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3-1
제3부 어둠의 산하
1. 또 하나의 음모
"요시다 지배인님 드시느만이라우."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다급한 듯 울렸다. 그와 함께 방안에 앉아 있던 예닐곱 명의 남자들이 튕기듯 일어났다.
그들은 방문을 열고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평소와 달리 양복을 차려 입은 요시다가 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어깁없이 다리 절룩거리는 이동만이 따르고 있었다. 예닐곱 명의 남자들은 허둥지둥 대청에서 내려서 댓돌 양쪽으로 갈라서며 허리를 구부려 머리들을 조아렸다. 그들은 미처 구두를 신지 못해 하나같이 양말 발 그대로였다.
"지배인님, 어서 오십시오."
누군가가 어색한 일본말로 인사했다. 다른 남자들은 그 말에 따라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요시다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청으로 올라섰다.
"어찌덜 되았어?"
싸늘한 기색을 내쏘며 이동만이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채비 다 끝냈구만이라우."
그 남자도 빠르게 속삭였다.
"채비 다 끝낸 것이 요 꼬라지여?"
이동만이 차갑게 내쏘았다.
"야아?"
"여그가 기생집이여, 사내놈덜만 들끓는 절깐이여? 월향이 그 썩을 년언 어디 자빠졌는 것이여!"
이동만은 거칠게 구두를 벗으며 대청으로 올라섰다. 그 남자의 얼굴이 머쓱해지면서 일그러졌다.
이동만이 요시다를 뒤따라 황급하게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화사하게 차린 기생이 머리를 매만지며 이쪽으로 종종걸음을 쳐오고 있었다.
"요런 썩을 년, 어디 자빠져 있었능겨."
그 남자가 기생을 가로막으며 대뜸 내질렀다.
"음마, 그 무슨 상시런 소리랑게라?"
기생이 놀라며 상을 찌푸렸다.
"요것언 나가 허는 욕이 아니고 이 주임님이 허신 것이여. 그리 알고 얼렁 안으로 들어가 부와."
남자가 기생의 어깨를 밀었고, 기생은 금세 켕기는 기색으로 혀를 낼름하고는 몸을 돌렸다.
기생은 요시다 앞에 나부시 절을 올렸다.
"기생년이 귀인 모시는 예절도 모르느냐!"
기생이 몸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일본말 호령이 떨어졌다. 몰론 요시다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이동만이 한 호령이었다.
"죄송시럽구만요. 주임님이 부탁허신 햇내기헌티 지배인님 잘 모시라고 이르다봉게 한 발이 늦어진 것이구만요."
기생은 상대방의 약점을 걸고 들며 능란하게 둘러붙이고 있었다.
"햇내기먼, 나가 말헌 대로 아다라시로 구했단 말이여?"
이동만은 처녀를 굳이 아다라시라고 하며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예에, 진짜배기 아다라시구만요."
기생은 얄궂게 눈웃음을 쳤다.
"인물언?"
"그야 이 월향이 눈인디요."
기생은 재빠르게 이동만을 휘감아들고 있었다.
"되았어. 지배인님 시장허신디 얼렁얼렁 상 채리고, 갸도 당장 딜고와."
이동만이 손을 까불어댔다. 그때까지 예닐곱 명의 남자들은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방 가장자리로 들어서 있었다.
"자네들 글로 앉드라고."
이동만이 그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눈치를 보아가며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불이농장의 농감이거나 간척지의 감독이었던 것이다.
"여그 아다라시 대령이구만요."
월향이는 방으로 들어서며 일부러 <아다라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동만의 짓짓이 눈꼴시고 역겨워 그의 말을 흉내 내는 것으로 감정풀이를 하고 있었다. 월향이의 뒤로는 다른 기생이 고개를 살짝 수그린 채 따르고 있었다.
"인사 올리거라, 요시다 지배인님이시다."
월향이의 지시를 따라 새로 온 기생이 이마에 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월향이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그 기생의 머리는 치렁하게 땋아 내려져 있었다. 그 머리끝에 드리워진 빨간 댕기가 남빛 치마 위에서 핏빛으로 고왔다.
"으음......"
요시다가 처녀기생을 올려다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알되았어. 월향이 애썼네!"
이동만이 신바람 나게 외쳤다. 앳된 처녀 기생은 얼굴이 갸름한 것이 퍽 예뻤다. 월향이는 이동만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처녀기생을 데려다가 요시다 옆에 앉혔다. 곧 안주가 그득그득 놓인 술상 두 개가 잇따라 들어왔다. 보료가 깔린 상석에는 요시다 혼자 버티고 앉았고 그 양쪽 옆으로는 두 기생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삼면으로 빼꼭하게 둘러앉았다.
"저어...... 지배인님 생신을 축하해서 저희들이 이것을......"
이동만이 요시다 앞에 빨간 종이로 싼 네모진 것을 내밀었다. 그건 담뱃갑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었다.
"거 뭐 이렇게 술상을 차렸으면 됐지......"
요시다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리고는,
"이게 뭔가?"
앞에 놓인 작은 물건에 궁금증을 나타냈다.
"아 예에,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라고 금돼지를 장만했습니다."
"금돼지? 이거 너무들 과용한 거 아닌가."
요시다는 비로소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얼굴에 적이 만족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닙니다. 과용은 무슨 과용입니까. 저희들이 입고 있는 은혜에 비하면 그까짓 건 너무 약소합니다. 이게 처녀니까 맘에 드시면 오늘밤......"
이동만은 자기네가 장만한 것이 금돼지만이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시키고 있었다.
"음, 이만하면 이쁘게 생겼어. 허허허허...... 자아, 다들 한 잔씩 들지."
요시다는 너털웃음을 웃어대며 술잔을 들었다. 그들은 감지덕지해하며 모두가 술잔을 받쳐 들었다.
"그런데...... 요새 공사장은 어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요시다가 왼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예, 예,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한 남자가 당황스럽게 대답했다.
"글세, 겉으로만 이상이 없는 건가. 속까지도 이상이 없는 건가?"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요시다의 눈길은 날카롭게 건너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예, 노동자들 속에 심어둔 끈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 헌데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그 남자는 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소작인들보다는 노동자라는 것들이 더 문제야. 내지 일본에서는 벌써 사회주의자라나 공산주의자라는 놈들이 노동자들 속에 파고들어 노동자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시작했어. 조선에도 작년에 조선노동공제회라는 게 생긴 이상 우리도 방심해선 안 된다 그 말이야. 노동공제회 놈들이 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빨간 물 먹은 놈들이고, 그놈들이 생긴 지 벌써 1년이 되었으니 우리 공사장에도 손을 뻗칠 때가 됐다는 걸 명심해야 돼."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 남자가 힘있게 대답하며 일본식으로 두 번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 남자를 따라 옆에 앉은 다른 세 남자들도 머리를 깝신거렸다. 요시다가 담배를 빼들었다.
"죽향아!"
월향이가 처녀 기생을 낮게 부르며 빠르게 눈짓했다. 어딘가 슬픈 기색이 깃들인 처녀기생이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성냥갑을 집어 들었다.
"참, 이름이 뭐지?"
요시다가 코로 입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예, 죽향이라 하옵니다."
월향이가 대답했다.
"쟤는 귀머거린가, 벙어린가?"
요시다가 월향이를 흘겨보았다.
"아 예, 일본말을 인제 배우고 있는 중이라서......"
"그렇겠군. 아직 나이 어리니까."
요시다는 속 넓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짓고는,
"죽향이라, 대나무에서 향기가 나면 어떤 향기가 날까?"
죽향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코를 큼큼거렸다.
"예, 그 향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따가 지배인님께서 혼자 맡으셔야 아십니다."
월향이의 능란한 말장구였다.
"허허허허...... 그래, 그렇겠지 그렇겠지. 조선사람들이 기생 이름 하나는 아주 잘 짓는단 말야. 우리 일본사람들이 그건 못 따라간다니까."
요시다는 흔쾌하게 웃어대며 죽향이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죽향이의 몸이 움찔하는 걸 그는 느끼고 있었다.
"지배인님, 제가 술 한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이동만이 술주전자를 들었다.
"그러지. 자네들도 술 많이 마시도록 하게. 그간에 수고들 많이 했지."
요시다는 술잔을 들며 마치 자기가 사는 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 인심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요시다가 금돼지에도 처녀 기생에게도 만족해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이고 있었다. 돈은 돈대로 쓰고 효과가 별로 나지 않을까 봐 그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예에 또, 술들 취하기 전에 한마디 더 하겠는데 말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그동안 내가 누차 말했지만 금년부터는 우리 불이농장이 추진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막중한지 자네들도 잘 알 거야. 한마디로 말하자면 간척사업을 차질없이 진행시켜야 하고, 아물러 쌀수확도 더 올려야 한다 그 말이야. 다시 말하자면 자네들이 공사장에서는 노동자들을 잘 닦달해야 하고, 농장에서는 소작인들을 잘 닦달해야 한다는 말이야. 더구나 총독부에서는 작년 12월에 산미증식계획을 발표했고, 금년은 그 첫해라는 것을 모두 명심해야 돼. 우리 불이흥업주식회사에서는 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보다 앞서서 간척사업을 시작했으니까 총독부 정책에 십분 호응하게 된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앞으로 더 박차를 가해서 우리 호남지역 불이농장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를 대내외에 과시해야된다 그 말이야. 그런데, 대내외란 무엇이냐! 대외적으로는 다른 농장들에 비해 우리가 총독부 정책에 얼마나 모범적으로 호응했는지 시범을 보이는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조선 땅에 불이농장이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능력이 다른 데에 비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본사에 보여야 한다 그 말이야. 자네들도 다 알다시피 우리 불이농장은 조선 땅에서는 제일 큰 농장이야. 그런데 또 2백40만 원의 거금을 투자해서 간척사업을 벌이고 있지 않나. 2천5백 정보, 7백50만 평이 계획대로 내년 말까지 개간되면 어찌 되는지 알겠지! 우리 불이농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거대한 농장이 되는 거야. 어디 그뿐인가! 자네들은 어떻게 되지? 그야 더 말할 것 없이 공신들로 평생 편안하게 살게 되는 거야. 그렇지만 그 반대로 일을 계획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차질이 생기거나 망치게 되면 어떻게 되지? 더 이상 긴말하지 않아도 잘들 알겠지."
요시다가 매서운 눈길로 부하들을 휘둘러보았다.
"예, 잘 알았습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잔뜩 긴장한 그들은 맹세라도 하듯 제각기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다.
하! 똥강아지 같은 놈들. 네놈들 같은 것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조선 땅을 맘껏 짓밟을 수 있는 거다.
요시다는 작은 술잔을 느리게 기울이며 머리 숙인 것들을 눈 아래로 깔아보고 있었다.
"자아, 다들 내가 한 잔씩 따라주지."
요시다가 술주전자를 들었다.
"아이고 이거 황송스럽습니다."
제일 먼저 몸을 벌떡 일으킨 건 이동만이었다.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든 그는 잔에 술이 차자 두 번 세 번 굽실거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차례로 술을 받으면서 이동만이 한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자아, 맘껏 술들 마시게."
요시다는 언제 살벌한 협박을 했느냐 싶게 흔쾌하게 말하며 술잔을 홀짝 비웠다. 그리고 그는 왼손을 죽향이의 치마 밑으로 디밀어 허벅지를 잡았다. 죽향이의 몸이 또 움찔 떨었다. 그 떨림에 요시다는 샅이 화끈해지는 성욕을 느꼈다.
"헤헤헤헤...... 지배인님, 조선 여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동만이 간사스럽게 웃으며 요시다의 비위를 맞추고 들었다.
"조선 여자! 글쎄에...... 나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선 여자들을 꽤나 겪어본 셈인데, 거 뭐랄까, 김치 냄새 마늘 냄새만 안 나면 말야, 조선 여자들 쓸 만하지, 그래 쓸 만해."
요시다는 불콰해진 얼굴로 연상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그의 왼손은 자꾸 죽향이의 허벅지 깊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죽향이는 그 손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반대쪽 허벅지를 꼭 오그려 붙이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불이흥업에서 추진하고 있는 간척사업은 옥구군 해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은 바닷물이 밀려들고 빠져나갈 때마다 신비스러운 조화를 부렸다. 밀물일 때는 보이지 않던 뻘밭이 썰물이 되면 몇십 리 길이로 뻗치며 질펀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 경사도 거의 평지처럼 완만해 넓은 들판이 펼쳐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넓은 땅이 물에 잠겼다가 드러났다 하는 것은 마치 바다가 심심풀이로 부리는 요술 같았다. 더러 바다를 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바다 밑에서 그리도 넓은 땅이 드러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불이흥업에서는 그 버려진 뻘밭을 농토로 만들 욕심으로 바다를 막고 나선 것이었다. 그들은 작년에 인부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그들은 세 가지 조건을 내걸어 가까운 지방마다 선전을 하고 다녔다.
첫째, 영구소작권을 준다. 둘째, 개간비를 따로 지불한다. 셋째, 소작료를 3년간 면제한다.
그 조건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농민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도 제대로 얻지 못해 허덕거리고 있는 농민들이 도처에 수두룩하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세 가지 조건은 논밭도 없고 소작도 없는 농민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인부들은 쉽게 모아졌다. 외리와 내촌 사람들 중에서도 네댓 명이 나섰다. 외리의 남상명도 나섰고, 3·1만세 때 죽은 내촌의 김춘배의 아들 장섭이도 나섰다.
"아재, 건식이성님도 불러오는 것이 어쩌겄소?"
김장섭은 몸을 피해 목포로 떠난 박건식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글씨, 건식이가 어찌 생각헐랑가도 모를 일이고, 나스는 사람덜이 저리 많은 판에 오가다가 때럴 놓쳐불면 그것 낭패 아니겄는가."
남상명의 신중한 대꾸였다.
"야아, 아재 말씸도 맞구마니라. 군산경찰서가 가차운게 건식이성님이 안 올라고 헐랑가도 모르겄구만요."
집을 떠나 간척지로 모여든 사람들은 3천 명이 넘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날품팔이들도 끼여 있었다. 군산 부두며 역전을 배회하며 지게 하나에 목숨을 매달고 살았던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은 농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도 땅을 빼앗기고 도회지로 흘러들어 막벌이꾼이 된 사람들이었다.
간척공사장은 철도공사장과 똑같은 형태였다. 기술자 몇 십 명은 일본사람들이었고,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조선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조장이며 감독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똑같았다. 군대조직 그대로 편성된 인부들은 조장과 감독들의 철저한 통제 아래 매일 중노동을 치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고 두 달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한 달에 10원씩 주기로 했던 임금인 개간비를 지불하지 않고 두 달을 넘긴 것이었다. 집에서 처자식들이 굶어죽게 생긴 판이었다. 인부들은 끼리끼리 모여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요것덜이 어쩔라고 이렁고?"
"금메 말이여, 무신 씨다 달다 말이 있어얄 것 아니라고."
"요것덜이 우리 흘릴라고 애초에 거짓말헌 것이 아닐랑가?"
"글씨, 이리 많은 사람덜 놓고 그러기야 허겄어?"
"무신 태평시런 소리여 시방. 나라도 생짜로 집어묵은 놈덜인디 우리 돈 띠묵기야 손바닥 뒤집기제."
"맞어. 하로 세 끄니 밥 믹여주고 소작 줄 참인디 돈언 무신 돈이냐하고 낯짝 뒤집고 나올란지도 몰르제."
"아니, 뻘밭에서 좆빠지게 일해 갖고 간기 배올르는 논 서너 마지기 소작 부치자고 이 지랄염병얼 혀? 이리 똥장군맨치로 입덜 닫고 있을 일이 아니여."
"그러기넌 헌디, 어째야 헐꼬?"
그들은 이 대목에서 말이 막히고는 했다. 막상 누가 앞장서 따지고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두 가지 조건이 그들의 발목을 묶고 있었다. 괜히 남들 먼저 입바른 소리하고 나섰다가 영구소작권과 소작료 3년간 면제의 혜택도 보지 못하고 공사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차츰 커져가는 불만이 조장이나 감독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인부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내가 듣기로는 개간비를 안 준다고 뒤에서 불평들이 많은 모양인데, 여기가 맘에 안 드는 자들은 당장 여길 떠나라. 여기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에에 또, 개간비는 안 주는 것이 아니라 당분간 늦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들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시피 시설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돈이 약간 달리기 때문이다. 돈이 여유가 생기는 대로 개간비를 곧 줄 것이다. 불평들 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 만약 오늘부터 또 불평을 하는 자들이 있으면 모두 골라내 내쫓고 말 것이다. 모두 쓸데없는 불평하다가 내쫓기지 말고 3년 후면 영구소작권을 얻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참고 기다려라."
요시다의 일장 연설이었다. 3천 명이 넘는 인부들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말았다. 두달치 임금을 받고 당장 내쫓기느니 조금 더 참고 기다리다가 임금을 받아가며 영구소작권을 얻는 게 나았던 것이다. 한 달이 또 지나 석 달이 꽉 차서야 임금이 나왔다. 그런데 한 사람 앞에 지급된 임금은 30원이 아니라 11원씩이었다. 한달 식비가 3원씩, 석 달치 9원을 제하고, 나머지 21원에서 10원씩은 뒤로 미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10원씩을 또 뒤로 미룬 것도 미룬 것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밥값을 뗀 것에 분을 터뜨렸다.
"아니, 밥언 공짜로 믹여주는 칙기 허등마 요것이 무슨 도적놈 심뽀여."
"요런 날도적놈덜 보소. 깡보리 밥에 짠지만 믹여놓고 무슨 밥값이 3원썩이냔 말이여."
"그려, 3원이면 1등미가 두 말이고, 보리로는 반 가마니가 넘는 엿 말이여, 엿 말. 우리가 많이 묵었어야 그 절만 묵었을 것 아니라고. 글먼 그 남치기 절반언 어디로 간 것이여."
"요런 지에미 붙어묵다가 좆대감지 못 빼고 뒤질 놈덜이 우리 밥값에서 절반얼 띠묵은 것이 틀림없덜 안혀."
"아니, 베룩에 간얼 빼묵고 모기다리서 피럴 뽈아묵을 일이제 우리덜 등얼 쳐묵어! 요런 놈덜언 당장 좆대감지럴 뽑아죽여야 혀."
사람들은 말을 할수록 점점 더 분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도 풀 길이 없이 가라앉혀야 했다. 감독들이 나서서 해명인지 으름장을 놓는 것이지 모를 말을 해댔던 것이다.
"아니, 밥언 그냥 되는 것이여? 낭구럴 때야 밥이 되고, 사람이 일얼해야 밥이 될 것 아니겄어. 끄니때마동 꼬실라대는 장작 값언 어디서 나오고, 물일 허는 여자덜 품삯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여? 하늘서 떨어지겄어 땅에서 솟겄어? 허고, 끄니때마동 맨밥덜만 묵었드랑가? 국에다 반찬덜언 안 묵었어? 그 돈언 또 어디서 나왔겄어? 앞 뒤 생각도 안해 보고 무신 잔말덜이 그리 많혀. 지배인님도 주임님도 화가 나 기신게 더 따지고 잡은 사람덜언 이 앞으로 나와. 나가 당장 지배인이나 주임님 앞으로 모시고 갈 것잉게."
사람들은 그 공세 앞에서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감독들에게 그런 재빠른 공세를 취하게 한 것은 이동만이었다. 그는 식비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이동만은 취사문제에 그 누구도 개입시키지 않고 단독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식비가 인부들의 노임에서 나가는 거니까 요시다도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동만은 그 기회를 이용해 마음대로 많은 돈을 착복하고 있었다. 식량에서부터 부식이며 장작을 사들이는 데까지 알뜰하게 돈을 붙여 먹었다. 또 상인들에게는 따로 뒷돈을 받아 챙겼다. 3년 예정인 간척사업동안 벌어들일 액수를 계산하면 엄청난 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달 돈이 들어올 때마다 고리채를 놓으면 새끼 쳐서 불어나는 돈 또한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 꿈을 꾸고 있는데 인부들이 말썽을 일으키면 그것처럼 고약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감독덜이 멀허는 사람덜이여! 자네덜 농감자리 안 놓칠라면 지끔보통 그놈덜 꼼짝 못하게 닦달혀."
이동만은 감독들을 몰아쳤던 것이다. 인부들은 또 참고 기다리며 쉬는 날이라고는 없는 한 달을 중노동으로 채웠다. 그런데 밥값을 뗀 임금이 7원인데 4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돈얼 맡게 놓는다고 썩어지는 것이여 닳아지는 것이여. 안 쓰고 애끼면 다들 당신에 재산 불어나는 것 아닌감. 맘덜 탁 놓고 회사에 돈이 풀릴 때꺼정 기둘리란 말이여."
감독들이 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기가 막혀했다. 그 돈으로는 처자식들의 굶주림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요런 사람 잡을 놈덜이 있능가. 제삿날 잘 묵자고 석달 열흘 굶을 것이여. 안 되겄구만. 여그 떠야제."
"그려, 한 달에 10원을 다 줘도 우리가 허는 일에 비허먼 하품 나는 돈 아니여. 미선소서 여자덜이 한 달에 받는 돈이 13원에서 15원이고, 대갱이에 피도 안 몰른 관청 소사새끼덜이 받는 월급이 15원에서 16원인 판 아니라고. 근디 일 중에 질로 심든 흙일에 뻘밭일얼 험스로 10원이고, 거그서 또 밥값 띠고, 거그다가 또 절반은 외상인지 짤라묵는지허고. 어떤 넋 빠진 개아덜놈이 요런 짓거리 허겄어. 가드라고, 날품 신세가 더 나슨게."
날품팔이했던 사람들이 마침내 반발하고 나섰다.
"머시여, 당장 돈얼 내라고? 기둘리란 말 못 들었어? 요것덜이 일얼허기 싫으면 고이 떠날 것이제 어디다 대고 까불대고 이려."
밀린 임금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총을 든 경찰이었다. 그들은 잡초 뽑히듯 해서 공사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들처럼 감정이 뒤틀려 올랐던 다른 인부들은 그들이 맨주먹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그만 기가 수그러들었다. 경찰이 농장 편인 것은 번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총을 들이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재, 우리가 잘못 왔능갑소. 저 꼴 나다가넌 우리덜 밀린 돈도 영축없이 띠믹히고 말게 생겼소."
김장섭이 한숨을 토해내며 어깨가 처져내렸다.
"아니여, 그러기사 헐라등가, 시상 눈이 있고 귀가 있는디. 저 사람덜얼 저리 안 다루면 다덜 들고일어날랑가 무서와 저러는 것일 기여. 너무 걱정 말소."
남상명은 김장섭의 어깨를 다둑거렸다. 그러나 그건 김장섭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씻어내려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선소 여자들의 급료보다 적고, 관청 급사의 월급보다 적은 임금은 그다음 달에도 4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맥이 빠질 대로 빠져 일할 맛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조장이나 감독들의 성화는 그들의 그런 기분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 조장이나 감독들의 성화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하루에 채워야 하는 전표의 수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돌을 나르는 사람이나 돌을 다지는 사람이나 흙을 퍼담는 사람이나 흙을 나르는 사람이나 모두가 일할 만큼 전표를 받게 되어 있었다. 감독들은 그 전표를 날마다 나눠주고 거둬들이며 작업량을 조사했다. 전표가 모자라면 임금만 깎이는 것이 아니었다. 개간이 끝난 다음에 소작을 줄 때 그만큼 논을 적게 준다는 것이었다. 꼼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맨 법이었다. 그 규정에 예외라고는 없었다. 몸이 아파도 어디를 다쳐도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책임이었다. 그러니 몸살이 나도 일을 쉴 수가 없었고, 발목을 삐어도 돌짐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밀리는 돈은 매달 늘어가면서 해가 바뀌고, 공사가 시작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재, 아재, 요 약 잠 드시게라."
한 손에 사발을 든 김장섭이 거적 위에 누워 있는 남상명을 조심조심 흔들었다.
"으으응......응, 으응......"
눈을 꼭 감은 남상명은 몸을 바짝 오그려붙인 채 연상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재, 약이란 말이오, 약."
김장섭은 남상명을 좀더 세게 흔들며 목소리도 커졌다.
"이...... 약언 무신 약이라고......"
남상명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꽉 잠긴 목소리가 새나왔다.
"나가 약얼 지다가 대랬구만이라?"
"머시여? 자네가......"
남상명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손끝 마디마디며 머리털 끝까지 저리고 쑤시는 것 같은 지독스러운 몸살이었다.
"따땃허니 딱 부기 존께 쭈우욱 마셔부시오. 두 첩만 대래묵으면 지아무리 독헌 몸살도 깨끔허니 낫는다드만이라."
김장섭은 손가락으로 약을 휘휘 저어대며 남상명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허허 참, 자네가 무신 돈이 있다고 약얼 짓고, 대리기넌 어디서 또 대랬다는 것이여. 몸살이야 앓을 맨치 않고 지물에 지는 것이제 어디 약얼 묵을 병이나 된간디."
남상명은 꺼칠한 얼굴로 열적어했다.
"허, 꼭 우리 할매 겉은 소리만 허고 앉았소 이. 감기 몸살이 만병에 근원이란 것도 몰르요?"
김장섭이 약사발을 디밀었다.
"체, 자네 유식허네 웨. 근디, 이 약언 어디서 대랬어?"
약사발을 받아든 남상명은 너무 고밥기도 하고 너무 신통하기도 해서 또 같은 말을 꺼냈다.
"아, 고것이야 약 짓기보담 쉰 일이제라. 우리 밥해 주는 디에 밥허고 남은 불뎅이가 이글이글헌디요."
"이, 그렇구만. 근디 둔갑술 허는 홍길동이도 아니겄고, 약언 언제 진 것이여?"
곰방대만 빨고 있던 한기팔이가 용하다는 듯 말을 걸쳤다.
"참말로, 두 양반 다 영판 땁땁허시오 이. 거 밥허는 아짐메덜언 뒀다 어디다 쓴당게라."
"허, 자네 참말로 인자 봉게 비우 좋고 수완 좋네그려. 얼음판에다 꿰 벳세놔도 살아날 사람 아니라고."
한기팔이가 놀라워했고, 남상명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따 벨 것 아닌 일 갖고 그리 춰올리지 마시게라. 꼬라백힘서 코 깨지면 나만 아픈디." 김장섭은 겸연쩍어 하며 빈 코를 들이마시고는, "아재, 약 다 식어부렀겄소." 직접 약을 먹일 듯이 그는 남상명에게로 다가 앉았다.
"그려, 잘 묵겄네."
남상명은 약사발을 입으로 가져갔다.
"감기 몸살 약이 징허게 씨구만."
한기팔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남상명이 약사발을 입에서 떼며 진저리를 쳤다.
"짜아, 인자 푹 지무시게라."
김장섭이 사발을 받아들었다.
"그 자석덜이 자네만 같애도 나가 그리 맘이 안 씨일 것인디......"
남상명이 손으로 입을 훔치며 혼잣말을 흘렸다.
"참, 갸덜헌티서넌 안직꺼정도 무신 소식이 없답디여?"
한기팔이 남상명을 쳐다보았다.
"금메 말이여, 어쩌크름 생게묵은 자석덜이 핀지 한분 보낸 뒤로넌 3년이 다 돼가도록 함흥차사여. 에미 애비가 애가 타 죽는지도 모르고 자석덜이 그런 소견머리도 없이, 나이덜 쳐묵어도 꺼꿀로 쳐묵은 것이제."
남상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성님, 몸이 아픈게로 아덜덜이 그리워지는게비요 이. 근디 그리 서운허니 생각할 것 없으시오. 돈벌이 하겄다고 타관 떠돌다보면 언제 핀지 쓸 새가 있겄소. 차일피일험서 1년 가고, 2년 가고 허는 것이 세월 아닙디여. 그러다가 돈 많이 벌어갖고 마당으로 척 들어설 것잉게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허고 기둘리시게라."
한기팔은 평소에 속말을 별로 하지 않는 남상명이 두 아들 이야기를 꺼낸 심정을 헤아리며 위로하려고 들었다.
"돈얼 많이 벌어? 다 틀린 일이여. 요리 숭악헌 왜놈덜 시상에 즈그덜이 무슨 재주로 돈얼 벌어. 허다못해 돌 쌓는 기술이라도 있으면 또 몰라. 빌어묵을 놈덜, 어디서 뒤지지나 안했는지 몰르제."
남상명이 말하는 돌 쌓는 기술이란 간척공사장에서 방죽 쌓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많은 인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표가 필요없이 일을 했고, 보수도 세 배가 더 많으면서 밀리는 일 없이 받았던 것이다.
"아이고, 성님도 인자 늙었는갑소. 자식덜 두고 속에 없는 억지소리나 퉁퉁 허능 것 봉게."
한기팔이 눈을 흘겼다.
"그려, 나도 늙었제. 요까진 일 못 이기고 몸살이 나는 판잉게."
남상명이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남상명은 두 아들이 돈벌이를 떠나겠다고 나섰을 때 완강하게 잡아 앉히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빼앗긴 땅을 언제 되찾게 될지 모르면서 젊은것들을 그냥 빈둥거리며 세월 보내게 할 수가 없었고, 세상이 바뀌어 다른 젊은이들도 돈벌이를 떠나는데 두 아들도 힘 모아 한 이삼 년 돈벌이를 해오면 논 마지기나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두 아들한테서는 함경도 어디에선가 딱 한번 소식이 왔을 뿐이었고, 풍문으로 듣기에 타관 돈벌이라는 것이 막노동인 경우에는 제 살 깎아먹기로 돈을 모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풍문을 설마설마 했었는데 막상 간척지에서 노동을 해보니까 모든 것이 확연해졌던 것이다. 그 어디고 인부들 많이 쓰는 일터는 왜놈들이 주인일 것이고, 품삯을 적게 주면서 그나마 뜯기고 미루고 하는 그놈들의 못된 짓에 걸려 돈을 벌기란 틀린 일이었다. 얼마나 고생을 하며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 두 아들을 생각하면 남상명은 가슴에 돌이 얹히고 또 얹혔다. 그런데 몸이 아프자 두 아들 생각은 더욱 절절해지고 있었다.
남상명은 밤새껏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앓는 사람은 남상명만이 아니었다. 쉰 명이 기거하는 임시변통의 막사 안에서는 네댓 명의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날이 밝자 남상명은 자기 몸 같지 않은 몸을 커다란 바위를 떠밀 듯 일으켰다. 눈앞이 어질거리고 전신이 조근조근 쑤시면서 조각조각 부서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재, 밤새 잠 어쩌신게라?"
낯을 씻어 물 묻은 얼굴을 양쪽 소매로 씩씩 문질러대며 김장섭이가 물었다.
"어이, 잘 잤능가. 많이 낫네."
남상명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닌디요, 밤새 대들보 흔들리게 끙끙 앓튼디요?"
김장섭은 미심쩍은 얼굴로 남상명의 수척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니시, 병 나가니라고 그런 것이네."
남상명은 걱정 말라고 손을 저었다. 말을 하다보니 어쩌면 어젯밤 약을 먹기 전보다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재, 병 도지면 안된게 남은 약 한 첩 더 잡숫고 오늘 하로 푹 쉬시는 것이 어쩌시겄소?"
"아니랑게, 암시랑토 안혀."
남상명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만 눈앞이 핑그르 돌았다. 그런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고 남상명은 어금니를 앙 다물며 목에 걸친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맸다.
"그려, 심들드라도 어찌어찌 하로 때와넘게야제. 돈 깎이고 소작 깎이고 어디 손해가 한둘이라야 말이제."
한기팔이가 시름겹게 말하며 혀를 찼다. 남상명은 눈을 똑바로 뜨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품삯이 몇 십 전 깎이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소작이 깎이게 할 수는 없었다. 영구소작권을 준다는데 한번 소작이 깎이면 그 손해는 두고두고 커지는 것이었다. 개간이 끝나면 논을 다섯 마지기씩 소작을 줄 거라고 했다. 한 마지기 소작을 얻으려고 서로 다투는 판에 그걸 깎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려, 나가 안직 이까진 몸살에 구둘장 지고 눌 나이넌 아니라고. 어디, 누가 이기능가 보자.’
남상명은 저 어딘가 깊은 곳에서 뻗쳐오르는 오기에 몸을 의지하며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아재넌 어쩔라고 말기덜 앓고 외레 부채질이요, 부치잴이."
김장섭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한기팔에게 눈총을 쏘았다.
"헤, 자네가 저 사람 고집이 얼매나 황소고집인지 몰라서 허는 소리여. 순헌 생김허고넌 달르단 말이시. 글고 말이여, 오늘 우리 조가 헐 일이 등짐 지는 것이 아니고 자갈다지기로 바뀐단 말이시. 긍게로 우리가 양쪽 옆이서 심 잠 더 쓰먼 되덜 안컸어."
"아니, 오늘 일이 바뀌는 날입디여?"
김장섭은 반색을 했다.
"자네넌 날 가는지도 몰르고 살어?"
한기팔이 어이없어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가 원체로 모지랜게라." 김장섭이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씨익 웃고는, "아재, 아조 잘되았소. 심언 나가 다 쓸라요." 그는 손바닥에 침을 튕겼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간척공사장의 뻘밭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드러난 검은 뻘밭은 광활한 평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뻘밭은 썰물이 된 바다와는 직선을 이루고 있으면서 반대쪽인 육지와는 여러 개의 반차원을 이루며 뻗어가고 있었다. 뻘밭은 바닷물이 침범하지 못하는 육지와는 그 색깔로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뻘밭은 반육지이면서 반바다였고, 또한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셈이었다. 밀물이 되면 바다가 되었다가 썰물이 지면 육지가 되는 것이 뻘밭이었다. 이런저런 조개들과 여러 가지 게들의 안식처일 뿐인 그 드넓은 땅을 농토로 만들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바치고 있었다.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도 개미떼들이 분주하게 바글거리는 것 같았다. 뻘밭을 농토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닷물 막기였다. 그 방죽 쌓기는 썰물이 된 바닷물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쪽에서 뻗어나가고 있는 방죽이 하나로 이어지게 되면 그 안에 갇힐 뻘밭은 2천5백 정보, 7백50만 평이었다. 방죽은 3분의 1정도 쌓여져 나가고 있었다. 남상명네 조는 오늘부터 방죽의 양쪽 돌벽이 높아짐에 따라 자갈과 흙을 뒤섞어 다지는 일로 작업교대가 되었다. 그 일은 공사장 작업 중에서 그래도 수월한 편이었다. 두자 길이로 자른 아름드리 통나무를 세 사람이 방아 찧듯 하루종일 들어올렸다 내려놓았다 하는 그 일도 힘을 쓰지 않고는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흙짐 돌짐을 지는 것에 비하면 한결 나았고, 더구나 전표 채우기에 쫓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느긋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은 돌벽이 쌓여 올라오는 것에 맞추어 방아질을 하면 하루품을 쳐주었던 것이다. 인부들은 그 자갈다지기를 신선놀음이라고 불렀고, 누구나 그 일이 차례 오기를 기다렸다.
"아재, 기운 쓰덜 말고 설렁설렁 시늉만 허란 말이오."
김장섭을 불끈불끈 기운을 써대며 남상명에게 눈짓하고는 했다.
"어이, 알겄네. 자네나 너무 기운 빼덜 말어. 그러다 허리 가물 타겄어."
남상명은 한기팔과 김장섭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힘을 쓸 만큼 쓰고 있었다. 약기운인지 어쩐지 그래도 기운을 쓰다보니 누워서 앓을 때보다는 몸이 나았던 것이다. 점심때가 되었는데 종소리가 울리지 않고 사방에서 호루라기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호루라기는 감독들이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인부들은 반가운 종소리 대신 방정맞게 울려대는 호루라기소리게 얼굴들이 찌푸려지고 일그러졌다. 호루라기소리들이 울려대면 언제나 속상하고 귀찮은 일이 생겼던 것이다.
"집합이여, 집합!"
"얼렁얼렁 공터로 뫼여!"
조장들이 손나팔을 입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또 무신 잔소리 까라는 것이여."
"보나마나제. 우리헌티 존 일언 아닐 것잉게."
인부들은 일손을 놓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두 공터 쪽으로 빠른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인부들이 다 모이자 높직한 돌더미 위에 올라선 것은 요시다였다.
"에에 또, 지금부터 하는 말을 다들 똑똑히 들어라. 제군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조선총독부에서는 넉달 전인 작년 12월에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고 이제 그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정책에 적극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제군들은 내일부터 하루에 두 시간씩 더 일하도록 한다. 다들 알아들었나!"
요시다는 오랜 세월 동안 조선사람들을 소작인으로 부려온 사람답게 조선말이 거침이 없었다.
"저것이 시방 먼 소리여?"
"몰러, 나도 못 알아묵겄는디."
"어허, 일얼 더 부레묵잔 것 아니라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거 머시냐, 산미 머시랑가 허는 말이 머시다요?"
누군가가 목청 드높게 소리쳤다. 그 외침을 따라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주딩이덜 닥치게 혀!"
이동만이 눈을 치뜨며 소리질렀다. 그 서슬에 감독과 조장들이 후다닥 행동을 개시했다. 호루라기소리들이 날카롭게 울리고, 조장들이 인부들 사이로 뛰어들며 고함치고 있었다.
"주딩이 닫어, 주딩이!"
"누구여, 주딩이 까는 놈이 누구여!"
"떠드는 놈덜 욜로 나와!"
인부들은 곧 잠잠해졌다. 요시다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에에 또, 누가 산미증식계획이 뭐냐고 물었다. 좋아, 지금부터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니 잘들 들어라. 조선총독부가 새로 추진하는 산미증식계획이란 뭐냐! 그건 다른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앞으로는 쌀을 더욱 많이 수확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제군들은 농토가 똑같은데 어떻게 쌀을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제군들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앞으로 장기계획을 세워 농토를 많이 늘려나가기로 했다. 그 농토확장계획이 바로 우리가 지금 벌이고 있는 간척사업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전국적으로 농토가 될 수 있는 땅을 개간해서 농토를 넓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미리 막아 지금 농사짓고 있는 농토에서도 쌀을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해 수리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산미증식계획은 두 가지 일을 해나가게 된다. 첫째 농토 확장, 둘째 수리사업 실시다. 그러면 조선총독부에서는 왜 그런 일을 시작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이토 총독 각하께서는 조선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문화정치를 실시하신 자애로운 분인 것은 제군들도 잘 알 것이다. 총독 각하께서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으시고 조선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살게 하기 위하야 바로 산미증식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 말이다. 이것이 그 얼마나 고마우신 뜻인가! 제군들은 총독 각하의 그 고마우신 뜻을 받들어 내일부터는 더욱 열성으로 일을 해야 한다. 제군들이 열성으로 일을 하면 그만큼 빨리 제군들이 원하는 농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농토를 하루라도 더 빨리 갖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오늘 당장 공사장을 떠나라!"
요시다는 운집한 인부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훑어나갔다. 그의 싸늘하고 매서운 눈길 아래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그는 거만스럽게 아래로 내려오며 명령했다.
"좋아, 해산시켜라."
그때서야 점심때를 알리는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리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럴 위헌다는 것이 무신 소리랑가?"
"낸들 알어, 그 요상시런 소리럴."
"아이고, 머시기넌 머시겄어. 괭이가 쥐새끼 생각혀 주는 것이겄제."
"참말로, 또 무신 꾀럴 쓰는지 원."
사람들은 조별로 밥을 타러 가면서 막혔던 말문을 틔웠다. 그러나 의문만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아래, 그 말 믿어도 되능게라?"
"아니여, 종놈 위허는 상전 봤능가?"
남상명의 반문은 싸늘했다.
"근디 어찌 그런 거짓말얼 헐게라?"
"긍게 왜놈덜 아니여."
한기팔이가 말을 받았다.
"참 징헌 놈덜이랑게. 일 많이 부레묵어 비용 애낄라는 심보로구만."
김장섭이 침을 내뱉었다.
"그 속 알었으면 되았네. 말조심 허소."
남상명이 더 파리해진 얼굴을 찡그리며 김장섭에게 눈길을 꽂았다.
"씨부랄 눔덜, 참말로 개좆 겉으네."
김장섭은 또 침을 내뱉었다. 조선사람들을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한다는 요시다의 말은 물로 당치도 않는 거짓말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일본의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 것이 그 정책이었다. 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공업생산력은 급속히 발전한 반면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3년 전인 1918년에는 대규모의 쌀폭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공업생산력을 지속시키면서 모자라는 쌀을 손쉽게 충당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식민지 조선이었다. 이미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많은 농토를 빼앗아놓았겠다, 값싼 노동력은 얼마든지 있겠다, 그보다 더 좋은 식량공급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시다는 총독부의 그 정책을 끌어다가 자기에 회사의 사업에 이용하고 들었던 것이다.
2. 여자의 세월
백남일은 째보선창으로 들어섰다. 꽃샘바람결에 갯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포구로 아침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코를 큼큼거리며 포구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작은 배들이 밀물을 타고 통통거리며 금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배럴 한 척 부리는 것도 돈벌이가 짭짤헐 것인디......"
백남일은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생전에 아버지가 더러 했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면장자리에서 밀려난 다음부터 이상하다 싶게 돈벌이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권세가 없어졌으니 돈이라도 더 많아야 새 권세가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쯤 배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빌어묵을 놈덜이 어째 이리 속터지게 말얼 안 듣고 이려, 기술자놈덜 곤조통 드럽기넌 참......"
백남일은 화난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아버지 생각을 하자 허전한 슬픔과 함께 정미기계 기술자를 손수 부르러 다니는 자신의 몰골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백남일은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가 대단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는 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그걸 몰랐던 것이 면구스러웠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의 간섭을 피하려 하고 꾸중만 지겨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모든 일이 막히고 걸리는 데가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제대로 풀리는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새로 배를 부리기는커녕 정미소와 미선소를 뜻대로 꾸려가기도 쉽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말썽 많은 소작인들까지 다루자니 너무 골치가 아팠다. 정미소 기계는 벌써 사흘째 돌지 않고 서 있었다. 사람을 몇 차례 보냈지만 기술자가 오지 않아 직접 나선 참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이런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싶은 자격지심까지 겹쳐져 백남일은 더 화가 부글거리고 있었다.
째보선창은 언제나처럼 너저분하고 북적거렸다. 나무장수에 떡장수, 생선장수에 잔술장수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다. 그곳에서 싸구려 잔술을 마시거나 떡으로 요기를 하는 사람들은 날품팔이 노동자들이거나 기계공장의 막일꾼들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조선사람들이 싼 맛에 모여들었다. 백남일은 자신이 그런 시궁창 같은 곳에 발걸음을 한 것도 기분 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공장들이 발동선들 수리에 편리하도록 그곳에 몰려 있으니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남일은 빠른 걸음으로 난전을 지나 기계공장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아까시상,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백남일은 공장으로 들어서며 대뜸 주인에게 쏘아댔다.
"아니, 왜 이러시오?"
주인 아까시가 기계부품들을 치우던 손길을 멈추며 백남일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아니, 몰라서 묻소? 내가 사람을 몇 번씩이나 보냈으면 기술자를 보내줘얄 것 아니오."
화가 나 있는데도 백남일의 일본말은 막히는 데가 없었다.
"아니, 사람을 여러 번 보낸 것은 백상 형편이고, 난 그때마다 일이 밀려서 기술자를 보낼 수 없으니 딴 공장에 알아보라고 했잖았소. 내가 할 도리는 다했는데 잘못한 것이 뭐가 있다고 화를 내고 이러는 거요?"
아까시의 얼굴은 냉정했다. 백남일은 그만 당황했다. 아까시의 말이 틀리지 않았고 다른 공장들을 돌아다녀 보았자 신통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보시오 아까시상,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흘째 못 돌아가고 있으니까 답답해서 그러는 거 아니오. 단골을 이렇게 박대하기요? 아까시상, 나 좀 도와주시오. 수리비를 배를 내겠소."
백남일은 금방 태도를 바꾸며 주인의 손을 붙들었다.
"수리비야 뭐......"
"술도 한턱내겠소."
"글세, 일이 너무 밀려서......"
"그러지 말고 당장 좀 보내주시오."
주인은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백남일은 주인이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어려운 일을 이렇게 거뜬하게 해결하는 수완을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남일은 한시름 던 느긋한 마음으로 공장 골목을 벗어났다. 그는 난전으로 들어서기 전에 걸음을 멈추고 담뱃갑을 꺼냈다. 그의 손에 든 것은 한 갑에 15원짜리 고급품인 해태였다. 난전사람들로서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담배였다. 담배에 불을 붙인 백남일은 성냥개비를 아무데나 휙 던져버리고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저, 저것이 누구여!"
백남일은 깜짝 놀라며 주춤 멈춰 섰다. 그의 눈앞에 크게 확대되는 얼굴이 있었다.
"저, 저것이 그년 아니라고!"
백남일은 하나뿐인 눈을 부릅떴다. 그 옆얼굴이 틀림없이 그년 수국이었다. 백남일은 피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야 이년아, 수국아!"
백남일은 고함을 치며 어느 떡장수 여자의 어깨를 잡아챘다.
"워메, 수국이?"
아이를 업은 떡장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 요것이 누구여......"
백남일은 어리둥절해지고 있었다. 머릿수건이 벗겨진 눈앞의 여자는 수국이와 너무 닮았을 뿐 수국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댁언 누군디 우리 수국이럴 아시오?"
보름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험상궂은 명씨박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수국이라고? 글먼 수국이가 니년 동상이여?"
백남일은 한쪽 눈으로 보름이를 노려보며 숨을 씩씩거렸다.
"야아, 그런디요......"
보름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려, 니년 잘 만냈다. 수국이 그년 시방 어딨냐! 아니여, 수국이 그년에다 그 남동상 놈얼 찾어야 혀. 그 잡녀러 것덜이 어디 사는지 대!"
얼굴에 핑ㅅ발이 오른 백남일은 보름이의 저고리 옷고름께를 틀어잡아 일으켰다. 보름이는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서며 다급하게 대꾸했다.
"몰르는디요, 나도 몰르는디요."
무언가 느낌이 불길해 보름이는 모른다고 잡아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전사람들의 눈길이 전부 그들에게로 쏠려 있었다. 어떤 지게꾼이 백남일이가 팽개친 담배를 잽싸게 집어 들고 있었다.
"요런 빌어묵을 년 보소, 니년 식구덜이 어디 사는지 니년이 몰른다고. 이 느자구없는 년아, 헐 거짓말얼 히야제. 니 뒤지고 잡냐, 뒤지고 잡어!"
열이 치받친 백남일은 곧 후려칠 기세였다.
"아니, 어째 이러시오. 갸덜이 무신 잘못얼 혔다고......"
"요런 잡년아, 주딩이 까덜 말어. 느그 동상놈이 내 눈얼 요리 맨든것이여! 내 눈얼 말이여!"
백남일은 부르짖듯 소리치며 발 앞의 떡함지를 걷어찼다.
"아이고메 엄니, 내 떡, 내 떡......"
보름이는 땅바닥에 흩어지는 떡들을 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백남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등에 업힌 아이가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어쩐디야......"
"저, 저 아까운 것얼......"
백남일의 발 밑에 밟히고 있는 떡들을 보며 사람들은 혀를 차고 고개를 내두르고 있었다.
"이년아 얼렁 대. 요래도 안 대면 인자 니가 죽을 순서여. 니년 눈구멍에다 명씰럴 박을 챔이여."
백남일은 이빨을 갈아붙이며 독을 내뿜었다.
"저어...... 긍게로 머시냐, 만주로 떴다든디요."
보름이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만주로 가버렸는데 제놈이 어쩌랴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머시, 만주로 떴다고? 만주 어디여?"
하나뿐인 눈에 살기가 돌며 백남일이 다그치고 들었다.
"만주 어딘지넌 나도 몰르는디요."
"아니, 요런 씨부랄 년이 누구럴 놀리는 기여? 니 뒤져볼겨!"
백남일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참말이랑게라. 나도 넘헌티 들어서 만주로 뜬지 알었단 말이오."
보름이는 울상이 되었다. 왼쪽 이마에 큰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요런 개잡년!"
백남일은 보름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리고 발을 배를 걷어찼다. 아이를 업은 보름이는 땅바닥에 곤도박질 쳐졌다. 아이가 진저리치며 울어댔다.
"어메메, 저걸 어쩐댜......"
"남정네덜 멀혀, 생사람 잡겄구마......"
동무장수 여자들이 애달아 했다.
"이년아, 대! 만주 어디여? 얼렁 대란 말이여! 만주 어디여?"
백남일은 소리 지르는 것에 맞추어 쓰러진 보름이를 마구 짓밟고 있었다. 아이는 숨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보름이는 아이가 맞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름이는 자신을 패고 있는 이 남자와 수국이가 어떤 관계였고, 왜 남동생 대근이가 이 남자의 눈을 못쓰게 만들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대근이가 정말 이 남자의 눈을 명씨박이게 했다면 자신이 대신 맞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 야, 족발 치워!"
"요것이 누구럴 패고 이려!"
사람들 사이에서 두 젊은이가 튀어나와 백남일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한눈에 주먹패라는 것이 표가 났다.
"이새끼덜, 느그덜언 머시여!"
백남일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두 젊은이를 떠밀었다. 주먹패 둘 정도는 우습게 보는 헌병대의 가락이 아직 그에게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요것이 어디다 대고 욕직이여, 욕질이."
"니 저 아짐씨가 누군지나 알고 족발 놀리고 이러냐?"
두 젊은이는 백남일의 나이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하며 막나오고 있었다.
"요런 싸가지 없는 새끼덜이 사람 몰라보고 어디다 대고 개지랄이여, 이거. 저년이 느그놈덜허고 무신 상관이 있다고 넘 일에 골통 내밀어. 당장 안 비켜!"
"허, 요새끼가 시상 무서운지 몰르고 들뛰네. 저 아짐씨가 누구냐먼 말이여, 우리 오야붕허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그 말이여. 인자 알아묵겄냐?"
한 젊은이가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쏘았다.
"니넌 인자 죽었어. 저 아짐씨럴 저리 맹글어놨시니 니 남치기 눈깔에 명씨백이든지, 니놈 붕알이 터져나가든지 헐 것이여."
다른 젊은이가 말을 끝내는 순간 백남일의 주먹이 그 젊은이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리고 다른 젊은이의 배를 걷어찼다. 나머지 눈알에 명씨박이게 한다는 말에 백남일은 열이 치뻗쳤던 것이다. 느닷없이 공격을 당한 두 젊은이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고 백남일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새끼 잡어라."
배를 걷어차인 젊은이가 뛰려고 했다.
"아니여, 아니여."
얼굴을 얻어맞은 젊은이가 동료의 팔을 붙들었다.
"어찌 그려. 니 겁묵었냐?"
"미친 소리 말어. 저 명씨박이가 누군지 나가 아는디, 우리 둘이서 패을 놈이 아니여. 잘못 손대면 오야붕헌티 우리가 당혀. 우선에 화나는 것 참고 저놈이 저 아짐씨 팬 것얼 얼렁 오야붕헌티 전히야 혀."
"저놈이 그리 씨냐?"
"시방 정미소도 허고, 헌병보조원도 해묵은 놈이여."
"글먼, 눈깔에 명씨백인 것언 보조원 허다가 다친 것이라냐?"
"아니여, 즈그 미선소에 있는 이쁜 시악씨럴 냠냠 맛나게 입맛 다신 것언 좋았는디, 메칠 있다가 그 시악씨 남동상이 저리 맨글어부렀다드라."
남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켜 아이를 달래고 있던 보름이의 귀가 번쩍 띄었다. 바로 수국이와 대근이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햐아, 그것 참 꼬시게 잘되았다. 근디 그 시악씨허고 남동상언 어찌되고?"
"쥐도 새도 모르게 밤중에 도망얼 가분 것이여. 글고 저놈언 눈깔이 빙신 되았응게 헌병대서 쫓겨나고."
"어허, 고것 참마로 꼬시고 달다."
"근디 아짐씨, 어찌서 그놈이 그리 무작시럽게 팼드랑가요?"
젊은이가 측은해하는 얼굴로 보름이에게 물었다. 보름이는 머리에 수건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동생들의 이야기를 절대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자, 그것이야 차차 알게."
두 젊은이가 돌아섰다.
"빙신이 맘 고른디 없드라고 떡함지넌 왜 차엎고 지랄이여."
"저 떡얼 아까와서 어쩌까 이."
여자들이 혀를 차고 있었다. 흙이 묻고 짓이겨진 떡들은 개조차 먹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보름이는 그 떡들을 내려다보며 새롭게 목이 메고 있었다. 집에 있는 두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걸신들린 듯 떡을 먹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한 번도 넉넉하게 먹여보지 못했던 것이다. 못쓰게 된 떡을 보며 보름이는 두들겨 맞은 아픔보다 마음이 더 아파오고 있었다.
"그놈허고 무신 웬수럴 졌댜?"
"그놈허고 무신 곡절이 있는겨?"
동무장수들이 궁금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름이는 아무 대꾸 없이 엎어진 함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모여서 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참말로, 미인 박복이라등마 꼭 저 사람 두고 이르는 말이여."
"금메 말이여, 미색 타고나먼 멀혀. 팔자럴 타고나야제."
"아니여, 사람 팔자 부모 팔자가 반이드라고, 저 사람도 가난헌 집서 태여서 애초에 피지도 못허고 꾀이기만 혔을 것이여."
"인물 좋고 얌전허고 나무럴 디가 없는다. 참 아까운 여자여."
"어디, 그것도 다 이마에 숭 잽히기 전 이얘기겄제. 이마에 숭이 커서 인물 베래분 것 아니겄어?"
"그렇기도 혀. 고것이 불에 딘 숭언 아니고, 어떤 못된 인종이 그리 맨글어놨는지 원. 쯧쯧쯧쯧......"
"어떤 못된 인종이 그리혔는지, 어디서 다친 것인지, 그것이야 어찌 알 것드라고. 통 말얼 안헝게 말이시."
"당연지사제. 궂은 팔자도 서러운디 무신 자랑이라고 콜콜히 이얘기허고 잡겄어. 신세타령혀봤자 나느니 눈물이고 지느니 한숨이고, 넘덜 입질만 성허제."
"그려, 긍게로 속 찬 여자여."
여자들은 보름이가 비워놓고 간 자리를 이런 말로 채우고 있었다. 보름이는 혼자 걸으며 비로소 서러움이 사무치고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속입술을 깨물었다. 운다고 풀릴 서러움이 아니었고 울면 마음만 허물어진 뿐이었다. 세 자식을 생각해서 마음 옹골지게 먹어야 했다. 자신이 짱짱하게 버티지 않으면 어린것들은 그날로 배곯는 거지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무장수들에게 아침장사를 하고 나서 떡함지가 엎어지게 된 것이 다행이라 싶었다. 보름이는 몸 여기저기가 결리고 아프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시원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남동생 대근이가 그놈의 한쪽 눈이나마 멀게 만들어 수국이의 원수를 갚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시원함도 금방 스러지고 말았다. 신세를 망친 수국이를 데리고 만주로 떠나면서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인가. 판석이 아저씨나 부안댁이 수국이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여지껏 숨겨왔던 것이다. 알면 병이고 모르면 약이라고 했다. 그 속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보름이는 오늘 일을 판석이 아저씨나 부안댁에게 알리지 않고 덮어 넘기기로 했다. 또 그들 내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새삼스럽게 수국이가 당했던 일을 들춰내게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까 주먹패 총각 둘이서 나누었던 몇 마디 말로 모든 것을 다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판석이 아저씨나 부안댁이 오늘 당한 일을 알게 되면 또 속상해하고 분해할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그분네의 마음을 괴롭힌 일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허허 참, 나가 암디도 쓰잘디 없는 허깨비 아니라고, 허깨비."
자신이 세끼야에게 쫓겨났을 때 판석이 아저씨는 어느 때보다 분해했었다.
"아니, 그놈이 어디 사람종자여. 아무리 인종 못된 것이 왜놈덜이라고 혀도 지 새끼 업혀 내쫓는 것도 어디헌디 땡전 한닢도 안 주고 맨몸으로 내몰다니, 시상에 요런 법이 어딨당가."
부안댁도 너무 분해하며 가슴을 쳤던 것이다. 보름이는 아이를 추슬러 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는 달리 그때의 일이 또 떠올랐던 것이다. 이마에 남은 흉터를 보고 보름이는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가 심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흉터가 자리 잡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두 갈래로 갈라진 손가락 길이만한 흉터는 왼쪽 이마를 가득 채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보려고 했지만 낭자머리라서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흉측스러워 보름이는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싫었다. 그러나 보름이는 그때 학생을 숨겨주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세끼야의 집에서 쫓겨난 것은 보름쯤 지나서였다. 어느 날 낯모르는 사람이 와서 집이 팔렸으니 집을 비우라는 것이었다. 보름이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벌써 그런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치료가 끝나고 흉터가 드러나자 세끼야의 태도는 더욱 표나게 달라졌던 것이다. 뭐라고 한마디 말이 없었고, 싸늘하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턴가 발길을 끊었다.
"아니, 그 숭이 어찌 된 것이여?"
어느 날 찾아든 서무룡이의 놀람이었다.
"......"
"어허, 그 아까운 인물 베래부렀구만."
서무룡은 방정맞다 싶게 혀를 차댔다.
"......"
보름이는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단단허니 벌얼 받았구만그랴. 그렁게 멋났다고 학상놈얼 숭켜주고 그려."
서무룡은 화를 내듯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보름이가 집을 쫓겨날 때까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당허기만 헐 일이 아니시. 요 가시네럴 세끼얀지 에미얀지헌테 갖다줘 불소. 고상고상 험서 왜놈에 새끼 키워갖고 무신 영화럴 보겄능가. 정 지놈이 안 맡겄으면 뭄신 살 방도라도 맹글어줄 것 아니겄어."
부안댁이 분을 못 참고 한 말이었다. 보름이는 고개만 저었다. 매정하고 급한 성질로 횡포를 부렸으면 부렸지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낄 세끼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고 이 사람아, 자네넌 에랬을 적보톰 맘이 너무 순해서 탈이었어. 맘이 그리 순해 뺘져갖고 이 삼허고 팍팍헌 시상얼 어찌 살아갈라고 그렁가. 맘 독허니 묵고 나랑 나서보세."
부안댁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보름이 옆으로 다가앉았다.
"아니구만요, 저것이 지 자석이기도 헝께요."
"머시여? 자네가 무신 수로 저 두 새끼덜얼 키워낼라능가?"
부안댁은 어이없고 안타까워했다.
"다 지 묵을 것 타고난다고 허닝게......"
보름이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아이고 이 사람아, 그것이야 옛날 옛적 태평세월에나 허든 소리여. 땡전 한 닢 없이 여자 혼자 몸으로 고것이 될 일이 아니란 말이시."
"그만 허소, 시끄럽네. 세끼야 그놈 맘보야 보름이가 질로 잘 알 것 아니겄어.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 없응게 그리 걱정허덜 말어."
곰방대만 빨고 있던 손판석이 퉁을 놓듯이 말했다. 며칠이 지나 손판석은 보름이 앞에 돈을 내놓았다.
"요것이 20원인디, 자네가 세끼야헌티 그리 당헌 소식얼 들었담서 서무룡이가 내놓등마."
"야아?......"
보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있었다. 서무룡이가 입을 놀렸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전에 판석이 아저씨를 찾아가서 서무룡이가 못 오게 막아달라고 부탁을 하면서도 억지로 몸을 섞고 있다는 것은 차마 부끄러워 감추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행투넌 못쓰게 혀도 자네헌티넌 영판 지성이라닝게. 그 맘 쓰는 것이 고맙덜 않으요?"
부안댁이 보름이와 남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 부안댁은 아무 눈치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기사 허제. 20원이면 작은 돈이 아닌디 그가 맘 쓰기가 쉽지넌 않제." 손판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네 처지럴 딱허니 생각히서 내놓는 것이제 무신 흑심이 있는 것 같지넌 않은게 받아도 괜찮헐 것 같구마. 그 사람이 본시 인정이 있는 사람이시." 그는 서무룡이와 보름이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보름이는 소리 없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판석이 아저씨도 자신과 서무룡과의 깊은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던 것이다. 보름이는 돈보다도 자신과의 관계를 발설하지 않은 서무룡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요 돈이먼 우선에 무신 장사밑천이라도 헐 수 있덜 안컸다고."
부안댁은 돈을 보름이 앞으로 더 밀어놓았다. 보름이는 그 돈이 싫었다.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 돈은 몸값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받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려면 서무룡이게세 당해 온 일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건 판석이 아저씨가 없는 자리에서 부안댁을 상대로도 차마 꺼내기 창피스러운 이야기였다. 보름이는 눈물을 머금고 그 돈을 받아 넣었다. 그날 밤 보름이는 아들 삼봉이를 껴안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죄스러움 속에 남편과 시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리고 삼봉이가 더없이 안쓰러웠다. 무주를 떠나오면서는 해마다 성묘를 가리라 했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성묘는커녕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했던 것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제사 때가 되면 세끼야의 눈을 피해 도둑제사를 지내고는 했었다. 아들 삼봉이를 생각하면 이마에 흉이 크게 남은 것이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 어린 삼봉이는 세끼야의 매운 눈총 속에서 언제나 주눅 들어 옆걸음질을 쳤던 것이다. 세끼야와 서무룡이한테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이마의 흉이 고마울 뿐이었다. 보름이는 20원을 가지고 살 궁리를 마련했다. 우선 셋방부터 하나 얻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세 식구가 먹고 살아갈 일을 찾았다. 그 돈을 까먹지 않고 살아가려면 천상 장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려, 맘만 강단지게 묵으면 이문 쏠쏠헌 장사가 괜찮허제. 장사해 묵자면 속창아리럴 다 빼놔야 헌다는 말도 있제만 그려도 농사꾼덜언 배곯코 살아도 장사꾼덜언 다 하로 세 끄니 찾아묵고 사는 법 아니여. 헌디, 무신 장사럴 해야 좋을랑고?"
손판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떡장사가 어쩌겄소? 보름이 저사람 손끝도 매시랍고, 이문도 톡톡허다고 허든디. 글고 부두고 역전 앞이고 떡 사묵을 사람덜이 얼매나 많으요."
부안댁의 의견이었다.
"글씨...... 다 안 팔리고 남으면 으쩌라고. 삼동에넌 굳어서 못씨게 되고 삼복에넌 쉬어서 못씨게 될 것 아니여?"
"아이고 참, 걱정도 팔자요 이. 누가 하로에 한 섬썩 떡얼 헌답디여? 쬐깨 모지랜다 허게 맨글어갖고 해전에 싹싹 팔리게 허고, 그래도 남는 것이야 아그덜 믹이먼 한 끄니 때와지는 것 아니겄소."
부안댁의 자신감 넘치는 말이었다.
"글씨...... 장사야 묵는 장사가 질이라는 말도 있기넌 있는디......"
손판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떡장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보름이는 부안댁을 따라나섰다. 떡장수들이 많은 데를 찾아가 이것저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루에 얼마씩이나 만들어야 하는지, 떡은 몇가지나 되는지, 어떤 떡이 제일 잘 팔리는지, 떡은 얼마나 커야 하는지, 떡값은 얼마씩 받는지, 어디가 장사가 잘되는지, 알아볼 것이 많았던 것이다.
"참, 아줌매넌 용허기도 허요 이. 떡장사도 안해 봤음서 어찌 그런 생각얼 다 해내고 그런다요."
보름이는 그런 빈틈없는 생각을 해낸 부안댁이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스스로가 딱하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에이, 용허기넌 모시가 용혀. 나도 농사짓고 살 적에야 어디 그런저런 눈치 알었간다. 도회지물 묵고 살다붕게 살살 요시가 돼가는 것이제. 도회지란 것이 사람 여물게도 맨글고 백여시도 맨글고 그러는 것 아니여?"
부안댁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나넌 안직도 무주 촌것이구만......
보름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물큼 풍겨오는 산내음을 맡았다. 서늘하고 싱그러운 산내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산 첩첩했던 그곳이 못내 그리웠다. 그러나 이제 성묘조차 갈 수 없도록 더렵혀진 몸이었다. 그 죄를 씻는 길은 아들 삼봉이를 잘 키우는 것뿐임을 보름이는 새롭게 깨닫고 있었다.
그려, 나도 인자 여시가 돼야 혀. 아니여, 백여시가 될 것이여.
보름이는 어금니는 맞물며 무주로 뻗치는 마음을 잡아챘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들을 장하게 키우리라고 또다시 마음을 다졌다. 나무장수 떡장수 들이 많이 몰려 있기로 이름난 째보선창부터 가보기로 했다. 째보선창에 들어선 보름이는 기가 질렸다. 떡장수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아이고메 안되겄소."
보름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 말을 했다.
"어시가 안돼야?"
부안댁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떡장사가 이리 많은디......"
"자네 그럴지 알았네. 이 사람아, 자네 맘언 어찌 그리 순허고 물텡잉가. 동무장사가 많애야 장사가 잘된다는 말도 못 들었능가? 장사가 잘된게 저 사람덜이 이리 몰린 것이란 말이시. 겁묵덜 말고 우선 구경이나 잘해 두소."
부안댁이 보름이의 등을 다둑거렸다. 부안댁과 보름이는 분주한 사람들 사이를 피해 다니며 떡장수들이 장사하는 것이며 떡함지들을 유심히 살폈다.
"저어, 떡얼 사묵어 보는 것이 어찌겄소."
보름이가 내놓은 의견이었다.
"떡얼?......"
"눈으로 보기만 해갖고야 어디 세세허니 알겄소. 떡얼 사묵어야 이것저것 물어볼 수도 있고라."
"이, 존 생각이시. 근디 돈이 아까와서 으쩌까?"
"고것도 밑천 딜이는 것인디 머시가 아까와라."
보름이는 부안댁의 등을 밀었다.
"음마, 금세 장사가 몸에 익은 것맨치로 말허네."
보름이는 자기를 위해 애쓰는 부안댁에게 떡을 대저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보름이와 부안댁은 많은 떡장수들 중에서 나이 지긋하고 마음씨 좋아보이는 여자를 골랐다. 떡을 고르고 있는데 왼쪽 편에서 여자들의 싸움이 일어났다.
"아이고, 저 예편네가 또 말썽이시."
떡장수 여자가 그쪽을 힐끗 쳐다보며 혀를 찼다.
"같은 장사찌리 어찌 저런다요?"
"자리쌈 허는 것이제라. 저놈에 예편네가 어디서 새로 불거져 갖고 염치없이 넘덜 틈으로 끼들라고 헝게 쌈이 안 일어나고 어쩌겄소."
"글먼 이 길바닥에도 니 자리, 내 자리가 말뚝 백혀 있단 말이다요?"
부안댁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무신 소리다요? 자릿세꺼정 톡톡허니 물고 있는디."
"아니, 관공서서 요런 시장시런 장사덜헌티도 세럴 뜯어가도 헌단 것이요?"
"아이고 참, 몰르면 말얼 허덜 마시게라. 요 길바닥 쥔이 누군지 아시오?
군산바닥 왈패덜 아닌게라. 왈패덜헌티 꼬박꼬박 자릿세럴 바쳐야 허요."
"아이고 잘되았네!"
부안댁이 불쑥 말하며 보름이의 팔을 쳤다. 그런 부안댁의 얼굴은 더없이 환했다.
"머시가 잘되아라?"
떡장수 여자의 목소리가 금방 달라졌다.
"아니, 암것도 아니오. 우리찌리 그냥 허는 소리요."
부안댁이 얼버무렸다. 부안댁이 서무룡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알고 있는 보름이는 민망스러워 고개를 수그렸다. 역시 떡장사는 째보선창이 가장 잘된다는 것이었다.
"자리야 걱정 말고 아무 때고 나오라등마."
손판석이 보름이와 부안댁에게 전해 준 서무룡의 말이었다. 보름이가 떡함지를 이고 나가는 날 서무룡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의 부하 둘이 보름이를 맞이해서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 자리가 제일 좋은 길목이라는 것을 보름이는 나중에야 알았다. 주먹패들은 보름이한테서는 자릿세를 받아가지 않았다. 벌써 떡장수여자들 사이에서는 보름이와 서무룡의 관계에 대해 구구한 수군거림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보름이는 일체 귀를 닫고 떡 팔기에만 마음을 모았다. 더구나 보름이는 누구에게도 말못할 근심을 안고 있었다. 서너 달째 꽃이 안 비치더니만 기어코 아랫배가 뽀속하니 불러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애비 없는 자식이 뱃속에서 커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보름이는 도무지 살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이 세끼야의 자식이라 해도 애비 없는 자식이었고, 서무룡의 자식이라 해도 애비 없는 자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참말로 하늘도 무심허시제. 사람 팔자럴 어찌 이리 험허게 맨드시능고. 아니여, 세끼야 그놈이 천벌을 받아 꼬드라질 것이여. 하먼, 천벌을 받고말고."
아이를 받아낸 부안댁이 목메는 소리로 분을 씹었다. 보름이는 사무쳐오는 서러움 속에서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움으로 서러움이 더 커지며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름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쓰러졌다. 온몸이 아프고 무거워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그 명씨박이 눈이 언제 또 앙갚음을 하려 들지 모를 일이었다. 그 사내는 주먹패 총각들의 힘에 쫓겨난 것뿐이지 수국이와 남동생이 만주 어디에 사는지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려고 또 찾아올 것만 같았다. 설핏 잠이 들었던 보름이는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누구다요?"
"우리요, 우리. 째보선창 터줏대감."
보름이는 지게문을 밖으로 밀었다. 툇마루에 주먹패 총각 둘이 앉아있었다.
"얼렁 병원에 갈 채비허시게라."
"병원이라? 나 병원에 갈 맨치 아프지넌 않은디요......"
보름이는 의아스럽게 두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 허덜 말고 얼렁 나스시오. 다 우리 오야붕이 내린 영이신게."
"아그덜 밥도 해믹여야 허고......"
"허 참, 어찌 그리 우리 오야붕이 미리 헌 말허고 딱 들어맞어 분다요? 그나저나 해결 볼 일이 남었응게 우리 오야붕이 시키는 대로 허랍디다. 아그덜이야 어디다 기면 될 일 아니겄소."
"그려, 손샌집에 기라고 헙디다. 병원에 안 가먼 우리가 졸갱이 치요."
다른 사내가 그냥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보름이는 서무룡이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병원에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서무룡이가 설마 자신에게 해 입힐 일이야 꾸미랴 싶었다. 보름이는 두 아이를 부안댁에게 맡기기로 하고 젖먹이는 업고 집을 나섰다.
"아니, 얼매나 아프간디 병원에 가나?"
부안댁이 놀라움고 함께 의아해했다.
"갔다 와서 세세허니 말허겄소."
보름이는 서무룡이가 미리 잡아놓은 병실에 입원해서 진찰을 받게 되었다. 다음날 보름이의 진단서를 받아든 서무룡은 똘똘한 부하 셋을 골라 백남일에게 보냈다.
"어지께 째보선창서 떡장사럴 개 패디끼 혔담서요?"
주먹패 셋 중에 키가 호리호리하고 얼굴에 독기가 지르르 흐르는 사내가 백남일에게 물었다.
"근디,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여?"
백남일은 대뜸 반말을 내뱉었지만 그 기색에는 겁이 실려 있었다.
"좆도, 혓바닥이 반절뿐이여?" 사내는 사무실 바닥에 침을 찍 내뱉고는, "우리 구역서 사람얼 친디다가, 그 떡장사가 무지허게 상해서 시방 병원에 입원중이라 우리 오야붕이 화가 지독허니 나셨다는 것얼 명심혀. 우리 오야붕이 화럴 참고 전허는 말잉게 똑똑허니 듣고 그대로 혀. 첫째로, 그 떡장사 치료비에다가 손해럴 물고 둘째로, 우리 오야붕 찾아가서 잘못혔다고 빌어." 그는 독기 흐르는 얼굴에 사르르 웃음을 띠었다.
"머시 어쩌고 어쩌? 그년 동상놈이 내 눈얼 요 꼴 맨근지나 알고 그런 개 잡소리 치는 것이요 시방!"
백남일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주머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헹, 고것이야 떡장사 동상허고 풀 문제제 우리는 모를 일이고. 오늘 점심 때꺼정 우리 오야붕 안 찾아오면 어찌 되는지 알겄어?"
"하늘이 무너져 봐라, 나가 가나."
백남일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되았어. 글먼 쇠고랑 차야 될 것이로구만."
"머시여?"
"폭행범으로 진단서가 경찰서로 넘어가게 되야 있응게. 자아, 가자."
주먹패 셋은 유유하게 백남일의 사무실을 나갔다. 서무룡은 백남일이가 자신에게 빌러 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하들을 보낸 것은 폭행범으로 쇠고랑 채울 것이라는 걸 알리는 것이었다. 백남일의 아버지 백종두가 죽고 없는 형편에 결정적인 증거인 상해진단서로 백남일을 잡아넣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일단 쇠고랑을 차게 되면 백남일은 몸이 달아 굽히고 들어올 것이었다. 그때, 그전에 백종두가 살아 있을 적에 실패했던 정기 상납액을 정하고 그리고 보름이의 일도 해결해 줄 작정이었다. 서무룡은 부하들을 백남일에게 보내고 자신을 바로 경찰서로 들어갔던 것이다. 백남일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줄담배를 피워대며 우왕좌왕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버지가 간절하게 느껴졌다. 백남일은 경찰서에 손을 쓸 만한 사람들을 몇 번이고 더듬어보았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잡히지 않았다. 장칠문이만 있으면 간단할 것이데 개똥도 약에 쓰자면 안 보이더라고 그는 아직까지도 시골 주재소에 박혀있었다. 헌병대만 그대로 있었더라도 그 싹수머리 없는 서무룡이놈을 되잡아 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의 문화정치인지 뭔지 때문에 헌병대는 슬쩍 자취를 감추고 낯모르는 순사들만 부쩍 늘어났던 것이다.
백남일은 시간만 자꾸 흘러가는 초조감 속에서 또 3·1만세를 욕해대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3·1만세 때문에 자신은 이래저래 등 비비고 기댈 권세며 바람막이를 다 잃어버린 것이었다. 백남일은 정말 점심때가 가까워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이거 왜들 이러시오. 내가 누군지 아시오? 내가 친화회 회장이오, 친화회 회장!"
백남일은 쇠고랑을 차지 않으려고 자신의 감투를 내세우며 몸부림했지만 두 일본순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백남일은 잡혀가면서 서무룡이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무룡이에게 사람을 보낼까말까 망설이기만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자니 그까짓 서무룡이 놈에게 굽히는 꼴이 되었고, 자신이 친화회 회장인데 경찰에서 어쩌랴 싶은 믿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경찰은 서무룡의 주먹패 조직인 일심회 편을 든 것이었다. 백남일은 경찰이 자신의 친화회보다 서무룡의 일심회를 더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너무 분했다. 백남일을 유치장에 가두게 한 서무룡은 느긋해져 있었다. 백남일이 재판까지 받게 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손을 쓴다 해도 제멋대로 풀려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피해 당사자인 보름이와 화해를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고발자는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고발을 취소시키게 하려면 백남일은 자신의 요구를 듣지 않고는 안 되었다.
"똑같은 말 자꾸 할 게 없단 말이오. 빨리 나가고 싶으면 어서 당사자와 고발자, 양쪽에 화해를 하라잖소."
경찰의 대꾸는 이렇듯 사무적이었다. 결국 서무룡이 그런 놈한테?...... 아니야, 백남일은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불상놈한테 어찌 잘못했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보아도 그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서무룡이를 좀 만나게 해주시오."
점심도 굶은 백남일은 해질녘에 결국 입을 열었다. 차마 유치장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무룡이가 없소. 급한 일로 아까 이리에 갔다는 거요."
담당순사가 백남일에게 전해 준 말이었다.
"뭐요? 날 그럼 내보내주시오."
백남일은 벌컥 화를 냈다.
"그건 안되오."
"그럼 나보고 유치장에서 밤을 새란 말이오?"
"별수 없잖소. 내일까지 기다리시오."
순사는 돌아서 버렸다.
"요런 오살육시혀서 자근자근 씹어묵을 놈이! 나럴 골탕믹일라고 역부러 안 만낼라는 것이여."
백남일은 쇠창살을 붙들고 부르르 떨며 이빨을 갈아붙였다. 백남일의 생각은 틀림없었다. 서무룡은 이리에 간 것이 아니라 자리를 피해 술집에 앉아 있었다. 백남일을 몸 달게 하고 기를 꺾기 위해 유치장에서 하룻밤 쓴맛을 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서무룡은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경찰서로 나갔다.
"어지께 날 찾었담서. 용건이 머시오?"
서무룡은 백남일과 마주앉자마자 거만스레 내질렀다.
"자네 나허고 평상 원수지고 살 챔이여?"
백남일이 외눈으로 서무룡을 노려보았다.
"그것 따지자고 만내자고 혔소? 원수 될 맘 없응게 딴소리 말고 허고 잡은 말이나 얼렁 허시오. 나 바쁜게."
서무룡은 네놈 속을 다 안다는 듯 백남일을 마주 노려보며 비웃고 있었다.
"원수 될 맘 없으면 되았구만. 경찰에서 화해럴 허라는디 자네 생각언 어쩌?"
백남일은 급하게 마음을 드러냈다.
"화해? 그것 나쁠 것 없는디, 화해 조건이 머시오?"
서무룡의 얼굴이 더 거만스러워졌다.
"그 여자 치료비럴 나가 다 물제."
"고것이 다요?"
"고것말고 머시가 또 있간디?"
"더 중헌 것이 우리 구역서 난장판 지긴 죄요. 그 벌금으로 다달이 정미소 자릿세럴 내야 허요."
"머, 머시여? 택도 없는 소리 치워!"
백남일이 버럭 소리 질렀다.
"되았소. 이얘기 끝났응게 앞으로 재판이나 오지게 받아보시오."
서무룡은 냉정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아니...... 그것이 아니고 말이시, 그 이 얘기가 그렁게......"
당황한 백남일은 서무룡을 붙들었다.
"피차 원수 되잠서 멀라고 붙드요?"
서무룡은 백남일을 사납게 꼬나보았다.
"아니여, 그것이 아니고...... 그전보톰 그 이 얘기럴 해 는디, 대체 얼마썩얼 보태도라는 것이여?"
백남일은 서무룡이를 자리에 앉히며 자릿세를 낼 뜻을 비쳤다. 그러나 그는 이번 일로 자릿세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보태줄 수도 있다고 말을 슬쩍 돌려 자기 체면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보태줘!
서무룡은 그 말이 귀에 거슬림과 동시에 백남일의 속셈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기분이 사르르 꼬였지만 참새도 죽으면서 짹 하더라고 그 정도 체면 세우려고 하는 것은 그냥 넘겨주기로 했다.
"한 달에 백 원씩 내시오."
서무룡이 내지르듯 말했다.
"머, 머시여? 십 원이 아니고 백 원?"
놀란 백남일이가 말을 더듬었다.
"십 원? 누구럴 동냥아치로 알어?"
서무룡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갔다.
"아니 이 사람아, 백 원이면 쌀이 가마닌지나 알어? 2등미가 시무가마니여. 나가 정미소 혀서 한 달에 그맨치도 못 번단 말이여."
물론 서무룡이는 그 돈을 다 받아내자고 백 원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깎일 것을 생각해서 미리 양껏 불러댄 것이었다.
"글먼 얼매럴 내겄다는 것이요?"
"그려, 자네도 일심회 끌어가자면 비용이 들겄제. 나가 일심회 후원비로 다달이 20원씩 내놓기로 허겄네."
백남일은 또 머리를 써서 주먹패에게 눌려 돈을 뜯기는 게 아니라는 명분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일심회 후원금? 그것 좋소. 근디, 근사한 이름에 비해 돈이 쥐좆만해서 어디 쓰겄소. 주고받는 사람 체면이 있제, 두말 말고 그 배로 내시오."
"40원얼? 이 사람아, 나가 흙 파서 정미소 돌리는지 알어? 다달이 40원이먼 1년이먼 얼맨지나 알고 그려?"
"나허고 친허게 지내먼 그보담 큰 이문이 돌아가게 될 것인디요?"
"여러 말 말고 30원으로 짤러."
"30원? 심에넌 안 차제만 말대접으로 그리허겄소." 서무룡은 결정을 알리듯 손바닥을 찰싹 맞때리고는, "그 여자 치료비넌 흥정이고 머시고 없이 딱 30원이오. 치료비에, 골병든 것에, 떡값에, 우세 산 것이 다 들어간 것잉게. 요 돈얼 깎을라고 들먼 이적지 헌 이 얘기넌 다 작파요." 백남일을 쏘아보고 있는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넌 한 20원 생각혔는디, 그리 말허먼 벨수 있겄다고."
백남일은 어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그는 한시라도 빨리 경찰서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서무룡과 백남일은 화해조서에 손도장을 눌렀다. 서무룡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고, 백남일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서무룡은 백남일에게 자릿세를 받아내게 된 것만이 기쁜 것이 아니었다. 보름이에게 30원을 챙겨주게 된 것도 마음 가벼웠다. 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보름이에게 보탬을 준 것은 누구에겐가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기쁨이었다.
"이쁜 꽃에넌 독이 들었다고 허등마 수국이 그년 보지에넌 독이 들어도 지독시런 독이 들었는갑서. 아니여, 그년 보지넌 귀신단지여, 귀신단지. 귀신단지가 아님사 그년 보지 한분 묵고 요리도 두고두고 재수가 드러울 수가 있간디."
백남일은 경찰서를 나서며 누가 듣거나 말거나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보름이는 다음날 서무룡의 부하가 가져온 30원을 받아가지고 퇴원했다.
"참말로 이리 고마울 디가 어디 있당가. 서무룡이 그 사람이 진짜배기 주먹패 오야붕은 오야붕이시. 진짜배기 주먹패넌 의리럴 지킨다고 안 그러등가."
보름이와 서무룡의 관계를 모르는 보안댁은 서무룡의 칭찬이 늘어졌다.
"어이 보소, 요 돈 30원에 셋방 돈얼 보태면 어디다가 방 딸린 쬐깐헌 점방 한나 채릴 수 있덜 안컸다고? 아무리 작아도 어디다 점방 채래서 떡 장사 신세 면허도록 허소. 우리 당장 낼보톰 점방 구허로 나스제."
부안댁은 신바람을 냈다.
"저어......아니구만이라. 요 돈으로 따로 헐 일이 있는디요."
보름이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딴 일? 그보담 더 급헌 일이 머여?"
부안댁은 멀뚱하게 보름이를 쳐다보았다.
"저어...... 우월이가 너무 고상얼 허고 있는디......"
보름이는 부안댁의 눈치를 보며 어색스럽게 웃음 지었다.
"오월이? 오월이야 미선소서 돈벌이 안허고 있다고?"
"근디, 미선소 일언 심들고 벌이넌 시원찮고, 날마동 몸 더트는 험헌 꼴 당허고...... 소문난 지옥살이 험스로도 움막 신세넌 언제 면헐란지 모르고 헝게......"
"그려서 어쩔라는 것인디?"
부안댁의 기색은 싸늘했다.
"......"
보름이는 눈길을 떨구었다.
"참말로, 자네넌 어찌 그리 맘이 순허고도 부처님 가운데 토막잉가. 그리 곱게 맘 쓰는 것이야 시상에 존 일이제. 근디 보소, 자네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헌가, 오월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헌가? 자네넌 새끼덜이 싯이고 오월이넌 한나여. 그 새끼덜 안 굶기고 살리자면 자네가 오월이보담 세 곱얼 더 벌어야 헌단 말이시. 나 말 야박허니 생각허지 말소. 자네 앞질이 너무 팍팍허고 고단허게 생겨서 허는 소링게."
"야아, 알겄구만이라."
"그러고 말이시, 시방 돈얼 쪼개서 서로가 이도저도 안되고 고상만 허느니 자네가 먼첨 자리 잡은 담에 오월이럴 생각혀 줘도 안 늦는단 말이시. 나 말 알아묵겄능가?"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우."
보름이는 밤늦게까지 보안댁의 말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부안댁의 말도 속 깊은 데가 있었다. 그러나 미선소에서 시달리며 사는 오월이를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오월이가 다른 벌이로 고생을 하면 도와주는 것을 뒤로 미룰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월이는 미선소에서 날마다 몸뒤짐을 당하고 있었다. 오월이는 그동안에도 서너 차례나 몸뒤짐 당하는 괴로움으로 눈물을 흘렸었다. 오월이는 혼자 울다가 들킬 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잡아떼고는 했다. 그러다가 캐묻고 들면 마지못해 희롱당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곤 했다. 보름이는 그때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라고 했었다. 보름이는 자신이 마음에도 없는 남자들에게 당해 보아서 오월이의 마음이 어떨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월이에게 기다리라고 한 것은 임시변통의 헛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떡장사를 열성으로 해서 돈을 모아 오월이를 미선소에서 빼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월이에게 떡장사시킬 밑천은 마음처럼 그리 쉽게 모아지지 않았다. 오월이는 벌써 1년이 다 되도록 미선소에 묶여 있었다. 보름이는 오월이한테서 동무의 정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오월이는 오빠가 좋아했던 여자였다. 오월이를 보면 하와이로 떠나 소식이 없는 오빠를 느끼고는 했다. 오월이는 말이 없었지만 눈 그 깊은 곳에 변함없이 오빠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든 시어머니를 잃은 뒤로 혼자 살아가던 오월이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월이는 동무의 정만 믿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마음으로 의지해 온 것이었다. 보름이는 오월이를 도와야 한다고 마음을 작정했다. 오빠를 생각해서도 미선소에 더 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무로서 오월이가 자신처럼 애비 없는 자식을 갖게 될지도 모를 위태로운 처지에 더 두어서는 안 되었다. 보름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3. 새 길을 열어라
4월 한낮의 들녘을 아지랑이로 가득 차 있었다. 햇발이 진해질수록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더 현란하게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지랑이의 실줄기들은 멀고 먼 들녘끝까지 겹쳐지고 겹쳐지고 또 겹쳐지며 아른거리는 몸짓으로 끝없이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겹겹의 아른거림 속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도 아른거리고 푸른 들녘도 아른거리고 맑은 하늘도 아른거렸다.
천지에 가득한 그 아른거림은 꿈결인 양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하소인양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은 서러움 깊은 사람들의 탄식 같기도 했고, 한 많은 사연 품은 넋들의 승천 같기도 했다. 그건 기실 굶주려 배고픈 사람들의 한숨이고 한탄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그리도 숨 막히게 흐드러지면 보릿고개에 배고픔도 병이 되도록 사무쳤다. 이미 죽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부황이 들고 어질병을 앓았다. 그 배고픈 병이 든 눈으로는 아지랑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어질병을 더 도지게 했다. 그 사람들은 속 메스꺼운 어지럼증에 휘둘리며 하늘을 향해 한숨짓고 한탄을 토했다. 배곯고 사는 기구한 팔자를 쓰라려 하고 아파하는 그 한숨과 한탄은 풀릴길 없는 채 아지랑이에 실려 멀고
먼 하늘로 스러져 갈 뿐이었다. 아지랑이의 어질거리는 춤사위 속에 유별나게 고운 꽃밭이 들녘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싱그러운 초록빛 잎들이 풍성하게 바다를 이룬 가운데 선연하게 붉은 꽃들이 보석을 뿌린 듯 낭자하게 피어나 있었다. 싱싱하게 돋아 오르는 초록빛 위에 점점이 찍힌 붉은 꽃들은 핏빛으로 고왔다. 넓게 펼쳐진 초록빛은 붉은 꽃들을 더 붉게 받쳐 올리고, 수없이 많은 붉은 꽃들은 초록빛을 더욱 풋풋하게 복돋우면서 극치의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 들판에 펼쳐진 꽃밭은 바로 자운영의 모습이었다.
자운영의 붉은 꽃 하나하나는 그다지 화사하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다. 진달래가 그렇고 개나리가 그렇듯이. 그러나 무리지어 핀 질달래나 개나리의 아름다움에 누구나 절로 감탄하듯 자운영도 집체미가 돋보이는 꽃이었다. 자운영 붉은 꽃들은 논들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꽃반속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소가 쟁기를 끌며 더딘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이 뒤집히면서 자운영은 초록빛 잎이고 붉은 꽃이고 무참하게 땅속에 파묻혔다.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자운영의 운명이었다. 자운영은 거름에 좋아 길러진 것이었다. 자운영 붉은 꽃이 넘실거리는 논둑에서 송아지들이 가끔 길 울음을 울고는 했다. 그건 쟁기질을 하고 있는 어미소에게 배고픔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자운영을 뜯어먹지 못하도록 입에 주둥망이 씌워진 어미 소는 새끼의 배고파하는 소리를 들은 듯 만 듯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겨 놓을 뿐이었다. 송아지는 그런 어미 소를 따라 논두렁을 돌며 아지랑이에 취한 듯 맥없는 울음을 길게 울고는 했다. 어미 소는 쟁기질이 힘겨워 끈끈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아랫배에는 탱탱하게 불어난 젖을 풍만하게 매달고 있었다.
"이려, 이려!"
차득보는 소를 몰며 또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중천에 옮겨와 있는 해를 따라 배가 출출했던 것이다.
움머어어 -
논두렁에서 송아지가 목을 길게 늘이며 또 배고프다고 보채고 있었다. 차득보는 자꾸 잦아지는 송아지 울음소리에 속이 더 출출해지며 코를 큼큼거렸다. 쟁기질에 줄기들이 부러지고 잎들이 상하면서 자운영 풋내음이 물큰물큰 풍겨오고 있었다. 그 풋풋한 향기는 시장기를 더 동하게 했다.
"요것 잠 받아줄랑게라?"
등 뒤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차득보는 후딱 고개를 돌렸다. 느낌대로 저쪽 논두렁에 월엽이가 광주리를 이고 서 있었다. 차득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쟁기야 넘어지든 말든 논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호, 혼자서 어쩐 일이다요?"
차득보는 광주리를 받아 내리며 물었다. 또 말이 더듬거려지는 것이 그는 속상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엄니도 아부지랑 전주에 가시기로 혀서 안 기시는구만요."
월엽이가 사르르 웃으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아니, 아짐씨도 다 행차럴 허셔라?"
차득보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월엽이를 바라보았다. 월엽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또 가슴이 찌릿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당황스럽게 눈길을 돌렸다.
"야아, 아부지 말씸이 그래야 사둔댁에 지대로 인사 채리는 것이 된다등마요. 시장헌디 얼렁 드시게라."
월엽이가 광주리에서 보자기를 걷었다.
"야아, 요 무거운 것얼......"
차득보는 광주리 옆으로 다가앉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이 무거운 것을 혼자 이고 오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었느냐는 말이 속에서는 환한데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소가 커다란 소리로 울었다. 그리고 몸을 흔들어댔다. 멍에와 봇줄이 따라서 흔들렸다.
"아이고메, 저 쟁기 풀어줘야 쓰겄소."
월엽이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밥 때라 일을 쉬게 된 것을 안 소는 쟁기를 풀고 여물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미소의 울음에 답하듯 송아지가 어리광스럽게 울었다. 그러면서도 송아지는 논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요런, 이놈에 정신 잠보소."
차득보는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그려, 니도 묵어야 살겄다 그것이제. 미안타, 기둘려라아." 그는 타령조로 가락을 붙이며 자운영 꽃밭을 무질러가고 있었다.
월엽이는 그런 차득보의 건장한 뒷모습을 살짝 훔쳐보았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끼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월엽이는 그에게 마음 쓰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몸을 움츠렸다. 차득보가 언제부턴가 자신을 색다르게 대한다는 걸 느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눈치를 모르는 척 덮기만 했다. 여자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차득보의 이도저도 아닌 처지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차득보는 머슴도 아니고 그렇다고 객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2년이 다 되도록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는 낮에는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공부를 배웠던 것이다. 그 생활대로 하면 그는 절반은 학생이었고, 절반은 일꾼이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그를 머슴으로만 대했다. 그런데 그는 속 좋게도 그저 머슴인 척해 가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아이고, 뱃속에 동냥아치 삼시랑이 들었다냐 어쩐다냐 . 어찌 이리 배가 고프고 이려."
차득보는 둘이만 마주하게 된 어색스러움을 없애려고 일부로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논두렁으로 올라섰다. 월엽이는 앉음새를 고치며 파리 쫓는 시늉을 했다. 파리 아닌 벌 한 마리가 논두렁의 들꽃에 앉으려다 말고 황급히 날아갔다. 차득보는 광주리 안에서 술이 든 호리병부터 집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월엽이가 한잔 따라주면 술맛이 꿀맛일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쌀 앉히기도 전에 밥 먹으려 덤비는 어림없는 욕심이었다. 차득보는 실없는 자기 욕심에 비식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차득보는 막걸리 두 사발을 연거푸 비웠다. 목마름과 배고픔을 함께 다스리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는 느긋해진 기분으로 된장에 무친 나물을 듬뿍 집어 입에 넣으려다 말고 아차 싶어 월엽이를 쳐다보았다. 젓가락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나물을 집어든 것이 문득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월엽이는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자운영꽃을 따고 있었다. 그 다소곳하면서도 암팡진 모습이 어찌나 아리따운지 차득보는 그만 와락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길게 땋아 내린 머리끝에 달린 빨간 댕기가 풀섶에 달락말락하는 것이 꽃보다 더 고왔다. 그 빨간 댕기가 차득보의 마음을 더욱 휘감아들었다. 차득보는 설렁거리는 마음을 짓누르듯 나물을 입에다 몰아넣었다. 꼭 저 빨간 댕기의 임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스승 신세호의 엄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만 가슴에 찬바람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 흔허디 흔헌 꽃얼 멀라고 따고 그러요?"
차득보는 그 찬바람을 막아내려는 것처럼 월엽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땅에 묻히게 허기기 아깝고 짠헌게라. 다른 꽃덜언 안 그헌디......"
월엽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꽃을 따면서 대꾸했다.
"자운영이야 애초에 거름에나 씨일 팔자로 태였응게 벨 수 있간디요."
차득보는 이렇게 뚱하니 말하면서도 흔해빠진 꽃이 땅에 묻히는 것을 가엾어 하는 월엽이의 고운 마음을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월엽이는 더 말이 없었다. 차득보는 뒤늦게 자신이 말재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말을 오래 나누고 싶으면 상대방의 말이 풀려나오도록 말의 매듭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한 말은 그 반대로 월엽이의 말을 막아버린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밥을 한입 가득 떠 넣으며 차득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동생을 찾아 동냥질로 몇 년을 떠돌면서 남다르게 익힌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눈치가 빨라졌고, 비위가 두꺼워졌고, 말솜씨가 늘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 멍청하게 말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 다 월엽이 탓이었다. 월엽이 앞이라 너무 마음쓰다 보니 말이 엉뚱하게 나가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다른 말거리를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부산하게 밥을 먹어대며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댕기도 새것으로 사주고 싶었고, 빗도 사주고 싶었고, 거울도 사주고 싶었고, 분도 사주고 싶었다. 아니, 그런 것들보다도 제일 먼저 고무신을 사주고 싶었다. 월엽이의 발에서 어서 짚신을 벗겨버리고 그 야들야들하고 보들보들한 고무신을 신기고 싶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다.
차득보는 문득 공허 스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사람 노릇을 하고 살려면 글을 배우고 농사짓는 것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2년 동안 농사를 열성으로 했지만 돈 구경은 할 수가 없었다. 공허 스님이 2년에 쌀 두세 말 정도만 용돈으로 돌려주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면목 없는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차득보는 고개를 저었다. 신세호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글 값은 한 푼도 안내면서 그런 욕심을 부리는 것은 사람 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배운 공부는 너무 많아 돈으로 치자면 얼마를 선생님 앞에 바쳐야 할지 모를 판이었다.
"아이고, 잘 묵었다. 배 터지네."
차득보는 배를 쓸며 트림을 했다. 월엽이는 꽃따기를 멈추고 곧 돌아섰다. 왼손에는 빨간 꽃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월엽이의 얼굴에는 꽃처럼 밝은 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 꽃 머헐라요? 금세 시드는디......"
차득보는 뚜벅 말했다.
"음마, 담배 피우요?"
월엽이는 광주리 옆에 앉으려다 말고 눈이 동그렇게 커졌다.
"나도 인자 어런이단 말이오."
종이에 담배를 말고 있던 차득보는 월엽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고메......"
월엽이는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머시가 우습소. 이팔청춘 넘게 2년이 지냈으먼 외상없이 어런이제."
열여덟 살이니까 성인이 됐다는 것인데, 월엽이는 그 말이 영 억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자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근디, 아부지도 아시오?"
월엽이는 그릇을 챙기며 물었다.
"에이, 선상님 앞이서야 안 태우제라."
당치도 않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듯 차득보는 고개를 내저으며 시원스럽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월엽이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담배 피우는 것을 보자 차득보가 한결 더 실하고 듬직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근디 말이요, 월엽이라는 이름이 무신 뜻이라요?"
차득보는 월엽이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야...... 달 월에 잎 엽잔게요."
"글먼 달잎인디, 달에 무신 잎이 달렸다요? 이 그려, 계수나무 잎이다 그런 뜻이구만이라."
차득보는 자기 해석에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음마, 꿈보다 해몽이 좋으시오."
그 색다른 해석이 썩 그럴듯해 월엽이는 생긋 웃었다.
"아니 글먼, 나가 헛짚었소?"
차득보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어, 아부지가 말씸허시기로넌, 달빛에 젖은 나뭇잎이라등마요."
"그렇구만이라. 나가 원체로 무식해논께 선상님 짚은 뜻얼 알 수가 있간디요."
차득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닌디요. 계수나무 잎이란 뜻도 아조 존디요."
자기도 모르게 불쑥 나간 말이었다. 월엽이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려라?"
차득보는 금방 환해진 얼굴로 월엽이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월엽이는 그 뜨거운 눈길을 피해 서둘러 광주리를 이며 일어섰다. 차득보는 자욱한 아지랑이 속으로 멀어져 가는 월엽이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는 월엽이가 손 닿지 않는데 핀 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을 차득보는 또 곱씹고 있었다. 그러나,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도 있었다. 차득보는 다시 담배를 말며 뒷말이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열 번 아니라 백 번도 더 찍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며 담배 말기에 꽁꽁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차득보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게 빈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월엽이와 짝이 되자면 자기는 기울고 모자라는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먼저 집안의 지체부터가 맞지 않았다. 신씨와 차가는 금에 무쇠 비하기요, 비단에 무명 견주기였다. 그리고 자신은 부모도 형제도 없는 외톨이였다. 그렇다고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에 땅뙈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의 집 딸을 넘보면서 어느 것 하나 갖춘 것이 없었다.
차득보는 담배 연기를 한숨으로 내뿜었다. 그러나 그는 공허 스님을 생각했다. 화통한 공허 스님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공허 스님은 양반과 상것 가르는 것을 못 마땅해했고, 신세호 선생님은 공허 스님을 아주 대단하게 여겼던 것이다. 공허 스님은 주막을 찾아가 여동생 옥녀의 일을 해치우듯 속 시원하게 이 일도 풀어줄지 몰랐다. 주막을 찾아갔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속이 후련하고 통쾌하기만 했다. 몇 년 동안에 더 살이 찌고 개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주모는 득보고 옥녀고 그런 아이들 모른다고 몇 번이고 잡아뗐다.
"요런 사람 열두 번 잡을 년 보소. 요런 불지옥에 떨어질 못된 인종아, 밥 허고 술이나 고이 팔아묵고 살 일이제 부모없는 불쌍한 아그덜 꾀다가 팔아묵는 천하에 못된 짓얼 어디서 배와묵었냐. 그러고도 당자가 눈앞에 있는디 몰른다고 잡아띠요. 에라 이 잡것!"
그만 화가 난 공허는 주모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아이고메, 중놈이 사람 잡네에!"
주모는 있는 껏 소리를 질러댔다.
"온냥, 더 소리 질러라. 나넌 인종 못된 것돌 죽이기럴 예사로 허는 중놈이다. 니년도 죽여서 주막허고 항께 불 싸질를 챔이여. 안 뒤질라면 얼렁 말혀. 옥녀 어디다 팔아묵었어!"
공허는 주모의 머리채를 휘둘러댔다. 주모는 죽는 소리를 하고, 아침이 어중간해 손님은 하나도 없고, 부엌데기 여자는 어쩔 줄을 몰라 행주치마를 쥐어짜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그때 사립을 들어서던 개가 으르릉거렸다.
"워리, 워리. 물어라! 이놈 물어!"
주모가 개에게 손짓하며 외쳤다. 그러자 개는 우왕 괴성을 토하며 공허를 향해 뛰었다. 공허는 주모의 머리채를 놓고 잽싸게 피해 섰다.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오던 개가 그대로 지나쳐 갔다. 공허는 민첩하게 마루 밑에 쟁여 있는 장작개비 하나를 빼들었다. 그 사이에 개가 더 사납게 으르릉거리며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개가 공허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 공허가 장작개비를 휘둘렀다. 개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마당에 곤두박였다. 그리고 머리에서는 곧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주모는 마루의 기둥을 붙든 채 입이 헤벌어져 질려 있었다.
"니년도 저리 골통이 깨지고 잡겄제?"
공허는 장작개비를 들고 토방으로 올라서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니구만이라, 잘못혔구만이라. 다 말허겄구만이라, 잘못혔어라우."
주모는 떨면서 손바닥을 맞부볐다.
"잡소리 말고 얼렁 대기나 혀!"
"야아, 떠돌이 놀이패헌티 넘겠는디, 지끔은 어디 있는지 몰르는구만이라우."
"하, 요런 백여시가 앞막음 먼첨 허는 것 보소. 니년이 몰르면 누가 알어!"
공허는 눈을 부릅뜨며 곧 내려칠 듯이 장작개비를 치켜들었다.
"아니 참말이구만요, 참말이어라. 그 놀이패가 달에 한 분썩 지내간 게 쬐깨 여유럴 주시먼 꼭 알아내겄구만요."
주모는 연상 손을 싹싹 비볐다.
"옥녀 갸가 누군지 아냐? 내 조카여. 갸럴 안 찾아내면 니년이 죽어. 글고 나럴 피해 어디로 뜰 생각도 말어. 나넌 사방천지 골골이 발 안 닿는 디가 없응게. 그랬다가 잽히는 날에는 진짜배기로 오살육시 당헐 것잉게. 알겄어!"
공허는 갑자기 빽 소리 지르며 장작개비로 마루를 쳤다.
"야아,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우."
주모는 와들와들 떨었다.
"여그 국밥 두 그럭 내와."
공허는 장작개비를 마당으로 내던지며 말하고는,
"득보야, 이리 오니라. 밥 묵자."
그때까지 토방 한쪽에 불안하게 서 있는 차득보에게 손짓했다. 국밥을 다 먹고 난 공허는 돈을 냈다.
"아니 저어, 돈 그만두시시오."
주모가 당황해서 말했다.
"잔말 말어. 나넌 니년 심뽀가 아닝게. 옥녀나 후딱 찾아내."
공허는 또 주모를 쏘아보았다.
"야아, 그리 허겄구만이라우."
주모는 얼른 손바닥을 맞비볐다.
"인자 더 떠돌아 댕길 것이 없다. 동상언 꼭 찾게 될 것이고, 니도 나이 들고 혔응게 사람 값허고 살아얄 것 아니겄냐. 나가 시키는 대로 혀라."
주막을 나선 공허가 득보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월엽이네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동안 공허 스님은 옥녀의 소식을 두 차례 가지고 왔었다. 경상도 진주 근방에서 놀이패에 끼어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고, 그다음에는 전라도 어딘가로 소리 공부를 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공허 스님만 생각하면 그 고마움에 가슴이 저려왔다. 여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무서우면서도 정이 많은 공허 스님은 월엽이 일도 꼭 성사시켜 줄 것만 같았다.
한편, 신세호는 2년 형을 살고 출감하는 사위를 맞으려고 전주 걸음을 하고 있었다. 송중원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동료들과 함께 상해로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 안씨는 아들마저 중국 땅으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아 완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세호는 사위를 공허에게 부탁해 어느 산 깊은 절로 피신시키기로 했었다. 그러나 경찰의 손이 먼저 뻗치고 말았던 것이다. 신세호는 사위가 체포된 그날부터 지금껏 하루도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안사돈에게 죄지은 마음에 시달려야 했다. 피신을 더 서두르지 못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작 고생을 하고 있는 사위를 생각하면 그 죄지은 마음은 그만 바윗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면회를 다니면서도 제대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우환 중에서도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딸이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만약 딸을 낳았더라면 우환이 더 깊어질 뻔했던 것이다. 아들 손자를 본 안사돈은 웃음이라고는 없던 얼굴에 웃음일 피울 만큼 기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씨는 안씨대로 자기 잘못을 후회하며 애를 태웠을 뿐 바깥사돈 신세호를 탓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신세호가 면목 없어 할 때마다 안씨는 자기 잘못이 커지는 걸 느끼고는 했다. 자신이 하루만 일찍 서둘렀더라도 아들은 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설마 하며 집 가까운 친척 집에 둔 것이 큰 잘못이었다.
형무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신세호는 사람들 틈에서 기쁨보다는 비애감이 더 커지고 있었다. 만세 부른 것이 무슨 죄라고 그 당시에는 각 도에 있는 형무소마다 사람들이 넘쳐 잠을 앉아서 잘 지경이라고 했었다. 그동안 형기가 다른 사람들이 많이 풀려났을 텐데도 2년 옥살이를 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신세호는 사람들 사이에 아이를 업고 서 있는 딸 하엽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누구보다도 마음고생 몸 고생이 컸던 것은 하엽이었던 것이다.
"옥문이 열렸네에!"
"저그 사람덜이 나오는구마!"
이런 환성이 울림과 함께 사람들이 형무소 철문 앞으로 와르르 쏠려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 큼바구니를 송중원의 어머니 안씨가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그 뒤를 아이 업은 하엽이가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신세호의 아내 김씨는 외손자를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벌린 채 딸 하엽이의 뒤에 바짝 붙어서 있었다. 신세호는 몸 빠른 그 모습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세 여자가 이루고 있는 순서에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안사돈은 한시라도 빨리 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앞장서 가고 있었다. 딸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입장을 잊지 않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내는 혹시 외손자가 다쳐 딸의 처지가 옹색해질까 봐 애쓰고 있었다. 그건 참 묘한 조화였던 것이다. 신세호는 그 조화 속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신세호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도 어서 사위가 보고 싶기도 했고, 괜히 뒤처져 있다가 서로 찾느라고 분주해져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철문 앞에서는 벌써 반가움에 넘친 울음소리들과 함께 액막이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액막이질은 철문을 나선 사람이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철문을 나선 사람 입에 무작정 두부를 틀어넣듯이 하고는 그 머리 위에다가 소금을 세 번 뿌려댔다.
"거그 액땜질언 저 짝으로 나가서 허드라고. 어째 넘덜 못 나오게 앞덜 가로막고그려!"
"공자님 말씸이여. 문 앞 티워!"
이쪽저쪽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철문을 나오는 사람들에 비해 밖에 와글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한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 예닐곱씩은 되었던 것이다. 바깥사람들이 반나마 줄어들었을 즈음에 송중원의 모습이 철문 밖으로 드러났다.
"중원아, 아니, 아범아!"
문 앞에 바짝 붙다시피 하고 있었던 안씨가 아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씨는 아들을 <아범>으로 고쳐 부르고 있었다.
"예, 어무님......"
송중원은 핏기없이 핼쓱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빙장 어른, 아니 빙모님꺼정......"
장모까지 마중 나온 것을 알고 그는 놀라는 기색을 나타냈다.
"어너, 니 얼어 요것 묵어라."
안씨가 아들을 옆으로 끌며 큼직한 두부를 내밀었다.
"요것이 머신디요?"
송중원의 얼굴이 마뜩찮아졌다.
"다시넌 옥살이허지 말라고 액매기허는 거이다."
안씨가 두부를 더 가까이 디밀었다.
"그런 것 다 미신이구만요."
송중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다, 다덜 허는 대로 따르는 것이 존 일인 거이다."
신세호는 사위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신세호의 눈에는 말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장인의 눈짓말을 알아들은 송중원은 두부를 받아 들어 듬뿍 베물었다. 그때 안씨는 아들의 머리 위에다 가 넓게 소금을 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면서 안씨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입안엣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숙연하고도 간절했다.
"인자 니 아덜얼 봐야제. 쟈가 니 아덜 준혁이여."
안씨가 밝아진 얼굴로 그때까지 뒤물러나 있던 하엽이 쪽으로 아들을 끌었다.
"아, 예에...... 거 머......"
입가에 묻은 두부 부스러기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송중원은 어물어물했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쑥스러워했다. 하엽이도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자아, 어디 가서 요기보톰 허세."
신세호는 사위를 이끌었다. 젊은 날의 자신의 경험을 미루어 그는 사위의 쑥스러워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세호는 딸과 사위의 그 서먹서먹함에 얼핏 신경이 쓰였다. 아니, 어른들 앞이라서 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것이 옳은 예절이라고 가르치고 익혀왔으니까. 신세호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영 못 됐는디, 어디 아픈 디넌 없다냐?"
안씨가 핏기없는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불안한 기색이었다.
"예, 암디도 아픈 디 없구만요."
송중원은 어머니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고 짧게 대꾸하고는,
"만주서넌 무신 소식이 있는가요?"
그는 어머니의 다른 물음을 막듯 장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 송수익의 소식을 묻고 있었다.
"글씨...... 세세헌 것언 이따가 집이 가서 허기로 허고, 공허 스님이 그간에 두 행보 하셨는디 어디로 옮기셨는지 뵙지럴 못했다는 것이네."
신세호의 목소리는 낮고 우울했다.
"혹여 무신......"
말꼬리를 흐리는 송중원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드러났다.
"아니시, 그럴 일언 없을 것이네. 공허 스님 말로넌 부대가 다 이동혀서 아라사 땅 연해주로 일시 옮긴 것이라고 허데. 너무 걱정 안해도 될 것이네."
신세호는 사위를 쳐다보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예에...... 무사허셔야 될 것인디요."
송중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먼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신세호는 부친의 안부를 염려하고 있는 사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볕에 드러난 그 얼굴은 더 창백하고 파리해 보였다. 그런데도 2년 전보다 한결 달라진 느낌이었다. 남자답게 듬직해졌는가 하면 어른스럽게 든든해 보이기도 했다. 그전에 드러나 보였던 앳되고 나약한 듯한 감은 거의 가셔지고 없었다. 신세호는 그게 단순한 신체적 변화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갇혀서 보낸 세월 동안 마음이 더 실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위가 면회 때마다 은근히 말을 돌려가며 제 아버지의 안부를 묻곤 했던 것도 생각이 깊어지는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위는 갇혀 지내면서 무슨 생각인가를 많이 하고 있는 눈치였다. 제 아버지가 있는 만주 땅으로 신속하게 피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도 같았고, 감옥살이로 허송세월 하는 것을 분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았고, 앞으로의 일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네, 참말로 어디 아픈 디가 없능가? 어디 아픈 디가 있으면 말허소. 어여 치료보톰 혀야 된게. 맘에 뜻이 있을수록 몸이 천하인 법이시."
신세호는 아까 안사돈이 물었던 말을 사위에게 다시 물었다. 예로부터 옥살이 반년이면 반 골병이 들고 1년이면 온 골병이 든다고 했었다. 그런데 사위는 취조 과정에 고문까지 당한 몸으로 2년을 살아낸 것이었다.
"예, 배맨 고프고 암디도 아픈 디던 없구만요."
송중원은 어머니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분명하게 대답하며 고개까지 저었다.
"삭신 어디가 절리고 쑤시고 허는 디가 없단 말이여?"
신세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몸을 두루 더듬듯 해 보이며 재차 물었다.
"예, 아지랑이고 햇발에 눈만 시리제 삭신 아픈 디던 없구만요."
송중원은 장인에게 웃어 보였다.
"그려? 참 천만다행헌 일이시. 젊은 몸이라 그런가 어쩐가......"
신세호는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는 사위의 건강에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었다. 건강에 이상이 없으면 안사돈과 상의해 놓은 일을 곧 실행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사돈은 아들이 딴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일본으로 유학 보내기를 원하고 있었다.
신세호는 밥집을 골라 들어갔다. 이제 전주 시가지에도 일본인들의 나무신인 게다짝 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나 아범아, 인자 아덜 한 분 보듬어보도록 혀야제."
며느리한테서 손자를 받아안은 안씨가 행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무님언 차암......"
송중원은 겸연쩍게 웃었다.
"아범얼 많이 탁했다. 어여 보듬어봐."
안씨는 손자를 아들에게 안겨주었다.
"누구 탁했는지 잘 모르겄는디요."
아이를 어설프게 안은 송중원이 쑥스럽게 중얼거렸다.
"첨에넌 다 그런 법이여."
안씨의 얼굴에서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밝은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송중원은 아까와는 달리 눈 맑은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본시 젊은 아범 눈에넌 그리 뵈는 법이시. 안직 애기도 너무 에리고."
신세호의 아내 김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세호는 아내의 그 눈치보듯 하는 조심스러움에서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을 역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딸 가진 부모로서는 외손자가 사위를 많이 닮아야 마음이 편하지 딸을 많이 닮아서는 그것도 근심이었다. 자식이 외탁을 많이 했대서 시집살이가 매워지는 경우가 적잖았던 것이다. 사위야 어쨌거나 안사돈이 손자의 친탁을 믿는 것은 다행이라 싶었다. 꼭 딸의 시집살이를 생각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손자를 본 다음부터 안사돈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걷혔던 것이다. 남편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늘 어두웠던 안사돈의 마음에 손자가 등불이 된 것이 분명했다.
"저어, 감옥 안에도 만주서 독립군들이 일으킨 전쟁 이얘기가 떠돌았구만요."
점심을 마치고 밥집을 나서며 송중원이 신중하게 꺼낸 말이었다.
"으음, 그랬든가......"
신세호는 그때서야 왜 사위가 면회 때마다 제 아버지의 안부를 알고 싶어 했었는지를 깨달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만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감시 삼엄한 형무소 안에까지 뚫고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사위는 단순히 그런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갇혀 있었던 동안에 만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어서 알고자 하고 있었다. 마차 정거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신세호는 걸어가는 동안에 그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다.
"그려, 들어보소. 자네가 갇히게 된 담으로 그짝 사정이 어찌 됐능고 허니......"
신세호는 공허한테서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간추려서 해나갔다.
"...... 글먼 아부님도 연해주로 이동허신 것으로 봐야 허능가요?"
장인의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듣고 난 송중원의 물음이었다.
"그리 생각허는 것이 좋겄제. 공허 스님도 그리 생각허시데."
송중원은 가늘게 함숨을 내쉬며 더 말이 없었다. 그는 한동안 걷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됐으면 인자 그짝에넌 아무도 없고, 그 땅도 이놈덜 차지가 되야분 것인가요?"
송중원의 말에서는 만주며 독립군 왜놈들 같은 말들이 다 감추어지고 없었다.
"아니시, 그 쌈에 안 나슨 축덜언 서편 짝으로 안직 많이 있고, 금년에도 벌써 수십 차 강얼 넘나들고 있다는 소문이시. 그러고, 이놈덜도 그 땅얼 차지허지 못 허고 군대럴 도로 조선 땅으로 빼냈다는 것이네. 거 얼매라고 허등가...... 소부대럴 잔류시키고 말이시."
"아, 그리 됐구만요. 그러면 얼매든지 가망이 있는디요."
송중원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았다. 신세호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사위의 말이, 제 아버지가 다시 만주로 무사하게 돌아오게 되었나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만주로 갈 수 있게 되어 잘되었다는 것인지 모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세호는 사위가 만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직감했다. 그 직감과 함께 신세호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을 후회했다. 그건 사실 그대로였지만 사위가 그 말을 듣고 만주로 갈 생각을 더 굳힌다면 그거야말로 자신의 실언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사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자네 몸 아픈 디가 없다고 혔제. 얼매간 쉬었다가 곧 일본으로 뜨도록 허소."
신세호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마음이 급해 사위의 의사를 묻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다.
"예에? 일본으로 뜨다니요?"
송중원은 걸음을 멈출 만큼 놀랐다.
"놀랠 것 없네. 그전보톰 생각혀 왔든 유학얼 떠나라는 것잉게."
신세호의 어조는 태연하면서도 무게가 실려 있었다.
"집안 형편이 일본에 유학가기넌 에로운디요. 동상도 있고......"
"그런 걱정언 안 해도 되네. 나도 심얼 보탤 것잉게."
"아니, 무신 말씸이신가요?"
송중원은 놀라 목소리가 커졌다.
"나 겉은 가난뱅이가 무신 돈이 있냐 그것이제? 그만헌 돈이야 다 있제."
신세호는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구만요, 그리넌 못 허겄구만요. "
송중원은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장인은 살림이 가난한 것만이 아니었다. 양반 신분을 무릅쓰고 손수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도저히 그런 돈을 축낼 수는 없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넌 안 헌다는 그런 맘이겄제?"
"아니구만요, 그것이 아니고 저어, 그렁게 빙장 어런께서......"
송중원은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려, 나가 손수 농사럴 짓고 사는 형편이라 맘이 씨인다 그것이겄제? 그런 생각 말고 내 말 잘 듣게. 나가 어찌서 손수 농사럴 짓게 된지 아능가? 머심 한나 못 부릴 만치 가난해서가 아니시. 자네 춘부장 어런께서 저 짝으로 뜨신 후로 나넌 춘부장 어런맨치로 당당허니 나스지넌 못해도 혼자 편케 살아서넌 안 된다고 생각헌 것이네. 손수 농사짓소, 가장이 집을 비운 자네 집안얼 도와야 헌다고 맘 묵은 것이제. 자네가 내 사우가 안 되었어도 나넌 자네 학비에 돈얼 보탰을 것이여. 헌디 사우꺼정 됐시니 얼매나 자로딘 일인가. 자네 자당님허고넌 다 상의럴 끝낸 일인게 자네넌 그리 알고 새 맘으로 공주에 나스도록 허게. 알아듣겄능가?"
송중원은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장인이 고맙기도 했고,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까지 뜻이 합해진 일이라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세호는 할 말을 해버려 속이 후련했다. 다른 말이 없는 사위의 태도는 일본 유학을 수긍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위를 일본으로 보내는 것은 자신이 떠맡은 짐이었던 것이다.
"아니, 요것이 누구여? 중원이 아니라고?"
송중원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멋 부린 차림새의 젊은이를 얼핏 알아보지 못했다.
"나 재균이야, 김재균이."
젊은이가 자기의 가슴을 벌려 보이며 웃었다. 혈색 좋은 얼굴에 자신감인지 자만인지 모를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이, 재균이. 어쩐 일이여? 너무 변해서 어디 알아보겄다고?"
송중원이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상대방의 모습을 다시 훑어보았다.
"자네 그간에 어디 있었능가? 어디가 아픈 것이여?"
김재균이란 사내도 송중원의 모습을 훑고 있었다.
"어디 있기넌. 시방 형무소에서 풀려나오는 질이제."
송중원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쳐 갔다. 송중원은 김재균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불쾌했던 것이다.
"글먼 그때 일로 2년간이나 징역살이럴 했다는 것이여?"
김재균은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송중원은 그 무관심에 맥이 빠져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같이 학교를 다녔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시위에 참여했던 자가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자네 멀허나?"
송중원은 할 말이 마땅찮아 그저 형식적으로 물었다.
"이, 보통학교 선생질 허네."
김재균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에는 만족스러움과 거드름이 배나고 있었다.
"보통학교 선생?"
송중원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치올라갔다. 그는 놀라움과 함께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네도 될 것도 아닌 일로 헛고상허고 허송세월만 헌 것이여. 그놈에 만세 불러 달라진 것이 머시가 있능가. 애시당초 안될 일에 뎀비덜 말고 한시상 그작저작 사는 것이여. 자네도 인자 정신채리소."
김재균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사뭇 훈계조였다.
저런 죽일 놈이 있나?
송중원은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기가 막힌 심정이 분노를 눌렀다. 분노대로 하자면 그놈의 낯짝에 침을 내뱉어야 했다. 그러나 그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친일파였다. 아니, 바로 정보원이고 끄나풀이었다.
"알겄네, 나도 인자 나이가 들었응게. 저그 식구덜이 기둘링게, 또 만내세."
송중원은 여유롭게 웃었다.
"앞으로 멀헐랑가?"
"멀허기넌. 몸이나 보해야제."
송중원은 돌아서며 대꾸했다.
"사장(査丈) 어런께서 에로운 일 매듭 풀어주셨구만요. 참말로 고마워서......"
아들이 일본유학을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 너무 반가워 안씨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안씨는 그동안 사돈 신세호에게 그 일을 부탁해 놓고 줄곧 불안감에 사로잡혀 왔었다. 아들이 남편처럼 외곬으로 제 뜻을 꺾지 않으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예감 때문에 안씨는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먹었었다. 남편은 남편이라서 만류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만주로 떠나보냈었다. 의병대장으로 만주길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식들을 데리고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어머니 앞에 감히 꺼내지도 못할 말이었다. 남편은 그리 허망하고 안타깝게 보냈지만 아들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아들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로서의 뜻을 절대 굽히지 않으리라 했다. 그렇게 마음먹을수록 불안감은 자꾸 커져갔던 것이다. 안씨는 바깥사돈의 수고도 고마웠지만 말을 들어준 아들이 한결 더 고마웠다. 불안감이 일순간에 마음을 빠져나가면서 그만 눈물이 핑 돌았던 것이다.
"여그서넌 안직 내색얼 안 허시는 것이 어떨까 싶구마요."
아는 사람과 헤어져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위를 보며 신세호가 말했다.
"예, 그래야제요."
안씨가 빠르게 대꾸했다. 아이를 받쳐 업은 하엽이는 고개를 수그린 채 아무도 듣지 못하는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 또 몇 년이 걸릴 것인가...... 하엽이는 또 가슴에 시름이 쌓이고 있었다. 혼인을 한 뒤로 한 달을 제대로 함께 지내보지 못한 남편이었다. 학생이라서 한 달에 두어 번 다녀갔다. 그것도 대게 하룻밤을 자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 남편은 언제나 서먹서먹한 손님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서먹거림이 가시면서 남편이라는 정이 피어났다. 그러나 남편은 또 떠나버리고, 열흘이나 보름쯤 되어 다시 서먹서먹한 손님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남편은 방학 때에도 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공부를 보충한다고 전주에서 보내는 날이 더 길었다. 그러다가 잡혀가게 되었고, 아이가 들어선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또 일본으로 떠나고 말면...... 하엽이는 저 멀리 짙게 아롱거리는 아지랑이를 보고 있으면서도 가슴에서는 낙엽 지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에 안씨가 안사돈 김씨 옆에 다가서 뭐라고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김씨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주와 군산을 오가는 마차는 신작로를 달리고 있었다. 송중원은 마차가 덜컹거리고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에 저것덜 집이 더 늘었구만요."
송중원이 입을 열었다.
"어쩌겄능가......"
신세호의 대꾸에 한숨이 묻어났다. 송중원의 머릿속에는 김재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재균의 그 뻔뻔스러운 꼴과 장인의 맥없는 한숨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어쩌겄능가...... 하는 장인의 체념적인 대꾸는 김재균 같은 자들이 왜 생겨나는지를 알려주는 더없이 좋은 설명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여그꺼정 배달이 되는가요?"
"이, 되제."
"보는 사람이 많은가요?"
"어디 많기야 허겄능가."
송중원은 마차를 내릴 때까지 더는 말이 없었다. 송중원의 집에는 한약 달이는 냄새가 진하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 열댓 명이 송중원을 맞이했다. 신세호는 사위에게 중요한 말도 다 했고, 사돈네 친척들도 있고 해서 곧바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그는 잠깐 사위를 불렀다.
"나 한마디만 허고 가야겄네. 자네 저 약 댈리는 냄새 알제? 자네 몸 보허잔 것잉게 저 약 다 묵을 때꺼정언 딴 방 써야 허네. 그것이 효도허는 것잉게."
자네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한다는 말을 효도하는 것이라고 돌렸다. 그러고도 민망해 신세호는 얼른 몸을 돌렸다.
"...... 시어머니 뜻이 그렁게 서방이 머시라고 혀도 못 들은 칙끼 험서 박절허니 혀야제 맘 풀어져서넌 안된다, 잉!"
같은 시각에 김씨는 딸에게 이르고 있었다. 하엽이는 귓볼이 붉어진 채 고개만 수그리고 있었다.
4. 알 수 없는 소문
"저어, 그 소문이 어찌 된 것이다요?"
수국이가 밥상을 놓으며 물었다.
"무신 소문?"
양치성이 웃음 벙글거리는 얼굴로 수국이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는 수국이와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 있었다.
"아, 그 독립군돌 소문 말이오. 연해주로 피해 간 독립군덜이 아라사 군대헌티 총질 당혀서 수도 없이 죽고 잽히고 혔다는 소문도 못 들었소?"
수국이의 얼굴에는 화가 돋아나고 있었고, 그 얼굴만큼이나 목소리에도 빳빳하게 풀기가 서 있었다.
"이, 그 소문 들었제. 근디?"
양치성은 수국이의 눈치를 살폈다.
"참말로, 그 소문 듣고도 생각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리 묻소? 밤낮 나만 생각험서 산다는 말이 다 헛소리구만이라."
수국이는 맵게 쏘아대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넘 속도 몰르고 무신 억지소리여. 나도 넘덜 알게 표넌 못 내고 속으로 처남 걱정얼 태산겉이 허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여."
양치성은 뒤늦게 수국이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아차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잽싸게 덫을 건너뛰며 능청스럽게 도배질을 했다.
"참말이다요?"
수국이는 양치성을 쏘아보았다. 그 눈길에는 풀리지 않은 성깔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포동하게 살이 오르고 혈색이 좋은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왔다. 몇 달 동안의 편한 생활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남정네가 그런 일얼 맘속에 진득허니 담고 있어야제 초라니 방정으로 촐싹촐싹혀야 되겄어?"
양치성은 점잖게 말하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괴기넌 씹어야 맛이 나고 말언 해야 속을 안다는 말도 못 들었소. 속에 진득허니 담고 있을 말이 따로 있제."
수국이는 입을 삐쭉거리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얼굴에 화난 기색은 가셔져 있었다.
"처남이야 원체로 몸이 날래고 똑똑헝게 벨일 없을 것잉마."
양치성은 수국이를 바라보며 진정스럽게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이야말로 건성이었다. 그는 러시아 땅 자유시인 알렉세예프스크에서 러시아 적군(赤軍)이 독립군들을 공격해서 죽이고 생포하며 무장해제시킨 것을 더 없이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참으로 손 안 대고 코 푼격이었던 것이다.
"근디 저어, 거그서 무사허니 살아난 독립군덜이 만주 땅으로 피해 들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제라?"
"그런갑등마."
"장사허로 돌아댕김서 혹시 그런 사람덜 못 만내봤소?"
"이, 못 만냈는디. 그 사람덜이야 항시 넘덜 눈 피해 사는 사람덜인디 어찌 만내보겄어. 그전보담도 더 몸덜 숨킬 판인디."
동생 대근이를 찾고자 하는 수국이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양치성은 아예 그 생각을 단념시키려고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넌 헌디...... 그려도 그 사람덜이 또 독립군으로 싸우자면 우리 동포덜하고 어울러지덜 안컸소. 여그저그 산 짚은 동네로 돌아댕김서 우리 대근이 소식 잠 알아냈시오."
수국이는 양치성 쪽으로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고 목소리도 간절했다.
"이, 대근이? 나도 진작보톰 그리 생각허고 있었구만."
양치성은 우물거리던 밥을 삼키고는,
"근디 작년에 왜놈덜이 원체로 사람덜얼 무작시럽게 많이 죽여서 누가 또 독립군덜얼 수발헐라고 헐랑가 몰라?"
그는 슬쩍 자신이 피해 설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건 수국이의 기대를 한 풀 꺾는 것이기도 했다.
"수발얼 또 허고 안허고넌 나중 일이고 대근이만 먼첨 찾아내면 될 것 아니겄소. 찾아주기 싫으요?"
수국이의 기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무신 소리여? 처남이면 같은 성제간인디. 걱정허덜 말어. 나가 꼭 소식 알아내고 말팅게."
양치성은 수국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장담했다.
"갸가 한나뿐인 동상인디, 갸럴 못 만내면 나가 무신 낯으로 엄니럴......"
수국이는 울먹이며 목이 메고 있었다.
"알어, 알어. 나가 다 알아서 헐 것잉게 맘 푹 놓고 있어."
양치성은 수국이를 달래듯 정겨운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양치성은 겉으로 태연한 것과는 달리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소문이라는 것은 정말 바람보다 빠른지도 모른다 싶었다. 집에만 붙어 있는 수국이가 그 소문을 들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영사관이나 군부대에서는 그 소문이 자꾸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은밀한 상태에서 잠입해 오는 독립군들을 색출해 내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그 소문이 넓게 퍼질수록 조선사람들이 독립군들을 숨겨주고 도와주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 소문이 퍼지는 걸 막으면서 숨어드는 독립군을 색출해 내는 것이 새 임무였다. 그런데 수국이가 그 소문을 알고 있을 정도면 소문은 퍼질 대로 다 퍼진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소문이 막을 도리 없이 그렇게 퍼지고 있는 것은 아주 고약한 징조였다. 만주의 조선사람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직도 독립군들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독립군이란 것들이 어디론가 자꾸 숨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어째서 아라사 적군들이 조선독립군들을 공격하고 무장해제까지 시켰는가 하는 점이었다. 일본군과 아라사 적군은 서로 적이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을 했던 것은 그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적군은 조선독립군을 공격해 일본군이 할 일을 대신 해준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인지 영문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리고 있는 적군은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공언했던 것이고, 적군과 조선독립군은 한통속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 까닭을 상관에게 물어보았지만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내막이야 어찌 되었거나 간에 발등에 떨어진 불은 다시 잠입해 들어오고 있는 독립군들의 색출이었다. 청산리 일대에서 싸움이 붙었을 때처럼 영사관에서 그 일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럴 만도 했다. 독립군들을 일망타진해 버리려고 작년에 만주에 출병했던 그 많은 일본군들이 금년 1월에 보병 2개 대대만 잔류시키고 모두 조선 땅으로 철수했던 것이다. 북간도의 독립군들 거의가 연해주로 이동해 버린 형편에 일본군은 더 이상 만주 땅에 주둔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 측의 철군 요구로 두만강을 다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청산리 일대에서 빠져나간 독립군들이 귀신같이 빠르게 중국 땅을 벗어나 버린 이동 작전에 일본군이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과 함께 독립군들에게 두 번째 당한 셈이었다. 그런데 일본군들이 만주 땅에서 철수하게 되자 곧 문제가 발생했다. 서간도 일대에서 독립군들이 다시 활개를 치며 압록강을 건너 총질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군의 서간도 토벌에도 북간도 쪽으로 피하지 않고 산악지대에 분산되어 은신해 있다가 다시 일어난 부류들이었다. 그런 데다가 북간도에도 또 독립군들이 잠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력이 2개 대대뿐인 형편에 영사관으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들은 3천여 명이라고 했다. 그중에서 아라사 적군의 공격으로 2백70여 명 죽고, 9백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영사관의 파악이었다. 만주 땅으로 다시 숨어드는 자들을 천 명으로 잡더라고 그건 어마어마한 수였다. 넓고 넓은 만주 땅은 그들의 편이었다. 넓은 땅에 그들이 숨어들기는 쉬워도 이쪽에서 찾아내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만주 땅 곳곳에서 합류해 또 총을 들 것이었다. 그럼 일본군의 만주출병은 도로아미타불 아닌가. 하긴 어차피 만주출병은 실패한 작전으로 책임자 문책설이 은밀하게 떠돌았던 것이다. 불령선인들의 토벌에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 조선인들의 민심만 악화시켰다는 것이 상부의 평가라고 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잇따라 일어나서 양치성은 그만 밥맛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재빨리 바꾸었다. 상황이 나빠지는 건 어디까지나 영사관과 군부대일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래, 이 기회에 공을 세워 고향으로 돌아가자!
양치성은 숟가락을 힘있게 잡았다.
"근디, 저어......"
수국이는 양치성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거렸다.
"이, 무신 헐말이 또 있는감? 우리 새에 못헐 말이 머시여. 무신 말인지 얼렁 히보드라고."
눈치 빠른 양치성은 정이 넘치게 말했다. 또 대근이의 이야기라면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수국이의 마음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저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디......"
고개를 숙임막한 수국이는 눈을 올려 떠 양치성을 쳐다보며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수심이 어린 듯한 얼굴은 더 예쁘고 고혹스럽게 보였다.
"무신 부탁인디 그려. 멋이고 간에 다 들어줄팅게 어여 말이나 허랑게."
양치성은 가슴에서 이는 화끈한 바람에 휩쓸리며 나오는 대로 말을 쏟아냈다. 그는 또 저 아리따운 것을 품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참말로 다 들어줄라요?"
앉음새를 고치는 수국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가 언제 안 들어준 말 있었간디?"
양치성이 뽐내듯 웃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그동안 수국이는 그에게 부탁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가 수국이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사다 준 것은 환심을 사려고 제멋에 한 일이었다.
"저어, 우리 이사 갔으먼 좋겄소."
"이사? 어디로?"
양치성의 얼굴에 주춤 놀라는 기색이 드러났다.
"저어, 우리가 살았든 마실로."
"어디, 춘명향?"
"야아."
"안돼야!"
양치성이 날카롭게 내쏘았다. 그러나 양치성은 그 순간 후회했다. 그런 감정 노출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직무를 생각해서 그리된 것이지만, 자신의 본색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수국이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그건 잘못된 것이었다.
"그려, 그리 이사 가고 잡아허는 수국이 맘언 알겄는디, 그려도 그리 앞짜른 생각얼 허면 되간디. 저분에 봤디끼 그 동네넌 인자 사람 살 디가 아니여. 사람덜언 다 죽고 귀신만 드글드글헝게. 그러고 거그 살다가넌 우리 굶어 죽어. 물건을 어디서 대다가 장사럴 헐 것이냔 말이여. 나가 무신 수럴 써서라도 동상 소식얼 알아낼 것잉게 맘 푹 놓고 기둘리도록 혀."
양치성은 위로하듯 달래듯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말해 나갔다. 수국이는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 부탁이 꼭 받아들여 지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쪽으로 가면 장사를 못해 굶어 죽게 된다는 데야 다른 말은 더 하나마나였다.
"알겄구만요......"
수국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서운허니 생각덜 말어."
"......"
수국이의 눈에는 눈물이 번졌다. 흐린 눈앞에 어머니와 대근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동생이 무사하게 만주 땅으로 되돌아온다면 틀림없이 집으로 찾아올 것이었다. 동생을 다시 만나자면 옛집에서 기다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갈 수가 없었다.
"요분에도 한 닷새 있다가 올 것잉마."
양치성이 밥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수국이는 아무 대꾸 없이 밥상을 들고 일어섰다. 양치성은 성깔 돋은 눈초리로 수국이의 뒷모습을 치올려보았다. 자신의 출타에 줄곧 무관심한 수국이에게 양치성은 괘씸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그렇게 잘해 주는데도 수국이는 이상하게도 냉랭하기만 했다. 특히 잠자리에서 수국이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찬바람이 돌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잘못된 것만 같았다. 얼굴 예쁜 것에 비해 잠자리 재미는 너무 썰렁하고 싱거웠던 것이다. 얼굴 못났어도 잠자리 재미 좋은 여자하고는 살아도 인물 잘나고 잠자리 재미없는 여자하고는 못산다는 나이든 남자들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자신을 좋아하게 하려고 온갖 애를 다 써왔지만 아직까지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문단속 잘허고."
양치성은 집을 나서며 말했다.
"야아, 댕겨오시시오."
수국이가 한 인사였다.
양치성은 깜짝 놀랐다. 그건 수국이가 처음으로 한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짝 밝아졌던 양치성의 마음은 금방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건 자신에게 마음이 열리고 정을 느껴 하는 인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 동생 대근이 일을 잘 보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양치성이가 장사를 떠나버리자 수국이는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동안 낯을 익힌 주변 사람들은 새댁이 외로워서 어찌 사느냐고 입들을 모았다. 돈벌이도 좋지만 임의 품 안에서 자는 것만 하겠느냐고 했다. 젊은 내외 사는 맛은 호의호식이 아니라 한 이불 속에서 자는 것이라고도 했다. 세상에는 이런 재미 저런 재미가 많기도 하지만 잠자리 재미에는 당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수국이는 부끄럽고 창피스러울 뿐 도무지 그런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세상 사는 맛이고 재미이기는커녕 두려움이고 고통일 뿐이었다. 양치성과의 잠자리는 옛날 미선소집 아들에게 당한 것이나 영사관 지하실에서 형사에게 당한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양치성이는 강제로 덤비지 않고 살갑고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들을 겪으면서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다. 남자들은 그 일을 하면서도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전에는 처녀가 몸을 버리면 점이 박히듯 표가 나고, 남자들은 잠자리를 해보고 그걸 단박에 알아내는 줄 알았던 것이다. 남자들이 눈뜬 장님이라는 것이 다행하면서도 한편으로 어이없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나 아주머니들은 처녀들이 몸을 버리면 떡판 찍듯이 표가 나고, 남자들이 그걸 금방 알아내는 것처럼 겁을 주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장사를 나선 양치성은 대엿새 간격으로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을 쉬고는 또 나섰다. 며칠 만에 돌아온 양치성은 마치 배곯은 짐승 같았다. 하루밤에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괴롭히고 드는 것이었다. 양치성이가 장사를 떠나면 그 지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수국이는 두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아 동생을 찾을 수 있는 길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양치성에게만 의지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보아도 신통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수국이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혼자 속을 태우느니 어떤 새로운 소문이 없는지 귀동냥을 하는 게 나았던 것이다. 장텃거리 경상도 아주머니를 찾아가면 이런저런 소문을 얻어듣기가 쉬웠다.
"그 말이 옳소꼬망."
"앙이, 어떻게 알겠음둥."
"이겝꼬망."
고샅에서 서너 여자가 무슨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수국이는 그 여자들 옆을 지나가며 또 낯선 땅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서먹함과 외로움을 느꼈다. 그 함경도 말은 너무 귀설어 같은 조선사람이면서도 말하기가 쭈뼛거려지고 가깝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함경도 말은 말투나 말꼬리만 전라도 말하고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너무 많았다. <아무려면>하는 말이 <간대루>였고, <거짓말>이 <도삽>이었다. 그 사람들의 말을 이쪽에서 못 알아듣는 것만이 아니었다. 전라도 말을 그 쪽에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수국이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묘한 증상을 느끼고는 했다. 저 사람이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나 어쩌나, 내가 저 사람 말을 잘못 알아듣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과 함께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말은 자꾸 더듬거려지고 목소리는 커지고는 했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점이었다. 서간도에서 평안도 말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그 정도로 느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 상대가 없어지자 함경도 말이 그리고 귀설고 이상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 수가 없는 일은 북간도에 와서 전라도 사람들을 하나도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용정의 큰길이며 장터에 나다닐 때마다 유심히 귀를 기울여도 전라도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서간도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그래도 심심찮게 있었는데 북간도에는 어찌 된 것인지 이상하기만 했다. 그나마 양치성이가 없었더라면 낯설고 귀설음이 더 심해져 어찌 됐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양치성은 전라도 말을 영 마땅찮아 하는 것이었다.
"요놈에 말얼 고칠라고 허는디 영 안 된단 말이여. 머시고 맘 묵은 대로 다 되는디 어째 보들보들헌 셋바닥이 그리 말얼 안 듣는지 몰라. 요좀에 말 땀세 사람꺼정 촌시러와지고 추접시럽게 되는디. 어쨌그나 고쳐질 날이 있겄제."
양치성이 투덜거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텃거리에서 만난 것이 경상도 아주머니였다.
"사이소, 순대 사이소. 둘이 묵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리게 맛이 좋심더."
초라하게 좌판을 벌이고 있는 여자가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수국이는 그 경상도 말에 퍼뜩 귀가 띄었던 것이다. 서간도에서부터 귀에 익은 경상도 말은 평안도 말이나 함경도 말에 비하면 못 알아들을 말이 없었고, 또 한결 친근했던 것이다.
"아짐니, 경사도서 오셨구만이라?"
수국이는 반가움으로 좌판 앞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맞소, 거그넌 전라도 말씨 아닝교?"
경상도 여자가 눈치 빠르게 말을 받았다.
"야아, 지넌 전라도서 왔구만이라우."
수국이는 울음이 담긴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반가와라. 전라도 경상도야 이웃사춘 아닝교."
그래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골목을 벗어난 수국이는 영사관 쪽으로 뻗은 큰길을 건넜다. 수국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영사관은 멀리서도 쳐다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영사관이 얼핏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때 형사에게 당했던 일이 끈질기게도 꿈에 나타나고는 했다. 수국이는 용정이 싫었다. 용정은 어쩌면 그렇게 군산과 똑같은지 몰랐다. 군산에는 조선사람, 중국 사람, 일본사람이 묘하게 섞여 살았다. 그런데 주인 행세를 하는 건 일본사람이었다. 용정에도 세 나라 사람들이 사는 게 똑같았고, 일본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똑같았다. 수국이는 중국 땅인 용정마저 왜 그런 꼴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간도에 살 때부터 용정에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얼씬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수국이는 용정에 살면서 그 까닭을 깊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국 관헌들은 제쳐놓고 일본의 경찰이며 군인들이 그리 멋대로 활개를 치며 조선사람들을 닦달해대고 있으니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숨어들 틈이 없는 건 너무 당연했다.
수국이는 용정을 떠나고 싶었다. 서간도 통화, 송수익 선생님이 계시고 필녀가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낮에 일하고 밤이면 송수익 선생님한테 여러 가지 교설을 듣던 그때가 그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송수익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여자도 독립운동을 해야 된다는 마음을 다지게 되었고, 일본군 국경수비대의 장교 마누라들이 총 쏘는 훈련을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도 열이 올랐던가. 송수익 선생님 몰래 필녀와 자신에게 총쏘기를 가르쳐준 마음 넉넉한 삼출이 아저씨가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새댁, 우에 이리 걸음이 일찍나?"
경상도 아주머니가 수국이를 먼저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야아, 멀 잠 살라고......"
수국이는 어물거리며 엷게 웃었다.
"앉소. 와 이리 덥노."
여자는 팔을 저어 파리를 쫓았다.
"날이 이리 더와서 어쩔께라?"
수국이는 여자 옆에 앉으며 순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이 쪼매썩 삶아내니라고 봄 가을보담 심이 더 드는 기제."
여자는 낡은 머릿수건 아래 기미 낀 얼굴로 떫은 듯한 웃음을 지었다.
"여그 한 접시 주시게라."
"아이라, 우리 새에 인사 채릴 기 머 있나. 그리 안 해도 다 팔린다 아이가."
"아니구만이라. 나 순대 좋아허는 것 암스로도 그러요? 딴 디 가서 사 묵어도 좋겄소?"
"알게, 새댁 맘 내사 다 알제."
여자는 중얼거리며 칼을 들었다. 그 목소리에 물기가 젖은 듯싶었다.
"아짐니, 무신 새 소문 없등게라?"
수국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 새로 들은 기 있구마. 그러쩨라 하등가......, 그 사람덜이 서넛 잽히 왔다카능 기라.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 몰르니께네 그보톰 알아보는 것이 어쩔랑가 싶구마넌."
"그려라? 어쩌다가 서넛썩이나......"
수국이는 목소리가 커지려는 것을 얼른 눌렀다. 가슴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그기 어데 왜 순사덜 솜씨가. 중국 관리덜 손에 잽혔다는 소문인 기라. 그 사람덜이 속은 기지."
"원 시상에나!......"
수국이는 가슴이 내려앉는 절망을 느꼈다. 중국 관리들이 독립군을 잡아 넘겨주면 일본영사관에서 상금을 준다는 것은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소문이 떠돌았지만 수국이는 설마설마 했던 것이다.
"글먼 영사관서 상금 준다는 소문이 참말인갑소 이?"
"참말이 다 뭐꼬? 중국 관리덜이 돈벌이 헐라꼬 눈에 불얼 키고 싸댄다는 말 듣도 몬했는강."
"중국 관리덜이 참 무정하구만요."
수국이의 한숨이 먹구름처럼 짙었다.
"그것덜 사람도 아이라. 옛적에 조선 관리덜 썩은 것맨쿠로 중국 관리덜도 푹푹 썩어삐린 기라."
여자는 제 목소리에 놀라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수국이는 순대를 먹을 수가 없어서 종이에 싸가지고 일어났다.
"새댁, 너무 걱정 마소. 내 겉은 사람도 사는데 새댁이사 상팔자 아이라."
경상도 아주머니의 말을 등뒤로 들으며 수국이는 서글프게 웃었다. 그 아주머니가 보기로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자신이 상팔자일 수 있었다. 그 아주머니도 팔자는 어지간히 기구했다. 왜놈들한테 논밭을 다 빼앗기고 3년 전에 만주로 왔다가 남편이 병들어 죽었다고 했다. 남편이 죽자 중국이 소작도 떨어지고, 네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용정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수국이는 영사관으로 잡혀온 것이 동생일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동생은 돈에 눈먼 중국 관리들에게 잡힐 정도로 둔하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았다.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소문이 날 만큼 영리하게 공부를 잘했고, 기운이 세면서 무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괜히 송수익 선생님이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었을 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독립군을 잡아 오면 상금을 주기로 한 왜놈들은 흉악한 놈들이었다. 또 그렇다고 독립군들을 잡으려고 나서는 중국 관리 놈들도 고약하고 더러운 인종들이었다. 수국이는 문득 관리들만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돈욕심에 그 짓을 하고 나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제 손으로 독립군을 잡을 수 없는 중국 사람이 관리에게 밀고를 하고, 관리가 받은 돈에서 얼마를 얻어먹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중국 사람들도 믿을 수 없게 세상은 무섭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게 다 왜놈들이 꾸며내고 있는 수작이었다. 수국이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만주에 퍼져 있는 일본영사관들이 독립군을 잡아 넘겨주는 중국 관리들에게 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독립군 토벌에 실패하고 군대까지 철수시킨 그들은 중국 관리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 계획이 바로 이화제한(以華制韓)이었다. 중국의 힘으로 한국을 제재하자는 것이었다. 그전의 이한제한(以韓制韓)의 수법에다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었다. 조선인 친일파와 밀정들을 투입하여 독립투쟁 세력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이 이한제한이었다.
수국이는 버릇처럼 해란강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해란강에 가면 그래도 마음이 풀리곤 했던 것이다. 수국이는 용문교가 바라다보이는 강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저 멀리 모아산이 양쪽으로 야트막하면서도 길고 긴 산줄기를 거느리고 오똑하게 솟아 있었다. 그 형상이 모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모아산이었다. 모아산은 산 같지 않게 나지막했다. 꼭 고향 들판의 산처럼 조그마해서 정답다. 비암산도 그렇고, 용정 근방에는 높고 큰 산이 없었다. 그 대신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해란강 건너에서부터 저 멀리 모아산까지는 그대로 질펀한 들녘이었다. 그 들녘은 한창 자라난 나락으로 짙푸르러 있었다.
수국이는 있는 껏 숨을 들이켜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고향의 드넓은 들판이 환하면서도 아련하게 떠올랐다. 풋풋하고 알케하며 쌉싸름한 냄새도 풍겨왔다. 큰언니 작은언니 그리고 동무들...... 그리운 얼굴들도 떠올랐다. 아아, 가고 싶은 곳. 불현듯 눈물이 솟았다. 수국이는 입 안으로 입술을 맞물며 눈물을 삼켰다. 그러나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를 땅이었다. 어머니가 그리도 허망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셨고, 동생을 찾을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어떻게 동생을 만나게 된다고해도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아니었다. 수국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용정에 중국 사람들보다 조선사람들이 훨씬 더 많듯 눈앞에 펼쳐져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다 나락이 자라는 논이었다. 조선사람들은 만주 땅 그 어디든 발 닿는 데마다 논을 풀었고, 초가집이 눈에 띄기 전에 논을 보면 그 근방에 조선사람들의 마을이 있었다. 그 넓은 들녘에 벼들이 탐스럽게 자라도 그러나 그 논들은 조선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거의 다 중국 사람들의 땅이었고 조선사람들은 소작인이었다. 몇 안 되는 중국 지주들에게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매달려 살았다. 고향에서도 그랬듯 땅 넓은 곳은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몰랐다. 장사를 하고 사는 조선사람들은 중국 지주들이 내놓는 쌀을 사 먹어야 했다. 수국이는 들녘의 서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들녘은 그쪽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나아가고 있었다. 용정을 감싸고 있는 들녘이 용정들이었고, 서쪽으로 펼쳐진 것이 평강벌이었다. 평강벌 그 북쪽으로 올라가면 어머니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수국이는 눈길을 거둬 용문교를 바라보았다. 해란강을 가로지른 용문교를 따라 넓은 길이 들녘 가운데로 곧게 뚫려 있었다. 그 길은 모아산 중턱을 넘어 국자가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모아산 너머가 바로 국자가였고, 모아산이 양쪽으로 거느린 야트막한 산줄기는 용정과 국자가를 구분 짓는 담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면 걸어서라도 며칠이면 어머니 옆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수국이는 흘러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슴에서도 그 강물처럼 서러운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용문교 왼쪽으로 물줄기 하나가 해란강과 합해지고 있는 것이 바라다보였다. 명동촌을 거쳐 흘러내리는 육도하였다. 육도하가 해란강에 흘러드는 것처럼 수국이는 자신의 가슴에서 흐르는 서러움을 해란강에 띄워 보내고 있었다. 물 맑은 해란강은 평강벌과 용정들을 지나 두만강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엄니이...... 동상얼 살펴주시시오......"
수국이는 북쪽 먼 하늘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뇌고 있었다.
한편, 방대근은 일행 두 명과 함께 밀산에서 3백 리쯤 떨어진 의란 근처의 야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수척해 있었고 옷도 군복이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부랑자들의 모습이었다. 지난해 청산리 전투 때 군복과 군모에 총을 들었던 당당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저 사람 무슨 병 같은가?"
노병갑이 근심스런 얼굴로 속삭였다.
"굴씨, 설사에 열이 저리 나는디......"
방대근이 침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수록 심해지고 있잖은가."
"당연지사제, 약도 못쓰고 지대로 묵지도 못험서 날마도 걸어대니......"
"큰일인데. 어디로 의원을 찾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노병갑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대근은 나무그늘 아래서 정신을 잃은 듯 널브러져 거친 숨을 쉬고 있는 이유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의원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러시아 국경이 가까운 만주 땅에 조선의원이 있을 리 없었다. 중국의원이라도 찾아가자면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번화한 곳에 발글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곳은 영락없는 함정이었다. 중국 관헌들의 눈길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 그러니까 중국 관헌들은 왜병들과 똑같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리고 중국 민간인들도 그전처럼 믿어서는 안 된다. 그전에는 중국 사람들이 우리 독립군들을 많이 도와주었지만 왜놈들이 돈으로 이간책동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변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또한 명심해야 한다."
대원들을 소조로 분산시켜 출발을 앞두고 참모장이 강조했던 다짐이었다. 그래서 방대근은 밤에만 움직이기로 했다. 그건 안전을 지키기에도 좋았지만 대륙의 숨 막히는 무더위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행동의 불편함과 방향을 잘못 잡을 위험도 있었다. 러시아국경이 가까운 북쪽 만주 땅일수록 동포들의 마을이 드물었다. 낮에 산속에 숨어 쉬면서 중국인 마을을 보아두었다가 해가 질 무렵 밥때에 맞추어 찾아 들어가곤 했다. 저 멀리 산동성에서 돈벌이를 나선 떠돌이로 행세했다. 별로 잘하는 중국말은 아니었지만 거뜬하게 눈속임 귀속임을 할 수 있었다. 중국이 워낙 넓어서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러시아에 가까운 만주 끝과 산동성은 까마득하게 멀다는 것으로 통하지 않는 말은 덮어졌던 것이다.
"저러다가 큰일 당할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동포 부락을 찾아내면 맡기고 가는 게 어떨까?"
노병갑의 말이었다.
"글씨, 그리 될 수 있었으면 좋겄는디. 아무리 동포하고 혀도 누가 병자럴 맡을라고 헐랑가 몰라. 무신 병인지도 몰르는디......"
방대근의 말이 무거웠다.
"그렇기도 하지,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한테......"
노병갑은 시무룩하게 말하고는,
"이놈의 만주 땅은 사람 살 데가 못돼. 겨울에는 늑대도 얼어 죽게 춥고 여름에는 개도 더위를 먹게 덥고 말이야."
그는 이마의 땀을 뿌리며 짜증을 부렸다.
"허, 더운 것 타박허덜 말어. 이리 안 더우면 만주사람들 다 굶어 죽응게."
방대근이 피식 웃었다.
"굶어 죽어?"
무슨 소리냐는 듯 노병갑은 방대근을 빤히 쳐다보았다.
"겨울이 질고 여름이 짧은디, 거그다가 여름이 사람 살기 좋게 서늘서늘혀봐. 밭농사고 논농사고 되겄어? 여름이 짧아도 농사가 다 되는 것언 이리 숨 맥히게 푹푹 쪄대는 덕이제. 다 하늘이 알아서 부리는 조환게 그저 고맙습니다 허고 참아내는 것이여."
"참, 농사만 짓는 사람처럼 모르는 게 없네."
노병갑이 멋쩍게 웃었다.
"그려, 나가 에렸을 적보톰 우리 아부님이 허신 말씀이제. 나라가 요꼬라지가 안되았드람사 나넌 시방 농사꾼으로 땅얼 파묵고 살고 있겄제."
방대근의 얼굴이 무슨 생각엔가 잠겨 들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고향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들의 얼굴도 줄줄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콧등이 매워지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와 수국이 누나의 얼굴이 다른 형제들의 얼굴을 밀치고 앞으로 다가들었다. 어머니와 수국이 누나의 걱정이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경신참변의 소식은 혹한 속의 밀산을 더 춥게 만들었었다. 만주 땅에 가족이 있는 독립군들은 근심 걱정으로 풀이 죽고 기가 꺾였다. 그건 바로 독립군의 사기 저하였다. 그렇다고 독립군들이 다시 청산리 쪽을 진격할 수는 없었다. 일본군들은 중무장한 대병력으로 추격해 오고 있었고, 독립군들은 청산리 일대 전투에서 탄환을 많이 소모한 데다가 여름옷을 입은 채 월동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 천릿길 밀산으로 이동한 것도 일본군의 보복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탄환을 보충하고 월동준비를 하려는 것이었다.
"또 식구를 걱정이야?"
노병갑의 착잡한 어조였다.
"아니여, 그냥......"
방대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어. 누나가 눈치 빠르니까 별일 없이 무사할 거야."
"......"
고개를 떨군 방대근은 풀잎만 잡아 뜯고 있었다.
"그래, 걱정이 안 된다면 말이 아니지. 일단 동녕현까지 가서 집에 찾아가 보도록 해."
가족 걱정이 없는 노병갑은 너무 입에 발린 위로 같아 다시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그려, 그래여겄제."
방대근은 마음을 추스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목이 아프게 울음덩이를 삼키며.
"난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총재님을 이해할 수가 없어."
노병갑은 일부러 말머리를 돌렸다. 또한 총재 서일의 자결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마음속에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총재님얼?......"
방대근은 어리둥절하고 의아스런 얼굴로 노병갑을 쳐다보았다. 노병갑의 말이 갑작스럽기도 한데다가 그 말뜻이 얼핏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응, 총재님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자결하신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네."
자리를 고쳐앉는 노병갑의 얼굴이 진지했다.
"이해할 수가 없다면...... 총재님이 잘못허시기라도 혔다는 것이여?"
예사로 들어넘길 말이 아니라 싶어 방대근은 노병갑의 의중을 짚어내려 했다.
"그렇지. 자넨 그런 생각이 안 들던가?"
노병갑의 눈에 더 윤기가 돌았다.
"글씨...... 앞으로도 허실 일이 태산이고 헌디 그리 돌아가셔서 애석허고 한시럽다는 생각언 혔어도......"
"그래, 바로 그거란 말이네. 앞으로 해야 할 중대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일로 자결을 하시느냔 말이야. 병사들의 억울한 죽음에 책임을 통감하신다는 총재님 심정도 모르는 건 아니야. 허나, 마적들의 습격이 총재님의 잘못은 아니잖은가. 또, 죽어버린 몇십 명의 목숨이 중한가, 살아 있는 몇백 명의 목숨이 중한가. 그리고 또 있어. 총재님이 자결한다고 해서 죽어버린 병사들이 살아나느냔 말야. 난 모르겠어. 총재님 같으신 분이 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인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노병갑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어대고 있었다. 방대근은 새삼스럽게 노병갑을 바라보았다. 노병갑이가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자신은 서일 총재의 갑작스러운 자결에 놀라고 슬퍼하고 앞날을 걱정했을 뿐 노병갑처럼 여러모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총재님의 자결은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고, 또한 그런 결단이 높게 우러러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병갑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려, 나제 말도 일리는 있네. 허나 총재님도 얼매나 많이 생각허셨을 것잉가. 그런 것얼 다 못 생각허실 분이 아닌디, 우리가 그분 깊은 속얼 어찌 알겄어. 인자 그분 명복이나 빌어야제 그런 생각헌다고 그분이 환생허는 것이 아니덜 안혀."
방대근은 노병갑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다시 살아 돌아오실 리가 있나. 그분이 많이 생각하셨을 줄 알면서도 그 일만 생각하면 너무 속이 상해 그런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단 말일세."
노병갑이 쓸쓸한 빛으로 말했다. 러시아에서 다시 국경을 넘어온 북로군정서 일부는 밀산의 당벽진에 머물러 있었던 총재 서일의 부대와 합류했다. 자유시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무장해제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북로군정서는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마적떼가 습격을 해왔다. 그 기습으로 독립군 수십명이 생명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또 소동이 일어났다. 총재 서일이 마을 뒷산에서 자결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다수의 병사들을 무고하게 희생시킨 책임을 통감한다는 유서가 자결의 이유를 밝혀놓고 있었다. 서일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 기지로 삼으려 했던 밀산이라는 곳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의 완전한 해체를 의미했다.
청산리 일대의 전투에서 합동작전으로 큰 승리를 이룩해 낸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밀산으로 이동해서 통일된 조직체를 탄생시켰다. 더욱 효과적인 투쟁을 위한 그 조직체가 대한독립군단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의 탄생은 두 가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무정부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종교 중심적이거나 신분 중심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각 독립군 부대들이 그 한계를 극복한 점이었다. 둘째, 그동안 분산되었던 힘을 군사적 통일과 단합으로 투쟁을 보다 강력하게 확대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들이 자유시에서 참변을 당하고 무장해제까지 되면서 대한독립군단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군단의 총책임자인 총재 서일마저 자결하고 만 것이다. 그건 대한독립군단의 완전한 해체였다.
"해가 많이 기울었네. 해가 뭔지 더위도 많이 가시고."
노병갑은 나뭇잎들 사이로 서쪽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려, 한낮에만 덥제 벌써 아침저녁으로넌 선들선들 안혀. 담 달보톰언 추수가 시작될 것 아니여."
방대근도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기는 한가?"
"그러겄제. 아라사 쪽으로 가는 것언 아닝게."
"아라사 쪽으로 잘못 가는 사람들도 있을까?"
"글씨, 조럴 짤 적에 중국말얼 쬐깨라도 허는 사람덜얼 골라넣었는디, 어쩌다 그런 사람덜이 있을지도 몰르제."
"동녕현에 가면 그전처럼 부대를 잘 꾸미게 될까?"
"무신 소리여?"
방대근의 어조가 달라지며 노병갑을 쳐다보았다.
"만약 거기에 조선사람들이 왕청현이나 화룡현 같은 데처럼 많지 않으면 부대를 다시 일으키기가 곤란하지 않겠느냔 말야."
"이, 무신 소리라고. 그런 디보담언 동포들이 많지넌 않을 것이여. 그려도 동포들이 날로 달로 불어나고 있응게 벨 걱정언 안 해도 될 것이구만."
"동포들이 조선 땅에서 살기 힘들어 만두로 자꾸 건너오는 것은 안됐지만, 독립군을 위해서는 더 많이 와야 해."
"꼭 그런 것도 아니시. 너무 많이 오면 여그 만주서 동포들찌리 서로 살기가 에로와지고, 조선 땅이 빌수록 왜놈덜만 좋아지는 것잉게. 거르서 고상덜 험서 사는 것도 조선 땅얼 지키는 것이고 왜놈덜허고 싸우는 것이란 말이시."
"으음, 그게 그럴 수도 있겠는데. 왜놈들이 제놈들 백성들을 자꾸 조선 땅으로 이주시킬수록 우리 동포들이 밀리게 되는데, 그건 참 곤란한 문제로군."
"바로 그것이여. 그 심에 밀리먼 우리 조선언 영영 왜놈덜 땅 되야부는 것이제. 그렁게 거그서 버팀서 지키고 여그서 또 심 모아 싸우고 혀서 양수겸장얼 쳐야 허는 것이여."
"자네 말이 맞네. 이제 슬슬 움직여야 되지 않겠나?"
"그래야제. 해가 다 빠져가는디."
방대근이 주변을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추수철이라면 얼마나 좋겠어. 애써서 얻어먹을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따 먹고 캐 먹고 할 텐데 말야."
노병갑도 일어서며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리됐으면 더 좋을 것이 없제."
방대근이 중얼거리며 이유석에게로 다가갔다. 이유석은 그때까지도 맥이 다 풀려버린 몸으로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초췌한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이 동지, 이 동지, 인자 일어나야겄소. 떠야 할 시각이 다 되았소."
방대근은 이유석을 가만가만 흔들었다.
"아으...... 으응......"
이유석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감시를 피해야 하는 사람답게 그는 곧 눈을 떴다.
"곧 출발해야 하는데 좀 어떴소?"
노병갑이 이유석의 이마에 손을 대보며 물었다.
"무시기, 벌써 그리 됐음둥?"
이유석이 당황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의 고개와 어깨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도로 누워버렸다.
"자아, 그리 급허니 허지 말고 찬찬히 일어나도록 허시오."
방대근이 이유석의 머리와 한쪽 어깨를 받쳤다. 노병갑도 이유석의 등 밑으로 손을 넣었다.
"이리 짐이 돼서리...... 미안합꼬망, 미안합꼬망."
이유석은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며 쉰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안키넌 머시가 미안허다고 그러요. 그런 맘 쓰덜 말고 심얼 내시오."
방대근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유석의 병세가 어제보다도 더 심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노병갑과 눈길이 마주쳤다. 노병갑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아, 저것은 내가 다 들도록 하지."
노병갑이 풀섶을 헤쳤다. 그는 긴 나무토막 같은 것들을 집어 들었다. 그건 헌 천으로 둘둘 감싼 총이었다. 출발 때부터 모든 대원들은 그렇게 위장했고, 총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목적지까지 휴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만큼 값비싸고, 구하기 어렵고, 소중한 물건이었다.
"총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겨야 한다."
모든 부대장들이 부하들에게 시시때때로 강조하는 말이었다. 방대근도 부하들에게 그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총은 단순히 적을 무찌르는 무기만이 아니었다. 일본돈 50원에서 백 원까지 하는 그 물건은 만주에서 고생고생하며 살아가는 동포들의 피땀의 덩어리였다. 총값처럼 시세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없었다. 관의 눈을 피하는 뒷거래라서 암상들의 농간이 심했던 것이다. 50원이면 쌀이 열 가마가 넘었다. 만주의 동포들은 벼농사를 지으면서도 순 쌀밥을 1년에 몇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독립군들은 왜 총을 소중히 해야 하는지 그 속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방대근은 이유석을 부축하고, 노병갑은 총 세 자루를 들고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석양빛 속에 중국인 마을이 멀리 보였다. 그 마을에 가까워지면 어둠살도 퍼질 즈음이 될 것이었다. 그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풀벌레들이 연약한 소리를 내며 포르르 날아오르거나 튀어 달아났다. 방대근은 걸음을 옮길수록 걱정이 커져 가고 있었다. 이유석의 다리가 자꾸 휘청거리면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심하게 풍겨났고, 얼굴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래 가지고는 밤에 길 떠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이유석에서 맞추어 걸음도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어이 병갑이, 총 두 자루 날 주고 자네도 이 동지럴 부축해야 되겄네."
밥때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방대근은 앞서 걷고 있는 노병갑을 불렀다.
"왜, 이 동지가 심한가?"
노병갑이 서둘러 다가왔다.
"밥때가 지내불먼 안 된게."
총을 달라고 손을 내밀며 방대근은 말을 돌려서 했다. 아픈 사람이 마음의 부담까지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방대근의 말뜻을 알아차린 노병갑이 눈짓말을 하며 총 한 자루를 내밀었다.
"왜 이려. 한나 더 내."
"괜찮아. 어서 가세."
"안 괜찮은디. 병자 또 생기먼 안된 게 얼렁 내."
"또 키 작다고 그러는 거지."
"키만 작간디, 기운도 딸리제."
"자네보단 반 뼘밖에 안 작아."
"허! 반 뼘이면 몇치나 되는지 알어? 세 치에서 네 치여. 사람 한 치키 차이에 쌀 서너 말 들 기운이 왔다 갔다 헌다는 말도 못 들었어?"
"그래도 자네 머리통이나 내 머리통은 똑같다는 걸 모르나?"
"아니, 어찌서 머리통이여? 아내 짝 물건이 똑같다고 허제."
"그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으니까."
노병갑이는 키득 웃었다.
"그려어? 그러니 작은 몸띵이가 얼매나 심들겄어. 우아래로 그것덜이나 잘 달고 댕기도록 허고 총 얼렁 내."
"자네 입심에는 못 당해."
노병갑은 총 한 자루를 더 내밀었다. 그들은 이유석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을에 가까워졌을 때는 생각보다 어둑발이 진하게 퍼져 있었다.
"이보게, 어차피 총도 감춰야 하고 재빨리 움직여야 하니까 이 동지를 여기 두고 갔다 오는 것이 어떻겠나?"
노병갑이 내놓은 의견이었다.
"이, 그것도 존 생각이시."
"이 동지, 우리가 금방 먹을 것 얻어가지고 올 테니까 이 동지는 여기서 쉬면서 기다리시오."
이미 늘어져 누워 있는 이유석을 흔들며 노병갑이 말했다.
"무시기? 나만 두고 간단 말임둥? 아니됩메, 동지들 아니됩메."
놀란 이유식은 눈을 흡뜬 채 노병갑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 동지, 정신 채리시오. 이 동지럴 내불고 우리만 간다는 것이 아니고 이 동지넌 아픈 게 여그서 쉬고 있으먼 우리가 얼렁 가서 밥얼 얻어 오겄다 그 말이요. 이 동지넌 여그서 쉼서 총얼 지키고 있으시오. 총 세 자루 여그 있소, 여그."
방대근은 총 세 자루를 이유석의 팔에 안기듯 해주었다.
"알았소꼬망, 알았소꼬망......"
이유석은 총들을 꼭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방대근은 그런 이유석을 내려다보며 콧날이 시큰해졌다. 노병갑은 이유석의 이마를 짚어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중국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갈 때는 밀 총을 감추고는 했었다. 헝겊으로 싸서 위장을 했지만 완전한 눈속임을 하기엔 무리였던 것이다. 그들은 한 집에서 셋이 먹을 것을 다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소작인이 많은 중국 농부들도 가난하기는 동포들과 별고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저 한 집에서 만두 몇 개, 종이 두부 몇 장, 조밥 한 덩이 하는 식으로 모으는 게 빨랐다. 중국 사람들은 가난해도 인심은 후한 편이었다. 길손을 박대해서는 복 받지 못한다는 오랜 풍속 탓이었다. 그건 조선사람들이 나그네를 후하게 대하는 것이나 똑같은 미풍이었다. 그들은 네 집째에서 셋이 먹을 만큼 음식을 모았다. 의심받은 눈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만일을 몰라서 그들은 이유식이 있는 데까지 곧장 가지 않고 빙 돌아가면서 뒤를 살폈다.
"자네 중국말이 갈수록 느는데."
"또 농허잔 것이여?"
"농하려는 게 아니라 부러워서 하는 소리지. 그런 선견지명이 어디서 나왔나?"
"송수익 선생님의 혜안이시네."
"역시 그렇군. 말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이번에 단단히 느꼈네. 나도 바로 중국말을 배워야 되겠어."
"자네야 맘만 묵으면 쉽제. 귀가 열려서 에진간헌 말언 다 알아들응게."
"그게 쉽게 될까?"
"겁내덜 말어. 신흥무관학교꺼정 나오신 학식 든 분네가."
"아이고, 또 입심 나오네."
이유석은 물만 벌컥거릴 뿐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왜 이러시오, 이 동지. 입맛이 없어도 억지로 먹어야 되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노병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굶어 심 쓰는 장사 없고 배곯아 나슬 병 없다는 말도 못 들었소? 이 동지, 묵는 것이 약이고, 묵어야 기운 채래 걸을 수 있응게 꼭꼭 씹어서 넴기시오. 꼭꼭 씹으면 안 단 음식이 없고, 안 넘어갈 음식이 없는 법잉게."
방대근은 어머니에게 듣곤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며 만두를 이유식의 손에 쥐어주었다. 풀벌레들이 가늘고 고운 소리들로 울고,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낮의 더위와는 달리 밤바람이 서늘했다. 그들은 다시 북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유석 때문에 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이유석은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다리도 더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는 방대근과 노병갑은 팔에 얹혀오는 무게가 아까보다 한결 무거운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십여 리쯤 걸었을 즈음에 이유석의 몸이 축 처져 내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방대근과 노병갑은 당황해서 이유석을 붙들어 앉혔다.
"이 동지, 어디가 아프요?"
"왜 이러시오?"
방대근과 노병갑은 동시에 물었다. 이유석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토하기 시작했다. 노병갑이 이유석의 어깨를 붙들었고 방대근은 그의 등을 살살 두들겨주었다.
"억지로 먹어 체한 모양이네."
노병갑의 말에 방대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방대근은 불길한 생각에 잡혀 있었다. 병자가 음식을 넘기지 못하거나 넘긴 음식을 토해내면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힘겹게 토하기를 끝낸 이유석을 픽 쓰러지고 말았다. 방대근은 이유석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몸이 너무나 뜨거웠다.
"안 되겄네, 쉬게 혀야제."
"어디 쉴 만한 데를 찾아야 되지 않겠나? 여긴 들판인데."
"그래야제. 자아, 나헌티 업혀주소."
노병갑은 말없이 이유석을 끌어안아 일으켜 방대근의 등에 업혔다. 그들은 이유석을 번갈아 업어가며 이십 리 남짓 걸어 야산에 이르렀다. 그들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유석을 풀섶에 눕히고 노병갑과 방대근도 쓰러지듯 눕고 말았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방대근은 소스라쳐 잠이 깼다.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방대근은 이유석 쪽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이유석은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이유석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어이, 얼렁 일어나. 이 동지가 죽었네."
방대근의 목소리가 울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의 혁명군대인 적군(赤軍)에 소속괸 이광민은 말 못 할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가 조선의 독립군인가, 러시아의 적군인가. 이것이 이광민이가 풀지 못하고 있는 의문이고 고민이었다. 그 의문과 고민의 뿌리는 흑하 사변이라고 이름 붙여진 자유시 참변에 닿아 있었다. 자유시에서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 줄도 모르고 독립군들이 죽어가고 체포되는 것을 목격했었다. 그리고 적군에 소속되어 두 달쯤 지나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 흑하 사변은 두 가지 이유가 동시에 작용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첫째는 내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인 공산당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결이었다. 둘째는 외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혁명정부와 일본의 합의한 조선독립군의 무장해제였다. 청산리 일대에서 전쟁을 한 독립군들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 땅 이만으로 들어선 것이 3월이었다. 거기서 러시아 적군에 소속된 한인 부대의 안내를 받아 독립군들은 자유시로 이동했다. 독립군을 안내한 한인 부대는 사할린부대였다. 그런데 자유시에는 적군에 소속된 또 다른 한인 부대인 자유 대대가 있었다. 사할린부대와 자유 대대의 두 지휘관은 3천여 명을 헤아리는 독립군들을 놓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그 주도권 다툼은 단순한 지휘권 장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그에 비판적으로 맞서고 있는 이르쿠츠크파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할린부대는 상해파였고, 자유 대대는 이르쿠츠크파였다. 그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서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는 러시아인을 의장 겸 사령관으로 한 고려혁명군 정의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그 회는 이르쿠츠크파의 영향력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그 회에서는 코민테른의 결정을 앞세우며 사할린부대도 고려혁명군 정의회의 지휘 아래 들어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실제로 독립군들을 자기 영역에 두고 있는 사할린부대 지휘관은 그 명령을 거부해 버렸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할린부대 지휘관의 행위는 일방적인 것이었지 그가 독립군들의 지휘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독립군의 여러 부대장들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립군 부대장들은 사할린부대 지휘관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홍범도부대가 사할린부대를 떠나 자유 대대 쪽으로 갔다. 안무의 부대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 상황변화 속에서도 사할린부대 지휘관은 끝내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득을 포기한 고려혁명군 정의회 사령관은 병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적군 29연대와 자유 대대는 탱크와 기관총으로 사할린부대를 공격했다. 사할린부대와 그때까지 사할린부대에 남아 있던 독립군들은 소총뿐이었다. 화력에 밀린 사할린부대와 독립군들은 죽고 잡히고 하면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사건의 전모를 몰랐을 때는 이광민은 조선사람들끼리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파쟁에 분노하고 절망했었다. 그러나 사건의 내막을 다 알고 나서는 체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파쟁이 없었더라도 독립군들은 러시아 적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정보는 러시아 땅에 있는 항일세력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겠다고 일본과 합의를 한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방해군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들은, 다른 방해군인 영국이나 프랑스군들은 다 철수했는데도 혼자만 버티고 있었다. 오랜 혁명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소비에트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 없이 일본군을 몰아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군은 무엇이든 트집을 잡는 입장이었다. 러시아 땅의 조선독립군은 이본이 트집 잡기 좋은 대상이었고, 소비에트 정보로서는 그런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소비에트 정부는 파쟁에 휘말린 독립군의 일부를 체포해 수용소에 가두고, 나머지 독립군들을 적군 제5군단에 소속시켜 러시아 땅에서 조선독립군이란 실체를 말끔히 없앤 것이었다. 어차피 적군에 소속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광민은 체념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그걸 마음놓고 의논할 사람이 없이 이광민은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