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도시 8-2
4. 야습
오다 센자부로와 동행한 사내는 50대 중반쯤의 나이에 마른 체격이었다. 그러나 눈빛이 매서웠고 턱을 오만하게 쳐든데다가 어깨도 뒤로 젖히고 있어서 당당한 자세였다. 일본 정보국의 제2인자인 후가쿠 차장이었다.
「근대리아에 들른 길에 인사차 왔습니다.」
후가쿠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미 연락을 받고 있던 터라 김상철이 그의 손을 잡았다. 센 악력이다. 일본과 미국의 정보원들을 추방시킨 주역이 김상철이었으므로 후가쿠의 방문은 뜻밖이었다. 후가쿠가 온 얼굴을 주름살투성이로 만들며 웃었다.
「시바다 겐지 때문에 왔습니다. 그놈이 내 부하였던 몬도를 살해한데다가 반역 행동을 하고 있어서.」
근대시 변두리에 있는 샤니 클럽의 밀실 안이다.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말을 이었다.
「여러 경로로 정보를 모은 결과 시바다 겐지가 근대리아에 숨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후가쿠가 부드럽게 말했다.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본에서 야쿠자를 모아 왔는데 우리가 추정한 바로는 사백 명이 넘습니다. 근대리아의 이나카와회와 족히 대항할 만한 세력이지요.」
「저도 들었습니다. 총독 비서실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고도 하더군요.」
그러자 후가쿠가 다시 웃었다.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시바다는 강미현 씨의 보호를 받고 있지요. 시바다의 부하들은 모두 체류 허가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검거가 쉽지 않지요. 경비대 내부에서도 정보가 새어 나가는 형편이라.」
그는 탁자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사태가 점점 심각하게 진행되는데 김사장께서는 어떤 복안을 갖고 계십니까?」
「계획은 없습니다.」
후가쿠와 오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계획이 없으시다면, 이대로 내버려 두겠단 말씀입니까?」
「어쩔 수 없지요. 지난번에 강미현을 찾아가 경고는 했습니다만.」
「전남수는 한국에서 오백 명이 넘는 폭력배를 데려왔습니다. 전쟁 준비는 모두 끝낸 상태요.」
정색한 얼굴로 후가쿠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우리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강미현이 시바다와 손을 잡은 이상 일본 측 사업장은 다시 그놈한테 장악당할지도 모릅니다.」
「강미현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요. 그 여자는 그처럼 무모한 일을 벌일 성격이 아닙니다.」
김상철의 말에 후가쿠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면 승부를 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김사장의 제거요. 김사장만 제거하면 부하들의 소탕은 쉬워질 테니까요.」
「‥‥‥‥」
「이번의 남북한 회담으로 근대리아의 입지가 단단해졌습니다. 한국 정부는 근대리아 정부 측에 약점을 잡히게 되었고 근대리아와 북한과의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이 되었지요. 모두 북한의 계략입니다. 그래서 일이 벌어지면 북한이 총독의 편에 서게 될 확률이 커졌지요.」
후가쿠가 피로한 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우리 일본이 김사장을 선택했듯이 김사장도 물러나느냐 도전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후가쿠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심재택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타운의 나파스 클럽에서 그는 김상철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탁자 위의 보드카 병을 든 그가 잔을 채우고는 한 모금에 삼켰다.
「근대리아에 오고 나서 술이 늘었소.」
「한국에서 오백 명을 데려왔다니 이건 처음 듣는 말인데.」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긴 나만 제거하면 일이 쉽게 풀려가겠지. 러시아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거요.」
미국과 일본의 정보원들이 소탕된 상황이었으니 러시아의 우려는 사라졌다. 김상철이 아니더라도 근대리아의 사업장을 관리할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북한이 총독의 편에 설 가능성도 많습니다. 후가쿠는 정확하게 보았어요.」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조태광이 들어섰다.
「사장님, 타운의 신용금고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눈을 부릅뜬 그가 소리치듯 말했다.
「직원 세 명이 죽고 금고 안에 있던 돈을 모두 강탈당했습니다.」
긴장한 김상철이 그를 쏘아보았다.
「누가 한 짓이야?」
「동양인이라는 것밖에는. 십여 명이 되었답니다.」
신용금고를 설립한 것은 작년이었지만 대출 이자가 낮았고 담보 없이도 신용 대출을 해 주었으므로 주민들의 평판이 좋았다. 수십 개의 유사한 신용금고가 생겨났으나 예치금 실적은 1위였다.
탁자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변순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용금고도 그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사장님, 신용금고가 털렸습니다.」
「방금 태광이한테서 들었다.」
「세 명이 죽고 현금 이백만 달러가량을 털렸습니다.」
「동양인이라면서?」
「예, 그런데 어느 민족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모두 복면을 했고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
「밤 열 시경에 순식간에 쳐들어왔답니다. 경비원을 쏘아 죽이고 직원들을 한 곳에 몰아 놓고는 금고에 마악 넣으려던 돈을 강탈했습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것 같습니다.」
「경비대에는 알렸나?」
「지금 와 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강미현이 시작했을까요?」
「시바다가 한 짓인지도 모릅니다.」
심재택의 얼굴도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것, 막막한데요. 의도도 아직 알 수가 없는 데다 상대가 분명치 않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김사장님을 혼란에 빠뜨릴 계획이었다면 틀림없습니다.」
「‥‥‥‥‥」
「섣불리 나섰다가 저쪽에 구실만 만들어 줄 수가 있어요. 조심해야 됩니다.」
다음 날 아침, 유장석과 이대각은 총독실에 들어섰다. 총독은 비서실장 이남호와 마주 앉아 있었는데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요즘은 큰 눈이 내리질 않는군, 그렇지 않나?」
그러나 앞자리에 앉은 이남호의 얼굴은 굳어 있다. 소파에 자리 잡고 앉자 총독이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타운의 신용금고가 강도를 만났다면서?」
「예, 셋이 죽었습니다. 돈도 이백만 달러나 강탈당했는데.」
「어떤 놈들 소행인가?」
「그것은 아직.」
「김상철이가 소유주라면서?」
「예.」
총독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이 실장, 자네가 이야기하게.」
이남호가 굳어진 얼굴을 들었다.
「이대각이, 자네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난데없이 이름을 불리운 이대각이 멀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근대 시절부터 이남호는 까마득한 윗사람이었지만 이렇게 이름을 불리운 적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상황이라면, 근대리아의 분위기 말씀입니까?」
「그렇지, 경비본부장으로서 자네 의견을 듣고 싶어서 묻는 거야.」
「일촉즉발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
「양쪽이 충분히 타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쪽이라면 어디 말인가?」
「김상철과 아가씨 말이지요.」
「김상철이 위험인물이라고는 생각지 않나?」
「생각지 않습니다.」
이대각이 자르듯 말하자 이남호는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방 안의 분위기는 어느덧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총독이 헛기침을 했다.
「노파심인지는 모르지만 김상철은 조직뿐만이 아니라 주민한테도 막대한 영향이 있다. 그놈은 근대리아 정부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이 되어 있어.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총독의 얼굴도 이미 딱딱해져 있었다.
「북한과 중국, 거기에다 마피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김상철의 조직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근대리아 정부의 위협 세력이 된 거야.」
「총독님, 그것은 …….」
이대각이 머리를 들었으나 총독이 말을 이었다.
「더구나 정부에 자네 같은 김상철이 비호세력이 많아. 위태한 일이야.」
「제가 김상철이 비호세력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나?」
총독이 이대각을 쏘아보았다.
「김상철이와 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누구를 택하겠나?」
「난 자네를 잘 알아, 자네는 단순하고 정직한 사람이야. 의리가 강하고.」
「총독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김상철이한테도 마찬가지겠지.」
얼굴이 하얗게 된 이대각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제가 본부장으로 있는 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비본부장으로 오치호를 임명할까 하는데, 자넨 행정청 부청장까지 겸하고 있어서 업무가 과중할 테니까 말이야.」
퍼뜩 머리를 든 이대각이 몸을 굳혔다. 총독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내 사람이야. 근대 밥을 먹여서 내가 키웠어. 난 자네가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어.」
「‥‥‥‥‥」
「모두 근대리아를 위한 일이야, 우리가 애써 세워 놓은 근대리아가 흔들리는 것을 자네도 원치 않을 거야.」
차에서 내린 박기동이 마악 건물의 현관으로 들어서려는 때였다. 대여섯 명의 사내가 그의 앞길을 막았고 뒤쪽에서도 한 무리의 사내가 다가서더니 그를 둘러쌌다.
「당신들 뭐야?」
박기동의 경호원으로 꽤 다부져 보이는 사내가 그렇게 소리치면서 가슴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으려는 시늉을 했다.
「억.」
다음 순간 사내는 뒤통수를 얻어맞고는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권총의 손잡이로 뒤통수를 찍히자 눈을 뒤집어 뜨면서 사내는 앞으로 쓰러졌다. 박기동은 사내들에게 양팔을 끌려 차도에 세워진 승용차로 다가갔다. 사내들은 한국인이었다. 그렇다면 뻔한 것이다. 백주에 시 한복판에서 자신을 납치해 갈 무리는 하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경호원들이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을 보면서 건물을 떠났다. 한 시간쯤 후에 그가 들어선 곳은 리조트 시티 안에 있는 3층 건물이었다. 스키장이 바라보이는 이곳은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었다. 사내들은 그를 1층의 구석진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곧 빈방에 그를 남겨 두고는 방을 나갔다. 책상 두 개와 소파 한 세트가 있을 뿐인 방에는 히터가 가동되지 않는 모양으로 냉기에 덮여 있었다.
이한의 영역이다. 리조트 시티가 보였을 때부터 박기동의 머리는 회전을 탁 멈춘 상태가 되어 있어서 계획은커녕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가 않았다. 이놈은 부하들이 우글거리는 전남수의 본거지로 걸어 들어가 심복 부하를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전남수의 입에 총구를 집어넣어 앞니를 모조리 부러뜨린 미친 놈이다. 그에게는 설득도, 기지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문이 열리더니 이한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선 것은 김상철이다. 그들은 잠자코 소파의 앞쪽에 앉았다.
「이봐, 당신도 앉아.」
김상철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차가운 표정이었다. 이한이 붉은 기가 도는 흰창을 번들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시바다가 어디 있는지 아나?」
박기동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을 때 김상철이 물었다
「모릅니다, 저는.」
「이제까지 운 좋게 기웃거리며 살아왔지만, 그것이 오늘로 끝날지 모른다.」
김상철이 다시 물었다
「시바다는 어디에 있느냐?」
「이유미 씨가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여자는 시바다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른다는 초조감에 박기동은 필사적이 되었다.
「저는 심부름만 했을 따름으로, 예, 이유미 씨가 시바다의 돈을 찾아오라고 해서.」
「시바다와는 어떻게 연락을 하지?」
「그자가 제 사무실에 연락을 해 옵니다.」
「그놈과 연락을 하는 자는 누구냐?」
「예, 제가 알기로는 전남수와 오치호가, 자주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한이 소리 내어 한숨을 쉬었으므로 박기동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 김상철이 불을 붙였다.
「시바다 부하들의 영주권을 누가 해 주었지?」
「예, 관광과장 안인석 씨가 해 주었습니다.」
「누가 부탁을 했어?」
「예, 그것은 …….」
「너 아닌가?」
「저는 오치호의 심부름을 했을 뿐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이한을 돌아보았다
「이판석이를 불러라.」
이한이 튕겨 나가듯 몸을 일으키더니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것은 그들 둘뿐이다. 갑자기 박기동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장님, 저는 보잘것없는 놈이올시다.」
그는 흐느껴 울었다.
「어쩔 수 없이 이용당하고 살았습니다. 살려면 어느 한쪽의 제의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근대리아를 떠나겠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이한과 이판석이 들어섰다. 이판석은 박기동의 몰골을 보고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다. 김상철이 이판석에게 물었다.
「이자의 재산 상태를 말해라.」
「예, 사장님.」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낸 이판석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은행의 개인금고에 미화가 백오십만 달러, 엔화가 삼억 엔 정도가 있고 집 안의 금고에 미화가 칠십만 달러, 엔화가 삼억 엔, 거기에다 이번에 최태호한테서 구입한 마약 오백 그램이 있습니다.」
이판석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타운의 사채사무실에 보관된 현금이 미화가 팔십만 달러, 엔화가 이억 엔, 한국 원화가 삼억 원 정도가 있는 데다 깔려있는 돈이 미화로 백만 달러가 넘습니다.」
「‥‥‥‥‥」
「그리고 사업장 다섯 곳의 시가를 환산하면 미화로 약 삼백만 달러가량이 됩니다.」
「너는 이자가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이자한테 어떤 것을 배웠느냐?」
「돈을 벌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항상 강자에 붙어야 한다는 것도.」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김상철이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럼 말로가 어떻게 되는가도 보아라. 이자를 데리고 나가라.」
「사장님, 살려 주십시오.」
털썩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박기동이 울부짖었다.
「저는 약자였을 뿐입니다. 제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한이 손뼉을 치자 문이 열리면서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장님, 재산은 다 바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발버둥을 쳤으나 사내들에게 팔다리를 들린 박기동이 방을 나가자 방 안에 남은 것은 김상철과 이판석 둘이다.
「일을 맡을 준비는 되어 있겠지?」
소파에 등을 기댄 김상철이 묻자 이판석이 머리를 깊게 숙였다
「아직 부족합니다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분을 갖고 일을 하도록 해라. 내가 해 줄 충고는 그것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판석의 두 눈은 생기 있게 번쩍였고 입술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결의에 찬 표정이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이유미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귀국할 예정이었으므로 오늘은 일찍 쉴 생각이었다.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고 그녀가 마악 내렸을 때였다. 이유미는 좌우에서 다가오는 두 사내를 보았다.
「이유미 씨, 우리하고 같이 가셔야겠는데.」
사내 한 명이 대뜸 그녀의 팔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누구신데 …,」
잡힌 팔목을 빼내려는 듯 몸을 뒤로 젖힌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알 것 없어, 이 년아.」
옆으로 다가온 다른 사내가 거칠게 말을 받더니 다짜고짜 손바닥으로 이유미의 뺨을 후려쳤다.
「따라와. 반항하면 죽여서라도 끌고 간다.」
사내들이 양팔을 움켜쥐고 끌고 간 곳은 화물용 엘리베이터 앞이다. 서양인 부부가 그들을 스치고 지났으나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내 한 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이유미는 온몸을 떨었다. 도와줄 사람은 너무나도 멀리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지하 3층의 주차장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곧 벤이 다가오더니 문이 열렸다. 네 남녀를 쓸어 넣은 벤은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주차장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것 보세요. 왜 이러시는 거죠? 난 …….」
벤의 구석 자리에 박혀 앉은 이유미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는 둘러앉은 사내들에게 말했다. 한쪽 볼이 아직도 화끈거렸는데 부어오른 모양이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호텔을 빠져나온 밴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대로를 달려가는 중이다.
「그년 말이 많네. 누가 입에다 양말이나 박아 줘라.」
옆쪽의 누군가가 말하자 이유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자신의 무력감과 공포심이 섞여진 무의식 상태의 반응이었다.
「안인석이도 행방불명입니다. 아무래도 이유미나 박기동처럼 납치된 것 같은데요.」
보안과장 곽만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김상철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국장님.」
깊은 밤이다. 고속도로를 통행하는 차량들도 줄어들어 있어서 그들이 탄 승용차는 시속 백 마일이 넘는 속력을 내고 있었다.
「본부장이 바뀐 것을 알게 되자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
장동택은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이대각이 경비본부장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총무국장 오치호가 전격 임명된 것은 오늘 아침이다. 인사권을 쥔 총독의 결정이었으므로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으나 파격적인 인사였다. 경비본부 내에서 서열 2위였던 장동택도 4위의 오치호에게 밀린 것이다 장동택이 차창에서 시선을 떼었다.
「누구건 간에 범법을 한 자는 체포한다. 경비대는 어느 누구의 사유물이 아니야.」
「안인석은 체류 허가증 발급에 대한 의혹이 있어. 행정청의 고위직과 끈이 닿아 있을 테니 그놈들이 조바심을 내겠군.」
곽만수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 고위직이 이제는 직속상관인 경비본부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안인석이 시바다의 부하들에게 허가증을 발급해 줬고 그 일에 오치호가 관련되었다는 것은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카폰이 울렸으므로 장동택이 전화기를 들었다.
「장동택입니다.」
「장국장, 납니다.」
오치호의 목소리였다. 그는 어쨌든 근대그룹의 비서실 출신으로 이남호 실장과 총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다.
「장국장, 경비대에 A급 경계령을 내리라는 총독의 지시요. 오늘 밤 자정을 기해서 A급 경계령이 발동됩니다.」
장동택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2시 5분 전이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저도 본부로 들어가지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장동택이 입맛을 다셨다.
「총독이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군. A급 경계령이야.」
「A급 경계령이란 말씀입니까?」
놀란 곽만수가 눈을 크게 됐다. 그것은 계엄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이었지만 경비대 전 병력이 동원되어 경계 태세에 들어가게 된다. 주요 사업장과 관공서에 경비대가 배치되고 거리에는 경비대가 늘어서서 검문을 한다.
「총독만 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장님.」
곽만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 차례가 누가 될지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까요.」
김상철의 저택은 한때 빈집으로 방치되었다가 작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해서 새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통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었는데 방이 20개가 되었고 상주 인원만 해도 30명이 넘는다. 벽면의 통나무 결이 매끄럽게 반들거리는 응접실 안에서 김상철은 조태광과 마주 앉아 있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집 안의 곳곳에서는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다.
「오다 씨의 사무실 앞에는 1개 중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어서 부하들이 들어갈 수 없다는군요.」
조태광이 말을 이었다.
「오다 씨는 사무실에 갇혀 있는 형편입니다.」
오다 센자부로의 사무실은 시의 남동쪽에 위치한 5충 빌딩이었다. 경비대는 경비를 이유로 부하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다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 쪽 사업장은 어떠냐?」
「마찬가지입니다. 주요 사업장에 대규모 병력이 지켜 서 있습니다.」
방문이 열리더니 박미정이 들어섰다.
「오늘 밤, 무슨 일 있어요?」
다가선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별일 아니니까 먼저 올라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사람들이 모두 자지도 않고.」
「걱정할 것 없으니까 어서 올라가래도.」
이맛살을 찌푸린 박미정이 몸을 돌렸다. 방문이 닫히자 조태광이 입을 열었다.
「안인석은 시바다의 부하에게 허가증 사백 장을 만들어 주었다고 자백했습니다. 박기동의 말과도 일치합니다.」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면서?」
「예, 살려만 주면 근대리아와는 인연을 끊겠답니다.」
「이유미가 시바다를 만난 곳은 비어 있었습니다. 시바다가 눈치채고 피한 것 같습니다.」
김상철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1시 30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시바다는 경비대에서 정보를 받을 테니까 그놈의 정보망은 우리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인 무전기가 울렸으므로 조태광이 서둘러 집어 들었다
「무슨 일이야?」
대뜸 물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무전기의 스위치를 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비대의 트럭 열 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십오 분 후면 도착할 것 같다는데요.」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얼굴에 쓴웃음을 띠었다. 트럭 열 대분의 병력이면 1개 중대가 된다. 오다 센자부로의 사무실을 가로막은 병력과 거의 동수인 것이다. 정문의 경비책임자는 중국계 조선족 출신인 최인영으로 조태광과 동향 사람이었다. 전직이 이발사인 그는 초소의 손바닥만 하게 뚫린 창구멍으로 다가오는 트럭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소는 정문 안쪽에 세워졌지만 통나무 담과 맞붙여 세워진 곳에 창구멍이 나 있는 것이다.
「담장의 불을 꺼라.」
그가 말하자 담장 위에 켜져 있던 보안등이 일시에 꺼졌다. 트럭의 엔진소리가 더욱 요란해지면서 일렬종대로 달려오던 대열이 곧 정문 앞 50미터쯤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서치라이트.」
최인영의 명령에 좌우측 담장에 장착해 놓았던 서치라이트가 일제히 켜지면서 트럭의 대열을 비췄다. 트럭에서 내리던 경비대원 중에는 눈이 부신 듯 손등으로 눈을 가리는 자도 있었다. 경비대의 간부로 보이는 세 사내가 곧장 정문으로 다가왔다. 이곳은 타운의 외곽지대로 근처에는 민가도 없다. 최인영은 옆에 놓인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멈추시오.」
세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는데 정문과의 거리는 20미터 정도였다. 모두 방한복으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어서 드러난 피부는 없다.
「우린 경비대요. 저택을 경비하러 온 거요.」
왼쪽에 선 사내가 허리에 차고 있던 핸드 마이크를 입에 대고 소리쳤다.
「A급 경계령이 내렸소. 당신들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초소의 문이 열리더니 조태광이 들어섰다. 방한모를 집어 던진 그가 곧장 마이크를 쥐었다.
「여긴 사업장도 아닌 개인 저택이오. 1개 중대 병력으로 경비를 한다는 이유는 뭐요.」
「우린 명령을 받았을 뿐이오.」
트럭에서 내린 경비대원들은 곧 횡대로 벌려 섰으므로 담장을 에워싼 형국이 되었다. 모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차림이다
「좋아, 하지만 저택의 출입은 금지요. 만일 한 발짝이라도 저택 안에 발을 디뎠다가는 전쟁이오, 그쯤은 알고 있겠지?」
조태광이 마이크의 스위치를 끄고는 최인영을 바라보았다.
「경비대는 확실하다. 하지만 잘 지켜.」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님.」
최인영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저놈들은 가만히 두어도 얼어 죽을 겁니다.」
본부장실로 들어선 장동택이 눈을 부릅뜨고 오치호를 노려보았다.
「김상철 씨 저택에 경비대를 보낸 이유는 뭡니까?」
총무국장 한용식과 앉아 있던 오치호가 머리를 들었다.
「왜 그러시오? 뭐가 잘못되었소?」
「그를 자극시켜서 일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까?」
「이봐요, 장국장.」
오치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김상철 씨 저택이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받았단 말이오.」
「나는 그런 정보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자를 경계할 필요도 있소.」
자르듯 말한 오치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장국장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일을 일으키려고 한다니, 그렇게 날 모욕해도 되는 겁니까?」
「김상철의 부하들이 결집하고 있단 말이오. 타운과 근대시는 물론이고 소도시에 흩어진 부하들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어요. 당신들의 쓸데없는 짓 때문에.」
장동택이 그의 책상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그곳은 요새요. 1개 중대로 결딴을 낼 수 없단 말이오.」
「이 사람이 정말.」
「총독이 어떤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김상철을 공격한다면 부하들이 일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경비대 전 병력이 나서도 감당을 못해요.」
「말을 삼가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오치호가 상기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우리는 보호 차원에서 병력을 보낸 것이오. 공격한다니, 그리고 도대체 지금의 당신 태도는 뭐요?」
「보안국장인 나도 모르게 병력을 동원한 당신도 계통을 흐트려 놓은 거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군.」
이를 악문 오치호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당신과는 같이 일할 수가 없습니다, 장국장. 내 직권으로 당신을 보직 해임시키겠소.」
「나도 미련 없어. 당신 밑에서 일하기는 싫으니까.」
몸을 돌린 장동택이 문으로 다가가더니 손잡이를 잡고는 오치호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 눈에는 당신의 미래가 보여. 조심하시오, 오치호 본부장님.」
장동택이 방을 나가자 오치호가 한용식을 바라보았다
「이대각과 한통속인 놈이야. 더구나 아직도 한국의 안기부와 끈이 닿아 있고. 유사시에는 김상철에게 붙을 가능성이 있는 놈이야.」
「보안국에 그의 심복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정리해요. 당장 오늘 아침부터. 마침 제 발로 찾아와 사건을 만들어 주어서 다행이군.」
오치호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2시가 되었을 때 아래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났으므로 최인영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초소에 있던 부하들도 마찬가지여서 그중에는 자리를 차고 일어선 사내도 있다. 총성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는데 10여 정쯤의 소총 사격이었다. 트럭을 횡대로 세워 놓고 삼삼오오 모여 서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던 경비대는 당장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서로 고함을 질렀고 일부는 아래쪽의 어둠 속을 향해 무작정하고 총을 쏘았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저택에 있는 조태광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래쪽에서 경비대를 향해 사격을 합니다.」
「아래쪽에서? 누가?」
「그건 모릅니다. 경비대가 그들에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경비대는 대열을 겨우 수습하는 중이었다. 총성은 더욱 격렬해져 있었는데 이제 경비대가 그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저택에서 50미터쯤의 거리로 물러난 상태였는데 이쪽을 향해서도 총구를 겨누고 있다.
「이쪽으로도 사격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실장님.」
최인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절대로 먼저 사격하면 안 된다.」
전화기를 통해 김상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 순간 요란한 폭발음이 울리면서 통나무로 세워 만든 담장 한 부분이 폭발했고 그러자 위쪽에 세워 놓았던 대형 서치라이트가 떨어졌다.
「이쪽을 공격합니다. 놈들이 담장에 로켓포를 쏘았습니다.」
악을 쓰듯이 최인영이 소리쳤다. 다음 순간 총탄이 빗발 뿌리듯 담장에 맞아 다른 쪽의 서치라이트가 박살이 났다.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쳐들어온단 말이냐?」
「아직 아닙니다, 사격만.」
전화기를 손에 든 김상철이 조태광을 바라보았다. 저택의 주위는 온통 총성과 폭음으로 덮여 있었다. 유탄이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며 날았고 타오르는 담장의 불기둥이 밤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우리도 공격 할까요? 사상자가 ….」
최인영의 목소리는 다급해져 있었다. 사상자가 생겨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옆쪽의 전화기가 울렸으므로 조태광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김상철에게로 내밀었다.
「장국장입니다.」
김상철이 전화기에 귀를 대었다.
「장국장, 아래쪽에서 경비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시바다나 전남수의 부하들일 겁니다.」
장동택이 빠르게 말했다.
「그것은 경비대에게 구실을 주기 위해서 시늉만 하는 거요.」
「경비대는 우리를 공격하고 있어요.」
「절대로 대응하지 마세요. 놈들의 수단에 말려듭니다.」
다음 순간 로켓포탄이 응접실의 벽 근처에서 폭발했으므로 유리창이 부서지면서 파편이 휘날렸다.
「사격 중지!」
작전 과장 임복기가 핸드마이크로 다시 한번 소리치자 드문드문 울리던 소총의 발사음도 그쳤다. 근처에서 트럭 한 대가 불기둥을 뽑으며 타오르고 있었는데 아래쪽에서 발사된 로켓포에서 발사된 것이다. 그러나 아래쪽으로부터의 사격은 얼마쯤 전부터 그쳐있었고 저택에서는 무반응이다. 그는 무전병에게서 송수화기를 건네받고는 트럭의 바퀴를 짚고 일어셨다.
「본부장님, 저택에서는 이쪽으로 사격해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도 사격을 멈췄습니다.」
「협공하려는 거야. 아래쪽에서 멈췄다면 저택으로 밀고 올라가라. 지금 증원대가 가고 있으니 뒷걱정은 말고.」
오치호가 소리쳤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방법은 저택으로 치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마악 송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다시 신호음이 났으므로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송수화기를 귀에 대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장동택이야.」
그가 서두르듯 말했다.
「절대로 김상철을 공격하지 말아라, 임과장. 넌 오치호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어.」
트럭의 불길이 그의 얼굴에 흔들리는 불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오치호는 김상철이 경비대를 공격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거다. 아래쪽에서 경비대를 공격한 건 시바다나 전남수의 부하들이야.」
「국장님이 보직 해임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지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
「내가 금방 김상철과 통화했어. 공격할 생각도 없단 말이다!」
「하지만 본부장님이.」
「그놈은 미친놈이다. 그놈 말만 들었다간 애꿎은 부하들만 몰살당한다.」
「‥‥‥‥」
「그곳은 평지야. 저택 안팎에 이중으로 크레모아와 대전차 지뢰가 깔려 있단 말이야. 내가 가 보아서 안다. 1개 연대가 진입해도 힘든 곳이야. 오치호는 너희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김상철을 제거하려는 거야!」
「무전기를 잡고 시간을 끌어라. 김상철이 절대로 너희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 말을 믿고, 아래쪽 놈들은 이미 도주했을 것이다. 양쪽의 싸움을 붙이지 말고, 그것은 오치호가 시킨 일이야.」
그 시간에 오다 센자부로의 사무실 건물은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김상철의 저택 주변 상황과 마찬가지로 건물을 경비하던 경비대가 앞쪽에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인데 사상자가 여럿이었다. 더구나 건물 쪽에서도 여러 발의 총탄이 날아와 경비대원을 쓰러뜨렸으니 의심할 나위 없이 앞뒤에서 공격을 받는 셈이 되었다. 건물의 경비를 맡은 경비대 간부는 성질이 격한 사내였다. 그는 앞장을 서서 건물로 뛰어들었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는 오다의 부하에게 가차 없이 총을 쏘았다. 오다는 5층의 사무실까지 밀려갔는데 그곳에서 죽을 작정이었다. 건물은 요란한 총성으로 가득 찼고 어디선가 화재가 났는지 연기가 복도를 메우고 있다. 가토 이사무가 아래쪽 계단을 향해 베레타의 탄창이 비도록 10여 발을 연사한 다음 벽에 등을 붙였다. 이마에는 검댕이가 묻었고 저고리의 오른쪽 소매는 무엇에 걸렸는지 반쯤 뜯겨져 있다.
「유리창을 부숴라!」
아래쪽에서 연기가 뿜어 올라왔으므로 그가 소리쳤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어서 순식간에 5층까지 쫓겨 올라온 것이다. 소리나게 탄창을 갈아끼운 사토는 이를 악물었다. 건물 안에 있던 50여 명의 부하들 중에서 겨우 10여 명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다행인 것은 보스인 오다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유리창 부서지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났고 연기가 밖으로 빨려 나갔다. 그는 베레타를 움켜쥐고는 머리만을 내밀고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탄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났다. 그러자 반대편 모퉁이에 기대 서 있던 부하가 아래쪽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갈겼다
「형님, 보스가 부르십니다.」
부하 한 명이 달려오더니 헐떡이며 말했다. 오다는 복도 끝 쪽의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가 들어서자 마악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리엔트 호텔의 나카야마가 배신을 했다.」
눈을 부릅뜬 그가 사토를 노려보았다.
「시바다 겐지가 놈과 함께 있다. 금방 그놈과 통화를 했어.」
나카야마는 오다의 간부급 부하로 오리엔트 호텔과 그 근처에 있는 네 개의 사업장을 맡고 있었다. 복도 쪽에서 격렬한 총성이 울리더니 부하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렇다면 경비대가 시바다와 같이 우릴 공격한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오다가 허리춤에 찔러 넣은 콜트를 빼내 들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다. 모두 총독이 시킨 일이야. 김상철과 우리를 동시에 제거하려는 것이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총탄이 쏟아져 들어왔으므로 그들은 벽에 등을 붙였다. 전기가 나간 상태였지만 밖에서 비치는 불빛에 건물은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방 안으로 부하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보스, 경비대가 곧 올라옵니다.」
그의 한쪽 팔은 총에 맞아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5층 건물이어서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는 형편이다. 탁자 위에 던져 놓은 무전기에서 신호음이 울렸으므로 무전기를 움켜쥔 오다가 스위치를 켰다.
「오다 씨, 나 시바다요.」
시바다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투항하는 게 나을 텐데. 그래서 나하고 같이 근대리아의 사업장을 경영해 봅시다. 목숨을 걸고 하시모토에게 충성할 필요는 없소.」
「닥쳐! 이 간사한 자식아! 나는 네 계획을 안다. 사업장을 합법적으로 가로채려는 것이겠지만 뜻대로 안 될 것이다.」
오다가 무전기를 향해 고함을 쳤다.
「근대리아 정부도 그렇게는 못한다, 이 개자식아!」
그는 방바닥에 무전기를 던지고는 콜트를 겨누어 한 발을 쏘았다.
「이봐, 오다 센자부로.」
바닥이 어두웠으므로 총탄이 빗나가자 시바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는데 그쪽을 겨누고 쏜 두 번째의 총탄에 무전기는 박살이 났다.
4층의 복도에서 부하들과 함께 서 있던 강신규가 퍼뜩 눈을 치켜뜨고는 몸을 굳혔다. 전장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어서 모두가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는 태도였는데 그도 예외가 아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서두르는 중이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선 이대각이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큰 키의 강신규를 올려다보았다.
「네놈 계급이 뭐야?」
이대각의 목소리는 컸다. 그러자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덩달아서 총성도 뜸해졌다. 강신규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경비본부장이었던 이대각을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근대시 제3구역의 경비소장으로 계급은 과장입니다.」
「오치호가 공격을 하라더냐?」
이대각이 소리치듯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걸음 물러섰는데 정신을 가다듬은 모양으로 시선이 똑바로 이대각을 향해져 있다.
「당장에 철수해. 이건 내 명령이다.」
「안 됩니다, 부청장님.」
「그렇다면 너도 오치호와 함께 테러를 계획한 놈이란 말이냐? 정신 똑바로 차려.」
이대각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오치호는 곧 근대리아에 테러를 일으킨 죄목으로 체포될 것이다. 그놈은 야쿠자의 배신자인 시바다 겐지와 짜고서 이 일을 일으켰단 말이다.」
「하지만 본부장님.」
「닥치고 내 말을 들어, 이 개자식아!」
기세에 눌린 강신규가 주춤대자 그가 말을 이었다.
「건물 앞의 경비대를 앞뒤에서 공격한 것은 시바다의 부하였다. 위층에 있는 오다 센자부로가 아니었어. 오치호와 시바다가 짜고 한 짓이란 말이다.」
그가 주위에 둘러선 경비대원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 철수해라! 어서!」
행정청 부청장의 명령이다. 경비대원들이 한두 사람씩 몸을 돌리더니 금방 복도가 비워졌다. 그러나 강신규는 그 자세로 그대로 서 있었으므로 무전병과 부관이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거렸다. 이대각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왜 안 내려가고 있는 거냐?」
「본부장은 총독님 지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대각이 쓴웃음을 지었다.
「총독의 지시를 사칭한 것이다. 네가 총독의 지시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어?」
「없습니다.」
「총독은 청장과 부청장인 나에게만 직접 지시를 한다. 오치호 같은 말단한테는 전화 지시도 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렇다면 ….」
「오치호가 정부를 뒤엎으려고 계획한 짓이야. 야쿠자와 한국인 깡패를 천 명이 넘게 끌어모아 김상철과 오다 센자부로의 세력을 제거하면 근대리아를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 더구나 강미현 씨한테 잘 보여서 경비본부장까지 되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의심하기 시작하자 서둘러 오늘 일을 일으킨 것이다. 이제 이해가 가나?」
「예, 부청장님.」
무전병이 등에 맨 무전기가 아까부터 울려대고 있었으나 무전병조차도 무전기를 들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걸어 온 것인지 뻔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은 어떻게 된 거야?」
경비본부의 상황실 안이다. 오치호가 소리치듯 묻자 총무국장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본부장님, 계획이 조금 빗나갔습니다. 김상철의 저택 앞에서도 병력이 철수하는 중이고 콘티넨탈 호텔의 경비대도 같은 상황입니다.」
「장동택이 이놈이.」
오치호가 입술만을 움직여 그렇게 말했지만 총무과장 한용식은 알아들었다. 그도 목소리를 죽였다.
「하지만 염려하실 건 없습니다. 경비대는 자위 수단을 썼을 뿐이니까요. 그자들은 경비대에 대적할 용기도 힘도 없습니다.」
새벽 3시 30분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있었지만 상황실의 누구 한 사람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모두 긴박감에 싸여 있는 것이다. 근대리아 최대 세력인 김상철이 저택을 경계하는 경비대를 공격했고 야쿠자의 오다 센자부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리아 정부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전쟁이 터질 순간에 장동택의 설득으로 김상철과 이한의 본거지에서 병력이 철수한 것이다.
「오늘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이것은 총독의 지시다.」
그는 힐끗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3시 35분이다.
「근대리아의 운명이 걸려 있는 일이야. 오늘 내부 재정리를 하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책상 위의 전화기가 울렸으므로 그는 말을 멈췄다. 백색전화기였으니 본부장 직통이다. 그는 서둘러 전화기를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어떻게 되었어요?」
강미현의 목소리였으므로 그는 몸을 세웠다.
「김상철의 저택과 콘티넨탈 호텔에서 철수하고 있습니다. 장동택이 이간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시바다는 옛 조직을 장악했다면서요?」
「예,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시바다는 이제 전남수의 친위 세력과 함께 경비대를 보좌하는 양대 세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다의 거취가 불투명했으므로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비소장 강신규가 갑자기 무전 연락을 끊은 것에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다.
「그럼 기다리겠어요.」
그렇게 말한 강미현이 전화를 끊었다. 그렇다고 서두르는 것 같지도 않은 차분한 말투였는데 그것이 오치호에게 냉정을 되찾게 해 주었다. 그는 한용식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런 빌어먹을.」
시바다 겐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작만 했지 끝맺음을 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빌어먹을 경비대 놈들은.」
「오다 센자부로는 목숨만은 건졌지만 이제 벌거벗은 몸입니다. 보스, 우리는 목적 달성을 했습니다.」
앞에 선 나카무라가 말하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김상철의 세력이 그대로 있는 한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방은 개조되어 있었지만 그는 전에 사용하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나카무라의 표현대로 오다 센자부로가 거느렸던 이나카와회의 부하들은 대부분이 귀순해 온 것이다. 몇 달 동안 치밀하게 사전 공작을 해 온 데다 거의가 예전 부하들이다. 간부급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오다나 시바다는 마찬가지의 보스일 뿐이다. 강한 자가 보스가 되고 보스는 부하들을 장악한다. 더욱이 중간 간부급 부하들을 흔들리게 한 것은 시바다가 근대리아 정부의 힘을 업고 경비대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시바다 쪽으로 기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는 법이다. 근대시 외곽의 사업장을 관리하는 나가노와 타운의 후바쓰, 간바 등의 간부급 보스들이 저항 세력을 모으고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시바다는 며칠 사이에 그들을 소탕할 자신이 있었다.
「오치호는 본부장감이 아니야. 그놈이 잔재주는 뛰어날지 몰라도 큰일을 같이 할 놈이 못 돼. 내 이럴 줄 알았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방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숨어 지내는 동안 시바다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있었다.
「오늘 당장부터 김상철은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이젠 드러내놓고 싸우게 되었어.」
「보스, 경비대가 있습니다. 그렇게까지는.」
「오치호의 장악력이 문제 아닌가? 오늘 밤의 일을 보란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시바다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3시 50분이었다. 북극의 날이 새려면 아직 다섯 시간은 더 남아 있기는 했다.
「이런 제기랄, 개자식들이 또.」
최인영이 창구멍을 내다보며 바짝 긴장을 했다. 저택을 향해 트럭의 대열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20대가 넘는다. 옆쪽의 적외선 스코프로 어둠 속을 바라보던 부하가 차분하게 말했다.
「스물두 대입니다. 모두 경비대 차량입니다. 거리는 사백 미터,」
이미 20분쯤 전에 트럭이 국도에서 저택으로 휘어지는 도로에 들어섰을 때 연락을 받았으므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무전기의 신호음이 울렸다.
「예, 최인영입니다.」
서둘러 무전기를 집어 들자 조태광의 목소리가 초소를 가득 메웠다.
「철수해라, 지금 당장.」
「지금 말입니까?」
「부하들을 데리고 전원 철수야, 어서!」
「예.」
무전기를 든 채 최인영이 소리쳤다
「철수다. 모두 저택 동쪽의 지하도로 모인다. 서둘러라!」
방한모를 눌러쓴 그가 저택의 넓은 정원을 달려 동쪽 건물의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저택의 모든 인원이 지하도로 들어간 후였다. 지하도의 입구에서 조태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마지막이다, 어서.」
그들이 지하도의 안으로 들어서자 부하들이 육중한 철문을 안으로 닫았다.
「지금 온 놈들은 경비대가 아니야. 오치호가 전남수의 부하들을 보낸 것이다.」
폭이 2미터 정도의 지하도를 나란히 달리면서 조태광이 말했다. 짙은 향냄새가 코를 찌르는 이곳은 저택 경비원들만의 힘으로 근래에 완성된 것이다.
「놈들은 저택을 아예 박살을 낼 것이다. 오늘 중으로 일을 끝낼 작정이야.」
앞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하도의 끝은 저택 밖의 숲이다. 숲을 지나면 눈에 덮인 대평원이 나온다. 평원의 위쪽은 끝없이 펼쳐졌지만 남쪽은 근대타운이고 서쪽으로 가면 근대시에 닿는 것이다. 지하도의 끝 쪽에는 스키 장비들이 놓여져 있었으므로 수십 명의 남녀는 제각기 하나씩 스키장비를 메고 지하도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숲을 지날 때 뒤쪽의 저택에서 폭음이 났다. 한두 번이 아닌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크례모아의 폭음이었다. 그러자 갖가지의 총기에서 발사되는 총성이 밤하늘을 메웠고 로켓탄이 폭발했다. 빈 저택을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크레모아가 터졌으니 조금 더 다가오면 지뢰밭에 들어설 것이다. 그곳을 겨우 건너 정원으로 들어서면 다시 크레모아가 기다리고 있다. 숲을 헤쳐나가던 김상철이 다가와 박미정의 손을 잡았다. 방한복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고 두터운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힘주어 잡는 그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방한 안경 안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박미정도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뒤쪽의 폭음이 요란한데다 숲길이 험해서 여러 번 비틀거렸지만 그녀는 전혀 두렵거나 초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 8시 30분에 행정청으로 출근한 총독은 집무실로 정부의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원탁에 둘러앉은 간부들의 면면은 비서실장 이남호와 행정청장 유장석, 부청장 이대각에 경비본부장 오치호, 그리고 총독 보좌관 강미현이다.
총독의 표정은 어두웠다. 두 눈이 충혈되어있는 것은 그도 어젯밤을 뜬눈으로 새웠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녹차 잔을 들어 건성으로 한 모금 삼킨 총독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사건은 밤새도록 보고를 받았으니 현 상황과 대책을 듣기로 하지. 그래, 김상철은 지금 어디에 있나?」
「콘티넨탈 호텔에 부하들과 같이 있습니다.」
대답한 것은 오치호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지방에 나가 있던 그레고리 파트킨 등 부하들을 불러 모았는데 숫자가 삼천 명이 넘습니다.」
모두 잠자코 있었으므로 그의 목소리만 방을 울렸다.
「오다 센자부로가 그와 합류했습니다.」
총독이 유장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주민이나 관광객들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만 분위기가 조금 ….」
말끝을 흐린 유장석이 힐끗 오치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경비대 내부 분위기는 아주 좋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러자 오치호가 총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부 분열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분열시킨 장본인이 있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총독이 눈을 껌벅이며 오치호를 바라보았다.
「그, 시바다 아무개라는 놈, 지금 어디에 있나?」
이번에는 오치호가 눈을 깜박이며 총독을 바라보았다.
「예, 지금 오리엔트 호텔에. 저희 경비대가 보호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침에 일본 정부로부터의 항의문을 대표부가 가져왔어. 아주 강경해.」
「‥‥‥‥」
「우리 경비대가 시바다하고 연합해서 일본인의 재산을 강탈했고 일본인을 살상했다는 내용이야.」
「답변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들이 경비하고 있던 우리 경비대를 먼저 …….」
「극동군 사령관 로스토프도 전문을 보내왔어. 정국이 불안해서 우려하고 있다는군.」
다시 총독이 말머리를 돌렸으므로 오치호가 몸을 굳혔다. 잠자코 있던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합니다. 김상철이 조금 전에 저한테 연락을 해 왔습니다.」
헛기침을 한 그가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겁니다.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것인데 엄포 같지가 않습니다.」
총독이 입을 꾹 다물고 위쪽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회의 전에 그로부터 보고를 받았다는 표시였다. 이남호는 돌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저택은 폐허가 되었는데 사상자가 육십 명 가깝게 났습니다.」
「그, 사상자가 모두 민간인이라며?」
「예, 한국에서 건너 온 사람들로 …….」
이남호와 총독의 대화를 듣던 이대각이 헛기침을 했다.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모아졌다.
「어젯밤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김상철과 타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머리를 뒤로 젖힌 그가 총독을 바라보았다.
「경비대를 동원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경비대는 더 이상 본부장은 물론 총독의 명령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과 장동택의 잘못이야. 당신은 총독과 경비대를 이간질 시켰어!」
눈을 부릅뜬 오치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반역자야. 감히 총독의 면전에서 뻔뻔스럽게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다니.」
턱을 치켜든 이대각은 아예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러자 총독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가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경비본부장을 해임시키고 그 자리에 다시 이대각을 앉혀야 될 것 같은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오치호의 시선이 이리저리 옮겨졌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은 없다.
「그래야 수습이 되겠어. 당신들 생각은 어떤가?」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이남호가 말했고 유장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총독님.」
당사자인 이대각은 시선을 들어 위쪽의 벽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강미현은 회의가 끝났다는 듯이 앞에 놓인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5. 재정비
방 안으로 들어선 김상철은 잠자코 소파로 다가가 이유미의 앞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한두 점씩 눈발이 보이는 흐린 날씨였다. 이유미는 스웨터에 바지 차림으로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몸을 굳힌 이유미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는데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다. 끌려오고 나서 처음으로 그를 만나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시바다와의 관계 때문에 잡아두자는 말들이 있었지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었었어.」
김상철이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군, 시바다 정부(情婦)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어서.」
「그냥 부탁만 받았을 뿐예요, 심부름만.」
무릎 위에 두 손을 움켜쥔 이유미가 그의 시선을 받았다. 가슴이 세차게 고동을 쳤고 목소리가 떨려 나온 것은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본능적인 예감 때문이다.
「아는 사실은 모두 말했어요. 시바다의 은신처나, 구좌번호, 그리고 그가 했던 이야기를 모두‥‥‥」
「넌 기회만 있으면 다시 그자와 만날 여자이고 언제든지 나한테 해를 끼칠 인물이야, 너는 악의가 없다고 하겠지만 말이지.」
「그렇지 않아요.」
눈을 크게 뜬 이유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전 이제 안인석 씨하고도 연락을 끊었어요. 당신한테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고 유감도 없어요.」
「시바다의 정부인 너를 인질로 그놈을 끌어들이자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놈이야 끌려들지 않겠지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거야, 나하고 인과관계가 없다니 그럼 그렇게 하지.」
「‥‥‥‥‥」
「널 만난 남자는 모두가 불행해졌다. 안인석은 물론 네 전남편, 그리고 시바다. 물론 시바다야 직업적인 관계겠지만 어쨌든 …」
「날 보내줘요.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테니.」
이제 얼굴을 하얗게 굳힌 이유미가 말했다. 크게 뜬 두 눈에 가득 물기가 배어져 있었는데 이윽고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상철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내였으므로 무력감에 휩싸인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서울에 돌아가 있어. 일이 수습될 때까지.」
「사건이 정리되면 그땐 다시 나와도 돼. 당신은 그땐 스폰서가 모두 없어졌을 테니 내가 뒤를 봐줄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강한 자가 선이었고 배신당하고 이용당한 자는 약자였어. 당신을 나무랄 수만도 없어.」
「시바다의 행방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김상철을 향해 변순태가 말을 이었다.
「지금 오리엔트 호텔 근처는 어수선합니다. 시바다의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호텔과 카지노의 금고를 부숴 현금을 털었고 서류를 태우거나 찢어 던지는 바람에.」
콘티넨탈 호텔 지하실에 있는 사무실 안이었다.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은 사내들은 김상철과 이한, 그레고리와 변순태, 그리고 오다 센자부로 등이었다. 아침 10시였지만 지하실이어서 천장의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다. 그레고리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새끼는 겨우 몇 시간을 버티려고 그 짓을 했군.」
유창한 한국말이다. 그가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잡아서 없애 버립시다.」
조금 전 근대리아 정부에서는 어젯밤 사건의 수습책으로 오치호를 해임시켰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다시 이대각이 경비본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경비대는 김상철의 요구대로 시바다와 그의 부하들을 체포할 계획이었다.
오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돌아가겠습니다.」
김상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머리를 숙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이대각에 의해 겨우 궁지에서 빠져나온 그는 이한과 합류해 있었던 것이다. 오다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정부 측에서 전남수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어. 강미현이 가로막고 있는 모양이야.」
한숨도 자지 못한 터라 그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이번에 강미현은 너무 서둘렀다. 시바다를 잡으려고 우리가 압박해 오자 경비대를 완전히 장악하기도 전에 일을 벌인 거야. 물론 일이 잘 안 되어도 우리가 어쩌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만심도 있었을 것이다.」
근대리아의 주인은 근대그룹인 것이다. 그것은 임차계약에도 나와 있는 상황인 만큼 근대그룹의 소유주인 강씨 일가는 러시아로부터 근대리아의 통치권을 보장받은 셈이었다. 강미현은 그것을 믿은 것이 틀림없었다.
김상철이 이한과 변순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너희들은 시바다를 찾아라. 그놈은 아마 근처에 있을 것이다.」
「강미현과 전남수는 서로 연락을 하고 있겠지요.」
변순태가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치호와 경비대 간부 몇 명을 해임시키는 것으로 총독은 일을 수습할 계획이야. 뿌리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채 밑 몇 개만 자른 것이다.」
그는 입술만을 비틀어 웃었다.
「이대각 씨를 본부장에 앉힌 것은 고도의 용병술이다. 이대각 씨를 완충 역할로 이용하려는 거야.」
근원은 강미현과 김상철의 반목이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김상철에 대한 강미현의 견제였다. 따라서 그의 말대로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었다. 시바다와 전남수가 제거되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의 상황인 것이다.
근대공항의 출국장은 사면이 유리 벽으로 되어 있어서 활주로는 물론 근대시로 향하는 고속도로도 한눈에 바라볼 수가 있다. 동쪽은 흰 눈에 덮인 대평원이었다. 눈이 내릴 것 같은 흐린 날씨였으므로 짙은 회색 하늘에 깔린 지평선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광활한 대륙이다. 인간은 물론 짐승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던 땅이었다.
머리를 돌린 박기동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1시 10분이었다. 이제 손가방 하나만 들고 서울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으니 빈손으로 들어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입장이다. 저도 모르게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금액으로 계산하면 천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쥐었다가 순식간에 무일푼이 된 것이다. 5년 동안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번 돈이었다. 입맛을 다신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기는 했다. 이번에도 김상철이 지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저쪽 평원의 눈 밑에 누워 있게 되었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옆자리에 않았으므로 그는 머리를 들었다.
「아니?」
놀란 그가 입과 눈을 딱 벌렸다 안인석이었던 것이다
「여기 웬일이시오?」
「나도 서울 갑니다.」
그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그도 손가방 하나만을 든 차림이었는데 박기동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활주로를 바라보고 있다.
「어쨌든 살아서 다행이오, 반갑습니다.」
박기동이 부드럽게 말하자 안인석이 쓰게 웃었다. 안내방송이 들렸으나 서울행은 아니었다.
「그런데 안형, 그 이유미 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풀려났나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하긴 시바다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모양이군.」
사람을 상대할 때 언제나 활기를 보이는 것이 박기동의 버릇이다. 그것이 지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것이다.
「듣자 하니 어젯밤에 전세가 두 번이나 뒤집혀졌던 모양이오. 시바다는 다시 도주했답니다.」
「나는 이제 관심 없습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요.」
「김상철과 총독과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젯밤은 전초전이었을 뿐이오.」
그러자 안인석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박사장은 살아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물론 다행이지.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으니까.」
「허나 살아남았으니 다시 궁리를 해야만 되는 것 아닙니까? 난 근대리아에 있는 모든 재산의 포기각서를 쓴 대가로 살아 나왔으니 누구한테 빚진 것도 없어요.」
「‥‥‥‥‥」
「안형이야 김상철이하고 오랜 인연이 있었으니 나하고는 입장이 다릅니다.」
「인연은 무슨, 이젠 악연뿐이오.」
「내 재산을 찾겠어, 나는.」
박기동이 활주로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이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오.」
「설령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런 노력이라도 하면서 살아야 살아갈 힘을 얻을 거요.」
이번에는 그들이 타고 갈 서울행 비행기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은 탑승객의 대열에 끼어들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깨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이남호의 사무실 안이다. 다소 지친 표정의 이남호가 테이블 건너편의 강미현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흐렸던 하늘에서 한두 점씩 눈발이 보이기 시작하는 오전 열두 시경이다.
「이번 일로 김상철과는 완전한 적대관계가 되었어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면 안 돼요. 이젠 수습할 차례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가씨.」
전에는 반말을 썼으나 요즘은 존대를 한다. 하지만 훈계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강미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실장님은 이번 일로 김상철의 진면목이 확인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왜냐하면 그냥 앉아서 당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우리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자가 먼저 숨통을 조여 왔을 거예요.」
「아가씨가 노골적으로 견제 세력을 키워 왔기 때문이오. 시바다 겐지를 끌어들인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로부터도 수배 받고 있는 인물을 말이오.」
이맛살을 찌푸린 강미현이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남호가 담배를 꺼내 들었으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대각과 장동택이 아니었다면 어젯밤 일이 성공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랬을 수도 있었어요.」
「어젯밤 김상철은 총 한 발 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아예 저택에서 철수했단 말이오.」
「이대각과 장동택을 경비대에 복귀시킨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현 상황에서 김상철에게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그들 뿐이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짙은 연기를 테이블 위로 뱉었다.
「아가씨, 근대리아를 파국으로 끌고 가면 안 됩니다. 아가씨는 너무 무리하고 있어요. 너무 서두르기도 하고.」
강미현이 잠자코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라는 것을 이남호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총독께서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어젯밤의 상황을 아가씨는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으셨더군요.」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렇다고 전남수에게 경비대 트럭을 빌려줘서 김상철을 공격하게 한 것은 잘못입니다. 김상철은 모두 알고 있단 말입니다.」
「경비대 안에 스파이가 있었어요.」
「그것은 이유가 될 수가 없어요. 아가씨.」
마침내 이남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김상철은 아가씨의 귀국을 요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놀라실까 봐 내가 아가씨께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까지 말했단 말이오.」
그러자 강미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는데 입술 끝을 떨었다. 억지웃음이다.
「그러리라고 예상했어요.」
「우리는 그놈에게 명분을 주었단 말이오.」
「우리 힘이 약하다는 핑계밖에 되지 않아요. 그 말은.」
「총독은 유장석과 이대각에게 중재를 맡겼습니다.」
「점점 김상철의 위상이 높아져 가는군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솔직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남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난 아가씨를 곁에서 겪어 보아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놀랍니다. 저돌적이고 결단력이 강한 건 할아버지를 닮았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겉과는 달리 치밀한 분이오. 준비가 완벽하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저한테 실망하셨어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아가씨의 역량과 재능을 시험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요.」
「‥‥‥‥」
「도대체 왜 그렇게 서둘렀습니까? 김상철이 체류 허가증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 텐데 말이오.」
자리에서 일어선 강미현이 이남호를 내려다보았다.
「이번 일로 많은 걸 알게 되었어요. 물론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그녀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 올렸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소득이에요. 물론 두 번 다시 이런 실패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찻잔을 내려놓은 전남수는 부하로부터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전남수올시다.」
「나, 한용식이오.」
경비대의 총무국장 한용식과는 여러 번 술자리를 같이 한 사이였다.
「한국장, 지금 어디시오?」
전남수가 서두르듯 물었다. 오늘 아침부터 그와는 통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경비본부장이 이대각으로 재임명되고 오치호가 해임되어 대기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침 9시경이었다. 상황이 끝난 것이다. 김상철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전세를 뒤집었는데 그것은 그의 막강한 조직이 결집되어 있는 데다 경비대 내부의 반란 때문이었다.
「난 지금 대아센터에 와 있어요. 이층의 밀실에 있습니다.」
한용식이 차분하게 말했다.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바로 와 주셔야겠는데.」
「가지요. 지금 당장.」
대아센터는 경비대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앉은 빌딩으로 경비대 간부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쓰이는 곳이다. 이층의 밀실이면 중국식당으로 한용식과 자주 만난 장소였다.
「그런데 한국장은 괜찮습니까?」
생각난 듯 전남수가 묻자 그는 피식 웃는 것 같았다.
「난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럼 오본부장은?」
「대기발령 상태지만 곧 회복될 거요.」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기세에 잠시 밀렸다지만 배후에는 절대자인 총독 일가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전남수의 얼굴에 모처럼 생기가 떠올라 있었다.
「배국철과 이응만을 불러라. 지금 대아센터로 간다.」
배국철과 이응만은 그의 심복으로 한국에서 지방 도시를 휘어잡고 있던 보스들이다. 그들은 전남수와 함께 거대한 대륙에서 뜻을 펼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이제까지는 그것이 실현되어 가는 중이었다. 삼십 대 중반의 그들이 들어서자 전남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아센터로 한국장을 만나러 간다. 준비하도록.」
이한에게 이빨이 몽땅 부서지고 나서 그는 틀니를 해 박았는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그리고 매사에 철저한 성격의 전남수였다. 그의 사무실 빌딩 안에는 백오십이 넘는 부하들이 있었고 움직일 때는 미국 대통령 못지않은 경호를 한다.
그가 대아센터의 현관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건물 안에는 헬스클럽과 사우나가 있었으므로 로비에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경비대원들도 섞여 있었다. 배국철과 이응만, 거기에다 십여 명의 경호원까지 대동한 그는 곧장 이층의 계단을 올라 중국식당으로 들어섰다. 낯익은 종업원이 다가와 그를 안쪽의 밀실로 안내해 갔다. 밀실에는 한용식이 혼자 앉아 요리접시를 앞에 놓고 중국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어서 오시오, 전사장.」
그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오본부장이 움직이기가 조금 불편해서 내가 왔습니다.」
「어쨌든 다행이오, 한국장은 별 탈이 없다니.」
자리에 앉은 전남수가 입맛을 다셨다.
「우리가 김상철이를 쳤을 때는 이미 빈집이었어요. 경비대 내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한용식이 전남수의 잔에 고량주를 채웠다.
「시바다 겐지가 다시 잠적한 바람에 오다가 대숙청을 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것도 전남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오다 센자부로는 우선 오리엔트 호텔의 관리책임자였던 나까야마의 목을 베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나까야마는 시바다가 모습을 내밀자 재빠르게 그에게 가담한 오다의 부하이다. 그리고 오다는 수십 명의 간부급 가담자를 잡아들이고 있었는데 김상철의 부하들이 그를 돕는다는 것이다.
「경비대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대각이와 장동택이 자리를 차고앉았으니 거북하지 않겠습니까?」
말머리를 돌린 전남수가 요점을 물었다.
「아마 조금은 그렇겠지요.」
한 모금에 술을 삼킨 한용식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총독이 건재하고 있는 한 우리가 걱정할 것은‥‥J
문이 열렸으므로 그들은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경비대 간부 두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깨의 견장을 보면 과장급 간부였다. 그들은 한용식의 양쪽에 서더니 전남수를 바라보았다.
「죽였다는 증거로 목을 베어가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셔서.」
사내 한 명이 자신을 향해 말했으므로 영문을 모르는 전남수가 한용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한용식의 얼굴이 이미 돌처럼 굳어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자 그다음 순간 사내들은 일제히 권총을 뽑아 들었다. 총구에 소음기가 끼워진 긴 총신이 자신에게 겨누어지자 전남수가 한용식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날 배신하다니.」
그러자 사내 하나가 웃었다.
「나는 김사장님의 부하로 변순태라는 사람이다. 사무실에만 숨어 지내니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겠지.」
그는 총구를 전남수의 이마를 향해 겨누었다.
「이층에 올라온 네 부하들은 모두 죽었다. 네가 마지막이여.」
전남수가 크게 뜬 눈으로 변순태를 바라보았다. 이미 얼굴에는 핏기 한 점 보이지 않는다. 다음 순간 변순태의 총구에서 섬광이 튀면서 낮고 둔한 발사음이 났다. 벌떡 머리를 뒤로 젖힌 전남수가 의자와 함께 방바닥으로 넘어지자 변순태는 테이블을 돌아 확인하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마 한복판에 동전만 한 구멍이 뚫린 전남수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전남수를 비롯한 그의 간부급 부하 두 명이 경호원 여덟 명과 함께 중국식당에서 몰사했다는 소식은 한 시간도 안 되어 근대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근대시의 북한 대표부 안이다. 환하게 불을 밝힌 회의실에는 대표부의 간부들이 소집되어 있었는데 의제는 물론 전남수 사건이다. 박기환이 입을 열었다.
「경비대는 시체들을 공립의료원 영안실에 옮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전남수가 중국식당에 누굴 만나려고 갔나?」
서일이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대표 동지.」
「그곳은 경비대 간부들이 자주 가는 곳입니다. 전남수는 그곳에서 오치호와 한용식 등 간부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이금철이 대신 말했다.
「경비대원이 가득 차 있는 건물에서 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는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 경비대의 협조가 없는 한 말이지요.」
「일리가 있어.」
서일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대각과 장동택이 다시 경비대를 장악했고 그자들은 김상철의 인맥이야. 그렇다면 경비대가 도왔겠군.」
「경비대가 사건을 재빨리 덮어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와도 맞습니다.」
그러자 서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강미현과 총독이 김상철의 세력에 밀린 증거라고도 볼 수가 있어. 강미현의 세력이 잘려 나가는 것이 말이야.」
「아마 타협을 한 것 같습니다. 대표 동지.」
그렇게 대답한 것은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장호성이다. 그가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서일을 바라보았다.
「정부가 불리한 상황을 잠시 모면하려고 말입니다.」
「김상철이 정부를 전복시킬 가능성이 있을까?」
서일이 탁자 위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이 벽의 한쪽에 고정되어 있다
「러시아와 근대의 계약에는 근대리아의 임차인은 근대그룹의 강우진으로 되어 있어. 총독은 명실상부한 근대리아의 주인이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은 그의 가계만이 근대리아를 통치하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어. 공식적으로 김상철이 근대리아를 전복할 명분은 없단 말이야.」
「하지만 정부의 요직과 기간시설, 주요 사업장을 장악하면 총독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총독은 그것 때문에 김상철을 견제한 것이지요.」
장호성이 말하자 서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말석에 앉은 최태호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는 언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북한은 이미 근대리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상태여서 근대리아의 장래에 무관심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 시간에 이대각은 승용차의 뒷자리에 앉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승용차는 근대시를 벗어나 북쪽으로 뻗은 고속도로 위를 총알같이 달려가는 중이다.
「전남수를 대신할 관리자는 제가 찾아보도록 하지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대각이 말하자 강미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장동택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시바다가 남아 있지만 곧 잡히겠지요.」
「꼭 그랬어야만 했나요?」
강미현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또렷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담당관님.」
「그 정도로 끝낸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김상철은 오늘 밤 안으로 일을 벌였을 겁니다.」
「‥‥‥‥」
「그리고 그 여파가 담당관께 미칠 것이 틀림없었지요.」
「잘 알았어요.」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고하셨어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대각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불만인 모양이군. 내 처사가.」
그러자 장동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야 임시방편으로 우리를 재임용했지만 불안하군요. 언제 뒤에서 총을 맞을지 모릅니다, 본부장님,」
「설마, 그럴 리야. 아무리 총독의 후계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는.」
「이번에는 이것으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본부장님과 저를 김상철의 인맥이라고 믿고 있는 이상은.」
머리를 든 이대각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경우에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
「상황에 따를 밖에요. 법대로 진행시킨다고 하면 개도 웃을 노릇이니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처신하겠습니다.」
「…………」
「김상철은 조직원뿐만 아니라 한인 이주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의 조직이 주민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도 김상철 때문이란 말입니다.」
「글쎄, 그걸 누가 모르나? 총독도 그럴 목적으로 김상철을 내세웠었어.」
「그런데 지금 와서 자리가 위험하다고 그를 치다니요? 제가 보기에는 김상철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강미현의 노파심이 이런 분란을 만든 겁니다.」
「솔직히 장래가 염려됩니다, 본부장님.」
「똑똑한 여자야. 할아버지 못지않아.」
「여자는 여자지요.」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각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강미현뿐만 아니라 총독도 이제는 김상철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그들은 더욱 김상철을 경계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다시 폭발할 소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미현 쪽에서 일어난다.
장동택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숨을 뱉었다.
「저는 전직이 안기부 직원이었고 제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제가 자원해서 이 눈밭에 온 이상 제 소신대로 일하겠습니다.」
이대각이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는 눈치였는데 찾지 못하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내가 근대 밥을 이십 년이 넘게 먹다 보니까 근대 사람이 되었어. 총독의 말씀이 곧 법이고,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내 사명이 되었지. 솔직히 난 주관이 없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어. 하나는 내 생명의 은인이고 또 하나는 내 인생의 교사였으니까.」
중국인 거리의 홍등가는 골목이 좁은 데다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대문마다 붉은색 종이등을 달아 놓았다. 종이등에는 갖가지 상호가 씌어져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드물었다. 따라서 손님들은 단골집의 특징을 기억해 두었다가 찾아 들어간다. 화구(花九)장의 특징은 문짝에 알루미늄판을 댄 것이었다. 집주인 적씨가 근대시의 공단에서 주워 온 것으로 그것이 밤에는 희게 보였으므로 찾기가 쉬웠다. 사또 이사무가 이시까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사내가 다가와 가로막듯이 섰다.
「아는 여자 있소?」
한눈에 이쪽이 일본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으로 일본어로 묻는다. 사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문 안은 바로 다섯 평쯤 되어 보이는 대기실이었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서너 명의 사내는 그의 시선을 일제히 피했다.
「매영을 불러 줘.」
「롱이오. 숏이오?」
「롱이야.」
「그렇다면 지금부터 오백 달러야. 열두 시 넘으면 삼백 달러로 깎아줄 수 있어.」
「지금부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 사또가 계산을 치르자 사내는 이시까와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은?」
「나는 아무나.」
이시까와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사또도 그렇지만 그도 중국인의 홍등가는 처음이었다. 만족한 표정의 사내가 커튼을 들치고 안쪽으로 사라지자 그들은 소파에 앉았다.
「시간은 별로 안 걸릴 것이다. 삼십 분 후에 대문 앞으로 나와 있어.」
사또가 이시까와의 목덜미에 대고 낮게 말했다.
「주의해라. 안에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바다 겐지가 데려온 부하 한 명이 화구장의 매영과 단골 관계라는 정보를 얻은 것은 오늘 오후였다. 시바다가 다시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지만 그와 그의 부하 오십여 명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오다는 예민해져 있었다. 시바다와 내통했던 부하들의 숙청작업도 이미 끝난 상태였는데 간부급은 목을 잘랐고 말단은 총살을 했다. 처음에는 김상철이 부하들을 보내어 오다를 지원했지만 이틀 후에 일본에서 이백 명 가까운 회원이 몰려와 조직을 보강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원흉인 시바다와 그의 부하들이 살아 있는 한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 오늘도 중국인 정보원에게서 들은 신빙성 없는 정보였지만 허탕을 칠 셈치고 찾아온 것이다.
커튼이 열리더니 중국인이 대기실로 나왔다.
「당신은 7호실로.」
그가 먼저 기다리고 있던 사내 중의 하나에게 중국어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
그는 이제 사또를 바라보며 일본어를 썼다.
「당신은 5호실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사또는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어두웠다. 복도 위에는 조그만 전등 하나가 달려 있을 뿐이어서 방문 위쪽에 붙여진 호실 번호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집은 일자형 구조로 좌우로 벌려져 있었는데 바로 눈앞이 4호실이다.
먼저 들어간 사내는 어느 틈에 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또는 우선 복도의 좌측으로 두어 걸음 들어섰다. 그러자 방문 위에 붙여진 석삼(三)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반대쪽이다. 방음장치가 제법 되어 있는 모양으로 방 안의 소음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아서 복도는 조용했다. 커튼 앞으로 지나칠 적에 커튼이 열리면서 사내 하나가 복도로 들어섰다.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사또가 멈춰 섰으므로 젖혀진 커튼 사이로 대기실이 드러났는데 이시까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 들어선 사내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는 익숙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멈춰 섰던 사또는 대기실의 커튼을 젖혔다. 대기실은 비어 있었다. 중국인 사내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숨을 들이쉰 사또는 허리춤에 찔러 둔 베레타를 뽑아 쥐었다. 대기실의 출구는 현관뿐이다. 그가 다시 복도 안으로 모습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복도 끝 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내가 보였고 그 순간 둔한 발사음과 함께 사내에게서 흰 섬광이 번쩍였다. 사또는 왼쪽 어깨를 치는 강한 힘을 느끼면서 손에 쥐고 있던 베레타를 겨누어 세 발을 쏘았다.
「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집 안을 울리면서 사내가 털썩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함정이다. 그 순간 4호실의 문이 열리면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또의 베레타가 다시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사내가 문틈에 끼면서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쪽의 현관문이 와락 열렸다. 구두를 신은 채로 성큼 대기실로 뛰어든 사내는 안내를 맡았던 중국인이었는데 손에 권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와 사또의 권총이 동시에 발사되었다. 다시 요란한 총성이 났고 가슴을 맞은 사내가 몸을 젖히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시 한 발의 총탄이 그의 배를 관통하자 그는 벌떡 뒤로 넘어졌다. 사또는 대기실로 뛰어 들어가 아직도 사내가 움켜쥐고 있는 스미스 앤 웨슨을 빼앗아 왼손에 쥐었다. 양손에 권총을 쥔 그는 커튼을 향해 한 발을 쏘고는 한 발은 현관 밖을 향해 쏘았다. 그 순간 현관 앞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형님!」
그의 부하 목소리였다. 사또는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손에 든 총을 난사할 기색이었다. 그의 앞에는 여자 다섯에 남자 두 명이 꿇어앉아 있었다. 이들이 화구장에 남아 있던 손님과 색시 전원이다. 화구장은 본래 방이 9개에 색시도 9명이었던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7개의 방에 색시는 5명뿐이었다. 안채에 있던 주인은 도망쳐서 보이지 않았고 이시까와의 행방도 아직 모른다. 총성을 듣고 달려 온 부하들이 화구장의 안팎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언제 경비대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사또는 총구를 매영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20대 후반의 가냘프게 생긴 중국 여자이다.
「시간이 없다. 이년을 끌고 나가라.」
부하 두 명이 달려들어 매영의 양쪽 팔을 움켜쥐었다. 그들이 골목을 벗어나 길가에 세워둔 차로 다가가자 앞쪽 사거리를 꺾어 들어오는 순찰차는 세 대나 되었는데 곧장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서둘러 차에 오른 그들은 곧장 차도를 달리는 차량의 대열 속으로 끼어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경비대를 피한 것이다. 화구장 사건을 변순태가 들은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그렇다면 그 주인 놈을 잡아라.」
변순태가 즉시 말했다. 중국인 거리는 달려서 10분 거리였던 것이다. 부하들이 뛰쳐나가자 변순태도 분주했다. 우선 근대시의 로얄 카지노에 있던 이한에게 전화 보고를 한 다음 삼합회의 양필성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 죽은 놈들이 시바다의 부하가 확실하다면 주인 놈이 수상합니다. 우리도 그놈을 찾겠습니다.」
그러나 양필성의 언짢아하는 표정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사또가 데려간 여자한테서 나온 정보는 없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이제 겨우 십 분이 지났을 뿐이어서.」
변순태는 오다 센자부로한테서 직접 협조 요청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시바다를 찾는 문제는 오다와 김상철 두 세력이 같은 열의를 보이고 있다.
양필성과의 통화를 끝낸 변순태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9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타운의 거리가 가장 활기를 띠는 시간이다. 인구 500만의 근대리아에 타운은 거주민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발전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인도 20만이 넘었으므로 찾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나다.」
그의 응답소리를 들은 김상철이 대뜸 말했다.
「여자가 털어놓았다. 시바다의 부하 나까무라가 임시 주거지역 18동 706호에 살고 있다는 거야. 705호와 704호에도 부하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거야.」
「예,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오다 씨의 부하 가와베와 사또가 그쪽으로 갔다. 그들과 협조하도록.」
「예. 사장님.」
오다 센자부로가 김상철에게도 협조를 부탁한 모양이었다. 김상철은 시바다와 씻을 수 없는 원한 관계가 있다. 2년 전 근대리아의 남쪽 철도역에서 그는 장인규와 이한의 여자인 황윤 등 모두 십여 명의 식구를 잃은 것이다. 그중에는 장국진의 유가족인 두 모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김상철은 두고두고 그것을 애통하게 여겨 왔었다.
변순태는 탁자 위의 벨을 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임시 주거지역은 타운의 변두리에 세워져 있어서 차로 3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김상철이 숙소로 정한 곳은 리조트 시티 안의 빌라였다. 구릉 위에 세워진 빌라 정면으로 스키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뒤쪽은 울창한 숲 지대여서 경관이 좋았다. 그가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박미정이 시선을 들었다. 밝은 색 원피스 차림에다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린 산뜻한 모습이었다.
「이곳이 오히려 아늑하고 더 편해요. 경치도 좋고.」
박미정이 눈으로 창 쪽을 가리켰다.
「마치 캘린더에 나오는 그림 같아요.」
물론 통나무 담장에 둘러싸인 저택보다 경관이야 좋겠지만 아늑하고 편하다는 말은 지어낸 것이다. 빌라는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임시 주택이어서 좁은데다가 가재도구는 물론 입을 옷까지 몽땅 태워버린 신세였으므로 식사 준비부터가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창으로 다가간 김상철이 커튼을 닫았다
「아무래도 당신은 내일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가는 것이 좋겠어.」
그는 박미정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아버지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지 않아? 이 기회에 인사도 드리고 말이야.」
잠시 굳어졌던 박미정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도 전화로만 안부 여쭙는 것이 죄송했어요.」
「반가워하실 거야.」
머리를 든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혹시 이곳이 위험하니까 날 보내시는 것 아녜요?」
「그런 건 아냐. 하지만 조금 불편하긴 해. 그래서 새로 집을 짓는 몇 달 동안만. 석 달이면 된다고 하던데.」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시선을 내린 박미정이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너무 제 생각만 했어요.」
「같이 가서 인사드려야 정상인데 내가 이곳을 비울 형편이 안 되어서 미안해.」
아직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도 못한 것이다. 그것은 박미정의 부모한테도 마찬가지였는데 근대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김상철의 형편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가의 허락은 모두 받아 놓은 상황이다.
빌라 안은 조용했다. 조태광은 좌우로 나란히 연결된 세 동의 빌라에 부하들과 함께 묶고 있었으므로 빌라 안에는 두 사람뿐이다. 거실의 벽에 걸린 시계가 밤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쓰지 마.」
김상철이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당신이 한국에 가 있는 사이에 모든 일이 정리될 거야.」
전화벨이 울리자 김상철은 전화기를 집었다.
「변순태입니다.」
변순태가 소리치듯 말했다.
「집이 비었습니다. 눈치를 채고 도망친 모양입니다.」
「알았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찾아라.」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선 마음 놓고 쇼핑도 하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 수도 있을 거야.」
「시골 아버님께 가 있겠어요.」
그러자 김상철이 웃었다.
「아버지가 불편해하실걸? 며칠이면 몰라도.」
그는 박미정의 배를 눈으로 가리켰다.
「임신한 며느리 보살피는 것에 힘들어하실 거야.」
헤드라이트의 가시거리는 5, 60미터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트럭은 100킬로 이상의 속력은 내지 않았다. 강한 북서풍이 벌판에 쌓인 눈가루를 고속도로 위로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리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남진하는 네 대의 트럭에는 모두 근대운송의 마크가 찍혀져 있었다. 근대리아 정부가 직영하는 운송회사의 트럭이다.
선두 차의 조수석에 앉은 나까무라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밤 12시 20분으로 한 시간 후면 포포크 시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타운에서 간발의 차이로 추적자들을 따돌린 지 세 시간이 되었고 이젠 남쪽으로 2백여 킬로 거리에 있다. 그는 옆에 앉은 오무라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오무라, 다음 간이휴게소에서 십 분간 쉰다. 연락을 해라.」
「예, 보스.」
오무라가 무전기를 손에 쥐었다. 뒤를 따르는 차량에게 연락을 하려는 것이다.
간이휴게소는 5킬로쯤 앞쪽이었다. 주차장에는 두 대의 트럭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차에서 내린 나까무라는 두 번째 트럭의 뒤쪽 문을 열고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전등이 켜져 있었고 히터를 들여놓았으므로 훈훈했다. 근대운송의 컨테이너 트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오치호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오치호는 행정청의 명의로 트럭을 빌려 총독 직인이 찍힌 특별운행증을 발급하여 주었으므로 시바다는 이제까지 근대리아 전역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부하들이 모여 앉은 대기실을 지나 나까무라는 안쪽의 문을 열었다. 컨테이너를 두 칸으로 나눈 이곳이 시바다의 방이다.
「보스, 앞쪽으로 사십 킬로 지점에 고속도로 검문소가 있습니다.」
그의 앞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나까무라가 말했다.
「지난번에는 별문제 없이 통과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변해서, 미리 손을 써 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검문소 경비대야 열 명 안팎 아닌가? 수상하면 깔아뭉개고 지나가자.」
시바다의 얼굴은 술기운에 달아올라 있었다. 그야말로 절치부심하는 자세로 일본의 야쿠자를 모아들였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다나 김상철 측의 금고를 털었다. 오다의 간부급 부하들을 설득하고 회유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결과 그날 밤, 작전이 시작되자 단숨에 오다 센자부로에게 넘어간 사업장과 조직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감개는 네 시간도 못 되어 허망하게 무너졌다. 경비대의 내분과 김상철의 위협 때문이다. 시바다는 요즘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보스, 제가 확인을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까무라를 시바다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까무라, 지금 우릴 따라온 놈들은 모두 몇 명이냐?」
「35명입니다. 보스.」
나까무라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시간이 급해서 아사노 일행 열두 명이 합류할 수 없었습니다. 곧 연락이 되겠지요.」
보름 전만 해도 500명 가까운 부하가 휘하에 있었고 일거에 오다의 본거지인 오리엔트 호텔에 입성하여 위세를 자랑하던 시바다였다. 나까무라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방을 나왔다.
그로부터 10분쯤 후, 간이휴게소 남쪽의 검문소 소장 이필석은 행정청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총독 비서실 소속의 행정담당 보좌관 박태혼으로 국장급 인물이다.
「거기. 얼마 후에 총독 비서실에서 보낸 트럭 네 대가 갈 거야.」
그가 대뜸 말했다.
「물론 총독이 발행한 특별운행증이 있다. 그런데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는데 책임자더러 빨리 서두르라고 해. 그놈들 한 시간이 늦었다.」
「예, 보좌관님.」
긴장으로 몸을 굳힌 이필석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한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만 말하면 됩니까? 초소에서 보좌관님께 연락을 취하도록 할까요?」
「필요 없어. 총독의 지시니까 빨리 서두르라는 말만 전해. 늦었다고. 그리고 보고는 당신이 나에게 직접 하도록.」
「알겠습니다. 보좌관님.」
「하바로프스크로 보내는 화물이다. 그놈들. 이제야 차보스를 지난 모양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필석이 옆에 선 부하를 돌아보았다. 그는 전라도 전주 출신으로 해병대를 제대하고 근대리아로 자원해 들어온 사내였다.
「보좌관 놈이 솔찬이 급헌 모양이여, 나 같은 말단헌티 전화헌 것을 보먼.」
긴장이 풀리자 사투리가 술술 나왔는데 군대에서부터의 버릇이다. 그는 유리창 밖으로 위쪽 도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시키가 몰고 오는디 이런 농땡이여?」
그때 위쪽의 도로에서 일렬로 다가오는 전조등의 불빛이 보였다. 한두 대씩 지나는 차량들이 검문소 앞에 멈춰 서서 검문검색을 받고 통과하고 있었는데 차량의 통행이 뜸한 새벽이다. 검문소 앞에 멈춰 서 있는 차량은 서너 대밖에 되지 않았다.
「저기 온다.」
방한모를 집어 든 이필석은 초소를 나섰다. 백령도에서 3년을 보낸 경험이 있는지라 초소 근무는 이골이 나 있는 것이다. 트럭은 근대운송의 마크를 붙인 컨테이너 트럭이었다. 바리케이드 앞에서 속력을 줄인 트럭의 대열은 곧 이필석의 앞에서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사내 한 명이 뛰어내렸다.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는데 보나 마나 특별운행증일 것이다
「이보쇼. 금방 총독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서두르라고.」
이필석이 대뜸 말하자 사내가 멀뚱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빨리 가시오. 어서, 연락은 내가 할 테니까.」
「고맙소.」
사내가 몸을 돌리자 이필석이 한 걸음 다가갔다
「운행증은 보여 주셔야지.」
이필석은 사내가 내민 운행증을 플래시로 비춰 보았다. 이미 검문이 끝난 차량들은 모두 빠져나갔으므로 트럭 대열이 선두가 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오,」
「고맙습니다.」
이필석이 손짓을 하자 철제 차단봉이 올라갔다. 바람이 세었고 체감온도는 영하 40도가 훨씬 넘는 추위였다. 초소로 돌아온 이필석이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대단한 화물인 모양이여, 총독 비서실이 서두르는 걸 보면.」
그 순간 말을 멈춘 그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무전기로 다가가 스위치를 켰다. 잡음 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곧 방 안에 말소리가 울렸다.
「경비본부 일직 사령실입니다.」
「여긴 524 초소장 이필석이올시다.」
「일직 부관 고현수다. 말하라.」
이필석이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방금 총독의 특별허가증을 가진 컨테이너 트럭 네 대가 통과했습니다. 모두 근대운송의 트럭입니다.」
초소 안에 모여 선 십여 명의 경비대원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필석이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트럭이 통과하기 전에 총독 비서실의 박태훈 보좌관으로부터 트럭을 서둘러 통과시키라는 지시가 왔었습니다. 총독의 특별지시라고 했습니다.」
「총독 비서실의 박태훈 보좌관이라고?」
일직 부관의 목소리도 긴장으로 굳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 부관님.」
「컨테이너 트럭 네 대라고?」
「그렇습니다. 근대운송의.」
「알았다.」
무전이 끊기자 이필석이 허리를 펴고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조금 턱을 치켜든 자세였다.
「내가 말단 초소장이지만 총독 비서실이 지난번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쯤은 알아. 총독의 손녀 딸내미가 보좌관들을 주무르고 있다는 것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 그가 무전기의 스위치를 다시 켰다.
「매사가 불여튼튼이여. 우리가 보낸 컨테이너 트럭 속에 그 강미현이가 뒤를 돌봐 준 시바다라는 일본 놈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가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갔다.
「행정청 일직입니다.」
「비서실의 박태훈 보좌관님 부탁합니다.」
잠시 후에 박태훈의 목소리가 울렸다.
「박태훈입니다.」
「보좌관님. 저 524 초소장 이필석입니다. 트럭이 조금 전에 출발했습니다.」
정중히 말하는 이필석을 부하들이 멀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트럭은 포포크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놈들은 트럭을 버리고 다른 교통수단을 택한 것 같습니다.」
전화기를 쥔 장동택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상황실의 시계는 새벽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포크에서 불칸까지는 이십 킬로 거리이고 그 시간대에 러시아행 열차가 두 편이나 내려갔습니다.」
불칸 역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근대리아 역이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이대각이 입을 열었다.
「놈들이 러시아로 넘어간 것 같군. 아마 열차로 내려간 모양이야. 화물칸에나 아니면 빈 컨테이너 안에 숨어서.」
전화상이어서 그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지친 목소리였다.
「하지만 소득이 있어. 비서실의 회색분자를 또 하나 잡았군.」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이대각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독이 발행한 특별운행증을 갖고 돌아다닌다니. 이건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니 경비대가 허탕만 칠 수밖에요. 우린 허수아비 노릇만 한 겁니다.」
「본부장으로 오치호가 앉아 있을 때는 오죽했겠나?」
탄식하듯 말한 이대각의 목소리가 갑자기 팽팽해졌다.
「장국장. 이 일은 극비에 부치도록. 담당자 모두에게 지시하도록 해. 일이 알려져서 좋을 것 없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이미 시바다도 떠났다. 근대리아 정부 내의 부끄러운 사건이야. 이 일이 알려지면 여러 놈이 좋아할 테니까.」
「그렇지요.」
장동택이 길게 한숨 소리를 내었다. 그 첫 번째가 북한계 조직이다. 대표부를 중심으로 그들은 이번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분열이 심할수록 그들은 더욱 기세를 올릴 것이었다.
「근대리아의 발전은 곧 우리 공화국의 발전이나 같습니다. 솔직히 지난 육 개월간 근대리아에서 공화국으로 송금된 돈이 이천만 달러가 넘었지요.」
서일이 얼굴을 펴며 웃었다.
「지도자 동지께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강미현의 사무실에는 서일과 박기환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그들로서는 강미현과 첫 공식회담이다. 3월 초순, 푸른 하늘에 흰 태양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밝은 날씨였다. 밝은 색 정장 차림을 한 강미현의 표정도 밝았다.
「우리도 만족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적지 않게 우려가 되었거든요. 북한 이주민이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투입되었다고 해서.」
얼굴에 웃음을 띤 강미현이 서일을 바라보았다.
「근대리아를 북한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 북한 지도층의 목표라고도 들었습니다.」
「모두 남조선 사람들이 우리와 근대리아 사이를 이간질시키려는 수작이지요.」
서일이 따라 웃었다
「그 사람들, 정권 다툼이나 하면서 이제까지 근대리아의 발전을 방해만 해 왔지 않습니까? 우리가 협조적으로 나오니까 무조건 공산화가 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간섭하려고 드는 겁니다.」
「제가 오시라고 한 건 이주민 문제 때문인데요.」
자리를 고쳐 앉은 강미현이 정색을 했다.
「이젠 근대리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이주민 문제를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우리 공화국 정부는 환영합니다.」
얼굴이 굳어진 서일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적극 협조해 드리지요.」
「이번에는 오만 명으로, 물론 가족 단위의 이주민을 받고 싶은데요.」
「인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난번 5천 명의 이주민을 들여올 때는 민간 차원에서 김상철과 북한 정부가 계약을 했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거부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국 정부와 북한과의 비밀 협상에 근대리아 정부가 참석하게 된 것이 그 원인이 될 것이다.
이제 근대리아 정부는 더 이상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약점을 잡은 입장인 것이다.
「그럼 구체적인 사항을 이야기할까요?」
강미현이 서류를 펼치자 서일과 박기환도 제각기 노트를 꺼내었다. 모두 생기를 띤 표정이었다.
근대리아는 인구가 500만이 넘어서자 국가의 체제로 자리잡혀 갔는데 행정청은 정부 기관이다. 행정청의 16개 국(局)은 제각기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고 경비대는 사법과 국방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입법기관으로 총독이 의장을 맡은 국민회의가 있었는데 인원은 백 명으로 주 구성원은 한국에서 데려온 각계의 전문가들이었다. 따라서 행정기관은 물론 경비대, 국민회의 의원 전체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총독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또한 근대시 외곽과 지방 소도시에 세워진 거대한 공단들은 반 이상을 정부에서 직영하고 있는 데다가 갖가지의 사업장에도 투자한 상황이어서 근대리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정부의 고용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총독은 근대그룹을 경영하듯이 근대리아를 통치해 왔고 그것을 대부분의 주민들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근대리아는 근대그룹의 영지이고 총독의 소유였다.
그러나 차츰 인구가 많아지면서 중소 자영업자를 비롯한 한국의 오성그룹, 외국의 자본이 기업체를 세우면서 정부의 지분이 날로 줄어들어 갔다. 처음에는 정부 직영의 기업이 거의 90퍼센트였던 것이 이제는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이것은 근대리아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부 투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총독은 한국은 물론이고 각국의 투자가들에게 최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으므로 기업가는 물론 검은돈도 대량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근대리아는 유흥과 도박, 향락의 천국이어서 올해의 관광객은 200만 명을 예상하고 있다. 한 해 관광 수입만도 20억 달러가 넘는 것이다.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는 데다 정부에서 주택을 영구 임대 해주고 있었으므로 아직도 밀입국자가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밀입국자의 대부분은 중국과 러시아인이었지만 요즘 들어 북한인의 수가 부쩍 늘어나 있었다.
이제까지 북한 정부는 철저하게 국경을 막아 북한인의 근대리아 밀입국을 통제해 왔다. 이미 근대리아의 소문이 난 터이라 대량 탈북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행정청의 잠정 통계로는 밀입국한 북한인이 만 명 가깝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밀입국한 북한인은 조선족이나 고려인 행세를 하였는데 그것은 북한 대표부의 규찰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밀입국한 북한인을 잡아 가차 없이 총살시킨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규찰대는 북한인은 물론이고 조선족이나 고려인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는데 책임자는 32호실 소속의 박기환이었다.
저녁 무렵, 김상철은 최태호와 단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다. 레이크 호텔의 카지노에 딸린 밀실 안이었다.
「오만 명을 들여온다니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 이주민을 받을 모양이군요.」
최태호의 잔에 보드카를 따르면서 그가 말했다.
「더욱이 공식적으로 말이오.」
「근대리아 정부가 더 이상 한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최태호가 한 모금에 보드카를 삼켰다.
「정치공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몇 수 위요. 우리는 일사불란한 체제로 연구하는데 남조선은 중구난방 아닙니까? 더구나 정치인들의 인기 위주의 정책에다 선거 때가 되면 더욱 볼 만합디다.」
최태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그 남조선의 북한 전문가라는 학자들이 쓴 글을 나도 읽어 보았는데 정치권의 반응에 따라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더구만. 이러니 남조선이 무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김상철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나도 북한 텔레비전에서 어린애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지도자 동지의 은혜로 잘 산다고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것 끔찍합니다. 저렇게 자란 애들과 우리 한국 애들이 과연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불안해지던데.」
「애들은 잘 우니까요.」
「어른들도 그러던데 영양실조에 걸린 몸으로.」
「버릇이 되어서요.」
「오만 명도 모두 사상교육이 투철하게 배인 사람들로 보내겠지요?」
「물론이지요. 성분이 확실한 자만. 그리고 가족 중에 인질을 꼭 한두 사람 공화국에 남겨 놓을 겁니다. 지난번 오천 명을 보낼 때도 그랬지요.」
김상철이 정색을 했다.
「난 강미현이 갑자기 북한의 이주민을 대량으로 받는 의도를 알고 싶은데, 본래 북한 이주민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늘리기로 했었단 말이오.」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술잔을 든 최태호가 머리를 저었다.
「서일과 박기환 둘이서만 협상을 했기 때문에, 나와 이금철 동지는 사업장 관리자로 전락되었으니까요.」
그 후 최태호는 분주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북한산 박기동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는 밀입국자들이 가져온 마약을 팔았고 은밀하게 고리대금업을 했으며 김상철에게 정보를 팔았다. 돈이 될 만한 일에는 모조리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이미 북조선공화국은 조국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근대리아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6. 고도의 모략
인사동의 좁고 허름한 한정식집 안이다. 주방까지 포함해서 스무 평도 되지 않는 식당 안은 저녁 일곱 시가 되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근처 사무실 직원들의 회식이 있는 모양으로 길게 상을 붙여서 남녀가 늘어앉았고 나머지는 둘셋씩 모여 앉은 술손님이다.
삐걱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대한일보 편집국장 이정훈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을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쟁반을 들고 좌측의 방에서 나오던 중년 여인이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누구 찾으세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심재택 씨.」
「저기 주방 옆문으로 들어가세요.」
여자가 턱으로 가리킨 곳은 방 끝 쪽의 닫혀진 쪽문이다. 신을 벗고 손님들 사이를 헤치고 쪽문을 열자 안방이 나왔다. 다섯 평쯤 되는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이미 상 가득히 한정식 요리를 벌여 놓고 혼자 앉아 있던 심재택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어서 오시오, 이 형.」
「아니, 이곳도 안가(安家)요?」
「그런 셈이지요. 어디 조용하고 고급스런 곳만 안가가 되라는 법 있습니까? 이야기하기 좋은 데면 다 안가지.」
이정훈은 심재택과는 15년 가깝게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물론 친구 사이는 아니다. 5공 때 이정훈이 정부를 비판한 필화사건으로 연행되었을 때 안기부의 담당 수사관이 심재택이었던 것이다. 심재택 덕분에 큰 고초를 겪지 않고 자리도 날아가지 않았던 이정훈은 그 후로 가끔씩 만나는 사이가 되었는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주량도 비슷했으므로 소주를 마셨다. 술이 서너 잔 비워졌을 무렵이다 이정훈이 술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 심형. 털어놓아 보시오. 나한테서 뭘 알고 싶은지. 우리가 엊그제 낸 사설에 문제가 있습니까?」
「난 요즘 그런 것 읽지도 않는데.」
「허, 이 양반이.」
이정훈이 입을 딱 벌렸다.
「별일이네. 회사 그만둔 것도 아닐 텐데.」
「난 근대리아에 있었거든.」
「근대리아에는 대한일보 안 갑디까?」
사기잔에 든 맹물 같은 소주를 한 모금에 삼킨 심재택이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형. 대선이 얼마 남았지요?」
「대선? 그거야 여덟 달 남았나?」
그렇게 대답하면서 이정훈이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정치부 기자만 20년을 해 온 이정훈이다. 한국 정치는 주의(主義)도 비전도 없이 육감으로 하는 정치라고 그가 비판해 온 것처럼 그도 육감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대선에?」
심재택이 잔에 소주를 채웠다.
「잘 들으시오, 이 형.」
삼십 분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완전히 술이 깬 얼굴의 이정훈이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심재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매국(賣國)이로군.」
웅얼거리듯 이정훈이 말했다.
「사실이라면 큰일이오, 심 형.」
「정권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지. 대단히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현 정권이 그럼 오래전부터 북쪽과 비밀 협상을 해 오고 있었단 말이오?」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 하는 것을 보아서는.」
「이백만 톤 중에서 올 11월에 백만 톤, 내년에 백만 톤이라.」
이정훈이 술잔을 들어 올렸는데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술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더한 요구도 들어주겠군.」
「이형 말대로 곧 매국을 하게 되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지금도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니까.」
술잔을 그대로 내려놓은 이정훈이 물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안기부는 현 정권의 작태에 제동을 걸 모양인데. 그래, 언론을 이용할 겁니까? 그래서 날 부른 것 아니오?」
「물론 언론도 필요하지, 하지만 아직 시기가 아니오. 섣불리 지금 터뜨렸다가는 개죽음을 당합니다.」
심재택이 다시 한 모금에 소주를 삼켰다.
「확실한 증거가 더 있어야 하고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동조 세력도 더 있어야 해요. 일사불란한 조직과 계획이 서 있어야 한단 말이오. 터뜨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터뜨린 후의 정국 수습책도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이정훈이 소주잔을 들었다.
「나도 동조하겠습니다. 나도 한몫을 하겠소.」
「그러실 줄 알았소.」
한숨을 내리쉰 심재택이 잔을 들어 이정훈의 잔에 마주 대었다.
「자, 답답한 가슴 술로나 풉시다.」
정가는 서서히 대통령 선거전에 돌입하고 있었는데 해방 이후 처음으로 야당의 단일후보가 나온 상태여서 선거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 이대현은 60대 중반으로 전라도 출신이다. 골수 야당인으로 정치 생활을 보내온 그는 지난해에 그야말로 극적인 야당 대연합을 이루었고 선거 1년 전에 대선 후보로 지명이 되었는데 그것은 지역 간의 대연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대선 후보로 지명된 지 얼마 후에 그는 거주지를 부산으로 옮겨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부산 주민은 물론이고 일부 참모들까지 부산 산다고 모두 부산 사람이냐? 하는 등 그를 비웃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잠잠해졌다. 오늘도 이대현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리자 곧장 차를 달려 여의도로 향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김상식 의원을 오라고 할까요?」
앞자리에 앉은 비서실장 전상국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김상식 의원은 제1야당인 국민당의 사무총장으로 이대현의 직계이다. 이대현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좌우의 거리를 살폈다. 승용차는 여의도의 중심가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김의원과의 약속은 오후로, 그리고 차를 동경식당 뒤쪽에다 대어.」
이대현이 말하자 기사가 핸들을 우측으로 꺾었다.
「약속이 있으십니까?」
의아한 얼굴로 전상국이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성훈이와 만나기로 했어.」
이성훈은 그의 장남으로 국제문제연구소라는 정책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차가 식당 건물의 뒤쪽에서 멈추자 그는 혼자서 차를 내렸다. 뒷문으로 들어선 그가 이층의 계단을 오르자 식당 입구에 서 있던 이성훈이 머리를 숙였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냐?」
그가 묻자 이성훈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식당 앞에는 사람의 기척도 없다.
「안기부장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대현이 퍼뜩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일로?」
「은밀히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해서.」
머리를 끄덕인 이대현은 잠자코 불도 켜지 앉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권준규의 이야기가 끝났으나 이대현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동경식당의 밀실 안이었다. 이성훈은 긴장으로 굳어진 표정이었다. 그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이윽고 이대현이 탁자 위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었다.
「우선 고맙소이다. 그런 사실을 알려주셔서. 나는 권부장이 나를 택한 것은 순전히 애국심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자 권준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이 총재님밖에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참으로 불행한 일이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니.」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총재님.」
권준규가 똑바로 이대현을 바라보았다
「더구나 간과할 수 없는 일은 미국과 일본 정부가 현 정권을 비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난번 근대리아에서 한국과 북한 정부 간의 합의 내용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이총재님의 강한 독자성과 남북관계에 대한 힘의 논리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대현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미 하원에서 반공주의자를 자처하는 길버트 의원이 말하더군요. 미 ·일 양국은 한반도가 당분간 현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그들의 국익에 최선의 방안이라는 거예요. 당연한 얘기지요.」
「현 정권이 이어져 가면 북한의 꼭두각시가 될 뿐만 아니라 미 ·일 양국의 조종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권국가라고 할 수가 없지요.」
머리를 끄덕인 이대현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적절한 대처 방법이 있겠습니까?」
「아직 선거가 8개월 남았습니다. 그동안 면밀한 계획을 세워야 되겠지요.」
권준규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저도 감시를 받고 있어요. 많이 조심을 하고 있지만 현 정권도 자신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여서 여간 경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기부는 정부의 대북정책에 오래전부터 소외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권준규는 내색하지 않았고 부 내의 반발을 진정시켜 왔다. 그것이 그를 장수한 안기부장 대열에 끼게 했는지도 몰랐다. 이대현이 따라 웃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권부장, 어쨌든 방법을 만들어 보십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은 막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번 선거는 예측불허다. 막상막하라는 말이야.」
김영환 씨가 신문을 펼쳐 든 채로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어서 고용인들이 올라온 집 안은 활기에 차 있었다. 젖소만 해도 600두가 넘었으므로 고용인이 15명 가깝게 되는 제법 큰 목장이다.
「아버님은 정치에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찻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은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신문도 정치면만 보시고 사회면은 거의 읽지 않으시데요.」
「그런가? 너한테 들켰구나.」
김영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회면 안 본 지 꽤 오래되었다.」
정확히 말해서 김상철의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부터였다. 그 이후로 김영환 씨는 신문의 사회면은 물론 뉴스의 사건 소식도 듣지 않는다. 찻잔을 든 김영환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젠 서울로 올라갈 때가 되었다. 부모님도 기다리고 계실 테니.」
「며칠 후에 잠깐 들렀다가 오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불편해서 그래.」
김영환이 정색을 했다.
「애 가진 몸으로 집안일 거드는 것 보기 딱하다. 난 이만 됐으니 올라가.」
「아버님, 저는‥‥」
「이놈아. 시애비 말을 들어야지. 고집 피우면 못 쓴다. 서울 친정에 가 있다가 떠나기 전에나 내려왔다 가거라. 너도 보다시피 난 건강하고 주위가 적막하지도 않다. 일에 재미도 붙였는데다 목장도 잘 되고 거기에 며느리가 곧 손주까지 낳게 되었으니 ….」
찻잔을 내려놓은 김영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장으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내일 아침에 올라가거라. 시애비 말 어기지 말고.」
따라 일어선 박미정이 입을 열려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시선을 내렸다. 김영환을 따라 마당으로 나온 박미정은 맑고 향기로운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산등성이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는 이곳은 이제 꽃피는 4월이었다.
4월 초순이 되자 근대리아에는 북한 이주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철도편으로 근대리아에 들어오는 것이다. 5만 명의 이동이었으므로 50량 정도의 긴 열차 행렬이 매일 2, 3천 명의 이주민을 날랐지만 이주를 마쳤을 때는 4뭘 말이 되어 있었다. 4뭘 말이 되었지만 근대리아의 날씨는 아직 영하 20도 안팎이었다. 게다가 이틀 걸러 눈이 내렸으므로 전역이 눈에 묻혀 있었다.
고구려 호텔 26층에서는 눈에 덮인 근대시뿐만 아니라 대평원과 지평선도 보였다. 국빈용으로 쓰여지는 특실 안이다. 창가의 테이블에 네 남녀가 둘러앉아 있었는데 근대리아 정부 측의 강미현과 유장석, 그리고 북한 대표부의 서일과 박기환이다. 방 안의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어제로써 5만 명의 북한 이주민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서류보다 두 명이 더 늘었더군요, 수송 도중에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나서.」
강미현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두 명 모두 딸이에요.」
「근대리아에 여자가 부족한 형편인데 잘 되었지요.」
서일이 맞장구를 쳤다.
「더구나 남남북녀라고 했습니다. 우리 공화국 여자들은 출중합니다.」
「그런가요?」
서류를 덮은 강미현이 서일을 바라보았다. 행정청장 유장석이 오늘 회합의 근대리아 측 대표였지만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강미현이다
「올해 안에 다시 북한 이주민을 받을 계획인데, 그쪽 사정은 어떻습니까?」
「우린 환영합니다.」
서일이 즉각 대답했다. 이미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그렇지 않아도 추가계획을 여쭤보려고 했었습니다.」
「노동력은 얼마든지 필요합니다. 공단이 올해 안에 두 곳 더 늘어날 테니까요.」
러시아와 중국 땅에 흩어져 있던 교포들 중에서 들어올 사람은 거의 다 들어온 상태였다. 그렇다면 모자라는 노동력은 러시아나 중국인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서일이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좋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내용은 언제쯤 알 수 있겠습니까?」
「조만간 제가 연락을 드리지요.」
강미현이 잠자코 앉아 있는 유장석을 돌아보았다.
「청장님, 하실 말씀이 계시면 ‥‥‥」
그러자 유장석이 헛기침을 했다.
「총독께선 지난번의 남북회담 때 근대리아를 참석시키도록 한 북한 당국의 호의에 감사하고 계셨습니다. 덕분에 근대리아의 독자적 기반이 강화되었고 위상도 높아졌습니다.」
그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물을 마셨다.
「북한 주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근대리아 정부가 북한 정부와 친선관계를 강화시키겠다는 의지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서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청장 각하.」
「우리는 이러한 친선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총독의 말씀을 저희 지도자 동지께 전하겠습니다.」
그는 건배를 하듯 물잔을 들어 올렸다.
「전에는 주체사상 교육이나 지도자의 어록을 공부했는데 지금은 다릅니다. 그저 우의를 다지는 모임같이 보입니다.」
조태광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거주지, 또는 직장 단위로 자주 회합을 갖습니다. 물론 규찰대가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하고 있지요. 규찰대 인원은 거의 오백 명 가깝게 되는데 이번의 오만 명 중에도 상당수가 섞여 있다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방 안에 모인 사내들은 김상철과 이한, 변순태에다 말석에 박기동의 사업체를 인계받은 이판석이 앉아 있었다. 저녁 무렵이었다. 오늘은 조직 보스들의 회의로 북한 측의 동향을 조사해 온 조태광의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종이를 손에 든 조태광이 말을 이었다.
「이금철과 최태호가 관리하는 조직원 숫자도 고려인과 조선족을 포함하여 이천 명 가깝게 됩니다. 거기에다 규찰대가 있으니 막강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한이 혀를 차고는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그런 숫자로 따진다면 삼합회는 오천이 넘습니다. 식당 종업원에 뚜쟁이까지 합쳐서 말이지요. 머릿수가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이한은 요즘 들어 말과 행동에 관록이 베어져 있었다. 초창기에 같이 일했던 하용준과 송길수, 장국진과 장인규까지 모두 목숨을 잃은 지금 그만이 유일한 김상철의 동생이다. 4년여 동안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사라져 간 터이라 그렇지 않아도 반발성이 강했던 그의 성격이 더욱 공격적이 되어 있기는 했다.
「오만 명이 왔다고 해서 모두 그놈들 세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철저하게 교육시켰더라도 다른 놈들처럼 석 달만 지나면 새 세상을 알게 되지요.」
조태광이 그의 말을 받았다.
「글쎄, 형님. 이번에는 그놈들이 예전과는 다른 방법을, 그저 친목 도모 형식으로 모임을 갖는데 호응률이 높습니다.」
「그건 그러라고 해. 걱정할 건 없다.」
그러자 변순태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나셨다.
「처음에 우리 조직의 기반은 한국이었고 근대리아 정부가 뒤를 받쳐 주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도 근대리아 정부도 떨어져 나간 상태가 되었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타운의 책임자인 변순태는 북한 측과 접촉이 잦은 편이었다. 북한 주민과 조직원의 대부분이 타운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고려인과 조선족의 대부분이 우리 조직에 호의를 갖고 조직원도 그들로서 채워졌지만 기반이 약합니다. 배경도 없어졌구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잘 지적했다. 거기에다 북한과 근대리아 정부가 손을 잡는다면 상황은 더 어렵게 되겠지. 이번에 북한 이주민을 대량으로 받은 것도 그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가 말을 이었다.
「경비대는 다시 이대각 씨가 장악하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미리 대책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야.」
북한 이주민이 대량으로 투입되면서 근대리아 정부와 북한과는 밀월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극심한 식량난과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팽배해 있는 북한 정권으로서는 근대리아가 유일하고 확실한 희망일 것이었다. 또한 통치기반이 불안정한 근대리아의 통치권은 북한의 세력을 필요로 한다. 김상철은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강미현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은 당면한 가장 큰 장애물인 것이다.
오리엔트 호텔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아나카와회가 운영하는 룸살롱 로즈가 있다. 크고 화려한 분위기의 룸살롱으로 일본인 단골손님들이 많았고 한국인들도 자주 가는 고급 술집이었는데 카지노에서 피로해진 몸을 로즈에 들어와 푼다고 소문이 난 집이었다. 밤 열 시경, 스무 개나 되는 로즈의 룸이 여느 때처럼 손님으로 채워졌고 지배인은 현관에 정중한 만원사례의 팻말을 걸었다. 오늘은 한국 손님들이 초저녁부터 몰려들었는데 사업가들이었다. 그들은 씀씀이가 컸으므로 로즈 측에서는 언제나 대환영이다.
4뭘 말이었지만 영하 30도의 추위였다. 그래도 바람은 없었으므로 강진남 대리는 방한모의 방풍 안경을 위로 젖혀 놓고 있었다. 그는 경비대의 보안국 소속으로 마약단속반원이다. 로즈 살롱 옆 건물의 골목에 기대 선 그의 앞쪽에는 부하 두 명이 골목 끝의 좌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10시 20분이 되었을 때 앞쪽의 부하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로즈에서 사람이 나온 것이다. 부하 한 명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쪽으로 옵니다.」
「좋아, 잡아라.」
벽에서 몸을 뗀 강진남은 팔짱을 끼고 섰다. 상대는 여자 한 명이다. 이쪽에도 부하 두 명이 서 있지만 차도에 세워진 밴에도 두 명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윽고 부하들이 뛰어나가더니 모피 슈바에 온몸을 감싼 여자 한 명의 양팔을 움켜쥐었다. 행인들이 놀란 듯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강진남은 끌려 들어온 여자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서둘러야만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팔았어?」
골목 안은 어두웠으므로 그는 여자의 턱을 손끝으로 치켜올렸다.
「빨리 말해. 이 년아.」
그는 장갑 낀 손으로 여자의 볼을 후려갈겼다. 팔을 붙들고 있던 부하가 재빠르게 그녀의 몸을 수색했다.
「여기 코카인이 있습니다. 돈도.」
조그만 비닐봉지에 담긴 한 움큼의 코카인과 돈뭉치를 꺼낸 부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대리님, 이 년은 중국년입니다. 신분증이 있는데요.」
다른 한 명의 부하가 신분증을 들어 보였다.
「좋아. 빨리 말하지 않으면 아예 죽여 버린다고 말해라. 이년한테.」
강진남이 여자의 턱을 치켜올리자 희미한 빛을 받은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이 제법 반반한데. 그 전에 실컷 방망이 맛을 보여 주겠다고 해.」
부하들을 이끈 강진남이 로즈 룸살롱의 3호실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5분쯤 후였다. 화려한 장식의 방 안에는 세 사내가 제각기 여자들을 끼고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앉은 채로 여자와 그 짓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놀란 그들이 제각기 몸을 굳히자 강진남은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년놈들을 모두 잡아라, 경비대로 끌고 간다.」
「이것 봐, 당신 뭐야?」
안쪽의 상석에 앉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쳤다. 40대 후반쯤의 체격이 당당한 사내였다.
「무슨 일로 그래?」
「마약 구입 복용 혐의요. 판매자도 잡았고 지배인도 자백했어. 당신들에게 돈 받고 팔았다고.」
「당장에 지배인 오라고 해.」
「경비대에 가서 말하시오.」
「이것 봐. 당신 우리가 누군지 알아?」
「범법자야. 어서 일어서.」
「너, 어디 출신이야? 고려인? 아니면 조선족인가?」
일어선 사내가 허리에 두 손을 얹고는 그를 쏘아보았다.
「감히 누구한테 이 자식이. 근대리아 법이 한국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강진남이 테이블 위로 올라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곧장 발길질로 사내의 배를 차자 신음소리를 내며 사내가 소파 위로 주저앉았다.
「빨리 나오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맞아 죽을 줄 알아라. 이 한국놈아.」
이한이 경비본부에 들어섰을 때는 아침 열 시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곧장 이층의 보안국장실로 들어섰다.
「이사장, 요즘 바쁜 모양이오?」
그에게 자리를 권한 장동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한테 술 마시자는 소리도 안 하는 걸 보면.」
「국장님이 바쁘셔서 그렇지요. 술이야 언제든지 삽니다.」
이한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눈칫밥을 먹고 자라 온 터이라 상대방의 감정을 예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장동택은 언제나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
「내가 이사장을 보자고 한 건 어젯밤에 우리 마약단속반에서 마약 판매자와 중개자 구입자 해서 모두 다섯 명을 잡았는데 …….」
그는 커피포트를 들어 이한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그 판매자가 이사장을 찾는단 말이오. 혹시 동연교라고 아시오?」
「동연교라면.」
이한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몸이 가늘고 얼굴도 갸름한 여자 아닙니까?」
「그래, 나도 만나보았는데 미인입디다. 아버지가 타운에서 구둣방을 했다는데.」
「압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마약을.」
김상철과 숨어 지낼 적에 그녀의 집에서 신세를 입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지난해에 병으로 죽은 모양이오. 그래서 마약 장사로 나섰다고 하는데.」
「코카인의 출처를 대지를 않아. 그리고는 이사장을 찾는단 말이오.」
얼굴을 붉힌 이한이 머뭇거리며 동연교와의 사연을 말하자 장동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신세를 입으셨구만. 두 분이 갚으셔야 되겠어요.」
「그러더라도 출처는 알아내 주시오. 곧 데려올 테니까.」
10분쯤 후에 동연교는 경비대원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한을 보고 잠자코 머리를 숙이는 걸 보면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모피 코트에 가죽 장화를 신은 차림이었는데 긴 머리는 뒤로 모아 묶었고 화장기가 보이지 않는 얼굴은 창백했다. 장동택은 그녀를 이한의 옆자리에 앉혔다.
「자, 이사장을 모시고 왔다. 코카인의 출처가 어딘지를 대라.」
장동택이 중국어로 묻자 그녀가 머리를 들고 이한을 바라보았다.
「저, 나가게 해 주실 거죠?」
이한이 입맛을 다시자 장동택이 대신 대답했다.
「그래, 출처만 대면 나가게 해 준다. 알고 있는 사실만 말해.」
「북조선 사람한테서 샀어요.」
「그 사람이 누구야?」
「이름은 모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타운의 대동강 클럽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어요.」
머리를 돌린 동연교가 이한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빚을 갚을 길이 없었어요. 어머니 모시고 살기도 힘들었고.」
「날 찾아오지 그랬어?」
「구걸하기는 싫었어요.」
장동택이 헛기침을 했다.
「그 사람이 대동강 클럽의 종업원인가?」
「모르겠어요. 클럽 이층 방에서 돈을 주고 사기만 했으니까.」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지?」
「아버지의 친구 만씨가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도 마약 장사를 하나?」
「중독자가 된 데다가 재산도 탕진해서 일을 못 해요. 요즘은 제가 마약을 대주고 있어요.」
북한에서 공급하는 마약은 가격이 싼데다가 질이 좋았다. 더구나 대량으로 들여와 무리하게 시장을 확장시키는 바람에 동연교 같은 소매인이 급격히 늘어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삼합회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중국인 시장마저도 잠식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것들이 요즘 제 세상을 만났구만 그래.」
장동택이 혼잣소리를 했다. 요즘의 근대리아 내부 상황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승용차 안이다. 이한이 옆자리에 앉은 동연교를 바라보았다.
「너희 중국 년들은 다 똑같아. 무서운 줄 모르고 아무 일에나 달려드는 걸 보면.」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자리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는 곳이 이곳이야. 공단에 취직해도 두 식구는 충분히 먹고 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빚이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버지 빚이 얼마나 되었어?」
「달러로 만 오천 달러였는데 제가 다 갚고 지금은 삼천 달러쯤 남았어요.」
「빚만 갚으면 취직하려고 했어요.」
동연교가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움켜쥐었다.
「집에 어머니가 혼자 계셔서 어쩔 수 없이 이사장님을 찾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너 몇 살이야?」
동연교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유난히 검어 보이는 눈이었다.
「스물둘 되었어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한이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승용차는 타운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려가는 중이었다. 하늘은 흐려져 있었지만 눈이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계집이 동무 얼굴을 아나?」
장호성이 묻자 사내가 굳어진 얼굴을 들었다.
「예. 알 겁니다. 몇 번 만났기 때문에. 하지만 이름은.」
「이름이 무슨 필요가 있어.」
칼로 베듯이 그의 말을 막은 장호성이 박기환에게 머리를 돌렸다
「그년이 풀려 나온 것을 보면 날낱이 털어놓은 것이 틀림없어. 빨리 조처를 해야겠소.」
박기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년은 한 사람밖에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에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동무는 너무 부주의했어. 클럽 안에서 거래를 하다니.」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
「지금 당장 몸을 피하도록. 숙소는 위험하니 허가증 미취득자 숙소에 은신해 있는 것이 좋겠어. 조진철 동무가 안내해 줄 거야.」
박기환이 탁자 위의 벨을 누르자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이 동무를 42동의 숙소에 은신시켜.」
사내들이 방을 나가자 장호성이 입을 열었다.
「경비대가 문제로군. 이대각이와 장동택이가 있는 한, 발을 뻗고 잘 수가 없겠소.」
「마약 문제에 있어서는 총독실의 입장도 같을 겁니다. 총독은 작년에도 마약사범은 철저하게 발본색원하겠다고 발표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약 판매 대금이 이제는 월간 2백만 달러가 넘는 상황이다. 평양 정부로부터 판매 신장에 대한 격려까지 받은 입장이었고 지금 이쪽이 움츠러든다면 삼합회가 다시 시장을 장악할지 모른다.
「이한이가 여자를 데리고 나갔다는 것이 꺼림칙하군요.」
이맛살을 찌푸린 박기환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아무래도 경비대와 김상철이 연합해서 작전을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
「이대각이 김상철을 선봉으로 내세울 생각인지도 모르지요. 경비대는 총독실의 제한을 받을 테니까요.」
「글쎄.」
장호성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불안정할 때의 버릇이다.
「우리와 근대리아 정부와의 관계를 모르는 놈도 아닐 테니 명분이 생긴 이 기회에 그럴 가능성도 있겠소.」
그동안 심재택은 근대리아의 업무에 집중하여 이제는 김상철의 보좌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가 지어내어 자신을 보좌관이라고 했을 뿐으로 김상철을 섬기는 고용인은 아니다. 그는 지금도 엄연한 안기부 간부로 수시로 서울과 근대리아를 오가는 입장이었다. 심재택이 집중적으로 맡고 있는 일은 조직의 편성과 구성에 관한 일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을 데려왔는데 그들은 모두 조직관리와 구성 등에 대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김상철의 조직뿐만 아니라 주민을 상대로 철저한 세포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세 확장에 대한 대비책이자 김상철의 자위수단이었다 그는 심재택의 제의를 받아들여 친한(親韓)세력을 조직화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5월 초, 폐허가 된 저택의 공사 현장에 나와 있던 김상철은 아래쪽에서 달려오는 한 대의 승용차를 보았다. 영하 10도 정도의 날씨여서 그는 검정색 가죽 코트에 방한모도 쓰지 않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흰 태양이 머리 위에서 모처럼 환하게 빛나는 맑은 날씨였다. 회색 승용차는 이십 미터쯤 앞에서 멈춰 서더니 뒷문이 열리고 심재택이 내렸다. 그는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길이었다.
「예전 그대로 지으시려는 모양이군요.」
그가 산처럼 쌓인 통나무 더미와 이제 일층이 올라간 저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긴 시멘트는 양생을 해야 할 테니까.」
「그것보다 통나무가 더 단단합니다. 탄력도 있고.」
그는 턱으로 본채의 통나무 벽을 가리켰다.
「두 겹으로 쌓으면 로켓포도 뚫지 못합니다.」
그러자 쓴웃음을 지은 심재택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들으셨지요? 북한 고속정이 한계선을 오십 킬로나 넘어와 우리 어선 두 척을 끌고 갔습니다. 해군이 출동했지만 놈들의 기관포 사격을 받았어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찌푸린 표정이었다.
「도발입니다. 공군기가 출동했을 때는 이미 넘어간 후였고 오히려 그쪽은 어선이 한계선을 침범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어요.」
그것은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군사정전위를 통해 그들이 듣거나 말거나 항의를 했지만 지금은 북한 임의로 정전위를 무효화시킨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미국을 통해야 하는데 이것은 한국 정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그들의 뻔한 작전이었다. 한국 정부를 대신하여 미국은 번번이 북한과 협상을 했고 그때마다 한국인은 좌절감과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진전되어 배신감을 갖는 상황이었다.
심재택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어뿜었다.
「정부는 지금 미국과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어선과 어부의 송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젠 기가 막혀서 허탈할 따름이오. 우리를 국가 취급도 해 주지 않아서 상대를 뻔히 앞에 두고 제네바의 국제 적십자사를 찾다니,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어요.」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난 이제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앞쪽에서 조태광이 누군가를 소리쳐 나무라고 있었다. 공사 인부는 전문인력 몇 명을 빼놓고 모두 부하들을 쓰고 있었는데 보안 때문이다. 일당을 다섯 배나 주고 있지만 경험이 없는지라 실수가 잦다.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다시 여당의 인기가 곤두박질쳤습니다. 정부는 당황하고 있어요.」
「선거 육 개월 전이오. 더구나 백만 톤의 쌀을 주기로 한 상황에 어선을 납치해서 한국 정부를 골탕 먹인다는 건 이해가 안 갑니다. 혹시 쌀을 더 달라는 것인지.」
그는 담배를 버리고는 발로 비벼 껐다.
「아니면 또 다른 계획이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겠어요. 어쨌든 이곳이 북한과 제일 가까운 창구가 되어 있으니까.」
서일이 총독 보좌관실에 들어서자 강미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 9시 반이어서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앉은 시간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서일은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혼자서 그것도 강미현과의 단독 면담을 요청해 온 것이었다. 직원이 그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가자 그가 입을 열었다.
「총독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저와 보좌관님하고 셋이서 말씀을 나눌 것이 있는데요.」
머리를 든 강미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총독 면담은 비서실장을 통해야만 하고 그것도 열흘쯤 전에 신청을 해놓는 것이 관례로 정해져 있다. 자신을 만나는 것처럼 하루 전에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지금 같은 경우는 말도 되지 않는다.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총독님은 근대그룹 회장으로 계셨을 적에도 그런 일은 없으셨어요.」
강미현의 차가운 대답에 그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총독님과 보좌관이 같이 계신 자리에서 말씀을 드리라는 평양의 지시가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
「‥‥‥‥」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보좌관님을 뵙고 사정 말씀을 드리려고. 북남한에 관한 문제입니다.」
30분쯤 후에 서일은 긴장한 표정으로 넓은 총독의 접견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일국의 국가원수를 대하는 태도로 최상의 예의를 갖추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접견실에는 서일의 요청대로 세 사람이 모인 것이 아니라 다섯 사람이다. 총독이 비서실장 이남호와 행정청장 유장석을 동석시켰기 때문이다. 한동안 인사와 건강,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건성으로 오갔다가 곧 접견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것을 서일이 깼다.
「총독 각하. 저희 지도자 동지께서는 각하께 북남관계의 조정을 부탁하셨습니다.」
총독이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얼굴의 검버섯이 더욱 두드러진 얼굴이었으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서일이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며칠 전에 남조선 어선 두 척이 한계선을 넘어와 저희들을 긴장시켰습니다. 그래서 저희 해군이 어선 두 척과 어부 육십오 명을 나포하고 있습니다.」
「‥‥‥‥」
「남조선 당국은 전처럼 미국과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어부 송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동지께선 단호한 입장이십니다.」
총독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내었다. 안타깝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냐는 표현으로 들렸다 그와 걸맞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서일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지도자 동지께선 근대리아의 총독 각하께서 조정 역할을 맡아 주신다면 얼마든지 양국 간의 협상에 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각하께서 양국의 대표단을 부르신다면 저희 공화국은 즉시 대표를 보낼 계획입니다.」
이남호와 유장석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고 시선이 강미현에게로 갔다가 일제히 총독에게로 모여졌다. 이윽고 총독이 입을 열었다.
「지도자께서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난데없는 질문이어서 당황한 듯 서너 번 눈을 깜박이고 난 서일이 대답했다.
「예, 각하. 올해로 오십칠 세가 되십니다.」
「내가 그 나이 때에는 자동차를 세웠지. 조선은 그 전에 만들었고.」
「내가 요즘 자꾸만 나이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겨서.」
그는 녹차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요컨대 근대리아의 위상을 한층 더 높여 주신다는 뜻이구만. 게다가 내가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온 굴욕과 수모를 갚을 기회도 만들어 주시려고.」
그는 이남호와 유장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양반들한테 해 드릴 일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이렇게 번번이 신세를 입어서야 어디.」
이남호가 헛기침을 했다.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있기는 할까?」
「있을 겁니다, 각하.」
그러자 이번에는 유장석이 나섰다.
「그 문제는 서대표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각하.」
총독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전하시오. 여러 가지로.」
다음 날 아침 대한민국 외무부 아주국장 송기현은 정시에 출근하여 자리에 앉았다. 외무고시를 패스한 후에 6년 동안 미국과 멕시코 대사관 영사를 거친 다음 줄곧 본부 근무만 해 온 그는 유력한 대사 후보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면서 부하 직원이 들어서자 그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국장님, 근대리아에서 공식 채널로 전문이 와 있는데요.」
서기관급 부하는 입술 끝을 조금 말아 올리고 있었는데 가소롭다는 뜻이었다.
「무슨 내용이야?」
부하가 건네준 전문용지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묻는 것은 그도 같은 분위기라는 표현이다.
「그것이 조금 민감한 문제여서, 근대리아가 이번 어선 납치사건에 대한 중재 역할을 맡겠다는 겁니다.」
「미친놈들, 간덩이가 부었구만.」
와락 이맛살을 찌푸린 송기현이 전문에 시선을 주었다. 건성으로 내용을 출어 본 송기현이 전문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강우진이가 이젠 국가 노름을 하고 있어. 분수도 모르고 말이야.」
「총독이라면 한국에서도 그 감투를 인정해 줄 줄 알았던 모양이지요? 한 마디로 코미디입니다.」
「제 따위가 무슨 재주로 중재를 하겠다는 거야? 북한 대표부가 그곳에 있다고? 그렇게 하면 우리가 국가 대접을 해 줄 줄 알았나? 건방지게시리.」
「매스컴을 한번 타보겠다는 심보입니다. 강우진이 전부터 쇼맨십이 있었거든요.」
송기현이나 서기관 부하가 근대리아에 갖는 무의식적인 반감은 한국 정부의 대부분의 관료들이 갖고 있는 감정과 같았다. 그들의 거의 모두는 근대리아나 강우진 총독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정부의 장악 하에 있었던 일개 기업주가 근대리아라는 자치국의 통치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마치 부리고 있던 하인이 갑자기 휘하를 떠나 상전이 된 것 같은 배신감과 불쾌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송기현이 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관님은 오전에 국회에 나가셨다가 오후에는 청와대에 들어가실 계획이야. 이건 청사에 들어오시면 보고하기로 하지.」
그는 사 두었던 주식이 하한가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본 것처럼 쓴 표정을 했다.
「적십자사에 보낸 공문이나 확인해 봐. 수신확인 스탬프가 찍힌 피스를 받아 두도록.」
작년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제네바에 협조를 부탁한다는 공문을 보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가 그쪽에서 받지 않았다고 하는 바람에 질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겨우 언론의 입을 막아 궁지를 벗어났지만 아찔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송기현이 본부의 대기 대사로 있는 조영균과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2시였다. 조영균은 이집트 대사를 지낸 선배였는데 송기현은 넉 달 후인 9월의 대사급 인사에서 이집트 대사 물망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는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중동의 중심지였다. 그는 조영균으로부터 자주 그곳의 풍습과 중동지역의 분쟁에 대한 조언을 듣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직통전화였다.
「아주국장 송기현입니다.」
「여긴 청와대인데요. 잠깐 기다리세요.」
송기현은 번쩍 상체를 세우고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잠시 후에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주국장이오?」
「예, 그렇습니다.」
「난 안보수석 신형목이오.」
「예, 수석님. 안녕하십니까?」
송기현의 온몸이 뻣뻣해졌다. 안보수석은 장관급이지만 안보 관계에 있어서는 총리급이다. 신형목이 말을 이었다.
「당신, 근대리아에서 전문을 받았소?」
「예?」
「전문을 받았느냔 말이야.」
「예, 그것이 ……,」
「받았어? 안 받았어?」
저쪽에서 고함을 치자 송기현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예, 받았습니다만.」
「언제?」
「저, 그것이 …….」
「아침 9시 정각에 보냈다는데 맞소?」
「예, 하지만.」
「옆방에 당신 장관하고 대통령이 계셔. 우리는 조금 전에 똑같은 전문을 받았는데 당신은 다섯 시간 동안이나 그걸 깔아뭉개고 있었어.」
숨을 멈춘 송기현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신형목의 말소리가 다시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당신 얼마나 중대한 직무유기를 했는지 아직 실감이 안 날 거요. 대통령 각하께서 진노하고 계시단 말이오.」
그리고서 전화가 끊기자 송기현은 천천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물 색깔이 짙다는 나일강이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이제 끝난 것이다. 아무리 줄을 대어도 대통령을 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무부에서 아주국장이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근대 측의 말이 맞습니다.」
자리에 앉은 신형목이 말하자 외무장관 오병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가 오전에 국회에 가 있는 바람에 보고를 못 한 모양입니다.」
「전화가 없습니까? 팩스가 없습니까? 직무유기예요.」
그러자 두 사람의 말을 비서실장 이태준이 가로막았다.
「장관이 그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고, 이젠 대책을 상의해 봅시다.」
근대리아에서 다시 비서실장 이태준 앞으로 전문을 보낸 것은 오후 2시였다. 사태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이태준은 즉각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고 마침 안보수석을 만나려고 들어온 오병한까지 모이게 한 것이다. 근대리아에서 행정청장을 참관인으로 하여 남북한 양국 대표가 비밀회담을 했다는 것은 철저한 비밀로 붙여져 있다. 아주국장 송기현이 그것을 알았다면 이집트 대사로 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태준이 잠자코 앉아 있는 대통령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각하, 제 생각입니다만 일단 제의를 수락한다는 전문을 띄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남북한 간 직접 대화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니만치 .」
그러자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표정은 어둡다.
「그렇게 하지.」
「각하께서 친전으로 보내시는 것이 ….」
「좋도록.」
간단한 몇 줄의 수락 전문은 그 자리에서 금방 작성되었고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타전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 대한 국민 여론이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흐르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따라서 지난번 근대리아의 비밀 협상을 성사시켜 정권 유지를 위한 남북한의 공조 체제를 이루었다고 자부했던 이태준과 신형목의 입장도 난처해져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놓아서 야당 후보 이대현에게 좋은 공격목표만 제공해 준 상황이었다.
집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비서관 한 명이 서둘러 들어섰다. 손에는 전문용지를 쥐고 있었으므로 대통령까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락 전문을 보낸 지 5분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각하.」
전문을 훑어본 이태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눈이 크게 뜨여겼고 얼굴에는 화색이 드러났다.
「제가 읽겠습니다.」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이자 침을 꿀꺽 삼킨 그가 조금 큰 목소리로 전문을 읽었다.
경애하는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
근대리아 정부는 귀국의 수락 통지를 받고 즉시 근대리아의 북한 대표부에 연락하여 다음과 앉은 결정 사항을 통보받았기에 연락드립니다.
1. 금번 남조선 어선의 영해 침범 사건에 대한 북남 장관급 대표 회담이 사흘 후인 5월 8일 근대리아의 고구려 호텔에서 개최되기를 바람.
2. 양방의 회담 참석 인원은 장관급 대표를 포함한 5명 이내로 하나 수행원은 제한 없음.
3. 금번 회담을 성사시킨 근대리아 정부의 참관인 2명이 회담에 참석함.
내용을 읽고 난 이태준이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근대리아 총독 강우진의 이름으로 발송되었습니다, 각하.」
대통령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군.」
그러나 그의 표정은 아직 밝아지지 않았다. 신형목이 입을 열었다.
「각하, 이번 회담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언론사에 알리는 것이 .」
이태준과 대통령의 시선이 마주쳤고, 이윽고 대통령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서 잘 내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오병한이 소리죽여 숨을 내리쉬었다. 신형목의 말대로 이제 남북한의 대표가 직접 만나 현안을 협상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겨우 정상적인 국가관계로 돌아온 감개였고 그것도 근대리아 정부의 덕분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어두운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정훈의 앞에 선 정치부기자 서동조는 청와대에서 배포한 자료를 들고는 헛기침을 했다.
「정부는 납북 어선 및 어부에 대한 송환 문제에 대해서 여러 채널을 통하여 다각도로 북한 정부와 접촉한 결과 수일 내로 장관급 대표회담을 근대리아에서 개최하기로 북한 정부와 합의하였음. 이상입니다.」
「대단하군. 장관급 직접 회담이라.」
혼잣소리처럼 이정훈이 말하자 서동조가 바짝 다가와 섰다.
「일면 톱으로 낼까요? 다른 곳도 모두.」
「그래야겠지.」
「회담 대표는 아직 미정이지만 외무장관 아니면 통일부총리가 갈 것 같습니다.」
「그대로 써.」
서동조가 자리로 돌아가자 곧 전화벨이 울렸다.
「이정훈입니다.」
「이국장 나요, 박기찬.」
「아이구 박수석이 웬일이십니까?」
박기찬은 청와대의 문공 수석이다. 그와는 신문사는 달랐지만 같은 정치부 기자로 십 년이 넘도록 뛰었던 인연이 있다. 이정훈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위인 그는 정치 감각이 있는 데다 처세술이 좋아 여당의 전국구 후보가 된 다음에 대변인을 거쳐 문공 수석이 된 관운이 뛰어난 사내였다.
「이국장. 이번의 회담 말인데. 정부 쪽이나 이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성사시킨 모양이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런 것 같더군요.」
「각하께서도 밤잠을 설치셨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논단에 정재일 교수의 원고를 실어 주셨으면 해서.」
「잘 아시겠지만 흐름을 맞추자는 뜻입니다. 부탁 한번 합시다.」
「글쎄 그것이.」
「솔직히 남북대화의 시작 아닙니까? 더도 덜도 없습니다. 이국장.」
「한번 보내 보시지요.」
「지금 쓰고 있으니까 마감 시간 안에 갈 겁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정훈은 입맛을 다셨다. 정재일은 한국대학 교수로 북한 문제 전문가였다. 그는 또한 정부의 외교 안보 연구실의 연구관을 겸임하고 있었으니 그가 써 올 내용은 뻔했던 것이다.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분주한 실내를 바라보던 이정훈은 전화기에 손을 대었다가 다시 떼었다. 심재택은 지금 근대리아에 가 있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7. 한민족의 3국
유장석의 방에 들어선 이대각이 그의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부르셨습니까?」
「응, 상의할 일이 있어서.」
창밖으로 맑게 갠 푸른 하늘이 보이는 아침 시간이었다. 유장석이 테이블 위에 양팔을 올려놓고는 바짝 다가앉았다.
「어제 북한계 주민 몇 명을 연행해 왔지?」
「열두 명인데 앞으로 더 늘어날 겁니다. 그 새끼들 혐의가 짙어요.」
이대각의 말이 금방 거칠어졌다.
「이 기회에 아예 뿌리를 뽑겠어요.」
며칠 전부터 그는 북한계 주민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마약 단속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동강 클럽을 샅살이 뒤졌지만 동연교가 마약을 샀다는 북한인은 찾지 못한 대신 타운의 다른 사업장들을 급습하여 상당량의 마약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 개자식들은 같이 숨 쉬고 살 자격이 없는 놈들이오. 마약은 북한 대표부에서 관리를 합니다. 대표부가 아예 마약 장사를 한단 말이오.」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개인이 장사를 할 수는 있으니까.」
「근대리아를 철저히 이용만 하는 놈들이오. 전혀 이점이 없는 해충 같은 족속이란 말입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어뿜은 유장석이 정색을 했다.
「내일 이곳에서 남북한 대표회담이 열리는데 우리가 주관하게 된 걸 알고 있지?」
그것 때문에 경비대가 비상대기 하고 있는 터이라 이대각이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유장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북한이 우리의 위상을 크게 올려 주었어. 그자들은 우리가 주관하면 남북한 대표회담을 하겠다는 식으로 한국 정부에 통고를 했단 말이야.」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당분간 마약 단속을 중지해. 북한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아.」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건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이오.」
「농담 아니야. 이 사람아.」
「치안을 맡은 내가 정치권의 지시에 따라 어디에서처럼 왔다 갔다 할 것 같습니까?」
입맛을 다신 유장석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큰 것을 보란 말이다. 마약 단속은 나중에 해도 돼.」
「내가 큰 것을 볼 필요는 없어요. 나는 내 일만 볼 테니까.」
「총독의 지시다.」
「총독 할아버지가 지시해도 난 못해, 마약 파는 놈들은 뿌리를 뽑을 거요.」
마침내 유장석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눈가가 붉게 물들여진 얼굴로 그가 이대각을 쏘아보았다.
「이대각이 말 좀 들어! 한 템포 늦추라는 것이지 방관하라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지금 늦추면 다 놓쳐요.」
「이런 빌어먹을 자식.」
그러자 이대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들이 마약 단속을 중지시키려고 한국 어선을 납치한 모양이구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근대리아 정부한테 생색을 내게 해 주었으니 총독이 북한 놈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 한국 정부는 호구 노릇만 하고 영문 모르는 어부들만 불쌍하구만.」
자리에서 일어선 이대각이 유장석을 내려다보았다.
「회담 끝날 때까지만 중지하지요. 나도 정치적이 되어가는 모양인데.」
입맛을 다시면서 그를 흘겨보는 유장석을 향해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큰 뜻이 없어요. 한국에서처럼 국회의원이 되거나 무엇이 될 상황도 아니고, 그쯤은 알고 계시오.」
한국 측의 협상 대표는 외무장관 오병한이었고 부대표가 안보수석 신형목이다. 거기에다 며칠 전에 해임된 아주국장 송기현 대신 실무 요원으로 두 명의 이사관급 행정요원이 참석해 있었다. 북한 측은 대표가 외교부장 김영남에다 부대표는 서일이었다.
고구려 호텔의 26층 특실에 모인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데 ㄷ자형의 이어진 부분이 조정 역할을 맡은 근대리아 정부의 강미현과 유장석의 자리였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서로 안부를 묻고 날씨 이야기들을 웃음 띤 얼굴로 주고받았는데 물론 건성이다.
이윽고 오병한이 헛기침을 했다. 본론을 꺼내겠다는 표시였다.
「이번 어선과 어부 문제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당국의 협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남북 간의 대화와 협조가 더욱 긴밀해질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의 이 역사적인 남북 간의 대표 회담에서 대한민국 전 국민이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김영남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건 잘 압니다. 그런데 남조선 정부는 남조선 측이 먼저 북남 회담을 제의했다고 발표를 하셨던데, 어떤 신문의 사설에서는 정부의 대북정책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라고도 했더군요.」
「잘 아시다시피 한국 언론은 너무 앞질러 가지요. 통제가 잘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신형목이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린 표정이었다.
「정부도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기회만 오면 아부를 하는 사이비 학자들 때문에, 그건 지난 정권에서 버릇이 잘못 들여진 때문이지요.」
「근대리아 정부가 주선해서 회담이 이루어진 것인데 남조선 정부는 그것을 철저하게 감추고 계시더군요. 청와대 발표문에도 근대리아는 오직 장소만 제공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것도 남조선 정부가 선정을 한 것으로.」
「글쎄 그것이 ….」
신형목이 다시 입을 열려는 것을 김영남이 손을 들어 막았다.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합시다. 당신들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변명만 하시다간 모처럼 만든 기회가 날아갈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러십시다.」
쓴웃음을 지은 신형목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말씀 계속하시오.」
「이 회담이 몇 달 안 남은 남조선의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겁니다. 아마 현 정권이나 여당 후보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요.」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미국 정부가 평양 대표부를 통해 우리에게 강력하게 항의해온 것을 아십니까?」
김영남이 묻자 오병한과 신형목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오병한이 조그맣게 머리를 저었다. 긴장한 표정이었다.
「모르고 있었는데요.」
「지난번에도 불쾌했던 모양입니다.」
김영남이 힐끗 두 명의 부이사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미국이 당연히 중재에 나서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행동이오, 그자들은 아직도 남조선을 식민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우리 지도자 동지께서는 코웃음을 치시고는 단호하게 그들을 물리치셨지요. 미국 대통령이 무릎 꿇고 사정을 한다고 해도 우리 지도자 동지는 한다면 하십니다.」
「여러 가지로 고마운 말씀인데 ….」
오병한이 입을 열었다.
「우선 당면 문제부터 이야기를 하십시다. 어선과 어부들을 돌려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양국의 관계에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오.」
「그렇게 하지요.」
김영남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한국 대표단의 얼굴에 금방 생기가 돌았다.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서두르듯 묻는 오병한을 향해 김영남이 웃어 보였다.
「사흘 후에 동해상에서.」
「어선과 어부 모두를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잡은 고기까지 모두, 그리고 우리가 준 선물까지 싣고 갈 겁니다.」
「고맙습니다.」
「양국 간의 합의문을 작성토록 하지요. 기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김영남이 오병한과 신형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실무자들이 합의문을 작성하는 동안 우리는 옆방에서 이야기를 조금 나눌까요?」
그는 강미현과 유장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근대리아의 중재자분들하고 말입니다.」
이한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동씨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반겼는데 아마 동연교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몰라보도록 여위었고 흰 머리가 부쩍 늘어나 있었다. 그가 전에 김상철이 쓰던 방에 들어가 앉자 동연교가 쟁반에 찻그릇을 받쳐 들고 들어섰다. 갑작스런 방문이라 그녀도 놀란 듯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그의 앞에 녹차 잔을 내려놓았다.
「저, 빚 말이야. 그것 계산 끝났어.」
이한이 불쑥 말하자 동연교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잔을 든 이한이 헛기침을 했다.
「이젠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말이야.」
「앞으로는 착실하게 살도록 해. 어머니 모시고.」
그는 탁자 밑에 내려놓았던 비닐가방을 들어 그녀 앞으로 밀었다.
「이것 내가 모은 돈인데 쓸 데도 없고 해서, 받아.」
동연교가 머리를 저었다.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받을 수 없어요.」
「왜?」
이맛살을 찌푸린 이한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내가 널 돈으로 사려는 줄로 아는 거냐?」
동연교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한국어로 투덜거린 이한이 녹차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가 뜨거운 바람에 입을 딱 벌렸다.
「지난번에 진 신세를 갚는 거다. 그것뿐이야.」
「우린 신세 지고는 못 살아. 꺼림칙해서 만일 안 받는다면 나나 우리 형님을 무시한 것이 돼. 내가 너 같은 계집한테 무시를 당하고 살아야 된단 말이냐?」
녹차 잔을 흘겨본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즉 우리를 찾아왔어야지. 넌 그것부터도 우리를 무시했어 」
거칠게 문을 열고 그가 방을 나서자 동씨 부인이 서둘러 다가왔다. 그녀는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눈치가 역력했다.
「아니, 벌써 가시려고.」
「자주 들르지요. 아주머니.」
중국인 거리를 나온 이한이 리조트 시티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는 그로부터 두 시간 후인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사무실 안에는 김상철과 변순태가 앉아 있었다.
「타운의 밀입국자 숙소에 마약이 숨겨져 있다는 정보가 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경비대는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형편이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더러 대신 그놈들을 치라고 부탁해 왔다.」
이대각이 부탁을 해 온 것이다. 이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겁니까?」
「총독의 지시라는 거야.」
「그렇다면 마약을 가게에 내놓고 팔아도 된다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다.」
자르듯 말한 김상철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경비대가 손을 뗀 줄 알고 있을 테니 놈들은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얼굴을 드러내 놓고 나설 수는 없어. 중국계 애들을 모아라.」
이한과 변순태가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 쪽의 정보는 최태호에게서 정확하게 흘러나온다. 이제까지 경비대가 그만큼이라도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빌라의 응접실에서는 스키장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요즘은 밤 기온이 영하 이십 도 안팎으로 추위가 많이 가셔져 있었으므로 환하게 불을 밝힌 스키 코스에는 스키어들이 많았다. 모두가 관광객들인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던 김상철이 몸을 돌렸다.
「대표단의 공식회의가 끝난 후에 양쪽의 두 사람씩만 옆방으로 가서 비밀 회담을 했다는 겁니다. 그 내용은 물론 알 수가 없지만……」
소파로 다가간 그는 심재택의 앞쪽에 앉았다.
「근대리아 측의 유장석 씨와 강미현도 동석을 했다지만 강미현은 말할 것도 없고 유장석 씨도 입을 열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넘어갈 북한 놈들이 아니오. 또 다른 요구 조건을 내걸었을 것이고 한국 정부는 승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합의문이 발표된 겁니다.」
오후 세 시경에 남북한 양국의 대표는 내외신기자 백여 명을 모아 놓고 공동발표를 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로 방영된 TV 생중계 방송이었다. 합의 내용은 대단히 고무적이었고 한국 측 입장에서 본다면 외교정책의 커다란 결실이었다.
우선 북한은 납북된 어선과 어부들을 사흘 후에 동해상에서 한국 측에 인도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합의문에 다른 조건은 없다. 또한 양국의 외무장관은 핫라인(007 LINE)의 전화를 개설하여 현안이 발생하는 즉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고 발표를 했다. 이것은 공식 대화 창구가 개통된 것으로써 한국 정부가 역사적인 합의라고 자화자찬할 만한 일이었다.
심재택이 입맛을 다셨다. 그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아니었고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이건 현 정권이나 여당의 대선 후보에겐 전화위복이 된 사건이오. 야당의 자주국방 논리나 현 정권의 유화정책 비판론이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방문이 열리더니 현채옥이 쟁반 위에 술병과 간단한 안주 접시를 담아 들고 들어섰다. 빌라의 주인은 현채옥이었던 것이다. 탁자 위에 술상을 차려 놓은 그녀가 방을 나가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하긴 합의문 발표를 보면 한국 측의 체면만 높여 주었습니다. 뭔가 흑막이 있는 것은 틀림없어요.」
술잔을 든 그는 한 모금에 보드카를 삼키고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열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밀입국자의 숙소라고는 하지만 시멘트로 지은 5층 건물이었고 난방시설이 잘되어 있는 30평형의 아파트였다. 타운 외곽에는 이러한 5층 건물이 50여 개 동이나 세워져 있었으므로 이곳도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었다. 밀입국자라고 해도 근대리아에 직장을 얻게 되면 곧 영주권 미취득자로 분류가 된다. 따라서 직장의 보증으로 이곳의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되는데 주민의 대부분은 중국계와 러시아계 밀입국자들이었다. 한국계는 밀입국했더라도 행정청에 신고만 하면 즉시 근대리아 영주권이 나왔으므로 이곳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변순태는 40동의 앞마당에 설치된 물물교환 시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시장 안은 떠들썩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내다 팔거나 바꾸려는 사람들이 목청을 돋우어 흥정을 하는 것이다. 내다놓은 물건은 여자 속옷에서부터 전자제품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했는데 도대체 저 물건을 들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시장가에 있는 음식점의 나무 의자에 앉아 마악 국수 그릇을 들었을 때였다. 사내 한 명이 다가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현관 앞에 세 명이 있습니다. 출입구는 한 곳뿐이지만 이층이라 뒤쪽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변순태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뒤쪽은 네가 다섯 명을 데리고 맡아라. 난 현관으로 간다.」
부하가 잠자코 일어서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5분 후에 변순태는 42동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물거래 시장이 열린 40동의 바로 뒤쪽 건물이었는데 앞마당에는 주민들이 꽤 있었다. 날씨가 풀린 때문인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그들은 대부분이 중국인들이었지만 러시아인도 보였다. 변순태는 느린 걸음으로 좌측의 출입구로 다가갔다. 마당가에는 보안등이 켜져 있는데다가 아파트의 창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주위는 밝았다. 42동의 203호실이다. 출입구 안쪽 시멘트 받침대에 한 사내가 기대고 서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쪽 마당에 둘러앉은 중국인들과 어울린 두 사내가 북한인일 것이다. 3층의 창문이 열리더니 여자가 몸을 내밀고는 누군가를 소리쳐 불렀으므로 마당에서 왁자지껄한 웃음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시장도 활기찬 분위기였지만 이곳도 밝다.
변순태가 출입구로 다가가자 시멘트 받침대에 기대 서 있던 사내가 몸을 떼었다. 담배를 떨어뜨리고는 변순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그를 스쳐 지나자 사내가 서둘러 다가왔다.
「이보쇼.」
한국말이다. 변순태가 못 들은 척 발을 떼어 현관 안에 들어섰을 때 사내가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어디 가시오?」
이젠 중국말이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변순태가 사내를 바라보았다.
「5층에.」
변순태의 중국말에 사내가 옷소매를 놓았다.
「5층에 사시오?」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왜 이러시오?」
현관 안의 계단에 서 있던 두 사내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앞마당에 있던 두 사내가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5층 몇 호실에 사는 누구요? 이름을 대 보시오.」
사내는 아직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503호실의 황씨와 나는 때이안 동향이요.」
변순태는 몸을 돌려 계단으로 다가갔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내들이 잠시 주춤대더니 분주하게 변순태 뒤쪽의 사내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들의 시선을 읽으면서 계단에 발을 디딘 변순태는 파카의 주머니에 자연스럽게 손을 집어넣자마자 안에 넣어 둔 리볼버의 총신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째 총을 쳐들고는 두 명의 사내를 쏘았다.
「탕, 탕, 탕, 탕.」
단숨에 네 발을 쏘아 갈겨 두 사내를 맞춘 그는 몸을 비틀면서 뒤쪽의 사내를 겨누었다. 그 순간 십여 발의 총성이 났다. 이미 권총을 뽑아들고 변순태를 겨누었던 사내가 입을 딱 벌리고는 그를 향해 한걸음 다가왔다가 시멘트 바닥에 엎어졌다. 현관 안으로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변순태는 권총을 세워 들고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203호는 우측이다. 203호의 문 옆으로 비껴 선 변순태는 숨을 몰아쉬며 3층의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부하들이 몰려오더니 문의 양쪽에 플라스틱 폭탄을 때려 붙이듯이 부착시켰는데 시간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계단의 사각으로 몸을 피한 순간 아파트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문짝이 부숴지며 떨어져 나갔다. 아직 파편이 떨어지고 있었는데도 부하 한 명이 계단을 내려가 아파트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다시 폭음과 함께 문밖으로 집기와 유리 조각이 쏟아져 나왔다. 아래쪽에서 올라온 부하 한 명이 다시 한 발의 수류탄을 집어넣자 이제는 문밖으로 화염이 뻗쳐 나왔다.
같은 시간, 창광 클럽의 이층에는 박기환과 이금철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나이는 비슷했지만 박기환은 소장이었고 이금철은 대좌여서 계급의 차이가 있다. 더구나 박기환은 지도자의 직속부서인 32호실 요원이다. 이금철이 근대리아의 개척자로 인정은 받고 있었지만 박기환은 이제 그의 엄연한 상관이었다. 박기환은 피부가 검은 때문인지 보드카를 한 병 가깝게 마셨지만 술을 마신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 건배를 합시다.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서.」
술잔을 부딪친 그는 단숨에 술을 삼켰다.
「아마 남조선 놈들도 이 시간에 축배를 들고 있을 거요.」
박기환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사적인 날이니 외교정책의 승리니 하면서 자화자찬하겠지만 모두 거짓이야. 무지한 남조선 국민들을 속여 넘겼다는 축배일 뿐이오.」
「우린 성동격서(聲來擊西)의 전법을 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려운 말 쓸 것 없고 일거양득이지. 한 번 움직여서 두 개를 단숨에 손에 쥐었소.」
그것은 한국과 근대리아 양쪽을 말하는 것이었다. 박기환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동무, 이번에 당의 조직을 재정비했소. 이건 평양에서 심사숙고하여 작성한 것이오.」
오늘은 술자리가 그저 북남의 대표 회담에 대한 자축의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은 이금철도 짐작하고 있었다. 5만 명의 이주민이 도착하고 나서 대표부는 서일과 장호성, 박기환의 셋을 중심으로 조직개편 작업을 극비리에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리아 정부와 비슷한 조직으로 편성이 되었는데 유사시에 근대리아를 순조롭게 인수하기 위한 것이다. 긴장하고 있는 이금철을 향해 박기환이 웃어 보였다.
「주민들은 앞으로 다섯 가구를 한 조로 열다섯 가구를 한 반, 육십 가구를 한 통, 백이십 가구를 한 동, 육백 가구를 한 면, 삼천 가구를 군, 육천 가구를 시, 일만 이천 가구를 도로 분류하는 조직 속에 포함될 거요. 어느 주민이라도 그에게는 조장, 반장, 통장, 동장, 면장 등이 있게 된단 말입니다.」
세포조직이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미 공화국에서 올 때부터 조직되어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소. 반 이상의 조직에 규찰대가 심어져 있어서 내 통제를 받습니다.」
「장호성 동지는 행정과 자금을 맡고 나는 치안을 맡습니다. 동무는 행정상으로 장동지의 소속이 되었소.」
「지금까지도 그래 왔으니까요.」
「그런데 최태호 동무 말인데.」
박기환이 술잔을 내려놓자 이금철은 긴장을 했다. 이것이 본론인 것이다. 조직 개편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동무 여러 가지 소문이 돌고 있어요. 돈을 모아서 숨겨 두었다고도 하고 사람을 시켜서 돈놀이를 한다고도 합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있소? 그래서 귀국시킬까 하는데, 동무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정색을 한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최태호 동무는 근대리아 개척 당시부터 저와 함께 일해 온 사람입니다. 소문만으로 그를 귀국시킨다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소문만이 아니오. 그자가 마약 장사를 했다는 것을 고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덮어 두고 명예롭게 귀국시켜 주려는 겁니다.」
그 순간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낯익은 규찰대의 간부가 서둘러 들어섰는데 당황한 표정이었다.
「42동 숙소가 습격당했습니다.」
그가 박기환을 향해 서두르듯 말했다.
「열한 명의 대원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
사내가 눈을 부릅뜬 박기환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 달 분으로 며칠 전 도착한 물건 오 킬로를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박기환이 주먹으로 탁자를 치자 술병이 넘어졌다. 그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떤 놈의 소행이야? 경비댄가?」
「경비대는 아닙니다. 중국인 같습니다.」
사내가 주춤대며 말을 이었다.
「중상을 입은 동무의 이야기를 들으면 중국말을 하는 것을 들었답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강미현이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아침 시간이다. 출근하자마자 강미현의 방에 들어온 유장석에게서 어젯밤의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중국인들이 왜 북한 사람들을 습격했을까요?」
「이 본부장은 마약 문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파트 안에서 방바닥에 흩어진 코카인 분말을 상당량 발견했답니다.」
「북한 대표부가 조금 전에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해 왔습니다.」
열한 명의 북한인이 피살되었으니 엄청난 사건이다. 북한 대표부는 경비대의 늑장 출동에 대해서도 항의를 해 왔는데 이대각의 해명을 들은 유장석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덮어두고 있었다.
강미현과 유장석은 곧 총독실로 들어섰다. 총독은 이남호와 마주 앉아 있었는데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총독이 불쑥 물었다.
「어젯밤에 난리가 났다면서? 북한 사람들이 열 명도 넘게 죽었다고?」
유장석에게 묻는 말이다.
「예, 각하.」
행정청장으로서 책임이 있는지라 그가 머리를 숙였다.
「마약 문제로 중국인 갱단과 싸운 것 같습니다.」
「삼합회와 말인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총독이 입맛을 다셨으나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저희들끼리 죽고 죽이는구만. 우리가 손을 대지 않아도.」
혼잣소리처럼 말한 총독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어때? 시간되었지 않나?」
이남호가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정각이니까 오 분만 더 계시다가 일어나시지요. 바로 옆방이니까요.」
10시 5분 정각에 총독이 비서실장 이남호와 행정청장 유장석, 총독실의 강미현과 함께 접견실로 들어섰다. 10시 5분 전에 접견실로 들어와 앉아 있던 대한민국 외무장관 오병한과 안보수석 신형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기다리셨습니다.」
만면에 웃음을 띠운 총독이 그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총독은 오병한과 안면이 있다.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오병한이 웃으며 말하자 총독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들은 총독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 앉았는데 양쪽 모두 약간은 긴장되고 서먹한 분위기였다. 접견실은 백 평쯤의 넓이에 사각의 양면이 유리벽으로 덮여 있어서 푸른 하늘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대리석 바닥과 양탄자, 천장의 샹들리에와 가구들이 잘 조화된 방이었다.
신형목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저, 대통령 각하께서 안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아아, 그래요?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총독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통령 그만두시면 이곳으로 한번 쉬러 오시라고도 말씀드리시오. 공기가 맑아서 아주 좋습니다.」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신형목이 눈을 깜박이며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6개월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오병한이 입을 열었다.
「이번 회담을 도와주셔서 저희 정부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도 꼭 그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도와 드린 것이 아니오. 북한 사람들이 일부러 우리를 끼워 넣었을 뿐이지.」
총독이 선뜻 말하자 오병한과 신형목이 얼굴을 굳혔다. 그들은 이러한 파격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사실입니다. 북한이 먼저 우리에게 접촉을 해 왔지요. 한국에 연락을 하라고 말입니다.」
방음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숨소리도 들릴 것 같은 방 안에 다시 이남호의 말소리가 울렸다.
「요컨대 우리 근대리아 정부도 한국 정부의 약점을 쥐고 있으라는 북한 측의 배려지요. 그래서 지난번 비밀회담 때부터 우리를 참석시킨 것입니다.」
오병한과 신형목의 얼굴이 더욱 딱딱해졌다. 그들은 잠자코 이남호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의 본래 뿌리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들을 벗어나 얼마나 후련한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끊임없이 받고 있었을 테니까요.」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그들을 쏘아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들이 우리를 속국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한 마디면 역적 아니면 매국노로 몰릴 당신들이 말이오. 조금 전에 총독 각하께서 당신네 대통령께 이곳에 쉬러 오라는 말씀을 흘려듣지 말아요. 그것은 이곳을 망명처로 삼아도 좋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봐, 이실장 모두 알 만한 분들이다, 예의를 차려라.」
총독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정치는 그렇게 하는 모양이라고 배우고 있는 중이다. 속이야 어떻든 겉치레가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여.」
오병한이 헛기침을 했다.
「이것, 드릴 말씀 없습니다. 원체 사정이 급박했고 솔직히 끌려가는 형편이어서.」
「근대리아로 한국인의 무제한 투자이민을 승인해 주시오. 다음 달부터 당장.」
허리를 편 총독이 자르듯 말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 사이에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서울에 근대리아의 대사급 대표부를 설치할 테니 그렇게 아시고, 투자이민에 대한 광고를 대대적으로 내겠소. 그것을 허용해 주시오.」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당신들이 이곳에 대표부나 대사관을 설치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 시간이 꽤 걸릴 테고 할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 대표부는 다음 주에 설치될 테니 일국의 대사관 대우를 해 줘야 될 겁니다. 북한이야 당신들한테 쌀이나 돈을 받으려고 그저 밀고 당기고 하겠지만 우린 달라요. 아쉬운 것이 별로 없는 입장이니까 잘 생각하시오.」
총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오병한과 신형목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로 방을 나가자 따라 일어섰던 이남호가 그들을 둘러보았다.
「자, 세부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내부에서 정보가 새었다.」
그리고는 어금니를 문 박기환이 앞에 선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북한 대표부의 그의 방 안에 모인 부하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42동 203호를 딱 짚고 공격해 왔어. 그곳에 물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는다.」
그의 말소리는 얼음날처럼 섬뜩했다.
「배신자가 있다. 너희들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앞에 둘러선 사내들은 규찰대의 간부들로 모두 네 명이다. 그들은 잘 단련된 군입답게 차렷 자세로 선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박기환이 소리죽여 한숨을 벨어 내었다 마약의 판매는 장호성의 소관이지만 수송과 보관은 그의 책임인 것이다. 소매가격으로 500만 달러 값어치의 코카인을 강탈당했으니 이제까지의 노력이나 경력이 일순간에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
머리를 든 그가 부하들을 쏘아보았다.
「규찰대 전원을 풀어서 중국인 거리를 뒤져라. 조금이라도 수상한 놈이 있으면 잡아 족쳐라. 삼합회를 염두에 둘 것도 없다.」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어서 움직여!」
부하들이 방을 나가자 그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중국어가 들리자 그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난 북한 대표부의 박기환이오. 양필성 선생을 바꿔 주시오.」
그의 중국어는 유창했다.
「내가 양필성 입니다.」
그의 직통전화 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통화는 처음이었다.
「양선생, 전화로 실례합니다.」
「아니 천만의 말씀을. 박선생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 아니라 어젯밤의 사건 때문에‥‥들으셨지요?」
「아아, 들었습니다. 정말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부드러웠다.
「무자비한 놈들이었습니다. 그래, 사건에 진전이라도 있습니까? 제가 도와 드릴 일이라도.」
「부상당한 동무의 말을 들으면 습격자들은 중국인이었다는 겁니다.」
「허어,」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췄던 양필성이 혀를 차는 소리를 내었다.
「그렇다면 우리 삼합회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중국인이라면 양선생께서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우린 우방이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집안에 값진 물품이 있었습니다.」
「허어.」
다시 서너 번 혀를 찬 양필성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유감이군요. 어쨌든 우리도 힘닿는 데까지 협조해 드리지요. 지금은 그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군요.」
「고맙습니다. 양선생. 그럼.」
아랫입술을 깨문 박기환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승승장구해 왔던 그의 인생에서 처음 닥친 시련이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일과 장호성이 그의 결과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날 밤, 열두 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타운의 대동강 클럽 후문을 나온 한 사내가 주위를 살피더니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지나치는 행인이 간혹 있을 뿐으로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여러 차례 골목을 돌아 앞쪽의 큰 길이 보이는 입구 근처에 나온 사내는 건물의 벽에 등을 기대고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꽤 오래 골목을 돌았으나 대동강 클럽의 네온사인이 한 블록도 못 된 옆쪽에서 반짝이고 있는 위치였다. 곧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사내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곳은 사무실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으므로 밤에는 인적이 끊기는 곳이었다.
「최 동무야?」
다가온 사내는 이금철이었다. 그는 최태호의 옆에 붙어 서더니 길게 숨을 내리쉬었다.
「참, 내 꼴이 우습게 되었군. 이제는 감시를 달고 다니다니.」
「전 밤낮으로 두 명이나 붙어 있습니다. 위원장 동지.」
둘이서 있을 때는 최태호는 지금도 이금철을 위원장이라고 부른다. 그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으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위원장 동지도 감시가 붙다니요?」
「어젯밤 사건으로 박기환이 반쯤은 미친놈이 되었어.」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동무를 보자고 한 건 동무가 곧 평양으로 소환당할 것 같아서야. 어제저녁에 박기환한테 들었어.」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뜬 최태호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이금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무 소문이 나쁘게 났어. 그리고 박기환은 어떤 증거도 쥐고 있는 모양이야.」
「어떤 증거 말입니까?」
「돈을 모아 두었다든가 돈놀이를 한다는 건 소문을 들은 모양이고 마약 장사를 했다고 어떤 놈이 고발한 것 같아.」
「‥‥‥‥」
「박기환은 교활한 놈이야, 나한테 말해 준 것도 어쩌면 함정을 파려고 그랬는지도 몰라.」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어젯밤의 사건이 일어난 거야. 박기환은 지금 정신이 없어. 마약 보관은 그놈의 책임이니까.」
「그놈도 온전치 못할 겁니다.」
혼잣소리처럼 말한 최태호가 그에게로 바짝 붙어 섰다.
「위원장님, 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처자식까지 데려온 마당에 소환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망치겠나? 이곳에 남아 있을 수는 없어.」
최태호가 이금철의 손을 움켜쥐었다
「위원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도망치면 책임을 지셔야 할 텐데요.」
길게 한숨을 내리쉰 이금철이 최태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동무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어. 그런데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더구만. 노력한 대가를 받는 것이고 또 그럴 자격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란 말이야. 나도 썩었나 봐. 나한테 권한을 준다면 부하들에게 역량껏 돈을 벌도록 기회를 주고 싶었지, 그렇게 한다면 남조선 놈들보다 몇 배나 더 성과를 올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쓴웃음을 지은 그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없어. 돌아가야 돼. 변소에 간다고 나왔으니까. 자, 그럼 동무도 돌아가.」
「위원장님.」
최태호가 불렀으나 이금철은 잠자코 몸을 돌리더니 골목 안의 어둠 속으로 곧 자취를 감추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기환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깊은 밤이다. 벽시계는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대표부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방금 평양의 하준일과 전화 통화를 마친 것이다. 하준일은 이제 당 조직지도부의 당 사업 담당비서가 되어 있었는데 명실공히 조직지도부의 2인자였다. 물론 조직지도부의 수장은 지도자인 김정일이다. 조직지도부는 체제의 직접 담당 기관으로 이 기구의 지시에 의해서 당 중앙위원회가 움직이고 북한 체제가 작동되어 온 것이다. 하준일은 대단히 중대한 과오라고만 발했을 뿐이지만 그것은 곧 과오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었다. 500만 달러의 현금이나 마찬가지인 코카인을 강탈당했으니 이것은 엄청난 직무유기였다.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흰색의 직통전화였으므로 그는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박소장. 난 박기동 씨 심부름을 온 사람이오.」
사내가 한국어로 대뜸 말했으므로 박기환은 와락 눈을 치켜떴다.
「당신 누구야?」
「박기동 씨의 전갈이야. 동로의 마냐 클럽에 가면 쥬코프라는 지배인이 있어. 그 사람이 쪽지를 가지고 있는데 당신이 직접 찾아가도록 해.」
그리고는 사내가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허튼짓 말고, 그쪽은 마피아의 본거지니까. 쥬코프는 당신 얼굴을 알아.」
「이봐, 무슨 수작이야?」
박기환이 버럭 소리를 치자 사내가 다시 웃었다.
「당신 목숨이 달린 일이지. 박기동 씨가 그렇게 말하더구만. 그러니 잠자코 쪽지를 받아.」
마냐 클럽은 대표부에서 차로 이십 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유명한 러시안 클럽이었다. 마피아는 5층 건물의 전체를 클럽과 카지노, 호텔로 만들어 놓았는데 백계 러시아 여인들의 수준이 일급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단숨에 마냐 클럽으로 달려간 박기환은 혼자서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지배인 쥬코프는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체중이 150킬로그램은 될 것 같은 거인이었다. 다가온 쥬코프가 얼굴에 웃음을 띠우더니 소란스러운 홀을 피해 계단 쪽으로 그를 안내해 갔다. 계단 밑의 으슥한 곳에서 둘이가 되자 그는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 한 장을 내어밀었다.
「여기 있소, 박장군.」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인 새벽 두 시경에 고속도로 하행선을 맹렬하게 달려온 검정색 포드가 근대시 기점 120킬로에 있는 간이휴게소로 들어섰다. 주유 시설도 없는 데다 매점도 시원치 않은 이곳은 그저 피로한 운전자를 위한 주차장 구실만 하는 곳이었다. 넓은 주차장에는 서너 대의 승용차가 드문드문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뿐이었는데 포드가 들어서자 승용차 두 대에서 불이 켜졌다. 그리고는 포드의 양옆으로 다가오더니 나란히 멈춰 섰다. 곧 포드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박기환이 내려섰다. 그러자 옆쪽의 벤츠에서 내린 것은 김상철이었다. 차량들의 라이트는 켜진 상태였으므로 반사광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서로 상대방의 사진으로 얼굴을 익힌 것이다.
「박소장님. 나 김상철입니다.」
그에게로 다가간 김상철이 손을 내밀었다. 영하 십 도 정도의 날씨여서 그들은 맨손으로 악수를 했다. 굳은 얼굴로 선 채 입을 다물고 있는 박기환을 향해 김상철이 웃어 보였다.
「제 차로 가실까요?」
그들은 곧 벤츠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는데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심재택이다. 운전사는 옆쪽 차로 옮겨간 후여서 차 안에는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
「이 사람은 내 보좌관이오.」
심재택을 소개하자 박기환이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김사장, 당신은 내 약점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잘못 생각한 거요.」
「글쎄 나도 진즉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빌미로 박소장을 불러낼 생각은 하지 않았었습니다.」
「어떤 협박을 할 거요? 우선 들읍시다.」
표정은 굳어져 있었지만 박기환은 두렵다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은 그는 턱을 들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박기동이 추방당하기 전에 모두 털어놓았지요. 박소장한테 세 차례에 걸쳐 뇌물로 팔만 달러를 바쳤다고. 그 대신 북한 측 공사의 자재공급을 맡아 오십만 달러쯤 남겼다고 하더군요.」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물론 영수증도 없고 증인은 주었다는 박기동뿐이니 모함이라고 밀어붙일 수도 있으시겠지. 하지만 박기동이 자재 대금에서 얼마나 이득이 남았다는 기록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요. 물론 지출 전표와 함께.」
「그래서?」
표정 없는 얼굴로 박기환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협조해 주시오. 그 보상은 얼마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갖고 있는 고급 정보만 얻으면 됩니다. 절대로 노출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셔도 될 거요.」
「당신은 김사장의 보좌관이 아니지?」
불쑥 박기환이 묻자 김상철과 심재택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심재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한국의 안기부 요원이오.」
「남조선 정부 대표들은 이곳에서 떡이 되어 나갔는데 안기부 요원은 신바람이 나 있군.」
「그것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소.」
「묘한 때에 만나게 되는군. 엎친 데 덮친 꼴인가.」
혼잣소리처럼 말한 박기환이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당신들은 날더러 조국을 배신하라고 하는 모양인데, 사람 잘못 보았어.」
「박기동의 일은 난 모르는 일이야. 장부를 아무리 위조해도 난 결백을 주장할 거야.」
「여긴 녹음장치 같은 건 없습니다. 박소장.」
심재택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이곳에 와 준 것으로 우리는 당신 입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서로 협조해 나갑시다.」
「당신들은 날 도울 수가 없어.」
갑자기 문을 열고 박기환이 밖으로 나가자 김상철과 심재택도 따라 내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났으나 오히려 시원했다.
「난 이번 사건으로 문책을 받게 돼. 곧 이곳을 떠날지도 모른단 말이야.」
바람에 날린 그의 목소리를 듣자 김상철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섰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선 듣기나 합시다.」
다음 날 아침 북한 대표부 이층에 있는 서일의 집무실 안이다.
「내일쯤 평양에서 감사조가 파견되어 올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서일이 찌푸린 얼굴로 장호성을 바라보았다.
「지도자 동지가 직접 지시를 내리셨다는 거야. 이번 사건을 해결하라고.」
「박소장은 내부에서 정보가 새었다고 합니다. 대표동지.」
장호성의 말에 서일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더 시끄러워지겠군, 내부를 온통 휘저어 놓을 테니.」
「박소장이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꽤 오래 겪어 보았는데 책임감이 강한 동무입니다.」
솔직히 500만 달러 값어치의 코카인을 강탈당한 것이 사람 죽은 것보다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삼합회는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데 혹시 다른 중국인 갱단들의 소행이 아닐까?」
서일이 묻자 장호성이 머리를 저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군에서 흘러들어온 무기들을 식당 종업원도 갖고 있으니까요.」
「호사다마라고 일이 잘 풀리나 했더니 꼭 걱정거리가 생기는군.」
장호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업장을 돌아보겠습니다. 일반 조직은 별 문제가 없는데 이번 사건 때문에 사업장의 조직이 뒤숭숭해져 있어서요.」
근대시의 사업장을 맡고 있는 최태호는 그 시간에 리조트 시터의 스키장 구역에 들어와 있었다. 스키장은 이백만 평이나 되었으므로 사무실 건물만 해도 수십 동이다. 그는 스키장 서쪽의 창고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와 마주 앉은 사내는 이한이다. 이한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지금 도망치면 며칠 전의 사건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하긴 당신 덕분에 그곳을 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직하게 도망칠 건 없지 않아?」
「이봐, 마음 편한 소리 그만해,」
최태호가 짜증을 냈다.
「당신들은 지금 내 입장을 몰라서 그래. 박기환이 날 오늘이라도 소환시킬 수가 있단 말이야.」
이미 최태호는 처와 열두 살 난 딸을 스키장의 빌라에 숨겨 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김상철의 도움으로 러시아나 일본으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입맛을 다신 이한이 정색을 했다.
「걱정하지 말고 어서 사업장으로 돌아가. 만일 소환시킨다면 내가 쳐들어가서 빼내 줄 테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김상철이 들어섰다. 일어선 그들에게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보인 김상철이 자리에 앉았다.
「최형, 방금 연락을 받고 온 길인데, 걱정하지 말고 근대시로 돌아가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최태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금철 씨가 박기환에게서 직접 들었단 말씀입니다. 제 소문을 조사하고 있는 데다 증인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저하고 김사장님하고의 관계까지 알려지면 저는 당장에라도 총살을 당합니다.」
「내가 들은 정보로는 최형의 증인도 없고, 소문의 증거도 잡은 것이 없어요. 그건 박기환이 최형을 떠보기 위해서 한 짓이오. 이금철 씨를 통해서 말이 전달되리라고 예상하고 말이오.」
김상철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함정에 빠지면 안 됩니다. 나를 믿고 사업장으로 돌아가세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그리고 최형 부인과 딸은 지금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아침에 스키 타고 왔다고 말하라고 했어요.」
얼굴이 하얗게 된 최태호가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믿어도 됩니까?」
「날 믿어요. 최 형.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겠습니다.」
최태호가 사무실을 나가자 이한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박기환을 주물러 놓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왜 그것을 감추라고 하시는 겁니까?」
「심재택 씨 생각이다. 최태호는 박기환이 돌아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낫다는 거다. 그리고 박기환도 그것을 바라고 있어.」
「난 잘 모르겠는데.」
이맛살을 찌푸린 이한이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 심선생은 일을 골치 아프게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형님.」
그날 밤, 타운 서쪽에 새로 형성된 영주권 미취득자의 집단 거주지 안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어서 거주지의 주민들은 거의 잠에 취해 있을 때여서 총성은 더욱 크게 울렸다. 한두 정의 발사음이 아니었고 기관총까지 섞여져 있었는데다 잠시 후에는 수류탄의 폭발음도 두 번이나 났다. 이쪽의 거주지는 조립식의 3층 건물로 100여 동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총성과 폭발음이 들린 곳은 왼쪽의 끝부분에 있는 건물이었다. 2층의 창문으로 불길이 보이는 걸 보면 안에서 화재가 난 모양이었다. 어느덧 총성이 그쳐 있었으나 주민들은 창에서 눈만을 내어놓고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둘러라!」
권총을 움켜쥔 박기환이 응접실에 버티고 서서 소리쳤다. 집안은 박살이 나 있었고 벽에는 무수한 총탄 자국이 나 있는 데다 응접실 구석에서는 옷가지가 불에 타오르는 중이었다. 숙소는 30평 규모로 방 두 개에 응접실, 화장실 등으로 나뉘어진 간단한 구조였으므로 부하들은 제각기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집 안을 뒤지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집 안이 떠나갈 듯한 소리를 지르며 안방에서 부하 한 명이 뛰쳐나왔다. 그는 손에 검정색 비닐 가방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지퍼가 열린 안쪽이 드러나 보였다. 비닐 포장지에 싸인 코카인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박기환이 권총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철수!」
십여 명의 사내들은 쏟아지듯 문짝이 떨어진 현관문을 나가더니 계단을 구르듯 내려갔고 곧 그곳에서 경계하고 있던 십여 명과 합류하여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인 새벽 두 시경이다. 북한 대표부의 집무실에서 서일은 장호성과 박기환을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모두의 얼굴에는 생기가 났다.
「다시 찾아서 어쨌든 다행이야.」
서일의 목소리도 밝았다.
「하나도 축나지 않았다니, 박소장은 명예회복을 했어.」
「더구나 놈들이 집을 비웠을 때 치고 들어간 것을 보면 운도 좋은 모양이오.」
장호성도 웃는 얼굴로 그를 추켜 주었다.
「그, 조선족 정보원한테는 상금이라도 주어야겠소. 아니면 훈장을 주든지.」
「노출시킬 수 없는 정보원입니다. 내가 따로 상금을 주지요.」
「그렇지, 그렇게 하는 것이 낫겠소.」
박기환이 거주지에 심어 두었던 조선족 정보원의 정보로 코카인 전량을 무사히 찾게 된 것이다. 집은 비어 있었지만 옷가지와 일용품 몇 가지를 가져온 결과 중국인들의 소유물로 밝혀졌다. 중국인 갱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고 있던 집이 박살이 난 데다가 정체가 탄로난 터이니 그들이 집에 돌아올 리는 없었다.
「그럼 피곤들 하실 텐데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들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젠 편히 주무시오. 박소장.」
방문이 닫히고 나서 그들은 서로 마주 보았다
「박소장은 관운이 타고난 사람이군.」
서일의 말에 장호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반쯤은 미쳐 돌아다녔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정보원이 도와준 것이지요.」
「지금 당장 평양에 연락을 해야겠어. 감사조는 올 필요가 없겠군. 이제.」
「그럼요, 오히려 표창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찾은 것은 기적입니다. 대표님.」
머리를 끄덕인 서일이 전화기를 쥐었다. 새벽 두 시 반이었지만 지도자 동지는 깨어 있을 확률이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