이대현 씨가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까?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됩니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요.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던 조영규가 입을 열었다.

청와대에서 대선자금 협조를 독촉하고 있어요. 이 실장한테서 이번 주만 해도 두 번이나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더러 일억 달러를 내라는데, 현금으로 스위스 은행에 입금시키라는 겁니다.

조영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일 년 이내에 그 몇 배의 이익을 정부로부터 받겠지만, 지금 걸려 있는 사업들이 많으니까 말이오.

중요한 시기입니다, 조실장님. 결단을 내리실 때가 되었어요.

막혔던 도로가 뚫린 모양인지 승합차가 차출 속력을 내자 열려진 창문으로 습기 찬 바람이 휘몰려 들어왔다.

 

응접실로 들어선 이한은 소파에 앉아 있는 김상철을 향해 우선 허리부터 기역자로 꺾었다. 그러자 뒤를 따라 들어선 사내들도 모두 그의 흉내를 내었다. 12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봉천동의 주택가는 이미 깊은 정적에 묻혀 있었다. 허리를 편 이한은 잠자코 서 있었는데 시선은 김상철의 머리 위쪽을 향해져 있다. 의식적인 행동으로 말할 테면 말해 보라는 자세였다. 이한을 안내해 온 남용배가 참다못해 헛기침을 했지만 응접실 안에는 조금 더 정적이 계속되었다. 이한이 이곳을 찾아온 것은 근대리아의 변순태가 중계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내에 나가 근대리아에 연락을 했던 남용배는 이한이 한국에 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 이한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오느라 고생했다. 들어가 쉬어라.

그러자 이한이 뒤에 늘어선 부하들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들어가 쉬어.

그러고는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김상철의 앞자리에 앉았다.

기관총과 수류탄, 저격용 소총까지 무기는 충분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무기 장사꾼과 같이 왔거든요.

말씀만 하시면 경찰서 한 개쯤은 날려버릴 수가 있지요. 아니, 두 개라도.

방문이 열리더니 심재택이 들어섰으므로 이한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심재택이 그를 향해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여 보이더니 옆쪽에 앉았다.

이 형, 만나서 반갑소.

아니, 잡혀 있다고 들었는데.

김사장님이 빼내 주셨지요.

그는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지하실의 아이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저녁때 고광식한테 전화를 했어요.

표정 없는 얼굴로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국 기관에서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일 때까지 잡아두고 있겠다고.

심과장을 빼돌리고도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면 능력 있는 사내요. 어떻게든 제가 그러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든지 아니면 흥정을 하든지 할 겁니다.

김상철의 목적은 박미정을 살해한 사람과 그 조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는 심재택처럼 한국의 정치 현실과 장래에 대하여 목숨을 걸 생각은 없다. 그것은 근대리아에 이주해 간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자코 있던 이한이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 형님.

그는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 아이는 어떻게,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김상철이 시선을 들었으나 심재택은 재빨리 알아들었다.

지금 병원에 있어요, 이형. 아직 인큐베이터 안에 있지만 건강해요. 장모님이 옆에 계십니다.

가라앉은 분위기의 방 안에 그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다음 달이면 퇴원을 할 수 있다고 합디다. 목장 아버님이 아이 이름을 완이라고 지었어요, 김완이오.

 

김상철이 병원에 나타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아이가 아직 인큐베이터 안에 있으니까요. 병원에 두는 것이 안전하지요.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침 시간이다. 이윤재는 보안국장 박영수의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 수배 지시가 내려진 심재택은 자주 근대리아를 방문했더군요. 아마 김상철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항을 빠져나간 흔적은 없지?

없습니다.

이윤재가 자신 있게 말했다. 공항 감시는 한국만큼 철저하게 하는 나라도 드물다. 신원 확인이 컴퓨터로 즉시 되는 데다가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사람은 잡아놓고 보는 것이다.

안기부에서도 찾고 있으니 그자도 곧 잡히겠지.

서류를 덮은 이윤재가 머리를 들었다.

그런데 대검 고차장의 지시야. 내일 오후 세 시 반에 근대리아로 출발하는 대한항공 오백십팔 호 편에 탑승할 이십칠 명을 극비 출국시키라고 했어.

27명이나 말입니까?

이윤재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청와대의 지시사항이야.

그자들이 누굽니까?

그건 자네가 알아서 뭐해? 시키는 대로만 하라구.

이윤재가 짜증을 냈다

자네가 오후 한 시 정각에 삼청동의 그랜드호텔에 가줘야겠어. 경찰의 호송버스를 끌고 가서 그자들을 태워. 그리고는 곧장 공항으로 가란 말이야. 물론 대검에서 공항 당국에 연락을 해놓았을 테니까 활주로로 곧장 들어가서 비행기 앞에 버스를 세우면 돼. 공항 담당자가 비행기 안에서 출국 도장을 찍어줄 테니까.

근대리아에서 또 무슨 회담이 있는 모양이군요.

혼잣소리처럼 박영수가 말했다. 이 방법이면 공항 대합실이나 출국 심사대를 거칠 필요가 없으므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다. 이윤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쪽지를 들더니 말을 이었다.

그랜드호텔에는 청와대에 파견된 김총경이 그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자가 공항까지 따라가겠지만 호송책임자는 자네야. 518호는 전세 비행기다.

박영수는 수첩을 꺼내어 잠자코 지시사항을 적었다. 청와대의 지시라면 대한민국에서 이유를 달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날 밤은 비가 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좀처럼 그칠 기색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병원의 앞마당은 불빛에 반사된 물줄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구급차 한 대가 경고등을 번쩍이며 달려오더니 응급실 앞에서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뒤에 실린 환자를 내리는 잠깐 동안 사람들은 비에 흠뻑 젖었는데 응급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들은 환자보다 비를 피하려는 것처럼 보여졌다.

술 처먹고 자빠진 모양이군, 저놈은.

안형사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 오는 놈들은 술 먹고 사고 친 놈들이 대부분이여.

그의 옆에 선 윤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빗발이 바지 끝을 적시고 있었으므로 차츰 짜증이 나는 중이었다. 그들이 감시를 맡은 곳은 응급실의 입구로 병원의 4개 출구 중의 하나였다. 다른 3곳도 모두 2명씩 지키고 있는 데다가 4층의 신생아실 입구에는 3명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한 번 교대에 11명씩이 움직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응급실 안은 공기도 탁한데다가 소란스러웠고 서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바지를 적실지언정 담배도 피울 수 있는 처마 밑이 나았고 그것은 안형사도 같은 생각이었다.

앞장선 남용배는 거침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는데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깊게 찔러넣고 있었다. 그의 뒤를 두 발짝쯤 떨어져서 김상철이 따랐고 뒤에 선 것은 이한이다. 단숨에 3층의 계단을 오르자 왼쪽으로 4층의 비상문이 보였다. 문 앞에 선 남용배는 바지 주머니에 든 손을 꺼내었다. 그가 손에 쥔 것은 소음기가 달린 신형 토카레프 권총이다. 구소련 시대부터 사용된 러시아군의 제식 권총으로 이번에 이한이 들고 온 것이다. 남용배는 문을 조금 열고 안쪽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라 복도는 조용했지만 중간쯤의 벽에 의자를 붙여놓고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의 뒤쪽이 신생아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내의 앞쪽이 환한 것을 보면 간호사의 대기실이다.

저놈 앞쪽의 사무실에도 몇 놈이 더 있을 것이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복도를 바라본 이한이 낮게 말했다.

어쩔 수 없다. 곧장 다가가서 저놈을 쏘고 사무실에 있는 놈을 해치우자.

해치지 마라.

김상철이 이한의 말을 받았다.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총질은 안 된다.

문을 열어 제치고 세 사내가 한꺼번에 나타나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와의 거리는 15미터 정도였는데 거침없이 다가오는 그들을 보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이한과 남용배가 일제히 권총을 빼내 들고는 그를 겨누었다. 사내가 입을 딱 벌리고는 반쯤 머리를 돌려 앞쪽의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이제 거리는 10미터 정도가 되었다. 사내가 와락 앞쪽의 사무실로 뛰었는데 두 걸음째에 이한의 권총에서 둔한 소리의 총성이 났다. 그 순간 사내는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으면서 복도에 뒹굴었고 남용배는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대기실의 탁자에 손을 얹으면서 권총을 들이댄 것은 그로부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3명의 간호사와 2명의 사내였다. 간호사 한 명이 짧게 비명소리를 내었고 사내 2명은 이미 권총을 빼내든 상황이다. 남용배는 사내들을 향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는 간호사 셋이 동시에 비명소리를 내었고 사내들의 신음소리와 섞여졌다. 이한과 김상철이 대기실 앞에 섰다.

입 닥쳐, 이 년들아!

권총을 휘두르며 이한이 소리치자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이자들은 모두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서 응급조치를 해요.

서둘러! 이 년들아!

이한이 다시 소리치자 선반의 약병을 떨어뜨리며 간호사들이 움직였다.

난 김완이를 보러왔는데,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 말입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간호사에게 말하자 그녀가 허리를 폈다. 아직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시선이 김상철을 향해져 있다.

안내해 주시겠소?

그녀가 안내한 곳은 앞쪽 신생아실 옆방이었다. 유리관처럼 보이는 인큐베이터가 대여섯 개 놓여진 그곳에서 그녀는 벽 쪽의 것을 손으로 가리켰다. 김상철은 인큐베이터 앞으로 다가가 섰다. 아이는 입과 코에 호흡기를 붙이고 있는 데다 눈까지 감고 있었으므로 전혀 특징으로 기억할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관 앞에 흰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김완이라는 이름표는 선명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건강해요. 다음 달에는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어느 틈에 따라왔는지 이한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형님을 꼭 닮았습니다. 저 손이, 그리고.

김상철을 바라본 이한이 덜컥 말을 멈추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김상철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젠 됐다, 가자.

세 사내가 몰려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복도를 휩쓸며 돌아가자 간호사 한 명이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응급실 담당을 부르려는 것이다.

 

신형목이 김상철의 성신병원 침입 사건을 보고받은 시간은 아침 7시였다. 마악 아침 식사를 하려던 그에게 고광식이 전화로 보고를 한 것이다.

무자비한 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사실이군.

고광식이 말을 마치자 그가 뱉듯이 말했다.

도대체 경찰은 허수아비야, 뭐야? 열 명이 넘는 인원이 세 놈을 막지 못하다니. 그래, 총상을 입은 사람들은 괜찮겠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그 이국장한테 사건을 노출시키지 말라고 해요. 물론 부상자들은 최대한으로 대우를 해줘야 되겠고.

이미 그렇게 말해 두었습니다.

그놈이 부정(父情)은 있는 모양이야.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을 찾아온 걸 보면.

「‥‥‥‥」

모두 총기를 휴대하고 있다니 앞으로는 발견 즉시 처리해야 되겠소. 그렇지 않소?

경찰 측에서도 그럴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수사에 전력하라고 일러주시오. 나도 경찰청장에게 따로 이야기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그랜드호텔 건, 차질 없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광식의 앞으로 안숙명이 다가와 앉았다.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김상철 그 사람이 병원을 습격했다구요?

떨리는 소리로 그녀가 묻자 고광식은 입맛을 다셨다. 요즘의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오가는 내용의 전화를 모두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 총까지 가지고.

그만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김상철은 부하 한 명을 응급환자로 가장시켜 성신병원의 구급차를 불러 탄 다음 응급실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 일당은 모두 4명이었는데 4층을 지키던 3명의 형사는 모두 총상을 입었고 응급실 입구에 있던 2명은 뒤에서 기습을 받아 기절을 했다. 둔기로 머리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는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자식을 보기 위하여 그런 모험을 한 것이다.

고광식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동민이는 살아 돌아올 거야.

그러자 안숙명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글쎄, 걱정하지 말라니까.

고광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냥 이렇게 마주 앉아 눈물 타령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후 110분 전에 박영수는 그랜드호텔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가 타고 온 승용차 옆으로 유리창에 철망이 둘러쳐진 호송버스 한 대가 다가와 멈춰 섰는데 영등포 경찰청에서 차출해낸 차량이다. 뽑아낸 지 며칠 안 된 신형으로 아직 돌팔매나 화염병도 맞지 않아서 매끈한 차체에 내부도 깨끗했다. 청와대의 지시로 VIP 27명을 싣게 된다고 해서 박영수가 신경을 쓴 것이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흐렸고 습기가 많은 날씨였다. 차 밖으로 나온 박영수의 앞으로 김재식 총경이 다가왔다. 그는 정보국 소속으로 청와대에 파견된 사내였는데 경정인 박영수보다 계급도 한 계단 위인데다 청와대 근무인 신분이다. 턱을 치켜든 그가 눈 아래로 박영수를 바라보았다.

이봐, 박 경정. 호송경비 요원은 몇 명 데려왔나?

저까지 여덟 명입니다, 총경님.

승용차는 자네 것 하나인가?

, 그렇습니다.

그럼 내 차까지 두 대로 가고, 나머지는 버스에 타면 되겠군.

그는 턱으로 버스를 가리켰다.

, 출발하지. 버스를 호텔 현관에 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10분쯤 후에 그들은 호텔을 출발했다. 박영수의 승용차가 선두에 서고 버스의 뒤를 김재식의 차가 따르는 순서였는데 다행히 도로가 막히지 않아서 그들은 곧 올림픽대로로 들어섰다.

모두 젊은 사람들인데, 뭘 하는 사람들이죠?

문득 옆자리에 앉은 고경감이 물었으므로 박영수가 머리를 들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내가 아나? 그저 호송만 해가면 되지 뭘.

모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마치 군인 같은데.

이윤재도 모르는 모양으로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박영수는 뒤쪽 김재식의 차에 같이 타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40대로 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사내였는데 그가 일행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신수석께 안부 전해 주시오. 언제든 뵙고 인사를 드리겠다고.

김재식의 옆에 않은 시바다 겐지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지요.

유창한 일본말로 대답한 김재식은 어정쩡한 표정이었다. 그는 시바다 겐지가 초면일 뿐만 아니라 뭘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 그저 어제 신형목으로부터 그랜드호텔에 가서 27명을 호송하여 출국시키라는 지시만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호송책임은 경찰청의 보안국이 맡고 자신은 확인하고 보고하는 것이 임무였다.

시바다가 김재식을 바라보았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같은 일을 하니까요.

그렇습니까?

,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힐끗 시바다를 바라본 김재식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목적이 같고 어떤 일이 끝나지 않았느냐고 물어도 이 일본인은 대답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차는 제법 속력을 내어 달려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맥도널 더글러스 사 생산품인 DC-727이었는데 30명도 안 되는 승객을 태우기에는 너무 큰 느낌이었다. 활주로로 통하는 철문을 지나 14번 게이트에 세워진 비행기 앞에 차가 멈췄을 때는 오후 230분이었다. 비행기의 트랩은 이미 붙여져 있었으므로 버스에서 내린 사내들은 제각기 무거워 보이는 짐가방들을 메고 트랩을 올랐다. 김재식과 박영수는 그들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는데 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 자네 부하가 김상철을 놓쳤다면서?

출구 근처의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김재식이 박영수를 바라보았다. 역시 턱을 들고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박영수가 입맛을 다셨다.

, 그것이.

러시아 대사관 차가 실어 가기 전에 잡았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

「‥‥‥‥」

그 후로는 영 종적이 잡히지 않나?

머리를 든 박영수가 김재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어젯밤에 성신병원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는 3명에게 총상을 입히고 2명을 때려눕혔다. 시선이 마주치자 박영수는 곧 머리를 돌렸는데 그런 태도가 김재식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놈은 이미 국외로 탈출했을지도 몰라. 배편으로 일본은 금방이니까 말이야.

마치 힐난하는 듯한 말투였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했어.

이자는 어젯밤 사건을 모르는 것이다. 박영수는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자는 우리보다 더 겉돌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명령계통은 청와대에서 대검의 고차장, 경찰청의 보안국장인 이윤재에서 끝이 난다. 그것은 사건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실무 라인만 가동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경찰청 정보국에서 파견된 김재식이 겉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오늘처럼 앞과 뒤가 없는 눈먼 일이나 시키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박영수의 시선에 승용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직원들이 탄 차인 모양이었다. 비행기로 올라온 관리사무소 요원은 2명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좌석의 이곳저곳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중 한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옮겨지자 김재식이 턱을 들고 말했다.

, 청와대에서 왔는데, 빨리 끝내도록 해요.

그럼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아 주시지요. 이렇게 산만하게 흩어져 있으면.

사내가 말하자 김재식이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 이쪽으로 모여 않으시오. 빨리 끝내기 위해서니까. , 서둘러 주시오.

매끈한 일본어 실력이었다. 앞쪽 자리에 앉아 있던 예의 선글라스가 옆 사내에게 뭐라고 말하자 사내들은 모두 일어섰다. 그들이 한쪽에 모여 앉은 것은 채 3분도 되지 않았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다. 사내들은 만족한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단정히 입고 머리도 말쑥하게 깎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다. 사내들의 시선을 받으며 관리 요원들은 제각기 들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꺼내든 것은 소음기가 끼워진 길쭉한 권총이다.

움직이면 죽인다.

기체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사내 한 명이 소리치자 앞쪽의 조종석 문이 열리더니 제각기 기관총을 움켜쥔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5명이다.

움직이지 마!

유창한 일본어였다. 놀란 김재식과 박영수는 입을 딱 벌리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사내의 총구에서 섬광이 번뜩이더니 둔탁한 총성이 났다. 2발이다. 그러자 안쪽 창가에 앉은 사내 1명이 벌떡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의자 밑으로 상반신을 숙이더니 보이지 않았다.

두 손을 모두 들어! 내린 놈은 죽인다!

조종석에서 뛰쳐나온 사내 한 명이 소리쳤다. 그들은 이제 한 무더기로 몰려 않은 26명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박영수는 겨우 시선을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낀 사내도 손을 들고 있었는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쪽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그는 맨손이었다.

시바다 겐지.

그가 앞쪽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숨소리도 죽인 비행기 안에서는 또렷하게 들렸다.

시바다 겐지, 일어서라.

김상철이다. 박영수는 그제야 그가 김상철인 것을 알아챘다. 그의 가슴이 세차게 고동을 쳤다. 그 순간 벽을 몽둥이로 계속해서 두들기는 듯한 총성이 났다. 총을 겨눈 사내 한 명이 한쪽 열을 향해 소음기가 끼워진 기관총을 쏘아 갈긴 것이다. 한쪽 열에 나란히 앉아 있던 세 사내가 사지를 비틀더니 금방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 새끼들, 움직이지 말라니깐.

한국말이다. 다시 다른 사내 3명이 총을 쏘아 갈기자 이번에는 세 열의 사내들이 한꺼번에 몰살을 했다. 비행기 안은 금방 피바다가 되었는데 총에 맞은 서너 명이 신음소리를 내자 이젠 다른 사내들이 일제히 신음소리를 내는 사내들을 향해 총을 쏘아 갈겼다. 다시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제 산 사람은 더 높이 손을 들고 있었는데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역시 두 손을 치켜든 박영수는 김재식과 어깨가 닿아 있었다. 그는 김재식의 상반신이 흔들리는 것처럼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상철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낀 시바다를 똑바로 가리켰다.

시바다, 일어서라.

시바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얼굴이 백지장처럼 흰 사내가 선뜻 그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통로 쪽으로 잡아당겼는데 통로 쪽의 사내가 걸리적거리자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사내의 옆머리에 대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가 반쯤 날아간 사내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시바다는 통로로 끌려 나왔다.

나까무라, 이리 나와.

김상철이 다시 말하자 사내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통로로 나왔다. 시바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는 사내는 이한이다. 선글라스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졌고 반쯤은 얼이 빠져 있는 시바다를 김상철 앞으로 끌고 간 이한은 그의 정강이를 발끝으로 찼다.

꿇어앉아!

시바다가 무릎을 꿇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놈들 둘을 묶어라.

시바다와 나까무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김상철의 시선이 출입구 쪽에 앉은 김재식과 박영수 쪽으로 향해졌다.

저분들도.

그다음 순간 사내들의 기관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으므로 김재식과 박영수는 눈을 감았다. 총성이 그치자 그들은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는 27명의 VIP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묶여 있는 두 사내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김재식이 목 안으로 신음소리를 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얼굴이 흰 사내가 다가오더니 권총의 손잡이로 얼굴을 후려갈기자 신음소리가 뚝 그쳤다.

당신들의 호송차로 돌아가야겠어.

김상철이 똑바로 박영수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정신이 나간 것 같으니 당신이 나하고 앞장을 서지.

그의 시선을 받은 박영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김재식보다는 덜하지만 그도 온전한 정신은 아닌 것이다.

 

 

 

4. 김상철의 선물

그날 밤 9시경에 서울발 대한항공 518편은 근대리아의 근대공항에 착륙했다. 관제탑의 유도로 23번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915분이 되어 있었다. 예정보다 15분이 늦은 것이다. 송명길 관제사는 부산 출신으로 공군에서 제대한 후에 근대리아로 이주한 사내였다. 그는 마이크의 스위치를 켜고 518기를 호출했다.

대한항공 오일팔, 삼십 분 후에 사십이 번 게이트로 이동하라. 그곳에 곧 노스웨스트가 들어온다.

공항경비대 책임자를 바꿔 달라.

기장의 목소리에 주위의 관제사들이 모두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맛살을 찌푸린 송명길이 마이크를 입에 바짝 붙였다. 도난사건이나 기내에서 싸움질이 가끔 일어났던 것이다.

오일팔, 무슨 일이냐?

난 시체를 싣고 왔다.

뭐라고?

관제탑 책임자는 이미 뒤에 서 있었고 대여섯 명의 관제사가 송명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기장의 짜증 난 듯한 목소리가 다시 관제탑을 울렸다.

서울에서 시체를 싣고 왔다. 기내가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고 시체는 모두 스물다섯 구이다. 앰뷸런스는 필요 없다.

아니 도대체.

모두 총에 맞아 죽었다.

이봐, 오일팔. 당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버럭 소리친 것은 책임자인 하동수 소장이다.

시체를 싣고 오다니? 더구나 총에 맞은‥‥」

이 개자식아, 와서 보면 될 것 아니야!

기장의 아우성치는 듯한 목소리가 관제탑 안을 울렸으므로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기장이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에 승객의 거의 전부가 피살되었어. 피살자는 모두 일본 야쿠자들이다. 시바다 누구의 부하라고 들었다. 나는 시체를 싣고 근대리아로 가라는 협박을 받았어. 그렇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겠다고.

이봐요, 기장. 진정하고.

진정 못 해! 어서 기내에서 시체를 가져가란 말이야! 수취인은 행정청의 강미현 보좌관이라고 들었다.

김상철이 보내는 화물이라고 했어!

 

2시간쯤 후인 밤 11시경이다. 근대시 교외의 총독 관저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건물 옆쪽의 헬기장에는 방금 착륙한 헬기의 프로펠러가 아직도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남호와 이대각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총독이 머리를 들었다. 검정색 실크 가운 차림인 그의 얼굴은 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들이 잠자코 앞쪽 자리에 앉자 총독이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 시바다의 부하들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대답한 것은 이대각이다. 어깨를 편 그가 총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분증도 확인했지만 근대리아에 있는 오다 센자부로 씨의 부하들도 확인해 주었습니다.

각하, 그들은 대량의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승무원들의 말을 들으면 한국 경찰이 그들을 활주로 안까지 호송하여 왔다고 합니다. 한국 정부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총독 못지않게 이남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김상철의 부하들은 미리 조종석을 점거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출입국 관리 요원으로 위장하고 와서는 야쿠자들을 앞뒤에서 친 것입니다.

이대각은 방 안의 분위기에 맞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결국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끝을 떨었다. 그는 바로 조금 전 이남호와 둘이 있을 때는 실로 호쾌한 작전이라는 등 하면서 제 일처럼 후련해했던 것이다. 이남호가 이대각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각하, 김상철은 시바다 겐지와 나까무라 두 명을 끌고 갔다고 합니다. 경찰 간부 두 명도 함께 끌려가는 것을 조종사가 보았다는군요.

조종사는 기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 호송대 7명도 순식간에 제압되어서 호송버스에 실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김상철의 부하들이 조종석 안에서 자신의 집까지 확인한 터이라 조종사는 그들이 시킨 대로 시체를 날라 왔다. 모험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총독이 머리를 들었다. 눈시울이 더욱 늘어져 있어서 지친 얼굴이었다.

한국 정부가 그자들을 보호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이남호와 이대각이 제각기 시선을 피하자 그가 거친 헛기침 소리를 냈다

총기를 가지고 근대리아에 도착했다면 우리 공항의 세관과 경비대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을까?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그들을 검색 없이 공항 밖으로 빼돌릴 예정이었을까?

이남호와 이대각이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총독이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말해 봐라, 어서!

각하.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진정하십시오.

강미현이가 배후에 있어, 그렇지?

청와대에 부탁해서 그놈들을 출국시킬 계획이었고 이곳 공항에는 검색 없이 입국시키려고 준비를 해두었을 것이다.

총독이 한껏 눈시울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김상철의 부인을 죽인 것이 시바다이고 그놈을 배후 조종한 것이 강미현이란 말인가?

각하, 자문관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저한테도 누차‥‥」

손을 끊으라고 했는데도 그놈이 ‥‥」

어깨를 떨군 총독이 탁자 위로 시선을 내렸으므로 이대각은 소리죽여 한숨을 쉬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25명의 시체는 강미현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는 김상철의 전갈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한 일이라면 내가 했다고 하지. 지금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어깨를 편 시바다가 똑바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이한에게 몇 차례 얻어맞은 후라 입가에 피가 맺혀 있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고 목소리도 굵다.

난 당신 처를 납치해서 당신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당신을 없애려고 했어. 난 목장에 부하를 내려보내지도 않았다.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입술을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 거처가 탄로 나는 바람에 일이 허사가 되었다. 솔직히 당신 처를 누가 그랬던지간에 당신이 한국에 왔다는 건 나에게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야.

저택의 지하실 안이었다. 시바다 주위에는 김상철을 중심으로 이한과 심재택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아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나무 의자에 묶여 앉은 시바다가 턱을 들더니 위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년을 믿지는 않았지만 배신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그렇게 간덩이가 큰 년인 줄은 몰랐어.

심재택이 헛기침을 했다.

너는 김사장님을 제거하라는 강미현의 지시를 받았어.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그렇지 않나?

시바다가 심재택을 쏘아보더니 이윽고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죽는 마당에 나도 신의를 지켜보자. 난 그런 부탁을 받은 적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널 보호해 준 이유는 뭐라고 설명할 테냐?

내가 대통령과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지.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이 년 전, 불칸 역에서 넌 기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그것도 아니라고 하겠지?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여서 심재택이 그를 돌아보았다. 시바다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묶인 손이 불편한 듯 팔을 꿈틀대었다.

불칸 역이라. 그곳에서 네 애인인 중국 갈보년도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는 똑바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일이다. 이젠 후련하겠지?

그의 시선을 받은 이한이 창백한 얼굴을 펴고 웃었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래, 후련해.

불칸 역 사건은 내가 집행한 거요.

나까무라가 반듯이 앉아 말했는데 놀랍게도 유창한 한국어를 썼다. 그들은 이제 옆방으로 옮겨와 나까무라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위조지폐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처음에는 저택을 습격하기로 했는데 기차로 떠난다는 정보를 듣고 계획을 바꿨지요.

머리를 끄덕인 심재택이 부드럽게 물었다.

네가 재일동포라는 소문은 들었다. 강미현이 김사장님을 제거하라는 부탁을 했을 텐데, 자세한 내막을 말해라.

말하면 바로 죽여주실 겁니까?

심재택과 김상철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한이 헛기침을 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소원대로 해주지.

강미현은 백오십만 달러의 활동비를 보내주었습니다. 김사장님을 제거하는 조건의 계약금이었지요. 일이 성공하면 삼백오십만 달러의 잔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지하실은 창고로 쓰이는 시멘트 구조물이었다. 그의 말소리가 방을 울렸다.

강미현은 청와대 쪽에 우리 일행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들도 합의했지요. 강미현은 김사장님이 안기부 관리들과 함께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

그리고 한국 정부는 강미현의 요청을 거절할 입장도 못 된다고 하더군요. 시바다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그들은 나까무라가 시바다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긴장을 했다. 나까무라가 앞에 앉은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물론 김사장님 부인의 트럭 사고 건은 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시바다는 한국 정부가 선수를 친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인을 납치할 계획이었습니다.

김상철이 가늘게 한숨 소리를 내었고 와락 상체를 세운 심재택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 정부가 했다는 증거가 있어?

그들밖에 그 짓을 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물론 시바다가 계집질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어쨌든 우리들도 성공했겠지요.

의자에 등을 기댄 나까무라가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도 근대리아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인으로 어깨를 펴고 살고 싶었지요. 그곳은 확실한 한국인의 땅이었으니까요.

이한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김상철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한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님, 돌아가서 그 계집부터 죽입시다. 그 일이 첫째인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새벽,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선잠이 들었던 안숙명 여사는 소스라쳐 잠에서 깨었다. 그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에는 고광식도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머니.

아이구, 동민아.

저도 모르게 소리친 안숙명이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동민아, .

어머니, 저 강남역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에 있어요.

아이구, 공중전화.

고광식이 손을 뻗쳐 수화기를 쥐었으나 안숙명은 몸을 흔들어 더욱 귀에 붙였다.

그럼 동민아, .

겁이 났고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안숙명이 더듬거렸다. 이미 눈에는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고 목이 메었다.

어머니, 저 풀려났어요.

, 풀려나?

그러자 고광식이 기를 써서 수화기를 뺏어 쥐었다.

동민아, 애비다.

그도 이제 목이 메었다.

풀려났다구?

, 아버지. 금방 택시 타고 갈게요.

택시, 그것보다 내가‥‥」

괜찮아요, 아버지. 그 사람들이 택시비도 넉넉하게 주었어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뱉은 고광식이 어깨를 늘어뜨리자 다시 안숙명이 수화기를 가로채었다.

동민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다구?

그로부터 20분쯤 후에 고동민이 탄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안숙명이 두 팔을 휘저으며 달려가 그를 안았고 턱을 들고 선 고광식은 헛기침을 했다. 새벽 5시다. 안숙명이 아들을 안았으나 체격이 큰 고동민이 어머니를 안은 꼴이 되었는데 안숙명은 소리죽여 흐느껴 울었다.

, 어서 들어가자.

고광식이 아들의 어깨를 안았다. 고동민은 검정색 운동모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깎인 머리칼 때문일 것이다.

전 괜찮아요, 어머니.

철부지인 것 같았던 고동민이 어머니의 어깨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처음에는 겁났지만 그 아저씨들, 괜찮은 남자들이었어요,

그들의 뒤를 따라 걷던 고광식은 어금니를 물었다.

 

출근시간이 가까워진 아침 7시경이다. 대한병원의 앰블런스가 고광식의 이층 양옥집 앞에 도착했고 안숙명과 고동민의 부축을 받은 고광식이 앰블런스에 올랐다. 뒤칸의 침대에 누운 고광식은 아내가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눌렀다.

나 고차장인데, 이명규 부장을 바꿔 줘.

잠시 후에 고광식은 말을 이었다.

이부장, 나야. 나 지금 앰블런스 안인데, 갑자기 쓰러져서 당분간 일을 못 할 것 같아서.

그는 한 손을 뻗쳐 고동민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내의 손이 그들의 손등을 덮었다.

그래, 지금 대한병원으로 가는 중이야. 아니, 올 것 없어. 내 말을 들어. 그래, 내 병가를 내줘. 청장께도 말씀드리고, 그리고 청와대의 신수석한테도.

핸드폰의 스위치를 끈 고광식이 누운 채로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손을 잡은 채로였다.

 

그 사람이 고혈압일 줄은 몰랐는데.

신형목의 목소리는 짜증기가 섞여져 있었다.

병이 났다면 하는 수 없지. 이봐요, 이부장. 이젠 앞으로 당신이 수고를 해주셔야겠는데.

알겠습니다, 수석님. 제가 부족하지만‥‥」

우선 몸이 건강해야 일을 할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수석님.

이제까지 진행 상황은 잘 알고 있겠지요?

, 제가 실무자였기 때문에.

김상철과 심재택의 검거에 총력을 기울여 주시오. 그리고 이정훈도.

알겠습니다, 수석님.

김상철 그놈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 발견 즉시 처리해야 됩니다.

김상철이 공항에 나타나 비행기 안에 있던 25명의 야쿠자를 사살하고 시바다 겐지와 나까무라 두 사람을 끌고 간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김상철은 비행기를 근대리아로 떠나보냈고 근대리아 정부는 25구의 시체를 인수하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만일 공항에 시체들이 남아있었을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경찰의 보호 아래 세관도 거치지 않고 비행기에 태운 일본인들이다. 언론이 이런 호재를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은 2명의 경찰 간부와 4명의 승무원뿐이었으므로 승무원만 입막음을 하면 되었다. 경찰 간부들은 인질로 잡혀 시내까지 끌려갔다가 풀려났는데 그들이 입을 열리는 없고 비행기 아래에 있던 경호 경찰들은 안에서 일어난 일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명규와의 통화를 끝낸 신형목은 방을 나와 비서실장실로 들어섰다. 오전 1010분 전이었으므로 이태준은 서류를 챙겨 들고 나갈 차비를 하는 중이었다. 매일 10시 정각이면 그는 대통령과 독대하는 것이다. 사흘에 한 번꼴로 여당 대선후보 정동민이 아침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 날이다

실장님, 그럼 저는 약속 때문에 나가보겠습니다.

선 채로 신형목이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자 이태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전에 각하께서 직접 연락을 하실 거요. 그러나 오늘은 결론을 내야 합니다.

머리를 숙여 보인 신형목은 방을 나왔다.

12시 정각에 신형목은 시청 앞의 로열호텔 15층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로 들어섰다. 라운지의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이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배인이 그를 안내해 간 곳은 안쪽의 밀실이다. 원탁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있던 오성의 비서실장 조영규가 일어섰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동안 적조했습니다, 수석님.

서로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창밖은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8월 초순의 무더운 날씨였지만 방 안은 서늘했다. 주문한 음식이 놓여지고 종업원이 물러갈 때까지 그들은 날씨와 건강, 집 안 이야기로 시간을 때웠다. 그래서 웃음도 건성이고 끄덕이는 것도 형식적이다. 스테이크를 썰어 포크로 찍어 든 신형목이 이윽고 정색을 했다.

각하께서 회장님께 직접 통화를 하신다고 하셨는데 ‥‥」

, 제가 출발하기 조금 전에 하셨습니다.

조영규가 입 안에 든 야채를 삼켰다.

이 년쯤 전에 저희 전자 공장을 방문하신 적이 있지요. 그곳 식당의 음식이 맛있었다고 하셨다는군요.

저희 회장이 꼭 다시 모시겠다고 했답니다. 영광이지요.

고기를 씹어 삼킨 신형목이 헛기침을 했다.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려는 것이 각하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안정을 바라고 있고.

결국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입니다. 각하께선 다른 욕심이 없으십니다.

조영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도 정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말씀 안 하셔도.

대선자금이 필요합니다. 선거 직전에 마련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다시 머리를 끄덕인 조영규가 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물론 드려야지요. 그래서 저희들도 미리 비자금으로 외국은행에 예치해 두었습니다.

, 그러셨군요.

얼굴에 웃음을 띠운 신형목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련히 알아 하셨겠지요.

그런데 그 돈을 11월에야 찾게 되어 있어서, 예전처럼 선거 직전에 돈을 풀 것으로 생각해서 말입니다.

은행에 적립시켜 놓았기는 하지만 도저히 11월 이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기술적인 문제입니다만, 그 돈을 담보로 차관을 얻었는데 11월이 되어야 담보가 해제될 것 같은데요.

물잔을 쥔 채 신형목이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이제까지 대선자금 수금에 대한 뚜렷한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선거 유세기간 동안에도 걷었으므로 더 이상 다그칠 명분이 없는 입장이었다.

로열호텔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킹덤호텔의 지하 식당 안이다. 경제 부총리 윤동선은 통상산업부 장관 진양근과 마주 앉아 초밥으로 점심을 들고 있었다. 윤동선은 경제 부총리를 두 번째 맡고 있었는데 10년 전 처음 맡았을 때는 경제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었다. 윤동선이 머리를 들었다.

재경원의 사무관급 이십여 명이 사표를 내었어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모두 근대리아로 이주할 모양이야. 근대리아의 행정청으로 자리를 옮기는 거요.

그는 입맛이 달아난 듯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단났어. 사람들이 왜 진득하지를 못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내 생각엔 선거 전에 대한민국 중소기업인의 반은 근대리아로 이주해 갈 것 같습니다.

그러자 윤동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에이, 진장관도, 설마 그렇게까지야.

요즘 하루에 몇 명씩이나 이주해 가는지 아십니까? 삼천 명 가깝게 된단 말입니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조사한 바로는 그중 반 이상이 중소기업인입니다.

경제수석은 부도 직전이나 경쟁력이 없는 중소기업인들이 떠난다던데.

그 소인배. 그자는 정권이 바뀌면 무솔리니처럼 광화문에 거꾸로 매달아야 합니다.

진양근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자도 전 안보수석 박정규처럼 수틀리면 미국으로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면 끝이지요. 나라는 황무지가 되고.

윤동선은 정권을 4번이나 겪은 노회한 인물이다. 잠자코 입맛만을 다시는 그에게 진양근이 말을 이었다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이 떠난다면 한국에는 경쟁력 있는 기업만 남는단 말입니까? 도대체 그런 발상은 그자가 배운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 놈이 말한 것입니까? 큰일 났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 산업은 밑바닥이 무너져 단숨에 허물어질 테니 위기예요.

선거 끝나면 다시 안정이 돼요. 이주도 제한을 할 것이고, 또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제도나 규제도 고쳐야 될 것이고.

진양근이 머리를 저었다. 그는 상공부 주사로 시작하여 통상산업부 장관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는데 운도 좋았다. 정치권의 인맥도 없었던 터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암으로 입원을 했고 다른 하나는 장관이 된다고 미리 떠드는 바람에 물을 먹었던 것이다.

저도 오래 연구도 하고 노력도 해보았습니다만 이제 뿌리가 너무 깊습니다. 아니, 더러워졌다고 할까요? 흙탕물 구덩이에 몇 양동이 맑은 물을 넣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물을 모조리 뽑아내고 다시 채우든지 아니면 모조리 정수시설에 넣어 거르든지 해야 됩니다.

너무 비관적이야, 진장관은

너무 낙관적이십니다, 부총리께서는.

한국민의 저력을 모르시는데, 어떤 계기나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일시에 일어납니다. 두고 보시오.

이런 정치권 아래에서 말씀입니까? 다음 정권에도 과연 그런 기회가 올까요?

윤동선이 잠자코 입맛을 다시자 진양근이 다시 머리를 저었다.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증시는 폭락하는 데다 수출은 마이너스, 거기에다 각종 규제와 부처 간 이기주의로 기업 활동은 위축되고 투자는 대폭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장개방으로 국산 제품의 가격은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인데다 노조의 고질적인 파업 투쟁으로 기업은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국가부채가 세계 삼위인 나라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북한의 위협에 경수로 자금이네 부가 시설 자금이네 해서 몇십억 달러를 공출당하듯이 주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 정치권에서는 대선 준비만 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어제 열릴 경제장관 회의가 무산된 이유는 뭡니까? 이런 위급한 시기에 말입니다.

곧 열리겠지요.

그러자 진양근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긴 한숨소리를 냈다.

기업인뿐만이 아닙니다, 부총리님. 이젠 일반 국민들도 작금의 정치와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근대리아로 이주해 가는 것입니다. 그들도 알고 있어요. 흙탕물은 맑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맑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입맛을 다신 윤동선이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끄덕였다.

위기의식을 느끼는 건 나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길이 있을 거요.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길이, 우린 이제까지 그렇게 견디어 왔으니까.

 

총독이 행정회의를 주관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어서 각 국장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행정청의 국장이면 내각의 장관이었고 행정청장은 국무총리이다. 따라서 오늘의 회의는 한국의 대통령이 주관하는 각료회의와 비슷한 역할이었다. 총독과 행정청장 이남호, 그리고 16명의 국장 외에 부청장이자 경비본부장인 이대각이 두 명의 핵심 참모와 함께 참석하고 있었으므로 근대리아의 행정부와 사법부 양원의 합동회의였다.

8월 초순, 남부지방의 들판에 푸른 풀잎이 돋아나고 영상 10도 안팎의 기온이어서 리조트 시티의 스키장에 나체 스키어들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총독이 무거워 보이는 눈시울을 들고 둥글게 둘러앉은 각료들을 바라보았다. 행정청의 소회의장이었지만 대리석으로 벽과 바닥이 장식된 300평이 넘는 방이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생활한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곳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야.

낮은 음성이었지만 앞에 장치된 초소형 스피커의 볼륨을 알맞게 키웠기 때문에 총독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행정규제는 최소한으로 한다. 부처 간의 이해가 걸린 일로 업무가 한 시간 이상 지연되었을 경우에는 담당 실무자는 국외로 추방시킬 것이고 담당 국장은 파면이다.

그런 일은 아예 있지도 않았으므로 국장들은 태연한 표정들이었다. 한국에서 너무 오래 시달려 온 총독의 과잉 반응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청장실 산하에 행정조정위원회가 있어서 부처 간의 업무를 조정한다. 한국은 공장 하나 짓는데 300여 개의 도장이 필요하지만 이곳은 6개의 도장에 제한 시간은 3시간이었다.

총독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중소기업뿐만이 아니라 고급인력이 몰려오고 있어,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 같은데 아까운 인력을 낭비하지 말도록.

인력수급위원회를 만들까 합니다만.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는 비서실에서 지원서를 받고 해당 국장에게 지원자의 자료를 넘겨주었는데 업무가 많습니다. 그래서 .

어허.

이맛살을 찌푸린 총독이 입맛을 다셨다.

청장은 아직 한국 버릇을 못 버렸어. 자꾸 조직을 만들어서 뭘 하자는 게야? 기존 조직에서 처리하도록.

, 각하.

꾸지람은 받았지만 이남호는 느긋한 표정이었고 국장 서너 명은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다. 근대리아의 행정부에는 정년제도가 없었으므로 두어 명의 국장은 70대로 전직 한국 정부의 장관들이었다.

오늘의 회의 주제는 이주민 수용 및 중소기업 육성 방안이다. 한국에서 몰려드는 수백 가지 업종의 중소기업군()을 업종별로 배치하고 지원해 주는 방안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이미 15개의 위성도시에 업종별로 공단을 세우는 중이었고 중소기업가들은 각각 사업장을 배정받아 일을 시작하게 된다.

노동국장이 머리를 들더니 헛기침을 했다.

각하, 청장에게 보고한 사항입니다만 기본인력이 모자랍니다. 시급한 조처가 필요합니다.

총독이 이대각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지금 현재로 근대리아 인구가 얼마나 되지?

680만 명이 조금 못 됩니다, 각하.

국적 비율은?

한인과 러시아인, 중국인의 비율이 각각 삼십 퍼센트이고 나머지 십 퍼센트가 약 25개 국적입니다.

올해 예상은?

그건 각하께서 결정하셔야지요.

그러자 국장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국경의 통제를 풀기만 하면 당장에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타국민의 비율이 치솟아 오를 것이다. 그러면 인구 1,000만도 몇 달 안에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총독은 엄격하게 민족의 비율을 조절해 왔다. 총독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보고서를 보았는데 한국 이주민이 이 추세로 나간다면 올해 안에 백만 명 가깝게 될 거야. 그것은 확실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이주민은 대부분이 중소기업인과 그 가족, 투자이민에다 전문인력이다. 노동국장이 말하는 기본인력이 아닌 것이다.

 

창틀에 두 손을 짚은 강미현은 석양이 걸려 있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늘이 짙어가는 대초원의 지평선이 붉은 하늘을 더욱 선명하게 받쳐 주었고 반쯤 걸린 흰 태양이 여러 개의 빛무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광대한 땅이다. 대자연의 중심에 서 있으면 인간의 희로애락과 때로는 삶과 죽음까지도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간은 미물(微物)일 뿐이다. 요즘 며칠 동안 강미현은 관저에 박혀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총독이 금족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행정청에는 병가를 내었으므로 가끔 이곳저곳에서 차도를 묻는 전화가 올 뿐이었다.

창틀에서 몸을 뗀 강미현은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총독이 아직 퇴근해 오지 않은 관저 안은 조용했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모두들 조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미현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위쪽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시바다 겐지의 부하들을 몰살시켜 그 시체를 자신 앞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대각은 말하지 않았지만 비서실의 박태현을 통해 그가 전한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제 그의 다음 대상이 누가 될지는 뻔한 일이다. 그가 박미정을 사랑했던 만큼 증오심이 반비례하여 증폭될 것이고 그 대상은 자신이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문 강미현은 상체를 세웠다. 박미정을 그렇게 만든 것은 한국 정부일 것이다. 그들은 김상철의 제거라는 목적만 같았을 뿐이지 작전은 별개였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녀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수화기를 들면서 올려다본 시계는 저녁 8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병세가 어떠십니까?

서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앞에는 장호성과 박기환이 나란히 앉아 그를 바라보는 중이다.

이젠 좀 나아졌어요.

서먹한 분위기로 강미현이 말하자 그는 얼굴을 폈다.

, 정말 다행입니다. 걱정하고 있었지요. 근대리아의 여름 감기는 독해서요.

그럼 언제부터 출근하십니까? 병문안을 못 오게 하셨으니 사무실로나 찾아뵙지요. 상의드릴 일도 있고.

제가 나중에 연락을 드리지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서일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근신이 언제 풀릴지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야.

총독이 단단히 화가 났다고 들었습니다. 강미현을 귀국시킨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요.

장호성이 입맛을 다셨다. 강미현은 그들의 가장 든든한 근대리아 정부 측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김상철을 견제하기 위한 그녀의 계산된 행동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기회였다.

서일이 박기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김상철의 소식은 없소?

아직 남조선에 있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대표 동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박기환이 말을 이었다.

시바다를 잡아갔다니 곧 제 마누라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내겠지요.

이미 근대리아의 조직 세계에서 공항에 시바다의 부하 25명의 시체가 실려왔고 시바다와 나까무라가 김상철에게 잡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한 강미현이 시바다의 배경이 되어 있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는 것이다.

서일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남조선에서 김상철이 제거되면 그 시점에서 강미현의 금족령도 풀릴 거요. 총독은 지금 근대리아에 남아 있는 김상철의 추종 세력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강미현을 잡아두고 있는 거요.

그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강미현이 시바다를 시켜 김상철의 처를 해쳤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소. 김상철의 부하들은 흥분하고 있단 말이오. 이런 상태에서 김상철이란 뇌관이 근대리아에 오게 되면 근대리아는 전쟁이 일어날 거요.

비록 김상철은 떠나 있지만 그레고리와 변순태 등을 중심으로 그의 조직들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근대리아의 조직은 모두가 사업형 조직이다. 조직원들은 종업원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김상철의 공식 조직원만 해도 2만 명 가깝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안기부의 도움으로 한인 전체를 망라한 세포조직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의 세포조직에 대항하려는 의도였다.

장호성이 입을 열었다.

근대리아에 이미 남조선 이주민이 삼십만이 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북조선 이주민은 비율이 적어요. 시급한 조처가 필요합니다.

숫자가 많다고 두려워할 건 없어요.

서일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남조선의 투자이민과 기업인들, 고급 전문인력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도 바람직한 일이오, 모두 당과 지도자 동지께서 계획하신 일이란 말이오.

 

역삼로의 대형 빌딩 신축공사장의 주차장에는 트럭 2대가 세워져 있을 뿐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12시가 지난 시간이어서 주차장 아래쪽의 현장사무소에도 인적이 없었고 담장 너머의 도로를 지나는 차량들의 엔진소리만 울려오고 있었다.

적당한 장소로군.

트럭 옆으로 차를 세우고 시동과 라이트를 끈 심재택이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물론 숨어서 저격하기에도 적당하고 말이야.

옆자리에 앉은 이한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심재택이 직접 운전하고 온 승합차에는 그들 외에도 2명의 부하와 2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것은 시바다와 나까무라이다. 그러자 뒷좌석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시바다였다.

공사장에 시체를 묻을 모양인데 그건 옛날 수법이야.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겨우 이렇게 하려고 그 소란을 떨다니.

심재택은 어둠 속이었지만 이한이 입술 끝을 비틀면서 웃는 것이 보였다. 부하 한 명이 뒤쪽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습기가 많이 포함된 눅눅한 공기가 차 안으로 몰려 들어왔고 파헤친 흙냄새가 짙게 맡아졌다.

이봐, 뭘 해? 어디서 종소리라도 울려오기를 기다리나?

시바다가 다시 빈정거리듯 말했을 때 차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자갈더미를 밟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소리였다.

왔습니다.

운전석 옆으로 다가온 부하가 말하자 심재택은 차에서 내렸다. 어둠 속에 세 사내가 서 있었는데 가운데에 선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노구치 마사요시입니다. 일본 정보국의 동북아 과장으로 있지요.

심재택입니다.

이미 전화로 인사를 나눈 터이라 그들은 가볍게 손을 잡았다.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

뒷자리에 있습니다.

이한과 차 안에 있던 부하까지 내렸고 노구치와 2명의 사내가 대신 안으로 들어갔다.

고문하는 기계 같은 걸 가져오지나 않을까 했는데 맨손이군.

주위를 둘러보던 이한이 혼잣소리를 했다. 김상철은 시바다를 쫓고 있던 일본 정보국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이미 시바다의 거처를 통보까지 해주었던 김상철이다. 그의 연락을 받은 노구치가 펄쩍 뛸 듯이 기뻐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한이 심재택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그들은 승합차 앞쪽의 흙더미 옆에 서 있었다.

심선생은 형님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를 알고 계시오?

어두웠으므로 심재택은 크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모릅니다. 그걸 물을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이형도 아시다시피 .

「…………」

강미현의 사주를 받은 한국 정부가 저지른 일은 틀림없어요. 저놈이 한 짓은 아닌 것 같소.

그는 턱으로 승합차를 가리켰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안보수석 신형목이 다른 라인을 통해 일을 시킨 것 같소. 고광식이 안 했다면 말이오.

그가 흙더미 위에 쭈그리고 앉았으므로 이한도 옆쪽에 앉았다. 안보수석이 어떤 위치의 인물이라는 것은 이한도 안다. 신형목은 이제까지 그가 상대해 온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다. 심재택이 잠자코 있는 이한을 돌아보았다.

이형, 이 정권은 썩었소. 이형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난 이미 각오를 했어요. 죽을 때까지 부딪쳐 보겠다고.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놈이오, 나는.

내 생각엔 강미현이 한 년만 죽이면 끝나겠는데. 난 이 나라하고는 인연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심재택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승합차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나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온 사내는 노구치였다.

이건 계획에 없는 일입니다만.

그들 앞에 선 노구치가 입을 열었다.

시바다 놈을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물론 시바다는 전 동북아 과장 몬도와 요원 두 명을 살해한 혐의로 중형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자 이한이 한 걸음 다가섰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들은 조사할 것이 있으니 만나게만 해달라고 하지 않았소?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그의 일본어도 수준급이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김사장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노구치가 부드럽게 말했다

차 안에서 연락을 했으니 지금 확인해 보시지요.

시바다가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어서, 저희 정보국으로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잠자코 있던 심재택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김상철에게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잠시 후에 그들은 승합차 안에 들어가 있었다. 뒷좌석의 뒤쪽 자리에 시바다와 나까무라가 나란히 앉고 그들의 앞에 심재택과 이한, 노구치가 둘러앉은 형태였다. 심재택이 시바다를 바라보았다. 차 안은 어두웠으나 건너편 빌딩에서 흘러들어온 빛을 받아 서로의 얼굴은 보인다.

시바다, 너는 또 일본 정보국과 흥정을 한 모양이군.

시바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국 안기부와도 흥정할 것이 있었는데 네가 안기부에서 잘려 나간 바람에 이야기가 안 되었어. 그건 네 탓이다.

입맛을 다신 심재택이 노구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자는 필요 없단 말이오?

나까무라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조금 비아냥대는 말투였는데도 노구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 그자는 필요 없습니다. 마음대로 처리하십시오.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심코 그를 바라본 심재택이 입을 딱 벌렸는데 그의 손에 충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소음기가 끼워진 긴 총신의 검은 쇳덩이가 싸늘한 빛을 내었다. 노구치가 눈을 크게 떴지만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한이 이를 모조리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총구는 시바다의 양쪽 눈썹 사이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다.

아무리 네가 운이 좋고 흥정을 잘해도 내 손에 잡힌 이상 끝난 것이다, 시바다 겐지.

이미 시바다의 얼굴은 시멘트벽같이 굳어져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가 향해져 있는 곳은 총구의 검은 구멍이다.

형님이 허락했어도 나는 안 돼.

다음 순간 그의 총구에서 섬광이 튀어나오면서 모래 자루를 몽둥이로 치는 것 같은 총성이 났다. 눈썹 사이가 뚫린 시바다가 머리를 뒤쪽 창에 부딪히며 넘어지자 이한이 노구치를 바라보았다

, 저놈을 데려가시오, 선생.

 

이한은 딴전을 피우며 앉아 있었고, 심재택이 공사장에서의 상황을 김상철에게 보고했는데 당사자가 옆에 있는데도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심재택이 말을 마치자 김상철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한의 시선은 딴 곳에 있다.

나까무라를 살려 데려온 이유는 뭐냐? 같이 쏘아 죽이지 않고.

이한이 머리를 들었다.

한국인이라고 괄시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우리끼리 있으니까 죽여 없애지요. 살리려고 데려온 건 아니니까요.

마악 입을 벌렸던 김상철이 다시 입을 닫고는 입맛을 다셨다. 심재택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노구치는 잠자코 시바다의 시체를 싣고 갔습니다. 그 일로 일본 정보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리는 없습니다.

김상철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나까무라를 데려오너라.

이한이 잠자코 방을 나가자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어제 대한일보 편집국장 이정훈과 연락이 되었어요. 그동안 숨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야당 대선후보 이대현 씨와도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김사장님은 내가 의지하는 가장 든든한 힘이오.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씀인데, 이곳보다 근대리아가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머리를 돌린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누가 그 짓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지도 못했어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경찰청 사람들은 범인이 아니오. 내가 공항에서 인질로 잡았던 사내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내 자식이라도 살리자고 비행기로 전화를 해왔던 사람이었어요.

시바다도, 검찰도, 경찰도 아니라면 신형목이 군 요원이나 경호실 요원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안기부 요원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신형목을 만나야겠습니다.

글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방문이 열리고 이한과 나까무라가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췄다. 새벽 3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모두 눈빛이 생생했다. 나까무라는 등산용 로프로 두 손이 우악스럽게 결박되어 있다. 김상철은 앞에 선 나까무라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이었다.

나까무라,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느냐? 살아서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은 거다.

이한과 심재택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나까무라는 아직 말뜻이 제대로 이해 안 된 모양이었다. 눈을 껌벅이며 김상철을 바라보고만 있다. 김상철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시바다를 따라 죽을 의리도 충성심도 사라진 마당이라 넌 그저 짐승처럼 죽는다. 그래서 너한테 기회를 주려는 것인데.

김상철이 힐끗 이한을 바라보았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이한은 의외로 딴전을 피우고 있다. 김상철의 목소리가 다시 방을 울렸다.

구걸해라, 값지게 죽겠다고. 우선 네 옆에 서 있는 이한한테부터. 너는 한이의 여자와 누님을 죽였다. 너를 죽여서도 한이의 분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서 그에게 빚을 갚아라, 죽는 날까지.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나까무라의 시선이 곧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아래로 내려졌다. 이윽고 옆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이한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형님, 살려 주십시오.

형님, 살려 주십시오.

이한이 옆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말주변도 더럽게 없는 자식이군.

묶인 두 손을 땅바닥에 짚은 나까무라는 머리를 숙이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심재택이 헛기침을 했다.

이형이 받아들인 것 같군요, 김사장님.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나까무라를 바라보았다.

네 한국명이 무엇이냐?

나까무라가 꿇어앉은 채로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봉만입니다. 김해 김씨로 봉우리 봉()에 찰 만(滿) 입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봐,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박영수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아내는 입을 다물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옷장에서 저고리를 꺼낸 박영수가 머리를 들자 아내의 등 뒤로 제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 녀석이 보였다.

제 친구들하고 약속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약속은 제 놈 멋대로 하고. 그래, 그 약속을 내가 지키란 말인가?

저고리를 입은 박영수가 아내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도대체 살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돈 이백도 못 만들어?

어머나, 세상에.

눈을 크게 뜬 아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급에서 적금 넣고 애들 학비 빼면 남는 돈이 얼마라고. 생활비는 또 얼마나 나오는지 아시우?

몸을 돌린 박영수는 서랍을 열고 콜트를 꺼내어 혁대에 찔러 넣었다. 권총집이 있었으나 버릇이 되지 않아서 불편했던 것이다. 그의 등에 대고 아내가 퍼붓듯 말을 이었다.

수진이네는 지방청으로 나간 지 이년 만에 집을 옮겼어요. 당신은‥‥」

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와락 몸을 돌린 박영수가 눈을 부릅뜨자 아내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방문 앞에 아들 녀석이 나타났다. 그의 장남으로 대학 1년생이다.

엄마, 그만두세요. 안 가면 되지 뭘.

그는 박영수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머리를 숙이고 있다. 박영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들 녀석은 방학을 이용하여 친구들과 함께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윽고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어제 한 달 분 판공비와 수사비로 210만 원가량이 나온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200만 원을 내밀자 아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아들 녀석도 우물거리며 웃었다. 이번 달에도 다시 가불을 해야 수사비용을 메울 것이다.

그가 아내와 장남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마악 현관을 나서려는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아내가 서둘러 응접실로 돌아갔다.

여보, 전화 왔어요. 경찰청이래요.

예상했던 터이라 곧 그는 수화기를 쥐었다. 이 시간이면 당직의 전화였다.

전화 바꿨습니다.

난 김상철입니다.

사내의 굵은 목소리에 박영수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누구시라고?

며칠 전에 만났던 김상철입니다.

여보, 당신 지금.

박 경정님은 내가 어떤 이유로 수배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라.

아내와 장남이 다가왔으므로 그는 손을 휘저어 그들을 방으로 내몰았다.

난 알고 싶지 않아.

당신은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내 자식만이라도 살리려고 나한테 전화를 해준 것을 잊지 않고 있어요.

당연한 일이오. 가족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남북한 간의 비밀 합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내 아내의 사고도 그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내가 현장에 있었지만 난 모르는 일이오.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난 끼어들기 싫소. 난 지시받은 일만 할 테니까.

듣고 나서 판단은 당신이 하시오. 우리는 약점을 잡지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원상태로 돌아간다고 약속드리지요.

김상철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난 당신을 살려 주었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알고 나서 말이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만나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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