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도시 2-1
2권
1. 탐욕자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저녁때였다. 사흘 앞으로 다가온 러시아 정부와의 임차계약 준비로 서울에서 중역진이 대거 몰려왔으므로 콤소몰 광장 근처의 숙소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함박눈이 내리다 그친 저녁 날씨는 그다지 춥지 않았고 바람도 없다.
김상철이 아래층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서자 한일만과 마주 앉아 있던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어서 와, 김대리. 거기 앉아라.」
유장석이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는데 찌푸린 표정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그가 앞에 앉는 김상철을 향해 대뜸 말했다.
「이윤제가 보상금으로 250만 달러를 요구하고 있어. 그 돈을 내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는 거야, 러시아 정부와 한국 정부 양쪽에.」
「‥‥‥」
「놈은 오늘 오후에 한국영사관으로 들어가 신변 보호 요청을 했어. 마피아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말이야.」
그러자 한일만이 나섰다.
「정보에 의하면 오성그룹 직원과 안기부 요원이 영사관으로 들어갔어. 이윤제를 만난 것은 틀림없는데 그자들한테 털어놓았는지는 알 수 없어.」
유장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내 생각엔 아직 털어놓지는 않은 것 같아. 그렇게 된다면 우리한테서 돈을 받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유장석이 입맛을 다셨다.
「그놈의 새끼는 끝까지 말썽이야. 이젠 유정 문제로 돈을 내라니, 파렴치 한 놈이다.」
「그자가 그렇게 나올 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김상철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무님.」
유장석과 한일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임차지에서의 습격사건으로 이쪽은 임차조건을 대폭 수정해서 계약할 예정이었고 러시아 측과도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윤제가 유정 발굴을 폭로하면 러시아는 아예 계약을 하지 않으려 들지도 모른다.
「그자의 입을 사흘 동안만 막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장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은 내일 낮 12시까지 돈을 스위스 은행에 입금시키라는 거야, 호텔에서 스위스로 전화를 해서 구좌까지 개설해 놓은 모양이더군.」
헛기침을 한 한일만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우리끼리 해결해야 되는 일이야. 말하자면 회장님은 이 일에 관계가 없으시다는 것이지 결정은 이실장이 하고. 알고 있는 것은 몇 사람 되지 않아. 거기에 김대리가 포함된 것이야.」
「내가 자네를 포함시키자고 했다.」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러시아에서 일을 하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마피아와 손을 잡아야만 돼. 한이사가 이미 마피아 보스인 파리야킨의 부하 파벨과 만나서 협조하기로 가계약을 맺었다. 곧 이실장이 파리야킨을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이 일까지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 내부의 일이고, 이런 일로 약점을 잡히기는 싫으니까.」
「이윤제가 영사관에만 눌러 붙어 있지는 못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김상철의 말에 한일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피아 쪽 사람들한테 부탁을 했어. 그쪽 동향을 파악해 달라고 말이야. 아직 이윤제는 영사관에 있고 안기부 직원 두 명과 오성그룹 직원 두 명도 나오지 않았어.」
「우리한테서 거절당하면 그 정보를 그들에게 팔겠군요.」
「안기부야 거래대상이 못 되지만 오성 쪽은 거금을 내놓겠지. 금액은 우리보다 적겠지만.」
김상철이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제가 이 일을 처리하기를 바라십니까?」
「김대리밖에 없다.」
정색을 한 유장석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자네가 적격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떠냐?」
한동안 시선을 주지 않던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잘 보셨습니다, 전무님.」
한국영사관은 칼리닌 거리의 안쪽에 있는 2층 벽돌집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백 평 정도의 작은 집이어서 직원 한 명만 영사관에서 숙식을 할 뿐 영사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나가 사는 형편이다. 저녁 6시가 되자 2층에서 내려온 영사가 대기실 문을 열고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교수님,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이만 숙소로 갑니다.」
이윤제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도 곧 나가겠습니다, 영사님.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아니, 천만에요.」
젊은 영사는 방 안의 사내들을 향해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여 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공항에 연락해 보았더니 정시에 출발한다고 합디다. 여덟 시 출발이니 여기서 일곱 시에 출발하면 될 거요.」
이윤제의 앞쪽에 앉은 40대의 사내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올라온 안기부 요원으로 이윤제와 동행하여 도쿄 행 비행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그때 창가에 기대서 있던 고정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다른 탐사단원들은 이틀 후에 떠날 모양이던데. 그동안 관광이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 사람들 태평이더군요.」
「어쨌든 그 사람들, 한국에 돌아가면 고생 좀 해야 될 거요.」
안기부 요원 심재택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윤제가 오후에 영사관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는 몇 번이나 인투리스트 호텔을 찾아갔으나 탐사단원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면담을 거절했고 귀찮게 하면 경찰을 부르겠다고까지 했다. 틀림없이 근대 측과 밀약이 되어 있다고 믿어졌지만 이곳은 러시아 땅이다. 어금니만 물면서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이윤제가 피난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쪽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피아의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그 이유도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어쨌든 러시아를 떠나 도쿄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집중적으로 캐물을 작정이었다.
「어때요? 시베리아, 견딜 만합디까?」
고정문이 지나가는 말처럼 묻자 이윤제가 금테 안경을 벗고는 손등으로 눈을 눌렀다. 피로한 듯한 몸짓이다.
「지독했지요. 하지만 사람의 적응력이 강하다는 걸 이번에 실감했소.」
「영하 40도가 넘는다던데, 어떻게 그곳에서 활동합니까?」
「낮에는 견딜 만해요. 셔츠 차림으로 다닐 수도 있고.」
「사고가 많았지요? 습격에서 몇 사람이나‥‥‥」
그러자 이윤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봐요. 장난하지 말아요.」
「아니, 내가 무슨‥‥‥」
고정문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이윤제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오성그룹 사람인 이상 술술 말해줄 수가 없어요. 난 근대그룹에서 돈을 받고 일한 사람이어서 말이오.」
「끝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여기 ‥‥」
이윤제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가리켰다.
「여기에 입력된 자료가 있지요.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그걸 지금 꺼내기는 싫단 말이오.」
「지당하신 말씀.」
심재택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고형, 자꾸 옆에서 치근거리지 마시오. 자꾸 속이 들여다보여서 듣고 있는 나도 얼굴이 간질거리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는데요, 이교수님.」
고정문이 심재택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이교수님은 돈 받고 고용되었던 처지 아닙니까? 근대 쪽과 어떻게 계약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그 이상으로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 계신 심 선생께서도 양해하신 겁니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곤란하지 않소?」
심재택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소. 우리가 알고 싶은 것만 이교수가 말씀해주시고 나면 오성 쪽과 어떻게 하시든지 말이오.」
이윤제가 벽시계를 올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도쿄에 가서 봅시다. 내일 말이오.」
김상철이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장국진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마에 붕대를 감고 콧등에 넓은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지만 두 눈에는 생기가 있었다. 옷도 갈아입어서 엷은 색 스웨터에 진바지 차림으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내가 되어 있다.
「어때? 내 처리 문제가 결정되었나?」
장국진이 슬리퍼를 꿰며 물었다.
「러시아 당국에 넘길 것이냐, 아니면 죽여서 흑룡강에 던질 계획이냐?」
「겁이 나는 모양이군.」
김상철이 방 안에 하나밖에 없는 나무 의자에 앉으며 웃었다. 장국진은 근대 직원으로 위장하여 기지에서 이곳까지 데려왔던 것인데 도중에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당국에 넘겨지면 그레고리의 일당으로 분류되어 당장에 처형될 수도 있는 것이다.
「네 말대로 네 신상처리 문제가 지금 거론되고 있어. 솔직히 너에 대해서 대부분 호의적이지 않은 형편이야. 아마 내일 아침에는 결정이 날 것 같다, 네 처리 문제가.」
김상철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고는 담뱃갑과 라이터를 그에게로 던졌다.
「북한이 우리의 시베리아 임차를 반대한다는 증거물로 네가 제출될 거야. 그레고리 일당에게 우릴 습격하게 만든 것이 북한이었고 넌 아마 감독관이나 아니면 독전관 역할이었겠지.」
「개수작하지 마라.」
담배에 불을 붙여 물면서 장국진이 말했다.
「내가 쉽게 불 것 같으냐? 어림없다.」
「그건 당해봐야 알겠지. 우린 그런 것쯤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곧 계약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날 이곳에 데려온 그 이유나 듣자.」
「난 기대는 하지 않지만 북한 쪽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다는 거야. 더구나 이쪽 지역은 너희들이 오랫동안 기반을 닦아놓은 곳이니까.」
「‥‥‥」
「우린 광대한 이 땅에 도시를 세울 계획이야. 공장과 빌딩, 학교와 병원, 그리고 목장을, 그래서 연해주나 사할린 등 러시아나 중국 북부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 동포들을 모아 살게 할 작정이란 말이다.」
「‥‥‥」
「나는 새로운 땅,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시작하는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 회장의 이상이 실현될지 어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야. 이 일에 참가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렇다.」
「너희 정부도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공화국과의 관계를 위해서.」
「그까짓 썩어 빠진 놈들, 정권이 바뀌면 없어지는 것들이야.」
「우린 너희처럼 50년 동안을 한 놈에 의해 통치받지 않는단 말이다. 지금은 자식이 대를 이었지만.」
한동안 김상철을 노려보던 장국진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거, 우습구만. 너 같은 조무래기가 날 회유시키려고 들다니.」
「내가 널 회유시키려고 이런 말한 것 같으냐.」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더니 와락 손을 내밀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낫살이나 먹었으면 현실을 똑바로 보고 판단을 해. 나처럼 새 인생을 살든지 뒈지든지 곧 결정을 하란 말이다.」
멱살을 놓은 김상철이 문 쪽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쥐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결정을 해 둬. 시간이 없으니까.」
숙소에서 나온 그들은 길가에 대기시켜 놓은 택시로 다가갔다. 눈은 그쳤지만 쌓인 눈이 얼어붙어서 도로는 미끄러웠다. 라이트를 켠 차량들이 사람들의 보행속도와 비슷하게 움직여 가고 있었다. 앞장서서 걷던 심재택이 이윤제를 돌아보았다.
「이교수님, 걱정할 것 없어요. 저 속도로 가도 한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할 테니까.」
6시 30분이니 그래도 시간이 남는 셈이다. 뒤를 따르던 고정문이 코트깃에 머리를 묻으며 이윤제에게 물었다.
「이교수님, 호텔에 남겨둔 짐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사람 시켜서 보내 드릴까요?」
「그까짓 것, 버려도 됩니다.」
이윤제가 가볍게 말했다.
「옷가지하고 책 몇 권뿐인 걸 뭘.」
그들이 택시 옆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택시의 뒤쪽에 멈추더니 사내 두 명이 재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두 명 모두 눈만 내어놓은 방한 덮개를 썼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권총이다.
「네 지갑!」
사내 한 명이 서툰 영어로 소리치면서 심재택의 배를 총구로 밀었다. 입을 쩍 벌린 이윤제와 고정문이 다른 사내에게 밀려 택시에 등을 대고 섰는데 그 순간 택시 운전사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차를 출발시켜 버렸다. 밤이라고 해도 시내의 한복판으로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도롯가였다. 고정문이 떨리는 손으로 코트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냈고 이윤제도 두 손으로 코트의 지퍼를 내리는 순간이다.
「멈춰!」
러시아 말로 거칠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이윤제의 가슴에 권총의 총구를 대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방한복을 힘껏 찌르면서 발사된 총탄이라 총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심장을 관통당한 이윤제가 차도로 벌렁 넘어졌고 사내들은 당황했다.
「빨리!」
심재택의 지갑을 빼앗아 쥔 사내가 외치자 이윤제를 쏜 사내는 고정문이 손에 쥔 지갑을 나꿔채고는 뒤쪽의 차를 향해 뛰었다. 승용차의 타이어가 빙판 위에서 맹렬하게 공회전을 하더니 튕기듯 달려 나와 차도에 쓰러져 있는 이윤제를 치고 달아났다. 이윤제의 몸은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지은 벽 쪽으로 털썩 떨어지면서 미끄러졌다.
「아아, 빌어먹을!」
절규하듯 외친 심재택이 이윤제에게로 달려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 쌍놈의 새끼들.」
이제까지 근처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들 가까이로 모여들었다. 영사관에 당직으로 남아 있던 직원 한 명이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총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소리쳐 묻자 심재택이 머리를 들었다.
「당했어, 갱한테. 빌어먹을.」
「그 사람 죽었습니까?」
「죽었어. 어서 영사한테 연락하고 구급차를 불러줘요.」
직원이 다시 뛰어 들어가자 심재택이 고정문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봐! 뭐해! 이 사람 좀 들어서 인도로 옮기자구!」
얼이 빠져 있던 고정문이 정신이 난 듯 다가왔다. 그와 함에 이윤제의 시체를 인도 위로 올려놓은 심재택이 가래를 긁어 땅바닥에 뱉았다.
「젠장, 총 든 놈 앞에서 그렇게 손을 빨리 움직이면 어떡하냔 말이야! 그렇게 하고 죽지 않고 배겨!」
방으로 들어선 김상철이 방한복을 벗자 벨트 사이에 찔러 넣은 스미스앤 웨슨이 드러났다. 그는 옷을 구석에 던지고는 그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장국진에게로 다가갔다. 밤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어서 숙소에는 인기척이 끊겨 있었다.
「바쁜 모양이군.」
의자를 당겨 앞쪽에 앉는 그에게 장국진이 말했다.
「문 앞에 지켜 서 있는 놈은 하나 있지만 이 방에 들어오는 놈은 너밖에 없어. 발자국 소리가 날 때마다 넌가 하고 기다려진단 말이야.」
「너하고 말장난할 시간이 없다.」
김상철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널 설득시킬 말재간도 없고 그럴 의욕도 없어.」
「가타부타 대답이나 하란 말이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되는 거야.」
장국진이 재떨이를 뒤적여 꽁초를 집어 들었으므로 김상철이 담뱃갑을 던져 주었다. 꽁초를 던진 장국진이 담뱃갑을 집었다.
「당에 충성하겠느니 어쩌느니 하면 네가 웃겠지?」
담배를 피워 문 그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런 놈도 있겠지. 그렇다고 우러러보지도 않아.」
「네가 내 입장이라면 어떡하겠어?」
「살겠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한 김상철이 벨트에 찔러 넣은 권총의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것 한 방으로 길바닥에 벌렁 누워 숨이 끊어지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난 근대 직원이 되는 거냐?」
「비공식 직원이지. 보수와 수당까지 합하면 한 달에 3천 달러는 될 것이다.」
「아마 북에 남은 네 가족들의 신변도 충분히 고려해줄 것이고.」
길게 담배 연기를 내어뿜은 장국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너희들은 돈이 무기로군.」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으니 난 이만 가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방한복을 집어 들었다.
「밤새 실컷 생각해, 내일 아침에 일찍 올 테니까.」
「보드카나 한 병 넣어줘.」
「맨정신으로 생각해.」
눈을 치켜뜬 김상철이 그를 노려보았다.
「괜히 술김에 일 저지르지 말고.」
강회장의 아침 기상 시간은 6시로 30년 동안 변함없이 지켜져 왔다. 30분 동안 간단한 체조를 마친 회장이 샤워를 마치고 식탁에 앉는 시간은 7시, 외국 출장 시에는 오렌지 주스 한 잔과 토스트 두 조각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다. 숙소의 식당은 직원들에게 사용하도록 하고 오늘도 강회장은 2층의 거실에서 이남호와 둘이서 아침을 들었다. 물론 시중을 드는 사람은 박미정으로 이젠 익숙해져서 식탁 끝자리에 앉아 같이 식사를 한다. 이것도 강회장의 지시이다.
'너는 가정부가 아니고 사원'이라는 배려성 지시에 의해서였다.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던 이남호가 생각난 것처럼 문득 머리를 들었다.
「회장님, 어제 저녁에 탐사단 교수였던 이윤제가 영사관 앞에서 강도들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자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겨우 살아왔는데 이곳까지 와서 변을 당했단 말이냐? 도대체 왜?」
「일찍 귀국하려고 안기부 요원하고 같이 공항으로 출발하려는 길이었습니다.」
「저런.」
「지갑을 꺼내려고 서두르는 것이 강도에게는 무기를 꺼내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라고 안기부 요원이 말했다는군요.」
「우리 책임이다. 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해 줘야 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장이 박미정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빵을 한쪽만 더 먹어야겠다. 아까보다 더 살짝 구워다오.」
「예, 회장님.」
식탁에서 일어난 박미정이 옆쪽의 임시 주방으로 다가가자 이남호의 말소리가 들렸다.
「김상철이가 쓸 만합니다, 회장님.」
「그래, 똑똑한 놈이야.」
「지하실에 있는 놈이 김상철이에게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그놈을 믿을 수 있을까?」
「김상철이가 데리고 다니겠답니다. 조수로 쓰겠다는데요.」
그러자 회장의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그놈 참.」
「이쪽 사정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북한 쪽도 경계해야 할 상황이니까요. 놈이 진심으로 협조한다면 도움이 크지요.」
「괜찮을까? 우리야 상관없지만 데리고 다니겠다는 김상철이가 말이야.」
「염려 말라고 합니다. 그땐 없애겠다고.」
박미정이 살짝 익힌 토스트를 가져왔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잘 익었다.」
토스트를 씹으면서 회장이 만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침에 기분이 좋으면 하루가 잘 풀리는 법이야. 미스 박도 그걸 명심하고 남편을 대해야 한다.」
자신에게 한 말이었으므로 박미정이 머리를 숙였다.
「예, 회장님.」
지하실 안. 김상철과 장국진이 마주 앉아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식탁이 없었으므로 의자 위에 빵 바구니를 올려놓고 우유병은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빵을 씹는 것이다.
「아마 지금쯤 회장께 보고가 되고 있을 거야, 네 이야기가.」
빵을 삼킨 김상철이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실장이 허락한 일이니까 회장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유전무가 말하더군.」
「실장의 힘이 그렇게 센가?」
장국진이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일은 실장이 알아서 하니까, 회장은 큰 것만 결정하지.」
「우리들도 강회장에 대해서는 잘 알아. 돈이 엄청나게 많다고 소문이 났어.」
「엄청나지.」
우유병을 집어 든 김상철이 병 채로 우유를 마시고 나자 장국진이 받아들었다. 두어 모금 우유를 마신 장국진이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면서 피식 웃었다.
「이거, 생각해보니 우습군.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분위기가 이렇게 변하다니. 동무하고, 아니, 당신하고 꽤 오래 사귄 사이 같단 말이야.」
「슬금슬금 친한 척 말아. 넌 내 조수로 날 따라다녀야 돼. 그런 조건으로 네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니까.」
「내 생사가 당신한테 달렸단 말이구만.」
「그렇다고 봐도 돼.」
「당신, 몇 살이야?」
「나이보다도 계급이야. 직장생활도 군대하고 비슷하단 말이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나이를 물어볼 수는 있지 않아?」
「스물여섯이다. 」
「난 서른 살이니 나보다 네 살 적구만. 그런데 유전무하고는 언제 만나게 되는 거야?」
「아침 먹고 바로. 유전무는 시베리아 개척의 책임자고 네 직속상관이기도 하니까 숨김없이 털어놓아야 돼. 믿음이 가게 행동하란 말이다.」
「알고 있어 나도 이제는 공화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야. 과업에 실패한데다가 너희들하고 이렇게 며칠간 같이 있었다는 것도 의심을 받게 될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자본주의 물이 조금 들었기도 하고. 연변의 노래방에 가서 돈도 뿌려보았어.」
「썩은 공산당원이로군.」
「비웃지 마라,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회하는 거냐?」
「천만에, 오히려 편안하다.」
「가족은 있어?」
「부모형제 다 있고 처자식도 있지. 아이가 세 살이다.」
「‥‥‥」
「아까 말한 대로 드러내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거다. 공화국에서는 날 죽은 것으로 믿도록 말이야.」
「‥‥‥」
「과업이 실패는 했지만 전사한 것으로 되면 내 가족들은 아무 일 없어. 난 그렇게만 되면 미련이 없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 유전무를 모시고 올 테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려. 그리고 모두 털어놓아 버려.」
방 안으로 들어선 여종업원은 들고 온 새 시트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몸집이 우람한 여자였으나 얼굴 표정은 밝다.
「당신, 미스 서, 맞지요?」
문득 그녀가 그렇게 물었으므로 서은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금방 불안한 표정이 되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종업원이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떤 한국 사내가 당신한테 이것을 갖다주라고 해서,」
쪽지를 받은 서은영이 접혀진 부분을 폈다. 한국어로 씌어진 메모였다.
「서은영 씨. 모스크바에서 뵈었던 신우그룹 김부장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오후 1시에 아무르 가로수 거리에 있는 베료스카 상점 입구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읽고 난 쪽지를 바지 주머니에 넣자 시트를 갈아 끼우던 종업원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방에 있는 전화는 불통이었고 옆쪽과 앞쪽 방 모두 근대 직원이 묵고 있었는데 밖에 나갈 때는 물론이고 식당에 내려갈 때도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유장석은 앞으로 사흘 동안만 참아주면 특별사례를 하겠다면서 부탁하는 시늉을 했지만 이것은 감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두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 청소하는데 먼지가 많이 나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다가서는 것은 백대리라는 사내다. 그는 이번에 회장을 따라온 일행 중의 하나로 그녀의 감시 책임자였다.
「잠깐 커피숍에나 내려가 계시겠습니까?」
「네, 그런데 김상철 씨를 만나고 싶은데요.」
그녀가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김상철 대리는 지금 숙소에 있을 겁니다. 곧 연락을 하지요.」
그들은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랐다.
「혹시 저희들이 옆에 있어서 불편하지 않으신가 걱정이 됩니다.」
「아녜요. 괜찮아요.」
서은영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말끔한 얼굴에 예의가 바른 사내였다.
「그런데 김대리한테는 그냥 보자고만 하신다고 전할까요?」
「네, 그렇게만.」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지요.」
김상철이 방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40분쯤 후인 11시가 되었을 때였다. 양복 위에 단정하게 털코트를 걸친 차림으로 바뀐 그가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웬일이야? 갑자기 날 보자고 한 건?」
서은영이 그를 쏘아보았다.
「이렇게 날 가둬 놓기만 하고 들여다보지도 않을 거야?」
「가둬 놓다니, 너 가고 싶은데 못 가게 한 적 있어?」
「그렇다면 여기에 가도 되겠네.」
서은영이 탁자 위로 쪽지를 던졌다. 쪽지를 집어 들어 쪽지 내용을 읽은 김상철이 서은영을 바라보았다.
「누가 가져왔어?」
「호텔 종업원이.」
「신우그룹이라니, 당치도 않아. 이곳에 와 있는 건 오성그룹 놈들이야.」
「신우건 오성이건 상관없어. 난 만나지 않을 테니까.」
「오후 한 시라면 시간이 조금 있는데.」
시계를 내려다본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다. 이렇게 알려줘서.」
「고맙긴 뭘, 이쪽의 대우가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거지.」
「물론이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참‥‥‥」
따라 일어선 서은영이 그에게로 다가섰다.
「어제 아침부터 이윤제 씨를 보지 못했어. 식당에서도, 커피숍에서도.」
「백대리한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고, 어디 다른 곳으로 옮긴 거야?」
「강도를 만나 총에 맞아 죽었어, 어제저녁에.」
「호텔을 빠져나와서 영사관에 들렀다가 공항으로 출발하는 길에…」
김상철이 그녀의 어깨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운이 없는 사람이지, 그 사람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임차할 시베리아 땅은 북위 60도에서 65도 사이와 동경 130도에서 150도 사이에 펼쳐진 광대한 툰드라와 삼림 지역으로 면적이 45만 평방킬로가 되었다.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대륙이다.
탁자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내려다보던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사할린과 하바로프스크 주변의 조선족만 해도 30만이 넘는다. 인력자원은 충분해. 내 계획대로라면 5년 이내에 중국과 북한에서 넘어올 숫자까지 합해 3백만 인구의 임차지가 된다.」
팔짱을 끼고 서서 지도를 내려다보던 이남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회장님, 한국인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계획단의 설계에 의하면 러시아 이주민까지 해서 6백만 명이 됩니다.」
「그 계획을 수정해야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강회장이 언성을 높였지만 짜증난 얼굴은 아니다.
「러시아 정부와의 계약조건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민족보다 타민족의 숫자가 많으면 안 돼.」
「그것은 차츰 조정해 갈 수가 있습니다, 회장님 」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한일만 이사가 들어섰다.
「회장님, 계획단의 고상무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어.」
시베리아 임차에 대한 계약과 개발계획을 전담하고 있는 계획단에는 그룹의 각사에서 차출된 엘리트 중역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계획단의 단장은 이남호 실장이고 현장 책임자는 유장석 전무의 체제인 것이다.
「이번 기회에 자치권을 강화시키도록 해야겠다. 자치주와 엄연히 다른 모양새를 갖추어야 한단 말이야.」
강회장이 붉은 선이 그어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레고리 일당의 습격 사건은 이쪽에서 계약조건을 유리하게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러시아 정부 측에서도 받아들일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이틀 후로 다가온 계약에 대비하여 수십 명의 계획단 두뇌들은 철야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앞장을 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강회장의 뒤를 따르는 이남호에게 한일만이 바짝 다가섰다.
「실장님, 호텔에 있는 서은영한테 누가 만나자는 쪽지가 왔습니다.」
그가 낮게 말하자 이남호가 주춤 걸음을 늦추었다.
「무슨 말이야?」
「오성그룹 같습니다. 서은영이가 김상철한테 쪽지를 보여주었답니다.」
「그놈들, 끈질기구만.」
「유전무는 서은영이를 이곳으로 옮기고 놈들을 무시하라고 했습니다.」
「그건 잘했어.」
「그리고 김교수를 비롯한 다른 탐사단원들도 이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냐고 여쭤보라고 하던데요.」
「그렇게 하라고 해. 계획단원 몇 명을 대신 호텔로 보내면 되겠지.」
이남호가 걸음을 크게 떼어 강회장의 뒤를 쫓자 한일만은 복도의 옆쪽으로 몸을 돌렸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 계집 맹랑하죠. 당장에 근대 놈들한테 불어 버리다니.」
쓴웃음을 지은 최선호가 말하자 박대용이 따라 웃었다.
「자신도 없었을 거요. 감시를 따돌리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그들은 인투리스트 호텔 건너편의 하키장 앞에 세워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거리에는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지만 영하 20도 가까운 추위에 모두 움츠려든 모습이었다. 며칠 동안 포근하더니 추위가 닥친 것이다.
「아마 콤소몰 광장 근처에 있는 근대그룹의 숙소로 옮겼을 거야. 내 부하들이 곧 알려 오겠지만.」
박대용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서은영과 탐사단원들은 짐을 꾸려 근대 직원들과 함께 호텔을 떠났다. 그들이 가는 곳은 공항 쪽이 아니었으므로 박대용의 추측이 맞을 것이다.
「한국의 안기부 요원들은 이번 계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박대용이 묻자 최선호가 머리를 저었다.
「알 수 없어. 그 사람들 계획은 정부가 하는 일이니까.」
「정부는 강회장의 시베리아 진출을 반대한다고 들었는데. 남북 정상회담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글쎄, 그런 모양이오.」
「내 정보가 그쪽으로 가지요.」
「세 명이 오늘 아침에 인투리스트에 체크인했으니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한국 안기부 요원은 모두 다섯인가.」
「강회장을 제거할 계획입니까?」
그러자 최선호가 퍼뜩 눈을 치켜떴다.
「무슨 말을, 우리는 경쟁 회사의 정보를 얻으려고 할 뿐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다니.」
「나한테 그렇게 펄쩍 뛸 필요는 없습니다, 최전무님. 난 일본 정보국에 정보를 팔아먹는 놈이지만 또한 오성그룹의 정보원이기도 하니까. 더구나 내 국적은 러시아요. 정보 수당 외에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단 말입니다.」
「‥‥‥‥」
「2천 달러만 내시오. 그만한 정보를 드릴 테니.」
「이봐, 박형. 우리는 한 달에 2천 달러로 계약을 했지 건별로 정보료를 주기로 한 건 아니지 않소.」
「그건 그렇지만 이것도 장사요, 이번 기회에 한몫을 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이것은 당신들이 바라는 정보일지도 모릅니다. 강회장을 어떻게 하든 간에.」
「들어봅시다, 그럼.」
「그림 2천 달러를 받는 것으로 알겠소.」
박대용이 최선호에게로 몸을 바짝 붙였다.
「오늘 저녁에 강회장이 로스토프 사령관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요.」
「그런가?」
「레닌 대로에 있는 아무르 식당에서 저녁 일곱 시에. 참석인원은 양쪽 세 명씩 여섯 명이오.」
「이것은 당신뿐만이 아니라 한국 안기부에도 전해질 테니까 정보료는 그만큼 받아야겠소.」
2층의 계단을 오르던 김상철이 내려오는 박미정과 마주쳤다.
「유전무는 어디 계시지요?」
「실장님과 같이 응접실에 계세요.」
그러면서 멈춰 섰으므로 그들은 계단의 한쪽에 마주 보며 섰다.
「조금 전에 서울로 연락하는 길에 안인석 씨와 통화했어요. 안부 전해달라고 하데요.」
「그래요? 잘 있습디까?」
김상철의 얼굴이 밝아졌다.
「며칠 후면 내가 서울에 간다고 했어요?」
「네, 그리고 진급하셨다니까 깜짝 놀라던데요. 축하한다고 전해달래요.」
「저런, 그 이야기는 왜.」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뭐가 어때서요?」
「그래도 그놈한테는.」
「바쁘신 모양인데….」
그녀는 옆으로 한 걸음 비껴갔다.
「어서 올라가 보세요.」
그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이남호와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탁자 위에는 어지럽게 서류가 널려 있었다.
「거기 앉아.」
이남호가 턱으로 소파의 한쪽을 가리키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이윤제 건은 잘 처리해 주었어. 그라노프는 별 탈 없겠지?」
「그라노프 부하는 제가 실수로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라노프한테도 그렇게 보고했을 겁니다.」
「중요한 때에 그런 소동을 벌이기는 했지만 안타까운 일이야.」
「대업을 그런 인간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장님!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남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 일은 우리 넷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해야 돼. 실제로도 그렇지만 한이사까지 합해서 우리 네 명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실장님. 그 일은 저 혼자 알아서 한 일입니다.」
「그라노프한테서 연락이 왔어. 한국인 기업가라는 사내 세 명이 인투리스트에 투숙했는데 안기부 요원들 같단 말이야.」
말을 멈춘 이남호가 입맛을 다셨다.
「청와대에서 회장실로 어제 연락이 왔어. 계약을 중지하고 귀국하지 않으면 모종의 조치를 하겠다는 경고를 했다는 거야. 수석이라는 작자가. 또 총리도 공문을 보냈고.」
「북한은 근대가 시베리아 임차를 포기한다면 남북 정상회담과 경제협력 등 가능한 문호를 개방할 의사를 보였다는 정보가 있어, 그 교활한 놈들이 급해진 것이지. 러시아 정부가 먹혀들지 않으니까 이제 한국 정부를 몰아붙이는 것이야.」
얼굴을 굳힌 김상철이 잠자코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그룹의 일급 비밀은 물론 정부와 그룹과의 관계에 대한 고위정보를 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듣고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은 2백 명이 넘는 중역들 중에서도 10명 안팎일 것이다.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밀고 나간다는 것이 회장님의 방침이고 우리 임직원들도 따르기로 했다. 설령 어떤 피해나 보복을 받더라도 시베리아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예, 저도 신명을 걸고‥‥‥‥』
「앞으로 며칠이 중요하다. 정세분석팀의 보고로는 북한은 물론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근대의 시베리아 확보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거야. 거기다 한국 정부가 날뛰는 것까지 합하면 우리는 외우내환이다. 아니, 사면초가라고 할까.」
안기부 요원 심재택은 오랫동안 일본 주재원 생활을 해온 노련한 정보원이다. 그가 영사관 앞에서 강도를 만나 이윤제가 피살당한 사건을 알리고 난 다음 날 본부에서는 세 명의 인원을 증원해 주었는데 모두 서울에서 파견된 요원들이었다. 이제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요원은 다섯 명으로 일본 주재원과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인투리스트 호텔 8층에 있는 그의 방에 이석도가 들어선 것은 오후 4시 30분, 그는 거리의 공중전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요원과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과장님, 강회장에게 직접 정부의 지시를 전하라는 연락입니다.」
이석도가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들고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요원은 서울과 암호 전화를 했고 그것을 연결받아 온 것이다.
「정부는 대통령의 긴급 지시를 전한다. 이것은 국무총리가 발신자로 되어 있는 공문입니다.」
이석도가 목청 을 가다듬고 읽어 내려갔다.
「1. 근대의 강회장은 정부의 허락 없는 시베리아 계약을 즉각 중지할 것.
1. 만일 지시를 어겼을 경우 강회장 및 계약에 임한 임직원은 국가보안법 등 관련 법규에 의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1. 이것은 남북한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 중대한 범죄행위로 즉각 중지되지 않으면 국가적인 혼란이 올 것인 바 강회장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1. 이 공문을 접수한 즉시 가능한 한 빨리 강회장에게 직접 통보할 것.」
머리를 든 이석도가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서울의 그룹 회장실에는 이미 공문이 보내져 있지만 비서실에서는 회장과 연락이 안 된다면서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답니다.」
「거짓말이야. 이미 강회장은 전해 들었는데도 밀고 나가고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더러 직접 전하라는 것 같은데요.」
싱재택이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이것, 우리가 찾아간다고 해도 만나줄 사람이 아닌데 고약하구만.」
「이 영감태기, 아예 목숨을 내걸고 시베리아 계약에 달려들고 있어요. 노망이 든 모양입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으므로 심재택이 탁자 위에 놓인 쪽지를 집어 들었다.
「오늘 저녁은 강회장이 극동군 사령관과 시내에서 저녁 식사 약속이 있어. 숙소에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찾아가실 계획입니까?」
「찾아가도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야.」
「그래도 밀고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부장님의 직접 지십니다, 이것은.」
이석도의 얼굴을 바라보던 심재택이 머리를 끄덕였다.
「방법을 찾아보자구. 강회장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말이야.」
「그라노프는 사업체를 여러 개 갖고 있는 데다 독자적으로 마약 장사를 하고 있어. 보스 파리야킨의 중간 간부로 하바로프스크에 보내진 지 2년인데 이젠 기반을 단단하게 굳혔지.」
말을 할 때마다 장국진의 입에서 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다시 길 건너편의 아무르 식당을 바라보았다. 식당 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10여 명의 무장군인 사이로 보이는 두어 명의 동양인은 근대 직원들이었다.
「로스토프도 마피아와 결탁해서 돈을 모은다는 소문이 있어. 마약이나 총기류를 군을 통해 공급받으면 안전하거든. 경찰은 건드리지 못하니까.」
장국진은 국경지대의 사정에 밝았는데 그가 시베리아로 파견된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찬바람이 휘몰려 왔으므로 그들은 방한복의 깃에 목을 움츠려 넣고는 건물의 모퉁이로 비껴섰다.
저녁 7시 30분이었다. 강회장과 로스토프 사령관은 이제 막 저녁 식사를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봐, 김대리. 근대도 물론 로스토프와 계약을 하고 있겠지? 러시아 정부와의 계약은 별도로 하고 말이야.」
장국진이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 내용은 잘 모르지만.」
「사업이 커질수록 요구액이 많아질 텐데. 나중에는 동업자가 되려고 할 것이고.」
「동업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러시아 정부도 주무르는 판인데, 마피아는 시베리아에 들어 온 근대쯤이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
「두고 봐야지.」
「그레고리 일당이야 군대가 쉽게 부셨지만 마피아는 안 돼. 군대와 경찰, 정부 관리와 끈이 닿아 있어서 모두 한통속이야.」
장국진이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집에 가족이 있나?」
화제를 바꿀 모양이었다.
「결혼은 했어?」
「아직 안 했어.」
「그림 부모님은?」
「안 계시고 여동생만 있어.」
「홀가분한 신세구만.」
「그 나이에 대리가 되었으니 월급으로 충분하겠군. 한 달에 얼마나 받나?」
「수당까지 합해서 2백만 원 정도.」
「달러로 치면 얼마야?」
「2천 5백 달러쯤.」
「굉장하군.」
장국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일하다가 죽으면 회사에서 보상금도 준다면서? 연변에서 만난 서울 어느 회사원한테서 들었는데.」
「당연하지.」
「얼마나 주나? 지난번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받았어?」
「5억 원 정도.」
「달러로 얼마야?」
「60만 달러쯤 되나.」
김상철이 장국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왜 그래?」
「과연 근대는 돈이 많은 회사로구만.」
「목숨을 내놓고 일할 만하겠어.」
「나한테도 그렇게 줄까? 만일 무슨 일이 있다면 말이야.」
「당연한 일이야. 그런 돈 떼어먹는 회사는 없어, 한국에.」
「그럼 난 정식으로 고용이 됐나?」
「된 것이나 마찬가지야. 실장님이 결정했으니까」
「사원인가?」
「그래, 내 조수로.」
「서류를 작성해야 되겠는데.」
「네가 원한다면.」
「보상금 수취인도 정해야겠고, 평양의 가족한테 직접 주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칼루가는 아무르강에서 잡히는 철갑상어의 일종으로 하바로프스크가 자랑하는 특급 요리로 꼽힌다. 생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강회장이었지만 야채와 곁들인 칼루가는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백포도주를 몇 잔 마시자 얼굴에 만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로스토프가 붉은 얼굴을 펴며 환하게 웃었다. 양쪽 어깨에 금색실로 수놓은 대장 계급장을 붙인 그는 50대 중반의 거인이었다.
「자, 건배를 합시다. 회장님의 건강을 위하여.」
그가 보드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포도주는 제쳐두고 그는 보드카를 물 마시듯 마셔댔는데 양옆에 앉은 참모장과 기갑군단장도 마찬가지였다. 강회장과 이남호, 유장석 등이 술잔을 들었고 그들을 따라 다시 요란한 건배를 끝냈다. 식당의 안쪽에 마련된 특실이어서 방에는 그들 여섯밖에 없다.
강회장이 로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지하자원이나 천연자원의 생산 이익금을 50 대 50으로 나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문제는 자위권이오. 자체 경비를 우리 쪽 부담으로 맡긴 이상 자위권도 우리에게 주어야 합니다. 사령관이 도와주셔야겠소.」
그의 영어는 유창했다.
「글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어서.」
로스토프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이해는 가지만 모스크바에서 정책적인 결정을 하겠지요.」
「사령관도 의당 대표중의 하나요. 이해하신다면 반대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포도주잔을 들면서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자, 시베리아의 미래를 위해서 건배합시다.」
그들이 다시 일제히 술잔을 비우고 나자 로스토프가 강회장에게 물었다.
「엊그제 체르넨코를 만나셨을 때도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물론이오. 나는 내 직원들의 시체를 싣고 돌아온 참이어서 단단히 화가 나 있었지요. 그래서 자위권을 주지 않으면 계약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장군들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본래의 계약 초안은, 근대는 임차지의 경비를 자체적으로 할 수 있지만 러시아에서 파견된 치안조직에 의해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회장은 임차지 내에서의 치안과 법집행도 근대 측에 위임하는 것으로 계약조건을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임차지는 또 하나의 연방국 형태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체르넨코 장관도 내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시합디다. 사령관, 근대가 50년 임차한다지만 그곳은 러시아 영토이고, 러시아 국적을 가진 국민들이 개척할 땅이오. 나는 내 모든 재산을 차츰 그곳으로 쏟아부어서 첨단산업이 발달된 땅으로 만들 작정인데 솔직히 누가 보장해 줍니까? 내 투자에 알맞은 대우를 해주려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줘야 합니다. 그래도 결국은 당신들이 이득이지요. 내 성취감을 이용해서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새로운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 수 있으니까.」
로스토프와 장군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자 강회장이 이남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
물론 한국말이다. 이남호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쯤 하십시오, 회장님. 나갈 적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남호는 세 사람 앞으로 각각 세 개의 돈 가방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로스토프에게는 백만 달러의 현금을,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십만 달러씩이었다 이들은 현금 애호가로 스위스 은행에 구좌를 만들어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글쎄, 난 정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위치여서.」
이렇게 말하면서 로스토프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군부 실세로 국방장관 체르넨코와 더불어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미 조금씩 매수하고 있었으므로 가방을 전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이남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2. 하바로프스크의 밤
강회장 일행이 탄 세 대의 벤츠가 식당을 출발한 것은 10시 30분이 되었을 때였다. 기온은 저녁때보다 뚝 떨어져서 영하 20도를 넘어서 있다. 레닌 대로를 곧장 달려 올라가는 벤츠 대열의 선두 차에는 김영규 부장이 직원들과 함께 탔고 가운데의 벤츠에 강회장과 이남호가, 유장석은 후미의 차에 탔는데 옆에 앉은 것은 김상철이다. 유장석이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뒷머리를 보이고 앉아 있는 사내는 장국진이다.
「이봐,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조선족들이 얼마나 살고 있나?」
장국진이 뒤쪽으로 상반신을 돌렸다.
「예, 작년에 조사를 했는데 32만 5천7백 명이었습니다, 전무님.」
「사할린에 있는 동포까지 합한 숫자인가?」
「예, 전무님.」
「우리가 조사한 숫자보다 적은데.」
「러시아 전체로 치면 40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전무님. 하지만‥‥‥」
「하지만 뭐야?」
「동포들의 인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국경 부근의 조선족만 해도 50만 명이 넘는 데다 또‥‥‥」
「또 뭐야」
「밀입국자들도 많습니다.」
얼굴에 웃음을 띤 유장석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김대리, 네가 빠르게 가르쳐 가는 모양이다. 장국진이를.」
「저, 장국진 씨는 근대의 정식사원으로 채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상철의 말에 유장석이 눈을 크게 떴다.
「채용되었지 않아? 결정이 된 일이다.」
「정식 서류로 계약이 되고 월급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보상금 지급처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러자 유장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장에 서류를 만들라고 하지.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그런지 말이 통하는 친구구만, 장국진이는.」
레닌 대로는 영광 광장 앞에서 직각으로 오른쪽으로 꺾어지게 되어 있었는데 두 블록을 가면 왼쪽에 콤소몰 광장이 나온다. 차량의 대열은 영광 광장 앞에서 속력을 줄이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사람의 통행이 뜸해진 시간이다. 광장과 영원한 불이 있는 전몰 병사의 위령비 쪽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선두 차의 운전사는 서울에서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고참 사원이었다. 앞에서 달리고 있는 회색 승용차 때문에 차의 속도가 떨어지자 힐끗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2차선에서 바짝 옆으로 붙어오는 트럭이 보였다. 입맛을 다신 그는 회색 승용차의 뒤로 차를 바짝 대었다. 이쯤하면 2차선으로 비껴 서주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두 번째의 벤츠에 타고 있던 이남호는 차 옆으로 트럭의 엔진 부근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민간 트럭으로, 엔진 옆으로 둥근 커버가 씌워진 구형이었지만 요란한 엔진 소리에 강회장도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이다. 트럭이 불쑥 튀어 나간다고 느끼는 순간 트럭 옆쪽의 두꺼운 캔버스 천이 들쳐 올라가면서 서너 개의 총구가 나타났다.
「아이구!」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친 이남호가 회장의 목을 한 팔로 감아 안고 앞으로 엎드리는 순간 요란한 총성과 함께 유리창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 파편이 피부 위로 떨어져 내렸고 앞에 앉은 직원의 신음소리도 들렸다.
트럭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김상철은 무의식중에 머리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캔버스 천으로 적재함을 덮은 트럭은 맹렬한 기세로 회장 차 옆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앞자리에 앉은 장국진도 긴장한 듯 그쪽을 바라보았다. 트럭이 회장의 벤츠와 나란히 달린다고 보이는 그다음 순간이다. 벤츠 쪽을 향한 적재함에서 불꽃이 튕겨 나오면서 요란한 총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회장의 벤츠가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으므로 이쪽 운전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오른쪽으로 비꼈는데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인도의 블록을 받고 멈춰 섰다.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내들이 일제히 뛰어나갔을 때 트럭은 멀어져 가는 중이었고 회장의 벤츠는 2차선에 비스듬히 멈춰 서 있었다. 한걸음에 달려간 김상철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회장님!」
「이봐, 우린 괜찮다. 」
의자 앞쪽에 납작 엎드려 있던 이남호가 그제야 머리를 들었는데 회장은 보이지 않았다. 유장석과 장국진이 달려왔고 앞 차에서도 직원들이 몰려왔다. 도로는 순식간에 마비가 되어 차량들이 줄을 이어 섰다. 이남호가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깔려 있던 회장이 상반신을 세웠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되어 뒤엉켜 쓰러진 앞자리의 두 직원을 보았다.
「이놈들.」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디 두고 보자.」
「회장님, 어서.」
이남호와 유장석이 서둘러 그의 팔 하나씩을 잡았다.
「어서 숙소로 가시지요. 이곳은 저희들이.」
유장석이 머리를 돌려 김영규를 찾았다.
「김부장, 네가 이곳을 맡아.」
「예, 어서, 염려마시고.」
눈을 치켜뜬 채 반쯤 얼이 빠져 있던 김영규가 소리쳐 대답했다. 찬바람과 함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비된 도로에 자동차의 라이트가 첩첩이 쌓이기 시작할 때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콤소몰 광장 쪽에서 다가왔다.
숙소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회장을 옹위하고는 한 덩어리가 되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흥흥한 기세였고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물어뜯을 듯한 표정들이었다.
회장은 2층의 응접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꿀물 한 잔 타오너라,」
주춤거리며 문 앞에 서 있는 박미정에게 말하고 난 그가 앞에 서 있는 이남호와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어떤 놈들이냐?1
사건 이후로 그들에게 처음 던지는 말이었다. 비뚤어진 넥타이를 한 채 서 있던 이남호가 한 걸음 다가섰다.
「찾겠습니다, 회장님.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우리가 습격당한 것을 곧 모두 알게 될 겁니다. 러시아 정부 쪽에서도 조사를 하겠지요.」
누구라고 선뜻 말할 수가 없는 것은 러시아 정부만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나라가 이번의 계약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미정이 가져온 꿀물을 마시고 났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직원 한 명이 들어섰다.
「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만, 안기부 과장이라고 합니다. 꼭 뵙고 싶다고.」
이남호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건방진 놈들 같으니. 유전무, 당신이 나가 봐.」
최악의 상황일 때 면담 신청이 온 것이다. 유장석이 아래층 현관 옆의 대기실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일어섰다. 심재택과 이석도이다.
「전 안기부 과장 심재택이고 이 사람은 저희 직원입니다.」
심재택이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난 비서실의 유전무요.」
악수도 생략한 유장석이 자리에 앉자 그들도 따라 앉았다.
유장석이 그들을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요? 이런 시간에. 더구나 우격다짐으로 안으로 들어오다니, 이런 무례가 어디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만, 당신들은. 그 지시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통할 곳에 가서 써먹어야지.」
이석도가 눈을 치켜떴지만 심재택은 그래도 노련한 사내였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연락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계약은 즉각 중지해야 한다는 정부의 지시 말입니다.」
「난 모르는 일인데.」
「그럼 지금 전해 드리지요. 계약을 중지하지 않으면 법에 위반됩니다. 근대그룹은 물론 강회장께 중대한 결과가 닥칠 것입니다.」
「공갈 그만 치라고 대통령에게 전하시오.」
「그건 강회장 말씀입니까?」
「비서실의 유장석 전무 말씀이오.」
「그렇게 전하지요.」
머리를 끄덕인 심재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회장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인사입니다만.」
「회장님을 뵈려고 식당 앞에서부터 따라왔었지요. 그런데 트럭이 제 차를 추월해 갈 적에 운전석에 앉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두 명 다 동양인이더군요,」
유장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이유는 뭐요?」
「오해를 살 염려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제 독단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
「용의자 리스트에서 안기부는 제외시켜 주시지요. 그 말씀도 드리려고 우격다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인투리스트에서 영광 광장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백 미터가 조금 넘을 뿐이었지만 오성그룹의 최선호 전무가 총격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시내에 나갔던 고정문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강회장의 피습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12시 가깝게 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강회장 일행이 탄 승용차가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만을 들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앞에 앉은 고정문을 한동안 바라보던 최선호가 입을 열었다.
「안기부 짓일까?」
안기부의 심재택에게 강회장과 로스토프가 아무르 식당에서 식사 약속이 있다는 정보를 전해준 것도 이쪽이다. 고정문이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북한 공작원들의 짓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마피아 짓인지도.」
「우리가 안 했다는 것만 확실하군.」
그러면서 최선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누구의 짓이건 간에 강회장이 습격을 받았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이쪽이 잠자코 있는 동안에 상황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어떤 놈이 했건 간에 그자들은 로스토프와 강회장과의 저녁 약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그렇지요. 우연히 보고 습격했을 리는 없습니다.」
「근대 쪽에서는 우리를 의심하고 있을까?」
「우리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당연하지요.」
근대 쪽의 머리도 이쪽 못지않은 것이다. 서은영에게 쪽지를 보낸 것이 신우그룹이 아니고 오성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최선호가 머리를 들었다.
「박대용이를 불러.」
「지금 말입니까?」
「지금 당장, 내가 만나잔다고.」
고정문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박대용을 만날 때에는 이쪽에서 그의 연락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보안 유지 때문이었다. 박대용은 고정문에게 연락처를 알려주면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뭐라고 말할까요?」
고정문이 묻자 최선호도 생각에서 깨어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응? 급한 일이라고, 그렇게만 말해.」
「알겠습니다.」
고정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텔 안의 전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차에서 내린 최선호는 꽁무니를 이쪽으로 하고 길가에 멈춰 서 있는 검정색 승용차로 다가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오르자 핸들을 쥐고 있던 박대용이 그를 바라보았다. 찌푸린 얼굴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라니, 박형. 오늘 밤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겠소.」
「강회장이 총격을 받은 사건 말입니까?」
박대용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회장은 총알이 스치지도 않았다고 합디다. 같이 타고 있던 비서실장도 그렇고, 앞자리에 탔던 운전기사와 수행비서만 현장에서 즉사했소.」
「도대체 누구 짓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난 당신들이 저질렀는가 하고도 생각했는데.」
「이곳에선 하루에도 서너 번씩 총격 사건이 일어납니다. 경찰 추산으로 무기가 10만 정이 넘게 깔려 있다는 거요.」
「추측이라도 가는 대상은 없소?」
「그레고리의 잔당이 공격했거나 아니면 한국 정부의 지시로 안기부 요원이 그랬을 수도 있겠지. 또 마피아가 경고를 했는지도 모르고.」
「일본 정부나 북한 쪽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참이군.」
「그렇소, 강회장은 원체 적이 많으니까 말이오.」
머리를 끄덕인 최선호가 박대용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고맙소. 그럼 다른 소식이 있으면 곧 나에게 전해주시오.」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핸드 브레이크를 풀면서 박대용이 입맛을 다셨다.
「이번 정보가 급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앞으로 이렇게 부르지는 마시오.」
오케안 어시장 건너편에 있는 시멘트 벽돌집은 박대용이 지난달에 얻은 셋집으로 지금은 내부 수리 중이어서 비워두고 있었다. 새벽 2시 가깝게 된 거리는 조용했고 건물들의 불도 대부분 꺼진 시가지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승용차를 길옆의 골목에 주차시킨 박대용은 골목 쪽에 나 있는 샛문으로 다가갔다. 얼핏 보아서는 구분이 안 되는 샛문을 주먹으로 두드리자 눈높이에 나 있는 손바닥만 한 구멍이 열렸다. 구멍이 닫히면서 빗장이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머리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샛문이 열리자 그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서너 명의 사내가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는데 모두 동양인이다. 잠자코 그들을 지난 박대용이 안쪽의 방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던 이금철이 머리를 들었다. 안쪽의 페치카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셔츠를 풀어 헤친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놈이 왜 찾는 거야?」
대뜸 그가 묻자 박대용은 찌푸린 얼굴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누가 그랬는가 알고 싶다는 거요. 그래서 머리가 어지럽게 말해 주었는데.」
그는 이금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는 도중에 세 번이나 검문을 받았소. 경찰과 군 수사기관까지 동원된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지고 있단 말이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야. 내일 아침에는 집을 비울 테니 걱정하지 말라구.」
이금철이 입맛을 다셨다.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야, 강씨 놈은. 수십 발을 쏘았는데도 살아남았어.」
「이제 다시 기회를 잡기가 힘들 거요. 오늘 수상과 국방장관이 내려오면 경비도 더 삼엄해질 것이고.」
「두고 봐야지.」
그러자 박대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가봐야겠소. 그 망할 놈들이 부르는 바람에 밤중에 이리 새끼처럼 쏘다니게 되었구만.」
「돈 받은 값어치는 해줘야지.」
힐끗 이금철을 쏘아본 박대용이 방을 나왔다. 사내들을 지나 샛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바람 끝이 드러난 피부를 칼날처럼 베고 가는 심한 추위였다. 슈바 깃에 머리를 묻은 그는 차로 다가가 열쇠를 구멍에 넣었다.
그 순간이다. 뒷머리를 강타당한 박대용이 차체에 얼굴을 부딪치면서 고꾸라지듯 엎어졌다. 박대용이 겨우 머리를 들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사내 한 명이 마악 주먹을 내려치려는 참이었으므로 반사적으로 입을 쩌억 벌리며 눈을 치켜떴으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옆머리가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었다.
시멘트 벽돌집이 군경 합동 병력에 의해서 포위된 것은 그로부터 20분쯤 후였다. 거리는 수백 명의 군경에 의해 봉쇄되었고 밤하늘을 울리며 떠 있는 헬기들의 서치라이트가 거리를 대낮같이 비추고 있었다.
「1분의 여유를 준다. 항복하고 나오라.」
마이크를 쥔 미하일 서장이 벽돌집을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샛문과 현관의 좌우에는 군경의 특공대가 돌입 준비를 끝냈다. 1분의 시간을 재려는 듯 미하일이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며 마이크를 옆에 선 부하에게 건네주고는 권총을 빼 들었다. 30초도 되기 전이다. 밤하늘을 향해 한 발을 쏘자 현관과 샛문에 붙여진 폭약이 동시에 폭발하면서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문 양쪽에서는 안쪽으로 가스탄을 던져 넣은 특공대가 돌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찰차를 방패로 삼아 뒤에 서 있던 미하일이 옆에 서 있는 장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로스토프 사령관이 파견한 사령부 소속 참모였다.
「산 채로 잡기는 힘들겠는데. 부상자나 잡아야겠소, 장군.」
「할 수 없지. 입만 성한 놈을 찾는 수밖에.」
그때 안에서 콩을 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가 났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흰 가스가 밖으로 구름처럼 뿜어져 나오는 건물 안에서 밖으로 총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문밖에 서 있던 대원 두어 명이 연달아서 건물 안으로 무엇인가를 집어 던지자 건물이 들썩이는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폭음이 그치면서 안에서의 총성도 그쳤다. 가스 마스크를 쓴 채 벽에 일렬로 붙어서 있던 대원들이 그때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서 다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나왔을 때 장군이 미하일에게 머리를 돌렸다.
「서장, 사건이 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놈들을 소탕했으니 훈장감이오.」
「그까짓 훈장은 이젠 필요 없어. 백 달러를 가슴에다 붙여주는 게 훨씬 실용적이지.」
그러자 장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경찰서장도 미국식이 되어가는군.」
「개방에 발맞추는 거요, 장군.」
요란한 총성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걸 보면 안에서 치열한 사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특공대원들이 꼬리를 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총성과 폭음이 이곳까지 전해져 왔으므로 숙소의 직원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김상철과 장국진이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총성이 그쳐 있었지만 새벽 3시가 넘었는데도 잠자리에 든 직원은 드물었다. 그들이 곧장 2층의 계단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마주 앉아 있던 유장석과 한일만이 머리를 들었다.
「그놈은 어떻게 처리했어?」
유장석이 묻자 그들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자백을 받았습니다. 북한 쪽뿐만 아니라 일본 정보국과 오성그룹 모두에게 정보를 팔아왔다고 하더군요.」
「그렇겠지.」
「오성그룹과 안기부가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관계인 것도 말해 주었습니다.」
「안기부 사람들이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말이 맞는군.」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옆쪽의 한일만을 턱으로 가리켰다.
「한이사가 금방 마피아 그라노프의 연락을 받았어. 작전이 끝나고 북한 공작원 시체 12구를 확인했다는군. 부상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그러자 장국진이 헛기침을 했으므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제가 박대용한테서 들었습니다만 이번 작전의 책임자는 이금철 대좌입니다. 그는 해외사업단 소속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자입니다. 그자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몰살당했다지만 그라노프를 통해서 경찰에 정보를 던져 줘야겠군. 그자가 있나 확인해 보라고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유장석이 김상철과 장국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고들 했어. 오성그룹 놈들을 감시시켜 놓았던 것이 적중했어, 이중 첩자를 잡으니 소득도 이중으로 오는구만 그래.」
김상철과 장국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참, 그자는 어떻게 처리했나?」
김상철과 장국진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는데 입을 연 것은 김상철이다.
「이제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방을 나온 그들이 계단을 내려갈 때 장국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것은 시작이야. 저쪽은 이번 일에 실패했다고 그냥 물러나지 않아.」
그들 옆으로 직원들이 지나갔으므로 장국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다시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설령 계약을 끝낸다고 하더라도 개척과정에서 쉴 새 없는 파괴 공작을 해올 거란 말이야.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 같은 자가 빛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김상철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들은 지하실 한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히터 장치는 되어 있었지만 5평 정도의 방에는 양쪽 구석에 간이침대 하나씩이 놓여 있을 뿐 다른 가구나 장식이 없어 썰렁하였다. 이곳이 그들의 숙소인 것이다.
「회사에 입사했을 때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회사에서 날 필요로 하는 것을 보면 기운이 나고….」
침대에 걸터앉은 김상철이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어느새 러시아어 학습용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있었다.
「내 배경으로는 난 절대로 출세할 수가 없었어. 회사 입사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이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말이야.」
「어떤 배경인데?」
장국진이 궁금한 듯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알 필요 없어.」
안인석이 다가오자 강형문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수시로 표정이 변하는 자인만큼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찡그린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대리님, 무슨 일입니까?」
「여기 앉아.」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겨 준 강형문이 자신의 의자도 그쪽으로 당겼다. 오전 10시경으로 넓은 사무실에서는 간간이 컴퓨터 키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조용했다.
「안인석 씨의 8인치 웨이퍼 예상 수요안은 훌륭했어, 팀장한테서도 좋은 평가가 나왔어.」
강형문이 부드럽게 말했다.
「대만의 A사가 예상보다 빠르게 치고 올라오지만 지금 우리의 경쟁상대는 오성이야. 놈들을 따라잡아야 돼.」
오성의 메모리 분야 반도체 수출실적은 세계 1위이다. 그들은 엄청난 연구 투자와 기획, 생산시설의 확충으로 선두주자 자리를 차지했고 근대는 뒤를 쫓는 상황이었다. 강형문이 컴퓨터의 키를 두드려 화면을 가리켰다.
「이것 봐, 유럽 시장의 올해 3개월간 우리 실적은 작년 대비 23% 성장인데 ‥‥‥」
그는 재빠르게 다시 키를 두드렸다.
「여기 오성의 실적은 42% 성장이야. 우리의 두 배 가깝게 돼.」
오성전자의 작년 매출액은 8조 원가량으로 근대의 두 배에 가까웠으므로 매출액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성장률이 이쪽의 두 배라면 그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는 것이다.
안인석이 입을 열었다.
「오성이 영국의 합작사에 80% 가격으로 물건을 대량으로 넘겨주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도 합작사에 넘겨서 유통시키고 있어.」
「오성이 넘기는 물량이 우리보다 많습니다, 대리님.」
「이것을 보게 .」
강형문이 키를 두드리고는 화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곳에 함정이 있어. 피터슨과 B&A 상사의 실적이 3개월간 60% 증가한 1억 7천만 달러야. 이 두 놈의 매월 증가율은 10% 이상이란 말이야.」
그가 뽑아낸 자료는 재경원에서 집계한 반도체 수출통계였다. 팔짱을 낀 강형문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재경원이나 통상산업부의 통계는 기업에서 보내준 자료에 의해서만 집계가 되지. 선적서류와 수출금액으로 맞춰보기는 하지만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이 자료가 틀렸단 말입니까?」
「자료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야. 총계는 맞는데 피터슨과 B&A가 실제로 오성의 물건을 가져갔느냐 하는 것이 문제야.」
「일본의 고마쓰사 상무가 연초에 오성전자의 간부진과 만나고 갔어.」
「우리 부에서 내린 결론을 이야기해 주지. 오성은 생산량을 극비에 붙이고 있어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 힘들지만 웨이퍼 가공 능력은 월 15만 장 미만이야. 그런데 3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월 20만 장 이상을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어.」
「그렇다면 고마쓰와‥‥‥」
「고마쓰와 손을 잡고 일본에서 가공 웨이퍼를 들여와 외국으로 넘기는 거지. 세관 안에서 수입 수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서류만 찍으면 되는 일이야. 법에 저촉되지도 않고 수출입 물량만 통계에 기록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우리를 누르려고.」
「그래, 우리에게 시장 점유율을 뺏기지 않으려고 고마쓰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많아, 이것은 우리 부의 조사팀이 내린 결론이야.」
「안인석 씨 일본어 잘하지?」
갑자기 그가 말을 돌렸으므로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예, 조금,」
「고마쓰의 한국 대리점에서 이번에 신입사원 모집을 하고 있어. 어때? 거기에 지원할 생각 없나?」
「놀란 모양이군. 이것은 간부급 회의에서 나왔던 의견이야. 믿을 만한 사원을 지원시켜서 그쪽 정보를 빼내자는… 그래서 생각난 것이 안인석 씬데.」
「물론 봉급과 수당에다가 정보비 명목으로 매달 상당한 돈이 지급될 것이고 고마쓰 쪽에서도 봉급이 나가겠지. 그건 합격된 후의 일이겠지만.」
「그리고 본인이 원하면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복귀할 수가 있어. 아마 인사고과에 큰 플러스가 될 거야.」
「만일에 거절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강형문이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본인이 싫으면 할 수 없는 거지, 이건 강요하는 것이 아니야.」
「전 싫습니다.」
「그럼 기밀이나 지켜주라구. 내 생각이지만 지원자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컴퓨터 앞으로 몸을 돌린 강형문이 머리를 돌려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내가 안인석 씨 위치에서 그런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는데.」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난 했어. 설령 회사가 날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도 했겠고, 분하다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전 대리님과 다릅니다.」
「다르지, 여러 가지로.」
그는 컴퓨터로 머리를 돌렸다.
「난 이곳에 내 인생을 걸고 있으니까 말이야.」
노바 호텔 스카이라운지는 안인석이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그가 앉은 아래쪽으로 불야성을 이룬 강남의 밤거리가 보였고 옆쪽으로 밤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 있는 것은 남산 타워였다.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는 이유미의 기척에 안인석이 창에서 머리를 돌렸다.
「시베리아 문제로 언론에서 매일 근대를 비판하던데, 회사는 괜찮아?」
「상관없어, 그런 것.」
안인석이 술잔을 쥐었다. 이유미와 이렇게 둘이서 마주 앉은 것은 꽤 오랜만이었는데 오늘따라 그녀가 선선히 나와준 탓에 안인석은 기분이 조금 풀려져 있었다. 물론 이곳도 새로운 분위기여서 마음에 든다.
「강회장이 러시아로 모든 재산을 옮길지도 모른다고도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안인석이 입맛을 다셨다.
「난 그따위 루머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야.」
「왜? 회사 일인데」
「오늘 대리 놈이 날더러 다른 회사에 시험 쳐서 가라는 거야.」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이유미에게 안인석이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나한테 정보원이 되라는 거지. 진급을 보장해주고 봉급도 이중으로 받게 된다면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라고 하긴, 거절했지. 그따위 치사한 짓을 하면서 월급쟁이 노릇은 못 해.」
「‥‥‥‥」
「제 놈은 회사에 인생을 걸었다나? 날더러 제 흉내를 내라는 거야.」
「안 간다고 했으니 불이익 같은 건 없을까?」
「기밀이나 지켜주라면서 없는 것으로 하자고 했지만 조금 꺼림칙하긴 해.」
안인석이 술을 벌컥 들이키고는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엊그제 하바로프스크에 가 있는 친구한테서 연락을 받았는데 상철이가 대리로 진급을 했다는 거야. 개척단에 파견되었던 직원들 모두 한 계급씩 올라갔어.」
「어머나, 잘됐네.」
「상철이는 잘해, 오기가 있고 적응력이 강한데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나도 그 소식 듣고 기뻤어, 진심으로.」
「그놈이 여기 있다면 상의를 할 수 있을 텐데,」
이유미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안인석의 손을 쥐었다.
「기운을 내. 갈등이 있는 것은 인석 씨뿐만이 아니니까.」
「솔직히 회사와 내 사생활과의 구분을 할 수가 없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밖에서 풀리지가 않는단 말이다.」
「이제 그런 소리 그만해.」
담배를 입에 물면서 이유미가 말했다.
「걱정할 것이 뭐가 있다고 그래? 회사 그만두어도 평생 먹고 살 만큼 유산을 물려받을 사람이, 회사 들어가기 전에도 한 달 용돈을 월급의 몇 배씩 받아썼지 않아?」
잠자코 시선을 주고 있는 안인석을 향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때려치워도 그만이다 하고 왜 밀고 나가지 못해? 뭐가 겁나서」
시트를 끌어당겨 가슴을 덮은 이유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 축축하고 끈적이는 공기로 덮여져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었다.
안인석과는 꽤 오랜만에 갖는 섹스였고 그것이 서로를 달아오르게 한 모양이었다. 하체에 남아 있는 약간은 무겁고 나른하며 짜릿한 느낌이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천장으로 담배연기를 뿜어내던 안인석이 입을 열었다.
「어떤 선배는 결혼하면 훨씬 적응이 빨라진다고 하더구만. 자기도 그랬다는 거야.」
「‥‥‥‥」
「네가 좋다면 회사 때려치우고 아버지 병원 사무장을 할 수도 있고 가게를 차릴 수도 있어. 백화점은 안 되겠지만.」
안인석이 벌거벗은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는 이유미를 내려다보았다.
「적응하지 못하는 나한테 실망한 건 아니야? 만날 때마다 너한테 못난 소리나 지껄이는 나한테 말이야.」
「그런 거 없어.」
「예전과는 네가 달라진 것 같아서 그래. 한때는 내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아아, 답답해.」
이유미가 시트를 젖히고 일어서자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알몸인 채로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냉장고 안의 빛을 받은 그녀의 알몸이 뚜렷한 입체감을 지니고 드러났다. 생수병을 집은 그녀는 벌컥이며 병 채로 물을 마셨다. 벽시계의 바늘이 새벽 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은 안인석이 말했다.
「유미, 넌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난 직장생활을 더 하고 싶어.」
팬티를 찾아 발에 꿰면서 이유미가 말했다.
「몇 년 더 하다가 결혼할 거야.」
「‥‥‥‥」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인석 씨.」
브래지어를 채우고 셔츠를 입으면서 이유미가 그에게로 다가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난 사흘 후에 LA에 가게 됐어. 한 달 동안 지사 업무를 도와주라는 회사 지시야.」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회사 일인데 할 수 없지.」
안인석도 침대에서 일어나 팬티를 찾아 입었다. 이유미가 전등 스위치를 켰으므로 방 안은 환해졌는데 그것이 제각기 옷을 찾아 입는 두 남녀를 더욱 어색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들은 옷을 다 입는 동안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고 입도 열지 않았다.
근대그룹의 중공업 그룹 회장이며 조선의 회장인 강용식의 집무실은 아마 총회장의 집무실보다 20배는 클 것이다. 그리고 장식품도 총회장실처럼 질박하지가 않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넓은 바닥을 온통 덮은 카펫에 맞춤 집기들과 장식품들은 근대그룹 2인자의 품위에 손색이 없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강용식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인물로 아버지를 닮아 추진력도 뛰어났지만 온건한 성품이었다. 그는 앞에 앉은 이상기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글쎄, 제가 연락이 안 된다면 믿지 않으실 테니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제 제가 해드릴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이상기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청와대의 안보수석으로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비밀방문을 한 것이다. 50대 초반이었으나 하얀 머리와 주름진 얼굴은 그를 10년쯤 늙어 보이게 했다.
「강회장께서 그 정도로 무모하신 분인지는 몰랐습니다. 도대체 대통령의 말을 이렇게 무시하셔도 되는 겁니까?」
「무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 끝내고 나서 틀림없이 찾아뵙고 말씀드릴 겁니다, 수석님.」
「글쎄, 일을 끝내다니요. 계약을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데도.」
「‥‥‥‥」
「북한을 자극해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땅을 임차해 우리 영토화한다는 회장님의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는데요, 수석님.」
강용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저희 근대그룹에 가해진 압력으로 수천억 원의 물적 손실이 났고 예상 손실은 수조 원에 이를 것 같습니다. 그걸 처리해 주실 방법이 있습니까?」
「미국 해리티지 재단이나 뉴욕 타임스에서 발표한 한국의 시베리아 임차에 대한 견해는 긍정적이었습니다. 미국의 군부 쪽에는 절대적으로 찬성을 하고 있어요. 물론 한국 군부도 마찬가지 입장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국 군부의 누가 그래요?」
「각하의 임기가 끝나면 말씀드리지요.」
「허어.」
이상기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강회장, 정말 이렇게 나오실 거요.」
그러자 강용식의 얼굴도 굳어졌다.
「아버님이 총격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지셨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
「목숨을 걸고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도 나라를 위한다는 사명감으로 그곳에 조선족 동포들을 이주시킬 계획이고, 도시를 만들어 또 하나의 한국을 세운다는 장대한 계획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우리가 그곳에서 원목만 베어서 사리사욕만 채우려 한다고 언론을 통해 수없이 매도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계획을 내보이려 하면 기관을 통해 가로막고.」
「이것 보시오, 강회장.」
「권력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근대는 정부에서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안 될 겁니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서 정권이 바뀌면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지실 겁니까? 그때 판단을 잘못했다고 하실 겁니까?」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겁니까?」
「그까짓 북한과의 정상회담 안 되면 어떻습니까? 선원 몇 명 송환시켜 주고, 이산자 몇 명 왕래시켜 주고 나면 곧 끝날 텐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북쪽 사람들의 속성을.」
「허어.」
「그런다고 국민들이 표를 주지 않습니다. 이제는 국민들이 그런 일회성 대북정책에 놀아나지 않아요. 정말 답답들 하십니다.」
「정말 상종 못 할 사람이군.」
이상기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어디 두고 봅시다. 어떻게 되나.」
「잠깐만요, 수석님.」
웃음 띤 얼굴로 강용식이 그를 바라보았다.
「잊고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더 이상 계약을 방해한다면 국교 단절과 함께 대사관 철수, 그리고 한국을 적국으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할 예정입니다. 아마 오늘 오후에 러시아 대사가 외무장관을 방문할 것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그때에는 아무리 언론에 기름칠을 해놓았더라도 언론이 현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려주겠지요. 시베리아 임차의 실익이 무엇이고 정부의 의도는 무엇인가를. 아마 그것도 비밀에 붙였다가는 매국노가 될 테니까요. 감춘 사람 모두가.」
안기부장 권준규가 청와대의 비서실장실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인 11시 30분경이었다. 급한 김에 청와대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안기부장과 외무장관 그리고 통일 부총리까지 오도록 연락을 한 이상기는 발바닥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안민수 비서실장실에 모인 것은 회의 결과를 즉각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 여성 단체장들과 오찬 회동이 끝나고 나서 보고를 받도록 해야만 했다.
제일 늦게 들어선 안기부장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상기로부터 강용식의 협박 내용(?)을 전화로 들은 것이다.
「어젯밤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강회장이 총격을 받아 직원 두 명이 현장에서 죽었고 강회장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여기 계신 분들은 대충 알고 계시겠지요.」
그 사실은 그가 아침에 안보위원회원인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다시 정보가 왔습니다. 습격한 자들의 아지트를 군경 특공대가 기습해서 일망타진했는데 모두 12명을 사살 또는 생포했습니다. 그자들은 북한 공작원들이었지요.」
다시 그의 말소리가 방을 울렸다.
「러시아 정부가 아직 공식 발표한 것은 없지만 하바로프스크 전역에 북한인들의 검거령이 내려졌습니다. 북한 여권을 가진 자는 모두 잡아들인다는 겁니다. 이러한 조치는 곧 블라디보스토크, 니호트카까지 연장될 것이라고 합니다.」
「북한 측의 대응은 없습니까?」
비서실장이 물었다. 그러자 권준규가 머리를 저었다.
「없습니다. 러시아 땅에서 테러를 한 증거가 있는데 나설 처지가 못 되지요. 그자들이 한국을 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통일 부총리가 피식 웃었으나 입은 열지 않았다. 이상기가 헛기침을 했다.
「제가 전화로 사정은 대강 말씀드렸는데, 강용식의 협박에 대처할 방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자 말대로 오후에 러시아 대사가 외무장관을 찾아올 것인가 말 것인가를, 그리고‥‥‥」
「오후 3시에 대사와 부대사가 방문하겠다는·연락이 조금 전에 왔습니다.」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외무장관이 말하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입을 연 것은 통일 부총리다.
「방문 목적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중대한 일이라고만 해서 지금 차관 이하 실무자들이 모든 서류를 챙기고 있지요.」
장관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석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외교적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러시아가 국교 단절을 하면 한국은 당장에 고립무원의 상태가 돼요,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지.」
혼잣말처럼 권준규가 말했으나 모두 알아들었다. 그가 이제는 분명하게 말했다.
「뉴욕 타임스나 미국 군부, 주한 미군 사령관도 근대의 시베리아 임차에 긍정적이오. 대통령과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시베리아가 일본과 북한, 러시아 세 세력의 완충지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현실적이어야‥‥ 우리는 지금 당장 북한과의‥‥‥」
이렇게 이상기가 입을 열었는데 부총리가 손을 들었다. 말을 그치라는 시늉으로 좀체로 그런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저지한다고 해도 내일 강회장은 계약을 할 것이고, 그때에는 우리만 곤경에 처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망신입니다. 러시아 대사가 오기 전에 계약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합시다.」
그러자 모두 부총리를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발의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물론 비공식이오. 근대가 계약을 하더라도 정부의 지시를 어긴 것으로 놔둬야 국가 기강이 섭니다.」
비서실장 안민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각하께서 결심을 해주신다면 러시아 대사관 쪽에 통보를 해줘야겠는데요. 그자들이 찾아오기 전에 말입니다.」
외무장관이 말했다.
「실장께서 서둘러 주셔야겠어요.」
권준규가 말하자 안민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점심 식사 중이더라도 내가 직접 말씀을 드리지요.」
그러자 이상기가 얼굴을 굳힌 채 시선을 떨구었다. 근대와 러시아와의 문제는 그의 소관이었고 이제까지 그가 직접 각하를 뵈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볶음밥이라도 먹으면서 기다리지요.」
주위를 둘러보며 권준규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실장께서 다녀오시는 동안 여기서 청와대 볶음밥이나 먹읍시다.」
강회장이 강용식으로부터 정부의 비공식 승인방침을 연락받은 것은 그날 저녁, 마악 저녁 식사를 시작하는 때였다. 이남호로부터 보고를 받은 강회장이 수저를 들면서 말했다.
「시베리아 임차가 거론되던 5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수천억의 손실을 입었다. 금융 제한, 투자규제, 세무감사에다 토지정리, 거기에다 원자재 수입 규제까지. 그것을 누가 보상해준단 말이냐」
식탁에 둘러앉은 것은 이남호와 유장석, 그리고 계획단의 중역 세 사람에다 한일만 이사까지 포함해서 일곱이다. 박미정은 고용된 러시아 여인과 함께 바쁘게 움직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회장의 기분은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어젯밤의 총격 사건으로 이쪽의 주장에 더욱 무게가 실려질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내일 계약조건에 대한 검토가 끝나면 모레 정식 계약이 될 것이야. 각자 빠뜨린 것이 없도록 준비를 해.」
그러자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서울에서 대기하고 있는 2진은 모레 저녁에 이곳에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베리아를 비워두기가 불안해서요.」
이미 개발된 유정을 말하는 것이다.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몇 명이야? 이번에 올 직원은?」
「김동호 부장 인솔로 85명입니다.」
「그럼 여기 남아 있는 직원들은 모두 휴가를 보내. 고생들 했으니 금일봉을 주어서. 그리고 탐사단원들한테는 내가 말한 대로 그렇게 하고.」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회장님.」
이남호의 목소리도 밝았다. 된장찌개를 먹던 회장이 옆을 지나는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미정이 솜씨가 아주 늘었다. 이제 된장찌개가 제법이야.」
박미정이 말없이 웃었으나 이남호가 거들었다
「다재다능합니다, 회장님. 성실하구요.」
회장이 좋아하는 단어만 골랐으니 회장의 얼굴이 더 펴졌다.
「내가 중신을 하지, 틀림없는 놈으로 회사에서 골라주마.」
그러자 중역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회장이 중매를 서서 고른 놈이니 해당 중역들이 뒤를 안 봐줄 리가 없다. 따라서 그놈은 회장의 말대로 자연스럽게 틀림없는 놈으로 성장할 것이니 회장 말이 맞는 셈이 된다.
「그런데 회장님.」
유장석이다.
「김상철 대리는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합니다. 장국진이 때문에. 그자와 같이 있다가 1진과 함께 시베리아로 들어가겠다고 하는데요.」
그러자 회장이 수저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으므로 식탁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놈은 참.」
이윽고 회장이 혼잣말처럼 말했으나 뒤쪽에 서 있던 박미정까지 다 들었다.
「나는 요즘 그놈한테 빚진 기분이 든단 말이야. 마음이 무거워.」
회장이 중역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놈은 업보를 벗어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거야.」
그러자 유장석이 헛기침을 했다.
「저도 목숨 빚을 졌습니다, 회장님, 이대각 부장도 그렇지요.」
「그놈도 서울로 돌아가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도록 해. 장국진이는 이곳에 남겨둔다. 지사원들과 같이 있도록 하고 도망치면 놔둬라.」
회장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자 모두들 홀가분한 얼굴로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밝은 분위기의 식탁이었고 박미정의 마음도 마찬가지가 되어 있었다.
3. 전화위복
그들은 계약서를 주고받았는데 그것은 분명 명문화된 조약이었다. 자위권 문제를 놓고 다소 의견대립이 있었으나 코시킨 수상은 이미 대통령으로부터 내락을 받고 온 눈치였다. 근대가 요구한 조건 대부분이 수용되어 45만 평방킬로에 달하는 시베리아 땅이 50년간 근대그룹의 임차지로 결정이 되었다. 물론 지하와 천연자원의 개발은 근대의 단독 투자로 이루어질 것이지만 생산자원의 분배는 50 대 50이다. 근대는 임차의 대가로 러시아 정부에 10억 달러의 현금을 6개월 내에 지급하기로 했고 2년 내에 8억 달러를 투자하여 근대 자동차의 러시아 현지 법인을 세우기로 계약을 했다. 또한 근대 임차지에 5년 이내에 20만 명을 고용하는 생산시설을 세우고 최소한 백 만의 이주민을 받기로 했는데 구속 조항은 아니었다. 기타 세부 사항도 양쪽의 전문가와 법률고문들이 철저한 확인을 거쳐 작성했다.
사흘째 되던 날 오후, 강회장과 코시킨 총리는 내외신기자 수백 명의 플래시를 받으며 조약에 사인을 했다. 강회장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어서 옆에 있던 이남호는 자주 눈치를 보았으나 조인식은 무사히 끝이 났다. 한국에서도 기자 몇 명이 참석했는데 하바로프스크 시청에 운집한 기자단에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외국이 이 일에 대한 더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가 형식만 차리려고 보내졌던 기자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밤 러시아 대표단과 밤늦도록 셀 수 없이 건배를 했던 강회장과 중역들이 일어나 출발 준비를 했다.
아에로플로트의 전세 비행기 편으로 귀국하게 되는 인원은 백 명이 넘었으므로 숙소는 아침 일찍부터 떠들썩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인 것이다. 숙소와 지사에는 오늘 오후에 개척단의 1진 85명이 도착하게 되었으니 빈자리는 금방 채워질 것이었다. 지하실의 방에서도 김상철의 출발 준비는 끝이 났다. 출발 준비라야 옷가지를 가방에 넣어 한쪽 구석에 놓고 방 안을 정리한 것뿐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장국진이 입을 열었다.
「모두 고향에 돌아간다고 들떠 있구만, 기다리는 사람들한테로 말이야.」
낮은 목소리였지만 비꼬는 것도, 그렇다고 가라앉은 분위기도 아니다.
「이거, 이 몸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서 시베리아에 버려졌구나.」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운명이야. 누굴 원망할 거야.」
「원망하다니, 팔자가 그렇다는 말이야.」
장국진은 지사 소속의 이대리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그는 경력이 5년째인 고참이었는데 정보수집 업무를 주로 해온 장국진과 팀이 된 것이다. 아직 출발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김상철에게 그가 물었다.
「한 달 후에는 돌아오겠지.」
「물론, 빨리 오고 싶지만 서울에서도 할 일이 많아. 개척단 일도.」
「알 수가 없군, 이곳으로 빨리 오고 싶다니.」
장국진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래도 반기는 사람은 있을 것 아닌가?」
「있지, 물론. 교도소에 계신 아버님을 뵈어야겠고. 기뻐하실 거야, 내가 진급한 것을 들으시면.」
「교도소라니? 감옥 말인가?」
「그래, 아버지는 감옥에 계셔.」
「그렇군.」
「여동생이 이모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걔도 만나봐야겠고.」
「어머니 산소도 가봐야겠어. 그리고 내 친구도 만나고.」
장국진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김대리도 사연이 많군.」
「여기 보내지지 않았다면 아마 근대에 입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아버지 때문에 말인가?」
「그럴 거야.」
「이젠 문제가 없지 않아?」
「그렇겠지만 난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이곳이 내가 일할 곳이라구.」
비행기 안이다. 러시아 대륙을 지난 비행기는 좌측으로 일본 열도를 끼고 동해상을 내려가는 중이다. 창밖으로 푸른색 젤리같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위쪽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손톱 끝만한 흰 항적을 그으면서 배 한 척이 아래쪽으로 열심히 항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얼싸안고 춤을 추었어. 우는 사람도 있었고, 저기 앉은 김교수는 주저앉아 울더군.」
서은영이 턱으로 앞쪽 좌석에 앉은 김진모를 가리켰다. 옆에 앉은 박미정이 눈을 깜박이며 귀를 기울이고 있다.
「글쎄, 뭐랄까. 현실과 타산을 떠나서 성취감 때문일지도 몰라. 우린 산적들의 습격을 받아 본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고 그곳으로 도망가 있었거든. 그런 와중에 유정이 터진 거야. 그 순간에는 다른 건 모두 잊게 되더라니까.」
닷새가량 같은 방에서 지냈지만 서은영은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나이가 몇 살 위여서 언니 취급을 해준 사이였던 것이다.
「언니,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
그러자 서은영이 피식 웃었다.
「입 닥치는 대가를 받았거든, 그것도 거금이야. 하지만 너한테 말하는 건 괜찮겠지.」
「많이 죽었다면서?」
「전쟁터가 어떤 덴지 넌 겪어보지 않아서 몰라. 난 정신이 나간 채 트럭 안에 멍하게 앉아 있었어. 그 총소리, 고함소리, 폭발 소리.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아.」
서은영이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했다.
「악몽이야, 처음부터. 결코 잊을 수가 없어. 시베리아의 석 달을.」
「좋은 기억은 없어?」
「없어.」
머리를 저은 서은영이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서 샴페인 두 잔을 받아들었다. 기내는 온통 웃음소리와 말소리로 떠들썩했고 스튜어디스들은 술 쟁반을 분주히 나르고 있다. 이남호가 마시라고 허락해 준 것이다. 박미정에게 술잔을 건네준 서은영이 문득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죽으려다 살아난 기억이 있지.」
「산적들이 습격했을 때?」
「아니 ‥‥ 저 사내.」
서은영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통로에 여럿이 둘러서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저기, 흰 스웨터.」
흰 스웨터를 입은 김상철이 직원이 따라주는 술을 잔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저 친구가 날 죽이려고 했어.」
「아마 내가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저 친구는 날 죽였을 거야.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우연일 것이다. 이쪽으로 머리를 돌린 김상철의 시선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박미정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이유를 물어도 돼? 왜 그랬는지.」
「내가 사보타주를 했거든. 돈을 받고 근대 쪽의 정보를 넘기기로 했었어. 그래서 기록을 녹음하다가 들켰지.」
「그리고 탐사기의 칩을 숨기기도 했고.」
「무서웠어, 저자가, 그래서 항복하고 이쪽의 사례금을 받은 거야. 난 적응을 잘하니까.」
그러자 박미정은 술잔을 쥔 손을 내렸다. 김상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서울에서 곧장 내려갈 거야?」
서은영에게 묻는 말이다. 서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개강 준비를 해야지. 주임교수까지 사고를 당해서 더 바빠지겠어.」
「그렇다면 만나기 힘들겠는데.」
「내 계약은 이제 끝났으니까.」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손을 내밀었다.
「공항에서는 서로 바빠서 못 볼지도 모르니까, 그럼 잘 가.」
서은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입 걱정은 말고, 좋은 추억이 될 거야. 시베리아 일들이.」
악수를 마친 김상철이 박미정을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우린 시베리아 동지지요.」
몸을 돌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여자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김상철은 민희와 함께 대전 교도소의 면회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민희는 혼자서 여러 번 면회를 다녀왔다고 했다. 지금 아버지와 오빠의 상봉을 기다리는 그녀는 들뜬 표정이었다. 이윽고 김영환씨가 면회실로 들어서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영환씨는 김상철을 보자 놀란 모양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다가왔는데 흰 머리가 많이 늘어나 있었지만 건강하게 보였다.
「네가 돌아왔구나.」
「아버지, 그동안‥‥‥」
「나는 잘 있다.」
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민희를 바라보았다.
「민희가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
「아버지는 참.」
민희가 눈썹을 찌푸렸고 잠시 말이 끊겼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진급했어요.」
「진급이라니? 네가 왜?」
눈을 끔벅이며 김영환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리 진급을 했습니다. 시베리아에서 일을 좀 해서요.」
민희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저, 한 달 후에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갑니다. 들으셨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땅에 공장과 도로, 건물들을 세우고 조선족들을 이주시켜 시베리아를 개척하게 됩니다.」
「‥‥‥」
「아버지, 그곳이 제가 일할 곳 같아요.」
김영환이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일은 무엇이냐?」
「개척단에서 보급 일을 맡았어요. 영하 40도가 넘는 곳이어서 힘이 들었지만 보람이 있었어요.」
「‥‥‥」
「이번에 돌아가면 다른 일을 맡게 될 것 같아요. 일이 많으니까요.」
「애비 때문에 그곳에 가는 것 아니냐?」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버지, 그곳에는 기회가 있어요. 저는 몸조심이나 하면서 현실에 만족해 가는 생활은 안 할 작정입니다.」
「윗사람의 신뢰는 받고 있느냐?」
「그런 것 같아요.」
「다행이구나.」
머리를 끄덕인 김영환이 말을 이었다.
「나는 혹시나 네가 나 때문에 사회나 직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아버지, 저는 그럴 정도로 어리숙한 자식이 아닙니다.」
「‥‥‥」
「이용 가치가 없으면 용도폐기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요.」
아버지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으므로 김상철은 말을 멈추었다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분노를 더 이상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적응이라기보다 어쩌면 체념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김상철은 민희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차 속에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해서 할 일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자신의 무력감 때문이었다.
김상철이 안인석을 만난 것은 교도소에서 돌아온 날 밤이다.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로 달려온 안인석과 함께 그는 신촌역 앞의 음식점에서 소주를 마셨다. 한바탕 흥분이 가라앉자 조금 차분해진 안인석이 술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개척단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어. 너 진급한 이야기나 듣자. 입사 4개월에 대리 진급을 한 놈은 근대 역사상 처음일 거야. 아마.」
「이 자식아, 목숨을 담보로 걸고 일을 한 거다. 고스톱 쳐서 대리 딴 것이 아냐.」
「죽은 사람도 있다던데. 회장이 습격도 당하고.」
「전쟁터보다 더 했어, 상황이.」
상대가 다름 아닌 안인석이다. 김상철이 혹한과 눈보라며 그레고리의 습격을 이야기하자 안인석이 입을 벌리고 들었다.
「그것, 지독한 곳에서 살아왔구나.」
안인석이 머리를 저었다.
「그 이야기 퍼지면 지원자가 다 도망가겠는데.」
「전자에도 지원자를 모집해?」
「우린 아냐. 건설과 중공업에서 모집하는 모양이야.」
안인석이 소주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빌어먹을. 날더러는 고마쓰 지사로 가라고 하더구만, 조장 놈이.」
「무슨 소리야?」
김상철이 묻자 대충 상황을 설명해 준 안인석이 입맛을 다셨다.
「눈치가 보여. 팀장도 그렇고,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
「아버지한테 사업이나 하면 어떻겠느냐고 슬쩍 쑤셔봤다가 잔소리만 들었어. 직장생활 반년도 안 한 놈이 뭘 알고 나서느냐고.」
「적응이 안 돼?」
「아마 그런가 봐. 우습단 말이야. 팀워크가 어쩌구 성취감이 어쩌구 하는 것이.」
「‥‥‥」
「씨발, 그런데 날더러 산업스파이가 되라구? 이건 무슨 영화 찍는 거야, 뭐야.」
「너, 나하고 시베리아에 갈래? 내가 유전무한테 말해볼 테니까.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아, 싫어. 네가 있어서 좋긴 하겠지만 그 추위에 눈 속에서 무슨 재미로. 요즘 해외주재원도 안 나가려고들 하는 판인데.」
「유미는 잘 있어?」
김상철이 말머리를 돌렸다.
「걔나 나오라고 해라. 오늘은 내가 술 살 테니까.」
「글쎄, 아마 퇴근했을 텐데.」
잔에 술을 채운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그 기집애하고도 잘 안 돼. 아마도 내 탓이겠지만 예전 같지가 않아.」
「이건 도무지,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몇 년 후에나 결혼하겠다는데 볼장 다 봤지. 슬슬 물러나는 거야, 걔도.」
「그럴 수도 있지, 인마. 그게 너하고 결혼 안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야, 더 이상 너한테 하소연하기에도 내가 신물이 난다, 내 자신이.」
안인석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다. 내 유일한 친구를 위해서.」
잔을 들어 올린 김상철은 잠자코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두 병 더요.」
주방을 향해 소리치고 난 안인석이 김상철을 향해 빙긋 웃었다.
「이렇게 술맛 나기도 오랜만이다.」
인사동 골목에 있는 한정식집 낙동강의 방 안이다. 근대전자의 구주팀 조장 강형문 대리는 청주 잔을 내려놓고 앞에 앉은 엄기호 과장을 바라보았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제일 필요한 건 열의지요. 그것은 곧 애사심과 협동심이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엄기호가 짜증난 듯 입맛을 다셨다. 청주를 세 병째 나눠 마신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마쓰 건을 안인석이에게 제의한 것은 실수였어. 놈은 회사가 자신을 내몰려고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다른 사람 같으면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세대는 달라. 그걸 이해해야 돼.」
「회사 조직이 그놈들한테 맞추라는 겁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런 놈들은 몇 명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강형문이 청주를 한 모금에 삼키고 내려놓았다.
「어쨌든 안인석이를 일본 지사로 보내주십시오. 고마쓰 제의를 거절당한 이상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도 거북합니다.」
「이봐, 회사 인사를 자네 마음대로 하려는 거야?」
「과장님이 말씀하시면 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오사카 지사는 티오를 늘리는 중이라고 들었어요.」
「자네 인사에 밝군. 어디, 이번 일사분기의 내 고과가 어떻게 나왔나도 알려줄 수 있어?」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과장님.」
「이제 말하지만 강대리는 너무 서두르고 있어 내년이 되면 어련히 진급 안 할려구. 안 그래?
방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입장이면서도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엄기호는 다른 팀에 비해 실적이 떨어지면 내년 초에 당장 인사 조치를 당할 수가 있었고 또 강형문이 실적을 크게 늘려 두각을 나타낸다면 자신의 팀이 쪼개져서 또 하나의 팀장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포분열이다. 엄기호 그 자신이, 미주와 구주를 맡고 있던 지금의 미주팀장 최병우 과장한테서 떨어져 나온 것과 같이 회사는 이렇게 성장해가는 것이다.
「알았어. 이제 술이나 마시자구.」
술잔을 든 엄기호가 말하자 강형문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엄기호가 같이 성장해 나가는 방법을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조를 적극 지원해 줘야 팀의 실적이 오르는 것이다.
청와대의 비서실장 방에서는 안뜰이 바라보였다. 아직 마른 잔디로 덮여 있는 정원 위로 아침 햇살이 환하게 내려 비추었고 옆쪽 부속건물의 푸른 지붕은 맑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지금 대통령은 외무장관과 함께 인도네시아 수상을 접견하는 중이었지만 안민수는 참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상기와 함께 근대그룹의 총회장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수상이 돌아가면 대통령과 강회장의 면담이 있게 될 것이다. 창 쪽의 소파에 앉아 있던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대단히 추워요. 그, 시베리아 땅이 말이오. 공기가 얼음이 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거요.」
옆에 앉은 이남호가 힐끗 앞쪽의 안민수와 이상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듣는 시늉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름에는 꽃이 피고 따뜻하다니 기대가 되는구만. 그때는 내가 두 분을 초대하리다.」
「저…· 각하께서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에 전력을 다하고 계시는 걸 아시지요?」
마침내 안민수가 입을 열었으므로 강회장도 정색을 했다.
「아, 그거야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그 일 때문에 부르신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나는 꾸지람을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그러시지는 않습니다. 각하께서도 회장님을 이해하고 계시니까.」
「‥‥‥‥」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지만 않았다면 시베리아 개발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계셨지요.」
「아아, 그렇습니까?」
「이번에 북한과의 이산가족 왕래나 어선 송환 문제 등이 깨진 데다 정부의 체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깎였지만 그걸 말씀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
「어차피 이렇게 된 일이니 서로 잘 수습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지요.」
「물론이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내가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근대의 시베리아 임차는 정부의 통일을 위한 장기계획이었다고 말씀을 해주셨으면 해서요. 각하께 그렇게 발표를 하겠다고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강회장이 옆에 앉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이남호는 헛기침을 했다가 회장의 시선을 받자 얼른 시선을 내렸다.
「원래 정부의 계획이었다고 말이지요?」
회장이 확인하듯 묻자 이제는 이상기가 나섰다.
「예,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근대를 비공식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물론 북한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러니 그자들이 시비를 걸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정부가 갖은 수단을 다 써서 날 방해한 것은 그자들이 더 잘 알 테니까.」
안민수와 이상기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발표하면 근대에 대한 갖가지 규제는 풀어주실 겁니까?」
「아니 저희들이 규제를 한 것이 아닙니다만, 각 기관이 지레 알아서 그런 일들이 있었던 모양인데‥‥‥」
찌푸린 얼굴로 이상기가 말했다.
「군사정권 시대의 유물입니다. 정말 저희들도 짜증이 납니다. 곧 그런 일이 없도록 조처를 하지요.」
「그것도 그렇고 차관을 빌리는 데 정부가 보증을 서 주셔야겠어요.」
「고려해 보지요. 금액은 얼마나 됩니까?」
「30억 달러 정도 됩니다. 조건이 좋아요. 정부가 보증을 서 준다면 말입니다.」
「아니, 임차계약에 필요한 금액은 10억 달러 아니었습니까?」
「개척비용이 엄청납니다. 10년은 집중 투자를 해야 하니까요.」
「각하께 말씀을 드리지요. 각하의 배후 지원이 없었다면 시베리아 임차는 불가능했다고 내일 중으로 발표하겠다고 말입니다.」
30분 후, 강회장은 대통령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배석하고 있는 것은 안민수 실장 한 명뿐이다. 접견실의 좌석 배치는 대통령이 상석이고 앞쪽으로 좌우에 놓인 의자에 강회장과 안민수가 앉은 형태여서 강회장이 대통령을 바라보려면 왼쪽으로 몸을 돌려야 한다.
「각하, 여러 가지로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강회장이 공손히 말했다.
「요즘 잘 되시지요?」
그렇게 대통령이 동문서답을 하자, 강회장이 말한다.
「각하께서 배려해 주신대로 시베리아 임차를 잘 끝냈습니다.」
힐끗 안민수를 바라본 대통령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잘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내일 중으로 제가 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각하의 비공식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시베리아 임차는 불가능했다고 국민에게 알리겠습니다.」
「한민족이 많이 산다면서요? 그쪽에.」
「예, 각하. 30만이 넘습니다.」
「5년 이내에 몇백만 명이 옮겨갈 예정이라던데.」
「그렇습니다, 각하.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한국이 시베리아에 건설되지요.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주민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50년간 아닙니까? 임차 기간이, 50년 후에는 돌려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한민족이 정착하고 있겠지요.」
「러시아가 내버려 둘까요?」
「러시아 쪽에도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극동 지역이 크게 발전하게 될 것이고 모두 러시아 국적의 국민들이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한민족이 경영하는 땅이 되겠지요.」
「조만간 나도 한번 그쪽에 가봐야겠는데.」
그러자 안민수가 헛기침을 했다.
「각하, 아직 그곳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도 있고.」
「그런가.」
강회장이 다시 나섰다.
「그래서 한실장한테 정부보증으로 차관을 얻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모두 각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이니만치 이번에도…」
「‥‥‥‥」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청와대를 나온 강회장은 승용차가 광화문을 지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강회장이 옆에 앉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시티은행에서는 20억 달러까지 빌려준다고 했으니 20억을 빌려라. 바크레이 15억에 시티 20억으로 35억 달러이다.」
「회장님, 아까 실장한테는 30억 달러라고 하셨는데요.」
「5억 달러 늘려. 제 놈들 돈이냐? 그리고 제 놈들이 책임질 것이냐? 결국은 내가 갚을 돈이지만 생색 내주는 대가는 단단히 받아야겠다.」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선다면 돈을 안 빌려줄 은행이 없다. 더구나 이자도 4.5% 쌀뿐더러 최대한 3년 이상 거치 상환도 되는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강회장이 말을 이었다.
「정치가 놈들, 나한테 흥정을 하려고 들다니, 내가 돈 안 받고 물건 팔 것 같으냐.」
「유정이 나온다는 것을 알면 돈을 안 빌려줄 은행이 없습니다, 회장님.」
「제정신이냐? 그 비싼 이자를 내게? 정부보증으로 거치 상환까지 하게 되면 이자까지 합해 몇억 달러를 번 것이다.」
비서실로 들어선 이남호가 자리에 앉자 유장석이 다가왔다.
「일 잘되셨습니까?」
그도 이남호 비서실장이 회장을 모시고 청와대에 다녀온 것을 아는 것이다.
「안 될 리가 있나」
소파에 마주 앉아 그가 다소 의기양양한 말투로 청와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 해주자 유장석이 활짝 입을 벌리고 웃었다.
「시원합니다. 그까짓 생색은 마음대로 내라고 하지요, 그 위선자들.」
이남호와 유장석 등 중역들은 휴가도 가지 못했다. 개척단 본부로 바뀌어진 안양 연수원에는 지금 300명이 넘는 개척단 요원들이 모집되어 있는 것이다.
유장석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손님들은 제가 만납니까?」
시계는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통령의 허락이 난데다가 정부보증으로 자금 대출까지 받는 상황이야, 유전무가 알아서 처리해.」
이남호가 비서실 안을 둘러보았다. 대여섯 명이 앉아 있는 비서실은 휑하게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점심시간이기도 했지만 열 명 가까운 직원이 시베리아에서 돌아와 휴가를 떠난 때문이다.
「참 마두라에 있는 코데코 기술진은 오늘 저녁에 서울에 도착합니다.」
유장석이 생각난 듯 말하자 이남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유정 기술자인 코데코 직원 20여 명이 시베리아로 보내져서 채굴장비를 설치하게 될 것이었다. 계획단은 일사불란하게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남호가 서두르며 방을 나가자 유장석은 시계를 내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래층 응접실로 들어서자 한일만과 마주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 모두 야무진 인상의 사내였다.
「전무님, 이분이 안기부 제2차장이신 김한성 차장이시고 이분은 특별보좌관 이해수 씨입니다.」
「아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악수를 나눈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보좌관님은 지난번에 부장님과 함께 오셨었지요? 제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유장석의 말에 이해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땐 회장님과 비서실장이 계셨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 시베리아에 파견될 사람들 때문인데요.」
대답한 것은 김한성이다. 50대 초반쯤의 나이로 보이는 그는 해외업무를 총괄하는 제2차장이다.
「지난번 파견하신 80여 명의 인적 사항은 별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앞으로는 파견 전에 저희 안기부에 인사서류를 넘겨주셨으면 해서.」
「당연하지요. 우리 그룹 직원에 빨갱이는 없습니다.」
유장석이 자르듯 말했다.
「그 일 때문에 차장께서 직접 오신 건가요?」
「아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김한성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제가 알기로는 그곳은 험악한 곳이어서 자위 수단도 강구하셔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지금 안양 연수원에 모집되어있는 지원자 중에서 군 경력이 있고 특히 야전군 출신의 젊은 사원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사람들은 그런 용도에 필요해서 모집하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안기부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요?」
「저희들이 도와드릴까 해서요.」
그러자 한동안 김한성을 바라보던 유장석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 일은 윗분들한테 여쭤볼 필요도 없이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자위대의 편성, 인원 공급까지 저희들이 맡아서 해드리는 것이 더 편할 겁니다. 모두 근대의 사원으로 등록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글쎄, 말씀이야 고맙습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 유장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안기부장께서 결정하신 일입니까?」
「글쎄, 그건 왜 물으시죠?」
「오늘 오전에 대통령과 우리 회장님이 만나 합의하신 것 알고 계십니까? 정부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임차대금도 정부보증으로 빌리도록 해주셨습니다. 더욱이 우리 회장께선 내일 대통령이 지지해주신 사실을 발표하십니다.」
「대충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면 대통령 각하께서 안기부를 보내서 시베리아 개척단을 장악하라고 하셨습니까?」
「글쎄, 오해를 하시는데, 그쪽은 위험한 지역이고 근대는 그런 경험도 없고 해서 우리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회장께 말씀드려서 그것에 대한 대통령의 결재도 받아둘까요?」
「이것 보세요.」
이해수가 나섰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의도는‥‥‥」
그러자 '어허 참'하고 한일만이 나섰는데 이런 행동은 근대의 전통이었다. 위아래를 따져 상대방의 낮은 급이 자신의 상사에게 대드는 꼴을 못 보는 것이다.
「이보시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댁은 가만히 계셔.」
이해수는 지난번에도 이남호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이해수에게 근대는 재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얼굴을 붉게 부풀린 채 입을 다물었다.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기관이 그쯤 눈치채지 못할 것 같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일본 정보국과 북한의 정보원이 득실거리는 곳이요, 그곳은. 그들이 근대의 임차지에 한국 안기부 요원들의 자위대가 깔려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
「계약위반이란 말입니다. 그곳에서 러시아의 국익에 반하는 정보활동은 못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요.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상의를 하도록 합시다.」
김한성이 부드럽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그렇지만 우리 도움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 우리는 같은 한국인 아닙니까?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도와드린 것 같은데요.」
엘리베이터 앞까지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선 유장석이 문득 한일만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이한테 연락을 해서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해. 그놈 휴가는 오늘로 끝이야.」
아래층 커피숍으로 내려온 이유미가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더니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밝은색 투피스 차림이어서 웃는 모습과 겹쳐 주위가 환해진 느낌이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언제 왔어?」
「며칠 됐어.」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눈이 부신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김상철은 틈만 나면 꽂고 있던 러시아어 학습용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었다.
「너, 그동안 몰라보게 달라졌다. 예뻐졌어.」
자리에 앉은 이유미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싱겁게.」
「내 친구 애인만 아니라면 한번 승부를 걸어 보겠는데.」
「이 남자도 자아도취에 빠져 있구만. 누구 맘대로 나를.」
종업원에게 차를 시키고 시베리아와 여행사 이야기가 건성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잠시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고 나서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곧 LA로 파견근무를 나간다구?」
「응, 한 달간이야. 인석 씨한테 들었어?」
「어제 한잔했어.」
「내 이야기를 했겠네? 날더러 뭐래?」
「왜? 그것이 듣고 싶어?」
「그래서 상철 씨가 왔겠지. 그저 날 만나려고 올 사람은 아니니까.」
「인석이한테 말 않고 온 거야.」
「알고 있어.」
이제 둘의 표정은 조금 굳어져 있었다.
「인석이가 요즘 어려운 거 알 텐데, 너까지 겉돌면 어떡해.」
김상철이 묻자 이유미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렵긴 뭐가? 백억쯤 재산을 물려받게 될 부잣집 차남이.」
「말 돌리지 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유미, 너까지 그러면 안 돼.」
「너까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
「난 그, 이름이 누구더라? 잊었네. 어쨌든 상철 씨의 지난 여자하고는 달라.」
「물론 상황도 다르고. 그런 것에 비교하지 마. 불쾌해져.」
「누구 있어?」
「없어.」
「그냥 결혼만 늦추자는 거냐?」
「그래,」
「그럼 왜 전처럼 안 돼?」
「바빠서, 서로.」
입맛을 다신 김상철이 머리를 돌렸다. 한동안 좌석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다시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내 친구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야. 인석이처럼 성품이 좋고 때 묻지 않은 남자를 찾기는 힘들어. 그리고 그놈만큼 널 사랑해주고 아껴줄 남자도 없을 거다. 헛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너에게 이 말은 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거야.」
「고마워, 상철 씨.」
「넌 재능이 있고 변화가 많은 여자지. 자극이 있어야 하고 욕심이 많아. 내가 잘 알지. 널 잡기가 힘들다는 것도.」
「사회생활 하다 보면 더 큰 것이 보일지 모르지만 인석이도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봐. 그놈한테도 기회를 주란 말이다.」
「상철 씨는 좋은 남자야.」
「헛소리 말고.」
김상철이 이유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할 거다. 시베리아에서 이 손으로 사람을 여럿 해쳤어.」
탁자 위로 오른손을 뻗은 그가 확 벌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나도 놀랐어.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정말 몰랐어. 이런 말은 인석이한테도 하지 않았는데‥‥‥ 잘 들어. 네가 인석이를 배신하면 널 어떻게 할지도 몰라.」
얼굴을 굳힌 이유미의 시선을 받은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난 인석이를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이다. 아주 잔인하게 복수할 거야, 인석이 대신으로. 잘 기억해 둬.」
탁자 위로 뻗은 손을 주먹으로 만들어 보이고 나서 김상철은 팔을 거두었다.
「잘 부탁한다. 사정해서, 협박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어.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그런 거야.」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휘적휘적 걸어 나왔으나 이유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안인석이 쇼룸으로 들어서자 엄기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여기 앉아.」
아침 10시여서 십여 개의 쇼룸은 상담하는 직원들로 거의 채워져 있었다. 옆방에서 커다랗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졸병 땐데, 그땐 영어도 서툴러서 사수 옆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상담을 거들었지.」
엄기호가 말을 이었다.
「지금 그 양반은 회사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하지만 영어가 본토 발음 뺨치는 거라. 한국에서 좋은 선생을 만났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양반이 물 달라고 워러, 할 때는 소름이 끼치곤 했어.」
「그리고 바이어 앞에서 실없이 웃더라니까. 이건 말이 끝날 때마다 웃는 거야. 그래서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서 이 사람은 항상 흥분 상태구나, 그리고 열등의식이 분명히 있다, 하고 결론을 내렸지. 그런데 내 말이 맞았어. 그 양반, 큰 상담에 들어서면 번번이 깨졌으니까. 그래서 난 정확한 한국식 영어를 쓰기로 했지. 물 먹을 거냐고 워터? 했고, 또박또박 정확하게만 이야기했어. 물론 실없이 웃지도 않았고. 그랬더니 바이어들이 내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야. 물론 손해가 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척하니까 답답해하기는 했지만,」
엄기호가 똑바로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별놈들이 다 있어 윗사람이 모두 완벽한 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저 그렇고 그런 놈들이지. 다만 경륜이 붙고, 요령이나 적응력이 높아진…. 회사에서 필요한 놈들이지. 안 그래?」
「그렇습니다.」
대충 긴 사설의 의미를 짐작할 것 같았으므로 안인석이 헛기침을 했다.
「저도 적응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과장님.」
「강대리는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냐. 그리고 안인석 씨를 싫어하지도 않아. 그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흠이 있다면, 물론 회사 차원에서는 흠도 아니지만 주위를 살필 여유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밖에. 그놈의 목표 달성에 대한 집념은 표창감이야. 부하직원들이 따라주지 않는 것을 회사에 대한 배신이라고 몰아붙인다고 회사가 그 사람을 나무라진 않아.」
「‥‥‥‥」
「오사카 지점으로 안 가겠나? 자네가 안 가겠다고 했다는 소리를 듣고, 제의한 것이 강대리여서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과장님.」
「그렇다면 좋은 기회야. 일본의 경쟁사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고, 안목도 높아져. 기간은 일 년이야. 원하면 연장할 수도 있고,」
「저는 싫습니다, 과장님.」
「나한테 이유를 말해주겠나.」
「팀에서 낙오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뿐인가?」
「외국 생활에 대한 준비도 덜 되었습니다.」
「결정이 난 일입니까?」
「아니, 아직 아니야.」
엄기호가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조만간에 어떤 결정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러니 다시 생각해보게.」
강형문의 조원으로는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말인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엄기호가 다가와 안인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운을 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김상철이 다가오자 여직원들은 이야기를 딱 그쳤다. 회사 근처의 식당이어서 회사 직원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비서실의 여직원 셋이 조금 전까지 김상철을 화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앉아도 되지요?」
좌석 네 개짜리 테이블이다. 김상철은 안면이 있는 비서실 직원들이라 자연스럽게 다가간 것이었다. 그도 당분간은 비서실 소속이었다. 박미정의 앞자리에 앉은 김상철이 설렁탕을 시키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이미 비빔밥 등을 시켜 먹고 있던 여직원들의 숟가락질이 다소 어색해졌다.
「아까 회장님의 TV 발표를 들었는데,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후원해줬다는 말, 맞아요?」
미스 정이 분위기를 깨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입사 2년 차로 셋 중에서는 고참이었다.
「맞겠지요.」
「그렇다면 왜 이제까지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굴었대요?」
「회장님 말씀대로 대북관계 때문에 그랬는지도.」
「지금은 대북관계가 풀렸나요?」
「나 같은 졸자가 뭘 압니까.」
「어머나, 대리님이 왜 졸자예요.」
그때 설렁탕이 나왔으므로 대화가 잠시 끊겼다.
강회장은 11시 정각에 특별 생방송으로 시베리아 임차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서두에 대통령의 지원에 대해서 꽤 길게 경의를 표했고 시베리아를 임차함으로써 얻게 되는 국가의 이익을 열띤 어조로 설명했다. 김상철도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회장이 말미에 정부 각 기관의 배려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 사실이었다.
「김대리님,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이렇게 물은 것은 미스 안이다. 그녀는 1년 차 사원으로 늘씬한 글래머였다. 김상철이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약속은 없지만 오후에는 유전무님과 연수원에 갑니다.」
「퇴근 후에 직속실 회식이 있어요. 오실래요?」
직속실은 회장과 비서실장의 직속실을 말하는 것으로 3부로 나뉘어진 비서실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였다. 김상철이 소속된 개척단 간부 10여 명은 모두 직속실 소속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일이 없으면 가지요.」
「인사동의 한정식집 낙동강이고 시간은 저녁 여덟 시에요.」
「알겠습니다.」
씹던 음식을 삼킨 김상철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안인석이의 직속상관 이름이 누구지요?」
「강형문 대리라고 고참이에요.」
박미정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그냥.」
음식점에서 나와 회사로 들어섰을 때 김상철이 박미정에게 다가섰다.
「잠깐만 저쪽에서 나하고.」
그들이 로비 안쪽의 고장 난 자판기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안인석이 문제 때문인데요.」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같이 근무했으니까 잘 아실 텐데, 그, 강대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글쎄, 조금.」
망설이던 김상철이 안인석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대강해주고 말했다.
「문제는 그 강대리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자 박미정이 김상철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아닙니까?」
「안인석 씨가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하셨어요?」
「안 했는데요.」
「제가 있을 때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안인석 씨는 능력이 뛰어났어요. 그건 모두 알고 있어요.」
「적응을 못하면 적응시키려고 윗사람이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글쎄요, 전‥‥‥‥」
「강대리가 좀 심한 것 같은데요, 내 생각엔.」
「그 사람 어떤 성격입니까?」
「적극적인 성격인 것 같아요. 내년 진급 예정이니까 물불 안 가리는.」
「걱정되세요?」
시선이 마주치자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인석이가 좌절하면 안 됩니다.」
「그런 친구가 잘돼야 해요.」
4. 야망의 함정
안양 연수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이다. 시트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던 유장석이 시내로 들어설 때쯤 해서 눈을 떴다.
「김대리, 네가 개척단의 보안을 맡아야겠다.」
그는 피로한 듯 눈썹 사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오늘 안기부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고 갔는데‥‥‥」
그는 이야기 내용을 대충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맡길 사람은 너뿐인 것 같다.」
이미 경비요원으로 50명 가까운 인원을 선발해서 연수원에 집결시켜 놓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건설 현장 출신이었다. 신체 건강하고 군 경력이 있으며 30세 미만의 사원이어야 지원 자격이 있었는데 경쟁률이 5대 1이나 되었다.
「전무님, 장교 출신도 있던데요. 저는 병장으로 제대했습니다.」
김상철이 말하자 유장석이 풀썩 웃었다.
「나는 이등병 출신이다. 일주일간 탈영해서 영창 한 달을 살고 강등되어서 제대했지.」
「………」
「이실장하고도 이야기가 된 일이야. 중위 출신이 세 놈인가 있던데 그놈들은 네 밑에 두고 관리하도록. 어제 1진이 모두 유전으로 떠났다. 김영규 부장이 지휘해서 갔지만 불안해. 러시아군이 따라가지도 않았어. 물론 협조 요청을 하면 로스토프가 군대를 보내겠지만 회장님이 반대하고 계셔.」
「제가 빨리 떠나겠습니다.」
「편성이 되는 대로 떠나줘야겠다.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유장석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사람은 특성이 있기 마련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널 두고 하는 말이다.」
「너, 전자에 지원했었지?」
「예, 그곳에서 근무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전자에 못 간 것 후회하고 있어?」
「그런 건 아닙니다, 전무님.」
「우리가 네 특성을 개발해 낸 것이지.」
「………」
「너나 우리나 모두 운이 좋은 거야. 회사는 너를 필요로 하고 넌 얼마든지 네 능력을 보일 수가 있다. 남들보다 몇 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어.」
「회장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셔. 네가 목숨을 걸고 일을 할 놈이라는 것을 알아내신 거야.」
승용차가 광화문 근처로 다가가자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시 50분이다.
「전무님, 저는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그래? 약속이 있어?」
「오늘 비서실 회식이 있어서요.」
「그런가」
유장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회식 자리에 나도 가고 싶지만 높은 놈이 가면 분위기가 깨지지, 잘 놀아,」
회식에 모인 인원은 대강 10여 명이 되었는데 제일 높은 직급이 과장이었다. 유장석의 말대로 높은 놈들은 알아서 빠진 모양이었다. 김상철이 들어서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모두 반겼다. 8시 30분이 되어 있었으므로 마악 술자리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김상철을 끌어 옆자리에 앉힌 과장이 술잔을 건네주었다.
「김대리가 유전무와 이대각 이사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소문이 났어. 그거, 사실이야?」
주위에 앉은 직원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아닙니다.」
한 모금에 술을 삼킨 김상철이 웃었다.
「저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누가 말을 만든 모양입니다.」
「강도단들을 쏘아 죽였다던데, 그것도 누가 말을 만든 건가?」
「아마 그럴 겁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실망한 듯 머리를 돌렸고 술자리는 다시 떠들썩해졌다. 옆쪽에 앉은 미스 안이 김상철에게 말했다.
「시베리아로 언제 돌아가세요?」
「아직 예정이 잡히지 않았어요.」
「그곳이 마음에 들어요?」
「듭니다. 」
떠들썩한 좌석을 둘러보던 김상철의 시선이 끝 쪽 자리에 앉은 박미정과 마주쳤다가 거의 동시에 비껴갔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택시 정류장에 서 있던 박미정은 다가오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밤바람에 코트 자락이 펄럭였으나 몇 잔 마신 술기운으로 추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댁이 어디세요?」
「봉천동.」
앞쪽 손님이 타자 택시를 기다리는 승객은 그들 둘이 되었다. 11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지만 사무실만 운집되어있는 곳이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택시 한 대가 다가오더니 그들 앞에 멈췄고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전 방배동이니까 같이 가요. 제가 먼저 내리면 돼요.」
택시에 올라 행선지를 말해주고 난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안인석 씨가 김대리님 귀국하면 소개시켜 준다고 했었어요.」
「걔가 그런 말까지 했어요?」
「같은 팀, 같은 조원이었으니까요.」
「………」
「왜 정류장 뒤쪽의 빌딩에 서 계셨어요?」
「박미정 씨가 혼자 남게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날 기다렸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박미정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하실 말씀이 있나 했어요.」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하고.」
「집 근처에서 한잔할까요?」
방배동에서 택시를 내린 그들은 근처의 조용해 보이는 카페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어둑한 실내에는 손님이 적었고 짜증 난 표정의 주인이 맥주와 안주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벽에 붙여진 붉은색의 흐린 전등 빛이 박미정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여동생이 반가워했겠네요.」
박미정의 말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모 집에 있다가 지금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요. 하지만 다시 돌아갈 겁니다.」
「집을 내놓았어요. 어차피 오래 비워둘 집이니까.」
「지금 학교 다니지요? 여동생.」
「나에 대해서 얼마만큼 압니까?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입견이 있나 그것이 궁금해서.」
「대충 알아요.」
「인석이 그놈이 나를 안주로 술맛을 내었구만.」
「절대 그런 건 아니에요.」
박미정의 정색한 얼굴을 보고는 김상철이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긴장할 것 없어요.」
「난 예정보다 빨리 돌아갈 것 같아요.」
「그곳이 좋으세요? 시베리아가.」
「유전무 말씀이 그곳이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시더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
「난 이곳에 맞지 않아요. 본래 그곳 용도로 채용도 되었고.」
술잔을 들어 몇 모금 맥주를 삼킨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걸고 일한다는 것에 스스로 보람을 느낍니다. 무엇을 세우고 있다는 것에도 긍지를 가질 수가 있고.」
「목표가 있어요?」
그러자 김상철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목표?」
「앞으로….」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아버지 앞으로 보험금과 상여금 합쳐서 6억 원쯤 지급하게 되어 있지요. 아마 그 이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난번처럼 회장이 특별상여금을 줄지 누가 압니까? 무슨 일이 없다면 시베리아 벌판을 이리처럼 쏘다니면서 기반을 굳힐 겁니다.」
그리고는 김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마 마적단 대장이 되어 있을지도. 사람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오퍼 서류를 끝낸 안인석은 강형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대리님, 오퍼 끝냈습니다.」
「어디.」
서류를 받아든 그가 꼼꼼히 훑어보는 동안 안인석은 그의 테이블 옆쪽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스웨덴의 첫 거래선으로 보내질 오퍼였다
이윽고 강형문이 머리를 들었다.
「잘 됐어, 완벽해.」
「됐습니까?」
「안인석 씨의 서류 만드는 솜씨는 일급이야.」
「감사합니다.」
안인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손바닥을 굽혀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아침 10시 30분으로 바쁜 시간이다.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주위 직원은 없다.
「요즘 내가 조금 신경과민이었어.」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나도 결점이 많아. 내가 하는 일이 모두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서로 노력하도록 하자구. 지난 일들은 잊어버리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고마쓰 일본지사 이야기도 잊어, 맡은 일만 열심히 해.」
「알겠습니다. 」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린 안인석을 향해 그가 웃었다.
「앞으로 안인석 씨는 외국으로 보내는 오퍼를 맡아 줘야겠어. 어학 실력이 괜찮으니까 전문성을 살려야지.」
자리에 돌아온 안인석에게 옆자리의 성태훈이 의자를 굴려 다가왔다. 그는 박미정의 대신으로 충원된 사원이었는데 눈치가 빠른데다 순발력이 있어서 윗사람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안인석이 머리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야.」
성태훈의 긴 얼굴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지사 이야기지?」
그도 안인석이 일본지사 요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 그 이야기야.」
「간다고 했어?」
「아니, 갈 필요가 없다는데.」
「그래?」
한동안 안인석을 바라보던 그가 의자를 굴려 자리로 돌아갔다.
10년쯤 전만 해도 해외지사원의 인기가 높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외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이제 얼마든지 여행으로 채울 수 있는 국민 수준이어서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본사와 떨어져 있다 보면 회사의 분위기에 동떨어지게 되는 데다가 선진국에서는 물가로 고생을 하고 후진국에서는 문화 수준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다. 안인석은 컴퓨터의 키를 눌렀다. 강형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에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맡겨지는 일만 열심히 하면 이제까지의 인상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밝아진 얼굴로 컴퓨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김상철이 회사 빌딩 건너편의 전통 찻집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2시 정각이었다. 테이블 열 개 정도의 조그만 찻집 안에는 손님이 두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중 한 명이 김상철을 향해 손을 들었다.
「여기야, 김대리.」
단정한 양복 차림에 머리를 깔끔하게 빗은 40대 정도의 사내들이다. 그들은 앞자리에 앉은 김상철을 향해 제각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난 안기부 과장으로 있는 오명환이고 이 사람은 우리 직원이오.」
상급자로 보이는 사내가 싸잡아서 자신들을 소개하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불러내서. 그리고 우리를 경찰이라고 한 것도 업무상 할 수 없었으니 이해하시오.」
「아버지 일로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얼굴을 굳힌 김상철이 묻자 오명환이 웃음을 띠었다
「곧 말씀을 드리지요, 우선 차부터 드시고.」
주인을 불러 주문을 하고 난 그들은 차가 나오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끌었다. 대추차와 쑥차 등이 제각기 앞에 놓이자 오명환이 정색을 했다.
「이번에 다시 시베리아로 가시지요? 그리고 경비단입니까? 그쪽의 책임을 맡으시고.」
「………」
「입사 반년도 안 되었는데 진급에다가 이젠 그런 중요한 직책을 맡으셨다니 윗분들의 신임이 대단한 모양이오.」
「용건이 뭡니까?」
그러자 오명환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한테 협조를 해 달라는 거요.」
「………」
「솔직히 당신 상관인 유장석 전무에게 제의를 했다가 거절을 당했는데,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하고 거절했던 모양인데 이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 아니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김대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니까.」
오명환이 상체를 굽히고 다가앉았다.
「위에서 거부를 했더라도 책임자인 김대리만 협조하면 되는 일입니다.」
「날더러 회사를 배신하라고 하는 거요?」
「배신하다니, 그건 표현이 지나치신데.」
이맛살을 찌푸린 오명환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쪽 사정을 알고 싶을 뿐이고 또한 그것은 우리의 당연한 업무요.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김대리를 포함한 근대그룹은 우리에게 협조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글쎄 그렇다면 윗사람들한테 말씀하시라니까, 난 못하니까요.」
「우리가 손을 써서 아버님을 석방시켜 드리겠습니다. 올해 말까지만 복역하시게 하고 성탄 특사 때 출감하게 해드리지요. 그리고 이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우리 요원에게 협조만 해주시면 되는 일이오.」
「날더러 안기부의 정보원이 되라는 겁니까?」
「정보원이라니, 김대리는 스파이 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신 모양인데, 어디, 근대그룹이 빨갱이 소굴입니까? 정상적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다른 기업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정보를 달라는 것입니다. 근대의 윗사람들이 우리한테 너무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어서 할 수 없이 김대리한테 부탁하는 것이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질 겁니다. 그리고 내 말이 사실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경비단을 안기부에서 조직해 주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하니까 책임자가 된 나를 협박하시는군요.」
그러자 두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오명환이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요, 김대리. 당신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그 시각, 강회장은 강용식과 함께 집에서 늦은 점심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서 쉬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회사 일로 강용식을 불렀으니 따지고 보면 집에서 회사 일을 하는 셈이다.
「북한이 떠드는 걸 보면 조금 꺼림칙합니다. 아버님의 발표 이후로 대남방송이라든가 일본이나 중국에 가 있는 관리들이 폭언을 퍼붓고 있는 모양인데요.」
수저를 내려놓은 강용식이 말을 이었다.
「국민들의 반응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코덱스가 실시한 여론 조사를 보더라도 80% 이상이 시베리아 임차를 찬성하고 환영합니다만 야당 일부와 대학생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강회장이 못 들은 척 숭늉 그릇을 들고는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숭늉 좀 뎁혀 오너라.」
「모스크바 지사의 정세 분석을 보면 내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코마노프가 코시킨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더군요.」
강용식이 말을 바꾸었다. 근대는 현 대통령이 재임을 하건 대통령과 정적관계인 코시킨이 당선이 되건 상관없다. 시베리아 임차는 그들 모두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도 마찬가지로, 체르넨코 국방장관도 시베리아 개발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강용식의 장녀인 강미현이 숭늉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늘씬한 키에 조금 마른 듯한 몸매였는데 표정이 밝다.
「할아버지, 숭늉요.」
「오냐.」
강미현이 방을 나가자 그녀의 뒷모습을 쫓던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미현이가 몇 살이더라?」
「스물다섯입니다, 아버님.」
「너무 싸다니지 말도록 해라.」
「일을 제법 열심히 합니다. 재능도 있는 것 같고.」
미국에서 방송 관계 공부를 하고 돌아온 강미현은 작년부터 근대 계열사인 근대 기획의 홍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근대 기획은 근대그룹의 홍보물과 광고 제작이 주 업무인 회사이다. 강회장이 뜨거운 숭늉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에 대규모 공업지역이 들어서는 것으로 크게 경제안정이 될 것이다. 저희들 돈 한 푼 안 들이고 개발이 될 테니까.」
「5개년 동안의 개발자금이 400억 달러가 넘습니다. 현재 러시아 정부로서는 극동지역에 그만한 투자를 할 여력이 없지요. 그들이 임차를 적극 환영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결국 러시아만 좋게 해주는 결과가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우리는 임차인에 불과하니까요.」
「50년 후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난 이미 죽어 없어졌을 것이고 네 나이도 벌써 쉰둘이니 그때는 아마 저 제상 사람일 것이다. 저기 미현이도, 가만있자, 일흔다섯이고 네 손자가 일할 나이구만. 증손자가 미현이 나이가 될 것이고.」
허공을 보며 한참 햇수 계산을 하던 강회장이 머리를 돌려 강용식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러시아가 대를 이어서 저렇게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남아 있을까.」
「내 자손, 그렇지, 네 자손이 남아 있을 확률이 많겠느냐, 아니면 러시아라는 나라가 남아 있을 확률이 많겠느냐?」
「아버님, 그것은,」
「이제 동서 냉전도 끝이 났고, 유럽도 통합이 되었다. 저 빌어먹을 북쪽의 빨갱이 놈들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강회장이 숭늉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제 앞으로 세계는 국경이 없는 경제권으로 구분이 될 것이다. 사상이나 이념은 개도 안 먹는다. 그러면 남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민족이지, 우리 한민족.」
「………」
「저 넓은 땅 시베리아에 자리 잡고 열심히 자손을 낳고, 남북한에서 이주민을 모으면 50년 후에는 몇천만의 한인 경제권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
「지금이야 러시아가 호박이 굴러 들어왔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때까지 러시아라는 나라가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우리 자손들은 확실하게 남아 있겠지, 안 그러냐?」
「예, 아버님.」
「50년 후에 네 손자가 그 대륙을 통치한다고 생각해봐라, 이 반도에서 벗어나 그 광활한 땅을 말이다. 도대체 이런 일에 투자를 안 하면 어디에다 한단 말이냐.」
그러자 강용식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세 아들 중에서 장남으로 가장 아버지를 가깝게 모셔온 그였으므로 호흡이 맞는다. 이제까지 턱도 없는 프로젝트를 가져와서는 놀라운 추진력으로 성사시켜온 강회장이다. 그리고 지금 강회장은 생애 마지막이 될 엄청난 사업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요, 후손을 위해서라도 잘하신 겁니다, 아버님.」
「내 후손만이 아니야. 한국말을 쓰는 모든 놈들의 후손을 위한 일이란 말이다.」
코마노프 대통령이 두주불사의 술꾼이라는 것을 모르는 러시아 관리들은 없다. 그는 보드카를 즐겨 마셨는데 한자리에서 두어 병을 마시는 것은 보통이었고 기분이 나면 쓰러질 때까지 끝장을 본다. 정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여서 술로 긴장을 풀어야 할 때도 있었으니만치 적당히 마신다면 회의석상에서 술 냄새쯤 풍긴다 하더라도 흉볼 사람은 없다.
국방장관 체르넨코가 작년에 민스크에서 술에 취해 열병식 도중 쓰러졌을 때에도 모두 너그럽게 눈감아 주었던 것도 고위층 간에 그런 묵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눈보라 치는 연병장도 격렬한 토론장도 아니다.
크렘린궁의 대통령 집무실에 모여 앉은 체르넨코와 코시킨 수상은 테이블을 넘어오는 코마노프의 술 냄새를 맡고 있었다. 시간은 아침 9시 30분. 대통령은 해장으로 보드카를 한 병쯤 마신 모양이었다.
코마노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미하일, 극동군이 임차지 안으로 언제 이동하게 되는 거요? 계약서에는 1년 후부터 1개 사단이라고 되어 있는데.」
「주둔지는 정해 놓았지만 기지를 건설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아마 7, 8개월 후가 될 겁니다.」
체르넨코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코마노프의 술 냄새를 피하려고 머리를 조금 젖히고 있다.
「물론 가막사를 짓고 분견대와 공병들은 다음 달쯤 파견될 겁니다.」
「그 산적들,그 레고리 일당이던가? 그놈들이 다시는 근대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도록 해야 될 거요.」
「분견대라고 해도 1개 대대 병력이니까요. 근대 쪽과 수시로 연락해서 협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시킨이 입을 열었다.
「회담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강회장은 러시아군 주둔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본래 3개 사단 병력이었던 것이 그들 주장으로 1개 사단으로 줄어든 것을 보아도 그렇지요.」
「러시아군 주둔 경비를 5년 동안 50%씩 부담하도록 했기 때문이지, 그건 당연한 주장이오.」
코마노프가 자르듯 말하자 체르넨코가 머리를 끄덕였다.
「러시아 주둔군 경비로 1년에 3천만 달러 정도를 내놓아야 할 테니까요. 아직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주둔군 경비만 물어야 하니 저쪽에서는 1개 사단도 많다고 하는 것이 당연해요.」
「계획안을 봐요, 장관. 5년 안에 300만 가까운 한인과 이주민이 몰려오게 된단 말이오. 그땐 1개 사단으로는 너무 적습니다.」
「아니, 수상은 전략가가 되셨는데, 무슨 생각으로 병력이 많다 적다를 말하는 거요? 근대 사람들이 우리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할까 봐 그러는 거요?」
체르넨코가 옆에 앉은 코시킨을 노려보았다.
「주위에 극동군 60만 병력이 있소. 1,500대의 항공기가 있고, 위성이 하루에도 두 번씩 그들 위를 지난단 말이오. 군사 문제는 언급하지 마시오.」
그러자 코마노프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들은 꽤 친한 것 같던데 내 앞에만 오면 다투는군.」
「………」
「두 분 말씀 모두 일리가 있소. 수상의 걱정대로 강회장은 욕심이 많은 자요. 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베리아에 그토록 애착을 갖는 것은 지하자원보다도 한민족을 모아 독립된 경제권을 이룩할 꿈이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등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1,500년 전에 한인 조상들은 시베리아까지는 못 왔지만, 동북부 중국의 광대한 땅을 영유했던 모양이야. 내가 동양학과 교수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한국인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합디다. 강회장은 50년 후에 수백만, 아니 수천만의 한인 자손들을 시베리아에 퍼뜨려서 경제권을 기반으로 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겠지.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50년 후의 일이오, 당분간 양쪽의 꿈을 병행시켜 나갑시다. 지금 그자들에게 이것저것 제동을 걸 시기가 아니오.」
이제 코마노프의 숨에서 술 냄새가 맡아지지 않는 것을 보면 면역이 된 모양이었다.
「투자하게 만드는 거요.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시베리아가 번영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오. 50년 후에는 우리 모두가 무덤 속에 있을 테니까.」
「내가 겪어 모았지만 박미정이 갠 괜찮은 여자야. 잘해 봐라.」
그렇게 말하는 안인석의 표정은 밝았다. 회사 근처의 경양식집 안에서 그들은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네 기준으로 보면 뭐가 괜찮아?」
김상철이 묻자 그가 피식 웃었다.
「유미 기준이야, 어쩔 수 없이. 박미정이는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히 빛을 내는 여자야. 겸손하고. 하지만 재치가 있어.」
「유미가 화려하고 오만한가? 물론 머리도 잘 돌아가지.」
「당연하지.」
술잔을 든 안인석이 벌컥이며 맥주를 마시고는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빌어먹을, 대리 한 놈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다니, 나도 이제 어쩔 수 없이 보통 월급쟁이가 되었어.」
「어쨌든 잘 되었지, 가기 싫은 일본에 안 가게 되었으니까.」
「그것보다도 강대리 그놈이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꾼 것이 불가사의하단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굳이 알고 싶은 눈치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술을 더 시켰다. 오늘은 안인석이 한잔 사겠다고 퇴근 무렵에 그를 불러낸 것이다.
「너, 며칠 후에 간다구?」
「일주일쯤 후에, 이번에 가면 오래 있게 될 거야.」
김상철이 안인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네 소식은 자주 듣게 될 거야. 박미정이가 연락을 해줄 테니까.」
안인석이 잠자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8시 10분이었다.
「일 년만 버텨 봐. 선배들 말 들으면 일 년이 고비라고 하더라. 일 년만 지나면 무뎌진다는 거야. 자극에 적응이 된다는 이야기다.」
「사람 따라 다르겠지.」
「넌 시베리아에서 얼마 동안 있을 거야?」
「그건 몰라. 하지만 끝장을 볼 테니까.」
「하는 일이 뭔데?」
그러자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보안 담당이다. 경비요원들의 책임자지. 이건 영 다른 길로 빠진 거야.」
「네 적성에 맞는 일이다, 인마.」
「그런가?」
「하긴 넌 어떤 일에도 맞춰갈 놈이지.」
술잔을 든 김상철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거 누구더라, 그래 한지은이. 그 여자가 나한테 2천만 원짜리 수표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너한테 했던가?」
「2천만 원을」
「그래, 생활에 보태 쓰라고. 내 형편을 알아보니까 눈물이 앞을 가렸던 모양이다.」
「전별금이었지.」
「인마, 왜 그 얘기를 지금 하는 거야.」
「유미를 놓치면 안 된단 말이다, 너는.」
「상처가 커지기 전에 내가 미리 손을 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인석이 술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유미한테 약한 면만 보였거든. 아마 그것이 원인일지도 몰라.」
「요즘 만난 적 없어?」
「없어, 서로 바빠서.」
「전화했다면서? 다른 말은 없고?」
「뭐, 별로. 출장 준비로 바쁘다고만.」
「………」
「당분간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 나을지 몰라.」
「이 자식아. 그것이 어디 스케줄대로 되는 일이냐?」
「늦어서 미안해요.」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그들은 머리를 들었다. 박미정이 웃으며 서 있었다.
「일이 있어서 늦었어요.」
안인석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말하자 김상철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박미정 씨 네가 부른 거야.」
「그래, 셋이 한잔하자고 했어.」
「나 때문에 분위기 깨진 건 아니죠?」
박미정이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때맞춰서 마침 잘 왔어요.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었거든.」
2차까지 간 술좌석이 끝난 것은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엉망으로 취한 안인석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난 김상철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자, 방배동으로 모셔다드릴까? 오늘도 집 근처에서 한잔 더 할까요?」
「차나 한잔해요.」
거리는 취객들과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그들이 방배동에 도착했을 때는 11시 30분경이었다. 지난번에 들렸던 카페는 오늘도 손님이 적었고 주인의 표정도 그대로였다. 안쪽에 자리 잡고 앉은 그들은 커피가 없다는 주인의 말에 맥주를 시켰다. 박미정의 두 눈이 붉은 등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 출발하시죠?」
「조금 빨라질지도 모릅니다. 그쪽에 인원이 부족해서.」
잔에 술을 채운 김상철이 갈증 난 듯 잔을 비웠다.
「자주 인석이를 만나주세요. 어떻게 일하는가를 알고 싶으니까.」
「회사 일은 잘 풀렸다니까 이젠 별일 없을 거예요. 안인석 씨는 실력이 있으니까,」
「저, 근대전자의 채상무가 며칠 전에 비서실에 들어와 유전무님을 만났는데, 알고 계시지요?」
머리를 든 김상철이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제가 추리하는 건 아니지만 두 분이 안인석 씨 이야기 하신 것 아닌가요?」
「마음대로 추리해도 좋지만 당사자한테는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바본가요.」
「인석이는 박미정 씨가 겸손하고 재치 있는 여자라고 하더군요.」
「그랬어요?」
박미정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칭찬은요?」
「날더러 놓치지 말라고.」
「놓쳐 본 적 있어요?」
「말 바꾸는 걸 보니 과연 그렇군.」
「그런 화법이 싫어요.」
화가 난 표정의 주인 여자가 마침 지나갔으므로 김상철은 맥주 두 병을 더 시켰다. 떠들썩한 말소리와 함께 대여섯 명의 20대 초반 남녀가 카페로 들어섰다가 가라앉은 분위기에 질색을 하고 돌아나갔다. 김상철이 테이블의 정적을 깼다.
「아버지 형기가 4년 몇 개월 남았어요. 형기를 채우고 출옥하시면 환갑이 넘으시지요. 갑자기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상철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자, 아버지의 남은 형기를 위해서 건배를 합시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병이 모두 비워졌을 때가 12시 30분이었다. 그들은 카페를 나와 서늘한 밤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마주 보고 섰다. 김상철이 트림을 했다.
「그 기지에서, 미정 씨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다가올 적에….」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김상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는지 록 술통 위로 머리가 나와 있는 것 같았는데. 나하고 시선이 마주쳤지요.」
「………」
「나는 그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미정 씨의 놀란 듯하고 겁난 듯한 그 표정의 얼굴을.」
「………」
「시베리아에 있을 때에도 내내 .」
밤바람이 달아오른 피부를 부드럽게 스쳤다. 팔짱을 낀 두 남녀가 종종걸음으로 그들 옆을 지나갔다.
커튼을 젖히자 환한 햇살에 덮인 건물들이 내려다보였다. 호텔의 뒤쪽 테니스 코트에는 흰 운동복 차림의 사내들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제 봄의 기운이 시선 가는 곳마다 제각기 뻗어있는 3월 중순의 오후였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흥만규가 물었으므로 이유미는 창에서 몸을 떼었다. 알몸 위에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고 금방 샤워를 마친 참이다. 머리에는 물기가 묻어져 있다.
「김상무가 박대리를 데리고 나간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녀는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요즘 박대리는 자주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자리를 비워요.」
「나도 알고 있어.」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홍만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최부장 소문은 어때?」
「이상해요. 요즘은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게.」
「그 친구는 마음을 돌렸어. 김상무가 나가게 되면 이사 진급을 할 테니까.」
「어쩐지.」
이유미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의 물기를 말렸다
「그렇게 손을 써 두었군요.」
「그것도 임시변통일 뿐이야. 언젠가는 다시 이런 일이 또 일어나게 되지.」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선 그가 팬티를 찾아 입었다.
「회사를 차려서 독립해 나간다면 하는 수 없지. 하지만 월급 몇 푼 더 준다고 회사의 거래선을 빼내서 다른 회사에 넘기다니.」
「그것이 자신들의 자산이라고 믿는 모양이던데.」
「글쎄, 그 의식 구조가 잘못되었어.」
점심을 마치고 나서 호텔에 들어와 한낮의 정사를 치르고 난 다음이다. 조금 나른해진 몸으로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 이런 일에 익숙해져서 분위기가 어색하지는 않다.
「우리 회사는 창립된 지 8년째인데 직원 180명 중에서 5년 이상 근속자가 10명도 안 되던데요.」
이유미의 말에 흥만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중역 두 명, 경리부 쪽 세 명, 그리고 나머지가 영업 실무직이었어요.」
「다른 회사들도 영업직의 이직률이 많더군요. 우리보다 훨씬.」
「관광업계의 고질이야. 아무리 대우를 좋게 해줘도 안정된 직장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답답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홍만규가 조금 전의 이유미처럼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LA에 가면 분위기를 잘 살펴 줘. 지사장이 랜드 비용을 많이 횡령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
「또 을지 여행사의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
을지 여행사는 경쟁업체로 그들도 LA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그랜드 여행사의 LA지사장이 을지 여행사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여행을 떠나는 미국 관광객을 을지 여행사로 넘긴다는 것을 말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홍만규가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가슴에 안았다.
「우선 한 달쯤 업무 파악만 해. 그리고 돌아와서 준비를 하자구.」
「언제 LA에 오실 거죠?」
「유럽 들렀다가 갈 테니까 유미가 도착한 열흘쯤 후가 될 거야.」
홍만규는 6개월쯤 후에 이유미에게 LA지사를 맡길 생각이었다. 물론 그 안에 그들은 약혼을 하게 될 것이니 회사 사람들이 그녀의 파격적인 진급을 이상하게 생각할 리는 없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그들은 방을 나왔다. 앞장서서 방을 나온 홍만규는 복도의 벽에 기대서 있는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머.」
낮고 짧은 이유미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홍만규의 몸이 굳어졌다. 저 사람은 이유미의 애인일 것이다. 서로 표현은 안 했지만 가슴속에 찌꺼기로 가라앉아 있던 근대그룹의 신입사원이다.
「나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사내는 육중한 체격에 목소리도 굵었다. 강한 시선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으므로 흥만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나 말이요?」
겨우 그렇게 묻자 사내가 바짝 다가섰다.
「그럼 너지 누구야, 이 새끼야.」
「이봐, 김상철 씨.」
이유미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조금 떨렸다.
「네가 무슨 권리로‥‥‥‥」
그러자 김상철이 홍만규의 어깨를 와락 밀어젖혔다. 김상철은 아직 닫혀지지 않았던 문을 활짝 열면서 흥만규의 어깨를 잡아 팽개치듯이 방 안으로 밀어 넣고 이어서 이유미를 끌어넣었다.
「이것 봐 너, 누구야.」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홍만규가 방 안에 엉거주춤 서서 소리쳤다.
「왜 이러는 거야!」
째질 듯한 목소리로 이유미가 외쳤다. 그러자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김상철이 홍만규에게로 다가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봐.」
홍만규가 주춤 물러서며 입을 열었을 때 김상철의 발끝이 날아 그의 턱을 쳐올렸다. 침대에 상반신을 부딪히며 그가 단번에 나가떨어지자 빙글 몸을 돌린 김상철이 이유미의 어깨를 밀었다. 이유미가 침대 위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내가 경고를 했는데도 너는.」
그녀의 앞에 선 김상철이 말했다.
「사장 놈하고 낮거리를 하고 다녀.」
옆에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엎어져 있는 흥만규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는데 아직 인사불성이었다.
「이 강도 같은 자식,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네가 왜 나서냔 말이야!」
째질 듯한 목소리로 이유미가 소리쳤다. 침대에 앉은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두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상관하지 말고 내 인생에서 꺼져! 이 거지 같은 자식아!」
「내가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니야, 물론….」
한 걸음 다가선 김상철이 손을 휘둘러 이유미의 뺨을 쳤다. 머리가 한쪽으로 돌아간 이유미가 두 손으로 침대를 짚어 겨우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하지만 너도 네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있는 한.」
엎어져 있던 홍만규가 꿈틀거리더니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코와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두 눈에는 아직 초점이 없다.
「만규 씨.」
이유미가 흔들리는 그의 상반신을 잡았다.
「만규 씨, 괜찮아요?」
침대에서 일어난 이유미가 탁자 위에 놓인 휴지를 가져오더니 홍만규의 얼굴을 닦았다
「너, 두고 봐,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문득 손을 멈춘 이유미가 김상철을 노려보았다. 한쪽 볼이 벌겋게 되어 있었다.
「네 아버지하고 같이 감옥살이를 하게 될 거야, 이 자식아.」
김상철이 손을 뻗어 홍만규의 한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 여자는 내 친구와 결혼할 사이였어.」
그러자 홍만규가 흐린 눈을 들었고 이유미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 여자한테서 손을 떼, 그렇지 않았다간 다음번엔 죽여 버릴 테니까.」
「이 개자식.」
이유미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가 김상철이 가볍게 지른 주먹에 관자놀이를 맞고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때? 약속할 거냐?」
김상철이 다른 쪽 손으로 홍만규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 개자식아, 쌔고 쌘 게 여잔데 왜 하필 내 친구의 여자를 가로채, 어때. 대답 안 해!」
「알았어.」
흔들리는 머리로 흥만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손을 떼겠어.」
사무실에 들어서자 안쪽의 소파에 앉아 있는 이대각이 보였다. 그도 김상철을 보고는 큰 머리를 흔들며 활짝 웃었다.
「아니, 이사님. 몸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다 나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쪽 팔은 불편해 보였다. 그는 이제까지 근대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이다. 아침 9시여서 이제 마악 업무가 시작된 참이었다. 아직 유장석이 출근 전인 것을 보면 본사에 들렀다가 오는 모양이었다.
「김대리가 보안업무를 맡았다면서.」
여직원이 날라준 커피잔을 받으면서 이대각이 물었다.
「그래, 언제 떠나는 거냐?」
「저는 닷새 후에 떠납니다.」
「유전무님은?」
「저희들 먼저 떠나고 나서 조금 있다가 오실 예정이었는데 아마 같이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야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대각이 다시 물었다.
「지원자 중에서 돌아가는 놈들이 늘어난다면서.」
「예, 조금‥‥‥」
「인마, 조금이 아니라 10%가 넘는다던데, 그래? 병원에 누워 있었다고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알아?」
직능별로 모집한 개척단원 중에서 특히 지원취소를 하고 돌아가는 인원이 많은 곳은 행정직이었다. 기술직 요원들의 취소 비율은 5% 미만이었는데 행정직은 30%가 넘는 상황이었다.
「시베리아에 있을 때의 이야기가 퍼져나간 모양입니다. 그것이 조금 과장되기도 해서, 아마‥‥‥‥」
「더 이상 과장할 것도 없다. 그땐 최악이었어.」
이맛살을 찌푸린 이대각이 큰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룹 내부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우리 직원이 수십 명이 죽었다느니, 그래서 사망자를 줄이려고 눈 속에 시체를 여러 구 묻고 왔다느니 하는 소문이 확 퍼져 있단 말이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이대각이 상반신을 김상철에게로 기울였다.
「이미 유전을 발굴해 놓았다는 소문도 떠돈다.」
「이걸 아는 놈들은 극소수인데, 비서실 직원들에게도 비밀로 한 일인데 말이야.」
「………」
「도무지 병원에 있지를 못하겠어, 조바심이 나서.」
「잘 오셨습니다, 이사님.」
「유전무가 날 보면 도로 병원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겠지만 그땐 대가리로 받아버릴 테다. 난 못 가.」
본부 사무실에서 나온 김상철이 연수원 1층에 있는 경비단 임시 사무실로 들어서자 고태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스물여덟으로 학군장교 출신이다.
「대리님, 조직도를 봐주시렵니까?」
그는 탁자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닷새 후에 시베리아에 도착하면 당장에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조직도를 살펴보던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고태성은 중위 출신인데다 입사 2년 차 사원이다. 근대 건설의 총무부에 있다가 개척단에 자원한 그는 경비단의 선임자였다. 건설에 그대로 있어도 내년에 대리 진급 순서였으니 정상적으로 따지면 김상철보다 한참 선배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지원을 취소한 사람들은 돌아갔습니까?」
「오늘 아침에 보냈습니다.」
고태성이 매섭게 보이는 눈을 치켜떴다
「그런 놈들은 차라리 잘 돌아간 겁니다. 시베리아에 가서 보수 많아지고 진급 빨라질 생각만 했던 놈들이니까요.」
「소문이 퍼져 있다던데, 시베리아 상황에 대해서 말이오. 들은 적 있습니까?」
「들었습니다.」
고태성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직원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러시아군 수백 명이 물살 했다고도 하고, 사망자를 은폐하기 위해서 시체를 묻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
「대리님에 대한 소문도 많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됐어요. 그런데 나에 대한 직원들의 거부반응은 없습니까? 아직 입사 몇 개월도 안 되었고 한데.」
「안 들으시겠다는 그 소문 때문인지 그런 직원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그리고 직장도 계급사회거든요. 그런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대리님.」
「앞으로 잘해 나갑시다.」
「제가 부탁드립니다. 저도 힘껏 능력을 발휘할 작정이니까요.」
고태성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책상에 앉아 차량 배치나 하고 회사 재산 체크나 하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시베리아 개척단 모집이 저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지요.」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탁자 위의 조직도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과 입장은 달랐지만 그도 절실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