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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의 초원에서(The night of the bull) 1

Bollnow 2024. 3. 5. 06:34

애수의 초원에서(The night of the bull)

Anne Mather

 

1

4월에 접어들자 북서풍이 오트 프로방스 일대의 사면(斜面)에서 얼어붙은 공기를 긁어모아 로느의 골짜기를 거쳐, 폭풍같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카마르그 지방을 휩쓸어 갔다. 그렇게 되면 사람도 짐승도 그저 몸을 움츠린 채 바람이 잦기를 기다릴 뿐이지만, 갈대 사이에 싹튼 붓꽃과 나팔, 수선은 용감하게 피어나 하구(河口)에 봄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윽고 그 심술궂은 계절풍도 기진맥진한 듯이 딱 멎는다. 그러면 그때까진 얼음을 밟고 질주하는 야생 백마(白馬)의 발자국을 쫓아 해조(海鳥)들이 헛되이 먹이를 찾고 있던 얼음판을 햇빛이 마법처럼 녹여 버린다.

한여름엔 작열하는 햇볕 때문에 금이 간 진흙밭으로 변하는 삼각주(三角洲) 지대도 그때엔 색채도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생명과 활기에 넘친다. 조용한 못과 싱싱하게 푸른 풀밭에는 야생의 생명이 넘쳐 흐른다. 활기찬 참새는 키가 큰 풀을 쫓아다니고, 벌새는 깃털을 선명하게 번뜩이며 수면에 떠오른 벌레를 향해 급강하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여왕처럼 우아한 플라밍고가 물가를 산책하는 기이한 광경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이안은 이 계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청춘에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된, 프랑스의 이 지방 프로방스에 왔던 때가 바로 이 계절이었으므로. 그리고 지금, 3년 전에 황급히 이곳을 떠났을 때와 같은 격정(激情)에 사로잡혀서 다시 되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마르세이유 마리냐느 공항에 착륙 태세를 취한 카라벨은 갑자기 기수(機首)를 수그렸다. 좌석에 앉아 팔걸이를 틀어쥐면서 그녀는 가벼운 욕지기와 함께 아직 비행기 안에 있음을 새삼 의식했다. 카마르그의 정경은 선명하게 뇌리에 되살아나긴 했으나 지금 그녀를 맞아주는 것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통로 저편에 앉은 청년이 걱정스런 듯이 그녀 쪽을 보고 있었다. 비행 중에도 이따금 그 청년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느끼곤 있었지만 그냥 무시해 왔었다. 누구하고도 말을 주고받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아까의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신경질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팔을 슬며시 만지며 청년은 말했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괜찮습니까?"

그 악센트로 틀림없이 프랑스인임을 알았지만, 어떻게 내가 영국인인 줄을 알았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마 스튜어디스와의 대화를 들었던 모양이다.

안전벨트를 맨 채 앉음새를 고친 그녀는 약간 웃음을 띠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착륙할 때엔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청년의 옆얼굴의 윤곽이 뚜렷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군. 크렐리 이모 같으면 자기에게 흥미를 보여 주는 사람을 매정하게 대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거야. 하지만 이모는 여기에 없어. 나는 외톨이야. 그리고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같아. 이젠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눈길을 창문으로 돌렸다.

활주로가 급속히 다가온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약간 진동하면서 착륙 장치에 무게가 걸리는가 싶더니 어느 새 착륙하고 있었다.

다이안은 벨트를 끄르고 머리를 매만지고는 일어서서 소지품을 챙겼다. 활주로에 비치는 햇빛을 보니 코트는 필요치 않을 것 같아 팔에 걸고, 어깨에 맨 항공 가방의 끈을 잡았다.

"도와 드릴까요, 아가씨."

또 그 청년이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스튜어디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트랩을 내려가 정해진 대로 공항 건물께로 가고 있었으나, 그 청년은 분명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안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흔들고는 곧바로 앞을 본 채 급히 출구로 향했다. 바깥 공기는 뜻밖에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머리 위에서 울려오는 제트 엔진의 굉음(轟音)도 문득 가슴에 솟구친 슬픔을 씻어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그녀는 트랩을 뛰어내려 세관 쪽으로 걸어갔다.

세관에서의 절차는 곧 끝났다. 담당자들은 매력적인 여성 앞에서 프랑스 남자의 특유하고 익숙한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대해 주었던 것이다.

바깥에 나온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는 동시에, 자기 앞에 당면할 일에 그 어떤 자신(自信)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부푸는 듯한 기분을 걷잡지 못하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닷물 냄새가 섞인 꽃 향기가 풍기면서 등에 쬐는 햇빛은 따뜻했다. 공항에 세워 두기로 예약한 렌터카는 어디에 있을까. 마르세이유로 손님을 태워다 줄 버스며 자동차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 청년이 나타나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다이안은 좀 초조해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끈질기게 말을 건네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다이안은 깊은 바다 같은 푸른 빛과 눈썹 언저리에 성난 표정을 떠올리며 돌아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마중 나온 분이 계십니까, 아가씨?"

다이안은 한순간 망설이고 나서 끄덕였다.

"그럼 도와드릴 만한 일은 없군요, 아가씨?"

"고마워요, 괜찮습니다."

몇 발짝 걸은 다음에 다이안은 인터 프랑스 여행사의 자동차를 찾아내려고 죽 늘어선 차들을 살펴보았다. 한 줄기의 냇물처럼 잇달아 자동차가 다가왔다가는 물러간다. 그 차체(車體)가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했다.

가방을 뒤적여서 다이안은 선글라스를 꺼내어 썼다. 큰 네모꼴의 폴라로이드여서 얼굴 표정도 잘 감춰 주었다.

눈치있게 그 청년이 물러나 주었으면 싶었으나, 그는 다시 옆에 와서 말했다.

"이걸 떨어뜨렸군요, 아가씨."

다이안은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그런 말에 냉담하게 반발해 주려고 돌아다보았으나, 그 청년의 손에 호텔의 예약 카드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머나, 고마워요. 선글라스를 꺼낼 때 떨어뜨린 모양이군요, 정말 고마워요."

청년은 미소를 띠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천만에요. 하지만 덕분에 아가씨가 아를르에 체재(滯在)할 작정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곳은 아름다운 거리지요. 나도 바로 그 가까이에 살고 있습니다."

다이안은 섬칫했다.

"정말 그렇지요."

그녀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말씀대로 아름다운 거리예요."

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도와드릴 만한 일이 없습니까, 아가씨?"

", 자동차를 얻어 놓았어요. 어딘가 저기쯤에 있을 거예요."

한마디 한마디를 확인하려는 듯이 듣고 있던 청년은 익숙한 동작으로 정차(停車)하고 있는 자동차들을 살펴보았다.

"이리 오세요, 아가씨의 차를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다이안은 자신이 있는 듯이 슈트케이스를 안고 걷는 그를 따라갔다. 사실 그는 이내 소형 시트로엔을 찾아내어 배차원(配車員)에게 소개해 주었다. 내 이름을 용케 알아냈구나 싶으면서 그녀는 슈트케이스를 트렁크에 넣었다.

"아마 또 만나게 될 겁니다, 아가씨."

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작별을 고하는 다이안에게 그 청년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아를르엔 자주 갑니다. 저녁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게 되면 영광이겠습니다."

다이안은 모호하게 웃어 보이며 청년의 유혹을 그냥 들어넘겼다. 역시 단순한 관광객으로 보인 모양이다. 이번 여행의 진짜 이유를 그 남자가 알 리가 없다. 그녀 자신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니 말이다.

손을 흔드는 청년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면서 다이안은 자동차를 발차시켰다. 단순한 관광여행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마르세이유에서 잠시 서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접어들어 아를르 가도에 들어서서 크로 대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거기는 거의 인적이 드문 황무지로써 군데군데 개척한 자취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다이안은 언젠가 마노엘이 얘기해 주던 전설이 생각났다.

그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이 평원에서 거인족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로 되었던 모양이다. 구원을 요청받은 제우스는 암석을 빗발치듯 떨어뜨려서 헤라클레스의 목숨을 건졌는데, 그 후 그 전투 때문에 이 고장 일대는 돌투성이의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마노엘! 온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런던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마노엘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럽게 여겨진다. 핸드백을 끌어당겨 담배를 꺼내고는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였다. 지쳤을 때 이외엔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다이안이었으나 지금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를르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가 지나서인데 여독(餘毒)이 풀리지 않아 몹시 지쳐 있었다. 곧바로 호텔에 자동차를 대어 숙박 절차를 마쳤다. 샌드위치를 방에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는 이내 방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 비단 실내복을 입고 작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호텔 종업원이 가져다 준 맛좋은 커피를 마셨다.

플라타너스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나부끼고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창문 밑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다이안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고집스레 자제(自制)를 하고 있어도 아무 의미도 없다. 우연히 마노엘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고, 설사 만나더라도 그가 만나기를 승낙해야 할 일이지만

겨우 되찾은 편안한 마음에 암담한 생각이 들자, 그녀는 샌드위치의 접시를 밀어치웠다. 만약 그가 만나기를 거부하면 어떻게 할까.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떻든 진상을, 그녀가 결심을 하게 된 진짜 이유를 그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또 한 잔의 커피를 따르자 컵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그 따스함을 즐기듯 흔들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고 거듭 궁리했다. 어떤 말을 물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빈 커피 잔을 받침접시에 되돌려 놓고 의자에 깊숙이 앉아 핸드백에 손을 내밀어 가죽지갑을 꺼내서 열었다. 그 속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의 조그마한 사내애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가슴이 메이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소리를 내어 울어본 지도 벌써 오래 된다. 지금 그 애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크렐리 이모를 애먹이고 있진 않을 테지.

충동적으로 그녀는 사진의 아이에게 키스를 했다.

"잘 자요, 조나단."

하고 목쉰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사진을 지갑에 도로 넣고 그것을 슈트케이스 속에 넣어 버렸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하고 그녀는 아쉽게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창문의 커튼을 통해 비쳐 드는 햇빛에 잠이 깼다. 한순간 어디에 있는지 얼른 생각나지 않아, 다만 조나단의 침대가 왜 여느 때처럼 옆에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거의 언제나 떠날 줄 모르는 어두운 마음을 밀어치우려는 듯이 그녀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 창가에 가서 커튼을 열고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의 중앙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는 몇 명의 어린이들이 환성을 지르며 공을 쫓아다니면서 뛰놀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또 몹시 가슴이 아파 창가에서 물러나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몸에 착 붙는 판탈롱과 흰 색깔의 블라우스를 입고 화장대의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늘씬한 모습은 안정감이 있고 활동적으로 보였다. 단순하게 묶은 검은 머리가 성숙한 여자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숙하게 보이게끔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리 애써도 귀여운 눈언저리며 어쩐지 섹시하게 볼록한 입술은 앳되고 약해 보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을 먹고 나서 그녀는 아를르의 중심가로 자동차를 몰고 갔다. 그 거리가 넓진 않지만 상가(商街)들이 그날 아침엔 활기에 넘쳐 있었다. 가게 앞에 듬뿍 놓인 맛있게 보이는 해산물을 보고 식욕을 느꼈으나 상인들의 권유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대신 시트로엔을 주차시키고는 윈도우쇼핑을 하며 점심때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아마 점심을 먹으러 돌아와 있을 마노엘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그녀는 상 살바도르 농원에 점심때쯤에 전화를 걸어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마노엘의 어머니하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자기와 마노엘만의 사이의 일인 것이다.

크렐리 이모 앞으로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리는 엽서를 부치고 나서 점심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 이번 일을 가지고 너무 흥분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마노엘을 만나기까지 마음을 가라앉혀야지. 그 사람이 자기를 너절한 여자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여기에 온 것을 마노엘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이젠 추측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마 이본느와 결혼하고 있을 게고 그렇다면 그의 입장도 있을 것이 아닌가. 만나기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이본느가 신경을 쓴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어떻든 3년 전의 마노엘과의 관계를 미끼로 해서 어떻게 그로부터 돈을 꾸려고 생각했을까. 그런 의무가 있다고는 그 사람도 결코 생각지 않을 텐데.

정오가 지나자 이내 그녀는 호텔로 돌아가 마음내키지 않은 채 현관 홀로 들어갔다. 거기에 공중전화 박스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고 다가갔다. 용기가 꺾이기 전에 전화를 걸고 싶었던 것이다.

번호는 메모해 두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지 않고서도 이내 기억해 낼 수 있었으므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어 교환수에게 말했다. 상대방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손바닥에 땀이 솟고 이마에도 땀방울이 솟았다.

곧 수화기를 들면서 여자의 목소리가 응답했다.

", 상 살바도르 농원입니다. 누구십니까?"

다이안은 얼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나 간신히 말했다.

"상 살바도르 부인?"

"아니에요, 잔느예요. 상 살바도르 부인을 찾으십니까?"

"아닙니다!"

다이안은 황급히 말했다.

", 마노엘 상 살바도르 씨는 계십니까?"

잔느는 잠시 망설이고 나서 대답했다.

"아니요, 지금 안 계세요. 아비뇽에 가 계세요."

다이안은 낙심했다. 마노엘이 아비뇽에 가 있다니! 언제부터일까? 그녀는 재빨리 생각했다. 잔느- 늙은 가정부임을 알고 있다-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제대로 대담해 줄지 의심스럽다. 그 말투에도 망설임이 느껴졌고, 마노엘과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 하고 있다.

다이안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 알았습니다."

라고만 말하고 당황한 나머지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 박스에서 나와 보니 홀에 호텔의 지배인이 서 있었다.

지배인은 창백해진 그녀의 뺨과 이상한 눈빛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다이안은 냉정을 되찾으려고 고개를 흔들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날씨가 좋군요."

"그렇지요, 좋은 날씨입니다."

하고 끄덕이는 지배인을 남겨 두고 그녀는 달아나듯 층계를 뛰어올라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크렐리 이모가 만들어 준 선명한 레몬색의 목면 시프트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는 빗질하고 나서 간단하게 고쳐 묶은 뒤, 눈에는 연한 올리브색의 아이섀도를 칠하고 입술엔 무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그러나 마음은 허공에 떠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기계적인 데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전화를 거는 일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또 한 번 전화를 걸어서 마노엘이 없으면 가족은 그녀의 의도를 의심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런 위험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할까?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지만 아비뇽까지 자동차를 몰고 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다소 시장하긴 했지만 별로 식욕도 느끼지 못한 그녀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생선 스프는 맛이 좋았으나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그 이외의 것도 모두 사양한 채 디저트로 나온 신선한 과일만 먹었다. 커피는 참 좋았다. 머리도 몸도 상쾌하게 해줄 만큼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야생의 말떼를 보러 가고 싶어졌다.

식당에서 나와 프런드 앞을 지나 호텔의 넓은 입구에 이르자, 지금은 그늘이 되어 있는 광장 쪽을 바라보았다. 호텔의 손님은 적었다. 아를르의 관광 계절로선 아직 일렀다.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은 5월과 6월인데 그 무렵엔 여러 가지 축제가 시작되며 축제에 집시들도 모여든다.

다이안은 별안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소금기가 많은 빵과 도기(陶器) 항아리로 따라주는 붉은 포도주 맛이 되살아나서 무심코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모두들 들떠서 내지르는 소란한 소리와 음악이 들리고, 몇백 년 전부터 있어온 의식에 참가하고 있다는 가슴 설레는 기분이 되살아난다

주먹을 틀어쥐고 그녀는 호텔 안으로 돌아갔다. 추억에 잠겨 있어도 별수없다. 그것이 아무리 추악하고 싫은 일이라도 해내야 한다. 조나단을 위한 일이므로.

오후에 내내 호텔에서 지냈기에 지배인은 놀라고 있었다. 지배인의 눈엔 분명히 관광객으로 보인 그녀가 관광명소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스러웠던 것이다. 지배인은 라운지에 있는 그녀를 몇 번 살펴보러 왔다. 다이안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배인이 당황하지 않도록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었다.

저녁때가 가까이 되어 광장에 떨어지는 그림자가 길어지는 무렵, 그녀는 라운지에서 나와 다시 전화박스로 향했다. 무릎이 약간 떨려서 걸음을 옮겨 놓기가 어려웠으나 가까스로 박스에 닿아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도 여자의 목소리가 대답하기에 다이안은 낙심했으나 잔느는 아니었다. 소녀의 목소리인데 다이안에겐 약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마노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지, 그렇군 루이즈다.

영어의 악센트를 눈치 채지 않기를 원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마노엘 상 살바도르 씨하고 얘기하고 싶은데요."

"오빠요?"

소녀는 놀란 모양이었다.

"누구세요?"

다이안은 망설였다. 만일 이름을 대면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에 빠져 버린다.

"마노엘의 친구입니다만."

소녀는 놀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영국 분이 아녜요?"

다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발음은 나쁘지 않았을 텐데. 몇 해 동안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어떻게 대답할까? 부정을 하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긍정을 하면 입장은 더욱 난처해진다.

"별로 중요한 볼일은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고 자기의 비열함을 경멸하면서 수화기를 놓았다.

박스에서 나와 황망히 층계를 올라가 방에 돌아와서 화장대의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 보았다. 흐린 불빛 눈엔 불안이 깃들여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이안 씨, 다이안 씨!"

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안은 가운을 입으면서 방을 가로질러 가서 문을 열었다. 하녀였다.

"전화가 왔습니다."

하고 하녀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래층에서 받아 주세요. 홀입니다."

다이안은 문의 손잡이를 틀어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나한테 걸려왔나요?"

"틀림없습니다, 다이안 씨. 남자 분입니다."

"남자라구요!"

다이안은 당황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 알았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곧 내려가지요."

늘씬한 몸매를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꼭 맞는 크림색 바지에 비취색의 두꺼운 스웨터를 입으면서, 누가 전화를 걸어왔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까 전화를 받은 사람이 루이즈였대도 이렇게 이내 나를 알아낼 리는 없고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내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떨리는 발로 층계를 내려가 전화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수화기를 드니,

"킹 씨예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노엘은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가볍고 젊어서,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목소리였다.

"누구십니까?"

"앙리 마르탕입니다, 아가씨.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다이안은 박스의 벽에 기대었다.

"아아, 마르탕 씨."

하고 목쉰 소리로 말했다.

"이름을 모르고 있었네요."

", 하지만 다행히 댁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요. 호텔에 계셨지요? 거긴 마음에 드셨습니까?"

다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 좋은 곳이더군요."

하고 시들해지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쩐 일로 전화를 거셨지요?"

상대방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건 까닭 말인가요? 물론 아가씨를 오늘 저녁식사에 초대할까 해서지요."

"죄송해요, 저는 갈 수가 없군요."

다이안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다이안은 가냘픈 어깨를 추썩였다.

"너무나 피곤해요. 도저히 식사를 할 기분이 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서운하군요."

그는 무심코 큰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뭘 좀 드셔야 할 텐데요."

"죄송해요."

다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적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건 곤란하군요. 그럼, 점심은 괜찮죠?"

"언젠가는."

다이안은 분명히 말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박스에서 나와 천천히 층계를 올라가 방에 돌아온 다이안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슬픔이 솟구쳤다. 고독감에 사로잡혀 크렐리 이모와 조나단이 자기를 의지하고 영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비참한 심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도저히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앉아 있을 기분은 될 성싶지 않아 핸드백을 손에 들고 아래층에 내려가 광장 쪽으로 나갔다. 어두운 가로등이 동그란 불빛 고리를 그리고 있었다. 아주 따뜻해서 녹을 듯한 부드러운 초저녁이 그녀의 지친 마음과 머리를 달래 주었다. 내일은 내일이야!

로느 강가의 조그마한 피스트로에서 한 잔의 커피와 빵을 먹고 나서 다이안은 투우장(鬪牛場) 쪽으로 걸어갔다.

몇 번인가 마노엘을 따라 투우장에 가서 욕지기가 나는 것 같은 무서운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카마르의 황소는 투우사의 적수답게 작열하는 오후의 햇빛 속에서 피로 피를 씻는 잔혹한 광경을 벌이곤 했다. 다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버렸지만 겁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투우사들에겐 매료(魅了)되었던 것이다.

아를르의 투우장엔 스페인에서도 국경을 넘어 유명한 투우사들이 찾아와서 코리다에 출전하여, 날카로운 뿔로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힘센 검은 황소와 비술(秘術)을 다해 싸웠고, 도처에서 찾아온 아마추어들이 이런 프로 투우사에게 도전하여 잇달아 서로 먼저 나온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끝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다이안은 농원의 목장에서 마노엘이 황소에게 도전하여, 투우장에서라면 흥분한 '오레!'라는 환성이 오를 만한 기술을 부리게 하는 것을 보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런 땐 가슴이 저미도록 걱정시키는 마노엘이 미워서 노여움에 사로잡혀 달아나곤 했지만 이내 마노엘이 쫓아와서 그녀를 땅바닥에 쓰러뜨려 모든 것을 잊게 할이만큼 세찬 입맞춤으로 노여움을 가라앉혀 주었던 것이다

살을 엘 듯한 슬픔이 치밀어 왔다. 그 행복했던 몇 달은 얼마나 빨리 지나가 버렸던가. 꿈의 절정이었던 나날들은 또 얼마나 감미로웠던가.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작별은 얼마나 괴로웠던가!

아홉 시경에, 그녀는 산책에서 돌아왔다. 혼자 조용히 걸어 다닌 덕택에 흥분했던 신경도 가라앉아 기분좋게 피로감이 몸을 적시고 있었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이제 생각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구름 잡는 듯한 내일을 걱정해 본들 소용이 없잖은가.

가벼운 마음으로 백을 어깨에 매고 그녀는 천천히 호텔의 홀에 들어가며, 귓전에 걸리는 검은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처음에 홀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널찍이 깔린 풀빛 양탄자를 가로질러 가니 층계 밑에 놓인 의자에서 웬 사나이가 벌떡 일어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다이안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무릎까지 올라온 진흙투성이의 부츠와 회색 쉐이드 바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눈을 치뜨자 근육질의 긴 몸과 그림자 속에서도 뚜렷이 알 수 있을 만큼 볕에 그을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나이는 한순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등줄기를 따라 번졌다. 그때 사나이가 불빛 속으로 한 발을 내놓았고,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뒷걸음질 쳤다.

"여어, 다이안."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목소리엔 마음이 메이는 듯한 냉랭함이 깃들여 있었다.

"왜 여기에 왔어? 나하고 얘기하고 싶다는 건 뭐 때문이지?"

 

2

다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진 마음속에 숨어 있던 마노엘 상 살바도르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심정이 북받친 끝에 그려낸 미친 듯한 환상이 아닐까 하고 한순간 생각했을 정도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것은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는 마노엘은 아니었다. 마노엘의 모습은 선명하게 그녀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지금 그녀 앞에 서 있는 쌀쌀한 눈을 한 낯선 사나이는 그녀가 지난 날 사랑했던 뜨거운 피가 통하는 그 사람과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얼굴 모양은 같았지만 더 이상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확실히 짙은 눈썹 밑의 잿빛 눈동자, 자랑스럽게 솟아오른 광대뼈, 육감적인 두꺼운 입술, 탄력 있는 턱언저리에까지 돋아난 짙은 살쩍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예전보다 여위고 눈은 패여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깊은 주름이 잡힌 얼굴엔 권태로운 우울이 감돌고 있었다. 몸도 가늘어져 있었으나 가슴의 근육은 부드러운 쉐이드의 상의를 밀어내듯 솟아오르고 강인한 넓적다리는 빠듯한 바지 속에서 터질 것같이 보였다.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찾아온 이 재회(再會)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힘없이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증오와 흡사한 기색을 띠고 냉담하게 자기를 바라보는 이 사나이로부터 동정을 얻는다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으랴. 하물며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으랴. 3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두 사람에게 가져다 준 것을 어리석게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대답을 해주면 좋겠는데, 아가씨."

그것은 마치 낯선 사람과도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다이안은 사나이의 눈에 떠오른 비난에 견딜 수 없어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무엇을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 왜 저렇게 불신의 기색, 혐오의 기색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일까?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그토록 싫단 말인가?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다이안의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노엘은 짜증이 나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그런 건 아무랬건 상관없어. 왜 여기에 왔어? 이제 새삼스럽게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요?"

이렇게 말하면서 한 발을 디디며 그녀의 어깨를 아플 만큼 힘껏 잡고 돌아서게 했다.

"얼굴을 돌리지 말아, 다이안! 아니 그렇게 내가 보기 싫은가?"

그의 손에 잡힌 채 다이안은 떨고 있었다. 마노엘은 웃지도 않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꺼운 풀빛 스웨터와 크림색 바지에 싸인 그녀의 몸에 눈길을 던지자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엄지손가락이 다이안의 목언저리를 건드렸으나 이내 입을 꼭 다물고 손을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묻겠는데 왜 당신은 여기에 왔지?"

"나는,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하고 다이안은 동요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마노엘의 눈이 흐려졌다.

"난처한 일이 생긴 모양이로군?"

그리고 안타까운 듯이 사방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기선 얘기할 수가 없군. 방은 잡아 뒀을 테지. 그리로 가요."

"안 돼요!"

애걸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안 돼요. 거긴 작은 방침실뿐이라서"

"아니, 당신 방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할 것 같아서 그러는 건가? 그게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당신은."

그는 불쾌한 듯이 입을 일그러뜨렸다.

다이안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길고 쓸쓸한 밤을 지내야 할 그 무미건조한 방에 그의 모습이 스며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으랴.

"저기에, 저쪽에 라운지가 있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혹시혹시나 사람이 없으면"

다이안은 라운지의 문을 열었다. 그 안은 캄캄했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올리니 인기척이 없는 공간에 불빛이 넘쳤다.

마노엘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라운지에 들어서자 등 뒤로 문을 닫고 거기에 기대었다. 사나이의 온몸에서 일종의 대항키 어려운 힘이 발산하고 있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다이안? 왜 내 도움이 필요한 거지?"

다이안은 쏘는 듯한 사나이의 눈길을 견딜 수가 없어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윽고 상대방의 그런 태도에 견딜 수 없다는 듯 억센 말투로 말했다.

"어서 말해 봐, 다이안. 나는 성질이 느긋한 편이 아냐! 할 말은 하고 그걸로 끝내도록 하자구!"

그리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게 뭐야? 돈인가?"

다이안은 가슴이 섬칫해져서 입술을 떨며 마노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내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의 말에 깃들여진 짓궂은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모두가 탐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해 치우고 그는 손가락을 꺾어 뚝뚝 소리가 나게 했다.

"나한테 수수께끼를 던질 생각이라면 그만둬. 그런 거추장스런 연극은 이젠 질색이야!"

경멸하듯 그녀를 흘겨보며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나한테서 돈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

다이안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똑똑히 말했다.

"나를 도울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겠군요?"

마노엘은 그녀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았다. 힘없이 눈을 내리깐 것은 그녀 쪽이었다. 이렇게 냉담하게 다루어져도 그에게 마음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기란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마음에 떠오르는 하찮은 생각마저 눈빛에 드러나 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를 보고 있기만 해도 벅찬 기쁨이 솟아나, 그 때문에 지금까진 의식하지 않도록 해온 온갖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비교적 갸름하고 다부진 얼굴의 모든 상을 죄다 알고 있었다. 그 탄력이 있는 뺨에 키스한 적도 있었다. 육감적인 입술의 애무를 받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 적도 있었다. 시간의 흐름도 그런 기억을 지워 버리지는 못했다.

그는 가는 허리를 죄고 있는 허리띠에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밀어넣고, 그녀가 묻는 말에 대답하려고도 않은 채 말했다.

"말 좀 해줘. 당신은 무엇에 돈이 필요한 거야?"

다이안은 어깨를 추썩이며 말했다.

"개인적인 일이에요. 하지만 나를 도와 줄 생각이 없다니 그런 일은 아무랬건 상관없잖겠어요?"

"당신을 돕지 않겠다고 잘라서 말한 기억은 없는걸."

그는 울적하게 말했으나, 눈은 빛나고 있었다.

"화를 내는 건 너무 일러, 다이안. 3년이나 지난 후에 여기에 돌아와서 예전과 같은 일을 기대한다는 건 너무 뻔뻔스럽지 않을까."

다이안은 두 손바닥을 맞대며 말했다.

"그런 걸 기대하진 않아요. 인간은 변하고 그전대로 있는 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필요없이 일을 복잡하게 해서 당신 생활을 휘젓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마노엘은 위협하듯이 몸을 내밀며 격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여기 왔는데도 내 생활이 휘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우린 인간이야,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란 말야! 무슨 짓을 하건 당신은 과거를 끌어들이고 미래를 바꿔 버리는 거야!"

그의 분노가 너무나 격렬해서 다이안은 몸을 떨었다.

"당신은 몰라요!"

하고 숨이 막힌 듯이 말했다.

"당신한테 오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그리구 돈도 필요할 테고."

하고 간신히 자제(自制)하며 그는 말했으나 노여움에 어깨는 솟아오르고 눈은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그래요."

다이안은 겨우 이렇게만 말했다.

"얼마나 필요해?"

다이안은,

"2, 3백 파운드."

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마노엘의 눈썹이 치켜졌다.

"2백 파운드라구? 25백 프랑쯤이군."

"그 정도지요."

하며 다이안은 끄덕였다.

마노엘은 꼬박 일 분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2백 파운드라"

하고 그녀의 가냘픈 몸을 훑어보더니, 이윽고 눈을 들고 말했다.

"뭐에 그런 돈이 필요한 거요, 다이안? 당신은 임신하고 있군?"

"아녜요!"

다이안은 몸을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떨고 있었다. 몇 번인가 깊이 숨을 들이켜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써야 했다.

"?"

그는 상대방의 몸을 사정없이 훑어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당신네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아니면 당신네 나라의 남자들은 다른 나라 남자들과 다른가? 그렇게는 생각지 않아. 당신은 미인이야, 다이안. 여전히 말야.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내 품속에 안긴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되새겨 본 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야."

그의 입술은 쌀쌀하게 일그러졌다.

"틀림없이 다른 사내도 알았겠지, 우리가 함께 나눈 쾌락을"

다이안은 손바닥이 비킬 겨를도 없을 만큼 잽싸게, 그리고 세차게 사나이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나직한 흐느낌과 함께 그녀는 사나이를 밀어붙이고 미친 듯이 문을 열고서는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자기 방에 돌아와 문을 잠그고는 쓰러지듯 문에 기대었다. 뒤쫓아 오는 발소리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없었고, 그녀의 숨소리만 잠시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침대에 엎드렸다. 몹시 실망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다이안은 좀처럼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잘 자지 못해 눈 둘레에 홈이 패어져 있었으므로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갈 때엔 선글라스를 썼다. 친절한 지배인으로부터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한 블랙 커피를 몇 잔 마시기만 하고 아침식사를 끝내고서는 지금 자기가 놓여 있는 처지를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이모만 여기에 있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모는 그녀의 방법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모는 처음부터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한다는 의견이지만, 지금으로선 다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다. 돈이 필요한 진짜 이유를 어떻게 마노엘 상 살바도르에게 말할 수 있으랴. 그걸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젯밤 그토록 굴욕을 당했으니 그로부터 동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일 그가 다시 찾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지? 이렇게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할 작정이야? 조나단이 건강해질 기회를 자존심 때문에 희생시킬 건가?

다이안은 깜짝 놀란 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은 자꾸 생각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체면을 무릅쓰고 마노엘 상 살바도르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설사 더 심한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조나단을 위해.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 가장 심한 조건이란 무엇일까? 그렇다, 그가 진상을 알고 그 애를 갖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거기에 저항할 수 있을까. 나에겐 내 입에 풀칠을 할 만한 교사의 급료밖에 없다.

마노엘은 카르르그 지방에 광대한 토지를 갖고 있고 로느 강 상류에는 포도밭도 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재산이다. 다투면 어느 쪽이 이길지는 뻔하다.

손바닥에 땀이 솟았다. 여기에 온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을까. 마노엘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내가 무서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용도도 묻지 않고 그냥 돈을 내줄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누구를 의지할 수 있단 말인가? 크렐리 이모밖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잖은가. 물론, 좋은 친구는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런 큰 돈을 주기는커녕 빌려 줄 여유조차 없다. 여러 날 밤 자지 못하고 몹시 기침을 하는 조나단을 간호하면서, 습기가 많은 곳에서 좀더 따뜻하고 건조한 고장으로 데려갈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던 것이다.

눈물이 솟구쳤다. 상 살바도르 집안으로는 2백 파운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돈이다. 들은 얘기론 2천 파운드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데. 그리고 3년 전엔 그렇게 열심히 돈을 떠맡기려 하지 않았던가. 지금 그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아도 좋지 않은가. 그녀는 힘없이 어깨를 추썩였다. 그 수표를 찢어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하지만 나중에 중요하게 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한숨을 쉬며 그녀는 호텔의 돌층계에 섰다. 오늘도 좋은 날씨여서 멀리 교회의 뾰족탑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말을 탄 사람들이 지나가고 말발굽 소리가 광장의 돌바닥에 울렸다. 그 중엔 어린이도 몇 명 끼여 있어,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은 훌륭한 솜씨로 말을 다루고 있었다. 백마는 아니고 흰 바탕에 반점이 섞인 말들뿐이었으나, 털이 많은 굵은 꼬리가 카마르그의 특산(特産)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다이안은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그들을 눈으로 쫓고 있었으나 이윽고 서글픈 듯이 발길을 돌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마노엘이 다시 찾아오기를 밤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이편에서 찾으러 갈까. 밤까지 기다려도 마노엘이 오지 않으면 또 하루를 허비하는 셈이 된다.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상 살바도르 농원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었다. 그곳엔 여러 번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는 사유지(私有地)이고 지금의 그녀는 침입자처럼 다루어질 것이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기꺼이, 필요하다면 완력으로라도 그녀를 쫓아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온종일 호텔에서 빈둥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신경이 하도 날카로워져서 뭔가 하고 있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호텔로 되돌아가 방에 들어서자 몸에 착 붙는 판탈롱과 눈부신 자홍색(紫紅色) 블라우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머리는 소박하고 단순한 모양으로 고쳐 묶었다. 활동적으로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 데도 지나치게 장식을 한 곳은 없었다. 상 살바도르 농원에 가더라도 각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 성싶지는 않았다.

시트로엔에 휘발유를 넣고서는 거리를 빠져 나가 강과 소택지(沼澤地) 사이의 굴곡이 많고 먼지가 많이 이는 도로를 따라 자동차를 몰고 갔다. 계속해서 강물 소리가 따라왔다. 자동차 소리에 놀라서 날아오른 제비갈매기와 물오리가 머리 위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멀리 못의 수면에 마치 신기루(蜃氣樓)처럼 반짝이며 보이는 것은 플라밍고 떼가 못의 얕은 여울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모래톱에는 생명이 넘치고, 하구 지대를 보금자리로 삼는 수천 마리의 새떼가 먹이를 찾아 오는 것이다. 키가 큰 갈대의 덤불 속에 간혹 보이는 한 덩어리의 색깔은 미나리의 일종과 좀갯질경이의 꽃무리인데, 이런 곳에 피리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가련한 꽃이었다.

저 멀리에 가슴이 울렁거릴 것 같은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황소 떼였다. 못의 흙이 솟아올라서 생긴, 풀에 덮인 작은 산 위에서 열두세 마리가 모두 풀을 뜯어먹고 있다. 그녀의 자동차가 옆을 지나가자 머리를 들었으나 별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위협하듯이 휘어진 뿔을 보고 그녀는 스페인 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옆구리에 찍힌 두 개의 S 모양의 낙인(烙印)을 보자 저도 모르게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것은 상 살바도르의 소떼였다. 막연히 이 근처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분명히 상 살바도르의 소유지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멀리 도로에서 떨어져서 플라타너스의 숲이 있고 말의 한 무리가 있었다. 그 숲 속에 거의 숨어 있듯이, 결코 잘못 볼 수 없는 색깔의 집시의 상자마차가 보였다.

다이안은 브레이크를 밟고 상자마차 쪽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차를 멈췄다. 흔히 볼 수 있는 집시의 상자마차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저건 마노엘의 할머니의 상자마차구나. 저기서 나는 마노엘과

그녀는 그런 생각을 뿌리치듯 핸드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왜 할머니의 상자마차가 이런 곳에 있을까? 버려져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할머니가 상자마차를 바꿀 리는 없지. 아니면 이젠 필요치 않게 된 것일까.

문득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스쳤다. 다이안은 판탈롱의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확실히 할머니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렇게 젊고 정정했잖은가. 죽었을 리는 없다! 아니면

다이안은 길가에 섰다. 상자마차의 주위는 몹시 질척거려서 그녀가 신고 있는 구두로는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이 있을 듯싶은 기척은 전혀 없었다.

상자마차의 흐린 창문에 걸린 커튼은 더러워진 채여서 도저히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머리를 흔들며 다이안은 자동차로 돌아와 핸들을 잡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토록 할머니가 자랑하면서 윤이 나도록 닦던 상자마차가 지금은 녹슨 채 버려져 있다. 또 한번 상자마차를 돌아다보았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할머니는 죽었을까? 그 강인하던 여자는 이젠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을까. 마노엘이 슬프게 보인 것은 그 때문이기라도 했을까.

양쪽 팔꿈치를 핸들에 올려 놓고 그녀는 피로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언제까지나 살 것 같았었다. 그 사람만이 상 살바도르의 가족 중에서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여 불로(不老)를 자랑하는 것 같았던 할머니를 마음 한구석에서 의지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낙심해서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되돌아갈까, 아니면 이대로 상 살바도르 가()로 갈까. 그렇게 하면 마노엘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그 여자는 영국 여자에 대한 적의(敵意)를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그 여자의 아버지가 상 살바도르 가의 옆의 땅의 소유주라는 이유로 마노엘의 아내로서 안성맞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칠게 발동을 걸면서 다시 조나단에 대해 생각하려고 했다. 그 애를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그 때문에 모욕을 당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길 양쪽에는 차차 습지와 못이 적어지고, 멀리 나무숲에 둘러싸인 여러 채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갈대의 덤불이 물가를 차지한 늪의 수면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인가가 가까이에 있는데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이 광대한 공간에 있는 사람은 그녀뿐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차를 멈추고, 보닛 위에 서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멀리 바라다보았다. 지평선 언저리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주위를 집중시켰다. 그것은 말을 탄 사나이들이었다. 유명한 카마르그의 '파수꾼'들인데 오랜 세월 동안 그랬듯이 소나 말떼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무리가 다가옴에 따라 다이안의 눈에 소떼를 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우람한 검은 소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자 다이안은 보닛에서 잽싸게 뛰어내려 자동차 안에 숨어 버렸다.

상 살바도르 농원에서는 코리다에 사용할 스페인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쿠르스 리블에 사용되는 그것보다 작고 근육도 못한 카마르그의 소는 기르지 않았다. 이전에 이곳을 찾아왔을 때 다이안은 코리다와 쿠르스 리블의 차이를 배웠다.

말하자면, 코리다는 로마의 원형 투기장에서 검투사(劍鬪士)가 싸웠던 시대부터 인류의 문명이 별로 진보했다고 할 수 없는 야만적인 구경거리이며, 쿠르스 리블은 그것에 비해 얌전한데, 위험하긴 매일반이더라도 소는 죽이지 않고 몇 번이라도 사용하는 스포츠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도 제일 비싼 값으로 거래되는 것은 스페인의 황소이며, 그런 의미에서 가장(家長)인 마노엘의 아버지는 투우장에서 존경을 받는 가축 파수꾼의 칭호로 불리기에 적합하다.

훌륭하게 사육된 스페인 황소는 확실히 다이안이 본 적도 없을 만큼 거칠고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투우장에 나타난 순간부터 최대한의 경의를 받으며 신중하게 다루어졌다. 예측도 할 수 없는 움직임 때문에 잠시라도 방심을 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소떼는 거의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갔으나 파수꾼들은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 살바도르의 토지에 들어온 여자가 누구인지, 왜 왔는지를 알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나이가 말에서 내려 자동차에 다가오더니,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와 똑같은 차양이 넓은 모자를 벗었다. 다이안이 알고 있는 사나이는 한 사람도 없었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말을 건넸을 때엔 놀랐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그 사나이는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다이안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친밀한 웃음을 띠었다.

"마노엘 씨는 어디 계십니까?"

사나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님 말입니까, 아가씨? 여기엔 안 계십니다."

다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에요, 주인님이 아니고 마노엘 씨 말입니다."

"마노엘이 주인님입니다."

하고 그 사나이는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다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노엘이 그의 주인이라니! 그럼 마노엘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물론 그녀는 그런 의문을 입 밖에 내진 않고 어깨를 추썩이며 말했다.

"실례했군요. 나는 이 댁의 일을 잘 모르니까요."

사나이는 조금 전보다 뚜렷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영국인이군요, 아가씨. 그렇지요?"

다이안은 끄덕였다.

"그래요. 영어를 할 줄 아는군요."

"조금은요, 아가씨."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싱긋 웃었다.

다이안은 마른 입술을 축이고 나서 물었다.

"좋아요, 마노엘 씨가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어요?"

사나이는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말이 있는 데로 돌아가 안장에 올라탔다. 다이안이 본 적도 없을 만큼 연한 푸른 눈의 그 사나이의, 마디가 굵은 손과 얼굴은 햇빛과 바람을 받아 마호가니 색으로 되어 있었다.

"어디에 있건 이상할 건 없지요, 아가씨."

사나이는 말했다.

"일 년 중에서도 지금은 할일이 태산같이 많은 때거든요. 아가씨가 농원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드리지요."

"아녜요, 괜찮아요."

다이안은 고개를 흔들었으나, 그 재빠른 반응에 나이가 지긋한 파수꾼은 미심쩍은 기색을 보였다.

주인에게 여기 와 있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이 여자는 불청객(不請客)이라고 그 파수꾼이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이안도 알았다.

"나는 아를르에 돌아가야 돼요"

다이안은 어정쩡하게 말했다.

아를르에 있다고 말씀해 주세요."

"알았습니다, 아가씨."

사나이는 짐짓 예절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것같이 보이자 다이안은 발동을 걸어 기어를 넣고 후진(後進)했다.

클러치를 너무 빨리 떼는 바람에 작은 자동차는 느닷없이 뒷걸음쳐서, 한쪽 바퀴가 돌 같은 것에 올라서자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길가의 도랑에 빠져 버렸다.

"아뿔사!"

다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낭패를 감추고 바깥에 나가 어디 망가진 곳이 없나 하고 살펴보았다.

대단치는 않았다. 오른쪽 바퀴가 도랑에 빠졌을 뿐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끌어올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파수꾼 쪽을 보았다.

"로프를 갖고 있습니까, 아가씨?"

다이안은 화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평소에 아침 드라이브를 나서는 데 로프를 가지고 갈 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하찮은 일로 화를 내본들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망가진 바퀴를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의 힘으로 빠져 버린 바퀴를 끌어낼 수 있다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파수꾼은 천천히 안장에서 내렸다. 사나이의 동작에는 그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소극적인 데가 있었다. 하긴 대지와 하늘을 가까이 하면서 오랫동안 인기척이 없는 습지대에서 지내온 탓이었다.

"로프는 있습니다, 아가씨."

그는 조용히 말하면서 안장 앞에서 로프를 벗겼다.

다이안은 마음이 놓이면서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던 욕설을 참았다. 그리고 약간 어색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하지만 어디에다 매면 좋을까요?"

파수꾼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쭈그리고 앉아 앞 부분의 범퍼에 로프를 비끌어 맸다. 그것이 끝나자 몸을 일으켜, 불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을 흘끗 보고 말했다.

"핸들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지요?"

"물론이에요."

다이안은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사나이는 로프를 말에 매어 두고는 다시 안장에 올라탔다. 그녀는 자동차를 밀기 시작했다. 힘겨운 일이어서 자동차가 겨우 도로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엔 흠뻑 땀이 솟아나 있었다.

그 작업도 거의 끝났을 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섬칫해서 살펴보니 한 필의 말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사내아이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 접근해 옴에 따라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다갈색의 머리를 보고 소녀임을 알았다.

말이 옆에 와서 멈췄을 때 다이안은 불안하게 몸을 일으켰는데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가 소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다이안 언니! 다이안 언니가 아녜요! 대관절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어요?"

다이안은 깜짝 놀라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한순간 두려움을 느꼈으나 소녀의 기쁜 듯한 목소리를 듣고 안심했다.

"루이즈, 정말 몰라보게 컸구나. 아주 어린애였는데 말이야."

소녀는 이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열네 살이었어요, 다이안 언니. 지금은 열일곱이고요.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할머니 만나러 농원으로 가는 길이었군요?"

다이안은 당황했다. 뜻밖의 일이었다. 루이즈가 감격을 하는 모습엔 거짓은 없었으나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로프를 풀고서는 말을 타고 있는 파수꾼을 돌아다보고 그녀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루이즈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의 말이 달려가 버리자, 루이즈가 한 말이 혼란했던 머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루이즈루이즈는 글랑메일이라고 말했지?"

하고 놀랍게 생각하며 그녀는 물었다.

"그건루이즈가 말한 할머니 말야?"

"물론이에요."

루이즈의 미소가 가셨다.

"할머니를 만나지 않고 돌아갈 작정은 아닐 테지요?"

다이안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상자마차를 봤던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그녀는 몸을 떨었다.

"이상하게 생각진 말아, 루이즈. 지금은 정식으로 방문한 게 아냐."

그리고 힘없이 어깨를 추썩이며 덧붙였다.

"아마 이젠 알 테지만 내가 농원을 찾아가도 기뻐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어."

루이즈의 눈이 흐려졌다.

"할머니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녀는 구슬프게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엘 왔어요, 다이안 언니? 어젯밤에 마노엘 오빠가 다이안 언니를 만나러 갔을 텐데."

다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었어?"

"물론이에요."

하고 루이즈는 어깨를 추썩이며 프랑스인답게 두서없이 말했다.

"전화로 다이안 언니 목소리라는 걸 알았어요. 다이안 언니가 틀림없이 여기에 와 있다고 오빠에게 말한 건 나예요."

다이안은 몸이 굳어졌다.

"그럼 모두 내가 온 걸 알고 있겠구나?"

루이즈는 얼굴을 찡그리고 발밑 끝을 비비면서 대답했다.

"그렇진 않아요알고 있는 사람은 마노엘 오빠와 나뿐이에요."

다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 줘, 루이즈. 아버님은 이젠 농원에 계시지 않아?"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2년 전에요. 지금은 마노엘 오빠가 책임자예요. 이건 오빠의 농원이에요. 저기 있는 건 마노엘 오빠의 소들인 거예요."

다이안은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마치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한데, 어머니는 아직 마노엘 오빠와 같이 살고 계시겠지?"

루이즈는 끄덕였다.

"그리구 이본느도."

다이안은 위()가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아아, 그렇구나, 이본느도 같이 살겠네."

루이즈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안 언니는 여윈 것 같네요. 아직도 선생님으로 계세요?"

"그래, 아직도 가르치고 있지. 루이즈는? 학교는 졸업했어?"

"마노엘 오빠는 나를 스위스의 학교에 보내고 싶어해요. 하지만 난 가고 싶지가 않아요. 여기가 좋아요. 뭣 때문에 나를 다른 데로 보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흘끗 다이안의 얼굴을 보았다.

"이본느가 사고를 당한 걸 알고 있겠지요, 물론?"

다이안은 섬칫했다.

"아니, 몰라. 어떤 사고였는데?"

루이즈는 어깨를 추썩이며 말했다.

"황소한테 받혀서 하반신불수가 돼버렸어요."

다이안은 겁에 질려서 숨을 죽였다. 루이즈는 냉담하고 태연하게 말해 치웠다. 마치 다이안 때문에 사고가 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어머, 끔찍해라!"

다이안은 손을 벌리며 말했다.

"언제? 언제 있은 일이지?"

루이즈는 또 어깨를 추썩였다.

"다이안 언니가 없어진 직후였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그렇게 생각해?"

다이안의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루이즈는 고삐를 만지작거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모두 이본느 때문에 생긴 일이에요. 마노엘 오빠 때문에 화가 나서 오빠 소를 못살게 굴며 분풀이를 하려다 당했던 거예요."

그리고 또 버릇처럼 어깨를 추썩였다.

"황소를 농락하다니!"

다이안은 귓전에 걸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마노엘이 나이에 비해 몹시 늙어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사람으로선 지난 3년 동안이 괴로운 기간이었을 게 틀림없다.

루이즈는 그녀의 팔을 가볍게 만지며 말했다.

"또 만날 수 있겠지요, 다이안 언니. 나는 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왜 마노엘 오빠를 만나려 하지 않았어요? 난 생각했거든요"

갑자기 그녀는 말을 끊고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동안이나 카마르그에 머물 작정이에요?"

다이안은 자동차의 문틀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시들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루이즈.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

루이즈는 한숨을 쉬었다.

"물론 오빠를 만나러 왔겠지요?"

다이안은 망설였으나 이윽고 끄덕였다.

"그래, 어디 있지?"

"오늘은 바깥에 나갔어요."

루이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포도밭으로 갔어요."

그리고 다이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지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다이안은 모른 체하며 물었다.

"다이안 언니와 오빠 사이에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오빠는 몹시 화를 내며 돌아왔어요! 이본느조차 말도 못 붙일 정도였어요. 나는 오빠와 언니가 싸운 줄 알았지만."

다이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젠 가봐야겠어, 루이즈. 마노엘이 없다면 농원에 가봐도 소용없지. 농원에 갈 이유가 없을 테니."

"그럼, 할머니는? 할머니께 다이안 언니를 만났다고 말해도 되죠?"

다이안은 핸들 뒤로 들어갔다.

"루이즈의 입을 막을 순 없잖아. 하긴 이런 처지에선 좋은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아아, 다이안 언니!"

루이즈는 보닛에 다가서서 다이안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렇게 숨기려고 해요? 왜 지금 돌아왔어요? 언니를 다시 만나면 마노엘 오빠가 어떻게 될지 잘 알잖아요, 그렇지요!"

다이안은 발동을 걸었다.

"미안해, 루이즈. 무언가 숨기려고 하는 것같이 보인다면 사과하겠어. 그리구 할머니도 만나고 싶었던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쉰 것 같았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잘 있어."

"잘 가요, 다이안 언니."

루이즈는 몸을 일으켰으나 또 몇 발짝 다가와서 말했다.

"다이안 언니가 떠나기 전에 호텔로 찾아가도 되겠죠?"

다이안은 핸들을 틀어쥐었다.

"거절은 안하겠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해. 잘 있어."

루이즈는 손을 흔들었다.

다이안은 넓은 장소에 나서기까지 자동차를 후진시켰다가 돌아섰다. 이윽고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다이안은 솟구치는 오열(嗚咽)을 걷잡지 못했다.

 

3

그날 저녁때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다이안은 크렐리 이모에게 편지를 쓰려고 방으로 돌아왔다.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상 살바도르 농원과 거기에 얽힌 슬픈 사연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그녀는 온종일 이본느의 심정을 헤아려 보려는 나머지 머리가 아파지기까지 했다.

한평생 폐인(廢人)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싶어 가슴이 죄어들었다. 이본느가 지난 날 보여 주던 악의(惡意)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말을 잘 다루는 모습과 아주 건강한 듯한 몸매였다. 겨우 몇 분 동안의 부주의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본느는 체념하는 대신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으며 살아갈 여자는 아니었다.

다이안은 펜과 종이를 꺼냈으나 편지를 쓸 생각은 없었다.

자연히 마노엘의 일이, 마노엘의 구제할 길 없는 처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 사람은 억세고 건장한 사나이다. 이본느는 분노의 돌파구를 그 사람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그 권태로운 태도와 지쳐 버리고 있는 듯한 모습은 그 일 때문일까.

그녀는 손바닥을 턱에 괸 채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오지 않았어야 했다. 조나단을 위해 그래야 한다는 이모의 권고를 따라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있었을 때보다 비참한 기분이 되었을 뿐이고, 그 이외에 아무 소득도 없다면, 여기에 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사정이 다르기만 했더라면, 하고 그녀는 절망감을 품으며 생각했다. 나하고 마노엘이 헤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히 마노엘에게도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굴레는 그토록 굳게 맺어져 있는 것같이 생각됐는데 이내 끊어져 버렸다.

지금도 그 이별의 슬픔은 잊을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더 세차게 가슴을 에이는 것이다.

그리고 마노엘의 할머니, 지엔마. 여러 가지 미신과 종교적인 신조(信條)를 완고하게 지키고 있는 고집스럽고 강인한 노파. 그 사람도 우리를 격려하고, 카마르그의 백마와 마찬가지로 중세(中世)로부터 면면히 전해져 온 의식에 의해 우리의 굴레를 굳게 맺어지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행복을 두번 다시 맛보진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손바닥 속에 얼굴을 묻었다. 인생이란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천국에 손이 닿게 된 순간, 영혼이 썩을 만큼 삽시간에 덧없이 빼앗겨 버린다.

다이안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일어서자 창가로 다가가 조용한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태양이 지평선에 가라앉고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었지만, 공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황혼의 감미로움이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비좁은 방에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생각했다.

마치 숨겨진 듯이 문께로 향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층계를 내려가 썰렁한 저녁 공기 속으로 나갔다.

그녀의 소박한 가지색 저지의 가운은 눈 둘레의 홈을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그것은 다이안이 초대를 받은 크리스마스 파티에 늦지 않게끔 크렐리 이모가 밤새 기워 준 긴 가운이었다. 물론 다이안은 그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런 초저녁에 입기엔 꼭 알맞는 드레스였다.

호텔에서 나오긴 했으나 별로 갈 데도 없어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둘이나 셋의 그룹뿐이고 외톨이인 것은 그녀뿐이었다. 야외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리라 작정하고 메인 스트리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를 걸어가니 한 대의 자동차가 마치 그녀와 보조(步調)를 맞추려는 듯이 속도를 늦추고 그녀의 옆을 달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인 젊은이가 차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말을 건넸다. 이름을 묻고 어딜 가느냐는 등의 말을 던지고는 자동차에 타라고 끈질기게 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시하고 걸어갔으나 마지막엔 당혹(當惑)과 노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참았다.

갑자기 자동차가 멎더니 한 젊은이가 그녀 앞으로 뛰어나왔다.

"아가씨! 이봐요, 아가씨!"

젊은이는 노래하듯 말했다.

"우리와 같이 갑시다."

"비켜 줘요!"

다이안은 앞이 막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 영국인이구나. 하지만 예쁜 영국인인데."

그 젊은이는 친구들 쪽을 의미 있게 흘끗 보며 말했다. 또 한 사람이 자동차 문을 열고 손짓을 했다.

다이안은 약간 불안해졌다. 마침 그때 길에는 거의 인기척이 없어 강제로 끌려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자동차 안의 젊은이들은 분명히 술을 마시고 있었고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고 제발 지나가게 해줘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짐짓 가다듬으며 말했으나 그 젊은이는 짓궂게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공포에 사로잡힌 다이안은 뒷걸음질 치다가 그 순간 딱딱한 남자의 몸에 부딪쳤다. 머리에 피가 솟아오른 그녀는 느닷없이 그 사내에게 돌아서서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상대방의 가슴을 힘껏 때렸다. 얼핏 젊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몸을 떠는 그녀를 밀어제친 사내는 추파를 던지던 젊은이는 아니었다. 훤칠하게 키가 큰 그 사내는 끈질기게 그녀를 쫓아다니고 있는 젊은이의 프릴이 달린 셔츠 깃을 힘껏 움켜쥐고는 자동차 쪽으로 밀어치웠다. 젊은이는 비틀거리며 자동차의 지붕에 머리를 부딪쳤다. 젊은이들에게 어떤 심한 욕설을 퍼부었는지 다이안은 알지 못했지만, 이내 그들의 자동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 버렸다. 그것을 보고 사내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그녀 쪽을 돌아다보았다.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때 그녀는 망연(茫然)히 서 있었다.

마노엘은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 가자구. 이젠 모두 처치됐어. 대관절 저녁때 이런 시간에 왜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어!"

다이안은 가까스로 침착을 되찾았다.

"산책을 나왔을 뿐이에요. 바깥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늘 희롱을 당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으나, 그런 동작에는 무의식적인 미태(媚態)가 느껴졌다.

"아무튼 도와 줘서 고마워요."

마노엘은 초조한 듯이 말했다.

"천만에!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돼 있었을지 생각해 보고 싶지도 않소?"

그는 입을 꼭 다물고 거의 성난 것같이 그녀를 보았다.

"다이안, 여긴 영국과는 달라. 당신 행동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돌연 말을 끊더니 호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어 이빨 사이에 물었다. 조심스레 불을 붙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 당신하고 얘기 좀 하려고 왔으니까."

다이안은 몸을 떨며 상대방을 보았다.

"농원에 자동차로 갔다는 얘길 루이즈한테 들었군요."

"그래."

머리를 갸웃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그는 말했다.

"집엔 들어가지 않았다지?"

다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마노엘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이 바라보고는 그 다음엔 아무 말도 안하고 크게 발을 떼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이안은 어디로 가는가 싶어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짐짓 뒤따랐다.

목적지는 이내 알았다. 호텔 앞 광장에 다른 자동차들이 모두 작게 보일 만큼 거대한 먼지투성이의 시트로엔의 스테이션 왜곤이 세워져 있었다. 마노엘은 조수석의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타요."

한 마디만 말했다. 다이안은 다리의 힘이 빠져 버려 시키는 대로 자동차에 올라탔다.

마노엘은 보닛을 돌아가 그녀 옆에 올라탔다. 다이안은 몰래 그를 지켜보았다. 어둡고 우울한 얼굴, 무릎까지 올라온 부츠에 검은 바짓가랑이를 쑤셔 넣었고, 앞을 크게 헤친 다크블루의 셔츠에서 삐져나온 볕에 그을은 건장한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가 걸려 있고, 그 끝에 달린 메달은 가슴털 속에 거의 숨어 있었으나, 다이안은 그 메달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라의 문장(紋章)이었다. 사라는 레상트 마리 드 라 메르의 전설에 나오는 흑인 하녀지만 유럽 전역의 집시들로부터 숭앙(崇仰)을 받고 있으며, 그 축제는 방랑의 족속들에게는 동경의 표적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 쇠사슬이 다이안의 목에 걸려진 적이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야릇하게 설레기 시작했다. 눈은 끌려가듯 사내의 갈색의 살갗 위를 더듬었다. 손을 내밀어 그것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걷잡을 수 없이 느꼈으나, 크게 숨을 돌이키고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마노엘이 손목을 놀리자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육중한 스테이션 왜곤은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 어디로 데려갈 작정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것도 참았다. 잠시 동안은 마노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노여움을 사게 될 뿐일지도 모를 질문을 해서 지금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동차는 북동쪽에 있는 레 보로 향하는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퐁비에이유의 조용한 계곡을 지나자 회색의 황성(荒城)과 무너진 탑으로 그것인 줄 알 수 있는 레 보를 얹은 암석 기슭에 닿기 전에, 마노엘은 자동차를 길가 쪽에 세우고 사이드 윈도우를 내렸다.

"한데"

하고 그는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 주지 않겠나?"

다이안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명백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 옆에 있으면 흥분하기에 손으로 더듬어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그녀는 몸을 떨었다. 아를르 지방에 비해 이곳은 훨씬 선선하고, 평원을 건너는 소금기를 머금은 상쾌한 바람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마노엘도 자동차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잠시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한 비단 같은 밤하늘을 등지고 솟아 있는 암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노엘이 그녀 쪽을 보았다. 다이안의 몸은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떨리고 있었으나 그것이 추위 탓만은 아니었다.

", 말해 봐. 당신, 무슨 일로 왔지?"

하고 그는 억센 말투로 물었다.

"왜 지금 여기에 돌아온 거요!"

그 심상치 않은 눈빛이 겁나서 다이안은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발을 움직여 뒤로 물러섰다.

"그 이유는 알고 있잖아요."

하고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

마노엘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난 몰라!"

그리고 마치 이를 갈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돈이 필요하다면서 그 이유는 내게 말하지 않았어. 내가 도와 주기를 바라면서 도와 주는 사람의 당연한 권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다이안은 어깨너머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 줘요."

힘없이 외쳤다.

"이미 나한테 돈을 줄 생각은 없다고 말했잖아요."

마노엘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게 무슨 뜻이지?"

다이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발 밑의 돌을 찼다.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요? , 또 찾아왔어요? 나를 도와 줄 생각이신가요?"

마노엘은 초조한 기색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목 뒤에까지 길게 늘어진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만졌다.

"내가 찾아온 것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야."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당신을 불러 달라고 말씀하셨어!"

"뭐라구요!"

다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흡떴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계세요? 할머님이?"

"어떻게? 할머니는 뭐든지 다 알고 계셔."

그의 눈은 흐려져 있었다.

"루이즈가 말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건 아무랬건 상관없잖아. 당신은 만날 테지?"

다이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 나는 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 어머니는 내가 거기에 가는 걸 싫어해요. 그리고 당신 부인도"

마노엘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내 아내라구? 부인이라구? 나한테 아내는 없어, 아직은!"

다이안은 숨을 가쁘게 쉬며 쫓기는 사람같이 성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루이즈가 말해 줬어요. 이본느에 대해, 그리고 사고에 대해서도. 루이즈는 말하더군요, 이본느는 농원에서 당신과 살고 있다구."

마노엘은 냉정하게 쏘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확실히 이본느는 농원에서 살고 있어. 그 여자는 불쌍한 불구자야!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도 이젠 이 세상에 없어. 그러니 어디서 살 수 있단 말야? 하지만 이본느가 내 아내는 아냐."

이렇게 말하면서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기에 다이안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버둥대며 소리쳤다.

"손목이 아파요. 부러져 버리겠어요!"

마노엘은 자기가 틀어쥐고 있는 가냘픈 손목이 시뻘겋게 되어 있는 것을 알고서는 당황해서 말했다.

", 미안해, 다이안."

그리고 목쉰 소리로 중얼대며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걱정스런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처럼 손을 파닥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상대방의 눈에 위험한 기색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뒷걸음질 쳐서 마비된 부분은 한손으로 비비며, 자동차의 너비만큼 떨어지자 목쉰 소리로 말했다.

"이젠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마노엘은 지친 듯이 손으로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외면을 하고 있었다. 다이안은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 모습을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두 손을 축 내려뜨리고 나서 어깨를 치켜세우듯 하며 돌아다보았다.

그는 다이안 쪽을 보지 않고 핸들 앞에 앉았다. 비틀거리며 다이안도 조수석에 앉아 그의 발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구겨진 긴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러나 마노엘은 그러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빨리 자동차가 떠나기를 바랐지만 그는 여전히 두 손을 핸들에 놓은 채 시동을 걸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퉁명스런 목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만일 할머니를 만나러 농원에 와 주면 당신이 그 비밀의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는 돈을 내가 주지."

다이안은 흥분해서 말했다.

"농담은 그만두세요!"

"왜 농담이라는 거요!"

다이안은 힘없이 어깨를 추썩였다.

"말썽거리가 될 뿐이에요, 내가 거기에 가는 건! 당신 어머니는 틀림없이 나를 싫어할 거예요. 알겠지요? 그분은 나를 싫어해요! 그리고 이본느도"

그녀의 목소리는 슬프게 끊겼다.

마노엘은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눈은 어두운 자동차 안에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이본느한테 비난을 받을 거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게 나로선 오히려 마음이 쓰이는군."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다이안은 가슴에 한쪽 손을 댔다.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 말이야?"

하고 그는 넓은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의 나에겐 더 놀라운 면이 있어."

"마노엘, 제발 그러지 말아요!"

하고 다이안은 매달리듯 말했다. 그 눈은 크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고 있어도 서로 괴로울 뿐이에요! 당신도 싫지요!"

"왜 그래? 기분전환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는 갑자기 룸라이트를 켰다. 진지한 표정을 한 다이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 불빛 속에 떠올랐다. 마노엘은 몸을 기울여서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가냘픈 손가락엔 반지 하나 끼여져 있지 않았다.

다이안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나, 이내 그는 손을 놓았다.

"말해 줘, 돈이 필요한 건 남자 때문이지? 당신은 그 남자를 사랑하나?"

"남자 같은 건 없어요!"

하고 신음하듯 그녀는 말했다.

마노엘은 의심하는 것 같은 눈초리가 되었다.

"그럼 당신을 위해 필요한가?"

"그래요."

하며 다이안은 얼굴을 붉혔다.

"? 무슨 이유로? 당신은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잖아. 그럼 뭐야? 그 외에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지?"

"아아, 마노엘, 제발! 그렇게 나를 괴롭히지 말아요!"

다이안은 목쉰 소리를 냈다. 그녀는 뺨에 손을 대고 냉정(冷靜)을 잃게 하듯 넘쳐 나온 눈물을 닦았다.

마노엘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으나 뺨의 근육은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아무 말도 안하고 룸라이트를 끄고는 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호텔에 돌아왔다. 스테이션 왜곤이 호텔 앞에 멎었을 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이안이었다. 뭔가 입 밖에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마노엘도 스스로의 딜레머를 깨닫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하고 어색하게 물었다.

"당신 하기에 달렸지. 안 그래?"

하며 마노엘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다이안은 목덜미의 윤이 나는 머리에 손을 댔다.

"생각했던 대로 할 작정이군요? 억지로라도 나를 농원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죠!"

그는 나른한 듯이 시트에 기대어 박자를 맞추듯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그래야지."

다이안은 어깨를 추켜세웠다.

"알았어요. 그럼 언제요?"

"갈 작정이야?"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는 수밖에 없잖아요?"

하고 똑바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는 얕잡아보는 것같이 말했다.

"없지. 당신은 기어코 돈을 얻으려 하고 있어. 나는 당신 자신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는 믿어지지 않아. 당신이 이런 희생을 하는 건 더 깊은 까닭이 있기 때문이야."

다이안은 문을 열고 말했다.

"이젠 가도 되지요?"

"잠깐 기다려."

그 눈은 쏘는 듯 그녀에게 쏠렸다.

"모레 당신을 데리러 가겠어. 내일은 니임에 가야 할 일이 있거든. 늦어서 미안하지만 당신은 틀림없이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해. 그토록 돈이 필요하다면 말야!"

다이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오만해질 수 있는가 싶었다. 그 매정한 말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마치 방해물같이 여기고 있잖아? 그 태도로 보아도 나를 자기 일밖에 생각지 않는 바람기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명백해.

그녀는 문을 열고 마노엘이 인사도 하기 전에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 문을 힘차게 닫고는 기어를 넣었다. 큰 자동차는 거칠게 달려가 버렸다.

다이안은 지쳐 버린 채 천천히 호텔에 들어갔다. 노여움과 슬픔에 짓눌려 반쯤 멍청해져서, 그를 만나기까지의 하루 동안을 어떻게 지낼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예상했던 것처럼 그 다음 하루는 헛되게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따뜻한 봄철의 햇살과 꽃피는 나무들과 선명한 색깔로 다투어 피는 꽃들은 다이안의 어두운 마음을 달래 주었다.

아침 전에 크렐리 이모에게 편지를 써서 부치러 갔다. 그러나 마노엘을 만났다는 것과 이삼 일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짤막하게 썼을 뿐이었다.

마노엘에게 진상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는 것과 앞으로 알릴 생각이 없다는 것을 크렐리 이모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있는 마노엘에게 진상을 밝히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님을 안 이상, 다소 양심의 가책은 느끼더라도 잠자코 있을 생각이었다. 가령 조나단이 태어났다는 부정하기 어려운 증거를 잡으면 크게 기뻐하며 아들을 빼앗아 버릴 가능성이 많다이때 조나단이 마노엘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것은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래도, 하고 마음속에서 양심이 속삭였다. 마노엘은 진상을 알 권리가 있지 않을까!

호텔로 돌아오자 뜻밖의 방문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그날은 길고 괴로운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앙리 마르탕의 아무 걱정도 없는 듯한 얼굴을 보았을 때 적이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프런트 옆의 의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홀을 가로질러 층계 쪽으로 가는 다이안을 보자 걱정스런 표정을 띠었다.

"다이안!"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감짝 놀라며 돌아다보았다.

"어머 마르탕 씨,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앙리 마르탕은 프랑스인의 특유한 몸짓으로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아가씨. 뻔뻔스럽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용서해 주시겠지요."

다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한순간 거절할까 했지만 무언가가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호텔에서 나가는 것도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싫어질 만큼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걱정을 잊고 싶기도 했다. 앙리 마르탕은 적어도 이 일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감사합니다, 마르탕 씨. 괜찮으시다면 동행을 하겠어요. 하지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요."

하고 슬랙스와 블라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앙리 마르탕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확실히 아주 핸섬한 청년이라고 그녀는 무심코 생각했다. 회색의 고급 양복에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는, 어젯밤의 마노엘 상 살바도르처럼 소탈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 고장에선 이채(異彩)롭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노엘도 그런 옷을 간혹 입는 수가 있었다. 그녀도 야회용(夜會用)으로 정장을 한 그를 만난 적이 있지만 정말 볼품이 없었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집시의 어두운 그림자는 가축 파수꾼의 옷차림일 때 훌륭한 매력으로서 발산되었다.

"어서 천천히 갈아입으세요,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앙리는 말했다.

다이안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 급히 층계를 올라가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연한 풀빛의 린네르의 미니 드레스를 입고 내려온 다이안은 매우 젊게 보였다. 얌전한 머리 때문에 별로 자극적으로 보이진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아를르의 중심가에 있는 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앙리가 잘 알고 있는 집인 모양이었다.

이 사람의 직업은 대체 무엇일까, 다이안은 생각했다. 도마토와 마슈룸을 함께 꼬챙이에 꿴 소의 콩팥요리를 먹었다. 별로 배는 고프지 않다고 처음에 말했던 다이안이지만 마지막에는 거리낌 없이 식욕을 발휘했다. 결국 그녀는 젊고 건강하며, 앙리와 같이 있으면 특히 마노엘과 그렇게 만난 다음인 만큼 더욱 스스럼이 없었던 것이다.

식사를 끝내자 앙리는 로느 강의 상류로 포도밭을 구경하러 가자고 제안했으나 다이안은 거절했다. 니임은 로느 강 상류에 있고, 앙리와 같이 있을 때 마노엘을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마노엘을 만나면 아마 그는 자기를 뒤쫓아 온 줄 알 것이다. 그래도 좋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으나 너무 무책임한 짓이라고 고쳐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레 상트 마리 드 라 메르로 자동차를 몰고 가서 몇 시간 동안 모래톱을 산책하며 즐겼다. 그날 오후에 다이안은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앙리의 집은 아를르에서 큰 슈퍼마켓을 경영하고 있고 아비뇽과 마르세이유에도 지점이 있다는 것이며, 앙리는 조만간 그 회사의 사장자리가 약속되어 있으므로 파리에서 회계학과 경영학을 공부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여가는 얼마든지 있다고 앙리는 말했다. 다이안은 그가 자기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앙리 마르탕은 아를르의 어머니들로부터 딸의 좋은 결혼 상대자로 보여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노엘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어머니들도 가난한 영국인 여교사하고 그가 같이 있는 것을 달갑게 생각할 리가 없다.

자기 자신에 관해 다이안은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단순한 관광객으로서 아를르에 온 것으로 생각하게 해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앙리가 마노엘과 그 가족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튼 상 살바도르 농원은 상당히 큰 기업체로 성공하고 있으며, 그 포도밭에서 생산된 질이 좋은 포도주는 앙리의 아버지의 슈퍼에서도 팔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이안은 자기가 앙리와 같이 있는 것을 마노엘이 안다거나, 아를르에 온 진짜 이유를 앙리가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일은 잊어버리고 그냥 즐길 작정이었다. 여러 해 전부터 이처럼 마음 편히 남성과 사귀어 본 적은 없었다.

앙리는 매력적이었고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자였다. 두 사람은 책과 그림에 관해, 또 최근에 소문이 자자한 연극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젠 다섯 시가 된다고 앙리가 말했을 때는 놀랄 정도였다.

잘 닦여진 이탈리아제의 스포츠카를 타고 두 사람은 아를르에 돌아왔다.

호텔 앞에서 차를 멈추자, 앙리는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다음엔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오늘 밤은 어때요?"

다이안은 핸드백의 가죽 끈을 손가락에 감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오늘 밤엔 안 돼요, 앙리. 그리구 내일도. 내일은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앙리의 얼굴이 좀 생기를 잃은 것같이 보였다.

"그럼 언제면 됩니까?"

다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여기에 묵게 될지 스스로도 모르는 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걸어 주시겠어요?"

망설이듯 말했다.

"그래요, 그게 제일 좋을 거예요."

앙리는 어깨를 추썩였다.

"그게 좋다면 그러지요. 하지만 전화는 받아 줄 테지요?"

다이안의 입술에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이에요. 오늘은 퍽 즐거웠어요. 인사치레로 말하고 있다곤 생각지 마세요."

앙리는 마음이 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알겠어요, 전화를 걸겠습니다. 모레면 괜찮겠지요?"

다이안은 끄덕였다. 시트 뒤에서 앙리의 손이 뻗어 나와 목덜미의 머리를 만지려 할 때 그녀는 슬며시 차에서 내려 재빨리

"안녕."

하고 말했다.

앙리의 입술이 일그러졌으나

"그럼, 안녕, 다이안."

하고 손을 흔들더니 스포츠카는 미끄러지듯 멀어져 갔다.

방에 들어서자 다이안은 핸드백을 내던지고 기지개를 켰다. 아까 앙리에게 한 말에 거짓은 없었다. 진정으로라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여하튼 즐긴 것은 사실이었다.

앙리는 마음속에 엉켜 있는 것을 잊게 해주었고 안심하고 사귈 수 있었다. 물론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성으로부터 뜻밖의 찬사(讚辭)를 받는 일은 흔히 있었고, 그가 열심인 것은 자기가 여성인 데서 오는 당연한 반응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견(外見) 이상으로 남자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자기에게 갖춰져 있는 것을 그녀는 전혀 깨닫고 있지 못했다.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그녀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비단 욕의(浴衣)를 입고 침대에 누웠다. 피로감을 느꼈으나 지금까지의 경위를 생각하면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이 호텔에 온 후로 잠을 푹 자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마음이 동요하고 있어서 완전히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바다의 공기를 쐰 때문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을 감자 이내 잠이 들어 버렸다.

잠이 깨니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다. 몹시 추운 것 같아서 침대에서 내려와 손목시계를 찾았다. 아까 샤워를 할 때 풀어서 화장대 위에 놓아두었었다. 시계 바늘이 곧 영 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섯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아래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떨고 문을 닫았다. 또 침대로 돌아가는 게 제일이다. 새삼스레 옷을 갈아입어도 소용없다.

시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으나 눈이 말똥해지면서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창가로 가서 그림자가 떨어지는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에는 나무 사이에 반쯤 숨어서 한 대의 큰 자동차가 서 있었다. 먼지투성이의 회색의 스테이션 왜곤이었다. 한 사나이가 나무 그늘에서 나타나는 것이 다이안의 눈에 띄었다. 볕에 그을은 키가 큰 사내인데, 그 머리는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짙은 색깔의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올려져 있다.

돌연 사내는 얼굴을 들어 호텔의 어두운 창문을 쳐다보았다. 다이안은 저도 모르게 한손을 가슴에 대고 뒷걸음쳐서 벽에 기대었다. 마노엘이다! 마노엘이 호텔 앞에 와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서성거리고 있다!

또 한번 내다보았다. 이번엔 스테이션 왜곤의 보닛에 기대어 시가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성냥불이 한순간 사나이의 얼굴의 거친 살갗을 떠올렸다. 그리고 시가를 문 채 두 손을 더러운 차체에 댔다. 그 어깨는 몹시 낙담한 듯이 움츠러져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끼며 마치 자기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듯이 팔장을 끼었다. 욕지기마저 느꼈다. 그것은 굶주림에서 오는 것과도 비슷했으나, 적어도 육체적인 굶주림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왜 더 빨리 잠들어 버리지 않았을까.

그녀는 다시 창가에 다가가서 대강 한번 살펴보았다. 스테이션 왜곤은 이미 거기엔 없었다. 광장에 인기척은 없었다. 비참한 생각에 잠겨 버리고 있었기에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4

이튿날 아침 다이안은 매우 일찍 잠에서 깼다. 그래서 다른 손님들이 아직 한 사람도 나타나기 전에 식당에서 커피를 마셨다. 초조해서 정신을 집중시킬 수가 없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박한 푸른 목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을 입으면 좋은 일이 있었고, 농원에 가더라도 어울리지 않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노엘의 어머니와 이본느의 마음을 끌고 싶어한다고 여겨지고 싶진 않았다. 하긴 무엇을 입어도 품위 있게 보여진다는 것은 전혀 깨닫고 있지 못했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갔으나 마노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이안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올 줄 알고 있었는데, 열 시 반이 지날 즈음엔 도대체 오기나 할 것인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안절부절못하게 되어 마노엘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프런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나를 기다리게 해놓고 어떤 면에서 우위(優位)를 차지하려는 속셈일까 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정면의 현관까지 가서 광장 쪽으로 눈을 던졌다.

그때 호텔의 지배인 리용 씨가 거기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가씨?"

하고 늘 손님에게 보이는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다이안은 변명을 하는 듯한 몸짓을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용 씨.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그뿐이에요."

"아아, 그렇습니까."

하고 지배인은 잘 알았다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젊은 남성이군요."

이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커피라도 드시지 않겠어요, 아가씨? 모리스에게 곧 준비를 시키지요."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그건 참 좋은 생각이에요!"

그녀는 흥분하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 필요했다.

"알았습니다, 아가씨."

리용 씨는 미소를 지었다.

"곧 가져다 드리지요."

"고마워요."

다이안도 웃음을 띠었고, 그러자 지배인은 물러갔다.

2, 3분 후에 지배인은 차반을 들고 나타나 라운지를 가리켰다. 라운지의 의자에 앉아 앞쪽의 낮은 탁자에 차반을 내려놓았다.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아가씨!"

그는 적당히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다이안이 고맙다고 말하자 지배인은 일하러 돌아갔다. 자기 손으로 컵에 커피를 따라 마시려 했을 때, 누군가가 문께에 우울하게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섬칫해서 쳐다보니 마노엘이었다. 마노엘의 잿빛 눈과 마주쳤다. 가슴이 울렁거려 그녀는 컵을 받침접시에 도로 내려 놓았다.

"어때?"

하고 라운지 안으로 들어오며 그는 말했다.

"준비는 다 됐소?"

다이안은 놀랐다.

"벌써 열한 시가 돼가요."

마노엘은 어깨를 추썩였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다이안은 한순간 노여움에 모든 것을 잊고 격하게 말했다.

"아홉 시부터 당신을 기다렸어요! 오늘 아침에 농원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잖아요."

"그렇게 하겠다니까."

그는 상대방을 골려줄이만큼 태연하기만 했다.

"하지만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에요!"

"그래? 그렇다면 집에서 점심을 먹도록 하지."

"아아, 마노엘!"

하도 떨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만은 싫어요!"

마노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옷을 갈아입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이안."

하고 상대방의 말은 묵살하고 말해 버렸다.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일에 드레스는 어울리지 않지. 슬랙스나 뭘로 갈아입고 와요!"

다이안은 순순히 걸음을 멈추면서 오늘의 그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넓적다리의 다부진 근육에 마치 피부처럼 꼭 끼인 회색 쉐이드 바지, 검은 테를 두른 회색 쉐이드 조끼, 그리고 빨간 비단 셔츠를 입고 있어 어느 모로 보나 프랑스의 귀족 같았다. 눈 코 등의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는 오만함이,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히 발음하는 말에는 존대함이 담겨져 있었다. 우아한 양복을 입은 앙리는 결코 이런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다이안은 마노엘의 개성(個性)과 박력에 압도되어 저항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도 더 말하지 못하고 그녀는 라운지를 나가 층계를 뛰어올라가서 방으로 향했다. 푸른 드레스를 막 벗어 던지고 몸에 착 붙는 크림색 슬랙스와 보랏빛 트라이셀 저지 블라우스를 입었다. 가슴의 단추를 두 개 풀어 놓은 채 머리를 매만져 보고 나서 다시 달음박질을 해서 라운지로 돌아왔다.

마노엘은 두 잔째의 커피를 컵에 따르고 있는 참인데, 지배인 리용 씨가 그런 그에게 공손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다이안은 노여움을 참았다. 옷을 갈아입으라고 명령해 놓고 자기는 그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남의 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라운지에 들어가자 키가 작은 지배인이 정중하게 돌아다보며 살짝 말했다.

"상 살바도르 님은 오늘 당신을 마나드에 모셔 가겠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아가씨. 틀림없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체험을 하실 겁니다."

"그래요?"

하고 다이안은 시들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들어왔을 때, 마노엘은 일어서서 울적하게 보고 있다가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는 컵을 받침접시에 도로 놓고 다가왔다.

"이젠 가볼까."

하고 만족스레 말했다.

다이안은 낯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노엘이 지배인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갔다.

어깨에 내리쬐는 햇살이 뜨거웠다. 말끔히 갠 날이어서 이런 경우가 아니었던들 희한한 야외의 하루가 됐을 게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신경이 잔뜩 긴장해서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두 필의 말이 울타리에 매어져 있고 스테이션 왜곤은 그림자도 없었다. 다이안은 의아스런 듯이 마노엘을 돌아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끄덕거렸다.

"실망했어?"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물었다.

"스테이션 왜곤을 탈 줄 알고 있었나?"

"그래요."

다이안은 불쾌한 듯이 외쳤다.

"벌써 여러 해 동안 말을 타본 적이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3년이겠군."

마노엘은 일부러 다이안을 외면한 채 말했다.

두 필의 말은 비슷하지 않았다. 한 필은 얌전하게 보인다. 자그마하고 살찐 카마르그 산()의 흰 암놈이었다. 또 한 필도 암놈이었으나 사나울 듯싶은 검정말이었다. 마노엘이 타기에 적합한 승용마(乘用馬)가 틀림없다고 다이안은 생각했다. 3년 전에 그는 검은 종마(種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없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이 마노엘이 말했다.

"이건 콩슈에로인데, 카스팔이 이 말의 아비 말이지."

다이안이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을 보고 마노엘은 흰 암말의 고삐를 풀었다.

"이건 메로디야."

이렇게 말하고 콧등을 두들겨 주고서는 다이안을 거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노엘을 만지고 싶지 않아 안장 앞쪽을 잡고서는 도움을 받지 않고 올라탔다. 마노엘은 솜씨를 알아보려는 듯이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여느 때처럼 어깨를 추썩이고는 검정말에 올라 재치 있게 고삐를 다루었다.

다이안은 그의 말이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삐가 늦춰진 콩슈에로가 우아하게 광장을 건너가는 것을 보고, 다이안은 메로디의 배를 발꿈치로 차서 따라가기를 명령했다. 오랫동안 말을 타지 않았으나 얌전한 암말은 다루기가 쉽고, 또 조금씩 지난 날의 경험이 되살아났다. 그녀에게 승마(乘馬)를 가르쳐준 사람은 마노엘인데 그 철저한 지도 방법이 뇌리에 아로새겨져 있있던 것이다.

두 필의 말은 그늘진 가로수 길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은 채 나아갔다. 하긴 마노엘은 몇몇 사람들에게 끄덕여 보이기도 하고 때론 말을 건네기도 하고 있었다.

말이 널찍한 교외로 나가기 전에 마노엘은 안장 위에서 얼굴만 뒤로 돌린 채 짓궂게 말했다.

"어때, 어려워?"

다이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도 어렵지 않아요."

"좋아."

그는 놀리는 듯이 눈웃음을 쳤다.

"그럼, 나하고 나란히 갈 수 있을 거야. 아라비아의 왕자님은 아니니까 여자더러 뒤에서 따라오라는 명령은 안하겠어!"

다이안은 메로디를 몰아 따라섰다.

마노엘은 짜증이 나는 듯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좀 빨리 달릴 수 없나? 당신한테 무리인가?"

다이안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말의 배를 차서 구보(驅步)를 명령했다. 메로디는 달려갔다. 이 근처부터 왼쪽엔 습지(濕地)가 펼쳐지고 멀리 못의 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은 뚜렷이 바닷물 냄새를 풍겼고, 다이안은 해방감을 맛보면서 마음이 들떴다. 등에 쬐는 햇빛은 따뜻하고, 반짝이는 푸른 못에는 온갖 종류의 새들이 몰려와 헤엄치기도 하고 물 속에 잠기기도 하면서 저마다의 울음 소리를 들려 주고 있었다.

메로디의 자그마하지만 단단한 몸은 다리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여서 다이안은 용기가 솟아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일대는 글자 그대로 자연이 지배하고 있었다. 말의 발이 빠질 것 같은 심한 진창도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갖가지 추억이 흡사 물결같이 그녀를 적시기 시작했다. 마노엘과 같이 말을 타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전에 여기에 왔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의 지배하에 있었다. 모든 생물을 이성(異性)에로 몰아내어 그 결합에 의해 참된 완성을 이루게 하는 원시(原始)의 힘에 지배되고 있었다.

마노엘을 돌아다보았다. 조용히 트롯 걸음으로 콩슈에로를 몰고 따라오고 있었으나, 다이안의 얼굴을 보자 일부러 검정말을 충동질하여 갤롭으로 다이안을 앞질러 소택지를 지나 저 편에 보이는 모래톱으로 향했다.

다이안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메로디의 고삐를 늦췄다. 작은 암말은 기꺼이 뒤쫓아갔다. 인기척이 전혀 없는 끝없는 공간을 질주(疾走)하는 것은 희한한 체험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검은 축우(畜牛)들이 있었지만 이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금기가 섞인 물이 정강이와 사타구니에 잠겨졌다. 부츠를 신고 오길 잘했다고 다이안은 생각했다.

깊은 개펄에 이르자 말은 속도를 늦추고 완전히 말 탄 사람을 생각지 않은 채 개펄을 밟고 건너간다. 그런 때 다이안은 아무래도 발을 들고 싶어지지만, 마노엘이 발을 들지 않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했다. 균형을 잃고 개펄에 떨어지긴 싫다.

그래도 투명한 푸른 물과 바닥에 보이는 모래는 몹시 마음을 끌었다. 헤엄을 치면 좋겠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저께 다이안이 시트로엔을 몰고 간 도로에서 떨어져서, 소택지를 가로질러 일직선으로 상 살바도르 농원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길이 훨씬 멋있다고 다이안은 생각했다. 여기엔 간척(干拓)의 자취도 보이지 않고 논밭도 없으며 관광객도 없다. 인간들에게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있다. 여기는 지금 다이안에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노엘은 말의 속도를 늦추더니 고개를 돌려 기쁨에 빛나는 다이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옆에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낙심하고 있어?"

몸을 굽혀 다이안의 등자(말을 탔을 때 두 발로 디디는 제구)를 조정하며 물었다.

다이안은 기쁨을 참을 수 없어 끄덕였다.

잠시 그 모습을 살피듯 바라보고 나서 마노엘은 몸을 일으켜 호주머니를 뒤져서 시가를 꺼냈다. 그리고 불을 붙이며 말했다.

"피곤하진 않지?"

수면에 비치는 햇빛이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그녀 쪽으로 눈을 돌렸다. 흰 암말의 넓은 등에 올라탄 다이안의 늘씬한 다리를 흘끗 보고 물었다.

"타기가 힘들지 않아?"

다이안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내일은 여기저기가 아플 테지만"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키고 한숨처럼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게 아름답기만 해요. 나를 제외하곤."

마노엘은 시가를 맛좋게 피우고 있었다. 머리 위에 푸르스름한 연기가 떠올랐다. 이윽고 덤벼들듯이 날카롭게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어, 다이안?"

다이안은 깜짝 놀랐다.

"내가내가 무엇을 했기에?"

"왜 나한테 작별인사도 안하고 가버렸어? 작별인사도 할 가치가 없는 사내라고 생각했나?"

그 눈은 싸늘하게 다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쏘는 듯한 눈길에 부딪쳐 그녀는 격노(激怒)했다. 모처럼 카마르그에 와서 안락한 기분이 되었는데 마노엘의 거친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얼른 대답할 말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내 날카로운 투로 말했다.

"당신 어머니한테서 모든 걸 들었겠지요?"

마노엘은 소리쳤다.

"어머니 얘길 하고 있는 게 아냐! 당신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왜 날 바보 취급하는 길을 택했는지 알고 싶은 거야! 뭐가 잘못됐지? 그 전날 밤 우리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왜 당신은"

"아아, 그만둬요, 그만둬 줘요!"

다이안은 상대방의 분격한 말을 듣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지나 버린 일을 따져서 어쩌겠다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길을 택했고, 나는 내 길을 택했던 것뿐이에요!"

"아냐, 그건 그렇지 않아!"

마노엘은 달려가려고 하는 그녀의 말의 재갈을 잡았다.

"지난 일은 확실히 되돌릴 수는 없어.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왜 당신은 그런 의식(儀式)을 받았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으면서"

다이안은 잡혀 있는 재갈을 뺏으려고 했다. 마노엘의 손가락을 떼어 놓으려고 기를 썼으나 되려 그 손이 잡혀 버렸다. 뜨거운 살갗에 닿는 사내의 차가운 손이 힘 자체가 되어 그녀에게 육박하여, 이 태양과 물과 하늘의 세계에 두 사람을 용해(溶解)시켜 버리는 격렬한 불길로 타올랐다.

"다이안!"

절박한 그 목소리에 몹시 마음이 흔들린 다이안을 마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려는 듯이 마노엘은 응시했다. 다이안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교활하다고 생각했다. 부정하기 어려운 관능(官能)의 힘을 이용해서 진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 되게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이렇게 다루어질 까닭은 없다.

초인적(超人的)인 노력으로 그녀는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메로디의 옆구리에 두 무릎을 힘껏 눌러댔다. 조그마한 말은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깊은 개펄에서 빠져 나가 습지에 말발굽이 닿자마자 메로디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이안은 정신없이 갈기에 매달리고 있었다.

성난 듯이 마노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그것도 한 순간 뿐이어서, 메로디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다이안의 귀엔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 작은 몸뚱이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한 속도로 메로디는 질주했다. 여기는 메로디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이제 메로디는 다이안이 아무리 고삐를 조여도 반응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진짜로 공포가 솟아나기 전에 검정 암말이 옆에 나타나면서 마노엘의 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그 힘에 눌려서 메로디는 조금씩 속도를 늦췄고, 마노엘은 끝내 두 필의 말을 정지시켰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다이안은 몸을 떨었다. 그것은 질주하는 말의 공포 때문이라기보다도 번쩍번쩍 빛나는 마노엘의 눈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재빨리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다이안은 자기도 끌어내려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땀이 솟아나 있는 말 쪽으로 돌아서서 부드럽게 말하며 콧등을 문질렀다. 이윽고 메로디는 침착을 되찾고 그의 손에 코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다이안은 그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안장에서 내동댕이쳐질 찰나였음을 깨닫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심성 없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렇게 잿빛 눈 속에 경멸을 품고 보지 말고 무엇이라 말해 주었으면 싶었다.

질책(叱責)보다도 심한 그런 태도에 몹시 화가 난 것이다. 원래 그 탓이 아닌가.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마노엘 때문이 아닌가.

그때 마노엘은 흰 말에서 물러나 콩슈에로의 옆구리를 문지르고는 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이안에게로 눈을 돌렸다.

"혹시 그 말을 병신으로 만들면"

하고는 말끝을 맺지 않았다.

다이안은 고삐를 꼭 틀어쥐었다.

"그러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마노엘은 입을 일그러뜨렸다.

"알고 있을 텐데."

다이안은 노여움에 몸을 떨었다.

"당신은 전능(全能)인 줄 아는 모양이군요?"

하고 우스꽝스러울 만큼 유치하게 말해 버렸다.

마노엘은 어깨를 움츠리고 활력에 넘치는 숱이 많은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가 목덜미까지 쓸어내렸다.

"일부러 화를 내려고 해도 안 돼, 다이안."

관대한 체하며 말했다. 잘못은 자기 쪽에 있다고 하는 것 같은 말투에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그가 콩슈에로의 고삐를 잡자 검정 암말은 순순히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다이안은 메로디를 걸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가만히 앉은 채 반항하듯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삐를 끌어 줄까?"

냉랭한 비웃음을 곁들여서 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는 물었다.

다이안은 손을 내려 메로디의 목 언저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말은 침착을 되찾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이 닿자 놀라며 꿈틀했다.

다이안은 말한테 말없는 비난을 당한 것같이 여겨졌다. 풀빛 눈을 도전(挑戰)하듯 흡뜨며 그녀는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마노엘은 어깨를 움츠리고 말 옆구리를 한 번 찼다. 콩슈에로는 걷기 시작했다. 다이안은 천천히 뒤따랐다. 갈대가 촘촘히 자라고 물이 괴어 있는 웅덩이를 건너가면서 야생의 만년납 덤불을 발견했다. 그 달콤한 냄새가 두송(杜松)의 가장 심한 냄새와 섞여서 풍기고 있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들이 야생의 아름다움에 넘쳐 있었으나, 이젠 다이안은 경치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못하게 되었다. 겨우 몇 분 사이에 그녀의 마음의 안정은 고스란히 가셔 버리고, 몇 미터 앞을 가고 있는 사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검정말을 탄 힘차고 우람한 사나이는 이제 젊지도 않고 삶의 기쁨에 불타고 있지도 않았으나, 그대신 엄연히 경험을 쌓은 사나이로서 사방에 눈을 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마 동안 말없이 말을 타고 갔다. 다이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마노엘의 말을 뒤따르고 있었다. 간혹 마노엘은 뒤돌아보았으나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태양은 중천에 솟아 몹시 더워지기 시작했다. 빨리 닿지 않을까 다이안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훨씬 멀리에 조그마한 카바느의 기울어진 지붕이 보였다.

카바느란 농원에서 일하는 가축과 파수꾼의 집을 말한다. 예전에는 갈대나 골풀로 만든 방이 하나뿐인 오두막이었으나, 지금 이런 집들은 훨씬 훌륭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카바느는 초가지붕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넓은 처마로 되어 삐죽이 나온 낡은 타입의 것이었다. 가까이 감에 따라 인기척이 없음을 알았다. 마노엘은 왜 곧바로 거기로 가고 있을까 하고 그녀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카바느>의 앞은 빈터로 되어 있어 기름진 땅이 평탄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거기에 이르자 마노엘은 말에서 내려 콩슈에로의 목덜미를 두드리고 나른한 듯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다가오는 다이안을 돌아다보고 말했다.

"내려요! 목이 마르군. 좀 쉬었다가 갑시다."

다이안이 안장에 앉은 채로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오만하게 허리에 두 손을 대고 불쾌한 듯이 말했다.

"끌어내려 주기를 바라나, 아니면 하라는 대로 할 텐가?"

다이안은 목청을 돋우어 대답했다.

"여긴 농원이 아니에요. 농원에 데리고 간다고 했잖아요!"

마노엘은 짜증이 나는 기색을 보였다.

"농원에 갈 작정이지, 쉬었다가 말야. 지금은 배가 고파. 당신도 그렇지?"

다이안은 전율을 느끼며 인기척이 없는 카바느에 눈길을 던졌다.

"이런 곳에 먹을 것이 있어요?"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억제하며 말했다.

마노엘은 메로디의 고삐를 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다이안을 보고는 목에 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간히 해둬, 당신한테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건 아냐! 당신하고 자려고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온 건 아니란 말야!"

그의 눈이 흐려졌다.

", 어서 내려, 뭘 좀 먹어야지."

그는 갑자기 말고삐를 놓고 얼굴을 돌렸다.

다이안은 떨리는 다리로 내려섰다. 두 필의 말은 사이좋게 나란히 서서 잘 자란 풀을 뜯어먹고 있다. 다이안은 마노엘 쪽을 보았다.

그는 카바느를 향해 걸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냘픈 어깨를 힘없이 움츠린 채 다이안은 풀을 밟고 문께에 이르러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밝은 문밖에서 카바느의 내부를 보니 캄캄했으나, 이윽고 눈이 익숙해지자 초라한 식탁에 앉아 굵은 프랑스 빵을 자르고 있는 마노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 카바느는 평소에 사용되고 있지 않았으나 티끌 하나 없고, 이렇게 이따금 누군가가 사용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노엘이 보고 있기에 그녀는 자신을 지키려는 듯이 문기둥에 기대었다. 그의 눈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조소(嘲笑)가 떠올라 있었다. 나이프를 쥔 마노엘의 손가락이 긴 거친 손은 시커멓게 볕에 그을려 있었다.

다이안은 별안간 뭔가에 신들린 것처럼 그 볕에 그을은 손에 다시 힘껏 안기고 싶었다.

예전엔 언제든지 그를 만질 수 있었고 자주 그렇게 해왔었다. 그때 그는 마치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같이 힘껏 껴안아 주었다. 얼마나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빵 외에 치즈와 버터, 그리고 포도주가 한 병 있었다. 마노엘은 어서 들어와서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다. 플라스틱 컵이 두 개 있었는데 그 하나에 포도주를 따라 다이안은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컵을 입에 댄 채 카바느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빈 화상(火床) 옆에 검게 그을은 프라이팬이 세워져 있고 그 안쪽엔 비좁은 잠자리가 있었다. 스프링이 있는 매트리스는 없고 하드보드 위에 짚을 넣은 이부자리가 놓여 있을 뿐이다.

방이 하나뿐인 오두막집인데, 다이안은 이런 카바느에서 지금도 살면서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노엘은 빵을 다 자르고 나이프를 옆에 놓더니 포도주병을 들어 다이안처럼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손등으로 입을 닦고는 창문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오두막 뒤쪽에 우물이 있음을 알렸다.

"물은 깨끗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좀 소금기는 있지만 차가우니 세수를 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

그는 포도주를 또 따르며 말을 이었다.

"위염(胃炎)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마시지 않는 게 좋지만 그것도 당신이 생각하기 나름이지."

짓궂은 말투에 다이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틀어쥐었다. 일부러 비양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무시하고 맛이 좋을 듯싶은 프랑스빵에 버터를 바르고 치즈를 잘랐다. 원래는 가슴이 답답해서 별로 먹고 싶진 않았지만, 그런 기색을 마노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노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넓은 어깨를 움츠리고 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다이안은 다리를 흔들면서 식탁 끝에 놓인 포도주를 컵에 따라 포도주를 곁들여서 빵을 먹었다. 마노엘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포도주를 마신 효과가 있어 천천히 취기(醉氣)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깥에 나가는 게 좋을 성싶어서 일어서서 카바느의 문께로 가자 마침 들어오는 마노엘과 부딪칠 뻔했다. 마노엘은 정중하게 옆으로 비켜서서 그녀를 나가게 했다.

바깥에 나가자 조심스레 오두막 뒤쪽으로 돌아가 물이 담긴 물통을 찾아내어 깨끗이 얼굴을 씻었다. 손수건으로 가볍게 두드리듯 얼굴을 닦으면서, 이것만이라도 가지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니 아무도 화장을 눈여겨 보진 않을 것이다.

얼굴을 씻으니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몹시 덥기에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더 끄르고, 무의식적인 요염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문득 보니 마노엘이 카바느에서 나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린 다이안은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그를 보았으나 그 숨결은 거칠어져 있었다.

마노엘은 그대로 꽤 오랫동안 서 있었으나, 이윽고 천천히 풀을 밟고 다가왔다. 다이안은 마음의 동요를 알리지 않으려고 망연(茫然)히 얼굴을 들고 있었다. 마노엘은 냉정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게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는 거야?"

하고 무례하게 물었다.

"여느 때엔 드리우고 있었잖어."

다이안은 몸을 떨며 말했다.

"어떤 머리 모양을 하고 있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마노엘은 양쪽 엄지손가락을 허리띠에 찔러 넣고 태연하게 그녀 앞에 버티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면 어떡하겠어? 그만두겠어?"

다이안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제발 아까처럼 덤벼들진 마세요!"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다툼을 하잔 말인가? 덤벼들어? 내가 말인가"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건 35명의 어린이들을 맡고 있는 교사로서 좀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있는 것같이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에요."

성나게 하기보다는 변명을 하는 게 좋다 싶어서 말했다.

"여긴 교실이 아냐, 다이안."

뚫어지게 들여다보듯 그녀의 눈을 보고 있는 마노엘의 눈이 블라우스의 가슴께에 머물었다.

다이안은 적의를 품은 그런 말에 참을 수가 없어 뒤돌아보았다.

"제발."

그녀는 또 말했다.

"이젠 갑시다."

그때 그녀는 등 뒤에 있는 사내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 손이 자기 몸을 건드리면 몹시 흥분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노엘은 놀려 주는 데 싫증이 난 모양이어서, 물러가는 발 소리와 말을 보고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그녀는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마노엘과의 사이에 얽힌 감정이 암초에 부딪칠 때마다 언제나 이렇게 묘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힘없이 슬랙스에 비비면서 그는 대관절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가 옆에 있어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된다. 3년 전에 마노엘에 대해 품었던 감정은 지금도 변함없이 한결같다. 아니,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국을 떠나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오는 것이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마노엘의 존재가 자기의 신경에 끼치는 압도적인 영향에 직면해서 그런 감정을 억제할 힘을 시험하는 것 같은 일은 싫었던 것이다.

그래도 마노엘은 행복한 결혼을 하고, 아마 어린애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욕망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마노엘은 형식뿐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결혼하고 있지 않았고, 예전처럼 단순한 인간은 아니었다. 더 건장하고 경험을 쌓아서 무슨 일이든지 외견만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으며, 모든 점에서 훨씬 매력적으로 변했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나에겐 그가 필요한 거야

마노엘은 안장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이안은 발을 끌듯이 하며 말이 있는 데로 다가갔다. 이번엔 쉽사리 메로디를 타지 못했다. 힘이 드는 승마 후에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근육이 굳어져서 쉽게 안장에 오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우스운 모습으로 기어올라가 지친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마노엘은 콩슈에로의 고삐를 한 번 흔들었다. 큰 암말은 그녀에게로 우아한 모습으로 걸어온다.

"괜찮아?"

하고 그가 물었다. 그 눈에선 힐문(詰問)하는 듯한 기색은 가시고 얼굴엔 진심으로 걱정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다이안은 하는 수 없이 눈을 들었다.

"물론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물어요?"

마노엘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거역하진 말아요, 다이안."

하고 조용히 말했다.

"적어도 농원에선 문화인답게 행동해 줘요!"

다이안은 화가 난 듯이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건 무슨 의미예요?"

마노엘은 흘끗 그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와 이본느는 우리를, 서로의 반응을 흥미깊게 지켜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의 추측에 먹이를 주고 싶진 않아!"

다이안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되잖아요!"

하고 응수했다.

마노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계획에 이러니저러니 참견하진 말아요. 당신한테 약속한 걸 기억하겠지?"

그가 손목을 움직이자 검정말은 떨어져 갔다. 농원이 가까워진 것이다. 멀리 방풍림(防風林)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는 목장과 창고가 보인다. 파수꾼들에게 쫓기어 다른 목초지(牧草地)로 이동하는 소떼가 나타났다. 대부분이 이런 황소였다. 파수꾼들은 '주인'을 보자 공손하게 모자를 들어 인사를 하고, 다이안에겐 분명히 호기심의 눈길을 던졌다.

무리에서 벗어나 몇 필의 소가 이쪽으로 향해 오는 것을 보고 다이안은 소름이 끼쳤다. 마노엘이 파수꾼들 쪽으로 가 있는 동안에 거대한 소가 위협하듯 뿔을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다이안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몇 분 후에 마노엘이 돌아오자, 다이안은 눈길을 피하려 했다.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카마르그를 다시 떠날 때엔 틀림없이 지금과는 다른 슬픔을 품게 될 것이다. 조나단조차 그 슬픔을 완전히 잊게 해주진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5

목장과 작고 초라한 투우장 사이에 상 살바도르 농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 그 투우장에서 황소와 싸우는 마노엘을 본 적이 있었다.

길가의 플라타너스는 큰 잎을 펴서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막는 그림자를 가로수 길에 떨어뜨리고 있다.

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타마리스크와 사이프러스가 눈에 띄게 된다. 농원의 주위는 땅이 기름져서 마노엘의 어머니는 집 근처에 조그마한 야채밭을 만들어 야채며 꽃나무를 심고 있었다.

다이안의 기억에도 생생한 것은 마노엘의 어머니가 농사일에 열심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이안은 마노엘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씁쓰레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의 앞뜰에서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렸을 때 그 주변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흥미 있게 다이안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농원의 건물은 카마르그에선 독특한 것이어서 육중한 단층이지만 유난히 큰데,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증축(增築)해 왔기 때문이다. 창문은 높고 좁다. 덧문은 지금은 열려져서 벽에 붙어 있지만, 겨울철이 되어 북서풍이 골짜기에 불어올 때쯤엔 꼭 닫힌다.

마당가의 물통에 말을 끌고 갔다가 천천히 돌아오는 마노엘을 다이안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옆에 와서 멈춰 서자 쏘는 듯이 다이안을 보았다.

"어때?"

그는 말했다.

"그전대론가?"

다이안은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없이 끄덕였다.

마노엘은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낮은 층계를 올라가 좁은 복도로 인도했다.

이 집에서 마노엘에게 자기 몸이 만져지는 것이 싫어서 다이안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마노엘의 잿빛 눈에 짓궂은 빛이 떠올랐다.

해가 쪼이는 바깥에서 갑자기 어두운 복도에 들어왔기 때문에 눈이 익숙해지는 데 오래 걸렸다. 집 안은 썰렁했다. 그리고 마노엘은 왼쪽 문을 열고, 별로 정답지도 않게 그녀를 큰 부엌에 밀어 넣었다.

더운 날인데도 큰 난로에서는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이안의 눈은 먼저 거기에 끌렸다. 그러나 이내 누군가가 있는 것을 알았다.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어린 하녀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마노엘처럼, 기억했던 것보다 늙은 모습이었지만, 이내 그녀가 마노엘의 어머니임을 알았다.

그녀의 눈은 꼼짝없이 아들에게 떠밀려서 들어온 다이안에게로 쏠렸다. 몹시 짜증스런 말투로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끝내 저 여자를 데리고 왔구나?"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다이안은 아들과의 대화를 죄다 자기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마노엘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 그래요."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의 어머니는 젖은 걸레로 손을 닦으면서 옆에 있는 하녀에게 뭐라 말해 거칠게 쫓아 버렸다. 그리고 빈틈없는 눈을 하고 다이안에게로 다가왔다.

"왜 여기에 왔지?"

다이안을 놀라게 하려는 듯이 느닷없이 물었다.

마노엘은 말리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왜 여기 왔는지 알고 있잖아요, 어머니."

그는 나무라듯 말했다.

어머니는 경멸하듯 아들을 보았다.

"아아, 왜 여기 왔는지 알고 있지, 이 농원에 온 까닭은!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카마르그에 또 왔는가 하는 거야! 네 계집이라고 해서 왜 무슨 권리가 있다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가만히 계세요!"

마노엘은 거칠게, 그러나 뚜렷한 말투로 소리쳤다.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으나 성난 듯이 눈을 흘겼다.

"이본느는 어디 있어요?"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직 있겠지요?"

어머니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으나 마노엘의 눈을 보자 생각을 바꿨다.

"물론 있지."

반항적으로 중얼거렸다.

"점심을 먹은 뒤엔 늘 있다는 건 알고 있잖아. 너희들이 생각보다 늦게 와서 그렇지."

마노엘은 그런 말은 무시하고 문께로 걸어갔다.

"그럼, 우리는 할머님을 만나러 가겠어요."

다이안의 창백해진 얼굴을 흘끗 보며 말했다.

어머니는 앙상하게 마른 어깨를 움츠렸다. 여위었다기보다는 차라리 수척해 보이는 그 모습은 잿빛 머리털 때문에 더욱더 을씨년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그녀는 중얼거렸다.

다이안은 침을 삼켰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나를 싫어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특히 견딜 수 없다. 이미 신경은 한껏 긴장해서 이 집에 있는 한 더욱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노엘이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싶어 바라보았다. 그러나 턱 위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이 자리의 숨막히는 공기를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리 와요!"

마노엘은 다이안을 불렀다. 그 말을 듣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내 문께로 갔다. 그의 어머니 옆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좁은 복도로 나가자 마노엘은 훨씬 안쪽의 문으로 향했으나, 다이안은 그 소매를 충동적으로 잡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마노엘."

하고 그녀는 애원했다.

"이젠 그만둬요!"

마노엘은 멈춰 섰다.

"? 어머니한테 뭘 기대하고 있었던가, 기분좋게 환영해 줄줄 알고 있었나?"

다이안은 눈을 내리깔고

"아니에요,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하며 다시 눈을 들었다.

"어머니가 나를 싫어하는 걸 모르세요? 여기서는 모두가 날 싫어한단 말이에요. 나는 그걸 잘 알아요."

부정해 줄줄 알았는데, 마노엘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싫다면 돈을 주거나 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런 굴욕의 괴로움을 맛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돈을 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이안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그는 가볍게 그 문을 노크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어와요!"

마노엘은 문을 열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 그 얼굴엔 아까와는 숫제 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다이안의 귀에 익숙하지 않지만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마노엘이냐! 다이안을 데리고 왔구나!"

마노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어귀의 낮은 들보 밑에서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 있어요, 자아, 다이안."

다이안은 조심스럽게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큰 방인데 널빤지가 붙여진 벽에는 카마르그를 그린 인상파(印象派)의 그림이 몇 장 걸려 있었다. 예전에 지엔마 할머니가 많이 도와 주었던 집시 화가 데메트르의 작품이다.

잘 닦여진 널마루에는 모포가 깔리고, 가구도 다루기가 어려울 만큼 큰 것이어서 대부분 몹시 낡아 있었다. 방 왼쪽의 대부분은 큰 네 기둥식 침대가 차지하고 있고, 그 한가운데 쌓인 베개에 기대어 검은 머리의 조그마한 늙은 부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눈엔 아직도 다이안이 기억하고 있는 광채와 날카로움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집시의 핏줄을 잇는 마노엘의 할머니, 지엔마였다.

마노엘은 그 칠흑의 머리며 쏘는 듯한 눈의 광채뿐만 아니라 성격 면에서도 많은 것을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상 살바도르 가의 사람들 중에서 지엔마 할머니가 제일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이안은 깨닫고, 왜 상자마차를 떠나 그처럼 경멸했던 농원에 돌아오게 되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이안은 문께에 서 있었는데, 늙은 부인은 새처럼 반짝이는 눈을 안타까운 듯이 그쪽에 던지고 있었다. 침대 옆으로 오라고 그 눈이 명령하기에 다이안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그녀는 자신없게 말했다.

"건강은 어떠세요?"

2, 3분 동안 늙은 부인이 말없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다이안은 견딜 수 없이 쑥스러웠다. 이윽고 할머니는 만족스레 끄덕이고는 손자를 돌아보았다.

"좋아."

할머니는 말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다, 마노엘. 잠깐 우리 둘이서만 있게 해 다오."

"아아, 하지만"

다이안은 말하려다 말았으나, 마노엘은 아무 말도 말라고 눈짓으로 알리고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방을 가로질러 할머니에게 정겹게 작별인사를 하고서는 나가 버렸다.

다이안은 마노엘이 닫은 문을 바라보며 손을 깍지 끼고 아프도록 꽉 틀어쥐었다. 그리고 침대 한가운데에 여왕처럼 앉아 있는 강인하고 조그만 늙은 부인 쪽을 돌아다보았다.

왕가(王家)의 피를 잇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그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엔마는 안타까운 듯이 다이안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디에 좀 앉지 그래. 여기가 좋겠군, 침대 말야. 내 곁으로 다가와, 어서"

지엔마는 손가락을 하나 세워 다이안의 창백한 뺨을 가볍게 찔렀다.

"이제야 돌아왔구먼."

다이안은 눈치 채지 못하게 어깨를 추썩였다.

"조금 전부터예요."

"마노엘을 만나러 말이지?"

"."

하고 다이안은 겉옷의 나뭇잎 무늬를 보며 말했다.

"?"

지엔마도 마노엘과 마찬가지였다. 날카롭게 급소를 찌른다. 마노엘의 어머니도 그랬지만 좀 어딘가 달랐다.

"돈이 필요해서요."

다이안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지엔마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 조만간에 진실을 알아내 버리니까. 다이안은 그 밖의 좀 복잡한 일을 물어올 때 과연 끝까기 숨길 수 있을지 몰라 두려웠다.

"그래?"

하고 지엔마는 베개에 기대더니 깊은 생각에 잠기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왜 마노엘한테 왔어? 그런 일이 있은 뒤인데, 아마 자네는 마노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다이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한테도 부탁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럼 마누엘에게 부탁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나?"

다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어요."

"왜 돈이 필요하지?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아니에요. 정확하게 사고랄 순 없어요."

다이안은 상대방의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이건 저하고 마노엘 사이의 일이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죄송해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 사람이 저를 여기에, 할머니한테 데리고 와서"

할머니는 날카롭게 그 말을 막았다. 그 눈은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자네를 데리고 와 달라고 한 것은 나였네. 아를르에 자네가 와 있다는 걸 루이즈한테 들었어."

"루이즈한테 들었다구요?"

"그래, 마노엘이 아냐"

할머니는 짜증이 나는 듯한 몸짓을 했다.

"루이즈야. 하긴 마노엘에 대해선 자네도 잘 알지, 그렇지!"

다이안의 뺨은 새빨개졌다.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자 황급히 방을 가로질러 좁은 창문께로 갔다.

"할머니는 왜 농원에서 살게 되셨어요? 왜 상자마차를 버리셨어요?"

지엔마는 잠시 다이안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격렬한 말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쓰러졌던 거야, 2, 3개월 전에. 그 의사 녀석들은 죽는 게 무서워서 벌벌 떨지. 그래서 그 공포를 얼버무리려고 끈질기게 남을 돌봐 주고 싶어 하는 거야. 그런 의사들이 고집을 세우는 거지. 농원에 데리고 가서 간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 말야!"

그녀는 작은 주먹을 틀어쥐고 말을 이었다.

"마노엘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데 올 리가 없지.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는 손을 펴는 시늉을 했다.

"여기 있는 거야. 그 여자하고 같은 지붕 밑에 말이지!"

그녀는 마노엘의 어머니인 며느리가 일하고 있는 부엌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알았어요."

다이안은 돌아서서 창틀에 기대었다.

"이젠 누구하고든 같이 사셔야 해요, 마노엘의 아버님도 돌아가셨으니."

"알베르 말인가?"

할머니는 손자와 똑같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알베르하곤 한 번도 마음이 맞아본 적이 없었지. 그러니 그의 아내였던 여자가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그 말없고 차가운 여자는 일생 동안에 꼭 한 가지밖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았어!"

"그게 뭔데요?"

하고 흥미를 갖고 다이안은 물었다.

"마노엘을 낳은 일 말야!"

지엔마는 겉옷을 틀어쥐었다.

"마노엘! 그 애가 내 아들이라면, 진짜 자식이라면! 아아, 물론 마노엘을 위해서라면 뭣이든지 하지!"

다이안은 더욱 얼굴이 붉어지면서 쑥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을 해도 과장되게 들리지 않는 것은 마노엘의 할머니, 지엔마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이안은 감동을 누를 길 없어 가슴이 뜨거워졌으므로 화장대 옆에 가서 자루가 진주조개로 되어 있는 머릿솔을 만지작거렸다.

"루이즈한테서 이본느의 일을 들었어요."

하고 할머니가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돌아선 채 다이안은 중얼거렸다.

"그래?"

흥미가 없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요."

다이안은 돌아서서 화장대에 기대었다.

"무서운 일이었더군요!"

할머니는 무관심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다이안으로선 그럴 테지."

하고 쌀쌀하게 대답했다.

다이안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늘 그렇게 건강하게 활기에 넘친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큰 충격이었겠어요!"

"그럴 테지."

하며 지친 듯이 할머니는 베개에 기대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요?"

다이안은 말을 이었다.

"루이즈의 얘기론 그 사람이 황소를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마노엘과 싸우고서"

할머니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들었다.

"갑자기 몹시 피곤해졌네."

하고는 이어 말씀하셨다.

"이젠 나가 줬음 싶네."

다이안은 한숨을 쉬고 머릿솔을 제자리에 도로 놓고서는 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았을 때, 할머니는 눈을 떴다. 피곤하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고 피곤한 체하고 있었음을 다이안은 알았다.

"또 만나고 싶네."

할머니는 날카롭게 말씀하셨다.

"언제 오겠는가?"

다이안은 신음하듯 대답했다.

"하지만,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게 급히 서둘러야 할 일이라도 있나, 영국에 사내가 있는가?"

"아녜요!"

다이안은 뒷머리를 쓸어 올렸다.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어리석은 소릴 하는 게 아닐세. 그런 건 구실이지! 마노엘더러 대책을 세우게 하겠네. 떠나기 전에 그 애를 여기에 보내줘."

다이안이 하는 수 없이 끄덕이자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다이안은 바깥에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에 나가 좀 망설이다가 부엌에서 마노엘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확실히 마노엘과 어머니는 거기에 있었지만, 다이안의 눈은 타일을 깐 부엌 바닥의 중앙에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멈췄다. 오만스럽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여자는 마노엘의 어머니가 기어코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하던 이본느 드마리였다.

그런 재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본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갈색 머리는 포니테일로 땋아 내렸고, 몸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냘펐다. 얼굴은 희고 갸름한데 눈빛은 푸르다고도 할 수 있고 잿빛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 눈엔 조금 전의 마노엘의 어머니와 같은 적의가 떠올라 있었다. 마음속의 흥분을 나타내듯 무릎을 덮고 있는 모포의 잔털을 짜증스레 쥐어뜯고 있었다.

다이안은 새삼 할머니의 기골(氣骨)에 놀랐다. 마노엘의 어머니도 이본느도 분명히 다이안을 맞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지만, 두 사람의 심정 같은 것은 그 귀족적인 늙은 부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마노엘 이외엔 아무도 할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한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이윽고 마노엘이 침묵을 깨뜨리고 놀리듯 물었다.

"물러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모양이군?"

다이안은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이본느 쪽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이본느.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 들었어요, 참 안 됐어요. 하지만 건강한 것 같군요."

이본느는 짙은 눈썹을 치켜세워 힐끗 마노엘의 어머니 쪽을 보았다.

"왜 안 됐다고 말하나요, 다이안?"

하고 쌀쌀하게 물었다.

"내가 병신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 고소해 했지요!"

다이안은 불끈 화가 났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그런 얘길 듣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짓궂은 말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신랄한 당신 혀가 여전히 성한 것을 보니 기뻐요, 이본느!"

이본느는 화가 난 듯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여기 와서 그런 투로 나한테 말하다니, 당신은."

"제발 그만둬 줘!"

마노엘은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다툼은 이젠 그만두란 말야! 정말 못 견디겠어."

그는 다이안을 보았다.

"앉아요! 어머니가 커피를 끓여 주셨으니 그걸 마시고 떠나요."

거역할 수가 없다 싶어 다이안은 난로 옆의 나무 의자에 순순히 앉았다. 바깥은 따뜻했는데 부엌은 몹시 썰렁해서 난롯불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천천히 부뚜막 쪽으로 가서 컵과 받침접시를 꺼내어 일부러 절그렁 소리를 내며 차반에 담았다. 이본느는 마노엘의 팔을 잡고 다이안이 알아듣지 못하게 사투리를 써가며 말하고 있었다. 마노엘은 엉덩이 위의 허리띠에 두 손을 태평스레 찔러 넣고, 이본느의 쪽에 몸을 기울여 그녀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분명히 결혼할 작정인 모양인데 왜 결혼식을 미루고 있을까 하고 다이안은 생각했다. 루이즈의 얘기로는 재난을 당한 것은 3년 전이라지만, 지금 이본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다이안은 가슴이 아팠다. 이본느가 회복될 기미는 있는 것일까?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될까?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상 살바도르의 피를 잇는 마노엘의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다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조나단에 관해 마노엘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다이안이지만, 지금 이 모양을 보고 있으니 그런 망설임은 가셔 버렸다.

이본느의 상태는 항상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될 것이며, 이본느가 지난 날 얼마나 심술궂게 굴었건 다이안은 이본느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부숴 버릴 수는 없었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향기 그윽한 커피를 큰 컵에 따라 가져와 주었다. 김이 오르는 짙은 블랙커피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다이안에겐 유난히 맛좋았다.

마노엘은 시가에 불을 붙이고 이본느의 휠체어에서 물러나 걱정이 되는 듯이 다이안을 흘끗 보았다. 다이안은 할머니의 일이 생각났다.

"할머니가 당신이 떠나기 전에 와 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깜박 잊었어요."

마노엘은 좀 망설였으나 이내 성큼성큼 부엌에서 나갔다. 그의 어머니와 이본느 사이에 혼자 남은 다이안은 불안해졌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이본느에게 커피를 주면서 다이안 쪽을 보았다.

"언제 떠나지?"

하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영국에 언제 돌아갈 거냐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다이안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2, 3일 내로 갈 거예요."

이본느는 반지를 끼지 않은 다이안의 손가락을 보고 나서 자기 손가락을 장식하고 있는 굉장히 큰 다이아몬드를 보았다.

"당신은 결혼하지 않았어요? 약혼은 했나요?"

다이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마노엘의 어머니는 다이안에게로 다가왔다.

"여기에 돌아와서 또 말썽을 일으킬 생각은 아닐 테지, 다이안?"

화난 듯이 물었다.

다이안은 어리둥절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여기에, 이 농원에 오고 싶진 않았어요! 이건, 지엔마 할머님의 부탁이었어요. 짐작하실 줄 알지만"

"지엔마라구!"

마노엘의 어머니는 비난하는 소리를 질렀다.

"마노엘과 가족 사이의 말썽의 원인은 언제나 그 늙은이란 말야! 그 애의 인생을 망쳐 놓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구!"

"할머님도 한가족이에요."

다이안은 조용히 지적했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그 여자는 가족이 아냐! 집시야, 소도둑이나 말 도둑질밖에 할 게 없는 게으름뱅이 집시 여자란 말야! 자기 자신의 율법(律法)으로 무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의 일 따윈 생각지 않는 무책임한 늙은이란 말야!"

그녀는 주먹을 거칠게 쳐들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이젠 너무 늙었어. 내 말 듣고 있어? 금방 죽어 버릴 거야! 그러면 그 여자로부터 풀려날 수 있어. 이 집에 불행의 장막을 씌우고 있는 주문(呪文)과 미신, 어리석은 신앙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야!"

다이안은 역겨워서 외면을 했다.

"그분은 확실히 늙었어요."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무책임하진 않아요! 알고 계시겠지만 그분은 부족의 왕녀(王女)였던 거예요. 만일 마노엘의 할아버지가 그분과 사랑에 빠져서 여기에 살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부족의 왕과 결혼했을 거예요!"

", 그래?"

마노엘의 어머니는 비웃었다.

"그런 옛날 얘기를 자네한테 들려주던가? 우리 시아버지하고 결혼했지만 가족을 몹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숨지자 이내 가족을 버리고 집시의 생활로 되돌아갔다구!"

다이안은 일어섰다.

"어머니는 모르고 계세요. 그분은 제약을 받기가 싫었던 거예요! 집에 있으면서 날이면 날마다 같은 경치를 창문으로 내다보며 사는 게 싫었던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 숨졌을 때 아드님은 이미 결혼하고 있었어요, 어머님과."

마노엘의 어머니는 다이안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적어도 내 남편은 자기 입장을 알았고 그걸 지켰어, 다이안! 남편은 나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경멸했지!"

"그런 걸 모르는 줄 아세요?"

다이안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지난 날 신세를 많이 진 사람에 대한 너무 심한 말에 다이안은 분격했다.

"그분의 인생을 불행하게 한 건 어머니예요! 산송장 같은 생활이 아녜요! 쓸데없는 규칙이니 규정이니 하는 걸 휘두르고 있는 건 어머니잖아요. 마노엘의 장래를 위한 자랑스런 계획을 강요하기도 하고! 마노엘이 부모의 권력욕(權力慾)을 추진할 도구가 아니었더라면 어머닌 그 사람의 행복 같은 건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거예요!"

"자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마노엘의 어머니는 격노했다. 이본느도 휠체어에서 몸을 내밀고 있었다. 자기를 대신해서 마노엘의 어머니가 밉살스런 영국 여자를 욕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같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말썽만 일으켰던 건 바로 당신이 아니었나, 다이안? 집시의 전승(傳承)을 조사한다는 그럴 듯한 구실로 여기에 와서, 학문이 어쩌구 하니 기가 막혀서! 지적(知的)인 이야기로 아들을 꾀어내서 사실은 그 애하고 하룻밤을 지내고 싶었을 뿐 아냐!"

마노엘의 어머니는 크게 숨쉬었다.

"그리고 그 늙은 집시한테 부추김을 당하기도 하고. 가엾은 바보야, 그 여자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그걸 모르다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옳고 점잖은 일이라고 손자가 생각하게끔 그런 결혼식까지 생각해 내는 판국이었지!"

다이안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블라우스의 깃을 여미며 신음하듯 말했다.

"어머니는 심술쟁이, 거짓말쟁이예요!"

이 말에 그녀가 느닷없이 다이안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다이안은 갑자기 당하여 비틀거렸다.

"그만둬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마노엘은 화난 듯이 성큼성큼 부엌에 들어가자, 뻘겋게 된 뺨을 손으로 누르고 떨며 서 있는 다이안을 먼저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잘 닦여진 나무 탁자 끝을 잡고 간신히 서 있었다.

"이 집에서 이 여자를 끌어내라!"

마노엘의 어머니는 몸부림치며 외쳤다.

"나한테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했어! 이 여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 모든 일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면서 여기에 데리고 오다니!"

"거짓말이에요!"

다이안의 분노의 외침은 돌연 터뜨려진 마노엘의 어머니의 간드러진 울음 소리에 지워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이본느는 가끔 성난 눈길을 다이안에게 던지면서 사투리로 마노엘에게 비난하는 듯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시어머니가 될 여자한테로 휠체어를 굴려 가서 부둥켜안듯이 하며 다정한 말로 위로하기 시작했다.

다이안은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노엘의 어머니는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몹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본느가 그녀를 달래고 있으나 좀처럼 울음을 그칠 것 같지도 않았다.

마노엘은 얼굴에 성난 표정을 띠고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건 누군지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별안간 다이안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방에서 뛰어나가 아무도 없는 마당으로 나갔다. 그녀의 분한 마음을 달래 주는 것은 암탉과 참새뿐이었다.

그녀는 현관 바로 옆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세찬 고동(鼓動)을 가라앉히려 했다. 지금까지 이런 치욕을 당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3년 전에 마노엘의 어머니가 와서 단호하게 자기 아들과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분하지는 않았었다. 그때엔 닥쳐올 쓸쓸한 밤에도 용기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가서 목장의 울타리에 기대었다. 울타리 안에는 농원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 필의 백마가 있었다. 마침 일이 일단락된 것이다. 마른 풀더미도 같이 던져 있어 말들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으로 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먼지 속을 뒹굴기도 했다.

다이안은 부러워졌다. 사람에 비해 얼마나 단순한 생활일까. 갠 하루 일을 하고 돌아오면 먹이가 주어지고 오두막에 넣어져서 필요에 따라 교미(交尾)를 한다. 그녀는 뺨에 손을 대고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여기에 오지 않았어야 했어, 하고 그녀는 전에도 여러 번 그랬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아버지에겐 헤아릴 수 없을 만한 재산이 있는데 어머니에게 그런 여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조나단이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크렐리 이모는 말했다. 그런 말을 곧이들을 것이 아니었다. 돈과는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만일 마노엘의 어머니가 조나단을 마음대로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렇게 되는 수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기의 비참한 처지에 정신이 빼앗겨 누군가가 집에서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노엘이 집 안에서와는 딴판인 음성으로,

"다이안!"

하고 불렀을 때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마노엘한테서 얼른 비켜서는 바람에 마노엘은 짜증을 내며 외쳤다.

"다이안, 제발 그러지 말어!"

턱의 근육이 굳어지고 눈은 격정(激情)에 흐려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때리기라도 할 것같이 보지 말아 줘! 그런 짓은 안해. 사과하고 싶었던 거야. 그런 일이 벌어지게 돼서!"

다이안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거기서 일어난 일을 변명할 작정이군요?"

하고 떨면서 물었다.

마노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를 변명하지도 않아. 다만 느낀 대로를 말하고 있을 뿐이야."

다이안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들- 상 살바도르 가의 사람들은 대관절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솟구치는 흐느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구 당신 어머니하고 그런 싸움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이죠."

"그럼 내 탓인가?"

마노엘의 눈이 빛났다.

"그래요."

다이안은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다니까요. 당신은 나를 마치 꼭두각시같이 다루었어요. 도착했을 때부터예요. 비방(秘方)을 갖고 있대서 마음대로 나를 춤추게 하고 있는 거예요. 이젠 질색이에요! 이런 불쾌한 짓은 그만두겠어요! 당신 돈도 축나지 않을 테구! 나는 이젠 필요 없어요!"

"다이안!"

그는 험상한 기세로 이를 갈며 말했으나 다이안은 몸을 홱 돌려 마당을 달려나가 메로디가 얌전하게 매어져 있는 데까지 왔다.

말을 만지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을 무시하고 다이안은 안장에 뛰어오르자 옆구리를 차서, 마노엘이 말릴 겨를도 없이 걸음을 옮겨 놓게 했다. 그도 자기 말에 뛰어올랐다. 다이안은 붙들리지 않을까 싶어 겁이 났다. 지금까지 마노엘을 애태워 왔으나 이제 더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을 매어 둔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될지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이안은 메로디의 고삐를 늦추어 농원 앞의 널따란 목초지에 말을 몰고 가서 전속력으로 달리게 했다.

이번엔 다이안도 침착하게 말을 다루어 흰 암말은 대번에 풀밭 위를 질주했다. 머리를 스치는 바람은 선선했는데, 문이 닫힌 농가 안에서 혐오와 의혹에 찬 공기에 휩싸이고 있던 후였던 만큼 더욱 상쾌하게 느껴졌다.

핀이 바람에 날려가 머리는 흡사 비단 스카프같이 나부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 해방감은 말할 수 없이 근사했다.

그러나 얕은 못을 첨벙거리며 건너가고 있는 사이에 검정말은 이내 뒤쫓아 와서 삽시간에 옆으로 나란히 섰다. 마노엘은 과감하게 손을 내밀어 다이안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으나 홱 비켜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 모습을 돌아다보는 순간 메로디도 돌아서서 다이안은 안장에서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순간 허공에 떠 있다가 무서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이내 땅바닥에 떨어졌으나, 질척한 습지였기에 다행이었다.

떨어진 순간에 그녀가 느낀 것은 고통도 공포도 아니고 크림색 슬랙스와 보랏빛 블라우스가 엉망이 돼버린 데 대한 낙심이었다. 화가 나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갑자기 마노엘이 옆에 와서 말에서 내려 주저앉아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다이안."

목쉰 소리로 불렀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다이안은 멍청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고 한쪽 팔꿈치를 일으켰다. 블라우스의 깃이 벌어져서 부드럽고 불룩한 가슴이 들여다보였다.

"더러워졌을 뿐이에요."

하고 그녀는 힘없이 대답했다. 걱정스런 듯한 눈을 보니 반항할 생각이 없어졌다.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머리가 커튼처럼 얼굴에 드리워졌다.

"어리석은 짓을 했군요. 죄송해요, 마노엘."

"아아, 다이안!"

마노엘은 일어서서 사납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발 일어서 줘요!"

다이안은 그를 쳐다보면서 그의 존재를, 그 힘을, 마음을 휘젓는 개성(個性), 그리고 얼마나 그를 원하고 있는가를 의식했다.

일부러 다이안은 말했다.

"손을 잡아 줘요, 마노엘. 손이 더러워져도 상관없다면."

마노엘은 돌아다보았다. 그 얼굴은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내밀어진 손을 다이안은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으나 다이안으로서는 불타는 것같이 느껴졌다. 마노엘은 쉽게 그녀를 일으키고는 손을 놓고 돌아서서 익숙한 솜씨로 콩슈에로의 재갈을 떼어냈다.

다이안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뒷모습에조차 마음이 흐트러져서 등 뒤에서 매달려 힘껏 끌어안고 싶은, 더없이 세찬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조나단의 일과 마노엘 옆에 가기만 해도 피할 수 없을 성싶은 무서운 위험을 생각하려 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지금까지보다도 더 경멸을 받게 될 일을 마노엘에게 당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엇 때문인가 하면 흔들리는 마음 때문이었다. 겨우 한순간의 격정이 모든 것을 수포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그때 마노엘이 침착을 되찾은 듯이 돌아다보았다. 그 눈엔 사나운 분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준비는 됐어?"

하고 묻기에 다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농원으로 돌아갈까?"

"농원으로요?"

다이안은 겁을 내며 말했다.

"거기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 모양을 한 채 거리로 돌아갈 작정이야?"

그의 목소리는 냉담하게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이안은 흙투성이의 옷을 살펴보고 헝클어진 머리에 손을 댔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마노엘은 망설였으나 이윽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카바느에 가지."

하고 똑똑히 말했다.

다이안은 몸을 떨었다.

"알았어요."

"좋아요, 갑시다!"

마노엘은 콩슈에로에 뛰어올라, 다이안이 안장에 탈 때까지 메로디의 제갈을 잡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의 옆구리를 한 번 차니, 검정말은 습지를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후 카바느에 닿았으나 다이안은 시간의 흐름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초가지붕의 오두막 밖에서 그녀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러는 동안에 마노엘은 포도주를 마시러 카바느에 들어갔다.

손과 팔의 흙은 이내 떨어졌다. 블라우스를 벗고 옷과 어깨를 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짓은 물론 할 수 없기에 블라우스의 단추를 벗겨 가슴께에 찬물을 끼얹기만 했다. 그래도 뜨거워진 몸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이 기분 좋았다.

생각에 잠기듯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노엘이 카바느에 나타나는 표범처럼 거의 발소리를 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황해서 블라우스를 여미는 다이안을 그는 말없이 노려보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무뚝뚝하게 물어보는 그의 눈은 블라우스의 깃으로 들여다보이는 흰 목언저리에 못박혀 있었다.

"더워서요."

하며 변명하듯 다이안은 말했다.

"몸을 식히려고 했을 뿐이에요."

마노엘은 다이안의 붉어진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견딜 수 없게 됐을 때, 그는 입을 열었다.

"들판을 욕실(浴室)로 착각하진 말아."

하고 나무라듯 말했다.

"누가 올지도 모르는 거야! 그러면 어떡할 작정이야!"

다이안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그려 했으나 손가락이 떨려서 잘되지 않았다.

"오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겠지요."

비난하듯 말했으나 억센 말투는 아니었다.

"그래 당신이 왔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마노엘의 눈이 갑자기 흐려졌다.

"어떻게 해주길 바라고 있는 건가?"

그 눈을 보고 다이안의 손이 멎었다. 부질없는 말을 입 밖에 내버린 것이 다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두 사람 사이의 긴상된 공기를 쫓아 버리려는 듯이 다이안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우물 저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마노엘은 그녀의 팔을 잡자 사정없이 끌어당겨 가냘픈 허리에 두 손을 감았다. 뒤로 돌아선 채 끌어안긴 다이안은 몹시 버둥거렸지만 남자의 힘엔 당할 수가 없었다.

"그만둬요!"

그녀는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마노엘은 조급해져서 한 손을 다이안의 입술에 대고 억지로 벌리고는 혀를 밀어넣었다. 그리고 굶주린 듯 그 달콤함을 맛보는 것이었다.

온몸의 힘이 빠진 다이안의 부드러운 육체는 사나이의 품속에서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마노엘에게 매달려 목에까지 드리워져 있는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헤치며 목덜미를 애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이의 손이 블라우스의 옷자락 밑으로 들어와 매끈한 살갗을 주무르기 시작했을 때, 다이안은 바싹 정신을 차렸다. 사랑의 행위에 내가 이성(理性)을 잃으려 하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 다이안은 몸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나단을 위해서라도

사나이의 손이 느슨해지자, 그녀는 초인적(超人的)인 노력으로 몸을 떼어 블라우스의 앞자락을 여미면서 카바느 쪽으로 빨리 걸어갔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아다보니 마노엘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우물에 몸을 굽혀 물을 얼굴과 목에 끼얹고는 젖은 손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그리고 권태롭게 몸을 펴면서 일으키자 이쪽을 보았다.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다이안은 가슴이 아팠다. 거기엔 심각한 고뇌와 을씨년스러운 쓸쓸함이 떠올라 있었다.

마노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정말에 다가가 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이안이 서 있는 데까지 돌아와 경멸하듯 내려다보았다.

"말을 타요!"

그가 거칠게 명령조로 말하자 다이안은 하라는 대로 했다. 그리고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마노엘은 말의 옆구리를 찼다. 아를르의 교외에 닿기까지 그는 늘 앞장을 섰고,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다이안에게 마노엘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쌀쌀하게 말했다.

"시내에까지 가고 싶지 않아. 그리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이내 알 수 있어. 모르면 물으면 되지. 남자라면 누구든지 기꺼이 가르쳐 줄 거야. 당신한테는 말야!"

그리고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려고도 하지 않고 물러갔다.

혼자 남은 다이안은 더없이 비참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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