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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를 위하여(The Princess) 2

Bollnow 2024. 3. 5.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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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는 차를 타고 래리와 보니의 아파트로 가면서 내내 말없이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분위기를 북돋우려고 애썼지만, 그녀는 그들이 온통 자신의 기분을 맞추려고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들이 어쨌거나, 그녀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 이 모든 건 몽고메리 대위의 실수에서 비롯된 거야. 그 끔찍하고 불쾌한 남자는 미국에서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의 장본인이었다. 물론 그를 만나기 전 유괴를 제외하고. 그는 그때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그녀를 그냥 물속에 빠져죽도록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보니의 조그만 거실로 들어가 서성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JT와 돌리가 돌아왔다. 그를 보자 마자 아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부엌으로 가버렸다. JT가 뒤따라왔다.

당신에게 줄 게 있소.” JT가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그녀가 돌아섰다.

역사책인가요? 조지 워싱턴의 전기(傳記) 끝 부분에 열 가지 논문식 문제가 함께 포함되어 있죠?” 그녀는 한번 해볼 테면 해봐라 하는 식으로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는 그저 희미하게 웃음을 띠더니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그녀는 시험삼아 가방을 받아 열어보고 감청색의 수영복을 꺼내며 회의적인 표정을 던졌다.

내가 직접 골랐소. 그리고 모자와 지갑, 간편한 원피스도 있소. 그리고 자동차에 향수도 있소. 역사책은 한 권도 없어요.” 그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건네도 아리아는 웃지 않았다. “뭘 사온 거예요?” 게일이 현관께에서 꽥 소리치며 다가왔다.

아리아가 가방을 내밀자 게일이 받아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은 사과 방법이군요, JT. 아직까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게일이 아리아를 쳐다보며 눈을 찡긋했다. 아리아는 게일이 그녀에게서 무슨 말인가를 기대하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이 사과하면, 아내는 키스를 해서 보상을 해주는 거죠. , 해보세요. 2분을 주겠어요. 그런 다음 이층에서 갈아 입고 해변으로 가도록 해요. 배고파요.”

그녀는 두 사람만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 , 내 생각엔 그 방법이 평화적인 방법인 것 같군.” JT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소. 당신이 너무 달라 보여서 놀랐던 것뿐이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난 미국인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그리고 긴 머리는 너무 구식으로 보였기 때문이었고요.” 그가 한 발자국 그녀에게 다가왔다.

정말로 마음에 들었소. 당신에게 잘 어울려요.” “머리가 짧으니까 느낌이 아주 좋아요.”

그녀가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그가 한 손을 올려 그녀의 굵게 굽이치는 머리카락 주위를 매만졌다.

과연 그렇군.” “내 말은…….” “시간 됐어요. 어서 가자고요.”

게일이 밖에서 소리치자 두 눈에 당황스러움을 담고선 아리아가 그를 지나쳐 부엌을 떠났다. 2층으로 올라가, 그녀는 침실이 공동 탈의실이 되어버린 걸 발견하고 그 기묘한 상황에 대해 얼떨떨했다. 시녀 앞에서 옷을 벗는 것과 모르는 사람 앞에서 발가벗는 것은 다른 것이다! 게다가 그녀로서는 옷을 입고 벗는 일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으며, 이 수영복은 등에 아래위로 움직이는 지퍼가 달려 있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했다.

하지만 돌리는 아리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리아의 여름 원피스 등에 있는 단추를 풀고 옷을 벗을 수 있도록 거들기 시작했다.

이젠 내가 할게요.” 빌려입은 레이스 속옷 차림으로 아리아가 말했다. 돌리 덕분에 옷을 벗는 일은 아리아가 예상했던 것보다 쉬웠으며, 탄력이 있는 빳빳한 수영복을 입자 뭔가 근사한 일을 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명의 잘생긴 남자가 싱글거리며 서 있었다. 미첼과 JT였다. 하지만 JT는 그녀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나른하게 게단 난간에 몸을 기대고 보니가 하는 말에 함박 웃고 있었다. 이제 그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 하며 아리아는 몹시도 궁금했다. “공주님!” 미첼이 한 팔을 내밀자 그녀는 웃으면서 그 팔을 잡았다.

그때 JT가 둘 사이를 밀치고 들어왔다. “내가 직접 아내를 호위하고 싶은 걸.”

그러게.” 미첼이 중얼거리고는 슬픈 빛으로 아리아를 한 번 쳐다보더니, 전날밤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모두 JT의 승용차에 우르르 몰려들어 장작더미 쌓아올리듯 포개 탔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무릎 위에 앉았다. 운전대를 잡은 JT와 그 옆에 앉은 아리아만이 예외였다. 그는 계속해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미소를 크게 지을수록 그녀는 점점 의심이 생겼다. 도대체 지금 어떤 끔찍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

해변에 이르자 남자들은 수영복 팬티를 갈아입으러 어둠침침한 곳으로 갔고, 그동안 여자들은 모닥불을 피울 나뭇가지를 모았다. JT가 까만 수영복 팬티만 입은 채로 불빛으로 나오자 돌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그녀에게 윙크를 보내고는 바다가 물결치는 곳으로 돌아섰다. “수영하러 가시겠습니까, 공주님?” 그가 뒤에서 소리쳤다.

밤에는 저런 물에 들어가 수영하지 않아요.” 아리아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JT는 자맥질을 하더니 돌리와의 약속대로 열두 마리의 바다가재를 가지고 돌아왔다. 모두들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식사 후,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부부들이 서로 엉겨 키스하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곤혹스러워 시선을 돌렸다. “JT!”

돌리가 잠시 빌의 품에서 벗어나 바닷내음을 들이키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소리쳤다.

공주님께 목을 껴안는 오래된 미국 풍습을 소개하는 게 어때요?” “그럴 생각이오.”

그가 대답하더니, 아리아의 한손을 붙잡아 위로 올렸다.

그가 한쪽 손을 입술로 가져가려는 순간 그녀가 손을 홱 잡아 뺐다.

여기 이 사람들처럼 공개적으로 내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녀가 야멸차게 몰아붙였다. “당신 나라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쌀쌀맞소?”

난 따뜻한 나라에 살고 있어요. 겨울이 되어도 푸근하죠.”

당신은 미국인이 되고 싶은 거요, 아니면 그렇지 않은 거요?” 그가 매몰차게 닦아세웠다.

배우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요. 그리고 잘 해내고 있소. 저 사람들을 봐요.”

그가 엉킨 자세로 사랑을 나누는 다른 쌍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바로 이 순간 독일 침공에 대해서도 알려 하지 않고 우리에게도 관심이 없어요. 그들의 온마음은 그저 서로의 목을 껴안고 키스하는 거예요. 갓 결혼한 부부는 그렇게 하는 거란 말이오.” “좋아요.” 그녀가 그에게서 뒤쪽으로 몸을 젖히며 한손을 내밀었다.

팔을 비틀거나 잡아당기는 둥 당신이 의도한 고통스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면 내 손에 키스할 수 있어요.” “이봐요, 아가씨…….” “난 공…….” 그가 한 손을 그녀의 머리 뒤쪽으로 살그머니 가져가더니 그녀가 뭐라고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키스를 해버렸다.

입술에 키스를 받아본 적은 두 번밖에 없었다. 줄리앙 백작이 청혼했을 때와 섬에서 여기 이 몽고메리 대위에게 한 번,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시간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한 손이, 그리고는 다른 손이 부드럽게 보호하는 듯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더니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감미롭게 애무했다. 아리아는 눈을 뜬 채 그를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손을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느낌이 휩쓸고 지나갔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도 깨닫기 전에 본능적으로 그녀의 두 손이 그의 어깨로 이동했다. 그녀는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맨살이 기분 좋았다. 천천히 그가 그녀의 머리를 한쪽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키스가 점점 깊어졌다. 아리아는 눈을 감고 약간 앞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그가 키스를 끝냈지만 그녀는 그곳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눈을 감은 채였다.

그녀는 랑코니아 말로 뭐라고 웅얼거렸다. 그런 다음 서서히 깜박거리며 눈을 떴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게 우리 미국 풍습 가운데 하나요. 랑코니아에서는 그런 게 없죠?”

그녀는 그가 우스갯소리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미첼의 키스와 비교해서 내 키스는 어땠소?” 그녀는 그 말에 자세를 가다듬고 그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철썩 소리가 나게 그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때리는 이 그 미국 풍습은 워싱턴에서 만난 당신 여자 친구에게서 배웠다고요.“

그녀가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누군가 날 집으로 좀 데려다주세요!”

이봐요.” JT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

우린 당신 하인이 아니오. 여기에선 뭔가를 요청할 수는 있지만, 명령할 수는 없소.”

그렇다면 이곳을 떠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내가 데려다주겠소.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오? 나로선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말이오.” 그가 돌리를 보려고 돌아섰다. 모든 쌍이 일어나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 노력했소. 엄청 노력했단 말이오. 이봐요, 공주님. 내가 당신을 집으로 모셔다드리죠.”

다른 부부를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시내를 도는 동안에도 두 사람 모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의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심한 말이 아닌 데도 너무 쉽게 소란을 피웠다는 걸 알았지만-사실 그녀는 JT가 질투어린 태도를 보이는 게 즐거웠다-갑작스럽게 까닭모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걸음마를 시작함과 동시에 예법을 익히고 자기 수양을 쌓아왔다. 항상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부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해서도 사람들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사지가 찢기는 극한 고통을 느꼈지만 절대로 울지 않았다. 또한 두 번의 난처한 상황에 빠졌어도 재치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통제해왔다. 그리고 영원토록…….

그러나, 오늘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통제력을 잃을 뻔했다. 그 남자의 키스, 그리고 그 황홀한 느낌!

그녀는 이 야릇한 느낌을 할아버지께 얘기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었다. 이건 옳은 일일까? 줄리앙 백작과의 키스엔 결코 이런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결코 그와 함께 살지 않았으며, 같은 침대에서 자지도 않았고 그와 단 둘이서만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그래, 백작과 결혼했더라면 아마도 이러한 느낌이 생겼을지도 몰라.

그녀는 몽고메리 대위가 커브를 틀 때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거나 기어를 조종할 때마다 그녀의 무릎을 건드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심장 역시 점점 세차게 뛰어올랐다.

이제 두 사람만이 남자, 그녀는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쪽으로, 의자 끝쪽으로 가줬으면 좋겠소. 가능하면 내게서 멀리 떨어지시오.”

아리아는 그의 요구대로 했으며, 두 사람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다음 이틀 동안은 무척이나 끔찍스러웠다. 그녀는 보니, 돌리와 함께 쇼핑에다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손질하기도 하고 수영하러 갔지만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JT는 예전의 쌀쌀맞은 남자로 다시 되돌아갔다. 웃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서류가방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며, 요리하는 법과 세탁 방법을 알려주면서 침착성을 잃곤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제 설거지를 했는걸요.”

아리아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그리고 오늘 다시 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 일주일에 7일을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농담하시는 거죠? 매일 설거지를 하고, 매일같이 가구의 먼지를 떨고, 빨래에다 음식을 만들고 채소를 사온다면, 책은 언제 읽죠? 돌리, 보니와 함께 쇼핑은 언제 가나요? 몽고메리 부인이 아니라 아리아가 되는 때는 언제인가요? 설거지나 세탁 이외의 것에 대해 언제 생각하죠?” “출근해야겠소.” 그날 아침, JT가 고용했다던 험프리즈 부인이 갑자기 나타나 집안을 청소하고 저녁식사로 요리를 해주었다.

그날 밤 아리아는 촛불을 밝히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분위기를 그럴듯하게 꾸몄다.

하지만 JT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집안의 전등을 모두 켜더니 촛불을 꺼버렸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아주 화가 나 있었기에 그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는 두 사람의 결혼은 일시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보다 그 사실에 대해 더욱 절실하고 있는 터였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험프리즈 부인이 만든 신선한 바다가재 샐러드를 내놓고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등을 활모양으로 굽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는 남부사람 특유의 느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만 바다가재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조그만 나를 드시겠어요?”

돌리의 말을 멋지게 흉내 내어 그가 웃음을 지었다.

용기를 얻은 그녀는 그의 건너편 의자로 가서 앉았다.

미국 부부들은 둘만 있을 때 뭘 하죠?”

난 그들이 침대 밖에서는 뭘 하는지 모르겠소.”

그녀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아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미국 여자들은 이런 생활이 따분하다는 걸 알지 못하나요? 아무리 가족을 위한 경우라 하지만 정말로 청소하는 걸 즐기나요?” JT가 다시 웃었다.

“‘즐긴다는 말은 적당한 단어가 아닐 거요. 그러면 공주로서 당신은 뭘 했소?”

항상 다양한 훈련을 쌓았죠. 여동생과 나는 말을 타기도 하고, 검술은 물론, 총 수업도 받았죠.”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군…….”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어떻게 보인다고요?” 그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수영복을 입었을 때 몸매가 아주 훌륭해 보이더군.” “고맙군요.”

당신 입에서 그 말은 오늘 처음 듣는군.”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일을 처음 하셨잖아요.”

그녀가 샐쭉거리며 톡 쏘아붙였다.

, 그래요? 당신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맙다는 말을 들을 만한 일이 아니었소?”

내가 기억하기론 당신은 유괴범들보다 더 형편없었어요. 뭐라 그랬지? , 맞아. ‘멋진 몽고메리를 위해 숨을 쉬어 봐요.’” 그녀가 그의 목소리 그대로 흉내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고 말머리를 돌렸다.

당신은 새로운 증류 선박에 대한 청사진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더군요. 그거라면 지루함을 덜어주는 데 그래도 도움이 될 거요.”

그래요. 보여주세요.” 청사진 위로 상체를 기울이며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기분좋은 일이었다. 전쟁 중에 짠 바닷물을 식용 담수로 증류시켜 부대로 수송하는 임무는 막중했고, 그 임무 수행엔 선박이 반드시 필요했다. JT는 이러한 시설을 갖춘 선박으로 개조하는 첫 번째 시도로서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흘러간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현재 호기심을 충족시킬 무언가가 없을까 하고 항상 굶주려 왔다. “이같은 시설을 육지에도 만들 수 있나요?”

선박보다는 육지가 더 쉬울 거요. 그런데 왜요?”

랑코니아의 주요 농작물은 와인을 만드는 포도예요. 하지만 지난 5년 동안이나 가뭄이 드었어요. 그런데 이걸 보니 그런 시설을 만들 수 있다면 포도밭에 물을 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젊은이들이 랑코니아를 떠나고 있어요. 주요 수입원을 잃고 있기 때문이죠.”

기술자에게 알아봐야겠지만, 내 생각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소.”

당신이 알아봐주시겠어요? 내 말은, 우리가 고향으로 가면 당신이 내 나라를 도와주겠는가 하는 겁니다.”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력해보리다.”

그녀가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해낸다면 그건 우리 백성들에겐 엄청난 일이 될 거예요. 돌리 말에 의하면 당신은 조선(造船)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더군요.”

JT가 듣기 싫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괜히 비행기 태우지 마시오. 하지만 내 가족들은 많이 알고 있죠.”

그가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잠잘 준비 됐소, 여보?”

그가 어색했는지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내 말은…….”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보냈다.

“‘여보아가씨라는 말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공주님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예요.”

그 호칭이 당신에게 어울려요. 차갑고, 융통성이 없으며 고집이 센 데다가, 인간적이지 않아요. 그 호칭은, 어느 누구나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바로 당신의 모습과 꼭 맞아요.”

!”

그녀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음소릴 내뱉고는 시선을 돌렸다.

인간적이지 않은 사람이라…….”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으로 된 모자를 쓰면서 그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난 정말로 그가 설명한 대로일까? 이틀 전 그가 키스했을 때 난 두려워질 만큼 강렬한 열정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단 말인가? 그가 헤더에게 키스했을 때 그녀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을 거야. 헤더는 키스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리아는 JT의 침대 사이를 가로막은 칸막이의 다른 쪽에 있는 좁은 침대로 가서 누웠다. 늘 그렇듯이, 날씨가 무더웠다. 그녀는 복숭아빛이 감도는 얇은 나일론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운이라기보다 속치마에 가깝다고나 할까.

리타 헤이워드 스타일이라고 이 가운을 살 때 돌리가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자정 무렵에 폭풍이 치기 시작하더니 얇은 벽으로 만든 자그마한 집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천둥이 우르릉 쿵쾅거리고 번개가 번쩍이며 방안을 밝혔다. 아리아는 이불을 걷어내버렸다. 그래도 나이트가운이 무겁고 죄는 느낌이 들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안이 후덥지근해지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녀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천둥이 치자 유리창이 덜컹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리아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영상이 마음속에서 떠돌았다. 섬에서 앉아 있는 그녀 앞에 서 있던 JT의 모습, 알몸에 가까웠던 그의 우람한 체격, 수영복 팬티를 입은 JT의 모습, 그리고 섬에서 그가 공터로 들어와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에서 목욕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의 두 눈동자에 언뜻 스친 눈빛이 떠올랐다. 게다가 두 번의 키스…….

그녀는 뒤쪽에서 마룻바닥이 소리를 내자 얼른 이불을 끌어당겼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녀는 JT가 그녀의 침대를 지나쳐 유리창으로 다가가는 걸 보았다.

그가 돌아서더니 그녀를 흘낏 쳐다보고는 잠깐 멈추었다.

깨어 있었소?” 그의 나지막한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대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폭풍 때문에 깬 거요?” 그녀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침대 끝에 앉았다. “괜찮아요?” 그가 한 손을 그녀의 이마에 얹었다. 아리아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쥐었다. “무슨 일이오? 나쁜 꿈을 꾸었소?”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그가 품 안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리아가 필요한 건 위안이 아니었다. 그에게 몸이 다가서는 순간, 맨살인 그의 가슴에 젖가슴이 닿는 걸 느꼈다. JT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뭘 원하는지 깨달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그가 세 번째 키스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굶주린 듯 키스하기 시작했다.

, 내 사랑. 나의 아름다운 공주님. 당신은 내 것이오. 당신도 알고 있소?”

그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처럼 그녀의 목에 키스를 퍼부었다.

난 당신의 목숨을 구했으니 당신은 내 것이오. 내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지금 살아 있지 않을 거요.” “그래요.”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그래요. 날 살아 있게 해주세요. 비로소 살아 있는 걸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날 안아주세요.”

그리고 그녀가 말을 더 했지만 랑코니아 말로 했기 때문에 JT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그녀를 얼마나 갈구하고 있었는지 자신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섬에서 알몸인 그녀를 본 이후로, 그녀의 커다란 젖가슴과 조그만 엉덩이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매일 등을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쑥 앞으로 내민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나이트가운을 찢으며, 그토록 수없이 꿈꾸었던 젖가슴을 굶주린 듯이 파고 들었다.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두 손으로 움켜쥐자 젖가슴이 그의 두 귀를 덮었다. 아리아가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JT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녀는 처녀였으며 어쩌면 공포를 느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가득한 자신을 억제하기란,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화물 열차를 멈춰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는 그녀의 몸과 팔, 젖가슴, 어깨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시 목으로 올라가 가볍게 입술을 스치고,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지난 몇 주 동안 그가 상상하고 있던 것과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빗장뼈에 점이 하나 있어 그가 거기에도 키스했다. 그는 머리를 아래쪽으로 내리면서 스치는 모든 것에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 , 장딴지 등…….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마치 키스 한번에 체온이 일도씩 올라가는 것 같았다.

.” 그녀가 마른 침을 삼키며 힘겹게 속삭였다. “여기 있소.”

그가 뚜벅 대답하고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는, 그녀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에 사랑 만들기를 이끌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따라왔다. , 그렇다! 그녀는 아주 빨리 익혔다. 그리고 천천히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면서 그는 그녀가 거의 본성에 가까운 재주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오랫동안 부드럽게 젖가슴에 키스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어. 그녀는 살아오면서 많은 훈련을 쌓은 덕에 그녀의 몸은 그만큼 강하고 기민했다. 그녀는 그가 이끌어가는 대로 쉽게 따라왔다. 드디어 절정에 달하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그녀 위로 무너지면서 팔과 다리로 그녀를 푹 감쌌다. 그가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괜찮소?” 그는 가슴 아래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느끼고 빙긋 웃었다. “숨 쉴 수 있겠소?”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목젖 깊숙이 킬킬거리며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아주 약간 풀어주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땀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의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유리창으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아프게 했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요. 하지만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 그게 좋았어요.”

사실 그는 그녀를 쳐다보는 게 약간 겁이 났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 혹시 뭔가 불만스런 빛이 보이지 않을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그녀를 뒤로 약간 밀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머리카락은 부드럽고 탐스러웠다. 몇 가닥이 땀에 젖어 두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목욕하는 게 어떻소? 함께 합시다. 둘이 함께 욕조에 들어갑시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게…… 가능한가요? 여자와 남자는 그렇게 해야 하나요?”

여기 이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할 거요.” 그가 일어서자 그녀는 알몸이 된 그에게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시트로 가슴을 가린 채 나이트가운을 찾았다. JT가 침대 밖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가리지 말아요. 그저 지금의 당신을 바라보고 싶소.”

.”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그녀의 한족 손을 잡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군요. 아니오. 아가씨가 아니라, 내 말은 공…….” 그녀가 앞으로 다가가자 젖꼭지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그의 입술에 댔다.

아가씨나 여보, 둘 중에 당신이 오늘밤 원하는 걸로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요.”

그렇게 말만 하다간 목욕할 시간이 없겠소. , 내 사랑. 당신을 씻어 주리다.”

 

 

11

드디어 해냈군.” 빌 프레이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JT는 듀발 스트리트의 한 초라한 맥주집에 앉아, 네 잔째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왕자에게 어떻게 넘길 셈인가?”

그는 왕자가 아니야. 백작일 뿐이라고. 돈도 없고. 그녀보다 키도 더 작아.”

그 남자에 관해 뒷조사를 할 만큼 자넨 그녀에게 관심이 있지는 않았던 걸로 아는데.”

JT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다섯 잔째를 주문하려고 여급에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자네가 취하면 해군 헌병대에서 자네 은신처를 접수할 걸세.”

난 취하지 않아. 취하고 싶지만 말이야. 눈만 뜨면 내게 명령만 해대는 오만한 여자한테 말려드는데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나?”

JT가 으르렁거리며 대들었다.

지난밤에 그녀가 오만해서 자네 눈 밑에 그렇게 그늘이 진 건가?”

JT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아무 쓸모가 없어.”

그러더니 이내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게 문제야. 이봐, 그녀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누군가와 결혼하도록 운명이 정해진 거지. 그래서 줄리 백작과 잘 지낼 거야. 게다가 왕족들은 모두 연인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자네가 주위에 머물면서 그녀의 연인이 되면 되잖아.”

JT가 맥주잔을 소리가 나게 거칠게 내려놓는 통에 맥주가 반쯤 테이블로 흘러넘쳤다.

빌어먹을! 그녀는 이 결혼을 장난으로 여기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여기 나, 미국인에게는 그렇지 않아.”

워싱턴으로 불려갔을 때에 자네가 한 말과는 다르군. 자넨 미국을 도우려고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고, 마침내 때가 되어 그녀에게서 벗어나면 기쁘겠다고 했잖나? 그런 멍청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아무도 없다고도 했고 말이야. 자넨…….”

자넨 뭐야? 녹음긴가? 나도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 있단 말이야. 이제 문제는, 이 결혼이 조금씩 복잡해지고 있다는 거야. 이런 일은 어떤 여자에게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네. 자넨, 군대측이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건강한 두 남녀가 함께 있으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 거야. 내겐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이 필요해. 그것뿐이야. 난 그녀 주위에 있어 왔고, 그런 만큼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단 말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래, 그렇지. 자넨 그녀를 나만큼 알지 못해. 그녀는 모든 것에 대해 언쟁을 벌이지. 가사일 같은 건 그녀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돈을 써댄다고. 지난주에 에델 미용실에서 얼마를 썼는지 알기나 하나?”

돌리보다 더 많이 쓰지는 않았을 거야. 자네 아낸 꼭 내 아내 같단 말이야.”

바로 그거야…… 그녀는 내 아내가 아냐. 그건 차를 빌리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차이 같은 거라고 생각하네. 그건 엄청난 차이가 있어. 빌린 차는 사용할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돌려줘야 하는 거란 말이네.”

그 조그만 숙녀의 경우, 자네가 빌어먹을 차 한 대를 빌린 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로군.”

JT가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그래, 난 롤스로이스(영국제 최고급 승용차)를 빌린 거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앞으로 뷰익(미국제 일반 승용차)으로 내 인생을 보내야겠지.”

빌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녀가 돌아가기까지는 일 주일이 남았네. 맞나?”

일 주일이 지나면 난 그녀를 그녀의 나라로 데려가서, 그녀의 성으로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데려다주고 나면, 그녀는 초라하고 빼빼 마른 백작에게 돌아가겠지.”

빌이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가는 게 좋겠네. 돌리가 7시에 수영장에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 했어. 벌써 15분이나 지났어.”

그들은 거리로 나와 장교들을 위해 해군측에서 개방한 수영장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에게서 맥주 냄새가 나는데요. JT, 아리아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거죠? 아주 활기에 차 보이니 말이에요.”

돌리의 말에 JT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아리아가 수영복을 입은 채로 미첼과 함께 구내매점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보았다. 미첼은 제복을 입은 상태였다. 둘 다 웃고 있었다. JT는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는 수영장 가장자리 쪽으로 몇 발자국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보다 몸집이 더 작은 미첼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내 아내와 가까이 하지 말아. 내 말 알아듣겠나?”

미첼이 허우적거리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JT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보아 왔던 야만적인 태도 중에서도 이건 최악이에요!”

아리아가 쏘아붙이고 허리를 굽혀 미첼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JT가 그녀의 어깨를 그러잡고 끌어당기자 미첼이 다시 물속으로 덩벙 빠져버렸다.

집으로 갑시다.”

그들의 조그만 집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리아가 옷을 다 입자, 그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그의 걸음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집에 당도하여 다부지게 따질 작정이었다.

지난밤 사랑을 나눴는데도 어쩜 이다지 불쾌하게 행동하는 걸까? 그녀는 온몸을 애무하던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피부에 와 닿던 그의 입술의 체쥐 역시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함께 목욕까지 하지 않았는가. 물론 너무 부끄러워서 그의 몸을 제대로 쳐다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그가 웃으면서 시간이 됐소라고 했지. 목욕 후 그가 그녀의 물기를 닦아주고 안아서는 침대에서 다시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두 번째에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않았고, 둘은 충만한 기쁨으로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눈부시도록 청명한 아침이었고, 그는 옆에 없었다. 그녀에게 남겨둔 아무런 쪽지도 메시지도 없었다. 하루종일 그녀는 전화가 울리기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두 시에 그녀는 머리를 손질하려고 황급히 에델 미용실로 갔다. 그에게 예쁘게 보이리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식탁에 촛불을 켜두었다.

530분에 돌리가 들러 장교들을 위한 수영장에서 남자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JT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 내심 놀랐다.

그리고 JT가 대뜸 나타나서 미첼을 수영장으로 집어던졌다!

집에 당도하자, 그가 그녀를 대신해 문을 열쇠로 열었지만 집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난 어딜 가봐야 하오.”

그가 중얼거리더니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가서 그의 팔에 한쪽 손을 얹었다.

, 뭐가 잘못된 거라도 있어요? 오늘 뭔가 기분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가 그녀의 손이 닿자 팔을 움찔거렸다.

어머니 말고는 날 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JT. 아시겠소?”

그녀는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이죠, 몽고메리 대위. 그런 실수는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녁을 데워드릴까요? 그게 미국 아내의 도리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디 다른 데서 아무거나 먹겠소. 그리고 오늘 밤은 당신 침대에서 주무시오.”

그녀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얼굴 표정에 각별히 신경썼다.

그러죠, 높으신 어른. 이 가련한 첩에게 다른 걸 원하는 게 있나요?”

그가 그녀를 노려보더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난 울지 않을 거야. 그는 날 울리지 않을 거야.”

아리아는 휑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JT는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치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구해주는 사람이 없는-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리아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극적인 변화를 거듭했다. 그녀는 천진스럽게 웃고, 춤추며 농담을 던졌다. 그가 선박에 대한 복잡한 계획들을 알려주었을 때 그녀는 그가 말한 모든 내용을 이해했다. 그녀는 영리했으며, 성적인 매력이 풍부했고 유머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지만 다른 남자가 그녀를 쳐다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곤 했다.

그는 그녀와 떨어져 지내면서 마음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에 머물면서 허름한 소파에서 새우잠을 잤다. 하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로부터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받았다. 어머니 아만다 몽고메리는 친구가 수백 명이나 되며, 분명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 소식을 친구들에게서 들었으리라는 걸 JT는 확신했다. 어머니의 방문은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식을 치른 일에 대해,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단히 충고하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방문에 대해선 별로 탐탁지 않았다.

여자들이란!”

JT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섬으로 줄행랑을 쳐서 얼마동안 혼자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 생각이 밀려들자 그는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섬에서 마지막으로 혼자지냈던 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기운을 차리고 아리아에게 어머니에 대해 말해주러 갔다. 아리아는 어깨에 조그만 나비 리본이 달려 있고, 목과 팔을 훤히 드러낸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맛있는 복숭아처럼 상큼해 보였다. 어렵사리 그는, 그녀가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며 궁중식으로 손에 키스하기를 요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리아는 그저 무심한 태도를 보일 뿐이라 그는 안달이 났다. 급기야는 화가 치밀어 그는 집이 흔들릴 정도로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JT는 거의 이틀 동안 집에 오지 않았다. 첫날밤에는 전혀 나타나지도 않더니 다음날 밤에는 채 한 시간도 머무르지 않고 그녀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다가 떠나버렸다.

어머니가 내게 전보를 보냈소. 토요일에 이곳으로 오실 거라는군요. 어머니는 곧장 집에 들러 우리 둘과 함께 사령관의 무도회에 참석할 것이오. 입고 갈 만한 게 있소? 볼륨 댄스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해군 장교들에게 격식을 갖춰 인사말을 하는 법을 알고 있소?”

아리아는 너무 놀라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왕궁의 공주인 그녀를 마치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처럼 취급하다니……

창피 당하지 않게 어떻게든 해보죠.”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속에 빈정거림이 숨어 있다는 걸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줄기차게 떠들어댔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훈족(Hun, 흉노족이라고도 하며 45세기 경 유럽을 휩쓴 아시아의 유목)의 왕 아틸라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영국의 간호원, 근대 간호학 확립의 공로자)처럼 용맹성과 희생심이 각별한 분이었고 도한 미국 혁명가의 딸이었으며 메이플라워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몽고메리 가문의 아버지와 결혼했소.”

그 말이 그 밖의 모든 걸 설명해주기라도 하듯이 JT가 말했다.

아마도 우리의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뜻으로 어머니에게 내 집안의 족보를 보내야 할 것 같군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덕분에 난 유럽의 모든 왕가 혈통을 이어받았어요. 혹시 외국 왕들이 당신의 미국 여장부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요?”

비아냥거리는 그녀를 JT가 노려보더니 집을 떠나버렸다.

그는 옷을 갈아입으러 다음날 아침에 돌아왔으나, 어머니가 도착하니 집에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청소하길 바란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고 다시 일하러 나가버렸다.

험프리즈 부인이 떠난 직후 정각 1시에 돌리가 왔다.

어떻게 돼가요?”

그녀는 인사치레로 물었다.

아리아는 언제나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오면서 믿을 만한 사람이란 혈연관계의 친척들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돌리에게 굳이 사소한 일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함께 드시겠어요?”

난 음식에는 관심 없어요. 빌이 그러는데 JT가 지난밤 내내 밖에서 지냈다면서요? 플로이드가 게일에게 말한 걸 다시 빌에게 전한 모양이에요. 두 사람 싸웠어요?”

여기 먹음직스런 새우 샐러드하고 신선한 토마토가 있어요.”

아리아.”

돌리가 아리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난 모든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공주라는 것도, 그리고 당신 나라로 돌아가길 원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이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알아요. 무슨 일인지 듣고 싶어요.”

아리아는 생각 밖으로 그래도 미국인이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웃고 떠들면서 서로에 대해 가장 비밀스런 얘기를 털어놓을 땐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아리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를 토닥이는 돌리의 팔이 편안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돌리가 그녀를 소파로 데리고 갔다.

아리아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돌리가 말해달라고 채근했다.

그가…… 그가 나와 사랑을 나눴어요.”

아리아는 훌쩍이며 말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론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털어놓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왕족은 왕족 이외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었다. 귀족일지라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날 싫어해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죠?”

절대로 잘못한 거 없어요. 그 일 때문에 빌과 싸웠지만, 결국 빌이 얘기해주더군요. JT가 했던 말을요. ‘줄리 백작은 누구죠?”

원래는 줄리앙 백작인데, 나와 약혼한 그 사람을 몽고메리 대위가 그렇게 부르더군요.”

아리아는 하얀 손수건에 코를 풀며 말했다.

“JT가 당신이 아직도 이 백작과 결혼할 걸로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리가 앞으로 몸을 숙였다.

“JT는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는 우리 결혼이 일시적이라고 믿었기에 나와 결혼한 거예요. 하지만 난 이혼할 수 없어요. 그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돌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렇다면 JT는 왕이 되겠군요.”

여왕의 남편이 되는 거예요.”

아리아가 손을 내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난 그가 지금 내게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건 간단해요. 물론 그가 빌에게 얘기를 한 건 아니지만, 그는 당신과 사랑에 빠질까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는 누군가에게 당신을 넘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싶지 않은 거죠.”

그에게 이 결혼은 영원하다고 말해줘야겠어요.”

돌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용감한 미국 남자에게, ‘당신은 속은 거예요!’라고 말한다고요? 감쪽같이 속은 거라고요?”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인가요?”

돌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당신이 그를 사랑에 빠지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딸기와 와인을 먹여주라고요?”

아리아는 그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는 방법을 전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먼저 그의 관심을 끌어야 해요. 성적 매력이 돋보이는 옷을 입고 사령관 무도회에 가는 거예요.”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 말이죠.”

아리아가 샐쭉거리며 중얼거리자 돌리가 웃었다.

나도 그의 어머니가 이곳에 올 거라는 얘길 들었어요. 꽤 높은 양반이라죠?”

그녀를 만나려면 공주의 예의범절로도 모자라서 더욱 신경을 써야 할 정도죠.”

돌리가 아리아의 한쪽 팔에 손을 얹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든 남자들이 다 그래요. 빌은 내게 부풀린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자기 어머니 발아래 엎드려 숭배할 채비라도 하라는 듯이 꾸며댔죠. 그는 끊임없이 그녀의 요리솜씨를 과장했어요. 내가 사정이라도 해서 어머니의 요리 비법을 배워야 한다고 난리법석을 피웠죠. 그래서 처음에 그의 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난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갔어요. 어떻게 요리를 하시나 메모를 하려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만든 요리라니! 그분이 만든 스파게티 소스가 어땠는지 알아요? 토마토 수프 캔 두 개와 토마토를 으깬 캔 하나를 섞어서 만든 거였어요. 정말 끔찍했죠. 유명하다는 그녀의 칠면조 드레싱은 빵을 아홉 조각으로 잘라서, 물 반 컵과 세이지(쑥의 일종)가루 팔분의 일 티스푼을 넣어 만든 거였죠. 양파나 샐러리, 아무 것도 넣지 않은 거였어요. 그녀는 칠면조에 이 드레싱을 쑤셔 넣고 빵조각들을 부풀린 과자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바싹 구웠어요. 그러고는 그 수다스런 어머니는 천연덕스럽게도 내게, 당신의 어린 아드님에게 과연 능력 있는 요리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더군요.”

아리아가 두 눈을 반짝였다.

줄리앙 백작의 어머니는 내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죠. 그리고 날 공주님이라고 불러요.”

새침스런 그 말에 돌리가 생긋 웃었다.

빌의 뚱뚱한 어머니가 내게 무릎을 굽히고 인사하는 걸 보고 싶어요. 줄리앙 백작의 어머니는 당신의 손에 키스하나요?”

그녀는 내가 내민 손등에 이마를 대죠.”

아리아가 약간 우쭐거리며 대꾸했다.

나도 그걸 보고 싶어요.”

고국으로 돌아가면, 당신을 초대할게요.”

어머나, 멋진 일이네요! 영화 보러 나가지 않겠어요? 오늘은 낮에 상영하는 게 있어요.”

보고 싶어요.”

두 여자는 점심으로 새우 샐러드가 듬뿍 담긴 접시를 비우고 와인 한 병을 거의 다 마셨다. 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극장으로 가려고 식당을 나왔다. 아리아는 계속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돌리가 헐떡거리는 소리를 듣고선 꺄르륵 웃었다. 시선을 돌려 돌리와 눈이 마주치자 돌리가 아리아 앞으로 다가와 막아섰다.

이쪽 길로 가도록 해요. 캐논볼 나무가 활짝 피었을 거예요. 그 나무는 이 섬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거라고 들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리고…….”

아리아는 돌리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JT가 한 카페의 조그만 테이블 앞에 어떤 예쁘장한 빨강머리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여자의 손을 들어 올려 키스하는 걸 쳐다보았다.

그래요. 캐논볼 나무를 보러 가요.”

아리아가 얼른 시선을 돌려 활기차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돌리가 그녀의 뒤를 따라 얼른 뛰어갔다.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죠?”

아내란 남편의 배신 행위에 대해 철저히 무시해야죠.”

뭐라고요?”

돌리가 아리아의 팔을 잡고 그녀를 멈춰세웠다.

당신 나라에서의 법도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그곳으로 가서 그 방탕한 여자를 패대기쳐야 해요.”

그 여자를요? 하지만 그녀가 뭘 어쨌길래요? 그녀는 그의 초대를 받아들였을 뿐이에요. 그녀는 아마 그가 결혼했다는 걸 모를 거예요. 나쁜 일을 저지른 건 몽고메리 대위라고요.”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 말이 맞을 거예요. 그렇다면 어쨌든건 간에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죠?”

공주는 복수 같은 걸 하지 않아요.”

아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돌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나, 바로 그게 다른 거군요. 나라면 뭔가 보여주겠어요.”

두 사람은 극장까지 가면서도 내내 말이 없었다. 영화 제목은 록키산의 봄이었으며, 출연한 배우 가운데 형편없는 옷차림을 하고 나온 카르멘 미란다라는 여자가 특히 눈에 띄었다. 아리아의 눈에, 그녀는 미국인들을 낯선 이방인으로 대하는 풍자적인 등장인물로 보였다. 돌리는 그 여자의 행동과 틀린 발음에 줄곧 웃어댔지만, 아리아는 그녀의 연기에서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잘이 내 나라 국민을 생각할 때 저런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비슷할 거야. 그는 내가 머리 꼭대기에 열 개도 넘는 바나나를 얹고 무도회에 나타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내가 그의 명문가인 어머니를 당황하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아가 그 빨강머리 아가씨-가짜 빨강머리-와 공개적으로 사귀면서도 내 행동을 걱정스러워 하고 있어.’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죠?’라고 했던 돌리의 말이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그녀는 미국인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며 짧은 머리카락과 꽃무늬가 들어간 면직물 옷은 겉보기에도 그녀를 미국인으로 느끼게 했다. (‘내 어머니만이 날 잘이라 불러요.’ 그녀는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혐오감이 치밀었다)의 부정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졌다.

그녀는 화면을 쳐다보았다. 카르멘 미란다는 이제 보라색과 하얀색의 천박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아리아는 배꼽을 드러내놓고 그 유명하다는 시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스커트 자락을 길게 찢고선 머리에 길이가 45센티 정도의 머리장식 천이든, 뭐든 한다면?

바로 그거예요.”

갑자기 아리아가 속삭였다.

그게 뭔데요?”

이 여자 노래를 판으로 내놓은 적이 있나요?”

카르멘 미란다요? 물론이죠. 나와 있는 레코드판이 많아요.”

아리아는 미소를 머금고 그 여자의 동작을 마음속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과장이 심해서 흉내 내기가 쉬울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나자 돌리는 아리아의 눈빛에서 아까보다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았다.

기분이 괜찮아졌군요?”

난 남편이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 그대로 될 거예요. 카르멘 미란다처럼 옷을 입고 사령관 무도회에 갈 거라고요. 몽고메리 대위의 어머니를 만나서 그녀의 뺨을 한 대 치며 말할 거예요. ‘치카 치카.’”

…… 내 생각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군요. 내 말은, 사령관 무도회는 가장 큰 연중행사고 다분히 형식적이란 뜻이에요. 그야말로 높은 분들만 참석하죠. 빌과 나는 한 번도 초대된 적이 없어요. JT는 어머니가 오시기 때문에 참석이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아리아, 시어머니에게 잘 보여야 해요. 그건 어디에서나 통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당신을 하찮게 취급할 수도 있지만, 당신은 항상 그녀에게 잘 보이도록 해야 해요. 내 말을 믿으세요. 화가 난 시어머니는 당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지금보다 더한 지옥으로 말인가요? 내겐 아무 것도 없어요. 남편은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마치 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해요. 그가 나에게 냉정하며 비인간적이라고 했어요. 난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줄 거예요.”

“JT가 그렇게 말했어요? 필시 그가 당신에게 마음을 쏟도록 해야겠지만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택하세요. 화가 난 내 시어머니보다 더 불같은 사람들을 보고 싶군요.”

그 옷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빨간색과 흰색으로 만들겠어요. 아주 값싼 천을 사용하면 될 거예요.”

아리아. 정말이지, 사령관의 무도회는 그런 곳이 아녜요…….”

아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이 일에 절 도와주시면, 내 나라로 돌아가 당신을 한 달 동안 머무르도록 초청하겠어요.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왕관을 써보는 기회를 주겠어요. 열두 개쯤 있거든요.”

돌리가 침을 꿀꺽 삼키고 눈동자를 굴렸다.

당신 머리에 빨간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하는 자그마한 볼로 장식해줄게요. 그러고 보니의 집주인 여자에게 가장 크고 보기 흉한 조개껍데기 귀고리 한 쌍이 있어요. 쿠바에서 가져온 거죠. 빨갛고 하얀 반점이 들어가 있죠.”

완벽해요.”

아리아가 미소를 띠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레코드판을 사러 가요. 춤출 동안 부를 노래를 알아봐야겠어요. 잘 타이넌 몽고메리의 관심을 확실하게 끌 수 있을 거예요."

성공하길 바래요. 그의 어머니가 당신을 미워하게 될 테지만…….”

그러다가 돌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남자들은 용기있는 여자를 좋아해요. 겁쟁이들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번 일은 잘될 거예요.” “그는 그 빨강머리가 아니라 나만 바라볼 거예요.”

나도 그 점에 대해선 보장하죠. 그래도 그가 어떻게 당신을 바라볼지 은근히 걱정이 되네요.”

 

 

12

마침내 우리가 해냈군요.“

돌리가 화장실 문에 기대며 말했다.

당신이 무도회에 참석할 수 없다고 둘러댄 이유를 JT가 믿던가요?”

그에게 뭔가 생각거리를 주었죠. 아침부터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했어요.”

아프지 않잖아요.”

돌리가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 옷을 입으세요. 사람들을 15분 동안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여급에게 5달러를 줬어요. 그러니 어서 일을 시작하도록 해요.”

아리아는 긴 레인 코트를 벗고선, 동동 걷어 올렸던 스커트를 바닥까지 내렸다. 스커트는 값싼 흰색 공단으로 만들어 엉덩이에서 바닥까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곳과 엉덩이 부분은 빨간 색과 흰색의 반점이 들어가 반짝거리는 30센티 넓이의 나일론 세 겹을 덧댔다. 역시 흰색 공단으로 어깨에 끈이 달리고 잔등과 팔 배꼽을 드러낸 상의를 걸쳤다. 빨간 공단 리본으로 허리부분과 어깨를 장식했다. 소매는 반짝거리는 금박이 찍힌 세 겹의 나일론을 둘렀다.

그리고 팔에는 손목에서 팔뚝 중간까지 이어진 번쩍이는 빨간 팔찌를 찼다. 목에는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열네 겹의 세공 유리구슬 목걸이를 걸었다.

하지만 그런 옷차림보다 더욱 걸작은 15센티 정도 넓이의 나일론으로 만든 다섯 개의 꽃모양 머리장식과 하얀 공단 터번 꼭대기에 반짝거리는 반달 모양의 판자로 장식하고, 귀걸이는 터번에 매 늘어뜨렸다.

, 이런 모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돌리가 머리장식을 높이 치켜 올리다가 뒷전에서 쏴아하고 변기통의 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자 말을 중단했다.

", 이런 미처 점검하지 못했어요.“

돌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화장실에서 예쁘장한 중년 여인이 나왔다. 크가 크고 마른데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아주 근사한 검정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피부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돌리는 아리아의 머리 위에 얹힌 터번을 붙잡고 아리아와 함께 얼어붙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늘밤에 쇼가 있나요?”

아름다운 여인이 물었다.

즉흥쇼예요.”

아리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녀가 터번을 가리키며 물었다.

좋아요.”

여인이 어깨로 내려온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는 터번에 고정시켰다.

무거운가요?”

심한 정도가 아니에요. 준비가 다 된 것 같은데요.”

, 아니에요. 화장이 충분치 않아요. 반짝거리는 금박 때문에 얼굴이 돋보이지 않아요. 내게 화장품 몇 가지가 있어요, 도와드릴까요?”

아리아가 순순히 거울 앞에 앉자 여인이 화장을 해주기 시작했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꾸민 건 어떤 남자와 관련이 있나 보죠?”

아리아가 입을 열지 않자 돌리가 나섰다.

그녀의 남편 때문이죠. 그는…… 글쎄요,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 아리아와 난 그와 그의 어머니에게 앙갚음을 하기로 한 거예요.”

그의 어머니라고요?”

그녀는 양키 속물이죠. 며느리를 살펴보려고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JT는 아리아가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여서 말썽이나 일으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돌리!”

아리아가 눈을 곱게 흘기며 주의를 주었다.

, 그렇군요.”

여인이 뒤로 물러나 아리아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 내가 여급에게 5달러를 더 준 다음, 악단을 설득해 칼립소(서인도 제도의 트리나다드 원주민이 춤추면서 부르는 즉흥적인 노래나 곡조) 풍으로 연주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그 음악에 맞춰 당신이 들어오는 거예요.”

무척이나 친절하시군요.”

내게도 며느리가 있어요. 남편도 있고요. 남편의 부정을 눈감아 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요. 그가 무척 당황하는 건 물론이고, 이 기회에 당신이 그에게 좋은 교훈을 가르쳐주기를 바래요. 그러면 앞으로 그렇게 방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 악단에게 뭘 연주하라고 부탁하죠?”

“‘치카 치카 붐붐’, ‘티코-티코라는 말이 있지요. 그리고 아이, , , , , 난 당신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라는 말도 있어요.”

모두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여인이 말하자 세 사람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음악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려요.“

아리아는 칼립소 음악이 연주되는 걸 이 분 동안 듣고 있다가 화장실에서 튕기듯 뛰어나갔다. 그녀는 며칠 동안 연습을 해왔으며, ‘록키 산의 봄을 무려 네 번이나 보았다. 차분한 조명, 보수적인 옷차림의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 낮게 깔리는 음악과 대화, 공손하고 점잖은 웃음이 간혹 들리는 무도회장으로 그녀가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카르멘 미란다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놀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가면서 강한 스페인 억양을 쓰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흐물거렸다.

아주 귀엽군요.”

그녀가 사령관의 뺨을 꼬집고는 그의 아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에 아주 많은 별이 달려 있네요.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이 하나씩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리를 옮겨 부사령관의 무릎에 걸터앉아 엉덩이를 비벼댔다.

치카치카 붐붐 하고 싶지 않아요?”

이봐요 아가씨! 이 파티에 초대된 사람이오?”

남자가 황당하여 버럭 소리쳤다.

, 물론이에요. 전 매우 권세있는 분의 아주 하찮은 아내예요.”

그녀는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그가 누구요?”

남자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무릎에서 떼내려 했다.

저기 계시는군요.”

JT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재미있어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 맙소사.”

그는 아리아라는 걸 깨닫고 신음소리를 내뱉고는 쿵쿵소리를 내며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부사령관의 무릎에서 그녀를 끌어내렸다.

너무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제 말은…….”

당신은 빨간색으로 치장한 여자들을 좋아하는 모양이더군요.”

아리아가 재빨리 JT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서 난 빨간 옷을 입었어요. 이 빨간색은 그녀가 머리카락에 물들인 것과 같은 물감으로 물들인 거예요.”

그녀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주 힘이 세지 않아요? 그래서…….”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엉덩이를 쭉 빼고, 한쪽 발을 엉덩이께로 들어 올리고는, 엉덩이를 JT의 다리로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우우우하며 그녀가 괴성을 질렀다.

몽고메리 대위!”

사령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 각하.”

JT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 하지만 전 그의 어머니를 무척이나 만나 뵙고 싶어요.”

아리아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다급하게 말했다. 그녀는 JT에게서 가볍게 떨어져나가더니 사령관을 향해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조아렸다.

남자들은 한순간에 아주 무자비하게 변한답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난 잘의 어머니요.”

그녀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리아는 시선을 돌리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세상에, 그녀는 바로 화장실에서 보았던 여자였다.

, 하느님.”

그녀는 평생 처음으로 하느님을 불렀다.

…… …….”

그녀는 말문이 막혀 제대로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하느님, 지금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몽고메리 부인이 앞으로 몸을 수그리더니 아리아의 뺨에 키스했다.

지금 포기해선 안 돼요.”

그녀가 나직이 말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며느리와 제가 여러분께 노래 한 곳 불러드리겠습니다. , 주머니칼을 빌려주겠니?”

어머니! 각하, 두 사람 모두 집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좋소, 대위. 그게 현명할 것 같군. 그리고 내일 아침 내 사무실로 오시오.”

사령관이 불쾌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 각하.”

JT가 절도있게 경례를 하고는 아리아의 한팔을 콱 틀어쥐었다.

아리아는 얼른 JT를 뿌리쳤다.

그는 독재자예요. 안 그런가요?”

그녀가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내게 설거지를 시키고, 바닥을 닦으라고 하는가 하면 자신의 등을 문지르라고 해요. 그러면서도 내겐 노래 한 곡 못하게 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여러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노래를 부르게 하시오!”

뒷전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래요. 노랠 시켜요.”

사령관의 부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네 칼을 다오, .”

몽고메리 부인은 그의 칼을 받아들더니 무척이나 아름답고 엄청나게 값비싼 드레스의 스커트 자락을 무릎 위까지 쭉 찢어, 늘씬한 한쪽 다리를 드러냈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의 꽂꽂이 장식에서 세 송이의 커다란 하이비스커스(무궁화, 부용 따위와 비슷한 관상용 식물)를 뽑아 머리에 꽂았다.

악단에게 티코-티코를 연주하라고 하거라.”

그녀가 JT에게 명령조로 말을 건넸다.

아리아와 그녀의 시어머니는 함께 연습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비범할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펼쳐보였다. 두 사람 모두 관객을 두려워하지 않아 호흡이 척척 맞았다. 아리아는 영화 속의 카르멘 미란다가 한 것처럼 성적 매력이 넘치는 동작이 주된 것이었지만, 몽고메리 부인은 성적인 매력이 풍부한 여자로서의 평생 동안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누가 잘하나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아리아가 한 번 흔들어대면, 몽고메리 부인은 다른 동작으로 한바탕 흔들었다. 그들은 아무 소절이나 주거니 받거니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맞춰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악단이 드럼은 물론 대형 악기를 연주하여 마치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했다. 아리아가 수년동안 춤 교습을 받았던 세월이 모두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노래가 끝나고 두 여자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자, 박수소리가 우레와 같이 터져나왔고, 수많은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수없이 인사를 하고선 두 여자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절 용서해주시겠어요?”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아리아가 몽고메리 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돌리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정말이지 전 전혀 몰랐어요…… 몽고메리 대위 말로는…… , 죄송합니다.”

몇 년 동안 이렇게 재미있어본 적이 없어요.”

이제 우리와 함께 집으로 가시겠어요?”

몽고메리 부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내 사랑하는 새로운 딸, 혼자서 남편과 마주쳐야 해. 몽고메리 가문의 남자들은 건드리면 더 짖어댄다는 걸 명심하렴. 그에게 용감히 맞서라. 아주 오랫동안 심한 싸움을 벌이는 거야. 그런 다음 침대에서 다시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는 거지. 그래야 네게 도움이 되거든.”

아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난 이제 가야겠다. 내게도 메인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남편이 있단다. 너희들 두 사람 모두 빠른 시일 내에 우리 집으로 와주기를 바란다. , 그러나저러나, 정말로 아침부터 아팠던 게냐?”

아니에요. 하지만 제게 시간을 주세요.”

아리아가 말갛게 미소 지었다.

난 내 아들을 알고 있단다. 그 애가 이곳에 곧 나타날 게야. 그는 항상 계집애들을 좋아했단다.”

그녀가 아리아의 뺨에 키스했다.

이제 정말로 가야겠구나. 곧 날 보러 오거라.”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화장실을 떠났다.

내 시어머니하고는 완전히 다르군요. 저분이라면 스파게티에 토마토 수프를 들이붓지는 않을 거예요.”

돌리가 나지막이 말을 건네자 아리아는 문 쪽을 아스라히 바라보았다.

미국 남자들은 여자들만도 못해요.”

오우, 이런!”

돌리가 소리치며 문 쪽으로 뛰어가, 사람들이 화장실 문앞에 웅성거리며 들어오려고 하자 문에 몸을 기대곤 얼른 잠갔다.

레인 코트를 들고 창문으로 올라가서 빠져나가세요. 내가 저들을 막고 있을게요. 그리고 미국 여자들에 대해 당신이 한 말은 맞아요.”

돌리가 호들갑스럽게 외치고 있는 사이 아리아의 두 다리가 창문에서 사라졌다.

JT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소.”

아리아가 창문을 반쯤 타넘고 있는데 그가 빈정거리며 다가왔다.

내 왕족 아내께서 화장실 창문을 타넘지 않고서야 어디로 빠져나가겠소?”

그가 그녀의 허리춤을 잡고 내려오는 걸 도와주었다.

쇼핑하러 갔다가 들치기로 체포되어도 이젠 별 문제 없겠군. 그런 문제쯤 간단하게 해치워버릴 테니까. 이제 시내에 있는 상점 주인들은 전부 당신만 보면 무릎을 꿇을 거요. 당신은 무도회장에서 날 욕보이고, 내 어머니를 옷을 절반만 걸친 채로 날뛰게 이끌었소.”

그가 차로 그녀를 끌고 가 문을 열어주자 그녀가 올라탔다. 그녀는 그가 운전석에 앉기를 기다리면서 레인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 순간, 그의 주머니칼을 발견했다. 몽고메리 부인이 거기에 넣어둔 게 틀림없었다.

그건 미국인 아내로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오.”

JT가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으며 계속 이죽거렸다.

그건 왕궁의 공주가 할 만한 행동도 아니오. 오늘밤 당신이 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 말이 맞아요.”

그녀가 깊이 뉘우치는 투로 말을 이었다.

이건 어느 누가 입어도 끔찍한 옷이에요.”

아주 엄숙하게, 그녀는 칼을 꺼내 튀어나온 두 개의 컵 모양을 연결한 리본을 잘라내자 어두운 차 안이 뽀얀 가슴으로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커트도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칼을 들고 스커트를 쭉 찢고 몸을 움직이자 한쪽 엉덩이와 다리가 드러났다.

JT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뒷창문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날쌘 동작으로 몸으로 그녀의 몸을 덮어가렸다.

아침에 보도록 하지, 몽고메리 대위.”

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각하!”

여전히 JT가 아리아를 몸으로 가린 채 대답했다.

사령관이 두 사람이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광경에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졌다.

JT와 아리아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한 손을 그녀의 코트 안으로 집어넣어 젖가슴을 더듬거리면서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당신 훌륭했소. 아주아주 훌륭했소.”

그녀가 다시 그에게 키스하며 그의 제복에 달린 단추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랬어요? 당신의 빨강머리보다 나았어요?”

그녀는 내 비서요. 그게 전부요.”

그녀가 그를 밀어냈다.

당신은 비서의 손에 키스하는 사람이에요?”

씩씩거리는 그녀를 멀뚱거리며 바라보다가 그가 그녀의 스커트를 찢어냈다.

날 위해 밤새워 보고서를 타자할 때에는 그렇소. 이건 뭘로 꿰맨 거요? 낚시 도구로?”

느닷없이 그가 한쪽 팔꿈치로 경적장치를 치자, 두 사람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 눈동자에 열기가 가득했다. JT는 아리아에게서 벗어나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몸을 비틀며 나머지 카르멘 미란다 복장을 벗어버리고 알몸 위로 레인 코트만 걸쳤다.

JT는 이러다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일이 터지겠다 싶을 정도로 급하게 차를 몰았다. 어느 정도 그가 열정을 누그러뜨린 게 분명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시 그녀에게 연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신은 주의를 끌고 싶어하는 여자가 아니지만, 오늘밤 당신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소. 그건 미국인에게 합당한 행동이 아니었소. 또한 내 아내로서 합당한 행동도 아니었소.”

그녀는 레인 코트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 앞에 알몸으로 섰다.

이건 어때요? 미국인다운 행동인가요? 그리고 당신의 아내다운 행동이에요?”

그녀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두어 번 눈을 깜박거렸다.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잠깐 동안은 그렇소.”

눈깜짝할 사이에 그가 그녀를 덮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난 싸우는 데 지쳤소. 앞으로 우린 함께 시간을 즐길 것이오.”

그가 격정을 누르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두 사람은 거실 바닥에서 사랑을 나눈 다음, JT가 그녀를 층계 쪽으로 데려가 디딤판에 눕히고 다시 사랑을 나눴다. 그녀가 층계를 올라가자 그가 뒤따랐다. 두 사람은 층계 꼭대기 바닥에서 사랑 나누기를 끝냈다. 둘다 땀을 흘리면서 숨을 헐떡이며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영화배우 진 할로우처럼 입으면 어떨까요?”

아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마치 그녀의 몸이 고무처럼 흐느적거렸다.

난 너무 지쳐 같은 짓은 더 이상 못하겠소.”

그래요?”

그녀가 그의 몸 아래서 꿈틀거렸지만 썩 내키지 않는 동작이었다.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배우는걸. 이제 목욕하러 갑시다.”

내 등을 닦아줄 거예요?”

아마도. 하지만 앞쪽은 안 돼요. 당신 앞모습은 날 고통스럽게 만들거든.”

그 말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목욕하는 동안 그녀와 가까이 그는 욕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어머니에 대해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의 연기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알고 있는 어머니는, 그날 밤 높은 무대 위에 서 있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을 나눠 당신을 낳았다는 걸 기억하세요.”

아리아는 그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자, 그가 얼굴을 붉히는 걸 보고는 노골적으로 음란한 미소를 지었다.

등을 닦고 싶은 거요,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거요?”

, 엉터리. 닦을 거예요.”

그녀가 카르멘 미란다 말투를 흉내냈다.

JT신음을 내뱉고는 그녀의 등을 닦으면서 목에 키스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목욕을 하고 그녀가 그의 등을 밀어주었다. 아리아는 라일락이 그려진 나이트가운을 입고 욕실 밖에 조용히 서 있었다.

뭘 기다리고 있는 거요?”

오늘밤에는 어떤 침대가 내 침대가 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자신의 침대로 그녀를 끌고 갔다.

물론, 나와 함께 자는 거요.”

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는 금세 잠이 들었다.

난 그의 관심을 끈 거야.”

그녀가 그의 품속에서 속살거렸다.

뭐라고, 새끼벌?”

JT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새로운 이름이군요.”

아리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더욱 바싹 파고들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 방안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벌써 더워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천국에라도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몸을 약간 움직여 옆에 누워 있는 JT를 바라보았다. 지난밤은 꿈이 실현된 밤이었다. 통증도 없었고 전혀 불쾌한 기분도 들지 않았으며, 순수한 감각적인 기쁨만이 가득 했다.

그녀는 한쪽 팔을 괴고 그를 쳐다보았다. , 이런! 그는 너무 잘 생겼어. 두 사람이 사랑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가 점점 더 잘생겨 보인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질 않는가? 그는 줄리앙 백작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사실, 바로 지금 그녀는 그가 이 세상 어느 남자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그가 눈을 뜨고, ‘사랑하오라고 말하면 어쩌지? 내게 그런 말을 해주는 남자가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물론 줄리앙 백작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왔지만, 두 사람 모두 그가 그녀의 왕국을 원해서 형식적인 말을 내뱉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녀의 왕국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그녀에게서 원하는 것은 그녀의 육체가 전부였다.

그녀는 그런 생각에 빙그레 웃었다. 섬에서 그녀는 공주라는 사실을 누차 강조했건만 그는 그녀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여자로 행동하자……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했다.

불현듯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온몸이 짜릿했다. 그녀는, 자신이 기쁘게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은 그녀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뿐이라는 걸 강요하는 그런 가르침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곳 미국에서 그녀는 다른 장교들의 아내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으며(그녀는 그 기억을 해내며 침을 삼켰다), 이제는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미국인이 되는 걸 하루빨리 익히기를 그가 원하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꼈다. 그녀는 더 힘껏 노력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를 위해 고기를 다져 햄버거 스테이크를 굽도록 하자. 미국 사람들은 특히 이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가 잠을 방해받았는지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좋은 아침이오.”

그가 그녀를 끌어당겨 털이 수북히 난 커다란 가슴으로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그 미국 곰을 뭐라고 하죠?”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다정하게 물었다.

장난감 곰?”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당신은 마치 날 당신의 장난감 곰처럼 느끼게 만들어요.”

당신은 내게 어떤 종류의 곰처럼도 느껴지지 않소.”

그가 한쪽 다리로 그녀를 감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너무 말랐고 몸에 털도 많지 않잖소?”

너무 말랐다고요?”

그녀가 놀라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감 곰이 되기에는 너무 말랐다는 거요.”

!”

그녀가 한쪽 다리를 그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다른 뜻으로 너무 말랐다는 건 아니죠? , 아니에요. 당신이 뭐라고 했죠? ‘뼈 가죽만 남은 멍청이라고 했던가요?”

섬에서 했던 말들은 우리 둘 다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소.”

그가 키스하기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밝은 시간에 사랑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모르겠어요. 시도해보고 판단해 보도록 하죠, . 땅이 갈라지고 악마가 우릴 데려가도 우린 행복할 거예요.”

JT가 그녀의 목에 막 키스를 하려는데 아리아가 목젖을 울리며 키득거렸다.

그는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그녀의 몸을 애무했다. 처음으로 그녀도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손끝에 전해오는 그의 몸은 얼마나 특별한 느낌이었던가! 부드러움이라곤 없으며, 단단한 근육뿐이었다. 그의 피부 또한 거친 느낌이었다. 그래도 몸에 나 있는 털은 느낌이 좋았다.

행복하오?”

그가 나지막이 묻고는 그녀를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사랑이 끝난 후 그들은 함께 누워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서로 보듬어 안고 충만한 기분으로 표정이 들더 있었다.

일어나야겠어요. 머리를 감아야 해요. 에델이 핀컬로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걸 알려줬어요. 오늘 저녁 전에 말라야 해요.”

핀컬? 그런 끔찍한 핀으로 혹여 남자의 눈을 찌르진 않겠소?”

그녀가 그에게서 몸을 비틀어 떨어져 나갔다.

여자들의 핀컬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어요?”

당신이 줄리 백작의 콧수염에 대해 아는 것보다 하찮은 일이오.”

그가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요?”

추측이오.”

JT의 말에 아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욕실에서 그녀는 머리를 감으며 흥얼거렸다.

가까스로 머리를 감고 헹구기까지는 했지만, 컬을 만드는 일은 그녀의 능력으로선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JT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 반쯤 졸면서, 욕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노랫소리에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몽고메리 대위님!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그녀가 황급하게 소리쳤다.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도대체 JT라고 부르는 걸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고 다진 이후로 그녀는 몽고메리 대위라는 호칭을 고집하고 있었다.

15분 후, 정말이지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휘감고 보비 핀(머리핀의 일종)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당신이 날 속이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 역시 그걸 돕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군.”

그가 중얼거리자 아리아가 깔깔 웃었다.

잠시 후, 일을 끝내고 그가 옷을 입고 있는데 그녀가 뛰어와 재빠르게 살짝 키스를 하고는 그에게 점심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어제꼈다. 이 결혼에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것 같은 기분은 지나친 망상일까. 아침식사 전에 사랑을 나누고, 점심을 집에서 요리해 먹고…….

얼마 후 JT가 막 층계를 내려가려는데 누군가 요란스레 문을 두드렸다. 순간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콰당열리면서 브룩스 장군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JT는 세 번째 계단에 멈춰서서, 차렷 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붙였다.

이게 뭣하는 짓이야?”

부관이 보는 앞에서 브룩스 장군이 소리가 나게 문을 밀쳐 닫으며 버럭 소리쳤다. 그는 <키웨스트 시티즌>이라는 신문을 높이 쳐들고 카르멘 미란다 복장을 한 아리아가 아만다와 팔짱을 끼고 춤추는 사진이 실려 있는 1면을 가리켰다. 두 여자 모두 높이 발길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분이 공주님인가?”

그가 으르렁거리며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이분이 아리아 공주야?”

그렇습니다, 각하!”

JT가 시선을 똑바로 정면에 두고 대답했다.

브룩스 장군이 JT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신문을 탕탕내리쳤다.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나? 자넨 우리의 계획을 세상에 노출시킨 거야. 랑코니아에서 누군가 이걸 보면 어쩔 거야?”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각하.”

날 속이려 하지 말게나, 젊은 친구. 이건 자네 실수야. 군대 측에서 자네에게 엄중한 임무를 부여했는데 자넨 실패했어. 그 불쌍한 아가씨가 이런 일을 할 정도까지 되었다면 도대체 어떤 수단을 사용한 건가? 자넨 그녀에게 미국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지, 남미의 싸구려 댄서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각하! 그건 그녀가 혼자서 생각해낸 것이었습니다. 제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JT는 아직도 차렷 자세로 층계에 서 있었다.

그 시끄러운 라디오는 누가 틀어대고 있는 거지?”

그건…….”

JT가 입을 여는 순간 장군이 얼른 가로챘다.

그녀의 생각인가? 자넨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이봐, 그 여자는 왕궁의 공주야. 그녀는 멋진 옷들을 입고 우아하게 자라났어. 그런데 여기서 그녀는-그가 신문을 치켜들고 이리저리 흔들었다-두꺼운 싸구려 신발을 신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각하. 그건 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브룩스 장군이 가느다란 가지로 엮어 만든 등나무 의자에 앉자, 그의 몸무게에 눌려 까칠한 가지 하나가 삐져나왔다.

좋아. 그렇다면 자넨 그녀에게 약간의 자유를 허용했어야 할 것 같군. 때로는 여자들은 길들지 않은 망아지 같기도 하니까 말이야. 항상 가둬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가끔은 약간 자유롭게 뛰어다니도록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 곳에나 고개를 들이밀고 말썽을 피울 테니까.”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난 결혼한 지 삼십이 년이 됐네만, 그 어느 때보다 오늘은 아내가 아주 낯선 여자로 느껴지더군.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나? 여러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네. 버번 있나?”

그렇습니다, 각하.”

JT는 대답은 했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서 가져와!”

브룩스 장군이 냅다 소리쳤다.

JT는 계단을 내려와 재빨리 부엌으로 갔다. 장군은 줄곧 부엌에다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공주는 미국인처럼 행동해야 해. 미국 여자들은 다리가 드러난 스커트를 입고 사령관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지는 않아. 자네가 그걸 그녀에게 설명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건 간단한 일인 것 같군. 그녀는 그게 변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나?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그 매춘부는 누구야?”

제 어머닙니다, 각하.”

JT가 장군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 맙소사.”

브룩스 장군이 놀라 입을 딱 벌리더니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봐, 대위. 이건 명령이네. 공주를 잘 다스리게나. 그렇지 않으면 자네를 해군 내에서 가장 우둔한 장교 밑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내 말 알겠나? 그녀가 한 행동은 고삐가 너무 옥죄이는 데서 비롯된 것이 분명해. 내 아내도 결혼 초기에 한 번 그런 반응을 한 적이 있어.”

그가 고통스런 기억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공주에게 좀더 재미를 느끼도록 하게. 그런 다음에 그녀는 미국인이 되는 걸 익힐 수 있을 걸세. 시간이 흘러가고 있어. 이런 식으로는 랑코니아 유괴범들을 속이지는 못할 걸세. 빌어먹을! 라디오 소리가 너무 시끄럽군. 그걸 튼 사람이 누구건 당장 꺼버리라고 하게.”

각하!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장군은 피곤에 지친 듯 손발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의자에서 겨우 뒤뚱거리며 일어나 JT를 따라 부엌 창문으로 다가갔다.

뒤뜰에는 바비큐 석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열려진 창을 통해 전선이 뻗어 라디오로 이어져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는 사과나무 그늘에 앉지 말아요라는 가삿말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아리아는 무릎까지 걷어 올린 자루 같은 청바지를 입고, 세 겹으로 말은 양말에다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새들 구두(구두끈이 있는 등 부분을 다른 가죽으로 덮어씌운 구두)를 신은데다가 JT의 바둑판무늬 셔츠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핀으로 곱슬거리게 말아올려 점박이 무늬가 들어간 스카프로 묶고 있었다. 그녀는 껌을 씹으며 음악소리에 맞춰 두 손을 번갈아가며 햄버거 스테이크를 척척 눌러댔다.

저분이 공주님이신가?”

브룩스 장군이 놀라 숨을 헐떡였다.

여느 미국의 가정주부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각하?”

지나치게 미국인 가정주부처럼 보이는군.”

그가 시선을 돌려 JT를 노려보았다.

반대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버린 것과 같은 이치야.”

그러다가 표정을 바꿔 그가 한손을 JT의 어깨에 얹었다.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싶나? 내 말은, 이건 보통의 전시(戰時) 임무가 아니란 뜻일세. 상당히 어려웠던 모양이군?”

JT는 장군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그 앞에서 버번 두 잔을 따르고는 자신의 잔을 훌쩍 털어넣었다.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내가 빌어먹을 하인이나 되는 것처럼 한 손을 내밀기도 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날 당황시키질 않나, …….”

그가 돌연 말을 끊고는 침을 삼키며 다시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 둘만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명령하는 일은 하려들지 않아요. 제가 다리미질에 대해 설명하자 날 비웃었습니다.”

내 아내도 다리미질은 하려들지 않아. 항상 그래 왔지.”

브룩스 장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항상 그래왔어.”

전 아내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합니다. 그저 여자들을 조금 알 뿐이죠. 그리고 이 여자는 어느 부류에도 들어맞지 않더군요.”

그녀를 좋아하고 있군, 그렇지?”

JT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지만, 그렇게 대단할 정도로 원하는 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그런 감정과 싸울 작정입니다.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약혼자인 백작에게 넘길 겁니다.”

브룩스 장군의 얼굴에 죄책감이 이는 듯한 표정이 스쳐갔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가 자네 점심 준비를 마친 것 같으니 난 가는 게 좋겠네. 내가 왔었단 얘기는 하지 말게. 내일 누군가가 와서 랑코니아로 돌아가는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줄 걸세.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떠날 때 그녀에게 카르멘 미란다 의상은 꾸리지 말도록 해주게.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나?”

알겠습니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JT가 장군을 문 쪽으로 안내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잠시 서서, 카르멘 미란다 의상이 조각조각 찢겨져 아직도 그의 자동차 바닥에 널려 있다는 걸 생각해냈다.

아리아는 햄버거 스테이크가 거의 다 준비되었노라고 소리치고,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라디오에서는 키 작은 조지가 쿵쿵거렸고, 아리아는 자연스럽게 한 손을 내밀었다.

함께 춤춰요.”

더 느린 곡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요. 난 이런 곡에 맞춰 춤추는 데에는 소질이 없소.”

좋아요.”

그녀가 다시 햄버거 스테이크 쪽으로 돌아섰다.

다음에 미첼을 만나면 부탁하겠어요. 그는 대단한 춤꾼이에요.”

느닷없이 JT가 그녀의 손을 움켜잡고 홱 돌려세우더니 그녀와 함께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소년이었을 때부터 노를 저어서인지 팔 힘이 대단했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를 다리 아래로 밀어 넣은 다음, 팔을 쭉 펴고선 그녀를 빙그르르 돌렸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난 전혀 못한다고 했잖소.”

그가 새침을 떼며 말하자 아리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다정하게 두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JT는 아리아를 그윽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결치듯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그녀가 씹던 껌은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햄버거를 손에 들고 음악에 맞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두드리며 먹다가 맥주를 병째 마셨다. 섬에서 보았던 공주와는 전혀 다른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장군의 방문으로 속이 뒤틀림을 느꼈다. 곧 빌려온 공주를 넘겨줘야 한다는 암시로 부아가 치밀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둘러 결혼을 하는 것 같았지만, JT는 여자로 인해 덫에 걸리는 건 현명한 짓이 못된다고 생각해왔다. 자주 그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결혼한 후 2주일 정도 지나면 지금의 아리아처럼 그런 모습으로 바뀌는 걸 보았다. 그는 사귀던 여자들이 머리를 단정하게 꾸미고 화려하지 않은 화장과 향수를 뿌리는 걸 퍽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아리아를 바라보며, 그는 미녀 여왕과 그녀를 바꾸지는 않으리란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 셔츠는 어디서 났소?”

그녀에게는 너무 크고 해진 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가 맥주 너머로 솔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신 옷장에 있는 상자에서요.”

뒤쪽에 있는 상자에서? 테이프로 봉해져 7센티 정도 크기의 글자로 모든 면에 엄금이라고 적혀 있는 상자 말이오?”

그런 것 같은데요.”

JT가 투덜거리자 그녀는 그를 향해 생글거렸다. 그는 주위 남자들이 결혼해서 개인적인 자유를 침해받는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은 결혼하면 아내가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절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 그런 건 모두 부질없다는 걸 알았다. 사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소유물을 뒤질 정도로 호기심을 보였다는 게 오히려 기뻤다. 그건 두 사람이 정말로 결혼한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제 얼마 안 있어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어야 하리라.

바로 그 순간 그는 말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되기로 맹세했다-그리고 나서 다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그녀를 떼버리자마자 다른 아내를 얻겠지. 갑자기 누군가 집에 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토요일 오후에 뒤뜰에 앉아 햄버거 먹는 걸 즐겼다. 가까이 다가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좋아했다.

물론 아리아처럼 흥미로운 다른 아내를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는 지난밤을 기억해내고는 빙긋 웃었다. 젊은 장교 대부분의 부인들은 어깨에 별을 하나 단 남자라면 누구든 환장했지만, 아리아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방문에 대해 그가 조금은 긴장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누구든 어머니가 방문한다면 물론 그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라디오 소리를 줄였다.

어제 아침부터 아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게 사실이었소? 아니면 내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요?”

사실이 아니었어요.”

내 아이를 가지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래도 명문 귀족인 백작이 당신을 받아들일까?”

난 그래도 여왕이 될 거예요. 그가 여왕과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어 그건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고 믿어요.”

그리고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요?”

사내아이라면, 전통에 따라 언젠가 왕이 되죠. 만약 아이가 계집아이고 내게 아들이 없다면, 그 애는 여왕이 되는 거죠.”

JT는 맥주를 쭉 들이켰다.

좋소. 당신의 키작은 남편으로부터 반대는 없는 거겠지?”

아리아는 웃음을 참느라 기침을 해댔다.

난 여왕이 될 거고 그 아이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하는 거예요.”

그 빌어먹을 줄리앙은 다른 누군가의 아이 아버지가 될 테고?”

그는 비록 자신의 아이라고 할지라도 양육에 그다지 많은 관여를 하지 않게 되지요. 왕족의 아이는 가정교사들에 의해 길러져요.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내가 열네 살에 여성의 징후가 보였을 때까지, 난 매일 저녁 어머니를 여섯 시에서 여섯 시 반 정도밖에 볼 수 없었어요.”

그런 식으로 당신의 아이들도 자라게 되는 거요?”

다른 방법은 몰라요.”

미국에서는 상당히 다르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여기 우리와 함께 있게 돼요. 당신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장난감을 흔들어주기도 하지.”

미국 평등의 또다른 본보기로군요. 여자가 그 일을 도맡아 하고 남자는 빈둥거리고 말예요.”

JT는 화가 난 듯한 표정을 보였다가 이내 웃고 말았다.

아이를 모르는 사람 손에 기르게 하는 건 좋지 않아요. 당신이 넘어져서 상처가 생기면, 누가 껴안아주었소?”

아리아가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당장 의사가 달려오죠. 하지만 왕궁의 공주는 철저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 일은 그다지 없어요. 말에서 떨어져 다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말예요.”

보호를 받아요? 난 열 살 때 혼자서 노를 저어 어떤 섬으로 가서 이틀 동안 혼자 야영생활을 했소.”

왕족 아이들은 결코 혼자 있는 법이 없어요. 밤이 되더라도 누군가가 아이들의 방에서 함께 자죠. 내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혼자만의 방이 주어졌지만 딸린 옆방에 시녀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어요.”

알겠소.”

JT는 햄버거를 한 입 커다랗게 베어물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 내 말은 우리가 아이를 갖게 되면…… 우리 아이도 그렇게 키워지겠군요?”

그게 전통이에요.”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뚜벅 말을 건넸다.

하지만 당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아이를 방문할 수 있어요.”

아니오.”

JT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는 등을 뒤로 젖히고 다시 라디오 소리를 높이더니 이내 침묵 속으로 빠졌다.

 



13

 

월요일 아침, JT는 브룩스 장군에게서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든 일이 준비되었으며, 두 사람은 화요일에 랑코니아로 떠나게 될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

, 일의 약속이군.”

빌이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중얼거리다가 JT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괴로운 일이 있는 건가?”

공주와 난 내일 랑코니아로 떠나네.”

그녀가 그리울 거야. 돌리의 상심이 크겠는걸? 그 두 사람은 너무 친해져 버렸어. 그리고 시내의 상인들도 울겠군.”

JT가 들고 있던 전보를 신경질적으로 구기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전화해서 짐을 싸라고 해야겠군.”

난 돌리에게 전화해서 그녀를 도와주라고 해야겠군.”

그날 늦게 돌리는 JT에게 전화를 걸어 해변에서의 식사에 모든 사람을 초대할 거라고 말했다.

그녀를 위한 송별 파티에요.”

돌리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잠겨들었다.

그래도 당신은 나보다 더 그리워하지는 않을 거야.’

JT는 우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해변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태도로 아리아가 그를 맞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힘내요. 아가씨. 당신은 고국으로 가게 될 거요.”

미국이 그리울 거예요. 미국의 자유와 음악과 진보에 대한 감각을 그리워하게 되겠지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를 그리워할 거라는 말은 하지 않는군,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약간 화가 났다.

바다가재를 잡아오겠소.”

. 그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퍼졌다. 아리아는 아무리 노력해도 기운을 낼 수가 없었다. 돌리는 더욱 심했다. 공주는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는 법이 아니라고 아리아는 주문 외듯 혼잣말로 수없이 되뇌었다.

JT가 바다가재를 들고 돌아오자 남자들이 석쇠에 올려놓았다.

, 이런 얄미운 암코양이가 뭘 물고 갔는지 보세요.”

돌리의 말에 아리아는 고개를 들고 통통한 헤더 에디슨이 미첼의 팔에 안겨 있는 걸 보았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미첼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치고는 아리아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워 보이는군요. JT가 잘 돌봐드리나 보죠?”

내가 아주 잘 돌보고 있지.”

JT가 바베큐 찍는 포크를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들고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헤더가 아리아에게 경멸적인 시선을 보내고는 JT에게 우물쭈물 다가갔다. 그녀는 그의 한쪽 팔을 잡고 바싹 달라붙으며 젖가슴을 대더니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JT, 워싱턴에서 보고 처음이군요. 시내에서 함께 보냈던 밤을 기억하세요? 그날 이후로 결혼한 거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흥겨움이에요. JT, 이 밤을 즐겁게 보내요, 알겠죠?”

게일이 역겨움이 치미는지 얼른 끼어들어 신음하듯 내뱉었다.

미첼이 아리아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내일 떠난다고 들었소. 당신이 보고 싶을 거예요. JT도 가나요?”

JT가 고개를 돌리더니 끼어들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갈 거네. 랑코니아는 조선(造船)에 대한 조언이 필요하고, 내가 그 조언을 할걸세. 내 아내는 나와 함께 간다고.”

미첼이 아리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랑코니아는 이를 데 없이 아름답더군요. 밤이 긴 데다 시원하며, 염소의 목에 단 방울소리가 울러퍼지고 말이에요.”

맞아요.”

아리아가 구슬픈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곤 말을 이었다.

거리의 여자들은 없고 새벽 세 시의 쓰레기 트럭도 없으며, 싸구려 댄스 홀도 없고, 해변에서의 파티도 없어요.”

그곳에 갔었나요?”

아니오.”

JT와 아리아가 동시에 대답하고선 얼른 JT가 덧붙였다. 미첼은 아리아가 랑코니아 공주란 걸 모르고 있는데 하마터면…….

우린 단지 그 얘기를 들었을 뿐이오.”

“JT, 차에 어깨두르개를 두고 왔는데, 당신이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헤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누가 석쇠 좀 지켜봐줘요.”

JT가 소리치고는 불빛에서 멀어져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헤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따라가며 ‘JT! 기다려요.’하며 불렀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는 볼멘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당신은 이곳에 와서는 안 되었어.”

내게 그러지 말아요. 일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나도 알아요. 당신과 그…… 그 공주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립스틱 세 개와 양말 세 켤레를 치렀다고요. 그녀가 정말로 왕족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어요.”

지질 준비나 하는 게 좋겠군.”

JT가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돌아서자 헤더가 다급하게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이 결혼은 일시적이며 당신 두 사람이 그녀의 나라에 도착하는 즉시, 그녀가 당신을 차버릴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녀는 당신을 차버리고 뼈만 남아 앙상한 백작과 결혼할 거라더군요.”

헤더, 입이 걸구만.”

그가 미첼의 자동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동차 문을 열더니 그녀의 어깨두르개를 움켜쥐고는 그녀에게 툭 안겨주었다.

당신은 내 입술을 좋아했었잖아요.”

그녀가 그의 가슴께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봐요. 난 그저 당신을 염려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녀가 당신을 버리면 어쩔 거예요? 찢긴 가슴을 부둥켜안고 끝낼 정도로 어리석은 건 아니겠죠?”

그 말은 아주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돌아갑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

여기 있겠어요. 당신이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그가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내가 당신을 떠맡게 되겠군."

두 사람은 함께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당신 저 모습을 계속 참고 견딜 수 있겠어요?”

헤더와 JT가 석쇠 위로 허리를 굽히는 걸 쳐다보며 돌리가 아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주 멋진 어깨두르개군요.”

아리아가 무심하게 딴전을 피웠다.

돌리, 저 여자가 여기서 저 어깨두르개를 샀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돌리가 안 되겠다 싶어 눈동자를 굴리더니 일어서서 JT와 헤더 사이를 밀치고 들어갔다.

당신 데이트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어때요?”

돌리는 해더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내 데이트는 오늘밤 내내 계속될 거예요.”

헤더가 시침을 뚝 떼고 당돌하게 대꾸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하게 변해갔다. 아리아와 돌리는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으며, 헤더는 JT가 그녀 이외의 누군가와 결혼해버렸다는 사실에 계속 씩씩거렸다. 미첼은 작별의 밤을 함께 지새우자는 암시를 아리아에게 줄기차게 던지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내심 오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리아는 헤더와 JT를 쳐다보고는, JT가 줄곧 치근거리는 헤더의 손을 굳이 뿌리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사실, 그는 아리아에게서 뭔가를 기대하는 듯이 그녀를 끈질기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헤더가 JT에게 몸을 기댈수록 아리아의 등은 꼿꼿해졌다. 그녀는 지난 몇 주동안보다 오늘밤은 왕궁의 공주에 더 가까운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이 헤어지면서 작별의 인사를 할 때까지, 아리아의 태도는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날 초대해줘서 무척 기뻤습니다.”

그녀가 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하지만 친밀한 미국식 악수가 아니라, 몇 시간 내에 수백 명의 손을 잡아 악수하려고 손가락만 대는 궁중식 악수였다.

내일 배웅하러 갈게요.”

돌리가 아리아의 형식적이 태도에 약간 주눅이 들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JT가 그녀를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주자 그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주 즐거운 파티였어요.”

그가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몰자 그녀가 어색하게 말했다.

왜 헤더 흉내는 내지 않는 거요?”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가씨예요. 머리카락도 아주 보기 좋고요.”

그건 천연색이 아니오.”

그래요?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그 후로는 집까지 오는 동안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실례하겠어요. 무척 피곤해서 자야 할 것 같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리아가 덤덤하게 말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JT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저 여자는 감정도 없나? 그녀에 대한 질투 때문에 난 대체 몇 번이나 바보 같은 짓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오늘밤 헤더가 지독스레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해도 그가 그저 방관하고 있었는데 아리아는 그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뒤뜰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진하게 탄 진토닉을 마셨다. 아마도 그녀는 나를 떼어버리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질투 같은 감정을 느끼기에는 너무 냉혹한 여자인지도 몰라.

여느 때처럼 키웨스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짓눌러 꺼버리고는 술잔을 내려놓고 시선을 들어 위층의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밤 싱글 침대에서 자리라. 좋아, 이제 서로 헤어질 준비를 시작하는 게 더 나을 거야.

계단은 어두웠다. 그는 넘어질 듯하며 계단을 올라와선 옷을 벗으면서도 조용히 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닫으려고 아리아의 침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번개가 번쩍이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비췄다.

빌어먹을!”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내뱉으며 그녀의 침대 맡에 있는 스탠드 쪽으로 다가갔다.

이봐요, 이제 모든 일이 끝나가요. 당신은 곧 고국으로 갈 거요. 당신 궁전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될 거요. 그리고 내 추한 몰골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거란 말이오.”

어쩌면 돌리는 보게 될 거예요.”

그녀가 계속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속삭였다.

당신이 승낙한 거요?”

그가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당신과 돌리 사이가 그렇게 깊어진 거요?”

그녀가 돌풍처럼 순식간에 돌아서더니 두 주먹을 꼭 쥐고 올리더니 맨살이 드러난 그의 가슴과 팔을 마구 쳐댔다.

당신은 날 모욕했어요!”

그녀가 격렬하게 고함쳤다.

당신은 내 친구들이 된 사람들 앞에서 날 곤경에 빠뜨렸어요.”

그가 그녀의 주먹 쥔 손을 움켜잡았다.

누굴 얘기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내 상관들 앞에서 치카 치카노래를 부르며 어떻게 했소?”

하지만 당신은 그런 망신을 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당시은 내가 당신 어머니에 비해 뒤처진다는 말을 은근히 비쳤잖아요.”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결코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소.”

그는 그녀의 가슴에 묻어둔 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다면 정식 무도회장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소?’ ‘내 어머니는 눈앞에서 껌을 씹으며 풍선 부는 걸 싫어하오’ ‘당신은 내 어머니에게 공손하게 굴어야 해요.’ ‘어머니는 원한느 곳이면 아무 곳에라도 앉을 수 있어요.’라고 했던 건 뭐였죠? 그 말들은 다 뭐였나고요?”

JT가 어둠속에서 히죽 웃었다.

내가 약간 극단적으로 행동했던가 보오.”

당신은 치카 치카로 망신을 당할 이유가 충분했어요. 하지만 난 헤더에게 당할 이유가 없었어요. 지난 며칠 동안 난 아주 잘해왔어요.”

JT가 그녀의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물론이오, 여보.”

그가 키스하려고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녀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뻔뻔스럽게 날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내게서 떨어지세요.”

JT가 돌연 멈칫했다.

좋아요, 좋아. 당신 혼자 내버려두겠소. 거기에 누워 다시는 날 보지 않아도 될 날을 꿈이나 꾸시오.”

그는 자신의 침대로 갔으나 너무 화가 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의 부당함에 대해 줄곧 생각해 봤다. 그는 그녀의 목숨을 구했으며 그녀와 결혼하여 그녀에게 미국인이 되는 걸 가르쳤는데 그녀는 그에게 소리를 질러대며 혼자 있게 해달라고 하다니……. 그가 침대로 쭉 몸을 뻗자 시트가 몸에 감겼다. 그는 베개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지만 도무지 잠이 다가들지 않았다.

헤더가 그런 행동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둔 게 화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항상 약간 골칫덩어리였다. 그녀는 결혼하기를 원했으며, 그 또한 그녀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동안 줄곧 그는, 헤더가 그를 원하는 게 아니라 워브룩스 조선소를 원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품어왔다.

이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악담을 퍼붓고는 두 사람을 정략 결혼시킨 군대 측을 저주했다. 그리고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섬으로 가고 싶게 만든 바닷내음의 그리움마저 저주하며, JT는 침대 밖으로 나와 그녀의 침실 끝으로 갔다. 그녀는 아직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이봐요, 난 아까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헤더가 약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어서 미안하오.”

그녀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말 듣고 있소?”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관자놀이를 만졌다.

, 이런 울고 있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그녀를 팔 안으로 끌어당겼다.

, 내 사랑, 미안하오. 당신을 울릴 생각은 아니었소. 당신이 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소.”

물론 나도 울 수 있어요.”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며, 코를 훌쩍였다.

공주는 일반인들 앞에서 울지 않는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난 일반인이 아니오. 난 당신 남편이오.“

그가 고통스런 목소리로 내뱉었다.

하지만 당신은 오늘밤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어요. 마치 헤더가 당신 아내인 것처럼 행동했어요.”

글쎄, 아마 그녀는 내 아내가 될 거요.”

뭐라고요?”

아리아가 놀라 숨을 헐떡였다.

그렇소, 난 장래를 생각해야 하오. 당신은 빼빼 마른 당신 백작과 결혼하여 랑코니아에 머물게 되잖소. 난 이번 경험으로 결혼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소.”

그래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그녀가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그래도 결혼이 내 인생에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안겨줄지 확신하지는 못하겠소.”

몽고메리 대위, 랑코니아에 머물면서 내 남편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내 나라는 당신의 지식으로 이득을 얻게 될 거예요.”

그리고 왕이 되고 말이오? 당장 동물원에 갇힌 꼴이 되고 말 거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내겐 어떤 여자도 그 정도의 가치가 없소, 이봐요, 어디 가는 거요?”

그가 물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동물원에 갇힌 꼴로 화장실에 가요.”

지금은 또 내가 뭘 잘못했단 거지?”

그가 툴툴대며 중얼거렸다.

 

돌리와 빌이 작별인사를 하려고 비행장으로 왔다. 돌리가 공공장소에서 그녀를 껴안자 아리아는 이상스레 자연스런 기분을 느꼈다.

돌리가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하찮은 거지만 미국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 벌겋게 충혈되었다.

JT는 빌과 악수를 나누었다.

…… 일이 끝나는 즉시 돌아올 걸세.”

JT는 아리아가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거라고 생각이나 하듯이 아리아 곁에 바싹 붙어 서 있었다.

안녕!”

아리아와 JT가 비행기에 오르자 빌과 돌리가 소리쳤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겠지. 독일 상공을 넘어가다 폭격을 당하는 위험을 겪는 대신 안전하게 러시아를 거쳐 가기로 했다.

아리아는 딱딱한 가죽 좌석에 등을 기대고 창밖을 돌리와 빌이 서 있는 모습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기운 내요. 당신은 고국으로 가고 있는 거요. 돌리가 뭘 주었소?”

JT가 등을 토닥이자 아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훔치고는 꾸러미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껌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에게 단단히 보답을 해야겠군. 풍선껌을 좋아하는 공주라…….”

JT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행기가 하늘 높이 떠오르자, 부조종사가 JT에게 불룩한 서류봉투를 가져다주었다.

이건 우리에게 지시한 명령서요. 랑코니아에 도착할 때면, 당신은 새로운 배경에다 새로운 신분을 갖고 있어야 해요. 이걸 봐요!”

그가 겉봉에 쓰인 글자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브룩스 장군은, 당신이 메인 주의 워브룩스 출신이며 당신과 나는 서로를 속속들이 알기를 원하고 있소. 내가 당신에게 내 고향마을에 대해 얘기해 주겠소. 그리고 당신 이름은 캐서린 판즈워스 몽고메리요. 좋아요, 캐서린. 작업을 시작합시다.”

아리아는 워싱턴에서 키웨스트로 날아간 지난 번 여행과 이번 여행을 비교해 보았다. 이번만큼은 그녀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해가며 익히는 동안 그가 꾸벅꾸벅 졸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고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다. JT가 겸손하게 가족이 꾸리는 정도라고 설명하면서 사업체를 현재 혼자 경영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세 형 얘기와 함께 서로 겨루었던 노젓기 경주에 관한 부분에선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얘기를 건넸다.

내가 항상 이겼지. 그땐 난 가장 작긴 했지만 튼튼했소.”

우쭐거리는 그의 표정을 보다가 그녀는 비행기 좌석에 두 다리를 쭉 뻗은 그의 키와 몸집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가장 작은 건 아니겠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혹시 그의 집안이 거인 가족이 아닌지 두려움이 배어났다.

물론 그렇지 않지.”

그가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키스하려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릎에 놓인 서류더미를 치워내고 키스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지금은 안 돼요!”

그녀가 당황스레 내뱉자, 그는 주춤하다가 빨갛게 물들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우린 어디에서 살았죠?”

그의 물음에 그녀가 대꾸하자 그가 신명이 난 듯 어깨를 들썩였다.

, 맞아요. 워브룩스.”

그는 줄곧 그의 고향마을과 가족들에 관해 얘기했다. 그녀는 그곳을 가보고 싶다는 느낌이 일었다.

비행기는 연료를 보충하고 두 명의 승객이 서둘러 화장실에 다녀올 시간을 주려고 런던에 착륙했다. 두 사람은 다시 탑승한 후 계속 이런저런 사실들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JT가 미국에서 그녀가 성장했음을 가정하고 그녀만의 핵심 통계자료에 대해 검토하고 질문했다.

그들은 러시아 어디쯤을 날아가는 사이에 서로에게 기대어 잠이 들었다가 랑코니아의 수도인 에스칼론에 도착해서야 깨어났다.

JT는 창밖 저 멀리, 산 정상에 만년설이 뒤덮여 있지만 대부분 청록색으로 물들어 있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랑코니아는 고지대예요. 우린 지금 해발 약 2천 미터 상공에 있기 때문에 공기가 희박하죠.”

그녀의 말에 그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당신은 이곳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기억하오? 우린 둘다 전에 여기 와본 적이 없는 거요.”

알았어요, 여보.”

그녀가 껌을 짝짝 씹으며 대꾸했다.

호칭이 듣기 좋군, 어느 정도는. 그걸 꼭 씹어야겠소?”

이건 아주 미국적이에요. 게다가 얼마 안 있으면 난 이 짓도 포기해야 한다고요. 왕관과 풍선껌은 어울리지 않아요. 어서 내려요. 내게 여동생이 있다는 기록이 든 서류를 누군가 찢어버리는 건 원치 않아요.”

캐서린에게는 여동생이 없다는 걸 기억하오?”

그가 아주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곱게 눈을 흘기고 그에게 풍선을 불었다.

, 가요!”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역시 산속의 공기라 서늘하면서도 신선함이 파고들었다. 비행기가 뿜어내는 매연조차 맑고 깨끗한 공기를 더럽히지 못했다.

전쟁 때문에 비행기가 넉넉지 않아 소형 비행기도 간신히 구한 터였다. 자동차 한 대가 JT와 아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위님, 모든 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

검은색 양복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말을 건넸다.

만나서 반갑군요!”

아리아가 남자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호들갑스럽게 덧붙였다.

이곳은 항상 이렇게 서늘한가요? 자연 경관이 정말 멋지네요. , 뭘하죠?”

그녀의 의중을 눈치 챈 그 남자가 눈빛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몽고메리 부인?”

그냥 캐서린이라고 하세요. 모두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요. 이따금씩 그는 날 다른 이름으로 부른답니다.”

그녀가 껌을 뱉으며 JT의 팔짱을 끼고선 사랑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 . 호텔로 모실까요?”

남자가 불편한 기색으로 물었다.

한 사람이라니?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요?”

JT가 그녀를 위해 자도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모든 랑코니아 인들의 우상인 한 미국인.”

차를 운전하는 남자는 제임스 샌더슨으로, 랑코니아 주재 미국 대사의 비서였으며, 그와 대사만이 가짜 공주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대위님, 내일 지방 수질 처리 공장으로 모셔질 겁니다. 증류 시설에 대한 전문가인 거죠.”

샌더슨이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포도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얘긴가요?”

아리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우리가 매일 왕과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샌더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분은 어떠세요?”

늙으셨더군요.”

샌더스은 간단하게 대꾸하고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랑코니아는 수백 년이 지나도 항상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풍경이 뼛속 깊이 스멀거리며 파고드는 걸 느꼈다. 거리는 염소지기들이 지나다닐 정도로 닦여져 있어 길고 넓은 미국 승용차가 지나가기에는 무척 좁았다. 자갈들이 자동차 바퀴에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느 곳이든 집들은,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랑코니아가 제조한 독특한 청회색 지붕 타일로 치장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 랑코니아는 멋진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으며, 이곳에 한 번이라도 들른 관광객들은 랑코니아 특유의 타일을 집으로 가져가 조그만 랑코니아의 장난감 집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유행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타일을 만들던 공장은 수천 장의 타일이 재고로 쌓일 지경까지 이르렀다.

거리의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있었으며, 말이 끄는 마차가 몇 대 있었지만 자동차는 한 대도 없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간소했으며 수백 년 동안 거의 변함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길고 검은 스커트와 하얀 블라우스, 예쁘게 수를 놓은 허리띠. 한 때 그러한 허리띠도 다양한 무늬와 빛깔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남자들은 무거운 신발을 신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양모 양발을 신었으며, 니커보커(무릎 아래 부분을 졸라메는 낙낙한 반바지)형의 짧은 양모 바지를 입었다. 흰색 셔츠 위로는 수를 놓은 소매없는 조끼를 걸쳤다. 여자들은 훌륭한 바느질 솜씨로 자신들의 허리띠와 남편의 조끼에 한껏 멋을 부렸다. 아이들은 어른들 옷과 같은 종류로 치수가 더 작은 것을 입었으며, 허리띠와 조끼를 입지 않는 대신, 정교하게 주름 장식이 들어간 셔츠를 입었다.

JT와 샌더슨은 비좁은 거리를 누비는 데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과거의 시간 속으로 회유한 느낌이군.”

JT가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이에요.”

아리아가 심란한 표정으로 받아넘겼다.

다 왔습니다.”

샌더슨은 뚜벅 말을 건네고는 3층짜리 흰색 호텔 앞의 원형 도로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그가 몸을 뒤쪽으로 젖히더니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아볼 때를 대비해야 할 거예요. 당신은 가능하면 얼굴을 많이 내비쳐야 할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짜 공주를 데려가버리면-이건 내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그 하수인들은 공주 대리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들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오? 누가 공주를 살해하려 했는지 모른단 말이오?”

JT의 물음에 샌더슨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혐의자는 알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난 게 없어요. , 호텔사환이 나와 있군요. 갑시다.”

잠깐 기다려요. 난 저 사람을 알고 있어요.“

아리아가 JT의 팔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 사환은 일흔 살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는 서열 세 번째인 왕궁 정원사였어요. 그의 아내는 내게 쿠키를 가져다주곤 했죠. 이건 쉽지 않은 일 같은데요.”

이제 와서 그런 사실을 말하기엔 우린 너무 가까이 와버렸소. 당신은 전에 한 번도 여기 와본 적이 없고 그 남자를 본 적도 없다고 발뺌을 해야 하오.”

좋아요.”

그녀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샌더슨이 안으로 들어가고 JT가 짐을 손수레에 싣는 걸 도와주는 동안 벽돌로 된 입구에 서 있었다.

노인은 아리아를 보고선 들고 있던 가방 두 개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일단 껌을 탁 내뱉었다.

귀신을 봤나요?”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이 그냥 선 채로 숨을 헐떡이자 아리아는 몸을 숙여 스커트를 넓적다리 위로 반쯤 끌어올리고는 스타킹을 매만졌다. 그가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제 원하는 걸 다 보셨죠?”

그녀가 구역질난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JT가 그녀의 팔을 잡고 호텔로 끌고 갔다.

미국의 명성을 시궁창에 완전히 처박는군. 좀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해요.”

알았어요, 여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맘에 들어요.”

JT가 경고의 눈짓을 보냈다.

호텔 안은 러시아 짜르 황제의 사냥 막사처럼 보였다. 통나무로 된 천장, 회반죽을 바른 벽,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커다란 소나무 가구 등. 책상 위에는 빨간색 바탕에 수사슴과 염소, 포도 한 송이가 그려진 랑코니아 국기가 꽂혀 있었다.

기묘하군. 이 건물엔 욕실이 없소?”

JT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나지막이 말했다.

미국의 명성을 기억하세요.”

그녀가 아까 JT에게 당한 걸 보복했다는 듯 싱글거렸다.

JT가 숙박부에 서명하는 동안, 호텔 지배인이 아리아를 멍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가 계속해서 쳐다보자 그녀는 얼른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그가 얼른 숙박부로 시선을 떨구었다.

실례합니다만, 몽고메리 대위님. 가져올 게 있습니다.”

지배인이 황망스레 말을 건네고는 책상 뒤쪽의 문으로 사라졌다.

JT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샌더슨을 쳐다보자, 그도 난들 알겠느냐는 듯 어깨를 들먹였다.

지배인은 그의 가족 모두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뚱뚱한 아내와 통통한 두 명의 십대 소녀, 그들은 주춤거리며 서서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아리아는 침착하게 지배인이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이 마을에 있는 우편엽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아마 미국의 내 가족들은 이곳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곳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아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책상 위로 몸을 숙이고 지배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뭘 하는 거죠?”

그녀가 마치 한판 벌이기라도 하듯 앙칼지게 물었다.

왜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보고 있는 거죠? 당신들은 미국인을 좋아하지 않나요? 우리가 당신네들에게 호감을 주지 않나 보죠? 당신들 생각엔…….”

JT가 나서서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캐서린, 조용해요.”

지배인이 눈을 껌벅이며 고개짓을 하면서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우리의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빤히 쳐다볼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리 공주님과 너무 흡사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아리아의 턱이 일그러졌다.

들었어요, 여보? 내가 공주처럼 보인데요.”

그녀가 JT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지배인의 뚱뚱한 아내가 슬금슬금 책상 밑으로 다가가더니 우편엽서를 꺼내 아리아에게 쭉 내밀었다.

그녀는 그걸 받아들고 아리아 공주의 공식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리아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감돌더니 이내 샐쭉거렸다.

예쁘군요. 하지만 더 예쁜 여자들을 많이 봤어요. 사실 엘리가 더 예쁘지 않아요, 여보? 이봐요! 잠깐 기다려요! 내가 귀족처럼 보인다고 했잖아요? 나도 1941년에 미스 서브마린(잠수함) 로맨스였다는 걸 알려줄게요. 260명의 선원들로부터 표를 얻었다고요. 선원들이 가장 함께 잠수하고픈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요?”

그녀가 JT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난 여기 공주처럼 보이지 않죠? 공주는 마치 무성 영화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보이네요.”

그가 그녀에게 어깨를 두르고 우편엽서를 받아들더니 화가 난 듯이 책상에 콰당내려놓고 지배인과 그의 가족들을 노려보았다.

내 아내는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예뻐요. , 여보. 위층으로 올라가서 쉬면서 이런 모욕은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파묻게 하고선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

방에 이르러 사환이 떠날 때까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세 사람만이 남자 샌더슨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축하합니다, 몽고메리 부인. 나로선 당신처럼 지독하게 밉살스런 미국인을 만난 게 보통 불행한 일이 아니군요.”

그녀가 껌을 짝짝 씹으면서 히죽 웃다가 눈을 찡긋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14

샌더슨은, 앞으로의 모험이 의미하는 중요성과 아리아가 왕좌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세 시간 동안 그들의 방에 머물렀다. 그는 바나듐에 대한 미국의 요구와 미국이 랑코니아에 군사 기지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가짜 공주와 그녀의 숙모인 에머 부인이 내일 미국에서 돌아오는 즉시 데려갈 겁니다. 랑코니아에 있는 그녀의 가족 중 누군가가 시시 공주를 보기 전에 말입니다. 그러면 그녀를 아리아 공주의 자리에 앉힌 도당들이 즉각 공주님에게 손을 뻗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당신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 당신 두 사람은 그 후 24시간 동안 가능하면 자주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일단 그들이 공주님을 모셔 가면, 대위님. 당신의 임무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겁니다. 공주님께서는 미국인 남편을 모시고 왕궁으로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대사님과 제가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대위님이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아는 몽고메리 대위는 남편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JT가 그녀의 팔에 손을 얹으며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이 성사될 때까지 이틀 남았군요.”

그렇습니다.”

샌더슨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친밀함을 가슴 깊이 느꼈다.

여기 공주의 안전이 걱정됩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적들에게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아요. 전에도 누군가 그녀를 살해하려 했소.”

맞습니다만, 이제 그녀를 살해하는 자는 누구든 그녀가 미국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살인자들은 실제 공주는 플로리다에서 익사했다고 믿고 있어요. 우린 공주님에게 손을 뻗치는 사람과 가짜 공주의 귀환에 대해 협상할 계획입니다. 누군가 진짜 공주는 죽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캐서린 몽고메리에게 접촉하는 사람과 동일 인물은 아닐 겁니다.”

JT가 일어서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서성거렸다.

이 계획을 세운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멍청하다고 믿지 않소. 그녀는 언젠가 정체를 드러내게 돼 있어요. 내 생각을…….”

대위님, 그때 가서 당신의 임무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겁니다. 우린 공주님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샌더슨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리아는 감정을 자제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JT가 그녀를 보호하고자 하며, 그가 자신의 안전을 그토록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아마도 그건 진실의 위장이리라. 아니, 어쩌면 나와 함께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는지도 몰라.

JT는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우리, 대사와 저는, 당신들 두 사람이 행복하게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공주님과 접촉할 때에, 공주님께서 남편 없이 이 광대짓에 기꺼이 끼어드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습니까?”

샌더슨의 말에 JT는 돌아서지 않고 계속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요, 맞는 말이오.”

그러다가 그가 중얼거리면서 돌아섰다.

저녁식사 하러 갈까요? 우리 두 사람에게는 긴 비행이었소.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군요.”

샌더슨이 헛기침을 했다.

오늘밤 가능하다면, 당신들 두 사람이 저녁식사를 하며 소리 높여 공개적으로 언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공주께서는 화가 나서 대사관으로 뛰어가 거기에서 밤을 새우는 거지요. 우린 공주님에 관한 사항을 작성할 시간이 필요하고, 공주님 역시 우리 대사관과 접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세부적으로 많아요.”

그렇다면, 난 더 이상 필요 없겠군요.”

JT가 음울한 눈빛을 띄었지만 아리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샤워를 좀 하고…… 이곳에서 욕실을 찾을 수 있다면 말이오…… 식사를 하러 나가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 거요. 그건 간단해요.”

그가 가방에서 깨끗한 속옷을 집어 들고 못에 걸린 수건을 잡아채고는 방을 떠났다.

아니예요, 안 돼요, 안 돼요.”

JT가 방을 나가자마자 아리아가 샌더슨에게 격렬하게 소리쳤다.

당신은 모든 걸 잘못 알고 있어요. 우린 갈라서지 않을 겁니다. 내가 내 옆의 왕좌에 미국인을 앉히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미국 정부에서 날 도와주지 않았을 겁니다. 우린 결혼한 상태로 남게 되고 그가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게 더 나아요.”

그녀는 약간 공포스러움을 느꼈다. 미국은 아직 그녀의 핏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었으며, 수많은 기억 역시 달아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토록 사랑스러운 감정을 심어준 이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샌더슨이 냉혹한, 그야말로 외교관다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우린 이런 상황이 되기까지 당신의 동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공주님. 하지만 그건 군사적인 동의였지, 외교적이나 정치적인 동의가 아니었습니다. 설마 랑코니아의 왕좌에 미국인을 앉히겠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는 여왕의 배우자의 의무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더욱이 랑코니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소. 그리고 내가 듣기로, 그는 여왕의 부군이 되고 싶은 욕심도 없다더군요. 랑코니아 사람들이 미국의 한 평민을 여왕의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는 여왕의 부군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해낼 수 없을 겁니다. 랑코니아를 생각하셔야지, 공주님 자신의…… , 개인적인 감정을 생각해서는 안 됩나다.”

그의 말을 듣고 아리아는 랑코니아의 운명이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걸 느꼈다.

하지만 왕족은 이혼하지 않아요.”

당신의 결혼은 무효가 될 겁니다. 그 결혼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으며, 랑코니아 최고위원회에서도 동의할 것입니다.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우린 당신이 바나듐을 미국에 주도록 왕을 설득할 수 있으며, 그 도움의 결과로 우리는 당신을 무사히 복위시키고 앞으로 미국의 군부대가 당신 나라에 주둔하게 될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좋아요. 미국이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 난 그 보답을 하겠습니다.”

샌더슨의 낯빛이 변했다.

기분을 언짢게 한 점이 있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당신들 두 분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공주님께서는 결혼이 무효가 되는 걸 기쁘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때는요.”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작별을 고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리고 나서 서로 만나면 화를 낼 겁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게 되겠죠. 난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고 대답할 겁니다. 후에 난 아내보다는 공주가 되는 걸 더 좋아한다고 선언을 하는 거죠. 이 결혼은 내가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면 무효가 될 수 있어요.”

, 하지만…….”

이제 떠나셔도 돼요.”

아리아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합법적인 명령을 해본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죠, 공주님.”

샌더슨이 일어서서 짧게 목례를 하고 방을 떠났다.

아리아는 창문으로 다가가서 사람들이 오가는 좁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아주 생활에 찌들어 보였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활기찬 생동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매년 많은 젊은이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났다. 그들을 위한 산업이나 직업이 없었으며, 현대적인 오락거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이 사람들에게 자신은 얼마나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는가 더욱 깊이 깨달았다. 최고위원회에서는 법률을 통과시키고 공판 체제에 관한 일을 처리했지만, 이 나라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은 왕족에게 달려 있었다. 지난 백 년 동안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는 입고 있는 옷을 흘낏 내려다보았다. 옷차림은 무척이나 간소했다. 다이아몬드도, 특별한 궁정 기장도 없이 매우 간소한 짙은 갈색의 원피스였다. 그녀는 공주로서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는지를 떠올렸다. 매일 아침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고 그녀의 길다란 머리카락을 손질하려고 세 명의 여자들이 두 시간 동안 애를 썼다. 하루종일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 나절에 입는 옷, 오후에 입는 옷, 리셉션에서 입는 옷, 차를 마시며 입는 옷이 모두 달랐으며, 길다랗고 형식적인 만찬용 드레스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공식 일정에 생각이 미쳤다. 매일 매분마다 용무가 꽉 차 있었다.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그녀는 공공적인 모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공장을 순시하고, 사람들의 불평거리에 귀를 기울이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개인적인 질문들은 피했다. 그런 다음 랑코니아를 두루 방문하는 일정이 잡혔다. 또한 며칠 동안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연달아 이 병원 저 병원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죽어가는 아이와 아이의 부모를 위로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길고 따분한 무도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무가 그토록 많다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한 의무는 학업을 마친 후로 늘 해오던 일이었으며, 그러한 일을 하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제…… 이제 그녀는, 상점에서 물건을 산다거나 다른 여자들과 잡담을 즐기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음악에 맞춰 열광적으로 춤을 춘 경험을 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시시각각으로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 평범한 여자가 될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

그녀는 어느 한때를 기억해냈다. 열여덟 살이던가? 그때 그녀는 목선이 깊이 파인 옷을 입고 오후에 열리는 정원 파티에 참석했다. 이 파티에서 한 사진기자가 느닷없이 그녀의 발밑으로 기절하여 쓰러졌다. 그녀가 그를 도와주려고 허리를 구부리자, 그가 갑자기 카메라를 빼들고는 그녀의 사진을 찍더니, 재빨리 정원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세상의 모든 신문에 젖가슴이 반쯤 드러난 랑코니아의 아리아 공주 사진이 실렸다.

바로 그게 그녀에게 주어진 삶이었다. 그녀는 유리 상자 안에서 살았으며, 그녀의 모든 움직임은 감시받고 조사당한 후 세상에 노출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녀의 이 미국 남편에게 그러한 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지 물어볼 생각까지 했다. 그가 왕이 되면 어떻게 될까? 보고서들을 수영장으로 집어던져 버릴까? 줄리앙을 줄리 백작으로 부르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대놓고 그런 행동을 할까? 공공적인 장소에서 평범해 보이는 여자들과 식사를 나눌까? 식사시간에 속옷바람으로 나타날까?

그리고 랑코니아의 백성들은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염소지기들에게 모욕적인 표정을 지을까? 포도 따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대할까?

모든 미국인들은 미국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과연 몽고메리 대위가 랑코니아 인이 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할 수 있을까? 또한 애써 랑코니아 말을 배우려 할까?

그는 무척이나 화를 잘 내고 성급하며, 아주 참을성이 없었다. 그녀는 섬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제 그의 편협함과 화를 잘 내는 불 같은 기질을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그가 랑코니아에 남게 되면, 매일같이 길다랗게 늘어선 사람들과 사귀게 되리라. 그들의 속물근성으로 아리아는 농부를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이 들곤 했다. 그들은 이 미국 평민을 어떻게 여길까?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사촌 프레디가 이 미국인을 깔보는 순간, 몽고메리 대위가 프레디의 갸날픈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틀어쥐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위는 여왕의 부군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크나큰 장애였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가 일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마지못해 해낸다고 하더라도 역시 버릇없고 덩치만 커다란 두 살바기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이리라.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창문에서 돌아섰다. 샌더슨 씨 말이 옳아. 모든 게 끝났어.

미국인으로서의 편안하고 행복한 막간 촌극은 막을 내렸다. 이제 위엄을 갖춘 태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여왕이 될 운명이었으며, 이제 그러한 임무를 위한 준비를 계속해야 한다. 아니다. 그건 여왕으로서의 명예라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녀는 JT가 다시 방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여유 있게 미소를 지을 정도로 안정이 되었다. 그가 그런 그녀를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고국에 돌아오니 기쁜가 보군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미국은 항상 내게 즐거운 추억을 안겨줄 거예요. 돌리가 날 방문하겠다고 했으니, 당신 나라와의 접촉을 송두리째 잃게 되지는 않겠죠. 아마 당신도 방문…….”

안할 거요. 해낼 수 있겠소? 공개적인 언쟁 말이오.”

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연기되었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늘까지 그녀는 두 사람이 항상 결혼한 상태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녀는 지금이 함께 하게 될 마지막 몇 시간이라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함께 식사를 하고…… 그리고 밤을 보낸 다음, 내일이나 그 다음날 접촉하게 될 거예요. 우린 내일 가능하면 자주,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여야 해요.”

그는 허리에 수건 한 장을 두르고 다른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머리카락을 비비며 말렸다. 그가 무척이나 건강해 보여 그녀는 그의 가슴을 둥글게 손가락으로 그려가며 만져보았다.

난 가능하면 빨리 기지로 돌아가야 하오…….”

그가 말끝을 흐리자 그녀는 바싹 긴장했다.

날 어서 빨리 떼어버릴수록 당신은 기쁘겠군요.”

그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과 함께 이 일을 해낸다면 더없이 좋을 거요.”

저녁식사는 그녀가 지금까지 경험한 일 가운데 가장 힘겨운 식사였다. 그녀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그녀는 슬픔으로 가득 찼지만, 그는 그녀와 어서 헤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조바심을 치는 것만 같았다. 그건 차라리 형벌이었다. 냉정한 표정은 물론이고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

아리아는 곧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을 숨기고, 랑코니아 사람이 가까이 오기라도 할라치면 천박한 미국인 행세를 했다.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로 나가고 싶으세요? JT, 여보. 그들은 날 보고 싶어 안달이라고요. 그들은 날 가리키며 내가 그들의 공주와 닮았다고 말하고 싶어 안달이라고요. 계속 이 마을에 머물러야 하나요? 제대로 그런 수모를 참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쪽입니다, 귀부인 마님.”

웨이터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더니, 그들을 구석의 패쇄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돌아가면 뭘 할 거죠?”

두 사람만 있게 되자 아리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일을 해야겠지. 난 이번 전쟁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할 거요.”

키웨스트로 돌아가면 군대 측에서 당신을 우리의 그 조그만 집에 머물게 할까요?”

그러고 싶지 않소.”

아리아는 그 말에 미소 지었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이별에 무척 속이 상해 있는 게 틀림없어.

미국이 그리울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보고 싶을 거예요.”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자신의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내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면 무척 기쁠 거요. 그동안 내 일을 소홀히 해왔잖소.”

그녀는 그의 말에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음식이 나와도 입을 열지 않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헤더를 다시 만날 건가요?”

미국 동남부에 있는 모든 여자들과 데이트를 할 거요. 당신은? 그 조그만 백작과 결혼할 거요?”

정말이지!”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때로 당신은 꼭 젖먹이 어린애 같아요. 줄리앙 백작은 나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남자예요. 훌륭한 여왕의 부군이 될 거라고요. 당신보다 훨씬 더 잘할 거예요.”

나보다 더 잘할 거라고요? 내가 말해볼까요? 이 낙후된 나라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젊음이오. 내가 당신과 함께 머문다면 당신에게는 행운이겠지만, 난 백금 조각처럼 창백한 이곳에 있지 않을 거요. 저 밖에서는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소한 문제에 깊숙히 파묻혀 다른 사람은 돌아보지도 않소.”

우린 전쟁이 뛰어들지 않았어요. 그게 우리의 잘못이라는 건가요?”

그녀가 파르르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호전적이고 화를 잘 내는 당신네 미국인들은 평화로운 우리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나라를, 전쟁 무기를 가지고 파괴하지 않아요.”

당신들은 그 무엇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기 때문이오. 당신들은 그저 외부 세계가 당신들을 돌봐주도록 마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당신들은 바나듐을 팔아 이 전쟁에서 이익을 얻으려 하면서도 남자들을 군대에 보내는 그따위 희생 같은 건 하지 않잖소.”

우릴 겁쟁이라고 부르는 건가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들의 손에 창건된 국가예요. 서기 874년에 우린…….”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당신 나라의 역사에 신경을 써야 하오? 현재 당신들은 한 무리의 겁많은 착취자들이나 다름없소.”

그 말에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그의 뺨을 세게 내리치고는 후다닥 식당을 나가버렸다. 그녀는 호텔을 빠져나와 거리로 내달렸다. 시원한 밤공기 속으로 달려나가, 마치 유령을 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거리를 지나고 또 지나면서 지칠 때까지 달려 내려갔다. 그녀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수도인 에스칼론의 여러 거리에 대한 그녀의 경험은 고작해야 의식을 치르려고 마차를 타고 갔던 것뿐이었다. 조그만 소녀였을 때, 그녀는 마부가 방향을 아는 건 그저 장미 꽃잎의 흔적을 따라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남자를 어떻게 여왕의 부군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잠자리에서의 즐거움이 나의 이성적인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걸까? 그는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멍청이에다 참을성 없는 고집불통이야. 난 기꺼이 미국인의 생활방식을 익히고 미국인의 눈으로 사상과 관념을 이해하려 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방식은 아무 것도 눈여겨보지 못한다고. 그의 나라는 매우 젊고, 청년들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어. 미국은 힘을 원했으며, 그러한 힘을 위해서 기꺼이 살인을 저지른 거라고. 내 나라는 늙었고 평화의 힘을 익혀왔어. 어떤 시기엔가 내 조상들은 유럽과 러시아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적이 있었지. 사실, 내 가족이 권력을 잡게 된 이유는 가장 크고 강한 전사들을 낳았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이 미국인은 그들을 겁쟁이라고 불렀어! 착취자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그녀는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한참을 걸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걸으면서 그런 바보짓을 한 자신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누군가에게 달려가 걸음을 멈추었다.

실례합니다.”

그녀는 미국말로 건네며, 왕을 가까이 모시고 따라 다니는 신하인 시종장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 시종장은 거리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길을 비켜주기를 바라는 거만한 남자였다. 그의 검은 두 눈동자엔 총명함이 불타고 있었다.

아리아는 그가 자신을 보고 기억해주기를 원했다.

당신이 지나다니기에는 이 길이 너무 좁죠, 노인 양반? 그래서 이 거리를 다니면서 숙녀를 툭툭 건드리나요?”

아리아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시종장은 그녀가 마치 병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리아가 앞쪽으로 몸을 수그리며 그의 휘장에 손을 댔다.

이봐요! 당신 왕족인가요? 아니면 중요한 인물?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죠? 라틴말인가요? 우린 미국엣 라틴말을 배우죠. 공주님을 아세요? 이곳 사람들 말로는 내가 그녀와 닮았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녀의 왕관을 빌어다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고향에 돌아가면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공주님의 왕관 하나를 빌리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어쩌면 공주님께서 왕관을 빌려주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우린 아주 많이 닮았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거물 양반?”

시종장이 코웃음을 치고는 사라져버렸다.

그건 미국 시민을 대하는 방법이 아니에요!”

그녀가 그의 등에 대고 고함치자, 고요한 거리의 정적이 와르르 무너졌다.

우린 당신 나라 편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굴어야 한다고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출입문이나 창문을 열고 그녀를 내다보았다.

내가 당신을 미국 대사관에 고발하겠어요.”

그녀는 소리높여 외치고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한 행인에게 돌아서서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방향을 물었다.

그녀가 대사관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그녀는 대사관 건물 안의 모든 등이 켜져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출입구를 지키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 있으니 말이다.

평상시 꽉 끼는 코르셋을 입고 팔사적으로 몸매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듯한 분위기의 몸집이 크고 관록있는 대사 부인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마치 눈을 삽으로 퍼올리듯 위에서 홱 낚아채듯 아리아에게 덤벼들더니 그녀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 세상에. 공주님, 이곳은 그동안 아주 끔찍했어요. 미국 정부가 당신께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죠? 정말로 가엾은 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죠?”

아리아는 부인이 호들갑을 떨자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리곤 사치스런 청색 비단 벽지에 감청색의 실크 커튼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침실을 둘러보았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대사관에 인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 이런!”

부인이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신이 나서 떠벌렸다.

수많은 일이 일어났죠. 우린 공주님이 오시는 걸 잘 알지 못했고, 전쟁 때문에 필요한 걸 얻기가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제가 공주님을 위해 이리저리 손을 써 간신히 나이트가운을 마련해뒀어요. 프랑스의 수녀들이 만든 건데, 바느질에 정성이 가득하답니다. 공주님 마음에 드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공주님께서 사용하던 것만큼 질이 좋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요?”

아리아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 남자가 여기에 왔었어요. 우리 정부에서 당신과 결혼시켰던 그 끔찍한 남자 말예요.”

몽고메리 대위? 지금 여기 있어요?”

, 아니에요. 그를 내보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제 남편인 대사께서 그를 간신히 내보내긴 했지만, 현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죠. 그는 네 명의 무장한 경비병들에게 주먹질을 가했어요.”

아리아는 침대 끝에 앉았다.

그는 왜 여기에 왔었죠?”

당신을 만나려고 한다면서, 여기에 당신이 없다고 하자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우린 애가 닳도록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제 남편이 몇 번이나 그에게 떠나라고 했지만 그가 말을 곧이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소동이 일어난 거예요.”

그가 다쳤나요?”

아니에요. 한두 군데 타박상이 난 정도였죠. 할 수 없이 제 남편은 마침내 그에게 어떻게 하더라도 왕이 될 수 없다고 말했죠. 그 소식을 듣자 그는 잠잠해졌어요. 그리고는 둘이서 내 남편의 서재로 들어갔죠. 경비병들이 내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를 바랄 뿐이에요. 이 모든 일을 비밀로 지키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어요. 난 당신을 공주님이 아니라 조카처럼 여길 거예요. 절 용서해주길 바래요. 우린 당신을 위해 모든 일이 잘 되도록 무척 애썼지만…….”

당신의 남편이 몽고메리 대위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아리아가 예리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주님이 군대측과 했던 거래는 지켜질 수 없을 것이며, 그가 아무리 싸워도 결코 왕이 되는 걸 허락할 수 없다고 설명했어요.”

아리아가 부인에게서 시선을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는 그 말을 다 들었겠군요.”

남편은 아주 확고한 투로 그에게 말했어요. 미국인이 왕이 된다는 바로 그 생각에 대해서 말예요. 내 말은, 미국은 제 나라이기도 하지만 미국인을, 특히 그런 남자가 왕이 된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뜻이죠! 그 생각! 그토록 미숙한 젊은이를 말예요. 현관에서의 소동이라니!”

이제 나가셔도 돼요.”

부인이 놀라서 갑작스럽게 말을 중단했다.

, 공주님. 옷입는 데 도움이 필요하세요?”

아니에요. 그냥 날 혼자 내버려두기만 하면 돼요.”

그녀가 부인에게 손을 내저었다.

혼자 남게 되자, 아리아는 꽤 시간이 걸려 옷을 벗고 걸고 높은 목깃이 달린 나이트가운을 입었다. 정말이지, 이 가운은 그녀의 모든 삶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진부해진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더 이상 매력이 넘치는 리타 헤이워드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시시각각 그녀는 미국을 벗어나 랑코니아로 돌아오고 있는 듯했다. 이미 그녀는 마음속에서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을 하나 둘씩 지우고 있었다.

그녀는 빈 침대로 올라가 남편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오늘밤 대사가 퍼부은 신랄한 말에 저으기 화가 나 있음이 틀림없어.

그녀는 그가 왜 가장 먼저 이 대사관으로 찾아왔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며 천천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JT는 차창 밖을 조용히 내다보았다. 아내와 함께 점심식사를 한 다음, 랑코니아의 수도 에스칼론 기념 여행을 끝낸 후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 그의 일정이었다.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일정이 변해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과 미국으로 돌아가서 뭔가 중요한 작업에 복귀한다는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난밤의 언쟁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그가 했던 모든 말이 다 진실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결국 이곳은 그녀의 조국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그의 조국에 대해 비난하는 얘길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얘기를 나누려고 대사관으로 갔던 것인데, 문을 열자 마자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왕좌를 차지하려고 제 아무리 협박과 술수를 부리며 안간힘을 쓰더라도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다는 대사의 얘기를 듣고 혼란스런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십 분 동안 뚱뚱하고 조그만 대사의 말에 귀 기울이며, 피가 끓어오르는 걸 겨우 눌러 참았다.

대사가 JT를 지능 발달이 덜된 지진아 취급하면서 잰 체하며 훈계를 해대다 다시 살살 어르는 동안, JT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꿰어 맞출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리아는 미국이 자신을 도와준다면 미국인 남편을 왕좌에 앉히겠다고 군대 측에 말했는데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라는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JT의 분노는 가라앉아 독약처럼 온몸을 흘러 다녔다. 그는 겉보기엔 아주 공정한 일을 어리석게도 믿고 말아 결국 이용당했으며, 감쪽같이 속은 꼴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미국인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녀와 결혼하는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제 그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작자들만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대사가 잔뜩 점잔을 빼며 연설을 해대는 모양새를 지켜보면서, JT는 자신이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던 진짜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워브룩스 조선소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다면 몽고메리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제재소와 강철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회사들이 이 가난하고 황폐한 나라에 얼마나 유용하겠는가.

그녀는 뭘 요구했던 것일까? 이용이 가능한 미국 부자? 나는 얼마나 바보 같았던가. 난 그녀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녀에게 화가 났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우쭐하긴 했지. 하지만 그녀는 나의 돈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그녀 옆의 왕좌에 앉힐 것에 동의했던 게 분명하다. 이 가난한 나라에는 몽고메리 집안의 돈이 필요하니까.

그는 일어서며 대사에게 말했다.

이제 가면 다시는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겁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제 수송편은 직접 알아보겠습니다. 제 대신 공주님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이혼이나 무효 조치에 필요한 건 뭐든지 내가 다 하겠다고요.”

그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갑자기 대사가 침을 튀며 JT에게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가짜 공주를 붙잡아오고 아리아가 다시 진짜 공주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JT는 그 동안 남은여생 내내 즐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조롱과 속임수를 당했으니 이 나라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라고 맞고함을 쳤다.

대사가 그 말을 듣더니 말투를 바꾸었다. 그리고선 랑코니아와 미국이 필요로 하는 한 남아 있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다정스레 얘기를 건넸다.

당신은 내일 점심식사 시간에 공주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 한 번 더 말다툼을 벌인 후 헤어지게 될 거요. 공주는 혼자서 언덕으로 걸어갈 거예요. 우리 생각에 그녀는 그때 그곳에서 누군가의 접촉을 받게 될 거라는 예상을 하는 거요. 그리고 나서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웨이터가 그녀에게 수프를 엎지르게 되면, 당신 두 사람은 매우 화를 내고, 당신은 짐을 싸서 랑코니아를 떠나게 되는 거요. 공주는 비행기에 태워져 이곳에서 남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송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요.”

당신은 그들이 그녀와 접촉하게 되리라는 걸 아주 맹목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 같군요.”

미국 정부측 얘기로는 우리에게 바나듐을 주기로 한 서류가 8일 이내에 서명되지 않을 경우, 미국은 랑코니아를 적으로 간주하게 될 거라더군요. 그 서류는 우리가 공주를 데려가기 전까지는 전달되지 않을 거요. 왕의 측근자들이 왕이 손녀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려고 무슨 짓이든 할 거라고 확신하오. 왕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무 흥분해서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려 들 것이니 말이오. 그리고 더 안 좋은 상황이 발생될 수도 있는데,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게지.”

그렇다면 랑코니아 정부는 결국 그 서류에 서명해야 하겠군요.”

바나듐은 왕의 가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땅에 묻혀 있소.”

JT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조국을 도와 바나듐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음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리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을 그토록 바보로 만들었던 여자……. 그녀가 미국에서 했던 모든 것-층계에서 성교를 하고, 햄버거 스테이크를 굽고, 그의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굴었던 것-은 그녀의 조국을 위해 그의 돈을 얻어가기 위한 짓거리였다. 모두가 거짓이었어!

“24시간 더 이 나라에 머물겠소. 그리고 그걸로 끝이오.”

대사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더니 JT에게 한손을 내밀었지만, JT는 단호한 표정으로 무시해버렸다.

 

 

15

다음날 아침 여덟 시가 되자, 백합이 그려진 리모주(프랑스 중남부)산 도자기 잔에 차를 담아 쟁반에 받쳐 들고 하녀가 아리아의 방으로 날라 왔다. 매일 아침, 궁전에서 지내는 그녀이 일상과 다름없었다. 갑자기 이전의 공주로서의 생활 방식으로 빠져들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대사의 아내에게 옷 입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그리고 딸기가 싱싱하지 않다고 되돌려보내며 이런저런 일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또한 시녀가 그녀의 칫솔에 치약을 짜놓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마음 한구석에선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한쪽에는 그걸 억누를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으로 계획된 1245분이 되자 그녀는 급하게 층계를 내려갔다. 몽고메리 대위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신경질을 부렸던 마음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해변에서의 파티와 무도회에서 벌어졌던 우스꽝스런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JT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접견실로 그녀를 끌고 가더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날 배반했소. 당신은 우리 결혼이 일시적인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굳이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게 당신 정부가 나를 도와줄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게다가 난 미국인 남편을 여왕의 부군으로 맞이하는 데에 동의해야 했어요.”

왕이겠지.”

그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그녀가 그를 새치름히 쳐다보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게 거짓말을 했고, 그들에게도 거짓말을 한 거요. 난 그동안 계속해서 이 결혼을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해왔소.”

그녀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 사실에 대해 언제쯤 내게 알려줄 계획이었소? 어느날 밤 침대에 누워 그런데 말이에요, 당신은 앞으로 남은 평생을 하느님께 버림받은 이 비참한 나라에서 살아야 해요.’라고 말할 작정이었소? 내게 기대했던 게 그것이었소?”

당신을 마음에 두어본 적이 없어요. 난 줄곧 내 조국에 대해 생각했어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했다는 얘기군. 난 미국인이고 미국에 머물 계획이라는 걸 분명히 말해두겠소. 난 이곳에 살고 싶지 않소. 태엽 감는 장난감 왕이 될 생각은 전혀 없단 말이오. 난 새장 속에서 살려고 내 자유와 맞바꾸지는 않을 거란 말이오. 난 오늘 고국으로 떠날 거요. 군대 측의 거래는 내가 아니라 당신과 이루어진 것이었소. 난 돌아가는 즉시 우리 결혼을 취소할 거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던 거고, 당신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시 한 번 다른 풋내기를 속여 얼치기 왕으로 내세울 수 있을 거요.”

그가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는 으르렁거렸다.

이제 이 일을 끝냅시다.”

아리아의 몸이 뻣뻣하게 긴장되었다. JT의 말 중간에 달려들어 그게 아니라고 소리치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긴 거리를 걸으면서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호텔로 돌아와 식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왕궁에서의 교육 덕분이었다.

언쟁을 하도록 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자리에 앉자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문을 열었다.

언쟁하고 싶지 않군요.”

그녀가 오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공주님으로 돌아간 거로군요. 미국인 흉내를 내는 데에 진력이 났나 보군. 섬에서 만났을 때와 같이 버릇없는 선머슴으로 돌아간 거요. 내가 당신에게 공손하게 절을 해야 될 것 같군. 그래? 당신의 손에다 입을 맞출까요? 아가씨, 키웨스트에서의 연기에 대해 아카데미상이라도 안겨줘야 할 것 같군요. 이 일이 모두 끝나면 웃을 일이 아주 많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우리가 당신의 행동에 얼마나 깜박 속았는지 당신 친척들한테 말할 거요? 그리고 고귀하신 당신 친척들 앞에서 돌리와 빌과 우리 나머지의 흉내를 내겠지. 새 남편을 얻으면 나라를 구하려고 나와 벌였던 성행위에 대해서도 얘기할 거요?”

아리아는 마음의 상처를 입어 간담이 싸늘한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당신이 당신 나라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도 내 나라를 사랑해요. 누구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가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

, 저런! 당신은 한 가지 점을 빠뜨린 것 같군. 난 오늘밤 미국으로 돌아가서 즉각 이 결혼을 취소시킬 거요. 당신은 절대로 워브룩스 조선소에 손대지 못할 거요.”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굳이 그런 내색을 짓고 싶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할 수 있어요.”

그래야 할 거요, 아가씨.”

난 공주예요.”

그녀가 깔보는 듯한 태도로 되받아쳤다.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웨이터가 다가오자 입을 다물었다.

아리아는 껌을 씹는 것처럼 쩝쩝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나보다 그 살찐 난쟁이 헤더와 살고 싶다는 거군요.”

그녀는 웨이터가 들으라는 듯이 앙칼지게 큰소리로 소리쳤다.

당신만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괜찮을 거야.”

그의 시선이 자못 진지해졌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에다 돈만 밝히는 여자라고. 게다가 여지껏 같이 잤던 여자들 중에 잠자리에선 최악이야.”

아리아는 일부러 눈물을 찔끔거릴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리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오.”

천천히, 그녀가 일어나 식당을 떠났다. 다른 계층의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하셨던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바로 이 순간 그녀는 그와 함께 있으면 아주 마음이 편안해졌던 일들이 무척이나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보이지 말았어야 할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다니…….

어젯밤 대사가 지도를 펴 보이며 그녀가 걷게 될 장소, 즉 가장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띨 장소를 알려주었다. 보도 모퉁이에는 산으로 이어진 지저분한 염소가 다니는 길이 나 있었다.

그녀의 신발은 산에 오르기에 적당하진 않았지만 일단 그 길로 접어들자 기분이 한결 나아져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쪽의 덤불에서 한 남자가 펄쩍 뛰어나오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하마터면 당황한 나머지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넬 뻔했다. 그는 왕의 세 번째 비서로서, 거의 눈에 잘 띠지 않았으며, 악한이라고 생각할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몽고메리 부인,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당신 일이나 신경 써요, 젊은이.”

그녀는 단숨에 쏘아붙이고 돌아서서 언덕을 내려갔다.

또 다른 남자 하나가 그녀의 곁을 가로막았다. 그는 철갑 부대장의 비서였다.

이건 단순히 요청에 불과한 게 아니오.”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한쪽으로 끌고 가자 그녀는 저항하며 소리쳤지만,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아무도 그녀의 고함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염소지기들이 사용하는 오두막으로 끌려갔다. 실내에는 어제 부딪쳤던 시종장이 앉아 있었다. 아리아는 화가 치미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 남자는 할아버지께서 항상 신뢰해오던 부하였다.

그는 그녀에 대한 경멸을 한껏 드러내며 거드름을 피웠다.

몽고메리 부인,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잠시 후, 아리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와 마주보았다.

간단히 말해, 내가 당신의 공주가 되기를 원한다는 건가요?”

아주 잠시 동안만. 우린 손녀의 유괴 소식이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될까봐, 걱정하는 거요. 왕은 늙었고 심장이 나빠요. 이 소식은 왕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소. 당신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소. 단지 공주의 저택에 머물면서 가끔씩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돼요. 우리는 당신이 병을 앓고 있어서 방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할 거요. 가끔 사람들이 들여다보러 올 때마다 당신은 침대에서 앓고 있는 척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외 대부분은 마음대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당신 같은 미국인들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요.”

그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한 2주일 정도 방에 갇힌 죄수가 되겠군요. 당신은 이런 짓을 해서 이득을 보겠지만 나에겐 무슨 이득이 있는지 알아야겠어요.”

시종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죽음이 임박한 한 늙은이를 돕게 되는 게고, 우리나라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 말대로라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겁니다.”

시종장의 두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우리나라는 부유한 나라가 아니오.”

좋아요. 그렇다면 내게 다른 식으로 보상을 할 수 있겠군요. 작위는 어때요? 난 여공작 칭호를 받고 싶어요.”

시종장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여공작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는 위대한 작위요. 당신은 부인으로 호칭될 거요.”

부인이라니!”

그녀가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건 내 남편이 부르는 거예요. 부인으로 불리는 건 싫어요.”

그건 당신 나라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오. 대단히 영광스런 직함이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일어섰다.

이봐요, 가겠어요. 만나서 아주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렵겠군요. 2주일 동안 방에 누워 아픈 척하고 싶지 않아요.”

좋소. 그렇다면 뭘 원하시오?”

아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와 내 남편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해요. 난 잠시 동안 정말로 공주가 되고 싶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내게 공주처럼 말하고 공주처럼 행동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그러면 당신 나라의 공작이나 다른 높은 양반과 일을 벌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다음 당신 나라의 진짜 공주가 돌아오더라도 난 이곳에 머물면서 공작과 결혼할 수 있을 거예요. 또는 공주가 되든지 말예요. 공주가 좋겠군요.”

시종장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해 숨을 몰아쉬었다.

이봐요, 내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결정을 내리시죠.”

아리아가 다시 일어서며 물었다.

그리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누가 알고 있죠? 편찮으신 왕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미국 대사는요? 이 일이 잘 되어 가리라 확신하는가요?”

대꾸도 없이 시종장이 방을 나가더니 잠시 후 아리아 공주의 시녀인 웨르타 부인과 함께 돌아왔다.

여기 이 미국인 부인이 해낼 수 있겠소? 훈련받으면 아리아 공주가 가족을 만나는 일뿐 아니라 엄격한 일정도 수행할 것 같으오?”

그가 웨르타 부인에게 묻자 웨르타 부인이 아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명령했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걸어보세요.”

웨르타 부인에게 자신의 행동이나 신경 쓰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아리아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몸을 굽히고 단정치 못하게 방을 가로질러 걸으면서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어댔다.

불가능해요. 모조리 불가능해요.”

웨르타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 그래요? 이걸 보세요.”

아리아는 조그만 방안을 성큼성큼 건너가 웨르타 부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당신은 날 반드시 공주님이라고 부르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난 그런 무례한 태도를 다시는 참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

그녀가 시종장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내 앞에서 어떻게 감히 앉아 있는 거죠? 이제 차를 가져와요.”

, 공주님.”

얼떨결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아리아가 히죽 웃으며 껌을 씹고선 풍선을 불자 놀란 표정으로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난 배우였어요. 진짜처럼 해낼 수 있다고요.”

! 훈련을 받으면 어느 정도는 되겠네요.”

웨르타 부인이 코웃음을 치고 나서 오두막을 떠났다.

늙은 암탉 같으니라고. 그럼 난 연기를 하게 되나요, 어쩌나요?”

이틀 동안 훈련기간을 주겠소. 그 다음에 봅시다.”

내가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놀라게 될 거예요.”

몽고메리 부인, 더 이상 날 놀라게 하지 않았으면 하오. , 세부사항을 의논해 볼까요?”

 

아리아는 호텔방에 앉아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정물처럼 앉아 JT를 기다렸다. 그건 끔찍한 오후였다. 시종장을 만나고 나서 금세 공주가 되는 훈련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감옥에 가기 위해 훈련받는 느낌이었다. 미국에서 보낸 몇 주간의 짧은 시간은 외로움과 고립감, 공주로서의 경직된 생활을 잊게 만들었다. 규칙, 규칙, 그리고 또 규칙. 웨르타 부인은 한 가지 규칙 다음에 또다른 규칙을 줄줄이 내뱉었다. 모두 공주로서 하지 말 것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오만한 늙은 여자가 말을 할 때마다, 아리아는 몽고메리 부인이 아니라 점점 왕관을 쓴 공주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강하게 일었다.

웨르타 부인이 내일 코르셋을 가져와서 아리아의 커다란 몸에 제대로 맞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사실 아리아는 그동안 영양가가 높은 미국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살이 쪘다.

지금 당장,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아리아는 미국으로 돌아가 돌리와 함께 에델의 미용실에도 가고 JT에게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JT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온몸이 긴장되었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이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주었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점점 그를 좋아한 것은 고통의 시작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가 방으로 들어왔을 쯤엔, 그녀는 몇 시간 동안 한때의 생각에 빠져 앉아 있는 상태였다. 의자에서 등을 떼고 있었기에 등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형식적인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공주님식이군.”

그가 빈정거리듯 말하고는 옷장에서 가방을 꺼내 열었다.

싸둔 게 이거요?”

그래요. 아내는 남편을 위해 짐을 꾸리죠. 당신이 가르쳐줬잖아요.”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그녀에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마치 항의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굽어 있었다.

내려가서 이 일을 끝냅시다. 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소.”

그녀가 딱딱하고 형식적인 태도로 일어섰다.

그들이 오늘 당신에게 접촉했소?”

JT가 층계를 내려가면서 물었다.

.”

그가 그녀의 한쪽 팔을 잡고 걸음을 멈춰세웠다.

이봐요, 난 당신에게 얼마간의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이 진짜 공주라는 걸 그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되오. 누군가 전에 당신을 살해하려 했소. 그들이 당신이 진짜 공주란 걸 알면 다시 죽이려 할 거요.”

날 구해줄 사람이 있겠죠. 당신처럼 내 존재에 그다지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말이에요.”

그가 키스를 할 것처럼 한참동안 쳐다보자 아리아는 호흡을 멈추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당신은 괜찮을 거요. 당신은 나라를 거머쥐게 될 테고 황금 왕좌에 앉게 될 거요…… 난 당신이 황금 왕좌를 차지하리라 믿어요.”

그건 황금 이파리에 불과해요.”

매우 큰 고초를 겪겠군요. , 아가씨. 우리의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러 갑시다.”

아리아는 밉살스런 미국 여자 행세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두 사람은 가슴속에 응어리를 덮어두고 웨이터가 수프를 엎지르기를 기다렸다. 아리아가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

대사가 오늘 당신을 데려다 에스칼론 여행을 시켜주기로 했다더군요. 재미있는 거라도 봤어요?”

“19세기 방식으로 살고 있는 한 나라를 보았소. 아니, 18세기에 더 가까웠소. 내가 본 바로는, 미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 이외에 시내에서 가장 새로운 자동차는 29년형 스타드베이커더군요. 사람들은 샘도 없어서 강에서 물을 길어 나르더군요. 가난하고 교육이 뒤떨어진 나라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신 나라에는 학교도 있고 현대적인 통신설비도 갖추고 있소?”

하지만 우리에겐 돈이 없어요. 우린 바나듐을 제외하면 아무 자원이 없는 가난한 나라예요. 세계가 전쟁에 휘말려들지 않았다면 관광 사업이라도 성행할 텐데 말에요.”

포도가 있잖아요. 포도와 관련된 유일한 문제는 가뭄 때문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잖소?”

그래요. 우린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고 있지만…….”

그동안 당신은 국민들에게 관개사업이나 댐, 우물 같은 것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지도 못했단 말이오?”

말했잖아요.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감당이라니, 빌어먹을! 당신 나라의 남자들 삼분의 이가 카페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하루종일 값싼 술이나 마시고 염소 치즈를 먹고 있소. 그들이 일어나 무슨 일인가 한다면, 이 나라를 도울 수 있을 거요.”

우릴 겁쟁이라고 부르더니 이젠 게으르다고까지 하는 거예요?”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경우에 딱 맞는다면, 아가씨.”

내 생각에 당신 나라는 훨씬 더 훌륭한 것 같군요. 당신의 국민들은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에요.”

당신 나라는 그토록 평화를 사랑해서 자기 나라의 공주를 납치해 쏘아 죽이려 한 거로군?”

당신 나라는 자신들의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을 쏘아 죽였어요.”

그건 여러 세대가 지난 오래 전 얘기요. 이봐요, 이 얘긴 그만 둡시다. 이 마을에서 식사 한끼 먹고 소화불량에 걸리고 싶지는 않군.”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하기 시작했지만, 몇 숟가락 먹기도 전에 웨이터가 JT에게 수프를 엎지르고 말았다.

JT는 속으로 모든 일이 끝나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건 진짜로 화가 나서 내지른 소리이기도 했다.

수프는 벌써 먹었잖소! 당신과 이 나라에 질렸소. 오늘밤에 연료를 보급하려고 이곳을 통과하는 군용 선박이 있을 거요. 우리 그걸 타고 갑시다!”

거칠게 소리를 지르더니 그가 아리아의 한쪽 팔을 붙잡고 층계로 끌고 올라갔다.

그건 어리석은 말이었어요.”

방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말을 꺼냈다.

랑코니아에선 어떤 군대의 군용 비행기에도 연료를 보급할 수 없어요. 우린 이번 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두 개의 여행가방을 움켜쥐더니 방을 나갔다. 데스크에서 백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올려놓고는 떠나버렸다. 택시가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JT의 휘파람 소리에 쏜살같이 갖다댔다. JT는 트렁크에 짐을 싣고 콰당문을 닫았다.

공항으로 갑시다.”

그가 아리아를 뒷좌석으로 거의 떠밀다시피 하며 내뱉었다.

제복을 갈아 입을 걸 그랬어요. 온몸에 수프 투성이에요.”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건네도 그는 대꾸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리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녀는 지금 이 시간이 그가 미국에서 즐겼던 자유의 마지막 연결 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 모든 일이 자신의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걸 기억하려 애썼다. 앞으로 2주일 안에 이 남자를 거의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혹시라도 그를 기억한다면, 무례하고 야비한 인물로 앙금처럼 남아 있겠지. 그가 무릎에 물고기를 홱 던져주었던 섬에서의 끔찍한 날들을 기억하게 될 거야. 밤에 그녀를 끌어안았던 그의 손길이나 뒤뜰에서 햄버거를 구웠던 날의 오후, 또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춤을 추었던 날은 기억에서 멀어지겠지.

다 왔소. 내리겠소?”

아리아는 차에서 내려 말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는 무릎에 수북히 서류를 올려놓은 채 샌더슨이 앉아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가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에스칼론에서 남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엔진 고장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때 JT와 아리아는 헤어져, 아리아는 랑코니아에 남아 수도로 돌아가 염소지기의 오두막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시종장과 아침 일찍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계획이 치밀하게 짜여졌다.

우린 그가 아리아 공주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사람인지는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시종장은 진짜 공주가 유괴되었다는 소식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뿐일 수도 있소. 웨르타 부인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녀는 공주와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모를 리가 없소.”

샌더슨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해 염소지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그는 우리 측 사람 가운데 하나요. 최대한으로 편안하게 모실 겁니다. 마차 뒷좌석에 침대가 마련돼 있소. 잠을 좀 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샌더슨이 비행기 출입문가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JT는 창밖을 내다보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JT에게 손을 내밀며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당신의 도움에 무척이나 감사드립니다. 몽고메리 대위님. 목숨을 구해준 것에도 감사드려요. 그리고 그동안 당신에게 불편을 끼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편지 쓰겠다고 돌리에게 전해주세요.”

JT가 한줄기 빛이 지나가는 속도로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무릎에 올려놓고는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린 채, 마음 한구석에서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안녕, 공주님. 행운을 빕니다.”

그가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그가 자신과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공주님, 가야 합니다.”

샌더슨이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녀가 JT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당신에게도 큰 행운이 함께 하길 빕니다.”

그녀는 형식적으로 말하고는 기내를 떠났다.

몇 분 후, 그녀는 염소지기가 모는 냄새나는 마차의 뒷좌석에 몸을 숨겼다. 마차가 덜컹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일은 끝난 거야. 이제부턴 앞만 보아야 해.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미국과 미국인 남편은 잊어버리려 최선을 다할 거야. 이제부턴 내 조국만을 생각해야 해.

어쩌면 곧바로 줄리앙과 결혼해야 할지도 몰라. 그는 왕의 자질을 갖추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의 나라에서는 1921년에 군주제가 폐지되었지만, 줄리앙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통치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시켰다. 그건 그녀의 할아버지가 그녀의 남편감으로 줄리앙을 선택했던 한 가지 이유였다.

그녀는 지푸라기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 내가 앞으로 바라볼 남자는 줄리앙이야. 그는 잘 생겼고, ‘임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고, 군주가 될 수 있는 교육을 받아왔어. 그는 왕궁의 의식이 뭔지도 알아. 그는 아내인 여왕보다 두 걸음 뒤에 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도 알잖아.

잠시 동안 아리아는 JT가 여왕의 부군이 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와 둘이서 층계를 올라 최고위원회 건물로 들어가는데 JT가 갑자기 조바심을 친다. 두 사람의 아이들이 그날 오후 JT가 손수 가르친 소년 야구 경기를 펼치기로 되어 있거든. 그가 아리아의 팔을 잡아끌고 건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아이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살그머니 미소를 떠올렸다.

아니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나는 미국인 주부가 아니라 여왕이 될 거야.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모르는 남편을 맞이할 수는 없어. 난 줄리앙 백작에게 집중해야 해.

그녀는 줄리앙과 한 번 나누었던 키스를 떠올리며 줄리앙이 앞으로 더 여러 번 키스할지 생각했다. 미국에 가기 전가지 그녀는 열정이라는 걸 몰랐다. 그렇다면 줄리앙을 어떻게 판단했단 말인가? 난 공식석상의 여왕의 부군으로서만이 아니라 남편으로서 그의 모습을 찾아내야 할 거야.

어느새 새벽이 다가오자 그녀는 점점 졸음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댐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산중턱에서 자라는 농작물에 어떻게 물을 댈 수 있을까? 아마 줄리앙은 알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와줄 미국인 기술자를 고용할 수 있을 거야.

어느 결에 그녀는 잠이 들었다.

 

대위님, 엔진에 말썽이 생긴 것 같군요. 이륙하려면 약간 시간이 걸리겠어요. 그러니 밖으로 나간다거나, 자리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쉬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좋아요.”

조종사의 말에 JT가 중얼거리고 기내를 떠났다.

밖은 어두웠지만 달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는 활주로 한쪽으로 걸어가, 키가 작고 듬성듬성한 산의 초목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모금 깊이 빨아들이며, 뭐든 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그는 이 나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처럼 절실하게 뭔가를 원해본 적이 없었다. 그와 그의 공주 사이에 가능하면 먼 거리를 두고 싶을 따름이었다.

나의 공주님이 아니야.”

그는 담배를 홱 집어던져 발로 비벼 끄면서 중얼거렸다.

저와 함께 가시죠.”

등 뒤에서 낯선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JT가 돌아서서 무장한 군인 하나가 서 있는 걸 보았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저 뒤쪽에서 비행기가 시동 거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저와 함께 가시죠, 몽고메리 대위님.”

군인이 다시 말했다.

난 저 비행기를 타야 하오.”

JT가 경비병을 뿌리치고 뛰어가기 시작하자 다른 세 명의 군인이 손에 총을 들고 어둠속에서 나타났다.

우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JT는 싸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를 군에서 익혀 이미 알고 있었다. 두 명은 JT의 앞에 서고 다른 두 명은 뒤에 섰다. 단념하고 그들을 따라 어둠속에 숨겨 있는 검은 승용차로 다가갔다. 승용차의 창문으로 그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망할 놈의 그 여자!”

그는 아리아 공주를 만난 결과,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45분 동안 차를 몰아 아름드리나무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석벽 저택앞에 섰다.

여기요.”

경비병 하나가 고갯짓을 했다.

집안은 오래된 은촛대에 꽂힌 수백 개의 촛불들이 활활 타올라 눈이 부셨다. 여러 개의 국기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으며 벽에는 낡고 먼지 낀 색색의 실로 수놓은 벽걸이가 걸려 있었다.

경비병 하나가 어떤 방 앞에 멈추더니 문을 열고 JT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문을 닫았다. 그가 어둠에 익숙해지기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석벽으로 된 방은 한쪽 끄트머리만을 제외하고 어둠이 깔려 있었다.

와서 앉으시오. 식사는 하셨소?”

테이블 앞에 앉은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말을 건넸다.

난 총부리로 위협받아 명령받는 걸 좋아하지 않소.”

JT가 서 있는 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지만, 전시에는 그런 모욕쯤은 참아야 하오. 사슴고기와 토끼고기, 그리고 당신의 미국 쇠고기가 조금 있소. 그리고 내가 직접 잡은 메추라기도 있지. 저녁을 먹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걸.”

JT가 테이블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는 육십 대쯤으로 보였지만 젊은이다운 힘과 체격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가 아주 건강해 보여 JT는 그동안 레슬링이라도 했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네드, 미국산 와인을 따르게.”

중년의 남자가 중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JT는 어깨를 한 번 움찔하고는 남자의 건너편 의자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당신은 비행기를 놓치게 만든 게 얼마나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건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 나라의 대통령과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소.”

JT는 포크로 사슴고기 한 조각을 찍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오? 당신은 누굽니까?‘

이 나라의 왕이오. 변변치는 못하지만.”

JT는 한참 동안 남자를 쳐다보다 다시 먹기 시작했다.

죽음을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 있다고 들었는데, 그다지 많이 아프신 것 같지 않군요.”

폐하라고 제대로 부르세요.”

왕 뒤에 서 있던 수척한 남자가 불쑥 끼어들더니 쏘아붙였다.

네드는 내게 아주 극진하다오.”

왕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우린 미국인에게 나긋나긋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소. 내 손녀는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에스칼론으로 안전하고 돌아온 것으로 믿고 있소.”

JT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왕이 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왕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JT는 왕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말하지는 않을 참이었다.

왜 내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JT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 일은 손녀애가 미국 여행을 시작한 직후에 시작됐다고 믿고 있소. 그 애는 유괴당했소. 아마도 랑코니아의 누군가에 의해 그런 것 같소. 그런 다음 총격을 받았소. 난 당신을 믿어요. 목숨을 걸고 그 애의 목숨을 구해주었잖소. 영원토록 고마움을 느낄 것이오.”

천만에 말씀입니다.”

당신 도움으로, 그 애는 미국 정부로 가서 공주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소. 당신 군대에서는 미국인과 결혼하여 그를 그녀 옆자리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들의 목표는 내 나라에 군사 기지를 세우는 것이라고 믿고 있소.”

무엇보다도요.”

, 그래요. 바나듐도 있죠. 하지만 그때 아리아는 이미 바나듐을 미국에 주겠다고 동의했지. 지금까지의 내 말이 맞소?”

아직까진 그렇습니다.”

왕이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그 애의 남편으로 선택되었소. 당신 가문을 살펴보니 미국인으로서 당신 조상은 꽤 훌륭하더군요.”

JT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먹기만 했다.

두 사람은 키웨스트에서 살았소. 당신은 그곳에 주둔해 있었고, 내 손녀는 거기에서 미국인이 되는 법을 배웠소. <키웨스트 시티즌>이라는 신문에 아리아와 당신 어머니가 함께 실린 사진에 대해 그 상황을 내게 말해주시오. 몽고메리 부인은 무척 즐거워 보이더군.”

그녀는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그런 볼썽 사나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테지요? 난 이 나라를 떠나는 다른 비행기를 알아봐서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더 이상 그곳을 오래 비울 수가 없습니다.”

, 당신의 전투 임무? 술 더 하시겠소, 대위?”

왕이 네드에게 잔을 다시 채우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이제 내 손녀는 돌아왔소. 펄펄 기운이 넘치는 그 미국 대사의 도움으로 아리아 공주로 다시 임명되었소. 그리고 다시 한 번 위험에 빠져 있지.”

JT가 먹던 걸 멈췄다.

전 그녀가 보호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누굴 믿을 수 있겠소? 여기 있는 네드만이 이 음모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그는 지금 나와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이곳에 머물고 있소. 난 아리아의 조언자들과 친척들, 그녀의 시녀까지도 믿을 수 없소.”

가짜 공주를 왕좌에 앉힌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수 없습니까? 그 가짜 공주는 곧 우리측에 인도될 겁니다. 그녀에게서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녀를 미국으로 보냈소. 당신 나라의 대통령이 내 손녀애가 미국 땅에서 없어졌다고 알려왔을 때, 난 즉시 위험을 감지했소. 그건 랑코니아를 전쟁으로 몰고 갈 위태로운 상황이었소. 난 아리아의 사촌 애를 데리러 네드를 남부로 보냈지. 그 애는 아리아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 외에는 아리아와 비슷하게 생겼소. 그 애를 아리아를 대신해서 곧바로 미국으로 보냈다오.”

아리아 공주 말로는 자신이 사라졌다는 걸 당신이 알게 되면, 당신 목숨이 위험해질 거라더군요.”

왕이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난 그런 일에 죽을 만큼 약하지 않소.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의무와 이 나라가 먼저요.”

그녀도 당신과 똑같군요.”

왕이 넉넉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당신 성질은 미국과 랑코니아 모두에 잘 알려져 있소. 그 애는 매우 훌륭한 배우죠?”

내게서 뭘 원하는 겁니까?”

랑코니아에 남아주길 바라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JT가 일어서며 덧붙였다.

난 이곳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의 조국은 지금 전쟁을 치르고, 날 필요로 하고 있어요.”

당신은 이미 교체되었소.”

선박에 대해 나만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죠. 난 쉽사리 교체되지 않습니다.”

제이슨 몽고메리는 어떻소? 그가 이틀 전에 그 자리를 인계받았소. 그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JT는 급작스런 사실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이슨 삼촌은 아버지의 동생으로, JT는 언젠가는 선박에 대해 이 삼촌만큼 많이 알게 되기를 바랬다.

그분이라면 아주 잘 해내실 겁니다. 워브룩스 조선소를 경영하는 아버지는 누가 돕고 있죠?”

당신 어머니와 부상당한 형 한 분이 돕고 있소. 그분은 군대 병원에 있지 않고 조선소 사무실 책상에 앉아 몸을 회복하는 게 낫겠다 싶어 상당히 만족하고 있소.”

많이도 아시는 것 같군요.”

JT는 화가 치밀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건방진 그의 태도에 네드가 덤벼들려 하자 왕이 한 손을 들어 네드를 저지했다.

지난 몇 주 동안 난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흥미가 아주 많아졌소. 당신을 믿을 수 있는지 확실히 해두고 싶었소.”

내가 당신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이토록 음모가 얽히고 설킨 곳은 본 적이 없습니다.”

나도 동의하오. 그게 바로 내 손녀애를 보호하도록 그 애와 직접 관련이 없는 누군가를 원하는 이유요.”

JT는 와인을 쭉 들이켰다.

누군가 이 뒤떨어진 나라를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집착하리라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바나듐이 그렇게 값진 건가요?”

아니오, 우라늄(방사성 원소로 원자 폭탄·원자로 등 원자력 이용에 필요한 원료)이 있는 거요.”

왕이 온화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전쟁이 터진 직후, 랑코니아에는 여러 개의 우라늄 광산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소.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이 나라는 전쟁에 말려들게 되리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소. 여러 국가들이 우라늄 통제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었소. 난 그 사실을 비밀로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누군가 그걸 알고 이 나라의 통치를 원하고 있는 게 분명하오. 그게 누구든, 아리아를 쉽게 다룰 수 없음을 알고 그 애를 제거하려고 했던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누가 남았습니까? 제 생각엔 왕께선 싸우지 않고서는 절대 쓰러지지 않으실 것 같은데…….”

아마도 다음 목표물은 나였던 것 같소. 그리고 아리아의 여동생인 제나를 여왕 자리에 앉히려고 했던 게지. 그 애는 상당히 쉽게 다룰 수 있으니까요. 이런 말을 하자니 마음이 아프군요.”

아리아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십니까?”

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한 무리일 수도 있소. 당신이 이곳에 머물면서 그걸 알아봐주거나,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있으면서 그 애를 보호해주었으면 하오.”

그녀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기에는 고집이 너무 세요. 이건 제가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내 나라는 전시에 놓여 있고, 키웨스트에서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군인들처럼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갈 겁니다.”

하지만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내가 당신 나라 대통령에게 제의했소. 당신을 내게 보내준다면, 우라늄을 미국에 팔겠다고 말이오.”

왕이 JT에게 봉해진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일급비밀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JT는 마지못해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보낸 편지로 그에게 랑코니아에 남아 이 어려운 문제를 도와주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JT가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랑코니아에 머물면서 국가에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아울러 적혀 있었다.

대통령께선 왜 제게 최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요?”

JT가 편지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왕이 포도송이를 뚝 떼내 입에 넣었다.

당신에게 부여된 임무가 왜 그토록 당신 비위를 거슬리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당신은 아주 예쁜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궁전에서 살게 될 텐데 말이오. 당신이 가장 노력을 기울이게 될 일은 아침 승마시에 손녀와 동행하는 것이오. 그리고 가장 좋은 음식을 먹게 될 거요. 그런데 왜 몹시 지친 표정을 짓는 거죠?”

다시는 당신 손녀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부리는 버릇없는 선마슴 같습니다. 난 그녀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아무튼 적합하지 않습니다.”

알겠소. 그렇다면 그건 사사로운 거로군요. 미국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하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단지…….”

JT가 말을 하다 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국은 제게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어떻게든 보탬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머물면서 내 손녀를 보호해주시오. 난 구경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지금은 그래야겠군요. 그 애는 당신에게는 문제아일지 모르겠지만 내겐 삶의 위안이오. 그 애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워요. 우리나라의 미래의 희망이지요. 나와는 달리, 당신이 그 애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니 유감이군.”

그녀는 훌륭한 여성이 될 겁니다.”

JT가 포크로 음식을 집적거리며 마지못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이지, 매일 아리아를 보러가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 말은, 제가 동의한다면, 그녀의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소개되는 건가 하는 겁니다.”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당신이 타던 비행기가 수리하려고 이곳 부근에 착륙했을 때, 내가 당신을 보고 호감이 가서 당신을 기술 고문으로 고용했다고 하고 싶군요. 아니면 당신 대통령이 당신에게 이곳에서 바나듐을 책임지라고 명령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당신 아내는 미국으로 돌아간 거요. 당신에게는 내 손녀를 보호하는 일 외에 아무 의무도 없을 거요.”

아리아를 캐서린 몽고메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의 고용에 대해 무슨 반응을 보일까요?”

그들은 아무 데나 툭툭 끼어드는 늙은 왕을 모시고 있는 운명을 저주하겠지.”

JT는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접시 위쪽에 놓인 다섯 개의 포크 가운데 하나를 손가락으로 빙그르르 돌렸다.

전 당신 손녀를 따라다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겠군요. 전 이 나라에 뭔가 변화를 꾀할 수 잇기를 바랍니다.”

왕의 표정이 맘씨 좋은 노인의 얼굴에서 수백 년 동안 전사의 핏줄을 이어온 남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마음속에 무슨 변화를 생각하고 있는 거요?”

관계사업. . 이곳에 20세기의 상징인 뭔가가 심어지길 바랍니다.”

왕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감탄했다.

그런 걸 알고 있단 말이오? 참으로 훌륭한 일이오. 물론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작인들을 도울 수 있을 거요.”

소작인들이라고요? 아직도 그들을 해방시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까?”

JT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물론 그들은 자유의 몸이오. 그건 단지 표현일 뿐이지.”

왕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호기심어린 눈길로 JT를 바라보았다.

몽고메리 대위,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당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던 브룩스 장군이 있었소. 그분이 키웨스트에 있는 당신의 조그만 집에서 내 손녀를 보고 그 애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맞소?”

JT는 미소 지으며 그날 오후의 기억을 더듬었다. 쿵쿵거리며 요란스러운 라디오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핀컬한 머리, 청바지, 내 셔츠, 쿵쿵거리는 라디오, 손바닥으로 찰싹 찰싹 햄버거를 치며 춤추는 등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왕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 그 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내 아들의 아내인 그 애의 어머니는 아리아가 언젠가 여왕이 되리라는 걸 정확히 꿰뚫어보고 아리아가 사사로운 감정을 갖게 되거나, 적어도 그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도록 길렀소. 말해보시오, 그 애가 우는 걸 본 적이 있소?”

딱 한 번요.”

왕이 잠시 동안 JT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 애가 당신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단 말이오? 당신이 그토록 가까운 사람이었는지 몰랐소.”

아리아는 두 사람입니다. 내 아내인 아리아가 있고, 그녀는…….”

JT는 미소를 머금고 평온한 목소리로 이었다.

그녀는 괜찮은 여잡니다. 그리고 공주 아리아가 있습니다. 그녀는 조그많고 아주 젠 체하는 여자죠. 난 이 아리아에게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에 있는 동안, 그녀는 시간이 더할수록 내가 섬에서 만났을 때보다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왕이 술잔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뚜벅 입을 열었다.

아마도 당신이 이곳에 머물면서 그 애의…… 거 뭐랬죠? 잰 체하는 버릇을 버리도록 가르칠 수 있을 거요.”

아닙니다.”

JT가 의자 등받이에 털썩 등을 기댔다.

전 그녀를 보호하고 이 나라를 돕기 위해 여기에 머무는 겁니다. 절 위해서라도 그녀는 잰 체하는 여자로 남는 게 좋습니다. 제겐 그게 더 안전하거든요.“

그 애와 가까워지는 걸 걱정하고 있는 게요?”

왕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렇습니다. 그녀에게 한 번 작별을 고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다시 그래야 한다면, 더 힘들어질 겁니다.”

그래요, 알겠소. 물론 당신은 다시 작별인사를 해야 할 거요. 당신 정부는 우리나라 법률을 충분히 검토했어야 했는데……. 미국인 평민은 합법적으로 여왕과 결혼할 수 없어요. 그 애는 왕위를 포기해야 할 거요. 물론 랑코니아 백성들이 당신을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다면 몰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데에는 회의적이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녀가 그러고 싶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렇게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으니 기쁩니다만, 그 자리가 주어진다고 해도 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 누군가에게 제 침실을 안내하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지하 감옥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겁니까?”

왕이 네드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네드가 벽에 늘어져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곧바로 문이 열리더니 네 명의 경비병이 들어왔다.

몽고메리 대위를 붉은 침실로 모셔가게.“

왕이 위엄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JT가 사라지자 네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무례한 사람이군요. 폐하의 가운을 만질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왕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랬던 것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네. 그에게 잘해주는 게 좋을 거네, 네드. 내가 저세상으로 가면 그 사람이 랑코니아의 다음 왕이 될 테니까 말일세.”

네드가 뭐라고 투덜거리자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16

아니,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야, 아니라고요!”

웨르타 부인이 꽥꽥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당신의 일곱 번째 사촌이고 서열이 스물여덟 번째예요.”

아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나마 이 고통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원했다. 그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차에 실려 왔다. 그리고 새벽 여섯 시에 그들은 그녀에게 훈련을 시작했다. 지금은 오후 네 시였으며, 그녀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오늘 아침엔 여러 시간 동안 걷기 연습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공주처럼 걸으려는 서툰 미국인인 체했지만, 너무나 지쳐 앉고 싶은 생각에 왕관을 쓴 공주였을 때처럼 걷기 시작했다.

웨르타 부인에게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다. 아리아 공주의 걸음은 훨씬 더 왕족다우며, 미국인으로선 도저히 그녀를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리아는 처음으로 편견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 외엔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웨르타 부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실패작이었다. 웨르타 부인은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들이 누구인지 다급하게 알려주면서 사진을 넘기고는 그들이 누군지 대라고 몰아세웠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 대해 끝도 없이 잔뜩 훈계를 늘어놓았다.

지긋지긋한 시간이 흘러 정오에 이르자 시종장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랑코니아 말로 물었다.

어떻게 돼가고 있소?”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아리아 공주의 독특한 개성이 전혀 없어요. 내가 찻잔을 내밀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질 않겠어요? 아마 양철 커피잔을 내밀어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거라고요. 이 여자가 아리아 공주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너무 지나치게 친절하더라고요, 글쎄.”

아리아는 그들의 대화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토록 모든 사람들에게 목에 가시 같은 고통만 안겨주었단 말인가?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았지만, 잠깐 차를 마시며 쉬는 시간에 매우 피곤한 내색을 지었다.

이 접시들은 뭐죠? 그리고 접시에 박힌 이 꽃들은 뭔가요?”

스위트피(콩과의 원예식물. 여러 빛깔의 나비모양의 꽃이 핌)일 거예요. 서둘러 마셔요. 수업을 계속해야 해요.”

웨르타 부인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들이 머문 곳은 시종장의 시골 별장이었다. 그곳은 아주 넓고 호화스러워서 아리아는 시종장이라는 지위의 봉급이 얼마인지 나중에 검토해봐야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내 찻잔 받침에는 장미꽃이 들어가 있길 원해요. 아리아 공주는 항상 장미꽃이 뿌려진 찻잔 받침을 사용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니 내가 그녀가 되어야 한다면 난 장미를 원해요. 그리고 신선한 케이크를 먹고 싶어요. 이 음식들은 하인들이 먹다가 남긴 음식처럼 보이는군요. 내 말 이해하겠어요? 난 장미와 신선한 케이크를 원한다고요. 그리고 나서 낮잠을 좀 잤으면 좋겠어요. 피곤해서 쉬어야 겠어요.”

그러시죠, 공주님.”

웨르타 부인이 방을 나가면서 빈정대며 톡 쏘았다.

아리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했다. 그후 스물네 시간 동안 내내 그녀는 웨르타 부인을 기진맥진케 했다. 아리아는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음식이 나오면 너무 뜨겁거나 차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투덜댔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 시종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그녀는 귀가 멍할 정도로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점점 나아지고 있죠?”

시종장이 랑코니아 말로 웨르타 부인에게 물었다.

말하는 태도야 그렇죠.”

웨르타 부인이 눈 주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샐쭉거렸다.

진짜 공주에 거의 가까운 정도로 오만해요.”

그녀를 가족에게 소개해도 될까?”

오늘밤에요. 사람들이 내게 그녀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몸값에 대해 들은 얘기 없어요?”

그들은 수백만 달러를 원하고 있소. 그 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소.”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유괴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그분께 얘기하지 않았죠?”

그분은 사냥 오두막에 계시오. 어린애처럼 순진한 분이죠. 그동안 그가 비밀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드디어 그분이 손녀를 봐야겠다고 우기고 있소. 지금 제나 공주가 그분과 함께 있죠.”

웨르타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준비시켜야겠어요. 폐하는 점점 늙어가고 있어요. 그분이 이 광대짓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우린 아리아 공주가 그토록 차가운 여자라는 걸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그녀에게 따뜻함이 부족하다는 걸 안타까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아리아는 바싹 긴장하고선 두 사람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 이런! 미국에서는 차가웠던 적이 없질 않는가.

내 앞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건 아주 무례한 짓이예요.”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사진들을 다시 보여주세요. 지금 궁전에는 누가 있나요?”

 

 

랑코니아 궁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은, 13세기에 용맹을 떨친 로윈이 지은 것이었다. 그 건물은 육중한 석재 벽돌로 만들어진 장중한 구조로, 이 건물을 지은 통치자처럼 강한 요새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갖췄다.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에 접해 있었고, 한 면은 14세기에 선동자들의 공개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던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지면에 위치해 있었다. 동남쪽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면 조그만 강이 있었는데, 이 성은 궁전이 굽어보고 있는 즉, 지배하고 있는 마을 쪽으로 흘러갔다.

1684년에 대단한 미술 애호가였던 안웬은 칙칙한 오래된 석벽을 없애고 궁전을 증축해 매우 길고 커다란 6층짜리 이탈리아식 별장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오래된 성은 동편 날개, 새로운 스타일의 커다란 중앙 통로, 동편과 짝을 이룬 서편 날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랑코니아 재정을 고갈시킬 정도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안웬은 외관을 장식하려고 이탈리아에서 희귀한 황색 사암(砂巖)을 수입해 왔다.

1760, 안웬 왕의 넷째 아들의 아내였던 반사다 왕자비는 한 영국 공작부인에게서 초라한 뜰이 궁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말을 전해 듣고 뜰을 어떻게든 다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왕국을 빚더미로 몰아넣었지만, 눈부신 정원을 만들어냈다. 그곳에는 사계절 내내 궁전에 신선한 꽃을 제공해주는 열두 개의 온실이 있었다. 동편 날개와 서편 날개 양 끝에는 여러 이름이 붙은 정원과 이십 에이커에 달하는 야생 정원, 장미 정원, 귀부인들의 야외 쉼터로 이어지는 다리가 놓인 인공 호수가 있었다. 전망대도 세 군데나 있었는데, 하나는 중국식, 다른 하나는 고딕식,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중세의 옛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곳곳에 조각상(彫刻像)이 널려 있었는데, 대부분 잘생긴 젊은 남자를 새긴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러한 조각상들이 반사다 왕자비의 연인이라는 고약한 말을 하기도 했다. 게걸스러운 탐욕이 사그라들자, 왕자비는 싫증을 느꼈는지 조각상들에 회반죽을 입혔다는 말이 전해졌다. 아리아는 성인이 되어 조각상들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걸 보고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시종장은 비밀리에 아리아와 함께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두꺼운 검은색 옷을 여러 겹으로 걸쳐서,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위장했다. 그녀는 검은 옷에 파묻혀 검은색 리무진 안에 앉아 한 마디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그녀는 궁전에 가까워짐과 동시에 그곳의 내음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조각상들이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궁전은 그녀에게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정겨운 궁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자 눈물 방울이 맺혔다. 화사한 햇살이 궁전 하나 가득 에워싸듯 쏟아졌고, 궁전 뒤로 산들이 솟아 있는 아련한 모습이 너무도 반가워 눈시울을 적셨다. 그녀는 얼굴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게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감정을 내보이지 않도록 교육을 받아왔던 것이 새삼스럽게 기쁘게 다가들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그녀에게 일부러 말을 건네지 않았던 시종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치 그녀가 지수가 낮은 하찮은 존재라는 듯이 그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짙게 묻어났다.

당신은 왕관을 쓴 공주라는 걸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일초도 방심해서는 안 돼요. 혼자 있다고 생각될 때에라도 말이오. 공주는 결코 혼자 있는 법이 없소. 공주는 항상 보호를 받고 주시받고 돌봄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이었다.

모든 것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그 경박한 미국인 습관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아리아는 입을 열어 한 마디 하려다 이내 포기했다. 그 대신 이제 그녀의 삶은 간단한 유머로 활기가 넘쳐흐르리란 각오를 했다. 미국의 무도회장에서 몽고메리 부인과 춤 경연을 벌였던 생각에 미소 지었다. 아마 궁전에 살고 있는 친척들에게 가볍고 발랄한 미국 풍습을 몇 가지 소개해줄 수 있을 거다.

줄리앙은 강가에서 햄버거 스테이크를 구워먹는 걸 좋아하게 될까? 그녀는 바베큐 석쇠에다 고기를 굽고, 사람들은 식사 때 입는 길다란 가운 대신, 청바지를 입으리라. 그녀는 고모할머니 소피에게 청바지를 입도록 설득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저절로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군요!”

갑자기 시종장이 꾸짖듯 소리쳤다.

다시, 아리아는 내뱉고 싶은 말을 꾹 눌러 참았다. 그녀가 공주였을 때, 시종장에게서 그녀는 물론 그녀의 모든 가족들이 아버지 같은 자상함을 흠씬 느꼈다. 물론, 그녀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선 그다지 많은 호감을 사고 있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런 불평들은 한낱 헛된 소문으로 간주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노신사였기에, 아리아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집무실로 왕실에서 제공한 집에 사는 것조차 황송하다며 거절했다. 아리아는 그의 그런 태도에 감동을 받았었지만, 이제 그의 시골 별장을 보고 그가 왜 사양했는지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녀는 그에 대한 백성들의 불평을 보다 철저하게 조사하리라 맹세했다.

그는 공주의 역할이 얼마나 기계 같은지, 서류에 서명하고 공장들을 둘러보는 일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자동인간 같은지를 설명하면서, 공주의 품행과 의무, 책임감 등에 대해 단조로운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이 공주에게도 뭔가 재미있는 구석이 있겠죠?”

그녀는 자신의 어줍잖은 말투에 질린 표정을 짓는 그의 태도를 즐기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내 말은, 그녀에게도 남자친구가 있지 않느냐는 뜻이에요. 그들은 언제 만나서 낄낄거리며 재미있어 하나요? 당신은 아세요?”

줄리앙 백작은 그렇지 않소-그는 거의 속이 뒤집힌 얼굴이었다-낄낄거리다뇨? 그는 공주님의 남편감으로 완벽한 사람이오. 당신이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두 사람만 있게 되는 일은 없을 거요. 절대로 두 사람만 따로 있을 경우는 없어요. 그러니 행동을 조심해야 해요.”

아리아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려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한쪽 가슴에서 아리아 공주라는 신분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즐겨본 적이 없다니……. 하지만 지금 그녀는 새로운 모습의 아리아 공주였다. 미국에서의 경험은 그녀를 바꾸어 놓았으며, 앞으로 궁전에서의 생활을 바꿀 결심을 단단히 했다.

웨르타 부인이 궁전의 평면도를 보여주었지만, 시종장이 공주의 내실로 데려가기 전에 가능하면 많은 방들을 보여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베일로 얼굴을 잔뜩 가리고 있긴 하지만 많은 가신(家臣)들이 그녀를 알아볼 것이라고 그가 귀띔했다. 미리 그들이 퍼뜨린 이야기는, 그녀가 미국을 여행한 후에 아주 심한 독감에 걸려 회복될 때까지 오스트리아의 한 사설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리아가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몰랐으며, 아예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시종장은 그녀를 궁전으로 안내하게 시작했지만, 아리아는 그 자리에 붙박혀서 그가 그녀보다 앞서서 걸어가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지시했다. 그가 증오의 빛을 드러내더니 그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웅장한 현관 홀은 모든 이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벽과 천장에 붙인 원목의 판벽엔 회반죽을 이겨 소용돌이 무늬로 한껏 장식을 했다. 특히 전장의 판벽에는 위대한 로완의 용맹스런 장면을 묘사한 그린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벽은 모든 군주와 여왕의 문장이 새겨진 참나무 돋을새김으로 장식했다. 아리아의 문장은 동쪽 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남편의 문장을 새길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몽고메리 대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정 전형적인 미국인이 이곳에 새겨지기 바라는가?

시종장이 그녀 뒤에서 목청을 가다듬자 그녀는 커다란 현관문을 통과해 전쟁 노획품이 진열된 전승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이 방 역시 인상적인 방이었다. 한쪽 벽에는 말을 타고 있는 로완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그 초상화는 무려 2평방미터에 달했다. 로완은 자신의 초상화를 하나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 그림은 후에 한 화가가 우대한 전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아리아의 할아버지 설명에 의하면, 초상화의 로완은 매우 지치고 지저분해 보이며, 화가는 금발 머리카락을 훨씬 적게 묘사했다고 지적했다.

아리아는 그러한 기억을 더듬으며 미소짓다가, 몽고메리 대위가 현재 랑코니아 사람들은 겁쟁이들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 웅장한 층계 쪽으로 걸어갔다. 이 층계는 말 여섯 마리가 마차를 끌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마부 헤이저가 그걸 당당히 증명해 보였지. 물론 마차를 끌던 마부의 생명은 왕이 내세운 경쟁자를 이기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마부는 마차를 끄는데 성공했지만 대리석 층계에서 입은 상처가 뿌리 깊어 결국 회복되지 못했다.

뒤쪽에 있던 시종장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방향을 알려주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층계와 방 바깥에 궁정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경비병들은 여덟 시간 동안 한 번밖에 쉬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아리아는 전에 그들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지루하게 서 있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것만 같았다. 이 다음에,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이번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궁정의 경비병들에 대해 특별 조치를 취할 작정이었다.

시종장의 목소리는 아리아가 고집스럽게 그녀의 내실로 다가가자 거의 광적으로 흥분되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말을 무시했다. 홀에서는 조상들의 초상화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엄숙했다. 마치 그녀가 왕족답지 않은 생각들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며 얘야 , 경비병들에게 의자를 내주지 그러니?’ 하며, 어머니가 혐오스런 말을 내뱉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로완은 안락의자에 빈둥거리던 부하들을 독려해 능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건지도 몰라.

아리아는 가슴에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두 명의 경비병이 문을 열어주자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역시 시종장의 목소리도 묻혀버렸다.

네 명의 시녀와 두 명의 의상 담당자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이 절을 올렸다. 그들은 모두 나이든 여자들이었으며, 모두 어머니가 선택했다. 아리아는 무릎을 꿇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그들은 합창을 하듯 낭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뿐 그들의 환영 인사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여자들에 대해 정말이지,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어머니에게서 시녀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었다.

날 내버려두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그 말에 여자들이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웨르타 부인이 앞으로 나섰다.

공주님께서는 목욕을 하고 싶으신가 보군요.”

아리아는 그녀에게 모두 물러가게 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반복해야 하나요?”

여자들이 떠나자 아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묵직한 베일을 들어 올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그녀가 수많은 시간을 보냈던 방이었으며, 그녀의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려고 뭔가를 하곤 했던 방이었다. 방의 전체 색상은 노란 빛깔이었다. 벽에는 야생 숲이 내다보이는 여러 개의 높다란 창문이 나 있었으며, 창문마다 똑같은 비단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다란 방에는 열한 개의 다양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모든 테이블에는 정교한 솜씨로 조각한 다리에다, 각 테이블은 나름대로의 독특함과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진기한 특성을 지녔다. 하나는 한 회교 군주가 보낸 선물로 조그만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아리아와 그녀의 부모, 여동생을 그린 에나멜 광택제를 바른 초상화가 들어 있었는데, 음악 소리가 나는 가구가 달려 있는 독특한 것이었다. 여러 개의 다른 테이블 위에는 가족 사진이 든 은박 사진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거실은 조그만 소파 하나와 노란색과 하얀색의 비단으로 덮은 세 개의 의자로 이루어진 응접 세트도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짙은 청색과 흰색, 금색의 프랑스 산 오부숑 카펫이 깔려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일 년 후, 아리아는 궁전을 거닐면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든 모형과 초상화를 골라 그녀의 방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녀의 전용 책상이 있었는데, 조그맣고 값비싼 황동과 적갈색의 원목으로 만든 것이었다. 편지봉투칼과 만년필, 기타 문구류 등은 모두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그녀가 직접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것들이었다. 자신이 직접 고른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 한숨 짓다가 문득 줄리앙 역시 그랬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도 줄리앙보다는 낫군.”

아리아는 중얼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거실을 통과하면 그녀의 침실이 있었는데, 전체 분위기는 연한 옥색을 띠고 있었으며, 벽에는 100년 전, 어떤 여왕을 위해 전설의 동물 유니콘과 숲의 정령들이 살았다는 상상의 숲을 연상시키는 환상적인 풍경을 그렸다는 벽화가 있었다. 그녀의 침대는 17세기에 마리 오거스트 여왕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섯 명의 세공인들이 2년에 걸쳐 정교한 덩굴손과 이파리, 포도나무들이 사방으로 뻗어 올라가도록 새겨 넣었다. 마리 오거스트 여왕의 남편은 이 침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다른 어느 남자도 이 침대에서 함께 자본 적이 없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침실의 한족 벽에는 반쯤 감추어진 쭉 이어진 문들이 있었는데, 이 문들은 네 개의 붙박이장과 연결이 되었다. 각각의 붙박이장은 실제로 그녀가 키웨스트에서 지냈던 침실 크기 정도였다.

첫 번째 붙박이장에는 매일매일 입는 옷들이 들어 있었다. 수백 벌의 실크 블라우스 대부분이 랑코니아의 여자들이 직접 손으로 수를 놓은 것이었다. 맞춤 스커트가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고 한쪽 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뻗어 있는 횃대에는 실크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횃대에서 드레스 한 벌을 꺼내고는 허리에 들어가 있는 심을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이보다 품이 넉넉한 드레스가 없는 것 같군.”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부드러운 실크 감촉에 미소를 떠올렸다.

두 번째 붙박이장에는 무도회에 입는 가운과 의식을 치를 때에 입는 옷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모든 드레스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투명한 보일사(두 가닥 이상의 실을 꼬아 합친 실)로 성기게 짠 옷감을 소매까지 달아 특수하게 만든, 순면 씌우개를 덮어 보관하였다.

씌우개로 덮었지만 다양한 드레스는 어깨부분의 금장식이나 세퀸(의복 장식으로 다는 원형의 작은 금속조각), 조그만 다이아몬드, 진주 장식까지도 빛을 발하면서, 마치 붙박이의 옅은 분홍빛 벽이 황혼속으로 젖어드는 것 같은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세 번째 붙박이장에는 모자, 장갑, 손으로 만든 구두, 지갑, 부츠, 스카프 등과 같은 액세서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속치마, 속바지, 나이트가운등의 수공예품 속옷을 넣은 서랍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무겁고 신축성 있는 메리 위도우상표가 붙은(그 뜻이 영 기분이 좋질 않았다. Merry Widow, 들뜬 과부라니?) 파운데이션(몸매를 교정시키기 위한 속옷종류)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이것들을 노려보다가 서랍을 닫아버렸다.

네 번째 붙박이장에는 겨울에 입는 모피류가 들어 있었으며, 거울 뒤에는 보석 금고도 있었다. 그녀는 세 개의 걸쇠를 벗기고 뒤로 밀어젖힌 다음, 금고의 문자 맞추기 다이얼을 돌렸다. 벨벳으로 덧댄 서랍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붉은색 벨벳은 목걸이, 팔지, 귀고리 등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검은색 벨벳은 반지를, 노란색은 다른 종류의 귀고리를, 푸른색은 시계를, 녹색은 브로치를, 흰색은 보석을 박은 왕관이 들어 있었는데, 진주를 박은 왕관과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를 박은 왕관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보석들은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는 자체의 칸에 항상 보관했다.

아리아는 차례로 서랍을 열면서 미소 지었다. 보석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 각각의 보석은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아리아는 보석을 지녀본 적이 없었으며, 여기 이 보석들은 왕족 대대로 물려받은 유품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갑작스럽게 그녀는 서랍과 거울을 닫았다. 누군가가 거실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붙박이장에서 물러나자 그녀는 웨르타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좋아요. 공주의 소유물들을 점검하고 있군요.”

아리아는, 이 여자가 자신을 함부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을 깨뜨려 버리고 싶었다.

허락도 없이 어떻게 감히 내 방에 들어 올 생각을 한 거죠?”

그녀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웨르타 부인이 잠시 놀란 표정을 보이더니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내겐 그런 행동 보이지 않아도 돼요. 난 당신을 알고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린 오늘밤에 관한 얘기를 나누어야 해요. 줄리앙 백작이 여기 와 계세요.”

당신과는 아무 것도 논의하지 않겠어요.”

아리아가 거실로 이어진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기다리세요.”

웨르타 부인이 아리아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아리아는 여자의 손이 닿자 무척이나 놀랐다. 이제 그녀는 공주를 흉내 내는 미국인 아리아가 아니었다. 공주였다.

웨르타 부인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며 말을 건넸지만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였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어야 해요.”

시녀들을 불러줘요. 만찬에 맞는 옷을 입어야겠어요.”

아리아가 말하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아리아는 수천 개의 진주알이 박힌 길다란 흰색 가운을 입고 만찬에 참석했다. 가운은 목깃이 높고, 소매는 길었으며 장식이 아주 많아서 성적 감성을 일으키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웨르타 부인은 이 미국인이 훔쳐갈까봐 진짜 다이아몬드 귀고리 대신 값싼 귀고리 세 쌍을 골라 아리아에게 내밀었다.

이게 다예요?”

아리아가 웨르타 부인만이 듣도록 불평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나라는 가난해요.”

웨르타 부인이 화난 눈빛을 드러내며 빈정거리듯 속삭였다.

미국에서 얻은 병에서 완전히 회복되신 걸 보니 기쁩니다, 공주님.”

세 명의 다른 시녀들이 방안을 오가며 아리아의 변덕에 비위를 맞추려고 전전긍긍했다.

의상 담당자 하나가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미국에 계셨을 때보다 더 마르셨군요.”

아리아는 그 여자에게 고압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개인적인 평은 스스로에게나 하도록 하고, , 옷이나 입혀줘요.”

여자들의 손놀림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참아낸다는 게 힘이 들었다. 그녀는 그녀들이 입혀주는 것보다 혼자서 입는 게 절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다란 파운데이션은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의상 담당자가 훨씬 더 짧아진 머리카락을 간신히 말아넣어 쪽머리를 하자 미국인 아리아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비서는 한 손에 공주의 공식 모임 일정표를 들고 뒤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일 아침 9시에는 승마가 있습니다. 1030분에는 새로 개설한 어린이 병원을 방문하시게 됩니다. 오후 1시에는 미국과의 바나듐 계약에 관해 토의하기 위해 최고위원회 세 분의 위원들과 점심을 드시게 됩니다. 2시에는 네 명의 철도 고용원들에게 금장 시계를 전달하시고, 4시에는 최고위원회 위원들의 아내들과 다과를 함께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530분에는 동북부 발린 산맥의 곤충 생태에 관한 과학 아카데미에 참석하시어 인사말을 하시게 됩니다. 7시에는 830분으로 예정된 저녁 만찬에 나갈 준비를 위해 돌아오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10시에는…….”

무도회장에서 재즈 춤 공연대회가 열리죠.”

아리아가 말을 가로채자 방안에 있던 모든 여자들이 손길을 멈추었다.

웨르타 부인이 얼른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공주님께서 미국을 방문하시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농담을 하시는 거라고요.”

여자들이 정중하게 웃음을 지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리아가 농담을 한다는 것은 매우매우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웨르타 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귀에 대고 경고했다.

잠시 후, 아리아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에게서 어떤 행동을 지시받는지 신호를 기다렸다. 왕이 자리에 없을 때는 왕관을 쓴 공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리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 프레디.”

아리아가 그녀의 사촌인 프레디 왕자에게 말을 건넸다.

여전히 태도가 바르지 못하군요. 내가 인사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가 내민 손 위로 몸을 굽혀 랑코니아의 말로 인사했다.

그동안 걱정했습니다.”

잠시 동안, 아리아는 망설였다. 이 남자는 그녀의 사촌으로,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는 그녀가 오래 자리를 비운 후 오늘 처음 만나 그녀를 아주 약간 안면이 있는 사람이거나 하는 것처럼 인사를 했던 것이다.

영어로 말해요. 미국인들을 다루려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아요.”

그녀는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라도 하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프레디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아리아보다 겨우 몇 센티가 더 큰 정도였으며, 상당히 깡마른 체구였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단정치 못한 태도로 걸어갔다. 아리아는 항상 프레디를 무시해왔지만-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지금 그녀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리아와 동생 다음으로 왕위 서열 세 번째였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만큼 왕위를 원하고 있는 걸까?

좋아 보이는군, 아리아.”

고모할머니 소피가 큰소리로 소리쳤다. 이 늙은 여인은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라서 모든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그녀의 옷차림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차림이었다. 하늘거리는 엷은 푸른빛 시퐁(견 모슬린)에다 짙은 푸른색 실크로 만든 커다란 장미송이를 길게 파인 목선에다 촌스럽게 장식했고, 쭈글쭈글한 가슴이 드러났다. 미국인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정말 어울리지 않게 젊게 꾸미려고 안달이 났다고 할까? 소피 고모할머니는 항상 남편을 구하려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제까지 그녀에게 청혼한 그런 어리석은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언젠가 할아버지가 아리아에게 귀띔을 했다.

, 괜찮아요. 거의 죽었다 살아온 후로는요.”

아리아가 되받아서 소리치자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이런 아리아 공주는 소리를 지르는 일이 없었다!

좋구나!”

소피 고모할머니가 다시 소리치고는 돌아서서 웨이터에게 브랜디를 더 가져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무사하신 걸 보니 무척 기쁘군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줄리앙 백작이 거의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몽고메리 대위는 이 남자를 항상 줄리 백작이라고 불렀으며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하지만 아리아는 이 남자의 두 눈동자에 남자다운 호기가 서려 있음을 엿보았다. 그는 몽고메리 대위처럼 몸집이 크거나 강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여자에게 짓눌려서 왜소해 보인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그는 꽤 잘생겼으며, 키는 아리아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고 군인처럼 곧고 똑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줄리앙은 네 살 때부터 열여섯까지 강철 등받이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줄리앙 백작이 그녀의 한손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식사 전에 뭐 좀 드시겠소? 백포도주는 어때요?”

좋아요.”

그녀는 가볍게 대꾸하고선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가 남편으로 느껴질까? 침실 문이 닫히는 즉시 그는 호랑이처럼 맹렬해질까? 그녀는 그가 천장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돌아오자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선 그가 말없이 옆에 서 있자 아리아는 실제로 그와 얘기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식사에 초대된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사촌인 니키와 토비가 와 있었고, 브래들리 숙모, 아름다운 사촌 여동생인 바바라도 와 있었다. 바바라는 왕위 서열이 일곱 번째였다.

시시와 제나는 어디 있나요?”

그녀가 프레디의 여동생인 시시와 자신의 여동생인 제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줄리앙에게 물었다. 물론 시시는 현재 미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분 다 사냥 오두막에 폐하와 함께 계십니다.”

식사는 끔찍하도록 따분했다. 남자들은 지난주에 동물을 몇 마리나 죽였는지 그런 이야기밖에 할 줄 몰랐다. 그들은 피를 보는 스포츠만이 유일한 관심사였고 그외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고모할머니 소피는 주위에 앉은 사람들에게 고함을 질러대며 대화에 끼어들려 했지만,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프레디와 니키, 토비의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아리아는 꽥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바라는 이 남자, 저 남자와 농지거리를 주고 받으면서 일부러 눈을 깜박거리며 깊게 파인 가슴을 드러내려고 앞쪽으로 몸을 숙이곤 했다.

바바라에게도 남편감을 찾아주어야겠군요.”

아리아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줄리앙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뭐라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내가 농담을 시작한다면 그들은 놀라지 않을까? 아리아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향미료 소스를 친 철강 상어를 곧은 자세로 먹고 있는 줄리앙을 쳐다보며, 자신이 만약 그에게 눈을 깜박인다면 그가 대단히 충격을 받아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녀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더 긴장되기 전에 재빨리 손을 뻗어 줄리앙의 한쪽 손을 잡았다.

식사 후에 왕의 정원에서 만나시겠어요?”

그가 한 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는 그가 잡힌 손을 빼내며 눈썹 사이의 미간을 약간 찌푸리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그녀는 방금 무슨 짓인가를 했고, 왕관을 쓴 공주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예의였다.

그녀는 고모할머니 소피가 저쪽에서 그녀에게 고함을 질러대며 뭐라고 묻자 시선을 돌렸다.

식사가 끝난 후, 그녀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듯이 암담한 표정을 짓는 웨르타 부인을 따돌릴 구실을 만들었다. 아리아는 슬그머니 온실 휴게실로 들어가 전승 기념관을 지나 재빠르게 왕들의 초상화 전시실 휴게실을 통과해 백마가 노니는 안마당으로 나가 그리스 오렌지온실을 거쳐 마침내 왕의 정원에 이르렀다. 이 정원은 껑충한 소나무가 빽빽했고 비밀스럽고 꾸불꾸불한 오솔길이 나 있어 맑고 깨끗한 공기가 항상 풍부하다고 여겨 왕의 정원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로완이 한때 이곳에 캠프를 차리기도 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줄리앙이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보다 열여섯 살이 많았으며, 그녀는 항상 그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간직해 왔다. 결국, 그녀는 두 사람의 결혼이 평범한 결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결혼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이유 때문에 성립된 것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의 정략 결혼이라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지.

저와 얘기를 나누고 싶으시다고요?”

줄리앙이 정중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 못마땅한 느낌이 묻어났다.

그녀는 현명하게 대꾸할 말을 찾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내게 화가 나 있는 거군요.”

그녀는 어린 소녀같이 아양을 떠는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이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속으로 저주했다.

그녀는 그가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걸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매우 잘생겼으며-몽고메리 대위가 뭐라고 했든지 간에-달빛을 받아 더욱 눈부셨다.

당신의 명성을 생각해서 하는 얘깁니다. 둘이서만 함께 있는 걸 누군가 보서는 안 될 겁니다.”

아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결혼 첫날 밤 그는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그녀는 다시 그를 쳐다보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우린 약혼한 사인데도 함께 보낸 시간이 거의 없어요. 두 사람이건 다른 사람과 함께이건 말이에요. 우린 앞으로 삶을 함께 꾸려나가는 사이잖아요?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대꾸했다.

그렇다면 무슨 의논을 하고 싶은 거죠? 다가오는 선거요? 현재의 시종장은 공직에 그대로 남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그는 자손들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줄 거예요.”

아니에요. 내 말은, 그래요. 난 위원회에 관한 일을 논의하고 싶지 않지만 내 생각에는…….”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당신의 미국 여행에 대해서 말인가요?”

그는 어깨를 뒤로 젖히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모든 훈장을 달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서 있었다. 아무데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리아는 JT가 일터에서 돌아올 때면, 문을 열고 들어서기 바쁘게 땀으로 범벅이 된 제복을 훌훌 벗어던지며, ‘여보, 맥주 한 잔 갖다줘요.’라고 소리치던 모습을 떠올렸다.

맥주 마실 줄 아세요?”

아리아가 무심결에 불쑥 물었다.

줄리앙이 잠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 맥주를 마시기도 하죠.”

그런 줄 몰랐어요. 난 당신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아는 게 없어요. 우리가…… 어울릴지 때로는 의아스러워지곤 해요. 내 말은, 우린 함께 살 거고, 결혼이란…… 내 말은, 들은 바로는 결혼이란 매우 깊은 관계라고…….”

그녀는 다시 말끝을 흐리며, 약간 어리석고 유치하다고 느꼈다. 줄리앙은 아직도 딱딱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아리아는 점잖은 체하는 그의 목소리가 역겨웠다. 아니면 자신이 지금 느끼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서인지도…….

이렇게 사소한 일로 당신에게 부담을 주어서 미안합니다.”

그녀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돌아섰다.

아리아.”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멈춰 섰다. 그가 다가왔다.

당신의 질문은 아주 타당해요. 난 결혼 제안서를 왕에게 제출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소. 결혼이란 정말로 진지한 약속이지만, 우린 아주 가장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믿는 수많은 근거가 있소. 우린 같은 방식으로 길러졌고, 난 왕이 될 거고 당신은 여왕이 될 거요. 우린 같은 사람들을 알고 있고, 군주제의 의례를 알고 있소. 우린 멋진 결혼 생활을 꾸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아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어요. , 우린 멋진 한쌍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무슨 일이 있는 거요?”

그는 아주 가까이 서 있었지만 그녀에게 손을 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따질 일은 아니었지만, 아리아는 불쑥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우린 어떤가요? 날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해요? 여왕으로서가 아니라 내게 뭔가 느껴지는 게 없나요?”

줄리앙은 낯빛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한손을 내밀어 그녀의 뒷머리에 얹더니 그녀를 끌어당긴 후, 오랫동안 억눌린 욕망의 표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가 키스를 끝내고 물러섰을 때에도 아리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단한 예감으로 결혼 첫날 밤을 기대하고 있소.”

그가 속삭이자 그녀의 얼굴 바로 위로 그의 숨결이 쏟아져내렸다.

아리아는 눈을 뜨고 몸을 곧추세웠다.

나도 한때는 그랬어요.”

그 말에 줄리앙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따뜻함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당신은 아름답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요. 당신과 사랑하고 싶다는 나의 갈망을 어떻게 의심하는 겁니까?”

…… 난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다시 한 발자국 그가 그녀에게서 물러나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오늘밤 식사 시간에 당신은 달라 보였소.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더군.”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가 자신을 지켜보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많은 생각을 해보지 않고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했다. 그녀는 남자로서의 줄리앙보다는 그의 조상들과 그가 받은 교육에 훨씬 더 많은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제 그녀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일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질 않는가.

미국에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난 연인들이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며 공원 벤치에서 키스하는 걸 보았어요.”

미국에서는 능히 그럴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소.”

줄리앙이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바뀌더니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미국은 멋진 곳이에요.”

아리아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곳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있어요. 아무 것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없죠. 전통이 수백 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며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아요.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요. 사실,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예요.”

공원에서의 연인들은 새로운 게 아니오.”

줄리앙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당신이 얼마나 젊은지를 잊어버렸소. 여태까지 당신은 환심을 사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소. 당신은 악수를 하고 반지를 받는 것 외에 더 이상 원하는 게 없는 것처럼 나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건가요?”

아니에요. 하지만 미국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

연인들을 보자, 당신은 자신의 연인을 갖게 되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되었군요?”

, 그와 비슷한 거죠.”

그녀가 중얼거리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줄리앙, 우리 결혼이 잘 되기를 바래요. 내겐 그게 필요해요. 우리 결혼은 랑코니아를 위한 결혼 이상의 것이어야 해요. 난 여자이며, 단지 내 지위 때무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사랑받고 싶어요.”

줄리앙이 더욱더 재미있다는 표정을 내보였다.

그보다 더 쉬운 일을 요구한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소. 당신을 유혹해 볼까요?”

그가 그녀의 한 손을 잡고 손바닥에 키스했다.

야생화 꽃다발을 들고 당신 문앞에 나타날까요? 아니면 창문 아래서 연가를 부를까요? 예쁜 당신 귀에 대고 사랑의 말을 속삭일까요?”

아무튼 뭔가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손에 키스하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에 만나서 말을 타도록 합시다.”

새벽에요? 하지만 난 9시에 승마하도록 일정이 잡혀 있어요.”

그걸 깨세요.”

그가 명령하듯이 말을 이었다.

새벽에 오겠소. 하지만 이젠 백마가 노니는 안마당으로 당신을 호위해야겠소. 그곳으로 들어가면 사람들 눈에 덜 띌 거요.”

그가 옆으로 비켜서며 그녀에게 앞장서라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그녀 오른쪽으로 다가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의 한쪽 팔을 끌어당겼다.

안마당 끄트머리에서 그녀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키스해주겠어요?”

그가 궁전의 창문들을 흘끔 쳐다보더니 주저하는 것 같았다.

제발요, 줄리앙. 우리 결혼이 괜찮을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단 말예요. 난 잊어버려야 할 필요가 있는…….”

그가 손가락 두 개를 그녀의 입술에 얹었다.

우린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게 있는 법이오. 당신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키스하겠소, 내 사랑.”

그가 천천히 그녀를 팔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가 리타 헤이워드나 되는 듯이.

키스를 끝내고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제 가시오! 아침에 뵙죠.”

그가 명령하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가 돌아서서 가려 하자 그가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았다.

키스한 걸 잊어버리려고 애쓴다면 아마도 당신은 내일 정오까지 기억상실증에 걸릴 것이오.”

그가 놓아주자 그녀는 궁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웨르타 부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뭐라던가요? 혹시 추측하기라도 했나요? 그는 아리아 공주와 가까웠으니 당신이 그녀가 아니라는 걸 알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들은 연인들이 나누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을 거예요.”

웨르타 부인이 아리아를 따분하게 만들기 시작하자 아리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잠자리로 가세요. 오늘밤에는 더 이상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난…….”

가란 말예요!”

아리아가 쏘아붙였다.

, 공주님.”

웨르타 부인이 씩씩거리며 물러갔다.

위층에서 아리아는 의상 담당자들이 가운을 벗기고 나이트가운을 입혀주는 동안 꼼짝않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불을 끄고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할 때에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어 며칠만에 처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내 삶은 분리되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잘 타이넌 몽고메리 대위와 함께 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를 잊고 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내일 줄리앙 백작에게 온 신경을 집중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랑코니아가 필요로 하는 남자이며, 그녀에게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키스로 판단하건대, 그건 지나치게 힘든 일이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잠속으로 빠져들면서 어느덧 자제력은 사라지고 욕조에 앉아 있는 JT, 그녀가 만들어준 닭튀김을 맛보는 JT, 그녀에게 요리사가 되었어야 할 거라고 말해주던 JT, 가슴을 애무하던 JT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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