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물 소리 3
5. 하늘과 땅과 사람
또다시 덧없는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강경 저자에서도 뱃길이나 육로를 따라 행상에 나갔던 상단들이 돌아왔고 장터는 인근 지방에서 설빔을 준비하러 나온 장꾼들만 붐비고 있었다. 내가 전주 남원 거쳐서 부안으로 나들이를 다녀온 사이에 엄마가 시름시름 앓더니 아예 드러눕고 말았다. 갑오년 동학 난리 나던 해에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우리 땅에서 전쟁을 치렀고 이듬해 왕후 민씨를 죽이는 변이 있고 나서 호열자가 돌기 시작하였다. 지난 여름까지 한양으로 번졌다가 여름 경에 더욱 극성하여 경기도를 넘어 호서 지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는데 벌써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의원을 데려왔더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역병인 듯 보인다며 관아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 우환이 있고서야 강경의 몇 집에 환자가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에서 사령배가 나와 우리 집에 금줄을 치고 손님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며 의원은 엄마를 뒤채 윗방에 격리시키고 우리는 손님이 묵던 앞채로 모두 쫓겨났다. 찬모와 내가 엄마의 방에 드나들며 구완을 했는데 의원에 지시에 따라 온 식구가 물을 끓여 먹었고 엄마의 옷은 잿물에 삶았으며 식기 등속도 펄펄 끓는 물에 담갔다가 설거지를 했다. 다행히 식구들에게는 더 이상 전염되지 않았지만 엄마는 회생하지 못했다. 아가를 묻었던 채운산에 엄마를 묻었다.
나는 엄마를 보낸 뒤에야 부안에서 헤어질 때 백화가 내게 내주었던 책이 생각났다. 그것은 겉장에 '천지도경풀이'라고 언문으로 제목이 씌어 있는 필사본이었다. 백화는 그 책을 내게 내밀면서 말했다.
"그 사람의 손길이 남아 있는 글씨랍니다. 이제 내가 지니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요."
장지에 붓으로 쓰고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얽어맨 책은 귀퉁이가 동그랗게 닳았고 누렇게 변색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경문이 원래는 한자로 되어 있던 것을 신통이 스스로 우리 글로 풀어서 옛날이야기처럼 엮은 것으로 보였다. 그가 한양 시절에 서 지사와 더불어 책을 인쇄하였다고 하는데 천지도경과 천지도가의 두 책이었다고 하더니, 그는 아마도 다른 방각본 언패소설 책들과 함께 자기의 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통이 부안에 머물던 무렵에 이들을 풀이하여 여러 권의 언문 필사본을 베껴두었을 것이다.
엄마를 인근 산에다 묻고 돌아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우리 모녀가 함께 살던 세월이 수십 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인 홀몸이며 더 이상 누구의 딸이 아님을 절실한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아, 내 아기가 먼저 가지 않고 곁에 있었더라면. 문득 이신통이가 나의 전생 아들인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나자, 애틋하고 속상하던 것은 겨울 굴뚝의 저녁 짓는 연기가 북풍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듯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대신 그를 보듬어 쉬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의 손길을 느껴보고 싶어 필사본 책을 들었으나 읽어나가는 중에 점점 빠져들어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가 아니며 홀몸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내가 바로 하늘님이라니!
이 글은 최성묵(崔性黙) 대신사(大神師)께서 직접 쓰시고 말씀하신 것을 최경오(崔敬悟) 신사(神師)께서 외우고 받아쓰게 하여 전해진 것이니라.
나는 경주 사람으로 허송세월하면서 누구네 집 후손이라 구구히 말해야만 남들이 겨우 알아듣는 한미한 집안의 가난뱅이 선비였다. 칠대조 할아버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서 싸우다가 공주 영장으로 경기도 용인 싸움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으며, 이 같은 조상의 음덕을 입어 아버지는 학문을 연마하여 영남 일대에 이름을 널리 알린 선비이셨다. 칠대조 할아버지는 충절로 이름을 떨쳤고 아버지는 학문으로 이름을 남겼으니 이 어찌 나의 복이 아니겠는가.
아아 학자의 삶이란 봄날의 꿈처럼 덧없는 것이런가. 어느덧 나이 사십이 되어 아버지는 과거 공부가 쓸데없는 짓임을 깨닫고 벼슬길을 단념하셨다. 혼탁한 세상을 살며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했던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빌려와 글을 짓고 읊조리셨다. 막대 하나 짚고 나막신 신고 나들이하실 때면 영락없는 산림처사의 행색이셨다. 군자의 모습은 높은 산과 같고 흐르는 강과 같다고 하더니 아버지의 모습이 꼭 그러하셨도다. 아버지가 사시던 곳은 경주 구미산 용담정이니, 기암괴석이 즐비한 구미산은 월성과 금오산의 북쪽에 우뚝하고 아름답게 흐르는 구미산의 용담계곡은 경주 현곡 마룡의 서쪽에 있다. 아버지의 심경을 아는 것인지, 동산에 핀 복사꽃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그 복사꽃처럼 행여 누가 찾아올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도다. 강태공이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보냈듯이 아버지는 집 앞 용담계곡의 맑은 물결을 거닐며 세월을 보내셨더라.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뉘라 막을 수 있을 건가. 어느 날 문득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 홀로 이 세상에 남았노라. 내 나이 열일곱에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 아해일 뿐이더니, 아버지께서 평생 써오신 글들도 모두 불에 타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불효를 탄할 뿐 다른 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였다. 혼인을 하고 살림을 꾸려야 했으나 농사도 지을 줄 몰랐으며 과거를 볼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못하여 점점 빈궁해져서 어찌 살아야 할지 걱정이었다. 열 살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열일곱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더니 삼년상을 마치고 열아홉에 혼인하여 무과나 치를까 하였으니 나는 후실의 자식이라 문과로는 나설 수 없었느니라.
봇짐장수로 십여 년을 떠돌며 세상의 온갖 사람과 풍파를 겪고 사십 가까운 나이에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이룬 것 하나 없어 한숨이 절로 났다. 나는 몸 누일 집 한 칸 마련치 못했건만 어느 누가 이 세상이 넓다고 말하는가? 생업은 벌일 때마다 패하여 내 한 몸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도다. 기미 시월에 처자식을 데리고 내 고향 경주 용담으로 찾아가니 아버지께서 후학을 가르치며 늙어가시던 곳이었노라. 이듬해 사월에 세상은 저리도 어지럽고 인심은 각박한데 나는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할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간에서는 서양 사람들은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져 조화를 부리는 경지에 이른지라 못하는 일이 없고 무기를 들고 나오면 당할 사람이 없다더라는 해괴망측한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거늘 중국이 망하면 이웃 나라인 조선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양 사람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겠도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네 학문을 서도라 부르고 천주를 섬긴다 말하며 성인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하늘의 때를 알고 하늘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면서 말로는 천주를 섬긴다고 하니 행동과 말이 이렇듯 상반되는 경우가 하나둘이 아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나라와 백성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 말을 듣고 나가서는 길거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려고 하지를 않는도다.
어느 날 몸에 몸살과 오한이 나면서 밖으로는 신령과 접하는 기운이 일고 마음속에서는 가르침을 전하는 음성이 들려왔도다. 보려 해도 눈으로는 보이지가 않았고 들으려 해도 귀로는 들리지 않아서 괴이한 일이라 여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스스로 물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오니까? 하니 답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람들은 천지는 알면서도 귀신은 모르는데 그 귀신이 바로 내로다. 네게 모든 일에 통용되는 도를 전해줄 터이니 그 도를 닦아 글을 지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법을 바로 세워 덕을 펼쳐라. 나는 그 말이 참말인지 마귀에게 홀린 것인지 한 해 동안 수련하며 생각해보니 모두 자연의 이치를 말한 것이더라.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순수한 마음인 신(神)은 하늘에 있고 몸의 욕망인 귀(鬼)는 땅에 있어 그 마음의 순수함과 욕망이 함께 있으니 군자는 학문과 수도로 순수한 마음을 지킬지언정 어리석은 소인은 좋은 마음을 지닐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마음을 지니려는 작용이 있고 이를 간직할 수 있다고 말하려 한다. 좋은 마음이란 부귀빈천에 상하차별 없이 어느 사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느니라.
천상의 상제가 하늘 궁전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 이치 고사하고 허튼소리 아닐런가. 사람이 바로 하늘이니 사람 밖에 하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 밖에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마음이 하늘이니 그 마음을 존귀한 하늘처럼 소중하게 받들어서 좋은 마음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길이로다. 그 말을 확신하고 나서 본 주문을 짓고 강령주문을 짓고 불망주문을 지어 순서를 정하여 늘어놓으니 스물한 자가 되었도다.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原爲大降)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영세불망 만사지(永世不忘 萬事知)
지극한 기운이 이제 이르렀으니라는 말은, 지극한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않음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것 같지만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기운이로다. 하늘의 지극한 기운이 내가 되었다는 뜻이로다. 원위는 청하여 비는 것이요 대강은 그 기운에 교화됨을 원하는 것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이란, 하늘의 지극한 기운이 지금의 나에 이르렀으니 그에 동화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니라. 시천주 조화정은, 하늘님을 내 마음과 몸에 모신 나는 창조와 진화를 스스로 정했다는 뜻이며, 영세불망 만사지의 영세는 사람의 한 평생이요 불망은 생각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며 만사지는 자신의 모든 일을 하늘의 도에 맞게 행하는 것이니라.
하늘의 지극한 기운이 내게 이르렀으니, 하늘님을 모신 나는 스스로 조화를 정하여, 평생 잊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에 맞도록 행하겠습니다.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하늘의 신령한 기운이 선생에게 내렸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함인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은가. 천도(天道)라고 부른다. 천도라고 하면 서학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서학은 천도를 따르는 것 같지만 천도를 따르자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올리는 것 같지만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천도를 말하고 기도를 올리는 겉모습은 같지만 그 내용이 다르니라.
어떠한 점이 다른가. 우리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방식은 사심을 품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방식인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길이다.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의 기운을 바로잡아 하늘이 내린 본성에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면 절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게 된다. 서학은 말에 논리가 없고 글에 옳고 그름이 없노라. 사심 없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할 만한 단서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뿐이다. 몸에 수양의 흔적이 없고 배워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니 하느님을 섬긴다는 형식은 있으되 하느님을 섬기는 태도가 아니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여도 진실함이 없도다. 이러할진대 어찌 천지도를 서학과 같다고 하겠는가.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면 누구나 좋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어찌하여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는가. 사람은 제각각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니라. 그래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귀천과 고락이 운명으로 주어진다. 누구나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고 누구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는 없도다. 그러나 군자는 기가 바르고 마음이 한결같아서 주어진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천명에 따를 수 있지만 소인은 기가 바르지 않고 마음이 때때로 흔들려서 천지의 명을 거스르고 자연의 이치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주어진 환경에 휘둘리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요 양심이 없어서 그러한 게 아니니라.
천지도를 비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도는 새로운 생각이다. 예전에도 이러한 생각이 없었고 지금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없어서 견주어볼 데가 없도다. 실제로 수양을 하게 되면 얻는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좋은 결과가 있지만, 수양은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하면 뭔가 있는 듯 여기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노라. 이리하여 우리 도를 비난하는 것이다. 수양해보지 않은 사람만 천지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수양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도 있다. 천지도를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왜 그러한가.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런가. 존중하면서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함부로 말하여도 안 되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느니라. 그런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도에 들었다가 어떤 마음으로 도를 떠나는 것인가. 바람 불면 눕고 그치면 일어서는 풀잎처럼 환경과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세태가 이러한데도 그런 이들에게조차 지극한 하늘 기운이 있다고 하는가. 지극한 하늘 기운은 선한 사람에게만 있고 악한 사람에게는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믿어도 득이 없고 믿지 않아도 해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고대의 성인 요 순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 모두 요 순처럼 선하였다. 세상은 혼자 복 받고 혼자 화를 입는 것이 아니다. 복을 받아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받고 화를 입어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입는 것이다. 게다가 복을 받느냐 화를 입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 지은 바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해득실을 하나하나 마음과 연관 지어 마음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 해로움이 도리어 자신에게 미치게 된다. 아마 이런 사람들이 복을 누리기는 어렵겠으나 이런 일은 나에게 물을 일도 아니요 내가 관여할 일도 아니노라.
우리 도에서는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참된 것(誠)으로 여기나니 믿을 신(信) 자를 통하여 정성 성(誠)의 의미를 살펴보자. 신(信) 자는 사람 인(人) 자와 말씀 언(言) 자가 합쳐서 이루어진 글자로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니, '말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여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린다'는 의미다. 확신이 들 때까지 거듭거듭 생각하라. 마음에 확신이 서고 나면, 믿지 못할 것과 믿을 것을 확연히 알게 되며 이 같은 방식으로 수양하면 진(眞)과 가(假)를 구별하게 되느니라. 진과 가를 구별하는 척도는 멀리 있지 않으니 '내 마음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곧 참된 것이니라. 사람의 말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으로서 이루어지나니 먼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밝혀야 성실함을 이룰 수 있느니라.
평생의 근심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각박한 세상이 되었음이다. 울울한 그 회포는 가슴에 가득한데 물어도 아는 사람 전혀 없어 처자식과 산업을 다 버리고 팔도강산을 떠돌며 인심 풍속을 살피더니, 도덕이 없고 사나워진 인심을 달리 치유할 길이 없는 세상이 되었더라. 기댈 곳 없는 세상 사람들은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괴이한 참서 예언서 들추며 말하기를, 저런 난리 만나면 소나무 숲으로 피신해야 화를 면했고 이런 난리 때에는 집 안에 숨어야 이로웠다 말한다. 벼슬을 팔고 사는 세도가들도 한마음으로 궁궁촌(弓弓村)을 찾고 돈과 곡식을 쌓아놓은 부자들도 한마음으로 궁궁이며 패가망신하여 떠돌며 빌어먹는 사람들까지 궁궁을 찾아 헤매는구나. 소문에 미혹한 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궁궁촌을 찾아가거나 서학에 입도하여 각자의 이익에 따라 옳고 그름을 다투는데, 이미 하늘님이 제 마음에 내려와 계시나니 먼 데서 찾지 마라. 요 순의 다스림이나 공자 맹자의 가르침으로도 이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인즉 그 누구도 믿지 말고 네 속의 하늘님을 모시어라. 사람은 하늘을 하늘은 사람을 모시고 사람은 사람을 서로 모시느니라.
그 말 저 말 다 하자니 말도 많고 글도 많아, 다 함 없는 그 이치를 불연기연(不然其然) 살펴내니 다 함 없는 우주 속에 다 함 없는 내가 있다. 마음이여! 본래 모양 없고 보이지도 않는 것이라 비어 있음 같도다. 만물에 응하여도 자취가 나타남이 없는 것이로다. 하지마는 이 마음을 닦아야만 하늘 덕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요 하늘 덕이 밝아지면 이가 곧 도이니라. 우리가 도를 깨닫고 이루는 것이 하늘님 덕에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도를 이루는 것은 하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에 있으며 결코 한갓 공부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이 도는 가까이 있는 것이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정성에 있는 것이지 구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다. 만물이 생기기 이전이나 만물이 생긴 이후나 그 이치에 있어서는 서로 같은 것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을 아우르는 근본 이치를 밝힌 도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결코 멀리 있지 아니하고 우리 살림 속에 있는 것이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이 일정한 차례가 있어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바뀌고 바뀌는데 이는 어찌하여 그리되는 것인가. 하늘의 무궁한 섭리에 의한 것이로다. 어린아이는 어리고 어려서 말을 못하여도 오히려 자기 부모를 알아보건만 세상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신이 태어난 생명의 근원인 하늘님을 아지 못하는가. 성인이 이 세상에 태어남이여, 황하의 물이 천년에 한 번 맑아지는구나. 성인이 나실 운이 제 스스로 회복이 되는 것인가. 황하의 물이 제 스스로 알아서 맑은 물로 변하는 것인가. 하늘의 섭리에 의하여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로다. 밭을 가는 소가 농부의 말을 알아듣고 농부가 부리는 대로 일을 하는구나. 이 소는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마음이 있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 같도다. 그러니 사람보다 훨씬 힘이 센 소가 사람의 부림에 대항할 수 있는데도, 어이하여 대항하지 않고 사람이 부리는 대로 일을 하는 어려움을 스스로 겪으며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모두 하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까마귀 같은 미물도 어린 시절 어미가 먹이를 날라주던 것과 같이 늙은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주는 반포(反哺) 은공을 행하나니 저들도 효도와 공경을 역시 아는구나. 봄이 되면 어김없이 제비가 주인의 집으로 날아오니 그 주인의 집이 아무리 가난해도 역시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구나.
천황씨는 어떻게 최초의 임금이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문명도 임금도 없었다니 어찌된 노릇인가.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이 있을 수 없으니 그를 낳아준 부모가 있었기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것이라. 천황씨는 최초의 임금이고 최초의 스승이니 임금은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스승은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쳤다. 그러나 최초의 임금 천황씨는 그에게 자리를 넘겨준 임금이 없었거늘 어디서 법을 전수받았으며 어디서 예를 배웠는가.
아아, 이러한 헤아림이여 확실히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세상사를 바라보면 점점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불확실한 것을 탐구해서 세상사를 알려하면 점점 애매해져서 알기가 어렵다.
이렇듯 드러난 현상으로부터 자연의 섭리를 추구하여 현상과 이치를 밝히는 대업을 이룬 것이 머나먼 옛날의 일이다. 하물며 그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 어찌 앎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성인들이 이치를 밝힌 지 몇몇 성상이었던가. 천황씨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어찌해서 운(運)이란 말이 있고 어찌해서 복(復)이란 말이 있다는 말이냐. 사람이 식견으로 판단하여 알 수 있는 것이 기연(期然)이라면 사람이 일반적인 식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불연(不然)이라, 기연이 없이 어찌 불연에 도달할 수 있으며 불연이 없다면 어찌 기연이 있을 수 있는가. 불연 기연이 하나임과 같이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니 시천주(侍天主)가 가하도다. 모심〔侍〕은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內有神靈 外有氣化〕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깨달아 옮기지 않아야 한다.
태초에 허허 창창한 어둠 가운데 하늘과 땅이 비로소 열림으로 우주가 형성되었으니 모든 물(物)의 시작이더라.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 것을 선천개벽이라 하나니 물질 우주의 개벽이라. 이제 그 가운데 사람이 생겨나 세상과 스스로를 바꿀지니 후천개벽을 열어야 함이로다. 모름지기 천도를 닦는 이는 정성을 다하여 자신과 세상을 후천개벽으로 이끌어야 하느니라.
철종 십사 년 계해(癸亥) 겨울 십이월에 대신사께서는 경주에서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당했다가, 임금의 승하로 대구 감영으로 내려와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이듬해인 신자(申子) 봄 삼월에 남문 밖 관덕정 앞뜰에서 효수형을 받았으니 죄목은 혹세무민과 모역죄였다.
대신사께서 형을 받기 하루 전에 마지막 심문으로 주뢰형을 받아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고초 속에서도 담뱃대에 서신을 말아 넣어 밖으로 전하였으니 신사께서 이를 받아 기록하였다.
등명수상무혐극(燈明水上無嫌隙)
주사고형역유여(株似枯形力有餘)
등불이 물 위에 빛나니 온 세상을 밝힐 것이요
기둥이 제법 말랐으니 떠받치는 힘 넉넉하리
불이 물 위에 있으니 이는 주역 육십사 괘(卦)의 마지막 끝자리인 화수미제(火水未濟) 형상이다. 주역은 순환과 변화의 것이라서 불이 위에 물이 아래, 하늘이 위에 땅이 아래면 자연에서처럼 정위치가 아니라 통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막히고 멈춰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도 천지부(天地否)가 아니라 지천태(地天泰)로 소통되어야 한다. 바로 앞의 육십삼 괘인 수화기제(水火旣濟)가 이미 이루어진 완성을 뜻하듯이 화수미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옛 성인이 이 괘를 모든 것의 마지막 자리에 놓은 것은 우주의 무궁한 순환을 가르치려는 것이며 이는 미완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니 온 세상이 밝아질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대신사께서 천도를 세상에 밝히는 일은 나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요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일은 그대들의 몫이다 하는 유언이니라.
나는 단숨에 읽었고 다시 천천히 글귀마다 마음속에 새기며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었다. 휘갈기지 않고 단정하고 반듯하게 써 내려간 이신통의 언문 글씨는 알아듣기 쉽고 앞뒤가 정연하였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풀이를 써 내려갔는지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뒷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지냈다. 스물한 자의 주문을 저절로 외우게 되어 중얼중얼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하루는 바깥 툇마루에 인기척이 있더니 어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와 잠시 기다렸다가 물어보았다.
"누구 왔소?"
"예, 저 안 서방입니다."
문을 밀치니 그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이제 날두 풀렸는데 나들이 안 가시렵니까?"
막음이 아버지가 내 속을 잘 알고 그러는 줄 알고 있었다.
"좀 들어오세요."
안 서방이 문가에 들어와 앉더니 한마디 했다.
"어떻게 공부가 좀 되십니까?"
"네? 아 그게…… 저 들으셨군요."
"예, 저는 그 주문하구 칼노래는 압니다만."
"칼노래는 또 뭔가요?"
안 서방이 얼른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건 아무 데서나 부르면 안 됩니다. 지난번 난리 때에 농민군이 행군하고 쌈하러 가면서 부르던 노래라서."
"한번 불러보우."
"에이 방 안에서 숨죽이고 부를 노래가 아니라니까요. 관군이나 순검들 들으면 경칩니다."
나는 자꾸만 졸랐고 그는 못이긴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조그맣게 읊조렸다.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장부(萬世一之丈夫)로서 오만년지시호(五萬年之時乎)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 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짓 들어
호호 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빗겨 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드는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주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디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시고
용천검 드는 칼이 해와 달을 희롱한다는 대목에서 안 서방은 흥을 못 참았든지 허리춤에 질렀던 곰방대를 빼어 허공을 휘두르며 앉은자리에서 일어설 듯이 어깨춤을 들썩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으니 대신사의 숙연한 흥취를 짐작하겠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번 더 해보라고 조르니 안 서방은 제풀에 사그러진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고만 할랍니다. 이 노래만 부르면 자꾸 우금치서 죽은 사람들 생각나서. 그리고 그전부터 행수님들은 칼노래 부르지 말라구 그랬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큰 스승님께서 이 노래를 지은 뜻은 후천개벽이 오는 기쁨을 시늉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 노래로 역적죄를 씌웠다구요."
"칼춤이야 기녀나 무녀들도 흥겹게 춥니다. 삿됨과 슬픔을 베어 뿌리치는 춤사위니 까마득하게 오래된 춤이지요."
"이 서방은 농악 장단에 대나무 작대기 들고 곧잘 칼노래를 부르면서 한바탕 춤을 추었습니다."
나는 백지를 꺼내어 막음이 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이 노래를 적어두었다. 음과 장단은 귀로 들어 아는 바이라 혼자 흥얼거려보기로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상단의 출발 무렵에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상단은 오랜 경험으로 농번기의 틈새에 장터를 찾아 각처로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월 중순이라 봄빛은 완연했지만 아직도 바람은 싸늘했고 꽃샘추위로 꽃망울도 움츠려 있을 무렵이었다. 안 서방이 여정을 어림짐작하여 우선 갱갱이에서 금강 뱃길을 따라 공주까지 올랐다가 거기서부터 육로를 따라 예산으로 갈 작정이었다. 안 서방은 이번에 장쇠를 데리고 가기로 했는데 곁꾼도 한 사람 붙여서 나 외에 남정네가 셋이나 되어 든든했다. 우리 집에서 객주 붙였던 어염 짐을 싣고 부여와 공주에 가서 풀어먹일 생각이던 것이다. 이신통만 없었다면 엄마 먼저 가신 뒤에도 이렇듯 집안에 좋은 식구들이 남아 있었으니 이게 무슨 복인가 싶었다.
내가 찾아가는 이는 이전에 들은 바 있던 예산 덕산의 박인희 박도희 형제였다. 박도희는 서 지사와 이신통이 한양에서 군란이 일어났을 적에 난군 중에 파옥이 되어 고향으로 보냈던 내포지역 천지도의 행수였다. 우리가 백화를 만나러 갔을 적에 그녀가 의탁하고 있던 손동리 선생의 맏아들이 천지도 난리가 일어나기 전해에 서일수가 도인 몇 사람과 와서 묵어갔으며 그에게서 이신통이 이미 오래전에 천지도에 입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손 선생은 입도한 도인은 아니었지만 살아생전에 전주 이방의 소개로 서일수와 친밀하게 지냈으며 그에게 선산까지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백화는 이신통과 헤어진 뒤에 그때 처음으로 집에 온 서일수와 도인들을 통하여 신통의 소식을 들었던 셈이었다. 연옥이 애가 달아 자꾸만 물었더니 백화는 기억을 더듬어 이신통과 자기가 사계축의 박삼쇠 패거리와 내포 지방을 연행 다닐 적에 예산 읍내에서 박도희를 만났고 그의 형 집에 묵었으며 놀이패들과 헤어진 뒤에도 다시 찾아가 열흘이나 묵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백화도 연옥이처럼 한양에서의 이신통의 행적을 자세히 듣고 기억하고 있어서 아마도 예산 덕산의 박씨 형제를 만나면 같은 도인들이니 서일수와 이신통의 행방을 알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벌써 천지도의 난리가 폭풍처럼 휩쓸고 간 뒤라 지금쯤 그 전의 도인들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근처에 가보면 소문이라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집 떠난 지 나흘 만에 우리는 예산에 도착했다. 뱃길로 부여 공주를 거쳐서 어염 짐을 풀어놓고 쉬엄쉬엄 가던 길이어서 장쇠와 곁꾼은 공주에 남겨두고 안 서방과 나만 팔십 리 길을 이틀에 걸쳐서 보행 길로 갔던 것이다. 예산 읍에서 가까운 원마을에 이르니 아직도 해가 중천인 낮것 무렵이었다. 우선 동네로 들어서기 전에 다리쉬임이라도 할 겸 봇짐에 넣어온 인절미로 요기를 했다. 시절이 그러한지라 망설이며 둘러보다가 길가 논에서 소를 몰아 흙갈이를 하고 있던 농부에게 다가가 안 서방이 물었다.
"저기 박 초시 댁이 어딥니까?"
"그 댁은 왜 찾으슈?"
농부가 잠시 일을 멈추고 되묻는 것이었다.
"저희하구 일가뻘이 됩니다."
농부는 안 서방과 뒷전에 서 있는 나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손을 들어 가리켜주었다.
"저어기 길을 똑바로 가서 돌담이 보이지요? 그 왼편으루 돌아서 죽 올라가면 맨 안쪽에 기와집이 보일 거유."
하고는 농부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였다.
"이것이 시방 그 댁 논이우."
백화에게 듣기로도 박도희 형제네가 일대에서 몇백 석지기는 하는 집이라더니 밥 먹고살 만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가 가르쳐준 대로 돌담을 돌아 양쪽에 몇 채의 초가집이 있는 담을 끼고 올라가 맨 안쪽에 돌담과 일각대문을 발견했다. 사람을 찾으니 하인이 나와서 안에 아뢴 뒤에 그들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박도희는 긴 저고리와 바지를 걸친 평상복에다 탕건 차림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안 서방이 먼저 말했다.
"뵙겠습니다. 강경 사는 안 서방이라구 합니다."
"강경 사는 심 씨입니다."
나와 안 서방은 각자 주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박도희는 뭐라고 묻지도 못하고 좀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반절을 하며 응대하던 주인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뉘신지…… 저를 아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서일수 지사와 이신통을 아시지요? 저는 이 서방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내가 말하자 주인은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나는 난리 이후에 그가 얼마나 걱정이 많아졌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안 서방이 빙빙 돌며 이야기하기 전에 질러서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그와 우연히 맺게 되었던 인연이며, 갑오 난리 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함께 부부가 되어 살던 나날과, 그가 갑자기 집을 떠나던 것이며 내가 남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다녔던 일까지 조곤조곤 모두 말하였다.
박도희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더니 드디어 돌아앉아 소매로 눈을 씻고는 말을 꺼냈다.
"서 지사와 이 서방을 저도 잘 알지만 내 아우에게는 더욱 형제 같은 사람들이라오. 아마 만나면 반가워 할 텐데……"
"그러면 아우님께서 덕산에 사시나요?"
나도 반가워서 이곳에서 지척이나 다름없는 덕산에 그가 살고 있기를 바라고 물었지만 그는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갑오년 이후로 내 아우는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고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지요. 내가 이나마 집안 제사라도 받들고 살아가는 것도 천만다행 조상님 은덕입니다. 아우는 지금 이 고장에 있지 못하고 강원도 깊은 산골에 솔가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지금도 서 지사나 이 서방과 연이 닿을 것입니다. 갑오년 난리 이후에 삼남은 물론이오 위로 경기도와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인들이 죽고 가산이 적몰했으며 봉기를 했던 남도의 대행수들은 김봉집 대장 이하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인의 문초와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한때에는 내포 지방 백성의 거의 절반이 도인들이었다지만 지금은 내색을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붙어 살아남은 처지입니다. 저도 거사할 때에 직접 싸움에 나가지 않은 탓으로 나중에 체포되었으나 아우의 행적만 문초당하고는 형장을 받고 겨우 살아났지요. 살아난 일반 도인들은 모두가 다시는 천지도를 믿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났으니 이제 평생 부끄러움에 시달리며 마음을 감추고 살아갈 밖에요."
주인이 계속하여 낙담과 슬픔의 빛을 보이는데 나는 말머리를 돌려 서 지사에 대하여 먼저 묻고 싶었다.
"군란이 있던 해에 아우님께서 먼저 옥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오셨고, 그 뒤를 따라서 몇 달 뒤에 서 지사가 찾아 오셨을 겝니다. 제 남편은 이듬해 연희패에 들어 이 지방을 돌아다니다 들르셨을 테구요. 그때에 기억나는 일을 좀 듣고 싶어요."
"아우가 뱃길로 예산에 돌아온 것이 군란 나던 해 늦여름이었지요. 그는 당진포에서 세마에 책짐을 싣고 돌아왔는데 나는 경을 치게 된 아우가 무사하게 풀려난 이야기와 서 지사의 소식을 듣고 더욱 기뻤습니다. 저와 아우는 이미 오래전에 천지도에 입도하였고 이는 아우를 첫번째 곤경에 빠트린 임효 때문이었습니다. 임 서방은 저희뿐 아니라 신사님을 비롯한 천지도 전체를 위험하게 했고 관군의 추적을 받게 만들었지요. 서 지사는 진천의 산사에 스님으로 머물 적부터 아우와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이가 두 번이나 아우를 구명해준 셈이올시다. 아마 약조가 미리 있었던지 한 달쯤 지나서 서 지사가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에 우리는 책의 일부를 내포 지역과 전라도를 위하여 남겨두고 단양의 아무개 대두에게 서울에서의 방각 형편도 알리고 책과 자금의 결산도 알릴 겸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저희 계에서는 우리 형제와 서 지사와 대두 두엇이 동행하였지요. 서 지사가 따라나섰던 것은 만약 이번 길에 신사를 만날 수 있다면 자기도 입도하겠다고 하여 아우가 적극 끌어들였기 때문이었지요. 당시는 군란이 휩쓸고 간 뒤에 한양에 청군과 일군이 진을 쳤고 나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다는 소문이 전국에 돌아서 말깨나 하고 글깨나 읽었다는 지방 서생들 사이에는 뭔가 세상이 바꾸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결기가 번져가고 있던 때였소. 우리가 단양의 여 아무개를 찾아가니 세 해 전에 경전을 백 부 찍어서 각 지역 행수에게 돌리고 이를 다시 현지에서는 필사하여 대두들에게 나누어주어 도인들이 기도를 할 때에 읽도록 했다지요. 그렇지 않아도 바야흐로 교세가 늘어나는 때이라 경전은 매우 필요할 때였습니다. 단양 행수는 우리를 인솔하여 강원도 인제 원막골의 깊은 산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탑거리에 우리를 남겨두고 산으로 올랐다가 다시 나타나서 우리를 산등성이 넘어 뒤편 골짜기로 안내했습니다. 원막골은 오래전부터 화전민이나 약초꾼들이 살던 너와집이 대여섯 채 있는 궁벽한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관에서 탐지했다 할지라도 기찰할 수 없을 정도로 숲과 계곡이 깊은 곳이었지요. 집들도 숲 속에 멀찍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쓰는 집에 이르니 신사를 모시고 다니는 측근 도인 세 사람과 집 주인이 나왔고 먼저 방으로 안내되어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지요. 단양에서 우리를 데려간 여 도인이 일행을 한 사람씩 소개하고 어느 고장의 누구이며 지역의 행수 또는 대두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측근 도인 한 사람이 나가서 신사를 모시고 오는데 반백의 머리와 수염에 중키의 마른 몸매였고 눈빛이 형형하여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았지요. 당시에 신사의 연세는 쉰 일곱이셨습니다. 그이는 길에서 만나면 그냥 약초꾼이나 마을 농투성이로 보일 정도로 너무 평범해 보였습니다. 거의 삼십대부터 평생을 관군에 ?기며 한 고장이나 마을에 한 달 이상을 머무르지 못하고 숨어 다니며 전도를 다녔다지요. 나중에 서일수 대행수가 스승을 일컬어 '최 보따리'라 별명을 지은 것은 저러한 연유였습니다. 신사께서 좌정하자 우리 일행은 일시에 일어나 큰절을 올렸고 그이는 앉은 자리에서 두 팔을 양쪽으로 짚고 맞절로 받았지요. 측근의 손천문이란 도인이 우리들의 출신지와 이름과 직임을 적어 올리니 신사께서 보시고는 말했지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어느 분이 경전을 찍어 왔다더니……"
그이가 둘러보자 손 도인이 대답합디다.
"예.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 박 초시 형제가 수고를 하셨습니다."
시절이 어려운 때에 팔도 각처에 도인들이 늘어나고 있으나, 다만 안타까운 것은 교리의 전파가 미흡하더니 참으로 귀한 일을 해주셨소. 이는 돌아가신 대신사는 물론이요 내가 일일이 접하지 못한 교도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거요. 그게 언제였던가?
다시 물으니 손 도인이 곁에서 말했지요.
"삼 년 전입니다. 백여 부를 찍었구요 다시 이듬해에 단양에서 천지도가를 찍었습니다."
"그랬군요. 저는 글은 한 자도 모르는 무식자이지만 어려서부터 종이 만드는 일로 밥 먹고 살아왔고 그 때에 어깨너머로 방각술과 목각조판도 좀 배워서 책 만드는 일을 좀 압니다."
저녁상이 들어와 우리는 다 함께 둘러앉아 먹게 되었지요. 산골의 식사라야 서속에 감자를 썰어 넣은 밥이라 실하지 못하였으나 된장과 각종 산나물 버섯이 있으니 먹을 만했지요. 스승님 이하 모두들 머리 숙여 기도를 올려 하늘에 고하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따라온 서 지사는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습니다. 신사께서는 일찍이 사람이 하늘이라는 대신사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밥이 하늘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이 그 말씀이지요. 물건마다 하늘이요 일마다 하늘이니 만약 이런 이치를 옳다고 한다면 모든 물건이 다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 것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 것은 곧 하늘의 기화를 통하게 하는 것이니, 대신사께서 모실 시(侍)자의 뜻을 풀어 밝히실 때에 안에 신령이 있다함은 하늘을 일컬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함은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 것을 말씀한 것이니 지극한 천지의 묘법이 도무지 기운이 화하는 데 있느니라 하셨지요. 서 지사는 원래가 불승이었던 사람이어서 이심전심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저녁을 마치고 나서 신사께서는 서 지사를 데리고 나가 주위를 거닐었습니다. 신사께서도 자신과 가족이 풍비박산했듯이 서 지사가 임효의 거사에 휘말려 쫓기고 떠돌게 된 연유를 아시고 그가 입도의 뜻을 품고 찾아온 것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나중에 서 지사가 우리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대강 어떤 말씀이 오갔는지는 내용만 전달해주었을 뿐입니다. 서지사가 먼저 질문을 했겠지요.
"천지란 무엇입니까?"
"천지는 한 기운 덩어리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란 무슨 뜻입니까?"
하늘 땅 사람은 도무지 한 이치 기운뿐이지요. 사람은 바로 하늘 덩어리요, 하늘은 바로 만물의 정기입니다. 푸르고 푸르게 위에 있어 해와 달이 걸려 있는 곳을 사람이 다 하늘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홀로 한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운이 마음을 부리나요, 마음이 기운을 부리나요? 기운이 마음에서 나왔나요, 아니면 마음이 기운에서 나왔나요?"
"화생하는 것은 기운이요 작용하는 것은 마음이니, 마음이 화하지 못하면 기운이 그 도수를 잃고 기운이 바르지 못하면 마음이 그 궤도를 이탈하나니, 기운을 바르게 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그 기운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기운이 바르지 못하면 마음이 편안치 못하고, 마음이 편안치 못하면 기운이 바르지 못하나니, 기실 마음도 또한 기운에서 나는 것이지요. 움직이는 것은 기운이요, 움직이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요, 능히 구부리고 펴고 변하고 화하는 것은 귀신입니다. 귀신이란 천지의 음과 양이요 이치와 기운의 변동이요 차고 더움의 정기니, 나누면 한 이치가 만 가지로 다르게 나타나고 합하면 한 기운일 따름입니다."
서 지사는 신사께서 스스로 문맹(文盲)의 일자무식꾼이라 자처한 뒤에 이러한 설법을 듣고 처음에는 거짓말하신 것으로 알았다가 다음 순간에 문득, 깨우쳤답니다. 이는 글을 읽어 얻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게 된 것이라고. 사대부처럼 사서삼경을 통독한 것이 아니라, 시골 농투성이나 나무꾼이 깊이 생각하고 뼈를 깎는 체험 끝에 얻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한즉 사람이 바로 하늘이요 하늘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하늘에 있고, 하늘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있지요. 그러한즉 마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마음이 없습니다. 하늘과 마음은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니 마음과 하늘이 서로 어기면 사람들이 모두 시천주(侍天主)라고 말할지라도 저는 시천주라고 이르지 않으리다. 천지는 한 기운 울타리입니다. 기운은 혼원이요 마음은 허령하니 조화가 무궁한 것입니다.
서 지사는 그날 입도했고 신사께서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셨던 것입니다. 손천문 도인은 아전 출신으로 학식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도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우리가 찾아갔던 한 해 전에 입도했다고 합니다. 그이는 그때로부터 죽는 날까지 스승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 말씀과 행적을 꼼꼼히 기록하였지요. 서일수 지사는 그때부터 손 도인과 막역지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제 원막골을 떠난 지 석 달 뒤에 관아의 탐지와 기찰이 촉박하여 신사와 측근 도인들은 전라도 익산으로 피신하여 여름을 났는데 이때에 서일수 도인이 주선하여 여름을 함께 났다지요. 신사께서는 이후 상주에 초가삼간을 사서 함께 도피하여 다니느라 피로한 가족을 이사 시키고는 측근 몇 사람과 공주 산간 암자에서 사십구일 기도를 올리고 다시 보은으로 그리고 청주 진천을 돌아서 공주 마곡사를 거쳐 경상도 영천을 거쳐 상주로 되돌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본 그 일 년 반 동안의 스승님의 숨 막히는 도피 행로였지요. 매달마다 위기가 아닌 적이 없으며 뒷간에 들었다가 기찰을 면하고 뒷산으로 도망치기도 하고 제자들이 일부러 잡히면서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간신히 빠져나가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서일수 도인이 스승의 별명을 최 보따리로 부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열아홉에 손 씨와 혼인하여 종이쟁이로 호구하시다 대신사를 뵙고 그를 따르게 되셨으며 법통을 잇게 되지요. 대신사 순교 후에 식구를 이끌고 숨어 다녔으나 임효의 거사가 벌어지고 나서 부인 손 씨와 두 딸은 단양 옥에 하옥되어 생이별합니다. 도피하던 신사는 거의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삼 년여 동안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매다가 그이를 수발할 사람으로 도인이 중매하여 김 씨 부인과 혼인하여 안정을 찾게 되지요. 신사와 김 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최솔봉입니다. 나중에 서일수 대행수와 동서 간이 되지요. 아무튼 오 년 만에 행방이 묘연하던 첫 부인 손 씨가 유랑민 행색이 되어 딸과 함께 스승님을 찾아 왔습니다. 아무튼 이들 부인들은 고난의 시기에 차례로 명을 달리했습니다.
서일수 도인은 처음 입도하자마자 포교에 힘썼고 각 지역 대두들과 스승님 사이를 연결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가 병술년에 도인이던 청주 음 씨의 첫째 딸과 혼인했고 나중에 그 둘째 딸이 신사의 아드님 솔봉과 혼인했던 것이지요. 이 무렵에 서일수 도인은 손천문 도인과 더불어 스승님을 모시고 강원도 정선에 가서 사십구일 기도를 함께 올렸습니다. 신사께서는 이 해에 회갑이셨지요. 스승님께서 일찍이 개벽운수(開闢運數)와 부화부순(夫和婦順)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운수는 천지가 개벽하던 처음의 큰 운수를 회복한 것이니 세계 만물이 다시 포태의 수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경에 말씀이 있기를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가장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 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개벽의 운이요 개벽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새 하늘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 성한 것이 오래면 쇠하고, 쇠한 것이 오래면 성하고, 밝은 것이 오래면 어둡고, 어두운 것이 오래면 밝나니 성쇠명암은 천도의 운이요, 흥한 뒤에는 망하고 망한 뒤에는 흥하고, 길한 뒤에는 흉하고 흉한 뒤에는 길하나니 흥망길흉은 인도의 운이니라. 봄이 가고 옴에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변하는 운이요,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감에 만물이 나고 이루는 것은 동하는 운이요, 황하수가 천 년에 한 번 맑음에 성인이 다시 나는 것은 천도와 인도의 무궁한 운이니라.
세상 만물이 나타나는 때가 있고 쓰는 때가 있으니, 달밤 삼경에는 만물이 다 고요하고, 해가 동쪽에 솟으면 모든 생령이 다 움직이고, 새것과 낡은 것이 변천함에 천하가 다 움직이는 것이니라. 동풍에 화생하여도 서풍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나니 서쪽 금풍이 불 때에 만물이 결실하느니라. 운을 따라 덕에 달하고 시기를 살피어 움직이면 일마다 공을 이루리라. 변하여 화하고, 화하여 나고, 나서 성하고, 성하였다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나니, 움직이면 사는 것이요 고요하면 죽는 것이니라. 낮이 밝고 밤이 어두운 것은 하루의 변함이요, 보름에 차고 그믐에 이지러지는 것은 한 달의 변함이요, 춥고 덥고 따스하고 서늘한 것은 한 해의 변함이니라. 변하나 변치 아니하고, 움직이나 다시 고요하고, 고요하나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와 기의 변동이요, 때로 변하고 때로 움직이고 때로 고요한 것은 자연의 도이니라.
선천이 후천을 낳았으니 선천 운이 후천 운을 낳은 것이라, 운의 변천과 도의 변천은 같은 때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운인즉 천황씨가 새로 시작되는 운이요, 도인즉 천지가 개벽하여 일월이 처음으로 밝는 도요, 일인즉 금불문(今不聞) 고불문(古不聞)의 일이요, 법인즉 금불비(今不比) 고불비(古不比)의 법이니라. 이 운은 동방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니 동방은 목운(木運)이라 서로 부딪히면 불이 일어날 것이라. 이 세상의 운수는 개벽의 운수니 천지도 편안치 못하고, 산천초목도 편안치 못하고, 강물의 고기도 편안치 못하고, 나는 새 기는 짐승도 다 편안치 못하리니, 유독 사람만이 따스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으며 편안하게 도를 구하겠는가. 선천과 후천의 운이 서로 엇갈리어 이치와 기운이 서로 싸우는지라, 만물이 다 싸우니 어찌 사람의 싸움이 없겠는가. 천지일월은 예와 이제의 변함이 없으나 운수는 크게 변하나니, 새것과 낡은 것이 같지 아니한지라. 새것과 낡은 것이 서로 갈리는 때에 낡은 정치는 이미 물러가고 새 정치는 아직 펴지 못하여 이치와 기운이 고르지 못할 즈음에 천하가 혼란하리라. 이때를 당하여 윤리 도덕이 자연히 무너지고 사람은 다 금수의 무리에 가까우리니 어찌 난리가 아니겠는가. 어느 때에 우리 도가 세상에 드러나려나. 산이 다 검푸르게 변하고 길에 다 비단을 펼 때요 만국과 교역할 때이니라. 때는 다 그때가 있으니 마음을 급히 하지 말라.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때가 오리니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모두 물러가는 때이니라.
멀리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 한 것도 나요, 내 마음을 그 땅에 보내라, 한 것도 나요, 내 몸으로 화생한 것을 헤아리라, 한 것도 나요, 말하고자 하나 넓어서 말하기 어려우니라, 한 것도 나요, 내 마음의 밝고 밝음을 돌아보라, 한 것도 나요, 이치가 주고받는 데 묘연하니라, 한 것도 나요, 나의 믿음이 한결같은가 헤아리라, 한 것도 나요, 내가 나를 위한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니니라, 한 것도 나니, 나 밖에 어찌 다른 한울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바로 한울이라 한 것이니라.
부화부순은 우리 도의 첫번째 가는 종지(宗旨)이니라. 도를 통하고 통하지 못하는 것이 도무지 내외가 화순하고 화순치 못하는 데 있느니라. 내외가 화순하면 천지가 안락하고 부모도 기뻐하며, 내외가 불화하면 한울이 크게 싫어하고 부모가 노하나니, 부모의 진노는 곧 천지의 진노이니라.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하늘을 공경하는 것과 제사를 받드는 것과 손님을 접대하는 것과 옷을 만드는 것과 음식을 만드는 것과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과 베를 짜는 것이 다 반드시 부인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사람은 천지의 화한 기운이요, 남녀가 화합치 못하면 천지가 막히고, 남녀가 화합하면 천지가 크게 화(和)하리니 부부가 천지란 이를 말함이로다. 여인은 편성이라 혹 성을 내더라도 그 남편 된 이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절하라. 한 번 절하고 두 번 절하며 온순한 말로 성내지 않으면 비록 그 어떤 나쁜 정도 반듯이 화할 것이니 이렇게 절하고 또한 절하라."
서일수 대행수가 스승님의 아들인 솔봉과 차례로 신도의 첫째 둘째 딸과 혼인하였고 이때로부터 전라도 지역의 포교에 힘을 기우렸습니다. 당시에 이신통은 아직 입도하지는 않았지만 삼남 지방을 떠돌며 광대물주를 하던 중에 서 행수와 가끔씩 만났다고 전해 들었지요. 그러다가 전국적으로 민란이 다시 일어나던 기축년에 이신통은 입도하여 서 행수와 더불어 호서 지방의 도인 대(隊)와 접(接)을 조직하던 중에 영동 민란에 터무니없이 연루되어 뒷돈을 주고 풀려났지요. 그러나 관에서는 이미 서 행수의 행적을 포착하고 뒤를 밟다가 청주 근방에서 체포하였습니다. 그는 사문난적의 포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당시에 이신통이 은밀하게 한양에 뒤따라 올라가 그를 뒷바라지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만, 제 아우는 잘 알고 있을 거외다."
박인희는 갑오 난리 때에 아우가 농민군을 일으켜 내포 일대를 휩쓸고 위로 북대와 남대가 공주를 공격할 적에 바로 이웃인 홍성을 공격하다 참패하고 쫓기게 된 이야기를 했다. 천지도 병란이 꺾인 뒤에 인근 사방에서 학살당한 양민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또 울음을 참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의 권유로 하룻밤을 유숙하고 예산 원마을을 떠났다. 그의 아우가 강원도 횡성 소구니골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밀히 전해주었고 나는 이제 이신통의 등덜미에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곧 그의 뒤꿈치를 밟을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다가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여에서 객점 식구들과 만나 집에 돌아와서도 하루 이틀 그냥 보내는 것이 못내 안달이 나서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안성방의 아낙인 부여댁이며 찬모 어멈과 막음이와 장쇠가 있고 밥 부쳐 먹는 곁꾼들도 네댓 명이나 되었지만 아무래도 주인이 자주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하여 안 서방과 의논을 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장쇠만 데리고 갔다 와도 됨 직한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쇠도 이젠 많이 컸고 세상 물정도 제법 알게는 되었지만 어찌 아씨와 이 서방의 심정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천지도 측에서도 저는 우금치 싸움도 겪은 바가 있어 믿어주지 않겠습니까? 이 일이 나라에서 철천지로 미워하는 천지도 일이 아니라면 저는 누가 뫼시고 가든 염려하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여댁에게도 잘 말씀드려주세요."
"우리 식구가 곧 이 댁 혈족인데 무슨 말 하구 말구가 있겠습니까? 저도 월말에 길을 떠날까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안 서방과 나는 세마를 내어 갱갱이에서 서북으로 청주 충주를 거쳐서 원주까지 나흘 길의 고된 여로를 지났고 원주에서 하루 온종일 쉬고 나서 횡성에는 한낮에 당도하였다. 읍치를 지나 동쪽을 향하여 산을 끼고 개천이 흐르는 길을 걸어 소구니골 어구에 당도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와 둥글게 닳은 돌 사이로 계곡물이 기운차게 흘러내렸고 골골마다 웅덩이가 있었다. 우리는 다락 논에서 일하던 농부에게 물어 소구니골을 찾아 북쪽 골짜기로 들어갔다.
십여 리를 올라가 숲이 우거진 골짜기 안쪽에 집이 몇 채 보이고 산비탈에 다락논과 밭이 있으니 개간지로 보였는데 이런 동네라면 누가 살더라도 바깥에서 나그네가 일부러 찾아오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우리가 소나무 울창한 숲 안의 너와집을 기웃거리는데 한 계집아이가 뒷전에서 외쳤다.
"누굴 찾으세요?"
안 서방이 먼저 아이에게 되묻는다.
"여기 어느 집이 박 선비의 집이냐?"
"어디서 오셨는데요?"
아이는 다시 그 물음을 되돌려주었고 이번에는 내가 나섰다.
"우리는 예산에서 박 초시를 뵙고 이곳에 아우님이 사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이 댁 선비님의 동무 되는 사람 아내라우."
안 서방이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
"박 씨 성에 도 자 희 자 쓰는 어른 댁이 어디냐?"
"잠시 기다려보세요."
계집아이가 말하고는 산속으로 뛰어가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나와 안 서방은 너와집 방문 앞에 길게 잇댄 툇마루에 잠시 걸터앉아 있었고 잠시 후에 아이가 사라졌던 방향에서 고의 등거리와 짧은 잠방이 차림의 농부가 흙 묻은 맨발로 나타났고 뒤에는 치마를 정강이 위로 치켜 올려 매고 머릿수건을 쓴 아낙이 뒤를 따랐고 계집아이도 깡충거리며 뛰어왔다. 농부가 먼저 당도하여 얼른 일어나 예를 차리고 섰던 우리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신 뉘십니까?"
"예, 저는 이신통의 아낙입니다. 예산에서 박 초시님을 만나 뵈었더니 이곳을 알려주셔서……"
"아 그러시군요. 저는 박도희라구 합니다. 이 서방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입니다."
"바쁜 철에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니 뭐 이곳은 산간이라 봄 농사가 조금씩 늦습니다. 논과 밭이라고 열 마지기에 온 식구가 달라붙어 일해야 겨우 한 해 농사로 밥을 먹지요. 가족이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 이것도 저의 분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 앉았고 박도희가 들어와 앉자 서로 맞절하여 정식으로 인사했다.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열대여섯의 총각 처녀가 모두 일하다 돌아오는지 저희 부모와 같은 차림이었고, 그들은 흙발이라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하고 열린 문 앞에 늘어서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거였다. 박 선비가 방문을 닫고는 형님의 안부를 물었고 내가 고향 소식을 전하니 그도 돌아앉아 눈물을 감췄다. 박 선비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지난 얘기를 꺼냈다.
"입도했던 그해 말에 이 서방은 영동 옥에서 풀러난 뒤 서일수 행수와 더불어 속리산의 암자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서 행수는 호서 지방의 도인들과 차례로 만나면서 동짓달까지 함께 있다가 이신통이와 하산을 했지요. 신통이 보은에 들러 자기 처남에게서 노잣돈을 받아 호남으로 내려갈 작정이었답니다. 이때에 스승님의 최측근이던 손 도인이 청주에 머물고 있다고 하여 서일수 행수가 청주로 갔지요. 청주의 국사봉 아랫녘에 솔뫼 마을이 있었으니 나중에 우리 도의 큰 은신처가 되었던 곳입니다. 스승님께서는 당시에 기찰을 피하여 괴산에 은거했다가 인제에서도 거처를 세 번이나 옮겨 다닐 무렵이라 측근 도인들도 매우 조심하고 있었지요. 서일수 행수는 이미 몇 해 전에 청주 율봉 역말의 음씨 댁 첫째 딸과 혼인하고 스스로 중신하여 둘째 딸과 스승님의 아드님을 혼인하게 하였지요. 그러한즉 청주에 가서는 장인 댁인 율봉 역말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서 행수와 손 행수는 각자 거처하던 곳을 떠나 성안 장터거리로 나와 이신통이 마련한 주막의 내외 방에서 하룻밤 유숙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시골 주막의 내외 방이란 대개가 곡식이나 메주 등속을 보관하는 골방이기 십상인데 다른 손님들과 부딪칠 일이 없어 안전하기도 합니다. 이신통은 먼저 율봉 역말에서 나와 방을 잡아놓고 솔뫼로 찾아가 손 도인께 알린 다음에 장터 초입에 있는 목로에서 서 행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때에 이 서방은 자신에게 기찰이 붙었다는 것을 아지 못하였지요. 나중에 서 행수가 잡힌 뒤에야 누가 지목한 것인지 알려졌습니다. 이 서방에게는 일찍이 의절하다시피 하고 집을 나간 이복형이 있었답니다."
"네, 이준이라고 청주 목에서 비장 직을 얻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이가 이신통 집안의 큰댁 소생으로 이복 남매를 종모법에 따라서 외갓집 노비로 추쇄하려 했다는 사실을 신통의 누이 덕이에게서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네, 그 사람이랍니다. 갑오년 난리 끝난 뒤에 제가 고향을 떠나서 이곳으로 정처 없이 흘러들고 다시 두 사람과 만나서 자세한 전말을 들었지요."
박 선비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당시의 이야기를 달과 해가 저물고 떠오르듯 순서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날 삼현육각이 울리고 퇴청 시각이 된 뒤에 관문을 나와 성안 장터거리로 갔다. 겨울 저녁 해가 재빨리 기울어 벌써 사방은 어둑어둑했고 민가의 창문에는 따뜻한 불빛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는 읍내의 유지인 향소 별감과 약조가 있었는데 새해가 오면 신임 목사가 올 것이라 관내 현의 밥술깨나 먹는 부자들에게 신구 목사의 전별비와 부임비를 할당하려는 논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외직은 삼 년 기한이었으나 요즈음 세상에서는 어찌된 노릇인지 반년도 못가기 일쑤고 이번에 일 년 반을 머문 청주 목사는 제법 오래 임지에 있었다고 아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청주에 그래도 먹을 것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라는 거였다.
장터거리는 한산했는데 파장이 훨씬 지난 저녁나절인 데다 날씨도 제법 추웠던 것이다. 그는 듬성듬성 행인이 오르내리는 장거리를 걷다가 문득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덧저고리 차림의 장돌뱅이 비슷한 자를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옆의 전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물건을 살피는 척하였다. 장돌뱅이가 그의 등 뒤를 지나쳐 갈 때에 이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이내 알아보았다. 아우 이신통이 틀림없었다. 이준은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쫓아가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반가운 말을 던지려던 참이었다. 신통이 두리번거리더니 방향을 돌려 마주 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준은 아우를 아는 체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고 신통이 지나갔다. 준은 자기가 어째서 아우를 순간적으로 피해버리는지 그 연유를 잠깐 생각해보았다. 부친 이의원의 격노한 얼굴이 떠올랐고 이준은 같은 또래의 외숙에게 이복동생인 신이 덕이가 외갓집 교전비의 소생임을 말하면서 노비송사를 부추겼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아우가 과거를 본다며 한양에 올라갔다는 소문은 전해 들은 적이 있었고 무슨 연고인지 장가를 들고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고 의원도 매제 송생에게 물려주게 하고는 계속 떠돌며 살아간다는 얘기도 들었다.
청주목 관아에서는 그동안 천지도의 번성 때문에 상관의 추달이 자심하여 전에 서학 교도들을 잡아들이던 사람들을 재편성하여 군교로 들이고 전담시키고 있던 시절이었다. 목의 비장인 이준은 잠깐 토박이 관아치로서의 호기심이 생겨났다. 도대체 저 녀석이 무슨 일로 청주에 나타났으며 누구를 만나려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신통의 뒤를 밟아 가다가 그가 장터 초입의 목로에 들러 요기 겸하여 탁주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분명히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조했음을 눈치챘다. 아니라면 그는 숙소를 잡든지 봉노에 들어 여러 행객들과 겸상을 받아먹었을 터였다. 이준은 목로가 내다보이는 건너편 전방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마른 나물에 버섯 호두 잣 대추 곶감 같은 견과물에 건어물 등속을 맷방석과 채반에 그득히 쌓아두었는데 그도 알 만한 장사치의 가게였다.
주인이 알은체하고는 웬일이냐며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쉿 소리까지 내고는, 지금 기찰 중이라고 속삭였다. 갓을 깊숙이 내려쓴 키가 훤칠한 자가 목로로 들어서서 아우와 만나는 것을 보자마자 이준은 곧 쪽지를 적어서 점원 아이에게 내주며 관아에 알리라고 전했다. 담배 한 죽 태울 시각에 군교가 사령 두 사람을 데리고 당도하였는데 그는 전부터 천지도인들의 뒤를 밟았던 경험이 많은 자였다. 그는 슬쩍 들어가서 막걸리 한 잔 시켜서 마시고는 곧장 나왔다.
"두 놈 모두 심상치 않아 보입디다. 이 골 사람도 아니고 장사치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끌고 가서 문초를 해볼 만합니다."
이준은 군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를 피하여 관아로 돌아갔고, 군교 사령들은 목로에 들어가 두 사람의 호패를 조사한 다음 물을 것이 있다며 관아로 가자고 하였다. 서일수가 버티면서 언성을 높였다.
"여보, 호패를 보았으면 됐지 뭘 하러 관가에 간단 말이오?"
"허어 이 사람이…… 관인이 가자면 순순히 따라올 것이지 화를 내구 그러우. 요즈음 근처 현에서 화적이 들어 경계 중이라오. 곧 끝날 것이니 잠깐 갑시다."
군교가 좋은 말로 구슬리자 서일수는 신통을 돌아보고 말했다.
"자네는 여기 기다리구 있게. 내 얼른 갔다가 올 테니……"
그러나 그런 말에 넘어갈 군교가 아니었다.
"아니 두 사람 다 갑시다."
그러한 때에 손천문은 영문도 모르고 이신통이 잡아놓고 알려준 주막의 내외방에 들어가 곰방대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하는 수 없이 군교 사령에게 등 떠밀려 목로주점을 나섰고 장터 길로 걸어갔다. 뒷전에 세 군병이 바짝 붙어서 뒤따르고 있었는데 갈래길이 나오자 갑자기 이신통이 걸음을 멈추더니 바로 옆으로 다가서는 군교의 목덜미를 껴안아 허리치기로 넘기면서 서일수에게 말했다.
"달아나우!"
서일수는 엉겁결에 앞을 막아서는 사령의 가슴을 주먹으로 지르고 옆길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군교는 넘어졌다가 얼른 일어나며 부하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그놈 놓치지 마라!"
사령들이 서일수의 옷자락을 잡아채며 육모방망이로 뒤통수 어깨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자 그는 땅에 엎어졌고 군교가 서일수의 팔에 오라를 묶었다. 이신통은 그들이 서일수에게 몰린 틈을 타서 멀찍이 달아날 수 있었다. 그들은 서일수를 질청에 있는 형방의 추청에 끌고 갔고 우선 분풀이 겸하여 형리들과 더불어 서일수에게 몽둥이 타작을 퍼부었다. 잠시 내버려두었다가 불러오게 했던 기찰꾼이 들어오자 서일수를 일으켜 앉혔다. 기찰꾼이란 이전에 천지도에 들었다가 일단 경을 치는 대신 관에 붙어서 도인들을 잡아내는 일에 협조하게 된 자들이었다. 개중에는 공을 세워 직임 없는 벼슬을 받기도 했고 어떤 자는 부장이나 종사에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그런 출세를 노리고 일부러 도인이 되어 대와 접에 접근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가 기진맥진한 서일수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는 얼른 추청 밖으로 나갔고 군교가 따라 나갔다.
"틀림없소. 저 사람은 대행수라는 자요. 내가 전의에서 모임에 참례했다가 저 사람이 도리를 가르치는 걸 본 적이 있소."
기찰꾼이 말했고 군교는 얼굴이 벌게졌다. 질청에서 기다리던 이준이 마당에 나와 군교에게 물었다.
"뭐라든가?"
"저 자는 천지도의 대행수랍니다."
"같이 있던 녀석은 어찌 되었나?"
군교는 거기서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혀를 가볍게 차고는 말했다.
"저놈을 잡는 사이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준은 어쩐지 섭섭한 가운데도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안전께 알리고 형방 비장 불러서 추국을 벌여야겠네."
이신통은 그 길로 방을 잡아두었던 주막으로 달려가 손천문 대행수를 불러내어 솔뫼에는 들르지도 않고 밤새 걸어서 청주목 경계를 벗어났다.
서일수는 이튿날 청주 목사가 임석한 가운데 고신(拷訊)을 받았고 스스로 천지도인임을 밝혔으나 교주 최경오의 은신처와 본부 도방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었다. 목사는 서일수의 인적사항과 입도 경위며 활동 내력 등 기초적인 것들을 조사한 추국문을 첨부하여 장계를 올렸다. 보고는 공주 감영을 거쳐서 한양으로 올라갔고 곧 이어 의금부로 압송하라는 명이 하달되었다. 그해 말에 서일수는 청주 목에서 역마 편으로 한양까지 압송되었다.
이신통이 이 무렵에 손천문을 따라 강원도 간성에 은거하고 있던 신사를 뵈었고 대책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신사는 한 달에 한 번씩 거처를 옮겨 다니며 지목을 피했다. 신통은 도력이 일천한 신도였지만 서일수와 도경을 출간하고 각종 언해본을 필사본으로 써서 널리 알린 일로 이미 본부 도방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고 특히 신사의 측근인 손천문의 신임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신통이 서일수를 구명할 방도를 찾아 한양에 올라간 것은 그가 체포된 지 한 달이 지난 이듬해 정월 말이었다. 신통은 실로 여덟 해 만에 애오개 쌍버드나무집 객점을 찾아갔으니 경주인은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가 서일수의 행적을 찾아온 연유를 말하고 군란 당시의 일을 얘기해주니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반겨주었다. 주인은 벌써 반백의 중늙은이가 되었는데 위로 해서는 물론 서북 관북 지방에까지 천지도가 퍼져 나갔고 삼남 지방은 탄압이 심하여도 일반 도인들의 왕래는 활발하여 애오개와 칠패 시장에 각 지방의 물산을 내어 객점은 그런대로 성업 중이었다. 그는 옆집까지 사들여 객점을 넓혀놓았고 객점에서는 절대로 기도를 한다든가 밥을 먹을 때에도 천고를 하지 않았다. 그는 서일수의 체포와 심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신통에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서 행수가 신사의 거처에 대하여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네. 그이가 지목했던 곳을 지방 관아에서 탐문하였으나 이미 산간의 집을 온 식구 솔가하여 비운 뒤여서 종적을 찾지 못했다지."
하더니 주인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찍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서 행수는 주뢰형을 받아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네. 형문을 견디고 지금은 사형수 방에 있으니 한시 바삐 그이를 구명할 방도를 찾아야겠네."
"전옥서에 연줄은 있습니까?"
"내가 서일수 도인이 잡혀 왔음을 어찌 알았겠나? 하루는 저녁나절에 웬 사람이 나를 찾아왔네. 그가 내게 서일수란 이를 아느냐고 묻더구먼. 내가 그를 모를 리가 있나. 서 도인은 난리 뒤에도 가끔씩 한양에 올라와 우리 집에 머물렀거든. 자네 유영길이라구 아는가? 군란 때에 자네들을 알게 되었다던데."
신통은 김만복과 함께 처형당한 유춘길 별장을 기억해냈고 당시에 그의 동생 유영길은 달아나서 처벌을 모면했던 것도 생각이 났다.
"예, 알 듯합니다."
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그 사람이 지금 서린 전옥서의 옥사장이라네. 그이가 예전의 의리로 서 도인을 보살펴주고 있으나 언제 처형될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손을 써야 하네."
신통은 그를 구명해내는 일은 신사와 본부 도방의 모든 대행수들의 한결같은 염원이라고 말했고 이튿날 오전에 객점 주인이 유영길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전갈을 받은 유영길은 다음 날 퇴청 시각 이후에 애오개로 이신통을 찾아왔다. 그들은 주인 방에서 함께 반주 한 잔을 나누며 논의했다.
"사형 처결이 내려졌으나 대시수(待時囚)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요. 이는 바꿔 말하자면 도형수(徒刑囚)로 감형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도형수로 감형이 된다면 유배형이 되겠군요?"
그렇소, 사형 아래가 극변위리안치 형이니 그렇게 되면 목숨은 건질 수가 있소이다. 유배형만 떨어진다면 그다음엔 미리 손을 써서 도중에 빼낼 수가 있겠지요."
"그러면 감형을 시킬 방도가 없을까요?"
"천지도는 예전 천주학의 사례에 비추어 사문난적으로 다루는 죄인데 적어도 당상관 정도는 되어야 말을 낼 수가 있겠지요."
유영길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신통에 물었다.
"혹시 전에 대원위 대감 댁의 호종무사였던 허민이란 이를 뵌 적이 있습니까?"
"아,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서 지사님은 군란 때 얘기를 꺼내면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거요. 서 지사와 나와 김만복 별장이 함께 대원위 대감을 뵙고 하소를 올렸으니까. 허민 무장은 지금 운현궁 호종감을 맡고 계시니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유영길은 형이 처형된 뒤에 강원도로 피신했다가 중국에 억류되었던 대원군이 돌아온 뒤에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고, 같은 무렵에 예산으로 내려가 남연군 묘의 참봉을 하며 은거했던 허민도 운현궁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유영길이 가족을 수습하고 이나마 하급 관직을 얻게 된 것도 허민의 도움이 있었던 때문이라 하였다. 이신통과 옥사장 유영길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우선 내일은 당장에 전옥서로 찾아가 아저씨 접견을 하고 나서 운현궁에 통자해 볼까 합니다."
"접견이야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운현궁에는 나하구 함께 가야 할 거요."
이튿날 늦은 오전에 신통은 객점 경주인과 함께 서린 전옥서를 찾아갔고 신통은 이전에 박도희를 만나러 드나들던 기억이 새로웠다. 경주인은 삼층 찬합에 여러 가지 밑반찬을 해왔고 따로 옥전거리의 상밥집에서 주문을 했다. 그들이 옥리에게 알리자 미리 알고 있었는지 순순히 쪽문을 열어주었고 이전에 박도희를 원옥에서 불러내어 음식을 먹이던 상방 마루에서 서일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주 보이는 곳은 죄수들의 식사처요 높은 담장이 가로막혔는데 또한 쪽문이 보였다. 이쪽의 바깥을 가로막은 담에 붙여서 지은 지붕만 있는 칸막이들은 가족들이 죄수들에게 밥을 차입해주는 곳이었다. 불려나오기 시작한 죄수들이 칸막이마다 몰려서자 옥리들이 바깥으로 낸 창문을 막아놓았던 널판자 덧문의 고리를 벗겨내고 활짝 열었다. 서로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찾다가 식구들과 죄수가 만나면 보퉁이에 싸온 떡이며 찬이나 장에 곁들인 주먹밥 등속을 들이밀었고 옥리들은 조용하라고 으름장을 올리며 꾸짖곤 했다. 신통과 경주인이 마루에 앉아 기다리려니 서일수가 옥리의 부축을 받으며 쪽문으로 나왔다. 신통이 달려들어 서일수를 껴안았다.
"아저씨, 이게 무슨 고생이우."
서일수는 비칠거렸다가 신통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슬그머니 밀어내고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싱긋 웃었다.
"자네 신수가 훤하구먼."
경주인은 며칠에 한 번씩 만나던 처지라 그냥 고개를 끄떡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뒷전에는 전옥 아래 두번째 책임자인 옥사장 유영길이 따라왔다. 방에 들어가 앉자 신통은 여러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는 않았고 그냥 이렇게 얘기했다.
"모두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저씨를 구명해내야 한다고 이르셨지요."
"고마운 일일세."
옥사장은 곁에 옥리가 있어서 자세한 얘기는 늘어놓지 않고 한마디 거들었다.
"조만간 좋은 일이 있지 않겠소?"
옥전거리 밥집의 중노미가 채반에 담은 상밥을 머리에 이고 들어와 펼쳐놓았고 서일수는 거위병에 담긴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그는 경주인을 돌아보며 한마디했다.
"우리 칸에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떡이나 사서 좀 들여주고 가우."
"허어, 매번 그놈들까지 먹이려는 구려."
옥사장이 투덜거리자 서일수가 말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굶주림이야 어찌하겠소. 내가 바라지 받으러 나올 때마다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는데."
"염려 마오. 우리가 나가다 떡집에 차입하라고 당부하리다."
접견을 끝내고 경주인은 애오개 객점으로 돌아갔고 이신통은 옥사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부근에서 요기를 했다. 두 사람은 종루 거리를 올라가 철물교에서 관인방 쪽으로 올라갔고 운현궁에 이르렀다. 가끔 들렀던지 유영길이 익숙하게 대문간에서 하인에게 일렀고 두 사람은 허술청으로 안내되었다.
허술청에도 격이 있어 이름난 양반이나 관직이 있는 사람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큰사랑 쪽으로 갔지만 허물없이 드나드는 중인 이하의 아랫것들은 행랑으로 내려갔다. 행랑의 가장 큰방이 작은사랑인 셈이었는데 대개 식객들 중에 풍채가 있는 자들이 돌아가며 손님맞이를 하기 마련이었다. 유영길이 행랑 사랑채로 이신통을 데려갔는데 때는 대원위 대감의 세가 전보다 떨어져 왕족의 체통만 지키고 있던 무렵이라 방문객이 많지는 않았다. 안쪽에 서랍책상을 놓고 단정히 앉아 있던 사람이 그들을 내다보는데 눈빛이 쏘는 듯하였다. 이신통은 그 사이 전국 각처로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세월이 십 년 가까이 되어서 인상을 보는 눈썰미가 생겼다. 신통은 그 사람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볕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얼굴에 붓끝 수염이었으나 눈빛이 또렷하게 빛났다.
"영장님 계십디까?"
"대감께서 출타하셔서 모시고 나갔으나 저녁 전에는 돌아올 걸세."
그의 목소리는 외모와 달리 컬컬한 쇳소리였다. 유영길은 신통에게 일렀다.
"예서 좀 놀다가게 생겼군. 내 나가서 마실 거라도 좀 챙겨 오리다."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신통이 먼저 객으로서 자신의 출신 성명을 밝히며 인사를 청했고 작은사랑을 지키고 있던 사람도 맞받아 예를 차렸다.
"정읍 고부에서 온 김봉집이라구 하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죽게 된 친척 아저씨 일로 청원이나 하고자 와 보았습니다."
김 서방은 무덤덤하게 바라보더니 한마디하였다.
"그러면 지금 처결을 받아 옥에 갇혀 계신 거요?"
"예, 의금부 고신을 끝내고 대시수 옥에 갇혀 계시지요."
신통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야흐로 난세인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정말 죽일 놈들은 모두 벼슬아치들이지요. 청은 물론 양 왜가 함부로 들어와 나라의 이권을 제각기 도적질해가는 판인데 힘없는 백성들 등이나 치려고 벼슬을 사고 파니 망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신통이 김봉집의 말을 듣고 보니 의기가 있는 사람이었고 이쪽이 중죄인의 가족이라는 데도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이 기이해 보였다.
"이곳엔 어인 일로 와 계십니까?"
"글을 읽고 배운 지 삼십 년이 넘어서 시골 훈장으로 연명하며 과거도 치러 보았으나 다 쓸데없는 일입디다. 과장이 난장판이 된 것이 벌써 백 년이 넘었다오. 시골에 살면서 부패한 관리와 잘못된 조세에 대하여 감영에 소도 올려보고 끌려가 곤장도 맞으며 살다가 처음에는 청원하러 이곳을 찾았소. 이 댁 수집사가 몇 다리 건너 아는 분이라 들렀더니 집안일을 도와주며 지내다보면 작은 자리라도 포부를 펼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 그럽디다. 부끄럽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인 줄 속으로 잘 알면서도 하루 이틀 하다가 일 년이 넘었소 그려."
둘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유영길 옥사장이 잘 아는 하인에게 소반을 들려 들어왔다. 소반 위에는 마른안주와 술병과 잔이 놓였다. 민어포에 생률이며 대추 등속이 안주고 술은 소주였다. 세 사람은 상머리에 둘러앉아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몇 잔을 나누어 마셨다. 저녁참이 되어가는데 바깥에서 술렁이는 인기척이 들리더니 대감의 초헌(軺軒)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황급히 술상을 방구석으로 밀어버리고 모두 마루 아래로 내려와 읍하고 섰으며 대감의 행차는 곧바로 중문을 지나 안사랑인 노안당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중문 밖 큰사랑 작은사랑 행랑채에 밥상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들도 식객과 손님들 틈에 끼어 저녁을 얻어먹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서야 허민이 안에서 나와 큰사랑에서 그들을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유영길이 신통을 데리고 허민에게 현신하였다.
"영장님 기간 평안하셨소이까."
"그래, 자네두 지낼 만한가?"
"덕분에 무고합니다. 실은 근래에 저희 옥에 서일수가 잡혀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조카되는 사람이지요."
영길이 곁눈질하여 이신통이 절하고 출신 성명을 밝히니 허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고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서일수가 누구던가?"
"아니, 그 군란 때 죽은 김만복이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서 지사를 기억하시지요?"
"음, 그래 자네하구 김별장과 같이 와서 대감마님을 뵈었지. 헌데 이제 와서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어 옥에 갇혔단 말인가?"
유영길이 다시 신통을 돌아보았고 그는 얼른 대답을 했다.
"삼촌은 천지도에 입도하여 포교 중에 체포되었습니다."
순간 허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신통을 바라보았다.
"천지도라…… 자네도 도인인가?"
신통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저도 도인입니다. 저희는 서교와는 달리 조선 백성을 위하여 척양척왜 하고 만백성이 상생하는 나라를 이루는 것이 오직 소망이올시다. 일세 교주께서 사문난적의 오명을 쓰고 처형된 이후 신원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방 각처에서 도인들은 함부로 살해당하고 임의로 가산 몰수를 당하는 등 핍박을 받으며……"
허민은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말을 자르며 신통에게 물었다.
"그래, 너희 도인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되는가?"
"북으로 서북 관북 해서 지방에서 근기 지방은 물론이요 남으로 삼남에 이르기까지 백만이 넘을 것입니다."
허민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 나라에서 너희를 잡아 죽이려는 것이다. 너희 도가 정말로 척양척왜를 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다면 조정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내가 대감마님께 여쭈어보기는 하겠다. 무슨 방도가 있겠지."
유영길이 눈치를 채고 물러서서 나오려는데 허민이 말했다.
"자네는 나하구 잠깐 얘기 좀 하세."
신통은 혼자 큰사랑에서 물러나오고 유영길은 한참이나 있다가 작은사랑으로 돌아왔다. 사랑에는 김봉집은 안으로 물러가고 신통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구명할 길이 생길 것 같네."
이신통이 듣기로 서일수를 대시수에서 도형수로 낮추려면 적어도 형조나 의금부의 재심이 있어야 할 텐데 요즈음 시국이 그러한 중죄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감형할 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권도(權道)를 쓸 수밖에 없는데 운현궁에서 의금부 판사에게 천지도를 무조건 탄압만 할 게 아니라 이번에 스스로 나라의 통치에 귀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고 권유는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유영길은 그러고 나서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어디 그게 맨입으로 될 일이우? 벼슬 사는 일보다도 사람 목숨 살리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오. 우선 이 댁에 한 오백 냥 들이고 전옥에도 이삼백 냥은 써야 할 테고 나중에 노상에서 풀리려면 나장 나졸들 행하로 백 냥은 써야 할 텐데……."
이신통은 돌아다니며 그런 일을 많이 겪어서 대뜸 알아먹었다.
"그러면 천 냥이 들겠군요."
"그게 사람 목숨 값이우. 이게 모두 예전 만복이 형님과의 인연 덕이외다."
이신통은 애오개 주막으로 돌아가 경주인과 상의했고 일단 천 냥을 마련해 보기로 하였다. 떠나올 때에 손천문 대행수와 연결할 집을 정해두었으므로 급주를 날려 사연을 알렸고 보름 만에 팔백 냥이 올라왔다. 나머지는 경주인이 이백 냥을 메워 간신히 천 냥 돈이 마련된 것이다. 신통은 그동안 운현궁에 가끔씩 들어가 작은사랑에서 판서도 도와주고 장부도 정리하며 수집사와 낯을 익혔고 무엇보다도 선비 김봉집과 친해졌다. 김 선비는 신통을 따라서 종루 거리로 나와 목로에서 술도 마시고 애오개 경주인 집에서 묵어가기도 하면서 천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깊숙이 듣게 되었다.
돈을 올린 지 다시 한 달이 지나서 이월 중순경에 유영길 옥사장에게서 전갈이 오기를 서일수가 도형수로 감형이 되었고 극변지 위리안치 형이 확정되었다는 거였다. 유배지는 나중에 알아보니 전라도 진도 옆의 금갑도(金甲島)라고 하였다.
호송 날짜가 정해지자 신통은 마지막으로 전옥서로 서일수 접견을 가서 그동안의 일을 대충 귀띔해주었다. 경기도계를 벗어나 충청도 접경에 이르러 어디서 풀려나는 게 좋은지 은밀히 논의하니 서일수가 생각해보고 진천쯤이 좋을 거라고 결정했다. 신통은 유배자의 조카로 귀양지에 이르기까지 죄인을 뒷바라지하고 그가 달아나면 책임을 진다는 약서를 내고 동행하기로 되었다. 사대부나 벼슬아치가 유배 가면 그의 하인이나 노비가 길양식을 지고 따라가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금부의 나장 한 명과 나졸 두 사람이 전옥서에서 죄인 인수를 받아 출발했는데 서일수의 주뢰형을 받은 다리가 아직 낫지를 않아서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원래가 죄인의 호송에는 각 지방의 역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서 한강을 건너 양재역에 이르러 간신히 역마를 구하였다. 걸음이 늦다고 투덜거리던 나졸들도 기분이 한결 편해진 모양이었다. 수원 가서 하루 묵었고 이튿날 안성을 넘어가 진천에 당도한 것은 짧은 해가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진 저녁이었다. 숙소를 잡기 전에 나장이 슬그머니 뒤로 처지더니 신통과 나란히 걸으면서 말했다.
"여기쯤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근기(近畿) 도계를 넘었으니……"
"아 예, 여기서……"
신통이 짊어지고 있던 행담을 벗어 이백 냥 꿰미를 내주었고 나장은 아무 말도 없이 건네받고는 앞서 걷던 나졸들에게 일렀다.
"짐을 내려라."
나졸들은 대번에 알아듣고 역마에 태웠던 서일수를 부축하여 내려주고는 뒤도 안 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미 판결도 떨어졌고 유배지의 죄수 인수서 한 장만 첨부되면 끝나는 일이라 금부의 담당 서리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이신통은 서일수의 옆구리를 끼면서 말했다.
"자아, 조금만 더 걸읍시다."
잠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은 관원들이 사라진 곳과 반대 방향으로 절뚝이며 걷더니 그들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천에 서 지사님이 수도하던 절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박 선비의 긴 얘기 중에 일부러 끼어들며 말을 돌리고자 하였다. 박도희 선비는 문득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벌써 방 안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을 보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허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두 분 시장하시겠소이다."
내가 눈짓하여 안 서방이 밖으로 나가서 세마에 싣고 온 부담에서 길양식을 꺼내어 부엌으로 갖다 준 모양이었다. 아들이 방문 앞에 와서 아버지에게 고했다.
"안 받겠다는데도 기어이 양식을 주십니다."
"돈을 드려야 할 것이나 그러면 너무 야박하다 하실 듯하여 과객들처럼 양식을 드린 것입니다. 앞뒤 경우가 있으니 받아주시고 댁에서 유숙하게 해주세요."
내가 공손하게 말하자 박 선비는 난처한 얼굴이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통 아우의 아낙이니 저에게는 제수씨가 되십니다. 산간의 궁핍을 보여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군요."
안방으로 건너가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은 뒤에 다시 옆방으로 돌아와 끊겼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 절이 진천 보적사입니다. 거기서 두 사람은 서 대행수의 부상당한 다리가 나을 때까지 두어 달 은거했다지요. 서 도인께서 걸을 수 있게 되자 두 사람은 신사의 행적을 찾아 간성 왕곡리에 피신하고 계신 스승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이듬해 인제로 옮기시고 연이어 한 달마다 은신처를 충주 양구 간성을 왕래하시다 홍천 공주 진천 그리고 경상도 금능과 충청도 공주를 오락가락하셨지요. 이신통은 그 무렵에 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녔다는데 서울 운현궁에서 만났던 김봉집이 고부 고향에 낙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그를 찾았다지요. 이때부터 서 도인과 이신통은 호남 서부 지방을 섭렵하고 다녔습니다. 호남에 퍼지기 시작한 교세는 마치 들불처럼 번져 나갔지요. 대신사께서 초기에 신사께 법통을 넘기시며 북대(北隊)를 맡으라 하신 이후 호남 지역이 어느 결에 남대(南隊)를 자처하게 되었으며, 세상 사람들은 물론 도인들까지도 남대 하면 즉 호남의 도인 조직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천지도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유생들은 남대를 서일수가 이루었다 하여 서대(徐隊)라고도 불렀다지요. 갑오년 난리 때에 남대의 대장이 된 김봉집은 일찍이 이신통이 다리를 놓아서 대행수와 만났고, 자신의 천지도 입도를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의 터전으로 생각했다고 그랬지요. 처음부터 세상을 변혁할 뜻을 품고 기꺼이 도에 입문했던 것이지요. 그는 법무아문 재판소에서 심문받을 적에 천지도는 마음을 닦아 충과 효로써 근본을 삼고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었음을 주장했지요. 또한 우리 도는 하늘의 마음을 지키고 받드는 것이어서 심신을 바칠 수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전라도에서는 여러 대행수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은 임진년 삼례의 교조 신원 모임에서였습니다. 물론 저도 당시에 삼례에 갔습니다. 교조 신원 활동은 처음에 서일수 대행수의 주장으로 시작되었는데 신사께서는 예전에 임효의 과격한 활동으로 십여 년 동안 포교의 지장을 받았고 관으로부터 서학보다 더한 탄압을 받았던 전례를 들어 이를 만류했습니다. 사실 남도에서는 죽다 못하여 민란을 일으켜서라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던 차에 울고 싶은 때에 뺨 때려주는 격이었거든요. 충청도 전라도의 관아에서는 천지도 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아 가두고 형장을 가하며 유배형에 가산 몰수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충청도 한 고을에서만도 형장을 당하여 죽거나 재물을 빼앗긴 자가 만여 명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고향을 떠나 가족이 생이별하고 타관 객지로 떠도는 이가 부지기수였지요. 전라도는 관의 탐학이 더욱 자심하여 각 고을마다 탐관오리들의 화를 당하여 죽어나가는 백성들이 넘쳐났습니다.
서 대행수 등 도인 천여 명이 의관 정제하고 엄숙하게 열을 지어 충청도 감영인 공주 관아로 들어가 건의문을 올렸고, 충청감사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천지도인에 대한 횡포와 침탈을 금하고 편히 생업을 영위케 하라는 하명까지 내렸지요. 우리는 다시 닷새 뒤에 각 지역 대두 행수들을 삼례역에 모이라 했는데 이때에도 서 대행수가 앞장을 섰고 고부 행수 김봉집도 나섰지요. 전라감사에게 건의문을 제출할 때에 김봉집이 자원하여 갔습니다. 전라감사 역시 각 고을 수령들에게 천지도인들의 가산을 탈취하는 것을 금하라는 하명을 내렸습니다. 교주 신원에 대하여는 양도의 관찰사 모두 언급하지 않았고 지방 고을에서의 교도 침탈도 여전했으므로 해를 넘겨 계사년 정월에 한양에 올라가 복합 상소할 준비를 했지요.
선발대로 서일수와 김봉집과 이신통이며 저도 올라갔고 상소의 전면에 나설 한양의 몇몇 행수와 각 지방의 젊은 도인들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서 대행수와 신통이나 저 같은 사람들은 관의 기찰에 드러난 바 있어서 애오개 경주인 집에 머물며 한양 거사의 봉도소를 운영하기로 했지요. 한편 김봉집은 대원군 댁에 식객을 살았던 적이 있어 은밀하게 그를 찾았던 모양입디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외다'라고 하였다는데 대원군 측은 그들대로 우리를 이용하여 정국의 변화를 꾀하였으나 서로 때가 맞지 않은 듯합니다. 이월 열하루 날 아침에 아홉 사람이 소장을 받들고 광화문 앞에 자리를 폈고 도인 천여 명은 광화문 앞에서 육조거리를 가득 메우고 꿇어앉았습니다. 각자 귀향하여 안업하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는 임금의 전언이 내려온 것은 오후 늦은 시각이었습니다. 그 전날 밤과 상소를 올린 날 이틀에 걸쳐 서일수와 신통과 근기 지역의 젊은 도인들이 척양척왜(斥洋斥倭)에 관한 방과 괘서를 사대문 부근과 운종가 그리고 피맛골에 이르기까지 수십 장이나 붙였습니다.
연이어 삼월에는 보은에서 교조 대신사 순교 기념을 겸하여 시위를 하였는데 전국 각처에서 삼만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각 대의 오색 기(旗)와 치(幟)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펄럭였지요. 이십여 일을 버티었지만 무장한 관군의 위협으로 충돌을 우려하여 자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북대와 남대 사람들이 처음으로 의기투합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지요.
그해 말에 김봉집이 군수의 탐학에 못 견디어 봉기했고 각 지역의 남대 대행수들도 함께 일어나 갑오년 난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내포 지역에서 도인들과 더불어 거병하여 처음에는 면천으로 진출한 일본군을 당진 구룡리에서 크게 이겼고 홍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나섰지요. 남대의 주력은 같은 무렵에 공주 감영을 치기 위해 우금치에 진을 쳤고 서일수는 청주성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패잔하여 구사일생이 된 다음에 이신통이 우금치에서 생환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서부 해안 고을과 내포 일대를 휩쓸던 농민군은 홍주성에서 대포와 양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저지당했지요. 이틀 낮과 밤을 싸웠으나 이름 있는 행수 대두와 젊고 날랜 민병들 수천이 전사했고 해미와 서산으로 몰려 마지막 전투에 패하고 흩어졌지요. 사정은 충청도 동쪽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관군과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패퇴했고 우금치의 패전 이후에 남도 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이어졌습니다. 실로 젊고 기백 있던 아까운 젊은이들이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마을의 부호와 유생들이 조직한 민보단에게 죽임을 당했고 쟁쟁한 대행수들이 잡혀 죽었습니다. 김봉집 이하 호남의 다섯 대행수가 모두 상금과 벼슬을 노린 친척이나 믿음을 버린 교도와 마을 사람들의 배신과 밀고로 잡혀서 일본군과 관헌에 의하여 한양에 잡혀 올라가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일부 신도들은 서일수와 김봉집의 거사가 신사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일이 벌어지자 신사께서는 '호랑이가 물려고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자' 하시면서 거병을 명하셨지요. 어느덧 삼 년이 흘렀거늘 이제 상처와 슬픔도 가시고 새살이 돋고 있으니 다시 하늘의 도를 천하에 펼치게 될 것입니다.
박도희는 말하다 스스로 숨을 삼키기도 하고 복받쳐 눈물도 흘렸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이야기의 고비마다 가슴을 졸이기도 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들었고, 마침내 이신통이 나와 평안한 살림을 펼치지 못하고 떠나게 된 그 심사를 헤아릴 수가 있었다.
"그러면 저는……"
하면서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이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박도희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고 있더니 나에게 말했다.
"만나면 또한 곧 헤어지게 될 터인즉 만나서 어찌하시렵니까?"
"박 선비님처럼 이렇게 산간에서 숨어 살아도 좋습니다."
내 말에 박도희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신통 아우는 저와는 지금 처지가 다릅니다. 그는 신사님 측근에서 그이의 말씀과 행적을 경전으로 쓰는 일을 맡았습니다. 천지도가 신원되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이신통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요. 그 일은 조선 팔도에서 죽어간 모든 천지도인들의 꿈과 소망을 짊어진 일입니다."
"그럼 이번에 한 번 만나면…… 그이의 일이 끝나기 전에는 다시는 찾으러 다니지 않으렵니다."
"그러시다면 저와 함께 길을 떠나십시다."
"예? 정말이요?"
나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앉았고 박도희가 말을 이었다.
"다음 달 사월 초닷새 날이 저희 천지도의 창도(唱導) 기념일인데 그날 신사께서는 몇몇 사람만 부르셨습니다. 관의 지목이 촉박한 중에 임시 거처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라 제가 다른 도인들의 핀잔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하겠습니까? 다만 혼자 따라오셔야 합니다."
곁에서 묵묵히 앉았던 안 서방이 입을 떼었다.
"제가 인근 고을까지 따라가서 기다렸다가 모시고 돌아오면 안 될까요?"
박도희는 안 서방이 우금치에서 이신통을 살려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잠잠히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겠군."
이미 날짜는 사월에 접어들었고 장소가 어딘지는 몰라도 이삼 일 길은 될 것이라 적어도 낼이나 모레쯤에는 길을 떠날 참이었다.
사월 초이튿날에 안 서방과 나는 박도희를 따라서 횡성을 떠나 원주를 지났다. 원주 강천면쯤에서 우리를 길가의 민가에서 다리쉬임 하도록 이르고 박 선비는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왔는데 아마도 현재 스승님의 거처를 도인을 통하여 다시 확인한 것 같았다. 문막 어름에서 하루 묵고 여주를 지나 남으로 내려가다가 가남 마을 부근에서 다시 하루를 묵었다. 박도희는 읍내의 주막에 들지 않고 민박을 했는데 기찰에 띄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길을 나서자마자 정봉산 아랫녘 두 갈래 길에서 앞서 걷던 박도희가 안 서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이녁은 이쯤에서 헤어져야겠소."
나는 안 서방이 견마잡고 왔던 세마에서 내려 그와 잠깐 논의를 하였다.
"관속들이 많이 사는 이천이나 여주 읍내보다는 장사치들이 묵어가는 장호원이 나을 듯합니다. 이 서방과 만나면 장호원 주막거리로 오십시오. 며칠이 지나든 아씨와 이 서방을 기다리구 있겠습니다."
"모임은 내일 하루라고 하니 모레쯤에는 장호원에 갈 수 있겠지요."
안 서방과 헤어진 다음 박 선비는 길에서 노성산이 어디인가를 묻고는 부지런히 남쪽을 향하여 걸었다. 정오도 못 되어 우리는 노성산 북편에 당도했고 나무꾼 아이에게 길을 물어 앵두골로 향했는데 양쪽으로 야산이 팔을 벌린 듯한 좁은 들이 끝나자 오르막이 되더니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왔고 누군가 길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는 아마도 우리가 언덕으로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 선비와 그이는 두 손을 합장하고 서로 인사를 했고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이 들렸다.
"저이는 웬 여자요?"
"얘기하자면 좀 깁니다만, 이신통 도인의 내자랍니다."
나는 신통의 이름이 그들 속삭임 가운데 들려오자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숲을 지나자 제법 널찍한 밭과 함께 초가집 몇 채가 동쪽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앞서 걸으며 뭔가 의논했는지 나를 일단 맨 앞쪽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 집에는 아기를 업은 아낙뿐이었는데 부엌에서 내다보다가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이분을 여기 좀 계시게 하오."
나는 어쩐지 야속했지만 아낙이 이끄는 대로 건넌방에 들어가 앉아서 새색시처럼 입 닫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되었을까, 인기척이 들리더니 방문이 조금 열렸다가 다시 반쯤 벌어지고 그이가 상반신을 내밀었다. 맨 두건에 덧저고리 차림 그대로 이신통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가만히 방문을 닫고 내 앞에 섰다. 그는 내 손을 잡아주거나 두 팔로 안아주는 대신에 엉거주춤 섰다가 언젠가처럼 두 손을 모으고 큰절을 올렸고 나도 당황해서 얼른 일어나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절을 했다. 우리는 동시에 허리를 폈고 그제야 신통이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어느 결에 눈물이 솟아 나와 뺨에 번졌고 그의 눈도 젖었다. 그는 소매를 들어 내 뺨을 닦아주었다.
"먼 길을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로 쓰러지면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이는 나를 안고 한 손으로 달래듯이 내 등을 토닥였다. 흐느끼지 않으려고 입을 꼭 물고 숨을 여러 번 삼키고 나니 간신히 가라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저야 무슨 고생이겠어요? 도인들 형편이 이러한 줄 제가 몰랐지요."
그는 내게서 떨어져 벽에 기대어 앉아서는 이쪽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나도 그이를 마주 보았더니 얼굴이 초췌하고 볕에 그을었으나 짓궂게 장난기 어린 그 눈빛은 아직도 맑았다. 신통이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여전하구려."
"여전하다니요……"
신통은 나직하게 웃고는 말했다.
"어여쁘다고나 할까……"
나는 입으로 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에그 철부지야,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채운산 기슭에 애장한 이름도 없는 아가에 대하여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찌 할 말이 그뿐이랴.
그는 내 침묵이 쑥스러웠던지 다시 물었다.
"구례댁 우리 장모님은 평안하시지?"
"돌아가셨어요. 작년에……"
나는 엄마가 흉한 역병에 돌아가셨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고 그는 한참이나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이가 원래 씩씩하신 분인데…… 나를 얼마나 원망하셨을고."
"원망하진 않았지만 저하구 함께 기다려주셨지요."
그때에 나는 그의 유일한 혈육인 자선이를 만난 얘기며 그가 광대로 떠돌 적에 함께 살았던 백화를 만난 얘기도 모두 가슴에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나는 오래 참고 스스로 수행한 사람처럼 속내를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팔도의 백성들이 다들 그렇게 죽는대요."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집 밖으로 나와 맨 뒤쪽에 있는 초가로 올라갔는데 그 집 안방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가 스승님의 측근이거나 대행수들이었다. 맨 아랫목 중앙에 몸집이 야위고 자그마한 노인이 앉았는데 눈매가 부드럽고 인자했으며 흰 수염이 뺨과 턱을 덮었다. 신통이 방문을 열자 모두들 우리를 돌아다보았다. 스승님 외에 여섯 사람이 양쪽 백가에 둥글게 앉아 있었고 신통과 나는 방 가운데로 나아가 나란히 섰다. 이신통이 스승님께 말했다.
"저의 내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래 원로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소?"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좌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경오 명월신사께 문안 인사를 올렸다. 노스승은 두 팔을 양쪽에 짚으며 내 절을 받았다.
"내일은 우리 교조께서 득도하신 날이라 제례를 올릴 텐데 이것은 과연 이녁이 인연이 닿았다 하겠소. 내가 여러 해 전에 청주를 지나다가 아무개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물었소. 저 누가 베 짜는 소리인가, 하니 아무개가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짭니다, 하였소.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 하니 아무개가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합디다. 하늘님이 베 짜는 것인 줄 어찌 알겠소. 여러분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하늘님이 오셨다 이르시오."
나는 그날 하루가 어찌나 빠르게 흘러갔는지 겨우 한 식경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댁 아낙과 더불어 부엌일을 도와주었고 저녁을 먹고는 처음 왔던 집으로 내려왔다. 관솔불 돋우고 앉았노라니 이신통이 누군가를 데리고 함께 들어왔다.
"여보 대행수 아저씨께 인사하우."
내가 일어서려 하니 그이가 손을 내저어 만류하고 앉으면서 말했다.
"우리 그냥 앉아서 뵙시다. 나는 서일수라고 합니다."
나도 말없이 앉은 채로 상반신을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말했다.
"전에 전주 살 때에 제 집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랬군요, 이 사람을 몇 년씩이나 찾아다니셨다지요? 박 선비가 저쪽에서 한참이나 이 서방을 꾸짖었습니다. 갑오 난리에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나라는 망해가는 지경이라 결기 있는 사내들은 집과 고향을 떠나 산하를 헤매 다니고 있지요.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지금 고생을 옛말하듯 하면서 오순도순 사십시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묻고 있었다. ‘언제요, 그런 날이 언제 오는데요?’ 그러나 입 밖으로는 간신히 이렇게 말해버린다.
"저에게는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
서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오늘도 좋은 날이지요. 그렇구말구요."
그는 다시 말하였다.
"저희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거역한 사람들입니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망해가는 나라와 백성들의 참상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백성들이 일어나니 패망을 알았어도 저들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교조 이래로 저희 도는 우주만물과 통하여 상생하고 화평하는 마음이었으나 이를 깨부수려는 조정 권관들과 외세에 저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 이르시기를 우리 모두가 죽은 백성들의 뒤를 따르고 난 연후에라야 상생과 화평을 제대로 닦는 도가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실천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한즉 우리가 어떻게 스승님을 저버리고 혼자 여염 살림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까. 제가 이 서방의 큰 형으로서 말하건대 일 년에 한두 번씩이라도 꼭 강경에 들르도록 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기별이라도 전하도록 이르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서일수가 나간 뒤에 신통과 나는 가만히 마주 앉아 있었다. 희미한 관솔불 빛이 춤출 때마다 우리 그림자도 벽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신통은 시렁 위에서 이부자리를 내려 정돈하더니 자기가 먼저 누웠다.
"이리 오우, 잡시다."
관솔불을 끄고 곁에 누웠더니 나는 어느 결에 뻗은 남편의 팔베개를 베었고, 까마득하게 잊은 언젠가의 밤처럼 먼 데서 부엉이가 울었다.
이튿날은 제 지내는 날이라는 데도 모두 무심한 것처럼 보였다. 동네 아낙이라야 세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각자 밥을 짓고 물을 긷고 국 끓이고 나물을 무칠 뿐이었다. 나는 윗집에 올라가 아침 상차림을 도와주었다. 장정들이 밥상 셋을 벽 쪽에다 붙여놓고 역시 벽 아래 밥과 국 한 그릇씩에 수저를 놓고 앞쪽으로 나물이며 반찬을 늘어놓았다. 신사께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벽에 무엇이 있는가?"
측근이었던 손천문이 동작을 멈추고 스승을 돌아보았다. 신사께서는 다시 물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 벽을 향하여 자리를 베푸는 것이 옳은지, 나를 향하여 자리를 베푸는 것이 옳은지 하는 말이오."
그의 친척이며 나중에 도통을 이어받게 되는 손의암이 말했다.
"나를 향하여 자리를 베푸는 것이 옳은가요?"
신사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제부터는 나를 향하여 자리를 베푸는 것이 옳지요. 그러면 제물을 차릴 때에 혹 급하게 집어 먹었다면, 다시 차려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소 아니면 그대로 지내도 되겠는가."
다시 좌중의 누군가가 되물었다.
"그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가요?"
"여러분은 매번 식고(食告)할 때에 하늘님 감응하시는 정을 본때가 있었소?"
또 누군가가 못 보았다고 대답하자 신사께서 말했다.
"벽에는 아무것도 없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모신 하늘님의 영기로 사는 것이니, 사람의 먹고 싶어 하는 생각이 곧 하늘님이 감응하시는 마음이요, 먹고 싶은 기운이 곧 하늘님이 감응하시는 기운이요, 사람이 맛나게 먹는 이것이 하늘님이 감응하시는 정이요, 사람이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하늘님이 감응하시지 않는 이치입니다. 사람이 모신 하늘님의 영기가 있으면 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죽은 것이외다. 죽은 사람 입에 한 숟갈 밥을 드리고 기다려도 능히 한 알 밥이라도 먹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하늘님이 이미 사람의 몸 가운데서 떠난 것이요. 그러므로 능히 먹을 생각과 먹을 기운을 내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늘님이 감응하시지 않는 이치입니다."
집 주인 아무개가 다시 물었다.
"나를 향하여 자리를 베푸는 이치는 어떤 연고입니까?"
"저 벽과 나 사이에 큰 틈이 있으니 이는 누가 만든 것이오?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만 대에 이르도록 혈기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은 하늘님으로부터 몇만 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자리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자리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하고,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일의 뜻을 생각하면서 다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좌중의 누군가가 또한 물었다.
"제사 지낼 때에 절하는 예는 어떻게 합니까?"
"마음으로써 절하는 것이 옳지요."
나는 측근과 대행수들 뒷전에서 그러저러한 신사의 말씀을 들었으나 처음에는 알쏭달쏭하여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저녁에 아랫집으로 물러나와 신통과 함께 있으려니 문득 생각이 나서 그에게 물었다.
"아까 제사를 나에게 차리는 것이 옳다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랬더니 남편은 웃으면서 내게 말해주었다.
"향아설위(向我設位)라고 내가 적어두었지. 벽과 나 사이에 큰 틈이 있다는 말씀이 벼락 치듯 하였소. 그 벽에 귀신이 어른거린다고 밥을 밀어놓고 나는 절하라는 것은 누가 시킨 것일까. 그러한 법식은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그리고 아녀자들은 하루 종일 뒷전에서 일하고 음식 차려서 갖다 바치고 제사 참례는 얼씬도 못하게 하는 제도를 누가 만들었을까. 땀 흘려 농사 지어 거둔 곡식을 차려놓고 나 아닌 벽에다 바치게 무엇이 만들었나. 그것을 만든 것들이 세상의 법식과 제도를 짓고 덫을 쳐서 공으로 빼앗아 먹으려고 틈을 벌려놓았다는 우레 같은 말씀이라오."
나는 신통의 말이 그야말로 벼락을 치듯이 내 마음을 흔드는 것 같았다. 천지도의 가르침이 이러하니 나라의 높으신 여러 대신들과 사대부 양반 나리들이며 지방 향청의 선비들이 그들을 잡아 죽이려 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이의 곁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이제 날이 밝으면 나는 스스로 그와 헤어져 집으로 쓸쓸히 돌아가야만 한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수 년 동안 잊고 있었던 내 몸이 아직 살아 있고 파묻혔던 잿불처럼 뜨겁다는 것도 깨달았다. 겨우 이틀 밤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어찌나 무섭게 자라는지 어제는 노랗고 조그만 싹이 움튼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늘 밤에는 벌써 두 개의 떡잎이 벌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내일 밤이면 이미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가 되어 있을 것이고 뿌리는 좀처럼 뽑히지 않을 거였다. 나는 그날 초저녁에 윗집 큰방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박도희 선비를 뵙고 은근히 당부해두었다.
"선비님, 내일 일찍 길을 떠나려 합니다. 장호원 주막거리까지 동행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스승님을 모시고 또 어디론가 가겠으니 제가 먼저 떠날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나오십시오. 동구 밖에서 기다리지요."
내 생각에는 기왕에 사방으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신사의 도소를 따라가지 못할 바에야 신통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불승들처럼 단칼에 마음의 집착을 휙 베어낼 수야 없겠지만, 내 몸이 먼저 떠나면 마음은 타래에서 풀린 실처럼 서서히 따라오다가 모르는 결에 어디선가 툭 끊어져 나가게 될 것 같았다. 혹시 누가 알까, 그이가 끊어진 실의 끄트머리를 잡고 내가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게 될지. 그이에게 역겨움을 주기보다는 내 빈자리를 그의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
6. 옛날 옛날 한 옛날
다시 그로부터 다섯 해나 흘러갔다.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계절별로 사람과 물건이 땅길 물길로 들고 나갔으며 변한 거라곤 장쇠와 막음이를 혼인시켜 뒤채의 텃밭으로 쓰던 땅에다 집을 지어 안 서방네 살림집을 마련해준 일이다. 뒤채에는 이전처럼 나와 찬모 어멈이 살았고 남는 방은 내외 손님방으로 썼으며 앞채는 여전히 봉노와 객점으로 운영했다. 이천 노성산 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함께 지냈던 이신통은 일 년에 한 번 들르기는커녕 소식조차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이듬해인 무술년 가을에 보은 이신통의 고향 집에 가게 되었는데 그이의 딸 자선이의 혼례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 서방은 내륙으로 상단 일을 떠났다가 나 몰래 송 의원 댁을 찾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전처럼 애를 태우거나 먼산바라기 하던 버릇도 나아졌고 밥도 장쇠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절반 정도는 잘도 먹었다. 그이를 만나고 돌아와서 태기가 있더니 여름부터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여 어김없이 열 달 만인 이듬해 이월경에 아기를 낳았다. 이번에는 열 달이 되면서부터 아예 부여댁과 찬모가 내 옆에 붙어 있더니 산통이 오기 시작하자마자 산파와 의원을 불러다 애를 낳을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아두었다. 아들이었고 어찌나 튼실했는지 낳는 중에 나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나는 벌써 나이도 많았으니 늦어도 한참이나 늦둥이였다.
안 서방은 애비도 없는 자식을 낳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추석을 앞둔 대목장을 본다고 내륙을 돌면서 처음부터 보은에 들러보리라 작정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는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뜸을 들였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자선이가 시집 간다더라는 소리를 흘렸고 나는 금세 애가 달았다. 혹시나 그 애비인 이신통이 집에 다만 하루 이틀이라도 들르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내가 추석 지내고 자선이 혼례 날짜에 맞추어 길 떠날 채비를 하자 안 서방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노성이를 데리구 가시려오?"
"암, 내가 업구 가야죠."
"보아줄 사람두 많은데 집에 두구 갑시다."
"이 서방이 올지두 모르잖아요?"
내 말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차마 뭐라고 더는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전처럼 뱃길로 공주 거쳐서 문의까지 올라가 보은으로 향했다. 산에는 벌써 단풍이 노랗고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노성이는 여정 내내 씩씩하고 건강했다. 처음에 아기를 낳고는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망설였다. 어차피 그이가 돌아오면 새로 지을 이름이라 아명을 아무렇게나 지어 부를까 하다가, 아가의 태기를 받은 곳이 이천 설성의 노성산 앵두나무골이어서 산 이름을 그대로 붙여주기로 하였다. 우리는 배 타고 세마 타고 하면서 나흘 만에 보은에 당도했다.
제생약방에 이르니 역시 혼사 치르는 집이라 사람이 북적거렸지만 덕이는 나와 아기를 제 방에 재웠다. 자선이가 와서 나를 반겼고 노성이가 아우라는 말을 듣고는 아기의 손발을 만지고 뺨에 입술을 맞추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자선이의 혼숫감으로 강경에서 마련한 서울의 청국 비단을 주었고 그 애가 신랑을 따라 집을 떠나기 전에 내가 지녔던 신통의 염주를 내주고 말았다. 나는 산에서 신사를 만나기 이전부터 정확하게는 이신통이 백화에게 남겨두고 간 도경풀이 책을 읽던 무렵부터 천지도인이 되었다. 아니 그 염주를 손에 쥐고 '사람이 하늘이다' 하는 소리를 삼세번씩 세 차례 아홉 번을 다시 삼십 바퀴나 돌리던 나날은 또 몇 해던가.
"이건 네가 지녀야 하겠구나."
나는 아무런 사연도 말하지 않고 그렇게만 말했는데, 그녀는 이미 고모 덕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는지 다시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주신 염주라구 들었어요. 고모도 똑같은 걸 갖구 계시니까요."
자선이는 할아버지 이 의원이나 가업을 이은 송 의원에 걸맞은 괴산의 신 씨 댁에 시집을 갔는데 인삼 밭으로 크게 일어난 집이라 하였다. 나는 자선이가 시집 간 뒤에도 열흘 가까이 머물렀는데 덕이와 그 댁 아이들이 올케며 숙모라 부르는 통에 실로 오랜만에 가족에 둘러싸인 듯하여 날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덕이와 송 의원은 조심스럽게 몇 달 전에 이신통이 집에 왔던 일을 말해주었다.
"지난 사월 보름께였나?"
"아무튼 사월 스무날은 넘지 않았어요. 한밤중에 오라버니가 불쑥 찾아왔어요."
"그래 어디서 뭘하구 있었대요?"
시누이는 말을 끊었고 송 의원이 말했다.
"신사께서 관군에 잡혀갔다구 합디다."
두 사람은 번갈아서 그 무렵 이신통에게서 들었던 최경오 신사가 체포된 전말을 내게 말해주었다.
그해 겨울에 이천 노성산 앵두나무골의 이 아무개와 부근 동네에 사는 권 아무개두 사람이 잡혀갔는데 이때에 신사는 원주 강천면 전거리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다. 이들의 자백을 받아낸 이천부에서는 관속과 이십여 명의 병졸을 출동시켰고 이천의 두 도인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먼저 알게 된 여주의 한 도인이 신사가 있는 도소에 달려가 지목이 급한 사정을 알렸다. 전거리 거처에는 손의암과 손위 조카인 손천문과 이신통 서일수가 함께 있었는데 주위에서 피신을 권했으나 당시에 신사께서는 몇 달째 오한과 설사로 괴질에 시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천명을 기다릴 따름이다."
신사는 거의 평생을 잠행하고 다니더니 이제는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진 것 같았다. 정오가 지나서 관군이 마을에 들이닥쳤고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더니 도소로 쓰고 있던 집의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앞장선 장교가 문을 벌컥 열었다.
"최 법헌이 누구냐?"
"지금 노인이 앓아누워 계시거늘 이 무슨 소란이오? 아무리 관군이라 하나 이리 무도할 수가 있소?"
방문을 막아서며 일어나 외친 것은 이신통이었다. 장교는 뒷전에 길잡이로 끌고 왔던 이천 사람 권생을 앞으로 끌어냈다.
"이 사람들이 맞는가?"
이신통보다 손아래였던 손의암이 툇마루로 나아가 목침으로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자아, 자세히 날 봐라. 알거든 안다고 말해보라니까!"
권생은 매에 못 이겨 군사를 예까지 끌고는 왔으되 한때 자신의 집에서 함께 기거했던 동료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 차마 '저 노인이 최 법헌이고 이들은 천지도인들이오' 하고 고자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횡설수설하다가 장교가 급히 겁박하니 삿갓봉에 도소가 있다고 말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추적해왔던 참이라 관군은 집뒤짐을 하던 끝에 동네 훈장이 의관 정제하고 풍채가 그럴듯하여 그를 포박하여 끌고 갔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도인들은 취조 끝에 군사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앓는 스승을 담가에 모시고 산길을 올랐다. 지평 거쳐서 홍천 가서 십여 일을 보내고 원주 송골에 거처를 정한 것이 정월 말이었다. 이때에 여러 사람이 한집에 기거하는 것은 남의 눈에 띄기 쉽다고 하여 서일수는 박도희를 찾아 떠났고 손의암과 손천문은 다른 마을에 있으면서 서로 번갈아 왕래하며 스승을 돌보았고, 이신통이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다.
기찰과 지목이 날이 갈수록 조여들게 된 것은 조정에서 천지도의 법통을 이은 최경오를 잡는 자에게 현상금과 높은 벼슬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충청도의 송모라는 자는 진작부터 벼슬과 현상금을 탐하여 신사를 체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지방의 대두에 접근하여 오래된 도인인 척 가장하는 한편 한양에 올라가 포도청에 의도를 밝히고 시찰사(視察使)의 직임을 받게 되었다. 이제부터 송모의 임무는 오로지 최경오 신사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한편 원주 송골에서 피신하던 신사가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가 서성대고 있었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이 작대기를 들고 군사 놀음하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동네에 병정 쳐들어온다!"
물론 아이들의 장난 소리였지만 신사는 문득 그 소리를 듣고 탄식했다고 한다.
"저것은 하늘의 소리다. 가히 심상히 듣지 못할 소리니라."
그날 저녁이 되자 스승을 뵈러 와 있던 손의암 손천문 그리고 측근을 지키던 이신통 등에게 신사는 일렀다.
"오늘은 각자 거소로 가서 제사를 지내라."
마침 이튿날이 천지도 창도일이라 측근 제자들 이외에도 이 지역의 도인 몇몇이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손천문이 스승에게 물었다.
"문도인 저희는 먼 곳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한곳에 모여 제사를 올림이 옳거늘 어찌 물러가라고 하십니까?"
"내 생각한 바 있으니 어기지 말라."
최경오 신사는 이미 자신의 명운을 알았음인지 며칠 전에 법통을 손의암에게 물려주었고, 그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온밤을 기도하며 새웠다고 한다. 시찰사가 된 송모는 오래전부터 접근했던 옥천 지방의 천지도 대두라는 자를 잡아 고문하여 입을 열게 했다. 시찰사는 그에게서 알아낸 원주에 사는 도소의 연락을 맡은 도인을 잡아 앞세우고 천지도 창도일 정오경에 송골에 들이닥쳤다. 경병 오십여 명이 송골의 도소를 겹겹이 둘러싸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때를 기다리던 신사를 체포해서 한양으로 압송했다.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손천문 손의암 이신통 등의 측근들은 논의하고 각자 상경했는데 이신통이 먼저 올라갔다. 그들이 서울로 가기 전에 측근 사람들과 각자 옥바라지 비용을 마련하기로 논의가 되었던 듯싶다. 신통이 보은 본가에 들렀던 것은 아마도 매제와 누이로부터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송 의원은 급하게 백 냥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이신통은 애오개 경주인 집으로 가서 일단 유영길을 수소문해보기로 하였다. 몇 해가 지나는 사이에 관청과 제도가 개화되어 옛 포도청과 의금부 전옥서는 없어지고 경무청과 재판소와 한성감옥으로 바뀌어 있었다. 객점 주인은 유영길이 한성감옥에서 간수장을 지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신통은 종루 철물교 부근인 예전 좌포도청 자리의 한성감옥으로 찾아가 유영길을 피맛골 주점으로 불러냈다.
"최 교주 노인은 경무청에 갇혀 조사를 받다가 여기로 옮겨온 지 며칠 안 되었소."
"접견은 해볼 수 있겠지요?"
"이전의 서 지사와는 그 경중이 다르니 장담은 못하겠소. 애를 쓰면 접견 한 번쯤 어찌 해볼 수는 있겠지."
"돈 쓸 일이 있으면 얼마나 될지 말해보구려."
신통이 은근히 말했으나 유영길은 손을 들어 내저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당신네를 알게 된 게 군란 때였으니……"
그는 손가락으로 꼽아보고는 다시 말했다.
"벌써 올해로 십칠 년이나 되었소그려. 나의 형님이 참수되어 죽은 일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으며, 이 서방보다 내가 한두 살 위이니 또한 형이나 한가지인데 어찌 아우에게서 돈을 받을 수가 있겠소?"
"어쨌든 내가 신사께 의복과 사식을 차입해드릴 테니 형은 옥리들에게 술이라두 좀 사주시우."
이신통은 그러면서 삼십 냥을 그에게 억지로 전해주었다. 뒤이어 서울에 온 손의암은 수표교 지인의 집에 유숙했고 손천문은 다른 도인 두엇과 더불어 칠패에 머물렀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신사께서는 병환 중에 체포되어 한 달 가까이 압송이며 취조를 당하고 쇠약해져서 음식을 제대로 잡숫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중죄인 방에서는 언제나 무거운 칼을 쓰고 지내어 노인의 몸으로는 견디기가 힘들다고 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면회를 하고자 하였으나 간수장 유영길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대한 국사범이라 친지는커녕 가족이라 할지라도 접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나마 스승의 말을 밖으로 전해주기만 하여도 큰 다행으로 여겼다. 유영길이 나와서 제자들을 만나자 신사의 말을 전했다.
"최 교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디다. 내게 관한 일은 조금도 염려 마시라고, 천명이니 마음 편안하게 최후를 기다린다고. 도의 장래는 탕탕할 것이니 십년 뒤에는 주문 외우는 소리가 장안에 진동할 것이라 하셨지요. 그리고 긴요하게 쓸 곳이 있으니 오십 냥을 넣어달라 하십니다."
신사는 병환 중이었으나 그 정신은 매우 맑았다고 한다. 유영길의 전언에 의하면 신사는 차입한 돈으로 떡을 구매하여 굶주리는 일반 죄수들에게 몇 차례 나누어주었다. 그의 병세가 악화되자 조정은 재판을 서둘러서 오월 열하룻날부터 개정하여 오월 말일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죄명은 대역반란죄가 아니라 사도(邪道)를 징치하는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에 의한 것이었다. 스승이 감옥에서 재판소까지 큰 칼을 쓰고 걸어가다가 기운이 진하여 몇 번이나 주저앉는 광경을 먼발치서 따라가며 보았던 이신통은 돌아서서 눈물을 씻었다.
밖에서 논의한 뒤에 제자들이 스승을 탈옥시키고자 하였는데, 유 간수장의 말에 의하면 한성감옥으로 바뀐 옛 좌포청의 옥이 허술하여 뒷담을 헐면 바로 옥사의 벽에 이른다고 하였다. 벽이라고 해봤자 옛날 관아로 쓰던 낡은 건물이라 산자치기로 나무쪽을 얽어 흙과 회를 바른 것이라 발로 내질러도 쉽게 무너질 테지만 문제는 족쇄와 칼인데 날짜만 정해주면 간수장인 유영길이 미리 열쇠를 열어두겠다는 거였다. 그들은 스승을 빼내기로 의논을 정하고 유영길을 통하여 뜻을 전했으나 신사께서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까닭을 간단히 전했다. 내가 죽은 뒤에야 갑오 이래의 난이 그칠 것이요 도는 평안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 스승이 전한 말씀이었다. 선고가 떨어지고 이틀 뒤인 유월 초이튿날 오후 두시에 한성감옥에서 신사의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으니 그의 나이 일흔둘이었다. 그날 밤 간수장 유영길과 이신통이 장대같이 쏟아지는 장맛비를 무릅쓰고 신사의 시신을 다시 파내어 거적에 싸서 짊어지고는 새벽에 동작나루를 건너갔다. 두 사람은 일단 송파의 아는 사람 밭두렁에 신사의 주검을 파묻고는 후일을 기약했다.
"내가 보은에 다녀오고 세 해가 지난 신축년 가을에 장사를 나갔던 안 서방이 돌아와서 말했다."
"이번에 무시로 객주의 물건을 모으러 옥천 금산 무주에 갔다가 배 서방네 집에 들렀습니다."
"배 서방이 누구요?"
하다가 나는 옛날에 신통의 첫 입도 시기를 잘 안다는 천지도인 배 씨의 집에 들렀던 것이며 그로부터 보은 고향집 제생약방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던 일이 기억났다.
"아, 생각나요."
"배 서방한테 들었는데 작년에 서일수 대행수가 잡혀서 처형되었답니다. 이제 천지도는 아예 끝장이 나고 말았다고 하구, 서울 근기에서는 오히려 교세가 늘어난다는 말도 들리구요."
나는 전처럼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쯤 남편이 무엇을 생각하며 떠돌아다니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이와 다시는 한 식구가 되어서 이승을 마치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 곁에는 그가 남긴 노성이가 벌써 다섯 살이었다. 상단 회장의 소개로 훈장님을 맞아 노성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아이는 지금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횡성 소구니골의 박도희를 만나러 가보기로 작정했다. 박도희는 이제 마지막 남은 계미년 입도의 측근 대행수로서 그간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동안 노성이와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내가 새삼스럽게 남편과 가까웠던 이를 다시 만나러 간다고 생각한 그날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일손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식구들도 내가 길을 떠나게 되리라는 눈치를 챘는지 도중에 먹을 마른 찬이며 갈아입을 의복들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안 서방이 따라나서기로 했으니 우리 식구는 언제 약속한 적도 없건만 모두 천지도의 주문을 외우고 밥 먹을 때면 두 손 합장하여 식고를 올리는 도인이 되어 있었다. 안 서방이 속 깊은 사람이라 말은 안 하여도 우금치 전투에 따라나섰다가 무수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잊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이는 해마다 그맘때가 되면 뒤뜰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도 드리는 눈치였다. 나는 구월 말경에 안 서방과 함께 강원도 횡성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소구니골로 들어가는 계곡 위편의 다락논밭은 모두 추수가 되어 마른 풀만 덮여 있었고 숲은 낙엽이 지는 한편 단풍의 끝자락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박도희 식구들은 우리를 알아보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방으로 들어가 앉자 내가 먼저 노성이를 낳은 얘기며 강경의 한결같은 살림에 대해서도 말해주었고 박 선비는 궁금한 점에 대하여 가끔씩 내 말을 끊고 묻고는 했다. 나는 박 선비를 따라 이천에 다녀온 뒤에 남편이 내게는 소식도 없다가 보은 고향집에 잠깐 들렀던 일이며 신사의 체포와 죽음에 대해서도 남편의 식구들에게 들었음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 뒤로는 모든 소식이 끊겼습니다. 한 도인으로부터 작년에 서 대행수도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혹시 남편의 소식을 들을까 하여 찾아뵈었지요."
박 선비는 잠시 천정을 올려다보며 망연한 표정이더니 나에게 말했다.
"그렇소이다. 갑오년에 시작된 혁명이 이제 다 끝났지요. 그러나 아주 끝나버린 것은 아니외다. 물이 말라 애를 태우던 가뭄이 지나면 어느새 골짜기와 바위틈에 숨었던 작은 물길이 모여들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요. 백성들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죽은 이들의 노고가 잊히겠습니까?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하고 나서 그의 이야기는 신사께서 죽어 묻히던 그때로 돌아갔다.
신사가 죽은 뒤에 한양에 머물고 있던 이신통은 손천문과 더불어 횡성으로 내려왔다. 서일수가 박도희의 거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두 사람은 아직 신사의 체포와 처형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측근인 이신통 등의 연락이 두절되어 신사께서 어느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도소를 마련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원주에서 기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이 와서 스승의 최후를 전해주자 서일수와 박도희는 서로를 붙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소식을 알려준 이신통과 손천문도 새삼스럽게 설움이 북받쳐서 다시 통곡하였다. 울음이 그치고 나서 손천문이 소매로 눈을 씻고는 말했다.
"도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오. 이제 다시 교세를 넓히기 위해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경전이 필요합니다. 교조 대신사의 도경을 풀어서 새 방각본을 만들어야 하고, 이세 교주이신 신사의 말씀과 행적을 모두 기록해내야 되겠습니다."
서일수도 자기 생각을 말했다.
"지금 남대에는 죽은 이도 많지만 살아남은 이가 더 많습니다. 다시 이 사람들을 모으고 일으켜 세워서 천지도와 두 스승님의 신원을 해내야만 전국 팔도의 도인들이 마음 놓고 수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논 끝에 이신통과 손천문은 어딘가 안전한 곳에 은신하며 일흔두 해를 살다 죽은 스승의 생각과 행적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가 대신사에게서 도통을 물려받은 것이 서른일곱 살 때였으니, 삼십오 년 동안이나 경상 전라 충청 강원 경기 다섯 도계를 넘나들며 풍찬노숙과 굶주림과 도인들끼리의 주도권 다툼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관속과 기찰꾼들에게 쫓기면서 백성들 스스로가 하늘 같은 존재임을 일깨우고 다녔다. 손천문과 이신통은 측근에 있으면서 신사를 며칠 또는 몇 달씩 숨겨주고 수발했던 벽지의 백성들이나 연락 도인들을 통하여 스승의 숱한 행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기억하고 있었다. 서일수는 우선 전라도로 내려가 흩어지고 망실된 행(行)과 대(隊) 가운데 누가 온전하고 누가 죽었는지, 또는 누가 변하여 도를 버렸고 누가 지금까지 신심을 지키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서 남대를 다시 조직하겠다는 거였다. 박도희도 충청도 내포 일대와 내륙 산간 지방의 도인들을 돌아보고 북대를 다시 추스를 생각이었다.
이신통과 손천문은 단양 근처 소백산 자락에서 한 해 동안 최경오 신사의 기록을 해나갔고 서일수는 전라도를 잠행하고 있었다. 서일수는 갑오년에 죽어간 남대의 대장 김봉집이 일어났던 고부 무장 고창 부안 장성 영광 함평 등지에서 예전 천지도의 행수와 대두들을 만났다. 이름이 알려지고 세가 컸던 부대의 지도자들은 거의가 죽고 흩어졌으나 젊은 대두들은 시골 마을의 대동계와 두레 중심이어서 들판의 풀처럼 꿋꿋하게 살아 있었다. 이들 거의가 천지도에 입도한 적이 있었고 죽어간 여러 대행수와 함께 전주에서 보은에서 우금치에서 또는 삼남 군현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신사가 처형된 해의 겨울에 고창에서 군수를 쫓아내는 민요를 일으킨 일이 계기가 되어 고부에서 농민 수백여 명이 들고 일어나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이웃 고을 무장까지 점령했다. 고창 읍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영암의 민란을 지원하고 광주 전주 등의 도회지와 전라도의 크고 작은 고을을 돌면서 세를 키워서 서울로 치고 올라갈 계획이었다.
농민들은 갑오년 그때처럼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세우고 봉기했다. 이들은 고창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라고 해봤자 관아에서 빼앗은 화승총과 칼이며 몽둥이와 죽창이 고작이어서 신식 양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비가 억수로 쏟아져 물기에 젖은 화약과 화승을 격발시킬 수 없게 되자 패하여 부안 장터로 후퇴했고 일본군이 추격하여 장터를 포위하고 농민군을 몰살했다. 외곽에 있었거나 다른 군현을 점령했던 농민 병력은 예전처럼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서일수도 어둠 속에서 농민 잔여 병력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삼남 지방의 곳곳마다 이러한 크고 작은 민요가 일어났고 이들은 관군에 쫓겨 집과 마을을 떠났으며 산으로 들어가 의병이 되거나 활빈당이 되었다.
박도희도 옛날 농민군에 들었던 행수와 대두를 찾으러 다녔더니, 어느 곳에서 죽었다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 후문과 함께 많은 젊은이들이 사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화적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깊은 산간에 숨어 살거나 행상을 가장하여 장터에 내려왔다가 부잣집이나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내포 일대와 충청도 내륙 지방에서부터 경상도의 서쪽 산간 지역에 이런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천지도의 농민군으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경험이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경신년 무렵부터 서로 전국적으로 연계하여 스스로를 활빈당이라 부르고 있었고 지역마다 지도자인 사장(師丈)과 유사(有司)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부잣집이나 큰 사찰과 관아를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는 활빈 투쟁을 하였다. 이들 거의가 천지도의 지도부가 사라진 뒤에 관군에 쫓긴 잔여 농민군이었고 이들은 또한 을미의병에 가담했다가 살아남은 자들이기도 하였다.
이신통과 손천문은 경서 집필의 진전이 있어서 초고를 지니고 일단 단양을 떠났고 청주 산외면 속리산 서북쪽 기슭에 마련한 거처로 옮겨갔다. 신사께서 돌아가시고 두 해가 지난 경신년 봄에 신사의 봉도소를 모시고 다니던 제자들은 다시 한양에서 모이기로 하였으니 스승의 이장 문제 때문이었다. 서울 도인들이 재촉하여 오기를 이전에 가매장했던 송파의 밭 임자가 관의 지목이 두려우니 제발 묘를 옮겨가 달라고 사정한다는 거였다. 그해 삼월 초에 이신통과 손천문 그리고 연락을 받은 서일수와 박도희가 상경했고 서울에 은신하고 있던 손의암과 몇몇 도인들이 모였다. 이들은 송파에서 스승의 유골을 수습하여 여주 천덕산에 안장하고 나서 각자 헤어졌으니 삼월 보름께였다.
그해 여름에 전라도 일대를 잠행하던 서일수와 이신통과 함께 책을 쓰고 있던 손천문이 거의 같은 무렵에 체포된 것은 기이한 노릇이었다. 그것도 같은 지역인 청주에서였다. 서일수는 갑오년에 이미 처형된 예전 남대 대행수들의 조직 근거지를 뒤밟아 전라도의 도인들을 만나고 다니다가 칠월 초에 처가가 있는 청주 율봉마을 음 씨 댁을 찾아갔다. 주인 음 씨는 그래도 땅 마지기나 갖고 있던 중농이어서 밥은 먹고 살았는데 두 딸을 차례로 서일수와 신사의 장남에게 시집보낸 탓으로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편 신통의 이복형 이준은 청주목에서 비장을 다니더니 관제 개혁 이후에 포졸은 순검(巡檢)이 되었고 포교는 권임(權任)이 되었으며 비장은 총순(總巡)이 되었다. 이준은 위로는 상관인 경무관을 모시고 아래로 백여 명의 권임과 순검들을 지휘하는 입장이었다. 이준은 전에 자신이 기찰과 함께 잡아들였던 서일수의 인적사항을 나중에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서일수가 천지도 교주의 최측근이었으며 갑오 난리 때에는 그가 남대의 김덕영 대행수와 더불어 청주성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서일수가 당시에 유배형을 받고 나서 무슨 수로 풀려났는지 다시 활동 중이라는 소문도 입수했다. 그는 아우 신이가 진작부터 천지도에 입도했고 수 년 동안 이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들의 수하에 지나지 않는 졸개일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도인 출신 순검의 기찰을 통하여 서 아무개의 처가가 청주 관내에 있으며 그곳이 바로 율봉마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청주의 총순 이준은 관보를 통하여 최경오 교주가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실을 알고 나서 가까운 시일 내에 서 모가 처가에 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마을 사람 하나를 지목하여 상금을 내걸고 서 아무개가 음 씨 댁에 오면 즉시 발고할 것을 다짐해두었다.
칠월 초사흗날에 기찰에게서 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서일수가 처가에 왔다는 것이었고 이준은 순검 이십여 명을 동원하여 율봉마을을 급습했다. 총순의 직접 지휘 아래 순검들은 무기를 들고 음 씨의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양총도 있었고 대부분 구식 무기인 칼과 화승총이었으나 막상 집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가서는 그런 무기가 어딘지 우스꽝스럽게 되었다. 총순인 이준도 일본군의 신식 장검 사벨을 차고 있었지만 칼을 뽑을 일도 없었다. 그들이 요란하게 마당으로 몰려들자 맞은편 방문이 열리면서 장본인이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는 맨상투 바람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마당의 순검들을 향하여 외쳤다.
"내가 서일수다. 소란 피우지 말고 잠깐 기다리라."
하더니 침착하게 흑립을 쓰고 바지저고리 위에 여름 배자를 걸치고는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이준은 뒷전에서 아무 말 없이 그가 포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사흘 동안 청주 옥에 구금되었다가 즉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손천문이 어쩌면 청주 관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발고가 들어온 것이 그로부터 십여 일 지나서였다. 지목이 들어오기를 장터에서 손천문이 유유히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기찰을 풀어 알아보았으나 그냥 지나간 것인지 관내에 머물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손천문은 보은 집회와 갑오년 난리 이래로 일대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일찍이 손천문이 차린 봉도소가 국사봉 아래 솔뫼마을에 있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로 온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도 죽거나 달아나 폐촌이 되어 있었다. 순검 기찰들이 광범위하게 수소문해보니 그를 청주 근방에서 보았다는 주민들이 많이 있었다. 종합해본즉 그가 관내의 외곽에 머물고 있을 것이며 가끔씩 장을 보러 읍내에 들어오는 것 같다는 소문이었다.
다시 보름쯤 지났을 때 드디어 그의 거처가 알려졌는데 보은에 가까운 속리산 자락의 깊은 골짜기였다. 이번에도 이준은 순검 병력을 이끌고 대낮에 산외면의 거처를 급습했는데 손천문은 집 밖에 나와 있다가 먼 데서 순검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초연한 태도로 포박을 당하였다. 손천문은 그 무렵에 아무 곳이나 버젓이 출몰하곤 하여 지역 도인들이 관헌의 지목을 받으면 어쩌겠느냐고 걱정했고, 그럴 때마다 손은 처연한 낯빛이 되어 대답했다고 한다.
"스승님께서 몸소 순교하셨으니 내 어찌 구구히 살기를 도모하여 몸을 피하겠소? 내 반드시 도에 순하여 선사의 뒤를 쫓으리다."
마침 이신통은 집에 없었으므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차례나 천지도의 마지막 두령들을 체포한 이준의 관운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서는 총순 이준이 곧 경무관 직임을 받게 될 것이라고 모두들 부러워하였다. 손천문 역시 잠깐 구금되어 있다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서일수와 손천문 두 사람은 그해 팔월 중순경에 스승의 뒤를 따라 한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시신은 이번에도 이신통이 간수장 유영길과 애오개 경주인 등 서울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습하여 한양 동교(東郊)의 공동묘지에 묻었다.
이신통은 추석 무렵에 다시 청주 근방으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박도희가 나중에 횡성에 온 신통에게서 들었기도 하지만 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청주의 도인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신통은 곧 일대의 천지도 대두들 가운데 활빈당이 되어 있는 젊은 도인 칠팔 명을 모아서 저녁 무렵에 청주 읍내로 들어갔고 그들은 모두 행상의 차림새였다. 읍내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시가 다 되어 그들은 조용히 이준의 집으로 갔다. 주위의 민가마다 모두 불이 꺼졌고 깊은 밤이라 동네 길은 인적이 끊겨서 고요했다.
총순의 집이라지만 시골의 민가여서 낮은 토담에 겨우 초가를 면한 기역자의 기와집이었다. 그들은 물처럼 조용히 마당으로 스며들어 안방 건넌방 사랑으로 돌입하여 아녀자는 모두 한방에 몰아넣고 손발 묶어 이불을 덮어놓았고 하인 둘은 묶어서 광에 처박아두었으며, 잠자고 있던 이준의 상반신에 두루마기를 씌워 그대로 결박하여 장정들이 떠메고 나왔다. 그들은 우암산 기슭으로 올라가 이준을 소나무에 묶어놓고는 덮어씌웠던 두루마기 자락을 헤쳐 얼굴을 내놓게 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내게 뭣 때문에 이러느냐?"
이준이 어둠 속에서 시커멓게 자기를 둘러싼 장정들을 향하여 물었으나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앞으로 나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서일수 손천문 대행수의 목숨 값을 받으러 왔다."
이준은 그제야 저들이 천지도인의 일당들인 것을 알아채고 어찌 되었든 모면할 방도를 재빠르게 생각해보았다.
"너희 천지도는 이미 오래전에 국법에 의하여 사문난적으로 판명나지 않았는가? 나는 나라의 록을 먹고 사는 관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거늘, 어찌 이런 무도한 짓을 자행하는가?"
"뭘 저런 놈의 구구한 말을 듣고 있소? 어서 쳐 죽입시다!"
장정 하나가 분김에 그의 묶인 몸통을 발로 내지르고 외쳤는데 앞에 섰던 사람이 그를 밀어내고는 말했다.
"그것이 어떤 자들의 나라인가? 일본의 조종을 받는 허깨비 같은 권력자들이 차지한 정부를 백성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너도 조선의 백성으로서 척왜양하려는 우리의 충정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준은 어쩐지 듣던 목소리여서 어둠 속에서도 그를 살펴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그의 키며 몸짓을 문득 알아본 이준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너 혹시 신이 아니냐?"
그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흘러나오자 이신통은 잠깐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사정을 알고 있던 활빈당 장정 몇 사람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이신통은 자신을 밝혔다.
"그대가 내 혈육이라는 것이 욕스러울 뿐이다. 너는 아버지 어머니께 천추의 한을 품고 돌아가시게 하였고, 이제 다시 의인들을 잡아 죽였으니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신통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고 활빈당 장정 하나가 환도를 빼어들고 앞으로 나섰다.
"신아, 살려다오!"
이준이 외쳤지만 장정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그의 몸에 칼을 꽂았다. 그들은 소나무에 묶인 이준의 시신을 남겨두고 올 때처럼 조용히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우암산을 넘어갔다. 이신통은 그길로 괴산 충주를 거쳐서 강원도 횡성 소구니골 박도희의 집에 당도했다. 신통은 박도희에게 이복형을 죽인 전말을 이야기하고는 참으로 가슴속에 쌓였던 모든 것을 쏟아내려는 듯이 실컷 통곡했다고 한다.
횡성으로 박도희 선비를 찾아간 지 다시 두 해가 지나갔다.
나는 그동안 매해 시월 말경이면 보은을 시집이라 생각하여 찾아가곤 했다. 시누이 덕이는 그때마다 노성이의 옷가지를 지어두었다가 내주곤 했고 나를 위해서도 집에 가서 달여 먹으라고 보약재를 꾸려주곤 했다. 지난번 나들이에는 장쇠가 따라나섰는데 이제는 그도 막음이에게서 첫아들을 보아 아비가 되었고 안 서방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하루는 부여댁과 찬모와 마당 안 우물가에서 푸성귀를 다듬고 있었는데 장쇠가 떠꺼머리에 두건 동인 젊은이를 데리고 문 안에 들어섰다.
"보은서 방자를 보냈습니다."
젊은이는 손에 서신 한 장을 들고 서 있었다.
"왜 무슨 일이 났다던가?"
"저야 모르지요. 이 댁에 급히 전하라 하여 달려왔을 뿐입니다."
젊은이는 내게 서신을 전하고는 이내 핑하니 사라졌다. 나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고는 마루에 앉아서 봉서를 뜯어 읽어보았다. 덕이가 언문으로 참하게 써내려간 사연은 먼저 집안의 안부며 노성이에 대하여 묻고, 일간 집에 들르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오라버니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지금 집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고 어쩌다가 꾸는 그이의 꿈이 그렇듯이 쓸쓸한 느낌만이 천천히 밀려올 뿐이었다. 이제 추석을 쇠었으니 강경 대목장은 지나갔지만 연이어 군산서 들어오는 어염 파시가 시작될 무렵이라 나들이 가기에는 그야말로 애매한 철이었다. 파시 지나려면 예년처럼 시월이 지나야 하는데 시댁에 찾아왔다는 손님이 어디 사나흘이면 몰라도 수십 일을 묵을 리가 없었고, 오죽하면 시누이가 방자를 사서 급주까지 띄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안 서방에게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이는 펄쩍 뛰며 내일이라도 길 떠날 작정을 하시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이튿날 장쇠를 데리고 부랴부랴 길을 떠났고 사흘 걸려 보은에 도착했다.
제생약방에 이르니 덕이가 반기며 우리를 맞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안채 뒷방에 들었는데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송 의원이 패랭이 쓴 남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시누이와 함께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서로 인사하고 송 의원이 나를 이신통의 부인이라고 소개했으며 손님은 다시 머리를 조아려 정중하게 내게 인사했다.
"저는 유사 어른을 모시던 김돌몽이라고 합니다."
"그이가 지난 몇 해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요?"
내가 물으니 송 의원이 대신 말했다.
"처남께서 호서 활빈당의 유사 노릇을 했다는군요."
"지금 그분이 어디 계신데요?"
내가 송 의원과 김돌몽을 번갈아 살피며 물었더니 두 사람 다 잠자코 앉았더니 김돌몽이 말했다.
"저희 부대는 단양 근처에서 관군의 급습을 당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평소에 고향이 보은이라 하시고 제생약방 말씀을 하셔서 저는 이곳에 오신 줄 알았지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대번에 맥이 풀려버렸다.
"어디 다치거나 총에 맞거나 하신 건 아니지요?"
"밤중에 경황 중이라 숲 속 산비탈을 뒹굴며 내려와서 다른 사람들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요. 저희 부류는 경상 전라 충청 삼도에 널리 퍼져서 서로 연줄을 맺고 있는데 지도자인 행수유사를 맹감역이라 부릅니다. 그분의 성함이 이신이라는 것은 이 댁에 와서야 알았지요."
내가 한숨을 내쉬고는 무릎을 세워 이마를 짚고 앉았으니 송 의원이 곁눈질하여 사내를 데리고 나갔고 시누이가 내게 말했다.
"저 사람이 두 해 동안이나 활빈당을 따라다녔답니다. 이번에는 오라버니의 행적을 뚜렷하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이제는 이신통이 내 앞에 직접 나타나 겸상하여 밥이라도 함께 먹지 않는 한 말로만 들어서는 아무런 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송 의원이 다시 들어오더니 내게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들은 화적당처럼 산채를 두고 모여 살지는 않는 것 같습디다. 이들은 소백산 부근에 몇 무리씩 마을을 이루어 살았고 유사니 맹감역이니 하는 두령도 민가에 내려가 살았답니다. 처남이 유사요 맹감역을 맡았다니 거처가 어딘가에 있을 게 아니냐,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영월 덕포가 맞을 거라고 합디다."
나는 다시 끊긴 길 위에 망연히 서 있는 듯하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긴 또 어딘가요?"
"남한강의 원천이라고 하는 데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처남을 찾아가보려 합니다. 어떻게든 찾아서 데리고 와야겠습니다."
"그 먼 길을 어찌 가시렵니까?"
"단양까지 가서 소금배를 타고 오른다지요. 그러니 아주머니는 여기 계십시오."
활빈당에 들었다던 사내는 내포 지방이 고향이라면서 이튿날 노자를 얻어 가지고 떠나갔다. 나는 보은 시댁에 남아 있었고 송 의원이 장쇠와 약방 조수인 젊은이를 데리고 단양으로 출발하였다. 열흘 만에 송 의원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시누이와 내가 물었더니 돌아앉아 곰방대만 퍽퍽 피우던 그가 짧게 한마디 했다.
"처남은 돌아가셨어요."
나는 멍하니 앉았고 시누이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아니 밑두 끝두 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총에 맞아 간신히 거처에까진 왔다는데 며칠 못 가서 죽었다는 게요. 내가 그 묻힌 자리까지 보고 왔구먼."
그는 지난 두 해 동안 영월 덕포의 뗏사공 집에 방을 빌려 살았는데 사공이 직접 묻었노라고 하면서 산소 자리까지 데리고 가서 보여주었다고 했다. 송 의원은 제물을 장만하여 가서 조촐하게 제도 올리고 왔다는 거였다.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웬일인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이듬해 봄에 나는 남편의 이장을 결심하고 안 서방과 장쇠와 더불어 먼 길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하고는 세마를 내어 단양을 향하여 출발했다. 단양 가서는 세마를 맡겨두고 돛배를 세내어 영월까지 물길로 올랐다. 충주 가서 서울 마포강에서 오는 소금을 받아 싣고 내륙으로 올라가는 소금배였다. 화물은 없고 우리들 세 사람에 사공이 네 사람이었으니 배는 가뿐하게 미끄러져 갔다. 물 깊은 데서는 바람을 받고 잘도 거슬러 올랐지만 얕은 곳에 이르면 세 사람은 내려서 긴 줄에 뱃머리를 매어 끌었다. 도사공은 삿대로 배가 기슭으로 가지 않도록 버팅기며 천천히 올라갔다. 다시 깊고 너른 데로 나오면 배는 다시 잘도 올라갔다. 정선 애오라지 동강과 평창강에서 내려온 산판의 통나무 뗏목들이 영월 덕포에서 모여 남한강으로 흘러내려 오는데 끝도 없이 긴 꼬리를 끌고 흘러 지나가곤 하였다.
덕포 물가의 둔덕에는 산자락을 등지고 서너 채의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앉았는데 오가는 뱃길의 사공들이며 장사치들을 상대로 하는 주막이나 밥집이었다. 이신통이 빌려 살았다던 뗏사공의 집도 역시 주막을 겸하고 있었다. 방 세 칸 있는 너와지붕의 옴팡집인데 울타리도 없이 그냥 마당에 서면 강변이 내다보였다. 한 번 다녀갔던 장쇠가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하여 그 집으로 올라가니 마침 사공이 집에 있었다. 그는 장쇠를 알아보았고 우리를 방으로 들였다. 머리와 수염이 회색빛으로 센 늙은 사공이 말했다.
"이 서방은 참 말수도 적고 점잖은 분이었소. 우리네야 그이가 활빈당 유사인지 뭔지 한다는 소린 들었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나요. 사람들이 이 서방을 찾아 배를 타고 오기도 하고 말을 타고 오기도 했소. 나하구 가끔씩 술도 먹었다오. 어찌 여염 살림을 할 생각이 없는가 물으면, 자기는 덤으로 사는 죄 많은 인생이라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구 알쏭달쏭한 소릴 합디다마는."
하룻밤 자고 나서 우리는 사공의 뒤를 따라 덕포리 동산으로 올라갔다. 윗골 아랫골이 있는데 신통이 묻힌 곳은 윗골이었다. 사공의 집에서 곧장 오르는 오솔길로 한 마장쯤 올라가는데 산길이 제법 가팔랐다. 산에는 새잎이 돋아나고 진달래가 등성이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여기요……"
사공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봉분이랄 것도 없이 땅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자리가 보였다. 우리는 거기서 제물을 늘어놓고 간단히 예를 올리고는 안 서방과 장쇠가 잡초 무성한 땅을 괭이로 팠다. 관도 없이 묻었는지 시커멓게 삭은 멍석이 보이고 그 뒤에서 삭은 나무뿌리 같은 그의 유골이 나타났다. 나는 아무 감정도 없이 눈물이 솟아나와 바람에 뺨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칠성판 대신에 안 서방이 무명천을 꺼내어 펼쳐두었고 구덩이 속에 들어가 흙 속의 유골을 일일이 추슬렀다. 나는 그가 올려주는 것들을 받아 천 위에다 차례로 늘어놓았다. 맨 나중에 머리가 올라왔을 때에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쳐들고 들여다보았다. 얼굴에 씌웠던 베가 들러붙은 채로 삭아서 얼굴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유골 위에는 긴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사이사이로 흰 머리카락이 보여서 그가 이제 중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보았다. 나는 그이의 유골을 수습하여 행담에 넣었다.
그날 다시 뗏사공 집에서 묵었다. 나는 노인이 평생을 아우라지에서 뗏목을 이끌고 한양까지 부려가던 사람이며 이제는 그의 아들이 뒤를 잇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슷한 모양으로 늙은 그의 노처는 저렇게 숫기가 없으니 어찌 술이며 밥을 팔까 할 정도로 얼른 밥상을 들여 밀고는 문 뒤로 숨곤 했다. 창호지 너머로 안 서방과 술상 받아 대작하는 뗏사공 노인의 젊은 시절을 자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평다리 건너서 물금 지나고 개구멍소를 지나 다래여울 넘고 여우바우 나오고, 그 바로 밑에 바귀미 여울 지나면 또 바로 왕바우 서리, 왕바우 지나 진펄여울로 해서 벽탄 지나면 범여울이 나오고, 옛날에 새끼 범이 물 건너다 빠져 죽었다고 범여울이라 그러는 데요. 범여울 밑에 새범여울 그 아래가 옥바우 있지요. 옥바우 지나면 가진개 그 밑에는 열두절, 물이 쑥 올라갔다가 쑥 내려갔다가 열두절이 인다고요. 남면물 지나서 그 아래가 황새여울이고 황새여울 떨어져선 된꼬까리, 아주 여울이 험하고 급해, 거기서 떨어져 나가선 상산암 돌아나가 제남문으로 나갈 적에 바위가 꼭 문처럼 났는데 급물살이 쏠려 흐르지. 임기서 나온 물하고 송천서 나온 물하고는 아우라지에서 합수되고 이 밑으루 내려가면서 자꾸 합수되어 큰물이 되구요. 호호탕탕 가지마는 언제까지 그렇지도 않고 갑작스레 물이 좁아지고 급해지며 또 몇 고비가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라."
나는 신통이 쓰던 바깥방에 그의 유골이 든 행담을 옆에 두고 뒤척거렸다. 흥이 났던지 노인이 쉰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 한 자락이 아득하게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오늘 갈는지 내일 갈는지 맨드라미 줄봉숭아는 왜 심어놨나,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정들이고 가는 임은 가고 싶어 가나.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다가 얼마나 잤는지 문득 깨었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 감고 있을 때에는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다가 눈을 뜨면 멀찍이 물러가서 아주 작아졌다. 가만히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다.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