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3-4
16. 변하는 게 절기뿐이랴
상해는 분명 중국 땅이었다. 그러나 그 면모는 전혀 중국 도시가 아니었다. 황포강을 따라 즐비하게 솟아 있는 고층건물들은 하나같이 서양식이었다. 육중하면서도 호화로운 그 높은 건물들은 서로 뽐내듯 상해의 중심지를 채우고 있었다. 그 각양각색의 서양 건물들은 그저 그 느낌만으로 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 건물들의 크기와 높이만큼 구미 여러 나라들은 힘을 앞세워 다투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이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뒤늦게 일본도 세력을 확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해의 서양식 건물들은 영국풍이거나 프랑스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황포강에서 배를 타고 바라보면 상해는 영락없이 어느 서양의 도시였다. 제각기 독특한 외양으로 호화롭게 치장된 건물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노을이 지는 황포강에 그 건물들이 흐릿하게 비치는 풍경은 퍽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좀 아쉬운 감이 있다면 황포강의 물이 너무 누른빛으로 탁하다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도 이렇게 크고 호화로운 도시는 그리 흔하지 않지요."
서양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구미 여러 나라들이 중국 대륙을 집어삼킬 욕심으로 발판 삼아 앞다투어 일으킨 도시. 서로 경쟁을 하다 보니 중국 제1의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 상해였다. 그래서 상해에는 각 나라의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들이 저마다 소도시를 이루듯 하고 있었다. 상해에 <국제도시>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여진 것이 그 까닭이었다.
방대근은 프랑스 조계의 공원 언덕배기에서 황포강의 먼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포강의 그 먼 줄기는 바로 양자강이었다. 황포강이 굽이치며 양자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상해는 자리 잡고 있었고, 황포강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린 양자강은 바다 쪽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폭파나 암살 임무가 아니기는 하니까. 아직 그놈을 잡아죽이지 못했으니 꼭 살아 돌아와야지. 조직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렇고...
방대근은 입을 더 꾹 다물며 된 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공글리며 방대근은 수국이 누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국이 누나를 생각하면 연달아 어머니가 떠올랐다. 수국이 누나나 어머니는 늘 눈물이고 한이었다. 송수익 선생을 따라 북경에 온 누나는 배가 불러 있었다. 뜻밖에 누나가 불쑥 나타난 것도 큰 놀라움이었고, 임신을 한 것은 더 큰 놀라움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마음을 닫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어, 엄니넌, 엄니넌"
도무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사연이 기네. 이따가 차차 이야기 듣게나. 자넨 그간 무고한가?"
송수익 선생의 침통한 말이었다. 파리하고 근심 깊은 얼굴로 누나는 느껴 울기만 했다. 한 손으로는 부른 배를 가리듯 하고 있었다.
"내 생각도 그렇고, 자네 누님 생각도 그렇고, 자네가 새로 시작한 일에 방해가 될까 봐 그간에 소식 안 전하고 있다가 내가 북경 오는 길에 동행하게 된 걸세."
"무신 안 좋은 일이 생겼능게라?"
"아닐세,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같은 분들하고 급히 상의할 방략이 있어서."
"그분들이면 혹시 무정부주의에 대한 상의가 아니신 게라?"
"어허, 자네가 어찌 그리 쪽찝게 무당인고?"
"예, 그분네들은 저희 단체허고도 연통이 되고 있구만요."
그날 밤늦게까지 누님이 당하고 겪은 이야기를 들으며 울분과 눈물을 함께 씹어야 했다. 어머니의 횡사도 횡사였지만 그 등짐장수가 밀정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 뜻밖이었다. 그놈의 악랄함에 치가 떨렸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놈의 흉계로 누나만은 살아난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왜놈들의 무차별 학살에 휩쓸려 누나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딴맘 묵덜 말고 악착시리 살아야 허네 이. 나라 되찾으먼 엄니 뫼시고 고향 땅에 가야 헝게. 엄니럴 아부지 옆에 뫼셔얄 것 아니겄어."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 송 선생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누나에게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밀정 양치성이라는 놈이 어찌 되었을지 께름칙했던 것이다. 누나가 칼로 찔렀다고는 하지만 죽은 것을 분명히 확인하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의 서투른 솜씨인 데다가, 두려움 속에서 저지른 일이었다. 만약 그놈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면 그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누나한테 보복을 가할 것이었다. 행동의 제약을 피해 어머니 산소에는 누나와 동행하지 않았다. 처음에 누나는 막무가내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송 선생까지 나서서 만류했다. 그 쪽은 왜놈들의 감시가 더 심하고, 임신한 몸으로 오가기에는 넘 멀고 힘들다는 이유를 댔다.
"그려, 나도 요 꼬라지 혀갖고 엄니 뵐 면목이 없응게."
누나의 울먹임이었다. 어머니의 산소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벌초를 하는 동안 줄곧 눈물이 쏟아졌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험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한평생이 한으로 사무쳤다.
"나가 인자 한시상 봤다 와!"
자신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을 때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 감격스러워했던 모습이 너무나 선하게 떠올랐다. 그 길이 출세도 아니었고 돈벌이도 아니었는데도 어머니는 그리도 흡족해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한세상 봤다고 기뻐한 것은 어서 나라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산소를 떠나 국자가로 숨어들었다. 어둠을 밟으며 동경 사회를 찾아갔다. 의열단원이 하는 상점치고는 그 상호가 아주 그럴듯한 위장이었다.
"그놈이 살아 있소."
다음날 늦게 상점 주인이 알아온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원산경찰서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밀정 노릇을 끝내고 정식 경찰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단칼에 죽여없애려고 했던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누나에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송수익 선생과 지삼출 아저씨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누나의 신변을 부탁했다. 언제 다른 밀정 놈이 나타나 누나를 해코지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 뒤로 활동거점을 상해로 옮겼고,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하는 투쟁에 쫓기느라고 누나는 더 만나지 못했다. 이따금 편지를 주고받으며 수국이 누나의 기구하고 가엾은 팔자에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어이 대근이, 거기서 혼자 뭘하나."
방대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윤주협이가 경쾌한 곡조를 휘파람으로 불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몸에 꼭 맞는 짙은 갈색 양복에 기름 바른 머리를 매끈하게 빗어넘긴 그의 몸에서는 탄력이 넘치고 있었다. 아주 세련된 멋쟁이였다.
"사진 박을라면 얼렁얼렁 나올 것이제 어째덜 굼벵이걸음이여."
방대근은 구시렁거리듯이 말했다. 방대근의 차림도 윤주협 못지않았다. 회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었고, 넥타이는 빨간색이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에서는 자르르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검정 구두도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보통을 넘는 키에 균형 잡힌 체구, 나이 듬직한 번듯한 얼굴에 양복 차림은 아주 잘 어울렸다.
"사진사 데리고 곧 올 거네,. 헌데, 자네 기분 안 좋은 일 있나? 아까 저격연습에서도 총이 빗나가고 말야."
사람 좋게 생긴 인상에 비해 눈초리가 매서운 윤주협이 방대근을 빠르게 훑었다.
"아니, 그럴 일 없는디.."
방대근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이번 일이 마음에 걸리는 것 아닌가? 기분 좋지 않으면 내가 단장님께 말씀드릴까?"
"이 사람아, 그런 실답잖은 소리 말어. 하도 오랜만에 고향 땅으로 가게 된께 맘이 잠 싱숭생승헌 것이제. 자네넌 암시랑토 안혀?"
방대근은 아까의 생각들을 지우려고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자넨 나보다 더하겠지."
윤주협은 남달리 불행한 방대근의 가정사를 헤아리며,
"전라도 말을 죽어라고 안 고친 자네 고집이 이번에 아주 쓸모를 발휘하겠구먼."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글씨, 그간에 서울말 숭내냄서 살았드라도 고향 땅 밟으면 고향 말 지절로 나와지는 것 아니겄어?"
방대근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자네 혹시 쏘냐하고 약속해서 먼저 나온 것 아닌가?"
방대근의 울적한 기분이 전환되는 것 같지 않아서 윤주협은 다시 쏘냐의 이야기로 바꾸었다.
"자네넌 민수희 만내기로 혔는갑제?"
방대근이 씨익 웃으면서 윤주협의 마음을 꿰뚫듯 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아, 남 화 지르지 말어. 쏘냐야 자넬 미치게 좋아하지만 민수희야 내가 미치고 돌아가지 내 뜻대로 안 되는 걸 잘 알잖나."
윤주협은 화가 난 척 목청을 돋우었다.
"걱정 말소. 러시아 여자허고 조선 여자 차이닝게 러시아 여자덜언 속이고 거죽이고 항께 뜨거운디 조선 여자덜이야 속언 뜨거와도 거죽언 냉랭허덜 안혀. 민수희도 자네가 새 임무로 상해럴 뜨는지 알먼 거죽꺼정 화끈 뜨거와질 것이네."
"모르겠어, 서울내기라 그러지 유식해서 그런지 영 깐깐한 게 우리 의열단원식 열애에는 어울릴지 않는 여자야."
윤주협은 실의에 찬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허, 자네야말로 의열단원 기개 얻다 두고 그런 소리여. 민수희 전력 잊어부렀어! 그 여자가 3.1만세 주도혔다가 이 상해로 내뛴 인물 아니여. 가심에 피가 펄펄 꿇는 여자가 바로 그 여자란 말이시."
"그렇기는 하지. 저기 사진사를 데리고 오는구만."
방대근과 윤주협은 언덕배기의 완만한 경사를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저쪽에서는 하나같이 몸에 꼭 맞는 양복을 입은 예닐곱 명의 멋쟁이들이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활달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자네들 둘이서 애인 만나려고 뺑소니쳐 버린 줄 알았네."
그들 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저런 못난 사람들 같으니. 애인 품고 재미 볼 시간도 없는데 여기서 뭘 기다리고 그래."
다른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맘은 다 콩밭에 가 있겠지."
또 다른 목소리였다.
"다 알면서 왜들 이리 늦게 와. 여기 붕대 감아둔 지가 언젠지 알어?"
윤주협이 사타구니를 훔쳐 보이며 맞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그만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활달하고 쾌활한 모습에서는 젊은 건강미가 넘치고 있었다. 두어 시간 전에 저격연습을 하면서 하나같이 긴장하고 날카롭던 모습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훈련이나 운동을 할 때는 더없이 심각하고 치열했다가도 옷을 갈아입고 쉬게 될 때는 전혀 딴사람들처럼 명랑하고 유쾌하게 변했다. 그들은 긴장과 이완을 신기하게 조화시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건 의열단원들의 전통적이고 규율화된 생활 태도였다. 그런 신축성 있는 생활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폭탄으로 내던져야 하는 특별한 임무를 언제나 수행할 수 있도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최상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숲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방대근과 윤주협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다른 사람들이 양쪽 옆으로 섰다. 오늘의 주인공은 가운데 선 세 사람이었다. 삼발이 위에 사진기를 받친 사진사가 검은 천을 둘러쓰고 사진기를 조절하는 동안 그들은 언제 떠들고 웃어댔나 싶게 심각해져 있었다. 아니, 그들의 얼굴은 모두 비장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진은 단순히 훗날의 추억을 위해 찍는 것이 아니었다. 의열단원들은 동지들이 새 임무를 맡아 떠날 때마다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데 그 기념촬영 거의가 영원한 이별이 되어왔던 것이다. 5년의 세월 동안 3백여 명이 사진만 남겨놓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이번에 찍는 사진이 죽기 전에 마지막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아, 찍습니다!"
사진사가 왼팔을 치켜들며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그건 프랑스 말이었다. 사진사 하나에서도 프랑스 조계라는 표가 금방 났다. 사진사의 외침에 따라 그들의 몸은 일시에 차려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 비장감 넘치던 얼굴에는 긴장된 엄숙함이 서렸다.
"하나, 둘, 셋!"
사진사가 고무줄에 연결된 고무 주머니 셔터를 누르며 왼팔을 뿌리치듯 내렸다. 사진사가 사진기를 거두는데도 그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저 아가씨들 누구야? 혹시 자네들이 애인 불러낸 것 아닌가?"
누군가가 앞쪽을 손가락질하며 가운데 선 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목소리는 쾌활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저쪽 건너편 벤치에서는 서너 여자가 아까부터 사진 찍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속 없이 대낮에 애인을 왜 불러내. 자네들 불알 낚으러 온 낚시꾼들 아닌가. 조심들 하게나."
담배를 빼 드는 윤주협의 엉뚱한 대꾸였다.
"잉, 마침 잘되았다. 내 것 싸구려다, 싸구려. 다덜 이리 오니라."
방대근이가 그 말을 받고 나섰다. 그들은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들은 침울하고 울적해진 분위기를 몰아내고 있었다. 사진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찍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사진사를 밖으로 불러내 찍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젊은 멋쟁이들이 공원에서 자주 사진을 찍어대니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었다. 의열단원들은 겉모습만 말쑥하고 멋지게 차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틀 잡힌 건강한 체구에 농담을 잘하면서도 예의가 발랐고, 톨스토이를 비롯한 문학이며 신사조 같은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죽음을 늘 눈앞에 두고 사는 사람들답게 언행이 거침없고 화통했다. 그런 그들을 선망하고 동경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제각기 다 사연을 지니고 상해에 와 있는 조선 처녀들치고 의열단원들을 연모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특히 블라디보스톡 쪽에서 온 아가씨들은 의열단원들을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러시아인과 조선인의 혼혈인 그 아가씨들은 서양적인 아름다움에다가 조선인의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인의 개방적인 열정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가씨들은 의열단원들과 짧으면서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로 소문나 있었다. 의열단원들은 자기들이 젊은 아가씨들에게 그렇듯 인기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열렬하게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건 죽음이 닥치기 전에 맘껏 젊음을 불태우며 짧은 인생을 즐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방탕하게 흐를 수는 없었다. 연애는 얼마든지 자유였지만 빈틈없이 짜여진 나날의 조직 생활이 방탕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같이 수영 정구 달리기 같은 운동을 했고, 투쟁 활동을 위해 저격연습 폭파술 격투기 같은 훈련을 했다. 그리고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독서와 토론을 전개했다. 그야말로 지. 덕. 체를 갖추자는 조직 생활이었다. 연애는 그런 일과를 끝낸 다음에 얻어지는 자유였다. 의열단원들은 입단과 동시에 죽기를 맹세한 사람들이었다. 그 맹세를 따라 죽어간 사람이 벌써 3백여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젊은 나이에 조선에서 일본에서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왜적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총을 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잡혀서 총살을 당한 것이었다. 목숨을 내놓은 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짧은 삶을 여한 없이 살라는 듯 조직에서는 비싼 양복이며 구두 같은 것을 아낌없이 해 입히고 사 신겼다.
"자아, 자네들 셋이는 이제 애인이나 만나 재미 보게나 이별주는 이따 저녁에 마시기로 돼 있으니까."
방대근 윤주협 이상태를 남겨놓고 나머지 젊은이들은 자기들끼리 떠났다. 모레면 상해를 떠나야 할 세 사람에게 그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자네들 약속했나?"
머리가 작은 듯하면서 차돌 같은 인상인 이상태가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씨익 웃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의 몸은 단단하면서도 날렵해 보였다.
"자넨 한 모양이군?"
윤주협이 마주 웃었다.
"인생은 짧고 사랑은 뜨겁다. 뜨거운 사랑은 식혀야지."
"얼렁 가보드라고, 가심 디는디. 나도 가심 식히로 가야 쓰겄네."
방대근은 이상태의 등을 밀었다. 이상태는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평양에서 학생대표를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상해로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그는 대동강 철교를 폭파하려다가 사전에 탐지되어 실패하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가 승한 평양 출신답게 유아세례를 받았다면서도 기독교를 버린 사람이었다. 무정부주의니 공산주의 같은 물결에 휩쓸리면서 일으킨 변화였다.
"자네넌 어쩔 심판이여?"
방대근이가 놀리듯 한 표정으로 물었다.
"빌어먹을, 쏘냐 같은 연해주 쪽 여자하고 배를 맞춰야 하는 건데 영 잘못했어. 지금 병원에 찾아가 봐야 뭘 하겠어"
간호학교 출신인 민수희는 병원에 근무 중이라서 만날 수가 없다는 윤주협의 불만이었다.
"어허, 가서 모레 떠나게 되았다고 말얼 척 걸쳐보드라고. 글먼 아이고메 서방님 험스로 치매 훌쩍 걷어올릴란지 누가 알어 춘향이도 이별 앞두고 잠자리 핀 것인디."
"이따가 병원일 끝나고 만나기로 전화해 뒀네. 자네 쏘냐한테 가나?"
윤주협이 방대근의 눈치를 살폈다.
"워째, 심심헝게 동무허자고?"
"흐흐, 쏘냐 집에 가서 브랜디 한잔 얻어 마시면 안될까?"
"쏘냐헌티 미움 사는 것이야 나가 알 바 아니네 이."
"그야 걱정 말게. 내 수완이 손오공 수완 아닌가."
그들은 담배 연기를 날리며 걷기 시작했다. 길이며 잔디밭은 물론이고 키 큰 나무들까지 잘 손질된 공원에는 서양 아이들이 명랑하게 뛰어놀고, 서양 남녀들도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다 프랑스사람들이었다. 프랑스풍으로 꾸며진 공원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넓기도 무척 넓었다. 그 넓이는 곧 프랑스 조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프랑스 조계가 없었더라면 우린 어찌 됐을까?"
윤주협이 새삼스럽다 싶은 말을 불쑥 꺼냈다.
"왜, 여그 다시 못 올 상싶어 감개가 새로와진가?"
"글쎄, 나도 모르게 정이 든 모양이네."
"이 구역이 없었으면 임정이고 의열단이고 상해에 발얼 못 붙이고 딴디에 있었겄제."
"하이, 동지!"
어떤 서양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며 큰길가에 나선 그들에게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헤이, 마르틴!"
방대근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저 낙천가가 왜 저리 바뻐?"
윤주협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르틴은 독일인이면서 의열단 단원이었다. 폭탄제조 기술자인 그는 월급을 받는 유일한 단원이기도 했다. 상해의 그 어딘가에 분산되어있는 12군데의 비밀 폭탄 제조소가 그의 일터였다. 그 12군데가 어디인지 일반 단원들은 알지 못했다. 독일인이면서 독일인과 일본인을 끔찍이 싫어하는 마르틴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조선말이 <동지>였다. 그는 조선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했고, 테러리스트들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마르틴이 애지중지하며 상해가 좁다 하고 몰고 다니는 오토바이도 의열단에서 사준 것이었다. 일의 기동성을 겸한 격려의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쏘냐의 집은 프랑스형 연립주택 2층이었다. 방 한 칸을 세내어 살고 있었다.
"왜 이리 늦었어요. 딴 여자한테 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문을 열자마자 방대근의 목을 끌어안고 덤비는 쏘냐의 말이었다.
"그렇잖아도 딴 여자한테 가려는 걸 내가 쏘냐한테 끌어왔소."
윤주협이 이렇게 말하며 자기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어머, 윤주협 씨. 그런 거짓말 하면 쫓아낼 거예요."
쏘냐는 쪽 소리가 나게 방대근의 볼에 키스를 하고는 그 크고 푸른 눈으로 윤주협을 흘겼다.
"저런, 저런, 또 말을 잘못하네. 그런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농담이라는 거요, 농담."
윤주협이 넉살 좋게 말했다.
"또 선생님 노릇 하지 말고 어서 들어오기나 하세요."
쏘냐는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아리따운 서양 여자의 얼굴에 피어나는 그 웃음은 화려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혼혈아들이 거의 그렇듯 쏘냐도 혼혈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크고 푸른 눈이며, 오뚝하게 솟은 코, 윤곽 뚜렷하게 도도록한 붉은 입술, 투명하게 하얀 피부가 의심할 데 없는 서양 여자였다.
그런데 윤기 흐르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검은빛이었다. 쏘냐는 아버지가 러시아사람이고 어머니가 조선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가난해 상해로 돈벌이를 온 것이었다. 서너 달 전에 방대근과 눈이 맞은 것은 쏘냐가 일하는 바에서였다. 쏘냐는 외모와는 달리 조선말을 잘하는 데다가 일본 사감을 아주 미워했다. 방대근은 그런 쏘냐에게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다. 연해주 쪽에서 온 쏘냐 같은 혼혈아들은 꽤나 많았다. 그 여자들은 거의가 바나 카페 같은 데서 돈벌이를 했다. 그 외모와 헐한 임금 때문에 프랑스 술집들은 그 아가씨들을 환영하는지도 몰랐다. 그 아가씨들은 대부분 예쁘고 아름다우면서도 지성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그녀들은 이상하게도 조선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러니 젊고 건장한 멋쟁이인 의열단원들과 연분이 많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쏘냐, 애인 얼굴이나 많이 봐두시오."
독한 술을 한 모금 삼킨 윤주협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술잔을 입에 대려다가 도로 떼며 쏘냐가 큰 눈동자를 굴렸다.
"며칠 후에 이 사람도 나도 상해를 떠날 거요."
"피이, 또 농담이군요."
쏘냐가 눈을 흘겼다.
"아니, 정말이야."
방대근이 대꾸하고는 술잔에 남은 술을 다 비워버렸다.
"어머, 어쩌면 좋아요."
쏘냐는 술잔을 놓고 발딱 일어서더니,
"그런줄 알면서 왜 오셨어요. 방해하지 말고 어서 가세요, 어서."
그녀는 거침없이 윤주협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니, 아니, 남은 술은 마시고 가야지 이런 법이 어딨소."
윤주협이 과장되게 소리 질렀다.
"어서 애인 찾아가면 되잖아요."
쏘냐는 정말 윤주협의 등을 떠밀었다.
"긍게로 입조심허란 것 아니여."
방대근이 쿡쿡 웃고 있었고, 술잔을 빼앗긴 윤주협은 쫓겨나가고 있었다.
"오우, 안돼요, 안돼요."
쏘냐는 서양사람 특유의 몸짓을 지으며 방대근에게로 내달아왔다. 얇은 분홍빛 원피스에 감싸인 쏘냐의 풍만한 육체를 받아안으려고 방대근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방대근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쏘냐는 뜨거운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잘깃거리는 자극과 함께 꽃향기 같기도 하고 광일향기 같기도 한 쏘냐의 냄새에 취하며 방대근은 원피스 등뒤의 단추를 따내렸다.
"며칠 남았어요?"
쏘냐는 방대근의 넥타이를 풀며 물기 젖은 소리로 물었다.
"곧 떠나."
"어디로 가는데요.."
"아직 몰라."
"언제 오나요."
"나도 잘 몰라."
"오우, 다이링!"
쏘냐는 흑 울음을 터뜨리며 방대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끝까지 쏘냐에게 떠나는 날짜도 가는 곳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건 생명과 다름없는 조직의 규율이었다. 방대근과 윤주협은 밤배를 탔다. 그들은 중국 상인의 졸개들로 변장하고 있었다. 중국 상인의 보호를 받으며 인천항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평양 출신인 이상태는 진남포로 가는 다른 배를 타고 있었다. 휘황하던 상해의 불빛이 어둠 속으로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리자 밤바다를 뒤덮은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하늘 가득한 별들만 더욱 말게 반짝이고 있었다. 방대근은 무수한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한정으로 크고 둥근 하늘에 처지도록 매달린 별들이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저런 하늘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아, 대평원의 하늘과 넓은 바다의 하늘은 같구나!
방대근은 그때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러시아국경을 넘어갔다가 만주로 되돌아오며 올려다보았던 하늘. 그 어디인지 모를 넓고 넓은 만주 땅에 동료를 묻고 걷고 또 걷다가 지쳐 쓰러져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찌 그리도 별들이 많았던가. 그 별들은 이상하게도 서럽고 슬펐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앞길의 막막함과 절망스러움이 눈물을 따라 깊어지고 있었다. 정말 우리나라가 독립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일까. 총을 들고 나선 후로 처음 생긴 의문이고 회의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서워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앞에는 신흥무관학교 선생님들의 엄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송수익 선생과 지삼출 아저씨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처럼 지금 마음도 무겁고 어두웠다. 일본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어찌해야 일본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장도가 무사하기를 빌겠소. 모두 무리하지 마시오. 더 이상 무모한 회생을 해선 안 되오. 생명보존이 첫째임을 다같이 명심하시오."
떠나기 직전 술 한 잔씩을 나누며 단장 김원봉이 한 말이었다. 방대근은 같은 또래인 김원봉의 말을 되짚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의열단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내포되어 있었다. 단원들도 의열단의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뭘하나. 쏘냐 품속을 그리워하고 있나?
윤주협이 중국말로 너스레를 떨며 다가섰다. 중국 옷을 입은 만큼 철저하게 중국인 행세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배 안에 박혀 있을 일본 경찰의 끄나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자네 속 짚어 남의 속이군. 그나저나 처녀를 버려놨으니 어쩔 셈이야?"
"이 사람아, 말 그리 험하게 하지 말어. 민수희가 자발적으로 헌신한 건데"
'제길, 민수희가 그리 순박할 줄은 몰랐네. 떠난다는 한마디에 순결을 바치다니."
"죽음이 더 중한가 순결이 더 중한가. 그 여자도 가슴에 뜨거운 피를 품고 있는 로맨티스트라고."
"뻔뻔하긴. 자네 이번에 죽어질 것 같은가? 다시 돌아가서 민수희를 무슨 낯으로 대하려는 거야?"
"이런, 생환해 온 영웅이니 사랑이 더 열렬해질 것 아닌가."
"이런 사기꾼이 있나. 죽을 일이 아니었다고 내가 다 털어놓고 말겠네."
"이런 배신자 그럼 자네하고 난 평생 원수 되는 거지 뭐."
"하! 아주 똥배짱이로군."
윤주협이 흐흐거리며 웃었다. 갑판 위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별똥별이 어두운 하늘에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서늘한데 그만 내려가 자세."
윤주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 먼저 내려가게. 난 머리가 좀 아파서.."
"그건 멀미가 아닐세. 쏘냐한테 원기를 다 뽑혔으니 오죽하겠어."
윤주협은 방대근의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섰다. 배가 통통거리는 안동이었다. 압록강 철교 폭파계획이었다. 엄청난 계획이었던 만큼 동원된 인원도 많았고 준비된 폭탄도 많았다. 영국 깃발을 단 조그만 장삿배에는 단원 20여 명이 탔고, 폭탄이 수십 개 실려 있었다 영국상품들이 가득 찬 배에는 다른 승객이라고는 없었다. 일은 완벽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빗나가고 말았다. 안동에서 일이 세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일본수비대의 검거가 시작된 것이었다. 어떻게 비밀이 누설되었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처음부터 일을 도왔던 영국회사 이륭양행의 직원이며 일꾼들이 체포되는 속에서 의열단원들은 결사적으로 안동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사건으로 단원 10명을 잃었다. 방대근으로서는 그때가 첫 번째 작전 참가였다. 그런데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재주나 요령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력이 없는 신입 단원이라 제1선에 나서지 못하고 수비대로 보조 역할을 한 덕이었다. 가까스로 천진으로 빠져나와 상해로 다시 돌아오면서 줄곧 괴로움에 시달렸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선배 동료들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군들 하나하나가 전부 조선이다! 조국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계속 승리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실패도 하고 패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수치가 아니요. 치욕도 아니다. 투쟁에 나서지 않고 투쟁을 기피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비국이고 치욕이다. 우리 조선인의 정의는 투쟁이고, 가장 큰 명예는 투쟁하다 죽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의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을 따라 의열단에서만 죽어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1백50명이 넘었다. 방대근은 그 가르침을 붙들고 새 기운을 차렸다. 자신에게 하달되는 임무는 주로 밀정 제거였다. 중국말을 하는 덕에 중국 내에서의 활동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북경과 만주를 오가며 처치한 밀정이 여섯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와 누나의 원수인 양치성이란 자는 없애지 못했다. 조직이 지목하지 않은 놈인 데다가, 개인행동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압록강 철교의 폭파 실패가 의열단 투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전에 벌써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터뜨린 기세 그대로 상해를 방문하는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해인 23년 1월에는 종로경찰서를 폭파했고, 3월에는 대량의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이 실패로 끝났으면서도 세상을 뒤흔들었던 것은 폭판의 양이 엄청난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사건의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황옥이 현직 경부였던 것이다. 총독부 경찰관이 의열단 단원이었으니 세상이 요란하고 시끌시끌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의열단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기만 했다. 그리고 금년 1월에는 일본 동경의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악독하기로 소문 자자한 총독부 경무부장 마루야마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조선에 관한 흉악한 음모로서 이미 폭로된 것은 모두 이들의 소위라 할 만큼 의열단은 광포한 암살단으로,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이란 청년을 단장으로 하고 있다. 동 단체가 조직된 것은 대정 9년으로 그 후 동인은 상해 북경 천진을 구치하면서 항상 음모를 기획하고 있어서 당국에서도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고심하고 있다."
경무국장은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무릅써가며 체포하려고 "고심"하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었다. 약산 김원봉에게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그러나 약산이 프랑스 조계에서 명상하듯 묵묵히 지내는 한 아무리 많은 현상금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여기서 밤새려나?"
윤주협이 다시 갑판으로 나왔다.
"자넨 또 왜 나오나."
방대근이 담뱃갑을 꺼냈다.
"자네가 없으니 잠이 오나 원."
원주협은 방대근이 권하는 담배를 뽑고는,
"자금이 많이 달리는 모양이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 얘기는 꺼내지 말세."
방대근은 성냥을 켜려다 말고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래, 담배나 피우고 들어가세."
"이렇게 별들을 바라보기도 참 오랜만이군. 보게, 얼마나 좋은가."
방대근은 밤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후우 내뿜었다.
"별도 달도 좋기야 좋지, 마음에 근심만 없다면."
윤주협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들은 현란한 반짝임으로 빛나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더 말이 없었다. 배는 지칠 줄 모르고 통통거리며 어둠 짙은 밤바다를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인천 해관에서 중국 상인 진씨가 해관원을 젖혀두고 헌병 대장 앞에 은밀하게 내민 것은 비단보퉁이가 아니었다. 그 큼직한 보퉁이에서 나온 것은 호랑이가 금방 으르릉거리며 뛰쳐오를 것처럼 그 대가리 부분이 생동감 있게 박제된 호피였다.
"대장님, 이거 어떻습니까? 진작 부탁해 뒀던 건데 이번에야 손에 넣게 됐지 뭡니까. 워낙 국경지대에서 불티가 나니 말입니다."
진씨는 능란하게 일본말을 하며 여유롭게 허허거렸다.
"아니, 이건 호피 아닌가!"
헌병대장은 눈이 휘둥글해지며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예, 백두산 순종에 숫놈입니다. 마음에 드실런지요."
진씨는 사르르 눈웃음치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마음에 들다뿐이겠소. 이걸 갖지 않고서야 대일본의 무사가 아니지. 흐흐흐흐."
헌병대장은 너무 좋아하며 어깨를 들썩이고 웃어댔다.
"무운이 활짝 열려 어서어서 대장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진씨는 능란하게 허파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물론이오, 물론. 잡귀는 다 막아내고 무운이 활짝 열려 승승장구할 거요."
헌병대장은 벙글벙글하며 호피를 책상 위에 쫙 펼치고 있었다.
"대장님, 대장님께서 살펴주시는 덕분에 제 장사도 번창해 이번에 물건도 좀 많이 가져왔고, 젊은 일꾼 놈들도 둘을 데려왔는데요. 어찌 좀."
진씨가 손을 맞비비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 그까짓것 염려 마시오. 당신 장사가 잘되는 건 좋은 일이니까."
헌병대장의 대꾸는 아주 흔쾌했다. 방대근과 윤주협은 두어 마디 이름과 고향 정도만 대고는 해관을 통과했다.
"허허, 호랑이가죽이 신효하긴 신효하군. 압록강 두만강 넘나드는 아편 장수들은 많고, 왜놈들은 저 지경이니 백두산에 호랑이가 남아날 리가 있나."
짐 가득 실은 마차 뒤를 따라가며 윤주협이 하는 말이었다.
"사람만 수난을 당하는 게 아니라 짐승까지 못살게 된 세상이니 원."
방대근이 혀를 찼다.
"어디 짐승들뿐인가. 산판에선 나무들이 마구 잘려나가고, 탄광이다 금광이다 해서 산들은 구멍 뚫리고"
"그래, 별수없는 일이지."
그들은 중국 조계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허름한 농부 차림이었다.
"일 잘허소. 열흘이시 이."
중국 조계를 벗어난 방대근이 비로소 조선말로 말했다.
"자네 갈 길이 멀군. 무사하게 만나세."
윤주협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인천역에 이르러 헤어졌다. 방대근은 경성역에서 기차를 갈아탔다. 강경 기차표를 가지고 호남선 열차에 자리를 잡으면서 방대근은 가슴 설렘을 느꼈다. 마침내 조선에 돌아왔다는,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덧 10년 세월이 넘어 있었다. 만주와 중국에서 겪은 일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줄거리를 잡아 보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후로 계속되었던 나라 찾기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를 잃은 것과 끝내 신세가 망쳐진 누나의 일이었다. 첫 번째 일에는 아쉬움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으며, 왜놈들과 밀정들에게 총질 칼질을 하는 것은 이제 둔감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가정사인 어머니와 누나의 문제에 대해서는 안타까움과 회한이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리고 쓰렸다. 어머니는 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향을 못내 그리워했다. 특히 아버지를 못 잊어했다. 추석이나 한식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한마디를 흘렸다.
"잡풀이 얼크러지고 설크러졌겄다."
아버지의 산소를 걱정하는 그 낮은 한마디에는 서러움과 그리움이 절절했다. 어머니 생전에 고향에 다녀오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죄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 고향은 그 언젠가 돌아갈 곳이지 아무 때나 오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압록강 두만강은 아무나 넘나드는 것이 아니었고, 그날그날 살기에도 힘이 벅찬 생활이었다. 후회를 하자면 안타까움이 끝이 없었다. 방대근은 어머니의 생각을 지우려고 애쓰며 연달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차 안에서는 충청도 말과 전라도 말이 섞여 들리고 있었다. 방대근은 전라도 말에 이끌리며 고향 냄새를 진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고향 말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변하지 않은 것은 많았다. 여자들의 낭자머리는 물론이고 남자들도 상투머리가 훨씬 더 많았다. 방대근은 그것이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일본세상이 된 지 오래인데 머리도 옷도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것이 뜻밖에도 큰 위안이 되었다. 방대근은 옆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을 억누르며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바로 신분 노출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아, 남자가 앗싸리허게 말허란 말여."
"지가 앗싸리허지 않은 기 머 있남유. 지도 답답혀 사까다찌허겄구만유."
뒤에서 들려오는 두 남자의 말이었다. 방대근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 투박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섞이고 있는 일본말이 옷차림과 머리 모양에서 위안받았던 마음을 구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방대근은 그런 정도의 변화에 기분 상할 것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모깃불 옆에서 초저녁만 지내도 몸에서 풋 연기 냄새나고, 돼지 삶는 가마솥 옆에서 반나절만 얼씬거려도 몸에서 누린내 풍기는 법이었다. 일본 세상 된 것이 을사보호조약에서부터 치면 20년이 다 되었고, 그놈의 합방으로부터 치더라도 15년 세월이 다 차고 있었다.
기차는 해거름에 강경에 닿았다. 역을 나선 방대근은 속으로 너무 놀라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강경은 훨씬 더 변모해 있었다. 옛날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일본식 도회지가 되어있었다. 기모노에 게다짝을 따그락거리며 방정맞게 아장거리는 일본 여자들도 너무나 많았다. 방대근은 인천이나 경성역에서 느꼈던 것보다 한결 심한 참담함을 느꼈다.
그래, 강경은 벽촌이 아니니까. 왜놈들이 군산만큼 중히 여기는 요충지니까.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방대근은 스스로를 설득시키고 있었다. 옥미 정미소는 선창 가까이라고 했다. 방대근은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선창 쪽으로 갈수록 일본 상점들이 번창하고 있었다. 전봇대도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전봇대마다 나폴레옹 군대의 모자를 쓴 수염 난 서양 남자가 찍힌 양철판이 돌출되어 붙어 있었다. 은단 선전판이었다. 그 서양 사나이를 보면서 방대근은 건물에서부터 의복 그리고 사소한 일용품까지 서양 것이면 사족을 못쓰는 왜놈들의 가소로움을 비웃고 있었다.
"일본놈들은 흉내 잘 내는 원숭이 새끼들이오. 유럽의 것이면 무엇이든 흉내 내려고 덤비는데, 그 덕에 무기 만드는 기술을 익혀 당신네 조선을 집어삼키고 이제 중국까지 노리고 있는 것이오. 아주 교활하고 악질적인 종자들이오."
일본사람을 아주 미워하는 마르틴의 말이었다. 그가 돈벌이만을 위해 의열단에서 폭탄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방대근은 옥미 정미소를 확인해 놓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국밥을 사 먹었다. 정미소 뒤쪽으로 네 번째에 있는 기와집, 그게 김철호의 집이었다. 방대근은 어둠살이 차츰 진해지고 있는 골목을 몇번 배회하며 김철호의 집 안 동정을 탐색하고 있었다. 김철호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야 했고, 혹시 어떤 손님이 와 있는 것 않은가도 살펴야 했다. 물론 김철호의 얼굴은 알지 못했다. 암호와 의열단의 신표가 있을 뿐이었다.
"아부지, 아부지, 어디 가아?"
방대근은 담 옆에 걸음을 뚝 멈추었다. 어린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집안에서 울렸던 것이다.
"이냐, 손님 만내로 간다. 밥 많이 묵었으먼 니넌 얼렁 자그라."
방대근은 주춤 놀랐다. 결혼한 의열단원도 있나?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이었다. 그래, 자금책이니까. 스스로 답을 찾았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방대근은 걸음을 빨리 옮겨놓았다. 일본식 활동복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저어, 실례허겄구만요. 김철호 선생이신 게라?"
"그런디 누구요?"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에는 경계의 빛이 역연했다.
"예에, 그렇구만요. 지리산 약산골서 캔 동삼 갖고 왔는디요."
"아니, 약산골?"
그 남자는 반가운 목소리로 다가서다 말고,
"엊디 동삼얼 봅시다."
좀 냉정한 기색으로 말했다. 방대근이 내보인 것은 대추 세 알이었다. 지리산 "약산골"이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호 "약산"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동삼이란 신표를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사용한 신표는 상해임시정부에서 썼던 방법과 같은 식이었다. 나무쪽이나 바가지 쪽에 글자 하나씩을 써서 반으로 자르고, 그것을 서로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일본 경찰에 발각된 다음부터 전혀 다른 방법으로 바꾸었다. 고정책들의 신표를 미리 정해 놓고, 활동대원들은 현지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이었다. 윤주협이 인천에서 구한 것은 빨강과 파란색의 색실이었다.
"원로에 얼매나 고상 많으셨소. 얼렁 여그 뜨십시다."
대추 세 알을 받아든 김철호는 지체없이 방대근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디 가시든 질인갑는디."
"아니구만요, 늦어도 괜찮헌 일잉게."
김철호는 한동안 걸어 어느 외딴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여그가 지 이모님 집으로 아조 안전허구만요 금세 댕게올 것잉게 편헌 맘으로 쉬시게라."
등잔 불빛에 드러난 김철호는 스물대여섯 나 보이는 듬직한 사나이였다. 얼굴이 넓고 광대뼈가 약간 불거진 것이 배포도 있어 보였고, 꽤나 학식이 든 것 같기도 했다. 문고리를 건 방대근은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었다. 며칠 동안 중첩된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전신에 기운이 빠지면서 드러눕고 싶었다. 그러나 방대근은 마음을 추스르며 담배를 꺼냈다. 위험이란 예고가 없는 것이었다. 방대근은 건성으로 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는 졸지 말아야 한다고 안간힘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밀려들고 또 밀려드는 졸음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상체가 휘청 꺾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다시 꺾이고 하면서 그는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그 휘청거리고 기우뚱거리는 모양이 곧 방바닥에 퍼질러 누워버릴 것 같은데도 그는 용케도 앉음새를 지탱해 내고 있었다.
"앗, 뜨, 뜨.."
방대근은 갑자기 소리치며 화닥닥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꽁초였다. 방대근은 담배꽁초를 집으랴 허벅지를 문지르랴 분주했다.
"요런, 담뱃불에 딘 짜잔헌 눔!"
방대근은 허벅지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옷에는 담뱃불에 탄 동그란 구멍이 나 있었다.
아이고 요놈아, 의열단원 싸다. 인자 똥통에만 빠지먼 정승감이다.
허벅지 덴 자리에 침을 찍어바르며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다. 그때 김철호가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인지 곧 술상이 들어왔다. 방대근은 눈이 번쩍 띄었다. 그렇지 않아도 술 생각이 간절했던 참이었다.
"자아, 한잔 받으시씨요. 인자 술도 다 공장 술이라 맛이 게심심허니 지랄 같기넌 혀도 마시먼 취허기넌 헝게 많이 드시게라."
김철호가 술주전자를 들었다. 그 황갈색 주전자는 광목이나 고무신처럼 유행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산이었다.
"예, 진작보톰 사사로이 술 담과묵으먼 잡아가고 벌금 물리고 헌담서요?"
"참, 왜놈덜 허는 짓짓거리가 기가 차구만요. 어찌허먼 세금 많이 뜯어낼까 허고 대가리 궁굴린 결관디, 전매사업으로 묶은 것이 소금서보톰 시작해서 술 담배는 말헐 것도 없고 생강꺼정 뻗쳤구만요. 소작질로 살고 몸띵이 팔아 사는 가난헌 조선사람덜언 이중삼중으로 피 뽈림서 살기가 지옥이구만요."
방대근은 막걸리 사발을 들어 올려 함께 마시자는 눈짓을 했다. 김철호가 술잔을 들어 올려 방대근의 잔에 부딪혔다. 방대근은 천천히 잔을 기울이며, 이 사람도 사회주의 의식을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그나 그 지옥서 어서 벗어나야 허는디 큰일이구만요. 헌디, 자금 고갈이 심각헙니다. 여그 사정이 안 좋은갑제요?"
방대근은 목소리를 낮추며 김철호를 지그시 건너다보았다. 그 눈길은 여기에 온 임무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었다.
"참 면목이 없구만요. 3.1운동 기세로 의기가 생긴 부자나 지주덜이 협조럴 잘헌 것언 몇 분이고, 차차로 관심이 줄어가다가 그놈에 자치론이 대두됨스로 표나게 등얼 돌리기 시작혔구만요. 가망 없는 독립에 헛돈 쓰지 말고 자치 쪽으로 붙는 것이 낫다 생각덜 헌 것 아니겄능가요. 거그다가 빈발허고 있는 소작쟁의로 지주덜 맘이 더 변허기도 허고, 그 꼴이구만요."
방대근은 술을 연거푸 두 사발이나 비웠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 내정독립, 자치, 참정권론자나 강도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 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방대근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서를 생각하고 있었다. 의열단의 투쟁목표와 행동강령을 만천하에 밝힌 그 글은 의열단선언서라고도 불렸다. 의열단원들은 그 선언서에 명시된 대로 혁명조국을 위해 죽기를 맹세했고, 독립투쟁을 방해하는 모든 적들을 죽음으로써 척결할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적들은 너무나 많이 불어나 있었다. 의열단이 곤궁에 처할 정도로.
"여그야 노동쟁의넌 벨로 없을 것이고, 소작쟁의넌 어찌 되고 있는게라? 그것이 긍게 조직적인지, 즉흥적인지"
방대근은 김치를 씹으며 물었다. 그 현황 파악은 두 번째 임무이기도 했다.
"그렁게..태반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쓸 것이구만요."
"태반이"
방대근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가,
"김 동지넌 공산주의럴 어찌 생각허시요?"
불쑥 물었다.
"글씨요.. 책얼 몇 권 읽어보기넌 혔는디, 타당헌 이론이 많기넌 헌디 아직은 전체럴 다 파악 못허고 있구만요."
김철호는 방대근이가 그런 것을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탐지하려는 눈빛이었다. 방대근은 상대방의 그런 기색을 묵살하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김철호가 술을 더 가져오라고 일렀다.
"공산주의에 농민덜 호응이 큰갑제요?"
방대근이 담배를 빼 물었다.
"구색도 맞고 입맛도 맞은게요. 왜놈타도 조선독립, 지주타도 농지분배, 이 시국에 이만치 존 구화가 어디 있겄능가요. 농민덜헌티야 동확보담 못허덜 안컸제라."
방대근은 김철호의 명쾌함에 동감하며 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잔을 김철호에게 건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대숲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먼 파도 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근디, 소작쟁의가 해마동 불어나고 있는디,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덜이 늘고 있다는 징조 아니겄소?"
"그렇구만요. 젊은 지식층에 새로 불로 있는 바람잉게요."
"중국이고 어디고 그러기넌 매일반이오."
방대근의 어조에서 술기운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그 말을 하며 의열단 내의 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의열단원들의 사상은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공사주의사 혼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급속히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변화에 따라 단원들 사이에서 토론이 치열하게 벌어지곤 했다.
"근디 말이오, 낼보톰 한 사나흘 만석꾼 부잣집얼 몇 집 골라 터는 것이 어쩌겄소?"
방대근이 불쑥 내놓은 말이었다. 그의 눈빛은 흐린 등잔 불빛 속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예? 무신 말씸이다요?"
놀란 김철호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헛걸음헐 수야 없는 일 아니겄소."
"무신 그런 서운헌 말씸얼. 아무리 헹편이 에롭다고 혀도 지가 빈손으로야 뜨시게 허겄능가요. 3.1운동 후로 왜놈덜 경찰망이 빈큼없이 째여 있응게 그런 생각언 당최 안허는 것이 좋구만요."
김철호는 고개를 내둘렀다. 자정이 가깝도록 술을 마셨다. 말술을 마셨는데도 방대근은 취하지가 않았다. 이래저래 먹구름이 낀 것만 같은 의열단의 장래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방대근은 다음날 하루종일 잠에 파묻혀 있었다. 겨우 해거름에 일어나 밥상을 받았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방대근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어디 가실랑가요?"
김철호가 의아해했다.
"예, 딴 디 또 볼일이 있응게 한 사날 댕게올랑마요."
방대근은 방을 나섰다.
"혹시 그 위태헌 일 헐라는 것언 아니겄지요?"
사립 앞에 이르러 김철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개도 못 가보고 그런 일로 죽기넌 서럽덜 안컸소?"
방대근은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하먼이라, 더 큰일을 허셔야제"
김철호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방대근이란 사나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남이기보다 호남으로 생긴 얼굴은 침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인상이었다. 어찌 보면 마음씨도 너그럽고 유순할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는 찬바람이 획 스치며 잔인해 보이는가 하면,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나며 살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말하는 것에서는 상당한 학식이 느껴지는데 목덜미며 어깨에서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굳건한 힘이 뻗쳐 나고 있었다. 특히 두 손은 무슨 거친 일을 어려서부터 많이 했는지 투박하게 크면서도 억세 보였다. 방대근, 방가는 족보없는 상민 중에 상민이었다. 상민과 중국과 학식 그리고 의열단. 무언가 많은 사연과 곡절을 지닌 사람 같았다. 방대근은 어둠살을 밟으며 군산행 기차에 올랐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를 자세히 알아내려면 손판석 아저씨를 만나야 했다. 그러나 군산은 조심해야 할 곳이었다. 다른 데들보다 경찰력이 강화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수국이 누나를 망쳐놓은 그놈, 백남일을 만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서로 아는 얼굴이 아니었고,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자신을 알아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만일을 생각해서 밤 기차를 탄 것이다.
손판석 아저씨가 집을 장만했다는 것은 오래전에 공허 스님한테서 들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 나서고 보니 그동안 어디로 이사를 가지 않았는지 마음이 쓰였다. 공허 스님을 못 만난 지도 어느덧 5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스님이기보다는 아저씨 같은 그분은 무사한 것인지, 불현듯 그리움이 사무쳤다.
기차는 금강 줄기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며 달리고 있었다. 연회색 어스름이 진회색 어둑발로 변해 가고 있는 저 멀리로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벌판 따라 남쪽으로 사오십 리 가면 고향이었다. 무시로 꿈에 보이곤 했던 그 들녘이 바로 눈앞에 드러나 있었다. 방대근은 숨을 한껏 들이켰다. 고향 냄새가 가슴 가득 차왔다. 그 냄새는 만주의 냄새와 분명 달랐다. 달콤하면서도 싱그럽고 아련했다. 그런데 만주 땅의 냄새는 느끼하고 텁텁하고 역했다. 어머니는 그 냄새에 머리 아파하며 고향 냄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군산역에 내리자 어둠은 완연히 짙어져 있었다. 방대근은 째보선창부터 찾아갔다. 무슨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거기서부터 길을 잡아야 판석이 아저씨 집을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십장 손샌 집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가난한 조선사람들이 몰려 사는 동네에서 십장인 손샌은 뜨르르하게 알려진 사람이었다.
"아니, 머시여! 니가, 아니 자네가, 자네가 대근이라고!"
처음에 누군지 몰라보았던 손판석은 방대근을 붙들고 목이 메었다. 방대근은 전혀 뜻밖의 소식을 듣고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보름이 큰 누님이 군산에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세 궂어져 군산으로 나온 것 자네 어무님이 아시먼 속상허고 애만 탄 게 알리덜 말자고 공허 시님이 정허신 것이네."
방대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허 스님 생각이 깊었던 것이다.
"어이, 누님얼 욜로 불러야 되겄네. 누님언 셋방살이라 눈이 많은게."
방대근의 동의를 얻어 손판석은 밖으로 나와 아내에게 귀뜸했다.
"대근이넌 보름이가 군산서 사는 것도 몰르고 있었응게 그간에 보름이가 팔자 사납게 살아온 일언 입도 뻥끗허지 말고 덮으라고 허란 말이시. 몰르먼 약이고 알먼 병잉게. 알아듣었제!"
방대근이도 보름이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갑자기 만나게 된 반가움 탓이 아니었다. 방대근은 큰 누님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고, 보름이도 막냇동생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방대근은 고생에 찌든 중년 여자한테서 큰 누님의 그 곱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고, 보름이는 눈앞에 선 건장하고 의젓한 남자가 그 어렸던 막냇동생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어, 엄니, 엄니허고 수국이넌 모, 모다 무사허다냐 어쩌다냐.."
동생을 붙든 보름이는 걷잡을 수 없는 울음으로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방대근은 어머니가 당한 참변만을 이야기했다. 수국이 누나는 시집가서 잘산다고 얼버무렸다. 그 기구한 팔자를 구구하게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방대근은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관계를 손판석에게 자세히 알아보았다. 부두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이 손을 뻗친 것은 이미 오래되었고, 노동자들의 호응도 날로 커져갈 거라고 했다. 손판석의 말은 김철호의 말과 똑같은 셈이었다. 방대근은 세상의 변화에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상해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국내의 변화는 한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세력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이 전개될 것인가?
방대근은 그 물음을 심각하게 되씹었다. 그건 의열단이 숙제로 풀려고 하는 문제였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다가 서무룡의 이야기가 나왔다. 방대근은 너무 충격을 받았다. 그가 주먹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과 헌병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맘얼 돌리게 허먼 어쩌겄소?"
방대근은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분노를 누르면서 반대로 말했다. 마음씨가 나쁘지 않고 생각이 단순했던 그를 설복시켜 역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서, 아서. 도끼 자루로 쓸 낭구가 따로 있제. 그놈언 빽따구꺼정 왜놈 다 되야부렀어. 권세에 돈에.."
손판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을 없애는 수밖에 없다!
방대근의 가슴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그러나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울렸다.
"무리하지 마시오!"
단장이 당부했던 말이었다. 방대근은 서무룡을 잊으려고 애쓰며 말머리를 돌렸다.
"공허 시님언 만내기 에롭겄제라?"
"그렇제, 항시 뜬구름잉게."
방대근은 큰 누님 보름이에게 말을 꺼내지도 않고 혼자서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어머니가 늘 마음 아파했던 것처럼 산소에는 잡초가 무성할 대로 무성해 있었다. 준비해 간 낫으로 차근차근 벌초를 해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방대근은 나흘째 되는 날 군산을 떠났다. 큰 누님이 노자에 보태라며 돈을 내밀었다. 판석이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방대근은 마구 화를 내며 뿌리쳤다. 방대근은 기차에서 내내 가슴이 눈물로 젖고 있었다. 고생에 찌든 큰 누님의 떡함지인 모습이 줄곧 따라오고 있었다. 큰 누님에게 돈 한 푼 보태주지 못한 것이 그리도 가슴 아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자꾸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방대근은 강경에 이틀을 더 머물렀다가 한성행 기차를 탔다.
"아부님이 시상얼 뜨시고 정미소가 지 앞으로 되먼 사정이 잠 풀릴 거구만요."
김철호가 전대를 내놓으며 못내 면목 없이 했다.
"요것이 어디 혼자 짊어져서 될 일이간디요. 참, 왜놈덜만 좋아나게 생겼소."
방대근은 탄식처럼 말했다. 기차 창밖에 망연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방대근은 윤주협이나 이상태도 자신과 비슷한 형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7. 최초의 동정파업
"아니, 시상에 요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당가요? 물가넌 올르기만허제 내리는 법이라고넌 없는디 품삯얼 올려주지넌 못허드라도 깎는 법이 시상에 어디가 있겄능게라."
나이 듬직한 인부가 앞으로 나서서 사정조로 말했다. 다른 인부 다섯은 그 뒤에 둘러서 있었다.
"어허, 무신 잔소리여, 잔소리가. 나라고 그러고 잡어 그러는 것이 아니여. 여그저그 뜯기넌 디넌 많고, 기계가 돌아봐야 밑지고 들어간 게 벨 수가 없어. 듣기 싫응게 더 잔소리 말어!"
백남일은 싸늘하게 내쳤다.
"야아, 아는구만요. 요런 큰일 허시자면 이래저래 맘얼 많이 쓰시겄제라. 조그덜이 일얼 더 열성으로 헐 것잉게 품삯얼 그냥 그대로 쳐주시게라우."
그 인부는 더 간곡하게 말했다.
"어허, 귓구멍이 먹었어! 썩 나가, 썩."
백남일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인부의 가슴을 떠밀었다.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인부는 비척거리며 뒤로 떠밀리고 있었다.
"요것 해도 너무허요. 베룩에 간얼 빼묵제 그 코딱지만헌 품삯얼 깎어 묵는 법이 어디가 있다요."
어떤 인부가 내뱉은 말이었다.
"어떤 놈이여, 시방 주딩이 깐 놈이?"
백남일이 소리치며 눈을 부릅떴다. 한눈에 명씨가 박인 데다 다른 한 눈이 부릅 뜨이자 그의 인상은 더없이 험상궂어졌다. 인부들은 굳은 듯이 서 있기만 했다.
"허, 지절로 뚫어진 구멍이라고 요것덜이 말얼 즈그 멋대로 씹어대네. 머시여? 코딱지만헌 품삯! 요것덜이 배때지가 뜨뜻헝게 못허는 소리가 없어. 이놈덜아, 당장 부두에 나가봐. 나가 주는 돈이 얼매나 큰돈인지 몰라서 그려?"
백남일은 기세등등하게 소리쳐댔다.
"이래 갖고넌 안되겄소. 그냥 갑시다."
한 사람이 앞에 나섰던 인부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쩔라고 그려?"
나이 듬직한 인부의 낮은 말이었다.
"금매 가잔 말이오."
젊은 인부가 팔을 더 세게 끌었다. 백남일은 사무실을 나가는 인부들을 눈 아래로 깔아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헹, 즈그놈덜이 꼼지락 히봐야 땅바닥 기는 개미새끼덜이고, 한 자도 못 뛰는 깨구락지새끼덜이제. 부두로 나가봐라 한마디 딱 헝게 설설 기는구만그려. 흐흐흐흐..’
백남일은 서무룡이에게 다달이 기고 있는 돈이 배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잘라버릴 수도 없었다. 서무룡이는 그동안에 세력이 더 커져 있어서 무슨 보복을 더 크게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백남일은 이런저런 궁리 끝에 딱 좋은 생각을 해내게 되었다. 인부들의 임금을 내려 그 손해를 벌충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남일은 기계 돌리는 기술자 하나만을 빼놓고 나머지 인부들의 임금을 깎아내리고 말았다. 막일하는 인부들이야 개천가에 자갈처럼 많았지만 정미소 기술자는 그리 흔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느직하게 정미소에 나온 백남일은 뜻밖의 사태에 부딪혔다. 한창 돌아가며 쌀을 쏟아내고 있어야 할 정미소가 돌지 않고 멈추어 있었던 것이다.
"강씨, 강씨, 멀허고 있능겨!"
백남일은 목청껏 소리치며 정미소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는 기술자 강씨가 또 낮술을 마시고 기술자 헹투를 부리건, 기계가 또 말썽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 인자 나오시능게라? 나락이 없어 기계럴 못 돌리고 있구만요."
기술자 강씨가 담배를 뻐금거리며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 미쳤능가 시방! 저그 산데미로 쌓인 나락언 다 머시요."
열이 뻗쳐 소리치는 백남일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아따, 춤 튀요."
강씨는 상을 찡그리며 피해 서면서,
"창고에 있는 것이야 누가 몰룬다요? 고것얼 나가 짊어져다가 기계에 부슬께라?"
야유조로 말하며 그는 백남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머시여! 아니, 요것덜이 다 어디 갔어?"
백남일은 그때서야 인부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여그 있소."
정미소 안쪽에서 들려온 말이었다.
"아니, 머시여? 거시서 멋덜 허고 자빠졌어!"
감정이 폭발하는 백남일의 고함이 정미소 안을 찌렁 울렸다.
"우리 일 안허고 자빠졌소."
백남일의 고함에 맞서는 반항적인 목소리였다.
"요런 죽일 놈덜 보소!"
백남일은 욕을 내지르며 그쪽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백남일은 그 사태가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파업이라는 것, 경성 고무신 공장이며 평양 양말공장 같은 데서 이삼 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그 노동쟁의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미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철렁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대책이 떠올랐다.
"자아, 존 말로 헐 직에 일 시작혀!"
백남일은 인부들 앞에 버티고 서며 명령했다. 한쪽 팔을 뻗치고 있는 그의 기세는 당당했다.
"깎은 품삯을 도로 올리기 전에넌 일 못허겄소."
누군가의 맞대거리하는 목소리도 짱짱했다.
"참말로 일 안허겄어?"
백남일이 인부들을 노려보았다.
"품삯을 도로 올리란 말이오."
인부들이 연달아 말했다.
"자아, 삼시세판으로 인자 끝장으로 묻는다. 일 허겄어, 안허겄어!"
백남일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안 올리면 죽어도 못허겄소."
"시상에 그런 야박헌 인심이 어딨소."
"우리도 묵어야 살제라."
"두말 말고 도로 올리씨요."
"딴 정미소넌 요런 짓 안허요."
"하먼, 요것이 사람이 헐 짓이여."
인부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제각기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얼씨구, 자알덜 놀아난다. 어디 느그놈덜 맘대로 혀봐."
백남일은 독 오른 얼굴로 돌아섰다. 백남일은 그 길로 정미소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하루종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자 인부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것 암 요상허시? 어째 코빼기도 안 비치능고?"
"그놈이 행여 딴 맘 묵고 잇는 것이 아니여?"
"딴맘? 무신 맘?"
"아니여, 아니여. 우리 겁믹이자고 수쓰는 것이여."
"그려, 고것이 지 애비헌티 못된 것만 배우고 커서 심뽀가 아주 고약헝마."
"맞어, 오직이 행투 고약허니 했음사 평상 눈깔빙신이 되았겄어."
"그나저나 해 떨어졌는디 으째야 쓰꼬?"
"으쩌기넌 으째. 인자 집으로덜 가고 낼 또 퍼질르고 앉는 것이제."
"어째 껄쩍지근헌디."
"어따, 똥 싸고 밑 안 닦았간디 껄쩍지근허고 말고 혀. 맘덜 강단지게 묵어. 경성이고 평양서넌 남자도 아닌 여자덜이 똘똘 뭉쳐 품삯 올려받는다는 소문덜 들었제? 우리넌 올려받지도 못허고 깎인 것 도로 찾아묵자는 것인디, 요것도 못해내면 봉알덜 다 띠내부러야 혀. 다 알아들어?"
"그려, 그려. 봉알값얼 히야제 그냥 당헐 수야 없제."
"그나저나 일 안허고 하로 보내기도 편헌 것이 아니네 이."
"맘이 안 편헝게 긍가 영 지랄 같구마."
그들은 어스름을 밟으며 집으로 흩어져 갔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정미소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정미소 큰 문 앞에는 백남일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정미소 기계는 벌써 돌아가고 있었다.
"나가 삼시세판으로 물었제? 근디도 일 못허겄다고 뻗디여? 그려서 느그덜 소원 착 들어줬다. 인자 속덜이 씨어언허시겄제? 사람이야 얼매든지 있응게 걱정허덜 말어. 소원대로 일허덜 말고 가서 푹덜 쉬드라고."
백남일은 비웃음 어린 거만스러운 얼굴로 인부들을 깔아보며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인부들은 황당한 얼굴들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정미소 돌아가는 기계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썩 물러가! 꼬라지덜 뵈기 싫은게."
백남일이 버럭 소리질렀다.
"어디 두고 봅시다, 뜻대로 되는가!"
인부 하나가 내뱉었다.
"머시여! 이놈으 새끼가 얻다 대고 ."
백남일이 곧 후려칠 기세였다.
"자아, 다덜 갑시다. 우리도 수가 있응게."
그 인부가 한껏 목청을 높이며 인부들게게 손짓하고 돌아섰다. 인부들이 그를 따라 돌아섰다.
"하! 참새 새끼도 죽음서 짹 허드라고 참 가관이다. 에이 빌어묵을 종자덜, 어디 가서 쌩똥 싸게 고상이나 혀라. 에에엑 퉤!"
백남일은 억지로 가래를 돋우어 내뱉으며 속이 시원해지고 있었다. 인부들은 째보선창으로 나가 술집을 찾아들었다.
"이거 아칙보톰 술 묵어 될랑가."
어느 인부가 구시렁거렸다.
"안될 건 머시여. 홧짐에 서방질이제."
다른 인부가 받아쳤다.
"그려, 홧짐에 소 잡아묵기다."
그들 여섯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고런 느자구없는 호로새끼, 대가리가 그리 돌아가네 이."
"고것이야 우리도 얼추 짐작헌 것 아니여. 말이 씨 될랑가 무서와 입에 안 담은 것이제."
"어찌 그리 못된 지 애비 빼다 꽂았는고."
"씨 도적질 못헌다고 안혀."
"그나저나 인자 어째야 쓸랑고?"
"아까 자네, 우리도 수가 있다고 혔는디, 수가 무신 수여?"
"물에 빠진 것 아닝게 숨넘어가게 잡지덜 말어. 자아, 술이나 한 잔씩 쭈욱 허고 보드라고."
때마침 내온 술을 그들은 한 사발씩 가득 채워 들이켜기 시작했다.
"나가 말허는 수라는 것언 우리가 그 자리럴 새로 차지허고 들어가는 것이시."
아까 그 인부가 입가에 묻은 막걸리를 훔치며 말했다.
"머시여?"
"어허, 그리허는 수가 무신 수여?"
"그려, 새로 차고 들어가는 수럴 먼첨 말히야 순서에 맞제."
"굼벵이야 궁굴 재주나 있제만 자네가 무신 신통술이 있다고ㄲ"
"어허 이사람덜, 신 내린 무당도 아니겄고, 귀신 들린 점쟁이도 아니겄고, 어찌 그리 말덜이 많혀."
그 인부는 사람들에게 퉁을 놓으며 또 사발ㄹ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는 여유만만하게 술 한 사발을 입 떼지 않고 다 비워냈다.
"아따, 술 마시는 것맨치로 옹골지게 일얼 해낼랑가 모르겄다."
"방구 씨게 뀐 놈이 물똥 싸는 법인디."
"평상 수절허겄다고 삼일장에 목쉰 년이 가지밭에 먼첨 가고."
"흐흐흐흐ㄲ 저 사람 술 얹히겄다."
그 인부는 그런 말질을 들은 척도 안하고 무김치를 으석으석 씹고 있었다.
"다덜 술값 허니라고 돌아감서 입방애 찧었으먼 인자 나 말 잘 듣드라고. 나가 굼벵이 궁굴 재주럴 허든지 춘향이 그네뛰기 재주럴 허든지 그것이야 나헌티 딱 맡게놓고 말이시, 자네덜언 우리 자리 기연시 말고 들어간다는 맘으로 찰떡 붙데끼 똘똘 뭉치기만 허란 말이여. 무신 소린지 알아묵어?"
그 인부는 팽팽한 눈길로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이사람 참 싱겁기가 소금 안 친 흰죽이시. 헌 소리 암것도 없음서 알아묵기넌 멀 알아묵어."
"우리찌리 못헐 소리가 머시가 있능가, 속시언하게 탁 털어놓소."
"허, 참말로 눈치없어 이 사람덜허고 일 못해묵겄네. 시상일이란 것이 탁 털어놔서 졸 일이 있고 꽉 틀어잡아서 졸 일이 있덜 안혀" 말이란 것이 지 맘대로 발 달리고 발통 달레서 그것이 어디 참자고 참아지고 실수허자고 실수가 되는 법이간디. 우리 일언 미리 소문 퍼지면 망허는 것잉게 그러는겨."
그 인부는 언짢은 얼굴이었다.
"그려, 을남이 자네 말이 맞어. 아는 것이 병잉게 자네가 어디 혼자서 재주럴 부려봐. 우리야 더 오갈 디 없는 몸덜잉게 자네만 믿고 맘 강단지게 묵고 있을 것잉게."
나이 듬직한 인부가 말했다.
"야아, 오래 안 걸릴 것이구만이라. 메칠 안으로 일 쌈빡허니 되게 맨글어불겄소."
배을남이가 자신 있게 말했다.
"몰르겄네, 저 사람이 헛방구 뀌는 것 아니여?"
"저 구름에 비 들었을라디냐 허는디 쏘내기 쏟아진다고 안혀."
"그려, 을남이럴 믿어보드라고."
그들은 거나하게 술을 마시면서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며 신세타령들을 하면서 울화를 식혀갔다. 그들은 점심나절이 아까워 헤어졌다. 배을남은 혼자서 부두 쪽으로 느리게 걸었다. 술 취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두 비위 상하고 고깝기만 한 것이었다. 그동안에 어마어마하게 큰 쌀 창고들은 더 늘어나 있었고, 돈 창고라고 하는 은행들도 멋진 건물을 짓고 더 많아졌고, 게다짝을 방정맞게 딸그락거리는 일본사람들도 훨씬 불어나 있었다. 참말로 사람이 복장 터져 줄을 일이다.
‘여그만 오면 쌀도 많고 돈도 많은디 이놈에 신세넌 요것이 머시다냐. 금싸래기 겉은 전답 그 빌어묵을 토지조사에 빼앗겨불고 갈수록 쪼그라드는 신세니 참말로 한심허다. 다 저 왜놈덜이 웬순디, 저것덜얼 싹 몰아낼 방도가 그리고 없능가. 아니여, 그 새로 나온 방도로 허먼 된다고 했제? 그려, 그 방도로 허먼 될란지도 몰러. 밑에서보톰 차근차근허니 심얼 엮고 짜나가는 것잉게.’
배을남은 해관이 있는 부두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활기 차 보였다. 지게를 진 날품팔이들도 여전히 많았다. 그들을 보자 백남일이 떠올랐다.
‘못된 자석, 여거 기나와서 인부덜얼 구했겄제. 지게꾼덜이야 목돈 받는 정미소가 날품팔이보담 나슨게 아이고메 할아부지 혔을 것이고. 허나 니놈이 그리 잔꾀 써봤자 니놈 뜻대로넌 안될 거이다. 인자 시상이 달라졌응게.’
배을남은 주먹을 말아쥐며 이를 앙다물었다. 아직도 해는 하늘 가운데 떠 있었다. 그분을 만날 수 있으려면 너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술도 깨야 했다. 배을남은 공원으로 갈 생각을 하며 약간씩 흔들리는 걸음을 느리게 옮겨놓고 있었다.
아리라앙 아리라ㄷ앙 아라리요오
아리라앙 고오개로오 너머어가안다아
물 좋고 산 좋은데 일본놈 살고
논 좋고 밭 좋은데 신작로 난다아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요오
아리라앙 고오개로오 너머어가안다아
말깨나 허는 놈 감옥소 가고오
인물깨나 생긴 년 갈보로 팔리네에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요오
아리라앙 고오개로오 너머어가안다아
대대로 물린 땅 토지조사에 뺏기고
처자식 배곯리는 타향 거지 되었네
배을남이가 늘어진 몸으로 후적후적 걸어가며 흥얼거리고 있는 가락이었다. 그의 흥얼거림은 눈물에 젖은 것 같기도 하고, 풀 길 없는 탄식 같기도 했다. 그 구성져 늘어지고, 처지다가 되감기고 하는 가락에 실린 가사는 딴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원에 올라온 배을남이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한 바다에 크지 않은 섬들이 아련했다. 크고 작은 배들이 바다에 물길을 남기며 아주 느리게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배을남이는 바다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는 처자식들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돌 위에 털퍽 주저앉았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았다. 소학교 교복을 입은 일본 아이들 몇이 소리 높여 외치며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배을남은 담배를 빨며 그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학교를 보내지 못한 자기 아들의 모습이 어릿거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소리치고 깔깔거리며 공원 아래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동안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던 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무 그늘이 휘어진 그의 등에 드리워져 있었다. 배을남이 잠을 깼을 때는 꽤나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잠에 취한 눈으로 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는 허둥거리며 공원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을남은 옥구 쪽으로 20리를 부지런히 걸었다. 술기운도 말끔히 가셨고 다리에서는 새 힘이 돋고 있었다. 고 선생님을 만나면 이번 일이 거뜬하게 풀릴 것 같았던 것이다. 고 선생은 아직 집에 와 있지 않았다. 배을남은 당산나무 아래서 몇 례나 담배를 재었다. 어스름이 퍼질 즈음에 자전거의 방울소리가 울렸다.
"선상님, 지가 왔구만이라우, 배을남이."
배을남은 너무 반가워 자전거 앞으로 뛰어가랴, 허리 깊이 숙여 절을 하랴 정신없이 바빴다.
"아니,배을남 씨가 여기까지 웬일이오. 무슨 일 생겼소?"
자전거에서 내린 사람은 영명중학교 선생 고서완이었다.
"야아, 정미소에 일통이 생게서.."
배을남은 고 선생이 너무나 고마웠다. 눈치빠르게도 무슨 일 생겼느냐며 말문을 틔워준 것이었다.
"자아, 들어갑시다. 들어가서 이야기 들읍시다."
고서완은 자전거를 끌며 앞장섰다.
"앉으시오. 혹시 배을남 씨가 여기 온 걸 누구 아는 사람은 없소?"
고서완이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암도 없구만이라우. 혼자 살짝허니 왔응게요."
배을남은 고 선생이 어려워 남모르게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됐소. 시장하실 테니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 듣도록 합시다."
고서완이 어서 밥상을 들이도록 일렀다.
"자어 저어.."
배을남은 밥상에 다가앉지 못하고 옹색스러우하며 뭉기적거렸다.
"아니, 왜 그러시오?"
"저어..저넌 따로"
'그레 대체 무슨 소리요. 우리는 다 똑같은 사람이오. 그런 생각 다 없애버리라고 하잖았소. 자아, 이쪽으로 오시오."
고서완은 배을남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배을남은 겸상으로 차린 밥상머리에 앉으며 너무 고맙고 황송해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동안 고 선생은 사람이란 아무 차등이 없이 공평한 것이라고 해왔었다. 그러나 겸상을 차려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이다. 익산 옥구 고씨는 뜨르르한 양반이었고, 더구나 그분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자아, 시장할 텐데 어서 많이 드시오."
고서완은 숟가락을 들며 밥을 권했다. 배을남은 밥을 먹으면서 정미소에서 생긴 일을 다 이야기했다.
"옳게 생각했소. 그대로 물러나서는 안 되고 다시 그 자리로 들어가야 하오. 다 방책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맘 편하게 밥 많이 드시오."
고서완이 위로하듯 말했다. 배을남은 비로소 안심이 되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러나 고 선생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밥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밥을 퍼넣었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날마다 정미소로 나가서 버티시오. 허나 주인이 뭐라고, 주먹 다툼을 해서는 안 되오. 이쪽에서 뒤집어쓰게 되니까. 내가 사흘 안으로 일을 해결 짓겠소. 그런데 일이 해결되더라도 우리 내막을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오."
고서완은 상을 물리고 나서 배을남에게 신중하게 말했다.
"야아, 명념하겄구만이라우."
인부들 여섯은 다음날도 정미소로 나갔다. 일이 다 끝난 줄 알았던 백남일은 다시 나타난 그들을 보고 허둥지둥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덜아, 무신 낯짝으로 여그넌 또 와! 일 다 끝났응게 썩 없어져."
밸남일은 그들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외쳐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한 사람씩 큰 문 앞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아아니, 이놈덜 보소! 어째 여그 주저앉고 이려. 꼬라지 뵈기 싫은게 당장 없어지란 말이여!"
백남일은 더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아니, 요런 잡녀러새끼덜이 귀에 말뚝얼 박았능가. 나 말 안 듣겨? 몽딩이 찜질허기 전에 당장 눈앞에서 없어지라니께!"
그래도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점심도 굶고 하루종일 햇볕에 앉아 버티었다. 그리고 정미소 기계가 멈추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날도 그들은 또 정미소에 나타났다. 백남일은 더 펄펄 뛰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남일을 아랑곳하지 않고 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런 쳐죽일 놈덜이 있능가. 어디 누가 이기는가 보자. 거그서 다 굶어 뒤져 봐라."
백남을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은 다시 하루종일 버티었다. 그리고 정미소가 문을 닫자 따라서 흩어졌다.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또다시 정미소 앞에 나타났다.
"하이고, 저것덜이 귀신이여, 사람이여!"
백남일이 토해낸 소리였다. 그들은 백남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땅바닥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백남일은 이제 소리 지르기도 지쳐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떼의 사람들이 정미소로 몰려들었다. 그들 열댓 명은 다짜고짜 큰 문을 떠밀어대고 정미소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머시여! 느그덜언 누구여?"
뒤늦게 사무실에서 뛰어나온 백남일이가 외눈을 희번덕이며 소리 질렀다.
"보먼 몰르겄소. 딴 정미소 인부덜이요. 품삯얼 깎는 것도 부당헌디, 사람얼 몰아내기꺼정 혀라?"
한 사람이 따지고 들었다.
"아니, 니놈이 먼디 넘 지사에 배 놔라 감 놔라여?"
백남일이 쏘아질렀다.
"자아, 말로 해서넌 안된 게 다덜 들어가서 새로 온 물건덜얼 끌어냅시다."
그 사람의 말에 열댓 명이 백남일을 밀치고 정미소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아니, 아니, 저놈덜이."
백남일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새로 온 인부 여섯은 두세 사람씩에게 붙들려 곧 밖으로 끌려 나왔다.
"요런 염치없는 인종덜아, 넘 밥그럭 채트는 것 어디서 배왔어. 당장 여그서 떠. 또 한 분만 여그 오먼 그때넌 다리몽댕이럴 작신 분질러볼 것잉게."
그 말이 떨어지자 여섯 인부들을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 그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새로 온 여섯 인부들은 겁에 질려 앞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덜아, 느그가 머시여. 느그가 머신디 넘 일에 끼들고 이려!"
백남일이 분을 못 참아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 그리 알고 잡으먼 말 못헐 것이 없소. 우리넌 군산 정미노동조합 조합원이요. 깎은 품삯을 되올리고, 저 사람덜얼 그대로 쓰씨요!"
"머시요? 니놈이 먼디 간섭이여 간섭이."
"우리 말대로 안허먼 결국 이 정미소 못해묵을 것잉게."
"시건방구지게 주딩이 까덜 말어. 느그놈덜 싹 다 쓴맛 볼 거싱게."
백남일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들은 그날로 체포되었다. 물론 배을남이네 여섯 명도 함께 붙들려갔다. 백남일은 신속하게 새 인부들을 구해 빈자리를 채웠다. 그런데 백남일은 다음날 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다시 한 떼의 인부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제보다 더 많은 스물댓 명이었다. 그들은 어제하고 똑같이 정미소로 뛰어들어 새 인부들을 끌어내 몰아냈다. 백남일은 또 허겁지겁 경찰서에 연락했다. 그들 스물댓 명도 긴급 출동한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부터 경찰서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정미소 주인들이 경찰서로 전화를 해대고 찾아오고 했던 것이다. 정미소에서 일을 못하니 인부들을 풀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정미소 주인들은 일본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틀 동안 체포된 인부들은 40명이 넘었다. 한 정미소에 6명씩을 잡으면 7개의 정미소가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다 경찰서에 묘한 정보가 입수되고 있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정미소 인부들이 또 들고일어날 거라고 했다. 그리고 경찰에서 인부들을 자꾸 잡아넣는 것에 대해서 모든 정미소 인부들이 들먹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심상치 않은 조짐에 경찰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군산 정미소의 기계가 다 멈추는 날에는 예사 문제는 본토에 직접 미치게 되고, 그 책임은 자기네 경찰서로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경찰에서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자아, 여러 말 할 것이 없소. 우리 경찰에서도 협조할 만큼 했으니까 계속 정미소 해먹고 싶으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임금을 다시 인상시키고 그 인부들을 다시 채용하도록 해요."
사찰과장의 말이었다.
"아, 아니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백남일은 저항의 빛을 보였다.
"정미소 더 해 먹고 싶지 않소!"
"..."
백남일은 눈길을 떨구었다.
경찰에서는 그날 밤에 노동자들을 다 풀어주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원하는 대로 경찰에서 일을 해결해 좋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백남일은 다음날 아예 정미소에 나오지 않았다. 인부 여섯은 돌아가지 않는 정미소를 하루종일 지키다가 흩어졌다. 그러나 다음날도 정미소는 돌아가지 않았다. 백남일은 집에 앓아누워 있었다. 홧김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데다 경찰을 생각할수록 화가 끓어올라 술병이 더욱 도지고 있었다. 그가 더욱 분한 것은 그 어떤 정미소고 자기의 편을 들지 않는 것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백남일은 결국 정미소로 나갔다. 누워있을수록 손해만 커졌던 것이다.
"씨부랄눔덜, 그간에 일 못하고 손해난 것 다 볼충해 내!"
백남일이 큰 문 앞에 서 있던 여섯 인부들에게 소리친 말이었다. 여섯 인부들은 욕을 먹거나 말거나 그저 벙글거리며 정미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낙합 정미소 파업은 8일 만에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 소문은 금방 군산 시내에 퍼져나갔다.
"거 참 씨언허니 잘된 일이구마."
"근디 요분 일이 참 용허덜 안혀? 딴 정미소 인부덜이 안 들고 일어났음사 이리 안됐을 것 아니여?"
"그야 두말허먼 잔소리 아니라고."
"어허, 나가 잔소리허잔 것이 아니고 말이여, 딴 정미소 인부덜이 어찌 그리 용헌 생각얼 해낼지 알었냐 그것이랑게."
"이, 그야 참 용허고말고."
"근디, 그리 어깨동무허고 나슨 것이 첨 일 아니라고?'
"긍게 말이시. 그리 심지게 뭉쳐갖고 나슨 게 경찰서서도 무시 못허덜 안혀."
"그렁게 우리도 보고 배와야 써."
"하먼, 배와야 허고말고."
이런 말들은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 사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정미소의 일이 그렇게 해결된 것을 당사자들 못지않게 즐거워하는 사람은 고서완이었다. 그 일은 자신이 의도하고 추진한 대로 아무 차질 없이 종결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동정파업을 유도하면서도 불안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노동자들이 자기네들의 일자리까지 잃을까 봐 두려워해 호응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고서완은 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대략 세 가지 정도로 간추릴 수 있었다. 첫째, 근년에 빈발하고 있는 소작쟁의와 노동쟁의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이 일반적으로 깨어나고 있는 것. 둘째, 일본 기업주는 물론이고 이미 친일파들이 되어버린 조선 기업주에 대한 반감이나 적대감. 셋째, 직장마다 뿌리박고 있는 비밀조직원들의 꾸준한 활약. 고서완은 이런 분석과 함께 앞으로의 운동에 청신호가 켜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서완은 점심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고 선생님이신가요. 저는 조독만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방과 후에 선생님을 좀 뵈었으면 합니다."
"아 예, 그러십니까. 아드님이 착실하고 공부를 잘합니다."
그런 누가 들으나 학부형과 선생의 대화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학부형이 아니라 정도규였다. 조독만이라는 학생 이름은 "조선독립만세"를 줄인 암호였다. 우체국 교환실의 도청에 대비한 것이었다. 고서완은 집 쪽으로 자전거를 몰아 군산 시내를 벗어난 다음 들길을 따라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도규는 외딴 농가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한성에서 언제 내려오셨습니까?"
"어제 왔소."
정도규와 고서완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럼 노독도 아직 안 풀리셨을 텐데, 무슨 급한 일 있으십니까?"
"있고말고. 이번에 고형이 아주 큰일을 해냈는데 어찌 묵혀둘 수 있겠소."
"아니, 큰일이라니요?"
고서완은 의아하게 정도규를 바라보았다.
"군산 정미소 소문 들었소."
정도규가 환하게 웃었다.
"예에? 아니, 그 소문이 벌써 만경까지 퍼졌던가요?"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데 군산서 만경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아니오."
"헌데, 어찌 그 일을 제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허, 남보다 영리한 고형도 그런 말 할 때가 다 있소? 현재 군산에서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있는 건 우리밖에 없고, 다른 정미소 노동자들이 줄줄이 동조하고 나선 그런 동정파업은 조선에서 최초로 일어난 일이오. 그런 조직적인 일을 해낼 사람이 고형 말고 도대체 누가 있소?"
정도규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더없이 흡족하게 웃었다.
"선배님은 계시지도 않고,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불안해하며 시도한 일이 어떻게 잘 풀린 겁니다."
고서완이 쑥스럽게 웃었다.
"아니오, 큰일을 아주 치밀하게 잘해 낸 거요. 이번 동정파업의 성공은 여러모로 의미가 지대한 것이오. 첫째가 조선 최초로 성공시킨 동정파업이란 사실이오. 작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성 고무신공장 여공들의 파업에서도 타업종 노동자들의 동정금 지원은 있었지만 동정파업은 없었단 말이오. 둘째가 전체 노동자들과 기업주들에게 같은 업종의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대처하는 단결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좋은 모범을 보인 것이오. 셋째가 모든 노동자들에게 소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나약성을 버리고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소. 넷째가 전국적인 파급 효과요. 그걸 위해 우리가 더욱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소문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소. 다섯 째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서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법인 동정파업을 이룩해 냈다는 점이오. 이건 전국적으로 고형이 세운 공인데, 자기가 세운 공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도 문제지만 또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도 똑같이 문제란 걸 알아두시오."
정도규는 흔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고 무슨.."
고서완의 선하게 생기 얼굴이 더욱 쑥스러워졌다.
"저어, 진지상 다 봤는디라우."
조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예, 들여오시오."
밥상에는 호리병이 놓였고, 갓 삶아낸 돼지고기가 접시 가득 푸짐했다.
"자아, 우리 술부터 한잔합시다."
정도규가 호리병을 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고서완이 호리병을 뺏으려고 했다.
"어허, 무슨 소리요. 동정파업투쟁 성공을 축하하는 뜻으로 일부러 마련한 술이란 말이오. 어서 받으시오."
정도규는 꾸짖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고서완은 난처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자아, 그럼 우리 기분좋게 한잔합시다. 술 마신 지도 참 오랜만이오."
정도규가 먼저 술잔을 들었고,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다.
"고형은 이거 좋아하시오?"
정도규가 돼지고기를 양념 된장에 찍으며 물었다.
"예, 아주 좋아합니다."
"시장한데 많이 드시오. 난 한성이고 일본이고 다녀봤지만 돼지고기를 푹푹 잘 삶아 양념된장에 찍는 이만한 고기맛을 본 적이 없소. 특히 막걸리 안주에는 이거 당할 게 없단 말이오. 이건 우리 전라도의 독특한 음식인데, 가끔 먹고 싶어진단 말이오."
정도규의 말에는 훈훈한 친근감이 흐르고 있었다.
"예, 농사꾼들이 힘든 논일 하면서 배 든든하게 하기에 꼭 알맞은 음식이지요."
"아, 맞소. 그래서 농토 넓은 우리 전라도에서 이 음식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소."
정도규가 색다른 눈길로 고서완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성 집회는 잘되었습니까?"
고서완은 말머리를 궁금한 한성 집회로 돌렸다.
"아, 집회는 대성공이었소. 예정대로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총회까지 마쳤소."
정도규는 결론부터 말했다.
"마침내 노동자 농민 운동의 전국조직이 탄생했군요."
고서완의 목소리에 감격이 담겨 있었다.
"그렇소, 노농총 창립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일대 전화기를 맞게 되었소. 노농총 창립을 보고 돌아오니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고형이 정미소 일을 그렇게 처리해 놓지 않았겠소. 내가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정도규도 새 기운 넘치는 소리로 말하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회원들은 얼마나 모였던가요?"
"가맹단체가 1백81개에다 출석 대표들이 2백95명이었소. YMCA회관 강당이 입추의 여지가 없었소."
"예, 그 정도면 명실공히 전국조직이 갖추어진 셈이군요."
"그래서 그 위세를 몰아 중대한 결정을 한 가지 했소. 그게 뭔고 하니,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자치운동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오. 자치운동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게 신문이 공론화하고 있는 상황 아니오."
"아, 그것 참 시기에 딱 맞는 결정입니다. 자치를 하자는 자들이야말로 새로운 친일파들 아닙니까."
"그렇소. 우리의 이번 결정으로 자치주의자들이 신종 친일파라는 마각이 드러나면서 여지없이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오. 그리고 또 한 가지 효과는 민족주의 세력 중에서 자치를 내세우는 타협파와 자치를 반대하는 비타협파가 확실하게 분리될 것이오."
"예, 그건 진작 그렇게 되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운동을 하면서도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알아야 되니까요. 어쨌든 이광수 최남선이가 제일 먼저 궁지에 몰리게 생겼군요."
"그 사람들 참 한심스럽게 짝이 없소. 이광수는 상해 임정의 독립신문 주필까지 하고는 민족개조론을 써 자치운동의 씨를 뿌리더니만, 최남선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일선동조론을 써 자치운동에 불을 붙이고 있단 말이오. 의열단 조선혁명선언서를 통해서 자치주의자나 내정독립운동자나 참정권자나 문화운동자나 모두 일본놈들과 똑같은 우리의 적임을 선언한 신채호 선생하고는 너무나 좋은 대조가 되는 것이오."
"참, 그 대조야말로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거울이고 교훈이지요. 저는 3.1만세 때부터 감히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혼자 깊이 생각해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곤 합니다. 운동에 나선 자들 그 누구에게나 가장 참혹한 패배와 종말이 변절인데, 나는 그 어떤 고문의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가, 나는 그 어떤 고난이나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면서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신 있는 응답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고서완의 잠긴 듯 담담한 말이었다. 정도규는 그 뜻밖의 고백에 멈칫 놀랐다. 그렇게 내심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고형, 그건 고형만 그러는 게 아니오. 나도 그런 생각을 때때로 하는데, 자신이 없고 장담할 수 없기는 고형과 마찬가지요. 처음부터 인간은 강철이 아니오. 그런 내심의 괴로움과 고통을 통해서 단련되고, 동지들과 결속하고 학습에 나가면서 단련되고, 외부의 사건과 충돌하고 해결해 나가면서 단련되고 그러는 것 아니겠소."
정도규도 자기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예, 이제 하는 말이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고문을 끝까지 꿋꿋하게 이겨내고, 재판정에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내세운 사람은 한용운 선생 한 분뿐이었다는 게 참 충격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꺾였다는 것에 놀랐고, 만약 내가 그 처지였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나도 두려움에 떨며 꺾였을 것인가, 아니면 한용운 선생처럼 꿋꿋했을 것인가, 많이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용운 선생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꺾이고 말 것 같기도 했고, 영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보다는 꽤 강해진 것 같습니다만, 변절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를 살펴보곤 하게 됩니다."
"고형의 말이 참 솔직하고 진실한 것이오. 나도 나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늘 고민이오. 내가 나를 자신 있게 믿을 수 있게 하려고 나도 나를 자꾸 단련시키고 있는 중이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약한 말을 꺼내가지고..."
고서완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오, 아니오. 이리 솔직하게 내심을 털어놓는 담화를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오.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가 서로 단련되는 것 아니겠소.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잔씩 더 합시다."
두 사람은 다시 잔을 부딪쳤다.
"혹시 사회주의 단체들의 난립에 대해서는 뭐 토의된 게 없습니까?"
"그건 시기상조라는 서로 간의 묵시로 거론되지 않았소. 그 어떤 사회 변동이나 그렇듯이 사회주의 단체들의 난립도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는 필수적 현상이니까 별로 큰 문제는 아닐 것이오. 그리고 그 난립 현상이 우리 사상을 대중적으로 급속하게 확산시킨다는 기여의 측면도 있으니까."
"예, 그렇기도 하지요. 그런데 지식층 조직원 확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측면에서 말이오?"
"예, 다 아시는 것처럼 신사상바람이 무슨 풍조처럼 번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식층들 중에 어지간한 사람들은 맑스 레닌을 들먹이지 않는 사람들이 없고,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그게 심합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주의를 아마 한복에서 양복쯤 갈아입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조직원 확보에 옥석을 구분하는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것 참 중요한 말이오. 사실 지식인들 속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허세로 과장하고 있소. 사회주의자인 척해야 선진 지식인인 것 같은 풍조 말이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더라고 앞으로 신중을 기하도록 합시다."
정도규는 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노농총 창립으로 새로 해야 할 일은 뭐 없습니까?"
"그건 차차로 의논해 나갑시다. 고형 갈 길이 먼데 오늘은 이만 일어납시다."
고서완을 배웅한 정도규는 어둠이 진하게 밴 들길을 빨리 걸었다.
"어디 또 나가실라고요? 애기가 많이 아픈디..."
끝을 흐리던 아내의 말이 들리고 있었다. 의원에게 데려가 보라는 말을 기왕이면 좀 부드럽게 할 것을 그랬다 싶었다.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미안함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마음이 없어서 퉁명스럽게 내쏜 것이 아니었다. 좀 부드럽거나 살갑게 했다가는 그게 빌미가 되어 아내가 엄살을 부리며 매달릴지 몰라 미리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내놓고 말은 못 했지만 매사에 불만이 많았다. 유산상속에도 할 말이 많은 눈치였고, 남들보다 낮은 소작료 징수에도 마땅찮은 기색이었고, 자신이 밖으로만 나도는 것을 더욱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내의 속마음을 일체 모르는 척 묵살하는 것으로 정도규는 탈출구를 찾았다. 아내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미안스런 생각은 어쩌다 떠오르는 것뿐이지 정도규는 아내에게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죽도록 일을 하면서도 굶주리는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아예 죽어버렸거나 멀리 집을 떠나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살아가는 여자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 여자들에 비하면 아내는 너무 호강스러웠던 것이다. 정도규는 들길 30리를 걸어 유승현의 집에 당도했다.
"앉게, 아직 공허 스님은 안 오셨네. 저녁은 어쨌능가?"
유승현이 자리에 앉으며 책을 덮었다.
"응, 진작 먹었네."
정도규는 걸어오는 동안에 참았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성에 갔든 일언 어찌 되고?"
유승현도 담배를 뽑아 들었다.
"응, 모든 게 아주 잘 되었네."
정도규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총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환청인 듯 감감하게 들리고 있었다. 쉰 듯 구슬프고 사무친 듯 구성진 그 울음이 멀리서 들려오니 더 애절감이 깊었다.
"아, 그것 참 잘한 결정이네."
유승현은 무릎을 치고는,
"자치허자는 놈덜언 더럽고 추접허기가 똥통에 구데기만도 못헌 놈덜이시. 왜놈덜에 식민지인 것얼 자인험서 왜놈덜얼 상전으로 받들고 자치럴 허자니, 그것이 영영 나라는 안 찾고 종놈질이나 대대로 해묵자는 것 아니여. 식자들었다는 놈덜이 그런 못된 생각덜얼 해내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되는 것이제. 자치허자는 놈덜언 다 총독부 앞잽이고 친일파덜잉게 우리가 몰아쳐야 허는 것이야 너무 당현헌 것이시."
그는 속 시원한 반응을 보였다.
"똥통에 구더기만도 못하다는 말을 누가 한지 아나?"
정도규는 속이 후련해져 물었다.
"그야 아무나 허는 말 아니여?.."
유승현이 정도규를 의아스릅게 쳐다보았다.
"그게 말이네, 고문을 당하면서 겁먹고 있는 민족 대표들에게 한용운 선생이 화가 나서 터뜨린 말일세."
"아니, 그것이 그렁가?"
유승현의 눈이 커졌다. 그때 뒷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누구시오?"
유승현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소승 공허요."
유승현이 문을 열자마자 공허가 성큼 들어섰다.
"아이고 이런, 정 선상이 먼첨 와 기셨구만이라 이."
공허가 정도규한테 먼저 인사를 했다. 늦어진 미안함의 표시였다.
"어디서 장삼자락 잡고 안 놓는 과부가 있었구만이라."
유승현이가 말을 걸쳤고, 정도규는 툭 웃었다.
"금매 말이오, 과부도 한나가 아니고 쌍과부가 붙드는디 어쩔 것이오."
세 사람은 소리 죽여 웃으며 자리 잡고 앉았다.
"어찌 생각얼 정허셨는게라?"
유승현이가 문갑 안에서 유과가 담긴 작은 바구니를 꺼내며 공허에게 눈길을 보냈다.
"글씨요, 무식허고 바쁜 대로 요 책얼 다 읽어보기넌 혔는디..."
공허는 바랑에서 꺼낸 책을 유승현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꼬리를 사렸다.
"책이 맘에 안 들든게라?"
유승현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공허는 손을 젓고는,
"나가 무식헌 눈으로 보기로넌 가난허고 불쌍헌 사람덜, 거 머시라드냐, 이, 무산자럴 위헌 혁명이라는 것이 저그 저 동학허고 달를 것이 머시냐 허는 생각이 들드란 말이오. 동학도 인내천으로 모든 사람덜이 다 하늘맨치로 귀허고 공평허다고 혔고, 동학군덜이 들고 일어난 것도 모두가 차등없이 공평허니 사는 새 시상얼 열자는 것 아니었소. 한나 달른 것이 있다면, 아니 둘이 달른디, 한나넌 요것이 저 타국서 들어온 물건이란 것이고, 둘은 요 사상얼 신봉하면 쏘련이란 나라가 우리나라 독립얼 도울 것이다 허는 것 아니겄소.근대 그 달르다는 것이 나 맘얼 콱 틀어쥐덜 못헌단 말이오. 요것이 쿠신 소린고 허니, 나넌 애초에 가난허니 살었든 놈이라 줄으나 사나 가난허고 천대받는 사람덜 편이고, 또 우리 식구 다 불태와 죽인 것이 왜놈덜이라 나가 죽을 때꺼정 왜놈덜얼 쳐없애기로 딱 작정이 되야 있다 그것이요. 긍게 나헌티넌 요런 신사상이 따로 필요허덜 않단 말이오. 나넌 그간에 중옷얼 입고도 대종교 사람덜허고 아무 탈 없이 투쟁얼 잘혀 왔소. 나넌 나라럴 되찾자는 뜻만 같음사 어느 누구허고도 뜻얼 합칠 수가 있소. 근디 아조 중옷얼 벗어불고 나스기에넌 그 신사상이라는 것이 거 머시냐. 참 그렇소."
그는 유승현과 정도규를 번갈아 보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유승현이 정도규를 건너다보았다. 그 얼굴이 난처해져 있었다.
"예, 스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제가 깨달은 것도 있습니다. 스님도 저희들도 더 여유를 가지고, 필요한 일은 서로 협조해 나가면서 더 좀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조선사람들의 제일 큰 목적은 어디까지나 독립이니까요."
정도규는 공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승려인 데다가 그 나름의 체험 논리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의 의식 전환이란 빠를 수가 없었다. 만약 의식 전환이 안 된다 하더라도 거기에 구애될 것이 없었다. 그가 견지하고 있는 투철성으로나 오랜 투쟁경력으로나 그는 귀한 존재였다. 그런 사람과는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협조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야아, 정 선상이 그리 도량 넓게 생각해 주신게 고맙구만이라. 근디, 나럴 믿어주신다면 나가 틀림없이 신용허고 있는 젊은 사람덜얼 소개헐 수는 있겄구만이라."
공허가 유과를 집어들며 내놓은 제안이었다.
"아 예, 그리 협조해 주시면 더 고마울 게 없겠습니다. 스님이 소개해 주시는 사람이면 맘 놓고 믿겠습니다."
정도규의 반색이었다. 유승현의 얼굴도 비로소 편안하게 풀려 있었다. 소쩍새는 밤 깊은 줄 모르고 울고 있었다.
18. 그 깊은 한
유달산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그 자태를 우람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온갖 형상을 한 크고 작은 바위봉우리들이 청옥색 투명한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한층 더 우아하고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수많은 바위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유달산은 언제나 전설적인 신비를 간직한 한 폭의 입체 음양을 그려내자 유달산은 더욱 신묘한 입체화가 되고 있었다. 유달산은 그다지 높지도 그리 크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바위산이라 우람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바위 몇 덩어리로 이루어진 산이었더라면 육중하기는 하되 둔중해 보이고 싱거웠을지 모른다. 유달산은 바위산으로 태어나되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을 수많은 자식인 양 품어 듬직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다양한 바위봉우리들로 모양을 갖추었다고 하나 바위만으로는 산의 구색이 모자란다고 생각한 것일까. 중턱 아래로는 차츰 나무들을 키워내 산자락에 이르러서는 넉넉한 숲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 생김대로 사람들은 유달산을 신령스럽게 여겼다. 안개나 구름이 중턱을 휘감고 있을 때면 그 신비스러움이 극치를 이루어 유달산에는 영락없이 영험한 신이 머무는 것처럼 신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목포에는 유난히 무당들이 많았다. 그 무당들이 유달산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바위 아래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물론이었다. 유달산은 언제나 목포를 굽어보고 있었다. 목포에 사는 사람들도 언제나 유달산을 바라보았다. 목포사람들은 유달산을 에워싸듯 하면서 터를 잡고, 차츰 해변 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목포사람들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면 어디에서나 유달산을마주하게 되었다. 목포사람들에게 바다와 더불어 유달산은 모태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주름함지를 무겁게 이고 가던 어떤 할머니가 유달산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가 가득 든 함지의 무게에 눌려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그 할머니의 눈은 유달산을 향해 위로 잔뜩 치켜 뜨여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신령님 전 비나이다. 신령님, 신령님, 우리 동화몸 성허고 공부 잘혀 앞질이 휘언히 열리게 굽어살펴 주십소사. 그놈이 우리 집안 대들보 될 장자입네다. 그놈이 똑똑허니 잘돼야 우린 집안이 새로 일어납네다. 왜놈덜 손에 기맥히게 전답 다 뺏기고 우리 남정네 할라 한얼 품고 죽은 뒤로 집안이 폭싹 내래앉었습네다. 근디 아덜 전식이가 왜놈덜 몰아낼라고 만세 불른 것이 죄가 되야 으지가지없는 여그 목포땅으로 왔시니 이 늙은 것이 누구럴 믿겄능게라 그저 영험허신 신령님만 믿습네다. 이 늙은 것 불쌍허니 생각허셔서 우리 동화 잘되게 굽어살펴 주십소사, 굽어살펴 주십소사..’
이런 기구를 올리고 있는 그 할머니의 늙고 메마른 얼굴은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쯤이 유달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지점이었다. 그 할머니는 시가지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늙은 여자는 다름 아닌 박건식의 어머니 대목댁이었다. 대목댁은 아침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소원을 빌었다. 그러기를 벌써 몇 년째였다. 그 소원을 빌지 않고서는 하루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쩌다가 몸이 아파 시가지로 나오지 못하게 되는 날에도 그 소원 빌기를 빼먹지 않았다. 멀리 유달산을 바라보며 더욱 간절하게 빌고는 했다 대목댁은 날마다 부두 어귀로 고구마장사를 나다녔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들 건식이는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라고 성화였다. 막판에는 아들놈 불효자식 만들지 말라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목댁은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손자 동화를 잘 가르쳐야 한다는
작심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들 건식이의 막노동으로는 여섯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에도 허덕거렸다. 그런데 손자 동화는 학교 갈 나이를 벌써 몇 년째 넘기고 있었다. 며느리가 제 아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일거리를 구해 나섰다. 며느리는 선창가 어란 공장에 일을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벌이로 동화의 공부 뒷바라지가 되지 않았다. 대목댁은 생각다 못해 아들과 며느리 모르게 가을걷이 날품을 나다녔다. 일부러 고구마밭만 찾아다녔다. 하루종일 고구마를 캐주고 품삯을 고구마로 받았다. 한 바가지도 받고 두 바가지도 받고, 인심에 따라 품삯은 대중이 없었다. 그 고구마를 날마다 모았다. 보름 남짓 모은 고구마는 한 가마가 다 되었다. 대목댁은 그걸 밑천으로 마침내 고구마장사를 나섰던 것이다.
부두 언저리에는 싸구려 행상들이 많았다. 언제나 북적거리는 부두노동자들과 날품팔이들이 불러모은 행상이었다. 대목댁은 고구마를 삶아 가지고 그 행상들 상로 비집고 들었다. 장사는 먹는 장사가 제일이고, 아무리 하찮은 장사라 해도 이문 없이 밥 굶는 일 없다는 귀동냥을 대목댁은 굳게 믿고 있었다. 부두 언저리의 여러 가지 행상들 중에서 고구마 장수가 가장 보잘 것이 없었다. 먹거리로서의 등차로 보나 값으로 보나 쌀로 만든 음식에는 댈 수가 없었다. 죽 한 그릇에 5전이고, 떡 한 쪽에는 2전이고, 콩국물 수무 한 사발이 2전인데, 고구마는 한 무더기 3개에 1전이었다. 그러나 천한 입 많은 데서 천한 장사가 세나고, 아무리 이문 박한 장사라도 많이만 팔면 목돈이 된다고 했다. 바로 고구마장사에 그런 쏠쏠하나 재미가 있었다. 맛은 어쨌거나 허기진 배를 채워햐 하는 사람들에게 5전짜리 죽보다는 3개에 1전인 고구마가 훨씬 더 나았던 것이다. 주먹만큼씩 한 고구마 3개에 물을 한 사발 마시면 배가 든든하고 벙벙해지는 것이 죽 한 그릇은 댈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2전씩 하는 떡 한 쪽이나 콩국물 우무
한 사발은 더욱 댈 것이 없었다. 제일 싼 돈으로 가장 든든하게 배를 불릴 수 있는 맛에 가난한 노동자와 날품팔이꾼들은 점심 요깃거리로 고구마를 많이 찾았다. 하루에 주름 함지 가득한 고구마를 다 팔기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러 다 팔지 못해 몇 개씩 남더라고 아무 걱정이 없었다. 집에 가지고 가 손자들에게 먹이면 그 또한 톡톡한 할머니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모아진 돈은 아들 벌이에는 댈 것이 못 되었지만 며느리 벌이하고는 맞먹었다. 그 돈을 며느리 벌이에 보태서 장손 동화를 학교에 보내게 되었을 때 대목댁은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았다. 입학식 날은 헌 옷이나마 깨끗이 빨아 풀 빳빳하게 먹여 잘 다려 입고 손자의 손을 활기차게 잡았던 것이다. 손자는 남편 닮고 아들 닮아 공부를 썩 잘했다. 대목댁은 그것만이 유일한 보람이고 위안이었다. 손자가 덧셈 뺄셈으로 자기는 더듬거리는 돈 계산을 척척 해내고, 자기는 한 글자도 모르는 책을 줄줄이 읽어내리는 것을 볼 때면 대목댁은 온갖 고생이 다 풀리며 그보다 더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대목댁은 더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는 했다.
‘그려, 그려, 이쁘고 이쁜 내 새끼야, 니가 그저 공부만 잘히어. 글먼 이 할메가 뼉따구가 녹아내릴 때꺼정 일히서 니 공부 뒷수발헐 것잉게. 니가 똑똑허니 되아야 원통허니 돌아가신 느그 할아부지 웬수 갚고 우리 땅도 되찾을 것잉게.’
대목댁은 손자 동화를 중학교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대학까지도 보내리라고 작정한 지가 이미 오래였다. 저녁때면 몸이 지쳐 기운이 까라지다가도 대목댁은 그 생각을 하며 새 기운을 차리고는 했다. 대목댁은 기차역 앞을 지나며 고부정한 걸음걸이가 더 빨라지고 있었다. 마음은 벌써 부두 어귀로 가 있었다. 마수걸이를 남들보다 먼저 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대목댁은 언제나처럼 부두로 내려가는 비탈길 중간쯤에 바다를 둥지고 자리 잡았다. 맞은편에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어서 행상들은 누구나 그쪽에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탈길이 끝나면서 시작되는 부두에도 행상들은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늘 번잡한 부두 일에 방해가 되는 탓이었다. 그렇다고 비탈 길가에 줄이어 낮는 것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장사가 잘되는 길목이니까 행상들이 막무가내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한두 달씩 별 탈 없이 지나다가도 어느 때는 느닷없이 순사가 나타나 소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순사는 행상들의 좌판을 닥치는 대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순사가 나타났다 하면 행상들은 뻘밭의 게들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고구마 함지며 떡시루 같은 것을 들고 어쩌면 그리도 날쌔게 피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행상들 모두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너 네댓 사람들은 꼭 화를 입었다. 불쑥 나타난 순사의 발길질 앞에서 행상들의 몸놀림이 제아무리 기민하다 해도 몇몇 사람은 피해를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행상들 중에서도 죽장수가 당할 때가 가장 보기 딱했다. 사정없이 걷어차인 죽 항아리가 깨지면서 죽이 그대로 길바닥에 쏟아지는 것이었다. 떡장수나 고구마 장수는 걷어차인다 해도 물건을 다 망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 장수는 항아리가 깨지는 날에는 꼼짝없이 피해를 다 당하고 말았다. 그러기는 우무장사도 마찬가지였다.
역전 주재소에서 행상들에게 가장 인심을 잃은 것이 오카노 순사와 문 순사였다. 특히 문 순사는 행상들에게 욕을 삼태기로 얻어먹었다. 오카노야 그런다 하더라도 문 순사는 같은 조선사람이었다. 그런데 문 순사는 꼭 죽 항아리만 골라서 차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나타날 때마다 피해자들 중에 죽 장수가 많았던 것이다. 죽이 땅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진 앞에 버티고 선 문 순사의 모습은 일본인 순사 뺨칠 만큼 당당하고 사나웠다.
"아이고 요런 드런 놈아, 대대로 염병이나 앓다가 꼬드라져 뒤져라."
"저 오살육시헐 놈, 뒤져서도 천년만년 왜놈 똥구녁이나 핥고 살어라."
행상들이 입 모아 문 순사에게 퍼대는 욕이었다. 대목댁은 점심때를 맞아 한바탕 정신없이 장사를 해냈다. 언제나 점심때가 장삿손이 제일 달았다. 점심때 장사를 잘못하면 그날 장사는 망치게 되었다. 대목댁은 고구마가 함지 밑바닥에 깔릴 만큼 점심 고비를 잘 넘겨 마음이 느긋해져 있었다. 대목댁은 남은 고구마들 중에서 껍질이 상하고 못난 것 하나를 골라 들었다. 점심 요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대목댁은 고구마를 반으로 자르려다가 멈칫했다. 돈을 생각하고, 귀하고 예쁜 손자 동화를 생각하면 고구마를 하나라도 축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늙어가는 몸에 장사를 계속하자면 고구마 하나로라도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대목댁은 벌써 몇 년째 고구마를 먹으려고 할 때마다 똑같은 생각에 주저하고는 했다.
‘그려, 나가 몸 성허니 오래 삼서 이 장시럴 잘히야제 우리 동화 뒷수발얼 잘허게 되제.’
대목댁은 이 다짐과 함께 눈을 질끈 감으며 고구마를 반으로 잘랐다.
"대목댁언 인자 좋겄소."
옆의 떡장수 여자가 시루떡 고물을 입에 찍어 넣으며 말했다.
"누가 베실헐 일 있간디?"
대목댁은 고구마를 한입 베물려다 말고 그 여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인자 찬바람 살살 일어남서 명태철이 안 닥쳤소. 명태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허먼 메누리 벌이가 얼매나 톡톡해지겄소."
"아이고, 시장시런 소리 말소, 좋아지는 것이야 왜놈덜허고 광주 현부자에 영암군수겄제. 밤잠 못 자감서 명태 배대기 따서 몇푼 더 벌어봤자 몸 축나는 것에 비허먼 시장시런 벌이 아니드라고."
"그려도 벌이가 느는 것이 어디요."
겨울과 함께 명태철이 오면 어란공장에서는 밤일을 시작했다. 며느리는 온몸에 비린내를 묻혀가지고 밤늦게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밤일 품삯은 보잘 것이 없었다. 일본사람들치고 생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지만 어란은 유별나게 좋아했다. 특히 목포에서 나는 명란에 환장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사람으로 목포 명란젓을 제일 많이 사는 사람은 광주의 현 부자라고 했다. 그것을 사교 선물로 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암군수로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전을 해간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목포 명란젓을 총독부 관리들에게 부지런히 바친 까닭이라고 했다.
"참, 시상이 지랄겉이 얄궂어진께 알 통통허니 밴 명태국 한분 씨언허니 낄 에묵덜 못허고 사요 이. 마산 알언 왜놈덜이 미리 다 빼묵어불고 장바닥에 나도는 것은 배때기 째진 것이나, 알 안 밴 것덜뿐이니 원."
"어디 명태알뿐이여? 도미고 대구고 삼치고 맛난 생선이야 싹 다 왜놈덜이 차지해불고 우리 조선사람덜이야 갈치나 홍어 묵으면 잘 묵는 것이 아니드라고."
대목댁이 고구마를 우물거리며 쓰게 웃었다.
"금매 말이오. 왜놈덜언 어찌 그리 맛난 생선은 이골나게 잘 아는지 몰르겄습디다 이. 뱅어도 그리 환장얼 안헙디여?"
"뱅어도 얼매나 맛난 괴기여. 비린내없고 살이 쫀득쫀득험서 지름기 자르르 도는 것이 둘이 묵다가 한나 죽어도 모를 맛 아니드라고."
대목댁이 군 입맛을 다셨다. 그때 갑자기 고함소리와 외침이 터져 올랐다.
"빨리 몰아내, 빨리!"
"요런 잡것들 보소, 요거!"
"바가야로!"
"다 잡아딜여, 다!"
일본말과 조선말의 외침이 뒤섞이는 속에 호각소리까지 요란하게 울려댔다. 다른 때와는 달리 순사들 예닐곱 명이 여기저기로 내달으며 행상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 느닷없는 공격에 행상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순사들의 발길질에 함지며 항아리가 엎어지고 박살이 나고 있었다. 대목댁은 먹다 남은 고구마 쪽을 내던지며 함지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순사의 발질이 함지를 걷어찼다.
"아이고메.."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대목댁은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런데 뒤쪽은 축대였다. 대목댁은 함지와 함께 축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상들의 자취는 찾을 수가 없었다. 순사들에게 끌려온 날품팔이꾼들이 그 길을 말끔하게 청소했다. 그리고 순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경계를 섰다. 전에 없었던 그런 광경에 행인들마저 쭈뼛거렸다. 두어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누가 보아도 고급 관리라는 것이 금방 표가 났다. 그들은 깨끗한 비탈길을 느리게 걸어 내려가며 부두와 바다 쪽을 두루두루 살피고 있었다. 그들 예닐곱 명은 쌀보다는 목화가 더 많이 쌓여 있는 부두까지 다 돌아보고 나서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부두 근방에는 금세 소문이 돌았다. 총독부에서 고급 관리가 시찰을 나와 부윤은 물론이고 도지사까지 뒤따른 행차라는 것이었다. 대목댁은 날이 어두워져서 가마니로 엮은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축대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허리를 심하게 다쳐 꼼짝을 못했던 것이다.
"아이고 엄니, 허리럴 어쩌크롬 다치셨간디 요리 꼼짝얼 못허신게라?"
박건식은 소스라치며 어머니를 붙들었다.
"아니여, 아니여. 쬐깨 접질린 것잉게 메칠 지내먼 나슬 것이여."
대목댁은 애써 아픔을 감추며 아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대목댁의 얼굴에는 고통이 역연하게 드러나 있었고, 목소리에는 신음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박건식은 덜컥 겁이 났다. 늙은 몸에 허리를 다쳤으니 병 중에 중병이었고, 어머니의 기색으로 보아 다쳐도 심하게 다친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한테 어머니가 다치게 된 연유를 듣고 난 박건식은 가슴에서 불길이 솟았다.
"어무님 뫼시고 온 사람덜 말로는 축대 밑으로 떨어진 사람덜이 어무님말고 서넛이 더 있다는디 그것이 순사덜이 헌 일이라 논 게 어찌..."
박건식의 아내 반월댁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아이고, 사람 미쳐 죽겄네!"
박건식은 이 말을 울컥 토해내며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쳤다. 그건 분함을 토해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아내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박건식은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를 못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끙끙 앓았던 것이다.
"공장 나가지 말고 엄니 수발 잘허소. 나넌 의원 불를 돈 구해 올 것잉게."
박건식은 아내한테 일렀다.
"아니여, 아니여. 나야 암시랑토 안헝게 다덜 일 나가그러, 일 나가, 나야 똥물 잠 걸러묵으면 나슬 병인디 의원이고 머시고 불르덜 말고."
아픔으로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대목댁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반월댁은 망설거리는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아내를 쏘아보는 박건식의 눈길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반월댁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남자들의 일자리도 그렇지만 여자들의 일자리는 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하루이틀 나가지 않으면 기다려주는 법 없이 딴사람으로 자리를 때웠다. 그리되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대목댁은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큰탈났구만이라. 어무님이 두 다리럴 영 못쓰신당게요."
애달아 있던 반월댁은 남편이 사립을 들어서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
"머시여? 무, 무신 소리여?"
"어무님 두 다리고 굳어부렀단 말이오. 피도 접도 못허시고, 꼬잡아도 아픈지도 몰르시고.."
반월댁이 눈물을 훔쳤다. 박건식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눈물을 훔치고 있던 반월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으원 불를 돈언 구허셨능게라?"
"이, 그려. 나 댕게올라네."
박건식은 잠시 나갔던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허둥지둥 사립 밖으로 나갔다.
"아무 장담얼 못허겄소. 허리럴 짚이 상해 생긴 병인디다가 삭신이 늙어논께...참 고약시럽게 되았소."
몇 군데 침을 놓고 나서 의원이 마당으로 나서며 무겁게 한 말이었다.
"어찌 잠 낫게 혀주시게라오. 으원님만, 으원님만 믿겄구만요ㄲ"
박건식은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충격 속에서 이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의원은 아무 대꾸가 없이 고개만 보일 듯 말 듯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의원은 날마다 와서 침을 꽂았다. 그러나 대목댁의 병세는 아무런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딴 병이 덧치고 있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고 누워만 있으니 소화가 되지 않아 배탈이 났다. 그리고 배탈이 잡히지 않으니 몸이 축나면서 기력이 떨어졌다. 설사가 멎지 않으니 반월댁의 병 수발은 더 어려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대소변을 받아내는 형편에 설사까지 하게 되어 갈아입힐 옷이 없을 지경이었다. 반월댁은 날마다 빨래하기에 숨돌릴 겨를이 없었다.
"나넌, 인자 그만 오겄소. 나가 헌다고 혀봤는디 나가 지닌 으술로넌더 어찌 안되겄소. 이 집 살림도 에로운 것 같은디 더 돈받을 체면도 없고.."
치료를 시작하고 보름이 되자 의원이 한 말이었다.
"아니구만이라, 돈언 걱정 마시고 더 치료럴 혀줏씨요. 돈이야 얼매든지 댈 것잉게 맘쓰덜 마시고.."
"아니오, 아니오. 돈이 문제가 아닝게 정 더 치료럴 받아볼 맘이 있으면 딴 으원헌티 뵈이는 것이 좋겄소."
의원은 무정하다 싶게 자기의 할말만 하고 돌아섰다. 박건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다. 의원의 말은 더 치료를 해봐야 나을 가망이 없다는 뜻이었다. 박건식은 현기증을 느끼며 토방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지러운 눈앞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박건식은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면목이 없었다. 빼앗긴 땅을 되찾기는커녕 어머니마저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가 가슴을 쳤다. 고구마장사를 아무리 말렸지만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구마장사로 손자를 학교에 보내게 된 것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낙으로 삼았고 누구에게나 자랑을 했다. 그런 어머니의 정성에 아내도 자신도 말로 다 못할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결국은.. 박건식은 핏빛 한숨을 뭉텅이로 토해냈다. 대목댁은 자신의 병이 나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원이 오지 않게 되자 그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열흘이 다 되도록 침을 맞는데도 몸은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대목댁은 그즈음에 벌써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여나 싶어 의원을 퇴하지 않고 며칠 더 침을 맞았던 것이다. 제발 좀 일어나게 해달라고 신령님한테 간절하게 빌고, 남편한테 애타게 매달리면서, 그런데 의원이 먼저 발을 끊고 말았다. 이렇게 산송장이 되어 시나브로 죽어가야 된다는 것이 대목댁은 기가 막혔다. 차라리 축대에서 떨어졌을 때 죽었어야 했던 것이다. 대목댁은 마음을 공글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손자를 중학교고 대학이고 공부시키려고 했던 꿈만 깨진 것이 아니었다. 아들에게 너무 큰 짐이 되어 그나마 집안을 망칠 판이었다. 자신의 병 수발에 묶여 며느리가 돈벌이를 못 나다니니 손자가 공부를 작파해야 할 것은 너무 빤한 일이었다. 손자를 맹무식꾼을 만들어 전정을 망치는 것은 곧 집안을 망치는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효심이 깊은 아들은 앞으로도 또 다른 의원을 부르거나 약을 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벌써 의원비로 나간 돈도 다 빚이었다 그것도 차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대목댁은 이런 생각들을 수십 번 되짚은 끝에 마음을 작정했다. 아무래도 성한 몸이 될 가망이 없는 자신이 떠나버리면 집안의 우환이 모두 걷힐 것이었다. 아들이 큰 짐을 덜게 되고 며느리는 다시 돈벌이를 나서고, 며느리의 벌이에다 자신이 하루 세 끼 먹어없애는 돈을 보태면 손자는 그대로 학교에 다닐 수 있을 터였다. 이렇게 작심을 하고 나자 대목댁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스러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말년이 이처럼 기구하고 각박해질 줄은 예전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왜놈들에게 느닷없이 논밭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살림이었다. 소작을 내놓지는 못했어도 머슴 하나는 부린 자작농이었으니 모진 흉년이 들지 않으면 죽을 끓이는 일은 없었다. 평작만 되면 집안 식구들이 철 따라 옷을 해 입을 만큼 살림에는 여유가 있었다. 하늘은 변덕을 부려도 땅은 변덕이 없이 듬직해 평생이 든든했던 것이다. 그런데 땅을 빼앗기게 되면서부터 팔자는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당장 배곯는 가난이 닥친 것만이 아니었다. 하늘이었던 남편을 감옥에서 잃어야 했다. 그 기막힘과 절통함을 어금니 사리물며 이겨냈던 것은 남편의 유언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남편의 유언대로 기어이 땅을 되찾을 일념으로 한스러움을 가슴속 깊이 감추고 아들을 부축했던 것이다. 내 땅에 소작질을 해야 하는 분함을 참지 못하는 아들을 애써 다독거렸던 것도 남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들이 3.1 만세에 그리도 거세게 나섰던 것도, 그런 아들의 기를 더욱 세워주었던 것도 다 남편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3.1 만세에 발 벗고 나선 것은 오히려 남편의 뜻과 멀어지고 말았다. 꼭 왜놈들을 몰아내게 될 줄 알았는데 그 반대로 왜놈들에게 쫓겨 고향을 등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혼자서라도 집을 지킬까 어쩔까 얼마나 망설였는지 몰랐다. 고향을 등지게 되면 땅을 영영 되찾지 못하게 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남편을 남겨 두고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위험에 처해 쫓기고 있는 아들 앞에서 그런 생각들은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핏줄이 당기는 힘에 끌려 부랴부랴 아들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이놈으 말년 팔자가 어째 요리 궂은고.., 아니제, 아니여, 나 팔자가 궂은 것이 아니여 나라럴 뺏긴 것이 병통이었제.’
대목댁은 먹빛 한숨을 토해냈다.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할무니, 할무니!"
툇마루를 뛰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사내아이의 활기찬 목소리였다.
"온냐, 동화 오냐아."
대목댁도 반갑게 화답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그건 생각뿐이었다. 고개만 약간 들렸을 뿐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환한데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손자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번번이 실수를 하고는 했다.
"할무니, 나 핵교 댕게왔네."
책보를 허리에 동인 동화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어야 내 새끼, 어여 오니라!"
대목댁은 누운 채 두 팔을 벌렸다.
"할무니, 허리 잠 어찐가?"
동화는 거침없이 할머니 품에 안기며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동화는 멈칫했다.
"할무니, 더 많이 아픈갑제!"
대목댁은 약간 고개를 저으며 손자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여, 거짓말이여. 많이 아픈 게 울었제 머."
할머니를 내려다보는 동화의 눈에 눈물이 그렁 고였다.
"이, 무신 소리라고. 아니여, 아파 운 것이 아니여."
대목댁은 그때서야 서둘러 눈언저리를 훔치며 완강하게 부인했다.
"근디 어찌서 할무니가 울어. 글먼 무신 속상헌 일 있능가?"
그러나 동화는 할머니를 더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이고 내 새끼야, 이 할메 그리 안 위혀도 돼야 분허고 원통헌 생각에 지절로 흘른 눈물잉게."
대목댁은 고마움에 목이 메며 손자의 손을 붙들었다. 왜 울었는지를 끝까지 캐고 드는 손자의 다부진 모습에서 대목댁은 언뜻 남편을 느끼기도 했고 아들을 느끼기도 했다.
"머시가 그리 분허고 원통헌디?"
동화는 더 바짝 다가앉았다.
"아이고메, 이 할메 한 분 울었다가 뽕이 빠지겄다."
어른 못지않게 매듭매듭을 짚고 드는 손자의 그 질긴 추궁에 대목댁은 대견스러운 똑똑함과 가슴 저리는 정을 느끼며,
"니 할메럴 누가 이리 맨글었는지 알지야?"
속마음에 든 말을 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이, 개잡놈에 왜놈순사제."
동화는 지체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려. 우린 전답얼 누가 뺏어갔는지도 알지야?"
"그려. 우리가 어찌서 여그 목포로 와 이 고상인지도 알지야?"
"이, 고것도 왜놈 순사덜이 아부지럴 잡어 감옥에 가둘라고 헝게."
"아이고, 우리 동화 똑똑타. 글먼 할아부지럴 누가 죽인지도 아냐?"
"하먼. 고것도 왜놈순사덜이 그랬제."
"그려, 그려. 긍게로 왜놈덜언 누구누구 웬수다냐?"
"할아부지 웬수고, 할무니 웬수고, 아부지 웬수제."
동화는 말을 따라 손가락을 꼽아나갔다.
"그리고 또 있는디?"
"또오?"
동화는 의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니나 엄니나 동상덜이나 어찌서 타관서 배곯고 요 고상덜인지 몰르냐?"
"알어. 왜놈덜헌티 땅 뺏겠응게 그렇제."
"그려. 글먼 왜놈덜언 또 누구누구 웬수겄냐?"
"이, 엄니 웬수고, 나 웬수고 동상덜 웬수네."
"옳여. 왜놈덜언 우리 온 식구 웬수다. 니가 이 집안 장자로 할아부지 아부지헌티 효도헐라먼 어째야 쓰겄냐?"
"왜놈덜헌티 웬수럴 갚아야제."
동화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힘찼다.
"아이고메 내 새끼, 똑똑허고 장허다. 니가 커서 꼭 웬수럴 갚어야 되는겨."
대목댁은 손자의 팔을 끌어당겨 등을 토닥거리면서,
"니가 담에 웬수럴 갚을라먼 시방어째야 쓰겄냐?"
그녀는 눈물 번진 눈으로 손자를 올려다보았다.
"공부 열성으로 히야제."
"옳여, 옳여. 우리 동화넌 그간에 이 할메가 헌 말 하나또 안 까묵고 있구나. 할아부지가 저 시상서 우리 동화 내래다보심서 너무 좋아라 허시겠다. 니 할아부지 생각나냐?"
"잉.."
동화는 폭넓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시무룩해지고 있었다.
"그려, 할아부지가 니럴 영판 이뻐라 허셨니라. 니가 야물고 똑똑혀서 더 이쁨 받었제. 니 할아부지가 이 시상얼 뜨심서 냄긴 말씸이 머신지 아냐?"
"이, 전답얼 꼭 찾으라고.."
"그려, 그려. 그 전답은 대대로 물림해 온 것잉게 니도 아부지 따라서 그 전답얼 기연시 찾어야 쓴다 잉!"
대목댁은 힘주어 다짐했다.
"이, 다 알어."
대목댁은 속에 든 말을 거의 다 한 셈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이 입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 할메가 오래 못살겄다. 니 할메 없어져도 공부 열성으로 허겄지야?’
그 다짐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것을 놀라게 할까 봐 차마 그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동화야, 니가 무신 일얼 질로 잘해야 이 할메가 좋아라 허는지 아냐?"
"치이, 공부제 머."
그 쉬운 것을 왜 묻느냐는 듯 동화는 입을 삐쭉하며 웃었다.
"그려, 공부 잘히야 써. 공부 잘히서 똑똑허니 되아야 우리 식두덜 웬수도 갚고 땅도 찾어지는 것잉게. 알겄지야?"
대목댁은 자신도 모르게 목이 잠기며 손자의 손을 더 꼬옥 잡았다.
"잉, 다 알어, 인자 할무니 다리 주물러야제."
동화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기의 손을 빼냈다.
"..."
대목댁은 곧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다리를 주물러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자의 정성을 생각해서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손자는 날마다 학교에 갔다 와서는 다리 주무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대목댁은 더욱 서러움과 비감을 느꼈다. 손자가 아무리 애써 주물러도 주무르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손자의 그 애틋한 정선이 고마워 가슴 저리는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대목댁은 저녁밥을 그저 먹는 시늉만 했다. 마음을 딱 작정하고 나자 입맛도 떨어졌지만 한 술이라도 더 손자들에게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
"어무님, 어디 아프신게라우?"
반월댁은 밥을 몇 숟가락 뜨다가 마는 시어머니를 놀란 기색으로 쳐다 보았다.
"아니여. 나넌 많이 묵었응게 아그덜이나 갈라믹에라."
"어무님, 어쩔라고 이러신당게라. 밥이 동삼이고 불로초드라고 억지로 라도 드시고 기운 채래야 병얼 이기제라."
반월댁은 밥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시어머니 옆으로 다가앉았다.
"아니여, 나 다 묵었당게."
대목댁은 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반월댁은 주춤했다. 시어머니가 화난 기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어무님, 아범이 요런 일 알면 지가 생난리 당허는구만이라우."
반월댁은 시어머니가 제일 어려워하는 남편을 끌어다 댔다.
"억지로 더 믹여 속 아프게 맨드는 것이 어디 효도라디냐?"
대목댁은 엄한 눈길로 며느리를 쳐다보고는,
'아서라, 얼렁 아그덜 갈라믹여."
차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반월댁은 더 어찌하지 못하고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고 있던 세 아이가 곧 밥그릇을 덮칠 듯이 반월댁에게로 달려들었다.
"절반은 동화 믹이고 남치기 절만으로 두 가시네 가라믹여."
대목댁의 명령이었다. 그 엄한 말에 두 손녀딸은 그만 움찔해졌다. 그리고 얼굴을 돌리며 입을 삐죽거리고 힐끗힐끗 눈을 흘겼다. 대목댁은 밥도 그렇고 물까지도 줄인 지가 이미 오래였다. 대소변을 며느리에게 의지하게 되면서부터 밥이고 물이고 양을 줄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날마다 더러운 빨래를 해야 하는 며느리의 빨랫감을 하나라도 더 줄이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 마시는 것조차 며느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도 또 하나의 기구함이었다. 박건식은 언제나처럼 어둑어둑해져서야 돌아왔다. 박건식은 어머니 방문부터 먼저 열었다.
"엄니, 오늘도 심드셨제라?"
"아니여, 심들기넌. 시장헌디 얼렁 밥 묵어야제."
대목댁은 아들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모자의 대화는 날마다 똑같았다. 그 한마디씩을 주고받으면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기 마련이었다.
"근디 머시냐, 남샌헌티서넌 무신 소식이 없제?"
대목댁은 어서 아들에게 저녁밥을 먹여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말을 꺼냈다. 저녁을 먹으면 몸이 고단해서 곧 잠에 곯아떨어지는 아들을 다시 부를 수 없어서였다. 남샌이란 남상명을 이르는 것이었다.
"야아, 남샌도 살기가 정신 없응게요."
"혹여 남샌이 그 일 안 잊어부렀겄지야?"
"하먼이라, 꿈에도 안 잊어불제라."
'그려, 그래야제. 하늘이 두 짝이 나도 그 일얼 잊어부러서는 안 되제."
대목댁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야아, 땅 되찾을 일 잊어분 사람 아무도 없응게 걱정 안 허셔도 되느만이라."
"하먼, 그래야제. 땅이 목심잉게. 가, 얼렁 가서 밥 묵어."
대목댁은 심중에 있는 말을 다 한 홀가분함으로 아들에게 손짓했다. 첩첩산중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뛰어내리려고 마음을 작정했으면서도 너무 무서워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구름을 타고 오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 두둥실 구름을 탄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다. 말끔하게 하얀 옷을 입은 남편은 연상 웃으면서 어서 뛰어내리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너무 무섭당게라."
"아니시, 나가 받아줄 것잉게 아무 걱정 말드라고."
"못 받으먼 어쩔 것이오?"
"그런 구름에 태와줏씨요."
"아니, 그리넌 안되네. 거그서 뛰어내래야 이 구름얼 탈 수 있게 되능마."
"아이고, 참말로 무서와 그리넌 못허겄소."
"글먼, 나 그냥 갈라네."
"아니오, 아니어라. 쬐깨 기둘리씨요."
허둥거리다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깊은 저 아래로 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목댁은 소리를 지르며 잠이 깼다. 참 묘한 꿈이었다. 남편이 그리 말끔한 흰옷 차림으로 웃으며 자신을 어서 오라고 부른 것은 처음 일이었다. 그동안 남편의 꿈을 자주 꾸었지만 언제나 원한에 찬 모습이거나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대목댁은 자신의 마음이 남편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자신을 꾸짖지 않고 데려가려고 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어미, 댕게올라능마요."
박건식이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그려, 조심허고 잘 댕겨와."
대목댁은 언제나처럼 예사롭게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아들을 쳐다보는 그 눈빛은 깊고 서러웠다.
"할무니, 나 핵교 갔다 올라네."
박건식이가 떠난 한참 뒤에 동화가 책보를 허리에 두르며 말했다.
"그려 내 새끼, 어디 보자."
대목댁은 손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찌 그려? 할무니, 일어나 앉게?"
동화는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이상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여, 우리 동화가 이뻐서.."
대목댁은 달라진 손자의 기색에 가슴이 뜨끔해지며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공부 잘하라는 다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얼렁 가그라, 핵교 늦는디."
대목댁은 손자의 손을 서너 번 어루만지고 놓았다. 며느리가 빨랫감을 챙겨가지고 집을 나서는 것을 대목댁은 확인했다. 집에는 이제 두 손녀 딸만 남아 있었다.
"야덜아, 이 할메가 신 것이 묵고 잡은디 어디 가서 탱자 잠 따오니라."
대목댁은 두 손녀딸에게 일렀다.
"탱자가 안직 덜 익었는디?"
"덜 익었응게 시어 좋제. 동상 딜고 얼렁 가서 따와. 그래야 할메 몸이 낫제. 얼렁 가!"
대목댁은 두 손녀딸을 꾸짖듯 했다. 두 손녀딸까지 집을 나가자 집 안에는 대목댁 혼자가 되었다.
‘나가 인자 당신 옆으로 갈라요. 나럴 구름에 태와줏씨요.’
대목댁은 눈을 꼭 감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눈앞에는 어젯밤 꿈에서 본 남편의 모습이 선히 떠올라 있었다. 대목댁은 두 팔에 온 힘을 모아 몸을 뒤집었다. 상체는 뒤집어졌는데 하체는 어찌 되었는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대목댁은 양쪽 팔꿉으로 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기어지지가 않았다. 대목댁은 빨리 기려고 기를 썼다. 양쪽 팔꿉이 번갈아 놓일 때마다 축 늘어 처진 하체가 무겁게 조금씩 끌리고 있었다. 대목댁은 안간힘 쓰며 방문 턱을 넘었다. 그리고 툇마루 끝에서 그대로 토방으로 굴러떨어졌다. 대목댁의 바로 눈앞에는 댓돌이 박혀 있었다. 대목댁은 두 손으로 댓돌을 붙들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대목댁의 몸은 토방에 엎어진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댓돌을 낭자하게 적신 피가 토방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19. 무엇인들 못하랴
"소식업슨 지 메칠이나 되았능가?"
공허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연했다.
"이틀 되았구만이라우."
차옥녀는 송구스러운 몸짓을 지었다.
"또 거그 간 것이겄제?"
"야아, 그런갑구만요."
"쯧쯧쯧... 왜놈덜헌티 맺힌 한도 많고 히서 쓸 만헐지 알았등마 알고 봉께 영 물짜디물짠 물건 아니라고."
"...!"
차옥녀는 순간적으로 성질이 곤두서며 공허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공허와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피해 고개를 약간 돌렸다. 차옥녀는 오빠의 주책스러운 행위 때문에 공허 스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그렇지만 스님이 오빠를 못나고 못난 물건이라고 하는 데는 우선 고깝고 서운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스님의 말을 과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빠는 어쩌자고 시집을 가서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잊지 못하고 쫓아다녔다. 그리 마음을 못 잡고 상사병을 앓는 오빠에게 그동안 공허 스님은 여러 가지 말로 타일러왔다. 그러나 오빠는 그 병을 고치지 못하고 어느 날 불현듯 집을 나가서는 사나흘 만에 풀이 죽어 돌아오고는 했다. 한번은 오빠의 뒤를 밟아보았다. 오빠는 누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40리 밖까지 기세 좋게 내달았다. 그러나 어느 동네에 이르러서는 당산나무 아래 한정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해가 지자 터벅터벅 걸어 동네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주막을 찾아갔다. 오빠는 다음 달 또 그 동네를 찾아갔다. 한나절을 당산나무 아래 앉아 있던 오빠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길 저쪽에 아이를 업은 여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거리가 멀어 여자의 얼굴은 잘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오빠는 그 여자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길을 걷던 여자는 어느 배를 두 대나 연거푸 피운 오빠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그 동네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오빠의 발길은 올 때와는 정반대로 칙칙 끌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 나누기는커녕 가까이에서 보지도 못하는 여자를 찾아 오빠는 그리도 애를 태우며 살고 있었다.
"시님, 오빠럴 어찌히야 되겄능게라?"
차옥녀는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리 죽고 못살겄으먼 애당초 손목 틀어잡고 삼십육계를 놓든지."
공허는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그건 공허다운 말이었다.
"저어..오빠도 그럴 맘이 있었을란지 몰르구만이라. 그럼스롱도 지럴 찾을라고 그리 못헌 것일구만요."
차옥녀의 대꾸에 공허는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성질이 돋아 불쑥 내쏜 말이긴 했지만 옥녀 앞에서는 조심해야 할 말이었다. 그리고, 옥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사실일 것도 같았다.
"무신 다른 방도가 머 있겄다고. 어디 쓸 만헌 시악씨 골라 장개 달여야제."
"근디 맴이 콩밭에 있어서.."
차옥녀는 하르르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에 몇 번이고 그 이야기를 꺼냈었지만 오빠는 귓등으로 들어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여, 나가 그간에 딴 일로 정신이 없었고, 자네허거 성제간에 기룬 정풀이 허고 살으라고 그냥 세월 보냈든 것인디, 인자 발 벗고 나서야 되겄구만. 앞얼 봄서 살아야 될 젊은 사람이 저리 뒤에 옭아매여서넌 사람 노릇이 안되는 법이시."
공허는 말만큼 단호하게 장삼 자락을 뒤로 내쳤다. 그 바람에 가녀린 등잔 불꽃이 곧 꺼질 것처럼 자지러졌다.
"어디 마땅헌 시악씨가 있으신게라?"
차옥녀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아, 천지간에 널린 것이 큰애기고 시악씨 아니여. 인물도 그댁잖고 행실도 참헌 시악씨가 한나 있구만."
"야아, 잘되았구만요. 시님이 차고 나스시먼 오빠도 움쩍 못헐 것이구만이라. 오빠가 시님얼 질로 에로와헝게요."
차옥녀는 반색을 했다.
"허, 살다가 봉께 인자 중매쟁이질꺼정 허게 생겼네. 말이 난 짐에 어디 쌈빡허니 히보드라고. 가망없는 상사병이 병 중에 병인 것인디, 그리 뽀트작뽀트작 애길ㅎ이다가넌 사람 망치기 딱 좋은 법이시. 그나저나 오빠가 장개들먼 자네 전정언 어찌 정해지는 것이여?"
공허는 소리 잘한다고 소문난 차옥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지야 그저 소리혐서.."
얌전한 앉음새인 차옥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소리험서 살겄다 소리 잘허는 것도 다 타고난 팔잔디. 여자 몸으로 소리험스로 한평상 살아가자먼 낙보담 고상이 더 많덜 안컸어?"
"소리허는 것이 낙이면 되았구만요."
차옥녀의 말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하! 저것이 생김대로 야물고 당차시그려, 백정도 지 좋아서 허먼 낙인 것이고, 무당도 지 신명으로 허먼 복이 되는 법잉게.’
공허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공허는 옥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표나게 빼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난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그만하면 예쁜 축에 드는 생김이었다. 그런데 생김보다 더 두드러진 것이 있었다. 그 얼굴에 감돌고 있는 야릇한 기색이었다. 그 기색은 어찌 보면 색정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냉기 같기도 했다. 그런 얼굴의 인상은 약간 야한 듯하면서도 야무지게 보였다. 그만하면 소리꾼으로 인물 치레는 넉넉하다고 공허는 생각했다.
"헌디, 소리꾼으로 한평상 살자먼 남원 명창대회 겉은 디럴 나가야 되는 것 아니등가?:"
공허는 옥녀의 앞날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남원 명창대회 같은 데서 1등을 해야 소리꾼의 길이 순조롭게 열린다는 것을 공허는 들은 풍월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야, 오빠 일이 급허제 지 일이야 안직 안 급헝게."
차옥녀는 공허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스님이 자신의 앞날까지 생각해 주는 것이 마음 훈훈하고 고마웠던 것이다. 스님이 오빠를 보살펴준 것을 생각하면 부모 맞잡이의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는 것은 스님 앞에 못내 면목 없는 일이었다.
"안 급허기넌. 소리 너무 오래 안 허면 목청이 거 머시냐, 쇠고 때 찌고 혀서 덜 좋아지는 것아니?"
공허는 옥녀가 오빠 때문에 꽤나 오래 소리를 못 하고 지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 호맹이 오래 안 쓰고 걸어두면 녹쓸데끼 목청도 소리 오래 안 허먼 퇴허고 상허게 되느만요. 근디 지넌 그간에 전주로 정읍으로 댕김서 승무 검무럴 배우고, 거문고고 양금얼 배움스로 소리넌 끈허니 독공얼 해왔구만이라."
"어허, 글먼 오빠헌티 묶여서나 허송세월헌 것이 아니고 오빠허고 정풀이 해감서 야물딱진 광대 될 채비혔응게 양수겸장 친 것 아니라고?"
공허는 놀라는 기색으로 반색했다.
"야아, 소리만 갖고넌 실헌 알짜배기 광대가 못되니께요."
차옥녀는 수줍은 듯 웃었다.
"허, 참새가 작아도 알얼 까고, 제비가 작아도 강남얼 간다등마, 장허시 장혀."
공허는 옥녀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생김대로 야무지다 싶었고, 오빠 득보가 당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 같았다.
"오빠가 왔능게비요!"
차옥녀가 눈을 반짝 빛내며 몸을 발딱 일으켰다.
"오빠 왔소?"
차옥녀는 다급하게 지게문을 밀쳤다. 그런데 공허는 어느새 바랑에서 목탁과 목탁채를 꺼내 양쪽 손에 나눠들고 방문 옆에 붙어서 있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엉뚱한 놈들이 뛰어들면 목탁으로 내려치고 목탁채로 후려칠 작정이었다.
"이, 나여. 미안허니 되았다."
어둠 속에서 한숨과 함께 들린 말이었다.
"아이고 오빠, 큰 탈 났소. 시님이 오셨단 말이오, 공허 시님."
툇마루에 주저앉은 오빠에게 차옥녀는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머, 머시여?"
차득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 놀랠 것 없네. 얼렁 들오소."
쿠렁하게 울린 공허의 말이었다.
"아이고 시님, 언제 오셨능게라우."
허둥거리며 방으로 들어선 차득보는 공허 앞에 넙죽 큰절을 올렸다.
"요것이 어쩐 일인가. 안직도 맘얼 못 잡고 요리 허깨비질이니!"
공허의 엄한 꾸지람이 엎드린 차득보의 정수리를 쳤다.
"..."
차득보의 어깨가 무겁게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등잔 불빛 흐린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고개럴 들고 답해 보소. 저분참에 나허고 헌 약조넌 어찌 된 것이여?"
공허의 엄한 목소리에는 노기까지 서려 있었다.
"야아, 지가 죽일 놈이구만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차득보의 목소리가 겨우 밀려 나오고 있었다.
"나가 사람얼 잘못 봐도 영 잘못 본 것이여. 진작에 넘 지집 되야분디다가 아새끼꺼정 논 지집헌티 미쳐서 부모 웬수 가을 일얼 작파해분 요런 천하에 호로자석이 어디가 있어!"
공허는 일부러 차득보의 가장 아픈 데다가 쇠꼬챙이를 찔러댔다.
"아니구만요, 아니얼. 엄니 아부지 웬수 갚을 일얼 작파헌 것이 아니구만이라."
차득보는 고개를 치켜들며 당황스럽게 말했다.
"머시라고? 절로 뚫어진 구멍이라고 멋대로 씨볼거리덜 말어. 넘 지집헌티 넋 빼고 미쳐 돌아가는 놈언 술 처묵고 총질허는 포수 놈보담 더 가당찮은 놈이여. 왜놈덜언 전부 낮잠 자고 있간디 그런 꼬라지로 웬수럴 갚어?"
공허는 쇠꼬챙이를 더 깊이 찔러대며 차득보를 몰아치고 있었다.
"지가 잘못혔구만이라. 인자 다시넌 안 그러겄구만이라. 시님, 인자 다시넌..."
차득보는 어느새 두 손을 합장한 채 애원하고 있었다.
"그런 약조가 어디 한두 번이여? 인자 나허고 인연얼 끊세."
공허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아이고 시님, 다시넌 안 그런당게라. 차, 참말로 약조허겄구만요."
너무 당황한 차득보는 곧 장삼 자락을 붙들 것 같았다.
"시님, 한분만 더 참아주시씨요. 우리넌 천지간에 둘뿐인디, 시님이 이러시먼 우리넌 누구럴 믿고 살겄능게라우."
차옥녀도 합장을 한 것인지 비는 것인지 모르게 두 손바닥을 맞붙인 채 애가 달고 있었다.
"나럴 믿기넌 멀라고 믿어. 나허고 헌 약조럴 밥 묵디끼 깨는 것이야 나럴 얼매나 무시허는 짓거리여. 다 틀렸응게 오늘로 인연 끝장이여."
공허는 지게문을 박찼다.
"아아고메 시님, 지가 빙신 팔푼이라 지 맘얼 지도 어찌 못혀서 그리됐제 눈꼽째가리만치도 시님얼 무시혀서 그런 것이 아니구만이라우. 시님, 죽어도 다시넌 안 그럴 것잉게 이분만 용서혀 주시씨요. 시님, 잘못혔구만이라우."
급한 김에 공허의 한쪽 다리를 붙들고 엎드린 차득보는 울먹이고 있었다.
"시님, 지발 즈그덜얼 불쌍허니 생각허시고 한분만 더 용서혀 주시게라우."
차옥녀도 물기 젖은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놈으 약조럴 또 어찌 믿어!"
공허는 냉정하게 쏘아 질렀다.
"죽기럴 한허고 부처님 전에 약조허겄구만이라."
차득보는 토해놓은 말이었다. 공허는 그만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부처님까지 들고나오는 걸 보니 급하기는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부처님얼 속이면 그 죄가 어찌 되는지나 알어?"
공허는 자못 근엄하게 말했다.
"야아, 날베락 맞어 죽고, 줄어서넌 불지옥에 떨어지는구만이라."
공허는 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어떤 불경에도 그런 벌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연하게나마 부처님을 그렇듯 높게 우러르고 있는 것은 전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려, 그리 무서운 벌얼 받는디도 부처님 전에 약조허겄다. 그것이여?"
"야아, 약조허겄구만이라."
공허는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니 맘얼 니도 어찌 못허겄다고 혔지야?"
가부좌를 틀고 꼿:꼿하게 앉은 공허는 자세에 어울리는 소리로 묵직하면서도 잔잔하게 물었다.
"야아.., 인자 도끼로 지 발목얼 찍어도 그 못된 맘얼 이기겄구만이라."
"그려, 일찍허니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럴 이 시상에 세 가지 에로움이 있다고 허셨니라. 이 시상 만상 중에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에롭고, 인간 중에 남자로 태어나기가 에롭고, 남자 중에 참 불자가 되기 에롭다고 허셨니라. 시번찌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겄냐?"
"잘 몰르겄는디요.,.."
부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르고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뜻 정도로 생각하면서도 차득보는 행여나 싶어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고것이 무신 뜻인고 허니, 부처님께서넌 옳고 바른 말씸얼 수고 없이 설허신 것이여. 중생덜이 그 말씸얼 그대로 잘 따르고 잘 실행허면 이 시상이 금세 극락이 되는 거이다. 근디 그 말씸얼 지대로 따르고 실행허는 사람이 아조 드물다. 어찌서 그런지 아냐? 다 맘덜이 강단지덜 못하고, 한 분 작정헌 맘얼 끝꺼정 지키지덜 못 혀서 그런 거이다. 득도고 성불이고 다 맘 묵기에 달린 것인디, 어찌서 득도허고 성불헌 사람이 그리 많덜 않은지 아냐? 다 지 맘얼 지가 야물딱지게 붙들지 못해 그런 것이다. 긍게로 이 시상서 질로 짜잔허고 쫌팽이 남자가 누군지 아냐? 지 맘얼 지 심으로 지키덜 못허고 이기지 못허는 남자여. 무신 말인지 알아 듣겄냐?"
"야아, 짚이 명념허겄구만요."
차득보가 머리를 조아렸다.
"어디 또 한 분 믿어보자. 니가 부처님 전에 약조혔응게 허는 말인디, 인연을 놓고 부처님게서 머시라고 설허신지 아냐? 인연언 흘르는 물과 같은 것잉게 순리로 맺어져야 허고, 순리가 아닌 인연언 시상만사의 화근이라고 허셨다. 니허고 월엽이허고넌 애초에 그 순리가 이니었든 것이여. 근디 니가 월엽이럴 안 잊어불고 억지럴 부리면 사방 일이 어찌 되는지 아냐? 먼첨 니 옆이서보톰 화럴 입게 되는디, 우선에 니가 얼이 빠져 니 진정 망치고, 느그 엄니 아부지 웬수 못 갚아 불효자식 되고, 나가 그 꼬라지 되먼 동상이 니럴 원망험서 성제간에 이나고, 요리 되먼 집구석이 어찌 외겄냐? 나허고 인연 끊는 것이야 암것도 아니다. 그리고 월엽이네헌티 입힐 화가 또 있다. 방구가 잦으면 똥 나오고, 꼬랑댕이가 질먼 밟히드라고 니가 그리 오래 월엽이 찾아댕기다가넌 결국 들키고 말이 나게 될 것이여. 그리 되면 판이 어찌 되겄냐? 월엽이넌 소박감기고, 월엽이 친정이고 시집을 뒤집히는 것 아니여? 니 짜른 소견머리로 판이 그리되면 월엽이허고 살란다고 생각헐지도 몰르느디, 아서라, 멍텅구리 겉은 생각언 허덜 말어라. 월엽이 아부지 신 선상님이 니럴 웬수로 삼제 둘이 배 맞추라고 냅둘 분이 아니시요,. 어찌냐,. 니 한나 잘못으로 판이 요리 험허게 되기럴 바래냐?"
"아니구만이라우. 인자 다시넌 안 그럴랑마요."
차득보는 또 머리를 조아리며 다짐했다. 그는 공허 스님의 말이 결코 과장되었건, 허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려, 맘 단단허니 묵고 정신채래라. 이놈으 시상이 인연 없는 여자헌티 정신 풀아감서 흘룽할룽 살 시상이 아닝게."
공허가 한숨을 쉬었다.
"시님, 오빠 장개들이게 존 시악씨 있으먼 중매 잠 스시제라. 지도 광대로 나스자먼 언제꺼정 오빠허고 함께 살 수가 없응게요."
차옥녀는 시치미를 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오빠가 기죽어 있는 판에 아까 공허 스님과 나눈 말을 고삐로 꿰자는 것이었다.
"이, 그것 아조 존 생각이시. 나가 사방천지 떠돌아댕김서 인물 좋고 행실 참헌 큰애기덜 많이 봐뒀응게 중매 잘 스기야 쉽제. 고런 존 생각얼 진작에 해낼 것이제."
공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능란하게 반죽을 맞추었다. 옥녀의 재간이 예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차마, 장개넌 무신 장개여. 보도시 입에 풀칠험서 돈 귀경허기 에로운 헹펜인디."
차득보의 마뜩찮은 어조였다.
"오빠넌 돈 걱정 겉은 것이야 안히도 되겄소. 돈이야 나가 다 알아서 헐 것잉게 오빠넌 장개들 맘만 묵으면 될 일이오."
차옥녀는 얼른 오빠의 말을 막고는,
"시님, 지넌 시님만 믿을 것잉게 후딱후딱 신부감얼 구해 주시먼 좋겄구만요."
공허를 쳐다보는 그 눈길이 확실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알겄구만. 자네가 돈얼 장만혐사 나야 중매스기가 쉽제. 아무 걱정 말드라고."
공허는 아무 주저할 것 없이 확답을 했다.
"야아, 시님만 믿겄구만요."
차옥녀는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공허가 떠나고 나자 차옥녀는 마음이 바빠졌다. 공허 스님은 오래 끌 것 없이 서둘러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허튼소리 하는 법 없고 무슨 일이나 그 생김대로 힘차게 밀고 나가는 공허 스님이었다. 목돈을 구할 일을 어물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차옥녀는 이삼일 곰곰이 생각했다. 오빠의 재산이라고는 헌 초가삼간에 논 세 마지기가 전부였다. 그 재산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것이었다. 부모도 없이 떠돌아다닌 오빠의 처지로서는 많은 재산이었고, 장가를 가서 자식들을 낳고 기르며 살기에는 적은 재산이었다. 그 재산도 결국 공허 스님이 장만해 준 것이었다. 신 선생네 집에 소개해 준 사람이 공허 스님이었고, 월엽이란 처녀와 연분이 닿지 않아 그 집을 나오면서 받은 돈으로 장만한 것이 초가삼간과 논 한 마지기였다. 그리고 자신을 팔아먹었던 주막집 주인한테서 공허 스님이 받아낸 돈으로 논 두 마지기를 보탰던 것이다. 차옥녀는 오빠를 만나게 되면서 여러 번 놀랐다. 찾을 길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오빠를 너무 수월하게 만나게 되어 놀랐고, 헌 초가삼간이나마 오빠가 집을 지니고 있는 것에 놀랐고, 그뿐만 아니라 논까지 한 마지기 가지고 있는 것에 더 놀랐고 틀림없이 맹무식일 줄 알았던 오빠가 글을 줄줄 읽고 쓰는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옥녀는 오빠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리고 서러웠다. 몇 년 동안 자신을 찾아 사방천지를 헤매다닌 고초를 생각하면 오빠가 고맙고 안쓰러워 언제나 가슴이 눈물로 젖었다. 오빠가 헐벗고 동냥질을 해가며 자신을 찾아다닌 것에 비하면 놀이패에 끌려다닌 자신은 호강을 한 셈이었다. 자신은 오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가 탔을 뿐 밥을 굶거나 옷을 헐벗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오빠가 마음을 잡고 장가를 들기로 했으니 차옥녀는 자신의 힘으로 오빠를 실팍하게 돕고 싶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오빠가 평생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도울 수 있었다.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도 그러기를 바랄 것 같았다. 오빠가 터를 잡고 제대로 살아야만 집안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그건 아버지 어머니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효도이기도 했다. 차옥녀는 자신의 인생살이가 한동안 묶이는 것에는 눈을 감기로 했다. 자신은 평생 하고 싶은 소리나 맘껏 하면서 살면 그만인 팔자였고, 소리를 어디에 한동안 묶여서 하나 자유롭게 떠돌면서 하나 소리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리하는 자리가 술자리라는 것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몸을 아주 팔아 넘기는 신세가 아니었고 자유롭게 소리를 하며 부름을 받는 경우에도 태반은 술자리였던 것이다. 또한 소리하는 팔자를 타고난 여자들이 임시로 그 길을 거치는 건 흉도 아니고 흠도 아니었다. 차옥녀는 그동안 망설이고 미루어왔던 남원 명창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소리 대접을 제대로 받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남원 명창대회에서 1등을 하면 그날로 뜨르르하게 유명해질 뿐만 아니라 소릿값이 금값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하고서도 차옥녀는 마음 한구석이 께름칙했다.
"설익은 소리로 이름 날리는 디에 정신 폴아서넌 안된다."
소리 스승님의 말씀이 가슴속에서 쟁쟁히 울리며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무리 살기가 궁해도 인종 못된 것덜 앞이서 소리혀서넌 안 된다."
"소리 몰르는 백 량 앞이서 소리허지 말고 소리 아는 몰 한 그럭 앞이서 소리혀야 헌다."
"독공이 게을르먼 소리 망치고 돈에 눈멀먼 소리가 병든다."
"소리 자랑에 취하고 돈맛에 흘리면 소리는 도망가고 생목만 남는다."
스승님의 말씀이 연달아 가슴팍을 치고 있었다.
‘스승님, 아부님. 용서해 주시게라우. 하나뿐인 불쌍헌 오빠구만이라. 지가 호의호식허잔 것이 아닝게 나무래지 마시게라우. 더는 스승님 말씸 거역허는 일 없을 것이구만요.’
일단 마음을 정한 차옥녀는 며칠 동안 온 정성을 바쳐 소리를 다듬어 나갔다. 1등을 하는 것은 별걱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만일을 생각해서 빈틈없이 채비를 해두고 싶었다.
"오빠, 나 전주 잠 댕게올라요."
차옥녀는 남원에 가는 것을 감추었다. 오빠가 동행하려고 할지 모르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었고, 자신의 의중을 오빠가 먼저 눈치채는 것도 싫었다.
"또 멀 배우로 가는갑제? 메칠이나 걸린다냐?"
차득보는 그저 덤덤했다. 여동생의 공부 나들이는 빈번했던 것이다.
"한 사날 걸릴 것이오. 근디..집 비우덜 안컸제라?"
차옥녀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눈길은 오빠의 속을 더듬듯 곧고 날카로웠다.
"나가 미쳤다냐. 시님허고 그리 단단허니 약조혀 놓고."
차득보는 민망한 듯 눈길을 돌렸다.
"오빠 맘얼 오빠도 몰르겄당게 허는 소리 아니오."
"허, 니가 나럴 영 쫌보로 못박았능갑다 잉."
차득보는 쓰게 웃으며 쌈지를 꺼냈다.
"어디, 오빠럴 쫌보로야 생각허겄소. 그늠으 병이 하도 요상시러서 나 없는 새에 또 도질랑가 무서와 그러제. 나도 없고 오빠도 집 비우고 없는디 공허 시님이 오시면 판이 어찌 되겄소."
차옥녀는 완전히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다짐을 받지 않은 것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남원 명창대회는 춘향이를 기리는 행사로 봄맞이를 삼았다. 그 행사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 명창대회였다. 활쏘기며 그네뛰기 같은 것은 명창대회를 받치는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춘향이를 기리는 행사들 중에 명창대회가 으뜸을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판소리 중에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유일한 것이 바로 춘향가였던 것이다. 춘향이의 고을 남원을 속칭 소리고장이라고도 하고 색향이라고도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도령과 춘향이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엮어낼 만큼 소리꾼들이 많았던 것이고, 춘향이의 정절을 본뜨려는 격을 갖춘 기생들도 많았던 것이다. 차옥녀는 달구지를 얻어타고 눈익은 남원 길을 가면서 또 장엄하게 뻗어 나가고 있는 지리산 줄기를 우러르고 있었다.드높게 솟아 우람한 자태로 수십 리를 뻗어 나가고 있는 지리산 줄기는 언제 보아도 숙연하게 머리 숙이게 했다 차옥녀는 그 거대함에 또 자신이 졸아드는 것을 느끼며 언젠가는 저 폼으로 독공을 하러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원 여자들이 인물이 곱고 특히나 눈이 맑고 총기가 서린 것은 지리산 정기를 타고나서 그런다고 했다. 지리산은 다른 명산들과는 달리 산신령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정기가 지리산 아래 명당인 남원고을의 여자들에게 타고내린다고 했다. 차옥녀는 그 지리산 정기를 받아 득음을 하고 싶었다. 차옥녀는 자정이 넘도록 지리산 쪽을 바라보고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앉아 있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내일 부를 것을 소리하고 있었다 내일 부를 것은 당연히 춘향가 중에서 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한 대목만으로는 안 되었다. 1등을 하게 되면 재청에 삼청도 받아야 했다. 귀명창인 남원 청중들에게 1등으로 뽑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재청에 삼청의 박수를 받는다는 것도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차옥녀는 아침밥을 먹는 등 마는 등 하고 주막을 나섰다. 광한루에 가까워질수록 잔치 기분이 돌고 있었다. 나들이옷을 입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광한루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 흥겨운 사람들을 보자 차옥녀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외로움만이 아니었다.
"소리넌 은제고 돌부처를 깨운다는 맘으로 혀라. 청중언 보지도 생각지도 말고."
귓전을 때리고 스승의 말이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의 가지가지마다 유록색의 새 잎새들이 돋아나고 있는 광한루 주위에는 봄기운이 화사했다. 그 싱그럽고 풋풋한 봄기운 속에서 청춘남녀의 춘정이 도질 만도 했다. 차옥녀는 숨을 깊이 들이켜며 이 도령과 춘향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는 그네를 타는 춘향이의 아리따운 모습과 그 모습에 흘린 이도령의 모습이 삼삼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사또의 아들 이 도령과 기생의 딸 춘향이의 사랑. 그 걸맞지 않은 신분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설레는 사랑인가. 차옥녀는 자신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또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사랑병에 사무쳐 있는 오빠였다. 오빠는 이 도령과는 정반대의 처지였다. 상놈으로 양반집 규수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여자는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오빠의 경우를 생각하자 이 도령과 춘향이의 사랑은 더욱 귀하고 신기할 뿐이었다. 지금 세상에도 양반과 상것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어찌 그 옛날에 그런 사랑이 맺어질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그 희한한 사랑 이야기가 진짜가 아니라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으며 차옥녀는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차옥녀는 오작교 쪽으로 천천히 돌아 광한루 아래 차일 친 곳으로 갔다. 그곳이 명창대회에 나온 소리꾼들을 접수하는 곳이었다.
"성명 삼자럴 대시오."
"차옥비, 구슬 옥에 날 비구만요."
"차옥비라, 어느 권번이여?"
"기생이 아니구만요."
"잉? 이름서넌 그런 냄새가 나는디? 되았소, 저짝으로 가서 기둘리소."
여자 출전자는 모두 아홉이었다. 수백 명을 헤아리는 청중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차옥녀는 내려뜬 눈으로 조심스럽게 그 사람들을 살펴보며 숨길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들은 예삿사람들이 아니었다. 귀명창에다가 오늘 명창 대회에서 명창을 뽑아낼 심사자들이었다. 심사원들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의 정도에 따라 1등 명창이 가려지는 것이었다. 귀명창들을 존대하는 심사방법이었다.
첫 번째 여자가 나섰다.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로 한껏 멋을 부린 처녀였다.
일짜로 아뢰리다. 일편단심 먹은 마음, 일부종사 하올지라..
춘향이가 변 사또 앞에서 곤장을 맞는 십장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던 차옥녀는 두 번째 소절이 시작되면서 허리를 부려버렸다. 더 들을 것 없는 생목으로 질러대는 소리였다. 예상대로 그 처녀는 청중들에게 추임새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물러섰다. 두 번째 여자는 낭자머리의 기생이었다. 그 여자도 십장가를 시작했다. 첫 소절이 끝날 즈음 차옥녀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세웠다. 제법 탄탄한 소리였던 것이다. 스물예닐곱 된 나잇값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소절로 넘어가면서 청중들 사이에서 추임새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번째 소절을 지나면서 차옥녀는 소리 없는 코웃음을 쳤다. 천구성이 아니라 벌써 소리에 금이 가고 있었고, 십장가에서는 더욱 필요한 한이 서려 있지 않았다. 역시 귀명창들의 박수 소리는 신통치가 않았다. 차옥녀는 세 번째로 나섰다. 쥘부채를 두 손으로 꼭 쥔 차옥녀는 숨길을 가다듬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스승의 엄한 모습이 떠올랐다.
아부님, 지럴 붙들어주시게라우.
차옥녀는 속으로 간절하게 뇌었다. 그리고 눈을 떠서 고수와 눈길을 맞추었다. 고수가 앉음새를 고치는 것을 보며 차옥녀는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응시했다. 그때 쿵 떡떡 북소리에 중모리 가락이 실려 울리기 시작했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어화 등등 내 사랑이야ㄲ
춘향가 중에서 이몽룡이 춘향이와 첫날밤을 보내기 직전에 불렀던 사랑가의 첫 대목이었다.
"얼싸 좋타!"
"얼씨구나!"
첫 대목에서 추임새들이 터져나왔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어화 등등 내 사랑이로구나.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
다시 추임새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차옥녀는 그 흥겨운 소리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호통 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추임새에 정신 폴먼 소리가 깨져!"
스승의 성난 얼굴도 떠올랐다. 차옥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청중들의 추임새에 신경 쓰다 보면 북장단을 놓치게 되고, 북장단을 놓치면 소리가 흔들리고 깨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추임새는 북장단에 묻어들게 해야 하고, 북장단에 묻어든 추임새는 너름새로 걸러내야 했다. 언제인지 모르게 쫙 펼쳐 들었던 부채를 맵시 있는 한 동작으로 착 접으며 차옥녀는 소리를마감했다. 그리고 나부시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얼씨구나, 명창 났네에!"
"더 볼 것 없이 1등이여, 1등!"
"재청이여, 재청!"
"그려 그려, 1등 줘라. 춘향이 이 도령 환생이다아!"
청중들이 아낌없이 환호하고 외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차옥녀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철 이른 땀을 훔치며 더없이 가슴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리가 그리도 잘 엥기는 무대였던 것이다. 1등을 하거나 말거나 소리가 그리고 차지고 휘늘어지게 잘 엥긴 것만으로도 한바탕 소리한 보람이 있었다. 나머지 여섯 사람의 소리는 어떻게 들어넘겼는지 차옥녀는 별 기억이 없었다. 딴생각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두가 귀에 담기지 않는 생목이거나 걸목이었고, 심지어 어떤 여자는 가사가 막혀 소리를 중단하기도 했다.
"어이 귀명창님네덜, 오늘에 1등 명창얼 누구로 뽑을라요오?"
갓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청중들에게 물었다.
"시번찌요, 시번찌!"
"옳여, 사랑가 부른 시번찌요!"
"그 시악씨 이름이 머시라고 혔어?"
"어허, 차옥비 아니여, 차옥비!"
"참말로, 소리맨치 이름도 이쁘시."
"다덜 그리 생각허요?"
노인이 다시 외쳐 물었다.
"두말허면 잔소리요."
"귀명창 무시허요, 시방!"
'얼렁 새 명창 재청 듣세에!"
"옳여,재청이여, 재청!"
청중들은 다시 소리쳐 환호하다가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차옥녀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무대로 나갔다 차옥녀의 눈앞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양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두 가지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빠의 살림 밑천을 장만해 줄 수 있게 되었고, 명창의 칭호를 받아 어엿한 소리꾼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차옥녀는 아까와는 다르게 탁 풀린 마음으로 십장가를 불러 재청에 답했다. 마음이 풀리자 소리는 더 흐드러지고 치렁거리면서 잘도 엥기고 있었다. 차옥녀는 온몸에서 새싹이 파릇파릇 돋는 생기를 느끼며 제 흥에 겨워 너름새도 날개를 달았다. 차옥녀는 옥중 상면 장면으로 삼창까지 답하고 무대에서 놓여났다.
무대에서 벗어난 차옥녀는 그때서야 목이 마른 것을 느꼈다. 차옥녀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샘을 찾아 발길을 서둘렀다. 소리를 길게 하면 한겨울에도 땀이 나고, 아무리 명난 명창이라도 판소리 한마당을 완창하려면 한 말 땀을 흘린다고 했다. 그래서 소리꾼들은 제대로 소리를 하고 나면 목이 타기는 해도 오줌이 마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보소, 보소, 옥비 명창!"
뒤따라오는 경상도 말에 차옥녀는 고개를 돌렸다. 화사한 옷차림의 두 여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염집 여자가 아니라는 걸 차옥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어, 우리는 진주서 왔는 기라예. 어데 가서 차분허니 이바구 잠 허입시더."
나이 좀 더 든 여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진주 권번서 오셨능게라?"
차옥녀도 웃음을 지었다. 소리는 원래 전라도 것이고,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은 소리를 좋아하면서도 소리를 제대로 할 수는 없어서 전라도에서 소리꾼들을 구해 가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특히 여자 소리꾼들은 더 그랬다.
"소리만 잘허는지 알았드라넌 눈치도 우예 그리 빠른교?"
다른 여자가 놀란 기색이었다.
"그래 재인 아이가."
"저어, 지넌 진주로 갈 헹펜이 못되는구만요."
차옥녀는 말 길게 할 필요 없다는 듯 웃음 걷힌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예 그런교? 대접 후허니 할 끼라요."
두 여자는 당황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금매 돈이 소양 없소. 나넌 안된께 딴 소리꾼얼 수소문해 보씨요."
차옥녀는 냉정하다 싶게 말을 자르고 돌아섰다. 오빠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 진주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경상도 사람들은 동편제를 좋아하는데 자신은 전라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편제 소리였던 것이다. 목을 축이고 차일 아래로 돌아온 차옥녀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전주와 이리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차옥녀는 그들이 묻는 대로 숙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해거름에 주막으로 찾아왔다. 먼저 발길을 한 것이 이리 여자들이었다. 차옥녀는 한마디로 이리 여자들을 퇴해 버렸다.
"군산이고 이리고 왜놈덜 승해 감서 유곽만 번창혔제 소리 지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간디요. 천금얼 줘도 싫구만요."
차옥녀는 전주 권번의 여자들과 마주 앉았다. 남원은 소리 고장으로 그리고 격조 높은 기생고장으로 일찍부터 명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귀명창 많고 품격 갖춘 기생 많기로 전주도 남원에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차옥녀는 반년에 백 원을 받을 것인지 1년에 2백 원을 받을 것인지 몇 번이고 되작거려 생각했다. 그동안 논값도 올라 상답이 6원을 넘어 7원에 이르고 있었다. 반년만 하자니 백 원으로는 논 스무 마지기가 안 되었고, 2백 원을 탐하자니 내키지 않는 권번에 매이는 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차옥녀는 여러 생각 끝에 반년으로 마음을 정했다. 백 원으로 논을 장만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세 마지기를 합쳐서 스무 마지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스무 마지기면 부자가 될 수는 없어도 오빠가 아이들 데리고 한평생 배곯고 등 춥게 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반년이면 별로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사실 반년의 소릿값 백 원이면 작은 돈이 아니었다. 평생 기생으로 팔리는 몸값이 2백 원 남짓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팔린 처녀들이 이런저런 예를 고루 갖춘 기생이 되자면 꽤나 긴 세월과 적잖은 비용이 들게 마련이었다.
"머시여? 니가 나 땀시 기생이 돼야?"
차득보는 펄쩍 뛰었다.
"아니, 소리만 헌당게요."
"기방서 소리허먼 기생이제 기생이 따로 있어? 나 그리넌 못혀. 그리혀서 장개들어 엄니 아부지럴 어쩌크름 대헌다냐."
차득보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참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으요 이. 알라면 똑똑허니나 알고 말허시요. 헌다허는 명창들도 그리 기방서 소리허고 산단 말이오."
"아 글씨 니가 그리 되라고 아부지가 니럴 소리꾼 맨글라고 허셨겄어."
"딴말 마씨요. 나가 기연시 소리꾼 되야 명창대회서 1등도 허고, 그 덕으로 오빠헌티 이리 심이 되는 걸 내래다보심서 아부지가 얼매나 좋아라 허실지 아요? 나가 오빠럴 위허는 일임사 그보담 열 곱 험허고 천한 일도 허겄소. 더 암 말도 말고 쓸 만헌 논이나 얼렁얼렁 물색허씨요. 곧 공허 시님이 오실 때가 되야간게."
차옥녀는 오빠보다 세게 기세를 올렸다.
"차암, 야가 영 쇠고집이시..."
20. 또 하나의 날개
송중원은 아침 설거지를 대충 마쳤다. 설거지래야 그릇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궁색한 자취생활이니 반찬이 변변찮아 씻을 그릇은 대개 네다섯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설거지는 밥을 하는 것에 비해 귀찮았다. 언제나 밥을 할 때는 시장기에 몰려 부지런을 떨었다. 그런데 밥을 먹고 나면 배부름과 함께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졌다. 간사하고 약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송중원은 설거지통 물을 담 쪽으로 끼얹었다. 그건 화단에 물주기를 겸한 것이었다.
"어머나!"
여자의 놀란 외침이 쨍 하게 울렸다. 송중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게 뭐예요! 옷 다 버리게."
여자의 외침이 더 커졌다. 송중원은 뒤늦게 그 여자가 박정애라는 걸 알아보았다.
"아이고, 이거 미안합니다. 옷 많이 버렸습니까?"
송중원은 황급히 부엌을 나섰다. 그러나 속으로는, 왜 하필 이런 때 나타나고 그래, 하며 짜증이 일고 있었다.
"내가 빨리 피했으니 망정이지 운동신경이 둔한 여자 같았으면 그 구정물 다 뒤집어썼을 거예요. 근데 송중원 씨 다시 봐야 되겠네요. 어쩜 구정물을 수챗구멍에 안 버리고 화단에다 버리나요?"
박정애는 얼굴을 찡그린 채 한심스럽다는 눈길로 송중원을 쳐다보았다.
"또 교양 없다고 따지고 싶은 건가요? 그건 내 뜻이 아니라 꽃을 사랑하는 이 집 주인의 명령입니다. 물도 아낄 겸 구정물이 더 영양가가 높아 거름이 잘된다는 겁니다."
송중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박정애가 들고 있는 정구채를 흘낏 쳐다보았다. 자신이 운동신경이 예민하다는 말을 왜 굳이 했는지 그 정구채가 잘 입증해 주고 있었다.
"체, 영양가가 높아? 아주 형편없는 노랭이로군요."
그만 말꼬리를 놓친 박정애는 경멸스러운 코웃음을 쳤다.
"다행입니다. 운동신경이 예민해 옷을 하나도 안 버렸으니."
송중원은 옹이를 박고 돌아섰다.
"허탁 씨는 뭘해요?"
박정애의 목소리가 경쾌해졌다.
"글쎄요, 오늘 아침 식사 당번이 아니니까 한잠 자는지 모르겠군요."
"아니, 아침밥을 먹자마자 또 자요? 돼지같이."
"낮잠만 맛있는 줄 압니까? 아침잠 맛있는 줄 알아야 인생을 아는 겁니다."
송중원은 방문을 옆으로 밀며 느릿한 타령조로 말했다.
"어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건 또 누구 철학책에 나오는 말인가요."
"글쎄요, 허탁과 송중원의 인생살이에서 나온 철학이라고 해두죠."
"호호호..모를 소리네요."
그래, 부잣집 딸년이 고학생들 인생살이를 알 리가 있느냐. 새벽에 한바탕 배달을 해봐라. 아침을 먹고 나면 전신이 축 늘어지는 게 졸음이 막 몰려온다. 그 절로 눈이 감기는 노곤함을 너 같은 부류들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이보게 허형, 일어나게. 제2의 윤심덕 행차시네."
송중원은 방으로 들어서며 굳이 "제2의 윤심덕"이라고 소리를 크게 지르고 있었다. 그 별칭은 박정애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허탁이가 인심 후하게 그리 부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박정애는 정말 자기가 제2의 윤심덕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송중원의 턱없이 큰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야유조가 섞여 있었다. 박정애가 들고 있는 정구채를 보는 순간 송중원의 심사는 비꼬였던 것이다.
"허형, 어서 일어나라니까. 제2의 윤심덕 납시셨어."
송중원은 다다미 위에 네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는 허탁의 허벅지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어엉? 뭐, 뭐라구?"
허탁이 허둥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인생 맛 그만 즐기시고 잠 좀 깨세요. 이 좋은 공일날 이게 뭐예요?"
박정애의 목소리가 카랑하게 울렸다.
"응, 정애 씨 왔소. 무슨 일 생겼소? 아아흠...왜 이리 졸리냐."
허탁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일은 무슨 일이 생겼겠어요. 우리 테니스 하러 가자고 왔어요."
박정애가 정구채를 들어 보였다.
"테니스요? 아니, 여자가 그런 운동도 합니까?"
"어머, 또 여자 타령이에요? 테니스는 남녀 구별이 없는 아주 신사적인 운동이란 걸 모르세요?"
박정애는 짜증스러워하며 주저앉았다.
"글세, 그놈의 운동이 신사적인지 야만적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여자가 그런 운동하고 나서는 건 좀 마땅찮소."
허탁이 불퉁스럽게 말하며 재떨이에서 꽁초를 골라 들었다.
"아니, 남녀차별을 안 한다는 허탁 씨가 왜 그러세요? 요새 남녀 대학생들 사이에서 테니스가 유행인 걸 모르세요?"
"그런 건 모르는 게 낫소. 그놈의 정구채 하나가 쌀 서너 섬 값이라니 우리 같은 고학생 신세로는 아는 게 병이오."
허탁은 담배 연기를 푸우 소리나게 내뿜었다.
"어머, 아실 건 다 아시네요 뭐. 허지만 라켓이 비싼 건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요. 내가 하나씩 사드린다면 화를 내실 거고, 정구장에 가면 빌려주는 게 얼마든지 있거든요. 공부를 잘하려면 운동을 해서 몸이 건강해야 되잖아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고 했으니까요."
박정애는 생글생글 웃어가며 허탁의 마음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운동이라면 날마다 자전거로 과자 배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넘칩니다. 곧 자전거 선수가 될 판이니까요."
마음 선선한 허탁이 잘못 넘어갈까 봐서 송중원은 이렇게 잘랐다.
"그거야 어디 운동인가요, 노동이지. 억지로 하는 그런 힘겨운 노동으로 쌓인 피로는 바로 테니스 같은 경퇘한 운동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서 풀어야 한다구요. 안 그래요?"
박정애는 눈을 빛내며 허탁과 송중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허, 말재주 자꾸 늘어서 좋소. 허나 돈 한 푼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운동이 얼마든지 있는데 돈 들어가며 주먹만한 공을 서로 쳐대는 그런 운동 같지 않은 운동을 우린 할 맘이 전혀 없소. 그리고, 우린 오늘 선약이 있소."
허탁은 손가락이 타들도록 빨아댄 꽁초를 잉끄려 끄며 냉정하게 말했다.
"어머, 그럼 어떡해요. 테니스코트로 동무를 나오라고 해놨는데요."
박정애는 울상이 되면서도 정구에 관한 용어는 꼬박꼬박 영어를 쓰고 있었다.
"그게 무슨 걱정이오? 정애 씨 혼자라면 좀 문제지만 둘이니 짝이 딱 맞아서 아주 좋잖소."
허탁의 능청이었다.
"그게 아니잖아요. 같은 여자끼리."
박저애는 말끝을 흐리며 허탁을 야속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허탁은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박정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송중원은 빙긋이 웃음 짓고 있었다. 박정애는 허탁만을 끌어내기 난처하니까 자기 친구까지 동원해 짝을 맞추려고 한 것이었다. 박정애가 허탁에게 색다른 감정을 보여온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박정애는 허탁이 기혼자임을 알면서도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러기는 물론 박정애뿐만이 아니었다. 동경에 유학 온 모든 여학생들은 자칭 신여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고, 거의가 자유연애 신봉자들이었고, 상당수가 남자의 기혼문제가 연애의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허탁 씨, 중한 약속이 아니면 취소하세요. 동무한테 좋은 사람 소개시켜 주겠다고 큰소리쳐 놨는데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박정애는 금방 눈시울까지 붉어지며 매달리기작전으로 나왔다.
"나한테 여자를 소개시켜 주려고?"
박정애에 맞서 허탁은 김빼기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아이, 몰라요."
박정애가 토라지며 눈을 흘겨댔다.
송중원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내 체면을 생각해서 테니스코트까지만 나가줘요."
박정애는 이제 유인작전을 쓰고 있었다.
"아니, 그럴 시간이 없소. 우린 곧 나가야 되겠소."
허탁은 매정하다 싶게 잘라버렸다.
"그리 중한 약속인가요?"
"그렇소."
"피이, 또 되지도 않을 독립을 놓고 왈가왈부 떠들어대기나 하겠죠."
박정애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아니, 무슨 말을.."
정색을 한 송중원이 말을 시작하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허탁이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던 것이다.
"오늘은 박정애를 달래듯 말하며 느물거리도 웃었다.
"흥! 다시 만나나 보세요."
박정애는 매섭게 쏘아붙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허탁과 송중원은 박정애의 탄력 넘치는 뒷몸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박정애가 내쏜 말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박정애가 토라지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 어쩔라고 그래?"
송중원이 재떨이를 끌어당겼다.
"뭘?.."
허탁이 신문지 쪽을 찢었다. 재떨이에는 이제 골라 피울 꽁초도 없어서 천상 꽁초들을 까서 신문지쪽에 말아야 했던 것이다.
"다음 공일에 원족이라니. 저 여자 맘을 자네도 알면서 그러면 되겠나?"
"괜찮아, 너무 염려 말게."
"염려가 아닐세. 자네가 그런 식으로 대하면 저런 여자는 자네도 자기를 좋아하는 줄로 오해를 한단 말일세."
"글쎄, 그런 오해는 좀 필요한지도 모르지."
"무슨 소린가?"
"거 뭐랄까.. 우린 주변에 저리 단순하고 악의없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쁠 건 없네. 다 인간관계니까."
도량이 넓으면서도 능청스러운 허탁의 성격답게 그 말은 둥글둥글하고 막연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말에는 묘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음을 송중원은 감지하고 있었다. 송중원은 그 말뜻을 대충 짐작만 하며 더 묻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허탁이 박정애를 이성적 호감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송중원과 허탁은 학생 티가 나지 않게 허름한 평상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 모임을 위장하기 위해서 학생복은 입지 않기로 되어있었다. 그들은 전차에서 내려 바로 맞은편 인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들의 집회 장소는 반대쪽이었다. 서로 멀찍하게 거리를 둔 허탁과 송중원은 제각기 다른 골목으로 꺾어 들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눈치 빠르게 뒤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골목을 두 번 더 꺾어 돌아 미행자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아까의 큰길로 나섰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길을 건너갔다. 송중원과 허탁은 또다시 서로 다른 골목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송중원은 골목의 교차점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허탁은 다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잠시 후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걷게 되었다. 그들은 빠른 눈짓을 주고받았다. 미행이 없다는 신호였다. 미행자가 없다는 것을 두 차례나 확인했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간격을 유지하며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걷는 방향이 같은 것이었다. 허탁이 먼저 민가들이 촘촘한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여보세요 허 동지, 저 좀 보세요!"
다급하고 긴장된 목소리가 허탁의 발목을 걸었다. 그 느닷없는 상황에 허탁은 소스라쳤다. 그러나 써늘해진 가슴을 누르며 갑자기 나타난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당신, 누구요!"
허탁의 짧은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예, 일월회 연락부 세폽니다. 장소가 노출된 것 같으니 빨리 피하라는 지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노출? 혹시 누구 체포된 동지들은 없소?"
"그런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 오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소. 헌데, 형씨 이름이 뭐요?"
"예, 이경욱이라고 합니다."
"이경욱, 못 보던 얼굴인데"
"예, 가입한 지 얼마 안 됩니다."
매섭게 변한 허탁의 눈은 한 점 의혹이라도 찍어내고 말겠다는 듯 이경욱이라는 사나이를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왜, 이자는 누군가?"
그때 송중원이 경계태세로 다가섰다.
"응, 일월회 세폰데, 개들이 냄새를 맡았다는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허탁이 저위를 빠르게 살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이경욱이란 사나이가 앞장섰다. 큰길로 나선 그들은 곧바로 전차를 탔다. 이경욱은 한사코 사람들 사이를 비집으며 앞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허탁과 송중원도 민첩하게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혹시 전차 안에 따라붙었을지 모를 미행자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다음 정거장에서 전차를 내렸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오는 전차를 다시 탔다. 미행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세 정거장을 가서 전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른 선의 전차를 바꿔탔다.
"얼마 안 됐다면서 솜씨가 아주 능숙하오. 저학년 같은데."
허탁이 중얼거리듯 말하며 이경욱이란 사나이를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아, 아니구만요..."
그 사나이는 긴장기 서린 얼굴로 쑥스러운 듯 웃었다. 허탁은 사나이의 긴장을 풀어줄 겸 해서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그렇게 했던 것이다.
"고향이 전라도요?"
송중원은 사나이의 말에서 묻어나는 전라도 어조에 어떤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예, 군산이구만요."
사나이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엿다.
"군산? 난 김제요."
송중원은 사나이를 쳐다보며 엷게 웃었다. 선하게 생긴 얼굴이면서도 어딘가 우울한 기색이 깃들인 인상이었다.
"예, 송 선배님은 진작 알고 있었구만요. 춘부장 어르신도, 선배님이 옥살이허신 것도.."
"아니, 전주에서 학교를 다녔소?"
송중원은 중학교 후배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의 고향이 군산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군산에서 전주로 유학을 오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군산 영명 중학에 다녔습니다. 선배님에 대해선 여기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경욱은 송중원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열등감과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의식은 더욱 짙어진 우울한 기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송중원은 무심한 듯 반응하고 말았다. 이경욱은 송중원의 그런 반응이 너무 다행스러웠다. 만약 고향 후배라고 해서 송중원이 좀 더 관심을 보이며 아버지에 대해 묻게 된다면 그보다 더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름 드높은 의병장인 송중원의 부친과 일본인 농장의 지배인인 자신의 아버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김제. 만경 평야에 동척을 제외한 일본 개인 농장으로 제일 큰 불이농장의 절름발이 지배인 이동만. 그 이름을 어쩌면 송중원도 알는지 몰랐다. 불이농장이 큰 만큼 소작인들이 많고, 소작인들에게 인심을 잃은 만큼 악명 높은 아버지의 이름은 넓게 퍼져 있었다. 사상운동에 몸 담고 있는 송중원이 골수 친일파이면서 소작인들의 적인 이동만이라는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동만의 아들인 것을 알면 송중원은 자신을 어찌 대할 것인가. 이경욱은 참담한 심정으로 어금니를 꾹 물었다. 고서완 선생님이 자신을 이해하고 감싸주듯이 송중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그와 정반대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송중원조의 안내를 맡고 나섰던 것이다. 우선 그런 부러운 내력을 지닌 고향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고 선생님한테서 위안을 받고 힘을 얻었던 것처럼 송중원과의 교류를 통해서도 어떤 자신감과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어디까지 가는 거요?"
혹시 내릴 데를 지나칠까 싶어 허탁은 무슨 생각엔가 깊이 빠져 있는 이경욱을 일깨웠다.
"예,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이경욱은 놀란 기색으로 차창 밖을 살피며 말했다. 그들은 두 정거장을 더 지나 전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간격을 두고 걸었다. 골목을 네댓 번 돌아 이경욱은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송중원과 허탁은 그 뒤를 따르기 전에 제각기 주위를 살폈다. 그 식당이 회합 장소가 아니었다. 식당의 변소를 통해 그 옆집으로 갔다. 앞서 온 사람들이 열 명 남짓 모여 있었다. 말이 없는 그들은 모두 긴장된 빛을 띠고 있었다. 송중원과 허탁은 서너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과도 눈길이 마주치는 대로 서로 예를 갖추었다. 두 차례에 걸쳐 다섯 사람이 더 합류했다. 예정된 열여섯 명이 다 모인 것이었다.
"다들 무사히 오셨군요. 모두 긴장하신 것 같은데, 우선 긴장들 푸십시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처음의 그 장소는 애초부터 회합장이 아니었습니다. 이 장소를 은폐하려고 그곳을 허위로 정했던 것입니다. 날로 심해져 가는 왜경들의 감시를 철저히 봉쇄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부조직원들의 기동성 있는 훈련도 겸하자는 것이기도 하구요."
일월회 대표의 해명이었다.
"체, 그런 줄도 모르고 똥줄이 탔군."
누군가가 불쑥 말해 놓고 과장되게 한숨을 토해냈다.
"거긴 똥줄이 탔으니 다행이오. 난 불알 두 쪽이 다 타버렸소."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받았고, 몇몇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송중원은 그 엉뚱한 소리를 한 허탁의 허벅지를 쥐어박았다. 그런데 허탁은 시침을 뚝 따고 옆 사람에게 담배 있느냐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런 농담으로 모여앉은 모든 사람들의 긴장이 금세 풀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은 담배를 피워물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에, 여러분들은 지금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 모르는 얼굴이 반반씩은 될 것입니다. 그 점이 바로 오늘 회의의 특징이며, 회의를 열게 된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이 대강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회의는 우리가 한 단체로 합해져 한 식구가 될 것이냐 아니냐를 논의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학생간부들의 이런 모임은 물론 상부조직의 동향에 따른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국내에서 대중기반의 확대를 꾀하고 있는 양대 세력인 북풍회와 화요회가 합동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 유학생조직의 의견 수렴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기탄없는 의견을 개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합동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조직과 힘을 강화하자는 것입니까?"
"예, 물론 그렇습니다."
"그럼, 새로운 조직의 형태는 무엇입니까? 국가 단위의 당입니까?"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큰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건 분명한데, 그건 비밀사항인 모양입니다."
"국내에는 북풍회와 화요회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도 많습니다. 그 단체들과는 어떻게 됩니까?"
또 다른 사람의 질문이었다.
"그건 여기 도경과 같은 형편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도 군소단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선 우리 일월회와 화요회 지부가 뭉쳐지게 되면 다른 단체들은 점차로 유입되고 통합되어 나갈 것 아니겠습니까."
"예, 분산된 힘보다 통합된 힘이 훨씬 더 강력해진다는 건 불변의 철칙 아닙니까. 우리는 효과적인 독립혁명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 하루빨리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허탁의 말이었다. 그는 질문들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초기 단계의 무원칙한 분산상태를 지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왜경의 감시와 탄압은 날로 가중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화급히 분산상태를 청산하고 통합된 투쟁력의 창출을 도모해야만 합니다."
일월회 쪽 회원의 동의였다.
"예, 화요회 쪽의 발의에 일월회 쪽의 동의가 나왔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 사이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표결합시다."
누군가가 말했다.
"표결 제의가 나왔습니다. 재청 있습니까?"
"예, 재청합니다."
"그럼 표결은 간편하게 거수로 하겠습니다. 합동에 찬성하시는 분..."
그들은 한꺼번에 팔을 들어 올렸다.
"예, 좋습니다. 만장일치로 합동을 결의했습니다. 마음 놓고 박수를 치지 못하는 게 유감입니다만, 이 사실을 신속하게 본국에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의장은 한성이나 경성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본국"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 속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중대하고 기쁜 결정을 하고도 맘껏 박수를 못 치는 대신 축하주는 한 잔씩 돌려얄 것 아니오? 바로 옆이 식당이던데."
누군가가 농조로 말했다.
"누구 만석꾼 자제분 없소?"
다른 목소리가 농담을 받았다.
"난 안 되겠는데, 구천석 집 자식이라."
"아, 열려 마시오. 사사오입 시켜드리리다."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의장을 맡았던 사람이 말했다.
"이런 좋은 결과가 나올 줄 알고 미리 축하주를 준비했습니다. 허나,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여기 오래 머무를 수도 없고, 경비문제도 있고 해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로 아주 간소하게 차렸으니까요."
모두들 반색을 했다. 송중원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여유만만하고 능글능글한 농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긴장하고 진지해져 있다가 어떻게 그리도 금방 농담들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평소에도 농담을 잘하지 못하는 데다가 더욱이 이런 형편에는 농담이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농담 잘하는 것도 타고 나야 하는 것인지, 성질이 느긋해야 하는 것인지, 배짱이 두둑해야 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해초무침과 다꾸앙"단무지"뿐인 그야말로 간소한 술상에 둘러 앉았다. 그러나 술잔을 돌리며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얼마 전 경전 파업이 실패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인사가 다 끝나자 누군가가 새 화제를 꺼냈다.
"그게 사실인 모양이오."
"원인이 뭐지요?"
"그야 뻔하지요. 회사측이 경찰을 믿고 완강하게 버티고, 경찰은 무자비하게 탄압을 가해대고 하니까 결국 견디지 못한 거지요."
"그것 참 곤란하게 됐군요. 한성에서 실패하면 그 영향이 클 텐데요."
"그게 문제요. 그게 본보기가 되어 지방에 악영향이 미치게 되지요. 경찰에서는 그걸 시범으로 내세우며 지방에 더욱 탄압을 가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되고, 지방 노동자나 농민들은 그 실패로 사기가 떨어지게 되고.."
"헌데, 금년 노동쟁의나 소작쟁의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작년 이맘때보다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오."
"그것 참 잘되고 있군요. 역시 노동자 농민 들이 현식적인 독립투쟁을 제대로 전개하고 있는 겁니다. 해마다 쟁의가 늘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생활상의 요구와 직결되고 있으니 그 투쟁이 힘을 받으면서 자꾸 확대되어 나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노동자 농민 들의 투쟁을 더욱 확대시키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 조직들의 통합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군요."
"그렇구말구요. 우리의 통합에 따라 노동자 농민 들의 조직도 더욱 강화시키고 확대시켜 나가야 되겠지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토론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혹시 상해임정 소식들 들었소?"
누군가가 말머리를 돌렸다.
"왜, 무슨 일 생겼소?"
"예, 일도 큰일이 벌어졌지요. 이승만이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쫓겨났소."
"예에? 그게 언제요? 이유가 뭐요?"
"얼마 전 3월 18일이고,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가 상해 임정에서 근무하지 않고 무풍지대인 미국에만 앉아 있는 근무 태만인 모양이오."
"근무 태만, 그것 참 잘됐소, 헌데 이승만이 쫓겨났으면 그럼 임정이 외교독립론을 버리고 무장투쟁에 나서겠다는 뜻인가요?"
"그건 잘 모르겠소."
"이승만 한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게 잘되겠어요? 외교독립론이나 교육준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만약 임정이 무장투쟁론을 채택한다 해도 문제요. 독립자금은커녕 생활비도 없어서 요인들이 배를 곯고 있다는 소문 아니오. 그러나 무슨 수로 비싼 무기를 사들여 무장독립군을 편성할 수 있겠소."
"독립자금의 고갈은 임정 요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동포 모두의 잘못이오. 지금 조선 땅에 5백 석 이상 만 석이 넘는 지주들이 얼마나 많소. 그 사람들이 꾸준히 독립자금을 염출했더라면 그런 비참한 꼴이 됐겠소. 토지조사사업을 당하면서 지주란 지주들은 모두가 친일파가 되어 자기들 재산 지키기에 급급할 뿐 독립자금 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지 않소."
"예,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임정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임정 초기부터 논란이 된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제라도 임정은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하고 만주로 이동해서 만주에 분산되어있는 무장부대들을 통합시키는 동시에 만주의 동포들을 결속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무장력도 강해지고 동포들을 기반으로 재정도 안정을 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상해에 그대로 있다가는 점점 더 고립무원으로 궁지에 몰릴 것입니다."
"글쎄요,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임정이 사회주의자들을 백안시하고 거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앞으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고, 우리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글쎄요, 그건 그다지 염려할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서로가 타협과 협동을 모색하게 될 테니까요."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임정이 공화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그 구성원의 절대다수가 봉건주의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공화주의자들이라도 사회주의와 대립하게 돼 있는데 봉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속단입니다. 왜냐..."
"예, 여러분, 토론은 차후로 미루고 그만 해산해야 좋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도 꼭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의장의 말에 차츰 열기가 오르기 시작하던 토론이 중단되었다. 그들은 한 사람씩 분산되어 식당과 그 집 뒷문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큰길에서 기다리게."
앞서 나가는 송중원에게 허탁이 귓속말을 했다. 송중원은 식당을 나서며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한적한 뒷길에 의심나는 낌새는 없었다. 몇 걸음을 옮기다가 그는 문득 이경욱이란 사나이를 생각했다. 그 젊은이는 안내만 끝내고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곳에 숨어 파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이 가난한 고학생일까. 송중원은 그의 얼굴에 서린 우울한 그늘을 되짚어 생각했다. 그건 그의 독특한 인상이기도 했다.
"자넨 왜 아까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송중원은 허탁과 함께 큰길을 건너면서 물었다.
"자넨 했나?"
허탁이 픽 웃었다.
"자넨 언변이 좋잖나. 임정에 대해선 관심도 많고 말야."
"허, 살다보니 별소리 다 듣겠네. 자네도 봤지만 어디 내 말이 끼어들 틈이 있던가."
"헌데, 그 사람들 말을 어찌 생각하나?"
"글쎄, 다 일리가 있는 말 아니던가. 특히 사회주의자들을 거부한다는 건 중요한 지적이지."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하는데, 그게 앞으로 어떻게 될까?"
"글쎄, 그거야말로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 아닌가. 서로가 수용하고 협동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힘이 분산되는 난처한 일들이 생기겠지."
"그건 소모고 비극인데.."
송중원은 중얼거리며 눈길을 멀리 보냈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사회주의자를 거부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본에서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무수히 생겨나고 있는데 러시아와 한땅이나 마찬가지인 만주에서는 더 심할지도 모른다. 만약 아버지도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입장이라면, 송중원은 그야말로 난감함을 느꼈다.
"무슨 생각하나?"
"아니, 그저..."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세."
"밥때가 지났는데 그냥 굶지 뭐."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어. 자넨 학생이기 이전에 자전거 배달꾼인 노동자라는 걸 명심하라구. 노동자는 한 끼도 굶을 권한이 없으니까."
한 끼라도 거르는 것을 싫어하는 허탁의 그럴듯한 말이었다.
"가세, 노동자의 수칙을 지켜야 하니까."
송중원은 한 끼 밥값을 벌려던 생각을 지우며 비식 웃었다. 그들은 뒷길로 접어들어 값싼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다.
"합동을 하면 알력없이 잘될까?"
물을 한 모금 마신 송중원이 허탁을 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글쎄, 그게 제일 문제지. 합동은 해야 하고, 서로 주도권은 노리고 그리 되면 알력은 피할 수가 없게 되는데 말야."
허탁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합동과 주도권 다툼, 그건 참 앞뒤가 안 맞는 모순 아닌가. 인간이란 너무 복잡하고도 모순투성이의 고등동물이라니까."
"그렇기도 하지. 허나 그런 모순의 과정을 거쳐 질서도 잡고 통일체를 이루고 하는 게 인간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와 반대로 분열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두고 보세나. 분산상태를 거쳐 통합의 필요성을 느껴 시작된 일이고, 우리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니까 슬기도 더 있겠지."
시장했던 참이라 밥이 나오자 그들은 밥 먹기에 바빴다. 송중원은 한성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단체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북풍회와 화요회 외에 떠오르는 것은 서울청년회와 무산자동지회뿐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단체들이 있었지만 군소집단이라 잘 기억이 되지 않았다. 그러기는 동경에 있는 단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들이 15개가 넘는다고 했지만 그 내력까지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두 단체에 불과했다. 그건 자기 조직 내에서 기본 학습에 충실해야 하는 까닭도 있었고, 모든 단체들이 지하화되어 있는 탓도 있었다. 동경에서 제일 먼저 탄생된 유학생들의 사회주의 조직은 노동동지회였다. 그 결성이 1917년 1월이었다. 그것이 3년 후에 조선 고학생동지회로 바뀌었고, 그 단체는 1922년 2월에 본국으로 진출해 <조선일보>에 그 유명한 동우회 선언을 광고로 발표했다. 그건 조선 땅에서 일어난 최초의 계급투쟁 선언이었다. 그리고 고학생동우회의 일부가 21년 11월에 따로 결성한 것이 흑도회였다. 그건 다시 22년에 풍뢰회와 23년에 북성회로 갈라졌다. 북성회는 건설사를 조직해 한성의 거점을 마련했고, 그것을 강화해 24년 11월에 북풍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동경의 북성회의 명칭을 금년 1월에 일월회로 바뀌었다. 한성에서 북풍회와 같은 시기에 결성되어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는 화요회는 23년 7월에 조직되었던 신사상연구회가 탈바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두 단체의 공통점과 특징은 핵심간부들이 모두 일본 유학생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이 마침내 하나로 뭉치기로 합동 결의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북성회가 본토에 확고한 뿌리를 내린 것에 비해 풍뢰회는 23년 1월에 흑우회로 이름을 바꾸고는 8월에 해체되고 말았다. 송중원은 그 합동이 잘 이루어져 무언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몸담을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잘 먹었다."
허탁이 젓가락을 놓으며 입을 훔쳤다.
"일본 밥 먹을 날도 몇 달 안 남았군."
송중원은 물잔을 들었다.
"그래, 금년도 벌써 4월이니 세월 참 빠르군. 공부를 한다고 세월을 보냈지만 다 써먹을 데 없는 공부니 원."
허탁이 서글프고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거의가 다 그렇지. 공부한 걸 생계를 위해 써먹자면 그때부터 친일파가 되는 게 우리 운명이니까."
송중원이 쓰게 웃었다.
"참 비참하지. 사회주의가 없었더라면 대학 생활이 죽도 밥도 아닐 뻔했어. 자넨 그래도 글 쓰는 재주가 있어서 다행이야. 문학을 하기로 작정했나?"
송중원은 당황스러워했다.
"겸손이 지나치면 교만이네. 자아, 가세."
이틀이 지나 허탁이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갔다. 배달하는 과자를 자전거에 가득 싣고 비탈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아이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사내아이는 중상이었다. 얼굴이며 머리에 입은 찰과상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왼쪽 다리가 부러졌던 것이다.
"아, 이것 참 큰일 났군, 큰일 났어. 그러게 항시 조심하라고 하잖았어. 이게 말이야, 이게, 조선 사람이..이거 참.."
과자 공장 사장은 할말을 다 하지 못하며 못내 속상해했다 그가 삼키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송중원은 잘 알고 있었다. 인명피해를 입힌 것도 큰일인데, 조선사람이 일본 아이에게 중상을 입혔으니 더 큰 일이라는 뜻이었다. 벌써 그 아이의 아버지는 경찰서에 나타나, 조센징이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한 짓이니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펄펄 뛰었던 것이다.
"사장님, 어떻게 좀 도와주십시오. 허군이 그런 나쁜 맘 먹을 사람이 아닌 건 사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송중원은 사장에게 매달리 수밖에 없었다.
"알지, 허군과 송군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한지 내가 다 알지. 내가 치료비는 다 물어줄 수 있는데 그 남자가 엄벌에 처하라고 하는 건 막을 수가 없단 말이오."
"사장님, 아이를 피하려다가 넘어져 허군도 많이 다치지 않았습니까. 그 점을 경찰서에 강력히 주지시켜 주십시오."
"그 말은 벌써 다 했지. 허군도 그런 주장을 했고. 허나 그 남자가 계속 엄벌하라고 해대면 다른 수가 없다니까. 내가 경찰 고위직에 아는 사람도 없고."
송중원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중상인 치료비를 물어주려고 하는 것만도 사장은 큰마음을 쓴 것이었다. 송중원은 학교에 가서 홍명준부터 찾았다. 법학을 공부하는 그에게 그런 경우의 처벌 관계를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결국 사고를 냈군."
이야기를 다 끝내기도 전에 홍명준이 화를 내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늘상 허탁이 고학을 하는 걸 마땅찮아 했던 것이다. 너무 철들어 사서 하는 고생이라는 것이었다.
"아주 악질 왜놈한테 걸렸군."
홍명준은 두 번째로 내뱉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송중원도 홍명준이 내민 담배에 불을 붙여 빨았다. 홍명준은 담배 연기를 짙게 내뿜을 뿐 말이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입장이라 송중원도 담배만 빨고 있었다.
"방법이 없진 않은데..."
담배를 반 넘게 태운 홍명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송중원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화해를 유도하는 거네."
"화해?."
"타협 말일세."
"자네 정신 있나?"
송중원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어깨가 처져 내렸다.
"그냥 말로 하는 타협이 아니야. 위자료를 주겠다고 유도하는 타협이지."
"위자료? 그게 한두 푼으로 되겠나?"
송중원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그야 적잖은 돈이 들겠지. 그래도 징역살이를 해선 안 되니까."
"..."
송중원은 구두 뒷굽으로 땅바닥을 밀치고 또 밀쳤다.
"돈 액수도 모르면서 낙담부터 하지 말게. 액수도 자네 사장을 시켜서 접촉부터 해보세. 돈이야 그다음 문제니까."
홍명준은 허탁의 죽마고우답게 적극성을 보았다.
"그놈이 화해를 거부할지도 모르지."
"무슨 소린가. 돈은 귀신도 흘리네."
홍명준이 코웃음을 쳤다.
송중원은 홍명준과 함께 사장을 찾아갔다.
"허군은 제 형제와 마찬가집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사장님께서 꼭 좀 일을 성사시켜 주십시오."
홍명준이 예의 바르게 부탁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제가 해야 될 일을 친구분이 맡고 나서서 면목이 없습니다. 일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일본놈치곤 썩 괜찮은데? 빈말이라고 그렇게 하고 말야. 이름이 뭔가?"
홍명준이 흡족해했다.
"오까노라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지."
송중원과 홍명준은 다음날 점심 무렵에 사장을 찾아갔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는군요."
오까노 사장은 몹시 민망해했다.
"대체 그 사람이 무라는 겁니까?"
홍명준의 말에 노기가 묻어났다.
"저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으니 화해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돈, 이야기는 했습니까?"
"예, 위자료를 주겠다고 했지요."
"액수도 말했습니까?"
"그거야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오까노 사장님,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하고 한 번 더 만나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예, 그러면 다시 만나보지요."
그러나 오까노 사장은 또 고개를 저었다. 송중원과 홍명준은 암담해지고 말았다. 홍명준과 술을 마신 송중원은 어둑어둑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박정애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허탁 씨 조선 건너갔나요?"
박정애가 대뜸 물은 말이었다.
"아니오."
"그럼 무슨 일 생겼지요?"
"아니오."
송중원은 쪽마루에 털퍽 주저앉았다.
"그런데 왜 사흘씩이나 안 보이죠?"
"알 것 없소."
"무슨 소리예요! 송중원 씨하고만 동문 줄 알아요."
박정애가 빽 소리 지르며 발을 굴렀다. 송중원은 그 방자함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박정애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짝사랑이 어쨌든 박정애가 허탁의 소식을 몰라야 될 이유가 없었다.
"여기 앉으시오. 사고가 났소."
송중원은 술기운에 실린 처량한 기분으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다 들려주었다.
"됐어요, 저한테 맡기세요. 그까짓 일 당장 해결돼요."
박정애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아니, 무슨 수로..."
송중원은 박정애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박정애는 송중원을 묵살해 버리고 다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음날 송중원은 홍명준에게 박정애의 이야기를 했다.
"시건방지게 나대기는!"
홍명준은 침을 내뱉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송중원은,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느냐는 말을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박정애를 달갑잖게 여기는 홍명준의 말이 더 거칠어질 것이 뻔한데 그런 말을 보태는 건 부질없은 일이었다. 그리고 박정애에게 어떤 막연한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박정애의 그 당당한 기세를 믿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의 해결책이 없는 상태에서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형국이었다. 송중원은 학교에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박정애를 찾고는 했다. 그런데 박정애는 사흘 동안이나 전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송중원은 자꾸 마음이 초조해져 배달할 기운도 빠지고 밥맛도 없어졌다. 그런데 허탁은 나흘 만에 풀려났다. 초췌해진 허탁을 부축한 건 박정애였다.
"수고했습니다, 박정애 씨. 정말 고맙습니다."
송중원은 그야말로 감격해 박정애 앞에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수고는 무슨..."
송중원은 두 번째 놀라고 있었다. 허탁을 무사하게 빼낸 능력에 놀라고 있는 판인데 박정애는 그렇듯 겸손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목욕하고 푹 쉬고 계세요. 이따가 저녁때 제가 한턱내겠어요."
박정애는 꽃웃음을 피우며 돌아갔다. 저녁때 박정애가 안내한 곳은 긴자의 고급 음식점이었다.
"얘는 제 동무 김정하예요. 지난번에 테니스 같이 치려고 했었잖아요."
박정애가 음식점에 뒤늦게 나타난 친구를 소개했다. 박정애가 왜 자꾸 친구를 소개하려고 하는지 송중원은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제 하숙집 주인이 아버지 동업자라고 했잖아요. 그분이 거상이라서 경찰서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게만 알아두세요."
박정애는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허탁은 다음날부터 꼬박 일주일 동안을 앓아누웠다.
"이봐, 지난 4월 17일 날 한성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됐다는 거야."
"뭐, 뭐라고!"
누웠던 허탁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