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2-4
11. 어둠 저편의 새벽
"어이, 필녀 있는가,필녀!"
천수동의 아내 솜리댁이 다급하게 필녀를 찾으며 사립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에 비해 뒤뚱거리는 거북한 걸음걸이는 빠르지를 못했다. 솜리댁은 만삭이 된 배를 안고 있었다.
"아따, 이 대낮에 백두산 호랑이가 쫓으요, 왜놈덜이 들이대요? 뱃속에 애기 경기들겄소."
쪽마루에 걸터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필녀는 느긋하기만 했다.
"음마, 누가 애기헌티 젖 뽈리는 엄씨 아니라고 헐성불러 그리 태평시런 소리만 허고 앉았구만 이. 근디 호랭이보담 더 무선 사람덜이 찾아왔단 말시."
솜리댁의 말은 더 숨 가빠지고 있었다.
"호랭이보다도 더 무선 사람? 그 화상들이 누군디 그려."
"아이고, 안 있는가. 그 독립운동 헌다는……"
그때 두 남자가 사립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자 솜리댁은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그들은 상투 튼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필녀는 그들이 왜 찾아왔는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독립운동 허신다는 양반덜헌티 호랭이보담 더 무섭게봬서야 쓰것소?"
필녀가 대뜸 두 남자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필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도 말 내용과는 다르게 나긋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이고,그리 말허먼 어쩔라고……"
솜리댁이 당황하며 빠르게 수근거렸다.
"아니, 우리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니요?"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가 언짢은듯 어색한 듯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군자금을 안 낼려고 하니까 우리가 무서워지는 거 아니오."
얼굴이 좁장한 남자가 여러 말 말라는듯 역정 묻어나는 소리로 말했다.
"에이, 말씸얼 그리 막 허시먼 쓰간디라. 우리도 명색이 조선 사람인디 낼 돈언 다 내고 사느만요."
필녀는 아까보다 더 진하게 샐샐 웃고 있었다. 목소리도 묘하게 꼬여 돌아가고 있었다.
"낼 돈을 다냈다니, 어디다 냈다는 거요?"
수염 남 남자가 내질렀다.
"음마, 여거 첨 걸음 하시능게라? 글먼 잘 모르시겄응게 갤쳐 디려야겄네 이. 여그넌 부딘만 구역이라 우리넌 부민단에 돈얼 바침서 독립운동 잘허고 우리덜 잘 지켜도라고 허능구만이라."
"뭐라고? 누가 여길 부민단 구역이라고 정했단 말이오? 부민단에서 그럽니까?"
얼굴 좁은 남자가 눈을 치떴다.
"누가 아요? 여그 오고 첨보톰 부민단 믿고 돈 냈응게라."
필녀는 아이의 입에서 젖꼭지를 빼며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게 다 잘못된 것이오. 어디고 구역이 정해진 데가 따로 없으니까 독립군한테는 다 군자금을 내야 하는 거요."
좁은 얼굴의 완강한 말이었다.
"하이고, 누구넘 안 그러고 잡겄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꾸락 없는디, 사흘거리 찾어오는 독립군덜헌티 아 골고로 주고 잡제라. 근디 우리가 원체로 배터지게 묵고 사는 부자라 논게 고것이 그리 안 되느만이라. 지주헌티 뜯기제, 관리헌티 뜯기제, 마적헌티 뜯기제, 소작살이 신세 배터져 죽는 것 아시겄제라 잉."
필녀는 여전히 샐샐 웃고 있었다.
"여러 말 할것 없소. 그런 사정 다 보다가는 독립군들을 지탱할 수가 업소. 우리 독립군들이 없으면 당신네들이 어찌 되는지 알고 있지요?"
수염 난 남자의 말투는 다른 독립군 단체의 사람들이 하는 말과 너무나 흡사했다.
"하먼이라, 독립군들이 없어지먼 우리 신세야 쥔 없어진 수박밭이고 임자 없는 강아지덜 아니겄능감요."
"그러니까 어서 군자금을 내놓으란 말이오."
얼굴 좁은 남자가 답쳤다.
"돈을 내자도 우리 여자덜이 멀 알간 디라. 남정네덜이 있어야제."
"아, 꼭 돈만 내라는 게 아니오. 곡식도 좋고 포목도 좋소."
"아이고메, 누구 죽는 꼴 볼라고 그러시요?"
필녀는 겁먹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내둘렀다.
"남자들은 다 어디 갔소?"
"대낮에 어디 갔겄소, 묵고 살아보겄다고 논바닥 씨름이제."
"이거 참 속상해서."
수염 난 남자가 침을 내뱉었다.
"정 헐 말이 있으면 이따가 남정네덜 들을 적에 새로 와보시게라."
필녀는 한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른 동네 돌아 아따가 또 오겠소."
"하 이거 참, 못해 먹겠군."
두 남자가 사립을 나갔다.
"아이고, 자네 참말로 용허시. 어찌 그리 능청시럽게 웃어감서 그리도 사리 살짝 잘도 넘어간당가."
말 한마디 못하고 있던 솜리댁이 그때서야 탄복하며 필녀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요것이 어디 한 두 번 당허는일이간디라."
필녀는 시큰둥해했다.
"아니여, 자네 성질허고넌 영판 달릉게 허는 소리여."
"체, 선상님이 그리 좋게 대해서 보내라는디 어쩌겄소. 나가 그리허니라고 속이서 천불이 일어나요. 나 성질대로 허자면 소리소리 질러댐서 와득와득 쥐어뜯어 놓고 잡소."
"그래서야 쓰간디. 미우나 고우나 다 독립군덜인디. 그나저나 우리야 남정네덜찌리 만내먼 이얘기가 십케 풀리기나 헝게 살아지는디, 글안허고 그냥 농새만 지묵는 사람인덜 그리 이중삼중 볶게고 시달림서 어째 살아가는고."
"긍게로 사방서 못 살것다는 원성이 나날이 커지고, 독립군이 아니라 거 머시냐, 아이고 그 말 안 있소, 세금 이중삼중으로 뜯는 못된 관리 놈 덜 말이오, 그런 놈덜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 생기는 제라. 아이고, 이 무식헌 년이 그 예로운 문자를 알어야제."
필녀는 끝내 탐관오리라는 말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제 머리를 주어질렀다.
"근디 참 요상스런 일이여.어째서 딱 채럴 잡덜 못허고 니나 나나 독립군이랍시고 나댐서 그리 원성얼 사는지 몰르겄당게."
"이, 선상님 말씸이 그런 방책얼 세우고 있다고 그러시드만이라. 첨에넌 다 그런 것잉게 쬐깨 참고 젼디먼 그런 일이 안 생기게 맨든당만마요."
필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것이 송수익의 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녀는 자신 있게 말하면서 자기가 송수익 선생님과 가깝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먼, 그리 돼야제. 이리 시달려서야 못살 일이제."
솜리댁은 팽팽하게 부른 배를 쓸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기가 노요?"
필녀는 솜리댁의 배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인자 배가 뜨끔허니 발질얼 허고 그런당게."
솜리댁은 기미 낀 얼굴에 사르르 웃음을 피워냈다.
"그리 씨게 노는 것이 아덜인갑소."
"누가 알간디. 그리 나대다가 불거지는 지집애덜도 많은게."
"아니구만이라. 입덧 벨로 안 헌 것도 그렇고, 배가 많이 불른 것도 그렇고, 아덜이 영락없구만이라."
"글씨, 요리 험한 시상얼 삼스로 아덜이라고 머시가 졸 것이 있능가."
"음마, 아덜이 있다고 그런 배 불른 소리 허덜 마씨요. 나가 요놈에 가시네덜 낳고 시상 살 재미럴 잊어부렀소. 시상이 요리 험할수록 아덜얼 낳아야 허는디, 요놈에 가시네덜 아까운 젖 먹여 키워서 어디다 써묵겄소."
필녀는 업은 아이를 내둘렀다.
"아이고, 그런 말 마소. 다 알아듣네."
"젖도 안 떨어진 것이 알아듣기넌 머럴 알아들어라. 지 애비 탁해 둔허고 미런허기도 할 것인디."
"아서, 아서, 뱃속에서도 다 알아듣는다는 말 못 들었능가."
"그나저나 나넌 첨보톰 조갑진지 알아부렀구만이라."
"먼 소리여? 심신할매 현몽이라도 혔든 것이여?"
"아 딱 보먼 몰르요? 씨가 그 꼬라진지 딸 아니고 머시겄소."
"아이고, 큰일 날 소리 말어. 만희 아부지가 들으먼 난리날라고."
"헤, 당자 앞이서 골백번도 더했소.“
"근디도 암시랑 안 혀?"
솜리댁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쩔 것이오. 지 씨가 부실헌디."
필녀는발끈 화를 냈다.
"아이고메 시상에나! 좌우간 필녀 넌 시집 한 분 잘 간 지 알어. 딸만 대여섯 썩 줄줄이 낳게헌 남정네덜도 씨 타박했다허먼 난리판 굿이 나덜 안혀. 첫딸이야 살림 밑천잉게 씨 타박해 쌌지 말고 담에넌 아덜 날 생각이나 많이 허소."
필녀는 말이 길어지는 것이 싫어서 더 대꾸하지 않았다. 남편 배두성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언제나 짜증만 나는 것이었다. 필녀는 딸보다는 딸의 이름을 더 예뻐하고 아꼈다. 만희, 만주에서 낳은 계집아이. 송수익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어이, 자네 저 그 핵교있는 동네에 마적 떼 들었단 소문 들었능가?"
솜리댁이 말머리를 돌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야아, 그 동네야 마적 떼 들게 안 생겼소. 돈 있다는 냄새가 나는디."
필녀는 잠든 아이를 내려 눕혔다.
"그놈덜언 어찌 그리 냄새도 잘 맡능고? 숭헌 것덜."
"그 놈덜이야 관리할 애비란 말 못 들었소?"
"긍게 말이여. 요놈에 만주 땅언 참말로 빌어묵겄어. 도적 떼가 관리 할애비 노릇얼 허니 사람이 무서와 살 일이여."
솜리댁은 부르르 몸서리쳤다.
"그나저나 사람이 상허고 잽혀가고 혔당게 그 동네도 큰 일이제라."
학교 있는 그 동네란 신흥강습소가 있는 합니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새로 큰 동네가 이루어져 있었다.
"근디 잽혀간 사람덜언 일 당허는 것아니여?"
"무신 소리다요. 총 맞어 몸 상헌 사람이 더 큰일이제."
"어찌서 그려?"
솜리댁의 얼굴이 의아스러워졌다.
"잽혀간 사람덜이야 돈만 주면 놓여나제만 총 맞은 사람이야 앓다 죽을란 지도 몰르고, 살아나도 평상 빙신 될란 지도 몰르덜 않으요. 마적 떼야 돈 많이 뜯어낼라고 사람 잡어가는 놈덜잉게."
필녀는 송수익의 옆을 배돌리면서 귀동냥한 것을 제가 아는 일인 것처럼 풀어놓고 있었다.
"잉, 자네넌 아는 것도 많혀. 근디, 수국이넌 그 병이 다 잽혔드랑가?"
솜리댁은 배 아래를 눈짓했다.
"고것이 어디 손꾸락 까시에 찔린 것이다요. 징허게도 추운 이놈에 만주 삼동에 속이 얼어 생긴 골병인디."
"그나저나 그 병 앓는 여자덜이 너무 많은 게 큰일 아니라고. 그 병 심허니 오래 앓으면 애럴 못 낳는다든디."
"다 간수럴 부실허니 혀서 그리된 것 아니겄소. 수국이 그 가시네도 나 말 안 들어 그 꼬라지 되았소. 답답허다고 솜기 저구럴 안 찼으니 속곳 밑으로 찬바람이 얼매나 잘 들락기렸겄소. 냉병 걸리는 것이야 당연지사제라."
"아이고, 나넌 애 밴 몸이라고 상길이 나배가 얼매나 맴얼 쓰든지 소 기저구럴 곱절은 뚜껍게 히서 차니라고 참말로 답답허고 몰뚝잖해서 혼이 났구만그려."
솜리댁리 키득거리며 웃었다.
"음마, 수동이 아재도 영 쑹허요 이. 잘 되았소, 골려묵어야제."
필녀의 눈이 반짝 뜨였다.
"얼랴, 어랴, 누구 잡을라고 그려? 넘 이불 속 일인디."
당황한 솜리댁이 정색을 했다.
"하이고, 그리 겁남사 멀라고 말언 꺼냈소. 농인지 먼지도 몰르고."
필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흘겼다.
"워메, 가심이야!" "
솜리댁은 가슴을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사람이 농얼 참말맨치로 허고그려. 자네 성질에 그 말 불쑥 해불먼 판이 어찌 되겄어."
하며 고개를 내둘렀다.
"어찌되기넌 어찌 되겄소. 수동이 아재가 두고두고 우새 안 당허고 살라먼 저 우에 길림으로나 짐 싸들고 떠야제."
"아이고, 염병헌다!"
솜리댁이 필녀의 어깨를 철벅 쳤다.
"새끼 에린덕에 일 안 허고 이리 집이나 지키고 있응게 고향 생각만 절절허요."
필녀가 어깨를 부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려, 만주 땅이 봄도 없고 가을도 없이 살기가 에로운 게 더 그렇제. 사시장철 또렷허고 물 좋고 인심 좋은 땅 다 두고 요것이 무신 신세여."
솜리댁도 한숨을 지었다.
"참말로 이놈에 만주 땅언 사람 살디가 못돼요. 삼동언 징상시럽게 춥고 길제, 쌀 농새넌 허기 예롭제, 물언 떠 어찌 그리 못돼 묵었는지."
"그려, 물 나쁜 것이 질로 고약혀. 무신 놈에 물이보기넌 멀쩡헌디 끓이덜 않고 묵으면 꼭 탈이 나고 사람얼 잡냔 말이여."
"우리 조선 물이야 샘물얼 묵으나 도랑물얼 묵으나 아무 탈 없이 얼매나 시언허고 맛납디여."
필녀는 고향이 못내 그리운지 슬픈 기색으로 감감한 눈길을 멀리 보내고 있었다.
"고향 생각허먼 멀혀. 속만 씨리고 아프제. 사람덜이 갈수록 만주 땅으로 밀려드는디, 우리도 고향 땅 쉽게 찾아가기넌 글렀제."
그때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주저하는 몸짓으로 사립을 들어서고 있었다.
"저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필녀와 솜리댁은 눈길이 마주쳤다. 양복쟁이는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저어, 다름이 아니오라 자매님들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필녀와 솜리댁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공손하게 인사하며 한 말이었다.
"고것이 무신 소리랑게라?……"
필녀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솜리댁도 멀뚱하니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 예, 다른 말이 아니라 저는 야소교 목사올시다. 이번에 저쪽 동네에다 예배당을 새로 지었는데, 예수님을 믿으러 오시라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사십 객의 남자는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야소교라고라? 우리넌 타국서 들어온 것언 안 믿으요. 우리 배달국 한배님얼 믿제."
필녀는 거침없이 내쏘았다. 그동안 송수익을 통해서 배우고 익힌 것이 그대로 나가고 있었다.
"한배님? 아, 대종교 말씀인가요?"
남자는 당황하며 안색이 변했지만 애써 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그러요. 우리 동네넌 싹 다 대종교럴 믿으요."
필녀의 태도는 너무 당당했다.
"아,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한배님을 믿는 것은 산신령이나 터줏대감을 믿는 것과 똑같이 귀신을 믿는 것입니다. 귀신을 믿으면 마음이 악해지고 더러워집니다. 그래서는 천국에 못 갑니다. 하늘나라 천국에 가려면……"
"머시여, 귀신? 야소교가 서양 귀신 이제 어찌서 우리 한배님이 귀신이여!"
필녀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 기세가 이만저만 사납지 않았다.
"아니, 머, 머라고…… 서양 귀신……"
남자가 당황하며 얼굴이 구겨졌다.
"그려, 서양 귀신 믿어서 밥이 나오냐 죽이 나오냐. 우리넌 한배님얼 받들고 믿음서 나라 찾자는 거이다. 요것이 장허고 잘 허는 일이제. 머시가 맘이 악해지고 더러와지는 일이냐. 니가 여그서 다리 몽댕이가 뿐질러져야지 정신이 나겄어!"
필녀는 곧 남자의 콧구멍도 찌르고 눈도 찌를 것처럼 세차게 삿대질을 해대며 퍼부었다. 그리고는 치마 말기를 치켜올리며 빠르게 양쪽을 두리번거렸다. 필녀가 부엌 쪽으로 달려가 집어든 것을 절굿대였다.
"여런 넋 나간 조선놈아, 어디 뒤져봐라!"
필녀는소리치며 토방을 뛰어내리고 있었고, 그 남자는 벌써 사립을 벗어나 달아나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저 남정네가 우리 필녀헌티 단단허니 걸렸구마."
솜리댁이 부른 배를 받쳐 잡고 어쩔 줄을 모르고 웃어댔다.
"염병헐 좀이 붕알 떨어져라 하고 도망언 잘 가네."
필녀가 절굿대를 내던지며 숨을 씩씩거렸다.
"이, 방울 울리는 소리가 들링마."
솜리댁은 이 말을 해놓고 또 웃어댔다. 필녀가 한바탕 해대는 바람에 놀라 잠이 깬 아이가 울어대고 있었다.
"문딩이, 빽빽 처울기넌."
필녀는 혀를 차며 아이를 안았다.
"어이, 자네 성질대로 아조 잘 해뜨아 부렀네. 근디, 자네 어찌 그리 청산유수로 유식해져 부렀디야?"
"음마, 서당 개 3년이란 말도 못 들었소? 선상님이 그리 애쓰심서 갤치시는디 그만도 못함사 그것이 어디 사람이겄소."
필녀가 눈을 흘겨대는 바람에 솜리댁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자기가 송수익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것 같은 자격지심이 생겼던 것이다. 필녀는 자기가 야소교 목사를 그렇게 몰아친 것이 너무 가슴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송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받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솜리댁 혼자서가 아니라 서너 여자가 더 봤어야 했던것이다. 그래야 송 선생님의 귀에 빨리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송 선생님이 자신을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송수익은 작년 하반기부터 대종교도가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종교는 배달겨레의 시조인 단군을 섬기면서 나라 찾는 독립운동을 실천하고자 하는 종교였다. 1911년 10월 환인현에 남만주 최초의 시교당을 세운 대종교는 동포들을 상대로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송수익은 동포들을 결속시키는 효과적인 방안을 궁리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표방하는 어떤 단체만으로는 응집력이 약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종교와 만나게 되었다. 배달겨레의 나라를 되찾자는 대종교는 민족 종교로서 설득력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이라는 현실적 호소력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단체조직 고하 종교 조직의 이중 강화, 그것처럼 바람직한 것이 없었다. 송수익은 서슴없이 대종교인이 되었다. 필녀가 부민단 관할이 아닌 독립군을 돌려보낸 일이며, 야소교 목사를 혼비백산 달아나게 한 일이 며칠 동안 동네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우리 필녀가 할 만한 일을 했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송수익이 빙긋이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즈음 송수익은 농지문제로 속을 썩이고 있었다. 대지주 추가(鄒哥)와 농지의 경작권을 놓고 의견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 강가의 습지와 저지를 논으로 개간하면서 꼭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주인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주인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에는 잡초 우거진 땅은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자니 사람 사는 땅에 주인 없는 땅이란 쉽지 않았던것이다. 그렇다고 땅을 살 형편도 아니면서 굳이 주인을 찾아 나설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반신반의하면서 개간을 했던 것이다. 봉천 쪽에 20년 남짓 벼농사를 짓는 조선사람들 동네가 몇 있다고 해서 몇 사람을 보내 볍씨도 구하고 만주 논농사도 배워오게 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볍씨를 그냥 쓰자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기후가 달라 어쩔지 모르니까 반반씩 쓰기로 했던 것이다. 여자들까지 매달린 농사였지만 첫해 소출은 보잘 것이 없었다. 야토라 논으로 풀이 죽지 않았고, 뿌리 덜 뽑힌 잡초들이 기승을 부렸고, 기후 적응도 서툴렀던 것이다. 그러나 겨울날 쌀을 장만한 기쁨으로 모두가 덩실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금년 들어 땅 주인이 나타나고 말았다. 첫해는 그냥 넘겨주었으니 금년부터는 반타작 소작료를 내라는 것이었다. 송수익은 그에 정면으로 맞섰다. 폐지로 버려둔 땅을 농지로 만들었으니 절반은 우리에게 영구경작권을 주고, 나머지 절반은 5년 후부터 소작료를 물되, 소작료는 3할이다. 이 조건에 대한 지주 측의 응답은, 내 땅에서 떠나라는 것이었다. 참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는 똥배짱이었다. 지주 추가의 땅은 어찌나 넓은지 몇 개의 현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다시 조건을 제시했다. 영구경작권을 3할로 낮춘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 측에서는, 더 잔소리하면 무력으로 몰아내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엄포만이 아니었다. 추가의 힘이면 마적 떼 수백 명도 동원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반타작 소작료를 낼 수는 없었다. 송수익은 세 번째 조건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영구경작권을 없애고, 5년 후부터 소작료를 물되, 소작료는 3할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 조건은 폐지나 박토를 개간하는 경우 조선에서 적용하는 상례라는것을 밝혔다. 그 조건을 내걸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지주 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송수익은 그 조건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도 나날이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도 송수익은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만주 땅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동포들이 지주의 그런 강앞 앞에 꼼짝없이 굴복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송수익은 궁리 끝에 부민단 본부를 찾아가기로 했다. 부민단 관할 동포들만이라도 그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해 보자는 것이었다. 소작조건의 문제는 동포들의 생계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동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은 당연히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기도 했다. 중국 사람들은 만주의 조선사람들을 <메기>리고 불렀다. 한산코 물가를 찾아가 논을 일구기 때문에 붙인 별명이었다. 그런 별명을 붙여 놀리는 것은 중국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 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이 만주로 건너오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자기네들의 농토가 줄어들까 봐 갖게 된 적대감이었다. 그런데 조선사람들은 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물 가까운 습지나 저지를 찾아다니며 논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그러자 밭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는 중국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었다. 밭을 일구는 것에 비해 논을 일구는 것은 몇 갑절 더 힘이 들었다. 밭을 일구는 데는 나무뿌리나 풀뿌리를 캐내고 돌을 골라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논을 일구자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논둑을 쌓아야 하고, 물길을 터서 도랑을 내야 하고, 농로를 닦아야 했다. 조선사람들은 메기라는 놀림을 당해가며 피땀을 흘렸지만 결국 소작인으로 묶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지주들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농토를 늘리는 동시에 해마다 재산이 불어나 더욱 큰 부자가 될 횡재를 한 것이었다. 벌써 중국 지주들은 조선사람들이 더 많이 오기를 바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길림족 지주들은 조선사람들을 자기네 쪽으로 끌어가려고 나섰다는 풍문이 들리기도 했다. 송수익은 타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비감이 커질 뿐이었다. 중국 지주들이 조선사람들을 환영한다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동포들이 만주 땅에 안착하면서 그 기반으로 독립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기는 반면에 동포들 거의가 중국 지주들의 소작인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서글펐던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고개 너머 동네에서 두 남자가 송수익을 찾아왔다.
"선상님요, 즈이 동네에 밀정 놈이 들었심더."
한 남자가 가쁜 숨길과 함께 토해낸 말이었다.
"밀정이!"
송수익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야아, 약초럴 캔다 카는 늙은이하고 젊은 놈 둘이서 하로밤 묵어가자꼬 들지 안했능교. 그란데 젊은 놈이 한눈에 이상한 기라요. 눈째고 얼굴 생김이 산에서 산 사람이 아이다 싶드마요. 그래 슬쩍 몇 년이나 약초럴 캤나 물으니께네 칠팔 년 됐다 안 캅니꺼. 그기 시뻘건 거짓말이라요. 칠팔 년 됐다카몬 손이 우째 됐겄능교? 손에 못이 백이고, 손꾸락끝마동 트고, 손툽 밑에 때가 끼고, 손툽은 모지라지고 해야 안 되겄습니꺼. 그란데 그놈 손은 말짱헌 기라요."
"알겠소, 거의 틀림없소."
송수익은 단호한 어조였다. 지삼출이 불려오고,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김판술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확인되면 절대 표나지 않게 처치하시오."
송수익이 지삼출에게 지시했다.
"소문이 나지 않게 단단히 단속하시오."
송수익은 그 남자에게도 지시했다. 지삼출 일행 여섯 명이 가진 총은 세 자루였다. 아직 인원수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 총은 의병 시절의 화승총이 아니었다. 연해주 쪽에서 흘러들어온 서양 신식 총이었다. 그들이 총으로 무장한 것은 상대방이 총을 가진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총 이외에도 모두 칼을 차고 있었다. 지삼출은 네 명에게 집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김판술과 함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둘이는 닥치는 대로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네댓 차례씩 개머리판을 휘둘러대자 비명소리만 들릴 뿐 대항하는 낌새는 없었다. "묶으소!" 총을 겨누고 선 지삼출의 명령이었다. 김판술은 젊은이를 엎어 놓고 두 팔을 뒤로 묶기 시작했다. 지삼출은 쓰러져 있는 늙은이의 허리를 한 발로 밟고 있었다. 지삼출은 늙은이만 어둠 가득한 뒷산으로 끌고 갔다. 배두성이와 양승일이 늙은이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다.
"그려, 다 알어. 살기가 에로와 길잽이럴 했겄제. 거짓말 안 허고 실토허먼 당신언 살래 보낼 것이여. 하먼, 우리야 같은 동포고, 잠시 잠깐 맘 잘못 묶은 것이야 죄가 아닝게. 어쩌, 저놈이 왜놈덜 밀정이제?"
지삼출의 나긋나긋한 말이었다.
"아니오, 저것은 내 조카요"
"그려? 목얼 팍 따불 것이여. 여그 낭구 밑이 그대로 니놈 묏등 되는지나 알어!"
지삼출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리고 칼등으로 늙은이의 늘어진 목줄기를 득 긁어내렸다.
"아이고, 아이고, 맞소, 밀정이오, 밀정."
늙은이가 쏟아놓은 말이었다. "산 타고 댕김서 멀혔어?"
"폭도대들이 어디 있는지……"
"며칠이나 되았어?"
"엿새째……"
"많이 찾았어?"
"아니…… 두 군데……"
"어디로 알린 것이여?"
"아니오, 산만 타고 다녀서……"
"되았어. 풀어내려."
그들은 구덩이를 깊이 팠다. 시체 둘을 한 구덩이에다 던져넣었다.
"땅 야물게 다지고, 우에다 풀얼 떠다 심궈."
지삼출의 지시였다. 부민단은 동네마다 촌장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두 동네나 세동네를 단위로 무장 자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장대는 아무런 표가 나지 않았다. 낮에 총을 들고 다니는 법이 없었고, 옷도 농부복이었던 것이다. 겉보기로 동네들은 조선사람들이 모여 사는 농가일 뿐이었다. 그러나 장수들이든 행인이든 낯모르는 사람이 나타났다 하면 금세 포위를 당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독립운동가라고 하여 아무런 소개장도 없이 나타났다가는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갇히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부민단에서는 신의주 안동 봉천 통화 등지에 소개장을 발부하는 비밀조직을 두고 있었다. 그런 곳은 국밥집이기도 했고, 미곡상이기도 했고, 여관이기도 했다.
12. 하루살이
"토지조사사업도 일사천리로 끝나가고 있고, 의병이란 것도 씨가 말랐으니까 이제 조선 땅에 대일본제국의 태평세월이 시작된 것 아닙니까?"
하시모토는 노골적으로 아부하며 쓰지무라에게 두 손을 받쳐 술잔을 올렸다.
"글쎄에…… 꼭 그렇지도 않소. 토지조사사업이 농토는 거의 끝나가고 있지만 산이 많은 지역은 아직 멀었고. 그렇게 총칼로 엄히 다스리는데도 대항하고 덤비는 자들은 끝없이 생겨난단 말이오. 죽은 놈들은 죽었으니까 상관없지만 죄가 가벼워 감옥에 가둔 놈들이 너무 많아 감옥이 터져나갈 지경이니 그게 큰 골칫거리요. 헌데 골칫거리는 그것만이 아니오. 토지위원회에 접수된 분쟁 토지들은 또 얼마나 많소. 그게 다 뭐요. 조센징들의 질긴 근성을 나타내는 것이오. 우리가 총력전을 펴서 의병을 소탕하고, 조센징들이 잠잠하다고 해서 방심할 일이 절대 아니오. 조센징들이 당장 총칼이 무서워서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란 말이오. 의병 소탕으로 억센 놈들은 일단 제거하긴 했지만 또 언제 힘을 모아 덤빌지 모른단 말이오. 조센징들은 무식한 것에 비해 머리들이 좋고, 겉보기에 어리숙한 것 같아도 눈치가 빠르고, 오랜 세월 동안 부락마다 모여 살아 저희들끼리 잘 뭉쳐지고, 대대로 힘든 물 농사일들을 하고 살아 근성이 끈질기다는 걸 방심해선 안 된다 그 말이오."
쓰지무라는 하시모토 옆에 앉은 죽산면의 새 소장을 노려보듯 했다.
"옛, 명심하겠습니다."
새 주재소장은 앉음새를 똑바로 하며 고개를 절도있게 꺾었다. 하시모토는 긴장했다. 자신이 그저 비위를 맞추려고 한 말일 뿐이었는데 쓰지무라는 공박을 하듯 정색을 하고 말을 받았던 것이다. 그건 새 주재소장 앞에서 고급관리로서의 위신을 세우고 유식을 과시하려는 의도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쓰지무라의 남다른 분석력과 투시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동안 일본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른 조선사람들에 대해서, 그러나 막상 따져보려고 하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확실해지지 않고 막연하고 혼란해지기만 했었던 점을 쓰지무라는 군인들 줄 세우듯 확연하게 정리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쓰지무라는 관리로서의 헛밥을 먹은 것이 아니었고, 조선 땅에서 헛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탁견이십니다. 과장님한테는 언제나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하시모토는 예의 바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건 아부만이 아니었다. 쓰지무라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 혼란스럽기만 했던 머릿속이 정연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뭐 탁견일 건 없고, 그 정도로 알아두면 하시모토상도 앞으로 조센징들을 부리는 데 별 실수 없이 많은 이득을 보게 될 것이오."
겸손한 척하는 말과는 다르게 쓰지무라의 얼굴에는 자만이 끈적이고 있었다.
"참, 이번에 이쪽에서 말썽을 부려왔던 임…… 아니, 그놈 이름이 뭐더라…… 임 뭐라는 놈을 잡아넣지 않았습니까?"
"임병찬이란 놈 말이오?"
"예, 맞습니다. 국권 회복을 하겠다고 총독부에 종이쪽지나 올리고 하던 놈말입니다."
"그놈을 거문도로 유배시켜 버렸소. 물고기나 실컷 낚아 먹다가 죽으라고. 헌데 그놈이 한 짓이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는 잠꼬대 같은 것 같아도 그런 놈들이 조센징들 속에 얼마든지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단 말이오. 그런 놈들이 불씨로 산지사방에 박혀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오."
"예예, 그렇구말구요. 그런 놈들은 샅샅이 잡아들여 없애버려야지요."
하시모토는 맞장구를 쳤다.
"그런 놈들보다 몇 배 더 위험한 것이 바로 하시모토 상 집에 침입한 놈들이오. 그놈들이 도둑질한 거액의 돈이 어디에 쓰이겠소. 보나 마나 우리한테 대항하는 조직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것 아니겠소. 그놈들이 아주 악질인데 그것들을 아직까지 못 잡고 있다니……"
쓰지무라는 혀를 차며 얼굴을 구겼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고미야 소장이 그놈들을 틀림없이 잡아낼 겁니다."
하시모토는 옆에 앉은 주재소장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예,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그놈들을 잡아내 과장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꼭 보은토록 하겠습니다."
새 주재소장 고미야는 간장 종지만한 정종잔에 이마가 부딪칠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그건 나한테 보은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천황폐하께 보은하는 것이오. 대일본제국의 양양한 앞길을 반석 위에 탄탄히 닦기 위해선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능력 있는 관리들이 필요한 것이오. 앞으로 맘껏 능력 발휘를 해 보시오."
쓰지무라는 조금 남은 술을 홀짝 마시고 고미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하시모토의 나이 또래인 고미야는 황급히 두 무릎을 세우며 감지덕지 술잔을 받아들었다. 쓰지무라의 말은 얼핏 들으면 덕이 담긴 격려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을 뒤집으면 그건 그대로 날이 시퍼런 칼이었다. 전직 소장이 그렇듯 너도 얼뜨게 굴었다가는 가차 없이 치고 말겠다는 협박이었다. 하시모토는 느리게 술잔을 기울이며 그 말뜻을 새기고 있었다. 역시 쓰지무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묵지근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주재소장을 바꿔치기하는 데 쓰지무라는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전직 소장의 책임을 새 소장에게까지 연장시켜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었다.
"과장님은 역시 여복이 많으십니다. 나이도 어리고 예쁜 것이 꼭 아침 이슬을 머금고 금방 벌어질 것 같은 사쿠라 꽃망울 같습니다."
하시모토는 쓰지무라 옆에 붙어 앉아 고미야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 기생을 쳐다보며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허, 자네 말이 아주 그럴듯하군. 혹시 자네 맘에 드는 것 아닌가?"
쓰지무라가 불쑥 던진 말이었다. 그 느닷없이 날아든 화살에 하시모토는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젊다고 해도 그런 정도의 예절은 갖출 줄 압니다. 전 과장님을 모시지 않고는 이 집에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하시모토는 화살을 쳐내는 기분으로 태도를 분명하게 했다. 이런 경우에 잘못 어물거렸다가는 심장에 정통으로 맞기가 십상이었다. 늙은 수컷의 질시에 찬 그 화살에 맞게 되면 그건 치료 불가능의 치명상이었다. 아라사에서 군대 통역을 하며 그런 경우를 보았던 것이다.
"네에, 하시모토 상은 너무하세요. 과장님을 모실 때만 오시지 말고 다른 때에도 좀 놀러 오고 그러세요오."
술을 따르고 난 기생이 앉음새를 바로잡으며 교태 섞인 눈흘김을 보냈다.
"어허, 이런 못된 년이 젊은 나비를 꼬이네."
쓰지무라는 기생의 엉덩짝을 철썩 치며 흡족한 듯 껄껄거리고는,
"자넨 역시 상하좌우를 잘 알아서 맘에 든단 말이야. 자네같이 총명한 사람이 왜 관리 생활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는 기분 좋은 김에 말 인심을 후하게 쓰고 있었다. 제때에 한마디 한 기생의 말이 더없이 큰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다. 하시모토는 술을 마시는 척하며 앳된 기생을 훔쳐보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그 기특한 암컷을 발가벗겨 갖고 싶은 욕정이 휘돌고 있었다. 불현듯 일어나는 그 욕정은 앳된 기생이 발산하고 있는 야성적인 색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늙은 수컷에게 밀려야 하는 젊은 수컷의 오기가 발동하고 있었다. 어디 두고 보자. 하시모토는 왼손으로 사타구니를 훔치며 작은 술잔을 뒤집었다.
"과장님께서는 조선 여자들을 싫어하십니까? 잘생긴 것들은 아주 기막히게 생겼든데요."
하시모토는 빙긋 웃으며 농담을 걸었다. 그는 끝내 손아귀에 넣지 못한 수국이를 또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 여자? 응, 더러 예쁜 것들도 있긴 있지. 헌데, 조선년들한테서는 냄새가 나서 틀렸어. 마늘 냄새, 김치 냄새, 그것 고약하거든. 또 그것만이 아니야. 말이 안 통하는 건, 잠자리에서 하는 말이야 몸으로 하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년들은 도무지 맛이 없어. 잠자리에서 어찌 그리들 뻣뻣하게 산 송장이냔 말이야. 좋은지 싫은지 무슨 표가 나야 말이지. 평소에 얌전한 건 좋지만 잠자리에서까지 얌전하니 그게 무슨 맛이야. 유교라는 게 여자들 다 병신 만들어놨다니까."
쓰지무라는 정말 입맛 없다는 듯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여자들이 그런 것하고 유교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시모토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어허, 하시모토 상은 조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먼. 조선에서 유교는 저 위에 임금으로부터 저 아래 상놈들까지 떠받드는 신주단지 아닌가. 그 유교라는 게 특히 따지는 게 위신이고 체통에다 예의범절 아닌가. 그 까다로운 예의범절을 평소에 지키는 건 좋은데, 그게 지나쳐서 잠자리에서까지 지키도록 되어 있단 말일세. 무슨 말인고 하니, 양반들이 잠자리에서 그 짓을 하는데 옷을 다 벗고 발가숭이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이네. 그러면 옷을 안 벗고 그 짓을 어떻게 하느냐. 남자야 바지를 벗어야 하고, 여자는 위아래 속옷을 그대로 입는데, 여자들의 속곳이라는 게 그게 아주 묘하게 생겨 먹었거든. 자네 봤는지 모르겠는데 말야. 옷감이 위아래로 겹쳐져 밑이 길게 터져 있어서 걸음을 걸을 때는 속살이 드러나지 않게 착 감싸이고, 오줌을 누려고 앉거나 누워서 두 다리를 벌리면 그 아랫것들이 훤하게 드러난단 말일세. 우리한테는 없는 아주 편하게 생겨 먹은 옷인데, 그런 옷을 생각해 낸 조선 것들이 제법이라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 편리한 속곳이라는 건 입고 있어도 그 짓을 하는 덴 아무 지장이 없게 되 있어. 헌데 옷을 왜 다 안 벗느냐! 양반 체통에 발가숭이가 되는 건 짐승처럼 상스러운 거니까 부부끼리도 예절을 지켜야 한다 그거지. 아, 형편이 그 지경이니 여자가 기분 좋다고 해서 코피리를 불 수가 있겠나 엉덩이춤을 출 수가 있겠나. 양반의 체통을 지키자면 그저 뻣뻣하게 누워서 참아내는 도리밖에 없잖은가. 그런 양반들의 행태는 본 받아야 할 모범으로 아래 상것들에게도 퍼진 거야. 그리고 엄한 규율이 생기게 됐지. 그게 뭐냐 하면, 여자는 얌전하고 정숙해야하고, 얌전하고 정숙한 여자는 그 짓을 하면서도 야한 소리를 내거나 천한 몸놀림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기생들까지도 밥맛없이 산송장 노릇을 하는 거란 말일세."
쓰지무라는 내 식견이 어떠냐는 듯 두 손가락으로 콧수염 끝을 밀어 올리며 허음허음 헛기침을 해댔다.
"아이 참, 조선 여자들은 불쌍하네요. 참을 게 따로 있지 그런 걸 어떻게 참아요."
앳된 기생이 냉큼 말했다.
"하! 요런 맹랑한 것.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네."
쓰지무라는 기생이 귀여워죽겠다는 듯 볼을 꼬집는 시늉을 했고, 앳된 기생은 부끄러운 척하며 쓰지무라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게 그 정도로 심한가요? 그럼 여자들은 그렇다 치고, 남자들은 무슨 재미로 그 짓을 하는 겁니까? 조선 양반이라는 것들 체통 좋아하고 예절 좋아하다가 진짜 사는 맛을 다 놓치고 헛살아가는 미련한 바보들이로군요."
하시모토는 어이없어했다.
"이 사람아, 모르는 소리 말게. 머리 잘 돌아가는 양반이란 것들이 그 기막힌 맛을 그런 식으로 놓치고 평생을 살 리가 있나.다 제 놈들 재미 볼 방도는 만들어놓고 있다네. 거 양반이란 양반은 줄줄이 첩질을 하지 않던가? 그걸 왜 하는지 아나? 상것인 첩하고는 체통을 안 지켜도 되니까 그때는 발가벗고 맘껏 그 짓을 하면서 재미를 본다 그 말이야. 첩이야 상것이니까 무슨 짓이든다 시켜도 되거든."
"허! 그럼 재미는 첩이다 보고 본부인은 뭡니까?"
"본부인은 점잖게 양반 체통 지키면서 애들이나 낳아라 그거 아닌가."
쓰지무라는 큭큭거리고 웃었다.
"양반이란 놈들, 영 겉 다르고 속 다른 놈들이로군요."
하시모토는 술기운 도는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제대로 보는군. 그게 조선 양반들이니까 자네도 앞으로 조심해. 점잖다고 믿어서는 안 되고 예절 바르다고 방심해선 안 된단 말일세.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딴맘을 먹고 있으니까. 아주 다루기 고약하고 힘들 종자들이니까 미리미리 경계하란 말일세."
쓰지무라는 하시모토와 새 주재소장을 번갈아 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혹시 백 면장 소식 들으셨습니까?"
하시모토는 말머리를 슬쩍 돌려잡으며 쓰지무라에게 술잔을 권했다.
"오라, 백 면장이 얼마 전에 두 번째로 첩을 얻었다고 하더군. 이번에는 나이가 더 어려 열세 살이라던가 어쩌던가. 그 사람은 양반도 아니면서 양반 흉내를 곧잘 내고 산다니까. 허허허허……"
쓰지무라는 이야기를 바꾸려는 하시모토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아까 이야기에 취해 엉뚱한 말을 지껄이며 기분 좋아 하고 있었다.
"헌데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면장 자리에 안장서 떵떵거리는 것은 순전히 과장님 덕이 아닙니까?"
하시모토는 의미 깊은 눈길로 쓰지무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야 말하나 마나 아닌가. 왜, 그자가 날 욕이라도 하던가?"
쓰지무라의 눈에서는 마침내 불빛이 일어났다.
"욕이라도 하면 차라리 저라도 나서서 혼쭐을 내거나 목을 비틀기가 쉬울 것 아닙니까. 이건 부자지간에 묘하게 과장님 체면에 똥칠을 하고, 과장님을 욕 먹이고 있으니 탈이지요."
"뭐, 부자지간에 내 체면에 똥칠을 해! 그런 배은망덕한 놈들이 있나.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 보게."
쓰지무라는 벌컥 화를 내며 그때까지 허벅지 깊숙이를 주물러대고 있던 기생을 뿌리쳤다.
"이거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쩔지 원. 꼭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하시모토는 쓰지무라가 걸려 드는 것에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살짝 말꼬리를 사렸다.
"이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체면에 똥칠을 하고 나를 욕 먹이고 있는 놈들 이야길 나한테 하는 건데 그게 무슨 고자질이야. 어서 말해! 이건 명령이야."
쓰지무라는 술상을 내리쳤다. 하시모토는 마침내 쓰지무라가 완전히 걸려든 것에 만족과 쾌감을 느꼈다.
"예, 그럼 명령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백 면장은 근자에 들어서 면민들의 원성을 크게 사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외눈깔이 되어 헌병대들 쫓겨난 아들놈이 할 일이 없어지니까 미곡도매상을 시켰습니다. 헌데, 백 면장은 자기 권세를 앞세워 면민들의 쌀을 전부 자기 아들에게 넘기라고 강압하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쌀을 처분할 집을 찾아다니며 쌀을 강제로 뺏듯이 행패를 부리고요. 그 짓만 하면 그거야 저희들 조센징끼리 다투는 거니까 별 상관이 없습니다만……"
"안돼, 그것도 안 돼! 면장 놈이 그따위 짓을 해서 원성을 사는 건 총독부를 욕 먹이는 짓이고, 대일본제국의 기강을 흔드는 짓이야."
쓰지무라는 냅다 고함을 지르며 술잔으로 상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술 방울들이 사방으로 튕겨 올랐다. 옳지, 그래야지. 그래야 좋고말고. 하시모토는 생각보다 훨씬 더 효과가 나고 있는 것에 신바람이 나고 있었다.
"예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헌데, 백 면장은 항의를 하는 부자 양반들에게 과장님의 이름을 팔아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잔소리들 마라, 나는 곧 군수가 될 것이다.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내가 군수 된 다음에 당신들은 정말 좋지 않을 것이다. 군산부청 쓰지무라 과장님이 나하고 어떤 사이인지 아느냐. 김제 군수는 다 내략이 되어있다. 백 면장의 이런 협박 앞에서 양반들도 꼼짝을 못하고……"
"저, 저런 죽일 놈이 있나!"
쓰지무라는 더 화를 내뿜으며 또 술상을 내리쳤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화가 머리꼭지까지 치받쳐 오르다 못해 완전히 폭발해 버릴 때까지 밀어붙여야 된다고 작정했다. 화가 완전히 폭발해서 백종두의 목을 단칼에 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헌데 백 면장만 과장님 존함을 더럽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눈깔인 그 아들놈은 병신 주제꼴에 일본 상인들에게나 누구에게나 과장님 존함을 팔아 제놈 장사에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일본 상인에게 돈을 미리 받고 쌀을 넘겨주지 않는 거짓말을 해서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가지 않았습니까.헌데, 일본 상인이 돈을 미리 준 것은 그놈이 과장님 양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그랬다는 것 아닙니까."
"뭐라고, 그런 쳐죽일 놈이 있나! 그놈을 당장 끌어와, 당장!"
쓰지무라는 목소리가 파이도록 소리를 지르며 새 주재소장을 향해 팔을 뻗쳤다. 그런 그의 눈은 술기운과 함께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손가락질을 당한 새 주재소장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쓰지무라의 화가 마침내 폭발했음을 느꼈다. 이제 뽑은 칼을 내려치게만 하면 목적 달성을 하는 것이었다.
"과장님, 술도 드셨는데 고정하십시오. 그런 것들이 다시는 그따위 짓을 못하도록 쳐 없애는 건 내일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그까짓 하찮은 조센징들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시면 과장님 몸만 상하시게 됩니다."
하시모토는 애원이라도 하듯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내일 당장 잡아들일 테니 건강을, 아니 저 옥체를 생각하셔서 참으십시오."
새 주재소장도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과장니임, 두 분 말씀대로 화 푸세요오. 화내셔서 술 탈 나면 과장님만 손해시잖아요. 그까짓 조센징들이 뭔데요."
쓰지무라의 팔을 붙들고 제 몸을 흔드는 교태를 부리며 앳된 기생은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 자네들 말이 옳기는 하군. 그런 못된 종자들!"
쓰지무라는 한숨을 돌리며 담배를 빼 들고는,
"그 눈깔 병신 놈이 어째서 내 양아들이라는 그런 당치도 않는 거짓말을 해대는 건가?"
그는 노기가 역연한 얼굴로 하시모토에게 눈길을 박았다.
"예, 경찰서에서 한 말이, 제놈은 과장님 양아들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저런 사기꾼을 봤나. 그래서 경찰서에서는 어떻게 했나?"
"예, 경찰서에서도 과장님과 백 면장이 가까운 사이라는 건 다 아는 처지고, 그 외눈깔도 헌병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해서 쌀을 약속대로 상인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저런 멍청한 작자들이 있나. 어쨌거나 백종두 그놈부터 제 명대로 못 살고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만."
"예에, 맞는 말씀입니다. 늙은 것이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 노추를 부리는 겁니다."
하시모토는 어서 칼을 내려치라고 살살 긁어대고 있었다.
"그놈이 몇 살이나 먹었나?"
"예, 꼭 쉰살입니다."
"아니, 그놈이 벌써 그렇게 늙었나? 그거 진작 잘랐어야 할 폐품 아닌가. 너무 오래 붙여놓으니 그런 병폐가 생길 수밖에 없지. 자넨 언제나 쓸 만한 정보만 가져온단 말야. 수고했네.“
쓰지무라는 하시모토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하시모토는 쓰지무라가 칼을 내려치는 것을 확인했다.
"황송합니다."
하시모토는 술잔을 받으며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백종두 제 놈이 내 일을 방해하고 그 땅을 제 놈이 먹어치우려고 해? 어림없지,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멍청한 놈. 제 놈이 땅 욕심을 부리고도 내 앞에서 살아날 줄 알았나.’
하시모토는 자신이 꾸민 연극에 만족을 느끼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가 쓰지무라에게 한 이야기 중에서 사실인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백종두가 자기 아들의 장사를 위해 나락 섬이나 지닌 사람들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한 것이었고, 그의 아들 남일이가 나락을 미처 정미하지 못해 약속한 날짜에 쌀가마니를 선적시키지 못하고 경찰에 고발당한 것이었다. 그 나머지 이야기는 평소에 그들 부자가 자랑삼아 했던 말들에다가 다른 말을 더 보태 꾸며댄 것이었다. 하시모토는 백종두가 먹어치우려고 하는 하천부지의 개간 허가를 부탁할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새 주재소장 앞에서 꺼낼 말이 아니었고, 더구나 기생 앞에서 그런 부탁을 했다가는 일에 흠집이 생길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부탁은 쓰지무라와 단둘이 앉았을 때 은밀하게 하는 것이 뒤탈을 막고 서로 간의 체면도 살리게 되는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었다. 뜻하는 대로 일을 끝낸 하시모토는 느긋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술맛을 새롭게 느끼며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새 면장으로 누가 마땅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죽산면을 다 차지할 날도 머지않았다는 뿌듯한 마음과 함께.
한편 백종두는 원평천 하구의 질펀한 갈대밭에 둑을 쌓아 논을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바다에 가까운 개천 양쪽으로 펼쳐진 갈대밭은 임자 없이 버려진 땅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라가 임자였다. 그러나 나라에서도 바닷물에 절어 갈대만 무성한 그런 쓸모없는 땅은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렸다. 예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총독부에서 혈안이 되어 실시하는 토지조사사업에서도 그런 땅은 소홀하게 넘기고 말았다. 토지조사국에서는 당장 곡식이 생산되는 농토를 주목했지 갈대만 우거진
그런 땅은 〈국유〉라는 서류 한 장으로 지나쳤다. 백종두는 그 허술함을 이용해 종토를 넓힐 꿍꿍이속을 차렸다. 면장의 권한이면 그런 무관심한 국유지는 얼마든지 사유지로 바꿀 수 있었다. 특히 그 갈대밭을 눈독들인 것은 넓이도 넓을 뿐만 아니라 둑을 쌓기가 손쉬울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둑을 쌓는 비용이 수월찮게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목돈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일반 논값에 비하면 수만 평의 논이 거저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백종두는 그동안 하시모토가 설치는 바람에 억눌러왔던 땅 욕심을 그것으로 채울 작정이었다. 면장을 하면서 남 좋은 일만 시키고 땅을 하나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자아, 똑똑허니 봐라. 쩌어그서보톰 쩌어그꺼정 둑얼 막는 거이다. 쩌어그다가 싹 둑얼 둘러치면 저것이 얼매나 넓은 농토가 되겄냐. 수천 마지기다, 수천 마지기!"
아들을 거느린 백종두는 발뒤꿈치까지 들어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신명이 오르고 있었다.
"차암 아부지도, 어째 아그덜 꿈꾸디끼 고런 소리럴 허신당게라?"
외눈으로 드넓은 갈대밭을 바라보고 있던 백남일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눔아, 무신 소리여. 버르장머리 없이."
백종두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부풀어 오르던 신명이 싹 식는 걸 느끼며 벌컥 화를 냈다.
"아, 저 넓은 뻘밭에다 어는 세월에 둑얼 쌓냐니께요. 아침저녁으로 갱물언 오르락내리락 허는디라."
백남일의 목소리는 더 불퉁스러워졌다. 그러잖아도 흰 창뿐인 한쪽 눈으로 흉해 보이는 얼굴에 짜증이 드러나니 더 험악한 인상이 되었다.
"이눔아, 누가 니보고 막으라고 허디냐? 니넌 그저 왔다갔다험서 일얼 추실리라는 것이제. 이 애비가 면장 자리 차고 앉어서 앞에 나슬 수야 없는 일 아니여. 니가 몰르는 소리여. 돈이먼 안 되는 일이 없는디, 돈얼 와짝 풀먼 이놈 저놈 박 터지게 몰려드는디도 부지하세월이냐.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 뺏기고 일거리 구허는 놈덜이야 쌔고 쌨응게 니넌 그런 걱정 안해도 돼야. 이 애비도 일 질질 끄는 것 못 보는 성민지 알지야?"
백종두의 목소리는 어느덧 아들을 타이르는 어조로 바뀌어 있었다.
"글씨요, 그리된다면 또 몰를까……"
백남일은 마지못해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일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 일로 재산이 더 늘어나고 어쩌고를 따지기 전에 우선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군산에서 죽산면까지 수시로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또, 재산이 아무리 많이 불어난다 해도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논밭에서는 어김없이 소출이 생기고 있었고, 정미소에서는 기계가 돌아가는 만큼 돈이 쏟아지고 있었고, 새로 시작한 미곡도매상에서도 돈벌이는 제법 좋았던 것이다. 정미소를 관리하고 도매상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 보고 살 여유는 모자랐다. 그런데 아버지는 또 새 일을 벌인 것이었다. 지금 있는 재산만으로도 아버지 평생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평생도 얼마든지 호의호식해 가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다.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려, 내년 이맘때면 저그가 다 논이 될 것이다. 어느 때 어느 시절이고 재산 중에 질로 믿을 것언 땅이니라. 세월이 가니 썩기럴 허냐, 아무리 숭헌 도적놈이라도 짊어지고 갈 수가 있냐."
백종두는 가늘게 뜬눈으로 싱싱한 갈대밭을 바라보며 아들에게 이르는 것인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게 근엄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아부지, 알었응게 인자 가시제라. 날이 사람 잡게 덥구만요."
백남일은 아버지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넘기며 짜증스럽게 이마의 땀을 문질렀다.
"시건방구지게 설렁기리지 말고 애비 말 똑똑허니 명심혀. 가자, 어험!"
백종두는 쥘부채를 시원스럽게 쫙 펼치며 거드름 실린 걸음을 옮겼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들녘의 푸르름은 바닷빛으로 짙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넓고 큰날개를 느리게 펄럭이며 한가롭게 날고 있는 두루미의 우아한 자태가 들녘의 푸르름 속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한 떨기 하얀 꽃이었다. 한가한 두루미들과는 대조적으로 푸르름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푹푹 찌는 더위를 무릅써가며 논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었다. 절기에 맞춰 논일을 미룰 수 없는 농부들은 넓고 넓은 들녘에 수없이 많은 점으로 박혀 있었다. 그들은 불볕을 온몸으로 받고 팥죽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허리를 펼 짬도 없이 논일을 하고 있었다. 긴 다리로 겅중겅중 걷다가 우렁을 잡아먹고, 기다란 목을 세워 여기저기 살피다가 큰 날개를 펼쳐 다른 논으로 유유하게 날아가고는 하는 두루미들에 비하면 그들의 신세는 너무 고달프고 힘겨운 것이었다.백남일은 아버지의 뒤를 멀찍이 따르며 연상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양반걸음으로 느리게 걷는 아버지가 불만이었고,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는 더위에 짜증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불볕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은 아예 그의 안중에 없었다. 백종두는 하루라도 빨리 일을 시작할 작정이었다. 괜히 어물거리다가는 하시모토에게 들켜 일을 망칠 위험이 컸다. 지금까지 하시모토 모르게 일을 감쪽같이 꾸며온 것이 그는 만족을 넘어 통쾌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하시모토, 제놈이 아무리 머리를 빨리 돌린다고 해도 날 당할 도리가 있나. 내가 일을딱 벌여놓으면 그놈 쌍판이 어찌 될까. 그놈 날벼락 맞은 기분이겠지. 내가 언제까지 젊은 네놈 좋은 일만 시킬 것이냐. 나도 이제 내 실속 좀 차려야겠다. 흐흐흐흐……’
백종두는 부채를 할랑거리고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흐흐거리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종두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하나 저지른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토지조사국 다나카를 자기편이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나카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 그는 자신이 조선사람이 아니라고 착각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가 믿었던 다나카는 그의 계획을 고스란히 하시모토에게 알려주고 말았다. 그의 계획을 다 알고서도 그를 속인 것은 오히려 하시모토였다. 백종두는 자신이 아무리 면장이라고는 했지만 국유지를 사유지로 바꾸려면 토지조사국 조사원 다나카를 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다나카에게 돈을 두둑하게 쥐여주고 회유했던 것이다. 쓸모없이 여기는 국유지를 사유지로 바꾸는 서류 한 장을 다시 쓰는 수고비로는 거액의 돈이었다. 백종두는 개간사업을 추진시킬 계획에 몰두해 있다가 다음날 전주부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 여보세요, 백종두 면장입니까? 여긴 전주부청 총무괍니다."
"아 예에, 죽산면장 백종둡니다."
"예, 좋습니다. 긴급 인사조치를 알립니다. 잘 들으시오."
"아 예에, 어서 말씀하십시오."
그 순간 백종두는 눈앞이 훤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김제군수! 그는 가슴이 화끈 뜨거워지는 것도 느꼈다.
"오늘부로 백종두 당신을 죽산면장에서 면직시키는 바이오."
"예에에?"
"긴급 인사조치라 전통으로 알리는 것이고, 공문은 곧 송달될 것이오."
"여보세요, 아니 여보세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쪽에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미 끊어진 전화가 다시 이어질 리 없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진 백종두는 수화기를 놓치며 비실비실 쓰러지고 있었다. 사무실이 기우뚱 넘어가고,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숨이 막히는 걸 느끼며 백종두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아무거나 붙들었다. 그는 간신히 책상다리를 붙들며 마룻바닥에 머리를 찧는 것을 모면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안간힘 했다. 정신 차리라고, 이 무슨 못난 짓이냐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는 이를 앙다물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눈앞에는 안개가 뿌옇게 낀 채 몸은 가눌 수가 없이 처져 내렸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마룻바닥에 주저앉았다. 의자에 올라앉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의자가 멀리 솟은 산처럼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기만 했다. 그는 책상 옆구리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부렸다.
"오늘부로 백종두 당신을 죽산면장에서 면직시키는바이오."
천둥소리처럼 다시 울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귀에서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아니, 가슴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잡았다.
‘아니여, 아니여! 나가 잘못헌 일이 머시가 있다고. 나가 얼매나 충신 노릇얼 잘혔다고. 머시가 잘못된 것일 기여. 하먼, 잘못된 것이고말고.’
백종두는 정말 무엇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치밀하게 손을 써온 것을 생각하더라도 군수가 되었으면 되었지 면장에서 목이 떨어져 나갈 위험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부청 직원이 전통(電通)을 잘못 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전통을 전하는 순서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던 것이다.
‘그려, 이리 넋 빼고 있을 일이 아니여. 어서 무신 연곤지 캐내고, 일이 굳어지기 전에 되엎어야제. 나가 이리 끝낼라고 즈그덜 앞장슨 것이 아닝게.’
백종두는 빠드득 이빨을 갈았다. 그의 몸 어딘가에서는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적응하는 특유의 힘이 솟고 있었다. 눈앞의 안개가 차츰 걷혀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쓰지무라를 떠올리고 있었다. 쓰지무라를 만나기만 하면 면직 사유를 금방 밝혀낼 수 있을 것이고, 일을 되잡을 수도 있을 거였다. 전주부청이 군산부청을 움직일 수는 없어도 군산부청이 전주부청을 주무르기는 쉬웠다. 그건 일본 세상이 되면서 볼품없었던 군산이 갑자기 부청으로 승격된 것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니까 군산부청이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경제력이 전주부청의 행정 능력을 누르고 있었다. 백종두는 어서 쓰지무라를 만나야된다는 생각으로 마음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선 백종두는 그만 난감해졌다. 군산으로 타고 나갈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군산에다 인력거를 보내라고 연락할 수도 없었다. 해가 반나마 기울고 있는데 인력거가 오고 가고 하다 보면 군산에는 밤중에나 당도할 것이었다. 그러면 쓰지무라는 천상 내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안될 일이었다. 오늘부로 면직이라고 했으니까 오늘부로 뒤엎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무슨 수가 없을까……, 무슨 수가 없을까…… 백종두는 초조하게 손바닥을 맞부비며 울상을 지었다. 그때 저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려, 저것이여!"
백종두는 순간적으로 탄성을 토하며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쳤다. 울상이던 얼굴을 환해졌고 불안이 서렸던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
"하시모토상! 하시모토상!"
백종두는 목청껏 외치며 면사무소를 뛰쳐나가고 있었다. 거수경례를 붙이던 수위가 머쓱해져 정신없이 뛰고 있는 면장의 뒷모습을 이상하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시모토상, 나 좀 보시오! 하시모토상!"
백종두는 행인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소리치고 있었다. 저만치 앞에서 속보로 뛰고 있던 말이 멈추었다. 그리고 말머리가 돌려지면서 말에 올라앉은 사람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달음박질쳐 온 백종두는 말 가까이 다다르고 있었다.
"하, 하, 하시모토상, 나, 나를 군산에, 구, 군산에 좀……"
뛰기를 멈춘 백종두는 숨이 가빠 손으로 가슴을 누른 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요?"
백종두를 내려다보며 하시모토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하시모토상, 그 말에 태워다가 나를, 나를 군산에 좀 데려다주시오."
숨을 헐떡거리는 백종두의 얼굴은 온통 구겨지고 있었다. 그는 숨이 가쁜 것만이 아니었다. 너무 갑자기 급하게 뛰는 바람에 가슴이 뒤틀리면서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치받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그, 급한 일이 좀 생겼소"
"어딜 가는데요?"
"부청에…… 부청까지 좀 데려다주시오."
백종두의 숨 가쁜 소리는 애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백종두의 말을 듣는 순간 하시모토의 눈에 묘한 빛이 스쳐갔다.
"대체 무슨 일이오?"
똑같은 말을 다시 묻는 하시모토의 입가에 찬 웃음이 서렸다.
"그건 차차 말하기로 하고, 어서 좀 태워다주시오."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도 급한 일로 어딜 가던 참이오."
하시모토의 말은 차가웠다.
"하시모토상, 나 좀 살려주시오. 오늘 부청에 가지 않으면 큰일날 일이 생겼소. 나 좀 살려주시오."
하시모토를 올려다보고 있는 백종두는 완전히 애원하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백종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급해서 미안하오."
하시모토는 냉정하게 말하며 말을 급히 돌려세웠다.
"하시모토상!"
백종두는 울부짖듯 하며 말을 붙들려고 했다. 그러나 엉덩이에 채찍을 맞은 말은 땅을 박차며 뛰기 시작했다.
"쩌, 쩌, 죽일 놈! 저런 배은망덕한 놈이……"
백종두는 멀어져가는 하시모토를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며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도와주었는데…… 백종두는 가라앉아 가던 가슴의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백종두가 새로 생각해 낸 것은 주재소장의 자전거였다. 자전거가 말만은 못해도 인력거보다는 빨랐다. 주재소장에게 테워다 달라고 하면 일과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백종두는 부리나케 주재소로 갔다. 그러나 주재소장의 자전거도 보이지 않았다. 주재소장이 자전거를 타고 면내 순찰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백종두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학도들이 대창을 꼬나잡고 일어났을 때도 이처럼 암담하고 절박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래된 일이라서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쩌면 그때에 비하면 지금 형편은 아무것도 아닌지도 몰랐다. 그때는 자칫 잘못하면 대창에 바람구멍이 뚫릴 판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위기도 무사히 넘겨온 자신이었다. 백종두는 허물어지려는 마음에 회초리질을 해댔다. 백종두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달구지였다. 그것도 짐을 싣지 않으면 말보다는 못해도 자전거만큼은 빨리 달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종두는 지나가는 빈달구지를 붙들어 세웠다.
"니 나가 누군지 아느냐!"
"야아, 면장 나으리……"
"얼렁가자, 군산으로!"
백종두는 서슴없이 달구지 위로 올라앉으며 호령했다.
"야아?……"
"어째, 못 가겄다는 것이냐?"
"아니, 아니구만이라우. 이 짐 싣는 것에 면장 나으리가……"
"급한 일이 터졌응게 얼렁 소나 몰아라. 돈이야 얼매든지 줄팅게 저놈이 걷지 못허고 뛰게 볼기짝얼 사정없이 쳐. 알겄느냐!"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달구지꾼은 회초리 든 손에 침을 튀기고는 소의 볼기짝을 후려치며 〈이려, 이렷〉 소리쳤다. 흠칫 놀란 소가 고개를 내두르며 뛰기 시작했다.
"더 씨게 쳐, 더!"
백종두의 명령이었다. 달구지꾼은 그 명령에 따라 회초리를 더 세게 휘둘렀다. 소는 둔중한 몸을 철렁거리며 군산으로 뻗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더 씨게 쳐, 더!"
"너무 글먼 소가 상허는디요."
참다못한 달구지꾼이 불만을 가득 문 입으로 꿍얼거리듯 말했다.
"상허먼 더 기운 존 놈으로 사줄 것잉게 더 씨게 쳐,더!"
백종두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씩씩 문질러대며 애를 태웠다. 정신없이 사무실을 나오느라고 쥘부채를 지니지 않아 그의 얼굴은 땡볕에 잘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위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소몰이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백종두는 일과가 끝나기 직전에 가까스로 부청에 도착했다.
"저어…… 면장 어르신……"
돈을 줄 기미라고는 전혀 없이 달구지에서 뛰어내리는 백종두 앞에 달구지꾼이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어허, 한시가 급혀, 한시가. 낼 면사무소로 와, 면사무소."
백종두는 달구지꾼을 떼밀며 허둥지둥 부청으로 들어갔다. 벌겋게 익은 그의 얼굴에는 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니기럴, 무신 붕알 밑에 불붙을 일이 생겨 저 지랄인고. 오늘 재수 참말로 똥 밟고 엎어진 재수시, 염병허고."
달구지꾼은 투덜투덜하며 안쓰러운 듯 소의 볼기짝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목을 늘어뜨린 소는 입을 헤벌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커다란 눈은 충혈되고 눈꼽이 끼어 있었고, 길게 늘어진 혀에서는 끈끈한 침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과, 과장님 크, 큰일났습니다."
쓰지무라의 사무실로 뛰어든 백종두는 평소의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 같은 것은 차릴 겨를도 없이 이렇게 더듬거렸다. 말이 더듬거려지는 것은 숨도 가쁘고 마음도 급했던 것이다.
"아 아니, 백면장. 이게 무슨 짓이오!"
쓰지무라는 불쾌한 기색으로 백종두를 쏘아 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너무 급해서 그만……"
백종두는 뒤늦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쓰지무라의 앞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목이 달아나는 급한 일이라도 절도와 품위를 지키는 것이 대일본제국의 관리라는 걸 모르오?"
"예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 안 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백종두는 연상 머리를 조아리며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급한 일이라는 게 뭐요?"
쓰지무라는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예에,오늘, 아까 전주부청에서 밑도 끝도 없이 오늘부로 면직시킨다는 전통을 받았습니다. 과장님,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제가 뭐를 잘못했다고 면직을 시킵니까. 제가 그동안 얼마나 성심성의껏 일을 했는지는 과장님께서 잘아시지 않습니까."
"글쎄에, 아무 잘못이 없는데 상부에서 그런 인사조치를 할 까닭이 있겠소?"
쓰지무라는 다른 때와는 달리 의자를 권하지 않았다. 그의 책상 앞에 두 손을 모아 잡고 선 백종두의 모습은 천상 잘못을 저지른 죄인의 꼴이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만한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 면직 사유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좀 알아봐 주시고,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저를 살려주실 분은 과장님밖에 안 계십니다. 그 은혜 평생토록 갚아 올리겠습니다. 과장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연상 허리를 굽실거리는 백종두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인 듯하면서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있었고, 양쪽 겨드랑이며 가슴팍 부분은 겉옷까지 땀이 내배고 있었다.
"뭐어, 내가 무슨 힘이 있소. 하여튼 알아보도록 합시다."
쓰지무라는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장님, 고맙습니다. 당장 좀 조처를 취해 주십시오. 오늘부로 면직이라는 전통을 취소시켜 주십시오."
백종두는 곧 전화기라도 돌릴 것 같은 기세였다.
"이거 보시오, 백 면장! 정신 좀 차리시오. 인사조치가 무슨 어린애들 장난인 줄 아시오? 총독 각하라도 그렇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오. 내가 알아보도록 할 테니 돌아가 기다리시오."
쓰지무라는 냉정하게 백종두를 쏘아보며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예예, 제가 그만 마음이 급해서……"
백종두는 일그러지는 얼굴에 억지웃음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나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겠소. 내가 알아보고 연락할 테니 기다리시오."
백종두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부청을 나선 백종두는 무심코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을 멈추었다. 어서 하시모토를 만나야했다. 하시모토를 내세우면 쓰지무라는 더 열성으로 일을 보아줄 것이 틀림없었다. 백종두는 몹시 목이 타면서도 지나가는 인력거를 세웠다. 그는 인력거에 몸을 부리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인가…… 세상에 이럴 수도있는가……’
그는 마음이 허물어지고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낙담과 고통을 느꼈다. 자신의 신세가 끝장나버리는 것 같은 절망이 밀려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뭐가 잘못된 거야, 이 꼴을 당하려고 여지껏 그렇게 충성을 바쳐온 게 아니야. 안 돼, 안 돼, 안되고말고. 적어도 군수까지는 해먹어야 돼!’
백종두는 허물어지려는 마음을 다시 찰흙을 꽁꽁 뭉쳐대듯 다잡았다. 그리고 주먹을 말아쥐며 부르르 떨었다. 기운을 차리려 했지만 몸은 너무 지쳐 있었다. 백종두는 한숨을 자고 나서 기운을 차리려고 했다. 인력거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이 더 또렷또렷해지기만 했다. 근자에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되집어보고 따져보았다.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도 그런 일을 당할 만큼 잘못한 일이라고는 없었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더 미칠 것만 같았다. 어떤 놈이 내 자리를 노리고 모함을 한 것인가! 뒤늦게 떠오른 이 생각에 그는 무릎을 쳤다. 그놈이 누구인지 찾아내야 했다. 순간적으로 증오가 불기둥처럼 솟구쳤다. 당장 그놈을 찾아내서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팔다리를 토막토막 잘라야 된다고 생각했다. 면장이며 군수까지는 조선사람들의 차지였던 것이다. 어떤 나쁜 놈이 할 짓이 없어서…… 백종두는 이빨을 갈았다. 인력거는 반딧불들이 신비롭게 날아다니고 개구리들이 낭자하게 울어대는 어둠을 헤치며 면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아이고메, 사람 죽겄네!"
인력거꾼이 비명을 토하듯 하며 주저앉았다.
"그려, 고상혔네. 국밥에 막걸리나 한잔 걸치고 가소."
백종두는 인력거 삯에 잔돈푼을 더 얹어주었다. 몇십 리 길을 한 번도 쉬지 못하게 하고 몰아친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아이고, 고맙구만이라우, 고마워라우."
인력거꾼이 큰절하듯 했다. 백종두는 그 길로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하시모토는 밥상을 받고 있었다.
"백상, 오늘부로 면직당했다면서요?"
면상을 치는 그 말에 백종두는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호칭도 백 면장이 아니라 〈백상〉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걸 어찌 아시오?"
백종두는 하시모토를 노려보았다.
"소문이 쫙 퍼졌소."
"소문이? 그럴 리가 없소."
"무슨 소리요? 면사무소 직원들이 내일 새 면장이 온다고 준비하느라고 정신없이 바쁘던데.“
‘아니, 그놈들이 그게 무슨 짓인가……그놈들이 그걸 어찌 알았나……’
어리둥절해진 백종두는 헛소리하듯 하고 있었다.
"매사에 눈치 빠른 백상이 어찌그 일엔 그리 둔하시오. 부청에서 백상한테만 전통을 보낸 줄 아시오? 직원들한테도 보냈단 말이오. 행정 책임자 자리를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다는 건 백상도 잘 알잖소?"
빈말이라도 밥 먹었느냐는 말 한마디 묻지 않고 하시모토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대체 새로 오는 놈이 누구요?"
"그거야 난들 알겠소. 어쩌면 면직원들은 알지 모르겠소."
당일로 너무 냉담하게 변해 버린 하시모토의 태도에 백종두는 세상인심 조변석인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당장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하시모토였다.
"하시모토상, 내 부탁 하나 들어주시오. 쓰지무라 과장님께서 날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는데, 하시모토상이 다시 한번 과장님한테 부탁을 좀 해 주시오. 뭐,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그간에 나도 하시모토상을 백방으로 돕지 않았소?"
백종두는 하시모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나이 많은 모습이 더없이 초라하고 비굴해 보였다. 하시모토는 속으로 백종두를 맘껏 비웃었다. 제놈이 살려달라고 매달리니까 쓰지무라 과장이 따돌리느라고 내던진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약삭빠른 척하는 가소롭고 가엾은 놈이었다. 제 놈이 아무리 까불고 재주를 부려봐야 부처님 손안에서 노는 손오공이고, 하루살이일 뿐이었다.
"아, 그래요? 쓰지무라 과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소?"
하시모토는 놀라는척하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자신도 쓰지무라처럼 연막을 쳐서 백종두가 당분간 내막을 전혀 모르게 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럼요, 발 벗고 나서서 일을 제자리로 되돌려주시겠다고 하셨소."
백종두는 하시모토의 도움을 받을 욕심에만 매달려 엉뚱한 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그는 내일이면 새 면장이 부임해온다고 했던 하시모토의 말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그것 참 잘된 일이오. 과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틀림없는 일이니까 내가 나서서 또 말하나 마나요. 맘 푹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소."
백종두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그만 발등 찍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니오. 과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더라도 하시모토상이 한 번 더 부탁을 하면 마음을 더쓰실 것 아니겠소. 나 좀 살려주시오. 그 은혜 평생 갚겠소."
백종두는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허둥거리듯 말했다. 하시모토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백종두의 얄팍한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백종두를 희롱할 재미도 없어졌다. 더 얼굴 맞대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요, 나도 백상 덕을 많이 봤지요. 나도 그 고마움을 갚아야 하니까 과장님한테 부탁을 드리겠소. 고단해 뵈는데 가서 쉬시오. 내가 바로 연락하겠소."
하시모토는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나 그럼 하시모토상만 믿고 가겠소."
백종두는 가슴이 약간 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하시모토의 집에서 나왔다. 그는 안도하는 기분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머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일이면 새 면장이 부임해 온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괜히 헛짓을 하고 다닌 것 아닌가! 백종두는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머리가 핑 울렸다. 정신이 아뜩해져 그는 머리를 감싸잡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곧 쓰러질 것만 같아 그는 몇 걸음을 비척거렸다. 아니야, 면장 자리는 많아. 우선 면직만 면하면 돼, 면직만. 그는 살아날 길을 찾아 생각을 고쳐먹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든 그놈에 대한 보복은 급한 불부터 끈 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지칠 대로 지쳐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집으로 들어선 백종두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물 갖고 와, 물! 찬물!"
그는 비로소 당당하게 기가 살아나 있었다. 그의 첩이며 남녀하인들이 잽싼 동작으로 움직였다. 백종두는 마루에 걸터앉은 채 물을 두 사발이나 거푸 들이켰다. 상스러운 행동거지를 딱 싫어하는 그가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는 짓이었다. 백종두는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신 탓도 있었지만 입맛이 완전히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밥상을 물린 그는 거의 쓰러지듯 왕골 돗자리 위에 네활개를 폈다. 얼핏 한숨을 자고 난 백종두는 더 잠들지 못했다. 닭이 울 때까지 밤새도록 뒤척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길한 생각에 시달렸던 것이다. 백종두는 옷을 갈아입고서도 방에만 앉아있었다. 어제 마음과는 달리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새 면장 놈의 목을 비틀기 전에 자신에게 쏟아질 사람들의 눈길이 두려웠던 것이다. 백종두는 한기와 몸살기를 느끼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쓰지무라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백종두는 10시가 되자마자 전화기의 손잡이를 부리나케 돌려댔다.
"백 면장, 아니 백상! 그게 무슨 못된 짓이오. 총독부 재산인 국유지를 착복하려고 하다니. 감옥에 갇히지 않고 면직으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아시오."
아니, 다나카 그놈이! 백종두는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픽 쓰러졌다.
13. 떠도는 구름
개울가의 느티나무숲이 풍성한 반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잎들이 무성한 만큼 그늘도 짙었다. 그 풍요롭고 넉넉한 숲의 어느 가지에선가 매미들이 극성스레 울어대며 한여름 제철을 맘껏 즐기고 있었다.
"이눔아, 니 저물에 낯이나 잠 씻거라. 아무리 거렁뱅이라고 그리 땟국물이 질질 흘러서야 쓰겄냐."
남루한 차림에 병색이 드러난 남자가 아름드리 나무에 기대앉은 그지 행색의 아이에게 말했다.
"치이, 낯 깨끔허먼 누가 밥 주간디라? 아저씨나 씻그시오."
아이는 윤기 나는 검은 눈으로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또랑하게 맞대거리를 했다. 때가 끼고검댕 같은 것이 묻은 데다 땀 얼룩까지 져 더럽고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비해 그 눈초리며 말하는 품이 예사가 아니었다.
"이눔아, 니 밥 못 얻어묵게 맹글라는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그리 드럽게 허고 댕기먼 종기가 생긴 게 하는 소리여. 낯 씻거도 니 꼬라지넌 천상 거렁뱅잉게 걱정 안 해도 되겄다."
"씻거도 또 드러와지는디요 머."
아이는 쌩긋 웃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허, 고놈 참영판 여물시. 니 말허는 것 봉게로 장타령도 잘허게 생겼다. 날도 돕고헌디 장타령이나 한분 씨언허니 뽑아봐라."
"아이고 참, 아자씨도 요상허시오 이. 아까보톰 자꼬 거렁뱅이, 거렁뱅이 허는디, 나넌 거렁뱅이가 아니랑게라."
불만스러운 얼굴로 아이가 쨍하니 소리쳤다.
"허허허허…… 미친 놈이 안 미쳤다고 허고 술 취헌 놈이 안 취했다고 허넌 소리넌 많이 들었다마넌 거렁뱅이가 거렁뱅이 아니란 말언 내 생전 첨 듣는 소리다. 니가 어사또 이몽룡이 아덜로 새끼 어사또냐?"
남자는 말을 마치고도 한참이나 더 웃었다. 병색에 수심까지 끼어 있던 얼굴에 핏기가 돌며 한결 건강해 보였다.
"지금 시상에 어사또가 어디 있간디라? 나넌 거렁뱅이가 아니라 우리 동생 잡아간 도적놈덜 찾으러 댕기요."
똑똑히 알고나 말하라는 듯 아이가 조그만 턱을 치켜들며 입을 씰룩했다.
"무신 소리다냐? 느그 엄니 아버지넌 어찌 되고 니 혼자서."
남자는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슬픈 얼굴이 되며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나가 니 속도 몰르고 헛소리럴 혔다. 고것언 잘못된 것이고 니가 무신 곡절이 있는갑는디, 어떤 놈덜이 느그 동상얼 잡어갔단 것이냐? 어디 세세허니 이얘기혀 봐라."
아이는 도리질을 했다.
"이눔아, 병 나먼 소문내야 명약 구허디끼 사람 찾을라먼 소문내야 수월케 찾아지는 것이여. 나도 마누래 찾을라고 천지사방얼 안 더튼 디가 없응게 니 일에 심이 될란지도 몰른단 말이여."
아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자씨 각시도 누가 잡아갔는 게라?"
"잡아가?……그려, 그런 심이제."
"아그덜도 아닌 어런이 어찌 잽혀가고 그런당가요?"
"요런 놈 보소. 지 이야기 허랑게나 이야기 살살 풀어내게 헐라고 그러네. 이눔아, 얼렁 니 이야기보톰 혀라."
"아자씨, 천지사방 다 돌아댕갰으먼 놀이패덜도 많이 만났제라?"
"그려, 뜬구름맨치로 떠도는 놀이패도 만내고 소리패도 만내고 거렁뱅이패도 만내고 그랬니라."
"이, 글먼 너댓명 놀이패헌티 잽혀댕김서 소리 기맥히게 잘허는 쬐깐헌 가시네럴 못 봤는게라? 나이가 일곱 살, 아니 설 쇠었응게 야닯 살이고, 이름이 옥년디요. 얼굴이 이쁘고, 눈 옆 여그에 꺼먼 점이 찍혔는디요."
아이는 제 얼굴을 남자 쪽으로 돌려 손가락으로 오른쪽 관자놀이께를 짚어 보였다.
"소리럴 기맥히게 잘허는 야닯 살묵은 점백이 이쁜 가시네……?"
남자는 기억을 더듬는 생각 깊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는,
"놀이패 따라댕김서 소리허는 가시네덜언 많이 봤는디, 야닯 살 안팎 묵은 에린 가시네럴 본 적언 없는디 으짤꺼나?"
남자는 미안스럽고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아이를 건너다보았다.
"옥녀야, 니넌 어디 있는 것이여……"
남자 아이는 혼잣말을 하며 먼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그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남자는 측은한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픔이 서린 남자의 얼굴은 더 병색이 짙어 보였다.
"아가, 그리 서러와 말어라. 니가 맘만 단단허니 묵음사 언제고 만내지게 될 것잉게. 성제간 인연이야 찔기고 찔긴 것인디 하늘이 무심털 않을 거이다."
남자가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아이는 땟국이 흐르는 지저분한 손등으로 눈을 씩 문질렀다. 아이의 씰룩이는 입술 언저리에 울음이 가득했다.
"느그 엄니 아부지넌 어찌 되았냐?"
아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없다냐?"
아이는 풀잎을 잡아 뜯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항참 나이에 어쩐 일이다냐?"
아이는 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무신 돌림병이라도 앓았다냐?"
남자의 물음은 질겼다. 아이는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눔아, 니 입으로 이야기 엮기 싫으면 묻는 말에나 답혀."
남자의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남자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가엾고 딱해 자꾸 마음이 쓰이고 있었다. 아이도 그런 눈치를 챘는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부지넌 왜놈덜이 총으로 쏴죽이고, 엄니넌 미쳐서 죽었구만이라우."
아이의 빠른 말이었다.
"머시여? 무신 죄럴 졌간디?"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의 입은 다시 다물어져 버렸다.
"아 이눔아, 답답허다. 무신 죄냐니께."
"우리 아부지넌 죄진 것 하나또 없당게요!"
아이는 빠락 소리를 질렀다. 남자를 노려보듯 하고 있는 아이의 눈에는 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신 요상헌 소리다냐? 죄 진 것이 없는디 총 맞어 죽어?"
"하먼이라. 우리 아부지넌 죄 진 것 하나또 없어라. 즈그가 우리 땅 뺏어간 게 우리 아부지가
지주 총대놈 패대기쳐뿐 것이지라. 우리 아부지가 얼매나 맘씨가 좋고 육자배기 타령도 잘헌다고요."
응답을 꺼려하던 아이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아이는 제 아버지를 힘주어 변호하고 있었다. 남자는 마침내 아이의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고, 아이가 어째서 혼자 떠돌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땅을 되찾으려다가 신세가 망가진 자신과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
"그려, 그려, 니 말이 맞다. 땅얼 찾을라고 나섰다가 총질 당했음사 느그 아부지가 아무 죄도없고 말고."
"그렇제라? 우리 아부지넌아무 죄진 것이 없제라?"
아이는 금세 얼굴이 밝아지며 다짐하고 들었다.
"하먼, 느그 아부지야 죄인이 아니라 장헌 사람이다. 땅덜얼 뺏기고도 겁나서 찍소리 못허고 기죽어 있는 사람덜에 비허먼 느그 아부지넌 장허고 장헌 사람이고말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참말로 우리 아부지가 장헌 게라?"
아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먼 장허제. 왜놈덜헌테 뎀비고 싸우는 것언 이 세상서 질로 장헌 일이여."
아이는 남자의 병색 짙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다 장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지 장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낯선 아저씨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아버지가 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참, 니 이름이 머시냐?"
"야아, 득본디요, 차득보!"
아이는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얼른 이름을 댔다.
"차암…… 에린니가 무신 죄냐. 왜놈덜 등쌀에 부모 잃고 성제간꺼정 생이별히서 이리 떠돌아댕기니……"
남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긍게로 후제 커서 왜놈덜헌티 우리 엄니 아부지 웬수 갚을랑마요."
아이는 또랑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말했다. 그건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말대꾸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총살당한 다음부터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오고 있는 결심이었다.
"하이고, 작은 꼬치가 맵네!"
남자가 놀란 얼굴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이와 눈길이 마주친 남자의 얼굴에서는 정겨운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간에도 웬수갚음 험서 동상 찾으러 댕기는 디요."
득보는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자랑하듯 말했다. 그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머시여? 니가 무슨 수로 웬수갚음이고 말고여?"
남자가 의아스러워하는 것과 동시에 피식 웃어버렸다.
"어째 콧방구 뀌고 그러요?"
득보는 고까운 듯 눈을 치켜뜨며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허! 니가 하품 나는 소리럴 헝게 안 그러냐."
남자가 쓰다듬듯 하는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치이, 나가 어찌허는 지도 몰름서 하품 나와라?"
"하이고, 그 새다리로 허먼 멀허겄냐. 어디, 멀허는지 말해 봐라."
"야아, 들어봇씨요. 나가 안직 기운 없응게 왜논덜얼 주먹으로 해보지넌 못허제라. 긍게로 어찌허냐먼 이, 밤중에 주재소에다 대고 오짐 싸고, 작대기에 똥 찍어 주재소에다 볼르고, 왜놈덜 집 골라감서 돌 던지고, 왜놈덜 점방서 묵을 것 돌라묵고 그렁마요."
득보는 어떠냐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며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허, 참말로……"
남자는 할 말을 잃고 아이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저 어린것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은 어린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은 그동안 마누라를 잡아 원수갚을 생각에만 빠져 있었지 왜놈들에게 원수 갚을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자신의 신세를 망쳐놓은 것은 마누라가 아니라 왜놈들이었던 것이다.
"그려, 니가 헌 그런 일덜이 웬수갚음이야 웬수갚음이다. 근디, 그러다가 잽히먼 큰 탈 남게 조심히야써."
남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히히, 나가 멍청이간디라?"
득보는 사람 우습게 보지 말라는 듯 콧등을 찡그리며 하늘을 보고 웃었다. 그 겁 없어 보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남자는, 저것이 크면 어찌 될까를 생각했다.
"니가 담에 커서 웬수갚얼 지대로 헐라먼 지끔보톰 조심허란 것이여. 그런 말도 암디서나 허덜 말고."
"야아, 나가 애기간디라."
득보는 제가 나이가 퍽 많은 것처럼 대꾸하고는,
"아자씨 각시도 왜옴덜이 잡아갔는 게라?"
이제 당신이 이야기할 차례라는 듯 궁금증을 나타냈다.
"이, 그려. 이 아자씨도 왜놈덜헌티 땅도 뺏기고 각시도 뺏게불고 요꼬라지가 되야부렀다.“
남자는 아이가 묻는 말을 받아 이렇게 얼버무렸다. 마누라가 딴 놈과 배가 맞아 도망갔다는 것보다는 한결 나은 말이었던 것이다. 남녀 음양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아이를 상대로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한다는 것도 주책스럽고 얼뜬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왜놈덜이 어찌서 땅도 뺏고 아짐씨꺼정 잡아갔당게라?"
"몰르제. 그놈덜…… 그놈덜 즈그 맘대로 허는……"
남자는 숨이 가빠지는 것 같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막았다. 그러나 병색이 밴 기침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마누라의 얼굴이 떠오르면 으레껏 분이 뜨겁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어김없이 기침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마누라에 대한 미움과 풀 길 없는 분함이 가슴속에 뒤엉켜 끓으며 생긴 병이었다. 아무리 산지사방을 헤매다녀도 마누라를 찾을 길은 막막했다. 그럴수록 가슴이 화끈거리고 벌떡거리는 병은 깊어져 갔다. 어느 때에는 마누라를 그만 잊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새로 살아보자고 마음을 돌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앞길엔 가망도 보이지 않았다. 땅을 빼앗겨 빈털터리가 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된 몸으로 살아볼 방도는 없었던 것이다. 몸을 오그라뜨린 남자는 가까스로 기침을 잡고 있었다.
"저어 아자씨, 요거……"
득보가 조심스럽게 남자 앞에 내미는 것이 있었다. 때 전 바가지에 물이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려, 그려, 고맙구먼……"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진땀 밴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침 더 못 나오게 얼렁 물 마시씨요."
득보는 바가지를 남자의 입으로 가져갔다. 남자는 바가지를 받쳐 잡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남자의 핼쑥한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득보의 얼굴이 근심스럽게 찡그려지고 있었다.
"휴우……물맛이 영판 달다."
남자가 긴 숨을 내쉬며 득보를 보고 밝게 웃었다.
"저어 아자씨……어디가 많이 아프신 게라우?"
득보는 마주 웃지 못하고 찡그려진 얼굴로 물었다.
"아니여, 그저 쬐깨 아픈 것이여."
남자는 이마에 내밴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자씨넌 인자 어디로 가신당가요?"
득보는 미심쩍어 하는 얼굴인 채로 기울어진 해를 올려다보았다.
"이, 니가 인자 가야 되는갑제? 그려, 가그라. 나넌 저짝으로 갈란다."
남자는 득보가 서 있는 반대쪽을 가리켰다.
"글먼나 가볼랑마요."
득보는 바가지의 물을 쏟았다.
"그려, 니 만내서 재미지게 잘 쉬었다. 몸 아프덜 말고 동상 꼭 찾도록 혀라 이. 놀이패덜언큰 동네럴 찾아댕긴게 그리 알고."
"야아,아자씨도 몸 성히서 각시 꼭 찾으씨요 이."
득보는 꾸벅 절을하고는 돌아섰다. 남자는 팔을 뻗치며 아이를 부르려다가 멈추었다. 마음뿐이었지 수중에는 땡전 한 닢이 없었던 것이다. 바가지를 허리춤에 찬 아이는 햇볕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 다부지고 영특한 아이를 지켜보며, 저런 아들 하나만 있었어도 바람난 년 잡으러 다니려고 허송세월을 하며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 건데……,남자는 시름겨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이 가망 없이 깊어지지만 않았더라도 저 아이를 말벗 삼고 길벗 삼아 함께 떠돌아다니면 제격일 터였다. 그러나 병은 햇볕 속에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으로 심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가슴이 축축이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뒤로 눕혔다.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한숨을 자야 했다. 땀을 덜 흘리자면 밤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고향은 아직도 2백 리가 더 남아 있었다. 한창 기운 좋을 때는 이틀이면 족할 그 길이 이제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고향에 간들 반겨줄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몸을 지탱하기 어렵고 병이 깊어지면서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고향 쪽으로 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무성한 나뭇잎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싱싱하게 짙푸르렀다. 단풍이 들기까지는 한창 기운 펄펄한 잎들이었다. 사람의 한평생을 60으로 잡으면 자신의 나이도 저 잎들처럼 한창 싱싱해야 할 나이였다. 그런데 자신의 몸은 이미 단풍이 들어 있었다. 세상이 바뀔 때만 해도,아니 땅을 빼앗길 때만 해도, 아니 아니 주재소에서 매타작을 당할 때만 해도 자신의 신세가 이 지경으로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했는지도 몰랐다. 괜히 아내에게 분풀이하지 말고 더 살갑게 대했더라면 아내는 도망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그대로 세상의 끝장이었다. 마음을 어떻게 다잡거나 추스를 방도가 없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주재소 순사들은 분풀잇감으로는 너무 무서웠고 그저 만만한 것이 아내였던 것이다. 남자는 온몸에 맥이 빠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내의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표나게 예쁘지는 않아도 수더분하게 선한 생김이었다. 아내는 그 생김처럼 행실도 얌전한 편이었다. 자신이 못살게 굴지만 않았더라도 아내는 딴마음을 먹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내를 잡으러 다니면서 언제부턴가는 은근히 걱정이 생기기도 했었다. 만약 찾아냈는데 아이를 낳고 살면 어쩔 것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문득 찾지 못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아내에게 미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겉마음이었고 속마음에는 그리움도 있었다. 그는 아내의 꿈을 꾸고 싶었다. 아내의 알몸을 끌어안고 밤새는 줄 몰랐던 첫날밤과 같은 꿈을 꾸고 싶었다. 그는 여울져 오는 잠결에 젖어들고 있었다.
"어이 남샌, 남샌 있능가!"
하봉수는 절름거리는 다리로 남상명네 마당으로 뛰어들며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절름거리는 다리로 급히 뛰다보니 그의 상체는 보기 딱할 지경으로 뒤뚱거리고 있었다.
"하샌, 어여 오시오. 안개도 아직 안 걷혔는디 어쩐 걸음인게라?"
텃밭에서 아욱잎을 따고 있던 남상명의 아내가 하봉수를 맞았다.
텃밭의 남새들은 잠푹한 안개발에 잠겨 있었다.
"남샌 어딨소. 안직도 자요?"
하봉수는 인사도 받지 않고 다급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아니, 칙간에 있는디요. 또 무신 일 났는게라?"
남상명의 아내가 불안한 얼굴로 바구니를 텃밭 골에다 내려놓았다.
"어이 남샌, 똥두칸에 앉았음서 다급헌 사람 소리 들었으면 무신 기척이 있어얄 것 아니여. 무신 장헌 일 헌다고 그리 점잔 빼고 있능가!"
하봉수는 뒷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시비를 걸 듯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어허, 참새 새끼덜도 안직 안 깬 아칙보톰 머 묵자것 있다고 그리 설레발이여. 앞으로 묵는 것이 중허먼 뒤로 빼내는 것도 중허제. 못 묵어서 죽는 것만 알고 못 빼내서 죽는 것언 몰르는가, 자네? 죽기 면허자고 허는 요 일이 안 장허먼 무신 일이 장헌고?"
뒷간에서 들려오는 느긋한 대꾸였다.
"이 태평시려서 좋구만. 이사람아! 당산나무 아래 용철이가 와서 죽어 있네."
하봉수가 냅다 쏴 질렀다.
"머시라고? 용철이!"
뒷간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아니시, 더 태평가 불름서 찬찬히 장헌 일 보드라고."
하봉수는 떫은 얼굴로 엇진 소리를 뱉어내며 고개를 꼬아 돌렸다.
"아니, 고것이 무신 뜸금 없는 소리당가. 자네가 잘못 본 것 아니여?"
남상명은 바지를 치켜 올리며 뒷간에서 허둥거리고 나왔다.
"체, 나가 다리 빙신인지넌 몰라도 눈빙신언 아니로구만."
"어허 이 사람아, 고것언 또 무신 오기 받친 소리여. 얼렁 가보드라고, 얼렁."
남상명은 허리끈을 매며 앞장섰다.
"어쩌끄나, 용철이 김샌이 어찌 된 일이여. 결국 마누래넌 못 찾고 집 동네 찾아들어 죽음 혔는갑네 이……"
남상명의 아내는 다급하게 사립을 벗어나는 남편과 하봉수를 바라보며 울음 번진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산나무 아래는 안개가 더 자욱했다. 한 남자가 당산나무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안개에 몸이 반쯤 가려진 남자는 흡사 구름에 둥실 실려 있는 신령이나 도인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고, 용철이가 맞네그려. 얼굴이 많이 상허고 축나기넌 혔어도……"
남상명은 금방 용철이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만져보지 않고도 그가 진작 숨이 끊어졌다는 것도 느꼈다. 그의 몸에서는 죽은 사람한테서 끼쳐오는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무신 병이 들었든 갑데. 저승 가기로넌 안직 펄펄헌 나인디. 그저 객지 죽음 면헐라고 여그꺼정 찾아든 것 아니겄능가?"
"이, 필시 그런 것이로구마. 즘생도 죽을 적에넌 지 집얼 찾아든다는디 사람이야 더 말 헐 것이 없제. 근디 마누래넌 못 찾은 것아니라고?"
"긍게로 저 꼬라지가 됐겄제. 참말로 저 나이가 아깝네. 쯧쯧쯧쯧……"
"그려, 기맥힐 일이시. 다 시국 잘못 만낸 죄 아니라고."
"저 일얼 어찌야 헝고?"
"저승길 앞에 두고 여그 찾아든 것이야 우리럴 믿어서가 아니라고? 그 맘이 얼매나 고마운가. 우리가 저승길 닦아 보내야제."
"빌어묵을, 땅도 못 찾음시로 그놈에 일로 줄초상이 나네그랴."
하봉수가 침을 내뱉었다.
"그려, 왜놈덜이 원체로 독허니 해댔시니 요런 변고가 끝도 없는 것이제."
"날도 덥고 헌디 오래끌 것 없제?"
"하먼, 호상도 아니고 무신 병얼 앓았는지도 몰르는디 오늘 해 안으로 일얼 막음허는 것이 좋겄제. 건식이넌 빼야 하는 것 아니라고?"
"하먼, 상 당헌 지가 엊그젠디."
아까 하봉수가 말한 줄초상이란 감옥살이를 하던 박병진의 초상을 며칠 전에 치른 것이었다. 그가 속병을 얻어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남상명은 몇 사람을 불러 김용철의 시심부터 거두었다. 그 한 맺힌 사람의 남루하고 서러운 모습을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해서는 안 되었고, 무슨 병을 앓았는지 몰라 아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였다. 외리 사람들은 하루 들일을 작파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곡식이며 돈푼들을 추렴했다. 아무리 간소하게 치르는 장례라 하더라도 칠 입히지 않은 싸구려 관은 있어야 했고, 거친 삼베옷 한 벌은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 어느 집에서나 마다하거나 싫은 기색 없이 형편 닿는 대로 마음들을 썼다. 한동네에서 고운 정 미운 정 나누며 살았고, 같은 당산나무 아래서 한뜻을 모으며 어우러져 산 이웃사촌이라는 인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남다르게 쓰리고 아프게 살다가 허망하게 끝을 맺어버린 그의 기구한 삶이 동네 사람들의 가슴마다 슬픈 얼룩을 지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경사스러운 일보다는 궂은일에 더 마음을 모으고 손들을 합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가르치고 배워왔던 것이다. 집집마다 화목을 누리자면 마을이 화목해야 한다는 건 오랜 세월에 거친 일깨움이었다. 남자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한 바깥일에 나섰고, 여자들은 그 일을 뒷받침 하는 안일에 일손을 맞추었다.
"삼포댁이 요 소식얼 알먼 맘이 으쩌까?"
"아이고, 실답잖은 소리 허고 앉었네. 맘이 씨리고 애리제 으째."
"음마, 물어보도 않고 그리 인심 후허니 말허덜 말어. 어찌먼 속이 씨언해 헐란지도 몰릉게."
"어따, 그 무신 숭헌 소리여? 한때넌 그래도 속살 섞음서 산 내외지간인디."
"참말로 자네덜 사람속 맘 몰르는구만 이. 아, 지 남정네 등지고 딴 놈허고 배맞어 달아난 년이 지년 잡아서 죽이겄다고 나섰든 남정네가 죽어뿌렀단 소식 듣고 얼씨구나 씨엉쿠 잘 되었다 허고 춤 추제, 아이고메 불쌍히서 으짤끄나 허고 곡얼 헐 성불른가?"
"얼랴, 정작 사람 속 모르는 것언 자네시. 삼포댁이 그냥 화냥기가 동해 딴 남정에하고 배럴 맞쳤간디? 똥싼 놈이 큰치허드라고 김샌이 잠자리 농사 짓지도 못허게 됐음시로 됩데 사람얼 개 패디끼허고, 오짐 누고 젖은 속곳 밑 보고도 눈에 불얼 쓰는 판굿얼 벌이고 헌 것이야 동네 사람덜이 다 아는 일 아니여? 삼포댁이 그리허고 잡아 헌 일이 아니란 말이시."
"그려, 새끼라도 한나 있었으먼또 몰르는디, 어느 여자고 그리 쌩사람 잡는 시집살이 당허먼 딴 맘이 생기지도 허겄메."
"음마, 음마, 지 속 짚어 넘 속이드라고 인자 봉게 자네덜 맘보가 사리 살짝 딴 남정네 보고 잡아허능구마 이."
"아이고메 잡것, 벨 징헌 소리 다허고 자빠졌네. 얼렁 가서 우리 서방헌티 그 소리 일러바치소."
"그 숭헌 소리덜 말어. 좌우간에 김샌도 불쌍허고 삼포댁도 기구허제 머."
"그려, 서로가 백년해로 못 헌 팔잔게. 근디, 삼초댁언 어디 잘도 숨어 사는 갑네 이. 김샌이 천지사방얼 더트고 댕갰을 것인디도 안 잽힌 것 보먼."
"글씨, 아무리 천지사방얼 더트고 댕긴다고 히도 맘 묵고 숨어뿐 사람 찾아내기가 어디 그리
쉽간디. 풀섶에서 바늘찾기고 모래밭서 깨알 찾기제."
"그나저나 김샌한티넌 안 된 말일란지넌 몰라도, 찾덜 못헌 것이 피차에 잘된 일인지도 몰르제."
"이, 그렇기도 헐 것이여. 자석 낳고 사는 판에 딱맞대허먼 그 일얼 어찌겄어. 참 기맥힐 일 아니라고."
"근디, 삼포댁이 어디서 바래는 대로 잘살기나 허는지 몰르제."
"기왕지사 팔자 고치기로 나섰응게 새끼덜 낳고 잘살어야 할 것인디."
"금메…… 그 남정네도 지닌 것 없고, 시국언 요리 험헌디두 다리 뻗고 속 편허니 살기야 에롭겄제."
"그려, 우리 살기 고단허고 팍팍헌 것이나 얼추 같겄제."
"참말로, 우리 손으로 이리 김샌 수의럴 맨들지 어찌 꿈에라도 알었드라고."
"긍게 말이여. 김샌이 죽어서나 존 시상으로 가얄 것인디."
"김샌이야 새로 사람으로 황생하겄제. 이승에 핏줄얼 못 냄긴 사람언 그 한얼 풀으라고 새로
태어나게 해준다고 안 그러드라고. 시님네덜도 그렇고."
"이, 부처님이 살피시어 왜놈덜 없는 시상에다 부자로 태어나게 히주시겄제."
"그리 됨사 얼매나 좋겄능가. 나넌 그 집에 강아지로라도 환생할란지 몰릉게 수의라도 지성으로 지어야 쓰겄구마."
"그려, 요 인연도 예사 인연이 아닝게."
김용철의 수의를 짓고 있는 네댓 명의 여자들은 그간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이어가면서도 일손들을 재게 놀리고 있었다. 한편, 박건식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례 일을 차고 나섰다.
"무신 소리다요. 딴사람 장례도 아니고 김샌 장롄디 나가 안 나스먼 아부님이 노허실 것잉마요. 아부님언 그 일에 나슨 사람덜찌리 한 덩어리가 되라고 항시 당부하셨응게요."
박건식의 말에 사람들은 더 만류할 수가 없었다. 박병진의 죽음은 그 일에 나섰던 외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내촌 사람들에게도 충격과 낙담을 주었다. 그들은 언제 결말이 날지 모르는 토지심사의 결과를 고대하며 박병진이 출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병진이 갇히고 나니 땅을 되찾으려는 일은 거의 중단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 중에 토지조사국에 출입하며 토지검사를 독촉하고 항의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학식이 없는 데다가 담력도 없었던 것이다. 박병진은 많은 나이에 주재소에서 매타작을 당한 몸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상한 몸에 감옥살이의 고초까지 겹쳐진 것이다. 젊은 사람들도 다리 병신이 되거나 성불구가 되는판국에 감옥살이를 하면서 몸을 제대로 회복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데다 나이까지 들어가면서 속병을 얻게 된 것이었다. 박병진의 장례는 삼일장으로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치렀다. 아들 건식이가 실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나섰던 사람들 모두의 뜻이기도 했다.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땅언 끝꺼정 찾어야 써. 그 땅언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고 자손 대대로 물려줘야 할 것잉게. 작인 노릇이 아니라 그보담 더헌 고초럴 당허드라도 참고 참아감서 깡언 기연시 찾어야 써. 살기 에롭다고 중도에 작파하고 딴 디로 뜨면 그것이야 조상허고 자손헌티 곱쟁이로 죄짓는 중죄인이 되는 것잉게."
박건식에게서 전해 들은 박병진의 유언이었다. 사람들은 그 마지막 말을 가슴에 새기며 장례를 치렀다. 김용철의 장례채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사람이 읍내에 나가 송판으로 얽어 짠 볼품없는 관을 사 오는 동안에 다른 남자들 패는 묘자리를 팠고, 여자들도 두 패로 나뉘어 수의를 짓고 간소한 제물을 장만했던 것이다. 점심 무렵에 당산나무 아래서 발인제를 올렸다. 아이들까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정작 빠진 사람은 지주 총대를 겸한 이장이었다. 처음부터 이장은 추렴에 넣지를 않았고, 이장은 박병진의 장례 때 그랬던 것처럼 모르는 척 읍내 걸음을 했던 것이다.
"어이 용철이, 한 다 풀어 불고 존 시상으로 가소 이."
두 번 절을 하고 난 남상명이 술을 관 둘레에 부으며 목이 메었다.
"나 겉은 사람도 사는디 시퍼러니 젊은 자네가 요것이 어쩐 일이여. 그려, 요런 드런 눔에 시상 아닌 존 시상으로 먼첨 가드라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관 둘레에다 술을 붓고 난 하봉수가 눈을 훔쳤다.
"김샌……"
박건식은 술잔을 들고 한동안 서 있다가,
"이리 허망허니 가불먼 우리 아부님이 돌아가신 것이 헛일이 안 되겄소. 저 시상에 가서나 편케 사씨요."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작별을 고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전에 없었던 발인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때 절고 낡은 김용철의 옷을 태우는 것으로 발인제는 끝났다. 외줄기 파란 연기는 김용철의 넋인 양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관은 상여에 실리지 못하고 들것에 올려졌다. 관은 당산나무 그늘을 벗어났다. 곡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여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남자들은 묵묵히 관을 들고 걸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당산나무 아래서 그 쓸쓸하고 초라한 장례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이 타는 연기가 시나브로 사그라들고 있었다. 핏줄을 남기지 못한 고인의 마지막 길을 서러워하듯 매미들이 줄기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해거름이다 되어 마을도 돌아온 남자들의 삼베옷은 땀으로 척척하니 젖어있었다. 거적쌈을 겨우 면하게 치른 장례였지만 산역만큼은 호사스런 장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봉분의 크기가 부잣집 것보다 작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봉분을 작게 했다고 해서 그들은 힘이 덜 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봉분을 쌓아 올리기 직전에 달구질을 하면서 봉분을 크게 만드는 것만큼의 기운을 썼던 것이다. 달구질에다가 유달리 그렇게 힘을 들였던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아무 칠도 안된 하얀 송판때기 관이 너무 부실했다. 그리고 관 위에 가로 걸치는 횡대마저도 좀 실한 나뭇가지들을 잘라 엮은 반횡대였다. 그들은 그런 것이 마음에 걸려 돈 안 들이고 자기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달구질만은 어기차게 기운을 써가며 오래 했다. 땡볕 속에서 뛰며 땅을 다지자니까 팥죽땀이 쏟아졌다. 본래 달구질이란 상제나 그 가족들이 잇따라 내놓는 돈맛에 신명이 나서 올라 뛰게 되는 놀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돈 한 푼 놓이지 않았는 데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로 잇대어 소리 장단에 맞추어 발바닥이 얼얼해지도록 땅다짐을 했다. 그건 한스럽게 죽어간 김용철이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였고 그리고 작별인사였던 것이다.
"이따가 보드라고들."
당산나무 아래서 흩어지며 남상명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막걸리 잔이라도 있겄소?"
누군가의 염치불구한 말이었다. 사실 그들은 장례 치른 사람들답지 않게 목이 너무 껄껄하게 말라 있었던 것이다.
"아니구만, 맹물이나 한 바가치썩 믹일랑마!"
남상명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 저녁 밥덜언 집이서들 묵고 맹물언 남씨네 것으로 마시도록 허드라고. 저 집 맹물언 틉틉헌 것이 마실 만헝게."
누군가의 흥 도는 목소리였다. 남상명은 저녁밥을 먹자마자 마당에 덕석을 내다 깔고 모깃불을 두 군데 다 지폈다. 그저 마을 나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굳이 모두를 청했던 것은 뜻하지 않은 장례로 마음이 울적해서만은 아니었다. 모두 모여 앉아 결정지을 것이 있기도 했다. 어둑어둑해지면서 사람들이 덕석에 둘러앉기 시작했다. 모깃불의 진하고 매캐한 연기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자연히 김용철이에게로 모아졌다.
"참 요상시런 일이여. 도사가 따로 없당게. 도사덜언 자기덜이 어느 날 어느 시에 죽을지도 알고, 오늘이 죽을 날인디 아랫것들이 무신 일이 있응게 사나흘만 더 있다가 죽으라고 허먼 또 그러기도 헌다등마, 용철이가 똑 그렇단 말이여. 어찌 그리 죽을 날 딱 알고 동네로 찾어들었는지 모르겄당게."
"아니여, 사람이야 다 지 죽을 날 안다고 안그러드라고."
"그려, 즘생덜도 즈그 죽을 날 다 안다든디 영물인 사람이야 비문허겄어."
"그렁랑가? 안 믿기는디."
"그나저나 용철이가 고상얼 지독시리 혔는갑드마. 몸이 어찌 그리 허깨비여."
"타관 떠돔서 굶어서 축나고 병들어 곯고 어디 사람 사는 것이였겄어."
"좌우간 삼포댁 그년이 죽일 년이여. 그년이 쌩사람 잡아 묵었제."
"말이 났으니 말인디, 그년이 보기보담 음기가 승헌 년이었는갑서. 음기승헌 년덜언 꼭 서방잡아 묵는 법이여."
"어허, 몰르는 소리 허덜 말드라고. 음기 승헌 년이 어디 따로 있간디. 좆대감지 맛본 지집년
덜치고 그 구녕에 석달열흘만 헛바람 돌먼 다 환장허고 나스제. 지 연장 실허지 않음사 지집얼 어찌 믿어."
"어허, 더 크게 떠들소. 이 집 여자덜 다 귀 먹었응게."
"아서, 아서. 용철이 생각허먼 밉기넌 혀도 떠나뿐 사람 욕허덜 말어."
"허기넌 그려. 욕허먼 우리 입만 더러와지고 우리 입만 아프제."
"그나저나 용철이가 가부렀시니 우리가 다 땅얼 되찾게 되는 날에넌 용철이 땅언 어찌 되는 것이여?"
"아이고 참, 벨 새 날아가는 소리 다 허고 앉았네. 입관허기 전에 네가 용철이 손도장 떠놓제 그랬능가."
"아니, 머시가 으쩌고 으쩌!"
"짜아, 다덜 자리 잠 틔웁시다아. 아가 말헌 대로 우리 집 맹물얼 한 바가치썩 돌려야 쓰겄응게 자리 잠 틔웁시다아."
남상명이 술동이를 덕석 가운데다 놓았다. 뒤따라온 딸이 개다리소반을 술동이 옆에다 얌전하게 나란히 놓았다. 개다리소반에는 김치가 수북하게 담긴 사발과 된장에 풋고추가 푸짐하게 놓인 접시가 맞붙어 있었다.
"자아, 한 잔썩 돌림서 더우 풀드라고."
남상명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좌장인디 남샌보톰 한잔 쭈욱 허씨요."
"에이, 그럴 법이 어디 있간디. 세네 살 묵었어도 손님얼 우선으로 치는 우리덜 예절 몰라서 하는 소리여?"
남상명은 두 팔을 내저으며 물러나 앉았다. 남상명이 더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아 그들은 나이 순서대로 쪽박을 돌려나갔다. 나이 젊은 사람들은 미처 쪽박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김치를 집어먹는가 하면 된장에 풋고추를 찍기도 했다.
"지랄, 시상이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혀도 술맛언 꿀맛이고, 요리 둘러 앉은 게 시상 변허기 전하고 맘언 똑겉은디이."
누군가가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쉬었다.
"그려, 시상살이가 팍팍헐수록 술맛 밥맛언 더 달고 꼬신 것 아니등감. 우리찌리 살 적이 요순시절이었제."
누군가가 한숨을 받아 쉬었다.
"그나저나 요놈에 시상언 은제나 끝날 챔이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왜놈 농꾼덜언 늘어가고 우리덜 살기넌 자꼬 팍팍해져 가니 말이여."
"아이고, 요놈에 시상 끝장나기넌 우리 생전에 다 글렀네. 헛꿈 꾸덜 말고 잠 깨드라고."
"그런 각다분헌 소리 허덜말어. 무신 수가 나야제 요런 눔에 시상얼 한평상 살다가 꼬드라져?"
"무신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여 시방. 천지사방얼 뒤집어 까봐도 심쓸 사람덜이 어디가 있어야 무신 수가 나고 말고 허제. 잉, 자네가 의병장으로 나스먼 되겄구마."
"아니, 누구 화 질르는 것이여 시방!"
"아니제, 입이 가죽이 모지래서 뚫어 논 구녕이 아닝게 말얼 바로 헌 것인디, 바른말 듣고도 화나먼 내야제. 반편이 되는 것이야 나가알 바 아닝게."
"아니, 머시요!"
"어허 이 삶덜아, 그만들 두소. 막걸리 한잔에 설취해 쌈덜 나겄네."
남상명이 가로막고 들었다. 두 사람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런 식의 입씨름은 서로 볼만한 사람들끼리 모여앉으면 자주 벌어지곤 했다. 그 입씨름은 서로 의견이 달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마음도 같았고 생각도 같았다. 그러나 속이 상하다 보니까 서로의 말꼬리를 잡고 트집을 부리거나 화풀이를 하려고 들었다. 술은 이미 동이 나 있었다. 여기저기서 요란스럽게 트림을 해대고 있었다. 트림은 무엇을 흡족하게 먹어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트림은 술이 양에 다 차지 않는 아쉬움을 나타내는 건트림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틀어 올린 건트림을 따라 솟아오른 술 냄새를 맡으며 술이 모자라는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저어 머시냐, 우리가 요리 모여앉은 짐에 한 가지 의논헐 것이 있는디요."
남상명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제각기 앉음새를 고쳐앉았다.
"그것언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덜 땅 되찾을 일얼 앞으로도 심지게 해나가야 허는디, 그러자먼 앞장슬 대표럴 뽑아야 하겄다 그 말이오. 박샌이 옥살이럴 허실 적에는 나이 잠 많이 묵은 죄로 나가 어물어물 자리럴 맨들고 험서 지내온 것이야 다 아는 일 아니겄소. 근디 인자 박샌이 시상얼 떠부렀시니 나이만 묵었제 무식헌 나넌 아무 소양이 없게 되야부렀소. 우리덜 땅얼 되찾자면 문서럴 볼 지도 알고 꾸밀지도 알어야 허고, 토지조사국이니 면사무소니 드나듬서 따지고 싸우고 헐 말재주에 뱃보도 있어야 허요. 한말로 무식해서넌 안 된다 그것이오. 근디 우리덜 중에 한문자도 깨치고 말재주도 존 사람이 한 사람 있소. 그 사람이 바로 건식인디, 우리 일에 박건식이럴 대표로 뽑으먼 어쩌겄소?"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나넌 나이가 질로 밑인디. 남샌이 그냥 그대로 채럴 잡으씨요. 나넌 밑이서 시키는 일얼 헐 것인게요."
박건식이 완강한 태도로 말했다.
"어허 이 사람아, 요런 때 당자넌 나스는 것이 아니여. 알고 봉게 영 무식허시."
하봉수가 퉁을 놓았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샌 말이 맞으요. 당자넌 말헝 자격이 없응게 딴사람들이나 헐 말 있으면 허도록 허씨요."
남상명이 흐트러질지 모르는 분위기를 재빨리 바로잡고 있었다.
"더 말허고 자시고 헐 것 머 있겄소. 박건식이럴 대표로 뽑읍시다. 한문이야 허면 날 일자네 사람 인자나 어찌어찌 알아보는 우리에 비허면 건식이야 공자님 맹자님잉게 더 말허먼 잔소리제."
하봉수가 바람을 잡고 나섰다.
"와따, 무식허담서 유식헌 말언 혼자서 다 혀부네. 알고 봉게 영 유식허시."
누군가가 하봉수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저것 어떤 싱건 물건이여. 소금 독에 꺼꿀로 박았다가 빼야 쓰겄다."
하봉수가 발칵 화를 냈다.
"어허 그 사람 속도 참 넓네. 요런 때 안 웃어보면 우리가 언제 웃어본다고 화내고 그려."
누군가의 느릿한 말이었다.
"되았소, 딴사람덜 더 헐 말 없소?"
남상명이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럽시다, 박건식이로 정헙시다."
"그리 헙시다. 박샌이 냄긴 한얼 아덜이 푸는 것이 얼매나 좋소."
"이, 그렇기도 허구만. 효도도 허고 우리도 살리고, 양수겸장 아니라고."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동의를 표했다.
"되았소, 다덜 그리 생각헝게 박건식이럴 대표로 정허기로 허겄소. 오늘보톰 박건식이가 우리 일얼 해 나갈 대표요."
남상명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고는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손뼉을 쳤다.
"어이, 대표가 되았응게 한마디 허소."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또 싱건 소리 히서 웃어보잔 것이여?"
하봉수가 걸고 들었다.
"아, 못 웃어보고 죽은 귀신이 환생얼 혔간디? 앞으로 어찌 일얼 히서 땅얼 되찾게 헐랑가 들어보잔 것이제."
"뜸금없이 대표 맨글어놓고 또 뜸금없이 앞으로 헐 일 말해 보란 것언 무신 놈에 경우고 심뽀여. 열성으로 허겄다넌 말 말고 무신 말얼 더 허겄어."
"아, 자네가 활동사진 변사여?"
"이, 변사시. 어쩔랑가?"
이렇게 해서 박건식은 난처하고 쑥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을 모면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안겨진 대표라는 임무가 결코 싫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을 더욱 충실하게 지켜나갈 수있게 된 때문이었다. 박건식은 땅을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다지고 있었다.
"근디, 우리덜 역둔토 심사라는 것언 은제나 끝막음헌다는 것이여?"
"이 사람아, 그 잘난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담부텀이랑게 묻덜 말고 끈허니 기둘려. 땅이 썩기럴 혀, 내래앉기럴 혀."
"긍게 그놈에 토지조사사업이 끝날 날이 언제냐 말이여."
"아이고 시끄럽네, 총독부에 가서 물어보소. 그것이야 그놈덜이 즈그 좆 꼴리는 대로 헐 것잉게."
"씨부랄눔덜이 누가 이가나 보자 허고 역부러 질질 끌고 있는 것이제. 그 개자식덜 붕알얼 쫙쫙 훑어부러야 써!"
"그리 못허는 것도 빙신이제."
"아니여, 저 사람 말도 맞구만. 그놈덜이 역부러 심사럴 질질 끌어서 사람덜이 진이 빠지고 빠져서 정얼 띨 때꺼정 밀어 갈란다는 소문도 안 있드라고."
"맞구만요. 그놈덜이 그럴수록 우리넌 맘 강단지게 묵고 버팅겨야 헌당게요. 우리 아부지가 유언헌 말도 왜놈돌에 그런 심뽀럴 말씸허신 것 아니겄는 게라우. 자석 새끼덜얼 생각히서라도 맘덜 짱짱허니 묵어야 된단 게요."
박건식의 단호한 말이었다.
"어허, 우리 젊은 대표가 오지게 한마디 혔다. 그려, 대창맨치로 꼿꼿허고 창창하게 버티는 것이여. 즈그가 무신 염병 지랄얼 히도 이 땅 쥔언 우리덜잉게로."
하봉수가 힘 뻗치는 목소리로 모두의 기분을 북돋우려고 했다.
"하먼, 그래야제. 우리가 헐 일이 머시가 또 있겄어."
남상명이 하봉수의 말을 거들었다. 모두는 숙연하게 앉아있었다.
"참 별도 오지게넌 많네. 용철이넌 존 시상으로 갔는지 몰르겄다."
누군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몰르제, 구만리 장천얼 떠도는지도."
14. 두 개의 덫
"반짝 들어, 반짝!"
"그려, 그려, 더 심써어!"
"아니여, 아랫배에 더 심줘야제!"
"저러다 저것, 쌩똥 싸겄다."
"아, 암 말 말어. 넘 기운 쓰는디."
"쩌, 쩌, 쩌 다리가 휘청기린다!"
"밤일얼 너무 했는갑만!"
"어깨심 빼고 허리심 써, 허리!"
부두 앞 빈터를 가득 메운 남자들은 왁자지껄 소리쳐대며 들떠 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겹을 이루며 둘러선 가운데는 한 남자가 쌀가마 세 개를 어깨에 올린 채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남자의 두 다리는 쌀 세 가마를 힘겹게 밀어 올리며 반쯤 펴지고 있었다. 겹으로 둘러선 사람들은 그 남자가 기운을 쓰는 데 따라 제각기 소리치고 있었다.
"쩌것, 쩌것, 넘어간가!"
"저런, 저런, 안 되겄네에."
"어허, 아깝네. 쬐깨 모지래시!"
"아니여, 저것언 한참 모지래는 기운이여. 번쩍 일어나도 뛰다가 무너지고 주저앉는 판 아니여!"
그 남자는 무릎을 다 펴지 못하고 쌀가마들을 허물어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시뻘겋게 피가 몰려있는 그 남자의 얼굴에는 진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짜아- 얼렁 물러스고, 담 사람!"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가 쌀가마 더미 위에 올라서서 외쳤다. 아까 주저앉았던 남자가 비칠거리며 물러났고, 다른 남자가 팔을 휘둘러대며 앞으로 나섰다. 그 남자는 왼쪽 무릎을 땅에 대고 오른쪽 무릎을 꺾어 세워 앉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허벅지를 받치고 오른팔을 꺾어 오른손으로 엉치뼈를 받쳤다. 오른쪽 어깨에 쌀가마를 받을 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두 남자가 쌀가마 하나를 양쪽에서 가벼운 듯 들어 그 남자의 어깨에다 올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두 팔이 재빨리 움직여 쌀가마를 움켜잡았다. 두 개째의 쌀가마가 올려졌다. 세 개째의 쌀가마가 올려졌다.
"되았어, 얼렁 일어나!"
어깨 벌어진 남자가 명령했다. 쌀가마 세 개에 짓눌리듯 앉아 있던 남자가 끄응 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왁자지껄 소리치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건 무슨 씨름같이 기운내기를 해서 상을 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겹으로 둘러선 남자들은 구경꾼이 아니었다. 그건 1년에 한 차례, 쌀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추수철을 앞두고 기운 센 부두노동자를 뽑는 것이었다. 쌀 세 가마를 한꺼번에 어깨에 올리고 뛰어 배에 실을 수 있는 노동자는 <부두장사>라고 부르거나 <만보귀신>이라고 불렀다. 만보란 쌀 한 가마를 옮길 때마다 그 표시로 십장이 나눠주는 젓가락같이 생긴 나무쪽이었다. 그건 일종의 전표인데, 귀한 종이를 없애지 않고 또 오래 쓰기 위해서 나무를 얇게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 반들반들 손때가 묻은 만보 하나는 노임 1전을 표시하는 것으로 눈깔사탕 두 개 값이었다. 보통사람들이 한 행보에 만보 2개씩을 받는데 <부두장사>는 한 행보에 3개씩을 받아버리니 만보 잡아먹는 귀신이라는 별명이 안 붙을 수가 없었다. 농토를 빼앗기거나 소작을 못 구해 일거리를 찾아 부두로 몰려든 사람들에게는 그 1년에 한 차례 있는 부두장사 뽑기는 알음 없고 끈 없이도 고정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아무나 나락도 아닌 쌀 세 가마를 어깨에 올리고 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겹겹으로 둘러선 수십 명의 사람들 중에 많아야 서너 명이 뽑힐 뿐이었다. 농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쌀 두 가마는 예사로 짊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세 가마를 지는 기운은 따로 있었다. 그런 기운을 쓰는 사람은 동네에서도 장사로 이름나기 마련이고, 황소가 걸린 씨름판에서 뒤제비를 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들이었다. 그런데 부두 근방에서 <부두장사>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정하는 말이 따로 있었다. 철도공사장에서 기차 레일 하나를 어깨에 올리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나, 신작로공사에서 땅 다지는 데 쓰는 5백 근짜리 쇳덩어리를 무릎까지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쌀세 가마를 어깨에 올리고 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들 자신도 모르게 따르고 있는 일본노동판의 기준이었다. 철도공사와 신작로공사는 일본 세상이 되면서 총독부가 줄기차게 벌이고 있는 사업이었다. 토지조사사업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듯 철도공사장이나 신작로공사장에 한 번쯤 끌려나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운을 가름하는 기준마저도 어느새 일본공사판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걸 조선식으로 하자면 연자방아 윗돌을 들거나, 성난 황소의 뿔을 붙들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빈터에 바글거리고 있는 그들이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제각기 소리쳐대는 것은 그 사람을 응원해서가 아니었다.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며 스스로 기운을 돋우는 준비운동인 셈이었다. 그리고 뽑히지 못하고 물러난 사람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빈터에 몰려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기운이 얼마나 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지게 없이는 세 가마니를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포기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찌 어찌하면 세 가마니를 밀어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이 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요행수가 있을 리 없었다. 농사를 등지고 노동판 일거리를 찾아 군산으로 흘러들면서 벌써 끼니가 부실해지기 시작한 몸들이었던 것이다. 산판에서는 도끼질 잘하는 놈이 최고고, 노름판에서는 속임수 잘 쓰는 놈이 최고요, 서당에서는 글 잘 읽는 놈이 최고라고 했다. 부두노동판에서는 쌀짐 많이 지는 놈이 최고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제일 기운 잘 쓰는 축이 세 가마니들짜리들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두 가마니짜리들이었다. 한 가마니짜리는 약골로 아예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두 가마니를 지다가 어디 몸이라도 아파 한 가마니를 지게 되면 그날로 쫓겨나야 했다. 십장과 절친한 경우에만 몸이 나을 때까지 다른 날품팔이로 바꿔치기해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 인정사정없는 행위는 당연한 것처럼 행해졌고 또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전체작업량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개인 사정은 가차 없이 묵살되고 말았다. 물론 다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당을 계산하는 만보가 주어질 리 없었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서너 네댓 명이 작이 되어 사람들은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침울하고 맥빠져 보였다. 나락을 쪼는 참새떼들이 돌팔매질에 날아가 보았자 그 옆 논이듯, 그들은 흩어져도 부두 근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본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날품 팔 거리는 군산지역보다 한결 나았던 것이다.
"참, 기운도 타고나야 허는 것인디, 가난헌 팔자에 기운도 쓰덜 못허니 팔자 피기넌 다 글렀제."
"속상해허덜 말드라고. 장사 기운 못 타고난 사람덜이 훨씬 많은 게."
"그나저나 여그서 떠돌아갖고넌 입에 풀칠도 못허게 생겼는디. 사람덜언 자꼬 몰려들고 말이여."
"그에 말이시. 군산 좋다는 말도 인자 헛짜오구만."
네댓 사람이 모여서 근심스럽게 나누는 이야기였다.
"근디, 목포넌 어쩔랑고? 듣자닝게 거그도 여그만치 번창헌다든디."
"거그라고 사람 없다등가. 소문난 잔치 가보나 마나제."
"그려, 거그말고 멀리 보는 것이 어찐가? 요새 또 새로 철길이 뚫려가기가 아조 편해졌다든디."
"무신 소리 허는 것이여?"
"아, 만주 땅 말허는 것 아닝가. 여그서 이리 한심헌 꼬라지로 사느니 땅 찾아가서 농사 짓는것이 낫덜 안컸냔 말이제."
"글씨, 만주에 가먼 농새질 땅이 얼매든지 널렸다는 소문이기넌 헌디, 정작 뜨는 사람덜언 얼매 없덜 안혀?"
"긍게 넘덜 먼처 가잔 것이제.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드라고 늦어지먼 존 땅다 없어질 것 아니라고."
"이, 그 말이 맞소. 우리 작은 아부지가 작년에 갔는디 우리보고도 얼렁 오라고 야단이오. 더 늦어지먼 존 땅 다 없어진다고. 거그넌 금 긋는 것이 내 땅이랑게 우리 집도 곧 뜰 참이오. 요분에 경원선이란 철도가 새로 생겨서 만주 동쪽으로도 가기가 아조 편해졌소."
그들의 말에 끼어든 것은 뜻밖에도 서무룡이었다.
"그려요? 거그가 참말로 임자 없는 땅이 그리 많다고 그럽디여?"
"아, 두말 허먼 잔소리요. 임자 없는 땅이 여그 징게맹갱 들판 열 곱이고 시무곱이 넘게 아시무락헝게 지 맘 꼴리는 대로금 긋는다고 헙디다. 허고, 땅이 무지허게 걸어서 거름 하나또 안히도 농새가 기막히게 잘된답디다. 나도 여그서 지랄발광 그만 허고 만주 천지에 가서 부자로 살기로 혔소."
"거그가어디다요?"
서무룡은 주춤했다. 미처 대비하지 않은 물음이었던 것이다.
"이, 나가 듣고도 까빡 히부렀는디, 어디고 간에 만주넌 다 그렇다고 헙디다."
서무룡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툭 불거진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여유만만하게 얼버무려 넘기고 있었다.
"보소, 가볼 만허덜 안컸어? 농새 지 묵든 사람덜언 농새 지 묵고 살어야제. 저 억지 기운 써감서 등짐질히서 은제꺼정 살 것잉가. 저것이 다 지살 녹혀 묵는 골병드는 짓거리제."
한 사람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몰르겄네, 지 아무리 널른 땅 있다 혀도 낯설고 물 설은 타국인디 무신 사는 맛이 있겄어. 나야 여그서 정 못 살겄으먼 산속으로 화전얼 일구로 들어가먼 갔제 만주로넌 안 갈랑마."
한 사람이 고개를 내저었다. 서무룡은 불끈 성질이 솟는 것을 참아냈다.
"땅이 널르고 거름도 안 허고 농새럴 지먼 괜찮허기넌 헌디.청국 말도 몰름서 고적히서 살아질랑가?"
다른 사람이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그 땅이 얼매나 거냐먼 말이요 이, 나락얼 뿌리먼 거름 한 분도 안 허고 추수럴 허는디, 쌀 알갱이 크기가 거짓말 하나또 안 보태고 여그 것 곱쟁이가 된다고 헙디다. 허고, 우리 조선 사람덜찌리 동네럴 모툼서 산 게 청국말언 쓸 디도 없고, 고적허기는 새로 재미지게만 산답디다."
만주 땅의 중국 사람들은 아예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서무룡이는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신바람 나게 거짓말을 해대고 있었다.
"그 보소. 우리 다 한꾸미로 짜고 가서 한 시상 새로 살아보는 것이 어쩌겄능가?"
"그러기만 험사 나쁠 것이야 없는디. 원체로 멀리 타국으로 가는 것잉게 쬐깨 더 생각해 봐야겄제."
"참, 아까 새로 난 철길 이얘기럴 허등마, 고것이 어디서보톰 어디로 가는 것이다요?"
만주로 가는 것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남자가 서무룡이에게 물었다.
"이, 고것이 경원선이라고 경성서 함경도 원산꺼정 논 것이오. 고것얼 타먼 두만강얼 빨딱 넘어 만주 땅으로 가게 되야 있소. 긍게로 우리가 여그서 가자면 군산역서 기차럴 타고 경성에 가고, 경성서 노리까이히서 앉어만 있으먼 만주 땅이단 밀이오. 얼매나 편허고 좋으요. 일본 사람덜덕에 걸으면 달포 걸릴 질얼 이틀이먼 가부요."
서무룡이는 또 자기도 모르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원산이 두만강가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듣는 사람들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의 거짓말은 그대로 참말이 되고 말았다.
"치이, 돈 안 받고 태워주간디 일본 놈덜 덕이여? 돈 없는 사람덜이야 죽으나 사나 걸어서 가야제 왜놈덜이 기차 발판이나 밟아보게 허간디."
한 사람이 콧방귀를 뀌었다. 서무룡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말끝마다 일본놈들 왜놈들 하는 것에 정말 성질이 솟구쳤던 것이다.
"에이, 그리 말허먼 쓰겄소. 비싼 물자 딜여다가 철길 놔서 천리 길도 하로에 빨르고 편허니 댕기게 히준 것얼 고마워해야제. 거그다가 또 공짜로 타기럴 마래먼 말이 안되덜 않소?"
서무룡은 감정을 감추며 자기의 임무에 충실하려고 은근한 설득조로 말했다.
"고마울 것 에진간이 없든 갑소. 호랭이 퇴깽이 생각허기제."
그 남자가 쏴질렀다. 서무룡은 성질이 곤두서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다시 성질을 꾹 누르며 배운 대로 말을 꺼냈다.
"그 경원선이란 것이 말이요 이, 여그 호남선허고 달라서 첩첩산중얼 뚫어감서 논 것이다요. 근디 그것얼 3년 만에 놔부렀소. 그리 빨르게 공사럴 끝낸 것이 순전허게 조선 사람덜 편허니 살리자고 그렸답디다. 근디도 안 고마우요?"
"헹, 조선 사람덜얼 끌어다가 얼매나 지독허니 왈기고 몰아 때랬으먼 첩첩산중 에로운 공사럴 그리 빨르게 끝냈겄소."
그 남자는 정곡을 찌르고 들었다.
"어허, 이 사람 또 시작이시. 누가 들으먼 어쩔라고 그리 입바른 소리여."
옆의 남자가 눈을 흘기며 혀를 찼다.
‘온냐, 나가 잘 듣고 기시다. 니놈언 짜운 맛얼 뵈어야 정다실 놈이다.’
서무룡은 그 입 방정맞게 놀리는 남자의 얼굴을 눈에 새기며 마음을 공글렸다. 그건 바로 자신이 찾고 있는 종류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좌우간에 만주로 갈 맘이 있음사 하로라도 빨르게 뜨는 것이 졸 것이오. 나야 메칠 있다 갈 참잉게."
서무룡은이렇게 말하며 슬슬 그 자리를 떴다. 그는 만족감에 차서 발길을 서둘렀다. 오늘의 성과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할 만했다. 철도를 가설한 일본의 공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선전함과 동시에 만주가 살기 좋으니까 어서들 뜨라고 아주 그럴싸하게 바람을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불평불만 분자까지 색출해내게 되었으니 임무 수행을 떳떳하게 보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병가담자 · 부두노동자 · 선동자 · 불평불만 분자색출은 서무룡에게 내려진 변함없는 지시사항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는 새로운 지시를 받게 되었다. 대일본제국은 조선사람들을 편하게 살게 하고 개명시켜 주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들여 호남선에 이어 또 경원선을 개통시켰다는 사실을 일반인들에게 선전함과 동시에 그 기차를 타고 살기 좋은 만주로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유포시키라는 것이었다. 서무룡이는 경원선이라는 철도가 어디에 놓인 것인지 알지를 못했다. 또, 만주 땅이 그렇게 살기 좋은지 어떤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교육받은 대로 사람들에게 철도를 놓아준 일본의 은공을 선전해댔고, 살기 좋은 만주로 떠나자고 충동질해댔다. 서무룡은 그런 말들을 되풀이할수록 정말 일본의 은공이 크고 만주 땅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지시는 서무룡이에게만 내려질 리가 없었다. 서무룡이 같은 사람들을 조직화해서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철도가 새로 개통될 때마다 그것을 일본이 조선사람들을 위해 베푼 은공으로 역선전함으로써 철도공사에서 야기될 온갖 원성을 덮어 무마함과 아울러 철도를 가설하는 자기네들의 목적을 철저하게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주로 떠나도록 유혹하고 충동질해대는 것은 토지조사사업과 일본인들의 이주로 발생하게 된 조선농민들의 실업 상태를 해결하고 그 불만요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족들을 분열시켜 힘을 약하게 만들고 지배를 수월하게 하려는 이중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해가 군산앞바다에 현란한 붉은 색조의 낙조를 드리웠다.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인 낙조는 하늘의 노을보다도 한층 황홀한 빛의 치였다. 바다에 낙조가 지면서 부두의 하루 일도 마감되어 가고 있었다. 부두의 분주함이 가라앉아 가면 날품팔이들도 빈 지게를 걸머지고 하나둘씩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서무룡은 어느 지게꾼의 뒤를 멀찍이서 밟아가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 지게를 걸친 지게꾼은 다 헐어빠진 짚신을 칙칙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성님, 어디가시요?"
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사내가 건들거리며 서무룡이를 아는 체했다. 그러나 서무룡이는 앞에 정신을 파느라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무룡이 성님, 귀 먹었소!"
사내의 목청 높인 소리에 서무룡이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성님, 나요 나. 무신 생각 허니라고 그리 정신이 없소. 또 그 여자 생각허니라고 그러요?"
"사내가 한쪽 다리를 까딱거리며 비식비식 웃었다.
"이, 니여? 나 시방 바쁜 게 이따가 보자."
서무룡은 사내를 힐끗 보고는 돌아섰다.
"나 째보 선창에 가 있을라요이."
사내의 말에 서무룡은 손만 흔들었다.
"참 좆겉이 사람 본치만치 허네. 저것도 주먹만 씨제 대그빡언 멍청이여. 아무리 낯짝이 반반허다고 명색이 총각 놈이 새끼꺼정 달린 헌 지집년 헌티 미치고 환장헐 것이 머시여."
사내는 서무룡을 꼬나보며 투덜거렸다. 서무룡은 뒤에서 자기 욕을 하는 것도 모르고 지게꾼의 뒤만 쫓고 있었다.
"저놈이 의병질 해묵던 놈인지도 몰르제. 말이 아조 톡톡 쏘는 것이 까시가 백히고 꽤나 똑똑허든디. 저런 것덜이 개씹에 보리알 까디끼껴 있으면 나가 허는 일이 다 도로아미타불이여. 저런 놈언 삭신이 노골노골 해지게 맛얼 뵈어야 못된 버르장머릴 고칠 것이여."
서무룡은 아까 자기의 말마다 초를 치고 재를 뿌리고 나섰던 것에 새롭게 성질이 돋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게꾼은 번화가를 벗어나 역전을 지나고 변두리로 접어들어서도 한참을 걸어갔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움막동네로 가는 길이었다. 지게꾼은 어느 싸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사 든 것은 잡곡한 됫박이었다. 서무룡이는 멀찍이 떨어져 궐련을 피우며 지게꾼의 뒷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서무룡은 지게꾼의 움막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그의 걸음은 뛰듯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빠른 걸음에 맞추어 일본 군가를 휘파람으로 불어대고 있었다.
"원, 초라니 방정도. 해가 넘어가는디 비얌 나오라고 저 지랄잉가. 젊은 것덜이 왜논덜헌티 배와도 똑 못된 것만 배와갖고. 이잉, 이래저래 시상언 망쪼여, 쯧쯧쯧쯧……"
어떤 여자 노인네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서무룡이에게 눈을 희게 흘겨대며 마구 혀를 차댔다. 양쪽 끝을 일부러 비비대 틀어 올리는 팔자 수염이 그렇듯 휘파람을 부는 것도 일대 유행 풍조였다. 팔자 수염이 나이 많은 축들이 따르는 유행이라면 휘파람을 부는 것은 젊은 축들이 흉내 내는 유행이었다. 한 손에 물건을 받쳐 든 채 신나게 휘파람을 불어대며 자전거를 잽싸게 몰아가는 일본 배달원들의 모습은 더없이 멋들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휘파람으로 온갖 노래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희한하고 괴상한 소리들은 특히 잘 내는 것이 일본 뱃사람들이었다. 돈 잘 쓰고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젊은 뱃사람들이 군산의 번화가를 휘젓고 다니며 여자들을 향해 휘익휙 불어대는 괴상한 휘파람 소리는 건달패들의 부러움을 살 만도 했다. 그런데 조선사람들, 특히 노인네들은 휘파람 소리 울리는 것을 딱 질색했다. 휘파람을 아침에 불면 재수가 없다고 질색이었고, 저녁 때 불면 뱀이 나온다고 질색이었고, 밤에 불면 귀신을 불러들인다고 질색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가관인 것은 팔자 수염을 기른 늙수그레한 사람이 휘파람을 불어대는 젊은 사람을 못마땅해하며 혀를 차거나 꾸짖는 일이었다. 서무룡은 흥겨운 기분으로 역 앞에 이르렀다. 보고를 하러 갈까 어쩔까 망설였다, 그러나 집까지 다 알아두었으니 더 서두를 것이 없다 싶었다. 내일 아침에 보고를 해도 잘못될 일이 없었다. 그는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더 급한 자기 일부터 보기로 했다. 서무룡은 역 건물을 바라보았다. 평양역과 똑같은 모양으로 생겼다는 지붕이 2층으로 된 건물은 언제 보아도 근사하고 멋진 신식이었다. 저렇게 멋진 건물 안에서 테 둥근 모자를 쓰고 활개 치는 역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갔다. 그러나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역원들 중에 조선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조선사람이 있어보았자 심부름꾼들뿐이었다.
"네가 언제까지고 이런 일만 하넌 건 아니야. 열심히 공을 세워나가면 정식으로 순사든 헌병이든 시켜줄 수가 있어. 출세시켜 주겠단 말야. 그러니까 열성으로 하라구."
서무룡은 잠시 역원이 되고 싶어 했던 생각을 지웠다. 역원보다야 순사나 헌병이 훨씬 나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권세를 부리기로나 외모가 멋지기로나 역원은 댈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는 순사도 되고 헌병도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다. 서무룡은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켜며 역마당을 가로질렀다. 그 마당 양쪽으로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많은 상점들중에 조선사람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역을 만들면서 일본사람들에게만 상점을 허가한 것이었다. 서무룡은 과자점부터 찾아갔다. 과자며 사탕을 가지가지로 푸짐하게 사들었다. 과자점을 나선 서무룡은 잠시 망설였다. 어른 것을 사야 되겠는데 마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늘은 옷감을 한 감 떠다 줄까……그러나 좋아할 것 같지가 않았다. 너무 속보이지 말고 고깃근이나 사 가자고 마음 정했다. 쇠고기를 사든 서무룡은 발길을 빨리했다. 저녁밥을 하기 전에 당도해서 쇠고기를 해먹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저녁을 해 먹어 버린 다음에 쇠고기를 내놓아보았자 원님 행차 뒤에 나팔 불기였다. 그리고, 저녁을 짓기 전에 빨리 가서 어물어물 뭉그적거리다가 밥을 얻어먹어 볼까 하는 속셈도 없지 않았다. 밥을 얻어먹어 볼 생각을 하자 또 가슴이 이상야릇한 느낌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화끈거리면서도 화아한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우면서도 어지러운 것 같은 그 묘한 두근거림은 긴장하거나 두려울 때 느끼는 두근거림과는 달랐다. 그 달콤한 것 같기도 하고 향긋한 것 같기도 한 두근거림은 수국이 때와 똑같았다. 전신이 간질간질한 것도 같고 어딘가가 스멀스멀한 것 같은 기분에 들뜨게 하는 그 묘한 두근거림에 휘둘리며 날마다 끌리듯 찾아간 것이 방대근이네 움막이었다. 그 움막에 가면 숨이 막히도록 진한 향기를 내뿜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곱고 고운 얼굴에 딱 어울리도록 이름이 너무나 예쁜 그 처녀는 수국이었다. 대근이의 병문안은 겉치레일 뿐이었다. 수국이를 하루라도 안 보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만 끝나면 매일 허겁지겁 움막으로 달려가고는 했던 것이다. 그때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것이 그 곱고 예쁘고 예쁜 수국이가 그리도 볼품없고 어둠침침하고 누추한 움막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서무룡이는 수국이를 놓고 두 가지 작심을 했다. 첫째,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각시를 삼는다. 둘째, 뼈가 녹아내리도록 일을 해서 고운 옷 입히고 좋은 집에서 호강시킨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수국이네 식구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것이다. 그때의 허망하고 기막혔던 심정이야말로 어찌 형언할 수가 없었다.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남자가 여자때문에 왜 죽는지도 알았고, 왜 우는지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살고 싶지가 않았고, 잠을 자나 잠을 깨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수국이 얼굴뿐이었다.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꼭 미칠 것만 같았다.
"손샌, 요것이 어칙게 된 일이다요. 어디로 갔는지 지발 일러주씨요. 나 미치고 폴딱폴딱 뛰다 죽겄소."
가슴을 쥐어 뜯기도 하고 치기도 하면서 손판석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아, 나도 몰라 미치겄단 말이시. 나도 소식 오기럴 기둘리는 판잉게 자네도 나허고 항께 기둘리세. 자네 맘이 그리 뜨끈뜨끈허먼 꼭 다시 만낼 것이여. 인연이 찔긴 것잉게."
손판석의 이 말을 믿었다. 믿으니까 위안이 되기도 했다. 손판석의 옆에만 붙어 있으면 수국이네와 언젠가 소식이 닿을 것이 분명했다. 몸이 성한 사람들도 하늘의 별 따기인 십장 자리를 다리가 불구인 손판석에게 돌아가게 하려고 몸살을 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국이의 소식은 감감한 채로 날이 가고 해가 바뀌었다. 수국이에 대한 그리움은 절절히 남아 있었지만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심정은 차츰차츰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꿈에서도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손판석이 관리하는 창고에서 수국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소스라쳐 놀라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얼굴을 바로 돌린 여자는 수국이가 아니었다. 수국이와 너무나 많이 닮은 여자일 뿐이었다.
"그려, 수국이 큰언니 보름이여. 올 디 갈디 없어져 날 찾어왔는디 어찌겄어."
손판석의 무덤덤한 대답이었다.
"수국이넌 어디 산다등 게라?"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이 사람아, 수국이가 어디 사는지 알먼 글로 찾어갔제 딴 넘인 날 찾아왔겄능가? 안 그려?"
그 반문 앞에서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일은 또 벌어졌다. 수국이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던 마음이 그전과 똑같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야릇한 가슴 두근거림도 새로 시작되었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손판석네 창고로 걸음 하게 되었다. 손판석의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돌려지고는 했다. 대근이네 움막에서 어떤 힘이 끌어당기는 것 같았던 것처럼 창고로 가는 것도 무슨 힘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침에는 나오지 않았다 싶어 가보았고, 점심때는 혹시 밥을 굶지 않았나 싶어 발길이 돌려졌고, 저녁때는 얼마나 고단할까 싶어 걸음 하게 되었다. 갈 때마다 마음은 다 다른데도 정작 그 여자에게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말을 걸기는커녕 멀찍이서 손판석이와 알맹이 없는 말을 지껄이며 힐끔힐끔 훔쳐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고 돌아서도 마음은 흡족하고 편안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보름을 넘기게 되면서 그 그림자같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얌전한 여자와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얼굴이 익으면서 그 여자는 살포시 눈인사를 짓고는 했다. 그 예쁘고 다소곳한 모습이 사람 환장하게 했다. 수국이 같으면서도 수국이 같지 않은 그 모습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고 벌떡거리게 했다. 그 여자의 옆모습은 영락없는 수국이인데 똑바로 보면 수국이와는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여자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도 날이 갈수록 예뻐지고 고와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눈에 무엇이 씌어 그렇게 보이나 싶어 눈을 문지르고 또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잘못 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아, 그것이야 당연지사 아니라고. 무주 산골서 농새짐서 낯 끄실리고 살다가 여그 창고 안이서 땡볕 피허고 생바람 피허고 헝게 본래 낯색이 나는 것 아니겄어?"
서너 달이 지나서 손판석이가 답답하다는 듯 한 말이었다. 한 달을 넘기면서도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했다. 수국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슨 말을 한마디라도 걸려고 하면 가슴부터 벌떡거리며 입이 얼어붙어 버렸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를 한두 번 다루어본 것이 아니었다. 남달리 말재주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를 다루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어떤 술자리에서고 콧대 세우는 계집을 남들 먼저 꺾지 못한 적이 없었다. 말로 해서 안 되면 완력을 써서라도 손아귀에 넣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이지 말 한마디 걸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술집 계집과 여염집 여자의 차이라는 것만으로는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사람은 손판석이었다. 그렇게 날이 날마다 뻔질나게 창고를 드나들어 한 달을 넘기고 두 달을 넘기면 장승도 낌새를 눈치챌 판이었다. 그런데 손판석은 무덤덤한 얼굴로 눈만 껌벅거리고, 뚱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며 엉뚱한 말만 내놓지 전혀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손판석이 무슨 말이라도 물어오면 그 기회를 빌미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매달리려는 참이었던 것이다.
"손샌, 나가 생쥐 새끼도 아니겄고 날이 날마동 여그 창고에 오는 것이 요상허도 안 허요?“
참다 참다 못해 어느 날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머시가 요상혀? 수국이보고 잡은 맘 보름이 봄스로 얼르는 것 아니여?"
손판석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그러나 아무 막힘 없이 말했다.
"아니, 눈치 다 알고 있었구만이라?"
"차암, 나럴 벽창호로 아는 것이여?"
"근디 어째서 이적지 말 한마디 없이 몰른 칙끼 허고 있었소?"
"무신 소리여? 알은 척 헐 일이 따로있제. 넘 애간장 타는 일인디."
"손샌이 눈치가 있기넌 헌디, 근디……헛짚었소."
"헛짚어? 무신 소리당가?"
"나 중매 잠 서주씨요."
"머시여? 누구허고?"
"누구넌 누구겄소, 보름이제"
"아니, 자네 넋 나갔능가? 자네넌 총각이고 보름이넌 애기꺼정 딸린 과부여."
"나도 총각 아닌 게 걱정 마씨요."
"그 무신 생뚱헌 소리여?"
"나가 장개만 안 들었제 그간에 여자럴 본 것이 수도 없소. 헌 것 되기로 말허자먼 나가 더 헌 것이오."
"어허 이사람, 요새 시상에 안 그런 총각이 어딨어. 그것이 어디 남자허고 여자허고 똑같간디? 명색이 총각이먼 총각인디, 총각이 과부 장개럴 가는 법이 시상에 어딨어. 그것도 애기꺼정 딸린 과부가 아니냔 말이여."
"아, 당자가 좋다는디 법이고 말고가 무신 소양 있다요. 얼렁 중매나 야물게 스씨요."
"이 사람, 완력 쓰디끼 순 억지시. 자네허고 나이도 택도 없이 많이 차이 진단 말이시."
"와따, 손샌언 어찌 그리 일이 안 되는 쪽으로만 따지고 그요. 나가 따져봉게 다섯 살 차이지는디, 고것이 머시가 많으요? 열 살 신랑이 열일곱 살 신부 얻는 것보담 작제라. 양반덜이 다 그리 나이 차이지게 혼인 허는디, 나도 양반 잠 되고 잡소."
"자네 이 없응게 잇몸이다 그것이여?"
"야아? 무신 소리다요?"
"아, 수국이허고 맺어지기 틀렸응게 보름이라도 꿰차자 그것 아니냔 말이여."
"어, 어, 아닌디요, 고것이 아니어라. 수국이허고넌 또 달르게 보름이가 사람 환장허게 헌당게요."
"글먼, 보름이허고 혼인혔다가 이삼 년 후에 수국이럴 만내게 되먼 어쩔 챔이여?"
여기서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네 맘언 알겄네. 헌디, 보름이 맘이 어쩐 지도 알어야 헐 것 아니라고. 무신 말인고 허니, 보름이가 시아부님 상 당헌 지가 얼매 안 되네. 보름이가 재가헐 맘이 있는지 없는지가 질로 중헌 것이고, 재가헐 맘이 있다 혀도 시아부님 3년 상 전에야 안 되는 것 아니냔 말이시. 아덜 자식이 없으면 몰라도 그 집 핏줄이 있응게. 뜸 안 든 밥 못 묵는 것잉게 뜸 딜임서 기둘리소. 나도 옆이서 거들 것잉게."
손판석의 이 말에 더 밀어댈 말이 없었다. 완력으로 될 일이 아닌데 참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서너 달이 지나면서 서로 간에 한두 마디씩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슬슬 뜸 들이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들 삼봉이의 과자를 조금씩 사서 내밀었다. 보름이가 받지 않으려고 할수록 점잖게 처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손판석은 서무룡이가 바라는 바를 전혀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밀하게 방해를 하고 있었다.
"나도 털끝맨치 내색얼 안 허고 모름 칙끼 험서 지내네만 실은 그놈이 경찰서고 헌병대 앞잽이시. 사람이 생각이 짧음서 주먹이 앞스는 것이 탈이기넌 해도 인정도 있고 사내답기도 허제. 근디 언제보톰 그 못된 왜놈덜 앞잽이 놀이럴 시작혔는지 모를 일이시. 요새 겉은 시상서 질로 못된 짓이 그 짓거리 아니겄어. 알 것언 미리 다 알아두라고 허는 말이시."
손판석은 보름이에게 귀띔했다.
"거그 더 못 나댕이겄구만이라."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어찌할 줄 모르며 보름이가 내놓은 말이었다. 손판석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구데기 무서와 장 못 담그간디. 거그 안 나댕긴다고 그놈 맘이 어디 달라져야 말이제. 맘 더 다급허니 묵고 무신 일 저질를란 지도 몰릉게 그저 아무 표 내지 말고 간격 둬감시로 나댕기는 것이 더 낫구만. 나가 옆이서 지키고 있응게 아무 걱정 말고."
"하먼, 그것이 낫제. 거그 그만두먼 그놈 성질에 눈에 불 쓰고 나댐서 일 저질를 것이여. 남자가 여자 좋다고 뎀비는디 누가 가로막고 나슬 수도 없는 일이고. 거그 그만두는 것언, 워리 워리 얼렁 와서 나 물어라, 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 글고 자네 앞으로 살아갈 앞날도 막막해지는 것이고."
손판석의 아내는 보다 노골적으로 말을 거들고 나섰다.
"야아, 그리 허겄구만이라."
보름이는 떨리는 손으로 잠든 아들의 손을 감싸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서무룡이가 앞잡이라는 것도, 자신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도 뒷전이었다. 자신에게는 그저 아들의 앞날이 소중할 뿐이었다. 서무룡은 양쪽에 들고 있던 과자봉지와 소고기 봉지를 한쪽으로 모아들었다. 그리고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보름이네 집이 가까워오자 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뜨거워지려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름이네 집을 찾아갈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보름이와 맞닥뜨리게 되면 입이 딱 얼어붙어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보름이네 집에 들어서기 전까지 수없이 연습을 했는데도 그 말은 가슴속에서만 들끓을 뿐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사실 가슴에서 들끓는 말은 여러 가지였지만 막상 말로 하기는 그 어느 것도 마땅하지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나 당신헌티 장개들고 잡으요. 나허고 혼인헙시다. 나 각시가 되야주씨요. 나랑 삽시다. 나가 당신얼 좋아허요. 나 당신 없이넌 못 살겄소. 우리 한집서 삽시다. 나가 삼봉이 아부지 노릇 허고 잡으요."
이런 말들은 보름이를 만나기 전에는 다 그럴듯했다. 그러나 보름이를 대하기만 하면 하나같이 어색하고 쑥스러워 어느 것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서무룡이는 깊이 들어 마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또 수국이와 보름이를 비교해 보았다. 누가 더 예쁘다고 할 수 없도록 잘생긴 인물이었다. 다만 그 느낌이 다르고 차이가 날 뿐이었다. 수국이의 얼굴이 대낮 같다면 보름이의 얼굴은 달밤 같았다. 수국이의 얼굴이 밝게 생글거린다면 보름이의 얼굴은 슬픈 듯 잔잔했다. 수국이는 봄에 활짝 핀 작약이었고 보름이는 동지섣달에 새초롬하게 핀 동박꽃이었다. 보름이와 살다가 이삼 년 후에 수국이를 만나게 되면 어쩔 것이냐고 손판석이 물었을 때 대답할 말이 없어서 대답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속으로는 둘 다 데리고 살아야지 별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손판석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방해물이었다. 손판석이만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거나 진작에 결판을 냈을 것이었다. 처녀도 덮치면 인자인데 그까짓 과부쯤 덮치면 더 볼 것이 없었다. 몇 번씩 그런 마음이 동했지만 손판석을 생각해서 참아내고는 했었다. 서무룡은 담뱃불을 끄며 낮춤한 토담 너머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보름이는 보이지 않고 삼봉이가 어떤 아이와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삼봉이가 집에 있는 것은 보름이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는 표시였다. 보름이는 아들을 손판석이네에 맡기고 일을 나갔다가 저녁때 데려오는 것이었다. 보름이가 손판석이네와 한집에서 같이 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셋방살이를 하는 것이 못내 신경이 거슬리고 마땅찮았다. 셋방살이만 하지 않았더라도 벌써 마음 먹은대로 일을 해치웠을지 몰랐다. 초가삼간의 셋방살이는 주인네와 한방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삼봉아, 아자씨 왔다아."
서무룡은 언제나처럼 점잖은 목소리를 내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야아, 아저씨다아!"
삼봉이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이, 그려. 아자씨가 꽈자 사왔다."
서무룡은 정다운 웃음을 환히 지으며 뛰어오는 아이 앞에 봉지를 쑥 내밀었다.
"와아, 우리 아저씨 질이다아."
삼봉이는 신바람 나게 외치며 큼직한 과자봉지를 받아 앉았다. 함께 널던 아이가 흙 묻은 손가락을 입에 물며 제 동무를 부러운 눈길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엄니이이, 아자씨 왔네 아자씨이."
삼봉이는 길 잘 든 심부름꾼처럼 제가 할 일을 먼저 알아서 했다. 서무룡을 올 때마다 과자를 사다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보름이가 거적을 쳐놓은 부엌에서 머릿수건을 벗으며 나왔다.
"저어, 그냥 지내가는 질이 있어서……"
서무룡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요런 등신 팔푼이겉은 놈아, 머시가 맨날 지내가는 질이여. 니가 보고 잡아 왔다 허고 탁 까놓덜 못 허고. 니가 팔다리가 빙신이냐, 좆대감지가 빙신이냐.’
그는 스스로가 병신스러워 욕을 퍼대고 있었다.
"멀라고 또 과자럴 저리……"
고개를 숙임막해서 아들을 옆 눈길로 보고 있는 보름이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냉기와 함께 서려 있었다.
"아그덜이야 군 입맛얼 다셔야 쑥쑥 잘 크제라."
서무룡은 언제나 하는 말을 또 되씹고는,
"저어, 괴기 쬐깨 샀는디요……"
그는 어물거리며 쇠고기 봉지를 내밀었다.
"아니구만이라……"
보름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고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그 차가운 목소리처럼 보름이의 두 손은 앞으로 모아져 맞잡혀 있었다.
"쬐깨 샀는디, 얼렁 받으씨요."
서무룡은 봉지를 보름이의 마주 잡은 손 앞으로 더 내밀었다.
"아니랑게라……"
보름이는 좀 더 싸늘해진 소리로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옆 얼굴이 약간 찡그려졌다.
‘하이고, 저 포로록 성질내는 것 잠 보소. 저 까시가 돋친께 더 이쁘세. 하이고메, 저것얼 확 품고 뽈아대먼 단맛이 쪽쪽 뽈리겄네.’
"어찌라고 그요?"
서무룡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봉지를 더 내밀었다.
"그리 안 해도 다 묵고 산 게 그냥 가지가시오."
너무 싸늘하면서도 또렷해진 말이었다.
‘아니, 머시여! 요것얼 팍 패대기럴 쳐뿌러야 맛얼 알겄냐. 사람얼 멀로 보고 하는 소리여 시방.’
서무룡은 성질이 치솟았다.
‘정말 봉지를 패대기쳐서 마구 짓밟아버리고 싶었다. 그냥 가져가라니……’
봉지를 내밀고있는 자신의 손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어금니를 맞물었다. 여기서 일을 망쳐버리기는 너무나 곱고 탐나는 꽃이었다.
‘그려, 니가 찔기면 얼매나 찔기능가 보자. 우선에 나가 빙신 되기로 허제. 니가 남자였으면 당장 대골통이 깨졌을 것이고, 니가 딴 년이었으면 그냥 낯짝이 뭉크러졌을 것이여.’
"삼봉아, 요것 괴기다."
서무룡은 과자봉지를 싸안은 채 사탕을 우물거리고 있는 삼봉이 앞으로 걸어가 봉지를 내밀었다.
"이? 괴기?"
삼봉이가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를 닮아 잘생긴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
"그려, 괴기여. 엄니보고 맛나게 해도라고 혀. 그래야 얼렁얼렁 크제."
"히히, 우리 아자씨가 질이여."
아이는 어깨춤을 추었다. 서무룡이는 이 귀여운 것이 자기 아들이 되는 것은 더욱 좋다고 얼핏 생각했다.
"인자 아자씨 갈란다."
서무룡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름이는 그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몸에 손이 닿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이, 아자씨 또 와아."
쇠고기 봉지까지 안은 삼봉이가 맑은 소리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서무룡이는 고개를 떨군 채 사립을 나섰다. 아이하고 노는 척하며 어물어물 뭉그적거리다가 저녁밥을 얻어 먹어볼까 했던 욕심을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보름이의 냉랭함은 조금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보름이의 그 안개가 사르르 낀 것 같고 수심이 서린 것도 같은 모습과 함께 그 풀리지 않는 차가움이 오히려 좋으니 사람이 미칠 지경이었다. 서무룡은 좀 더 참고 기다리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어허, 또 그 총각이 왔드만 이. 참말로 지극 정성이랑 게. 그 총각도 자꼬 보면 볼수록 괜찮허니 생겼당게로. 인물도 그만허면 남자로 안 빠지고 키도 훤출허고 말이여."
무인 여자가 부엌에서 나오며 너스레를 떨어대고 있었다.
"삼봉아, 니 봉지 이리 도라. 과자 만길이허고 갈라묵어야제."
보름이는 주인 여자의 입을 막으려고 아들한테서 과자봉지를 빼앗듯이 했다.
"이잉, 멀라고. 우리 만길이야 괜찮헝게 삼봉이나 믹이소. 항시 얻어묵기만 히서 쓰간디. 베룩이도 낯작이 있제."
말은 그러면서도 주인 여자는 옆눈길을 아래로 뜨고 발뒤꿈치까지 약간씩 들며 봉지 속을 힐끔거렸다.
"이잉, 이잉, 나 과자……"
과자봉지를 빼앗긴 삼봉이는 울상이 되어 코를 불며 어깨를 내둘렀다.
"에지간허먼 맘 주제 그려. 그간에 봉게 그만허먼 맘씨도 좋아 뵈등마."
과자를 똑같이 나누게 하려는 듯 주인 여자가 또 엉뚱한 소리를 하고 들었다.
"애기가 알아듣느만요."
보름이는 들릴 듯 말 듯 혀를 차며 과자를 반나마 주인 여자에게 건넸다.
"엄니이, 나몰러, 나 몰러……"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던 삼봉이는 마침내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때까지 부러운 눈으로 기죽어 있었던 주인집 아이는 혀를 낼름낼름 하며 깡충거렸다.
"아이고메, 맨날 이리 염치없이 얻어묵기만 히서 으쩌까? 근디, 쩌것언 또 머시고?"
주인 여자는 목을 빼듯 하며 다른 봉지에 눈길을 보냈다.
"야아, 괴기라는디, 요것도 갈라 묵어야제라. 쬐깨 기둘리씨요."
보름이는 감추지도 않고 꾸며대지도 않았다. 고기 몇 점 더 먹자고 속일 마음도 없었고, 괜히 속였다가 엉뚱한 입질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시, 아니여. 사람이 그리 염치없어 쓰간디. 삼봉이나 많이 해 믹이소."
주인 여자는 이렇게 능청을 떨며 고소한 눈웃음을 살살 치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보름이가 비위 두껍지 못하고 심성 여리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절해야 할 과부에게 총각이 드나드는 것을 약점으로 잡고 있었다. 보름이는 쇠고기까지 반을 갈라주고 더욱 발버둥치며 우는 아들을 감싸 안았다. 아이는 제 것을 빼앗긴 분을 참지 못해 엄마의 가슴을 떠밀며 울어댔다. 보름이는 아들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꼭 붙였다. 아이는 다시 엄마의 얼굴을 밀어내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자기의 것을 지켜주지 않고 오히려 빼앗아 남을 준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그렇게 나타내고 있었다.
"얼라, 얼라, 우리 삼봉이 착허지. 우리 삼봉이가 과자럴 갈라 묵어야제. 만길이 성도 삼봉이허고 재미있게 놀고 맛난 것도 주고 그러제. 울지 말어, 어이 우리 삼봉이 장사다., 어이 이쁘고 착허다."
보름이는 아들을 얼르면서 뜻 모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는 어느덧 커서 맛있는 것에 욕심도 부릴 줄 알고, 빼앗기면 분해할 줄도 아는 것이 신통하고도 대견했다. 그 성깔이 남자답기도 해 적이 믿음직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직 젖비린내를 역연하게 풍기고 있는 작고 연약한 아이를 품고 보니 천지간에 단둘이라는 외로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그 외로움 저편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정이 깊어지기도 전에 떠나가 버린 남편이었다. 남편은 말수가 적은 대신 막일을 절대로 못 하게 하거나 무엇인가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속 깊은 정을 표시하고는 했다. 산골 추위를 막아주려고 산토끼털로 모자며 목도리며 토시까지 안 만들어준 것이 없었다. 모두 내다 팔면 돈인데도 남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아버지도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흡족해했다. 남편의 그런 유별남은 동네 여자들이 부러워한 흉거리였다. 남편은 꼭 여우 목도리를 해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덫을 더 많이 놓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 언약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정말 자신도 모르게 의병들의 연락을 도왔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놈들은 그 죄목으로 남편을 총살시키고 말았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나서도 그 내막은 시아버지에게 묻지 않았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병 이야기 같은 것은 입에 올리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찌 되어 있을까. 여우 목도리를 받고, 아이는 둘쯤 더 낳았을지도 몰랐다. 보름이는 목이 메었다. 차라리 무주를 떠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그저 남편과 시아버지 묘를 지키며 살았더라면 이렇듯 난처하고 곤궁한 처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서무룡이만 해도 견디어내기가 어려운데 그 남자까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엄니, 나 배고파 이잉."
울음을 그친 삼봉이가 새 투정을 부리고 들었다.
"그려, 배고프제? 잉, 엄니가 얼렁 밥 해줄팅게 어부바 허자."
보름이가 허리를 약간 굽히며 아이 엉덩이를 받쳐 옆으로 돌리자 아이는 잽싸게 엄마의 겨드랑 밑을 돌아 어깨를 붙드는가 싶더니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순간적인 동작은 마치 다람쥐가 나무에서 나무를 건너뛰며 가지를 타는 것처럼 기민하고 민첩했다. 보름이는 또 그 남자의 징글맞은 모습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으스스한 냉기와 함께 그 남자의 칙칙하고 개기름 흐르던 얼굴은 더 뚜렷해졌다. 애써 잊으려고 했지만 그날 이후로 그 남자의 모습은 아무 때나 불현듯 떠오르고는 했다. 꿈에서도 그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에게 쫓기거나 끌려가는 꿈이었다. 쫓기다가 바닷물에 빠져 죽기도 했고, 어디론가 끌려가 몸을 망치기도 했다. 그날도 일을 마치고 부지런히 쌀 창고를 나섰다. 쌀 창고를 벗어날 때면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허둥거려지고 빨라졌다. 하루종일 떼어놓은 아이때문에 마음이 급한 것만이 아니었다. 속곳에 달린 서너 개의 주머니에 쌀이 담긴 탓이었다. 쌀을 훔쳐 담는 일은 손판석이 망까지 보아주는 속에서 벌써 몇 달째 해오는데도 전혀 몸에 익지를 않았다. 창고를 나서기만 하면 누군가가 금방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속곳 주머니를 까뒤집을 것 같은가 하면, 도둑으로 몰려 머리채를 잡아끌릴 것만 같기도 했다. 그런 초조와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두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날도 부두 앞 큰길을 서둘러 건너고 있었다.
"아니! 가만있어라 보자!"
마주 오던 사람이 옆을 지나치려다 말고 느닷없이 큰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보름이는 그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건너편에서 순사가 오는 것을 얼핏 보고 눈길을 피했던 참이었다.
"요것이 누구여?이, 그 시악씨가 맞구만그려."
보름이 앞을 재빨리 가로막듯 하는 순사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넘쳤다. 보름이는 그 반가워하는 것이 이상해 얼결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반가워할 순사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름이는 순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알은 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번뜩 스쳐 갔다.
"나 몰르겄소, 나?"
순사는 모자를 약간 밀어 올리며 헤벌쭉 웃었다. 보름이는 멍청한 듯 꾸미며 상대방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어허, 나럴 못 알아보요? 아요, 나!"
순사는 안타깝고 답답해하며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퍽퍽 쳐댔다. 보름이는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저었다.
"어허, 요것 참 섬허시. 그간에 세월이 쬐깨 흘렀기넌 혔어도 나럴 몰라보면 되겄소? 나가 시악씨헌티 홀딱 반해 갖고 환장얼 험스로도 워낙에 시악씨 집안에 진 죄가 있어서 가심만 끙끙 앓음서 돌아슨 장칠문이오, 장칠문이. 시악씨 오빠럴 하와인가 어디론가 보낸 장칠문이란 말이오. 이리 말해도몰 르겄소?"
장칠문은 안타까워하며 번드르르 기름기 도는 얼굴을 보름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보름이는 질겁을 하며 물러섰다. 그 살찐 얼굴도 징그러운 데다가 역한 입 냄새가 확 풍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뻔뻔스럽게도 오빠 이야기까지 꺼내놓았는데 더 모르는 체했다가는 오히려 엉뚱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뛰는 호랑이 눈썹도 뽑는다는 순사로 변해 있었단 것이다.
"야아, 인자 알아보겄구만이라우."
보름이의 목소리는 모깃소리였다.
"허, 오빠 이얘기럴 헝게 딱 알아보요 이. 나 그럴지 알고 그 이얘기럴 꺼냈소."
장칠문은 자기요령에 만족한다는 듯 한껏 웃고는,
"여그 군산서 사요?"
불쑥 물었다.
"야아, 아니 저어……"
보름이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어물거렸다.
"잉, 딱 봉게 여그 부두에 나댕기는구마. 안 그요?"
보름이는 가슴이 섬뜩했다. 어떻게 그걸 단박에 아는지, 순사 옷은 괜히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싶었다. 보름이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며 기가 질리고 있었다.
"서방이 없소? 안 그러먼 빙신이오?"
아니 저놈이 족집게 점쟁인가 무엇인가. 보름이는 더 기가 질리고 있었다. 부두나 창고에 낙미쓸이를 나선 여자들은 거의가 남편이 죽고 없거나, 남편이 불구이거나, 남편은 있어도 아이들이 많아 혼자 벌이로는 살 수 없는 막판에 처한 여자들이라는 것쯤 파악해 두는 것은 순사
의 기본 임무도 못 된다는 것을 보름이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 어째 대답이 없소."
장칠문의 말은 위압적이었다.
"야아, 시상얼 떴구만이라."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검은 순사 옷에 겁 질려 다른 말을 꾸며댈 수가 없었다. 순사나 헌병은 먼발치에서만 보아도 미리 한기가 드는 끔찍스러운 사람들이었다.
"허, 미인박명이라등마 그 말이 딱 맞아떨어져 부렀네그려."
장칠문은 마침 알고 있는 문자 한마디를 써먹으며 거만을 떨고는,
"일허는 디가 어디요? 부두요, 창고요?"
거침없이 물었다.
"야아, 창고구만이라우."
"여그서 일헌 지 얼매나 되았소?"
"저어…… 몇 달 되았구만요."
장칠문의 태도와 어투는 마치 범인을 취조하는 것 같았고, 주눅 들어 대답하고 있는 보름이는 천상 죄 지은 범인 같은 모습이었다.
"허, 요상허시. 몇 달 되았는디 어찌서 인자사 만내지는고?"
장칠문은 보름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그덜언 많소?"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하나구만이라."
"하나? 그려, 긍게로 안직도 그리아리 아리허니 이쁜 것이제. 흐흐흐흐……"
장칠문은 음탕한 눈길로 보름이의 온몸을 훑어내리며 칙칙한 웃음을 흐흐거렸다. 보름이는 심한 모독감을 느꼈다. 그런 인종하고 더 마주 대하고 서 있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어서 집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자 가야 쓰겄구만요. 애기가 기둘린디."
보름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오늘만 날이 아닝게 가보시오."
장칠문은 선선하게 말했다. 보름이는 가슴이 짓눌리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며 부리나케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칠문은 다음날 집 가까이에서 불쑥 나타났다. 보름이는 그때서야 어제 뒤를 밟혔다는 것을 알았다.
"군산바닥언 이 장칠문이 손바닥이여."
장칠문은 뒤를 밟은 것을 미안해하기는커녕 거드름을 피우고는,
"창고일도 그렇고, 집이란 것도 그렇고, 꽃 중에서 질로 이쁜 꽃인 그 인물에 요것이 어디 사람 사는 꼴이여.“
그는 마음 놓고 반말지거리를 하고는 음탕한 웃음을 지르르 흘리며 돌아섰다. 그러고는 장칠문은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름이는 서무룡이보다 장칠문한테 더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장칠문은 서무룡이와 댈 것이 아닌 순사만이 아니었다. 옛날에 오빠까지 끌어간 위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수록 불안감은 커져가고 있었다. 보름이는 한데 아궁이에 짚불을 지피며 자꾸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두 남자의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판석이 아저씨한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판석이 아저씨가 서무룡이는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칠문이는 어쩌지 못할 것이었다. 다시 무주로 들어가 버릴까……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없어지고 말았다. 어머니를 찾아 만주로 갈까…… 그러나 팔자 기구해진 꼴을 어머니에게 보이는 것도 죄였고, 아이까지 데리고 친정살이의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막막하면서도 어디로 떠나야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요것이 죄짓는 것언 아니라도 오래 헐 짓언 못 되제. 그저 아그 키움서 묵고 살 무신 장사밑천이라도 장만허게 될 때꺼정만 참드라고."
판석 아저씨가 가끔 하는 말이었다. 매일 피 마르는 긴장 속에서 쌀을 훔쳐내는 고통을 참아냈던 것은 아들 하나 잘 키우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재가고 팔자 고치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장사밑천을 잡게 되면 그것에 의지해 아들을 키우며 살아볼 마음뿐이었다.
"사람이 그리 간이 콩알만히서야 혼자 아그 키움서 어찌 살겄어. 그리 빼묵으먼 쥐도 새도 몰릉게 아무 걱정 허덜 말어. 허고, 왜놈덜이 자네 집안 망해 놓고 자네 신세 망친 것얼 생각험서 맘 강단지게 묵어야 써."
손가락 가늘기의 대롱을 만들어주며 손판석이 한 말이었다. 대롱의 한쪽 끝은 대창처럼 날카롭게 깎여 있었다. 그걸 가마니에 찔렀다 빼도 가마니에는 전혀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 대롱에 차는 쌀은 숟가락 하나가 될까 말까 했다. 그런데 그 대롱으로 아무 가마니나 찌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로 배에 실릴 쌀가마니들을 한 번씩만 찔렀다. 이미 검사가 끝난 쌀가마들이었고, 만약 다시 저울질을 한다고 해도 그 정도 빼서는 저울눈도 봉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이 들통나는 날에는 판석 아저씨까지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대롱을 만들어주며 소리 없이 웃던 아저씨의 마음이 그저 눈물겨울 뿐이었다. 자신이 오로지 바라는 것은 어서 창고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사밑천은 쉽게 모아지지 않았다. 두 입이 날마다 밥을 먹어 축내는 탓이었다. 마음이 급하고 초조한 만큼 먹어 없애는 것이 그렇게 아깝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물론 쌀밥을 해 먹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비싼 쌀을 보리나 잡곡으로 바꿔 양을 늘려야 했고, 주인집의 눈길도 피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속곳 주머니의 쌀도 집 안으로 들여오지 않았다. 아들을 데리러 판석이 아저씨네로 가는 길에 거기다가 털어놓고는 했다. 아저씨네서 함께 살았으면 그런저런 번거로움이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초가삼간에 아저씨네 아이들이 셋이라서 어디에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던 것이다.
"저어……저녁에 늦으실랑게라?"
보름이는 다음날 일을 마치고 창고를 나서기 전에 손판석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닌디. 무신 헐 말 있능가?"
손판석의 눈치 빠른 대꾸였다.
"야아, 디릴 말씸이 있어서……"
"이, 이따가 보세."
창고에서는 더 이상 길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남들 눈에 십장과 낙미쓸이가 친하게 보이는 것도 의심을 사거나 흠집 잡힐 일이었던 것이다. 보름이는 어제 밤새껏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또 하루종일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군산을 떠나야 될 것만 같았다. 보름이는 말귀를 알아듣는 손판석의 아이들의 귀도 염려해서 저녁을 먹은 다음 좀 느직하게 집을 나섰다.
"무신 이얘기여?"
"손판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어……"
보름이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손바닥을 맞비볐다.
"무신 말인지 맘 놓고 허소. 우리 새에 못헐 말이 머시가 있능가."
부안댁이 말문을 틔워주려고 했다.
"야아, 긍게 머시냐……그나에 모아진 것으로 떡장시라도 헐 수 있게 되았으먼 창고에 그만 나댕기는 것이 으짤랑가 히서……"
"일이 심이 드느갑제?"
손판석이 쌈지를 펼치며 무겁게 말했다.
"아니구만요, 그까짓 것언 일도 아니제라, 아재도 못 헐 일이고 히서……"
"나? 아니여, 아니여. 나야 암시라 안헝게 자네나 맘 강단지게 묵고 쬐깨만 더 참소. 인자보톰 쌀이 정신없이 쏟아질 판인디. 요분 추수절만 참아내먼 어디다가 쬐껀헌 점방이라도 채리게 된단 말이여. 나 걱정언 허덜 말어."
손판석은 정색을 하다 못해 고개를 흔들고 손까지 내저었다.
"하먼, 하먼. 요분 한철이 대목이고, 다 된 잔친디 여그서 일얼 작파해서 되간디. 그려, 여그서 일얼 막음허먼 자네 말대로 떡장시 밑천이야 족허겄제. 근디 생각 히보소. 떡장시가 거것이 말이 쉽제. 사라미 묵고 살아질 장시가 아니란 말이시. 그러고, 자네 삼봉이럴 개명시상에 맞게 신식공부도 많이 시키고 잡은 욕심이등마 떡 장시 히갖고야 그것언 어림도 없는 일 아니여? 참소, 참는 짐에 한철만 꾹 참아내소."
부안댁도 몰아세우듯 거들고 나섰다. 보름이는 아들 삼봉이의 이야기에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아들은 자신보다도 더 소중했다. 아들을 잘 키우는 것이 자신의 단 하나 간직하고 있는 소망이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아들의 장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보름이는 자신의 위태로움을 피하려고 앞뒤 없이 다급해 했던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아들에게 미안했다. 창피스럽고 낯뜨거워 아예 서무룡이나 장칠문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어떻게 창고일을 끝내려고 했었다. 그러기를 잘했다 싶었다. 만약 그들의 이야기를 꺼냈더라면 일이 어떻게 결말이 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판석이 아저씨도 어찌할 수 없어 창고 일을 그만두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으면 아들의 장래는……보름이는 아들을 기둥으로 붙들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는 아들의 눈동자처럼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