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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4-2

Bollnow 2024. 3. 6. 07:30

4. 도전자

야망을 가진 놈이야.

대형 유리창 앞에 선 강회장은 회색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바라보았다.

아침 10시가 넘었지만 태양은 짙고 두터운 회색구름 안쪽에 갇혀 보이지 않았다. 횐 눈에 덮인 대지 위를 바람 끝이 날카롭게 긁고 지나면서 횐 파도 같은 눈가루가 휘날렸다.

이젠 제 스스로 맥을 짚어가고 있다. 운송 수단에 눈을 돌리는 걸 봐도 그렇고 타운에 제 소유의 사업장을 늘려가는 재주도 그렇다.

강회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던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장악력이 있는 데다 관리능력도 우수합니다. 타운에서는 이미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굳혔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몸을 돌려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내 부하들이 날 배신하지 않은 것은 내 인간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끝없이 부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 밑에서라면 얼마든지 제 꿈을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지.

이곳은 그놈들에게는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제 능력과 운을 시험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전장이야.

강회장이 소파에 앉았으므로 이남호도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자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방음장치가 잘된 방이다. 난방시설도 잘돼 있어 방 안 온도는 매우 쾌적했다.

제 생각입니다만 김상철에게 운송 사업을 맡기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행정적인 뒷받침만 조금 해준다면 충분히 관리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조심스럽게 이남호가 말하자 강회장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먼 시선이었으므로 이남호는 숨을 죽였다. 이윽고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운송 수단까지 그놈이 장악하면 그놈은 명실공히 근대리아의 실력자가 되겠지. 그렇지 않나?

그제서야 이남호는 강회장이 길게 말을 늘어놓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김상철이 그다음에 갖게 될 목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남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마피아나 야쿠자, 삼합회의 견제 세력으로 내세울 사람은 김상철이가 적격입니다.

이제 근대시의 개발이 시작된 상황입니다, 회장님.

알겠어, 그놈한테 운송 사업을 맡기도록 하자.

머리를 든 강회장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유장석이한테 제출한 계획서를 보면 근대와 자신이 반씩 지분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어. 투자는 근대에서 하고 관리는 자신이 하겠다는 맹랑한 계획이야. 하지만 그것도 허락한다.

알겠습니다.

그놈은 너무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이곳은 상황이 다른 곳입니다, 회장님. 그리고 솔직히 김상철은 운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정한다.

강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미현이와 그놈과의 교제를 허락했다. 그놈에게 내 가슴을 열어놓은 셈이야.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그놈을 생각할 때마다 뭔가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다.

입맛을 다신 강회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런 소리 늘어놓는 걸 보면 아무래도 늙은 것 같다.

아닙니다, 회장님은 아직도‥‥‥‥」

아부는 그만해라.

말을 자른 강회장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갈수록 초조하고 조급해지고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난 근대리아가 확실하게 기반을 굳히는 것을 죽기 전에 보아야겠단 말이다.

 

강미현이 흘 안으로 들어서자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술잔을 든 채, 또는 웃다가 멈춰서 입을 떡 벌린 채 사내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저녁 7, 나파스 클럽 안이다. 주위의 시선에 조금 당황했던 강미현이 마음을 정한 듯 발을 떼자 홀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저쪽으로.

그녀 옆으로 붙어선 이한이 안쪽을 가리켰다. 클럽 안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시선을 차단할 수 있는 구석진 자리였다. 이한의 손끝을 바라본 종업원 서너 명이 재빠르게 그 테이블로 다가가더니 이미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사내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가가던 강미현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머리를 돌렸다. 오늘도 타운을 구경하려고 나온 참인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한이 그녀를 안내하고 있다. 강미현이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돌아갔다. 흘 안은 자욱한 담배 연기에 덮여 있는 데다가 취객들의 떠드는 소리로 금방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시끄러우면 방으로 옮기시지요.

상체를 테이블 위로 숙인 이한이 소리쳐 말하자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손님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어림잡아 2백 명이 넘어 보이는 남자들 중 여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대여섯 명뿐이었다. 그것도 홀의 한복판에 세워진 무대 위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몸을 비틀고 있는 러시아 여자 두 명을 포함한 숫자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투명한 색의 보드카를 마셔대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몸이 풀려 있는 사람도 보였다.

2층은 여자들이 있는 곳인가요?

옆쪽의 계단 위에 걸터앉은 사내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묻자 이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여자가 몇 명 있어요?

50명 정도.

던지듯 말한 이한에게 사내 한 명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머리를 끄덕인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이 뒤채로 오시랍니다. 가시지요.

그를 따라 클럽을 나온 강미현이 뒤채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안내한 이한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이제 그들뿐이었다.

대충 돌아보았겠군.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들더니 잔을 채웠다

내가 직접 안내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 볼 만한 것 있었나?

알고는 있었지만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성범죄가 많이 일어나겠어요.

김상철이 그녀에게 술잔을 건네주었다.

성범죄는 거의 없어, 이상하게도.

그는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여자가 드문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창을 공인해주기 때문인 것 같아.

모두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더군요.

그렇게 보였어?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다행인데. 하긴 그 말도 일리가 있어. 근대직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사연들이 있지. 죄를 짓고 도망쳐왔거나 아니면 이곳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온 놈들이어서 더 이상 갈 곳도 없을 테니까. 하긴 나도 그중의 하나였지만.

범죄 발생률이 꽤 높겠네.

요즘은 줄어든 편이야. 경비대의 치안 강화 때문이 아니라 각 조직이 기반을 잡아가는 상황이어서.

술잔을 내려놓은 김상철이 정색을 했다.

하지만 미현 씨는 이제 그만 돌아다녔으면 좋겠어, 이것은 회장님의 지시야.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상철 씨 사업장을 꼭 둘러보고 싶었어요. 이젠 거의 다 보았으니 그만두겠어요.

내가 안내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녜요. 바쁘신데 괜히 ‥‥‥」

이 상황에서 근대리아의 총수인 강회장의 손녀에게 손을 댈 조직은 없다. 그러나 김상철이 그녀처럼 저녁 시간에 가게를 순회한다면 총 한 발에 끝장이 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조직은 곧 조각으로 찢겨지고 새로운 대리인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의 시선을 받은 강미현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반짝이던 눈이 반쯤 감기면서 입술 끝이 위쪽으로 살짝 올라간 표정의 그녀는 아름다웠다. 김상철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자신이 죽는다면 자신은 곧 잊혀질 것이었다. 아직 시작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잊혀진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무슨 생각을 해요?

강미현이 묻자 그는 시선을 모았다.

집에 식사 준비를 해두었어. 늦기 전에 갑시다.

좋아요. 오늘은 조금 늦는다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

자리에서 일어선 강미현이 다시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간이 커졌는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셔서 그런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요.

 

아직 연락이 없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으나 이한의 눈빛은 강했다. 클럽 앞에서 김상철과 강미현을 마악 배웅하고 난 후였다. 클럽으로 다가가던 송길수가 걸음을 멈추더니 머리를 저었다.

아직 없어.

벌써 닷새째 아냐.

그래, 하지만 아직 윤곽을 잡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보고할 것이 없으니까 연락 안 하는 거야.

그가 한 손을 어깨 위에 올려놓자 이한은 몸을 틀어 떨어뜨렸다.

혹시 걔를 알아본 중국 놈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아?

글쎄, 그래서 내가 처음에는 말렸는데‥‥‥)

송길수가 힐끗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뒤채의 사무실로 들어가 마주 앉았는데 서둘러 담배를 빼어 문 송길수는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황윤을 중국인 거리로 보낸 후 이한으로부터 전해지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별것 없으면 그냥 돌아오라고 했어, 무리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담배 연기를 길게 뿜은 송길수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어디 알았나? 네 허락을 받았다고 하길래 그런 줄 알았지.

가방 가지러 사람을 보내지 않는다면 저라도 나왔어야 할 것 아냐?

글쎄, 나도 그것이 ‥‥‥」

황윤은 소개소에 들어가기 전에 옷가방을 근처의 음식점에다 맡겨 놓았었던 것이다. 그것은 미리 송길수와 만들어 놓은 연락 방법으로 가방을 찾으려고 사람을 보낸다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는 표시였다. 아마 그때는 황윤이 그들에게 잡혀 가방을 가게에 맡겨놓았다고 자백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이봐, 2, 3일만 더 기다려 보자.

송길수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소식이 없으면 아예 그 소개소의 중국 놈을 납치해다가 껍질을 벗겨서라도 걔가 간 곳을 알아낼 테니까.

내일까지.

자르듯 말한 이한이 그를 쏘아보았다.

내일까지 연락이 없으면 내가 알아서 하겠어.

형님한테 우선 보고를 해야 되니까 먼저 나서지 마라, 알았어?

마음대로 해. 어쨌든 나는 내일까지만 기다린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송길수가 혀를 찼다.

빌어먹을, 이건 도무지 신경이 곤두서서.

그는 김상철한테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꾸지람을 들은 데다가 이한으로부터는 아예 죽이려고 보냈다는 식의 눈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쪽에서 경솔하게 서둘다가 그놈들이 눈치를 챌 수도 있단 말이다.

얼굴을 찌푸린 송길수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 며칠만 더 기다려 봐, 알았어?

황윤이 정식으로 일하게 된 곳은 중국인 거리 안쪽에 있는 노름방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통나무집이었다. 그러나 서너 채의 집이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으로 연결되어서 대기실과 노름방, 색시집이 한울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둘러싼 가옥들은 담장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10여 채의 가옥이 한 무리가 되어 있었으므로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지난번 사건으로 경비부가 가택 수색을 했을 때에도 이곳에서는 한 사람도 잡혀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위의 가옥에 분산 배치되었던 여자들도 무사했을 뿐더러 수색이 끝난 지 한 시간 후부터 노름방과 색시방 영업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곽비가 말해주었다. 곽비는 그녀와 함께 일하는 색시방 여자였다.

나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황윤은 한동안 멍한 얼굴로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옆방에서는 여자가 신음소리를 뱉아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꾸며내는 소리라는 것을 황윤은 알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선 황윤은 가운을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반 평짜리 방이 좁은 복도 양쪽으로 열 개씩 붙어 있는 이곳에는 15명의 색시가 있었다. 거기에다 7, 8명의 사내들이 언제나 집 안팎에 머물고 있다. 갖가지 교성과 신음소리가 들리는 복도를 지나 끝 쪽의 화장실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빨리 끝내. 곧 들여보낼 테니까.

화장실과 마주 보이는 출입구에 앉아 있는 화선생의 목소리였다. 그의 등 뒤에 늘어져 있는 검은 휘장 안쪽이 대기실이었다. 황윤은 잠자코 화장실로 들어섰다. 여자용 공동 화장실이어서 빨랫감과 갖가지 잡다한 물건이 놓여진 사이로 이미 여자 한 명이 쭈그리고 앉아 아랫도리를 씻고 있었다. 황윤은 플라스틱 통에 담겨진 더운물을 세면기에 퍼 담고는 그 위로 쪼그리고 앉았다.

오늘 밤에 두 명이 온댄다. 낮에 고가한테서 들었어.

옆에 앉은 서파가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그녀는 이곳에 온 지 석 달째인 고참으로 고향이 뻬이안이라고 했다. 굵은 몸에 얼굴도 투박했고 나이는 서른이라고 하지만 마흔도 넘어 보였는데 단골이 꽤 있었다.

돈벌이도 좋고 이 짓도 할 만은 하지만 갑갑해서 못 살겠다.

서파가 일어서더니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눌러 닦았다. 주름진 뱃가죽이 드러났으므로 황윤은 머리를 돌렸다.

석 달 동안 시내 구경을 딱 한 번 했을 뿐이야. 그리고는 밤낮으로 소시지 구경만 했다.

서파가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나가자 황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내려쉬었다. 이제 이곳을 운영하는 조직이 삼합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규모의 색시방이 중국인 거주지 안에 여섯 개가 더 있고 안쪽 깊은 곳에는 마약방도 두 개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모두 색시들로부터 들은 정보였는데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겠지만 타운에 있는 삼합회원이 500명이 넘고 북경에서 내려온 따꺼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것은 정확한 정보 같았다.

가운을 추스리며 일어선 황윤은 세면기에 담긴 물을 발끝으로 차 쏟은 다음 화장실을 나섰다. 계약서에는 원한다면 외출을 허가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서파의 말처럼 자신은 감금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계약대로 수익금의 반을 정확하게 나눠주었고 본인이 싫다면 남자를 들여보내지 않았으므로 큰 불만들은 없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중국인으로 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는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는 사내였다. 가운 자락을 펼쳐 아랫도리를 내보이며 황윤은 침대에 누웠다. 이제 알 만큼 알았으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차례였다.

 

타운의 중심 부근에 세워진 5층짜리 시멘트 건물은 타운에서 큰 건물 중의 하나였다. 정사각형의 단순한 건물에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흰색 페인트를 칠해 놓아서 얼핏 보면 병원이나 관공서 건물같이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면 현관 위에 타운 호텔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이곳이 타운의 유일한 공식 호텔이었고 근대리아를 비공식적으로 방문한 점잖은 손님들이 묵는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호텔 입구에는 언제나 두 명의 경비소 직원들이 지켜 서 있다. 물론 근대리아를 공식 방문한 사람들은 숙사 근처에 있는 7층짜리 영빈관에 묵었는데 그곳은 세계 초일류호텔의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근대시에 건설예정인 호텔들이 완공되기 전까지 타운 호텔은 사업상 근대리아를 찾는 사람들의 유일한 고급스런 숙소가 될 것이었다.

호텔의 1층 커피숍 안이다. 아침 9시경이 되자 식사를 마친 투숙객들이 들어섰으므로 좁은 커피숍은 금방 떠들썩해졌다. 대부분이 근대리아에 물건을 판매하려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수출업자들인 것이다. 커피숍 입구에서 박기동은 빈자리를 찾는 듯 잠시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30대 후반의 잘생긴 호남으로 짙은 색 양복에 넥타이를 맨 단정한 차림이었다. 주방 옆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영만을 발견한 그는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띠었다.

어젯밤에 한잔하신 모양이요, 손형.

다가간 그가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손영만은 서양식 변기를 생산하는 회사의 영업부장으로 지금 기를 쓰고 근대의 구매본부와 접촉하는 중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근대시만 해도 필요한 변기가 30만 개였고 대부분이 한국의 제일요업과 계약이 되었지만 이번에 공사를 시작할 상가 지역은 미계약 상태라는 것이다. 찌푸린 얼굴의 손영만이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이렇게 막힌 경우는 처음이야. 도무지 말이 먹히지가 않아.

찻잔을 내려놓은 손영만이 꺼칠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근대는 시베리아로 확 막힌 놈들만 보냈어.

손영만은 40대 중반으로 박기동보다는 7, 8년 연상이었다. 그러자 얼굴에 웃음을 떤 박기동이 의자를 당겨 다가앉았다.

손형은 지금 엉뚱한 곳을 쑤시고 있는 거요. 근대의 구매본부보다 러시아나 일본 회사와 직접 로비를 해야 돼요.

공사는 근대가 맡아서 하기로 되어 있으니 구매본부를 잡으면 돼. 그리고 아직 어느 놈의 공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까.

내가 기가 막힌 줄을 소개시켜 드릴까?

손영만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줄인데?

내가 기가 막히다고 하지 않았소? 상가 공사와도 직결되는 줄이야. 그리고 그 사람만 잡으면 아마 근대리아의 모든 화장실은 손형이 장악하게 될 거요.

, 글쎄 그게 누군데?

이제 손영만이 의자에 엉덩이 끝만 걸치고는 바짝 다가앉았다.

말을 해줘야 알 것 아냐.

내가 이곳에서 그 질긴 스테이크만 먹고 허송세월을 보낸 줄 아쇼? 나만큼 근대리아에 정통한 놈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

글쎄 그건 알아.

그 친구는 절대로 외부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타운이 마피아와 북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건 알고 있지요?

그건 알지. 그래서 북한쪽 술집에는 안 가고 있어. 그런데 그 줄이 누구란 얘기야?

그 친구는 타운에 있는 일급 사업장의 반 이상을 갖고 있어요. 크라우프 바, 나파스, 투돌레프 클럽 모두가 그 친구 소유지.

그 사람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손영만이 상체를 뒤로 조금 젖혔다.

한국 사람이라던데, 마피아 간부이고.

근대그룹 총회장인 강우진의 손녀사위가 될 친구야.

지금 손녀가 와 있어요. 그 친구를 만나러.

놀라 눈을 껌벅이는 그를 향해 박기동이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상가로 진출해서 수십 개의 사업장을 지을 거요. 그 친구만 잡으면 손형 사업은 만세삼창을 부르고 끝납니다.

그렇다면 박형이 ‥‥‥」

내가 조금 알지요, 그 김상철이라는 친구를.

박기동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손형이 애태우는 것을 보다 못해 말씀드리는 거요. 그 친구가 도무지 나서기를 싫어하기도 하고.

 

김상철이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던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어서 오너라.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머리를 숙이는 김상철에게 다가온 그가 팔을 뻗어 어깨를 쳤다.

그래, 너도 잘하고 있더구나.

그들은 소파로 다가가 마주 앉았다. 강회장이 근대리아에 온 지 보름째 되는 날 아침이다. 그동안 강미현은 매일 만나다시피 했지만 강회장과의 대면은 처음이었다.

내가 온 지 꽤 되었지만 바빴다. 하지만 네 이야기는 매일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뜬 강회장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지금 타운에서 네가 관리하는 사업장이 몇 곳이더라?

, 27개이고 그중 파벨이 투자한 곳이 8, 지난번 근대에서 인계받은 곳이 10, 그리고 제가 만든 곳이 7, 기타가 2개입니다.

기타라니?

, 제 자본은 아니지만 제가 보호해주는 곳입니다.

강회장이 생각난 듯 탁자 위에 놓인 커피포트를 들어 잔에 녹차를 채웠다. 김상철 앞으로 녹차 잔을 내려놓은 그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 마피아하고는 어떻게 할 계획이냐?

파벨은 근대시의 사업장은 직접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그놈이 널 실컷 이용만 했군. 그렇지 않나?

저도 그 사람 덕분에 기반을 굳힐 수가 있었으니 서로 이용한 셈입니다.

그것도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찻잔을 들었는데 이제 얼굴에 웃음기는 보이지 않는다.

네 세력은 얼마나 되느냐?

문득 강회장이 그렇게 물었으므로 김상철은 긴장했다.

, 세력이라면 ‥‥」

네 부하들 말이다. 듣자 하니 그 강도단 놈들도 끌어들였다던데.

, 회장님. 그들은 이제 완전히 우리 편이 되었습니다. 이곳에 정착하려고 가족들을 데려오고 있습니다.

모두 몇 명이냐?

그들까지 포함해서 350명 정도를 데리고 있습니다.

무장 세력을 말이지?

김상철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무장 세력의 규모로 본다면 마피아가 백, 북한계도 그와 비슷한 숫자이고 삼합회는 아직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3, 4백이 넘을 것이다. 그러나 삼합회가 근대시로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면 그들은 세력을 대폭 증강할 것이다. 강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획단에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난 그자들도 선별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자들이 투자 열기를 일으키는 효과도 있는 데다가 결국은 우리가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야.

「‥‥‥」

그래서 너한테 그자들을 조정할 책임을 맡기기로 했다. 경비본부와 긴밀하게 협조해서 타운에서와 같은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써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타운에서 네가 관리하는 마피아 업체들도 그들에게 떼어줘야겠군.

그러려고 합니다. 하지만 파벨과는 서로 협조하는 사이로 지낼 생각입니다.

상가 지역 계획서는 보았나?

, 회장님.

그리고 너한테 운송 사업을 맡기기로 했다. 근대리아에는 본부의 운송부와 네 운송회사, 그 두 개의 운송체제만 있게 될 것이야.

, 회장님.

나는 아직 너에게 익숙해 있지 않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너는 지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나도 노력하는 중이니까 너는 더욱 그래야 될 것이야. 내 꿈을 안다면 적은 욕심은 버려라. 그래야 내가 너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진정한 가족으로 말이다.

 

간부회의를 마치고 상담실로 들어선 전규영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고마쓰에 있던 미스터 강이 구속되었어, 그 자식 방심하고 있다가 고마쓰 직원의 감시에 걸린 거야. 그 일 때문에 회사가 지금 비상이 걸려 있어.

미스터 강이라니요?

안인석이 묻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자넨 이름을 모르고 있겠구만. 강규호라고 2년 동안 그곳에 침투해 있던 친구야.

안인석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것, 야단났는데요. 구속되었다면 모두 털어놓을 것 아닙니까?

그 바보 같은 놈이 정보를 빼돌리는 현장에서 잡혀버렸으니 변명을 할 여지가 없어.

시계를 들여다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 밀러가 올 시간인데 안인석 씨가 내 대신 상담을 해. 대충 알 테니까.

어디 가시려구요?

그 일 때문에 나가봐야 돼. 강규호 와이프한테는 이미 감시가 붙어져 있을 테니 하다못해 장인이나 장모를 통해서라도 그에게 말을 전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 그걸 왜 과장님이‥‥‥‥」

나뿐만이 아냐, 지금 여러 명이 뛰고 있어.

전규영이 상담실을 나가자 혼자 남게 된 안인석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영국의 대리점 사장 밀러와의 약속 시간은 20분쯤 남아 있었다. 상담실을 나온 그는 회사 빌딩 지하실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곧장 안쪽에 있는 공중 전화박스로 다가간 그는 카드를 넣고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자 그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몸을 돌려 빈 커피숍을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곧 귀에 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성그룹 비서실의 이재환 과장이다

납니다. 안이오.

그렇지 않아도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재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거기 어딥니까?

회사 지하의 공중전화요.

좋아요, 매사 조심해야지. 그런데 지금 그곳 분위기는 어때요?

비상이오.

그렇겠지. 이건 토픽뉴스감이니까. 아마 내일쯤 일본 정부에서도 움직일 거요.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온 것이다.

그렇게 크게 벌어질 사건이라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겁니까? 구속시키고, 토픽뉴스감이라니, 더구나‥‥‥」

그렇게 되었어요, 안형. 하지만 안형한테는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리고 안형은 아마 10월 말이나 11월 초 인사에 포함되는 것이 확실합니다. 내가 전에 말했던 대로 오사카 지사로 가게 될 거요.

이쪽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이재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형, 듣고 계시오?

듣고 있어요.

그쪽이 지금 어떤 분위기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을 겁니까?

 

다이애나 클럽은 안인석이 대학 시절 때 자주 다니던 곳으로 강남의 고급 칵테일 바였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거의 찾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빴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미 때문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에는 그녀와 같이 다니던 장소는 결코 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다. 안인석이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어둑한 클럽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그쪽으로 다가가는 안인석을 향해 웃어 보인 것은 이유미이다.

오늘은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이미 술을 시켜놓은 이유미가 그의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내가 맞춰 봐?

그렇게 묻는 그녀의 표정은 밝다.

나쁜 일이겠지, 그렇지? 인석 씨는 감정 상태가 표정에 금세 드러나.

안인석은 잔을 들어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억울해, 아니, 갑갑해.

낮게 웅얼거리듯 말했지만 이유미는 그 말을 들은 모양인지 두 눈이 둥그레졌다.

뭐가?

그러나 안인석은 잔에 술을 따라 입 안에 털어놓고 나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홀 안이 잔잔한 노랫소리에 덮여 있었다. 낮고 맑은 목소리를 가진 이태리 가수였다. 빈 잔이 보이면 서로 채워주고 때로는 자작을 하면서 그들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이윽고 술 한 병을 더 시킨 이유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힘든데 억지로 매달려 있을 필요는 없어. 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r‥‥‥」

일단 털어내고 나면 쓸데없는 승부 욕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하던데.

안인석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 김상철이가 살아 있는 걸 알아?

그래? 어디에?

상반신을 세운 이유미의 얼굴이 팽팽해졌다.

서울에 있어?

시베리아에.

다행이네.

악몽이지, 나한테는.

놈은 이미 상당한 실력자야. 이제 내 목줄을 쥐고 있어. 나는 그놈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사정을 아는 이유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아무려나. 그때 상황이 ‥‥‥」

난 그놈 연락을 받고서도 미정이한테 그놈이 살아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어, 하긴 그때 그놈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리고 난 대전에 내려가지도 않았고‥‥혹시 미정이가 대전 내려가서 아버지한테서 그 말을 들을까 봐. 미안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어.

그놈은 지난 5월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한국을 다녀갔어. 난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그놈의 시선이 그때 분명히 내 몸을 훑었을 거야. 그리고 미정이도.

술잔을 든 안인석이 다시 술을 삼키고는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이제 물러설 수는 없어. 비록 그놈이 로열패밀리가 되더라도.

무슨 말이야?

그놈은 지금 회장 손녀와 가까운 사이라는 거다.

난 다음 달에 오사카 지사로 쫓겨 갈 모양이야. 그것은 그놈의 복수가 시작된다는 증거지.

그만두면 되지 않아? 회사를.

안인석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술잔을 연거푸 비웠지만 술을 입에 대지도 않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다고 끝낼 놈이 아니야.

놈이 노리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 테니까, 나와 미정이 둘이다.

난 회사에 남아 있겠어. 그리고 내 식으로 해나갈 테다. 그놈이 나를 아는 만큼 나도 그놈을 잘 아니까.

술 그만 마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유미가 말했으나 안인석은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우선 내 가정을 파탄시키겠지.

한번 만나보지 그래? 그래서 ‥‥‥」

이미 끝난 일이야. 엎질러진 물이라구.

빈 잔을 내려놓은 안인석이 이유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리 옮기자, 괜찮지? 네 남편 미국에 가 있다며?

잠시 안인석과 시선을 마주치던 이유미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깜박 잠이 들었던 안인석은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의식은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이곳은 테헤란로의 파크 호텔이다. 그리고 자신의 하반신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 있는 것은 이유미이다. 그가 손을 뻗어 옆쪽의 스탠드 불을 켜자 이유미가 뒤치락거리더니 그에게 온몸을 붙여왔다. 그 순간 안인석은 자신과 이유미가 모두 알몸인 것을 깨달았고 격렬하면서 자극적이었던 그녀와의 정사를 떠올렸다.

벌써 세시야.

손으로 그의 다리 사이를 쓸어 올리면서 이유미가 말했다. 약간 코가 막힌 듯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집에 들어가야지, 자긴.

자신은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안인석은 냉장고로 다가가 음료수 캔을 꺼내 들었다.

나도 냉수 한 컵 줘.

상반신을 세운 이유미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그녀는 드러난 상반신을 감추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고 그에게 물잔을 건네주는 안인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곧 상반신을 세운 자세로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지?

이유미가 조금은 감동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안인석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술은 깼으나 머리가 아팠고 입 안이 썼다.

정말 집에 안 들어가도 돼?

내 걱정으로 그러는 거야?

걱정은 무슨, 내가 불안해서 그러는 거지.

얼굴에 웃음을 띠운 이유미가 시트를 당겨 아랫배를 덮었다.

다음 달에 오사카로 발령 나면 정말 갈 생각이야?

가겠다니까.

가족은 데리고?

나 혼자.

? 거긴 못 데리고 가게 돼 있어?

갈 수는 있지만 당분간은‥‥‥」

박미정 씨는 알아?

알긴 뭘 알아.

이유미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다리 사이를 쓸었다

그럼 내가 오사카에 자주 들릴게.

내가 도와줄게.

그럴 필요는 없어.

정말 김상철이가 자기를 벼르고 있다고 믿어?

그러자 안인석이 얼굴을 돌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는 동안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상체를 안인석에게 반쯤 기댄 이유미도 숨을 죽인 듯 잠자코 있다.

, 자기야.

안인석의 목소리가 방의 정적을 깼다.

, 여기 상가집인데, 어제 갑자기 친구한테서 연락이 와서,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거든‥‥ 미안해, 전화 못 해서. 경황이 없어서 전화를 못 했어. 지금 몇 시야?‥‥ 나 여기서 밤새우고 회사로 바로 가는 게 낫겠어‥‥ 여긴 상계동이라 멀어. 그래. 어디 가서 사우나나 하고‥‥‥ 그래. 아침에 회사에서 전화할게.

그리고는 전화를 때려 부수듯이 내려놓은 안인석은 앞쪽을 노려보았다. 마악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 이유미가 다시 입을 닫았을 때 그가 뱉듯이 말했다.

어디 두고보자구.

「‥‥‥‥」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그동안 이유미의 손안에 잡혀 있던 자신의 남성이 어느덧 뜨거워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유미가 몸을 굴려 자신을 타고 앉자 그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신문 봤어요?

식탁에 앉아 있는 안인석에게 박미정이 다가왔다. 손에는 신문을 접어 들고 있다.

, 화장실에서 봤어.

세상에, 야단났네.

대충 타이틀만 읽었던 모양으로 그녀는 앞자리에 앉더니 신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된장국을 떠 입에 넣은 안인석은 입맛이 썼으므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문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보도된 것은 근대전자의 산업스파이 사건이다. 2년 동안이나 일본 고마쓰 상사의 한국지사에 심어두었던 정보원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특종기사였다. 더욱이 근대전자는 정보원의 자백을 염려해서 그의 처남을 통해 면회를 시키려는 공작을 하려다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근대전자 기획실의 모 과장이 처남을 설득하는 대화 내용을 증거로 하여 강규호로부터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박미정이 신문에서 머리를 들었다.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세상에, 이걸 어떡해.

그녀는 아직도 근대맨이다. 남편이 근대전자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비서실에서 일하던 때의 감정 상태 때문이다.

큰일 났네, 회장님이 아시면‥‥‥」

안인석이 수저를 내려놓자 그녀가 밥그릇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요? 밥맛 없어?

, 입맛이.

이 강규호라는 사람, 자기는 몰라?

내가 알 리가 있나.

기획실의 서과장이라는 사람도 당하게 되겠네.

할 수 없지, .

식탁에서 일어선 안인석은 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보통 때보다 조금 빨리 집을 나서는 셈이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씩 셋씩 모여 있는 사원들의 화제는 모두 강규호에 관한 사건일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간부회의가 열렸고 회의가 끝나 간부들이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1030분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전규영은 점심시간이 끝난 오후 130분이 되어서야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다시 대리급 조장들과 상담실에서 회의를 마친 것은 오후 3시경, 이제는 안인석의 조장인 박창환 대리가 조원들을 상담실로 불러 모았다. 박창환은 입사 5년의 1년 차 대리이다.

오성이 고마쓰와 연합해서 우릴 간 거야. 별일 아니니까 그 일은 무시하라는 지시야.

박창환이 네 명의 조원을 둘러보았다.

혹시 누가 물으면 모른다고 할 것, 물론 나도 모르는 일이지만.

, 기획실의 서과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인석의 1년 선배로 입사 3년 차인 이광우가 물었다.

듣기로는 서과장도 잡혀 있다던데.

쉬고 있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이맛살을 찌푸린 박창환이 말을 이었다.

이건 고마쓰보다 오성이 주도해서 우릴 견제하려는 거야. 근대리아 개발 이후로 급격히 올라간 우리의 명성을 깨려는 의도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부딪쳐왔으므로 안인석은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근대리아는 이제 차츰 한국인들의 꿈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면적의 시베리아, 그곳에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TV에서는 매일 눈에 덮인 끝없는 대지와 그곳에서 일하는 활기찬 근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답답할 때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근대리아에나 가겠다'라고 유행어처럼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곳이 마지막 기회의 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그런 꿈을 갖게 해준 근대그룹에 대해서 호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최선호 전무는 이재환 과장이 보고를 마치자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근대가 강규호의 처가 쪽에 접근할 것이라는 정보가 아주 적시에 들어왔어. 이과장이 수고했다.

아닙니다, 마침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이재환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쓸었다. 비서실 안쪽에 있는 최선호의 집무실 안이었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밝게 빛났고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재환이 머리를 들었다.

안인석의 김상철에 대한 피해의식은 예상보다 강합니다. 솔직히 그가 그렇게 협조적으로 나을 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내가 김상철이를 알지.

쓴웃음을 지은 최선호가 말을 이었다.

환경 탓이기도 하겠지만 독사 같은 놈이다. 그놈과 절친했던 안인석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안인석이는 피해의식이라기보다 아마 공포심 때문에 우리에게 의지해 왔을 거야.

안인석은 의지가 약하고 끈기가 없습니다. 그 친구를 끌어들이려면 끊임없이 자극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오사카 발령은 확실한가?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이달 말에 인사발표가 나갈 겁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최선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위에서 작용한 것이 확실하지?

그렇습니다. 근대전자 자체에서 그런 결정을 내릴 이유도 결정을 내렸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강미현과 강재원 그리고 근대전자의 경영진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김상철이 강미현에게 안인석의 조처를 부탁했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고 사정을 아는 강미현의 독단일 수도 있습니다. 강미현은 개성이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안인석의 행태를 알았을 가능성이 많고, 그래서 김상철 대신으로 조처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안인석은 요즘 옛 애인을 만나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여행사 대표로 있는 여자인데 만나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파탄이로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최선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박미정한테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털어놓을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 성격에 다른 상대를 찾을 수밖에.

그는 앞에 앉은 이재환을 바라보았다. 분석력이 뛰어나고 업무 의욕과 집념이 강해서 과장급으로는 그가 직접 일을 맡기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에게 안인석과 같은 인물은 부담 없이 이용하고 도태시킬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최선호는 얼굴에 문득 웃음을 띠었다. 안인석을 이용해 보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자 이재환은 근대의 명성에 찬물을 끼얹는 큰 성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용할 조건까지 갖춰놓은 것이다.

수고했어.

만족한 듯한 최선호의 표정을 읽은 이재환이 활기차게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집무실을 나갔다. 최선호는 한동안 그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이재환의 모습에서 김상철을 본 것이다. 유형은 다르지만 오성에도 김상철과 같은 인물이 있었고 또한 안인석과 같은 제물이 있을 것이었다. 이것이 총 없는 전장인 직장생활의 실상이다.

 

회사 근처의 일식집 안이다. 방 안에 자리 잡고 앉은 전규영과 안인석은 생선회 안주로 정종을 마시는 중이었다. 퇴근하고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인데 저녁 8시가 되자 정종 주전자는 세 개째 비워졌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동안 그만큼 마셨다면 빨리 마신 셈이다. 이윽고 강규호 사건과 오성그룹의 모략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난 전규영이 술잔을 내려놓고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이봐, 안인석 씨. 당신. 오사카 지사로 발령이 났어. 111일 자로.

그는 잠자코 바라보는 안인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고 있었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할 수 없지. 이번 인사는 경영진에서 정책적인 차원으로 조치한 거야.

오사카 지사를 강화시킨다는 이유이고 안인석 씨는 그곳에 필요한 인물로 결정된 거야. 그리고 사원급 물갈이가 대폭 있어. 우리 부에도 대여섯 명쯤.

오사카 지사는 저 혼잡니까?

안인석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 혼자야. 왜냐하면‥‥‥」

아니, 그만 됐습니다.

그의 말을 자른 안인석의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그것만 알면 됩니다.

오사카 지사 발령은 영전이야. 그것은 알고 있지?

압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

아무 생각 없습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전규영이 정색을 했다.

내가 엄과장한테 들었는데 당신 신입사원 때 오사카 파견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하고는 경우가 달라. 그땐 강형문이의 편파적인 감정이 개입되었던 것이고‥‥‥」

「‥‥‥」

지금은 엄연히 유능한 사원으로 차출되어 보내지는 상황이란 말이야.

퇴근하는 그를 잡고 단둘이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안인석을 설득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전규영이 열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침에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누굴 찾아간지 알아? 중공업의 강실장님을 찾아갔어. 사원 한 명의 인사 문제를 그 양반께 부탁하려고.

그리고는 그는 입맛을 다시더니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직사하게 깨졌어. 난 그 양반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단 말이야.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오늘같이 어수선한 날에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찾아간 내가 어이없는 놈으로 보였겠지.

이를테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었는데 하긴 어느 누구도 그 이상의 노력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안인석이 입을 열었다.

가지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 주겠나?

활짝 펴진 얼굴로 전규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했어. 나도 뉴욕 생활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허송 생활이 아니었어. 상사맨이 되려면 꼭 해외주재원 생활을 해야 된다고 나는 믿고 있어. 현지에서 감을 익혀야 된단 말이야.

그의 길고 열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인석은 박미정이 아닌 이유미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것이 결코 그녀 탓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박미정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요즘 자기 무슨 일 있어?

박미정이 몸을 돌려 그를 향해 누웠다. 방의 불을 껐으므로 방 안은 어두웠으나 그녀의 흰 얼굴과 검은 눈동자는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그가 다시 천장으로 머리를 돌리자 그녀의 손이 가슴 위에 놓여졌다.

회사 일로 그러는 거야?

, 조금.

조금이라니?

안인석이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으므로 박미정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말할 것이 있어.

가만, 불을 켜고.

그러나 일어서려던 박미정은 안인석에게 잡혀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 야광침이 새벽 1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주 멀리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 왔다가 사라져 갔다.

, 오사카 지사로 발령이 났어.

안인석은 자신의 목소리가 메말라 있는 것을 느끼고는 헛기침을 했다. 검은 동자가 더욱 뚜렷해진 박미정의 얼굴이 가깝게 떠 있었다.

열흘 후야, 111일 자. 회사에서는 지사 업무를 강화할 목적으로 그랬다고‥‥」

박미정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난 간다고 했어.

문득 손을 뻗은 박미정이 그의 손을 잡았다.

자기, 잘했어. 정말.

지금은 지난번하고 경우가 다르니까 자기는 영전한 것이나 다름없어.

지사 업무를 강화시킨다는 말이 맞을 거야. 그 말은 나도 들었거든.

난 당분간 혼자 가 있어야 돼.

내가 얼른 이곳 정리하고 따라갈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곳에서 시간 나면 우리 여행을 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 재미있을 거야.

「‥‥‥」

2년 기간일 테니 그렇다면 우리 아기도 일본에서 낳을지 모르겠네.

박미정의 손끝이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일로 요즘 그렇게 심란했어? 나한테 말하기도 걸렸고?

몸을 안인석에게 붙인 박미정이 속삭이듯 말했다.

자기가 어디로 가든 그리고 어떤 결정을 하든 따라갈 테야.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고 기운을 내.

 

논현로에 있는 작지만 깨끗한 커피숍 체인점 앞에서 이유미는 택시를 세웠다 10월 하순 오후, 하늘은 맑았지만 약한 햇살에 대기가 건조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그녀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섰다.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조금 늦었어요.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말하자 40대의 사내가 마른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아닙니다, 저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서요.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커피를 시킨 이유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다 되었습니다.

사내가 옆쪽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두툼한 서류 봉투를 탁자 위에 놓았다.

최근 한 달간의 행적이 시간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복잡하더군요.

사내가 힐끗 이유미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관계가 하나둘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애를 먹었어요. 인력과 비용이 예상보다 훨씬‥‥‥」

봉투를 열자 두툼한 서류와 각 서류마다 끼워진 사진이 드러났다. 대충 훑어보는 시늉을 하던 이유미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흥신소 사장으로 그녀가 한 달 계약으로 고용한 사내였다. 조사대상은 홍만규와 그녀의 전 애인이었던 신명인이었다.

그 여자한테 홍만규 씨가 몇 번 갔지요?

그녀가 묻자 사내가 손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 미국 가시기 전에, 그러니까 한 달이 아니라 20일로 계산해야지요. 20일 동안 두 번입니다.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 놓고 돌아갔다.

그 여자하고 같이 있는 사진은요?

, 거기‥‥‥」

사내가 서류를 뒤적여 사진을 찾아주었다. 망원렌즈로 찍었는지 배경이 조금 흐렸지만 창가에 나란히 서 있는 홍만규와 여자의 얼굴은 또렷했다. 셔츠차림의 홍만규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서 있었다. 이유미가 사진 속의 홍만규를 향해 쓰게 웃고는 머리를 들었다.

이 여자, 남자가 많아요?

, 한 달 동안에 동침했던 남자가 거기 홍사장 포함해서 네 명, 횟수로는 12, 각 남자 별 동침 횟수와 장소는 거기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홍만규 씨는 겨우 두 번이란 말예요?

, 하지만 두 번 모두 아파트에서 했고 또 아무래도 스폰서니까 제일 비중이 크지요.

그가 다시 손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거기 아파트의 등기부등본 카피가 있습니다. 거기에 원소유주가 조동철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사람은 홍사장 부친의 부동산 관리인입니다.

그러니까 조동철 씨한테서 신명인이가 사 간 것으로 등기되어 있단 말씀입니다.

신명인의 나이는 26, 학력은 대학중퇴에 부모는 대구에서 상업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고 대학 다니는 남동생이 한 명 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놈 중 두 놈은 건달입니다. 하는 일 없이 먹고 노는 놈들로 거기 신상명세서가 있습니다.

나머지 한 놈은 기둥인데‥‥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인이한테 얹혀사는 놈이란 말씀입니다. 가끔 신명인의 차를 몰고 나가서는 은행 심부름도 합니다.

이유미는 설탕과 프림을 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여유 있어진 자신을 느꼈다.

 

 

 

5. 음모

근대시에서 돌아오는 차 안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어서 최복수는 지프의 속력을 줄였다.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와이퍼가 아래쪽으로 내려간 순간에는 이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세지는 것이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으나 벌써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한이 손바닥으로 유리창 안쪽에 덮인 습기를 닦아냈다. 근대시와 타운 사이에 위치한 도로인 탓에 가끔씩 근대마크를 붙인 트럭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갈 뿐 차량의 통행도 드물어진 시간이었다.

오늘이 며칠이냐?

문득 뒷자리에 앉은 김상철이 물었으므로 최복수는 긴장했다. 그러나 대답은 이한의 몫이다.

, 111일입니다.

반쯤 몸을 돌린 이한이 대답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20일이 되었구만.

그러자 이한이 그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는 몸을 굳혔다. 황윤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중국인 거리로 그녀를 찾아 나서려던 그는 김상철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20일이 지난 것이다.

눈이 꽤 오는구만.

김상철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오늘 같은 날은 공사가 일찍 끝날 테니 초저녁부터 가게에 손님들이 몰리겠다.

어제 직업소개소의 왕씨라는 놈을 잡아서 창고에 가둬두었다.

그레고리가 그놈한테서 자백을 받아냈는데 황윤이는 색시방을 도망쳐 나오다가 잡혔다는 거다. 그것이 일주일쯤 전 일이라는데 황윤이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

지프는 마악 타운의 입구를 지나 위쪽으로 가고 있었다. 김상철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이한은 몸을 돌렸다. 이제 삼합회가 타운의 중국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타운을 혼란에 빠뜨렸던 지난번의 연쇄사건도 모두 그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나서 전쟁의 위기는 잠시 가라앉았다. 양대 세력인 마피아와 북한계가 모두 삼합회 농간에 놀아난 것이다. 삼합회는 자신들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별다른 투자도 하지 않은 채 타운의 3대 세력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환강부에서 중국인 거리로 위생점검을 나갈 것이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거리 안쪽의 민가까지 샅샅이 점검할 거야. 중국인 거주지는 위생 상태가 나쁘다고 소문이 나 있거든.

응접실로 들어선 김상철은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걸쳐놓고는 탁자 위에 있는 보드카 병을 들었다. 페치카에서 장작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방 안은 훈훈했다. 오늘은 근대시에 들러 유장석과 간부들을 만나고 돌아온 참이었다. 거의 매일 이곳에 찾아왔던 강미현은 며칠 전에 강회장을 따라 서울로 돌아갔다. 소파에 앉은 김상철은 술병을 기울여 두어 모금을 삼켰다. 짜릿한 알코올이 식도를 흘러 위장에 가라앉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방문이 열리더니 부하가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곧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30대쯤으로 웃음을 띠운 환한 얼굴이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박기동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허리를 깊게 꺾으면서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박 선생님.

그의 손을 잡으면서 김상철도 반가운 듯 말했다.

바빠서 이제야 뵙습니다. 진즉 뵈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 송길수를 찾아와 김상철과의 면담을 요청해왔던 것이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타운 호텔에 묵고 계신다구요?

김상철이 묻자 박기동이 다시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 꽤 오래되었습니다.

무역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본래 중국에 신발공장을 갖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만두었습니다.

요즘 들어 거래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김상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이 무역업자들로 개발에 필요한 갖가지 상품을 팔려는 사람들이었다. 잠자코 있는 김상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인력수출이라고 하면 맞는 말이 되겠지요. 갖가지 인력을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업별로 나누면 군인에서 전기기술자까지, 그것을 또 여자만 분류해서 말씀드리자면 간호원에서 몸 파는 여자까지 . 제가 다른 장사꾼처럼 샘플을 갖고 다닐 수가 없어서 유감입니다만 여하간에 어떤 종류의 인력이라도 공급해드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김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 대단히 다양한 상품입니다.

, 그리고 수량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품질에 대해서도 염려하실 것 없지요.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발 달린 인간이라 내보내면 제 발로 돌아갈 것입니다. 손해 보실 것이 없습니다.

근대리아 본부에 말씀해 보셨나요?

그쪽은 아시다시피 그룹 차원에서 모집하고 있어서요.

박기동이 상체를 조금 숙이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김 사장님께서 꼭 필요로 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오래 기다리고 있었지요. 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김상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럼 인력은 한국에서 데려오는 겁니까?

, 고급인력은 주로 그쪽에서‥‥‥ 잘 아시다시피 아무래도 한국 사람은 그, 3D 업종은 피하는 형편이라서요.

그렇다면 다른 인력은 어디서?

중국의 조선족이 제 주력상품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태국이나 필리핀, 또는 방글라데시에서 동원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김상철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박 사장님은 지금 나에게 어떤 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여자지요, 색시방의 여자 아닙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대답했다.

지금 타운의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101입니다. 여긴 치마만 둘렀다 하면 호박을 데려와도 금값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김 사장님께서는 그‥‥ 마피아 사람들한테서 여자를 공급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김 사장님 소속 사업장의 여자들 질이 마피아나 북한 쪽에 비해서 떨어져 있다는 건 사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것은 마피아가 제 사업장 우선으로 여자를 골라 보내고 남는 여자들을 김 사장님께 보내기 때문이지요.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북한 쪽은 아예 러시아 땅을 휘젓고 다니면서 조선족 여자들을 고릅니다. 그러다 보니 김사장님 사업장 쪽 여자들 질이 떨어질 수밖에요. 그리고 수량도 제대로 공급이 안 되고. 아다라시, 아니, 처녀나 다름없는 조선족 여자들을, 그것도 반반한 애들로만 추려서 얼마든지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주 저렴한 수수료만 두당 계산해서 받으면 됩니다.

 

차 안에 앉아 빈 벌판을 바라보던 이금철이 옆자리의 최태호에게 머리를 돌렸다.

딱 어디가 요지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원체 도로가 넓은데다가 모두 길가의 땅이어서 ‥‥‥」

오랜만에 외출한 이금철의 행차여서 도롯가에는 그들이 탄 네 대의 차량이 나란히 멈춰 서 있다. 바람이 벌판 위에 쌓인 눈가루를 긁어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들은 지금 근대시에 건설될 거대한 상가 부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업장당 5천 평에서 만 평까지 배분해주고 특별한 경우에는 5만 평 한도 내에서 조정해줄 수 있다는군요.

최태호가 말하자 그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미 4백만 평이 넘는 상가부지에 각국의 투자단이 투자계획서를 제출해놓은 상태인 것이다. 그들의 옆을 지프 두 대가 스치고 지나갔다. 속도를 늦추고 길가에 붙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투자단 일행이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타운으로 돌아가자.

 

이금철이 말하고는 고쳐 앉았다.

 

곧 눈이 내릴 것 같다.

 

힐끗 그의 눈치를 살핀 최태호가 시선을 앞으로 준 채 입을 다물었다. 늦은 오후인데다 하늘은 흐려서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평양의 해외사업반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스폰서가 되겠다는 자본주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초조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금철이 모두 도로가의 땅이어서 요지가 따로 없다고 말한 것은 그러한 허탈감을 달래려는 허세였다. 중심가에서 가까울수록 요지이고 그것이 이미 투자신청서를 제출한 각국의 투자단에게 선점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태호가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해외사업반이 조총련 사람들을 설득하는 모양이던데요.

이금철은 잠자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몇 사람을 집중적으로 설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들었어. 그런데 조금 어렵다는 거야. 그럴 돈이 있다면 차라리 나진 선봉에 공장을 짓겠다고 반발을 한다는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이지만 그럴 만도 하지. 이제까지 너무 쏟아부은 덕분에 돈이 말랐으니까.

빠징코의 김원달 씨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은 위험한 투자는 못하겠다고 거절했어. 시베리아 임차지는 한국 땅이고 한국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

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근대시에 진출하려면 타운에서처럼 1, 2백만 달러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최소한 천만 달러 규모의 투자계획서를 내야 검토를 한 후에 승인을 받는다.

최태호는 어금니를 물었다. 이제는 한국 쪽이 북한을 배제시키려고 일부러 조건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스폰서를 찾지 못하면 북한은 근대시에 기반은커녕 발을 딛지도 못한 채 좁은 타운만을 맴돌다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근대의 강회장, 이 영감탱이, 보통이 아니야.

이금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땅에 엄청난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을 보라우. 러시아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 거기에다 일본의 야쿠자까지 돈을 싸 들고 와서 기반을 잡도록 내버려 둔다. 거기에다 한국과 우리까지 끼어들면 다섯 개 세력이 된다. 그것은 마치 동북아시아의 축소판과 같아. 근대리아 땅에 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 영감탱이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최태호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다섯 세력이 각각 제 나라의 국력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근대 마크가 새겨진 코트를 입고 방한모에 마스크를 쓴 환경부 직원들은 사업장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에게도 경원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정기적인 위생검사 외에 불시검사를 실시하여 위생 상태, 전기와 가스의 안전도 검사, 구조물의 안전 상태까지 감독했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경비부보다 더 위력이 있는 기관이다.

환경부 직원들이 들어서자 왕씨는 웃음 띤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수고가 많으십니다.

방문은 모두 열어놓으시오, 화장실까지.

앞장선 직원이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그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서 눈만 보였는데 아마도 중국계 조선족일 것이다. 왕씨가 옆에 선 사내에게 눈짓을 하자 사내가 몸을 돌렸다.

이곳은 합숙소요? 웬 방이 이렇게 많아.

직원이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왕씨가 서둘러 따랐다. 나머지 직원들은 제각기 집 안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애들은 모두 치웠습니다.

중국인 거리 입구에 있는 그릇 가게 안이다. 가게 안쪽의 계산대 옆에 앉은 마연중이 사내 말에 입맛을 다셨다.

며칠 전에는 서쪽 러시아촌을 불시검문하더니 망할 자식들이 오늘은 이쪽이네.

거리 뒤쪽을 재개발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 일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상관없다. 그런데 환경부 직원은 모두 몇 명이나 돼?

20명 정도로 서너 명씩 한 조가 되어서 집중적으로 검사한다는데요.

의자에서 일어선 마연중이 옷걸이에 걸린 슈바를 집어 들었다.

봉우와 안망을 불러서 애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가라고 해라. 앞뒤를 지키란 말이다.

긴장한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 형님, 지키라고만 합니까?

그렇다, 만일을 위해서. 놈들이 얼쩡거리다가 운 좋게 뭔가 찾을지도 모르니까.

, 형님.

나는 대형한테 가 있을 테니 그쪽으로 연락하고.

 

황윤이 눕혀진 곳은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위로 벽에는 옷장까지 붙어 있는 방이었다.

환경부 검사다. 금방 끝날 테니까 그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되겠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화씨가 말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주머니를 뒤져 기름종이에 싼 쥐똥만 한 알약을 손끝으로 집어 들었다.

, 두 개만 드실까? 이것이면 아주 기분 좋게 주무실 수 있을 거야.

그는 한 손으로 황윤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녀의 입속에 알약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주전자 물로 입 안의 약을 삼키게 하고나서 다시 그녀의 입을 벌려 입 안을 확인했다.

, 됐다, 주무셔라.

다시 황윤을 눕힌 화씨가 침대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네 서방님 꿈이나 꾸거라, 이년아.

그가 방을 나가자 황윤은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러진 왼쪽 다리는 부목을 대고 있었는데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성한 오른쪽 다리와 전신에 통증이 왔다. 도망치다가 잡혀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기 때문인데 일주일이 지났어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온몸에 열이 올랐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므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곧 아편의 효과가 올 것이었다. 그러면 통증도 두려움도 잊고 오직 뜨겁고 반짝이는 쾌감만이 온몸을 휩싸게 된다. 문득 이한의 얼굴을 떠올린 황윤은 눈을 떴다. 이제는 이곳으로 들어왔던 자신이 무모했다는 후회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고문에 견디지 못해 모든 것을 자백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도 없다. 이윽고 이한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그녀가 더 크게 눈을 부릅떴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던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이한이 턱으로 옆쪽을 가리키며 앞장을 섰다. 이미 밤 10시 가까운 시간이어서 기온은 영하 20도로 뚝 떨어져 있었다. 이한과 뒤를 따르는 최복수와 정기만 세 사람 모두 환경부원 차림이었다. 그들이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을 걸어 나가는 동안 스치고 지나간 서너 명의 사내는 모두 놀란 듯 양쪽으로 비켜섰다.

이곳은 중국인 밀집 주거지역의 한복판으로 대낮에는 경비부원도 들어서기를 꺼리는 곳이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일부 조선족 경비원들은 중국계 사내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경향까지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한이 문득 걸음을 멈추자 최복수 등도 따라 멈췄다. 그들은 다시 갈림길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저쪽이다.

이한이 다시 오른쪽을 가리켰다. 소개소 왕씨가 말해준 대로라면 오른쪽 골목은 막혀 있어야 한다. 뛰듯이 골목길을 달려간 이한은 앞을 가로막은 나무 문짝을 보았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문짝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나무 문짝을 밀어젖혔을 때 안쪽에서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나타난 사내가 중국어로 물었다.

무슨 일이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정기만이 앞으로 나섰다.

환경부 검사야. 소식 못 들었어?

그는 선양 출신의 조선족으로 중국어가 유창했다.

비켜 서. 우리도 시간이 없다.

이한은 사내를 밀치고 앞을 가로막은 육중한 나무 문을 밀었다. 그러나 안에서 잠근 문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 열어!

정기만이 발길로 문을 걷어찼다. 환경부의 위생 검사를 거부한다면 사업장이나 주택을 막론하고 폐쇄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정기만이 다시 문짝을 내지르자 고리가 빠지면서 문이 열렸다. 안은 넓은 마룻방으로 희미한 전등 한 개가 천장에 매달려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 들어선 이한은 아직도 남아 있던 사람들의 온기와 함께 콧속을 파고드는 매운 듯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편이다. 이곳이 왕씨가 말해주었던 아편방이었다. 그는 몸을 날려 반대쪽 문으로 뛰었다.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대기실이 나타났다.

나무 의자와 탁자가 어수선하게 놓여진 한쪽 탁자 위에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재떨이에 놓여진 담배 연기였다. 이한이 다시 옆쪽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 밤중에 웬 환경부 검사요?

40대쯤의 둥근 얼굴과 몸집을 가진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앉은 채였고 여유 있는 말투였다.

이건 마치 범죄자 수색을 하는 것 같군요, 환경부원이.

이 새끼, 아편 소굴을 운영하고 있었어. 당장에 체포하겠다고 해라.

뒤따라온 정기만에게 이한이 뱉듯이 말했다. 정기만의 중국어를 들은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정말 놀랄 일이군. 이곳은 노동자 합숙소로 근대의 허가증도 받아놓은 곳이오.

그는 이한에게 다가와 섰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등록증이 있는 근대리아 시민이오. 우리가 중국인이라고 해서 차별을 하는 겁니까?

그러자 이한의 옆으로 최복수가 다가와 섰다.

형님,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비부에 연락해서 이 새끼를 끌고 가.

이를 악문 이한이 몸을 돌렸다. 실패다. 5개 조로 나뉘어진 환경부원들이 황윤이 있다는 색시방을 포위하듯 수색하게 했는데 그는 소개소의 왕씨가 자백한 대로 그들의 탈출 예정지인 이곳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환경부원들이나 그도 여자들은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철저히 조롱당한 것이다.

 

그놈이 몸이 달았어.

밀실에 앉은 진대원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며칠 전에는 러시아촌의 환경부 불시 점검을 하는 등 사전에 꽤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늦었다면 아편방에서 그년을 빼앗길 뻔했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골목 입구에 들어섰을 때 겨우 연락을 받고 치웠으니까요.

진대원의 기분이 좋아 보였으므로 마연중도 여유 있는 말투이다.

하지만 대형, 위선생이 경비소에 들어간 것이 걱정입니다. 김상철 측이 악에 받쳐 있을 텐데 혹시나‥‥‥」

내가 일부러 위형을 그곳에 남게 한 것이다.

위형에게 중국에 돌아가라고 했다. 경비소가 위형을 추방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낭패야.

찻잔을 내려놓은 진대원이 정색을 했다.

결국은 그놈들이 여자를 구하려고 움직이는군, 그따위 작전으로 여자를 구해내려고 하다니, 우리를 어떻게 보고‥‥」

제 생각입니다만 놈들이 오늘 밤은 허탕을 쳤지만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은데요. 아마 다시 시작할 것 같습니다.

마연중의 말에 진대원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용준에 대한 원한도 있는 데다가 우리 세력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도 할 테니까.

여자는 어디에 두었지?

마작방의 공씨한테 맡겨두었습니다.

진대원이 생각에 잠긴 듯 벽을 바라보았으므로 마연중도 입을 다물었다.

왕씨가 소개소로 돌아온 것은 다음날 아침이다. 직원이라야 하북 출신의 상군이라는 젊은이 한 사람뿐인 조그만 사무실이었지만 중국인 거리에 한 곳밖에 없는 소개소였다.

감기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빗질을 하고 있던 상군이 묻자 그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김상철의 부하한테 납치되었을 때 왕씨는 상군에게 전화를 걸어 감기로 사무실에 나가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제가 어제저녁에 숙소에 들렀었는데 안 계시더군요. 옆방의 모선생도 모르신다고 하고.

몸이 조금 풀려서 마작방에 갔었어.

자리에 앉은 왕씨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력서가 20여 장 모여져 있었는데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의 실적으로는 적은 편이다.

이봐, 상군, 그동안 별일 없었나?

그가 묻자 상군이 다가와 섰다.

별일 없었습니다. 소개료 받은 것이 50달러 조금 넘고 또‥‥‥」

누가 나 찾지 않았어? 마선생이나 또 다른‥‥‥」

찾지 않았습니다.

숨을 내려쉰 그에게 상군이 말을 이었다.

어제 트럭 편으로 백 명이 넘게 들어왔다니까 오늘은 꽤 올 것 같은데요.

근대리아에 연고를 찾아오는 사람은 적었고 대부분 무작정 들어왔으므로 그들이 들릴 곳은 이곳뿐이다. 왕씨는 입맛을 다셨다.

 

이 자리는 곧 달러박스였다. 직종과 남녀의 차이에 따라 소개료는 각각이었지만 수수료는 달러로만 받는다. 특히 여자 고객들 중에서 색시방 지원자를 넘겨줄 때 업주로부터 받는 사례금 몫이 제일 컸다. 그는 책상을 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봐, 어제 우리 거주지에서 무슨 일 없었나?

글쎄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던 상군이 그를 바라보았다.

, 어제저녁에 환경부 직원들이 위생점검을 했다고 합니다. 그 화선생네 색시방하고 그 근방의 합숙집들을‥‥‥」

일부는 위쪽의 아편방까지 갔던 모양인데 허탕을 쳤다더군요. 그래서 홧김에 아편방에 있던 위선생을 데려갔다고 합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한 상군이 몸을 돌리자 그는 다시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놈들의 구출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에 마음이 놓인 것이다. 거기에다 그 끔찍한 송가놈도 앞으로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쪽만 모르고 있으면 지난 이틀간은 악몽으로 접어두고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이 열렸으므로 그는 머리를 들었다. 마연중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웃음 띤 얼굴을 보는 순간 왕씨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난 이틀간의 악몽보다 더한 것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한의 눈이 벌개진 것은 낮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대작하고 있는 것은 김상철이었다. 송길수는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더니 다시 오지 않았으므로 둘이서 잔을 주고받는다. 오전 1030분이었지만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잔뜩 흐린 날씨였다. 보드카를 한 모금 삼킨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지금 서울에서 내 친구와 결혼해서 살고 있지.

그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지금도 내가 이곳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내 친구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아. 무슨 일이냐 하면 내 친구가 그 여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녀를 속였다는 것이다. 그놈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여자에게 알려질까 봐 교도소에 있는 내 부친한테도 그 말을 전해주지 않았거든.

술잔을 든 채로 잠자코 있는 이한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서울에 갔을 때 숨어서 그 여자를 훔쳐보았다.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 보고 싶어서. 그래, 기다려주지 못한 그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내 친구하고 함께. 그러면 미련도 없이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김상철은 여자 이야기는커녕 집안 이야기조차 꺼낸 적이 없다. 이한은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졌다.

이해하는 척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잊을 수도 없었다. 행복을 바란다는 따위의 우스운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감히 나설 처지도, 분위기도 아니었으므로 이한은 술잔만 내려놓았다.

지금도 그 두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끓어오른다. 그들이 차라리 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으니까.

이한을 바라보며 김상철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한테 내색한 적이 없고 어떤 행동을 한 적도 없다. 그저 그들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에 칼질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왔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만 될 것 같다. 이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내 개인의 일이야.

이한이 머리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서둘렀기 때문에 형님 체면에 먹칠을 했습니다.

이놈아 체면은 무슨, 우스운 소리 말아.

쓴웃음을 지은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네가 답답한 것 같길래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한 것뿐이다. 넌 기다리면 된다. 희망이 있어.

 

코즈모프 바의 밀실 안이다. 소파에 앉은 이금철은 최태호와 함께 들어서는 사내를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등을 기대고 앉은 여유로운 자세였다.

위원장 동지.

다가선 최태호가 입을 열자 그는 천천히 몸을 풀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누가 보아도 의식적인 행동이다.

어서 오시오.

사내를 향해 그렇게 말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들어설 때부터 웃는 얼굴을 허물지 않고 있는 사내는 박기동이었다.

박기동이올시다.

, 이씹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마주 앉았다. 박기동의 옆자리에 앉은 최태호는 이제 이금철에게 맡겼다는 시늉으로 아예 딴전을 피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이 아주 좋습니다.' 하고 방을 둘러보던 박기동이 감탄하는 시늉을 했지만 말을 받는 사람은 없다.

, 이번에 북한 축구팀이 말레이시아를 깼더군요. 축하드립니다.

3 0으로 이겼지만, 그전에 중국에 연패를 당해서 월드컵은 이미 물 건너갔다.

올겨울은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던데요.

그렇게 말하는 박기동은 웃는 얼굴 그대로였는데 참지 못한 것은 최태호였다. 그가 상체를 세우고 헛기침을 했을 때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그래, 박선생,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요?

, 그거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전 장사꾼이니까 장사하려고 뵙자는 것이지요.

박기동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만나 뵈려다가 타운 호텔의 터줏대감이 다 되었습니다.

우리하고 장사를 하겠다고?

, .

어떤 장사인데?

그러자 박기동이 정색을 하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장사라고 하시니‥‥ 제가 물건을 팔려는 것으로 오해하신 모양인데 사실 사려고 왔습니다.

무얼 말이요?

여자를 삽니다.

이금철과 최태호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제는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는데 무게중심이 박기동 쪽으로 넘어가 있다.

여자를 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맛살을 찌푸린 이금철이 묻자 박기동이 헛기침을 했다.

색시방 여자, 클럽 종업원, 가게 점원, 안내원, 거기에다 앞으로 근대시에 들어설 수많은 호텔과 클럽, 유흥업소에 필요한 여자 말씀입니다.

「‥‥‥」

물건만 대주시면 얼마든지 사드릴 수가 있습니다. 몸값을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수수료를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수수료는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어야겠지요.

잠깐만.

이금철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말하자면 우리가 물건을 대면 당신이 넘겨받는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공급처에 다시 넘기고, 수수료를 받고 말이야.

맞습니다.

이것 봐.

이금철이 최태호를 불렀다. 그리고 턱으로 박기동을 가리켰다.

똑똑히 봐두라우. 이것이 바로 한국 장사꾼이야. 이놈들은 이렇게 해서 돈을 벌었다구.

눈을 껌벅이고 있는 박기동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이놈은 우리가 죽겠다고 만들어 내면 수수료만 떼어먹고 다른 곳에 넘긴다는 거야. 머리 돌리는 것 좀 보라우.

박기동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혹시 직접 공급하실 데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물론 내가 필요 없지요.

당신은 있나?

물론입니다.

어디야?

김상철 씨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러자 숨을 들여 마신 최태호가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이금철이 박기동을 노려보았는데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계약을 했다구? 김상철이와?

앞으로 김사장한테 필요한 인력은 모두 내가 공급합니다.

아무래도 러시아 땅이나 중국 땅에 있는 조선족들을 모으기에는 이쪽이 나을 것 같아서 찾아왔지요. 하지만 내키지 않으시다면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을 수밖에요. 물론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박기동이 커피숍에 들어서자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손영만이 반색을 했다.

오후 내내 안 보이시던데, 여자 만나러 간 거요?

앞자리에 앉은 박기동이 머리를 저었다.

난 낮거리는 안 합니다.

그럼 우리 슬슬 나가볼까.

저녁 8시가 되어 있어서 타운 전체가 북적이는 시간이다. 손영만이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갑시다. 내가 한잔 살 테니까, 내일 서울로 돌아갈 테니 오늘 밤은 비상금을 풀 생각이오.

방에서 한잔합시다. 나가야 소란스럽기만 하고‥‥ 어디 반반한 여자 하나라도 있어야지.

하긴 러시아 여자들하고는 사이즈도 안 맞고.

손영만은 이제 박기동을 깍듯이 대접하고 있었다. 대개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들끼리는 서로 업종이 다르더라도 경계심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했다거나 골탕을 먹은 사례가 많은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에게 더 큰 경쟁의식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실적을 가져가야 하는 상사원들로서는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이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대다. 그러나 손영만은 지금 기대에 차 있었다. 박기동이 김상철과 친밀한 관계라는 것이 사실이었고 힘들게 가져왔던 변기 샘플 두 개도 김상철의 저택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물론 계약이 되었을 때 거래금액의 5%를 박기동에게 수수료로 떼 줘야 하지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은 커피숍을 나와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방에서 손영만의 환송 파티를 하려는 것이다.

박기동 씨, 잠깐만 보십시다.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몸을 돌렸다. 슈바 차림에 방한모를 쓴 두 사내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박기동 씨, 잠깐 우리하고 같이 가주셔야겠는데.

사내 한 명이 부드럽게 말하고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경비본부에서 왔습니다. 저기 전화로 본부에 제 신분증을 확인해 보십시오.

근대리아에서는 연행해가기 전에 반드시 본부에 확인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경비부원의 신분을 가장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끄덕인 박기동이 손영만을 바라보며 웃었다.

환송 파티가 조금 늦겠는데요, 손형.

박형, 무슨 일로‥‥‥」

얼굴을 굳힌 손영만이 묻자 그가 어깨를 슬쩍 치켜올려 보였다.

낸들 압니까? 하지만 손형이 나파스 클럽의 송길수 지배인을 찾아 이 일 좀 전해줄랍니까? 그 사람이 김사장의 심복이거든.

 

그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프런트의 전화기를 향해 다가갔다.

장동택은 안기부에서 근대리아로 파견된 사내로서 경비본부에서의 직책은 보안과장이었다. 보안과는 경비본부의 직할 부서였고 주 업무는 이름 그대로 보안에 관한 모든 것을 통괄하는 것이었는데 쉽게 표현하면 근대리아의 안기부였다. 따라서 5명의 간부는 모두 안기부원 출신이었고 50여 명의 직원들은 대부분 사상이 투철한 한국인이었다.

장동택이 근대시 서쪽에 위치한 보안과의 작전 주택에 도착한 것은 밤 1030분이었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밖의 기온은 영하 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타운에서만 해도 대여섯 명의 동사자가 생긴다.

그가 아래층의 조사실로 들어서자 방 안에 있던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했다. 장동택은 부하들의 절도 있는 자세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그가 해병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30대 후반이 된 그가 아직도 20대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절도 있는 생활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가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놈 데려와.

그러자 부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가는 사내, 의자를 준비하는 사내, 그리고 자료를 챙기는 사내들로 나뉘어져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장동택은 팔짱을 끼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큰 몸집에 두터운 입술을 꾹 다물고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고 있는 그의 별명은 동탁이다

삼국지에서 동탁은 초선이란 계집에 빠져 엉망진창의 삶을 살았는데 그가 그런 엉뚱한 별명을 듣게 된 것은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하들이 박기동을 데리고 들어서자 그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박기동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이것은 박기동의 장사꾼 생활에서 비롯된 습관이었지만 상대방의 대부분이 그런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철썩!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박기동이 옆으로 자빠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세웠다.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두 눈과 입이 쩍 벌어진 얼굴이 되었다.

이 개새끼야, 너 이금철이 왜 만났어?

장동택이 다시 팔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박기동이 몸을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놈이.

장동택의 다른 쪽 손이 날아가 그의 뺨을 다시 쳤다.

두 번 묻게 하지 말란 말이다. , 이금철이 왜 만났어?

, 사업관계로 ‥‥」

아이고!

박기동이 비명을 지른 것은 장동택의 구두 끝이 그의 정강이를 내려쳤기 때문이다. 조인트를 깐 것이다.

사업? 니가 무슨‥‥‥」

장동택이 반쯤 몸을 일으키고 윗도리를 벗어 던지자 부하가 그것을 집어 들어 옷걸이에 걸었다.

, 이 새끼, 부도내고 도망 나와서 한국 땅은 밟지도 못할 놈이 무슨 사업!

아이고.

이번에는 맞은 것도 아니었는데 장동택이 불쑥 상체를 들이대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비명이다.

, 이북으로 넘어가려고 그랬지?

아이고, 제가‥‥‥」

장동택은 상체를 번쩍 세웠고 박기동은 몸을 젖히려고 하다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너 같은 놈은 산 채로 묻어도 혼적도 남지 않는다. 찾을 사람도 없고.

장동택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이 새끼, 며칠 전에는 김사장 찾아가더니 오늘은 이금철이를 만나? 이놈이 무슨 이중간첩이야, 뭐야?

몸을 세우고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은 박기동은 이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이고, 잠깐만요, 제가 무슨, 정말로‥‥‥」

손을 휘저으며 박기동이 정신없이 말했다.

저는 장사하러 갔습니다. 정말입니다. 물어보십시오. 여자 장사를 하러 가서 ‥‥」

뭐여!

장동택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주위 사내들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가득 담겨졌다.

여자 장사?

, 여자를 모아달라고, 제가 판다고, , 김사장께 팔고, 그렇게 해서 ‥‥‥」

겨우 일어나 의자 귀퉁이에 엉덩이 끝만 걸친 박기동은 평소와는 전혀 달리 두서없는 말로 해명을 해댔다.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듣고 난 장동택은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여?

사기 치는 겁니다, 남북한 양쪽에다.

부하 한 명이 단언하듯 말했다. 벽 쪽에 서 있던 부하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이 새끼 혹시 삼합회 끄나풀인지도 모릅니다. 양쪽을 이간질시켜서 ‥‥‥」

아이고, 무슨 말씀을‥‥」

이제 박기동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고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유능한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촉망받던 중소기업 경영자로 승승장구하다가 부도를 맞은 것이 1년 전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다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근대리아로 들어온 것이 말 그대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김상철이 방에 들어선 것은 다음 날 아침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나무 의자에 넋을 잃고 앉아 있던 박기동은 그를 보더니 금방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아이고, 김 사장님.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

방 안으로 들어서던 장동택이 그 말을 들었다.

? 오해? 저 새끼가, ‥‥‥」

그는 김상철의 옆에 서서 박기동을 노려보았다.

오늘 비행기 편으로 널 한국으로 보낼 작정이었어. 그런데 김 사장께서 보증을 서주셨다, 알겠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는 박기동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당분간 너를 김 사장께 맡긴다. 하지만 명심해 둬, 넌 우리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한바탕 경고를 받고 난 박기동은 김상철을 따라 작전 주택을 나왔다. 길가에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오르자 박기동이 옆자리의 김상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금철이가 여자를 조달해준다고 합디까?

, 지원자가 얼마든지 있다고. 하지만 김 사장님이 받으실지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소?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어째서?

누구 손을 거치나 여자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지요.

건설 현장 노동자들처럼 훈련받은 공산당 조직원을 내 사업장에 넣는단 말인가?

근대리아에 있는 조선족 대부분이 북한계 아닙니까? 그건 예상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

사업장에 넣은 후 우리 사람을 만들면 됩니다. 이제 곧 북한에서도 몰려올지 모르는데 조선족마저 경계한다면‥‥‥」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요.

제가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아다녀 봐서 아는데 북한에서 교육시킨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박기동의 말투에 열기가 띄워졌다.

그리고 건설 현장을 보십시오. 공산당 조직이 세력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서울에서 부도를 내고 도망쳐 왔더구만,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에다 사기 혐의로 기소된 수배자 신분이던데……」

그러자 박기동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패가망신했습니다.

타운 호텔에서도 사기를 친 것 같던데.

타운 호텔에서라니요.

눈을 둥그렇게 뜬 박기동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 없습니다.

변기 사업을 하는 사람한테서 나하고 로비하는 데 필요하다고 만 달러를 받았다는데 ‥‥」

아니, 그것은 빌린 겁니다.

김상철이 앞자리에 앉은 송길수를 바라보았다.

누구 말이 맞는 거냐?

송길수가 몸을 돌려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박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박기동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아주 잘하십니다, 박선생님은.

 

안으로 데려가, 내 숙소로.

장인규가 날이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장 클럽의 현관 앞이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장인규는 황윤을 가로막고 섰다. 길바닥에 앉아 있는 황윤은 창백한 얼굴로 몽롱한 시선만을 이리저리 굴릴 뿐 입도 열지 않았다. 사내들이 달려들어 황윤을 안아들었을 때 장인규는 황윤의 치마 속의 다리 한쪽에 부목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텅 빈 클럽을 지나 안쪽의 숙소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어서 식사 중이던 종업원들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황윤은 조금 전에 클럽 앞의 길가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클럽의 종업원 하나가 길가에 두 다리를 쭈욱 펴고 앉아 있는 황윤을 처음 발견했는데 다리 한쪽이 이런 상태라면 제발로 왔을 리는 없다. 황윤은 장인규의 침대 위에 눕혀졌다. 여자들이 달려들어 눈에 범벅이 된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동안 그녀는 순한 어린아이처럼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번갈아 말을 시켜도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지 않는다.

아편을 먹었어요.

중국계 여자 하나가 장인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편 먹으면 이래요, 내가 알아요.

장인규가 뒤쪽에 선 사내에게 몸을 돌렸다.

나파스 클럽으로 연락을 해. 거기에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녀는 다시 침대 위에 누운 황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자들은 그녀의 얼굴과 손발을 물수건으로 씻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가서 안토노프를 데려와.

장인규가 말하자 누군가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안토노프는 러시아인 의사였다.

이한이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20분쯤 지난 후였다. 그때는 이미 안토노프가 진찰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잠자코 황윤을 내려다보았다.

아편을 먹였다는 거야. 그래서 의식이 없어.

옆에 선 장인규가 낮게 말했다.

다리가 부러진 채 부목을 잘못 댄 것 같다고 해. 몸에 타박상이 많고.

그놈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꼴로 돌려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

살 수는 있답니까?

중얼거리듯 이한이 묻자 장인규가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아직 안토노프가‥‥‥」

눈을 깜박이는 걸 보면 우리를 알아보는 것 아닙니까?

아니, 처음부터 그랬어.

그러자 안토노프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본부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낫겠소. 아직 의식이 없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가 마약중독이요, 외상도 많고.

 

차에서 내린 이유미는 가벼운 걸음으로 호텔 현관을 들어섰다. 조금 턱을 든 자세로 시선을 곧장 앞쪽으로 뻗은 채 로비를 횡단한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섰다. 12월 초순의 오후, 맑은 날씨였으나 기온이 낮았으므로 주위에 선 사람들은 모두 두터운 겨울 옷차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가 라운지에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던 홍만규가 손을 들어 보였다. 밝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군.

그녀가 앞자리에 앉자 홍만규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멋져, 정말 아름다워.

그런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요.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당신도 양복이 어울려요, 넥타이도.

라운지에는 두어 팀의 손님뿐으로 한산했다. 차를 주문하고 난 홍만규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맥도웰과 1시 약속인데 괜찮다면 당신과 같이 가고 싶은데 같이 식사한 지 오래되었지 않아?

아니, 됐어요.

홍만규가 추진하고 있는 대형 유통 합작 회사는 내년 초에 출범할 예정이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종업원이 돌아가자 그가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잘 돼가요, 회사는.

정말 맥도웰한테 같이 안 갈 테야?

우리 이혼해요,

그러자 홍만규가 알아듣지 못한 듯 부드러운 표정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뭐라고 했어?

이혼하자고 했어요.

당신 무슨‥‥‥」

차츰 굳어지기 시작하던 그의 얼굴이 이유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을 때는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난 당신한테 더 이상 미련 없어요. 헤어져 주세요.

이것 봐.

그랜드 여행사 지분 모두하고 여행사 빌딩을 저한테 위자료로 넘겨주세요, 난 그것만 가지면 돼요. 며칠 안에 정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오늘부터는 집에 오시지 마세요. 내일 중으로 당신 짐 모두 꾸려서 청담동 신명인의 아파트로 보내든지 아니면 본가로 보내드리든지 할 테니까.

당신 정말 왜 이러는 거야?

홍만규가 눈을 치켜떴다. 하얗게 되었던 그의 얼굴이 차츰 붉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야?

조금 심하게 할까요? 당신이 거부한다면 내일 중으로 간통죄로 고발할 작정이에요, 그리고 법적으로 위자료를 청구할 생각이고. 당신 재산의 반을 받아낼 수 있다면서 사건만 맡겨달라는 변호사들이 많더군요.

‥‥ 이런.

증거도 모두 갖춰져 있으니까 추태 보이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내 말은 이제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건가?

, 그래요. 필요 없어요, 이젠.

여행사와 빌딩을?

집까지 끼워 넣을까 했는데 그건 뺐어요.

당신, 이제 보니 정말‥‥‥」

내일 아침에 당신 사무실로 제 변호사가 갈 거예요, 서류 가지고, 그 안에 당신 변호사와 상의해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이유미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집에 우리 어머니를 오시라고 했어요. 당신은 미국 출장을 갔다고 했으니 나타나시면 안 돼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이연희 여사는 핸드백을 소파 위로 던져 놓더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에이, 엄마는 참‥‥‥」

코트를 벗으면서 박미정이 그렇게 말했지만 웃는 얼굴이었다. 이곳은 친정집이다. 안인석이 오사카로 떠난 후에 그녀는 친정을 찾아오는 횟수가 늘었다.

당신이요?

이쪽에 등을 보인 채 어머니가 소리치듯 말했다. 회사에 계신 아버지께 하는 전화였다.

여보, 미정이가 애를 가졌다우. 금방 미정이하고 병원에서 오는 길이에요. 3개월째라고 합디다.

박미정은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 아버지 전화 받아라.

활짝 핀 얼굴로 어머니가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병원에서부터 어머니는 줄곧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저예요.

이놈아, 축하한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안 서방도 좋다하겠구나, 연락했느냐?

아뇨, 아직.

연락해라, 어서.

.

오늘은 거기 있거라. 그리고 앞으로는 몸 관리를 잘해야 돼.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미정이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어머니, 또 어디다 전화할 데 없어요?

있다. 네 이모하고 숙모, 아이구, .

어머니가 웃는 얼굴로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네 시댁에 연락을 해야지. 그건 네가 할래? 아니면 안서방이, 아니 그것보다 네가 먼저 안서방한테‥‥」

자리에서 일어선 박미정은 화장실로 들어섰다. 말로만 듣던 헛구역질을 시작했을 때 박미정은 그것을 무심히 넘겼었다. 그러다가 생리가 끊긴 것을 알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았던 것이다. 화장실에서 입을 헹구고 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모한테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안인석이 박미정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후 6시경이었다.

자기 바빠요?

아냐, 조금 있다 퇴근하려고.

저녁 꼭 챙겨 드세요.

그는 당분간 지사원 두 명과 함께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 나 오늘 병원에 갔다 왔는데 ‥‥‥」

박미정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나 임신했어요. 3개월이래.

뭐라고!

퍼뜩 머리를 든 안인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직원은 없다.

그거 정말이야?

목소리가 컸으므로 앞쪽의 직원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놀랬어요?

그럼, 아니, 그게 정말‥‥」

안인석이 말을 더듬자 박미정이 웃음소리를 냈다.

지금 어머니한테 와 있어요, 친정.

그래?

좋아요?

그걸 말이라고 해?

잠깐만요, 엄마가 바꿔 달래요.

곧 이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아, 축하하네.

, 저도 정말‥‥‥」

애 아빠가 되겠어, 이젠.

.

통화를 마치고 나자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앞쪽 자리의 서현섭이 코트를 걸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 형, 서울 전화야?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서현섭이 궁금한 듯 다가섰다.

, 무슨 일 있어?

안인석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오사카 지사는 상무급 지사장에 현지인을 포함한 지사원 수가 30명이 넘는 1급 지사이다. 지사원은 근대그룹의 주력기업인 근대상사, 중공업, 전자와 해운 등에서 파견된 사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전자는 네 명이었다. 안인석과 함께 회사를 나와 식당에 마주 앉은 서현섭도 전자 소속으로 그와는 입사 동기였다. 그러나 신입사원 때 오사카에 파견된 서현섭은 고참이다. 안인석은 현지 사정과 업무 현황에 밝았고 거기에다 일본어까지 유창하게 하는 그에게서 배울 것이 많았다.

왜 그래? 우울하게 보이는데.

그렇게 보여?

그래, 아까 전화 받고 나서부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안인석이 정종 잔을 들고 한 모금에 삼켰다.

술이나 들자구. 오늘은 그냥 술이나 실컷 마시고 싶구만.

그릴 때도 있지.

식당 안은 퇴근한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논현동이나 인사동 골목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다음 날 아침. 홍만규의 사무실 안이다. 홍만규는 두 사내와 마주 보며 앉아 있었는데 머리가 반백인 사내는 자신의 변호사인 최기욱 씨였고 검은 머리에 혈색이 좋은 사내가 이유미의 변호사 고동호 씨다. 고동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야비하느니 어쩌느니 따질 것이 못 되지요. 우리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여기 최 변호사님도 계시지만 고발하면 구속되십니다.

그러자 최기욱이 나섰다.

그거 마음대로 안 될 거요. 사진 몇 장 가지고 확실한 증거라고 볼 수가 없지.

그는 화난 듯 목청을 높였다.

고변호사 당신도 판사 생활을 했으니 생각해봐요. 신명인이란 여자하고의 증거라는 것이 사진 몇 장하고· 그래 아파트 등기부등본인데, 그것이 확실한 간통의 증거란 말이요? 어림도 없지.

간통이라는 말에 홍만규가 문 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최기욱이 말을 이었다.

해봅시다. 우린 무고로 맞고발을 할 테니까. 그리고 이유미 씨가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위자료는커녕 이혼도 힘들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최 변호사님께서 억지를 쓰시는 겁니다.

고동호가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이것은 내놓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동호는 가방을 열고 탁자 위에 소형 녹음기를 내려놓았다. 긴장한 홍만규와 최기욱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방 안에는 헐떡이는 숨소리와 여자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여긴 그렇고.

혼잣말을 하며 고동호가 테이프를 뒤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켰다. '좋았니?' 하고 남자가 물었는데 호흡이 조금 가쁘기는 했지만 바로 홍만규의 목소리였다.

, 자기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애.

이것은 아마 신명인일 것이다. 스위치를 누른 고동호가 홍만규를 힐끗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길어요. 여섯 시간짜립니다.

이런 개 같은‥‥‥‥」

얼굴이 시뻘겋게 된 홍만규가 악문 잇사이로 말했다. 그러나 두 변호사는 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30분쯤 후에 고동호는 홍만규의 사무실을 나와 근처에 있는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커피숍 입구로 최기욱이 들어섰다. 그는 곧장 고동호에게로 다가와 앞자리에 앉았다.

여행사는 해외 지점의 자산과 기타자산까지 합하면 백억이 넘어. 그리고 여행사가 들어 있는 빌딩도 시가로 백억 정도고. 모두 2백억이 넘는 위자료야.

최기욱이 말하자 고동호가 빙긋 웃었다.

그러니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해두었지 않습니까? 홍만규는 제 애비 재산이 2천억이 넘습니다. 그만큼은 내놓아야죠.

내가 홍만규 아버지를 알아. 그는 교도소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놓지 않을 거야. 다행히 그것들이 홍만규 명의로 되어 있으니까 망정이지.

어쨌든 이 건은 그대로 간통죄로 들어갈 수 있는 사건입니다.

가운뎃다리 한번 잘못 놀려서 2백억이 날아갔군.

수고하셨습니다, 최 선배.

내가 무슨‥‥‥」

고동호가 양복 가슴 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 탁자 위로 밀어놓았다

여기 약속대로 1억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러면서도 최기욱은 손을 뻗어 봉투를 거머쥐었다.

그나저나 그 여자, 통이 크네. 10년이 넘도록 홍씨 집안을 맡았어도 이런 목돈은 못 만졌어.

통이 남자 이상입니다. 머리 좋고.

당신은 얼마 받았어?

에이, 최 선배도.

그런데 참, 그 녹음은 누가 했어? 해결사를 시켰나?

아니오, 그 신명인이의 기둥서방 되는 놈을 시킨 겁니다.

허어.

그 여자 머리 좋다고 안 했습니까? 덕분에 나나 최선배까지도 주머니돈도 채우고‥‥‥」

언제 골프나 가지, 우리.

그들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강미현은 아버지를 따라 2층의 서재에 들어섰다. 강회장은 포항의 영빈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내일쯤 상경할 예정이었다. 서재에 마주 앉자 강용식이 피로한 듯 어깨를 두어 번 손으로 주무르더니 입을 열었다.

그 김상철이란 자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하자.

강미현이 몸을 굳혔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더니 똑바로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네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고 또 너에 대해서 유난하신 분이라 내가 조금 방관하는 것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야.

강용식은 차분한 성격으로, 강미현은 이제까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인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 네가 할아버지 모시고 근대리아에 간 것도 홍보 필름 제작보다는 그자를 만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그렇지 않니?

, 아버지, 그랬어요.

그자는 운송 사업까지 맡게 되었고, 상가 관리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근대리아의 실력자가 되었어.

능력이 뛰어나고 거기에다 운도 강한 자라고 하시더구나, 할아버지께서는.

곧 아버지께 인사드릴 거예요. 지금은 그곳 일이 바빠서‥‥」

그런 뜻이 아니야.

강용식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난 네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근대리아나 그룹의 장래와는 별개로 네 인생을 걱정해서 말하는 거야.

할아버지나 또는 김상철의 야망에 자칫 네가 잘못 끼어들어서‥‥ 그래, 심한 표현이지만 희생물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동그랗게 뜬 강미현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건 제 스스로 찾은 감정이에요. 누구의 강요는 전혀 없었어요.

알고 있어, 이제까지 이야기는.

강용식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가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름대로 김상철의 주변이나 성격도 파악해 놓았어.

그는 널 사랑하고 있느냐?

, 아버지.

믿을 수가 있겠어? 말하자면 너처럼, 이건 비교할 성질은 아니다마는, 너처럼 절실한 감정이 그에게 있던가?

확신해요, 아버지.

그 사람.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그래서 혹시 제가 대신, 아니면 정략적으로 저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지 마세요. 그쯤은 저도 알 수가 있으니까요.

나는 이제까지 할아버지의 충실한 수족이었다. , 아들이니 수족보다 더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지. 나는 할아버지가 벌여놓으신 사업의 뒤처리를 해왔어. 우린 아주 호흡이 잘 맞는 상하관계였고 부자지간이었다.

잠자코 있는 강미현을 향해 강용식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 사업에 근대리아 말이다. 김상철이 대단히 중요한 자라는 것에는 할아버지나 나나 의견이 같아. 그리고 할아버지가 너와 김상철이의 교제를 허락하신 것에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할아버지로서는 당연하신 처사였으니까.

넌 김상철이 하루하루를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아느냐?

, 아버지.

할아버지를 거론할 필요 없이 그런 남자에게 이 애비가 딸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으냐?

「‥‥‥‥」

감정을 누르고 냉정해지거라. 강우진의 손녀이고 강용식의 자식으로, 근대그룹의 두 번째 후계자가 될 신분으로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

나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제일 잘 아는 것이 김상철이 본인이야.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약속을 할 수 있을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입장을 무시하고 여자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 있을까 하고.

그 사람은 저한테 약속하지 않아요. 내일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강미현이 말했다.

그 사람은 이미 할아버지, 아버지의 의도를 알고 있어요.

다행이다.

그 사람을 조사하셨다면 여자관계도 아셨을 텐데요. 그 사람이 결혼하려던 여자와 그 사람의 친구가 결혼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아직도 김상철 씨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어요. 왠지 아세요? 그는 그 여자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했던 거예요.

알고 있다.

다시 강용식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친구가 배신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아무래도 서울에 두면 안 될 것 같아 오사카로 보내게 했다.

「‥‥‥‥」

이번 일도 내가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더욱이 이 일은 내 딸 인생에 관한 일이야. 그렇다고 교제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네가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러려면 이제 누가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것이 네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란 것을 명심하란 말이다.

 

 

 

6. 불타는 차이나타운

크리스마스가 사흘 앞으로 다가온 저녁 무렵이다. 회색빛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오사카성을 바라보며 이유미는 커피잔을 들었다. 오사카의 뉴오타니 호텔 라운지 안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께지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혼간사에서 죽고, 그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에 의해 오사카성이 세워졌다. 그리고 무참한 전화(戰禍)를 두 번이나 치른 다음 다시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정권에 의해 오사카성은 다시 재건되었던 것이다. 이유미는 성에서 자랐다는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기억력이 떨어졌다기보다 안내원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이라고 자위하면서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라운지의 입구로 들어서는 안인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그녀를 본 모양으로 이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미안해, 조금 늦었어.

이유미는 안자리에 앉는 그의 얼굴이 그동안 여윈 것처럼 느껴졌다.

일이 바쁜 모양이지?

그녀가 묻자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쁘기는 뭘, 정보수집이나 하고 슬슬 눈치 보며 지내는 거지. 회사 돈으로 휴가온 셈 치는 거야.

회사에서 알면 짜증 나겠는데.

, 그쪽도 알고 있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유미는 그의 시선이 자꾸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 분위기 좋은 데 있어?

이유미가 묻자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시기 좋은 데가 있지. 네가 있으니 분위기는 이미 잡혔고.

안인석을 만나러 서울에서 날아온 참이다. 방은 이미 잡아놓았겠다 안인석도 혼자 있는 몸이었으므로 이유미는 마음도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인석이 그녀를 안내한 곳은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바였다. 성인용의 조용한 분위기인데다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바 안을 둘러본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자긴 역시 나하고 기호가 같아. 마음에 들어.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고급 스카치 한 병 값이 엄청나게 비쌌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낮게 흘 안을 울리고 있었다. 카운터 옆쪽의 조그만 장식용 전등 몇 줄기가 반짝이고 있는 것이 오히려 요란한 트리의 불빛보다 더 운치가 있어 보였다. 위스키를 반병쯤 마시고 났을 때 이유미가 물었다.

와이프가 오겠다고 안 해?

술잔을 든 안인석이 머리를 저었다.

오기는 뭘 ‥‥‥」

그럼 이렇게 살 거야?

글쎄, 그것도‥‥‥」

한 모금 술을 삼킨 이유미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기가 안 돼 보여서 그래, 이곳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아서.

내내 가라앉은 표정으로 술잔만 비우던 안인석이다. 머리를 든 그가 퍼뜩이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 몰아낸 근대그룹에 빛을 갚아줘야 돼. 난 이대로 죽지는 않아.

누가 죽는대? 그런데 어떻게 갚아? 여기에서.

네가 알 필요 없어.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안인석이 더운 숨을 뱉아냈다.

미정이가 임신을 했어.

3개월이야. 그래서 집안에서는 서울에 있는 것이 낫다고들 해.

r‥‥‥」

빌어먹을.

안인석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정말 미치겠어, 지금은 아이를 가질 상황이 아닌데,

그러자 얼굴에 웃음을 띤 이유미가 술잔을 들었다

난 자길 잘 알아. 자기는 기대하지도 않았을 거야.

넌 나쁜 여자야.

자긴 우유부단하고 책임감이 강하지 못해. 하지만 평온한 일상에서는 둘도 없는 애인감, 남편감이야.

나만 매도하지 말란 말이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박미정을 서울에 남겨둔 것은 인석 씨의 무의식적인 자기방어였어. 같이 있어야 도움도 안 되고 눈치가 보일 테니까. 언제 사실이 드러날지 불안도 했을 것이고, 그렇지?

뭐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미정이는 그만큼 가치가 있는 여자라는 것만은 알아둬라. 나하고 김상철이가 이렇게 될 정도로.

얼굴을 굳힌 이유미가 조금 미소 지었다.

거짓말.

너는 네 집안이나 신경 써. 괜히 네 일까지 나한테 겹치게 하지 말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이유미가 바닥이 난 술병을 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한 병 더할까? 아니면 내 방으로 가서 마실 거야?

안인석이 잠자코 있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방으로 가. 그게 낫겠어.

 

눈발이 한두 점씩 날리고 있었지만 포근한 날씨였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꼭 눈이 내려야 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에는 눈을 기다렸었다. 김상철은 피부에 닿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눈을 맞으며 다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110,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고 그가 서 있는 곳은 대전 교도소 정문 앞이다. 그는 지금 성탄 특사로 석방되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성탄 특사로 석방될 사람들의 가족들이 수백 명 몰려와 있었으므로 그는 사람들에게 밀려 이리저리 발을 옮겨야 했다.

시간이 20분이나 지났는데.

옆으로 다가서며 투덜거리는 사내는 심재택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은 왜 이렇게 꾸물대는 거야.

그들은 벽 쪽에 붙어 섰다. 담배를 꺼내 문 심재택이 그를 바라보았다.

김형은 근대리아에서 운송 수단까지 장악하게 되셨다면서요.

,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서.

김상철이 다시 정문을 바라보았으나 철문이 열릴 기척은 없다.

이젠 우리 안기부에서도 근대리아 파견 지원자가 줄을 섰어. 경쟁률이 수십 대 1이오. 그것이 근대리아 개발의 성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심재택의 웃는 얼굴을 본 킴상철도 따라 웃었다.

글쎄요. 어쨌든 좋은 현상이긴 합니다.

삼합회가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양이오. 홍콩 조직이 대거 근대리아로 이주한다는 정보도 있고.

이렇게 말을 건너뛰는 것이 기관원들의 말버릇임을 겪어 아는 탓에 김상철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야쿠자가 들어옵니다. 그들에게도 근대리아가 자금을 투자하는 최적의 장소로 판단된 모양이야.

「‥‥‥‥」

달러의 유출에 제한이 없고 은행 잔고 체크도 없는 데다 기름과 가스로 벌어들이는 돈을 다시 개발에 쏟아부으니 그야말로 근대리아는 그런 놈들한테 물 반 고기 반의 어장이지.

북한은 어떻습니까?

이제 김상철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직 그자들은 근대시에 투자계획서를 내지 않았어요.

도태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심재택이 입맛을 다셨다.

조총련에서 자금을 끌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곳에 그들의 사업을 전개할 토대를 다지기 위한 몸부림이오.

그때 갑자기 군중들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정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특사자들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에게 밀려 김상철이 앞으로 다가갔을 때 철문이 삐꺽이며 열렸다. 안에서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눈을 치켜뜨고 한껏 목을 뽑아 그들을 훑어보던 김상철은 이윽고 아버지를 보았다. 김영환 씨는 양복에 단정히 넥타이를 맨 차림에 손에는 꽤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린 그는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그에게로 다가간 김상철은 목이 메었다.

아버지.

, 너 왔구나,

그가 얼굴을 허물어뜨리면서 조금 웃었다.

네가 이곳에 어떻게 왔니?

그가 누구를 찾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자 김상철은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그에게로 돌아온 아버지의 시선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가족은 둘뿐이다.

 

안 서방이 모레 온다니 내일 아침에 나하고 같이 가자. 가서 집 안 청소만 하면 되겠지. 음식은 여기서 대충 준비해가면 될 테니까.

어머니가 주방에서 말했다. 사흘 후면 신년이다. 안인석은 신년 연휴를 맞아 모레 귀국할 예정이었다.

네 시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한다니 나도 좋아. 안사돈을 조금 뻑뻑하게 보았는데 그게 아니네.

저녁 무렵이어서 주방에서는 구수한 찌개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박미정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친정에 머무르면서 손 한번 까딱 않고 지내는 중이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박미정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혹시 박미정 씨 계십니까?

낯선 사내의 목소리였다.

전데요.

, 마침 직접 받으셨군요.

어디신데요?

, 저는 근대리아 직원 박영대라고 합니다.

사내가 정중하게 말하자 박미정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이것,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경솔해서 전화번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

「‥‥‥」

, 혹시 김상철 씨 이모님댁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제가 심부름을 왔는데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

이모님 댁은 왜요?

얼굴을 굳힌 박미정 옆으로 어머니가 다가와 앉았다. 박미정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리고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수첩에 적어놓고 있어서.

김상철 씨가 이모님 드리라면서 캐비어 한 통하고 코트 한 벌을 보냈거든요. 그렇다고 근대리아에 있는 김상철 씨한테 전화번호를 잃어버렸다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하셨어요?

목소리가 높아지자 어머니가 바짝 다가앉았으므로 박미정은 몸을 돌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김상철 씨한테 연락을 하신다고 했어요?

바짝 마른 목소리로 묻는 그녀에게 저쪽은 당황한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 박미정 씨가 모르신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사람이 지금 근대리아에 있단 말인가요?

아니, 그럼 모르고 계셨단 말입니까?

이제는 사내가 되려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리가, 농담하시는 것 아닙니까?

근대리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는데‥‥‥」

「‥‥‥‥」

그 양반, 요즘은 높은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같은 사람은 만나볼 수도 없습니다. 그는 근대타운을 장악하고 있어요.

여보세요.

아아, 이것 낭패인데‥‥‥」

문득 사내가 전후 사정을 파악한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야단났네, 내가 괜히 ‥‥‥」

근대리아의 어디에 ‥‥‥」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박미정이 물었을 때 전화가 끊겼다.

무슨 전화냐? 김상철이가 어떻게 …….

어머니가 다급한 얼굴로 바짝 다가앉았으나 박미정은 탁자를 내려다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니까.

그러자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미정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시선이다. 덜컥 겁이 난 어머니가 이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박미정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저녁 무렵 가볍게 흩날리던 눈이 밤이 깊어지자 무겁고 굵어지기 시작했다. 함박눈이다. 길가의 나뭇가지 위에는 그 굵기 만큼이나 횐 눈이 위태롭게 떨어져 있었다. 낮고 맑은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카페 안. 김상철과 강미현이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것은 커피잔으로 아직 따뜻한 커피가 가득 담겨져 있다. 이윽고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어느 아버지라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특별한 예가 아니야.

그의 표정은 밝다.

그리고 나도 미현 씨의 지원이나 배경을 기반으로 일할 생각은 없고.

강미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난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요?

몇 년이 걸릴지, 아니면‥‥‥」

그때까지 상철 씨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는 다시 운에 맡기고…」

그럴 수밖에.

그러자 퍼뜩 눈을 치켜뜬 강미현이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 없어요?

운에 무슨 자신이 ‥‥‥」

날 데려갈 자신 말이야, 이 멍청아.

이번에는 김상철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시기가 너무 일러. 그리고‥‥‥」

시기는 무슨‥‥ 우리 둘 이야기만 해.

그러니까 그쪽 상황이 아직 근대시의 상가 문제도 그렇고.

그만.

강미현이 손바닥을 와락 펴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았다.

지금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내가 오히려 이용당하고 있는 기분이야.

주고받는다는 어설픈 말장난도 이젠 그만해. 난 이제부터 내 감정에만 충실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계산은 당신네들이 알아서 해. 난 상관 안 하겠어.

이것 봐, 미현이.

통나무집 침실 벽지를 다른 색깔로 바꿔요. 그 색이 난 싫어.

 

김상철이 이모 집에 돌아왔을 때는 12시가 넘어 있었지만 아버지와 이모부는 술상 앞에 앉아 있었다.

너 기다리는 중이다. 우선 한잔해라.

소주잔을 내미는 이모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술기운이 배인 얼굴이었다. 김상철이 이모 집에 아버지를 모시고 온 것은 갈 곳이 없어서라기보다 무난한 성격의 이모부와 함께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술잔을 받아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 이모부하고 내일부터 목장을 보러 다니기로 했다. 네 이모부도 이제 보니까 목장 연구를 해온 모양이야.

돈이 없어서 못 했지. 돈만 있다면야 진즉 시작했어.

이모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근대에서 받은 보상금이 그대로 있는 데다 이번에 가져온 돈을 합하면 조그만 목장 하나는 통째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장하다.

다시 술잔을 건네주며 이모부가 말했다.

너 같은 효자가 없다. 이제 아버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술자리가 끝나고 나서 김영환과 김상철 두 부자는 방에 들어와 나란히 누웠다.

그래, 내일 그곳으로 돌아가면 다음에는 언제쯤 나을 생각이냐?

천장을 바라보며 김영환이 물었다.

봄쯤이나‥‥ 하지만 시간이 나면 자주 오겠어요.

일이 바쁘냐?

, 아버지.

그런데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

가게를 해요.

무슨 가게?

음식 같은 것을 …」

한동안 잠자코 있던 김영환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정말 내가 특사받는데 타협하지 않았겠지?

안 했다니까요. 타협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주무세요, 아버지.

한동안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낮은 호흡소리만 들려왔다. 건넌방의 이모 부부도 잠이 들었는지 집안은 조용했다. 이윽고 김영환이 부스럭거리며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고맙다, 상철아.

감았던 눈을 번쩍 뜬 김상철이 그의 등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1월 중순 무렵, 근대리아의 중부지역에 쏟아지기 시작한 폭설은 하순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가옥이 눈에 파묻혀 버릴 정도의 눈이어서 러시아와 근대리아 간의 육상교통이 끊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타운과 근대시를 잇는 도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두절 상태였다. 다만 제설반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비행기의 이착륙은 가능했는데 네 개의 활주로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한 개뿐이었다. 그러나 눈보라가 심한 날은 비행장 위를 맴돌다가 돌아가는 비행기가 많았고 결국 근대리아 전역에는 물자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열흘이 넘도록 정상적인 보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근대리아 본부에서 창고에 있는 재고 식량과 생필품을 타운의 상인들에게 파는 방법으로 공급량을 유지하려 했지만 타운의 생필품 값은 두 배 가깝게 폭등해 있었다. 근대리아가 개발된 이후로 처음 있는 대폭설이다. 이제 근대리아는'근대시 외곽의 공단이 정상 가동을 시작했고 근로자 가족들이 시와 타운 외곽의 숙사에 정착하기 시작한데다 이주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50만에 이르는 하나의 자치국 같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근대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도로 주위에는 개발의 특성에 맞는 마을이 건설되었는데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까지 합하면 백여 개쯤 되었다. 근대시 한복판에 있는 근대리아 본부 안이다.

아침 10시가 되자 유장석의 사무실에 이대각과 경비본부장인 박종용, 경비부장 이상훈이 바쁜 듯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김상철이 들어섰다. 특별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유장석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인공위성의 예보로는 폭설이 앞으로 열흘쯤 더 계속된다는군. 그래서 창고에 있는 생필품을 모두 내놓을 작정이야.

그는 박종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재기만 하지 않으면 근대리아 인구가 한 달은 견딜 수 있는 모양이오.

이미 열흘분을 방출했는데도 가격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아마 소매상들의 농간인 것 같습니다.

박종용이 말을 이었다.

근대 자체에서 판매한다고 해도 호구별 인구대로 배급하는 방식이라면 모를까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생필품 소매상은 대부분이 중국계로 영세업체들이다. 그들이 모두 삼합회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방 안의 사내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상훈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타운에서 중국계 생필품 소매상 한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삼합회 소행 같습니다.

모두가 이유가 무엇이냐는 시선을 주자 이상훈이 말을 이었다.

그자의 고기 가게에 러시아인 단골들이 많았다길래 러시아인 몇 명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자는 고깃값을 올리지 않고 팔았다더군요.

삼합회가 지시를 어겼다고 처벌한 것이로군.

이대각이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인들한테는 공정가격으로 거래하게 하고 다른 민족에게는 값을 올려 팔게 하는 겁니다.

타운의 인구 5만 중 중국인은 2만 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의 주력 업종이 자본이 많이 들지 않는 식당, 생필품 가게 등인 것이 문제였다. 유장석이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작년 초에는 조선족이 타운 인구의 반이었는데 지금은 30%인 만5천 정도야. 거기에다 남북 세력으로 찢어져 있어 한심한 노릇이다. 중국인 가게에서 두 배 값을 내고 쌀을 사야만 하다니, 이 땅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땅인데‥‥‥」

그가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수송단은 지금 어디에 있지?

어제 50킬로쯤 전진해왔습니다만 길이 막혀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방 안에는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지난해 말부터 김상철은 컨테이너 트럭 2백여 대를 보유한 운송회사를 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1월 초에 하바로프스크로 떠났던 백여 대의 트럭은 지금 눈에 발이 묶여서 근대리아 도로 위에 세워져 있다. 근대시로부터 700킬로나 떨어진 지점이었는데 트럭들은 모두 식량을 만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부의 지시로 자재들을 모두 내리고 대신 식량을 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유장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생필품 가격을 철저히 단속할 것, 경비부 전원을 투입해서라도. 그리고 근대시와 타운에 직영 판매점을 설치하도록. 일단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날 오후, 근대 비행장의 활주로에 수송기 한 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앉았다. 아직도 폭설이 쏟아지는 악천후였다. 더구나 활주로는 빙판이 되어 있어서 길게 미끄러지던 수송기가 겨우 멈추자 사람들은 모두 숨을 내려쉬었다.

화물이 뭐야?

관제탑 안에서 수송기를 내려다보던 관제사 한 명이 옆의 동료에게 물었다.

이것 봐라.

옆의 동료가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화물이 꺽 자야, 153. 국적은 조선족과 어이구‥‥ 조선 인민공화국이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관제사들이 그를 둘러쌌다. 조선족이 50여 명이었고 100명 가까운 여자들이 북한 국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이야?

누군가가 물었지만 대답할 것도 없었다. 아래쪽에 접객업소 근로자로 입국된 것이고 고용주는 대아운송이다. 대아운송의 책임자가 김상철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윽고 누군가가 한마디 했다.

드디어 북한 여자들을 건드릴 기회가 왔다.

악착같은 기질이 드러났어. 이런 기상 조건에 내려앉다니.

옆에서 말을 받자 웃음소리가 났다. 수송기가 악착같이 내려앉은 것은 조종사 때문이지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십 대의 수송기가 비행장 상공을 맴돌다가 돌아간 상황이어서 별로 틀린 말도 아니다.

이제 북한 쪽과도 길이 뚫린 모양이군.

제각기 흩어지면서 누군가가 혼자소리를 했다. 공항의 입국심사소 안에 자리 잡고 앉은 박기동은 어금니를 힘껏 악물고 두 눈을 부릅뜬 얼굴이었다. 그러나 북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에 가끔씩 콧구멍이 크게 벌어졌다가 오무라든다. 옆에 심사원들만 없었다면 두 손을 쳐들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그것은 지금 내려앉은 화물이 바로 자신의 첫 번째 오더였기 때문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돌아갈 연료를 싣지 않은 부주의한 조종사에게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은 마음이다.

어디로 데려갈 거요?

여자들에게 나눠줄 허가증을 체크하던 심사원이 그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타운에 숙사를 마련해 놓았으니 우선 그곳으로, 거기서 분류가 되겠지요.

그럼 안나네 집에도 가나?

글쎄, 가는 여자도 있겠지.

그러자 주위의 심사원들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박 사장하고 친해져야겠어, 앞으로는.

, 말씀만 하시오, 언제든지.

박기동이 어깨를 펴고 말했다.

근대리아의 여자 공급은 내가 맡았으니까.

 

그날 밤에는 강한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어서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폭설로 인한 물가폭등으로 사업장도 손님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11시경이 되자 한두 대씩 차도를 지나던 차량의 통행도 끊겼고 타운은 눈바람 속에 묻혔다. 동쪽 거리의 2층짜리 창고 건물 앞에 설상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바람이 거칠어져 있었으므로 차에서 내린 사내들이 쫓기듯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쪽으로.

입구 안쪽에 서 있던 사내가 몸을 돌리더니 앞장을 섰다. 계단을 올라 2층 복도에 선 사내는 안쪽 문을 가리켰다.

안에 혼자 계십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주위에 둘러선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이금철이 일어섰다. 꽤 넓은 방이었으나 가구라고는 소파 한 세트와 탁자뿐이어서 썰렁한 분위기였는데 오늘 밤의 회동을 위해 급히 꾸민 모양이었다.

김선생, 이거 오랜만이오.

이금철이 손을 내밀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렇군요.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서도 뵙지 못했습니다.

김상철이 자리에 앉자 이금철이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쥐었다.

우선 한잔합시다.

박기동을 통해 김상철의 만나자는 제의를 받은 이금철은 만나는 장소를 자신이 정하는 조건을 붙였던 것이다. 이곳은 북한 쪽이 창고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삼킨 그들은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여자 153명이 들어왔어요. 북한 여권을 가진 근로자로는 처음이오.

김상철의 말에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감개가 크오. 솔직히 난 김선생이 받아들일지 의문이었소.

모두가 박기동 씨 업적이오.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 사람한테는 국경이나 이념 같은 것은 없어요. 오직 상품만 보일 뿐이지요.

그 동무, 사기꾼이오. 김 선생도 아시지요?

, 조금 그런 면도 있습니다.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술잔을 서너 잔씩 비우자 분위기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창밖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삼합회가 농간을 부렸습니다. 그자들은 우리가 절대로 동반자가 될 수 없는 관계라고 믿고 있지요.

그런 것 같소.

머리를 끄덕인 이금철도 정색을 했다.

우리는 서로 믿지 않았으니까, 하긴 이제까지의 행태를 보면 그럴 법도 하지.

그래서 내가 만나자고 한 겁니다. 이제 근대리아는 우리 남북 양쪽의 세력에다 러시아 마피아, 삼합회, 거기에다 일본의 야쿠자까지 가세한 각축장이 되었어요.

동양의 5강이 모두 모였다니까, 각자의 국가세력을 배경으로 대리전 양상이 되어가는 거요.

내가 이 선생을 만나자고 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김상철이 정색을 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비공식이지만 나는 이 선생과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짐작은 하고 있었소, 김 선생이 우리 공화국 처녀들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는 문득 머리를 들었다.

근대본부도 묵인했으니 여자들이 들어온 것 아니겠소?

그렇지요.

그렇다면 한국 정부도‥‥‥」

한국 정부까지 연결시킬 필요는 없지요. 경비본부가 안기부의 영향력 밑에 있지만 이쪽은 한국과 상황이 다르니까, 융통성 있게 상황처리를 합니다.

머리를 끄덕인 이금철이 김상철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당신들은 그렇지만 나로서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요. 오늘 당장 평양에 어떤 방식으로든 보고를 해야 하는데 ‥‥」

솔직히 현지 상황을 평양에 이해시키기가 어렵소. 일부 이해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강경파의 원칙론과 기세가 살아 있고, 잘못하면 변절자가 되거든.

긴장한 얼굴로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금철은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고 있다. 그것이 계산에 의한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금철이 말을 이었다

김 선생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소. 근대리아를 우리 공화국의 세력권으로 만든다는 것 말이오. 노동자나 주민의 50% 이상이 북한계 조선족이니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이오. 그리고‥‥‥」

술잔을 듣 이금철이 단숨에 술을 삼켰다.

이제 우리 공화국에서 선발된 일꾼들까지 들어오게 된 이상 평양에서는 그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생각할 거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평양의 승인까지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선생의 협조뿐이오. 아마 그것이 이 선생이나 궁극적으로 평양을 위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요.

우스운 일이지만 평양에서는 김 선생이 포섭되기를 바라고 있소.

그러면서 이금철이 웃었다.

그 사람들 생각하는 것이 그런 식이오.

아마 우리 쪽 안기부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요. 이선생이 포섭되기를 바라는지도요.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협조하겠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는 박기동이를 이용하도록 합시다. 그 동무, 사기꾼이지만 대단히 쓸모가 있는 동무요.

좋습니다.

웃음 띤 얼굴로 김상철이 술잔을 들었다.

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잘 되었어요.

 

그레고리도 이런 폭설은 처음이었으나 헤쳐나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근대시 남방 650킬로 지점의 도로 위다. 말이 도로이지 눈더미에 묻힌 길은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길게 늘어선 트럭 대열이 있을 뿐이다.

이런 개 같은 파벨, 이놈의 새끼.

무전기를 내던진 그레고리가 옆에 선 주코프를 바라보았다.

파벨이 마르첸코에게 지시를 했을 것이다. 제설차를 부수라고.

눈에 핏발이 선 그의 수염에 눈송이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 운송 사업을 방해하는 거다. 마피아와 우리의 동맹관계는 끝났어.

주코프는 잠자코 입맛을 다셨다. 어젯밤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출발하기로 한 제설차 5대가 모두 엔진이 부서져 움직이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파벨은 근대리아로의 운송사업을 대아운송이 독점하게 되자 겉으로는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500여 대가 넘는 트럭을 근대리아로 보내던 마피아의 운송 수입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것은 그들에게도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아운송은 머지않아 컨테이너 트럭 200여 대를 더 들여올 계획인데다 독점 운영을 하게 되었으니 운송 수입은 제로가 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레고리가 수염에 붙은 눈을 거칠게 털어냈다.

내가 하바로프스크로 가겠다.

아니, 대장, 내가 갑니다.

충직한 부관 주코프가 머리를 저었다.

대장은 러시아에 발만 들여놓아도 곧장 유치장 행이오. 이런 상황에서 파벨이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러시아 경찰을 데려올 거요.

그놈들이 감히 나를 어떻게‥‥‥」

안 됩니다, 대장, 내가 다녀오지요.

주코프의 말투도 강해졌다.

난 아직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돌아다녀도 상관없습니다. 가서 사흘 안에 제설차를 이곳까지 끌고 오겠소.

빌어먹을.

그레고리가 어깨를 들어 올리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트럭 위로 눈이 덮여가고 있어서 마치 작은 언덕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양이었다. 대열의 앞에서 제설차 석 대가 전진해 나가고 있었지만 진행 속도는 하루 50킬로가 고작이다.

좋아, 애들 데리고 다녀 와.

그가 턱을 들어 길가에 내려앉아 있는 헬기를 가리켰다.

서둘러라, 돈은 달라는 대로 주고.

제설차 5대가 도착하면 진행 속도는 두 배쯤 빨라질 것이니 일주일이면 근대시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바로프스크 공항의 국제선 터미널 안이다. 오후 3시가 되자 도쿄와 서울행 비행기가 연달아 탑승을 시작하는 바람에 대합실은 잠깐 소란스러워졌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벽에 붙은 탑승 안내판이 움직이면서 아래쪽의 지명이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에로프로트의 근대시행은 끝자리를 지키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출발 시간도 지워진 채 '지연'이라고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아에로프로트의 근대시행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은 한국인이었는데 승객들의 문의에 지친 듯 아예 이쪽으로 시선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박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저 좀 보세요.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 손님.

애써 입술에 웃음을 띠었으나 짜증을 참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혹시 다른 비행편은 없을까요? 수송기나 헬기라도.

그러자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그건 왜요? 수송기나 헬기라니요?

폭설로 여객기는 안 뜰지 모르지만 수송기는 갈 것 아녜요?

그래서요?

그것이라도 타고 가려고.

나아 참.

입맛을 다신 사내가 눈을 껌벅이며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근대직원도 수백 명이 공항에서 발이 묶여 있는 형편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저는 2년 전에 헬기로 가본 적이 있어서 그래요. 회장님을 모시고‥‥‥」

회장님을 모시고 말씀입니까?

사내의 눈이 조금 커졌다.

2년 전이라면‥‥‥」

유전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죠.

아아.

이곳에서 헬기를 타고 두 번 쉬고는 그곳에 도착했어요.

실례지만 근대 직원 되십니까?

비서실에 있었어요.

그러면 ‥‥」

흔들리던 사내의 시선이 다시 모아졌다.

그러나 저희들로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수송기나 헬기 스케줄도 모르고.

어디에서 컨트롤하는지만 알려주세요.

박미정이 데스크에 바짝 다가섰다

그것만 말씀해주시면 돼요.

폭설로 비행기가 끊긴 바람에 박미정은 지금 사흘째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박미정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명안이 으시대면서 색시방에 들어선 것은 저녁 7시 정각이다. 계속되는 폭설로 술집은 매상이 줄었지만 색시방은 호황이었다. 작년 말에 며칠 동안 기온이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졌을 때에도 장사가 잘 되었지만 지금처럼 붐비지는 않았었다. 폭설로 모든 것이 불편한 상황에서 색시방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실에는 10여 명의 사내가 제각기 시치미를 뗀 얼굴로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휘장 옆의 의자에 앉아 있던 부하가 일어서더니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방이 모두 꽉 찼소, 형님.

머리를 끄덕인 화명안은 휘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도 사내 하나가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의 옆으로는 길게 뻗어 있는 복도가 보였고 좌우로는 방들이었다.

시간을 땡겨.

화명안이 짧게 말하자 벌떡 일어선 부하가 복도로 들어섰다. 그는 손에 백 미터 달리기의 기록을 재는 기계처럼 큼직한 스톱워치를 쥐고 있었다.

어이, 여기 시간 지났어!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방문짝을 두드렸다

여기, 일분 남았어! 빨리 싸!

다른 쪽 방에는 발길질을 했다. 화명안은 사내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방별로 입방과 퇴방 시간을 기록해놓은 것으로 손님을 몇 명 받았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영업을 시작한 지 4시간이 된 지금 대부분이 8명째 손님을 받는 중이었으나 7번 방은 5명째였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곽비 이년은 지난번 황윤이의 탈출을 돕다가 골병이 나도록 맞은 때문인지 일부러 손님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횟수를 줄이려고 한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가 복도로 들어서려는데 뒤쪽의 대기실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들이 항의를 하는 것 같다. 몸을 돌린 그는 휘장을 들치고 대기실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눈앞을 가로막듯 서 있는 사내와 마주쳤고 그다음 순간 아랫배에 선뜻한 느낌을 맛보았다. 불로 금방 지져대는 것 같은 고통으로 허리를 숙이면서 그는 가슴에 찬 권총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나 곧 가슴에 또 다른 충격이 오면서 그는 팔을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었다. 피 묻은 칼을 던진 사내는 파카 주머니에서 묵직한 권총을 꺼내 들더니 휘장을 젖히고 들어섰다. 마악 부하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 .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으므로 가슴에 고스란히 총탄을 받은 부하가 두어 발짝 뒤로 날아가 넘어졌다. 사내는 몸을 돌려 대기실 안을 둘러보았다. 두 눈만 내어놓은 방한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동양인인지 러시아인인지 구별이 안 되었고 다른 세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벽에 찰싹 달라붙어 두 손을 치켜든 10여 명의 중국인들은 지금 마스크를 한 사내들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리고 있는 중이었다.

 

소개소는 왕씨가 계단에서 굴러 목뼈가 부러져 죽은 다음에 상군이 맡아 하고 있었는데 매일 저녁마다 마연중의 감사를 받는다. 그러나 요즘은 폭설로 이주민이 뚝 끊긴 바람에 한산했고 전업을 원하는 사람들만 간혹 찾을 뿐이었다. 마연중이 소개소에 들린 것은 7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소개소는 중국인 거리의 입구에 있었으므로 일이 많으나 적으나 지나는 길에 꼭 들리는 것이다. 경호원 두 명을 대동하고 들어선 마연중이 왕씨가 앉던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다섯 명밖에 일이 없었습니다.

책상 앞으로 다가간 상군은 풀죽은 표정이었다.

더구나 두 명은 소개료를 후불로 해달라고‥‥‥」

괜찮다.

마연중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소개료에 신경 쓸 것 없다. 우린 지금 폭설로 엄청난 이득을 내고 있으니까.

생필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계 이주민들이 가격 담합으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은 상군도 안다.

이렇게 며칠만 더 지나면 조선족의 올망졸망한 가게나 러시아계 잡상인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야. 그땐 다시 이곳이 벅적이게 되겠지.

시계를 내려다본 마연중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동양인이다. 세 명의 동양인이 날렵하게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모두 손에 소음기를 낀 권총을 쥐고 있었다.

, , .

그들의 총구에서 무딘 발사음과 함께 섬광이 튀면서 먼저 마연중의 부하 두 명이 꼬꾸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상군과 마연중 둘이다.

누구냐!

눈을 부릅뜬 마연중이 어깨를 펴고 소리쳤다.

, 이 새끼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나 그의 중국어가 그치기도 전에 세 사내의 총구에서 다시 일제히 섬광이 튀어나왔고 마연중은 뒤로 벌떡 넘어졌다. 이어서 사내들의 시선과 함께 총구가 자신에게로 향해지자 상군은 눈앞이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넌 소개소 직원이지?

어디선가 중국어가 들려왔으므로 그는 우선 목청껏 대답했다.

, 선생님, 저는 직원입니다.

이곳 금고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어?

, 한 달분 소개료로 삼천 달러쯤.

그걸 꺼내 가라.

「………」

그걸 꺼내 가란 말이다. 이 멍청아, 그 돈은 우리가 털어갔다고 하고.

온몸을 떨면서 상군이 눈을 껌벅였으나 아직 초점이 잡히지는 않았다. 그러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상군의 귀에 들렸다.

 

마약방의 밀실에 있던 진대원은 부릅뜬 눈으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놈들은 김상철이가 데리고 있는 조선족들일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전쟁이다. 우리도 그놈들을 친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부하 서너 명이 서둘러 들어섰다.

대형, 마형님이 당했습니다. 소개소에서 동생들과 같이.

방 안의 사내들이 제각기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상관없어.

술렁대는 분위기를 장악하려는 듯 진대원이 차갑게 말했다.

오늘 밤에 김상철의 사업장을 모두 태워라. 나도 나서겠다.

그가 자리를 차고 일어서자 부하들도 따라 일어섰다. 저녁 750분이었다. 그들이 마약방 입구를 나서는데 다시 두어 명의 부하들이 달려왔다.

대형, 시내에 폭동이 터졌습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에 있는 중국인 가게 수십 군데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이를 악문 진대원을 향해 다시 부하 하나가 허덕이며 말했다.

러시아인들과 조선족들입니다, 대형.

습격한 자들이 말인가?

아닙니다. 물건을 약탈해 가는 놈들이.

경비소는, 그놈들은 무얼 하고 있길래 ‥‥‥」

진압은 하고 있지만 원체 군중들이 많아서‥‥‥」

진대원이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총소리가 났다. 요란한 기관총의 발사음이었는데 한두 정이 아니다.

대형.

부하 한 명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기습이오. 놈들은 사전 계획이 치밀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피합시다.

「‥‥‥」

여기서 나서다가는 함정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중국인 거리 깊숙한 곳에 있는 색시방 6곳이 습격당했고 마작방에 수류탄이 던져져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리고 곳곳에서 너댓 명씩 조를 짠 놈들에게 기습을 당해 사상자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진대원은 이를 악물었다. 경비대는 가게를 습격해서 약탈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놈들은 김상철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한이 맹렬하게 앞장서 달렸으므로 뒤를 따르는 최복수와 정기만은 그를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난번에 한 번 달렸던 길이어서 이한은 날듯이 달려 나갔다. 그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칼라시니코프 돌격소총의 개량형인 킬 KS 74U로 러시아 낙하산 부대 등 특수부대용 기관총이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숨결을 뱉아내면서 골목의 입구로 내달려간 그는 앞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을 보았다.

타타타타타타.

좁은 골목 안이다. 앞으로 쏘면서 달려 나가자 두어 명의 몸뚱이는 이미 땅바닥에 쑤셔 박혀져 있다. 이제 곧 지난번의 마약방이 나온다. 다시 어둠 속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한 이한은 골목 안쪽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순간 앞쪽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났으므로 그는 땅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총에 맞았다면 총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다.

비켜! 비켜!

뒤를 쫓아온 최복수가 소리치더니 이한의 옆으로 엎어지면서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고막이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파편이 쏟아졌으므로 그들은 납작 엎드렸는데 연거푸 폭발이 일어났다. 최복수의 뒤를 따라온 정기만이 다시 수류탄을 내던진 것이다.

잘 간다.

폭음을 들으면서 이렇게 내뱉는 것은 최태호였다. 마작방을 털고 난 그는 부하들과 함께 골목을 빠져나오는 참이었다.

, 이젠 철수다.

그는 앞장서서 눈가루가 흩날리는 골목을 뛰쳐나갔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습격이다. 놈들의 주요 아지트와 가게에 습격조가 정해졌는데 북한은 25개 조, 김상철의 한국 측은 30개 조, 거기에다 파벨의 부하인 그루진스키가 지휘하는 습격조도 10여 개였으니 한 시간 동안에 65개 조가 치고 들어간 것이다.

거리로 나선 최태호는 화광이 충천한 가게들을 보았다. 대부분이 통나무로 만든 가게여서 눈발 속에 붉은 불기둥을 일으키며 타오르는 중이었다. 경비대원들이 도로의 곳곳에 서 있었지만 서두르며 스치고 지나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사실상 경비대까지 가세한 삼합회 토벌이다. 대리전의 양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한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의 연합세력이 중국의 기세를 꺾은 것이다.

 

자강도의 강계에서 북쪽으로 60킬로 정도 거리에 있는 온산 시범소는 질이 나쁜 사상범을 수용하는 집단수용소이다. 벌거숭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시범소에는 400여 명의 사상범이 막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급자족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경작지라야 산기슭의 천 평 미만의 옥수수밭뿐이어서 식량은 수용인원의 10분의 1의 몫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비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수용소 인원들에게 근처의 협동농장에 사역을 시키고 품삯으로 식량을 받아오게 했지만 그쪽도 흉년인데다 겨울이라는 악조건이었다. 노인들과 병약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서너 명씩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아침 6시가 되자 357호는 겨우 몸을 틀어 나무 침상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직도 자고 있는 딸아이를 깨우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몸놀림이었지만 아이는 눈을 떴다. 맑은 얼굴이었지만 핏기가 없었고 두 눈이 깊게 패여 있다.

어머니, 어디 ‥‥‥」

경희가 가느다란 소리로 물었다. 6살짜리인데도 이젠 배고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눈치만 본다.

자고 있어라, 내 곧 돌아올 테니.

영하 20도가 넘는 기온이었으므로 이인숙은 담요를 잘라 만든 외투를 뒤집어쓰고 막사를 나왔다. 길게 이어진 막사는 각각 3평 정도의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각 단위 가족의 숙소였다. 손에 양철그릇을 든 그녀가 막사 아래쪽 길로 들어서자 아직도 어둠에 덮인 주위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모두 그녀처럼 경비대의 막사로 가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곧 긴 행렬을 이루면서 아래쪽의 막사를 향해 내려갔다. 막사에서는 땔감이 있었고 그곳에서 더운물과 강냉이 한 개씩을 넣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경비병의 점호가 끝나야만 했으니 두어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동별로 나누어 앉아 경비군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찬바람이 휘몰고 지나갔으므로 몸을 더욱 웅크린 채 그들은 기다리고만 있었다. 점호는 7시였지만 8시가 될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9시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이제 반년이 가까워진 시범소 생활로 이인숙도 점차 짐승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몸을 웅크린 채 쪼그리고 앉아 깜박 잠이 들었던 그녀는 웅성거리는 기척에 놀라 깨었다. 점호가 시작되는 모양으로 사람들이 몸을 펴며 일어서고 있었다. 동녘이 뿌옇게 밝아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위는 어두웠다. 경비 군관이 막사의 불빛을 등으로 받으며 나와 섰으므로 사람들은 열을 맞추었다. 그러자 군관이 소리쳤다.

357, 이인숙, 앞으로!

그의 목소리가 골짜기를 울리며 새벽하늘로 메아리치자 이인숙은 온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딸아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아나가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이름이 불리는 경우는 형을 집행할 때 뿐인 것이다.

351, 이인숙!

다시 군관이 소리치자 사람들이 몸짓으로 웅성거렸다.

빨리 나왓!

굳어진 다리로 비틀거리며 열에서 빠져나온 이인숙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군관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머리를 돌려 옆에 늘어선 병사들에게 짧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자 병사 두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양쪽 팔을 하나씩 붙들고는 곧장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막사 안으로 들려가면서 그녀는 눈물을 쏟았다. 경희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곳은 시범소장의 방이었다. 시범소장인 중좌가 들어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옆쪽에는 사복 차림의 두 사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으므로 이인숙의 가슴은 바닥까지 무너져 내렸다. 형 집행관 이외에는 올 사람이 없다.

어흠.

커다랗게 헛기침을 한 박기동이 중좌를 바라보았다.

중좌님, 애는 어디 있습니까?

막사로 데리러 갔습니다.

중좌가 대답하자 박기동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 부인은 어디 앉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좌의 눈짓에 앞쪽에 서 있던 이인숙을 병사들이 의자에 앉혔다. 잠자코 있던 사복 차림의 사람이 뱉듯이 말했다.

어서 씻기고 이 선생 따라 보내,

,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중좌가 공손하게 대답하자 박기동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옷을 미리 준비해 왔으니 그렇게만 해주시고, , 날씨가 꽤 춥네, 이곳도‥‥‥」

그는 지금 김상철의 지시를 받고 장국진의 유가족을 데리러 온 것이다.

 

아니, 이 새끼. 어디로 간 거야.

주코프가 버럭 소리를 치고는 문짝을 발로 걷어찼으므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 개새끼, 어디 잡히기만 해봐라. 당장에 쏴 죽여 버릴 테니까.

그때 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다시 나왔다.

이봐, 젊은이, 왜 그래!

몸을 돌린 주코프가 부하들과 함께 현관을 떠났다.

빌어먹을, 모두 마피아 놈들 짓이야.

기다리게 했던 택시에 오르자 주코프가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놈들이 운전사들을 협박했어. 그래서 운전사 놈들이 모두 도망쳐 버린 거야.

하바로프스크의 근대지사가 협력해준 덕분에 제설차는 다시 준비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차를 몰고 갈 운전사들이 도망쳐버린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두둑한 보수로 계약을 한 것에 만족해하던 그들이 아침이 되자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주코프가 주먹으로 택시의 시트를 쳤다.

좋다, 내가 운전사들을 데려오겠다.

그는 부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날아갔다 올 동안 너희들은 차를 지켜, 이젠 어떤 훼방을 놓을지 모르니까.

부하들을 내려놓은 주코프가 헬기 전용 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가 넘어 있을 때였다. 근대리아는 아직도 눈바람 속에 묻혀 있었지만 이곳은 청명한 날씨였다. 서둘러 운항 관리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관리원에게로 다가갔다.

KA 24호기 조종사를 불러주시오. 지금 당장 근대리아로 떠나야겠어.

관리원은 근대직원으로 한국인이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주코프의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잠깐 저분과 이야기를 해보시지요.

뭔데.

몸을 돌린 주코프 앞으로 다가온 것은 박미정이다. 조금 피로해 보였지만 보기 드문 미모의 여자였으므로 주코프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 근대리아로 떠나시나요?

그녀가 정확한 영어로 묻자 주코프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마담,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7. 상처

근대리아로 떠났어.

이유미가 말하자 안인석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사카의 뉴 오타니 호텔 안이다. 아래층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그들은 라운지로 올라와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근대리아로 떠나다니?

그렇게 묻는 안인석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럼, 미정이가‥‥‥」

그래, 김상철이 만나러 간 것이지.

시골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난 여행사 사장이야. 한국에 있다면 모를까 외국으로 나간 것은 5분 안에 알아낼 수가 있어.

닷새 전에 도쿄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갔어.

「‥‥그렇다면‥‥」

김상철이가 근대리아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아니겠어.

온몸을 굳힌 안인석이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연초의 나흘간의 휴가 동안 그녀는 내내 침울했었고 말수도 적었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이유미가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미정 씨하고 연락이 안 된다고 걱정하길래 그저 생각 없이 여행자 리스트를 컴퓨터로 조회해 보았어. 그랬더니 ‥‥‥」

「‥‥‥‥」

놀랐어.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곧장 달려가다니.

, 그만, 조용히 해.

번쩍 얼굴을 든 안인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입 좀 닥치란 말이다.

그러자 이유미가 쓴웃음을 짓고는 찻잔을 들었다.

,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처음부터 입 닥치고 있을 작정이었는데 생각해서 말해준 것이.

그만두라니까!

안인석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위의 시선들이 그들에게 모아졌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유미는 찻잔을 든 채 오사카 성을 바라보았고 안인석은 탁자를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요즘 이유미는 주말이면 오사카로 날아왔다가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에 서울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안인석은 아직 그녀가 이혼한 것을 모른다. 여행사와 빌딩을 자신의 명의로 이전하고 홍만규와 이혼한 이유미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입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안인석에게 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안인석이 치켜 뜬 눈으로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미정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어?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긴장되어 있었다.

집 안에만 있는 애가, ?

그걸 내가 알아.

이맛살을 찌푸린 이유미가 얼굴을 옆쪽으로 돌렸다.

매일 사람들이 근대리아로 수백 명씩 왕래하는 상황이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

차분하게 생각해야 돼.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까.

의자에 등을 붙인 이유미가 다시 입을 다물자 안인석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눈발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하늘은 어둑한 근대시. 유장석의 방 안에는 박종용과 이상훈, 그리고 김상철이 모여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듯 김상철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상석에 앉은 유장석이나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이제 이 일은 경비본부가 마무리를 짓도록, 앞으로 더 이상의 난동은 없도록 하고.

유장석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대다수 중국계는 선량한 시민이야. 그리고 생필품 가게의 대부분도 삼합회의 지시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폭리를 취한 만큼 삼합회에 상납했으니 그들도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경비 본부장인 박종용이다. 타운의 소요는 이제 그쳤지만 중국인 마을은 수십 군데의 가게가 불에 탔고 마을 안쪽의 색시방, 마약, 마작방은 철저히 파괴되어 마치 전쟁을 치른 듯한 참상이었다. 경비본부가 집계한 중국인 사상자는 사망이 47, 부상이 128명인 대참사였다. 이상훈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의 공격으로 삼합회는 당분간 예전의 세력으로 회복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2인자인 마연중이 죽고 진대원도 부상당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어젯밤에 제일 바쁜 사람 중의 하나가 이상훈이었다. 그는 경비대원들을 지휘하여 공격조들의 뒤를 받쳐주면서 습격당한 가게가 약탈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양면작전을 썼기 때문이다.

진대원이 부상당했다고?

놀란 듯 유장석이 묻자 이상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같이 있다가 부상 당한 부하가 자백했습니다. 수류탄 파편에 맞았다고 합니다.

「‥‥‥」

아직도 중국인 마을에 숨어 있을 테지만 감정을 자극시킬 염려가 있어서 가택 수색은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믿습니다.

당연하지, 그리고 주민들에게 이 일은 삼합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려야 돼.

유장석이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이것은 해외 토픽감이다. 특히 중국 정부가 알게 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따라서 계획한 대로 근대리아로의 입출국을 엄격히 통제하도록. 이주민 외에 입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시키고 출국은 말할 것도 없다.

타운으로 돌아온 김상철은 나파스 클럽 앞에서 차를 세웠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하늘은 벌써 잿빛이었고 끈질긴 눈발은 그치려 하지 않았다. 클럽의 현관을 들어선 김상철에게 안에서 송길수가 다가왔다. 조금 허둥거리는 모습이었다.

형님, 조금 전에 그레고리한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송길수가 말했다.

아무래도 마피아가 방해를 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제설차를 끌고 올 운전사들이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코프가 운전사를 실으려고 그레고리한테 갔습니다, 그런데 ‥‥」

그들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형님, 주코프가 여자 한 명을 싣고 왔답니다.

여자라니?

소파에 앉은 김상철이 묻자 송길수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박미정이라고, 형님의 친척이 되신다는데.

김상철이 그를 쏘아보았다.

박미정?

, 형님, 친척 되십니까?

내 친척이라고?

, 제가 확인을 했더니 형님의 친구인 안 누구하고 결혼한 박미정이라고 하면 아실 것이라고.

「‥‥‥‥」

지금 그레고리의 임시 막사에 있습니다, 형님.

주코프의 말로는 막무가내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형님을 만나야 한다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닷새를 기다린 모양입니다.

형님, 헬기를 그레고리한테 보낼까요?

 

그 시간에 헬기 한 대가 만 피트 고도를 유지한 채 근대리아의 상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헬기는 러시아 공군의 주력 공격용 Ml-24하인드를 민간용으로 개조한 것으로 2,200마력짜리 엔진 두 개에서 뿜어내는 강력한 힘으로 쏜살같이 날아오는 중이었다. 조종석과 분리된 뒤쪽에는 2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오늘 승객은 세 사람뿐이다. 벽에 방음장치까지 덧대어 있어서 진동과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소음은 적다. 갑자기 천장의 스피커에서 러시아인 조종사의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한 시간 반 후에 근대리아에 도착합니다.

그러자 박기동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그러는군

러시아어를 제대로 못 알아들으면서 어림잡고 말하는 것이다. 이인숙은 파카로 몸을 감싼데다 바지에 가죽 장화를 신은 산뜻한 차림이었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를 뒤로 묶어 올렸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여위었지만 깔끔했다. 털코트로 온몸을 감싼 경희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근대타운에는 조선족이 많습니다. 북한에서도 이번에 내가 사람들을 데려왔는데 ‥‥」

박기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계속 데려올 거요.

저처럼 말인가요?

이인숙이 묻자 그는 크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아주머니는 우리 사장님의 특별 손님이라니까 그러시네요.

「………」

아주머니의 남편 되시는 분하고 우리 사장님이 친했던 사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하고는 달라요.

김상철에게서 대충 들은 대로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일 뿐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근대리아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얼굴에 생기를 띄었다. 이인숙은 경희를 내려다보았다. 악몽에서 벗어난 지 아직 사흘도 되지 않는다.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가끔씩 두려워질 때도 있었으므로 생각에도 두서가 없다. 하지만 고급 모피옷을 입고 있는 경희를 보면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것이 꿈이라면 깨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헬기가 도착했을 때는 대지가 짙은 어둠이 덮인 오후 6시경이었다. 헬기의 문이 열리자 눈보라가 휘몰려 들어왔으므로 박미정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쪽으로.

먼저 내린 사내의 안내를 받고 그녀는 앞쪽에 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헬기의 회전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에 눈더미가 맹렬하게 몸에 부딪히며 지나갔다. 그들이 건물로 다가갔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서너 명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불빛을 등에 지고 있었으므로 방한모와 코트로 몸을 감싼 그들은 모두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박미정은 자신의 앞에 정면으로 다가온 사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어두웠지만 김상철의 얼굴 윤곽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흰 입김이 코끝에까지 와 닿았을 때 박미정은 그에게 와락 몸을 부딪쳤다. 그의 몸을 깍지끼듯 안자 김상철의 손이 어깨 위에 놓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자, 집으로.

헬기의 엔진소음이 컸지만 그가 귀에 대고 말하는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그것도 분명 김상철의 목소리였으므로 박미정은 어깨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통나무집의 거실, 페치카에서는 장작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는 중이라 방 안은 훈훈했다. 짙은 어둠에 덮인 창밖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박미정은 스웨터에 바지의 가벼운 차림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뜨거운 홍차로 위스키를 조금 섞은 것이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우선 쉬라는 김상철의 제의를 거절한 대신 마시는 두 번째 잔이었다. 김상철은 위스키 잔을 쥐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으므로 갑작스러운 여자 손님에 술렁였던 집안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과일 접시를 들고 온 황윤의 태도도 그래서인지 거북스럽지 않다. 조금 절름거리면서 그녀가 나가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인석이는 오사카에 있다고 들었는데, 연락이나 하고 온 거야?

그녀가 잠자코 있자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던지 그가 말을 이었다.

꼭 이렇게 확인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럴 만한 가치도 없고, 이제는.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서로 묻지 않는 것이 낫다는 얘기야.

그냥 왔어요.

박미정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으므로 그가 주춤 말을 멈추었다.

나도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보려고.

어쩌면 당신이 누굴 시켜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었는데 …」

아닌 것 같네.

난 미정이하고는 맞는 상대가 아니었어.

그러자 박미정이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상철 씨, 성공했네요.

다른 건 잊고 지낼 만도 하겠네.

바쁜 생활이야.

뻔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러고는 잠시 아랫입술을 물었던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연락 안 한 이유는 듣고 싶어요.

그녀의 시선을 받은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한테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미정이하고는 맞는 상대가 아니었고.

난 당신이 죽은 걸로만 알고 있었어요.

갑자기 목이 메인 박미정이 이를 악물었다.

넌 나쁜 자식이야.

「‥‥‥‥」

나하고 인석 씨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우리는 상철 씨를 찾으려고‥‥」

「………」

난 인석 씨한테 이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어. 상철 씨한테 미안해하고 놀랄까 봐서.

김상철이 손에 든 술잔을 한 모금에 입 안으로 삼켰다. 그 순간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박기동이 들어섰다.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몸짓이다.

사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만.

소파에 얌전히 앉은 경희는 분주히 시선을 놀려 방 안의 호화로운 가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움직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엄마 곁에 붙어 앉아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6개월 동안의 시범소 생활이 여섯 살짜리 아이를 철저히 주눅 들게 한 것이다. 이인숙은 손을 뻗어 경희의 조그만 손을 쥐었다. 본래의 밝고 천진한 아이로 되돌아가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지만 그쯤은 문제가 아니다. 살아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인 것이다. 방문이 열리고 박기동과 함께 사내 하나가 들어섰으므로 이인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희도 재빨리 따라 일어서서 새로운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내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김상철입니다.

반갑게 말한 그가 손을 뻗어 경희의 머리를 쓸었다. 경희가 어머니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머리를 숙인 이인숙이 감사의 인사를 몇 마디 했지만 잘 들리지도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 김상철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 집에 방이 꽤 많습니다. 부디 내 집이라 생각하시고‥‥‥」

박기동이 소파 끝 쪽에 앉아 가볍게 헛기침을 한 것은 뭐라고 대답을 하라는 표시 같았지만 이인숙은 채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경희 교육 문제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학교도 있으니까요.

집 안에 일하는 사람이 대여섯 명 있고, 묵고 있는 사람도 20명이 넘습니다. 대가족이지요. 괜찮으시다면 당분간 이곳에 계시면서 그 사람들 관리를 해주셔도 좋고‥‥‥」

시키신 일은 뭐든지 ‥‥‥」

겨우 이인숙이 말하자 박기동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자 정색을 한 김상철이 손을 저었다.

일을 하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그저 감독만‥‥‥」

알고 있습니다.

이인숙이 머리를 들었다.

어떻게든 저희 모녀에게 잘 해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지요. 장형이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제가 약속을 했지요. 부인과 경희를 보살피겠다고, 이젠 경희를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셔야 합니다.

열심히 살겠어요.

이제 또렷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김상철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잘 견디셨습니다.

저어 ‥‥」

이인숙이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저는 외국어를 조금 하는데요.

아아, 그렇습니까? 어떤?

김일성 대학에서 어학을 했습니다. 영어가 전공이었지만, 노어, 중국어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용하실 수 있지요. 우선 푹 쉬시고 나서 …」

김상철이 박기동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당신도 러시아어, 중국어는 모르지?

아아, .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개진 박기동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모릅니다, 사장님.

잘 되었다. 내가 그쪽 일을 부인께 부탁할 수도 있겠습니다. 더구나 영어를 전공하셨다니 영어는 능통하시겠고.

박기동이 다시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다음 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내리던 눈이 딱 그치더니 참으로 오랜만에 햇살이 비추었다. 눈에 오랫동안 씻기고 있었던 것처럼 파란 하늘은 더욱 맑은데다가 햇살은 한없이 밝았다. 이한은 아침 일찍부터 저택 주위의 제설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대충 치웠던 눈을 땅바닥이 보이도록 치워내는 작업이다. 그가 정문 앞에 서 있는데 지프 한 대가 덜컹이며 달려오더니 멈춰 섰다. 안에 타고 있는 것은 의사인 안토노프였다.

아니, 당신 웬일이요?

이한이 묻자 안토노프가 눈으로 저택을 가리켰다.

아침부터 의사가 놀러오겠어? 여자 손님이 아프다는 거야.

어느 여자?

어젯밤의 여자 손님은 공교롭게도 두 팀의 세 명이다. 대답도 하지 않고 저택 안으로 차를 모는 안토노프를 따라 이한도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서 만난 조선족 여인에게 물은 후에야 그는 박미정이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택 안의 사람들은 그녀가 김상철의 친척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한은 언젠가 김상철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헬기장에서 그들이 만나는 장면을 본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토노프가 진찰을 끝낸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김상철에게 말했다.

감기 기운이 있고 몸이 쇠약해져 있소. 당분간 쉬어야지 잘못하면 태아에게도 영향이 옵니다.

잠자코 있는 김상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임신 3개월이오. 푹 쉬도록 하는 것이 제일 좋은 처방이오.

김상철이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박미정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열기를 띠고 있었고 입술에는 물기가 없다.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그가 박미정을 내려다보았다.

무모한 일을 했어. 더구나 아이까지 있는 몸으로.

박미정은 천장을 향한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인석이한테 전화를 하겠어, 미정이가 이곳에 있다고, 그리고 내가 초청한 것으로 말할 테니까 ‥‥.

하루 이틀쯤 쉬어야 한다니까 마음 놓고 .

김상철이 몸을 일으키자 박미정이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날 테니 준비 좀 해주실래요?

오늘은 안 돼, 의사 말이‥‥」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어요.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을 보기도, 목소리도 듣기 싫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글쎄, 이곳이 싫다니까.

크게 뜬 눈으로 박미정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당장, 지금이라도.

한동안 잠자코 서 있던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림 준비를 하지.

부탁해요.

그녀가 피로한 듯 눈을 감았으므로 김상철은 몸을 돌렸다.

 

진대원은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한의 습격을 받았을 때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기둥에 몸이 깔렸지만 다행히도 기둥 한쪽이 벽에 걸려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중국인 마을 안의 임시거처에 은신해 있었다. 그러나 조직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우선 마연중을 비롯한 간부급 10여 명이 죽었고 3분의 1이 넘는 부하가 죽거나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조직의 기반이었던 색시방과 마약방, 마작방이 모조리 파괴된 데다가 중국인 가게 30여 곳이 불태워졌다.

이것이 남북한과 마피아까지 연합한 세력의 공동작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진대원은 아연해졌다. 그로서는 남북한의 연합작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북한 정부의 경직성을 오래도록 들어 온 진대원이다. 김상철과 이금철이 연합하려면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할 것이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피아까지 끌어들여 이쪽을 쳤다. 더욱이 경비대까지 배후를 도왔으니 자신은 사면초가의 형세였고 그 책임은 물론 자신에게 있었다. 무리했던 것이다.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끈 진대원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방심했다. 남북한이 연합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금철이 북한의 조종을 받는 것처럼 근대리아 행정부나 김상철이 한국의 지휘를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둘러앉아 있던 부하 중의 하나가 번쩍 허리를 세웠다.

대형, 조직원은 둘째치고 주민들의 불만이 큽니다. 그들은 우리 지시를 따랐다가 생계 수단을 잃었습니다.

30대 후반의 그는 사천성 출신으로 이름은 양필성이다. 삼합회 내에서의 지위는 중간계급이었지만 마약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파견되어 근대리아의 마약을 총괄하는 사내였다.

근본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이오. 대형의 반성만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건방진 ‥‥‥」

진대원이 눈을 치켜떴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양필성.

마약방이 폭파되었고 돈과 마약을 몽땅 털렸소. 대형의 오판이 조직을 망쳐 놓은 거요.

보통 체격에 그저 평범한 인상의 양필성이었지만 눈을 부릅뜨고 대들자 위압감이 느껴졌다.

애초부터 남북한 양쪽을 건드려서 싸움을 붙인다는 발상도 단순했고 그것이 무위로 끝났다면 자중하고 있어야만 했소. 폭설을 기화로 생필품 가격을 폭등시키도록 한 것으로 우리는 모든 조직들의 공적이 된 것이오.

그의 굵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진대원의 얼굴빛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곧 하얗게 굳어졌다.

양필성, 이놈, 반항하는 것이냐!

당신은 나를 처벌할 수 없소. 나는 회주 직속의 충방 사람이야.

너를 처단하고 회주께 보고해도 된다.

내분이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별 탈 없이 조직이 굴러가지만 어긋날 때에는 조직도 흔들리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악조건에서 어떻게 조직을 운용하는냐 하는 것으로 지도자의 역량이 판가름 난다. 지금은 양필성을 장악하지 못했던 진대원의 미숙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근대리아는 내 소관이다!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치면서 진대원이 소리쳤다. 충실한 오른팔이었던 마연중의 존재가 사무치게 아쉬웠는데 그것은 조직의 장래보다도 우선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양필성 같은 중급 간부가 감히 대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창밖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횐 눈 위에 반사되는 한낮의 햇살로 대지는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으므로 김상철은 창에서 몸을 돌렸다. 들어서는 건 이한이다.

형님, 준비되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그는 이한과 함께 방을 나왔다. 잠시 후에 그는 지프의 뒷자리에 박미정과 앉아 있었다. 차는 속력을 내 눈 덮인 평원을 끼고 달려가는 중이다. 차가 덜컹이며 흔들릴 때마다 차안의 공기가 움직이면서 그의 코에는 박미정의 체취가 스며들었다. 코에 익은 향기였다. 숨을 내려쉰 그는 반대쪽 창으로 머리를 돌렸다. 제설차에 치워진 눈더미가 작은 언덕처럼 길가에 쌓여 있었다. 박미정은 똑바로 앞쪽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온몸에 열이 났고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이제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지프는 오른쪽으로 꺾어지더니 공항 입구로 들어섰다. 게이트의 경비원에게 통과 확인을 받으려고 차가 멈춰 섰을 때 이한이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비행기 앞으로 곧장 가겠습니다. 지금 탑승을 시작했으니까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지프는 속력을 내며 넓은 활주로 위를 달려 나갔다. 저택에서 공항까지 오는 한 시간 동안 그들은 한마디의 말도 뱉지 않았다. 덩달아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던 이한은 앞쪽으로 비행기가 보이자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비행기는 아에로플로트의 쌍발 제트기로 승객들이 트랩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트랩 밑에서 지프가 멈추자 이한이 먼저 내렸다. 따라 내리던 박미정이 문득 머리를 돌려 차 안에 앉아 있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김상철 씨, 그럼 안녕히. 난 당신과의 모든 감정을 이 눈밭에 두고 떠나요.

「‥‥‥‥」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뿐만 아니라 내 가정을 위해서라도.

박미정이 몸을 돌리자 가방을 들고 옆에 서 있던 이한이 앞장섰다. 그러자 밖에 서 있던 운전사가 힐끗 김상철의 눈치를 보더니 문을 닫았다. 곧 이한으로부터 가방을 받아 쥔 그녀는 꼿꼿한 걸음으로 트랩을 올라 비행기 안으로 사라졌다.

 

그레고리가 수송단을 이끌고 근대시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이다. 근대리아 건설단의 지원을 받아 밤을 낮 삼아 길을 뚫고 전진해온 것인데 꽤 멀리까지 마중 나간 김상철을 보자 그는 소리치듯 말했다.

마피아 새끼들의 방해만 없었다면 사흘은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거요.

그들은 김상철의 지프에 올랐다. 트럭의 긴 대열이 이제는 속력을 내어 그들의 옆을 달려가고 있었다.

제설차를 부숴놓은 데다, 나중에는 운전사들을 위협해서 도망치게 했단 말입니다.

알고 있어.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마피아하고의 밀월은 끝났다.

지난번의 연합전선을 구축할 때처럼 필요한 때에는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더 이상 김상철을 이용할 필요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근대리아에 기반을 굳히게 된 것은 김상철의 공이었다. 김상철 입장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은 마피아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각기 기반을 굳혔고 서로 매어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이 김상철의 운송회사 설립으로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마피아는 근대리아 내의 황금사업인 운송업을 김상철에게 강탈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이번은 간접적인 방해만으로 그쳤지만 다음에는 노골적으로 나올 것이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삼합회를 치려고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있을 때라 그 정도로 그쳤을 것이야. 이제 삼합회 토벌도 끝났으니 마피아가 우리에게 부담을 느낄 이유도 없다.

내가 이번 전쟁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오.

전쟁도 아니었어. 기습 토벌이었지. 진대원은 이제 주민들의 신뢰도 잃은 모양이야.

그들이 탄 차는 수송단을 앞질러 근대시 외곽에 자리 잡은 운송회사로 달려가는 중이다.

하지만 세력이 꺾였을 뿐이지 삼합회는 곧 재기할 것이다. 중국계 주민이 있는 이상 뿌리가 쉽게 뽑혀지지 않아.

그레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마피아도, 북한계 조직도 마찬가지요. 러시아계, 조선족 주민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세력이 뿌리박혀 있으니까.

그들뿐만이 아니야. 곧 야쿠자가 일본 기업을 내세우고 들어온다. 아마 올해 안으로 한국계 일본인들이 근대리아로 대거 몰려들어 올 것인데 그자들은 대부분 야쿠자 조직원들로 보아도 될 거야.

이것, 근대리아가 해외 조선족들의 집결지가 되는군.

웃음 띤 얼굴로 그레고리가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이 근대리아를 세운 강회장의 목적이야. 조선족의 나라!

그런데 병균처럼 묻어오는 무리들이 있지. 마피아나 삼합회, 야쿠자 같은 것들 말이야.

 

저녁 무렵이 되자 타운은 흥청대는 분위기가 되어갔다.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빛났고 거리는 인파로 채워져 어느 대도시의 밤거리 못지않았다. 서쪽 거리에 있는 마야 클럽에도 이미 좌석의 반 이상이 채워져 있었는데 흘 중앙의 무대에서는 러시아인 댄서가 느린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클럽 2충에 있는 사무실 안이다. 상석에 앉은 사내는 근대리아의 마피아 책임자인 그루진스키였고 그의 앞쪽에 앉아 있는 것이 진대원이었다. 오늘의 회담은 진대원이 기습방문한 것으로, 그루진스키는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이제 여유를 찾아가는 참이었다. 손님으로 클럽에 들어와서는 면담을 요청하는 바람에 그루진스키는 부하들을 서둘러 모으는 소동을 벌렸던 것이다. 며칠 전에 남북한 세력과 연합하여 그의 부하들도 중국인들을 기습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대원은 러시아어에 유창했다. 그루진스키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대원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찾아온 목적을 말하겠소. 그루진스키 씨, 난 우리 양대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 온 겁니다.

그루진스키는 40대 중반으로 거구였다. 수염에 덮인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듯 진대원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운송 사업을 김상철이 가로채 버려서 이제 당신들 화물까지 김상철의 운송회사가 운송해 주게 되었소. 말하자면 당신들은 다리가 잘려진 꼴이지. 경비대를 배후에 두고 있는 김상철의 세력은 곧 우리를 말살시키게 될 거요, 러시아 주민이나 중국계 주민은 근대리아의 서자야. 조선족을 배경으로 하는 북한계는 달래면서 남겨둘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그럴듯한 말이기는 한데 ‥‥‥」

그루진스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근대리아가 러시아 영토라는 것을 잊으신 모양이군. 조선족들은 우리 땅에서 세를 살고 있는 것이라구. 따라서 우리 러시아 주민은 서자가 아니야.

말장난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이맛살을 찌푸린 진대원이 그를 쏘아보았다.

한국 세력을 누를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온 거요. 물론 당신도 동의할 줄로 믿고.

그것이 쉽게 될까? 그리고 당신은 시급할지 모르지만 우린 아직 아니야. 이 공존 관계를 깨뜨려서 득이 될 것이 별로 없단 말이야.

한국 세력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아니야, 다만‥‥‥」

진대원이 탁자 위로 상체를 숙였다.

다만 세력을 반감시킬 필요가 있단 말이야. 그러면 우선 당신들의 운송 사업을 되찾게 될 길이 생길 것이고.

 

동무, 이젠 우리도 길이 생겼어.

이금철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었다. 드디어 조총련이 근대리아에 투자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며칠 후면 투자단이 근대리아를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다. 그는 앞에 앉은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평양에서 해외사업부 부장 동지가 직접 투자단을 이끌고 온다. 타운 호텔 한 층을 지금 예약해 두도록. 실수가 있으면 안 돼.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최태호도 밝은 표정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타운에만 갇혀있게 될 것인가 그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항에 환영단을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천 명쯤은 동원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자 이금철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여기가 평양인 줄 알아? 부장 동지는 비공식으로 이곳에 오는 거란 말이야.

아아, .

최태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우리 공화국 노동자를 받은 것은 김상철이지 근대리아 행정당국이 아니야.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우리 공화국과 단절된 관계에 있다는 걸 명심하라구.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삼합회 덕분에 당분간은 공존 관계가 되었지만 이 땅의 조선족은 대부분이 공화국과 연고가 있는 동포들이야. 근대리아가 무슨 수단을 쓰던 간에 이 땅은 결국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서 온 동무들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태호가 그의 말을 받았다.

박기동이의 말을 들으면 김상철이 곧 일꾼들을 더 모집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상철은 철천지원수 사이였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아주 유용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각 기지내의 노동자 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은 안팎에서 조직을 강화할 시간과 인력이 필요한 때였다. 그것을 김상철이 모두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삼합회를 꺾기 위한 연합 제의는 이금철에게 조직을 강화할 시간을 주었는데 평양에서 데려온 100여 명의 인력은 모두 훈련된 당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장인규는 클럽 뒤에 2층 벽돌집을 지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따라온 서규환과 여러 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으므로 김상철의 저택에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엔 이틀에 한 번꼴로 볼가 승용차를 타고 찾아왔는데 그것은 이인숙과 친해졌기 때문이다.

김상철의 저택은 통나무로 만든 방어용 성곽 같은 구조이다. 높이가 5미터가 넘는 통나무 담장이 빙 둘러쳐진 안으로 들어서서 밋밋한 능선을 2백 미터쯤 올라가야 본채가 나온다. 전혀 엄폐물이 없는 2백 미터의 공지에서 습격자들은 저지당할 것이고 만에 하나 본채까지 온다고 해도 20여 명의 경호대가 상주하고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공지를 오른 장인규가 현관 앞에 차를 세웠을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김상철이 나왔다. 코트에 방한모를 쓴 외출복 차림이었다.

요즘은 자주 오는군.

김상철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하자 장인규도 따라 웃었다.

언니가 생겼으니까요, 경희도 귀엽고.

잘 됐어. 그런데 ‥‥‥」

김상철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이 타운 내 사업체들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난 근대시와 운송 사업에 전념해야 될 것 같아서.

날 당신 수하로 끌어들이겠다는 말인가요?

그러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렇게 되어가는 상황 아닌가? 그럴 바에는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낫지.

이 장인규가 결국 당신 수하가 되는군요.

날 찾아왔을 때부터 그렇게 되도록 결정된 거야.

, 지난번에 찾아온 여자는 누구지요? 친척이라고 했다는 여자.

장인규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 여자가 당신의 옛 애인이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런 소문이 났어?

당신에 관한 소문은 금방 퍼져요. 당신의 모든 행동이 관심의 대상이니까.

이한과 경호원들이 차를 세워두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김상철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옛 애인이었어. 지금은 내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지만.

그렇군요.

장인규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이 피해 다니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겠군요.

그런 셈이지.

여자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고, 그래서 확인하러 왔군요.

이제 모두 끝난 일이야.

김상철이 발을 떼었다.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와. 사업체 현황과 관리 문제를 상의해야 될 테니까.

 

토요일 오후였다. 유리창 밖으로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을 받은 앞동 아파트는 이미 반쯤 그늘에 묻혀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안인석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소파에 앉자 박미정이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예고도 없이 날아와서 시치미를 떼고 옷을 벗은 다음 씻고 나왔는데 마치 아침에 출근했다가 퇴근한 것 같은 행동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건을 옆으로 던진 안인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할 얘기 없어?

무슨 얘기요?

쭈욱 기다려왔어.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겠지 하고‥‥‥」

감출 생각이었어?

박미정이 크게 숨을 마셨다가 천천히 뱉아냈다.

내가 근대리아에 다녀온 이야기 말인가요?

당신, 김상철 씨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아요?

그놈을 만났어?

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안인석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물었잖아. 그놈을 만났느냐고.

만났어요.

? 그놈을 아직도 못 잊어서?

아랫입술을 깨문 박미정이 머리를 돌렸다.

대답해, 멀쩡한 남편 놔두고 그 먼 곳까지 다녀온 이유를, 감격의 해후를 했어?

「‥‥‥‥」

그놈이 뭐라고 그래? 이 안인석이가 배신자라고 했겠지? 그렇지?

「‥‥‥‥」

내가 그놈 때문에 오사카로 밀려난 걸 이제 알 수 있겠지? 그놈은 총회장의 손녀와 곧 결혼할 귀하신 몸이 되었으니까.

퍼뜩 머리를 든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예요?

나는 지금 그놈의 복수의 대상, 아니, 노리개가 되어 있다는 말이야. 내가 오사카로 밀려난 것도 그놈이 조종했다는 증거가 있어.

안인석이 호흡을 진정하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그런데 이제 너까지 그놈을 찾아가서 해후를 해? 그리고 입을 다물고 비밀을 지키고 있어?

나는 당신이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박미정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 다녀온 것, 그저 확인해 보려고 했지 다른 의미는‥‥‥」

거짓말 말아!

버럭 소리친 안인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란 말이야! 너는 기대를 가지고 갔어. 그리고 그놈한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너희들 음모에 놀아날 내가 아니야!

당신‥‥‥」

창백해진 얼굴로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오사카로 간 것이 그 사람의 복수라는 말, 이해가 안 돼요. 도대체 왜?

내가 널 빼앗아갔기 때문이지. 그놈은 그런 이야기는 안 한 모양이구만. 하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당신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건 왜 물어?

놀라지도 않고.

문득 말을 멈춘 그녀가 안인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근대리아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그놈이 말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버럭 소리친 안인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놈은 내 인생, 그리고 내 가정도 부셔놓았어. 나는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부셔놓은 것 없어요.

나는 이미 부서졌어.

그가 차가운 눈으로 박미정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근대리아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이제 더 이상 네 말을 믿지 않기로 했어. 그놈한테 세뇌되었을 테니까. 그놈은 회장의 손녀를 꼬드겨서 내가 비열한 배신자라고 말했을 거야. 내가 너와 결합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거지.

그가 무슨 자격으로?

메마른 소리로 박미정이 묻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사랑했던 여자를 가로채 갔으니까.

그 사람은 나를 잊었어요. 그래서 연락을 안 했던 거야.

잊지 않았어, 지금도.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선 안인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도 마찬가지고, 내가 너와 같이 있는 동안은 내내 그놈의 목표가 될 거야.

박미정이 눈을 치켜떴으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저 참담한 표정으로 안인석을 올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커피숍에 들어선 강미현은 카운터 앞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 마악 지난 때여서 손님이 꽤 많았다. 안면이 있는 종업원이 다가왔다.

누구 찾으세요?

그 순간 강미현은 벽 쪽의 테이블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일어서는 여자를 보았다 짙은색 코트 차림에 눈에 띄는 미모의 여자였다. 강미현이 다가가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미현 씨 되시나요?

, 그럼 그쪽은 박미정 씨?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녜요. 그렇지 않아도 한 번쯤 만나고 싶었습니다.

강미현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회사 빌딩의 지하 커피숍이어서 옆을 지나는 몇 명이 강미현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제 그녀가 회장의 손녀인 것을 모르는 직원은 없다. 차를 주문하고 나자 박미정이 머리를 들었다. 긴장한 모양으로 표정이 굳어져 있다.

, 갑자기 이런 말씀 드리면 놀라시겠지만 저는 전에 김상철 씨와 가깝던 사이였습니다.

그러자 강미현이 밝게 웃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결혼하신 것도.

저는 그 사람이 실종된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야 그 사람이 근대리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어요. 폭설로 꽤 고생하셨다고.

이제 후련해요. 그 사람과의 관계는 정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릴 것은‥‥‥」

얼굴을 더욱 굳힌 박미정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우리, 그이, 제 남편되는 사람한테 그 사람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데요. 그이는 김상철 씨가 영향력을 행사해서 오사카로 전출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강미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믿으시겠네?

그런 일 없어요. 아마도 남편 되시는 분의 피해의식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제 생각이지만.

이제 말씀드리지만 남편 되시는 분은 김상철 씨의 생존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박미정 씨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말예요. 그런데 아마 그 사실을 박미정 씨한테 숨긴 것 같더군요. 만일 말했다가는 결혼도 안 되었을 테니까.

몸을 굳힌 채 꼼짝하지 않고 바라보는 박미정을 향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김상철 씨가 박미정 씨한테 연락을 못 한 것은 살인 혐의로 기소된 상태로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박미정 씨를 구속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는 이미 당신 둘이는 깊은 관계가 되어 있었고. 그는 당신들의 결혼을 알면서도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았어요. 나는 그런 김상철 씨를 존경했어요. 그리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지요.

그런 김상철 씨가 이제 와서 그런 일을 하다니, 믿을 수가 있겠어요?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운 강미현이 찻잔을 들었다.

나는 그이를 믿어요, 누구보다도.

 

아니, 아직 못 만나셨습니까? 부인 만난다고 삼십 분쯤 전에 나갔는데.

직원이 의아한 듯 물었다. 공항의 공중 전화박스 안이다. 박미정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 어디로 가셨는지 혹시 아세요?

뉴 오타니 호텔 아십니까? 부인께서 그곳에 묵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죠?

아아, .

언제 한번 뵙게 해달라고 했는데 안형이 계속 미룬단 말입니다.

직원과의 통화를 마친 박미정은 박스를 나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사카에 온 것은 안인석을 만나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으나 비행기 안에서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회사로 전화를 하자 그는 아내를 만나러 갔다는 것이다.

그녀가 뉴 오타니 호텔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후인 저녁 7시경이었다.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데다가 안인석이 아직까지 이곳에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로비 안쪽의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하숙집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으니 만날 수는 있을 것이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이곳에 방을 잡아 묵을 작정이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박미정은 문득 머리를 들었다. 부인이 이곳에 묵고 있지 않느냐는 직원의 말이 아까부터 자꾸 귓속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미정은 프런트로 다가갔다. 접수구의 직원은 웃음 띤 얼굴의 남자였다.

무얼 도와드릴까요.

그는 대뜸 영어로 이렇게 물었는데 그것은 호텔 맨 직감으로 국적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한국인 투숙객 명단을 알고 싶어서요.

박미정의 유창한 일본어에 사내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이제 그도 일본어를 쓴다.

그건 곤란한데요, 손님. 한국인 투숙객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름을 말씀해주시면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박미정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사내가 데스크에 몸을 바짝 기댔다.

남잡니까?

안인석.

박미정이 불러주는 영어 스펠링대로 컴퓨터를 두드리고 난 사내가 머리를 저었다.

유감인데요, 없습니다.

한국인 여자는요?

사내가 컴퓨터를 재빠르게 두드리고 나서 말했다.

여자 투숙객은 모두 여섯 명이군요.

이름을 불러주시겠어요?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하경숙, 조미선, 김영희, 이유미, 고순자, 박경미. 이제 됐습니까?

이유미라고 하셨나요?

, 927호실 손님입니다.

이유미와 안인석이 방에 들어선 것은 밤 12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시내의 클럽에서 위스키 한 병을 나눠 마신 그들은 적당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던져놓은 이유미가 이제는 발을 흔들어 구두를 벗어 던졌다. 눈가가 약간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요염했다.

그래, 이제 어떡하려고 그래?

소파에 털썩 앉은 그녀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검정색 망사 스타킹 사이로 발가락의 선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던 안인석이 몸을 돌렸다

어떡하다니?

이혼할 거야?

안인석은 캔의 뚜껑을 뜯어내고는 벌컥이며 마셨다. 그러는 그를 바라보던 이유미의 얼굴에 천천히 웃음기가 번졌다.

미안해, 그런 식으로 말해서.

안인석은 넥타이의 매듭을 풀어 내리면서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우선 아이 문제가 걸려. 아직 아이를 가질 여유가 없어.

그럼 아이 지우라고 할 거야?

정나미가 떨어졌을 테니 제가 알아서 했으면 좋겠는데.

이유미가 머리를 돌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자기 입으로는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군.

아직도 박미정이한테 미련이 있어?

그러자 안인석이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이봐, 솔직히 미정이가 무슨 죄가 있어? 모두 다 내 잘못이지. 나하고 김상철이의 악연 사이로 미정이가 끼어든 죄밖에 없단 말이다.

행복하겠어, 그 여자는.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내가 잘못한 거야. 그리고 책임은 너한테도 있어. 너는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단 말이야.

짜증 나.

단추를 푼 이유미가 재킷을 벗어 던지자 브래지어 차림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자기의 우유부단한 성격, 그 책임 전가의 버릇. 정말 싫어.

곧 결정하겠어.

자리에서 일어선 안인석이 냉장고 위에 놓인 샘플 위스키의 마개를 뜯더니, 병 채로 들여 마셨다.

김상철이는 내가 미정이를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 가정이 파탄이 나야 속이 시원할 테니까. 그래, 가라고 해.

몸을 돌린 안인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다니?

이대로 살 거냔 말이다. 밥 먹듯이 외박을 하면서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남편은 바지저고리야?

이유미가 피식 웃었다

내 걱정은 마. 내가 알아서 하니까.

그때 탁자 위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벽시계는 12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웬 놈의 전화.

짜증 난 얼굴로 안인석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한국말이다. 그러나 저쪽에서 응답이 없었으므로 안인석은 금방 일본말로 바꾸었다.

모시 모시.

그러자 전화가 끊겼다.

 

김상철이 강미현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후 3시경으로 그가 운송회사의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운송회사가 잘 된다면서요?

맑은 목소리로 강미현이 말했다.

바쁜데 전화한 것 아녜요?

아니, 괜찮아.

김상철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운송회사는 이미 차량 대수가 210대가량이 되었고 근대에서 지원받은 정비 요원과 행정직원들을 포함하면 사원 수만 해도 700명이 넘는다. 근대의 수송부를 제외하면 근대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운송 독점권을 가진 회사였으므로 벌써부터 화물량이 폭주했고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사도 설치되어 있었다.

별일 없지요?

그녀가 묻자 김상철은 잠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폭설이 내릴 때 박미정 씨가 다녀갔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모양인데, 잘 돌아갔는지 모르겠어.

「‥‥‥‥」

내 말 듣고 있어?

들어요.

그 여자한테 상처를 주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나요?

나한테 찾아왔더군요. 안인석 씨가 오사카로 간 것은 당신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말해주었어요, 사실을.

김상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사실을 말이야?

그의 목청이 높았던 때문인지 저쪽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강미현은 계속했다.

모두 다. 나는 내 남자가 그런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어요.

「‥‥‥‥」

어차피 상처는 받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어떻게 말하든‥‥하지만 그쪽은 받아들일 자세가 아니더군요. 특히 안인석이란 사람은.

「‥‥‥‥」

이제 모두 말해주었으니 그들 일은 그들이 알아서 하겠죠. 우리가 책임질 일은 아니니까.

그 여자는 피해자야.

김상철이 겨우 이렇게 말하자 강미현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피해자는 당신이에요, 멍청이 같으니. 당신이 벌판을 헤매는 동안 그들은 행복에 겨워 당신을 잊었어요. 그리고 또 욕심을 부려 그 여자는 두 남자를 모두 가질 셈인가?

그만해.

갑자기 화가 나서 ‥‥ 그만할게요.

강미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갈게요. 몸조심해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은 한동안 벽을 바라보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박기동이 들어섰다. 그는 요즘 근대리아에 와 있는 무역상 중에서 제일 잘나가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가 타운 호텔에 얼굴을 보이면 그와 면담을 하려고 무역상들이 줄을 서곤 했다. 허리를 숙여 절을 한 박기동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여섯 시에 타운 호텔에서 약속이 있으십니다.

알고 있어.

5층의 연회실을 빌려 놓았고 식사 준비도 시켜 두었습니다.

무역상과의 상담은 박기둥이 주선을 하는 것이다. 그는 재치가 뛰어났고 경험도 풍부했지만 김상철은 그가 아직도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나파스 클럽의 송길수한테 준비를 하라고 해. 그러면 알아.

다시 한번 절을 한 박기동이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타운 호텔에서 김상철과 만나기로 한 사람은 러시아인 주류 도매상 세메노프였다. 그는 김상철과 꽤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거상으로 구 소련 연방 시절에는 내무성 관리였다는 인물이었다. 백발에 풍성한 턱수염이 머리와 같은 색으로 센 육중한 체격의 세메노프에게 산타의 옷을 입히면 위엄 있는 산타클로스로 보일 것이다. 그런 그가 두 명의 경호원을 뒤에 달고 아래층의 커피숍에 들어서자 주위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저녁 65분 전이어서 커피숍에 손님이 모일 시간이었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세메노프가 팔을 들어 올려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을 때 슈바 차림의 러시아인 하나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세메노프 선생, 저는 김상철 사장이 보낸 사람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그가 정중히 말하자 세메노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디로?

밖에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선생.

세메노프가 잠시 망설이듯 옆 좌석에 앉은 경호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갑시다.

호텔 앞에는 두 대의 검정색 볼가가 주차되어 있었다. 세메노프와 경호원들이 차에 오르자 볼가는 어두워진 거리를 달려 나갔다.

 

나파스 클럽의 뒤채에는 타운의 여러 사업체를 관리하는 본부 사무실이 있다. 클럽 뒷문으로 나와 뜰을 사이에 두고 통나무와 벽돌을 섞어 만든 2층집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초창기의 무법시대에 만든 집이다. 마치 인디언의 습격을 막으려는 서부 개척자들의 통나무집처럼 총안이 군데군데 만들어져 있고 벽도 두껍다.

저녁 7시가 되자 주위는 짙은 어둠에 덮였다. 앞쪽의 클럽에서 흘러나온 소음이 뒤채까지 희미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검정색 볼가 두 대가 현관 앞에 나란히 세워진 뒤채는 환하게 불을 밝혔으나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지붕 위의 벽돌로 만든 굴뚝 옆이다. 모피 깔개를 지붕 위에 펴놓고 아래쪽의 뜰을 내려다보던 곽동기가 옆의 동료에게 머리를 돌렸다.

몇 시냐?

일곱 시 십 분.

명령이 있어야 내려갈 것이므로 시간을 물어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그냥 해본 말이다. 그는 손에 쥔 기관총을 조심스럽게 지붕 턱 위에 걸쳐놓았다. 뒤채는 철통같이 경비되고 있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인원만도 8명이었고 사무실과 앞쪽 클럽의 빈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이 30명이 넘는다.

빌어먹을, 무지 춥구만.

곽동기가 다시 중얼거렸다. 이런 식의 경비를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휘하는 송길수가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색다른 상황인 모양이었다. 입맛을 다신 곽동기가 무심코 머리를 들었을 때 그는 옆쪽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쪽 가게의 네온사인이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그가 입을 쩍 벌렸을 때 불빛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아앗!

그 순간 빛살은 일직선으로 날아와 자신이 엎드린 바로 아래쪽 2층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밤하늘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곽동기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의식을 잃었다. 폭음은 세 번이 들린 다음 잠잠해졌으나 방 안의 사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만큼 폭음이 컸기 때문이다.

어디야?

누군가가 소리치듯 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사내들이 다투어 전화기를 집으려다 결국 이한이 수화기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여기는 나파스요.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대방은 악을 쓰듯 소리치고 있었다.

뒤채에 로켓탄을 맞았습니다. 뒤채가 박살이 났어요!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

놀란 이한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더듬거렸다.

, 모릅니다. 아마‥‥‥」

수화기를 내던진 이한은 복도를 달려 응접실로 들어섰다. 세메노프와 마주 앉아 있던 김상철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형님, 나파스가‥‥‥」

뒤채 말이냐?

, 로켓탄을 맞았습니다.

튕기는 듯한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 세메노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안에 누가 있었어?

송길수가‥‥‥」

그때 탁자 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김상철이 턱으로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한이 전화를 받았다.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세메노프를 바라보았다.

세메노프 씨. 이제 내가 당신을 두 번이나 옮겨 다니게 한 이유를 알겠소?

김상철의 말에 세메노프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세메노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리 없었던 것이다.

나파스가 로켓포 공격을 받았소. 물론 놈들의 목표는 나였소.

누굽니까?

세메노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김상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이한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장 누님의 전화입니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답니다. 나파스에서는 지금 사상자 수습을 하고 있답니다.

이한도 누구의 공격인지는 모른다. 김상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김상철의 굳게 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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