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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5-2

Bollnow 2024. 3. 6. 07:35

5. 몰락의 시작

830, 블라디보스토크 부둣가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마린스키는 간부급 부하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직선거리로 ~킬로 북쪽이 근대리아의 부두였고 창가로 가 서면 다섯 개의 거대한 크레인이 희미하게 보인다.

마르첸코가 행방불명이 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오늘도 그는 파벨과의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대기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파리야킨도 그랬지만 파벨은 결코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다. 이번에 행방불명이 된 마르첸코가 2인자 행세를 했지만 파벨이 보낸 세 명의 간부급 부하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마린스키도 알고 있었다. 마린스키는 이고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조직에서 2인자인 인물로 자문관이었는데 파벨의 심복이다. 아마 파벨은 이고르를 감시하기 위해 또 다른 심복을 보냈을 것이지만 그놈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공격 시간은 보스가 정해줄 것이다. 그것이 오늘 밤이 될지 내일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마르첸코의 행적이 밝혀질 다음이 될 것이다. 그가 죽었건 살아 있건 파벨은 그것을 동기로 삼을 작정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보드카 병이 즐비했고 모두들 냉수 마시듯 들이키고 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부하 한 명이 들어섰다. 손에는 봉투 한 개가 쥐어져 있다

보스, 이것이 사무실에 여러 개 와 있는데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봉투 속에서 테이프 한 개를 꺼냈다.

녹음테이프입니다. 마르첸코 씨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린스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져서 테이프를 손에 쥔 부하는 당황했다.

보스, 어떻게 할까요?

거기다 내려놔라.

테이블 위에 테이프를 내려놓은 부하가 방을 나갔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대부분의 시선이 테이프에 모아졌다. 모두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것이다. 이윽고 마린스키가 입을 열었다.

여러 개가 보내진 모양인데‥‥ 우선 듣자.

누군가가 녹음기를 가지고 왔고 테이프가 끼워졌다. 스위치를 누르자 조용한 방 안에 마르첸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니콜라이 마르첸코다. 난 지금부터 2년 전 조세프 파벨이 어떻게 해서 안드레이 파리야킨을 제거했는지를 여러 동지들에게 고백하려고 한다. 파벨은 북한의 이금철에게 정보를 팔았다. 그는‥‥‥」

그만!

마린스키가 소리쳤으므로 부하 한 명이 스위치를 껐다.

마르첸코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단언하듯 말한 것은 이고르였다.

이놈들이 우리를 교란시키려고 음모를 꾸미는 겁니다.

그러자 마린스키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우리를 교란시키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보스, 테이프를 회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개가 있다는 데‥‥‥)

이고르가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회수하도록. 그리고 놈들의 조작이라고 들은 놈들한테 말해 주도록 해.

알았습니다.

이고르와 두어 명의 부하가 서둘러 방을 나갔다.

마르첸코가 다급했던 모양이지?

의자에 등을 기댄 마린스키가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남아 있던 부하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고르는 테이프의 목소리가 마르첸코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이것, 안 되겠다.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아예 근대리아를 쓸어버리는 것이 낫겠다.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부하 한 명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다른 부하였는데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전화기였다.

보스, 전화가 왔습니다.

난 그레고리 파트킨이라고 한다.

그레고리가 쏘아대듯 말했다.

, 허튼 소리 늘어놓을 시간도 없고 기분도 아니야, 내가 보낸 테이프를 받았나 확인하려고 전화한 것이다.

그레고리 파트킨이라면 강도단 두목 놈이로군. 지금은 김상철의 졸개가 된‥‥」

마린스키는 태연했고 오히려 그레고리보다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런 테이프로 도대체 뭘 어쩔 작정이냐?

시간이 없어서 우선 5백 개만 이곳저곳에 뿌렸는데 2, 3일 후에는 몇천 개가 배포될 거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 발악을 하는군.

한마디 하겠는데 마린스키‥‥‥」

그레고리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우리는 네까짓 졸개들한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두었으면 해. 애초부터 우리 목표는 너 같은 강아지들이 아니다. 파벨이야.

「‥‥‥‥)

이 테이프가 제 부하들한테 수천 개 배포된 것을 알면 그놈이 어떻게 나을 것 같나? 마린스키.

너는 잘 알 것이다, 마린스키. 용케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견디어 온 놈이니까.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레고리는 전화박스를 나와 길가에 멈춰 서 있는 볼가에 올랐다. 그가 옆에 앉은 김상철에게 말했다.

파벨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마린스키일 겁니다. 보포프는 최측근이지만 독자 세력이 없고 마르첸코는 저 꼴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전화했다는 것만으로도 효력이 있습니다.

볼가는 하바로프스크 시내를 벗어나 달려가는 중이었다. 김상철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9시가 넘어 있었으니 지금쯤 근대리아 부두에 송길수가 인솔하는 150명의 무장병력이 도착했을 것이었다.

보스, 아직 군은 움직일 기미가 없습니까?

그레고리가 생각난 듯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로스토프는 경찰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는 거야.

이틀에 걸쳐 로스토프를 만났던 이대각은 오후에 근대리아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에서도 로스토프에게 압력을 넣고 있었지만 군은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레고리가 답답한지 한숨을 쉬었다. 경찰은 마피아와 더욱 밀접한 관계여서 온갖 정보가 그들에게로 흘러나간다.

파벨도 지금쯤 테이프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놈이 당장에 대응할 최상의 표적은 근대 부두지요. 하바로프스크에 지사가 있지만 이미 직원들은 대피한 상태이고‥‥‥」

교활한 놈이다, 파벨은. 언제 어떤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는 놈이야.

그렇지만 그놈도 우리가 러시아로 뛰어들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볼가는 속력을 내어 어두운 밤길을 달려 나갔다. 그들이 은신처인 김스크 마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마을 안쪽의 공회당에서 차를 내린 그들은 판자문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마룻방 벽 쪽의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는 것은 마르첸코였다

여어, 이제 오시는군. 혼자서 술을 마시려니까 술맛이 안 났는데 잘 왔어,

마르첸코의 얼굴은 이미 술기운에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이 테이블에 앉자 마르첸코는 잔에 술을 따라 그들 앞에 밀어놓았다.

제일 유력한 보스 후계자는 마린스키야. 그놈은 파리야킨한테서도 견제를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두 한쪽만 영역으로 받았지.

술잔을 든 마르첸코가 건배를 하자는 듯 들어 올렸다가 그들의 반응이 없자 혼자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근대 부두도 마린스키가 습격하게 될 거야. 놈은 무장병력 천 명쯤은 금방 끌어모을 수 있거든.

파벨의 계산이지. 근대 부두의 경비대와 싸우게 되면 마린스키의 세력은 이기나 지나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

그쯤은 알고 있어, 마르첸코,

그레고리가 자르듯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에 파벨이 보포프를 보냈다. 놈은 이미 네 조직을 인수한 거야.

보포프라‥‥ 그 도마뱀 같은 놈.

얼굴에 웃음을 띠운 마르첸코가 술잔에 술을 채웠다.

너희들 덕분에 파벨이 내부 정리를 할 기회를 잡았구만 그래. 이번 기회에 놈의 기반이 단단히 굳혀지겠다.

글쎄, 그것은 두고 봐야지.

그렇게 말한 것은 김상철이다.

우리가 파벨한테만 기회를 준 것은 아니니까.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기동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조대길이 궁금한 듯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다리라는데, 지금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박기동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보드카를 삼켰다. 나호트카의 번화가인 치하오케안스카야 역 근처에 있는 카페 안이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주위는 술손님으로 소란스러웠는데 대부분이 선원이었다.

이것, 야단났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고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조대길은 이금철의 부하로 이번에 박기동을 따라온 사내였다. 마피아가 하바로프스크의 운송기지를 폐허로 만들고 그 보복으로 김상철이 마르첸코의 간부들을 몰살시킨 사건으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떠날 준비가 된 1,500명의 북한 근로자는 국경 근처의 군 기지에 수용되어 있었지만 근대리아로 들어갈 길이 끊긴 것이다. 철도로 하바로프스크까지 갈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근대리아로 들어갈 차편이 없다. 지금 근대리아와 하바로프스크와의 교통은 단절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어, 기다리는 수밖에. , 술이나 마저 마시고 나가자구.

박기동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숙소로 연락을 주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그가 연락을 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족 가게주인인 최진삼 씨였다. 최진삼 씨는 본래 장인규의 정보원이었다가 지금은 김상철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숙소로 정한 항구 근처의 모텔에 들어선 것은 오후 6시가 되었을 때였다. 보드카 한 병을 나눠 마신 그들은 적당히 취해 있었다.

이봐, 조형. 밤에는 색시집이나 가자구.

문에 열쇠를 끼워 넣으며 박기동이 말하자 조대길이 피식 웃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근대 부두가 있는데다가 연락하기에도 쉬웠고 호텔도 깨끗한 곳이 많았지만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것이 그가 나호트카에 온 이유였다.

방에 들어선 박기동은 소파에 길게 앉았다. 김상철이 마피아를 습격한 것은 조선족한테도 엄청난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가 연락을 할 때마다 최진삼 씨는 이쪽의 사정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신바람을 내 상황설명을 해주었는데 근대 부두는 조만간에 공격당할 모양이었다. 소파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던 박기동은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문으로 다가갔다.

, 누구요?

문 열어요.

한국말이었으므로 그는 문고리를 풀었다. 그러자 낯선 사내 세 명이 쏟아지듯 들어섰으므로 그는 완전히 잠이 깨었다.

당신들 누구요?

당신 박기동이지?

그렇게 물으면서 사내 두 명이 박기동의 어깨를 밀어 소파에 앉혔다. 이제 박기동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지만 아직 기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야? 지금 왜 이러는 거야?

사내 하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소리 쳐도 소용없다. 옆방에 있는 놈은 이미 골로 보냈으니까.

그는 30대 중반쯤으로 밝은색 양복을 맵시 있게 입었고 정확한 서울 말씨를 썼다. 박기동의 어깨가 점점 가라앉았다.

어때? 순순히 따라갈 거냐, 아니면 여기서 죽을 테냐? 결정해라, 당장.

, 어디로 말입니까?

그건 알아서 뭐해?

서울입니까?

그러자 사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넌 기소중지자 신분이지.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박기동이 그 일 때문에 사내들이 나호트카까지 올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도대체, 그러면 내가 무슨‥‥‥」

시끄러, 이 자식아.

갑자기 날아온 손바닥에 뺨을 얻어맞은 박기동이 몸을 움츠렸다.

, 일어나. 어서 짐을 꾸리란 말이다.

사내가 말하자 박기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방의 조대길을 골로 보냈다면 이놈들은 북한 쪽도 아니다. 짐을 꾸리면서도 그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어쩌면 이놈들은 조선족 마피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테이프쯤은 문제 될 것이 없다.

파벨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몇만 개를 뿌린다고 해도 상관없다. 놈은 우리 조직의 분열을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그것,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밤이 깊었으므로 저택은 조용했다. 응접실에 둘러앉은 간부급 부하들은 모두 파벨에 의해서 요직에 발탁된 인물들이었으니 최측근이라고 불리워도 될 사람들이었다. 그중 하나인 이고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KGB 출신으로 마린스키의 보좌역이자 파벨의 지시를 전달하는 연락관의 역할을 한다.

보스, 근대 운송에서 컨테이너 트럭 300대를 보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근대시를 출발했다는데 타운에서 보내온 정보여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말하자 파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들었다. 어떻게든 물자를 날라야 할 테니까 아마 사실일 지도 모르지.

근대 부두를 공략할 필요 없이 그 트럭들만 파괴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보포프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파벨이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근대의 강회장이 대통령을 만나러 모스크바로 떠난 모양이야. 로스토프한테서 연락이 왔어. 당분간은 자제하고 있으라고.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통령이 나서면 조금 골치 아파져. 체르넨코나 로스토프도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고.

모스크바의 양대 마피아 두목이었던 톨마초프가 아파트를 나서다가 반대파인 브리스탈파의 공격을 받아 살해된 것이 지난 달이다. 아파트 한 채가 거의 무너져 내린 전쟁이었는데 그 일을 기화로 대통령은 구소련 시대의 KGB 조직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모스크바 경찰국장과 간부급에 KGB 출신 간부들을 임명한 것이 그 예이다.

며칠간만 더 기다린다. 그때까지 각자 관리를 잘 하도록.

파벨이 맺듯이 말하자 부하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1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부하들이 모두 나가고 파벨이 혼자되었을 때 다시 방문이 열리더니 이고르가 들어섰다. 파벨도 기다렸다는 듯이 앞쪽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마린스키는 근대 부두 공격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승산은 있습니다, 보스.

이고르가 말하자 파벨이 잠자코 잔에 보드카를 채웠다.

김상철이 마린스키를 목표로 삼는 것은 확실하지만 마린스키가 모험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레고리가 세 번 전화를 해왔다면서?

술잔을 든 채 파벨이 묻자 이고르가 머리를 끄덕였다.

, 어제 두 번, 이틀 전에 한 번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 것 같나?

아마 내가 김상철이 같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근대 부두의 공격으로 네 세력은 거의 없어질 것이다. 넌 죽을지도 모른다. 너는 파벨의 총알받이로 희생될 것이다‥‥ 라고.

아마 마르첸코 그놈도 끼어들어서 네가 근대 부두 공격을 맡은 것은 그것 때문이라고 충고를 했을지도 모르지.

설마 마르첸코가‥‥‥」

이고르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파벨이 한쪽 입술만을 비틀며 웃었다.

마르첸코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다. 테이프를 들어보았겠지? 아주 구체적으로 성의 있게 협조해준 흔적이 보여. 그놈은 김상철과 손을 잡았다.

「‥‥‥‥」

마린스키가 병력을 모으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근대 부두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거야. 그 빌어먹을 대통령이 나설까 봐 그런 것이 아냐.

「‥‥‥‥」

병력을 모아서 총부리를 나한테 돌리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단 말이야.

술잔을 내려놓은 파벨이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고르, 이럴 경우에 너 같으면 어떻게 처신하겠느냐? 말해보아라.

이고르가 굳어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방 안에 찾아왔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방 안을 울릴 뿐이었다.

 

강회장을 수행한 것은 이남호 실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그룹 사장단과 그 배수 임원, 거기에다 근대리아에서 날아간 유장석 일행들이다. 그러나 코마노프 대통령을 만난 것은 강회장과 이남호, 유장석 셋이었고 러시아 측 참석자는 코마노프와 체르넨코 국방장관, 그리고 마슈크 경찰총장 셋이다. 두 시간에 걸친 회담을 끝내고 강회장이 숙소로 삼은 러시아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시가 되어 있었다. 경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호텔 앞에서 차를 내린 그는 수십 명의 수행원에 둘러싸여 로비를 지났다. 국가 원수 못지않은 위용이다. 방에 들어선 그는 저고리를 벗어 강미현에게로 건네주었다.

근대리아에 가는 것은 당분간 보류다.

저고리를 받아든 강미현이 잠자코 서 있자 그가 입맛을 다셨다.

물론 대통령은 우리 요구를 들어주었다. 부두에서 근대리아까지의 육로는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게 될 거야.

소파에 앉은 강회장은 지친 표정이었다.

근대리아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운영위원장 이하 정부 측 놈들이 근대리아를 망치고 있단 말이야.

강미현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을 만난 김에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한국 정부가 친미, 친일 정책으로 근대리아를 통제하려 한다고. 지금 같은 상황으로 나갈 바에는 차라리 ‥‥‥」

말을 멈춘 강미현이 힐끗 강회장의 눈치를 보았다. 답답한 김에 뱉은 말이었지만 강회장이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한다면 러시아는 공식 대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한국 정부의 의도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을 터이니 이것을 계기로 계약을 무효화하고 러시아군을 진입시켜 근대리아를 장악할 수도 있다. 개발에 투입된 자금과 노력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강회장의 의도대로 이제 근대리아는 러시아와 중국의 조선족에게는 새로운 조국이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희망의 땅인 것이다.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야 있나?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지. 그래서 상철이가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냐?

「‥‥‥‥」

코마노프한테는 내 사위가 될 놈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잘난 사위 두었다고 웃더라‥‥ 그 사람이.

잠자코 탁자 위에 시선을 주는 강미현을 향해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코마노프도 내가 근대리아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더구나. 보기보다 꽤 사려가 깊은 사람이야. 될 수 있는 한 한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고 일을 해결하기를 바라더라.

그럼 운영위원회가 어떻게 하고 있는 것도 알겠군요?

알겠지.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은근히 지원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러시아 정부가 운영위원회 체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면 한국 정부가 근대그룹을 억압하여 투자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강회장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우선, 성과는 있었다. 코마노프가 육로를 보장해준다고 했으니 근대리아는 다음 기회에 가기로 하자.

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내부 사정이 심각해. 경비본부장 놈이 유장석이를 체포한다 어쩐다 하고 대드는 상황이란 말이다. 그리고 상철이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이 할애비 말을 들어. 그놈은 운이 강한 놈이니까. 그리고 내 운까지도 넘겨받은 놈이란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되니까 잠자코 기다려라.

근대리아 운영위원장 관사는 경비본부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3층 건물이다. 근대시 외곽에 세워진 이곳은 본래 영빈관으로 사용될 계획이었으나 운영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위원장 관사가 된 것이다.

아침 10, 환한 햇살이 내려 비치고 있는 맑은 날씨였다. 보통 때 같으면 시내의 행정청에 출근했어야 할 운영위원회 전창남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방금 도착한 경비본부장 신재열이다.

코마노프가 약속했다니 육로는 열렸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물자 부족 현상은 해결되겠는데‥‥‥」

신재열이 말하자 전창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대각이 국경 근처에 대기시켜 놓았던 트럭 300대를 러시아로 출발시켰어.

마피아가 그대로 둘까요?

글쎄, 두고 봐야지. 하지만 로스토프가 코마노프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방관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수송단 경비를 해주겠지.

그렇다면 이번은 강회장과 김상철이의 판정승인가?

그러자 전창남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어젯밤에 이곳으로 실어 왔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안전하기도 하고 기초 조사를 마쳐야 할 것 같아서.

뭐야. 자백했나?

, 의외로 순순히 자백하더군요. 현재 북한 국경의 온성에 1,500명이 대기하고 있는 데다 교육을 받고 있는 놈들이 3,000명 정도 더 있다고 합니다. 그놈이 직접 확인하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김상철이의 지시를 받은 겁니다. 타운의 북한 측 책임자 이금철 대좌와 김상철의 합작품이지요.

신재열이 열띤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겁니다, 위원장님.

타운에는 곧 북한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입국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고 박기동이 김상철의 인력관리 대리인이라는 것은 경비본부에서 파악하고 있던 터였다. 신재열은 박기동을 추적한 끝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셈이었다.

 

보포프는 교활한 놈이야. 아마 당분간은 부하들과의 공식 석상에도 나타나지 않을걸? 한 놈씩 불러 충성을 확인하면서 세력을 키우겠지. 전에 파벨이 쓰던 방법이야.

마르첸코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고 지친 표정이었다.

나한데 반감을 갖고 있었거나 조금 소외당했던 놈들을 키워주면서 제 사람으로 만들 거야. 그런 놈들이야 어느 조직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늦은 오후여서 공회당의 유리창 밖에는 기운 햇살이 만든 그림자가 덮이고 있었다.

내가 얘기했던 베료스카의 지배인 칼리닌과 쟈파린 거리의 볼쇼이 클럽 주인 파르포프가 그놈에게 붙을 거야. 그놈들은 파벨이 심어 놓은 놈들이니까.

나머지 놈들은 내 별장에서 죽었지. 한 놈은 내가 처치했지만.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칼리닌과 파르포프는 이미 죽었어. 칼리닌은 가게 안에서 기관총에 맞았고 파르포프는 차 안에 있다가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그러자 방 안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고 그것을 김상철이 깼다.

이제 마르첸코, 아무래도 당신을 풀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래야 보포프보다 빨리 손을 쓸 것 아닌가?

마르첸코가 굳어진 얼굴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칼리닌과 파르포프를 없애다니, 보포프가 혼비백산했겠는데.

보포프를 없애는 걸 도와줄 수도 있어.

오히려 마린스키 입장이 딱하게 되었는데 그건 당신한테 맡기겠어.

조건이 뭐야?

상체를 세운 마르첸코가 바짝 다가앉았다. 이제 두 눈을 치켜뜬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새 마피아 보스의 동업자가 되는 것뿐이야. 아니, 후원자라고 할까?

파벨과 같은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으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지. 그레고리의 부하 몇 명을 당신이 데리고 있어 줘야겠어. 아마 도움이 될 거야.

이미 칼리닌, 파르포프는 당신이 제거한 것으로 소문이 났을 테니까 보포프는 잔뜩 긴장하고 있을 거야. 어때, 나가서 해보겠나? 마르첸코.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마르첸코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야. 그래서 나도 협력을 했고‥‥내가 왜 안 하겠나?

김상철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자 문이 열리더니 주코프가 들어섰다.

보스, 부르셨습니까?

마르첸코 씨가 나가실 예정인데 그전에 우리들과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주코프가 머리를 끄덕였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스.

 

로스토프가 1개 연대 병력을 근대 부두에 파견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고르는 방금 파벨한테 다녀온 길이었다. 마린스키의 앞자리에 앉은 그가 말을 이었다.

보스, 당분간은 움직임을 자제하라고 파벨이 말하더군요. 코마노프가 적극 개입하고 있답니다.

나도 들었어, 근대의 강회장이 코마노프를 만났다는 것을.

코마노프가 직접 로스토프한테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근대의 수송단이 하바로프스크로 다가오고 있어. 300대가 넘어. 아마 내일부터는 근대 부두에서 수송 열차가 출발하겠군.

그렇게 되겠지요.

마린스키는 이미 술이 조금 들어간 상태였는데 술병을 움켜쥐더니 보드카를 두어 모금 삼켰다. 저녁 7시가 넘어 있어서 창밖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이야기는 들었겠지?

술병을 내려놓은 마린스키가 이고르를 바라보았다.

파벨이 그 이야기는 안하더냐? 마르첸코가 대활약을 하고 있다는‥‥ 그가 칼리닌과 파르포프를 없애는 바람에 보포프가 어디에다 머리를 처박고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들었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세이를 하바로프스크로 파견했더군요,

알렉세이 같은 피라미쯤이야 2, 3일 후에는 얼굴 없는 시체가 되어서 아무르 강 위에 떠 있게 될 것이다.

「‥‥‥‥」

마르첸코는 김상철이의 지원을 받고 있어, 이미 하바로프스크는 마르첸코의 수중에 다시 들어갔다.

다시 술병을 쥔 마린스키가 병을 기울여 두어 모금을 삼키고 내려놓았다.

마르첸코 습격 사건이 있는 직후 파벨은 근대 부두를 공격해야 했다. 그렇게 했으면 나는 반 이상의 세력을 잃었을 것이고 성공했든 실패했든 파벨의 권위는 설 수 있었어.

이고르가 긴장한 얼굴로 마린스키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파벨에 대한 비판이다. 마린스키가 말을 이었다.

이고르, 넌 내가 파벨 앞에서 내 병력을 동원해서 근대 부두를 치자고 솔선해서 나서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이다. 그것은 의심받기 싫어서였어.

마르첸코의 테이프 사건과 놈들의 전화가 나한테 몇 번 왔다는 것을 알게 된 파벨은 아예 병력동원을 포기했지. 그렇지 않나?

, 그렇습니다, 보스.

파벨이 블라디보스토크는 너한테 넘겨준다고 하더냐?

이고르가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닙니다, 보스.

그러자 갑자기 마린스키가 술병을 거꾸로 들더니 테이블을 내리쳤다. 병이 깨어지면서 술이 사방으로 튀었고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마린스키의 심복들이다.

그들이 잠자코 주위에 둘러서자 마린스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고르, 이제 명분은 나한테 있다. 파벨은 이제 끝났단 말이다.

 

장인규가 금강산 클럽에 들어선 것은 아침 10시 정각이다. 이제 날씨는 영상 10도의 여름 날씨였으므로 얇은 가죽 잠바에 바지 차림을 한 그녀는 곧장 홀로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앞장을 섰다. 김상철이 러시아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이제 그녀는 타운의 업소들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일을 관리하는 입장이다. 사내는 홀 안쪽의 밀실로 다가가더니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소파에 앉아 있는 이금철이 보였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뒤에 붙어선 경호원들에게 그녀가 말했다. 이제 서로 왕래하는 사이이지만 한 번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금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클럽이 꽤 좋아졌네요.

그렇게 인사는 했지만 악수 같은 것은 양쪽 모두가 할 생각도 없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생수병과 잔이 각각 앞쪽에 놓여 있었고 담배와 재떨이도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요? 갑자기.

이금철이 묻자 장인규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박기동 씨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블라디보스토크의 최진삼 씨도 나흘 전에 전화를 받은 것이 마지막이라는데‥‥‥」

글쎄, 나는 그쪽하고 직접 연락이 안 되어서 · 하지만 온성에 다녀간 것만은 확인이 되었소,

이금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혹시 김 사장한테 가 있지 않을까?

확인해봤는데 없어요. 그리고 박기동은 김 사장의 연락처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이제 육로가 개통이 된 상황이라 박기동이 준비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쪽 사람도 연락이 없습니까?

온성과는 연락을 주고받지만 박 선생과 같이 다니면서 나한테 연락을 하지는 않소,

그렇다면 좀 찾아봐 주세요, 나호트카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합니다. 바닷가의 무슨 모텔이라는데 최진삼 씨가 압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인규가 말을 이었다.

내일까지 연락이 없으면 김 사장께 보고를 해야겠어요.

따라 일어선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장 사람을 보내지요. 온성에도 연락을 해보겠소.

 

하바로프스크는 마피아 간의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파벨이 보낸 알렉세이와 보포프가 연합한 세력과 마르첸코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기선을 잡고 있는 것은 마르첸코였다. 그는 이미 파벨의 심복들을 거의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레고리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 가게나 주거지를 불문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대낮에도 거리에는 폭음과 총성이 났다. 경찰 당국은 총격전 시는 물론이고 총기를 휴대한 마피아는 현장에서 사살한다는 강경책으로 나왔는데 마피아가 일사불란한 지휘체제였을 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 상황이 그들에게는 마피아를 제압할 기회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녁 8시가 되자 시내는 인적이 드물었고 차량의 통행도 뜸해졌다. 경찰 당국이 밤 9시로 통금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시 외곽의 주택가는 이미 인적이 끊긴 지 오래였다.

 

국도로 이어지는 주택가의 도로 모퉁이에 세워진 3층 건물도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이곳은 전에 철도노동조합 사무실로 쓰이다가 지금은 낡아서 시의 자재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건물 2층의 사무실 안, 창에 짙은색 커튼을 내린 방 안에 테이블을 중심으로 7, 8명의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천장에 달린 두 개의 형광등이 열 평 남짓한 방 안을 비추고 있었는데 분위기는 무겁다. 보포프는 테이블 안쪽에 앉아 있었다. 며칠 사이에 그의 볼은 핼쑥하게 여위어 있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마르첸코한테 칼리닌과 파르포프가 당했지만 아직도 간부급 서너 명은 우리가 끌어들일 수 있어. 주저하거나 저쪽으로 넘어갈 눈치가 보이는 놈들은 우리도 가차 없이 처단할 테니까.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의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혔다.

오늘, 빌리 클럽을 박살낸 것도 그것 때문이야. 바하린 그놈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지만 이제 다른 놈들도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와 마주 보고 앉은 알렉세이는 30대 중반으로 유지노사할린스크 출신이다. 회색빛 머리칼에 다부진 체격의 그는 구소련 시절에 꽤 날리던 축구선수였다는 소문이 있다. 알렉세이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들도 제각기 담배를 피우거나 딴전을 피웠는데 입을 여는 것은 보포프 혼자이다.

저녁에 파벨하고 통화를 했어. 블라디보스토크를 곧 정리하고 이곳에 온다는 거야. 근대 부두는 코마노프가 가로막아서 당분간 보류시킬 수밖에 없겠다고 하더군.

그러자 알렉세이가 머리를 들었다.

보포프, 마르첸코는 이미 예전의 조직 대부분을 규합해놓고 있어요. 그것도 파벨한데 말해주었소?

보포프가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이야, 알렉세이. 그리고 김상철의 지원을 받아 더욱 날뛰고 있다고도 말해주었어.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할 것이야, 그 배신자는.

문이 열리면서 사내 하나가 들어섰으므로 방 안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사내는 알렉세이의 부하였다. 곧장 알렉세이에게로 다가간 그는 허리를 굽혀 몇 마디 귓속말을 하고 물러섰다. 천천히 머리를 끄덕인 알렉세이가 보포프를 바라보았다.

보포프, 파벨은 한 시간 전에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쳤어. 블라디보스토크는 지금 마린스키가 지배하고 있어.

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말을 이었다.

방금 내 부하한테 연락을 해온 사람은 이고르야. 그러면 믿을 만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보포프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 당장 파벨한테 연락을‥‥‥‥」

그 순간이다. 어느 사이에 권총을 빼든 알렉세이가 총구를 보포프의 가슴에 똑바로 겨누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도 일제히 총을 뽑았다.

이고르가 해준 말이 또 있다. 마린스키와 마르첸코가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야. 이고르가 마린스키 측에 붙었듯이 나도 마르첸코에게 협조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지.

, 이것 봐, 알렉세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보포프가 손을 내젓는 순간 알렉세이의 총구에서 섬광이 튀었다. 소음기를 끼운 총성은 둔탁했지만 방 안을 울렸고 가슴을 맞은 보포프가 앉은 채로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알렉세이와 나란히 앉은 부하들이 앞쪽에 앉은 보포프의 일행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다. 보포프와 그의 심복 세 명은 시체가 되어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마르첸코를 찾아라. 서둘러.

알렉세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만나고 싶다고, 아니, 연락이 되면 날 바꿔 줘, 어서!

김상철이 파벨의 도주 사실을 안 것은 그날 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내려보냈던 그레고리의 부하가 전화로 알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하바로프스크의 마르첸코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어젯밤 알렉세이가 보포프를 사살했소. 이것으로 사건은 종결이요, .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린스키와 곧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조직을 양분해야 될 것 같소.

그가 마린스키에게 전권을 양보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통화를 마친 김상철로부터 내용을 들은 그레고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연하지요, 그리고 그런 상황이 우리들에게는 차라리 낫습니다. 파벨과 같은 경우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파벨은 어디로 갔을까?

모스크바나 아니면 유럽 쪽으로 가고 있겠지요. 이미 그자는 잊혀진 놈입니다. 부하 두어 명이 따라간 모양인데 아마 그놈들도 믿지 못해 당하거나 말거나 하겠지요.

일 년쯤 전의 일로 모스크바의 마피아 보스였던 밀리우스라는 자가 경쟁세력에 밀려 부하 몇 명과 함께 헝가리로 피신한 지 한 달 만에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살해범은 그의 부하들이었다. 부하들은 그의 엄청난 재물을 모조리 강탈한 다음 뿔뿔이 흩어졌는데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난 근대리아로 돌아가겠다.

김상철이 말하자 그레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난 이곳에 남아서 마르첸코와 수습을 하겠습니다. 마린스키도 만나봐야 될 것 같습니다.

박기동이 나흘째 연락이 없다니 마음이 개운치가 않아.

그놈, 마피아 전쟁이 일어나니까 어디 깊숙한 곳에 엎드려 있을 겁니다. 이제 사건이 끝났으니 얼굴을 내밀겠지요,

그레고리도 박기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김스크 부락은 아침부터 활기를 띄고 있었는데 부하들에게 마피아 내부의 정변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부락민은 모두 조선족으로 백 명도 안 되는 인구였지만 벌써 십여 명이 근대 타운의 사업장에서 돈벌이를 하는 중이다. 그들은 부하들과 함께 번갈아 경비까지 서주면서 고생해왔던 참이라 같이 들떠 있었다.

공회당의 문이 열리더니 이한이 들어섰다.

형님, 하바로프스크 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 앞에 선 이한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은 어제 서울에 도착하셨다고‥‥ 근대리아는 상황이 나아지면 들리시겠다고 하셨답니다.

곧 들리시겠군, 이제는.

그레고리가 말을 받고는 김상철을 힐끗 바라보았다.

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풀려버렸지 않습니까? 마르첸코는 물론이고 이제 블라디보스토크의 마린스키도 근대리아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계약을 백지화시켜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강회장이 탄 승용차가 청와대에 들어선 것은 아침 1045분이었다. 현관에서 차를 내린 강회장과 이남호는 비서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곧장 비서실장 이태준의 방으로 들어섰다. 이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는데 동석하고 있는 것은 안보수석 박정규이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곧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이태준이 강회장에게 러시아 방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초청한 것이다.

고생하셨겠습니다. 연로하신데 긴 여행을 하셔서.

이태준이 입을 열었다.

성과가 대단하셨더군요. 군대가 동원된 것을 보면 이제 수송로는 물론이고 근대 부두도 걱정이 없겠습니다.

그야‥‥‥‥」

강회장이 입맛을 다시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러시아 정부의 체면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요. 마피아 때문에 국사를 망칠 수는 없지요.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선 모양이던데요.

그렇지요. 직접 극동군 사령관한테 전화 지시를 했으니까요.

다행입니다. 근대를 위해서나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곧 수송이 시작되겠지요?

아침에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잘 되었군요, 그런데 러시아 대통령이 다른 이야기는 없던가요? 한러 양국관계나 아니면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

글쎄, 나는 근대리아와 러시아 관계만 신경을 쓰다 보니, 원체 정신이 없어서‥‥」

강회장이 힐끗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같이 있었는데, 그 양반이 뭐라고 한 것 있었나?

없었습니다. 시간도 짧았고 해서 ‥‥‥」

그렇지. 짧았지.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이태준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일로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가 조금 소원해졌지만 별일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제 얼굴에 침 뱉듯이 제 나라 험담하는 사람도 아니고.

잘못되면 계약위반으로 러시아가 근대리아를 몰수해 갈 수도 있는 판이니까. 다 된 밥을 엎을 수는 없지.

, 남북관계만 우리 정부와 호흡을 맞춰주신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지요, 강회장님.

이태준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도 근대리아와 회장님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겁니다. 이해해 주셔야지요.

경비본부장이 행정위원장에게 막말을 하고 대드는 상황인데, 어디 일이 제대로 될까요?

강회장의 말에 분위기가 금방 딱딱해졌다. 박정규가 헛기침을 하더니 나섰다.

, 그것은 조금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를 주었습니다만.

근대리아가 언제 넘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운영위원회는 안에서 내분만 일으키고 있소. 행정위 소속의 직원들을 불러다가 조사나 하고.

그러자 이남호가 그의 말을 가로막듯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일이 모두 수습되었으니 내부도 정돈해야 되겠습니다. 차차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시켜 나가야겠지요.

그렇지요. 조화가 중요합니다.

이태준이 맞장구를 쳤다.

곧 경비본부장을 한국으로 불러들이지요. 잘잘못 이전에 하극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조처하겠습니다.

눈을 껌벅이며 이태준을 바라보던 강회장이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잘 생각하신 거요,

저회들은 원칙을 지킵니다. 곧 대의를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알겠소.

이남호의 시선이 박정규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시선을 의식했을 것임에도 박정규는 잠자코 강회장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국경에서 150킬로 정도 근대리아 영토로 들어선 곳에 테르시 마을이 있다. 본래 토착민 서너 가구가 사냥을 생업으로 하며 살던 곳이었다가 길이 뚫리면서 개척마을이 세워진 곳이었다. 그러나 인구는 아직 2백 명 정도로 반수 이상이 주유소와 정비소 등에 근무하는 근대리아 정부소속 직원들이었고 대아운송의 직원들도 7, 8명이 있다. 이곳에서 수송단이 차량을 점검하고 연료와 보급품을 갖추어 내륙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김상철이 헬기로 이곳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이젠 여름이어서 헬기장 주위에는 푸른 풀잎이 무성했고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결에 짙은 땅 냄새가 맡아졌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온 참이어서 대아운송의 테르시 책임자인 송명기가 헬기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타운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김상철 일행을 따라 헬기장을 나서면서 송명기가 말을 이었다.

장사장님이 도착하시는 대로 타운으로 연락을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테르시는 한눈에 들어오는 조그만 부락이다. 헬기장에서 백 미터쯤 앞쪽으로는 직진으로 뻗은 도로가 나 있고 그 양쪽으로 십 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들이 다가가는 대아운송의 주차장에는 50여 대의 컨테이너 트럭이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북한 노동자들을 싣고 가려고 대기하고 있는 수송단인 것이다. 김상철이 테르시에 온 것은 북한 노동자의 입국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대아운송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상철이 안쪽의 지사장실에 자리 잡고 앉자 송명기가 전화기를 들고는 다이얼을 눌렸다. 이한은 바깥 사무실에 있는 모양으로 방에 따라오지 않았다

사장님, 장사장님 연결되었습니다. 급하신 모양인데요.

김상철은 송명기가 건네주는 전화를 받았다. 장인규에게는 하바로프스크를 떠나기 전에 테르시에 간다고 연락을 해두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요?

그가 묻자 장인규가 서두르듯 말했다.

박기동이 납치 된 것 같아요.

「‥‥‥‥」

나호트가의 모텔에서 두 사내가 대여섯 명한테 끌려가는 것을 주인이 보았다고 해요. 그 두 사내가 박기동과 조대길이 분명합니다.

그게 언제였소?

닷새쯤 전이라니까 말이 맞습니다.

러시아인이요? 아니면‥‥‥」

조선족이었답니다.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장인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금철한테 확인을 했는데 펄쩍 뛰었습니다. 그도 지금 사람을 풀어 찾고 있는데‥‥‥」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마피아나 나호트카의 폭력배들을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

지금 이쪽으로 오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곳에 계실 필요가 없습니다.

알겠어. 곧 가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송명기를 바라보았다.

헬기장에 연락해서 내가 곧 근대리아로 출발하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송명기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쥐었다. 물론 마피아에도 조선족이 있었고 무리를 이룬 조선족의 폭력집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김상철에게 송명기가 다가와 섰다.

사장님, 헬기가 대기하고 있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더니 서너 명의 사내들이 물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사장님, 근대리아 경호본부의 특수수사과장 염태식이오.

그중 선임자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김상철의 앞에 멈춰서면서 말했다.

당신을 보안법위반 및 살인 혐의 등으로 체포합니다. 여기 영장이 있습니다.

사내가 잠바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딱 벌어진 어깨에 다부진 용모의 사내였는데 김상철로서는 초면이다. 넋을 잃은 송명기가 눈을 치켜뜨고는 김상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어디로 데려갈 겁니까?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어.

사내 두 명이 다가와 김상철의 양쪽 팔을 잡더니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 가자.

염태식이 몸을 돌리자 사내들은 김상철을 에워싸고는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 일어서 있었으나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운송 사무실에서 헬기장까지는 백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헬기장에서는 이미 헬기가 프로펠러를 회전시키고 있었는데 김상철이 하바로프스크에서 타고 온 헬기였다. 염태식이 인솔해온 부하들은 20명 가깝게 되었고 모두 기관총과 권총으로 중무장한 차림이었다. 그들은 이미 김상철이 테르시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야? 운영위원장 짓인가?

헬기장의 사무실로 다가가던 김상철이 앞장선 염태식에게 묻자 그가 머리를 돌렸다.

닥쳐, 이 새끼야. 건방진 새끼 같으니, 어따 대고 반말이야.

염태식이 그를 쏘아보며 잇사이로 말했다.

넌 인마, 이제 인생 끝이야. 좋은 시절 끝났단 말이다.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김상철은 문득 박기동의 얼굴을 떠올렸고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 박기동의 실종과 이 사건의 연관성이 생각났던 것이다. 헬기장의 대합실은 좁다. 20평 남짓한 대합실 겸 휴게실로 들어서자 염태식은 여유를 찾은 듯 어깨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새끼 똘마니들은 몇 놈 잡았지?

네 명입니다, 과장님.

누군가가 대답하자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근대리아가 제 집인 줄 아는 모양이군. 겨우 경호 네 명을 달고 들어오다니.

그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없다. 우선 이놈하고 경호 책임자 이한이 두 놈만 싣고 떠난다. 너희들은 본부에서 헬기가 곧 올 테니 그것을 타고 오너라.

대합실에 가득한 경비요원들을 둘러보는 그의 모습은 당당했다.

김반장, 네가 남아라. 이주임은 다섯 명을 데리고 나를 따르도록.

헬기는 고도 천 미터 상공을 날고 있었다. 강력한 터번 엔진 2기에서 뿜어 나오는 진동으로 기체는 신음하듯 떨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자랑하는 Mi-24 하인드형 공격용 헬기였다. 물론 동체 측면의 날개에 대전차 미사일이나 로켓탄 포드를 탑재하지는 않았으나 날개를 벌리고 나는 모습은 언제나 위협적이다.

러시아 공군은 Mi-24수백 대를 민간에 양도하여 상업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김상철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 대를 빌려 타고 왔던 것이다. 조종석과 분리된 일렬식 좌석에 여덟 명의 사내가 넷씩 마주 앉아 동체의 진동에 같이 떨고 있었다. 앞쪽의 창으로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바라보였다. 김상철은 염태식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지 못한 염태식이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힐끗거리더니 이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도 이번에 안기부에서 교체 파견된 간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며칠 전에 단 한 명 남아 있었던 안기부 파견 간부 장동택이 근대리아를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

문득 머리를 든 김상철이 앞쪽에 앉은 이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김상철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던 듯 시선이 마주치자 떼지 않았다. 그에게도 청천벽력처럼 일어난 사건일 것이었다. 운영위원회와 행정위원회의 갈등, 한국 정부와 근대그룹 간의 불화 등에 무관심했던 이한으로서는 아직도 현실이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헬기가 방향을 트는 모양으로 기체가 조금 옆쪽으로 기울어졌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앞쪽의 사내들의 몸이 통로 쪽으로 굽혀졌다.

앞으로 두 시간쯤이면 근대리아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는 밤이 되어 있을 것이고 염태식은 자신을 비밀리에 경비본부의 사무실로 데려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서울행 직행 편 비행기를 탄다. 김상철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근대리아의 남은 조직은 경비본부에 의해서 접수되거나 분해될 것이었다.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끝이다. 그레고리는 아마 하바로프스크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송길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 모두 마피아 계열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근대리아는 마피아의 제물이 된다. 그리고 북한의 이금철은 기회를 노릴 것이다.

김상철의 시선이 다시 이한에게로 옮겨지자 그때까지도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한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김상철이 눈길을 내리자 이한이 손가락 하나를 잠깐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시선을 돌린 김상철은 앞쪽을 바라본 채 주위의 사내들을 시선 안에 모두 집어넣었다. 앞쪽 사내들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쪽 사내들의 시선은 잡을 수가 없다. 김상철의 눈길이 다시 이한의 팔목으로 내려가자 그가 다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가 내렸다. 헬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앞쪽으로 쏠렸으므로 사내들의 몸이 일제히 기울어졌을 때 김상철은 다시 이한의 팔목을 보았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누르고 있던 이한이 잠깐 손을 들어 보였는데 수갑의 양쪽날 끝이 드러나 있다. 이미 그는 한쪽 수갑을 풀어놓은 것이다. 헬기가 중심을 잡자 길게 숨을 내려쉰 김상철은 앞쪽을 바라본 채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염태식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창문은 동쪽에 붙어 있어서 어느덧 푸른빛이 가신 하늘은 회색빛이 되어가는 중이다. 김상철은 잠깐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안전벨트는 버튼식으로 누르기만 하면 풀어지는 형식이다. 머리를 든 김상철이 다시 이한을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한의 오른쪽에 앉은 사내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건너뛰어 왼쪽의 사내 두 명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왼쪽 끝의 사내가 그의 시선을 받고는 하품을 했다. 다시 한번 김상철이 시선을 반복하자 이한이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30분쯤 시간이 지났을 때 앞열 왼쪽 끝의 사내는 졸고 있었다. 창밖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고 헬기 천장의 붉은색 등이 기체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김상철은 이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벨트의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양쪽 팔꿈치를 치켜올려 오른쪽 사내의 미간을 후려치듯 찍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마로 염태식의 얼굴을 받으면서 손으로는 그의 벨트에 찬 권총을 뽑아 들었다.

, , .

헬기 안에 총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그것은 이한이 쏘아 갈긴 총성이었다.

움직이지 마!

김상철이 왼쪽 끝의 사내에게 총을 겨누고 소리치는 순간 다시 이한의 총이 발사되었다.

!

왼쪽 끝의 사내가 말 한마디 뱉지 못하고 사지를 늘어뜨리자 이한의 권총이 염태식에게로 겨누어졌다.

쏘지 마라!

김상철이 소리치자 눈을 치켜뜬 이한의 총구가 오른쪽으로 돌려지면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김상철의 팔꿈치에 미간을 맞고 흔들리고 있던 사내가 바닥으로 몸을 꺾었다. 이한은 옆 사내의 권총을 빼앗아 들자마자 나란히 앉은 세 사내를 차례로 쏘아죽이고 앞 열의 두 사내까지 마저 죽였다. 김상철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염태식의 턱밑에 총구를 가져갔다.

내 수갑을 풀어라.

그리고는 이한을 돌아보았다.

조종사에게 저택으로 가라고 해, 그리고 장인규에게 연락해.

 

이미 나는 경비부원 다섯 명을 살해했다. 경비대는 곧 이곳으로 진입해올 것이다.

김상철이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장인규를 위시한 타운에 남아 있는 간부급 사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저택의 응접실이었는데 도착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시각이다. 이한의 무선 연락을 받은 장인규가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금방 회의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잡혀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이곳에서 경비부원들과 전쟁을 치러 동지들을 희생시키지도 않겠다.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유 위원장에게 중재를 부탁하지요. 전쟁이 일어난다면 경비대에 승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북한 측과 손을 잡으면 근대리아는 전복됩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김상철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유 위원장한테 당신을 부탁할 생각이야. 대아운송은 넘겨주더라도 우리가 세운 타운의 사업장은 모두 당신과 우리 동지들이 관리할 수 있도록.

「‥‥‥‥」

아마 그것은 책임져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떠난다.

그러자 방 안의 사내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김상철이 손을 들자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 방법밖에 없다. 여러분이나 근대리아를 위해서‥‥ 송길수와 그레고리가 돌아올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지만 앞으로 근대리아의 조직은 장인규가 맡는다.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가 김상철의 세찬 시선을 받고는 입을 닫았다.

근대리아의 운영자들도 북한을 견제하는 조선족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 이제 그것을 장인규가 맡는 것이다.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말석에 앉은 사내 하나가 물었는데 그는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고맙지만 하나라도 더 이곳에 남아서 장 사장을 도와라. 그것이 나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김상철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정위원회도 내 문제는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풀릴 것이다. 근대리아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간섭이 풀리는 날이 되면 …….

그때까지 잘 부탁한다.

연락은 자주 하시겠지요?

장인규는 상황판단이 빠른데다 분위기 장악력도 있다. 그녀가 그렇게 묻자 김상철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이곳이 내 고향이고 내 형제들이 있는 곳이야. 당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저택의 뜰에 내려앉은 헬기가 다시 우렁찬 폭음을 울리며 두 개의 엔진을 가동시키고 있었다. 이제 밤이어서 주위는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지만 저택 주위는 사내들로 뒤덮여 있었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이 머리칼을 날렸고 먼지가 휘몰아 얼굴을 때렸다. 이한이 부하들을 지휘하여 분주히 헬기에 짐을 싣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상철을 따라갈 사람으로는 이한과 그의 부하인 최복수, 정기만 세 사람이었다. 현관에 서 있는 김상철에게 장인규가 다가와 섰다.

타운에 있던 달러를 실었습니다. 모두 2백만 달러쯤 됩니다.

그러자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도 돈이 있어. 쓸데없는 짓을‥‥‥」

객지에선 돈이 많을수록 좋아요. 내가 당해봐서 압니다.

유 위원장이 염려 말라고 했어. 내일 아침에 이대각 부위원장이 찾아오기로 했으니 만나보도록.

심란한 얼굴로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이자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장인규 씨. 이럴 때 당신이 큰 도움이 됩니다.

당신은 강한 여자요.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이곳으로 숙소를 당장 옮기도록 해요.

그녀가 다시 머리를 끄덕이자 김상철이 생각난 듯 말했다.

이인숙 씨 모녀도 잘 부탁합니다.

글쎄 그런 걱정은‥‥‥」

그러자 사내들을 헤치고 이금철파 최태호가 다가왔다. 현관의 등불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김 사장님, 어떻게 된 일이요?

다가선 이금철이 다급하게 묻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사건을 모두 들었을 터였다.

난 당분간 떠납니다. 내 대신 여기 있는 장사장이 조직을 맡기로 했고, 물론 행정위원장의 승인도 받았지요,

아니 그런데 왜?

경비원들을 다섯이나 죽였소.

이한이 했다던데.

아무튼 여기 있지는 못하게 되었소, 당분간,

헬기에 짐을 다 실었는지 이한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김상철은 장인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 사장, 잘 부탁합니다.

장인규와 악수를 마친 김상철이 이제는 이금철을 향해 돌아섰다.

잘 부탁합니다, 이 대좌. 내가 지켜보겠습니다.

걱정 마시오, 잘 될 테니.

이금철이 그의 손을 힘차게 흔들어 주었다.

 

 

 

6. 유랑

강미현이 사건을 안 것은 다음 날 아침이다. 운영위원회가 설치된 후로 근대리아 뉴스는 거의 매일 한국의 뉴스 시간에 보도되었는데 그것도 정부 측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이제 근대리아는 근대의 임차지가 아니라 한국의 임차지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근대리아의 운영위원회 산하 홍보실은 재빠르게 김상철 사건을 한국에 보고했고 그것이 아침 뉴스로 보도된 것이다. 뉴스를 보다 말고 응접실을 나온 그녀가 들어선 곳은 아래층 서재였다. 서재에 마주 앉아 있던 강회장과 강용식 부자가 들어서는 강미현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아직 식사 전이다.

잘 왔다. 우리도 마침 네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다.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강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김상철이 소식을 들었느냐?

, 할아버지.

강미현이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움켜쥐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엄청난 사건이었다. 보안법 위반 및 살인 혐의의 용의자인 김상철이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안기부 요원 다섯 명을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다. 김상철과 그의 일당에게 납치되었던 안기부의 모 간부는 밤늦게야 풀려났는데 그가 증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늘 새벽에 유장석으로부터 전말을 들었다.

강회장이 말을 이었다.

김상철이는 조직과 사업장 모두를 인계하고 어젯밤 근대리아를 떠났다.

「‥‥‥‥」

분하지만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다. 며칠 전에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그 사람들이 원칙대로 하겠다고 하더니만.

「‥‥‥‥」

경비본부장을 교체시키더니 김상철이를 잡았단 말이여.

어디로 떠났는데요?

그러자 강용식이 입맛을 다셨다.

그건 모른다. 그리고 이젠‥‥‥」

힐끗 강회장의 눈치를 살핀 그가 말을 이었다.

김상철이는 북한 노동자 1,500명을 근대리아로 입국시키려다 체포된 거야. 대리인이라는 자가 낱낱이 자백했다는 거다. 북한과의 협상 내용도.

「‥‥‥‥」

북한에서 훈련받은 공작원 2만 명을 입국시키고 나서 근대리아를 적화시킬 계획이었다는 거다.

아버지, 그 말을 믿으세요?

강미현이 필사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도 믿지 않는다. 아마 그 박기동이라는 자가 정부 측이 만든 각본대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방법이 없다. 경거망동을 해선 안 된다.

이제는 강회장이 나섰다.

우리 가족이 다시 여론의 표적이 되었다가는 대단히 힘들어진단 말이야. 언론이 너를 표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강미현이라고 전후 사정과 내외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탁자를 내려다보고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강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가족과 기업을 위해서 개인감정을 버릴 때가 되었다. 절대로 내색하지 말고 초연한 태도를 보여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정부의 공격목표가 너와 우리 그룹으로 쏟아질 게야. 오늘 석간이나 저녁 뉴스에서 김상철의 북한과의 거래와 행적이 낱낱이 폭로될 것이다. 우리가 손을 써서 네 이야기는 덮을 작정이다만 그것도 아직 불안해.

서재를 나온 강미현이 2층의 계단을 오르는데 내려오는 강재원과 마주쳤다. 그도 뉴스를 들은 모양으로 표정이 굳어져 있다.

할아버진 뭐라고 하셔?

강미현은 잠자코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났다. 그에게 김상철의 안위 걱정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에게는 오직 강회장의 의중이 중요할 뿐이었다.

 

근대리아가 조용할 날이 없구만.

커피 잔을 내려놓은 백한기 과장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이라는 놈, 잘 나가다가 신세 조졌어. 지금부터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구만 그래.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이다. 사무실의 책상에 풀린 자세로 비스듬히 앉은 그들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김상철이 잡히면 사형이겠다. 안 그래?

그렇겠지요.

백한기는 그와 김상철과의 관계를 알 리가 없다. 조금 전에 도착한 한국의 석간신문은 김상철에 대한 기사로 칠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상철은 전대미문의 살인범이자 야망을 위해서 북한과 결탁은 물론 근대리아의 적화도 무릅쓴 이기주의자로 묘사되었다. 신문을 접으며 백한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글쎄, 처음부터 잘나가는 놈은 꼭 뒤탈이 있다니까. 난 먼저 퇴근하겠어.

김상철의 일취월장을 시기해 마지않는 것은 백한기 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근대그룹 사원들은 말은 삼가고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였고 모르는 사람일수록 그것이 더욱 심했다. 오후 7시가 넘어 직원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 사무실이 거의 비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든 그에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유미였다.

웬일이야? 갑자기?

신문 읽었어?

그녀가 대뜸 물었으므로 안인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그녀는 오사카에 들린 이후로 전화 한 통 없었던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전화한 거야?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인석 씨와 내가 공통 화제를 삼을 수 있는 일이니까.

이유미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이제 김상철의 인생은 완전히 끝장이지? 지난 경우하고도 다르지 않아?

글쎄, 난 길게 생각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그러자 저쪽에서 잠시 말이 끊겼다. 서먹한 분위기에 그녀도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인석 씨, 나한테 화났어?

아니, 그런 것도 없어. 그냥‥‥‥」

많이 변한 것 같아, 그동안.

항상 같을 수야 없지. 넌 그것이 즐거울지 모르겠지만.

이왕 뱉은 김이라 안인석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알고 있어? 넌 한 번도 열심히 살아본 적도, 그래서 보람도 고통도 당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이제까지 다행히 넌 재주를 부리면서 꽤 화려한 인생을 살았지만 너도 잠깐이야, 언제 김상철이 같은 결과가 올지 모른다.

「‥‥‥‥‥」

네가 날 우유부단하고 재주 없는 놈으로 치부해왔다는 걸 잘 알아. 그리고 네가 날 아는 만큼 나도 널 알고‥‥ 이제 쓸데없는 전화질도 그만하란 말이다.

던지듯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사무실은 어느덧 텅 비어 있었으므로 그는 의자를 뒤로 물리고는 길게 앉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자 전화벨이 울렸다. 한동안 잠자코 앉아 있던 그는 거칠게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여보세요.

, 안형. 납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민태식의 목소리였다.

, 그럼, 우리 만날까요?

한 시간쯤 후에 그들은 소네자키의 조용한 바 안에 마주 앉아 있었다. 꽤 분위기가 있는 고급 술집이어서 바 안은 조용했다. 민태식이 보드카 잔을 들어 올리면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도 이제 보드카에 맛을 들였어. 근대리아 스타일이지.

그는 이제 한 달에 두어 차례씩 근대리아에 다녀오고 있었다.

상가 공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오. 겨울에는 시멘트 공사가 어렵기 때문에 이번 여름에 기초 공사는 끝낼 거요.

술을 한 모금에 삼킨 민태식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안형,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근대리아에 지원을 하시오.

어떤 조건이 말입니까?

운영위원회와 행정위원회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키고 있어요, 우리는 운영위원회에 줄이 있습니다.

이젠 마음에 걸릴 것도 없지 않습니까? 김상철이도 도주한 마당인데.

안인석이 민태식이 야쿠자의 연락원이 아니라 조총련계의 간부급 조직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달도 안 된 일이다. 그러나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는데 야쿠자건 조총련이건 간에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사이인 것은 마찬가지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몸담고 있는 근대그룹을 배신하여 오성에게 정보를 넘긴 전력이 있는 몸이다. 오사카에 버려진 것처럼 쑤셔 박혀 있는 것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재량껏 활용하여 출세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것은 김상철과 근대그룹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짓밟은 박미정과 이유미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했다. 김상철이 패가망신하여 도주했다고 해서 그 감정이 지워질 수는 없었고 이젠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안인석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민태식을 향해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좋습니다. 내일 지원을 하지요.

민태식이 만족한 듯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진급은 자동적으로 되겠지만 좋은 보직을 받게 될 겁니다. 앞으로 안형의 미래가 열리게 될 것이오.

안인석의 잔에 보드카를 따르던 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 그 여자, 이유미라는 여행사 사장 말인데 ‥‥‥」

지난번 여기 들렀다가 근대리아에 가서 김상철이를 만났다고 하지 않았소?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안인석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근대타운을 휘젓고 다니면서 자기가 김상철과 친한 사이라고 소문을 뿌리고 다녔던 모양이야. 그러다가 김상철한테 쫓겨났다는 소문이 있소.

안인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여자지요, 춥지만 않았다면 다리도 여러 번 벌렸을 겁니다.

움직임을 멈춘 민태식이 안인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시 그 여자를 만날 가능성도 있겠소. 안형이 근대리아에서 기반을 잡는다면.

 

다음날 회사로 출근한 이유미를 찾아온 첫 손님은 40대의 두 사내였다. 안기부 직원으로 신분을 밝힌 그들과 응접실에 마주 앉은 이유미는 좋은 기색이 아니다. 선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짐작하셨겠지만 김상철씨 사건 때문에 왔습니다. 혹시 연락 온 적 없습니까?

나한테 연락을 해요? 내가 그 사람하고 무슨 관계라구요?

와락 얼굴을 붉힌 이유미가 물었으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지난번에 근대리아에도 다녀오셨고, 그곳에서는 애인이라고 소문이 났던데요. 본인 입으로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신 걸로 아는데 ‥‥‥」

오해예요. 그 사람은 대학 시절 제 남자친구의 ‥‥‥」

그건 압니다.

그녀의 말을 자른 사내가 탁자 위로 상체를 숙였다.

전화 연락이나 어떤 형태의 연락이 오면 우리한테 즉각 알려주셔야 합니다. 만일 숨겼을 경우에는 각오하셔야 할 거요.

, 정말.

사내를 쏘아보던 이유미가 뱉듯이 말했다.

나보다도 근대그룹의 회장 손녀를 찾아가 보시지 그래요? 곧 김상철과 결혼할 사이인 여자 아녜요?

우리가 안 갔겠습니까?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마른 몸집의 사내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박미정 씨하고 김상철이가 서로 연락이 되는 사이든가요? 이혼하고 말입니다.

그건 모르겠어요.

지난번 근대리아에 가셨을 때 혹시 김상철로부터 들으신 이야기는 없습니까?

글쎄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없었던 것 같아요.

김상철이가 박미정 씨가 파리에 있는 것은 알고 있지요?

알고 있더군요,

옛날 감정이 남아 있습디까?

머리를 든 이유미가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람인데 왜 감정이 없겠어요?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는데.

사내들이 응접실을 나가자 아침부터 기분을 잡친 이유미는 사장실로 돌아와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안인석과의 통화로 받은 충격이 꽤 컸던 때문으로 어젯밤에는 남자 애인 하나를 데리고 외박을 하고 나온 참이었다. 온몸이 나른했고 하체에 힘이 풀려 있어서 사우나를 한 다음 푹 자고 싶었지만 요즘 경기가 말이 아니다. 경쟁업체의 난립으로 도산하는 여행사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유미는 손을 뻗어 인터폰을 눌렸다.

, 사장님.

오 전무를 내 방으로 오시라고 해.

의자에 등을 묻은 이유미는 가늘게 숨을 내려쉬었다.

지난달의 수지는 몇억 적자였다. 오 전무에게 유럽의 배낭여행단 모집을 맡겼지만 실적은 바닥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근대리아의 이번 사건만 없었다면 한국 최초로 근대리아 관광단을 모집하여 석 달 안으로 다시 상위권 여행사로 진입할 자신이 있었다. 모두가 김상철 덕분이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근대리아 운영위원회는 김상철이 관여한 모든 계약과 업무를 취소하고 중지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유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무르강이 내려다보이는 인투리스트 호텔의 8층 객실 안이다. 한낮의 태양이 비치는 강가의 모래사장 위에는 수영객이 가득했고 강물을 가르며 모터보트 한 대가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머리를 돌렸다. 밝고 따스한 바깥 날씨와는 달리 방 안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겁다.

내가 러시아에 남아 있는 것도 근대리아에 부담이 될 거야. 한국 정부는 내가 유 위원장이나 장인규와 연락을 하고 있는 줄로 믿을 테니까.

앞쪽에 앉은 그레고리와 송길수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난 러시아를 떠난다. 당분간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돌아갈 시기를 기다리겠다.

이미 그레고리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마르첸코와 연차하여 마피아 세력에 합류하기로 결정을 했고 송길수도 근대 부두에 파견되었던 조선족 부하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남기로 한 것이다. 물론 송길수는 마린스키의 휘하에 들어가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그것을 성사시켜 준 것은 그레고리였다. 그레고리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좋은 인연이었소, 보스. 내가 강도단 두목일 때 정착할 길을 열어주었고 이제 러시아 땅으로 되돌아와 기반을 굳히게 된 것도 모두 보스의 덕분입니다. 잊지 않겠소.

운과 재능이 따라야지. 이것은 근대 강회장의 인생관이다.

존경할 만한 보스를 갖는 것이 바로 운이 좋은 거요.

그러자 송길수가 머리를 들었다.

이제 근대리아와 우리와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장인규가 타운에 있지만 근대리아 정부와 우리와는 무관합니다.

송길수의 말에 그레고리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개자식들이고 배은망덕한 놈들이오.

하바로프스크에서 마르첸코와 그레고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린스키와 송길수가 가로막는다면 근대리아는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지도 모른다. 파벨의 방해 공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군대가 목숨을 걸고 근대리아의 수송단을 지킬 리가 없으며 수송선은 1,000킬로가 넘는 것이다.

그레고리와 송길수도 근대리아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근대리아 정부는 허술한 때를 기다려 보스를 체포했고 자신들을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믿고 있었다. 송길수가 말을 이었다.

이 기회에 근대리아 운영위원회에 본때를 보여야 합니다. 수송단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괴롭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야 형님의 가치를 알게 될 겁니다.

송길수는 너무나 분했다. 김상철과 근대리아의 개척단 후신인 행정위원회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람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된 김상철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난 다시 근대리아로 돌아간다. 그곳은 내가 인생을 걸고 일을 할 장소이고 또 내 새로운 조국이야.

나는 강회장의 신념과 유장석 씨의 열정에 따랐던 사람이야. 그들이 근대리아에 남아 있는 한 난 그렇게 못한다.

그는 그레고리와 송길수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알아서 처신해주기 바란다. 이제 너희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입맛을 다신 그레고리가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저격수를 보내 운영위원장 이하 한국 정부 측 놈들을 하나씩 쏘아죽이겠소.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릴 생각은 없다. 방안의 침묵을 송길수의 목소리가 깨뜨렸다.

형님이 돌아오시면 저도 근대리아로 가지요. 그곳에 조선인 나라를 세운다는 것에 저도 동화가 되었으니까요.

 

운영위원장실로 들어선 유장석과 이대각은 곧장 전창남의 앞쪽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전창남은 그들이 앉을 때까지 시선만 들었을 뿐 입도 열지 않았는데 쓴 약을 삼킨 얼굴이었다. 이쪽의 유장석은 그런 대로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이대각은 다르다. 눈을 치켜뜨고 어금니를 문 고약한 표정이었다.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근대리아를 나갈 테니 당신들이 운영하겠소? 당신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요?

말소리는 낮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행정위원회와 협의도 거치지 않고 또 제멋대로 굴 거요?

그러자 전창남이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인터폰을 눌렀다.

, 위원장님.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부위원장하고 경비본부장을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병신 같은 놈.

이대각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전창남은 알아들었다. 두 눈을 치켜뜬 그가 이대각을 쏘아보았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소?

병이 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전창남이 찌푸린 얼굴을 유장석에게로 돌렸다.

무슨 일로 또 이러는 거요? 우리가 제멋대로 하다니?

어제 한국 정부에 근대리아의 경비 병력을 만 오천 명으로 세 배 증원시켜야 한다는 공문을 보내지 않았소?

그것이 어쨌단 말이요?

이런 개새끼.

마침내 이대각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 이 개자식아. 네가 뭔데 그런 공문을 보낸단 말이냐? 만 오천 명 경비 병력을 들여오면 그 경비는 네가 댈 테냐? 한국 정부가 댄다더냐!

아니,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이런 씨발놈 봐라? 네가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자 방문이 열리더니 부위원장 안주익과 경비본부장 소명일이 들어섰다. 전창남이 이제는 시뺄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쳤다.

아니, 이런 불한당 같은 놈이 어디에다 대고 욕질이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너하고 나하고 누가 여기에 오래 붙어 있나 내기할까? 그리고 네가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꼬락서니가 되나 내가 말해줄까?

이대각도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 개자식아, 정부가 네 뒷바라지 해줄 줄 알아? 여기서 쫓겨난 신재열이가 지금 뭐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해? 그 새끼, 옛날에 땅 투기한 것, 또 동생시켜서 돈 먹은 것, 깡그리 고발되어서 지금 쇠고랑을 차게 되었어, 이 새끼야.

이것 보시오. 부위원장님,

소명일이 나섰다가 이대각이 노려보자 주춤 멈춰 섰다. 이대각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지금 사람 시켜서 네가 미국에서 어느 놈한테 후장을 대주었는지까지 다 조사하고 있단 말이다. 넌 이곳에서 떨려나가는 즉시 매장이야. 파멸이라구,

이봐, 그만해라.

유장석이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끌어당겨 앉혔다.

언성을 높여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야 이곳에서 나가도 근대계열의 사장이나 회장으로 진급해서 자리 잡을 겁니다. 무용담이나 남겨야지요.

난 이 사람 같은 불한당하고는 일 못 하겠소.

전창남이 이대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당장에 본국에 고발하겠소.

그건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경비대 병력을 만 오천으로 늘린다는 공문은 왜 우리한테 협의도 하지 않고 보낸 거요?

유장석이 따져 묻자 전창남이 소명일을 바라보았다. 소명일이 대답하라는 표시였다.

그건 정부에서 근대리아의 치안을 확보하려면 병력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물어왔기 때문에‥‥」

소명일은 예비역 장군으로 근대리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가 말을 이었다.

현재 주민 85만 기준으로 보아도 1만 명 이상이 필요한데다가 주민 대부분이 북한계 조선족과 러시아계 마피아, 중국계 삼합회의 세력에 지배당하고 있어서 그 조직들을 제압하려면 만 오천도 모자랍니다.

그러자 이대각이 헛웃음 소리를 내었고 유장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들의 견제 세력으로 우리가 키웠던 김상철의 세력을 운영위원회는 산산조각 내버렸소. 친북세력이라는 이유로‥‥ 그런데 북한 세력이 줄어든 것 같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요즘 며칠 동안에 배 이상으로 불어났습니다. 김상철의 세력이 견제력을 잃었기 때문이지,

그는 전창남을 노려보았다.

삼합회도 마찬가지이고 마피아는 예전보다 더욱 강해진데다가 김상철의 부하들이 가담하여 우리한테 반감을 갖게 되었소. 본부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 저는‥‥‥」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체격의 소명일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본국에서 듣던 것하고 많이 차이가 납니다. 이곳은 흑백논리로 처리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김상철이 그대로 있었으면 경비대는 5, 6천 명으로 충분했을 거요.

유장석이 말하자 전창남이 머리를 저었다.

난 확신이 있소. 북한 근로자를 대량으로 들여오는 그런 정책으로는 얼마 가지 않아 근대리아는 적화되었을 거요.

유장석과 이대각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이대각도 지친 듯 입을 열지 않았다.

 

김상철이 여장을 푼 곳은 우에노에 있는 조그만 여관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든 러시아 여권은 실제로 러시아 정부의 직인이 찍힌 정식 여권이었지만 만일을 위해 주의가 쏠릴 호텔을 피한 것이다. 여관은 3층 건물로 아담했고 잘 손질된 정원도 있는데다 주인 부부가 친절했다. 백발에 깡마른 몸매의 주인 남자와 닮은꼴의 주인 여자는 러시아에서 온 그들 일행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일식 구조의 벽돌 건물로 아래층은 주인 내외의 거실과 식당, 응접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고 2, 3층이 여관이었는데 김상철 일행 네 명이 3층의 방 네 개를 모두 빌려 투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에 여행을 온 한국인 관광객이 되어 있었지만 주인 부부가 그것을 믿는지는 알 수 없었다.

투숙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오전, 이한과 최복수를 심부름 보낸 김상철은 정원의 나무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두 쌍의 남녀가 들어와 2층에 머물다가 일찍 나갔으므로 여관 손님은 그와 대문 옆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정기만 둘뿐이다.

근대리아의 장인규하고는 어제도 전화를 했는데 이대각이 많이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그는 타운에 있는 20개 가까운 김상철의 사업장 대리인으로 장인규를 인정해준 것이다. 그러나 대아운송은 근대운송과 합병하는 형식이 되어 관리가 근대운송으로 넘어갔다. 근대시의 상가에 짓고 있는 사업장도 마찬가지였다. 근대는 직영 사업장 외의 투자 사업에는 다른 관리인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주인 여자가 현관을 나오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김상, 차 드세요,

나무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녀가 온 얼굴에 주름을 만들면서 웃었다.

우에노 공원이 시원하고 여러 가지 볼 것도 많습니다. 왜 놀러 가지 않으세요?

저녁때나 갈 생각입니다.

김상철의 일본어는 서툴었지만 의사소통은 된다. 그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머니를 떠올렸다. 마른 몸매에 정갈한 기모노 차림의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잠자코 몸을 돌렸다

그가 일본행을 택한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러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인데다가 교통이 편리했고 몸을 숨기기가 중국보다 용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한국에 계신 아버지 때문이다. 만나지 못할 바에야 일본에 있으나 미국에 있으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버지와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은 그의 본능적인 행동의 영향도 있었다. 아마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로 아버지는 사건을 알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관원들도 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으므로 김상철은 연락을 단념해야만 했다.

찻잔을 든 그는 뜨거운 녹차를 한 모금 삼켰다. 오사카에 안인석이 지사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박미정과의 결혼 이후로 이미 자신의 가슴에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박미정을 차지하기 위하여 신의를 버렸다. 둘의 결혼에 대한 감정은 분노나 배신감이라기보다 차라리 실망이었다. 희망을 잃은 것이다. 안인석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교도소의 아버지를 찾아가지도 않았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김상철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한동안 정원을 바라보았다. 박미정은 두 남자에게 상처를 입은 셈이 되었다. 안인석이 자신과 박미정을 모두 배신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만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시간에 우에노 경시청의 단바 형사는 부하 고간과 함께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차는 오리가미 회관 앞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선배님, 한국인 수배자의 검거 협조공문이 일선 경찰서까지 내려온 건 제가 보기에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고간이 차에 속력을 내며 말했다. 모처럼 길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한국 측도 꽤 기민한데요. 하바로프스크발 도쿄행 일본항공 편에 탄 네 사람이 용의자라고 찍어낸 걸 보면 말입니다.

그건 우간다 경찰도 할 수가 있어.

단바가 씹던 껌을 종이에 싸서 재떨이에 버리고는 다시 새 껌을 입에 넣었다. 그는 담배를 끊고 나서 하루에 두 통의 껌을 씹는다.

컴퓨터에 찍히는 인적 사항을 조회하면 금방이야. 한국 놈이 기민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인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뚜렷한 이유는 없다. 언론에 보도되는 한국인의 언행이 신경에 거슬린다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 역시 일본인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을 터였으므로.

차는 다시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김상철과 이한 등 네 명의 여권번호와 인상착의가 각 경찰서에 통보된 것은 어제 아침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수사 협조 의뢰에 적극적으로 수사하고 있었는데 고간의 말마따나 한국의 범죄자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이런 식으로 협조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놈들, 근대리아에서 한국 안기부 요원 다섯 명을 살해했다니, 대담합니다. 잡으려면 힘깨나 들겠습니다.

고간의 말에 단바가 머리를 끄덕였다.

근대리아의 한국계 조직 보스다. 이번에 한국 정부에 의해서 짤린 거야.

그나저나 관내에 여관만 해도 2백 개가 넘습니다. 그놈들이 오피스 빌딩이나 개인소유 주택에 숨어 있다면 찾아낼 방법이 없어요.

신호가 풀리자 그는 차를 발진시켰다. 짚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으므로 단바는 김상철의 수색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부서의 다른 담당 형사들도 마찬가지 기분일 것이다.

이봐, 저기서 조금 쉬었다 가자, 커피나 한잔하고.

단바가 턱으로 앞쪽의 간이음식점을 가리켰다. 다른 청에서도 아마 오늘쯤 조사보고서를 써내고 담당 형사를 다른 사건으로 돌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손을 댔다가 미루어둔 20대 여자의 폭행치사 사건을 다시 맡아야만 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는 차 안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단바가 말했다.

신고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일단 숙박업소나 유흥업소에 모두 통보는 해두었으니까.

그는 피로한 듯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우에노가 신고율이 낮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날 밤, 다다미방 위에 누워 있던 김상철은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구요?

접니다, 형님.

이한이 문을 반쯤 열고 상반신을 들이밀었다. 11시가 넘어 있어서 여관 안은 조용했다.

형님, 주인아주머니가 잠깐 뵙자고 하시는 것 같은데 ‥‥‥」

이한은 일본어를 모른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인 여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일이어서 ‥‥」

여자가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오늘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인 양반의 부탁이기도 합니다.

얼굴을 굳힌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잘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여자는 주름진 얼굴을 들었다. 적게 보아도 60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그를 향한 얼굴은 조금도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 주인은 서에 신고를 할 작정입니다.

「………」

이제까지 4대에 걸쳐 여관업을 운영했지만 한 번도 여관에서 현행범이 체포되어 간 적이 없었다는 주인의 말씀입니다.

알았습니다 바로 떠나지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린 일본법을 어긴 현행범이 아닙니다, 부인.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주인이 서에 연락을 해서 어떤 사건인지를 물어보았지요.

여자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짐을 꾸리시는 동안 도시락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무래도 먼 길을 가셔야 할 것 같으니까요.

 

다음 날 아침, 단바 형사가 고간과 함께 득달같이 여관에 들어서자 주인인 이시하라 내외는 응접실에 나란히 앉아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발의 이시하라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떠난 네 명의 한국인이 서에서 찾는 사람들 같아서요.

낡은 헝겊 소파에 앉은 단바가 이시하라를 살펴보았다.

이시하라 씨, 협조공문이 발송된 것이 이틀 전인데 오늘 아침에야 그들을 알아보셨다니,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나이가 들어서 주의력이 떨어집니다. 오늘 아침에 생각난 것만 해도 다행이오.

단바가 입맛을 다셨다.

그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짐작이라도 가는 곳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우리와는 말도 나누지 않는 손님이었소.

위층을 조사하고 내려온 부하들이 현관에 모여 서 있었다. 원체 조그만 여관이라 둘러볼 곳도 없는 것이다. 맥이 빠진 단바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앉자 고간이 수첩을 꺼내 들고 주인 부부의 진술을 기록했다. 진술을 참작해 보더라도 그들 네 명은 김상철과 그의 부하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모두 말쑥한 차림이었고 건장한데다 예의가 발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가 방 청소를 했고 소리 내어 음식을 씹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대목에서 단바가 힐끗 고간의 수첩을 넘겨다보니 예상대로 고간은 적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여관을 나왔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쏟아지는 무더운 날씨였다.

자아, 어쨌든 놈들은 우에노를 떠났다.

차에 오르면서 단바가 말하자 고간이 머리를 끄덕였다.

도쿄를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선배님.

그러나 곧 우에노를 시발로 일본의 전 경시청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 한국기관의 자료만 갖고 있었던 일본 경시청은 이제 스스로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잔 살 테니 같이 퇴근하자구,

백한기가 다가와 안인석의 어깨를 쳤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오후 6시 경이었다.

오랜만에 기생집이나 갈까?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접대비가 크게 축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아, 이럴 때 그런 데나 가지, 언제 가나?

그가 이렇듯 사근사근 구는 이유는 안인석이 근대리아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전에 팩스로 보내온 공문에 안인석은 근대리아 행정부의 기획실 근무로 발령이 났고 겸해서 대리로 승진이 되었다. 오사카 지사에서 근대리아 근무를 자원한 예가 없었던 터라 지사장 이하 간부급들이 모두 안인석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오전에 지사장실에 불려간 안인석이 용기 있는 사원이라는 난데없는 칭찬을 들은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백한기가 자리에 돌아간 후에 안인석이 책상 위를 정리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퇴근 무렵이면 전화가 잦다.

여보세요.

안인석 씨를 부탁합니다.

굵은 목소리의 한국말에 그는 주춤 눈을 치켜떴다.

접니다만.

, 김상철이다. 오랜만이다.

얼굴을 굳힌 안인석이 숨을 죽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소식 들었을 테니 전화 받기도 불편하겠는데, 대답만 해라. ,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시간은 있어.

그렇다면 만나자. 나올 수 있지?

그것은‥‥‥」

물론 날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 가지 불편이 따르겠지. 어때, 모험 한번 해볼래?

안인석이 숨을 천천히 내려쉬었다.

그래, 만나자구. 시간과 장소를 정해줘.

백한기와 기생집에 갈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한 시간쯤 후에 안인석은 한큐우히가시 거리에 있는 한 음식점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들로 북적대는 음식점 안은 소란스러웠고 빈자리도 찾을 수가 없다. 입구에 서서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종업원이 다가왔다

안선생 이십니까?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종업원이 음식점 구석에 있는 전화기를 가리켰다.

곧 전화가 올 겁니다. 조금 전에도 안 선생을 찾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안인석은 겨우 빈자리를 찾아 자리에 앉아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일본인들로 퇴근한 길에 어울린 모습들이었다. 전화벨 소리가 소음에 섞여서도 들렸고 종업원이 수화기를 들더니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서둘러 다가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나다.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가면 문 앞에서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사람을 따라오면 된다.

김상철의 목소리였다.

알았어.

미안하다. 혹시나 널 미행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끊긴 전화를 내려놓은 안인석은 바쁜 주인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음식점을 나왔다.

안인석 씨 되십니까?

가게의 옆쪽에 서 있던 잠바 차림의 사내가 다가와 물었으므로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내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햇볕에 탄 얼굴에 눈매가 날카로웠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대뜸 그렇게 말한 사내는 인파를 헤치며 앞장을 섰다. 안인석은 그를 따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유흥업소가 들어찬 번화가여서 행인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갔고 가게에서 울려나오는 갖가지 소음이 그의 정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사내와 함께 대만원인 지하철을 타고 시달리다가 다시 택시를 두 번이나 갈아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미나미의 아메리카촌 안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 앞이다.

안인석은 잠자코 따라왔지만 사내가 미행을 당할까 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하철도 세 정거장인가를 지난 후에 내려서 택시를 탔고 그것도 갈아타면서 빙빙 돌았던 것이다. 덕분에 이제 시간은 밤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현관 앞에 서자 사내가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안에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안인석은 어깨를 펴고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지쳐있던 몸이 긴장으로 다시 굳어졌던 것이다. 레스토랑은 30평쯤의 규모였는데 조명이 어두웠다. 서너 테이블만 손님이 앉아 있을 뿐 빈자리가 많았는데 안쪽의 자리에서 그를 향해 손을 든 사람이 보였다. 김상철이다. 그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오랜만이구나.

, 정말 그렇다.

자리에 앉은 그들 사이로 잠깐 동안 서먹한 정적이 흐른 다음 다시 입을 연 것은 김상철이다.

이해해라. 일본 경찰도 날 찾고 있어서, 도쿄에 있다가 오늘 낮에 이곳에 왔어,

「‥‥‥‥」

나하고 같이 온 사람들도 이곳 지리를 몰라서 널 데려오는 데 예행연습까지 해야만 했다.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김상철이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띠었다.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 내가 일본에 와 있는 걸 경찰이 알고 있으니 널 감시하고 있을 것 같아서.

너희들 둘을 또 다른 내 부하가 따라왔지만 미행은 없는 모양이다.

안인석의 굳은 얼굴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그것은 긴장감과 함께 불안감이 더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양주병과 안주가 놓여 있었으므로 종업원은 얼씬하지도 않았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공작을 해서 오사카로 보낸 줄로 믿는 모양이더군.

그건 사실이야. 나도 소스가 있으니까. 회장 측에서 압력이 내려왔다고 알고 있어.

술잔을 쥔 김상철이 한 모금에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제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일본에서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오사카였고 너였어. 넌 나쁜 놈이야. 이제 나는 너를 믿지도 않고 친구로 생각하지도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안인석은 기세에 눌린 듯 시선을 떨군 채 입을 열지 않는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너를 만나 분명히 해두고 싶은 일이 있었어. 난 네 인생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너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박미정 씨가 근대리아에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넌 이혼을 했는데‥‥‥」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에 대한 반발이었든 두려운 감정 때문이었든 간에 넌 비겁한 놈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

내가 너를 잘 알지. 마음이 여리고 참을성이 없는 데다 책임감이 부족했던 거야. 너는 지금 그 일을 나나 박미정 씨 탓으로 돌리고 있을 것이다.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레스토랑 안은 어두웠지만 그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말하지 말라고 해서 미정이한테 이야기 안 했던 거야. 그리고 결혼한 것은 양쪽이 좋아서 그랬던 것이고.

「‥‥‥‥」

내가 오사카로 온 것은 강용식 회장이 전자로 직접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나도 요즘에야 확인했어.

「‥‥‥‥」

생각해 봐. 남편을 둔 아내가 옛 애인을 찾아 말도 없이 외국으로 떠났단 말이다. 난 자신이 없어졌다.

한동안 안인석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머리를 돌렸다. 그에게 박미정이 찾아왔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준다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또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결국 오늘의 만남에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의 증오심과 선입견이었고 자신도 그것을 해명하거나 설득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누구의 책임이었느냐고 따질 필요도, 기력도 양쪽 모두 없다. 그리고 또 하나 확인한 것은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다. 이제까지 억누르고 있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분노가 그를 보자 불끈거리며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김상철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 다시 만나겠지, 살아 있다면.

안인석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네 식으로라도 열심히 살거라, 그러면 누가 알겠냐? 너한테도 운이 열릴지.

 

밝은색 양복에 넥타이를 맸습니다. 부하 한 놈은 잠바 차림이었고 나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안인석이 말하자 30대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근처에 있었겠지요. 그런데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앞으로의 계획이라든가 아니면 여행 일정 같은.

그 친구가 어디 어린앱니까? 꼬리 잡힐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날 믿는 눈치도 아니었고.

안인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내가 이렇게 신고할 것도 예상하고 있었을 거요.

12시가 넘어 있어서 호텔의 로비는 한산했다 안인석의 앞쪽에 앉은 두 명의 사내는 한국에서 파견 나온 안기부 요원들이다. 김상철과 헤어진 그가 오사카의 한국 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신고를 하자 그들과 즉각 연락이 되었던 것이다. 한쪽 사내는 전화박스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모양인지 이쪽에서는 옆모습만 보이고 있다. 사내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김상철이 안형을 왜 찾아왔을까요? 믿지도 않고 있다면 말이오.

나하고는 감정이 있었으니까‥‥ 난 그놈이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했지요. 그리고는 일 년도 안 되어서 이혼을 했습니다. 그 여자가 그놈을 못 잊어서 그놈이 있는 근대리아로 찾아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섰는데 그것을 따지려고 날 찾아온 모양이오. 그 이야기만 했던 걸 보면. 나보고 나쁜 놈이라고 합디다. 분위기가 오싹했어요. 날 어떻게 할 것 같아서 겁도 났습니다.

김상철이 아직도 그 여자에 대해서 미련이 있는 모양이군요.

나도 조금 전에야 확인할 수 있었어요. 난 그놈이 강회장의 손녀한테만 빠져있는 줄 알았거든요.

안인석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아까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 일이 공개되면 난 근대그룹에서 일하기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그놈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약속 지켜주실 거지요?

사내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안형.

김상철이 안인석을 찾아간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지만 않았을 뿐이지 다음 날 아침에는 한국과 일본의 모든 수사기관에 통보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도쿄의 여관에 은신해 있다가 잠적한 사건은 양국의 언론에 의해 크게 보도되었다.

 

강미현이 오리엔트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들어선 것은 12시 정각으로 아직 점심 손님이 들어차지 않았을 때였다. 전망이 좋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최희은이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꽤 심란한 얼굴이구나, 가엾은 것.

자리에 앉는 그녀를 보며 최희은이 서너 번 혀를 찼다.

기다리는 동안 조금 생각해 보았는데 네 팔자는 모두 네가 만든 거야. 그래서 누굴 원망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냈다.

친구가 여럿 있었지만 대부분이 이쪽의 분위기를 맞춰주거나 거리감을 느끼게 했지만 최희은은 아니다.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건성으로 음식을 시켰다.

네가 날 보자고 했을 때 즉각 김상철 씨 사건 때문인 줄 알았어. 넌 잘 나갈 때는 절대로 연락한 적이 없는 애니까.

냅킨을 펴면서 그녀가 말했다.

내 짐작이지만 네 아빠나 그랜드아빠가 이젠 정리하라고 하실 것 같은데, 맞지?

강미현이 잠자코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네가 아직도 끈적끈적한 감정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안 믿어. 지금 경우는 지난번하고는 다르니까.

잊어, 그만. 하긴 네가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만.

자신이 없어졌어.

혼잣말처럼 강미현이 말하자 최희은이 풀썩 웃었다.

남녀관계가 무슨 수능시험 보는 것처럼 뭘 빡빡하게 갖춰야 되는 거냐? 자신이 있고 없고는 상대적이야.

운때가 맞아야 하고‥‥ 속말로 궁합이지.

난 요즘 잠자리 궁합이 딱 맞는 놈씨를 만났는데 그냥 결혼해버릴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다.

최희은이 슬쩍 말머리를 돌린 것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표시였다.

음식이 날라져 왔으므로 그들은 말없이 야채를 찍어 입에 넣었고 스테이크와 새우튀김을 씹었다. 이윽고 포크를 세워든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미국지사에나 보내달라고 했더니 절대로 안 된다는 거야. 서울에 있으라고.

당연하지. 누가 보내겠어?

최희은이 코웃음을 쳤다.

서울이 안전하지. 김상철이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그 여자는 지금 파리에 있어. 알지?

그 여자라니? 누구 말이냐?

박미정, 그 사람의 애인이었던‥‥‥」

, 그 여자가 거기로 갔다지.

포크로 야채를 찍은 그녀는 입가에 이것저것을 묻히고 흘리면서 소리 내어 씹었다.

이것에 비하면 우리 김치나 동치미는 얼마나 예술적이고 깊은 맛이냐? 김치나 동치미 그 자체에 맛이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국물에도‥‥‥」

그 사람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일까 하고 자꾸 생각이 나.

마요네즈에 술을 조금 섞고 오렌지나 과일 기름을 부어서 내놓은 이 꼴을 좀 봐, 야만인이 만들어낸 음식이야.

난 파리에 가겠어. 아마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미쳤어?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은 최희은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자존심도 없니? 네가 뭐가 모자란다고 그런 신파극을 연출해? 아예 그 박가 기집애와 함께 나란히 앉아서 그 사람 전화를 기다리지 그래?

난 네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정했어. 난 포기하지 않을 테다.

열녀 났네,

나만이라도 그 사람을 응원하고 기다려줄 테야. 그것이 우리 가족과 회사의 신의를 지켜주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

거창하네.

솔직히 노력도 해봤지만 내가 너무 쓰레기 같이 느껴져서.

물 잔을 든 강미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난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야. 너 아니?

「‥‥‥‥」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내 기분이 얼마나 상쾌한가를. 넌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모를 거야.

그래, 너 잘났다.

입맛을 다신 최희은도 물잔을 들었다.

네가 그렇게 나을 줄 예상하고 있었어. 그런데 ‥‥‥」

최희은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 사람이 파리에 간다면 그 박가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봐야겠는데, 그렇지?

간다면 만날 수도 있겠지.

똑바로 말하자구. 만나러 간 거야. 안 그래?

파리가 도망자의 도시라는 건 옛말이다. 혁명가들이 숨어 살던 때는 아득한 옛날이야. 지금은 안 그래,

파리는 유럽의 관문이야.

입맛을 다신 최희은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런던이나 스톡홀름, 아니면 로마라도 좋아, 차라리 그런 곳으로 가서 그를 기다리는 게 어때? 매스컴으로 네 여행지를 알리게 하면 그 사람이 알 수 있을 테니까.

강미현이 머리를 저었다.

파리가 나아.

? 박가하고 한판 붙겠다는 거야? 파리에서?

미쳤니?

쓴웃음을 지은 강미현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난 그를 만나서 아직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믿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족해. 나머지는 그의 선택이고,

어머나, 행복해라,

그 여자를 만난다면 그러라고 해야지. 난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아.

그 여자를 만나러 갔는데 네가 돌연히 나타나서 당황하지 않을까? 물론 좋긴 하겠다만, 양손에 먹을 걸 쥐었으니.

당황하고 주춤거릴 남자라면 이러지도 않아.

테이블 위로 연기를 내뿜은 강미현이 낮게 목구멍을 울리며 웃었다.

마음을 정하니까 개운해. 모두 네 덕분이다.

미리 정해놓고선, 망할 기집애.

이맛살을 찌푸린 최희은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아?

 

 

 

7. 기다리는 사람들

센강 아래쪽, 앙리 4세 다리에서 뻗어나간 무프타르 거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다. 그중 하나인 3층 건물의 3충이 박미정의 사촌언니 박은희의 집이었다. 치과의사인 그의 남편이 아침 일찍 몽마르트의 병원으로 출근을 하면 방이 다섯 개짜리 큰 집에는 여섯 살짜리 아들 하나와 그들 셋이 남게 된다. 박은희는 프랑스 유학을 왔다가 학교에서 지금의 남편인 랑베르를 만나 국제결혼을 한 것이다. 랑베르는 30대 중반으로 검은 눈동자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이었다. 박은희도 남에게 빠지지 않는 미인인지라 그들이 외출하면 주위의 시선이 모인다. 다정다감한 성격의 랑베르가 오히려 언니보다 더 신경을 써주는 형편이어서 박미정은 파리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정장 차림의 박은희가 응접실로 나왔다. 볼게 화장을 한 얼굴에 귀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도 좀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자.

미안한 듯 웃음을 띠운 그녀가 다가와 박미정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녀는 랑베르와 시내에서 만나 친구들 모임에 가는 것이다.

, 걱정 말고 놀다 와.

앙드레한테는 너무 많이 먹이지 말고.

알았어, 언니.

박은희가 응접실을 나가자 집 안은 조용해졌다. 학교에서 돌아온 앙드레는 놀이방에 박혀서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TV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이곳저곳 눌러보던 박미정은 곧 스위치를 끄고는 소파에 길게 앉았다. 예비학교의 가을 학기 수강 신청을 해놓았으니 그때에는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전공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김상철이 근대리아에서 탈출한 것을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쯤 지난 후였다. 우연히 한국식당에 들어가 묵은 신문을 들치다가 사건을 읽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는 하루에 한 번씩 식당에 들렸기 때문에 김상철이 도쿄 우에노의 여관에 묵었다가 다시 잠적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름휴가 때에는 텅 비어 한낮에는 관광객들만 가끔 지나가던 거리였다. 이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다.

그녀는 석상처럼 서서 아래쪽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식당에 들러 신문을 읽고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서 장을 봐오는 것이 요즘의 일과이다. 그러나 이제는 외출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박미정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려쉬었다.

자신은 김상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탈출 보도를 읽었을 때부터 가슴속에 싹튼 생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크고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당치 않은 상상이며 욕심이라고 스스로를 억눌러도 보았다. 이렇게 버려두었다가는 상처만 커질 뿐이라는 계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처도 욕심도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의 전화나 또는 만남을 상상하는 것이 요즘의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수심에 젖은 얼굴이야, 섹시한데.

이렇게 말한 것은 건너편 건물 4층의 창가에 서 있던 박항석이다. 도로 폭이 2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앞쪽 3층 건물의 창가는 손에 닿을 듯이 가까웠다. 거기에다 망원경까지 눈에 대고 있었으니 주근깨라도 보일 판이다

이봐, 커튼을 조금 더 닫아. 틈새가 너무 넓다.

뒤쪽의 소파에 기대앉은 현민규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박항석은 커튼을 닫았다.

이쪽에 나 있는 창문이 20개도 넘는단 말이야. 그리고 햇볕의 반사로 커튼 안쪽은 보이지도 않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박항석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들은 안기부 요원으로 본래 국립미술학교의 연구생이 사용하던 이방을 빌린 지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달 계약으로 3천 달러를 건네자 그는 두말하지 않고 방 열쇠를 건네주고 지금은 때늦은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다.

이제 박항석은 커튼 사이로 건물의 현관과 3층의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제기, 정말 죽겠구만. 기약도 없고, 낌새도 없이 맨날 이 지랄이니.

박항석이 혼잣소리로 투덜거렸다. 2, 3일 전부터 그의 말버릇이었으므로 현민규는 잠자코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루 12시간씩 2명씩 2교대 근무였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12시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창가에 앉아 눈을 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현민규의 옆쪽 탁자 위에는 커다란 금속제 가방이 뚜껑이 열려진 채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전화도청 장치였다. 일주일 전에 가족이 모두 집을 비웠을 때 요원 둘이서 집 안에 들어가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놓고 나온 것이다. 이제 집 안에서 전화를 걸거나 걸려왔을 때 가방 속의 수신기와 연결되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통화내용을 들을 수가 있다.

어제 이야기 들었는데, 염태식이가 병가원을 냈다는 거야. 간이 나쁘다고 6개월짜리로.

박항석이 말하자 그제야 현민규가 잡지에서 시선을 뗐다.

병가원을? 그렇다면 내년 초에 계장 진급이 어렵겠는데.

진급은 이미 물건너 갔어. 김상철이를 놓쳤을 때부터‥‥ 죽지 않고 산 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 친구.

그 일 없었으면 진급 0순위였는데.

글쎄, 운이라니까! 아마 병가원도 진급이 물 건너 간 줄 알고 선수 친 것 같아.

그렇게 말하던 박항석이 목을 뽑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2층의 할망구가 오늘은 시장 보러 가는 것이 조금 늦는군.

그러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최 형이 그러던데 아예 한국신문을 집으로 배달시켜 주는 방법을 만들자는 거야. 한국식당까지 따라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지겨워서 죽겠다면서 말이야.

박미정이 집을 나오면 감시자 한 명은 서둘러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집 안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보다도 더 지겨운 일이었다. 똑같은 길을 같은 페이스로 걷는데 이제 그들은 눈을 감고도 세 개의 사거리를 지나 횡단보도를 다섯 개 건너 한국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새끼,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여자가 있는데 도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거야?

박항석이 다시 투덜거렸으나 현민규는 잡지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박미정이 훑어보는 것은 신문의 사회면이다. 그녀는 정치, 경제, 문화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므로 커피 한잔 마시고는 10분이면 다시 식당을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지루함 속에서 조금 긴장감을 찾기도 했다.

 

심재택이 차장실에 들어서자 제3차장 오학수가 머리를 끄덕이며 눈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지난번에 근대리아 파동으로 안기부의 수장 이하 간부급 대부분의 이동이 있었고 오학수도 신임이다. 그러나 그는 심재택과 부산에서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아. 누군가가 총대를 메야 될 것 같아.

오학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한계가 급격히 세를 늘리고 있어. 상대적으로 장인규 세력이 위축되다 보니까 놈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근대리아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단 말이야.

운영위원회더러 책임을 지라고 하지요.

그자들이 책임을 질 인물들인가? 김상철이 북한계를 배후에서 조종한다고 하는 자들인데.

암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저희들로서는 불가항력입니다.

오학수가 입맛을 다셨다. 세를 늘리는 것은 북한계뿐만이 아니다. 삼합회는 공공연히 중국인 행사를 열어 주민들을 결속시켰고 마피아도 이미 전의 기반을 회복해 놓고 있었다. 그것에 대한 근대리아의 대비책은 경비대원을 현재의 ,4800명에서 I5,000명으로 늘린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운영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면 당장에 북한 프락치로 몰리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강회장도 속수무책인 형편인데 저희들이 어떻게‥‥‥」

심재택의 말에 오학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근대리아 안보의 실무 책임자였지만 근대리아의 정책을 결정하는 운영위원회에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회의에 참석하는 부장 손에 여러 차례 쥐어준 상황분석 자료는 번번이 다시 들려왔는데 모두 안보수석 박정규에 의해서 거부당한 것이다.

박정규가 상황을 모를 리가 없어.

오학수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이제야말로 근대리아가 북한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

무조건 경비대원만 늘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근대에서 반발이 대단해,

저는 요즘 20년 가까운 이 생활에 환멸을 느낍니다, 차장님.

솔직한 자네 생각을 듣자. 자네가 이 상황에 대해서 느낀 것을.

글쎄, 차장님. 그것이 무슨 소용이 ‥‥」

그러자 오학수가 눈을 치켜떴다. 50대 초반의 그는 조그만 체격이었지만 강단이 있는 인물이다.

잔소리 말고, 어서.

근대리아는 곧 북한 손에 떨어집니다. 조선족 주민들 속으로 북한조직이 깊게 파고들 테니까요. 근대그룹은 그놈들이 잘 자라도록 토양에 잔뜩 비료를 뿌려준 셈이 되었습니다. 근대리아의 조선족은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 겁니다. 관리자 놈들은 적응력을 키웠으니까요.

「‥‥‥‥」

김상철은 그들을 견제하고 어쩌면 흡수시켜 버릴 수도 있었던 스폰지 역할을 해왔었지요. 그리고 힘으로도 제압해왔습니다.

그는 머리를 들어 오학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놈을 믿습니다.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놈이지요. 확실한 자유인으로 개성이 강한 놈이었습니다.

그놈 이야기는 그만해. 이미 끝난 일이니까.

화가 나서 그럽니다,

그래도 그놈은 우리 요원 다섯 명을 쏴 죽였어. 엄청난 일이야.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근대리아를 위해 마피아와 전쟁을 치르고, 그것도 이기고 돌아왔는데 난데없이 체포했으니.

「‥‥‥‥」

우리도 병신이 되었지요. 박정규와 전창남, 거기에서 경비본부장으로 연결된 선에서 일이 결정되었으니까요. 우린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보고를 받았지 않습니까?

오학수가 다시 입맛을 다셨다.

그만해 둬라. 곧 잡히거나 죽게 될 놈이니까. 근대리아 일이나 생각해,

 

그들이 산책이라고 부르는 찬국식당까지의 도보 왕복을 마치고 박항석이 방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3시가 되어 있었다. 오전과 오후, 이렇게 12시간씩 나눠 근무를 하고 있어서 산책은 대개 오전반인 최병국 조가 맡았는데 오늘은 박미정이 오후에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는 미리 신문을 읽어본 터여서 오늘자 한국신문의 사회면에 김상철의 기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답답했었다. PC로 신문의 사회면을 읽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음료수 안 사왔어?

그의 빈손을 보고 현민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사 오라고 두 번이나 말했잖아? 음료수 없이 어떻게 저녁을 먹는단 말이야?

이런 젠장, 얘가 곧장 집으로 가는데 날더러 어쩌라고?

박항석이 따라 소리치면서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마켓에도 들리지 않더란 말이야, 망할 년이.

현민규가 혀를 찼다.

할 수 없이 내가 나갔다 와야겠군.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던 그는 창문을 향해 말했다.

정말 짜증나는구만. 이게 무슨 꼴이야? 열흘이 가깝도록.

그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잡지를 뒤적이던 박항석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소스라쳐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권총의 총구에서 발사되는 섬광을 보면서 뒤로 넘어졌다. 한 발에 심장을 관통당한 것이다. 그때에는 이미 현민규도 일어서 있었으나 그는 비무장이었다. 무겁고 걸리적거렸으므로 권총집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창을 등지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현민규를 바라보며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동양인이었으나 김상철은 아니다. 양복 차림에 조금 허리를 굽히고 권총을 똑바로 겨누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온몸에 찬 기운이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두 눈은 죽은 생선의 눈 같았다. 사내가 옆걸음으로 두어 걸음 돌았으므로 현민규도 그를 바라보며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현민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놈은 창에 총알 자국을 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쏜다면 창문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현민규가 와락 몸을 창으로 돌리는 순간 사내의 총구에서 다시 섬광이 튀었다. 둔탁한 총성이 방 안을 울렸고 박항석과 같이 심장이 뚫린 그는 벽에 등을 부딪치며 넘어지더니 금방 숨을 멈췄다.

마파척은 권총 끝에 배인 화약 냄새가 가시기를 기다리는 듯 총구를 허공에 대고는 서너 번 휘저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유 있는 태도였다.

 

누구세요?

문 앞으로 다가간 박미정이 불어로 묻자 저쪽에서는 잠시 대답이 없다.

누구세요?

김상철 씨가 보낸 사람입니다.

낮으나 또렷한 영어가 들리는 순간 박미정은 온몸을 굳혔다 보안경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사내 한 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박미정 씨, 계십니까?

사내가 다시 묻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양인으로 훌쩍 큰 키에 마른 체격이다. 조금 어깨가 굽어져 있었으므로 평범한 샐러리맨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박미정은 문의 고리를 풀었다. 가슴이 커다랗게 고동을 쳤고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진 것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사내는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우선 주위를 살펴보았다. 흐린 시선이었다.

놀라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김상철 씨의 부하로 진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낮으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직 응접실의 복판에 서 있는 채로였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릅니다. 근대리아에 들어와 김상철 씨 밑에서 일을 한 지 일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무슨 일로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한국 안기부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박미정이 머리를 젓자 그는 턱으로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가리켰다.

전화도 도청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너편 건물에도 두 사람이 24시간 이곳을 감시하고 있지요.

「‥‥‥‥」

지금은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웠지요. 하지만 시간이 30분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는데요?

홍콩.

박미정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홍콩이요?

일본에서 겨우 홍콩으로 왔습니다. 더 이상 움직이기가 어려워서요.

「‥‥‥‥」

절박한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꼭 만나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습니다. 한국기관뿐만 아니라 인터폴에서도 쫓고 있으니까요.

온몸의 기력이 떨어진 박미정이 소파의 등받이에 겨우 몸을 기대고 섰다.

사내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저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보스의 지시를 받고.

「‥‥‥‥」

지난번 근대리아에 오셨을 때 저택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병이 나셔서 제가 의사를 데려왔었지요. 그래서 얼굴을 알고 있는 제가 이곳에 온 겁니다.

박미정이 똑바로 섰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준비를 해야겠으니까.

그냥 간단히 ‥‥ 시간이 없습니다.

사내가 불안한 듯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옷가지만 간단히 추려 가시면 됩니다. 다른 건 제가 준비해 왔으니까요,

그로부터 3시간쯤 후인 오후 7시경, 생제르맹 데 프레에 있는 케이레 호텔의 객실 안이다. 전화기를 움켜쥔 홍경준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는 박미정의 감시 책임자로 케이레 호텔이 감시 본부인 것이다.

, 지금 요원 세 명이 현장에 나가 있습니다.

그가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박미정은 집 안에 없습니다. , 아마 김상철이 요원들을 해치고 바로 박미정을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고위층인 제3차장 오학수였다. 그는 사전 보고를 받자 직접 홍경준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오학수도 목청을 높였다.

여기서도 조처를 할 테니 넌 그곳에서 사건을 수습해라.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차장님, 알겠습니다.

도청 장치는 치웠겠지?

, 차장님.

김상철에 대한 수사 협조 의뢰가 프랑스 당국에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이곳에서도 전담반이 그곳으로 출발한다. 기다리도록.

수화기를 내려놓은 홍경준은 땀이 배인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 앞에 서 있던 요원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박항석과 현민규가 피살체로 발견된 것은 한 시간쯤 전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보고하던 아파트 감시조가 두 시간 동안 연락이 없었으므로 이쪽에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홍경준이 머리를 들었다.

최병국이한테 연락해서 준비가 되었으면 경찰에 신고를 하라고 해.

머리를 끄덕인 부하가 전화기를 쥐었다. 현장에는 요원 세 명이 도청 장치를 치우고 무기들을 회수하는 등 프랑스 당국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현장을 수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체 두 구를 치울 수는 없는 것이다. 서둘러 최병국과 통화를 하는 부하의 목소리를 귓가로 들으며 홍경준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체를 발견한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그들이 피살된 것이 몇 시간 전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김상철은 지금쯤 박미정을 데리고 유유히 도망치고 있을 것이었다.

이 새끼, 어디 두고 보자.

눈을 치켜뜬 홍경준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한국이었다면 이미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을 상황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한 시간을 헛되게 보낸 것이다.

파리발 로이터 통신으로 한국 기관원 두 명의 피살사건이 보도된 것은 다음 날 오전이다. 그리고는 석간신문에 특파원들의 흥분이 그대로 드러난 내용이 사회면의 톱을 장식했는데 이제는 김상철을 살인마라고 부르는 일간지도 있었다.

 

그날 저녁, 아예 집에다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강미현은 이태원의 카페에서 최희은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파리행 결심을 굳히고 아버지한테는 이태리 밀라노의 현지 공장 취재의 허락까지 맡아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근대기획의 직원들과 밀라노에 도착해서는 그곳에서 혼자 파리로 간다. 파리의 근대그룹 현지법인 담당자들은 놀랄 테지만 그들에게 자신이 파리에 와 있다는 소문을 내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김상철이 파리에 온다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수사당국이 김상철과 박미정을 추적하고 있다던데, 이건 한 편의 드라마다. 아니, 드라마틱한 액션 영화야.

술잔을 든 최희은이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실내였지만 그녀의 반들거리는 두 눈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차라리 잘 되었어. 그 일이 조금만 늦게 일어났다면 삼류 멜로물이 될 뻔했으니까, 물론 눈물의 주인공은 네가 되었겠지, 가엾은 것.

그러자 강미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일수록 심한 말을 뱉는 것이 최희은의 성격이다. 그것이 어설픈 위로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한 모금에 위스키를 삼킨 강미현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금 의외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막판이야,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그랬겠지.

이제 최희은의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다.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인데‥‥그 죽은 두 사람이, 할 수 없지 않았겠니? 만나려면,

잔잔하고 낮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므로 강미현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최희은이 혼자서 술잔을 채우고는 홀짝이며 마셨다.

오늘 오후에 들었는데‥‥‥」

생각난 듯이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이실장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김상철 씨가 오사카의 안인석이를 찾아갔다는 거야. 도쿄에서 오사카로 간 것이지.

「‥‥‥‥」

안인석이가 신고를 했는데, 물론 언론에 보고는 안 되었고! 박미정이를 찾아갈 것 같은 눈치를 보였다고 했다는 거야.

그것은 네가 잘 짚었다.

그리고는 최희은이 코웃음을 쳤다.

파리로 간다는 것 말이다. 족집게다.

「‥‥‥‥」

이제 끝났어, 진짜로.

술병을 든 최희은이 강미현의 잔에 술을 채웠다.

넌 이혼녀와의 경쟁에서 넉아웃 당한 거야. 그래서 널 위해 내가 금방 말을 만들었는데 ‥‥ 김상철이는 제 분수에 맞는 상대를 꿰차고 도망친 거야. 어때?

쓴웃음을 지은 강미현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넘겼다. 최희은이 말을 이었다.

화실에서는 김상철이가 멋있다고 애들이 그러더라. 그런 사랑을 한 번 받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애도 있고‥‥ 미친 것들이지. 막상 제 앞에 그런 일이 닥치면 팬티에 오줌을 찔끔대다가 도망칠 것들이,

다 남의 일이니까 그런 야단법석을 떠는 거야. 그런데 이건 네 일이야. 네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미현아, 꿈 깨.

누가 꿈꿨니?

강미현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난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번번이 착각해오구선 ‥‥‥」

그 사람 만날 때까지는 아니야.

술잔을 든 강미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한테 연락을 해오겠지. 그리고 확실하게 해줄 거야. 그때까지는 너도 입 닥쳐.

그러자 의외로 최희은이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이제는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카페 안을 흐르고 있었다.

 

자바섬의 동북단에 위치한 술라바야는 인도네시아 제2의 항구도시이다. 바로 건너편의 마두라섬에서는 유전이 발굴되고 있는데다 자바 해협을 건너면 거대한 원시림의 땅 칼리만탄에서 생산되는 원목 등이 집결되는 요충지인 것이다.

술라바야의 해변가. 마악 석양이 지고 있어서 바다는 짙은 남색이 되었고 수평선 위의 하늘은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위로 바다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것처럼 파도 끝의 횐 물거품이 차례로 몰려왔다. 눅눅한 바닷바람이 스치면서 바다냄새가 맡아졌다. 탁자 위의 신문이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졌으나 김상철은 바다를 향해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술라바야의 모텔에 투숙한 지는 열흘째가 되어가는 중이다. 본래의 목적지는 자카르타였는데 그곳에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술라바야로 이동한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그는 여섯 개의 여권을 만들어 놓았고 이한 등도 모두 서너 개씩의 여권을 가지고 있어서 입출국할 때마다 다른 여권을 사용했지만 모두 러시아 여권이라는 것이 약점이었다.

나무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최복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형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남방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표정이 밝다. 시베리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들에게 이번의 유랑이 김상철과는 다른 감정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한이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오면 같이 먹자.

, 형님.

고분고분 대답한 최복수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50평이 넘는 2층 목조건물에 묵고 있었는데 독립된 방갈로식 모텔로 뒤쪽에는 수영장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쪽으로 밀려오는 파도의 횐 끝만 겨우 보일 뿐, 바다는 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밝은 날에는 마두라 섬의 서쪽 해안에서 반짝이는 민가의 불빛이 보였지만 오늘은 흐린 때문인지 그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래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나무계단을 서둘러 밟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이한이다. 2층의 불은 아직 켜지 않았으므로 그는 윤곽만을 드러낸 채 다가와 섰다.

형님, 다녀왔습니다.

그는 술라바야 시내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송길수와 통화를 하고 온 참이다. 이틀에 한 번 정도로 김상철은 송길수로부터 근대리아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한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으므로 김상철이 일부러 가볍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근대리아의 일이 아닙니다.

「‥‥‥‥」

파리에 계셨던 박미정 씨가 납치당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누가?

한국언론이 크게 보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두 형님이 그렇게 하신 줄로‥‥박미정 씨를 감시하고 있던 안기부 요원 두 명을 사살하고 납치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두서는 없었지만 이한은 송길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빠짐없이 말하고 나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혹시 이것도 한국 정부의 장난이 아닐까요?

 

박미정이 홍콩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후 5시였으니 시차까지 포함하면 꼬박 하루가 걸린 비행이었다. 비행기 안에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지만 막상 공항의 입국 심사대 앞에 서자 박미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진선생은 이미 옆쪽의 심사대를 통과해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으나 그것으로 안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비행기로 오셨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세로로 앉아 있던 세 명의 심사관 중 가운데 앉은 사내가 물었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싱가포르 에어 725편입니다.

사내는 그녀의 여권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조금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관광하러 오셨군요.

.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스탬프를 찍자 박미정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심사대를 통과하자 진선생이 다가왔다.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눈에 띄게 긴장하고 계시는군요. 걱정하지 마시라는데도.

그는 가운데에 있는 사내하고는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박미정이 들고 있는 여권은 붉은색의 중국 여권이다. 진선생은 이미 그녀의 중국 여권을 준비해 왔는데 최근의 모습인 자신의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그들은 면세점 사이를 걸어 곧장 검색대를 지났다. 짐이라고는 각각 손가방 하나씩뿐이었으므로 검색할 것도 없다. 이제 마지막 관문을 지났다고 생각하자 박미정의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프랑스 출국과 홍콩 입국이 모두 끝난 것이다. 그가 만들어온 여권은 그의 말대로 중국 정부가 발행한 것이 확실한 모양이었고 미리 홍콩의 공항에까지 손을 써놓은 것이다.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가던 박미정은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비행기가 홍콩에 가까워지면서 생겨난 버릇이었는데 입국 심사대 앞에서는 잊고 있었다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구룡반도의 어느 혼잡한 길가의 건물 앞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가 되었을 때였다. 인도에는 행인들이 들끓었고 늘어선 가게에서 울리는 소음으로 거리는 떠들썩했지만 활기에 차 있었다.

진선생이 앞장서서 입구로 들어섰다. 5, 6층은 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간판과 빨래, 뻗어 나온 테라스 등으로 지저분한 분위기였다. 박미정은 가방을 옮겨 쥐며 그의 뒤를 따랐다. 서민층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곳이어서 어수선한 차림의 남녀가 좁은 복도를 걷는 그들을 스치고 지났고 양쪽의 벽 안에서는 갖가지 소음이 들렸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 거기에다 어느 곳에선 남녀가 싸우는 모양이었다.

진선생이 2층의 계단을 오르다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머리칼을 매만지며 뒤를 따르던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자 그는 다시 발을 떼었다. 3층의 좁은 계단을 오르자 그는 곧장 안쪽의 복도로 들어섰다. 박미정은 갑자기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조용한 곳에서 옆방이라도 좋으니 잠깐 숨을 돌리고 나서 김상철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앞장서 걷던 진선생이 멈춰서더니 힐끗 이쪽을 보고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와 두 걸음쯤 옆에서 멈춰선 박미정은 가늘고 긴 숨을 내려쉬었다. 입국 심사대 앞에서와는 경우가 다른 긴장감이 엄습해왔으므로 그녀는 두근대는 가슴을 억제하려는 듯 어금니를 물었다.

문이 열리자 진선생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시지요,

안으로 들어선 박미정은 지저분한 방 안에 서 있는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허름한 옷을 걸친 그들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진선생이 들고 있던 가방을 방 안의 의자 위로 내던지더니 사내들과 중국어로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한 사내는 안쪽의 문을 열고 사라졌고 다른 한 사내는 방 안을 치운다.

거기 앉으세요.

저고리를 벗어 다시 의자 위로 던지면서 진선생이 턱으로 낡은 소파를 가리켰다.

어서, 피곤하실 텐데.

소파로 다가간 박미정이 한쪽 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넥타이를 끌어내리던 그가 문득 머리를 돌려 박미정을 내려다보았다.

사장님은 지금 집 안에 안 계십니다. 이제까지 기다리고 계시다가 일 때문에 어젯밤에 나가셨다는군요. 그동안 이곳에서 쉬고 계시라고 하셨답니다. 이곳이 지저분하기는 해도 갖출 건 다 갖췄지요, 위험하니까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경찰 정보원이 깔려 있으니까요.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박미정이 겨우 묻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다시 일본에 가셨답니다. 하지만 곧 오실 겁니다. 제가 부인을 모시고 왔다고 연락을 할 테니까요.

 

시테 섬의 중심부에 있는 파리 경시청 안이다. 홍경준과 최병국은 담당 수사관 미셀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방 안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미셀은 30대 중반으로 비대한 체격에 대머리였다. 홍경준은 그의 불친절이 인종에 대한 편견 때문인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놈일수록 겉으로는 그렇지 않게 보이는 법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놈은 파리의 두 곳 공항에 두 남녀의 여권번호만 체크했을 뿐, 수십 군데의 국경 출입국 관리소에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미셀이 머리를 들고 홍경준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입출국 심사대에서 일일이 여권심사를 하지 않아요. 비자가 필요 없는 국가의 여권을 가진 사랑들은 여권만 흔들어 보이면 통과시킵니다.

그가 육중한 몸을 의자에 기대자 턱의 주름이 세 개로 늘어났다.

프랑스에 있는 모든 항공사와 여행사에 박미정과 김상철의 여권번호와 신상 명세를 보내주었으니 그쪽에서 연락이 올지도 모릅니다. 물론 바보같이 제 여권을 보이고 탑승했다면 말이오.

홍경준은 불어에 익숙했으므로 그의 비꼬는 듯한 말투를 그대로 알아들었다.

미셀 씨, 공항에 두 사람의 사진을 보냈습니까?

물론이요, 팩스로 보냈습니다.

김상철이 러시아 여권을 사용하고 있으니 박미정의 여권도 미리 러시아 여권으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겠군요. 그래서 러시아 여권을 가진 동양인을 주의해서 체크하라고 통보했습니다.

이미 사건 이후로 수백 대의 비행기가 프랑스를 떠났고 육로나 해상으로 떠난 사람들은 수백만이다. 홍경준을 맥이 풀렸다.

미셀이 의자를 삐걱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런데 당신들, 박미정의 아파트에 도청장치를 해두었더군요.

「‥‥‥‥」

당연하지요, 우리라도 그랬을 테니까. 앞 건물에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지요. 사건이 신고된 후에 조사반이 아파트에서 도청 장치를 바로 찾아냈소.

「‥‥‥‥」

남의 나라에 와서‥‥ 더구나 프랑스 시민의 주택에 무단 침입해서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는 건 대단히 큰 문제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셀 씨, 그건‥‥‥」

미셀이 손을 들어 홍경준의 말을 막았다.

지금 고위층이 언짢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렇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요, 선생.

이것으로 미셀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 것만은 확인된 셈이었다.

 

밀실에 앉아 술잔을 비우고 있던 흥기천이 흐린 시선을 들어 어둑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근대 타운 깊숙한 곳에 있는 중국인 마을의 마약방이다. 홍기천은 마약을 하지 않는 대신 술이 셌다. 50도짜리 보드카도 약하다면서 물처렁 마셨는데 그가 취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본 부하는 없다.

11시가 넘어 있었지만 안쪽의 마약방은 만원이었다. 마약방에는 중국식 빨대를 이용해서 아편을 마시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는데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신분이 확실한 중국인이 아니면 아편방 근처에는 얼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안쪽이 조금 술렁이더니 방문이 열리면서 양필성이 들어섰다. 그는 전임 대형인 진대원이 제거된 후로 근대리아 삼합회의 실질적인 2인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필성은 홍기천의 앞자리에 앉았다. 홍기천은 회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사내다.

대형, 마파척은 홍콩에 있습니다. 조금 전에 구룡에 있는 곽 선생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말소리를 낮춘 그가 말을 이었다.

곽선생한테도 비밀로 하고 있어서 정확한 소재는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하던데요,

마파척, 그놈은 신의가 있는 놈이다.

술잔을 든 흥기천이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이 진대원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 그놈이 목적도 없이 근대리아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을 리가 없어.

양필성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마파척이 찬드라라는 가명을 쓰고 타운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것을 안 것은 우연이었다. 마파척은 간부급들도 이름만 들었지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타운 호텔에 들렀던 간부급 하나가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마파척은 타운 호텔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홍기천은 마파척과 예전에 몇 번 거래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유리컵에 담긴 보드카를 꿀꺽이며 마시고는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씻었다.

마파척의 용도는 단 한 가지뿐이야. 너는 진대원이 어떤 용무로 그를 불렀을 것 같나?

시기적으로나 상황으로 보아도 한 가지뿐입니다. 김상철의 제거지요.

「‥‥‥‥」

진대원은 김상철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양필성이 입맛을 다셨다.

진대원이 죽은 이상 거래대상이 없어진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용무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술병을 기울여 잔에 술을 채우던 홍기천이 빈병인 것을 깨닫고는 병을 내려놓았다.

죽기 전에 계약을 했을 수도 있지, 이미 계약금을 받은 상태이고.

「‥‥‥‥」

20여 년 전에 홍콩의 부간이라는 거간꾼이 죽기 전에 흑사회의 전태대를 죽여 달라고 거금을 내놓고는 죽었다. 전태대가 1년 후에 목이 잘려 죽자 우리 삼합회에서도 그 해결자의 신의를 칭송한 적이 있었다.

그 해결자는 누구였습니까?

양필성이 묻자 홍기천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모른다. 어쩌면 뜨내기 강도였는지도.

「‥‥‥‥」

부간이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을 본 놈도 없고 증거도 없다. 소문일 뿐이었고.

우리도 회원들에게 신의와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사건을 미화, 과장시킨 혼적이 있다. 그러나 마파척 같은 성격의 해결자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마파척이 아직도‥‥‥」

상관없는 일이다.

홍기천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김상철이 파리에서 날뛰거나 쥐새끼가 구멍 드나들듯 마파척이 홍콩을 들락거리는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제 그놈들 모두 우리와는 인연이 멀어진 놈들이니까.

 

장인규의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신문을 내던진 유장석이 창가로 다가가 섰다. 아침 햇살이 곧게 뻗은 대로 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9월 초의 맑은 날씨였다.

그리고 장인규도 직접 들은 말이 아니지 않아?

뒷짐을 지고선 그가 혼잣말처럼 내뱉자 이대각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우리야 그 말을 믿고 싶지만 이거 증거로 내세울 게 있어야 말이지요.

소파에 기대앉은 그의 말투는 가라앉아 있었다. 한국에서 공수된 신문은 연일 김상철의 파리 잠입과 살인, 박미정과의 인연에다가 근대리아에서의 활약상을 흥미 위주로 보도하고 있는 증이었다.

근대리아는 겉으로는 정상 운영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대시의 상가는 기초 공사가 거의 끝나 지금은 외관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투자단들이 경쟁하듯 건물을 짓기 때문인데 이미 근대리아에 진출한 각국의 건설회사만 해도 50여 개가 되어 있었다. 근대시의 골격을 만든 근대리아 측에서 건설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행정위와 운영위의 갈등 해소를 위해 연합회를 발족시켰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순탄한 결론을 내어본 적이 없다. 운영위 측은 조선족의 이주부터 제한하려 했는데 그것은 근대리아의 설립 취지부터 부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자 이금철을 중심으로 한 북한계 세력의 단결력이 급격히 강해졌고 세력이 커졌다. 삼합회와 마피아도 마찬가지였고 일본에서는 조총련계와 조선인 야쿠자가 밀려 들어오고 있다.

경비대를 우여곡절 끝에 2천 명 늘려 7천 명 가까운 병력이 되었지만 유장석도 치안 상태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김상철이 내부를 장악했던 전에는 5천 명의 경비대만으로도 안정된 분위기였던 것이다. 유장석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어때? 장인규의 생각은?

생각할 것도 없답니다. 만일 누가 끼어든다면 사업장을 정리하고 근대리아를 떠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일이지. 죽 쒀서 개줄까?

전창남과 소명일은 지금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어, 머지 않아 윤곽이 드러날 거야.

하라고 내버려 두지요, .

불끈 눈썹을 치켜세운 이대각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작자들 여태껏 우리한테 그 내용을 상의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운영위원장 전창남과 경비본부장 소명일은 근대리아 내부 관리에 있어서 한국인의 조직화된 세력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에 김상철의 존재와 그의 잠재력을 부정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경비대만으로 주민을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그들의 대리인과 휘하 조직을 보내 장인규가 통솔하고 있는 김상철의 세력을 흡수한다는 것이었으니 장인규가 강력히 반발할 만도 했다.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잘못하면 김상철의 조직마저 분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장을 모르는 관리 놈들의 탁상공론이오. 근대리아가 망해도 그놈들은 떠나면 끝입니다.

장인규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대로 둔다는 것도 위험해. 세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어.

유장석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김상철의 귀향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장인규도 알아야 돼, 그나마라도 조직을 유지하려면 그런 도움이라도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러자 입맛을 다신 이대각이 머리를 저었다.

, 글쎄, 제가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막무가내인 걸 어떡합니까? 차라리 독자 세력으로 남을 테니 한국인 조직을 새로 결성하라고까지 한단 말입니다.

소명일이하고 같이 갔는데 아예 소명일이하고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불신하고 있었어요,

괜찮은 여잡니다. 남자보다 나아요.

 

장인규가 전화를 받은 것은 오전 11시 정각이다. 수화기를 귀에 대고는 무의식중에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더니 정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화 바꿨습니다.

장인규 사장 맞습니까?

나파스 클럽 사무실에 설치된 직통전화였는데 사내가 영어로 커다랗게 물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래요, 납니다.

장인규는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익숙하다. 그러자 사내가 대뜸 물었다.

당신은 김상철과 연락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지요?

이맛살을 찌푸린 장인규가 허리를 세웠다.

당신 누구야?

김상철에게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있소.

쓸데없는 소리하면 전화 끊겠어.

박미정의 생명이 달린 문제요.

장인규가 말의 뜻을 되새기듯 잠자코 있자 사내는 말을 이었다.

박미정이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은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어.

김상철이 한 짓으로 알고 있습니까?

여유 있는 사내의 목소리에 그녀는 온몸을 굳혔다. 파리 사건을 모르는 근대리아의 주민은 없을 것이다. 사건 소식을 듣자마자 장인규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송길수에게 연락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송길수는 그것은 다른 자의 짓이라면서 길길이 뛰었다. 김상철은 파리에 가지도 않았고 지금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이대각조차도 반신반의하는 상황이었고 증거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뿐더러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한 짓이오. 김상철 씨는 누명을 쓴 것이지. 나는 그래서 김상철 씨와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박미정 씨가 갇혀 있는 곳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당신은 누구요?

김상철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은 사람으로 알면 되겠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믿어서 손해 볼 것이 무엇인가 계산해 보시오. 박미정의 생명과 잘 되면 김상철의 살인 누명이 벗겨질 상황인데‥‥ 근대리아 전화는 거의 전부가 경비본부의 감청을 받을 테니 다시 말해드리지요. 파리 사건은 김상철이 한 짓이 아니오, , 되었지요?

「‥‥‥‥」

내가 김상철과 직접 연락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박미정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까, 어서.

길게 숨을 내려쉰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세 시간 후에 다시 연락을 해줘요. 그때 가부간에 결정을 할 테니까.

녹음을 들은 소명일은 한동안 책상 앞에 서 있는 박환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장인규의 통화내용이 전화국에 파견되어있는 경비본부 요원에 의해 녹음된 다음 보고가 된 것이다. 경비본부가 감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조직들은 암호를 쓰거나 때로는 군대용 무전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번의 통화는 장인규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소명일이 박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정보담당 과장이다.

이 내용은 기밀이야. 감청 원본을 나한테 가져오고 누설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긴장한 박환이 대답하자 소명일이 다짐하듯 말했다.

내 말은 경비본부 내부까지 기밀이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 본부장님.

세 시간 후에 다시 연락을 하자고 했는데, 그때 장인규가 송길수의 연락처를 알려주겠구만, 송길수는 김상철에게 연락을 하고.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소명일이 찌푸린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도대체 이놈이 누구일까? 한국인은 아닌 것 같고‥‥」

중국계나 일본계 같습니다만‥‥‥」

자신 없는 말투로 박환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조선족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미정을 이놈이 납치했단 말인가?

이자는 박미정이 갇혀 있는 곳을 안다고, 그래서 김상철에게 직접 연락해서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만.

글쎄 그 이유가 뭘까 말이야?

「‥‥‥‥」

이 망할 놈이 경비본부가 전화 감청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떠들고, 그래서 김상철이 파리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되풀이하는 걸 보면 혹시 김상철이 쇼를 부리는 게 아닐까?

, 그럴 가능성도‥‥‥」

소명일이 와락 눈을 치켜떴다

가능성, 가능성 하지 말아, 듣기 짜증 나.

, 본부장님.

장인규가 송길수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이제 마피아의 간부가 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버티고 있는 그에게로 접근해서 뭔가를 알아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소명일을 짜증나게 하는 이유였다.

 

다음 날 오후, 시내에 다녀온 이한이 2충으로 올라왔다. 방갈로 안은 조응했는데 아래층의 최복수와 정기만도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송길수한테 그자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3일 후에 홍콩의 메리디안 호텔에 투숙해 있으면 연락하겠답니다.

그는 김상철 앞으로 다가와 섰다.

송길수는 부하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가겠다고 합니다만.

쓸데없는 소리.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사내는 이제 송길수에게 연락을 했고 이쪽도 송길수로부터 전해 듣는 상황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기관의 도청 위험성은 조금 가셨다고는 하지만 이쪽은 아직 그의 신분도 모르는 형편이다.

3일 후에 와 있지 않으면 박미정이는 없어진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데요.

내일 아침에 홍콩으로 떠난다.

김상철이 말하자 이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 하지만 저희들 넷으로는 조금 불안합니다.

그놈이 박미정 씨를 데리고 있다지만 아직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놈이 함정을 파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

송길수도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노출된다면 그놈뿐만 아니라 홍콩 경찰, 한국 기관원들한테도 표적이 될 테니까요.

이것도 송길수가 한 말일 것이다. 경찰 출신인 송길수는 치밀한 사고력을 가진 사내였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놈은 근대리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일 것이다.

, 송길수도 그렇게 ‥‥‥」

내가 안 가면 박미정은 위험하다.

, 그것도, 하지만‥‥‥」

이대로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그의 말을 자른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스듬한 햇살을 받은 바다 위로 짙은 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박미정은 침실에서 나와 응접실을 건너 식당으로 들어섰다. 지저분한데다가 가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집이었지만 세 개의 방에 식당과 응접실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아침 8시 정각에 식탁에는 흰밥과 닭요리, 튀김과 수프 등 중국식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오늘도 진선생은 보이지 않았고 사내 하나가 주방 당번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박미정이 젓가락을 들면서 식탁에 물잔을 내려놓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 부탁이 있는데요.

물론 영어이다. 사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미안하지만 신문을 가져다주셨으면 좋겠는데, 영자신문도 좋지만 한국신문을‥‥거리에 나가면 구할 수 있을 텐데 . TV도 없어서 조금 답답해요,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허리를 편 사내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오후에 진형님이 오실 테니까 그때 말씀해보시지요.

미안해요. 그렇게 할게요.

벼르고 있었던지라 그의 차가운 반응에 식욕이 떨어져버린 박미정이 흰밥에 젓가락을 댔다.

집 안에는 다행히 오래된 잡지와 신문, FM 라디오가 있었으므로 사흘 동안 그것을 읽고 들으며 지내왔다. 인터폴이 김상철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추적하고 있다는 진선생의 말에 집 밖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선생은 도착한 다음 날 용무가 있다면서 집을 나갔지만 두 사내는 집 안에 틀어박혀 외출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식당으로 마른 체격의 다른 사내가 들어서자 그들은 빠른 중국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내들이 이쪽을 힐끗거리는 걸 보면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로 화제를 삼는 모양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진선생이 방 안으로 들어섰으므로 박미정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녀의 앞쪽에 앉으면서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 답답해서요, 그런데 ‥‥‥」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은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상철 씨는 언제 오실 건가요?

지금 오시는 길입니다.

밖의 소식이 궁금하십니까?

, 전화도 없다보니까· . 물론 있다고 해도 여기서는 곤란하겠지만, 집에다 연락해서 안심시켜 드리고 싶어요.

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곧 김사장님이 오실 텐데, 그때 다시 상의하시는 것이‥‥ 왜냐하면 전화의 발신지 추적이 되면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분하고는 연락이 되셨나요?

그럼요, 이제 도착하실 날이 이틀 남았습니다.

신문은 제가 나갔다가 내일 사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답답하시더라도‥‥‥」

아녜요. 잡지가 많아서 그렇게 많이 답답하지는 않았어요.

이틀만 지나면 되는 것이다. 박미정에게 바깥소식에 대한 궁금증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김상철을 중심으로 한 바깥소식이었기 때문이다.

 

 

 

8. 대결

오후 3, 회의를 마친 강미현은 방으로 돌아와 지친 듯이 소파에 앉았다. 지난달에 그녀는 근대기획의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승진해 있었으므로 넓은 집무실은 격조에 맞는 가구로 장식되어 있었다. 대형 유리창 밖으로 가을의 느슨한 햇살이 내려쪼였고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박미정이 실종된 지 나흘째, 이제 매스컴은 조금 기세를 늦추었지만 일간지 한 곳이 김상철의 인생역정을 소설 형태로 3회째 연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룹 차원에서 손을 써서 자신과의 관계는 A그룹 B양 식으로 슬쩍 표현해서 넘어갔지만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렇다고 그것이 꺼림칙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론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을 때, 강미현의 당당한 표현에 그들이 당황하곤 했던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녀는 팔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직통전화였다.

여보세요.

강미현 씨, 납니다.

김상철의 목소리였다. 숨을 죽인 강미현이 온몸을 굳혔다.

걱정시켜서 미안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제 걱정은 마세요. 그보다도‥‥‥」

그곳이 어디냐고 물을 뻔한 강미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도 한국신문을 봅니다. 내가 꽤 유명인사가 되었던데 ‥‥ 」

곧 잠잠해질 거예요.

파리의 사건은 내가 한 짓이 아니오. 물론 박미정 씨도 내가 납치한 것이 아닙니다. 난 그럴 만한 열정도 없고 무모하지도 않아요.

믿겠어요,

강미현이 힘 있게 말했다.

제가 믿어드릴게요.

지금 박미정 씨를 납치해간 사내한테서 연락을 받았어요, 박미정을 찾으러 오라고 말이오. 그놈의 목표는 나인 것 같습니다. 박미정을 미끼로 나를 유인할 작정이오. 이것은 함정이오. 하지만 상대방이 어떤 개인인지 아니면 어떤 조직인지 아직도 확실치가 않아요.

강미현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녀는 기를 쓰고 묻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난 박미정을 찾을 작정이오.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박미정이 끌려간 건 어쨌든 나 때문이니까. 내 책임이란 말입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강미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어요,

그가 가볍게 말을 받았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연락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대단히 어려운 관계가 되었는데 ‥‥‥ 내가 파리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해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당신한테는 꼭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여도 할 수 없지만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만 알아주시오.

왜 나한테 존댓말을 써요?

문득 강미현이 그렇게 묻자 김상철은 당황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잃지 마세요. 이제까지도 난 잘 버티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참이니까.

「‥‥‥‥」

설령 박미정이 가슴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난 당신을 받아들일 자신이 있어요. 기운을 내세요.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지만 강미현은 가슴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진심이었던 것이다.

 

강미현이 오리엔트 호텔의 라운지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심재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시간이어서 라운지에는 손님들이 꽤 들어차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그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심재택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후에 강미현의 만나자는 전화 요청을 받고는 두말 않고 나온 것이다.

주문을 받으려고 종업원이 다가왔다. 식사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대뜸 커피를 시키자 심재택도 머리를 끄덕였다.

요즘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그 일 때문에 뵙자고 했어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심재택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김상철 씨 전화를 받았어요, 오후 세 시쯤.

파리 사건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파리 사건은 함정이라고‥‥」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심재택은 숨을 멈춘 듯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한동안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입장으로 말씀드리는 거지만 김상철이 파리 사건에 개입되지 않은 것 같아요.

당연하지요.

그 지역을 알면 우리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유감입니다.

이것은 그저 빈말이다. 파리 사건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김상철은 요원 다섯 명의 살해범으로 쫓기는 몸인 것이다. 그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이미 김상철은 근대리아를 떠난 상황이고 타 조직이 그렇게까지 해서 그를 제거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씩 꼽아보면 북한은 김상철과 제법 돈독한 관계로 오히려 그가 필요한 입장이고, 마피아는 그레고리와 송길수가 간부진에 끼어든 상황이니 말할 것도 없고, 삼합회는 진대원을 김상철 측 손에 제거시킬 정도로 마찰을 피해온 형편이오. 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박미정은 그들에게 잡혀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박미정을 구하러 떠났고.

그렇군요.

저는 파리 사건이 그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뵙자고 한 건 아닙니다. 아직 내세울 만한 증거도 없는 데다 그 사람도 그걸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강미현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다만 기관원에 쫓기는 몸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우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그의 추적을 보류시켰으면 하는 생각으로‥‥‥」

「‥‥‥‥」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자 심재택이 소리 내어 숨을 내려쉬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로서는‥‥‥」

「‥‥‥‥」

제 직속상관인 3차장도, 아니 안기부장의 힘으로도 어렵습니다.

그는 식어 버린 커피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근대리아에 김상철의 공간을 메우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한국 정부와 운영위원회가 뒤늦게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지요. 곧 김상철을 대신할 사람과 조직이 파견될 예정입니다.

「‥‥‥‥」

그들에게 김상철은 귀찮은 존재지요.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근대리아에 남은 그의 부하들의 구심점이 되어 있으니까요.

강미현이 머리를 똑바로 들고는 어깨를 폈다.

저도 들었는데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요? 두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더 이상 위로도 조언도 할 것이 바닥난 심재택이 입맛만 다셨고 강미현도 말을 잇지 않았다.

 

나도 그 말을 믿는다.

심재택의 이야기가 끝나자 오학수는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김상철은 옛 애인을 만나려고 그따위 유치하고 무모한 짓거리를 할 놈이 아니야.

9시 가깝게 된 시간으로 그들은 오학수의 아파트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강미현과 헤어진 심재택은 곧장 오학수의 아파트로 찾아온 것이다. 가장의 생활에 익숙한 식구들은 응접실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집 안은 조용했다.

하지만 차장님, 제가 강미현에게도 말해주었지만 우리로서는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박미정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그놈이 누구인지도‥‥‥」

찌푸린 얼굴의 심재택이 말하자 오학수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근대리아에 관계가 있는 조직이겠지. 그것은 확실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대리아의 경비본부는 이미 그들의 장악권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소명일은 안기부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협조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소명일은 아마 장인규를 제거할 모양이야.

오학수의 목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깼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장인규는 북한의 해외 특수사업반인 32호실 출신에다가 조선족 여성동맹위원장까지 지낸 빨갱이거든.

장인규는 북한 공작원 여섯 명을 죽이고 달아난 여잡니다.

심재택의 말에 오학수가 머리를 저었다.

다시 이금철과 협조 관계에 있거든, 어쨌든 간에.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근대리아 내부는 파탄 상태가 됩니다. 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이란 말씀입니다.

소명일이 한국에서 전직 경찰을 중심으로 이미 백여 명의 인원을 모은 것은 그 때문이야. 그것들은 김상철의 공백을 메울 친위세력의 역할을 맡을 것이고 장인규는 당연히 장애물이 돼.

야단났습니다.

심재택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장인규만 제거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그레고리와 송길수가 당장에 들고 일어날 겁니다. 내부에서는 이금철이 반발 세력을 모을 것이고,

마피아와 북한 세력이 연합합니다. 거기에다 장인규의 반발 세력까지 · 그렇게 되면 경비대를 아무리 늘려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근대리아 행정부가 두 손을 들겠지, 운영위원회와 경비본부 수뇌급들은 한국으로 도망쳐올 것이고.

오학수가 말을 이었다.

러시아가 내분을 핑계 삼아 근대리아를 다시 흡수하든 북한이 지배하는 땅이 되건 한국 정부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잠자코 바라보는 심재택을 향해 오학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국과 일본이 경계해왔던 것은 한국의 거대한 자본과 기술력이 투입되고 거기에다 조선족이 대거 몰려든 또 하나의 한국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러시아 땅이 되건 북한의 세력권이 되건 그때에는 한국으로부터의 자본과 기술 유입이 끊길 테니까 근대리아는 더 이상 위험 대상이 아니지,

심재택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분합니다. 근대리아는 민족의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나도 요즘에야 박정규와 운영위원회가 무모한 작전을 서슴지 않고 밀어붙이는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그가 심재택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은 최악의 상황까지 예상해 두고 있는 거야, 미국 측의 각본일 것이다. 거기에다 일본 측의 입장도 포함된‥‥‥」

「‥‥‥」

광개토대왕 이후로 처음 갖는 우리의 거대한 땅이 될 뻔했다. 그것도 반도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는데‥‥‥」

밤이 깊어지고 있었으나 두 사내는 시간의 흐름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안인석이 배치된 곳은 근대리아 운영위 소속 종합기획실이었다. 종합기획실은 전창남의 직속기관이었는데 업무 내용은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행정위원회 업무의 감사와 정보수집이었다. 원칙적으로 근대리아 내부 업무는 행정위원회 소관이었으나 운영위원회가 감사의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종합기획실 구성원은 대부분이 전창남이 데려온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근대그룹 소속으로 발령 난 직원은 안인석이 최초라는 것이었다. 안인석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기획실장 박찬홍의 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기획실 근무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거기 앉아, 안대리.

박찬홍은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전창남이 소장으로 있던 국책연구소에서도 기획실장이었다.

이제 대충 업무 파악은 되었겠지?

, 실장님.

단순한 업무여서 파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안대리도 대충 짐작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우리가 애를 써서 이쪽으로 빼내 온 거야. 행정위원회가 상당히 반발했었어.

이미 주위 동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운영위가 근대 직원을 차출해간 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도 처음에는 그에게 거리감을 두었었다.

내가 왜 안대리를 데려왔는가는 알고 있겠지?

이것은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다. 안인석이 잠자코 있자 그가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미 근대는 자네를 사생아 취급하고 있었어. 그것은 김상철과의 관계 때문이지. 안대리가 근대리아 지원을 하자 그들은 서슴없이 받아들였지. 근대 전자의 오사카 지사에 근무시키는 것보다 근대리아에 보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야. 그들은 우리가 자네를 끌어갈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잠자코 내 말을 들어.

박찬흥의 얼굴이 굳어졌다.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사내였다.

자네, 오사카에서 만난 사람이 있지?

거기에서는 민태식이라고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내 말이야.

「‥‥‥‥」

처음에는 자네한테 자신이 야쿠자 관계자라고 접근해 왔을 거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안대리는 그자의 본색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머리를 든 안인석이 결심한 듯 말했다.

민태식은 자신이 조총련계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조총련계와 수시로 접촉하여 그의 지령을 받고 그에게 한국 기업의 정보를 넘겨준 셈이 되는데‥‥‥」

그를 어떻게 만났지?

오성그룹 소개로 만났습니다.

이제 숨길 것도 언다. 박찬홍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이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을 추궁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찬홍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어, 그것도, 그런데 안대리, 민태식의 본색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

긴장으로 눈을 크게 뜬 안인석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는 조총련계에 침투해 있는 일본 정보 요원이야. 그자는 오성그룹의 핵심 간부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이번에 북한 측이 근대시의 사업장에 진출하는 데 큰 공적을 세웠지. 일본 정보국은 근대리아 문제에 대해서 CIA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이만하면 우리가 자네를 끌어들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나?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안인석은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이해하기에 앞서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던 것이다. 이곳의 업무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치열하고 살벌한 음모가 있었고 계략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김상철이는 지금 박미정을 데리고 잠적해 있어. 솔직히 우리는 그놈이 그렇게까지 무모한 놈인지는 예상하지 못했네.

박찬홍이 말머리를 돌렸다.

안대리가 제일 잘 알겠구만, 그놈 성격이 전에도 그랬나?

그렇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안인석이 말을 이었다.

박미정을 만나려고 그렇게 했다는 걸 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 여자는 제 마누라가 되기 이전에 그 친구의 애인이었지요. 제가 오사카에 있을 때에도 그 여자는 근대리아로 그 친구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서로 잊지 못하는 사이지요.

그렇군.

쓴웃음을 지은 박찬홍이 몸을 반듯이 세워 앉았다.

이제 그쪽은 끝장난 인생들이야. 앞으로는 자네의 인생이 활짝 펴질 거야.

 

홍콩, 저녁 7시경의 시장 안은 소란스러웠고 번잡해서 옆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은 공항 위쪽으로 아파트촌을 끼고 올라가다가 내륙으로 빠지는 길목에 세워진 시장이었는데 주로 채소와 어물이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펄펄 끓는 기름솥을 걸어놓고 튀김국수나 삶은 고기를 파는 간이음식점 앞에 가득 모인 사람들은 선 채로 음식을 먹는다. 사람과 소음으로 가득 찬 시장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앞장을 서서 사람들을 헤쳐 가던 정기만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옆쪽을 바라보았다. 시장 안에 있는 가게는 거의 간판도 없어서 그놈이 그놈 같이 보였으므로 그들은 시장을 두 번째 돌고 있는 참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어물 가게의 한쪽 구석에 푸른 종이등 한 개가 달려 있었는데 안에 켜진 전등빛에 비쳐진 횐 글씨가 드러났다. 대해()였다. 좌우를 주의 깊게 둘러본 정기만이 앞장을 섰고 그의 뒤를 이한이 따랐다. 가게는 꽤 컸고 수십 종류의 생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주인은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비대한 체격의 사내였다. 한 손에 쇠갈퀴를 쥔 그는 들어서는 그들을 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고기를 드릴까?

그러면서 그는 그들을 쉴 새 없이 번갈아 바라보았다. 중국어에 능통한 정기만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섰다.

채 선생이시요?

, 내가 채담이오.

안쪽의 지저분한 구석에서 나무상자를 내리던 사내들이 이쪽을 힐끗거렸다. 손님 서너 명이 들어왔으므로 사내들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리예프 씨 연락을 받으셨을 텐데.

정기만의 말에 그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쇠갈퀴를 내려놓았다.

조금 늦으셨군.

찾기가 어려웠소.

작업복을 벗어던진 채담이 그들을 안내해간 곳은 시장 건너편의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낡은 승용차를 몰고나온 그는 그들을 태우고는 이제 짙게 어둠이 덮인 밤길을 달렸다.

필요한 건 뭐요?

한동안 말없이 운전하던 채담이 문득 물었다. 승용차는 고가도로 위를 달려와서는 주택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기만이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더니 머리 위에 있는 실내등을 켰다.

권총과 기관총 각각 ~정에 실탄이 각 천 발과 3천 발, 수류탄 20, 로켓포와 포탄 10, 저격용 소총 2정에 실탄, 야간투시경과 휴대용 무전기가 각각 5.

채담이 표정 없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로켓포탄 종류는 어느 걸로 하시겠소? 물론 로켓포는 RPG7V, 러시아에서 나온 최신형이지.

HEAT탄이오.

채담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마피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해온 무기 상인이었다. 따라서 마피아의 무기 거래 책임자인 유리예프의 부탁을 거절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큰길에서 좁은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면서 채담이 입을 열었다. 가로등만 드문드문 켜진 한적한 길이었다.

모두 합해서 미화로 2만 달러 되겠습니다. 유리예프의 부탁을 받아서 염가로 드리는 거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기만이 힐끗 이한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물건이나 봅시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있던 박미정은 문이 열리는 기척에 소스라쳐 상반신을 일으켰다. 문은 안에서 잠그는 장치가 없었지만 이제까지는 사내들이 꼭 노크를 했고 늦은 시간에 들어오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진선생과 마른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무시는 중이군.

진선생이 의자를 당겨 앉았으므로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반대쪽 의자에 앉았다. 잠옷차림에 맨발이었지만 옷을 갈아입을 상황이 아니다.

무슨 일이세요?

김상철이 도착하기로 한 날이 내일이오.

그의 흐린 시선이 앞가슴에 닿자 박미정은 손으로 잠옷의 앞쪽을 여몄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이곳도 준비를 해둬야 할 것 같아서,

진선생이 뒤에 서 있는 사내에게로 머리를 돌리더니 무어라고 짧게 중국어로 말했다. 그러자 사내가 박미정에게 다가왔는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수갑이었다.

왜 이러시는‥‥‥」

얼굴이 하얗게 된 박미정이 더듬거리며 영어로 물었지만 사내는 얼이 빠져 반항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지만 네가 너무 믿고 있어서.

진선생이 입술만으로 웃었다.

너한테도 다행한 일이지. 고생을 덜한 거야, 그동안.

당신은 누구요?

그녀가 겨우 그렇게 묻자 진선생이 다시 웃음을 띠었다.

난 마파척이라고 살인 전문가다. 영어의 킬러라는 표현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해.

널 미끼로 김상철을 부르는 오래된 수법을 쓴 거야. 쫴 오래 공을 들였어.

박미정이 수갑 찬 두 손을 들어 잠옷의 앞자락을 여며 쥐었다.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다리가 떨리는 바람에 온몸이 흔들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마른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소리를 질러도 들여다볼 사람도 없지만 만일 그런다면 입에다 테이프를 붙여두겠다. 그러니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

마파척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제 박미정에게는 섬뜩하게 들렸다.

난 김상철을 없애기로 오래전에 계약을 했어. 그 계약은 김상철이 죽어야만 유효가 되는 거야.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박미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상철이 오기로 한 날이 내일이다. 그놈은 네가 미끼가 되어있다는 연락을 받고는 홍콩으로 오겠다고 했어, 그럴 줄 예상은 했지만 꽤 어리석은 놈이야.

「‥‥‥‥」

대개 철부지 놈들은 신의나 의리, 또는 여자에 대한 책임 등의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목숨을 걸지. 김상철 그놈도 예외일 리가 없으니까,

나쁜 놈,

아직도 몸이 떨렸지만 기를 쓰고 눈을 치켜뜬 박미정이 말했다.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

그러자 마파척이 다시 웃었다.

하긴 너도 그런 셈이지. 김상철이 찾는다는 말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날 따라온 입장이니까. 김상철과 오십보백보로군.

나쁜 놈,

이를 악문 박미정이 어깨를 떨었다.

그는 나를‥‥‥」

너를 위해서는 그래도 다행이다. 김상철이 오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하면 말이야.

마파척은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렇게 되었다면 너는 두 번 죽었을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마락척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마른 사내가 들어왔다.

이 여자를 침대에 눕히고 다리에도 수갑을 채워라.

그는 박미정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입에도 테이프를 붙여둬라. 마음이 바뀌었다.

 

결국 홍콩에서 꼬리가 드러났군.

이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 것은 홍기천이다. 그는 오늘도 물컵으로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안쪽의 아편방은 조용했다. 새벽 1시가 넘어 있어서 새 손님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양필성도 대작을 하고 있었으므로 술잔을 쥔 그가 입을 열었다.

채담이 한국어로 씌어진 무기목록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총기를 각각 다섯 정씩 주문한 것도 아귀가 맞습니다.

그쪽은 네 명 아닌가?

한 정은 예비로, 아니면 숫자를 감추기 위해서 그릴 수도 있지요.

물컵을 들어 서너 모금의 보드카를 삼킨 흥기천이 더운 숨을 뿜어냈다.

마피아 쪽에서 연결을 시켜준 것도 들어맞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송길수가 두목급 간부로 있으니까. 김상철이 송길수한테 부탁했을 것이다.

채담은 삼합회 간부였다. 그는 마피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해서 필리핀이나 캄보디아 등 제3국으로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삼합회 소속의 무기상인 것이다. 유리예프로부터 비밀을 지키라는 당부를 받았지만 채담이 즉각 총회에 보고를 한 것은 이 일이 마피아와 삼합회가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관계된 일이라면 자신이 삼합회원인 줄로 알고 있는 유리예프가 그런 거래를 주선할 리도 없는 것이다. 총회로부터 정보를 받은 홍기천과 양필성은 채담한테서 무기를 사간 자들이 김상철의 일행이라는 것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었다.

, 그렇다면 홍콩에서 전쟁이 터질까?

술잔을 내려놓은 홍기천이 양필성을 바라보았다. 마파척을 찾아 김상철이 홍콩에 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홍콩 메리터안 호텔의 객실 안이다.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깬 김상철은 누운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자고 있나?

사내의 목소리에 김상철은 일어나 앉았다.

누구십니까?

당신을 기다렸던 사람이야.

그럼 당신이 바로‥‥‥」

박미정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지.

익숙한 영어를 쓰고 있었지만 사내에게서는 동양인식 억양이 느껴졌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내 목적은 단 하나, 네 목숨이야. 그것은 알고 있지?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싶은 것이 단 하나 있는데, 너는 누구야?

곧 알게 될 테니까 서두르지 마.

이제 내가 왔으니 여자는 놓아줘도 될 텐데, 그렇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 이제 넌 시체로밖에 홍콩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선택권은 나에게 있어 넌 요구 조건을 내놓을 입장이 아니야.

넌 비열한 놈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상철이 수화기를 귀에 댄 채로 옷을 입었다.

네가 마피아도, 북한계도, 삼합회 소속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넌 명분도 없이 날뛰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것도.

잘 아는군.

사내가 목구멍을 울리며 웃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이야, 나는.

너한테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다만 나는 사자(死者)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사내의 말투가 조금 빨라졌다.

시계를 보아라.

김상철이 탁자 위에 놓인 손목시계를 들어보았다. 아침 720분이다.

지금 몇 시냐?

720.

당장 옷을 입고 그곳을 떠나. 왜냐하면 내가 홍콩 경찰당국에 너를 신고했기 때문이야. 아마 곧 경찰이 그곳에 들이닥칠 거야.

네 이름을 댔으니 더 빠를지도 모르지.

이를 악문 김상철의 귀에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다음 목적지는 구룡반도 입구에 있는 성화 호텔이다. 내가 10시 정각에 다시 그곳으로 전화를 하겠다.

전화가 끊기자 김상철은 저고리를 걸치고는 구두를 신었다.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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