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Отцы и дети [Ottsy i deti] 1862) 3
23
바자로프는 빈정거리는 듯한 동정의 빛으로 아르카디를 전송하면서, 그가 떠나는 확고한 목적에 대해서는 결코 속지 않으리라고 암시해두고는 완전히 고독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열병에라도 걸린 듯이 연구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이제 파벨 페트로비치와는 말다툼도 하지 않았다. 상대는 그의 앞에서 극단적으로 귀족 티를 보이며, 자신의 의견을 말로써보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나타내려 들었기 때문에 논쟁은 더욱 불가능했다. 단 한 번 파벨 페트로비치가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발틱 연안의 귀족들의 권리가 어떠느니 하는 문제로 이 허무주의자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으나 자기 쪽에서 먼저 황급히 그만두어 버리고 냉정하고도 은근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군.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영광을 조금도 지니지 못했소.”
“그러실 테죠.”
하고 바자로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가령 에테르가 어떻게 떨고 있고, 태양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른 방법으로 코를 푸는가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뭐라고, 그것도 재치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말하고는 저쪽으로 가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따금 바자로프에게 실험하는 것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 한번은 값비싼 화장품으로 말끔히 씻고 향수를 듬뿍 바른 자기 얼굴을 현미경에 갖다 대고는 투명한 적충류가 녹색의 가느다란 먼지를 어떻게 해서 삼키며, 또 그것을 목구멍 옆에 있는 뭔가 매우 날카로운 이 같은 것으로 바삐 씹고 있는 것을 관찰한 일까지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보다도 더 자주 바자로프를 찾았다. 그는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날마다라도 농업경영 쪽의 일을 가지고 그의 말대로 ‘공부’하로 찾아갔을 것이다. 그는 이 젊은 자연 연구자를 곤란케 하는 일은 없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 걸터앉아 어쩌다가 한 번씩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양해를 구하면서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점심때나 밤참을 먹을 때 그는 화제를 물리학이나 지질학, 혹은 화학 방면으로 이끌어가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 밖의 다른 화제는, 정치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경영 문제마저도 충돌 내지는 상호 불만을 초래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짐작한 바로는 바자로프에 대한 그의 형의 증오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다른 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그의 짐작을 확실케 했다. 이 지방 여기 저기에 콜레라가 발생하기 시작하여 마리노 마을에서도 두 명의 농부를 데려가 버렸던 것이다.
어느 날 밤 파벨 페트로비치는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새벽녘까지 줄곧 신음했지만, 바자로프의 의료 기술에는 결코 의지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이튿날 그와 만났을 때
“왜 저를 부르러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는 바자로프에게 아직도 좀 핼쑥한 얼굴로, 그러면서도 어느 새 머리를 단정히 빗고 수염도 말끔히 깎은 그는
“자네 자신도 의학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바자로프는 침울한 얼굴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댁에는 그의 심중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대화 상대는 되어줄 만한 한 사람이 있었다… 페니치카였다.
바자로프는 대개 아침 일찍 정원이나 혹은 뒤뜰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가 그녀의 방에 들르는 일은 없었으며, 그녀 역시 단 한 번 미짜를 목욕시켜도 좋을지 어떨 지를 물으러 그의 방 근처까지 갔던 적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를 아주 신용했고 무서워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앞에 있을 때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와 함께 있을 때보다 한층 더 자유스럽고 마음이 푹 놓이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일었지만, 어쩌면 그녀가 바자로프에게는 귀족적인 것, 즉 자신이 이끌리기도 하고 두려워하고 있기도 한 그 고급스러운 면이 전혀 없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뛰어난 의사이며 소탈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가 옆에 있을 때에는 별로 거리낌 없이 자기 아이를 돌보았다. 한번은 그녀가 갑자기 현기증이 일고 두통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손에 의해 직접 약 한 숟가락을 받아먹기까지 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앞에서는 웬일인지 그녀는 바자로프를 본체만체했다. 숨기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예의 범절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파벨 페트로비치만큼은 전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감시하게 되었고, 그 조끼가 딸린 양복을 입고는 노려보는 눈초리로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체 마치 지면에 우뚝 솟아나기라고 한 것처럼 그녀 등 뒤로 불쑥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소름이 오싹 끼쳐”
하고 페니치카는 두냐샤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쉬고는 또 다른 ‘무정한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소녀의 마음에 ‘잔인한 폭군’으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페니치카는 바자로프를 좋아했고, 그도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의 그의 얼굴 표정까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그 얼굴은 밝고 거의 선량함에 가까운 표정으로, 여느 때와 마찬가지고 태연한 태도에 뭔가 장난기 비슷한 것이 뒤섞이는 것이었다. 페니치카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젊은 여성의 일생 가운데에는 여름 장미처럼 갑자기 꽃피우고 찬란해지는 시기가 있는데, 페니치카가 바로 그러한 시기를 맞은 것이다. 모든 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북돋워주었으며, 그 무렵 계속되었던 7월의 더위마저 그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얇은 흰옷을 입고 있으면 그녀는 한층 더 희고 가뿐하게 보였다. 햇볕에 타는 것은 그녀에게 별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무더위만큼은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그녀의 볼이나 귀를 불그레하게 물들이고 몸 전체에 나른함을 불어넣어 그 아름다운 눈에 졸린 듯한 피로함을 나타내게 했다. 그녀는 거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팔은 걸핏하면 무릎위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녀는 걸음도 간신히 걸었으며, 노상 헉헉거리면서 우스꽝스러우리만큼 지친 모습으로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여보, 찬물에 목욕을 하면 좀 어떨까?”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그다지 물이 잦아들지 않는 못 하나에 삼베로 둘러친 커다란 목욕장을 만들어주었다.
“아아,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하지만 못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릴 거예요. 아니면 돌아오는 사이에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정말이지 뜰에는 그늘 하나 없다니까요.”
“정말 그렇군, 그늘이 없지”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대답하고는 눈썹을 비벼댔다. 어느 날 아침 여섯 시가 지나 산책에서 돌아오던 바자로프는, 이미 꽃철은 지났지만 아직도 파랗게 무성한 라일락 정자에 않아 있는 페니치카를 발견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벤치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이슬에 젖어 있는 희불그레한 커다란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아,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하고 그녀는 말하고 그를 보기 위해 머릿수건의 한 끝을 조금 들어 올렸는데, 그러는 바람에 그녀의 한쪽 팔이 팔꿈치께까지 드러나 보였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하고 그녀 옆에 앉으면서 바자로프는 말했다.
“꽃다발을 만들고 계시는군요.”
“예, 아침 식사 테이블에 놓을까 해서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좋아하시는 꽃이거든요.”
“하지만 아침 식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합니다. 꽃이 정말 많군요.”
“지금 막 꺾은 거예요. 좀 더 있으면 더워져서 밖에 나올 수가 없는 걸요. 그래도 지금 당장은 숨을 쉴 수 있으니까요. 전 이 더위에 그만 지쳐버렸어요. 병이나 나지 않을까 정말 걱정이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맥을 좀 짚어볼까요.”
하고 바자로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맥을 찾아냈지만, 그 맥박수를 세어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백 년쯤은 사시겠습니다.”
하고 그는 그녀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아아, 그건 지겨운 일이에요.”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어째서요? 당신은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 년이라니요. 집에 여든다섯 살 되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야말로 대단한 고통이었어요. 피부는 새카매지고 귀는 먹고 등은 굽고, 노상 기침을 하셨는데, 당신 자신은 오직 괴로워하실 뿐이었어요. 그렇게 살면 뭘 해요?”
“그렇다면 젊은 쪽이 더 좋으십니까?”
“그야 물론이죠.”
“젊은 것이 왜 좋습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왜냐고요? 보세요, 전 지금 젊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잖아요. 갈 수도 올 수도 있고 또 물건을 운반하는 것도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요… 이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젊었거나 늙었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찬가지라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 젊음 따위가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 외로운 가난뱅이인데요…”
“그런 건 얼마든지 당신 자신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말입니다, 제 나름대로 되질 않더군요. 하다못해 누군가가 저를 불쌍히 여겨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요.”
페니치가는 바자로프를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잡조 계신 그건 무슨 책이에요?”
하고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이거 말입니까? 학술 서적입니다. 매우 복잡한 책이지요.”
“당신은 언제나 공부만 하고 계시는 군요. 지루하지 않으세요? 당신은 이제 뭐든지 다 알고 계시잖아요?”
“뭐든지라고 말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지요. 좀 읽어보십시오.”
“하지만 전 그런 건 하나도 몰라요. 당신의 책은 러시아어로 되어 있나요?”
하고 묵직하게 제본된 책을 두 손으로 받아들면서 페니치카가 물었다.
“무척 두껍군요.”
“러시아어로 된 책입니다.”
“그래도 역시 전 아무것도 모를 거예요.”
“저 역시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시기를 바라고 드리진 않았습니다. 전 단지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읽는지 그것이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당신의 코끝이 매우 예쁘게 움직이니까요.”
페니치카는 마침 펼쳐진 ‘크레오소트(나무타르를 증류하여 기름기를 정제한 것. 목재방부에 쓰임)’에 관한 곳을 나직이 읽기 시작하다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책을 내던지고 말았다… 책은 벤치에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당신은 웃을 때도 보기가 좋습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만하세요.”
“당신은 말할 때도 보기 좋습니다. 마치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 같아요.”
페니치카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군요.”
하고 손가락으로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말했다.
“제가 지껄이는 소리 따위는 들어서 뭘 해요? 당신은 꽤 현명한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잖아요.”
“아, 페도이샤 니콜라예브나,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온 세상 귀부인들을 전부 합쳐서 당신의 팔꿈치만큼의 값어치도 안 될 겁니다.”
“또 그런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하고 페니치카는 속삭이고 두 손을 꼭 쥐었다. 바자로프는 땅에서 책을 주워 올렸다.
“이건 의학책입니다. 어째서 당신은 내 던지는 겁니까?”
“의학책이라고요?”
하고 페니치카는 되풀이하고 나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예요, 정말 당신이 그 물약을 주신 후로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미짜가 무척 잘 자요, 당신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무척 훌륭한 분이에요. 정말”
“사실 의사들은 마땅히 그 대가를 지불받아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하고 엷은 웃음을 띄면서 바자로프가 말했다.
“의사들은 당신도 아시다시피 욕심이 꽤 많은 사람들이니까요.”
페니치카는 바자로프 쪽으로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리쬐는 햇빛에 반사되어 한층 어둡게 보였다. 그의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그녀로서는 알 수 가 없었다.
“당신만 좋으시다면 기꺼이… 제가 니콜라이 피트로비치에게 여쭈어 볼 수는 있지만요…”
“제가 돈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천만에. 전 당신에게 돈 따위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뭘?”
하고 페니치키가 말했다.
“뭐냐고요?”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맞혀보십시오.”
“전 수수께끼를 잘 풀지 못해요.”
“그럼 제가 말씀드리지요. 전 이걸 바랍니다…. 이 장미 한 송이를”
페니치카는 손뼉까지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바자로프의 소원이 그녀에게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웃고 나서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바자로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그러죠”
하고 그녀는 간단히 말하고는 벤치에 엎드려서 장미를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게 좋을까요? 붉은 것으로 할까요, 아니면 흰 것으로?”
“붉은 것으로, 너무 크지 않은 것으로 부탁합니다.”
그녀는 허리를 똑바로 폈다.
“자, 받으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다가 내밀었던 손을 도로 움츠렸다. 그러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정자 입구를 흘끗 보고 나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십니까?”
“아니에요… 그분은 밭에 나가셨어요… 그리고 전 그분은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파벨 페트로비치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뭐라고요?”
“그분은 저기서 걷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니에요…, 아무도 없어요.”
하고 페니치카는 바자로프에게 장미를 건네주었다.
“어째서 당신은 파벨 페트로비치를 두려워하십니까?”
“그분은 언제나 저를 위협하고 계세요. 말씀은 안하시지만 매우 이상한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세요. 당신도 그분을 좋아하지 않으시더군요. 당신은 전에 항상 그분과 언쟁을 하셨지요. 무슨 언쟁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신은 그분을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하신다는 걸 알았어요. 이런 식으로 말예요…”
페니치카는 바자로프가 파벨 페트로비츠를 뜻대로 눌러버리는 모습을 두 손으로 시늉해 보였다. 바자로프는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분이 저를 이길 것 같으면 당신은 제 편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저 같은 것이 어떻게 당신 편을 들 수 있겠어요? 게다가 어느 누구도 당신을 굴복시킬 순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저를 때려눕힐 수 있는 손가락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어느 손가락인데요?”
“그럴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자, 맡아보십시오, 당신이 주신 장미의 향기가 무척 좋군요.”
페니치카는 목을 빼고 꽃 가까이에 얼굴을 댔다… 그녀의 머리에 썼던 수건이 어깨로 미끄러져 내리자 약간 헝클어진, 윤기가 흐르고 검고 부드러운 머리 다발이 드러났다.
“잠깐만, 저도 당신과 함께 맡고 싶군요.”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굽혀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 힘껏 키스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밀어내는 힘이 약했으므로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출 수가 있었다. 라일락 그늘 속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페니치카는 황급히 벤치의 저쪽 끝으로 옮겨 앉았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모습을 드러내고 가볍게 인사하더니, 악의에 찬 싸늘한 말투로 “당신, 여기 있었군.” 하고 말하곤 저쪽으로 가버렸다. 페니치카는 곧 장미꽃을 전부 주워 모아 정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녀는 나가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바자로프는 최근에 있었던 또 하나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경멸해주고 싶도록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머리를 저으면서 ‘이제 정식으로 뻔뻔스러운 바람둥이들 속에 끼여들었군’하고 냉소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면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한편 파벨 페트로비치는 정원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잡목 숲 가까이에까지 왔다. 그는 오랫동안 거기 멈춰 서 있었다. 그가 아침 식사를 할러 돌아오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그에게 몸이 불편한 게 아니냐고 염려스럽게 물었다. 그토록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보였던 것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가끔 황달로 고생하잖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침착한 어조로 그에게 대답했다.
24
두 시간쯤 지나 그는 바자로프의 방문을 두드렸다.
“자네의 공부를 방해하게 되어 미안하네.”
그는 창가의 의자에 앉으면서 상아꼭지가 달린 아름다운 지팡이(그는 평소에는 지팡이를 짚는 일이 없었다)에 두 손을 얹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게 5분만 할애해주도록 부득이 부탁하는 바이네… 기껏해야 5분일세.”
“좋으실 대로 하시죠”
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바자로프의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다.
“5분이면 충분하네.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물어보신다고요? 뭡니까?”
“들어보게, 자네가 내 아우네 집에 머무르기 위해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자네와 이야기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었네. 또 많은 문제에 대한 자네의 의견을 들을 기회도 가질 수 있었지.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나 혹은 여럿이 함께 이야기하는 가운데에서 결투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같네. 이 문제에 대해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네.”
바자로프는 바벨 페트로비츠를 맞으러 일어서려다가 다시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는 팔짱을 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 때 결투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 역시 생각해볼 문제지요.”
“결국 자네는 결투에 대한 자네의 이론적 견해와는 상관없이 실제에 있어서는 자네 자신이 모욕을 당할 경우 그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 그래?”
“정확히 제 의중을 꿰뚫어보셨군요.”
“아주 잘됐네. 자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대단히 기쁘네. 자네의 그 말은 애매한 상태로부터 나를 끌어내주었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로부터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네. 나는 남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 거니까. 또 나는… 신학교의 사동은 아니니까. 어쨌든 자네의 말은 어떤 필연적인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출해주었어. 나는 자네와 결투하기로 결심했네.”
바자로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하고 말씀입니까?”
“분명 자네하고 말일세.”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엉뚱하게.”
“그 이유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네만”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차라리 잠자코 있는 편이 나을 줄로 생각하네. 내 생각엔 자네는 이 집안에 필요 없는 사람일세. 나는 자네를 용서할 수가 없어. 자네를 경멸해. 그래도 충분치 못하다면…”
파벨 페트로비치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바자로프의 눈도 갑자기 타 올랐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저를 빌미 삼아 자신의 기사도 정신을 시험해보려고 하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당신의 그런 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어찌 되든 상관 않겠습니다.”
“충심으로 자네에게 감사하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그럼 내 청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폭력적인 수단을 쓰지 않더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그 지팡이로 말인가요?”
하고 바자로프는 차갑게 말했다.
“옳은 생각입니다. 저를 모욕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전혀 위험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도 이제 신사 체면을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 신사답게 당신의 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훌륭하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말하고는 지팡이를 한쪽 구석에 세워 놓았다.
“그럼 즉시 우리들의 결투 조건을 두어 가지 상의하세. 그런데 우선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자네는 내 청에 대한 구실이 될 만한 약간의 언쟁의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그런 형식 따위는 없는 것이 좋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우리가 서로 충돌하게 된 근본 원인을 너무 깊이 캐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서로가 미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나?”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비꼬는 투로 그를 흉내 내어 말했다.
“결투 조건 그 자체에 대해서 말인데, 우리는 서로 입회인들이 없으니 대체 어디서 그들을 구해올 수 있겠나?”
“정말 어디서 구해오지요?”
“그럼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지? 결투는 내일 아침 일찍, 가령 여섯시로 해두세. 숲 저쪽에서, 무기는 권총으로 하세. 그리고 거리는 열 발짝…”
“열 발짝이라고요? 그렇게 하지요. 그 정도의 거리라면 우린 충분히 서로 미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여덟 발짝도 좋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좋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사격은 두 번일세. 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각자 자기 주머니에 편지를 넣어두도록 하지. 거기에다 자기가 죽은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써서 말일세.”
“그건 찬성하고 싶지 않은데요.”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어쩐지 좀 프랑스 소설 같군요.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자네도 동의하겠지만, 살인 혐의를 받는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잖나.”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불쾌한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있긴 있습니다. 우린 입회인들은 없어도 증인은 둘 수 있습니다.”
“그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피오트르입니다.”
“피오트르라니, 그게 누군가?”
“당신 동생의 하인 말입니다. 그는 현대 교육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라 이런 경우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여 자기 역할을 완전무결하게 해낼 것입니다.”
“자네, 농담하고 있는 건가?”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제 제안을 잘 생각해보시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상식적이며 간편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피오트르로 하여금 그만한 각오를 하게하고 사격 장소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자네는 여전히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군.”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이토록 친절하게 준비를 해주니 내 어찌 불평을 말할 수 있겠나… 그럼 다 됐군 그래… 그런데 자네는 권총을 갖고 있나?”
“어디서 권총 같은 것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파벨 페트로비치씨? 전 군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것을 쓰도록 하게. 믿어도 좋을 걸세, 그것을 쓰지 않은 지가 5년이나 됐으니까.”
“그거 참 반가운 소리군요.”
파벨 페트로비치는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그럼 이제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자네가 다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이곳을 떠나는 것만이 남았군. 그럼 이만 실례하겠네.”
“그럼 다음에 꼭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하고 손님을 배웅하면서 바자로프는 말했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나가자 바자로프는 문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흥, 빌어먹을. 어쩌면 그렇게 점잖은 말투로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한담. 우리는 얼마나 우스운 짓을 했는가. 마치 재주를 익힌 개들이 멋들어지게 뒷발로 춤을 추듯이.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어. 그랬다면… (바자로프는 생각만 해도 얼굴이 새파래지고 자존심이 극도로 상해 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랬다면 나는 그 녀석을 고양이 새끼처럼 목 졸라 죽였을 거야.”
그는 다시 현미경 쪽으로 돌아왔지만 그 마음의 고동은 그치지 않아, 관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침착성이 사라져버렸다. ‘그 녀석이 오늘 우릴 본 것임에 틀림없어’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정말로 제 아우를 위해 이토록 감싸주는 것일까? 게다가 키스쯤이야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분명 뭔가 다른 문제가 있을 거야. 흥, 그렇겠지. 역시 그 자신이 그녀에게 반한 걸 거야. 그거야 뻔한 노릇이지. 어쩌다가 이런 딱한 처지가 되었을까, 어쩌다가? 정말 더럽군.’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더럽게 됐어, 어느 모로 보더라도. 무엇보다도 탄알에 이마가 뚫려야만 하니. 어쨌든 여기서 떠나야만 해. 그런데 여긴 아르카디와… 그 호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참 더럽게 됐군, 더럽게 됐어.’
그날 하루는 어쩐지 꾸물거리며 조용히 저물어 갔다. 페니치카는 마치 이 세상에 없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쥐구멍 속의 쥐새끼처럼 자기의 작은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기대를 걸고 있었던 밀밭에 깜부기가 생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 기분 나쁜 정중한 태도로 모두를, 마침내는 프로코피치까지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다 말고 그것을 찢어 책상 밑에 던져버렸다. ‘내가 죽는다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결국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는다. 아니, 나는 이제부터 이 세상에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는 피오트르에게 중요한 용무가 있으니 내일 새벽에 자기에게 와주도록 일렀다. 피오트르는 그가 자기를 페테르부르크로 함께 데려가 주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늦게야 잠이 들었는데, 밤새껏 어수선한 꿈으로 시달렸다… 오딘초바 부인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그녀가 자기 어머니가 되는가 하면 그 뒤에 검은 새끼 고양이가 걸어가기도 하고, 그 새끼 고양이가 페니치카로 보이기도 했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자기 앞에 커다란 숲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쨌든 그는 꿈에서도 그 작자와 결투를 해야만 했다.
피오트르는 네 시경에 그를 깨웠다. 그는 곧장 옷을 주워 입고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상쾌하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맑은 유리빛 하늘에 조그만 얼룩 구름이 드문드문 희부연 양떼처럼 떠 있었다. 잔이슬이 나뭇잎이나 풀 위에 맺혀 있었고 거미줄 위의 이슬방울들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눅눅한 대지는 붉은 빛 아침놀을 아직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선 온통 종달새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숲 가까이에 이르자 그 어귀에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아, 그제야 비로소 피오트르에게 그가 어떠한 임무를 맡아야 하는지를 털어 놓았다. 이 교양 있는 하인은 깜짝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바자로프는 단지 멀리 서서 지켜보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과 또 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면서 하인을 다독거렸다.
“그렇지만 말이야.”
하고 그는 덧붙였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가를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피오트로는 두 손을 좌우로 벌리고 눈은 내리깔고,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자작나무에 기대어 섰다. 마리노 마을로 통하는 길이 이 작은 숲 주위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어제 이후로 아직 차바퀴나 사람 발자국이 지나간 흔적이 없는 가벼운 먼지가 그 길 위를 덮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자기도 모르게 그 길을 따라 보면서 풀을 뽑아 이로 씹고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참, 어쩌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줄곧 뇌까리고 있었다. 아침의 찬 공기가 그를 두어 번 후들후들 떨게 했다. 피오트르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를 흘긋 바라보았으나, 바자로프는 다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띌 뿐 겁을 집어먹고 있지는 않았다.
말발굽소리가 길 쪽에서 들려왔다… 한 농부가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농부는 발을 묶은 두 마리의 말을 앞세워 몰고 있었다. 그리고 바자로프 옆을 지나치면서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어쩐지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이 좋지 못한 전조로서 피오트르를 당황케 한 것 같았다. ‘저 사나이도 퍽 일찍 일어났군’ 하고 바자로프는 생각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적어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우리는…’
“오신 것 같습니다.”
하고 갑자기 피오트르가 속삭였다. 바자로프는 고개를 들어 파벨 페트로비치를 보았다. 얇은 바둑판 무늬의 저고리에 눈처럼 흰 바지를 입고서 그는 바쁜 걸음으로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겨드랑이 밑에 녹색 나사로 싼 상자 하나를 끼고 있었다.
“미안하네. 자네를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군.”
하고 그는 말하고 비로소 바자로프와 피오트르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것은 이 하인을 증인으로 대우하여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되도록 하인을 깨우고 싶지가 않아서.”
“괜찮습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대답했다.
“우리도 방금 전에 왔는걸요.”
“아아. 그거 잘됐군.”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안 보이는군.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럼 시작할까?”
“그러지요.”
“새삼스럽게 설명을 요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자네가 손수 탄알을 장전하겠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상자에서 권총을 꺼내면서 물었다.
“아닙니다. 직접 장전하여 주십시오. 전 거리를 재기로 하겠습니다. 제 발이 더 긴 것 같으니까요.”
하고 엷은 웃음을 띄면서 바자로프는 덧붙였다.
“하나, 둘, 셋…”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하고 피오트르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그는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뭐라 말씀하시든 저는 저쪽에 가 있으렵니다.”
“넷… 다섯… 그쪽에 가 있어도 돼. 나무 그늘에 서서 귀는 막아도 좋지만 눈만은 감지 말아주게. 그리고 누구든 쓰러지거든 달려와서 일으키는 거야. 여섯… 일곱… 여덟”
하고 바자로프는 멈춰 섰다.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그는 파벨 페트로비치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두 걸음 더 나아갈까요?”
“마음대로”
하고 두 발의 탄알을 재면서 그는 말했다.
“그럼 두 걸음 더 나아가기로 하겠습니다.”
하고 그는 구두 끝으로 선을 그었다.
“여기가 경계선입니다. 그런데 경계선에서 각자 몇 걸음씩 떨어집니까? 이것도 역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았군요.”
“나는 열 걸음이 좋다고 생각하네.”
하고 바자로프에게 권총 두 자루를 모두 건네주면서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잡게.”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들의 결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좀 별나군요. 피오트로의 표정을 좀 보십시오.”
“자넨 늘 우스갯소리만 하는군.”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나는 우리들의 결투가 사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자네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자네에게 미리 말해두는 것이 A bon entendeur, salut(내 의무라고 생각되는군). ‘영리한 사람은 한 마디만 하면 안다’라고들 하니 말일세.
“아, 저도 우리가 서로 죽일 결심을 했다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utile dulci(‘유익한 것’과 ‘유쾌한 것’ (Lat.))을 결부시켜서… 웃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 어째서 그런가요? 당신이 제게 프랑스어로 말씀하시니, 저도 당신에게 라틴어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싸울 작정일세.”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렇게 되뇌고 자기 자리로 향했다. 바자로프도 경계선에서 열 걸음을 세고 멈춰 섰다.
“준비는 다 됐는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다 됐습니다.”
“그럼 결판을 내세.”
바자로프는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총구를 천천히 들어올리면서 바자로프를 향해 나아갔다… ‘저 작자는 정확히 내 코를 겨냥하고 있군 그래’ 하고 바자로프는 생각했다. ‘실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군, 강도같은 녀석. 나는 저자의 가슴에 매달린 시계줄을 노려야지…’
뭔가가 바자로프의 한쪽 귀를 휙 하고 쓰쳐갔다. 그러자 그 순간 총을 발사하는 소리가 울렸다. ‘총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로군’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또 한 걸음 내디뎌 조준도 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가볍게 몸을 떨더니 한 손으로 넓적다리를 꽉 잡았다. 한 줄기 피가 그의 흰 바지 위로 흘렀다. 바자로프는 권총을 집어던지고 적수에게로 다가갔다.
“다치셨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자네는 나를 경계선까지 오게 할 권리가 있었던 걸세.”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하지만 이만한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네. 약속대로 하면 각자가 또 한 번씩 쏠 수 있잖은가?”
“미안하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룹시다.”
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하고 창백해지기 시작하는 파벨 페트로비치를 끌어안았다.
“이제부터 저는 결투자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상처를 보아야겠습니다. 피오트르. 이리 와요, 피오트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이까짓 상처는 하찮은 것일세… 나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떠듬떠듬 말했다.
“그리고… 해야지… 다시 한 번…”
그는 자기 콧수염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손에 힘이 풀리고 현기증이 일어나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니, 이런. 기절해버렸군. 웬일이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를 풀밭에 내려놓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바자로프는 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봐야겠군.”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피를 닦고는 상처 주위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뼈는 괜찮은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탄알은 그다지 깊이 박히진 않았어. 다만 바깥 대퇴근을 스쳤을 뿐이야. 3주일만 지나면 춤이라도 출 수 있어. 그런데 기절을 하다니. 아아, 정말 지나치게 예민한 인간이로군. 어쩌면 피부가 이렇게도 얇을까?”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등 뒤에서 피오트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자로프가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물을 좀 가져오게. 이 분은 나나 자네보다도 더 오래 사실 거야.”
그러나 꽤 개화되었다는 이 하인은 어쩐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돌아가실 겁니다.”
하고 피오트르는 중얼거리며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자네 말이 맞아… 거 무슨 바보 같은 표정인가.”
하고 부상당한 신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 물을 좀 떠오라니까, 맹추야.”
하고 바자로프가 외쳤다.
“필요없네… 그저 일시적인 vertige(현기증이었을 뿐이네)… 일어나 앉겠으니 손을 좀 잡아주게… 약간 긁힌 상처쯤은 그저 뭘로 좀 묶어 매면 그만이야.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네. 아니면 마차를 좀 불러주던가. 결투는 자네가 만일 더 원치 않는다면 이 이상 하지 말기로 하세. 자네는 훌륭했네… 오늘만큼은 말일세. 오늘만은 그렇단 말이야, 알겠는가?”
“지난 일은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또 미래에 대해서도 역시 지나치게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곧 이곳을 떠날 생각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 당신 다리에 붕대를 감아드려야겠군요. 당신의 상처는… 그렇게 위험하진 않지만, 역시 피를 멈추게 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런데 우선 이 녀석부터 정신 차리게 해야겠군요.”
바자로프는 피오트르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는 마차를 부르러 보냈다.
“아우가 놀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말했다.
“그에게 알려서는 안 돼”
피오트르는 곧장 달려갔다. 그가 마차를 부르러 뛰어가고 있는 동안, 두 적수는 잠자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바자로프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역시 화해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태도와 패배가 부끄러웠고 자신이 계획한 사건 자체도 부끄럽게 여겨졌다. 더욱이 사건이 이보다 더 좋게 매듭지어질 수는 없으리라고 그 역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자는 더 이상 이곳에 얼굴을 들고 머물고 있지는 못 할 거야’ 하고 그는 자위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좋은 기분일 수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친구들끼리라면 이러한 의식이 유쾌하겠지만 원수끼리는 실로 불쾌한 것이다. 특히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처지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다리를 너무 단단히 졸라맨 게 아닐까요?”
하고 마침내 바자로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하고 나서 잠시 후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우를 속일 수는 없네. 우린 정치문제로 말다툼을 했다는 정도라고 그에게 말해야만 할 걸세.”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제가 모든 영국 숭배자들을 철저히 조소했노라고 말씀하여도 좋습니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는 저 사람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한 농부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그는 결투하기 바로 몇 분전에 발이 묶인 말들을 몰고 바자로프의 옆을 지나가던 그 사람이었는데, 그가 이번엔 같은 길을 되돌아오면서 그들을 보자 길을 비켜서며 모자를 벗었던 것이다.
“알게 뭡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농부들이란 일찍이 래드클리프(Mrs. Radcliffe, Ann Radcliffe, 영국의 여류작가) 부인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극히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알겠습니까? 저 사람 자신도 자기를 모를 텐데요.”
“아아,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는군.”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내다가 갑자기 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했다.
“저 봐, 저 바보 녀석 피오트르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모양이군. 아우가 마차를 타고 이리로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바자로프가 뒤돌아보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새파랗게 질려 사륜마차를 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차가 채 멈추지도 전에 뛰어내려 형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이게 웬 일인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넌 지나차게 염려하고 있는 거야. 난 바자로프 군과 언쟁을 좀 했을 뿐이고, 그 때문에 좀 앙갚음을 당한 것뿐이야.”
“하지만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신 겁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말씀 좀 해보세요.”
“글쎄 뭐랄까, 바자로프 군이 로버트 피르 경(Sir Robert Peel, 영국의 정치가)에 대해 무례한 비평을 했기 때문이야. 또 이번 일은 모두 내게 잘못이 있는 것이고, 바자로프의 태도는 훌륭했어. 내가 이 사람을 불러낸 거야.”
“하지만 형님, 피가 흐르고 있다고요.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럼, 넌 내 혈관에는 물이라도 흐르고 있는 줄 알았더냐? 이렇게 피를 흘리는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한 일인지도 몰라. 그렇지 않은가, 의사 선생? 제발 나를 마차에 태워주게. 그리고 제발 우울해하지 말게. 나는 이제 곧 건강해질 테지. 그래, 그런 식으로. 이제 됐어. 자, 마부, 그만 가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마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자로프는 뒤에 처지려고 했다.
“자네가 형님을 좀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말했다.
“그동안 나는 시내에서 다른 의사를 데려오도록 할 테니”
바자로프는 잠자코 머리를 숙였다. 한 시간쯤 후에는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미 발에 붕대를 솜씨 있게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 집안이 떠들썩해서 페니치카는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근심에 잠겨 남 몰래 손을 쥐어짜고 있었는데, 파벨 페트로비치는 특히 바자로프와 어울려 웃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얇은 린네르 루바시카에 ?은 저고리를 입고 터키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커튼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또 음식을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농담식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는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의사가 도착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바자로프 자신도 그렇게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바자로프는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얼굴이 아주 누렇게 떠 있었으며, 환자의 방에는 아주 잠깐씩 들를 뿐이었다. 두 번쯤 페니치카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으나, 그녀는 두려운 듯이 움찔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새로 온 의사는 그에게 찬 음식을 권하며 별로 위험할 것은 없다고 말함으로써 바자로프의 증언을 확인해 주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형은 자신의 부주의로 다친 것이라고 말하자 그 말에 의사는 흠 하고 미심쩍어했으나 곧 그가 은화 25루블을 건네주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요.”
온 집안사람들은 누구 하나 자려고 들지 않았고 옷을 벗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쉴 새 없이 발뒤꿈치를 들고 형의 방으로 들어갔다가는 다시 발뒤꿈치를 들고 살짝 나왔다. 환자는 의식을 잃기도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기도 하는가 하면 아우에게 프랑스어로 ‘Conchez-vous(자거라)’ 하고 말하기도 하고 또 물을 마시고 싶다고도 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페니치카에게 레몬수가 든 컵을 가져가게 했다. 그는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고는 그것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버렸다. 아침녘에는 열이 좀더 오르더니 가벼운 헛소리까지 했다. 처음에 파벨 페트로비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는데, 이윽고 그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침대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는 아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니콜라이. 페니치카는 어딘가 넬리를 닮은 데가 있지?”
“넬리라니, 누구 말입니까, 형님?”
“누구냐니? P공작 부인 말이야… 특히 얼굴 윗부분이 ‘C'est de la meme famille(같은 혈통일 거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내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한번 스쳐 지나간 감정이 이다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때에 떠오르나다니’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아, 그렇게 하찮은 여자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슬픈 듯이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신음소리를 냈다.
“갑자기 나타난 무례한 녀석이 감히 손을 대는 것을 난 참을 수가 없었어…”
하고 몇 분 뒤에 그는 간신히 말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저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그는 형님이 대체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여덟 시경에 바자로프가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바자로프는 이미 짐을 모두 꾸려놓고 개구리와 온갖 곤충과 새들을 다 놓아주고 난 뒤였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나?”
하고 그를 맞기 위해 일어서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도 자네의 기분을 모르는 게 아니니 자네의 의사에 전적으로 찬성하네. 물론 우리 가엾은 형님에게 잘못이 있네. 따라서 형님은 벌을 받은 것일세. 형님 자신도 자네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자네를 부추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네. 자네로서는 이 결투를 피할 수 없었으리라고 나는 믿고 있네. 그건…그건…어느 정도까지는 자네와 형님 상호간의 견해가 항시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걸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이 혼란되기 시작했다.) 우리 형님은 구식이라 성미가 까다롭고 완고하시네… 고맙게도 그 정도로 그쳤으니 다행이야. 나는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모두 강구해두었네…”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해서 제 주소를 남기고 가겠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네, 예브게니 바실리예치… 자네가 우리 집에 머물러 있어주었는데, 이런… 이런 결과를 보게 되어 매우 유감일세. 게다가 더 유감스러운 것은 아르카디가…”
“저는 틀림없이 그와 만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만.”
하고 바자로프는 대꾸했는데, 그는 언제나 모든 종류의 ‘변명’이나 ‘해명’에는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못 할 경우에라도 제발 말씀 좀 잘 전해주시고 또 제 유감의 뜻도 표해 주십시오.”
“나 역시 잘…”
하고 인사를 나누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렸다. 바자로프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를 방으로 불러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언제나처럼 냉담했다. 그는 파벨 페트로비치가 자못 관대한 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니치카와는 작별 인사를 나눌 수가 없었다. 다만 창문으로 통하여 그녀와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녀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틀림없이 저 여자는 저대로 묻혀버릴 것이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빠져나올지도 모르지.’ 반면 피오트르는 매우 슬퍼하여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울었을 정도였으므로 바자로프가 “자네, 울보로군?” 하고 말하며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혀주기까지 했다.
또 두냐샤는 슬픔을 감추기 위해 숲으로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슬픔의 원인이 된 이 사나이는 마차에 올라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4마장쯤 되는 곳에 있는 모퉁잇길에서, 한 줄로 펼쳐져 있는 키르사노프 댁의 택지나 그 신축한 주인집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는 다만 침을 한번 퉤 하고 뱉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주받을 귀족들 같으니” 하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더한층 외투 속으로 깊숙이 파묻혀버렸다.
파벨 페트로비치의 건강은 얼마 안 가서 좋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일주일쯤 더 자리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는 자기표현에 의하면 포로생활에 꽤 참을성 있게 견뎌내고 있었으나, 단 화장에 대해서만은 그야말로 법석을 떨었으며 늘 향수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잡지 등을 읽어주었고 페니치카는 종전대로 육즙이나 레몬수, 달걀 반숙, 차 등을 날아왔다. 그러나 그의 방에 들어설 적마다 남모르는 공포가 그녀를 사로잡곤 했다. 파벨 페트로비치의 뜻하지 않은 행위는 온 집안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그녀였다.
다만 프로코비치 만큼은 당황해하는 내색도 없이 “내가 젊었을 때에는 나리들이 흔히 결투를 하곤 했는데 그것을 다만 기품 있는 나리들끼리의 행위로, 저런 사기꾼 따위가 버릇없이 흉내를 내면 그 벌로서 마구간에서 실컷 두들겨 패도록 분부하셨다.” 하고 설명했다.
페니치카는 거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파벨 페트로비치가 매우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은 그녀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등뒤로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끊임없는 불안으로 다소 야위기는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더 예쁘게 보였다.
하루는 (아침이었다) 파벨 페트로비치가 기분이 좋아져서 침대에서 소파로 옮겨 앉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의 용태를 묻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곡식 창고로 나갔다. 페니치카는 차 한 잔을 들고 와 그것을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파벨 페트로비치가 그녀를 만류했다.
“무얼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페도이샤 니콜라예브나”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라고 있나요?”
“아니에요…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도 차를 따라 주어야하기 때문에.”
“당신이 아니더라도 그런 일은 두냐샤가 할 거예요. 잠깐이라도 아픈 사람 옆에 있어줘요. 그리고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하니.”
페니치카는 입을 다문 채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다른 게 아니라”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하고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나는 전부터 당신에게 묻고 싶었는데, 당신은 어쩐지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더군요?”
“제가요?”
“그래요, 당신이 말이에요. 당신은 한 번도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는데, 무슨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페니치카는 얼굴을 붉히면서 파벨 페트로비치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어쩐지 낯설게 여겨져 그녀의 가슴은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어째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어요?”
하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냐고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누군가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닙니까? 나에 대해섭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것 같지도 않군요. 이 집 안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섭니까? 그것 역시 아닌 것 같군요. 설마 아우에 대해서? 그러나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겠지요?”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세요, 페니치카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당신도 알겠지만 거짓말처럼 큰 죄악은 또 없어요.”
“전 거짓말 같은 것 하지 않습니다. 파벨 페트로비치.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럼 아우를 누구와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군요?”
“그분을 대체 누구와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라니요, 상대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얼마 전에 떠난 그 신사하고라도.”
페니치카는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 그런 말씀일. 파벨 페트로비치, 무엇 때문에 저를 이토록 괴롭히는 겁니까? 제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씀입니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 …”
“페니치카”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언짢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보았다는 것을 당신도 알잖소…”
“당신이 뭘 보셨다는 겁니까?”
“왜, 그… 정자 안에서.”
페니치카는 머리끝에서부터 귓불까지 새빨개졌다.
“하지만 대체 제가 무슨 죄가 있단 말씀이에요?”
하고 그녀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몸을 약간 일으켰다.
“당신에겐 죄가 없단 말입니까? 과연 없을까요, 조금도?”
“저는 이 세상에서 오직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 평생토록 사랑할 생각이에요.” 그녀는 흐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어 이렇게 말했다. “최후의 심판날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일이라면 저에겐 죄가 없습니다. 아니 없었습니다. 그 일로 의심을 받는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죽는 편이 나아요. 그것은 은인이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 대하여…”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파벨 페트로비치가 자기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갑자기 화석처럼 굳어져버렸다. 그의 얼굴은 전보다 한층 창백해졌다. 그의 눈은 번쩍번쩍 빛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페니치카”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기묘한 속삭임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주시오, 아우를 사랑해줘요. 어느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말아요. 생각 좀 해봐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어요. 저 가엾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를 결코 버리지 말아줘요.”
이제 페니치카의 눈에서는 눈물이 말라 있었고 두려움도 지나가버렸다. 그만큼 그녀의 놀라움은 컸던 것이다. 그러나 파벨 페트로비치가, 다른 사람도 아닌 파벨 페트로비치 그 사람이 그녀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댄 채, 그렇다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따금씩 경련하듯 한숨을 내쉬고만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아’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혹시 발작이라도 일어난 건 아닐까?…’ 그러나 그 순간 그의 흘러간 전생애가 그의 마음 속에서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이 삐걱 하는 소리를 내더니 서둘러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를 자기 곁에서 밀쳐내고는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문이 열리고 즐거운 듯 생기가 도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붉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기가 도는 발그레한 얼굴을 한 미짜가 조그마한 루바시카만을 한 겹 걸친 채 아버지의 시골식 외투의 커다란 단추에다 작은 맨발을 올려놓고는, 그 가슴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페니치카는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어 그와 자기 아들을 두 팔로 감싸 안고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깜짝 놀랐다. 페니치카는 언제나 행동이 조심스럽고 얌전해서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결코 애정 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보, 어떻게 된 거요?”
하고 그는 말하고는 형을 바라보며 미짜를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형님, 혹시 기분이 언짢으신 건 아닙니까?”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에게 다가가면서 그는 물었다. 형은 린네르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 전혀… 오히려 난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
“갑자기 소파로 옮긴 게 잘못이었군요. 아니, 당신 어딜 가는 거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페니치카 쪽을 돌아보며 이렇게 덧붙였지만, 그녀는 이미 문을 찰칵 닫고 나가버린 뒤였다.
“전 형님에게 우리 집 대장부를 보여 드리려고 데리고 왔어요. 그 녀석이 제 큰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아이를 데려가 버렸담? 한데 형님,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동생”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점잔을 빼며 말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뜨끔했다. 그는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졌는데, 자기로서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동생”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되풀이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해주게.”
“무슨 소원입니까? 말씀해보세요.”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난, 네 일생의 행복이 모두 그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나는 지금 네게 말하려고 하는 이 일에 대해서 요즈음 줄곧 여러 모로 생각해왔어… 동생, 자네의 의무를, 성실하고 고결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주게. 비범한 인간인 자네가 보여주고 있는 유혹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짓은 이제 그만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형님?”
“페니치카와 결혼해주게… 그녀는 널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네 아들의 어머니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깜짝 놀라 뒤로 한발 물러서며 두 손을 쳐들었다.
“형님, 형님이 그런 결혼을 절대로 반대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는군요. 하지만 형님이 제 의무라고 말씀하신 그것을 제가 아직까지 실행하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다만 한 가지, 형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는 걸 모르시나요.”
“그런 경우에 나를 존경하는 따위의 짓은 쓸데없는 짓이야.”
하고 서글픈 미소를 띠며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받았다.
“나는 나보고 귀족주의라고 비난한 바자로프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게 됐어. 그러니 동생, 우리들은 이제 체면이나 차리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도록 하세. 우리는 이제 나이든 사람들이니 그저 점잖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린 이제 모든 허영심을 떨쳐버려야만 해. 즉 네가 말한 대로 우리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돼. 두고 보게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행복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테니.”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을 끌어안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형님은 제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하고 그는 소리 높여 말했다.
“형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현명한 분이라고 제가 항시 주장해온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저는 이제 형님이 얼마나 분별 있고 관대한 분이신가를 알게 되었어요.”
“가만, 가만”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의 분별 있는 형의 다리를 자극하지 않도록 해다오. 쉰이 다 된 나이에 소위처럼 결투를 하였으니 말이야. 그럼, 이 문제는 결정됐군. 페니치카는 내… ‘belle-soeur(계수씨)’가 되는 거지?”
“아, 파벨 형님. 하지만 아르카디가 뭐라고 할까요?”
“아르카디라니? 그 애도 매우 기뻐할 거야. 결혼은 그 애의 원칙에는 없는 것이겠지만, 그 대신 평등감이 그 애를 만족시켜 줄 거야. 게다가 실제로 au dixneuvieme siecle(19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신분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아아, 파벨, 파벨 형님. 다시 한 번 제게 키스해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심할 테니까요.”
형제는 서로 껴안았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네 생각을 지금 당장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되겠니?”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말을 받았다.
“형님과 무슨 이야기라도 있었습니까?”
“이야기? 우리들 사이에? Quelle idee(별소릴 다 하는 구나).”
“아니, 그럼 됐어요. 무엇보다도 먼저 완쾌하셔야죠.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잘 생각해봐야죠, 좀 더 검토해보고요…”
“그런데 너 정말 결심한 거지?”
“물론이죠. 형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이제 형님 혼자 있게 해드릴 테니 형님은 좀 쉬세요. 어떤 일에든 흥분하는 것은 해로우니까요… 다음에 또 이야기를 나누기로 해요. 제발 형님, 쉬세요. 건강을 되찾도록 말예요.”
‘아우는 왜 그토록 내게 고마워하는 걸까?’ 하고 혼자 남게 되자 파벨 페트로비치는 생각했다. ‘마치 그것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나는 아우가 결혼하면 곧 어디론가 멀리, 드레스덴이나 플로렌스에라도 가서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아야겠어.’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마에 향수를 좀 뿌리고 나서 눈을 감았다. 선명한 햇빛에 비친 그의 아름다운 머리는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흰 베개 위에 놓여 있었다… 그만큼 그는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25
니콜스코예 마을 정원에 있는 키가 훤칠한 물푸레나무 그늘 밑, 잔디밭 벤치에 카샤와 아르카디가 앉아 있었다. 그들 옆에는 피피가 사냥꾼들 사이에 ‘잠자는 잿빛 토끼의 모습’이라고 칭송되는 그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땅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아르카디와 카샤는 둘 다 잠자코 있었는데 그는 두 손에 반쯤 펼쳐진 책을 들고 있었으며, 그녀는 바구니 속에 남아 있는 흰 빵 부스러기를 꺼내어 몇 마리의 참새들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참새들은 그들 특유의 겁먹은 태도로, 그러나 다소 뻔뻔스럽게 그녀의 발 바로 밑까지 날아와서는 짹짹거리고 있었다. 산들바람은 물푸레나무 이파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그늘진 작은 길과 피피의 누런 등에 있는 엷은 금빛 반점을 조용히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고르게 퍼진 그림자가 아르카디와 카샤를 덮고 있었다. 다만 이따금 선명한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밝게 내리비칠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그 침묵 속에는, 둘이 나란히 앉아 있다는 그 자체에는 서로의 마음을 탁 터놓은 친근감이 나타나 있었다. 어느 쪽도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옆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기뻐하고들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르카디는 전보다 침착해 보이고 카샤는 생기가 돌아 대담해진 듯했다.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하고 아르카디는 입을 열었다.
“러시아어로 ‘물푸레나무’란 정말 잘 지은 이름입니다. 어떤 나무도 이 나무처럼 가볍고 ‘맑게’ 공중에 비쳐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카샤는 위를 올려다보며 “그렇군요.” 하고 말했는데, 아르카디는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내가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지도 않는군 그래’ 하고 생각했다.
“전 하이네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고 카샤는 아르카디가 두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꺼냈다.
“그분이 웃고 있을 때에도, 울고 있을 때에도 말예요. 전 그저 그분이 깊은 생각에 잠겨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좋아요.”
“하지만 나는 그분이 웃을 때가 좋더군요.”
하고 아르카디는 말했다.
“그건 당신에게 아직도 옛날의 풍자적인 경향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옛날의 풍자적 경향이라’ 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했다. ‘바자로프가 이 말을 들었다면’
“기다려 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드릴 테니.”
“누가 나를 변하게 한다는 거죠. 당신이요?”
“누구냐구요? 언니 말이죠. 당신이 이젠 말다툼을 하지 않게 된 포르피리 플라토노바치(Porfiry Platonovitch)도 말예요. 또 당신이 엊그제 교회에 모시고 갔던 이모님도 말씀예요.”
“하지만 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또 안나 세르게예브나에 대해서 말씀 드리자면, 그분은 당신도 기억하시겠지만, 여러 가지로 내가 아닌 바자로프와 의견이 맞았어요.”
“그때는 언니도 그분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꼭 당신처럼 말예요.”
“나처럼이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이제 그 사나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도 짐작하셨단 말입니까?”
카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알고 있어요.”
하고 아르카디는 말을 계속했다.
“그 친구는 한 번도 당신 마음에 든 적이 없었어요.”
“전 그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가 없어요.”
“이봐요,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Katerina Sergyevna), 나는 아무래도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인간은 없는 겁니다. 그건 다만 변명에 불과하지요.”
“그럼, 말씀드리겠어요. 그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저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는 거예요. 저 역시 그분에겐 낯선 사람이지요… 그리고 당신도 그분과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뭐랄까… 그분이 맹수라면 당신은 잘 길들여진 짐승이라고나 할까요?”
“나 역시 길들여진 짐승이란 말입니까?”
카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디는 귀 뒤를 긁적거렸다.
“이봐요,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 그 말은 솔직히 나를 아주 화나게 하는데요.”
“당신은 맹수라도 되고 싶으시다는 말씀인가요?”
“맹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강하고 정력적인 것이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기를 바란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당신 친구 분은 바라지 않아도 그분 자신 안에 그걸 가지고 계세요.”
“흠. 당신은 그러게 생각하시는군요. 그 친구가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요?”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언니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분예요… 전 이걸 말씀드리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언니는 자신의 독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거든요.”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아르카디는 물었으나 머릿속으로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카샤 역시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정한 젊은이들 사이에는 흔히 이렇게 똑같은 생각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아르카디는 미소를 띠고 카샤 쪽으로 몸을 살짝 기대며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바른대로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녀가 두려운 거죠?”
“누구 말예요?”
“그녀 말입니다.”
하고 아르카디는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그럼 당신은요?”
하고 이번엔 카샤가 물었다.
“나도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나도 그렇다고 했어요.”
카샤는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그를 위협하는 듯한 시늉을 했다.
“참 이상해요.”
하고 그녀는 말을 꺼냈다.
“언니가 이번만큼 당신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없었어요. 당신이 여기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그래요.”
“허허. 그래요.”
“당신은 그런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어요? 당신은 그것이 기쁘지 않으세요?”
아르카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내가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당신 어머니의 편지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이유도 있을 테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하지만 그 이유를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그건 어째서죠?”
“말할 수 없어요.”
“아아. 알겠어요. 당신은 매우 고집이 세군요.”
“그래요.”
“게다가 관찰력도 있으시고.”
카샤는 아르카디를 흘겨보았다.
“그럴지도 몰라요. 그것이 당신을 화나게 했나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난 지금 과연 당신의 그 관찰력이 어디에서 왔나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척 겁이 많고 의심도 많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하고 있는데…”
“저는 줄곧 혼자 살았어요.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지요. 하지만 제가 사람들을 모두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르카디는 고맙다는 듯한 눈길로 카샤를 바라보았다.
“그건 다 좋아요.”
하고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당신 같은 경우, 다시 말해서 당신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런 재능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그런 사람들에게는 황제가 진리에 도달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난 부자가 아닌 걸요.”
아르카디는 깜짝 놀라 처음에는 카샤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소유지는 모두가 언니의 것이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 생각은 그에게 별로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씀 잘 하셨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뭘요?”
“잘 말씀해주셨다고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주 시원스럽게 말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일부러 이야기하거나 하는 그런 인간의 내부에는 틀림없이 뭔가 특별한, 일종의 허영심 같은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저는 언니 덕분에 그런 경험은 전혀 해보질 못했어요. 제가 제 신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다만 이야기가 나와 생각났기 때문이에요.”
“좋아요. 그러나 바른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당신에게는 지금 내가 말한 그 허영심이라는 게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면 설마 당신은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당신은 부잣집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지요?”
“만일 제가 그 사람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예요, 그럴 경우에라도 아마 가지 않을 거예요.”
“아아. 그것 보십시오.”
하고 아르카디는 소리 높여 말하고는 잠시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어째서 당신은 부자와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왜냐고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노래 가사에도 나오잖아요.”
“당신은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으며…”
“아니에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런 짓을? 반대로 전 복종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다만 평등치 못한 것만은 곤란해요. 자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후에 타인에게 복종하는 것,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이것이 행복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예속된 생존이라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 이대로가 더 좋아요.”
“지금 이대로가 더 좋다고요?”
하고 카샤의 말을 받아 아르카디가 대꾸했다.
“그렇군요.”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역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같은 혈통이군요. 당신 역시 그분 못지않게 독립심이 강하지만 당신은 다만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당신은 결코 자기가 먼저 자기감정을 말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강하고 신성한 느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요?”
하고 카샤가 되물었다.
“당신은 언니와 같이 현명합니다. 당신의 기질도 언니 못지않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요…”
“제발 저를 언니와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카샤는 성급히 가로막았다.
“그건 제게 너무나 불리해요. 언니는 미인이고 영리한 여자라는 것을 당신은 잊으셨나 보군요. 게다가…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당신은 그렇게 말해선 안 돼요. 그런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말예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게다가 당신은’이라니요? 어째서 당신은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단정하려 드는 겁니까?”
“물론 당신은 농담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내가 하는 말에 내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요? 또 말재주가 없어서 분명히 표현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내가 한다면요?”
“당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정말입니까? 이제야 알겠습니다. 내가 당신의 관찰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군요.”
“뭐라고요?”
아르카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고, 카샤는 바구니 속에서 약간의 빵 부스러기를 찾아내어 참새들에게 던져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힘을 주어 던지는 바람에 참새들은 쪼아먹지 않고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
하고 갑자기 아르카디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이 일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겨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을 당신의 언니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마치 자기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이 말에 깜짝 놀라기라도 한 듯 재빨리 저쪽으로 가버렸다. 카샤는 바구니를 든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고개를 숙이고는 오랫동안 아르카디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녀의 볼은 약간 붉어졌으나 미소를 띠지는 않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망설이는 빛과 또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어쩐지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 혼자 있었니?”
하고 그녀 옆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음성이 들렸다.
“난 네가 틀림없이 아르카디와 함께 뜰로 나온 줄로 알았는데.”
카샤는 별로 서두르지도 않고 눈을 들어 언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게 옷을 차려 입고 길가에 선 채 활짝 편 양산 끝으로 피피의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예요.”
“그건 알고 있어.”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그분이 방으로 들어가 버린 모양이로구나?”
“예.”
“둘이서 함께 책을 읽고 있었잖니?”
“그래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카샤의 턱을 손으로 살짝 쥐고는 그녀의 얼굴을 좀 쳐들었다.
“혹시 싸운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카샤는 이렇게 말하고 살그머니 언니의 손을 밀었다.
“그렇게 시치미 뗄 건 뭐 있니? 난 그분이 여기 계시면 함께 산책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그러고 싶다고 늘 내게 말하셨거든. 시내에서 네 구두가 도착됐다. 가서 신어봐. 네 구두가 다 닳았다는 것을 어제야 알았어. 대체 넌 그런데 너무 신경을 쓰지 않더라. 그렇게 예쁜 발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넌 손도 예뻐… 좀 크긴 하지만. 그러니 이 발을 잘 보여야 해. 그런데 넌 몸치장도 할 줄 모르더라.”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 예쁜 옷자락을 스치면서 좁은 길을 따라 먼저 걸어 내려갔다. 카샤도 벤치에서 일어나 하이네의 책을 집어 들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구두를 신어보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예쁜 발’하고 카샤는 햇볕을 쬐어 몹시 뜨거워진 테라스의 돌층계를 천천히 사뿐사뿐 올라가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예쁜 발이라고 했지… 그래, 이제 곧 그분이 이 발밑에 꿇어앉게 될 거야.’ 그러나 그녀는 이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아르카디는 복도를 따라 자기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하인이 뒤따라와 바자로프씨가 방에 와 있다고 알렸다.
“예브게니가.”
아르카디는 흠칫하며 소리쳤다.
“오신 지 오래됐나?”
“이제 방금 오셨습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겐 알리지 말고 직접 당신 방으로 안내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하고 부지런히 계단을 뛰어올라 물을 활짝 열었다. 바자로프의 표정이 곧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좀 더 노련한 눈이었더라면 이 뜻하지 않은 손님의, 체격은 말랐어도 여전히 원기 왕성한 용모 속에 내면적인 흥분의 징후가 숨겨져 있음을 아마도 포착했을 것이다. 먼지투성이인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머리에는 학생모를 쓴 바자로프가 창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르카디가 소란스럽게 외치며 그의 목에 매달렸을 때에도 그는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거 뜻밖인데. 무슨 바람이 불었나.” 하며 아르카디는 방안을 두루 서성거리며 이렇게 되풀이 하였는데, 그것은 기쁨에 넘치기 때문이라고 자신도 믿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우리 집은 만사가 잘 되어가고 있겠지? 다들 안녕하신가?”
“다 잘되어 가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안녕하시진 않네.”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그런데 자네 수다만 떨지 말고 크바스를 좀 내오도록 일러주게. 그리고 차분히 앉아 내 말좀 들어보게. 나는 이제부터 자네에게 인상에 남는 짤막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네.”
아르카디는 침착해졌다. 바자로프는 파벨 페트로비치와의 결투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아르카디는 매우 놀랐고 마음이 괴로웠지만, 그것을 겉으로 나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만 큰아버지의 상처가 정말로 대단치 않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의학적인 견해에서가 아닌 다른 견해에서 볼 때 흥미진진한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웃음을 지어보이기까지 했으나, 속으로는 기분이 나쁘고 어쩐지 수치스럽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바자로프는 그의 그런 기색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러니 여보게”
하고 그는 말했다.
“봉건주의자들과 함께 살면 이런 일도 생기는 법일세. 자기도 봉건주의자들 틈에 끼여 기사들의 경기에 참가한다는 격이지. 그래서 나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하고 바자로프는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것일세…이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만일 내가 쓸데없는 거짓말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말일세, 아니, 내가 여기 들른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 사실 인간은 이따금 자신의 앞머리를 움켜쥐고, 밭에서 무를 잡아 뽑듯이 자신을 내던져 볼 필요가 있는 걸세. 나는 며칠 전에 이미 그렇게 해버렸었네… 그러나 나는 일단 나와 헤어진 것이, 즉 나 자신이 묻혀 있었던 그 밭이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진 것일세.”
“그 말이 나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아르카디는 흥분된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자네는 나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바자로프는 가만히, 거의 뚫어질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자네를 매우 슬프게 한 것 같군. 하지만 자네는 이미 나와 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자네는 이제 제법 생기에 넘쳐 보이고 깔끔해졌을 뿐만 아니라…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일도 틀림없이 잘되어 가고 있겠지.”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일이라니, 무슨 일인가?”
“자네가 시내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닌가, 요 어린애 같은 양반아. 그런데 그 주일학교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그래 자네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이제 자넨 겸손해도 될 만한 단계에 이르렀단 말인가?”
“예브게니,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 무슨 일이든 자네에게 털어놓았었네. 자네에게 단언하지만, 하느님께 맹세코 자넨 잘못 알고 있는 걸세.”
“흠. 새로운 사실이로군.”
하고 바자로프는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그런 일로 그렇게 흥분할 것까지는 없네. 난 그런 건 어찌 됐든 상관하지 않네. 로맨티시스트라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고 있음을 서로가 느끼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은 이제 서로에게 신물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네.”
“예브게니…”
“여보게, 어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네. 이 세상에는 진절머리 나는 일들이 이런 일 말고도 얼마든지 있네.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나는 여기 온 후로 매우 언짢은 기분이 드네. 마치 현지사 부인에게 보낸 <Гоголя к калужской [Gogolya k kaluzhskoy] 고골리(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의 칼루가 Kaluga에게 보내는 편지, 1846년 6월 6일자의 편지로, 종교적 · 도덕적 완성이라는 것을 부르짖고, 자신의 그때까지의 전 작품을 부정했다. 편지 자체가 책이름처럼 고유명사화된 표현)> 라도 수없이 읽고 났을 때처럼 말일세.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는 마차에서 말을 풀지도 않았네.”
“천만에, 그럴 수는 없네.”
“어째서?”
“난 별로 상관없지만,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는 큰 실례가 되네. 그녀는 틀림없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할 거야.”
“아니, 그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걸세.”
“하지만 나는 내 짐작이 옳다고 확신하네.”
하고 아르카디가 대꾸했다.
“그런데 왜 자네는 가면을 쓰고 있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자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도 좋지 않은가?”
“그야 물론 구실은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자넨 잘못 짚었네.”
그러나 아르카디의 추측은 옳았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자로프를 만나고 싶어 했고 집사를 통해 그를 자기 방으로 초청했다. 바자로프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새 옷을 따로 챙겨두었던 것이다. 오딘초바 부인은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방이 아닌 응접실에서 그를 맞아 상냥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무의식중에 긴장하는 빛이 나타나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하고 바자로프는 숨가쁘게 말했다.
“우선 당신을 안심시켜 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군요. 당신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이젠 정신을 차렸으며 저 자신의 우스꽝스러웠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잊어주길 바라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제 영원히 여기 오는 일이 없을 것이고, 설사 제가 유순한 성질의 사람은 아니라 할지라도 당신에게 싫은 사람으로서의 추억만을 남기고 떠난다는 것은 저로서도 유쾌한 일은 못되니까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제 막 높은 산에 오른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으나, 그 얼굴은 생기있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바자로프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에 응했다.
“지난 일은 깨끗이 다 잊어버리기로 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교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내게도 잘못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한마디만 더 말씀드리겠는데, 우리 전처럼 친구가 되기로 해요. 그때의 일은 꿈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꿈 따위를 기억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요.”
“누가 꿈같은 것을 기억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랑 따위야… 정말 가식적인 감정이니까요.”
“정말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뻐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런 식으로 말했고 바자로프는 이런 투로 말을 받았다. 그리고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은 정말로 진실이었을까. 그것은 두 사람 자신도 알지 못했으니, 하물며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완전히 믿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작되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야기 도중에 키르사노프 댁에서는 무얼 하고 지냈느냐고 바자로프에게 물었다. 그는 하마터면 파벨 페트로비치와의 결투에 대해 이야기할 뻔했다. 그러나 혹 그녀의 마음을 끄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오해받지나 않을까 싶어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그 동안 줄곧 연구하며 지냈다고 대답했다.
“어찌 된 일인지”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말했다.
“처음에 난 너무나 기분이 울적해 외국에라도 나가볼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곧 그런 기분은 사라지고 게다가 친구이신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가 와주셔서 나는 다시 나의 궤도로 돌아온 거예요. 나의 참된 역할로 말예요.”
“어떤 역할 말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아주머니나 교사, 어머니의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좋을 대로 불러주세요. 그런데 말씀예요. 난 전에는 당신과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와의 친분을 잘 몰랐었어요. 그분은 별로 신통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자세히 알고 보니 현명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중요한 것은 그분은 젊다는 거예요… 나나 당신과는 달리 말씀예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 친구는 여전히 당신 앞에 나서면 서먹서먹해합니까?”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정말로…”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잠시 생각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은 그 분도 전보다는 마음이 놓이는지 저하고도 이야기를 잘해요. 전에는 저를 피하셨어요. 그리고 저 역시 그분과의 교제를 원하지도 않았고요. 그분은 카샤와 사이가 매우 좋아요.”
바자로프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여자란 어쩔 수 없는 여우로구나’하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은 그 친구가 당신을 피했다고 하시지만”
하고 그는 싸늘한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리는 없겠지요.”
“뭐라고요? 그 사람도?”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입에서 뜻밖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도 말씀입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허리를 굽히며 대꾸했다.
“당신은 짐작도 못하고 계셨던 그 사실을 제가 전한 셈이 되었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잘못 보신 거예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나봅니다.”
하고 그는 말하고는, 속으로 ‘이봐요, 앞으로는 그런 여우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하고 덧붙였다.
“왜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거지요? 내 생각엔, 당신은 이런 일에 있어서 순간적인 인상에 너무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아요. 당신은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군요.”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나 세르게예브나?”
“어째서요?”
하고 그녀는 반문하고 나서 자기가 먼저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노라고 말했고, 또 그녀 자신도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바자로프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했다.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하면서도 두려움이 은근히 압박해 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마치 바다에서 기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안전한 지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법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배가 잠시라도 정지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눈치가 보이면 삽시간에 그들의 얼굴에 부단한 위험을 의식하는 특유의 불안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바자로프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의미 없는 대답만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객실로 나가자고 제의했다. 그곳에는 늙은 공작 따님과 카샤가 있었다.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는 어디 계시니?”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묻고 나서, 그가 벌써 한 시간 남짓이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찾으러 보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정원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팔짱 낀 양손 위에 턱을 얹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그 사색은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었으나 슬픈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바자로프와 마주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전처럼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또 무언가를 결심한 듯해 보이기도 했다.
26
세상을 떠난 오딘초바 부인의 남편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미는 아니었지만 ‘어떤 고상한 취미의 놀이’는 몹시 좋아했으므로 자기 저택 정원의 온실과 연못 사이에 러시아 벽돌로 그리스의 주랑과 흡사한 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이 주랑 또는 회랑의 뒷벽에는 그가 외국에 직접 주문하여 마련한 조상을 놓기 위한 벽감(глухой стене [glukhoy stene])이 여섯 군데 패어 있었다. 그 조상들은 은둔, 침묵, 사색, 우울, 치욕, 감상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했다. 그 중의 하나인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침묵의 여신은 도착하자마자 이내 안치될 판이었는데, 그만 하인방의 어린애들이 여신의 코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근처의 조각가가 ‘처음보다 두 배나 더 훌륭하게’ 그 코를 만들어 붙이려고 착수했지만, 오딘초바 씨가 그냥 치워버리라고 일렀다. 그래서 그 여신은 타작 헛간 한쪽 구석에 팽개쳐진 채 여인들의 미신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거기 오랫동안 세워져 있었다. 주랑 정면에는 꽤 오래전부터 관목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다만 원주의 머리만이 푸르름 속에 우뚝 솟아 보일 뿐이다. 그 주랑 안은 대낮에도 서늘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언젠가 거기서 뱀을 본 뒤로는 그곳을 찾는 일을 꺼림칙해 했지만, 카샤는 이따금씩 찾아와 한 벽감 밑에 높여있는 커다란 돌 벤치에 앉곤 했다. 서늘한 공기와 그늘에 싸여 책을 읽거나 일을 하기도 했으며, 또는 완전한 적막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그러한 기분은 아마도 누구나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며, 그 매력은 우리의 주위나 우리들 자신 속에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는 광활한 생명의 물결을 어렴풋이 의식하면서 묵묵히 지켜보는데 있는 것이다.
바자로프가 도착한 이튿날 카샤는 자기가 좋아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르카디 역시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함께 주랑 쪽으로 가자고 간청한 것이다. 아침 식사 때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쯤 남아 있었다. 이슬이 많이 내린 아침은 이미 이글거리는 낮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아르카디의 얼굴은 어제의 표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카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를 마신 후 언니는 곧 그녀를 자기 방으로 불러 늘 그렇듯이 카샤가 다소 놀랄 만큼 먼저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한 다음, 아르카디를 대하는데 있어서는 좀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느니, 특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그분과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라느니 하며 그녀에게 충고했다. 이모나 집안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미 전날 밤부터 다른 일로 기분이 언짢았으며, 게다가 카샤 자신도 마치 자신의 죄를 의식이라도 하고 있는 듯 당혹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아르카디의 청을 들어주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
하고 그는 다소 소극적이면서도 허물없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행복하게도 당신과 한집에 지내게 되면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여전히 아직 손을 대지 않은 문제…나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어제 내가 이곳에 온 뒤로 변화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의문에 찬 카샤의 시선에 주목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난 여러 면에서 변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으로 인한 변화였으니까요.”
“저요? 저로 인한 것이라고요?”
하고 카샤가 말했다.
“난 이제, 여기 처음 왔을 때의 그 거만한 철부지가 아닙니다.”
하고 아르카디는 말을 계속했다.
“스물 셋이라는 나이를 헛먹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으며, 내 온 힘을 진리를 위해 바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이상을 더 이상 전에 탐구하던 방식으로 탐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젠 내게… 훨씬 가까이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제까지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나는 너무나도 어려운 임무를 나 자신에게 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눈은 어떤 감정으로 인해 이제야 크게 떠졌습니다. 나는 말재주는 별로 없습니다만 당신은 틀림없이 내 말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카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아르카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말입니다.”
하고 제법 흥분된 목소리로 그는 또다시 말을 꺼냈다. 그의 머리위의 우거진 자작나무가지 속에서 멋쟁이 새 한 마리가 목청을 가다듬어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실한 인간이라면 모두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자기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숨김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생각으로는…”
그런데 여기서 아르카디의 웅변은 주제에서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더듬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잠시 후 다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카샤는 줄곧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 그가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이기도 했다.
“내 말이 당신을 당황하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만”
하고 또다시 용기를 내어 아르카디는 말을 꺼냈다.
“이 감정은 어느 정도… 어느 정도 당신과 관계가 되는 일이니까요. 당신은 어제 내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난하셨죠?”
하고 아르카디는 늪에 빠진 사람이 한 발 더 깊이 빠져 들어감을 느끼면서도 되도록 빨리 건너가 버리려고 서두를 때의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런 비난은 이따금… 젊은 사람들에게 돌려집니다…. 때로는 무작정 퍼부어지지요. 그런 비난을 받을 까닭이 없을 때조차도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게 좀더 자신이 있다면… (’제발 나를 좀 도와주시오, 좀 도와달란 말이오.’ 하고 아르카디는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카샤는 여전히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믿어도 좋다면…”
“만약에 당신이 하신 말씀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때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또렷한 음성이 울려왔다. 그 순간 아르카디는 입을 다물었고 카샤는 새파랗게 질렸다. 주랑을 덮고 있는 관목림 옆에 한 가닥 좁은 길이 통해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자로프를 따라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카샤와 아르카디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말 한 마디 한마디, 옷 스치는 소리, 심지어는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발짝 걷더니,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주랑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렇지 않아요?”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계속하여 말했다.
“우린 둘 다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 우린 이제 이미 나이를 먹었어요. 특히 난 더해요. 우린 인생살이에 지쳐 있는 거예요. 둘 다 솔직히 말해서 현명한 인간들이지요. 처음에는 우린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고 호기심도 가졌었지요. 그런데… 그 후로는… 그런데 우리 사이를 벌어지게 한 원인은 아니잖아요.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공통점이 많았어요. 우린 그걸 즉시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반대로 아르카디는…”
“당신은 그 친구를 필요로 하고 계십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그만두세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가 내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당신도 말씀하셨지만, 나 자신도 그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생각은 해왔어요. 난 그의 아주머니 노릇쯤은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아요. 하지만 이제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군요. 사실 난 전보다 자주 그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 젊디젊은 싱싱한 감정 속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런 경우 일반적으로 매력이라는 말이 통용되지요.”
하고 바자로프는 받았다. 침착하면서도 공허한 그 음성은 울화가 치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아르카디는 어제 내게 뭔가 숨기는 듯 했어요. 당신과 당신 동생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알만한 징조이지요.”
“그와 카샤는 꼭 남매간 같아요.”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말했다.
“그의 그런 점 역시 마음에 들어요. 어쩌면 그 두 사람을 그렇게 가까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언니로서 하시는 말씀이겠죠?”
하고 말꼬리를 끌면서 바자로프가 말했다.
“물론이죠…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 서 있지요? 왜 우리가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그렇잖아요?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난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동시에 난 당신을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정말 착한 분이기 때문이에요.”
“첫째로 나는 조금도 착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나는 당신에 대한 모든 의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게 착하다고 하시니… 이건 마치 죽은 자에게 화환을 걸어주는 것과도 같군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우린 누구도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말을 꺼냈는데, 휙 바람이 일며 나뭇잎을 흔들더니 이내 그녀의 말을 앗아가고 말았다.
“당신은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까?”
하고 잠시 후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 이상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말소리는 점점 멀어져가고… 주위는 점점 고요해졌다. 아르카디는 카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줄곧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다만 아까보다 좀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까쩨리나 세르게예브나.”
그는 손을 비틀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영원히, 그리고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당신 외엔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난 당신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나서 청혼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니까요…이제 내게 대답해주지 않으시렵니까? 당신은 나를 믿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내가 경솔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며칠 동안의 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미 짐작하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른 모든 것은 나를 이해해주실 테죠? 다른 모든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나를 좀 보시고… 내게 한마디만 말씀해주십시오…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발 나를 믿어주십시오.”
카샤는 진지하면서도 빛나는 눈으로 아르카디를 바라보았다. 그런 후에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엷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예”
아르카디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라고요? 당신은 예라고 대답하셨죠,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당신이 나를 믿어 주신다는 겁니까… 그렇잖으면…그렇잖으면…나는 차마 말할 수 없군요.”
“예”
하고 카샤는 되풀이 했다. 이번엔 그도 그녀의 말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의 커다란 아름다운 두 손을 잡아서 환희에 넘쳐 숨을 몰아쉬며 그 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그는 간신히 두 발로 버티고 서서, 다만 “카샤, 카샤” 하고 쉴 새 없이 되풀이할 뿐이었으나 그녀는 까닭 없이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본적이 없는 사람은, 이 순간 이 당위의 인간이 감사와 부끄러움 때문에 정신이 온통 아득해지면서 느끼는 행복감을 아마도 모를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자로프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억지로 엷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접혀진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그것은 아르카디가 쓴 편지로, 거기에는 동생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자로프는 재빨리 편지를 훑어보았는데, 그 순간 자기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신을 겨우 억제하였다.
“호호, 그렇습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친구는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와 남매와 같은 애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셨지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당신이라면 내게 어떤 충고를 하시겠습니까?”
하고 여전히 웃으면서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물었다.
“글쎄요, 제 상각으로는”
하고 바자로프 역시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는 달리 사실상 전혀 유쾌하지도 못했으며 전혀 웃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제 생각엔 두 젊은이를 축복해 주어야 할 것 같군요. 모든 면에서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키르사노프 댁에는 상당한 재산도 있고, 그는 외아들인데다가 아버지는 호인이니 반대할 리가 없지요.”
오딘초바 부인은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그녀의 얼굴빛은 계속해서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좋아요, 나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카샤를 위해서도… 그리도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를 위해서도 기뻐요. 물론 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릴 생각이에요. 아르카디를 직접 아버님께 보내겠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당신에게 한 말은 역시 옳았어요. 우린 이미 둘 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 말예요… 어째서 난 그 점을 몰랐을까요? 이상해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또 웃기 시작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렸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꽤 능청스러워졌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말하고 그도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안녕히 계십시요.”
하고 잠시 잠자코 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당신이 이 문제를 무사히 풀어나갈 수 있기를 빕니다. 저도 멀리서나마 축원하지요.”
오딘초바 부인은 재빨리 그를 돌아보았다.
“떠나시려는 겁니까? 어째서 이번에는 더 머무르지 않으시나요? 머물러 주세요…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즐거워요… 마치 벼랑 끝을 걷는 느낌이에요. 처음엔 조심스럽지만 곧 어디선가 용기가 솟아나거든요. 좀 더 머물러주세요.”
“말씀은 고맙습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저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기쁘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오랫동안 저와 인연이 없는 사회에 넘나든 것 같습니다. 날치라는 놈도 잠깐 동안은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지만, 마침내는 물속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니까요. 제발 저도 제게 익숙한 무대로 뛰어들게 내버려 두십시오.”
오딘초바 부인은 바자로프를 바라보았다. 쓰디쓴 엷은 웃음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했던 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동정어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싫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전 가난한 인간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남의 동정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은 아니겠지요?”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말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요.”
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하고 나서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래 자네는 보금자리를 꾸미기로 작정한 건가?”
그날 바자로프는 허리를 구부리고 여행 가방을 챙기면서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잘된 일이야. 다만 자네가 능청을 떨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난 자네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어. 혹시 어쩌면 자네 자신도 지쳐서 여우에 홀려버린 건지도 모르지.”
“자네 말대로야. 자네와 헤어졌을 때에는 나도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
하고 아르카디는 대답했다.
“한데 자네는 능청스럽게 ‘잘된 일이다’라고 말하는 건가? 마치 내가 자네의 결혼관을 모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뭐라고”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가를 보고 있잖은가? 여행 가방에 빈 곳이 생겨서 마른풀로 그곳을 채우는 걸세. 우리들 인생 가방에도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쑤셔 넣어 빈 공간을 채우는 걸세. 제발 화내지 말아주게. 내가 평소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다른 아가씨라면 그럴 듯한 한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현명하다는 평판이 날 수도 있겠지만, 자네의 카샤는 자기 자신을 챙길 줄 아는 아가씨야. 더욱이 자네 머리 꼭대기에라도 올라앉을 만큼 똑똑한 아가씨지. 사실 마땅히 그래야만 할 처지지만”
하고 그는 가방뚜껑을 찰칵 닫고서 일어섰다.
“그래, 지금 작별하는 마당에 거듭 말하지만 왜냐하면 속에 없는 말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 말일세. 우리는 이제 영원히 헤어지려 하고 있네. 자네 역시 그걸 느끼고 있겠지. 자네는 현명한 짓을 했어. 자네는 나처럼 고통스럽고 지겨운 가난뱅이로 태어나질 않았네. 자네에게 배짱이나 심술궂은 면이 없고, 다만 앞뒤를 재지 않는 혈기만이 있을 뿐이네. 하지만 그런 건 우리에겐 아무 쓸모가 없네. 자네 귀족들은 고결한 겸손이나 고결한 마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가 없으니 다 쓸데없는 것들이지. 이를테면 자네들은 싸움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훌륭한 인간으로 여기고 있지. 그런데 우리는 싸우고 싶어 싸우는 걸세. 그러니 어떻게 되겠나? 우리가 일으키는 먼지가 자네들 눈으로 스며들 것이고 우리의 시궁창이 자네들을 더럽힐 걸세. 정말 자네들은 우리를 따라오려면 아직도 멀었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즐겨 찾고 있지.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건 지루한 일들이야. 우리에게 새로운 희생자를 달라. 우린 다른 녀석들을 때려 눕혀야 한단 말이야. 자네는 착한 녀석이야. 그러나 자네는 역시 온실에서 자란 자유주의에 물든 귀족의 아들에 불과해. 우리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저 그런 사람’이란 말일세.”
“영원히 이별할 작정인가, 예브게니?”
하고 아르카디가 서글픈 듯이 말했다.
“내게 더 할 말은 없는가?”
바자로프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야 물론 있지, 아르카디. 할 말이 더 있고말고. 단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뿐이야. 왜냐하면 그건 로맨티시즘이니까.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마니까. 그건 그렇고 자네는 빨리 결혼이나 하게. 둥지를 짓고 자식들을 많이 낳는 거야. 아이들은 나나 자네와는 달리 좋은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영리해지는 걸세. 저런. 말 준비가 다 된 모양이야. 시간이 됐어. 나는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네… 어때, 한번 안아볼까?”
아르카디는 자기의 지도자이자 친구였던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젊음이란 정말 소중한 것이야.”
하고 바자로프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에게 기대가 크네. 두고 보게, 그녀가 얼마나 훌륭히 자네를 위로해주는지.”
“잘 있게”
하고 어느 새 마차에 뛰어오른 그는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그리고 마구간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한 쌍의 까마귀를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걸 좀 보게. 저기 자네가 잘 배워두어야 할 것이 있네.”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자네는 어째 그렇게 생물학에 어두운가? 까마귀는 가장 존경할 만한 가족적인 새가 아닌가? 자네에겐 좋은 본보기가 될 거야. 잘 있게, Senor(자네)”
마차는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바자로프의 말은 옳았다. 그날 밤 카샤와 이야기하는 동안 아르카디는 떠나버린 자기 지도자에 대한 생각은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벌써 그녀의 말에 따르기 시작했고 카샤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이튿날 마리노 마을의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젊은 남녀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체면상 두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붙어 있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작 따님을 두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게 했는데, 이는 이모가 그들의 임박한 결혼 이야기를 듣고는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노했기 때문이다. 처음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혹 자기 마음이 좀 괴롭지 않을까 하여 염려되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한 처지는 그녀를 딱하게 만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흥미를 끌었고 결국에는 그녀를 감동시키기까지 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바자로프가 옳은 것 같아’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호기심인 거야,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해. 그리고 평온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기주의와…’
“이봐, 과연 사랑이란 비현실적인 감정인가?”
하고 그녀는 크게 소리쳐 물었다. 그러나 카샤와 아르카디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우연히 엿듣게 된 그때의 대화가 두 사람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곧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마음이 평온해졌기 때문이다.
27
바자로프의 노부모는 예기치 않았던 아들의 귀향에 매우 기뻐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온 집안을 뛰어다녔으므로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그녀를 ‘작은 자고 새’에다 비유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얇고 짧은 웃저고리의 아랫단이 어쩐지 새를 연상케 한 것이다. 바실리 이바느이치 자신은 그저 신음소리만을 내면서 호박으로 만든 긴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손가락으로 목을 살짝 짚더니, 마치 머리가 몸뚱이에 옳게 붙어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러는가 하면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없이 웃는 것이었다.
“아버지, 전 여기서 약 6주일쯤 머무를 예정이에요.”
하고 바자로프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네가 아비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로 방해하지 않겠다.”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대답했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전처럼 아들에게 자신의 서재를 쓰도록 하고 그의 눈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아내가 지나친 애정의 표시를 하려는 것도 일체 단념시켰다.
“여보”
하고 그는 말했다.
“지난번에 예브게니가 돌아왔을 때에는 우리가 그 애를 너무 성가시게 했으니 이번엔 좀 현명해집시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남편의 말에 동의는 했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아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식사 때뿐이었으며, 그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겁을 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뉴센카”
하고 그녀는 말을 꺼내놓고는 아들이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벌써 손주머니 끈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저…”
하고 더듬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실리 이바느이치에게로 와서 손으로 턱을 받쳐 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 오늘 저녁 식사는 시금치 수프가 좋겠어요, 무 수프가 좋겠어요? 예뉴센카는 어느 쪽을 더 좋아할까요?”
“왜 그 애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소?”
“귀찮아 할까봐 그래요.”
그런데 바자로프는 얼마 안 가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짓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그 대신 우울한 권태와 까닭 모를 불안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동작에는 이상한 피로감이 엿보였다. 건장하고 저돌적이고 대담하던 그 걸음걸이마저도 변해버렸다. 그는 혼자서 산책을 하는 일을 그만두더니, 여러 사람과 어울릴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객실에서 차를 마시거나 바실리 이바느이치와 채소밭을 거닐거나 그와 ‘말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했다. 때로는 알렉세이 신부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처음엔 이러한 변화를 기뻐했으나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뉴센카가 걱정되는군.”
하고 그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애는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화가 나서 저러는 게 아냐. 그렇다면 아무 걱정도 없겠지만, 그 애는 지금 고민하고 있어 그건 무서운 일이야. 차라리 당신이나 나에게 화를 내면 좋으련만. 늘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문제야. 몸도 야위고 안색도 어쩐지 좋지 못해.”
“어쩌면 좋아요, 어쩌면 좋을까요.”
하고 노모는 속삭였다.
“그 애는 목에 부적이라도 달아주고 싶은데 말을 들어야지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바자로프에게 그의 일이나 건강, 아르카디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몇 번이나 자세히 물어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달갑지 않게 되는 대로 대답했을 뿐이며, 그러다가 한번은 그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뭔가를 은근히 캐묻고 있는 듯한 눈치를 채고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늘 제 주위를 발소리를 죽이며 살피시는 거예요? 그것은 전보다 더 나빠요.”
“아냐, 아냐, 아무것도 아니다.”
가련한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황급히 대답했다. 정치문제를 꺼내 봐도 마찬가지로 그저 그러했다. 또 한 번은 이제 곧 농노해방이 실현된다는 것과 진보라는 주제를 꺼내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의 공명을 얻으려고 했지만, 아들은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제가 어제 담장 옆을 지나면서 들었는데, 여기 농부의 자녀들이 옛 노래 대신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더군요. ‘정의의 시대는 찾아온다, 가슴은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진보라는 것입니다.”
이따금 바자로프는 마을로 나갔는데, 그때마다 그는 늘 빈정거리며 농부들과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이봐.”
하고 그는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의 인생관을 한번 말해보게. 러시아의 국력과 미래는 모두 자네들에게 달려있는 게 아닌가? 역사의 새 시대도 자네들로부터 시작되고 바로 자네들이 우리에게 진실한 언어와 법을 가져다준다지 않나?”
농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거나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하거나 했다.
“그야 우리는 할 수 있지요… 역시 그건, 즉 그… 어쨌든 우리는 대개 뭐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으니까요.”
“자네들의 그 농민조합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내게 설명해줄 수 있나?”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세 마리의 물고기 위에 놓여 있는 그 ‘세계’를 말하는 건가?”
“물론입죠, 주인님. 땅바닥이 세 마리의 물고기 위에 놓여 있습죠.” 순진하고 선량한 농부는 노래하듯 타이르듯 이렇게 설명했다. “즉 우리 농민조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인님들의 뜻대로 되는 것입죠. 왜냐하면 나리들은 우리의 어버이시니까요. 주인님이 엄숙하시면 엄숙하실수록 농민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바자로프는 경멸하듯 어깨를 움츠리고 외면해버렸다. 그러자 농부는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지껄이던가?”
하고 바자로프와 이야기하던 것을 멀리 집안에서 지켜보던 또 한 사람의 중년 농부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농부에게 물었다.
“밀린 소작료 이야기던가?”
“그런 게 아니야.”
하고 처음의 그 농부가 대답했는데 그 음성에는 이미 순진하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반대로 난폭한 어조가 섞여 있었다.
“그저 이것저것 지껄였을 뿐이야. 쓸데없는 소릴 하고 싶었던 게지. 주인이란 놈들이 알게 뭐야.”
“그럼, 알 수 없지.”
하고 다른 농부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모자를 한 번 휘두르고 허리띠를 내리더니 자기들의 일과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아. 경멸하듯 어깨를 움츠려버린 바자로프, 그리고 자기는 농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장담하던 바자로프(그는 파벨 페트로비치와 언쟁할 때 이것을 자랑했었다), 이 자신만만하던 바자로프 역시 농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한 사람의 광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꿈엔들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마침내 자기의 할 일을 발견했다. 어느 날 그의 앞에서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농부의 다친 발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는데, 늙은 아버지의 손은 떨려서 붕대를 잘 감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돕게 되었고, 그 후로 그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가 권장한 치료방법을 즉시 실행에 옮긴 아버지를 계속해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바자로프의 조롱은 바실리 이바느이치를 조금도 당혹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그를 위안해주기까지 하였다. 자신의 기름때 묻은 실내복의 배 부위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기도 하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도 하면서 바자로프가 하는 말을 즐거운 표정으로 들었다. 그리고 아들의 엉뚱한 언행에 더 많은 야유가 섞일수록 그 새까만 이를 있는 대로 드러내 보이면서, 행복에 젖은 이 아버지는 호인답게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그는 종종 아들이 하는 평범하고 무의미한 말들을 되뇌는 일조차 있었다. 예를 들면 며칠 동안을 전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냐.’ 하고 노상 뇌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그가 아침 기도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이 그렇게 말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울증이 사라졌어.”
하고 그는 아내에게 속삭였다.
“그 녀석이 오늘 나를 꼼짝 못하게 해댄 건 정말 훌륭했어.”
그는 자기가 이런 조수를 데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쭐하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뿌듯했다.
“그래, 정말이지”
하고 두터운 외투에 뿔이 돋친 벙거지를 쓴 어떤 농부의 아낙네에게 작은 물약병을 건네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봐요, 알겠소? 내 아들이 집에 머물러 있는 걸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오.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새로운 방법으로 지금 당신을 치료하고 있으니까. 내 말 알아듣겠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일지라도 이보다 더 나은 의사는 갖지 못했을 거란 말이야.”
‘콕콕 쑤신다’고 호소해온 그 아낙네(이 말의 의미는 그녀 자신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는 다만 넙죽 절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을 따름이었다. 거기엔 손수건으로 싼 계란 네 개가 들어 있었다. 한번은 바자로프가 떠돌아다니는 피륙 행상인의 이를 한 대 빼준 일이 있었다. 그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으나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것이 희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잘 보관하고 알렉세이 신부에게까지 보이면서 끝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걸 좀 보십시오. 괴상한 뿌리지요. 예브게니는 이만큼 힘이 세답니다. 옷감 장수가 허공에 매달렸을 정도였다고요… 그만한 힘이라면 떡갈나무라도 뽑을 것 같던데요.”
“놀랍군요.”
하고 알렉세이 신부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또 자식 자랑에 몰두하고 있는 이 노인을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어느 날 이웃 마을에 사는 농부가 장티푸스에 걸린 자기 아우를 데리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를 찾아왔다. 불쌍한 사나이는 짚단 위에 엎드린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몸뚱이는 거뭇거뭇한 반점으로 온통 뒤덮이고 이미 오래전부터 의식을 잃고 있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좀더 일찍 의사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혀를 차면서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농부는 자기 아우를 집까지 데리고 갈 수가 없었으므로 병자는 그냥 짐마차 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 후 사흘쯤 지나 바자로프가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질산은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었다.
“있지. 그런데 무엇에 쓰려고 그러니?”
“좀 필요해서요… 상처를 지지려고요.”
“누구 상처를?”
“제 상처를요.”
“네 상처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무슨 상처냐? 어디 좀 보자.”
“바로 여깁니다. 손가락이에요. 저는 오늘 그 장티푸스에 걸린 농부가 살던 마을에 나갔었어요. 어쩐지 시체를 해부해보고 싶어서요. 전 이 방면은 오랫동안 실습을 해보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서 군 공의에게 부탁했지요. 그러다가 다쳤어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갑자기 새파랗게 질렸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서재로 뛰어가더니 질산은 부스러기를 들고 이내 돌아왔다. 바자로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제발, 그건”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말했다.
“내가 치료해주마.”
바자로프는 미소를 지었다.
“실습을 퍽 좋아시히는군요.”
“제발 농담은 마라. 어디, 손가락을 좀 보자. 상처는 대단치 않군. 자 아프진 않니?”
“더 세게 눌러주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손을 멈추었다.
“어떠냐, 예브게니.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편이 낫지 않겠니?”
“진작 했어야 했어요. 실은 이젠 질산은도 소용없어요. 만일 감염된 거라면 이미 늦었어요.”
“뭐라고… 늦었다고…”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간신히 말했다.
“그럼요. 그 후로 네 시간이나 지났으니까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상처를 좀더 지졌다.
“그런데 군 공의에겐 질산은이 없더냐?”
“없었어요.”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의사라는 작자가 그런 필수품도 갖고 있지 않다니”
“그분의 란세트(양발의 끝이 뾰족한 의료용 칼)를 보셨더라면…”
하고 바자로프는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그리고 이튿날 온종일 바실리 아비느이치는 온갖 구실을 다 붙여 아들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귀찮을 정도로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거나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는 바람에 바자로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나가버리겠다고 위협했을 정도였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겠노라고 아들에게 약속했다. 물론 남편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까지도 왜 당신은 자지 않느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면서 그를 성가시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고 나서 만 이틀 동안 그저 참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끊임없이 훔쳐보던 자리에서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바자로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은 채 한 술도 뜨지 않았다.
“왜 먹지 않니, 예브게니?”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는 물었다.
“음식이 아주 맛있게 된 것 같은데.”
“먹고 싶지가 않아요.”
“식욕이 없나보구나? 그럼 머리는”
하고 그는 겁에 질린 소리로 물었다.
“아프지 않느냐?”
“아파요,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귀를 곤두세웠다.
“제발 화내지 말아다오, 예브게니”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말을 이었다.
“내가 맥을 한 번 짚어볼까?”
바자로프는 벌떡 일어섰다.
“맥을 짚어보시지 않아도 제 자신이 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오한도 나니?”
“네, 그래요. 저는 이만 가서 누울테니 라임 꽃차나 좀 들여보내 주세요. 감기에 걸린 것이 틀림없어요.”
“그러고 보니 나도 밤중에 네 기침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구나”
하고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말했다.
“감기에 걸린 거예요.”
하고 바자로프는 되풀이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라임 꽃을 넣어 차를 달이기 시작했지만,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옆방으로 들어가 잠자코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바자로프는 그날 일어나지 못하고 밤새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는 밤 열두시가 지나 간신히 눈을 뜨고는 자기 바로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제발 저쪽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라는 대로 했으나 이내 다시 살그머니 되돌아와서는 옷장 문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눈을 떼지 않고 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 역시 자지 않고 있었다. 서재의 문을 살며시 열고 가까이 다가와서는 ‘예뉴센카의 숨소리는 어떤가?’ 하고 귀를 기울여보기도 하고 바자로프의 안색을 살피기도 했다.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남편의 굽은 등밖에는 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자 바자로프는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현기증이 나고 코피까지 터져 그냥 다시 눕고 말았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잠자코 그를 간호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병실로 들어와 그에게 기분이 어떤가를 물었다. 그는 “좋은 편이에요.” 하고 대답하고는 벽을 향해 홱 돌아 누웠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아내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꼭 깨문 채 밖으로 나갔다. 집안이 갑자기 온통 캄캄해진 듯하였다. 하나같이 침통한 얼굴이었고, 집안 가득 이상한 적막이 흘렀다. 큰 소리로 꽥꽥거리던 수탉 한 마리가 뒤꼍에서 마을 쪽으로 옮겨졌고 바자로프는 벽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종일 누워만 있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것이 바자로프를 괴롭히는 일이 될 것 같아 노인은 그저 안락의자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어쩌다 한 번씩 딱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꺾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뜰에 나와 마치 어처구니 없이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우상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놀란 듯한 표정은 줄곧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의 세세한 질문을 피하고자 다시 아들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아내는 마침내 그의 손에 매달리더니 위협조로 재빨리
“그 애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 대신 그녀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도 놀란 것은 어찌된 일인지 미소 대신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는 아침 일찍 의사를 부르러 보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이 화를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사실을 미리 알려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자로프는 갑자기 침대에서 돌아눕더니, 멍한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에게 물을 먹여주고는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마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바자로프가 쉰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병이 아주 심각해졌어요. 저는 감염된 거예요. 며칠 후면 제 장례를 치러야 할 거예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마치 누군가에게 다리를 걷어채인 듯 휘청거렸다.
“예브게니”
하고 그는 혀가 돌지 않은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당치도 않아. 감기에 걸린 거야…”
“그만하세요.”
하고 천천히 바자로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염된 징조가 뚜렷해요.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대체 어디에 그런 징조가 나타났단 말이냐, 예브게니? 당치도 않은 말을…”
“그럼, 이건 뭡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말하고 저고리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팔뚝에 있는 불길한 붉은 반점을 아버지에게 보였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깜짝 놀라 공포로 인해 소름이 오싹 끼쳐짐을 느꼈다.
“설사”
하고 그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설사…만일에… 만일에 뭔가 감염된 것… 같은 것일지라도…”
“농독증이란 말예요.” 하고 아들이 일러주었다.
“그래 뭔가… 전염병 같은…”
“농독증이라니까요.”
하고 바자로프는 거친 소리로 똑똑히 되풀이 했다.
“이젠 자신의 텍스트도 잊으신 겁니까?”
“그래, 그래, 너 좋을대로 해석하렴… 그러나 어쨌든 난 너를 고쳐볼 테다.”
“아닙니다. 그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에요. 전 제가 이렇게 빨리 죽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건 정말이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정말 불쾌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그 깊은 신앙의 힘에 매달리셔야 합니다. 두 분 신앙을 시험해 보실 좋은 기회니까요.” 하고 말하고 그는 또 물을 조금 마셨다. “그런데 아버지께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 머리가 아직 제 통제 하에 있는 동안에 말입니다. 지금도 사실 제가 하고 있는 말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지 어떤지, 별로 자신이 없어요. 아버지는 마치 산새를 발견한 사냥개처럼 저를 위에서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요. 저는 마치 술에 취한 것 같고요.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시겠지요?”
“천만에, 예브게니. 너는 아주 정상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버지는 의사를 부르러 보냈다고 하셨는데, 그걸로 아버지는 소원을 푸신 셈이니까… 제 소원도 하나 들어주십시오. 급히 심부름을 좀 보내주세요.”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한테 말이냐?”
하고 노인이 물었다.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라니, 누구 말씀이세요?”
바자로프는 생각이 잘 안 난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아아, 그렇지. 그 애송이 말씀이시로군요. 아니, 그 친구는 그냥 놔두세요. 그 친구는 이번에 까마귀 역할을 했으니까요. 놀라지 마세요, 이건 헛소리가 아니니까요. 급히 오딘초바 부인에게,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주세요. 이 근방에 그런 여지주가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입니다. 또 죽어가고 있노라고 전해주세요. 아버지, 그렇게 해주시겠지요?”
“그러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 있겠니. 네가 죽다니, 예브게니 네가… 생각 좀 해보아라, 그럴 수가… 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단 말이냐”
“그런 건 몰라요. 어서 심부름꾼을 보내주세요.”
“이제 곧 보내마, 편지도 쓰겠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하기만 하면 돼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그럼 저는 다시 개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저는 죽음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데 잘 되질 않아요. 무슨 반점이 하나 보일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또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바실리 아바느이치는 서재를 나와 아내의 침실에 당도하자 갑자기 무너지듯 성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해줘요, 아리나, 기도해줘요.”
하고 그는 애원했다.
“우리 아들이 죽어가고 있어.”
의사가 도착했다. 그는 초산은을 가지고 있지 않던 그 군 공의였다. 그는 병자를 진찰하고 나서 장기 치료를 권유했고 또 자리에서 회복할 가망이 있다고 두어 마디 그럴 듯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말예요, 나와 같은 상태에 있는 환자가 저승으로 가지 않은 예를 본 적이 있습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묻고 나서,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육중한 책상의 다리를 잡고 흔들어 그 자리를 옮겨 놓았다.
“힘은, 힘은”
하고 그는 말했다.
“아직 이렇게 그대로 있는데 죽어야만 하다니… 혹시 노인이라면 그래도 어쩌다가 산다는 걸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죽음을 부정한다 해도 죽음이 나를 부정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니. 누굽니까? 거기서 울고 있는 게?”
하고는 잠시 있다가 덧붙였다.
“어머니세요? 가엾은 어머니. 이젠 그 맛있는 수프를 누구에게 주시렵니까?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도 울고 계시는 군요. 자, 그리스도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철학자라도 되세요. 스토아(Stoa) 학파라도 말예요. 어때요? 아버지는 자신이 철학자라며 자랑하셨잖아요?”
“내가 무슨 철학자냐”
이렇게 말하는 바실리 이바느이치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자로프는 매시간 점점 더 나빠져 갔다. 병은 외과의 중독이 언제나 그렇듯이 급속도로 진행해갔다. 그는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자기에게 하는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헛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아”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러고는 이내 또 “여덟에서 열을 빼면 얼마가 되지?”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면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생각해 보았으나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의 발에 이불을 덮어주는 것뿐이었다.
“찬 시트로 몸을 감싸줘야 해. 토하는 약을 주고… 배에 겨자를 발라주고… 피를 뽑고”
하고 그는 긴장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간청하여 머물러 있는 의사도 그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환자에게는 레몬수를 먹이고 자기에게는 파이프에 잴 담배라든가, 몸을 ‘따뜻하게 하고 힘이 나게 도와주는 것’, 즉 보드카 등을 달라고 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문 옆에 있는 낮은 의자에 계속 앉아 있었는데, 다만 이따금 기도하러 나갈 뿐이었다. 며칠 전에 손거울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깨진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나쁜 징조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피수시카 역시 그녀에게 한마디도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치모페이치는 오딘초바 부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은 바자로프의 병세가 좋지 않았다… 심한 열이 그를 괴롭혔다. 아침녘이 되자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에 빗질을 해달라고 아리나 블라시예브나에게 부탁하고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나서 차를 두어 모금 마셨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기운을 조금 차렸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되뇌었다.
“위기가 다가왔었으나…위기를 넘겼어.”
“뭐라고요?”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말이라는 건 역시 값어치가 있는 것이로군요.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어 ‘위기’라고 하면 안심이 되니까 말이에요. 인간이 아직도 말을 믿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에요. 이를테면 바보라고 말하면 얻어맞지 않아도 슬퍼지고, 총명한 사람이라고 하면 돈을 받지 않아도 만족을 느끼니 말이에요.”
바자로프의 이 짤막한 말은 그가 전에 하던 그 ‘엉뚱한 언행’을 생각나게 하여 바실리 이바느이치를 감동시켰다.
“브라보. 훌륭한 말을 하는군. 훌륭한 말을”
하고 손뼉 치는 시늉을 하면서 그는 갈채를 보냈다. 바자로프는 슬픈 듯이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위기를 넘긴 겁니까, 그렇잖으면 위기가 다가선 겁니까?”
“너는 좋아지고 있다. 나는 그걸 알고 기뻐하는 거야.”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대답했다.
“좋아요, 기뻐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녀에겐, 기억하시죠? 사람을 보내셨습니까?”
“보냈고말고, 여부가 있나”
점점 좋아지던 이 변화도 오래 계속되진 못했다. 발작이 또 시작된 것이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바자로프 곁에 앉아 있었다. 뭔지 모를 괴로움이 이 노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브게니”
하고 그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내 아들, 내 귀여운 아들”
이 심상치 않은 외침은 바자로프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돌리고 그를 억누르고 있던 혼수상태의 중압으로부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예브기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말을 계속하면서 바자로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들은 눈을 뜨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예브게니, 너는 이제 좋아지고 있어. 괜찮아, 회복할 거야. 그러나 이 순간을 잘 이용하여 나와 네 어미를 안심시켜다오. 그리스도교의 의무를 다해다오. 네게 이런 말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그러나 더 괴로운 건… 정말 영원히, 예브게니… 생각해보아라, 얼마나….”
노인의 음성이 끊겼다. 그의 아들의 얼굴에는, 비록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고는 하지만 무엇인가 이상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것이 두 분의 소원이시라면 저도 싫다고는 않겠습니다.”
하고 그는 드디어 말했다.
“그러나 아직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아버지께서도 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씀하였으니까요.”
“좋아졌다. 예브게니. 좋아졌어. 그러나 알 수는 없는 거야. 이런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의무를 다해두면…”
“조금만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는 위기가 다가왔다는 아버지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 짚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잖아요? 의식을 잃은 자도 성찬은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소릴. 예브게니…”
“기다려 보겠습니다. 지금 저는 졸려요,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그는 고개를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렸다. 노인은 일어나 안락의자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손가락 끝을 깨물기 시작했다. 갑자기 스프링이 달린 마차의 덜컹 소리가, 이런 벽촌에서는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그 마차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게 달리는 바퀴소리가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말들의 콧바람소리까지도 들리게 되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뛰어갔다. 그 집 바깥뜰에 2인승 사두마차가 들어섰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으로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제복을 입은 하인이 마차 문을 열자, 검은 베일에 검은색 망토를 입은 부인이 그 안에서 나왔다…
“제 이름은 오딘초바라고 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는 아직 살아 계신가요? 당신이 아버님이십니까? 제가 의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인정이 많은 분이시군요.”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고는 그녀의 한 손을 잡고 덜덜 떨면서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그 사이에 안나 세르게예브나가 데리고 온, 안경을 쓴 작달막한 독일인인 듯한 의사가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 예브게니는 살아 있습니다. 할멈. 할멈. 우리 집에 천사가… 천국에서…”
“아니 뭐라고요?”
하고 노부인은 응접실에서 뛰어나오며 외치고는 영문도 모른 채 현관 앞에서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발밑에 쓰러져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옷자락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러시면 안돼요. 이러시면 안돼요.”
하고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말했다. 그러나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다만 “천사님. 천사님” 하고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Wo ist der Kranke(환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Ger.))?”
하고 다소 화가 난 듯 의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이쪽입니다, 이쪽. 제 뒤를 따라오세요, wertester Herr Collega(존경하는 동료(Ger.))”
하고 그는 옛 기억을 더듬어 독일어로 말했다.
“아하”
하고 독일인은 이를 드러내어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오딘초바 부인이 모셔오신 선생님이시다.”
하고 그는 아들의 귓전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그분도 오셨다.”
바자로프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뭐라고 하셨어요?”
“안나 세르게예브나 오딘초바 부인이 오셨고, 또 그분이 이 선생님을 모시고 오셨단다.”
바자로프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분이 오셨다고요… 만나고 싶은데요.”
“조금 있으면 뵐 수 있을 거야, 예브게니. 그러나 먼저 이 의사 선생과 잠깐 이야기를 해야 해. 시도르 시도르이치 (그것은 군 공의의 이름이다.)가 돌아갔으니 이분에게 네 병에 대해 죄다 말씀드리고 좀 의논하고 싶어서 말이다.”
바자로프는 독일인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럼 빨리 이야기해주세요. 하지만 라틴어만은 안 돼요. 저도 ‘jam moritur(이제 죽어가고 있다 (Lat.)))’라는 뜻쯤은 알고 있으니까요.”
“Der Herr scheint des Deutschen machtig zu sein(이분은 독일어를 잘 하시는 모양기군요).”
하고 새로운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 그리스 신화의 의술의 신)의 제자가 독일어로 바실리 이바느이치에게 말했다. “ich habe(그러니까 나는)…”
“러시아어로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 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아, 아아, 그렇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의논이 시작되었다. 반 시간쯤 지나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바실리 이바느이치의 안내를 받아 서재로 들어갔다. 의사는 틈을 보아 그녀에게 환자는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귀뜸했다. 그녀는 바자로프 쪽을 보았다… 그리고 문턱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희미해진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발열하여 타는 듯한, 동시에 거의 죽어가고 있는 듯한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놀라움은 단순히 소름끼치는 괴로운 충격으로 인한 그런 놀라움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느끼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고맙습니다.”
하고 그는 애써 입을 열었다.
“이렇게 와주시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우린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매우 친절한 분이셔”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가 참견했다.
“아버지,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안나 세르게예브나, 그래도 괜찮겠지요? 아마 이번만큼은…”
그는 쇠약해지고 무력한 자기 몸을 턱으로 가리켰다.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밖으로 나갔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되뇌었다.
“마치 황제 같은 태도로군요. 황제도 역시 죽어가는 병자를 위문한다니까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난 아직 희망을 갖고 있어요…”
“아, 안나 세르게예브나, 우리 솔직히 이야기 합시다. 전 이제 끝장입니다. 차바퀴에 깔려버렸습니다. 앞으로의 일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이란 어떻게 보면 구식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새삼스러운 것입니다. 전 아직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혼수상태에 빠지면 만사는 끝장입니다. (그는 힘없이 한쪽 팔을 흔들었다.) 자, 이제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요… 제가 당신을 사랑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이 말은 전에도 아주 무의미한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은 형체인데 저 자신의 형체는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지요. 당신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 당신은 거기 그렇게 서 계십니다. 너무도 아름답군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니, 놀라지 마십시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 앉아주십시오… 제 곁에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제 병은 전염병이니까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재빨리 방을 가로질러 바자로프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안락의자에 앉았다.
“당신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
하고 그는 속삭였다.
“오오, 이렇게 가까이에, 젊고 신선하고 청초한 당신이…, 이런 더러운 방안에 있다니… 그럼 안녕. 오래 오래 사십시오. 그것이 무엇보다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 추한 광경을. 거의 죽어가는 벌레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꼬락서닙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온갖 일을 다해볼테다, 허무하게 죽지는 않겠다. 내겐 사명이 있다. 난 거인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거인의 사명은 어떻게 하면 흉측스럽지 않게 죽느냐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짓은 하지 않으니까요.”
바자로프는 입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며 컵을 찾았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장갑도 벗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을 먹여주었다.
“저 같은 것쯤이야 당신은 곧 잊어버릴 테지요?”
하고 그는 또 말을 꺼냈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지요. 아버지께서는 당신에게, 지금 러시아는 어떤 인물 하나를 잃어가고 있노라고 말씀 하실지는 모르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노인의 환상을 깨뜨리지는 마십시오. 당신도 아시다시피 ‘어린이는 어떤 개구쟁이 짓을 하더라도…’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친절히 대해주십시오. 정말 이 두분 같은 분은 당신들의 상류사회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러시아는 나를 필요로 합니다… 아닙니다.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필요합니까? 구두 수선공이 필요합니다. 재봉사가 필요합니다. 푸주한은 고기를 판다. 푸주한은 아니, 잠깐만요. 엉망이 돼버렸어요. 저기 수풀이 있다…”
바자로프는 이마에 한 손을 얹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내가 여기 있어요…”
바자로프는 곧 이마에서 손을 떼고 몸을 조금 일으켰다.
“안녕”
하고 그는 갑자기 힘주어 말했다. 그의 눈은 마지막 광채를 띄고 있었다.
“잘 있어요…그래… 그때 나는 당신에게 키스를 하지 않았어요… 꺼져가는 불꽃에 입김을 불어주세요. 그러면 곧 꺼지게 됩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고 그는 말하고 베개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이젠…어둠이야.”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어떻습니까?”
하고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속삭이듯 그녀에게 물었다.
“잠이 들었습니다.”
하고 그녀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자로프는 이미 다시 깨날 운명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자 그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 이튿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알렉세이 신부가 그에게 종교적인 의식을 올려 주었다. 그에게 성유식을 거행했을 때, 성유가 그의 가슴에 닿자 그는 한쪽 눈을 떴다. 그러고는 제의를 입은 신부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와 성상 앞에 세워놓은 촛불을 보자 순간 어떤 공포와 전율과 같은 그림자가 죽어가는 그의 푸르스름한 얼굴에 가냘프게 떠올랐다. 마침내 그가 숨을 거두고 온 집안에 일제히 곡성이 터져 나왔을 때, 바실리 이바느이치는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난 하늘을 저주하겠다고 말했다.”
하고 그는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찌푸리고서, 마치 누군가를 위협하듯 주먹을 허공으로 내휘두르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 난 하늘을 저주하겠다. 저주하겠어.”
그러나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온통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쓰러졌다.
“그렇게”
하고 잠시 후에 하녀 방에서 안피수시카는 이야기했다.
“함께 나란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어, 마치 한낮의 햇빛을 쬐고 있는 양들처럼 말이야…”
그러나 한낮의 폭염이 지나면 이윽고 저녁이 되고 밤이 찾아온다. 그리고 아늑한 안식처로 돌아오면 마음 괴롭고 녹초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도 단잠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28
여섯 달이 지났다. 이미 하얀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엄동의 지독스런 적막, 단단히 뭉쳐져 서걱거리는 눈, 나뭇가지마다 드리운 장밋빛 고드름, 뿌연 에메랄드빛 하늘,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고리 모양의 연기, 열린 문으로 순간 쭉 빠져나가는 안개의 소용돌이, 마치 추위에 쏘이기라도 한 듯 붉은 빛이 선명한 사람들의 얼굴, 또 추위에 몸을 떠는 말들이 가볍게 땅을 차며 달려가는 소리, 이제 정월의 하루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녁의 추위가 꼼짝 않는 공기를 더욱더 꽁꽁 죄어 매고 있었고, 핏빛 저녁놀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마리노 마을의 지주 저택의 창문에는 등불이 비치기 시작했다. 검은 연미복 차림에 흰 장갑을 낀 프로코비치는 유난히 점잔을 빼며 7인용 식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주일쯤 전에 그다지 크지 않은 교회에서 아르카디와 카샤, 그리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와 페니치카 두 쌍이 입회이도 없이 조용하게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또 오늘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모스크바로 볼 일을 보러 떠나는 형을 위해 송별회를 열기로 되어 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젊은 두 사람에게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준 다음 결혼식이 끝나면 그녀 역시 곧 모스카바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정각 세 시가 되자 모두들 식탁으로 모여들었다. 미짜도 한몫 끼었다. 그를 돌보는 유모의 모습도 보였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카샤와 페니치카 사이에 앉아 있었다. 신랑들은 각자 신부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두 신랑은 이제 아주 변해 있었다. 두 사람 다 대장부다워졌고 관록도 붙은 것 같았다. 오직 파벨 페트로비치만이 다소 쇠약해졌는데, 그것은 도리어 그 날씬한 몸매에 한층 더 우아하고 귀족적인 냄새를 풍기게 했다. 그리고 페니치카도 역시 많이 달라졌다. 산뜻한 비단옷에 머리에는 넓은 비로드 리본을 달고, 목에는 금목걸이를 하고서 그녀는 아주 품위 있게 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여러분, 용서하세요. 하지만 이건 제가 한 일은 아니예요’하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가 마치 사죄라도 청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두들 좀 쑥스럽고 좀 서글픈 느낌도 들었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뭔가 악의 없는 희극을 연출하기로 사전 합의라도 한 듯 서로 즐겁게 마음을 써가면서 식사를 권하고 있었다. 카샤는 누구보다도 침착했다. 그녀는 붙임성 있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그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고 파벨 페트로비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우리에게서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형님. 당신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물론 그렇게 오랜 기간은 아닐 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전 형님께 한 말씀 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즉 저는… 우리들은…얼마나 저는, 얼마나 우리들은 이거 안되겠는데, 나는 말할 줄을 몰라서. 아르카디, 네가 말해봐라”
“아니, 아버지, 전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요.”
“나는 준비가 다 돼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 형님, 다만 형님을 포옹하고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대신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될 수록 빨리 돌아와 주십시오.”
파벨 페트로비치는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물론 미짜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페니치카도 손을 채 내밀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키스했다. 그리고 두 번째 따른 술잔을 들이켜면서 깊이 탄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May you be happy my friends! Farewell(그럼 여러분,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맨 나중에 한 이 영어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들 깊이 감동하였다.
“바자로프를 추념하는 뜻에서”
하고 카샤는 남편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고는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아르카디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으나 이 건배를 큰 소리로 제안하지는 못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독자들 중에서는 지금까지의 등장인물들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되어 이제 그들을 만족시켜 주고자 한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얼마 전에 결혼했다. 그것은 연애가 아니라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상대는 장래 러시아의 일꾼의 한 사람이며 매우 현명한 사람으로, 정확하고 실제적인 이해력과 굳센 의지와 훌륭한 말재주를 지닌 법률가로 아직 젊고 선량하며 얼음처럼 냉정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매우 사이좋게 생활하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낼 것이며 또 틀림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늙은 공작 따님은 죽고 말았는데, 죽은 그날로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졌다. 키르사노프 부자는 마리노촌에 정착했다. 두 사람의 사업은 점점 잘 되어가도 있다. 아르카디는 매우 착실한 경영자가 되어 그 ‘농장’은 벌써 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농노해방의 조정자가 되어 분투하고 있다.
그는 늘 담당구역을 순회하면서 기나긴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농민들에겐 ‘이해시킬 필요’, 즉 그들이 지치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언짢고도 우울한 말투로 ‘소유권의 양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교양 있는 귀족들이나 또 염치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욕하는 교양 없는 귀족들, 그 어느 쪽도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어느 쪽을 막론하고 너무나 온순하다는 것이다.
카쩨리나 세르게예브나에게는 아들 콜랴가 생겼고, 또 미쟈는 벌써 한창 개구쟁이로 뛰어다니며 무엇이든 자꾸 지껄여 대고 있다. 페니치카, 즉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는 남편과 미짜 다음으로 누구보다도 더 며느리를 사랑해주고 있는 며느리, 즉 카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에는 하루종일이라도 그 곁에서 떠나려 들지 않는다.
겸해서 하인 피오트르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두고자 한다. 그 역시 결혼해서 색시로부터 상당한 지참금을 받았다. 그녀는 시내의 채마밭 주인의 딸로, 두 명의 훌륭한 구혼자들을 그들이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했다. 그런데 이 피오트르는 시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니스를 칠한 반장화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레스덴(Dresden)의 부뤼레프(Bryulev, 브륄르 궁(The Brithl Palace)을 말함) 테라스에는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즉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시각에 나이가 쉰 살쯤 되는 노인이 가끔 눈에 뛴다. 백발이 성성하고 통풍에 걸린 듯한데, 아직 잘 생긴 용모를 유지하고 있고 옷차림도 깔끔한 데에서 오랫동안 상류사회의 물을 마셔온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 독특한 기품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바로 파벨 페트로비치다. 그는 건강 회복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국으로 떠났는데, 드레스덴에 거처를 정한 후 그곳에서 주로 영국이나 러시아 여행자들과 사귀고 있다. 그는 영국인들에게는 꾸밈없는 소탈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품위만은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영국인들은 그를 좀 따분한 사람이라 여기면서도 ‘완벽한 신사’라고 존경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에겐 허물없이 행동해서, 멋대로 화풀이를 해대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태도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쾌하고 친근하게, 그러면서도 고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슬라브주의적 견해를 굳게 지키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상류사회에서는 그것을 trХs distingue(정말 존경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어로 된 책을 전혀 읽지 않으나 그의 책상 위에는 농민들의 짚신을 본따 만든 은제 재떨이가 놓여 있다. 러시아의 관광객들은 그를 매우 만나고 싶어 한다. 마트베이 일리이치 콜랴진은 한때 반대파의 입장에 있었으나 보헤미아의 온천에 가는 길에 어마어마한 행차로 그를 찾아준 일도 있다. 그 지방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넣는 데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키르사노프 남작 각하’만큼 손쉽고 빠른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선행을 베풀고 있지만, 지금도 역시 이따금 세상이 떠들썩한 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일찍이 사교계의 인기를 끌었던 사나이다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나가는 것이 괴롭게 느껴졌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괴로운 것이다. 러시아 교회에서의 그의 모습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그는 한쪽 구석 벽에 몸을 기댄 채 괴로운 듯 입술을 꼭 깨물고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있는데, 이윽고 제 정신이 돌아오면 남 몰래 성호를 긋기 시작하는 것이다.
쿠크신은 외국에 나가 있다. 그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이젠 자연과학이 아닌 건축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자기는 그 방면의 새로운 법칙을 몇 가지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학생들과 사귀고 있는 특히 하이델베르크에 많이 모여 있는 물리나 화학전공의 젊은 러시아인들과 교제한다. 그들은 처음엔 사물에 대한 그 성실한 의견으로 우직한 독일인 교사들을 놀라게 하지만, 나중에는 그 완전한 무위와 절대적인 나태로 그 교수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는 것이다.
시트니코프는 산소와 질소의 구별도 못하는 주제에 부정의 정신과 자긍심에 찬 몇 명의 화학자와 위대한 옐리세비치와 더불어 자기도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 페테르스부르크 시내를 헤매면서, 그가 단언하는 바에 의하면 자기가 바자로프의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누군가가 최근 그를 구타했는데, 그는 잠자코 있지 않고 어느 정체 모를 잡지에 실린 수상쩍은 논문에도 자기를 구타한 자를 비겁자라고 빈정거린 모양이다. 그는 이것을 아이러니라 말하였다. 부친은 여전히 그를 혹사하고 있으며, 아내는 그를 바보로 취급하기도 하고… 문학가라 생각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어느 시골 한 구석에 조그마한 마을 묘지가 있다. 거의 모든 묘지가 그러하듯 그것 역시 서글픈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주위를 둘러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풀숲에 가리워져 있었고, 잿빛 나무 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운 채 한때는 채색을 했던 적이 있는 그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었으며, 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다 민 것처럼 어느 것이나 다 삐딱하게 서 있다. 가지들이 많이 꺾인 나무 몇 그루가 가냘픈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양떼가 제멋대로 그 위를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무덤들 사이에 단 하나, 사람의 손도 닿지 않고 짐승도 넘나들지 않은 무덤이 있다.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 아침 노래를 부른다. 무덤은 철책으로 둘러져 있고 조그마한 단풍나무 두 그루가 그 양쪽에 심어져 있다.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이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다. 이 무덤에는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마을로부터 이제 늙을 대로 늙은 두 노인 한쌍의 노부부가 종종 찾아온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 올라온다. 철책 가까이 오면 그들은 엎드려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비통하게 울고 나서 한참을 간절한 마음으로 말없이 우뚝 선 비석을 바라본다.
그 아래에 아들이 누워있는 것이다. 짤막하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어주기도 하고, 또다시 기도를 드리기도 하면서 이곳을 이내 떠나지를 못한다. 이곳에 있으면 두 사람은 마치 아들 곁에, 아들의 추억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과연 이 두 사람의 기도는, 이 두 사람의 눈물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 과연 사랑은, 성스럽고 끝없는 사랑은 전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아무리 열정적이고 죄 많은 반역적인 정신이 이 무덤 속에 숨겨져 있을지라도 그 위에 피는 꽃들은 순결한 눈으로 우리를 잔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꽃들은 단지 영원한 평화만을, ‘무관심한’ 자연의 그 우대한 정적만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꽃들은 또 영원한 화해와 무한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86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