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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3-1

Bollnow 2024. 3. 6. 07:24

3

 

1. 태풍 전야

박미정이 김상철의 실종 소식을 안 것은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 초순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검찰의 소환요구서가 접수된 지 10여 일 후여서 그동안 가슴을 졸이고 있던 그녀는 시베리아에서 보내온 팩스를 읽다가 금방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팩스는 유장석이 보내온 공문이었다.

임차지에서 근무 중이던 김상철 과장이 차량과 함께 실종되었는데 아무래도 늪지에 빠진 것 같다는 짧은 내용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미정은 한과장의 책상 위에 공문을 내려놓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황망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자 지나던 직원들이 힐끗거렸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비어 있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벽에 이마를 붙인 박미정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깨를 떨며 잔뜩 소리를 죽였으나 입에서는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비서실의 한과장은 박미정이 놓고 간 공문을 읽다가 자리에서 솟구쳐 일어섰다. 허둥거리며 이남호에게로 다가간 그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실장님, 시베리아에서 공문이‥‥‥」

그는 공문을 읽는 이남호의 표정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윽고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안 됐군, 이 사람.

그는 길게 한숨을 내려쉬었다.

이리떼가 많은 곳인데, 그곳은.

그날 오후부터 실종된 김상철이 이리에 잡아먹혔다는 소문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박미정은 그 이튿날부터 일 주일간 휴가원을 내고는 행방을 감추었다. 갑작스러운 휴가여서 한과장이 여러 번 집에 연락을 했지만 시골에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행태를 부리는 직원이 있었으므로 한과장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박미정의 모친 이연희 여사는 50대 중반이었지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깔끔한 용모의 부인이었다. 아파트 근처의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여사는 안인석이 주춤거리며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에 전화했던 안인석 씨 맞지요.

, 어머님, 접니다.

그들은 초면이었지만 안인석이 여러 번 전화를 했던 때문에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마주 앉아 차를 시키고 나자 이여사가 입을 열었다.

회사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안인석 씨는 친구 되니까 내가 보자고 했어요.

, 저도 궁금했습니다. 갑자기 휴가를 낸 것도 그렇고 연락도 안 되고 해서.

글쎄, 나도 속이 상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울기만 해서.

지금 집에 있습니까?

이여사가 머리를 저었다.

점심때 지나서 내가 시장 간 사이에 나갔어요. 부산 외삼촌한테 바람 쐬러 간다고 쪽지를 남겨두고. 다행히 조금 전에 부산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외삼촌 집에 왔다고,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안인석 씨는 모르세요?

저는 잘‥‥‥」

김상철 씨라는 사람, 그 사람이 친구 되지요?

, 제 친굽니다.

그 사람하고 가까워진 것 같던데‥‥ 매일 그 사람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예 그런데 그 친구는 시베리아에 있는데.

연락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저는.

걱정이 돼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 도무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회사 직원한테 넌지시 물어봤더니 몸이 아프다고만 하면서 휴가를 냈다는군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걱정이 돼서 집안이 어수선해요.

박미정의 가족은 대학에 다니는 남동생 하나에 보험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는 아버지로 네 식구라고 했다. 이여사는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으나 신통한 답을 못 얻자 오히려 더 답답해진 얼굴을 하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안인석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7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룹 비서실의 재무팀 소속인 김영광은 컴퓨터를 두드리면서 수화기를 귀에 댔다.

, 재무팀 김영광입니다.

김선배, 접니다. 백해근이요.

, 너냐? 아침부터 웬일이야?

백해근은 고등학교 후배이다. 그가 지난겨울 입사했을 때 동창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선배님, 바쁘시겠지만 뭘 좀 물어봐도 되겠지요?

그래, 물어라, 물어,

컴퓨터에서 손을 뗀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끔 후배들로부터 받는 이런 전화는 귀찮기도 했지만 우습기도 했다. 그들은 그룹 비서실을 청와대 비서실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히 증세가 심한 것은 신입들이다.

선배님, 김상철이 아시죠? 김상철 과장.

백해근의 말에 김영광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 ?

그 친구,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시베리아지, 어딘 어디야? 그런데 너, 김 과장 잘 알아?

아니, 잘 모릅니다. 제 친구의 친구가 되는데‥‥ 선배님, 제 친구가 김과장한테 꼭 좀 연락을 해야겠다고 해서요.

누군데? 그 친구라는 자가.

안인석이라고 제 대학 동창인데요.

선배님, 김과장 전화번호나 아니면 팩스 번호라도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그건 곤란해.

아니 왜요?

이맛살을 찌푸린 김영광이 잠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회사기밀이 아니다. 이미 비서실은 물론 관련 부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일이었고 검찰에도 통보가 된 것이다.

김과장은 실종되었어. 며칠 전에.

? 실종요?

그래. 시베리아 늪지에서 말이야.

죽었어요?

그건 몰라. 그러니 네 친구한테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해.

아아, .

그리고 괜히 김과장 가족에게 이런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 회사에서 연락이 갈 때까지는 말이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선배님.

내 입장 난처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다. 그랬다간 너하곤 끝장이야. 알았어?

 

그날 오후 비행기로 부산에 내려간 안인석이 해운대의 조그만 호텔에 묵고 있는 박미정을 만났을 때는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그녀는 안인석을 보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호텔 앞의 찻집으로 가자는 그의 제의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한참 후에야 커피를 가져다 놓았는데도 제각기 딴전을 피우며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박미정이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이야기 듣고 왔어?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살아 있을 거야. 난 그놈을 믿어. 죽을 놈이 아냐.

「‥‥‥」

아아, 왜 내 주변에서는 이런 일만 일어나지.

그 순간 안인석의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종업원이 지나면서 힐끗거렸지만 그는 흐르는 눈물을 가리지 않았다.

네가 비서실에 있으니 더 잘 알 것 아냐? 늪지에서 실종되다니?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왜 나한테 진즉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 너만 알면 되는 거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지만 외면한 채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던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을 거야. 난 며칠간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이제 조금 정리가 돼. 아마 상철 씨는 소환을 피해서 행방을 감추었을지도 몰라.

소환을 피하다니?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친 안인석이 바짝 상체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럴 일이 있어. 검찰에서 소환시키라고 했거든.

어떻게 된 일인데?

, 피곤해.

박미정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상체를 의자에 기대었다.

며칠 동안 별로 먹은 것이 없어.

난 내일 서울로 올라갈 거야. 다시 회사에 나가서 기다릴 거야.

검찰에서 무엇 때문에 상철이를 소환하려는 거야? 자세히 말해.

그러자 잠시 안인석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검찰에서 살인 혐의로 소환장이 왔던 이야기를 하자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살인 혐의라고? 누구를? ?

직원이야.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만일 그것이 사실이래도 난 기다릴 거야.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들을 거야.

이제 박미정은 김상철이 실종되지 않고 모습을 감추었다고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인석은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는 연속적인 충격으로 박미정과는 달리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 조퇴하고 내려왔어?

그녀가 묻자 안인석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당연한 일을 왜 묻느냐는 시선이다

그럼 내일 아침 나하고 서울로 올라가. 첫 비행기로.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낸 박미정이 그에게 내밀었다.

얼굴 닦아. 지저분해.

 

찻잔을 내려놓은 강회장의 표정은 밝았다.

유장석이가 여러 지역을 조사했는데 거주환경이 좋은 곳 몇 군데를 사진으로 보내왔어. 하지만 내가 눈으로 직접 봐서 결정할 작정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연내에 거주지를 기공하면서 조선족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일 작정이야. 내년쯤이면 직원의 가족은 일부분 받아들일 수 있겠지.

저녁을 마치고 서재에 마주 앉은 그들의 화제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임차지에 관한 것이다. 임차지 이야기를 할 때의 강회장 분위기가 언제나 밝았으므로 강용식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다. 방문이 열리더니 약그릇을 든 강미현이 들어섰다.

김진모 교수가 연락해 왔다는 보고는 들으셨습니까?

강용식이 묻자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어. 우린 그런 사람이 필요해. 학자라도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이야.

직급은 상무급으로 하고 연구소장 직책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유전을 발견했던 김진모 교수는 교직을 떠나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는 이제 임차지의 연구소장이 되어 자원을 발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강용식이 소파의 한쪽에 앉아 있는 강미현을 힐끗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약그릇이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자세였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버님, 그럼 언제 떠나실 겁니까?

다음 주에 가겠다. 이젠 지난번하고는 상황이 다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안기부에서 실종 확인을 하려는 모앙입니다. 임차지로 직원을 보내겠다고 해서 이실장이 거절했다는군요.

그런 망할 놈들 같으니.

강회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저희들이 뭔데 남의 땅에 들어와? 유장석이한테 단단히 말해 둬야겠군.

이실장이 이미 조처했을 겁니다.

약그릇이 비워지자 강미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이번에 가실 적에 제가 따라가면 안 돼요?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그쪽 자연을 필름에 담아오고 싶어요. 회사 홍보 효과도 있고, ‥‥‥」

얘가 무슨‥‥‥」

강용식이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강회장은 눈을 껌벅이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젠 근대직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말로만 들은 광대한 땅에 대해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보다 더한 선전효과도 없을 것 같아요.

강미현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던 강회장이 천천히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그럴 때도 되었다, 이젠. 그럼 준비해라.

꼭 마음에 드시는 작품을 만들겠어요, 할아버지.

서재를 나온 강미현은 약그룻을 가져다 놓고는 응접실에 앉아 TV를 보았다. 건성으로 화면만 보던 그녀는 한참 만에 아버지가 밖으로 나오자 이제는 과일을 깎아 들고 서재로 들어섰다. 강회장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앞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은 강미현은 소파의 한쪽에 앉았다. 어렵기로 하면 아버지보다 열 배는 더한 할아버지였지만 이해의 폭이 그만큼 더 컸으므로 어려운 이야기는 그가 더 낫다.

이윽고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느냐?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할아버지.

말해라.

, 김상철이라는 사람 정말 실종되었어요?

그러자 강회장이 눈썹 사이를 좁히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네가 그놈에 대해서 잘 알겠구만.

강미현의 해독으로 여러 번 암호 전화를 주고받은 것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은 큰 문제가 해결이 되어서인지 강회장은 집에서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미현은 김상철이 실종되었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래, 그놈은 실종되었다. 이실장은 그놈이 늑대한테 잡아먹혔다고 믿는 모양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어요?

그건 나도 모른다.

강회장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운이 없었던 거지, 그놈은.

「‥‥‥‥」

재주도 좋고, 기회도 잡았던 놈이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은 모양이야.

너도 이제 스물다섯이지?

, 할아버지.

강회장이 나이를 집어 말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놀란 그녀가 머리를 들었으나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이남호 실장은 회의실로 내려와 두 사내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가 회의실에서 손님을 맞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어서 직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는 장관이 방문을 해도 사무실의 소파에서 맞아들이는 성격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이남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곳은 우리가 개발을 하고 있지만 러시아 영토지요. 그곳에서 일어나는 범죄행위는 러시아 사법당국의 권한입니다.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이 못 된단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물은 것은 검찰 수사관이었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은 심재택이다. 수사관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40대 후반으로 눈매나 분위기가 보통이 아닌 사내였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임차지에는 러시아 경찰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법권을 행사할 러시아 기관도 없고, 근대에서 조직한 자위대가 경비를 하고 나름대로 치안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남호가 힐끗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심재택이 하바로프스크에 있었고 고태성이 그의 부하로 활동했다는 것도 안다. 김상철의 말에 의하면 심재택은 고태성과 함께 신해복을 죽인 인물이다.

잘 아시는데, 우리 그러면 원칙대로 하십시다.

이남호가 다시 검찰 수사관을 향해 말했다.

한국은 아직 러시아와 범인 인도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당국에 수사 협조는 의뢰할 수 있을 거요. 러시아 당국에 의뢰하세요. 그러면 일이 수월해질 테니까.

협조하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이남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협조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국 수사관이 러시아 영토를 돌아다니면서 범인을 잡아갈 수는 없지요. 아마 러시아 정부가 그것을 알면 그 수사관은 러시아 경찰에게 잡혀갈 것이고 그것은 곧 국제 문제가 되겠지요.

「‥‥‥」

더구나 김상철이는 실종이 되었습니다. 직원을 살해했다는 어떤 확실한 증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실종된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그 넓은 땅에서 말이오.

실장님.

심재택이 입을 열자 이남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구, 이제 말씀을 하시는군. 그래, 듣겠습니다.

증인은 바로 접니다. 김상철이 고태성을 살해했다는 증거를 내놓은 사람이 바로 나란 말씀입니다.

그래요?

고태성은 살해되기 직전에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김상철에게 쫓기고 있다고 했어요. 살해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직후에 트럭에 치여 죽었습니다. 난 직업상 통화는 녹음을 하지요. 특히 외국에서 작업을 할 때는 더욱.

이남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저는 김상철이가 왜 자기 부하직원을 죽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심과장께서는 그 이유를 아시오?

그건 모릅니다.

그리고 근대 직원인 고태성이가 왜 안기부 간부인 심과장께 전화를 했을까요? 근대의 다른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말이오.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자 이남호가 허리를 세우더니 일어날 채비를 했다.

유감이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더니 두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시간에 비서실의 한성문 과장은 회사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있었는데 마주 보고 앉은 것은 강미현이다.

이것 참, 기획에서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투덜대던 한성문이 강미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획의 홍보부장이 고부장 맞지요?

, 고세훈 부장님이세요.

그렇다면 강과장께선 고부장 밑에 계시겠구만.

, 제가 모시고 있어요.

입사한 지는 얼마나 되십니까?

미국에 있다가 온 지 일 년 조금 못 됐어요.

그러자 한성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유학파로 특채된 직원쯤으로 아는 모양인지 그의 태도가 다소 느슨해졌는데 강미현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근대 기획 내에서 자신이 회장의 손녀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머지않아 노출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회장의 손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들이 대하는 것이 싫은데다가 자신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받고 싶다는 자신감으로 기획의 사장과 몇 명의 핵심 간부에게 부탁을 한 것인데 내년쯤이면 전 그룹에 소문이 퍼질 것을 그녀도 예상하고는 있다.

한성문이 물었다.

그런데 그 실종사건의 무엇을 알고 싶다는 겁니까? 그리고 언론은 어디까지 알고 있습디까?

저한테는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셔야겠어요. 그래야 언론에 관한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한성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야 대외비도 아닙니다. 조금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이죠? , 김상철 과장이란 사람.

살인 혐의를 받고 있어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료를 살해했다는‥‥그래서 검찰의 소환장이 와 있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실종이 된 겁니다. 임차지에서 공문이 온 걸 보면 늪에 빠져 실종이 되었다고 했어요, 그 근방은 이리떼가 많다고도‥‥‥」

살인한 동기는요?

그건 모릅니다. 그저 용의자라고만.

회사에서는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지요?

실종 처리를 하고 있어요. 임차지에선 실종 통보가 온 후로 연락이 없습니다. 그래서 ‥‥ 언론에서 살인 혐의나 검찰소환 같은 이야기가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나도 고부장한테 따로 당부를 할 테니까.

그건 알아서 하세요. 그런데 살해되었다는 직원은 누구죠?

고태성이라고 김상철 씨 소속 직원이죠. 트럭에 친 교통사고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한성문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힐끗거리고 있었으므로 강미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은 실종이나 살인 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눈물을 닦은 김민희는 수건을 접는 것에 온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귀퉁이를 맞추고 반으로 꺾고는 다시 사각형으로 정성 들여 접었다. 학교 근처의 카페 안이다. 10시가 되어 있었지만 카페 안은 음악과 손님들의 소음으로 떠들썩했다. 이정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민희야, 실종되었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야.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 없어.

그래. 회사 직원도 그렇게 말했어.

코가 막힌 김민희가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비관 안 해.

그럼 술이나 먹자.

이정훈이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복학생으로 김민희의 애인이다.

그녀가 김상철의 실종 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 3시경으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보호자로 되어 있는 이모를 찾던 근대직원은 이모가 외출했다고 하자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임차지에서 실종되었는데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짧은 내용이었고 자세한 것은 모른다면서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달 말쯤 회사에서 보상금이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던 김민희는 겨우 다이얼을 눌러 이정훈을 불러냈다.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였기 때문이다. 이모는 그 소식을 들으면 떠들썩하게 울기부터 할 것이 뻔했고 그걸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이다.

술잔을 들어 단숨에 삼킨 김민희가 흐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그렇게 사라질 사람이 아냐.

벌써 몇 번째인가 되풀이하는 소리였으나 이정훈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민희야.

하지만 아버지한테는 어떻게 말해야지?

말씀드리지 마라, 당분간.

만일 오빠가 정말로 그렇게‥‥‥」

재수 없는 소리 말라니까.

빈 잔에 술을 채워준 그가 술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기다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네가 기운을 차려야 한단 말이야.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아버지가 대전 교도소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가 접근해 왔을 때 김민희는 그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그것이 그들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김민희에게 같이 면회를 가자고 조르고 있었지만 아직 같이 간 적은 없다.

오늘은 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술잔을 든 이정훈이 다짐하듯 말했다.

내일도, 모레도 마찬가지야. 네 오빠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자 김민희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술기운이 겹쳐서인지 흐느껴 울었으므로 옆자리의 손님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카페를 나온 것은 11시 가 넘어서였다. 김민희는 부축하려는 이정훈의 손을 뿌리치고는 꼿꼿한 자세로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 괜찮아? 토할래?

따라 걷던 이정훈이 묻자 그녀는 하얗게 된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그들은 택시 정류장에 섰지만 택시는 멈춰 서지 않았다. 차량들은 속력을 내며 그들 앞을 지나갔다. 가끔 합승 택시가 멈춰 섰지만 방향이 다르자 요란한 엔진 소리를 뱉으며 사라졌다.

빌어먹을.

주위를 둘러본 이정훈은 이곳에 택시 승객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꼼짝 않고 서 있는 김민희의 어깨를 잡았다.

민희야, 길 건너서 타자.

건너편에는 빈 택시가 여러 대 지나고 있었다. 앞쪽을 바라본 채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이는 김민희를 보고 그는 몸을 돌렸다. 건널목은 50미터쯤 아래쪽이었다. 대여섯 걸음 아래쪽으로 걷던 이정훈은 무심코 머리를 돌려 옆을 보았다.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던 김민희가 없다. 다시 뒤쪽으로 머리를 돌린 그는 순간 입을 딱 벌렸다.

민희야!

정신이 반쯤 나간 김민희가 차도를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민희야!

온몸을 굳힌 그가 다시 악을 쓰듯 소리쳤을 때 두 개의 불빛 가운데 그녀가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거리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에 이어서 충돌음이 났고 김민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이정훈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차도로 뛰어들었다. 이제 거리에는 차들이 모두 멈춰 서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북쪽 20킬로 거리에 있는 김스크 마을은 조선족 20여 호가 모여 사는 곳으로 그들 사이에는 김일성 마을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김일성 장군이 며칠간 묵고 갔다는 이유 때문인데 어느 집에서 묵었냐고 물어보면 모두 모른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이름이 남아 있는 것만 보아도 김스크 마을은 북한과 관계가 깊었고 북한 공작원이 마음 놓고 묵을 수 있는 아지트 중의 하나였다.

김상철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이금철의 권고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시내의 호텔이나 여관에 묵을 형편도 아니었다. 아무르 호텔에는 안기부 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데다가 인투리스트에는 오성그룹 직원들이 공공연하게 정보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종자가 된 상황에서 그들에게 발견된다면 당장에 회사가 불편해지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김스크 마을에 묵은 지 열흘째 되는 날 아침. 장국진이 지프를 몰고 그가 묵고 있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국도에서 낮은 산맥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2킬로쯤 들어간 곳에 세워진 마을이다. 비포장도로여서 지프의 바퀴는 흙물에 젖어 있었다. 지프에서 내린 그가 김상철에게로 다가왔다.

김과장님, 이번에 다시 조선족 500명을 모집합니다. 그래서 각 기능별 모집 인원을 장인규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북한 쪽과의 연락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당가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았다.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세워진 집이어서 산 밑을 흐르는 개울물이 바라보였다. 장국진이 발밑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더니 앞쪽에 모여 있는 서너 마리의 닭을 겨누고 던졌지만 빗나갔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문득 그가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김상철에게 깍듯한 경어를 쓴다.

어떻게 하다니?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기만 할 거냔 말이오.

매일 저녁 주인 영감님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어. 밀주 맛도 괜찮고.

돌멩이를 집은 장국진이 닭을 향해 던졌지만 또 빗나갔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일만 이사와 장국진밖에 없다.

직원들은 모두 과장님이 늪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압니다. 철저하게 비밀로 한 것은 좋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건 나도 숨이 막히누만.

장국진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 올 때에도 몰래 와야 합니다. 한 이사한테도 비밀로 하고 온단 말이오. 과장님과의 접촉을 될 수 있는 한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단 말입니다.

당연하지,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유 전무님하고는 어떻게 이야기가 된 겁니까? 이렇게 숨어 있기만 하라는 거요?

당분간은. 그동안 회사에서 해결해 보겠다고 했어.

해결은커녕, 모두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장국진이 다시 집어던진 돌멩이에 이번에는 닭 한 마리가 맞아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이번에 새로 온 과장은 마음에 안 들어. 그놈은 매일 한 이사와 무슨 쑥덕공론을 하는지 나하고는 얼굴 맞대기도 힘듭니다. 그놈도 아마 나에 대한 감정이 마찬가지겠지만.

너밖에 없어. 지금 북한 쪽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글쎄, 날 믿지 않는 것 같은데‥‥ 과장이나 한 이사도 말이오.

말을 멈춘 그들은 한동안 앞쪽의 골짜기와 개울물을 바라보았다.

 

장인규가 찾아온 것은 오후 2시경으로 점심을 마친 김상철이 개울가에 나와 앉아 있을 때였다. 산을 등진 위치여서 마을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쪽은 두리번거리며 오는 것이 그를 찾는 모양이었다. 이젠 여름이어서 밝은색 바지에 단화를 신고 긴팔 셔츠를 입은 간편한 차림이다. 언제나처림 머리를 뒤로 묶어 올렸으므로 긴 목과 둥근 얼굴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개울가에 와서야 그녀는 건너편에 앉은 김상철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낚시하러 가셨다고 해서.

골짜기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장인규는 개울에 박힌 바위들을 가볍게 뛰어 건너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낚싯대만 가져왔을 뿐으로 낚시를 한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가 묻자 장인규는 머리를 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야기나 하려고.

하긴 이러고 있는 나한테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아침에 장국진 씨가 다녀갔다면서요?

누가 또 재빠르게 보고를 했군.

모두 김 선생을 보호해드리려는 거예요.

장인규가 숨을 돌리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답답하군요. 이곳은. 앞뒤가 막혀 있어서.

근대 쪽에서는 무슨 대안이 있다던가요?

실종자한테 무슨 대안이. 사후 정리만 남았을 뿐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고 개울물 소리와 뒤쪽에서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바람이 침엽수의 윗가지를 흔들고 지났으나 그들한테는 닿지 않았다. 장인규가 낚싯대를 들더니 낚싯대 끝으로 개울물을 건드렸다.

솔직히 말하지요. 우린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은 이제 상황을 파악했으리라 믿고 말하는 겁니다.

「‥‥‥」

지금 근대에서 당신은 처치 곤란한 짐이에요. 아마 그들 입장에서는 김상철 씨가 영영 사라져 주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낚싯대를 내려놓은 그녀가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자신이 소모품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겠지요. 이제 근대에서의 당신 역할은 끝났습니다.

그럼 당신이 새 역할을 준다는 거요?

메마른 소리로 김상철이 묻자 그녀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절실하게 당신을 필요로 하니까, 큰 역할이 되겠지요.

근대를 배신하고 말이요?

그쪽이 먼저 배신한 것 아녜요? 실종자 처리를 하고는 이미 완벽하게 당신의 기록을 지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장국진도 당신을 몰래 만나러 오지도 못할 겁니다.

아까 내가 당신을 보호한다고 했지요? 누구로부터 보호한다고 생각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상철이 얼굴을 펴고는 웃었다.

머지않아 북한 쪽이 마스크를 쓰고 근대직원인 체하면서 날 치러 올 것 같군.

아마 근대 쪽은 웃는 얼굴로 다가와서 당신을 쏠 것 같은데.

내 역할이 뭐요?

우리 쪽의 근대 창구‥‥아마 당신도 마음에 들 겁니다.

당신은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들이 당신을 이용한 만큼 당신도 그들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어요. 사실 당신은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나요?

김상철이 불쑥 손을 뻗어 장인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놀란 듯 눈을 치켜뜬 그녀를 향해 그가 말했다.

날 위해서 옷을 벗을 수가 있소?

장인규가 그의 손을 떼어내려는 듯 어깨를 흔들었다.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이 손, 치워요.

이런 경우는 예상 안 했나?

이제 김상철의 두 손은 그녀의 양쪽 어깨를 쥐었다.

당신을 지금 강간하겠어. 선택의 여지는 당신도 없단 말이야.

김상철의 힘에 눌린 장인규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구두가 벗겨져 떨어졌고 어느 사이에 벨트가 풀려진 바지가 내려갔다. 그러자 겨우 한 손이 풀린 장인규가 손을 휘둘러 김상철의 뺨을 쳤다. 그 순간 김상철의 주먹이 날아왔고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그녀는 사지를 늘어뜨렸다.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린 장인규는 아랫도리가 허전한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팬티까지 벗겨진 하체는 알몸이었으므로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김상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옷을 찾아 입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몸에 침입당한 흔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를 악문 장인규는 구두를 찾아 신고는 개울에 발을 적시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일만 이사가 김상철의 실종 소식을 들은 것은 점심을 마친 후였다. 사흘 만에 다시 찾아간 장국진에게서 보고를 받은 것으로 실종자가 실종된 사건이라 당황했다.

이거 야단났는데.

한일만이 찌푸린 얼굴로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에는 그들 둘밖에 없었으나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북한 애들도 정말 모른다는 거야?

그들도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나한테 물어보던데요.

숨겨두고 그런 것은 아닐까?

글쎄요. 그것은‥‥‥‥」

장국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한일만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유전무가 알면 난리를 치겠는데‥‥ 이거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나서서 찾아봐야겠어. 잘 알겠지만 소문나지 않게 말이야. 김상철이는 이미 실종된 사람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김상철이가 회사에 불만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건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회사에서 처리해줄 텐데 말이야.

이거 곧 회장님도 오실 텐데 신경이 쓰이는구만 그래.

한일만의 방을 나온 장국진이 아래층 사무실로 들어서자 조병기 과장이 손짓을 했다.

장형, 나 좀 봐.

그는 김상철 대신으로 서울에서 파견된 근대 경력 10년 차의 고참이다

한 이사하고는 무슨 얘기야?

편치 않은 얼굴로 그가 묻자 장국진이 머리를 저었다.

별것 아니오. 이번에 보내질 인력 관계 때문에,

인력 관계가 어쨌다구?

혹시 북한에서 보내진 빨갱이가 섞여 있지 않느냐고 물었소.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원 두어 명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장국진이 제 입으로 빨갱이 소리를 하는 것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병기는 가는 눈을 찌푸리며 웃지 않았다. 그는 장국진이 한 이사와 접촉을 하면 언제나 심기가 불편했는데 소외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일 그자들한테 가서 서둘러 달라고 말해, 다음 주 중에는 보내야 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 이사를 만나고 오면 나한테 보고를 해줘. 당신은 직장생활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데 그렇게 해야 되는 거야.

그렇게 하지요.

주위의 사원들은 제각기 분주한 척 일하며 딴전을 피웠지만 모두 듣고 있을 것이다. 장국진은 자리에 앉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 있는 파벨의 저택은 2층 시멘트 건물로 도로에서 1킬로쯤 들어간 숲 속에 세워져 있었다. 물론 파리야킨의 대저택에 비교하면 움막이나 다름없는 집이었지만 이제 이곳은 권력의 중심이다. 집 앞에 늘어선 수십 대의 차량과 들락이는 사내들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파리야킨은 이미 잊혀진 인물이 되어서 그의 유가족을 찾는 사람은 없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김상철이 파벨의 방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일어섰다.

,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잘 왔어.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북한 쪽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나한테 온 것을 근대 쪽에서는 아나? 블라디보스톡

그들도 모릅니다.

하긴 그쪽에 보고할 상황도 아니지.

탁자 위에 놓여진 보드카 병을 든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한잔하겠나?

주십시오.

잔에 술을 따르고 제각기 한 모금에 삼킨 그들은 잔을 내려놓았다.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던데, 근대에서 손을 쓰고는 있겠지?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

동료 직원이었다고 들었는데.

안기부 정보원이었지요. 그자는 그날 밤에 저와 행동을 같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파벨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 쪽 아지트에 숨어 있다가 나온 걸 보면 그쪽도 불안했던 모양이군. 잘 왔어. 이곳이 자네한테는 제일 적당한 은신처야.

「‥‥‥‥」

내가 숙소를 마련해주지. 이곳은 안전해. 마음 놓고 지내도 돼.

고맙습니다, 파벨 씨.

근대 쪽에 나하고 같이 있다고 이야기해도 상관없어. 한국 정부가 알아도 문제 될 것이 없고. 그렇지, ‥‥」

생각났다는 듯이 파벨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가족이 서울에 있으니 그건 곤란하겠군.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자네 생각대로 하게, 그것은.

이제 서울에 내 가족은 없습니다.

잠자코 바라보는 그를 향해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제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제 장례를 치렀다는군요.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답니다.

저런, 정말 안 됐네, .

파벨이 찌푸린 얼굴로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기운을 내게나, .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닙니까? 보드카 몇 병만 더 마시면 더 기운이 날 겁니다, 파벨 씨.

어제 김상철의 전화를 받은 것은 이모의 집을 지키던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학교 선배라면서 김민희를 찾는 그에게 장황하게 사건을 설명해주다가 감정에 벅차 울먹이기까지 했다. 장례를 치르는 마당에 난데없는 남자 선배가 나타나 민희를 바꿔달라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김상철 이모를 통해 김상철 가문의 내역도 알고 있는 터여서 외국에 나가 있다는 김상철의 걱정도 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김상철은 파벨이 따라주는 보드카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우나를 하고 한숨 잘 생각이었다.

 

아직 아무 소식 없어?

자리에 앉자마자 안인석이 물었다. 회사 근처의 경양식집 안이다. 박미정이 머리를 저었다.

아직, 그대로야.

그대로라니?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그러자 안인석이 혀를 찼다. 이틀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김민희의 장례를 도맡다시피 해서 끝낸 그였다. 놀란 이모네는 민희 애인 이정훈에게서 들은 대로 안인석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 한 탓인지 그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그래도 이 실장이 빈소에 찾아와주기까지 한 걸 보면 많이 생각한 거야.

박미정의 말에 안인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책도 없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면 되느냔 말야. 민희는 근대가 죽였어.

안인석이 양주병의 마개를 거칠게 뜯고는 잔에 따랐다. 그는 반쯤은 넋을 잃고 있는 이정훈에게서 김민희가 무엇 때문에 폭음을 했고 어떤 상태에서 차도로 들어갔는지를 모두 들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들만 불쌍하지.

술을 삼킨 안인석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상철이 수색작업은 하고 있는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그 자식이 살아 있다고 해도 이 일을 알면 ‥‥‥」

박미정은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다가 집어 들고는 한 모금을 마셨다. 이 실장에게 김민희의 사고 사실을 알린 것은 그녀였다. 놀란 이 실장이 그날 저녁에 빈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다시 박미정을 만나자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아마도 자신과 김상철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든 박미정은 안인석의 얼굴을 보고는 숨을 멈추었다.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본 것이다. 빈소에서 손님을 맞으면서, 묘지에 김민희를 묻으면서 수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보아온 터였으나 박미정은 가슴이 메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녀는 그에게로 내어 밀었다.

그만해, 인석 씨.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도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만 울어. 그리고 그만 마시고,

상철이가 불쌍해.

수건을 가로채듯 받아 쥔 그가 얼굴을 닦았다.

그 새끼, 차라리 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다음 날 아침, 회장실로 들어선 이남호는 강회장 앞으로 다가가 섰다.

회장님, 아직 김상철의 행방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국진을 시켜 가볼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게 했습니다만.

서류에서 시선을 든 강회장은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한 놈들도 찾고 있다고는 하지만 혹시 그쪽으로 넘어간 것 아닐까? 내 생각엔 그럴 가능성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 쪽에서는 김상철이 연락해 오지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라,

제 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알까?

전화를 했다면 알겠지요. 하지만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강회장이 찌푸린 얼굴로 앞자리에 앉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 애인이라는 놈의 입을 막아. 회사에서 실종 통보를 해서 그 애가 비관했다는 얘기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도록 하란 말이야.

조처했습니다.

어쨌든 안 되었어, 김상철이.

유전무가 매일 연락을 해옵니다. 김상철이한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자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우리로선 그만하면 최선을 다한 거야.

김상철이 회사에 반감을 품게 된다면 문제가 커집니다. 더구나 동생 사건까지 알게 된다면‥‥‥」

그러자 한동안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윽고 입을 연 것은 강회장이다.

그놈, 어쩌다가 안기부한테 꼬투리를 잡혀가지고서‥‥ 운이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회장실을 나온 이남호가 자리에 앉자 주춤거리며 테이블 앞에 선 것은 박미정이다. 그녀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실장님, 이번 시베리아 출장에 제가 빠졌는데요.

, 그런가?

이남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출장 인원이 많아서 내가 조정을 시켰어. 그래서 거기도 빠진 모양이지.

,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하바로프스크 지사와 이번에 통신 관계로 회의를 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도 모두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통신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곧 위성통신으로 대체될 것이니까.

얼굴에 웃음을 띤 이남호가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가서 고생만 할 테니 한과장만 따라가도 될 거야. 맡은 일에 책임을 갖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

염려하지 말고 한 과장한테 맡겨.

이남호가 시선을 내렸으므로 박미정은 머리를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서류를 뒤적이던 이남호가 힐끗 시선을 들어 박미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가늘게 숨을 내려쉬었다.

 

사흘 후, 전세 비행기 한 대가 백여 명의 승객을 싣고 하바로프스크 공항에 착륙했다. 강회장이 계열사 사장단과 기자들, 거기에다 이남호가 인솔한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도착한 것이다. 강회장과 이남호 등은 숙소로 들어갔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인투리스트 호텔의 3개 층을 차지하고 여장을 풀었다. 이제 이곳도 여름이어서 아무르 강가에는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시내 구경을 하고 온 강미현이 콤소몰 광장 근처의 숙소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4시였다. 이제 그녀는 회장의 손녀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고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2층에 있는 회장실로 들어섰다.

차를 마시고 있던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사람들에게 광대한 땅과 천연자원만을 보여줘서는 안 돼. 그것을 개척하는 근대 일꾼들을 부각시키고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심어주도록 해야 한단 말이다.

앞자리에 앉은 그녀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기자들이야 있는 그대로 찍고 취재하더라도 넌 그런 자세로 사진을 만들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근대시는 아마 세계에서 제일 깨끗하고 현대적이며 넓은 도시가 될 것이다.

그는 임차지 중심부에 건설될 도시의 이름을 근대시로 결정해 놓았다. 동부 시베리아에 인구 2백만이 상주할 도시가 건설되는 것이다.

조선족 노동자들이 벌써 만 명 가깝게 임차지로 보내졌다. 아마 올해 안에 노동자들만 3만 명이 될 거야. 그 거대한 역사의 장면을 찍으면 국민들이 감격을 할 것이다.

강회장의 표정은 밝았고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 조그만 반도에서 정권 다툼으로 밤낮을 보내는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난 국민들에게 보여줄 선물이다. 우리가 이만큼 할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누구 덕분인지를 국민들도 알게 될 거야. 국민들 자신의 노력과 경제인들의 공로지. 정치인들이 도와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남호가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한일만이다.

회장님, 말씀드릴 일이‥‥‥」

이남호의 시선이 강미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괜찮아. 말해 봐.

강회장이 말하자 그들은 나란히 섰다.

장국진이 없어졌습니다. 담당 과장한테는 어젯밤 시내에 다녀오겠다고 했다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습니다.

이남호의 말을 한일만이 이었다.

김상철이 실종된 후로 근무태도가 불성실했다고 담당과장이 말합니다만 제 생각엔‥‥」

그가 말을 멈추자 강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 생각에는 어쨌단 말이야?

김상철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해서요.

김상철이와?

, 그자는 김상철이의 심복입니다. 그래서.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혹시 북한 쪽으로 돌아간 것 아니야?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자는 돌아가면 중형을 받는다고 제 입으로도 말했습니다.

그럼 잡혀간 것 아니냔 말이야.

그자는 우리 쪽의 중요한 연락원이고 그들로서도 필요한 자였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회장님.

머리를 든 강회장이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넌 나가 있거라. 그리고 자네들은 자리에 앉아.

이제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어서 조금 전의 활기는 보이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단층 시멘트 주택 안이다. 값싼 재료로 만들었지만 단단하고 단순한 구조의 서민용 주택이었으므로 김상철과 장국진이 생활하기에는 적당했다. 특히 어제 아침에 이곳에 도착한 장국진은 대만족이었다. 달러를 들고 나가 베료스카에 가서 잔뜩 쇼핑을 하고 들어온 그가 물건을 꺼내면서 김상철에게 말했다.

이제 여자만 있으면 되겠시다. 아예 조선족 여자 하나씩 잡아서 우리 둘이 이곳에 눌러앉아 삽시다.

점심때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강회장은 아침에 시베리아로 떠났겠군.

김상철이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군에서 헬기를 여러 대 빌리는 모양이었는데 아마 근대의 헬기까지 합해 행차가 장관일 거요.

조선족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강회장은 사장단에다 기자들까지 합해 백 명도 넘는 수행원을 데리고 왔습디다. 거기에다 이번엔 손녀까지 데리고 온 모양이오.

우리야 이젠 그자들한테서 잊혀진 사람들이지만. 나는 더 이상 미련이 없시다.

파벨은 김상철에게 자신의 보좌역을 맡아달라고 했는데 좋게 표현하면 비서였다. 그는 근대와의 관계에서 김상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김상철이 머리를 들고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이실장을 만나야겠어.

프라이팬에 고깃덩이를 넣고 기름에 굽던 장국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실장을 왜요?

내가 북한 쪽의 모함에 걸려 있다는 것을 말해야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장국진은 프라이팬을 주방 위에 내려놓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과장님이 고태성을 처치하라고 그들에게 맡긴 것은 사실 아니요?

그렇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김상철이 부릅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어떻게 할 작정인가를 내 귀로 들어야겠어, 이실장이나 회장한테서.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도.

입맛을 다신 장국진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있었다면 진즉 조처를 했을 거요. 이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만나고 돌아오겠다.

김상철의 고집을 꺾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장국진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좋시다, 같이 갑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요. 심재택이도 와 있다고 하니까.

 

아무르 호텔의 커피숍에 앉아 있던 심재택은 다가오는 고정문을 보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제 그들은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전세 비행기 편으로 오신 거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정문이 묻자 심재택이 코웃음을 쳤다.

자리가 있어도 내주지 않았을걸? 근대 놈들은.

아직도 실종된 김상철이는 못 찾았다고 하던데. 그 일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어떻게 되기는? 그래서 내가 다시 이곳에 온 것 아니요.

주위를 둘러본 고정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대의 일꾼으로 뽑혀서 돈을 벌려면 북한 공작원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까?

글쎄, 나도 그런 소문을 듣긴 했는데.

심재택의 말에 고정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곳에 상주하다시피 머물고 있으면서 정보원들을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안기부 요원보다 정보가 빠르면 빨랐지 늦지는 않다. 고정문은 심재택이 정보요원으로서의 자존심으로 아는 척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대에서 노동자 모집을 할 때 북한에서 온 공작 요원들에게 취업신청서를 내면 된다는 거요. 그리고 그곳에서는 북한에 충성한다는 서약서를 받는답니다. 그러기만 하면 100% 취업이 된다는 거요.

이제까지 만 명 가깝게 임차지로 보내졌는데 아마 서약서를 쓰고 떠난 사람들이 반도 넘을 것이라고 합디다.

고정문이 만나자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말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른침을 삼킨 심재택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자존심을 내세워 빙빙 돌려 물을 여유도 달아났다.

그렇다면 근대와 북한 쪽 놈들이 서로 비밀 협상을 맺었단 말인가?

그가 묻자 고정문이 말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근대에 취업신청서를 내면 경쟁률이 101이 넘는데 서약서를 쓰고 나면 100% 취업이 된다니 말이오. 근대와 무슨 묵계가 있지 않고서야‥‥‥」

그 신청서를 받는다는 놈들은 일정한 거처가 있다고 합디까?

그러자 고정문이 머리를 저었다.

그자들은 조선족 몇 명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겁니다. 일정한 거처는 없고 어떤 때는 공회당에서 접수를 했다가 때로는 북한과 가까운 조선족 마을 한 집에서 일을 한다는데‥‥」

이것, 큰일이군.

심재택이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당겨 내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근대는 끝장이야.

신중하게 조사하셔야 할 겁니다. 나도 최근에야 그 사실을 듣고서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래서 심과장을 만나기만을 기다렸던 겁니다.

김상철이가 내 부하를 죽인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탁자의 한끝을 노려보며 심재택이 말했다.

북한 놈들과의 관계를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김상철이의 실종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실종이 아냐. 이제는 나도 확신이 섰어. 근대 놈들은 김상철이를 숨겨두고 있는 거야.

다음 날 아침, 강회장 일행이 헬기 14대에 나누어 타고 임차지로 떠난 후이다. 헬기 착륙장에서 돌아온 한일만은 긴장이 풀린 나른한 몸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회장이 옆에 있는 동안은 음식도 제대로 넘어가는 것 같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자리에 앉는 그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이사님, 대기실에서 장인규란 여자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인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한일만이 눈을 치켜떴다. 그가 장인규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김상철과 장국진, 또는 조과장을 통해서 접촉했을 뿐으로 그가 만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대기실로 들어서자 밝은색 정장 차림의 장인규가 혼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무스름한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20대 후반의 미인이다.

갑자기 찾아와 놀라셨군요.

얼굴에 웃음을 띠운 장인규가 말하자 한일만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잘 오셨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중요한 일이라 제가 직접 찾아왔어요. 시내에서 뵐까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정보원들 눈에 더 띌 것 같아서.

하긴 그렇지요. 이곳은 한국인들로 들끓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일만은 그녀가 말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말씀하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이것을 들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그러면서 장인규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소형녹음기였다. 테이블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은 그녀는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심재택과 고정문의 대화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어제 아무르 호텔 커피숍에서 안기부의 심재택과 오성그룹의 고정문 부장이 나누는 이야기지요.

그들의 대화 도중에 장인규가 설명을 했다.

오성그룹은 정보수집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점점 굳어져 가는 한일만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인규가 물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녹음기의 스위치를 껐다.

하지만 안기부는 어떤 증거도 증인도 찾지 못할 거예요. 우리한테 서약서를 쓴 조선족들이 안기부 요원한테 사실을 말할 리도 없고. 왜냐하면 그들보다 우리가 가깝게 있거든요.

「‥‥‥‥」

하지만 이걸 듣고 나서 느끼셨겠지만 문제는 김상철입니다. 그자가 실토하면 근대는 치명상을 입게 될 거예요.

「‥‥‥」

살인을 한 것도 북한과의 관계 때문인 것 같다고 심재택이가 당장에 추정하는 것 보세요. 만일 김상철이가 근대를 걸고 넘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한일만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김상철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그쪽도 모르십니까?

찾고는 있어요. 하지만‥‥」

머리를 든 장인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는데 그는 근대 쪽에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 되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는 이렇게 있을 바에는 정부 쪽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떳떳하게 살겠다고 제 부하한테 말하기도 했습니다.

「‥‥‥」

그가 우리한테도 몸을 숨긴 것은 당연합니다. 아마도 근대나 우리가 자신을 제거해서 입을 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그럴 리가.

조치를 취해야 됩니다. 우리 쪽도 알아서 손을 쓰겠지만 근대에서도 ‥‥」

가방에 녹음기를 챙겨든 장인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 사업을 위해선 희생을 각오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헬기가 삼림지대인 타이가 지역을 지나자 이제 툰드라 지역이었다. 동토에도 여름이 찾아와 늪지는 초원이 되어서 푸른 풀이 자라나고 있다. 헬기 위에서 필름을 돌리던 유기사가 연신 탄성을 뱉아내더니 유전지대가 보이자 입을 딱 벌렸다. 이제 유전지대 옆쪽에는 거대한 주거지역이 건설되고 있는 중이었다.

장관입니다, 강과장님. 이곳에서 영화 한 편 찍으면 좋겠는데, 대작으로.

그는 영화감독이 꿈인 사내였으니 웅대한 자연의 경관을 보자 그런 말이 나을 법도 했다.

헬기가 개척단 본부 옆의 착륙장에 내리자 경비 완장을 찬 두 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각각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차림이었고 가슴에는 근대의 마크가 새겨져 있다.

강 과장이십니까?

앞장선 사내가 물었으므로 강미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 무슨 일이시죠?

저는 경비단의 박 대리입니다. 여기 계실 동안은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부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오후에 회장님께서 기자단에게 유전을 공개하실 계획입니다. 그때 동행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박 대리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그녀가 회장의 손녀인 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거 경호원까지 붙여주다니.

유기사가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강 과장님 따라다니면서 이제야 제대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 시간에 유장석은 본부의 단장실에서 강회장과 이실장을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밝은 것은 강회장의 기분이 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장단과 기자단들이 자연의 웅대함에 압도당하는 것을 보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일 북단 기지까지 다녀오면 이 땅이 얼마나 광활한지 실감하게 될 것이야. 대한민국 5천만을 모두 이주시켜도 남을 땅이니까.

소파에 등을 기댄 강회장이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북단 기지는 본부에서 5백여 킬로 북쪽에 위치한 툰드라 지대였다. 헬기로 날아가도 도중에 한 번 연료를 공급받아야 한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유장석이 말하자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근대시와 근대 임차지는 세계지도에 남게 되었다. 모두 자네들의 공이야.

아닙니다. 모두 회장님의 선견지명과 과감한 개척정신 덕분이지요. 저희들이야 잔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이남호였고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회장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뭔가?

김상철이 문제입니다.

이남호가 얼굴을 굳혔고 강회장도 똑바로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인데?

그 사람을 구제해 주십시오. 제가 듣기에는 행방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회사에 큰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나도 알아.

앞으로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유 전무.

이남호가 그의 말을 부드럽게 자르고는 강회장을 힐끗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도 신경을 쓰고 계시니까 그 일은 우리한테 맡겨요.

알겠습니다.

시계를 내려다본 강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아, 유전으로 가볼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겠군.

유장석과 이남호가 따라 일어서자 그는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내가 안기부장을 구워삶아서라도 그놈 혐의는 벗길 테니 유 전무는 걱정하지 말아. 알았나?

, 회장님.

회사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니, 회사가 책임을 져 줘야 직원들이 따를 것 아닌가.

 

 

 

2. 배신

식당 안으로 들어선 심재택과 최성문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선 음식 전문식당으로 식당 안에는 조선족들이 가득 차 있었고 소란스러웠다. 저녁 7시가 조금 못 되어 있었지만 벌써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과장님, 저기.

최성문이 그의 팔을 잡고는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구석에 앉은 사내 한 명이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인 것이다. 사내는 40대 후반쯤의 나이로 보였으나 어쩌면 그보다 젊은지도 모른다. 햇볕에 탄 피부와 깊은 주름, 그리고 굵고 억세게 보이는 손가락을 보면 그가 거친 일에 시달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쪽에 앉은 심재택이 사내에게 물었다.

전호근 씨, 맞습니까?

, 제가 전호근이오.

사내 앞에는 장국밥과 싸구려 보드카 한 병이 놓여져 있었다.

이곳은 너무 시끄럽군요, 전 선생.

심재택이 말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까? 우선 술이나 한잔하고 자리를 옮깁시다.

심재택의 앞에 자신의 빈잔을 놓은 그가 술을 따랐다. 그는 오성그룹 고정문의 정보원으로 구소련군의 상사 출신이라고 했다. 심재택이 술을 한 모금에 삼키고 잔을 내려놓자 그가 다시 은을 박은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고 선생한테 이야긴 들었는데 그것 입수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한 장씩만 나눠주는 것이라.

탁자 위로 상반신을 숙인 그에게서 역한 술 냄새가 풍겨왔지만 심재택은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오. 그 자리에서 쓰게 하고는 걷어가 버린단 말입니다.

보상은 하겠소. 약속대로 500달러를 낼 테니까.

그 사람은 천 달러를 내라고 합니다. 어차피 근대에 가서 돈을 못 벌게 되었으니 그 보상에다 위험수당까지 합해서.

옆자리의 최성문과 잠시 시선을 마주치던 심재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드리지. 그림 오늘 받을 수 있겠소?

물론이오. 이놈만 마시고 나갑시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잔에 술을 채운 전호근이 한 모금으로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변두리에 위치한 식당이어서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라이트를 켠 차량들만 속력을 내어 달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탄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그곳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카페 앞이다.

저기서 10분 정도만 기다리시오.

전호근이 턱으로 카페를 가리켰다.

내가 그 사람을 데려오겠시다.

그가 서두르듯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심재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식당 앞쪽보다는 번화한 곳이어서 길가의 상점 앞에는 한가한 모습의 남녀들이 모여 서 있었다. 차도에도 서너 대의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끝 쪽에 있는 검정색 볼가에는 그의 부하 세 명이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식당 앞에서부터 따라온 것인데 전호근은 모른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최성문이 길가에 서 있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카페 안은 손님이 남녀 한 쌍밖에 없습니다. 안전한 것 같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그는 최성문과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매사에 철저한 성격인데다가 더구나 이곳은 적지나 다름없다. 그는 조선족으로부터 근대에 입사하는 조건으로 북한 측에 내는 서약서 원본을 받으면 곧장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서약서는 북한 측이 불러준 내용을 모두 받아 적는 것으로 내용이 모두 똑같다고 했다. 그것은 곧 근대와 북한과의 밀약의 증거이자 근대가 파멸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10분이 조금 넘었을 때 전호근이 20대 후반의 청년 한 명을 데리고 들어섰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있었다.

이 사람이 겁이 많아서 끌고 오느라고 혼났시다. 그렇다고 내가 달랑 서약서만 들고 올 수도 없고.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자 사내는 전호근의 독촉에 저고리의 안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꺼냈다. 심재택이 종이를 받아들고는 펴서 읽는 동안 테이블 주위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심재택이 머리를 들었다.

됐습니다.

그는 최성문을 바라보았다.

돈을 드려.

최성문이 건네준 백 달러짜리 지폐 열 장을 받아 쥔 사내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가야겠시다.

전호근이 일어서며 그들을 향해 웃었다.

내 친척 조카요,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은 친척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이 카페를 나가자 심재택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됐다.

그는 만족한 얼굴로 서류가 든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쳤다.

이 안에 든 것은 근대그룹에 대한 사형선고장이야.

주문한 보드카를 마시지도 않고 계산을 하자 주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들은 밖으로 나와 길가에 세워진 볼가로 다가갔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피부에 닿는 기분 좋은 밤이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볼가의 뒷좌석 문이 열리면서 부하들이 나왔다. 그러자 주춤 걸음을 멈춘 심재택이 눈을 치켜떴다.

아니.

밖으로 나온 것은 그의 부하들이 아니다. 그의 옆을 따르던 최성문이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가 휘청거리더니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느 사이에 그들의 뒤쪽에도 서너 명의 사내들이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반항하면 죽여서 데려갈 수도 있으니까.

앞에서 권총을 겨눈 사내가 이렇게 말했고 뒤쪽에서 누군가가 그의 등을 와락 밀었다.

빨랑 움직이라우, 심선생.

그가 쑤셔 박히듯이 볼가의 뒷좌석으로 밀려 들어가자 사내들이 양쪽에 조여 앉았다. 최성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가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움직일 때에야 심재택은 자신이 이제 사지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북한 공작원이 틀림없었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자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르 호텔 옆의 해산물 식당에서 게다리 요리를 먹고 있는 고정문에게 종업원이 다가왔다.

고 선생, 전화가 왔습니다.

나한테? 누구랍디까?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묻자 종업원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모릅니다.

입구 옆쪽에 있는 전화박스로 다가간 그는 수화기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버릇이 된 러시아어로 말하자 저쪽에서는 한국어가 나왔다

고 선생, 거기 계셨구만.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정보원 중 하나인 이씨였다.

고 선생, 조금 전에 시내에서 한국인 납치사건이 일어났소. 나도 들었는데 오케안 아래쪽의 카페 앞이라고 하던데.

한국인이라면 누구 말이요?

긴장한 고정문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납치한 건 누구고?

글쎄,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여럿이서 두 명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는 거요,

두 명?

검정색 볼가에 태우고 갔답니다,

오케안 아래쪽이라면 평양식당 근처인가?

두 정류장쯤 떨어져 있지요.

이미 먹다 만 캄차카 타라바 생각이 멀리 달아난 고정문이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곧장 계산대로 다가갔다.

하바로프스크에는 근대 직원만 해도 50명이 넘었고 상사원들, 거기에다 찾아오는 관광객들까지 합하면 수백 명의 한국인이 있다. 한국인이 당하는 강도사건만 해도 하루에 한두 건씩 발생하고 있었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식당을 나온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옆쪽의 호텔을 향해 걸었다. 호텔에는 동료 직원이 세 명 있었고 조선족 경호원도 두 명이 있는 것이다.

호텔의 현관 앞으로 다가가자 제복을 입은 낯익은 수위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시간이어서 현관에는 10여 명의 남녀가 몰려서 있다. 그제야 발걸음을 늦춘 고정문이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바로 뒤를 따르고 있는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노타이 셔츠 차림의 동양인이었다. 그에게서 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고정문은 옆쪽에서 누군가 부딪혀 온다고 느꼈고 곧 뒷머리에 거센 충격을 받았다. 그가 서너 명의 사내에게 끌려 길가에 세워진 승용차에 실려지는 동안 지나가던 행인들은 아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서 있던 남녀들이 잠시 조용해졌으나 차가 떠나자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고 수위도 똑같은 모습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페 밖에서 기다리다가 불시에 습격을 받은 심재택의 부하 세 명이 차에 실려 쓰레기처럼 버려진 곳은 아무르 강변이었다. 세 명 모두 심한 상처는 입지 않아서 겨우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밤 11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재택과 최성문의 행방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실종 사실은 곧 서울로 보고되었다. 상황으로 보아 납치당한 것 같다는 긴급 보고였다.

그들은 아무르 호텔로 연락을 해서 고정문을 찾았다. 심재택이 그의 정보원을 만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고정문도 종적을 감춘 것을 알게 되었다. 호텔 옆의 해산물 식당에서 유명한 게다리 요리인 캄차카 타라바를 먹다가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을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안기부 요원들과 오성그룹 직원들의 분주한 몸놀림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깊은 밤, 새벽 1시경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아무르강을 따라 10여 킬로 위쪽으로 올라간 강가의 단층 통나무집 안에는 아직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정사각형 구조의 넓은 집 안은 식탁으로 쓰이는 넓은 탁자와 벽에 붙여진 두 개의 침대와 찬장, 그리고 서너 개의 목제 의자가 가구의 전부였는데 세 사내가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마피아는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입을 연 것은 장국진이다.

그리고 우리와도 관계가 없는 일이오. 북한과 한국과의 싸움에 오성그룹이 끼어든 모양이오.

그러자 김상철이 옆에 앉은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북한 쪽 공작원이 그랬다는 건 틀림없습니까?

틀림없습니다. 그건 오성그룹의 정보원인 이씨가 떠들고 다녀서 시내에 소문이 좌악 퍼져 있습니다.

사내는 조선족의 택시 운전사이며 마피아 요원인 배석규이다. 김상철을 도우라는 파벨의 지시를 받은 터라 그는 어젯밤 시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려준 것이다.

오성 쪽이 정보원 노릇을 하던 전 아무개란 자를 찾고 있어요. 이씨가 수소문을 하고 다니는데 아마 그자하고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배석규가 술잔을 내려놓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제일 조용한 곳은 근대요. 하지만 아마 이 사건을 알고는 있겠지요.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일만은 장인규로부터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직접 연락을 받은 터였다. 그녀는 도청을 염려한 듯 한일만이 전화를 받자 지난번 말씀드린 것 잘 되었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나서 정보원들이 가져온 정보를 들은 한일만은 한동안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것은 근대 쪽에 대한 일종의 시위 성격도 띄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위력을 보여주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근대는 이제 어쩔 수 없이 북한과 공모하여 한국기관원과 한국인들을 납치 제거한 셈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한일만은 사무실에 들어선 조병기에게 물었다.

아침에 들어온 정보는 없나?

없습니다. 오성과 안기부 양쪽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 외에는 진행사항이 없습니다, 이사님.

안기부에서 요원들이 몰려올 텐데. 그 사람들,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곧 진이 빠질 겁니다. 찾지 못할 테니까요.

조병기는 어젯밤 장인규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물론 그 며칠 전에 찾아와 이야기한 내용도 한일만은 말해주지 않았다. 근성이 있는 데다 눈치가 빠른 사내였지만 한일만과 이남호는 더 이상 김상철의 전철을 밟지 않기로 한 것이다. 밑의 직원은 시킨 일만 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그 자신을 위해서도 이득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북한 측에게 끌려갔다는 것은 이미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그것이 북한 짓이라면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군. 자네 혹시 정보원들한테서 무슨 이야기 들은 것 없나?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사님.

하지만 김상철이가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거야 오래된 소문 아닌가? 김과장이 실종되고 나서부터 나왔던 말이야. 그래서 안기부에서도 우릴 귀찮게 구는 것이 아닌가.

그에게 김상철 문제도 비밀로 했던 것은 물론이다. 회사 내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사람뿐이고 사원급으로는 장국진 한 명이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한일만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 소문도 철저히 알아보도록 해. 근거가 있는 소문인지 모르니까. 시체를 찾지 못하는 바람에 꽤 오래 시달리는구만 그래.

 

상담을 끝낸 안인석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강형문 대리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서류는 잘 되었어?

이상 없습니다. 돌아가서 본사에 연락한 다음 내일 사인해 가지고 오겠답니다.

잘 됐군.

그는 옆의 빈 의자를 손으로 두드려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일주일간 휴가를 낸 건 무엇 때문이야? 정말 몸이 아파서 그래?

그런 건 아닙니다.

집안일 때문인가, 그럼?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강형문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인가?

아닙니다.

안인석이 소리 죽여 긴 숨을 내려쉬었다. 일주일 후부터 3일간의 여름휴가가 시작되는데 전체가 한꺼번에 가는 것이 아니라 겹치지 않도록 휴가 계획을 내 조정을 받아야 한다. 안인석은 3일간의 정기휴가에 4일의 병가를 보태어 일주일의 휴가원을 냈던 것이다.

실은 러시아에 가려고 그럽니다. 이번에 시베리아에서 실종된 제 친구가 있는데요. 개척단 소속의.

안인석 씨 친구가 실종되었어?

, 그래서 제가 찾아보려고‥‥ 물론 힘들겠지만 노력은 해보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야?

비서실 소속이었습니다.

어디서 실종되었는데?

임차지의 늪에 빠졌다는데, 하바로프스크의 지사에 들러서 임차지로 보내달라고 해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주일간 그 넓은 임차지를 돌아다니겠다구? 안인석 씨 혼자서?

같이 갈 사람이 있습니다. 그 친구 애인인데, 비서실에 근무하는 …….

그것 참.

입맛을 다신 강형문이 안인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지 않겠어? 그런데 둘이 나서서 될까?

안인석이 머리를 저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됩니다, 대리님. 설령 아무런 도움이 안 되더라도 제가 이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알았어. 위에 보고를 하지.

머리를 끄덕인 강형문이 손으로 그의 어깨를 쳤다.

안인석 씨한테 그런 친구가 있는지 몰랐어. 내가 어떻게든 휴가를 받아내겠네.

 

수화기를 든 안인석은 머리를 들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 650분이다.

안인석 입니다.

인석 씨, 나야.

오랜만에 듣는 이유미의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굳어진 얼굴로 안인석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웬일이야?

오랜만이야, 인석 씨.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LA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쯤 되었어,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만나서 이야기했으면 해서.

홍만규 씨 하고 이야기할 건 다 했는데.

나도 알아.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일곱 시 반에 영동의 비엔나에서 기다릴게.

안인석은 뚜뚜 소리만 들리는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730분에 그녀와 자주 만나던 비엔나 카페로 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미 또한 그것을 믿고 있을 것이다. 안인석이 카페에 들어선 때는 740분이었다. 그가 다가와 앞자리에 앉는 동안 시선을 떼지 않은 것은 이유미였지만 안인석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여윈 것 같아.

이유미가 부드럽게 말했다.

회사 일은 잘 돼가?

머리를 건성으로 끄덕여 보인 안인석이 그제야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뭐야?

난 올가을에 약혼하기로 했어.

들었어. 그 말 하려고 나온 거냐?

미안해.

그러자 테이블에 잠시 말이 끊겼고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갔다.

어쨌든 내가 인석 씨를 배신한 건 사실이니까,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날 줄 알았는데‥‥정말이야.

넌 앞으로도 끝없이 그런 일이 일어날 거다. 결혼으로 그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야.

굳은 얼굴로 안인석이 말했으나 이유미는 입술 끝으로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위로가 된다면 마음대로 생각해.

넌 상대방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 왔어. 지금 나한테도 그래.

그럴 의도는 없었어. 그냥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내 감정은 생각이나 해봤어?

종업원이 다가와 커피잔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동안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커피잔에 설탕을 넣으면서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난 내년 봄쯤 결혼하면 여행사를 경영하게 될 거야. 그 사람과 약속이 되어 있어.

「‥‥‥」

한 남편의 아내로 집안에서 아이들 키우고 살림만 하는 여자는 안 될 거야. 나도 사업을 해서 성취감도 가져보고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도 하고 싶어. 인석 씨 말대로 끝없이 변신해 갈지 몰라. 변화를 바라면서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남자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알았어. 이제 그만해, 그리고 지난번 같은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안심을 하고.

안인석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난 네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거든. 너한테는 다행한 일이겠지만, 너한테 그 이유를 말해줘야겠다.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그가 말을 이었다.

시베리아에서 상철이가 실종되었어. 이젠 너나 네 남자한테 행패를 부릴 사람도 없다. 그리고 상철이 동생도 교통사고로 죽었어. 난 그 일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너 따위한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

너하고 상철이 둘 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난 그놈이 그렇게 된 것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래서 널 잊을 수가 있었어.

자리에서 일어선 안인석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놈한테 나는 또 신세를 진 기분이다. 잘 살아라, 이유미.

 

커피 한잔해.

종이컵에 담긴 커피잔을 박미정에게 건넨 한과장이 의자를 당겨 옆에 앉았다. 점심을 마치고 마악 자리에 앉은 참이어서 사무실은 아직 빈자리가 많다.

고맙습니다, 과장님.

자리를 고쳐 앉은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과장님은 휴가 어디로 가세요?

글쎄, 이번에도 동해안이나 갈까.

휴가가 시작되는 7월 하순이 이제 닷새 후로 다가와 있었다.

한과장이 먹다 남긴 커피잔을 그대로 휴지통에 넣었다.

그런데 박미정 씨 휴가 건 때문에 말할 것이 있어.

정식휴가 사흘에다 병가 나흘을 합해서 일주일을 신청했는데, 그건 문제 될 것 없어, 결재가 났으니까.

그는 피로한 듯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우리 팀은 이번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가을이나 겨울에 대신 가기로 결정했어, 잘 알겠지만 개척단 일 때문에.

다른 팀들도 대부분 그런 모양이야.

과장님, 저는‥‥‥‥」

설마 혼자 빠지겠다고 하진 않겠지? 그리고 실제로 아픈 것도 아니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선 한과장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내 경험인데 휴가철이 아닐 때 휴가 가는 것이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지 알게 될 거야. 이번 여름에 개척단 일을 마치기만 하면 곧 떠나게 될 테니까.

한과장이 자리로 돌아간 후 우두커니 앉아 있던 박미정이 수화기를 들었다. 안인석은 자리에 있었다.

, 이번 휴가 계획 연기되었어. 팀 전체가 일 때문에.

그러자 안인석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났다.

나도 그래. 갑자기 조장하고 일본 출장 계획이 잡혔고 돌아와서는 연달아서 바이어 상담이야. 올가을이나 시간이 날 것 같아.

수화기를 귀에 댄 박미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석 씨, 혹시 그 얘기 누구한테 했어? 상철 씨 찾으러 간다는.

그건 왜 물어?

무언가 이상해서. 날 시베리아 출장에서 빼고 또 이번 휴가도 둘 다 못 가게 된 것이.

담당 조장한테 상철이 이야기를 했어. 적당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리고 그걸 숨길 필요도 없고, 안 그래?

미정 씨가 너무 신경이 예민해진 것 아냐?

글쎄, 나는‥‥‥」

저녁에 만나. 내가 술 한 잔 살게.

안인석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그때 다시 상의를 해.

포장마차의 나무판자로 만든 의자에 겨우 엉덩이를 걸친 안인석은 취해 있었다. 술잔을 쥔 그는 흐린 눈으로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내가 하는 일은.

그는 한 모금에 소주를 삼켰다.

난 조장한테 출장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생각했어. 회사를 그만두고 시베리아로 갈 것인가 아니면 조장을 따라 출장을 갈 것인가를.

「‥‥‥‥」

결국은 출장을 가기로 했지. 내가 간다고 해도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자학할 필요 없어, 인석 씨. 그리고 합리화시키지 않아도 돼.

낮은 목소리로 박미정이 말했다.

회사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그저 우리는 최선을 다하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그의 시선을 받은 박미정이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묻고 싶은 말이었던 것이다. 좌절감의 정도를 따지자면 자신이 그보다 더할 것이다. 그러나 박미정은 이제 자신이 회사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팀이 휴가도 반납하고 해야 할 개척단 일은 이쪽만 끝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며칠 전까지 아무 말이 없던 한과장이 돌연 팀의 휴가를 보류시킨 것도 의심스러웠다. 회사는 자신의 시베리아 행을 가로막는 것이다. 소주를 한 모금 삼킨 박미정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대화 상대는 그밖에 없었다. 머리를 떨구고 앉아 있는 그를 보자 가슴이 메어 왔다.

그래, 회사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하려는 짓이 엉뚱할 거야. 회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찾고 있는데 우리가 나서서 찾고 돌아다니겠다면 말이야.

준비하지도 않았던 말이었으나 그녀는 말을 이었다.

회사를 불신하는 것 같이 보일지도 몰라, 그것도 비밀리에 시베리아로 간 걸 알면 말이야. 우리를 불러서 경고를 해도 할 말이 없어.

그놈이 빠졌다는 늪이라도 보고 오려고 했는데.

안인석이 몸을 기울이다가 술잔이 엎어져 술이 흘렀다.

이런 빌어먹을,

혼자서 소주를 거의 네 병쯤 마신 참이라 그는 술잔을 집다가 이제는 술병을 자빠뜨렸다.

그들이 포장마차를 나온 것은 밤 12시가 넘어 있을 때였다. 박미정은 안인석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쳐 몸을 받치고는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서늘한 밤바람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지 안인석이 몸을 곧게 세웠다.

나도 다 잃었어. 나한테 소중한 것들을 모두‥‥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어

그가 헛구역질을 했으므로 놀란 박미정이 그를 끌고 길가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벽에 두 손을 짚은 안인석이 먹은 것을 몽땅 토해 놓는 동안 그녀는 골목 어귀에 조바심을 내며 서 있었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간혹 지나치는 행인도 이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자 뒤쪽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벽에 이마를 대고 선 안인석이 내는 소리였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다가선 박미정은 그가 그렇게 신음처럼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기운을 내야지, . 기운을.

박미정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운을 내, 인석 씨. 견뎌내야 돼.

그러자 가슴이 터져나갈 듯 아파왔으므로 박미정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같이 견뎌 내. 우리 같이.

 

강회장 일행이 임차지에서 돌아오자 숙소는 다시 분주해졌다. 일주일 동안 임차지를 돌아보고 난 후여서 하루쯤 쉴 만도 한데, 회장은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사장단과의 회의를 주재하는 정력을 보였다.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오후 3시경 회의장에 들어선 한일만이 발끝걸음으로 걸어 이남호에게로 다가갔다. 다가선 그가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짧게 말하자 이남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회장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그는 한일만과 함께 회의장을 나왔다.

제 사무실입니다, 실장님.

복도에 나서자 한일만이 말했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이다. 그들은 서둘러 옆쪽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 내려 놓인 수화기가 보였다. 다가간 이남호는 선 채로 수화기를 귀에 댔다.

, 이실장이야.

실장님, 안녕하셨습니까?

김상철의 목소리였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이남호가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섰다.

그래, 자네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떠돌아다니다가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저쪽에서도 자넬 찾던데, 그쪽에 연락은 했나?

북한 쪽을 말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그쪽에서 빠져나왔는데 연락을 할 리가 있습니까?

지금 정국이 혼란해. 그것도 알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만나자. 만나서 얘기해. 그러고 다니면 안 되니까.

그는 머리를 돌려 한일만을 바라보았다.

장소는 어디로 정하면 좋겠나?

송화구를 막은 채 재촉하듯 묻자 눈을 깜박이던 한일만이 말했다.

디나모 스타디움 앞이 좋습니다. 시간은 저녁 여덟 시쯤. 그곳엔 요즘 경기가 없어서 ‥‥」

이남호가 송화구에서 손을 뗐다.

디나모 스타디움 앞에서 저녁 여덟 시에. 내가 직접 갈 테니 그곳에서 기다려.

알았습니다, 실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남호가 찌푸린 얼굴로 한일만을 바라보았다.

괜찮을까?

만나시는 것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아니, 이 전화 말이야.

이남호가 턱으로 전화기를 가리키자 한일만이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미리 말을 맞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제까지 중요한 일은 암호를 사용하거나 간단하게 요약한 말만으로 통화를 했던 것이다 도청이 발달된 곳이어서 마피아 쪽의 충고를 받고 나서는 내국의 통화도 조심을 해온 터였으나 한일만의 말마따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디나모 스타디움 앞이라면 인적이 드물 겁니다. 요즘 경기도 없는 데다 인도의 보수공사를 하고 있거든.

장국진이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두운 바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들의 앞에는 보드카 병이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실장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소?

내내 못마땅해 있었던지라 장국진의 말투에는 짜증기가 베어나 있었다. 그는 김상철과 함께 파벨 밑에서 일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 해결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약속은 해줄 수가 있을 거야.

무슨 약속 말이요? 지난번에도 기다리라고만 하고는 연락도 없었지 않소? 기다리면 해결될 것이라고 약속도 했을 것이고.

그곳에서는 장인규의 압박을 피해 나온 거야. 더 머물러 있기가 힘들었어.

김상철의 시선이 팽팽해졌다.

아마 그 여자는 개인적으로도 나에게 이를 갈고 있을 거다. 물론 나도 뛰쳐나와 서울에 전화를 건 덕분에 서울 일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 나만큼 너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내 말을 들어.

장국진이 다시 전처럼 말을 놓았다.

그 이유는 너와 내가 똑같은 상황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미 북한을 배신한 놈인데다가 네가 없는 근대생활은 그야말로 언제 북한 쪽에 잡혀갈지 모르는 형편이었어. 그리고 너도 이제 한국과 북한 양쪽에 쫓기는 몸이 되었고. 더 이상 기대하지 마. 그들은 방법이 없어. 너만 비참하게 될 뿐이야.

어쨌든 오늘 만나서 결정을 한다.

김상철이 보드카 잔을 들고는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내가 실종된 데다가 동생까지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감옥에 있는 아버지가 들었다면 아마 살아갈 의욕을 잃게 되었을 거야. 내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근대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면 난 서울에 연락을 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는 파벨의 심부름꾼이 되든지 장사를 하든지 하면서 이곳에서 살아야지. 그래야 아버지도 산다.

동생이 사고로 죽었다구?

놀란 장국진이 눈을 크게 떴으나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는 조건으로 근대에 아버지를 부탁할 생각이야. 제대로 형을 받고 나온 후의 생활 보장을. 나에 대한 가망이 없더라도 나는 그 약속만 받으면 된다.

85분 전. 디나모 스타디움 앞쪽 길로 검정색 볼가 한 대가 다가오더니 길가에 바짝 붙으며 멈춰 섰다. 속력을 내어 차도를 달리는 차량들은 꽤 많았지만 인도의 행인은 드문 곳이었다. 디나모 공원 안에 위치한 스타디움이어서 뒤쪽의 공원에는 여름밤의 산책객이 많았고 드라마 극장의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이남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봐, 이 길이 맞나?

스타디움이 옆쪽이었으므로 이남호가 묻자 운전석에 앉은 한일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안쪽에는 차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인 한두 명이 티셔츠에 운동화 차림으로 앞쪽에서 걸어왔다. 공원으로 가는 모양인지 가벼운 걸음으로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이남호가 다시·시계를 내려다보았을 때 옆쪽 창문에 인기척이 났다. 놀라 머리를 든 그는 조금 전에 지나갔던 러시아인의 얼굴을 보았다.

차에서 내려서 스타디움 정문 앞으로.

러시아인이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는데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서툰 영어로 말했다.

스타디움 정문 앞, 그곳에 미스터 김이 있소,

그리고는 이쪽에서 무어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남호가 문을 열고 내리자 차의 시동을 끈 한일만도 따라 나왔다.

실장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들은 곧장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에 싸여 있는 스타디움의 정문은 옆쪽으로 50미터쯤의 거리였다.

김 과장이 꽤 조심을 하는군.

이남호가 혼잣말처럼 말하자 한일만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하지요. 요즘 시내 상황도 좋지 않으니까요.

굳게 닫힌 정문이 보였고 어둠 속에 스타디움의 윤곽이 드러났지만 주위에는 인적이 없다. 그들은 정문 앞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이남호는 옆쪽 잔디밭가의 나무둥치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김 과장인가?

이남호가 묻자 다가오던 사내가 대답했다

, 접니다.

어둠 속에서 곧 김상철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 사람아, 걱정했어.

이남호가 다가온 그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걱정 끼쳐 드렸습니다.

우리 어디 가서 앉지.

한일만과도 인사를 나눈 김상철이 조금 전에 나온 나무 그늘 밑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피해 다니는 몸이어서.

정문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나 나무둥치 옆에는 낮은 돌의자가 길게 놓여져 있었다. 그들은 스타디움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그 일은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고 며칠 전에 안기부원 두 명과 오성그룹 부장 한 명이 납치당한 사건이 일어났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북한 공작원들 짓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네가 안기부 요원의 눈에 띈다면 자네뿐만 아니라 우리도 입장이 곤란해져.

압니다, 실장님. 그래서 말씀대로 기다리느라 동생이 죽었는데도 가보지도, 연락하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남호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알고 있었나?

말씀해 주시지 않을 생각이셨습니까?

솔직히 그럴 생각이었네, 자네 가슴만 아프게 할 것 같았으니까.

「‥‥‥」

정말 안 됐네. 나도 빈소에 갔었어. 장례는 잘 치렀네.

김상철이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께 연락을 해주십시오, 제가 살아 있다고. 아마 지금쯤 제가 실종되고 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아버지도 위험합니다.

그렇게 하지. 그래, 내가 책임지고 부친께 꼭 전하겠네.

그 순간이다. 스타디움 위쪽의 창에서 흰 섬광과 함께 요란한 총성이 울려 나왔다. 그리고는 사내의 외침 소리가 났는데 놀라 벌떡 일어난 이남호는 어느 사이에 김상철의 몸이 나무둥치 옆으로 굴러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조금 전의 스타디움 위쪽에서 흰 섬광이 여러 번 번쩍였다. 이남호는 한일만에게 끌려 잔디밭 위로 넘어지면서도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나무둥치에 무엇인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여러 번 부딪혔다.

김 과장!

엎드린 채 이남호가 소리쳤다.

이봐! 김 과장!

그러나 이미 김상철의 모습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눈을 부릅뜬 이남호가 스타디움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제 그쪽의 총격은 멈춰져 있었으므로 그는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실장님, 괜찮으십니까?

따라 일어선 한일만이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스타디움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차도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어둠에 덮인 스타디움 안은 깊은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드라마 극장의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 밑으로 삼삼오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드러났다. 이윽고 스타디움의 2층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김상철이 머리를 돌렸다.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장국진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는 김상철이 이남호를 만나는 동안 스타디움에 올라가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총격을 피한 그가 한참 만에 이곳에 돌아왔을 때 장국진은 마악 숨을 거두는 중이었다. 덮치듯 다가간 김상철이 장국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왔군.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놈들은 모두 돌아갔다. 그래서 이곳에 누워 널 기다리고 있었어.

이봐, 어디 맞았어?

그가 다급하게 묻자 장국진이 허덕이며 말했다.

가슴에 두 발, 아니 세 발인가

그의 가슴은 온통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병원에 가자.

그의 어깨 한쪽에 팔을 넣자 그가 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온몸을 늘어뜨렸다.

놔둬. 소용없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기다려, 내 말을 들어. 시간이 없다.

그의 말이 절박했으므로 김상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날 쏜 놈들은 북한 공작원들이다.

그의 목 안에서 가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김상철이 장국진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장국진이 서두르듯 말했다.

내 보상금, 그것을‥‥‥」

나을 거야. 내가 어떻게 하든지 ‥‥‥」

주소는 아나?

갖고 있어. 평양 보통강구 봉화산 공원 옆의 국민아파트 12125호다.

12125.

그래, 12125.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데……」

파벨한테 부탁을 할 테니까.

잘 될까?

보상금은 틀림없어. 그리고 파벨이 힘을 쓰면 어려운 일이 아니야.

이봐, 정신 차려!

그는 장국진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김상철은 장국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느덧 극장의 불빛 밑으로 사람들의 왕래는 끊겨져 있었다. 차도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도 이제 드물게 들리고 있다. 이윽고 장국진의 머리를 시멘트 바닥 위에 내려놓은 김상철이 몸을 일으켰다. 장국진은 저격하려는 자들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그것은 김상철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 대신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다.

 

강회장의 아침 기상 시간은 보통 6시여서 강미현은 530분이면 일어나 할아버지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이번 출장의 중요한 일과였다. 임차지에서 돌아와 며칠간 극동군 사령관 등 러시아 정부의 고위층을 만나며 휴식을 취한 강회장은 오늘 오후에 남은 인원들을 인솔하여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그녀도 강회장을 따라 떠나게 되었으니 고생도 오늘로 끝이었다. 깨죽 준비가 되었을 때는 610분이었으므로 강미현은 죽그릇을 받쳐 들고 서둘러 2층의 숙소로 들어섰다.

숙소는 20평 규모로 서재를 개조하여 한쪽은 침실로 쓰고 나머지는 응접실로 사용했는데 강회장은 보통 혼자서 응접실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응접실로 들어섰으나 강회장은 응접실로 나와 있지 않았다. 아마 어젯밤 로스토프와 과음을 한 때문인지 아직도 침대에 있는 모양이었다. 죽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고 할아버지를 깨울까 생각하고 있는데 탁자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회장실의 직통전화였으므로 이남호나 유장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회장실입니다.

회장님 계신가?

젊고 낯선 목소리였으므로 강미현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 그렇지만 아직 주무시는데요. 그런데 어디시죠?

난 김상철이오.

강미현이 숨을 들여 마시고는 온몸을 굳혔다.

아아, .

그쪽은 누구십니까?

‥‥‥」

순간 말을 멈추었던 강미현이 마음을 굳혔다.

강미현이에요. 회장님의 손녀 됩니다.

그렇다면 내 말을 전해요, 회장님께.

굳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실컷 이용하고 나서 쓸모없어지면 제거하는 것이 회장님의 경영철학인가를 묻고 싶었어.

어젯밤 이실장과 한이사가 날 만나자고 해놓고는 북한 놈들을 시켜 날 저격했어. 난 겨우 살았지만 날 구하려던 친구가 죽었다.

그건 오해일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강미현이 다급하게 말하자 김상철이 목청을 높였다.

닥쳐! 북한 놈들이 내 전화를 도청했다면 이실장은 그것을 알고도 내버려 둔 것이다. 난 너희들을 믿었어. 난 배신당했다, 철저하게. 너희들을 위해서 난 실종자가 되었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김상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 이젠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너희들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

김상철 씨, 저하고 만나요.

힐끗 침실 쪽을 바라본 강미현이 다급하게 말했다.

오늘 오전에, 제가 혼자 나갈게요. 저하고 이야기해요.

당신하고?

그래요, 저하고. 저를 믿으세요. 저를 만나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제 얼굴도.

당신 얼굴을?

열한 시에 베료스카 앞에서, 제가 혼자 서 있을게요. 절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전에 만났던 근대 기획의 여직원이니까요.

근대 기획의 여직원?

제 신분을 속였었어요.

그러자 침실에서 기침소리가 들렸으므로 강미현이 서둘러 말했다.

열한 시에, 베료스카.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침실 문이 열리며 강회장이 나왔다.

, 일찍 일어났구나.

속이 거북한지 강회장은 찌푸린 얼굴이었다.

 

죽은 그라노프의 후임으로 하바로프스크를 맡은 니콜라이 마르첸코는 지난번에 한일만과 만나 부임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서로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침 10, 마르크스 대로변에 있는 사무실에 한일만이 찾아오자 마르첸코는 다소 의외라는 듯 눈을 멀뚱거리고 있었다. 물론 아침 9시쯤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해온 터였으므로 갑작스런 방문은 아니다.

진하고 뜨거운 커피를 반쯤 마시고 났을 때 건성으로 세상 이야기를 하던 한일만이 정색을 했다

마르첸코 씨, 혹시 김상철을 보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김상철이라니 ‥‥‥」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던 마르첸코가 생각났다는 듯 얼굴을 폈다.

, 그 젊은 녀석 말인가요? 난 모르겠는데, 보호하다니 ‥‥ 그게 무슨 말이요?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한일만이 말을 이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하고 우리 사이에.

저런, 어떤 오해요?

북한과 관계되는 일이오.

그러자 마르첸코가 입맛을 다셨다.

내가 도와드리고 싶지만 미스터 김의 행방을 모르는 터라.

찾아주셨으면 좋겠는데, 마르첸코 씨. 모르신다면 말이오. 이건 우리한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공금을 횡령했나?

그건 아니요.

허리를 편 한일만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호화로운 집기를 가득 진열해 놓았지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들이어서 마치 산적 두목의 임시막사 풍경이었다.

북한이 장난을 친 겁니다. 그에게 그 말을 꼭 전해줘야 합니다, 마르첸코 씨.

북한이 장난을 쳤다고 말이요?

그렇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소?

그렇게만 전해도 알 겁니다.

글쎄, 찾아야 전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마르첸코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알겠소, 어쩠든 찾아봅시다.

문 앞까지 한일만을 배웅하고 사무실로 들어온 마르첸코는 따라 들어선 부하에게 말했다.

김상철에게 전해라. 근대의 미스터 한이 금방 다녀갔다고.

그렇게만 전하면 됩니까?

우리더러 보호하고 있느냐고 물었어.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찾아달라는 거야.

그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가 있었다는 거다.

어젯밤 일 말입니까?

그래, 놈은 자세한 이야기도 해주지 않더구만.

말하기 거북했겠지요. 제 부하를 죽이려고 했으니,

김상철의 동료가 죽었어. 그놈은 신원확인도 안 되었다고 하니 아마 화장되어서 강에 뿌려질 것이다.

이제 남북한 양쪽이 김상철을 제거하려는 것 아닙니까?

근대 쪽이 북한 놈들한테 부탁한 짓이지. 이제 김상철이는 골칫거리가 되었으니까.

몸을 돌린 부하가 방을 나가자 마르첸코는 소파에 앉아 방 안의 장식품들을 하나씩 주의 깊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강미현은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110분이다. 1010분부터 나와 서 있었으나 김상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초조해졌다. 베료스카 앞은 쇼핑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차도로 한 걸음 더 나왔다. 눈에 잘 띄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택시 한 대가 그녀 옆으로 다가와 섰다. 운전사는 동양인으로 상반신을 그녀에게로 굽히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타요.

한국말이어서 조금 놀랐지만 강미현은 머리를 젓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김상철 씨 부탁이오. 어서 타요!

눈을 치켜뜬 강미현이 그를 바라보다가 마음을 굳힌 듯 차로 다가왔다. 그녀가 뒷좌석에 오르자 택시는 속력을 내었다.

김상철 씨가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운전사가 백미러를 향해 말하자 강미현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날 어떻게 알아보았어요?

김상철 씨하고 조금 전에 베료스카 앞을 지나갔지요.

미인이라 금방 눈에 띕디다, 히히.

어디로 가는 거예요?

20분쯤 달리면 됩니다. 미행이 있으면 그보다 더 걸리겠지만.

다시 백미러를 올려다본 그는 핸들을 우측으로 꺾었다.

미행이 없는 모양이오. 하바로프스크 시내에서 날 따라올 놈들은 없지.

정확히 25분 후에 택시가 멈춰 선 곳은 교외의 숲속에 가려진 목조 가옥 앞이다. 앞마당에 대여섯 마리의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내려요. 난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운전사가 말하자 강미현이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상철 씨는 어디 있죠?

저기 있지 않습니까.

그가 틱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강미현은 옆쪽의 벽에 기대 서 있는 김상철을 보았다. 차에서 내린 강미현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셨어요.

밝게 들리도록 노력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당신이 회장의 손녀라니.

김상철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점점 더 당신 일가를 믿을 수 없을 것 같군.

날 만난 것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인 줄로 알아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잠자코 몸을 돌렸다. 그들은 가옥을 등지고 앉아 병풍처럼 앞을 가로막은 숲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가 울었는데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저는 자주 회의내용을 들을 수 있어요. 할아버지의 시중을 드느라고.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도 직접 들었어요. 김상철 씨를 그렇게 하라는 말씀은 맹세코 없었어요. 근대는 직원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로 이루어진 기업이지만 그것을 이용만 하고 배신할 회장님이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열기가 더해지고 있었다.

어제 김상철 씨의 전화가 왔다는 보고를 받고 회장님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어젯밤 일은 북한 측의 독자적인 행동이었단 말이요?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묻자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젯밤 늦게 이실장이 회장님께 그렇게 보고했어요. 김상철 씨가 오해할지도 모르겠다고.

회장님은 화를 내셨구요.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이실장을 꾸짖으셨어요.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믿어야 해요, 날 봐서라도.

무슨 소리냐는 듯 김상철이 시선을 들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왔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서울에 있을 때부터 당신에게 끌렸어요.

회장 딸답게 거침이 없군.

김상철이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난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말을 바꾸지 말아요.

알고 있어요, 그것도. 좋아하는 남자를 사지에 밀어 넣을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주세요.

「………」

난 결혼한다면 상대는 당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에 온 것도 당신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자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요. 택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가 턱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요. 내 혼자 힘으로 해결해 볼 테니까.

기다리시면 회장님 말씀대로‥‥‥‥」

따라 일어선 강미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위험한 일을 하시면 안 돼요.

회사를 배신할 일은 없을 거라고 전해주시오.

그것을 말한 것이 아녜요.

내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지 알아?

눈을 부릅뜬 김상철이 한 걸음 다가서자 강미현이 갑자기 상반신을 부딪쳐 왔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

알아요. 절박한 것, 당신 동생의 사고도.

「‥‥‥」

당신 아버지께는 이실장이 꼭 전해드릴 거예요.

김상철이 강미현의 팔을 떼어내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니까.

그는 이제 손을 들어 옆쪽을 가리켰다.

 

교외의 통나무집 안이다. 사방의 창문을 열어놓은 넓은 방 안에 이금철과 장인규 등 대여섯 명이 나무 탁자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저녁 바람이 방 안을 훑고 반대편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상석에 앉은 이금철이 입을 열었다.

심재택과 부하를 찾으려고 한국에서 안기부 요원들이 물려왔어. 러시아 당국에도 한국에서 압력을 넣고 있는 모양이야.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오성그룹에서도 따로 손을 쓰는 모양인데· 그자들은 막강한 자금력으로 이곳저곳에 로비를 해대고 있어.

그러자 장인규가 나선다.

지금 제일 급한 것이 김상철입니다. 그자부터 처치해야 후환이 없습니다. 심재택이나 오성그룹 납치사건도 그자가 폭로할 수도 있어요.

하긴 그렇소.

머리를 끄덕인 이금철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잘못하다가는 마피아와의 관계가 악화돼요. 만일 그자들이 보호하고 있다면 말이오.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대좌 동지.

장인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책임을 집니다.

「‥‥‥‥」

중요한 것은 우리와 근대와의 관계예요, 김상철이 그것을 폭로하면 우리들의 앞으로의 계획은 허사가 됩니다.

「‥‥‥‥」

그놈은 이제 궁지에 몰려 있으니 당연히 그럴 거예요. 더욱이 어젯밤 근대에서도 자신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을 알게 된 이상 이젠 거칠 것이 없을 테니까.

어젯밤 작전은 미숙했었소.

이금철의 말에 장인규의 눈가가 금방 달아올랐다. 그녀는 똑바로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실패한 것을 시인합니다. 우리는 장국진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머리를 들었다. 이금철의 보좌역으로 소좌 계급을 가진 사내였다. 그가 장인규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에 근대의 한일만이 마르첸코를 찾아갔었소. 그 내용을 압니까?

아직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김상철을 내놓으라는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만일 그들이 숨겨두었다면 내놓을 것 같습니까?

그러자 장인규가 머리를 저었다.

내놓지 않을 거예요. 마르첸코와 파벨은 우리 덕분에 그 자리를 차지 한 놈들이니까 더욱.

될 수 있는 한 우리 세력이 약화되어야 마음이 놓일 테니까. 우리가 김상철이를 노릴수록 그자들은 더 내놓지 않을 겁니다.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파벨은 근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다. 그리고 파리야킨을 쳐서 파벨을 밀어주었을 때 서로 제휴하자는 식의 언약만 했을 뿐으로 약점을 잡을 조처를 취할 수 없었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파벨은 근대와 파격적인 계약을 해주어서 북한 측의 체면을 살려주었고 그 덕분에 북한은 임차지에 북한에 충성한다는 서약서를 받은 조선족들을 대거 투입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파벨과 그들과의 관계는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아 빚진 것도 없는 입장이다.

이금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7시가 넘어 있었다.

좋소, 찾읍시다. 그 방법밖에 없소.

그는 탁자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장동지가 말한 대로 김상철이 근대와 우리의 관계를 한국 정부에 폭로해서 저 살겠다고 나서면 큰일이오. 이제 전 요원이 나서서 찾읍시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말을 이었다.

안기부 요원까지 서약서를 찾아갈 뻔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오. 난 이제 모든 것을 장동지에게 맡기겠소,

따라 일어선 장인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앞으로는 서약서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제부터 녹음으로 하니까요, 그것이 더 정확하고 확실합니다.

 

레닌 대로의 끝 쪽에서 공항 방면으로 꺾어지는 교차로 부근에 있는 러시아 무역상사는 3층 시멘트 건물이다. 현관의 바로 옆쪽에는 건물과 이어진 차고가 있고 차고 안에는 경비실까지 설치된 꽤 근대적인 시설이어서 인근 주민들도 정부 기관이 입주해 있는 것으로 안다.

저녁 830분이 되자 경비실로 백용길이 들어섰다.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온 참이어서 입술 주위가 벌갰고 술 냄새가 났다. 반주로 보드카를 몇 잔 마신 토양이었다.

어이, 박선생, 한잔할 거야?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납작하고 작은 보드카 병을 꺼내며 물었다. 40대 중반으로 한쪽 볼에 심한 상흔이 있는 그는 경비 책임자였다.

난 됐습니다. 백반장님이나 드시오.

박기수가 사양하자 그는 의자에 앉아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건 오선생한테 얻었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사람 말인가요?

그래, 그 사람들은 달러도 많이 갖고 있더구만.

35세로 이곳에서 일한 지 1년째인 박기수는 아직 러시아 무역상사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술병을 입에 대었던 백용길이 황급히 손을 내렸다. 차고 안에 들어와 있는 한 사내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건 웬 놈이야.

일어선 그는 부랴부랴 술병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박기수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장신의 사내를 보았다. 어두운 차고 안인데다 잡담을 하는 사이에 사내가 창고 안으로 들어선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백용길이 서둘러 경비실 밖으로 나갔을 때 사내는 이미 한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당신 누구야?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쏘아대듯 말하던 백용길의 말이 그것으로 뚝 그치고는 곧 무언가 둔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뒤로 훌떡 넘어갔다. 백용길의 뒤쪽에 서 있던 박기수는 넘어지는 그의 몸을 받아 안다가 입을 딱 벌렸다. 백용길의 이마에 뚫린 구멍과 그리고 그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와 겨누어진 총구가 거의 같은 순간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놈을 끌고 경비실로 들어가라, 어서.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이 자식아.

알았시다.

박기수는 백용길의 시체를 끌고 뒷걸음질로 다시 경비실로 들어섰다.

저쪽 구석에다 놓아.

총구로 구석 쪽을 가리키는 사내의 얼굴은 젊었다. 많이 친다고 해도 30대 초반이다. 박기수가 백용길의 시체를 구석에 박아놓는데 어느 사이에 다가온 사내가 권총의 손잡이로 그의 뒷머리를 내려쳤다.

.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박기수는 눈앞이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번 같은 장소에 충격이 오자 그는 백용길의 시체 위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차가 현관 앞으로 다가갔을 때 뒷자리에 앉은 장인규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럼 난 들어갈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을 해요.

알았습니다, 조장 동지.

앞자리의 사내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기부에서 풀어놓은 정보원들이 많습니다. 놈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있어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지.

장인규가 입술 한쪽을 올리면서 웃었다.

돈만 떼이고.

차가 건물의 현관 앞에서 멈추자 장인규가 뒷좌석의 문을 열고 내렸다. 습기가 눅눅하게 배어 있는 공기가 피부에 닿았지만 기분 좋은 밤이었다.

차가 떠나자 장인규는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 순간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옆으로 머리를 돌렸다. 제복에 모자를 눌러쓴 경비원이 차고에서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와의 거리는 5, 6미터 정도,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현관문 앞에 섰을 때 경비원도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 순간 경비원의 얼굴을 본 장인규는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김상철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벨을 눌렀다.

움직인다면 당장에 쏘아 죽일 테니까.

다가선 김상철이 장인규의 한쪽 팔을 움켜쥐었다.

날 따라와.

그 순간 현관문이 안쪽으로 열리면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나자 김상철의 총구가 곧장 그쪽으로 겨누어졌다.

, .

두 발의 무딘 총성이 현관을 울리면서 사내는 안쪽으로 쓰러졌고 다시 문이 닫혔다.

따라와.

김상철이 총구로 장인규의 허리를 찔렀다.

뛰란 말이야.

그들은 계단을 나란히 뛰어 내려가 아래쪽의 인도로 달려갔다. 그러자 현관문이 와락 열리더니 서너 명의 사내들이 달려 나왔다. 계단을 구르듯 내려온 사내들은 좌우를 둘러보다가 아래쪽 인도를 달려 내려가는 그들을 보았다. 인도에는 행인들이 적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 것이다.

저기다!

뒤쪽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거리의 모퉁이를 돌았다. 길가에 세워진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장인규의 눈에 띄었다. 김상철에게 한쪽 팔을 잡힌 장인규는 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속도면 뒤쪽의 부하들이 곧 다가온다. 그 순간 승용차의 뒤쪽 문이 덜컥 열리는 것이 보였다. 차를 대기시켜 놓은 것이다. 차로 다가간 김상철은 주춤거리는 그녀를 와락 밀어 넣었다. 뒤따라 그가 올라타자마자 승용차는 날카로운 타이어의 마찰음을 내면서 차도로 튀어나갔다. 운전석에 앉은 것은 배석규였다. 그때서야 사내들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것이 뒷창문을 통해 보였다.

이봐, 날 어떻게 하려는 거야!

눈을 치켜뜬 장인규가 소리치자 배석규가 힐끗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한쪽 팔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김상철이 대답 대신 주먹을 쥐더니 그녀의 관자놀이를 후려갈겼다. 장인규가 금방 머리를 꺾고는 비스듬히 쓰러지자 배석규가 빙그레 웃었다.

 

 

 

3. 사면초가

그날 밤 1030분이 되었을 때 아무르 호텔 건너편에 있는 의류 가게 앞에 승용차 두 대가 달려와 멈춰 섰다. 그리고는 차의 앞뒷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내리는 것은 모두 동양인들이었다. 그들은 곧 사내 한 명을 옹위하고는 가게 안으로 몰려 들어갔는데 문 앞에 지켜 서 있던 두 사내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가게에는 서너 명의 점원들뿐이었지만 안쪽의 벽에 나란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사내들은 그렇다고 손님들도 아니었다.

동양인들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사내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층에, 그리고 한 분만 올라가시오.

사내가 턱으로 옆쪽의 계단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금철이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이곳은 마르첸코가 관리하는 수입 의류 판매점이다. 그는 마르첸코와 담판을 지으려고 달려온 것이었다. 계단을 오른 이금철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르첸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이선생. 그동안 바빠서 뵙지를 못했소.

나도 그렇습니다.

악수를 나눈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아시지요?

이금철이 대뜸 묻자 마르첸코가 머리를 끄덕였다.

얘기는 들었소. 간부 한 명이 납치당하고 몇 명이 총에 맞았다던데.

김상철이 짓이오.

김상철이라면 근대그룹 사원 말이요?

그러자 이금철이 눈썹을 찌푸렸다.

마르첸코 씨, 그놈 때문에 우리의 유대관계가 깨지면 안 됩니다. 그놈이 의지할 곳은 당신밖에 없소.

난 모르는 일이요, 이 선생.

이제 마르첸코도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난 당신이 이렇게 찾아와 억지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불쾌하단 말이오. 이것은 모욕이오, 도전이고.

마르첸코 씨, 그놈이 납치해간 여자는 우리 정부의 요직에 있는 여자요. 이건 큰 문제가 될 거란 말이오.

이금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장인규는 자신의 부하도 아닌 것이다.

문제가 커지면 나도 감당을 못합니다. 그 여자는 32호실 소속이오.

그렇다면 대단한 여자군.

마르첸코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김상철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요? 당신이 왜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이런 망할.

한국어로 투덜거리고 난 이금철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 여자를 찾는 데 협조해 주시오. 김상철이가 그 여자를 다치게 하면 안 됩니다, 마르첸코. 당신은 그렇게 말을 전해줄 수 있을 거요.

어디, 정보원들을 풀어서 찾아봅시다.

소파에 등을 기댄 마르첸코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그 말이 김상철이 귀에 들어가도록 해야겠는데.

 

1230분이 되었으므로 이병택은 침대에 들었다. 하루 종일 쏘다닌 후여서 온몸이 나른한데다 술까지 두어 잔 마신 참이다. 그런 탓에 베개에 머리를 묻는 순간에 전화벨이 울리자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든 그는 짜증 난 김에 거칠게 한국어를 내뱉았다.

거기 안기부 요원이시지요?

그쪽도 한국어인데다가 대뜸 이쪽의 신원을 묻는 터라 이병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댁은 누구시오?

심재택 씨 문제로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 상반신을 일으킨 그는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무슨 말씀이신데 ‥‥ 그리고 댁은 누구십니까?

심재택 씨가 감금되어있는 곳을 압니다. 그래서 그곳을 알려 드리려고.

이병택은 베개를 집어 들고는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동료를 후려쳤다. 잠결에 베개로 얻어맞은 동료가 놀라 일어났다가 그의 손짓을 보고는 벌렸던 입을 닫았다.

그건 고마운데 우선 댁이 누구신가를 말씀해 주시오. 그래야 우리가‥‥‥」

알고 싶지 않다는 거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이병택은 우선 들어보기로 작정을 했다. 조선족 정보원들은 심재택이 오사카에 있다는 정보도 가져오는 판이다.

우선 말씀해 보시지요.

심재택 씨는 시내에서 아무르강 하류 쪽으로 20킬로쯤에 위치한 우르바크라는 마을에 갇혀 있습니다. 20여 호가 사는 마을인데 마을 왼쪽 끝의 창고가 높은 집이니까 찾기가 쉬울 겁니다.

우르바크 마을, 창고가 높은 집.

정신을 집중한 이병택이 그의 말을 반복해 보고 나서 다그치듯 물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누군지 밝혀 주시지 않겠습니까?

믿기지 않으실 것 같아서,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가 그 이유라도.

나를 위해서요.

「‥‥‥‥」

경비 인원이 7, 8명 있다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경찰에 신고를 하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서둘러야 할 거요. 곧 장소를 옮길지도 모르니까.

알았습니다, 그럼.

저쪽에서 전화가 먼저 끊겼으므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병택이 동료를 바라보았다. 눈을 부릅뜬 얼굴이었다.

서둘러. 심 과장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아.

누구야? 전화를 해온 것은?

동료가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아직 몰라. 하지만 느낌이 사실인 것 같아. 우선 경찰에 신고를 하고.

이병택이 다시 수화기를 쥐자 동료는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옆방의 동료들을 깨우려는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분 후, 우르바크 마을의 왼쪽 끝에 자리 잡은 농가에서 세 대의 승용차가 출발했다. 달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이어서 여섯 개의 헤드라이트는 국도로 향하는 좁은 길을 비치며 빠른 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선두 차에 타고 있는 것은 이금철의 보좌관이자 당에서 파견된 감시역인 유태영 소좌이다. 뒷자리에 앉은 그는 초조한 듯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 없다. 서둘러라.

차 한 대가 겨우 통행할 수 있는 비포장도로인데다 패인 곳이 많았으므로 승용차는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핸들을 움켜쥔 운전사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가속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던 그는 산모퉁이를 돌자 가볍게 숨을 내려쉬었다. 그의 앞쪽으로 국도 위를 지나는 차량의 불빛이 보이는 것이다. 이제 직선거리로 200미터만 나가면 국도 위에 올라갈 수가 있다. 그 순간 그는 차체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그러나 가속을 받고 있던 차체여서 몸이 공중으로 훌떡 떠오른 느낌을 받고는 입을 쩍 벌렸다.

이거 뭐야!

뒤에서 유태영이 악을 쓰듯 소리쳤지만 자동차는 앞쪽 부분을 땅속에 박고는 뒤쪽이 허공으로 휘익 들려 올라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길 위로 뒤집혀졌다. 뒤를 바짝 따르던 두 번째 차는 앞차가 왼쪽으로 기우뚱하는 순간에 누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하체가 번쩍 들리더니 길가로 뒤집혀 버리는 것을 보았다. 운전사는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으나 뒤집힌 앞차의 뒤쪽 옆부분을 들이받고는 멈추었다. 그리고는 세 번째 차가 앞차의 뒷부분을 세차게 들이받자 두 번째 차는 길가의 도랑으로 굴러떨어졌다.

내려! 어서!

두 번째 차의 뒷자리에 타고 있던 심재택은 좌석의 등받이에 어깨를 세차게 부딪친 참이었다. 뛰어내린 사내 한 명이 악을 쓰듯 소리쳤으므로 그는 도랑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지금이 기회다. 그렇게 생각한 그의 가슴은 벌써부터 뛰었다. 이제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짙은 어둠 속인데다가 뒤집힌 차 안에서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고 차에서 뛰어내린 사내들은 어지럽게 소리치는 중이었다.

도랑 위로 발을 내딛고 선 심재택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방 소리쳤던 사내가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첫 번째 차에서 사람을 끌어내던 한 사내가 뒤로 몸을 젖히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습격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라이트의 불빛 속에서 사내 한 명이 다시 두 손을 휘저으며 앞으로 넘어졌다. 심재택은 몸을 틀어 옆의 밀밭으로 뛰어올랐다. 도로는 순식간에 정적이 깔렸는데 세 번째 차의 터진 라지에터에서 뿜어 올리는 증기 소리가 밤공기를 울리고 있을 뿐이다.

밀밭은 무릎 높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너 걸음 발을 떼다가 주저앉은 심재택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팔이 뒤로 묶여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한데다 정적 속이어서 움직이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사내들은 제각기 엄폐물에 숨어 총기를 빼들고 있었다. 훈련이 잘된 사내들이어서 모두의 방위각이 다르다.

심재택을 찾아!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심재택이 주위에 없는 것이 확인된 모양이었다. 밀밭에 머리만을 내밀고 엎드린 심재택은 움직이는 사내들이 여섯 명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첫 번째 차에서 두세 명, 그리고 총에 맞은 것도 두세 명이다. 사내 한 명이 갑자기 권총을 들어 첫 번째와 두 번째 차량의 라이트를 향해 여러 발의 총을 쏘았다. 그러자 라이트가 부서지며 주위는 순식간에 짙은 어둠 속에 묻혔다. 심재택이 탔던 두 번째 차량은 도랑에 머리를 박고 있어서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심재택은 사내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도로를 가로질러 오더니 차체의 기울어진 부근에서 차 안을 슬며시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이다. 심재택의 옆쪽에서 무딘 발사음이 들리더니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비명소리가 났다. 그러자 곧 밤하늘을 울리는 요란한 총성이 이어졌다. 총구의 불빛을 본 사내들이 그쪽을 향해 집중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심재택은 머리를 앞으로 한 자세로 몸을 정신없이 뒤로 뺐다. 다행히 차량이 앞쪽에 가려져 있어서 엄폐물이 되었다. 얼마쯤 갔을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때 심재택은 옆에서 밀대가 부딪치는 소리에 머리끝이 곤두섰다. 숨을 죽이며 움직임을 멈춘 그의 옆으로 곧 사내 한 명이 기어 왔다.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조금 전에 총을 쏜 사내일 것이다. 사내의 번들거리는 두 눈과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심재택은 입을 쩍 벌렸다. 그는 김상철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쪽 도랑 위로 나타난 사내들의 흐린 윤곽이 보였다. 횡대로 늘어선 그들은 이쪽을 향해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상철은 심재택의 묶인 손목의 끈을 칼로 잘라내었다.

당신을 구해낸 것만 해도 다행이오.

그러면서 그는 심재택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놈들은 아직 습격한 것이 나 혼자인 줄 모릅니다. 갑시다.

그들은 밀밭의 뒤로 뒷걸음질 쳐 빠져나왔고 곧 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에 이르자 김상철이 앞장을 섰다.

곧 경찰이 도착할 거요. 내가 신고를 했으니까.

앞장서 뛰면서 김상철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경찰에 맡깁시다.

밀밭과 옥수수밭 사이를 2킬로쯤 달려간 그들은 이윽고 국도에 다다랐다, 숨을 허덕이는 심재택을 돌아본 김상철이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기운 내요.

길가에 고장 난 표시를 해놓고 본넷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가 뛰어오는 그들을 보더니 곧 본넷을 내렸다. 그들이 뒷좌석으로 쓰러지듯 들어가 앉자 차는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5분쯤 전에 경찰차 일곱 대가 지나갔습니다. 모두 특공대를 가득 태우고 있었어요.

백미러를 바라보며 배석규가 말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곧 이 길도 통제가 될 테니까.

김형,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심재택이 김상철에게 물었다.

가보면 압니다.

그러자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심재택이 머리를 돌렸다. 30분쯤 달린 후에 차가 멈춰 선 곳은 시 외곽에 있는 2층 시멘트 건물 앞이다. 차를 세운 배석규가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난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김선생.

그들을 내려놓은 배석규는 곧장 차를 몰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길가에 선 심재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로등도 없고 차량의 통행도, 인기척도 없는 스산한 분위기의 주택가였다. 깊은 밤이어서 불빛이 모두 꺼져 있는 건물들은 겨우 윤곽만 드러나 있을 뿐이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앞장을 서며 김상철이 말했다. 그가 다가선 건물은 직사각형 구조로 창고처럼 보였다. 철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선 김상철이 전등의 스위치를 켜자 곧 안이 드러났다. 천장에 닿도록 박스와 각종 통들이 쌓여 있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금방 자다 깬 얼굴의 러시아인이 구석에 놓여진 간이침대에서 마악 일어나는 참이었다. 그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인 김상철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파벨의 창고요. 난 한동안 이곳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는 김상철의 뒷머리를 바라보면서 심재택은 그가 예전의 김상철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한 것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는 자신이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점이었다. 2층에 올라 복도 옆쪽의 방으로 들어선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방은 5평쯤으로 벽에는 침대가 붙여져 있는 것이 침실인 모양이었다.

내가 왜 당신을 구했는지 압니까?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들어 심재택의 잔에 술을 따르며 김상철이 물었다.

내 실종을 믿지 않고 어떻게든 찾아내 살인죄로 잡아넣으려는 당신을 말이오.

글쎄, 누명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겠소?

그가 건네준 술잔을 받는 심재택의 말투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제 슬슬 살아났다는 실감이 나는지 제 입으로 누명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태성이는 북한 공작원들이 죽였지만 아마 그들이 내 손에 맡겼더라도 처치했을 겁니다.

그는 보드카를 한 모금에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2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먼저 북한 측과 내가 어떻게 해서 제휴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야겠군요.

김상철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 심재택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끔 손을 뻗어 보드카 병을 쥐고 잔을 채울 때에도 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말을 마친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근대에서는 날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심정이오.

그렇다면 앞으로 어쩔 생각이요? 파벨 밑에서 일할 겁니까?

심재택이 묻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김 형은 검찰에 증거서류까지 넘어가 있어서 살인 혐의를 벗기가 힘들 거요.

옆방에 장인규가 있어요.

김상철이 턱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그 여자가 자백한 이야기를 나도 녹음해 두었습니다. 물론 강제로 시킨 것이지만.

그가 가리킨 옆방 쪽의 벽을 바라보던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어떤 내용이요?

고태성은 북한 공작원들이 트럭에 밀어 사고로 위장했다는 내용이오. 그리고 김상철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손을 썼다는 것, 그 이유는 날 포섭하기 위해서였다는데 …….

「‥‥‥」

내가 당국에 쫓기게 되면 자연히 그들 품 안에 들어와 일해 줄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물론 처음 얼마 동안 나는 그들의 아지트에 숨어 있다가 탈출했지요.

심재택이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난 조선족 노동자들이 북한에 서약서를 내고 보내진다는 증거를 잡았다가 이 꼴이 된 거요. 매일 고문을 당했지만 죽이지 않은 것은 나한테서 알아낼 것이 많았기 때문이지.

그는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돌아간다면 그 서약서 문제를 보고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소? 김형과 상관이 있는 일일 텐데.

북한의 손을 거치는 노동력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근대는 북한 측 사람들을 쉽게 파악할 수가 있지요.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심재택이 몸을 소파에 기대었다.

김형은 사면초가의 상황이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과장님을 구해드린 것 아닙니까? 나한테 그 대가는 해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시계가 새벽 3시를 쳤다. 방에 들어선 김상철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창고를 개조한 방이어서 창문도 없는 데다 가구라고는 소파와 침대뿐이었는데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장인규가 머리를 들었다. 잠을 자지 않았는지 두 눈이 붉게 충혈된 데다가 한쪽 입술 가에는 피딱지가 붙어 있어서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두 눈을 치켜뜬 장인규가 그를 쏘아보았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우르바크 마을에서 심재택을 빼냈어, 그는 지금쯤 호텔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간 그는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네 녹음테이프도 들고 갔어. 이제 그 사람이 유일한 내 희망이다.

넌 순진하지만 행동력은 있어.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끈기도 있고.

장인규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파벨이 도와주었겠지? 우르바크 마을을 습격하는 걸 말이야.

도움을 받은 셈이지.

그럼 약속대로 날 보내줘야 할 텐데.

그러자 김상철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약속을 믿었다니, 너도 순진한 편이야.

그럼 없앨 테냐?

내 생각에는 그것이 나을 것 같은데. 내보내서 다시 후환을 만드느니.

난 나가도 예전처럼 일을 못 해. 아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장사나 하게 될 거야.

장인규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평양에서 소환해 가려고 하거나 사람을 보내 추궁할 거야. 하지만 난 러시아 시민이야. 네 덕분에 그자들의 비판대상이 되겠지만 공공연히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날 돌려보내 줘. 난 살고 싶어.

말투는 그랬지만 그녀는 눈을 치켜뜨고 김상철을 노려보았다.

내가 너한테 협조한 순간 북한과의 관계는 끊긴 셈이야. 내가 너한테 고문을 당했건 어쨌건 간에 난 그들을 배신한 셈이 되니까.

너무 쉽게 뒤집히는 여자야, 너는. 그래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상황에 적응하는 거야.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장인규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날 보내줘.

「‥‥‥‥」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가면 파벨을 만날 작정이야. 그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어. 내 사업체도 있으니까. 자진해서 그의 보호를 받을 거야.

난 네가 해달라는 대로 모두 협조해 주었어, 약속은 지키겠어.

이윽고 김상철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행 열차를 타야겠군, 그럼.

 

창밖으로 소나무 숲에 쌓인 낮은 언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차창을 열어놓아서 짙은 숲 냄새가 차 안으로 밀려들어 왔으므로 박미정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 위를 부드럽게 달리는 고급 승용차의 핸들을 쥔 것은 안인석이다. 그가 아버지의 차를 빌린 것은 오랜만이었다. 대학 시절, 잘난 체하는 졸부 딸의 기를 죽이려고 빌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박미정의 기를 살리려는 의도였다. 어쨌든 소음과 진동이 적은 고급 차는 편안했다.

토요일 오후여서 그들처럼 바다로 향하는 차량의 긴 대열이 길을 메우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다. 안인석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학 1학년 때인가, 바다에 간 적이 있지. 그땐 동해 바다였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바닷가 횟집에서 우리 또래들과 싸움을 했어, 우리는 둘이었고 그쪽은 넷이었는데 난 그때 처음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 보았어.

「‥‥‥」

일주일 만에 아버지가 꺼내주셨는데 그해 여름의 추억은 그것으로 끝이야,

박미정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안인석의 시선이 힐끗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이야기를 할까?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어. 그때도 상철 씨하고 같이 갔던 거야?

그래, 싸움을 건 것은 그놈들이었지만 다친 것도 그놈들이었지. 그렇게 만든 건 상철이었고. 우리는 도망쳤다가 얼마 못 가서 나만 잡혔는데 내가 뒤집어쓰기로 미리 말을 맞추었어. 왜냐하면 상철이가 부탁을 하더라구,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골치 아프니까 네가 나서라는 거야.

앞을 바라본 채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식이나 나나 순진했어. 그 말을 한 놈이나 그 말을 믿은 놈이나.

차가 산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바다가 보였다. 흰 백사장 자락에는 수많은 인파가 들끓고 있다.

12일로 가까운 서해안의 해수욕장에 다녀오자는 안인석의 제의에 박미정은 선선히 동의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때로는 상처가 다시 후벼지듯 아파올 때도 있었지만 같이 나눈다는 의식이 있는데다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인석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다. 아마 안인석이 느끼는 감정도 그럴 것이었다.

그들은 해변가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둘이 나란히 들어서서 방 열쇠 두 개를 받아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듯 프런트 직원이 그들에게 자주 시선을 주었다.

수평선에 붉은 태양이 걸려 있는 때였다. 바닷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그들은 어둠에 덮인 백사장으로 나왔다. 물결의 흰 끝이 소리 없이 미끄러져 왔다가 밀려가는 백사장에는 연인들의 쌍이 많았다. 그들은 백사장의 한쪽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참 우습지.

안인석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는 아버지가 회사를 경영할 생각이 없냐고 묻더군. 친구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데 한국 파트너를 찾는다는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의료기기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회사로 장래성이 있어, 아버지가 도와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젖은 모래를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던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가 우스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회사 그만두고 병원 사무장이나 하면 어떻겠느냐고 어머니를 통해 물었을 때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단 말이야.

「‥‥‥」

집에서도 유미가 여행사 사장과 곧 결혼한다는 걸 알아. 그래서 그 일로 자극을 받으셨나 했더니 어머니 말씀은 아니라는 거야. 내 생활 태도에 성실성이 보여서 그랬다나.

그래서 어떻게 했어?

어떻게 하기는, 그냥 회사에 다니겠다고 했지. 회사에서 승부를 걸겠다고,

「‥‥‥」

난 그 애는 이미 잊었어. 이상하게도 요즘은 생각도 나지 않고, 그 애 얼굴도 떠오르지 않아.

잘 되었네.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습기를 머금은 끈끈한 바람이었다. 안인석이 머리를 돌려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난 너하고 있으면 편안해져. 바쁘고 초조하다가도 네 얼굴을 보면 긴 숨이 나오고 그냥 네 옆에서 쉬고 싶어져.

그러자 박미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분위기가 그렇게 쳐졌어?

넌 어때? 나에 대한 느낌이.

박미정이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바다 쪽으로 뿌렸다.

마찬가지야, 나도. 그리고 그만큼 가슴도 아프고.

「‥‥‥」

아직 희망은 버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나한테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어,

얼마 전부터 널 생각하거나 만날 때마다 죄책감 같은 감정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그것 때문에 널 멀리하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안인석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손에 쥐었던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넌 내 희망이야.

메마른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도 노력하겠어. 네가 날 그렇게 느낄 때까지.

 

강회장이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지 10여 일이 지난 후이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회장이 서류를 읽고 있을 때 이남호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회장님, 어제 하바로프스크 교외에서 한국인 두 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지난번 납치되었던 사람들 같다는데요.

그렇다면 안기부 요원하고 오성그룹 직원인가?

이남호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렇습니다. 탈출해 나온 한 사람만 다행히 목숨을 건진 셈이지요.

탈출했다는 과장인가 그 사람은 운이 좋군.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했던 모양입니다. 경찰이 포위하는 혼란 통에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별문제는 없겠지?

이남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느 정도 증거를 확보했다가 저쪽에 다시 빼앗겼을 테지만 윤곽은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회장님.

미련한 놈들, 아니 한심한 놈들이야. 그따위 50년 전 방법을 아직도 쓰고 있다니.

강회장이 두어 번 혀를 찼다.

이것, 안기부나 오성그룹 모두가 상황을 시끄럽게 만들겠어.

그래서 한이사와 유전무한테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김상철이 소식은 있나?

아직 없습니다, 회장님.

그놈이 납치했다는 북한 공작원도?

, 아직.

그러자 방 안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이남호였다.

김상철은 이제 우리가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 큽니다.

폭약의 뇌관이야, 김상철이는. 어떻게든 그놈을 찾아야 돼.

혼잣말처럼 말한 강회장이 이남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일만이한테 분명히 전해. 서툰 짓 하지 말고 김상철이를 내가 만나잔다고 하더라고. 그놈에게 이 말을 틀림없이 전하란 말이야.

, 회장님.

이남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자네나 한일만이 다시 나서겠나? 그놈이 그런 꼴을 당하고서도 자네들의 말을 믿어줄 것 같나?

내가 나서겠어. 그리고나서 내 말도 못 믿는다면 하는 수 없지.

 

점심때가 되어서 서류를 덮고 나갈 준비를 하던 이남호는 전화벨이 울리자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실장님, 저 강미현이에요.

아니 웬일이야?

조금 놀란 이남호가 눈을 크게 떴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때문인지 강미현은 사적인 이야기를 해온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런 전화도 처음인 것이다.

그룹 사장과의 점심 약속을 취소한 이남호가 그녀와 마주 앉은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회사에서 꽤 떨어진 시청 앞 경양식집으로 장소를 정한 것은 긴한 이야기가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양식을 주문하고 수프가 나왔을 때 강미현이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 지난번 제가 회장님하고 시베리아에 갔을 때 김상철 씨를 만났어요.

수프를 소리 나게 삼킨 이남호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김상철이를? 미현이가.

머리를 끄덕인 강미현이 김상철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가는 동안 이남호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상철 씨는 회사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줄로 믿고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약속을 받고 싶었던 거예요.

말을 마친 강미현이 식은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전 회장님은 그런 의도가 없으셨다고 말해주었지만 이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더군요. 믿을 수 없다고.

위험한 일을 했는데.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회장님에 말씀드린 건가?

아녜요, 실장님한테 처음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쭤보고 싶은 일도 있고 해서요.

강미현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상철 씨 부친은 찾아가 보셨어요?

머리를 끄덕인 이남호가 물잔을 쥐고는 한 모금을 마셨다.

사람을 시켜 만나게 했어. 그분은 모두 알고 계시더구만. 친구와 친척이 그동안 면회를 갔던 모양이야.

우리가 보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안심하는 것 같았다는 거야. 지금은 식사도 잘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

교도소에 들어가면 생에 대한 집착이 대부분 강해진다고 들었어. 쉽사리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아.

이남호는 테이블에 상체를 기대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미현이가 그 친구한테 왜 그렇게 관심을 갖지?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면서, 또 집안일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가 뭐야?

제가 만난 남자 중에서 제일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었거든요.

허어.

입을 벌리고 신음소리 같은 짧은 탄성을 뱉은 이남호가 곧 입맛을 다셨다.

회장님이나 아버님이 아시면 어떻게 하려구 그런 무모한 일을.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그래서 언젠가는 모두에게 말씀드릴 생각이에요.

그 친구는 여자가 있어. 비서실에 근무하는 직원인데.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여자는 그가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곧 잊겠지요. 그저 그런 감정으로 만났다가 무슨 상처나 유혹, 또는 계산으로 헤어지는 그런 평범한 관계일 테니까요. 아마 그 여자도 지금쯤은 상처를 달래려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달라요.

야단났군.

실장님이 도와주셔야 돼요. 솔직히 제가 의지할 분은 실장님밖에 없어요.

정말 야단났어.

이남호가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날더러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안기부에 적극적으로 손을 써 주세요.

이제까지는 소극적이었단 말인가?

그랬어요.

다시 입맛을 다신 이남호가 입을 다물자 강미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이사한테 지시를 해주세요, 절대로 다른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지난번의 실수 한 번이면 족해요. 제가 만났을 때 겨우 그 사람을 달래놓았는데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돼요, 실장님.

그러자 길게 숨을 내려쉰 이남호가 머리를 창밖으로 돌렸다. 햇살이 느슨하게 내려앉고 있는 오후였다.

 

오성그룹의 비서실장 조영규가 점심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자 최선호 전무가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실장님, 고부장 시신은 내일 도착합니다. 조금 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테이블 앞에 선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공항에서 곧장 장지로 옮기도록 조처를 했습니다.

장지가 천안이던가?

, 천안에서 30분쯤 거리에 있는‥‥‥」

기자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해. 매스컴에 발표되지 않도록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이 사건으로 조영규는 회장에게 단단히 기합을 받은 것이다. 부장급 간부가 외국에서 납치 살해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더욱이 납치한 범인들이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이 되는 데다가 제일 신경이 쓰였던 것은 안기부 요원들과 같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그저 세 명의 한국인 회사원들이 납치당했다고 크게 보도를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곧 세 사람의 신분이 파악되었다. 다행히 안기부에서 협조를 해준 덕분에 고부장만 0그룹 직원이라고 발표가 되면서 사건이 흐지부지 되었던 것이다.

조영규는 그제야 최선호에게 앞쪽 의자에 앉으라는 턱짓을 했다. 그의 심기가 아직도 편치 않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아우성치던 북한의 항의가 뚝 끊긴 걸 보면 근대와 북한과의 비밀협상이 분명 있었을 거야.

조영규가 안경알 속의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내 생각도 당신과 같아. 고부장은 그 서약서인가 뭔가를 찾다가 당한 거야.

사건 직전에 안기부 요원과 접촉했다니 틀림없습니다. 직원들한테도 곧 증거물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니까요.

그러나 안기부 쪽에 확인할 길은 없다. 납치되었던 두 사람 중 한 명만 피살된 채 하바로프스크 교외에서 발견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도 실종 상태인 것이다.

최선호가 말을 이었다.

근대는 북한뿐만이 아니라 마피아와도 밀착되어 있습니다. 마피아의 수뇌진이 폭사 당한 후에 등장한 파벨은 근대에 협조적입니다.

파이프라인 공사가 앞으로 몇 달 후면 끝난다는데, 연구소의 보고에는 내년 하반기부터 시장에 영향이 오게 돼.

알고 있습니다.

경쟁력을 잃은 우리의 석유화학 제품이 살아남기 힘들단 말이야.

조영규가 안경을 벗더니 손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하게 닦았다. 그의 맨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으므로 최선호는 시선을 돌렸다.

근대처럼 종합 생산시설을 갖춘 기업이 원유까지 생산하여 자사 제품의 생산에 활용하면 원가가 엄청나게 절약되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최대 경쟁기업인 오성에서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 저는 오늘 저녁에 도쿄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들어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최선호가 인사를 하자 조영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임차지에 벌써 3만 명이 넘는 노동력이 들어가 있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속도가 빨라.

수시로 보고를 드리지요,

방을 나온 최선호는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어쩐지 고립된 기분이 들고 있는 것은 정부에서 근대의 석유생산을 자신들의 공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청사진을 늘어놓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안기부와의 관계도 갑자기 소원해져서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연락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재택이 안기부장실에 들어온 것은 작년 초에 차장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안기부장 권준규는 정치색이 엷은데다가 나름대로 외교와 경제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진 인물이다. 그가 부임하고 나서 세계 각국, 특히 한국과 외교관계가 활발하지 못한 국가에 대한 정보를 경제계에 주기적으로 전달해주는 체제를 만든 것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윽고 권준규가 서류를 덮고 머리를 들었다.

심과장도 그렇지만 이 친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내고 있구만 그래.

그의 얼굴에 어느덧 웃음이 떠올라 있었으므로 심재택도 굳혔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 부장님. 그는 이제 저희들한테 매달리고 있습니다.

근대에서는 지금도 찾고 있겠구만.

, 아직 증거는 잡지 못했지만 그들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김상철은 믿고 있습니다.

권준규가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다시 책상 위의 서류 표지를 내려다보았다.

심재택이 하바로프스크의 창고를 나온 것은 아침 7시경이었다. 호텔의 직원들에게 연락을 한 그는 곧장 공항으로 나가 일본행 첫 비행기를 타고 그곳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권준규가 내려다보고 있는 서류를 만드는 데 3일이 걸렸고 그것이 부장실에서 닷새 동안이나 보류된 후에 그가 불려온 참이다.

김상철이는 지금 어디에 있나?

권준규가 다시 물었으므로 심재택이 허리를 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습니다. 파벨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인 혐의가 벗겨지면 다시 근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본인도 희망하고 있고 근대 쪽에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관리하기 쉬우니까 환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던 권준규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근대에서 북한과 그런 협상을 했다는 건 이유가 어떻든 간에 근대그룹에 치명적일 수가 있어. 북한에 충성한다는 서약서를 낸 노동자를 받아들이다니.

나도 이걸 읽고 며칠간 생각을 해보았는데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문제만 터뜨리고 발을 뺄 수는 없고.

제가 보고드렸다시피 이제 북한은 서약서 대신 녹음으로 대체한다고 합니다. 증거를 잡기는 이제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협상을 할 차례가 된 것 같아, 근대하고.

권준규가 씁쓸한 표정으로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강회장이 전처럼 완강하게 우릴 따돌리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부장님.

그리고 김상철이 문제인데, 이 녹음테이프로 그의 결백이 입증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무리 심과장의 현장 보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 그것은 ‥‥‥」

사건의 전개를 보면 김상철이가 직접 살해하지는 않았어도 방조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 같고.

, 그렇습니다.

심재택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씻었다.

하지만 그를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근대와 중요한 협상을 해야 될 시점이야. 러시아 핑계를 대고 임차지에 우리를 접근시키지 않았던 강회장을 단단히 걸고 넘어가야 돼. 그러기 위해서도 김상철을 풀어 줄 수는 없어.

「‥‥‥‥」

북한에 충성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노동자들이 임차지에 들어가는 상황이야. 그곳이 러시아 땅이라고 하더라도 근대는 한국 기업이고 한국의 재산이야. 강회장은 이제 우리 제의를 받아들여야 돼.

, 그렇습니다.

실종되었다던 김상철이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걸고 들어가야겠어. 안기부 요원을 살해하고, 마피아를 치기 위해서 북한과 제휴하고, 그들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 모두가 김상철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었어. 그래서 근대는 그를 실종으로 보고했다가 나중엔 제거하려고 했지.

얼굴이 달아오른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부장님, 그렇게 되면 김상철은 도저히 ‥‥‥」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안 됐지만 국가를 위해서나 근대그룹을 위해서나 그자는 희생되어야 할 것 같네.

굳어진 심재택의 표정을 본 권준규가 표정을 부드럽게 바꿨다.

그가 내 중요한 간부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는 표창을 해줄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이 일과는 별개야.

 

소파에 앉은 유장석과 이대각은 모두 작업복 차림이었다. 겨울에는 눈에, 여름에는 햇볕으로 새까맣게 그을려진 두 사람의 피부는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연락도 해주시지 않고.

한일만이 앞자리에 앉으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예고도 없이 헬기를 타고 하바로프스크에 온 것이다.

직접 만나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김상철이 문제야.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어?

그러자 한일만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려쉬었다.

저도 지금 그 친구 때문에 머리가 아픕니다. 연락이 끊긴 지 꽤 되었어요.

왜 끊겼는데?

한동안 은신하고 있던 조선족 마을을 빠져나간 후에 연락이 끊긴 겁니다.

글쎄 그 이유가 뭐냔 말이야?

유장석이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장국진이는 어떻게 되었어? 그 친구도 실종되었다면서

, 김상철이와 같이 있는 모양입니다.

「‥‥‥‥」

걱정입니다. 이실장께서도 찾으라고 하시는데 회장님께서 직접 만나시겠다고.

회장님이 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주실 모양이지요. 아마 참고 기다리라고 하실 겁니다.

이대각이 헛기침을 하고 나섰다.

이봐요, 한이사. 김과장이 이쪽에 연락도 하지 않는다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니요?

문제라니? 그게 무슨 말이요?

한일만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김상철이 초조하고 불안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우리도 최선을 다해왔어요. 문제는 없었소.

그렇다면 왜 연락을 안 해? 의지할 곳은 이곳뿐인데.

낸들 압니까? 그래서 나도 속이 탄단 말이오.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지는 않았소?

말 삼가하시오, 이 이사.

난 말 삼가 안 해도 이사까지 됐어. 당신과는 달라.

그러자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해. 우리가 한이사를 추궁하려고 온 것은 아니니까.

그는 아직도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있는 한일만을 향해 말을 이었다.

김과장이 은신해 있을 곳은 추측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마피아하고 사이가 좋습니다. 아마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을 것 같은데 그쪽은 부인하고 있습니다.

혹시 북한 놈들이 어떻게 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은신처에서 나왔다는 증거도 없지 않아.

그럴 리는 없습니다, 전무님.

그럴 리가 없다니?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나?

우리와의 관계를 봐서도 그렇고 그들도 김과장을 찾는데 협조적입니다.

다시 이대각이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더니 입을 열었다.

난 까놓고 말하는 성질이라‥‥ 혹시 말이오. 김과장이 살인 혐의로 검찰의 추적을 받고 있는 데다 그가 잡히면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아예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요?

이것 봐요, 당신. 그렇게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한일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신은 회사 전체를 모독하고 있어. 이사쯤 되었으면 말을 가려서 하라구.

왜 회사를 끌어들이는 거야? 나는 이곳 책임자인 당신한테 말하는 중이란 말이야.

이대각이 큰머리를 뒤로 젖히고 그를 쏘아보았다.

연락이 끊긴 지 두 달이 되었는데도 찾지 못했다니, 나 같으면 마피아 보스를 만나 담판을 지어서라도 확인을 받았겠다.

공과 사를 혼동하지 말아. 사방에 안기부 요원과 오성그룹의 정보원이 깔려 있는 상황이야. 임차지에서 실종되었다고 한 김상철이를 공개적으로 찾아다니란 말이야?

그만!

유장석이 낮게 소리치자 그들의 말다툼이 그쳤다.

회장님까지 찾으신다니 한이사가 애를 써야겠는데.

그가 한일만을 향해 말했다.

본사와 연락하다가 김과장의 여동생 사고 소식을 들었어, 그래서 답답한 김에 이렇게 날아온 거야.

「‥‥‥」

나도 나름대로 알아보았어. 김과장은 이제까지 서울에 있는 친구한테도, 그리고 애인한테도 연락한 적이 없어. 그들은 김과장이 임차지에서 실종된 줄로만 알고 있더구만.

「‥‥‥」

김과장은 동생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신이 실종되었다는 것은 공식 발표된 일이니만치 아버지한테 전해졌으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을 거야.

유장석이 굳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연락을 해주지 않았어. 보통 사람 같았으면 서울에다 연락을 해서 아버지한테 전해달라고 했겠지.

「………」

그것은 무슨 뜻인지 아나? 김과장이 아직도 회사를 위해 피눈물 나는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뜻이야. 만일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그놈은 살아 있어요. 쉽사리 죽을 놈이 아닙니다.

이대각이 말을 받았다.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렇게 쉽사리‥‥」

 

파리야킨이 죽은 후로 그의 장대한 저택은 빈집이 되었다. 그의 가족들이 도망치듯 러시아를 떠났기 때문인데 대부분의 가구도 남겨 놓은 채였다. 그러나 그들은 수백만 달러의 현금이 있었으므로 지금 미국에서 백만장자 행세를 하고 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김상철이 은신처를 부탁하자 파벨은 그를 선뜻 파리야킨의 저택으로 보내주었다. 그들은 묘한 인연이었다. 김상철은 파벨로 인해서 죽은 자의 빈집을 차지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주인만 없을 뿐이지 완전히 빈집은 아니었다. 가정부 두 명과 경비원 겸 관리인 세 명이 저택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 7, 아침 운동으로 호숫가를 달려온 김상철이 땀에 젖은 몸으로 아래층의 로비로 들어섰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그는 보통 2층의 응접실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TV를 본다. 그가 넓은 로비를 지나는데 경비원 안토노프가 다가왔다. 그는 50대 후반의 퇴역 선원으로 저택의 관리 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 10분쯤 전에 서울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다시 건다고 했소.

누구한테서 왔습니까?

김상철이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밝히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온 전화라면 심재택이다. 그가 전화번호를 알려준 유일한 서울 사람인 것이다. 응접실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있군, 나야.

심재택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밖에서 전화하고 있는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당신 서류는 기각되었어.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다고 해봤지만이렇게 알려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야. 정말 미안하네.

아버지는 별고 없으시던가요?

건강하셔. 내가 확인해 보았어.

자세한 내막은 말해줄 수 없지만 상황이 묘하게 틀어졌어. 그래서‥‥‥」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난 당신한테 빚을 졌어. 잊지 않고 있네.

아버지나 잘 부탁합시다.

포기하지 마라. 기운을 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은 응접실 안을 둘러보았다. 가끔 파벨이 생각날 때마다 전화를 해왔지만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연락할 곳도 없는 감옥 같은 생활이었다.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그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여보세요.

, 나야.

이번엔 파벨이다.

어제저녁에 근대의 한이사가 마르첸코를 찾아왔다는 거야. 우리가 당신을 숨겨둔 줄로 믿고 있는 것 같다더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강회장이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거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달라는데, 어때, 하겠나? 우리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딱 잡아뗐지만 상관없어. 거짓말이 탄로가 나더라도.

만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파벨 씨. 지금 상황으로는.

그럴까.

조금 전에 한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 혐의가 풀려날 가능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근대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겠군.

한이사가 근대와 우리와의 협력관계 등을 꽤 오랫동안 강조하고 돌아갔다고 했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압니다, 파벨 씨.

내가 조만간 그쪽으로 가겠네. 그때 만나지.

파벨이 김상철에게 호의적인 것은, 물론 파리야킨을 제거하는데 그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은 다시 방의 한쪽에 시선을 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파벨은 근대와의 관계가 나빠지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었다.

 

아침 10, 서울의 근대그룹 본사 총회장실에 들어선 안기부장 권준규와 제2차장 오성룡, 그리고 심재택은 강회장과 이남호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건설 중인 근대시와 유전에 관한 이야기가 잠깐 오고 간 후에 여직원이 가져온 차를 제각기 두어 모금 마시고 나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강회장의 시선을 받은 권준규가 입을 열었다.

임차지에 저희 요원을 상주시켜 주시도록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물론 요원들은 근대직원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인력관리자라든가 보안, 또는 사상 문제까지 관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강회장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권준규가 말을 이었다.

러시아 쪽이 거부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계약서를 우리도 검토해 봤지만, 인력관리 조항에는 그런 내용이 없더군요. 러시아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될 것 같습니다.

힐끗 강회장을 바라본 이남호가 나섰다.

그건 지난번에 여러 차례 말씀드렸던 내용인데, 갑자기 또 이러시는 건 이해 할 수가 없군요. 부장님 .

글쎄,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가 그것을 알아내지 못할 것 같습니까?

그러자 제2차장 오성룡이 끼어들었다.

러시아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근대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남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의 어떤 자세가 그렇습니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제까지 근대가 보인 행동이 그렇습니다. 정부에 비협조적이었다고. 러시아 핑계를 대고 우리 요원들의 접근을 봉쇄시킨 것, 그리고는 우리 요원을 살해하기까지 했지요.

눈을 치켜뜬 이남호를 마주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임차지로 들어가는 조선족 노동자들은 북한에 충성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들어갑니다. 여기 있는 심과장이 그 서약서를 입수했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되었었지요. 그러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나왔습니다.

「‥‥‥)

그 와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줄 압니까? 근대에서 실종되었다고 발표한 김상철과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을 막으려고 근대와 북한 공작원들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희 요원을 살해한 것도 자신과 북한 공작원의 소행이었다는 것도 자백했지요.

강회장의 목에서 신음 같은 울림소리가 흘러나왔으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얼굴이 돌처럼 굳어진 이남호가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심과장, 증거가 있습니까?

그의 행적을 모두 들었습니다. 이 실장께서 한일만 이사와 함께 그를 스타디움 앞으로 유인해서 북한 공작원을 이용, 제거시키려고 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김상철의 동료가 대신 죽었지요. 장국진이라고 하더군요. 이만하면 제가 김상철을 만났다는 사실을 믿으시겠습니까?

증거가 또 있습니다. 김상철이 장인규라는 북한계 조선족 해외 특수사업반 소속의 여자를 잡아, 받아 놓은 녹음테이프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거기엔 근대와 북한과의 관계, 그리고 북한 공작원들의 활동이 모두 녹음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강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본의가 아니었어.

메마른 목소리였다. 그는 심재택과 권준규를 매서운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난 그따위 공산주의자들의 수단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야. 우리 근대그룹도 마찬가지고.

그는 이제 권준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좋소, 권부장. 나도 언젠가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지금이 적당한 시기 같소. 이왕 말이 나왔으니 권부장이 말씀하신 대로 당장에 시행합시다.

권준규가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강회장님, 우리는 회장님께 협조를 바라는 의도였으니 이해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약간 독선적이라서 남의 간섭을 싫어해요. 그런 이유 외에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곧 실무차원에서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적극 협조하지요. 그 서약서인가 뭔가‥‥ 나는 소문만 들었는데, 설령 소문이라고 하더라도 경계해야 되니까.

그는 이남호에게로 허리를 돌렸다.

이실장, 알아듣겠나? 실무차원에서 적극 협조하도록.

알겠습니다, 회장님.

머리를 숙여 보인 이남호가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만나셨다는데.

헤어졌습니다.

상체를 반듯이 세운 심재택이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마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요.

내가 그를 어떻게 하려고 했다는 말을 설마 믿으시는 건 아니지요?

그러자 권준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어떤 짓이라도 하니까요. 심과장은 그자의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믿기지가 않아서 그럽니다.

그만해.

강회장이 그의 말을 잘랐다.

부장께서도 말씀하시지 않나? 그자의 말은 무시하라고 말이야. 어서 실무계획이나 준비하라구.

저녁 식사가 끝나고 숭늉을 한 모금씩 마시던 강회장이 생각난 듯 강용식을 바라보았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김상철이가 배신을 했다. 놈은 안기부 요원을 만나 모든 것을 털어놓은 모양이야.

놀란 강용식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기부 요원한테 말입니까?

오늘 권부장이 찾아왔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강회장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렇지 않아도 은근히 인력관리에 신경이 쓰였던 참이야, 잘 됐어. 안기부에서 맡아주겠다니까. 여기서 보낸 노조가 북한계 골수분자들과 손을 잡으면 머리가 아파져. 유장석이도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거든.

강미현은 식탁에 시선을 준 채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나 기력을 차릴 힘도 없다. 강회장의 목소리가 다시 식탁 주위를 울렸다.

그놈, 내가 직접 만나서 조금만 더 참으라고 말해줄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숨어 있겠지. 러시아 땅은 넓다.

식사가 끝났으므로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은 강미현을 포함해서 그들 셋이다. 잠시 부자간의 대화가 끊어졌으므로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그 순간 강미현은 숨을 멈추었다. 강회장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놈은 회사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줄로 믿고 있는 모양이야.

강회장은 그녀를 향해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지사의 한이사가 그런 수단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실장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했다면 나한테 이야기를 한다.

제거하다니요? 우리가 언제‥‥‥」

강용식은 내막을 잘 모른다. 강회장의 시선이 다시 강미현에게로 향해졌다.

이제 그놈에게 기회는 거의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이실장한테서 다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강용식이 강회장과 강미현을 번갈아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강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놈의 마음도 근대를 이미 떠났을 것이다. 하긴 제가 살아야 회사도 있는 법이지.

아버님, 이실장이 무슨 이야기를 했단 말씀입니까?

참지 못한 강용식이 묻자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끝난 일이다. 그놈과 우리 근대와의 인연이 끝났듯이 미현이의 감정도 끝났을 테니 넌 묻지 않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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