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4-3
12. 보천보 진공
"송형, 이것 좀 보시오. 호외요, 호외!"
한 사람이 잡지사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서며 팔을 흔들어댔다. 열기 묻어나는 목소리만큼 그의 손에 들린 종이가 요란스럽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윤형. 무슨 호외요?"
송중원이 만년필을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편집실에 있는 서너 사람의 눈길이 모두 그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다.
"아 글세, 이렇게 통쾌할 일이 있소. 우리 독립군들이 함경남도 보천보를 기습공격했단 말이오."
소설가 윤일랑은 더 흥분된 목소리로 손에 든 종이를 깃발처럼 흔들어댔다.
"아니 독립군이? 어디 좀 봅시다."
송중원이 놀라며 급히 책상에서 벗어났다.
"자아, 보시오. 독립군이 더는 맥을 못 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오."
윤일랑이 의자에 털퍽 주저앉으며 호외를 송중원에게 내밀었다. 송중원이 윤일랑 옆에 앉으며 호외로 눈길을 보냈다.
"보시오, 함남 보천보를 습격. 우편소 면소에 충화……"
윤일랑이 호외 제목을 큰소리로 읽었다. 직원들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송중원의 등 뒤로 모여들었다.
"작야 2백여 명이 돌연 내습, 보교(보통학교) 소방서에도 방화라……"
송중원이 낮은 소리로 읽어나갔다.
함남 경찰부에서 출동
김일성 일파로 판명
그건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 호외였다. '동아일보'는 손기성 선수의 우승한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해 버린 사건으로 정간당했다가 6월 1일 복간되었던 것이다.
"선생님, 거기 김일성이란 사람이 누굽니까?"
젊은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글쎄에, 잘 모르겠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야."
윤일랑이 고개를 저으며 송중원을 쳐다보았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새로 등장한 인물 같소. 독립군도 계속 세대가 바뀌고 있으니 말이오."
송중원은 끝내 돌아오지 않은 동생을 생각하며 말하고 있었다.
"기둘리지말소, 올 사람이 아닝게. 그 일로 나슬 맘이 앞서서 대학도 안 댕길라고 헌 사람이시."
공허 스님의 말이었다.
어느 날 김일성이 아닌 송가원이란 이름으로 호외가 발행될지도 모른다고 송중원은 생각하고 있었다.
"2백여 명이 무장을 했으면 적은 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직원이 윤일랑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지. 그냥 흩어져 있는 일반인 2백여 명이 아니니까. 무장경찰 열 명만 줄 서서 종로에 나서봐. 종로거리가 그만 꽉차는 형국 아니던가. 헌데 무장병력 2백여 명이면 굉장한 거지."
윤일랑은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독립군들이 그리 많다니, 참 놀랍습니다."
"아니, 그것 보고 놀라면 안 되지. 그 부댄 일부고 만주에는 더 많은 부대들이 또 있을 것 아닌가."
"예, 그렇겠는데요 정말."
"만주에는 독립군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요?"
다른 직원이 물었다.
"그야 알 도리가 있나. 이리 죽치고앉았으니."
윤일랑의 얼굴이 침통해지며 쓴 입맛을 다셨다.
"왜놈들 만주 다 평정했다고 큰소리 뻥뻥 쳐대더니 이번에 아주 낯짝에 똥칠을 했군요."
그러게 통쾌하다는 것 아닌가."
윤일랑이 담배를 뽑아 들었다.
"관동군 사령관하고 조선 총독이 독립군들을 합동으로 토벌하자고 뜻을 맞췄는데 이번 사건은 그럼 누구 잘못일까요?"
직원의 말은 사뭇 야유조였다.
"응, 그것 참 재미있는 문제로군. 그거 집안싸움 나지 않겠어?"
"집안싸움이오?"
다른 직원이 의아해했다.
"아, 생각해 보게나. 독립군이 만주 땅에서 압록강을 건넜으니까 총독부에서는 관동군에게 책임을 따질 것이고, 이쪽에서는 그 잘난 국경수비댄가 뭔가가 독립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한 면이 불바다가 됐으니 관동군에서는 총독부로 책임을 떠넘기지 않겠나 말이야."
"아 예,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흐흐흐……망할 놈들, 그런 싸움으로 자중지란이나 일어났으면 좋겠다." 윤일랑은 담배 연기를 내뿔다 말고, "자넨 뭘 그리 생각하고 있나?" 그때까지 호외만 내려다보고 있는 송중원의 무릎을 툭 쳤다.
"음, 그저 워……"
송중원이 앉음새를 고치며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눈길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직원들이 어물어물 자기네들 자리로 돌아갔다.
"이봐 송형, 이 보천보 공격을 다음 달 잡지에 자세하게 다루면 어떻겠나?"
윤일랑이 나직하게 말했다.
"글세,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송중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정도가 아닐세. 잘만 다루면 인기 절정일 거야. 만주사변은 터지고, 사회주의 세는 잠적하고, 모두가 의기소침해 있는 판에 이런 통쾌한 쾌거가 어디 또 있겠나. 신문에서 호외를 발행할 정도면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인지 알 만하지 않나. 친일 반역자들 빼고 조선사람치고 이번 일에 통쾌해하지 않을 사람 없고, 박수갈채 보내지 않을 사람 없단 말일세."
"일리있는 말일네. 발행인하고 의논해 보지. 헌데, 자네 소설은 어찌 돼가나?"
"이런……, 갑자기 소설은 또……"
윤일랑은 어물거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런 일에 열정을 나타내는 것도 좋지만 그런 열정으로 소설을 쓰란 말일세. 독립군이 총을 들었으면 소설가는 펜을 들어얄 것 아닌가. 소설가가 독립에 참여하는 것이 그것밖에 또 있겠나."
"내 참, 누운 개 앉은 개 나무라는군. 그러는 자넨 무엇 하고 있나?"
윤일랑이 눈을 흘기며 성냥을 칙 그러댔다.
"난 문청(문학청년)이지 소설가가 아니고, 그저 잡지쟁이 소임이나마 충실히 하자고 이렇게 소설가한테 글 좀 써주시라고 애걸하는 거 아닌가."
"허, 이 사람 참 은근히 사람 잡는다니까. 그게 훈계고 협박이지 어디 애걸인가."
"어쨌든 쓰게. '발가락이 닮았다' 같은 것만 빼고 뭐든 써. 써야 읽고, 읽어야 깨달을 것 아닌가. 자네 밥벌이도 해결해야 하고 말이야."
"알겠어, 쓰긴 써야지. 힘을 내야지."
"안녕들 하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는 것은 박정애였다.
"어서 오시오."
송중원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고
"아, 여장부께서 납시는구만."
윤일랑이 손을 들어 보였다. 직원들은 박정애를 한 차례씩 힐끗거리고는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눈길들이 곱지가 않았다.
"말씀 삼가세요. 숙녀보고 여장부가 뭐예요, 여장부. 내가 뭐 칼이라도 차고 다니나요?"
박정애는 윤일랑에게 째지라고 눈을 흘기며 의자에 앉았다.
"오해 마시오, 여장부는 경칭인데. 아무나 그런 존경 받는 줄 아시오?"
마르고 선한 인상이면서도 눈이 날카로운 윤일랑이 묘한 웃음을 피워냈다.
"흥, 비꼬고 야유하지 말아요. 정 경칭을 쓰고 싶으면 박 선생이라고 하세요."
박정애가 정색을 하며 내쏘았다.
"아, 그거 나쁠 것 없소. 극단 창조좌의 실질적 대표이시며, 신여성의 선구요, 모범이시며, 성악가이시니 직함으로나 경력으로나 나이로나 선생이 아주 그럴듯하외다."
윤일랑은 야유의 기색을 더 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보세요 윤 선쟁, 댁하곤 용건 없으니까 그만 함구하시는 게 어때요. 요새 통 글 안 쓰시니 수입도 없으실 테고, 배고플 때 기운을 덜 빼는 건 말을 적게 하는 건 줄 몰라요?"
박정애의 거침없는 독설이었다.
"이거 농담하다 쌈 나겠소, 손아랫사람들 앞에서."
송중원이 나직하게 말하며 윤일랑에게 눈짓을 했다.
"예에, 박 선생이 내 사정 잘 알아줘서 고맙소. 그렇잖아도 땡전 한닢 없어서 점심도 굶었소이다. 어디, 물배나 좀 채워볼까."
윤일랑이 흐흐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머, 정말 점심을 굶었을까요?"
당황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박정애는 울상을 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니까."
송중원이 핏기없는 얼굴에 또 흐린 웃음을 지어냈다.
"이번에 새 연극을 올리기로 했어요. 잡지에 멋지게 좀 소개해 주셔야 해요."
박정애는 손가방에서 팸플릿을 꺼내 송중원에게 내밀었다.
"작품이 뭐지요?"
송중원은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로미오와 줄리엣'! 이름이 싸다. 창조좌. 차라리 모작좌, 아니 번역좌로 바꾸지 그래."
어느새 제목을 읽었는지 윤일랑은 이렇게 내 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저쪽에서 직원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윤일랑 씨! 꼭 이럴 거예요, 정말?"
박정애가 바락 소리질렀다. 금방 와드득 쥐어뜯고 덤빌 것처럼 박정애의 얼굴에는 독이 올라 있었다.
"아니, 내가 못할 말 했소? 이름이 창조좌면 당당하게 창작극을 하라 그거요. 독립군들은 압록강을 건너 진공하고, 굶주린 사람들은 만주로 집단이민을 떠나가고 하는 이 절박한 형편에 서양 놈들 사랑 타령이나 읊어대서 뭘 어쩌자는 거요? 아까운 돈 없애가면서."
윤일랑은 박정애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눈에 잔뜩 힘이 실린 그의 태도는 장난기 섞였던 아까의 태도가 아니었다.
"누군 창작극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줄 아세요? 창작극을 할 래도 작품이 있어야 하지요. 잘난 척하지 말고 윤일랑 씨가 당장 희곡을 써봐요. 얼마든지 창작극을 해낼 테니까요."
박정애도 마주 칼을 휘두르며 대들었다. 화가 난 박정애의 입에서는 '윤 선생'이 '윤일랑 씨'로 바뀌어 있었다.
"소설가보고 희곡을 쓰라? 그것 참 전대미문의 유식이오. 니나 내나 검열의 작두날 아래 목 잘린 목숨들이긴 마찬가지니까 독립적이고 애국적인 작품은 아예 포기했다 하더라도, 정 창작극이 할 게 없으면 '춘향전'을 하고, '홍길동전'을 하고, '콩쥐팥쥐'를 하라 그거요, 우리 것들을 잘 요리하면 은유와 현실을 반영시킬 수도 있고, 황당한 서양놈들 사랑 타령보다야 백번 낫단 말이오."
"흥, 소설보다는 말이 더 미끈하군요. 이봐요, 희곡만 창작이 흉년인지 알아요? 남의 일에 콩이야 팥이야 간섭 말고 소설가면 소설이나 부지런히 써요, 그리고, 서양 명작을 무대에 올려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소개하고, 식견을 넓혀주고 하는 게 뭐가 잘못됐죠? 우물 안 개구리로만 사는 게 애국애족인 줄 알아요? 유치하고 촌스럽게."
박정애의 독설에 불이 붙고 있었다.
"됐소, 됐소. 그만들 하시오. 그만하면 문화토론으로 충분하니까."
윤일랑의 입심이나 박정애의 독설을 잘 아는 터라 송중원은 그들의 입씨름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래, 세상살이 다 제멋에 겨워 흥!이니까."
윤일랑은 코웃음을 흘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의 행위는 박정애에 대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 때절은 소설가 명패만 달고 잡지사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제멋에 겨워 흥이지."
박정애는 흥에다가 유독 힘을 넣어 코방귀를 튕기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점잔찮게 왜들 이러시나. 나갑시다, 차나 한잔씩 하게."
송중원이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박정애가 발딱 일어섰다. 여전히 양장으로 멋을 부린 박정애의 화장은 마치 일본기생들처럼 했었다. 얼굴에 드러나는 나이를 감추려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윤일랑은 일어날 기미 없이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윤형, 안 갈래나?"
"술이라면 모를까 나 같은 촌놈은 차가 안 맞네. 우리 모범적인 신여성 모시고 다녀오게나."
속마음 같아서는 '학생첩'이라고 해버리고 싶었지만 무슨 덤터기를 쓸지 몰라 윤일랑은 '모범적인 신여성'이라고 말을 바꾸고 있었다.
"흥, 오죽하겠어. 자아, 가세요."
윤일랑을 향해 톡 쏘아붙인 박정애가 앞서 나갔다.
"원, 사람 참……"
송중원은 난처해하다가 윤일랑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빌어먹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설치고 다니기는."
윤일랑은 마치 가래라도 내뱉듯 하고는 잡지를 집어 들었다. 제호가 "조선계"인 잡지는 송중원이가 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끄럽기는 뭐가 부끄럽습니까? 학생첩 신세 면하고 정처가 된 승리감으로 오히려 더 기세등등한걸요."
기다렸다는 듯한 직원이 말을 받았다.
"세상 고루고루 망쪼지. 신식공부했다는 년들이 한 놈한테 줄줄이 붙어 정조를 걸레짝처럼 내던지질 않나, 첩 노릇으로 시작해 본처들을 내쫓질 않나. 나라 망하니까 계집년들이 발광이야."
윤일랑은 타령조로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 박정애 씨 뻔뻔한 건 약과 아닙니까. 모 아무개 여류시인은 세상이 다 아는 불륜관계를 버젓이 시집으로 내지 않았어요."
"유곽 갈보한테는 눈물겨운 사연이라도 있다만 설 배운 신여성님네들은 못된 풍조만 퍼트리고 있으니 원."
"그건 선생님이 너무 도덕적이고 일방적으로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 여류문화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재미도 보고 출세도 하고,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게 그리되나? 그럼 더 할 말 없군."
윤일랑은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박정애가 그렇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건 이미 사회적으로 말썽거리가 되어온 '학생첩'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때문이었다. '학생첩'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이전에 '기생첩'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기생첩은 정부인에 대해 마님이나 아씨라고 호칭하면서 예의범절을 깍듯이 지켰다. 그리고 기생첩은 남자가 돈이 떨어지면 물러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신식 교육을 받은 학생첩은 꼭 부부를 이혼시켜 본처를 몰아내고는 정처로 들어앉는 것이었다. 중매로 조혼을 한 남자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새로 여학생을 사귀어 일어나는 불상사였다.
일찍이 허탁에게 마음을 두었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박정애는 새로 연극하는 남자와 눈이 맞았고, 끝내는 부부를 이혼시키고 남자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애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재력으로 남편에게 연극단체를 만들어주었고, 자기도 홍보부장 자리를 차고앉아 신문사 잡지사를 드나들며 명사 행세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저런 구설수에 휘감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탁 씨는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나요?"
박정애가 커피잔을 들며 물었다. 송중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을 찾아올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물음이었다. 허탁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아니면 허탁을 끌어들여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둘 다가 합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너무 소식이 없는데 혹시 어디서 무슨 일 당한 건 아닐까요?"
"글쎄요? 단단한 사람이니까……"
가끔 소식이 닿고 있는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송중원은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 다 가망 없이 됐는데 좀 만나서 헛고생 그만하고 살라고 해줬으면 좋겠어요. 미련하고 답답한 사람이에요."
"글쎄요, 이런 세상에서 영리하고 시원하게 살자면 친일파밖에 더 되겠소. 허탁처럼 사는 것도 한평생이오."
"어머 무서워라. 송중원 씨도 속은 하나도 안 변했군요?"
박정애는 과장되게 떠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야 폐병쟁이에 심약자, 무서워할 거 없소, 지금 하는 일도 힘겨우니까."
송중원이 스산하게 웃었다 .
"제랑한테서는 역시 소식이 없구요?"
송중원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박정애가 빼놓지 않는 물음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박정애를 괄시할 수도 없고 박대할 수도 없는 인간적 올가미였다. 자신과 박정애는 엄연한 사돈간이었던 것이다. 이혼이나 마찬가지이면서도 호적이 정리되지 않았으니 인간의 형식적 고리는 그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거 대체 김일성이 누구야?"
"낸들 아나. 독립군 대장이겠지."
"어쨌거나 우리 조선사람들 체면 단단히 세워줬네."
"암, 그렇구말구. 우리 같은 것들이야 어디 언감생심 꿈이나 꿀 수 있는 일이겠나."
건너편 자리에서 호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들 저기 또 있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다고."
박정애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빈말이라도 그렇게 하지 마시오. 단 한 명이 총을 들고 싸우더라도 그건 위대한 것이오. 뒤에 물러나 앉은 자들은 그 누구나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소."
정색을 한 송중원의 목소리는 낮고 싸늘했다. 그의 뇌리에는 만주벌판 멀리멀리 날아가던 아버지의 뼛가루가 선히 떠올라 있었다.
"어머, 저어……, 그런 것이 아니고……"
무색해진 박정애가 어물거렸다.
"됐소. 커피 다 마셨으면 갑시다. 난 또 일이 밀려 있으니까."
송중원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다음날 '동아일보' 호외가 또 뿌려졌다. 보천보 습격 속보라는 제목 아래 독립군과 추격 경관이 충돌해서 양쪽의 사상자가 70여 명이 생겼고, 압록강 건너 23도구에서 교전이 벌어졌다고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혜산 신가파의 중국인들과 세 경찰서의 경관들이 총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신문들도 그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서울 장안을 흔들었고, 그 파장은 신문을 따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송중원은 여러 신문들의 기사를 비교하고 종합하며 사장 민동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비슷비슷한 게 통제된 냄새가 역연하게 풍겼다. 그런 냄새가 진할수록 보천보 진공을 구체적이고 실감 나게 다루어보고 싶었다. 사장은 11시가 다 되어 나왔다. 이상하게도 근자에 들어 출근이 자꾸 늦어지고 퇴근은 빨라지고 있었다. 송중원은 신문들과 잡기장을 가지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편집에 대해 좀 상의할 게 있어서요."
"아 예, 앉으십시오."
민동환이 책상에서 안락의자로 옮겨왔다.
"이 보천보사건 읽어보셨습니까?"
송중원은 민동환 앞으로 신문들을 밀어놓았다.
"예, 어제부터 읽었습니다."
민동환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신문을 보아서는 가려지고 감춰진 게 많은데 이번 호에 우리가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그 진상을 다뤄보면 어떨까 합니다."
"글쎄요, 그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거 일시적인 불장난 아니겠어요?"
"예, 신문에서 호외를 찍어내듯이 크게 다룰 만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주사변으로 지식인들은 물론이요 사회 전체가 위축되고 침체된 상황에서 독립군이 압록강을 건너 진공했다는 것은 조선사람 전부에서 큰 자극이고 활력을 되살릴 수 있는 ……"
"그럼 말입니다, 그 반대도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민동환은 담배 연기를 흘리며 웃었다.
"그 반대요?……"
송중원은 말뜻을 못 알아들어 반문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중단당한 불쾌감이 바늘 끝으로 솟기면서 순간적으로 의식이 정지하는 것 같은 느낌에 부딪쳤던 것이다.
"총독부 말입니다. 그건 민감한 정치적인 문젠데 괜히 취재하느라고 고생만 하고 결국 싣지도 못하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럴 염려도 없지는 않지요."
"염려가 아니라 틀림없이 실을 수 없을 겁니다. 조선사람들한테 그리 좋으면 총독부한테는 그만큼 나쁜 것인데 용납할 리가 있습니까. 안될 일 가지고 고생하고 자꾸 미운털 박히고 할 것 없지 않습니까?"
"예에……"
송중원은 바늘 끝이 계속 솟아올라 머리까지 콕콕 쑤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보다는 말입니다, 진작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인데,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좀 연재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잡지가 너무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는 게 중평인데, 어떻게 좀 바꿀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잡지를 읽는 건 독자들이니까."
"예에……"
눈길을 떨구고 있던 송중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불쾌감은 간 곳이 없고 충격만 머리를 띵하게 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 게 좋겠는데, 여러모로 입장이 난처하시기는 하겠지만, 문인들 원고료 선불을 억제했으면 합니다. 외상술 주면 돈 잃고 손님 읽는단 말 있지 않습니까."
"예에……"
"그렇다고 너무 신경 쓰진 마십시오."
"예에……"
사장이 일어났고, 송중원도 일어났다. 송중원은 자리에 돌아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무시당한 것 같기도 하고 추궁을 당한 것 같기도 했다. 연애소설 운운은 편집권의 간섭으로 분명 무시였고, 원고료 선불은 그러잖아도 적자가 나고 있는 잡지의 경영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책임추궁이었다. 사장의 말마따나 사장은 그런 마들을 그동안 오래 참아왔는지도 몰랐다. 또, 돈을 대는 경영자로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역시 그런 말은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편집권은 완전 위임한다고 약속했고, 잡지의 적자는 자기 평생 걱정할 것 없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그 두 가지 조건이 불변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동생의 친구라는 거북스러운 입장도 감내하기로 했던 것이 아닌가. 물론 그동안 사장이라고 해서 이쪽의 감정을 다치는 언행을 한 일은 없었다. 조금 전에도 흠을 잡을 수 없이 예의는 깍듯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말의 내용은 돌덩이로 머리를 치는 것이었다.
송중원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폐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고 있는 담배였다. 연애소설이라……, 사장은 변해 가는 세상 풍조에 따라 검열에 걸리고 어쩌고 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연애소설이나 실어 적자를 면해 보려는 것일까? 그것이 그 어느 쪽이든 사장의 마음이 변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편집을 간섭하기 시작하면 잡지는 사공 많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편집을 간섭하기 시작하면 잡지는 사공 많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원고료 선불을 말라……, 어쩌다 원고를 못 받고 돈을 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소수일 뿐이고, 돈을 미리 준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적자가 불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장은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돈을 다 떼일까 봐 겁이 나는 것일까? 외상술 주면 돈 잃고 손님 잃는다고? 이 얼마나 상스러운 장사치 말인가. 잡지를 시작하면서 자기는 문인들을 무조건 존경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젠 술값 떼먹는 자들과 똑같이 취급해? 어쨌거나 사장의 마음이 변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잡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식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내가 싫어진 것인가? 송중원의 생각은 이리저리 비약하고 있었다.
송중원은 며칠 동안 일손을 잡지 못하고 건성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일이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동안 원고료 선불을 원하는 소설가 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 감정이 더 복잡했던 것이다. 선불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댄 것은 다 꾸며낸 거짓말이었고, 그 곤혹스러움과 미안함은 체한 것처럼 가슴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송중원은 쪽지 하나를 받았다.
좋은 안주가 장만 됐습니다. 술 드시러 오세요. 설죽.
그건 허탁의 연락이었다. 송중원은 지루하게 퇴근을 기다려 부랴부랴 자하문 밖으로 갔다. 허름하고 조그마한 기와집에서 허탁은 천연덕스럽게 설죽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가 송중원을 맞았다.
"이런, 팔자 늘어졌군. 이러다가 다 늙은 나이에 애 배면 어쩔라고 그래요?"
송중원은 허탁과 악수를 하며 설죽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허 선생 애라면 열이라도 낳지요."
젊음은 사위었으나 모란꽃 자태를 지닌 설죽이 스스럼없이 웃었다.
"자네 들었지? 조심하게"
자리 잡고 앉는 송중원의 얼굴에 모처럼 밝은 웃음이 피어났다.
"걱정 없네. 어차피 저 사람이 맡아 키울 거니까."
얼굴이 검게 탄 허탁이 빙그레 웃었다.
"아이고, 저 유들유들한 배짱."
설죽이 유과 그릇을 옮겨놓으며 곱게 눈을 흘겼다.
"그 배짱에 반한 거 아니오?"
송중원이 유과를 집어 들었다.
"그런가 봐요. 실은 술값 밥값 다 떼먹는 날도둑인데."
설죽은 곱게 눈을 흘겼고, 허탁은 흐흐거리고 웃었다. 설죽은 술값 밥값만 떼이는 것이 아니었다. 술장사해서 버는 돈으로 허탁의 활동비까지 대고 있었다. 이 집을 장만한 것도 허탁을 돕기 위해서였다. 송중원은 고맙고 대견한 마음으로 다시금 설죽을 바라보았다. 사회주의자들마저 변심하고 전향하기에 바쁜 세상이었다.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속해 있던 문인들마저 카프가 재작년에 해체당한 뒤로 버젓이 친일 잡지에 자리 잡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퇴기 설죽은 변함이 없이 외로운 사회주의자의 뒷바라지를 해오고 잇었다. 독립기생이란 3·1운동 열기를 타고 번졌던 일시적 유행풍조려니 했었다. 그런데 산전수전 다 겪은 설죽은 갸륵하게도 세상의 흐름을 역류하고 있었다. 오만 사람을 다 대하는 설죽이 세상 달라지는 것은 그 누구보다 먼저 알 것이고, 사회주의자를 돕다가 들통나는 날에는 쇠고랑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 있나? 안색이 안 좋은데."
허탁의 눈길이 송중원을 스쳐 갔다.
"아니, 별일 없네."
송중원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가슴이 뜨끔한 것을 느꼈다. 허탁의 빠른 눈치는 여전했던 것이다. 회사의 일을 굳이 허탁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허탁이 하고 있는 일에 비하면서 너무 사소한 것이었고, 그런 문제로 허탁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요샌 어디 있나?"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송중원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왕십리 밖 기와공장에."
"기와 공장?"
"노동자들이 많고 안전하니까."
"거기서 운동을 해?"
"기와도 만들지. 왜놈들이 그런 곳의 노동자들한테까지는 눈을 못 돌리고 있단 말씀이야."
허탁은 통쾌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설죽이 밥상 겸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기와는 잘 만드나?"
대학 출신인 허탁이 기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상상으로도 전혀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런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비감에 송중원은 가슴이 아렸다.
"아이, 기와는 아무나 만드나요? 소리에 된 장단 맞추재도 북채 들고 10년 세월인데. 흙이나 죽어라고 져나르는 거지요. 저 검게 탄 얼굴 좀 보세요. 천상 막노동꾼이지."
설죽이 밥상 옆에 앉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흙짐 지는 건 기와 만드는 거 아닌가. 자아, 오랜만에 한잔하세."
허탁이 넉살 좋게 말하며 상으로 다가앉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걱정했지."
"걱정?"
"지난달에 10여 명이 검거되지 않았나."
"음, 재건운동하던 이재유계 말이로군. 그 몽상가들……"
"무슨 소린가?"
"문자 그대로 아닌가. 지금이 어느 때라고 당 재건을 꿈꾼단 말인가? 이 탄압과 핍박 속에서 필요한 건 당조직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의식 무장을 시키고 동조자로 확보해 나가는 것이네. 주춧돌 없이 집 지어지겠나."
"그래, 당을 재건해 봤자 개 아가리 앞에 고깃덩이 놓기지."
"요새 장안이 떠들썩하더군."
허탁이 송중원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보천보 진공 말인가?"
"음, 진공, 그 말이 기습보다는 낫군그래. 그러 왜놈들의 뒤통수를 친 아주 장쾌한 일이야."
"술자리에서도 온통 그 얘기들뿐이에요. 글세 검사들도 좀 놀란 기색이고 기분 나빠 하더라니까요."
설죽이 굴비 뼈를 발라내면서 거들었다.
"검사 놈들? 불알이라도 차인 기분이라 놀랄 만도 하지."
"아이 차암……"
설죽이 허탁에게 눈을 흘겼다.
"국내 세력이 고무되는 게 기분 나쁘기도 할 게고." 허탁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동생은 여태 아무 소식도 없나?" 하며 또 술잔을 송중원에게 넘겼다.
"폐병쟁이한테 자꾸 술잔 주면 자네 신세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송중원은 손을 젓고는, "그거 소식 전할 녀석이 아니지. 아버님을 많이 닮았으니까."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웃음이 쓸쓸했다.
"폐병균이 아무리 무서워도 우정을 꺾을 순 없고 왜놈들이 아무리 독해도 조선사람들 의지를 다 꺾을 순 없지. 안 그런가?"
허탁은 껄껄대고 웃으며 술잔을 송중원의 코앞에다 디밀었다.
"그 사람 참, 무식한 소리 유식한 것처럼 하네."
송중원은 할 수 없이 술잔을 받았다.
"자네 동생도 아마 그런 부대들 어디에 속해 있겠지?"
"그러겠지."
"소식 기다리지 말게. 아버님 유골을 뿌렸으니 누군들 그 땅을 떠나올 수 있겠나."
"그래…… 헌데, 자넨 전망이 어떻겠나?"
"전망? 갈수록 가시밭길 아니겠나?"
"가시밭길……" 송중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갈수록 위험도 커지는데 자네도 만주로 뜨는 게 어떻겠나?" 그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아니야, 여기는 어쩌고. 만주에서 싸우는 사람은 만주에서 싸우고, 이 땅을 지킬 사람은 이 땅을 지켜야 하네. 퇴로 갖춘 만주가 이 땅보다 덜 위험할 줄 모르지만, 이 땅 없는 만주는 아무 의미가 없네."
허탁의 말은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맞아요. 송 선생님은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퇴기 외톨이 만들어놓구서."
"아, 그게 그리되나요? 뭐 원망하고 말고 할 거 뭐 있나요. 따라가면 되지요."
송중원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따라가기야 쉽지만 따라오게 두겠어요? 여기서야 이리라도 쓸모가 있지만 거기 가면 짐만 되는데요."
"아이고, 내 맘을 어찌 그리 잘 아나 그래."
허탁이 설죽의 엉덩이를 철퍽 쳤다.
"어머나!"
설죽이 놀라며 얼굴이 붉어졌다. 중년 여인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꽃빛으로 곱다는 것을 송중원은 문득 발견하고 있었다.
"내가 자넬 보자고 한 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네."
술기운 불쾌해진 허탁은 굳이 앉음새를 고치며 말했다.
"……?"
송중원은 허탁을 건너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바르게 앉았다.
"다름이 아니고, 내 큰아들놈이 이번에 혜화동에 있는 보성고보를 졸업했네. 뭐 다른 재주는 없고 그놈이 책 읽기는 즐기는데, 자네가 어디 취직 좀 시켜주게나."
다른 말을 할 때와는 달리 허탁의 얼굴은 곤혹스러워 보였다.
"아니 이 사람아, 상급학교를 보내야지."
반사적으로 나온 이 말이 끝나기 전에 벌써 송중원은 후회하고 있었다. 대학을 보내고 싶지 않아 안 보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학 나와봤자 별수 있는 세상인가. 그만하면 많이 가르친 거네. 어떤가, 책임질 수 있지?"
허탁의 끝부분 목소리가 호탕하게 울렸다. 그러나 그건 호탕을 가장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 내 알아서 하지."
송중원은 술잔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탁이 쫓기는 몸이 된 이후로 그의 집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뒤늦게 죄의식이 되고 있었다.
"일본 척식성에서 조선 노동자 10만 명을 만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면서?"
허탁이 빈 술주전자를 흔들었다. 무슨 생각인가를 골똘하게 하고 있던 설죽이 놀라 주전자를 받아들었다.
"지난달에 그리 결정했지. 제놈들이 저희 국민 이민 끌어들인 만큼 조선사람들을 몰아내자는 수작이지."
송중원이 한숨을 쉬었다.
13. 압록강의 밤
"언니, 빨간 꽃만 따, 빨간 꽃."
"멀라고?"
"그래야 빨간 물이 진허니 들제."
"요런 멍청이, 다 똑겉은 것이여."
"아니여, 흰 꽃 노란 꽃은 따덜 말어."
"흰 꽃도 똑겉이 빨간 물이 든당게."
"그래도 싫여. 덜 진헝게."
"니 묘허고 신기허덜 않냐? 꽃언 흰디 손톱에넌 빨간 물이 드는 것이."
"머시가 묘혀. 봉숭아라 그렇제."
"아이고, 멋없는 가시네. 나넌 흰 꽃이 좋드라."
"아니랑게, 흰 꽃 섞지 말어."
금님이와 금예는 봉숭아꽃을 따면서 연상 토닥거리고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좁은 마당가에는 여름꽃들이 울긋불긋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키 껑충한 접시꽃, 작은 장난감 나팔 같은 분꽃, 새초롬한 색시 같은 도라지꽃, 방싯거리는 것 같은 봉숭아꽃. 그러나 담을 타고 있는 나팔꽃과 땅에 다붙은 난쟁이 채송화는 잠꾸러기답게 해가 지면서 꽃들이 오므라들었다. 그런데 접시꽃도 분꽃도 도라지꽃도 한 가지 색만이 아니었다. 흰색과 분홍색, 노랑색과 주황색, 보라색과 흰색 등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봉숭아꽃은 제일 다채로워 빨간색 흰색 노란색 분홍색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꽃밭은 더욱 화사하고 풍성했다.
"안직 꽃이 덜 여물었는디 발써 물얼 딜일라고 그러냐. 머시가 급허다고."
보름이는 가게 쪽에서 마루로 나오며 무심히 말했다. 그 순간 보름이는 어머니 냄새를 물큼 맡었다. 그건 어머니가 딸들에게 하고는 했던 말이었다.
아아, 엄니이......
보름이는 신음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금세 가슴이 눈물로 젖어내렸다. 어머니는 언제고 푸르른 그리움이었고 마를 줄 모르는 눈물이었다.
"금매, 금예가 얼렁 물딜이자고 물이 못 나게 잡진당게라."
금님이가 동생을 방패막이 삼았다.
"음마, 음마, 넘 말 허고 앉었네. 언니도 물딜이고 잡은게 왔제. 서방 헌티 이쁘게 뵐라고,"
금예가 더 야무지게 언니를 몰아댔다.
"아이고메, 쬐깐헌 것이 사람잡네."
금님이가 동생의 머리를 쥐어질렀다.
"아이고 엄니, 나 죽이네에."
금예가 머리를 싸쥐며 엄살을 떨었다. 보름이는 두 딸을 내려다보며 동생들과 함께 봉숭아물을 들이던 처녀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은 여름 한철에 느끼는 기쁨과 설렘이었고, 무더운 여름밤을 더운 줄 모르게 나는 흥겹고 재미있는 놀이였다. 생활이 아무리 가난하고 찌들어도 손가락마다 봉숭아 물들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형제들끼릴 동무들끼릴 아주까리 잎에 싼 꽃범벅을 서로의 손가락에 묶어주는 즐거움은 더할 수 없는 여름밤의 흥
취였다.
"안직 꽃이 덜 여물었는디......"
참 묘한 말이었다. 열매나 곡식이 여무는 것만 아니라 꽃도 여문다고 했다. 7월 꽃은 햇빛을 덜 받았으니 햇빛 많이 받고 핀 8월꽃을 써야 물이 진하게 잘 든다는 뜻이었다. 그건 틀림없는 말이었다. 마음들이 바빠 7월꽃을 따서 물을 들이고는 그 색깔이 성에 차지 않아 8월까지 두 번, 세 번 물을 들이다보면 손톱에는 핏물보다 더 붉은 흑적색 꽃들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너무 붉고 붉어 검은 빛이 도는 그 손톱 꽃들은 삼베에 무명옷만 거쳐야 하는 가난한 처녀들에게 유일한 치장이고 멋부림이었다.
"그려, 끝엣손꾸락 두 개에만 딜여. 더 많이 딜이먼 야허고 천헝게."
보름이는 딸들에게 이르고 가게로 돌아섰다. 그 말도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고, 딸들이 그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두 손 여덟 손가락에 다 물을 들이는 것이 왜 야하고 천한 것인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꽤나 긴 세월이 흘러야 했다. 봉숭아꽃물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 것은 물을 들이고 나서 두어 달쯤 지나면서부터였다. 너무 짙어 검은빛이 돌도록 봉숭아 물을 몇 번이고 들이면 그 물이 손톱가의 살에까지 배들었다. 너무 짙은 흑적색은 맑은 기 없이 탁해 보이는 데다 살에 배든 색깔은 살색과 썩여 누르붉게 칙칙해서 봉숭아 물은 그때가 제일 보기 덜 좋았다. 그런데 설거지며 빨래 같은 물일을 보름쯤 하다보면 살에 물들었던 색깔은 어느새 말끔히 날아가고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손톱의 봉숭아 물도 햇살과 물길에 시나브로 바래고 씻겨 검은빛이 탈색되면서 맑고 깊은 빨간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때쯤이면 하얀 반달처럼 손톱이 살 속에서 솟고 있었다. 하얀 손톱과 맞물린 빨간 봉숭아 물. 갓 솟아오른 하얀 손톱으로 봉숭아 물은 더욱 빨갛게 돋아 보이고, 투명하게 짙은 빨간 봉숭아 물로 손톱은 더욱 새하얗고, 그 아름다운 조화는 보석이 따로 없었다. 끝엣손가락 두 개에 한얀 반달을 물고 있는 빠알간 봉숭아물,
그 곱고 깔끔하고 귀한 아름다움은 그 어떤 꽃도 당할 수가 없었다.
"백반 넣소, 백반."
"고건 쬐깐 있다가 넣는겨."
"아니여, 첨보톰 넣야 혀."
"니 참말로 말 씹힐겨?"
"언니넌 통고집이여."
"하이고, 넘 말 허고 앉었다 잉."
금님이하고 금예는 또 다툼질을 해가며 길고 동그란 돌로 봉숭아꽃들을 콩콩 찧고 있었다. 꽃향기 그윽한 속에 어스름이 차츰 짙게 내리고, 모기들이 앵앵 날기 시작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여름별들이 다투어 돋아나고 있었다.
"웩! 우웩, 우웩!"
봉숭아꽃은 찧고 있던 금님이가 갑자기 입을 가리며 토악질을 했다.
"체했는갑네. 날 주고 쉬소."
금예는 재빨리 돌을 집어 들었다.
"우웩, 웩! 웩! 웩!"
금님이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누른 채 더 심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치이, 나 몰르게 혼자만 찰덕 묵다가 엊힌 것이제."
금예는 입을 삐죽거리며 콩당콩당 돌방아질을 시작했다.
"웩, 우웨엑!...... 엄니, 엄니, 나 죽어......"
금님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비실비실 쓰러지고 있었다.
"언니, 어찌 이려, 언니!"
금예는 그때서야 언니를 붙들었다.
"나 죽겄다. 엄니럴......, 우웨엑, 웩!"
금님이는 동생을 붙들고 토악질을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넘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엄니, 엄니! 인니 죽네, 언니 죽어!"
금예는 마구 소리치며 마루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무, 무신 소리여!"
보름이가 허둥지둥 마루로 나왔다.
"우웩, 웩! 우웨엑......"
맨발인 채로 마당으로 뛰어내린 보름이는 땅에 주저앉은 큰딸을 붙들었다.
"어찌 이러냐. 무신 괴기 묵었냐?"
금님이는 고개를 내둘렀다.
"글먼 쉰 반찬 묵었냐?"
"우웩, 웩, 웩......"
금님이는 토악질로 대답을 대신했다.
"금님아, 니 요새 꽃 비치냐?"
보름이는 딸의 등을 쓸어내리며 낮고 빠르게 물었다. 금님이는 고개를 저었다.
"글먼 안 비친단 것이여?"
숨을 몰아쉬며 금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것이 얼매나 되았냐?"
"잘 몰러, 두 달인지 석 달인지......"
"아이고 이 멍청아, 애섰다. 애!"
보름이의 목소리가 활짝 밝아지며 딸을 끌어안았다.
"머시라고라? 엄니, 나 몰라라."
금님이가 깜짝 놀라는 듯하다가 어머니 어깨에 머리를 부리며 흑 울음을 터졌다.
"아서라, 얼렁 일나그라. 여름 땅이라도 땅 냉기 안 좋다."
보름이는 딸을 부축해 일으키며 가슴 먹먹한 울음이 복받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기쁨이면서도 서러움이었다. 기구하게 태어나 애비를 모르고 큰 것이 아이까지 갖게 된 것이었다. 그 범벅된 감정은 혼례를 치를 때 느꼈던 감정과 또 다른 것이었다.
"엄니, 언니 어디가 아픈겨?"
금예가 따라오며 물었다.
"이, 다 나샀다."
보름이는 작은딸을 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요상허시, 곧 숨이 넘어가등마. 엄니 손이 약손은 약손인갑서."
금예는 씨익 웃고는 꽃을 찧으려고 돌아섰다.
"오늘 밤에 강서방헌티 알리고, 일이고 묵는 것이고 개래감서 몸간수 잘히야 혀. 여자 헐 일 중에 대 잇는 것이 질로 중헌 일잉게."
보름이는 딸을ㄹ 마루에 누이며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엄니, 나 겁나네."
금님이는 어머니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애기간디. 다 지절로 풀리는 것잉게 겁묵덜 말그라. 차차로 맴이 든든해지니라."
보름이는 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또 어찌할 수 없이 세끼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이나 그리움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없이 섬뜩한 징그러움과 서늘한 무서움만 남겨놓은 사람이었다. 세월은 속일 수 없어 그도 늙어서 언제인가 모르게 일본으로 떠나고 없었다. 행여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떠나면서도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모질고 야박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이 더 보시한 것인지도 몰랐다. 금님이나 금예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애비없는 자식을 키운 죄는 금님이의 혼기가 차가면서 더 가슴 아리게 사무쳤다. 중매발이 섰다가도 과부 자식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만 이야기가 끊어지고는 했다. 애비가 없다는 서러움과 외로움이 새삼스러워지기도 했다. 어차피 갖춘 집을 혼처로 구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이쪽 흠만큼 저쪽에도 흠이 있는 집이라야 말길이 쉽게 트일 거였다. 그래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철공소 직공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나마 밥벌이 되는 기술이 있고 사람이 신실해 금님이가 복 받았다 싶었다. 그리고 가까이 살게 된 것도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기구하게 태어났으나 제 한평생은 복되게 살라고 무리를 해가면서 혼수를 장만해 시집을 보냈다. 시어머니도 남편도 흡족해했고 금님이도 시집살이를 정겨워했다. 그런데 고맙게도 반년 만에 태기까지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보름이의 가슴에는 말 못 할 걱정거리가 차 있었다. 정작 아들 삼봉이가 여지껏 장가를 안 간 것이다.
"요새 시상에 장개 일찍 가는 것언 웃음거리구만이라. 조혼은 법으로도 금허는 판인디요. 돈 더 벌어갖고 갈랑게 아무 걱정 마시게라우."
혼인 말만 비치면 삼봉이는 이런 말로 얼렁뚱땅 넘기고는 했다. 그러나 삼봉이는 돈을 더 벌려고 장가를 미루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남모르는 일에 마음을 쏟느라고 장가갈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 일이 무엇인지 어림잡고 있기는 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묻는다고 사실대로 대답할 것 같지가 않았고, 또 아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옛날에 남편도 의병들의 길 안내를 하면서 자신에게는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삼봉이는 벌써 남편의 그때 나이를 넘기고 있는 장부였다. 아들이 장하면서도 늘 걱정스러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보름이는 보약을 지어다가 큰딸에게 달여 먹이기 시작했다. 약을 달이기에는 너무 더운 날이었지만 보름이는 거저 흥겹고 딸이 대견해 더운 줄을 몰랐다. 그런데 뒤숭숭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고 했다. 중일전쟁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중국 전부를 조선처럼 집어먹게 될 거라고 하는가 하면, 초장에는 일본이 이길지 몰라도 종당에는 일본이 당할 거라고 하기도 했다.
"고것이 긍게 어찌 되는 판이다냐?"
보름이는 종잡을 수가 없어서 아들에게 물었다.
"고것이 긍게 일본이 먼첨 쌈얼 시작히서 전쟁이 터진 것인디, 일본이 만주럴 집어묵음서보톰 일 저질를라고 맘묵고 있었든 일이구만요. 3월에 모집혀 간 이민도 다 그런 일 꾸밀라고 미리미리 채비헌 것이구만이라."
"왜놈덜언 어찌 그리 일마동 숭허고 징허다냐. 근디 일본이 중국얼 다 집어 묵는다는 것이 참말일그나?"
금매 말이오, 더 두고 봐야겄는디요."
"요 일이 울리 조선사람헌티넌 더 궂어지겄지야?"
"그러겄제라."
"참말로 갈수록 태산이다 이."
소문은 날마다 달라지고 있었다.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옛날 서울인 북경을 빼앗았다고 하는가 하면, 다음날에는 천진을 빼앗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문에 덩달아 뛰듯 순사들이 표나게 설치고 다녔다. 그리고 길을 걷는 일본사람들의 기세도 더 펄펄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오삼봉이 집으로 뛰어들었다.
"날니 났소, 엄니. 우리 피해야 허요!"
"무, 무신 일이다냐?"
"잽히먼 다 죽응게 얼렁 돈만 챙기씨요."
"무신 일인디 우리가 다 죽어야?"
"아, 말헐 새 없당게라."
"이, 이 점방언 어찌고?"
"금님이헌티 개야제라."
"금님이라고 안 당허겄냐?"
"금님이넌 출가외인 아니오."
"가먼 워디로 간다냐?"
"우선 포교당으로 가야제라. 공허 시님얼 만내야 헝게."
"알겄다, 알겄다......"
보름이는 어질어질한 가운데 금예를 깨우고, 허둥지둥 돈을 챙겼다. 세 식구는 밤길을 줄기차게 걸어 새벽녘에 포교당에 당도했다.
"아니, 요것이 어쩐 일덜이여?"
그들을 맞이한 것은 마당을 쓸고 있던 손판석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아니라 놀라움이 드러나 있었다.
"공허 시님 기신게라?"
오삼봉은 인사치레도 못하고 이렇게 불쑥 물었다.
"그분이야 안 기시제. 무신 일 났능가?"
"야아, 생사가 걸린 일이구만요."
"글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제. 얼렁 따라오소."
손판석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후적후적 걷기 시작했다. 법당에서는 목탁 소리와 함께 독경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아침 예불을 올리는 것이었다.
"시님, 시님, 큰일이 났구만이라우."
손판석은 법당 앞에서 목청을 돋우었다. 예불을 올리는 데 있을 수 없는 불경이었다. 그러나 자비로운신 부처님께서는 세 중생의 생사가 걸린 일이니 용서하시리라 싶었다.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가 그치더니 법당문이 열렸다. 법당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 가사를 드리운 운봉이었다.
"시님, 군산서 보름 보살이......"
손판석이 합장하며 말했고, 운봉이 요사채로 가자고 손짓했다. 운봉이 나서자마자 보름이는 몸에 익은 동작으로 합장을 했고, 삼봉이는 고개를 꾸뻑했으며, 금예는 어머니 뒤에 숨듯이 하고 있었다.
"......한 동지가 일얼 실패험서 고리가 잽혀 체포되고 말았구만요. 고문이 지독시러 끝꺼정 비밀얼 지키기 에로울 것이고, 그리 되먼 그간에 헌 일이 있어서......"
오삼봉은 비밀조직을 만들어 그동안 활동해 온 내력과 이번에 일어난 사태를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예, 당장 피해야 되겄구만요. 세세헌 것이야 공허 시님 기둘렸다가 의논하기로 허고, 우선에 여그서 뜨십시다. 가차이 눈이 많은 게 여그도 안전치럴 못허구만요."
운봉은 주저하는 것 없이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곧 포교당을 나섰다. 먼동이 터오는 들녘길을 그들은 빨리 걸었다. 이슬에 흠뻑 젖은 푸르른 들녘에는 아직 인적이 없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산길을 걷고 걸어 해질녘에 산사에 도착했다. 지난날 송수익이 피신해 있던 절이었다.
"여그야 안전헝게 공허 시님 오실 때꺼정 안심허고 푹 쉬시게라. 포교당 오래 비우먼 혹시 의심 살지 몰릉게 소승은 이 질로 가야겄구만요."
운봉은 석간수 한 바가지를 들이켜고는 바람이듯 빠르게 떠나갔다. 푸른 산줄기들은 굽이굽이 뻗어나가고 이어져 그 끝이 아스라하게 하늘로 빨려들고 있었다. 첩첩인 산들에 석양빛이 물들고 있었다. 오삼봉은 망연한 마음으로 산줄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 산골 고향을 찾아갔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삼봉산을 바라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연유를 듣고 결심했던 일.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이곳에 이르러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동지의 실토로 신원이 드러나면 어차피 이 땅에서 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경찰의 눈초리를 피해 산속을 옮겨 다니며 연명해 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하던 일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땅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 땅은 만주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찌할 것인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도 계시니까 함게 가야 하는 것인가? 그쪽도 왜놈들 밑인데 살기가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 가게를 정리하게 해서 무주 고향에 가서 사시는 게 어떨까. 아니야, 공허 스님이 오시도록 기다려야지......
"오빠, 밥 왔는디......"
금예가 오빠 옆으로 다가서며 기죽은 소리로 말했다. 오삼봉은 복잡한 생각들을 털어내며 돌아섰다. 밥상을 가져온 아기 중이 총총걸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엄니, 걱정 말고 많이 드시씨요."
오삼봉은 일부러 숟가락을 집어 어머니 앞으로 내밀었다.
"그려, 니도 걱정 말고 많이 묵어."
아들을 바라보는 보름이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들이 자기의 뜻을 그리도 속 깊게, 그러나 그토록 무서운 일을 해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몇 년에 걸쳐서 잊어버릴 만하면 일어나고는 했던 그 살인사건들에 아들이 연관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말로, 오빠가 그리 숭헌 사람인지넌 몰랐구만."
금예가 뚱하니 말했다. 열다섯인 금예는 보름이를 많이 닮아 인물이 꽤나 고왔다. 그런데 전혀 닮지 않은 것이 툭 불거진 큰 눈이었다. 그 눈은 천상 서무룡의 눈이었다.
"숭혀서 무섭지야?"
오삼봉이 픽 웃었다.
"아니, 믿기덜 안혀. 오빠넌 그리 인정이 많음스로......"
금예는 끝말을 밥과 함께 삼켜버렸다. 사람 죽이는 일얼 어찌혔능가 몰라,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인정이야 니맨치로 착헌 사람덜헌티나 쓰는 것이고, 짐승만도 못허게 사는 놈덜언 다 죽여없애야 된다."
오삼봉은 여동생에게 경우를 따져주기 위해 일부러 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음마, 절이서 그리 궂은 말 막 허먼 어쩌. 부처님언 미물도 살생허지 말라고 허셨는디."
"얼랴, 쟈가 철 다 든 소리 허네."
보름이가 어리둥절하게 딸을 쳐다보았고
"그려, 니 말이 맞다. 부처님게서넌 미물도 살생허지 말라고 갤치셨제. 근디 그 경우가 달를 때가 있니라. 옛날에 임진왜란이라고 왜놈덜이 우리나라럴 요새맨치로 쳐들어온 적이 있었니라. 그적에도 왜놈덜이 사방천지서 조선사람덜얼 죽여대고, 나라 군사덜 심언 모지래고 헝게 왜놈덜 몰아내고 나라허고 백성덜 구허자고 시님덜이 창칼 들고 나서덜 안혔겄냐. 그것이 승군인디, 시님덜도 싸우고 백성덜도 싸우고 혀서 7년 만에 왜놈덜얼 싹 몰아내고 나라럴 구했다. 요것이 머신지 아냐? 우리넌 가만히 있는디 우리럴 죽이고 드는 웬수덜얼 죽여 몰리치는 것언 살생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그런 말인 것이여. 시방 우리 조선사람덜 웬수넌 왜놈덜인디, 왜놈덜보담 더 나쁜 잡것덜이 누군지 아냐? 왜놈덜 앞잽이놀이 허고 왜놈덜 편들어감서 배불르고 편케 잘사는 조선 놈덜이여. 고것덜언 웬수에 웬수다. 왜놈덜얼 죽여햐 허는 판에 그놀덜언 으째야 쓰겄냐?"
"......"
"아, 쳐다보고만 있지 말고 얼렁 대답히 봐."
"죽여야제."
"그려, 죽여야 허는 것이여. 그려서 오빠가 헌 일이 그것인 것이여."
오삼봉은 마침내 속이 후련해지는 걸 느끼며 밥을 한입 가득 떠넣었다.
"근디...... 우리넌 인자 어쩐당가?"
금예의 근심스러운 말이었다.
"걱정되냐?"
오삼봉이 씨익 웃었다.
"......"
금예는 툭 불거진 큰 눈으로 오빠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무 걱정 말어. 공허 시님이 오시먼 일이 다 풀릴 것잉게."
공허는 닷새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삼봉은 초조한 기색이 심해져 갔다. 보름이는 아들과 또 다르게 옹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세 식구가 절 양식을 축낸다는 것이 너무 짐스럽고 면목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딸을 데리고 밥짓는 일에 나섰다. 그런 마음을 헤아린 주지승이 말했다.
"보살님, 그리 맘쓰시덜 말고 편안허니 쉬시게라. 절 양식은 본시 중생덜 것이제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드님언 부처님에 극락정토럴 맨글라고 장헌 일 허신 것인디 그 공만으로도 평상 절밥 잡수시기에 족허구만요. 요런 무한지옥 시상에서 질로 장헌 것이 아드님 겉은 일허는 것이제 머시가 또 있겄능게라. 공허 시님이야 정처가 없으신게 그저 백일기도 올린다 셈치시고 편안허니 쉬시씨요."
"아이고메 시님, 과만허고 황감허신 말씸이구만이라우."
보름이는 그 말이 너무 고맙고 눈물겨워 합장과 함께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오삼봉은 지루함을 면하고 밥값도 하려고 나무도 해나르고 장작도 팼다. 그러나 열흘이 넘어도 공허 스님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오삼봉은 산을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순간순간 느꼈다. 다른 동지들이 어찌 되었는지 걱정이 되어 견디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각자 피신하기로 되어 있었다. 체포된 동지는 어찌 되고 있는지, 다른 동지들은 무사한 것인지, 마음의 요동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주로 뜨게 된다면 다른 동지들도 함께 가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체포된 동지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만약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조직을 실토해 버리면 다른 동지들은 우선 피신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이 땅에서 활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사태변화를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운봉 스님한테서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열이틀 만에 운봉 스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조직 전모가 드러나서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오삼봉은 곧 운봉 스님에게 연락을 보냈다. 나머지 동지들의 주소를 적고, 그들의 가족을 접촉해서 그들의 피신처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절로 안내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공허 스님은 보름에서 사흘이 더 지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운봉헌티 이얘기 다 들었다. 세월이 유상허다. 니가 그리 붕알값 톡톡허니 다 해내고."
공허는 껄껄껄 웃더니 오삼봉을 와락 끌어안았다.
"장혀, 장혀, 이 땅으 남아덜이 갈 질이 바로 그것인 것이여."
공허는 목소리만큼 뜨겁게 오삼봉의 등을 두들겼다. 그런 공허의 얼굴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도록 혈색 좋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나 그도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였다.
"그려, 인자 어찌헐 작정이냐?"
자리를 잡고 앉은 공허가 침착하게 물었다.
"저어, 조직이 탄로 나서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섰당게 인자 여그서넌 더 활동을 못허덜 안컸능게라. 그렁게 만주로 갔으먼 허는디요. 외삼춘도 기시고 헝게......"
"식구덜도 다 항께 말이냐?"
공허의 눈길이 보름이 모녀를 빠르게 훑었다.
"그것언 어찌야 좋을란지 안직......"
"그려......" 눈길을 떨군 공허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만주넌 시방 쌈 터제 사람이 살 만허덜 안타. 독립군덜허고 일반사람덜허고 연관을 끊을라고 왜놈덜이 집단부락이니 안전농촌얼 맨글어서 사람덜얼 몰아넣는디, 고것이 감옥이나 진배없응게 사람 살기가 여그보담 영 못허다. 그렁게 엄니허고 동상은 여그 남고 갈라먼 니 혼자 가야 헐 거이다. 으쩔라냐?"
공허는 오삼봉과 보름이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오삼봉은 어머니에게 눈길을 돌렸다. 보름이는 축축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님 말씸대로 허겄구만요."
오삼봉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려, 잘 생각큭다. 엄니허고 동상이야 걱정 말그라. 허고, 운봉헌티 느그 동지덜 부탁혔는갑제?"
"예에......"
"일얼 추실리고 있응게 기둘려가. 떠날 채비허로 나가 메칠 댕게올 디가 있응게 니넌 그간에 밥 많이 묵고 기운이나 모타놔라."
공허는 장삼자락을 내치며 일어났다. 보름이는 밤마다 잠을 설치며 뒤척였다. 아들과의 이별이 슬퍼서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아들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내력을 알려준 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마음이 어지럽고 괴로웠던 것이다. 둘도 아닌 핏줄을 만리타국 싸움터로 보내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이야기를 해준 때문이었다. 시아버지가 책망하는 것 같았고, 남편이 원망하는 것도 같았다. 또 어느 순간에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함께 그 이야기는 잘 알려준 것이고, 아들을 실하고 든든하게 잘 키웠다고 칭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처럼 꿈을 꾸고 싶었다. 시아버지가 삼봉이를 데리고 산골을 떠나라고 일러주었던 것처럼 다시 시아버지를 뵙고 싶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후회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우격다짐으로라도 혼인을 시켜야 했던 것이다. 핏줄을 하나라도 받았더라면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죄스럽지 않고, 자신도 그나마 의지할 데가 생겨 마음 다잡고 살 수 있었을 거였다. 한번 가면 어찌 될 줄 모르는 길, 가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간에 한 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갚음은 왠만큼 한 것이니 이대로 어느 산골에 자리 잡고 화전이라도 일구며 살고 싶었다. 다들이 없는 나날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서러운 꼴 험한 고생 다 이기고 살아온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 그건 아들의 힘이었고 아들이 없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힘이었다. 아들을 따라가고 싶었다. 거기가 아무리 살기 어렵다 해도 아들만 있으면 얼마든지 참고 이겨낼 수 있었다. 이런 오만가지 생각들이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얽히고설켰다. 그러다 날이 새면 부처님 앞에 간곡하게 합장을 했다. 마음을 붙들어달라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딴마음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공허는 엿새만에 한 청년과 함께 돌아왔다. 그 청년은 오삼봉의 동지 배영범이었다.
"우리가 한 발 늦은 것이여."
공허의 이 한마디에서 오삼봉은 모든 형편을 알아차렸다. 다른 두 동지는 체포되었다는 뜻이었다. 다섯 중에 세 사람은 체포되었고 혈청단은 사라진 것이었다.
"그 사람이 실토헐지넌 몰랐는디."
단둘이 되자 코 큰 배영범이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잊어부러, 왜놈덜 고문이 그리 맨들었을 것잉게." 오삼봉은 배영범의 등을 어루만지고는, "시님헌티 만주로 뜬다는 말언 들었겄제?" 나직하게 말했다.
"가야제, 딴 질이 없는디."
배영범의 어조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려, 가드라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저녁을 먹고 나자 공허는 두 사람을 불러 앉혔다.
"요것언 인삼이여. 포목장시가 되먼 당장 돈이야 작게 들어도 짐이 커서 기동허기가 심이 들제. 허고, 인삼언 당장 돈이 잠 많이 들어도 짐이 작아 기동허기 좋겄다, 뇌물로 왜놈덜 눈 피허기 좋겄다, 노자로 써묵기 좋겄다, 아조 금상첨화여. 무신 말이고 허니 말이여, 조선 인삼이다 허먼 약효 좋다고 중국 놈덜이 환장얼 허는디, 만주에 있는 왜병놈덜도 그 소리 귀동냥히서 조선 인삼에 사족을 못쓴다 그것이구만. 정력 좋아질라고 눈에 불 쓴 왜놈덜헌티 한두 뿌리 살짝 내밀먼 어디서고 무사통과여. 인자보톰 자네덜언 인삼 장시시 잉."
바랑에 가득 담긴 인삼을 꺼내가며 공허가 한 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들은 길을 나섰다.
"소승이 댕게올 때꺼정 푹 쉬심서 염불이나 허시게라."
공허가 보름이에게 말했다.
"야아......, 원로에 너무 애쓰시겄구만요."
보름이가 합장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무신 말씸이신게라. 나이 묵어 벨로 쓸모없이 된 이 땡초가 생광으로 알고 허는 일인디요."
공허가 합장하며 흔괘하게 웃었다.
"엄니, 건강허셔야 허요 이."
오삼봉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 눈자위에 붉은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려, 에미 걱정 말고 니나......, 니나......"
울음으로 보름이의 목이 막혔다. 보름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속입술을 깨물었다.
"금예야, 엄니 잘 모시고......"
오삼봉은 여동생의 어깨를 다둑거렸다.
"오빠!......"
금예는 고개를 떨구며 옷고름 끝을 눈으로 가져갔다.
"엄니, 글먼......"
오삼봉은 허리를 깊이 구부렸다.
"그려, 그려......"
보름이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오른손으로는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런데 '그려, 그려'하는 소리는 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뭉텅이진 울음이었다. 공허가 돌아서고, 배영범이 돌어서고, 오삼봉이 돌아섰다. 그들의 걸음은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는 보름이의 왼손은 점점 더 세게 입을 누르고 있었다. 아들의 모습이 멀어질수록 보름이의 눈앞은 눈물로 흐려지고 있었다.
여보......
보름이는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불렀다. 속으로나마 남편을 불러본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눈물 속에서 흐려지며 멀어져 가고 있는 아들의 뒷모습은 남편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세 사람의 모습은 나무숲 사이 비탈길 그 어딘가로 깜빡 사라지고 말았다.
공허는 사흘 동안 산길을 타고 대전까지 걸었다. 전주 이리는 물론이고 논산까지 기차역은 위험했던 것이다. 경찰에서는 그 역들마다 오삼봉과 배영범의 얼굴을 하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배치시켜 놓고 잠복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오삼봉과 배영범은 궁금하고 모르는 것들을 이것저것 물었다.
"중국허고 전쟁이 터졌는디 조선사람덜 살기넌 어찌 될게라?"
"그야 더 에롭고 고상시러와지겄제. 왜놈덜이 발써 각 도에다가 관민총후활동이라고 허는 전시체계령을 내랬고, 또 그 빌어묵을 놈에 산미증식 5개년계획을 되살리기로 혔당게. 전시체제령으로 조선사람덜얼 더 꼼지락달싹 못허게 묶어놓고 볶아칠라는 것이고, 중국서 싸우는 군인덜 군량미럴 조선서 긁어가자는 심뽀란 말이시. 인자 조선 땅언 생지옥서 불지옥으로 변해 가게 생겼네."
"만주엔넌 독립군이 많은게라?"
"이, 많제. 인자 조선독립군만 있는 것이 아니여. 중국 사람덜도 왜놈덜얼 몰아낼라고 나섰응게 그 수가 굉장허제. 근디 왜놈 몰아내자는 뜻이 같애서 두 나라 사람덜이 항께 어울려 싸우는디, 압록강 두만강 건너 산중으로넌 그 부대덜 천지로구만."
대전에서 기차를 탔다.
"인자보톰 입조심히야 써."
공허가 기차에 오르기 전에 눈빛 매섭게 주의를 시켰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공허는 잠자리를 역 주변 여관에 잡지 않았다.
"왜놈덜헌티 무신 조사럴 당헐 적에넌 눈얼 쳐다보지 말고 그저 굽실기리기만 혀. 눈을 뵈먼 맘얼 들키기 쉬운게."
기차를 다시 타기 전에 공허는 이런 말도 일렀다. 세 사람은 신의주에서 내렸다.
"여그서 돌아가는 헹편얼 잠 알아보드라고. 요새 사정이 시끌시끌히졌응게."
공허의 말이었다. 중국과 전쟁이 벌어져 국경 조사가 더 심해졌을 것이 뻔했고, 변장을 했다고 했지만 귀신같이 냄새를 맡는 철도경호대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불안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젊다는 것이 의심받기 딱 좋았다. 의심받고 일단 끌려내리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잡으면 조선 어디에서나 늦어도 이틀이면 신원이 확인되는 것이 경찰의 전화 조직망이었다. 공허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철도경호대의 조사가 말도 못 하게 심해졌고, 국경의 수비도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차로넌 안 되겄구만. 배를 타야제."
공허가 내린 결정이었다. 세 사람은 용암포로 갔다. 압록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모이는 용암포에는 월강을 시켜주는 나룻배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공허는 이틀 만에 배를 구했다. 배에는 세 사람만 타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탈 경우 그들 속에 누가 섞여 있을지 몰랐던 것이다. 독선을 부리는 대신 배삯이 비쌌다.
"저짝언 으쩌요?"
공허는 돈을 지불하기 전에 따지듯 물었다.
"안심허시오."
"수비가 심해졌다는디?"
"그래도 빈 구멍은 다 있지요."
자정이 가까워 배에 올랐다. 배는 어둠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깊은 밤의 적막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뱃전에 부딪는 물결소리만 가녀리게 들리고 있었다. 배가 움직여 나아갈수록 땅에서와는 다른 서늘한 물기운이 느껴졌다. 오삼봉은 그 서늘함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압록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몇번이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줄곧 두근거리고 있는 뜨거운 가슴을 그 서늘한 기운으로 식히고 싶었던 것이다.
아아,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고 있구나!......
오삼봉은 형용할 수 없는 감회에 휘감기고 있었다. 그 멀리멀리 느껴졌던 압록강. 고보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꼭 꿈만 같은 일이었다. 긴 숨을 내쉬느라고 고개를 젖히던 오삼봉의 눈길은 문득 하늘에 박혔다.
아아......
하늘에는 별사태가 일어나 있었다. 어둠이 짙은 만큼 명멸하고 있는 무수한 별들이 곧 쏟아져 내릴 것처럼 치렁치렁했다. 그 하늘에 두고 온 고향과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오삼봉은 목이 메었다.
어머니......
평생 기구하게 살오온 그분의 말년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앞으로 또 얼마나 고생을 할 것인지 생각할수록 죄스럽기만 했다. 어려서부터 여동생들을 다둑거리고 단 한번도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세끼야에게 구박받고 살아온 기억은 지금까지도 너무나 뚜렷했다. 그 어린 나이에 세끼야를 죽일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랐다. 왜놈들에 대한 증오는 그 시절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고향에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학생운동 때 앞장서지도 않았을지 몰랐고, 지금쯤은 어느 직장에서 월급 받으며 아이나 둘쯤 낳고 살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그런 편안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굳이 고향에 데려간 것일 거였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자신을 떠나보내면서도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소리내 울지도 않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무섭도록 강한 분이었다.
배가 강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따.
"다들 내릴 채비하시오."
사공의 속삭임이었다. 그들은 배의 흔들림에 조심하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배가 뭍에 걸리며 사공이 물로 첨벙 뛰어내렸다.
"어서어서 내리시오."
배를 붙든 사공이 재촉했다. 그들은 빠르게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불빛이 번쩍하며 외침이 터졌다.
"꼼짝 말고 손들엇!"
"아이고, 배를 잘못 댔나."
사공이 다급하게 쏟아낸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총을 겨눈 일본군 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공허가 태연하게 합장을 하며 두 군인 앞으로 다가섰다. 다음 순간 공허는 한 군인이 들고 있는 손전등을 걷어차며 외쳤다.
"내빼! 산으로 내빼!"
오삼봉과 배영범은 후닥닥 튀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으윽, 윽!"
공허는 총 맞은 가슴을 싸잡고 비틀거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본군을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일본군들을 가능하면 오래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탕! 탕!
공허는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군인들을 향해 덤비고 있었다.
탕! 탕!
마침내 공허는 땅바닥에 철퍽 엎어지고 말았다.
14. 20만 명을 실은 유형열차
"신부가 어찌 저리 생겼나?"
"그래, 신랑만 못하지?"
"그거 말이라고 허는가?"
"왜?"
"댈 것 대야지."
"신랑이 너무 잘생겨서 그렇지."
"그리 말하지 말어. 시집가는 날 예쁘단 소리 못 듣는 신부 없다는 말도 몰라."
"그렇지. 신부 혼자 있어도 그 소리는 못 들을 인물이다."
여자들 서넛이 가만가만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수군거렸다.
"신랑이 눈이 멀었나?"
"늦장가라 맘이 급했던 모양이지."
"그렇다고 저리 밑지는 장사를 해?"
"아니, 사람이 어디 인물만 갖고 사는가? 여자가 아주 똑똑하다던데. 학식도 높고."
"모르지, 맘이 고와 반했는지도."
"누가 아는가, 배꼽 밑이 기막힌지도."
"아이고, 징그러운 소리 다 하네."
"징그럽기는. 절세미인이 왜 소박맞는데."
"자네는 배꼽 밑이 기막혀 소박 안 당했구나."
"흐흐흐......"
"아니, 그 말 한번 묘하네? 그럼 내 얼굴이 저 신부처럼 못났단 말이 아니야?"
"크크크크......"
"어디 이따가 보세."
여자들이 끼리끼리 수군거리고 킥킥대는 동안에 결혼식이 끝났다. 윤철훈은 신랑 같지 않게 그저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못생겼다고 입질에 오른 신부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부끄럼을 타고 있었다. 신부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여자들이 입방아를 찧어댄 것처럼 그렇게 못난 인물도 아니었따. 그저 보통으로 생긴 인물에 흠이라면 이마가 불거진 편이었고 입술이 두꺼운 것이었다. 거기다가 나이가 들어 앳된 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풍기고 있는 인상은 어딘가 색다른 데가 있었다. 어느 여자가 말한 것처럼 학식이 높아서 그런지 도도한 것도 같았고 냉담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런 인상은 눈매 때문인지도 몰랐다. 눈꼬리가 치올라간 듯한 그 여자의 눈은 예사롭지 않게 예리하면서도 총기가 느껴졌다.
"오빠, 축하드려오."
윤선숙이 웃으며 윤철훈 앞으로 다가섰다.
"축하는 무슨, 쑥스럽게."
윤철훈이 정말 쑥스럽게 웃었다.
"늦장가 축하하네."
옆에 섰던 조강섭이 손을 내밀었다.
"모르겠네. 축하받아야 되는 건지."
조강섭과 악수를 나누며 윤철훈은 쓴 것도 아니고 떫은 것도 아닌 묘한 웃음을 피워냈다.
"본전 찾을려면 애나 부지런히 낳게. 그래도 내 이익에는 못 당하니까"
"난 포기하겠네. 술로나 실속 차려야겠으니 이따가 보세."
윤철훈은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받으며 신부와 함께 식장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요."
윤선숙이 마땅찮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이요?"
"그렇게 둔감해요?"
윤선숙이 짜증스레 톡 쏘았다.
"글쎄, 뭘 예민하게 느껴야 하는데?"
조강섭은 이미 짐작을 하면서도 짐짓 모른체하고 있었다.
"둔감이 아니라 아예 무관심이로군요. 신부 생김이 그게 뭐예요. 오빠한테 너무 실망했어요."
"그 생김이 어째서. 매력있잖소."
"네에? 매력이라구요?"
윤선숙의 큰 눈이 더 커졌다.
"얼마나 개성적이오."
조강섭은 빙글빙글 웃었다.
"아니, 농담이에요 진담이에요?"
"어디 맞혀보시오."
"장난하지 말아요. 난 화가 나 죽겠는데."
"당신이 왜 화가 나?"
"그런 여자가 올케니까 그렇죠. 아까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 듣지도 못했어요? 정말 창피해서 죽겠어요. 오빤 미쳤나봐요."
윤선숙의 눌러왔던 감정의 매듭이 풀리고 있었다.
"여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오. 오빠가 미쳤으면 당신도 미쳤소."
"네에?"
윤선숙이 걸음을 멈추었다.
"날 보시오. 이 절름발이를 선택했을 때 사람들이 당신보고 뭐라고 했겠소. 당신 식으로 말하자면 미쳤다고 했을 것 아니오."
조강섭은 불편한 다리를 약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어머, 당신은 달라요. 그건 투사의 훈장이에요."
"이런, 속 모르는 남들이 보기엔 마찬가지요. 이 다리에 혁명 투쟁에서 다친 것이란 표시가 없어도 당신이 당당해하듯 오빠가 그 여자를 선택한 데도 다 이유가 있을 것 아니겠소."
"체, 당신 논리에 내가 언제 이긴 적 있나요."
윤선숙이 토라지듯 하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만만한 여자가 아니오. 얼핏 보기엔 인물이 그렇고 해서 허술하게 볼 수도 있는데 좀 유심히 보면 거만기도 있고 냉정해 보이기도 한 게 예사 여자는 아닐 거요."
"시거든 떫지나 말지, 못생긴 게 시건방져 보이기가지 하니까 더 가관이지요."
"허, 허, 사촌시누이도 시누이라고 당신이 아주 시누이 노릇 톡톡하게 하려 드는군. 조선피 참으로 무섭다."
조강섭은 웃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트집잡는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트집은 상실감에서 움터나는 것이었다. 오빠를 빼앗겨버리는 것 같은 심정, 아내는 윤철훈과 사촌형제간 같지 않은 깊은 우애로 살아왔던 것이다.
"세상은 달라졌다는데 블라디보스톡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군."
비탈을 올라가는 전차를 보며 조강섭은 중얼거렸다.
"숙청해대는라고 세월 다 보내고 있으니 무슨 건물 하나 새로 지을 수가 있겠어요. 그가짓 권력이 뭐라고."
조강섭에 비해 윤선숙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목소리도 컸다.
"여보, 무슨 말을!"
조강섭이 놀라며 윤선숙을 쏘아보았다.
"체, 못할 소리 했나요 뭐."
윤선숙이 불만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조강섭은 아내를 더 탓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위험스러운 말을 부쩍 자주 하는 아내의 심정을 알면서 더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자신도 그런 말을 하고 싶기는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아, 바다는 여전히 좋군."
언덕바지에 오르자마자 조강섭은 두 팔을 뻗쳐올리며 감탄을 토했다. 신한촌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낙엽이 지고 있는 가을의 정취 속에서 바다는 슬프도록 맑고 푸르렀다. 윤선숙도 걸음을 멈추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바다 위에 선연하게 떠 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광민이었다. 조개와 해삼을 잡던 일이 너무 생생했다. 소년처럼 신기해하던 그의 모습이 콧날을 시큰하게 울렸다. 그의 기억이 이다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아직도 중국 땅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는 것일까. 그도 가끔은 나를 생각할까. 아니, 편지 받고 나서 잊었는지도 모르지.
"신한촌이 어째 쓸쓸해 뵈는군."
조강섭이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신한촌은 오른쪽으로 맞바라보였다.
"왜 안 그렇겠어요. 독립투사들 발길이 끊긴 지가 언젠데."
윤선숙은 이 말과 함께 황급히 이광민을 지웠다. 짧은 시간이나마 남편을 옆에 두고 옛 남자의 생각에 빠진 것이 너무 죄스러웠다. 윤선숙은 신한촌 쪽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윤철훈과 조강섭 내외가 마주 앉은 것은 이튿날 오전이었다. 전날 밤에는 많은 사람들과 술잔치가 벌어져 신랑은 곤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속은 괜찮은가?"
과음으로 아직도 얼굴이 부슥부슥한 윤철훈을 보고 웃으며 조강섭이 물었다.
"말 말게. 나도 이젠 늙었나 봐."
윤철훈이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이런, 신랑한테 어울리는 말이로군."
조강섭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넨 지내기가 어떤가?"
윤철훈이 물그릇을 들었다.
"뭐, 코흘리개들하고 마냥 그렇지."
"그런 생활이 부러울 때도 있고......" 윤철훈은 담배를 배들고는, "나 곧 딴 데로 옮겨갈 것 같네." 성냥을 그으며 말했다.
"딴 데?"
"어디로요?"
조강섭과 윤선숙의 말이 겹쳐졌다.
"뭐, 그리들 놀랄 건 없고. 어딘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
"그럼, 나쁜 족은 아닌 거예요?"
윤선숙이 다그쳐 물었다. 조강섭과 윤선숙은 직감적으로 숙청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동안 숙청의 회오리에 말려 종적을 감춘 조선사람 당원들이 작잖았던 것이다.
"그렇지, 나쁜 쪽이면 미리 알 리가 있나."
윤철훈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휴우, 간떨어지겠어요."
윤선숙이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저런, 너무 긴장들 하고 사는구나. 그럴 거 없어. 정치행위를 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윤철훈은 손윗사람답게 말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스탈린정권의 강화를 위한 내부 정치숙청도 어지러운데다 일본의 만주 점령으로 연해주 일대의 불안과 긴장은 고조되었다. 그런데 일본이 결국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자 그 위협은 곧바로 연해주에 미쳤고, 연해주의 조선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긴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이동 명령도 중일전쟁의 발발과 직결되어 있었다. 물론 일본의 만주 장악에 따라 예비된 것이기는 했지만 뜻밖에 장춘 침투가 결정된 것은 중일전쟁 때문이었다. 결혼을 서둘러 한 것도 그 위장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을 여동생과 조강섭한테까지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적 기밀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야말로 알면 병이고 모르면 약이었던 것이다.
"오빠......, 혹시 저어......"
윤선숙이 앉음새를 고치며 무슨 말이가를 머뭇거렸다. 활달한 그녀답지 않은 태도였다.
"응, 무슨 말인데?"
어서 말하라고 윤철훈이 눈짓했다.
"혹시 조선사람들에 대한 소문 내용을 알고 계세요?"
윤선숙의 말이 조심스러웠고, 아내의 말에 따라 조강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소문 내용?"
반문하는 윤철훈의 표정은 소문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문을 못 들으신 모양이지요? 조선사람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킬 거라는데......"
윤선숙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드러났다.
뭐라고? 중앙아시아!
윤철훈은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거 미안하구나. 새로 시작하게 될 일 준비하느라고 내가 몇달 동안 갇혀 지내다시피 해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어디 자세히 좀 얘기해 봐라."
담배를 빼드는 윤철훈의 얼굴이 긴장되고 진지했다.
"여긴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데는 연해주의 조선사람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킬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그러니까......, 우리 마을 근방에 원동사범대학을 다니던 학생이 있었는데 넉달 전이가 지난 5월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왜 그런고 하니, 조선학생들을 해관회관에 집합시켜 놓고 어떤 러시아사람 선생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 가서 같이 중앙아시아로 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중앙아시아......"
윤철훈이 침통하게 중얼거리며 담배 연기를 짙게 내뿜었다. 그는 막연한 채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게 사실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렇다면 그거 큰일 아닌가?"
마침내 조강섭이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 적의가 서려 있었다.
"글쎄, 조선사람들을 전부 이주시킨다면 그건 집단 강제 이주가 되는 건데, 그거야 보통 문제가 아니지."
윤철훈의 태도에도 거부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조선사람들도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되지 않겠나?"
조강섭의 목소리가 열기를 띠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사실 여부를 먼저 알아보겠네. 이건 섣불리 행동해선 안 될 문제 같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방 당이 아니라 당 중앙의 결정일 테니까 말야."
윤철훈이 괴로운 눈길로 조강섭을 쳐다보았다.
"알겠네만, 당 중앙의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처사 아닌가."
"당연하지. 조선사람들 전부를 강제로 이주시킨다는 건 한 민족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문제고, 사회주의 이념에도 위배되는 처사지. 낭설일 가능성도 있으니 일단 알아보도록 하세."
"사회주의 이념이고 뭐고 우리 조선사람들이 쏘련 혁명을 위해 연해주에서 일본 놈들을 몰아내려고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가. 그 보상은 따로 못할망정 만약 강제이주를 시킨다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네."
조강섭의 태도는 결연했다.
"그야 더 말할 것 없지. 어쨌거나 내가 빨리 알아보고 연락할 테니까 그리 알고 있게."
윤철훈은 조강섭의 자존심 강하고 꼿꼿한 성질이 신경 쓰여 우선 다둑거리기부터 했다. 그러나 자신의 심정도 조강섭의 태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여동생 내외가 육성촌으로 돌아가고 윤철훈은 그 일을 알아보고 어쩌나 할 틈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삼 일 동안 짐을 챙겨 국경 지역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요새 뭘 그리 생각하세요?"
기차 안에서 윤철훈의 아내 차은심은 남편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별거 아니오."
윤철훈은 그 눈길을 피해 버렸다.
"별거 아니긴요. 요새 계속 속상한 기분인데, 우리 일에 뭐가 잘못되고 있나요?"
차은심은 더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그건 아니고......, 혹시 우리 조선사람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다는 소문 못 들어봤소?"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 봐 윤철훈은 사실 그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아니 못 들었어요. 그런 소문이 있대요?"
차은심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윤철훈은 아내의 그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전 훈련을 받느라고 몇달 간 고립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여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너무 시간에 쫓기고 말았소."
"아닐 거예요, 아니에요. 스탈린 동지께서 우리 조선족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할 리가 없어요. 스탈린 동지께서도 우리 조선족이 쏘련혁명을 위해 세운 공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차은심은 '스탈린 동지께서'를 연발하며 고개를 저어댔다. 그 완강한 부정은 첩보원으로 뽑힐 만큼 당성이 좋은 열성당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윤철훈은 더 할말이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철훈 씨는 그걸 믿으세요?"
차은심은 약간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절대 믿고 싶지 않소."
"헌데 왜 믿는 것 같은 표정이세요?"
"믿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소."
"걱정 마세요. 헛소문일 거예요."
이건 윤철훈에게 하는 말만이 아니었다. 차은심은 부모 형제들을 걱정하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제발 헛소문이면 좋겠소."
윤철훈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아버렸다. 윤철훈은 기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또 그날 밤을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식 작별 인사를 하며 끈적한 느낌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여자. 최현옥은 지금까지도 무사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지 어쩌는지...... 부부로 침투해야 된다는 결정이 되었을 때 더욱 데려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조강섭은 윤철훈을 만나고 돌아온 지 보름이 다 못 되어 중앙아시아 이주 명령을 받았다. 출발일까지는 단 이틀의 여유밖에 없었다. 이주 명령과 함께 받은 것은 이주비 150루블이었다. 그건 집단농장에 속해 있지 않은 도시 근로자나 봉급생활자들에게 지급한 이주비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왜 오빠한테서는 여태 연락이 없지요?"
윤선숙은 허둥거렸다.
"정신 차려요. 연락이 온들 무슨 소용이 있소. 조선사람은 단 한 명도 안 빼놓고 모조리 보낸다는데."
조강섭의 말은 시베리아의 혹한처럼 차가웠다.
"아유, 이게 정말 무슨 미친 짓이에요."
윤선숙이 발을 구르며 울먹거렸다.
"별수 없소, 짐을 챙겨야지. 이틀밖에 안 남았으니 항의단이든 뭐든 조직해 볼 틈도 없소."
"짐은 뭘 챙기죠?"
"당신하고 나하고 들 수 있는 정도밖에 더 되겠소. 쌀하고 옷하고 이부자리......"
조강섭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절망적인 한숨을 토해냈다.
이틀 동안 육성촌은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집집마다 짐들을 싸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무엇을 챙겨야 좋을지 몰라 이웃끼리 바삐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길거리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집총을 한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둘씩 짝지은 군인들이 동네마다 순찰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집단 항의나 공동반발을 막기 위해서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크고 작은 집들을 이고 진 육성촌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인솔되어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그들은 영락없이 피난민 행렬이었다. 그러나 총 든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라서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무리들 같기도 했다.
그들은 동네가 까마득하게 멀어질 때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했다. 그들의 눈은 모두 눈물로 젖어 있었다. 집과 살림살이들을 고스란히 둔 채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고 있는 길 양쪽으로는 질펀한 들녘이었다. 그 들녘을 보고도 사람들은 눈물을 떨구고 한숨을 토했다. 그들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그 들녘의 논들은 모두가 자기들의 손으로 일구고 다둑거려왔던 것이다. 황무지를 논으로 일구기가 힘겨웠던 만큼 그들이 떨구는 눈물은 뜨거웠고 토해내는 한숨은 잿빛이었다. 조강섭의 일가족도 그 행렬의 중간쯤에 끼어있었다. 다리 불편한 조강섭이 지고 있는 짐은 다른 남자들에 비해 절반 정도로 작았다. 그는 7살짜리 큰아들 주환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주환이가 메고 있는 가방에도 무엇이 들었는지 빵빵했다. 머리에 이는 것이 서투른 윤선숙도 등에 짐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5살 먹은 딸 명혜가 잡혀 있었다. 2살바기 작은아들 경환이는 할머니가 업고 있었다. 우수리스크역에는 기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역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넘겨졌다. 플랫폼 한쪽으로는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집결해 있었다.
"빨리빨리 10명씩이다. 10명!"
"거기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군인들이 총을 휘젓고 개머리판으로 떠밀고 하며 살벌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꼭 죄인들 다루듯 하는 군인들의 거친 기세는 곧 총이라도 쏠 것 같았다. 집들을 이고 진 채 옆으로 10명씩 줄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네 가족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소란을 피웠다.
"다들 똑똑히 들어라. 한 칸에 40명씩 탄다. 가족 단위로 한 칸에 40명씩 탄다. 군인들이 지시하는 대로 질서를 잘 지켜라. 질서를 문란케하는 자는 즉각 처벌한다."
군 지휘관의 말이었다.
"빨리빨리 올라가!"
"거기, 똑바로 서 있지 못해!"
군인들이 눈을 부라리고 총을 겨누어가며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을 몰아넣고 있는 건 객차가 아니라 시커멓고 육중한 화물차였다.
"아니, 이놈들이 이럴 수가 있나!"
여지껏 입을 열지 않았던 조강섭이 터뜨린 말이었다.
"여보, 참아요."
윤선숙이 놀라 조강섭을 붙들었다.
"이놈들이 사람을 물건 취급하다니!......"
조강섭이 입을 앙다물었다.
"누가 듣겠어요."
윤선숙이 몸달아 남편의 팔을 흔들었다.
"이거 정말 안 되겠는데......"
조강섭이 중얼거리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사람들은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화물차를 한 칸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화물차는 어찌나 많이 연결되어 있는지 그 끝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였다. 화물차는 40량 정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간쯤에 객차가 딱 하나 끼어있었다. 그것이 인솔군인들이 탈 거라는 것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화물차에 오른 조강섭은 다시 신음을 씹었다. 화물차의 사방 벽은 널빤지들을 가로질러 막은 것이었고, 바닥에도 역시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서로 이가 맞물리게 손질되어 있지 않은 널빤지 사이사이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 벽 양쪽으로 급조된 시설물이 있었다. 그 문 좌우 벽면을 따라 2층 나무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침상이었다. 침상을 만든 나무들은 전혀 대패질이 되지 않고 제재소에서 나온 그대로라서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침상에는 잠자리가 될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채 널빤지들이 거친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침상의 한 층에 10명씩이 배정되었다. 양쪽 침상 사이로는 좁은 통로가 나 있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공간은 서로 맞바라보고 있는 출입문 부분이었다. 그 공간의 가운데에 드럼통으로 급조한 난로가 뎅그러니 놓여 있었다. 짐들과 함께 40명이 들어찬 화물차 안은 비좁고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시끄럽거나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어린아이들까지도 겁에 질려 잔뜩 기죽어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자기네 짐들을 배당받은 침상에다 옮겨놓기 시작했다.
조강섭은 짐을 아래층 침상으로 옮기며 자신이 다리 병신인 것을 그 어느 때 없이 참담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건 침상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짐을 많이 질 수 없어 이불을 적게 쌌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객차인데 이 정도면 되겠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물차였고, 침상꼴 또한 가관이었던 것이다. 나이 드신 어머니와 세 아이들이 그 이불로 밤 추위를 견뎌낼 수 있을지 큰 걱정이었다. 밤 추위는 벌써 겨울이나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이 밖에서 양쪽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을 잠그는 쇳소리가 철그럭 울렸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문 쪽으로 쏠렸다. 조강섭은 불끈 솟는 분노를 느꼈다. 밖에서 문까지 잠가버렸으니 영락없는 감금이었던 것이다. 조강섭은 주먹을 부르쥐며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덜커덩, 덜컹......
쇳소리의 둔중한 울림과 함께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어느 사내아이의 겁먹은 목소리였다.
"......"
화물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조금 있다가 다른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엄마, 왜 우리 집에서 쫓겨났어?"
어느 계집아이의 또랑한 목소리였다.
"몰라......"
계집아이의 목소리에 비해 너무 가늘고 힘없는 대꾸였다. 조강섭은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왜 떠나야 하는 것인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 두 가지 물음은 군인들이 짐을 싸라고 했을 때 누구나 가졌던 것이다. 군인들은 짐을 사라고 명령하기 전에 당연히 왜 떠나야 하는지 이유를 밝혀야 했고,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를 알려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군인들은 공포 분위기를 만들고 윽박질러가며 그런 것을 아예 물을 수 없도록 몰아댔다. 결국 그 두 가지 물음은 의문으로 바뀐 채 기차는 떠나고 있는 것이
다. 조강섭은 이틀 동안 왜 강제이주를 당해야 하는지 다각도로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물음에 대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그 이유를 짚어낼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생각이 미치는 데가 없지는 않았다. 그동안 가끔 말썽이 되어왔던 조선사람의 일본 스파이 문제였다. 그러나 조강섭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동안 일본 스파이 노릇을 한 조선사람이 몇 명인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20여만 명의 조선사람들을 전부 강제 이주시킨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고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추리가 너무 비약하는 것 같아 조강섭은 그 생각을 지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간다는 것도 막연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어느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지명이 밝혀지지 않는 한 중앙아시아는 목적지일 수가 없었다.
찰그닥 찰칵, 찰그닥 찰칵......
기차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저어 선생님,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
한 남자가 조강섭의 옆에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조강섭은 고개를 들었다.
"예, 저희들이 인사를 좀 드리고 여쭤볼 말씀이 있고 해서......"
그 남자는 조심스럽게 말하며 난로 쪽을 가리켰다. 난로가에는 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한눈에 보아 모두 농부였다. 조강섭은 그때서야 이 화물차에 다섯 가구가 탔다는 것을 알았다.
"예, 가십시다"
조강섭은 선생으로서 민망함을 느꼈다. 한 식구나 다름없이 된 처지에서 예의를 그들이 먼저 갖추고 나선 것이었다. 마흔댓 나 보이는 그 남자가 먼저 인사했다.
"예, 조강섭입니다."
"저는 도갑수라고 합니다."
그 옆의 주먹코 남자가 고개를 꾸뻑했다.
"예, 조강섭입니다."
"선생님 존함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김두만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이기철입니다."
러시아식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예, 반갑습니다."
"저는 김두태로, 저 두만이형님하고는 사촌지간입니다."
양쪽 턱뼈 기운 세게 불거진 남자가 김두만을 가리키며 인사했다.
"아 예, 그렇습니까."
"저희들은 같은 콜호즈에서 농사를 지은 농사꾼들입니다. 그러니 무식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 뭘 알아야지요. 이번 일만 해도 우리가 왜 느닷없이 이 꼴을 당해야 하는지, 이리 끌려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요. 선생님께서는 다 아실 테니까 속 시원하게 좀 가르쳐주십사 하는 겁니다."
김두만의 말이었다. 대강 예상했던 물음이 나온 것이었다. 조강섭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거 참 면목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하급학교 선생일 뿐이고, 이 일이 갑자기 시행된 걸로 봐서 그동안 비밀에 부쳐졌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허나 이 열차에는 관공서 같은 데서 근무한 조선사람들도 더러 타고 있을 겁니다. 앞으로 며칠 사이에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 내막을 알아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조강섭의 말에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는 줄기차게 달리고, 널빤지 사이사이로 새들던 햇살이 자취를 감추어가면서 화물차 안이 어둠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엄마, 나 오줌 마려."
어떤 사내아이의 말이었다.
"응, 그래 이리 오너라."
여자는 아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살피고 다녔다. 그러나 객차가 아닌 화물차 그 어디에도 변소로 쓸 수 있는 임시변통의 칸막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걸 어쩌면 좋으냐."
여자가 울상이 되었다.
"엄마, 나 오줌싸겠어!"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거머잡은 아이가 소리쳤다.
"여보, 이리 나와서 저 문 좀 열어봐요. 애가 오줌싸겠다는데."
여자가 빽 소리 질렀다. 콧수염 이기철이 침상에서 나와 출입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반대쪽 문으로 옮겨갔다. 그는 끙끙거리며 힘을 써댔지만 역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엄마아......, 나 오줌......"
사내아이가 삐이익 울음을 터뜨렸다. 오줌을 옷에 싸게 된 것이었다.
"아이고, 오줌을 옷에 싸면 어떡해."
여자가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이는 진짜 울음을 터뜨렸다.
"애는 왜 때리고 그래!" 이기철은 버럭 소리 지르고는, "이런 떡칠 놈에 새끼들, 문은 왜 잠가, 문은!" 그는 출입문을 마구 걷어찼다.
조금 있다가 다른 아이가 또 급하게 말했다.
"엄마, 나 오줌 마려, 오줌."
"이걸 어쩌면 좋지요?"
아이의 엄마가 당황스럽게 말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별수 없소. 문가에다 대고 싸게 하시오. 아이들 오줌이니 지린내가 나봐야 얼마나 나겄소. 괜찮겠지요, 선생님?"
김두만이 어둠침침한 저쪽에서 물었다.
"예, 그럼요. 그리해야지요."
조강섭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참 큰일이네요."
윤선숙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이오."
조강섭은 담배를 빼들었다.
"이거 어두워서 어디 살겠나. 등이 어디 있지?"
어느 남자가 어둠침침한 속에서 말했다. 그 남자는 한동안 왔다갔다하다가 여러 사람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다들 등이 어디 걸렸는지 좀 찾아봅시다."
여기저기서 성냥불을 켜가며 등을 찾았지만 그건 어느 곳에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있나!"
화물차 안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엄마, 나 배고파."
어떤 계집아이의 칭얼거림이었다.
그 소리는 금방 다른 아이들에게로 전염되었다.
"엄마, 나도 배고파."
"엄마, 나 밥 줘."
"엄마, 빨랑 밥해 먹어."
그러나 기차는 멈출 기미라고는 전혀 없이 줄기차게 달리기만 했다.
"이 일을 어째야 좋아. 물이 있어야 밥을 하지."
"기차가 왜 이렇게 쉴 줄을 모르고 내닫기만 하나."
"큰일났네. 좀 세우라고 할 수도 없고."
여자들은 우왕좌왕하며 애타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배고파 칭얼거리는 아이들의 소리는 갈수록 심해졌고, 속수무책인 남자들은 애꿎은 담배만 빨아대며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배고픔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밤이 되어가면서 화물차 안이 시시각각 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심해지는 계절이 이미 시작되어 밤 기온은 급히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벽과 바닥의 널빤지마다 벌어진 틈으로 찬바람이 거침없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안 되겠어. 난로에 불을 피워야지."
어느 남자의 말이었다.
"나무가 있을까?"
"난로를 설치했으니 나무야 당연히 있겠지. 찾아보더라고."
남자들이 나서서 침상 밑마다 샅샅이 뒤졌지만 나무라고는 없었다.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이런 개자식들이 해도 너무하네."
남자들이 어둠 속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불을 꺼내 아이들부터 감쌌다. 그러나 어느 집이고 이불이 넉넉하지 못했다. 오로지 몸에 의지했기 때문에 기운에 한계가 있었고, 챙겨야 할 짐이 이불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그나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밤이 깊어갈수록 심해지는 추위에 벌벌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기차는 자꾸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기차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제 어른들도 소변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윤선숙은 아랫배가 뻑적지근하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 통증을 견뎌내느라고 이를 사리물고 있었다.
제발, 제발 기차를 좀 세워라......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갈수록 통증은 심해지며 오줌이 곧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전신이 비비꼬이며 숨까지 막히는 것 같았다. 소변으로 이런 고통을 당하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윤선숙은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남편을 흔들었다.
"여보, 여보, 자요?"
윤선숙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가늘었다.
"아니, 왜 그래?"
웅크리고 누웠던 조강섭이 얼른 돌아누웠다.
"나 더 못 참겠어요. 죽을 것 같아요."
사정이 아무리 다급해도 윤선숙은 차마 소변이니 오줌이니 할 수는 없었다.
"소변 말이오? 나도 미칠 것 같소."
조강섭은 얼른 알아들으며 아내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윤선숙은 그걸 참으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왜 이리 기차를 안세우는 거지요?"
"글쎄......, 날이 샐 때가 얼마 안 남은 것 같소."
"세상에 이런 잔인한 고문은 없어요."
"못된 놈들이오. 날이 새면 강력히 항의해야겠소."
"짐승도 이렇게는 취급 안하겠어요."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오.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고 있소."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자 분함도 통증도 다소 나아지는 것을 윤선숙은 느끼고 있었다.
"아으 아으 아으......"
어둠 속에서 들리는 가느다란 여자의 신음소리였다.
"이런 때려죽일 놈들이 사람들 오줌보를 터쳐 죽이기로 작정을 했나. 왜 기차는 안세우고 이래!"
어느 남자가 목소리 거칠게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이거 미치고 환장할 일이라니까."
기다렸다는 듯 다른 남자가 말을 받았다.
"이놈의 새끼들이 조선사람들을 개만도 못하게 생각하고 하는 짓이지 뭐야."
또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그들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조강섭은 그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인가 더 달리던 기차가 마침내 멈추었다. 남자들이 우르르 양쪽 문으로 몰려갔다.
"빨리 문 열어, 문!"
"다 죽는다. 문 빨리 열어!"
그들은 소리소리 질러대며 문을 쾅쾅 치고 마구 걷어차며 야단 법석이었다. 그들의 아들인 젊은이 대여섯도 합세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밖에서 외침이 들렸다.
"떠들지 말엇! 소란 피우면 문 안 열어준다."
사람들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밖에서 문 따는 쇳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문을 열어젖혔다. 문은 한쪽밖에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와아! 소리치며 미친 것처럼 밖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밖은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밖으로 뛰어내긴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이리저리 뛰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가지 못했다.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새벽의 어스름이 겨우 가려주고 있었다. 40여 칸의 화물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엄청났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이야!"
"이 야만인들아, 변소로 가, 변소!"
군인들이 고함을 질러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나 그 러시아 말은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 물을 떠야 해."
"나무, 나무도 구해야지."
소변을 끝낸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하는 말이었다. 여자들은 크고 작은 그릇들을 들고 허둥지둥 뛰기 시작했다. 물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나무를 구하려고 앞을 다투이 어리저리 뛰고 있었다. 역 구내는 삽시간에 전쟁터처럼 변하고 말았다. 석탄을 채우고 물을 넣고 하느라고 기차는 두어 시간 정도 모물러 있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난로에 불을 피워 밥을 해먹었다. 밥을 함술 뜬 조강섭은 옆칸의 화물차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혹시 당원 안계십니까?"
조강섭이 화물차 안에다 대고 외치는 말이었다. 혼자 항의에 나서는 것보다 다른 당원들도 찾아서 힘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네 번째 칸에서 두 사람을 찾아냈다.
"이런 처사를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당원들을 다 찾아내서 정식으로 항의하고 시정시키도록 합시다."
조강섭은 그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이렇게 몰아붙였다.
"예, 그것 좋습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안한 게 아닙니다."
두사람은 반색을 하며 동의했다.
"그럼 셋이 나눠 당원들을 찾아내도록 합시다."
조강섭은 마치 작전지시를 하듯 말했다. 그는 어느덧 주동자가 되고 있었다.
"예, 그게 효과적이겠군요."
세 사름은 화물차를 분담해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화물차 점검을 다 끝내지 못하고 중단했다. 기차가 출발하려고 뛔엑, ! 기적을 울려댔던 것이다. 그 시점까지 확인된 당원은 그들 자신까지 합해서 모두 9명이었다.
"됐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정차시에 확인하도록 하지요. 저는 16호 찹니다."
조강섭은 두 사람과 급히 헤어졌다. 기차는 또 달리기 시작했다. 조강섭은 침상 기둥에 몸을 부리며 눈을 감았다.
하루가 갔구나. 오늘이 9월 17일......, 앞으로 얼마나 걸릴 것인가. 중앙아시아......, 지도상으로 보면 거기가 얼마나 멀던가. 그 까마득한 곳까지 20일? 한 달? 그나저나 하루 넘기기가 이리 힘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날은 자꾸 추워질 것이고......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떻게 이따위로 비인간적인 처사를 자행할 수 있는 것인가. 죄수들도 이렇게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는가. 이런 명령은 도대체 누가 내린 것인가. 스탈린이? 스탈린이 그랬을까? 스탈린이 조선사람들을 특별히 미워해야 할 무슨 악감정이 있을까? 글쎄......, 아니야, 모스크바와 시베리아는 거리가 너무 멀어. 중간에서......, 그래 중간에서 뭐가 잘못되고 있는 거야. 어쨌거나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는 일이지......
"선생님, 의논드릴 게 좀 있는데요."
조강섭은 더디게 눈을 떴다. 김두만이 손을 모아잡고 서 있었다.
"예, 이쪽으로 앉으세요."
조강섭은 침상 기둥에서 등을 떼고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예, 다른 게 아니고 임시변통으로 변소를 만들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변소요?......"
"예, 보아하니 이놈들이 석탄이고 물 채울 때만 기차를 세우는 것 같은데 그래 가지고서야 용변을 못 봐 사람이 어디 살겠어요. 용변을 오래 참으면 병 된다는데."
조강섭은 김두만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기차가 멈추는 것에 대한 판단이 아주 정확했던 것이다.
"헌데, 변소를 어떻게 만든다는 거지요?"
"예, 어느쪽이든 한쪽 문 앞의 널빤지를 한 두어 자쯤 뜯어내면 됩니다. 거기다 이불보라도 쳐서 급한 작은 용변은 보게 해야지요." 김두만은 재빨리 주위를 훑으며 조강섭의 옆으로 다가앉더니,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못 참지 않습니까. 어젯밤에도 옷 젖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 눈친데요." 그는 빠르게 귓속말을 했다.
"글쎄요. 그 생각은 참 좋은데, 기차 역에 따라 열리는 문이 다른데 널빤지를 뜯어내 버리면 어쩌지요? 아이들 발이 빠지고......, 위험한 일이 많이 생길 텐데요."
"그거 그렇기도 하겠는데요. 가만있거라 보자......, 그것을 그러니까......, 예, 방도가 있습니다. 널빤지 밑에 각목들이 받쳐져 있거든요, 그러니 널빤지를 아주 뜯어내 버리지 말고 그 각목에 양쪽이 걸쳐지게 잘 잘라내서 쓸 때만 들어냈다가 도로 맞춰놓았다가 하게 만드는 겁니다."
"예,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헌데, 무슨 연장이 있어야 일을 할 거 아닙니까?"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더라고 주머니칼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김두만의 자신 있는 말이었다.
"주머니칼? 그걸로 언제 널빤지를......"
"쇳덩이리 갈아 바늘 만든다는 말도 있잖던가요. 목마른 놈이 샘 파더라고 다급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일은 오래 안 걸릴 겁니다. 그 일은 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김두만은 밝은 기색으로 씨익 웃었다.
"예, 그럼 같이 일합시다."
조강섭도 밝은 웃음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은 몸도 불편하신데요. 다른 일이나 책임 맡아 주십시오."
김두만은 손을 저으며 고개까지 내둘렀다. 그 일은 곧 시작되었다 각목은 한 자 반 정도의 간격으로 받쳐져 있었다. 그건 널빤지에 박힌 못자리로 금방 표가 났다. 널빤지는 각목과 각목 사이의 한 매듭만 잘라내기로 했다. 그리고 양쪽 못대가리에 바짝 붙여 칼끝으로 금을 그었다. 널빤지가 양쪽 각목에 걸쳐지게 하려면 못대가리에서 멀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칼질은 쉽지 않았다. 그냥 나무를 깎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널빤지가 양쪽 각목에 줄을 곧바로 긋듯 하는 동작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반복 동작은 사람을 바꿔가며 쉴새 없이 계속되었다. 기운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젊은이들까지 다 동원되었다.
"옳지, 잘한다. 다급하게 하지 말고 천천히 기운 써. 나무가 제아무리 단단해도 쇠를 못 당하는 법이고, 쇳덩어리 갈아 바늘 만드는 사람도 있다."
김두만은 칼질하는 젊은이들 옆에서 함게 힘을 끙끙 써가며 이렇게 힘을 돋우어주고는 했다.
"칼끈이 무뎌졌어? 샘가에서 숭늉 찾을 수는 없고, 숫돌 대신 어디 쇠토막 불거진 것 있는가 찾아보자."
"바로 옆에 있네요, 난로."
"그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있더라고 사람 사는 세상에 사람 죽으란 법 없느리라. 이리 가져오너라, 낫이고 칼 가는 것은 나이가 말하는 법이다."
김두만은 계속 여유 넘치게 말해 가며 칼을 받아들었다. 조강섭은 그런 김두만의 언행에서 조선농부의 어엿함과 삶의 연륜을 느끼고 있었다. 대여섯 시간의 줄기찬 칼질 끝에 한 치가 넘게 두꺼운 널빤지는 결국 잘라졌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무두가 환성을 터뜨렸다.
"자아, 이제 마지막으로 양쪽 가운데다 손가락이 잘 들어가게 홈을 파야지."
널빤지를 들고 선 김두만의 이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한 건 아이들뿐이었다. 용변을 볼 때 널빤지를 들어내기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이들까지도 점심을 다 굶었다. 얼마가 걸리지도 모르는 길, 곡식을 아껴야 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칭얼거렸지만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고는 냉수 한 모금씩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기차는 멈출 줄 모르고 하루종일 달리기만 했다. 양쪽 침상의 기둥에다 끈을 묶어 이불보를 친 변소는 유감없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차가 멈춘 것은 어둠발이 퍼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자들은 그릇마다 물을 떠 오고, 남자들은 나무고 석탄이고 땔 것은 뭐든지 가져와!"
문이 열리기 직전에 김두만이 외쳤다. 밖으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허둥거리는 모습은 아침에나 똑같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기에 바빴다. 물과 땔감을 구하려는 소동이 한바탕 벌어진 다음 조강섭은 두 사람과 다시 그 일을 나섰다. 40칸의 화물차를 다 확인한 결과 당원은 모두 12명이었다.
"됐습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고, 회으에 대해선 내일 다시 의논하도록 합시다. 비밀경찰이 미리 알면 곤란하니까 서로 비밀을 지킵시다."
조강섭은 일이 되어가는 만족감을 느끼며 그들과 헤어졌다. 반찬이라고는 소금밖에 없는 밥을 얻어먹고 아이들은 밥을 해낸 온기 속에서 잠이 들었다. 무슨 반찬거리를 사려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기차가 멈추는 시각이 물건 사기에 고약한데다, 군인들이 역 구내를 벗어나지 못하게 통제했던 것이다. 밥은 하나뿐인 난로에다가 가구별로 따로 해냈다. 솥 크기가 서로 식구들 수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불만을 없애기 위해서 그 순서를 하루씩 바꾸기로 했다.
"쌀을 미리 구해야 되겠는데 걱정이네요. 농부들은 콜호즈에서 배급을 많이 받아왔다는데 우리는......"
이미 웃음을 잊어버린 윤선숙의 근심 어린 말이었다.
"아직 며칠분은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시오. 곧 시정이 될 거요."
조강섭은 아내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밤새도록 달린 기차는 또 새벽녘에 어느 역엔가 정거했다. 그러나 다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 역 이름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조강섭은 나머지 당원들을 다 만나보았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자신의 화물차인 16호에 모여 회의를 하기로 했다. 밤에는 등불도 없었고, 그들이 회의에 대해 생각할 시간 여유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당원 11명은 약속대로 화물차 16호로 모여들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그들은 회의를 시작했다.
"지금 이 열차에는 우리 조선사람들 천육백 명이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왜 연해주를 떠나야 하는지, 어디로 실려 가고 있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현재 화물차에 실려 죄인들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조선사람들이 쏘련에 대해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며, 어떤 죄지을 짓을 했습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 두만강변 핫산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저 북쪽 하바로프스크에 이르기까지 연해주의 황무지를 논과 밭으로 일구어 식량을 생산해 낸 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20여만 조선사람들 아닙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는 우리 조국의 독립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건설하기 위하여 적군과 함께 백군과 일본군에 대항해서 피흘려 싸웠습니다. 여러분들 주에도 분명 그런 전사가 계실 것입니다. 저도 그때 부상을 당해 다리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공헌에 대해 보상을 받기는커녕 지금 이 꼴이 되어 있습니다. 이건 분명 부당한 처사이며, 이 부당함을 누가 시정시켜야 되겠습니까. 그건 더 말할 것 없이 우리 당원 된 자들의 소임이며 사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의견들을 지금부터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강섭의 말에 모두들 숙연해져 있었다.
"예,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처우는 당장 시정을 요구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강제 이주 당하고 있는 것 자체를 막고, 원점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저는 이 결정이 어디서 내려진 것인가 하는 것부터 의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스탈린 대원수 동지께서 이런 가혹한 결정을 내리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스탈린 동지께서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세운 공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 그 말씀 일리 있습니다. 저도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 스탈린 대원수 동지께서는 이 문제를 모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쏘련은 지방정부가 결정하는 사항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연해주 지방정부와 중앙아시아 쪽 지방정부 사이에서 결정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스탈린 동지께서는 모르시는 겁니다."
"예, 맞습니다. 전인민의 단결을 주창하시는 스탈린 대원수 동지께서 우리 조선사람들에게 이런 가혹한 결정을 내렸을 리 만무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스탈린 동지뿐이십니다. 우리는 스탈린 동지께 긴급 시정요청서를 보내야 합니다."
나머지 당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스탈린 앞으로 보내는 시정요청서를 작성하여 내일 아침에 정식으로 인솔장교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바로 시정요청서 작성을 시작했다. 다시 기차가 멈추기까지는 발이 묶인 상태이니까 앉은자리에서 요청서의 내용가지 합의하자는 것이었다. 자연히 요청서 작성은 조강섭의 차지가 되었다.
조강섭은 침상에 따로 쪼그리고 앉아 서너 시간을 끙끙대서 요청서 초안을 써냈다. 그것을 당원들이 돌려 읽었다. 별다른 이의 없이 모두 찬성했다. 이튿날 아침 당원 12명은 16호 화물차 앞에서 만났다. 그리고 열차의 중간에 끼어있는 객차를 향해 떠났다. 다시 밖에서 화물차들 문이 닫히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 조 선생 안 오셨잖아요, 조 선생!"
당황한 윤선숙이 소리치며 문을 마구 두들겼다.
"어, 어, 이거 이상하네. 어떻게 된 거야?"
김두만도 당황해서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오?"
이기철이 손등으로 한쪽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문댔다.
"일은 무슨 일. 이야기가 길어지는 거겠지."
도갑수가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게 한두 마디로 끝날 얘기들이 아니거든. 그 덕에 객차에서 편히 가시고 잘됐지."
김두태의 말이었다.
"응, 자네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김두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 선생님, 조 선생님이 별일 없으실 것 같으니 맘 놓으시지요." 그는 윤선숙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예, 알겠습니다."
윤선숙은 더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발휘한 묘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던 것이다.
"다 들었다. 별일 없을 게야. 걱정 말고 기다리자."
윤선숙과 눈이 마주치자 시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서린 채로.
"예, 어머님......"
그러나 윤선숙은 하루종일 불안을 떼칠 수가 없었다. 예사로 저질러지고 있는 숙청과 비밀경찰의 서슬이 자꾸 마음을 감고 드는 것이었다. 어스름 속에 기차가 정거하자마자 윤선숙은 밥이고 뭐고 뒷전치고 객차로 내달았다.
객차로 뛰어 들어가려는 윤선숙을 보초가 총으로 가로막았다.
"뭐요!"
"여기 있는 당원들 만나러 왔어요."
"당원? 그런 사람들 없소."
"있어요. 아침에 12명이 인솔 장교를 만나러 왔잖아요."
"아 그 사람들, 진작 그 지역 비밀경찰에 넘겨졌소."
"뭐, 뭐라구요? 왜요?"
윤선숙은 현기증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난 모르겠소, 졸병이라."
"비켜요, 인솔장교를 만나야겠어요."
윤선숙은 진저리치듯 외치며 보초를 떠밀었다.
"이거 왜 이래!"
그러나 오히려 떠밀린 건 윤선숙이었다.
"비켜! 비켜! 비켜!"
윤선숙은 미친 것처럼 외쳐대며 군북을 움켜잡은 채 보초를 떠밀고 있었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옛, 대장님. 아침에 왔던 그 사람들 찾으로 왔다가 없다니까 대장님을 만나겠다고 이럽니다."
윤선숙은 앞을 쳐다보았다. 승강대 계단에 뚱뚱한 장교가 버티고 서 있었다.
"대장님, 그 사람들이 왜 비밀경찰에 넘겨졌습니까?"
윤선숙이 다가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 아무 걱정 마시오. 비밀경찰에 넘겨진 게 아니라 친절하게 안내한 거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지금 모스크바로 가고 있을 것이오.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장교는 돌아섰다. 윤선숙은 땅이 흔들리는 어지러움 속에서 부들부들 떨며 걸었다. 그 장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찬바람 돌던 묘한 웃음이 그의 말을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정말 모스크바로 떠나게 되엇다면 그 사람들이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냥 떠났을 리가 없었다. 16호 화물차가 가까워지면서 윤선숙은 걸음을 멈추었다. 시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감정을 수습해야 했다. 윤선숙은 고개를 젖히며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모스크바에 가?"
"네에......"
윤선숙은 의심 가득한 시어머니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도 안 보고 그 먼 길을 가? 뭐가 급해서......"
"일이 그렇게 됐대요."
"......"
시어머니는 더 말없이 눈길을 떨구었다. 그런 고부간의 말을 듣고 김두만과 다른 남자들은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윤선숙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기차에서 내려 물이며 땔감을 구하느라고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왜냐고 묻지 말고, 어디로라고 묻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그 두 마디를 입에 올리는 날에는 비밀경찰의 밥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 속에는 그들 12명의 행적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리는 말이 감추어져 있었다. 윤선숙은 시어머니가 그 소문을 들을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그 소문을 들었는지 어쩌는지 말을 잃었고 식욕도 잃어버렸다. 윤선숙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절말에다 시어머니에 대한 걱정까지 짊어지고 비틀거려야 했다. 그러나 윤선숙은 이를 앙다물었다. 자신만을 쳐다보고 깜빡거리는 세 아이들의 눈동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형편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졌다. 기차가 역에 서지 않고 역을 앞두고 10리나 20리 전에 섰고 또는 역을 지나서 섰다. 그건 역을 더립히지 않고 땔감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기차가 섰던 역마다 항의를 하는 바람에 취해진 조처였다. 기차가 역을 멈출 때마다 쏟아져 나온 1천6백 명은 아무에서나 소변만 본 것이 아니었다. 참고 참았던 대변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대소변으로 역이 더럽혀지고 악취가 진동할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땔감을 구하려고 눈에 불을 켠 남자들은 땔감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철도용 목재들이 순식간에 없어지는가 하면 석탄 창고가 습격을 당하는 꼴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군인들이 공포를 쏘아가며 석탄 창고를 지키게 되자 다른 창고의 나무벽이 다 뜯겨지는가 하면 판자울타리가 자취를 감추어버리기도 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어쨌거나 역마다 그런 피해를 입었으니 역에서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주 책임을 맡은 기관에서는 그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책을 세우지 않고 역을 피해 가며 기차를 세우는 교활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차는 서는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대소변뿐이었다. 여자들은 개울물이라도 찾아 허둥거렸고, 남자들은 나무를 찾아 앞다투어 뛰었다. 물이나 나무를 구하지 못한 채 그냥 기차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다고 기차가 역에 안 서는 것이 아니었다. 석탄과 물을 보충하려고 기차는 역에 멈추었다. 그러나 화물차의 문들은 꼭꼭 잠겨 있었다. 윤선숙은 김두만 앞에 있는 돈을 다 털어내 놓았다.
"양식이 다 떨어져서......"
"아, 아닙니다. 이 돈 도로 넣으십시오. 당연히 하루 한 끼를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어야지요. 조 선생님이 다......"
김두만은 아차 싶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조 선생님이 다 누굴 위해 그런 일을 당하셨는데요'하는 말이 밀려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조강섭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받아두세요. 어떻게 그냥......"
"아니, 아니라니까요. 두 선생님께서 우리 자식들 가르쳐준 은혜를 이런 때나 갚지 언제 갚겠습니까."
김두만은 돈 받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윤선숙은 그냥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0월 초순이 지나면서 날씨는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밤에는 화물차 안이 얼음덩이처럼 얼어붙었고, 낮에도 추워서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부들부들 떨었다. 먹는 것이 부실해서 더 추위를 타는 것이었다. 윤선숙은 날마다 애가 타고 있었다. 시름시름 기운을 못 차리던 시어머니가 완전히 앓아눕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 아이가 감기가 들어 콜록거리고 있었다. 감기에 걸린 것은 윤선숙의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날씨가 심하게 추워지면서 감기가 퍼지기 시작해 거의 모든 아이들이 감기를 앓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던 윤선숙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왼쪽에서 곡성이 울리며 시신이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병이래요?"
"병은 무슨 병. 노인네라 고생 못 이기고 눈감은 거지."
"에그, 잘 돌아가셨소, 더 험한 고생 당하기 전에."
"그래도 더 오래 살았어야지. 여기다 묘를 쓰고 떠나면 언제 또 찾아 오겠소.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지."
여자들이 혀를 차며 하는 말이었다.
눈을 감은 윤선숙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꼭 누르고 있었다. 그 일이 마치 자신에게 닥친 일만 같았던 것이다. 윤선숙은 시어머니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하게 해달라고 빌고 있었다. 다음날도 곡성이 울렸다. 윤선숙은 또 가슴이 철렁했다.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앓다 죽었다는 것이다. 몸 약한 노인과 아이가 고생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거였다. 윤선숙은 또 눈을 감으며 아이들을 무사히 지켜달라고 빌었다. 특별히 믿고 있는 종교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되는 것이었다. 다음날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밤사이에 눈이 내려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눈경치에 환호한 것이 아니었다. 눈은 바로 물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눈을 입에 퍼넣기에 바빴다. 새하얀 눈과 대비된 그들의 몰골은 천상 거지떼나 다름없었다. 비쩍 마른 얼굴들은 때가 끼고 검댕이 칠해져 있었고, 옷들은 낡고 더럽혀져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눈은 거의 매일 내렸다. 물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지만 널빤지들 틈새로 파고드는 설한풍은 혹독하게 매웠다. 그 추위와 싸우느라고 남자들은 눈에 띄는 나무는 뭐든지 모아들었다. 생나무도 남자들의 거친 손길에 남아나지 않았다. 작은 나무들은 통째로 꺾여졌고, 큰 나무들은 가지가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생나무도 난로 속에서 한동안 연기를 뿜어내고 나면 툭툭 튀면서 잘 탔다. 감기 든 아이들은 연기를 마셔 더 심하게 기침을 해대면서도 한사코 난로가로 모여들었다. 기침하는 고통보다 추위를 피하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어느 날 새벽녘에 터진 윤선숙의 울부짖음이었다. 사람들이 놀라 모여들었다. 윤선숙의 시어머니는 이미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밤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둔 것이었다.
"어머님, 저는 어떡하라고......, 저는 어떡하라고......,"
윤선숙이 시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목놓아 울고 있었다. 뒤늦게 잠이 깬 세 아이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제 어머니를 쳐다보며 올먹울먹하고 있었다.
"그만 고정하시지요. 이제 곧 기차가 설 건데 장례 채비를 해야지요."
김두만이 조심스럽게 말했고, 여자들이 윤선숙을 부축해 일으켰다. 장례준비라는 것은 따로 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을 다시 단정히 했고, 망자의 옷을 꺼내 얼굴을 감싸는 정도였다.
"어머님이 덮으셨던 이불로 싸드렸으면 좋겠어요."
윤선숙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애들을 생각하셔야죠. 셋 다 감기를 앓는 판에 날이 갈수록 추워지는데요."
김두만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차가 멈추자 남자들이 시신을 내렸다. 그 뒤를 윤선숙은 큰아들 주환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남자들이 눈을 헤쳐 나뭇가지로 땅을 팠다. 그러나 나뭇가지는 땅에 먹혀들지 않고 튕겨졌다. 땅이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연장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야단났네."
김두만이 난감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초상을 당한 것은 윤선숙만이 아니었다. 좌우로 세 집이 더 있었다.
"어이, 자네들 저쪽에 좀 가보고 와. 어찌하는지 알아야지."
김두만이 손짓으로 도갑수 김두태를 좌우에 배치했다.
"별수없이 그냥 눈으로 봉분을 만든다는데요."
먼저 돌아온 도갑수의 말이었다.
"그냥 눈장례를 치른다네요."
김두태가 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선생님, 어쩔 수 없는데요."
김두만이 윤선숙을 쳐다보았다. 윤선숙은 흑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신이 땅 위에 놓여졌다.
"선생님하고 아드님이 먼저 눈을 한 줌씩 놓으세요."
김두만이 말했다. 윤선숙은 아들과 함께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환아, 할머니 저 세상으로 가시게 엄마 따라서 해."
윤선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 손으로 눈을 펐다. 어린 주환이도 눈물 글썽한 눈으로 어머니를 따라서 했다. 윤선숙은 눈을 시신 위에 올려 놓았다. 주환이도 그 옆에 눈을 놓았다. 시신 위에 놓인 크고 작은 두 개의 눈덩이는 마치 흰 꽃송이 같았다.
"됐습니다, 일어나세요."
김두만의 말에 따라 윤선숙은 아들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남자들은 어기차게 눈을 모아다가 시신을 덮기 시작했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시신이 눈 속에 묻혀가는 것을 보며 윤선숙은 숨 가쁘게 울부짖고 있었다. 눈을 단단히 다져가며 둥그런 봉분이 만들어졌다.
"아드님한테 두 번 절 시키세요."
김두만이 손을 옷에 털며 말했다. 그의 손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주환아, 아빠하고 제사지낼 때처럼 큰절 두 번 해. 알지?"
허리를 굽힌 윤선숙이 아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주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환이가 눈 위에 엎드리며 큰절을 엉성하게 두 번 했다. 그것으로 장례는 끝냈다. 먼발치에서 총을 멘 군인들이 키들거리며 그 장례를 구경하고 있었다. 10월 중순에 이르면서 추위는 혹독해졌다. 영하 30도가 예사인 북쪽의 겨울 추위가 본격적으로 몰아닥치고 있었다. 앓아눕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곡식까지 동나가고 있었다. 열 살 아래의 아이들과 예순 넘은 노인들에게만 두 끼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 한 끼로 김두만이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기차가 정거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이 먹을 것을 훔치려다가 붙잡힌 것이었다. 기관차 뒤에 석탄 차가 붙어 있었고, 그 뒤에 규모가 좀 작은 화물차가 붙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군인들의 식량창고였다. 기차가 멈출 때면 그 창고가 열린다는 것을 알아낸 두 사람은 그곳으로 숨어들었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전원 집합하라!"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전원 집합하라!"
군인들은 기세 사납게 외쳐대며 총을 휘둘렀다. 아픈 사람들까지 부축해 가며 사람들은 한곳으로 모였다. 눈 위의 바람이 세차서 아이들은 와들와들 떨었다. 뒤로 팔을 묶인 두 사람이 객차에서 끌려 나왔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그들이 사람들 앞에 세워지고 조금 있다가 뚱뚱한 장교가 나왔다. 군인 하나가 큼직한 상자를 들고 뒤따랐다. 사람들은 그것이 두 사람이 훔치려던 것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군인이 장교 앞에 상자를 놓았다. 장교는 그것을 밟고 올라섰다. 그건 발판이었던 것이다.
"모두 똑똑히 들어라. 저놈들은 감히 인민의 군대의 식량을 도둑질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군대의 식량은 무기와 똑같고, 군대의 그 어떤 물품이든 도둑질하는 것은 극악한 반동 행위로 국법은 정하고 있다. 국법을 어긴 반동에겐 처형이 있을 뿐이다. 저놈들을 국법에 따라 총살형에 처한다! 이상."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두 사람은 발판을 내려서는 장교에게로 내달았다. 울음 섞인 그들의 애원은 서투른 러시아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재빨리 달려든 군인들의 개머리판에 맞고 나뒹굴어졌다. 두 사람은 군인들에게 질질 끌려가 아람드리 나무에 묶여졌다. 그리고 군인 6명이 도열했다.
"사겨억 준비!"
뚱뚱한 장교가 지휘봉을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사격!"
장교가 지휘봉을 내리쳤다.
탕탕탕......
총소리들이 눈 덮힌 적막한 광야를 뒤흔들었다. 윤선숙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 낮에 총 맞아 죽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남편으로 변하고는 했다. 윤선숙은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는 작은아들을 품고 식은땀을 흘리며 남편이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한 가닥 기대를 버렸다. 저희들 때문에 배곯은 사람이 먹을 것 좀 훔치려 했다고 그처럼 서슴없이 죽여버리는데 남편 일행을 살려두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먹을 거 좀 훔치려 한 것에 비하면 남편 일행이 도모한 일은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반동 행위였던 것이다.
여보, 여보, 우리 경환이를 지켜줘요. 경환이가 너무 아파요. 우리 경환이가 아무 탈 없도록 제발 지켜줘요. 경환이한테 무슨 일 있으면 난 미치고 말 거예요. 여보, 날 도와줘요......
윤선숙은 작은아들을 더 꼭꼭 끌어안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윤선숙은 세 아이들을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이를 맞물었다. 불시에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잃고......., 가슴이 찢어지고 터질 것처럼 분하고 억울했다. 그러나 그 분하고 억울함을 고하고 하소연할 데가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나라없어 당하는 서러움이고 원통함이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세 아이는 지켜내야 한다고 마음 다지며 윤선숙은 눈물을 훔쳤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화물차 저 화물차에서 눈장례를 치렀다. 아파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굶어 죽었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어 죽었다는 사람도 생겨났다. 윤선숙은 그 장례들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많은 조선사람들이 또다른 열차에서도 죽어가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이 열차에 탄 사람들이 1천6백여 명이고, 연해주의 조선사람들은 모두 20여만 명이었다. 그 사람들은 150여 개의 열차에 실려 이렇듯 죽어가고 있을 거였다. 그 수가 얼마일 것인지 생각만으로도 끔찍스러웠다. 김두만의 아버지가 앓다가 끝내 눈을 감았다.
"자식들......., 자식들 자알 길러......, 자식들이 ......, 보, 보배......,나, 나라 찾으면......ㅡ 나, 나를..... 고, 고향에......"
김두만의 손을 움켜잡고 노인이 남긴 유언이었다. 김두만은 눈장례를 치르며 남자답지 않게 통곡을 했다. 부친의 유언을 들어드리지 못하게 되어 그러는 거라고 윤선숙은 생각했다. 그러나 뒤늦게 알고 보니 김두만의 서러움은 더 속 깊은 데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일찍이 의병투쟁에 나섰다가 쫓겨 만주를 거쳐 연해주에서 살게 된 것이라고 했다. 늘 나라 찾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고, 이번에도 차라리 혼자 조선으로 가겠다며 밥을 굶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이기철의 어린 딸도 감기를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이기철의 아내는 어린 딸을 끌어안고 내놓지 않아 사람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결국 딸을 눈에 묻고 나서 이기철의 아내는 앓아눕고 말았다. 윤선숙은 이기철의 딸이 떠난 것을 보고 더욱 겁이 났다. 작은아들 경환이도 그 아이처럼 기침이 심해 한번 기침을 시작했다 하면 하얗게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윤선숙은 애가 타서 아들을 한시도 몸에서 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눈앞에는 어느 역이 보였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모두 내려라! 다 왔다."
군인이 손짓하며 외쳤다.
"뭐, 뭐라구요? 여기가 어디요?"
누군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타슈켄트!"
사람들은 어리벙벙한 채 서로서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외쳐댔다.
"와아, 다 왔다아!"
"와아, 살았다아-"
그들은 두 팔을 치올리며 환호했고, 서로서로 얼싸안았다. 윤선숙은 삐쩍 마르고 지친 작은아들을 내려다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여보, 고마워요. 경환이가 이렇게 무사해요.
윤선숙은 작은아들의 볼에 얼굴을 비비대며 남편을 부르고 또 불렀다. 윤선숙은 작은아들을 큰아들에게 업히고 자신은 기를 써서 짐을 남김없이 다 짊어졌다. 그 짐들은 아이들의 생명을 지킬 무기였다. 윤선숙은 줄을 서면서 며칠이나 걸렸는지를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막연하게 한 달이 넘은 것 같을 뿐 정확하게 날들을 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윤선숙의 가슴에서는 새로운 두려움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낯선 곳의 바람이며 냄새가 연해주하고는 달랐던 것이다. 저 멀리 눈 덮인 웅장한 산줄기가 뻗쳐져 있었다. 윤선숙은 그 산줄기가 육박해 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천산산맥 줄기였다.
20만 조선사람들의 강제이주는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강제이주 결정사항 제1428-326cc호에 기록된 공식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사람들의 첩자 행위 방지, 둘째는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농업인력 공급이었다. 그리고 강제 이주를 직접 명령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하바로프스크, 당지구위. 조선인들 이주 문제--시기적으로 성숙했음.
이주 시기에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철저히 조치를 조속한 시일 내에 강구하기 바람.
당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이것은 스탈린이 보낸 암호전보였다.
그 명령에 따라 연해주 일대의 조선사람 20여만 명은 9월 중순에서부터 11월 말까지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끌려갔다.
15. 국경 산악에 삭풍은 불고
만주벌판에 삭풍이 휘몰아치면서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의 토벌 작전은 본격화되었다. 만주 3개년 치안 숙정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과 전면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후방의 치안이 안정되지 않고서는 효과적인 전쟁 수행이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만주의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동북항일연군을 완전 소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군이 그런 계획을 세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공산주의 세력이 산발적으로 무기를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만 해도 그것이 무장세력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도처에서 무기 탈취 사고가 빈발하더니만 유격대라는 무장 조직이 돌출하기 시작했고, 거기다가 마적 떼들까지 합세하면서 항일 무장 부대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들의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1934년부터 3년. 그들을 괴멸 상태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괴멸된 것이 아니라 넓은 만주 땅을 이용하여 장소를 이동해 가며 오히려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그 둔갑술이 바로 동북항일연군이었다. 그들을 섬멸해 버리지 않으면 그들의 세력은 갈수록 커져 만주가 불안해질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적들의 가운데 놓여 협공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문제는 동북항일연군 내에서 발휘되는 조선사람들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도록 크다는 점이었다. 만주의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그 조선사람들에 의해서 조선의 치안까지 불안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급선무는 동북항일연군을 박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은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일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만주의 일본군들이 자연히 감소하고 토벌전에 투입되는 병력도 줄어들 것이므로 상황은 항일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나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일본군은 막대한 병력을 토벌에 투입했다.
일본군이 겨울에 토벌을 시작하는 데도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일본군이 구사해 온 토벌작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차단 작전이었고, 둘째는 초토작전이었다. 차단 작전이란 민간인들과 항일연군이 접촉을 못 하도록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 바로 집단부락 조성이었다. 그리고 초토작전이란 항일연군의 유격근거지는 물론이고 그들의 활동에 도움이 되는 산간 부락이나 무엇이든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작전을 병행하면 항일연군은 식량 같은 것을 지원받을 수 없이 고립되는 동시에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계절까지 겨울이 되면 산에 나뭇잎들은 다 떨어져 노출은 심해지고, 혹한 속에서 먹을 것도 없고 은신처도 없고, 더구나 눈 위에 발자국까지 찍혀 추적당하기 쉽고, 이중. 삼중고에 몰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항일연군 제1로군의 활동지역에 우선적으로 병력을 집중 투입시켰다. 그 이유 또한 확실했다. 제1로군의 주축이 바로 초기 유격대인 동북인민혁명군이었고, 그래서 조선사람들이 제일 많은 부대였으며,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활동무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11월의 산간 지역은 영하 30도가 예사였다. 그 혹독한 추위 속에 항일연군 제1로군 전체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제1로군의 편제는 제1군과 제2군으로 나뉘고, 그 아래 각각 3개사가 제1사에서부터 제6사까지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사 아래는 3개단이나 4개단이 배치되었다. 제1로군 군장은 중국인 양정우였다.
방대근은 제1군 제3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제3사 사장이 전사하면서 그 자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공세가 날로 심해져 가는 상황에서 특무공작대의 임무보다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상부에서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특무공작대 활동은 6개월 전에 중단되었다. 특무공작대가 해산되면서 이광민은 제3사 2단장 직책을 맡았다. 보천보전투로 항일연군의 사기를 높인 김일성은 제2군 제6사의 사장이었다. 방대근은 휘하부대의 비상태세 점검을 마치고 후방대를 찾아갔다. 그냥 전투에 나서기는 후방대의 마음쓰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후방대도 평소와 달리 긴장되어 있었다.
"아이고, 우리 대장님 오시었소?"
화들짝 반가워한 것은 필녀였다. 필녀는 꼭 우리 대장님이라 호칭했고, 반농담 삼아 존대를 쓰는 것이었다.
"무고허신게라?"
방대근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먼, 요리 씽씽이허구만요, 대장님."
필녀는 스스럼없이 방대근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악수는 필녀가 원해서 하게 된 것이었다. 자기도 어엿한 항일연군 대원인데 여자라고 차별해서 악수를 하지 않는 거냐고 따졌던 것이다. 그건 농담이 아니었고, 필녀는 다른 지휘관들에게도 거침없이 그런 말을 했다. 필녀는 항일연군 대원이라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자신도 남자 대원들과 똑같이 대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글을 몰라 사상학습은 영 싫어하면서도 남녀평등만큼은 용케도 잘 터득했다고 해서 필녀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고 또 유명해지기도 있다.
"누나도 별일 없소?"
방대근은 누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하먼, 어찌 틈이 있었는갑네?"
수국이는 동생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삼봉이넌 어쩌요?"
방대근은 통나무를 잘라 그대로 쓰는 걸상에 앉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이, 잘허고 있구마."
"잠 불러오먼 좋겄소."
"그러제."
수국이는 동생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돌아섰다. 비상령이 내려 짬을 내기가 어려울 텐데도 조카를 보려고 일삼아 와준 것이었다. 수국이를 뒤따라 들어온 오삼봉은 방대근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 절도 있는 동작은 외삼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을 대하는 군인의 태도였다. 그런 오삼봉의 얼굴이며 코끝은 추위로 벌겋게 얼어 있었다. 왼쪽 손에는 개털벙거지가 들려 있었다.
"근무허고 있었드냐?"
방대근이 경례를 받고 나서 물었다.
"예."
"으쩌냐, 첨 당허는 삼동이."
"젼딜 만허구만요."
오삼봉은 여전히 군인식 대답이었다.
"그려, 일로 편허니 앉그라."
방대근이 엷게 웃으며 통나무걸상을 가리켰다. 오삼봉은 어려워하며 통나무걸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첨이라 고상이 괼 거이아. 군산이야 어디 얼음이나 지대로 얼드냐. 동상 안 걸리게 조심히야 혀. 여그서넌 동상이 큰 병잉게."
방대근이 정답게 말했다.
"예에......"
"집 생각 안 나냐?"
"예, 괜찮허구만요."
"그려, 장허다. 여그서넌 잡생각 없애는 것이 질이다. 총은 인자 잘 쏘냐?"
"예, 안직 그냥......"
오삼봉은 어색하게 웃으며 이모 수국이를 쳐다보았다.
"이, 배운 사람이라 긍가, 다 늦어 압록강 넘어온 독헌 맘이라 긍가 총얼 아조 잘 쏘드랑게. 쏘았다. 허먼 직방이다요."
필녀가 거들고 나섰다.
"허먼, 그래야제. 총 잘못 쏜ㄴ 군인이야 군인이 아닝게."
방대근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조카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근디, 요분에 나스는 왜놈덜 수가 굉장허다고 허든디, 참말이다요?"
필녀가 물었다.
"으째, 겁나요?"
방대근이 빙긋 웃었다.
"이, 간이 콩알만히져 부렀소."
필녀는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얼맨지넌 당해 봐야 알 일인디, 이 산중서 또 포위작전얼 쓸 것잉게 그 수가 많기넌 많을 것이오."
"왜놈덜 수가 많으먼 그만치 싸우기가 에로울 것인디 우리넌 어째서 뒷전으로 밀쳐놓는다요. 여자라고 깔보는갑는디, 우리도 새로 다 사격훈련 받았겄다, 백짓장도 맞들먼 낫다는 말 안 있습디여? 우리도 써도라고 우에 말 잠 안 히줄라요?"
필녀는 또 그 말을 했다. 필녀는 후방대에서 피복이나 만들고 있는 것이 영 마땅찮았던 것이다. 송수익 선생의 유언대로 자신도 싸우고 싶었던 것이다.
"여자라고 깔보는 것이 아니고 후방대 일도 총 들고 싸우는 것이나 똑겉이 중허구만요. 후방대가 없으먼 이 삼동에 우리 대원덜언 싸우기 전에 다 얼어죽어불 것 아니겄소."
"아이고메, 또 그 소리. 학습헐 때 귀가 닳게 들어서 인자 씬물이 나요."
"그러고 말이요 이, 사태가 다급해지먼 마다고 혀도 총 들고 나스라고 헐 것잉게 그간에 사격연습이나 잘 혀두시게라."
방대근은 지휘관답게 의연하고 진중하게 말하고 있었다.
"글먼, 그런 때가 오먼 나럴 첫찌로 뽑아줘야 허요 잉!"
필녀는 '잉'에다가 된 힘을 썼다.
"예, 그때 가서 꽁지나 빼지 마씨요."
방대근이 씨익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하이고, 나가 여장군 되는 것이 무서와 발써보톰 저런 소리 허네."
필녀가 제까닥 받아넘겼다.
옆에 있던 다른 여자들까지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자아, 다덜 몸조심허시고......"
방대근은 둘러선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밖으로 나갔다. 오삼봉은 이모 옆에 서서 눈 속으로 빨리 사라져 가는 외삼촌을 지켜보고 있었다.
"니넌 넘도 아닌 외삼춘얼 어찌 그리 에로와허고 그러냐. 역부러 니럴 볼라고 오신 것인디."
필녀가 오삼봉의 등을 철퍽 쳤다.
"맘언 안 그러디 뵙기만 허먼 하도 엄허시고 높아서......"
얼굴이 붉어지며 오삼봉이 어물거렸다.
"그렇제, 하도 오래 못 만내고 살아논게......"
수국이가 조카의 등을 어루만지며 안쓰러운 웃음을 지었다. 수국이는 조카의 얼굴 그 어딘가에서 아련하게 언니를 느끼고 있었다. 오삼봉은 이모와 헤어져 막사로 돌아가며 또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공허 스님은 돌아가신 게 분명했다. 바로 얼굴을 마주 대한 거리에서 총소리가 그리 요란했으니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공허 스님이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였다. 공허 스님이 되돌아가시지 못했으니 어머니가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절에서 공허 스님이 돌아오시기만 기다리고 계신지, 어디 딴 데로 옮기셨는지...... 돌아오시지 않는 공허 스님을 기다리며 어머니는 얼마나 애가 타실 것인가...... 공허 스님이 변을 당하신 일이며, 자신은 무사하다는 자초지종을 전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그럴 방도가 없었다. 외삼촌이나 이모에게 그 일을 의논해 보고도 싶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날마다 총상 입은 대원들이 실려 오는 이 유격근거지 밀영에서 그런 걱정은 하찮고 우습게 보이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오삼봉은 그때의 기억으로 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내빼! 산으로 내빼!"
지금도 공허 스님의 외침이 쟁쟁이 들리고 있었다. 총소리에 쫓겨 무작정 뛰었다. 산속으로 내닫다 보니 날이 밝아왔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첩첩산중이었다. 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압록강 건너 산중에 독립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공허 스님의 말 한마디가 생각날 뿐이었다. 산으로 내빼라던 공허 스님의 외침은 당장 위험을 피하라는 뜻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영범의 생각도 같았다. 독립군을 찾아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걸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배를 채웠다. 밤이 되어오는데도 깊은 산속 그 어디에서도 독립군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군에게 잡힐 위험에서는 벗어난 것 같아서 바위틈에서 잠이 들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놀라 서너 번이나 잠을 깨었다. 그 울음소리들 중에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있었다. 그전에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쇳덩어리가 맞갈리듯 으르렁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전신에 오싹 소름이 끼치며 저것이 호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날이 밝아 또 물로 배를 채웠다. 다시 하루종일 산속을 헤맸다. 그러나 독립군은 만날 수가 없었다. 꼬박 이틀을 굶고 산속을 헤맨 탓에 너무 기진맥진해서 곧 잠에 빠져들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깨지도 않았다. 날이 밝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산굽이를 두 번짼가 돌았을 때였다. 총을 들이댄 너덧 명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이 아닌 그들은 한눈에 독립군이었다. 너무 반가워 그들을 얼싸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냉담했다. 아니, 이쪽을 완전히 죄인 취급했다. 어느 산골짜기 밀림 속에 없는 듯 숨어 있는 독립군 밀영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봇짐을 풀어헤쳐 인삼이 나오고서야 몸에 먹을 것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서도 그저 독립군 찾는 데만 온통 정신이 쏠려 인삼은 까맣게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독립군이 조사하는 것은 밀정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쪽을 일단 인삼 장수로 가장한 밀정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만주 땅에 오게 된 내력을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를 꾸며 독립군에 침투하기 위한 첩자로 단정했다. 그 어떤 말도 믿어주지 않고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
각했다. 생각다 못해 끄집어낸 것이 외삼촌 방대근이며 지삼출 아저씨였다. 그들이 모두 독립군이니 만나게 해달라는 말에 조사관의 기색은 좀 달라졌다. 열흘 가까이 움막에 갇혀 지냈다. 밥은 하루에 두 끼, 수수밥이나 조밥이었다. 된장국에 반찬은 짠지거나 산나물 한 가지씩뿐이었다. 그건 독립군들이 먹는 것 그대로라고 했다. 그 놀라움은 너무나 컸다. 그렇게 먹으며 독립투쟁을 하다니......, 그건 고향의 가난한 소작인들의 밥상만도 못한 것이었다.
어느 날 움막 앞에 나타난 것은 외삼촌과 이모였다. 그러나 자신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쪽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금방 서로 알아보았다. 외삼촌과 이모의 얼굴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공허 스님의 이야기를 하자 이모가 흐느껴 울었다. 그 울음이 너무 서러웠다. 외삼촌도 주먹으로 자꾸 눈물을 훔쳤다.
"시님께서 느그덜얼 살리고 돌아가신 것이다. 느그덜이 시님 모가치꺼정 다 해내야 쓴다. 알겄냐!"
그 부대를 떠나며 외삼촌이 한 말이었다. 군사훈련과 정신학습을 받고 배치된 곳이 후방대 경비소였다.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거치는 것이라고 했다. 사격 실습과 후방대 경계가 주임무였다. 그런데 독립군 부대에서 왜 그렇게 철저하게 조사를 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일본군들이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첩자나 밀정들을 침투시켜 기밀을 빼내 가고 지휘관을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오삼봉은 두 손을 입으로 불어대며 막사로 들어섰다. 불냄새와 함께 후끈하게 밀려드는 훈기가 달았다. 말로만 들어왔던 만주의 추위는 정말 지독스러웠다. 내리는 눈은 쌍이기만 하고, 해는 쨍하니 떴는데도 추위는 바늘 끝을 콕콕 쑤셔대고 모래로 박박 문질러대는 것처럼 살갗이 아프고 쓰라렸다. 뼛속까지 춥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1로군은 각 사 단위로 광대한 산악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사이를 연락병들이 연결시키고 있었고, 대부분의 전투는 사장의 독립지휘로 이루어졌다.
방대근은 부대를 이끌며 밀영을 출발했다. 그는 휘하의 각 단의 간격을 최대한 넓히며 북쪽으로 전진했다. 전선을 넓혀 적들의 포위 작전을 교란시키는 동시에 적들을 멀리서 막아 유격근거지와 후방대를 보호하자는 작전이었다. 이것은 1로군 전체의 기본 작전이었다. 일본군의 차단 작전에 따른 집단 부락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유격근거지의 확보는 바로 생
명선이었던 것이다. 일본군과 만주군들이 1933년 중반부터 추진하기 시작한 집단부락이란 한마디로 민간인들의 집단수용소고 감옥이었다. 집단부락은 마을의 크기와 현장의 형편에 따라 그 규모가 50세대. 100세대. 150세대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대체로 100세대 단위가 많았다. 집단부락은 그 구조가 일정했다. 다만 세대수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를 뿐이었다. 그 담은 안쪽에 있는 집들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높았다. 토담은 나무가 흔하지 않은 북쪽에서 많이 했고, 통나무 담은 나무가 흔한 남쪽에 많았다. 그 담의 사방에는 망루와 함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방을 경계함과 동시에 언제든지 포사격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방의 담 중앙에는 문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그러나 세 개는 폐쇄시키고 사용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정문에는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폐쇄되어 있는 세 개의 문은 유사시에 사용할 비상용이었다. 담을 따라서 또 하나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호였다. 그 구덩이의 폭은 어른이 두 팔을 벌려 닿지 않을 만큼 넓었고, 그 깊이는 어른의 키 두 길이 넘었다. 그러니 거기에 한 번 빠졌다 하면 그 어떤 장사도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구덩이를 따라 또 다른 설치물이 있었다. 그건 구덩이만으로는 부족해서 또 덧붙인 가시철조망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항일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 담 안쪽의 구조는 아주 삭막하고 살벌했다. 초소가 있는 정문에서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무실이었다. 그런데 정문에서 보이는 것은 길게 자리 잡은 건물의 옆면이었다. 그 건물은 사무실을 겸한 상주군인들의 막사였다. 그 건물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이 공회당이었다. 사무실과 공회당 사이에는 공동우물이 있었다. 사무실 외쪽 담 옆으로는 아주 큰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곡식창고를 겸한 무기 창고였다. 그 세 가지 건물을 제외한 땅에 주민들의 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사무실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는 집은 흔히 탄광촌이나 공사장에서 볼 수 있는 일직선의 바라크식이었다. 거기에 칸막이를 해서 열 세대나 열두 세대가 들게 되어 있었다. 그곳에 사는 100세대 사람들의 일거일동은 사방의 망루에서 내려다보면 손금보다 더 환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망루는 적의 기습을 탐지하는 동시에 부락민들을 감시하는 이중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부락민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상주하는 군인이나 경찰의 인솔 아래 단체로 일을 나갔고, 저녁때는 또 단체로 돌아왔다. 들에서 일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감시를 받았으므로 그 어떠한 개인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부락민들은 식량을 3일분씩 배급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마저 밖으로 빼돌리는지 어쩌는지 감시를 당했다. 그 곳식이 빠져나가 유격대에게 전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집단부락은 항일유격대가 활동하기 시작한 지역에서부터 만들어져 유격대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번져갔다. 그렇게 해마다 불어난 집단부락은 35년 말까지 4천 개가 넘었고, 동북항일연군이 만주 전역에 걸치다시피 결성되자 집단부락도 급증해서 36년 말에는 1만 개를 넘어섰다. 그리고 금년에 들어서도 계속 불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군은 그렇게 많은 집단 부락들을 만들어 차단 작전과 고사 작전의 효과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곡식을 와전 통제해서 군량미 확보는 물론 재정 안정을 꾀해 나갔던 것이다. 집단부락민들은 총부리 아래서 골빠지게 일해 수확이 얼마든 간에 3일분씩 배급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무도 그 부당성을 따지거나 항의할 수가 없었다. 잡혀가면 그만 종적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집단행동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담 사방에 설치된 포대가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집단 부락들은 모두가 그 속에 갇히게 된 부락민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총 들이댄 강압 속에 노임 한푼 없는 강제노동으로 자신들의 감옥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제3사 2단장 이광민은 산줄이에 에워싸인 분지에 이르러 부대를 정지시켰다.
"지금부터 분대별 산개합니다. 대원 여러분들은 첫째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둘째 학습과 실전을 토해 익혀온 4대 유격전법에 충실하여 용맹스럽게 싸워주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군은 우리 중국과 조선의 공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일심동체로 단결하여 기필코 왜적을 물리치도록 가일층 분발해 주기 바랍니다."
이광민은 짤막하게 훈시를 했다. 짧은 말속에서 일본이 중국과 조선의 공동의 적임을 또다시 강조했다. 그건 지휘관들이 수시로 환기시키도록 되어 있는 정신교육의 일환이었다. 왜냐하면 항일연군은 중국 사람들과 조선사람들이 혼합되어있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광민은 조선대원들에게 따로 상기시키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자제하기로 했다. 자칫 중국대원들이 서운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80명 중에 중국대원은 27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선지휘관이 조선대원들에게만 따로 격려를 하면 위화감을 느낄 염려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대원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입니다.
이 말은 너무 자극적일 수 있었다. 이광민은 그 말을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었다. 그 말을 송수익 선생한테서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 벅차고 황송했는지 몰랐다. 그 감동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용솟음치게 했고 목메게 했으며 자세를 흩트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도 늘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눈 덮인 산에는 솔바람 소리가 가득했다. 이광민은 분대별로 신속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4대 유격전법을 주문 외우듯 하고 있었다. 성동격서, 피실격허, 이정화령, 이령화정...... 소리는 동쪽에서 내고 정작 치기는 서쪽을 치며, 적세가 강한 것은 피하고 약한 곳을 노려서 치며, 치고 나면 흩어져 종적을 감추고, 필요할 때 다시 모여 세력을 이룬다. 이 유격전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적은 수로 많은 적과 싸우기 위해서 그전부터 독립군들이 유격전에서 써오던 전법이었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화력도 열세인 입장에서 그 전법은 최선의 것이었고, 효과도 컸다. 그런데 그 전법을 한마디로 줄이면 신출귀몰이었다. 대원들은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입지도 못하는 형편에 신출귀몰하는 기동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얼마나 힘이 들고 고생스러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광민은 눈밭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부하들을 보며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아프고 있었다. 항일연군 1개사는 2백여 명에서 3백여 명으로 부대에 따라 그 수가 조금씩 달랐다. 그 수에 따라 1개단은 80여 명에서 100여 명으로 편성되었고, 분대는 10명 내외로 짜여졌다.
쾅! 콰당! 쾅!
일본군은 박격포 공격을 앞세우며 밀려들고 있었다. 박격포탄은 중구난방으로 여기저기서 터져오르고 있었다. 두껍게 쌓인 눈을 파헤치며 터지기도 했고, 바위에 부딪혀 굉음을 내기도 했고, 나무들을 우지끈 부러뜨리며 작렬하기도 했다. 그런데 적정은 살피고 있던 이광민은 불길한 예감에 부딪쳤다. 적들의 수가 이만저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적들은 골짜기에서 등성이까지 아예 포위망을 구축해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포위망은 등성이에서 등성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전투를 치러왔지만 그 많은 수가 그런 식으로 포진한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겨울 동안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전개될 것이라는 정보는 이미 입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런 식으로 엄청난 병력이 투입되어 산 하나를 온통 둘러싸듯 해버릴 줄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여기 한 군데만이 아니라 큰 봉우리들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저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광민은 틀림없이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연락병을 사장인 방대근에게 띄웠다. 이쪽 상황을 알리고 작전 지시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이광민의 추측은 틀림이 없었다. 엄청난 병력이 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산줄기를 차단함과 동시에 포위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격포 공격을 앞세운 것은 유격대를 쫓아 포위망 구축을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제1로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을 뿐이지 얼마의 병력이 동원될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동원된 병력은 자그마치 3만을 헤아렸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후방대에 긴급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여자대원들에게도 총이 지급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병원이 이동하는 데 환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이고, 좀도 좋다. 인자 소원풀이혔네."
총을 받아든 필녀는 곧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것 같았다.
"......"
입을 꾹 다문 수국이는 두 손으로 총을 받쳐 잡은 채 그 어디인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광민은 열흘 사이에 부하 열아홉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2개 분대와는 연락두절이었다. 일본군의 끈질긴 장기전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본군은 병력만 어마어마하게 동원한 것이 아니었다. 전투도 전에 볼 수 없었던 장기전을 펴고 있었다. 전에는 길어야 이삼 일 정도 작전을 하고는 퇴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포위망을 구축한 채 모닥불을 피우고 횃불을 밝혀가며 야영을 했고, 다음날이면 포위망을 좁혔다가 다시 다른 산줄기를 타고 포위를 해오고는 했다. 1로군 부대들은 하나의 포위망을 벗어나면 다른 포위망에 걸려들고, 그것을 뚫고 나가면 또 다른 포위망에 둘러싸이는 형국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악조건에 처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장기전으로 대원들은 전부 식량이 떨어졌던 것이다. 예비식량은 3일치였고, 후방대까지 위협당하고 있어서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원들은 메마른 산열매를 따먹고 눈을 뭉쳐 먹어가며 사생결단 포위망을 뚫고 또 뚫어야 했다. 물론 이쪽만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었다. 공격할 때에는 수비보다 4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더구나 유격대와의 산악전투에서는 그 상식마저 통하지 않았다. 유격대의 특수전법으로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느 군대나 병력이 많을수록 기동성이 떨이지게 마련이었다. 포위망을 뚫기 쉽게 하고 포위작전을 교란시키기 위해 소조로 분산된 대원들은 기회만 생기면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그러니 일본군이 죽어가는 수는 이쪽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산비탈의 커다란 바위에 은신해 가며 포위망을 뚫은 이광민은 단 본부소속 부하 아홉을 이끌고 다른 골짜기로 빠지고 있었다.
"단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이광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원 두 명이 아람드리 나무 앞에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에는 무슨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게 뭔가?"
이광민은 급히 다가갔다.
"이거 왜놈들이 붙인 것 같은데요......"
한 대원이 어물거렸다.
투항 권고문
너희들은 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전원 몰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토벌작전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가망없는 저항을 포기하고 하루속히 투항하라. 투항하는 자는 일체의 잘못을 묻지 않으며, 처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후한 상금을 줄 것이며, 직장도 알선해 편히 살게 해 줄 것이다. 혼자도 좋고, 집단투항은 더욱 환영한다. 어서 빨리 결심하라!
투항 권고문은 한글과 한문 두 가지로 되어 있었다. 이광민은 그것을 확 잡아 뜯었다. 그리고 그것을 북북 찢었다. 그는 한두 번만 찢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부하들을 휘둘러보며 갈기갈기 찢어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