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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결혼(River Lady) 4

Bollnow 2024. 3. 5. 07:04

20

브래트가 터널로 사라지자 클레어는 머리핀을 거칠게 잡아 뺐다.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이 마치 자신의 적이라도 되는 양 사납게 빗어 내렸다. 아니 공격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했다.

물론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트레벨리언이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낼 것이라고 해서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트레벨리언은 캡틴 베이커고, 캡틴 베이커는 소문난 난봉꾼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편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클레어는 드레스의 벨트를 잡아채듯이 끄르고, 버슬의 호크를 열고 나서는 페티코트를 끌렀다. 코르셋과 속옷만을 입고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선회하듯 한 바퀴를 돌아서더니, 이윽고 얼굴을 손에 묻었다. 그런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혼자서 되뇌었다. 캡틴 베이커 같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클레어가 난폭한 손길로 속옷을 잡아채자, 부드러운 목면이 찢기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순백색 목면 나이트가운을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침대로 가서 램프를 끄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날까 두려워하면서 눈을 감자마자 설핏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열대의 나라, 푸른 나무와 다양한 색깔의 새가 있는 곳이었다. 위험한 곳이었고, 그녀는 두려웠다. 뭔가 정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그녀가 멈춰 섰다. 달아나야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고 있는 나무의 모습을 겁에 질려 노려보았다. 움직임이 가까워지며, 비명을 질러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무가 둘로 갈라지며 그 속에서 트레벨리언이 나타났다. 꿈속에서 클레어는 안도해야 할지 공포를 느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경련 하듯 눈을 떴다. 촛불을 들고 서서 그녀를 내려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트레벨리언이었다. 눈은 생기와 불빛으로 반짝였고, 뭔가를 질문하는 듯한 태도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저하지 않았다. 꿈의 연장이지 싶어 클레어는 손을 내밀었다.

촛불을 곁에 내려놓고, 트레벨리언은 정글의 야수처럼 그녀의 팔에 뛰어들었다. 얼굴에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부으며, 그의 손이 클레어의 팔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머리 위로 들어올려 거기서 멈춰 세웠다.

여전히 선잠이 들어 있었던 터라, 클레어는 남자의 손길이 마치 딴 세상 일처럼 느껴졌다.

"당신을 보고 싶소."

그의 목소리에서 짜릿한 전율이 클레어의 온몸에 전달되어 왔다. 트레벨리언은 숙련된 느긋함으로 그녀의 몸에 걸친 나이트가운을 벗겨 냈다.

그녀가 알몸이 되자, 트레벨리언은 몸을 뒤로 젖혔다. 높이 양초를 집어 들고 그녀를 비추었다. 깊고 성급한 호흡으로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들먹거렸다. 트레벨리언은 오랫동안 코르셋에 결박되어 잘록해진 허리를 보았다. 그의 손이 엉덩이를 타고 허벅지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시선이 얼굴로 거슬러 올라갔다.

클레어는 호흡이 짧게 가빠지며 몸이 뜨거워졌다. 트레벨리언이 키스를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키스의 감흥이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가도록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키스의 느낌을 즐기면서.

트레벨리언이 뒤로 물러서자 클레어는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전에 보지 못한 미소였다. 부드럽고 달콤한 아이의 미소였다. 항상 보아 왔던 냉소도, 늘 주변을 맴돌던 굳은 표정도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예전에 그를 조금만 덜 알았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그가 사랑으로 충만된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트레벨리언."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댔다가 떼어 내며 다시 키스를 했다. 사고가 멈춰 버렸다. 트레벨리언이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클레어는 한 오라기의 생각조차 남지 않은 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느낌이었다.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몸에 키스를 시작했다. 천천히 께느른하게.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시간을 모두 그가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전혀 서두름이 없었다. 그는 목을 타고 내려가 그녀의 가슴에 이르자, 봉우리를 입에 물었다.

클레어는 등을 구부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부드럽고 튼실하며, 풍성했다. 그 풍성한 검은색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며 그는 클레어 허리에 키스를 했고, 혀로는 배꼽 주변에 자그마한 원을 그렸다. 키스를 하면서도 내내 손은 그녀에게 머물렀다. 클레어의 몸은 여태껏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신체 접촉이 거의 없는 집안에서 자라났고, 해리를 만나기 전까지 키스 한번 해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마치 그런 그녀의 몸을 기억 속에 집어넣으려는 듯이, 오래도록 느끼며 음미하려는 듯이 클레어의 육체를 구석구석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클레어의 가슴 위를 미끄러져 올랐다가, 다시 허벅지로 내려갔다.

키스가 계속되었다. 허벅지, 종아리, 마침내는 그녀의 발에 이르렀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자그마한 그녀의 발의 곡선을 애무했다.

클레어는 팔꿈치를 괴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옷을 모두 입고 있었다.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르네상스 누드화의 여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는 레다(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의 아내였으나 백조의 모습으로 찾아간 제우스와 사랑을 나누어, 그리스 인의 조상이자 테살리아의 왕인 카스토르와 '트로이'의 헬렌을 낳았다)일 것이고, 트레벨리언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찾아와 자식을 남겨 준 제우스일 것이었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클레어의 무릎에 내려놓은 다음, 천천히 그녀의 몸을 거슬러 올라가며 가슴을 지나 목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얼굴에서 멈추었다. 그때 그는 클레어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니다. 단지 본 것이 아니라 연구를 했다. 그 안의 뭔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안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돌려 촛불에 비추는 동안에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 안 되오."

그가 마침내 속삭였다. 그리고는 뭘 하느냐고 물을 사이도 없이 다시 입술을 덮쳤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키스에 정신을 빼앗겨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키스는 모든 것을 망각하게 했다.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는 몸을 수그려 그녀의 육신을 덮쳐 왔고, 그녀는 숨이 막혔다. 전에는 여자의 몸을 내리누르는 남자 몸무게의 장엄함에 관해 알지 못했다. 그는 너무 컸고 그녀는 너무 작았다. 하지만 그의 무게는 천국처럼 황홀했다.

만약 예전에 남자와 여자가 침대에 든 모습에 대한 얘기를 들었더라면, 어쩌면 클레어는 남자의 몸무게에 여자가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을 것이었다.

트레벨리언이 키스를 퍼붓는 동안, 그녀는 나신의 허벅지로 바지 안에 감추어진 그의 넓적다리에 문질렀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이 키스하는 법을, 두 개의 입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간을 갖고 가르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혀를 사용하여 또는 사용하지 않고서 키스를 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깨물며, 트레벨리언의 혀가 부드럽게 클레어의 입술 위를 미끄러졌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려가며 입술을 탐닉했다. 깊은 키스, 부드러운 키스, 격한 키스를 모두 보여 주었다.

다른 모든 것에서도 항상 그랬듯이, 클레어는 키스에 관해서도 영리한 학생이었다. 처음에는 밑에 누워 수동적으로 트레벨리언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내 선생 자리를 밀어냈다. 그는 클레어가 원하는 바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위에서 굴러 내려오며 그녀를 가까이로 당겼다. 클레어는 그의 위에서 키스를 시작했다. 실험을 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했다. 눈에, 관자놀이에. 또 다른 곳에.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귓볼을 깨물었다.

너무 세게 물었던지 트레벨리언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굴려 위쪽을 차지했다.

"놀이를 하고 싶은 거지, 맞아?"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가 으르렁거렸다. 클레어는 킬킬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트레벨리언은 짐짓 노엽다는 듯 어깨를 물어뜯기 시작하더니, 아래로 내려와 가슴에 이르렀다. 순간 그는 극도의 인내심을 지닌 점잖은 신사에서 야만인으로 돌변했다.

클레어는 그의 욕정에 부응했다. 맨몸의 그를 피부로 느끼고픈 마음에 그의 셔츠를 당겼다. 트레벨리언은 지체 없이 옷을 벗어 던지며,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입술은 그녀의 몸을 떠나지 않았다. 한 차례 옷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무릎이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무엇을 재촉하는 키스였다.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속으로 무엇인가를 향해,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알몸이 되어, 그녀의 나신이 트레벨리언의 맨살을 처음 느꼈을 때, 클레어는 숨이 가빠지며 손톱으로 그를 할퀴기 시작했다. 손톱은 트레벨리언의 따뜻한 등을 파고들었다. 클레어는 허벅지를 움직여 털이 덮여 까칠한 그의 허벅지를 느꼈다. 그 선명한 대조로 그녀의 흥분이 훨씬 고조되었다.

트레벨리언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아픔이 느껴졌다. 온몸이 마비될 듯한 고통이었다.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트레벨리언은 비명을 키스로 막음하며 완전히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있어요."

명령이었다.

"좀 있으면 아픔이 멎을 거요."

그의 말대로 했지만, 그 얘기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으로 찢어질 것 같은 고통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금 그녀에게, 그녀의 목에 키스를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의 손이 가슴을 향하며 엄지가 봉우리를 차지했다. 그녀의 깊은 곳 어디선가 그 본능적인 의식에 답하기 시작했다.

"벨리."

그녀가 속삭였다.

"말해요. 내 사랑. 나 여기 있소."

서툰 몸짓으로 그녀가 히프를 조금 들썩였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얹고 다음 동작을 이끌어 나갔다. 아프지 않았다. 사실은 너무나 좋은 느낌이었다. 그는 클레어의 허벅지에 손을 얹어 자기 몸을 지탱하며 그녀에게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요!"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꼭 껴안았다.

"그러지 말아요."

트레벨리언은 더없이 괴상망칙스런 소리를 냈다. 웃음인지 신음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

클레어는 그를 휘감은 팔을 조이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다음, 돌연 그가 그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자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

밀려드는 감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머나."

트레벨리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위스키를 배울 때처럼 당신은 이것도 쉽게 배우는 것 같군."

그 뒤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서히, 길고도 오랜 트레벨리언의 전진 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거의 죽은 듯이 누워,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감흥을 느끼며, 마치 죽어 천당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동작 어디에서 부터인가 그녀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은, 엉덩이를 잡은 손으로 그녀를 리드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몸놀림에 자신의 동작을 조화시켰다. 두 사람의 동작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을 수 있는지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서로 어울리는 몸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그의 어깨에 깔끔하게 맞아 떨어졌고, 그녀의 엉덩이는 그의 엉덩이에, 그의…….

안에서 뭔가 새로운 느낌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클레어는 그를 꼬옥 안으며, 최대한으로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트레벨리언."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소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녀는 마치 뭔가를 애써 참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긴장되어 있었다. 클레어의 내부에서는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흥분이 겹겹이 고조되어 갔다.

마침내 폭발을 일으키는 절정의 순간, 클레어는 그 폭발이 평생의 가장 멋진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레벨리언을 꼬옥 껴안으며 그의 등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녀는 맨살에 닿는 덩굴손 같은 그의 축축한 머리칼을 느낄 수 있었다.

클레어가 몸을 빼내기까지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꼬옥 껴안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고 싶었다. 오래 전 언젠가 뉴욕의 집에 살 때였다. 클레어가 작은 식당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거기서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친구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같이 밤을 지내기 전에는 그 남자를 알았다고 할 수 없는 법이야."

순간 너무 당황하여 그녀는 발길을 돌려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때 어머니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몸을 빼내자 트레벨리언을 볼 수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고, 모습은 아주 젊어 보였다. 마치 어린 소년처럼.

"몇 살이에요?"

처음으로 그녀가 물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서른 셋."

클레어는 그의 관자놀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뒤쪽으로 쓸어 넘겼다.

"이런 짓,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가 나즈막하게 속삭였다.

순간 트레벨리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에는 원망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우리가 해리를 배신한 거라는 얘길 할 셈이라면, 당신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소. 해리는 지금 자기 정부와 함께 있단 말이오."

트레벨리언의 화난 목소리에 놀라 클레어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해리를 질투하는 건가요?"

"그 놈 정부가 누군 줄 아시오? 마흔 다섯이나 먹은 유부녀,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녀요. 애들 중에 하나는 해리를 꼭 빼닮았고."

그 순간 클레어는 그런 소식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해리는 아주 멀리, 아득히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눈썹에 키스를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 한편으로는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 있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남자는 바로 캡틴 베이커였다. 그녀가 오랫동안 숭배했던 바로 그 남자 말이다.

클레어는 손가락으로 트레벨리언의 뺨에 난 흉터를 쓸어 내려가며, 상처를 얻은 경위에 관해 그가 책에 썼던 한마디 한마디를 떠올렸다. 가볍게 그의 등을 떠밀고 몸에 난 흉터를 매만지며, 어쩌다 그런 상처를 입었을까를 상상했다. 방금 전에 팔에 새로 난 상처에 키스를 했다. 정강이에도 기다란 흉터가 있었다. 말라리아로 다리가 흉하게 부어 오르자 스스로 절개한 곳이었다. 피를 짜내기 위해 스스로 다리를 찌른 곳이었다.

클레어는 곁에 앉아 그를 만지며 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남자의 누드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다. 특히 이 남자의 벗은 모습은 더욱 궁금했었다.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트레벨리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 보고 있는 거요? 아니면 캡틴 베이커의 세계에 관해 당신이 쓸 거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는 거요?"

그녀는 팔을 뻗어 그의 무성한 턱수염을 매만졌다.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게 당신은 여러 가지 모습이었어요. 처음 만났을 땐 당신이 늙은이, 그것도 허약하고 병든 늙은이인 줄 알았어요. 그 다음에는 세상이 악하고, 비참한 결말을 선택하는 곳이라고 예단하는 냉소적인 비관론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당신이 그 유명한 캡틴 베이커라는 걸 알았고.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뭐지?"

"지금은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내가 알려 주겠소."

트레벨리언의 눈이 강렬하게 타오르며 환하게 밝아졌다.

"내 진면목을 알려 주겠소. 해리가 돌아올 때까지 내게 시간을 주시오. 부탁은 그뿐이오. 해리는 아마 사오 일 정도 후에나 돌아올 거요. 그럼 당신은 그에게 돌아갈 수 있소. 하지만 그 녀석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오. 하루 온종일, 매 시간을 말이오."

클레어는 벌거벗은 가슴 위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 잘 모르겠어요. 로저스와 공작부인은 어떡하구요. 해리의 어머니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벌써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내 가족도 염두에 둬야 하고. 우리 어머니는……."

"로저스는 내가 손을 봐 주겠소. 공작부인도 마찬가지고. 당신 부모에 관해서라면, 그분들은 자기 딸이 어딜 돌아다니는지 귀찮게 신경 쓰지 않을 거요."

클레어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세상 무엇보다 스스로가 트레벨리언과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 클레어는 자신에게 중요했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릴 수도 있겠지 싶었다. 그녀의 턱이 굳어졌다.

"당신의 귀여운 '나일의 에메랄드'인가 하는 여자는 어떡할 거예요?"

트레벨리언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의 진주'."

"기억하기가 어렵군요."

그녀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와 당신 사이에, 뭐랄까…… 경험이 어땠는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게 걱정스러워요. 다음 책에서 세상에 공표할 건가요?"

"물론이오. 그건 내 독자들이 좋아하는 대목이오. 가만 있자, 내가 뭐라고 썼더라. 물론 니사 얘기를 쓴 건, 마차 바퀴 치수 따위의 지루한 대목을 쓰기 훨씬 전이라서 말이오. 아마 이런 식일 거요. '니사는 최고의 여자다. 타오르는 불길 그 자체, 욕정 그 자체였다. 사랑을 나누기에는 멋진 여자다. 당신이 그녀와 함께 침대로 간다면 그것은 당신의 남성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

클레어가 침대를 내려가려 했지만, 트레벨리언이 팔을 붙잡으며 그녀의 등을 끌어당겼다. 그가 꼴도 보기 싫었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에 팔짱을 끼고 침대 닫집 아래쪽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질투하는 거요?"

그의 목소리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내 방을 나가세요. 그리고 행여나 다시 돌아올 생각일랑은 절대 하지 마세요."

그는 클레어의 목과, 그리고 대답 없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내가 니사와 뭘 했는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지는 아마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해리를 사랑하잖소, 기억나오?"

"또 날 놀리는군요!"

그녀가 소리쳤다.

"최소한 해리는 내게 어른 대접을 해 줬어요. 한데 당신은 내가 무슨 어린애인 양 놀리고 있잖아요."

"당신은 어린애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 큰 어린애 말이오."

그의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알다시피, , 당신의 '달덩이 같은 진주'인지 하는 여자나 내 동생보다 못생겼어요."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 키스를 했다.

"클레어, 당신은 내가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있소."

등을 뒤로 기대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평생 진짜로 이기적인 일을 해본 적 있소?"

클레어는 이유는 몰랐지만 왠지 그 질문이 곤혹스러웠다.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항상 대의 때문에 고민하는 자선가처럼 묘사하곤 했었다.

"난 이기적인 일을 많이 했어요.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미국 집에 있을 땐 나 자신밖에 몰랐어요."

"당신은 할아버지의 신탁 재산에서 이자를 지급받고 있소. 부모에게 돈을 빌려 준 적 있는지 내게 얘기해 주겠소?"

"겨우 몇 번뿐이었어요."

그녀가 냅다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트레벨리언이 예의 그 무불통지인 듯한 표정을 짓자, 클레어는 다시 침대를 내려가려 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당신이 싫어요."

트레벨리언은 클레어의 등을 침대로 잡아당기더니, 몸을 움직여 몸을 반쯤 내리눌렀다.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뭐요? 내가 당신의 진정한 실체를 봤기 때문이오? 아니면 당신 부모의 본질을 알아내서 기분 나쁜 거요? 아니면 난 현실주의자고 당신은 낭만파라서? 어쩌면 해리가 당신처럼 낭만주의자라서 당신이 그 녀석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해리는 오로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녀석이오. 그 녀석은 제 어머니가 좋은 여자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 여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 녀석은 당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오."

"해리 얘기는 여기서 왜 해요! 해리는 좋은 사람이고 또 친절해요."

"맞소, 그렇지. 그 녀석 몸에는 못된 성질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지. 그 녀석은 다른 사람을 해꼬지 하지 못해."

"당신관 달라요!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잖아요. 당신과 가까워지려는 모든 사람에게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의 안색이 바뀌며 몸을 뒹굴어 그녀에게서 내려왔다.

"맞소. 사실이오."

그는 아주 간단하게 인정했다.

그의 곁에 누워 클레어는 그의 몸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이 자신에 대해 했던 얘기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나누었던 말과, 그리고 둘이서 했던 행위 때문에 자신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트레벨리언을 침대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방으로 들어와 자신을 내려다보고 서 있을 때 그를 내쫓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기꺼이 맞아들였다.

클레어는 침대를 내려가는 듯한 그의 움직임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클레어는 그에게 팔을 휘감았다.

"가지 마세요, 벨리. 혼자 있는 데 너무 지쳤어요."

트레벨리언은 아주 단단히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은 사랑을 나누던 때보다 훨씬 가까워 보였다.

"당신도 나처럼 그런 걸 느끼오, 그렇소?"

"뭘요?"

턱으로 그의 가슴을 짓누르며 그녀가 물었다.

"고독감. 외로움 말이오."

클레어는 정정하려고 했다. 캡틴 베이커와 같은 유명인은 외로울 수 없다고, 전세계에 친구가 있을 거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품에 있는 사람은 캡틴 베이커가 아니라 트레벨리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기절했던 남자, 그녀에게 위스키를 가르쳐 주고, 읽을 책을 주었던 남자, 바로 그 트레벨리언이었다.

키스를 기대하며 클레어가 고개를 들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다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클레어가 잠에서 깨었을 때, 브래트가 침대 곁의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자던데."

브래트가 말했다.

침대를 돌아보았다. 비어 있었다.

"그 사람 갔어."

클레어는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렸다.

"알아. 해리는 어제 떠났어. 그인…… 사업상 에든버러에 갔잖아."

브래트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로저스 다리가 부러졌대."

그녀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 여자가 어쨌다고?"

어젯밤 트레벨리언은 로저스를 손봐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리까지 부러뜨렸을 리는 없다, 설마 그랬을까?

"어젯밤 조그만 자기 방의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대.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사의 방이더래. 다리에 깁스를 하구서 말이야. 엉덩이에서 발끝까지 온통 깁스를 했어. 그리고 머리가 무지하게 쑤신대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구. 몽유병으로 밤에 걸어 다니다가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쳤다는 얘기를 집사가 로저스에게 했어. 의사가 와서 깁스를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어. 집사 얘기로는 의사가 로저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깡그리 잊게 만드는 약간 끔찍한 약을 먹였다나 봐. 정말……안됐지 뭐야."

클레어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의사는 어디서 그런 약을 구했대?"

브래트가 미소를 지었다.

"페샤에서 가져온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

클레어가 슬며시 웃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브래트가 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벨리랑 함께 있는 여잔 누구야? 아침엔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거든. 그래도 꽤 예뻐 보이던데. 벨리에게 딱 붙어 걸으면서, 그 아저씨 팔을 자기 허리에 두르구……."

브래트는 갑자기 클레어가 침대에서 뛰쳐나오자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에는 클레어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마저 잊고 다른 사람 앞에 벗은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옷을 입게 도와줘."

클레어가 명령조로 말했다.

"…… ……."

"트레벨리언을 구하러 가야 한다구?"

브래트가 음흉스럽게 물었다.

"비슷한 얘기야."

코르셋을 입으며 클레어가 말했다.

겨우 20분도 안 되어 클레어가 트레벨리언의 탑에 있는 계단 위를 쇄도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을 예상하는지 자신도 잘 알지 못했지만, 몇 가지 지독히 불쾌한 상상을 할 만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발칙한 니사가 트레벨리언의 무릎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는 테이블 중 하나에 조용히 앉아,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집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고개를 수그린 채 쳐다보지 않았지만, 소리나는 방향으로 빈 위스키 잔을 들이댔다. 트레벨리언은 그 소리를, 바깥 방에 있는 오만이 들어오는 소리로 착각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캐비닛으로 걸어가 병을 꺼내 든 클레어는 그에게 다가가 잔을 채웠다. 잔을 채우는 동안 트레벨리언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작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위스키 병을 탁자에 내려놓는 클레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트레벨리언의 두 눈은 말할 수 없이 검었다. 클레어의 눈은 한편으로는 의혹을,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밤에 서로에 대해 했던 모든 행위에 대한 기억으로 인한 수줍음을 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몇 시간이 아닌 몇 년을 떨어져 있던 사람처럼 미친 듯이 키스를 해댔다.

트레벨리언은 스커트를 걷어 올리며 그녀를 무릎으로 끌어당기는 한편, 외투 속에 입고 있던 그의 바지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닫는 순간 클레어는 벌써 숨이 가빠 왔다. 저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을 덮쳐 오자 그녀의 머릿속에선 모든 생각이 순식간에 깡그리 지워졌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목을 껴안고 굶주린 사람처럼 키스를 했다.

처음에 클레어는 뒤에 있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트레벨리언은 들었지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계속 클레어와 키스를 하며 페티코트 세 개를 옆으로 내던졌다. 클레어는 벗어나려고 기를 쓰며 트레벨리언을 밀쳤다. 여자가 다시 무슨 얘기를 했다.

"트레벨리언!"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클레어가 그를 밀어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무릎을 내려오려고 했다.

트레벨리언이 낮은 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클레어는 그것이 페샤어임을 알 수 있었다. 니사가 웃으며 다시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를 그녀는 들을 수 있었다.

클레어는 세차게 트레벨리언을 밀어제쳤다. 그가 클레어를 놓아주자, 그녀는 법석대는 소리와 함께 돌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두 사람으로부터 겨우 둘 건너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니사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지난밤에 보았던 모습보다 아침 햇살 아래서 훨씬 더 아름다웠다. 입고 있는 노란색 실크 외투에 반사되어 갈색 눈이 거의 황금색으로 보였다.

클레어는 그가 니사와의 사랑 행위에 관해 했던 말이 모두 떠올랐다. 어젯밤 그는 클레어 자신의 침대에서 나와 '달의 진주'에게 갔을까? 하룻밤에 스물다섯 명의 여자와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남자인데, 두 여자쯤이야 아무 문제도 아니었겠지. 아주 간단한 일이었을 거야.

클레어는 일어서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가야겠어요."

그녀가 미처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트레벨리언이 스커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당신은 아무 데도 못 가오."

니사가 무슨 얘기를 하자 트레벨리언도 페샤 어로 대답을 했다.

"저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클레어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특별한 게 없소."

"뭐라고 했냐구요?"

클레어가 다그쳤다.

트레벨리언은 아주 피곤하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레스 색깔이 당신에게 안 어울린다고 했고, 그래서 당신이 창백하고 생기 없어 보인다고 말했소."

니사가 다시 뭔가를 얘기하자 클레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통역하세요."

"클레어, 사랑은……."

트레벨리언이 말을 꺼내려다 말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니사는 당신이 키에 비해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했고, 남자들은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소."

클레어가 이를 악물었다.

"남자들은 저 여자처럼 절벽에 젓가락 같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세요. 내 나라 미국처럼 문명 세계 사람들은 여자가 의당 웬만큼은 살집이 있어야 할 걸로 생각한다고 얘기하세요."

"클레어……."

트레벨리언의 목소리가 호소하는 투로 바뀌었다.

고개를 돌려 트레벨리언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노여움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 얘긴 저 여자에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요, 맞아요? 어젯밤 저 여자와 같이 잤어요? 나와 헤어지고 나서 저 여자에게 갔나요?"

"당신에게서 나와서 난 당신 하녀를 손봐 줬소. 다른 여자와는 같이 있을 시간이 전혀 없었단 말이오."

"그럼 단지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는 건가요, 그래요? 시간이 있었으면 저 여자랑 같이 잤겠군요."

"절대로 그렇지 않소."

트레벨리언의 아주 솔직한 심정이었다.

"니사는 너무 밝히는 여자요. 날 완전히 뻗어 버리게 만들지."

순간 클레어는 너무 황당해서 숨이 막힐 뿐이었다.

"저 여자에게 비하면, 난 늙은 하녀나 다름없다 이거로군요. 태양 앞에 반딧불 말이에요."

"그런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오. 내 말은……."

너무도 갑자기 클레어는 모든 것이 너무 버거워졌다.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당신 탓은 하지 않겠어요. 저 여잔 내가 평생토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자예요. 그리고…… 난 당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어요. 당신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어요."

그녀는 흐느끼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에게로 다가왔지만 분명 트레벨리언은 아니었다. 너무도 편안함을 주는 작은 손이었고, 그 손이 클레어의 조그마한 어깨를 잡아당겼다.

"당신 같은 가슴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난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감수하겠어요."

니사가 아름답고 부드러운 악센트의 영어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난, 내 피부가 너무 검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그렇게 하얀 피부를 유지할 수 있죠?"

"난 햇빛이 없는 데서 살아요."

클레어가 딱딱하게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물러서며 니사를 쳐다보다가 이내 트레벨리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또 날 조롱했군요."

그는 다소 덫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트레벨리언이 입을 열어 뭔가를 얘기하려고 했지만, 니사가 가로막고 나섰다.

"내가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페샤에서 돌아오는 동안 트레벨리언이 내게 영어를 가르쳐 줬죠."

니사가 클레어의 손을 잡았다.

"프랭크는 내 목숨을 구해준 데에 대해서 당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난 잭 포웰이 정말 싫었어요. 그 사람은 날 죄수 취급했어요. 나를 데리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 구경거리로 삼으려고 했고요 .아무도 날 도와 줄 사람이 없었죠. 모두들 프랭크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깐요."

니사가 클레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했던 사소한 장난을 용서해 주시겠어요? 당신이 프랭크와 싸우는 걸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난 저 사람이 글 쓰는 것 외에 정신을 팔게 만드는 건, 누구도 아무것도 본 적이 없어요."

클레어는 궁금하다는 듯이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내가 당신 일을 방해하며 딴 데 정신을 팔게 했어요?"

트레벨리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끔은. 목사 놀음을 해서 사람을 구해야 했을 때, 당신이 춤을 배우는 걸 앉아서 구경해야 했을 때, 영감 집에 당신을 데리고 가서 당신이 소작인들과 히히덕거리는 걸 구경해야 했을 때, 뭐 그런 정도요. 뿐만 아니라 당신 동생을 항상 재미있게 해 줘야 했고……."

클레어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가 외면을 했다.

"두 아이들께서는 밖으로 달려 나가 함께 노시는 게 어떻겠소?"

트레벨리언이 중얼거리듯이 얘기했다.

순간 클레어와 니사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니사가 물었다.

"우리에게 얘길 해 달라고 할까요, 아니면 함께 햇볕 아래로 나가서 놀자고 할까요?"

"여긴 스코틀랜드요."

트레벨리언이 투덜거렸다.

"햇볕이 없단 말이오. 그리고 잊은 모양인데, 여기서 내 존재는 비밀이란 말이오."

클레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잘 알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것은 그 여자가 트레벨리언과 함께 잤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이 클레어를 질투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사람들이 날 찾고 있을 거예요."

클레어가 말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뒤따라 나왔지만 아래층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클레어가 썩은 바닥 아래로 빠졌던 층이었다. 트레벨리언은 손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

"니사를 질투할 필요 없소. 그 여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소."

"하지만 그 여잔 예쁘고, 당신이 함께 밤을 보냈던 여자잖아요."

클레어는 도저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보이기가 싫었다.

"맞소. 그랬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에는 성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망할! 내가 그 여자와 함께 잤을진 모르지만, 결코 사랑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단 말이오."

클레어는 그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잠시 후 그녀가 해리를 사랑하는 방식에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정말 해리를 사랑했나? 어떻게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트레벨리언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백 명의 여자와, 어쩌면 천 명의 여자와 밤을 함께 보냈다고 말했지만, 그는 사랑과 섹스를 별개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트레벨리언은 클레어의 얼굴에서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읽으며,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클레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니사 말대로 바깥에서 하루를 지내면 어떻겠소?"

"셋이서 함께?"

"그렇소, 세 사람이 함께. 아니, 네 사람이서. 당신 동생도 함께 데려갈 거요."

클레어가 코웃음 소리를 냈다.

"아름다운 내 동생 말이죠. 내가 제일 못생겼군요."

트레벨리언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클레어의 턱을 들어 그의 얼굴과 마주했다.

"내게는 당신이 단연 최고로 예쁜 사람이오. 여태껏 봐 온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당신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정말이에요?"

클레어가 그를 쳐다보았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 진심이오."

그가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하지만 점차 욕정이 들끓는 도발적인 키스로 바뀌었다. 손을 그녀의 허벅지로 가져가며 급히 스커트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많은 옷을 입고 다니는 거요?"

"트레벨리언, 여기서 그러면 안 돼요. 사람들도 있고……."

그가 입술을 덮치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하라지."

"하지만 침대도 없잖아요."

중얼거리듯이 그녀가 말했다.

트레벨리언이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심한 조롱처럼 보이는 비웃음에 클레어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클레어는 그런 생각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스커트를 걷어 올리더니 그녀의 다리를 자기 허리춤까지 들어올린 다음, 두 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며 클레어의 등을 벽에 기대고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커다란 속 팬티는 중간 솔기 부분에 박음질이 없었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팬티를 벌렸다.

다음 순간 트레벨리언이 자기 외투를 열고 바지를 무릎마디 근처까지 끌어내렸다. 순식간에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클레어는 몸을 움찔하며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 새로운 경험이 어떻다 하는 느낌까지도 벌써 망각해 버렸다.

클레어가 머리를 뒤로 젖히자 트레벨리언의 뜨거운 키스가 목을 향해 치달려 내려왔다. 트레벨리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엉덩이를 붙들고 두 사람의 즉석 사랑을, 도둑 사랑을 이끌어 나갔다.

트레벨리언이 그녀 안으로 부딪쳐 올수록 클레어의 욕정도 정도를 더해 갔다. 그가 클레어의 체중을 받침 했다. 클레어는 자신을 향해 진퇴를 거듭하는 그의 몸동작을 느낄 수 있었고, 마침내 비명을 지르고픈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입술을 덮고 있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이 폭발할 때까지 그녀는 소리를 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트레벨리언을 꼬옥 껴안았다. 힘이 빠지고 녹초가 되었다. 충만된 힘과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트레벨리언."

클레어가 그의 목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얘기해요."

클레어가 머리를 흔들었다.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렵다는 듯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트레벨리언이 그렇게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벽에 기댄 채, 두 사람 모두 옷을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매우 은밀하게 엉켜 있었다.

"내게 시간을 주시오."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내게 며칠만 주시오. 바라는 건 그뿐이오. 미래도 필요 없소. 지난 일도 상관없소. 지금을 같이 합시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말이오. 내일을 생각하지 맙시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맙시다. 그래 줄 수 있겠소?"

클레어는 그의 목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을 위해서 산다는 것, 자신만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생소한 일인가. 클레어의 마음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며칠이 될지는 모르지만 트레벨리언과 함께 있으며, 부모가 원하는 것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행여 동생의 장래에 대한 걱정을 그만둘 수 있을까? 해리의 괴팍스런 어머니 지배 아래서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멈출 수 있을까? 앞으로 그녀 자신의 관심사보다 사냥이나 개와 말에 관심이 있는 척하면서 누군가와 뭔가를 얘기하며 웃고 떠들 수 있을까? 더구나 트레벨리언을 알려고 하는 시도를, 그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고 하는 시도를 며칠 동안 참을 수 있을런지…….

"니사를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클레어는 그를 쳐다보았다.

"손대는 것도? 심지어 키스도?"

그녀는 트레벨리언이 자기를 놀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으로 충분해요. 그리고 내 동생에게 무릎에 앉으라는 따위의 얘기도 하지 마세요."

"내 무릎에 당신이 앉는다면."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도 아마 당신 무릎에 앉는 걸 아주 좋아하게 될 거예요."

클레어가 그에게 키스를 하자,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떼어 놓으며 앞에 세웠다. 부드럽게, 그는 클레어의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편으로 정리해 주었다.

"벨리?"

그녀가 말했다.

"…… 이런 걸 하는 데는 아주 많은 방법이 있는 거예요?"

그의 눈이 밝게 빛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주 많지."

"내 생각엔 당신이 그걸 모두 할 줄 알 것 같아요."

그녀가 씁쓸하게 말을 던지고는 고개를 돌렸다.

"진정한 게임을 위한 연습이었을 뿐이오."

클레어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시간을 주겠어요. 아냐, 내 자신에게 시간을 주겠어요. 앞으로 며칠간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을 동안에는 현재만을 생각하겠어요. 미래도 과거도 아니구요. 당신이나 나의 과거 말이에요."

그가 클레어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내 과거는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소. 영원히 말이오."

트레벨리언이 손을 잡고 그녀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의 미래예요. 니사를 어떻게 할 생각이죠?"

"내 유일한 미래는 당신에게 모든 체위를 가르쳐 주고, 내가 가르칠 모든 사랑 행위의 뉘앙스를 알려 주는 것뿐이오."

클레어가 그에게 윙크를 했다.

"난 항상 배움을 좋아했어요."

그가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21

해리가 돌아오기까지는 나흘간의 시간이 있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천국 같은 날들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런 게 있으리라 상상도 못했던 날들을 트레벨리언과 함께 보냈다.

클레어의 기준으로 보면, 트레벨리언은 잠을 자지 않았다. 최소한 잠다운 잠은 자지 않았다. 아마 하루에 서너 시간이 고작이었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며 오랜 시간을 클레어와 함께 침대에서 보냈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가르쳐 주겠다던 약속을 지켰다. 클레어가 자신의 몸에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을 고루 어루만져 주었다.

실제 육체의 결합은 그들이 나누는 사랑 행위의 최소한에 불과했다. 클레어를 거의 무아지경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신체 접촉이 있기 전의 행위들이었다. 트레벨리언은 항상 그녀를 흥분시키는 단어만을 사용해 에로틱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가 해 준 이야기들은 천박하지 않았고, 항상 재미있는 약간의 도덕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으리만치 섹시했다.

일단 트레벨리언이 러브 스토리를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녀는 보니 프린스 찰리의 침대에 누워 그의 벗은 몸을 쳐다보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번번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시종일관 클레어에게 아름다운 공주와 그 아버지, 즉 왕의 자문관 사이의 연애 사건에 관한 얘기를 해 주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들켰다면 왕은 그들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문관의 기지로 왕을 가까스로 설득하여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 나가며, 공주와 그녀의 연인이 침대에서 함께 했던 행위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트레벨리언이 벌거벗은 채로 침대로 올라 올 태세를 갖추자, 클레어는 그를 깨물어 뜯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신이, 트레벨리언의 장대한 나신이 침대를 향해 걸어오자 클레어는 그에게 두 팔을 활짝 열었다. 그는 침대 곁에 멈춰 서며 하품을 했다.

"잠시 글을 써야 할 것 같소."

돌연 그 말과 함께, 트레벨리언은 로브를 집어 몸에 걸치고는 침실을 나갔다.

클레어는 깜짝 놀랐다. 그런 얘기를 하고 나서 어떻게 곧바로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나서 침대를 내려오며 무례함을 따질 요량으로, 그의 외투 가운데 하나를 걸치고, 집무실을 향해 걸어 나왔다. 멀리에서 고요하게 앉아 글을 쓰는 트레벨리언의 모습은, 클레어가 느끼고 있는 욕정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입을 열어 자기가 품은 생각을 트레벨리언에게 얘기하려 했지만, 펜을 든 그의 손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도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어는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가 그에게 속삭였다.

"가르쳐 주세요. 당신 무릎에 어떻게 앉는지 말이에요."

즉시 펜을 내던지고 나더니 그의 억센 팔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무릎 위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껴안고 애무하며,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했다.

그들의 밤이 사랑의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면, 그들의 낮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넘치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평생 많은 것을 보았고 그 모두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본 것을 재연해 주었다. 아프리카의 춤을, 인도의 놀이를 보여 주었다. 갔던 나라의 민요도 몇 곡 불러 주려고 했지만 곡조를 맞추지 못했다. 클레어가 띄엄띄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두 사람은 거의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산책하며 웃고 떠들고 이야기를 했다. 그는 클레어를 관목 숲으로 끌어당기며 거기서 키스를 했다. 목뒤에 키스를 하여 그녀가 욕정으로 몸을 떨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서로의 신체 접촉이 없을 때 트레벨리언은 그녀에게 집필 중인 원고를 읽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일단 클레어는 당돌하게 원고에 대해 논평을 했다. 독자들은 아무도 페샤를 에워싼 성벽에 사용된 돌의 치수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터이며, 그 결과는 어떨 거라는 점에 대해 언급했다.

두 사람은 싸웠다. 어쩌면 최소한 클레어가 트레벨리언에게 억지로 대답을 강요하는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트레벨리언은 그녀가 논평을 하자 아무 말 없이 멀리로 그냥 걸어가 버렸다. 질문을 해도 대답이 없었다. 키스를 해도 대답이 없었다. 입술을 귀에 대고 초대의 밀어를 속삭여도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트레벨리언에게 애들처럼 유치하게 군다고 말하자, 그가 돌아서며 클레어를 쏘아보았다. 클레어는 그 눈초리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는 클레어에게 아이는 그녀라고, 자신은 그녀의 나이보다 오래된 부츠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차적인 본능은 달아나 숨는 것이었지만, 억지로 그녀는 자신을 링 위에 올려 세웠다.

클레어는 그의 주요한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나이라고 되받았다. 그는 낡은 세대이고, 현대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고 얘기했다. 뿐만 아니라 퇴행적인 스코트 족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트레벨리언은 자신이 미국을 어떻게 보는지 얘기하며 그녀를 윽박질렀다. 클레어는 남의 말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옹고집에 대한 자기 생각이 어떤지를 말하여 맞섰다.

두 사람의 싸움을 가까스로 뜯어말린 사람은 니사와 브래트였다. 클레어와 트레벨리언은 바깥까지 들리도록 서로 큰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니사와 브래트는 위층으로 뛰어 올라와, 잠시 벽에 붙어 그냥 듣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니사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점수를 매겨 누가 더 말싸움을 잘하나 보자고 그녀가 브래트에게 말했다.

트레벨리언이 클레어의 부모를 비방하자, 니사와 브래트는 트레벨리언에게 4점을 주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이 부모 없는 자식이고, 아마 내다버린 자식일 것이라고 맞받아 쳐 점수를 땄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성큼성큼 방을 걸어 나가 버리자 니사는 큰소리로 패배를 선언했다.

클레어는 노란 소파에 앉아, 방금 전까지 그녀와 트레벨리언을 휩쓸었던 폭풍에 정신이 멍해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트레벨리언의 부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겨우 책 때문에 말이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책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 책이 아니면 어디서 그런 지식을 알았겠는가? 그것은 단지 자기 의견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녀가 알고 있는 바로는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수치에 관한 부분이었다.

니사가 곁에 앉아, 팔로 클레어를 감쌌다.

"그 사람을 뒤쫓아 가 보세요. 그 남잔 상처를 받으면 꼭 덫에 걸린 산짐승 같아요. 쉽게 극복하지도 못하구요."

클레어는 니사가 트레벨리언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클레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디로 갔을 것 같아요?"

"낡은 여름 별장에 있을 거야. 아저씨는 거기 자주 가는 편이야."

브래트가 대답했다.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탑을 내려와 여름 별장까지 먼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거리가 최소한 3킬로미터 가까이나 되는 거리였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걸음이 매우 빠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다 체력을 회복한 뒤로 그의 걸음 속도가 더욱 빨라져서 그녀는 전혀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는 조그만 집의 포치에 놓인 기다란 의자에 앉아 스코틀랜드의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원하는 거요?"

노여움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곁에 앉았지만 클레어는 그를 만지거나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꽤 좋지 못한 얘기를 했어요."

그는 애써 대답을 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자신이 심각한 방식으로 그에게 꽤나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서 그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혔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자기의 글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 사람이었나?

"난 당신의 책을 좋아해요."

그녀가 말을 꺼냈다.

"항상 당신 책을 좋아했어요. 당신 책 모두를 말이에요. 모든 부분을, 하나도 빠짐없이요."

트레벨리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당신 책 말이에요, 기억하세요? 우리가 싸운 게 그거잖아요."

그가 다시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거였나? 수치 몇 군데를 빼야 할지 모르겠군. 어쩌면 책을 두 권을 써야 할지 모르겠고. 하나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해, 또 하나는 일반 대중용으로 말이오. 대중용으로 쓸 책에서는 니사와 다른 예쁜 여자들 얘기를 써야겠소."

"이 세상에 그런 책은 없어도 될 거예요."

클레어가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트레벨리언은 별로 관심 없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아무 말 없이 잠시 그대로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이 몇 시간째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앞으로도 몇 시간은 더 입을 닫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 책에 대해 왈가왈부해서 화난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화가 난 거죠?"

트레벨리언은 당혹스런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오. 당신은 당신 의견이 있는 거고, 나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내게 삐쳐 있잖아요. 당신은 총총걸음으로 탑을 나와 여기로 왔어요. 내게 화가 난 거라구요."

트레벨리언은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클레어는 처음으로 지금까지의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화난 게 아니오. 그냥 머리를 좀 식히려는 것뿐이오."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다음 순간 트레벨리언이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레벨리언이 그녀에게 알리기를 꺼려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내게 얘기를 하는 게 어떻겠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트레벨리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치의 가장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소. 내 인생에 관해 어느 누구보다 당신에게 많은 얘기를 했소."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 말한 건 캡틴 베이커에 대해서였어요. 캡틴 베이커가 탄생하기 전의 당신 인생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요. 어디서 어떻게 자랐죠. 해리와는 어떻게 친척 관계죠?"

"추워지는군. 돌아가는 게 좋겠소."

트레벨리언은 돌아서며 눈썹을 내리누르고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어쩌면 당신은 여기 있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는데? 여름 별장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몸은 내게 주겠지만 당신 비밀은 아니겠죠. 당신은 나에 관해 알 건 모두 알고 있죠. 하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내게 전혀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당신은 나와 비밀을 함께 하지 않는 거라고요."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모두 당신과 함께 했소."

"당신은 내가 함께 했으면 하는 것만을 나와 함께 했어요."

그녀는 발걸음을 돌리며 트레벨리언의 곁에서 멀어졌다.

클레어가 여름 별장에서 채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붙잡았다.

"같이 있어 주시오. 떠나지 마시오."

그녀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눈을. 이내 그 뒤에 무엇이 숨어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에게서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클레어는 그가 지금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트레벨리언의 품에 몸을 기대자 그가 클레어를 꼬옥 껴안았다.

"좋아요.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머리 꼭대기에 키스를 하며 상당히 오랫동안, 그는 그렇게 클레어를 껴안고 있었다.

"그래, 당신은 내 책에서 수치들을 일부 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그렇소?"

"내 손에 연필을 들려주는 게 어떻겠어요?"

"당신에게 편집을 맡기라고? 당신에게? 아직 어린애에게?"

두 사람은 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입씨름을 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과 논쟁을 했지만, 트레벨리언이 하는 말은 반 이상이 그녀를 놀리려는 농지거리였다. 그럼에도 전에 했던 논쟁에서는 그녀가 한 말 가운데 무엇인가가 그를 정말로 화나게 했던 것이다.

소중한 나흘의 시간 동안 그것은 두 사람이 했던 유일한 언쟁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둘이서 사랑을 나누거나 브래트와 니사를 데리고 놀았다.

트레벨리언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던 첫 번째 날 아침, 클레어는 그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는 한시도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달의 진주'라고 불리는 여자와, 남자들만 사는 도시 전체의 추앙을 받던 여자와 마음 편하게 몇 시간씩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여자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니사와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니사의 아름다움은 차치하고라도 클레어는 니사가 그녀에 관해 했던 끔찍한 얘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피부가 개구리 아랫배 같다고 했던 말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트레벨리언이 얘기했던, 니사는 그도 감당하지 못하는 여자라고 했던 말 때문에도 더욱 그랬다. 세상에 무엇을 준다 해도 니사를 좋아하지 못할 거라는 데 내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클레어가 니사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헤아려 본 적이 없었다. 니사의 인생 목표는 원하는 곳 아무데에서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트레벨리언은, 페샤의 여제사장으로서 그녀의 임무는 즐기는 것밖에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니사는 정말로 그렇게 즐겼다.

니사는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에게 장난을 걸어 그를 웃겨 주기도 했다. 게다가 클레어가 방을 나서려는 순간 그녀를 놀리기도 했다. 니사는 트레벨리언의 태도가 정말 짜증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런 뒤에는 클레어의 머리카락이 부럽다고 말했고, 자기가 머리카락을 빗겨 주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머리칼을 매만져 주겠다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니사는 클레어의 풍성한 머리칼을 땋아 내린 다음 세 개의 보석이 박힌 빗을 찔러 주었다. 그 후엔 클레어를 침실로 데려가서 어느새 트레벨리언의 자수가 있는 로브를 그녀에게 입혔다.

"이제 당신 얼굴이요."

니사가 말했다.

클레어는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너무 궁금해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니사는 트렁크를 열고 그 안을 샅샅이 뒤져서 숯덩이처럼 보이는 검은 덩어리를 찾아냈다. 니사는 오만에게 그녀의 브레이져(주방 용구의 하나로 숯불구이용 소형 화로)를 가져오게 했고, 예의 까만 덩어리에 불을 붙였다. 검은 덩어리가 불타는 동안 니사는 주발을 거꾸로 뒤집어 연기를 덮어 씌웠다.

몇 분 정도가 지나자 주발 안쪽에 검은 잔류물이 모였다. 니사는 트렁크 안에서 조그만 빗을 꺼내 들었다. 니사가 주발 안의 잔류물을 떼어내 빗으로 가루를 만드는 동안 클레어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다음 순간, 니사는 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검댕 분을 클레어의 눈꺼풀과 눈썹에 칠했다. 그런 후에 파우더와 루즈를 클레어의 얼굴에 바르고, 클레어의 입술에 루즈를 한 차례 더 발라 주었다. 화장이 끝나자 그녀는 작은 거울을 클레어에게 건네주었다.

클레어는 자기 모습이 틀림없이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니사는 화장술의 전문가였다. 클레어는 자신이 전에 없이 예뻐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집무실을 한 차례 힐끗 훔쳐보았다.

"그이에게 가보세요. 좋아할 거예요."

니사가 말했다.

수줍은 듯이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집무실로 갔다. 그는 다섯 번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실제로 다른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 책상들 가운데 하나에 앉아 글을 썼다.

클레어는 한참 동안을 곁에 서서 시선을 끌기 위해 세 차례나 헛기침을 해야 했다.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연구라도 하듯이 골똘히. 그는 클레어의 뺨을 손에 쥐고 이쪽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니사에게 페샤어로 몇 마디를 건네고 나더니 클레어에게 키스를 하고 계속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소 실망스러운 낯빛으로 클레어는 니사에게 돌아왔다.

"그이가 뭐라고 했어요?"

그녀가 속삭이며 물었다.

"당신은 이미 완벽한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더 예쁘게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대요.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클레어는 기뻐서 미소를 지었다. 다시 트레벨리언에게 돌아가서 말없이 키스를 했다. 트레벨리언은 이런 클레어의 행동에 어리둥절했다. 사실 그가 니사에게 했던 말은, 그녀의 화장술은 좀더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것, 그녀는 너무 두텁게 화장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니사는 클레어에게 옷을 입히고 난 다음, 자기가 클레어의 미국 옷을 입어 봐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양말 몇 켤레를 둘둘 말아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덧대 주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니사는 트레벨리언과 오만 앞에서 패션쇼를 벌렸고, 오만은 두 여자에게 터무니없이 사랑스런 눈길을 보냈다.

브래트가 방안으로 들어온 건 패션쇼가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애가 니사의 모습을 가까이 보기론 처음이었다. 방안의 공기는 브래트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입고 있던 괴상한 가운 위에서 일종의 희열의 빛을 띠던 니사의 귀여운 얼굴 표정이 변했다. 가짜 가슴에 좋아라 하던 것을 그만두고 브래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미모에 관해서라면, 니사는 자기에게 필적할 만한 여자를 전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임을 클레어는 즉시 알아차렸다. 니사는 얼굴이 검고,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반면, 브래트는 창백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브래트는 밝은 갈색 머리, 푸른 눈, 핑크빛 입술과 그리고 상아색 피부를 갖고 있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는 의자 깊숙이 등을 묻고, 대단히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두 젊은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걸 책에 써야지' 하는 표정이었다.

브래트가 먼저 움직였다. 니사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세우고 눈을 마주보았다. 니사는 키가 작았고, 브래트는 아직 열네 살에 불과했지만 벌써 어른 키만큼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브래트는 주먹을 움켜쥐고 찰싹 소리가 나도록 니사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니사가 바닥에 엎드려 쓰러졌다.

"브래트!"

불구대천의 원수나 되는 양 니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생에게 클레어가 고함을 질렀다. 클레어는 니사에게 뛰어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그러는 동안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도와 줘요."

그녀는 명령을 하듯이 트레벨리언에게 말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품이, 이 상황에 매료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정말 미안해요."

클레어가 니사를 일으켜 세우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라 앤, 지금 당장 사과해."

브래트는 굳은 얼굴로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니사가 일어서자 클레어는 동생에게 다가섰다.

"해명을 하고 사과를 해.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 일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니사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클레어는 돌아서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아인 여태껏 자기보다 예쁜 여자와 한 방에 같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니사가 말했다.

브래트는 입을 꼭 다물고 서서 니사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움을 청할 요량으로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그는 다만 어깨를 움찔해 보일 뿐이었다.

"당신은 돈을 가졌고 동생은 대신에 미모를 가졌소. 당신보다 더 돈 많은 상속녀를 만나 본 적이 있소?"

저 사람이 정신 나갔나 하는 표정으로 클레어가 그를 쳐다보았다.

"이게 돈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내 동생은 단지 사람을 두들겨 팬 거고……."

니사가 클레어의 앞을 지나쳐 브래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클레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네 얼굴도 언니처럼 화장을 해 줄게."

상냥한 목소리였다.

"네 얼굴과 같은 붉은색 외투가 내게 있어. 그리고 조그만 거울이 달린 신발도 네게 줄게."

여전히 입을 꼬옥 다문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브래트가 이윽고 니사를 따라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첫 번째 에피소드 이후로 니사와 브래트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욱이 서로가 서로에게 친근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서로를 자신의 눈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클레어가 보기에 니사는 그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브래트는 필사적으로 진지했다. 더군다나 애초에 브래트가 니사에 대해 보였던 적대감에 그녀는 적이 곤혹스러워 했지만, 트레벨리언은 기껏 어깨를 으쓱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게 니사에겐 재미있는 일일 거요. 그러니 걱정할 것 없소."

클레어는 니사와 브래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트레벨리언의 대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니사는 클레어와 동갑인 열아홉 살이었지만, 그 젊은 페샤 여자는 클레어보다 훨씬 천진난만하게 행동했다. 일말의 책임감조차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질병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자신을 즐길 뿐이며, 클레어에게 살아있는 동안의 유일한 계획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한번은 클레어가 니사의 앞날에 관해 트레벨리언에게 얘기를 하려고 했다. 트레벨리언은 그 주제에 대한 언급을 꺼렸다. 그런 주제 자체가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저 여잔 당신과 다르오."

그는 반고함을 치 듯이 대답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여기와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걸 이해 못하겠소? 당신은 미국은 잉글랜드와 다르고,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다르다고 불평을 했소. 그런데도 세계의 다른 부분과는 어떻게 다른지 전혀 아무 생각이 없질 않소."

클레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길래 트레벨리언이 그토록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그런 예외적인 분노는 최소한 그녀가 트레벨리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때때로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사랑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전혀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글을 쓸 때는 다른 사람이 보기엔 끔찍할 정도로 집중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브래트와 니사가 서로 고함을 질러도, 두 사람 사이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으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태연했다.

한번은 브래트와 니사가 눈에 띄게 멋진 붉은 색 로브를 놓고 다툰 적이 있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을 잡아 흔들며, 글쓰기를 멈추고 두 사람을 타협하게 하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트레벨리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옷이 반으로 찢어지고 나면 후회를 하게 될 거요. 그러고 나면 두 사람은 내가 얘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배울 거요."

불행하게도, 그가 옳았다.

넷째 날 아침 오만이 클레어에게 편지를 한 통 들고 왔다. 땀에 푹 절은 말을 탄 남자가 그녀에게 전해 주라던 것이었다. 트레벨리언은 글을 쓰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며 대단히 궁금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팔을 내밀어 편지를 집는 동안 그녀의 가슴이 콩닥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트레벨리언과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해리가 들은 것은 아닐까? 편지가 그이에게서 온 것일까?

"웨일즈 공()에게서 온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니사와 브래트가 침실에서 뛰쳐나와 그녀가 편지를 개봉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클레어가 재빨리 편지를 읽고 나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웨일즈 공이 맥 트레비트네 위스키에 왕실 인증서를 보냈어요."

"그 사람이 위스키를 체포브래트는 'warrant''수배', '구인'한다는 뜻의 발음이 비슷한 'wanted'로 잘못 들었다하고 싶대?"

브래트가 물었다.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대공은 여태껏 맛을 본 중에 맥 트레비트 위스키가 최고이며, 그걸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썼어."

클레어가 트레벨리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그 여자가 맥 트레비트를 이 땅에서 내쫓을 수 없을 거예요. 웨일즈 공이 위스키를 원하지 않는 이상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이 한동안 클레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 노파가 좋아하지 않을 거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당신은 그 여자 일에 너무 끼어 들고 있는 거요."

클레어는 그를 외면했다. 얘기 내용은 물론 그 목소리가 너무도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맥 트레비트에게 전해 주러 같이 가지 않겠어요?"

"좋아요. 기꺼이."

니사가 대답했다.

"당장 출발해서, 어떻게 한 건지 당신 입으로 직접 설명을 해 주는 거예요."

트레벨리언이 오만에게 고개짓을 했다. 그리고 30분 뒤, 그들은 모두 맥아렌 가의 마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마치 별난 인간들의 집합 같았다. 트레벨리언은 플레드를 입고 있었다. 이미 그것이 수장의 플레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에게 입지 말라는 얘기를 다시 했다. 그는 해리의 킬트가 자기에게 너무 짧다고 대답했고, 클레어는 그 야비한 표정에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니사는 다이아몬드 문양을 빽빽하게 수놓은 황금색 계통의 갈색 외투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브래트는 그녀의 적이자 친구에게 뒤질세라 푸른색 긴 로브를 입고 머리에 꽃을 꼽았다. 오만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괴상한 차림새는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오로지 클레어만이 '정상인다운' 평이한 적색 모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클레어는 소작인들이 그들을 다른 별에서 온 사람으로 착각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마차에 탄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니사는 트레벨리언에게 페샤 말로 뭔가를 얘기했고, 그러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클레어는 니사를 쳐다보았다.

"통역해 주세요."

니사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트레벨리언이 대답을 했다.

"당신 등에 찬 괴상한 물건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 당신이 가장 괴상해 보인다고 말했소."

"내 버슬!"

클레어가 분개하며 소리를 질렀다.

"똑똑히 알아 두세요. ……."

클레어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마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클레어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소한 당신은 조지 워싱턴이 현대에 나타난 것 같은 복장은 아니군요."

트레벨리언이 미소로 대답했다.

아직도 4킬로미터 가량이 더 남았다 싶은 곳에서 마차 길이 끝났고,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앵거스의 집까지 걸어야 했다. 앵거스가 언덕배기에서 그들을 맞았고, 그의 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열댓 명 정도의 소작인들과 함께 있었다. 아마 아직 멀리 있을 때 마차가 오는 것을 보았고, 마차에 탄 사람들을 맞기 위해 몰려나온 모양이었다. 번쩍거리는 실크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언덕을 걸어올라 오자, 소작인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태껏 말문이 막혀 본 적이 없는 앵거스였지만 그는 브래트와 니사를 계속해서 번갈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씩 돌릴 때마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트레벨리언은 클레어를 쳐다보며, 그녀가 기분이 상하기 일보직전임을 눈치 챘다. 그는 얼른 앵거스의 거친 손을 잡아 끌어 오두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갑시다. 클레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오."

세 사람이 함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클레어가 유일한 등받이 의자를 차지했고, 트레벨리언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앵거스의 위스키가 도착하기까지 참을성 있게 앉아서 기다렸다. 위스키를 내오고 나서, 앵거스는 자리를 잡고 앉아 말을 꺼냈다.

"무슨 일 때문에 이 많은 사람이 함께 오게 되셨소?"

"이것 때문이에요."

클레어가 대답을 하며 편지를 앵거스에게 내밀었다.

그가 편지를 받아들고 들여다보았지만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클레어는 이내 그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웨일즈 공께서 당신 위스키에 왕실 인증을 내주셨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앵거스는 더 설명을 해 달라는 표정으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우린 최근에 에든버러에 다녀온 일이 있었소. 왕자는 여왕을 알현하려고 발모랄(스코틀랜드 Dee 강변에 있는 영국 왕실의 행궁. 파이프 백작의 소유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이 1848년 남편을 위해 임대했다) 궁을 방문하고 있던 참이었고. 클레어가 당신 위스키 한 병을 대공께 보냈소. 대공은 위스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오."

앵거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완전히 이해를 못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왕이 되실 대공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대공은 아무도 당신이 위스키 만드는 걸 막지 못하도록 할 거예요. 설사 공작부인이라도 말이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당신 위스키를 사려고 스코틀랜드로 몰려들 거예요. 특히 미국인들이요. 미국인은 스코틀랜드 적인 건 뭐든 좋아해요. 위스키를 사러 이곳을 오는 돈 많은 미국인과 비싼 값에 당신 위스키를 흥정할 수 있을 거예요. 원한다면 수천 달러씩 받아도 될 거예요. 미국인은 돈을 비싸게 주고 물건 사는 걸 좋아해요. 그래야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주고 샀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허풍을 떨 수 있기 때문이죠."

앵거스는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불행하게도, 저 여자가 말한 건 모두 사실이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앵거스가 두 사람 얘기에 정신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앵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다시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는 톤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난 항상 옛날 방식을 좋아했소. 내 가족들 역시 항상 옛날 방식을 따랐고."

클레어가 숨을 집어 삼켰다.

"인증을 꼭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에요. 누가 전에 인증을 거절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거절할 수는 있을 거예요. 원한다면 하던 방식대로 할 수 있을 거라구요."

앵거스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성난 얼굴을 해 보였다.

"거절한다구요? 내가 바보 얼간이로 보이시오? 멍청이로? 내가 늙어서까지 이 집에서 추위에 떨며 지내는 걸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내 아이들은 여기서 할 일이 없어서 떠났소. 나도 내 위스키를 도시에 내다 팔고 싶소. 하지만 그 노파가……."

그는 고개 짓으로 얼추 브램레이 방향을 가리켰다.

"그 늙은이가 내 마차를 습격해서 위스키 병을 모조리 박살내 버렸소. 옛날 일이오만."

그리고는 클레어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어떤 경우에는 옛날 것이 좋소. 당신은 내 킬트를 벗기고 볼기를 때리기까지는 않겠지만, 난 소를 훔치지 않으면 살 수 없소. 나도 돈을 주고 사고 싶지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겨울에 오렌지를 사서 먹고 싶소."

앵거스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잠시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거리가 있으면 내 가족들도 아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요. 난 아들이 넷 있소. 모두 잘생기고 허우대가 멀쩡한 녀석들이지. 모두 미국에 있고, 두 녀석은 벌써 결혼을 했소."

앵거스가 고개를 들어 클레어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앵거스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아들놈 중에 한 녀석은 애가 있소. 아직까지 그 손주 녀석 얼굴도 못 봤소. 앞으로도 행여 볼 날이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 꿔 봤고."

클레어는 앵거스를 쳐다보았다. 그녀 자신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다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그는 클레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클레어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을 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잠시 후 트레벨리언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앵거스는 두 사람이 방을 나서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트레벨리언의 손을 잡은 채로 클레어는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오두막 옆에서 백파이프 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어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지만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숲속으로 잡아끌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에 이르자,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향해 돌아서며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전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키스를 했다. 욕정의 키스가 아니었다. 아마도, 아마도…… 사랑의 키스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트레벨리언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감싼 채 등 뒤로 돌아가서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모습을 기억 속에 담아 두려는 듯이.

"앵거스를 위해 정말 좋은 일을 했소."

트레벨리언이 속삭였다.

사실 클레어가 칭찬을 쑥쓰러워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누구라도 했을 일이에요. 난 위스키를 왕자에게 보내면, 아마 그 분이 맛을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런던에서 대공을 만났을 때 그분이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트레벨리언은 예의 그 괴팍한 표정으로 클레어를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니사가 파티를 벌였지 싶은데. 가서 춤을 구경하지 않겠소?"

클레어는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하더라도, 앵거스에게 왕실 인증 얘기를 한 오늘 같은 날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앵거스는 커다란 위스키 통을 따서 모든 사람 앞에 내놓았다. 예전과 달리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나 봐."

트레벨리언이 클레어에게 소곤거렸다.

처음 클레어가 앵거스를 찾아왔을 때 춤을 배우던 사람은 그녀였지만, 오늘은 니사와 브래트였다. 두 아름다운 젊은 여자가 춤을 금세 배워 너무 잘 추는 것을 보고 클레어는 뒤로 물러나 구경만 했다. 두 사람의 발은 바닥에 놓인 칼 위를 스치듯이 사뿐히 날아다녔다.

브래트가 입고 있던 로브에 걸려 넘어지자 니사는 그들도 스코틀랜드 인과 같은 옷을 입고 싶다고 했다. 여자들 가운데 하나가 긴 수직 스커트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니사는 한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입고 싶은 옷이 저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여자들은 짧은 킬트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니사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얘기를 했다. 앵거스가 검은색 맥 트레비트 가의 플레드 두 개를 꺼내다 주었다. 그 킬트들은 앵거스가 대단히 소중히 여기며 오랫동안 따로 보관해 왔던 것으로 보였다. 니사가 킬트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들고 나서 앵거스의 깡마른 볼에 키스를 했다. 브래트도 뒤질세라 반대편 뺨에 키스를 했다.

 

앵거스는 빠진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예쁘고 젊은 두 여자가 다리의 맨살을 드러낸 채로 앵거스의 집에서 나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일부 여자들 사이에서 탐탁지 않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떤 남자들은 힐끗힐끗 곁눈질을 했다. 트레벨리언은 브래트와 니사에게 다가가, 각기 팔 하나씩을 두 사람 어깨에 얹고 호위를 하듯이 파이프 주자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 탐탁지 않아 하던 태도가 씻은 듯 사라졌다. 힐끔거리는 눈초리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자, 트레벨리언은 클레어에게로 돌아왔다.

"당신 말은 마치 법처럼 통하는군요."

그를 쳐다보며 클레어가 말했다.

"당신이 괜찮다고 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여자는 절대로 킬트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데리고 가자, 소작인들은 두 여자를 받아들였어요."

트레벨리언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주 춤을 잘 추지 않소, 안 그렇소?"

아무런 대답도 얻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서서,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이 소작인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트레벨리언은 소작인들 대부분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더욱이 그는 소작인들의 친척과 집안 사정 따위를 물었다. 그답지 않게.

정오가 되었을 때,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이 아이 두 명에게 뭔가를 얘기하자, 아이들이 서둘러 언덕을 내려가 브램레이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저 아이들이 어딜 가는 거죠?"

그녀가 물었지만, 트레벨리언은 클레어의 턱 밑을 가볍게 두드리며 깜짝 놀래 줄 일이라고만 얘기를 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야 그녀는 비로소 그 일이 뭔지를 알 수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소작인들 모두를, 백 명이 넘는 소작인들을 브램레이에 초대하기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시켜 두었던 것이다. 브래트의 친구 캐미는 연극 공연에 사람들을 초대했다.

트레벨리언은 브램레이에서 온 마구간지기 아이가 가져온 말 위에 올라 앉았다. 그는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자기 앞에 있는 안장에 앉혔다.

그의 앞에 올라 앉은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탄탄한 가슴을 느끼며 등을 뒤로 기댔다. 한때 그녀에게 말을 데려다 주고 기절했던 남자, 그래서 늙은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을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트레벨리언은 서서히 말을 몰아 숲을 통과했고, 멀찌감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브램레이를 향해 걷고 있었다.

"당신의 존재가 여기서 비밀에 붙여지지 못할 것 같군요."

클레어가 말했다.

"그렇소."

더 많은 얘기를 기대했지만 그것뿐이었다. 클레어도 더 이상 그를 강박하지 않았다. 그는 알리고자 하는 이상으론 얘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당신도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겠죠?"

그녀가 물었다.

"끝나지 말았으면 하는 그런 순간 말이에요."

"전혀. 내가 흥미를 갖는 건 항상, 과거가 아니라 오직 현재의 일, 곧 일어나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미소를 지었고, 트레벨리언에게 몸을 기대며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 순간에는 그녀도 미래를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칠흙 같이 어두운 스코틀랜드 시골길을 느릿하게 말을 몰아갔다. 두 사람이 동쪽 날개의 입구에 도착할 즈음 소작인들도 거의 동시에 그곳에 도착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전에는 음식을 못 들였던 거실에 음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캐멀롯 J. 몽고메리는 정신이 나갔다 싶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연극의 관객이 생겼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문간에 서서, 사람들이 일시에 음식 테이블로 뛰어드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것 아니오?"

트레벨리언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공작부인이 되면 하겠다던 일 말이오, 맞소? 혹시 당신네 미국인이 신봉하는 평등이 이런 것 아니오?"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해리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나올까요?"

트레벨리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까지보다 심한 짓이야 하겠소? 이제 걱정 그만 하고 가서 먹기나 합시다."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클레어는 걱정을 접어 두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래도 그 노파와 그 노파의 끔찍한 보복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캐미의 소극장으로 몰려갔다. 의자가 반 정도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벽을 따라 늘어섰다. 금박으로 치장한 실내의 화려함에 모두들 넋이 나가 있었다. 막이 오르면 원작을 왜곡시킨 괴상한 연극을 보게 될 거라고 클레어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사 혼자 무대 위에 올라왔다.

니사는 보석이 번쩍거리는 무거운 붉은색 로브를 차려입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커튼 뒤에서는 피리가 기분 나쁜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 곁에 서 있던 클레어는 그가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게 뭐죠?"

클레어가 속삭였다.

트레벨리언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추었기 때문에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가 지나치게 슬퍼하고 있다는 느낌이 현저했다.

"뭣 때문에 그러는지 얘기해 주시겠어요? 누가 피리를 부는 거죠?"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는 천천히 클레어의 등 뒤를 돌아 그녀를 끌어당기며, 그녀의 등과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켰다.

"잘 보시오."

볼멘소리로 그가 말했다.

"니사가 춤을 출 거요. 많은 의미를 가진 고대의 춤이오."

"뭘 의미하는 건데요?"

얼굴을 돌아보려고 애를 쓰며 클레어가 물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그녀가 돌아서게 두지 않았다.

트레벨리언은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가져갔다.

"죽음을 의미하는 성스러운 춤이오. 페샤의 여제사장은 모두 저 춤을 배우지."

클레어는 무대 위의 니사를 보았다. 니사가 입고 있던 무거운 로브를 벗어 던졌다. 안에 입은 얇고 투명한 속옷은 니사의 황금색 피부와 유연한 몸매를 거의 감추지 못했다. 도발적이고 심지어 문란하기까지 했지만, 객석은 일말의 동요가 없었다. 모두가 희극과는 거리가 먼 공연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는 듯했다.

춤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니사의 춤은 느리고 아름다운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부의 힘에 끌리듯, 잘 훈련된 완벽한 동작이었다. 그녀는 길고 느린 템포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정확하게 움직였고, 비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클레어는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그가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니사는 온 가슴과 영혼으로 자신의 종교를 믿고 있소."

그가 속삭였다.

계속해서 지켜보았지만 그녀는 도무지 소름만 끼쳤다. 니사가 느리고 우아한 몸짓으로 죽은 듯이 쓰러지자, 관객들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니사는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누워 있었고, 관객들도 그녀의 고요함을 반영하듯 숙연해 있었다. 그때 브래트가 무대 뒤에서 뛰어나와 니사를 일으켜 세우며 품안에 안았다.

니사가 눈을 뜨며, 갑자기 그녀의 웃음소리가 무대 안에 울려 퍼졌다. 순간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돌아서려고 애를 써 봤지만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꼬옥 껴안고 있었다.

"보시오."

그가 말했다. 이내 다시 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빠르고 흥겨운 곡조였다. 니사는 미소를 지으며 브래트를 밀쳐내고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금의 춤은 죽음을 상징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이건 뭘 축하하는 춤이죠?"

비아냥거리는 투로 클레어가 물었다.

"출산과 생식이오."

파도가 넘실거리는 듯한 춤동작에 웃고 손뼉치는 청중들의 소음 속에서 트레벨리언이 이렇게 대답했다.

클레어는 몸을 비틀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흥겨운 표정이었다.

"바람을 쐐야 하겠어요."

두 번을 되풀이하자 그가 겨우 말소리를 알아들었다. 트레벨리언은 의도를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클레어를 건물 측벽으로 데려간 그는 어둠 속에서 키스를 시작했다.

"나에 대한 건가요, 아니면 니사에 대한 건가요?"

숨을 가다듬으며 그녀가 물었다.

"그게 걱정되오?"

그녀가 웃어 젖혔다.

"사실은 안 그래요."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머리칼을 손에 잡고 그의 키스에 보답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녀가 눈을 뜨자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오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거운 눈까풀을 반쯤 내리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치 눈에 아무것도 뵈지 않는다는 듯이 서 있었지만,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클레어가 트레벨리언의 머리칼을 잡아 밀쳤다. 하지만 그는 키스를 멈추지 않고 오만에게 외국어로 나지막하게 뭔가를 얘기했다.

오만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만이 뭐라고 했죠?"

클레어가 물었다. 이제 그의 입술은 클레어의 목을 탐하고 있었던 바, 도무지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물음은 아랑곳없이 키스를 계속했다.

"오만이 뭐라고 했느냐구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트레벨리언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한 거리로 물러섰다.

"해리가 돌아왔소."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다시 클레어의 목에 키스를 시작했다.

클레어는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몸을 밀쳐내며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내게 할 말 없어요?"

"지금은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는 중얼거리며 허리를 구부려 다시 키스를 했다. 그녀에게서 응답이 없자 그가 말했다.

"정원으로 갑시다."

그는 클레어의 손을 잡아끌어 숲속의 은밀한 곳으로 갔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싶어 클레어는 그를 뒤따라 갔다. 하지만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안으며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그만 해요!"

클레어는 그를 밀쳐내며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두 사람이 떨어져 서며, 트레벨리언은 밝은 달빛 아래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정말 당신은 태평스럽게도 행동하는군요. 오만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트레벨리언의 얼굴빛이 바뀌며, 며칠간 보지 못했던 눈에 익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커튼이 내려진 듯,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비롯 누구라 할 것 없이 전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들었소."

클레어가 한 걸음을 앞으로 다가섰지만 그가 뒤로 물러났다. 클레어는 손을 그대로 곁에 내려놓았다.

"앞으로 우린 어떡하죠?"

그녀가 속삭였다.

"인생에서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가 있소."

"그게 무슨 뜻이죠? 어느 책에서 읽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 책에 썼던 얘긴가요?"

"말한 그대로요."

트레벨리언의 얼굴이 더욱 폐쇄된 표정으로, 더욱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녀가 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트레벨리언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날 내쫓지 말아 달란 말이에요. 난 어떻게 해야 하죠?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느냐구요?"

대답이 없자 클레어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클레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너무 키가 컸고, 표정은 너무 어두웠으며, 너무 먼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더 이상 그녀와 웃고 떠들던 트레벨리언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어린 시절 환상 속의 캡틴 베이커였으며, 신화 속의 인물처럼 그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갈무리하며 곁에 내려놓았다.

"나도 그런 여자들 중에 하나에 불과했군요, 그렇죠? 지난 나흘은 내게 전부나 마찬가지였어요. 평생 그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요. 당신과 그 많은 걸 함께 했어요. 아니, 함께 했다고 생각했어요. 난 여태껏 대화를 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과는 달랐어요. 내가 읽었던 것, 내 생각, 내 희망을 얘기할 수 있었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바라는 건 뭐든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에겐 내가 아무런 의미도 없었군요."

그녀가 돌아서며 걸음을 옮기자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당신이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나지막한 소리로 그가 물었다.

클레어는 격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만은 해리가 돌아왔다고 말했지만 당신은 이렇다 할 말이 없었어요. 내가 해리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 내가 당신과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거라고요. 당신은 내게 원하는 걸 얻었고, 난 이제 당신 책의 한 단원으로 남겠죠. 아니지, 미국인 상속녀 따위에게 한 단원씩이나 할애하겠어요? 당신의 '달의 진주' 같은 여자나 한 단원을 통째로 차지하겠죠."

"내가 어떡하길 바라는 거요?'

클레어가 머리를 저었다.

"당신이 모른다면 나도 말을 할 수 없어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가 몸을 움직여서 클레어 앞에 섰다.

"내게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보시오. 해리 대신에 나와 함께 살자고 당신에게 구걸이라도 하라는 얘기요?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거요? 공작부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정글 귀퉁이 오두막집에서 같이 살자고 당신에게 떼를 쓰기라도 해 달란 말이오?"

클레어의 머리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트레벨리언을 따라가 그와 한평생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했던 지난 며칠은 현실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트레벨리언은 묻기는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르겠어요."

고뇌하는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그녀는 격앙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같이 자는 얘길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 못하세요? 난 사랑에 대해 얘길 하고 있는 거라구요."

"나도 마찬가지요."

클레어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레벨리언이 어깨에 손을 얹자 클레어는 그의 손에 볼을 비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뭘 어떡해야 할지 얘기해 주세요."

그녀를 돌려세워 얼굴을 마주보며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당신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하오. 내가 그 결정을 대신해 줄 수는 없소. 아무도 남의 삶을 대신 살지 못하는 법이니깐 말이오."

듣고 싶던 대답이 아니었다. 왜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녀를 원한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그녀든 해리든,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이든 죽여 버리겠다고 얘기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요?"

마치 클레어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가 말했다.

"당신을 말에 태우고 여기서 당신과 달아나 주기를 바라는 거요? 당신을 납치해서 다음 원정지로 도망이라도 치라는 거요? 그럼 그랬다 칩시다. 날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소? 앞으로 이 년도 안 되어 내가 미워지기 시작하진 않겠소? 당신 부모가 땡전 한닢 안 남기고 당신 몫으로 물려준 할아버지 유산을 모조리 써 버려서, 가족들이 이젠 알거지 신세라는 동생의 편지를 받게 되면 말이오. 어쩌면 그 전부터 이미 내가 미워지기 시작할지도 모르지 않겠소? 내가 원정을 떠나고 나면 당신은 뒤에 남아, 당신이 없는 내가 뭘 하고 있을지 오만 가지 상상을 할 테니까 말이오."

"나도 모르겠어요."

그것이 클레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꼬옥 쥐었다.

"날 사랑하오? 날 말이오? 책을 몇 권 읽어서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캡틴 베이커가 아니라, 나 자신, 트레벨리언이란 사람을 사랑하느냔 말이오?"

그가 물었다.

클레어가 주저했다. 그러자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이에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과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다른 누구와도 난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음에도 어떻게 당신과 같이 잘 수 있겠어요? 내 부모가 그걸 알았다면, 해리가 그걸 알았다면, 아마 그건 커다란 상처가 되었을 거예요. 난 결코……."

다시 그녀를 쳐다보는 트레벨리언의 눈은 분노에 멀어 있었다.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그가 몸을 수그렸다.

"난 수백 명의 여자와 같은 침대에서 잤소. 당신이 상상도 못할 행위들을 그 여자들과 했소. 하지만 그 여자들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소. 당신을 사랑했던 것과 다르게 말이오."

클레어가 흠칫 한 걸음을 물러섰다. 격한 그의 태도에 놀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내게 물었어요. 사랑하는 건지 아닌 건지 내가 도대체 어떻게 알겠어요? 난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해요. 당신은 자신을 내게 비밀에 붙였잖아요. 난 트레벨리언보다 캡틴 베이커를 훨씬 잘 알아요. 어디서 태어났죠? 해리와는 어떤 관계죠? 소작인들이 왜 그렇게 당신을 존경하는 거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느끼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된 게 도대체 얼마나 됐죠? 몇 일? 몇 주일?"

클레어는 그를 쳐다보며, 트레벨리언의 대답을 얻어 낼 기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했어요. 당신은 날 원하고, 납치라도 해서 한평생을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판단을 해야 하나요? 그걸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날 원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아무런 얘기도 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털끝만큼도! 몰래 그렇게 훔쳐보지 않았으면 당신이 캡틴 베이커라는 사실도 몰랐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얘길 해 줄 리 만무하잖아요."

트레벨리언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눈빛이나 목소리, 어느 것 하나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말이 그렇게 중요하오? 당신이 원하는 게 말이라면,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소. 사랑하오. 세상에 어느 여자보다 사랑하오. 거의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아마 당신을 사랑했을 거요. 나랑 같이 갔으면 좋겠소. 지금! 오늘밤에! 뒤도 돌아보지 말고 여기를 떠나 버립시다. 앞으로 미래가 어떨지는 모르겠소. 틀림없이 난 남편 감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꼴찌일 거요. 원정을 떠났다 하면, 한 번에 몇 년씩 당신을 혼자 버려 둘 거요. 당신은 내가 태도가 못됐다고 욕을 할 거요. 난 이기적인 놈이고, 틀림없이 당신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거요. 여자 문제라면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일부일처제는 아마 내게 어려운 일일 거요. 노력은 해보겠지만 말이오."

약간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지금 그에게 팔을 내밀어 함께 떠나야 한다는 것을 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이 얘기했던 그대로 하고 싶었다. 함께 말에 올라 도망치는 것. 맥아렌 가의 영지는 결코 뒤도 돌아다보지 않을 것. 결코 지금을 추억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재산을 가질 수 있는 여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캡틴 베이커와 같이 위대하고 유명하고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그런 재산 말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트레벨리언과 함께 떠난다면 그것은 가족과 등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부모를 조롱하고, 그들을 쓸모없는 한쌍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가족이다. 아마 그는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겠지만, 클레어도 그럴 수 있을까? 그가 지적했듯이 자신이 동생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가 달아날 수 있을까?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윽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다려요!"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트레벨리언을 막아섰다.

"……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하지만……."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그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부드러워지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젊은 공작이 아마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 녀석에게 가는 게 나을 거요."

그녀가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해리에게 가는 게 아무렇지도 않나 보죠?"

"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지는 않소. 마음의 결정을 했으면, 난 당신이……."

그가 집 쪽을 쳐다보았다.

"난 여기서 앞으로 며칠 정도만 더 머무를 거요. 잘 주무시오. 미스 윌로비."

 

 

 

22

그날 밤 클레어는 혼자서 지치도록 울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른 아침까지도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해리가 방으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아마 아침을 훌쩍 넘겨서까지 잠을 잤을 것이었다.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로저스는 다치지도 않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아래층에 갇혀 있었다. 아무도 그녀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뻔질나게 방을 드나들던 브래트도 오지 않았다. 아마 니사와 트레벨리언, 오만과 함께 있을 것이었다. 클레어는 가슴이 쓰렸다. 베개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열 시가 되어 격렬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클레어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구태여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문 밖에 누가 있는지, 그녀를 보자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문을 열지 않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었지만 문은 열렸다. 무심한 시선으로 해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팔에는 꽃이 가득했고, 큼지막한 가죽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젊은 공작의 멋진 모습은 클레어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그에게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미소도, 결혼을 해야 할 남자를 만났다는 데에 대한 아무런 행복감도 없었다.

해리는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한아름 안고 있던 꽃을 침대 발치에 내려놓고 커튼을 열었다.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클레어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이불을 끌어다 덮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해리는 침대 곁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새 울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열아홉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당신에게 사과하겠소."

그가 말했다.

나가라는 듯이 클레어가 손을 내저었다. 입을 열어 말을 꺼내려 했지만, 다시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해리가 손수건을 건네주려 했지만 침대 곁 탁자 위의 손수건은 벌써 흥건이 젖어 있었다. 그는 서랍이 달린 커다란 수납장으로 걸어가 여기저기 서랍을 뒤적여서 깨끗한 손수건 더미를 찾아냈다. 그는 손수건 뭉치 하나를 꺼내 클레어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소리내어 세차게 코를 풀었다.

"당신에게 사과하러 왔소."

해리가 다시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클레어가 다시 뭔가 말문을 열려고 하자 그는 두 손을 뒤로 포갰다.

해리는 뒷짐을 지고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한동안 당신에게서 떠나 있기 전까지는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지 못했소. 클레어, 내 사랑,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소.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던 건, 내 어머니가 당신을 꾀어 오도록 날 런던에 보냈기 때문이오. 어머닌 미국인 상속녀를 얻을 기회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오. 뭐랄까, 고쳐야 할 지붕과 돌봐야 할 많은 가족들이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우린 당신 돈이 필요했소."

그는 서성거리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얻는 게 꽤나 쉬웠소."

순간 클레어가 울기 시작했다. 당신을 얻기가 쉬웠다! 실로 그녀는 만나는 모든 남자마다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보였다.

해리는 다가와서 침대 한쪽에 앉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난 이걸 돈 때문에 시작했지만 어디서부터인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소."

이 말은 클레어를 더 서럽게 울도록 만들었고 해리는 그녀의 손바닥에 키스를 했다.

"지난주에 집을 나섰을 때, 난 매우 화가 나 있었소. 당신이 나와 함께 사냥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 당신이 나와 함께 간 이유가 단지…… 난 당신이 함께 사냥을 따라 나섰던 이유를 도무지 헤아리지 못했소.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난 당신이 사냥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소. 당신은 항상 불행해 보였고, 그래서…… 돌아올 때는 항상 빗물에 푹 젖어 있었소."

해리가 미소를 지었다.

"지난 며칠 간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아시오?"

클레어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코를 풀었다. 물론 해리가 어디 있었는지는 이미 트레벨리언이 가르쳐 주었지만, 클레어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해리가 싱긋 웃었다.

"내 정부와 결별을 하고 왔소."

그때 클레어는 고개를 들어 해리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난 당신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거짓말 하지 않는 진실한 여자와 시간을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소.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싫을 때는 자기는 뭘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여자 말이오. 난 당신에게 화가 나 있었소. 에든버러에 도착해서, 난 올리비아를 만났소. 그리고 모든 걸 다 얘기했소."

해리가 가볍게 빙긋 웃었다.

"리비에(올리비아의 애칭)가 날 껴안으며 당신에게 심한 악담을 퍼부을 거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그녀가 어땠는지 아오?"

클레어가 머리를 저었다.

"웃었소. 내 평생 리비에처럼 심하게 웃는 여자는 처음 봤소. 저렇게 웃다 가슴이 터지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처음으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실컷 웃고 나서 리비에가 '그 여잔 틀림없이 당신을 너무 사랑하는 거예요'라고 하지 않겠소."

해리를 쳐다보는 클레어의 눈이 커다래졌다.

"맞소, 그녀가 그렇게 말했소. 사격장에서 며칠씩이나 하루종일 비를 맞고 앉아 있는 여자라면 나를 사랑하는 여자일 수밖에 없다고 리비에는 말했소."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비에는 나와 함께 사냥을 갔던 적이 없소. 어쨌든 리비에는, 자신이 당신처럼 돈이 많아 원하는 어떤 남자라도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웨일즈 대공을 위해서일지라도 종일토록 비나 쫄쫄 맞고 앉아 있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소."

"맞는 말이군요."

가까스로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당신도 그 여자가 마음에 들 거요. 내 말은, 당신이 그 여잘 만날 수 있다면 그럴 거라는 뜻이오. 하지만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소."

해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클레어, 왜 울고 있었던 거요."

클레어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비밀 통로로 통하는 문이 있는 커다란 초상화 앞에 가서 섰다.

"트레벨리언 발자국이오? 맞소?"

클레어가 대답이 없자 해리가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클레어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처음으로 분노를 보았다.

"대답은 필요 없소. 모든 여자들이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어딜 가든, 여자들은 모두 그를 사랑하지. 모두 그와 야반도주라도 하고 싶어 하지."

해리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과 함께 도망칠 셈이오?"

"……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해리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그걸 원하지만. 안 그렇소?"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이는 의문에 대해 자기 자신조차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트레벨리언과 함께 도망을 치고 싶었나? 트레벨리언처럼 냉소적인 남자의 손에 인생을 맡기고 싶어 했나? 진정 그 사람처럼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냉정한 남자를 원했던가?

해리는 그녀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녀에게 다가와 두 손으로 그녀의 양손을 잡고 그곳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클레어, 아직 내가 기회가 있다고 말해 주시오. 제발 내가 기회를 잃은 건 아니라고 얘기해 주시오. 같이 사냥 가자는 얘기는 이제 하지 않겠소.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자는 얘기는 다시 않겠소. 내가 트레벨리언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난 그가 주지 못하는 걸 줄 수 있소,"

그는 침대 위에서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이걸 보시오. 내가 에든버러에 갔을 때, 당신 어머니 빚을 모두 청산했소. 엄청나게 많은 옷을 주문했더군.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게인즈버로우(Thomas Gainsborough: 1727-88; 영국의 초상화 작가. 대상의 얼굴과 의상의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창안 적인 요소를 삽입하는 화법으로 미술사에 전기를 마련한 화가. 다만 게인즈버로우는 비슷한 경향의 레이놀즈와 달리 작위적인 양식 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물체의 특성을 파악하는 능력의 탁월함으로 유명하다. 대표작 <헤퍼필드 양의 초상화>, <시골 풍경>) 작품을 내다 팔아야 했소. 그 그림은 우리 가문이 꽤나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던 거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면,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소. 그리고 변호사와 함께 당신의 동생을 위해 재산을 신탁하기 위한 서류 몇 장을 작성했소. 누구 다른 사람이 그 아이의 재산을 날려 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뿐만 아니라 내 유언장도 새로 작성했소.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당신 동생의 결혼 전에 내가 죽으면, 커스올즈에 있는 내 영지를 브래트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을 거기 썼소. 그 아이가 영지와 거기서 나오는 모든 수입을 갖게 될 거요."

클레어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걸 보시오. 이건 당신 부모의 지출을 제한하는 서류요. 이건 당신 부모들에게 지급될 용돈이오. 내가 당신의 남편인 한, 두 분을 항시 보살펴 주겠소. 하지만 그들은 당신이 받게 될 유산의 원금에 대해서는 손을 댈 수 없소."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는 또 다른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건 내 지출을 제한하는 서류요. 결혼 후에도 당신 돈은 당신이 관리하게 될 거요. 당신 동의가 있어야 그 돈이 지출될 수 있다는 거요. 소작인의 집도 당신 뜻대로 하시오.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소. 원한다면 브램레이와 다른 내 영지를 미국식 투자 대상으로 바꿔도 좋소."

그는 마지막 서류를 클레어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클레어, 난 정말 당신을 사랑하오. 내가 트레벨리언과는 다르다는 걸 나도 아오. 결코 그 사람처럼 당신을 재미있게 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난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안정된 미래를 줄 수 있소.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가족을 모두 보살펴 주겠소. 클레어, 당신에게 잘해 주겠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오."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커다란 침대에 앉아 클레어는 그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고, 자신과 가족의 안정된 미래를 원했으며, 여기에 충분한 대답이 있었다.

해리를 돌아보았다. 그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꽃을 집어 들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란 장미였다.

그는 허리를 수그리며 클레어의 축축한 볼에 키스를 했다.

"클레어, 난 트레벨리언처럼 짜릿하거나, 낭송을 잘 하거나, 영웅적이진 않을지도 모르오. 인생에서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신기한 것을 본 적도 없소. 하지만 그 사람보다 좋은 남편은 될 수 있을 거요. 난 그 사람처럼 성질이 괴팍하지도 않소."

해리가 미소를 지었다.

"단언컨대, 함께 살기에 내가 그 사람보다 편한 사람일 거요."

그리고는 다시 키스를 했다.

"다시 내게 기회를 주겠소? 이번에는 저번처럼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하지는 않으리다."

클레어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다른 대안도 없었다. 그녀는 가족을 포기할 수 없었다. 트레벨리언과 함께 도망을 침으로써, 동전 한 닢 없는 모험가와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을 권리를 부모에게 줄 수는 없었다. 부모가 결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클레어의 몫으로 남겨 준 할아버지의 유산이 부모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몇 년 내에 유산을 모조리 탕진해 버릴 것이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가족이 알거지가 되었다는 브래트의 편지를 받고 나면, 그녀가 자기를 증오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돈이 모조리 떨어지고 나면 그녀의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누구도 일하는 법을 모른다. 혹여 어머니가 일을 해 봤다 해도 그것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먼 옛날의 얘기이다.

"좋아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해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에게 얘기할 것이……."

해리는 그녀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을 막았다.

"트레벨리언과의 일은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소. 어쩌면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은 잊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소.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소. 모두 내 책임이오. 내가 모두 책임을 지겠소."

그의 말은 클레어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녀는 해리처럼 훌륭한 남자를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리는 그녀를 즐겁게 해 주려고 모든 일을 다 했지만,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결혼을 하겠다 말겠다, 불평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일단은 당신이 옷을 입도록 방을 나가 있겠소. 도서관에서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았소. 이제 도서관은 당신 차지요. 도서관을 마음대로 출입해도 좋소."

해리가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점심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녀가 손수건을 집어 눈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꼭 오길 빌겠소."

침실 문을 뒤로하고, 해리는 곧장 어머니 방으로 갔다. 방에 도착하자,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깨끗이 사라졌다.

"어때?"

유제니아가 재촉했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모두 했어요."

"서류들을 모두 보여줬니?"

"모두요."

유제니아는 고개를 들어 막내아들을 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해리. 모든 게 다 널 위해서야."

유제니아는 처음으로 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일상적으로 보여 온 표정이었지만 해리에겐 처음이었다. 여태껏 해리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사랑의 표정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닌 협상 내용을 지킬 거죠?"

해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물론이지. 그리고 아가, 여기서 있다가 점심을 함께 하자꾸나. 연어를 구했는데, 네가 아주 좋아하잖니."

잠시 대답이 없었다.

"싫어요."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싶지 않아요. 클레어와 함께 먹을 거예요." 해리는 발길을 돌려 유제니아를 혼자 두고 방을 떠났다.

클레어는 그 날을 해리와 함께 보냈다. 해리는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트레벨리언을 언뜻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그녀는 계속 창문을 바라보았다. 에든버러여행에 관해 해리의 얘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단지 재미있어 하는 척만 했을 뿐이었다. 트레벨리언과 해리와의 대화가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클레어는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떨쳐 냈다. 해리는 그녀가 결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트레벨리언만큼 재미는 없을지 모르지만,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트레벨리언이 아니라 캡틴 베이커였다. 그리고 클레어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은 해리였다. , 해리처럼 평범한 사람을 캡틴 베이커와 같은 세계적인 명사와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당신 말을 못들었어요."

그녀가 해리에게 말했다.

해리는 테이블 너머로 팔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트레벨리언이 당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는 모양인데, 오지 않을 거요. 그는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하지만 그 사람은 날 사랑한다고 했어요."

클레어가 절망스럽게 외쳤다.

해리가 몸을 뒤로 젖히자, 클레어는 그가 틀림없이 심한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그랬소?"

해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여태 트레벨리언이 누굴 사랑한다는 말을 입밖에 꺼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소."

클레어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삼키려고 애를 썼다. 한때는 인생의 가장 주된 관심사가 도서관이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머릿속에는 오직 트레벨리언뿐이었다. 정말 사랑했다면 왜 찾아오지 않는 걸까? 어떻게 다른 남자와 함께 있도록 방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니사와 함께 있을까?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리는 너무 친절하게도 두 사람이 도서관에서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도통 입맛이 없었다. 음식을 집어 들어 접시 주변에 밀쳐놓았을 뿐이었다. 해리는 몇 차례 대화를 하려고 시도를 했지만, 클레어의 한마디 대답이 있고 나면 다시 침묵이 흘렀다.

식사가 끝나자 클레어는 너무 피곤해서 거의 몸을 끌다시피 침실로 돌아왔고,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닫집 아랫면을 쳐다보았다.

벽에 붙은 초상화가 움직이자 클레어는 침대에서 튀어 내려오며 그쪽을 향해 내달았다. 벨리!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트레벨리언이 사용하던 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에는 트레벨리언이 아니라 동생, 브래트가 서 있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돌리며 귀찮은 듯이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서 있지 마."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을 원해서라기 보다는 그저 습관적으로 했던 이야기였다.

브래트는 전에 없이 침대 위로 함께 올라와 언니를 꼬옥 껴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브래트가 속삭였다.

"난 전혀 이핼 못하겠어."

클레어는 여태껏 동생이 아이답게 행동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라 앤은 태어날 때부터 조숙한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껴안고 있는 것은 어린아이였다.

"해리와 결혼하기로 했어."

클레어가 말했다. 어린애에게 거짓말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는 트레벨리언을 사랑하고, 그 아저씨도 언니를 사랑하잖아, 안 그래?"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은 때로 단지 사랑 이상의 많은 것이 필요한 법이지. 때로는 사랑 이외의 것이 결혼을 좌우하고."

"언닌,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지, 맞지? 언니는 해리와 결혼해서 유산을 받아, 날 가난하지 않게 하려는 거야."

"무슨 바보 같은 소리니? 그런 생각 전혀 없어. 해리는 멋진 사람이야. 돈 때문이 아니라 해리를 사랑하니깐 결혼을 승낙한 거고. 해리와 아주 잘살 수 있을 거야. 브램레이와 해리의 다른 영지들을 갖구서 뭔가 사업을 벌려 볼 거야. 이 괴물 같은 저택에 모두 목욕탕을 설치할 거야.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안 그래? 여기서 사는 걸 좋아하게 될 거야. 넌 이 집과 여기 사는 모든 사람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잖아."

브래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언니도 마찬가지로 사랑해. 그리고 트레벨리언과 니사도."

브래트는 '그리고 해리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에든버러에서 돌아온 후로, 해리도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우울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라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결혼으로 끌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언제부터 니사를 좋아했어?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 여자는 툭하면 심한 말을 했잖아."

"그 여잔 나쁜 뜻은 없었어. 그 여잔…… 모르겠어, 그녀가 행복해 보여서 내가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알기론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거든."

"난 행복해."

클레어가 말했다.

"아냐, 언닌 아냐. 언니는 행복하지 않고, 트레벨리언도 마찬가지야. 해리는 불행해 보이고 모두가 슬퍼 보여. 이제 난 이곳이 싫어. 뉴욕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클레어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뉴욕엔 집이 없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 나라엔 아버지 요트도 집도 없어. 우리가 가진 거라곤, 내가 결혼하기 전엔 손댈 수 없는 할아버지 유산 뿐이야. 난 재산을 돌볼 수 있도록 도와 줄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해."

"난 돈이 싫어. 언니는 트레벨리언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클레어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도망을 쳐서 어딘가 오두막에서 함께 살까? 널 함께 데려갈까? 예쁜 옷도 입지 못하고 코코넛을 먹으며 살 수 있겠어?"

"트레벨리언이 아주 가난한 사람이야?"

"모르겠어."

클레어가 상당히 쓰라린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인 자기 자신에 대해선 내게 한마디도 알려 주지 않았어. 사실 난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언니도 알다시피, 해리에 대해서도 모르기는 매일반이잖아, 안 그래?"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걱정이야. 하지만 해리는 그리 복잡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아마 맞을 거야."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브래트가 말했다.

"난 항상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걸 성장한다고 하는 거야.이제 눈을 감고 잠을 좀 자 두는 게 어떻겠니?"

사라 앤은 클레어에게 바짝 달라붙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23

"에메랄드 목걸이를 해 봐."

브래트가 클레어의 보석함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클레어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래트를 위해, 별일 없다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본시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래, 에메랄드가 예쁠 거야."

그녀는 사라 앤이 이브닝 드레스를 고르도록 허락했고, 동생은 가장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무도회 가운을 골랐다. 만찬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겠다 싶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과 헤어진 이틀 동안 아무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해리와 함께 영지를 배회하며 모든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고, 해리와 결혼을 결심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애써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나뭇가지 밟는 소리, 누군가 방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매번 클레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마 트레벨리언은 글을 쓰고 있을 테고 그녀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히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녀에 대한 트레벨리언의 '사랑'이 너무 컸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화장대 거울을 쳐다보며 그녀는 동생에게 미소를 지었다. 불쌍한 브래트, 그녀는 생각했다. 지난 며칠간 클레어의 의기소침한 모습이 아이를 아주 혼란스럽게 만든 모양이었다.

예전에 클레어는 자신이 동생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허구헌날 요트 여행이나 동물을 잡아 죽이러 가고 없는 아버지와 연신 파티를 열어 대는 외에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어머니. 클레어는 브래트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것이다.

"니사가 오늘 아침에 노래를 했어."

브래트가 말했다.

묵직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목에 걸던 클레어의 손이 멈추었다.

"니사를 언제 만났는데?"

그녀가 속삭였다.

"계속 같이 있었어. 그 여잔 잠을 안 자는 것 같아. 그 여자 얘기론, 자긴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대. 잠은 죽음이나 마찬가지고."

클레어는 목걸이를 찼다. 목걸이의 줄은 금으로 만들어 중간 중간에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는데, 모두 손톱만한 크기 정도였다. 줄 끝에 매달린 메달에는 3.5센티미터 가량의 길고 두툼한 눈물방울 에메랄드가 달려 있었다. 이 커다란 에메랄드는 '진실의 순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목걸이는 어머니가 시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처음으로 샀던 물건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조만간 틀림없이 목걸이도 팔게 될 터이며, 브램레이의 새 지붕을 올리는 비용에 충당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에메랄드가 지붕용 납판으로 바뀌는 것이다.

"니사 혼자였니?"

무심한 척 행동하며 클레어가 물었다.

브래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트레벨리언이 항상 같이 있었어."

"그인 글 안 쓰니?"

"안 써. 한 글자도 안 썼어. 그러니까…… 니사가 춤을 췄던 날 저녁 이후로. 해리가 돌아왔던 날 말이야."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석함을 정리하며 분주한 척하려고 애를 썼다. 트레벨리언은 사랑이 클레어에서 아름답고 귀여운 '달의 진주'에게로 옮겨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는 동생을 돌아보았다.

"어때 보이니?"

브래트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워. 언니가 니사보다 더 예쁜 것 같아."

순간 클레어가 웃음을 터뜨리며 브래트에게 팔을 내밀었다.

"정말 거짓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이제 캐미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지. 난 해리를 만날 거구."

"그 드레스, 밸리 아저씨도 좋아할 거야. 내기해도 좋아. 그리고 헤어 스타일도 아주 예뻐. 아저씨가 언니 에메랄드 본 적 있어? 아마 언니 모습을 그려서 책갈피에 꽂아 두고 싶어 할걸. 어쩌면 언니는 아저씨에게……."

"그만 둬."

그녀가 할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래트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천천히 방을 걸어 나왔다.

아래층에서 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든버러에서 돌아온 뒤로 이틀 동안, 그녀가 시야를 벗어날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그녀와 트레벨리언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질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끔씩 그녀의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과 사냥을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는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클레어와 함께 있었다. 기분이 조금만 덜 비참했더라면 이런저런 질문을 해리에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했기에, 세상에 무엇으로도 귀찮게 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신, 아름다워 보이는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해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뿐이었다. 해리는 역시 키가 약간 작은 편이다. 그리고 역시 썩 잘생겼다. 눈은 역시 검지 않고, 머리카락은 길이가 적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턱수염은 왜 기르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 왜 트레벨리언이 되지 못할까?

해리가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보여 줄 것이 있소."

클레어는 해리의 뒤를 따라 응접실 금실을 지나고, 식당을 지나 집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해리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무도실로, 전에 딱 한 차례 구경한 적이 있던 곳이었다. 그때 방의 상태는 확실히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으스스해 보였다. 벽을 따라 배치된 의자는 모두 지저분하고 부서져 있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초저녁에는 더럽고 낡은 의자 따위는 눈에 띄지 않았고, 방안에는 수백 개의 촛불이 밝혀져 모든 것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방의 한쪽에는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여섯 사람이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앉아 있었다.

그녀를 방으로 인도하며 해리가 고개 짓을 해 보였고, 그들은 왈츠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썩 훌륭한 합주단은 아니었고, 실은 끔찍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클레어는 해리가 팔을 벌려 춤을 신청할 동안, 그들의 연주에 해리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 특히 불협화음을 내자 클레어가 웃음을 지었다. 며칠만에 처음으로 진짜 웃음을 지었다. 해리는 고개를 수그리며 그녀의 볼에 키스를 했다.

"저들이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준비할 수 있었던 최선이오."

해리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 클레어를 안고 숨이 가빠지도록 무도실 안을 선회했다.

"좋은 남편이 되도록 노력하겠소."

두 사람이 춤을 추며 창가에 이르렀을 무렵 해리가 말했다.

하지만 클레어의 귀에는, 자기가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편이 될 거라던 남자의 말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해리는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계속해서 클레어를 선회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해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스름한 석양 무렵 이울던 해가 무도실의 창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 클레어는 해리의 팔에 안긴 채로 문간에 서 있는 트레벨리언을 보았다. 순간 그녀의 가슴은 기쁨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이 만나러 와 주다니!

한 차례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다. 그녀의 반대를 개의치 않고, 함께 떠나 달라는 부탁을 하겠다고 결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따라 오시오."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해리에게 숨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그런 말투가 너무 싫었다.

트레베리언의 노려보는 눈초리에, 해리는 그녀를 트레벨리언에게 떠밀 수밖에 없었다.

"따라가 보시오."

"도대체, 왜 사람들이 모두 저 사람에게 복종을 해야 한다고들 생각하는 거죠?"

해리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마음이 상했다. 그녀는 정원에서 말다툼을 한 뒤로 트레벨리언을 보지 못했다. 그는 클레어를 만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빈번히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음을 알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트레벨리언은 두 걸음만에 볼룸 안을 성큼 가로질러 그녀의 윗팔을 잡았다.

"아프잖아요. 난 당신을 따라가기 싫어요."

"니사가 당신을 찾고 있소."

그가 말했다.

순간 클레어는 발로 바닥을 버티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그렇게 싸웠음에도 당신은 날 며칠 동안이나 방치했어요. 그리고 이젠 당신의 어린 창녀 때문에 날 데려가고 싶다구요? 따라가지 않겠어요."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불끈 안아 들고 방 바깥으로 나왔다. 클레어는 마치 도움을 청하듯이 해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해리는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클레어는 팔을 자기 가슴 위로 교차시켰다.

"이런 전술을 써서 내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거라면, 그건 오산이에요. 난 해리와 결혼을 해서 내 가족에게 집을 줄 거예요. 무슨 말을 하든 혹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당신과 함께 떠나지 않을 거예요. 먼곳으로 날 납치를 해 간다고 해도 돌아올 길을 찾을 거예요. 당신은 절대로……."

"닥치시오."

트레벨리언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걸음을 멈추고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온 기력을 집중하여 그녀를 노려보자, 클레어는 무심결에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뭐죠?"

그녀가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대답 없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놀라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사랑싸움 이상으로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돌려 정원을 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장 아름다운 정원 안의 작은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면이 개방된 언덕 위의 키 작은 오두막에는 니사의 밝은 색깔 스카프가 드리워져 있었다. 안에는 여러 개의 방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붉은색 로브를 입은 니사가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에게 뭔가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집 곁에는 키가 큰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검은 피부에, 모두 상체를 드러낸 미개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몸에는 푸른 띠가 그려져 있었고, 기다란 머리카락에는 깃털이 매달려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피리를 불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이 죽음을 찬양하는 곡이라고 했던 으스스한 곡조였다.

"니사가 뭘 하는 거죠?"

클레어가 물었다.

"저 사람들 누구예요?"

그의 표정은 변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트레벨리언에게 몸이 결박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클레어는 그가 질문에 대해 뭔가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도무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의 가슴에서 약간 이상한 기미를 느낄 수 있었다.

"니사가 죽으려는 거요."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순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클레어는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비틀었다.

"니사가 뭘 한다구요?"

"니사가 이제 죽으려는 거요. 이제 그녀 차례요."

놀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클레어가 말뜻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페샤 종교의 여제사장으로서의 오 년이 끝나고 니사가 이제 죽으려고 한다는 뜻인가?

"날 내려줘요. 당신이 안고 걷는 것보다 빨리 뛸 수 있어요. 우리가 저 남자들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트레벨리언은 아무 말 없이 계속 클레어를 안은 채 니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리지 않을 거요."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다시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리지 않겠다구요? 미쳤어요? 여기는 스코틀랜드예요. 당신네 이교도 국가가 아니란 말이에요!"

걸음을 멈추고 그가 클레어를 노려보았다.

"니사에게 페샤의 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얘기 따위는 하지 마시오. 니사는 당신을 생각해서 보자고 한 거요. 당신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말이오."

아무래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게 아니면 트레벨리언이 미쳐 버렸든가. 말리지 않을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려 줘요!"

두 사람은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니사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니사가 고개짓을 하자 그가 클레어를 내려놓았다.

클레어는 니사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선 겉옷의 주름을 펴고 목에 걸린 에메랄드 목걸이를 바로 한 다음 어깨를 뒤로 젖히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니사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죽음 어쩌구 하는 소릴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죠?"

클레어가 웃으며 물었다.

"좋은 날이잖아요. 내일은 더 좋은 날이 될 테고."

니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작별이오? 바보 같은 소리. 내일 우리 함께 런던에 가는 게 어떻겠어요. 해리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 거예요. 해리를 만나 본 적 있어요?"

니사의 웃음소리가 울려 나왔다.

"내게 더 이상 내일은 없어요."

클레어는 포위하듯 서 있는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인간들이었다. 그녀는 방석에 앉아 니사에게 몸을 수그리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는 자유로운 나라예요. 여기서 당신은 안전해요. 저 두 사람 때문에 불안하다면 내가 당신을 미국으로 보낼 방법을 찾아보겠어요. 살아있는 동안 내가 당신을 돌봐 주겠어요."

니사가 웃으며 몸을 일으켜 클레어의 볼에 키스를 했다.

"당신은 내게 잘해 주었어요. 당신을 위해, 내가 사후에 가게 될 곳에 대해 얘기해 줄게요. 나는 그곳 페샤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난 영원히 아름답게 남을 거예요."

클레어는 니사의 손을 잡았다.

"니사, 나이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당신은 항상 아름다울 거예요. 아름다움이란 타고나는 것이니깐요. 이런 놀음은 정말 모두 바보 같은 짓이에요. 일어나요. 여기서 일어나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안 돼요."

니사가 말했다.

"난 여기서 죽어야 해요. 여긴 아름다운 곳이잖아요. 아주 적당한 장소예요, 안 그래요?"

클레어는 니사를, 그리고는 포위하듯 서 있는 두 사람을, 겨우 일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서 있는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와서 니사를 설득해 주겠어요?"

트레벨리언은 더없이 슬픈 눈으로 니사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니사의 죽음의 위협이 실제라고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클레어는 니사의 팔을 꼬옥 잡았다.

"니사 내 말 들어요. 당신이 있는 곳은 페샤가 아니에요. 여긴 다른 나라고, 법이 있는 나라예요. 경찰을 불러 저 사람들을 쫓아 버릴 수 있어요. 저 사람들이 협박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구요."

"아무도 날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니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거예요. 이미 오래 전에 말이에요."

"알아요, 알아."

클레어가 안달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다른 나라에 있을 때 결심했던 거잖아요. 이제 당신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거구……."

"내가 어디에 있거나 항상 마찬가지에요. 난 여전히 '달의 진주', 오 년째의 마지막 날에 죽겠다고 맹세를 했어요."

클레어는 온몸에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니사의 다른 손을 마저 잡았다.

"하지만 니사, 당신은 지금 페샤에 있는 게 아니에요. 더 이상 그 사람들의 추악하고 잔인한 법률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구요. 당신은 자유의 몸이고……."

니사는 클레어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내 나라가 어떤 곳인지 당신은 모르잖아요. 당신이 스코틀랜드의 소작인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얘기를 프랭크에게 들었을 때 웃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당신은 가난이 뭔지 모를 거예요. 진짜 가난 말이에요. 당신은 굶어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거예요."

"물론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미국에 가면 그런 가난을 다시 볼 일도 없을 거예요."

니사가 손가락을 클레어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난 그런 빈곤 속에서 자랐어요. 내 어머니는 아이 둘을 낳고, 열 일곱 나이에 죽었어요. 벌써 난 어머니보다 이 년을 더 산 거라구요."

"미국에서 평균 수명은……."

그때 트레벨리언이 니사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클레어는 말을 멈추었다.

"우리나라에서 '달의 진주'가 되는 건 대단한 영광이에요. 내 또래 여자 애들이 먹을 걸 구하기 위한 매일매일의 투쟁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 길 외에는 없어요. 여자아이 하나가 선택되면, 선택된 여자는 다른 여자아이 여덟을 시녀로 고를 수 있어요. 전부 아홉 명이 생활고에서 해방되는 거죠. 난 죽을 때까지, 그리고 나머지 선택된 친구들은 꼬박 오 년간 충분한 음식이 제공되죠. 여자가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죠. 내가 가장 운이 좋아 선택된 거구요."

클레어가 꾸짖는 눈초리로 니사를 쳐다보았다.

"대단한 영광이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거기서 나왔잖아요. 그 끔찍한 곳에서 당신은 이미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구요."

니사는 머리를 약간 뒤로 젖히며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이해 못하겠죠, 그렇죠?"

트레벨리언이 약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해 못하는 건 당신들 두 사람이에요. 당신은 이런 이단 종교가 무슨 은총이나 내려줄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난 상상도 못했어요. 단지 우상 숭배에 불과한 신앙을 위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죽게 하다니! 난 도저히……."

트레벨리언이 성난 얼굴로 팔을 뻗자 그녀가 말을 멈추었지만, 니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장막 곁에 서 있는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리를 피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며, 트레벨리언에게도 마찬가지로 고개짓을 했다.

두 남자가 언덕 아래로 내려갔고 피리 소리가 멈추자 클레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위험하지 않아요."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가 도망치면……."

"싫어요!"

니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나요? 아무도 내게 이러라고 강요하지 않았어요. 믿기 때문에 죽으려는 거예요. 왜 이해하려고 하지 않죠?"

클레어는 부아가 치미는 것이 느껴졌다.

"영원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죽으려는 건가요? 썩은 몸뚱이가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내 신앙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하지만 잘못된 거잖아요!"

클레어가 반() 고함을 질렀다. 트레벨리언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니사가 손을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그게 전부라면, 내가 육체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내 생명을 포기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정말 부끄럽군요. 수세기 동안 오십 년마다 한 번씩 '달의 진주'의 죽음이 있어 왔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 도시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죠. 그 전통이 깨진다면 페샤도 멸망하는 거예요."

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샤를 은둔의 도시로 만든 건 여자의 죽음이 아니라 통신 수단의 부재, 운송 수단의 결핍 때문이에요. 언젠가는 페샤에도 기차가 들어갈 거예요. 아마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말이에요."

"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니에요. 오늘 죽을 거니깐."

설명이 계속되었다.

"페샤는 이미 발견되었어요."

클레어가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그럼 당신의 죽음은 쓸모가 없어지는 거예요. 캡틴 베이커가 발견했죠. 그 사람이 거기 들어 갈 수 있었으면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빅토리아 여왕은 수백 명의 군인들을 페샤로 파견할 거예요. 이미 파견했을지도 모르죠. 당신이 그걸 막을 순 없어요. 당신 죽음이 그걸 막을 수 없다는 건 확실해요."

클레어의 얼굴이 밝아졌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당신의 믿음을 전파할 수 있을 거예요. 영어도 아주 잘하잖아요. 당신이 세계를 교화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니사가 트레벨리언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자, 클레어는 얘기를 멈추었다. 트레벨리언은 클레어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멈춰요!"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놔 줘요. 가서 도와 줘야 한단 말이에요. 니사는 이제 저 야만인들 손에 죽을 채비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막아야 해요."

"안 되오."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이건 니사가 원하는 거요."

클레어는 발버둥을 멈추고 몸을 비틀어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지난 며칠간 당신이 말하던 게 이거였나요, 맞아요? 니사를 뜻대로 하게 놔둬야 한다고 했던 이유 말이에요."

그녀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당신은 이걸 줄곧 알고 있었죠, 그렇죠? 당신은 니사가 죽으려고 한다는 걸 내내 알고 있었을 거예요."

"에든버러에서 니사가 컵을 찾을 때 알았소."

"? 무슨 컵이오?"

클레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슨 컵이냐구요?"

고개 짓으로 트레벨리언이 니사를 가리켰다. 에든버러의 잭 포웰의 집에서 니사가 트레벨리언을 시켜 가져오게 했던 조잡한 컵에, 검은 피부의 남자가 액체를 따르고 있었다. 순간 클레어의 몸이 완전히 정지되었고, 트레벨리언의 팔이 그녀를 감고 있었다. 눈앞에 보고 있는 광경, 방금 들었던 얘기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니사가 컵을 입으로 가져가자 클레어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발로 차고, 그의 손을 할퀴고, 몸을 뒤틀어 돌리고……, 안간힘을 쓰며 빠져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억센 힘으로 의연하게 클레어를 껴안고 있었다.

니사가 컵에 든 내용물을 모두 마시고 나서야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클레어는 쓰러지듯 니사를 덮쳤다. 그녀를 붙들고 니사의 목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억지로 구토를 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클레어는 내내 울부짖고 있었다.

"도와줘요! 도와줘요!"

하지만 세 사람 중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클레어가 온갖 애를 썼지만, 니사는 구토를 하지 않았다. 독액은 그대로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클레어는 이제 니사를 껴안고 있었고, 그녀의 작은 몸이 점차 축 늘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이를 부탁해요."

니사가 속삭였다.

"그인 당신을 사랑해요."

깊은 숨을 몰아쉬며 니사가 눈을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내 컵이 다음 '달의 진주'에게 꼭 전달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 말을 끝으로, 클레어의 품속에서 니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니사."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니사!"

클레어가 그녀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이 클레어에게서 주검을 안아 들었다.

"저 사람들에게 당장 그녀를 넘겨 주어야 하오."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다시 꺼림칙한 장송 곡조의 피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한 여자의 자살을 방금 전에 목격했던 것이다. 트레벨리언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막을수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니사가 이러리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극장에서 저 사람들이 피리를 부는 소리를 들었고."

"그렇소."

트레벨리언이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때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소. '달의 진주'는 죽기 딱 사흘 전에 죽음의 춤을 추지."

클레어는 고개를 돌려 니사를 쳐다보았다. 가능한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모습이 훨씬 아름다웠다. 그녀는 다시 트레벨리언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이런 짓을 묵인할 수 있죠?"

그녀는 속삭이듯 물었다.

"여기 가만히 서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방관할 수 있느냔 말이에요?"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었다.

"당신은 막을 수 있었어요.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구요."

"난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지 않기로 결심을 했소."

그가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니사뿐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관심 없다는 건가요, 그래요? 나에 대해서도, 니사에 대해서도 말이에요. 당신은 그 잘난 책 말고는 누구에게도 무엇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서 니사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거겠죠."

뒤에서 피리 소리가 멈추며 두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레어가 돌아섰다. 온몸에 끔찍한 푸른 줄을 그린 남자들을 보는 순간, 그들이 니사의 몸에 손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니사처럼 순진한 여자를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꼬인 것이 바로 그 자들과 그들의 야만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다.

"저리 가요."

클레어가 남자들에게 비명을 질렀다.

"손대지 말아요. 내 말 안 들려요. 손대지 마!"

두 남자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클레어가 하는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투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컵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클레어가 먼저 움직였다. 컵을 집어 들고 루비 원석이 박힌 컵을 쳐다보았다. 증오스러웠다. 그녀는 곁에 있는 바위를 쳐다보며 컵을 부숴 버릴 생각을 했다.

클레어는 몽유병자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를 향해 걸어갔고, 내려뜨린 팔에는 컵이 들려 있었다. 팔을 높이 들어 컵을 바위에 내려치려고 했지만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나섰다.

"그러면 안 되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컵이 동족의 손에 돌아가야 한다는 게 니사의 바람이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이 죽을 수 있도록?"

고함을 지르며 클레어가 말했다.

트레벨리언은 여전히 손목을 붙든 채로 지긋이 그녀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그렇소. 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오래된 거요."

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슬퍼 보였다.

"'달의 진주'가 컵을 사용하여 죽을 때마다 그들은 루비를 컵에 하나씩 박아 넣었소."

공포에 질린 눈으로 클레어는 들고 있던 컵을, 그 위에 박힌 많고 많은 루비들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이 열리면서 구역질나는 컵을 땅에 떨어뜨렸다. 바위에 부딪히기 전에 트레벨리언이 컵을 받았다.

뒷걸음질 치며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에게서 컵으로,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은 모두 알고 있었군요. 그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했군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 뒤에서는 두 남자가 다시 니사의 주검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더러운 손 치워요!"

소리를 지르며 클레어는 남자들에게서 니사를 가로막고 섰다.

트레벨리언이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저 사람들은 지금 당장 니사를 데려가서 처리를 해야 하오."

다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클레어의 증오와 분노를 역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검은 눈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니사를 내려다보았다.

"저들은 의식을 치러야 하오. 그런 뒤에는 사체를 화장시켜 재를 페샤로 가져갈 거요. 저 사람들에겐 먼 길이오. 그리고……."

클레어는 그의 냉정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돌아서며, 그의 가슴에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신을 증오해요. 알아들어요? 증오한다구요. 당신이 니사를 죽였어요. 직접 총으로 쏴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당신이 죽였다구!"

그는 주먹질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얼굴을 때리려 하자 겨우 주먹을 피했을 뿐이었다.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클레어의 분노를 감당하고 있었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며 그녀가 울기 시작했지만 달래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두 남자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니사의 축 늘어진 시신을 안고 있었고, 또 하나는 그 끔찍한 컵을 들고 있었다.

클레어는 스커트를 들어올리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니사를 위해서는 컵에 루비는 안 돼요."

그녀가 남자들에게 소리쳤다.

트레벨리언은 클레어를 향해 도와 주러 오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루비는 피를 상징해요. 니사는 단순히 당신들이 죽인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에요. 특별한 여자란 말이에요."

클레어는 목에 걸었던 목걸이를 비틀어, 걸려 있던 에메랄드를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힘이 부쳤으며, 더욱이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니사와 함께 남자들이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트레벨리언이 곁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뭘 하려는 거요?"

"꺼져요!"

그녀가 말했다. 에메랄드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며, 피부가 겨 나가 있었다.

"니사는 목숨 대신에 에메랄드를 갖게 될 거예요. 이 에메랄드 말이에요. 이건 '진실의 순간'이예요. 루비는 안 돼요. 난 루비가 싫어요. 좋아했던 적도 없구요."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트레벨리언은 손에서 스치듯이 목걸이를 낚아채 어느새 세차게 비틀더니 눈물 방울 모양의 에메랄드를 떼어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클레어는 그의 뒤를 따르며, 트레벨리언이 남자들과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에메랄드를 꼭 보내야 해요."

클레어가 말했다.

"반드시!"

트레벨리언은 남자들과 언쟁을 시작했고,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었다. 두 남자는 가만히 서서 말이 없었다. 니사의 팔이 그 가운데 한 사람과 엇갈리며 아래로 드리워졌다. 그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더 격해졌다. 그는 클레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전히 남자들은 막무가내였다. 트레벨리언의 목소리가 협박이다 싶은 톤으로 바뀌었다. 다시 몇 마디가 오가더니 한 사람이 손을 내밀어 에메랄드를 받아 들었고,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이 클레어에게 돌아왔다.

"저들은 그 보석을 컵에 세팅할 거요. 이번 '달의 진주'가 특별하다는 걸 인정했소"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쳐다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손을 잡지 않았다. 트레벨리언이 니사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도, 결코 용서할 수도 없을 것이 확실했다. 클레어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잠들었을 거예요."

브래트를 내려다보며 클레어가 말했다. 사라 앤은 니사의 죽음을 듣고 극도로 흥분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불러, 아이가 비명을 멈추도록 아편을 주사해야 했다.

"당신도 눈을 좀 붙여야 할 것 같소."

사라 앤을 힐끗 내려다보며 해리가 말했다. 그는 의사가 올 때까지 줄곧 클레어, 사라와 함께 있었다. 어느 때인가는 우는 사라 앤을 품에 안고 달래 주기까지 했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특히 지난 몇 시간 동안 너무 버거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해리는 그녀의 팔을 잡고 의자로 데려간 다음, 맥 트레비트 위스키 한 잔을 건네주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 사람은 가 버렸소."

해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가요?"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해리가 누구를 얘기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이 몇 시간 전에 떠났소. 당신이 돌아온 직후에 말이오. 자기 하인과 함께."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벨리언은 틀림없이 니사 때문에 브램레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니사가 죽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다음 정복지, 다음 모험으로 떠나기 위해, 다음 책의 소재를 찾으러 떠나기 위해서 말이다.

"잘 됐군요. 그가 없어져서 기뻐요."

"내 생각엔 당신이 트레벨리언을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 같소."

클레어는 화난 눈초리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니사를 죽였어요. 그곳에 가만히 서서 그녀가 죽는 걸 방관했어요. 당신도 봤어야 해요. 그는 니사를 말릴 생각조차 안 했어요. 그녀의 죽음에 별로 신경도 않썼어요. 틀림없이 지금은 이걸 그 망할 놈의 책에 어떻게 쓸까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난 벨리가 그 정도로……."

"그 이름 부르지 말아요! 캡틴 베이커예요. 모든 것을 보고, 본 것을 모두 기록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예요. 이건 내가 그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고, 이제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다시는 그 사람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

해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위스키 잔을 내려다보았다.

"좋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24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클레어는 하인이 트렁크를 아래층으로 운반해 주기 위해 온 것이려니 생각했다. 니사가 죽은 뒤로 나흘이 흘렀고, 그녀는 해리의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해리는 결혼 날짜를 잡자고 졸라 댔지만, 클레어는 결혼에 대해 일언반구 대답하지 않았다.

클레어와 사라 앤은 모두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 같은 표정만 짓고 있었고, 부모는 그런 딸들에게 불평이 대단했다. 지난 며칠은 그녀의 부모도 브램레이에 대해 이것저것 불만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나 아버지, 누구도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왜 여기서 결혼을 못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아르바가 말했다.

"난 이곳이 좋아. 여기서 계속 머물고 싶어."

클레어는 그녀의 가족이 브램레이를 떠나야 한다고, 자신은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르바는 두 딸이 수녀처럼 검은 옷을 입는다고, 공작이 아직도 클레어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대영제국에는 비 새는 지붕이 수백 군데도 넘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구요."

아르바는 무슨 뜻인지 설명을 요구했지만, 클레어는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없었다.

클레어가 문을 향해 돌아서자, 하인이 아니라 레아트리스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너무도 멋진 레아트리스의 모습에, 클레어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늘상 얼굴을 떠나지 않던 표정, 예의 겁에 질려 끌려다니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볼은 이제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었고, 아주 예쁜, 매우 단순한 푸른 색조의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더 이상 전과 같은 애어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레아트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클레어의 뺨에 키스를 했다.

"아주 예뻐 보이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결혼이 당신에게 맞는가 봐요."

"그래요. 내게 결혼이 얼마나 잘 맞는지 모르겠어요. 제임스와 난 아주 공통점이 많아요. 이곳을 떠난 뒤로, 그이와 내가 궁합이 너무 잘 맞는다는 걸 알았어요."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봐서 너무 기뻐요."

그녀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그래서 돌아와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에 당신을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레아트리스가 다가가 손을 클레어의 팔에 얹었다.

"난 당신을 보러 이곳에 돌아왔어요. 해리가 내게 편지를 썼어요."

"해리는 너무 친절해요."

레아트리스는 손을 클레어의 어깨 위로 가져다 얹으며 그녀를 돌려세웠다.

"해리는 당신을 매우 걱정했어요. 해리 얘기로는 여기 일이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레아트리스는 클레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그 눈빛은 트레벨리언을 연상시켰다. 클레어가 시선을 외면했다.

"난 정말 빨리 짐을 꾸려야 해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우리 가족은 당신네의 환대에 오랫동안 많은 신세를 졌어요. 정말 너무 많은 신세를, 너무 오랫동안."

"트레벨리언과 내 어머니에 관해 얘길 해 주고 싶어요."

레아트리스가 말했다.

순간 클레어의 손이 멈칫 했지만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정말 난 시간이 없어요. 하인들이 곧 이리로 올 거구, 난 빨리 짐을 싸야 해요."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내가 기다리라고 얘기해 두었어요."

"하지만 난 가야 해요."

클레어가 말했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요. 가야 해요. ……."

입씨름을 해 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말꼬리를 흐렸다. 클레어는 한편으로 레아트리스가 하는 얘기를 듣고 싶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 순간 세상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은, 너무도 좋은 많은 기억뿐만 아니라 너무도 많은 끔찍한 기억을 안겨 준 그 집을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클레어는 의자로 걸어가서 자리에 앉아 궁금한 눈초리로 레아트리스를 쳐다보았다.

레아트리스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난 어머니와 함께, 이 집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겁쟁이 노처녀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미움이 사랑만큼이나 강하다는 사실이에요.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죠. 증오는 사랑만큼이나 사람들을 서로 묶어 놓아요. 내 어머니와 난 서로를 증오했죠."

"왜 당신 어머니 얘길 꺼내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요."

클레어가 말했다.

"그냥 사실을 말해 주려는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난 어머니에 관해 다른 사람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고, 어머니는 그것 때문에 날 미워했죠. 아니, 미움 이상이었어요."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이루 보답할 수 없는 뭔가를 해 주었어요.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던 미움을 대신할 수 있는 뭔가를 말이에요."

"사랑."

클레어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담겨 있었다.

"맞아요."

레아트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멜로드라마 같은 소리죠,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날 도와준 뒤로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내 어머니에 대해 얘기해 주고 싶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클레어는 치가 떨리도록 끔찍한 공작부인, 유제니아에 관해 듣게 될 얘기가 다소 두렵기도 했다. 얘기를 듣고 동정심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사를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그 부담을 안고 사는 데는 나도 지쳤거든요."

레아트리스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젊었을 때 어머니는 아주 아름다웠고 정열에 가득 찬 여자였죠."

믿지 못하겠다는 클레어의 표정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믿기 힘들겠죠, 안 그래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어머니는 잘생긴 젊은 해군 장교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어요. 세상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거의 숭배를 했던 거죠."

레아트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된 일이지만 그 젊은이는 평민이었어요. 중산 계급 출신에 돈도 한푼 없었죠. 어머니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원하는 것은 오직 그 남자뿐이었으니까."

레아트리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어머니의 인생을 바꿔 놓을 사건이 생겼어요. 어머니가 무도회에 갔었죠. 젊은 장교가 그 자리에 있었던지라, 어머니는 매우 행복하고 활기에 넘쳤으며, 아름다웠어요. 맥아렌 가의 젊은 공작, 즉 내 아버지가 그래서 어머니를 보고 반해 버렸죠. 공작은 즉흥적인 사람이었어요. 다음날로 외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미스 유제니아 리치몬드에게 청혼을 해 버렸어요."

레아트리스는 다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외할아버지가 어느 정도로 괴팍한 사람인지 알려면 직접 만나 봐야 해요. 나는 외할아버지가 친절하거나 상냥한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아요. 무슨 일을 하는 데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외골수예요. 자기 방식 말이에요. 외할아버지는 청혼을 받은 딸에게 자기가 잡은 결혼식 날짜를 통보해 주었죠. 결혼상대에 대한 딸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구요. 어머니도 나름대로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는 청년 장교와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죠. 외할아버지는 화도 내지 않았어요. 단지, 공작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청년 장교를 자기 눈앞에서 죽여 버리겠다는 말만 했죠."

클레어의 반응에 레아트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늙은이는 굳이 위험스럽게 어머니가 공작과 함께 있을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서로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그것도 단둘이 만났던 건 아니었어요. 그게 우리 아버지의 식욕을 자극했던가 봐요. 아버지는 결혼할 여자가 조신하고 상냥한 성품을 가진 여자라고 오해를 했어요."

그녀의 입술이 일직선으로 굳어졌다.

"어머닌 아버지와 결혼은 했지만, 결혼식장에서 모종의 결심을 했어요. 자기 아버지에게 분출시키지 못했던 분노를 결혼상대에게 쏟아붓겠다고 말이에요. 결혼 첫날밤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증오한다고 말했고, 항상 그렇게 미워했어요."

레아트리스는 또다시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마 처음에 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죠. 자기 부인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내, 어머니 고집이 외할아버지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어머닌 그 장교를 사랑하는 만큼 아버지를 증오했어요."

레아트리스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어머닌 아버지의 자식 셋을 낳았어요. 내 생각이지만, 셋 중에 막내였던 난 계획에 없었던 것 같아요. 내 생각에 의견충돌이 있었지 않았나 싶은데, 그 뒤에 아버지가 화난 얼굴로 어머니의 방에 들어갔대요. 그 아홉 달 뒤에 내가 태어났구요. 그날 밤 이후로 내 부모는 한 자리에 있었던 일이 거의 없었어요. 별거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레아트리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하지만 내가 세 살이 되던 해에 해군 장교가 다시 어머니의 삶 속으로 돌아왔죠. 처음에는 우연히 만났던 게 아닌가 싶지만,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는 아직 미혼이었죠. 장교는 어머니를, 오직 어머니만을 사랑했다고, 언제나 그럴 거라고 말했죠."

레아트리스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잠시 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차분해지려고 애쓰는 듯했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어요. 벌써 아들 둘을 낳아 주었으니까, 아버지를 떠나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거예요. 그리고 우리들을 말이에요. 남편을 저주하는 만큼 우리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예요. 우리는 모두 몽고메리 가문의 핏줄이었으므로 검은 머리였지만,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는 금발이었어요."

다시 레아트리스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와 짜고 야반도주를 할 날을 잡았어요. 어머니는 집안의 보물을, 다시 말해 팔 수 있는 물건들을 몰래 빼돌렸어요. 이혼하고 나면 빈털터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장교에게 돈이 좀 있다고 해 봐야 전보다 더 궁색해져 있었구요."

"그날이 왔고 모든 게 잘 풀려 나갔어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집안을 빠져나와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정부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거기에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렸던 거죠. 두 사람은 멀리 가지 못했어요. 도로에서 개 따위가 갑자기 튀어나오자 말이 마부의 말을 듣지 않았고, 도리 없이 마차가 전복되었던 거죠. 정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마부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마차에 깔려, 구조되기 전까지 몇 시간을 그러고 누워 있었어요. 다리가 부서졌구요."

그녀는 잠시 얘기를 멈추었다.

"여섯 달 후에 해리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때는 이미 어머니가 집에서 무슨 물건을 빼돌렸는지도 알고 있었죠."

"해리를 낳은 지 한 주일 만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아들을 보러 갔어요. 아버지는 아기 침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서 어머니 침대로 돌아와 청구서 한 묶음을 던져 놓고는 방을 나와 버렸어요. 청구서는 어머니의 정부가 말 값과 도박 빚, 옷값으로 쓴 것이었죠. 부채의 보증이, 자기가 곧 맥아렌 가의 공작부인과 결혼을 할 거라는 것이었어요."

레아트리스는 클레어를 쳐다보며, 클레어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그때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정서가 불안해진 것 같아요. 연인을 잃어버렸고, 움직이지 못하게 된 데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말처럼 무뢰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평정을 잃게 된 거죠. 어머닌 사랑과 증오를 두 개로 나누었어요. 맥아렌의 이름과 관련된 것은 누구나, 어느 것이나 증오했어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귀여운 금발머리 아들에게 쏟아 부었어요."

클레어는 얘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만, 거기서 레아트리스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해리가 당신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면 작위를 받을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클레어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전혀 없죠."

레아트리스의 눈빛이 다시 강렬해지며, 클레어에게 다시 트레벨리언을 상기시켰다.

"당신 아버지는 해리를 상속에서 배제시켰나요?"

"아버지는 사람이 좋아서 그런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분은 해리를 좋아했어요. 우리 자식들을 모두 좋아했어요.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장남, 알렉스였죠. 알렉스에게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건 아버지의 잘못이었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둘째 오빠와 난 너무 외로웠으니깐요. 알렉스는 아버지가 있었고, 해리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하지만 우린……."

레아트리스는 잠시 말을 멈추며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벨리와 난 서로 둘뿐이었죠."

클레어는 레아트리스에게 놀란 눈초리를 보였고,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자기 어머니였던 공작부인에 대한 트레벨리언의 적대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트레벨리언을 대하는 소작인들의 태도도 물론이었다.

"이 집안사람들 모두 트레벨리언이 진짜 공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대부분은. 오빠는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 집에 살러 보내졌어요."

레아트리스가 침을 삼켰다.

"노인은 벨리를 아이처럼 다루지 않았어요."

너무도 많은 생각이 클레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트레벨리언은 눈곱만큼도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그 기만의 깊이를 깨닫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 줄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게 틀림없었다. 그가 공작이라는 얘기를 했다면, 그녀의 부모는 결혼에 동의했을 것이다. 클레어는 할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 관한 어떤 것도 그녀와 공유하지 않았던 것이다.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짐을 꾸리려고 했다.

"할 말 없어요?"

레아트리스가 말했다.

"방금 난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공작이고, 당신이 결혼하려고 하는 남자는 몽고메리 가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도 아무런 할 말이 없나 보군요."

"그 사람 이름이 뭐죠. 트레벨리언의 이름이 뭐냐구요?"

"존 리치몬드 몽고메리. 어렸을 때 작위가 트레벨리언 백작이었고, 내 생각엔 트레벨리언이 더 어울리는 이름 같아요. 난 오빠를 벨리라고 불렀던 최초의 사람이구요. '트레벨리언'이란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거든요."

클레어는 계속해서 짐을 싸고 있을 뿐이었다.

레아트리스가 클레어의 팔을 잡았다.

"궁금한 게 그게 전부예요?"

분노가 타는 눈으로 클레어는 레아트리스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내게 자기 이름조차 안 가르쳐 줬어요. 그런 간단한 것도 말이에요. 그 사람은 자길 사랑하느냐고, 내 평생을 자기와 함께 살겠느냐고 내게 물었죠. 하지만 이름조차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트렁크를 돌아다보았다.

"당신은 이해 못해요. 벨리는……."

"냉정한 사람이죠."

클레어가 말했다. 그녀가 레아트리스를 다시 돌아보았을 때는 노기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사랑해요. 못된 성질에도 불구하고, 염세적인 인생관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자기가 캡틴 베이커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용서를 했어요. 날 조롱하고, 자기 책의 얘기거리로 삼으려고 했을 때도 용서했어요. 그를 용서하고 사랑했지만, 트레벨리언은 사랑을 돌려주는 방법을 몰라요."

레아트리스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클레어가 얘기를 계속했다.

"전혀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 사람은 니사가 죽는 걸 지켜보았어요. 항상 세상 바깥에 서서 관찰하기만 했죠. 날 사랑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성적인 즐거움을 사랑과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구요. 둘은 같은 게 아니잖아요. 그 사람은 전세계 수천 명의 여자를 '사랑'했고, 그런데도 난 내가 특별한 여자일 거라고 착각했던 거죠."

"당신은 특별해요."

레아트리스가 말했다.

"벨리는 누굴 사랑한다는 얘길 했던 적이 없었어요."

"그 바보 같은 이름은 그만 좀 부르시겠어요? 그 사람은 어른이잖아요. 아니, 사람이 아니라……, 기계지. 관찰하는 기계. 세계를 돌아다니며 관찰하고 그걸 글로 옮기는 기계 말이에요. 그 사람이 평생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있기나 할는지 도무지 의심이 가요."

레아트리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보냈던 편지를 읽어 드릴게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듣고 싶지 않아요."

클레어가 대답했다.

"가야 해요. 갑자기 이 집이 꼴도 보기 싫어졌어요."

레아트리스는 손을 클레어의 팔로 가져갔다.

"우리들이 당신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건 알아요. 어머닌 해리를 런던으로 보내 당신을 꾀어 왔죠. 돈 때문에 당신이 여기 오게 된 거죠. 하지만 클레어, 당신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이상을 주었어요. 당신 덕분에 난 제임스를 얻었고, 최소한 해리는 자기 어머니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죠."

레아트리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벨리를 쐈던 사람은 어머니였어요."

클레어의 손이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어머니는 정서가 불안하다고 말씀 드렸었죠. 그 여잔 자신의 귀한 아들 해리에게 작위가 돌아가길 바랐어요. 둘째 아들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얘길 듣고, 트레벨리언이 작위를 차지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람을 사서 암살을 하려고 했던 것이죠."

황당함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클레어는 레아트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클레어, 우리 집안은 당신들과 달라요. 어머니의 증오가 우리 모두를 삐뚤어지게 만들었죠. 하지만 우리들에 대한 그 여자의 지배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에든버러에 있는 해리에게 편지를 써서, 어머니가 트레벨리언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를 알렸죠. 어머니는 벨리가 당신과 함께 대단히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고, 당신과 당신 돈이 트레벨리언과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두려워했던 거예요. 벨리가 작위를 다시 주장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 거죠. 해리는 형의 목숨이 걱정되어, 당신을 설득해서 해리 자신과 결혼을 하려고 돌아온 거예요."

레아트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해리는 항상 형을 흠모했어요. 그 아인 항상 너무 게을러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했죠. 그래서 벨리의 모험을 통해 대리 만족적인 삶을 살았던 거예요. 생각컨대 그 아인 형을 위해 인생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형의 목숨을 구하려고, 심지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할 결심까지 한 거로군요."

"돌아와서, 벨리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순간 클레어가 코웃음을 쳤다.

레아트리스가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내 말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도무지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트레벨리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도 그 사람이 팔짱을 끼고 서서 젊은 여자가 독약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니지, 그런 건 누구에게도 바라고 싶지 않아요. 트레벨리언이 나를 신뢰했다면…… 조금이라도 자기 비밀을 나눌 수 있을 만큼만 날 사랑했다면……."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었어요. 이제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아요. 트레벨리언이 작위를 주장하지 않고, 해리가 계속 공작 노릇을 하게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거라구 생각해요."

"맞아요."

레아트리스가 말했다.

"트레벨리언은 오직 캡틴 베이커로 남고 싶어 해요. 이번 일이 있은 뒤로 앞으로 오빠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기나 할지 걱정스러워요."

"내 생각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내 생각엔……."

클레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이 열리며 해리가 방안으로 걸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뒤에는 네 명의 하인이 트렁크를 들고 있었다.

"거기 내려놓게."

해리가 명령을 했다.

하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해리와 레아트리스 두 사람은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클레어가 트렁크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안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트레벨리언에게서 온 편지들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때 그녀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꿈은 캡틴 베이커의 사신(私信)을 읽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트렁크를, 마치 사갈이 득실대기라도 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머리를 저었다.

"난 떠나야 해요."

해리가 문에 기대서며 길을 막아섰다.

"저걸 모조리 읽을 때까진 여길 떠날 수 없소. 모조리 말이오."

클레어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해리의 잘생긴 얼굴은 탄력 없이 굳어 있었고, 레아트리스의 눈은 호소를 하는 듯했다. 아주 간절히. 그녀는 생각했다.

편지 뭉치를 읽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거야. 트레벨리언은 공작의 작위를 주장하지 않을 테고, 따라서 내 부모들이 결혼을 승낙하지 않아 난 할아버지의 유산을 모조리 빼앗기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난 동생을 운명의 자비에 내맡기고 싶지 않아.

"갈 수 없소."

해리가 말했다.

레아트리스는 첫 번째 트렁크로 가서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깨끗하게 정리된 편지, 수백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오빠는 처음 집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내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오빠가 아홉 살 때였죠. 그날에 대해 얘기를 해드릴까요?"

"됐어요."

클레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요."

레아트리스는 그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이야기를 계속했고, 얘기가 끝나자 클레어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25

맥아렌 공작이 클레어 윌로비 양에게 면담을 신청한다는 친필 메모를 읽었다.

클레어는 집사가 들고 있는 은쟁반에 쪽지를 다시 던져 놓았다.

"짐을 싸느라 바쁘다고 해리에게 전해 주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집사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어라?"

클레어가 집사를 쳐다보았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고, 빨리 브램레이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메모를 보내신 분은 진짜 공작님이십니다."

집사가 말했다.

그녀는 남자의 말뜻을 헤아리느라 잠시 멈춰 섰다.

"트레벨리언?"

클레어는 집사에게 다가가 카드를 집어 들어 훑어보더니, 다시 쟁반 위에 던져 놓았다.

"우린 서로 할 얘긴 다 했다고 전해 주세요. 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세요. 몽고메리 집안사람들에겐 신물이 났다는 말두요. 그 사람이든 그 사람 친척 중에 누구든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얘기도 꼭 전해 주세요."

"아마 아가씨께서 그분께 그 이야기를 직접 하시는 게 더 좋으실 겁니다."

트레벨리언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즐겁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몇 가지 할 얘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집사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 어디 있죠?"

"청실에 계십니다. 그분 아버님의 방이죠."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 작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길 하리라. 그리고 나서 영원히 이곳을 떠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는 이 집안사람들을 꼴도 보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캡틴 베이커에 관해서는 앞으로 다시는 보지도 듣지도 않으리라.

집사가 커다란 침실 문을 열었다. 한때 아름다운 방이었을 테지만, 벽에 드리워진 실크는 이제 빛이 바래고 찢겨 있었다. 침대에 드리운 감청색 실크도 지금은 더러워져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등지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정장을 한 모습이었다. 자수가 놓인 실크 로브도, 벨벳 부츠도 없었다. 그는 말끔하게 재단된 모닝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한 길이로 말끔하게 잘려 있었다. 조금만 덜 알았더라면, 그녀는 트레벨리언을 잘생긴 젊은 신사쯤으로 착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정한 모습이었다.

"내가 왔어요."

트레벨리언의 등 뒤에서 그녀가 말했다.

"뭘 원하는 거죠?"

트레벨리언이 돌아섰다. 보통 때보다도 잠을 자지 못한 듯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니사가 죽은 지 거의 일주일이 지났지만, 클레어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만한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 시시각각 그녀의 웃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니사의 죽음을 알린 후, 공포에 질린 브래트가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틀림없이 니사를 화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손을 옆구리에 내렸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레아트리스가 우리 어머니에 대해 얘길 했다는 말을 들었소."

"그래요."

클레어가 차갑게 대꾸했다.

"집안의 대단한 비밀을 들었죠."

"그리고 내가 동생에게 보냈던 편지도 읽었고."

"그래요."

"그럼 무슨 생각이 들었소?"

대답을 하기 전에 클레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 동안 그녀는 편지를 읽으며, 마음속에 대단한 사랑을 간직한 남자를 보았다. 전세계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았는지도 읽었다. 만약 그녀가 캡틴 베이커의 전기 작가였다면, 편지는 전기에 보다 큰 생동감을 불어넣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클레어는 캡틴 베이커의 전기를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편지가 아주 재미있더군요."

"편지는 물론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듣고서도 날 용서할 수 없단 말이오?"

"그래요. 난 니사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잠시 클레어를 쳐다보더니 그는 다시 창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못하도록 막는 게 아주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소. 내가 빵은 어떤 게 좋다고 하면, 그 뒤로는 그 빵을 다시는 구경도 못하게 했소. 당근이 싫다고 하면, 하루 세끼 꼬박 식탁에 당근이 올라왔고. 그때부터 난 내가 좋아하는 걸 달라고 하기가 겁이 났소."

"그렇군요."

클레어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바라는 이상으로 당신 어린 시절 얘기를 들었어요. 나도 틀림없이 끔찍한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증오하는 어머니, 당신이 살아 있는지조차 관심 없는 아버지, 당신을 학대하는 외할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알았어요. 신중하고 쀼루퉁한 당신의 표정도 충분히 납득이 되고도 남아요. 당신의 엄청난 자기 연민에는 세상 무엇보다 충분한 변명이 되었어요."

트레벨리언은 돌아서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커다래져 있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동정을 바라나요? 당신의 자기 연민만으론 부족한가요? 당신은 동생들, 이 집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을 안타까워했어요.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말이죠. 불쌍한 존. 사랑 받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 백작. 물론 몸을 사리고 다른 사람 생각을 했더라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빈번하게 체벌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노인네에게 당근을 싫어한다고 얘기하면서 당신이 느꼈을 짜릿한 쾌감은 나도 상상이 가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해야 좋다는 것을 그때 깨우친 건가요?"

눈을 꿈벅이며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클레어의 반응에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의 미소가 웃음으로 변했다.

"사실, 그렇소. 언젠가 한번 요리사가 아몬드 케익을 만들어 주었더랬소. 한 입을 베어 물었다가 뱉아내며, 난 메스꺼워 도저히 한 입도 더 먹지 못하겠다고 말했소. 그 후로 외할아버지는 내가 본의와 상관없이 맛있는 척할 때까지 몇 달 동안 끼니를 거르지 않고 아몬드 케익을 식탁에 올려놓게 했소. 지금까지도 난 아몬드 케익에 관한 내 조그만 승리를 축하하고 있소."

클레어는 웃지 않았다.

"그게 날 재미있게 할 거라구 생각했어요? 내 귀엔 당신과 당신 외할아버지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소리로 들려요. 물론 마침내 이긴 사람은 당신이었겠죠, 안 그래요? 떠나고 싶을 때 그 노인을 떠났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까요. 항상 당신은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일만을 해 왔어요, 그렇지 않나요?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어떤 식으로든 말이죠."

"내 어머닌……."

"!"

클레어가 말했다.

"이젠 내게 거짓말 할 생각도 하지 말아요. 나도 당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내가 그 여자와 조금만 더 함께 시간을 보냈더라면 그 여자가 당신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들 두 사람은 못된 성질이 똑같이 닮았어요. 두 사람 모두 이기심의 화신이라구요. 그 여자는 잃어버린 사랑을 구실로 삼았고, 당신은……."

"그렇소."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난 뭘로 구실을 삼았소?"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요. 이제 난 가도 되겠어요? 내게 동정심을 유발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안됐군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불쌍한 공작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던 당신들 모두의 노력이 허사가 되었으니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은 높은 등받이가 달린 의자로 걸어가 거기에 앉았다.

"당신이 날 사랑하게 하려고 했던 노력도 실패한 거요?"

"그래요. 한때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알기 전의 일이에요."

트레벨리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젠 해리와 결혼해 금발머리 애들이나 낳아 기르겠다는 거로군."

그녀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아녜요. 해리와 결혼할 생각 없어요. 내가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 같아요. 난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거예요. 그게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특히 내가 당신을……."

"내가 어떻다는 거요?"

도전적인 눈빛으로 클레어가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요.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은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될 거예요."

그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칭찬이라면 뭐든 고맙소."

잠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내게 할 말 다 했나요? 난 할 일이 있어요."

"클레어."

트레벨리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오. 난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소. …… 난 당신이 필요하오."

클레어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래요. 당신은 내가 필요하겠죠.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여자이니까요. 난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당신이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노려봐도 난 겁나지 않아요. 당신에겐 대단한 청량제 또는 자극제가 되겠죠. 위대한 캡틴 베이커,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벌벌 떨게 만드시는 분이 겨우 열아홉 살 짜리 미국인 하나 겁을 줄 수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죠."

트레벨리언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꼭 맞는 얘기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은 내게 명령을 했소. 당신이 내게 한 첫 마디가 당신 말을 잡아끌고 오라는 것이었소. 매번 당신은 내 잘못을 질책했소. 내 책을 비판했고, 내 옷, 내가 하는 말과 말투를 비판했소. 우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소?"

클레어가 고개를 돌렸고,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보지 못했다. 그녀도 정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그녀만큼 호기심이 많고, 배우기 좋아하고, 그리고 세상과 그 본질을 알고 싶어 하는, 세상의 단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 트레벨리언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거의 서로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완전히 끝이 난 거요?"

"아니오."

솔직한 심정이었다.

"당신에 대한 사랑은 무덤에 갈 때까지 간직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당신과는 함께 살 수 없어요. 밖에 서서 현실을 방관하는 사람과는,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어요."

"나도 충분히 현실에……."

클레어는 성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천만에요.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당신은 오로지 변명만 늘어놓았어요. 날 사랑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데에는 끼어 들지 않겠다고 했어요. 왜 공작으로서의 제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가에 대해 변명만 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공작이 되면 당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일에, 소작인이나 어머니 일에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싫었던 거죠. 세계의 뒤편에 서서 가만히 관찰이나 하는 게 당신에게는 훨씬 편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아요? 당신은 내게 결혼하자고 하지만, 그건 진정으로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얼마 안 되어 얼마나 당신을 증오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겠소? 대체 어떻게 해야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걸 믿겠소?"

클레어는 불쾌한 웃음을 지었다.

"곁에 서서 여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요. 당신도 인간이라는 걸 보여 달란 말이에요. 그 편지를 쓴 주인공이라는 걸 증명해 달라구요.

트레벨리언은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한쪽 벽을 향해 걸어가서, 드리워진 태피스트리를 밀어젖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이 보이기 전에 벌써 니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저런 곳에 그렇게 오래 버려둘 수 있어요?."

니사가 불평을 했다.

"추위 때문에 온몸이 새파래졌어요. 당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클레어를 보자 니사는 말을 멈추었다.

"아직 얘길 안 했군요."

니사가 트레벨리언에게 말했다.

"클레어에겐 비밀로 하면 안 돼요."

"못 했소."

트레벨리언이 미소를 지으며 니사를 내려다보았다.

"클레어가 얘기를 할 틈을 주지 않았소. 당신은 클레어에 대한 내 선물이오."

클레어는 걸음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지만,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당신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소."

"날 속인 걸 좋아해요? 내가 그 남자들에게 죽지도 않은 여자를 위해 컵에 에메랄드를 넣어 달라고 통사정을 할 때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겠어요."

트레벨리언의 얼굴이 굳어졌다.

"항상 그렇게 날 최악으로만 생각하오?"

손을 뿌리치며 클레어는 다시 문을 향하기 시작했다.

니사가 길을 막아섰다.

"이런 싸움엔 정말 지쳤어요."

그녀가 말했다.

"저 남자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어요. 전에 무슨 짓을 했든지 간에 당신은 저 사람을 용서해야 해요."

클레어가 니사를 노려보았다.

"난 당신이 정말로 자살한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게 장난이라는 걸 전혀 몰랐고, 저 사람은 그런 얘긴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어요."

니사가 간드러지게 웃어 젖혔다.

"하지만 정말 난 죽었어요. '달의 진주'는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난 정말 죽었어요. 프랭크는 날 깨워 죽는 걸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게 만들겠다고 결심했어요."

클레어가 얼굴을 찡그렸고, 니사는 그녀를 의자로 인도했다.

"이리 오세요. 전부 얘기해 드릴게요."

클레어는 니사에게 이끌려 의자로 가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지 않았고, 트레벨리언은 두 사람을 등지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사는 최소한 그 액체가 독약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들이마실 때에는 죽을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그 액체가 단지 수면제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을 했다. 페샤에서 온 남자들이 니사를 어떻게 화장시킬까 크게 걱정하고 있을 때, 그는 화장시키면 정말로 니사를 태워 죽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트레벨리언은 두 페샤인은 단지 심부름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녀가 마신 액체가 독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트레벨리언은 금화를 넉넉히 주고 설득해서 두 남자를 니사와 떼어놓았다. 그는 두 사람에게 맥 트레비트네 화덕에 있던 재를 넘겨주고 페샤로 돌아가게 했다.

일단 트레벨리언이 니사의 몸을 확보하고 난 다음 그와 앵거스는 약에 취해 의식불명인 그녀를 깨우느라 사흘을 보냈다. 니사는 두 사람이 자신에게 먹였던 위스키 맛이 나빴다는 얘기, 너무 잠이 왔지만 트레벨리언이 억지로 그녀를 걷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이 잠이 들면 니사도 잠이 들까 봐, 그리고 나서는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트레벨리언은 꼬박 사흘을 깨어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클레어가 원하는 것이 니사가 살아 있는 거라면 니사를 저승에서라도 데려오겠다 했던 트레벨리언의 얘기도 전해 주었다.

"난 죽었어요. '달의 진주'로서의 나는 말이에요."

니사가 말했다.

"그리고 이젠 마음대로 살 거예요. 프랭크는 내가 원한다면 그의 가족과 함께 이곳에 살아도 좋다고 했어요."

니사는 트레벨리언을 돌아보았다.

"이제 난 나갈까요?"

트레벨리언이 고개를 끄덕였고, 니사는 방을 떠났다.

클레어는 의자에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왜 그런 일을 했죠? 그녈 구한 이유가 뭐죠?"

"당신을 원했기 때문이오."

클레어를 향해 돌아서는 트레벨리언의 눈이 타오르고 있었다.

"멀리 떠나 버리고 싶었소. 니사가 죽은 다음 이곳을 떠나 버리려고 했었소.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다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건 알라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했소."

갑자기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클레어, 당신이 내 동생과 결혼을 한다면 두 사람 모두 죽여 버리겠소. 당신이 죽고 싶어 하는 여자를 살리고 싶어한다면, 내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만들겠소. 당신이 공작부인이 되고 싶다면 난 공작이 되겠소. 클레어, 날 떠나지 마시오."

한참이 지나서야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팔짱을 끼었고,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요,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에필로그

클레어는 해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문제로 부모와 충돌했다. 예상대로 부모들은 탐험가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부모와 함께 밀담을 나누었고,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그녀의 부모들도 밝은 낯빛으로 결혼에 동의했다.

트레벨리언이 클레어 부모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세 사람 중에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클레어도 무슨 얘길 했는지, 아니 무슨 협박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과의 결혼식을 조용히 치렀고, 그의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자 두 사람은 곧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곳에서 트레벨리언은 여전히 캡틴 베이커로서 아프리카의 더욱 깊은 곳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클레어는 해안에서 머물며 그를 기다렸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은 트레벨리언이 믿지 못할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그녀는 두 사람의 여행에 관한 책을 몇 권 더 썼다. 그리고 잿빛 머리칼을 가진 아이들 몇 명이 태어나자, 필생의 역작, 즉 캡틴 프랭크 베이커의 전기를 썼다.

보통의 전기와는 달리 클레어의 책은 시류에 따라 잊혀지지 않았고, 트레벨리언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트레벨리언의 책은 유럽 영향권에서 발표되기가 무섭게 모두 부동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 후로도 백여 년간 그의 책은 누대의 학자들과 모험을 찾는 사람들의 애독서가 되었다. 그의 책은 역사에 살아남았다.

클레어와 트레벨리언은 성격상으로도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두 사람은 전세계를 함께 여행했으며, 모든 면에서 오랜 일생 동안 뗄 수 없는 동반자였다.

클레어의 부모와 동생은 몽고메리 가문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며, 브래트는 마침내 해리와 결혼했다. 해리는 여전히 공작의 작위를 유지했으며, 두 사람은 서로 아주 잘 어울렸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해리와 브래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지만 완전히 별개의 삶을 살았다. 브래트는 사교계의 여주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해리는 영국 최고의 엽사(獵士)가 되었다. 흔치 않은 아름다움으로 두 사람은 비길 데 없을 정도로 예쁜 아이들을 몇 명 낳았다.

가난의 위험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던 브래트는 탁월한 자금 운용자가 되었고, 부분적으론 클레어의 도움을 받아 몽고메리 가의 재산을 엄청나게 증대시켰다.

다우어저 더치스 유제니아는 해리와 브래트가 결혼을 하자 별채로 물러났고, 그 뒤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앵거스 맥 트레비트의 아들들은 미국에서 돌아와 맥 트레비트 위스키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니사는 몽고메리 가문과 함께 95세까지 살았다. 결혼은 하지 않았으며, 죽는 날까지도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녀는 자신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많은 청년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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