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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5-1

Bollnow 2024. 3. 6. 07:33

5

 

1. 사는 자와 죽는 자

마파척은 산동성 사람으로 30대 후반의 조금 마른 듯한 체격의 사내였다. 젊었을 때 세상을 떠돌면서 어느 누구한테도 메여 살지 않았던 그가 삼합회의 일을 맡게 된 것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특급 대우를 받는 별동대원이 되어 있었다. 구부정한 어깨로 휘청이며 걷는 그가 온갖 수단에 능한 살인업자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반년 전 마카오의 염대태를 사흘 안에 살해할 때까지 진대원도 그저 허명이었거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진대원은 마파척과 밀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죽은 생선의 눈알처럼 흐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파척은 어젯밤에 타운에 잠입해 왔다. 잠입해 왔다는 것은 진대원 외에 그의 입국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상황이 심각하다. 부하들이 동요를 하고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대원이 말했다.

믿을 놈은 몇 놈밖에 없다.

마파척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홍콩에서 진대원은 그에게 자신의 정보원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마파척은 정보원을 가족 두 명과 함께 살해하여 바다에 묻었던 것이다.

나는 내일 아침에 부하들을 동원해서 김상철을 친다.

지난번에는 놈에게 속아서 엉뚱한 곳을 쳤어. 놈은 이만저만 몸조심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

놈의 통나무집은 요새야.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안에는 무장병력이 20명이 넘는다.

둘러보았습니다.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마파척이 말했다.

실패했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래서 ‥‥‥」

놈이 제거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압니다.

오늘 아침의 습격도 철저히 준비된 것이야. 놈의 출근길을 덮칠 계획이다.

「‥‥‥‥」

그러나 만일의 경우, 실패했을 때 부하들의 동요가 더 심해질 것이다.

「‥‥‥‥」

그때에는 네가 나서라. 아마 놈도 우리 쪽 분위기를 조금쯤 읽고 있을 테니 방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만 달러를 내십시오, 진 형님.

그러자 진대원이 옆에 놓인 낡은 비닐가방을 들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정도 부를 줄 알고 준비해두었다.

염대태보다 더 어려운 환경입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한꺼번에 주는 것이다.

진대원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부하들과 회의를 해야 한다. 내일 아침에 그놈이 제거된다면 너에게 다른 임무를 줄 테니 기다려라. 실패한다면 예정대로 진행하고.

새벽 3시가 되자 주택가의 불빛은 거의 꺼졌다. 골목 입구에 켜진 외등 한 개만이 희미하게 주위를 비칠 뿐이다. 짙은 어둠이 내려덮인 중국인 주택가의 깊숙한 안쪽, 문패도 없는 허름한 판자 대문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 안이다. 간간이 기침 소리와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골목 밖으로 희미하게 흘러나올 뿐 적막에 싸여 있던 골목에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울려나왔다. 한두 사람이 아닌 서너 명의 빠른 발자국 소리였다. 이어 양쪽 담장의 어둠 속에서 두어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요?

나다, 용형이야.

다가온 것은 마작방의 책임자인 용형을 비롯한 서너 명의 간부급 보스였다. 그들은 사내들을 지나 그중 한 곳의 판자문을 들치고 들어섰다. 좁은 통로를 거쳐 그들이 방 안에 들어서자 상좌에 앉아 있던 진대원이 머리를 들었다.

늦었군, 용형.

검문이 심해서 애를 먹었습니다.

방 안에는 7, 8명의 간부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가 제일 늦은 것이다.

나파스 클럽의 로켓포 공격 사건이 지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경비부의 경계는 조금도 늦추어지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 거리에 대한 검문과 검색은 갈수록 심해져서 폭설 기간 때의 습격피해를 아직 복구하지도 못한 주민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있었다. 진대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내일 아침에 작전을 개시한다. 이번에는 실수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방 안의 사내들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켓포 세 문으로 세 대의 차량을 쏘는 것이야. 거리는 50미터 미만일 테니 내일로 김상철의 인생은 끝난다.

진대원의 시선이 철안에게로 향해졌다. 그는 지난번에 나파스 클럽의 뒤채에 로켓포를 쏘아 넣은 장본인이다.

철안, 세 대의 차량이 박살이 날 때까지 쏘아라. 한 놈도 살아 나와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대형.

말석에 앉은 그가 머리를 숙였다. 중국군 장교 출신으로 회에 가담한 그는 자신의 출세가 이번 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

계획은 완벽하다. 김상철이 집을 떠날 때, 그리고 타운 앞을 지날 때에도 너에게 연락이 갈 테니까. 네가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김상철이 차에 탔는지, 탔으면 몇 번째 차에 탔는지도 알려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것은 용형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만일의 경우, 내일 아침에 그자가 대아운송에 출근하지 않을 때에는 그냥 철수해서 돌아오도록.

알겠습니다, 용형님.

진대원이 머리를 돌려 양필성을 바라보았다.

경비본부 모략은 빈틈없이 하도록. 증인 제보나 신고에 허점이 있으면 안 된다.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양필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만 제대로 된다면 경비본부는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김상철은 적이 많은 놈이야. 근대리아 측에서는 일단 우리와 마피아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을 것이지만 사후 수습에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진대원이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내일 일이 성공하면 근대리아의 판도는 바뀐다. 통치는 근대리아 행정부가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주민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우리와 마피아 그리고 북한이다.

회의를 마쳤을 때는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일을 할당받은 간부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대원들은 용형과 함께 임시 사무실을 나섰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거처를 바꾸는 진대원인지라 간부들도 그의 소재를 모른다.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진대원과 용형이 들어선 곳은 주택가 끝 쪽에 있는 벽돌집이었다.

방 안에 자리 잡고 앉자 진대원이 용형을 바라보았다.

양필성이 고분고분한 것은 내가 원로회의에 보고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여굉의 보고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자를 이곳에서 내보내겠어. 난 내 지휘방식에 반발하는 자는 데리고 있지 않겠다.

용형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진대원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하긴 보고 내용에 따라 내가 즉결처분할 수도 있겠지.

그들은 양필성의 부하로 마약방의 재정을 맡고 있는 여굉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굉이 양필성의 자금 관계에 대해서 보고할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인데 진대원으로서는 이번이 눈 속의 가시 같은 양필성을 처단할 좋은 기회였다.

오는 모양이군.

용형이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밖에서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문이 열렸다. 앞장서서 들어선 것은 여굉이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는 낯선 사내가 한 명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내를 본 진대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양필성이었던 것이다. 진대원이 힐끗 용형을 바라보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 어서들 앉아.

갑작스런 양필성의 출현에 놀랐지만 그 정도에 동요할 진대원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곧장 양필성에게 쏘아졌다.

그래, 거기도 나한테 보고할 것이 있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대형.

앞자리에 앉은 양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진대원의 시선이 끝 쪽에 앉은 사내에게로 옮겨 갔다.

그런데 이자는 누군가?

저승사잡니다, 대형,

억양 없는 양필성의 말에 진대원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양필성, 지금은 농담할 상황이 아니다.

당신이 그렇소.

양필성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원로회의는 당신의 무리한 행동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결정을 내렸소, 당신의 개인적인 공명심 때문에 우리 조직과 수만의 주민이 피해를 입고 있단 말이야.

건방진, 감히 누가‥‥‥」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진대원이 버럭 고함을 친 것은 문밖의 경호원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그러자 양필성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발악하지 마라, 진대원. 대형답게 품위를 지키란 말이다.

이놈, 양필성.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네 부친이나 숙부도 어쩔 수 없어. 원로회의가 승인했고 회주께서 결정하신 일이니까,

양필성이 여굉의 옆자리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 이제 당신 차례요.

그러자 사내는 가슴속에서 소음기가 끼워진 기다란 리볼버를 꺼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싱거워서 ‥‥」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한이 진대원의 이마에 리볼버의 총구를 겨누었다.

뒈지기 전에 궁금증을 풀어주겠는데 난 김상철의 부하로 이한이라고 한다. 오늘 이 자리에는 초대를 받아왔어.

유창한 중국말이다. 그러자 양필성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뜻을 전달하기엔 이 방법이 좋을 것 같아서 초대한 거야.

그 순간 눈을 부릅뜨고 있던 진대원이 둔탁한 총성과 함께 뒤로 벌떡 넘어졌다. 입맛을 다신 이한이 권총을 가슴 안에 끼워 넣자 양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럼 이 일을 김 사장께 그대로 보고해 주시오, 이선생.

 

내분이 아닙니다. 삼합회가 근대리아에서의 정책을 바꾼 것이지요, 진대원이 제거당한 후에 오히려 조직이 안정되었고 주민들의 반응도 나아졌습니다.

유장석의 방 안이다. 이상훈의 보고를 들은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과격한 놈이 없어졌다니 다행이야. 그렇다면 누가 진대원의 뒤를 이었나?

그것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보다 치밀하고 경륜을 갖춘 자가 보내질 것은 분명합니다.

유장석이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김 사장 부하를 시켜 직접 쏘아 죽이도록 했다니 기발한 방법이다. 마음 놓을 놈들이 아니야.

진대원이 죽고 난 후로 타운은 오랜만에 휴전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네 개의 조직은 세력을 강화시키면서 마찰은 극력 자제하는 상황이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근대시의 상가지구가 개발을 시작하면 그곳이 격전장이 되겠지요. 이제 무대는 타운에서 근대시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러자 이상훈이 말을 받았다.

날씨가 풀려 건설이 시작되면 다시 움직임이 활발해지겠지요. 모든 조직이 근대시에서 승부를 걸려고 할 테니까요,

중국 정부가 지난번 삼합회 소탕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해 왔어.

유장석의 말에 두 사내는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근대리아 행정부에 말입니까?

이상훈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개발단장인 내 앞으로. 중국계 주민의 편파적인 탄압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꽤 강력한 경고야. 삼합회의 배후에는 중국 정부가 있다고 봐야 한다. 마피아의 배후는 러시아정부고‥‥ 이건 대리 국제전의 양상이다.

그러면서 유장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가 우리들의 책임이야. 잘못하면 소화불량이 되어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다.

유장석의 방을 나온 김상철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이상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김 사장님, 잠깐만‥‥‥」

그들은 옆쪽의 창가로 다가가 섰다.

지난번에 들여온 북한 출신 여자들 말씀인데요.

이상훈이 말을 이었다.

대부분이 군대에서 차출된 여자들인 것 같습니다. 이금철과 북한 당국은 여자 전투 요원을 보낸 겁니다.

「‥‥‥‥」

지금 각 사업장에 흩어져 있는 그 여자들 감시를 철저히 하셔야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인규한테 관리를 맡겼는데‥‥ 그 여자가 적임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자 이상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하지만 조심해야 될 거요. 이금철의 명령 한마디에 뒤에서 치고 나올 년들이니까.

 

안인석이 들어선 곳은 공원 끝 쪽에 있는 조그만 찻집이었다. 오사카성 옆의 공원에는 아직 2월 초순의 차가운 날씨와 평일의 오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찻집에도 손님은 한 사람뿐이었는데 오성전자의 오사카 지사원인 백용근 과장이다.

오랜만입니다, 안형.

백용근은 30대 중반으로 당당한 체격에 호남이다. 이번에는 열흘 만에 만나는 것이니 그가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차를 주문해서 뜨거운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나자 백용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형, 무슨 일입니까?

안인석은 이미 그에게 그 전에 근대전자의 중요한 자료는 대부분 빼내서 넘겨주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따위 도둑질은 하지 않을 작정이니까 그렇게 아시오.

안인석의 말에 백용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안형, 갑자기 무슨‥‥‥」

나는 근대그룹에 대한 원한은 없어요. 그건 당신들이 잘 알 겁니다. 그리고 당신들에 대한 인연이나 의무감은 말할 것도 없고‥‥ 돈이라면 당신네 어느 누구보다도 많습니다.

김상철에 대한 감정 때문에 당신들과 인연을 맺은 것인데 요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아, 내 인생에.

잠깐만 안형.

백용근이 부드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면 우리한테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시면 좋겠는데.

안인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들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겠지만 내 가정은 파탄이야. 마누라가 김상철을 찾아 근대리아에까지 다녀온 상황이란 말이오.

「‥‥‥‥」

죽은 줄 알았던 그놈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신을 못 차린 거지,

「‥‥‥‥」

내가 오사카로 떨려나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게 되었을 거요, 그런데도 나는 당신한테 지사 정보나 빼돌리고 있어야 한단 말이요?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이요?

상기된 얼굴로 안인석이 말을 이었다.

김상철이와 관련된 일을 돕도록 해주시오. 본래 난 그러려고 당신들과 제휴했던 것이니까. 난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말해주시오.

박미정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밤 10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숙소에 일찍 돌아와 있던 안인석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한 달이 넘도록 서로 전화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전화하기가 두려웠고 싫기도 했다.

그동안 전화 못 해서 미안해요.

박미정이 이렇게 말하자 그는 가늘게 숨을 내려쉬었다.

아니, 나도, 요즘‥‥‥」

, ‥‥ 아이 지웠어요.

숨을 멈춘 안인석이 잠자코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신이 없어서, 당신을 믿고 살 자신이 ‥‥‥」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억눌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계획이 있을 테니, 말해 봐.

우리, 헤어져요.

그렇군.

동의하시죠?

좋을 대로.

시부모님께는 당신이 말씀드려 주세요. 이쪽은 내가‥‥‥」

그래야겠지. 그런데 ‥‥‥」

안인석이 벽을 쏘아보았다.

김상철이하고는 이야기가 되었어?

널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다는 거야?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때문이라면 내가 당신들 앞에서 사라지겠어.

이봐, 미정이.

그러나 전화가 끊겼으므로 안인석은 전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이런 개 같은 년.

눈을 부릅뜬 안인석이 이를 악물었다

아주 계획적이구만 그래, 이년도.

박미정이 응접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이여사가 머리를 들었다. 며칠 사이에 그녀의 얼굴도 박미정만큼이나 초췌해져 있었다.

왜 나왔어? 누워 있지 않고?

난 괜찮아요.

괜찮기도 하겠다.

중절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는 박미정의 말을 듣고는 하마터면 기절해 쓰러질 뻔했던 이여사였다. 성화에 견디다 못한 박미정이 이혼해야 할 이유를 안인석에게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자 그녀는 다시 한번 까무라칠 뻔했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한테는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두 모녀는 눈치만 살피고 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겨울 날씨인데도 유리창 밖의 햇빛이 밝은 날이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박미정이 화장기 없는 얼굴을 들어 이여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걱정만 시켜드려서 미안해요.

이여사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머리를 돌렸다

내가 오사카에 갔을 땐 그 사람한테 기대하는 것이 조금은 있었는데 ‥‥‥」

가서 변했단 말이냐?

「‥‥‥」

그래, 이미 끝난 일 같다만 그 얘기나 자세히 듣자. 오사카에서 안 서방이 뭐라고 하던?

헤어지자고 그래? 여자 생겼다고?

아니, 그냥 그런 비슷한‥‥‥」

못된 놈 같으니.

반대의 상황이더라도 어머니는 이쪽 편이 되었을 것이다. 박미정이 소리죽여 숨을 내려쉬었다.

어머니, , 은희 언니한테 가 있겠어요.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

파리에 말이냐?

깜짝 놀란 이여사가 머리를 저었다.

안 돼, 내가 네 아버지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안 된다.

언니한테 가 있으면 아버지도 걱정하시지 않아요.

그래도 안 돼, 너는.

박은희는 파리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는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박미정의 사촌 언니였다. 결혼하기 전의 일이지만 그녀는 몇 번이나 박미정을 초청했었던 것이다.

엄마, 나 갈 테야.

박미정이 이여사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도와줘요, 엄마. 이곳에서는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

어느덧 박미정의 얼굴로 눈물이 가득 흘러내렸다.

그곳에서 얼마쯤 지나고 나면 나아질 거예요, 엄마. 엄마는 날 보려면 언제든지 파리로 올 수도 있고.

엄마, 날 도와줘, 이곳을 떠나게 해줘.

 

최선호 전무는 서울발 오사카행의 대한항공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는 파랗게 개인 동해 상공을 나는 중이었고 그의 옆자리에 상체를 꼿꼿이 세워 앓아 있는 사람은 이재환 과장이다.

근대리아의 작년 매출액이 30억 달러였지만 올해에는 150억 달러가 된다. 그야말로 비약적인 성장이야.

최선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제력이 곧 국가의 힘이야.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근대리아는 3년 후에는 500억 달러의 매출액을 갖는 중견 국가가 될 것이다. 강씨 연방이라고 해야 되나?

지하자원이 풍부한데다 주민들의 노동력이 때 묻지 않아서 마치 60년대의 한국과 같고 거기에다 첨단기술을 갖춘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으니까요.

이재환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기후조건 외에는 자본과 기술, 노동력에다 시장까지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안인석의 효용가치는 거의 제로야. 그자가 김상철이 운운하는데 우습다. 이미 레벨이 달라서 연결 고리가 없어.

최선호가 화제를 바꾸었으므로 이재환은 다시 긴장을 했다.

그렇습니다. 더구나 박미정과 갈라서게 되었다면 더욱 끈이 닿지 않습니다.

이제야 악이 받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김상철이처럼 람보 같은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최선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김상철이는 풍파를 일으키는 놈이다. 안인석이를 가볍게 파탄시키는 걸 보면 대단한 위력이야.

그들이 오사카 공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대합실로 나온 그들은 곧장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가서는 택시에 올랐다.

힐튼 호텔로.

운전사에게 말하고 난 최선호가 이재환을 돌아보았다.

예약은 되었겠지?

, 전무님, 제 이름으로 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최선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손을 떼야지. 그놈의 억지 요구에 우리가 무리수를 둘 수 없으니까.

안인석에 대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보도 빼낼 만큼 빼냈고 앞으로 신통한 일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오늘 상담이 끝나고 나서 자네가 만나 통보를 해. 우리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알겠습니다, 전무님.

백과장한테 그만두겠다고 한 건 우리 일이야? 아니면 근대야?

그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양쪽 다일 것 같은데요.

안 됐어. 졸지에 모든 것을 잃다니.

자업자득입니다, 전무님,

그 여행사 사장이라는 여자, 그 여자가 남아 있군, .

 

회전의자에 다리를 꼬고 기대앉아 있던 이유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임신 4개월째였다니 그 여자도 꽤 힘이 들었겠는데, 그렇지 않아?

그랜드 여행사의 사장실 안이다. 넓고 쾌적한 분위기의 방 안은 엷은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녀의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장님. 위험하기도 하고.

그 여자는 지금 친정에 가 있지?

, 짐은 거의 다 옮긴 상태여서 집은 빈집이 되어 있습니다.

20대 후반으로 체격이 건장하고 용모가 미끈한 이 사내는 신명인의 정부였던 오정길이다. 그러나 홍만규가 신명인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 지금 그는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그가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박미정이를 계속 감시 할까요?

아니, 이젠 됐어.

이유미가 머리를 저었다. 박미정에게 김상철이 근대리아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심부름 하는 사내처럼 전화를 한 것도 오정길이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봉투를 집어내더니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것, 500만 원이야. 당분간 카바레 가서 놀 만큼은 될 거야.

고맙습니다, 사장님.

재빠르게 봉투를 집어 가슴 주머니에 넣은 오정길이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시면 열심히‥‥‥」

당신은 쓸모 있는 남자야. 내가 다시 연락을 할 테니까.

허리를 숙인 오정길이 방을 나가자 이유미는 결재서류를 펼쳤다. 여행사는 목표를 초과 달성해가는 상황이었고 앞으로의 전망도 밝다. 인터폰의 벨이 울렸으므로 그녀는 스위치를 켰다. 등 뒤의 대형 유리창이 환한 햇살을 흠뻑 받고 있는 맑고 상쾌한 날씨였다.

사장님, 오사카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여직원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안인석 씨라고 합니다.

이유미는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직통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출장 갔다고 해줘요, 미스 정.

, 사장님, 그런데 어디로 가셨다고.

글쎄, 유럽 쪽이 좋겠네. 한 달쯤 걸릴 것이라고‥‥‥」

그럼 이 분한테만 그렇게 ‥‥‥」

물론이야, 미스 정.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유미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이미 안인석은 티켓팅이 끝난 고객이었다. 그렇게 되면 여행은 그가 하는 것이지 여행사 사장이 꼭 동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힐튼 호텔의 스위트 룸 안이다. 응접실에는 네 사내가 둘씩 마주 보는 위치로 앉아 있었는데 한쪽은 최선호와 이재환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저녁 6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진 선봉지역의 특혜뿐만이 아니오. 앞으로 오성그룹은 우리 공화국 사업에 대해서 최우선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50대 후반쯤의 나이로 깡마른 체격에 온화한 인상의 사내였다. 대체적으로 마른 체격은 날카롭게 보이는 것이 보통인데 그의 웃음 띤 얼굴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북한의 해외 특수사업부 부장인 안철현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기 나진 선봉지역에 대한 우리 공화국의 합의서를 가져왔습니다. 지난번에 합의했던 대로요.

그가 눈짓을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최선호에게 두툼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우리 공화국의 정무원 총리, 해당 각부 부장의 수표가 찍혀 있습니다.

안철현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

총비서 동지께서도 영광스럽게도 저를 직접 불러 격려해 주셨습니다. 오성그룹에 대해서도 대단한 호의를 갖고 계십니다.

이재환에게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인계한 최선호가 따라 웃었다.

영광입니다. 그토록 관심을 가져주시니, 저희 회장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머리를 끄덕인 안철현이 잠자코 시선을 주는 이유는 알았지만 최선호는 모른 척했다. 이윽고 이재환이 머리를 들었다.

전무님, 끝냈습니다.

이상 없다는 말이다. 그러자 최선호가 입을 열었다.

3천만 달러가 열흘 후에 스위스로 입금될 것입니다. 은행 이름과 구좌, 비밀번호는 그때 다시 만나서 전해드리기로 하지요.

, 그렇습니까?

저도 이 서류를 갖고 가서 보고를 해야 되니까요,

이해합니다.

최선호가 찻잔을 들고는 편하게 앉았다.

그런데 근대리아의 사업은 승산이 있겠습니까?

스위스로 보내질 3천만 달러는 거의가 근대리아의 상가 개발 사업에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남의 일이지만 속이 불편해진다. 그러자 안철현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승산이 있다마다요, 오래 가지 않아 승부가 납니다.

솔직히 난 그곳에 투자하시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만에, 최 전무님. 그곳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땅이오. 우리 동포만 해도 벌써 20만이 넘었고 올해 안에는 50만이 될 겁니다.

이제까지 차분했던 그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고 눈빛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급속도로 번영하고 있는 겁니다. 근대리아는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재환과 시선을 마주친 최선호가 헛웃음을 웃었다.

아니, 도대체, 근대리아 번영하고 북한하고 무슨 . 그것은 근대그룹의 번영이고 강씨 가문의 번성입니다, 부장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안철현의 표정이 단호해져 있었다.

그것은 우리 조선 동포의 번영이고 번성이오. 왜냐하면 근대리아는 곧 우리 조선 동포가 지배하게 될 테니까요.

「‥‥‥‥」

솔직히 오성그룹에서 우릴 지원해준 것도 그런 기대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아니, 우리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최선호가 정색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우린 나진 선봉지역의 특혜 대가로 그 돈을 드린 것뿐이지 다른 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실언을 했다고 생각한 듯 안철현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미안합니다. 말이 잘못 나와서‥‥ 어쨌든 지금 근대리아에는 우리 공화국의 일꾼들이 올라가고 있으니까요.

공화국에서 직접 말입니까?

놀란 듯 최선호가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계속될 거요.

근대리아 당국에서 받아준단 말입니까?

당국은 아니지만 타운의 실력자가 받아들이고 있소. 그자가 당국을 설득한 모양이오.

김상철이 말입니까?

잘 아시는군요.

알다마다요. 그자의 족보까지 훤하게 알고 있지요.

최선호와 이재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고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김상철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두실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정보를 조금 드릴까요?

 

박기동이 이번에 데려온 사내는 이태리인으로 도난 경보시스템의 판매 책임자였다. 상담을 마친 그가 김상철의 방을 나왔을 때였다. 아직도 깁스를 한 한쪽 팔을 목에 걸고 있는 송길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보쇼, 박 사장. 잠깐 저쪽으로 갑시다.

아니 난 이 사람하고 같이 호텔로 돌아가서 할 일이‥‥」

이렇게 말하면서 박기동이 이태리인을 눈으로 가리키자 송길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이면 돼요. 그리고 그 친구는 애들 시켜서 태워 보내고.

박기동이 송길수와 함께 들어선 곳은 저택 아래층에 있는 대기실이다. 그들이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이한과 장인규가 머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요?

소파에 앉은 박기동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레고리를 빼고 김상철의 고위급 간부가 모두 모인 셈이었다. 그러자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박 사장, 당신 덕분에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제때에 얻게 되어서 다행이오.

, 그거야 뭐, 당연히 ‥‥‥」

그런데 내가 데리고 있는 여자들 말인데, 당신이 지난번에 북한에서 데려온‥‥」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박기동이 상체를 세웠다.

계약을 어기면 교환이 됩니다. 하자가 있어도 마찬가지요.

여자들 말을 들었고 이금철 쪽의 이야기도 들었어요. 당신 여자들한테 주기로 한 1인당 1,000달러의 계약금에서 수수료 100달러를 떼어 먹었더구만. 그리고 여자들한테서도 다시 수수료를 걷었고.

얼굴이 하얗게 된 박기동을 향해 장인규가 말을 이었다.

결론적으로 당신은 이금철한테 여자 한 명당 900달러씩 주었어. 그런데 그 돈이 어떻게 된지 알아? 북한 당국에서 500달러를 떼고 여자들한테는 400달러씩 나눠줬지, 400달러에서 여자들은 집에 돈을 보내주고 겨우 50달러에서 100달러씩 가지고 온 거야. 거기에서 너는‥‥‥」

장인규가 박기동을 쏘아보았다.

이 뚜쟁이 같은 놈, 넌 당장에 쏘아죽여야 마땅하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한이 허리춤에 찔러 넣고 있던 콜트 45구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총구를 박기동의 이마에 쑤셔 넣었다.

쏴 죽입시다, 당장. 형님도 아무 말씀하지 않으실 거요.

, , 잠깐만, 잠깐만요.

박기동이 두 손을 크게 휘젓지도 못하고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오햅니다. 내가 아니고 여자들이 걷어서 ‥‥‥」

그 순간 송길수의 성한 한쪽 주먹이 날아가 박기동의 볼을 쳤다.

아이고머니!

몸을 비스듬히 굽힌 그의 뒤통수에 다시 총구가 와 닿았다.

누님,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쏴 죽입시다.

아이고머니!

일어나! 일어나서 날 봐.

장인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박기동이 겨우 머리를 들었다.

, 돈을 얼마나 모았어?

, 얼마 안 됩니다. 그저 ‥‥‥」

얼마야?

, 오만 달러 정도.

이런 도둑놈.

다시 주먹을 날리려는 송길수를 저지하면서 장인규가 말을 이었다.

다른 돈은 상관 않겠다. 여자 몫으로 뗀 돈을 한 시간 내로 가져와라. 넌 이미 사장님한테서 수고비로 만 달러나 챙겨 넣었어. 넌 나쁜 놈이야.

, 글쎄 죽여 없애자는데도 ‥‥」

이한이 짜증 난 듯 소리쳤으나 송길수가 박기동을 걷어차 밖으로 내몰자 더 이상 고집하지는 않았다.

 

대아운송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그레고리 파트킨으로 강도단 두목이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대단한 변신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전력은 구소련군 소령으로 그는 행정업무에 밝았고 지휘 통솔력까지 갖추어서 나무랄 데 없는 관리자였다. 더구나 그를 위시한 백여 명의 부하가 모두 새로운 직업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의 주요 업무는 수송계획보다 수송로의 안전에 있었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가끔씩 내리는 눈으로 길이 수없이 끊기고 눈에 묻히거나 구르는 사고가 난다. 그는 주요 수송로의 요소요소에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지만 천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오늘도 그는 헬기를 타고 사고 지점에 도착했다. 근대리아 국경에서 150킬로 지점으로 꽤 가파른 구릉지대였다. 다섯 대의 트럭이 길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고였는데 길이 끊겨 20대가량의 트럭이 발이 묶여 있는 것이다. 헬기에서 내린 그에게 부하가 다가왔다. 이곳에서 10여 킬로 위쪽의 길가 부락에 주재하고 있는 부하였다.

대장, 이번 사고는 도로의 지반이 약해져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레고리를 사고 난 지점으로 서둘러 안내한 부하가 말했다.

여길 보십시오. 멀쩡한 도로가 이 부분만 무너져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구릉을 깎아 만든 도로여서 아래쪽은 10여 미터 깊이의 골짜기였다. 트럭은 구릉의 구비를 돌다가 흙과 함께 굴러떨어져서 아직도 다섯 대의 트럭이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로를 유심히 살펴본 그레고리는 부하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반은 아직 얼어붙어 있어서 단단했다. 그런데 10미터가량의 도로 한쪽이 떨어져 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도로를 폭파해 놓고 그 위를 위장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운전사들의 말을 들어도 멀쩡했던 도로가 허망하게 꺼져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레고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덮인 길을 위장해 놓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돌아온 그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헬기에서 연락을 했었으므로 김상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보고를 받은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어, 사흘 전에는 유리를 싣고 오던 트럭이 뒤집혀서 큰 손해를 보았고 일주일쯤 전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트럭에 불이 났었다.

저도 파벨의 방해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증거가 없으니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폭설 기간 동안 근대리아가 식량난을 겪게 될 위험한 순간에 제설차를 모조리 부수고 운전사들을 위협해서 도망치게 한 것은 분명히 마피아 소행이었다. 그레고리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루진스키를 만나 따지겠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지요.

증거가 없으니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파벨이 운송사업에 대단한 미련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파리야킨의 코쟈크 마피아가 극동지역에서 기반을 굳힌 이유는 운송 수단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파벨이 비약적으로 성장해가는 근대리아의 운송업에 미련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파벨하고 협상을 해야 돼.

저택으로 돌아온 김상철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장인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운의 업체들을 관리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자주 저택에 들렸는데 이인숙과도 친해진 것이 그 원인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이제 이인숙을 언니라 부르고 있다. 김상철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박기동을 꼭 데리고 있어야 합니까?

? 돈을 게워내게 했지 않아? 또 다른 사건이 있어?

병균 같은 놈이오. 남조선의 썩은 습관을 하나도 빼지 않고 갖추고 있는 놈이란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놈이야.

그러면서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자도 역시 맹렬하게 살고 있는 중이야. 난 그자가 왠지 밉지가 않아,

오늘 하마터면 그놈을 죽일 뻔했어요. 그런 철면피한 행동을 한 놈과 같이 지낼 수는 없습니다.

장인규가 맑은 눈을 치켜떴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놈입니다. 그런 놈을 용서해준다면 부하들의 기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이제는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맡겼지 않아? 적당히 혼을 내주라고 말이야. 그놈은 감시받고 있어서 큰일은 못 해.

언니한테 치근덕거리는 것도 내버려 둘까요?

그러자 김상철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언니라니?

이인숙 씨 말예요.

한국의 마누라하고는 이혼했으니 같이 살자고 졸라대는 모양입니다.

「‥‥‥‥」

이쪽저쪽 그놈이 발을 디딘 곳은 문제가 생기지 않는 곳이 없어요. 언니는 어쩔 줄 몰라 나한테 상의를 해 왔습니다.

박기동이 응접실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약속한 대로 여자들한테 돌려줄 달러를 가방에 싸들고 돌아왔던 그는 곧장 김상철에게 불려간 것이다. 이한에게 안내되어 응접실에 들어선 그는 이미 주눅이 잔뜩 들어 있었다. 시선을 올리지도 못하고 앞자리에 앉은 그의 몸은 뻣뻣해진 상태였다.

당신, 근대리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김상철이 대뜸 물었다.

이곳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자. 솔직히 말해. 꾸며 말하면 끝장인 줄 알고.

그러자 박기동이 머리를 들었다. 한쪽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한테는 기회의 땅입니다. 사방에 돈이 보이는 . , 한밑천 금방 잡을 수 있는 곳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더듬대며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신이 보는 근대리아의 미래는?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있습니다, 사장님.

말해라.

박기동의 뒤쪽에 서 있던 이한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박기동이 입을 열었다.

예측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북한이, 중국이, 또는 러시아가 장악할지도 모르는‥‥ 모두 제각기 기반들을 굳혀가고 있어서. 한국의 근대리아 정부는 언제 전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조직은 어떤가?

박기동이 머리를 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듯 턱까지 치켜들고 있다.

주민을 바탕으로 하는 세력이 아니어서 기반이 약합니다. 오직 경비대와 행정부의 지원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지금은 막강한 세력으로 보일지 몰라도 상황이 다급해졌을 때는‥‥‥」

계속해.

근대리아 정부와 같이 넘어갈 것같이 보였습니다.

당신은 지난번에 조선족을 동화시켜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

, 근대리아에 이주한 조선족이나 북한계가 근대리아 식의 생활에 익숙해지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의 조직력이 강합니다. 그들은 정부 차원에서 이곳을 공략하고 있는 반면 근대리아 행정부는 한국 정부의 간섭을 배척하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오직 안기부의 협력으로 경비대가 운영되고 있으므로 주민 장악력이 없습니다. 군림하고만 있을 뿐이지요.

김상철이 머리를 들어 이한을 바라보았다.

박 사장과 함께 여자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오너라. 사과도 시키고.

, 형님.

박기동의 눈에서 생기가 났다. 그러나 아직도 조심스런 표정으로 김상철과 장인규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나가봐요. 그리고 참‥‥‥」

마악 일어서려던 박기동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한국에 있는 가족들 말인데, 내가 사람을 시켜 이곳으로 불러올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 아닙니다. 아직.

박기동이 한 손을 올렸다가 금방 내렸다.

제가, 아직 ‥‥ 조금 나중에, 다시 ‥‥‥」

이한과 박기동이 방을 나가자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제법 솔직하게 말한 것 같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그냥 보내기엔.

장인규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저놈은 다른 쪽에 잡혀 총을 들이대면 이쪽 사정을 술술 불 거예요, 지금처럼.

머리를 올린 그녀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죠?

알아서 처리해.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보고할 것도 없다.

 

박 형, 한 잔 듭시다.

술잔을 든 찬드라가 박기동을 향해 말했다.

, 오늘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거요? 술도 안 들고.

아니, 그런 건 없습니다.

박기동이 술잔을 들어 한숨에 위스키를 삼켰다.

나파스 클럽의 특실이어서 그들은 소음이 전혀 없는 방 안에 앉아 각각 러시아계 여자들을 옆에 앉혀놓고 술을 마시는 중이다. 찬드라가 박기동의 빈 잔에 발렌타인 17년을 따랐다. 그는 싱가포르 전자회사 중역으로 근대리아에 시장조사차 나와 있는 사람이다.

내가 술 산다고 부담 느끼실 것 없소. 난 술친구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찬드라가 얼굴을 펴며 웃었다. 말끔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낀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박기동에게 무슨 부탁을 해온 적이 없다. 호텔에 묵은 지 보름 가깝게 되어서 서너 번씩이나 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장의 상황 정도나 물어볼 뿐이었다.

싱가포르에 올 기회가 있으면 날 찾아주시오. 내가 근사한 곳을 안내해 드릴 테니까.

찬드라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그의 유창한 영어에는 영국식 발음이 약간 섞여 있었다.

이제 근대리아도 슬슬 관광 사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찬드라가 묻자 박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근대시의 상가와 유흥업소 공사가 끝나는 대로 시작될 겁니다. 아마 내년쯤이면 관광객이 들어올 거요.

동계올림픽으로는 그만인 조건이지. 우리 같은 남국 사람들이 겨울 휴가를 보내는 장소로 개발시켜야 해요,

술잔을 내려놓은 찬드라가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박형, 난 전자제품 판매보다 관광 사업에 관심이 있어요. 가능하면 근대시에 호텔이나 빠징코 업체를 차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근대리아 행정부에 신청을 하시는 것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정색을 한 박기동이 말했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대로 그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투자가였던 것이다.

서둘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분위기를 보니까 근대 쪽과 북한, 러시아, 삼합회에다 야쿠자까지 명함을 내밀고 있던데 ‥‥ 나는 슬슬 움직일 작정이오.

찬드라가 여유 있게 웃었다.

분위기도 보고, 장소나 시설들을 보고 나서 시작해도 늦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요.

그러고 나서 어떤 조직의 우산 밑에 들어갈 것인가를 먼저 정해야겠지. 그것이 이곳의 생존 법칙인 것 같으니까.

찬드라를 바라보던 박기동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찬드라와 같은 군소 투자가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다.

찬드라 씨, 그렇다면 내가 김상철 씨를 소개시켜 드리지요. 제일 안전한 우산인데다 조건도 좋을 겁니다. 어때요? 만나보지 않으시겠소?

천천히.

찬드라가 가볍게 손을 저으며 웃었다.

내가 뭘 부탁드리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소? 그리고 서둘 것 없습니다, 박형.

내가 뭘 바라고 이러는 것이 아니오.

박기동이 정색을 했다.

가장 장래성이 큰 조직이 김상철의 조직이오. 그리고 인물도 그렇소. 그 사람은 도량이 크고 심지가 깊습니다. 또 사람을 아낄 줄도 알고, 한번 믿으면 어지간한 실수는 눈감아 준단 말이오.

그는 잔에 든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밑에 있는 똘마니들은 좀 다르지만 말이오,

 

송길수는 천성이 무뚝뚝한 성격인데다 대가 굵고 큰 키의 거한이어서 거친 분위기의 사내였다. 유지노사할린스크의 조선족 경찰이었다가 상관을 살해한 그는 거지 신세가 되어 근대리아까지 도망쳐 왔다. 생에 대한 의지는 있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막막한 시점에서 만난 것이 김상철이다. 그때부터 그는 김상철의 오른팔이 되어 타운을 개척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했으니 기업으로 말하면 창업 공신이었다. 그는 이제 타운의 사업장들을 장인규에게 인계하고 근대시에 건설될 거대한 사업장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생의 의욕이 넘치는 나날이다. 현재 나이 28, 아직 독신으로 주거지는 김상철의 저택 1층에 있었다.

식사하세요.

방에 들어선 현채옥이 말하자 송길수는 머리를 들었다. 오늘 할 일을 꼼꼼히 적어두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 사장님은 내려오실 건가?

식당이 아래층에 있었으므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김상철과 같이 식사를 한다.

아닙니다. 사장님은 이 선생님과 일찍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그건 모릅니다.

현채옥은 지난번에 북한에서 들어온 여자 일꾼 중의 하나로 송길수의 당번이다. 클럽의 로켓포 폭파사건으로 송길수는 등과 팔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고 김상철의 지시로 현채옥은 그의 시중을 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식사 안 하겠어. 밥맛도 없고.

송길수가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리자 현채옥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식사 이쪽으로 가져올까요? 조금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 신경 쓸 것 없어.

그 말에 머리를 든 송길수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현채옥은 키가 늘씬한 미인이었다. 맑고 또렷한 눈에 콧날이 곧았고 윤기 있는 입술이 계란형의 얼굴과 빈틈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놔둬, 나가서 근배한테 10분 후에 공사장으로 출발한다고 전해.

그가 던지듯 말하자 현채옥은 잠자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송길수는 볼펜을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이는 스물다섯, 열차 기관사인 현아무개의 장녀로 함흥 교원대학을 졸업한 후에 3년간 인민학교 교사를 지냈다는 것이 그녀의 이력이었다.

시계를 올려다본 송길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테이블로 다가가 서랍 속에서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현채옥과 함께 들어온 백여 명의 여자가 북한군에서 차출된 정예 요원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리볼버를 끼워 넣으며 방을 나섰다. 저년은 방심하면 목을 떼어갈 년이었다.

식당으로 들어선 현채옥은 안옥에 서 있는 이인숙에게로 다가갔다.

언니, 송선생도 식사 안 하신답니다.

오늘은 장사가 안 되는군.

스웨터에 바지 차림의 이인숙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식당은 20평 정도의 크기로 직사각형의 식탁이 네 개 놓여져 있었으나 두 곳에서만 사내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방 책임자인 사내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지시하고 난 이인숙이 현채옥을 손짓해 불렀다.

네가 아침 먹고 타운의 장 사장한테 다녀와야겠다. 가면 술하고 고기를 줄 테니 받아와,

, 언니.

현채옥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일곱 명의 여자는 모두 이인숙의 통제를 받는다. 그리고 남자들도 이인숙이 정한 집안 규율에 따라야만 했다. 이제까지 타운을 두 번밖에 나가보지 못한 현채옥이다. 이인숙은 현채옥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이리 와 앉아.

그들은 빈 식탁의 끝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송길수가 나온 모양으로 그의 부하들이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잠시 어수선해졌던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제 주방 쪽에 두어 명의 사내가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 내 남편이 누구였는지 아니?

낮은 목소리로 이인숙이 묻자 현채옥의 눈이 동그레졌다. 대답을 기다리듯 잠자코 현채옥을 바라보던 이인숙이 다시 입을 뗐다.

정보국 해외공작반 대위였다. 작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돌아가셨어.

「‥‥‥‥」

알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잘 새겨들어라. 난 강계의 온산 시범소에서 살아나온 사람이야, 이곳에서 내 자식과 함께 새 생활을 찾았고 아주 만족하고 있어.

이인숙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주의를 주겠는데 공화국 사람들과의 접촉은 안 된다. 만일 이 규칙을 어겼을 때는 돌려 보내진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요, 언니.

난 네가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래.

자리에서 일어선 이인숙이 식당을 나가자 주방 안에서 여자 한 명이 식당으로 나왔다.

무슨 얘기야?

그녀에게 다가온 여자는 북한에서 함께 나온 동료였다.

타운으로 심부름을 가라는 얘기‥‥ 장 사장한테 가서 술하고 고기를 받아오라는 거야.

그것뿐이야?

고되더라도 참으라는 잔소리,

그것뿐이야.

 

 

 

2. 하바로프스크의 담판

3월 중순이다. 연일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되어서 남산 주위에 만발했던 개나리와 진달래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진득이는 습기는 싫었지만 비바람 속에 상큼한 꽃냄새가 맡아졌으므로 강미현은 창문을 반쯤 열고 차를 몰았다. 옆 좌석에 앉은 것은 친구 최희은이다.

그렇다면 네 계획은 가을이냐? 가을에 식을 올리고 근대리아로 들어갈 거야?

던지듯 그녀가 묻자 강미현이 윈도우 브러시를 빠르게 틀었다. 빗발이 세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때쯤 근대시의 상가 건설도 윤곽이 잡힐 테니까.

강미현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기반도 굳어질 것이고.

말하자면 그때까지 그 사람이 무사해야 한단 말인데, 그렇지?

무슨 소리야, 재수 없게.

말이야 바른말이지, 네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생각도 그러실걸?

「‥‥‥‥」

혹시 네 생각도 그런 것 아냐?

그러자 차의 속력을 줄인 강미현이 매섭게 눈을 흘겼다.

내가 그런 계산이 있었다면 마피아 두목한테까지 찾아갔겠어?

맹목이었지.

최희은은 냉담했다. 강미현의 시선을 옆얼굴로 끄떡없이 받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때가 있는 법이야.

승용차는 남산 중턱에 세워진 2층 벽돌집 앞에서 멈춰 섰다. 강미현이 자주 가는 양식집이다. 점심때였지만 비가 오기 때문인지 한산한 식당에 자리 잡고 앉은 그들은 식사를 시켰다.

운송회사가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가 봐, 마피아한테.

수프를 떠먹으면서 강미현이 말했다.

근대리아 내부는 제법 평온한 상태라는데, 아마 근대시에 진출하려고 각 조직들이 자중하고 있는가 봐,

재미없어, 그쪽 이야기.

최희은이 말을 잘랐다.

, 김상철 씨 애인이었던 여자, 너하고 내가 약혼식까지 훔쳐보았던 박 무어라는 여자는 이혼하고 파리로 갔다구?

그래.

김상철 씨가 알아?

모를 거야, 아마,

그 여자한테 네가 사실대로 말해준 것이 그렇게 된 동기가 되었을 텐데, 그렇지?

수프 그릇을 밀어놓은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겠지.

불안하지 않니?

전혀,

김상철 씨가 그 여자를 완전히 지웠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렇다면 페어플레이 해보자는 거야, 뭐야?

얘는 무슨‥‥‥」

스테이크 접시를 받아들며 강미현이 웃었다.

그 여자는 무대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면 돼. 안 됐기는 하지만.

「‥‥‥‥」

떠났다는 것은 그 의미밖에 없어.

그 여자야 그렇지만 김상철 씨는? 만일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말이야. 어떻게 나오리라고 생각했니?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은 강미현이 한참 동안 씹은 다음 삼켰다.

내버려 둘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

그녀는 정색한 얼굴로 최희은을 바라보았다.

생각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난 그것까지 욕심부리지 않아.

,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가 보다.

최희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네가 그런 양보를 서슴없이 하다니.

 

화장을 고치고 난 이유미가 몸을 돌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20대 초반으로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알몸인 상체가 우람한 사내였다. 이유미는 핸드백을 열고 봉투 하나를 꺼내 침대 귀퉁이에 내려놓았다.

다음에 내가 연락할게,

고맙습니다, 누님.

방을 나온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호텔의 지하 차고로 내려갔다. 성만 알 뿐 이름도 모르는 저 애송이와는 두 번 만났는데 오늘로 거래를 끝낼 작정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건달이었는데 이쪽을 꼬치꼬치 알려고 드는 바람에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벤츠를 몰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3, 사장실에 들어가 앉자 오영준 전무가 따라 들어섰다.

사장님, 예술관광회원 모집이 잘 안 되는데요. 이번 달에도 목표 미달입니다.

테이블 앞에 선 그가 말했다. 40대 후반으로 여행사 업무만 20년인 그는 이유미가 경쟁업체에서 특채한 사내였다.

세계 여행사에서도 같은 상품을 내놓았지만 그쪽도 마찬가지라는군요.

이유미가 소파로 옮겨 앉자 그는 앞자리에 앉았다. 예술관광회원이란 유럽의 이름난 도시를 여행하면서 각 고장의 음악회나 축제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만든 관광상품이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상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있던 상품을 약간 개조했을 뿐이었다.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가격을 내리거나 서비스 품목을 추가시킬 필요는 없어요, 매출을 늘리려다가는 적자만 늘어날 테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오영준이 머리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우리야 자금력이 있으니 손을 뗄 수도 있지만 다른 곳은 그렇게 하기가 힘들지요. 같은 상품으로 가격경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때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수천 개 여행사는 치열한 경쟁이 끝난 후에 즐비한 기소중지자들을 만들어 놓고 정리되었다. 이제는 대형 여행사의 전문상품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새 상품을 개발해 내도 경쟁사는 금방 모방하여 뒤쫓아 온다.

우선 기존상품으로 현상을 유지해 나갑시다.

이유미가 말을 이었다.

서둘 것 없어요. 기존 거래선하고 고객들이나 철저히 관리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오영준이 방을 나가자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이유미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면서 바라본 벽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갑자기 웬일이야?

안인석이 이렇게 물은 것은 이유미가 거의 한 달 만에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이혼한 지 두 달이 되었지만 이유미는 한 달 동안 유럽에 가 있었는데다 다녀와서는 바쁘다면서 딱 한 번 짧은 통화를 했을 뿐이다.

이유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어때? 일 열심히 해?

안인석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셈이지. 그것 확인하려고 전화한 거냐? 걱정이 되어서?

저봐, 또 어린애 같이.

이유미가 나무라듯 말을 이었다.

나도 요즘 죽을 지경이야, 경쟁업체들 때문에.

「‥‥‥‥」

내가 다음 주쯤 거기 들릴게, 별일 없겠지?

별일은 없어.

그때 만나서 이야기해. 그럼.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인석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퇴근한 안인석이 쓰루하시에 있는 조그만 술집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이미 가게 안에는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다.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안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늘은 조금 늦었소, 안형.

그렇게 말하는 사내는 30대 중반쯤의 나이로 용모가 깔끔했다,

우선 식사를 먼저 하실까?

아니, 밥 생각은 없습니다. 술이나‥‥‥」

좋지.

안인석의 잔에 정종을 따르며 사내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금방 호감을 느낄 만큼 흡인력 있는 웃음이었다.

이제 좀 안정이 됩니까?

금방 잔을 비운 안인석의 잔을 채워주며 그가 물었다.

, ‥‥」

시간이 약이지요. 그건 겪어본 사람만 압니다.

그는 재일동포로 오사카에서 꽤 큰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민태식이라는 사내였다. 오성그룹 백용근 과장의 소개로 만난 이후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술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난 며칠 후에 근대리아로 갑니다. 그곳에서 열흘쯤 머물다가 올 예정이오.

술잔을 내려놓은 민태식이 말했다.

아직 땅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벌써 공사를 시작한 구역도 있다는데요.

그럼 공사는 언제쯤 끝납니까?

글쎄, 올해 안에 몇 개 빌딩은 끝나겠지만 아마 공사는 몇 년이 걸릴 겁니다.

민태식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 우리의 미래를 위해 건배합시다.

그와 술잔을 부딪친 안인석은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백용근은 말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만났을 때 민태식은 자신이 야마구치조의 야쿠자 간부라고 제 입으로 털어놓았다. 야쿠자는 곧 근대시에 건물을 짓고 입성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수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호텔과 유흥업소, 백화점을 짓고는 그곳에 아성을 쌓을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큰 경쟁상대는 김상철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김상철과의 관계를 알게 된 그들이 안인석에게 접근해 온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근대그룹 내에서 근대리아 지원자가 늘어나고 있다면서요?

민태식이 묻자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오. 지원자가 폭주한다고 할까, 경공업 분야는 거의 100% 지원을 해서 올해 안에 가족과 함께 이주를 마칠 예정이오.

대단하군, 인원은 얼마나 됩니까?

대강 사원이 3만 명, 가족이 10만 명 정도 해서 13만 명 정도.

허어.

현지 고용 한국인도 3, 4만 명 될 테니까 올해 안에 근대리아로 떠나는 한국인은 20만 명이 될 겁니다.

그 자료를 뽑아주실 수 있겠소? 이주계획이나 고용계획 등 근대리아에 대한 근대 측의 자료 말이오.

기획실에 친구가 있으니 해보지요.

고맙소, 안 선생.

넓은 땅에 경치 좋고 공기 맑은데다 주택이 무료로 공급됩니다. 더구나 물가 싸고 보수는 두 배 정도가 되니 답답한 한국 땅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들이 줄을 설 수밖에요.

당연하지, 하지만 소문보다 더하군. 이주 현상이 ‥‥‥」

다만 내부 치안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하고, 한국 정부가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 걸림돌이오.

나도 들었소.

그들은 다시 잔을 부딪치고 술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 안이다. 소파에 앉은 대통령의 앞쪽으로 국무총리 김재선, 외무장관 오병한, 안기부장 권준규, 비서실장 이태준이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고 안보수석 박정규는 위쪽의 대통령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선이 끝나 대통령이 집무를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 안기부장 권준규를 제외하면 모두가 새 얼굴이다.

대통령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국경을 초월한 경제권 시대이고 이념투쟁이 퇴색한 세상이라지만 우리 한국은 달라. 아직도 휴전선이 있고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나라야.

그의 시선이 외무장관 오병한에게 머물렀다.

러시아는 적극 협력하는 입장이라고 했나?

, 각하.

주미대사 출신인 오병한이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러시아는 서울, 근대시 간의 직항노선을 곧 허용할 방침이고 근대리아 국경의 육로 검문도 곧 폐쇄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안보수석 박정규가 나섰다.

문제는 근대리아 행정 당국이 불투명한 사상으로 주민들을 관리하는 데 있습니다. 현재 조선족 인구가 20만 명에 러시아계 15, 중국계가 20만 명 정도로 대부분이 친북세력입니다. 그런데 근대리아는 이제 직접 북한에서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시선이 안기부장 권준규에게로 옮겨졌다. 근대리아의 사상 관리는 안기부 소관인 것이다. 권준규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근대리아의 상황을 단순한 흑백 논리로 구분하면 안 됩니다. 그곳은 각기 다른 체제로 살아왔던 여러 인종이 뒤섞여 있는 곳이어서 그곳 현실에 맞게 관리해야만 합리다.

그렇다면 북한계에 맞춘단 말입니까? 주민 대부분이 공산당 물이 들어 있는 현실이라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묻는 박정규는 프린스턴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대통령의 선거전 때부터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다가 이번에 안보수석이 되었다. 그는 20여 년간 미국 생활을 해오면서 모교의 교수와 미 국무성 자문관을 지낸 화려한 경력의 사내였다.

근대그룹은 급할지 모르지만 한국의 입장이나 국제관계를 고려해 봐도 급격한 이주나 자금과 산업시설의 이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현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박정규가 열띤 말을 마치고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산업시설이나 근로자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갈 예정인가?

대통령이 묻자 총리가 입을 열었다.

부총리의 보고로는 산업시설 및 자산이 25개에 4천억 원 정도이고 근로자와 가족 이주가 약 10만 명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연구소를 통해 뽑은 자료에는 6천억 원에 20만 명 정도입니다.

박정규가 금테 안경알 속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더구나 근대는 근대리아에 2기의 원자력발전소를 세울 계획으로 이미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권준규가 머리를 들었다.

그것, 어디서 들은 정보요? 미국 대사관에서 그럽디까?

그러자 박정규를 포함한 모두가 대통령의 눈치를 보았으나 권준규는 내쏘듯 말을 이었다.

근대리아는 근대인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운영되어왔습니다. 50년 임차지만 그곳이 곧 자치국이 될 것이라고 모두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대리아는 근대리아 식의 통치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조선족이 북한과 한국계로 나뉘어졌고, 러시아, 중국인들이 뒤섞여 있지만 통치하는 것은 분명히 한국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반을 굳히려면 한국계 이주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 년 안에 모두 이념이나 사상 같은 것들은 잊은 순수한 근대리아인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난 북한이 근대리아로 노동자를 보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것은 북한이 정부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야. 따라서 앞으로는 우리 정부도 나서야 될 것 같은데. , 수십조가 되는 자산과 공력이 허망하게 없어지기 전에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다시 검토를 해보도록. 그동안 근대 쪽에는 움직임을 자제하라고 연락을 하고.

 

그날 오후, 권준규는 강회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낡은 한식 온돌방이었는데 문 앞에 앉은 것은 비서실장 이남호이다.

이것 참, 보류되었다면 야단인데,

권준규의 말이 끝나자 강회장이 뱉은 말이다. 찌푸린 얼굴로 그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집을 팔아버린 사원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 다음 달 출발할 사원과 가족 약 1,500세대는 대부분이 집을 정리한 상태입니다, 회장님.

이거 내 식구들이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그러자 권준규가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정부 관계자들과 회장님이 긴밀한 협조체제를 가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린 만큼 앞으로 ‥‥‥」

관리들이 나서서는 될 일도 안 되는데.

찌푸린 얼굴의 강회장이 여러 번 입맛을 다셨다.

() 대통령 시절에는 각료나 청와대 사람들하고 제법 얼굴을 익혔는데 이건 된통 새 사람들이어서.

박 수석하고 이 실장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특히 박 수석이 ‥‥‥」

그 사람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여기 있는 이 실장도 모르더라니까,

아직도 미 국무성과 연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각하께서도 아시고.

허어.

강회장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 생각이 미국 입장인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권준규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미국은 근대리아가 갑자기 번성하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근대리아에서 캄차카반도만 건너면 바로 코앞이 알래스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캄차카를 건너 알래스카라도 집어삼킬 것으로 보인단 말이요?

충분히 위협이 될 수가 있지요.

우리는 군대도 없어.

원자력발전소를 짓고 첨단 공장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술력과 경제력으로 무장하는 건 금방이지요.

그러자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일본이 미국과 동조하겠군요. 권부장님, 그렇지 않습니까?

권준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작년 말에 미국 국무장관 러셀과 일본 외상 오카와가 하와이에서 만났을 때 논의된 것이 근대리아 문제일 거요. 발표는 주일 미군 문제에 대해서 회담한 것으로 되었지만.

그렇다면 박정규가 그놈들의 끄나풀이로군.

강회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권준규가 머리를 저었다

박 수석이 그들의 조언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한국 입장에서 봐도 의견은 타당합니다. 근대리아는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간섭을 배제해온데다 산업시설과 자본이 한국에서 빠져나가는 상황이니까요.

잠자코 자신을 바라보는 강회장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더욱이 근대리아가 공산화된다면 북한은 일시에 경제자립은 물론 동북아의 대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지요. 미국과 일본이 우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자 강회장이 혀를 찼다.

현실감각이 없는 공무원들의 탁상공론일 뿐이오. 미국과 일본 극우 세력의 정세분석에 놀아나는 것이야.

권준규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정부와 등을 돌리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거 야단났다.

강회장이 이남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나는 한국 공무원이 제일 무섭다. 이거 어떡하면 좋단 말이냐?

 

베이지색 투피스 차림인 이유미가 커피숍에 들어서자 뭇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저녁 시간이어서 커피숍에는 손님이 많았으므로 카운터 앞에 멈춰선 그녀는 안쪽을 둘러보았다. 벽 쪽에 앉은 안인석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서는 농도 짙은 여자의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몇 년을 같이 지냈지만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알 수 없는 여자가 이유미였다. 그녀가 이혼한 것을 안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며칠 전 오사카 도착예정일을 알려주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이혼했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기다렸지?

앞자리에 앉으며 이유미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웃었다. 안인석은 문득 저 웃음으로 몇 명의 남자가 파탄을 맞았는지 궁금해졌다.

어때? 식사할 거야? 아니면 술? 그것도 마땅찮으면 방으로 갈까?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마친 그들이 방에 들어선 것은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으면서 이유미가 물었다.

김상철이 소식 들었어?

소파에 앉은 안인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식 말이야?

근대리아에서 그 사람이 제일 실력자라던데 . 운송회사도 운영하고.

냉장고에서 얼음통을 꺼낸 이유미가 위스키병과 함께 탁자 위에 가져다 놓았다.

운송회사를 독점 운영한다는 거야. 알고 있지?

하긴 회장 손녀와 결혼할 사이니까 근대 쪽에서 그렇게 배려해줬겠지.

안인석이 유리컵에 위스키를 반쯤 따르더니 크게 한 모금을 삼켰다.

글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 두고 봐야겠지.

하긴 그쪽은 전쟁터나 마찬가지라고 하던데, 마피아에다 삼합회, 거기에다 북한 쪽 조직까지.

「‥‥‥‥」

근대에 같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와서는 인생이 너무 판이하게 달라졌지? 인석 씨하고 그 사람 말이야.

술맛 떨어지는 소리 그만해.

그러자 위스키를 한 모금 삼킨 이유미가 정색을 했다

이젠 잊어야 돼. 인석 씨는 아직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겠지만 다 끝난 일이야. 인석 씨 생각해서 그래. 괜히 마음 상하고 몸 버릴 필요 없어.

내가 그놈 상대가 못 된단 말이구나?

술잔을 내려놓은 안인석이 그녀를 살펴보았다.

, 날 경멸하고 있지?

저 봐,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왜 인석 씨를 경멸해?

넌 날 우습게 보았어, 처음부터.

날 가지고 놀았다구, 날 바보 취급하면서.

마음대로 생각해.

이유미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한테 책임 전가하는 버릇,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어, 인석 씨는 자신의 불행을 김상철, 박미정의 탓으로 돌리다가 이제는 나에게 돌려? 나까지 잃고 싶은 거야?

넌 나한테 돌아온 것이 아니야. 그저 방관자일 뿐이지.

「‥‥‥‥」

넌 조금 즐겼을 거야, 내 불행을. 특히 박미정과 나 사이의 문제를. 너는 그런 여자야. 그쯤은 알아.

오늘, 이상하네.

이유미가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나는 보고 싶어서, 아니 조금은 위로해주려고 오사카에 들린 것인데 …」

넌 내가 가장 절실하게 널 필요로 할 때마다 빠져나갔어. 이번에도 말이야.

「‥‥‥‥」

한 달 동안 유럽 출장을 갔다는 소리를 듣고 생각해보았지. 일주일에 한 번씩 오던 너였는데 말이야.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 , 유미가 이젠 나한테 일이 끝났구나 하고.

나하고 박미정이의 판이 깨지니까 네 관심이 사라져버린 거야, 그렇지 않아?

다시 시계를 내려다본 이유미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 내일 아침에 일찍 비행기 타려면 쉬어야 해.

머리를 끄덕인 안인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같이 있을 생각은 없어.

잘 지내, 인석 씨 . 몸 관리 잘하고.

그러자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아 정말 쓸데없는‥‥」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 호텔 현관에 벤츠 네 대가 동시에 멈춰 선 것은 오후 55분 전이었다. 차에서 내린 사내들은 모두 단정한 용모의 40대 사내를 옹위하고는 무리를 지어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극동지역 마피아 보스인 파벨의 행차였다. 조세프 파벨은 이제 수십 개에 달하는 국영기업체의 고문이자 수백 개 외국인 회사의 후견인이었고 직접 장악하고 있는 회사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몰려간 곳은 호텔 최상층에 있는 스카이 라운지였다.

부하들을 복도에 남겨둔 그가 하바로프스크 책임자인 니콜라이 마르첸코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안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상철과 그레고리가 일어섰다. 텅 비어 있는 라운지에 손님이라고는 그들 네 사람뿐이다.

,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

웃음 띤 얼굴로 파벨이 손을 내밀었다.

정말 뜻밖이야, 갑자기 하바로프스크에 오다니 ‥‥‥」

실은 계획이 늦춰진 겁니다. 조금 더 빨리 올 수도 있었는데 ……」

인사를 마친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리야킨 시대에 그레고리는 강도단 두목으로 그들과 몇 번 거래가 있었으므로 안면이 있다. 파벨이 그레고리를 향해 말했다.

그레고리, 이제 근대리아에 정착을 한 기분이 어떻소? 듣자 하니 당신 명성이 자자하던데.

당신들 덕분에 정신없이 바쁩니다, 파벨 씨.

우리들 덕분이라고?

웃음 띤 얼굴로 파벨이 마르첸코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레고리 씨를 바쁘게 했나?

그러나 마르첸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레고리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파벨 씨, 일주일 전에 하바로프스크의 우리 차량기지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트럭이 여러 대 불탔고 화물도 적지 않게 소실되었는데 ‥‥‥」

나도 들었어, . 유감이야.

어느 사이에 정색을 한 파벨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것과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그 일을 당신 부하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어요.

그런가?

파벨이 종업원이 가져온 보드카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마르첸코가 병을 건네받더니 자신의 잔을 채운다.

그것이 우리가 한 짓이란 말이지?

혼잣말처럼 말한 파벨이 술잔에 든 술을 단숨에 삼켰다.

만나자마자 화제를 본론으로 돌리는군. 이쪽에 여유도 주지 않고.

그 일 때문에 협상하려고 온 것이니까요.

그러자 마르첸코가 나섰다.

우리가 차량기지를 방화했다는 거야?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고 이래?

가만, 나서지 마라, 마르첸코.

파벨이 김상철에게로 몸을 돌렸다.

, 그걸 항의하러 왔나?

협상하러 온 겁니다. 당신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어떻게 말인가?

내 지분의 10%를 드리지요.

자네 지분은 50%인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나는 전체의 5%를 갖게 되는군.

내버려 두는 조건으로 5%면 대단한 금액이오. 이미 근대는 당신들한테 보호세를 내는 중이고.

운송사업은 그야말로 돈을 줍는 사업이지. 더구나 근대리아의 ‥‥‥」

파벨이 김상철의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난 하바로프스크에 본부를 둔 운송회사로 근대리아의 운송업을 장악하려고 했는데 자네가 선수를 쳤어,

그건 파벨 씨, 당신이 너무 욕심을 부린 겁니다. 근대리아에서 허락하지 않았을 거요.

근대리아와 내가 5050으로 계약을 맺을 수는 있었지 않았을까?

그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운송업은 근대리아가 직접 장악하겠다는 원칙이니까.

테러를 당해낼 수는 없지, 내 지시 한마디면 근대리아의 육로 수송은 끊길 테니까. 공로도 마찬가지야. 러시아 정부가 개입해도 난 끄덕하지 않아.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때는. 그렇게 되면 파벨 씨, 당신도 위험해집니다.

어쨌든 난 그 조건을 거부하겠네.

술잔을 내려놓은 파벨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네 지분의 반, 그러니까 25%의 지분을 내놓는다면 몰라도. 그래도 전체 지분의 4분의 1밖에 안 된단 말이야.

김상철이 옆자리에 앉은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라운지는 조용했다. 제복을 갖춰 입은 종업원 서너 명이 안쪽 주방 앞에 나란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파벨 씨, 4분의 1이나 가져간다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자네하고 나하고 똑같은 지분이야. 그것이 아주 합리적인 것 같은데.

파벨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것도 자네와 나의 우정을 생각해서 내가 양보한 것이야, .

파벨과 헤어져 숙소로 정해놓은 콤소몰 광장 근처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저택은 근대그룹의 하바로프스크 지사 겸 근대리아의 연락사무소 역할도 한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그레고리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내일 계약을 하실 겁니까?

파벨과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25%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강경한 자세였던 것이다. 근대리아의 물자는 모두가 러시아 땅을 통과하여 수송되므로 마피아의 손길을 피할 수가 없다. 소파에 앉은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어, 받아들여야지. 이런 식으로 수송단이 테러를 당할 수만은 없다.

그렇더라도 25%나 가져가다니 그 강도 같은 놈을‥‥」

자신이 강도 출신임을 상기한 그레고리가 말을 멈추고는 입맛을 다셨다.

연말 결산을 하게 될 테니까 시간은 있어.

그렇다면 올해 안에 무슨 변수가 생긴단 말입니까?

만들어야지. 놈한테 4분의 1의 수익을 거저 줄 수는 없어.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겠군,

혼잣말처럼 그레고리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마피아하고도 한 번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벅찬 상대이기는 하지만 말이오.

이제 마피아와의 밀월은 끝난 것이다. 근대리아의 임차조약 체결 당시에 보호세 문제로 전대의 보스 파리야킨을 남북 연합으로 제거한 후부터 시작된 밀월은 대아운송의 설립과 동시에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그림 보스는 파벨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받아들일 생각이셨군요.

그레고리의 말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시간을 벌 생각이었어. 파벨한테 기대를 갖고 온 것은 아니야.

더러운 마피아 놈들, 그놈들은 러시아의 암세포요. 구소련 시대만 같았어도 그놈들을 몰살시킬 수가 있었는데 빌어먹을 개방이 뭔지‥‥」

 

새벽 2시였다. 저택의 불이 대부분 꺼졌고 로비와 사무실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불빛이 넓은 정원 한쪽으로 흘러 나왔을 뿐 주위는 짙은 어둠과 정적에 덮여 있었다. 먼 쪽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잠깐 정적을 깼다가 다시 잠잠해졌을 때 저택의 왼쪽 담장 윗부분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검은 물체가 소리 없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그것은 어느 사이에 50미터쯤 떨어진 저택의 왼쪽 벽에 붙어서 있었다.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 검은 면 두건으로 얼굴을 덮어써서 두 눈만 드러나 있었고 몸에 걸친 옷도 짙은 색이다. 그는 벽에서 미끄러지듯 옆쪽으로 옮겨가더니 한 길이나 위에 나 있는 유리 창문으로 기어 올라갔다. 잠시 후 유리 창문은 소리 없이 열렸고 사내는 연체동물처럼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안은 주방이었다. 사내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온몸을 굳히고 서 있었다. 그리고 곧 문으로 다가가 허리춤에 끼워져 있던 길쭉한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뽑아 들었다. 저택 안에서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권총을 세워든 사내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주방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택 아래층은 사무실과 직원들의 숙소, 회의실, 식당 등이 배치된 구조로 2백 평이 넘는 면적이었다. 식당의 문을 10센티미터쯤 연 사내는 눈만 내놓고 바깥쪽 복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복도 끝에 서 있는 경비원의 모습이 보였다. 반대쪽의 로비 안에도 두 사내가 앉아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려면 복도 끝의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사내는 잠시 망설이는 듯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2층 계단 정면에 있는 방 안에서 이한은 부하들과 모여앉아 있었다. 김상철이 파벨을 만나러 하바로프스크에 왔다는 것은 적진에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송길수나 따라온 그레고리까지도 김상철의 하바로프스크 행을 반대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 이한은 50여 명의 대규모 경호원을 이끌고 따라왔는데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은 중무장한 병력이다.

내일 아무르 호텔에서 회담이 끝나면 곧장 헬기장으로 가서 이곳을 떠난다.

이한이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차라리 타운에서 얽혀 사는 것이 편하다.

지금도 그는 파벨이 김상철을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레고리, 송길수, 장인규도 마찬가지였다. 김상철만 제거되면 대아운송은 물론 타운이나 근대시의 사업장들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근대에서 아무리 뒤를 밀어준다고 해도 구심점을 잃은 조직은 사분오열될 것이고 그것이 마피아는 물론 다른 조직들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만 들어가 쉬자, 늦었다.

사내는 계단에서 일단의 사내들이 내려오자 식당 안의 벽에 등을 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의 적막이 깨지고 발자국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 낮은 말소리가 얼마쯤 계속된 다음 다시 복도는 조용해졌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사내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얼굴에 쓴 면두건을 벗어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조금 마른 듯한 얼굴에 짙은 콧수염을 길렀지만 흐린 눈을 감추지 못한 삼합회의 살인청부업자 마파척이다.

벨트 사이에 권총을 찔러 넣은 그는 식당 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그가 복도로 나오자 로비 쪽에 있던 사내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계단 입구에 서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처음에는 동료인 줄로 착각했는지 사내는 우두커니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

단 한 발이었지만 그 소리는 복도에 울려 퍼졌다. 소음기를 끼웠다 해도 모래자루를 몽둥이로 힘껏 내려치는 것 같은 둔탁한 음향이 난다. 눈 깜짝할 사이에 권총을 뽑아 사내의 이마를 맞춘 마파척은 이제 맹렬하게 뛰고 있었다. 계단 앞에 쓰러진 사내를 뛰어넘어 한걸음에 너댓 계단씩을 뛰어오르는 순간, 건물이 떠나갈 듯한 벨소리가 났다. 비상벨이다. 와락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계단을 마악 올랐을 때 이쪽저쪽의 문이 열리면서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파척은 권총을 발사하여 그중 두 명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두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몸을 굴린 그의 앞으로 사내들이 달려왔다. 엎드린 자세로 다시 두 발을 쏜 마파척은 몸을 세우면서 옆쪽의 방문을 상반신을 부딪쳐 열었다.

이쪽이다!

문밖에서 어지러운 고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파척은 단숨에 방을 가로질러 유리창으로 다가가 발을 휘둘러 유리창을 부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서지자 그는 몸을 날려 다이빙을 하듯 밖으로 뛰어내렸다.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다쳤습니다.

이한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집 안의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빠른 놈이었습니다. 사격 솜씨도 뛰어나서 다섯 발을 쏘아 모두 맞췄습니다.

김상철의 방 안이다. 잠옷 차림의 김상철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레고리는 셔츠에 바지만을 걸친 차림이었다. 침입자는 유리창을 깨고 정원으로 달아난 후에 종적을 감춘 것이다.

대단한 놈이다. 단신으로 들어오다니.

김상철이 앞쪽에 서 있는 이한을 바라보았다

집 안의 구조도 잘 알고 있는 놈 같다.

동양계였다니 조선족이 아닐까요?

그레고리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피아에도 조선족 요원이 있고 북한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파벨이 보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물론 목표가 김상철이라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다.

감시 카메라를 들여온 것은 한 달 전이다. 놈이 감시 카메라에 걸린 걸 보면 아직 그것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2층 경비실에는 각층의 요소 여섯 지점에 설치된 카메라가 12대의 스크린에 비춰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근대리아로 들어간다. 내일 협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긴장한 그레고리와 이한을 바라보았다.

부하들에게 서둘러 출발 준비를 시키도록 하고 비행장에도 연락을 해라.

몸을 돌린 그들에게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파벨이 보낸 놈이 아닌 것이 확인될 때까지 협상은 보류다. 이런 상황에서 눌러앉아 있을 순 없어.

파벨이 보고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인 새벽 4시경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수화기를 귀에 댄 그가 천장을 쏘아보았다.

김상철이 비행장으로 가고 있단 말이냐?

, 일행들과 함께 지금 이곳을 떠날 모양입니다.

습격당한 것은 확실해?

, 보스.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입니다. 제가 구급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시트를 걷어찬 파벨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김상철이 공항에 도착을 하면 나하고 통화를 하도록 만들어라, 알았나?

알았습니다, 보스.

수화기를 내려놓은 파벨은 침대 옆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았다. 이제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져 있었다. 부하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보스, 김상철에게 보스가 전화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직접 전했나?

아닙니다, 그쪽 경호원들한테.

이런 병신 같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20분쯤 기다렸을 때 벨이 울렸다. 서둘러 수화기를 들자 귀에 익은 김상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벨 씨, 전화 기다리신다고 해서 ‥‥‥」

, 도대체 무슨 일인가? 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

보고받지 않았습니까? 습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 부하들이 여럿 죽었습니다.

파벨은 그의 목소리가 조금 흥분되어 있다고 느꼈다.

나도 들었는데, 습격자는 누구야? 잡았나?

아직, 하지만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몇 명이 습격해 왔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파벨 씨. 하지만 전문가들 짓이오.

, 자네 설마 우리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기를 바라지만 부하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오, 파벨 씨. 그래서 일단 근대리아에 돌아가려고 합니다.

「‥‥‥‥」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소, 파벨 씨.

파벨은 끊긴 수화기를 한동안 들고 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습격자는 북한에서 보냈을 수도 삼합회의 청부살인업자일 수도 있었다. 김상철은 적이 많은 놈이다. 그를 제거함으로 득을 볼 조직들이 많았고 자신도 그중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입맛을 다신 파벨은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었다. 김상철이 이번 사건을 마피아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충분했다. 자신은 그에게 양쪽의 밀월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회담 석상에서 공공연히 말했던 것이다.

김상철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습격을 받았다는 소문은 금방 근대리아 안에 퍼져나갔다. 타운의 마피아 보스인 그루진스키가 나파스 클럽으로 장인규를 찾아온 것은 김상철이 돌아온 다음 날이다. 그들은 아직도 군데군데 로켓포의 폭발 자국이 보이는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아침 10시였으므로 아직 이른 시간이다.

하바로프스크 사건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오. 보스는 그 일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떠들썩한 목소리로 그가 말하자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의 최태호가 찾아와 그런 말을 했고, 삼합회에서도 사람을 보내 해명을 하더군요. 그렇다면 야쿠자 소행인가?

글쎄,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우린 그따위 방법을 쓰지는 않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호전적인 조직이 당신들이요, 그루진스키 씨. 당신들은 대아운송의 방해 공작을 수십 차례 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거요,

나는 모르는 일이오.

우리가 당하고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루진스키 씨.

장인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하고 김 사장이 파리야킨을 죽이고 파벨을 보스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눈을 둥그렇게 뜬 그루진스키가 무의식중에 빈방을 둘러보았다.

당신하고 김 사장이 파리야킨을 죽이다니?

그렇지, 북한의 이금철도 이곳에 있군요. 우리 셋의 연합작전이었지. 파리야킨이 근대에 너무 욕심을 부려서 그를 제거하기로 했던 거요. 물론 사전에 파벨과도 협의를 했지. 파리야킨이 제거되면 파벨이 보스가 되고 그때에는 근대와의 계약을 유리하게 해주겠다고.

「‥‥‥‥」

파벨이 김 사장이나 나한테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오. 물론 북한의 이금철한테도 마찬가지이고.

당치도 않은 소리. 파리야킨은 중국 마약 조직의 로켓포를 맞아‥‥」

내가 쏘았어. 파벨에게서 도착시간을 연락받고.

그러자 얼굴을 붉힌 그루진스키가 주먹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쳤다.

모함하지 마라! 만약 파벨이 알게 되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말해보시지, 그루진스키. 그땐 당신도 소리 없이 제거될 테니.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부하를 살려두어서 후환을 키울 수는 없을 테니까.

이건 참을 수가 없군.

그루진스키는 눈을 부릅떴으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보스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다니.

당신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파벨한테 보고할 수도 없어. 그러니 흥분해봐야 손해니까 잠자코 듣기만 해.

「‥‥‥‥」

만일 파벨이 이 이상 수송단을 방해한다면 내가 나서서 마피아 간부들한테 그 사실을 폭로할 작정이야. 당신한테는 직접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한데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쉽게 먹히지 않을걸? 보스는 그 정도에 흔들리지 않아.

이제 그루진스키는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 난 듣지 않은 것으로 할 테니까.

그러자 장인규가 웃었다.

난 파벨이나 다른 간부들한테 그 사실을 당신한테 털어놓았다고 말할 작정인데 ‥‥ 실제로도 지금 그랬고.

「‥‥‥‥」

작정이라고 그랬지 꼭 하겠다고는 안 했어, 그루진스키. 다만 당신이 알아둘 일은 우리가 너희들의 그 잘난 보스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거야. 당신 따위는 나한테 대등하게 이야기를 할 신분이 못 된다는 이야기란 말이야.

날 모욕하지 마라. 이 빌어먹을‥‥‥」

파벨한테 이렇게 전해. 장인규가 털어놓겠다고 하더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렇게만 말하면 보스가 알 것이라고 하더라고 말이야.

「‥‥‥‥」

당신이 전하지 않으면 내가 파벨한테 직접 전할 테니 그렇게 알아.

그루진스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에라도 덮쳐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 보스에게 협박을 하다니. 그 결과가 어떤지 내가 두고 보겠다.

 

박 사장님이세요?

다가선 여자가 그렇게 묻자 박기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운 호텔의 커피숍 안이다. 호텔은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어서 커피숍은 언제나 사람들로 들끓었지만 이런 미인은 처음이었다.

, 그렇습니다만.

처음 뵙습니다. , 이유미라고 해요.

여자는 핸드백을 열고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 여기 앉아도 되겠어요?

앉으십시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엷은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주위의 시선이 아직도 이쪽으로 쏠려 있는 것이 박기동은 싫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대부분이 남자인 손님들은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자신에게로 곧장 다가왔을 때 박기동은 가슴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여자가 귀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여자 속에 끼워 넣어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미인인데다 품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명함에서 눈을 뗀 박기동이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꽤 알려진 여행사의 사장인 것이다.

그런데 저한테 무슨 일이십니까?

근대리아에서는 박 사장님을 통해야만 일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박 사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미리 알아두었죠.

저런, 그건 과장된 소문입니다, 난 단지 중개인 역할만 할 뿐으로 실권은 없습니다.

박기동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제법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여행사에서 근대리아를 찾아온 건 처음 같은데요. 더구나 이 사장님 같은 미인이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이유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상철 씨한테 절 소개시켜 주셨으면 해서요.

글쎄요, 그건‥‥」

박기동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손을 들어 커피숍 안을 가리켰다.

이 사람들도 모두 김 사장님과의 면담을 부탁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김 사장님은 특별한 업무가 아니면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먼저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연락을 드리도록 하지요.

김상철 씨한테 이유미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씀만 해주시면 돼요.

그러자 박기동이 의자에서 상체를 뗐다. 정색을 한 얼굴로 그가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그럼 김 사장님을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잘 알아요.

직접 그 사람한테 전화를 할까 하다가 절차를 밟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 그거야‥‥‥」

이제 박기동의 표정에서 여유는 싹 가셨다.

바로 말씀을 올리지요. 호텔에 계시면 오늘 중으로 연락을 해 드리겠습니다.

 

 

 

3. 견제하는 세력들

승용차가 저택의 정문에서 멈추자 경비원이 다가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장님 손님이야.

이유미와 동행한 사내의 말에 경비원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햇살이 밝게 비치는 한낮이었다. 앞쪽에 펼쳐진 거대한 2층 저택을 바라보던 이유미는 소리 죽여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타운은 활력이 넘치는 도시였지만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긴박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축시키고 있는 것은 김상철의 위력이었다. 차는 저택의 현관을 향해 곧장 달려 나갔다. 요소요소에 서 있는 경비원들은 중무장한 차림이었다. 현관 앞에 차가 멈추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이유미 씨입니까?

굵은 목소리로 묻는 사내의 말투는 북한 쪽 억양이다. 머리를 끄덕인 이유미를 본 사내는 따라오라는 듯 앞장을 섰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1층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안내한 사내가 방을 나간 후에 이유미는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20평쯤 될 것 같은 방 안에는 소파와 탁자 등 간단한 집기만 놓여 있을 뿐이다. 벽 한쪽에 만들어 놓은 페치카에서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어서 방 안은 따뜻했다. 유리창 밖으로 통나무로 만든 담장과 아직도 눈에 덮여 있는 먼 쪽의 구릉이 보였다. 문이 열렸으므로 이유미는 긴장했다. 김상철이 들어서고 있었다. 짙은 색 스웨터에 바지 차림으로 건강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우자 김상철이 따라 웃었다.

대단한 여자야, 이유미 씨는. 이곳까지 날 찾아오다니 ‥‥‥」

사업 관계로 왔어요.

여러 가지 인사말을 준비해두었지만 막상 뱉은 것은 준비한 말이 아니다. 그들이 자리에 앉았을 때 아름다운 여자가 쟁반을 들고 방 안에 들어섰다. 잠자코 그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여자가 나가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많이 변한 것 같군, 당신이나 나나.

우선 축하드려요. 이렇게 기반을 굳히신 것.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맙군, 하지만 아직 기반을 굳힌 건 아냐, 그러려면 시간이 걸려.

김상철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사업상으로 무슨 볼일이 있지?

관광상품을 개발하려고 온 거예요.

「‥‥‥‥」

이곳은 얼마든지 큰 시장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겨울 상품으로‥‥‥」

김상철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더구나 아직 여행사들이 발을 들여놓지 않은 곳이기도 하고.

안인석이는 잘 있나?

갑자기 말머리를 바꾼 김상철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당신과 나는 그 친구 때문에 인과관계가 생긴 사이니만치 그 이야기가 먼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잘 있더군요. 하지만‥‥‥」

이유미가 힐끗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혼한 것 아시죠?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신상 이야기는 삼가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

이번에 여기 오기 전에 오사카에서 안인석 씨를 만났어요. 그 사람한테도 여기 온다는 이야기를 못하겠더군요.

잠자코 있던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혼한 이유는 뭐였지?

박미정 씨가 이곳에 왔다 간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지만 그전부터 쌓여왔던 감정이 있었어요.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전부터라니 ‥‥‥」

안인석 씨는 오사카로 전출된 것이 김상철 씨의 배후공작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박미정 씨가 이곳에 왔다 간 것이 결정적으로 ‥‥‥」

무책임한 자식 같으니.

김상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이유미는 긴장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으나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놈은 이제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있겠군.

이유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미정 씨는 아이를 지우고 파리의 언니한테 갔다고 안인석 씨가 그러더군요,

방 안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김상철은 잠자코 벽을 바라보았고 이유미는 옆쪽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장님하고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모양이오.

박기동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이미 위스키 한 병이 거의 비워져 가는 참이어서 그의 눈 주위는 붉어져 있었다.

굉장한 미인이야. 찬드라 씨도 호텔에서 보았지요?

찬드라가 머리를 끄덕였다

섹시합디다. 아직 20대처럼 보이던데‥‥ 여행사 사장이라면 집안에서 회사를 물려받은 모양이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크라우프 바의 밀실 안이었다. 저녁 8시면 타운이 흥청거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바 안에서 일어나는 소음이 희미하게 방 안으로 전해져 왔다.

우리 그룹도 근대시에 투자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나는 곧 근대리아 정부에 투자계획서를 낼 작정이오.

찬드라가 말하자 박기동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신 거요, 찬드라 씨, 내가 김 사장한테 말씀드려서 곧 만나도록 해 드릴 테니까.

고맙소, 박 사장.

박기동의 잔에 술을 채워준 찬드라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그 여행사 사장이라는 여자가 저택으로 숙소를 옮기지 않는 걸 보면 김 사장과 깊은 관계는 아닌 모양이지?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게 무슨 말이요?

김 사장은 곧 회장의 손녀와 결혼할 사람이니까 말이오. 여자를 함부로 집안에 끌어들일 수는 없지.

이해가 가는군. 소문이 날 테니까.

찬드라가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한 뭉치의 달러를 꺼내 박기동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것, 만 달러요. 용돈으로 쓰시고‥‥‥」

아니, 찬드라 씨, 이게 무슨‥‥‥」

눈을 동그랗게 뜬 박기동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돈 바랬습니까? 도로 집어넣으세요.

내가 언제 무슨 부탁을 합디까? 부담 느끼지 말고 쓰시오,

찬드라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몸을 뺐다.

나는 그저 김 사장의 최측근인 박 사장과 알고 지내는 것으로 만 족하고 있단 말이오. 그리고 거래는 내가 직접 김 사장과 합니다.

사업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고 부도까지 맞은 박기동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그는 달러 뭉치를 마지못한 듯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찬드라가 바라고 있는 것은 정보였다. 영업 활동에서 정보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그럼 술이나 더 듭시다.

박기동이 술잔을 들자 찬드라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

 

김상철이 파벨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루진스키가 장인규를 만나고 간 지 닷새 후였다. 그동안 근대리아 국경 근처에서 트럭 두 대의 전복사고가 있었지만 마피아 짓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그루진스키한데서 이야기 들었네, 장인규가 굉장히 흥분하고 있다던데.

파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털어놓겠다고 협박을 했다는군. 그루진스키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내 생각엔 장인규한테 내막을 들은 것 같네.

장인규가 흥분해 있어서요, 파벨 씨. 나도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대단한 여자야. 어떤 땐 여자가 남자보다 더 독하다니까.

파벨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는 있지만 전능은 아니다. 내부에서도 경쟁자가 있고 러시아 군부 내에서도 마피아 숙청론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파벨의 목소리가 다시 송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지난번의 일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야. 그건 믿어주기 바라게.

이미 지난 일이요, 파벨 씨.

나는 자네와 적대관계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우리 서로 뒤를 찌르는 일은 없도록 하지.

난 그래왔습니다, 파벨 씨. 당신도 알 거요.

그렇지, 나도 알고 있어. 어쨌든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다행입니다, 파벨 씨. 이제까지 우리는 잘 해왔지요.

그럼 이만 끊겠네.

파벨은 대아운송에 대한 지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은 인터폰을 눌렀다. 장인규가 그의 방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40분쯤이 지난 후였다. 서둘러 들어서서 앞자리에 앉은 장인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에 파벨한테서 연락이 왔어.

김상철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루진스키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우리와 적대관계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야.

예상했던 대로군요. 대아운송의 계약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없었어.

화장기 없는 얼굴을 든 장인규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우리가 파벨의 확실한 표적이 된 것 같군요.

그것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제 파벨은 수송단의 방해 공작 같은 눈에 띄는 도발은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상철과 장인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거하려고 할 것이었다.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어쨌든 얼마쯤은 시간을 벌었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득이야.

 

근대시의 상가 공사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으므로 각 조직은 근대시에 건설될 사업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복차선의 폭이 100미터나 넘는 도로 주위에 호텔과 카지노, 나이트클럽과 백화점 등 온갖 소비와 유흥업체들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강회장은 그곳을 동양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스가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 세워졌다면 이곳은 눈 덮인 동토의 한복판이다. 그러나 도시의 설계나 기초시설의 준비, 그리고 규모 면에서 근대리아의 새 유흥도시는 라스베이거스보다 월등했다.

이미 첫 투자단의 투자금액만 해도 몇억 달러가 넘는다. 그 돈의 태반이 마피아와 삼합회, 야쿠자에다 북한계 자금이 유입된 것이지만 강회장은 크게 개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끼리의 경쟁이 투자가들의 투자욕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세계 각국의 투자단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장인규가 머리를 들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 지금 타운 호텔에 묵고 있는 여자, 듣자니 여행사 사장이라던데, 어떤 사이지요?

어떤 사이라니? 그저 내 옛 친구의 애인이었던 여자일 뿐이야. 관광상품을 개발하려고 왔다던데.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전에는 몰랐는데 사업가 기질이 뛰어나. 이곳이 곧 유망한 관광지가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어.

아름답더군요.

그런가? 난 자주 봐서 그런지 ‥‥‥」

투돌레프 클럽의 지배인한테는 당신의 친구라고 한 모양인데, 시내를 휘젓고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이 당신 여자인 줄로 알고 있어요. 여자가 그런 분위기를 풍기니까 말예요.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 제 명대로 살기 힘들겠군그래.

불러다가 주의를 주지 그래요? 아니면 이곳에 데려다 놓든지.

철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교활한 것 같기도 해요, 그 여자.

 

공사 현장에서 직원들에게 작업지시를 하고 있던 이대각이 헬기의 폭음에 머리를 들었다. 이제 4월 하순이어서 추위는 가셨지만 아직도 바람 끝이 차가운 날씨였다. 흰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근대 마크가 그려진 헬기 한 대가 옆쪽의 헬기장에 내려앉는 중이었다. 유장석의 전용 헬기였다. 유장석은 지난달에 개편된 인사조치에 따라 근대그룹의 직함을 모두 반납하고 근대리아 행정부의 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이대각은 제2인자로서 부위원장 겸 건설위원이다. 헬기에서 내린 유장석이 이쪽으로 다가왔으므로 이대각도 그에게 다가갔다.

웬일이십니까? 위원장님.

가스 기지에 가는 길에 내렸어.

유장석과 이대각은 수행원들로부터 떨어져 쌓인 철제빔 밑에 와 섰다. 한낮의 햇살이 산처럼 쌓인 빔에 가려 짙은 그늘에 덮인 곳이다.

야단났어, 회장님이 정부와 충돌했어.

유장석이 찌푸린 얼굴로 말하자 이대각이 한 걸음 다가섰다.

사원 가족 이주 문제로 말입니까?

그래, 오늘 아침에 이주를 강행하려다가 정부가 공권력으로 막았어, 공항과 항구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있단 말이야.

이것, 야단났네.

이대각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회장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글쎄, 이실장하고도 연락이 안 돼.

그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한 달 가깝게 정부와 근대그룹은 근대리아의 관리 문제로 치열하게 협상을 벌여왔다. 그러나 정부 측의 완강한 자세에 밀려 협상은 지지부진이었다.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부 측의 근대리아 운영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 강회장은 정부 측의 운영위원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는 근대리아에 운영위원회에서 추천하는 감사단을 비공식으로 파견하여 근대리아의 행정과 정책을 감사하겠다는 입장이었고 근대 측은 안기부에서 파견한 경비단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한 달 동안 사원 가족들은 짐을 쌓아놓고 호텔과 근대그룹 기숙사 등지에서 생활해왔는데 그 숫자가 이제 2만 명 가깝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대각이 혀를 찼다.

모두가 미국과 일본의 조종을 받는 놈들이 하는 짓이요, 그 단순한 놈들이.

그렇더라도 그냥 밀어붙여 버리시다니 . 상대는 정부란 말이야, 한국 정부.

유장석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터놓고 하소연할 사람은 이대각뿐이다.

정부는 여론을 선동해서 우리를 몰아붙일 거야, 그놈들은 우리가 북한과 손잡고 한국의 재산을 빼내 간다고 하고 있어.

그나저나 회장님이 걱정이오. 그 양반이 어떻게 되면 우린 큰일 납니다.

이대각과 헤어진 유장석이 헬기를 타고 내린 곳은 가스기지가 아닌 김상철의 저택 안뜰이다. 그는 서둘러 마중 나온 김상철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은 그는 서울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 말을 이었다.

정부에서는 아마 강력하게 나올 것이다. 회장님한테는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들은 요주의 인물이 될 거야. 아마 소환시킬 수도 있지. 우리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

소환에 불응하면 그것은 우리가 범죄를 인정한 것이 돼. 이것은 우리 그룹 변호인단의 추측이다.

유장석은 이인숙이 날라 온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젠 안기부도 방패막이가 될 수 없어. 권준규 부장도 이번 기회에 갈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근대리아의 핵심 간부들도 문제지만 넌 더 위험해. 네가 북한 근로자를 끌어들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한국에서도 알고 있으니까. 더욱이 너는 예전의 혐의를 잠시 보류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다시 잡힐 수 있어.

알고 있습니다, 위원장님.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젠 한국 정부까지 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장석이 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상훈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움직이지 않았다. 방음장치가 잘된 방이어서 뒤쪽에 걸린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는 손을 뻗어 인터폰을 눌렀다. 보안과장 장동택이 방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부르셨습니까?

장동택이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거기 앉아.

눈으로 앞자리를 가리킨 이상훈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3차장한테서 연락을 받았어, 난 내일 아침에 본국으로 돌아간다.

정부는 강경책을 쓸 작정인 것 같다. 난 내일 소환되면 아마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니, 부장님이 문책당하실 이유가 뭡니까? 근대의 사원 가족 이주 문제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습니까?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장동택이 볼멘소리로 말하자 이상훈이 머리를 저었다.

문제는 근대리아의 공산화야. 그 책임은 우리한테도 있다는 것이다.

공산화라니요? 아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북한 여자 몇백 명 받은 걸 가지고,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이상훈이 담배를 입에 물고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근대리아에 보내려고 수만 명을 훈련시키는 중이라는 거야. 그건 나도 조금 전에 3차장한테서 들었어.

「‥‥‥‥」

그것은 미국과 일본의 정보국에서 보낸 정보이다. 이미 대통령 각하는 물론 안보위원회에도 보고가 되었다고 하더군.

이번에는 장동택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뱉아냈다. 한국 정부의 분위기가 지금 어떨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훈이 말을 이었다.

부장님하고도 연락이 안 돼, 이건 추측이지만 부장님도 신상에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근대리아에 있는 우리 간부 요원들 대부분도 이동이 있을 것이다.

「‥‥‥‥」

정부에서 파견된 감사원들의 지시를 받고 일하게 되겠지.

장동택은 혼란에 빠진 듯 두 눈만 굴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까지 안기부에서 파견된 요원들은 근대리아 측과 협조적이었다. 그것은 안기부장과 이상훈 등 간부들이 근대리아 정책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정부의 결정이 내려진 상황이다.

당분간 장과장한테 근대리아를 맡긴다.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도록. 다만‥‥‥」

이상훈은 말을 멈추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담장 앞에 간간이 세워진 보안등 때문에 담장은 환하게 드러났고 경비원들의 모습도 선명했다. 저택과 담장 사이의 넓은 공터 위로도 보안등의 빛살이 뻗어 있었지만 위쪽은 먹장 같은 어둠이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저택의 응접실이다. 김상철과 이유미는 마악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이유미에게 김상철이 술잔을 건네주었다.

조금 빠른 감은 있지만 근대리아가 관광지로 알려진다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지.

그는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행정당국에 그랜드 여행사의 관광객은 들어올 수 있도록 부탁해 놓았으니 그 후의 일은 당신 책임이야. 현재의 시설과 조건으로 당신은 관광객들을 맞아야 돼.

이만하면 충분해요. 자연조건도 최고이고. 다만 안전 문제가 조금 걸리지만.

관광객들은 건드리지 않아.

김상철이 잔에 위스키를 채우며 말했다.

마피아도, 삼합회도, 그리고 북한 쪽도 관광객이 많을수록 사업장 수입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아. 그들은 모든 조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거야.

창에서 몸을 뗀 이유미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몸에 딱 붙은 실크 드레스 차림이어서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정기간 동안 근대리아의 관광객은 그랜드 여행사가 독점하도록 해주실 수 없어요? 관광객이 무질서하게 쏟아져 들어오면 시설이나 관리에 문제가 많을 거예요.

우리도 이쪽 상황에 맞춰 관광 스케줄을 짤 테니까요. 그러면 근대리아에서 관리하기도 쉬울 것이고.

한동안 이유미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냥 넘기고 지나갔는데 확실하게 해둘 것이 있어. 서로를 위해서 말이야.

이유미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고 조금 흐트러졌던 몸이 바로잡혔다.

나와 당신과의 인연은 안인석이 때문이었지만 그때도 좋았다고 볼 수는 없었지.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없지 않은가 말이야,

「‥‥‥‥」

타운에서는 나와 관계가 있는 여자인 것처럼 행세를 했던 모양인데, 안인석과 홍만규에 이어서 내가 상대가 된 셈인가?

이유미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사업상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타운에서는 제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 같군요.그리고 안인석 씨와는 아직도 친구 사이로‥‥‥」

「‥‥‥‥」

물론 결혼 후에는 서로 소원해졌지만‥‥ 그가 이혼하고 나서 이번에 여기 오는 길에 한 번 들렀을 뿐이에요.

「‥‥‥‥」

솔직히 말하면 전부터 나에게 당신은 두려운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경멸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술잔을 든 김상철이 한숨에 위스키를 삼켰다.

당신의 사업계획에는 협조하겠어. 근대리아 발전을 위해서도 관광객 유치가 필요하고 그런 제의를 해온 여행사는 당신 회사가 처음이니까.

하지만 독점권은 안 돼. 근대리아는 모든 여행사에게 개방될 테니까.

김상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주의해야 될 거야, 난 여러 번 습격을 받아왔는데 그놈들이 한국에서 온 내 옛 친구라고 떠들고 다닌 당신을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아.

「‥‥‥‥」

그놈들은 당신을 미끼로 날 끌어내려고 할 가능성이 있어. 오래된 방법이지만 효과는 꽤 있는데‥‥ 그때는 그놈들이 실수를 한 것이지, 그렇지 않겠어?

 

오전 6시여서 아직도 세상은 짙은 어둠에 묻혀 있는 시간이다. 타운 호텔의 커피숍에도 손님이라고는 이유미와 박기동이 둘뿐이었고 종업원도 보이지 않았다. 창밖의 호텔 정문 쪽을 바라보던 이유미가 박기동에게 머리를 돌렸다.

한 달쯤 후에는 현지사무실 업무가 시작될 수 있겠지요?

충분합니다. 사무실 건물로 좋은 곳이 여러 개 비어 있는 데다가 김 사장님이 부탁하셨다면 행정당국도 문제가 없을 테니까요.

박기동이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제 그랜드 여행사의 일도 맡게 된 것이다. 그가 이유미로부터 5천 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행정업무를 처리해주기로 계약한 것이 어제 아침이다. 이유미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늦는 것 같네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이 시간에 공항까지는 40분이면 도착하니까요.

이유미는 근대 공항을 출발하는 첫 비행기인 8시발 도쿄행 JAL 277편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어제 저녁에 김상철의 저택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떠난다는 말이 없었으므로 갑작스런 출발인 셈이다.

그런데 참, 제가 어제 우연히 소문을 들었는데‥‥」

이유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제가 김 사장님의 옛날 애인이나 조금 친했던 사이로 소문이 났던 모양이지요?

아니, 저는 전혀 ‥‥」

박기동이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실상은 그에게 그렇게 물어보는 사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난번 이유미는 자신이 김상철과 친구인 것처럼 말했지만 타운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한테는 약간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저는 김 사장님 친구의 애인이에요. 다정했던 친구의‥‥‥」

아아, 그렇습니까?

그런 소문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하긴 지난번에도 여자 한 분이 오셨을 때 타운에 그런 소문이 났었지요. 하지만 금방 잠잠해졌습니다.

박미정 씨 말인가요?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고생을 하고 오셨지요. 그분, 아십니까?

그분이 김 사장님이 사랑하시던 분이었지요. 지금은 파리에 가 있는데 ‥‥」

그렇습니까?

김 사장님은 아직도 그분을 잊지 못하고 계세요. 내가 잘 압니다.

이것 차가 올 때가 됐는데 ‥‥‥」

박기동이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상관의 사생활에 상관하지 않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라이트를 켠 승용차가 호텔의 입구로 들어섰다. 두 대의 검정색 볼가였다.

, 저기 왔습니다.

박기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김상철이 보내온 경호 차량들로 이유미가 직접 부탁한 것이었다.

 

바람결에 숲의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면서 땅 냄새가 왈칵 맡아졌다. 아직 5월 초순이어서 나뭇잎은 연녹색으로 영글지 않았고 잡초의 뼈대도 약했지만 땅은 활짝 풀려 있었다. 강회장은 이런 시기의 골짜기를 좋아했다. 한여름이 되면 진한 수풀 냄새에 가려 지금처럼 조금 매운 듯하고 구수한 땅 냄새가 맡아지지 않는다. 설악산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안이다. 나무숲에 가려 겨우 2층의 끝부분만 보이는 조그만 별장이 골짜기 중턱에 세워져 있다. 별장 앞마당에 서서 흘러내리는 개울의 물줄기를 내려다보던 강회장은 머리를 돌렸다. 서너 명의 사내들이 서둘러 골짜기를 올라오고 있었는데 중간쯤에 신사복을 입은 사내는 이남호 실장이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비치는 한낮의 태양은 강도는 약했지만 눈이 부셨으므로 그는 손바닥으로 눈 위를 가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곧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이남호는 금방 서울에서 날아온 길이다.

여론이 대단히 불리합니다. 매스컴 전체가 우리를 북한과 연합하여 한국 경제를 망치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남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근대그룹을 두둔하는 사람은 매국노나 빨갱이로 몰리는 분위기입니다.

개울물을 내려다본 채 강회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안기부장 권준규는 열흘 전에 사표를 냈는데 해임이나 다름없는 인사였다. 근대리아로 파견되었던 이상훈과 대부분의 간부급 안기부 요원들도 귀국 조치 된 후에 새 인물들이 떠났다. 정부는 대대적으로 근대그룹의 비리와 자금이동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었고 속속 비리가 발표되는 중이었다.

정부의 선동에 국민들이 호응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 경제의 GNP 비율로 10%를 차지하는 근대그룹이 그룹 소유의 기업과 재산, 인력을 근대리아로 옮긴다면 물가 상승효과 6%, 국민소득은 12%가 줄어들고 실업자가 50만 명 가깝게 늘어날 것이며 국민의 1인당 세금부담률도 8.5% 늘어날 것이라는 정부의 통계가 발표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대는 근대리아의 유전이나 가스에다 한국에서 가져간 엄청난 자본과 기술, 그리고 조선족과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할 것이라고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근대는 한국인의 고혈을 빨아 성장해서 모든 재산을 근대리아로 빼돌린 다음 북한과 결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기간산업인 중공업과 화학, 자동차나 반도체 등의 이전계획은 없다고 근대그룹이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했지만 믿는 국민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소비자연맹 등 수십 개의 단체에서는 이미 근대 물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하여 확산 일로에 있었다. 그룹의 매출은 반 정도로 떨어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그룹 전체가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한 달이 안 된 기간에 밀어닥친 엄청난 시련이었다.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러시아에서 다른 조처는 없나?

어제도 대사가 외무장판을 만났습니다만 장관도 방법이 없다고만 말했다는 겁니다.

며칠 전에는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는데 언론은 그것을 러시아가 북한과 합작하여 근대 편에 선 것으로 몰아붙였다. 국민은 모처럼 정부의 대 러시아 강경 반응에 성원을 보내는 중이었다. 중국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러시아와 미국, 일본이 개입되었을 때에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회장님.

그렇게 부르는 이남호의 얼굴은 초췌해 있다.

방법이 없습니다, 회장님.

강회장이 머리를 들어 건너편의 숲을 바라보았다.

정부의 안을 수용하고 기회를 기다리시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일주일 후, 항상 그래왔듯이 뜨거웠던 냄비는 금방 식었다. 매스컴이 하나둘씩 꼬리를 내리더니 일주일 후에는 근대 문제를 흥분만 할 것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논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부의 언론 플레이는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관변 단체들도 동원인력의 일당 지급을 그치고 휴식에 들어갔으며 국민들은 각각 새로운 특종을 만들어낸 매스컴에 의해 다시 감탄하고 감동을 받으며 근대리아를 잊기 시작했다.

 

오후 7, 청와대 근처의 인가에 중형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강회장과 이남호가 내렸다. 그들이 이미 열려져 있는 2층 양옥집의 대문으로 서둘러 들어서자 곧 문이 닫혔다. 아래층의 응접실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는 사내들은 청와대 비서실장 이태준과 안보수석 박정규이다. 서로 정중하지만 서먹한 인사를 나눈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 위 각자의 자리 앞에는 이미 콜라와 생수병이 놓여져 있어서 오가는 시중꾼의 번거로움을 없애 놓았다. 이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협조해주셔서 감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한 일이니만치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자코 있는 강회장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대통령 각하께서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협조하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사항은 준비해온 서류를 보면서 말씀을 나눌까요?

그들이 서류를 펼치자 이번에는 박정규가 나섰다.

우선 러시아 정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근대와 정부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회장님께서 애를 써 주셔야겠습니다.

나도 러시아 정부에 근대리아를 몰수당하기는 싫소. 내가 당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면 그들은 당장에 계약을 무효로 할 테니까,

강회장이 거칠게 대답하자 이태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3선 의원 출신인 그는 적응력과 융화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됩니다.

다시 박정규가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근대리아 현지에 가칭 운영위원회를 두도록 해주십시오. 현재의 행정위원회 업무를 추인하는 부서로서 위원장 이하 위원은 모두 정부 관리는 아니지만 우리가 추천하는 사람들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근대리아에 대한 투자, 사업체 이전은 물론이고 근대그룹의 재산 반입은 금지됩니다. 이건 국민의 여론이 악화되어 있는 형편이니까 이해하여 주십시오. 물론 북한인의 고용은 금지되어야 하고 북한계 세력도 운영위원회가 주관하여 소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남호가 힐끗 강회장의 눈치를 보고는 어깨를 천천히 늘어뜨렸다.

세부 사항은 검토하신 후에 곧 승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박정규가 머리를 들고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서류에 기재되지 않은 사항입니다만 중요한 문제인데, 이번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대로 유야무야 넘어가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 국민 소리는 뺍시다.

이렇게 말을 뱉은 것은 이남호였다. 이제까지 눈치만 살피던 그가 버럭 소리치듯 말하자 폭발 일보 직전이었던 강회장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의 흥분 상태가 반감되었다는 증거인데 이남호는 그것을 계산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그가 내처 말했다.

우리끼린데 솔직해집시다. 여론은 당신들이 만든 것이고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일본의 압력에다 근대리아의 발전이 한국 정부에 이득이 없다는 계산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아니, 이실장님 ‥‥‥」

눈을 치켜뜬 박정규가 그를 쏘아보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그리고 그 계산이 지극히 근시안적이고 일방적이라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압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남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자 생수병이 자빠졌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대륙을 개척했소. 지금도 근대리아를 지키려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고 있단 말이오. 당신은 그 사람들을 매도하고 있는 거요.

이봐라, 이실장.

이제는 강회장이 손을 뻗어 이남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얼굴이 지극히 난처한 표정이었다.

, 왜 이래? 그만해.

? 근대리아가 공산화된다구?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요? 미국 놈들이, 일본 놈들이 그럽디까?

이남호가 다시 소리치자 박정규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이런 건방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만.

무엇이 어쩌고 어째?

이렇게 하고 버럭 소리친 것은 이제 강회장이다.

누구한테 하는 말버릇이야! 자리를 차고 일어나다니! 보이는 게 없단 말인가!

그러자 이태준이 일어나 박정규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그러나 강회장의 분은 이제 마악 터져 오른 참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정책이 만들어졌고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책임을 진 정치인은 한 사람도 없었어. 이번에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부 정책에 따르겠지만 꼭 밝혀내고 말 거야. 이 일을 만든 주모자를 찾아내서 심판을 받도록 할 테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그의 굵고 억눌린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근대그룹에서 희생양을 찾아내겠다면 차라리 나를 처벌하라고 대통령께 전해, 모두 내 책임이니까 목숨을 걸고 새 대륙을 개척한 내 직원들은 한 사람도 내놓을 수 없어.

그러자 박정규 대신 이태준이 머리를 들었다.

근대직원은 아닙니다, 회장님. 그자는 민간인 신분이지만 근대의 지원을 받는 인물로, , 북한과의 교량 역할을 하는 김상철이라고 하는 잡니다.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돌아가는 차 안이다. 한동안 밤거리를 내다보던 강회장이 머리를 돌렸다.

김상철이한테 연락을 해. 곧 소환장이 보내질 테니 처신 조심하라고.

알겠습니다.

이남호가 머리를 숙여 보였다.

더구나 앞으로는 경비본부의 지원이 없을 테니 김상철이 힘들게 되겠습니다.

할 수 없지, 그놈이 독자적으로 버텨가는 수밖에.

입맛을 다신 강회장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네 생각엔 운영위원장으로 누가 보내질 것 같나?

소문으로는 장관급으로 친미 성향이 있는 자가 임명될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놈이 어디 하나둘인가? 미국 박사만 해도 우리 그룹에 수백 명이야.

유장석이와 번번이 부딪치겠다.

다시 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덮였다. 근대그룹은 오늘자로 정부에 항복한 셈이 된 것이다. 앞으로 근대리아는 정부에서 파견된 운영위원회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회장이 차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분하다. 일 년만 더 있었다면 근대리아의 기반이 단단해졌을 텐데‥‥그렇게 되면 정부도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혼잣소리처럼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살기가 싫어졌다. 도무지 의욕이 일어나지 않아.

이남호가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장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기회를 기다리시면 꼭‥‥‥」

내 나이가 몇이냐? 내가 여유 있게 기다릴 나이냔 말이다.

운영위원회에서도 현지 사정을 알면 곧 적응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자 강회장이 머리를 돌렸다. 그는 근대리아가 공산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도 근대리아에 정착한 친북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 현상이 두드러졌다. 물론 성분의 흑백을 가린다면 붉은색이 태반이어서 한국 정부나 미국을 긴장시킬 만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근대리아 행정부는 그들을 중화시킬 자신이 있었고 이주민의 호응도도 높았던 것이다.

이남호는 강회장의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검버섯이 피어난 얼굴의 피부는 건조했고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이 사람은 위대하다. 갑자기 가슴이 메어져 왔으므로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 새로운 한민족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념을 초월한 한민족 대국을 건설하려는 그의 야망에 대부분의 근대인들은 공감하고 따른다. 만약 임차지 명칭을 근대리아가 아닌 대강민국이라고 했다면· 그들은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호응하지 않았을까.

 

그 시간 평양. 창광 거리에 밀집된 고층 아파트들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창광 거리는 당과 군의 최고급 간부들만 모여 사는 지역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건물이 바라보이는 어느 고층 아파트의 응접실 안이다. 안쪽의 상석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우를 둘러보는 사내는 정무원 부총리 겸 노동당의 정치국원이며 대외연락부장인 하준일이었다. 노동당의 정치국원 10명 중의 하나인 그는 당 서열 4위로서 김정일 주석의 최측근이었는데 근대리아에 대한 업무는 그의 소관이었다.

하준일이 앞쪽에 앉은 이금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대그룹은 남조선 정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마 곧 정부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지.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미국과 일본의 압력에 결국 한국 정부가 밀리고 말았어.

근대리아의 행정위원회 간부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남조선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금철의 말을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해외 특수사업부 부장 안철현이었다.

부총리 동지. 공식적으로 보낼 길이 끊긴다면 비공식으로 일꾼들을 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하준일이 이금철에게 물었다.

이 대좌는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 대기하고 있는 일꾼들만 5천 명 가깝게 된다.

당분간 보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부총리 동지.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군에서 지원자를 뽑아놓고 무작정 기다리기도 난처하단 말이야.

그들은 다 된 밥이 엎어진 기분이었다. 근대리아의 행정부는 김상철을 중개인으로 하여 북한 노동자를 받아들이기로 합의를 했고 1차로 보내질 3천 명의 일꾼들은 이미 교육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준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남조선 언론들이 요즘 근대그룹의 비판을 줄이고 있는 걸 보면 근대는 이미 항복을 한 거야. 아마 곧 근대리아 행정부와 관리체제가 바뀔 것이다.

이금철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당과 수령께 충성하겠다는 서약서를 써놓고 5만 명 가깝게 조선족을 근대리아로 보냈지만 그들의 태반이 전향해버린 상태였다. 자본주의의 물이 들어버린 것이다. 근대리아에서 당과 수령을 위해 일어나서 뭉치자고 한다면 지금은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 핵심 당원 수십 명만이 집회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보고서를 써 올렸고 그것을 읽는 하준일은 금방이라도 근대리아에 노동자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수령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며칠 두고 보다가 결정을 하겠다. 그동안 이 대좌는 상황을 세밀하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부총리 동지.

남조선이 문제 삼는 것은 근대리아가 노동자의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우리 측에 대한 경계가 강화될 것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근대시에 거금을 들여 공사를 시작한 상황이다. 20만 명 가까운 우리 동포들이 이미 들어가 자리 잡고 있어, 근대리아는 이제 우리 공화국의 희망이야.

「‥‥‥‥」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다. 우리 공화국이 대약진을 할 절호의 기회야, 다음번에는 이대좌 당신도 수령동지를 만나 수령동지의 위대한 포부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4. 마피아와의 전쟁

장동택이 김상철의 저택에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하 두 명과 함께 현관으로 들어선 그는 이한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부하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으므로 그는 김상철과 둘이서 마주 앉았다. ~월 하순으로 페치카의 불은 며칠 전부터 피우지 않는다. 넓은 방 안은 서늘했지만 견딜 만했다.

김 사장께 소환장이 왔습니다.

그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니, 소환장이라기보다 체포해서 본국으로 압송해오라는 명령이오.

물론 예상하고 계셨겠지요?

김상철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입맛을 다셨다.

본부장님이 아침에 운영위원회에 불려가더니 지시를 받은 겁니다. 그 양반은 내가 김 사장님을 체포해 올 줄 알고 있어요.

앞으로 경비본부와 나하고는 적대관계가 되겠군요.

김상철의 말에 장동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안 가신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한동안 둘은 입을 다물고 딴전을 피웠다. 근대리아에 운영위원회 위원들이 도착한 것은 사홀 전이었고 경비본부의 박종용 본부장 이하 이상훈 부장 등 간부급 20여 명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새 간부진으로 바뀐 것은 그보다 일주일이 빨랐다. 한국 정부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강회장과의 회담이 끝난 이틀 후에 운영위원회의 위원들을 전격적으로 근대리아에 보냈다.

이인숙이 녹차 잔을 들고 와 그들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운영위원장이 강경합니다. 청와대 안보수석이 추천한 인물이라는데 어제도 유위뭔장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오.

녹차 잔을 든 장동택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간부급으로는 나 혼자 남았는데 나도 곧 소환될 겁니다. 원체 내가 대북 관계를 많이 알고 있어서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이용하겠지만.

김상철은 그가 이상훈의 심복으로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이미 본국 소환을 각오하고 있는 만큼 자신을 체포해갈 생각은 없는 것이다.

내가 체포되면 형편이 나아질까요?

김상철이 묻자 장동택이 찻잔을 입에서 떼었다.

무슨 형편 말입니까?

근대리아 말입니다.

나아질 리가 있나? 당장에 난장판이 될 텐데.

그는 이제 세차게 혀를 찼다.

까놓고 말하겠는데 운영위원회와 본부장은 김 사장 대신으로 일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어제 유위원장과 전창남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전창남은 운영위원장의 이름이다. 국책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는 것이 그의 이력의 전부였는데 그가 안보수석 박정규의 인맥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부터 조심해야 됩니다. 본부장의 심복들 중에서 공명심으로 날뛰는 놈들이 있을 테니까. 물론 김 사장님의 힘을 아니까 무력을 쓰지는 않겠지만 방심했다가는 끝장이오.

찻잔을 내려놓은 장동택이 그를 바라보았다.

, 북한 측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이번에 3천 명 고용이 보류되어서 실망이 클 텐데,

반응이 없어요. 이쪽 상황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우리한테 항의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머리를 끄덕인 장동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과장이 안부 전합디다. 몸조심하시라고. 그 양반도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해 갔어요. 근대리아 일에 손을 뗀 지 얼마 안 되었단 말입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장동택이 따라 나오는 그를 말렸다.

체포하러 온 사람을 배웅하는 건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부하들도 있어서 ‥‥ 그만 됐습니다.

 

다음 날 저녁, 김상철이 마악 저녁을 마치고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그레고리가 따라 들어왔다. 서둘러 온 모양으로 호흡이 거칠다.

보스, 하바로프스크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송단 트럭 40대의 엔진이 부서졌단 말입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피아가 화염병을 던진 거요.

화물은 어때?

긴장한 김상철이 묻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화물은 반쯤 소실되었고 컨테이너 트럭 40대는 당분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어금니를 문 김상철이 그레고리를 노려보았다. 파벨이 근대리아의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 근대리아 행정부와 김상철이 곤경에 처해 있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보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화물은 근대의 자재들이오.

그레고리가 다그치듯 말했다.

그루진스키의 가게를 부숩시다. 우리가 당한 만큼만 태웁시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김상철은 수화기를 들었다.

김 사장, 나야.

이대각의 목소리였다.

자네, 하바로프스크의 수송단 화재 사건 들었나?

지금 들었습니다.

조금 전에 이곳으로 파벨의 변호사라는 자가 전화를 해왔어, 운영위원회로 말이야.

운영위원회로 말입니까?

그래. 수송단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파벨과 계약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거야. 이건 완전한 협박인데. 그런데 그 빌어먹을 운영위원장 놈이 솔깃한 모양이야. 그놈들한테 맡기면 사고가 없을 게 아니냐고 나한테 묻더구만,

이대각의 말투가 점점 격앙되어 갔다.

그래서 그 개자식한테 그럴 것 없이 파벨을 운영위원회 위원 자리에 앉히라고 쏘아주고 나왔는데, 이거 야단났다. 잘못하면 근대리아가 큰일 나겠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파벨이 운송업을 맡을‥‥‥」

네 지분을 파벨한테 주는 것이니까 근대리아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한다. 너는 곧 잡혀갈 몸이라면서. 우리 위원장도 물론 결사반대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어.

잘 알았습니다.

기운을 내. 내가 자리를 걸고 밀어줄 테니까.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한국말로 대화를 나눈 참이라 그레고리가 눈을 껌벅이며 그의 시선을 받았다.

 

새벽 3시가 되자 휘황했던 유흥업소의 네온사인도 거의 꺼졌고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대기는 언제나 맑아서 개인 날에는 거리의 불빛이 수그러지면 하늘의 별빛이 선명했는데 오늘 같은 날이 바로 그랬다. 요즘은 근대리아에도 차량이 늘어 교통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은 차량의 통행도 끊긴 깊은 밤이다. 경비소의 순찰 차량 한 대가 느린 속도로 동쪽 길을 달려오더니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거리는 더욱 깊은 적막에 싸였다. 겨울의 이맘때면 대기가 얼어붙어 사각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지만 지금은 3월 하순으로 대기는 부드러웠다.

길가의 좁은 골목길 안이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던 골목의 양쪽 담가에서 갑자기 그림자 서너 개가 흔들리더니 곧 사내들의 형체가 드러났다. 모두 손에 긴 총신의 총을 들고 있었는데 얼굴은 모두 동양인이다. 앞장을 선 사람은 김상철이었다. 그들은 골목을 나와 순식간에 대로변에 있는 레닌 클럽의 입구에 섰다. 육중한 나무 문이 굳게 닫혀 있었으므로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문의 중심부를 향해 기관총을 겨누었다. 소음기를 끼워놓아서 억눌린 듯한 연속발사음이 거리를 울렸다. 사내가 발길질을 하자 문이 활짝 열렸다. 사내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클럽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루진스키가 침대에서 몸을 굴려 일어났을 때는 이미 뒤채에까지 사내들이 몰려온 다음이다. 요란한 총성에 놀라 잠에서 깬 그가 벌거벗은 하반신에 바지를 겨우 끼었을 때 복도를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달음에 서랍 위의 권총을 움켜쥐었다. 같이 자던 여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벌거벗은 상반신을 시트로 가린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그루진스키는 문 쪽을 향해 루가의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서너 발 울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빈 공간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이다. 방 안으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졌고 그것이 데굴데굴 발 앞으로 굴러왔다. 수류탄이다. 그가 번쩍 상체를 세우면서 뒤로 물러나는 순간 흰 섬광과 함께 폭음을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방으로 들어와 그루진스키와 여자의 시체를 확인한 김상철은 잠자코 몸을 돌렸다. 앞쪽의 레닌 클럽에서는 마악 화광이 치솟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시간에 그레고리는 붙잡혀 온 그루진스키의 부하 세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은 레닌 클럽에서 3백 미터쯤 떨어진 러시아 클럽의 뒷마당이다. 이미 클럽은 화염에 싸여 있었고 마피아 다섯 명을 처치한 후이다.

대장, 갑시다.

부하 한 명이 뒤에서 재촉을 했다. 그러자 그레고리는 나란히 서 있는 세 사내를 향해 기관총을 겨누었다. 사내들은 미처 놀랄 겨를도 없이 빗발같이 쏟아진 총탄을 맞고 금방 시체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행정위원장 유장석의 방에는 운영위원장 전창남이 찾아와 둘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전창남은 50대 초반으로 배가 나온 비대한 체격에 혈색이 좋았다. 그는 살이 쪄서 둥근 얼굴을 쳐들고 유장석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긴장한 표정이었다.

사상자가 50여 명이나 되다니, 이건 전쟁 아녜요?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앞으로도 계속될 거요. 아니 이보다 더 심해질 거요, 마피아가 당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근대리아로 쏟아져 들어오겠지,

유장석이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하지만 김상철도 만만치 않아요. 중무장한 병력이 5백 명 가깝게 되니까,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근대리아를 점령할 수도 있어요.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경비본부에는 허수아비만 있답니까? 경비대원이 3천 명이 넘는데.

우리는 러시아와의 협정 때문에 경비용 소화기밖에 가질 수 없지만 김상철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로켓포에 갖가지 화기를 갖췄단 말이오. 더욱이 무장 강도단을 휘하에 두고 있어서 막강한 세력이오.

그러자 전창남이 혀를 찼다. 김상철의 새벽 공격은 철저했다. 십여 군데에 이르는 마피아 영업장은 한 곳도 빠짐없이 불에 타 파괴되었고 그루진스키를 포함한 조직원 50여 명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타운을 빠져나갔거나 민가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전창남이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일어납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니 우리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김상철이를 잡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그쪽은 상대를 잃었으니 물러나지 않을까? 어쨌든 전쟁을 피하려고 하면 말이오.

글쎄, 만일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우리가 몰살당하지 않을까?

당신은 살려주겠지. 당신과 김상철과는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럴까? 그러면 나는 살리고 당신을 죽이겠군,

전창남이 혀를 찼다.

대국을 생각하시오, 유 위원장님. 사사로운 정으로 일을 망치지 마시고.

그렇다면 당신이 이 일을 맡으시오. 난 손을 떼고 귀국할 테니까. 난 이미 능력이 없다고 말했소.

, 이거야 원.

당신이 운영위원장이니 경비본부와 알아서 처리해요. 난 빠지겠소.

무슨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마피아가 근대리아를 장악하게 될 것 같다고 서울에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미 당신은 대아운송의 김상철이 지분을 마피아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 참이니까,

찡그린 표정의 전창남을 향해·유장석이 덮어씌우듯 말했다.

마피아냐 깅상철이냐를 우리도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이긴 쪽이 우리를 다음 순서로 삼을 테니까.

「‥‥‥‥」

잘 아시겠지만 김상철에게는 응원군이 있소. 바로 북한 조직이오.

전창남이 퍼뜩 눈을 치켜떴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3백 명 가깝게 되는데 그자들도 정예요. 대부분이 군대에서 뽑혀온 자들이죠.

「‥‥‥‥」

남북연합군이지.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요, 이곳은.

 

잘 쳤소. 이 선생.

이한에게 말한 것은 최태호이다. 그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속이 다 시원해. 로스케 놈들을 철저하게 까부됐더구만.

그들은 금강산 클럽의 텅 빈 홀에 앉아 있었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지만 새벽의 사건을 모르는 타운 주민은 없다. 이한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경비본부가 비협조적이라 우리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이쪽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쪽 사정도.

최태호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우리도 아침 일찍 회의를 했소. 그런데 모두가 그러더구만, 김 사장이 머리를 잘 썼다고.

「‥‥‥‥」

, 운영위원회인지 뭔지 하는 놈들한테 근대리아의 실상을 잘 보여준 거요. 아마 지금쯤 그놈들은 골머리를 싸쥐고 있을 거야. 김 사장을 잡으려니 마피아가 걸리고, 김 사장 편을 들 수도 없고 해서 말이야.

사장님은 조만간에 다시 잔당을 소탕할 계획입니다.

이한의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뿌리까지 뽑을 모양이군, 김 사장님은.

그래서 말씀인데요.

의자를 당겨 다가앉은 이한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북 쪽에서 놈들한테 그 정보를 흘려주셨으면 해서요, 이건 사장님의 부탁입니다.

우리가 정보를 흘리다니? 그게 무슨 뜻이요?

미리 그자들이 타운을 떠나도록 하려는 겁니다. 더 이상의 살상은 피하려고.

뒷정리를 우리한테 맡기려는 것이군.

북한은 이제까지 그들과 사이가 괜찮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안면도 많으실 것이고.

사이가 괜찮다니, 그저 소 자보듯 지낸 사인데.

그렇게 말했지만 최태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위원장께 말씀드리겠소. 마피아 잔당에게 짐을 챙겨서 타운을 떠나라고 하라는 말 아니요?

그렇습니다. 떠나는 자는 내버려 두겠지만 오늘 밤 이후로 발견된 자는 가차 없이 없애 버릴 작정이니까요.

마피아의 씨를 말릴 생각이신 모양인데, 파벨이 가만있을까?

글쎄요. 그건 이후의 일이고 사장님도 예상하고 계실 테니까.

알겠소. 위원장도 허락하실 거요.

그놈들한테 생색을 내실 기회지요.

그러자 최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자들도 어린애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할까?

 

저녁을 마친 강회장 일가는 응접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식사를 마치면 제각기 흩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오늘은 강회장이 불러 모은 것이다. 따라서 강재원과 강미현은 긴장해 있었고 강용식 회장도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자주 강회장 눈치를 보았다.

그들에게 지난 한 달간은 악몽이었다. 근대그룹 창업 이후 이토록 철저하게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질타와 배척을 받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강회장의 항복으로 수습이 되었지만 이제 근대리아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한국 정부이다. 강미현은 조그맣게 기침을 하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렇게 가족이 모여 앉은 것도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시치미를 뗀 얼굴로 앉아 있던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김상철이가 일을 저질렀다.

강용식은 잠자코 있었으나 강재원과 강미현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오늘 새벽에 마피아를 공격해서 50여 명을 죽이고 가게들을 모두 불태웠다.

강미현은 할아버지가 전공을 발표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만큼 강회장의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안으로 잔당들이 보따리 싸들고 나가지 않으면 몰살을 시키겠다고 통보를 한 모양이야.

강용식이 머리를 들었다가 강회장이 말을 계속하려는 것을 보고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사건을 알고 있는 눈치 같았다.

운영위원장이 오늘 아침에 어마 뜨거라 하고는 서울에다 연락을 했어. 근대리아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말이다. 마피아가 쳐들어오기 전에 김상철이를 잡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는 거다.

「‥‥‥‥」

그러면 목표를 잃은 마피아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 아니냐고.

강회장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책상물림의 전아무개란 놈한테로 오후에 정부에서 연락이 갔어. 김상철이를 내버려 두라고, 이를테면 인정한다는 소리다.

강용식이 입을 열었다.

정부에서 현실을 감지하기 시작하는 모양이군요. 아버님.

그렇다. 김상철이를 몰아내고 마피아와 북한, 그리고 삼합회의 세상이 될 바에는 김상철이가 있는 것이 낫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다행입니다, 아버님.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길이 뚫린 것 같다. 근대리아가 혼란 상태에 빠질수록 김상철이의 가치가 돋보인다는 것을 나도 미처 생각 못 했다.

하지만 마피아가 보복을 해올 텐데요.

이미 그놈들하고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놈들은 김상철이가 하바로프스크에 갔을 때 암살하려고까지 했어.

그가 굵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아운송은 당분간 러시아 영토의 운행은 중지해야겠지만 그 대가로 근대리아의 마피아는 철저히 소탕당하고 근대시의 진출도 어려워질 테니까.

강회장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어깨를 폈다. 모처럼 여유 있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김상철이는 북한 조직의 지원을 받고 있어. 남북한이 뭉치면 당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

벼르고 있던 강미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김상철 씨의 소환은 어떻게 되지요? 취소되었나요?

아니다. 그냥 보류되었을 뿐이지,

그러면서 강회장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그의 시선이 강용식에게 머물렀다.

미현이하고 김상철이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너도 대충은 알고 있지?

압니다, 아버님.

나는 조금 더 두고 볼 생각이었다만 요즘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말이야. 그래서 이번에 미현이하고 김상철이를 약혼시키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이번에 말씀입니까?

그래, 상황이 대단히 나쁜 지금이 오히려 기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

내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정부에나 김상철이한테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느냐?

, 하지만 상황이 이래서 김상철이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을 텐데요,

우리가 미현이를 데리고 그곳에 다녀오면 된다. 마피아는 우리 가족을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까.

강미현은 아무한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잠자코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녀도 강회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김상철을 근대의 일을 받아 하는 하청업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들은 근대리아 내부조직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한국의 폭력조직처럼 가볍게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강회장이 강미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미현이, 네 생각은 어떠냐?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몰리자 강미현은 볼을 조금 붉혔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어요.

이것은 한국 정부에 대한 강회장의 또 다른 도전이다. 근대리아의 골격을 만드는 것이 근대그룹이었고 이제 그것이 운영위원회에 의해서 통제를 받지만 내부의 김상철까지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강회장이 만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림 내달 초에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그의 기색을 살핀 가족들도 밝아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의 가족회의가 끝난 것이다.

 

난 이혼한 지 3년 됐습니다.

박기동이 이인숙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저택 아래층의 구석에 위치한 창고 안이다. 부식을 내오려고 들어선 이인숙을 박기동이 따라온 것이다.

물론 내 소문이 조금 나쁘게 난 것은 압니다. 하지만 사귀고 보면 괜찮은 사람입니다.

바구니를 내려놓은 이인숙이 그에게로 돌아섰다. 차가운 표정이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이게 뭐예요? 도대체.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므로 박기동이 힐끗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필요하면 타운에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돈도 많으실 테니까 그곳으로 가세요.

아니, 이인숙 씨. 나를 어떻게 보고‥‥‥」

사기꾼으로 봅니다.

박기동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내가 누구한테 ‥‥ 그 증거가 있소?

들었어요. 여러 사람한테서.

다시 몸을 돌린 이인숙이 바구니에 통조림을 담았다.

자꾸 이러시면 김 사장님께 말씀드리겠어요. 난 박 사장님과는 그냥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내가 싫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러면서도 박기동은 창고를 나가지 않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는 놈이라 이곳에서 정착하고 싶었던 거요.

「‥‥‥‥」

이혼했다고 아까 말했지만 실상은 마누라한테 쫓겨난 거요. 회사가 부도났을 때.

애가 하나 있는데 지금 열 살이지. 지금 마누라가 데리고 삽니다.

내가 조금 경솔하고 돈을 밝히지만 사업하는 재주는 있습니다. 정도 많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 사장님은 날 알아줍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부식을 담은 바구니를 그녀가 힘겹게 들어 올리자 박기동이 다가와 바구니를 빼앗듯이 들었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하자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20대 청춘도 아니고, 그저 서로 말동무나 하면서 위로를‥‥‥」

그 바구니, 주방에 갖다 놔 주세요.

이인숙이 문을 열면서 말했다.

멀찍이 떨어져 오세요. 남 보기 창피하니까,

주방에 바구니를 가져다 놓은 박기동이 복도로 나왔을 때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저택 경비원인 조선족이다.

이보쇼, 박사장님, 한참 찾았수다. 사장님이 부르시니까 빨랑 가보시오.

놀란 박기동이 서둘러 계단을 올라 2층의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김상철의 주위에 장인규와 송길수가 앉아 있었다. 회의 중인 모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박기동이 조심스럽게 묻자 김상철이 앞쪽의 빈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오늘 아침에 이금철과 합의를 했는데 ‥‥‥」

자리에 앉은 박기동을 향해 김상철이 던지듯 말했다.

우선 1,500명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물론 밀입국이야. 근대리아 정부는 그들에게 허가증을 발급할 사정이 안 돼.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는 박기동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대각 부위원장이 천 명을 데려가기로 했으니 나머지 5백은 우리가 맡는다. 우리도 인력이 모자라는 판이니까.

, 그럼 제가‥‥‥‥」

이번에도 당신이 수고해야겠어, 소문이 안 나도록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그들을 데려오도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말입니까?

그래, 북한 쪽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책임지기로 했으니까, 거기서부터는 우리 책임이야.

국경에서 그레고리가 보낸 컨테이너 트럭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1,500명을 싣고 오려면 50대 정도가 움직여야 될 거야.

, 그 정도는 있어야‥‥‥」

경비본부에 발각되면 전원 추방에 내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진다는 건 알고 있겠지?

김상철의 시선을 받은 박기동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는 경비본부장 이하 간부급 요원들이 모두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행정위원장인 유장석이 직접 지시를 하더라도 운영위원장 전창남의 확인을 받고 나서야 움직인다. 박기동의 굳어진 얼굴을 보자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걱정할 건 없어. 당신은 이곳에서 추방되면 북한이라도 갈 수가 있을 테니까. 요즘 그쪽과 사이가 좋아졌지 않아?

농담이었지만 섬뜩한 기분이 들었으므로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삼합회의 대형으로 근대리아에 새로 파견된 사람은 홍기천이라는 40대 후반의 사내였다. 진대원을 제거시킨 삼합회의 회주 방선휘는 이번에는 간부 중에서 노련한 인물을 뽑아 보낸 것이다. 홍기천은 본래 남경 출신으로 상하이에서 밀수조직을 장악하고 있다가 이번에 근대리아로 진출했는데 성격이 교활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부하들의 관리능력이 뛰어나서 재주 있는 심복이 많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중국인 거리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작방의 내실 안이다. 홍기천은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는 반백이 된 머리칼을 단정히 빗어 넘겼고 움푹 패인 두 눈과 마른 얼굴은 병자같이 보이는 인상이다.

김상철, 그 어린놈을 우습게 보았는데 제법이다. 마피아와 전면전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궁지에서 벗어났어.

그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야. 곧 파벨이 치고 나을 텐데 ‥‥ 김상철은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앞에 앉은 양필성과 한태를 바라보았다.

내가 파벨이라면 근대리아의 수송단을 칠 것이다. 대아운송은 근대리아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대신 근대의 수송단을 치는 거야.

근대와 마피아는 이미 계약을 맺었습니다. 김상철이 때문에 마피아가 계약을 깨뜨릴까요?

양필성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약은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김상철이가 근대리아 행정부의 대리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이번 사건은 근대리아 사상 최대의 수난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수송로가 막혀 물자공급이 중단된 근대리아는 공황 상태가 될 것이다. 지난겨울에 있었던 생필품 폭동 사건은 이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될 것이다. 결국 근대는 마피아와 협상하게 되겠지. 김상철이는 제물이 될 것이고‥‥ 마피아의 저력을 당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생필품을 확보해두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한태가 물었다. 그는 흥기천이 상하이에서 데려온 심복 중의 하나이다.

주민들에게 최소한 석 달분의 식량을 쌓아두라고 해라. 그리고 물건이 귀해진다고 폭리를 취하면 안 돼. 지난번에는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였고 토벌당할 명분을 주었다. 미련한 짓이었어.

이제까지 삼합회는 눈에 띄는 행동을 삼갔을 뿐더러 중국계 주민들한테 위압적인 처신을 한 적도 없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처신을 보이면서 홍기천은 조직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태가 헛기침을 했다. 30대 후반으로 당당한 체격에 각진 얼굴의 사내였다.

대형, 북한이 김상철에게 붙었습니다. 지금은 부하들끼리 서로 왕래하고 있어서 한 식구처럼 보입니다. 양쪽이 연합해 있다면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홍기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남북한이 연합하면 우리와 마피아가 합해야 겨우 상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일시적인 제휴이지 남북한 연합은 안 된다.

「‥‥‥‥」

내가 조선족 근성을 잘 안다. 근세에 들어서 같은 동족끼리 전쟁을 치른 나라는 조선족뿐이야. 이번에도 북한은 근대리아를 먹을 작정이고 근대리아도 북한의 속셈을 모르고 있지는 않아.

 

수화기를 들자 강미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예요. 바쁘신데 전화한 것 아녜요?

아니, 그렇지 않아.

김상철이 의자에 고쳐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쪽이 그렇게 위험해요?

내 약혼자한테는‥‥‥」

강미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제 강회장은 5월 중순에 근대리아로 올 것이며 그때 강미현과의 약혼식을 할 테니 준비하라는 전화를 해왔던 것이다. 그는 이곳이 위험하다는 김상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곧 사람들을 그쪽으로 보내실 거예요. 미리 준비하려고.

김상철이 입맛을 다셨다. 강회장의 고집을 이제 알 만큼은 안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밝아지셨어요. 길이 뚫린 것 같다면서.

「‥‥‥‥」

나도 이제 조금 안정이 되고‥‥‥」

그녀의 목소리도 밝았다. 강회장이 무리를 해서 약혼식을 서두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으므로 김상철이 소리 죽여 숨을 내려쉬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러시아나 일본으로도 자신은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다. 암살자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많았고 그리고 한국 정부의 기관원에 의해 연행될 수도 있다. 강회장은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로 강미현과 약혼을 치르려는 것이다. 강회장이 근대리아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강미현이 적의 새로운 표적이 되리라는 것도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김상철은 이제 강회장이 품고 있는 집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운영위원회에 의해서 허수아비가 되어 있는 행정위원회 대신으로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미현은 김상철에 대한 그의 신뢰의 표시이자 제물의 역할도 할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미현 씨, 할아버지가 이런 상황에서 약혼을 서두르시는 이유를 알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밝다.

상철 씨를 믿고 있다는 증거이고, ‥‥‥」

자신의 손녀를 희생시켜서라도 근대리아는 꼭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

또 하나 있다면‥‥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인지도 모르겠는데, 할아버지가 요즘 초조해하세요. 이실장이 아버지한테 말했다는데 살면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것 같냐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여긴 곧 전쟁이 일어나, 미현 씨.

나도 알고 있어요.

한두 달 동안이 될지 어쩔지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렸으면 해. 유 위원장도 회장님께 얼마 동안만 보류해 주십사고 연락을 드린다고 했어.

알겠어요. 할아버지도 그렇게 억지를 쓰시지는 않을 테니까.

시원스럽게 말한 강미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린 우리 이야기는 젖혀두고 이유와 상황, 희생 같은 이야기만 했는데, 왜 이렇게 삭막해요?

미안해. 분위기가 이래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좋은 여자야.

그 표현이 낫네, 낯 간지럽지도 않고.

강미현이 목 안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몸조심하세요, 상철 씨. 날 위해서라도.

통화를 마친 김상철은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바로프스크의 근대 운송 터미널은 아무르 강변에 위치해 있어서 밤이면 강바람을 정면으로 받는다. 겨울에는 감히 바람을 맞을 엄두도 못 냈지만, 조일문 대리는 창문을 열고 강바람을 맞았다. 6월 초여서 짧은 여름이 곧 다가올 것이다. 습기가 조금 섞인 강바람이 부드럽게 그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아운송의 트럭이 국경을 넘어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따라서 화물량이 40%가량 늘어나 있었지만 겨우 편법을 써서 소화시키고 있었다. 근대가 화물을 국경 안에서 기다리는 대아운송의 트럭에 전달해주는 방법이다.

자리에 돌아온 조일문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1시가 되어가는 중이었고 사무실에는 당직인 그 혼자뿐이었다. 책상 위의 컴퓨터를 두드려 창고의 재고를 확인하던 그는 갑자기 울리는 폭음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폭음이 연속적으로 났고 총소리도 섞여 들렸다. 창문으로 달려간 조일문은 트럭에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넓은 주차장에 10여 대씩 나란히 세워진 트럭의 이곳저곳에서 잇달아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고 있다. 그리고 불길 속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내들도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눈이 뒤집힌 조일문은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그러나 곧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오더니 캐비닛을 열어젖혔다. 경비용으로 보관된 리볼버는 위쪽 서랍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폭음은 계속해서 들려왔고 그가 2층의 계단을 뛰어내려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주차장은 온통 화염에 싸여 있었다. 맨 끝쪽의 거대한 창고 두 채에서도 불길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 개자식들.

권총을 치켜든 조일문은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트럭의 불길 사이로 어른거리는 사내들이 보였다. 정문 앞 경비실에 네 명의 경비원이 있었고 사무실 아래층에도 두 명의 경비원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 개새끼들.

달려가면서 조일문은 사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났고 어른거리던 사내들은 어느 사이에 보이지 않았다. 조일문은 불길에 휩싸인 트럭의 대열 사이를 헐떡이며 뛰었다. 폭음이 계속해서 났지만 이제는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앞쪽에서 사람이 보였다. 러시아인이다. 그를 향해 달려가면서 조일문은 탄창이 비도록 쏘아 갈겼다. 공이가 빈 탄창을 철컥이며 때렸을 때 조일문은 총성과 함께 가슴에 거친 충격을 받고 멈춰 섰다. 다시 또 하나의 충격이 가슴을 치자 그는 무릎을 털썩 꿇더니 다음 순간 앞으로 엎어지면서 의식이 끊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근대그룹의 전용부두가 있다. 근대그룹이 시 당국과 50년 임차계약을 체결한 곳으로 면적이 백만 평 가깝게 되었고 다섯 대의 거대한 크레인과 부두 안까지 개통된 화물열차용 철로, 거기에다 컨테이너 적하장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춘 부두였다. 근대리아로 보내지는 거의 대부분의 화물이 하역되고 집적되는 장소인 것이다. 하역 노동자가 3천 명이 넘었고 직원도 350명이 되는 부두의 책임자는 관리본부장 직함을 가진 서종호 이사였다. 그는 유장석의 심복으로 40대 초반의 다부진 사내였다. 근대건설에서 유장석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을 때 공식 석상에서 대들었다가 뜨거운 맛을 본 후에 심복이 된 별난 인연이 있다.

서종호가 하바로프스크의 운송기지 습격 사건을 들은 것은 1040분경으로 사건이 일어난 지 20분쯤 후였다. 연락은 거의 동시에 두 곳에서 왔는데 운송기지의 책임자인 하일남 부장과 근대리아 본부의 이대각 부위원장으로부터였다. 부두 안의 숙소에 있던 그에게 이대각이 고함치듯 말했다.

마피아의 습격이야! 하바로프스크의 수송기지가 당했어!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놈들이 그곳도 칠지 모른단 말이야.

알았습니다. 어서 전화를 끊어야 내가 일을 할 것 아니요?

그러자 이대각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부터 서종호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힌 듯 움직였다. 경비대장에게 연락을 하고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여 사원을 모았다. 사원들에게도 각각 개인 화기를 지급하여 요소마다 파견하고 겨우 한숨 돌렸을 때가 새벽 1시였다. 물론 근대타운의 마피아 소탕 사건이 있고나서 유장석은 경비원 50여 명을 증원시켜 주기는 했다. 따라서 경비병력은 200여 명에 무장한 사무직까지 합한다면 500명 가깝게 되었지만 서종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종호는 창으로 다가갔다. 흰색 페인트를 칠한 크레인 다섯 대가 나란히 세워진 부둣가를 지프 한 대가 속력을 내어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지시로 부두의 모든 등불이 켜져 있었으므로 먼 쪽의 거대한 컨테이너 하역장도 보였다. 3천 개가 넘는 컨테이너가 현재 하역장에 쌓여 있었고 그중 1,500여 개가 근대리아로 실려 갈 자재와 기계류, 가전제품과 생필품 등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부두의 상황실을 임시본부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의 뒤쪽에서는 직원들의 전화 응답 소리와 벨 소리로 소란했다. 모두 긴장으로 경직되어있는 분위기였다.

본부장님, 전화 왔습니다.

직원의 말소리에 그는 몸을 돌렸다.

근대리아 행정위원장이십니다.

그는 직원이 내민 수화기를 받아 귀에 댔다. 유장석이다.

별일 없나?

그의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유장석이 대뜸 물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놈들은 운송기지를 거의 전소시켰다. 사망자도 일곱 명이야.

이제 부두가 피해를 입으면 우린 치명상을 받는다.

서종호가 입맛을 다셨다.

밤낮으로 지키겠습니다. 탱크나 미사일을 갖고 온다면 몰라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

그런데 뭐야?

내일 중으로 열차 편으로 하바로프스크로 보낼 컨테이너가 450개가 됩니다. 운송기지가 당했다면 보류시켜야 되겠군요.

받아 실을 트럭이 없어. 당분간 보류시켜.

유장석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우리도 대책을 세우고 있으니까 그동안만이라도‥‥‥‥」

다시 입을 열려던 서종호가 숨만 내려쉬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는 열차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고 긴 수송로이다. 설령 트럭이 온전하더라도 마피아는 마음만 먹으면 수송 열차를 폭파해서 화물을 쓰레기로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이대각이가 조금 전에 하바로프스크로 떠났다.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극동군 사령관 로스토프를 만나러 갔어. 모스크바에서는 정 상무가 국방장관 체르넨코를 만날 것이고, 우리도 모든 채널을 통해 대응을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위원장님. 그동안 목숨을 바쳐 지키지요.

고맙다, 서종호.

수화기를 내려놓자 직원 하나가 손에 다른 전화기를 들고 다가왔다.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본부장님, 근대리아 운영위원장이십니다.

서종호가 전화기를 쏘아보았다.

없다고 해.

그러자 직원이 황급히 송화구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벽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대각이가 로스토프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마르첸코이다. 그는 하바로프스크 교외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부하들과 모여앉아 있었다.

6월의 한낮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서 앞쪽 숲을 훑고 온 바람결에 옅은 숲 냄새가 맡아졌다

로스토프는 중립이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아.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마피아와 군부 간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군은 경비 조달을 위해 군수품과 각종 병기류를 처분했는데 대리인 역할을 해준 것이 마피아이다. 공식적으로 현역 군 관계자가 나서서 제3국으로의 판매를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략무기이거나 국가 간의 거래일 경우에 한했고 나머지 물량은 마피아를 통해 밀매되어 왔던 것이다.

지금 근대리아의 행정위원회 부위원장 이대각은 러시아 극동군 사령관 로스토프와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점심을 마치고 모여앉아 가볍게 보드카를 한 잔씩 마시고 있다.

보스, 경찰국장이 조금 전에 현장을 둘러보고 갔습니다. 현장에는 경찰 1개 부대가 증원되었다고 합니다.

부하의 말에 마르첸코가 쓴웃음을 지었다. 컨테이너 백여 개가 쌓여 있었으니 타다 남은 화물들도 많을 것이다.

이곳이 관문이다. 이곳을 통해야만 근대리아로 들어갈 수 있어. 이제 근대리아는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타협해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물은 것은 시내에서 클럽을 운영하는 네프스키였다. 그는 어젯밤 부하들을 이끌고 근대의 운송기지를 쑥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타협은 무슨‥‥ 무조건 항복이지. 그리고 나서 우리와 재계약을 해야 될 것이야.

낮술이 조금 과한 것 같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었으므로 그는 잔에 보드카를 채웠다.

보호세 인상부터 배상금, 거기에다 근대시 상가의 지분획득, 운송사업 장악 등 엄청난 곳이다, 그곳은. 너희들은 곧 그곳에서 한밑천 잡게 될 것이다.

그는 파리야킨이 죽은 후에 나호트카의 일부분을 차지했던 신분에서 일약 서열 2위의 하바로프스크 보스가 된 인물이다. 그가 강력히 주장한 덕분에 파벨이 보스가 되었다는 것은 졸개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마르첸코가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그의 간부급 부하들이다.

이제야 이야기하지만 보스와 나는 이미 합의를 했어. 내가 근대리아에 들어가기로.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하바로프스크에는 조금도 미련이 없다. 그곳은 나에겐 꿈의 땅이야, 나는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맞을 것이다.

모두들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근대리아는 지금의 매출규모 만으로도 북한의 몇 배였고 곧 엄청난 규모로 발전하리라는 것을 그들 모두 알고 있다.

마르첸코가 보드카 잔을 들었다.

, 우선 건배를 하자.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 시간 별장 정문에서는 서너 명의 경호원이 철문 안에 서서 길을 따라 이쪽으로 달려오는 세 대의 군용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장은 아무르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세워졌고 정문 앞으로는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강변의 길이 나 있다. 그러나 이쪽은 민가도 없었으므로 차량의 왕래는 거의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육군인데 ‥‥ 아마 강 아래쪽의 공병대로 가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그릴게 말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별장 앞에 나 있는 도로는 1킬로쯤 위쪽에서 국도와 연결된다. 트럭이 점점 가까워지자 정문의 경비 책임자인 포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자 제 위치로 가 있어.

부하들이 옆쪽으로 흩어졌으나 그는 철문 안에 서서 다가오는 트럭을 바라보았다. 이상이 있다면 트럭이 지나왔을 검문소에서 연락이 왔을 것이었다. 500미터쯤 아래쪽의 길모퉁이에 그의 부하 다섯 명이 차단막을 내려놓고 검문을 한다. 앞장을 선 트럭이 똑똑히 보였다. 야전용 트럭으로 앞자리에 앉은 두 사내의 윤곽이 드러났다. 운전석 위쪽에 설치된 기관총좌도 보였다.

타타타타타.

그 순간 총성이 울려 퍼졌다. 기관총구에서 뿜어 나오는 횐 섬광과 발사음이 거의 동시에 보이고 들릴 만큼 거리는 가까웠다. 포빈은 온몸에 수발의 총탄을 맞고 뒤쪽으로 나뒹굴었고 트럭은 이제 전속력으로 달려와서는 철문을 부서뜨리면서 안으로 돌진했다. 기관총이 쉴 새 없이 발사되었으므로 정문 근처의 어설픈 방어벽 뒤에 있던 경비원들은 이미 대부분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세 대의 트럭이 별장 안에서 멈춰 서자 곧 수십 명의 군인들이 뛰어내렸다. 트럭에 장착된 세 대의 기관총이 별장의 모든 곳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퍼붓는 중이었고 사방으로 흩어져 별장 안으로 진입해가는 군인들도 총을 쏘아댔으므로 별장은 총성에 뒤덮였다.

넌 저쪽, 넌 이쪽으로.

그레고리가 짧게 지시하자 부하들은 우루루 흩어져 갔다. 애용했던 칼라시니코프 돌격소총을 움켜쥔 그는 개머리판을 접은 짧은 총신으로 2층의 계단을 가리켰다.

놈은 2층에 있을 것이다.

이미 집안은 앞뒤로 완전히 장악되어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 아래층을 순식간에 소탕한 부하들이 그의 뒤에 서서 눈을 번득이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무장 강도단의 이력이 있는 놈들이어서 활기가 넘치는 표정이다. 그 순간 계단 위쪽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으므로 그레고리는 버럭 소리쳤다.

수류탄!

부하들이 제각기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가 로비의 기둥 그늘로 몸을 감췄을 때 수류탄이 폭발했다. 그레고리는 파편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기둥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2층의 계단을 달려 오르자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얼굴 한쪽은 벽에서 묻어나온 횟가루가 묻은 마르첸코는 한 손에 권총을 세워들고 소파를 방패삼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지금도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있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벽에 맞은 유탄들이 어지럽게 튕겨 이미 어깨의 한쪽은 찢어진 상태다. 응접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같이 술을 들던 다섯 명의 간부 중 두 명은 이미 시체가 되었고 한 명은 기관총탄에 복부를 뚫려 눈만 껌벅이며 바닥에 누워 있는 중이다. 다시 밖에서 쏘아대는 기관총탄이 쏟아져 들어왔다. 놈들은 이미 아래층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첸코! 살아 있으면 대답해라!

총성이 뜸해졌을 때 아래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30초 시간을 준다. 대답이 없으면 2층을 모두 가루로 만든다.

마르첸코가 권총을 고쳐 쥐었다. 습격해 온 것이 김상철 일당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운송기지를 폭파당한 보복이다. 그러나 그놈들이 하바로프스크까지 남하하여, 그것도 백주에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개자식, 마르첸코, 10초다. 살고 싶으면 손을 들고 나와.

아래쪽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났다. 어느덧 총성은 그쳐 있었다. 별장에는 경호원만 해도 10여 명이 있었던 것이다.

보스.

벽에 기대 웅크리고 앉아 있던 부하가 메마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레닌 대로에서 이번에 꽤 큰 클럽을 운영하게 된 사내였다.

보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마르첸코는 반대쪽 구석에 엎드려 있는 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구도.

부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르첸코는 그의 늘어져 있는 손가락을 보고는 그가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르첸코! 시간이 다 되었다!

아래층에서 다시 소리치자 마르첸코는 몸을 펴고 일어섰다.

지금 나간다!

버럭 고함을 친 그는 벽 쪽에서 따라 일어서는 부하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 , .

눈을 둥그렇게 뜬 얼굴 그대로 부하가 벽에 등을 부딪치며 쓰러지자 그는 권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마르첸코가 지금 나간다.

놈들은 자신을 포로로 데려갈 생각이었고 그럴 바에는 혼자되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죽은 구도도 그렇지만 이놈도 파벨이 보낸 감시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벨이 마르첸코 별장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오후 430분경이었다. 경비원 중에서 겨우 살아난 사내 한 명이 넋을 잃고 있다가 국도 근처의 가게로 달려가 전화를 했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부에 있는 그의 사무실 안이다. 파벨과 마주 앉은 두 사내는 보포프와 마린스키였는데 그의 심복들이다.

보포프가 입을 열었다.

금방 러시아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부하들의 사기는 물론 통솔에도 영향이 옵니다.

그는 40대 중반으로 전직이 대학교수였다. 파리야킨 시대에는 단순히 통역관 역할을 맡고 있다가 파벨에 의해 중용되어 지금은 자문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더구나 거래회사나 외국인 합자회사들도 모두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오. 러시아 정부나 군부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대응 방법 여하에 따라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자 마린스키가 나섰다. 체격이 당당하고 턱수염이 짙은 사내였는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실질적인 관리자였다. 그는 근대 부두를 제외한 부두에 실력 기반을 두고 있다.

보스, 근대 부두의 경비 상태는 정규군 1개 대대를 투입시켜야 승산이 있습니다. 모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린스키가 말하자 보포프가 힐끗 파벨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부두를 공격하여 근대리아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파벨은 굳어진 얼굴로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마르첸코가 부하들과 함께 몰살당한 것은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마르첸코는 파리야킨이 제거되자 자신이 보스로 옹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야킨의 잔당을 물아내고 기반을 굳히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머리를 든 파벨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서두르지 마라.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까. 급한 것은 우리가 아니란 말이야.

김상철이 러시아에까지 진입해 와서 이렇게 적극적인 공격을 해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놈은 근대리아의 부위원장 이대각이 극동군 사령관 로스토프를 찾아가 지원을 애걸하고 있는 동안 방심하고 있던 이쪽을 쳤다. 교활한 놈이었다.

마르첸코가 행방불명 상태라면 놈들에게 끌려갔을지도 모릅니다.

마린스키가 말하자 파벨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쩌면 몸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자.

보스. 만일 놈들에게 잡혀 있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놈들은 협상을 하려고 들 겁니다.

파벨이 그를 노려보았다.

협상? 그런 건 없다.

마르첸코는 이미 끝난 상태야. 숨어 있든 잡혀 있든 말이다.

그렇다면 병력을 모을까요? 다소 피해를 받더라도 근대 부두를 쳐서 아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요.

마린스키가 말하자 파벨이 머리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다. 부두가 어디로 갈 것도 아니니까.

 

유장석이 방으로 들어서자 전창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고 방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전창남이 자신의 방으로 그를 불러들인 것인데 오늘로 두 번째이다. 경비본부장 신재열이 낀 세 사람만의 회의였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근대시 중심부에 자리 잡은 행정청 안에서는 긴장감이 섞인 활기가 있었다. 대부분이 근대직원들로 이뤄진 직원들이다. 어젯밤의 운송기지 습격 사건으로 침체되었던 분위기가 오늘 오후 마르첸코 별장의 정보를 듣고는 일시에 활기를 되찾았던 것이다. 러시아 방송에서는 시간마다 톱뉴스로 하바로프스크의 저명한 사업가 니콜라이 마르첸코가 별장에서 습격을 받아 동료들은 몰사했고 그는 실종되었다고 발표하고 있었다.

본국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난리가 났습니다. 난 지금 허수아비가 되어 있는 느낌이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창남이 말했다.

마르첸코를 습격한 것은 김상철 일당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중대한 국제 문제로 발전될 거요. 만일‥‥‥」

잠깐만.

유장석이 그의 말을 잘랐다.

국제 문제로 발전할 것이라고 어느 놈이 그럽디까?

갑자기 뱉은 상소리에 전창남은 눈을 크게 떴다. 신재열이 헛기침을 가볍게 하는 것을 보면 그도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어떤 새끼가 그랬느냔 말이요? 그것부터 대답해보시오.

유장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어젯밤부터 끼니도 거른 채 유장석은 운송기지의 피해 상황 체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부두의 경비 문제, 거기에다 하바로프스크로 이대각을 급파하는 등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었다. 그리고 나서 터진 사건이 마르첸코의 습격이다.

그동안 전창남은 방 안에 앉아 쉴 새 없이 서울로 상황 보고만 하고 있었을 뿐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 보시오, 유위원장. 당신, 말을 삼가해야 될 거요.

호흡을 가다듬은 전창남이 말하자 유장석이 눈을 부릅떴다.

내가 당신 같은 자의 유형을 잘 알아. 책임질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지, 근대리아의 운영위원장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 봐. 당신 스스로 말이야.

말을 삼가하시오, 유 위원장님.

이렇게 말한 것은 경비본부장 신재열이었다. 그는 경찰 간부 출신으로 이번에 전창남과 같이 근대리아로 파견된 사내였는데 박정규의 인맥이다.

그렇게 막말하면 됩니까? 도대체 일을 일으킨 것이 누굽니까? 유 위원장이 감싸고 있는 김상철이 아니요? 그놈이 유 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엇이 어째?

유장석이 몸을 솟구쳐 일어섰다.

이런 건방진당신 지금 누구한테 눈을 쳐들고 대드는 거야? 당신 여기가 어딘 줄 알고나 있는 거야?

뭐야?

신재열이 따라 일어섰다. 그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엇따 대고 욕하는 거야? 이 사람이 정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인데, 나는 당장 당신을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할 수도 있단 말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그래?

유장석이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좋다, 어디 해봐라. 네가 경찰권을 쥐고 있겠다‥‥ 그렇게 되나 보자.

이봐요, 유 위원장.

전창남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성을 잃지 마시오. 당신, 지금 흥분하고 있는 거요.

그러자 신재열이 목청을 높였다.

모든 일은 제가 일으켜 놓고 운영위원회나 경비본부는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오. 당장에 이 사람을 서울로 압송시켜야 합니다.

유장석이 몸을 움직여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의 손잡이를 잡은 그가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땐 너희들도 끝장일 테니까.

말을 삼가해, 유장석.

신재열이 버럭 고함을 쳤다.

내가 네 부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란 말이다. 난 정부 입장을 따라야 해!

그렇지.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활기있게 걷는 직원들은 대부분이 근대 직원들이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어금니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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