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같은 사랑 1
야누스 같은 사랑
Sandra Brown
1.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는 소리라도 지를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주제로 바꿀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저녁 식사 내내 온통 그 이야기만이 오갔다. 마치 안타까운 상황이라기보다는 축하라도 해야 한다는 듯한 분위기였고 일요일 저녁에나 어울리는 식사였다. 사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을 들여 음식을 준비했다. 오븐에서 뜨겁게 부풀려서 갓 구워낸 이스트 롤과 두툼하고 향긋한 비프 그레이비, 집에서 만든 선명한 빛깔의 푸딩은 모두 보기만 해도 먹음직했다. 그러나 제니는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음식을 한입 집어넣을 때마다 혀가 따끔거리는 듯했고, 목구멍으로는 아무 것도 넘어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노란 앵초 무늬가 새겨진 도자기 컵에 따른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할의 중미 여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여행은 언제 끝날지 기한도 없었고, 사실상 할은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들 상당히 들떠 있었고, 특히 할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멋진 일이에요. 몬테리코의 순결한 영혼들의 용기 없이는, 우리가 해왔고 또 앞으로 해나갈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영광은 모두 그 사람들 몫입니다."
커피 잔을 다시 채워 주며 사라는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작은아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너희들이 그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잖니? 정말 훌륭한 일이었다. 훌륭하고말고, 하지만..."
사라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조심하여라, 얘야. 위험한 일은 없는 거지?"
할은 그의 팔에 올려진 부드러운 손을 토닥거렸다.
"어머니, 백번도 넘게 말씀 드렸잖아요. 정치 망명자들은 몬테리코 국경에서 저희를 기다릴 거예요. 우린 그 사람들을 멕시코로 인도했다가..."
"불법으로 미국까지 밀수해 오는 거죠."
케이지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사라는 할의 형을 차가운 눈빛으로 힐금 쳐다보았다. 그러한 푸대접에 이미 익숙해진 케이지는 어머니의 못마땅한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사라를 짜증나게 하는 특유의 몸짓으로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서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다리를 쭉 뻗었다. 어린 시절 내내 사라는 식탁에 앉은 그의 자세에 대해 스스로 노여움에 질릴 때까지 잔소리를 했었지만, 훈계는 별 효과가 없었다. 그는 앵글 부츠를 신은 다리를 꼬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감옥에 처 박혀서도 그렇게 열정을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게 할 말이 없거든 그만 식탁을 뜨는 게 어떠냐?"
밥 헨드렌 목사가 짧게 말을 끊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케이지는 완고한 자세로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할이 감옥에 간다고 해도 말이다."
목사는 말을 이었다.
"신념을 위해서다."
"지난번에 절 보석으로 빼내 주실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케이지가 예전 일을 들췄다.
"그때 넌 음주로 붙잡혔다."
케이지는 씩 웃었다.
"가끔씩은 술에 취해야 한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케이지, 제발."
사라가 고통스러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이라도 잘해 볼 순 없니?"
제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러한 가족 분위기가 싫었다. 케이지가 문제의 원인이기는 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중미 모험과 관련된 할의 위험을 이렇게나마 꺼내는 것이 옳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게다가 케이지의 냉소적인 반응이 바로 부모가 할에게 쏟는 지나친 편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밥과 사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지만 노골적인 편애는 할까지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케이지는 잘생긴 얼굴에 띤 비웃음을 싹 거두고 표정을 누그러뜨렸지만, 언쟁을 멈추진 않았다.
"할이 하고 있는 일이 숭고한 줄은 알지만 너무 위험하잖아요. 이유도 묻지 않고 총부터 쏴 대는 그런 야만 국에 목숨까지 걸어가며 자진해 가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넌 할의 신념을 이해하지 못할 게다."
밥은 큰아들에게 그만 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케이지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식탁에 팔을 기댔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의지는 이해를 하죠, 물론.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는 조바심이 나는 듯 진한 금발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하 조직을 통해서 정치 망명객들을 멕시코로 데려가서 불법으로 미국에까지 데려오겠다니."
그는 손가락으로 할의 임무를 하나하나 꼽아 가며 조롱하듯이 말했다.
"텍사스로 건너와서는 어떻게 살아간답니까? 뭘 할 수 있겠어요? 일거리, 잠자리, 음식, 의료, 옷가지들은 생각해본 겁니까? 그들이 내란 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두 손들고 환영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그들을 불법 체류자들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대접을 받게 될 거라고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의지를 믿어."
할은 조금 전의 확신을 잃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단호한 의지는 케이지의 현실주의 앞에선 항상 흔들리고 만다. 할이 자신의 확신에는 흔들림이 없다고 확실히 믿을 때조차도, 케이지는 그것을 뿌리째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 케이지의 논리는 지진을 일으키는 것처럼 확고부동한 신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할은 신이 케이지를 이용하여 그를 시험에 들게 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기도를 드리곤 했다. 어쩌면 케이지의 기민함은 할을 유혹하기 위해 내려진 악마의 선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부모는 후자 쪽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보다는 상식이 있으신 분이길 빌어 보자꾸나."
"그만 하면 됐다!"
밥이 날카롭게 말했다. 케이지는 어깨를 움츠리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으며,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작은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제니는 그의 긴 손가락이 그 가느다란 도자기 손잡이에 들어가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양손으로 컵을 쥐었다. 그는 목사관의 주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곳은 휴일에만 사용하고 보물처럼 다뤄지는 우아한 식기들이 가득 들어찬 중국식 찬장에, 창가에는 커튼이 살짝 나부꼈고, 노란 파스텔 조의 격자 무늬 바닥재가 깔려 있었다. 케이지는 아늑한 주방에는 어울리지 않게 거대해 보였다. 그가 지나치게 근육질이거나 키가 크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케이지와 할은 거의 구별이 안 되었다. 케이지가 동생보다 약간 더 강인해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멀 리서 뒷모습만 봐서는 두 형제를 구분해 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강인해 보이는 근육은 유전적인 영향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직업 때문이리라. 그밖에 두 형제는 닮은 점이라곤 없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라면 태도일 것이다. 케이지가 들어서면 그 어떤 방도 좁게 보인다. 저항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를 오로라처럼 감싸고 있는데, 그것은 검게 그을린 피부처럼 항상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실내에서의 그는 너무 꽉 끼는 옷을 걸친 거인처럼 보였다. 그와는 마치 열린 공간, 대지, 하늘만이 어울린다는 듯이 방을 꽉 채우고 마는 것이다. 옷이나 머리카락에 바람이라도 싣고 다니는 것처럼 그에게선 늘 상큼한 바람 내 음이 났다. 제니는 그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피부에서는 햇볕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얼굴을 보면, 특히 갈색 눈 주변을 살펴보면 그가 오랜 동안 햇볕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잔주름 때문에 약간 더 나이 들어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32년이라는 세월 동안 열심히 살아 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케이지가 가는 곳이면 늘 그렇듯이 오늘 밤에도 싸움 아니면 적어도 소란이 일 것이 분명했다. 장난기와 반항이 항상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적은 없었지만 그는 정글을 배회하며 평화로운 동물들을 놀라게 하고, 깃털을 세우게 만들어 고요함을 깨뜨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집결 장소는 잘 알고 있겠지?"
사라가 물었다. 그녀는 할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한 이별의 만찬을 케이지가 망쳐 놓아서 마음이 상했지만, 반항적인 큰아들은 과감히 무사하고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할이 이미 백 번도 넘게 말한 여행 여정을 다시 설명해 나가자, 제니는 조심스럽게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접시를 치우려고 그녀가 할의 어깨에 살짝 기대자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입술로 가져가서는 손등에 키스를 했지만 그의 열정적인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제니는 허리를 굽혀 할의 금발에 키스하고,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꼭 안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했다가는 식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생각하리라. 그녀는 감정을 억누른 채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실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이 목사관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설거지는 항상 제니의 몫이었다. 제니가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 옆에 걸린 못에 단정히 행주를 빨아서 걸고 난 후에도 그들의 대화는 15분이나 더 지속되었다. 그녀는 뒷문을 빠져나가 현관 계단으로 내려갔다. 마당을 가로질러가 하얀 울타리 위에 팔을 기대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서부 텍사스에서는 보기 드문 날씨였다. 공기 중에는 약간의 먼지의 흔적만이 보일 정도였다. 둥실 떠오른 둥근 달은 누군가가 검은 하늘에 꼬옥 붙여 놓은 거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도 이렇듯 가까이에 서 빛나고 있는 달빛의 위력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서로 꼭 끌어안고 싱겁지만 로맨틱한 말을 귀엣말로 속삭이는 연인들을 위한 밤이었다. 작별을 고해야 하는 그런 밤이 아니라, 아니, 반드시 작별을 해야 한다면, 했던 얘기를 또 반복하는 지루한 작별이 아니라 열정과 아쉬움이 사모의 마음과 뒤섞인 그런 밤이어야 했다. 제니는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이 가려운 것마냥 안절부절못했다. 뒷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오래된 나무가 서로 부딪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닫혔다. 고개를 돌리자 케이지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울타리로 다가와 곁에 나란히 서자 제니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없이 그는 앞 주머니를 뒤져서 담뱃갑을 꺼내어 흔들고는 담배 한 가치를 입에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켜자, 그 불꽃이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얼굴을 밝혀 주었다. 그는 라이터를 끄고 담뱃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건강에 해로워요."
제니가 여전히 앞만 응시한 채 말했다. 케이지는 고개를 도려서 잠깐 동안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울타리에 등을 기댔다.
"열한 살에 담배를 시작했지만 아직 살아 있어."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말도 안돼요. 폐에 얼마나 해로운지 생각해 보세요. 끊으세요."
"음?"
그는 어떤 여자라도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예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케이지 헨드렌의 미소에 무관심한 여자는 라 보타에 한명도 없었다. 그 중 몇몇은 멈춰 서서 그 미소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곤 했다. 여자들 대부분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나는 남자고, 당신은 여자. 그 외에 또 뭐가 필요하지?
"그래요, 끊어야 한다고요. 그렇지만 끊지 않을 거죠? 지난 몇 년간 당신 어머니가 피우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저 지저분한 재떨이나 절은 담배 냄새 때문이지. 한번도 내 건강이 걱정되셔서 끊으라고 하신 적은 없었어."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잠깐 동안 씁쓸한 빛이 배어났다. 제니 처럼 섬세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순간적이었다.
"난 당신 건강이 걱정돼요."
"정말이야, 지금?"
"그래요."
"정말 내가 걱정돼서 담배를 끊으라고 한단 말인가?"
제니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눈치 챘지만 응수해 주기로 했다. 그녀는 턱을 약간 들어올리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네."
그는 쓰레기 더미 위에 담배를 던지고는 부츠로 밟았다.
"됐어, 이제. 끊었어."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릴 때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목선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벌 꿀 빛의 피부를 돋보이게 했다. 부드러운 갈색머리는 어깨 근처에서 실크처럼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녹색 눈동자는 반짝였고 콧날은 살짝 주름이 지며 쾌활하게 움직였다. 제니는 결코 모르겠지만 그녀의 웃음소리는 놀랄 만큼 매혹적이었다. 케이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그 관능적인 소리에 반응하고 있었고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과 빛나는 치아로 시선을 낮췄다.
"오늘 밤 처음으로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게 됐네."
그가 말했다. 제니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웃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할이 떠나서?"
"당연하죠."
"또다시 결혼을 연기하게 돼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엄지손톱으로 울타리를 긁었다.
"물론이에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왜 안 중요하다는 거지?"
케이지가 거칠게 물었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일생 일대에 가장 중요한 일일 텐데. 최소한 당신 같은 여자에게는 말이야."
"그렇죠. 하지만 이번에 할이 해야 할 일과 비교하면..."
케이지가 욕설을 내뱉자 그녀는 입을 닫았다.
"다른 일과 비교하면 어떤가?"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에 연기한 거 말인가요?"
"그래."
"할은 박사학위를 받아야 했어요. 결혼을 하고, 그리고...가정을 꾸리기 전에 논문을 마쳐야 했으니까요."
언제나 그렇듯이 케이지 앞에만 서면 제니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 정도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느껴진 것뿐이었다. 그는 항상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그로 인해 숨이 가쁘고 현기증이 났다. 두 손이라도 꼭 쥐고 있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침착성을 앗아간 것이다. 웬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오늘 밤처럼 이미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지고 애써 억눌러 왔던 인내심마저 바닥 난 경우에는 더더욱 케이지의 뚫을 듯한 눈빛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할과 진짜 데이트를 시작한 건 언제였지?"
그가 갑자기 물었다.
"데이트라니 요?"
마치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투로 그녀가 되물었다.
"음, 그러니까. 그런 거 있잖소. 손도 잡고, 야외 극장에서 껴안기도 하고. 그런 데이트. 둘이 그렇게 다정히 구는 것을 내가 기억 못하는 거 보니 대학 다닐 때였나 보군."
"글쎄요, 그런 데이트는 한적 없어요. 그저...그저 발전한 거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어요. 항상 함께 였으니까요. 다들 우리가 커플이라고 생각해요."
"제니 플렛처."
케이지는 넓은 가슴팍에 팔장을 끼고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다른 사람과는 데이트를 해본적이 없단 말이야?"
"내가 인기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녀가 방어적으로 쏘아붙였다. 케이지는 항복을 선언하듯 손을 들었다.
"와 우, 이런. 그런 말이 아니었어. 당신 정도라면 동네 모든 남자들이 숱하게 쫓아다녔을 테지."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정말 품위 없게 들리네요."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자 케이지는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손을 내렸다.
"당신 앞에서라면 어떤 남자도 품위를 잃고 말 거야, 제니."
그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곧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할에게 충실하느라 다른 남자들과는 데이트 한번 안 했다는 얘기로군."
"맞아요."
"둘이 텍사스 대학에서 지냈을 때에도?"
"그래요."
"흠."
케이지는 무의식적으로 담뱃갑을 찾았으나 그녀와의 약속을 기억하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눈은 제니에게 못 박혀 있었다.
"언제 할이 프로포즈했나?"
"몇 년 전에요.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였나 봐요."
"때였나 봐요? 기억을 못한단 말이야? 세상에, 지구가 흔들렸을 그런 순간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놀리지 말아요, 케이지."
"지구가 흔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영화와는 달라요."
"당신은 제대로 된 영화를 못 봤나 보네."
그의 눈썹이 도발적으로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당신이 어떤 영화를 봤는지 알 것 같아요."
그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녀의 당당한 어조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케이지는 그만 눈부시게 환한 웃음 터뜨리고 말았다.
"좋아. 그렇다면 언제 한번 같이 보러 갈까?"
"싫어요!"
"왜 지?"
"왜냐고요? 그런 영화를 보며 심장마비에 걸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역겨워요."
그는 몸을 굽히고 비아냥거렸다.
"한번도 안 봤다면서 어떻게 그리 잘 알지?"
제니가 어깨를 떠밀자 그가 뒤로 물러났다. 순간 그녀의 상큼한 꽃 향기가 그에게 배어들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 침울함이 떠올랐다.
"제니, 언제 할이 당신에게 결혼하자고 했지?"
"아까 말했잖아요, 그건..."
"어디에 있었나? 주변을 설명해 봐. 무슨 일이 있었지? 무릎을 꿇고 앉았나? 아니면 할의 차 안에 있었나? 낮이었나, 아니면 밤이었나? 언제였지?"
"그만둬요! 기억이 안 난다고 했잖아요."
"그가 결혼하자고 한적이나 있었나?"
그의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고 동시에 그녀는 바짝 주의를 기울였다.
"무슨 의미죠?"
"할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냐는 말이지. 제니, 결혼해 주겠어? 하고 말이야."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모두들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했어요."
"누가 그랬단 말이지? 당신? 할? 어머니와 아버지?"
"그래요, 모두 다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들어가서."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할에게 이런 바보 같은 여행은 가지 말라고 말해."
그녀가 돌아섰다.
"네?"
"들었잖아. 할에게 떠나지 말라고 하란 말이야."
"그럴 순 없어요."
"당신 말이라면 들을 거야. 설마 그 애가 가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응?"
그녀가 대답을 못하자 그가 다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래요!"
그녀가 손목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할에게 명령하신 임무를 방해할 순 없어요."
"그가 당신을 사랑하나?"
"물론이에요."
"당신은 그 애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고 싶겠지, 안 그래?"
"그건 내 일이에요. 할과 내 문제라고요."
"제길, 당신 사생활에 끼어들려는 게 아니야. 내 어린 동생이 목숨을 잃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서지. 원하든, 원치 않든 난 아직 이 가족의 한 사람이니까 대답을 하라고."
그의 분노를 느끼며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하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부모들처럼 그녀도 그를 가족 문제에서 소외시키려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케이지가 아니라 그녀가 이방인인 것이다. 그녀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원해요. 케이지. 몇 년 동안이나 그와의 결혼을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좋아, 그렇다면."
그가 좀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단호하게 나가 봐. 최후의 통첩을 하는 거지. 그 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고 말해 봐.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히 말하라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옳다고 믿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할을 타락시켜 보란 말이야. 제니. 난 당신만큼이나 그 애를 걱정하고 있어. 대통령, 외교관이나 군인들도 중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막을 수 없는데 대체 할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그 앤 지금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일을 하려는 거야."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거예요."
"그 애가 한말을 되풀이하고만 있어. 나도 성경은 알고 있어. 제니, 완전히 주입되었지. 사실 한때 유태인 전쟁 영웅을 연구하기도 했으니까. 그래, 그들은 정말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었지. 하지만 할은 군대가 밀어 주는 게 아니라고. 미국 정부의 추천장도 갖고 있지 않잖아? 신은 우리에게 상식이 무언지 판단할 수 있는 뇌를 주셨지. 지금 할이 하려는 일은 무모해."
제니도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했다. 그렇지만 케이지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데는 명수였고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전문가였다. 케이지의 생각에 동조를 한다는 것은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할과 할의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다.
"잘 자요, 케이지."
"우리랑 지낸 지가 얼마나 됐지, 제니?"
그녀가 잠깐 멈추었다.
"열 네 살 때부터 였죠. 거의 12년이 됐네요."
헨드렌 부부는 제니의 부모가 사고로 사망한 후 그녀를 보살펴왔다. 어느 날 제니가 학교에 간 사이 가스가 폭발해서 집이 완전히 불타 버린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수학 수업을 하는 동안 소방차와 앰블런스 사이렌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때는 부모님이 감기로 목이 아파서 집에 누워 있던 여동생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아버지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여동생이 괜찮은지 알아보려고 집에 잠깐 들렀던 것이었다. 저녁때쯤, 제니는 학교 갈 때 입었던 옷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없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플렛처 가족은 교구 목사인 밥 헨드렌과 그의 아내인 사라와 가깝게 지내 왔다. 제니에게는 친척조차 한명 없었으므로 그녀의 장래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대학에 다닐 때였지. 추수감사절에 집에 돌아와 보니 당신이 있더군."
케이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재봉실을 공주님을 위한 방으로 개조하셨지. 마침내 그렇게 원했던 딸이 생긴 거였으니까. 당신을 가족처럼 대하라고 말씀하시더군."
"당신 부모님은 항상 저에게 잘해 주셨어요."
제니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래서 나서지 못하는 건가?"
마음이 상한 그녀가 받아 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니, 당신은 알고 있어. 지난 12년 동안 당신은 스스로 결정해 본 적이 없잖아. 순종하지 않으면 당신을 쫓아내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었나?"
"말도 안돼요!"
그녀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말이 되지, 슬픈 일이야."
케이지는 각진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 친구나 입을 옷, 가야 할 대학, 심지어는 결혼할 사람까지 모두 결정하셨지. 그러고 보니 결혼식 날짜까지 결정하시겠네. 부모님 계획에 따라 아기도 가질 건가?"
"그만해요, 케이지. 다 말도 안 되는데다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 취했어요?"
"불행히도 아니야. 차라리 취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지."
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제니, 이제 그만 해. 부모님은 당신의 숨을 꽉 틀어막고 있어. 당신은 너무도 아름다운 여자야. 당신이 좀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한들 어쩌시겠어? 당신은 이제 열 네 살이 아니야. 벌할 수 없단 말이지. 쫓아낸다면, 뭐 그럴 분들도 아니지만 그럼 또 어때? 당신은 어디든 갈 수 있어."
"독립적인 여성이 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당신처럼 방탕한 생활을 하라는 얘기예요?"
"아니. 99퍼센트의 생활을 성경 스터디 그룹과 함께 보내선 안 된다는 얘기지."
"난 교회 일이 좋아요."
"다른 일을 하기 싫을 만큼 말이야?"
그는 흥분하여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헝클어트렸다.
"당신이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도 존경할 만해, 그런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벌써부터 할머니들처럼 쪼그라든 삶을 사는 게 보기 싫은 거야. 당신은 지금 인생을 낭비하고 있어."
"난 이대로 가 좋아요. 그리고 할과 인생을 함께할 거예요."
"그가 중미로 가서 죽어 버리면 그러지도 못해!"
그는 제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이런, 미안하게 됐어.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사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할이 걱정돼서 한 얘기겠죠."
"그래."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할에게 말해. 제니."
"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요."
"당신 말은 들을 거야. 당신은 그 애와 결혼할 사람이 잖아."
"너무 확신하지 마세요."
"그의 결정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아니야. 그 애에게 가지 말라고 하겠다고 약속해 줘."
그녀는 부엌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해 할과 그의 부모가 아직도 식탁에 모여 앉아서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볼게요."
"좋아."
그는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쥐었다가 놓았다.
"사라가 그러는데 오늘 밤 자고 갈 거라면서요?"
웬 지 그녀는 그가 묵고 갈 수 있도록 그의 방을 청소하고, 이불의 먼지를 털고, 새 침대시트를 깔아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수고를 한 사람이 어머니였다고 케이지가 믿기를 바랐다.
"아침에 할을 환송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정말은 그 애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야."
"어쨌든 사라는 당신이 가끔씩 집에 와서 자고 갔으면 해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 제니. 당신은 정말 타관 외교가로군. 언젠가 어머니가 내 방에 있는 축구랑 농구 트로피 좀 치워 버리라고 말씀하시더군. 그런 폐물들 먼지 털기도 귀찮으시다고 말이야."
제니는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것을 꿀꺽 삼키며, 케이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주전에 그녀는 사라와 함께 할이 운동경기에서 딴 트로피를 깨끗한 천으로 싸서 다락에 보관했던 것이다. 지난 12년 동안 제니의 눈에도 노골적인 편애가 뻔히 보였다. 그렇지만 케이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인생을 선택한 것이다.
"잘 자요. 케이지."
제니는 갑자기 자신이 그를 잡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그는 누군가 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을 전체에 파다한 명성을 생각해 보면 쓸 데 없는 우려였다. 과연 케이지처럼 제멋대로 인 사람이 이런 종류의 사랑만으로 변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염려와 걱정 이상의 깊은 사랑이 필요하리라.
"잘 자."
그녀는 겨우 그를 남겨 놓고 뒷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할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곁으로 오도록 고갯짓을 했다. 그는 망명객들이 텍사스에 도착하면 전 주 단위로 후원 단을 모집하겠다고 열심히 설명하는 아버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할의 의자 뒤에 선 제니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 위에 턱을 괴었다.
"피곤해?"
밥이 말을 멈추자 할이 물었다. 헨드렌 부부는 그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약간이요."
"그럼 올라가서 자.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배웅해야 하잖아."
제니는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 위에 이마를 갖다 댔다. 그의 부모님들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절망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잠이 안 와요."
"그럼 의사가 처방해준 수면제를 좀 먹어 보려무나."
사라가 제안했다.
"나도 가끔 먹는데, 아주 약한 거라서 몸에는 탈이 없단다. 뇌활동이 느려져서 금방 잠이 올 게다."
"어서."
할이 그의 의자 등받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도 같이 올라갈게."
"안녕히 주무 세요."
제니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 아직 멕시코 연락처도 말해 주지 않았잖니?"
밥이 할을 일깨웠다.
"저도 아직 몰라요. 곧 돌아올 건데요, 뭐. 잠깐이에요."
제니와 할은 함께 계단을 올랐다. 부모님의 침실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추었다.
"수면제 좀 줄까?"
"그래야 할까 봐요. 그렇지 않으면 밤새 뒤척일 것 같네요."
잠시 후에 그는 핑크 색 알약 두 알을 손에 들고 왔다.
"약병을 보니까 한두 알 복용하면 된다는 군. 두 알쯤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들은 제니의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 곁에 램프를 켰다. 케이지 말이 맞았다. 제니가 목사관으로 옮긴 후, 이 방은 공주님 방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제니의 취향은 거의 반영되지 못했다. 몇 년 전에 사라가 이제 뭔가 바꿀 때라고 하여 그 지긋지긋한 하늘색 줄무늬 천을 하얀 색 레이스로 바꾼 것만 빼고는 제니의 취향에 비해 이 방은 너무도 어린아이 방 같았다. 그렇지만 사라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는 업었다. 제니는 자신의 침실을 마음대로 꾸밀 수 있도록 어서 빨리 할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밥이 은퇴하면 할이 그 자리를 맡는 건 기정 사실이었으므로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침실을 꾸밀 수 있다.
"약 먹고 파자마로 갈아입어. 잠들 때까지 있을게."
제니는 방 한가운데 서있는 할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가서 그가 시킨 대로 수면제 두 알을 모두 삼켰다. 파자마는 입지 않았다. 대신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바라며 몰래 사 둔 나이트가운을 입었다. 그녀는 거울을 비춰 보며 케이지가 말한 대로 행동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할이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할이 하려는 일은 바보들이나 생각해 낼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렇게 위험하지 안다고 해도, 그 일로 인해 결혼 계획이 또 한번 연기되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참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제니는 자신의 미래가 바로 오늘 밤에 달려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할이 떠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삶은 영원히 변하고 말 것이다. 그녀는 도박을 해야 했다. 전부를 얻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그녀는 승리를 위해 여인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무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하나님도 룻이 보아즈와 하룻밤을 보내도록 허락하셨다. 아마도 신은 오늘 밤도 허락하실 것이다. 룻은 벗은 몸에 죄스러울 정도의 나긋나긋한 감촉으로 감겨오는 부드럽고 감각적인 나이트가운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 깊숙이 팬 가슴 선에는 바이올린 줄처럼 가는 끈이 가슴의 풍만한 곡선을 드러내며 허리 부분과 연결되어 있었다. 엉덩이 부분에서 살짝 넓어진 진주 빛 나이트가운은 그녀의 섬세한 곡선을 그대로 내보이며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길게 파인 가운이 다리를 간질였다. 그녀는 꽃향기가 나는 가벼운 향수를 살짝 뿌리고 머리를 빗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그러모았다.
"제니, 잊지 말고..."
제니를 본 순간 할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맨발로 욕실에서 미끄러져 나와 부드럽게 문을 닫는 그녀에게서 미묘하고도 육감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램프의 불빛은 훤히 드러난 피부를 황금처럼 빛나게 했고, 움직일 때마다 얇은 나이트가운 너머로 내비치는 다리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금 대체...어디서 그런 가운을 산 거야?"
할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특별한 날 입으려고 아껴 뒀던 거예요."
그에게 다가서며 그녀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제니는 할의 가슴에 양손을 얹었다.
"오늘이 그 특별한 날인 것 같아서요."
그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우리가 결혼할 때까지 아껴 둬야 할 것 같은데?"
"그때가 언젠 데요?"
그녀는 할의 셔츠 깃에 뺨을 가져 다 대며 물었다. 그는 간편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렇게 약속도 했고."
"약속은 이전에도 했었어요."
"지금까지는 잘 참아 왔잖아."
그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제니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두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꼭 지킬게. 돌아오자마자..."
"몇 달은 걸리잖아요."
"그렇겠지."
그는 얼굴을 볼 수 있도록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미안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할."
"무슨 뜻이지?"
그녀가 한걸음 다가서며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자 순간 그의 동공은 너무 환한 빛을 본 사람마냥 수축되었다.
"사랑해 줘요."
"사랑해, 제니."
"내 말은..."
그녀는 입술을 적시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날 안고, 같이 누워요. 오늘 밤 사랑해 달라는 거예요."
"제니."
그가 신음했다.
"오늘 왜 이러는 거야?"
"너무 절실해서 그래요."
"당신이 날 더욱 절실하게 만드는군."
"당신이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가야 해."
"떠나지 말아요."
"해야 할 일이잖아."
"나랑 결혼해요."
제니는 그의 목에 대고 속삭였다.
"그럴 거야. 일이 끝나면."
"당신의 사랑이 필요해요."
"사랑해."
"그럼 보여줘요. 오늘 밤 사랑해 줘요."
"그럴 순 없어. 옳은 일이 아냐."
"난 괜찮아요."
"우린 둘 다를 위해서야."
"우린 서로 사랑하잖아요."
"그러니까 서로를 위해서 참아야 하는 거야."
"날 원하지 않나요?"
할은 제니를 더욱 가까이 잡아당기며 그녀의 목에 입술을 눌렀다.
"그래, 그래. 가끔씩 당신과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상상을 하곤 해. 난...그래, 당신을 원해, 제니."
그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할의 입술이 제니의 입술을 벌리는 동안 한 손은 그녀의 엉덩이 곡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도 허벅지를 그에게 문지르며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혀가 그녀의 부드러운 입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맞았다. 그는 다시 신음을 했다.
"날 가져요, 할."
제니는 그의 셔츠를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오늘 밤 당신이 필요해요. 날 안고 애무해 줘요. 우리가 정말 사랑하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꼭 돌아온다는 것을 확인시켜 줘요."
"돌아온다니까."
"확실하지 않잖아요. 당신이 떠나기 전에 사랑하고 싶다고요."
그녀는 그의 입술과 얼굴, 그리고 목 구석구석에 빠르고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약간 몸을 피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는 단호히 밀어냈다.
"제니, 생각해 봐!"
제니는 한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겨우 숨을 삼켰다.
"이럴 순 없어. 이건 우리의 믿음을 어기는 행위야. 난 내일 시의 부름을 받아 떠날 몸이야. 당신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날 방해하게 할 순 없어. 게다가 지금 부모님이 바로 아래층에 계셔."
그는 몸을 굽혀서 그녀의 볼에 살짝 키스했다.
"자, 이제 숙녀답게 잠자리에 들어."
그는 그녀를 침대로 이끌어 이불을 젖히고 기다렸다. 그녀는 순순히 침대에 올라갔고, 그녀의 가슴에서 겨우 눈을 뗀 그는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내일 아침에 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당신을 사랑해, 제니.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하지 않는 거야."
그가 램프를 끄고 문을 닫고 나가자, 방안은 암흑으로 가득 찼다. 제니는 동그랗게 몸을 굽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뜨겁고도 짭짭한 눈물이 뺨을 타고 강물처럼 흘러 베개를 축축이 적셨다. 가족을 잃었을 때도 지금만큼 서럽고 비참한 기분이 들지는 앓았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홀로 남겨졌다. 침실조차도 낯설게만 보였다. 아마도 수면제의 효과인 것 같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그녀는 가구와 창문의 윤곽을 구분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지각 능력이 수면제로 인해 무뎌진 것이다. 그녀는 자의 세계로 빠져들 것 같았지만, 계속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그 길을 방해했다. 너무도 부끄러웠다. 이제까지의 견고한 도덕적인 규범을 어긴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바쳤다. 할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맹세했다. 그런데도 철저히 그녀를 거부한 것이다! 완벽하게 사랑을 나누지는 않는다고 해도 함께 누워 그가 느끼고 있는 열정을 조금이나마 보여줌으로써, 멀리 있는 동안 그녀가 의지할 만한 추억이라도 남겨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거절은 완벽했다. 그의 인생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자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는 뻔했다. 그의 인생에는 그녀를 사랑하고 안심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제니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아누워서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한줄기 빛 사이로 보이는 깜깜한 물체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문을 닫기 전에 순간적으로 비춰진 갑작스러운 밝은 빛을 통해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제니의 가슴은 희열 감에 들떠 벅차 올랐다.
"할!"
그녀가 반갑게 외쳤다.
2.
그는 침대로 다가와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너무도 어두워서 그의 그림자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돌아 왔어요. 돌아와 줬어요."
제니는 양손을 쥐고 입술에 가져 다 대며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온통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오늘 밤 당신이 필요해요. 안아줘요."
흐느낌으로 그녀의 말이 중간중간 끊기자 그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그래요, 날 꼭 안아 줘요."
"쉬..."
갑자기 일어나 앉은 탓인지 약이 서서히 효과를 내는지 몇 마디하지 않았는데도 정신이 몽롱해졌다. 지친 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뺨을 가져 다 대자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훔쳐냈다.
"쉬..."
눈물이 마르자, 그녀는 그의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그녀 위로 고개를 숙였다. 턱수염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와 닿았다. 호기심에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그의 턱을 손톱으로 부드럽게 자극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실수로 그의 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는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아주 멀 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이내 깊고 낮은 신음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그녀의 고개를 돌려서는 입술을 찾아 더듬었다. 그는 주저하는 듯 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소유라는 듯이 두 팔로 꼭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자극적인 키스에 고개를 젖힌 제니는 마지막 의식의 끈을 놓고 오직 감각적인 본능에 온몸을 맡겼다.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의 달콤한 입 속을 혀를 밀고 들어가 비밀스러운 곳을 어루만지며 미친 듯이 밀어붙였다. 제니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그에게 매달렸다. 머리가 윙윙거렸지만 그 이유가 키스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감각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 수면제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키스가 계속될수록 열기는 더해져 만 갔고 심장 고동 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침대 시트와 이불이 미끄러져 떨어진 것일까? 갑자기 추워진 것을 보니 그랬나 보다. 그러더니 금세 따뜻해졌다. 그의 손이...그의 손이라고? 그래, 그의 손이 그녀의 몸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을 스쳐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애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부드러운 베개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마침내 그가 자신을 침대에 눕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트 가운의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가 내는 신음 소리는 저항이나 허락 중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몸 구석구석을 탐험이라도 하듯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는 손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끊임없이 그녀의 유두를 살짝 스치다가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때 뭔가 뜨겁고 감각적인 무엇인가 유두를 둘러싸며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입? 그래, 그랬다. 촉촉한 그의 혀가 그녀를 부드럽게 훑어 가고 있었다. 애무하고 있었다. 둥근 원을 그리며 길고도 느리게, 빠르고도 가볍게. 그녀는 그의 머리를 붙들어 꼭 끌어당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팔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침대에 묶여 있는 것처럼 무겁고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용암처럼 뜨거운 피가 혈관을 타고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고, 또 그럴 힘도 없었다. 그가 곁으로 바싹 다가와 그녀에게 몸을 실었고 그녀는 그의 무게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혀는 마치 은밀한 침입자처럼 그녀의 입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아주 달콤한 침입이었다. 그는 달콤했다. 드러난 가슴에 와 닿는 부드러운 옷감 역시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그녀는 엉덩이를 들어올려서 그가 나이트가운을 벗겨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제 그의 몸 아래에서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몸을 다루는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유쾌한 것이었다. 손은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다가, 이따금씩 멈춰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선사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발가락 끝을 간질였다. 아니면 그의 혀였을까? 그녀의 종아리가 부드럽게 쓰다듬어졌다. 무릎도, 그리고 허벅지도, 차가운 침대 시트가 그녀의 발바닥에 와 닿을 때까지 그가 그녀의 다리를 들어올려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소리 없는 그의 지시에 순종했다. 거절한다거나 방해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유혹적인 주인의 노예였고, 정열의 사제였으며, 욕망의 숭배자였다. 그가 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배를 간질였다. 그는 그녀의 소중한 곳 주변의 부드러운 살을 입술로 가볍게 물고는 혀를 밀어넣고 부드럽게 빨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곳을 벌리자 제니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며 소중히 쓰다듬는 그의 애무를 즐기기 시작했다. 아, 그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환희에 찬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그가 나를 원하고 있어! 그녀는 유혹적인 몸짓으로 기꺼운 마음을 내비쳤다. 감칠맛 나는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가 미끈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은 제니의 숨결을 한층 가쁘게 하고 맥박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더 빠르게, 더 확실하게, 이국적인 리듬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활짝 열려 빠른 날개 짓으로 퍼덕이는 형형색색의 새들을 날려보낸 것처럼 벅차 올랐다. 아직은 아냐, 더 원해. 그녀의 영혼은 저항의 뜻을 나타내며 소리쳤다. 벌어진 그녀의 다리에 와 닿는 그의 데님 바지는 거칠었지만 그렇게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추, 그리고...맨 살과 남자, 딱딱한 따스함과 부드러운 힘, 벨벳 같은 부드러움,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부드럽게 탐사하며 짝을 찾고 있었다. 의도하던 대로 정확히 들어맞을 때까지. 관통의 순간은 짧고도 확실했다. 그녀는 예리한 고통이 관통하는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외침을 들었지만, 자신이 그러한 소리를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 안에 꽉 찬 남성에 이미 온 신경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가져 다 준 환상적인 소유의 즐거움을 깨닫자마자 그가 멀어지려 했다.
"안돼요."
그녀의 말은 깜깜한 암흑이 드리운 그녀의 마음속에서 메아리 쳤지만, 실제로 소리 내어 그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끝나지 않았다고 아직 끝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바지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그의 단단한 근육을 손바닥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그가 전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짐승처럼 신음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귀에 와 닿는 그의 따뜻한 입김을 느꼈다. 또 아직도 그녀의 몸 안을 탐사하는 기적처럼 단단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편안한 가운데 자극을 더 크게 하기 위해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목에, 얼굴에, 가슴에 허기진 키스가 이어졌고, 그의 입술이 지나간 피부는 얼얼한 자극이 남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열정에 반응했다. 두 몸의 완벽한 리듬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 가운데를 꼭 휘감고 있는 전선이 갑자기 풀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허벅지와 배와 가슴은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열렬히 응답했다. 한순간, 그의 몸이 긴장했다. 그녀는 자궁 속 깊은 벽을 통해 그가 뿜어내는 분출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충만 감만이 그녀를 완전히 채웠다. 풍만하면서도 욕망에 들뜬 그녀의 몸은 부드러운 비단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옆으로 누워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을 때 그녀는 거의 잠에 빠져 있었다. 무의식중에도 그녀는 단단한 몸을 끌어안고 그의 축축한 셔츠를 꼭 움켜쥐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평화로운 느낌과 누군가에게 속했다는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새로운 경험 탓에 여전히 멍하고, 황홀하고, 어리둥절했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찍 잠에서 깼다. 혼자였다. 할은 밤사이에 자리를 뜬 것이리라. 그의 팔에 안겨서 잠을 깨는 기분은 황홀하겠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용서하기로 했다. 헨드렌 씨 부부는 지난밤에 벌어진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제니도 할만큼이나 부모님이 어젯밤의 일을 알지 못하기를 바랐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복도를 가로지르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구수한 커피 내 음도 맡을 수 있었다. 아마도 할의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그의 부모님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제 그녀만큼이나 결혼을 서두를 것이다. 그녀는 수줍게 어젯밤의 소중한 기억을 떠올렸다. 부끄러움은 느낄 수 없었다. 비록 그를 붙들기 위한 수법으로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제 그녀와 함께 머무르리라. 그의 아버지가 은퇴를 해서 완전히 인수인계를 받기 전까지 준 목사로서 계속 일을 할 것이다. 그녀는 목사의 부인이 될 교육을 충분히 받은 터였다. 분명 할도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깨닫게 되리라. 헨드렌 씨 부부는 그의 변심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모든 꾸지람을 혼자 듣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서 이불을 걷어 내던 그녀는 자신이 발가벗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 맞아. 그가 나이트가운을 벗겼지. 그녀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지난밤을 상기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 꼭지를 틀면서 얼굴을 붉혔다. 언뜻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가슴에 장밋빛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는 몸 위에 와 닿던 유쾌한 그의 무게와 그녀의 손아래에서 반응하던 탄력적인 근육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고, 만족스러운 그의 신음이 여전히 들리는 듯했다. 그런 기억만으로 자신의 몸이 반응하자 그녀는 부끄럽기도 하고 흥분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할을 보고픈 마음에 재빨리 옷을 차려 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에 도착할 무렵, 그녀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문턱을 넘어선 그녀의 시야에 먼저 헨드렌 씨 부부가 들어왔다. 헨드렌 씨 부부는 아침 식탁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케이지도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커피 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할은 어디 있는 거지? 아직 자고 있을 리는 없는데. 밥이 아멘 을 끝으로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제니 쪽을 돌아보았다.
"할은 어디 있죠?"
그녀가 물었다. 셋 다 아무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먹구름이 점점 다가오며 주변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애 벌써 떠났단다, 제니."
밥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일어서서 의자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그가 위협이라도 하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변을 감싸는 검은 기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내겐 작별 인사도 안 했는걸요?"
"또다시 아픈 이별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게지."
밥이 말했다.
"차라리 이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거다."
이럴 순 없어. 그녀는 마음속으로 오늘 아침 일어날 일을 상상했었다. 할은 다시 그녀를 보고 넋을 잃을 것이고 둘은 지난밤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며 비밀스러운 눈짓을 나누리라. 그리고 모두 앞에서 할은 자신의 계획이 바뀌었노라고 고백하리라. 그런데 할이 떠나 버리다니...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둘은 동정을 가득 담은 눈빛이었으나, 케이지의 눈빛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녀가 외쳤다. 그녀는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하며 뒷문을 통해 부엌을 빠져나갔다. 뒤뜰은 텅 비어 있었다. 도로를 지나는 차는 한대도 없었다. 할은 떠난 것이다. 진실이 그녀를 아프게 내리쳤다. 그녀는 버림받은 느낌이 들었다. 땅으로 곤두박질쳐서 딱딱한 바닥에 팽개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절망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할은 애정 표현을 한적이 없었다. 지금, 이 밝은 대낮에 생각해 보니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그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은 그녀가 요구했던 것이었다. 더 이상을 기대한 것이 어리석었다. 그는 그녀가 떠나지 말라고 애원할 기회를 미리 제거한 것이다. 할은 둘 모두를 위해서 그런 상황은 피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왜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왜 모든 희망을 빼앗긴 것 같을까? 왜 거부당한 듯한 느낌이 드는 거지? 그리고 미칠 것만 같았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아직도 서로의 팔에 안겨 있던 지난밤의 기억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제니는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금이 간 보도 블록 위에 망연히 서있었다. 어떻게 작별 인사도 없이,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떠날 수 있어? 그에겐 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야? 나를 사랑한다면...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과연 그가 나를 사랑했을까? 정말로 사랑했을까? 난 정말로 그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케이지가 말한 대로 어젯밤을 이용한 것인가? 할과 나는 정말 모든 사람이 기대한 대로 관계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한 것일까? 그렇게 하는 편이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이 얼마나 비참한 생각이란 말인가?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지난밤의 그토록 행복한 시간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잖아? 그렇지만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떠나질 않았다. 할이 돌아오기 전에 어떻게 든 결론을 지어야 한다. 어쨌든 의심을 하면서 결혼이란 항해를 시작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리라. 그와의 육체적 결합은 환상적이었지만 그것만이 결혼의 건전한 기반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때 수면제로 인해 몽롱한 상태였다. 어쩌면 실제보다 더 환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이 약물에 취해서 꾼 에로틱한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발걸음에 돌려 집으로 향하던 그녀는 있는지도 몰랐던 케이지와 거의 부딪칠 뻔했다. 강렬한 그의 눈빛에 그녀는 뛰어오를 지경이었다. 그는 진한 금빛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황금색이 도는 갈색 눈은 커다란 고양이 눈처럼 단호했고 한번도 깜빡 거림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 입가가 희미하게 씰룩 거릴 때까지. 제니는 그러한 그의 행동을 연민으로 해석했다. 할이 머무르도록 설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를 동정하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목숨을 건 임무보다도 못하게 여기고 있는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가엾은 여인으로 생각할까 봐? 그런 생각에 진저리를 치며 그녀는 케이지의 시선에서 눈을 떼고 어깨를 꼿꼿이 세우고는 그를 돌아가려 했다. 그가 옆으로 한걸음 움직여서 그녀의 길을 막았다.
"괜찮은 거야, 제니?"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가늘게 뜬 눈빛이 단호해 보였다. 턱은 화강암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럼 요."
그녀는 커다랗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밝게 대답했다.
"왜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인사도 없이 할이 떠나 버렸어."
"다시 돌아올 거잖아요. 그렇게 하는 편이 깔끔했어요. 그 사람 앞에서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자신의 말이 그에게 어떻게 들릴지 의심스러웠다.
"어젯밤 얘기했나?"
"네."
"그래서?"
그가 캐물었다. 순간 그녀의 미소가 굳었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게 확신을 줬어요. 돌아오자마자 결혼할 거래요."
그렇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진실도 아니지만. 케이지의 탐색하는 듯한 눈빛을 보니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황급히 그를 비켜가며 얼굴을 붉혔다.
"아침은 먹었어요? 내가 차려 줄게요. 계란 두개 완숙이죠?"
그가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는 건가?"
"그럼 요."
그녀는 그가 지나가도록 똑바로 서서 미닫이문을 잡고 있었다. 그의 몸이 그녀를 살짝 스치자 모든 세포에 불이 붙는 듯했다. 가슴이 딱딱하게 굳고 허벅지가 열기로 따끔따끔 쑤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은 거꾸로 치솟고 있었다. 제니는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허겁지겁 케이지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흥분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식탁에 앉아 있는 그 앞에 음식 접시를 내놓으려 할 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물러났다. 이제 그녀의 잠자고 있던 육체가 성에 눈을 떴고 다시 잠들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나님, 분별력이란 없는 건가요? 아무나 닿기만 하면 반응하는 건가요?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당황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가서 두 무릎을 가슴에 모았다. 그녀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기억해내고 아직도 물결치고 있는 아찔한 감각을 즐겼다. 유리잔에 담겨 있는 진한 호박 빛 액체도 케이지의 죄책감을 달래 주지 못했다. 오히려 의식은 더욱 또렷해져 만 갔다. 잘 닦여서 반짝거리는 테이블 위에 목이 긴 맥주 병 세 개가 나란히 섰다. 병은 모두 비어 있었다. 그는 1시간쯤 전에 위스키로 바꿔 마시기 시작했지만 그를 괴롭히는 죄의식은 거의 치명적인 양의 알코올로도 희석되지 않았다. 그는 제니를 범했다. 죄책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어떠한 미사여구를 사용해도 소용이 없었다. 달리 보면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거나, 그녀를 육체적인 사랑의 세계로 초대했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말장난 따위로 그녀를 범했다는 죄의식은 무뎌지지 않았다. 성폭행까지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열한 종류의 폭력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독한 위스키를 또 한 모금 넘겼다. 식도가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토할 만큼 취하고 싶었다. 그러면 좀 깨끗해질 듯도 싶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그는 그 무엇에도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제 와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녀에게 말해? 고백해 버려? 아, 그런데 제니. 지난밤에 말이야. 알잖아. 할이 떠나기 전날 밤. 그와 사랑을 나눴던. 음, 그러니까. 그건 할이 아니었어. 나였다고. 이렇게? 그는 미친 듯이 욕설을 내뱉으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의 눈앞에서 일그러질 그녀의 얼굴.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경악하리라. 그와 함께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니는 어쩌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될 수도 있었다. 텍사스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바람둥이가 제니 플렛처를 앗아가게 되는 것이리라. 그래, 그는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이전에도 착하다 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이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난봉꾼이라는 자신의 악명을 즐겼다. 그런대로 탈없이 견딜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오명을 뒤집어쓴 적도 있었지만 그 또한 신경 쓰지 않았고, 그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그렇지만 이건...바텐더에게 신호를 보내고서야 케이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비참할 만큼 익숙했다.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퀴퀴한 맥주 냄새로 절은 선술집이었다. 벽에는 빨갛고 파란 네온 등불로 새겨진 갖가지 맥주 상표가 윙크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사용하고 남은 황금색 반짝 이 장식이 마치 바퀴 모양의 샹들리에에 애처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바퀴 사이로 정교한 거미집도 보였다. 코너에 놓인 주크 박스에서는 비틀즈가 잘못된 사랑의 노래를 흐느꼈다. 싸구려 술집이었다. 그리고 바로 케이지에게 가장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고맙네, 버트."
바텐더가 위스키 한잔을 더 따라 주자 케이지는 간결하게 말했다.
"힘든 하루였나 보죠?"
힘든 한 주였지, 케이지는 생각했다. 그는 죄책감으로 일주일을 보냈지만 에는 듯한 고통은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그의 영혼은 날카로운 독사의 이빨에 물어뜯긴 것 같았다. 영혼? 내가 영혼을 갖고는 있었던가? 버트는 테이블로 몸을 숙여서 빈 맥주병을 치웠다.
"관심 있을 만한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 뭔데?"
유리잔 표면에 금세 몇 개의 물방울이 맺혔다. 그것을 보니 제니의 눈물이 생각나서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얼른 닦아내었다.
"메사의 서쪽에 있는 땅 말이에요."
침울했던 케이지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시키는 화제였다.
"그 늙은 목사의 목장 말인가?"
"네, 친척들이 벌써부터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가격을 제시한다는 군 요."
케이지는 치약 선전에 나올 법한 멋진 미소를 버트에게 지어 보이며 팁을 10달러를 건넸다.
"고맙네, 친구."
버트도 미소로 답하고 느릿느릿 사라졌다. 케이지는 버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에게 좋은 소식을 줄 수 있어서 기뻤다. 케이지 헨드렌은 분명 가장 훌륭한 투기 사중 한명이었다. 그는 원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본능적으로 석유가 있는 곳을 아는 것 같았다. 아마도 공과 대학에 가서 지질학 학위를 딴 후 그 본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자신감을 더 얻은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석유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요령, 책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터였다. 물론 그도 몇 번의 실패를 맛보았지만 겨우 손에 꼽을 만했다. 케이지만한 나이에 그 업계에서 그만큼 명성을 얻은 사람도 드물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목사의 땅에서 채굴권을 따내려고 노력했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는 몇 달 전에 운명했고, 그 자식들은 가족들의 땅이 채굴 도구로 파헤쳐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케이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가격이 오를 때까지 흥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일 전화를 할 작정이었다.
"잘 지냈어요, 케이지?"
그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여자가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겨우 어깨를 살짝 비켜서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흥미 없는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잘 지냈나, 디디?"
말도 없이 그녀는 잘 닦여진 둥근 탁자 위에 열쇠를 꺼내서 검지손가락에 걸어 케이지에게 건넸다.
"소니랑 나, 결국 이혼하기로 했어요."
"그래?"
디디와 소니와의 결혼 생활은 지난 몇 달간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도 케이지에게 접근했지만 그가 일부러 피했었다. 그렇게 양심적인 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한 가지에는 충실했다. 결코 유부녀와는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 그는 결혼의 성스러움을 믿고 있었으므로 절대 자신이 이혼의 원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음, 그렇다니까요. 난 이제 싱글 이에요, 케이지."
디디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혹적으로 입술을 핥고 있는 그녀는 방금 크림을 삼키고 만족해 하는 암고양이를 완벽하게 닮았다. 풍만한 몸매는 유명 상표 청바지와 깊게 패인 스웨터로 잘 드러났다. 그녀는 비스듬히 기대앉아 깊은 가슴의 계곡을 그에게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욕망이 일기는커녕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니, 제니, 제니. 청결한 그녀. 그녀의 몸은 청초한 여성의 분위기를 풍겼다. 너무 풍만하지도 않고, 관능적이지도 않은 단지 여성적인 몸매. 제길! 그저 의자에 걸터앉아서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을 돌리고 있을 뿐인데도 그는 정신적으로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디디는 긴 손톱으로 그의 팔을 훑어 내렸다.
"또 봐요, 케이지."
그녀는 유혹적인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는 엉덩이를 흔들며 사라졌다. 그의 입가가 조소로 일그러졌다. 저런 대담한 초대가 매혹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디디의 대담성은 웃음이 날 정도이다. 제니는 자신이 섹시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희미하게 풍긴다. 그에 비하면 디디의 진한 향수는 그녀가 멀리 사라진 다음에도 여전히 고여 있을 정도이다. 제니의 목소리는 초조할 정도로 숨이 막히는데, 억지로 꾸며낸 디디의 목소리보다 훨씬 섹시하다. 그리고 제니의 능숙치 못한 애무는 그가 여태까지 상대한 연인의 능란한 전희 보다 훨씬 그를 흥분 시켰다. 그는 실크 나이트가운을 입은 여인이 아닌 어린아이의 방 같은 순결한 여인의 침실로 마음을 돌렸다. 그의 손길은 여성의 몸에 걸친 실크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섬세했다. 하지만 제니의 피부는 실크만큼 부드러웠다. 그리고 머리 결, 또...그녀가 처녀였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분명, 분명히 동생은 그런 성인 군자는 아닐 텐데. 어떻게 할이, 남자라면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을 제니와 같은 집에 살면서 그녀를 내버려둘 수 있었단 말인가? 나와 동생이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몸의 구조라도 다른 걸까? 분명 그들은 같았다. 신체적으로 할에게 이상은 없었으니까. 자신에게 그렇게 엄격한 규범을 적용시키는 사람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케이지는 할의 무한한 도덕심에 존경을 표해야 했다. 제니는 그렇게 고지식하지 않을 것이다. 할이 떠나던 밤에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주려 했었다. 그런 고귀한 선물을 뿌리치다니 할은 대단한 바보임에 틀림없다. 그런 식으로 동생을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어 쨌거나 케이지의 생각은 분명했다. 제니가 그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할은 깨닫고 나 있는 것일까? 그녀의 연약한 처녀막을 느끼는 순간, 케이지는 알아차렸다.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러한 황홀함을 여태껏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정열이 그녀를 지배했을 때 그녀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던 작은 신음보다 더 달콤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보다 좋은 것은 일찍이 없었다. 다른 누구도 제니가 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가질 수 없는 존재였다. 금지된 사람. 그의 손길에는 미치지 않는 사람. 그는 지난 수년 동안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할의 소유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한 이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 케이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라면 누구든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한명의 여자. 제니 만 제외하면. 그는 심장까지 썩어 들어가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또 무엇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대부분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니와 할을 너무도 사랑했으므로 그들의 삶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잘 지켰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의심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어쨌든 그의 대한 그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 곁에 있을 때마다 얼마나 만지고 싶어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저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순수하게 오빠에게 느끼는 애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항상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곤 했는데, 그 사실이 그에겐 고통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를 두려워하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성적인 매력이 나병처럼 감염되는 끔찍한 것인 것처럼 고상한 여성들은 누구나 바람둥이로 악명이 높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했다. 그는 종종 제니가 좀 더 일찍 그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가 대학 때문에 집을 떠나 있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들이 관계를 발전시킬 시간이 있었다면 제니는 할 대신 그에게 마음을 열었을까? 그런 생각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공상이었다. 그는 이미 제니의 온순함 뒤에는 자유에의 열망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녀가 자유롭게 성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구출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유롭고 싶다는 무언의 호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꿈 깨.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너 때문에 자기 인생을 위태롭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의자를 난폭하게 밀치고 일어서서는 거칠게 테이블에 계산서를 던졌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손을 멈칫했다. 네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실 그는 그런 의도로 그날 밤 그녀의 침실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지나다가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할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상심하고 있을 그녀를 위로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할로 착각했고, 해안으로 밀려드는 밀물처럼 그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방을 가로질러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고, 곧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만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깃들인 절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갈망하는 사랑과 보답 받지 못하는 절망을 이해했다. 그는 그녀의 간청에 응답하며 그녀를 붙잡았다. 일단 그녀에게 키스하고 나자, 그의 손아래에서 그녀의 육체가 뜨겁게 반응하는 것을 감지하고는 결코 멈출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용서 받지 못할 행위를 저질렀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하려는 일은 그보다 더 나쁜 짓이었다. 그는 동생에게서 제니를 빼앗을 것이다. 이제 그녀를 소유했으므로 다시 놓칠 수 없었다. 지옥 문이 열려서 그를 삼켜 버린다고 해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제니의 숨통을 죄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할은 그녀의 사랑을 얻을 황금 같은 기회를 잡았지만 스스로 거부했다. 케이지는 옆으로 물러서서 도덕의 잣대에 가려져 그녀의 얼굴이 결국 핏기를 잃고, 활력과 생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알을 것이다. 그는 할이 떠나 있는 몇 개월 동안 제니를 얻을 것이고, 오직 신만이 그가 하려는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디디."
그 여자는 어두운 구석에서 그녀의 스웨터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있는 한 망나니와 포옹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입술은 디디의 귓불에 머물러 있었다. 방해를 짜증스러워 하며 디디는 남자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잊은 게 있어."
케이지가 열쇠를 던지며 말했다. 열쇠는 테이블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디디는 열쇠를 집어 들고는 케이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필요 없을 거니까."
"나쁜 자식."
그녀는 악의에 찬 목소리로 씩씩댔다.
"한번만 참지."
케이지는 선술집을 나서며 쾌활하게 말했다.
"이것 봐!"
남자가 그를 불렀다.
"숙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쓰나?"
"내버려둬요, 자기."
디디가 그의 셔츠로 손을 집어넣으며 속삭였다. 그들은 케이지가 방해하기 전까지 하던 일에 다시 몰입하기 시작했다. 술집 문을 나선 케이지는 서늘한 저녁 공기를 머금으며 선술집의 알코올 냄새로 찌든 머리를 막게 씻어 냈다. 63년 산 코르벳 스팅레이에 미끄러지듯이 올라탄 그는 시동을 켜고 속도를 내서 밤의 정적을 갈랐다. 재정비해서 복원한 클래식 차는 라 보타 사람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이제 모두들 그 차를 케이지와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악마처럼 검은 가죽 인테리어가 차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매끄럽게 황야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는 마을 도로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속도를 낮추었다. 목사관에 도착하기 반 블록 전에 케이지는 커브를 돌고 시동을 껐다. 제니 방의 창문은 벌써 어두웠다. 그는 꼬박 1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서 그녀의 창문을 응시했다. 지난 6일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3.
바깥에서 쏟아지는 밝은 태양을 등뒤로 어둡고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자 제니는 교회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치도 않게 케이지가 서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카펫이 깔린 교회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안녕."
"안녕하세요."
"십일조를 더 내야 겠네. 교회에서 관리인을 쓸 형편이 안 되나?"
그는 제니의 발치에 놓인 청소 도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의식적으로 그녀가 오렌지색 깃털이 다린 먼지떨이 손잡이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밀어 넣자 꼬리 깃처럼 깃털이 삐죽이 튀어나왔다.
"좋아서 하는 거예요."
그가 씩 웃었다.
"내가 나타나서 놀란 모양이군."
"맞아요."
그녀는 정직하게 인정했다.
"대체 얼마 만에 교회에 온 거예요?"
그녀는 꽃 배달원이 배달한 꽃바구니를 매만지며 성단의 먼지를 털었다. 높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공중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태양 광선이 쏟아져 제니의 피부와 머리카락 이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청바지는 그녀에게 꼭 들어맞았고, 신고 있는 테니스 신발은 보기 좋게 닳아 있었다. 케이지는 그런 그녀가 너무도 귀엽고도 섹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작년 부활절이 마지막이었나?"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양팔을 등받이에 척하니 걸쳐놓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는 교회 안을 면밀히 살펴보며 생각했다.
"아, 그래요."
제니가 대답했다.
"그날 오후에 공원으로 피크닉을 갔었지 않아요."
"내가 그네를 밀어 줬지."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높이 밀지 말라고 소리소리 질렀는데 계속 세게 밀었잖아요."
"당신도 좋아 했잖아."
그를 바라보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웃는 그녀의 입가가 사랑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어떻게 알아요?"
"본능이지."
그가 그녀를 향해 나른한 미소를 보내자 제니는 케이지가 여자에 관한 한 본능이 뛰어남을 직감했다. 물론 그 본능이 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케이지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지난봄의 어느 일요일을 회상했다. 그날은 부활절이었고 하늘은 투명한 파란색이었으며 공기는 따스했다. 제니는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남풍이 흩날릴 때마다 그 드레스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휘감겨서 소용돌이 쳤다. 그는 커다란 나무에 그의 손목 두께 만한 밧줄 그네에 앉아 있는 그녀를 자신의 가슴께로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그녀를 필요 이상으로 긴 시간 동안 끌어안았다가 놀리면서 힘껏 밀곤 했다. 그네를 밀어 주면서 그는 그녀의 머리에 배인 여름 향내를 들이마셨다. 또한 그녀의 날씬한 등이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을 즐겼다. 그네에서 손을 떼면 그녀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네가 그녀를 다시 그에게 돌려보낼 때마다 그녀의 엉덩이에 손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하며 그네를 힘껏 밀었다. 거의 닿을 뻔했다. 낭만적인 시인들이 봄날 젊은 남자들의 공상에 대해 쓴 시들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날 그는 청년의 혈기 왕성함을 새삼 깨닫고 결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었다. 그는 잔디밭에 제니와 함께 누워서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등지고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싶었다. 서두르지 않고 부드러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그녀는 할의 여자 친구였다.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는 것조차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그는 차로 가서 트렁크에 넣어 둔 아이스박스 안의 차가운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의 부모님들은 그런 그에 대한 불만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케이지는 가족간의 불화가 제니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모두의, 특히 제니의 행복한 시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검은 코르벳을 타고 공원을 빠져 나왔다. 그는 지금 그때와 똑같이 그녀를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무렇게나 옷을 걸쳐 입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는 교회 벽이 무너져 둘만이 갇혀 버려서 그녀를 품에 안고 그토록 바라던 키스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 주에는 누가 꽃을 기증했나?"
그의 몸이 자신의 욕망에 찬 생각을 따르기 전에 물었다. 매년 교회의 회원들끼리 돌아가며 꽃을 기증하곤 했다. 보통 특별한 날에 성단에 꽃을 기증하게 되는데 그런 날엔 가족들이 교회를 메웠다. 제니는 불타는 듯이 빨간 글라디올러스 꽃다발에 매달린 카드를 읽었다.
"랜달 씨 부부예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들, 조 윌리를 기억하며라고 적혀 있네요."
그녀가 소리 내어 읽었다.
"조 윌리 랜달."
케이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그를 기억하나?"
"물론이죠. 몇 학년 위였지만 가끔 함께 어울리곤 했는걸요."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몇 줄 뒤에 있는 의자를 돌아다보았다.
"저 네 번째 열 보여? 조 윌리와 난 일요일 아침에 저기 앉아 있었지. 헌금 바구니를 건네 받은 조 윌리가 씹고 있던 껌을 바구니 바닥에 붙이는 거야. 정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지. 조 윌리도 그러게 생각했나 봐. 우리는 헌금 바구니가 돌아가는 걸 가만 지켜보고 있었지. 누군가의 손에 껌이 달라붙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상상하면서 말야."
제니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곁에 앉았다.
"어떻게 됐는데요?"
"엉덩이를 얻어맞았지. 그 애도 맞았겠지."
"아뇨, 내 말은, 카드에는 조 윌리를 기억하며라고 적혀 있잖아요."
"아, 그 애는 남미로 떠났어."
그는 오랫동안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본 기억이 없어."
제니는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앉아서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그 자식은 정말 끝내 주는 농구 선수였어."
케이지가 회상에 잠겨 말했다. 그러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분노한 신에게서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고개를 쑥 집어넣었다.
"아, 이런 말은 교회에서 하는 게 아니지?"
제니가 웃었다.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슨 말을 하든 항상 듣고 계신걸요."
갑자기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그를 탐색이라도 하는 듯했다.
"당신도 신의 존재를 믿고는 있네요, 그렇죠, 케이지?"
"그럼."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예의 우울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우리 부모님조차 나를 이교도라고 생각하시니까."
"말도 안돼요."
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음, 당신은 전형적인 목사님의 아들이에요."
그는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지나친 일반화 아닌가?"
"아뇨. 당신은 커가면서 그런 순둥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고약한 척한 거예요."
"난 이미 다 컸지만 아직도 그런 순둥이가 되긴 싫어."
"아무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걸요."
제니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허벅지를 찌르며 놀려댔다. 하지만 곧 손을 뗐다. 그의 허벅지는 할만큼이나 단단했고, 그로 인해 그날밤 그녀의 벗은 다리를 문지르던 청바지 안의 근육이 떠올랐다.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가 물었다.
"내가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있을 때 날 웃기려고 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그가 화난 척하며 물었다.
"난 그런 짓 한적 없어."
"아, 했어요. 얼굴을 실룩거리며 두 눈을 모았잖아요. 여자 친구 중 한명이랑 저 뒤쪽에 앉아서..."
"내 여자 친구 중 한명? 꼭 내가 하렘이라도 거느린 것처럼 말하는군."
"그랬잖아요. 그리고 지금도. 아니에요?"
그가 시선을 낮춰서 그녀의 몸을 느릿느릿 훑어보았다.
"항상 한명쯤 더 들어올 방이 대기 되어 있지. 신청서 쓰고 싶은 마음 없나?"
"세상에!"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화난 척 그를 노려보았다.
"나가 줘요. 일해야 하거든요."
"음, 그러지."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금방 메사 근처의 12만 평 땅을 대여하기로 계약서에 사인했어."
"그 땅이 좋은 거예요?"
제니는 케이지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원유를 채굴한다는 것과 그 방면에서 성공했다는 것밖에.
"아주 좋아. 곧 채굴 작업에 착수할 거야."
"축하해요."
"석유를 발견할 때까진 그 말 하긴 이르지."
장난스럽게 그는 머리를 휙 젖혔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교회 복도를 거닐어 문으로 향했다.
"케이지?"
제니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응?"
강건하고 잘생겼으며 바람과 태양에 얼굴을 그을린, 좋지 않은 평판에 위험해 보이는 그가 돌아보았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벨트 고리에 끼웠다. 데님 조끼의 칼라가 턱 쪽으로 가볍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왜 왔는지 안 물어 봤네요."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별 이유는 없어. 안녕, 제니."
"잘 가요."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문을 나서기 전에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세찬 바람이 부는 와중에 제니는 축축한 침대 시트를 빨랫줄에 걸려고 애를 썼다. 빨래가 널린 빨랫줄은 돛처럼 솟아올라서 거대한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빨래 끝에 겨우 집게를 꽂고 아픈 팔을 떨어뜨리자 괴물의 울부짖음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시트 뒤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한 위협이 점점 다가오더니 그녀를 붙잡았다. 무엇인가 으르렁거리는 소음을 내며 거대한 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낮게 소리를 질렀지만 공포에 찬 외침은 부드러운 포옹에 묻혔다.
"놀랐지?"
그녀를 끌어당기며 아직 보이지 않는 공격자가 귓가에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놔줘요."
"부탁해요 라고 해야지."
"부탁해요!"
케이지는 그녀를 놓아주고 시트 주변을 맴돌며 그녀에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난리를 쳤는데도 놀랍게도 시트는 그대로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케이지 헨드렌. 이제는 대낮에도 날 놀래는군요!"
"아, 왜 그래. 난 줄 알았잖아?"
"전에도 그런 적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눈가에서 떼어내며 화가 잔뜩 난 척했다. 그렇지만 미소 짓지 않으려는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젠가..."
그녀가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입을 열자 그가 그녀의 손가락을 주먹으로 감싸 쥐었다.
"뭐라고? 언젠가 어 쨌다고, 제니 플렛처?"
"언젠가 복수해 줄 거라고요."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끌고 가서 장난스레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그렇게는 안 될걸?"
그의 강하고 하얀 이 사이에 끼어 있는 손가락을 보고 그녀는 어색하지 않게 그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낼 수 있기를 바랐다. 마침내 그가 손을 놓아주자 그녀는 뜨거운 불길에 데고 나서야 불에 너무 가까이 다가섰음을 깨달은 사람처럼 움찔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할이 떠나기 전에는 거의 발길을 끊었던 그가 왜 자꾸 목사관에 나타나는지 그녀는 궁금했다. 그 이후에 케이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곧잘 들르곤 했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할에게서 소식이 있었는지 물으러 온 것이겠지만 그의 변명은 너무 빤해서 제니는 그가 부모님의 관심을 끌려고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무척 자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는 전에 쓰던 침실에서 사라가 치우라고 했던 폐물들을 가져가기 위해 몇 번 목사관을 방문했었다. 모두 한꺼번에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한 번은 FHA 기금 마련 바자회에서 구운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 그도 그 케이크를 모두 먹어 치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어느 저녁에는 차의 버퍼를 광내기 위해 밥에게 전기 사포를 빌리려고 들렀다. 모두 그럴듯하긴 했지만 제니는 여전히 그 뒤에 분명 숨은 동기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목사관 일에 계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케이지 답지 않았다. 보통 그는 인부들이나 카우보이들과 바에서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저녁을 보내곤 했다. 물론 그가 여자랑 함께 있지 않은 날에 한해서 말이다. 그와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록 제니는 케이지와 그의 여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더 싫어졌다. 웬 지 모르지만 질투의 날카로운 독침이 느껴졌다.
"건조기가 고장 났나?"
케이지가 빈 빨래 통을 어깨에 걸쳐 메고 그녀의 뒤를 따라 뒷문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아뇨, 햇볕에 말렸을 때 나는 시트랑 베개 냄새가 좋아서요."
그는 문이 닫히지 않게 잡고 서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당신은 구제 불능이야. 제니."
"나도 알아요. 못 말리는 구식이죠."
"내가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는 거야."
그녀는 또다시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가까이 서있으면, 특히 이런 식으로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면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저기...콜라 마실래요?"
"그거 좋지."
그녀가 냉장고로 향하는 동안 그는 세탁실에 빨래 통을 가져 다 놓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유리잔에 얼음을 채워 넣고 찬장으로 가서 거품이 나는 콜라를 가져 와서 들이부었다.
"부모님들은 어디 가셨나?"
"병원에 그분들이 방문해 주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그곳에 가셨어요."
그제서야 오래된 집에 케이지와 단 둘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이유 없이 신경이 곤두섰다. 식탁에 마주앉은 그녀의 손이 약간 떨렸다. 그녀는 그를 만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가능하면 그런 일은 삼갔지만. 그녀는 초조하게 의자에 걸터앉아서 차가운 음료수를 한 모금 넘겼다. 그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를 직접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와 닿는 그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오늘따라 낡은 티셔츠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을까? 부끄럽게도 그녀의 그런 생각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가슴이 부드러운 천 위에서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제니?"
"네?"
그녀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아이 마냥 깜짝 놀랐다. 그녀는 할과 사랑을 나누던 바로 그 밤처럼 얼굴이 후끈후끈 거리고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할도 그날 밤 지금 케이지처럼 청바지에 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벗은 몸에 와 닿던 섬유의 감촉과 금속 벨트의 차가운 느낌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냉정을 가장하며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서 테이블 아래에서 두 무릎을 꼭 붙였다.
"할에게서는 소식이 있었나?"
그녀는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또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난달에 온 엽서가 마지막이에요.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아니."
고개를 가볍게 치켜올렸지만 케이지는 미소 짓고 있었다.
"별일 없다는 뜻이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얘기네요."
"비슷하지."
"밥과 사라는 처음엔 괜찮으시다가 요즘 들어 걱정하고 있어요. 할이 국경에만 가는 줄 알았거든요. 나라 안까지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지금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소식을 보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몰라."
"어쩌면요."
몇 번 소식을 전할 때마다 할은 가족 모두 앞으로 편지를 썼으므로 이기적인 줄 알지만 그녀는 마음이 상했다. 편지에서는 몬테리코의 상황은 좋지 않지만 그는 잘 있고 무사하다고 만 했다. 그녀를 위한 사적인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자신의 약혼녀에게 말이다. 과연 사랑에 빠진 남자, 특히 떠나기 전에 첫날밤을 치른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그가 보고 싶나?"
케이지가 그녀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이요."
그녀는 그에게 눈길을 돌렸지만 항상 그랬듯이 곧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갈색 눈을 바라보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물론 그녀는 할이 보고 싶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는 그가 계속 방해가 되지 않아서 안도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 이제 그와 함께 잤으니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일까? 대체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육체적인 환희를 모두 다시 느끼고 싶었지만 딱히 할이 보고픈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작별 인사도 없이 그녀를 떠나간 할에게 아직도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썩 만족스러운 해석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그녀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무사할 거야. 그 애는 항상 영웅처럼 나타나곤 하니까."
케이지는 의자를 비스듬하게 젖혀서 뒷다리 두 개로만 균형을 잡았다.
"당신이 우리랑 살기 훨씬 전에 저 아래쪽에 살던 가족이 있었지. 내가 열두 살 때였어. 할은 아홉 살이나 여덟 살쯤 됐겠지. 그 집 딸은 무척 뚱뚱했어. 비만이었지. 학교에선 아이들이 모두들 그 여자 애를 탱크, 돼지, 뚱보라고 부르곤 했어. 방과후에는 길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늘 그 애를 놀리고 비웃고 야유했지."
제니는 그의 목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는 서부 텍사스의 모래가 할퀴고 간 듯이 깊고도 거칠었다. 그는 말을 이으며 이슬이 맺힌 유리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난 털은 구릿빛 손가락과 비교되어 그 색깔이 옅어 보였다. 우스웠다. 이전에는 결코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었다. 유리잔을 쓰다듬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자니 그녀는...
"어느 날 할이 그 애랑 집에 가고 있는데 또 아이들이 그 애를 못살게 굴었어. 그 애를 보호하려다 할은 눈에 멍이 들고 입이 찢어지고 코피가 났지. 그날 밤 부모님은 그 애를 영웅으로 치켜세우셨어. 어머니는 할에게 디저트를 두 배로 덜어 주셨고 아버지는 할의 선행을 골리앗에 맞선 어린 다윗으로 묘사하셨지. 나도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난 싸우는 법을 알았거든. 할보다 훨씬 잘 알았지. 그래서 그 다음날 차고 뒤에서 그 아이들을 기다렸지. 그 애들을 기다린 이유는 두 가지였어. 한가지는 내 동생을 때린 죄였고 또 한가지는 불쌍한 여자 애를 괴롭힌 죄였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그 애들이 깔깔 웃으면서 걸어오더군. 난 차고 뒤에서 나와서 쓰레기통 뚜껑으로 한 녀석의 얼굴을 내리쳤어. 코가 깨졌지. 또 다른 녀석의 배 쪽으로 주먹을 날렸지. 또 다른 녀석은 발로 걷어찼는데, 어린 녀석들이라 다쳤어."
제니는 미소를 지으며 묻다가 얼른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어떻게 됐죠?"
"나도 할처럼 칭찬을 받을 줄 알았지."
쓴웃음을 짓는 그의 육감적인 입매가 비틀어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저녁도 굶은 채 내 방으로 쫓겨났어. 엄청난 훈계를 받고,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고, 또 2주 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 말이야."
마침내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의자의 앞다리 두 개가 바닥에 부딪혔다.
"이젠 알겠지. 제니. 만일 내가 중미 임무를 맡겠다고 했으면 또 난 말썽꾼에다가 싸우고 싶어 안달 난 선동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거야. 그렇지만 부모님은 할이니까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시지."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이 테이블을 가로질러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당신 마음이 어땠는지 알 것 같아요, 케이지."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덮었고 눈길은 그녀를 향했다. 에메랄드 빛 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제니? 우리 왔다. 어디 있니?"
헨드렌 씨 부부가 현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던 케이지와 제니는 부모님이 부엌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손을 놓았다.
"아, 너도 있었구나. 케이지."
제니는 늙은 부부에게 차가운 음료수나 커피를 가져 다 주려고 벌떡 일어섰다. 케이지도 따라 일어섰다.
"전 가야 할 것 같네요. 할에게 소식이 없는지 궁금해서 들렀습니다. 다음에 또 오죠. 안녕히 계세요."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할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가 목사관을 찾은 주요 원인은 제니를 보기 위해서 였다. 그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그를 만졌다. 정말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졌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제니는 차 뒷좌석에 식료품 봉지를 넣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헨드렌 씨 부부는 그녀가 TCU를 졸업하자 그녀에게 소형차를 선물했다. 늑대 울음 같은 긴 휘파람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돌리다가 머리를 찧고 말았다. 케이지가 그의 휘파람에 딱 어울리는 표정으로 오토바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손에는 반짝이는 검은 헬멧이 들려 있었다. 그는 소매 부분이 나풀거리는 푸른색 샴브레이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가 벌어져 가슴이 훤히 보였다. 단추가 구멍에서 빠져 나왔거나 깜박 잊고 채우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 쨌거나 셔츠는 청바지 허리띠 속으로 쑤셔져 들어가 있었다. 그에게서 단정해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찾기 힘들었다. 빛 바랜 빨간 손수건이 목 둘레에 묶여 있었다. 그는 마치 산적처럼 보였다. 아마도 저승사자 들이라면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대장으로 내세웠을지도 모르겠다. 제니는 그의 가슴에 덮인 밝은 갈색 털을 보고 호기심이 솟았다. 그 털은 가슴 게를 덮고 배까지 자라 있으리라. 그녀는 잘 그을린 피부와 남성스러운 체모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좋은 복장이 아니네요."
제니가 꾸짖듯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도 그다지 좋은 복장은 아니군."
케이지가 받아 쳤다.
"내가 뭘요?"
"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딱 들러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잖아."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그녀가 반박했다.
"일부 남자들이겠죠. 마음이 시꺼먼 사람들."
"흠, 날 두고 하는 말 같네."
"찔리나 보죠? 오늘 내게 휘파람을 부는 남자는 없었어요."
"당신이 몸을 굽히고 있는 모습을 못 본 모양이군."
"성차별주의."
그녀는 그를 신랄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걸 자랑스러워하는군요."
그녀는 엉덩이에 손을 가져 다 대고는 물었다.
"내가 당신 뒤에서 그렇게 휘파람을 불어 댄다면 좋겠어요?"
"그럼 당신을 숲속으로 끌고 가지."
"구제불능이로군요."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군."
그가 미소를 짓자 치아가 태양빛에 반짝 빛났다. 두 손으로 오토바이의 핸들에 가져 다 대고 그가 앞으로 살짝 몸을 기댔다. 그의 팔뚝이 불거져 나오자 제니는 단단한 피부 아래에 강한 혈관이 숨어 있음을 감지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그녀는 차의 뒷문을 꼭 닫고 운전 석 문을 열었다.
"태워 줄까?"
"같이 타자고요? 미쳤어요."
그녀는 오토바이를 흘겨보았다.
"아니. 구제불능 일 뿐이지."
그녀가 바라보자 그는 더욱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자, 타, 제니. 멋질 거야."
"말도 안돼요. 그럴 수 없어요."
"왜?"
"당신 운전 솜씨를 못 믿어요."
그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안 취했다고."
"기억해요?"
이번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제니가 말했다.
"이전에 당신 차를 한번 탄적이 있었죠? 정말 목숨이 위태로웠다고요. 당신이 지나가니까 뇌물을 받았는지 고속도로 순찰차도 당신에게 인사를 했죠. 아마 당신을 못 잡을 줄 알았나 봐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온갖 인상을 썼다.
"빨리 달리는 걸 좋아해서 그렇지, 안전하긴 하잖아?"
"난 더 안전해요. 사양하겠어요."
그녀는 정중하게 말하고 차에 올라타서 운전대를 잡았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어요."
그녀는 창문을 통해 말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는 집까지 계속 그녀의 차를 따라왔다. 그 바람에 그녀는 중간중간 그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여러 번 차를 세워야 했다. 그는 넉살 좋게 헬멧 아래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목사관에 도착할 무렵 결국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봤지?"
그는 그녀의 차 옆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정말 이상 없지? 한번 같이 타자니까."
햇빛이 그의 머리카락에 쏟아져 내려 머리색이 잘 익은 밀 빛으로 바뀌었고 진한 눈썹 아래에서 그의 눈이 호소하고 있었다. 제니가 망설이는 동안 팔에 들린 식료품 봉지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당신 스스로 뭔가 결정해 본 것이 언제였지?"
그가 그녀를 부축이며 물었다. 할을 유혹하던 그날 밤이요. 그렇지만 그녀는 할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 그가 떠난 지 10주째였다. 케이지는 목사관을 자주 방문했다. 오늘 식료품 가게 주차장에서와 같이 그는 항상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녀를 미행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날 정도였다.
"안돼요, 정말."
그녀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돼.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넣도록 도와주지."
그와의 다툼은 승산이 없었다. 식료품들을 재빨리 창고와 냉장고에 쌓아야 했는데 밥과 사라가 집에 없었으므로 제니는 속수무책이었다. 케이지는 약해진 사냥 감을 어떻게 가로채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제발."
그는 무릎을 굽혀서 그녀와 눈 높이를 맞추며 애원했다. 보조개 때문에 그의 입가에 팬 주름이 깊어졌다.
"좋아요."
제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항복했다. 사실 그녀의 가슴은 기대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식료품을 다 들여놓은 후 그는 제니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그녀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당신을 위해서 헬멧까지 준비했지."
케이지는 그녀의 머리에 헬멧을 씌우고는 턱 아래에서 끈을 묶었다. 잠시 동안, 아주 잠시 동안 그들의 눈빛이 얽혔다. 그가 그녀의 볼을 만졌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 순간은 끝났고 그는 어느새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제니가 시트에 올라앉자 그는 다리를 위로 흔들며 말했다.
"이제 나를 꼭 붙들어."
그녀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녀의 손이 벌어진 배 부분에 가 닿자 아무렇게나 자란 털이 손목을 간질였다. 그녀는 얼른 손을 뗐다.
"미안해요."
그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부딪힌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심장이 고통스러울 만큼 세차게 뛰고 있었다.
"괜찮아."
케이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자신의 허리 위쪽으로 둘러서 두 손을 꼭 눌렀다.
"잘 잡아야 해."
제니의 머리가 윙윙거렸다. 목구멍도 바싹 말라왔다. 어지러워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오토바이가 출발하여 거리를 누비는 동안에도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난 털을 손가락으로 쓸어도 보고 가슴의 근육을 어루만지고 싶은 미친 충동을 억누르느라 두 손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분이 어때?"
그가 뒤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소리쳐 물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녀도 정직하게 대답했다.
"너무 좋아요!"
도시 경계를 벗어나서 오토바이를 전속력으로 달리자 뜨거운 바람이 사정없이 와 닿았다. 그들은 고속도로를 나는 듯이 달렸다. 바퀴가 두 개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뭔가 야생적인 설렘이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와 가슴에 모토의 진동이 전해졌고 그 규칙적인 진동에서조차 스릴이 느껴졌다. 그는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검은색으로 덮인 좁은 도로로 들어섰고 마침내 대문을 통과해 계속 오토바이를 몰았다. 경사진 황무지 위에 우뚝 솟은 그 집은 전통적인 빅토리아풍이었다. 울타리 대신에 관목들이 심어져 있었고 그 나무들은 갖가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발코니가 있는 2층집 현관에 햇빛이 비추고 있었고, 양파 모양의 둥근 지붕이 한쪽 코너를 덮고 있었다.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이 건물은 모래빛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가장자리는 녹이 슨 듯한 슬레이트로 강조되어 있었다. 한쪽으로는 차고가 보였다. 여러 대의 차 옆에 주차 되어 있는 코르켓이 유독 눈에 띄었다. 차고 옆에는 마구간이 있었고 그 뒤쪽의 목초지에서 몇 마리의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내 집이야."
케이지가 간단히 말했다. 그는 움푹 패인 곳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그리고는 제니가 오토바이에서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헬멧을 들어올리며 집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살아요?"
"그래, 2년 됐지."
"난 여태 당신 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한번도 초대한 적이 없잖아요."
그녀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왜죠, 케이지?"
"거절 당하기 싫어서. 우리 부모님은 이곳을 무슨 사악한 소굴쯤으로 생각하시지. 여기엔 발도 들이려 하지 않아. 할도 여기 오지 않으려 했을걸? 부모님이 싫어하실 걸 뻔히 알고 있을 테니까. 모두를 위해서 아예 초대하지 않는 게 나았지."
"나는요?"
"초대했다면 왔겠나?"
"그랬을 걸요."
하지만 둘 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당신은 여기에 왔어. 들어가 보겠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상시 남자답던 모습에 비해서 그는 지금 무척이나 여려 보였다. 이번에는 제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녀도 그의 집을 무척 보고 싶으니까.
"물론이죠. 보여 주세요."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현관 계단으로 안내했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집이래. 주인도 몇 명이나 바뀌었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낡아진 거지. 내가 이 집을 샀을 때는 거의 폐가 수준이었어. 처음에는 땅을 보고 샀기 때문에 집을 허물고 뭔가 현대적인 건물을 새로 지으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이 집이 차츰 마음에 들기 시작하더군. 여기에 딱 어울리는 건물이거든. 그래서 수리만 좀 했지."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너무 멋져요."
제니는 천장이 높아서 상쾌한 기분이 드는 집안을 걸어 다니며 대답했다. 케이지는 벽이며 셔터, 거실과 부엌 사이의 커튼을 모두 회색 빛이 도는 흰색으로 꾸며서 단순한 이미지를 살렸다. 통나무 바닥은 부드러운 녹청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안락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구는 오래된 것과 새 가구가 보기 좋게 조화를 이루었다. 부엌은 최신식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모든 신식 장비들은 한 세기 동안 지속된 매력적인 고풍 속에 교묘히 감추어져 있었다. 2층엔 세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만이 완전히 복원되어 있었다. 복도에서부터 제니는 케이지가 침실로 사용하는 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래와 시에나의 사막 색으로 장식된 방은 그의 진한 금발과 잘 어울렸다. 커다란 침대에는 감치지 않은 스웨이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버터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연결되는 문을 통해 제니는 전망 창 아래에 커다란 욕조가 자리한 화려한 욕실을 힐끔 쳐다보았다. 케이지도 그녀의 눈길을 알아챘다.
"바깥을 내다보며 욕조에 누워 있으면 기분이 그만이지. 석양이 질 무렵은 정말 장관이야."
그는 따뜻한 입김이 그녀의 머리를 휘저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귓가에 속삭였다.
"환한 달빛에 별이 반짝이는 밤 풍경도 숨이 막히지."
제니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그에게 빨려 드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정말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집이네요, 케이지.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조화가 되네요."
그는 그녀의 말에 흡족한 듯했다.
"풀장을 보여주지."
그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서 커튼이 드리운 베란다를 통해 석회석 테라스로 안내했다. 그곳은 아주 다채로운 색상을 띠고 있었다. 테라코타 화분에 빨간 제라늄 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한쪽에는 샛노란 색과 분홍빛의 선인장 꽃이 만발해 있었다. 또 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린 은빛 세이지가 울타리를 따라 가지런히 자라 있었다. 풀장은 사파이어만큼이나 깊은 파란색으로 반짝였다.
"와 우!"
그녀가 작은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영하겠나?"
"수영복이 없어요."
"하고는 싶어?"
뭔가를 의미하는 듯한 유혹적인 목소리로 그가 확고하게 물었다. 제니 안의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추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박동을 멈추자 혈액 순환도 일순 정지되었다. 폐도 활동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의 꿰뚫는 듯한 시선과 허스키한 초대의 목소리에 사로잡혀서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물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으로 몸이 더워졌다. 발가벗은 그들의 모습과 벗은 피부에 와 닿는 태양, 그리고 그들을 감싸는 건조한 바람을 상상했다. 케이지는 햇빛에 탄 피부와 옅은 갈색 빛이 도는 금빛 체모를 드러내며 벌거벗은 채였다. 그녀는 남자에게 벗은 몸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수줍어했다. 그러한 환상으로 그녀의 입안에 물기가 가득 고였다. 그를 만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매끄러운 팔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 피부 위에 도드라진 핏줄을 더듬는 그녀의 손끝과 가슴의 부드러운 털을 휘감은 그녀의 손가락이 보였다. 또 그녀를 더듬는 그와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하며 유두를 아프게 매만지고 그녀의 배를 거쳐 허벅지까지 쓰다듬는 그의 강한 손이 보였다.
"가봐야겠어요."
제니는 돌아서서 마치 악마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테라스를 향해 거의 뛰다시피 발걸음을 옮겨 집안으로 들어섰다. 케이지에게는 포크 모양의 꼬리와 뿔이 달려 있지 않았지만 그 미소만은 정확히 악마와 똑같았다. 그가 베란다까지 그녀를 뒤따라왔다. 그녀는 그가 문을 다시 잠그는 동안 곁에서 뻣뻣이 굳은 채로 기다렸다.
"뭐가 잘못된 거지, 제니?"
"아니에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초조하게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대답했다.
"이 집이 마음에 들어요."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케이지는 그녀를 다치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대학에서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같은 집에 살면서 케이지를 오랫동안 알아 왔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가 낯설어 보이는 것일까?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인데. 할에게 느끼는 식의 마음을 케이지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에게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유대감을 느낀다. 왜 일까? 그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그녀를 휘저었다. 그 느낌들은 모두 낯설고 또 모두 성적인 것들이었다. 그리고 미들 수 없을 만큼 모두 옳은 것들이기도 했다.
"좋아, 당신이 시작한 거야."
그녀가 올라타자 그는 오토바이 위로 뛰어올라서 시동을 켰다.
"잘 잡으라고, 아가씨."
"케이지!"
그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완전히 내쉰 숨이었다. 그는 풍경이 흐릿해져 보일 때까지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목숨을 구걸하듯이 그녀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배를 두 손으로 꼭 껴안는 것도, 그의 등에 자신의 몸을 꼭 밀착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는 그의 엉덩이에 꼭 붙어 있었고 턱은 그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목사관 거리에 도착해서야 그는 간신히 속도를 낮추었지만 여전히 커브를 건너뛰고 수 십년 전에 누군가 심어 둔 오디 나무 사이를 부르릉거리며 누볐다. 그나마 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제니가 항의했다.
"당신은 미쳤어요, 케이지 헨드렌!"
마침내 목사관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나서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웃기 시작했다.
"내일 또 어때?"
그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물었다. 그녀는 무릎이 거의 땅에 닿을 듯 뛰어내렸다. 순간 흥분이 밀려왔지만 그의 어깨를 꼭 잡으며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뇨, 절대 안돼요. 이걸로 충분해요."
그녀의 뺨은 장밋빛으로 붉어졌고 눈은 녹색으로 빛났다. 케이지는 이렇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정숙한 표정 뒤에 그 미소를 감추고 있었다. 제니는 용케도 자신의 본 모습을 잘 감추고 있었지만 마침내 그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머리에 쓰고 있던 헬멧을 벗었다.
"곧 다시 타게 될걸."
그는 그녀의 헬멧을 건네 받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겨 주었다.
"다음엔 한번 음속으로 달려 보자고."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여전히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그녀는 그에게 기대 허리에 팔을 감았다. 둘은 나란히 뒷문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밥이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비난 어린 표정으로 케이지와 제니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의 이해하기 힘든 표정에 둘은 굳어졌다.
"아버지?"
"밥?"
그들은 동시에 물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아들이 죽었어."
4.
"제니?"
케이지의 다급한 속삭임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제니, 울지 마. 승무원에게 뭘 좀 가져오라고 할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눈에서 축축해진 티슈를 떼어냈다.
"아뇨, 괜찮아요, 케이지. 됐어요."
그러나 그녀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할 헨드렌이 몬테리코에서 군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제 오후부터 계속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왜 같이 온다는 걸 말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케이지는 씁쓸하게 자책하는 투로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녀는 여전히 빨갛게 부어 오른 눈과 코에 손수건을 가져 다 대며 고집스레 말했다.
"괜히 당신이 더 힘들어질까 봐 걱정이 되는군."
"아뇨, 그렇다고 집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당신과 같이 오지 않았으면 미쳐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할의 시체를 확인하고 다시 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몬테리코로 날아가는 것은 끔찍한 심부름이었다. 몬테리코의 까다로운 군사 정부와의 협상은 차치하더라도 미국 주 정부에서 처리되어야 할 서류만도 산더미 같을 것이다. 그래도 집에 남아서 헨드렌 씨 부부의 비참한 슬픔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모든 일을 맡는 편이 나으리라.
"제니, 어디에 있었니?"
사라가 외쳤다. 그녀는 밥에게서 소식을 듣고 난 후에 목사관의 거실로 뛰어 들어온 제니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네 차가 여기 있어서 여기저기 찾았단다. 오, 제니!"
사라는 제니 앞에 쓰러져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케이지는 소파에 무릎을 넓게 벌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쳐다보았다. 동생을 잃은 그를 달래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집안으로 뛰어 올라오면서 케이지가 홀 바닥에 떨어뜨린 오토바이 헬멧을 힐난하듯 바라보는 밥의 눈길을 신경 썼다면 그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제니는 사라의 옅은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전...케이지 랑 오토바이를 탔어요."
"케이지 랑 말이냐?"
사라가 고개를 치켜들고는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케이지가 거기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한, 이전에 한번도 그를 본적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할 소식을 들으셨어요?"
그가 조용히 물었다. 사라는 망연자실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혼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답을 해준 사람은 밥이었다.
"30분 전에 주정부에서 전화가 왔었다."
목사는 순식간에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노인처럼 보였으며, 턱 아래에 잡히는 살집이 처음으로 쳐져 보였다. 그의 눈빛은 평상시처럼 선명하지도, 생기에 넘치지도 않았다. 설교할 때 그 인상 깊고도 자신감에 넘치던 목소리가 비참하게 흔들렸다.
"정부를 장악한 파시스트 패거리들에게는 할의 방해가 달갑지 않았겠지. 할이랑 동료들이 모두 연행되었다는 구나. 구출하려던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말이다. 모두..."
그는 사라에게 동정이 가득한 눈빛을 던지며 정부 관리가 그에게 전한 말을 끝맺었다.
"죽었단다. 우리 정부가 공식적인 항의를 준비하고 있다는 구나."
"내 아들이 죽었다고!"
사라가 흐느꼈다.
"항의한다고 나아질 게 있어? 아무도 할을 되돌려 줄 순 없다고!"
제니는 아무 말 없이 동의했다. 두 여자는 저녁 내내 서로 붙들고 흐느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 소식이 퍼져 나갔다. 신도들이 속속 도착해서 목사관의 커다란 방을 가득 채웠고 부엌도 음식으로 가득 찼다.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댔다. 제니는 고개를 들고 케이지가 전화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어느새 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온 모양이었다. 양복바지와 스포츠 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전화를 받으면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벽에 기대 선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케이지와의 광란의 질주로 흐트러진 머리를 빗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갈 시간조차 없었다.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모두들 망연한 눈빛으로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할이 그들의 인생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듯 보였다.
"기진맥진해 보이는군."
제니는 커피를 따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곁에 케이지가 서있었다.
"뭐라도 먹은 건가?"
교회의 신도들이 가져 온 음식 접시들이 식탁을 가득 메웠다. 사실 그들은 음식을 먹는 것이 죄스럽다는 생각에 제니에게는 권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요?"
"나도 배가 안 고파."
"뭔가 먹어야 한다."
밥이 부엌에 들어서며 말했다. 사라는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주 정부에서 휘더 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더군요, 아버지."
케이지가 말했다.
"내일 제가 가서 할의 시체를 찾아오겠습니다."
사라는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꼭 다문 입술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케이지는 그런 그녀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멕시코시티에서 휘더 씨를 만날 겁니다. 그분이랑 같이 가야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뭔가 알게 되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곧 전화를 드릴게요."
사라는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그 사이에 고개를 올려놓고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가겠어요, 케이지."
제니가 조용히 말했다. 헨드렌 씨 부부는 그녀의 의견에 순순히 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결심은 굳건했고 그녀와 맞서 싸우기에 그들은 너무도 지쳐 있었다. 그녀와 케이지는 그 다음날 새벽에 엘 파소 까지 차를 몰아서 멕시코 시티로 떠나는, 세 달 전에 할이 탔던 것과 같은, 비행기를 탔다. 이제 케이지는 그녀 곁에 앉아 있었다. 빈자리도 있었지만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듯이 케이지는 그녀의 옆 자리에 앉았다. 눈물에 젖은 티슈가 찢겨지자 그는 점퍼 앞섶에 달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내게 고마워 하지마, 제니. 당신이 우는걸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죄책감이 들어요."
"죄책감이라고? 왜 당신이?"
그녀는 절망감에 손을 내저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모르겠어요. 수백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할이 떠났을 때 미친 듯이 화를 내서. 내게 개인적인 엽서를 보내지 않았다고 마음 상해하고 토라져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다니."
"누군가 죽으면 모두들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자연스러운 거야."
"네, 그렇지만 난, 살아 있는 게 죄스러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할은 벌써 죽었을 텐데 어제 당신과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잖아요."
"제니."
무엇인가 고통스럽게 케이지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도 똑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 팔로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팔로 자신의 어깨에 놓여 있는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면 안돼. 할도 원하지 않을 거야. 할이 원해서 한일이야. 위험하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잖아."
케이지는 그녀를 안고 있는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를 의식적으로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수백 번도 넘게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지금 그녀를 안고 있는 이유가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었다. 그녀의 아담하고 섬세한 몸이 그에게 와 닿는 짜릿한 쾌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왜 할이 죽었을까? 제길, 왜? 케이지는 그와 정당하게 싸워서 제니를 얻고 싶었다. 갑자기 할이 죽어 버렸으니 이제 승리란 있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제니의 죄책감일까?
"왜 할이 떠났을 때 화를 냈지?"
나중에 마음이 변해서 그날 밤 그녀의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후회하게 된 것일까? 제발 그렇지 않기를.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답을 들을 수도 있지만 물어야 했다. 제니는 오랫동안 망설였고 케이지는 그녀가 대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마침내 제니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가 떠나기 전날 밤. 우리가 매우 가까워질 만한 일이 있었어요. 그가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사도 없이 떠났더라고 요."
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지.
"난 절반쯤은 그가 여행을 취소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케이지는 깊은 호흡 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꼈다.
"꼭 버림받은 느낌이었어요. 물론 내 감정이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 해도..."
케이지는 그날 아침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정말 알고 싶었다. 아침 식탁에 마주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수천 가지의 질문이 마음속에 떠다녔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침묵해야 했다. 그는 묻고 싶었다. 괜찮아? 내가 아프게 했나? 제니, 그렇게 아름다울 줄 내가 상상이나 했겠어? 정말 있었던 일이야, 아니면 내가 환상적인 꿈을 꾼 건가? 라고. 그는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쨌든 간에 대답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할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떠나 버린 할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그날 밤이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떠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할에게는 그녀의 분노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 또한 이해가 갔다. 그 원인은 오직 하나였다. 늘 그렇듯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가 사랑을 나눈 상대는 할이 아니었으므로 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설명해야 할까? 그렇게 하면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사그라질까? 정말 그녀에게 고백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할의 죽음만으로도 지금 그녀로서는 벅찰 것이다. 사랑을 나눈 사람이 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떤 여자라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속인 남자 또한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제니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에게서 떨어져 앉는 것을 보니 분명 그의 팔에서 긴장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런 문제로 당신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 사생활에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물론, 관심이 있지. 그들은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적이 있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 그녀는 그가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그녀의 살결에 자국이 남을 때까지 애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가슴 모양과 입술과 혀끝에 닿는 느낌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환희에 사로잡혀 내뱉던 신음 소리는 이젠 마치 자신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매일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그녀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테이프를 돌리듯 수없이 되새긴 그 소리. 그리고 그는 동생조차 하지 않았던 더없이 진한 키스를 그녀에게 쏟아 부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그만큼 맛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그의 의식이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대체 나란 놈은 어떤 인간일까? 동생이 죽었는데도 제니와의 섹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니.
"곧 착륙할 거야."
그는 죄책감과 혼란을 숨기기 위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거울을 좀 봐야겠어요."
"당신 얼굴은 사랑스러워."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했던 생각에 스스로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케이지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니는 문득 자질구레한 일까지 모두 맡아서 해준 그에게 아직까지 아무도 감사를 표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궂은일까지 기꺼이 떠맡았다.
"정말 고마워요, 케이지. 당신 부모님이나 내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녀는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당신이 있어 줘서 기뻐요."
"나도 당신이 있어서 기뻐."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날 밤 그녀가 사랑을 나눈 상대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았다. 이전의 이기적인 케이지라면 그날 밤 그가 제니에게 주었던 사랑의 주인이 동생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이 태어난 케이지는 제니가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된다면 할과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몬테리코의 수도는 시끄럽고 지저분하며 매우 더웠다. 무너진 콘크리트와 엿가락처럼 흰 철근만이 한때 그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공사 자재가 쌓여 있어서 지나다닐 수 없는 거리도 있었다. 정치적인 문구가 핏빛처럼 붉은 페인트로 휘갈겨져 있었고 소름 끼치는 전쟁 이야기들이 게시판에 즐비했다. 군인 복과 전투화, 그리고 탱크톱을 입은 군인들이 짝을 지어 거리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들의 인상은 험상궂었고 태도 또한 거만하고 건방졌다. 겁을 집어먹은 시민들의 눈에는 불안과 경계의 빛이 가득했고 일터로 나가는 행렬 또한 은밀해 보였다. 제니는 일찍이 이렇듯 침체된 곳을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인권 탄압을 종결 지으려는 할의 신념에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멕시코 시티에서 만나기로 한 주 정부 관료인 휘더 씨의 첫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제니는 그 자체로 위협이 느껴지는 그레고리 펙과 같은 타입을 기대했지만 휘더 씨는 강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해 보였다. 주름이 가득한 리넨 양복을 입고 있는 그는 권위나 명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에게는 그가 군사 정부에 협박을 가하기는커녕 잔인한 농담에 장단이나 맞출 사람처럼 보였다. 뜻밖에 그는 북적거리는 공항을 통과해 케이지와 그녀에게로 다가와서 몬테리코 까지 그들을 태우고 갈 비행기로 안내해 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는 그녀를 정중하게 대접했다. 제니는 케이지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겼다. 공식적인 무제를 다루는 와중에도 케이지는 그녀를 세심하게 살폈으며 그녀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 그녀 곁에 있어 주었고 줄곧 그녀의 어깨를 감싸거나 팔꿈치에 부드러운 손길을 가져 다 대는 등 보호자 같은 자세를 취했다. 제니는 자연스레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가 없었다면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왜 사람들이 이렇듯 세심한 케이지를 신뢰하지 못하는지 의문이었다. 케이지 헨드렌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게 바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틀렸다. 케이지는 무척이나 세심한 사람이었다. 최소한 그의 동생에게는, 그리고 그녀에 관한 한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었다. 몬테리코에 도착하자마자 제니와 케이지, 그리고 휘더 씨는 낡은 포드 자동차의 뒷좌석에 몸을 묻었다. 앞좌석에는 운전사와 소비에트제 AK-47로 무장한 군인이 타고 있었다. 자동 무기를 쳐다볼 때마다 제니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운전사와 그의 동료는 현재 이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의 대표자였다. 그들은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도시를 한바퀴나 돌고 나서야 그들은 이전에는 은행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건물 기둥에 염소가 묶여 있었다. 그 염소마저도 몬테리코의 다른 거주자처럼 심술궂고 사나워 보였다. 건물 안에서는 탁한 공기를 빼내느라 가열된 팬이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최소한 구 은행 건물은 타는 듯한 태양으로부터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제니의 블라우스는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케이지도 재킷과 넥타이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지 오래 였다. 그들은 총부리를 겨눈 군인이 무례하게 가리키는 대로 낡아빠진 소파에 앉았다. 아무래도 앉으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휘더 씨는 군대 지휘자와의 면담을 위해 군인과 함께 자리를 떴다. 몇 분 후 그는 그들에게 돌아와서는 씩씩거리며 손수건으로 눈썹의 땀을 닦아내었다.
"워싱턴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가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말입니까?"
케이지가 캐물었다. 두 다리를 떡 벌리고 서서 어깨 위에 재킷을 늘어뜨리고 넓은 가슴이 들여다보이도록 셔츠를 풀어헤친 채 이를 악물고 있는 그는 다른 어떤 군인보다도 훨씬 사나워 보였다. 휘더 씨는 그들에게 할의 시신이 아직 도시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 마을, 그러니까..."
"처형이 실시된 마을 말이죠."
케이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바로 그 마을에서 게릴라전이 있었답니다. 시신은 저녁 무렵에나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는 다시 확인시키듯 끝맺었다.
"저녁이라고요?"
제니는 경악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도시에서 오후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그러네요, 플렛처 양."
휘더 씨는 케이지에게 초조한 시선을 보냈다.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히는 모르죠."
"그 동안 뭘 해야 하는 거죠?"
그녀가 물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침을 삼켰다.
"기다리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기다렸다. 그 끝없는 시간 동안 초침은 더디 가는 것만 같았다. 건물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휘더 씨가 모든 외교 수단을 동원해서 가져온 음식과 음료수는 만들어진 지 오래 되어 보이는 햄 샌드위치와 미지근한 물이 전부였다.
"분명 감옥에서 먹다 남은 거겠지."
케이지는 경멸을 감추지 않고 샌드위치를 가까이에 있는 쓰레기통에 가차없이 집어 던졌다. 제니도 샌드위치를 먹을 수가 없었다. 햄이 약간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탈수 증을 염려하여 물은 마시기로 했다. 오후가 되어 군인들이 총을 벽에 세워 두고 시에스타를 즐기는 동안 그들은 땀에 찌들어 있어야 했다. 케이지는 끊임없이 욕을 해대면서 몬테리코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계속했다. 대부분 라틴 계열이 거주하는 이 마을에서 제니의 옅은 색 머리와 녹색 눈동자는 보기 드물었다.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케이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건방진 군인들이 그녀 쪽으로 느물거리는 눈길을 보낼 때마다 케이지의 눈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수행원들은 그가 스페인 어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중 한 명이 제니의 대해 저속한 농담을 하며 웃음을 터뜨리자 케이지가 주먹을 불끈 쥐고 그들에게 다가서려 했다. 휘더 씨가 재빨리 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제발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부모님께 시체 세 구를 보내야 할 거요."
휘더 씨의 말이 옳았으므로 케이지는 분노를 삭이며 소파에 돌아와 앉았다. 그는 제니의 손을 꼭 붙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어."
멀 리서 빽빽한 정글로 태양이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 대규모의 군대 트럭이 커다란 소음을 내며 거리로 들어서서 정부 건물 밖에 멈춰 섰다. 운전사와 군인들이 게으른 몸짓으로 트럭에서 내려 농담을 하며 담뱃불을 붙였다. 먼지 나는 긴 도로를 달려온 뒤인지라 간간이 기지개를 켜는 사람도 보였다.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배가 불룩한 사람이 장교 사무실로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왔나 봅니다."
휘더 씨가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장교가 한 다발의 서류를 흔들며 사무실에서 나오더니 그들에게 밖으로 따라 나오라고 명령했다. 트럭 뒤로 장교와 휘더 씨, 그리고 케이지가 나란히 따라 올랐다.
"거기 있어."
그들을 따라 트럭에 발을 올려놓는 제니에게 케이지가 말했다.
"케이지..."
"안 돼."
그가 다시 단호히 말했다. 트럭 안에는 네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할은 그들이 열어 놓은 관 중 세 번째에 누워 있었다. 뚜껑이 열렸을 때 케이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제니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이 각인 하듯 격렬하게 변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두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물었다. 휘더 씨가 그에게 뭐라고 묻자 케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을 뜬 그는 동생의 시신을 차마 다시 볼 수 없다는 듯 트럭 구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동생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마침내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한 손을 뻗쳐서 동생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장교가 빠른 스페인어로 간단히 명령을 내리자 관이 다시 봉해졌다. 케이지와 휘더 씨가 트럭에서 뛰어내렸고 네 명의 군인들이 트럭에 올라 관을 끌어내렸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케이지는 제니를 감싸 안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여기서 나가죠."
그는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휘더 씨에게 말했다.
"공항으로 관을 보내도록 하고 즉시 떠납시다."
휘더 씨는 케이지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케이지가 제니의 턱에 한 손가락을 대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괜찮나?"
"할은...얼굴은..."
"걱정 마."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잠든 것처럼 누워 있더군. 믿을 수 없을 만큼 싱그럽고 평화로웠어."
제니는 흐느끼며 그의 셔츠 칼라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등을 다독였다. 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혼란스러웠지만 분명한 것은 오빠와 같은 존재였다는 점이다. 형제애를 느낄 만큼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것이다. 케이지도 그녀의 괴로움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일부분이 마치 관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더 씨가 큰 소리로 목청을 가다듬고 불편한 듯이 말했다.
"음, 헨드렌 씨."
케이지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지금 공항으로 시신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그는 덜컹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는 픽업 트럭을 가리켰다.
"좋아요. 제니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내보내고 싶소. 멕시코 시티에는 비행..."
"그게, 저, 문제가 생겼습니다."
케이지는 벌써 저만큼 걸어가다가 멈추어서 제니의 팔을 붙잡은 채 홱 뒤 돌아 노려보았다. 휘더 씨는 한쪽 발에 유지하던 체중을 다른 발로 옮기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두워진 후에는 비행기 이륙을 불허한답니다."
"뭐라고요?"
케이지가 소리쳤다. 태양이 이미 지고 있었다. 어스름이 열대 황혼에서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양으로 저물어 갔다.
"보안 조항이라는 군 요."
휘더 씨가 설명했다.
"밤이 되고 나면 착륙 조명을 켜지 않는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오늘 착륙할 때 활주로가 위장되어 있었지요?"
"그래요, 기억합니다."
케이지가 짜증스러운 듯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대답했다.
"그럼 언제 떠날 수 있는 거요?"
"아침 일찍이 요."
"아침에도 못 떠나면 지옥에라도 기꺼이 갈 것 같아. 나도 꽤 성질이 더러운 사람이거든요. 게릴라만큼이나 비열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소."
그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혹 제니를 이 은행 건물에 묶어 놓을 생각이라면 잘못 생각했다고 전하시오."
"아니 요, 그건 괜찮습니다. 우리가 묵을 수 있도록 호텔을 예약해 두었답니다."
"그렇겠지."
케이지가 빈정거렸다.
"우리가 직접 찾겠소."
그렇지만 선택은 제한되어 있었고 결국 정부가 지정해 둔 곳에 묵을 수밖에 없었다. 로비만큼 방도 초라하다면 편안한 저녁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겠다고 제니는 생각했다. 얼룩덜룩한 가구에는 보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뜨거운 열로 가열된 팬은 느릿느릿 돌아가고 있었다. 커튼은 초라했으며 가장자리가 풀려서 바닥에 끌렸다. 잡지 걸이에는 너무 오래 되어서 표지마저 희미해져 제목도 알아볼 수 없는 잡지들이 꽂혀 있었다.
"하얏트는 아니군."
케이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로비에는 단정하고 부지런한 벨 맨이 아니라 자동 소총을 든 냉소적인 군인들이 맴돌고 있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수위와 무슨 말인가를 하고 난 휘더 씨는 그들에게 각각 열쇠를 건네주었다.
"모두 같은 층에 있는 방이로군요."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잘 됐네요. 룸서비스로 샴페인과 캐비아를 주문해서 파티를 열도록 하죠."
케이지가 빈정거리자 휘더 씨는 마음이 상한 듯했다.
"플렛처 양. 319호실입니다."
케이지는 그가 제니에게 열쇠를 건네기 전에 가로채고 자기 방 번호를 확인했다.
"플렛처 양은 나와 함께 325호실에 머물 거요. 자, 가지, 제니."
케이지는 그녀의 팔을 잡고 로비를 지나 계단으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걷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나님도 포기한 듯한 이런 나라에서 여러 상황들을 생각해 볼 때 엘리베이터를 타느라 목숨을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방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휘더 씨가 귀찮은 강아지처럼 잰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오며 항의했다.
"각자에게 방이 할당된 거죠."
"지옥에나 가라지. 내가 제니를 혼자 있도록 할 것 같소? 다시 생각해 봐요."
"이것도 동의 조건입니다."
"그 조건을 어겨서 3차 대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럴 순 없소?"
"설마 플렛처 양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들도 야만인은 아닌데요."
케이지가 노려보자 주 정부 공무원은 뒤로 움찔 물러섰다.
"나랑 같이 있을 거요."
케이지가 완고한 말투로 말하자 더 이상의 언쟁은 없었다. 325호는 몬테리코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무덥고 숨이 막혔으며 먼지가 들끓었다. 케이지는 희미하게 램프를 밝혔다. 그는 창문으로 다가가서 바깥을 살폈다. 예상한 대로 3층 아래에는 두 명의 군인이 망을 보고 있었다. 들고 있는 담배 불빛으로 겨우 어둠 속에 서있는 그들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 놓고 창살 셔터를 조정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들어오면 호텔 방안도 그나마 견디기 수월해질 것이다.
"휘더 씨가 그러는데 저녁을 올려 보낸다는 군."
"점심 같은 음식이라면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을 지경이에요."
제니는 침대에 핸드백을 떨어뜨리고 한쪽 끝에 무너지듯이 걸터앉았다. 분명히 그녀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지만 여전히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사했다.
"신발 벗고 누워."
"잠깐 쉬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힘없이 말하고 누웠다. 화사한 꽃무늬가 그려진 침대 덮개가 그녀를 잡아 삼킬 것 같았다. 30분쯤 지나자 군복 차림의 병사가 문을 한번 두드리고는 거칠게 휙 열어 젖히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둥글게 몸을 말고 졸고 있던 제니가 벌떡 일어나서 침대에 앉았다. 그 바람에 스커트가 허벅지 끝까지 말려 올라갔다. 군인이 그녀를 힐끔 곁눈질했다. 휘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케이지는 쟁반을 낚아채고 군인을 난폭하게 밖으로 밀쳤다. 그는 문을 견고하게 잠그고 의자를 문손잡이 아래에 가져 다 두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AK-47 총탄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저녁 이라고 담아 놓은 쟁반에는 밥, 치킨, 그리고 콩,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매운 고추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손도 대고 싶지 않았지만 두어 번 포크를 움직이고는 힘없이 내놓았다.
"더 먹어."
케이지가 그녀의 접시를 가리키며 명령조로 말했다.
"배가 안 고픈걸요."
"그래도 먹어. 그렇지 않으면 기운 없어 안돼."
그가 엄하게 말하자 할 수 없이 치킨을 한 조각 집었다. 탁한 빛깔의 레드 와인이 식사에 곁들여졌다. 케이지는 뿌연 병에서 와인을 따라 맛을 보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이 걸로 변기를 청소하는가 보군."
"라 보타 카우티의 술고래가 하는 말이에요?"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부르나 보지?"
그가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가끔은 요."
그는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녀는 잔을 받기는 했지만 어쩌라는 거죠? 라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셔."
그가 무언의 질문에 대답했다.
"물은 믿을 수가 없어. 양조주에는 세균이 오래 살지 못하거든."
그가 와인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한 모금 삼키고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 얼굴 표정에 케이지는 눈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겨우 다섯 모금을 삼킬 수 있었다.
"이제 더는 못 마시겠어요."
그녀는 씁쓸한 끝 맛에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케이지는 더러운 접시를 담아 쟁반을 문 옆의 바닥에 내려놓았다. 문 앞에서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지만 다행히도 감시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최소한 문 앞에는 없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나 계단 근처에는 보초를 서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샤워기가 제대로 될까요?"
제니가 욕실에 들어서며 물었다.
"한번 켜보지."
"감염이 될 수도 있을까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쯤 벌써 감염됐을지도 몰라."
그는 흙투성이 셔츠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올록볼록한 거울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문을 닫은 후 옷을 벗고 샤워기 앞에 섰다. 보통 때라면 곰팡이가 보이는 샤워기 아래 맨발로 설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케이지가 말한 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땀과 먼지에 절은 채로 자는 것보다는 낫지 싶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는 물은 뜨거웠고 비누는 미국산이었다. 제니는 샴푸 대용으로 비누로 머리도 감았다. 몸을 닦고 나자 그녀는 무엇을 입어야 할지 난감했다. 속옷과 블라우스는 빨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 땀에 절은 걸 또 입어야 할 테니까.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슬립을 입고 그 위에 재킷을 걸쳤다. 우스꽝스러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니는 팬티, 스타킹, 브래지어, 블라우스를 세면대에 넣고 비벼 빨아 수건 걸이에 걸었다. 그녀는 불을 끄고 문을 열었다. 망설이는 그녀의 눈빛이 방 저쪽에 있는 케이지의 호기심 가득한 눈과 마주쳤다. 의식적으로 그녀는 재킷 단추를 다시 만져 보았다. 멋쩍고 수줍어 괜 시리 맨발을 꼼지락거렸다. 케이지가 내 젖은 머리를 본 적이 있었던가?
"저...수건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미안해요."
"바람에 말리면 되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의 눈은 무릎 위 부분에서 레이스로 끝 처리가 된 그녀의 슬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욕실로 향하며 그녀를 살짝 스쳤다. 그가 문을 닫고 들어섰을 때에야 제니는 속옷을 걸어 놓은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녀의 뺨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바보 같다고 느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들의 빨래는 나란히 걸렸다. 세탁실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서로의 빨래를 보았을 것이다. 케이지도 그녀가 잠옷이나 로브를 입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대수롭지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가 그녀의 속옷을 보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녀는 온몸이 붉어졌다. 그가 욕실에서 나올 무렵 그녀는 재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에게서 축축한 남자 냄새와 비누 향기가 동시에 풍겼다. 그는 바지만 입고 있었고 맨발이었다. 가슴에 난 털은 촉촉하게 곱실거렸다. 수건으로 머리를 문질렀는지 젖어서 더욱 진해 보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그가 불을 끄고 침대로 다가와서 모서리에 앉았다.
"편안해?"
"그럭저럭 이요."
그는 한 손을 뻗쳐서 그녀의 턱까지 시트를 끌어올려 주었다.
"당신은 특별해, 제니 플렛처."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걸 알고 있나?"
"무슨 말이죠?"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지만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잖아."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당신은 정말 대단해."
"당신도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할을 위해 울어 주었어요."
"그 앤 내 동생이야. 우린 분명 다르지만 그 애를 사랑해."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눈물이 고여 올라 뺨을 타고 내리자 그녀는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제니."
그가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훔쳐 주었다.
"해야 해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생각하다 보면 당신은 미쳐 버리고 말 거야."
"당신도 생각했겠죠, 케이지. 상상해 봤죠? 할이 죽기 전에 어땠을까요? 고문을 당했을까요? 겁에 질렸을까요? 아니면..."
그가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말을 중단시켰다.
"물론 나도 생각해 봤어. 그리고 할이 분명 당당히 맞섰으리라는 결론을 냈지. 그 애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고 있었잖아.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결코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
"당신은 할을 존경하는군요."
그녀가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는 분통한 듯 보였다.
"그래, 그랬지. 어떤 일에 있어서든 우리의 반응은 항상 달랐어. 나는 폭력적이었고 할은 평화적이었지. 말썽을 피우는 것보다 어쩌면 유순하고 순종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도 몰라."
저도 모르게 그녀는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할도 당신을 존경했어요."
"날?"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의 반항기, 투지, 하여간 그런 것들을요."
"그럴지도 모르지."
케이지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겠어."
그는 그녀의 어깨 위에 시트를 덮어 주고 토닥거렸다.
"잠 좀 자두지."
그는 램프를 끄고 잠시 망설이더니 몸을 기울여 그녀의 이마에 오빠처럼 키스를 했다. 그는 창문 옆에 놓인 하나밖에 없는 안락 의자로 걸어가서 걸터앉았다. 정말 힘든 하루였다. 둘은 금새 잠이 들었다.
"저건 뭐죠?"
제니가 침대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안은 깜깜했지만 낯선 창문에 주기적으로 밝은 빛이 깜박거렸다. 케이지는 그녀의 공포에 찬 외침에 깜짝 놀라 재빨리 침대로 뛰어갔다.
"괜찮아, 제니."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베개에 눕히려고 했지만 그녀는 뻣뻣이 굳어 있었다.
"수 킬로미터 밖에서 벌어지는 거지. 반시간 동안 저랬다고."
"천둥이 아니잖아요."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여 대답했다.
"응."
"전투죠?"
"그래."
"오, 하나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베개로 가라앉았다.
"난 여기가 싫어요. 먼지 투성이고 덥고 사람들을 마구 죽여요. 할처럼 선량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집에 가고 싶어요."
그녀가 흐느꼈다.
"너무 무섭고 겁에 질린 내가 싫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아, 제니."
케이지는 곁에 누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굉장히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내일 아침에 떠나고 나면 몬테리코에 대해서는 다시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또 내가 여기 있잖아."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뇌 속에 단어를 주입시키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다정스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누구도 당신을 다치게 하지 못해. 내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없어."
그녀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서 안정과 위안을 얻었다. 그의 강한 힘이야말로 그녀가 의지하고 있는 생명줄과도 같았다. 그가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가슴으로 끌어올리자 저항 없이 그에게 안겼다. 본능적으로 강하고 거대한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을 덮고 있는 빽빽한 털로 다가갔고 단단한 근육에 살며시 뺨을 가져 다 대었다. 다른 팔은 마치 그의 품에서 안식을 구하려는 듯이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그녀의 부드럽고 희미한 빛깔의 슬립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녀의 허리 아래로 레이스가 달린 실크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엉덩이 부분에서 매혹적인 곡선을 그렸다. 가슴에 와 닿는 그녀의 가슴은 너무도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그녀는 몸을 떨었고 그는 두 손으로 벗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머리카락에 키스를 했다. 그는 제니의 피부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새삼 깨달으면서 자신의 손길에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으려 노력했다. 얼마 안 있어 가슴에 와 닿는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고른 것을 보고 어느 새 그녀가 잠들었음을 알았다. 잠결에 그녀가 한쪽 다리를 그의 종아리에 얹고 이리저리 움직이자 그는 침대 머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녀의 허벅지가 다리에 걸쳐졌고 그녀의 무릎은 바지의 지퍼 부분을 거의 찌르고 있었다. 그는 몸 속을 관통하는 욕망에 맞서서 이를 앙 다물었다. 케이지는 자신의 허벅지에 놓인 그녀의 손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쓰다듬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도 커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녀가 애무했다면 환희의 고통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먼 곳의 전투 장에서 들려오는 천둥 같은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며 동쪽 수평선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새벽의 실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를, 할의 약혼자를 안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끌어안고 있었다.
5.
할 헨드렌의 장례식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순교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는 그의 무모함을 비난했던 사람들조차 무덤가에서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텍사스의 주요 도시에서 온 텔레비전 뉴스 팀과 몇몇 국영 방송들까지 카메라 앵글을 맞추며 장례식장에 개미처럼 몰려들었다. 임시 천막에서 밥과 사라와 함께 선 제니는 할의 임무가 이렇게 끝났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죽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너무나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기만을 바랐다. 제니와 케이지가 몬테리코에서 돌아온 이후로 목사관은 혼돈 그 자체였다.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댔고 방문객들의 행렬이 쉼 없이 이어졌다. 주 정부에서는 중미 국가에 대한 케이지와 제니의 인상을 묻고자 대표자를 파견했다. 교회 선도들의 지나친 선의에서 나온 간섭으로 이 모든 이벤트들은 사육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제니는 몬테리코의 호텔 방에서 케이지의 품에서 잠을 깬 후로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서서히 잠을 깨 보니 슬립만 입은 채로 그의 품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미, 미안해요."
그녀는 재빨리 침대를 빠져나가서 욕실로 뛰어가며 더듬거렸다. 옷을 입을 무렵 그들 사이의 긴장은 불꽃처럼 지글거리고 있었다. 우연히 서로 맞닥트린 듯이 보였으므로 어색한 사과가 필요했으리라. 그녀가 케이지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예외 없이 케이지의 눈빛은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일부러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약이 오른 것 같았다. 그들은 낡아빠진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여 할의 관을 실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멕시코시티에 이르자 휘더 씨는 라 보타에서 고향까지 관을 실어 나를 라 보타에서 온 장례식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는 엘 파소 행 비행기를 예약하기 위해 딱정벌레처럼 허둥거렸다. 케이지는 공항의 창문가에 서서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어깨는 구부정했고 표정은 굳어 있었으며 연신 줄담배를 피워 댔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떠오른 놀라움을 볼 수 있었다. 할이 떠나던 그날 밤 이후로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버렸다. 엘 파소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끝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라 보타 까지 의 차 안에서도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 후로도 그들은 서로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몬테리코에서 발전한 우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이유로 인해 제니는 여태까지 보다 훨씬 그의 존재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방에 들어서면 그녀는 방을 나갔다. 그가 바라보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왜 자신이 그를 외면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몬테리코 호텔 방에서 보냈던 그 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가 나를 안았어. 그래서? 잠자는 동안 그가 나를 침대에서 안았다고, 그래서? 자는 동안 슬립만 입고 있는 날 그가 침대에서 안았어. 그래서? 그들은 위험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나선 이방인들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선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법이다. 누구나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먼저 잠에서 깼을 때 그의 한 손은 그녀의 엉덩이 부분에 걸쳐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소유를 주장하듯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가슴 털에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그의 가슴의 평평한 젖꼭지 부분에 거의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그런 것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제니는 꽃으로 뒤덮인 관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날 아침의 기억을 애써 지워냈다. 그녀는 잠이 깬 후, 그러한 광경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고 화들 짝 놀라 달아나기 전까지 따뜻하고 안전하고 평화스럽다고 느꼈던 그 찰나의 시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케이지에게 다가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힘과 인내심을 끊임없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가 밥의 곁에 앉아 있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위로를 구걸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사는 긴 기도와 함께 장례식 절차를 모두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리무진 안에서 사라는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흐느꼈다. 케이지는 우울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제니는 손수건을 비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회의 몇몇 아주머니들이 이미 목사관에서 커피를 끓이고 펀치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파이를 잘라서, 장례식이 끝난 후에 들른 조문객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행렬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상대하기도 지친 제니는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제가 할게요."
그녀는 싱크대 앞에 서있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요."
"불쌍한 것."
"가여운 할이 가다니."
"그렇지만 넌 아직 젊어, 제니."
"넌 살아야지. 시간이 좀 걸릴 게다만."
"잘 견뎌 낼 거야."
"모두들 그렇다고 하더라."
"그 끔찍한 나라에 다녀온 건 정말 악몽이었을 게다."
"케이지 랑 함께 가다니."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끌끌 찼다. 마치 여자로서 케이지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 끔찍한 운명이라는 듯이. 제니는 케이지가 아니었다면 벌써 쓰러졌을 거라고 소리치며 그들을 쫓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엔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 둘씩 떠날 때쯤 제니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감사해 하기로 했다. 어 쨌거나 그녀를 걱정해서 한 말들이었다. 한참 만에 싱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다른 접시를 찾으러 나갔다. 거실에 헨드렌 씨 부부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제니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 등받이에 머리를 한껏 기댔다. 케이지의 라이터가 켜지는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반짝 떴다. 그가 물고 있는 담배 끝에서 불꽃이 번쩍 일었다. 그는 라이터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담배를 빨았다.
"이 집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었다."
사라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의 눈가는 이제 말라 있었지만 거무스레한 그람자가 어려 있었다. 그녀는 며칠 새 부쩍 주름지고 야위어서 거의 해골 같아 보였다. 표정은 너무도 비통했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죄송해요."
케이지가 순순히 사과했다. 그가 현관으로 걸어가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담배를 던져 버렸다.
"습관이 돼서요."
"그 고약한 습관을 이 집에까지 가져와야 하겠냐? 어머니에 대한 예의라고는 모르는 거냐?"
밥이 꾸짖었다. 케이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비난하는 듯한 밥의 거친 어조에 움칠 멈춰 섰다.
"전 두 분 모두 존경합니다."
몸은 긴장으로 굳었을망정 그는 부드럽게 답했다.
"너는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아."
사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넌 한 번도 동생의 죽음이 얼마나 비통한지 얘기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네게 동정을 느낄 수가 없구나."
"어머니, 전..."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했다.
"내가 너한테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구나. 넌 태어난 그 날부터 문젯거리만 안겨 다 준 아이다. 할과는 전혀 달랐어."
제니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지난 며칠간 케이지가 할의 죽음과 관련하여 언론과 법률에 걸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을 사라에게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라는 그녀가 말을 꺼낼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할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내 편이었을 게다."
"전 할이 아니에요, 어머니."
"내가 그걸 모르겠니? 넌 할과는 비교도 안 된다."
"사라, 제발 그만 하세요."
제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은 너무도 착하고, 듬직했었어. 내 새끼."
사라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고 그녀는 또 한 바탕 눈물을 쏟아내었다.
"하나님이 내 자식 중 한명을 데려가셔야 했다면 왜 하필이면 할을 택하고 널 남겨 두셨는지 모르겠다."
제니의 손이 저절로 입으로 향했다.
"세상에."
밥은 아내의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케이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부모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문을 거칠게 밀어젖히자 문에 걸려 있던 스크린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는 현관을 지나 계단으로 뛰어나갔다.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제니는 그를 따라 뛰어나갔다. 그녀는 정원을 달음질쳐서 그의 코르벳이 세워져 있는 모퉁이에 이르러서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는 불이라도 붙은 듯 재빠르게 검은 양복 코트를 벗고 조끼 단추를 떼내듯 풀고 있었다.
"들어가."
그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는 스포츠카의 낮은 운전석에 몸을 밀어 넣고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열쇠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클러치에 발을 올리고 그는 1단 기어를 넣었다. 그녀는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어젖혀서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무렵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차는 미사일처럼 앞으로 튕겨나갔다. 다음 모퉁이에 이를 때까지 거리 한복판을 마구 질주하다가 쏜살같이 커브를 돌았다. 제니는 문손잡이를 잡고 아슬아슬하게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고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케이지는 도시 경계 표지판에 이르자 4단 기어로 바꾸었다. 그는 기어 스틱을 작동시키면서 차의 속도를 높이는 마법이라도 되는 듯이 이를 갈았다. 제니는 감히 속도 판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풍경을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헤드라이트가 그들 앞에 펼쳐진 끝없는 어둠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차를 운전하며 라디오 버튼으로 손을 뻗어서 강렬한 비트의 락 음악을 찾을 때까지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렸다.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이자 차 안은 시끄러운 메탈 음악 소리로 쿵쿵 울렸다.
"당신 큰 실수한 거야."
케이지가 꽝꽝거리는 음악 소리에 대고 외쳤다.
"그냥 집에 있어야 했어."
손을 뻗어서 그녀의 무릎 근처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보관함을 열어 은색 병을 꺼냈다. 허벅지 사이에 끼워 넣고 뚜껑을 연 그는 은색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표정으로 보아 그 액체가 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고속도로 중앙선 가운데에서 속도를 낮추며 계속해서 마셔댔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 닥친 바람이 장례식을 위해 단정하게 올려 빗은 그녀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 놓았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었는데 어떻게 케이지가 담뱃불을 붙일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어 쨌거나 계기판의 빛을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어두운 얼굴과 붉게 타오르는 담뱃불이 보였다.
"스릴 넘치지?"
그가 비웃는 투로 말하며 짓궂게 노려보았다.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는 머리를 돌리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의 속도 감이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가다가 죽는다 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기로 했다. 그가 고속도로에서 도로표지도 없는 길로 차를 돌리자 제니는 정말로 사고 나기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이 도로를 알았을까? 제니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먼지가 자욱한 도로를 사정없이 달려서 우아한 코르벳을 흙투성이로 망쳐 놓고 있었다. 제니는 이가 부딪히지 않도록 앙 다물었다. 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통과할 때 그녀는 차 전장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으려고 의자를 꽉 움켜쥐었다. 차가 오르막길을 올랐다. 깜깜한 암흑이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고도가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 미친 듯이 움직일 때마다 헤드라이트도 따라서 춤을 추었다. 케이지 헨드렌이 연출하는 포악하고 아슬아슬한 장면을 아무도 목격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 달마저도 구름에 가려 빛을 내뿜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자 제니는 거의 앞 유리창을 들이받을 뻔했고 타이어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멈추어 섰다. 케이지가 시동을 껐고 울려 퍼지던 라디오 소리도 엔진 소리와 함께 사라져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열린 창문 턱에 팔을 걸치고 담배를 내뿜다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길게 술을 들이킨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책망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미안하게 됐어. 매너를 깜박 했네. 마시겠나?"
그는 술병을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차분한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싫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안 됐네."
그는 다시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담배를 권했다.
"담배 어때? 싫다고? 물론 그렇겠지."
그는 술을 더 들이켰다.
"당신은 결점이라고는 없는 숙녀니까. 안 그런가? 순결한 제니 플렛처 양. 완전무결하고 성스러운, 당신 같은 여자에게는 먼저 떠난 할 헨드렌 만이 어울리겠지."
그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태도가 그를 화나게 했는지 케이지는 창문 밖으로 담배를 던졌다.
"이것 봐. 어떻게 해야 당신을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겁에 질려서 떨겠냐고? 응? 어떻게 해야 화가 나서 내 차에서 뛰어내려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겠어? 내 망할 인생 밖으로 사라지겠냐고?"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숨결은 거칠고 부자연스러웠다. 제니는 그가 성질을 꾹 참고 감정을 조절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처와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흥분은 가라앉은 듯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비위가 상하겠나? 욕을 한바탕 해볼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 당신이 그런 욕을 알고 나 있는지 모르겠어. 한번 해보지. 알파벳 순서로 해볼까, 아니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해볼까?"
"헛수고 마세요, 케이지."
"내기할까?"
"당신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난 지금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날 구원하러 왔지, 그런가?"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그녀가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아, 그래?"
비꼬듯 그의 한쪽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어디 보자고."
그가 갑자기 조수석으로 돌진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쪽을 감싸 쥐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거칠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난폭하게 그녀의 부드러운 입을 공격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들어와 그녀의 입을 야비하게 자극하는데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그 난폭한 침입을 견디고만 있었다. 그녀가 할의 장례식에 입고 간 드레스는 검은 니트 투피스였다. 케이지가 그녀의 허리 게를 더듬어 상의를 들어 올리고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자에 관한 내 명성은 능히 알고 있겠지?"
그가 그녀의 목에 대고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난 무자비하다고.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않지. 처녀 사냥꾼에. 유부녀 도둑이야. 날뛰는 섹스 기계라고. 다들 날 보고 호색한이라고 하더군. 내겐 바지를 입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든 고문이지."
그는 한쪽 다리를 그녀의 무릎 사이에 밀어 넣었다.
"무슨 의민 줄 알아, 제니? 당신은 지금 난처한 상황에 빠진 거야, 이 아기씨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으며 또다시 경멸적인 키스를 그녀의 입에 퍼부었다. 그는 마침내 브래지어를 위로 올려 벗겨냈다. 그는 가슴을 거칠게 문지르며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유두 근처에 원을 그렸다. 저항하지 않겠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제니의 등은 시트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그에게 맞섰다. 노골적으로 저항한다거나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묵묵히,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맞서고 있었다. 그녀의 나지막한 헐떡임이 케이지의 머리에 갑작스러운 경고를 보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누군가 핀으로 구멍을 낸 풍선처럼 그녀에게 푹 가라앉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몇 차례 입김을 불어넣었지만 더 이상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지는 않았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알코올로 흐려 있던 그의 머리가 다시 맑아지는 듯했다. 그는 겨우 브래지어에서 손을 떼고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를 다시 채워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운전 석으로 돌아가 차에서 내렸다. 제니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숨을 진정시켰다. 다소나마 안정을 되찾자 그녀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차에서 내렸다. 케이지는 차의 앞쪽 후드에 앉아서 멍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이제 조금씩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곳은 주변의 평야에서 평평하게 솟구쳐 올라 있는 메사 였다. 메사는 몇 킬로미터에 걸쳐 뻗쳐 있었다. 널리 펼쳐진 대초원은 어둡고 고요했다.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펄럭이고 머리를 흩뜨려 놓았다. 흐느끼는 듯한 바람 소리도 들려왔다. 그녀는 그의 바로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들의 무릎이 거의 맞닿았다. 그가 고개를 들고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턱을 떨구었다.
"미안해."
"알아요."
그녀가 그의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칼 몇 가닥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러나 곧 바람이 다시 헝클어뜨렸다.
"어떻게 내가..."
"괜찮아요, 케이지."
"괜찮지 않아."
그는 이를 앙 다물고 말했다.
"괜찮지 않다고."
그는 고개를 들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농락했던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는 어떠한 성적인 느낌도 묻어 나지 않았다. 다친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듯이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내가 아프게 했나?"
그의 손길은 따스하고 정말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 같았으므로 제니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뇨."
"그랬을 거야."
"그분들이 당신을 아프게 한 만큼은 아니었어요."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전기가 흐르듯이 그들 사이에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교류했다. 제니는 손을 떨구었다. 그도 얼른 손을 뗐다. 제니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왁스 칠이 된 표면은 옷을 통해서도 열기가 느껴질 만큼 뜨거웠지만 둘 다 눈치 채지 못했다.
"사라도 진심은 아니었어요, 케이지."
그는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아니, 진심이었어."
"지금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슬픔에 잠겨서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아니, 제니."
그는 슬프게 고개를 흔들었다.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태어나지 않았기 바라시는 거지. 난 그분들이 만든 살아 있는 실패작인 셈이야. 그들이 미든 신념에 끊임없이 위배되는 실패작. 옛날부터 부모님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 아마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케이지 헨드렌이 죽었어야 했다. 동생이 아니라."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일어서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베사의 가장자리 쪽을 걸어갔다. 흰 셔츠가 칠흑 같은 어둠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제니도 그를 따랐다.
"언제부터 그랬죠?"
"할이 태어나면서부터. 그 전인지도 모르지. 기억이 안나. 항상 그랬던 것 같아. 할은 말 그대로 천사 같았지. 난 검은 머리였어야 했는데, 그러면 정말 검은 양이 되었을 테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어 쨌거나 사실 아닌가?"
그는 호전적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할 뻔한 일을 생각해 봐. 거의 강간할 뻔했다고. 내가..."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자 제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입밖에 내지 못한 말을 가슴에 묻었다.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알아요. 왜 술을 마시고 그렇게 과속을 했는지도. 당신은 부모님이 바라시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했던 거겠죠. 하지만 그분들이 틀렸어요, 케이지."
그녀는 그에게 다가섰다.
"당신은 흠 없는 집안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골칫거리가 아니 예요. 당신이 이렇게 된 원인이 뭔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먼저 나쁜 행동을 했는지, 아니면 부모님들의 편견이 먼저 인지."
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끌어 자신을 마주보도록 했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일부러 나쁜 짓만 골라서 한 거잖아요? 목사 집안의 검은 양이 되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케이지? 어렸을 적에도 그분들이 할만 편애하시니까 관심을 끌려고 그랬던 거잖아요. 그분들이 틀린 거예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 그분들 잘못이라고요. 아들이 둘 있는데 성격이 판이하게 틀려요. 그런데 할이 그분들의 이상에 더 들어맞았던 거예요. 당신도 그분들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 되니까 일부러 그 반대로 행동했던 거죠."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잘도 알아 냈네."
"그래요.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밤 잔뜩 겁에 질렸을 거예요. 몇 달 전만 해도 그랬을 지도 모르죠. 이젠 당신이 날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최근에 당신과 많은 시간을 함께 있으면서 당신을 살펴보았어요. 동생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았고요. 당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 예요. 할의 선함에 맞설 수 없었을 뿐이죠. 그래서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최고가 되고 싶었겠죠."
그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휘몰아치는 먼지로 흙투성이가 된 구두 끝을 내려다보았다.
"다만 언제까지 그럴지 가 의문 이에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니? 뭘 말이야?"
"자신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왔잖아요. 언제까지 그런 생각으로 살 거냐고요? 언제까지 가치 없는 인간임을 증명하려는 듯 살 거냐고요?"
그는 허리춤에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거만하게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멀리 왔어. 왜 빙빙 돌리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거지? 당신은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군."
"자기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죠."
"과속하고 무책임하게 술을 퍼 마시고 무모하게 사는 것처럼?"
"바로 그거예요."
"제길. 아무나 붙잡고 물어 봐. 그럼 내 가치를 말해 줄 거야.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려 줄 거라고."
"난 지금 당신이 연기하는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난 당신의 다른 면을 봤어요, 케이지. 평소 당신이 보여주지 않았던 민감한 부분을요."
"내가 천천히 자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는 이마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떼어 냈다.
"그런 이론적인 심리학 개론은 집어치우시지, 제니."
그는 방어적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좋아요,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케이지."
그는 곧바로 경계를 풀고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고맙지만 당신은 날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난 전속력으로 달리고 엉망으로 취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또 뭐가 있었지?"
그가 장난스레 물었다. 그러나 제니의 심각한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부모님들도 당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에게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제니의 머리 너머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시나? 할의 소식을 듣고 나서 나도 가까이 가서 안아 드리고 싶었어."
그의 목소리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낮아졌다.
"나를 안아 주기를 원했던 것처럼."
"케이지."
제니가 그의 팔을 어루만지자 그가 뿌리쳤다. 그는 누구의 동정도 원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않은 거야.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내 사랑과 슬픔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고."
그가 한숨을 지었다.
"부모님은 알아차리지 못하셨지만."
"난 알았어요. 그래서 감사했고요."
"날 멀리 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였어, 제니."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갑작스레 말했다. 그녀는 황급히 외면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모르겠지. 몬테리코에 있을 때 당신은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내게 의존했지. 그런데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또다시 날 전염병자 취급하더군. 손떼란 말이었나? 내 근처에 얼씬 도 않더군. 말도 걸지 않고. 제길, 날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어."
그 말이 맞았지만 제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날 피하는 이유는 몬테리코에서의 그날 밤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바짝 말라 가는 입술을 적셨다.
"물론 아니예요."
"진심으로?"
"그래요.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우린 함께 잤으니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녀가 방어적으로 외쳤다.
"물론이지."
그가 몇 발자국 다가섰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 죄책감을 느끼나?"
"죄책감 따윈 없어요."
"정말인가?"
그가 캐물었다.
"내 품에서 슬립만 입고 잠든 데 대해 죄책감을 못 느꼈단 말이야? 관에 누워 있는 할을 배신했다는 느낌이 안 들었단 말이야? 그런 말인가?"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가슴이 아픈 듯 두 팔로 몸을 껴안았다.
"그렇게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왜 지?"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요?"
"나랑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가 두려운 거지, 제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사람들이 그날 밤 일을 알게 될까 봐 두려운 건가?"
"아니 예요."
"케이지 헨드렌의 애인 명단에 이름이 오를까 봐 두려운 거야?"
"아니 예요."
"내가 두려운가?"
무자비한 바람도 그의 목소리에 떠오른 망설임을 가려 주지는 못했다. 그녀가 돌아섰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비참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뇨, 케이지. 아니 예요."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한 걸음 다가서서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가슴에 뺨을 가져 다 대었다. 곧 그의 팔이 그녀에게 감기며 온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조금 전에 내가 했던 짓을 생가가면. 날 용서할 수 없어. 당신을 아프게 했을까 봐 참을 수가 없어."
그녀는 차마 진정으로 두려웠던 것은 그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그가 가까이 있으면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살아왔던 목사관이라는 껍질 속에서 빠져 나온 또 다른 여인이 된 것 같았다. 케이지가 옆에 있으면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 오고, 손바닥이 젖어 왔다. 케이지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정상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오토바이를 같이 탔을 때도,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을 때도,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그녀는 자신을 잊고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서 사는 것 같았다. 마치 지난 수년 동안 할이 아니라 케이지와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사랑을 나눈 것은 할이지만 케이지의 팔에서 잠들던 그날 밤도 너무도 황홀했다.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할이 죽은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케이지와 사랑을 나눈다면 어떤 느낌일지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런 생각에 깜짝 놀란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뗐다.
"집에 가는 게 좋겠어요. 걱정하실 거예요."
그는 다소 실망한 눈빛이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차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애처롭게 술병의 뚜껑을 닫고 원래 있었던 자리에 집어넣었다. 그가 차창 밖으로 빈 담뱃갑을 던져버렸다.
"쓰레기 무단 투기."
제니가 조수석에서 꾸짖었다.
"여자들이란."
케이지가 저속으로 기어를 넣으며 투덜거렸다.
"절대 만족할 줄을 모른다니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다시 차분히 마을을 통과하여 목사관으로 돌아왔고 그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나란히 문으로 걸어갔다. 제니 또한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고마워, 제니."
"뭐가요?"
"친구가 되어 줘서."
"당신은 언제나 내 친구였는걸요."
"어쨌든 고마워."
문 앞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그는 헤어지기 싫은 듯했다.
"그럼 잘 자라고."
"잘 자요."
"당분간은 안 올 거야."
"알겠어요."
"전화는 하지."
"서로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당신과 부모님 사이가 이렇게 되어서 마음이 아파요."
그의 한숨에는 슬픔이 묻어났다.
"그래, 다 그런 거지, 뭐. 뭐든 필요하면 불러."
"그럴게요."
"약속해?"
"약속해요."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볼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꽤 오랫동안 그녀의 볼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면 그녀의 상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 방문 앞에 설 때까지 결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집은 어두웠다. 헨드렌 씨 부부는 벌써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방 문을 열고 한 걸음 들어섰다. 그리고는 아이 방처럼 장식된 방을 응시했다. 이제는 어쩐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제니 플렛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녀는 옷을 벗으면서 곰곰 생각했다. 침대에 눕고 나서도 이런저런 생각에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해답을 얻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헨드렌 씨에게 말할 것인가? 일단 말을 꺼내는 것이 문제였다.
6.
다음날 아침 제니가 부엌에 들어서자 밥은 토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앞치마를 두른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뺨에 키스를 했다. 커피를 한 잔 따르고 나서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접시에 놓인 스크램블에그를 뒤적거리는 사라 옆에 앉았다.
"어제 저녁엔 어디 갔었니?"
잘 잤니? 라는 말도, 좋은 아침이구나라는 인사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불쑥 물을 뿐이었다. 그렇게 묻는 사라의 입매가 굳어 있었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린."
제니는 한 단어씩 강조해 말했다.
"드라이브를 나갔어요."
"너무 늦게 돌아왔더구나."
밥은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제니는 이 대화가 그저 지나가는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선 마치 군대에서 적군을 조사하는 것 같은 적의가 느껴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벌써 주무시고 계셨잖아요?"
"힉스 부인이 오늘 아침에 들르셨다. 어젯밤에 너랑 케이지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구나."
제니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힉스 부인은 이 블록에서 가장 말 많은 이웃이었다. 특히 헛소문을 퍼뜨리기를 좋아했는데 대부분은 좋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것도 아니다."
밥은 불편한 듯이 말했다.
"아뇨. 알고 싶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분명히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겠죠?"
"우린 화가 난 게 아니란다. 제니."
밥이 차분하게 말했다.
"케이지와 연관돼서 네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실은 것뿐이다."
"내 이름은 벌써 케이지와 연관되었잖아요. 케이지도 헨드렌 가 사람 이에요. 이 집의 아들이라고요."
그녀는 화가 나서 되새겨 주었다.
"저는 지난 12년 동안을 헨드렌 집안 사람들과 함께 보냈어요. 어떻게 제가 헨드렌과 관련이 없을 수 있죠?"
"우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너도 알 잖니."
사라가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우리에게 남은 건 너밖에 없어. 우린..."
"그렇지 않아요!"
제니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케이지가 있잖아요.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두 분 다 정말 부끄러워 하셔 야 해요. 사라, 지난밤에 케이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아시기나 하세요? 케이지의 행동이 좀 거슬릴지는 모르지만 어 쨌거나 아들이잖아요. 어떻게 케이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실 수가 있어요?"
사라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터뜨렸다. 제니는 그렇게 나 화를 낸 것을 후회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밥이 사라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너희 둘이 그러게 뛰쳐나가고 나서 무척 속상해 했다."
밥이 제니에게 설명했다.
"어제 한 말을 후회하고 있어."
제니는 사라의 눈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커피를 홀짝거렸다. 마침내 그녀는 컵을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예상했던 대로 두 사람 모두 망연자실했다. 몇 분 동안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떠난다고?"
사라가 마침내 씨근거리며 말했다.
"목사관을 떠나서 제 삶을 시작할 거예요. 지난 수년간 할과 결혼할 날만 기다리며 여기서 살았어요. 만약 결혼을 했더라면, 그리고 아기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어요. 저도 절 위한 미래를 설계하겠어요."
"넌 우리와 함께 할 미래가 있잖니?"
밥이 되물었다.
"저도 성인이라고요, 저도..."
"우리에겐 네가 필요하단다, 제니."
사라는 촉촉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니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너를 보면 할이 생각나. 넌 우리 딸이나 마찬가지다. 네가 우리에게 이럴 순 없다. 제발, 지금은 안 된다. 우리도 할의 죽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 잖니? 넌 그럼 안 된다. 그럴 순 없어."
그녀는 다시 무너지듯 앉아서 흠뻑 젖은 티슈에 얼굴을 묻었다. 제니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은 그녀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녀를 돌봐 주었고 집을 제공했다.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몇 시간? 몇 주일까? 아님 몇 개월? 그녀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의무감도 느꼈다.
"좋아요."
그녀가 순순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힉스 부인이나 다른 누구의 감시도 받고 살진 않을 거예요. 난 할이랑 약혼한 사이고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이미 죽었어요. 내게도 남은 삶이 있잖아요."
"언제건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단다."
밥은 그녀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며 말했다.
"그래서 차를 사줬잖니?"
그것은 제니가 언급한 종류의 자유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또 다른 조건은 두 분 다 어젯밤 일에 대해 케이지에게 사과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그들이 항의하리라 생각하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결국 그들은 그녀의 끈질긴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좋다, 제니."
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널 위해서 하겠다."
"아뇨, 절 위해서가 아니 예요. 케이지와 두 분을 위해서예요."
그녀는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케이지는 두 분을 사랑하니까 금방 마음을 풀 거예요. 다만 하나님이 용서하실지는 모르겠네요."
식료품을 담은 카트가 충돌했다. 제니는 그 충격에 휘청거렸다. 세제 박스가 비틀거렸고 캔들이 요란하게 굴러갔다. 종이 수건이 계란 상자로 떨어졌다.
"어이!"
"심술쟁이! 일부러 그런 거죠?"
그는 뉘우치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느릿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한가한 오후에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날 수 있는 멋진 계략인걸. 그녀의 식료품 카트와 충돌하십시오. 그러면 그녀는 당황하거나 화를 내기도 하겠지만 항상 성공할 것입니다. 당신 카트 바퀴를 잠가야 겠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은 너무 빨라."
"양심도 없네요, 케이지 헨드렌."
"그렇지."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죠?"
제니가 물었다.
"궁금한걸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녀의 식료품 카트에 부딪혀서 바퀴를 잠근 다음에 그녀가 화를 내면 어쩌고 하던 거요. 그 다음엔 어쩔 건데요?"
"나와 자러 가지 않겠냐고 묻는 거지."
"오."
제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비어 있는 그의 카트를 비켜가 애완 동물 코너로 계속 이동했다. 헨드렌 씨는 애완 동물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그 코너에 관심을 쏟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음, 궁금하다고 했잖나?"
케이지가 항의하며 자신의 카트를 그녀의 카트 옆에 나란히 세웠다.
"그래요, 그랬었죠. 그렇지만 당신이 좀 더 은근하게 유혹할 줄 알았거든요."
"왜 지?"
"왜냐 고요?"
그녀는 휙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며 한 마디씩 끊어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단 말이 예요? 그렇게 요?"
그녀는 손가락을 퉁겨서 탁 소리를 냈다. 그는 일부러 생각하는 척하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 가끔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기도 하니까."
갈색이 도는 그의 눈동자가 깔끔한 바지와 면 니트 스웨터를 걸쳐 입은 그녀를 훑어보았다.
"당신을 예로 들어볼까? 내 생각에 당신은 좀 어려운 경우가 될 것 같아."
"왜죠?"
"그럼 나랑 같이 자러 갈 거야?"
"아뇨!"
"봐, 난 항상 잘 맞춘다니까."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만큼 이런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몇 가지를 터득하게 되지. 제 6감을 개발하는 거야. 당신 같은 경우는 말이지. 길고도 느린 접근법을 사용해야 하지."
그녀는 몇 초간 그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지, 정말이지 당신은 부도덕해요."
"뻔뻔스럽지."
그가 윙크를 했다.
"그렇지만 진실하다고."
그녀는 애완 동물 코너를 빠져 나왔다. 그가 앞 통로를 막아 섰다.
"오늘 당신 엄청나 군."
"그게 길고도 느린 접근법의 하난가요? 노력을 더 해야겠는데요."
그녀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그를 돌아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가 재빨리 그의 카트로 통로 전체를 막아 버렸다.
"무슨 말인 줄 알잖아. 피곤해 보여. 너무 말랐다고. 두 분은 뭘 하고 계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속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헨드렌 씨 부부는 그녀의 독립 선언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아니,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아침을 먹으러 내려오기 전까지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두었다. 먼저 할의 장례식에 오신 분들께 감사 편지를 작성해야 했다. 그녀는 편지를 가져와서 부칠 수 있도록 케이지에게 전화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 일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로 써 그분들이 케이지에게 사과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어색한 재회였다. 케이지는 부모님들이 그를 반겨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문 앞에 서있었다. 제니는 그와 밥이 복도에서 소곤거리는 대화를 알아듣기 위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케이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사라를 바라보며 거실에 서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왔니, 케이지? 와줘서 고맙다."
"기분은 어떠세요, 어머니?"
"좋아, 좋다."
그녀는 넋을 잃고 대답했다. 그녀가 질문이라도 하듯 제니를 바라보자, 제니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지난밤에 말이다. 할의 장례식 날 밤에 내가 한 말은..."
"괜찮아요, 어머니."
케이지가 성급히 말했다. 그는 방 안을 성큼성큼 걸어서 어머니의 의자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아서는 그녀의 창백하고도 핏기 없는 손가락을 꼭 쥐었다.
"어머니가 흥분하셨다는 거 알고 있어요."
제니는 가슴이 찌릿해져 왔다. 그도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사라의 사과가 진심이든 아니든, 그가 그 사과를 믿든 못 믿든, 어 쨌거나 그들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관에서의 제니의 허드렛일도 끝난 것 같았다. 헨드렌 씨는 중미의 정치적 망명 인을 돕는 할의 임무를 그녀가 계속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얘기를 건네왔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으므로 제니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직접 겪은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더 많은 사람을 구출할 수 있도록 원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녀도 자신이 피로로 인해 눈가에 그늘이 생겼고, 갑자기 입맛이 떨어져서 살이 빠졌으며, 또 핏기가 없이 아파 보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걱정이 되는군."
케이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지쳤어요. 모두들 그렇잖아요. 할의 죽음, 장례, 모두가 치러야 할 대가죠."
"벌써 2주나 지났잖아. 당신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있는 것 같더군. 건강에 좋지 않아."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이에요."
"그건 교회의 몫이지 당신 일이 아니라고. 계속 이러면 조만간 폭삭 늙어 버리고 말 거야, 제니."
"알아요."
그녀는 눈썹을 비비며 힘없이 말했다.
"그만 좀 괴롭혀요, 케이지. 나도 나가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런데..."
"언제?"
"장례식 다음날이요."
"그런데 왜 이러 고 있지?"
"너무 충격을 받으셔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할을 잃고 난 직후에 나간다는 게 잔인한 것 같기도 하구요."
"지금은 어떤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업도 없는 걸요. 나도 스스로 자립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그분들의 보살핌 속에서만 살았어요. 이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생각이 있지."
케이지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따라 와."
"이 물건들은 어떡하고요?"
"아이스크림이 녹는다는 등의 변명은 안 통한다고. 당신이 냉동식품 코너는 안 들렀다는 거 알고 있어."
"이 많은 식료품들을 매장 한가운데에 둘 순 없어요."
"괜찮아."
케이지가 서두르며 말했다. 그는 카트를 밀고 성큼성큼 걷더니 매장 앞으로 밀어 두었다.
"어이, 잭!"
매장 관리자가 사무실 한쪽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손님에게 수표를 교환해 주기 위해 지폐를 세고 있었다.
"어이, 케이지."
"플렛처 양이 이 식료품들을 여기에 잠깐 두겠다는 군."
그는 할인 쿠폰을 얻을 수 있는 냄비 세트를 전시해 둔 곳 앞에 카트를 세웠다.
"나중에 가지러 와도 되겠나?"
"물론이지, 케이지."
케이지는 카운터를 빠져 나오면서 밀키웨이 초코바를 하나 집은 뒤 점원에게 까딱 인사를 하고는 제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매장을 빠져 나왔다.
"그거 훔친 거예요?"
"물론이지."
케이지는 초코 바의 포장을 벗기고 입 속으로 반을 밀어넣었다.
"나머진 당신 거라고."
"하지만..."
그는 나머지 반쪽을 놀란 그녀의 입 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그녀의 항의를 잠재웠다.
"초코바를 훔쳐 본 적은 없겠지?"
제니는 질식하기 전에 초코바를 삼켜야 겠다는 일념으로 입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린 공범자가 됐어."
그는 코르벳 문을 열고 부드럽게, 그러나 사정없이 그녀를 조수석에 태웠다. 케이지는 분주한 다운타운 거리를 거의 고속도로를 달리듯 운전했다. 그는 모퉁이를 돌아 사무실이 죽 늘어선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는 차에서 내려 좌석 아래에서 천 가방을 꺼냈다. 휴일에 주차 미터를 덮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코르벳 앞에 있는 미터기에 천을 덮어씌우더니 제니에게 윙크를 하고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채서 건물 문 쪽으로 데리고 갔다.
"저럴 수 있는 거예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천이 씌워진 주차 미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금방 했잖아."
그가 사무실 문을 열어 주자 그녀가 한 걸음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문턱 바로 너머에서 우뚝 멈춰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안은 어두침침했다. 케이지가 창문 쪽으로 다가가 먼지가 뿌옇게 앉은 블라인드를 걷고 햇볕이 들어오도록 하자 더 어이가 없었다. 제니는 그렇게 엉망인 방을 본 적이 없었다.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에서 나 나올 것 같은 낡아빠진 소파가 벽 쪽에 밀어붙여져 있었다. 장밋빛 소파 커버는 먼지를 뒤집어써 거의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쿠션은 안쪽으로 움푹 패어 있었다. 다른 쪽 벽에는 보기 흉한 금속 선반이 보였다. 선반은 서류와 지도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한쪽 구석이 심하게 휘어져 있었다. 재떨이는 금방이라도 넘칠 듯이 보였다. 가장 멀리 보이는 벽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책상은 벌써 몇 년 전에 폐기 처분했어야 할 것 같았다. 낡은 잡지며, 버려진 종이컵이 쌓여 있었고 여기저기 흠집이 패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그의 이니셜이 아무렇게나 새겨져 있었다. 제니는 케이지에게 천천히 돌아섰다.
"이게 뭐예요?"
"내 사무실이지."
그가 겸연쩍어 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이 쓰레기장에서 사업을 한다고요?"
"그렇게 부를 것까진 없잖아?"
"케이지, 단테가 살아 있었다면 여길 지옥이라고 불렀을 거라고요."
"그렇게 나빠?"
"그렇게 나빠요."
제니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서 몇 밀리는 족히 쌓였을 법한 먼지를 손가락으로 찍어냈다.
"청소한 적이 있긴 한 거예요?"
"그럴걸? 아, 언젠가 관리인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지. 여기 온 사람이 정말 나랑 죽이 잘 맞아서 말이지, 우린 취해서..."
"됐네요, 안 봐도 알겠어요."
그녀는 넘쳐 나는 폐지 박스를 돌아서 벽장일 것 같은 문 쪽으로 향했다.
"어, 제니."
케이지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문이 열리자 커다란 달력이 그녀의 어깨를 내리치며 활짝 펼쳐졌다. 그녀는 놀라서 뒤로 펄쩍 물러났다. 못에 걸려 있는 달력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멈춰 섰다. 달력에 인쇄된 반짝이는 사진을 보고 그녀는 더욱 더 놀랐다.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있는 빨간 머리 아가씨가 텍사스의 심장이라는 문구가 적힌 반짝이는 파란 별로 중요한 부분을 교묘히 가리고 있었다. 베개만한 가슴에 딸기보다 빨간 유두가 그 사진의 포인트였다. 케이지는 어색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인부가 지난 크리스마스 때 준 거야."
제니는 벽장문을 꽝 닫고 그에게 돌아섰다.
"왜 날 여기로 데리고 온 거죠?"
그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가 다시 빼더니 초조하게 허벅지를 툭툭 쳤다.
"여기, 제이, 앉아 봐."
그는 부리나케 소파로 달려가서는 그녀가 앉을 자리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앉기 싫어요. 여기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요. 왜 여기로 날 데리고 온 거죠?"
"당신이 직업을 구한다고 했잖아, 내 생각엔..."
"당신은 진지하지 못해요."
그녀는 그의 생각을 대충 눈치 채고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제니, 내 말을 들어 보라고. 난 누군가가..."
"파괴 중대나 불도저가 필요한 것 같네요. 그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나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게요."
그녀는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그녀 앞을 막아서 어깨를 붙들었다.
"여길 치워 줄 사람을 찾는 게 아니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전화를 받거나 일반적인 사무를 맡아 달라는 거야."
"지금까지 그런 사람 없이도 잘해 왔잖아요. 여태까지는 누가 전화를 받았죠?"
"응답 서비스."
"지금 바꾸려는 이유는요?"
"매시간 확인해야 하는 게 얼마나 불편한데."
"호출기는 어때요?"
"해봤지."
"그런데요?"
"벨트에 차고 다녔는데, 음, 잃어버렸어."
그녀의 눈길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그는 움칠하며 눈길을 피했다.
"하긴, 당신 같은 사람이 벨트에 호출기를 차고 다닌다면 얼마나 불편해 할지 안 봐도 알겠네요."
다시 그를 돌아 나가려는 그녀를 케이지가 억지로 붙들어 세웠다.
"제니. 들어 봐. 당신에겐 일자리가 필요해. 난 지금 그걸 제공하려는 거야."
"침팬지도 훈련만 시키면 전화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지금 응답 서비스를 이용한다면서요?"
"모든 전화를 내게 꼼꼼하게 전해 주는지 알게 뭐야? 또 해야 할 일도 있고."
"예를 들면요?"
"회신하는 거지. 얼마나 많은지 놀랄걸."
"지금은 누가 하고 있는데요? 당신이?"
"아니, 내 친구가."
그녀가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든 일곱 살 된 근시 할머니야. 케케묵은 타자기를 사용하지. 대문자 T는 항상 삐죽이 올라와 있고 s자는 늘 구부러져 있다고."
그녀가 녹색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 당연히 T자는 올라오고 s자는 굽었죠!"
"아, 그런가? 어 쨌거나 내 말을 잘 알아듣는군. 그러니까 당신이 구제 불능은 아니라는 얘기네."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자기도 없네요?"
"곧 살 거야.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곰곰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그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럴 순 없어요, 케이지."
"왜 안 돼지?"
"당신 부모님에겐 내가 필요해요."
"바로 아는군. 그분들은 당신을 너무 많이 필요로 하시지. 그분들이 요구하는 걸 뭐든 다 들어줄 건가? 그분들은 이제 겨우 중년이야. 그런데 삶의 목적이 없다면 금세 늙어 버리실 거라고. 어떻게 든 새 삶을 시작해야지. 당신에게 의존하기만 한다면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해져. 난 자식이 없어서 자식을 잃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죽고 싶은 마음이겠지. 당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계속 돌본다면 아마 앞으로도 그 슬픔에서 벗어나시지 못할 거야."
물론 그의 말이 옳았다. 헨드렌 씨 부부는 점점 기력이 쇠약해 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일이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한 나머지 삶도 그렇듯 서서히 기울어 갈지도 모른다.
"월급이 얼마죠?"
그의 얼굴에 함지박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돈만 아는 수전노로군."
"얼마냐고요?"
그의 무례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재촉했다.
"글쎄."
그가 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일주일에 250달러?"
그녀는 그것이 적절한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졸라 보고 싶었다. 그녀는 여전히 생각하는 척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휴가는 며칠이죠?"
"할 건가, 말 건가. 플렛처 양?"
그가 엄격하게 물었다.
"좋아요. 할게요. 9시부터 5시까지 일하고 점심시간으로는 한 시간 반을 쓰겠어요."
매일 밖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생각이 훨씬 흥분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 시간이라면 목사관으로 돌아가서 헨드렌 씨 부부와 점심을 먹기에도 충분할 것 같았다.
"2주 유급 휴가에 모든 법정 휴일 휴무. 그리고 금요일에는 12시까지만 일할 거예요."
"아주 까다로우시군."
케이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내심 흥분이 되었다. 그녀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월급을 두 배로 올려야 했다 해도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녀가 목사관과 부모님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도록 할 수만 있다면.
"청소를 하기 전까진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래요."
"좋습니다 요, 마님."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저 달력도 없애야 해요."
그는 벽장문을 쳐다보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 세상에. 정말 아끼던 거였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또 있나?"
제니는 그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왔다.
"그래요.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씀 드리죠?"
"선택의 여지를 주지 말라고."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됐나? 그럼 우린 계약을 맺는 건가?"
"네."
그녀도 손을 내밀었지만 악수 대신 그는 그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악수가 웬 말이야?"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머리를 숙여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에 누르고 있던 손은 이제 그녀의 허리에 가볍게 놓여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배 안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키스는 길게 지속되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열었지만 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저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혀를 밀어 넣을 듯 말 듯 그녀를 약 올렸다. 그러나 결국 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식료품 매장으로 돌아와서 쇼핑을 마치고 나서야 그녀는 왜 자신이 그의 키스를 저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의아해 했다. 왜 뺨을 올려붙이거나, 발을 밟는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웃음이라도 터뜨리지 않았을까? 왜? 그리고 끝내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왜 맑은 눈빛과 얼얼하게 젖은 입술로 가슴까지 쿵쾅거리며 그를 바라보았을까?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때 그녀의 사지가 너무도 나른해졌다는 것이다. 솟아오르는 기쁨에 약해져 버렸다. 설사 저항하고 싶었다고 해도 손가락을 들 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은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헨드렌 씨는 그녀가 직업을 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니가 선언하자 사라는 접시에 포크를 떨어뜨렸다.
"월요일부터 시작해요."
"그러니까 일을 한다는 거냐?"
"케이지를 위해?"
밥이 아내를 대신해서 말을 마쳤다.
"네. 그 전에 끝내야 할 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그녀는 그들이 멍해 있는 동안 부엌을 빠져 나왔다. 케이지가 충고해 준 대로 그녀는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다음 월요일 아침 9시 1분 전에 제니는 사무실에 들어섰다. 문은 열려 있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다른 방에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사무실은 청소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청동 색 벽은 이제 온화한 크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끔찍한 소파는 고급스러운 초콜릿 빛깔의 가죽 의자 두 개로 대체되었다. 그 사이에는 호두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리놀륨 타일 바닥은 나무로 새로 단장됐고 이국적인 향기가 풍기는 양탄자가 바닥 중앙에 깔려 있었다. 금속 선반이 있었던 곳에는 나무 선반과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가구는 공간을 최대한 넓어 보이도록 짜여져 배치되어 있었고 모든 것은 깔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책상은 아이스링크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뒤로는 왕좌처럼 보이는 가죽 의자가 보였다. 반짝거리는 책상 위에는 신선한 꽃이 한 다발 놓여 있었는데 갓 배달됐는지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 꽃은 당신 거야."
뒤를 돌아보니 케이지가 벽장 바로 앞에 서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수표책으로 했지."
그가 심술궂게 대답했다.
"요즘은 수표가 마술 봉보다 더 효과가 좋더군. 마음에 드나?"
"네, 그렇지만..."
제니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내가 너무 흠을 잡았나 봐요. 엄청난 비용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 그렇게 약한 모습 보이면 안되지. 지저분하다고 다그친 게 누군데. 쓰레기장이라고 말이야."
그가 씩 웃자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당신이 맘에 드는 걸로 고를 수 있게 달력도 몇 개 가져왔지."
그가 첫 번째 달력을 펼치자 그녀가 부드럽게 숨을 몰아 쉬었다.
"각 달의 연인."
케이지는 웃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며 엄숙하게 말했다. 근육질의 남자들이 끈 팬티만 입은 채 풋볼 헬멧을 쓰고 음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건 10월의 연인이야. 축구 시즌이지. 다른 달도 보고 싶나?"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달력을 넘기려는 자세를 취하며 정중하게 물었다.
"충분해요."
제니가 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뭐가 있죠?"
케이지는 그 달력을 밀어 두고 또 다른 달력을 집어 들었다.
"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는 거지."
오일을 발라서 번쩍거리는 가슴과 불거져 나온 이두박근, 그리고 울퉁불퉁한 배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으면."
케이지는 세 번째 달력을 집어 들며 말했다.
"르느와르 그림 집."
"르느와르로 걸어요."
케이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요구대로 르느와르 그림이 인쇄된 달력을 못에 걸었다.
"나머지도 벽장 속에 넣어 두세요."
제니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가 맥 빠진 표정을 짓자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지, 사무실이 너무 아름다워요. 마음에 들어요."
"잘 됐네. 여기에서 편안히 일했으면 좋겠어."
"꽃도 고마워요."
그녀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 가죽 의자에 앉아 자세를 잡아 보며 말했다.
"특별 케이스야."
그가 공무용 편지지를 넣어둔 서랍과 새 타자기 사용법을 알려주기 전까지 그들은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이 편지부터 하면 돼."
그가 화 일을 건네주며 말했다.
"대강 썼는데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거티는 곧잘 알아봤는데."
"s자를 구부려 쓴다던 친구요?"
제니는 순진한 척 물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맞아."
그는 잠시 후 채굴장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떤 곳인가요?"
"샘플이 좋아 보여. 분명히 원유가 있을 거야."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다녀오세요."
"안녕."
그는 나서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거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좋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그는 정오가 되기 몇 분 전에 커다란 봉투를 들고 되돌아왔다.
"점심시간이야!"
그는 문을 들어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제니는 조용하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무엇인가를 받아 적고 있었다.
"네, 헨드렌 씨가 들어오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자랑스레 그에게 메모를 전했다. 그는 메모를 일고 종이를 툭 쳤다.
"좋았어.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야. 당신이 내게 행운을 가져 다 줬나 보 군."
그는 책상 모서리에 봉투를 올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점심을 가져왔어."
"매일 이런 친절을 기대해도 될까요?"
그녀가 일어나서 봉투를 열며 물었다.
"절대 아니지. 오늘은 특별 케이스라고 했잖아?"
"전 집에 가서 사라와 밥이 잘 있나 보고 와야겠어요."
"잘 계실 거야. 나중에 전화하면 돼."
그의 유쾌한 분위기가 전염됐는지 그녀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가 들고 온 점심을 펼치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가 벽장 속으로 사라지더니 샴페인 한 병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짠!"
"어디서 가져왔어요?"
"냉장고에 넣어 두었지."
"거기 냉장고도 있어요?"
"소형. 아직 안 봤나?"
"네. 바빴거든요."
그녀는 그가 서명해야 할 편지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샴페인을 마실 자격이 있어."
코르크 마개를 뽑으며 그가 말했다. 거품을 부글거리며 샴페인이 넘쳐흘렀다. 케이지는 그녀에게 종이 컵 가득 샴페인을 따라 주었다. 그녀는 황송한 듯이 컵을 받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다니?"
"믿기 힘들겠지만 점심 때 샴페인을 마시는 일은 없답니다. 목사관에서."
그녀가 빈정대듯이 말했다.
"웬 지 어색하네요."
"잘 됐네. 그럼 취할지도 모르겠는걸. 옷을 벗고 책상 위에서 춤이라도 추든지."
그는 탐색하는 눈길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런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했다. 당황한 그녀는 그가 컵에 샴페인을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신은 자주 하나요?"
"점심 때 샴페인 마시는 일? 아니."
"그럼 당신도 취해서 발가벗고 책상 위에서 춤을 출지도 모르겠는걸요."
그는 그녀의 컵에 가볍게 컵을 부딪히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제니."
그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속삭였다.
"만약 우리가 둘 다 벌거벗고 책상 위에 올라가 있다면 춤은 안 추겠지?"
그녀는 숨이 멎을 듯했다. 최면을 거는 듯한 그의 눈길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서야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한 모금 마셔."
케이지가 예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샴페인은 차갑게 그녀의 혀를 자극했다.
"어때?"
"좋아요."
그녀는 또 한 모금을 삼켰다. 그는 거의 코가 맞닿을 때까지 머리를 가까이 가져 다 댔다. 그의 눈이 불타고 있었다.
"이건 어때?"
"뭐가요?"
"매콤한 훈제 쇠고기!"
훈제 쇠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사실 제니가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축에 속했다.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사업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그는 제니의 재치 있고도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받고 흐뭇해졌다. 그는 더 이상의 샴페인은 권하지 못했다. 식사를 끝마친 후 그는 빈 용기들을 모아서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당신 사무실에는 쓰레기를 못 버리겠네."
그가 뾰로통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가 떠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녀는 그들이 모두 벗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춤을 추지 않을 거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또다시 그녀는 그 생각에 빠져들었다. 케이지와의 생활은 그날그날 정해진 일이 대강 있는 듯했지만 항상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미스터리로 가득 찬 정글 속의 강을 거슬러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 다음 굽이진 곳에서 어떤 놀라운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자그맣지만 그런 선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주 대단한 의미를 지닌 선물을 곧잘 남겨 두었다. 함께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에는 하나의 초가 꽂힌 작은 케이크가 책상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커피메이커 옆에서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발견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에 문을 연 그녀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커다란 곰 인형이 책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도 그들에 관한 소문으로 마을이 떠들썩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은행 출납 원들은 그녀가 케이지의 사업에 관한 은행 업무를 맡아 하자 처음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제는 그들도 케이지 대신 그녀를 만나는 일에 익숙해졌겠지만 그녀가 떠나고 나면 수군거리기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제니는 알고 있었다. 수년간 알고 지낸 친절한 우체부는 이제는 교회의 우편물이 아닌 케이지의 우편물을 다루는 그녀를 오싹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꾸준히 교회에 모습을 비치고 있는 케이지의 대한 소문도 온 마을에 파다했다. 그녀는 새로운 일을 매우 좋아했고 2주째로 접어들자 모든 일을 프로처럼 해결해 나갔다.
"헨드렌 엔터프라이즈 입니다."
"제니, 축하할 일이 있어."
케이지가 웃으며 말했다. 제니는 전화기 저편에서 떠들썩한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원유가 나왔나요?"
그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래, 원유가 나왔어!"
그도 소리쳤다. 그를 둘러싼 인부들은 벌써부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치킨 스테이크를 사주지. 1시간 안에 갈게."
"볼일이 좀 있거든요.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게 좋겠어요."
"좋아. 왜건 휠에서 2시 반, 어때?"
그녀도 동의 했다. 2시 반 무렵에 제니는 시내 거리를 아무런 목적 없이 쏘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인도에 멍하니 서서 화려하게 장식된 유리창 너머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마침 운전을 하다 그곳을 지나치던 케이지는 그녀를 발견하고 이름을 부르며 경적을 울렸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불법 유턴을 해서 한 자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주차장에 대강 차를 세워 놓고 인도로 뛰어나갔다. 터벅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부츠와 청바지는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니."
그가 숨가쁘게 불렀다.
"여기가 아니 잖아? 왜건 휠이 어디 있는지 모르나?"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의 환한 미소가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살짝 흔들었다.
"제니, 대체 무슨 일이야?"
"케이지?"
그녀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눈을 깜빡 거리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케이지."
"이런, 날 놀라게 하지 마."
그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픈가?"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떨구었다.
"아뇨. 하지만 점심을 먹을 기분이 아니 예요. 미안해요. 유전을 발견한 건 너무 축하해요. 그런데..."
"그런 헛소린 집어치우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 말해."
그녀는 그에게 스르르 무너졌다. 그는 가슴에 그녀를 안고 자그마한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자, 왜 이러는 거야? 커피숍으로 들어가자고, 콜라라도 마실까?"
그들은 반 블록쯤 걸어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최소한 케이지는 걸었다. 제니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녀는 녹색 소파에 말 그대로 쓰러지듯 앉았다.
"콜라 두 잔, 헤이젤."
그는 카운터 뒤에 있는 웨이트리스에게 주문을 했다. 케이지는 제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헤이젤이 다가와 테이블에 콜라 두 잔을 내려놓았다.
"일은 어떻게 돼 가요, 케이지?"
"잘돼."
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헤이젤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동생이 죽은 후로 케이지 헨드렌이 변하고 있다고 말들 했다. 그리고 꿀단지에 따라 붙는 파리처럼 그가 플렛처 라는 여자 주변을 서성인다고도 수군거렸다. 모든 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헤이젤은 항상 케이지와 최소한 반 시간 동안은 음탕한 농담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제니 플렛처와 함께 들른 그는 제니를 마치 눈을 떼면 사라지는 연기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제니, 콜라 좀 마셔 봐."
케이지가 그녀에게 컵을 밀어 주며 말했다.
"유령처럼 창백하다고."
그녀가 순순히 빨대를 빨았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그녀의 고개가 다시 바닥으로 떨구어졌는데 그 몇 초가 그에겐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자제력이 바닥이 날 즈음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반짝였다. 동시에 두 줄기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케이지."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임신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