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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1-1

Bollnow 2024. 3. 6. 07:12

영웅의 도시

이원호

 

1

 

1. 버림받은 사내

10월 중순의 어느 날.

비스듬한 오후의 햇살을 받은 잔디밭 한쪽은 이미 그늘이 졌고 교정 안은 정적에 덮여가는 시간이다.

도서관 앞에 서서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을 한동안 바라보던 김상철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굵은 눈썹 밑의 날카로운 눈빛과 꾹 다물린 입술이 강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어깨를 편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정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맨땅을 훑고 지나면서 메마른 소리를 냈다. 그가 학교 정문 맞은편의 미도 카페에 들어선 것은 65분 전이었다.

이미 환하게 불을 밝힌 카페 안은 손님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벽 쪽에 앉아 있는 한지은의 옆모습이 보였는데 자주색 정장 차림으로 불빛을 받은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성큼 다가간 김상철이 앞자리에 앉자 그녀가 머리를 들었다. 골똘한 생각에서 깨어난 듯 멍한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가 묻자 한지은은 앞에 놓인 커피잔을 다소곳이 쥐었다. 그녀는 국제여대 4학년으로 같은 졸업반이었지만 김상철의 군 복무 기간만큼 어린 스물둘이었다.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김상철은 커피를 시켰다.

난 영어보다 일어가 떨어져.

테이블 위에 팔을 기댄 김상철이 덤덤하게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특히 회화보다 문법이 말이야.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취업 시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자 한지은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상철씨, 왜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퍼뜩 머리를 든 김상철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얼굴이 굳어진 한지은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나뿐만이 아니야, 엄마는 지금도 누워 계셔.

너무해,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다니‥‥‥」

드디어 탄로가 났군.

굳어진 얼굴로 입술만 벌리면서 김상철이 웃었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감추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것 따지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우리 집안이 어떤 상황이 되어 있는지는 잘 알 거야.

한지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지난달에 우리 집에 왔을 때 상철 씨는 거짓말을 했어. 아버지가 시골에 계신다고.

대전은 서울보다 시골이거든.

김상철의 아버지 김영환은 지금 대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작년 가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세무공무원 비리 사건의 공범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문 한지은은 시선을 내린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긴 속눈썹 밑으로 곧은 콧날이 뻗은 서구형의 얼굴이었다. 김상철은 찻잔을 들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지은을 만난 지는 2년이 채 안 되었지만 그것은 김상철의 모든 삶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요즘은 그녀를 만나는 것만이 유일한 기쁨이다.

김상철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널 속여서. 그리고 네 부모님한테도,

「‥‥‥ 」

그래, 언제 탄로 날지 항상 불안했지만 내 스스로 말할 용기가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어?

무엇을 이해한단 말이야?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넌 신문도 안 봤니? 그때 사람들의 이야기도 못 들었어? 나는 전철 안이나 식당에서 이런 놈들은 총살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지내왔어.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감추는 수밖에 없었어.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니까 자식은 상관없다는 이해나 동정은 받고 싶지도 않고.

난 그런 돈으로 학비를 내고 용돈을 썼으니까 모른다고 할 처지도 못 돼.

「‥‥‥ 」

가능한 한 숨기는 수밖에 없었어, 살아가려면. 하지만 언젠가는 들통이 나겠지, 지금처럼.

잠자코 있던 한지은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상철씨가 정직하지 못하다고만 하셨어.

유감이라고 말씀드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갈게.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희미하게 웃음 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잘 지내.

한 시간 후, 김상철은 영등포의 떠들썩한 음식점 안에서 안인석과 마주 앉아 있었다. 안인석은 그와 고등학교 동창으로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대학이다. 얼굴선이 곱고 해사한 그는 김상철과는 성격도 대조적이었지만 둘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안인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 너 왜 이렇게 마셔? 무슨 일 있어?

소주 한 병을 혼자 금방 비운 김상철이 두 병째를 따르고 있다.

무슨 일은, 뻔한 일이지.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옆쪽 테이블을 쏘아보았다. 사내 네 명이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떠들썩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말끝마다 욕설을 뱉고 목청껏 소리를 질러 댔는데 주위의 손님들은 이맛살을 찡그리면서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김상철이 안인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지은이가 아버지 일을 알게 되었어.

지은이가 말이야?

상체를 앞으로 숙인 안인석의 눈이 커졌다. 아마 김상철의 집안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안인석일 것이다. 그는 김상철이 한지은에게도 아버지 사건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뭐라고 그래?

지은이만 아는 게 아니고 그쪽 집안에서 모두 알게 되었단 말이다

날더러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다는데, 지은이 아버지가‥‥ 어머니는 자리를 펴고 누웠고.

젠장, 잠자려고 누웠겠지, 정직하게 말했다면 상 주려고 했다더냐?

안인석이 소주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래, 지은이는 어때?

어쩌긴, 헤어졌지.

헤어진 건 알아, 네가 지금 혼자 있는 것을 보면.

말은 가볍게 받았지만 안인석의 시산이 긴장되어 갔다.

상철아, , 설마.

앞으로 만나지 않을 거다.

언젠가는 끝날 일이었어. 아버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아마 그랬겠지. 날 만나자고 했던 걸 보면, 이해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니까.

「‥‥‥‥」

내 형편에 그 여자는 과분했어.

이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 말아,

그러자 술잔을 내려놓은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네 놈이 어떻게 안단 말이냐? 내 미래를.

그래, 하긴 그렇다.

머리를 끄덕인 안인석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 달분 미리 가져왔다.

고맙다.

봉투를 집어넣은 김상철이 술잔을 들었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로 안인석은 김상철에게 매달 150만 원의 생활비를 건네주고 있었다. 김상철의 어머니는 그가 고등학생 두 팀의 가정교사를 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안다. 10억이 넘는 세금을 횡령했다고 발표된 김영환 씨가 항소심에서 추징금 4억에 징역 5년을 언도받은 바람에 집안은 거덜이 난 것이다.

안인석의 부친 안문세 박사는 강남 영동대로에 있는 문세병원의 원장이다. 안박사는 안인석의 씀씀이가 헤퍼진 것을 알았지만 공사가 다망하여 미처 캐묻지 못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사내들이 다시 왁자하게 소리치며 웃었고 그 위압적인 분위기에 음식점 안이 조용해졌다. 김상철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모두 짧은 머리에 체격이 컸고 가끔씩 주위를 훑는 시선들이 매서웠다. 건달일 것이다. 아마도 근처의 나이트클럽이나 오락장을 무대로 노는 주먹들로 보였다.

하지만 난 지지 않을 것이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김상철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는 안인석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옆자리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 이 새끼들아, 좀 조용히 못 해?

그의 말이 끝나자 음식점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김상철을 바라보았는데 네 사내도 예외가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상철이 사내들의 식탁 앞에 가 섰다.

일어나는 놈 있으면 죽인다. 먼저 말을 하는 놈이 있어도 그놈부터 죽인다.

그러자 안쪽에 앉아 있던 눈이 가늘게 찢어진 사내가 벌컥 의자를 제끼며 일어났다.

그 순간 김상철의 몸이 튕겨지듯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발이 날아가 사내의 턱을 차올렸다. 그리고는 떨어져 내리면서 옆에서 몸을 세우는 사내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한 손으로 탁자를 짚은 김상철의 몸이 다시 제자리에 바로 섰을 때 턱을 채인 사내는 의자와 함께 땅바닥에 누워 있었고 뒤통수를 찍힌 사내는 식탁 위에 코를 박고 엎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죽어.

남은 두 사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김상철이 낮게 말했다. 음식점 안은 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상철이 안인석에게로 눈만을 돌렸다.

계산해라, 가자.

그리고는 다시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 알 리가 없는 두 사내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들, 작년에 신문도 안 봤어?‥‥ TV도 안 봤느냔 말이다?

그러자 안인석이 그의 팔을 끌었다.

그만 가자.

이 새끼들,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는데도 나를 몰라본단 말야?

그는 안인석에게 끌려 음식점을 나왔다. 밖은 화려하고 혼잡한 영등포의 번화가였다.

서두르며 김상철을 끌고 인파를 헤쳐 나가던 안인석이 뒤를 힐끔거리더니 이윽고 걸음을 늦추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그가 김상철을 흘겨보았다.

칠려면 그냥 치지, 왜 그따위 공갈을 치는 거야?

무슨 공갈?

술이 깬 얼굴로 김상철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 내가 틀린 말 했냐 ? ‥‥‥‥」

다음 날 아침 ,

가방에 도시락을 넣던 어머니가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눈을 감았다.

작은 체격에 몸도 약해서 근래에 들어 자주 일을 쉬었으면서도 병원에는 한사코 가지 않으려고 한다. 옷을 입던 김상철이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또 아파요?

어머니가 눈을 떴다.

아니다. 조금 피곤해서.

병원에 가자니까 그러네. 정말 왜 이러시는 거요?

아픈 데가 있어야 갈 거 아니냐? 본래 몸이 약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병원에 가셔야 해요. 오늘 나하고 같이 갑시다.

오늘은 일 때문에 안 돼.

어머니가 그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쉰둘이면 아직 팔팔한 나이였는데 어머니의 피부는 거칠었고 주름살이 깊어서 환갑이 지난 노인처럼 보인다. 어머니도 나갈 채비를 했다. 작년부터 파출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이번 아버지 면회는 제가 갈 테니까 어머니는 쉬세요.

김상철의 말에 어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얘 좀 봐, 난 가만 있으면 가슴이 떨리고 어지러워, 움직여야 돼.

글쎄, 그러니까 집에서 쉬시라니까요.

안 된다.

머리를 저으며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내가 봐야 한다.

마치 주일날 교회에 가는 사람처럼 어머니는 빠짐없이 교도소에 면회를 갔고 그것이 다음 면회일까지의 정신적인 양식이 되어 온 것이다. 입맛을 다신 김상철은 가방에 책을 담아 넣고는 일어섰다. 심성이 여린 어머니에게 이러한 시련은 몸과 마음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들의 전셋집은 방 두 칸에 주방과 화장실이 나란히 붙은 15평형의 연립주택이었다. 아직 박스를 풀지 않은 세간이 이쪽저쪽에 가득 쌓여져 있는 사이를 지나 김상철은 현관으로 나왔다. 봉천동의 달동네이기는 하지만 재산 모두를 처분하여 추징금을 내고 전세금이 남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어머니가 뒤따라왔다.

아버지는 죄가 없어, 모두 과장하고 조서기가 해먹은 거야.

누가 그걸 몰라요?

신을 멘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새끼들이 조금씩 건네준 돈을 영문도 모르게 받았다고 해도 공범이 된다니까, 어머니는 참.

그래도 억울해. 조서기 그놈은 추징금을 내고도 빌딩 한 채가 남았다는데.

아침 730분이어서 여동생 민희는 아직 자고 있는지 방에서는 기척이 없다. 어머니를 닳아 내성적인 성격인데다가 아버지의 사건이 터지고 학교까지 휴학하게 되자 좀체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자 찬 아침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찻길이 멀어서인지 매연이 덜 섞인 시린 공기가 폐에 스며들었으므로 김상철은 어깨를 펴고 숨을 들이마셨다.

김상철이 체육관 앞의 나무 벤치로 다가가자 한지은이 머리를 들었다. 짙은 색 바바리코트 차림의 한지은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오랜만이구나.

옆자리에 앉은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학교 앞에서 그렇게 헤어진 지 보름 만이었다. 그동안 서로 전화 한 통 주고받지 않았다.

운동하고 있다고 해서. 도서관에 갔더니 …」

조금 파리해진 얼굴의 한지은이 말했다.

우리 나가, 밖으로.

아니, 난 한 시간쯤 더 있어야 돼. 시범경기가 있거든.

거절하기가 미안했는지 김상철은 운동으로 상기된 얼굴에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험공부 때문에 몇 달간 운동에 게으름을 피웠는데도 몸이 잘 풀려. 그래,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기분이야.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끌려 합기도를 배웠는데 지금은 공인 5단이었다. 그러나 단수를 높이기로 마음만 먹었다면 7단도 거뜬하게 딸 실력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중량급 한국 챔피언을 따내었고 군에 들어가서는 해병대의 무술교관을 지냈다. 그러나 복학 후에는 가끔 체육관이나 도장에 나가 몸을 풀었을 뿐 학업에 전념해 왔다. 아버지의 말대로 운동은 정신과 몸의 균형과 건강을 위한 것이었고 미래를 위해서는 취업 준비가 당면과제였던 것이다.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바쁘다는 시늉이어서 건성이다.

그래.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찾아온 건‥‥‥‥」

꼭 말해야 될 것 같아서.

김상철을 올려다보던 한지은이 고개를 떨구었다.

, 중절 수술했어. 사흘 전에.

, 그랬었지.

기억이 난다는 듯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생리가 한 달 동안 끊겼다고 한 것이 20일쯤 전이었으니 태아는 3개월쯤 되어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내가 같이 가주는 건데.

「‥‥‥ 」

관계를 끊자니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많았구만. 그래, 몸은 괜찮아?

구두 끝을 내려다본 채 입을 열지 않는 한지은의 어깨를 그가 가볍게 쳤다.

궁상떨지 말고 돌아가, 이제.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할까? 아니면 기회를 달라고 매달려 울까?

「‥‥‥‥」

혼자서도 잘 정리하면서 나한테 바라는 것이 뭐야? 네 마음이 개운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지?

난 그저 ‥‥‥‥」

넌 영리한 애야. 타산이 빠르고, 그래서 손해를 보지 않는 여자지.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한지은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그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오신다는 걸 내가 대신 온 거야.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서 상철 씨 집안을 알아보셨어. 그래서 이걸‥‥‥」

이게 뭔데?

얇은 봉투를 손에 쥔 김상철이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돈이야. 2천만 원이 들었어.

생활에 보태 쓰라고.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봉투를 한지은의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돈을 보니까 목구멍 안에서 손이 나을 것 같지만 안 받겠어. 받을 이유도 없고,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가지고 가,

이건 호의야. 단지, 우리 집안의‥‥‥)

상철 씨가 이러리라 짐작했지만 아버지가 굳이 ‥‥‥‥」

돈은 안 받겠지만 그 호의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전해. 그리고 염려하실 것 없다고도 전하고.

일어선 그는 한지은을 향해 웃었다.

아버지가 돈 먹고 교도소에 계신데 자식이 대를 이어 돈을 먹을 수는 없지.

근대그룹은 계열사가 40여 개에 임직원의 숫자만 해도 10만 명이 넘었고 해외 지사와 현지 법인을 합하면 200개가 넘는다. 또한 외국에 세운 현지 공장도 수십 개여서 그룹 전체의 1년 매출액이 20조 원 가깝게 되는 한국의 최대 그룹이었다. 55년 전, 철공소의 인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강우진 회장은 지금도 정력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었는데 물론 경영방식은 옛날과 달랐다. 그룹을 연계성이 있는 품목별 소그룹으로 나누어 소그룹 회장이 있고, 각 소그룹은 종합적인 전략에 따라 계열사를 지휘하는 것이다.

자동차, 중공업, 전자, 건설, 상사, 유통의 6개 소그룹으로 나누어진 방대한 조직을 통괄하는 것은 물론 강회장이다.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그룹장 회의를 주재하면서 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한 한 달에 열흘은 해외의 사업체를 시찰하면서 맹렬한 활동을 한다.

강회장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날 저녁이다. 모처럼 모인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강회장은 4형제 중 장남인 강용식과 함께 서재로 들어섰다. 강용식은 중공업 그룹의 그룹장으로 조선의 회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개발에 적극 찬성이야. ·러 합작 자동차 공장의 계약만 끝낸다면 우리에게 개발권을 주겠다는 거다.

소파에 앉은 강회장이 서두르듯 말하자 강용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 실장한테서 들었습니다, 아버님.

우리는 대한민국의 면적보다 큰 땅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이다.

, 45만 평방킬로니까 남북한을 합한 면적보다 두 배도 넘습니다.

내일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다.

아버님.

자리를 고쳐 앉은 강용식이 헛기침을 했다. 50대 초반으로 이제 경영자로서의 관록이 붙은 강용식이었지만 강회장 앞에서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뺨을 맞는 것이 예사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지금은 강회장에게 제일 신임을 받는 자식이다.

먼저 시베리아 지역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 쪽에서 보여준 슬라이드 사진만 가지고는 대뜸 계약하기가‥‥‥‥」

강용식이 말하자 강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까짓 나무가 조금 적으면 어때? 그땐 땅을 갈아서 옥수수를 심지. 끝도 없는 옥수수밭을 만든단 말이다.

그러실 바에는 기후와 조건이 더 좋은 땅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긴 그렇군.

청와대에 들어가시는 건 조금 보류하시고 조사단을 파견해서 임차될 땅에 대한 정밀 점검을 시켜야 합니다.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러시아 쪽은 서두르고 있는데 몇 달쯤 보류시켜야겠군.

러시아 쪽에는 로비를 하겠습니다.

강회장이 모스크바에 간 것은 시베리아의 땅을 임차하기 위해서였다.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은 아직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는데 풍부한 자연 자원을 지닌 땅이었다. 그가 임차 후보지 중에서 고른 지역은 주그주르산맥 옆쪽의 광활한 무인지대로 원목뿐만 아니라 갖가지 광물질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조사단을 구성해서 보내야겠다. 아니, 조사단으로는 약해. 지금도 호랑이가 나오고 산적들이 있다는 곳이야. 그렇지, 개척단이라고 해야 옳다.

강회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가 이런 기풍으로 근대그룹을 성장시켜 왔으므로 그의 심복들 중에는 산적 두목 같은 무리들이 많다. 강용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러시아 정부에 개척단을 파견한다는 통보를 하고 허락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도.

빌어먹을.

강회장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받아들이는 러시아 정부보다 보내는 이쪽 정부가 더 까다로울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청와대에 말해야겠군. 그 말 많은 놈들한테.

허락이 날 겁니다, 아버님. 러시아 정부가 허락해 주면 말입니다.

그렇지, 그게 순서지. 러시아의 신경을 거스를 배짱이 있는 놈은 없지, 이곳에.

강회장이 만족한 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시베리아의 땅을 50년 임차한다는 것은 그곳의 주인이 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강회장과 그 다음 세대, 그리고 손주의 세대까지 그 땅에서 살다가 뼈를 묻게 되어도 남을 기간인 것이다.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땅이 강씨 일문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 도시를 짓고, 공장과 학교, 그리고 산적을 막는 군대도 키울 수가 있을 것이다. 강회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영감의 로비는 당할 자가 없어. 멧돼지처럼 달려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사이에 뱀이 되어서 상대방을 감고 있단 말이야.

조영규 실장이 테 없는 안경을 추겨 올리며 말을 이었다.

주그주르산맥 지역은 원목뿐만이 아니라 광물질도 풍부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어, 정밀 조사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 곳에 투자할 돈으로 전자 단지를 몇 개 더 세우는 게 나아.

강회장은 꽤 집착하는 모양입니다.

앞에 앉은 최선호 전무가 말했다. 그는 비서실의 개발담당 팀장이었는데 직급은 전무이나 계열사로 내려가면 사장급이었다.

비서실장 조영규도 사장직급으로 오성그룹의 회장단 회의에 간사로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조영규가 입을 열었다.

우린 아직 시베리아 땅이라든가 유전 개발 같은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다른 일이 산적해 있단 말이야,

조영규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105분 전이었다. 1030분에 전자그룹 회장과 함께 미국의 파인사 회장을 만나기로 했으므로 회장에게 준비를 시켜야 했지만 5분쯤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 회장은 반도체 공장 증설에 관한 계획서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오성그룹이 전자 분야에서 세계의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선대의 김상모 회장이 기반을 구축했지만 2대째인 김호경 회장의 집념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첨단분야의 산업을 개발, 발전시키는 것만이 회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땅 넓이가 남북한 합친 면적의 두 배나 된다면서요?

최선호는 강우진 회장의 시베리아 개척 프로젝트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임차기간이 50년이라면 영국이 홍콩을 빌린 것만은 못하지만 자기 땅이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우리 회장님께서는 그걸 알고 계시는지요?

내가 어제 간략하게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아무 말씀 없으시더군.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최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50대 초반의 최선호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반도체에 대한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내였다. 그가 거느리는 개발팀 안에는 CIA나 모사드 특공대에 못지않은 A반이 있었는데 평시에 그들은 회장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최선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영규는 자리에게 일어섰다.

회장실로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고 앉아 있던 김호경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표정이었다.

회장님, 파인사의 그렌트 회장과 1030분에 약속이 있으십니다.

알고 있어요,

각진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럽다.

그런데 조 실장, 어제 이야기한 근대의 시베리아 개발 건 말인데…」

, 회장님.

긴장한 조영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건성으로 들은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 프로젝트를 알아보도록 하시오.

알아보시라면, ‥‥‥‥」

조사를 해요. 그곳이 가능성이 있는지.

, 가능성을 조사하겠습니다.

물론 근대 쪽에는 비밀로 하고.

물론입니다, 회장님.

러시아와 한국 정부 양쪽의 입장도 알아보도록 하고, 계약조건도 함께.

알겠습니다. 그러면 러시아가 내놓은 다른 임차지역도 함께 조사를 해도 좋겠습니까?

그러자 한동안 조영규를 바라보던 회장이 희미한 웃음을 띠우면서 머리를 저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조영규는 머리를 숙였다. 회장의 의도를 안 것이다. 회장은 러시아의 땅 임차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근대그룹의 팽창이다. 그리고 근대그룹과 러시아와의 밀착인 것이다.

대전 교도소의 면회실에서 김상철은 아버지 김영환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유리벽에 둥근 구멍이 총알 자국처럼 뚫린 통화구로 다투듯 말하는 면회자와 수감자들은 모두 쫓기는 표정이었다.

시멘트 벽에 부딪힌 말소리들이 웅웅 떠다니면서 방 안은 울림소리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제각기 목소리들을 높인다. 그러다가 양쪽에 서 있던 교도관의 주의를 받고 다시 말소리가 낮아지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김상철이 입을 통화구에 가져다 댔다.

아버지, 건강하셔야 돼요.

오냐, 고맙다.

볼이 홀쭉하게 여윈 김영환 씨가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횐 머리가 반쯤 섞인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깔끔하게 면도를 했지만 시선 끝은 무디어져 있었다.

아버지, 책 가져왔어요.

그래, 고맙다.

아버지, , 근대그룹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이미 근대그룹에 지원서는 제출했고 입사 시험은 20일 후인 121일이다.

아버지.

김상철이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김영환 씨의 먼 허공을 향하던 시선에 초점이 잡혀졌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김영환씨가 헛기침을 했다.

상철아, 나는 공금인 줄 알면서 받아썼다. 세금을 탕감해 준 것도 돌아올 돈을 기대했기 때문이야.

김영환 씨가 유리벽에 바짝 얼굴을 댔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검찰이나 법원에서는 몰랐다고 했지만 알고 받아쓴 거야. 난 내 자식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전에 대여섯 번 면회를 왔었지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긴장한 김상철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너한테만은 꼭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벽에 얼굴을 바짝 붙인 그가 말을 이었다.

강한 자만이 사는 세상이다. 이 애비의 인생은 실패작이다. 하지만 너는 이겨야 한다. 성공해야 된다.

아버지.

절대로 좌절하지 말아라. 이 애비의 전과가 네 장래에 지장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단호하게 나를 부정해라. 나를 욕하고 매도하고 아예 지워 버려라.

아버지.

김상철의 두 눈도 부릅떠져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욕한다면 그놈들을 상대로 싸우지요.

이런 바보 같은 놈!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치자 교도관이 주의를 주었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단 말이냐? 애비가 김영환이라는 걸 알게 하면 안 된단 말이다. 절대로.

떳떳하게 말한다고 해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사회라는 것은.

「‥‥‥」

난 너를 어릴 적부터 강하게 키웠다. 하지만 너는 아직 타협을 모른다. 상철아, 이기려면 타협을 해라, 너무 곧으면 부러지는 법이다. 굽혔다가 나중에 기회를 보아라,

알겠어요, 아버지.

거의 얼굴을 맞댄 김상철이 말했다.

타협하지요, 굽히겠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네 엄마와 동생을 잘 부탁한다.

기운을 내세요. 아버지.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벨이 울렸으나 그들은 얼굴을 마주 댄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진 것은 김상철이 면회를 다녀온 나흘 후였다.

함께 방을 쓰는 민희가 아침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어머니를 깨우다가 의식을 잃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김상철은 이를 악물었다. 겹쳐오는 시련에 대한 분노와 함께 견디어 내겠다는 투지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병명은 자궁암이었다. 의사는 이런 상태가 되도록 방치해둔 환자와 가족들의 무지에 혀를 내두르는 표정을 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어머니를 두 남매가 간병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낮 시간은 민회가 맡고 밤에는 김상철이 병실을 지켰다.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이다. 교대하러 온 민희와 김상철이 병실 밖에서 마주 보고 섰다.

수술은 닷새 후로 잡혔다.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몸이 약해져서 의사가 걱정을 하더라. 하지만 잘 되겠지.

뭐라고 했는데? 위험하대?

민희가 목소리를 떨자 김상철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의사들이나 변호사들은 원래 그래. 우선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 거야. 그래야 책임도 덜고 생색도 나는 법이니까,

오빠, 돈은? 수술비가‥‥‥‥」

걱정 마라, 내가 모아둔 돈이 있다.

김상철이 민희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네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넌 기운만 차리면 돼. 알았니?

민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김상철이 몸을 돌렸다.

한 시간쯤 후에 그는 천호동의 대로변에서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올리고 있는 빌딩 공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 인부를 체크하고 있던 반장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저 친구, 이제 오는구만.

화이버를 젖힌 반장이 손짓을 해서 그를 가까이 불렀다.

이봐, 장씨가 오늘 안 나왔어. 그래서 자네가 대신 올라가 줘야겠어.

제가요?

김상철이 붉은색 철근 빔만이 얽혀져 있는 빌딩의 골격을 올려다보았다. 15층까지 어제 놓여졌으니 오늘은 16층을 쌓을 차례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잔일을 거들려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뿐 위에서 작업을 한 적은 없는 것이다.

자네는 이씨 보조야. 이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반장이 자르듯 말하자 김상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요, .

배짱만 있으면 돼. 그리고 허리에 로프를 매고,

알았습니다.

반장이 만족한 듯 웃었다.

일당이 2만 원이나 차이가 난단 말이야. 저 병신들은 죽어야 돼.

크레인으로 끌어올린 거대한 빔을 가로 세로로 맞추어 끼우는 작업이었는데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크레인 기사와 호흡이 맞아야 했고 첫째로 폭이 50센티도 안 되는 빔 위를 걸어 다녀야 한다. 그것은 15층 높이에서 줄을 타는 것과 같은 상황이어서 초보자들은 아예 올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입에 담배를 문 이씨가 다가왔다. 40대 중반으로 철근조립 기술자여서 반장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봐, 김 군. 내가 자네를 데리고 일하겠다고 했어.

저를 왜요?

자네 하체가 든든해서,

이씨가 턱으로 김상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척 보면 알지, 자넨 연장도 튼실할 거야.

하체가 든든해야 돼, 위에서 일하려면,

그러자 반장이 이를 드러내며 맞장구를 쳤다.

암먼, 여자 위에서도 마찬가지여.

 

창으로 다가간 이유미가 커튼을 젖히자 눈부신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창을 배경으로 드러난 그녀의 나신도 빛살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안인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아홉 시야, 일어나.

그녀가 다가왔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단하게 솟은 젖가슴이 탄력으로 떨리듯 흔들렸다.

어서 일어나, 아침 먹으러 가게.

강남의 조그만 호텔 방 안이다.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나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이유미가 침대 위에 걸터앉더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왜 이렇게 비실거려?

, 30분만 더 있다가. 너무 일러.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쥐었다.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난 게으른 남자가 싫어.

안인석의 손을 털어낸 이유미가 일어나 팬티와 브래지어를 찾아 걸쳤다. 그녀는 쌍꺼풀이 진 또렷한 눈망울을 가진 미인으로 몸매도 미끈해서 문리대 안에서 모르는 남학생이 없다. 또한 그녀는 여러 가지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 담당 교수와 호텔에 들어갔다든지, 방송국의 PD와 동거를 했다는 등 야릇한 것도 많았지만 본인은 해명이나 변명 같은 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미는 안인석의 애인으로 영문과 클래스메이트였다.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있어서 안인석의 부모는 그녀를 며느릿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모처럼의 의견일치를 보았던 터였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이유미의 아버지도 물론 안인석을 사윗감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둘의 외박은 이제 반쯤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이유미가 밤늦게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서 ', 지금 인석씨하고 같이 있어' 하고서 외박하는 식이다. 그래서 양쪽 집안은 지난달에 어머니끼리 한번 인사를 나누었고 내년 중으로 결혼식을 올리자는 구두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안인석이 침대 옆의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누운 채 다이얼을 누른 그는 한동안 귀에 대고 있던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자식, 시험이 내일모렌데 어디 간 거야?.

혼잣소리로 투덜거리자 이유미가 침대에서 일어나 옆쪽의 의자에 앉았다.

, 전화를 안 받아?

, 아무래도 여동생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김상철은 도서관에도, 체육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밤에 집으로 전화를 하면 여동생이 받는데 한결같이 모른다고만 하는 것이다.

이유미가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어디 놀러 갔겠지, .

팔자 좋은 소리 그만해.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럴 형편이 아니야, 그놈은.

난 그 사람이 싫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기 친구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분위기의 남자는 질색이야.

네가 윌 안다고 그래? 걔에 대해서.

분위기가 싫다고 그랬지, 내가 윌 안다고 했어? 알 필요도 없는 사람이고.

분위기가 어때서?

질겨. 그리고 어둡고, 때로는 섬뜩할 때가 있어. 그 눈빛이 무서워.

상철 씨 애인은 그런 남자가 좋은지 모르지만 난 아냐.

안인석이 시트를 젖히고 일어섰다. 알몸이다. 바닥에 떨어진 팬티를 주워 입은 그가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그 자식은 애인도 떨어졌어, 지금.

아니, ?

글쎄, 네 말대로 그 여자도 그런 분위기가 질색이었는지 모르지,

한지은과도 서너 번 같이 만난 적이 있었던 이유미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9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930.

유장석 이사는 비서실의 소파에서 일어섰다. 각진 턱에 눈매가 예리했고 키는 보통이었지만 어깨가 넓다. 그는 비서실장 이남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섰다.

실장님, 시간 되었는데 들어갈까요?

가만.

이남호가 서둘러 책상에서 일어섰다.

내가 여쭤보고 올 테니 기다려.

회장실은 바로 옆방이다. 그가 회장실로 들어가자 유장석은 들고 있던 파일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넥타이의 매듭을 치켜올렸다. 근대건설에 입사하여 이사가 될 때까지 20년을 근무했지만 회장실로 들어가는 것도 처음이고 회장과 독대하는 것도 처음이다. 그는 날이 선 바지의 주름과 잘 닦여진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회장실의 문이 열리더니 이남호가 나왔다.

유 이사, 들어와.

유장석은 헛기침을 조그맣게 하고는 배에 힘을 주었다. 어제 오후 회장실로 출두하라는 지시를 받고 현재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세 곳의 공사장 현황을 꼼꼼히 점검해 보았었다. 진척률은 계획대로였고 사고가 한 건 있었지만 부상자는 경상인데다 노조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자금 문제나 금전 비리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강우진 회장은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이남호와 유장석이 테이블 앞에 다가가 섰는데도 머리를 들지 않았다. 회장실은 예상보다 좁았다. 회장 옆쪽 벽에 붙은 책장은 낡아서 옷칠이 벗겨졌고 반대편의 철제 캐비닛은 공사 현장에서도 쓰지 않을 정도로 녹이 슬어 있었다. 유장석은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영동의 공사 현장에 있는 자신의 현장소장 사무실보다도 옹색한 방이었다.

이윽고 강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 왔나. 거기 앉아라.

걸걸한 목청으로 말하며 강회장이 턱을 들어 옆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자신도 일어서서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 나하고 사우디에서 만났지? 그게 어디더라, 담맘인가?

강회장이 말하자 앞에 앉은 유장석이 허리를 폈다.

쥬베일입니다. 회장님.

그렇지, 쥬베일이었다. 넌 그때 하역 담당 졸자였지, 20년쯤 전이니까.

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대화 중의 하나는 옛날의 무용담이다. 회장이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넌 물에 빠진 장비를 구한다고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어, 그렇지?

잠자코 머리를 숙인 유장석을 향해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너는 두 번이나 들어갔는데도 빈손으로 나왔어.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선.

「‥‥‥」

가만, 빠진 장비가 뭐더라?

트럭 엔진 부속이었습니다. 회장님.

세 번째 네가 들어가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그렇지?

, 회장님.

내가 목숨을 아끼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뭐라고 했는데?

네놈이 죽으면 돈이 더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회장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내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만용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 놈들이 대부분이지.

「‥‥‥」

그런데 너는 내가 떠난 후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꺼냈더구만.

「‥‥‥」

그래서 너를 기억한 것이다.

회장이 헛기침을 하고는 소파에서 허리를 뗐다. 어느새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나는 내 일생의 숙원사업으로 시베리아의 땅을 임차해서 개간할 생각이다. 자네는 모스크바 지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

, 회장님.

러시아어는 잘하나?

좀 합니다.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놈의 땅을 사진만 보았지 답사해 보지 못했어. 이건 마치 백 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간 우리 조상이 사진만 보고 색시를 데려온 것과 비슷한 꼴이 될 것 같단 말이야.

「‥‥‥」

네가 이 일을 맡아라. 필요한 인원과 장비를 최대한 지원해줄 테니 네가 끌고 시베리아로 가란 말이다, 알겠어?

알겠습니다.

그러자 얼굴에 웃음을 띤 강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것 보라는 표정이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야. 산적이 있고 요즘은 군에서 이탈한 무리들이 무장 강도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짐승도 많고, 호랑이 같은.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곳을 철저히 조사하는 거야. 지질, 광맥, 그리고 원목의 상태 등 모든 것을,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데려가야 하는데 네가 총책임자다.

, 회장님 .

너는 개척단장으로 상무 승진을 시키겠다. 한 달 동안 여기 이 실장과 함께 개척단을 구성하도록 해. 출발은 1220일로 잡는다.

강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이남호와 유장석은 따라 일어섰다. 유장석에게로 손을 내민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마 그곳에서 물속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게다. 강이 모두 얼었다거든.

 

김상철이 나타난 것은 처음으로 서울에 물이 언 날로, 입사 시험을 사흘 앞둔 1127일이었다. 전화를 받은 안인석이 한달음에 약속장소인 카페로 달려왔다. 저녁 무렵이어서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다.

이 새끼,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디 있었어?

그러자 김상철이 수척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며 웃었다.

서울에 있었지, 어디 갈 데가 있나?

이 새끼야, 그럼 왜 연락을 안 해?

어머니가 입원해서 병원에 있었다. 네 놈 걱정시키기 싫어서 민희한테는 여행 떠났다고 이르라 시켰고,

놀라 눈을 치켜뜬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신 거냐? 이젠 괜찮으셔?

수술이 끝나서 조금 나아지셨다. 하지만‥‥‥」

그리고는 김상철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동안 공부를 못했어. 마무리를 했어야 되는데 야단났다.

기본실력이 있으니 넌 염려 없어, 인마. 네가 떨어진다면 붙을 놈이 없다.

근대그룹의 1차 시험은 외국어와 상식이다. 거기에다 대학 4년의 성적을 참조하여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다른 기업처럼 1차에서 서류전형으로 골라내고 2차에서 시험을 치는 방식이 아닌 것은 학점이 좋다고 쓸 만한 재목이 된다는 법은 없다는 강회장의 주장 때문이었다. 덕분에 경쟁률은 30 1이 넘어서 시험장만 해도 십여 개가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병원은 어디냐? 내가 문병을 가야겠는데.

안인석이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시험이나 끝나고. 지금은 안정을 해야 돼. 걱정해 줘서 고맙다.

망할 자식, 날 친구로 생각했다면 진즉 이야기를 해주었어야지.

번번이 신세만 지기 싫었어.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공사판에 나가 수술비를 보탰지. 반달쯤 일했는데 수당까지 합쳐서 백만 원 가깝게 벌었다.

너 설마 날 비꼬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안인석이한테는 아니다.

안인석이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네 전화를 받고 유미도 이쪽으로 나오라고 했어. 걔도 네 걱정을 했다.

난 지금 병원에 가봐야 돼. 잠간 네 얼굴만 보려고 나온 참이다.

시간 다 됐어, 10분만 기다려.

너희들끼리 있어, 난 갈 테니까.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사람한테 다시 중언부언 말 늘어놓기 피곤해서 그런다.

야 인마, 걔도 네 걱정 했다니까.

고맙다고 전해라.

그러면서 몸을 돌린 김상철의 눈에 카페 입구로 들어서는 이유미의 화사한 모습이 들어왔다.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안인석이 끌고 간 곳은 근처의 경양식집이었는데 모두 저녁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술을 마셨다. 두 병째의 양주를 반쯤 비웠을 때 잔에 술을 채우는 김상철을 향해 이유미가 물었다.

상철 씨, 내가 친구 소개시켜 줄까요? 괜찮은 애가 있는데.

순간 안인석의 몸이 굳어졌지만 김상철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저 자식이 또 입을 놀렸구만. 내가 지은이하고 헤어졌다는 걸 들은 모양이군.

말하면 어때요? 그게 무슨 비밀인가요?

이유미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포개 얹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소개시켜 줄까요?

고맙지만 싫어. 여유도 없고.

그럴수록 필요한 것 아녜요? 여자가.

아니, 오히려 짐만 되는 것 같아서.

이유미가 힐끗 안인석을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경양식집이었지만 이곳저곳의 테이블은 술을 마시는 손님들로 차 있었다. 술병을 든 김상철이 이유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인석이가 또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합디까?

안인석이 눈을 치켜떴다.

, 인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우리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습디까?

, 상철아.

김상철이 당황한 표정의 안인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인마, 그것까지 얘기해 줘야 여자 소개시켜 준다는 말이 안 나을 것 아냐?

그만해 둬, 인마.

이제는 안인석도 화가 난 표정이다.

넌 피해망상이야, 신경과민이라구.

내가 그랬다면 벌써 정신병원에 갔을 것이다.

술잔을 든 김상철이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넌 유미 씨한테 내 이야기를 모두 해주도록 해.

무슨 이야긴데 그래요?

이유미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내가 실수한 것 있어요?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버지 이야기는 뭐죠?

나중에 인석이한테 들어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릴 화제도 없었고 모두 의욕도 나지 않았으므로 술좌석은 끝이 났다. 경양식집을 나와 김상철과 헤어진 안인석과 이유미는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재수 없어, 정말.

안인석의 팔을 낀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이야기는 뭐야? 말해봐, 무슨 일인지.

 

 

 

2. 시련과 도전

근대그룹의 비서실은 실장 밑에 십여 명의 남자 직원과 대여섯 명의 여직원이 있을 뿐이어서 오성그룹의 방대한 비서실 조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비서실장은 오성그룹처럼 회장단이나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적도 드물고 그룹의 경영을 조정하거나 감시하는 권한도 없다. 따라서 비서실장 이남호는 근대그룹 사원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물론 비서실의 업무도 알려져 있는 것이 드물다. 그래서 근대그룹 직원들은 비서실 업무가 강회장의 일정이나 조정하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부서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을 뿐이지 강회장의 모든 지시는 비서실에서 다듬어져 나갔고 모아져서 보고되었으므로 중역들은 비서실의 눈치를 보았다. 이남호는 회장의 분신 같은 사내로 20년이 넘게 회장을 모시고 있었는데 회장의 심기를 누구보다도 잘 읽는 사람이어서 그룹장인 회장들도 그에게 회장의 근황을 물을 때가 있다.

회장실에서 나온 이남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옆쪽의 소파에 앉아 있던 유장석이 일어섰다. 그는 이제 비서실에 만들어진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소파로 다가가 앉은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밀고 나가기로 했어, 다만 개척단은 우리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명칭으로 하고. 유상무의 공식 직함은 러시아 지사 특별자문 역이야.

특별자문역이요?

멍한 표정으로 유장석이 되묻자 이남호가 둥근 얼굴을 더 넓게 펴며 웃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놈들이 북한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할 수 없어.

러시아와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주그주르산맥 근처의 임차계약에 난데없는 방해꾼이 나타난 것은 일주일쯤 전이다. 그것은 북한당국이었는데 북한주재 러시아 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부장이 모스크바로 날아가 수상을 만나기까지 했다. 일차적인 이유는 임차 예정지역에서 200킬로쯤 아래쪽으로 북한의 벌목사업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러시아 정부는 태도를 변치 않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쪽의 한국 정부가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기업 활동이 국가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말이었으나 그것이 어떤 정책인지를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강회장은 편법을 만들어 개척단 전원을 모스크바 지사로 발령을 내고 그곳에서 시베리아로 보낼 작정인 것이었다.

정부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북한 벌목소가 무슨 문제라고, 개새끼들.

유장석이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간섭만 안 했다면 한국기업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성장했을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남호가 탁자 위에 서류를 펼쳤다.

지질, 임업, 자원, 영농 네 분야의 전문가는 모두 준비가 되었는데 축산은 아직 연락이 없나?

오늘 중으로 결정이 날 겁니다, 전무님. 제가 두 사람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어설픈 사람을 고르면 안 돼. 신체도 강해야 하고, 괜히 며칠 있다가 돌아오게 되면 낭패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 달간 조사에 숙식을 제공하고 3천만 원씩이나 지급하는데 만약 공개모집을 한다면 줄을 설 겁니다.

이젠 입조심을 해야 돼. 그 사람들을 개별 출국을 시켜서 모스크바에 집합시켜야 된단 말이야. 정부에서 알면 어떤 조처를 취할지도 모르니까.

알고 있습니다.

정말 짜증나는군.

이제는 이남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그 사람들에게 정부의 입장 따위를 말해줄 필요는 없어. 기업비밀이니까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유럽으로 장기여행을 떠난다고 말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내부에서 선발할 인원이 남았는데.

서류를 덮은 이남호가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전권을 자네에게 맡기겠어, 자네가 데려갈 사람들은 자네가 뽑아.

 

외국어는 말하기와 듣기에다 해석과 작문으로 두 시간에 걸쳐 시험을 보았고 상식은 완전 필기시험으로 한 시간이었다. 아침 9시에 시작된 시험은 오후 1시 가깝게 되어서야 끝났다. 이제 일주일 후에 1차 합격자 발표가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면접이 있다. 1차 합격자는 750명 모집 정원에 1,000명 정도가 될 것이라니 면접 심사에서 약 25%가 다시 제외되는 것이다.

시험을 끝낸 김상철이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선 것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링거를 팔에 꽃은 어머니는 잠이 든 모양인지 움직이지 않았고 침대 옆에 서 있던 민희가 머리를 들었다.

오빠, 시험 잘 봤어?

어머니를 닳아 작은 체구에 목소리도 가늘다.

그래, 그런데 어머니는 어떠셔?

계속 잠만 자,

너 점심 먹었어?

배 안 고파.

가서 먹고 와.

김상철이 점퍼 주머니에서 횐 봉투 하나를 꺼내 민희에게 내밀었다.

생활비다. 3백만 원이야.

오빠, 돈을 이렇게 많이 ‥‥‥‥」

민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인석이한테 빌렸어. 입원비가 모자랄 것 같아서.

안인석이 생활비를 대주고 있는 것을 민희는 모른다.

민희를 내보낸 김상철은 간이침대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잠든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거역하거나 말다툼조차 해본 적이 없는 어머니였다. 물론 아버지가 어머니의 속을 썩인 적도 김상철의 기억에는 거의 없다.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의 결백을 믿었고 설령 아버지가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김상철은 어머니의 앙상한 손을 쥐었다.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으므로 그는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눈을 떴다.

시험 잘 끝났니?

가늘고 약한 목소리로 물으며 어머니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잘 끝났어요, 어머니.

일주일 후가 발표라고?

그래요, 어머니.

어머니는 가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네 아버지한테 내가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안 했어요. 어머니는 일 때문에 바쁘시다고, 이모하고 같이.

그러던 김상철은 말을 멈추었다. 어머니의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귀를 적시고 있었다.

어서 나으셔서 면회를 가야지요, 어머니.

김상철이 손끝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훔쳤다.

내 불쌍한 새끼들.

천장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내 탓이다. 나는 아버지가 돈을 들고 오면 좋아하기만 했어.

어머니, 이제 그만 말해요.

상철아.

어머니가 김상철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의사가 뭐라고 했어? 낫는대?

그럼요, 어머니. 수술도 잘 끝났는데, 어머니가 기운만 차리면 낫는대요.

차릴 거야.

그러던 어머니가 지친 듯 눈을 감았다. 얼굴이 엷게 상기된 어머니는 가쁘게 숨을 쉬다가 이윽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의사는 수술은 잘 끝났지만 허약한 체질이어서 합병증이 염려된다고 말했다. 회복 가능성은 수술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로 반반이라고 했는데 그건 환자가 위험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의사들 특유의 표현인 모양이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병원에 계셔서 생활이 말이 아닌가 봐.

커피잔을 내려놓은 이유미가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강남대로변에 있는 2층 카페는 언제나 손님이 들끓었는데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빈자리를 기다리려고 카운터 앞에도 십여 명의 손님이 서 있었다.

오해하지 마, 지은 씨. 난 김상철 씨와 지은 씨 사이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다만 나는 김상철 씨를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돼. 인석 씨가 그 사람하고 둘도 없는 친구니까 말이야.

안 됐어. 어머니까지 그렇게 되셔서, 정말 견디기 힘들 거야.

한지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저 잘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유미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한지은과는 김상철과 넷이서 여러 번 어울린 적이 있었으나 이렇게 둘이 만난 것은 처음이다. 이유미가 불러내자 그녀는 순순히 나왔으나 경계하는 빛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조금 풀려 있었다.

하긴 나도 며칠 전에야 알았으니까, 김상철 씨 집안에 대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면서 이유미가 말했다.

인석 씨도 철저히 입을 다물고 있었단 말이야, 난 배신당한 기분이었어.

난 말도 못 해. 아버지가 우연히 그 일을 알게 되시고 나선 집안이 뒤집혔어.

전에 집으로 인사 왔을 때, 상철 씨는 아버지가 시골에 계신다고 했어, 공무원이셨는데 쉬고 계신다고.

그래서 어머니가 무슨 공무원이셨냐고 물으니까 세무공무원이라면서 웃었어. 난 그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해.

우리 부모님은 상철 씨를 좋아하셨어.

교도소에 계신다고 말했으면 나아졌을까? 지금보다?

한지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을 거야. 우리 부모님도 막힌 분들은 아냐.

r‥‥‥‥」

비뚤어졌지.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난 이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이제 알았어.

담배 연기를 내뿜은 이유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둘이 헤어진 이유를 말야.

아버지가 생활에 보태 쓰라고 준 돈도 거절했어. 비뚤어져서 우리 호의까지 무시한 거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그랬겠지.

그러자 한지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존심은 무슨‥‥‥ 아버지는 걱정하고 계셔.

뭘 말이야?

혹시나 하고.

상철 씨가 어떻게 나올까 봐?

그 사람은‥‥ 어떨 때는 무서워.

이유미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나도 그 사람이 싫었어. 분위기가 어둡고, 짐승처럼 사납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아냐.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

나하고는 입장이 다를 테니까, 아무도 내 입장이 되어서 생각할 수 없어.

솔직히 오늘 내가 지은 씨를 만난 것은 인석 씨가 부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그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상의할 사람이 있어서.

무슨 문제라니?

나 요즘 남자 생겼어. 친척 소개로.

잘됐네. 그런데 무슨 문제야?

귀찮게 될까 봐.

그러자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꿈에서 깨어났다면서 아직도 꿈같은 소릴 하네. 그럴 일 없어. 왜냐하면 상철 씨는 지은 씨를 진정 사랑하지는 않았으니까.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 사람에 대해서 숱하게 들어왔으니까. 인석 씨한테서.

그러니 걱정 마.

이유미가 자은 표정으로 일어났으나 한지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때? 가겠나?

유장석이 부드럽게 말했으나 앞에 앉은 이윤환 대리는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유장석이 아끼는 부하로 지금 충주의 공사 현장에서 자재 업무를 맡고 있다가 불려 올라온 것이었다. 이윽고 떡 벌어진 어깨를 펴며 이윤환이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소장님, 그럼 저희들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시베리아로 가서 그곳에 계속 근무하게 되는 겁니까?.

기반이 잡힐 때까지다.

유장석이 잘라 말했다.

성격이 사내다워서 거친 일꾼들도 그의 말은 고분고분 따랐고 업무처리 능력도 뛰어난 이윤환인지라 이번 일에 꼭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시베리아는 다른 곳과 다르다. 완전 미개척지야. 그곳을 우리가 개발하는 것이지.

유장석이 이윤환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갈 테냐 안 갈 테냐? 대답을 해.

이제 다그치듯 유장석이 묻자 이윤환이 몸을 굳혔다.

소장님, 저는 한국을 떠날 형편이 못 됩니다. 처가 임신 중이고.

유장석이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윤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한국 어느 곳이라도 소장님을 따라가겠습니다만, 외국은.

알았다.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손을 저었다.

나가 봐.

소장님, 죄송합니다.

이윤환이 나가자 이대각 부장이 방으로 들어섰다. 작달막한 몸매에 머리가 커서 이대가리라고도 불리는 사내였는데 유장석의 심복으로 이번 개척단의 부사령관이다. 물론 부사령관이란 직함은 제 스스로 지어서 저만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간답니까?

앞에 앉으며 그가 대뜸 물었다.

눈치를 보니까 된 것 같던데, 어때요?

마누라가 임신 중이고 어쩌고 해서 못 간다는데, 외국은.

개새끼 같은 새끼.

이대각이 눈을 치켜떴다.

저 개새끼, 자재 맡으면서 상납받을 것이 밀린 모양이오. 자릅시다, 상무님.

건설에서 잔뼈가 굵은 이대각이라 말투가 험하다. 유장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정보만 새겠어. 안 간다는 놈들을 모두 자를 수는 없고 말이야. 병신 같은 놈들 같으니.

외국은 못 간다니 저놈은 소록도의 도로공사 현장으로 보내지요. 소록도 소장에게 철저하게 다루라고 해놓고 말입니다.

앞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이대각이 탁자 위에 서류를 펼쳤다.

자재만 빼놓고는 책임자급 사원은 결정되었습니다. 이건 보조사원 후보자들의 인적 사항입니다.

개척단의 인원은 외부에서 초빙한 전문가 8명과 그들의 장비를 수송하고 개척단 업무를 진행할 근대그룹 사원 20명으로 구성될 계획이었다. 유장석은 대부분의 인원을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근대건설 내부에서 선발하고 있었다.

후보자 명단을 바라보던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이 일은 그룹 내에서도 비밀이야. 회장님과 비서실장, 그리고 중공업 회장 등 몇 명만이 알고 있는 일이야, 비밀을 지켜야 돼.

염려 마십시오. 모두 믿을 만한 놈들이라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물으면 모스크바 지사에 파견 나간다고만 하라고 했습니다.

어제 이 실장이 그러는데 총리실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야. 남북관계에 지장이 있는 행동은 기업 측에서 삼가해 달라고.

웃기는 일입니다, 상무님.

내일부터 연수원의 사무실에 모여서 준비를 하도록. 장비도 먼저 보내야 할 테니까, 보안도 유지할 겸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대각이 활기 있게 일어섰다.

서로 얼굴을 익히고 팀워크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모르는 사이거든요.

 

유장석은 이미 개척단의 조직을 끝내 놓았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전문가와 근대그룹 직원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인원이 될 겁니다.

최선호가 말을 이었다.

근대그룹 내부에서도 극비업무로 진행시키고 있어서 시베리아 프로젝트를 알고 있는 임원도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실장님.

그럴 수밖에. 정부에서 프로젝트를 보류하라고 공문까지 보낸 상황이야. 강 회장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있지만 큰코다치게 될걸.

오성의 비서실장 조영규는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로 시선을 내렸다.

그나저나 엄청난 규모로군. 이만한 땅이면 나라를 세우고도 남겠다.

시베리아 지역의 지도였는데 근대그룹의 임차 예정지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북한이 기를 쓰고 반대를 할 만하군, 그래.

북한의 벌목사업소가 아래쪽에 있다고 합니다. 신경이 쓰이겠지요.

그자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러시아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걸. 국토개발을 하는데 누가 간섭을 할 수 있어?

지도에서 머리를 든 조영규가 최선호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엔 아마 머지않아 강회장이 러시아 정부를 움직여서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을 거야. 그러면 결과는 뻔하겠지.

솔직히 정부로서도 반대할 명분이 약합니다. 북한이 항의한다고 해서 기업 활동을 막는다면 여론이 들끓을 것이고, 또 시베리아 개발도 정부 돈을 빌려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자기 자본에다 차관을 얻을걸.

이게 우리 그룹과는 다른 강회장의 근대그룹 스타일 아닙니까? 아마 강 회장은 그곳에 나라를 세울지도 모릅니다.

웃음 띤 얼굴로 최선호가 조영규를 바라보았다.

사사건건 정부와 다투는 것에 싫증이 났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

알아내야 돼. 그곳이 어떤 자원을 갖고 있는가를 말이야.

조영규가 손으로 붉은 선 안을 짚었다.

그리고 강회장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실장님, 그렇다면‥‥‥」

이건 회장님의 지시야, 최 전무.

우리 그룹의 기풍이 이런 개척사업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네가 말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야. 우린 가능성이 보이는 일에는 전력투구해왔어, 이 일도 예외가 아니야.

실장님, 그렇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근대의 시베리아 프로젝트를 추적해. 모든 것을 자네가 책임지고 말이야.

 

김상철과 안인석이 1차 시험에 나란히 합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대학성적은 최상위권이었고 외국어에도 뛰어나 있어서 주위 사람들은 합격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있은 지 사흘 후의 아침, 김상철은 근대그룹 빌딩 안의 면접 장소로 들어섰다. 21조로 면접을 치르는 관계로 그는 낯모르는 사내와 동행이었다. 시험관은 5명으로 나란히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중역급들로 이곳에서 최종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니만치 지원자들은 긴장이 된다.

거기 390, 근대그룹에 지원한 동기를 말해봐요.

시험관 한 명이 대뜸 김상철을 향해 말했다. 금테 안경을 낀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 기업의 분위기가 다른 기업들보다 진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짧게 대답을 마치자 질문이 옆의 지원자에게로 넘어갔다. 주고받는 대화가 서너 차례 반복된 다음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대머리의 사내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부친이 전직 공무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슨 공무원이었습니까?

세무공무원이었습니다.

퇴직하셨군.

「……」

지금은 무얼 하고 계시지요?

대전 교도소에 계십니다.

시험관들은 물론 옆에 앉은 지원자까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대머리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가들 보세요.

지원자들이 방을 나가자 대머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어쩐지 이름이 낯이 익더라니, 김영환이면 작년에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세금 도둑이야.

자식 하나는 잘 두었군요. 성적이 좋습니다.

옆에 앉은 사내가 기록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합격입니다. 나무랄 데 없습니다.

그러자 대머리가 머리를 저었다.

아무래도 찜찜해, 작년에 저 친구 아버지와 관련되어서 우리 그룹 계열공장 세 곳이 세무조사를 받았어.

우리 그룹과는 상관없는 일로 끝났는데 김영환의 아들이 입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봐, 세금 일과 관련이 있어서 그 보상으로 입사시켰다고 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렇군요. 탈락시키는 게 낫겠습니다.

반대쪽에 있는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잠깐만,

그때 끝 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던 사내였으므로 모두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오? 유 상무.

대머리가 묻자 유장석이 김상철의 서류를 빼내 옆쪽에 놓았다.

저놈은 제가 쓰지요,

대머리는 근대전자의 사장 이형근으로 오늘의 면접 담당 중역의 대표이자 근대그룹의 사장단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었다. 한동안 유장석을 바라보던 이형근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유상무가 알아서 하시오.

고맙습니다, 사장님.

하지만 회장께 보고는 드려야겠소.

그렇게 하십시오, 사장님.

누군가 벨을 눌러서 다음 순서의 지원자 두 명이 들어섰으나 방 안의 중역들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김상철이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다음 날 밤이었다.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던 어머니는 가쁜 숨을 멈추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유달리 눈물이 많았던 어머니였는데 숨을 멈추는 순간에도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면서 김상철은 어머니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만 애써 생각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떠나 이제 빈 육신만이 남은 것이다. 몸부림을 치며 우는 민희를 안고 김상철은 밤을 새웠다.

병원의 영안실에 빈소를 차려 놓고 이틀째 되던 날 밤이었다. 중년 사내 한 명이 빈소로 올라와 영정에 절을 마치고 김상철과 맞절을 했다.

기운을 내게나, 김 군.

그의 목소리는 굵었으나 부드러웠다.

자넨 할 일이 많다네, 앞으로.

고맙습니다.

사내의 날카로운 눈매와 각진 턱을 바라보며 김상철이 인사를 했다.

난 근대건설의 유상무야. 자네를 면접했었는데 기억이 나나?

사내의 말에 김상철이 허리를 폈다.

아아,

소식을 듣고 내가 직접 왔다네. 왜냐하면 자넨 내가 데리고 있을 사람이니까.

유장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늦은 밤이어서 화투에 열중해 있는 대여섯 명의 조문객이 떠들고 있을 뿐 빈소 앞쪽은 썰렁했다. 민희는 이모에게 끌려 쉬러 갔으므로 내일 아침에 돌아올 것이다.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닷새 후에 신입사원 소집이 있어. 모두 안양 연수원에 모일 테니 그때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 알겠습니다.

이겨내야 돼, 이를 악물고 뚫고 나가야 된단 말이야. 세상 사람들에게 한번 보여 주게. 내가 기회를 줄 테니까.

김상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유장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빈소를 나가자 김상철의 옆으로 안인석이 다가왔다.

누구야? 아버지 친구 되시냐?

아니, 그저…」

, 밥 안 먹으려면 술이라도 한잔할래?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아래쪽의 술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래, 한번 보여 주겠어.

소주잔을 쥔 김상철이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남보다 몇 배 힘들겠지만 김영환의 아들 김상철이 이겨내는 것을 보여주겠단 말이다.

그래라, 이 녀석아.

수염을 깎지 못해 덥수룩한 얼굴의 안인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래, 어서 술이라도 처먹고 이겨내라, 인마.

장례식을 마친 이틀 후, 김상철은 교도소의 면회실에서 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말끔하게 면도를 한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상철을 바라보는 시선이 흔들렸고 꼭 다문 입술이 가끔씩 풀려졌다. 한 달만의 면회였고 어머니가 면회를 안 온 지는 두 달이 넘은 것이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내일부터 근대그룹의 사원이 되었어요. 입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잘 됐구나.

아버지의 굳은 얼굴이 풀어졌다.

솔직히 걱정이 되었었다. 네가 근대그룹에 지원을 한다고 해서.

근대그룹 계열사와 세금 문제가 있었어. 그 사람들도 작년에 고생 좀 했었지.

잘 되었다. 실력이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지. 축하한다, 상철아.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눈을 부릅뜬 김상철이 말하자 아버지가 멍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급성 자궁암이었어요. 수술을 했지만 결국 그제 장례를 치렀습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입을 열었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프다는 말씀도 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거짓말을 못 하겠습니다.

김상철이 소리치듯 말했다.

저는 견디어 낼 겁니다, 아버지. 아버지도 견디어 내셔야 해요.

민희를 생각해서라도‥‥‥ 아버지, 저는 그 애가 걱정입니다.

민희를 잘 부탁한다, 상철아.

희미했으나 김상철은 아버지의 입놀림을 보며 겨우 알아들었다.

네가 내 대신 민희를 잘 돌봐다오.

그건 염려마세요, 아버지.

김상철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유리벽에 바짝 얼굴을 댔다.

이제 어머니 대신 민희가 면회를 올 겁니다, 아버지. 걔도 아버지를 만날 희망으로 살아갈 겁니다.

「‥‥‥ 」

아버지, 기운을 내세요.

그 순간 김상철은 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다. 두 줄기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닦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면회를 다녀온 날 밤, 김상철은 집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민희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셨다. 이렇게 남매간에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민회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말씀드렸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게 되실 것, 면회 갈 때마다 서로 속이고 속아주는 척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아버지가 불쌍해.

민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는 네 걱정을 하셨어. 나에게 너를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내 걱정은 말아, 오빠.

핼쑥해진 얼굴을 든 민희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걱정 안 시킬 테니까.

올해에는 복학해. 내가 취직을 했으니 네 학비는 문제 될 것 없다.

「……」

내 말 알아들었어?

김상철이 민회의 어깨를 잡아 몸을 그에게로 돌려 앉혔다.

아버지에게 기운을 내시라고 하면서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왜냐하면 혹시나 아버지가 생을 포기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래서 민회가 아버지를 만날 희망으로 살 것이라고 했지. 아버지에게 의무감을 심어 주어야만 했단 말이다.

「……」

이젠 너에게 말해야 되겠다. 네가 기운을 잃고 어떻게 되면 아버지는 살 희망을 잃으실 거다, 무슨 말인지 알아?

살아야 돼, 민희야. 이를 악물고.

김상철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삼키고는 내려놓았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참고 기다려봐.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너무 힘들어.

민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 네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도.

빈 잔을 든 김상철이 앞쪽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주인은 어디론가 나가 있어서 포장마차엔 그들 둘뿐이었다.

난 돈과 권력을 쥘 것이다. 두고 봐라, 민희야.

잔에 술을 채우며 김상철이 말했다.

아버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저렇게 되신 거야. 권력과 금력을 쥐고 아버지를 조롱했던 자들은 모두 빠져나와 있단 말이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의 전철은 밟지 않는다.

술을 삼킨 그가 핏발 선 눈으로 민희를 바라보았다.

난 꼭 빚을 갚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을 쥘 테다, 그것이 지금 내가 사는 목적이야.

오빠.

걱정스러운 듯이 민희가 부르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는 요즈음 내 진면목을 보게 되었어. 난 좌절하지 않아. 누르면 누를수록 오기가 솟아오르는 내 자신을 보게 돼. 난 이뤄낼 자신이 있어.

김상철은 팔을 들어 민희의 어깨를 안았다.

너만 기운을 내면 돼. 내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은 제발 네 힘으로 견디어 내.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견디어 낼게.

민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오빠를 위해서라도.

 

신입사원의 연수원 입소식이 거행되는 안양 연수원의 대 회의장

아직 식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회의장을 가득 메운 신입사원들은 제각기 잡담을 나누며 느슨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단상에는 수십 개의 의자가 이쪽을 향해 나란히 놓여졌는데 아마도 중역들의 자리일 것이다. 오늘은 강우진 회장도 참석하여 격려를 해줄 예정이었으므로 연수원 관계자들이 연단 위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대회의장의 분위기는 밝다. 30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한 정예들이어서 모두 자랑과 긍지에 찬 표정들이었다.

회의장 왼쪽의 지정석에 앉아 있던 김상철은 옆쪽의 통로를 걸어오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사원들은 번호순으로 앉아 있었는데 김상철의 연수번호는 125번이다. 사원들의 가슴에 번호표를 훑으며 올라오던 사내의 시선이 김상철의 가슴에서 멈추었다.

30대 초반쯤의 나이로 보이는 검은 피부의 사내였다.

125번 잠깐만.

다가온 사내가 말하자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통로로 나가자 사내가 바짝 다가섰다.

날 따라와.

식이 시작될 텐데요.

상관없어, 그까짓.

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상무가 기다리고 계셔, 어서.

사내를 따라 김상철이 들어선 곳은 연수원 3층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안쪽의 소파에 앉아 있던 유장석이 그를 보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김상철은 유장석에게로 다가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사무실은 백 평도 넘어 보이게 컸지만 책상이 한쪽에만 배열되어 있을 뿐이었고 직원도 대여섯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긴 임시로 쓰고 있어, 우리가.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우린 보름 후에는 시베리아로 떠나니까 말이야. 회장님의 특명을 받고 임차 예정지를 조사하러 가네.

그는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 위를 손으로 짚었다. 붉은 선이 그어진 부분이었다.

이곳이야, 길도 없고 숙박시설은 물론 마을도 없는 광활한 동토. 산적들의 은신처이고 짐승이 들끓는 이곳의 자원을 조사하러 가는 거라네.

「‥‥‥」

지질과 임업, 기상 등 자원을 조사할 전문가 여덟 명이 우리 인원 스무 명과 동행이야. 우리 임무는 그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것이지. 어렵고 힘든 임무야. 그래서 못 간다고 내 제의를 거절하는 직원들도 있었어,

유장석이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입사원 면접 때 자네를 보고 내 개척단에 합류시키기로 결정을 했어 자네는 운동으로 단련되었고 지지 않으려는 패기가 내 눈에 보였네, 어때, 나와 함께 그곳에 가겠는가? 기간은 반년이 될지 일 년이 될지 기약이 없어.

가겠습니다.

김상철이 말하자 유장석이 빙그레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신입사원은 세 명을 뽑았지만 최종 단계에서 나머지 두 명은 보류시켰어. 자네 한 명만 남은 거야.

자넨 경영학과 출신으로 전자나 상사를 지망했더구만. 그쪽이 비전이 있는 사업이기는 하지. 하지만 직장인에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인맥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 이해가 갑니다.

우선 나에게 자네의 능력을 인정받도록 하게, 알겠나?

, 알겠습니다.

옆쪽으로 머리가 큰 사내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김상철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김상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체격이 좋습니다, 상무님,

간다고 했어, 이 부장.

그렇게 말한 유장석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인사해라. 이쪽은 이대각 부장으로 개척단의 실무 책임자다.

어느 사이에 반말이 되었으나 김상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김상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부장님.

 

박동원은 상반신이 크고 손이 길이서 별명이 원숭이였는데 앉아 있을 때는 표가 나지 않는다. 또한 앉은키가 커보였으므로 어딜 가나 우선 앉고 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대구의 공사 현장에서 불려 나와 개척단에 합류한 그는 오늘 수원의 찻집에 앉아 있었다. 오후 310분 전이다. 그가 허리를 펴고 다시 찻집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을 때 훤칠한 키의 40대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동원은 다가오는 이윤제 박사를 바라보았다. 혈색이 좋은 얼굴에 금테 안경을 끼고 있는 그는 경도대학의 지질학 교수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할 전문가 중의 하나였다.

기다리셨소?

앞자리에 앉는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단정히 빗은 머리에서는 윤기가 났다.

출발이 열흘 후라면 이제 서둘러야겠는데.

이윤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적어드린 장비는 준비가 되었습니까?

. 박사님은 몸만 가시면 됩니다. 그런데‥‥‥」

박동원이 이윤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박사님 조수는 같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곧 올 거요.

시계를 내려다본 이윤제가 입구 쪽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출발은 각자 하시게 됩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시면 우리 지사원이 마중 나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혹시 정부 쪽에서 어떤 제재를 해오지 않을까? 우리가 시베리아에 다녀온 걸 알면 말이오.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룹에서 책임을 집니다.

이윤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글쎄, 하도 비밀을 지키라고 해서 점점 불안해진단 말이오. 더구나 정부가 근대그룹의 시베리아 개발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고.

그때 찻집 안으로 20대 여자 한 명이 들어섰다. 모직 코트 차림으로 큰 키에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이쪽으로 시선을 준 그녀는 곧장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교수님, 빨리 오셨네요.

, 어서 와.

이윤제가 손을 들어 박동원을 가리켰다.

여긴 근대그룹의 박동원 대리시고 이쪽은 우리 학과 조교로 있는 서은영 씨.

서은영이 머리를 숙여 보이고 자리에 앉자 박동원이 눈을 크게 뜨고는 이윤제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박사님,

, 여자라서 놀랐소?

이윤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서은영 씨는 남자보다 나아. 나는 조수로 서은영 씨를 데려갈 작정이오.

시베리아의 미개척지라고 말해주셨습니까?

물론이오.

숙박할 곳도, 민가도 없는 곳에서 남자들끼리 지내야 합니다.

무장 강도와 짐승이 들끓는 곳이라고도 말해주었소.

그러자 서은영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작년에는 중국 오지도 들어갔었으니까요.

거긴 중국과도 다릅니다.

어쨌든 댁들이 들어가시는 곳 아녜요?

그러자 이윤제가 정색을 했다.

난 서은영 씨와 3년을 같이 일했소. 박대리, 다른 사람과는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갈 사람도 없고.

「‥‥‥‥」

, 출국 전에 준비할 사항이나 다시 검토해 봅시다. 시간이 촉박하단 말이오.

 

1230일 저녁 무렵, 서초동의 카페에 김상철이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 있던 안인석이 손을 저었다 그는 이유미와 함께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리에 앉자 안인석이 대뜸 물었는데 연수원의 입소식장에서 한번 얼굴을 보고는 20일 가깝게 서로 연락 한번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안인석은 연수원에서 일주일간의 교육과 일주일간의 계열 그룹 견학, 그리고나서 닷새 동안의 적성검사를 거친 후에 어제 근대전자의 영업부로 발령을 받았다. 이제 근대전자의 사원이 된 것이다.

어떻게 되긴, 나도 교육을 받았지. 이것 봐라.

김상철이 스웨터의 소매를 걷어 올려 보였다.

체력단련 교육이었어. 로프에 쓸려서 생긴 상처다.

아니, 이게,

안인석의 두 눈이 둥그레졌다.

체력단련을 하다니, 나는 도무지‥‥」

군대에서 교관 노릇 한 것이 도움이 되었지. 여기서도 교관이 되었으니까.

누구를 가르쳤는데요?

이유미가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신입사원들이었어요?

아니, 과장도 있었고 대리도 있었지요. 모두 러시아로 파견 나갈 사람들이었는데 나도 그중의 하나요.

네가 러시아로?

놀란 안인석이 바짝 다가앉았다.

네가 왜? 너 같은 신입이 뭘 한다고?

신입이지만 체력이 좋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놈이거든, 나는.

난 이 일에 파견되기 위해서 합격된 것 같다. 면접 때 분위기가 이상해서 떨어진 줄 알았거든.

그들을 둘러보며 김상철이 웃었다.

아버지와 근대그룹 계열사와의 세금 문제가 있었어. 계열사들은 세금을 탕감받았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지. 아버지만 교도소에 갔고.

「‥‥」

그런데 날 입사시켰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버지와의 관계를 오해할 소지가 있었어, 그래서 난 거의 단념했었는데.

러시아에 무엇 하러 가는 거야?

안인석이 다그치듯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말할 수 없어. 다만 조금 위험하다는 것밖에.

그는 호주머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안인석 앞에 내려놓았다.

회사에서 생명보험을 들어주었어, 직장인 보험도 함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회사에서 보상금을 내주기로 계약도 되어 있다. 수취인은 민희 앞으로 했어.

네가 갖고 있다가 처리해 줘.

언제 떠나는데요?

이유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언제 귀국할 예정이에요?

출발은 내일 오후, 귀국은 미정이오.

어제 아버지께 말씀도 드렸고 민희는 이모 집으로 옮기게 했어, 갠 매달 내 월급을 수령하게 될 거야. 이 서류를 써먹기 전까지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손으로 두드리며 김상철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오늘 밤엔 술 마실 시간이 있어.

심란할 때는 시끄러운 곳이 낫다면서 안인석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논현로에 있는 나이트클럽이었다. 그의 말대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울리는 음악과 어지러운 조명이 얼을 빼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청각이 무디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안인석이 폭주를 했으므로 양주 두 병을 금방 비우고 세 병째가 놓여졌는데 그들은 플로어에도 나가지 않았다.

홀 안에 명멸하는 불빛을 무심히 바라보던 김상철이 머리를 돌리자 이쪽을 향한 이유미의 시선과 마주쳤다. 곧 시선을 비킨 김상철이 술잔을 들었고 이유미는 안인석에게 무언가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술잔을 비운 김상철이 빈 잔에 술을 채우고 있을 때였다. 이유미가 상체를 그에게로 굽히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한지은이를 만났어요. 얼마 전에.

걱정을 하고 있더군요. 혹시나 앞날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하고.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김상철 씨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었다고.

그러자 김상철이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이유미의 얼굴에 형형색색의 불빛이 스쳐지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굴 사랑한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할 남자가 아냐.

이유미가 말하자 이제 김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에게 관심이 많군, 유미 씨는.

당연하지. 언제나 당신 이야기를 듣고 지내왔는데.

그러자 김상철이 플로어를 바라보고 있는 안인석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놈을 아껴줘야 돼.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이 있다면 저놈과의 우정이니까.

나는 뭐야?

이유미가 바짝 상체를 굽히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곁가지야?

그러자 안인석이 이쪽으로 머리를 돌리고는 소리쳤다.

, 나가자. 가만히 있었더니 술이 올라서 안 되겠다.

테이블에서 일어난 그들은 플로어의 인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발 디딜 틈도 없게 들어차 있는 남녀들이 광란에 빠진 듯 뒤틀며 소리치고 있었다. 음악이 폭발음처럼 들렸고 조명의 빛발은 쏟아지는 포탄 같아서 플로어의 무리들은 마치 단말마의 순간을 맞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무리 속에 끼어 있던 김상철은 곧 몸을 뺐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그는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3. 대륙으로

러시아 호텔은 크렘린궁에서 동쪽으로 모스크바강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진 거대한 건물이다. 어젯밤에 도착한 이윤제 박사가 시차 때문에 뒤치락거리다가 늦게 잠이 든 바람에 깨어난 것은 모스크바시간으로 아침 940. 놀란 그가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는 로비에 내려오자 서은영이 밝은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잘 주무셨어요?

못 잤어. 시차 때문에.

이윤제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시가 다 됐는데 이자들이 왜 나타나지 않는 거야?

그동안 커피나 드세요.

로비 라운지에 앉은 그들은 커피를 시켜 마셨다. 학술회의장으로 자주 쓰이는 호텔이어서 외국인 손님들이 그들 주위에 앉아 있었는데 영어와 독어, 불어가 이쪽저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곳 어디엔가 있을 텐데.

이윤제가 라운지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합류시킬 모양인가?

바로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명의 사내를 발견한 이윤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기 오는군, 박 대리께서.

박동원 대리는 장신의 사내와 동행이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젯밤 공항에서는 다른 근대그룹 지사원이 마중을 나와 호텔에 안내해주고 돌아갔던 것이다.

잘 쉬셨습니까?

다가온 박동원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의 옆에 선 사람은 김상철이었다. 박동원이 김상철을 소개하고는 그들과 마주 앉았다.

러시아 정부에서 오늘 중으로 조사허가서를 발급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오전 중에 하바로프스크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허가서를 하바로프스크에서 내줄 수는 없었나요?

이윤제가 묻자 박동원이 머리를 저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스크바까지 올 필요가 없었지요, 박사님.

다른 조사단원들은 어디 있습니까? 임업이나 기상학자들.

다른 호텔에 계십니다. 내일이면 모두 만나게 되실 겁니다.

박동원이 김상철의 어깨를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저녁 일곱 시에 연락을 드릴 테니까 그동안 시내 구경이나 하시지요. 그럼 저희들은 이만.

로비를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윤제가 서은영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시내 구경은 무슨, 영하 20도 가까운 날씨에 뭘 구경한다고,

시베리아는 영하 40도라고 했어요. 미리 단련해 두셔야죠,

웃음 띤 얼굴로 그녀가 말했지만 이윤제는 머리를 저었다.

방한 장비를 입고 있겠지, 그때는. 지금처럼 코트에 멋을 낸 차림으로는 안 돼.

이윤제가 손을 뻗어 서은영의 손을 쥐었다.

일곱 시까지 시간이 있다니, 내 방에서 보드카나 한잔하는 게 어때? 방은 따뜻하더구만.

낮에는 싫어요.

술 말인가?

아니, 교수님이 바라시는 다른 것.

이윤제가 쓴웃음을 지었으나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러시아 호텔을 나온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모스크바 지사의 승용차로 운전사는 현지인이다.

이윤제는 제 정부를 데려왔어.

박동원이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조교가 아닙니까?

아니, 조교는 맞아. 하지만 둘이는 그렇고 그런 사이야.

박동원이 잇몸을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시베리아에서 밀월을 즐기려는 생각을 하고 왔다면 매운맛을 보게 될 거야. 저 지질학자 놈은.

승용차는 제르진스키 광장을 지나 옛 KGB 건물을 좌측으로 바라보며 달려 나갔다. 김상철은 박동원과 한 조였는데 맡은 일은 연락과 감시역이다. 서울에서부터 박동원과 호흡을 맞추며 함께 행동했는데 그는 눈치가 빠르고 성격도 급한데다가 몸이 날랜 사내였다. 대부분의 개척단 요원이 그런 것처럼 박동원도 유장석 상무가 총애하는 심복 중의 한사람이었다.

저것들이 속을 썩이지 말아야 할 텐데.

박동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가리한테서 들었는데 현지 사정이 더러워. 하바로프스크에서 자동차로 2주일가량 북쪽으로 올라가야 되는데 무인 지대라 러시아군 탈주병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거야. 지사 요뭔 세 명이 현지인 세 명의 안내를 받고 조사차 들어갔다가 차 한 대를 잃고 도중에서 돌아왔어. 놈들의 총격을 받아서 죽을 뻔했다는군.

이부장님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러시아군이 우리와 동행할 것이라고 하시던 데요.

글쎄, 그거야 그렇지만.

박동원이 입맛을 다셨다. 근대건설에 입사한 지 6년으로 동남아의 오지와 중동의 사막지대 공사장을 거친 그였지만 이러한 조건의 땅은 처음인 것이다. 그들이 모스크바의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 강우진 회장은 본사의 회장실에 앉아 이남호 실장의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이부장이 1진을 데리고 어제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해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유상무는 조사단의 허가증을 받는 대로 내일 하바로프스크로 출발할 것입니다, 회장님.

그쪽 군부대의 지원은 어때? 경호부대를 딸려 주겠다고 체르넨코가 말했는데.

. 이부장의 보고로는 하바로프스크 주둔군에서 1개 중대 병력을 경호 병력으로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뭐야?

부대 사령관이 차량의 기름 비용과 주 부식비, 거기에다 병사들의 수당까지 합쳐 미화로 5만 달러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썩어빠진 놈들.

강회장이 혀를 찼다.

그 돈은 모두 사령관 놈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릴 거야. 개척단을 따라가는 병사들한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아.

. 아무래도‥‥‥‥」

사령관 놈의 아가리에 5만 달러를 처넣어주라고 하고 따로 5만 달러를 준비해 가도록 해. 틀림없이 따라가는 군인들이 손을 벌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총리실에서 연락 온 것 없나?

. 지난번에 보신 공문 이후로는 연락이 없습니다.

강 회장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러시아 대사를 외무장관과 만나게 한 것이 약효가 있는 모양이군.

. 하지만‥‥ 회장님.

이남호가 테이블 앞으로 반걸음쯤 다가섰다.

저는 청와대가 잠자코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만.

청와대가 나설 일이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선 강회장이 뒷짐을 지고 창가로 다가섰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흐린 1월의 오후였다.

러시아 정부가 적극 추진하려는 자동차 산업과 시베리아 개발을 청와대가 나서서 막는다면 당장에 한러 관계가 악화될 거야. 아마 총리실이나 외무부와 연락하면서 화를 삭이고 있을 거야.

「‥‥‥」

도대체 북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아직도 그 쓰잘데없는 정상회담에 미련이 있나?

북한의 반대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남호의 말에 강회장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늘어져 있던 눈시울이 조금 치켜 올라가 있었다. 재촉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끌려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경쟁사의 방해 공작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회장님.

오성그룹의 비서실 최선호 전무가 사흘 전에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들어갔답니다. 러시아 대사관의 플레노프가 오전에 알려주었습니다.

부대사 말인가?

. 회장님.

쥐새끼 같은 놈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은 강회장이 이남호를 쏘아보았다.

방해할 이유가 있나? 하긴 이렇게 묻는 내가 어리석지만.

충분합니다, 회장님.

이남호가 그의 시선을 받았다

임차된 땅에서 석유가 나온다든가, 또는 철이나 구리, 중금속이 생산된다면 우리 근대그룹은 원료를 생산하는 유일한 그룹이 됩니다. 그것이 2차나 3차 산업으로 연결되면 오성그룹은 이제 우리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말이지,

그자들은 만일의 경우에 생길 일에 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회장님.

그러자 강회장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놈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 보안에 신경을 쓰도록 러시아에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남호가 방을 나가자 강 회장은 머리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눈발이 아까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크렘린은 원래 성벽을 뜻하는 러시아어로 미국의 백악관이 그렇듯 아직도 러시아 최고 권력의 대명사이다. 러시아 호텔에서 붉은 광장을 건너면 바로 크렘린궁의 입구인 트로이츠카야 탑이었으므로 서은영은 크렘린궁에서 오후를 보냈다. 그녀가 러시아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4시경으로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파카에 두 손을 찌르고 호텔의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위쪽에서 내려오는 동양인을 보았다. 단정한 코트 차림에 머리에는 러시아인들처럼 검정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분이시죠?

걸음을 멈춘 그가 웃으며 물었으므로 서은영도 멈춰 섰다.

, 그래요. 한국 분이신가요?

한국을 확인하는 이유는 북한인을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북한 사람은 한국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서울에서 왔습니다.

여행 오신 거예요?

아니, 업무 관계로.

사내가 몸을 돌리더니 호텔 쪽으로 발을 옮겼으므로 서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신우그룹의 김 부장이라고 합니다. 모스크바 지사에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30대 후반쯤의 나이로 웃는 모습이 귀여운 사내였다.

그런데요?

아직도 서은영의 경계심은 늦춰지지 않았다. 호텔의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서은영이 발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만 실례하겠어요.

잠깐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쪽에서 10분이면 되겠는데요.

사내가 턱으로 로비 옆쪽의 라운지를 가리켰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저는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여기서 하세요.

서은영이 움직이지 않자 사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곧 시베리아로 떠나시죠? 근대그룹의 일을 하시려고 말입니다.

놀란 서은영이 눈을 치켜뜨자 사내가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 지사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하고 거래를 맺고 정보를 주십시오. 그 대가로 2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서울 구좌를 말씀해 주시면 내일 당장 송금해 드리지요. 정보는 시베리아에서 돌아오시고 나서 주시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서은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비에 가득 찬 사람들 중에서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근대그룹에 신의를 지키실 이유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그쪽으로부터도 돈으로 고용되셨을 텐데요. 그리고 이것은 국가기밀도 아닙니다. 기업 간의 정보전일 뿐이지요.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그쪽 땅에 대한 정보만 필요할 뿐입니다. 서은영 씨 전공인 지질 문제 외에도 기상이나 자원 문제를 함께 조사하실 테니까 상당히 입체적인 정보가 되겠지요. 그것을 정리해서 넘겨주십시오. 그들은 서은영 씨가 정보를 누출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도 없을 겁니다. 만에 하나 노출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국 정부가 반대하고 있거든요.

 

로비 기둥에 기대선 김상철은 서은영이 사내와 헤어져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자 피우고 있던 담배를 옆에 놓인 재떨이에 넣고는 가방을 들었다. 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갔을 때 이미 서은영은 보이지 않았다. 곧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탄 그는 6층에서 내려 618호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서은영이 안에서 영어로 묻는 소리가 났다.

김상철입니다.

그가 한국어로 말하자 곧 문이 열렸다.

웬일이세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조금 전의 모습 그대로인 서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 드리려고.

김상철이 손에 쥔 커다란 비닐 가방을 들어 보였다.

방한복입니다.

들어오세요.

가방만 받아들고 문을 닫기가 미안했는지 문을 열고 비켜섰다.

이 교수님한테는 조금 전에 드렸습니다.

가방을 건네준 김상철이 창가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창밖으로 붉은 광장과 크렘린궁이 바로 보였다.

내일 출발하실 때에 그 옷을 입고 가셔야 합니다. 신발은 넉넉하게 250으로 가져왔는데 양말이 두터우니까 맞으실 겁니다.

김상철의 말을 들으며 모피 방한복을 꺼내던 서은영이 시선을 들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차로 간다면서요?

. 차로 2주일쯤.

방한화를 든 그녀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김상철 씨는 그곳, 가 보신 적 있어요?

아니, 저는 모스크바도 처음입니다.

신발을 벗고 발가락을 굽혔다 편 서은영이 방한화를 신어보았다.

김상철 씨는 아직 젊으신데 근대그룹에는 언제 입사했어요?

아직 한 달이 안 되었습니다.

다시 머리를 든 서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입사하자마자 바로 선발되었지요.

축하드려요.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닙니다.

어쨌든 잘 부탁드려요. 같이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아마 제가 근처에 있을 겁니다. 어려우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방한화를 신은 서은영이 의자에서 일어나 새 신을 신은 어린애처럼 몇 걸음을 걸어보았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마실 걸 드릴까요? 보드카가 있던데.

우유나 한 잔 주십시오.

김상철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박동원이 데리러 올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투리스트 호텔의 로비에 들어선 최선호 전무와 고정문 부장은 앞을 가로막고 선 두 명의 사내들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두 명 모두 두터운 코트 차림의 러시아인으로 한눈에 경찰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여권을.

사내 한 명이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을 잠깐 보이더니 짧게 말했다.

잠깐 우리를 따라오시오.

최선호와 고정문이 내민 여권을 받아 쥔 사내들은 몸을 돌렸다.

이것 보시오.

그들을 따라 호텔의 현관을 나서면서 최선호가 말했다

무슨 일로 이러는 거요?

조사할 것이 있어.

힐끗 최선호에게 시선을 준 사내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것 보시오. 잠깐 이야기를 합시다.

경찰서에 가서 이야기 해.

호텔 앞에는 배기관에서 횐 증기를 뿜어내며 검정색 볼가가 대기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최선호가 고정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새끼들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야?

글쎄요, 저도 통‥‥‥」

고정문은 긴장이 지나쳐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KGB는 그들이 쓰던 구건물이 서방세계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 코스의 일부가 되어 있을 만큼 위력을 잃고 있었지만, 아직도 러시아 경찰의 권위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등을 떠밀려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최선호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보시오, 우린 한국의 오성그룹의 중역이오. 알고 있소?

소리치듯 최선호가 말했으나 옆에 앉은 회색 머리칼에 눈동자도 회색인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신도 들었을 거요, 한국의 오성그룹.

닥쳐!

앞자리에 탄 사내가 몸을 돌리더니 거칠게 두 마디의 영어단어를 뱉았다.

알았어? 닥쳐.

그것으로 차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차가 모스크바 호텔을 지나 스베르틀로프 광장 쪽으로 다가가자 문득 최선호의 머리에 러시아 호텔로 간 김성만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그곳에 묵고 있는 경도대학의 이윤제 교수와 서은영 조교를 접촉하러 간 것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최선호가 고정문을 바라보았다.

이것, 러시아 호텔 쪽이라도 잘되어야 할 텐데. 우리는 이 미친놈들한테 끌려가서 바로 나오기가 힘들 테니까 말이야.

고정문이 겨우 기력을 차린 듯 최선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성물산의 베를린 주재원으로 사교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속수무책인 것이다.

어떻게든 지사에 연락을 해야겠는데요, 전무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끌고 가는 것을 보면‥‥‥‥」

최선호는 잠자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로서도 지금 상황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인석이 배치받은 곳은 근대전자의 영업부로 그가 지망했던 곳이다. 1년 매출액이 5조 원에 이르고 그중 4조 원가량을 수출하는 근대전자는 종업원 수만 해도 3만 명에 이르는 거대기업이었다. 영업부는 본부장 밑으로 5개 부와 20개 팀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안인석은 영업 2부의 구주팀 소속이다.

팀장은 과장급이었지만 독립채산 방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서 독자적인 자금 집행을 했고 필요에 따라 팀원을 증감시킬 권한도 있다. 물론 연말 결산에서 팀의 실적이나 이익, 장래성 등이 엄격하게 평가되고 그에 따라 팀이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전쟁이었다.

영업 2부는 메모리형 반도체의 수출부서로 올해의 매출목표는 12천억 원, 달러로 환산하면 If억 달러이다. 그것을 네 개의 팀이 달성해야 하는데 구주팀의 목표는 2억 달러였다.

구주팀장 엄기호는 35세로 마른 몸매에 금테 안경을 낀 이지적인 용모의 사내였다 입사 10년째인 그는 작년의 과장 진급에 이어 올해에는 팀장이 되었으므로 매사에 의욕적이었다. 영업부서는 오로지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올해의 구주팀 내부 목표를 회사에서 책정한 2억 달러보다 20% 많은 24천만 달러로 세워 두고 있었다.

컴퓨터에 나타난 1월의 수출 집계를 바라보던 엄기호가 머리를 들었다.

안인석 씨, 박미정 씨.

그가 부르자 앞쪽 책상에 앉아 있던 두 남녀가 일어나 다가왔다.

당신들은 2개월쯤 수원공장에 내려가 현장실습을 받아야 정상인데.

엄기호의 시선이 빠르게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팀 일이 바빠서 내가 당신들 교육 계획을 조정했어. 당분간은 팀의 일을 돕도록, 이상이야.

엄기호는 컴퓨터의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들은 자리로 돌아왔다.

잘 됐죠?

박미정이 옆자리에 앉은 안인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는 영업 2부에 배속된 유일한 여사원이었는데 아직도 영업의 현장부서에서는 여사원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체력에서 뒤지고 궂은일을 시키기가 거북한데다가 일반적으로 꼼꼼하기는 하지만 순발력과 뱃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인석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대리가 팀장한테 그렇게 건의하겠다고 어제 오후에 말하더군요.

강대리라면 강형문 대리로 그들의 조장이다. 팀은 다시 네 개의 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대리급이 조장이었고 조원은 5, 6명 규모였다.

그러자 이야기의 주인공 강형문 대리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34세로 입사 9년째의 고참 대리였는데 내년에 과장 진급과 더불어 팀장이 되는 것에 모든 것을 건 것 같은 사내였다. 그리고 회사 측도 그러한 전력투구를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안인석 씨, 고마쓰의 63메가 D 수출가격을 조사하라고 했을 텐데.

책상에 두 손을 짚은 강형문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만의 합작공장에서 만들어낸 웨이퍼 가격이 덤핑으로 들어가고 있어.

알아보고 있습니다.

안인석이 서류를 펼치며 대답했다.

영국의 지사에 연락을 했더니 오늘 중으로 회신을 주겠다고 합니다.

다시 연락해 봐, 급하다고.

.

강형문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독일의 공급가격 조사는 끝냈나?

여기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미정이 컴퓨터에서 뽑아낸 자료를 건네주었다. 둥근 얼굴에 혈색이 좋은 강형문은 사람이 좋아 보이지만 독종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거기에다 술이 말술이어서 지난번 신입사원 환영회에서는 폭탄주를 열 잔이나 마시고 나서야 정식으로 술을 시작하는 바람에 신입사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었다.

좋아, 됐어.

선 채로 자료를 훑어보고 난 강형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칭찬이었다. 그가 몸을 돌리자 박미정이 안인석을 향해 어깨를 슬쩍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두 눈에 장난기가 스며들어 있다.

강 대리가 여자한테는 약한데.

안인석의 말에 박미정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체크하는 거예요, 나를. 빈틈이 보이나 하고. 아마 방심했다가는 느닷없이 후려칠걸요. 저 사람 눈빛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그들이 회사 앞의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830분이었다. 빌딩의 식사 손님으로 아침부터 붐비는 곳이었지만 밤에는 손님이 뜸해져서 언제나 빈자리가 많았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배고프지는 않으니까 와인이나 한잔해요, 간단하게.

자리에 앉자 박미정이 말했다.

정식 근무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마치 일 년도 더 지난 것 같아.

매일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고 일에 밀려서 토요일도 6시까지 근무를 해온 것이다. 오늘은 일찍 끝난 셈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입사 동기로 같은 조에 배속되었지만 단둘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나른한 몸으로 와인 잔을 부딪쳤다.

술맛이 나네. 이제야 직장인들이 퇴근 후에 한잔하는 기분을 알 것 같아요,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애인 만나지 않아요?

걔도 바빠서.

회사 다녀요?

여행사에.

이유미는 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잡지사에 사흘을 다니다가 그만두고는 그랜드 여행사라는 대형 여행사에 당당히 시험을 쳐서 합격되었다. 오후 6시면 정확히 퇴근을 하는 이유미가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퇴근길의 박미정이 본 것이다.

와인 몇 잔에 박미정의 두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짧게 커트한 머리에 두 눈은 생기 있게 반짝였고 다소 쉽은 입술 끝이 언제나 단정하게 닫혀있는 그녀에게서 이유미와는 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박미정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술잔을 들었다.

일 년쯤 지나면 제대로 일을 익힐 수 있을까? 안인석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 그보다 더 걸린다고도 하고. 하지만 당장에 일을 맡은 사람도 있으니까.

당장에 일을 맡다니, 그런 신입이 어디 있어? 경력사원 말하는 거 아녜요?

아니, 내 친구 중에 그런 놈이 있어. 신입사원 연수장에서 차출되어서 지금은 러시아에 가 있는데.

러시아에는 왜? 지사 요원으로?

아니, 시베리아로. 개척단이래나 뭐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개척단이라니 거창하네.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데요?

글쎄, 그건 모르겠어. 어쨌든 험한 일인가 봐. 조건도 좋지 않고, 영하 40도가 넘는대나? 사람도 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간댔어.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보조업무를 하는 게 낫겠다. 안인석 씨 친구는 자원한 거예요?

아니, 차출되었지, 강한 놈이니까. 합기도 챔피언을 지냈고, 머리도 좋아.

재미있는 사람이겠네요.

살아온다면 소개시켜 주지.

안인석은 부드러운 와인을 조금씩 삼켰다. 헤어진 지 20일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그를 까맣게 잊고 있을 때가 많았고 이제는 이유미조차도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볼 수가 없다.

안인석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직원들과 회식이 있다는 이유미도 지금쯤 어느 식당에 앉아 있을 것이었다.

 

세계 65개국을 가 보았다는 스물아홉 살 난 박정남 대리는 별명이 발정남이었다. 허우대가 멀쑥했고 시원스러운 용모의 그가 어울리지 않게 목하 발정난 상태라는 후끈한 별명을 갖게 된 동기는 누군가가 그가 올린 결재 파일의 이름에서 박을 발로 고쳐 썼기 때문이다. 그 박정남이 이유미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아까부터 잔만 비워지면 서둘러서 술을 채워준다. 영업부 미주과의 회식이어서 십여 명의 남녀 사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 상 위에 있는 술들을 어서 치우고 2차로 가자.

상좌에 앉은 미주과장 오병식이 호기 있게 소리쳤다. 그는 이미 눈이 풀려져 있었는데 남자 직원들이 연달아서 술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유미 씨, 2차에 가서는 과장이 틀림없이 뻗을 거요. 아마 도중에 밖으로 샐 텐데 그때 우리끼리 3차로 갑시다.

박정남이 낮게 말하자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는 여사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미혼남이었고 건너편에서 이쪽에 자주 눈길을 보내고 있는 미스 양이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박정남이 다시 입을 열려고 머리를 이쪽으로 숙였을 때다. 과장이 소리쳤다.

, 발 대리.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병식 쪽으로 모아졌다.

날 여기 놓고 너희들만 3차 갈 모의는 말아. 오늘은 안 넘어갈 테니까.

내빼지나 마십시오, 과장님.

여행사의 분위기는 가벼운 편으로 상하관계가 격식을 따지지 않아 좋은 점도 있었지만 질서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여행사 사장 홍만규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흥만규는 프린스턴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작년부터 여행사의 전무로 경영에 참여했다가 금년 초에 사장이 되었다. 그의 부친 홍동수는 영동에 부동산만 몇천억 원대를 가지고 있다는 재벌이었다.

, 500인을 위하여 건배다.

다시 과장이 술잔을 들고 소리쳤다.

1월 말이 아직 닷새나 남았는데 미국과는 이미 목표인 500명의 승객을 채운 것이다. 술잔을 든 이유미는 코끝이 빨개진 박정남 대리와 그 옆의 남자 직원, 그리고 입가가 지저분해진 여직원들과 끝자리의 과장까지를 한눈에 훑어보았다. 그러자 안인석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도 연일 야근을 하는 참이어서 며칠 전에 만났을 때에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던 것이다.

박 대리의 예상대로 오 과장은 1차가 끝나기도 전에 정신을 못 차리는 바람에 겨우 택시에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남은 직원은 박 대리와 이유미, 그리고 남자 직원 두 명에 미스 양까지 다섯 명이다. 택시를 타기에도 어중간한 숫자여서 그들은 근처의 조그만 나이트클럽으로 들어섰다. 미스 양은 이유미보다 2년 선배인 스물다섯으로 피부가 고왔고 깔끔한 외모의 여자였다. 소문대로 술좌석 내내 그녀의 시선은 박 대리 근처에서 맴돌았는데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언니가 이쪽에 앉아.

박 대리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미스 양을 그의 옆으로 밀어 앉힌 이유미는 남자 사원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양주를 두어 잔 마시고 나서 번갈아 가며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고 돌아온 이유미와 남자 사원 둘이 테이블에 남았을 때다.

박 대리는 사장의 고등학교 1년 선배가 돼요. 사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 갔지만 선배는 선배지.

한 직원이 턱으로 플로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장은 고등학교 동문을 별로 챙기는 것 같지도 않는데 저 양반은 정성이야. 작년부터 동창회에 꼭 참석하고 나서 사장께 보고한단 말이야.

그것만 해도 굉장한 인연이네요. , 박 대리님은 출세하시겠어요.

이유미의 말에 한 사원이 웃었다. 그녀보다 2,3년 선배로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는 사내였다.

하긴 우리 여행사는 한국의 20대 여행사 안에는 드니까, 재력도 탄탄하고,

김 선배는 조금 피곤하신 것 같아요.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일에.

벌써 지치면 어떻게 해요? 내가 보기에는 분위기도 좋고 보수도 괜찮던데요.

월급쟁이는 다 그게 그거지 뭐.

그 선배가 양주를 홀짝이며 마시더니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내 나이에 사장 자리를 차고앉은 우리 사장을 봐요. 부모 잘 만나서 외제차 굴리고 다니면서 한 달에 몇천만 원씩을 뿌리고 사는데 기 안 죽게 생겼소?

능력이 있으면 기회가 와요.

이유미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나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봐요. 성공과 실패는.

이유미 씨는 꿈이 뭐요?

글쎄요.

술잔을 든 이유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학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회사 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각이 만들어졌어요. 회사를 경영하는 거, 도전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미스 양이 환하게 펴진 얼굴로 박 대리와 함께 돌아왔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행들은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늦었어요.

머리를 숙여 보인 이유미가 몸을 돌렸다. 박 대리가 몇 번 불렀지만 소음에 묻혀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횐 눈에 덮인 대평원에는 나무 한 그루 자라나 있지 않았다. 한낮이었지만 흐린 하늘에 태양의 자취는 없고 칼끝 같은 바람이 눈가루를 날리며 평원 안쪽으로 휘몰려갔다. 북위 62, 서경 1435분 위치의 시베리아 대륙의 동남단. 아래쪽으로는 오호츠크해로 이어지고 위쪽으로 거대한 대륙이 펼쳐진 불모의 땅이다. 40여 대의 트럭과 10여 대의 랜드로버로 구성된 개척단의 대열은 장관을 이루며 하바로프스크를 떠났지만 16일 후인 지금, 평원에 줄을 이어 서 있는 차량은 트럭 25대에 7대의 랜드로버로 줄어들어 있었다. 전문가 그룹 중에서 축산과 임업 두 분야의 네 명이 동상과 설사로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갔고 직원 18명 중 ~명도 마찬가지였다. 뒤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스리코프 대위가 다가왔다. 그가 인솔해온 80여 명 병사와 12대의 트럭은 이제 60명에 7대가 되어 있었다.

미스터 유, 동쪽으로 70킬로 정도만 가면 삼림이 나옵니다. 일단은 그곳으로 갑시다.

30대 전후의 나이였지만 거친 피부에 수염이 무성해서 4,50대로 보이는 그의 콧수염에는 얼음덩이가 매달려 있었다. 유장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은 이 바람부터 피하고 보자.

기지를 선정해 두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잠시 정지되었던 대열이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장을 선 차는 김상철이 운전하는 예비트럭이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앳된 얼굴의 러시아 병사였다. 길도 나 있지 않는 평원인데다 눈에 덮여 있어서 언제 함정에 빠질지, 얼어붙은 호수로 들어갈지 알 수가 없다. 이를테면 김상철의 트럭은 대자연에 던져진 미끼였다.

김상철의 트럭은 끝없이 펼쳐진 빙설 위를 천천히 나아갔다.

이바노프, 유리창 좀 닦아라.

히터는 작동이 되었지만 환풍 장치가 막혔는지 유리창 안쪽이 부옇게 흐려졌다. 러시아어를 익히기 위해서 한쪽에 카세트와 연결된 이어폰을 꽃은 김상철이 소리치자 이바노프가 서둘러 유리창을 닦았다. 이바노프는 열아홉 살로 바이칼호 근처의 타츠 태생이었다.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 군에 입대했지만 일 년이 지나도록 하바로프스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 사령관한테 달러를 많이 주었다는데, 당신 알고 있어?

이바노프가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일주일이 넘게 같이 지내고 있는데 이바노프는 순진했다 가끔씩 한국산 담배와 소주병을 주면 뛰어오를 듯이 기뻐하면서 가슴에 품고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이바노프. 그리고 너도 그런 것 알 필요 없어.

, 당신들은 한국에서 제일 큰 회사 사람들이고 달러를 엄청나게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건 회사가 그런 거지. 우린 너희들과 똑같아.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란 말이다.

다시 안개가 끼었으므로 이바노프가 수건으로 유리창을 닦았다. 트럭은 시속 20킬로 정도의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눈구덩이를 지날 때는 10킬로 미만이 된다. 평원에 굴곡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눈에 덮인 비탈과 골짜기에서는 이런 속력도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갑자기 전방에 검은 무리가 나타났으므로 김상철의 몸이 굳어졌다. 긴장한 이바노프도 옆에 세워 둔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움켜쥐었다.

순록이야.

앞쪽을 쏘아보던 이바노프가 이윽고 말했다.

몇 마리 쏘아서 싱싱한 고기를 먹고 싶은데 안 됐군.

요즘 며칠 사이에도 벼랑에서 구른 트럭이 두 대나 되었고 웅덩이에 빠져 엔진을 못 쓰게 된 트럭이 세 대, 랜드로버가 세 대나 되었다. 처음에는 군의 트럭 서너 대가 앞장섰고 개척단의 랜드로버와 장비를 실은 트럭이 가운데, 그리고 후위에 다시 군 트럭들의 순서로 대열을 이루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열은 흐트러졌다. 선두를 맡았던 군 트럭들이 계속해서 사고를 냈으므로 이제는 김상철이 선두를 서서 일주일이 넘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 대위가 마르첸코 중위를 딸려 부상자와 허약자를 돌려보내려고 하고 있어.

이바노프의 말에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스무 명을 넘게 보내 놓고는 또 보낸단 말이야? 지금도 환자가 많아?

아니, 환자는 거의 없어,

그렇다면 왜?

대위가 자기 몫을 늘리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대위는 곧 당신들에게 사례비를 요구할 거야, 사례비를 받으면 졸병인 우리한테도 몇 달러씩 나눠주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바노프는 영어를 꽤 잘했으므로 김상철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머릿수를 줄여야 몫이 커진다는 말이었다.

마르첸코 중위는 화를 내겠지만 허약자나 동상 걸린 놈들을 데리고 돌아갈 거야. 아마 20명쯤 돌아갈 거라고 해.

김상철이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이바노프, 너는?

당신이 준 술과 담배를 대위한테 바쳤으니 아마 나는 남게 될 거야.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가 되자 대기 속의 미세한 얼음결정이 달라붙으면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 차 있는 것이 공기마저 투명한 얼음덩이로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이것을 별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지만 남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것은 온몸이 얼음이 되어 부서져 내릴 것 같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유장석은 모피 코트를 걸치고 눈만 내놓은 채 트럭 안으로 들어온 김상철을 맞았다.

어서 와, 무슨 일 있나?

그는 이제 김상철을 믿음직한 부하 취급을 했는데 그의 옆에 앉은 이대각이나 과장급 간부들도 이의가 없다. 김상철은 머리에 눌러쓴 털모자를 벗었다. 트럭은 뒷부분을 박스형으로 만들고 히터 장치를 해놓아서 10명까지 잘 수 있게 만들었는데 8대가 남아 있었으므로 러시아군에게도 4대를 나눠주었다.

대위가 중위에게 20여 명을 딸려 되돌려 보낼 것 같습니다.

그가 이바노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자 트럭 안은 금방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경비병이 40명 정도밖에 남지 않겠군.

이대각이 먼저 입을 열고는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40명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엔 별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바노프의 이야깁니다만, 이쪽 지역인지 어쩐 지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군을 탈영한 무리들이 밀렵꾼으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뭔가?

유장석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중위를 보내고 우리한테서 사례비를 받은 대위가 약속을 어기고 떠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위험한 지역인데도 병력을 줄이는 것을 보면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상무님.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유장석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허어, 이것 참.

이대각이 어깨에 걸쳤던 모피 코트를 벗어 던졌다.

그렇다면 야단이네. 상무님, 기지 사령관한테 무전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예 중위부터 못 보내게 말입니다.

사령관이 우리말을 들을까? 병자를 돌려보낸다고 하는데 말이야.

개새끼들, 그렇다면 돈을 일 끝내고 준다고 하지요. 중위 몫까지.

그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인 줄 스스로도 아는지라 말끝을 흐렸다.

유장석이 옆에 앉은 박동원을 바라보았다.

하바로프스크의 김 부장에게 연락을 해. 사령관을 찾아가서 대위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개척단을 떠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달라고 말이야.

, 상무님.

그리고 현재 인원이 60명밖에 남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질책을 내리도록 만들어야 돼. 사령관은 5만 달러나 먹었으니 그쯤은 해줄 것이다.

.

박동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장석이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인데 무슨 일이 있을 때 헬기를 보내주기로 되어 있어.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

무전기는 뒤쪽 차에 있었으므로 박동원이 밖으로 나가자 유장석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길이었다.

수고했다, 김상철.

그는 부하 직원이 마음에 들면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뱉는다. 더 마음에 들면 욕설을 한다.

너 이 새끼, 내가 잘 본 거야. 나는 사람 볼 줄을 안단 말이야.

버걱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몸을 돌린 김상철은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접근해 오는 것을 보자 기분이 섬뜩해졌다 모피로 온몸을 감싸 둥그렇게 되었지만 사람이다.

누구요?

저예요.

80여 명 가까운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서은영이었다. 그녀는 네 번째 박스 차에 설치된 화장실에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해가 뜬 한낮에는 코트를 벗어도 될 정도로 날씨가 푸근했고 그때에는 바람도 없다. 그래서 용변을 볼 때에는 눈구덩이를 발로 파고 거기에다 일을 보았지만 밤에는 안 된다. 피부를 내놓는 즉시 동상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든 발명품 중의 하나가 화장실용 트럭이었다. 그곳에서는 더운물 샤워도 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아서 스리코프와 마르첸코는 단골손님이 되었는데 그들은 양식과 기름을 실은 트럭보다 화장실용 트럭을 더 아꼈다. 트럭의 대열을 정리할 때도 화장실 트럭은 맨 가운데였던 것이다.

이곳을 기지로 정했다죠?

가깝게 다가선 그녀가 물었으므로 김상철은 어둠 속임을 감안하여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침실은 두 번째 트럭으로 이윤제와 자원팀 세 명, 그리고 직원 한 명 등 여섯 명이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트럭으로 다가간 서은영이 몸을 돌렸다.

아직 열 시밖에 안 됐는데올라오세요. 모두 자지 않고 있어요.

더욱이 2주일이 넘게 고생해서 목적지에 도착한 날 밤이다. 내일 아침 다시 출발할 일도 없는데다 유장석은 아침 11시까지 휴식 시간을 주었으므로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그녀를 따라 김상철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반겼다.

어서 오시오, 김 형.

소주잔을 든 이윤제가 소리쳤는데 얼굴이 벌게져 있는 걸 보면 시작한 지 꽤 되는 모양이었다. 한성대학의 김진모 교수와 두 명의 조교로 구성된 자원팀도 술기운이 오른 얼굴이었고 차 안에는 안주 냄새가 진동을 했다.

, 한잔.

50대 중반의 김진모 교수가 술잔을 건네주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섬에 들어가 일 년간 탐사해본 경험이 있다고 했지만 열대의 밀림에서 겪은 경험이 혹한 속의 시베리아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듣자 하니 신입사원이라던데 입사하자마자 고생이 많으시오.

김진모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김 형은 이 일을 지원한 거요? 아니면‥‥‥‥」

지원했다고 보셔도 됩니다.

소주를 한 모금 삼킨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갈 의사가 없는 사람들은 제외시켰으니까요.

생각보다 험한 곳이오. 그리고 상황도 좋지 않고,

김상철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스리코프 대위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다. 둘러앉아 있던 조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원목만 베어가도 굉장한 이윤이 남을 텐데요, 아직 조사도 안했지만 이 근처의 원목림만 해도 엄청나지 않습니까?

수송로도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닦기만 하면 될 테니까 큰 공사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말입니다.

김진모가 머리를 저었다.

그것 가지고는 아래쪽의 북한 벌목사업소 규모밖에 안 돼. 강 회장이 그러려고 우릴 고용했겠나?

트럭에 싣고 온 장비의 대부분이 김진모의 자원탐사용이다.

그러자 이윤제가 입을 열었다.

하긴 원목만 베어가면서 개발을 한다고 할 수는 없지. 이곳의 여름은 7월과 8월의 두 달 동안으로 나머지 열 달은 겨울이니 농사는커녕 축산도 할 수가 없어.

잔에 따른 소주를 한 모금 삼키고 난 김진모가 머리를 들었다.

아직까지 이 시베리아 땅에 시추공을 박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뛰어. 마치 처녀의 몸에 처음 손을 대는 남자의 심정이랄까.

그의 시선이 힐끗 서은영을 스치고 지나갔으므로 사람들은 웃음을 지었다.

강 회장은 최근 영국에서 만든 최신형 시추장비를 군소리 않고 사 보내주었어. 10여 명의 인원으로 하루 만에 설치가 가능한데다가 암반층을 뚫고 지하 1킬로까지 내려가는데 일주일이면 돼.

김진모가 붉어진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알겠소? 일주일이면 유전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단 말이오. 나는 한 달반 동안 다섯 군데를 조사할 수가 있어.

그의 열기에 끌린 듯 박스 안은 조용해졌다. 김진모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만 쏟아지면 이 혹한의 시베리아는 더워질 거요. 공장과 굴뚝이 생기고, 거리가 생겨나고 도시가 탄생 될 거요.

김상철이 머리를 돌리자 서은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차분한 표정의 그녀는 잠시 그의 시선을 받더니 곧 머리를 숙이고는 바닥에 놓인 안주 하나를 집었다.

 

 

 

4. 웅대한 꿈

맑고 횐 태양이 비치는 날에는 바람도 불지 않았으므로 시야는 더 멀리 트여져 있었다. 앞쪽으로는 검은 침엽수의 숲이 펼쳐진 삼림지대가 완만한 구릉을 이루며 한없이 이어져 있다. 슈바를 벗어 제친 스웨터 차림으로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유장석에게 스리코프가 다가왔다. 그는 벨트를 꽉 조여 매고 권총집에 루가를 꽃은 정장 차림이었다.

미스터 유, 알려드릴 게 있소.

유장석이 머리를 들자 주위에 있던 이대각과 서너 명의 한국인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벨트에 두 손을 짚고 선 스리코프가 유장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부하들 중에서 환자와 허약자를 추려 귀대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은 마르첸코 중위의 인솔로 내일 출발할 저요,

대위, 이것은 약속과 틀리는데.

유장석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본래 우리는 1개 부대 80여 명으로 당신네 사령관과 계약을 맺었던 거요. 그런데 도중에서 20여 명이 돌아가 지금 60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또 보낸단 말이요?

사령관의 허락을 받았소.

허락을 받다니?

유장석과 이대각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바로프스크의 김 부장이 아직 사령관과 연락이 안 되었거나 사령관이 그의 말을 무시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마르첸코 중위는 21명의 환자를 인솔하고 내일 출발합니다.

말을 마친 대위가 몸을 돌리자 유장석이 들고 있던 서류를 눈 위로 내팽개쳤다.

이런 개 같은 자식들,

이거, 김상철의 이야기가 맞아 들어가는데.

서류를 집어든 이대각이 묻은 눈을 털면서 말했다.

이 장비 장치하는 데 최소한 열 명은 있어야 돼요, 이 부장,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김진모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러시아 병사들이 거들어줘야 한단 말이오.

그 정도 인원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40명 정도가 남아 있는데.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이대각의 표정도 어두워져 있었다. 뒤쪽 트럭 위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던 이윤제도 맑은 대기 속이라 그들의 주고받는 대화를 모두 들었다.

야단났군.

그가 옆에 서 있는 서은영을 바라보았다.

도착 이튿날부터 말썽이 일어났어.

환자를 보낸다니 오히려 짐을 던 셈 아녜요?

우리 탐사반에도 대여섯 명의 일꾼이 필요한데 또 경비는 어떻게 하고? 40명으로는 어림도 없어.

어떻게 되겠지요, .

하긴 그렇지, 우리도 계약기간만 채우고 떠나면 되니까. 우리 국토를 탐사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는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가 낮게 말했다.

어차피 자원팀하고 따로 움직여야 할 테니 박스 차는 우리 둘 몫으로 한 대 배정받도록 해야겠어. 이미 모두 눈치챈 모양인데 체면 차릴 것 없어. 서울에서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고.

싫어요!

서은영이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이 기회에 정리했으면 좋겠어요. 교수님과 저 사이를.

이 기회에 정리하겠단 말이지.

이윤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넌 영리한 애야. 그래서 항상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내 시선을 끌었지. 그래서 조교가 됐고.

돌아가면 전임 발령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것을 포기할 결심을 했군. 그렇지?

중요한 건 현실이지요. 지금은 교수님도 절 어쩔 수가 없어요. 마음대로 자르고 보낼 수는 없어요.

이제는 서은영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 탐사기는 학교에서 쓰던 30년이나 된 구닥다리 일제 모델이 아니라 컴퓨터로 작동되는 최신 미제 티아이 제품인 것 아시죠? 교수님은 아마 손도 대지 못하실걸요? 왜냐하면 내가 오는 도중에 메뉴얼과 작동법 모두를 외운 뒤 내버렸거든요.

‥‥ 이 나쁜 년,

이윤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널 당장‥‥ 내가!

곡괭이를 들고 바위 조각을 깨서 화석을 찾으시려구요? 학교에서는 통했지만 여기에서는 안 될 거예요.

내 눈앞에서 없어져.

근대그룹에서 받은 금액의 반을 내세요. 그렇지 않으면 유상무한테 이야기해서 당신의 길기만 한 이론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첨단기기를 사용해서 분석하는 훨씬 신뢰할 만한 자료를 택할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할 테니까.

 

저녁 무렵, 태양이 서쪽으로 사라지기 직전 반월형으로 늘어선 트럭들과 횐 눈더미, 그리고 저녁 준비로 바쁘게 오가던 사람들의 얼굴이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손을 내밀어 살펴보자 손등도 진홍빛이었고 대기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동안 모든 것에 스며들었던 진홍빛이 사라지자 곧 어둠이 닥쳐왔다.

, 무슨 일이요?

트럭의 엔진 옆쪽에 서 있는 김상철에게 이바노프가 다가왔다.

그는 이제 슈바를 껴입고 방한모를 눌러 쓴 차림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김상철이 그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이바노프, 넌 남게 되겠지?

그러자 이바노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남을 거예요.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마르첸코 중위는 불평하지 않더냐?

스리코프와 말다툼을 하는 걸 들었지만 할 수 없지요. 지휘자는 스리코프니까요.

너에게 부탁이 있어.

김상철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은 맨 선두에 세워둔 차여서 사람들과는 꽤 떨어져 있다.

달러를 줄 테니까 총을 구해줘. 돌아가는 병사한테서.

소총과 권총을 실탄과 함께, 가능하겠지?

몇 정이나 필요합니까?

이제 이바노프의 목소리도 낮아져 있었다.

한 정씩이면 돼. 내가 필요해서 그러니까.

얼마로 사실 작정입니까?

네가 가격을 말해라.

소총 100달러, 권총 70달러를 주시오. 실탄은 충분히 드릴 테니까.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주머니에서 10달러짜리 20장을 꺼냈다.

200달러를 주겠다, 이바노프.

오늘 밤에 당신 차의 의자 밑에 넣어두지요.

돈을 주머니에 넣은 이바노프가 그를 바라보았다.

또 필요한 것 있습니까? 수류탄이나 철모, 탄띠도 얼마든지.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런데 이바노프.

, .

소문내지 말도록 해.

그러자 이바노프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내 걸 잃어버렸다고 하고는 돌아가는 친구한테서 얻을 거요. 그놈은 돌아가는 도중에 눈 속에서 잃었다고 할 것이고.

총을 준 병사에게 약간의 돈이 지불되겠지만 김상철에게서 받은 달러의 대부분은 아마 그의 수중에 남게 될 것이었다. 이바노프가 기운차게 몸을 돌리자 김상철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도 방어력이 있어야 한다. 그는 어제부터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강회장이 개척단의 상황을 보고받은 것은 그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였으니 사흘 후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이남호로부터 보고를 받은 그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1월 말의 오후였다 포근한 햇살을 받은 김포가도는 전날 내린 눈이 녹아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으면 경찰력이 필요하겠다. 자위 수단으로 말이야.

창에서 머리를 돌린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 망할 놈의 러시아 군대는 믿을 수가 없어 우리 땅은 우리가 지켜야 돼.

임차계약을 맺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계약조건에도 명기되어 있으니까요.

기름이 나오지 않아도 추진시킬 테니까, 3월 초에는 러시아 정부와 계약을 마칠 것이다.

강회장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논 색깔을 봐. 적어도 천 년 이상 저 논에서 곡식을 생산했을 거야. 거름도 주고 비료도 주었지만 이제 누렇게 되어서 논 같지도 않아. 마치 폐경기가 지난 할멈처럼.

회장님, 그곳 시베리아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글쎄, 누가 뭐래?

강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누가 농사를 짓는다고 했나? 난 그 새 땅에 새 도시를 건설할 거다.

「‥‥‥」

공해를 만들지 않는 기업을 옮겨 가고, 한국에서 이민을 허가하지 않으면 러시아 땅에 있는 조선족들을 받아들이겠다. 아마 모두 모여들 거야. 50만 명쯤 될까?

회장님, 아직 정부에서‥‥‥」

정부?

다시 강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대한민국 국민인 내가 한반도보다 두 배나 큰 땅을 러시아로부터 얻어 개발하고 관리한다면 박수를 쳐줘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떤 놈이‥‥‥」

임차보증금 1억 달러는 한국에서 가져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예상하고 있었어. 그래서 외국 은행에서 빌리기로 했다.

한국의 재산이나 근대그룹의 담보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예상했어. 그래서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몇 군데 은행 총재를 만났다.

「‥‥‥」

임차계약서만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겠다는 거다. 3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이자는 연리 10%.

강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 실장, 내 나이가 몇이냐?

, 회장님, ‥‥‥‥1

딱 하나 내 나이가 문제가 됐지, 73세니 3년 후면 76이라, 한국 사람의 남자 평균수명이 72세라는 거야. 그래서 중공업의 강 회장을 연대 보증인으로 세우기로 하고 끝냈다.

아아,

이 정권은 내가 시베리아 임차지의 주인이 되는 것에 배가 아픈 것이다. 국력의 신장이나 미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놈들이니까.

다시 얼굴을 굳힌 강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북한이 우리 경제인단 방북을 거절했다면서?

, 겉으로는 경제인단 규모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시베리아 지역 임차 관계 때문입니다.

강회장이 턱을 들고 웃음을 띠었다.

경제인단 규모가 많아서 거절했다고? 얼굴 가죽이 질긴 자들이군. 한국 정부가 반강제로 해서 겨우 모은 경제인단인데,

경제인단 대부분은 그렇게 되자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합니다.

정권의 대북정책에 기업인들이 더 이상 놀아나면 안 돼.

강회장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북한은 아직 한국 기업이 들어가 생산 활동을 벌일 준비가 안 돼 있어. 세계에서 기업 활동 하기가 가장 위험하고 조건이 좋지 않은 곳이다. 동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들일 준비도 돼 있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가 희생하면서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다.

강 회장은 4, 5년 전, 북한에 들어가 금강산을 개발하기로 김일성과 약속한 바 있었다. 그것은 물론 정부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남호가 헛기침을 했다.

북한은 한국이 위아래에서 압박을 할 작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회장님.

바로 그것이다. 그것인데도 현 정권은 제 놈들의 공적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방해를 하는 것이다.

강회장이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시베리아 임차지에 공장과 도시가 들어서고 수백만의 주민이 몰려들어 자치국이 형성되면 자연히 군대가 생긴다. 물론 러시아와 상호 협력관계가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북한은 자연히 위아래의 한국을 상대해야 돼. 그때에는 더 이상 남침 위협이 없게 된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강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 오성의 비서실 놈. 모스크바에서 추방당했겠지?

아닙니다, 회장님. 그자들은 곧 풀려났습니다.

풀려나다니?

오성에서도 인맥을 동원해서…」

, 그래서?

그자들은 지금 하바로프스크에 있습니다, 회장님.

끝까지 쫓아와서 훼방을 놓겠다는 말이지, 그놈들까지.

방해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저 정보나 캐려고 그러는 것이지요.

강회장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면서 입을 다물었으므로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차는 이제 성산대교를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 시간에 청와대 비서실장 안민수는 청와대 본관의 비서실장실에서 안기부장 권준규와 마주 앉아 있었다. 비서실장 안민수는 매사를 드러나지 않게 처신하는 인물로 겸손하다는 평도 많았지만 야당으로부터는 복지부동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인물이다. 그 안민수의 얼굴이 오늘은 유달리 찌푸려져 있었다.

부장님, 도대체 강회장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각하께서 여간 걱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부에서 그렇게 충고를 했는데도 그 양반, 기어코 시베리아 땅을 임차할 모양입니다.

원래 그런 사람 아닙니까? 정부로부터 사사건건 방해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더해가는 모양입니다.

권준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강회장이 고집불통의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정부의 경제정책이 정권의 홍보나 유지 수단으로만 운영되어왔다고 공식 석상에서 떠들기도 했던 것이다.

안민수가 입맛을 다셨다.

이제 정부 쪽이나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러시아 정부에서 촉각을 세우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러 관계가 악화될 소지가 있습니다.

압니다.

권준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러시아 대사관의 부대사 플레노프와 근대그룹 비서실장 이남호가 밀접한 관계지요, 그리고 강 회장은 러시아 대통령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자가 모은 재산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근대그룹 10여만 명 직원, 그리고 재벌을 키워준 국가의 은혜를 버리고 제 마음대로 해외로 재산을 빼돌릴 수는 없습니다.

안민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각하께서는 어떻게든 저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안기부장과 제가 책임지라고 하시면서.

이것, 난처하군.

권준규가 손으로 턱을 쓸었다.

지시대로 하겠지만 제가 쓸 방법은 한계가 있어서.

경제부처의 압력이나 규제는 면역이 되어버린 모양인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단 말입니다. 총리의 공식서한도 무시한 상황이에요.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권준규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은 연일 근대그룹의 시베리아 지역 임차 관계를 쟁점으로 내세워 북경에서 열리는 남북한 실무자 회의에서 한국 측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납북당한 어선과 어부들, 그리고 납치된 목사의 귀환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조사단이 현지에 가 있는데 아마 2월 말까지 조사를 마칠 모양입니다.

권준규가 입을 열었다.

조사를 마치면 곧 러시아 정부와 계약을 할 것 같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부장님.

허리를 편 안민수가 다시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띠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요, 계약을.

 

계약서류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유미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는 번호판의 7자를 누르고 나서 똑바로 섰다. 그녀의 왼쪽 한 발자국쯤 뒤에 홍만규 사장이 서 있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을 싣고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연한 향수 냄새가 풍겨져왔다. 홍만규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타면서 슬쩍 시선이 스쳤는데 그가 체크무늬의 재킷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그의 시선이 이쪽을 스치고 지났다는 것도 알았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갈 때다.

이유미 씨, 이제 업무 파악이 되었나요?

뒤쪽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유미는 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반쯤 몸을 돌리고는 머리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 조금‥‥‥‥」

그러자 홍만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에 입사한 신입사원은 20명 가깝게 되었고 홍만규한테는 신입사원 입사 일에 단체로 가서 인사를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추자 그녀는 다시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이유미 씨, 내일 노스웨스트 923편에 비즈니스 클래스 네 명 추가야.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박정남이 그녀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빨리 코드 번호를 알려줘야 돼, 서둘러.

자리에 앉은 이유미는 컴퓨터의 키를 두드리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홍만규는 백 명 가까운 여사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사무실이 있는 9충으로 별 용무도 없이 올라가는 여사원들도 있었고 비서실로 옮기려고 애를 쓰는 맹렬 여사원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곧 시들해졌는데 홍만규가 업무 분위기는 자유롭게 만들어 놓지만 사생활은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여사원에게 업무 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소문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이유미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랜드 여행삽니다.

나야.

안인석의 목소리였다.

오늘 저녁 어때? 그곳에서 볼까?

오늘은 일찍 끝나나 보지?

일곱 시쯤 끝날 테니까 여덟 시에 좋아?

좋아.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유미는 밝아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인석은 편안했고 따뜻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그는 또한 이해심이 많아서 어떤 투정도 모두 받아주었는데 여자들의 이상형이라면 바로 안인석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도 믿고 있었다.

 

안인석은 사무실로 들어와 책상에 앉는 박미정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그랬지만 박미정의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오후 6시가 넘어 있어서 옆쪽의 미주팀 책상은 모두 비어 있었다. 컴퓨터의 스위치를 끈 안인석이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박미정은 인사부로 불려 갔다 온 것이다.

정말 아무 일 없어?

? 내가 우울해 보여?

그러면서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입사 동기에다 같은 부서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다 보니 이제 자연스럽게 서로 반말을 하게 되었다. 박미정이 의자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앉았다.

날더러 그룹의 비서실로 가라는 거야, 강회장의 비서실로, 그래서 안 간다고 했어.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별소리를 다 해, 진급이 빠르다는 둥, 수당이 많고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둥 하고.

아마 사실일걸? 남자 사원들은 그곳으로 수평 이동을 해도 진급한 것으로 치니까.

남자야 그렇겠지만 여자는 달라, 더욱이 나는…」

박미정이 정색을 했다.

경영학과 나와서 비서실에 앉아 차 심부름이나 하고 강 회장 스케줄 정리나 하란 말이야? 그건 비서학과 애들이 해야 돼.

아마 다른 일을 시키겠지.

강 회장 스타일이면 뻔해.

퇴근길의 엄과장과 강대리가 나란히 책상 옆을 지나갔으므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래, 안 간다고 했더니 인사부장이 뭐래?

안인석이 묻자 박미정이 책상 위에 팔을 세우고는 손으로 턱을 받쳤다.

비서실 업무를 확장하기 때문이라면서 곧 발령을 내겠대. 내 말은 듣지도 않아,

잘된 거야. 넌 굴러들어온 복을 차려고 하고 있어.

정말 잘된 일일까?

넌 우리 조에서 나보다 더 인정을 받고 있어, 팀에서도 그렇고. 아마 조장이나 팀장이 써 올린 고과를 보고 너를 고른 걸 거야.

그렇다면 조장이나 팀장은 왜 모른 척하고 퇴근했지?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고과 성적순으로 널 뽑은 증거라니까 그러네. 이거 슬슬 내가 열이 받치는군.

박미정이 턱에서 손을 빼고 안인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안인석 씨는 참 좋은 남자야. 애인만 없다면 내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비서실에 가면 날 괄시나 하지 마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난 한동안 정들었던 조와 팀을 떠나기 싫었었어. 쫓겨난 기분도 들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늘 술 한잔할까?

나 약속이 있어.

그러자 박미정이 손에 잡힌 종이를 와락 구기더니 안인석을 향해 던졌다.

 

기지에서 동쪽으로 60킬로쯤 떨어진 평지 위에 시추공을 세우는 데는 김교수의 호언과는 달리 사흘이 걸렸다. 처음이어서 조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부속을 맞추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을 돕는 러시아 병사들도, 근대 측의 사원들도 서툴기 짝이 없어서 부속을 눈 속에 빠뜨리고는 한참 동안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어쨌든 시추공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은 툰드라 지역이어서 얼어붙은 늪과 습지가 이어진 곳이다. 김상철은 시추공에서 떠나 옆쪽에 세워져 있는 랜드로버로 다가갔다.

박 대리님, 그럼 저는 본부로 돌아가겠습니다.

랜드로버 옆에 서 있던 박동원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330분이었다.

이봐, 기지에 도착하면 여섯 시가 넘겠는데, 빨리 서둘러야겠어,

한두 번 다녀 보았나요? 길이 나 있어서 걱정 없습니다.

습지였지만 얼어붙어 있어서 타이어 자국만 따라가면 기지가 나오는 것이다. 김상철의 업무는 보급이었다. 기지와 조사 현장 사이를 오가면서 물자를 날랐는데 내일은 기름을 싣고 이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가지 않습니까?

트럭에 오르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바노프가 물었다.

아니, 내일 오전까지 기름을 가져와야 하니까 오늘 출발해야 한다.

트럭의 시동을 걸자 벤츠사 제품의 트럭이 육중한 엔진음을 냈다. 그때 시추공을 조작하고 있던 김진모가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김형, 내일 오는 길에 소주 열 병만 가져와요. 보드카가 있으면 그걸로 하든지.

그가 소리쳐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소주로 가져오지요. 보드카는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요,

일주일 후에 보급품을 실은 헬기가 도착하기로 했으니 그때에는 보드카와 스카치 등 도수가 센 술이 풍성해질 것이었다. 트럭은 얼어붙은 늪지 위를 천천히 달려 나갔다. 가끔씩 바퀴에 깔린 얼음이 빠지직 소리와 함께 부서지면서 차가 밑으로 내려앉았지만 곧 탄력을 받아 솟아오른 얼음덩이의 내력으로 곧장 앞으로 전진해갔다.

그들이 툰드라 지대를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530분경이었다. 이미 짙은 어둠이 덮인 대지는 얼어붙기 시작해서 창에는 하얀 얼음이 씌워졌다. 이제 울창한 삼림으로 덮인 구릉 사이를 20킬로쯤 더 가야 기지가 나온다. 두 줄기의 라이트 불빛은 2, 30미터밖에 가지 않았고 불빛 속으로는 무수한 횐 점들이 반짝였는데 대기가 얼음조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트럭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구릉 밑의 눈길을 달려 나갔다.

아니, 저것.

옆에 앉은 이바노프가 얼음이 달라붙은 유리창으로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댔는데 김상철도 거의 동시에 그것을 보았다. 두 줄기의 불빛이 앞쪽에서 휘익 돌아 구릉 옆쪽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차량의 불빛이었다. 김상철은 머리 위에 걸린 무전기를 손에 쥐었다. 기지와의 거리는 이제 10킬로가 조금 넘었다.

기지 나오라, 여긴 김상철.

, 여긴 기지. 지금 어딘가?

금방 담당 직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지금 C 지점 근방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의 불빛을 전방에서 본 것 같아서.

전방 어느 지점인가?

B 지점의 구릉 안쪽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확실한가?

이바노프와 같이 보았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움직인 차가 없는데 잠깐 스리코프한테 알아보겠다.

트럭은 이제 라이트가 사라져 간 구릉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잠시 후 무전기에 직원이 다시 나왔다.

스리코프도 밖으로 내보낸 차가 없다. 김상철 씨, 라이트 불빛이 확실한가?

김상철은 깊은 어둠 속에 묻힌 오른쪽의 낮은 계곡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보았습니다만‥‥ 지금 그 근처를 지나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지, 그런 곳에 차가 다닐 리가 있나?

알겠습니다. 곧 들어가겠습니다.

무전기의 스위치를 끈 김상철이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이바노프는 어느 사이에 한 손으로 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바노프, 차량 불빛이었지?

확실해요, ! 자동차였어.

그러자 그들의 앞에 환한 불빛이 보였다. 모터로 일으킨 전력으로 기지 주변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스리코프는 내일까지 돈을 만들어 달라는 거야. 놈은 우리가 달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

박스 안이다. 유장석이 둘러앉은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3만 달러를 내라니, 날강도 같은 놈. 제 놈이 한 일이 뭐라고.

그러자 이대각이 머리를 들었다.

기지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면 안 되겠습니까? 최악의 경우라도 스리코프가 우릴 어쩌지는 못할 텐데요.

회장님은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셔. 그래서 나에게 미리 달러를 지니고 가게 하신 거야.

하지만 김상철의 말대로 놈이 달러만 받고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박스 안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늘 오후에 스리코프는 유장석에게 사례비를 요구해온 것이다.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놀라지도 않았고 금액도 예상 수준이었지만 태도가 당당해서 마치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스리코프는 우리가 사령관에게 돈을 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어.

이윽고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돈을 주는 수밖에 없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말이야.

이때 박스 뒤쪽의 문이 열리면서 김상철이 들어섰으므로 방 안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아졌다.

늦었습니다.

방한모를 벗으면서 김상철이 그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오는 도중에 불빛을 보았다던데, 어떻게 된 일이야?

유장석이 묻자 김상철이 구석 자리에 섰다.

자동차의 불빛이었습니다. 오른쪽의 구릉 사이로 들어갔는데 그쪽으로 다가갔을 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헛것을 보았겠지, 아니면 이리든가. 어젯밤에 고과장도 이리 서너 마리를 보았다던데.

이대각의 말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이바노프도 보았지만 틀림없는 자동차 불빛이었습니다.

그러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는데 그것을 깬 것은 유장석이었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저도 모릅니다, 다만‥‥‥」

다만 무어야?

산적들도 러시아 군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트럭이나 지프를 타고 다닌다는 겁니다.

이바노프도 스리코프한테 보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상무님.

입맛을 다신 유장석이 이대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리코프와 사례금 문제로 실랑이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침에 기름을 싣고 다시 기지를 출발한 김상철은 어젯밤 불빛을 보았던 구릉 옆 골짜기 입구에서 트럭을 멈추었다. 밤사이에 쌓인 눈으로 땅바닥에는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옆쪽으로 구부러진 골짜기 안에도 횐 눈만 덮여 있을 뿐이다.

, 스리코프는 어젯밤 우리가 본 것이 그레고리 일당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바노프가 골짜기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대원들에게 비상 경계를 내렸어.

아침에 유장석과 스리코프가 만나 상의를 한 다음 비상 경계를 내려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레고리란 이름은 처음 듣는다.

그레고리는 누구야?

사할린에서 부대원을 데리고 탈주한 소령이오. 그자는 시베리아 동북부 지방을 돌아다니며 강도 짓을 한다고 했어.

그들은 다시 트럭에 올라 눈에 덮인 길을 조심스럽게 달려 나갔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그레고리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

비밀로 하라고 했소. 특히 나한테는 절대로 당신한테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했어.

「‥‥‥」

그레고리는 백 명이 넘는 부하에 대전차포에다 미사일까지 갖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한테는 비밀로 했더라도 사령관한테 보고는 했겠지?

안 했을 거요, 아마.

?

시베리아에 우리 부대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괜히 우리만 나서서 그레고리를 잡는다고 난리를 일으킬 필요가 없으니까. 잡아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잡으려다가 놓치면 좌천을 당할 거란 말이오.

김상철이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이바노프, 스리코프는 도망칠 작정이냐?

그건 모르겠소.

스리코프는 우리 보스한테 3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하고 있어. 달러로 말이야.

이바노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3만 달러나.

너희 사령관은 5만 달러를 가졌다, 이바노프.

그런데 너희들한테 돌아가는 몫은 얼마냐?

그러자 이바노프가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아직 모르겠어.

「‥‥‥‥」

그 도둑놈들이 그렇게 많이 받을 줄은 몰랐소. 아마 대원들이 알면 ‥‥‥‥」

이바노프가 말을 멈추었으므로 김상철도 잠자코 운전에 몰두했다. 그들이 시추공 작업기지 남동쪽으로 10킬로쯤 떨어진 지질 탐사기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후였다. 지질탐사 기지에는 근대그룹 책임자인 전 과장과 두 명의 직원이 이윤제와 서은영의 작업을 도왔고 러시아 병사 여섯 명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여어, 잘 왔소.

이윤제가 반색을 했다. 그들은 이틀에 한 번꼴로 기지에 들렀는데 오늘은 사흘 만에 온 것이다.

소주 몇 병이나 가져왔소?

열다섯 병입니다.

이윤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틀분도 안 되는군. 그걸로 어떻게 일주일을 버티란 말이야? 이 식구가.

전 과장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면서 잠깐 머리를 든 김상철은 이바노프가 러시아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은 이바노프의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스웨터 차림의 서은영이 다가왔다. 태양이 내려 비치는 한낮일 때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콧등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시추공 작업 기지를 거쳐서 기지로 돌아가실 거죠?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옆에 서 있던 전 과장이 입을 열었다.

서은영 씨가 몸이 좋지 않아 기지에 가서 진찰을 받아 봐야겠다니까 김상철 씨가 모시고 가.

어디가 아픕니까?

어지러워요. 식욕이 없고.

전 과장이 다시 나섰다.

이곳은 서은영 씨가 하루 이틀 자리를 비워도 돼. 탐사기 작동법을 우리도 배워 놓았으니까, 이 교수와 같이 말이야.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앞쪽에 있는 이윤제를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시추공 기지에 보급품을 내려놓고 기지로 출발했을 때는 오후 2시였다. 김상철은 차에 속력을 냈지만 기껏해야 20킬로를 냈고 빙판에서는 10킬로 정도가 된다. 트럭이 거칠게 요동을 치는 바람에 옆에 앉은 서은영의 몸이 김상철에게 부딪쳐 왔다. 그녀는 김상철과 이바노프의 사이에 끼어 앉은 것이다.

이바노프.

김상철이 서은영의 어깨 너머로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이바노프는 시추공 기지의 경비병들을 모아놓고 무엇인가 쑥덕거렸던 것이다.

, 나한테 들은 이야기를 병사들에게 해주었지?

그러자 이바노프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요, . 시추공 기지에 있는 보리스 상사와 지질 탐사기지의 에프게이 상사는 대위를 눈구덩이에 파묻든지 쏘아 죽이자고까지 했어. 대위는 상사들에게 300달러씩 주겠다고 했다는 거요.

300달러씩이라고?

그래 당신들한테서 3,000달러 이상 받아내기는 힘들 것이라고 하면서.

동그라미 하나를 줄였구나.

보리스 상사 말에 의하면 상사 세 명을 모아놓고 분배액을 정했는데 3,000달러에서 상사들은 300, 병사들은 50, 그리고 나머지 400달러가 자기 몫이라고 스리코프가 말했다는 거요.

그들 이야기를 듣던 서은영이 마침내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상철이 다시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상사들이 병사들을 장악하고 있나?

물론이요, . 그들은 모두 고참이야. 스리코프보다 군 경력이 많아.

이건 내 생각인데, 상사 세 명한테 차라리 돈을 나눠주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병사들 몫도 훨씬 많아질 텐데.

이바노프가 눈을 번들거리면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반대할 놈은 하나도 없어. 스리코프는 상사들이 간단하게 처리할 거요.

그러자 서은영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핸들을 움켜쥔 김상철은 앞쪽을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트럭은 얼음덩이를 부서뜨리면서 구릉 사이의 좁은 길을 달려 나갔다. 이윽고 김상철이 이바노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바노프, 기지에 남아 있는 상사는 어때? 스리코프의 심복 아니냐?

천만에. 그는 보리스의 친구요. 아마 림스키한테도 지금쯤 보리스로부터 무전 연락이 갔을걸? 그놈도 펄펄 뛰고 있을 거요.

상사들은 어쩔 작정이야?

아직 정하지 않았어. 돈을 받으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만.

갑자기 사방이 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횐 눈도, 대기도 유리창도 금방 진홍빛에 잠겨 들었다. 해가 지려는 것이다. 김상철은 덜컹거리는 트럭의 가속기를 밟아 속력을 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질 것이다.

 

좋아, 하자.

김상철의 말이 끝나자 유장석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하지만 돈은 계약이 끝나는 날인 2월 말, 철수할 때 지급한다.

옆에 앉아 있던 이대각도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럼 지금 이바노프한테 말해줘도 좋겠습니까?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물론이야.

따라 일어선 유장석이 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잘했다, 김상철.

밖으로 나온 김상철이 맨 끝 쪽에 세워 둔 고장 난 트럭으로 다가가자 슈바로 몸을 감싼 두 사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바노프와 림스키 상사였다. 이바노프는 아예 림스키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림스키가 김상철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그는 40대로 붉은 얼굴에 수염도 붉었고 배가 나온 거인이었다.

, 이바노프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소.

지독한 입 냄새와 술 냄새가 섞여 맡아졌지만 김상철은 피하지 않았다.

그래, 당신 보스의 생각은 어떻소?

상사 세 명에게 만 달러씩, 그리고 지급일은 계약이 끝나고 철수하는 날이오.

만 달러씩이라,

숨을 들이마신 림스키가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럼 병사들은?

당신들이 공평하게 나눠줘야 하겠지요. 이제 병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니까 말이오.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림스키가 입을 열었다.

만 달러씩, 틀림없겠지요? .

내가 책임집니다, 상사.

좋소.

머리를 끄덕인 림스키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낀 채로 그의 손을 잡은 김상철이 낮게 말했다.

대위는 내일 아침까지 돈을 내라고 했소. 그가 더 이상 우리에게 독촉하지 말도록 해주시오.

림스키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여 보이더니 이바노프와 함께 몸을 돌렸다.

김상철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앞쪽에 짙은 삼림이 방풍 역할을 해주고 있었으므로 바람은 불어치지 않았지만 수은주는 영하 30도를 훨씬 넘었을 것이다. 기지는 반월형으로 트럭을 배치해 놓은 형태였는데 안쪽에는 직선으로 박스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평원을 향해 늘어선 바깥쪽의 트럭들은 벽의 역할을 했고 안쪽으로 숙소와 창고, 식당이 배치된 형태였다. 삼림을 향한 쪽에는 2대의 랜드로버를 옆으로 세워 놓아서 병사들의 대용 초소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린 김상철은 트럭의 앞부분을 돌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민첩하게 몸을 놀려 박스 트럭의 옆 부분을 지났다. 그가 박스 트럭의 뒤쪽으로 몸을 꺾자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이 놀라 몸을 돌렸다.

어머나,

서은영이다. 눈만을 내놓은 방한모 속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놀랬잖아요. 갑자기,

여기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화장실은 끝 쪽인데 그리고 이곳은 당신 숙소가 아니고.

왜요? 잠깐 밖에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이 이상해요? 여기선 돌아다닐 수도 없나요?

서은영이 목소리를 높이자 김상철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날 따라와.

왜 이래? 이것 놔!

발을 버티던 서은영이 눈 위에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함께 눈 위에 뒹군 김상철이 이제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았다.

잔소리 말고 따라와.

소리 지를 테야. 이것 안 놔!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김상철은 그녀의 팔을 뒤로 꺾어 잡고는 앞쪽의 트럭 대열로 밀었다.

팔을 부러뜨리기 전에 잠자코 가. 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말고.

김상철이 서은영을 끌고 들어간 곳은 부품창고로 쓰이는 박스 트럭 안이다. 전등이 있어서 불은 켰지만 히터 장치가 없는 창고는 마치 냉장고 안과 같았다. 안에 들어서면서 팔이 풀리자 서은영이 거칠게 자신의 방한모를 벗었다. 그러자 눈을 치켜뜬 성난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 왜 이러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좁은 박스 안을 울렸다. 공구와 부속품들이 어지럽게 쌓여진 안에서 둘은 마주 보고 섰다. 김상철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내놔.

뭘 내놓으란 말이야?

그러자 김상철이 성큼 다가서더니 한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방한복 주머니를 뒤졌다. 서은영이 몸부림을 쳤으나 역부족이다. 이윽고 김상철이 그녀를 밀어젖히면서 몸을 세웠다. 그가 쳐든 한 손에는 손바닥만 한 녹음기가 쥐어져 있었다.

넌 시추작업 기지에 가서도 김 교수의 이야기를 녹음했고 차 타고 올 적에도 나와 이바노프의 이야기를 녹음했어. 그리고 조금 전에도.

이리 내!

서은영이 두 손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김상철이 가볍게 휘두른 주먹에 턱을 맞은 그녀는 타이어 더미 위에 엉덩이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김상철은 녹음기의 테이프를 앞쪽으로 회전시킨 다음 스위치를 켰다. 곧 김 교수의 유전 발굴 가능성에 대한 열띤 설명이 흘러나왔다. 김상철이 스위치를 껐다.

넌 도대체 누구야? 목적이 뭐야?

너희들이 도대체 뭔데.

이를 악문 서은영이 그를 노려보았다.

날 감금시킬 권한이 있어? 날 폭행할 권한이 있냔 말이야!

넌 러시아 호텔에서 어느 놈과 접촉을 했어. 그놈에게 정보를 주기로 한 거야.

김상철의 말에 서은영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날 보내면 될 것 아냐! 난 돌아가겠어, 한국으로.

네 마음대로?

호주머니에 무전기를 집어넣은 김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넌 잠깐 이곳에 있어야겠다.

서은영이 바닥에 놓여져 있는 공구 하나를 집어 들었을 때 김상철은 박스 문을 열었다. 재빠르게 빠져나온 그가 다시 문을 닫자 공구는 닫힌 문의 안쪽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다음 날 아침, 식당차에 앉아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던 유장석은 힐끗 앞쪽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침 8시면 정확하게 식당차의 계단을 올라 들어서던 스리코프 대위가 815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옆자리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이대각도 가끔씩 문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윽고 계단이 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지더니 붉은 별이 박힌 러시아군의 방한모가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난 얼굴은 림스키 상사였다. 거구를 흔들며 식당차 안으로 들어선 림스키가 눈을 껌벅이며 차 안을 둘러보았다.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상사, 거기요.

유장석이 손으로 앞쪽의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가 당신 자리요.

그러자 화난 듯한 표정의 림스키가 자리에 앉았다.

상사, 커피 드시겠소?

그쪽으로 큰 머리를 숙인 이대각이 다정하게 묻자 림스키가 머리를 끄덕였다

커피 주시오.

식사는 토스트로 하실까, 아니면 스테이크로?

스테이크,

뒤쪽에 있는 주방장이 이미 알아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랗게 주문하고 난 이대각이 림스키를 향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상사, 오늘도 날씨가 좋소이다. 그렇지요?

그렇소.

얼굴의 긴장이 풀린 림스키도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스리코프 대위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얼음 구덩이 속에 있는지 아니면 삼림 속의 썩은 나무 밑에 누워 있는지 그것은 이쪽에서 알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령부에 어떻게 보고했는지도 상관할 일이 아니다.

유장석이 림스키 옆쪽 자리에 앉아 잠자코 커피를 마시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상철아, 서은영은 며칠간 이곳에 잡아두었다가 작업기지로 보내든지 어쩌든지 할 것이다.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 교수한테는 아직 말해둘 필요는 없어. 그자도 한통속인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러자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김진모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침 일찍 각 작업기지에 파견된 사원들에게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했어.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제가 데리고 다니는 애한테 사례를 해줘야겠습니다. 이번 일에 그 애의 공이 컸으니까요.

이바노프 이름을 꺼내지 않은 것은 옆에서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림스키 때문이다. 아침에 병사들과 함께 마른 빵과 말린 고기만을 먹던 그는 긴장이 풀리자 이제는 대단한 만족감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었다.

좋아. 그 애한테 천 달러쯤 주지.

금방 눈치를 챈 유장석이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안 됩니다, 상무님. 처음부터 버릇이 나빠지면 곤란합니다. 2백 달러만 주십시오. 그것도 제가 주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대각이 커다란 머리를 끄덕였고 유장석이 만족한 듯 웃었다.

넌 이곳에 딱 맞는 놈이다,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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