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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인형

Bollnow 2024. 3. 5. 05:57

악어 인형

Rebecca Winters

 

1

그가 아기의 아버지임이 분명하다! 똑같은 올리브빛 피부, 고집스런 턱, 그리고 까만 머리칼도 똑같다. 비록 먼 곳에서 보았지만 캐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나 믿을 수 없어서 그녀는 문설주에 몸을 기댔다. 언니의 모성애적인 직관력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캐시, 제이슨을 팔에 안았던 순간부터 뭔가....좀 이상하다고 느꼈어. 아마 테드가 살아 있다면 그이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제이슨은 우리 아들이 아니야! 난 확신할 수 있어! 이기가 태어나자마자 급히 중환자 실로 옮겨졌다고 말했지? 그리고 그 순간 병원에 희생자들이 몰려들었다고 말이야. 그 날 아침 병원은 온통 북새통이었어. 그래서 그 와중에 그들은 인큐베이터에서 다른 아이를 꺼내서 보여 준 거야. 제이슨은 원래 그 애의 부모에게 돌아가야 해. 캐시, 아이를 찾아서 내 대신 그 애를 돌봐 주겠다고 약속해 줘. 그럼 난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있을 것 같아 ."

틀림없는 제이슨의 생부와 마주치자 캐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끝이 장방형인 긴 손가락이라든지 긴 속눈썹처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9개월 된 제이슨은 트레이스 엘링스워스 렘지와 국화빵처럼 닮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책상 앞에 잔뜩 오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지금 그는 전화기에다 대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 틀림없이 상대방은 그레이터 피닉스 금융회사의 직원으로 잔뜩 겁에 질려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마도 수잔의 진짜 아들은 이 위세 등등한 금융회사의 간부와 그의 아내와 더불어 벌써 병원을 떠나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수잔의 아기는 이제 램지의 성을 다고 그의 후계자로서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램지 역시 수잔처럼 9개월 전의 닮지 않았던 것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까? 아기가 가계를 닮지 않았던 것에 대해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까?

미스 아널드, 들어오세요! 트레이스 램지가 큰소리로 말했다..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캐시는 제이슨을 초조한 시선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직도 비서의 책상 옆에 세워둔 유모차에 잠들어 있다.

158cm의 키에 하이힐의 높이까지 몇 센티 보탰지만 캐시는 사무실로 들어가는 동안 난쟁이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실망스럽게도 램지의 아내와 아들의 사진 넣은 액자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책상 구석에 분재한 그루와 벽에 붙은 몇 점의 그림을 제외하면 사무실 안은 썰렁한 분위기였다.

캐시의 그의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램지씨,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를 만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촉박하게 약속을 정했는데.."

그는 화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검은 눈썹을 찡그렸다. "내 여비서 미세스 브레이크슬리에 의하면 당신은 나와 비밀리에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녀에게도 털어놓기를 거부했다고...."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일이에요."

그녀의 순진한 시선은 그에게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이건 순전히 우리끼리의 문제예요. 여기서 우리라는 건 물론 당신의 부인도 포함되는 거예요."

그는 손을 책상 위에 얹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캐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캐시도 그의 눈을 응시했다. 놀랍게도 그는 검은 눈썹에 깊고 파란 눈동자를 갖고 있다. 그것도 제이슨과 똑같았다.

"미스 아널드, 내 비서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절대로 약속을 해주지 않아요. 오직 당신의 경우만 예외로 한 겁니다. 이건 생사가 달렸다고 했다는데 그 말이 진심이기를 바랍니다. 내 사무실에 들어오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면 당신은 법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될 거요. 그리고 난 지금 중요한 이사회에 참석할 시간을 내고 있는 거요."

그의 오만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일이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만 아니라면 당장 그의 면전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뿐이다.

"이건 당신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녀는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표정이 협박 식으로 변했다. 갑자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손을 책상 위에 짚고 몸을 숙였다. 당신이 유괴 조직의 일원이라면, 경고하겠소. 우린 벌써 경보기를 설치해 두고 있소. 당신이 여기서 나갈 때면 무장한 경호원과 함께 나가게 될 거요."

"당신은 항상 이렇게 편집증 증세를 보이나요?"

"30초 내로 용건을 설명해요."

분명한 협박조의 말투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우선...우선 자리에 앉으세요.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소."

"당신이 거기... 거기 그렇게 전쟁에 나가려는 용사처럼 버티고 있으니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이제 10초 남았소."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는다는 게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수잔의 아들에게로 향하는 길은 바로 이 남자와 그의 아내뿐이니까. 그 사실이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몰아쉰 다음 입을 얼었다. "우연히 당신과 당신의 아내가 지난 224일 팜즈 오아시스 헬스센터에서 낳은 9개월 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나의 언니인 수잔 아널드 피셔도 거기서 같은 날 사내아이를 낳았었죠. 언니는 죽는 순간까지 화학 공장의 폭발 사건 때문에 그 병원에 뭔가 혼란이 생겼다고 믿었어요. 그 당시 그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몰려 왔었어요. 중환자 실에서 아기의 팔목에 이름표를 잘못 달았나 봐요. 그 결과 언니는 당신의 아기를 받았고, 당신과 당신의 아내는 언니의 아기를 데려간 거예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의 표정은 돌처럼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좋소." 드디어 그가 중얼거렸다. 좋소. 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소. 이제 당신이 훌륭한 변호사를 알고 있기를 바라겠소. 곧 변호사가 필요할 테니까

"잠깐만!" 그가 인터폰 버튼을 누르자 그녀는 소리쳤다.

"미스 아널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어 무장한 경호원과 경찰관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들은 손에 권총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그들 뒤로는 불안한 표정의 블레이크슬 리가 서 있었다. 그녀는 큰소리로 울어대고 있는 제이슨을 안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트레이스 램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캐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캐시는 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이슨에게로 달려갔다.

두 달 전 수잔이 죽은 이후로 캐시와 제이슨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친 엄마는 아니지만 그녀는 그 애를 몹시 사랑했다.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아기를 미세스 블레이크슬리에게 돌보게 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하자만 캐시의 신경은 제이슨에게만 가 있었으므로 그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램지씨, 무슨 일이 있었나요?" 경호원이 물었다.

아기는 캐시와 눈이 마주치자 더욱 격렬하게 울어대며 <엄마, 엄마...>를 되풀이했다.

그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캐시는 미소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아가야, 엄마 여기 있어 그녀는 여비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중얼거리면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기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건 오직 캐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아기는 캐시를 움켜잡고서 금장 조용해졌다.

그 순간 캐시는 강한 모성애를 느꼈다. 그리고 그 아기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그곳에 찾아온 건 실수였다.

캐기가 트레이스 램지를 찾아온 건 순전히 선의에 의해서였다. 좀전 유괴에 대한 그의 반응의로 봐서 그는 병원에서 데려온 아기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것 같다. 캐시는 언니의 유언을 따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제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램지 씨?"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잿빛이 되어 있는 그의 표정을 본 순간 캐시의 입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느새 아이의 아버지만 제외하고는 모두 사무실을 나가버린 후였다. 그는 사무실 가운데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캐시는 숨을 죽이고,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는 제이슨의 주먹을 폈다. 그런 다음 아기를 아버지와 마주보게 돌려놓았다.

잠시 후, 그의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맙소사,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닮았군."

캐시의 따뜻한 마음은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지금껏 남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심정일지 그녀는 상상할 수 없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당신과 같은 반응을 보였어요." 그녀는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제서야 그는 아기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이 애 이름은 제이슨이에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아기는 눈썹을 치켜든 다음 얼굴을 캐시의 목에 파묻었다.

"내가 안아 봐도 되겠소? ." 트레이스의 음성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제이슨을 데려갔다.

"물론이에요. 하지만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해도 놀라지 마세요."

제이슨은 즉시 캐시의 품안에서 떨어져나간 걸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기는 작고 강한 육체를 꿈틀거리고 발을 앞으로 내차면서 울어대기 시작했다. 건물이 떠날갈 것 같은 울음소리였다.

하지만 캐시는 절대로 아버지와 아들만의 시간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도 완벽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목이 메어 왔다.

아기가 계속 버둥거리자 트레이스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유병을 갖고 왔어요? 그걸 주면 좀 조용해질지도 모르겠소."

진작 그 생각을 해야 했다. 그녀는 가방 속을 뒤졌다. "여기 있어요."

그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제이슨을 편안하게 고쳐 안으면서 아기의 입에 우유병의 젖꼭지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그의 노력에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기는 더욱 거칠게 울어댔다.

트레이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달래 볼까요?" 캐시는 부드러운 어조로 제안했다.

그가 캐시를 흘끗 바라보더니 마지못한 듯이 아기를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아기가 계속 버둥거리고 있는 동안 그는 유모차에 잇는 아기의 누비이불을 가져다가 책상 위의 전화기를 치우고 그곳에 폈다.

캐시는 제이슨의 기저귀를 갈아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아가야, 진정해. 엄마가 널 편안하게 해줄게."

그녀가 깨끗한 기저귀로 갈아주자 트레이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제이슨의 오른발을 손으로 쥐었다. 왠지 아기는 좀 편안해진 것 같다.

캐시는 항상 제이슨의 오른발에 호기심을 느꼈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발가락에 물갈퀴가 있다. 그건 수잔이나 테드의 가계엔 결코 없는 특징이다. 아이의 아버지도 그걸 예사롭게 보지 않은 것 같다.

"이 애는 내 아들이오!"트레이스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런 다음 순수한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그이 푸른 눈동자엔 자랑스런 빛이 어렸다.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서 혈액형 검사를 하고 병원의 기록과 대조해 봐야겠어요."

"그래요, 하지나만 진실은 여기 있소."

그는 제이슨의 손가락을 잡아당기면서 아기의 힘을 시험해 보았다. 제이슨은 손을 꼭 쥐고 머리를 들더니 책상에서 아무 도움 없이 일어나 앉았다. 아무래도 제이슨은 이 검은머리의 남자에게 흥미를 느낀 것 같다.

실내의 기온이 서늘했으므로 그녀는 기저귀 가방에서 깨끗한 파자마를 꺼냈다. 하지만 꺼내자마자 트래이스가 낚아채듯 빼앗아 갔다.

"내가 입히겠소." 그는 능숙한 솜씨로 아기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피닉스의 거대한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벌써 트레이스는 제이슨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 같다.

이제 이 세상에서 제이슨을 강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둘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세 사람이 도리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그 일로 모든 게 더 혼란스러웠다.

캐시는 본능적으로 제이슨의 아버지가 자신의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란 는 걸 알았다.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적절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녀 역시 제이슨을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제이슨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

"램지 씨? 난 오늘 오후에 비행기를 타야 해요. 그러니까 오전 중에 당신의 아내와 함께 만나서 그분에게도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 조카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요."

"샌프란시스코?"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제이슨과 나는 거기서 살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제이슨의 관심을 끌었는지 아기는 다시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 애는 태어날 때부터 고집이 센 아이었다. 이제 캐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제 아기가 점심을 먹어야 하 시간이에요. 하지만 우유 한 병이면 충분할 거예요."

부드러운 그녀의 음성에 트레이스는 제이슨을 다시 그녀의 품안에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절대로 새로 찾은 아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캐시는 그를 비난할 수가 없었다. 감정적으로 너무 격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캐시는 자신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제이슨을 안고서 트레이스가 가리킨 가죽 의자에 앉았다. 제이슨은 양손으로 병을 꼭 움켜쥔 다음 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캐시는 제이슨이 컵으로 우유를 먹도록 가르치려 했었다. 하지만 소아과 의사는 여행 중엔 우유병을 주는 것이 아이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충고했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아내와 난 이혼했어요." 트레이스는 불쑥 그렇게 말하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녀는 양육권을 내게 넘기고 로스엔젤레스로 떠났소. 법률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가정부인 내티가 아들을 키우는 일을 돕고 있어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마이크는 몇 년 동안 나를 위해 일해 줬어요,. 내티는 아이에게 아주 잘해 주고 있소. 그리고 저스틴도 그녀를 아주 좋아해요."

"저스틴!" 캐시는 초록빛 눈동자를 빛내며 트레이스를 응시했다. "내 조카에 대해서, 아니 당신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줘요! 그 애는 어떻게 생겼나요? ... 난 빨리 그 애를 보고 싶어요."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책상 쪽으로 걸어가서 비서에게 통하는 인터폰을 눌렀다. "미세스 블레이크슬리? 오늘 오후의 내 약속을 모두 취소해 줘요. 난 집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요. 로버트에게 차를 대기시키라고 전해요. 우린 곧 내려갈 거요. 급한 전화 용건이 있으면 지금 내게 전해 줘요."

급한 용무를 처리하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은 캐시가 입고 있는 크림색 면 슈트 밑으로 드러난 날씬한 다리에 머물러 있었다. 캐시의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그의 사무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그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는 캐시가 모르는 화가들의 수채화를 즐겨 모으는 것 같다. 그 그림들은 다양한 사막의 풍경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제이슨의 커다란 트림 소리에 캐시는 다시 현시로 돌아왔다. 이어 트레이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캐시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제이슨은 숨 쉴 틈도 없이 우유를 마셔댄 모양이다.

"갈까요?" 트레이스가 서류가방을 든 채 문 앞에서 있었다.

"정말 예쁜 아기예요." 미세스 블레이크슬리의 책상 앞을 지날 때 그녀가 캐시에게 말했다.

"미세스 블레이크슬리." 트레이스는 아직도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여비서에게 말했다. "당신이 내 아들. 제이슨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 되는군요. 때가 되면 모든 걸 밝히겠소. 하지만 당분간은 이 사실을 비밀로 해줘요."

"난 알고 있었어요."

나이가 지긋한 그 부인은 벌떡 일어나서 황급히 다가와서는 제이슨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 아가씨가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말을 하기 전에도 난 알았어요. 이 아기는 놀랄 만큼 사장님을 닮았어요. 이렇게 아빠를 꼭 닮은 아기는 처음이에요!"

아들을 바라보는 트레이스의 표정엔 자랑스런 미소가 담겨 있었다.

캐시는 그의 여비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할 수가 있었다. 캐시와 트레이스가 한때 바람을 피웠고, 제이슨은 그 결과로 태어난 아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캐시는 보든 사실을 제대로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트레이스는 벌써 사무실을 나서서 개인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트레이스는 물었다. "내 사무실까지는 어떻게 왔소?"

"택시를 탔어요."

"피닉스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소?"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제이슨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이번엔 단 이틀밖에 안됐어요."

"이번엔?"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검은 눈썹을 치켜떴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수잔의 말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서 난 피닉스에 몇 번 온 적이 있었어요. 수잔이 제이슨을 낳은 그 날 아이를 낳은 부부가 다섯 쌍이었거든요. , 그러니까 저스틴을 낳던 날 말이에요."

"그렇게 많은 아이가 태어난 줄은 몰랐소. 팜 오아시스는 작은 병원이오."

"나도 놀랐어요. 아무튼 난 그 가족들을 찾아다녔지만 매번 허탕을 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제이슨이 격세유전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시작했죠. 그러다가 당신을 만난 거예요."

캐시는 용기를 내어 트레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내고 있다.

"당신의 비서가 당신은 방문 이유를 밝히지 않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을 때, 난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 나오려고 했었어요."

그의 눈동자는 진한 파랑으로 변했다. "당신이 그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오."

그녀는 재빨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램지 씨, 당신은 접근하기에 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경호원까지 있었어요. 난 정말 포기하려고 했었어요. 당신은 내 명단에 마지막으로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매달렸소?"

"제이슨을 맡아서 기르게 된 이후로 나 역시 그 애의 부모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일단 최선을 다해 보자고 생각했죠.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서 제이슨을 내 아들로 키우게 되었을 때 조금의 의구심도 없도록 말예요."

그녀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여 아이의 부드러운 뺨에 키스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고 돌아가면 난 항상 마음에 의구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러는 동안 트레이스가 다가와서 그녀의 팔꿈치를 붙잡고서 그녀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볼보 세단이 도로에 서 있었다.

"타이거, 넌 이리로 오렴."그는 제이슨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아기를 캐시에게 받아서 좌석에 앉혀 놓았다.

제이슨은 낯선 공간이 싫은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내가 아기와 함께 있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며 당신은 운전에 집중할 수 가 없을 거예요."

그녀는 뒷자리에 앉아서 아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건네주었다. 제이슨은 곧 그 단단한 플라스틱 원반을 씹는데 열중했다.

트레이스는 차안으로 몸을 숙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고정시켜 주었다. 그 동안 그들의 얼굴은 서로 불과 1,2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캐시는 그의 검은 머리칼과 깨끗하게 면도한 턱, 그리고 산뜻한 그의 향기를 고통스럽게 의식해야 했다.

"고마워요, 로버트." 그가 운전석에 앉아서 차고 관리인에게 소리치고는 곧 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은 번잡한 시가지를 빠져나와 산이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멀리 카멜백 산이 보였다. 캐시가 피닉스에서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은 그 깨끗한 도로와 아름다운 잔디, 그리고 정원이었다. 생생한 꽃과 관목, 그리고 파란 수영장...

캐시가 그런 모습들을 감상해 보는 것도 몇 달 만에 처음이다. 이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던 때가 언제였던가?

하지만 그녀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가방에서 다른 장난감을 꺼내기 위해 머리를 돌렸을 때, 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트레이스의 가는눈동자가 자신을 응시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경계하는 표정으로 미루어 트레이스 램지는 뭔가 불쾌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적대적인 시선에 마음이 상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뒤로 머리를 기댔다.

아침에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아기와 굿바이 키스를 한 다음 회사에 나와서 진짜 아들과 마주치 이 남자의 심정은 어떨까?

캐시는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는 동안 캐시는 가끔 아이가 뒤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다. 10억 분의 1이나 될까?

캐시는 트레이스의 가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램지의 결혼이 아기의 출생 직후에 깨져 버렸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의 아내는 어떻게 아기를 남겨 두고 다른 곳에 가서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까?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차는 거의 그의 집에 도착한 모양이다. 문득 하얀 돌로 된 건물이 나타났다.

트레이스 햄지의 집을 설계한 건축가는 주위 환경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도 성공한 것 같다. 그리고 조용한 숲의 아름다움이 아주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는 계속 집 옆으로 차를 몰아 옆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직사각형의 수영장이 있다. 그리고 수영장 옆으로는 초록색 잔디가 펼쳐져 있다. 캐시는 그 넓은 잔디밭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불과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처럼 멋진 휴양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캐시는 이런 저택은 처음 본다. 그녀는 지금껏 샌프란시스코에서 혼자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텔레그랩 언덕 위에 있는 빅토리아식 아파트에서 살아 왔다. 캐시는 아버지는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캐시가 제이슨을 들어 안았을 때 트레이스가 문을 열어주었다. 밖은 꽤 추운 날씨였다. 하지만 12월의 초순 날씨로 적당했다.

"이제 들어갈까요? ."그는 캐시의 팔꿈치를 잡고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기 가방을 들었다.

그는 캐시에게서 아들을 떼어놓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들이 다시 우는 게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트레이스의 인내심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제이슨은 캐시의 하이힐이 멕시코 타일 바닥에 닿는 소리에 매료된 모양이다.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면서 열심히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고 있다. 캐시는 몇 걸음마다 발을 멈춘 채 그 하얀 인테리어 멱과 나무로 된 천장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들은 무성한 나무와 그 지역 인디언 그림으로 가득 찬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곳에서는 수영장이 내다보였다.

"내티? 나 집에 돌아왔어요. 점심을 함께 할 손님을 데려왔어요. 어디 있소?" 트레이스는 안뜰로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저스틴이 나무에 물주는 걸 돕고 있어요. 점심을 드시러 들어오실지 몰랐어요. 빨리 식사를 준비할게요."

그들은 옛 멕시코의 매력적인 안뜰을 연상시키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온통 나무와 꽃들이 있었다. 하지만 캐시는 연철로 된 거실 가구나 적갈색 머리칼의 가정부를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어린이 놀 이장 속의 아이에게 가 있었다. 아빠의 음성을 들은 아이의 표정엔 어느새 환한 기쁨이 퍼져 있었다. 소매 없는 노란 놀이옷을 입은 아이는 마른 편이었다. 아이는 놀이장 안에 서서 아직 제이슨이 습득하지 묘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이는 아버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놀이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아이는 섬세하고 반듯한 연한 금발의 머리칼에 동그란 적갈색 눈동자를 갖고 있다. 아기의 관심은 온통 트레이스에게 쏠려 있다.

캐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건 정말 놀라운 느낌이었다. 조각그림 맞추기에서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아기의 체격은 테드와 아주 똑같다. 하지만 피부색은 수잔의 것을 닮았다. 아기의 눈 모양은 테드를 닮았지만 색깔은 수잔의 것을 닮았다. 그리고 반듯한 코와 광대뼈는 테드를 닮았다. 하지만 미소는...

캐시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사랑하는 그녀의 언니는 불과 8주전에 폐렴과 싸우다가 사망했지만 아들의 화려한 미소 속에 언니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 수잔!" 그녀는 언니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면서 제이슨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녀의 가슴은 감정으로 격해지고 말았다. 이제 그 감정은 거의 표면까지 올라와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칭얼대는 제이슨을 달래려 그녀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채 머리를 쳐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말 없는 비난과 경멸의 표정을 담고 있다.

"왜 이러는 거예요?" 그녀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처음에는 차에서, 그리고 이번엔 여기에서 .., 왜 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가요?"

 

2

그는 말없이 저스틴에게 다가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난 당신이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집착하고 있었소. 역시 당신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소." 그는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마치 적들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캐시는 제이슨을 고쳐 안았다. "왜 그러는 거예요?" 그녀는 트레이스가 그런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아닌 척하기엔 너무 늦었소. 저스틴은 자기를 멋진 아이로 봐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줘야 해요."

그녀는 당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였다. "저 애는 아주 멋져요!"

"하지만...."

"하지만 뭐예요?" 캐시는 화난 어조로 따졌다.

"당신은 내 전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그녀 역시 저스틴의 기형에 거부반응을 일으켰소. 그래서 저 애를 안아 주려고도 하지 않았소!"

기형이라고?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두 달 전 언니를 우리 곁을 떠나 버렸어요. 그때 난 영원히 언니를 잃어 버렸다고 생각했었죠." 그녀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제이슨을 놀이장에 내려놓고 자신의 손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수잔의 결혼사진을 꺼내서 그걸 트레이스에게 내밀었다. 그건 수잔과 테드가 허니문을 떠나기 직전에 찍은 사진으로, 캐시가 가장 아끼는 사진이다.

"그런데 저스틴을 조고 나니 마치 하느님이 수잔을 내게 다시 보내 주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램지 씨, 이 사진을 똑똑히 보세요!"

그는 굳은 표정으로 저스틴을 놀이장의 구석에 내려놓고 그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저스틴이 울기 시작했다. 캐시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놀이장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노래는 부르기 시작했다. 제이슨이 좋아하는 <틴지 윈지 스파이더 > 라는 노래였다?

두 아이들은 금방 조용해졌다. 제이슨이 그녀에게 기어오는 동안 저스틴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스틴이 왼쪽 손을 뻗어서 놀이판을 붙잡으려는 순간 움푹 패인 곳이 캐시의 눈에 들어왔다. 그 밑으로는 팔과 손이 제대로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처럼 정상적으로 발육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기형은 미세한 것이었지만 의식하면 눈에 띄게 드러나 보인다.

"귀여운 것..." 캐시는 충동을 누르지 못한 채 일어서서 저스틴을 안아 올렸다. "귀여운 아기.." 그녀는 얼굴을 아이의 부드러운 뺨에 대고 낮게 중얼거리면서 아기를 부드럽게 흔들어 주었다. "네 엄마와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이렇게 안아 줬을 거야."

아기가 캐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아기의 진지한 표정은 테드가 뭔가 생각에 잠길 때의 표정을 연상시킨다.

"널 꼭 찾겠다고 수잔과 약속을 했었어. 널 찾아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저스틴, 널 사랑해. 사랑해."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낮은 흐느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아이의 긴장된 근육이 풀리면서 금발의 머리가 그녀의 어깨에 기대 왔을 때 캐시는 아기가 자기의 이야기를 이해한다고 믿고 싶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조카의 따뜻한 육체 말고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소."

캐시가 눈을 떴을 때, 트레이스는 제이슨을 안고서 불과 5c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제이슨의 강인한 손가락이 아버지의 검은 머리칼을 꼭 움켜쥐고 있다. 아이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다.

캐시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 앤 전에는 한번도 그런 시선으로 뭔가를 본 적이 없어요."

놀랍게도 트레이스는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들 사이의 적대감은 살져 버린 것 같다. 그가 아름답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동안 캐시의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트레이스?" 그때 가정부가 그들을 불렀다.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겠어요, 아니면 식당에서 하겠어요?

캐시는 비로소 현실을 인식했다.

"내티, 테라스가 좋겠어요." 그리고 그는 캐시에게 말했다. "내가 놓은 의자를 가져오겠소. 아이들은 교대로 점심식사를 하는 게 좋겠소."

아이들.... 그 단어가 그의 입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누가 들으면 그건 항상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이슨과 나는 곧 공항으로 떠나야 해요. 그러니까 난 저스틴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내가 저스틴을 무릎에 앉히고 음식을 먹여 줘도 괜찮겠어요?"

트레이스는 얼굴을 찌푸렸다."비행기가 언제 떠나죠?"

"410분 비행기예요."

"내가 공항까지 데려다 주겠소." 그는 거친 어조로 말했다. "이제부터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일이오." 그는 제이슨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 타이거, 우리는 저스틴의 의자를 가지러 가자. 그래서 내티를 놀라게 해주는 거야."

제이슨은 이제 아버지를 붙잡고 있느라고 우는 걸 잊어버린 것 같다. 둘이 테라스에서 사라지자 캐시는 저스틴과 함께 남아 있었다. 저스틴은 그녀의 품안에 있는 게 만족스러운 것 같다. 강인한 제이슨과 비교하면 저스틴은 너무나 가벼웠다.

그녀는 풀 옆에 있는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서 아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기는 제이슨보다 더 컸지만 아직 말을 배우지 못했다. 아직은 테드의 수학적인 능력을 말 휘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제이슨은 한시도 입은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그 애는 자신의 음성을 듣는 걸 좋아했고, 어떤 음악이든 듣고 싶어 했다.

"만약 너의 할머니가 역 계셨다면 너에게 이런 노래를 불러 주셨을 거야." 캐시는 아기의 핑크빛 뺨에 입맞춘 다음 아기의 손을 붙잡고 노래를 시작했다. "한티, 민티. 큐니, , 애플 씨드, 애플 손..."

그녀가 팔을 활짝 펴자 아기는 웃기 시작했다. 아기의 웃음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다시 노래를 몇 번쯤 반복했을 때, 어디선가 여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단정한 60대의 부인 이 샐러드 두 접시를 들고서 현관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로 트레이스가 양쪽 팔에 높은 의자와 제이슨을 안고서 나타났다.

"미세스 블레이슬리를 재치고 용감하게 나타나서 당신에게 아들을 보여 준 여자를 만나게 되었군요!" 가정부가 캐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캐시는 일어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정부는 손을 에이프런에 훔친 다음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난 내티 파케에요. 오늘은 내 평생 가장 멋진 날이에요! 정말 아빠를 그대로 빼다 박았어요!"

제이슨을 바라보는 캐시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정말 그렇죠? 그리고 저스틴은 우리 언니와 형부를 너무나 닮았어요. 난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이모든 일들이 사실이 아닌 것만 같아요."

캐시는 저스틴의 금발 머리에 키스를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티는 고개를 끄덕였다."아기가 뒤바뀌는 건 소설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어요. 여태까지 당신은 제이슨의 아빠를 찾아헤맸군요. 그런데도 트레이스는 당신을 경찰에게 보내려고 했다니. 트레이스 부끄러운 줄 알아요!"

내티는 엄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음성에는 트레이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여인의 눈동자는 제이슨에게 고정되었다.

"나도 저 녀석을 안아 보고 싶어요. 아주 단단한 몸매를 갖고 있군요. 누구든 한번 만져 보고 싶어 할 거예요. 내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물론이에요." 그녀는 금세 내티가 좋아졌다.

캐시의 시선은 트레이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두 아들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언젠가 제이슨도 트레이스처럼 잘생기고 활기찬 남자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제이슨은 내태의 품안에서 발버둥을 쳤다. 내티가 쿠키를 주자 그제서야 얌전해졌다.

내티는 저스틴에게도 쿠키 하나를 주면서 재빨리 키스했다. ", 아가야." 그녀는 제이슨ㄴ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가서 맛난 걸 먹자. 오늘은 뭘 먹고 싶니? 콩과 양고기는 어때? 저스틴도 그걸 먹는단다."

내티가 사라지가 트레이스는 캐시에게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정말 저스틴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소."

"물론이에요."

캐시는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입에다 크래커를 물고서도 샐러드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다시 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난 몹시 흥분이 돼요. 저스틴은 두 손을 모두 움직이고 있어요. 그렇다면 팔을 완전히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아마 저스틴도 제이슨처럼 스포츠를 할 수 가 있을 거예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저스틴에게서 포크를 빼앗았다."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 주세요."

트레이스는 냅킨과 시원한 과일 음료를 건네준 다음 자리에 앉았다.

"의학적으로 양막 밴드라고 하는 증상이오. 산모의 자궁에서 팔이 압박을 받아서 혈액의 공급이 일부 차단되었다는 거예요. 전문의는 3살이 되면 근육을 살리는 물리요법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소. 그래서 성인이 될 때쯤이면 그 결함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캐시는 앞으로 몸을 수여서 저스틴의 부드러운 어깨에 키스했다."넌 정말 행운아야. 너의 아버지처럼 네가 훌륭한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있을지 걱정했었어. 넌 아버지와 똑같은 체격을 타고 났거든."

트레이스는 샐러드를 삼키고 난 다음 말했다. "정말 유전인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소. 안 그래요, 아널드 양?"

"그래요."

"당신의 언니는 언제 제이슨이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는 의심을 처음 하게 되었소?"

"아기가 태어나 황급히 유아용 중환자실로 수송된 다음이었어요. 잠시 후에 소아과 의사가 아기가 호흡 곤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대요. 드디어 아기가 언니에게 돌아왔을 때, 올리브비치 피부와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어요. 언니는 제이슨이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믿었고 내게 전화로 그 이야기를 했어요. 하지만 수잔과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제이슨의 머리칼이 몇 달 후면 금발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언니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하지만 내가 아기를 처음 보았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어요."

트레이스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불행히도 아이가 태어날 때 난 그곳에 없었소. 아기는 예상보다 빨리 태어났어요.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글로리아는 병실에 있었고, 아기는 중환자실에 가 있었어요. 아마 중환자실에서 아기가 뒤바뀐 것 같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의 날에 의하면 아기는 오전 95분에 태어났다고 했어요."

트레이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의 아기는 94분에 태어났어요. 당신 언니의 말이 맞아요. 내가 도착했을 땐 곳곳에 구급차가 있었소. 피닉스 외곽지대에 있던 화학 공장이 폭발했었소. 그래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수송됐고 많은 부상자들은 여러 병원에 분산 수용되고 있었소. 그래서 글로리아의 병실에 갈 때까지 시간이 지체됐었소."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 이유만큼은 납득이 가는 군요. 아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10억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요."

"물론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라도 생각해요."

"원칙적으로 난 불필요한 소송에는 반대하고 싶소."

"나도 같은 의견이에요.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엄청난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다시 소송을 제기할 기력이 남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사고로 테드가 죽었고, 그 다음에 수잔이 앓다가 죽었어요...."

하지만 최근에 롤프가 외국에 있는 여자와 약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사건 역시 캐시에겐 고통스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녀의 오랜 이웃이었던 롤프와는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었다. 비록 결혼 문제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학업이 끝나고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결국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깨져 버린 것이다.

"신문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힐 거예요 ." 그 상상을 하면서 캐시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결국 병원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불안해할 거예요. 난 그런 일들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건 원치 않아요."

"나도 동감이오." 트레이스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혈액검사를 받아야 하니까 내가 병원이사회에 편지를 보내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리겠소. 비록 손해배상 청구는 하지 않더라도 비공식적인 질의서를 보내기로 하겠소. 그렇게 하면 앞으로 이런 사고가 일어나는 걸 방지할 수가 있을 거요."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수잔과 테드가 살아 있더라도 똑같은 방법을 취했을 거예요. 램지 씨, 부인과 당신은 한 번도 저스틴이 당신들의 아들이 아닐 거라는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나요?"

그는 눈썹을 치켜떴다. "아무래도 이제 필요 없는 격식은 떨쳐 버리는 게 좋겠군요. 내 이름은 트레이스요. 그리고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번도 우린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없어요. 글로리아는 적갈색 눈동자에 금발 머리, 그리고 호리호리한 체격과 머리칼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신의 언니와 형부 사진을 보고 나니까 저스틴은 틀림없이 그 애의 부모를 닮은 것 같소."

캐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아내에 대해서 좀 더 물어 보고 싶었지만 바로 그 순간 내티가 제이슨과 함께 아기 음식을 갖고 들어왔다.

트레이스는 제이슨을 높은 의자에 앉혀 주었다.

식사를 하면서 캐시는 트레이스에게 테드의 부행한 교통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낙담한 수잔이 결국 임신의 후유증이 원인이 되어 폐렴에 걸렸다는 사실도 말했주었다. 언니는 테드가 없는 상황을 견딜 수다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저스틴은 완벽하게 행동했다. 그 애는 혼자서 스푼으로 음식을 뜨기 위해서 노력했다. 제이슨도 저스틴처럼 행동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이는 양고기를 좋아했지만 트레이스는 매번 콩을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래서 아이는 다시 그걸 뱉어내고 있었다. 더욱더 난감한 건 의자 위에 온통 손가락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는 거다.

그렇지만 트레이스는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가 그처럼 참을성이 있고 사려가 깊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간이 흐르자 저스틴은 피곤한 기색이 되어 졸고 있었다. 제이슨 역시 피곤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애는 잠에 떨어지기 전에 더욱더 소란을 떨었다.

트레이스는 제이슨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깔깔 웃어댔다. 캐시는 그런 트레이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스틴을 침대에 데려다 놓을까요?"

"우리 아이가 너무나 흥분해서 졸리 운 모양이오. 아이들을 달래는 동안 나는 제이슨을 욕조에 넣어 두겠소."

"제이슨이 평상시엔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엉망으로 굴지 않는다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나의 어머니가 이걸 보시면 아마 난 훨씬 더 심했다고 하실 거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모양이오."

캐시는 조심스럽게 저스틴을 안고서 자리에 일어섰다."당신의 어머니도 여기 피닉스에 살고 계시나요?"

"어머니뿐만 아니라 램지 일가가 모두 피닉스에 살아요."

"대가족이로군요?"

"내겐 두 분의 형님과 누나가 있는데, 모두 아이들이 있소."

캐시는 그를 따라서 테라스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제이슨의 턱받이를 떼어낼 무렵 트레이스는 음식이 잔뜩 묻은 아이의 팔을 꼭 움켜잡았다.

"엄마, 엄마." 제이슨이 소리쳤다.

"타이거, 넌 아빠한테 잡혀 있어." 트레이스는 말했다.

캐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태껏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이처럼 강한 육체적인 자극을 주지 못했다. 롤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어려서부터 그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미래를 설계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과 이어 테드의 사고, 수잔의 병이 가져다 준 고통으로 캐시는 탈진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혼 날짜를 잡을 수가 없었다.

롤프는 실의에 빠져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파혼해 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재빨리 음악공부를 한다며 유학을 떠나 버렸다. 그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그는 학자라기보다는 음악가였다.

수잔이 죽기 전에 그녀는 캐시와 롤프는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그들은 서로 1주일이나 2주일 이상 떨어져 지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 년 동안의 이별은 서로의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내 줄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만 날을 때, 두 사람이 진정 결혼을 원하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충고했었다.

수잔의 충고는 과연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롤프가 다른 여자와 사라에 빠질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제 수잔은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나 버렸다. 캐시는 그처럼 친한 친구이자 믿을 만한 동지였던 언니에게 결코 두 번 다시 고백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널드 양?" 트레이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괜찮아요?"

"그럼요."그녀는 미소 지었다. "난 잠시 멈춰 서서 이 수채화들을 보아야겠어요. 당신 사무실에 있는 그림처럼 아주 근사해요."

"누나인 레나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재능 있는 화가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한 편이오. 자신의 작품이 단 한 점이라도 대중들에게 소개되는 걸 거부해요."

"그래서 당신이 대신 소개하고 있군요." 캐시는 누나에 대한 그의 애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당신은 레나의 그림을 몇 정이나 팔았나요?"

"한 점도 팔지 않았소." 그들 이층에 도착했을 때 트레이스는 말했다. "누나와 약속을 했어요. 사실 누나는 그림에 사인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누나의 마음이 바뀌면 아마 내 멱엔 그림이 남아 있지 않을 거요."

캐시도 동감이었다. 사실 그녀의 벽에 걸어 두고 싶은 그림이 있었으니까.

저스틴의 방은 아이들 방답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진한 갈색 카펫이 깔려 있고 널찍한 공간에는 아기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은 커다란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건 멋진 숲속 풍경이었다. 그곳엔 작은 동물과 벌레도 있다. 캐시는 그 그림에 매료된 채 서 있었다. 그녀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를 즉시 알아 볼 수 있었다.

"당신의 누이가 이걸 그렸군요."

"그렇소. 레나가 저스틴에게 선물한 거요." 그는 욕실에서 소리쳤다.

욕조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제이슨의 항의가 점차 기쁨의 탄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애는 항상 목욕하는 걸 즐거워했다.

저스틴도 목욕하는 걸 좋아하는 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자. 지금 저스틴은 그녀에게 안긴 채 잠들어 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침대에 눕혔다. 그런 다음 면담 요로 아기를 덮어 주었다. 그녀의 손이 저절로 아기의 입술로 갔다.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아기를 깨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 충동을 누른 채 그녀는 저스틴에게 작별 키스를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욕실로 향했다. 제이슨과 그 애의 아버지 중에서 누가 더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트레이스는 하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

그는 제이슨을 물 위에 눕히고 발로 물장구를 치게 했다. "타이거, 바로 그거야. , 물벼락을 맞아 볼까?"

트레이스가 얼굴에 물을 뿌리자 아기는 깔깔대고 웃어댔다. 아기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아기는 벌써 타월을 들고 서 있는 캐시를 발견하고 말았다.

아기는 즉시 일어나 앉아서 우는 소리를 했다."엄마!" 아기가 손을 뻗쳤다.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캐시가 들어서서 방해하는 바람에 실망한 표정이 되어 있는 트레이스에게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제이슨의 몸을 타월로 감싼 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내 짐이 췌스트 피닉스의 모텔에 있어요. 그러니까 그곳에 들렸다가 공항으로 가야 해요."

트레이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캐시는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그는 빠듯한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를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수잔이 집에서 함께 살 때도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모두 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롤프와의 미래도 사라져 버렸고, 더욱이 어린 제이슨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돈을 쓰는 데 한층 더 신중해야 했다.

수잔과 테드가 결혼생활을 했던 1년 반 동안 그들은 약간의 보험과 저축을 해두었다. 언니가 죽기 전에 캐시와 수잔은 그 돈을 제이슨의 교육비로 쓰기로 동의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돈에 손댈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녀가 제이슨의 흙 묻은 옷을 챙기자 트레이스는 그 옷을 내티가 세탁하게 두고 가라고 말했다. "제이슨에겐 저스틴의 옷을 입히면 돼요."

욕실이 카운터에서 기저귀를 갈아 준 다음 그는 서랍에서 연두색의 옷을 꺼내서 제이슨에게 입혀 주었다. 그런 다음 그는 장난스럽게 머리를 제이슨의 배까지 낮춘 다음 재미있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의 아들에게서 장난스런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주 짧은 시간에 제이슨은 트레이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낸 것 같다. 아마 이번이 그 애가 남자와 함께 보낸 첫 번째 기회였을 것이다. 제이슨은 그 첫 번째 경험을 매우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캐시는 롤프가 다른 여자와 약혼을 했던 이유 중에는 그녀가 제이슨을 아들로 양육할 계획이라는 편지를 보낸 것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이 약혼녀는 바이얼리니스트였고, 그들은 부르셀에서 처음 만났다. 어쩌면 제이슨을 키우겠다는 생각은 그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그 여자와 진실한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캐시는 너무 혼란 스러워 제디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왔다. 그래서 캐시는 그를 사랑한고 생각했으며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저스틴을 바라보면서 캐시는 다시 한번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잠든 아이의 모습은 수잔과 너무나 닮았다. 핑크빛 뺨에 금발 머리를 가진 천사 같다.

다시 한번 캐시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저스틴의 부모가 살아서 아들이 트레이스의 집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양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캐시는 내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다음 트레이스를 따라서 밖으로 나와 볼보에 올라탔다. 캐시가 앞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그는 아들을 뒷자리의 아기 좌석에 앉혔다. 제이슨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모습이다.

차가 집을 떠나서 모텔로 향하고 있는 동안 트레이스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캐시, 난 제이슨을 나와 가까운 곳에 두고 싶소."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난 이 녀석과 9개월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소. 더 이상 이 녀석과 떨어져 있기는 싫소. 당신도 저스틴과 함께 있고 싶을 것이요.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주말을 보내고, 거기서 3일을 지내는 식은 우리 두 사람에게 만족스럽지가 못할 것 같소."

캐시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저스틴을 떼어 놓고 나오는 게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떻게 일을 하지 않고 이곳에 다시 올 수 있단 말인가? 크리스마스가 불과 3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지금이 그녀에겐 가장 바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판매해서 번 돈으로 그녀와 제이슨은 최소한 5,6개월 정도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1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칠 수가 없다. 그리고 발레에 근무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한 번에 이틀 이상 빠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트레으스, 당신 말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해결책이 없군요. 난 일이 몹시 많아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난 우리가 가끔씩 아이들을 바꿔서 데리고 있어 보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순간 그의 성난 음성이 들려왔고, 캐시는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말도 안 돼요! 이쪽 부모와 6개월, 그리고 저쪽 부모와 6개월을 보내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달리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어요."

"방법은 항상 있게 마련이오. 당신이 제이슨과 함께 피닉스로 이사 올 수도 있잖소."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불가능해요. 내가 금융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내겐 내 일이 몹시 서중해요. 우리는 두 세대에 걸쳐 바느질을 해오면서 고객을 확보했어요. 이제 내가 그 수공예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다른 도시로 옮겨가고 한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거예요."

그때 차가 모텔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트레이스는 차에서 내렸다. 그는 사무실로 가서 그녀의 짐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항까지 갔다.

공항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낸 다음에도 그는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위험스런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에게 경고해 둘 게 있소. 만약 우리가 이 문게를 해결하지 못하면 난 당신을 법정으로 끌고 가 제이슨에 대한 양육권 소송을 할 거요."

"지금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녀는 화난 어조로 소리쳤다. 하지만 굳어진 그이 턱이 그건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난 이 애의 진짜 아버지요. 그리고 난 이 애에게 경제적인 부를 누리게 해줄 수도 있어요. 그건 당신이 결코 할수 없는 일이오. 그리고 소송이 시작되면 병원 측도 소환되어서 부모를 입증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요. 그러면 모든 건 엉망이 되고 말아요."

"당신은 다른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걸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그녀의 음성은 두려움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분명히 <원칙적으로>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하지만 우린 지금 제이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이 애에게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는 거요.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소."

하지만 그건 캐시가 롤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당신에겐 특별히 정해 둔 상대가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소. 그렇다면 당신은 두 달 동안 혼자서 제이슨을 돌봐 온 셈이오. 당신은 이 애의 부모도 아니오. 그리고 이 애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오!"

"이제 내 말을 들어 봐요!" 캐시는 거칠게 말했다. "난 이 애를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당신 역시 저스틴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저스틴은 태어난 이후로 내 아들이오. 어느 판사도 그 애를 내게서 빼앗아 가지 못해요! 당신은 이모의 자격으로 기껏해야 자유롭게 아이를 방문할 권리나 얻게 될 거요. 게다가 엄청난 재판 비용과 변호사 비용까지 필요할거요.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내일 밤에 대답해 줘요. 내가 10시에 당신에게 전화하겠소."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거예요? 도대체 당신 요구가 얼마나 부당한지 알기나 해요? 그동안 내가 쌓아 둔 모든 기반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일자리도, 친구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오라고요? 단지 당신을 편리하게 해주기 위해서?"

"당연히 내가 당신을 돌봐 주겠소. 당신의 사업이 여기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말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언제든 서로 만날 수가 있을 거요. 우리가 평생 동안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는데 그게 고통이 될 수 있겠소?"

캐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생각해 봤어요?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당신은 미세스 블레이크슬리에게조차 사실을 밝히는 걸 꺼려하더군요. 아마 그녀는 내가 당신의 정부쯤 된다고 생각할 거예요. 갑자기 나타나서 당신에게 돈을 요구한다고 말예요."

"미세스 블레이크슬 리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아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당신은 남들의 평판에 대해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량이군요. 하지만 난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에요."

"제이슨과 저스틴과 함께 사는 것보다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오?"

그건 캐시의 논쟁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산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도 결심이 섰다. "밤낮으로 내게 전화해 봐요. 아무 소용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도전해 보겠어요. 판사가 제이슨과 내 조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결정하게 하겠다고요! 그럼 법정에서 만나요!"

캐시는 눈동자와 목소리에 분노와 혐오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에서 튕기듯 빠져나와서 뒷문을 열고 제이슨을 안아 올렸다. 아이는 깊이 잠들어 있다. 트레이스 역시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그녀의 짐을 꺼냈다.

단 일초도 그와 더 같이 있고 싶지가 않았으므로 그녀는 제이슨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방을 들고서 터미널쪽으로 걸어갔다. 어서 빨리 그 남자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오는 동안 캐시는 줄곧 피닉스에 갔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레이스 램지에게서 그대로 소식이 끊겨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캐시는 이웃집의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뷸라? 나 왔어요."

추운 날씨에 발레 스튜디오를 나와 가파른 길을 올라왔기 때문에 아파트는 유난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일주일 전에 그녀가 피닉스에서 날아왔던 날 밤 이후로 샌프란시스코는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난 스튜디오에 있어!" 뷸라 팀슨이 소리쳤다. 그 여인은 캐시와 수잔에겐 마음씨 좋은 이모와도 같은 존재다. 그리고 캐시에겐 시어머니가 될 뻔했던 여자였다.

유능한 도예가인 뷸라는 아주 오랫동안 아널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위층에서 그녀의 세 자녀와 함께 살아왔다.

케시와 수잔은 뷸라와 그녀의 두 딸, 그리고 아들인 롤프와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십대 후반쯤에 캐시는 롤프와 특별한 감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수잔과 캐시의 어머니가 암으로 병이 들자 롤프는 커다란 위로가 되어주었다.

캐시는 점차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에게서 도움과 애정을 기대하게 되었다. 캐시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그는 캐시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캐시는 기꺼이 그가 내민 초라한 약혼반지를 받았다. 그 무렵 두 사람은 모두 대학 4학년으로 음악 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첼로 전공했고, 그녀는 피아노를 전공했었다.

롤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캐시는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캐시는 그에게 음악 석사학위를 받으라고 격려해 주었고, 그동안 그녀는 자신의 수공예 사업을 확장해 갔다.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선 후 그는 대학생들을 가르쳐서 여분의 돈을 만들 수가 있었다.

캐시 역시 조촐한 결혼식을 얼릴 만큼의 돈을 마련해 두었다. 수잔이 결혼해서 애리조나로 옮겨 갔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테드를 만난 지 8주 후에 결혼식을 올린 수잔과는 달리 캐시는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러 테드가 죽었을 때 캐시는 엄청난 절망에 빠져 있었다. 만성 폐렴에 시달리면서 임신해 있었던 언니 때문에 무척 걱정하던 때에 생긴 일이었다. 따라서 캐시로서는 도저히 자신이나 롤프의 문제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상황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롤프가 그렇게 고집스러워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는 캐시가 결혼을 미루는 이유를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고집스럽고 요지부동인 건 처음이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캐시는 그에게 아파트를 떠나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마음이 차분해지면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그리고 몹시 분노한 말투로 그녀가 자신을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캐시는 그런 게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그는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혼반지를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봄 휴가 때 떠나 버렸다. 캐시는 깊은 절망과 외로움에 빠져 버렸다. 그 절망적인 시절을 회상해 보면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 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소동 속에서도 뷸라는 결코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어퍼투룰 자나서 작업실로 걸어갔을 때 뷸라는 물레 앞에 있었다. 아기 놀이장이 보이지 않자 캐시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제이슨은 어디 있어요?"

뷸라가 진흙을 개면서 말했다. "그 앤 캐시의 아파트에 내려가 있어. 아빠하고 함께..."

"뷸라! 그럼 안 돼요!"

"안될 게 어디 있어?" 뷸라는 여전히 자신의 일에 몰두한 채로 말했다. "그 사람은 제이슨을 유괴하러 온 게 아니잖아? 그는 그 사실을 확실히 했어. 그래서 나는 믿어 주기로 했다고."그녀의 음성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그녀는 캐시를 올려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둘이서 아주 국화빵처럼 닮았더군. 제이스은 그 사람과 함께 있으니까 너무나 행복한 것 같았어. 그리고 난 남자가 그렇게 아기를 좋아하는 건 처음 보았어. 그들이 함께 있는 걸 보니까 마치 크리스마스 같더라니까."

뷸라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캐시는 근처의 카운터를 꼭 움켜잡았다. 그가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밀 염두에 두었어야 했어.

그가 전화를 걸어오기만 하면 무조건 끊어 버렸으니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캐시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번민한 끝에 캐시는 결국 판사에게 모든 결정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려가서 조카를 보고 싶긴 했지만 트레이스가 그 애를 위해서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해다.

그리고 최대한 제이슨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트레이스와 소송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양육권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소송을 하기 직전에 그녀의 주소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제 캐시는 그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서 내려가서 인사라도 하지 그래? 그 사람은 캐시를 만나기 위해서 아침 일찍 피닉스를 출발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뭐가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난 제이슨을 잃게 될 거예요."

"말도 안 돼. 캐시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그렇게 매정하게 캐시와 제이슨의 관계를 끓어 버릴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 더구나 처음부터 캐시가 먼저 그를 찾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썻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잖아? 카산드라 아널드, 그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진짜 아들을 마난게 된 것도 바로 너 때문이었어.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은혜를 잊을 것 같아?"

"아줌마는 그가 양육권 소송을 하겠다고 나를 위협하던 현장에 계시지 않아서 잘 모르세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 후로 1주일이나 지났어. 그동안 그는 많은 생각해 봤을 거야. 그러니까 우선 그의 이야기를 들어 봐. 그의 전화를 그렇게 매정하게 끊어 버렸으니까 적어도 그 정도 성의는 보여 줘야겠지."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녀의 가슴은 두려움으로 조여 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캐시와 수잔은 어머니의 사업을 떠맡아서 한께 운영해 왔다. 그러다가 수잔이 테드의 직장 때문에 애리조나로 옮겨간 이후로 캐시는 혼자 그 아파트에서 살았다.

캐시는 그 아파트를 깨끗하게 치우고 집을 여러 가지 수공예품 진열장으로 꾸며 놓았다. 지금 그것은 크리스마스 주문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누비, 아프간, 벽걸이, 베갯잇, 헝겊 인형, 그리고 여러 가지 동물 인형들로 가득차 있다.

조그만 저실과 식당의 벽은 모두 그녀가 만든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침실은 더욱 사정이 나빴다. 침실에다 재봉틀과 보든 채턴과 재료를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이슨의 방은 여러 가지 동물 인형들로 거득 차 있다. 그 인형들은 벽을 따라서 줄지어 서 있다.

크리스마스나 되어서야 그녀의 가구들은 다시 제 모습을 찾을 것이고, 60cm짜리 크리스마스트리가 주방 식탁의 한가운데에 세워질 것이다. 제이슨은 조그만 전구들을 무척 좋아했다.

캐시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뒷문을 통해서 주방으로 들어섰다. 제이슨의 방에서 즐거운 재잘거림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그는 벌써 재판 일정을 잡아 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제이슨은 생부와 저스틴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캐시의 가슴이 마치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침실 문을 열고서 캐시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제이슨은 츠레이스의 앞에 앉아 있다. 트레이슨느 골덴 바지와 검은 스웨터 차림으로 캐시에게서 등을 돌린 채 카펫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수잔을 위해 만들어 주었던 4.5cm길이의 초록색 악어를 베개 삼아 베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제이슨을 간질이면서 놀고 있었다. 아이는 까르륵 웃어대면서 마구 발길질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이슨은 캐시를 보았다. 그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엄마>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웃느라고 계속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트레이스는 돌아누웠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한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처럼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캐시, 안녕."

그의 시선은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몸매와 찬바람에 핑크빛으로 물든 뺨,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천천히 훑어갔다.

"당신의 이웃이 날 들여보내 줬어요."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게도 다정해 보인다. 캐시는 초조함을 감추기 못한 채 이마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미안해요.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저스틴이 태어난 이후로 난 바닥도 아주 좋은 휴식처가 된다는 걸 알았소. 그런데 이곳에선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다 만날 수가 있군요."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유리로 된 악어의 눈을 문질러 보았다. "난 허전한 느낌이오, 아기 악어는 왜 없는 거요? 지금 당장 주문을 해야 할 것 같소. 1.8m정도의 길이에 제이슨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악어 말이오."

그가 왜 그런 제의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해어질 때의 감정을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제이슨, 이제 낮잠을 자야 할 시간이야."

캐시는 트레이스를 넘어서서 아기를 바닥에서 안아 올렸다. 그녀는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병을 물린 채 아기 침대에 눕히는 동안 트레이스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아기가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으나 트레이스가 떠난 다음에 줄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트레이스의 마음을 알고 싶다. 혹시 대화가 격해져서 제이슨이 놀라게 되는 건 싫다. "주방으로 세요. 제이슨은 곧 잠이 들 거예요."

그와 함께 주방으로 나가서 캐시는 둘이서 마실 코코아를 준비했다. 안개 때문에 실내는 어느 때보다 더 어두웠고 트리의 불꽃은 더욱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갑자기 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스웨터를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었다.

캐시는 코코아를 만들어 그의 앞에 놓아주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군청색 티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말했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건 내 잘못이었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하지만 내 평생 그렇게 화가 난적은 없었어요."

"사실 내 행동도 그리 바람직하진 못했소."그는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사실 난 법정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건 캐시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답이다.

"... 나도 당신이 제이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요. 저 애야말로 당신의 혈육이니까요. 문제는 나도 제애를 사랑한다는 데 있어요." 그녀의 음성이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스틴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 애도 내 혈육의 일부이기 때문이에요."

"나도 알아요."

그녀의 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합리적인 해결책을 생각해 내려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했어요."

"결국 우리는 타협을 해야 할 것 같소.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결혼하는 거요. 내가 여기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오. 당신에게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하기 위해서 찾아온 거요."

"결혼?"

캐시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이슨의 울음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트레이스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당신에게 일일이 장점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거요.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해결되니까. 그리고 저스틴과 제이슨은 엄마와 아빠를 갖게 되고,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면서 함께 아이들을 기르는 기쁨을 맛볼 수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아요!"

그는 캐시를 똑바로 응시했다."우리는 계약결혼을 할거요. 각각 다른 침실을 쓰게 돼요. 그리고 당신은 피닉스에서 수공예품 가게를 낼 수 있을 거요. 돈 걱정 같은 건하지 않아도 왜요. 나 역시 두 아이들이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까 안심하고 직장에 나갈 수가 있을 거요."

그녀는 찻잔을 꼭 움켜잡았다. "트레이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젊어요. 언젠가 당신은 정말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게 될 거예요. 첫 번째 결혼이 실패했다고 해서 앞으로 영영 배우자를 만난 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요. 캐시."그는 놀랄 만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대단히 매력적인 여자요. 당신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니 놀랍소."

롤프가 결혼하자고 했었어요. 캐시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난 결혼이란 게 어떤 것인지 경험을 해본 사람이요. 그리고 다시는 그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나에게 중요한 건 아이들뿐이오. 그 애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당신과 나를... .어떤 전문가는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3년 동안의 성격이 평생 지속된다고 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과 내가 그 애들의 삶을 인도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의 강렬한 시선을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캐시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지금 트레이스 램지는 명목상의 결혼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건 계약결혼이다. 그런 단어를 들어 보긴 했지만 캐시는 여태껏 결혼... 말만 들어도 등골이 으쓱하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필요하고, 그녀와 트레이스 램지는 그 욕구를 채워 줄 수 가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감정적으로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트레이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섰다. "캐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당신은 나보다 어려요. 그러니까 자신의 생활을 가질 권리가 있어요. 만약에 언젠가 우리 중 한 쪽이 우리의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그 문제는 그 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그녀는 싱크대 가장자리를 꼭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해 있을 만큼 힘을 주고 있었다."당신은 전 부인을 잊어 가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녀는 저스틴과 유대감을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몰라요. 수잔처럼 그녀 역시 저스틴이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수다 있어요. 하지만 제이슨을 보면 부인은 그 애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부인이 이번 기회에 당신과 재결합하길 원한다면 난 그녀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캐시는 그의 정직한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녀의 좁은 주방은 트레이스로 인해 꽉 차버린 느낌이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비누향기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래서 캐시는 그이 반응 같은 걸 살펴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캐시, 벌써 시도해 봤소."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피닉스를 난 떠난 날 저녁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담했소, 그래서 밤새워 편지를 써 보냈소."

"그래서요?"

"답장이 없었소."

"시간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아니면 편지를 받지 못했을 지도 모르죠."

"대단히 관대하게 그 여자를 감싸주는군요. 하지만 그런 게 아니오. 난 그녀의 가정부인 사비와 이야기를 해봤는데, 글로리아는 편지를 읽었다고 했소."

"그런데도 당장 제이슨을 보로 오지 않았단 말인가요?" 캐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아마 오지 않을 거요. 하지만 혹시라도 그 여자가 성격이 변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원한다면 내게 연락하라고 했어요. 제이슨과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하지만 아무 연락도 없는 걸로 봐서 그녀의 성격은 여전한 것 같소."

"하지만 제이슨은 부인의 아들이에요!"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모성애를 가진 건 아니오. 그리고 그녀는 결코 위선 같은 건 보이지 않아요. 지금 그녀는 시 법원의 판사 자리에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 대 법원 자리에 앉기를 꿈꾸는 여성이오."

캐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부부는 보통 사람들과는 정반대인 것 같다. 이 세상에 트레이스처럼 헌신적인 아빠는 없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인의 성격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나요?"

"내가 그녀를 임신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았을 거요."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나요?"

"우린 서로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결코 결혼 같은 건 계속하지 않았었소. 그녀가 유산을 시키려 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소. 그래서 협상을 했어요. 어느 정도 결혼생활을 한 다음에 내가 아이의 양육권을 갖게 되면 이혼하자는 거였소."

캐시는 눈을 깜빡였다. "부인은 저스틴을 몇 번이나 찾아 왔었나요?"

"오지 않았소."

"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요?" 캐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는 손을 뻗쳐서 그녀의 이마에 흘려 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그의 손길에 캐시는 떨었다. 롤프가 똑같은 행동을 했을 때도 그처럼 심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편지에 답장을 해주지 않았다고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소. 아직도 더 설명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소?"

아무래도 그와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아 캐시는 그를 지나쳐서 식탁 위에 있는 잔을 집어 들었다. "당신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거야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이 싹텄다고 말하면 될 거요. 아니면 마음대로들 생각하라고 입을 다물고 있어도 돼요. 난 이제 성인이오. 내가 하는 일에 가족들을 동의를 얻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입술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난 거짓말하는 건 싫어요."

"그럼 진실을 말해요. 저스틴과 제이슨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이요."

캐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깐 실례해요. 아무래도 아기를 살펴봐야겠어요

놀랍게도 그는 캐시를 가로막고 나섰다. "난 이제 가봐야겠어요. 내 제안에 대해 당신에게 생각해 볼 여유를 주고 싶소. 난 페몬트 호텔에 있어요. 결심이 서면 내게 전화해 줘요."

그녀의 가슴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얼마나 묵을 예정인가요?"

"당신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있겠소."

캐시는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내가 거절을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순간 그의 얼굴 근육이 굳어졌다. "당신은 승낙을 하게 될 거요. 아이들을 당신을 몹시 필요로 해요. 당신도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요. 당신의 언니가 죽기 전에 부탁했다고 했잖소? 자신의 아들을 찾아서 자신 대신 돌봐 달라고 말이오. 그렇다면 언니의 뜻을 존중하고, 동시에 제이슨의 어머니도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요." 말을 마치고 그는 주방에서 나가 버렸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캐시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그녀는 살금살금 제이슨의 방으로 들어가서 우유를 뺨에 댄 채 잠든 아기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우유병을 집어내고, 아기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 귀여운 아기를 휴일에만 만나야 하고, 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하는 모습도 볼 수가 없다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유치원에 갈 때도 데리고 갈 수가 없을 것이다.

트레이스와 결혼만 하면 저스틴의 어머니도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 네 사람은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트레이스에 대해선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아이들에 대해서 매우 헌신적 이하는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고 어떻게 결혼생활이 가능할까? 그리고 난 평생 내 아이는 가져 보지 못할 게 아닌가?

어쩌면 트레이스는 외도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그럴 만한 상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트레이스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캐시는 이상하게도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이상한 반응이었다.

캐시는 롤프가 그녀에게서 떠나던 날 밤에 그가 했던 말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롤프를 거절했던 게 그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롤프와 함께 침실에 들기를 거부했던 것이 의심의 씨앗을 낳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시의 어머니는 딸들을 키우면서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남편을 위해 육체적인 열정을 잘 간직해야 한다고 충고했었다. 수잔이 그토록 결혼하고 싶어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실 수잔은 테드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캐시가 롤프에 대해서 가졌던 사랑했지만 신혼여행을 떠날 때까지 사랑의 행위를 갖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트레이스와 결혼한다면 그런 면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망설이고 있을까?

다른 남자가 나타나서 캐시 자신을 정신과 육체적인 면에서 사랑해 줄 거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트레이스와 결혼하면 그녀는 최소한 어머니가 되고 싶은 바람은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제이슨과 저스틴의 인생에서 국외자로 남게 도리 것이다. 그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날 하루 그녀는 제이슨과 놀아 주문 받은 일감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하게 보냈다. 6시가 지나자 고객들이 계속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주문을 하거나 주문품을 찾아 가려는 사람들이었다.

제이슨을 재우고, 주방 청소를 마칠 때까지 그녀는 전화기 앞으로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11시가 되었을 때, 그녀가 더 이상 전화기 앞으로 다가가는 걸 미룰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전화가 연결되는 동안 그녀의 가슴은 거칠게 뛰었다. 하지만 전화벨이 10번쯤 울려도 받지 않았다. 그는 외출을 했거나 잠이 든 모양이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엄청난 긴장에도 불구하고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 플러그를 빼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이슨을 살펴본 다음 황급히 침실로 달려갔다. 빨리 잠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그런데 시트를 펼치려 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뷸라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전화를 먼저 걸고 찾아왔다. 도둑이 들거나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녀는 발끝을 들고 거실로 나와서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니가 하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잠시 후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캐시?" 나직한 음성이었다. "난 트레이스요. 아직 잠들지 않았소? 난 제이슨을 깨우고 싶지가 않았소."

트레이스?

그 순간 그녀의 내부에 야릇한 흥분 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쓰러지려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 위해 문을 움켜잡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녀는 나직한 어조로 속삭이고 가운을 가지러 침실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 주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머리칼이 샤워를 한 탓에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머리칼이 젖어서 엉켜붙어 있었다.

그는 캐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듯한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밤의 습기 때문에 그의 머리칼도 젖어 있었고 약간은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진한 갈색 스웨이드 가죽 재킷을 입고 있다.

"대답은 예스요. 안 그렇소?"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내게 한 시간 전에 전화를 걸어 피닉스로 가서 소송을 준비하겠다고 말했을 거요.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은 절대로 겁쟁이가 아니니까."

 

4

"미스 아널드?" 내티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캐시는 저스틴의 침실에 있다. 그곳에는 제이슨의 침대도 놓여 있다.

트레이스의 가정부는 아기 방으로 들어서자 캐시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줌마와 마이크는 날 캐시라고 불러 주세요. 제이슨을 따라 이곳에 온 지 겨우 24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줌마와 아저씨는 자상하게 날 보살펴 주셨어요. 우린 벌써 좋은 친구가 된 기분이에요."

"아가씨가 좋다면 그렇게 해요?"

"좋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다시 버둥거리는 제이슨에게 새 옷을 입히는 일을 계속했다.

"트에이스가 아가씨를 도와주라고 했어요. 그는 시간을 정확히 지킨는 사람이에요. 자기 결혼식에 늦을 사람이 아니죠. 제가 제이슨의 옷을 입혀서 아래층에 있는 저스틴과 아빠에게 데리고 가겠어요."

"고맙지만 옷은 다 입혔어요."

캐시는 아이에게 하얀 구두를 신기고 매듭을 단단히 묵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뺨에 키스한 다음 내티의 품에 안겨 주었다. 내티는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캐시는 자기 침실로 갔다. 그 집의 이층에는 마음에 드는 방을 선택하라고 했으므로 그녀는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방을 골랐다. 밤에도 아기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방 세 개 중에서 가장 작기는 했지만 그녀의 방에는 욕실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등나무 가구와 아름다운 창문이 있어서 집에 온 것처럼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캐시는 한ㄴ시라도 빨리 그 방의 깔개를 그 방의 깔개를 그 방의 분위기에 올리게 직접 디자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이 순간만큼 그 계획을 밀쳐 놓아야 할 것 같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신부였다.

그녀는 예복을 입고 있었고, 왼손 셋째 손가락에는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세트로 에메랄드 귀걸이도 달았다. 그건 트레이스가 그녀에게 결혼선물이었다.

5주일 전에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이슨과 함께 살면서 언니의 죽음과 롤프의 약혼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일만 하면서 절망을 쫓아내려고 애썼었다.

그런데 이제 캐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트레이스가 그녀를 너무나 애지중지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거의 의식할 수 없을 정도이. 그의 청혼에 동의 하자 그는 금용 업무를 잠시 미뤄 둔 채 크리스마스를 전 후해서 며칠 동안 샌프란시코에 머물렀었다. 그리고 제이슨을 돌봐주었으며 결혼 준비와 피닉스로 이사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동안 캐시는 자신의 사업을 정리하고 친구들에게 결혼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사실 일 때문에 친구들과도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캐시는 트레이스의 가족을 결혼식 후에 만나기로 하자고 제의했다. 결혼식은 아이들과 내티, 그리고 마이크만을 증인으로 세우기로 했다. 트레이스는 그녀의 제안에 따라서 군서기의 사무실에서 비밀 결혼식을 주선했다.

트레이스는 여러 가지 일들을 유능하게 처리해 주었다. 비록 정상적인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상상해 왔던 모든 꿈들까지 지울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침대 옆에 있던 상자 속에서 롤프의 사진이 든 액자를 꺼냈다. 그녀는 그의 갸름한 얼굴을 바라보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캐시는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 그에게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었다. 그녀는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트레이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모두 알렸다. 그리고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상처를 주었다면 자신ㅇ르 용서해 달라고 적었다.

벨기에에서 아무런 답장이 없었으므로 캐시는 그가 자신을 정말 잊고 있지만 아직도 상처는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 롤프...."그녀는 너무나 많은 추억들이 떠올라서 나직하게 흐느껴 울었다. 이제 꿈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캐시, 아직 준비가 안 끝났소?"

발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녀는 재빨리 액자를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알아차린 트레이스는 다가와서 그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잠시 그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눈물이 맺혀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전에도 이 남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소 . 뷸라 팀슨의 집에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리고 그의 뺨과 턱의 언저리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이제 그녀가 처음에 만났던 남자로 변해 버렸다. 그녀가 유괴를 하려 한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던 남자로...

"캐시, 무슨 일이오? 첫날 당신은 저스틴을 보로 이곳에 왔을 때 당신은 구속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소. 당신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트레이스의 음성은 분노의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캐시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쓸데없는 그런 소동을 일으킨 자신이 미웠다. 처음부터 트레이스는 그녀를 솔직하게 대해 주었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솔직해지는 게 예의일 것이다.

"난 롤프와 함께 컸어요." 그녀의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한때 우리는 약혼을 했었지만 사이가 나빠졌어요. 그래서 그가 반지를 돌려 달라고 했어요. 지금 그는 유럽에서 만난 여자와 약혼을 한 상태예요. 난 과거의 기억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트레이스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작은 진실이라도 캐내려는 것처럼.."예식은 11시에 시작해요. 아직 45분이 남아 있소. 취소할 시간은 충분하오."

"싫어요!" 그녀의 격렬하게 소리쳤다. 그처럼 격렬한 반응에 그녀 스스로 놀란 정도였다.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캐시, 분명히 해둬요. 이건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오."

"이제 갑시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가 어깨를 폈다. 굳어진 얼굴 근육도 풀어진 것 같았다.그는 사진을 침대 옆에 있는 상자 속에다 던져 넣었다.

"이제 갑시다."

그 이후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마이크는 아이들을 안고 있는 캐시와 트레이스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 광경에 놀란 제이슨까지 울음을 터뜨렸다.

트레이스가 캐시의 손을 잡고 한가운데로 나가는 동안 불쌍한 내티와 마이크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안간힘을 써야했다.

그런 소란 속에서도 캐시는 엄숙한 기분이 되었다. 그 순간 어머니와 수지가 함께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트레이스를 처음 본 순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뷸라조차도 그랬으니까.

그녀는 신랑이 될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늠름하고 자시감에 넘쳐 있다. 난 정말 이 남자와 결혼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치안 판사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카산드라 아널드와 트레이스 엘링스워스 램지는 오늘 이 예식이 끝나면 부부로서 첫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느님과 여기 증인들 앞에서 함께 서약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판사는 그들을 엄숙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구속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건 정열의 불꽃이 생계를 유지하느라고 누그러진 후에도 오랫동안 참고 견뎌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아를 잊고 배우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카산드라, 당신은 그럴 수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의 증인들 앞에서 자유로운 으지로소 이 남자를 법적인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까?"

캐시는 트레이스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걸 의식했다. "."

"그리고 트레이스, 당신도 이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자유로운 의지로서 카산드라를 법적인 아내로 맞이하여 평생 동안 보살펴 줄 책임을 감수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여자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느 누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겠습니까?"

캐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 있음을 느꼈다.

"."그는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교환할 반지가 있으면 지금 하세요. 카산드라, 먼저 하세요."

캐시는 트레이스를 위해 산 금반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운데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 반지를 빼내서 트레이스의 왼손 약지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반지는 아주 잘 맞았다. 그는 캐시를 바라보며 은밀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트레이스, 당신 차례요."

캐시가 왼손을 내밀자 트레이스는 하얀 백금 반지를 에메랄드 약혼반지 옆에 끼워 주었다. 그의 움직임은 침착하고 자신만만했다.

"좋아요." 치안 판사가 다시 한번미소를 보냈다. "이제 애리조나 주에서 본인에게 위임한 권한에 의해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공식적으로 신부에게 키스하는 의식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레이스는 고개를 숙여 캐시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 동안 그녀의 온몸에 관능적인 전율이 스쳐갔다.

"엄마! 엄마!"

제이슨과 저스틴이 울음소리가 서서히 그녀의 의식을 뚫고 들어왔다. 캐시는 충격과 당황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트레이스에게서 벗어났다. 트레이스도 그 키스를 끝내는 걸 주저하지 것 같았다. 달아오르는 얼굴을 돌리는 순간 캐시는 그의 눈빛에서도 불길이 이는 걸 본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머리를 들어얼렸을 때. 그의 표정에 그런 감정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판사가 내민 손에 악수하면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런 다음 허둥지둥 내티에게로 다가갔다.

내티는 제이슨을 안은 채 그녀를 포옹하며 축하의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칭얼대는 아이를 캐시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즉시 울음을 그치고 이번엔 캐시의 코르사주에서 오렌지색 꽃을 떼어 내려고 했다. 트레이스 역시 저스틴을 달래느라 분주했고, 마이크는 계속 사진을 찍고 있었다.

캐시는 벌겋게 달아오른 저스틴의 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트레이스, 호텔로 가는 게 좋겠어요. 저스틴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해요. 그리고 해열제를 먹여야 할 것 같아요."

스코츠데일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리조트 호텔 측은 그들의 방에 과일 한 바구니와 축하 샴페인 한 병을 보내왔다. 그곳엔 두 개의 아기 침대도 있었다. 캐시는 아이들을 황급히 침대에 눕히고, 그동안 트레이스는 아기 가방과 짐을 풀었다.

두 아이들이 칭얼대면서 간신히 잠들었을 때 그들의 점심식사는 이미 맛이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캐시는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무든 신경은 신랑에게가 아니라 두 명의 아기들에게만 가 있었다. 트레이스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같았다.

결국3일 동안의 휴가에 있었던 일은 그들 네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중 하룻밤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저스틴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캐시나 트레이스에게 안겨 있으려고만 했다.

캐시가 저스틴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걸 눈치 챈 제이슨은 더 큰소리로 울어댔다. 트레이스가 안아 줘도 아이는 그치려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8시에 그들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들 지치고 탈진한 모습이었다.

저스틴은 심하게 아프진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서야 정상적인 건강을 되찾았다. 그 며칠이 캐시에게는 지독히도 힘든 나날이었다.

금오일 아침에 트레이스의 선언은 그녀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그날 저녁 그의 가족들을 가든 파티에 초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모든 친척들을 한 지붕 밑에 모아 놓으면 그들이 두 아이들을 위해서 결혼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가 훨씬 수월할 거라고 했다.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캐시는 그저 멍하기만 했다.

오늘밤 트레이스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캐시가 아이를 기르는 행복감이라든가 제이슨과의 유대감은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이해하는 사람은 트레이스뿐이다.

캐시는 결혼식 날 입었던 의상에 트레이스가 보내 준 오렌지색 꽃을 달았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제이슨을 꼭 끌어안고서 용기를 내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테라스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트레이스의 검은 머리칼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엔 온통 검은 머리칼뿐이다. 그곳에 모여 있는 성인들을 모두 합하면 최소한 40여 명은 될 것이다.

저스틴은 행복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할머니의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캐시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담소 중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두려워졌다. 다행스럽게도 트레이스가 형제인 듯한 사람과 이야기를 멈추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목을 드러낸 하얀 이탈리아 실크 셔츠에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너무나 잘생긴 모습이었다. 캐시는 그를 바라보고 있기가 눈이 부셔 일부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제이슨을 안으려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러안았다. 캐시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캐시를 훑어보았다.

아침식사 때 그는 캐시에게 파티에 대해선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그의 리드에 따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 자신만만하다는 데 있었다. 그녀는 한심하게도 이 남자에게 정말 사랑을 받는 기분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몸을 돌렸다. 캐시와 내가 주말에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놀라셨을 겁니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어요. 나의 매력적인 신부가 몇 달 전에 내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폭탄선언을 했거든요. 저스틴이 그녀의 진짜 조카이고, 이 작은 타이거는 내 진짜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는 아빠한테 가려고 캐시의 품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제이슨을 받아 안았다.

"태어날 때 아기가 바뀐 것 같아여. 그 날 폭팔 사고가 일어나 병원에선 일손이 부족했고, 유아 중환자실에는 아기 손목에 두를 띠가 모자랐다는 겁니다. 간호사가 그걸 더 가져오라고 사람을 보냈는데 그가 띠를 갖고 돌아와서 그걸 다른 아기의 팔목에 감아 준 거예요."

가족들의 반응은 캐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격렬했다. 5분쯤 후에 친척들이 진정되자 그는 간단하게 그 이후의 사건을 설명했다. 테드가 사고로 죽고, 수잔이 폐렴으로 죽기 전에 제이슨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결국 캐시가 조카를 기르면서 진실을 밝혀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제이슨의 고수머리 위에 키스를 해주고 캐시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그런 다음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 이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 넷은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그래서 그 즐거움을 계속하기로 합의한 거죠. 그래서 우린 가족이 되기로 한 겁니다."

그의 음성은 마지막에 갑자기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은 그 이야기를 완벽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캐시조차도 그 이야기가 완전한 진실처럼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캐시, 나의 어머니인 올리비아 램지요." 그리고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 아내인 카산드라 아널드 램지와 제 아들 , 제이슨을 소개합니다."

"트레이스!"

시어머니의 외침엔 캐시가 듣고 싶어했던 기쁨이 담겨 있었다. 트레이스의 어머니가 새로운 손자와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해." 올리비아는 캐시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그런 다음 캐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녀의 깊고 맑은 회색 눈동자는 마치 캐시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소식을 듣다니.... 정말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트레이스가 내게 새로운 인생을 찾아 준 것 같아."

"고맙습니다. 어머니." 캐시는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트레이스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캐시는 갑자기 죄의식을 느꼈다. 그녀는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했다. 더구나 그처럼 따뜻하고 우아한 여인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

"캐시, 다른 며느리들처럼 날 올리비아라고 부르렴, 알았지?"

캐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눈물을 감췄다.

"어머니?"트레이스가 부드러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내 아들, 제이슨과 인사하시겠어요?" 그가 아기를 돌렸다." 이분이 네 할머니란다. 제이스. - -."

", 트레이스!" 올리비아는 소리를 지르면서 제이슨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 난 마치 33살이 되어서 너를 다시 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란다. 이 앤 너와 너무나 닮았어! 모두들, 여기를 봐요! 여기 또 한 명의 미남이 있어요!"

곧 올리비아와 아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열렬한 포옹을 받았다.

가족과 찬척들의 따뜻한 환대에 캐시는 다시 죄책감을 느꼈다. 트레이스의 형들인 제임스와 노만이 농담을 던졌다. 그들은 트레이스가 사랑에 빠진 걸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환호 소리가 아기들에겐 피곤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제이슨이 먼저 울음을 시작했다. 조카들이 제이슨과 저스틴을 서로 안아보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저스틴은 그런 사촌들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울먹이는 저스틴에게 바나나 조각을 건네주고 있는 데 늦게 도착한 친척들이 테라스 쪽으로 왔다.

캐시는 아직도 제이슨을 안고 있는 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서 날씬하고 적갈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레나... 캐시는 남편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서 즉시 그의 하나밖에 없는 누나라는 걸 알아차렸다. 크레이스 말에 의하면 레나는 몇 년 전에 심장마지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랜트램지를 닮았다고 했다.

트레이스가 누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걸 캐시는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레나가 팔을 뻗쳐서 제이슨을 안으려 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딱 달라붙어서 어느 곳에도 가려 하지 않았다.

모두들 깔깔 웃고 있는데 트레이스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스틴을 안고 있는 캐시를 찾아냈다. 그가 누나에게 캐시 쪽을 가리키자 레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캐시의 몸매에 비하면 레나는 좀 마른 편이다.

도도한 턱을 제외하고 트레이스는 누나와 거의 닮은 곳이 없어 보인다. 누나는 진한 회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 눈과 거침없이 뻗은 코 때문에 그녀의 인상은 활발한 말괄량이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앞으로 숙여 저스틴의 뺨에 키스했다. 저스틴은 캐시를 꼭 붙잡고서 울기 시작했다. 레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캐시를 바라보았다. 마치 화가가 그리고 싶은 모델을 찾아냈을 때와 같은 시선이다.

"난 트레이스의 누나인 레나 하롤드슨이에요. 소식을 듣고 난 정말 놀랐어요. 트레이스가 오늘 밤 10살쯤 더 어려 보이는 것도 바로 캐시 때문인 것 같아요. 캐시가 내 동생을 항상 이렇게 행복하게 해준다면 난 캐시를 영원히 사랑할게요."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캐시,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해요."

그 말은 분명히 칭찬이었지만 캐시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캐시 램지가 결코 속일 수 없는 사람이 것 같다.

"레나, 고마워요. ...난 우리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겠어요." 그 말은 최소한 진심이었다.

레나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서렸다. "트레이스와 제이슨을 결합시키는 게 올바른 길로 가는 위대한 첫걸음인 것 같아요.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듣고 싶어요. 하지만 오늘밤은 안될 것 같군요. 저스틴은 잠자리에 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다음 주에 좀 안정이 된 다음 함께 점심식사나 하는 게 어때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으로 초대할게요."

"좋아요."레나는 자신의 친절이 캐시에게 얼마나 많은 의미를 주는지 모를 것이다. "사실 트레이스의 사무실에서 형님이 그린 수채화를 본 수간부터 한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정말 멋진 그림이었어요."

레나느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빛나는 걸로 봐서 캐시는 그녀가 기뻐하고 있음을 알았다.

"트레이스도 캐시에게 멋지다고 이야기했을 거예요, 그렇죠?"

"아니에요, 이 사람은 날 유괴 혐의로 감옥에 넣으려고 했어요!"

"뭐라고요?"레나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건 트레이스답지가 않군요. 사업에서는 트레이스가 거친 평판을 얻고 있다는 걸 알아요. 사업에서는 트레이스가 거친 평판을 얻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감히 캐시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었죠?"

"거의 그럴 뻔했어요." 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이 작은 녀석이 어머니를 구해 주었어요. 그렇지. 타이거?"

두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어느새 그들 곁으로 다가와 있는 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엄마!" 항상 활발한 제이슨이 아빠의 품안에서 벗어나 캐시에게 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거센 몸부림에 아기는 거의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그 무렵엔 저스틴도 이미 구제불능이 되어서 진정시키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트레이스." 레나는 트레이스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이 생긴 것 같구나."

트레이스는 캐시에게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이 웬일인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누나, 난 상관 안 해요." 그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아이들을 침대에 눕혀야 할 것 같아. 다시 돌아올게."

그는 캐시의 어깨를 끌어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모든 침대에 눕혀야 할 것 같아. 다시 돌아올게."

그는 캐시의 어깨를 끌어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캐시는 그들에게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트레이슨는 자꾸 그녀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날 도와주지 않아도 돼요." 아기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트레이스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봐요. 우리 둘 다 자리를 비우는 건 예의 에 어긋나는 짓이에요."

"날 쫓아 보내고 싶은 모양이군." 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 기쁜 기색은 없었다. " 이곳에 당신 혼자 남겨 두고 떠나면 당신은 밤새도록 여기에 머무를 거요."

그녀를 비난하려고 한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들 사이의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그녀는 저스틴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침대에 눕혔다. 그동안 트레이스는 제이슨을 돌봐 주었다.

"당신 가족들은 아주 좋은 분들이에요. 난 그분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소."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이상하게 행동을 해요. 친구라면 서로를 바라보면서 가끔 미소도 짓고, 농담도 주고받는 게 정상이오. 당신은 아이들을 위해서 애정을 많이 저장해 둔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은 아이들을 항상 방패처럼 사용하더군."

그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란 캐시는 몸을 홱 돌렸다. "방패라고요?" 그녀는 조심성 없이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에 깃들인 위험한 표정이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이들 둘씩이나 데리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신혼여행? 캐시는 멍한 표정이 되어 재빨리 시선을 돌려 버렸다.

"소란스런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사 온 후에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짧은 휴가를 지내는 걸로 만족하기로 서로 동의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모두 사람들과 일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말예요."

"내 기억으로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소. 난 그저 당신의 의견에 동의했을 뿐이오. 하지만 당신이 호텔의 베이비시터를 갖춘 곳으로 소문난 곳이오. 그리고 언제든 의사와 간호사를 부를 수도 있는 곳이오. 만약 저스틴이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빠지면 언제든 최고의 의료진이 달려와서 치료를 해줄 수 있었소."

그녀는 아기 침대의 빗장을 꼭 움켜잡았다. "난 당신이 불만을 갖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렇다면 미리 내게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어요."

"난 계속 당신에게 알렸소. 하지만 당신은 내 암시를 무시한 채 아이들에게만 붙어 있었소. 저스틴은 정말 구제 불능이었소. 계속 당신만을 찾았고, 당신은 그 애의 응석을 모두 받아 줬소. 애정이 좀 지나친 것 같았소?"

그럼 내가 저스틴을 망치고 있단 말인가? 혹시 그의 애정을 받지 못하는 대신 저스틴의 애정으로 채우려 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신 말이 옳은 것 같아요. 저스틴과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을 보상하려고 내가 좀 지나쳤는지도 몰아요."

하지만 그 말이 그를 위로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당신은 내 침실에서 함께 잠을 자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내 아내인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엄마 역할 이외에 내가 당신에게 기대하는 역할들도 있소."

그게 무엇일까?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캐시는 알 수가 없었다.

"난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날 어떻게 이해하겠소? 우리가 만난 이후로 단둘이 있었던 순간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대표 이사로서 나는 여러 가지 사회 모임에 참석해야 하오. 그동안 그들을 접대하는 일을 나 혼자서 맡아해야 했어요. 하지만 이제 난 결혼을 한 상태요. 그러니까 이제 친구들이나 사업상 동료들을 집에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할 때 당신이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필요한 상상이나 오해를 하게 될거요. 물론 아이들을 그런 자리에 초대할 수는 없을 거요."그리고 그는 빈정대는 어조로 덧붙였다. "내 청혼을 받아들일 때, 당신은 보모로 고용되는 거라고 생각했었소?"

"그런 건 아니에요."

캐시는 당황했다. 도대체 그가 왜 이처럼 화를 내고 있는지 알 수다 없다."하지만 당신이 샌프란시스코에 왔을 때, 나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아이들의 욕구만을 생각했어요."

"캐시, 그건 벌써 2달 전의 일이오. 이네 우리들의 욕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되었소."

그의 말에 캐시는 경계심을 풀어 버렸다. "트레이스." 그녀가 속삭였다. "당신은 가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그의 시선이 강렬하게 그녀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캐시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러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그는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가족들이 떠나고 나면 다시 이 문제를 꺼내겠소. 그리고 그동안에는 나와 멋진 팀워크를 내색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건강이 좋지가 못했다."

캐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목으로 가져왔다. "어머님 건강이 나쁘세요?"

"어머니는 최근에 심장마비에 걸렸어요. 의사들은 어머니에게 흥분하지 말고, 인생을 즐겁게 사시라고 충고했어요. 우리의 결혼은 어머니에게 아주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준 갓 같소. 난 절대로 어머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좋은 결혼을 통해서 성취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내가 이혼을 해서 어머니는 몹시 상심하셨소. 심장마비가 온 이후로 어머니는 내가 아내와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뜰까 봐 걱정을 해오셨소."

캐시는 격렬한 고통을 느꼈다. 그가 청혼을 했던 이유 중에는 그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들의 결혼은 그분에게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었을 것이다. 아까 캐시를 소개받았을 때 시어머니의 반응이 그걸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역시 트레이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충실하고 헌신적인 남자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난 어머님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 거예요."

그는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가 폈다. 마치 인내심의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은 행동이었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나와 함께 있을 때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해 달라는 거요. 아이들이 없을 때도 날이오."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캐시, 난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아지도 예전의 약혼자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남자 때문에 남자들을 영원히 멀리 하려고 작정을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소."

 

5

트레이스는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는 캐시의 손을 낚아채듯이 붙잡고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캐시는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파티가 끝나기 직전 사람들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캐시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그가 입술을 그녀의 뺨에 댄 것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그녀의 온몸은 흥분으로 들떴다.

"오늘밤은 대단히 더워요. 모두들 떠나고 난 후에 나와 함께 수영을 하기로 합시다. 그러면서 이층에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트레이스와 수영장에 단 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결혼식에서 그가 키스를 한 이후로 캣시는 그를 육체적으로 의식하게 되었다. 그건 롤프에게서는 결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캐시는 전에 수잔이 테드에 대해서 하던 말을 떠올렸다. "캐시, 난 그와 작별인사를 해야 하는 게 너무 싫어. 키스 한번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아. 그와 접촉을 하기만 하면 난 혼돈에 빠지고 말아. 우리가 빨리 결혼하지 않으면 우린 둘 다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을 거야."

트레이스가 자신의 떨림을 알아차릴까 두려워 캐시는 얼른 트레이스에게서 벗어났다.

"우선 내티를 도와서 설거지를 해야 해요."

"내티는 요리업자들을 감독하기만 하면 돼요. 오늘의 파티를 위해 특별히 파견된 사람들이오. 그리고 마이크가 정원이나 다른 곳은 모두 알아서 손봐 줄 거요. 그러니까 집안일을 핑계 댈 생각은 하지 말아요. 오늘밤 나는 내 아내와 함께 있어야겠소. 한밤에 수영을 즐기면서 대화를 나눈다면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지 않겠소?"

캐시가 시댁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도망치듯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을 때도 그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침대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포장된 선물을 발견했다.

피닉스에 도착한 이후로 그녀는 너무나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더 이상 선물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누가 보낸 것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 선물을 집어 들었다.

누가 보낸 것인가? 그녀는 재빨리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었다. 티슈 우에 손으로 쓴 카드가 놓여 있었다.

"갑작기 당신이 스코츠데일에서 나와 수영하지 않았던 이유가 저스틴의 감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소. 혹시 당신에게 입을 만한 수영복이 없다거나 수영복을 파는 상점을 찾지 못했을지도 몰라서 내가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보았소. 당신의 눈동자에는 초록색이 어울릴 것 같소, 트레이스."

조심스럽게 티슈를 들춰 보니 투피스 수영복이 놓여 있었다. 그건 비키니 수영복보다는 훨씬 점잖은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태껏 투피스 수영복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트레이스는 캐시에 대해서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수영장에서 그와 마주치기 싫어하는 그녀의 심리를 알아차리고 수영복이 없다는 변명을 할까 봐 그걸 보내왔을 것이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캐시? 당신에게 5분의 여유를 주겠소. 그때까지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내가 들어가서 당신을 데리고 나오겠소. 문을 잠가도 소용없을 거요. 당신이 입고 있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망치는 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난 서슴지 않고 당신을 그대로 물속에 던져 버리겠소?"

트레이스의 위협에 캐시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3분 후쯤에 그녀는 새로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가운을 걸친 다음 맨발로 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 신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좋은데..."

깊으면서도 빈정대는 듯한 그의 음성에 캐시는 깜짝 놀랐다.

신부? 그녀가 몸을 홱 돌리자 트레이스는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풀의 반대편으로 헤엄쳐 가고 있었다. 중간쯤 가다가 그는 수영을 멈추고 머리를 흔들었다.

"어서 들어와요. 물이 아주 시원해요."

그는 먼 곳에 있었다만 캐시는 가운을 벗는 동안 그의 존재를 의식했다."나도 수영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난 별로 잘하지 못해요."

"난 보통 아침 일찍 수영을 하고, 잠들기 전에 또 수영을 해요. 이제 우리가 결혼을 했으니까 함께 수영을 하기로 합시다."

그의 말에 캐시는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다. 그의 음성은 캐시가 도저히 거절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캐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들끼리만 있으면 다정한 부분인 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무척 차가운 거라 예상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수영장의 물은 그녀가 카멜에서 수영을 했던 차가운 태평양의 물과는 전혀 달랐다.

"여긴 정말 천국이군요!" 그녀는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반대편으로 수영을 하는 동안 트레이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이 캐시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녀를 뒤로 뒤집어 버렸다.

"트레이스!" 그녀는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을 물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오.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서 발 운동을 해봐요. 지금 당신은 저스틴이 아팠을 때보다 몸이 굳어 있어요."

그제 서야 캐시는 용기를 내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피부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시선이 반쯤 드러난 그녀의 육체를 훑어보는 동안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몸을 움직이면 팔이 그의 털이 난 가슴을 스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남성다운 그의 육체를 의식해야 할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이 캐시를 자극하고 있었다.

트레이스는 캐시의 삶을 놀랄 만큼 생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부터 롤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만약에 롤프를 이런 식으로 그리워했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결혼을 해버렸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욕망과 떨림을 눈치 챌까 두려워 그녀는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그가 이겼다. 그는 이미 수영장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녀를 응시했다.

"우리가 단둘이 있을 때 당신이 웃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 알고 있소? 그 미소가 마음에 들어요."

캐시는 당황해서 목이 잠길 때까지 물밑으로 몸을 낮췄다.

"당신도 보다시피 난 당신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의 결혼생활이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닐 거요. 캐시, 내가 바라는 건 우리가 서로의 삶을 함께 공유하는 거요. 우리가 안정된 상태라는 걸 알면 아이들도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거요. 우리가 침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요. 이게 지나친 부탁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나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소."

캐시는 신경질적으로 변하려고 했다. 그녀는 침착을 되찾기 위해 애쓰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쓸어 올렸다.

아이들의 행복에 관한 한 그가 대단히 진지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지금 가가 정상적인 결혼생활처럼 보일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하는 건 그의 어머니의 건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육체적인 매력에 현혹되지 않고 매일매일 그와의 우정을 지속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서로 친구처럼 지낸다면 아이들에게도 훨씬 좋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트레이스는 좀 편안해진 표정이다. "당신도 같은 생각이라니 반갑소. 2주일 후에 가족들이 유타 주에 있는 스노보드로 스키 여행을 떠나요. 이건 매년 열리는 행사요. 당신도 여행 준지를 해야 할 거요."

그녀는 다시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내티가 아이들을 돌볼 거요."

"알겠어요. 그런데 며칠 동안 있게 되나요?"

"일주일 ."

트레이스와 일주일을 함께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와 단둘이 같은 방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캐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스노버드는 지옥이 아니오." 트레이스는 거친 어조로 말했다. 그의 표정엔 다시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

"매일 집에다 전화를 해서 아이들의 안부를 확인하면 돼요.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우린 몇 시간 내로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거요."

그는 캐시가 아이들 때문에 걱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리 알려 둘게 있어요. 안 여태껏 스키를 타본 게 딱 두 번뿐이에요. 경사지에서 나 때문에 당신이 곤란할 거예요. 난 아이들과 집에 있을 테니까 당신만 가는 게 어때요? 사실 내티도 휴가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

"나 혼자 가야 한다면 여행을 취소하겠소." 그는 화난 어조로 말했다.

그는 갑자기 빠른 속도로 수영장의 반대편으로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채 부르기도 전에 물에서 나가 버렸다.

"기다려요!" 캐시는 소리치며 그를 쫓았다.

이번에는 그가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가진 못했다. 그녀는 그가 자기 방으로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트레이스."캐시는 수영장 가장자리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난 당신을 편하게 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나도 수영만큼이나 스키를 좋아해요."

그는 자기 몸을 타월로 말리면서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스키를 얼마나 잘 타든 그런 건 조금도 관심이 없소! 당신이 스키를 아예 못 탄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소. 하루 종일 호텔에 누워서 텔레비전만 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아무래도 지난 5년 동안 텔레비전만 본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어머님과 수잔, 그리고 테드의 죽음에다가 파혼을 하고, 제이슨을 돌보는 동안 당신의 삶은 순탄치가 않았던 것 같소. 더구나 당신은 생활비까지 벌어야 했소. 난 당신이 일과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편하게 쉬면서 기분 전환을 할 기회를 주고 싶었소. 그런데 당신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소."

순간 캐시는 다리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를 알면 알수록 캐시는 그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새로운 아픔이 그녀의 온몸에 퍼져 갔다. 정말이지 그를 좋아하게 되는 건 원치 않는다. 최근 들어 캐시는 그와 사랑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녀의 초록색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미안해요. 아이들을 그렇게 멀리 떠나 있는 것도 불안했고, 하편으로는 당신이 날 데려간 걸 후회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뿐이에요."

약간은 화가 풀린 표정으로 트레이스는 캐시에게 가운을 내밀었다. 그녀는 재빨리 수영장에서 나와 가운을 걸쳤다.

"당신은 독립심이 대단한 여자인 것 같소."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당신 옆에서 누군가 당신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줘야 해요."

그는 캐시의 긴장된 어깨와 목의 근육을 풀어 주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그녀의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캐시는 자신의 반응이 두려웠다.

"트레이스, 당신은 와 제이슨을 망치고 있어요. 하지만 난 당신이 일을 못하게 되는 건 원치 않아요. 나도 당신에게 뭔가 보답할 게 있으면 좋겠어요."

잠시 그의 손길이 멈췄다. "당신이 내게 해줄 게 있소." 그는 이게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캐시는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꼈다. 캐시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까운 의자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거의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에서 그의 모습은 윤곽만 드러날 뿐이었다.

"그럼, 무엇인지 말해 봐요." 그녀는 재촉했다.

그는 목에 감고 있던 타월의 양쪽 끝을 움켜쥔 채 그대로 서 있다.

"당신은 수영이나 스키에서는 전문가가 아닐지 모르겠소. 하지만 바늘과 실로 하는 재주만큼은 당신을 따를 사람이 없을 거요. 그날 아침 제이슨과 당신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난 당신의 재주와 창조력에 감명을 받았소."

트레이스에게서 받는 칭찬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 정도의 손재주를 갖고 있는 여자들은 많아요."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든 걸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오. 당신이 들으면 화를 낼지 모르지만 그 날 난 당신의 아파트에 있는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소. 내가 저스틴을 위해서 사다준 물건 중엔 그것들처럼 그렇게 근사하고 독창적인 건 없었소. 캐시, 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에겐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도 모르고 피닉스로 이사 오라고 고집을 피웠던 내가 경솔했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고 다시 이어갔다. "정직하게 말해 봐요. 당신은 그 작품들을 사랑으로 만든 거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캐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걸로 돈을 벌기 훨씬 전부터 나는 뭔가를 창조해 내는 걸 좋아했죠.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아마 난 재봉틀에 엎드린 채 죽게 될지도 몰라요."

그는 껄걸 웃었다. "당신과 레나는 비슷한 사람들인 것 같소."

" 누나와 당신은 둘 다 예술가요.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엘리트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오."

캐시는 항의했다. "하찮은 내 솜씨를 누나의 재능과 비교하지 말아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천만에! 당신은 아이들의 세계를 가장 즐겁고 신비하게 만들어 주고 있어요. 레나는 우리들이 에어컨이 설치된 방을 떠나지 않고도 아름다운 사막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소."

"그건 정말 특별한 재능이에요."

"아무튼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캐시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했다.

"우린 주거용과 상업용으로 사용되는 여러 가지 부동산을 임대하고 있소. 그런데 크로스로드 광장에 스튜디오가 비어 있어요. 그곳은 피닉스에게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오. 그렇게 큰 곳은 아니지만 그곳엔 분리된 사무실이 네 군데나 있고. 별장 같은 기분을 주는 곳 말이오. 당신의 수공예품을 전시하기에는 아주 적당해요. 당신에겐 전시 공간이 필요할 것 같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곳이에요. 마치 내 꿈을 실현시켜 주는 공간 같아요. 하지만 난 임대료 낼 능력이 없고..."

"내 말을 끝까지 듣고 대답해요! 당신은 크리스마스 판매액에서 세금을 제외하고 얼마나 저축해 두었소?"

" 8천 달러 정도예요."

"그 돈이면 6개월 동안 그곳을 채울 만한 제품을 생산해 낼 수가 없어요. 그리고 상품에 낼 수가 없어요. 그리고 상품에 재투자할 돈도 없고..."

"캐시, 제발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요. 우선 자리에 앉아요. 그렇게 서성거리다가 내 테라스가 모두 닳아 보리겠소."

"미안해요."

하지만 캐시는 너무나 초조해서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수영장 가장자리로 다가가 앉아서 물속에 발을 담근 채 천천히 물장구를 쳤다.

트레이스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 캐시는 그의 오른발을 보았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발을 만져 보았다."당신의 발가락에는 물갈퀴가 있군요. 제이슨과 똑같아요!" 그녀의 음성이 커다랗게 울렸다. 캐시는 자신의 음성에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엘링스워스 가계 쪽에서 내려오는 유전이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의 발은 양쪽 다...이런 고통을 겪고 있소."

"나라면 그걸 고통이라고 표현하지 않겠어요. 내가 처음 제이슨의 발을 보았을 때 난 그게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물갈퀴가 있는 발을 가진 조상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수잔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의 그 미운 오리새끼는 내 자식이라는 게 밝혀진 셈이군."

그의 말에 두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슨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믿게 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인가요?"

"아니요, 난 그 애의 체격과 피부색을 처음 보는 순간 내 아들이라는 걸 확신했어요. 엘링스워스의 물갈퀴 발가락은 최후의 증거가 된 셈이요."

"그래서 나 항상 그 애가 램지라고 생각했어요."

"틀림없이 어린 램지도 어딘가에 있을 거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당신을 어머니로 가졌다는 거요. 당신은 아주 자연스러워요. 당신은 그걸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이 지적한 대로 난 저스틴을 망치고 있잖아요?"

"그건 사실이오. 하지만 나도 저스틴을 망치고 있소." 그의 정직한 발언에 캐시는 깜짝 놀란다. "내가 당신을 성급하게 판단했던 것 같소. 사실은 나도 똑같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 치유도리 거요. 사실 우리는 그동안 잃었던 시간들을 보충하려고 아이들에게 조급하게 굴었던 것 같소. , 그럼 다시 당신의 수공예에 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아무래도 일을 갖게 되면 당신의 인생은 조화를 이룰 수가 있을 거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기로 동의한 이후로 당신의 일을 잃어 버렸잖소."

그의 따뜻한 배려에 그녀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동안 캐시는 자신의 새로운 책임감과 트레이스에게 끌리는 감정 때문에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면 난 가게를 열만큼 돈을 벌 수가 있을 지도 모라요."

"하지만 레나에겐 너무 늦어요."

다시 레나가 화제에 올랐다.

" 누나에겐 곁에서 격려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누나 작품에 대한 믿음을 갖고 누나가 좀 더 활발하게 활동을 하도록 부추겨 줄 사람 말이오. 바로 당신이 적임자인 것 같소, 당신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 누나도 자극을 받게 될 거요. 그리고 당신이 일에서 기쁨을 얻게 되면 그것도 좋은 자극이 될거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그럼 레나와 함께 사업을 하라는 얘긴가요? 누나의 그림과 내 공예품을 함께 전시하자는 거예요?"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믹스 앤드 매치사우스웨스트>라고 하면 어때요? 레나의 미술과 내 수공품을 조화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은 남서부의 주제를 표현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선인장이 있는 로고를 만들어도 좋겠어요. 어쩌면 태양이나 이리 같은 걸 넣어도 좋을 거예요. 그리고 .... , 그건 정말 멋진 생각인 것 같아요!"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진심이오? 누나와 함께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게 필요하다면 괜찮겠소? 물론 당신의 가게도 열게 될 거요. 필요하면 나머지 1년 동안의 집세는 내가 지불하겠소. 하지만 그건 우리끼리의 비밀이오. 그렇게 되면 그 다음 해에는 사업적으로도 많은 이익을 얻게 될 거요."그는 다시 말을 멈췄다. "캐시, 내 제안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캐시는 그가 전적으로 레나를 위해서 화랑에 과한 아이디어를 꺼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차 그에겐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의도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벽에 걸려 있던 수채화를 기억하세요? 해가 뜰 무렵에 바위 옆에 서 있던 작은 호피족 소녀가 있는 그림말이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나 스케치북을 꺼내 그 자랑스런 아이를 닮은 인형을 디자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사실 그 집에서 살아가면서 난 애리조나 사막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난 벌써 내 방에 깔아 둘 깔개를 디자인 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당신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선인장꽃들이 그려진 수채화를 그 곁에 둔다면 아주 완벽할 거예요. 트레이스, 개막전에서 난 레나의 수채화와 같은 남서부의 모습을 주제로 삼고 싶어요!"

그리고 캐시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트레이스는 머리를 낮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캐시, 당신은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진 여자요. 아마 당신이 아이디어면에서는 누나를 능가할 거요."

그의 입술이 닿는 동안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의 접촉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어쩌면 다음 주에 레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몇가지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레나를 집으로 초대해요. 수채화 옆에 놓인 작품을 본다면 무척 좋아할 거예요."

"물론 그럴 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나에게 어떤 약속을 받아낼 수는 없을 거요."그의 눈동자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에 누나는 미술과 교수와 사랑에 빠졌었소. 그들은 깊은 관계에 빠져 있었지. 그런데 누나가 아파트에 갔을 때 그가 다른 학생과 침실에 있는 장면을 목격한 거요. 그 후로 그들의 관계는 끝아 버렸소."

캐시는 그 진부한 시나리오에 진저리를 쳤다.

"그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누나는 충분히 절망했소. 하지만 그 남자는 누나를 배신하는 데 만 족하지 않고 누나의 작품을 공격하기 시작했소. 그의 모욕 때문에 누나는 자신감을 잃고 말았소. 그는 누나에게 2류 화가밖에 되지 못할 거라고 악담했었소."

"하지만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나의 작품을 얼마나 훌륭한지 잘 알 거예요! 그런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요?"

"12년 전의 일이오. 그 이후로 누나는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소."

"그렇다면 당신의 사무실과 집에 걸려 있는 작품이 모두 레나가 대학 시절에 그린 그림이란 말인가요? 대학 시절에 그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렸단 말이에요?"

"그렇소."

"레나의 교수는 아마 그녀의 소질을 미리 알았을 거예요. 그리고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걸 알고 참을 수가 없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레나의 그림이 그의 그림을 능가했을 거예요. 내가 피아노 이론을 공부했던 대학의 음악과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레나는 그 일 때문에 여태껏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군요. 정말 슬픈 일이에요."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남편인 알렌은 누나가 다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결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매형은 누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누나는 매형의 말을 듣지도 않아요."

"아마 그 상처가 너무 깊었던 가 봐요."

"그렇소. 그리고 누나는 가족들에게도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있어요. 캐시, 누나는 당신과 달라요. 누나는 절대로 당신처럼 제이슨 문제로 나와 싸우지 못할 여자요. 당신은 자신감에 넘쳐서 절대로지지 않고 살아갈 여자요. 당신은 현실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오. 필요하다면 당신은 혼자서도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오. 당신의 그런 자신감은 누나에게 영향을 미쳐서 누나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거요."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선을 다해 보겠어요. 그런데 당신만 괜찮다면 난 이제 잠자리에 들고 싶어요. 너무나 피곤해요. 잘 자요, 트레이스."

트레이스는 굿나이트 인사를 하고 그녀를 따라 테라스를 가로질러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트레이스는 그녀의 칭찬하느라 그런 말들을 했겠지만 캐시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녀와 그의 전처는 결국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들은 둘 다 연약하고 무기력한 여성형과는 반대의 유형이다. 남자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고, 남자의 사랑에 안주하는 나약한 여성들이 아닌 것이다.

사실 잔 다르크처럼 그렇게 용감한 여성들은 항상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존경을 받는 존재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6

크로스로드 광장에 있는 빈 가게를 방문해서 1년 계약에 사인한 것을 제외하면 그 다음 주 내내 트레이스와 단둘이 지낼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일이 밀려 있다고 했다. 그는 스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늦게 귀가했다.

캐시는 그가 일 때문에 늦어지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가 없으면 그녀는 아이들과 편안하게 놀기도 하고 자신의 일에도 전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트레이스는 계속 그녀의 의식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힘이 넘치는 육체는 그녀를 다른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었다. 트레이스는 귀가를 하면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아니면 거의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캐시는 늘 그를 의식했다.

5주 동안 그의 관심을 받으면서 함께 지내 왔다. 이제 그가 곁에 없는 생활은 전혀 흥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일에 빠져들면 시간이 지나는 것도 몰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이거나 일을 할 때도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그가 집에 돌아올 시간을 가늠한다.

레나는 주초에 점심 약속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다. 캐시는 약속을 금요일로 미뤄 두었다. 그동안 세 점의 그림에서 얻은 영감으로 몇 점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트레이스는 그녀가 원하던 그림을 사무실에서 갖다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계단 벽에 있는 그림 두 점을 이용했다.

레나의 충격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캐시는 내티의 도움을 받아서 식당을 갤러리처럼 바꿔 놓았다. 그 효과는 캐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레나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캐시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레나는 캐시의 생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했다. 그리고 트레이스의 사무실까지 찾아가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몇 시간 후에 캐시가 레나를 다시 집으로 초대했을 때만해도 레나는 트레이스의 계획에 대해서 그저 웃어넘겼다. 하지만 자신의 수채화가 캐시의 작품과 나란히 놓여있는 걸 본 순간 레나는 웃음을 그쳤다. 그 작품들은 거실에 서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몰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마치 물 위를 걷고 있는 여자처럼 레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캐시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걸었다. 레나의 반응을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그림들은 레나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그린 그림들이다.

레나는 한동안 말없이 그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캐시가 피닉스에 온 다음에 이 작품들을 모두 만들었다는 건가요?"

"그래요.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끝난 상태는 아니에요."

"정말 멋진 그림이에요."

"형님의 그림이 내게 감흥을 불러일으켰어요. 난 그 호피족 소녀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벽에 걸린 여러 가지 인형과 벽걸이 같은 걸 보며 감탄할 그 애의 모습을 떠올렸어요. 형님의 그림은 모두가 내게 신선한 아이디어를 불러일으켜요. 그 새로운 영감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예요."

"트레이스는 캐시가 섬유로 뭘 만드는 데는 천재라고 말했어요."

"그의 사무실에 있는 그림을 보고서 나도 그랬어요. 누가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몰라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형님의 그림이 나를 자극시켰어요. 그래서 나의 숨겨진 영감을 불러일으켰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레나가 몸을 돌려서 캐시를 바라보았다."파티가 있던 날밤에 나에게 했던 말이 진심이었어요?"

캐시는 숨을 들이쉰 다음 대답했다. "그 대답은 이미 아시잖아요? 허락도 없이 형님의 그림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서 화가 나셨다면... ."

"화가 났다고요? ." 레나의 회색 눈동자가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내 생애에서 이처럼 기분 좋은 순간은 없었어요."

캐시는 비로소 안심이 되어 긴장을 풀었다."난 그동안 집에서 물건을 만들어서 팔기만 했어요. 처음에는 동화와 만화를 보고 착상을 해서 인형과 여러 가지 동물 인형들을 만들었죠. 생활비에 좀 보탬이 될까 해서 시작했는데 곧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어요. 난 개구리부터 왕자님까지 모두 만들었어요. 하지만 형님의 그림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내 작품의 주재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레나는 길게 꼬아 내린 머리칼을 아무 생각 없이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엄청난 수고를 한 건 분명한 나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 이유가 뭐죠?"

"트레이스를 만나기 전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내 작업실을 열려고 생각했었어요. 내 작품을 전시할 전시 공간도 만들 예정이었죠. 하지만 그가 내게 청혼을 하고 나서 모든 상황이 변해 버렸어요. 이제 생활도 좀 안정되었고.... 그래서 크로스로드 광장에 있는 공간을 임대했어요. 크리스마스 판매에서 번 돈을 모두 쏟아 부었죠."

"크로스로드 광장?" 레나가 꿈꾸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엔 아주 좋은 장소예요!"그녀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캐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트레이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캐시가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물론 집에는 있을 거예요. 아이들을 돌보는 일과 내 일을 병행하려고 해요. 내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작품을 전시하고 팔 공간을 갖지 못하면 아마 트레이스는 곧 내게 창고를 지어줘야 할지도 몰라요."

레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캐시 램지, 당신은 정말 놀라운 여자예요."

"그렇지 않아요. 난 내 의지보다는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에요."그녀는 캐시 램지라는 새로운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순간 레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재빨리 화제를 바꿔 버렸다.

캐시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오늘 형님을 우리 집에 초대한 건 뭔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한 달 후에 성대한 개막 전을 열려고 해요. 그래서 내가 이미 만든 작품을 전시해도 좋다는 형님의 승낙을 얻고 싶었어요. 사실 난 형님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물건들을 팔 권리는 없어요. 형님이 거절을 하셔도 난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선 형님의 의견을 듣고 싶었어요.... 혹시 거절하시면 난 다른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레나는 인형 하나를 집더니 그걸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눈물이 가득한 시선으로 캐시를 보았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내가 어떻게 그 부탁을 거절하겠어요? 거절하면 나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거예요."

캐시는 말없이 공예품들 사이에서 그림을 떼어 낸 다음 그걸 다른 쪽 벽에 기대어 놓았다.

레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시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웃음을 참았다. "형님의 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내 작품들을 보세요. 내가 만든 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괜찮긴 하지만 전시해 놓은 상태는 너무나 평범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솔직히 이야기 해 주세요."

한 동안 침묵을 지키던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는 마음을 졸이면서 대담하게 물었다. "개막식을 할때 여기 전시해 둔 것처럼 형님의 그림도 함께 전시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사실은 형님의 다른 10점의 그림을 토대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공예품으로 만들기 위해 스케치를 해둔 게 있어요.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면 난 그 개막식에 전시할 작품을 모두 만들 수가 있어요. 하지만 형님의 작품이 없으면 난 똑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어요."

레나는 분명 망설이고 있다.

캐시는 재빨리 그림들을 공예품 사이로 다시 갖다 놓았다. "어때요? 내 말이 맞죠?"

잠시 그 작품을 바라보던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간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든 작품들이 완벽하게 어울리는군요."

"그럼 이 작품들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는 거죠?"

"거절을 하면 그건 잔인한 일이 될 것 같아요."

"고마워요 형님." 캐시는 다시 한번 레나를 포옹했다. "사실 집에서 물건을 파는 것과 가게에 전시하는 것과 가게에 전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예요. 내가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하고 약간은 불안했었어요. 하지만 형님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면 개막전은 틀림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캐시는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런데 형님이 서명을 하셔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손님들은 이 그림을 내가 그린 줄 알 테니까요."

레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호피족 소녀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 그림을 전시하려면 난 소녀의 드레스를 좀 더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그녀는 일어서서 캐시를 바라보았다. "먼저 트레이스에게 사용할 그림을 사무실에다 갖다 달라고 부탁해요. 다음 주에 화방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산 다음 이곳에 와서 모두 사인해 줄게요."

"집에는 재료가 없으세요?"마음속은 기쁨으로 타오르고 있었지만 캐시는 애써 무심한 척 물었다.

"없어요." 레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의 그림 작업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모두 버렸어요. 몇 년 동안 캔버스에 붓을 대보지도 못했어요. 내가 이 그림들을 그릴 때만 해도 이 그림을 다른 사람이 봐줄 거라는 상상은 꿈에도 못했어요. 난 이 그림들을 버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트레이스가 갖고 싶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림을 받는 대가로 돈을 좀 주겠다고 제의했죠. 하지만 난 이 쓰레기 같은 그림을 주고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저었다. "내 동생은 ..."

"그이는 형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레나는 캐시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제 약속을 했으니까 캐시가 사용하려는 그림을 모두 다시 살펴봐야겠어요. 마무리가 안 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레나, 정말 뭐라고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난 형님의 이름을 <믹스 앤드 매치 사우스웨스트>라고 붙였거든요. 형님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난 어디서 영감을 얻어야 할지 정말 막막했어요. 트레이스는 내 작품도 훌륭하다고 믿고 있어요. ... 난 그에게 자랑스런 아내가 되고 싶어요."

"아직 눈치 채지를 못했나요? 벌써 그 애는 캐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형제들 중에서 난 트레이스와 가장 가까운 사이죠. 알렌과 내가 그 파티에 참석했을 때 트레이스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어요. 그 애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캐시뿐이에요."

"그건 아마 그이가 제이슨에게 빠져 있기 때문일 거예요."캐시는 떨리는 음성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레나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캐시를 바라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트레이스가 캐시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았어요. 그리고 저녁 내내 캐시 곁에만 붙어 있었어요. 그 애가 여자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걸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글로리아에게도 그러지 않았단 말인가요?"

"글로리아라고 다를 게 없었죠."

캐시는 트레이스의 전처에 대해서 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트레이스가 나에게 신경을 쓰는 건 전적으로 어머님 때문이에요."

"내 동생이 캐시를 대하는 게 엄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레나가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어머님의 심장 때문이에요. 그이는 어머님이 우리의 결혼을 사랑의 결합으로 믿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거예요."

"그럼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는 건가요?"

캐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트레이스는 내가 그를 아들과 연결시켜 준 것에 대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해요. 그래서 그는 내게 청혼을 했고, 난 아이들과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청혼을 받아들인 거예요. 난 아이들을 잃고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레나, 트레이스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는 편의상 결혼을 한 거예요. 난 계속 그게 아닌 척하고 지낼 수가 없었어요. 최소한 형님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어요. 형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기 때문에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담 캐시는 내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레나의 솔직한 발언에 캐시는 경계심을 풀었다. 그녀는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트레이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한 말이에요.사실 그가 내건 결혼 조건 중에는 우리가 둘 다 상대상을 점잖게 대해야 한다는 것도 있었어요."

"내 동생이 그렇게 말했다는 건가요?"

"레나, 우리는 한 번도 같이 잔 적이 없어요. 그는 결혼 하던 날 한번 내게 키스해 줬어요."그 짜릿한 키스를 떠올리면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레나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불쑥 내뱉었다. "이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요. 아마 아이들이 깼나 봐요. 올라가서 애들을 데리고 내려오겠어요."

그리고 캐시는 재빨리 거실에서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레나와 고통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방해할 아기들이 차라리 반가웠다.

캐시가 아기들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있을 때 내티가 아기 방의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도와줄까요?"

"괜찮아요. 제이슨이 좀 창백한 것 같아요. 하지만 별일 아닐 거예요. 오늘은 트레이스가 늦게 귀가하니까 나와 아기들은 간단하게 챙겨 먹겠어요. 아줌마와 마이크는 이제 그만 쉬세요."

"캐시, 고마워요. 당신과 같은 집에서 사는 게 정말 기뻐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내티, 어서 가서 푹 쉬세요."

내티가 나가자 캐시는 아이들의 옷을 강아입혀서 데리고 내려와 고모를 만나게 했다. 다행스럽게 레나가 더 이상 아까 하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캐시가 저스틴을 격려해서 걸음마를 하게 만드는 동안 레나는 제이슨과 즐겁게 놀아 주었다.

오후 동안 캐시와 레나는 주로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레나는 집에 가서 식사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캐시는 그녀를 보내기가 싫었다. 하지만 점점 제이슨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는 오랫동안 낮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보채고 있다.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어 보니 열이 있는지 이마가 뜨거웠다.

캐시는 저스틴을 놀이장에 내려놓고 제이슨을 팔에 안은 채 레나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트레이스가 사무실에서 그림을 가져오는 대로 형님에게 전화를 하겠어요."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 부탁할 게 있어요. 이 일을 다른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요."

"개막식에 형님의 그림을 전시한다는 거 말인가요?"

", 난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싶어요. 캐시만 상관없다면 그렇게 해줘요."

"그렇게 할게요. 트레이스에게도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겠어요."

"좋아. 붓을 놓은 지가 몇 년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쓸데없는 추측을 하는 게 싫어서 그래요."

캐시는 레나의 팔을 잡았다. "이해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 꼭 지킬게요."

"고마워요."

레나는 제이슨과 캐시의 뺨에 키스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스노버드로 여행하는 동안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을 거예요."

"레나, 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레나의 기대 이상의 선심에 캐시는 무척 기뻤다.

캐시는 시누이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트레이스와 캐시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묻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레나가 떠나자 캐시는 주방으로 가서 제이슨에게 우유 한 병을 먹였다. 그리고 아이의 열을 내리게 하기 위해 스폰지로 몸을 닦아 준 다음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아기를 보살피는 동안에도 그녀의 마음은 레나에게 가 있었다. 비록 수채화를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나가 당장 그림을 시작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트레이스의 생각이 옳았다. 레나는 아직도 실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감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더욱 나쁜 건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조차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나는 캐시의 요구를 거부하진 않았다. 그건 레나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캐시는 빨리 트레이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8시 경이 되어서야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에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캐시는 테라스로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일초라도 빨리 레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을 무척 기다렸어요.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레나와 나는..."

캐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울려대는 전화벨이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고 말았다. 트레이스는 전화를 받았다.

캐시는 작은 테이블 옆에 앉아서 그의 검은 머리칼과 웃고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있는 걸로 미루어 아마 은행업무인 것 같다. 그는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은 다음 전화를 끓었다.

캐시는 그에게 그 소식을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어두운 표정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단 한 번의 전화로 그의 표정은 너무도 차갑게 굳어 버렸다.

트레이스는 머리를 돌려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트레이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놀라서 물었다.

"브루셀에 있는 롤프 팀슨 씨로부터 당신에게 전보가 왔음을 알리는 웨스턴 유니온 사의 전화였소."

그가 메모지를 찢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에게서 풍기는 적대감이 손에 들고 있는 전보의 내용보다 캐시를 더욱 당혹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캐시." 전보의 내용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당신의 편지를 받고 우린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어. 우린 평생 동안 사랑했고, 난 그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피닉스에 도착하는 대로 전화하겠어. 깊은 사랑을 보내며, 롤프."

이제 와서야 롤프는 그녀를 만나려 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롤프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수영장에서 트레이스가 그녀에게 보여 준 관심은 그 믿음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어쩌면 수잔의 판단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캐시와 롤프는 한 번도 서로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모든 걸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서로 떨어져 있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들고 있던 메모지에서 자신의 마음을 강렬하게 휘어잡고 있는 남자에게로 옮겨갔다. , 트레이스,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그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소." 그의 말투는 거칠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와 결혼한 상태이기 때문에 상황이 아주 고약하게 되어 버렸소."

만약 트레이스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를 모르고 있다면 캐시는 그가 화를 내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롤프가 뭐라고 말하든 난 절대로 당신과 아이들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캐시, 날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과 롤프 사이의 유대감을 모르고 있을 것 같소? 두 사람이 나누었던 깊은 과계를 내가 모를 거리고 생각해요?"

"당신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런 관계는 아니었어요." 캐시는 낮게 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제를 했으면서 깊은 과계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요? 그렇다면 난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소."

"하지만 사실이에요. 어머니는 매우 보수적인 분이셨어요. 그래서 늘 수잔과 나에게 결혼 때까지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교육을 시키셨죠. 어머니는 우리들로 키우려 하셨어요. ㅡ런 의미에서 일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로 키우려 하셨어요. 그런 의미에서 언니와 난 천연기념물이었어요. 어머니는 우리가 남편에게 모든 걸 배우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서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는 마치 외국어를 지껄이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과 롤프 사이에 뭐가 잘못되었던 거요?"

캐시는 자신이 롤프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와 결혼하는 걸 망설였다는 것도 ... 하지만 그녀는 트레이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트레이스와 사랑에 빠져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약혼한 상태였어요. 그가 결혼 날짜를 잡자고 재촉했지만 나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난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테드가 죽은 다음 그는 다시 결혼을 하자고 졸랐어요. 하지만 난 수잔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결혼 같은 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비록 그를 사랑하긴 했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그가 파혼을 선언했을 때도 , 나는 그를 비난할 수 없었어요."

"그때 그는 유럽으로 떠난 거요?"

"그래요. 트레이스, 하지만 그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 레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녀는 ..."

"캐시, 지금은 안 돼요." 그가 거칠게 말했다. "난 지금 몹시 힘든 합병 작업을 고 있는 중이오. 오늘밤은 서재에서 보내야 할 것 같소."

트레이스는 그의 사무실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한 번도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캐시는 자신의 과거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최대한 성의있게 알려 주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함부로 취급하고 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한 번에 두 계단씩 성큼 내려갔다.

캐시는 그에게 뭐든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사라지자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마음ㅇ르 가라앉힌 다음 계단을 올라갔다. 제이슨이 우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녀는 아기 방으로 들어갔다.

제이슨을 안아 올렸을 때 그녀는 비로소 아기가 왜 그렇게 보채는가를 알아차렸다. 아이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가슴과 목을 덮어 버린 발진을 본 순간 그녀는 테라스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 버렸다.

그녀는 빨리 아이의 옷을 벗기고 욕실로 데려갔다. 빨리 열을 내리게 해주는 게 급했다. 욕조에 찬물을 채우고 아이를 욕조 안에 넣었다. 아기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어 저스틴이 악을 쓰며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캐시, 무슨 일이오? ."트레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캐시는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이슨이 열이 심해요. 몸에 발진이 일어났어요. 저쪽 욕실에 아기용 해열제가 있을 거예요. 그걸 좀 갖다. 주시겠어요?"

"금방 돌아오겠소. 그리고 캐시,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스틴도 예전에 똑같은 증상을 보인 적이 있었어요. 내가 보기엔 홍진인 것 같소. 일종의 바이러스인데 아이들에게 보기엔 홍진인 것 같소, 일종의 바이러스인데 아이들에게는 몹시 괴롭겠지만 그렇게 심각한 증상은 아니오."

캐시는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을 진정시키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아이는 찬물에 들어가 있는 걸 싫어해서 마구 발버둥을 쳤다.

곧 트레이스가 약병을 갖고 와서 그녀의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약을 꺼냈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말했다. "당신은 아이의 멈을 계속 문지르고 있어요. 내가 이 약을 아이의 입에 넣겠소. 30분만 있으면 아이의 열이 내릴 거요. 그럼 기분도 좀 나이질 거요."

캐시는 불안감으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트레이스가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트레이스는 드디어 아이에게 약을 먹였다.

욕조에 몸을 굽힌 채 제이슨의 욕구에 응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그에게 화나고 섭섭했던 마음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트레이스는 그녀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캐시는 갑자기 두려웠다. 어쩌면 트레이스가 이번 일로 그녀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때문이다.

"캐시, 그렇게 불안해할 거 없어요." 트레이스가 말했다. "제이슨은 곧 좋아질 거요, 그리고 이틀만 지나면 오늘밤에 일은 모두 잊어버리게 될 거요. 벌써 제이슨은 좋아진 것 같지 않소?"

캐시는 제이슨의 이마와 뺨에 손을 대보았다. 트레이스의 말이 옳았다. 제이슨의 열은 어느새 많이 가셔 있었다.

"이제 좋아질 거야. 엄마나 아빠가 여기 있으니까..... 불쌍한 것! 몹시 춥겠구나!"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요." 트레이스가 중얼거리면서 베이슨의 붉은 목과 가슴에 계속 물을 끼얹었다.

"엄마, 아빠." 제이슨이 또렷하게 그들을 불렀다.

트레이스가 활짝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시는 목이 메어 왔다. 그녀는 손등으로 아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 아가야, 조금만 견디면 아빠가 널 욕조에서 꺼내 주실 거야. 금방 끝날 거야."

제이슨은 다시 울면서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영원처럼 긴 시간이 흐른 다음 아이의 아빠가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소."

트레이스가 아이를 물에서 꺼내자마자 캐시는 타월로 아이를 감싸 안았다.

트레이스는 제이슨을 꼭 끌어안은 채 욕실을 나왔다. 캐시는 그가 아이를 아기 방으로 데려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안방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서 그녀에게 물었다. "캐시, 아기 침대에 주스 병이 있던데 그걸 내게 갖다 주겠소? 내 침대에서 재우다가 주스를 줄 수 있도록 말이오."

캐시는 황급히 아기 방으로 가서 제이슨의 주스 병과 기저귀, 그리고 가벼운 면 이불을 챙겨들었다. 저스틴이 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서 목놓아 울고 있었다.

"저스틴, 잠깐만 기다려. 이걸 갖고 놀아." 그녀는 아이 손에 돼지 인형을 쥐어 주었다." 엄마는 금방 돌아올 거야."

내티와 서랍장 안의 옷을 꺼내기 위해 딱 한번 트레이스의 침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집에 있을 때는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트레이스는 주스 병을 받아서 제이슨에게 내밀었다.

그동안 캐시는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젖은 타월을 떼어낸 다음 누비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의 표정은 그들이 진짜 남편과 아내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 난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속삭였다. "필요하면 날 부르세요."

"지금은 괜찮소."트레이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아까는 내가 너무나 무례하게 굴었던 것 같소. 레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요. 누나와 이야기가 잘되었소?"

"그래요, 레나는 자기 그림을 개막전에 전시해도 좋다고 했어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출발이 아주 좋은 것 같소. 우리가 스노버드에 가게 되면 당신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겠소. 아이들 걱정 같은 건 모두 잊은 채 일주일 동안 전적으로 당신에게만 관심을 쏟도록 하겠소."

정맥을 타고 흥분과 기쁨이 퍼졌다. 결혼 이후로 처음으로 두 사람은 단둘이서만 있게 되는 셈이다. 트레이스는 진심으로 그걸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어조였다.

물론 트레이스는 어디까지나 자기 누나에게 쏟아 준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캐시는 그가 자신을 바람직한 여자로서 인식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자신의 감정을 너무 많이 나타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캐시는 재빨리 그 방을 나왔다.

트레이스의 손길이 닿은 곳이 화끈거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칭얼대고 있는 저스틴을 안고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간식을 주었다.

아기는 즉시 행복한 표정이 되어 크래커와 따뜻한 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쯤 후에 아기는 잠이 들었다.

아기를 재운 다음 캐시는 곧장 트레이스의 방으로 가서 발끝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제이슨이 아빠의 가슴에 안겨 있는 걸 보고서 그녀의 눈동자는 젖어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그녀는 제이슨의 이마에 손을 대어 보았다. 트레이스의 말대로 열은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캐시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이 이마에 흘러내려와 있는 남편의 모습은 소년처럼 보였다. 그의 검은 눈썹은 청동빛 뺨 위에 내려앉아 있다. 그녀는 아직도 아들을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난 이 남자를 사랑해. 난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트레이스를 사랑하고 있어.

캐시는 자신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재빨리 그 방에서 빠져나와 침실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은밀하게 토해낼 수가 있었다.

트레이스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그녀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그녀는 절실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켜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녀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존경이나 감사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이다.

잠이 오지 않아 캐시는 잠옷과 가운을 걸친 다음 작업실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녀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열심히 작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서 옷감을 잘랐다. 그리고 4시간 쯤 후에는 1.8m정도의 검은 머리칼과 냉담한 파란 눈동자를 가진 악어 인형이 짓궂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응시 하고 있었다. 그 악어의 꼬리에다 그녀는 <아빠> 라는 단어를 수놓았다.

구석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악어를 숨겨 놓기 위해서 하얀 캔버스에 그걸 덮고 문을 닫았다.

트레이스가 그걸 본다면 그는 진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는 캐시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캐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레이스는 그녀를 동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보내는 동정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7

"이렇게 많은 눈은 본 적이 없어요!"공항 리무진이 램지 일가를 스노버드에 있는 호텔 앞에 데리고 왔을 때 캐시는 탄성을 질러댔다.

그녀는 로만과 트레이스 사이에 앉아 있었다. 트레이스는 계속 캐시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 앞에 보이기 위한 연극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캐시의 기쁨은 줄어들었다.

"사실 올해엔 유타의 겨울이 따뜻한 편이오."트레이스가 그녀의 귀에다 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벽이 온통 얼음이었던 적도 몇 번 있었소. 지금 유타 주는 가뭄 주기에 있어요."

캐시는 높게 솟은 하얀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의 존재에 애써 담담해지려고 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벌써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이 고도 때문인지 아니면 그와 함께 침실을 쓰게 된다는 사실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눈속을 달려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군!" 리무진이 멈추자 제임스가 소리쳤다.

"! 멋져요!" 노만의 아내인 제인과 마주앉아 있던 그의 아내 도로시가 소리쳤다. 레나와 알렌은 앞자리에 운전수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이 각자 가방을 찾고 스키 장비를 챙기는 동안 격의 없는 농담들을 주고받았다.

로비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난로에서 솟구치는 불꽃이 새로 도착한 손님들을 환영해 주고 있다. 트레이스가 접수계에 있는 동안 캐시는 그것을 훑어보았다. 캐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새로 산 형광색상의 초록색 스키복과 하얀색과 초록, 파랑으로 된 파카를 입었기 때문이다.

제이슨이 홍진에서 회복된 후에 트레이스는 스키와 스키부츠, 그리고 그 옷을 구입했다. 그리고 모두 포장을 풀어 보게 했다.

티슈 위에 올려놓은 카드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우리의 아들들에게 멋지고 다정한 어머니가 되어 준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오. 이 집을 천국처럼 만들어서 퇴근한 후에는 항상 집으로 달려오게 만들어 준 당신에게 이 선물이 작은 감사의 뜻으로 전해지기를 빌겠소. 당신은 우리의 계약 이상의 일을 해주고 있어요. 우리가 스노버드에 갔을 때 내 감사의 뜻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겠소. 우리는 일주일 내내 우리끼리만 있게 될 거요. 카산드라 램지에게는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요. 트레이스>

그 진지한 감사의 표현은 그녀를 감동시켰다. 하지만 그 메모는 그녀가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걸 빼놓고 있었다. 어쩌면 트레이스는 절대로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는 절망에 빠지게 했다.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했다. 하지만 계속 그를 속일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녀는 레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방을 빠져나왔다.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그녀는 트레이스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의식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도 레나는 집에 있었다. 그래서 캐시는 짐짓 열을 올리면서 스키 여행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트레이스가 방을 나간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이 경직된 반응을 떠올리며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기가 그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진지하게 하지 못한 모양이아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가 퇴근하자마자 전화를 거는 그녀가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다음 주 내내 캐시는 그의 메모에 적힌 대로 집안을 천국으로 꾸미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해야 했다. 바느질을 하는 틈틈이 그녀는 요리를 해야 했고 근사한 식탁을 꾸며 놓아야 했다.

그녀가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는 점점 더 정중하게 격식을 차렸다. 그래서 캐시는 점점 그 여행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면 아이들이 완충 역활을 해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어렵기만 한 남편과 6일 동안을 단둘이서 지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 휴가 동안을 견뎌내야 할지 난감했다. 아니, 그 휴가에서 살아남기나 할지 걱정이다.

", 어디서 왔어요?" 친근한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캐시가 뒤돌아보았을 때, 거기엔 스키 애호가인 듯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운동선수 같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햇볕에 탈색된 갈색 머리에다 피부는 검게 그은 상태였다. 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 남자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만만해 했다.

"우린 팀부크투에서 왔어요."레나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이 자신만만한 미소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는 계속 감탄하는 시선으로 캐시를 바라보았다. "혹시 스키 기술을 좀 더 배우고 싶다면 내가 적임자예요. 내 이름은 행크예요. 매일 아침 리프트 옆에서 날 만날 수가 있을 겁니다. 난 단체 및 개인 지도를 하고 있으니까요."

남자의 저돌성에 캐시는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레나처럼 그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캐시는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보를 줘서 고마워요. 지도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으면 당신을 찾아갈게요."

"방이 준비되었소."

트레이스가 그의 누나만큼이나 언짢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른 남자가 끼어드는 게 그 역시 혐오스러운 것 같았다. 첫날 그를 만났던 때를 제외하고는 그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다.

순간 그녀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초록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트레이스, 이 사람은 행크에요. 호텔에 소속된 스키 강사예요. 행크, 이쪽은 내 남편인 트레이스와 시누이인 레나예요."

"안녕하세요?"

트레이스가 손을 내밀자 행크가 마지못해 악수를 했다.

"당신의 누나는 당신들이 팀부크투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내가 알기론 아프리카 지역에는 눈이 많지 않을 텐데요."

행크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꽤 오랫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맞아요." 드디어 트레이스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캐시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소?"

"물론이에요."

"그럼 갑시다."

다시 불편한 침묵이 흐르자 캐시는 행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을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의 인사에 행크는 활짝 웃었다. " 난 항상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게 재미있어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갑자기 트레이스는 그녀의 팔꿈치를 움켜쥔 채 그녀를 재촉했다. 그들은 레나 부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봐, 뭘 그렇게 심각해?" 알렌이 아내에게 물었다. "아이들 없이 6일 동안이나 즐길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군."

알렌은 레나의 차가운 코 끝에 키스했다. 그러자 레나는 웃기 시작했다. 아마 알렌은 아내를 심각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당신에게 워밍업이 필요할 것 같아."

캐시는 그들 부부처럼 편안하고 다정한 관계가 부러웠다. 4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지만 캐시는 엘리베이터에서 빨리 나올 수가 없었다. 그건 트레이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럼 저녁식사 때 만나요."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그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트레이스는 그녀를 그들이 쓸 방으로 안내했다. 눈 덮인 와사취 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다. 그들은 바로 그 산에서 스키를 타게 될 것이다. 오후의 햇빛이 새하얀 봉우리를 비치고 있다. 그 햇빛에 눈이 부셨다.

"여기 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오늘 아침에만 해도 난 아기 방 창문에서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럼 괜히 왔다는 거요?"그의 대꾸는 투명스러웠다.

캐시는 깜짝 놀라 몸을 홱 돌렸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캐시, 난 장님이 아니오. 오늘 아침에 당신이 아이들에게 붙어 있는 걸 봤소. 누가 보면 내가 당신을 억지로 끌어내서 일 년 동안 그 애들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요. 그럼 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나머지 짐들을 가지고 올 테니 그동안 집에 전화를 해요."

그의 말을 반박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는 방을 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에게 뭐라고 반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번 여행을 두려워하긴 했지만 그가 상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스노보드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곳은 고통스런 추억을 상기시켜 주는 곳이 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처음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났던 곳이므로.

그녀의 시선은 두 개의 커다란 침대에 머물렀다. 그녀는 굴욕감이 몰려옴을 느꼈다. 트레이스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런 욕망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침대가 두 개인 침실을 예약한 것이다.

가족 중에 레나를 제외하고 이곳에 머물 일주일 동안 트레이스와 그이 아내는 단지 한방을 쓰는 룸메이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재빨리 양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집에서 트레이스를 향한 덧없는 사랑에 절망하고 슬퍼할 때면 그녀는 작업실이나 아기 방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금 이 호텔에서는 최대한 그 절망을 참아내야만 한다.

지금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스키뿐이다! 아마 6일 후면 트레이스가 사랑하는 스포츠의 기본 동작 정도는 익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강사에게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트레이스의 반응으로 미루어서 행크에게 배우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캐시는 그렇게 바람기 많은 남자는 질색이다. 분명 다른 강사도 있을 것이다. 여자 스키어보다는 스키 자체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성실한 강사도 있을 것이다.

캐시는 피닉스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이 무사히 잘 있다는 내티의 말에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다. 내티는 캐시에게 모든 걸 잊고 트레이스에게만 몰두하라고 말해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캐시는 내티의 마지막 말을 곰곰 생각했다. 그건 그저 단순한 충고가 아닌 것 같다. 그 가정부는 캐시와 트레이스가 각방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들 부부의 관계가 부자연스럽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캐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아직도 숨을 쉬고 있소?"

트레이스의 빈정거림에 캐시는 재빨리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대꾸를 하기 전에 몸을 돌리고 천천히 숫자를 열까지 세었다. 이 여행을 즐겁게 보내고 싶다. 그리고 남편과도 잘 지내고 싶다. 지금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매력적이다.

회색과 검은 줄무늬 스키 스웨터는 그의 검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그의 강렬하고 날씬한 체격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아이들은 잘 있어요. 그리고 당신 말이 맞았어요. 난 아이들에게 너무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아마 내가 그 애들의 진짜 엄마가 아니기 때문일지 몰라요. 그래서 더 책임감을 느끼는 거예요. 난 이곳에 온 게 정말 기뻐요. 이건 진심이에요. 제발 내 말을 믿어 줘요."

그녀의 말에 굳어졌던 그의 몸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트레이스는 캐시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눈동자를 한 동안 응시했다.

"캐시, 나를 만나기 전에 당신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것 같소."

그의 미소는 그녀의 가슴을 또다시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번 여행 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여행을 마음껏 즐깁시다."

"좋아요."

"그럼 됐어요." 그는 속삭이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캐시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그는 꽤 오랫동안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머리를 쳐들었을 때 그녀의 육체는 욕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접촉만으로도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육체적 반응을 일으켰다. 혹시 그가 자신의 그런 변화를 알게 될까 봐 캐시는 몹시 두려웠다.

"배고프지 않소?" 그가 뒤로 물러서면서 물었다.

"굶어죽을 것 같아요."

"그럼 햄버거나 먹으러 갑시다. 그런 다음 내가 당신을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 몇 가지 기본 동작을 가르쳐 주겠소 하루 이틀이면 당신은 리프트에 올라갈 수 있게 될 거요."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면서 스키를 가르쳐 주겠다는데 거절 할 수도 없다.

그날 캐시는 그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전제동 할강과 안전하게 넘어지는 법을 익히면서 그녀는 눈을 뒤집어쓰고 깔깔 웃어댔다. 그 역시 너무나 유쾌한 표현이었다.

태양이 지기 시작하자 그는 눈을 뭉쳐서 캐시에게 던지면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망을 치려 했지만 스키가 꼬이는 바람에 그대로 눈 속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넘어지는 걸 보고서 트레이스는 자신의 스키를 내려놓고 눈을 한 주먹 뭉치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자 캐시는 깔깔 웃어대면서 몸을 옆으로 돌리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안 돼요, 트레이스!"캐시가 웃음과 함께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한 손으로 그녀의 양쪽 팔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눈 속에 묻어 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제발 하지 말아요."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애원했다. 트레이스는 바라보는 캐시의 눈동자에는 즐거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랫동안 고정되어 있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점점 까맣게 변해 갔다.

"그러지." 쉰 듯한 그이 음성에는 열정이 담겨 있다. 그 음성에 캐시는 입에서도 떨리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을 때 그녀의 정맥에는 뜨거운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열기 때문에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키스는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졌다. 캐시는 더 이상 뜨거운 열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가 캐시를 끌어안았을 때 그녀는 시간과 장소를 모두 잊어버린 채 그에게 뜨겁게 키스했다.

"트레이스, 경치 좋은데? 그런데 네 방도 키스하기엔 아주 좋은 곳일 텐데? 우리와 함께 스키 타는 게 어때? 추위를 쫓기 위해서 말이야."

노만의 놀리는 듯한 음성이 캐시의 열정을 뚫고 들어왔다. 그녀는 재빨리 남편에게서 몸을 빼냈다. 여태껏 그렇게 난감하고 당황한 적은 처음이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울고 싶도록 절망스러웠다.

트레이스는 침착하게 일어서서 그녀를 일으켜 주고 그녀에게 스키폴을 건네주었다. 캐시는 쉽사리 침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캐시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제 남편은 그녀가 사랑의 행위를 즐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형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프트는 아직 안 닫았어?"

제임스가 아직 시간이 있다고 말하자 트레이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시, 당신만 괜찮다면 난 제임스와 노만과 함께 스키를 타고 가겠소. 호텔에서 저녁식가 때 만납시다."

그는 형들이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 게 다행스러운 것 같다. 재빨리 형들과 합류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캐시는 남편이 자기처럼 그 사랑의 행위에 흔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키를 타자는 형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녀와 함께 있어 줄 거라고 믿었다.

난 얼마나 어리석은가!

트레이스는 경험이 많은 남자이기 때문에 그저 눈 속에서 잠깐 즐겼을 뿐이다. 그는 그 키스를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진지한 반응에 그는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캐시는 머리를 쳐들고 세 사람을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누군가 트레이스를 즐겁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나도 온몸이 아파 죽겠어요. 어서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고도 때문에 몹시 피곤해요. 그러니까 샌드위치를 간단히 먹고 어서 자야겠어요. 당신이 돌아올 때쯤이면 난 아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을 거예요."

"제수씨도 도로시처럼 말하는 군요." 노만이 말했다.

트레이스의 표정이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캐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그가 중얼거리면서 재빨리 몸을 돌려 자신의 스키를 집어 들었다.

캐시는 아픈 마음으로 세 사람이 멀어져 가는 걸 바라보았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캐시는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는 그렇게 격렬한 상황으로 말려들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그녀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햄버거를 먹은 다음 침실로 돌아 왔다.

한 시간쯤 후에 그녀는 욕조에서 나와 빨간 플란넬 잠옷을 입은 다음 침대에 누워 버렸다. 온몸이 탈진한 상태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근육의 통증과 심한 허기를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혹시 늦잠을 잔게 아닐까? 트레이스는 다른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언제 돌아왔을까? 깊고 고른 숨소리와 함께 그의 검게 그은 팔과 어깨가 침대 위로 드러나 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것이 그녀를 황홀하게 매료시킨다. 그가 반겨 주기만 한다면 그의 곁에 가서 눕고 키스로 그를 깨우고 싶다. 그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녀의 욕망도 깊어만 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캐시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달려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이라면 스키 강습을 받기에 아주 좋은 시간일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옷을 입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로비에 내려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강습을 신청했다.

스키 강습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있었다. 캐시는 트레이스가 아주 훌륭한 강사였다는 걸 알았다. 캐시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진도가 빨랐다. 강습이 끝났을 때 그녀는 트레이스에게 그 말을 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그는 이미 망을 떠나고 없었다.

그 날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바람둥이 강사인 행크가 오전에 언덕에 있는 그녀를 보고서 스키를 가르쳐 주겠다고 재의했지만 캐시는 거절했다. 트레이스와 마주친 건 그 날 저녁 모두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모여 있을 때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캐시의 양쪽 뺨에 키스한 다음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행동은 나무랄 데 없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캐시는 그의 기분이 우울하다는 걸 알아챘다.

저녁 시간이 깊어가자 가족들은 음악을 들으며 아래층에 머물렀다. 하지만 캐시는 음악을 즐길 수가 없었다. 남편이 겉으로 정중한 남편처럼 행동하지만 자신에게 냉담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가족들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하나 둘씩 침실로 올라가버렸다. 드디어 캐시와 트레이스 단둘만이 남았다.

"당신도 피곤해 보이는군."트레이스가 말했다. "먼저 올라가서 잠자리에 드는 게 어떻겠소? 난 바에 가서 한잔할 생각이오."

더 이상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다. 캐시는 굿나이트 인사를 중얼거리고 침실로 올라왔다. 침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그 고통스런 시간들을 견뎌낼 수가 없다.

다음날도 별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트레이스는 다른 침대에서 잠에 빠져 있었고 캐시는 강습을 받기 위해서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니가 셔틀 버스를 타고 솔트레이크 시티까지 쇼핑을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다음 주가 알렌의 생일이기 때문에 그를 위해 뭔가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캐시는 쇼핑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따분하게 스키 연습이나 하면서 트레이스와 마주치기를 고대하는 것보다는 쇼핑이 나을 것 같다. 결국 레나와 쇼핑을 가기로 했다.

오후 내내 그들은 이 상점 저 상점을 구경하면서 보냈다. 아이들을 위해서 털로 짠 모자와 벙어리장갑을 샀다. 내티에게는 몇 가지 식료품을, 마이크를 위해서는 브랜드 위스키를 한 병 샀다.

트레이스의 선물도 준비했다. 마침 선물 상점에는 스노버드 주면 산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액자에 넣어 둔 게 있었다. 레나도 알렌을 위해 눈이 있는 풍경의 사진을 골랐다.

버스가 다시 호텔에 도착했을 때, 가족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즐기고 있었다. 캐시는 허겁지겁 선물을 들고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빨리 트레이스에게 선물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방에 없었다. 혹시 혼자 있고 싶어서 술집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절망감을 느끼며 샤워를 했다. 그리고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서 그날 오후에 산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트레이스는 30분 후에 돌아왔다. 캐시는 책 위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캐시는 강하게 그를 의식했다. 그의 표정과 몸과 몹시 긴장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안녕."캐시는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쇼핑은 재미있었소?" 그는 테이블 위에 키를 던져 놓으며 물었다.

캐시는 똑바로 앉아서 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 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 그리고 당신 선물도 샀어요. 침대 위에 올려놓았어요."

그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가서 포장지를 풀었다. "캐시, 정말 아름답소. 하니만 이렇게 뇌물까지 써서 집에 가자고 재촉할 건 없어요. 처음부터 당신이 스노버드에 오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소."

그녀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 난 떠나고 싶지 않아요. 여기서 지내는 게 정말 즐거워요."

그의 표정이 공허해졌다. "하지만 난 즐겁지가 않소. 당신을 이곳에 데려온 건 우리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소. 하지만 당신을 찾을 때마다 당신은 사라지고 없었소. 가족들은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소."

순간 캐시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일었고, 그녀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 난 이번 여행의 목적이 우리 둘이서 좋은 시간을 가지려는 것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첫날밤에 당신은 형들에게로 가버렸어요."

엉겁결에 그날 밤의 이야기를 해버리고 그녀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트레이스의 입술이 굳어졌다. 캐시의 말에 기분이 나빠진 것 같다.

"솔트레이크 시티에는 혼자 갔었어?"

캐시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는 자기가 편할 대로 화제를 바꾸려 하고 있다.

"아니에요."

"그럴 줄 알았소."

그녀는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와서 그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시선은 뜨겁게 그녀의 온몸을 훑고 있었다. 그이 강렬한 시선에 캐시는 잠시 그들이 다투는 이유를 잊어버렸다.

"혹시 내가 스키 강사와 함께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엄청난 착각을 하 거예요. 난 레나와 함께 솔트레이크 시티에 갔었어요. 레나는 알렌의 생일에 특별한 선물을 사고 싶어했어요. 알렌이 모르게 말예요."

"아무튼 당신이 사라진 걸 두고 가족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했소. 우리의 결혼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가 하고..."

"말도 안 돼요!" 캐시가 소리쳤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첫날을 빼놓고는 나와 함께 스키를 타자고 한 적이 있었어요? 나에게 저녁식사를 하자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술집에 가자거나, 함께 춤을 추자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의 표정이 분노로 굳어졌다. "당신이 형들에게 다른 사람이 와서 날 기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난 당신을 초대하는 걸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소."

캐시는 눈을 감았다. "당신이 나에게 매어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 당신이 형들과 스키를 타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트레이스의 입을 열었다. "우리의 오해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번 여행은 즐겁지가 못했던 것 같소. 짐을 챙겨서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합시다."

그는 사진과 구겨진 포장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가 버렸다. 캐시는 진한 아픔과 분노 속에 버려 둔 채....

 

8

놀란 내티가 놓고 간 치킨 샐러드를 조금 먹고 난 후에 캐시는 아까 침실에 눕혀 둔 아이들을 돌보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막 올라섰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트레이스가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는 오후에 스노버드에서 돌아온 후 사무실로 가버렸다. 그리고 저녁식사도 하러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이 서재로 달려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캐시? 레나예요!"

"레나? 스노버드에서 웬일로 전화를 하신 것예요?"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왜 트레이스와 함께 피닉스로 돌아간 거예요? 알렌과 나는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잤어요. 깨어나 보니 제임스가 캐시롸 트레이스가 호텔을 떠나서 집으로 간다는 거였어요. 아기가 아파서 갔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대체 무슨 일이에요? 지금 트레이스가 곁에 있는 거예요?"

"그는 은행에 갔어요. 난 한 시간 전에 아이들을 재워 놓고 방금 저녁식사를 조금 했어요."

"그러면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도데체 무슨 일이에요? 캐시와 트레이스를 돕는 일이라면 난 무슨 일이든 하겠어요."

"형님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캐시가 울음을 감추면서 말했다. "트레이스와 나는 계속 서로를 오해하고 있어요."

"이번 여행을 취소하고 먼저 돌아가자고 한 쪽은 어느 쪽이죠? 내가 지나친 간섭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괜찮아요. 그이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우리가 완벽한 부부인 척 연극을 하는 일이 피곤했나 봐요. 차라리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우리의 결혼생활에 휴가까지 끼워 넣는다는 건 무리였어요."

"캐시, 정말 안됐어요. 캐시에겐 견디고 힘든 일일 거예요. 언젠가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역시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어느 날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어. 아주 가슴 아픈 방법으로....그 상처를 극복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서 지금 캐시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어.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형님이 이렇게 따뜻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워요. 하지만 불행히도 트레이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캐시는 담담하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지금까지 그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가망이 없는 일이에요. 이게 현실이에요. 난 그 고통스런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난 아이들을 위해서 이 결혼을 한 거예요."

"하지만 아이들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아요."

"형님 말이 틀렸으면 좋겠어요." 캐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레나, 전화를 끊어야겠어요. 트레이스가 집에 돌아온 것 같아요."

"좋아, 돌아가는 대로 다시 전화할게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서재 문이 열리고 트레이스가 들어섰다. 복도의 램프 때문에 그의 모습은 실루엣만 드러났다. 캐시는 나직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몹시 초조한 것 같다.

"당신, 기분이 나쁜 것 같군요. 우리 여행 중에 있었던 합병작업이 잘못되었나요?"

"그렇게 전화 거는 데 열중해 있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을 거요. 아이들을 소홀히 해야 할 만큼 당신을 열중하게 하는 사람은 도댗체 누구요?"

그의 부당한 비난이 캐시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캐시는 저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당신은 아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늦는다고 전화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그녀가 격렬하게 남편을 비나했다. 그녀의 가슴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그가 주먹을 꼭 쥐었다. 캐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강인한 육체에 시선을 주었다. 꼭 맞는 진바지에 단단한 허벅지의 윤곽이 그대로 들어났고 그이 가슴에 달라붙은 검은 색 니트 셔츠는 마치 제 2의 피부 같았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캐시는 그의 육체가 뿜어내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샤워할 때 사용하는 비누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캐시가 그에게 욕망을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뜨겁게 몰려오는 욕망의 불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난 당신의 남편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요."

그가 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육체가 강렬한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소."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다. 전화를 걸어온 건 레나였다고 말하면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캐시는 말하지 않았다. 트레이스가 자신을 믿지 않는데 대해 그녀는 너무나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이성을 찾기 위해서 우선 그에게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각자 사생활을 갖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 건 당신이었어요.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비정상적인 생활을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결혼한 이후로 난 당신의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캐시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트레이스는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다고 생각했어?"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 모르게 다른 여자와 밀회라도 나누고 다닌다는 거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소? 모든 사람들의 욕구만은 충족시켜 주는 아내가 있는데 .... 하긴 나의 욕구만은 충족시켜 주지 못하지만 말이오. 이제 당신은 내 욕구도 충족시켜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가하오."

다음 순간 그는 캐시를 끌어안고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거부하려던 그녀의 몸짓은 그의 거친 행동 속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캐시는 오랫동안 그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원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트레이스의 손이 그녀의 등을 애무했을 때 캐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이 주는 마력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황홀한 느낌이 존재한다는 걸 캐시는 여태껏 모르로 살아 왔다. 이제 트레이스가 손길을 멈추는 걸 원치 않는다. 그녀의 팔은 어느새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가 트레이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속속들이 알게 될 때까지 캐시는 계속 그에게 주고 싶었다.

그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는 한.....

아마도 그의 몸을 떨게 만드는 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환희의 신음소리였을 것이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그는 갑자기 그녀를 밀쳐 버렸다. 캐시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책상을 움켜잡았다.

실내의 어둠침침했으므로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와 긴장한 육체로 미루어서 그 역시 캐시처럼 그들의 정열적인 포옹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이어 불만스런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난 당신에게 손가락 하나 댈 권리가 없소. 당신이 남는 시간에 무슨 일을 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난 우리의 계약 조건을 위반하고 말았소.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요. 이제 올라가서 자도록 해요. 아마 개막식 때문에 당신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거요. 내가 아이들을 보살피도록 하겠소."

서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캐시는 그를 부르고 싶었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럴 수는 없다.

같은 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육체적인 욕구를 인식하게 되었다. 캐시 역시 트레이스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격렬한 감정에 빠져서 캐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침대로 갔다. 하지만 그녀는 불면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트레이스가 그녀의 본능에 불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캐시는 여태까지 육체적인 사랑에 대해 갖고 있던 개념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캐시는 작업장으로 가서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아침 7시까지 일했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는 트레이스의 차가 집 앞에 없음ㅇ르 알았다. 그는 일부러 이 찍 집을 나선 것이다. 그걸 깨닫자 캐시의 상처는 더욱 깊어 졌다.

금요일에 캐시는 가게에서 선반의 포장을 풀고 있었다. 더 이상 트레이스와의 불가능한 애정 문제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레나가 몇 점의 그림을 들고서 가게로 들어섰다.

캐시는 시누이를 반겼다. "이렇게 와주셔서 기뻐요."

"스노버드에서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있었으니까 캐시는 내가 그 약속을 잊어버린 줄 알았겠죠. 하지만 알렌과 나는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었어요. 오늘은 차분하게 앉아서 그림에다 사인을 하며서 시간을 보냈죠. 알다시피 내차에는 한 번에 두 점 이상은 실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몇 번 더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아요."

캐시는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함께 스테이션 왜건을 끌고 집으로 가서 나머지 그림을 싣고 오기를 해요. 난 여기서 저녁때까지 있으면서 실내장식이 제대로 되었는지 살펴볼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나무를 좀 더 갖다 둬야 할 것 같아요."

레나가 실내를 꼼꼼하게 살폈다. "난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이곳에 와서 캐시를 도울게요. 하지만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요. 알렌은 내가 학부모 교사회의에 간 걸로 알고 있으니까요."

"정말이세요?"캐시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레나가<믹스 앤 매치>에 깊이 빠져 있다는 걸 트레이스가 안다면 그는 몹시 기뻐할 것이다.

"캐시는 정말 대단한 여자예요.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좀 더 손볼 부분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개막식 날짜가 너무 촉박해요. 더구나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아서 모든 걸 완벽하게 꾸며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 이제 집에 가서 나머지 그림을 가져오기로 해요."

사실 밤에 혼자 가게에 있는 게 그렇게 내키지 않았는데 레나가 나타나서 너무나 고마웠다. 시누이가 그 사실을 비밀로 한다는 게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것도 작품에 대해서 자신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레나와 캐시는 이틀 밤을 함께 일하면서 그 공간을 전시가 가능한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레나의 실내장식 안목은 정말 대단했다. 캐시는 토요일 밤에 시누이와 헤어지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일 저녁 7시에 알렌의 깜짝 파티가 있는 거 잊지 말아요. 내가 밀 트레이스에게 전화를 할게요."

"거기서 모두들 오시나요?"

"아니, 우리 넷만 있을 거예요."

레나의 말에 캐시의 불안감이 조금 거셨다.

다음날은 시작부터 좋지가 않았다. 트레이스는 아는 사람과 골프약속이 있어서 일찍 집을 나갔다고 내티가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캐시는 레나의 집으로 떠날 때에야 그를 볼수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정중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트레이스는 캐시에게 냉랭했다.

레나는 재빨리 그 사실을 눈치 챘다. 식탁을 치우면서 그녀는 캐시에게 동저의 눈길을 보냈다.

캐시는 알렌이 고마웠다. 알렌은 선물을 풀면서 즐거운 농담을 던졌다. 레나가 유타 주에서 사온 액자 속의 사진을 보는 순간 알렌의 시선은 아내를 응시했다. 그는 아내에게 뜨거운 사랑의 시선을 보냈다. 캐시는 그이 열렬한 표정에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이제 트레이스는 그녀는 스노버드에서 레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알렌은 곧 다른 선물을 풀었고 마지막으로 캐시가 주는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레나는 캐시에게 알렌이 바비큐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었다. 그래서 캐시는 알렌을 위해 불어로 요리 용어가 적힌 에이프런을 만들었다.

", 자넨 정말 행운아야." 알렌이 트레이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넨 어떻게 캐시 같은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됐지? 캐시는 요리와 바느질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그리고 좋은 어머니에다가 스키 타는 솜씨도 아주 수준급이 됐잖아? 거기다가 미모까지 갖추고 있잖아?"

평상시 같았으면 캐시는 알렌의 칭찬이 무척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냐는 트레이스의 기분에 너무 예민해져 있다. 캐시는 생일 케이크에 관심을 보이는 척했지만 남편이 알렌의 말에 뭐라고 대꾸해 주길 기다렸다.

"당신은 한 가지 빠뜨린 게 있다고요. 캐시는 사업 수완도 아주 대단한 여자예요." 레나가 끼여드는 바람에 트레이스는 답변해야 하는 곤경을 덜었다.

"당신 말이 맞아."알렌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사업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어요?"그는 캐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트레이스가 대신 대답했다. "밤늦게까지 바느질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아마 가게 몇 개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물건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는 예사로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캐시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레나가 그녀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걸 보고서 캐시는 얼른 머리를 숙였다.

"개막식은 언제인가요?"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 알렌이 물었다. "레나와 나도 거기에 갈 거예요."

"다음 주 토요일이에요."캐시는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트레이스에게서 느껴지는 긴장감 때문에 그녀는 초조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말하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레나가 목청을 가다듬고 남편을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보, 사실은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레나의 선언이 있자 모두들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다시 임신한 건 아니겠지? 이제 우리 아기를 낳을 수 없잖아?" 알렌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사랑이 빛났다.

"물론이에요." 레나는 웃었다. "사실 지난주에 이틀에 걸쳐서 회의가 있다는 했던 건 거짓말이었어요."

그 순간 알렌의 얼굴에 서렸던 미소가 가시기 시작했다.

"사실은 캐시의 화랑 일을 도와주고 있었어요."

알렌이 눈을 깜빡였다. "정말 잘했어.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내게 하지 않았지?"

"사실은...캐시가 개막전에서 예전에 그린 내 그림을 전시하겠대요. 처음에는 당신이 그 사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알렌이 케이크를 먹다가 그대로 멈춘 다음 아내를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그건 내가 짐작하고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인가?"

레나는 숨을 깊숙이 들이쉬었다. "난 과거에 대해서 지나치게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난 어리석었어요."

"여보..."알렌이 아내의 손을 붙잡았다.

캐시가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감정들이 흐르고 있다. 알렌은 격한 감정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트레이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순단 그의 시선도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시선이 캐시에게 은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시선이 레나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는 했지만, 캐시는 고맙기만 했다.

이제 더 이상 자존심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트레이스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

뒤에서 전화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레나의 딸인 베키가 식당 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캬시 외숙모? 트레이스 삼촌? 내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오시는 게 좋겠대요. 제이슨이 기관지에ㅔ 이상이 있는 것 같대요."

레나의 저녁식사 파티 후에 있었던 12시간은 트레이스가 없었다면 캐시에게는 끔찍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트레이스는 밤새도록 제이슨을 간호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홍진으로, 이제는 심한 기침 감기로 그들은 밤새고록 깨어 있어야만 했다. 다음날 정오가 되자 아기는 많이 좋아졌고, 캐시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트레이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의 얼굴엔 피로의 흔적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트레이스는 그날 오후에 은행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다면서 황급히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트레이스는 휴식도 취하지 않고 너무나 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캐시는 그날 오후 내내 제이슨 대신 남편 걱정을 하면서 보냈다.

키시가 잠깐 잠들어 있는 동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침대 옆의 시계를 흘끗 보았다.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티에요?" 그녀는 불안한 음성으로 말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캐시, 트레이스요. 당신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들어가도 되겠소?"

"물론이에요."

캐시는 떨리는 손길로 램프를 켠 다음 침대 커버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제이슨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나요?" 그가 가운을 걸치고 들어서자 그녀가 물었다. 아마 그는 방금 샤워를 마친 것 같다. 그에게선 산뜻한 비누 냄새가 풍겨 왔다.

트레이스는 문을 닫고 그녀의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아니오. 방금 제이슨의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아주 좋아요. 저스틴도 괜찮소."

그녀는 침을 삼켰다. "언제 돌아왔어요? 9시까지 당시 저녁식사를 차려 두었다가 냉장고에 다시 넣었어요."

"오늘도 늦어서 미안하오. 난 방금 돌아왔어요." 그의 얼굴에 드러난 주름살이 어느 때보다 더욱 심해 보였다.

"트레이스, 오늘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어요. 몹시 피곤해 보여요. 그런데 오늘 회의는 어땠어요?"

이처럼 늦은 시간에 그가 침실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마치 편안한 부부처럼 침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주 잘됐소. 하지만 내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당신을 깨운 건 아니오. 난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거요."

"레나와 알렌의 이야기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당황하는 것 같다.

"그런 게 아니오. 그들 사이에는 나빠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들의 이야기를 하겠소?"

"사실은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알렌은 왜 레나의 이야기에 그렇게 맥을 못 추는 건가요?"

"그건 알렌이 여태껏 누나와 결혼하고 살아오면서 은밀하게 두려워했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오. 매형은 누나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옛사랑의 연인 때문에 누나 자신이 과거에 화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까 봐 몹시 두려워했소. 할렌은 항상 코미디언처럼 행동은 어쩌면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방패막이였는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 돼요!" 캐시는 소리쳤다."레나는 알렌을 몹시 좋아하고 있어요. 레나는 나에게 모든 걸 고백했어요. 레나는 그 사건을 오래전에 극복했어요. 스노버드에서 모두들 떠난 후에도 그녀가 알렌에게 좀 더 머물러 있자고 말했던 건 레나가 남편과 두 번째 허니문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모든 남자들에게 그렇게 행운이 따라 준다면 얼마나 좋겠소? 어젯밤 누나가 자발적으로 모든 걸 고백한 후에 매형은 누나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을 거요. 모두 당신 덕분이오."

캐시는 머리를 저었다. "트레이스, 내 덕분이 아니라 당신 덕분이에요. 처음부터 레나와 이야기해 보라고 부추긴 건 당신이었어요. 당신에겐 사람들을 제자리에 찾아 가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아이들은 당신 같은 아버지를 갖게 되어서 정말 행운이에요."

"당신이 신뢰하는 그 재능이 우리의 가정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모르겠소."

그의 냉정함에 그녀의 가슴이 고통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뭐가 잘못된 건가요?"

그는 잘생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당신에게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우리 둘이서 동의했던 사실이 있소. 뭔가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에 부딪치기로 했었소."

"나도 기억해요." 캐시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도 당신이 그 동안 행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사실 당신과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어요."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간 내 잘못이오. 난 이대로 살아간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소. 캐시, 난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지속할 수가 없을 것 같소 ."

순간 그녀의 온몸이 그대로 마비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요. 재가 나가겠어요."

놀랍게도 그는 머리를 저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오늘밤 내가 여기에 온 건 당신에게 우리의 결혼계약에서 결정했던 규칙을 깨자는 제안을 하려고 온 거요. 난 당신에게 내 침대에서 함께 자자고 부탁을 하고 있는 거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트레이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고개를 젓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멍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당신과 같은 집에서 살면서 사랑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건 날 거의 미치게 만들고 있소. 지난 밤 이후로 당신도 알아차렸을 거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말이오. 당신을 그대로 보내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소."

그의 솔직한 고백은 캐시의 감정에 막아 두었던 문을 열어 버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욕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아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가고 있었다.

"당신을 밤새도록 끌어안은 채 만지고 싶소. 캐시, 당신은 나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오."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베개 위에 눕혀졌다. 한동안 캐시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걸 거부했다. 그 소리는 남자의 욕망과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캐시는 트레이스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캐시는 그의 행위가 그저 단순한 육체적인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건 캐시 자신이 절실하게 원하는 사랑의 감정이 배제된 채 그저 성적 만족을 추구하기 위한 행위를 지나지 않는다.

트레이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자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캐시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가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면 그들은 다시 예전의 계약결혼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캐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캐시는 그를 힘껏 밀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두 사람은 좁은 침대를 사이에 둔 채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트레이스는 헝클어진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자극적이었으므로 캐시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사랑을 거부해 버린 것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인지 그녀는 결코 모를 것이다.

"욕망을 느끼는 쪽은 나뿐인 것 같소."

그녀는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러는 건 옳지 않아요."

"영원처럼 긴 침묵이 흐른 다음 그가 말했다. "당신처럼 따뜻하고 아름답고 착한 여자가 여태껏 성적 경험이 없었다니 나로서는 믿기 힘든 일이오. 당신을 이 연극에 끼어들게 한 건 내 잘못이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캐시는 그가 혹시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모두 던져 버려야 했다.

".... 여태까지 난 그 연극을 하면서 아주 행복했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뭔가 잘못되었다면 유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남은 시간을 얼마든지 다른 사람과 보낼 수가 있었어요."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당신 말이 옳아요. 난 그랬소."

"당신이 원한다면 난 개막식이 끝난 다음에 이 집을 나가겠어요."

"그건 안 돼요!" 그는 거친 어조로 말했다. 그가 그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다. "아이들이 당신을 무척 좋아하고 있소. 그들은 당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문제일 뿐이오.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리고 그는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 버리자 캐시는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껴 울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 이후 트레이스는 놀랄 만큼 친절하고 사려 깊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날 밤의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매일 밤 그는 일찍 돌아와서 아이들을 돌봐 주었다. 그래서 캐시는 마음 놓고 개막전 준비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건 결혼한 후 처음 몇 주 동안의 생활을 연상시켰다. 그 때 그들은 함께 있는 게 즐거웠고, 아이들을 돌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에 캐시는 트레이스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3w고 있었으며 그 결혼을 정상적인 결혼생활로 영위해 볼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캐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과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 트레이스 때문에 몰려오는 절망감을 달래는 것뿐이다.

개막식을 하루 앞둔 금요일의 늦은 시각에 캐시는 화랑에 나가서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몸을 홱 돌렸을 때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칼의 그 남자 역시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롤프!"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캐시는 그가 피닉스까지 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캐시, 아주 좋아 보이는군!"

그가 팔을 내밀자 캐시는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당신이 그리웠어."

하지만 그에게 안겨 있는 동안 캐시는 그가 키스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그에게서 벗어났다.

"당신이 이곳에 온 줄은 몰랐어."

"난 한 시간 전에 이곳에 도착해서 어머니가 알려 준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어. 가정부가 당신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더군. 그래서 당신을 놀래 주려고 연락 없이 달려온 거야."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전보를 봤으면 내가 더 이상 약혼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그럼 캐시의 생활에 뛰어들어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단 말이오?"."

트레이스의 음성을듣고 캐시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포장된 프라이드치킨 세트를 들고 있었다. 캐시는 그가 자신의 저녁을 사온 것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격렬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롤프만 이 자리에 없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트레이스, 이쪽은 롤프 팀슨이에요. 롤프 내 남편인 트레이스 렘지를 소개할게."

두 남자는 잠시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트레이스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양쪽 다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톰슨, 당신이 원하는 건 뭐요? 내 아내는 개막식 준비로 너무나 바빠요. 아무래도 지금은 방문을 하기엔 좋은 시기가 아닌 것 같소."

롤프의 시선이 캐시에게로 옮겨졌다. "캐시는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고 있어요. 캐시와 난 항상 가까운 사이였소. 난 바보처럼 파혼을 하고 말았소.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요. 하지만 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고, 이젠 캐시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난 기다릴 수 있소."

"너무 늦었어요." 캐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트레이스가 끼어들었다. "이제 캐시는 내 아내요."

하지만 롤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캐시를 응시했다. "하지만 난 캐시의 진심을 알고 있소. 그걸 증명해 줄 편지도 갖고 있어요. 캐시는 수잔의 아기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 당신과 결혼한 것뿐이오."

맙소사! 그 편지!

캐시는 편지에 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트레이스를 사랑하기 이전에 보낸 편지이다.

트레이스의 몸이 굳어졌다. "팀슨, 당신 말이 옳아요. 지금 캐시는 내 아이들의 어머니이고, 계속 그 자리에 지켜야만 하오. 그럼 샌프란시스코까지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빌겠소."

트레이스는 음식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곧 집에 돌아오겠지? 아이들을 깨워야 하니까..."

"그러겠어요."그녀는 트에이스의 등 뒤에다 대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금방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어요. 저녁 식사 잘 먹겠어요."

그에게 감사의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그는 벌써 가게를 나서고 있었다.

롤프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들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캐시, 내가 당신의 편지를 오해했던 건가?"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그 편지는 내가 트레이스와 결혼하기 전에 보낸 거였어."

다시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지금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은 나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어. 하지만 난 그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았지."

캐시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롤프, 난 항상 당신을 형제처럼 사랑할 거야.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야. 트레이스를 제외하면"

"내가 파혼을 했을 때, 난 모든 걸 던져 버린 거야."

"아냐, 내가 트레이스를 사랑했던 것처럼 당신이 날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당신은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벨기에에서 만난 여자와의 약혼이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그건 당신이 이미 다른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야."

"캐시, 당신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그녀는 미소 지었다. "항상 당신을 기억할 거야. 당신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9

캐시는 빨리 트레이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어쩌면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내가 아내로 남아 주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어.

롤프가 떠나자 캐시는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차를 멈춰야 할 때마다 그녀는 남편이 사다 준 맛있는 치킨을 먹었다.

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 트레이스의 차는 그곳에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기대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티의 말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이미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과 놀면서 그녀를 기다려 줄 거라 생각했었다.

11시가 될 때까지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캐시는 그를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개막식을 하기 위해서는 잠을 자둬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샤워를 한 다음 캐시는 며칠 전에 사두었던 감색 수트를 입었다. 그 세련된 의상이 다시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레나를 <믹스 앤드 매치>에서 8시에 만나기로 해두었다. 캐시는 화랑으로 떠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작별의 키스를 했다. 아침식사는 거르기로 했다. 트레이스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캐시는 눈물을 흘리며 집을 나섰다.

"아주 예뻐 보여요." 캐시가 가게의 뒷문에 도착했을 때 레나가 말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린 것 같군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들어가서 이야기할게요."

가게에 들어서자 캐시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들을 레나에게 털어놓았다.

"레나, 난 그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는 마치 바람 같아요. 격렬하게 휘몰아치다가 차갑게 식어 버려요.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군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오늘 좀 더 생각해 본 다음에 결론을 내려야겠어요."

"캐시, 내가 충고 한마디 해도 될까요? 제발 급하게 서두르지는 말아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시간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 같아요."

그러나 더 이상 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 청년이 샛노란 장미를 한 다발 들고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50,60송이는 될 것 같다.

"캐시 램지에게 배달 왔습니다."

", 정말 아름다워!" 레나는 소리쳤다. "누가 그것들을 보냈는지 짐작이 가는걸!"

캐시는 꽃다발을 받았다는 사인을 했다. 캐시는 꽃송이 사이에 끼여 있는 카드를 펼쳤다.

<당신 같은 여자는 자신의 행운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같소. 하지만 그 행운과 함께 나의 축복과 바람도 함께 갖고 있다는 걸 명심해요. 트레이스>

그 문장은 언젠가 그가 캐시의 독립심을 칭찬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캐시가 자신의 두 발로 서 있음을 칭찬했었다. 홀로 서 있을 수 있음을.

캐시는 카드를 손에 꼭 움켜쥔 채 레나에게 속삭였다. "이 꽃다발을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놓아 주시겠어요? 틀이스가 나중에 오면 잘 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레나는 그녀에게서 꽃을 받아들었다. "캐시, 왜 그래? 얼굴이 아주 창백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트레이스의 친절에감동한 것뿐이에요. 이제 문을 열면 선물이 넘쳐날 거예요. 내가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건가요?" 캐시는 초조하게 웃었다.

레나는 캐시의 허리를 편안하게 끌어안았다. 105분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가게 입구에 몰려들었다.

캐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신의 가게를 갖는 꿈이 실현되길 소망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행운에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개장 후로 몇 시간은 정말 바쁘게 지나갔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계속 몰려들었다. 그리고 진열대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사야 할 문건들을 골랐다. 크레이스의 가족들로부터 여러 번 축하의 꽃다발이 배달외었다.

11시 경에 뷸라에게서 또 다른 꽃이 배달되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세 명의 남자가 꽃이 핀 거대한 선인장을 갖고 나왔다. 거기엔 캐시와 레나에게 행운을 비는 리본이 있었고 <그레이터 피닉스 금융회사로부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오쯤엔 더 많은 차량들이 모여들었다. 놀랍게도 가게의 물건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캐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작품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램지 여사?"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캐시는 몸을 돌렸다. 그는 크로스로드 광장 거리에 있는 유명한 음식점의 지배인인 것 같았다. "어디서 만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죄송하게도 당신의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군요."

"할 사이케스입니다." 그는 활짝 웃었다.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신문에서 광고를 보고 한번 들러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중에서 내가 사고 싶은 그림이 세 점이 있어요. 하지만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군요. 그 그림들은 이미 팔린 겁니까?"

캐시는 레나를 바라보면서 활짝 웃었다. "그건 화가인 해롤드슨 여사에게 직접 물어 보세요.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그리고 캐시는 인파를 뚫고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레나, 저쪽으로 가 봐요. 저기 선인장 옆에 서 있는 사이케스씨가 형님의 도움을 원하고 있어요. 핑크색 셔츠를 입은 분 말예요."

레나는 그를 흘끗 보았다. "낯익은 사람이에요."

"지난번에 우린 저분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어요."

", 생각나요. 그럼 금방 갖다올게요."

또 다른 고객이 캐시에게 그림 한 점에 대해 문의한 다음 명함을 놓고 떠났다. 레나는 30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은 몹시 당황한 듯하다.

"사이케스 씨가 뭐라고 해요?"

레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저기 있는 세 점의 그림 값으로 내게 5,000 달러를 주겠다고 했어요.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다시 꾸밀 생각인데 저 그림들이 장식용으로 완벽하다는 거예요."

캐시는 짐짓 냉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에게 만 달러를 주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고 하세요."

"캐시?"

"?"

"나는 그에게 그 그림들을 팔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수표를 써놓았어요. 7시에 문을 닫기 전에 다시 오겠다는 거예요. 혹시 내가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면서"

그녀는 캐시에게 수표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틀림없이 <믹스 앤 매치 사우스웨스트> 앞으로 되어 있었다.

"이 돈이면 물건을 채우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어요." 캐시는 담담하게 말하면서 그 수표를 금고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제의를 거절하기 전에 우리는 좀 더 그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때요? 그림을 판 값의 15퍼센트는 가게로 돌리고 나머지는 형님이 갖는 게 어때요?"

"농담하지 말아요." 레나는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몇 분 전에 한 여자 손님이 와서 형님의 일몰 그림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어요. 모두 핑크색과 주황색으로 칠한 그림 말예요. 그녀는 뉴욕에 사는데, 애리조나 방문 기념으로 집에 가져가고 싶대요. 그 여자는 그림 거래업자이기도 한데 형님의 그림을 5천 달러에 사겠다고 했어요. 여기 그녀의 명함이 있어요. 다음 주에 이 전화번호로 꼭 연락을 해달래요."

", 여보, 잘되어 가고 있어?" 귀에 익은 음성이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기뻐요." 캐시는 시누이 남편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사업은 잘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좀 쉬어야겠어요. 레나와 함께 빨리 점심식사를 하고 오시겠어요? 레나가 돌아오면 나도 뭘 좀 먹어야겠어요."

"정말?" 두 사람이 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전만큼 바쁘진 않아요. 하지만 반드시 돌아오셔야 해요. 형님이 없으면 난 이곳을 운영할 수가 없다고요."

"30분 후에 꼭 돌아올게."

"형님 그림이 벌써 9천 달러어치나 팔렸다는 이야기를 꼭 알렌에게 해주세요. 그럼 오늘 할 일은 절반은 끝난 셈이라고요!"

관심을 보이는 많은 고객들 앞에서 알렌은 기쁨의 탄성을 지르면서 레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시누이를 도우려는 트레이스의 계획은 성공한 것 같다. 거기에 캐시 자신도 한몫을 했다는 생각을 하니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물밀 듯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더 이상 그 생각에 잠겨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손님들은 꾸준히 몰려들었다. 손님이 많이 몰려드는 건 정말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트레이스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손님들과 잡담을 하고 팔린 물건을 더 주문하면서 그녀는 피닉스에 작은 아파트를 구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 살면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트레이스와 결코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내티와 마이크가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캐시는 지금껏 어머니와 똑같은 심정으로 두 아이들을 돌보아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저스틴의 이모일 뿐이고 제이슨과는 아무 혈연관계도 아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트레이스의 집을 떠나는 게 가장 현명할 것 같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살면서 아이들의 이모와 친구 자격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게 좋을 것이다.

결구 때가 되면 트레이스는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해서 아이들에게 새엄마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지만 그 길만이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 보라고요." 레나의 행복한 음성이 캐시의 상념을 깨뜨렸다.

캐시가 돌아보았을 때 트레이스의 가족이 거의 다 모여서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씩 다가와서 캐시를 끌어안았고, 캐시는 그들에게 꽃을 보내 준 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캐시,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올리비아는 캐시의 뺨을 두드려 주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금고 앞에 서 있는 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캐시, 축하한다."

"트레이스가 한 일이에요."

"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단다."

하지만 캐시는 시어머니의 묘한 질문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문 앞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시가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엔 검게 그은 얼굴의 트레이스가 느긋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2인용 유모차에 태워서 데리고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 가족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트레이스는 감색 스포츠 차림이었고, 아이들은 똑같이 캐시가 만들어준 감색 해군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하얀 양말과 하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캐시는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잠시 잊어별T.

그들은 불과 3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세 사람은 캐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갑자기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다행히 아이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재빨리 레나에게 말했다. "레나, 난 잠시 실례하겠어요."

시누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캐시는 뒷방으로 달려갔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밖으로 나왔다. 트레이스는 문 옆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시를 보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이곳으로 달려 들어가는 걸 보았소. 얼굴이 몹시 창백하군. 어디 아프오?"

캐시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아뇨, 아마 신경이 예민해진데다가 하루 종일 몹시 바빠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이 관자놀이의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의자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앉게 했다.

"그럼 뭘 좀 먹기로 합시다. 레나와 어머니가 계시니까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사실 어디도 가고 싶지가 않아요. 음료 한 잔만 마시면 괜찮을 거예요. 길을 따라 내려가면 식품점이 있어요."

"그럼 여기 있어요. 내가 사올 테니까."

그는 쏜살같이 달려 나가 우유와 사과 하나를 사갖고 돌아왔다.

캐시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맛있게 먹었다.

"이제야 얼굴색이 좋아졌소." 그녀가 우유를 다 마시자 트레이스는 중얼거렸다.

"이제 기분이 좀 좋아졌어요. 나를 구하러 와주셔서 고마워요. 도시락을 준비해 올 걸 그랬나 봐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줄은 몰랐어요."

그는 한동안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가게가 엄청나게 성공을 거두게 될 거라고 말했소. 아이들은 그걸 직접 보고 싶어 했어요.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고 다시 이어갔다. "그러니까 당신이 너무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소."

캐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에 일고 있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얼른 몸을 돌렸다.

지금 트레이스는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족들에게 행복한 부부로 보이기 위해 또 다른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을 보니까 너무나 기뻐요. 그 옷을 입으니까 아이들이 정말 귀엽죠? 우리, 애들을 보로 가요."

트레이스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 괜찮겠소?"

"물론이에요. 고마워요."

그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게 몹시 혼란스러웠으므로 캐시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제임스와 노만에게 안겨 있었다. 아이들은 캐시를 보는 순간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캐시가 카운터 뒤로 가자 동시에 울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 방해가 되기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소." 트레이스가 말했다.

"꽃이 정말 아름다워요.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당신 덕분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와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그 순단 그가 재빨리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느껴졌다.

"난 당시의 편이오. 그런데 내가 여기 오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그는 화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몸을 홱 돌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버렸다. 캐시는 그들을 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날 오후 내내 트레이스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630분경이 되어서야 손님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날 처음으로 캐시와 레나는 남아 있는 물건을 제대로 정리한 다음 금전 등록기의 판매액을 기록할 수 있었다.

"사우스웨스트 작품이 모두 팔렸어요." 캐시는 놀란 어조로 말했다.

캐시는 시선을 들어 그녀가 감동을 받았던 작품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 그림의 거기에 없었다.

"레나? 그 호피족 소녀의 그림은 어디 갔어요?"

시누이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알렌이 그걸 사서 집으로 가져갔지 뭐예요? 그는 금전 등록기에 수표를 넣어 놓고 갔어요."

"그랬군요. 트레이스는 그 작품이 형님의 최대 걸작이라고 했어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레나, 그러데 이만 문을 닫는 게 어때요? 나는 할 일을 있거든요."

"사실은 나도 그래요. 나도 연습을 해야 하거든요."

캐시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림 연ㄴ습을 다시 시작했어요. 요즘 난 내 인생에서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있어요. 알렌과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봤는데, 캐시의 제의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나도 이 사업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싶어요."

캐시는 말없이 레나의 가냘픈 어깨를 끌어안았다.

"곧 알렌이 올 거예요. 그럼 여기는 우리가 모두 알아서 정돈할게요. 그러니 이제 캐시는 트레이스에게 가 봐요."

"나도 그러려던 참이었어요. 난 그이를 사랑해요. 그리고 이제 내 감정을 그대로 말할 거예요. 더 이상 내 감정을 숨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캐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내티와 마이크도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도 없었다. 캐시는 깜짝 놀란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레나가 전화를 받자 캐시는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레나, 캐시예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혹시 트레이스가 이이들을 데리고 어디 갔는지 아세요?"

"엄마가 아이들을 오늘밤에 봐주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고마워요.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 보겠어요."

올리비아는 레나의 말대로 아기들을 보고 있었다. 트레이스는 회사 일 때문에 좀 늦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캐시는 시어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수화기를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계획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작업실로 돌아가 물건 뒤에 숨겨 두었던 1.8m짜리 악어를 꺼냈다. 그걸 차에다 실은 다음 그녀는 피닉스 시내로 향하는 고가도로로 차를 몰았다. 저녁 시간이라 교통이 혼잡하지 않았으므로 30분 후에 그녀는 시내에 도착 할 수 있었다.그녀는 트레이스의 회사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의 검은 메르세데스가 서 있는 걸 보고 캐시는 그 옆에다 자신의 차를 세웠다 그녀의 가슴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악어는 너무 무거워 부담이 되었지만 그녀는 반쯤은 들고, 반쯤은 끌다시피 해서 그걸 경비실까지 갖고 갔다. 그는 캐시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경비원이 악어와 그녀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제가 도와 드릴까요, 부인?"

"남편이 늦게 까지 일을 해요. 그래서 그를 놀래 주려고 해요."

"지금 이 빌딩 안에는 램지 씨밖에 없어요."

"내가 램지 부인이에요."

캐시는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악수를 하지 않았다. 캐시는 화가 나서 견딜 수다 없었다. 남편을 만나는 데 왜 제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제가 전화를 걸어서 부인이 와 있다는 걸 알리겠어요."

"그렇게 하면 그이를 깜짝 놀라게 해줄 수가 없어요." 캐시는 최대한 친절한 어조로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죄송합니다. 그분의 승낙이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핸드백을 뒤져서 크레디트 카드와 운전 면허증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보세요."

그는 그것들을 흘끗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쩔 수가 없군요. 그이에게 캐시가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램지씨,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와 있습니다. 그녀는 캐시라고 하면서 카드까지 내밀고 있지만"

그가 그녀를 훑어보는 동안 캐시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155cm에서 158cm정도 키에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졌어요. 미모에 체격도 좋으십니다" 그가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동안 캐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보다 더 큰 동물 인형을 갖고 왔어요. ,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캐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부인?"

"그러세요."

캐시는 그 악어를 경비원에게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악어를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1.8m 정도 되는 초록색 악어인데 검은 머리칼에 파란 눈동자, 그리고 짓궂은 웃음을 띠고 있어요. 꼬리에 <아빠>라고 적혀 있는데요." 그 말을 하면서 경비원은 웃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모든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올라가도 되나요?" 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인,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그는 악어를 유리에 기대 놓은 다음 벨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팔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고 그동안 경비원은 다른 한 쪽의 수갑을 자신의 팔목에 채웠다.

"이봐요. 왜 이러는 거예요?"캐시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서 소리쳤다.

"아마 몇 달 전에 부인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그의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엄청난 이야기를 하 모양입니다. 당신이 그 여자라면 매우 위험한 인물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램지씨가 직접 내려와서 확인하는 동안 부인을 꼭 잡아 두고 있으라고 했어요. 부인, 나는 지금 인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루이스, 아주 잘하고 있소."

캐시는 화가 난 표정으로 남편 쪽을 바라보았다. 트레이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캐주얼 감색 옷을 입은 그는 정말 매력적이다. 그는 캐시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 악어에게로 다가가서 그걸 유심히 살펴보았다.

"루이스, 바로 그 여자였소. 수갑을 풀어 줘요. 내가 위층으로 데리고 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소."

"알겠습니다!"

한 손으로 그녀의 팔꿈치를,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악어를 움켜잡은 채 그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루이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전에 트레이스는 소리쳤다. "이 여자는 내 아내요. 하지만 아내가 이런 괴물을 들고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돼요."

그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같은 건 따지고 싶지 않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캐시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언제부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는 캐시를 밖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캐시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았다.

"당신이 날 유괴범이라고 몰아붙이던 바로 그 순간부터"캐시는 속삭였다.

"캐시,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녀는 소리쳤다."난 당신에게 미친 듯이 끌리기 시작했고 당신이 저스틴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비로소 나 평생 동안 함께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어요."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스노버드에 갔을 때 왜 그걸 인정하지 않았소? 그리고 내가 당신과 함께 자자고 애원했을 때도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었잖소?"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내게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가 신음소리를 내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결혼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에 당신을 두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소. 당신이 사무실에서 보채는 내 아들을 달래는 순간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소.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소?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되었을 거요."

"트레이스"

그녀가 달려가서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지금은 말이 필요 없다. 언젠가는 롤프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은그저 트레이스가 전해 주는 황홀한 느낌 속에 빠져 있기만 하면 된다.

"롤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알고 있소?"

"이젠 알 것 같아요."

캐시는 그의 눈과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여태까지 당신이 날 원하는 건 그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결국 당신이 내게 싫증을 느끼면 난 버림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천만에!"트레이스는 다시 그녀에게 격렬하게 키스했다."샌프란시스코에서 당신의 아파트에 찾아갔을 때, 내가 무얼 느꼈는지 말해야겠소. 하지만 나 진실을 인정하는 게 두려웠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너무나 빠른 것 같았으니까. 우린 거의 서로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었소. 그리고 공항에서 그 격렬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요. 그래서 결국 당신이 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요. 바보 같은 계획이었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문질렀다.

"당신은 성공했어요. 비록 이름뿐이었지만 당신의 아내가 되는 것만으로도 내겐 더 없이 행복했으니까요. 그 때 롤프에 대한 감정은 여자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게 갖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영원해"

"난 그 말을 듣기를 기다렸소. 아주 오랫동안"

그는 아주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들이 일제히 살아나고 있었다. 악어를 무시한 채 그는 캐시를 방으로 데려갔다. 그건 그녀가 처음 보는 방이다. 하지만 그 방의 인테리어는 호텔보다 더 훌륭했다.

"이건 당신의 사무실이 아니군요."

그녀가 선물한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 걸 보고 캐시는 깜짝 놀랐다.

"우린 내 옥상의 아파트에서 멋진 허니문을 시작하는 거요."

캐시는 눈을 깜빡였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밤늦게 올 때는 여기서 있었나요?"

"그렇소."

그는 캐시를 커다란 창문 쪽으로 데려갔다. 피닉스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여기 서서 우리 집 쪽을 바라보았었소. 당신이 밤에 깨어서 날 원하고 있다면 얼마나 줗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캐시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가져갔다.

"우리 침실로 갑시다."

캐시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곳에맨 처음 제이슨을 데리고 왔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이곳으로 "

"캐시!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이 제이슨의 부모를 찾아 주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면 어쩔 뻔했소?"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어요. 수잔은 제이슨이 진짜 아버지를 찾아가기를 원했어요. 나도 그걸 원했죠."

그는 캐시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정직한 당신의 언니를 사랑하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을 사랑하오. 하지만 캐시, 난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오. 난 당신을 절실히 원하고 있소. 영원히 날 사랑해 줘요."

캐시는 나약해진 그의 모습을 의식했다.

"왜 레나를 위해 가게를 열겠다는 당신의 계획에 동의 했는지 알고 있소? 난 당신을 아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 두고 싶었소. 누나를 사랑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당신 때문에 더 그 게획에 찬성했던 거요. 당신이 그 일에 만족감을 느끼고 날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소. 레나가 당신의 소원대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를 원했지만 그게 이루어지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캐시는 평생 처음 진실한 행복을 느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음모는 성골한 겨예요. 오늘 밤 레나는 드디어 그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림도 다시 그리기 시작했어요."

트레이스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칼을 더듬고 있었다."나도 알고 있소. 알렌이 오늘 내게 모두 이야기해 줬어요. 알렌은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소. 그들의 결혼 생활이 더욱 견고해졌다고 말이오. 하지만 매형에게 좀 더 기다려야 할 거라고 말했소. 나도 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오."

"그래요, 당신 말이 옳아요. 제이슨과 저스틴은 정말 못 말릴 정도가 되어버렸어요. 아기가 하나 더 생기면 그 애들에게 무척 좋을 거예요. 나에게도 그렇고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트레이스의 표정에서 미소가 가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격렬하고 뜨거운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캐시는 그의 품안에서 몸을 떨었다.

"램지 부인, 난 당신의 욕망에 마음껏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