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도시 3-2
4. 무법자 타운
강 건너편의 강북 강변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의 불빛만 보일 뿐 한강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밤 11시 30분이 되자 차츰 한산해진 고수부지에 습기를 띈 바람이 지나가자 휴지 조각 몇 개가 강 쪽으로 날아갔다. 이제 가을도 중턱에 다다른 10월 중순이었다.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안인석이 머리를 돌려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박미정이 생각에서 깨어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무 생각도.」
「술 한 잔 더 할까? 맥주 더 사 와?」
「아니, 술은 이제 그만. 맨날 만나면 술만 마신 것 같아, 우린.」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덮였고 그들은 각기 상대방의 숨소리를 듣는다. 머리를 강 쪽으로 하고 주차한 차 안이라 발밑에서 시멘트 제방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를 의자에 기댄 안인석이 앞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평범한 놈이야. 난 내 자신을 잘 알아, 경쟁사회에서의 끌 위치를.」
「변화를 두려워하는 데다가 의지도 집념도 약해 환경 탓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워,」
「이제 그만해.」
박미정이 부드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나는 그런 인석 씨가 편안하고 따뜻해서 좋아. 난데없이 왜 그런 소리를 해.」
「널 사랑해.」
핸들을 움켜쥔 안인석이 강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자꾸만 비교가 돼. 자신이 없어지고.」
다시 차 안에 정적이 깔렸고 차창을 통해 들어온 강바람이 그들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박미정이 한 손을 뻗어 핸들 위에 놓인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나도 인석 씨가 좋아.」
안인석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와락 끌어안았다. 박미정은 거부하지 않았다. 품 안에 안긴 채 눈을 감은 박미정을 향해 안인석의 입술이 돌진하듯 부딪쳐왔다. 그런 안인석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안인석은 몹시 서둘렀다.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열고 갈증 난 사람처럼 혀를 빨아들이며 그녀의 온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겨우 입술을 뗀 박미정이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인석 씨, 이제 그만해.」
그녀가 가슴을 힘껏 밀자 안인석이 아쉬운 듯 몸을 뺐다. 그러나 아직도 호흡이 거칠다.
「늦었어. 데려다줘.」
두 손을 뻗은 박미정은 그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잡아주었다.
「어서.」
엔진의 시동을 걸고 후진 기어를 넣은 안인석이 아직도 초점이 없는 시선으로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비교도 하지 말고. 오늘은 너무 늦었을 뿐이니까.」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방문객의 연락을 받은 안인석은 회사 빌딩 지하실의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두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그를 찾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가 다가가자 그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쁘신데 미안합니다.」
그중 나이가 젊은 30대 사내가 신분증을 내보였다.
「우린 안기부 수사관이오. 이분은 저희 상관이신 김계장님이시고.」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치고 나자 30대 사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우린 김상철 씨 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안인석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김상철 씨하고는 절친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
사내가 조금 뜸을 들이고 나서 물었다.
「혹시 김상철 씨 소식 듣지 못했습니까?」
「소식이라니요? 저는 실종되었다고만 들었는데요.」
눈을 크게 뜬 안인석이 되묻자 김 계장이라는 사내가 나섰다.
「실종되었지요. 하지만 아직 시체를 찾지도 못한데다 그 사람은 살인 혐의자라서요. 만일의 경우도 대비해야지요. 예를 들면 살아서 안 형한테 도움을 청한다든가 하는 경우 말이오.」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까?」
「만일의 경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경우에 안 형이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는 알고 계시지요?」
「‥‥‥」
「우리한테 즉시 신고하지 않으면 곤란하게 되십니다. 우정 때문에 안 형도 인생을 망치게 된단 말이오,」
「나한테 협박하시는 겁니까?」
안인석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친구를 팔아먹을 놈 같습니까? 사람 우습게 보지 말아요.」
사내들은 뜻밖이라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을 부릅뜬 안인석이 다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이 살아만 있다면 난 무슨 일이라도 할 거요. 설령 내가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을 살려낼 거요. 그러니 당신들 마음대로 해요.」
「이것 보시오, 안 형. 진정하시오.」
김 계장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는 상반신을 굽히고는 안인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우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요, 안 형. 우리는 만일의 경우라고 했소.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아요.」
「그 자식 동생도 충격을 받아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 자식이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이오.」
안인석이 다그치듯 물었다.
「살아 있습니까?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날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상체를 의자에 기댄 김 계장이 안인석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실종이요. 유감스럽게도.」
「확실합니까?」
「실종이 확실하냐구? 그렇소. 확실해요. 하지만 그자는 살인범이란 말이야. 실종되었다고 수사를 끝낼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게지. 더구나 안기부 요원을 살해한 자란 말이야.」
「‥‥‥」
「하긴 그자는 차라리 실종된 채로 있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시베리아의 여름은 두 달이다. 트럭의 조수석에 앉은 김상철은 차체와 함께 흔들리면서 다시 눈에 덮인 겨울 평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은 구릉과 잡목림 지대를 지나는 수송단은 백여 대의 트럭으로 구성된 긴 대열이었다. 그러나 시속 20킬로의 속력이어서 길가의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눈에 선명하게 비쳐진다.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으나 짙은 회색 하늘은 어두웠고 가끔씩 눈발이 흩날리는 것이 곧 눈이 쏟아질 기세였다.
운전석에 앉은 니콜라이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는 10대 중반의 사내로 이 수송 선단의 책임자이자 블라디보스토크 운송회사 간부였다. 엄청난 양의 화물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차지까지 운반하는데 근대그룹 자체의 운송수단으로는 부족했으므로 러시아의 운송회사들은 지금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녁 늦게 근대시에 들어가겠군. 이번에는 전보다 하루 늦었어.」
니콜라이가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전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난 이런 곳에서는 못 살겠어.당신도 돈 좀 모으면 도시로 나오라구.」
차가 다시 심하게 흔들렸으므로 그는 말을 멈추었다. 파리야킨의 저택을 나온 그가 운송회사의 니콜라이를 만나 300달러에 임차지까지의 동승을 부탁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이제 임차지에는 고용된 노동자들만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정식으로 가족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노동자의 가족들이 떼를 지어 임차지로 들어가는 상황이어서 유전 근처의 노동자 숙소 주변에는 이미 꽤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니콜라이에게 막일거리라도 찾기 위해 임차지로 들어간다고 말했으나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았으므로 그들이 일주일간 나눈 이야기는 몇 마디도 되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다시 하품을 하더니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한 달쯤 전에 2백 달러씩 받고 두 놈을 태워주었어, 그놈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도망쳐 왔다더군, 임차지에 들어가서 한밑천 잡고 나온다고 떠들어 대더라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갑니까?」
「그런 놈들뿐만이 아니야. 뒤쪽 차에는 보드카가 2천 병이나 실려 있어. 지난주에 들어간 수송단에는 50명이 넘는 여자가 타고 있었다네.」
「‥‥‥‥」
「숙소 근처의 마을에는 없는 것이 없어. 근대에서도 어지간한 것은 눈감아 주는 모양이야. 사내 녀석들이 3만 명이 넘게 우글대는데 할 수 없는 일이지.」
이야기하는 사이에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다.」
니콜라이가 투덜거리며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켰다.
「마을에 가면 경비소를 조심하게. 그놈들은 신분증에 이상이 있으면 가차 없이 잡아넣어 버리니까.」
전조등을 켠 니콜라이가 김상철을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크라우프 바에서는 잡혀갈 염려가 없어. 그곳은 경비소가 봐주는 곳이야. 안나네 갈보집하고. 돈이 있으면 그곳에 죽치고 있는 것이 나아.」
「경비대가 봐주다니요?」
「그놈들이 사람을 시켜 운영하는 곳이란 말이야. 저 뒤에 실린 술도 그곳으로 배달되는 거야. 근대 놈들은 월급 준 것을 그렇게 회수해 가는 거지.」
트럭의 대열은 이제 앞이 탁 트인 평원으로 나오고 있었다. 주위는 눈보라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김상철에게는 낯익은 곳이었다.
크라우프 바는 마치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을 옮겨다 놓은 분위기로 거칠고 난잡했지만 생의 활력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목제 의자와 가구들 대신으로 플라스틱 제품이 놓여졌고 스피커에서는 러시아 노래가 흘러나왔다. 백 평쯤 되는 넓은 바에는 이미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김상철은 겨우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손님들은 러시아인과 조선족계가 반반이었는데 그중에는 근대의 마크를 붙인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도 보였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한쪽에서는 고함을 치며 말다툼을 벌이는 무리들도 있어서 바 안은 떠들썩했다. 조끼를 입은 종업원이 사람들을 헤치며 김상철에게로 다가왔다. 얼굴이 말쑥한 조선족 사내였다.
「뭘 드실 거요?」
「보드카 한 잔.」
「한 잔에 1달러, 전표를 쓸 경우 1달러 50.」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두 배나 비싼 술값이었으나 그가 잠자코 달러를 내주자 그는 돈을 나꿔채 돌아갔다.
창고로 가는 도중에 니콜라이와 작별하고 길가에서 내린 그는 겨우 마을로 간다는 트럭을 얻어 탈 수 있었다.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도시계획 같은 것도 없고 근대 측의 허가도 받지 않고 지은 건물들이어서 대부분 목조건물이었지만 십자형 거리는 4면의 길이가 각각 200미터쯤 되었고 도로의 폭은 50미터가량으로 넓었다. 거리 양쪽의 건물은 모두 술집과 오락장, 이발관, 극장, 여자들이 우글대는 술집 겸 호텔 등으로 니콜라이의 말마따나 없는 것이 없는 환락가였다.
종업원이 쟁반 위에 보드카를 받쳐 들고 다가왔다.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돈을 내밀었다. 돈을 받아든 김상철이 선뜻 팔을 뻗어 종업원의 허리춤을 쥐었다.
「이봐, 이건 3달러야. 1달러 더 내라.」
「1달러는 팁이야.」
종업원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경비원을 불러올까? 밀입국자 놈아.」
김상철의 손을 뿌리친 종업원이 어깨를 펴고 몸을 돌리자 옆자리의 러시아인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위기로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는 김상철 앞으로 옆자리의 러시아인 한 명이 일어나 다가왔다. 파카를 걸친 수염투성이의 사내였다.
「이봐, 자네 여기 언제 왔나?」
「오늘.」
그러자 사내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다음에는 큰돈을 주지 말아. 3달러 남겨준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렇다면 강도나 다름없구만, 이놈들은.」
「여기엔 모두 그런 놈들만 모였어.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못 들었나?」
바의 한쪽에서 싸움이 일어났으므로 사내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치고받던 싸움은 우습게 끝이 났다. 종업원 두어 명이 달려들어 싸우던 사내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팬 것이다. 그들이 사내들을 끌고 나가자 바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저놈들은 경비원의 개들이지. 저놈들한테 찍히면 이곳을 떠나야 돼.」
앞에 앉은 사내가 턱으로 종업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주머니에 달러가 있으면 쫓겨날 염려는 없어. 어때? 오늘 밤 잘 곳은 생각해 두었나?」
「아직.」
「그렇다면 내가 좋은 곳을 소개해주지.」
「안나네 집 말인가?」
「어디서 듣기는 했구만. 그래. 그곳에는 괜찮은 여자들이 많아.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사내가 손을 들어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렀다.
「보드카 두 잔.」
다가온 종업원에게 소리치고 난 그가 김상철의 눈치를 보았다. 김상철이 주머니에서 1달러 지폐 두 장을 꺼내 내밀자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임차지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안나의 집은 북쪽 변의 중간 부근에 있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밤 10시가 넘어 있었지만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흥청거리는 분위기였다. 눈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북쪽 20킬로 지점에 건설하고 있는 근대시가 밤에는 인적이 없는 유령의 도시가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노동자 숙소가 1킬로 남쪽에 있는 이곳은 처음에는 회사의 눈치를 봐가면서 한 채씩 가게가 생기더니 회사가 다소 규제를 풀자 석 달 만에 이러한 환락촌이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김상철이 안나의 집 입구로 마악 들어서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머리를 돌리자 크라우프에서 친절한 척하던 러시아인이다. 그의 뒤에는 동료 두 명이 서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봐, 우리도 이 집 단골이야. 그런데 그렇게 혼자 나가는 법이 어디 있어?」
김상철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럼 당신 먼저 가.」
「입장료가 10달러씩이야. 우린 세 사람인데 30달러만 빌려주겠나?
옆쪽 가게 앞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떠들썩하게 다투는 중이었고 그들 옆으로 행인들이 지나갔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사내가 한 발자국 다가와 섰고 나머지 두 사내도 벌려 섰으므로 그들은 김상철을 둘러싼 모양이 되었다.
「강도들이로군.」
김상철이 텁석부리 사내를 향해 말하면서 웃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명씩 시체가 되어 버려진다고 말했군.」
그러자 텁석부리가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파카 주머니에 든 무엇인가를 앞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우리하고 잠깐 뒤쪽으로 가실까? 반항하면 여기서 쏘아죽일 수도 있어.」
사내가 턱으로 가리킨 곳은 안나네 집 옆쪽의 좁은 골목이다. 일단의 조선족들이 그들의 옆을 지났으나 분위기를 알 만한데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김상철은 텁석부리에게 등을 떠밀려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이라지만 그곳은 앞부분이 탁 트여 있었다. 양쪽 가게의 담을 끼고 30미터쯤 나아가자 눈앞은 허허벌판이었다.
「자, 지갑을 내놔.」
공터에 서자 텁석부리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그는 털썩 땅바닥에 엉덩이를 부딪치며 주저앉았는데 잠시 자신이 왜 넘어졌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김상철이 주머니에서 소음기가 끼워진 베레타를 꺼내 남은 사내들을 향해 겨누었다. 사내 한 명이 짐승 같은 외침소리를 내며 두 팔을 들고 덮쳐오자 그를 겨누던 김상철이 마음을 바꾼 듯 베레타를 내렸다. 그리고는 발을 들어 사내의 사타구니를 힘껏 차올렸다.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채인 사내는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소리를 뱉으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김상철의 발끝에 다시 턱을 찍힌 사내는 뒤로 벌렁 자빠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머지 사내 한 명은 이미 이쪽에 등을 보인 상태였다. 도망치려는 것이다. 그의 등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김상철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골목 입구에 사내 한 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도망치는 사내를 향해 두어 걸음 다가가더니 다리를 휘둘러 사내의 옆구리를 찼다. 그리고는 연속 동작으로 사내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자 사내는 금방 땅바닥에 엎어졌다. 베레타를 주머니에 넣은 김상철이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조선족 사내로 뼈대가 굵은 체격이었지만 마른데다가 방한복 차림이었다. 나이는 김상철 또래로 보였는데 다가선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본 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내가 턱으로 곁에 쓰러진 사내를 가리켰다.
「이놈은 급소를 맞아 죽었소.」
그리고는 손을 들어 앞쪽 공터를 가리켰다.
「저쪽도 숨을 끊어 놔야 뒤탈이 없소.」
사내는 우선 앞에 쓰러진 사내의 목덜미를 만지더니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제 주머니에 넣더니 일어서서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김상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곧 어둠 속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더니 낮은 비명소리가 났다가 조용해졌다.
마을의 경비소장 고춘식은 근대 건설의 창고 과장 출신으로 본래 행정직 티오로 왔다가 자원해서 경비대로 옮긴 사람이었다. 건설에 있을 때에는 40대의 나이로 만년 과장 노릇을 하며 창고에 박혀,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하던 고춘식이 마을의 치안을 장악하는 경비소장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변신이었다.
경비소는 십자형 도로의 남쪽 끝에 세워진 유일한 시멘트 건물로 근대직원 ~명과 10여 명의 조선족 보조원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숙소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고춘식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에도 옆쪽 유치장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의 옆으로 어젯밤 당직 책임자였던 변홍근이 다가왔다.
「아침에 시체 세 구가 안나네 집 뒤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모두 러시아인으로 신원을 알아낼 서류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지갑도 털렸겠지?」
소장실로 들어서며 그가 묻자 변홍근도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한 놈은 총에 맞았고 두 명은 맞아 죽었더군요.」
「점점 끔찍해지는군.」
입맛을 다신 고춘식이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검시는 했나?」
「하는 중일 겁니다.」
「검시 끝나면 인상착의만 기록하고 묻어버려. 그리고 사건 발생 현장은 다른 곳으로 적고.」
마을 인구는 3천 명이 넘는 데다 강도, 도박꾼에다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온 수배자들이 들끓고 있었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살인이 다섯 번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살자는 신원을 알아낼 수 있는 증명서조차 소지하지 않았다. 피살자가 증명서를 아예 가지고 다니지를 않던가 살해하고 나서 살해자가 증명서를 없앤 것이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고춘식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차라리 나았다. 시체의 신원이 확인되면 러시아 정부에 넘겨야 했고 곧 귀찮은 조사서를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참, 어제저녁에 보드카 2천 병이 들어왔습니다. 크라우프 바의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바칼레프가 병당 15달러씩 500병을 사겠다는데요.」
변홍근이 말하자 고춘식이 코웃음을 쳤다.
「그놈, 간이 부었군. 500병이면 18달러를 내라고 해. 특별히 봐주는 것이니까.」
「그 값이면 가져갈 겁니다, 소장님.」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당 3달러짜리 싸구려 보드카를 들여와 술집 주인들에게 20달러 가까운 가격으로 넘기고 있었다. 술뿐만이 아니다. 갖가지 일용품은 물론 마약까지 들여와 가게 주인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받고 넘기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가끔 독자적으로 물품을 구입해오기도 했지만 만일 그것이 발각되면 경비원들의 검문으로 영업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변홍근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경비소의 부소장으로 근대 건설의 현장에서 자재를 맡았던 경력이 있다. 그 경험이 이곳 근대마을에서 아주 적절하게 이용되고 개발되는 중이었다.
「어제 단장님 모신 회의 때 무슨 말씀이 없었습니까?」
「특별한 말씀은 없었어, 근대직원이 사고 치게 하지 말라고만.」
「근대 근로자의 사고율은 거의 없습니다. 죽고 다치는 것은 쓰레기들이지요.」
변홍근이 의자를 당겨 다가앉았다.
「최태호가 북쪽 끝에 갈보집을 짓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고춘식이 고급 시가를 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욕심이 많으면 사고가 나, 알겠나.」
「마을은 두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형편이오. 하나는 경비소장 세력, 또 하나는 북한 쪽의 최태호 세력이지요.」
의자에 엉덩이 끝만을 걸친 송길수가 김상철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경비소장은 최태호를 쉽게 건드리지 못합니다. 최태호는 수십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 데다가 근대 근로자 상당수가 지원하고 있어서.」
안나네 집의 2층 방 안이다. 그들은 어젯밤 백 달러씩을 주고 여자와 함께 잠을 잤는데 물론 김상철이 계산을 했다 어젯밤부터 토막으로 들은 송길수의 내력은 나이가 스물여섯에 유지노사할린스크 태생으로 그곳에 아직도 부모 형제가 있다고 했다. 그도 트럭 뒷칸에 실려 임차지로 들어온 밀입국자 신세였는데 그렇게 된 사연은 말하지 않았다. 크라우프에 앉아 있다가 김상철을 우연히 보았고 러시아 건달들이 그를 뒤쫓아 나가는 것을 보고 도와주러 따라왔다는 것이 그를 만난 인연이다.
「경비소장이 이렇게 해 먹는 것을 개척단 본부에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혼잣말처럼 김상철이 말하자 송길수가 마른 얼굴을 펴며 웃었다.
「짐작은 하는지 모르지만 개척단 쪽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요. 이런 유흥가가 있어야 일할 맛이 나는 거요. 시베리아의 마을들은 대개 이렇게 건설되었으니까.」
「송형,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요? 난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은데.」
「우린 비슷한 처지 아닙니까? 당국에 쫓기는 신세 말이오.」
그러면서 송길수가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당신은 한국 정부로부터.」
「그렇게 보이는가?」
「금방 알아봤지요. 서울 말씨에 그 시계, 신발, 그리고 당신만큼 달러를 가진 북한 사람이나 조선족은 없지요.」
「그런가?」
「북한 공작원은 당신처럼 어리숙하게 크라우프 가게에 갔다가 안나네 집으로 가지 않소. 그들은 최태호가 운영하는 코즈모프 바에 모입니다. 그리고 북한 당국에 쫓기는 자라면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지. 당장에 잡혀갈 줄 알고 있으니까.」
「예민하군, 당신은.」
「난 유지노사할린스크의 경찰이었소, 그곳에서 상관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쳐 온 지 두 달이 되었습니다. 그놈은 경찰무기고에 있던 무기를 한 트럭이나 빼내서 마피아에 팔았소. 그때 내가 경비를 섰었는데 나한테 500달러를 주더구만.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불안했던 모양이오. 놈은 날 죽이려다 나한테 당했지.」
송길수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몸을 세웠다.
「덕분에 어젯밤 오랜만에 여자 맛을 보았습니다. 김 형은 이곳에 계실 건가요?」
「숙소를 다른 곳으로 잡을 생각이오,」
「하루에 백 달러씩 내고 이곳에 있을 바에는 하바로프스크의 특급호텔에서 생활하는 것이 낫지.」
「송 형은 어디로 가실 거요?」
「북쪽 거리에 가게 공사가 있어요. 일당 25달러니까 그것으로 하루 먹고 잘 수가 있습니다.」
창가로 다가간 그는 커튼을 젖히고 뒤쪽 벌판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경비소 직원들이 신고를 받고 나와 시체들을 치웁디다. 이곳이 그자들이 운영하는 곳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투숙객 모두들 조사했을 거요.」
그는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같이 공사장에 갈랍니까? 내가 일자리를 소개시켜 드리겠소.」
건물 위를 헬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마을이 변해가는군.」
헬기의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유장석이 말하자 조성욱 이사가 소리쳐 대답했다.
「마을 인구가 3천 명이 넘었습니다, 단장님,」
「살인 사건도 많이 일어난다니 큰일이야.」
「근대직원은 건드리지 못합니다. 저희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이지요.」
조성욱은 관리 담당 이사로 근로자들의 숙소와 그 주위의 시설물에다 인력까지 관리하고 있었다.
헬기는 마을을 지나 근로자의 숙소 쪽으로 날아갔다. 벌판 위로 2층 건물이 20여 동 늘어선 숙사는 장관이었다. 이곳의 근로자들은 근대시와 유전 작업장에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었으므로 북쪽의 벌목 현장이나 동쪽의 파이프라인 공사를 위한 숙사는 각각 2, 3백 킬로씩 떨어져 있다.
「이봐, 조이사. 숨어 들어온 북한 놈들이 마을에서 세력을 넓히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유장석이 조성욱을 바라보았다. 헬기 엔진의 소음이 컸으므로 그들은 소리치듯 말하고 있다.
「술집 몇 채를 차렸지만 별것 아닙니다. 모두 경비소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까요. 문제가 생기면 당장이라도 추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게에 손님도 줄고 있답니다.」
조성욱이 얼굴을 바짝 대고 말했다.
「저희들은 예상했던 일이지만 북한 쪽은 당황하는 것 같습니다. 노조 활동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헬기는 이제 유전 현장 위를 날고 있었다. 이미 거대한 원유저장 탱크가 세 개 세워진 옆으로 발전시설과 시추탑들이 건설된 현장이다. 근대는 근로자들을 받아들인 초기부터 서둘러 노조를 결성했던 것이다. 회사의 정책에 손발을 맞추는 노조가 북한 측의 기도를 사전에 저지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조선족 노동자들은 원래 북한이 기대했던 사상 바탕이 없는 데다가 좋은 보수와 환경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북한 쪽 세력은 아직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경비소에 협조적이고 회사의 규칙에 잘 따르는 편이니까요.」
「범죄자들이 모여들어서 걱정이야.」
「검문을 강화하면 금방 소탕이 됩니다. 조만간 검문을 실시해서 다시 정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근대는 허가 없이 임차지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경비소나 근대 측 사무소에 신고를 하면 체류할 수 있도록 했고 사업장을 만드는 것도 특별한 경우가 아닐 때에는 신고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범죄자들이 신고를 할 리는 없는 것이다. 한 달쯤 전에도 경비소에서 일제 검문을 실시해서 범죄자 20여 명을 잡아 러시아 당국에 넘겼는데 잡지 못한 인원은 그 열 배는 될 것이다.
헬기가 유전기지를 지나 옆쪽으로 기수를 틀더니 본부기지 쪽으로 날아갔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유장석이 근대시의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기지에 내린 유장석이 단장실에 들어서자 이대각이 따라 들어 왔다.
「경공업 단지를 내년 초부터 가동시키라는 총회장님의 지시가 왔습니다.」
유장석의 앞자리에 털썩 앉으며 이대각이 말했다.
「을 겨울에도 쉴 새 없이 작업을 해야 되겠습니다.」
「공사를 완료하라는 건 아냐. 일부 공장을 가동시키면서 단지 공사를 하면 돼.」
담배를 꺼내 문 유장석이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젯밤에 이실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비밀통신으로‥‥‥」
이대각이 몸을 굳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비밀통신이라면 암호를 사용하는 통신이다. 담배 연기를 내뿜은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김상철이가 안기부 요원을 만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거야. 고태성이를 죽인 일부터 북한과의 제휴, 그리고 근대에서 이제 자신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까지. 그래서 회장님은 안기부의 제의를 받아들이셨다는군.」
「관리직에 안기부 요원들이 정식으로 파견될 거야. 물론 근대 직원으로, 주로 경비본부에 보내져야 될 것 같아,」
「‥‥‥‥」
「회장님은 마침 잘 되었다고 하셨대. 하긴 우리도 나쁠 것이 없지 그렇지 않나?」
「그거야‥‥」
이대각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김상철이가 그랬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럴 놈이 아닌데요, 그놈은.」
「글쎄,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나도 조금 허무한데.」
「안기부에서 장난치는 것 아닙니까?」
「이실장은 그런 것 같지 않다고 하더군. 김상철이를 직접 만난 수사관의 말을 들었다는 거야.」
「그 자식을 그렇게 만든 것이 우리 아닙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그놈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대각이 눈을 부릅뜨고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놈이 그랬는데요? 그리고는 내팽겨쳐 두었다가 이제 와서 배신했다고 배신자라고 한단 말이지요.」
「이봐, 어쨌든 회사가 곤경에 빠질 뻔했어. 회장님이 잘 수습 하셨지만.」
「좇같네, 정말.」
「너, 인마. 어디에 대고 욕해.」
「단장님한테 하는 소리 아닙니다.」
「어쨌든 김상철이 이야기는 잊으라는 지시다. 기억해 두란 말이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나 단장님은 잊을 수 없어요. 목숨을 빚졌는데.」
심재택은 조금 당황한 듯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이실장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나로서는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제가 심과장님을 찾아온 것은 아무도 몰라요.」
강미현이 다부지게 말했다.
「그러니까 과장님이 김상철 씨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이것 참 난처하군.」
입맛을 다신 심재택이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강회장의 손녀가 김상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난데없이 강미현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그녀에 대한 자료는 봐두었다. 근대그룹의 후계자 중의 하나로 강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손녀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얼 알고 싶다는 겁니까? 우린 잠깐 만나고는 헤어졌을 뿐이고.」
「어디에서 헤어지셨어요?」
「하바로프스크.」
「실장님 말씀으로는 그 사람이 과장님을 찾아갔다는데, 맞지요?」
「그런 셈이지.」
「자신이 누명을 썼고, 모든 일은 근대에서 시켜서 한 일이라고 말했다면서요?」
「비슷한 내용이었소.」
「그렇다면 과장님께 구명을 부탁하러 찾아간 셈이군요.」
「그런데 과장님은 그 사람 말을 근거로 우리 근대에 압력을 넣으셨고, 그렇죠?」
「이봐요, 강미현 씨.」
「과장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신 것 같은데요. 그 사람은 아직도 과장님을 믿고 있을까요?」
「이건 도무지.」
심재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우리가 바보인 줄 아세요? 이실장이나 할아버지도 직접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심과장께서 김상철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상황을 짐작하시고 계세요.」
강미현이 심재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과장님은 납치되셨다가 도망쳐 나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와중에 김상철 씨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심과장님이 김상철 씨를 만났다면 체포해 왔어야 정상인데 그냥 헤어지셨던 모양이죠? 그건 어떻게 추측해야 될까요?」
「이봐요, 강미현 씨.」
심재택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소. 난 바쁜 사람이야.」
「이제 안기부는 목적을 이루었어요. 김상철 씨를 제물로 근대 임차지의 관리체제를 파악하게 되었으니까.」
그러자 심재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회장 손녀라 내가 예의를 차려주었지만 더 이상 못 듣겠어.」
「그 사람을 도와주세요, 아니면 저라도.」
강미현의 얼굴을 내려다본 심재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크게 뜬 눈과 조금 벌려진 입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강미현이 말을 이었다.
「과장님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아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심재택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제 조금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안 됐지만 찾아도 도울 방법이 없어요, 강미현 씨. 나도 솔직히‥‥‥」
「살아는 있지요?」
「살아 있지요, 물론.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니까,」
「어디에 있어요?」
입맛을 다신 심재택이 한동안 강미현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파벨이 숨겨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떠났습니다.」
「이제 아무도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소. 말하자면 완전한 실종 상태요.」
점심을 마친 안인석이 마악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 이유미야.」
예전에는 '나야' 하면 되었으나 이제는 이름을 말한다. 안인석은 의자에서 등을 떼었으나 선뜻 입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안인석 씨 아녜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야,」
「지금 바빠?」
「아니,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LA에서 한 달 어물고 온다고 한 것이 석 달 전의 일이다. 그러니 석 달 만에 전화 통화를 하는 셈이었다.
「별일 없나 궁금했어. 그리고 나, 지난 토요일에 약혼했어」
조금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연말쯤에 LA로 가게 될 거야. 그곳 지사를 맡게 되어서.」
「‥‥‥」
「내가 이렇게 전화하는 거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안인석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나한테 그런 소식 꼭 알려줄 필요가 있는 거냐? 내 축하를 받아야 마음이 놓여?」
그러자 수화기를 통해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숨기듯 하기는 싫었어. 그렇다고 축하를 받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당신은 좋은 남자야, 인석 씨. 내가 나빠. 나도 알아. 내 변덕과 허영심.」
「어쨌든 잘 살아라.」
「그런데 상철 씨는 아직도 실종이야?」
「그래, 나 바쁘니까 이만.」
「안 됐어, 그 사람. 그럼 안녕.」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인석은 한동안 앞쪽의 벽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안인석 씨.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옆으로 다가온 강형문의 목소리에 안인석은 머리를 들었다.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강형문이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름휴가 못 간 것 이제 갈 수 있겠어. 어때? 안인석 씨도 휴가 계획을 내도록 해.」
「연말이라 바쁜데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이젠 완전히‥‥‥」
강형문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하긴 나도 휴가를 반납했어. 막판에 피치를 올려야 할 것 같아서.」
「대리님, 내년에 팀장 되시면 절 데려가 주십시오.」
「그거야 여부가 있나? 이제 손발이 맞기 시작하는데.」
강형문이 자리로 돌아가자 안인석은 컴퓨터의 키를 눌렀다. 그러나 금방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조금 일찍 회사를 나온 안인석이 박미정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7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온 것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박미정이 문을 열어주었고 보험회사 중역인 아버지 박남호 씨와 어머니가 그를 맞았다. 50평의 아파트는 잘 꾸며져 있었고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안인석이 저녁도 얻어먹을 겸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가겠다고 진즉부터 졸라왔던 것이다. 인사를 마치고 응접실의 소파에 앉자 박남호 씨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근대전자에 다니고 있다고?」
반백의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의 그에게서 오랜 직장생활로 단련된 품위가 풍겨 나왔다.
「예, 작년 말에 입사했습니다.」
「미정이하고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다니 서로 잘 알겠구만.」
「제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서로 도와야지.」
과일을 깎아온 박미정이 탁자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참, 부친께서 병원을 하신다면서.」
「예, 영동에서 조그맣게.」
「문세병원이라면 나도 알아.」
과일을 집어든 박남호 씨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자네가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한 미정이 남자친구야. 그래서 그런지 내가 관심이 많아.」
「영광입니다, 아버님.」
안인석은 그의 표정에서 내비치는 호감을 읽을 수 있었다. 주방에서 가끔씩 이쪽을 바라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을 마친 안인석이 배웅하겠다는 박미정과 함께 아파트를 나온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11월 말이어서 밤 기는 찼고 습기를 띈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린 박미정이 그의 팔을 끼었다.
「인석 씨 알고 보니 교활해. 응큼한 데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박미정의 목소리는 밝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고 있더구만.」
안인석이 그녀의 팔을 잡고는 잠자코 옆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나 앞쪽의 어린이 놀이터가 시선에 들어오자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놀이터의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싸늘한 바람이 놀이터를 휩쓸고 지나가자 안인석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얼굴에 입술이 다가왔지만 박미정은 거부하지 않았다. 두 팔로 안인석의 허리를 안은 그녀는 곧 입을 벌려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다시 바람이 그들의 피부를 핥고 지나갔으나 열중한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치겠어. 널 갖고 싶어서.」
잠시 입술을 뗀 안인석이 그녀의 귀를 물며 허덕였다.
「난 너만큼 사랑한 여자가 없어,」
그의 한쪽 손은 이미 그녀의 재킷을 젖히고는 젖가슴을 거칠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시 안인석이 그녀의 혀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이윽고 그녀의 치마를 젖힌 그의 손이 저항 없이 팬티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와 젖어 있는 부분에 닿았다. 그 순간 박미정은 허리를 틀어 그의 손을 미끌어뜨리고는 얼굴을 뒤로 젖혀 혀를 뺐다.
「이제 그만.」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민 그녀는 가쁜 숨을 가누려는 듯 잠시 어깨를 들먹이며 앉아 있었다. 안인석의 입술이 다시 귀를 물었으므로 그녀는 다시 머리를 젖혀 그의 입술을 피했다. 그러나 이제 안인석은 예전처럼 조급하게 서두르지도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를 바라보면서 그도 호흡을 가다듬는 모양이었다.
「난 행복해. 이렇게 너하고 있는 것이.」
이윽고 그녀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그가 말했다.
대답 대신 그의 한쪽 가슴에 어깨를 묻은 박미정은 흔들리는 그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에도 저렇게 그네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에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안인석의 가슴에 안긴 채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밤, 부두 끝 쪽에 있는 화물 터미널 빌딩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항구 안에 떠 있는 수십 척의 화물선들이 제각기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하늘과 바다가 분간되지 않는 먹장 속 같은 어둠이다. 바람이 세어서 부둣가의 시멘트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컸다. 그 외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뒤쪽의 도로를 달리는 희미한 차량들의 엔진소리뿐이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파도소리와 차량들이 내는 미세한 진동뿐이었던 터미널 빌딩 앞의 정적이 깨진 것은 도로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차량의 엔진소리 때문이었다.
두 개의 라이트를 강하게 번득이며 승용차 한 대가 곧장 달려오더니 빌딩 앞의 공터에 멈췄다. 그러자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던 공터의 한쪽에서 갑자기 두 줄기의 불빛이 번쩍 뻗어 나왔다.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달려왔던 승용차가 다시 움직여 그쪽으로 다가가 멈춰 섰는데 긴 코트를 입은 한 사람이 내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차의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사내 한 명이 내렸다. 그 긴 코트를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 서자 그들은 차 사이의 공간에 마주 보고 있는 자세가 되었다.
「늦었습니다.」
긴 코트 차림의 장인규가 말하자 40대의 사내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심을 많이 하시는군, 장 동무.」
「할 수 없지요, 살아남으려면.」
얼굴에 웃음을 띤 장인규가 힐끗 옆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옆얼굴을 보인 채 앞자리에 앉은 두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평양에서 동무의 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동무는 친지가 많은 것 같소.」
「알고 있었어요. 그 친지들이 미리 알려주어서,」
장인규가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에 기부금을 내야 한다는 조건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역은 말해주지 않더군요.」
「동무는 듣던 대로 대단히 도전적이군.」
「여자 기준으로 보지 말아요. 난 남자 이상으로 일해 왔습니다.」
「50만 달러요. 그리고 동무가 경영하는 무역회사의 소유권을 우리에게 넘기시오.」
장인규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회사는 아버지의 전 재산이고 아직 내가 간섭할 수가 없어요. 그건 안 됩니다.」
「배신행위에 대한 보상을 이렇게 받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요, 동무. 그만큼 동무에게 관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걸 모릅니까?」
「50만 달러 현금을 만들려면 집과 모든 걸 팔아야 하고 회사까지 처분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우린‥‥‥」
「부자라고 소문이 난 집안이던데…· 개혁 이후로 당신 집안은 떼돈을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
「기간은 열흘이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동무의 배신으로 여러 명의 동지가 죽었고 중요한 포로를 탈취당했소. 이렇게 결정을 내린 조국에 감사해야 될 거요.」
「회사를 넘기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평양에 친구가 많아요. 그들에게 다시 부탁할 기회를 주세요.」
그러자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부탁하는 것을 우리가 말릴 수는 없지요. 하지만 기간은 열흘로 변함이 없소.」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쉰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이자 사내는 몸을 돌렸다. 곧 승용차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그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면서 장인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어두운 빌딩의 그늘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곧 사내 한 명이 다가와 섰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장신의 사내는 그녀의 아버지 장하연 씨가 보내준 경호원이다. 빌딩에 숨어 들어간 그로부터 이상이 없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야 이쪽으로 왔기 때문에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이다.
「아냐, 어서 집으로.」
차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가 다시 평양의 친지들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바 안에 모인 사내들은 대부분이 러시아인들로 동양인은 그들 둘뿐이었다. 동쪽 길의 끝에 세워진 이곳은 간판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보냐네 집으로 불리우는 싸구려 술집이었다. 성한 의자가 별로 없는 술집 안은 20평 정도로 조그마한 규모였지만 손님들은 가득 차 있었고 소음으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김상철과 송길수는 상표도 붙지 않은 보드카 한 병을 놓고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술은 밀주였고 가격도 한 병에 ~달러를 받았는데 하바로프스크의 시장에 가면 1달러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하게 독해서 몇 잔 마시자 머리끝이 당겨왔다. 숨을 멈추고 잔에 든 술을 한입에 삼킨 송길수가 입을 벌리고는 더운 숨을 뱉아냈다.
「얼마 전에 메틸을 먹고 두 명이 눈이 멀었지요, 서쪽 길의 싸구려 술집이었는데 눈먼 두 놈하고 술집 주인까지 세 놈이 러시아 경찰에 넘겨졌어요. 그 두 놈은 수배자들이어서‥‥」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에도 수송단 트럭으로 2, 30명이 이곳에 왔어요. 아마 그중에서 90% 이상이 수배자들일 거요.」
체격이 우람한 러시아인 두어 명이 그들을 훑어보고 지나갔다. 벌써 몇 번째였지만 이쪽의 받아넘기는 기세에 그냥 지나가고 있다.
「쓰레기 인생들이지. 이곳이 그래도 자유롭다고 찾아오지만 아마 살아나가는 놈은 얼마 안 될 거요.」
어깨를 늘어뜨린 그가 탁자를 노려보았다. 이제 열흘 가깝게 같이 붙어 다니고 있었는데 낮에는 술집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싸구려 술집을 찾아 술을 마시다가 하룻밤 2달러짜리 합숙소에서 잠을 자는 생활이었다. 머리를 든 송길수가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이나 나나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김상철은 그에게 자신도 한국의 기관원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근대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살인을 했다고 하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연은 제각기 길고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이야기를 제 입으로 할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들어 줄 때에는 지겹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아예 묻지 않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김상철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김상철이 술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술집을 하나 세우자 여자도 있는 술집을 말이다.」
그러자 송길수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돈이 어디 있다고. 형님, 지금 우리가 짓는 최태호의 술집이 얼마가 드는 줄 아시오? 5천 5백 달러나 든다고 합디다.」
「‥‥‥」
「거기에다 술 들여놓고 이것저것 드는 비용이 3천 달러는 될 거요.」
「경비소 허가는 네가 맡아라.」
「그거야‥‥ 하지만 형님.」
「자재는 수송단에 끼어 싣고 오는 것보다 근대에서 빼내 올 수가 있겠더구만, 최태호의 공사를 보니까.」
이제 송길수는 술기운이 달아난 듯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그런데 돈은‥‥」
「내게 3만 달러가 있어.」
「종업원은 수배자 중에서 너하고 내가 하나씩 골라야겠다. 내일부터.」
그러자 송길수의 어깨가 점점 펴졌다.
「형님, 정말이요?」
「이곳에서 제일 큰 술집과 색시집을 만드는 거야. 며칠간 생각한 끝에 결정한 것이다.」
「아니, 돈이 정말 있냐고 물었소.」
「내가 일당 25달러로 살아가니까 믿기지 않는 모양인데….」
김상철이 밝은 파카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쳤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어떠냐?」
「하지요, 형님.」
송길수가 손을 뻗어 술병을 쥐었다가 다시 오무렸다.
「나는 꼭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 줄로 믿었소. 이제야 말하지만 말이오.」
다음 날 아침, 경비소의 변홍근 부소장은 대기실에서 마주 앉은 사내를 의심쩍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여러 명이 잡혀온 모양으로 옆쪽의 유치장에서는 고함소리와 꾸짖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변홍근이 입을 열었다.
「그래, 가게를 연다는 건 좋아. 우리 근대에서는 그것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아. 하지만 우선 신고를 해야지.」
「예, 그러려고 지금 찾아온 겁니다.」
송길수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규칙은 꼭 지킵니다, 소장님.」
「난 부소장이야.」
「예, 부소장님.」
「그런데 어떤 가게를 짓는다는 거야? 괜히 통나무조각이나 주워다가 거지 움막 같은 걸 만들게 할 수는 없어. 도시 미관을 해치니까.」
「2층 건물로 2백 평쯤 되는 규모로 짓고 싶은데요, 소장님.」
그러자 변홍근이 입을 쩍 벌리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을에서 제일 크다는 크라우프 바도 백 평밖에 되지 않는다.
「뭐라고? 2백 평?」
「예, 아래층은 바로, 2층은 저 ‥‥ 색시집으로 만들고 싶습니다만.」
「돈은 있어?」
변홍근이 송길수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게 얼마나 들지 알고 하는 소리야?」
「예, 대충 압니다.」
「2만 달러 가깝게 들 거야. 모두 합쳐서.」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다시 멍한 얼굴로 송길수를 바라보던 변홍근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당신, 수배자지?」
「예, 소장님. 살인 혐의 수배잡니다.」
변홍근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당한지 바보인지 아직 분간이 안 가는 표정이었다.
「경찰이었는데 부정을 감추려고 절 죽이려는 상관을 쏘고 도망쳐 온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 정착하려고.」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변홍근이 입을 열었다.
「돈은 충분하단 말이지?」
「예, 소장님.」
「매일 밤, 그날 매출액의 10%를 낼 수 있겠지?」
「예? 10%를 말입니까?」
「싫으면 그만두고 일어서서 나가.」
그랬다가는 문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유치장에 끌려가 내일쯤이면 러시아 당국에 넘겨질 것이다.
「하지요, 소장님. 내겠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말씀이어서.」
「당신의 솔직한 점이 마음에 들었어.」
변홍근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살인범이라고 대뜸 말한 놈은 한 사람도 없었거든, 모두 금세 밝혀질 것인데도 거짓말을 한단 말이야.」
「자, 그럼 위치와 자재 이야기를 해야겠군.」
다시 의자를 당겨 앉은 변홍근이 생각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커피 한잔할까? 서울산 커피라 질이 아주 좋거든.」
「그 자식 덕분에 서울산 커피를 처음 마셔보았소, 아주 씁디다.」
송길수가 김상철에게 말했다. 그들은 보냐네 집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손님이라고는 대여섯 명뿐이었다. 그들은 일거리를 못 찾았거나 너무 취해 아직도 몸을 가눌 수 없는 사내들이었다.
「내가 살인범이라고 털어놓았더니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당장에 잡아서 러시아 당국에 넘길 수가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가게는 놈들 소유가 되지요.」
「크라우프 바도 10% 상납을 하나?」
「그건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철저히 봐주고 있지요. 주인은 이르쿠츠크에서 온 조선족이라는데 가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탁자 위에 보드카 병이 놓여져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
「자재는 모두 그 변가 놈이 대준다고 했소. 아마 근대의 자재 창고에서 빼내 올 모양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송길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서쪽길 끝의 땅을 배정받았습니다. 이제 공사는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요.」
이곳은 땅값이 없다. 경비소에서 마을 지도에 선을 긋고 떼어주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들어섰다. 작달막한 키에 다 헤어진 슈바를 땅에 끌리도록 입은 조선족이었다 그는 곧장 그들에게로 다가오더니 송길수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덮여 있어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송길수의 말을 들으면 20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인사해라, 김선생님이시고, 형님, 이 사람이 제가 말씀드린 하용준이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하용준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먹고 재워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지요. 저를 써 주십시오.」
「북한 군대에서 탈주했다구?」
「예, 양강도 국경경비대에 있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러시아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거기서 또 탈주했다면서?」
「예,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겁니다.」
힐끗 송길수를 바라본 김상철이 다시 물었다. 그로부터 대강 들은 것이다.
「특기가 무엇이야?」
「예, 몸이 빠릅니다. 싸움을 해서 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개 뒤에서 찌르거나 총을 쏜다면서?」
「허점을 보이는 놈이 지는 거지요.」
그러면서 하용준이 옆에 앉은 송길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주었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쓰겠다. 하지만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것 알지?」
그러자 하용준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압니다, 형님에 대해서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 것, 길수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뒤를 노리다가는 네 목을 떼어낼 테니 그것도 명심하고.」
하용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난 신세를 입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소. 두고 보시오.」
「우선 옷부터 사 입도록 해라. 사람들을 모으려면 그런 꼴로는 안 되겠다.」
김상철이 눈짓을 하자 송길수가 주머리에서 백 달러 지폐 한 장을 꺼내 하용준에게 건네주었다. 두 손으로 그것을 받은 하용준이 김상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유지노사할린스크에서 온 수배자랍니다. 살인범이라는데요.」
코즈모프 바 안에 있는 밀실에서 최태호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부하가 말을 이었다.
「서쪽길 끝에 2백 평 규모로 술집과 색시집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최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은 돈을 엄청나게 도둑질해 온 모양이다. 이곳에 그런 돈을 투자하는 걸 보면.」
그는 40대 중반으로 반쯤 흰 머리칼에 가는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였다.
「어쨌든 고춘식이 그놈, 가게가 생길수록 제 수입이 늘어날 테니까 살인자건 강도건 돈만 가져오면 영업을 하게 해주는군,」
「노동자가 올해 안에 4만 명이 넘게 될 테니 근대 숙사 내부의 시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근대 본부에서도 허락하는 모양입니다.」
사내는 코즈모프 바의 지배인이자 최태호의 보좌관인 진남일이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섰다.
「오늘 중으로 그놈을 만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최태호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지금 당장 그럴 필요는 없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담배연기를 앞으로 길게 뿜었다.
「근대 측의 허가가 난 이상 가게 짓는 것을 방해한다면 문제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경비소 놈들이 당장에 눈치를 채게 될 테니까.」
「다 짓고 나서 그놈의 가게를 송두리 채 먹어 버리도록 하자. 조선족 놈들이니까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진남일이 말머리를 돌렸다.
「어제 수송단 편에 도착한 보드카 3천 병이 아직도 근대의 자재 창고에 있습니다, 사장님.」
그러자 최태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망할 자식들, 꼭 돈을 받아야 내주는군. 한두 번도 아닌데.」
「제가 지금 고춘식한테 6천 달러를 전해주고 아예 자재 창고까지 같이 가서 술을 가져오겠습니다.」
최태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진남일은 방을 나갔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최태호는 다른 가게 주인처럼 경비소를 통해 물품을 공급받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예 수송단에 자신들의 물품을 끼워 넣고는 적당한 통과세를 주고 찾아오는 것이다. 그들이 들여온 술이나 물품들은 근대의 거대한 자재 창고에 입고되었다가 빠져나갔는데 창고 담당과 경비소가 손발을 맞춰 도둑질을 하는 것이었다. 보드카의 경우에는 병당 경비소와 창고가 각각 1달러씩 계산해서 3천 병이면 3천 달러씩 한몫에 먹는다.
「도둑놈들.」
씹어뱉듯 말한 최태호는 서랍을 열고 조그만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흰 분말이 곱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코카인이다. 그는 아주 작은 스푼을 들더니 한 스푼을 떠서 코에 들이대고 힘껏 들이마셨다. 코카인이나 아편같이 값진 물품은 인편을 통해 들여오므로 돈은 떼이지 않는다. 다른 물품값을 경비소나 창고의 도둑놈들에게 떼인다고 해도 힘없는 다른 가게 주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5달러짜리 고급 보드카를 구입해서는 운반비와 창고, 경비소 몫을 합쳐 병당 8달러 정도에 들여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판매가격은 병 당 30달러였다. 그러나 다른 가게는 고춘식한테서 20달러 가까운 가격으로 구입해야만 했으므로 이윤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맑아지는 기분이 되었으므로 최태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방 안은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역한 술 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조용했다. 가끔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발자국 소리와 나무 의자의 삐걱이는 소리가 날 뿐이다. 그러나 20평 정도의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3, 40명이 되었고 그들은 모두 테이블 주위에 몰려 서 있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내였다. 한 명은 러시아인, 또 다른 한 명은 동양인이다.
갑자기 발자국 소리까지 그친 방 안에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더니 러시아인이 권총을 세워 들었다. 콜트에 소음기를 낀 볼품없는 모양의 총이었지만 천장에 매달린 가스등 빛을 받아 검은 총신에 윤기가 흘렀다. 그는 천천히 총을 세우더니 총구를 오른쪽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잿빛 콧수염을 기른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 초점을 잃는 것같이 보였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윽고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힘이 주어지더니 노리쇠가 공이를 쳤다. 그러자 철컥하고 쇠가 마주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방안은 터져나갈 것 같은 소음에 휩싸였다. 내기 돈을 올리려고 악을 쓰는 사람과 돈을 넘겨주고 받으며 확인을 하는 통에 의자가 넘어졌고 종이쪽이 흩날렸다.
러시안 룰렛이다. 여섯 발들이 원형 탄창에 실탄 한 발을 넣고 번갈아가며 자신의 머리에 대고 쏘는 것이다. 잠시 후 소란이 뚝 그치더니 이번에는 동양인이 권총을 쥐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얼굴이 희었으나 두 눈의 흰창이 충혈되어 있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사내는 권총의 무게를 재듯이 눕혀 든 채 위아래로 흔들어 보이면서 주위에 둘러선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김상철은 그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가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사내는 총구를 입 안으로 틀어넣고는 손잡이를 탁자 위에 대었다. 머리가 탁자를 향해 숙여진 자세로 그는 엄지손가락을 쭉 펴면서 방아쇠를 힘껏 눌렀다. 이제 떨컥 소리와 함께 노리쇠가 또 한 번 빈 공이를 쳤다. 김상철은 다시 아수라장이 된 테이블 가에서 벽 쪽으로 물러 나왔다. 송길수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형님, 보기 싫으십니까?」
「저놈은 살아 나와도 쓰고 싶지 않다.」
벽에 등을 기댄 김상철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런 식으로 제 목숨을 내놓는 놈에게 일을 맡길 수가 없어.」
「일이 없었기 때문이요, 형님. 카자흐스탄에서 고아로 자라나 같은 얼굴,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찾아 시베리아까지 온 놈이오.」
그 순간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고 숨이 멈춘 순간에 다시 쇳소리가 났다. 러시아인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방 안은 다시 아우성 소리로 덮였다. 판돈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으므로 노름꾼들은 반쯤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곧 결말이 오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저놈은 일거리를 준다고 했더니 마지막으로 운을 시험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게임에 이겨야 빚을 갚는다는 겁니다.」
방 안이 다시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송길수를 바라보던 김상철이 서둘러 테이블로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으므로 몇 사람이 머리를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잠깐만 멈춰라.」
김상철의 고함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사람들을 헤친 김상철이 테이블 옆에 서자 권총의 손잡이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던 사내가 입을 조금 벌린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김상철이 손을 뻗어 사내의 권총을 낚아챘다. 한 손에 권총을 세워 든 그가 거간꾼을 바라보았다.
「이자한테 걸린 돈이 모두 얼마냐?」
그러자 사내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김상철이 권총을 조금 눕히자 조용해졌다. 러시아인 거간꾼은 금방 눈치를 채고는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슬쩍 보았다.
「모두 855달러.」
김상철이 송길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놈에게 돈을 줘라.」
한국말이다.
「예, 형님.」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낸 송길수가 한 뭉치의 돈을 세는 동안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것 보시오.」
침묵을 깬 것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다. 그는 핏발 선 눈을 치켜뜨고는 김상철을 올려다보았다.
「내 운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 일을 끝내도록 놔두시오.」
김상철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권총의 총구를 그의 이마에다 겨누었다가 직각으로 떨어뜨리고는 테이블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 재떨이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네 목숨은 내가 산 것이다.」
눈을 부릅뜬 김상철이 그를 노려보았다.
「일어서서 따라 나와!)
5. 보스들의 결단
「곧 연락을 해준다고 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숭늉을 마시면서 장하연 씨가 말했다. 그는 이민 2세였지만 1세들이 대부분 사망했으므로 교민 사이에서 원로 대접을 받는다.
「비서국의 박동일 비서는 언제나 당 서열 50위 안에 드는 거물이야. 그자가 대외정보 조사부에 있을 때 나한테 단단히 신세를 졌었다.」
장하연이 주름진 얼굴을 들어 장인규를 바라보았다.
「회사는 어떻게든 내가 손을 써서 남겨둘 작정이야.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그자들은 내 회사에 손을 못 댄다.」
장하연 씨는 소련연방 시절에 연해주의 행정관리였고 연방이 러시아 공화국으로 분리되었을 때 퇴직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공공건물 몇 채와 교외의 땅을 불하받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업을 일으킬 밑천이 되었다. 그는 건물 몇 채를 일본기업에 장기 임대해주고 그 돈으로 자신의 빌딩에 무역회사를 차렸는데 1년 매출이 천만 달러가 넘는 큰 회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장인규가 겨우 입을 열었다. 무남독녀 외딸로 자라면서 모스크바 유학까지 보내준 부모는 이제까지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혈기에 북한의 사업에 뛰어들어서는 결국 집안을 파탄 일보 직전까지 만들어 놓았다.
「쓸데없는 소리.」
숭늉 그릇을 내려놓은 장하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이 일로 마음을 잡고 가업을 하겠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솔직히 공화국의 사업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
「내 고향은 황해도 개성이고 네 조상들의 뼈도 그곳에 묻혀 있어. 네 할아버지는 일제 때 고향에서 굶어 죽기보다는 넓은 땅에서 죽자 살자 일하면 뭔가 나오겠지 하고 이곳에 오셨다. 」
벌써 수십 번 들은 이야기였으나 아버지는 이야기할 때마다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고향에서는 동포를 도와야 하지 않느냐며 기부금을 걷어가고 생일선물로 무엇을 바쳐야 한다. 나는 그자들의 동포 소리는 이제 질려버렸다.」
「‥‥‥‥」
「조국이라면 우선 자랑스럽게 생각되어야 하고 못살아서 이렇게 조국을 떠난 우리한테 뭔가를 도와줘야지, 안 그러냐? 우리가 그들한테 무슨 빚을 졌단 말이냐? 남조선을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공화국이 못사는 건 순전히 공산당 때문이다.」
「아버지, 이젠 그만하세요.」
장인규의 말에 장하연이 얼른 머리를 끄덕였다.
「오냐, 그만두마.」
예전 같았으면 부녀간에 한바탕 격론을 벌렸을 테지만 잠자코 있는 장인규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가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회사에 나가보겠다. 오늘 낼 사이로 박비서한테서 연락이 올 것이야.」
현관까지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온 장인규는 어머니와 설거지를 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여인으로 남편에게 순종하고 20여 년 동안 시부모의 제사를 정성껏 지내며 자식 뒷바라지에 헌신해 왔다. 오랜만에 딸자식이 집에 머무르게 되자 어머니는 말이 많아졌고 얼굴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설거지를 마친 장인규가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곧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아버지의 경호원 서규환이 들어섰다. 그는 눈을 찢어질 듯이 올려 뜨고 있었다.
「사고가 났습니다.」
그는 온몸을 굳히고 있는 두 여자들을 향해 다시 외치듯이 말했다.
「사장님이 강도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12월 중순이 가까워지자 팀과 조의 실적에 대한 윤곽이 드러났다. 엄기호 과장이 이끄는 구주팀은 목표 대비 95%를 달성하는 좋은 실적이었고 강형문 대리의 조는 130%였다. 그야말로 발군의 실적을 올린 것이었다. 그 주요 원인은 물론 내년에 가져가겠다는 바이어에게 재고 부담금을 이쪽에서 지불하는 조건으로 수출한 금액이 꽤 되었기 때문이다. 강대리가 내년에 새로운 팀장이 되는 것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월초부터 중역실과 인사부에서는 내년의 조직체제에 대한 작업에 들어갔고 각 부와 팀별 올해 확정 실적이 나오는 12월 하순에 조직개편안이 만들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야 내년 초에 새로운 팀이나 조가 발표되면서 승진 인사가 있게 된다. 강 대리는 엊그제 올해의 예상 실적과 내년의 계획안을 중역실에 제출한 후부터 탈진한 사람처럼 보였다. 갑자기 몇 년 정도는 늙은 얼굴이 되어서는 휘청거리며 걷고 멍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있다가 가끔씩은 졸기도 했다. 과장 진급에 팀장이 된다는 것은 근대그룹 안에서는 군대의 독립연대와 연대장에 비유되는 것이다. 팀별 독립채산제 방식으로 운영되는 근대전자에서 팀장은 팀의 예산에 대한 전결권을 갖고 있어서 어지간한 중소기업의 경영자 역할을 한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경, 안인석이 다가갔을 때에도 강형문은 책상에 앉아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대리님.」
안인석이 부르자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응, 무슨 일이야.」
「한 대리님 조에서 올해 실적에 350만 달러를 추가시켰습니다.」
옆자리에 앉으며 그가 낮게 말하자 강형문의 얼굴이 금방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한남석 대리는 미주팀 소속이어서 이쪽과는 팀이 다르지만 그도 입사 8년으로 내년에 팀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구주팀 내에서 강형문의 경쟁상대가 될 조장은 없었지만 미주 팀은 시장도 컸고 조장들의 기가 세었다.
「그 새끼, 다른 조장의 실적을 가져간 것 아냐? 내가 뻔히 아는데.」
강형문이 입술만을 들썩이며 말했다. 팀에도 티오가 있어서 부에서 두 개의 팀을 증설시킬 수는 없다. 한남석 대리의 조 실적은 3,200만 달러로 목표 대비 98%였는데 그것도 당겨 선적한 것까지 합한 실적이라는 것을 강형문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350만 달러가 추가되면 실적은 100%가 훨씬 넘는다. 강형문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이제 믿고 의지하는 동료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미주팀에 안인석 씨 동기들이 있지? 알아봐, 어느 조에서 실적을 돌렸는지. 한남석을 키우려고 실적 미달인 다른 조의 실적을 팀장이 돌려준 것이 틀림없어.」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겨우 100% 넘는데, 우린 130%란 말씀입니다.」
「그놈들은 마진이 높아. 40% 가깝게 된단 말이다. 우리보다 7, 8% 높으니 평가점수가 비슷하게 될지도 모른다.」
「알아보겠습니다.」
「고맙다, 안인석 씨.」
강형문이 일어서는 안인석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너밖에 없다.」
퇴근 시간이 조금 늦었으므로 안인석이 강남대로변의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8시 10분이었다. 캐럴 송이 울리는 커피숍 안의 분위기는 밝아 보였고 안쪽에 앉아 있다가 그를 향해 손을 든 박미정의 표정도 밝다.
「저 캐럴 송을 지금 여섯 번째 듣고 있는 중이야.」
앞자리에 안인석이 앉자 그녀가 눈으로 천장의 스피커를 가리켰다.
「속이 거북해서 토할 것 같아.」
그러자 안인석이 웃었다.
「잘 됐다. 그것은 술로 풀어야지.」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키고 나자 안인석이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었다.
「선물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박미정이 상자를 받았다.
「갑자기 무슨 선물?」
「이유야 얼마든지 있지, 크리스마스 선물이래도 좋고, 네 부모님한테서 합격점을 받았다는 기념이라고 해도 좋아,」
「누가 그래? 합격점이라고.」
「며칠 전에 너 없을 때 집에 전화했더니 어머니가 자주 놀러 오라고 하셨어.」
「아버지도 날 좋아하신다고 했고.」
안인석을 홀겨본 박미정이 포장지를 벗겨내고는 벨벳 천에 덮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박미정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목걸이였다.
「예쁘다.」
그녀는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두 눈가가 발그레해졌고 어느덧 입술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정말 예뻐.」
「정말 마음에 들어?」
「응, 정말」
박미정이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인석 씨.」
「고맙긴 뭘, 쑥스럽게.」
캐럴 송이 다시 흘러나왔으나 박미정은 이제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녁을 마친 그들은 영동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타운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올랐다. 성탄일을 일주일 앞둔 때여서 곳곳에 세워진 붉은 십자가와 트리가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이윽고 박미정이 창에서 시선을 삔다.
「대전에 요즘 안 갔지?」
안주를 씹던 안인석이 입놀림을 멈추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자주 가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상처만 건드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왜 갑자기 그걸 묻는 거야?」
「갑자기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안인석이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제까지 김상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사항이었지만 항상 그의 잔영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박미정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에 관련된 이야기는 입에 담기도 두려웠어. 지금도 조금 억지를 써서 말을 꺼냈지만.」
「‥‥‥」
「이젠 받아들이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아서.」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거야.」
안인석이 양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억지 쓸 것도, 그렇다고 감출 필요도 없어 .」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박미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거야, 네 행복을 위해서는. 그놈한테 빚진 기분이 언제 가실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너를 놓칠 수는 없어.」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안 해도 돼,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얼굴에 웃음을 띠운 박미정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리고 나도 놓치기 싫어.」
응접실로 들어선 파벨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오늘도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차림으로 가슴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수건이 양복 색깔과 어울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가 영어로 정중히 말하자 자리에서 일어서 있던 강미현이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을 것 같네요.」
「과연 그렇소.」
입술 끝으로 희미하게 웃은 그가 강미현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아침 10시였으니 강미현이 그의 첫 손님인 셈이었다. 아침 9시 30분에 그가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니온 빌딩에 출근했을 때 비서가 전해준 메모를 읽고는 머리를 기울였다. 근대그룹 강회장의 손녀가 비밀리에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던 것이다. 건장한 러시아인이 응접실로 들어서서 그들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돌아가자 파벨이 입을 열었다.
「강회장의 손녀가 있다는 것은 나도 오늘 처음 알았지요. 당신의 메모를 받고 서둘러서 확인을 했습니다.」
그는 강미현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팩스로 받아본 사진보다 더 미인이시군요, 강미현 씨.」
「만나주셔서 고맙습니다, 파벨 씨.」
「근대와 우리는 협력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날 비밀리에 만날 만한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김상철 씨 때문에요.」
그러자 부드러워졌던 파벨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김상철 씨 때문이라니? 자세히 말씀해 주시오.」
「그 사람의 행방을 알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가 나한테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안기부 수사관한테서 들었습니다.」
「‥‥‥」
「이것은 개인적인 일입니다. 나하고 김상철 씨 둘 사이의 일이지 회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만나자고 말씀을 드렸어요.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만 저는 일본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이곳에 왔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제가 이곳에 온 줄 모르십니다.」
「나는 아직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는데, 회장의 손녀가 이렇게 나서는 이유를.」
「부탁합니다. 저는 지금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왔어요.」
그러자 숨을 들이마신 파벨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천천히 내뿜었다.
「김상철은 내가 제공해준 은신처에 머물다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소. 지금 나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왜 그랬지요?」
눈을 반짝이며 강미현이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나하고 같이 있기에도 불안했던 모양이오.」
「‥‥‥‥」
「참, 하바로프스크의 한 이사는 당신이 날 만나는 걸 압니까?」
「모릅니다.」
「그가 김상철을 찾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아마 그렇겠지요.」
강미현이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는 파벨을 바라보았다.
「파벨 씨, 그를 찾아주시지 않겠어요? 이건 제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그러자 파벨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개인적이라고 자꾸 말하지만 당신은 근대그룹의 후계자 중의 하나요. 강회장의 손녀란 말이오. 이것은 결코 개인적인 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한 이사는 김상철의 소재를 알면 즉시 알려달라는 요청을 해오고 있소. 난 근대와의 협력관계를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근대그룹도 이제 상철 씨를 위해 해줄 일은 없어요. 그건 제가 잘 압니다.」
잠깐 아랫입술을 물었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파벨 씨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그 사람의 현재 상황을.」
「그리고 상철 씨에 관해서는 근대와의 협력관계까지 염려하실 것은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요.」
파벨이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강미현이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상철 씨가 당신을 의지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마 근대 쪽에서 압력을 넣자 떠난 것이겠지요. 그런데 가끔 실무자가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과잉 반응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바로프스크의 한 이사 같은 경웁니다.」
「‥‥‥」
「그 사람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습니다. 근대는 목숨을 바쳐 일한 직원을 그런 식으로 배신하는 회사가 아니에요.」
핸드백을 열고 손수건을 꺼낸 강미현이 얼굴을 가볍게 눌러 닦았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 된 것도 근대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저라도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 돕고 싶어요. 저는 나중에 할아버지께 당당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비밀리에 저 혼자 나서고 있지만.」
「잘 알았소, 강미현 씨.」
파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가 갑니다, 어느 정도는.」
머리를 든 강미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짐작하고 있었소.」
이제 파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해답이 되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밤 11시가 가까워지자 부둣가 상점들의 불빛이 대부분 꺼졌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했던 눈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그쳤지만 이제는 칼끝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쌓였던 눈이 바람결을 타고 빈거리를 지나면서 어지럽게 눈가루를 뿌렸다. 부두의 여객터미널 앞에 있는 러시아 바는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여서 나무 문이 굳게 닫혀져 있었다. 바 앞의 길가에 세워진 승용차도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어서 마치 치우다 만 쓰레기더미처럼 보였다. 11시 정각이 되자 차량의 왕래도 인적도 없는 거리를 승용차 한 대가 질주해오더니 바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눈을 뒤집어쓴 승용차의 문이 열리더니 두 사내가 재빠른 동작으로 나왔다. 그들이 멈춰 선 승용차로 다가가자 슈바 차림의 장인규가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사내 한 명이 장인규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앞장을 서서 바로 다가갔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곧 문이 열렸고 장인규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장 동무.」
그렇게 말한 것은 비어 있는 바의 한복판에 둘러앉아 있던 사내 중의 한 명이다.
「약속 시간에 정확하게 맞추셨군, 오늘은.」
잠자코 그들에게 다가간 장인규는 가방을 테이블 위에 놓고는 빈자리에 앉았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 동무, 부친의 사고는 정말 유감이오.」
장인규가 말없이 머리를 조금 숙여보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내는 모두 네 명이었으나 입을 여는 것은 좌상격인 박대일이다. 그는 열홀 전에 화물 터미널 빌딩 앞에서 만난 사내로 해외 특수사업반 소속의 간부였다. 장인규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을 열었다.
「서류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 쪽 서명은 했으니 내일 선생께서 시청에 접수시키면 됩니다.」
장인규는 한 묶음의 서류를 꺼내 박대일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50만 달러는 며칠 더 시간을 주시지요. 아직 돈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서류를 받아 옆 사내에게 넘긴 박대일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알고 있어요. 건물 두 동을 40만 달러를 받고 파벨에게 넘기셨더군.」
「남은 것은 살고 있는 집인데 아직 정리가 덜 됐어요. 정리되는 대로 팔 생각입니다.」
「서두르시오. 동무 때문에 난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3, 4일 후에는 채워질 수 있지만 40만 달러를 먼저 받으신다면 내일이라도‥‥‥」
그러자 박대일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한몫에 주시오. 이렇게 자주 만나기도 싫으니까.」
가방의 뚜껑을 덮은 장인규가 주위 사내들을 둘러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흘 후에 연락을 주세요.」
「알았소. 나흘 후에.」
따라 일어선 박대일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무는 운이 좋은 줄로 아시오. 이렇게 관대한 처벌을 받는 것은 모두 돌아가신 동무의 부친 덕이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와 악수를 나눈 장인규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문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문을 열어주자 찬바람이 휘몰려 들어오면서 곧 그녀 앞에 사내 하나가 바짝 다가섰다. 장인규는 그를 향해 손을 벌렸다. 그 손에 묵직한 권총이 쥐어졌고 그 순간 그녀는 몸을 돌렸다.
「타타타타타타!」
그녀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선 서규환이 방 안의 사내들을 향해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을 쏘아댔다. 먼저 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두 손을 휘저으며 쓰러졌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사내들이 황급히 몸을 피하려고 하는 바람에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인규는 표정 없는 얼굴로 권총을 똑바로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첫 번째 과녁은 박대일이다. 그는 테이블 밑에 엎드려 있다가 얼굴에 총을 맞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타타타타타타!」
다시 서규환이 쏘아대자 사내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중 한두 명이 권총을 드는 민첩함을 보였지만 선수를 친 것은 이쪽이다. 미처 방아쇠를 당겨보지도 못하고 그들은 온몸이 벌집이 되었다.
「탕, 탕, 탕, 탕!」
기관총에 맞고 이미 움직이지 않는 사내들을 향해 장인규는 다시 한 발씩 정확하게 쏘아댔다. 서규환이 테이블로 뛰어가 흐트러진 서류를 쓸어 담고는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가십시다.」
그들은 눈바람이 휘날리는 밖으로 나와 바의 문을 닫았다. 눈에 쌓인 승용차의 창밖으로 사람의 팔 한쪽이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장인규는 손을 뻗어 사내의 늘어진 손을 차 안으로 던져 넣고는 자신이 타고 온 승용차로 다가갔다.
문이 열리자 눈보라가 휘몰려 들어와 탁자 위의 종이들을 날렸다. 밖에 나갔던 송길수와 하용준이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슈바의 묻은 눈을 털면서 페치카 옆으로 다가왔다.
「형님, 자재는 모두 내려놓고 왔습니다.」
송길수가 페치카 옆에 앉은 김상철에게 말했다.
「변흥근이한테 잔금을 치렀습니다.」
「날씨가 이런데, 내일 공사를 할 수 있을까?」
김상철이 묻자 송길수가 눈썹에서 녹아내리는 얼음물을 손끝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내부 공사는 할 수 있지요, 인부들은 일당 때문이라도 일하려고 할 테니까요.」
공사는 이제 2주일 후면 끝날 예정이었고 개업식이건 뭐건 생략하고 바로 영업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공사 자재는 기둥에서 판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망치와 못, 톱 등 연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근대의 자재 창고에서 들여왔는데 그래도 사람 눈이 걸리는지 운반은 밤에 하는 것이다. 김상철이 주위에 둘러앉은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난 계획대로 러시아에 다녀오겠다.」
「아마 형님이 돌아오실 때쯤이면 나파스 클럽은 완공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요. 그러지 못했다가는 여자들을 재울 데가 없거든요.」
하용준이 그의 말을 받았다. 김상철은 내일 돌아가는 수송단의 트럭을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떠나는 것이다. 그는 20일 예정으로 그곳에서 여자를 모아올 계획이었는데 동행하는 것은 러시안 룰렛에서 입에 총구를 넣던 이한이다.
「이곳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가게의 허가도 정식으로 받았고 경비소와의 관계도 최상입니다. 다만 최태호가 잠자코 있는 것이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송길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20여 일 동안 그는 거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공사를 해왔지만 얼굴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그는 이제 이곳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방문이 열리더니 눈보라와 함께 집주인인 보냐가 들어섰다 그들은 보냐네 집의 뒤채를 임시거처로 삼아 빌려 쓰고 있는 중이었다. 50대의 털보인 보냐가 얼굴에 묻은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일제 검문이야. 곧 이곳으로 경비소 놈들이 들이닥칠 거야.」
그가 서두르듯 말하면서 턱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잠깐 벌판으로 나가 있든지 하라구, 재수 없으면 잡혀, 어서!」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상철에게로 모아졌다. 그의 말대로 방 안의 모두는 수배자 신분이어서 끌고 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들 중에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사람은 송길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다려, 나갈 것 없다.」
김상철이 말하자 잠깐 그를 바라보았던 송길수가 보냐에게 물었다.
「책임자가 누구야?」
「소장이 직접 왔어.」
다시 김상철에게 시선을 주었던 송길수가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자 보냐는 허둥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간 지 1분도 안 되었을 때다. 문이 왈칵 열리면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앞장을 선 것은 고춘식 소장이다. 그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는 방 안의 사내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주위로 경비원들이 늘어섰는데 가슴에 근대 마크를 붙인 제복 차림에다 모두 벨트에는 권총을 찼다.
「낯모르는 인간들이 많군.」
훑어가던 고춘식의 시선이 김상철에게서 멈추었다.
「너도 조선족인가?」
그가 턱으로 김상철을 가리키며 물었다.
「예, 소장님.」
그러면서 나선 것은 송길수였다. 그는 공사 관계로 몇 번 고춘식을 만나 안면이 있다.
「제가 유지노사할린스크에서 불러온 친굽니다, 학교 선생이었습니다.」
「너한테 묻지 않았어.」
그의 말을 자른 고춘식이 일어서 있는 김상철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너도 수배자냐? 솔직히 말해.」
「예, 소장님.」
김상철이 머리를 숙였다.
「공금횡령입니다, 소장님.」
「이름이 뭐야? 컴퓨터로 두드리면 금방 밝혀지니까 바른대로 말해.」
「양흥만입니다, 소장님.」
경비원 하나가 수첩을 꺼내 그의 이름을 적었다. 송길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진즉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이 친구가 몸이 아파서‥‥‥부소장님께는 미리 말씀을 드렸었지요, 제 동업자라고.」
「횡령한 공금이 얼마나 돼?」
송길수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고춘식이 다그치듯 묻자 김상철이 손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미화로 2만 달러쯤 됩니다요.」
「흥, 그 돈으로 이곳에서 장사를 할 모양이구만.」
그는 몸을 돌려 하용준과 이한을 훑어보더니 송길수에게로 돌아섰다.
「이봐, 명심해둬. 나는 당장이라도 너희들을 러시아 당국에 넘길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규칙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그날로 장사고 뭐고 끝이다, 알아?」
「알고 있습니다, 소장님.」
「벌써 서른 명 가깝게 잡아놨으니 오늘 밤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겠다.」
고춘식이 발을 돌리자 경비원들도 그를 따라 썰물이 빠지듯 방을 나갔다.
「저놈 숨통을 오늘 밤이라도 끊어 놓을 수가 있는데.」
눈을 치켜뜬 하용준이 송길수를 바라보았다.
「그, 양흥만이라는 자, 괜찮은 거냐?」
그러자 송길수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내가 양흥만을 담당했던 경찰이야. 걱정할 것 없다. 컴퓨터 기록과 형님의 인상착의도 비슷하니까.」
그들의 말을 들으며 김상철은 보드카 잔을 쥐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은 그와 함께 교육을 받은 경비요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춘식이나 변홍근 등은 그가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방 안에 있던 경비원들도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 그들은 숙사나 유전, 또는 다른 중요한 곳에 배치되어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입에 보드카를 털어 넣고는 버릇처럼 코밑수염을 쓸었다. 이제 코밑과 턱수염이 짙게 자라나 있었는데 그것도 얼굴을 가리기 위한 위장 때문이었다.
눈보라가 그친 아침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맑았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흰 지평선 위로 검은 점 서너 개가 보였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은 수송 트럭의 대열 때문이다. 근대시는 이제 골격을 갖춰가고 있었다. 우선 사변이 10킬로미터인 정사각형의 면적 위에 중심 부분에는 시청 건물을 세우고 시청에서 팔방으로 폭이 백 미터가 되는 대로가 뻗어나간다. 그것은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빛살이 뻗어나가는 모양이 되었고 파리의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에서 뻗어나간 12개의 방사선 거리와 비슷했지만 더 넓고 길었다. 이대각은 손바닥으로 햇살의 반사광을 가리고는 광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 시청 건물의 공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요란한 크레인의 엔진음과 쇠가 부딪치는 소리, 트럭에서 자갈이 쏟아지는 소리들이 귀를 울렸다.
이윽고 그는 눈 위에서 손을 내렸다. 직선도로를 달려 온 지프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프가 그의 앞에서 멈추고 관리이사 조성욱이 내렸다. 직급은 같지만 조성욱이 그보다 4, 5년 더 고참이다.
「이봐, 이이사, 노보시크 현장에서 2백 명을 이쪽으로 돌렸어, 한 시간쯤 후에 도착할 거야.」
육중한 체격의 그가 소리치듯 말하며 다가와 서자 이대각이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소, 조 이사. 그런데 철근은 언제 도착하는 거요?」
「이틀 후야. 눈 때문에 수송단이 그로발 지점에서 발이 묶이는 바람에 늦었어.」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제 기상학자가 다 되었어 러시아 기상청 놈들의 예보보다 내가 예측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니까,」
「조이사도 추운데 와서 고생이오,」
「그나저나 자재 도둑놈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어.」
그들은 철근 빔 위에 나란히 앉았다.
햇살이 비치는 맑은 날씨여서 그들은 작업 파카의 단추를 풀어 제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재가 유출되는 것 같은데 꼬리를 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이대각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 소문을 들은 것 같은데· 마을로 빠져나간다면서요?」
「그 마을에 가보면 세워놓은 가게들은 모두 우리 자재로 만든 것이라니까. 그것을 보면 열통이 터져.」
그는 가래를 긁어모아 땅에 뱉았다.
「장부상으로 조사를 하면 컴퓨터상으로는 입출 내역이 딱 들어맞게 찍혀져 나오지만 재고 파악을 할 수가 있어야지, 환장을 할 지경이야.」
축구장 크기의 다섯 배보다 큰 자재 창고가 일곱 개가 되는 데다가 하루의 입출 물량이 트럭 백여 대 분이다. 제 아무리 컴퓨터로 재고를 파악해둔다고 해도 재고 파악은 사람이 직접 해야만 했다.
「그런데 참, 이곳이 완공되면 마을을 없앤다는데, 그거 사실이야?」
「글쎄, 그건 단장하고 그 윗선에서 결정할 문제라서 난 모르겠어.」
「아예 그래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으면 아예 우리가 그런 술집들도 운영해 버리든지 말이야.」
그러자 이대각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 이사는 가끔 억지소리를 하시더구만. 그랬다가는 이 땅에 기어들어 올 사람이 노동자밖에 더 있겠소? 마을 같은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세워지게 내버려 두는 거요. 그것까지 막았다가는 이주해올 사람이 없어.」
「하긴 그렇지만.」
「내 생각이지만 마을은 그대로 번창하게 둘 것 같아요. 단장은 그럴 생각인 것 같습디다.」
「그런데 자재가 문제야.」
「혹시 경비소 놈들과 짜고 빼돌리는 게 아닐까요?' 그런 소문을 들었는데.」
이대각은 현장 책임자여서 현장 노동자들과 접할 기회가 누구보다 많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과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는 누구보다도 빠른 편이었다. 조성욱이 찌푸린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어. 그래서 정보원을 몇 놈 심어놓았는데 만일 증거만 잡힌다면 눈 속에다 묻어 놓을 거야, 어떤 놈이건,」
「그나저나 언제 나하고 색시집이나 갑시다. 곧 마을에 꽤 큰 색시집이 개업한다던데.」
「이 이사가 산다면 가지. 난 월급에다 수당까지 모두 서울로 보내야 되는 판이라 주머니가 비었어.」
「이 양반 알고 보니 지독하네. 그럼 여기선 뭘로 먹고 산다는 말이요?」
「숙사 밥이지. 돈 들 게 뭐 있어?」
그는 빔에서 엉덩이를 들고 일어섰다.
「6개월이 넘었는데 아직도 공치고 있어. 돈도 없지만 그놈의 마을에 내 자재가 덮인 걸 보면 속이 뒤집혀서 가기가 싫었거든.」
하바로프스크를 출발한 러시아 호는 쾌속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임차지의 마을을 떠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오후였다. 비킨과 야만을 거친 기차는 우스티스크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3시간 후면 15시간의 기차여행도 끝이 난다.
4인승 컴파트먼트에는 그들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김상철은 모처럼 긴 잠을 달게 잘 수 있었다. 객실 안은 따뜻해서 그와 이한은 겉옷을 벗은 차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한 달쯤 있다가 떠났지요.」
앞자리에 앉은 이한이 그를 향해 더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물세 살의 그는 여덟 살 때 카자흐스탄을 떠나 노보시비르스크, 이르쿠츠크 등에 있는 고려인과 러시아인 가정을 떠돌다가 열다섯 살 이후로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에서 5년간 혼자 공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고를 치고는 3년 동안 떠돌다가 시베리아의 근대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조선족 고아가 러시아를 횡단하는 긴 방황이었다.
「한국으로 가려고 화물선에 탔다가 들켰습니다. 그래서 경찰에 넘겨졌는데 그곳에서 도망쳤지요.」
이한이 창백한 얼굴을 들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나는 부모 얼굴도 못 보았지만 내가 길바닥에 버려졌을 때 전주 이씨라고 씌어진 쪽지가 내 옷 속에 넣어져 있었답니다. 날 여덟 살 때까지 키워준 사람은 내 부모가 떠돌이 부랑자이거나 카자흐스탄을 잠시 거쳐 간 고려인 범죄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이한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한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한국에는 전주 이씨가 많아. 전주라는 도시도 있다.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이지.」
「내가 한국으로 가려고 했던 것은 부모 고향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
「잘 산다고 들었고 그곳은 모두 같은 고려인일 테니 일을 내기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이곳보다는 낫겠지.」
「그런데 날 데리고 있는 이유는 뭡니까? 처음부터 그것이 궁금했었습니다.」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 얼굴을 보는 순간 곧 죽을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처음에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어. 너는 이미 살기를 포기한 놈 같았으니까. 그런데 송길수가 그러더군, 마지막으로 운을 시험해보겠다고 했다고. 그래서 내가 네 운을 열어주기로 한 거다.」
「‥‥‥‥」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때의 운은 그렇게 되었고 지금은 또 다르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김상철이 그에게로 상체를 숙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나와 같이 일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으니 나도 약속을 하지. 이제 난 네 보호자가 될 것이야. 또한 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나도 이 시베리아에서 지금 혼자니까.」
「………」
「너는 나보다 세상을 많이 겪었으니 잘 알 것이다. 네 운은 이제 네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돼. 지난번 같은 경우는 다시 오지 않아.」
러시아인 차장이 컴파트먼트 안을 굽어다 보더니 사라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파벨이 얼굴을 펴고 웃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선 김상철의 상반신을 안고는 손으로 등을 두드렸다.
「김, 나는 자네가 앞으로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 잘 왔네.」
김상철의 팔을 끌어 자리에 앉힌 그는 인터폰을 눌러 외부인의 방문을 금지시켰다. 아침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었는데도 대기실에는 벌써 파벨과의 면담을 기다리는 10여 명의 방문객이 있었던 것이다. 파벨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앞자리에 앉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 그동안 어디 있었나?」
「임차지에 있었습니다.」
「임차지라니?」
눈을 둥그렇게 뜬 그에게 김상철은 그동안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양흥만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다는 것까지 털어놓았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군.」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파벨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곳에 들어가서 사업을 벌일 생각을 했다니, 난 생각지도 못했네.」
「그저 불나방처럼 불을 향해 다가간 것이지요. 특별한 계획은 없었습니다.」
「이곳에 온 것은 여자를 모으기 위해서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파벨 씨.」
「어렵지 않아. 우스티노프에게 말하면 백 명이라도 모을 수 있어.」
그는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넬 찾는 사람이 나한테 왔었어, 서울에서.」
잠자코 바라보는 김상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도 놀랐다네, 김. 자네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여자였어.」
「강회장의 손녀와 그런 사이였다니 말이야. 어쨌든 미스 강은 당당했어. 꾸밈없이 솔직했고, 그리고 회사는 자네를 구해줄 책임이 있다고 하더구만. 그래서 나도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녀를 위해 협조하기로 약속을 했단 말이야.」
「그건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파벨 씨.」
가라앉은 목소리로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아직 나설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녀는 회장의 손녀야. 그녀는 경영자에게 과잉 충성을 하는 일부 실무자가 그런 짓을 했다고까지 했어. 자네는 그 말을 믿어야 될 것 같네.」
「그건 압니다.」
「이곳까지 나를 찾아와 부탁을 하고 갔어, 과연 강회장의 손녀답더군.」
「‥‥‥‥」
「물론 그 여자가 나선다고 일이 금세 해결될 리는 없지. 하지만 큰 도움이 될 거야, 자네한테.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근대의 한 이사는 어떻게 됐든 간에 오래가지 못하겠더구만.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어.」
파벨은 오늘따라 표정이 밝은데다가 말도 많았다. 그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김상철이 마악 문을 나서는 데 따라 나오던 파벨이 그의 팔을 잡았다.
「참, 장인규 말인데, 소식 들었나?」
「아니 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랬겠지. 그 여자, 재산을 정리해서 가족과 함께 이곳을 떠났어.」
「가족이라야 어머니 한 명 있었으니 튀기 쉬웠지.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었으니까.」
눈을 크게 뜬 김상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북한 놈들이 아버지를 제거한 모양이야. 그 여자는 북한 공작원 여섯 명을 몰살시키고 튀었다네. 그 여자도 대단한 여자야. 고려인 여자들은 대단해.」
샤워를 마친 안인석은 가운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적당한 취기까지 섞인 터여서 온몸에 기분 좋은 피로감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면서 그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시 45분이었다. 오늘도 박미정과 영동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온 것이다. 창밖으로 주택가의 야경이 바라보였다. 이쪽은 고지대인데다가 2층이어서 전망이 좋았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머리를 돌렸다. 박미정이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인석이냐?」
맑게 울려 나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안인석은 온몸을 굳혔다.
「여보세요. 누구‥‥‥」
「나, 상철이다.」
「아아.」
안인석은 이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온몸을 돌덩이처럼 굳혔다.
「야, 인마, 안인석. 듣고 있어?」
김상철이 소리치듯 묻자 안인석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블라디보스토크야. 놀랬어?」
「인마, 실종되었다던데.」
「지금도 실종 중이지.」
잠시 말을 멈추었던 김상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버진 별고 없으시지?」
「그래, 별고 없으셔.」
「민희 사고 소식은 알고 있다.」
「네가 봐주었겠지.」
「그래, 그거야 물론‥‥‥」
안인석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잘 치뤘어. 어머니 옆에 곱게 묻었다.」
「‥‥‥」
「상철아.」
기어코 안인석의 목이 메었다.
「상철아, 네가 살아 있구나, 이 새끼야.」
「그래, 살아 있다.」
김상철의 목소리도 젖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그렇게 쉽게 이 세상에서 없어질 놈이 아니다.」
「상철아, 그렇다면‥‥‥」
「난 당분간 한국에는 못 가.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난 수배자야. 살인 혐의를 받고 있어.」
「‥‥‥」
「너한테도 알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해서.」
「염려 말아. 내가‥‥‥」
「꼭 부탁한다.」
「글쎄 그것은 걱정하지 말라니깐.」
「내 전화 왔다는 것, 미정 씨한테도 말할 필요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충격이 가셨겠지. 난 그 여자한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단 말이다.」
「알아들었어?」
「상철아.」
「알아들었냐고 물었다.」
「알겠어.」
「절대로 말하지 마라. 돌아갈 기약도 없는 놈이야. 난 그 여자를 구속할 권리가 없다.」
「아버지를 꼭 부탁한다.」
「그것은 걱정 마라.」
「그럼 잘 있어.」
안인석은 끊긴 전화를 들고 한참동안이나 정신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자 다시 신호음이 커다랗게 울렸다. 정신을 차린 그는 통화 스위치를 눌렀다.
「여보세요.」
「인석 씨, 나야.」
박미정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므로 그는 다시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내었다.
「이 시간에 무슨 통화가 그렇게 길어?」
「아니, 저기 ‥‥‥」
「나 말고 또 다른 여자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와락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그제야 엉거주춤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래, 잘 들어갔어?」
「응, 그런데 기분이 안 좋아? 목소리가 왜 그래?」
「아니, 조금 피곤해서.」
「거봐, 맨날 술을 마시니깐 그렇지, 어지간히 마시라니깐.」
안인석이 상체를 세우고는 창밖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에는 초점이 없다.
「일찍 자, 인석 씨. 내일 거기서 기다릴게.」
「그래, 잘 자.」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인석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고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안인석이 아버지의 흰색 대형 승용차를 끌고 남산타운 호텔의 현관으로 다가가자 박미정이 뛰어왔다. 그녀는 서둘러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십 분이나 늦었어.」
그를 향해 눈을 홀기는 시늉을 하며 그녀가 말했다.
「고속도로 막히겠어. 서둘러.」
연휴기간 동안 설악산에 가기로 한 것이다. 평시에도 밀릴 고속도로 하행선이 토요일 오후 3시였으니 체증이 엄청났다. 그들이 영동고속도로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짙은 어둠에 덮인 6시 경이었다. 연휴를 맞아 떠나는 사람들로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일 새벽에나 설악산 가겠다.」
의자에 등을 기댄 박미정은 쫑알거리면서도 그 정도는 예상했었는지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래도 안인석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막혔던 길이 뚫려 차가 조금씩 속력을 내자 그녀가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어?」
「아니.」
안인석이 머리를 젓자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왜 그래? 축 늘어져서는.」
「내가 그래?」
「시치미 떼지 마. 무슨 일 있지?」
「없다니까 그러네.」
액셀러레이터를 밟던 안인석은 앞차가 속력을 줄이는 바람에 세차게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충돌을 면했다.
「조금 피곤해서 그래.」
안인석이 말하자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박미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조금 쉬었다 가. 서둘 것 없잖아? 사흘이나 있어, 시간은.」
「………」
「저기, 휴게소 표시가 보이네. 저기서 쉬어.」
지난여름, 1박 2일의 기간 동안 그녀와 바닷가에 간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분위기도, 상황도 다르다. 이제 그녀는 큰 저항 없이 3박 4일의 여행에 응해주었고 그것은 곧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휴게소의 한쪽 귀퉁이에 차를 세우자 박미정이 갑자기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이더니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상체를 세운 짧은 키스였지만 안인석은 정신이 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실 것 사 올 테니 쉬고 있어.」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은 박미정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안인석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길게 누운 그는 눈을 껌벅이며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츰 가슴이 가라앉아 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의 일은 꿈일 뿐이고 지금이 현실이다. 그는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아직도 체온이 남아 있는 의자는 따뜻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는 상체를 세우고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며 박미정을 찾았다.
설악산의 콘도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쯤이 되었을 때였다. 깨끗하게 정돈된 30평형의 콘도는 안문세 박사 소유로 그가 대학 시절부터 자주 찾아왔던 곳이다. 짙은 어둠에 덮인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안인석의 옆으로 가운 차림의 박미정이 다가와 섰다. 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 옅은 비누 냄새가 풍겨왔고 두 볼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한쪽 손으로 그의 허리를 안은 박미정이 상반신을 기대왔다.
「안아줘.」
안인석은 몸을 돌려 그녀를 안았다.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금방 그의 혀를 받아들였고 곧 그들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박미정은 가운 밑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녀의 나신을 본 안인석은 자신의 옷을 뜯어내듯이 벗어던졌다. 그녀의 다리를 거칠게 열어젖힌 그가 진입해 들어가자 박미정은 사지를 오그려 그의 몸을 안았다. 그의 거친 몸놀림에 그녀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그것에 오히려 더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곧 거침없는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방 안은 신음소리로 뜨거워져 갔다. 이윽고 안인석이 격렬한 몸놀림을 하더니 그녀를 안은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대로 그냥 있어.」
그를 감아 안은 박미정이 아직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떨어지지 마.」
안인석이 그녀의 유두를 가볍게 물었다. 그리고는 뜨거운 숨결을 뱉으며 말했다.
「그래,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아침 식사를 끝낸 강회장이 식탁에서 일어서더니 문득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미현이, 너, 서재로 차 가지고 오너라.」
연휴 기간이어서 모처럼 여유 있는 아침 식사를 마친 가족들은 아직도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강회장이 식탁을 떠나자 강재원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마 널 진급시켜주실지 모르겠다. 과장을 일 년 달았으니 때도 되었어.」
그는 뉴욕에서 돌아와 중공업 그룹의 비서실장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인 강용식의 뒤를 이을 준비작업이다. 녹차 잔을 들고 강미현이 서재로 들어서자 신문을 읽고 있던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거기 앉아.」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소파의 끝자리에 앉았다. 강회장은 차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강미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이유가 뭐냐?」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라, 어서.」
「파벨을 만났습니다.」
메마른 목소리가 나왔으므로 강미현은 헛기침을 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상철의 소식을 알려 달라고 했어요.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근대는 회사를 위해 일하다가 그렇게 된 사람을 버린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과잉 충성을 하는 실무자가 경영자의 뜻과는 다른 행동을 해서 김상철이 오해를 하게 되었다고 말해주었어요.」
「‥‥‥」
「김상철은 파벨이 제공한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말도 없이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것을 어떻게 안 거냐? 파벨이 숨겨주고 있다는 것을.」
「안기부 수사관한테서 들었습니다.」
「안기부 수사관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고?」
「이실장님한테 물었어요.」
「이 할애비가 알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겠지?」
「예, 할아버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으렸다.」
「그것을 말해보아라.」
「할아버지는 가족이 정상을 벗어난 행동을 했을 땐 엄격하셨어요.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해 」
「회사를 그만두게 하시고 집안에 가둬놓고는 결혼을 시키실 것 같았습니다.」
「그다음의 네 행동도 생각해 두었으렸다. 그것도 말해보아라.」
「할아버지를 설득시켜 보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는 제가 알았던 남자 중에서 저나 근대의 앞날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요.」
「그것이 무슨 얘기냐?」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제 결혼상대자로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강회장이 헛기침을 하고는 녹차 잔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눈을 치켜뜨고 강미현을 노려보았다
「우리 집안에서 제일 당돌한 놈이구나, 이놈은.」
「이놈이 도대체 누구를 닮았을꼬.」
「네가 만약 남자였다면 큰일을 내고도 남았겠구만.」
「할아버지, 저는‥‥」
「이놈아!」
낮으나 강한 강회장의 호통에 강미현이 머리를 떨구었다. 그가 쏘아대듯 말했다.
「천방지축 나대는 것, 용서할 수 없다. 오늘부터 근신이다. 만일 그놈에 대한 어떤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 앞으로 한 번만 더 발각될 경우 그때는 아예 회사고 뭐고 그만두게 하고 집에 묶어두겠다.」
「‥‥‥」
「하고 많은 남자 중에서 하필이면 그놈이라니.」
「할아버지도 그 사람을 안중에 두시고 계신 줄 알았어요.」
강미현이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특히 임차지의 미래를 말씀하실 때는요.」
「시끄럽다.」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친 강회장이 소리쳤다.
「그놈은 우리 미래와는 상관이 없다. 이미 운도 끝이 난 놈이다. 가문이 좋지 않으면 운이라도 좋아야 하는 법인데 그놈은 그것도 끊겼다.」
한 호흡을 쉬고 난 강회장이 말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회사를 위해 벌써 몇 명이 목숨을 잃었어, 그리고 난 그 보상은 충분히 했다. 그놈한테도 보상금이 지급되었고 제 애비가 찾아가게 되어 있어. 그놈은 실종자로 되어 있는 것이 이제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내가 너에게 화를 낸 것은 네 무모함 때문이야.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에 달려든 네 철부지 같은 행동 때문이다. 내 손녀가 감정에만 치우쳐 그런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알아들었으면 나가 보거라.」
강미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회장이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널 주의해 볼 테니 정신 차려야 돼.」
파벨의 저택 응접실 안, 사람을 물리친 파벨이 김상철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다. 아직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아 술을 마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으나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은 반병이 넘게 비워져 있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에 눈가에만 붉은 기운이 있는 파벨이 문득 술잔을 내려놓았다.
「김, 이건 내가 며칠 동안 생각한 것인데 ‥‥‥」
그는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임차지 안의 사업, 나하고 같이하면 어떨까? 솔직히 난 그곳에서의 사업은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자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야. 수배자들이나 들끓고 숙사 내에는 온갖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고 해서 말이야. 마을이 생기고 가게에 여자 몇 명씩 들어가 있는 것은 들었지만 잔돈푼만 긁는 줄 알았거든.」
「수배자들의 마을이 아니요, 파벨 씨. 근처에 생길 수십만 명의 근로자 집단을 상대로 하는 소비도시가 생겨나는 겁니다. 근대 자체 내에서 술집과 색시집을 운영할 수는 없지요. 그것은 이주민들이 만들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다.」
「어떤가? 나하고 동업을 하지 않겠나?」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그럴 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50명이나 여자를 데려간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나도 놀랐어.」
「5백 명도 부족하지요, 앞으로는.」
「내가 자금, 여자, 술, 모든 걸 대지. 자네는 운영을 맡고 이익을 반분하기로 하면 괜찮은 조건 아닌가?」
「근대 경비소에 매출의 10%를 줘야 합니다.」
「그것들이 누구 흉내를 내고 있군.」
파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곧 누구처럼 골로 가겠는데.」
「처음부터 경비소와 마찰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놈들은 싸구려 술을 들여와 몇 배로 강매하고 만일 가게에서 술을 몰래 들여온다면 그 날짜로 영업을 정지시키니까요. 또 근대 창고에서 건설자재를 빼내오는데 그놈들과 손발을 맞추는 놈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조금 사태를 눈여겨보아야 됩니다.」
「그건 자네한테 맡기겠어.」
파벨이 김상철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근대를 위해서도 그놈들의 숨통을 끊어놔야 되겠구만, 그렇지 않나?」
잠자코 술잔을 든 김상철이 한 모금에 술을 삼키자 파벨이 말을 이었다.
「자, 그러면 나와 계약이 된 것인가? 김, 대답을 하게.」
「계약이 되었습니다, 파벨 씨.」
「좋아, 그럼 건배를 하세.」
만족한 얼굴로 그가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가 일찍부터 술자리를 벌인 것도 이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틀 후, 연말을 나흘 남긴 아침 9시에 블라디보스토크 부두에서 북쪽의 근대 임차지로 수송단의 트럭들이 출발했다. 건설자재인 철근과 시멘트에다가 각종 하물을 실은 수송단의 트럭은 백여 대가 넘었는데 꽁무니에 달라붙은 세 대의 트럭에 김상철과 이한 그리고 파벨이 붙여준 두 명의 러시아인 부하가 50명의 여자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장장 일주일에 걸친 시베리아의 남북 횡단이다. 여자들은 건강함을 우선 조건으로 뽑은 데다가 방한 장비를 충분히 갖추도록 했고 트럭 안에는 난로까지 장치해 놓았다. 그러나 김상철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병사들도 견디지 못하고 낙오된 것을 본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는 10여 명의 여자와 함께 첫 번째의 트럭에 탔고 러시아인 부하들은 두 번째, 이한은 맨 끝의 트럭이었다. 이제 일주일간 여자들과 침식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여자들은 대부분이 러시아계였지만 한족과 몽고족 등 동양계도 10여 명 섞여 있었고 나이도 10대로 보이는 여자로부터 30대 후반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각기 비슷한 또래나 피부색들이 모여 금방 서너 개의 그룹이 만들어졌다. 그녀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며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반나절도 못되어 김상철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모두가 파벨이 운영하는 유홍업소에서 지원한 여자들이어서 산전수전 겪은 베테랑들인데다가 계약금을 두둑이 받은 터라 마치 소풍가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김상철의 옆에는 두 무릎을 세운 채 위로 턱을 올려놓은 동양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안쪽에 앉아 있다가 김상철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이는 스물하나에 이름은 황윤인 중국계 여인이었다. 트럭의 끝 쪽 부분에 슬리핑백을 베고 누워 잠이 깨었다 들었다 하던 김상철이 문득 머리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콧날이 조금 낮았지만 눈이 맑고 입술이 오동통한 여자였다.
「이봐요, 생각 있으면 말해요.」
그녀가 서툰 러시아어로 그렇게 말하자 옆자리의 여자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 괜찮아요.」
그러나 다시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웃지 않았다. 김상철이 누운 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고맙다.」
「이봐요, 대장. 그곳은 하룻밤에 100달러 맞아?」
이왕 말이 터진 참이라 안쪽에 앉은 러시아 여자가 소리치듯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일어나 앉았다
「그래, 틀림없어, 너희들 몫은 50달러고.」
그러자 차 안은 탄성과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장, 더 이상 까는 것은 없는 거지?」
「더 이상은 없어,」
「대장을 믿겠어.」
그러나 두어 명이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쑤군댔다. 그녀들이 있었던 부둣가의 색시집에서는 하룻밤에 30달러에다 20달러를 떼고 나면 손에 쥐는 것은 10달러뿐이었다.
「난 30달러짜리로 하룻밤 다섯 번 하는 것이 나아. 옆에 사내가 드러누워 있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
황윤이 김상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30분에 10달러는 내 몫이지.」
「그래.」
「샤워장은 있어?」
「공동샤워장이야. 방에는 없어.」
「그래도 괜찮아. 장화를 신을 테니.」
하바로프스크까지는 아스팔트 길이어서 트럭의 대열은 속력을 내고 있었다. 알루미늄으로 박스형 덮개를 씌운 트럭 안이라 엔진의 소음은 적다. 그러나 진동이 커서 가끔씩 서로 몸을 부딪쳤지만, 분위기는 아늑해졌다. 안쪽의 누군가가 낮게 노래를 부르자 두어 명이 따라 불렀다.
「어마어마하군.」
길가에 멈춰 선 자신의 승용차 옆으로 근대의 수송단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 스물 몇 대까지는 무의식중에 트럭의 수를 세다가 포기한 이금철이 다시 말했다.
「저거 모두 돈 아닌가?」
「돈 덩어리지요.」
옆자리에 앉은 하석태가 맞장구를 쳤다. 그는 임차지에서 잠시 돌아와 있는 비서국 소속의 조직지도부 요원이다.
「임차지에 있는 우리 영업장의 매출이 급신장할 수밖에 없군.」
아직도 이어지는 트럭을 바라보며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수송단은 하바로프스크에 머물지 않고 곧장 북쪽으로 올라갈 모양이었다. 그들의 승용차가 멈춰 선 교외의 도로를 속력을 내어 달려가고 있었다. 하석태가 그를 바라보았다.
「자금만 더 있으면 서너 군데 영업장을 더 세울 수 있겠는데 아깝습니다. 소비 인구에 비해서 영업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란 말입니다.」
낸들 어쩌는 수가 있느냐는 듯 이금철이 입맛을 다시자 그가 말을 이었다.
「조선족 수배자 한 놈이 본토에서 거금을 횡령해 와서는 2층짜리 술집과 색시집을 지어왔습니다. 며칠 후면 곧 영업을 시작할 텐데 규모가 제일 큽니다.」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몰려드는 모양이군.」
「근대에서 허용을 하고 있으니까요. 우린 일단 영업을 시작하게 하고 나서 기회를 노릴 생각입니다.」
이제야 소송단의 끝이 보였다. 알루미늄 박스로 화물칸을 장치한 세 대의 트럭이다. 그들이 탄 승용차는 다른 차들과 함께 길가에서 머리를 틀어 차도로 나왔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마을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외부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불안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석태가 멀어져가는 수송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차지의 영업과 조직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그는 물자구입을 위해 하바로프스크에 와 있는 참이었다.
「최태호가 이번에 지은 술집에 경비소 요원들이 불심검문을 나와 수배자 여섯 명을 잡아갔습니다. 상납 때문에 놈들이 시위를 하는 것이지요.」
「그놈들, 아예 겁을 주는 것이 어때? 몇 놈을 죽여 놓든지, 아니면 그런 사실을 폭로한다고 위협을 하면‥‥‥」
「그러면 다른 소장이 오게 되고 오히려 우리가 영업을 못하게 됩니다. 근대 쪽에서 대대적인 사찰을 하면 배겨날 수가 없어요.」
하석태의 말에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본주의의 대표기업인 근대가 벌써부터 구린내를 풍기는군. 바로 이것이 우리에겐 기회가 되겠지만 말이야.」
「그렇습니다, 대좌동지.」
「나도 이곳 일을 수습하고 나면 곧 그곳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평양에서도 대단한 기대를 하고 있어, 그곳 일에.」
「아직 장인규는 찾지 못했습니까?」
「이르쿠츠크, 유지노사할린스크를 모두 뒤졌는데도 아직 꼬리가 잡히지 않아. 제 어미와 부하 한 놈, 이렇게 셋이서 떠난 것은 확인되었는데 말이야.」
찌푸린 얼굴로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평양에서 보낸 간부급 동무까지 몰살시켜버리다니, 내가 해명하느라고 진땀을 뺐어.」
의자에 등을 기댄 그가 담배를 꺼내 물자 하석태가 재빨리 라이터를 켜 담배 끝에 대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평양으로 소환을 당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을 큰 사건인데도 이금철은 이렇게 건재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뒤에 엄청난 배경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곧 찾게 될 거야, 조만간에.」
담배 연기를 뿜으며 이금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6. 서울과 시베리아의 3월
3월 중순이어서 남산 하이츠 호텔 주변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센 날이었다. 바람에 쓸려간 듯 긴 구름 몇 조각만 흐르는 하늘은 파랗게 맑다.
호텔 12층의 소연회실에서는 옅은 매연에 덮인 영동 시가지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물결이 반짝이는 한강이 모두 내려다보였다. 연회실 안은 그 햇살만큼이나 분위기가 밝다. 이제 약혼식이 모두 끝나고 점심 식사도 거의 마친 시각이어서 긴장이 풀린 양쪽 가족 간에는 부드러운 대화와 웃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회를 맡았던 친구가 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일어나더니 마이크를 잡고 양가를 대신한 인사말을 하기 시작했다. 신랑석에 앉아 있던 안인석은 머리를 돌려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연분홍색 슈트 차림인 그녀는 오늘따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으므로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양가의 축복 속에 그녀와 약혼식을 마친 것이다. 결혼은 두 달 뒤인 5월 중순으로 날을 잡아두었고 이미 반포의 30평형 아파트도 장만해 놓았다. 박미정이 그의 시선을 의식한 듯 머리를 돌리더니 입술과 눈 끝으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안인석은 가슴에 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도 있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는 듯 시선을 옆쪽으로 돌렸다. 친구의 인사말은 끝나가는 중이었고 손님 몇 명은 자리에서 일어설 차비를 하고 있었다.
「다 끝났다, 얘.」
열려진 연회장 문 앞을 지나면서 최희은이 말했다. 그녀는 문 앞에 씌어진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안인석과 박미정 ‥‥ 뭐, 평범한 이름이네. 그런 냄새가 나.」
걸음을 재게 떼어 앞장선 강미현의 팔짱을 낀 최회은이 눈썹을 찌푸렸다.
「기껏 가보자고 해놓고선 왜 도망치듯 지나가? 너 무슨 죄 지었어?」
「시끄러.」
그들은 아래층의 라운지로 내려가 창가에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서는 아래쪽의 주택들만 내려다보인다.
「김상철의 친구와 애인이 약혼을 한단 말이지.」
차를 주문하고 난 최희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김상철 입장에서 보면 배신을 더블로 받았네, 안 그러니?」
「‥‥‥‥」
「참, 두 사람 다 그가 살아 있다는 걸 모른다고 했지? 그렇다면 부담은 없겠다. 행복하겠어.」
「날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얘기해, 이것아.」
이맛살을 찌푸린 강미현이 말했다. 그녀는 마침 날라 온 커피잔을 들고는 블랙으로 한 모금을 마셨다.
「내가 알고 있다고 해서 나설 이유는 하나도 없어. 난 저 사람들하고는 인연이 없단 말이야.」
「그런데 바쁜 나까지 끌고 와서 저 요란한 약혼식 모습을 구경시켜준 이유는 뭐야?」
「혼자서 확인하기에는 멋쩍었어, 조금 한심했고.」
「재미있는 영화는 친구와 함께 보는 게 더 분위기가 나지. 옛날에 우리가 그랬잖아.」
「시끄러.」
「속물근성이 아니다. 난 네 행동에 공감해. 너는 지금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 힘내라.」
커피잔으로 시선을 떨군 강미현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최희은도 정색을 하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아직도 근신 중이야?」
이제 최회은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는 숨을 내려쉬었다.
「네 할아버진 오래 사시겠던데, 산삼 좋은 것 있으면 다 잡수신다면서?」
「‥‥‥‥」
「그, 파울인지 하는 마피아 대장한테서는 연락이 없어?」
「전화 해봤지만 소식을 모른대.」
「그렇다면 너도 곧 저런 행사나 치르는 수밖에 없겠다. 」
최회은이 눈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넌 강단이 있지만 영리한 애니까 곧 바보 온달 찾는 건 그만둘 거야. 행방불명된 온달을 찾으려고 평강공주가 정조를 지킨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으니까.」
시베리아의 3월은 아직도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이다. 저녁 무렵이 되자 인구가 5천 명으로 늘어난 근대 타운의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두 달 전부터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건물에는 모두 전기가 들어오게끔 근대 측이 시설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근대 타운으로 정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서북방 20킬로 지점에 있는 근대시에는 경공업단지가 들어서 있었지만 아직 유흥인구는 이쪽의 십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근대 타운은 옆쪽에 거대한 유전시설과 근로자 숙소, 그리고 근대의 자재 창고를 두고 있는 데다가 남북으로 뻗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근대의 경영진에서도 근대타운을 근대시 쪽으로 옮기려고 검토를 했다가 결국 유흥도시로 발전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근대시는 상공업 중심도시로, 근대 타운은 소비 중심도시로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김상철은 그동안 다섯 개의 클럽을 세웠다. 물론 대표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인 경영자는 그였다. 그는 이제 근대 타운에서 북한 측을 바짝 따라붙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서쪽 길 대로변에 있는 나파스 클럽의 사무실 안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송길수가 슈바를 벗으며 김상철의 앞자리에 앉았다.
「밤 11시경에는 트럭이 도착할 겁니다, 형님. 게이트 책임자하고 이야기도 되었고 그곳에 블라디미르를 남겨두고 왔습니다. 그가 이곳으로 트럭을 인솔해 올 겁니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파벨의 보급 트럭이다. 근대의 수송단과 함께 오는 이번의 보급 트럭은 10대였고 화물은 술과 담배에다 각종 생필품 그리고 여자들 30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송길수가 아래쪽 60킬로 지점에 있는 도로의 검문소 책임자에게 미리 뇌물을 주어서 귀찮은 일이 없도록 하고 온 것이다. 이제 근대는 주류나 생필품 등의 반입을 제한하지 않아서 작년처럼 경비소장이나 부하가 폭리를 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매출액의 10%를 세금으로 내는 것도 공식화되어 있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투돌레프 클럽에서 어젯밤 소란을 피운 놈들이 다시 온다는 정보가 있어. 그래서 이한을 그곳에 보냈다.」
「북한 놈들의 장난입니다. 최태호가 시켜서 하는 짓이오.」
그는 주먹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들하고는 언제 한 판 붙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치고받기만 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둘 중의 하나가 없어져야 돼, 그러면.」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놈들은 크게 일을 벌리지 못해. 우리 뒤에 파벨이 있다는 걸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형님, 그렇다고 경비소 놈들이 제대로 할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만 뜯어가니 말이오.」
경비소장 고춘식은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얹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피아와 북한 공작반 사이에 끼어 있어서 얼핏 보면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야.」
그는 보드카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우리는 완충지대에서 놈들의 세력에 균형을 맞춰주면 된다. 본부에서도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고,」
「하지만 소장님, 며칠 전에는 나파스 클럽의 송길수가 매출장부 보여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보기는 했습니다만 돈을 반밖에 내지 않았어요.」
앞쪽에 앉은 변홍근이 말하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놈들은 우리가 아직도 그 돈을 독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믿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영수증을 줘도 버려버리는 놈들도 있으니까요.」
고춘식은 건설 현장의 창고 과장으로 잔뼈가 굳은 사내로 눈치가 빠른데다 요령이 좋았다. 그는 올해 1월에 관리 이사인 조성욱에게 타운의 관리비 및 경비소 운영자금은 각 업소의 매출액에서 일정 금액을 징수하여 조달하는 것이 낫겠다고 조심스럽게 건의를 했다. 그것을 조성욱이 정리하여 본부의 승인을 받아낸 것이다. 이제 매출액의 10%는 공식적으로 근대에 납부해야만 했고 이제까지 고춘식이 걷어낸 세금은 유야무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놈, 송길수가 마피아의 끄나풀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그 양흥만이 라는 놈도‥‥‥」
고춘식이 말하자 변홍근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보원 이야기를 들으면 양흥만이 마피아의 보스급이랍니다. 러시아 놈들도 그놈 앞에서는 설설 긴다는데요,」
「나도 들었어. 어쩐지 그놈 인상이 섬뜩했어.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변홍근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에 마피아 쪽의 보급 트럭이 옵니다. 트럭 열 대 분이라는데요. 그리고 여자도 30명이나 타고 있답니다.」
「이거 점점 북한 쪽의 영업이 떨어지겠다. 장사는 마피아가 잘 하는구만.」
「북한 놈들은 매출이익을 대부분 본국으로 보내는 모양입니다. 마피아처럼 몽땅 재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
고춘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숙사에 들어갈 테니 크라우프 바에서 싸움이나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 매출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어젯밤에 조선족 서너 명이 집기를 부수며 소동을 피우는 바람에 투돌레프 클럽의 영업은 엉망이 되었었다. 그들이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면서 영업을 방해했다는 것을 손님들도 모두 느낄 정도였다. 모두 최태호의 부하들로 잘 훈련된 사내들인 것이다. 이한은 창백한 얼굴을 들어 클럽 안을 둘러보았다.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클럽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찼고 대부분이 작업복에 근대의 마크를 붙인 조선족들이었다. 클럽은 정사각형의 구조로 중앙 부근에 세워진 원형 무대에는 러시아인 여자 둘이서 음악에 맞춰 풍만한 몸을 흔드는 중이다. 그 주위는 모두 테이블이었고 주방은 입구의 반대편에 있다.
「술 드릴까요?」
반팔 셔츠에 짧은 치마의 유니폼을 입은 황윤이 쟁반을 들고 그의 앞에 섰다.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는 쟁반에 놓인 잔 하나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 밤에 기다릴게요.」
그녀가 서툰 러시아어로 말하자 이한은 머리를 저었다.
「돈 없어.」
「그냥 와요.」
이한이 머리를 들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가 30달러를 주고 30분짜리 숏타임 상대로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지만 같은 트럭에 타고 왔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은 실패작이었다. 황윤이 텍스를 꺼내 길게 펴는 것을 보고 이한이 옷을 입고 나가버린 것이다. 두 번째 만남은 황윤이 하용준에게 부탁해서 이루어졌다. 하용준이 술을 먹인 이한을 끌고 오자 황윤은 텍스를 신지 않은 그의 맨살을 받아들인 것이다. 9시가 넘어서 클럽 안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님이 찼을 때 남자 종업원 한 명이 서둘러서 이한에게 다가왔다.
「총을 꺼낸 놈이 있습니다.」
그가 눈으로 안쪽의 자리를 가리켰다. 아직 주위의 손님들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가 가리킨 테이블을 본 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도 최태호 부하들의 난동이다. 요즘 들어 그들의 도전이 더욱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 주위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손님들이 수라장을 일으키며 밖으로 뛰쳐나갈 판이다. 이한은 그들에게 다가가 가로막듯이 섰다. 사내 두 명이 서로 권총을 겨누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이 봐, 참으라구. 왜 이래.」
옆에 앉은 두 사내가 제각기 달래는 시늉을 했다. 이한이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새끼들. 그 총으로 나를 먼저 쏴 봐!」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울림이 강해서 두 사내는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한이 한 손을 들어 자신의 파카 지퍼를 반쯤 내렸다 그러자 한쪽 가슴에 매달려 있는 매그넘 45구경 권총이 드러났다. 총신이 길고 구경이 커서 돼지 머리를 쏘면 머리 반쯤이 날아간다.
「셋을 세겠다. 그사이에 날 쏘지 않으면 내가 네 놈들 둘을 쏘아 죽인다.」
그는 파카의 한쪽을 잡아 벌리고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한쪽 손을 테이블에서 뗐다. 벽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자세여서 뒤쪽 테이블에서는 그의 등만 보였다. 이한이 숫자를 셌다.
「하나.」
그러자 총을 든 사내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그 순간 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내 두 명이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치우시오. 우리가 나가겠소.」
「이 새끼야, 앉아.」
그러면서 이한은 거대한 권총을 빼어 들고는 파카 속에서 사내들을 향해 겨누었다.
「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놔, 천천히. 그리고 일어서.」
사내들이 총을 내려놓자 뒤쪽에서 다가온 알렉세이와 보트킨이 그들의 권총을 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사내들을 밀고 밖으로 나가자 주위의 서너 개 테이블에서 이쪽을 힐끗거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손님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투돌레프 클럽 뒤쪽은 눈에 덮인 공터였다. 이한과 두 명의 마피아 동료는 사내들을 끌고 공터의 한복판에서 마주 섰다. 짙은 어둠 속에서 건물의 모서리를 훑고 지나는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그들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나란히 서.」
총 끝으로 가슴을 겨누며 이한이 말하자 사내 한 명이 소리치듯 말했다.
「이보쇼, 우리끼리 싸운 것 가지고 너무 하지 않소.」
「어제도 그랬어. 다른 놈들이었지만.」
바람 소리가 컸으므로 이한도 소리치듯 말했다. 알렉세이와 보트킨은 그의 양옆에 서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서로 쏘아 죽이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대신 해결해 주지.」
이한은 매그넘의 탄창을 털어 총알을 빼내고는 다시 두 발을 끼워 넣었다. 투돌레프 클럽 뒤창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으로 그의 손놀림이 선명하게 보였다.
「자, 여섯 발 중 두 발, 확률은 30%다. 그러나 첫발에 죽을 수도 있고 세발 째에도 살 수가 있지.」
탄창을 소리 나게 끼워 넣은 이한은 첫 번째 사내의 이마에 총구를 대었다. 클럽 안에서 권총을 겨누었던 사내중의 하나였다.
「권총 장난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이한이 방아쇠를 당기자 철컥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공이가 빈 탄창을 친 것이다. 그 순간 사내는 입을 쩍 벌리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온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다음은 너.」
이한이 다른 사내의 이마로 총구를 옮겼다.
「아무래도 이번은 공이가 탄알을 칠 것 같다.」
「아이구.」
사내가 두 손을 들어 권총을 쥔 그의 손을 잡으려는 시늉을 했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한이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자 귀청을 울리는 요란한 총성이 났다. 사내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고 나머지 세 사내도 온몸의 기력을 떨어뜨렸다. 이한이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봐 가자구, 이만하면 됐어.」
그제서야 사내들이 몸을 돌려 주저앉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건들거리며 앉아 있는 사내는 아직도 정신이 가물가물한 것 같았다. 이한은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순간에 총구를 비켰는데 그는 이마에 남아 있는 뜨끈한 열기를 총을 맞은 것으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몸을 돌린 이한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나도 배운 수법이야. 저놈들도 다시는 총 장난을 하지 않을 거야, 나처럼.」
장부를 덮은 김상철은 창가로 다가가 짙은 어둠에 쌓인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쪽은 나파스 클럽의 2층 뒷면에 나 있는 창이어서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눈 덮인 벌판일 것이다. 멀리 한 줄기 불빛이 어른거리다가 곧 사라졌는데 본부로 돌아가는 차량인 모양이었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선 그는 한동안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안인석에게 연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는 유일하게 믿고 있는 친구였으니 틀림없이 아버지를 만나 소식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뽑히지 않는 가시처럼 가슴에 언제나 남아 있는 미련, 그것은 박미정이다. 그가 어둠 속의 한 점을 응시하는 사이에 어느덧 그녀의 목소리와 냄새, 피부의 감촉까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당장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녀 사진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떠오르는 그녀의 영상은 흐리다. 감촉과 냄새는 아직도 생생한데도 모습은 흐려지는 것이다. 사진을 꺼내 보지 않은 지 오래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 절실할수록 상처의 몫도 커져야 한다고 결정해버린 결과였다.
이윽고 김상철은 턱을 들고 어깨를 폈다. 한국에 돌아갈 길이 막힌 이상 이제 그녀가 잊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는 시간이 상처의 아픔을 가시게 하고 언젠가는 흔적만 희미하게 남기게 된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내 아픔이나 미련쯤은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다. 창에서 몸을 돌린 그에게 탁자 위의 장부가 시선에 들어왔다. 이제까지 백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 모였고 앞으로는 더 빨리 불어날 것이었다. 이제 자신은 시베리아의 마피아이자 유지노사할린스크 출신의 공금횡령 수배자인 것이다.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으므로 그는 몸을 굳혔다. 송길수와 하용준이 서둘러 들어섰는데 모두 눈을 치켜뜬 얼굴이었다.
「형님, 보급대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송길수가 소리치듯 말했다.
「블라디미르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화물은 모두 빼앗기거나 불에 탔고 호송원도 여럿 죽었답니다. 강도단 짓이랍니다.」
「여자들은?」
다그치듯 김상철이 묻자 이번에는 하용준이 대답했다.
「다친 사람은 몇 명 있는 것 같지만 여자들 대부분은 무사한 모양입니다.」
「게이트 남쪽 50킬로 지점에서 습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자를 실은 트럭 두 대만 지금 게이트에 도착했다는데요.」
그렇다면 트럭 8대에 실렸던 보급품은 모두 유실된 셈이다.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남은 물자로 영업장이 얼마나 견딜 수 있지?」
「이틀이 고작입니다, 형님.」
송길수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강도단에게 습격을 당하다니, 게이트까지 다 와가지고 말이오.」
「차를 준비해라, 게이트로 가겠다.」
그러자 하용준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와 엇갈리듯이 이한이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벽 앞에 비스듬히 서서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지만 이것이 그의 성품이다. 김상철이 이한에게로 몸을 돌렸다.
「정보원을 모두 풀어서 북한 쪽 놈들이 지금 몇 놈 남아 있는가 알아봐라, 어서!」
이한이 소리 없이 방을 나가자 김상철이 어금니를 물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 수심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게이트의 사무실에는 경비소의 조사를 마친 호송대원들과 블라디미르가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밤 12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고 바람이 약해지면서 눈발이 굵어지는 중이었다.
「경비본부에서 현장으로 병력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오.」
김상철에게 다가온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놈들은 가져갈 수 없는 화물은 모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는군요. 트럭까지 함께 말입니다.」
반쯤 불에 타서 넝마가 된 파카를 걸친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보급대의 호송 책임자이다.
「그놈들은 모두 방한모와 방풍 안경을 끼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러시아인들이었소. 훈련이 잘되어 있는 놈들이었습니다.」
밖에서 부상자들을 나르는 앰뷸런스의 사이렌이 울려오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숙사 내에 세워진 병원으로 이송되는 것이다. 트럭 두 대에 실린 여자들을 우선 타운으로 보내고 난 김상철은 설상 트럭 두 대에 탄 부하들과 함께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운전사를 포함한 호송 대원 다섯 명이 사살되고 네 명이 부상 당한 데다가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여자들도 다섯 명이 병원으로 실려 간 것이다. 보급물자는 거의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그들은 눈보라를 헤치며 밤길을 두 시간쯤 달려 아직도 불탄 트럭의 잔해에서 연기가 오르는 현장에 도착했다. 근대의 마크를 차체에 커다랗게 붙인 경비본부의 트럭 세 대가 길가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근대의 경비요원들이 다가왔다. 미리 간다고 무전 연락을 해놓았으므로 선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볼 것 없수다, 깡그리 태우고 부쉈으니까. 이제까지 우리도 술병 서너 개 찾아낸 것이 고작이오.」
한국말이다. 그는 마스크를 아래로 내리며 김상철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화물 주인 되시오?」
「내가 화물 주인이오.」
옆에 서 있던 송길수가 한 걸음 나서자 그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발이 이렇게 심해서 놈들을 쫓기는 틀렸소, 늦기도 했지만.」
그것을 기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잠자코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놈들이 대전차포까지 사용한 걸 보면 아무래도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오.」
「그럼 그레고리 일당이란 말이요?」
김상철이 묻자 그는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 모릅니다. 날이 밝으면 헬기를 동원해 살펴볼 작정이지만 눈보라가 그쳐줘야 할 텐데.」
「북한 벌목사업소로 가는 길을 조사해주시오, 조장님.」
「날 아시오?」
경비대원이 다시 한 걸음 다가서더니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풍 안경에 방한 마스크를 쓴 차림이어서 얼굴이 모두 가려져 있다.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어깨에 계급장이 붙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 당신은 대뜸 북한 벌목사업소를 짚는데 그곳은 여기에서 500킬로도 넘게 떨어져 있소.」
「이런 눈보라 속이라면 내일 아침까지 200킬로도 나가지 못할 것이오. 만일 북한 벌목사업소 놈들 짓이라면 놈들은 눈 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남쪽은 평원지대라 마땅한 은신처도 없다. 조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본부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말해주더군.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요?」
「양흥만입니다.」
「아, 당신 이야기를 들었소.」
조장이 드러내놓은 입으로만 웃었다. 이제 양흥만은 마피아 보스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 시간에 코즈모프 클럽의 뒤뜰에 있는 사무실 건물 안에 하석태와 최태호 등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방 안은 페치카의 열기로 훈훈했지만 하석태를 제외한 다른 사내들은 모두 두툼한 슈바 차림이었고 옷에서는 눈이 녹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상좌에 앉은 하석태가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마피아 놈들이 제일 먼저 우리를 의심할 것은 뻔한 사실이야. 아마 우리 가게에 정보원들이 깔려 있을 거야.」
「당연하지요. 하지만 증거가 있습니까?」
최태호가 가는 눈매를 더욱 가늘게 뜨며 웃었다.
「오늘 밤 타운 밖으로 나간 우리 쪽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석태가 옆에 앉은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데 가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만 눈보라가 치면 저쪽도 마찬가지가 될 테니까요. 내일 아침이면 아마 2, 3백 킬로는 떨어져 있게 될 겁니다.」
사내가 무성하게 자란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경비본부의 헬기가 뜰 수 없게 되어서요.」
「저놈들이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증거는 없지만 우리 짓이라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을 테니.」
주위를 둘러 본 하석태가 말을 이었다.
「10여 명이 죽거나 다친 데다 영업할 물자를 몽땅 잃었으니 이를 갈고 있을 거라구. 준비를 단단히 해두도록.」
「며칠 후면 마피아 쪽 영업장은 대부분 문을 닫고 여자 장사만 겨우 하게 될 겁니다. 다음 물자는 아무리 빨리 도착한다고 해도 열흘 후가 될 테니까요.」
최태호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까지 이런 기회를 얼마나 기다려 온 줄 압니까? 그동안 숨이 막혀서 쓰러질 뻔했단 말입니다.」
유장석이 보급단이 습격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다. 이제 부단장에 상무로 승진이 된 이대각이 나름대로 조처를 하고 나서 출근한 유장석에게 보고를 했던 것이다. 유장석은 근대리아라고 명명된 임차지의 개척단장에 관리단장을 겸한 사장급 임원으로 승진해 있었는데 이제는 몸가짐에도 위엄이 있다.
「이상무 생각에는 북한 측이 마피아 측의 영업을 방해할 의도에서 습격한 것이란 말이지?」
그가 묻자 앞에 서 있던 이대각이 큰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단장님. 북한 측 영업장이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자금력 때문에 시설이나 서비스 면에 있어서 밀리는 판이었지요. 그래서 기어코‥‥‥」
「유혈 충돌이란 말인가?」
「충돌은 아닙니다. 강도로 가장한 한쪽의 일방적인 습격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가장을 했다 하더라도 북한 놈들 짓이라는 것은 마피아 쪽도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래서 말씀대로 곧 유혈 충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장님.」
그러자 단장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경비본부장인 박종용 상무와 이상훈 부장이 들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장석이 옆쪽의 소파로 옮겨가 앉자 그들도 주위에 둘러앉았다. 짧은 머리에 다부진 인상의 박종용은 육군 소장 출신이었고 이상훈은 안기부에서 파견된 사내였다. 박종용이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눈보라 때문에 헬기를 출동시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장님. 본부 중심으로 사방 5백 킬로가 모두 눈보라에 묻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놈들의 흔적은 깨끗이 감춰지겠군.」
「이런 눈보라 속이라면 이동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벌써 열두 시간이 지난 상태라서요.」
그러자 이상훈이 헛기침을 했다.
「제가 어젯밤 현장에 갔을 때 마피아 쪽 책임자들이 왔더군요. 송길수와 양흥만을 모두 보았습니다.」
주위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북한 측의 습격이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래쪽 벌목사업소에서 보냈을 것이라고.」
「‥‥‥‥」
「당분간 근로자들의 외출을 제한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단장님.」
「당신도 곧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군.」
유장석의 말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북한 측의 도발적인 행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는데 어젯밤 습격이 일어난 거였다고 합니다. 마피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타운이 혼란상태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무고한 이주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고 그것이 알려지면 근대리아의 이주민 정책에 차질이 올 것이야.」
「지금까지 두 세력이 견제도 받지 않고 너무 비대해져 왔습니다. 이 기회에 어느 한쪽의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단장님.」
유장석이 박종용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박상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부장의 의견과 같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북한 측이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걸리지만 이 기회에 타운의 질서를 경비본부에서 장악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무, 당신 생각은 어때?」
유장석이 불쑥 묻자 이대각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말씀입니까?」
「아, 이제까지 이야기 안 들었어?」
「저는 타운에 있는 중립업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친위세력, 아니, 괴뢰업소라면 좋겠는데 하고 말입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유장석이 입맛을 다셨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편리할 것 아닙니까? 이런 경우라면 아예 마피아와 북한 양쪽이 서로 치고받다가 전멸당하도록 버려둬도 되지요.」
「아직 한국에서 이주민을 받을 계획은 없어, 엉뚱한 소리는 그만해.」
「타운에 있는 크라우프 바, 안나네 집이라는 색시집, 그리고 조지 클럽 등 대여섯 군데의 일급업소는 중립입니다.」
말을 멈춘 이대각이 이상훈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부장도 알고 있지? 그곳은 마피아도 북한 놈들도 건드리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말이야.」
이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고 있습니다, 부단장님.」
「그 업소들의 주인이 누군지도 알겠구만? 그렇지?」
힐끗 유장석에게로 시선을 준 이상훈이 입을 열었다.
「모두 조선족 이주민들이지만 타운에서는 근대에서 돈을 대 만든 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눈을 치켜뜬 유장석이 이대각을 쏘아보았다.
「타운에 근대에서 투자한 업소가 있어? 빙빙 말을 돌려대지 말고 냉큼 말해.」
그러자 시치미를 뗀 얼굴로 이대각이 이상훈을 바라보았다.
「이부장이 말해.」
이상훈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경비소에서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난 것 같습니다, 단장님.」
「경비소가 말인가?」
「예, 업소의 주인들은 한사코 자신이 투자한 가게라고 하지만 종업원들조차 믿지를 않습니다.」
「그림 투자한 놈이 누구야? 경비소장인가?」
유장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놈을 당장에 잘라!」
「경비소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
그렇게 말한 것은 박종용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부터 부단장님과 그 일을 상의했습니다만 경비소장급에서 만든 일이 아닙니다, 단장님.」
「그렇다면 그 윗선에서‥‥」
「예, 타운의 건물들을 보셔서 알겠지만 자재 유출에서부터 업소 설립, 세금 문제 등 뿌리 깊은 부정은 훨씬 윗선에서 조직적으로 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서툴게 움직인다면 놈들의 뿌리는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유장석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벌써부터 조직적인 부정이니, 이 자식들이 시베리아에 와서도‥‥」
「더 해 먹기 좋은 조건이지요, 단장님.」
이대각이 말하자 유장석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이제야 말하는 거냐.」
「본부장과 이부장, 저‥‥ 이렇게 셋이서 비밀리에 조사해 왔습니다. 대책도 없이 말씀드렸다가는 단장님은 틀림없이 목부터 자르신다고 하실 것 같아서요, 지금처럼.」
「‥‥‥‥」
「비밀리에 더 조사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단장님께 상황 보고만 드리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지요. 마피아와 북한의 전쟁에 대해서.」
유장석이 이대각을 다시 노려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상훈이 서쪽 거리의 끝에 있는 조그만 가게에 들어섰을 때는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사내의 안내를 받아 가게 뒷문으로 나왔다. 사내는 잠자코 뒤쪽 공터에 세워진 시멘트 건물로 앞장서 가더니 문에 노크를 하고는 육중한 철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오,」
철문 안으로 들어선 이상훈은 어둑한 방 안에 앉아 있는 두 사내를 보았다. 들어서는 그를 향해 그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송길수는 몇 번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내가 어젯밤에 본 양흥만일 것이다. 방한 마스크와 안경을 벗은 그의 얼굴은 온통 짙은 수염에 덮여 있었다.
「어젯밤에 만났었지요, 우리는.」
이상훈이 우선 양흥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제는 경황 중이라 제대로 인사를 못 했습니다. 난 경비본부의 이상훈 부장입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표정 없는 얼굴로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송길수와도 악수를 나눈 이상훈은 자리에 앉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토치카다.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꺼운 시멘트벽과 어깨높이로 뚫린 작고 견고한 창문, 그리고 앞뒤의 철문에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옆쪽에 보였다. 송길수가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들더니 이상훈에게 한잔을 따라 내밀었다.
「갑자기 이부장께서 우릴 만나자고 하신 건 어제 일 때문인가요?」
「그것과 상관이 있지요.」
이상훈이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내가 여기 온 것은 타운의 경비소장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제 사건으로 이쪽과 북한 쪽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타운 주민들 대부분이 분위기를 느끼고 있겠지요.」
그들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이상훈이 말을 이었다.
「우리 정보원들의 정보를 모아본 결과 북한은 이미 100명 가까운 전투 요원을 모아놓았어요. 모두 중무기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자들은 아마 당신들의 도발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물론 당신들도 50명이 넘는 병력이 있으니 승산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요. 하지만 타운 내에서의 전쟁은 안 됩니다.」
그러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겁니까? 경고를 하려고?」
「충고요.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우리는 마피아와 북한계 양쪽의 균형을 적당히 맞춰서 타운을 관리해 왔습니다.」
이상훈이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들한테도 그렇지만 우리는 공공연히 북한 쪽을 견제할 수는 없어요. 그자들은 이미 근로자들 속에 프락치를 대량으로 심어놓은 데다가 러시아 본토에서 방해 공작을 하면 근로자 모집이나 이주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옵니다.」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사정은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우리 보급대를 공격해서 물자를 모두 못 쓰게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제재를 해야 합니다.」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타운이 전쟁터로 소문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미 전쟁터가 되어 있어요, 이곳은.」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는 북한 비서국 조직지도부 요원 하석태라는 자가 정예 요원을 데리고 와 있다고 합니다. 당신들과 북한의 두 세력 중에 어느 하나가 당했다 하더라도 금방 재충전이 되겠지요, 전보다 더 강하게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습니다.」
「주도권은 근대가 잡아야 한다는 말씀 같은데.」
「그렇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이상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도 나름대로 정보원이 있습니다. 이부장께서는 안기부 요원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어깨를 편 이상훈이 날카로운 눈매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양선생께서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수저를 내려놓은 강회장이 강용식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활기가 차 있었다.
「이제 석 달 후면 원유의 파이프라인이 완성된다. 그렇게 되면 하루 5만 배럴의 원유가 민스크 항에 모이게 돼.」
「예상보다 반년이 빨라졌습니다, 아버님.」
「러시아 정부에서도 놀라고 있어, 우리의 건설 속도에.」
강회장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올해 말까지는 하루 7만 배럴의 원유가 근대정유로 공급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년부터 근대의 중화학공업은 새 전기를 맞게 되겠지.」
근대리아 이야기를 할 때의 강회장은 언제나 몇 년쯤 젊어 보였고 따라서 분위기가 밝아졌다. 근대리아는 이제 경공업 단지에 10여 개의 공장이 시험가동 기간을 거쳐 제품을 생산하는 중이었다. 한국에서 3D업종으로 기피되었던 산업들이 시베리아에서 다시 경쟁력을 키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탐사단의 김진모 상무는 근대리아의 북부지역에서 천연가스와 아연광맥을 찾아내어 지금 매장량을 측정 중이었다. 숭늉 그릇을 든 강회장이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을 둘러보았다.
「난 내년 초부터 근대리아에 상주하겠다.」
갑자기 조용해진 가족들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본래 재원이 애비가 맡기로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곳 일이 내 적성에 맞고.」
강용식은 잠자코 있었는데 아마도 그와는 이야기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한국은 재원이 애비와 재원이한테 맡긴다. 물론 난 그곳에서 한국 일도 도울 것이다.」
「할아버지, 여러 가지 불편하실 텐데요.」
강재원이 말하자 강회장이 눈을 치켜떴다.
「이놈아,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이다. 그리고 유 사장이 벌써 내가 묵을 곳을 짓고 있단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강회장이 식당을 나가다가 문득 머리를 돌려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참, 미현이, 너 점심때 동양 호텔로 오너라. 나하고 점심이나 먹자.」
「네, 할아버지.」
강회장이 방을 나가자 강용식이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동양 호텔은 근대 소유의 호텔로 장충동 입구에 세워진 객실 1천 실 규모의 특급호텔이다.
강미현이 12시 30분 정각에 호텔 25층에 있는 양식당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이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강미현을 안내해 간 곳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밀실이다. 그곳에서 강회장이 중요한 손님과 식사를 하곤 한다는 것을 강미현도 알고 있었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강미현은 안으로 들어섰다. 20평쯤 되어 보이는 방 안에 장방형의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는데 강회장은 한 사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응, 어서 오너라.」
강회장이 그렇게 말하자 앉아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쑥한 차림새에 단정한 용모의 젊은이여서 강미현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사내는 예의 바르게 강미현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앉았다.
「그렇지, 참. 초면이겠구만.」
표정 없는 얼굴로 강회장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은 내 손녀다. 그리고 이쪽은 대동그룹 한회장의 차남이고. 인사들 해.」
「한민수입니다.」
사내가 앉은 채로 머리를 숙여보였다. 이름을 밝히고 난 강미현은 이제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직접 자신의 손주사위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다. 근신령을 내린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옛날 일을 끄집어내지 않았고 평시와 똑같이 그녀를 대했지만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식사가 날라져 왔고 식사하는 동안 강회장은 그들을 향해 이것저것을 번갈아서 물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단 한 마디도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것은 대충 알게 되었다. 한민수는 뛰어난 남자였다. 재계 순위 20위권 안에 드는 그룹의 차남인데도 그는 그룹의 후계자가 될 꿈을 버리고 법학 공부를 했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에 판사 생활을 잠깐 하다가 영국 유학을 가서 국제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온 것이다. 좀체로 이런 일을 할 것 같지 않던 강회장이 직접 나설 만한 가치가 있는 사내임에는 틀림없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던 강회장이 냅킨을 탁자 위로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갈 테니, 너희들은 여기 있거라.」
그가 따라 일어선 그들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따라 나을 것 없다.」
강회장이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간 후에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그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는 방이었지만 바깥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소리에 누군가가 경적을 신경질적으로 두어 번 누르는 소리도 들렸다.
이윽고 한민수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저도 놀랐습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저를 찾으셨을 때.」
「‥‥‥‥」
「저를 꽤 눈여겨보셨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영광이지요. 어쩌면 제가 고시에 패스하고 학위를 딴 것보다 더 자랑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 이를 드러내며 맑게 웃었다.
「그래서 말씀인데 지금 미스 강께서 절 거부하신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일이 아니죠. 전 이미 명예를 얻어 놓았으니까요.」
강미현이 시선을 들어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데다가 자신만만함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하긴 어설픈 겸손이나 재능, 그리고 허세로 할아버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거부감을 느끼시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가 찾으셨을 때.」
「천만에요. 내용을 알고는 기뻤습니다. 강미현 씨에 대해서는 들어왔던 터여서.」
「제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도 들으셨어요?」
「저도 여자가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같이 지내던 유학생이었는데 헤어졌지요.」
「‥‥‥」
「한때는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고시도 보았고 판사 생활도 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아버지나 다른 사람에게 무슨 훈장처럼 보여지는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마 치기였던 모양입니다.」
「‥‥‥」
「남녀 간의 결합은 비슷한 수준의 남녀일 때 훨씬 더 잘 이해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만나고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어느 정도는 사생활을 희생해야 되지요, 가족을 위해서는.」
한민수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내려놓았다. 정색을 한 얼굴이었다.
「강미현 씨가 할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것처럼 저도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남녀처럼 신선하고 감동을 받는 어떤 것을 기대했다면 잘못이지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얼마든지 그런 것을 만들어 볼 수도 있지요. 조금 낯이 뜨거운 일이지만.」
그리고나서 그는 다시 얼굴을 펴고 웃었다.
「한번 만들어 봅시다. 언젠가 저한테서 근대그룹의 손녀인 강미현이 아니라 그냥 여자인 강미현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점심을 마친 강형문 과장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 안인석이 다가갔다. 강형문은 이제 과장 진급에 팀장이 되었고 안인석은 그의 팀원이다.
「과장님, 퍼거슨한테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이것, 아무래도 이번 달 선적에 차질이 있겠는데요.」
안인석의 말에 강형문이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없지. 다음 달로 넘기는 수밖에.」
퍼거슨은 네덜란드 바이어로 5백만 달러 가까운 신용장을 아직 개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간 2천만 달러가량의 웨이퍼를 수입해가는 고정 거래선의 하나였고 신용도도 높았으므로 강형문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턱으로 옆쪽 의자를 가리켰으므로 안인석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전대리는 아직 안 들어왔나?」
그가 묻자 안인석의 시선이 앞쪽을 훑고 지나갔다.
전규영 대리는 그의 새로운 조장이었는데 미국지사 근무를 하다가 본사로 발령받아 온 사람이다.
「손님과 점심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조금 늦을 모양입니다.」
「어제도 그 친구하고 술 마셨다며?」
「예, 양주 한 병 나눠 마시고 바로 헤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안인석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전규영은 뉴욕지사 근무를 4년째 하다가 귀국한 입사 6년 차 대리였는데 사고를 일으켜 귀국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강형문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말 안 해? 내 이야기나‥‥‥」
「과장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 때문에 골치가 아파.」
강형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안인석 씨한테는 솔직히 말하는데 그 친구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을 줄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거야.」
「‥‥‥‥」
「그 친구, 뉴욕에서 백만 달러 가까운 제품을 사기당했어. 사기꾼이 내놓은 담보를 확인도 하지 않고 받고는 제품을 넘겨주었단 말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므로 안인석은 긴장을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사기꾼은 플로리다에 수백만 달러짜리 별장에 살면서 전대리를 초대하고 때로는 별장도 빌려주었다더군. 둘은 친구가 된 것이지. 회사에서도 그것 때문에 혹시나 하고 있어.」
강형문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답답해서 하는 소리야. 파면되지 않고 본사로 온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줘야 할 텐데 매일 술타령에 업무는 신경도 쓰지 않으니 말이야.」
「전대리도 곧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은 모양이던데요.」
안인석의 말에 바짝 긴장을 한 강형문이 다가앉았다.
「어디로 말이야?」
「근대리아의 경공업 단지나 유전 현장이라도 좋답니다. 곧 인사부에 지원하겠다고.」
「분위기가 싫다고 했습니다.」
강형문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안인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돌아왔다. 이제 강형문이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짐작할 만큼 그도 회사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강형문은 먼저 부장이나 인사부에 전규영이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다. 전규영보다 먼저 선수를 쳐야 될 것이므로 아마 오늘 중으로 보고서가 올라갈지도 몰랐다.
이제 섹스는 그들에게 자연스런 행위였다. 서로 근무시간이나 상황이 엇갈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대부분은 식사나 술을 들고 나서 호텔 방으로 간다. 오늘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방에 들어와서는 두 번이나 뜨거운 섹스를 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알몸인 채 누워서 시계를 바라보던 안인석이 옆으로 머리를 돌렸다. 역시 알몸인 박미정이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좋았어?」
그가 묻자 박미정이 눈을 떴다.
「응, 그런데 너무 길었어.」
「길다니, 난 너한테 맞추려고 했는데,」
「바보 같기는, 난 두 번이나 되었어, 그러다가‥‥‥」
「세 번째로 가다가 끝낸 모양이구만,」
그러자 얼굴에 웃음을 띠운 박미정이 손을 뻗어 그의 고환 밑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끝나고 나서 왜 그런 걸 물어? 내가 좋았던 걸 뻔히 알면서.」
「예의야.」
「앞으로는 내가 먼저 말해줘? 좋았는지 나빴는지,」
「생각해보니 그건 안 되겠다. 」
어느 사이에 다시 발기해 있던 자신의 것을 눈끝으로 내려다보면서 안인석이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참, 어머니가 내일, 아니, 오늘이군. 오늘 회사 일찍 끝내고 시내에서 널 만나자고 하셨어. 그러니 오전에 전화해 봐.」
안인석이 말하자 박미정이 상반신을 들었다.
「왜? 무슨 일이신데?」
「너하고 가구 보러 가시겠대.」
「그건 우리 엄마하고 다 보았는데.」
「잠자코 따라가 봐. 해주는 건 아무 소리 말고 받으란 말이야, 이 바보야.」
박미정이 몸을 굴려 안인석 위에 올라앉고는 자신의 몸속으로 안인석의 것을 밀어 넣었다.
「아까 끝내다 만 것 해줘.」
상반신을 뒤로 젖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인석은 그녀의 젖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가기 시작했다.
박미정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다. 한동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안인석이 문득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강과장이나 전대리는 모두 나를 이용하고 있어. 그들은 나를 통해 서로 상대방의 상황을 알아내려고 한단 말이야.」
「둘 다 인석 씨를 믿고 있기 때문일 거야.」
박미정의 말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좋게 해석하면.」
「왜 이용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배워왔거든, 이용 가치 기준으로 신뢰의 등급이 매겨지더란 말이야.」
「‥‥‥」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쫓아내려던 친구가 이제는 날 심복처럼 생각하고 있어.」
「전대리는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지?」
박미정은 틈틈이 들어서 안인석의 팀 분위기를 알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과장하고 안 맞는 거야. 뉴욕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강 과장의 스타일에 자주 거부반응을 일으켜.」
「‥‥‥」
「아마 오늘 강과장이 부장하고 인사부에 연락했을걸? 같이 근무 못 하겠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
「어제 전대리하고 술을 마셨는데 대단한 사람이야. 총회장의 장손 강재원 씨와 뉴욕지사에서 같이 있으면서 심복이 되었어.」
「강재원 씨와?」
놀란 박미정이 묻자 그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털어놓았어, 나한테.」
「심복이라고?」
「그래, 그리고 갑자기 본사로 발령이 나면 이상하게들 생각할 것 같으니 사고를 일으켜 좌천당한 것으로 소문을 내었다고.」
「곧 과장급 팀장이 되었다가 강재원 씨와 같이 근무하게 될 거야.」
「그런데 강 과장이 인사부에 같이 근무 못 하겠다는 보고를 해?」
「그러니 야단났지.」
그러면서 안인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부하직원을 마음대로 하려고 한 대가를 곧 받게 될 거야.」
「전대리는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더라구. 강과장한테 찍혀서 한때 코너에 물렸었던 것도.」
「그래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거야. 근대리아 이야기도.」
「근대리아라니?」
「이야기가 길어. 다 왔으니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재미있으니까.」
택시가 박미정의 아파트 쪽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박미정이 머리를 돌려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인석 씨는 많이 변했어.」
「적응해 가는 거지. 그래야 처자식 먹여 살리고 무시당하지 않을 것 아냐.」
「참, 내.」
안인석이 손을 뻗어 박미정의 손을 쥐었다.
「사랑해, 미정아. 난 내가 너한테 믿음직한 남자로 보여지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야. 월급이나 진급은 솔직히 내 안중에 없어.」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박미정은 그의 손을 마주 쥐었다· 택시가 아파트 정문 앞에 멈춰 서고 있었다.
7. 외로운 사나이
고춘식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선 최태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갑자기 소장께서 웬일이시오? 퇴근 시간이 넘었는데.」
이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여서 쓸데없는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겸손한 것도 아니다 고춘식은 무겁게 늘어진 권총집을 옆으로 비껴 올리며 소파에 앉았다.
이곳은 최태호의 아지트이자 북쪽 요원들의 본부나 마찬가지인 코즈모프 바의 뒤채 건물이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고춘식으로부터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최태호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가는 눈매 속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최사장, 지금 당신, 누구 땅에 들어와 있는지 알고나 계신 거요?」
고춘식이 대뜸 그렇게 말하자 최태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마피아 쪽과 당신들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시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고춘식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당신은 날 허수아비 취급하는 모양인데 나도 명색이 경비소장이오. 당신들 때문에 내 목이 달아날 수는 없어.」
「이것 보시오, 소장님.」
고춘식이 숨을 돌리는 사이에 최태호가 입을 열었다.
「전쟁 준비라니, 그건 너무 심한 말씀 아니오. 우린 어디까지나 자위 수단으로 영업장을 지키고 있을 뿐이오.」
「자위 수단? 이거 정말 날 바보 취급하는구만.」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최태호의 부하 한 명이 서둘러 들어섰다. 최태호에게 다가선 그는 무언가를 귀엣말로 말하고는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맛살을 찌푸린 최태호가 고춘식을 바라보았다.
「타운에 경비요원들이 몽땅 깔렸다는데, 무얼 하실 작정이요?」
「타운 밖도 통제시키고 있으니 오늘은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을 거요. 일제 단속을 하는 겁니다.」
타운 밖까지 막고 단속을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최태호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오늘 밤 마피아가 당신들의 영업장을 일제히 습격한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어요.」
고춘식이 자르듯 말했다.
「하선생은 어디 계시오?」
「하선생은 왜 찾는 거요?」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하선생과 그 부하들은 모두 경비소로 와 주셔야겠소.」
「경비소는 왜 갑니까?」
「안전지대이기 때문이지. 아니, 중립지대라고 해야 되겠군.」
시계를 내려다본 고춘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피아와 북한 쪽을 함께 모아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피아는 경비본부의 유치장에, 북한 측은 타운의 경비소에 격리시켜 수용하기로 한 겁니다.」
「하선생이 부하들과 함께 제발로 경비소로 찾아와 보호를 요청한다면 내일 아침에는 돌려보내 드리겠소.」
「‥‥‥‥」
「물론 지금 부소장 변홍근이 마피아의 양흥만과 송길수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부하들과 함께 경비본부에 출두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어요.」
「그럼 그자들도 내일 아침에 돌려보내 주시겠군.」
「아마 그렇게 될 거요. 그 대신 오늘 밤의 습격은 무산되겠지.」
문 앞으로 다가간 고춘식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돌려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만일 반항하거나 검거에서 잡힐 경우에는 사살되거나 최소한 추방이요. 서둘러 주시오, 최사장.」
「양흥만과 그 부하 20여 명이 서쪽 길 끝에서 경비본부의 호송차에 탔습니다. 제가 방금 보고 왔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부하가 서두르며 말한 것은 고춘식이 나간 지 20분쯤 되었을 때였다. 그때는 하석태도 와 있었으므로 방 안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모아졌다. 오늘 밤은 경비본부에서 유전과 근대시의 경비병력까지 동원한 2백 명이 넘는 병력으로 타운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하석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발악을 하는군, 고춘식이가.」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초조한 듯 최태호가 물으며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벌써 9시가 되어 있었다.
「양흥만이가 갔다면 나도 나가야 되겠군, 경비소에 가서 하룻밤 쉬고 오겠어.」
하석태가 주위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그가 평양에서 데려온 간부급 부하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안 간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일단 우리도 경비소에 들어가 근대의 체면을 살려주기로 하자.」
「만일 그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부하 한 명이 묻자 하석태가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마피아도 그렇지만 우리한테는 더욱 그럴 수가 없다. 우리만 추방시키거나 어떻게 할 수가 없단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근로자들의 사보타주는 물론 모집도 어려워질 테니까. 근대리아의 존립이 위험해지지.」
문이 열리더니 다시 밖에서 부하 한 명이 들어섰다. 밖에는 눈이 내리는지 눈가루가 옷에 묻어 있었다.
「네 방향에서 검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끝 쪽에서 안으로 검거해 옵니다.」
하석태가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경비소에 연락을 해, 나하고 20명이 들어가겠다고.」
「알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최태호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식사 전에는 경비소를 나와야 한다고 분명히 전해. 이것으로 양쪽의 분위기가 식어진 것은 틀림없으니 당분간 소장의 목은 단단하게 굳혀진 것 같구만 그래.」
「그렇습니다. 모두 고춘식이 당황해서 만들어 놓은 일입니다.」
최태호가 방을 나가자 하석태는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잔을 들었다.
「자, 한 잔씩 들자. 체면상 경비소에 술병을 들고 갈 수는 없을 테니까.」
눈보라가 흩날리고 있었지만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장갑을 벗어 옷에 묻은 눈을 털면서 변흥근은 경비소로 들어섰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제 오십니까?」
부하 한 명이 그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면서 지나갔다. 활기찬 몸짓이었다. 경비소 안의 분위기도 활기에 차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상황은 거의 종료되어가는 중이었다. 직원들 대부분은 마피아와 북한계 폭력단의 거물급 모두가 순순히 자수해 온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소장실에 들어섰을 때 고춘식은 마악 수화기를 내려놓는 참이었다.
「이동이다.」
고춘식이 옷걸이에 걸린 방한 파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저놈들을 모두 경비본부로 데려오라는 지시다. 」
「저놈들은 오늘 밤 이곳에 있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의아한 듯 변홍근이 묻자 지퍼를 올리며 고춘식이 머리를 저었다.
「본부에서 조사할 것이 있다는 거다.」
「그럼 호송원을 준비하지요.」
「필요 없어. 곧 본부에서 호송차와 호송원이 온다. 너하고 나만 따라가면 돼.」
「알겠습니다.」
그들은 방을 나와 옆쪽의 유치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자 유치장 안에 모여앉아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질서 있게 늘어앉아 있는 사내들의 맨 뒤쪽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사내가 하석태이다. 유치장 경비원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한 고춘식과 변홍근은 안으로 들어가 그의 앞에 나란히 앉았다.
「하선생, 곧 우리와 함께 본부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과 같이 말이오.」
고춘식이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본부에서 조사할 것이 있답니다. 조금 전에 본부로 데려간 사람들이 항의를 한다는 겁니다, 불공평하다고.」
「아마 뒤쪽 이유 때문이겠군요.」
하석태가 부드럽게 말했다.
「여러 가지 신경 쓰실 일이 많아 골치가 아프시겠소, 소장님도.」
「물론 내일 아침 아홉 시에는 타운으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그건 본부에서도 확인을 받았습니다.」
「당연하지요. 우리 모두가 이주증이 있고 현행범도 아닌데 문제가 될 일은 안 하는 게 낫지요.」
벽에 등을 기댄 하석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아마 사건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이야기나 근대의 규칙을 지키겠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하겠지. 그건 저쪽 마피아 놈들에게도 꼭 받아내야 될 겁니다, 소장님.」
눈발을 피해 방한 파카의 후드를 올려 쓴 최태호는 경비소 앞을 떠나는 한 대의 호송 트럭과 세 대의 지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소장이 책임진다고 했으니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자.」
옆에 선 부하에게 말한 그는 발을 떼었다. 밤 1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근대에서 타운으로의 외출을 금지시킨 때문에 거리는 한산했다. 가끔씩 옆을 지나는 행인들은 러시아인이거나 가게의 종업원들뿐이었다.
「이렇게 되었다가는 타운이 며칠 안 가 망해 버리겠군.」
옆을 따르던 부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많이 풀려나올 때는 하룻밤에 2만 명에 가까운 근대 근로자가 거리와 가게를 가득 메우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 빈 거리와 가게를 둘러보던 최태호는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마피아와 타운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지만 결국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근대인 것이다. 근대가 펴놓은 무대 위에서 뛰노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눈길을 10킬로쯤 전진해 나갔을 때 고춘식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초저녁부터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제는 거의 끝나가는 것이다.
「이봐, 자넨 타운에 자주 놀러 와 보았나?」
그는 옆자리의 경비대원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예, 몇 번 갔습니다.」
30대 초반의 사내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어깨의 계급장에 흰 줄이 세 개 있으니 대리급 사원이다.
「주로 어디서 놀았나?」
「예, 크라우프 바와 안나네 집이었지요.」
「그래, 그곳 분위기가 제일 낫지.」
고춘식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지프가 속력을 줄이더니 벌판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무슨 일이야?」
뒷자리에 앉았으므로 머리를 내민 고춘식이 앞쪽을 내다보았을 때였다.
「잠자코 있어.」
그렇게 말한 것은 옆자리의 사내였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고춘식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잠자코 있으란 말이다.」
사내는 눈 한번 깜박이지도 그렇다고 말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고춘식이 다시 입을 벌리려는 순간이다. 사내의 주먹이 날아와 고춘식의 턱을 쳤다.
「아이고.」
머리를 앞쪽 의자에 부딪히며 비명을 지른 그의 목덜미에 다시 주먹이 내려쳐졌다.
차가 멈추었을 때 두 번째 지프에 타고 있던 하석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경비본부와 타운의 중간 지점으로 주위에는 은폐물도 없는 벌판의 한복판이다. 앞자리에 타고 있던 사내가 밖으로 나가더니 뒤쪽에 있는 트럭으로 다가갔다. 하석태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쫓자 옆자리의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잘 봐두시오, 하선생.」
이제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던 사내였으므로 하석태는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어깨에 계급장이 없는 30대의 사내였다. 사내가 턱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잘 봐두시라니까.」
그러자 지프가 조금 움직이더니 앞쪽으로 30미터쯤 천천히 굴러가다가 멈춰 섰다. 뒤쪽의 트럭과는 50미터쯤의 거리가 된 것이다. 곧 하석태는 이쪽으로 뛰어오는 서너 명의 사내들을 보았다. 트럭의 전조등 불빛을 받으며 그들은 전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하석태는 문득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렸다. 사태를 눈치챈 것이다. 그 순간이다. 번쩍이는 불과 함께 트럭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폭발했다. 요란한 폭음이 울리면서 불덩이가 된 잔해들이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뛰어오던 사내들은 일제히 눈 위에 엎드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
번쩍 상반신을 일으키던 하석태는 옆구리를 강타한 주먹을 맞고 털썩 주저앉았다. 입을 쩍 벌리고 몸을 비트는 하석태의 목덜미를 사내가 움켜쥐었다.
「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내가 하석태의 얼굴을 뒤쪽 유리창에 밀었을 때 다시 폭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그 뒤쪽에 있던 지프였다.
「저 지프에는 타운 경비소의 부소장이 타고 있지. 그놈은 너희들의 공격을 받아 죽은 거야.」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우리 경비원도 다섯 명쯤 죽는다. 저기 앞차에 타고 있는 경비소장까지 포함하면 일곱 명의 경비원이 죽은 것으로 보고될 것이다.」
「네놈들이 우릴 없애려는 계획이었군.」
하석태가 이를 갈았다.
「두고 봐라, 우리 공화국이 네놈들 씨를 말릴 것이다.」
그러자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희들은 소장과 부소장 등 일곱 명의 경비대원을 죽이고 탈주하다가 폭사하고 사살된 것이다.」
그러면서 사내는 갑자기 하석태의 팔을 잡아 뒤로 꺾었다.
「문을 열어라.」
앞에 탄 사내가 서둘러 차에서 내리더니 하석태 쪽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밖으로 나와 섰다.
「자, 뛰어라.」
사내가 잡았던 하석태의 팔을 와락 앞으로 밀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두어 발짝 비틀거리며 밀려갔던 하석태가 발을 멈추고는 몸을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그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지만 어깨를 펴고 틱을 든 자세였다.
「쏴, 이 간나새끼야, 날 어떻게 보고 뛰라는 거야!」
그가 소리치자 어느 사이에 사내가 쥐고 있던 권총에서 총성이 울렸다. 고춘식은 하석태가 사살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눈 위에 서 있는 사내들이 이쪽저쪽에서 플래시를 비치고 있는 데다가 불타는 트럭과 지프가 주위를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네 차례다. 고춘식.」
옆의 사내가 고춘식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부소장은 먼저 보냈어, 귀찮아서.」
「당신들은 누구요?」
온몸을 떨고 있었으므로 그의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를‥‥」
「넌 쓰레기야. 그런데 그 쓰레기를 값지게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지.」
앞쪽에 앉은 사내들은 이미 밖으로 나가 있었으므로 차 안에 그들 둘뿐이다.
「하지만 기회를 줄 수도 있어. 네 배후 조종자가 누구고 그 라인을 모두 실토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사내가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서둘러야 돼, 여기 앞에 앉은 내 부하들이 돌아올 때까지 신통한 이야기가 없으면 넌 시체로 이곳에 던져질 거다.」
「당신들이 누군지 말하면 말하지요.」
그러자 사내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안기부 요원이야, 한국의. 그럼 됐나.」
「놀란 얼굴을 보니 꽤 기분이 좋군. 네놈 윗선과 라인만 말하면 살려줄 테니 이젠 부담 없이 말해라. 널 그대로 소장 자리에 앉혀서 돈 벌게 해주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다음날 오후 1시경이 되어서야 김상철은 부하들과 함께 타운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곧장 나파스 클럽의 사무실로 들어가 앉자 송길수 등이 주위에 모여 앉았다.
「소장과 부소장을 포함해서 일곱 명의 경비대원이 죽었습니다.」
송길수가 서두르듯 입을 열었다.
「저쪽은 하석태와 18명의 부하가 몰살당했습니다. 경비대원들을 죽이고 도망치려다 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주위의 부하들을 하나씩 둘러보았으므로 방 안은 조용해졌다.
「타운에서 고춘식이 관리했던 업소가 모두 몇 개인지 아나?」
누구를 향해서 물은 것도 아니어서 사내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빨빨거리고 잘 돌아다니는 하용준이다.
「모두 다섯 개 정도인 것 같은데요. 크라우프 바, 안나네 집, 마샤 클럽, 조지 클럽, 거기에다 북쪽 길 끝에 새로 생긴 서울 하우스도 경비소에서 봐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맞다. 하지만 일곱 개가 더 있다.」
그러자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파벨이 붙여준 러시아인 블라디미르도 한국어를 조금 아는지라 입을 쩍 벌렸다.
「아니, 그렇다면 열두 개 업소란 말입니까? 그렇게 많이 …」
송길수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그놈, 억울해서 곱게 죽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곳을 인수하기로 했다.」
김상철의 말에 사내들이 다시 놀란 얼굴들이 되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누군가 재촉하듯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인수금은 없어. 우리가 관리를 하고 이익금은 반씩 나누기로 했다. 이제부터 이익금의 반은 근대의 경리부로 보내지는 거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쪽지를 꺼내 들었다.
「오늘부터 당장이야. 그러니 이 업소들을 너희들이 한두 개씩 맡아야 할 것 같다. 잘 들어.」
그 시간에 최태호는 근대의 겅비 본부에 불려와 이상훈과 마주 앉아 있었다. 최태호는 이상훈이 초면인데다가 경비본부의 분위기에 조금 위축된 표정이었다. 더구나 하석태와 그 부하들이 몰살당한데다가 이쪽도 경비소장과 부소장을 포함해 일곱 명을 살해한 것이다. 이래저래 그의 심기는 불편해져 있었다. 이윽고 이상훈이 탁자 위에 펼쳐진 수십 장의 사진들을 걷어 모았다. 그것은 모두 어젯밤 사건 현장의 컬러 사진으로 마피아의 사상자와 파괴된 차량들, 그리고 무기들까지 세밀하게 찍어놓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가 당신들 모두를 근대리아에서 추방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근대의 경비소장과 부소장 등을 살해한 것은 근대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볼 수가 있으니까.」
이상훈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북한계로부터 조선족 모집에 협조를 받고 있지만 이런 만행을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어요. 본부 단장께서 이미 서울로 보고를 하셨으니 곧 조처가 내려올 겁니다.」
「하지만 우리도 20명이 죽었습니다. 더욱이 하석태 씨는 중요 인물로.」
「이것 보시오‥‥‥」
최태호의 말을 이상훈이 잘랐다. 그는 이제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싸움을 말리려고 데려가는 경비대원을 살해하다니, 그러고도 사상자가 났다고 투정을 부리는 거요? 당신들 억지가 한국에서처럼 이곳에서 통할 것 같소?」
「얼마 전, 게이트 남방에서 보급 트럭을 폭파하고 인명을 살상한 것도 당신들이라는 정보가 있소. 당신들은 이곳을 적화 사업장으로 삼을 작정이요?」
「그건 우리하고 무관한 일이오. 억지소립니다.」
얼굴을 붉힌 최태호가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증거로 그러는지 증거를 대시오.」
그러자 이상훈이 찌푸린 얼굴로 혀를 찼다.
「어쨌든 위에서 정책적인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물론 당신도 평양에 보고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충고를 하겠는데 ‥‥」
이상훈이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하석태 씨는 경솔했소. 갑자기 경비소장의 권총을 빼앗아 그를 쏘아죽이고 뛰쳐나가 트럭의 운전사를 쏘았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오. 그 사람의 행동으로 이제까지 무난했던 관계가 하룻밤 사이에 급변한 거요.」
「당신들은 당분간 자중해야 됩니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충고니 새겨들으시오,」
머리를 든 유장석이 옆쪽의 소파를 눈으로 가리켰다.
「거기 앉게, 곧 부단장도 온다고 했으니까.」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 시간이었다. 유장석의 뒤쪽 유리창 밖으로 광활한 평원이 바라보였고 지평선 위의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맑았다.
한동안 넓은 단장실 안에서는 유장석이 서류를 넘기는 종이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므로 이상훈은 숨을 죽였다. 단장이 자신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자신은 근대 식구가 아닌 것이다. 그 순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대각이 들어섰다. 큰 머리를 흔들면서 활기찬 걸음으로 들어선 그는 이상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상훈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그가 묻자 자리에서 일어난 유장석이 그들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부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해서, 엊그제 사건 문제로,」
유장석이 이상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말해 봐.」
「고춘식의 진술을 우선 들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들고 온 가방에서 소형녹음기를 꺼낸 이상훈이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곧 서두르며, 가끔씩 더듬거렸다가 목이 메기도 하는 듯한 고춘식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나왔다. 낯선 사내가 다그치듯 묻는 말에 고춘식은 고분고분 대답하는 편이었다. 녹음테이프가 돌아가는 20여 분 동안 방 안의 사내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테이프가 꺼진 후에도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대각이다.
「소름이 끼치는군. 아니, 이가 갈린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이상훈을 바라보았다.
「잘했어, 정말 수고했다구,」
그러자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이 진술을 받고 나서 고춘식을 죽였나? 변흥근이도 같이 말이야.」
이상훈을 노려본 채 그가 말을 이었다.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은 좋지만 난 죽이라는 지시는 하지 않았어. 그래, 고춘식과 변홍근을 제외한 다섯 명의 경비대원은 어떻게 된 거야?」
「가공의 인물입니다. 사진만 그렇게 찍었을 뿐입니다, 단장님.」
「그렇다면 병원 영안실에 있는 관 다섯 개는 비어 있겠군.」
「적당한 무게의 나무를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누구야? 안기부 요원인 당신과 부하들을 빼놓고‥‥ 경비본부장도 알고 있겠고.」
「본부장님도 모르고 계십니다, 단장님. 근대직원으로는 단장님과 부단장님 두 분만 알고 계신 겁니다.」
찌푸린 얼굴로 이상훈이 입을 다물자 이대각이 헛기침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놈들은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단장님.」
「시끄러!」
유장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단장쯤 되었으면 경망스럽게 굴지 좀 마라.」
「경망스럽다니요.」
이상훈의 앞이기도 했으므로 이대각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아니, 이런 방법이 아니었으면 어디, 북한 놈들 제력을 약화시킬 묘안이라도 있었습니까? 더구나 이 암세포 같은 놈들의 진상을 밝혀낼 수가 있었겠느냔 말입니다.」
한바탕 퍼붓고 난 이대각은 유장석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시선을 내렸다. 이상훈이 입을 열었다.
「사전에 말씀드리면 허락해 주실 것 같지 않아서 제가 독단으로 결정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단장님.」
「앞으로는 우리한테 승인을 받고 행동하시오, 이부장.」
「알겠습니다, 단장님.」
이상훈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냈다.
「그래서 지금 타운에 있는 열두 개 업소가 허공에 뜬 상태가 되었습니다. 관리인 노릇을 하던 고춘식과 변흥근이 죽었으니까요.」
「그렇군, 배후 놈들은 나설 입장도 아닐 것이고.」
이대각이 말을 받자 이상훈이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열두 개 업소의 관리를 양흥만에게 맡겼습니다, 단장님. 이것도 제 독단이었습니다만 하루라도 공석으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양흥만이라면, 그 마피아의 보스 말인가?」
「그렇습니다, 단장님.」
「그자한테 왜?」
「그 사람이 김상철입니다, 단장님. 기억하십니까?」
「김상철?」
버럭 소리치며 나선 것은 또 이대각이다. 그의 얼굴은 이제 하얗게 되어 있었다.
「김상철이가 양흥만? 아니, 양흥만이가‥‥ 마피아가 김상철?」
이상훈의 말에 일어나 왔다 갔다 하던 유장석도 이상훈에게 바짝 다가앉았을 때는 얼굴을 굳혔다. 유장석이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 해, 이 부장.」
「그는 양흥만이라는 가명을 쓰고 타운에 들어왔던 것이지요, 물론 그는 마피아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간부입니다.」
「‥‥‥」
「저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부에 보고를 했더니 그를 지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김상철을 지원하라고 말이야?」
이대각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비공식입니다. 그는 파벨의 심복이기도 한데다가 근대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한 사람이니까요. 여러모로 우리에게도 필요한 사람이지요.」
수화기를 귀에 댄 조성욱 상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숙소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데 아직 출근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예, 이사님. 하지만 창고에 가셨을지도 모르니까 곧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한동안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관리 담당 중역인 그는 창고의 관리에서부터 인력관리까지 맡아왔고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번에 상무로 승진까지 되었던 것이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떨어지면서 저쪽에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숙사 관리부의 양부장이다.
「나야, 거기 별 일 없지?」
「예, 저야 그렇습니다만‥‥‥」
그의 목소리가 허둥거리는 듯 들떠 있었으므로 조성욱은 한 호흡을 쉬었다.
「그래, 어제 다녀왔어?」
「예, 상무님.」
「그래서?」
「여느 때보다도 손님이 많았습니다. 전날에 외출 금지로 못 나왔던 바람에.」
「‥‥‥」
「별다른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알았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자리에서 마악 일어서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렸다. 들어서는 사람은 이대각과 이상훈이다.
「아니, 부단장께서 웬일이시오?」
조성욱이 사람 좋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들을 소파로 안내한 그는 앞에 앉은 이대각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또 가스 현장으로 인력을 증원시켜야 한다는 겁니까?」
조성욱이 입사 선배이긴 했지만 이대각은 부단장이다. 조성욱의 말에 이대각이 빙그레 웃었다.
「가스 현장 인력은 이미 조처했습니다. 내 직권으로 유정 인력에서 2천 명을 빼내었지요.」
「창고의 박용성 부장을 어젯밤부터 찾고 계시는데, 그는 지금 여기 있는 이부장이 보호하고 있어요,」
그러자 조성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부장이 보호하고 있다니, 그럼 경비본부에서‥‥‥」
「그렇소. 이제 조사는 다 끝났으니 곧 옮겨질 거요, 북쪽으로.」
이제 얼굴을 굳힌 조성욱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하나도.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소?」
「이부장 따라가서 이야기를 해.」
그를 쏘아본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더러운 놈, 도망치려고 헬기까지 준비해 놓았더군. 이제 북쪽으로 끌려가서 마음껏 놀아봐라. 시베리아 유형지라는 것이 어떤 곳인지 겪어 보란 말이다.」
저녁 8시가 되자 근대타운은 시베리아의 밤하늘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며 활기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고 수많은 가게에서 울리는 음악소리와 갖가지 소음들이 거리를 더욱 생기 있게 만들고 있었다.
서쪽 길의 중간 부근에 위치한 나파스 클럽도 예외는 아니다. 벌써부터 홀을 가득 메운 손님들은 무대 위의 댄서들을 바라보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 이제 곧 쇼가 시작되는 것이다. 클럽 안쪽의 밀실 안이다. 주방 옆에 만들어진 밀실은 출입구가 뒤쪽에 나 있는 데다가 2층으로 올라가는 비밀 계단까지 갖춘 VIP용이었다. 밀실 안에 혼자 앉아 있던 김상철은 문이 열리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장서서 들어선 것은 유장석이고 뒤를 따르는 것은 이대각이다. 김상철은 그들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갔다가 멈춰 섰다. 멈춰선 그들도 김상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대각이 입을 딱 벌렸다가 다시 닫았는데 그것은 유장석에게 말을 양보하려는 부하로서의 본능이다. 김상철을 바라보는 유장석의 표정은 마치 성난 것처럼 보였다.
「네가 여기 있었다니 ‥‥」
유장석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안을 울렸다.
「이 지독한 놈, 여기 있었으면서도 우리한테‥‥」
그리고는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와 김상철의 상반신을 안았다.
「우리는 네가 살아 있을 줄로 믿었다, 이놈아.」
「이제 그만하고 놓아주시오.」
옆에 서서 그렇게 말한 것은 이대각이다.
「나도 이 새끼 한 번 안아봅시다.」
그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가득 놓여져 있었으므로 이대각은 김상철과 방 안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김상철이가 색시집 주인이 되어 있다니.」
그들의 잔에 술을 따른 김상철이 머리를 숙여보였다.
「뵙고 싶었지만 폐가 될 것 같았습니다.」
「야, 인마. 폐는 무슨‥‥ 네가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폐를 끼쳤을 텐데.」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던 유장석이 잔을 비우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한 잔 마시기 전에 너한테 말해 둘 것이 있다.」
움직임을 멈춘 그를 향해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우선 살인 혐의에 대한 네 기소는 안기부에서 취하하기로 했다. 이제 넌 수배자도, 실종자도 아니다. 물론 안기부는 마피아의 간부급 대우를 받으며 파벨의 동업자로 이 타운을 장악하고 있는 네가 이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잠자코 자신을 바라보는 김상철을 향해 유장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네 힘으로 해낸 것이다. 결국 너는 네 혼자 힘으로 헤쳐 나왔어,」
「‥‥‥」
「그리고 오늘 오후에 이실장과 통화를 했는데, 네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회사에 복귀시키라는 지시였다. 총회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대단히 기뻐하셨다는 거다.」
그러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저는 이것이 낫습니다, 단장님. 저도 나름대로 도시를 건설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틈을 노리던 이대각이 그제야 끼어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오면서 단장님하고도 이야기했지만 네가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 둘 다 생각했었다.」
유장석이 헛기침을 했으나 그는 내처 말을 이었다.
「너는 소비도시를 건설하는 거다, 우리가 밀어줄 테니. 근대를 배경으로 말이야.」
「이번에 열두 개 업소를 인수받았지?」
길어지려는 말을 자른 유장석이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단장님.」
「아닌 게 아니라 우리도 네가 쉽게 복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복안을 가져왔는데, 타운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우리도 네 뒤를 밀어주기로 했다. 이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널 이용하는 셈이지.」
그는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넌 거저 주는 것은 받지도 않을 놈이야. 네가 힘이 있고 줄 것이 있어야 받을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다.」
「그건 나도 압니다.」
술잔을 들며 이대각이 말했다.
「혼자 다 아는 척하지 마시오, 단장님.」
점심시간이어서 투돌레프 클럽의 지배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한에게로 부하가 다가왔다.
「형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나를?」
이한이 버릇처럼 찡그린 얼굴에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누군데?」
「사장님을 찾아온 손님입니다.」
사장이라면 김상철이다. 이제 20개 가까운 영업체를 장악하고 있는 김상철은 사장으로 불리웠고 각 업소는 지배인이 관리하는 체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한은 부하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텅 비어 있는 홀의 안쪽에 앉아 있던 두 남녀가 다가오는 그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선족으로 여자는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었는데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는다.
「사장님을 찾아오셨다구요? 어디서 오셨는데?」
하용준이나 다른 부하들이 모두 지배인으로 나갔어도 이한은 자청하여 김상철의 옆에 남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장인규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여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이한이 몸을 돌렸다. 그로부터 20분쯤 후에 장인규는 나파스 클럽의 뒤채에 있는 김상철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있던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여기까지 날 찾아오다니, 어지간히 갈 곳이 없었던 모양이군.」
「이젠 술집 주인이 되셨군요, 아니 사장님인가?」
말은 빈정거리듯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풀려져 있었다. 자리에 마주 앉자 김상철이 새삼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벨한테서 온다는 연락은 받았어. 그전에 집안사정도 들었고.」
「갈 곳이 없었어요, 도망 다니기도 지쳤고.」
의자에 등을 기댄 장인규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토치카처럼 지은 걸 보니 이곳도 살벌한 것 같군요.」
「곧 이금철이 온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밤낮으로 그자의 얼굴을 보게 될 상황이지.」
「얼마 전에 조직지도부의 간부와 부하들이 몰사를 했다더니 이젠 이금철이 직접 나설 모양이네.」
짧게 자른 머리에 화장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은 야위어 있었다. 찻잔을 쥔 손가락도 가늘다. 그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둣가 가게에서 북한 측 요원 6명을 쏘아죽인 여자인 줄은 이한도 모를 것이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파벨은 그저 당신이 나한테 온다고만 말했는데. 그래, 여기까지 온 것은 무엇 때문이야?」
「성격은 여전하군요. 김상철 씨는.」
찻잔을 내려놓은 장인규가 정색을 했다.
「돈이 20만 달러쯤 있어요, 그 돈으로 이곳에서 사업을 하고 싶어요.」
「‥‥‥‥」
「이르쿠츠크의 친척 집에 어머니를 모셔다 놓고 돈을 떼어드리고 남은 돈이에요. 20만 달러면 가게 몇 채는 세울 수 있겠죠?」
「‥‥‥‥」
「파벨한테 상의하니까 당신과 말해 보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결정할 문제라고.」
「그 돈이면 일본에라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 어머니 모시고.」
그러자 장인규가 그를 쏘아보았다.
「도망치느라고 바빠서 그 생각은 못 해본 것 같군요.」
「이금철이 곧 온다니 나 때문에 그자와 일이 날 것이 걱정되나요? 그렇다면 돌아가겠어요, 구차하게 부탁은 않겠어요.」
잠자코 있는 김상철을 바라보던 장인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망하지 않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따라 일어선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익금의 반을 내야 돼.」
「그리고 내 통제를 받아야 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장인규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숙소는 우선 이 클럽의 별채를 써. 그리고나서 사업에 대해서 상의를 해보자구.」
다시 자리에 앉은 김상철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잘 왔어.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하지, 자리에 앉아서.」
5월 초순이 되자 하루걸러 비가 내렸으므로 거리는 지저분했다. 오늘은 비가 그쳤지만 하늘은 흐렸고 열려진 차창으로 몰려드는 바람도 눅눅한 습기를 품고 있었다.
강미현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똑바로 앞을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한민수와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회장님께선 근대리아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한민수가 입을 열었다.
「나도 놀랐습니다, 일 년 반 만에 그 정도로 빨리 발전될 줄은.」
「할아버지는 곧 그곳에서 사실 생각이세요.」
「저한테도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한민수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대뜸 나한테 물으셨어요. 시베리아에 가서 살 생각 없냐구요.」
「‥‥‥」
「사는 장소는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고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강미현은 소리 죽여 숨을 내리쉬었다. 아마 강회장을 크게 만족시킨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고시에 패스한 사람답게 정답만을 말하고 언행에 오차도 없다. 신호가 풀렸으므로 그의 대형 승용차는 부드럽게 굴러나갔다.
「이제 50년쯤 후면 세계는 경제권으로 구분이 되고 국경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회장님의 말씀에 나도 동감입니다.」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그때까지 살아남는 것은 기업,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것은 가문이지요.」
한민수가 손을 뻗어 강미현의 손을 쥐었다. 기어의 손잡이를 쥐는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서 강미현은 그가 기어를 잡으려다 손을 잘못 놀린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미현 씨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손을 쥔 채 그가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당신만큼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자는 없었습니다.」
강미현이 손을 들어 올려 시계를 보았으므로 그의 손이 핸들로 옮겨갔다.
오늘 저녁에 강회장은 한민수와 만난 이야기를 물어올 것이었다. 그와 만나고 난 다음이면 강회장은 꼭 오늘 어땠냐고 물어왔는데 아마 한민수 쪽에서 보고를 했거나 정보원이 따라다녔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오후 3시 정각에 도쿄발 대한항공 825편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상철이 세관을 통과해서 공항의 대합실로 나온 것은 3시 30분. 짐이라고는 손가방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곧장 출입국 신고만 하고 나온 것이다. 1년 가깝게 떠나 있다가 돌아오는 길인데다가 살인 혐의의 수배자로 한국 땅을 영영 밟지 못할 뻔했던 김상철이다. 참기 어려운 감회가 일어났으므로 어금니를 문 굳은 얼굴이 되어 그는 곧장 대합실의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 귀국이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합실을 나온 그는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고 아직도 두꺼운 모직 옷 차림이어서 그의 피부에서는 금방 땀이 배어 나왔다.
「김상철 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는 흠칫 머리를 들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몸을 돌린 그의 앞으로 강미현이 다가왔다. 밝은색 투피스 차림이어서 주위가 환해진 느낌이었다.
「귀국을 축하합니다.」
다가선 그녀가 웃음 띤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기뻐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김상철은 그녀의 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느꼈다. 이것은 촉감으로 느끼는 것이다.
「안기부 심과장님 한테서 들었어요, 오늘 오신다는 것.」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제가 공항에 나오리라는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빈 택시가 많았으므로 그들은 곧장 차에 올랐다.
「타운에서 사업을 하신다는 얘기 들었어요. 할아버지도 기뻐하시더군요.」
택시가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시내 어디로 가세요?」
그러자 운전사가 백미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내로만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갑시다.」
김상철이 운전사에게 말하고는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만나러 온 겁니다.」
「오늘 면회는 안 되겠지만 대전에서 자고 내일 일찍 뵈려고.」
목적지를 잡은 택시는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강미현 씨는 이미 아셨으니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김상철이 희미하게 웃었다.
「실종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몇 사람을 위해서는.」
「알고 계셨어요?」
그렇게 묻는 강미현을 그가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았다. 캐어내려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러나 곧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김상철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강미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쥐었다. 그러자 김상철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곧 그의 손이 아주 부자연스럽게 자신의 손 안에서 빠져나가자 강미현은 가슴이 저리는 듯한 느낌이 왔다. 알 수 없는 감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