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1-6
24. 세월의 상처
넓은 들녘의 논에는 벼 그루터기들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텅 비어버려 여름보다 더 넓어 보이는 들녘에는 맵고 찬바람만 가득했다. 보름이는 추운 줄도 모르고 또 가슴아 터져라하고 매운바람을 양껏 들이켰다. 숨을 들이켤 때면 저절로 감기는 눈앞에 어머니와 세 동생들의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숨을 토해낼 때면 펼쳐져 나간 들녘 끝으로 마음은 달음박질해
가고 있었다. 보름이는 들녘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놀이를 즐기며 부산하게 걷고 있었다. 들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여 살것만 같았고, 이미 친정 앞마당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산 첩첩한 무주에 갇혀 살며 얼마나 그리워했던 들녘인지 모른다.
보름이는 들녘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놀이를 즐기며 부산하게 걷고 있었다. 들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트여 살 것만 같았고, 이미 친정 안마당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산 첩첩한 무주에 갇혀 살며 얼마나 그리워했던 들녘인지 모른다. 보름이는 모퉁이를 바꿔들며 달게만 느껴지는 매운바람을 또 들이켰다.
까욱 까욱 까욱......
보름이는 소스라쳐 놀라며 사르르 내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들이켜고 있던 숨길도 뚝 멎었다. 까마귀 떼가 날개를 푸득거리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높게 솟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날개들을 펄럭거리며 사람 키 높이쯤으로 몸을 띄웠다가는 논 서너 마지기 건너로 내려앉고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 마지못한 듯 자리 옮김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은 날개들의 펄럭거림과 그 음산한 까욱거림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능청스러움에 보름이는 그만 소름이 끼쳤다. 까마귀 떼에 정이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다.
저것덜이 여그꺼정 멀라고 왔을꼬. 인자 산에 묵을 것이 없어서 긍가......?
보름이는 돌멩이를 던지려다가 멈칫했다. 그 끔찍스런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소나무 가지마다 목매달려 죽은 의병들의 시체에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시아버지가 산골이 울리도록 소리치며 돌팔매질을 해댔지만 까마귀떼는 달아날 기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달아나기는커녕 오히려 이쪽으로 덤벼들 기세였다. 돌이 날아가면 몇 마리씩이 괴성을 지르며 날개를 거칠게 퍼득거리는 것이 곧 이쪽으로 날아들 것만 같았던 것이다.
"안되겄다, 그냥 가자. 저것도 다 하늘이 시킨 것잉게."
시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보름이는 그때처럼 소름 끼치는 무섬증이 들었다. 자신이 돌을 던지면 까마귀 떼들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덤벼들 것만 같았던 것이다. 보름이는 돌멩이를 버리지도 못한 채 살금살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보름이는 또 그나마 남편의 죽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너무나 어이없고 억울하게 죽었다. 의병과 내통한다고 하여 왜놈들에게 총 맞아 죽고 말았다. 그러나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동네 젊은 남자들과 함께 당한 죽음이라 표 나게 슬퍼할 수도 없었다. 왜놈들은 멀리 끌고 가지 않고 뒷산에서 총질을 해버렸다. 그래서 묘나마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의병이 아니더라도 대토벌이 벌어졌을 때 왜놈들에게 끌려가 종적을 모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흉하게 죽어 까마귀 떼에 뜯겼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넓고 넓은 들녘에서 자란 탓으로 산들이 겹겹으로 담을 친 속에서 사는 것은 답답해서 미친 지경이었다. 그런데 남편마저 잃어버리게 되자 산들은 가슴으로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 암담한 세월의 힘겨움을 시아버지가 헤아려 주었다. 여름과 겨울에 친정 나들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먼발치의 둥그스름한 야산 밑자락으로 동네가 드러났다. 보름이는 보퉁이를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마구 뛰기 시작했다. 보름이는 벌써 어머니 냄새를 가슴 가득 맡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엄니이, 어엄니이......"
보름이는 사립을 뛰어들며 마치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누님이여, 큰 누님!"
지게문이 벌컥 열리며 동생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머시라고, 보름이라고!"
뒤따라 울린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야아, 엄니 나 보름이구만이라."
보름이는 토방에 발을 디디며 인사했다. 그 목소리는 벌써 반가움에 겨운 울음이었다.
"큰누님, 어서 오소."
남동생 대근이가 맨발로 토방으로 내려서며 보퉁이를 받았다.
"아이고메 아가, 어서 오니라. 이 추운디 몸띵이가 다 얼어터졌겄다."
감골 댁이 눈물 떨구는 목소리로 딸을 얼싸안았다. 그녀는 시집을 보내 아이를 낳은 딸을 대하면서도 <아가>였다.
"엄니, 그간에 어찌 사셨소. 몸언 성허시당가요?"
어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보름이는 목이 메면서 손바닥으로는 어머니의 등을 더듬어내리고 있었다. 보름이는 더 좁이지고 얇아진 어머니의 등에서 배고픔에 시달리며 늙어가는 어머니를 느끼고 있었다.
"하먼, 나야 성허제. 니넌 어찌냐, 무병허냐?"
거칠고 마디 굵은 감골 댁의 손도 딸의 등을 쓸어대고 있었다.
"큰누님 춥구마넌."
그때까지 먼 눈길을 보내며 눈을 껌벅이고 있던 대근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눈자위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이고, 이놈에 정신 잠 보소. 얼렁 들어가자, 얼렁."
재빨리 눈물을 훔친 감골 댁이 보름이의 등을 싸안았다.
"대근아, 인자 총각이 다 되았네."
보름이는 남동생을 보고 웃음지으며 손을 꼬옥 잡았다. 손이 두껍고 실했다. 그 손에서 문득 오빠를 느꼈다.
"총각언 무신......"
대근이는 누나를 마주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아버지 같기도 하고 오빠 같기도 해서 보름이는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여그, 여그, 일로 앉거라."
감골 댁은 아랫목에 깔아둔 얇은 이불을 걷으며 보름이를 잡아끌었다. 아랫목은 미지근할 뿐이었다. 그 식어가고 있는 온기에서 보름이는 친정의 피어날 줄 모르는 궁한 살림살이를 가슴 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근디, 아넌 어찌고 혼자다냐?"
감골 댁이 이불을 끌어다가 딸의 무릎을 덮어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 시아부님허고 약초럴 강경꺼정 실어내니라고 집에 띠놨구만이라우. 그라고 그 일이 아니라고 혀도 삼봉이럴 딜고 오기넌 에롭구만요. 날 추운디 병 얻는다고 시아부님이 먼 질 못 뜨게 헝게요."
보름이는 어머니에게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이, 그려. 그 댁도 그 자석이 귀헌 손 아니라고, 귀허고말고."
감골 댁은 생각 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먼, 시아부님언 강경서 혼자걸음 허신 것이여?"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어라, 동네사람덜 서넛이 항께 걸음 혔구만이라우."
어머니가 마음 쓰지 않게 하려고 보름이는 일부러 환히 웃어 보였다. 그 환한 웃음에 처녀 적의 고운 모습이 피어났다.
"사둔어런 맘이 넓고 넓은 분이여."
감골 댁이 나직하게 뇌었다.
"대근아, 그것 잠 요리 도라."
보름이는 보퉁이를 손가락질했다. 보퉁이에는 장을 본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그 물건들을 어서 어머니 앞에 꺼내 보이고 싶었다. 그 물건들이 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집살이가 고달프지 않고 시부모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살고 있다는 어엿한 증표였던 것이다. 남편을 잃어버리고 홀몸이 되어 어머니의 속 근심이 가실 날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야 자신으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엄니, 요것언 엄니가 쓸 참빗이고 바늘이요. 그라고 요것언 보선 맹글어 신으라고 끊은 일본광목인디, 많이넌 못 끊고 두 자구만이라우."
보름이는 참빗과 바늘쌈을 광목 위에 올려 어머니 앞에 내밀었다.
"아이고 멀라고 요 비싼 것덜얼 사온다냐. 산 골골이 더터서 심들게 캔 약초 팔아갖고 돈 이리 쓰다가넌 니 시집에서 미움 산다. 맨손이 서운허면 동상덜 엿이나 잠 사다주먼 됐제."
감골 댁은 정색을 하고 딸을 나무랐다. 시잡 살림 축내서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엄니, 아무 걱정 마씨요. 나가 마다고 히도 시아부님이 다 알아서 헌것잉게."
보름이가 목을 움츠리며 눈웃음을 쳤다.
"그려도 끄꺼정 마다고 혔어야제. 서로가 뻔히 다 아는 살림 밑천인디."
감골 댁은 무명베에 비해 훨씬 결이 곱고 광택이 좋은 광목을 매만지며 시름겹게 말했다. 홀로 된 젊은 며느리의 친정 길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시아버지의 마음과, 모처럼의 친정 걸음을 빈손으로 하지 않으려고 농사일 틈틈이 약초를 찾아 산골을 허덕이며 오르내렸을 딸의 발싸심이 환히 눈에 보였던 것이다.
"큰언니 맞제, 큰언니!"
반가움이 왈칵 넘치는 외침과 함께 다급하게 방문이 열렸다.
"이, 수국아."
"언니이......"
보름이와 수국이가 얼싸안았다.
"내 꿈이 맞네, 내 꿈이......"
수국이의 반가움에 겨운 소리였다.
"아침에 까치 우는 소리넌 못 들었구마."
대근이가 뚱하니 한마디 걸쳤다.
"그려, 느그덜이 나보담 낫다."
감골 댁이 말을 받으며 웃음을 피웠다.
"니 샘에 갔다 왔구나."
보름이가 수국이의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이, 바가지럴 엎었는디도 물이 자꼬 춤얼 춘당게. 옛날에 언니넌 안 그러등마는."
수국이는 멋쩍어 하며 제 손으로 다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체에, 궁뎅이가 고샅 좁다고 춤얼 춘게 물이 몸살얼 앓는 것이제."
대근이가 코방귀를 뀌었다.
"니 또 그놈으 애맨 소리!"
수국이의 손이 잽싸게 대근이에게로 뻗쳤다.
"아이고, 아이고, 살점 떨어져 나가네."
대근이가 몸을 들썩이며 맘 놓고 소리를 질렀다. 수국이의 손가락이 대근이의 옆구리를 꼬집은 채로 있었다.
"아서, 아서, 총각 죽이겄다."
보름이가 손을 저으며 웃었다.
"처녀 궁뎅이 큰 것이야 보물이제."
눈을 흘기며 감골 댁도 웃었다.
"엄니가 그리 역성든게 요것이 우아래럴 몰라본단 말이시"
수국이가 대근이의 어깨를 퍽 치며 눈이 찢어지게 흘겨댔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여그 요것 니 거이다."
보름이가 수국이 손에 색실묶음을 쥐어주었다.
"아이고메, 이쁘기도 헌 거. 요거 일본색실 아니라고? 글안해도 나넌 은제나 요리 존 것얼 갖어볼꼬 혔었는디."
색깔이 고운 색색의 수실을 싸잡으며 수국이는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 가슴께에 손을 모아잡은 수국이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름이는 동생의 헐어빠진 입성에 비해 너무 곱게 생긴 얼굴이 서러워 눈길을 돌렸다.
"속창아리 없이 왜놈덜 물건 좋아허덜 말어."
대근이가 느닷없이 것지르고는,
"큰누님도 우리 생각허는 것이야 고마운디, 아까운 돈 없애감서 왜놈덜 물건 쉽게 사덜 말소. 다 나라 망쪼드는 것잉게."
큰누나를 쳐다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음마, 음마, 진작에 망해뿐나란디 더 망헐 나라가 어딨냐!"
수국이가 동생을 향해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동생을 노려보고 있는 눈이 표독스러울 만큼 화가 돋아 있었다.
"넋 나간 소리 말어. 나라가 망혔어도 땅언 그대로 있고, 백성덜도 그대로여. 나라럴 뺏겠으면 백성들이 되찾을라고 정신덜얼 채레야제,니나 나나 왜놈덜 물건 삼스로 누구 배불리는지 몰르고 나대는 것은 망친 나라 망치고 망치고 또 망치자는 넋 빠진 짓거리덜이여. 그래 갖고야 백년 천년 왜놈덜 종질이여."
대근이는 목에 핏줄을 세우고 있었다.
"아이고, 누가 듣겄다 와."
감골 댁이 팔을 내저으며 질색을 했다.
"쟈가 어찌 저리 똑똑헌 소리럴 헌다냐?"
보름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어머니와 수국이를 둘러보았다.
"저것이 다 들은 풍월이랑마. 서당에 나댕김스로 똑 헌병헌티 잽혀가 늑신허게 매타작 당헐 소리만 배와갖고 와서 저리 아는 칙 해쌓고 야단이랑마."
수국이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거렸다.
"무신 서당이 그런 것도 갤치능고?"
보름이는 더욱 의아스러워졌다.
"긍게 말이시. 신세호라등가 신네호라등가 허는 사람이 벨 요상시런 것얼 다 갤치고 그런다드랑게."
수국이가 색실을 매만지며 코웃음을 쳤다.
"돈 안 길이고 뚫린 구녕이라고 그리주딩이 멋대로 놀리덜 말어. 선상님 존함얼 놓고 머시가 어찌고 어쩌? 신네호! 빌어묵을 주딩이럴 팍 그냥!"
눈을 부릅뜬 대근이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곧 내리칠 기세였다.
"아이고메, 엄니, 엄니....."
수국이가 화다닥 감골 댁 뒤로 몸을 감추었다. 보름이는 무슨 영문인 줄 몰라 화가 난 대근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화가 난 대근이의 모습은 자주 본 적이 없었다.
"그려, 선상님얼 그리 말헌 것언 수국이가 잘못혔응게 대근이 니가 참어라, 그 선상님이야 꿈에라도 그리 말해서넌 안 되제. 글얼 갤차줌스로 돈얼 받기럴 허냐, 뼈대 있는 양반임스로 사람에 차등얼 두기럴 허냐. 그 선상님 아니었음사 어디서 글얼 깨치고, 어디라고 시상 물정얼 알았겄냐. 양반 중에 다시없는 분이시제, 수국이 니도 그 선상님 놓고 입 못되게 놀리덜 말어라."
감골 댁은 차분하게 아들을 쓰다듬고 딸을 타일렀다. 신세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보름이는 송수익 같은 양반이 어디 또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엄니 말 들어봉게 수국이가 잘못혔다. 선상님 그림자넌 보지도 않는 것인디, 수국이가 장난으로 헌 말잉게 니가 화럴 풀어라."
보름이는 대근이의 등을 다둑거리고는
"니 인자 담배 피지야? 요것 맘에 들란지 모르겄다."
쌈지를 내밀었다.
"나헌티꺼정 멀라고......"
대근이는 어색스럽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힝, 나이 열여섯에 지게질언 서툴러도 담배넌 골촌 것얼 언니가 어찌 알었능고."
수국이가 어머니 등 뒤에서 얼굴을 빠끔 내밀며 오금을 박았다.
"지기럴, 나도 돈 있어 장개럴 제때 들었음사 두 자석 애비여."
대근이가 쌈지를 펴보며 받아쳤다. 감골 댁과 보름이는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세 자식을 모아 앉힌 감골 댁은 마음이 흐뭇하면서도 한쪽은 비어 있었다. 작은딸 정분이야 시집을 보냈으니 그만이지만 큰아들 영근이는 있어야 될 자리였던 것이다. 스물에 떠나 스물여섯이 되도록 감감 무소식이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슴은 타다타다 숯이 되고 말았다. 쉬 돌아오지 못할 몸이면 그 편지라는 것이라도 한 장 보낼 일이지 어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아들을 언문을 더듬더듬 읽기는 했어도 마음먹은 대로 쓸 줄은 몰랐다. 서로 못 배운 사람들끼리 누구보고 써달랄 수도 없고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그리 됐겠거니,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해가며 보낸 6년 세월이었다. 큰아들만을 기다리기로 치면 긴긴 세월이었고, 몸뚱이 하나를 굴려대며 아이들 입에 거미줄 치게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산 것으로 치자면 정신없이 지나간 세월이었다. 그리움에 사무쳐 걱정이 되고, 걱정이 겨워 병이 되어 큰아들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다. 이야기를 하게 되면 마음병은 새로운 아픔으로 도지는 것이었다.
"엄니, 엄니도 인자 많이 늙으셨구만이라."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보름이가 목이 젖었다. 흰머리 희끗거리기 시작한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 아리고 한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아니여, 아녀. 나 안직도 기운 펄펄허다. 대근이가 돌돌 씨언하게 들어 올려 보기 좋게 떡칠 맨치 장성혔는디 나가 이만허니 안 늙음사 욕 얻어묵으라고."
감골 댁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부러 환한 웃음을 피워냈다.
"정해논 신랑감도 없는디 색실 그만 되작이고 얼렁 밥이나 허소. 먼질 오니라고 큰 누님 얼매나 배 고프겄어."
대근이가 색실을 매만지기에 정신을 팔고 있는 수국이에게 통을 놓았다.
"이, 얼렁 밥 앉혀라."
감골 댁이 잊고 있었다는 듯 지체 없이 말을 받았다.
"언니, 쬐깨만 기둘리소. 금세 밥 맛나게 해올랑게."
수국이가 방싯 웃으며 일어났다.
"잡곡 싹 빼고 쌀밥혀라, 쌀밥!"
감골 댁이 다급하게 일렀다.
"엄니이, 쌀밥언 무신......"
"시끄럽다. 니 믹일 쌀언 있다."
감골 댁은 보름이의 말을 무질러버렸다. 논 귀한 무주라 첩첩산골에 살면서 일 년 열두 달 사시장철 쌀밥이라고는 구경도 못했을 딸에게 아무리 궁한 살림이라고 해도 잡곡밥을 먹일 수는 없었다. 명색이 들판에 있는 친정을 찾아온 딸이었다. 김 참봉의 음흉한 손길을 피할 겸해서 아무 차림도 갖추지 못한 채 시집이라고 떠나보낸 것을 생각하면 그제나 이제나 가슴이 아리고 저렸다. 보름이는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갈라고?"
"뒷간에 잠 갈라고라."
"니 수국이 일 덜어줄라는 것 아니겄제? 몸 곤헌디."
"야아, 아니구만이라우."
보름이는 뒷간으로 가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집안은 예나 다름없었지만 집은 좀 더 낡아 있었다. 오빠와 여동생 정분이가 함께 살았던 집, 그때가 그래도 정겨웠던 때였다. 멀리 떠나간 오빠는 소식이 없고, 정분이는 자신보다 효녀였다. 남편이 무사해서 어머니 마음에 근심을 심어주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보름이는 뒷간을 거쳐 부엌으로 들어갔다.
"음마, 멀라고 나온가. 들어가 쉬소. 나 혼자서도 요렇타께 다 헐 수 있네."
수국이가 보름이의 등을 떠밀었다.
"아니여, 아니여. 니허고 이얘기헐라고 나온 것이여."
"이, 그것이야 좋제. 글먼 언니넌 아무 일 말고 저그 앉어서 이 얘기나 허소."
수국이는 언니를 아궁이 앞으로 밀어다 앉혔다.
"작은 언니넌 소식 있디야?"
보름이는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짚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가느다랗게 피어오른는 파란 연기와 함께 짚이 타는 상큼한 냄새에 옛생각들이 휘감기고 있었다.
"그냥 그리 산다등마."
"갸도 은제나 심 피고 살아질랑고."
"작은 언니야 원체로 맘이 심지고 지독헝게 엄니야 항시 큰 언니 걱정이제."
"그려, 나가 엄니헌티 근심단지다. 내 팔자가 궂어서......"
부지깽이로 짚단을 받쳐 바람을 들이고 있는 보름이의 목소리는 시름겨웠다.
"음마, 언니넌 벨 소리 다 허네. 언니가 혼자 된 것이 언니 팔자가 궂어서간디. 다 시상이 지랄 겉애서 그리 된 것이제. 팔자가 궂은 사람이야 오월이 언니 같은 사람이제."
"이, 오월이넌 어찌고 산다냐?"
"말도 말소. 그 언니 시방 오빠 생각으로 밤잠 못 자고 애가 탈 것이네."
"뜸금 없이 무신 소리여?"
보름이가 놀라며 동생 쪽으로 후딱 고개를 돌렸다.
"참, 큰 언니넌 사진결혼 소식 몰르고 있제?"
수국이는 왼손으로 제 허벅지를 치며 눈을 빛냈다.
"사진결혼?"
보름이는 의아스런 얼굴이 되었다.
"이, 말 잠 들어보소. 얄궂은 일이 새로 생겼단 말시."
수국이는 살강 앞에서 반찬을 만들다 말고 보름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것이 긍게로 서너 달 전에 생긴일인디 말이시, 하와이로 간 남정네덜이 혼인얼 헐라고 조선 처녀덜얼 구허는디, 먼 뱃질 올 수가 없응게 사진얼 보낸 것이여."
"아니, 오빠가 인자 와서 오월이헌티 사진얼 보냈단 말이여?"
보름이는 마음이 급해 불쑥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시, 그거이 아니고 말이시, 인자 와서 처녀덜이 사진으로 신랑감얼 골르고 야단인 판인디, 그간에 끈허니 기둘리지 못허고 시집가서 헌지집 되야불고, 팔자꺼정 궂어서 혼자 된 오월이언니가 얼매나 애태움서 땅얼 치겄능가."
수국이의 말투는 곱지가 않았다.
"집안찌리 언약이 된 것도 아니고 소식 한 장 없는디 무신 수로 처녀 나이 시물셋꺼정 시집얼 안 갈 것이냐."
보름이는 아궁이의 너훌거리는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본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열자라는 괴질로 남편이고 자식까지 잃어버린 오월이가 가엾고 딱하기만 했다. 보름이는 새로운 걱정이 일고 있었다. 사진으로 신붓감들을 구하고 있다면 오빠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보름이는 그 말을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수국아, 그 사진결혼인지 먼지럴 엄니도 알고 기시냐?"
보름이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아닌디, 나넌 말 안혔는디."
수국이는 몸을 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서 말 안혔제?"
"음마, 언니도. 남정네덜이 하와이로 색씨덜 불러딜여 혼인허는 것이냐 거그서 영영 살겄다는 것 아니라고. 엄니가 그 일얼 알먼 어찌 되라고?"
"그려, 그려, 참 잘혔어. 니 소견이 인자 다 큰 어런이다."
보름이는 동생의 등을 다둑거렸다. 수구이는 그제서야 머쓱해졌다. 언니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언니를 깨우치듯 대답한 것이 쑥스러웠던 것이다.
"엄니가 어디서 그 소문얼 들었을란지도 모르제."
보름이가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도 내색얼 안허는지도 몰라."
수국이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엄니가 기둘린디 나 들어가 볼란다."
보름이도 부지깽이를 놓고 일어섰다. 마침 밥물이 끓어 넘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면서 불 때는 일을 거든 셈이었다.
"하먼, 얼렁 들어가소. 근디 언니, 저녁에 어디 마살갈랑가?"
"안되제, 첫날인디 엄니랑 식구덜허고 항께 지내야제."
"어메 존거. 나 이따가 언니 옆이서 잘라네."
불쑥 말을 해놓고 수국이는 옆눈잘을 하고 돌아가며 부끄럽게 웃었다. 보름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더없이 따스한 웃음을 지었다.
"수국이가 또 무신 새살까디야?"
방으로 들어서는 보름이에게 갑골댁이 물었다.
"아니어라, 벨 소리 안허등마요. 수국이도 인자 반찬솜씨가 지대로 잽혔드만이라."
보름이는 얼른 말을 둘러 붙였다.
"몰르겄다. 지대로 해묵는 것이 있어야 솜씨가 늘든지 말든지 허제."
감골 댁은 가늘게 한숨을 쉬고는,
"이따가 밥 묵고 무주 댁헌티넌 니 왔다고 말 전해야 헐 거이다."
하면서 말을 챙겼다.
"그래야제라. 근디 곱단이 아부지넌 어찌됐다요?"
보름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소식 끊긴 지가 발써 2년이다."
"무신 일 생긴 것 아니겄소?"
"어찌 알겄냐. 참말로 막막헌 시상이다."
"무주 댁도 맘고상 몸고상이 끝도 없구만이라."
"긍게 말이여, 니난 난나 다 시상 잘못 만낸 죄제. 이따가 무주 댁헌티 요런 말 비치지도 말어. 째진 속살에 소금 뿌리긴게."
가라앉은 어머니의 말에 보름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신 반찬이 이리 많다냐."
보름이가 놀란 눈으로 수국이를 쳐다보았다.
"많기넌 머시가 많혀. 간고등어 하나도 없는 반찬인디."
수국이가 입을 삐쭉했다. 밥상 가운데는 된장찌개가 놓였고, 무채무침과 콩나물에 젓갈종지까지 놓여 있었다. 거기다가 김장김치까지 곁들여지고 쌀밥그릇이 네 개가 놓여 밥상은 그득하고 푸짐했다.
"배고픈디 얼렁 묵어라, 얼렁."
감골 댁은 밥을 듬뿍 떠서 보름이의 그릇에 옮기며 채근했다.
"엄니, 이러면 나 밥 안 묵을라요. 글 안해도 나 밥이 질로 많이 퍼졌구마는."
정색을 한 보름이는 밥을 되퍼서 어머니의 밥그릇으로 옮겼다.
"엄니, 그냥 잡숫시요. 엄니가 그래싸면 누님이 묵을 밥도 못 묵응게."
대근이의 말이었다.
"음마, 가다가 옳은 소리도 다 허네."
수국이의 말이었다.
"그려, 그려. 다 얼렁 묵자."
감골 댁이 세 자식을 둘러보았다. 보름이는 밥알을 꼭꼭 씹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대하는 쌀밥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쌀밥이라서 자꾸 목에 걸려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 쌀알 하나하나는 어머니의 허리 휘고 두 동생들의 골이 빠진 고생살이로 모아진 것이었다. 입 안에서 씹히는 것은 쌀알이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들의 살점 같기만 했다.
"푹푹 퍼서 많이 묵어라."
"야아......"
보름이는 목이 메어 간신히 대답했다.설거지를 마친 수국이가 무주 댁에게로 심부름을 갔다. 보름이는 직접 무주 댁을 찾아가 인사하고 싶었지만 감골 댁이 말렸다. 남의 집 눈치살이 하는 처지에 마을꾼이 꼬이면 무주 댁을 바늘방석에 앉히는 꼴이라는 것이었다. 무주 댁은 보름이의 중매를 든데다가 시집의 먼 친척이라서 누구보다 먼저 찾아봐야 될 사람이었다. 무주 댁은 보름이가 과부가 된 다음부터 중매선 것을 면목 없어 했지만 그런 중매의 잘못이 아니라서 감골 댁도 보름이도 그만한 시집을 구해 준 고마움은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고, 쌀밥 묵은 기운으로 사내끼나 도 꽈볼끄나."
뒤꿈치로 윗방문을 밀어댄 대근이가 엉치걸음으로 뭉그적이며 문지방을 넘어갔다. 보름이는 윗방을 들여다보았다.
"무신 사내끼럴 그리 가늘게 꼬냐?"
방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새끼줄이 너무 가늘어 보름이는 이상스러웠다.
"허 누님도, 척 보면 모르겄어? 멍석 짤라는 것 아니여."
어느새 담배를 옮겨 담은 새 쌈지를 꺼내며 대근이가 씩 웃었다.
"아니, 니가 발써 멍석도 다 짤지 아냐?"
보름이가 놀라서 물었다.
"인자 배우는 것이제 머."
대근이가 콧잔등 웃음을 지었고,
"아니여, 갸가 손끝재주가 영판 좋아서 멍석이고 망태기고 한번 배왔다 허먼 영축없이 짜낸다. 쬐깨 더 손이 실해지먼 그 솜씨 이 근동서 당헐 사람이 없으 챔이여."
감골 댁이 자랑삼아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엄니, 자석자랑 허는 부모 머시가 되는지 알제라? 벌이가 심심찮은 게 억지로 서는 짓이제 재주가 좋기넌 머시가 좋아라."
대근이는 짚불화로에 곰방대 끝을 박고 담배를 뻑뻑 빨아댔다. 보름이는 그만 코허리가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동생의 옆모습이 너무나 아버지를 닮았던 것이고, 열여섯 살 나이에 벌써 동생은 생계를 위해 힘겨운 짐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보름이가 왔다고?"
반가운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아줌니, 그간에 편안허셨소."
보름이와 무주 댁은 손을 맞잡았다.
"이, 나야 그냥저냥 살제 머. 보름이넌 안직도 꽃이시. 아니여, 애기 엄니보고 보름이가 머시다냐.이놈에 주딩이가 김제댁이란 말얼 어찌 그리 못 배우는지 모른당게."
무주 댁의 기미 낀 얼굴에는 그저 반가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친정에 왔응게 그냥 보름이가 좋구만요. 김제댁이야 시집동네서나 불르는 이름인디요. 절로 앉으시게라."
보름이는 무주 댁을 아랫목으로 밀어다 앉혔다.
"요것 보잘 것 없는디 아그덜 입 다시게 허라고......"
보름이는 보퉁이를 집어다 무주 댁의 치마폭 위에 올려놓았다.
"머시가 요리 많당가?"
무주 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속이야 보잘 것 없당게라."
보름이는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다.
"아이고, 먼 질 옴스로 그냔 올 일이제 올 때마동 이러면 미안시러서 어쩐당가. 나야 평상 자네 식구덜헌티 빰싸대기 맞고 살어야 될 못된 중신에미 아니드라고."
무주 댁은 보퉁이를 풀고 있는 손만큼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보퉁이에서 나온 것은 사탕 한 봉지와 실고구마를 삶아 말린 것이다.
"아이고 참말로 너무 과허시. 없는 돈에 사탕언 머시고, 먼 질 옴스로 요것언 또 얼매나 짐이 됐을 것이여. 자네 덕에 우리 새끼덜 살판났네."
무주대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부끄럽구만이라우."
보름이는 고개를 돌렸다. 무주 댁에게 사주고 싶었던 백동비녀를 살까말까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마음을 닫았던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 자아, 요것 맛 잠 보시게라."
무주 댁이 사탕 하나를 집어 감골 댁 앞으로 선뜻 내밀었다.
"어디가, 아그덜 갖다주소."
감골 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그덜 입만 입이다요. 어런덜 입도 입이제. 나가 묵고 잡아 못 살것소."
무주 댁은 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수국이가 쿡 웃으며 입을 가렸다.
"그려, 수국이 니도 한나 묵고."
무주 댁이 수국이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여그도 사람이 있구만이라."
윗방의 사잇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였다.
"이, 총각이 거그 있었구마. 자네도 일로 건너와 한나 묵소. 우리찌리 헐 이얘기도 있고 헝게."
"아이고 저 뻔뻔한 것 잠 보소."
감골 댁은 쯧쯧쯧 혀를 찼고, 보름이는 더없이 흡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줌니 인심이야 항시 후헝게."
바지에 묻은 지푸라기 먼지를 털며 대근이가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들은 사탕을 하나씩 입에 물어 한쪽 볼들이 불룩해진 모습으로 둘러 앉았다. 방은 좁고 관솔불빛은 흐렸지만 따사로운 정은 끈적하게 배나고 있었다.
"헐 이얘기란 것이 존 이얘기요, 궂은 이얘기요?"
대근이가 이야기를 독촉하듯 무주 댁에게 물었다.
"이, 그것이 긍게 존 이얘기이기도 허고 궂은 이얘기도 허시."
무주 댁이 입안에 고인 사탕물을 꿀떡 삼키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또 무신 일 났능가?"
감골 댁이 무주 댁의 눈치를 살폈다.
"긍게로 그것이 무신일인고 허니 말이오, 일남이 아부지가 그지께 밤에 살짝허니 댕겨갔당마요."
"음마, 철길공사장서 인자 풀어줬등가?"
감골 댁이 놀라움과 의아스러움을 동시에 나타냈다.
"엄니도 참, 그냥 풀려난 사람이 밤에 살짝 왔다 갔겄소."
대근이의 낮은 목소리가 짜증스러웠다.
"자네 말이 맞네. 왜놈덜 모르게 도망 나왔다는 것이여."
"혼자라등게라?"
대근이가 바짝 다가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긴장되어 있었다.
"그것이야 잘 모르겄고, 산에 있는 의병들을 찾아간다고 허드라네. 의병덜이 안직도 산에 살아 있을랑가 몰라?"
무주 댁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하먼이라, 살아 있응게 찾아 들어가는 것아니겄소."
대근이의 말에는 힘이 짱짱했다.
"그간에 서로 무신 연락이 오가고 그랬을랑가?"
무주 댁의 불안한 얼굴이 다소 풀리고 있었다.
"아매 그랬을 것이오.의병이야 예삿사람덜이 아닝게요."
남편의 생사를 걱정하고 있는 무주 댁의 마음을 헤아리며 대근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리만 되았음사 얼매나 좋겄어. 살아있으먼 소식이나 잠 전헐 일이제."
무주 댁이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보름이는 까맣게 기미 돋은 무주 댁의 얼굴을 보기가 가슴 아파 눈길을 돌렸다.
"일남이 엄니 무신 일 안 당헐랑가 모르겄네."
수국이가 울상을 지었다.
"왜놈들헌티 또 머리끄댕이 잽혀 뺑뺑이를 쳐도 어쩌겄냐, 다 미런허게 열 많은 냄편덜 잘못 얻은 팔자소관이제. 임남이 엄니넌 우리 만복이 아부지가 즈그 일남이 아부지럴 베레났다고 날 원망허는 눈치든디, 일남이 아부지가 시살 묵은 아섀끼도 아니것고, 누가 누구럴 베레놓고 말고 헐 것이여. 이래저래 속 터져 못 살겄당게."
무주 댁은 빨고 있던 사탕을 마구 씹어댔다.
"참 큰일이시. 의병쌈으로 가망이 없이 됐으먼 인자 처자석 딜고 딴디로 떠서 살아갈 방도럴 구해야 될일 아니라고? 인자 의병은 사그러드는 불씬디."
감골 댁은 갑오년 때를 생각하며 마음 무겁게 말했다.
"그런 소견 아무나 낸다요. 요런 난리판 굿 치는 어지러운 시상얼 탈 없이 살자면 초라니 임샌 같어야 허는디, 우리 만복이 아베고 일남이 아베고 다 눈치 없고 미련하기가 곰이랑게라."
초라니 임샌이란 약고 눈치 빠른 임덕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임덕구는 아예 의병에 가담하지 않은 채 그 동안 죽은 듯이 숨죽이고 조심하며 살아오고 있어서 본인이나 집안에 아무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아줌니, 고상시럽고 속상헌다고 그리 말허덜 미시게라. 초라니 임샌이 본받을 것이 머시가 하나라도 있다요. 임샌언 만복이 아부지나 일남이 아부지 발샅에 때 만치도 못허요."
대근이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아이고, 또 저놈의 입. 어디 임샌만 그리 꾀살이로 사는 것이냐. 시상살이야 다 지각각 사는 것잉게 냅둬라."
감골 댁은 말보다 눈빛으로 더 맵게 아들을 꾸짖고 있었다. 서당을 다닌 다음부터 옹이가 박히고 뼈가 생기기 시작한 아들의 말이 행여 씨가 될까 무서워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허기야 지게럴 꺼꿀로 지고 갯바닥으로 나가든, 뜨건 밥 찬물에 몰아 묵고 체를 허든 다 지맘이제라. 근디 눈치 빠르게 요리저리 피해 산다고 어디 천년만년 살아지간디요."
대근이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나저나 일남이 아부지가 댕겨갔다는 소문이 나먼 그 집안에 안 좋을 겄인디."
감골 댁은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
"하먼이라,여그서나 헐 이얘기제라. 일남이 엄니보고도 입에 돌맹이 달고 있으라고 일렀구만이라우."
감골 댁의 말을 알아들은 무주 댁의 대꾸였다.
"의병이야 어찌 됐든 간에 일남이 아부지가 그 지독헌 철도공사장서 도망해 나온 것만도 장허고 장헌 일이구만이라."
대근이의 말이었다.
"아까 옴스로 붕게 날이 추운디도 공사허느라고 사람덜이 애쓰고 있드라. 대근이 니넌 괜찮허냐?"
보름이는 대근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치이, 나가 양반집 자석도 아니고 부잣집 자석도 아닌디 괜찮헐 리가 있겄어, 진작에 한 파수 댕겨왔고, 은제 또 끌려가서 고상얼 허게 될란지 모르제."
대근이가 쓰게 웃었다.
"여그넌 그래도 철길 놓는 디허고 잠 멀어서 괜찮헐랑가 했등마 소양이 없구나. 그놈의 철길이 우리겉은 사람덜헌티 무신 영화럴 뵐란지 모르겄다."
"영화넌 무신 영화. 군산서 진주까정 뚫린 신작로럴 보면 다 알쪼제. 그 신작로로 실어내는 건 쌀이고, 들어오는 건 왜놈덜 물건이여. 승합마차고 인력거도 돈 있고 권세 있는 놈덜만 타고 댕기고. 우리겉이 가난허고 천헌 것덜언 쌔빠지게 고상만 허고 재미야 왜놈덜허고 조선 놈 부자덜이 다 보는 것 아니여. 철길이라고 별수 있간디."
"대근이가 점쟁이시. 어찌 그런 것얼 훵히 내다보고 있다냐."
무주 댁이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점쟁이는 무신 점쟁이여라. 누구 눈에나 다 뵈는 것인디요."
대근이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아니여, 눈이야 누구든지 다 달리고, 보기야 머시든지 다 보제. 근디도 시상 돌아가는 이치럴 알기에넌 눈뜬 봉사가 아니디냐. 구실이 서 말이라도 꿰야 보배드라고 니 말얼 듣고 봉게 앞 뒤 아구가 딱 맞는 것이 예사 생각이 아니여. 옷에 오짐 싸서 소금 얻으러 오고, 호박에 말뚝 박어 매 맞던 때가 엊그제 같은디 그간에 몸만 큰 것이 아니라 생각꺼정 어찌 그리 크담해졌을끄나? 긍게로 세월이 무심헌 것만은 아닌 것이제잉."
무주 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대근이와 감골 댁을 번갈아 보며 무척이나 신통해했다. 감골 댁의 늙고 지친 얼굴에 보람스런 웃음이 엷게 피어나고 있었다.
"피이, 그것이 지 자작 생각이간디라? 다 서당에서 주워 들은 풍월이제."
수국이가 걸고 들었다.
"저 입방정, 또 싸울라고."
감골 댁이 수국이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려, 서당 댕긴다고 아무나 생각이 그리 커진간디. 한 나무에 달린 모과도 크기가 다 지각각인디."
무주 댁은 대근이를 역성들고는,
"대근아, 요것 잠 물어보자. 사람덜 말로넌 인자 의병이 끝장났다고도 허고, 심 모아 새로 일어날것이라고도 허는디, 니 생각으로넌 어쩌겄냐?"
무척 진지하게 물었다.
"글씨요....... 나가 멀 알간디요."
고개를 숙임막해서 눈을 올려 뜬 대근이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나가 듣기로넌 의병은 이자 새로 일어나기가 에롭다고 허드만이라. 사람덜이 겁묵어 더 모이덜 않는디다가 왜놈덜 심이 원체로 씨서 이길 가망도 없응게 의병언 예전 동학군들맨치로 시나브로 시들게 된다능마요."
그는 무주 댁의 눈치를 보아가며 어렵게 말을 했다.
"나도 그리 짐작혔는디, 글먼 어찌까? 만복이 아베가 집으로 찾아들기넌 틀렸응게 나가 새끼덜 델꼬 산으로 찾아 들어가야 될 일 아닐랑가?"
무주 댁의 느닷없는 말이었다. 모두의 눈길이 무주 댁에게로 쏠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안의 서먹한 침묵 속에서 관솔 타드는 소리만 가늘게 울고 있었다. 무주 댁의 갑작스러운 말은 그만큼 놀랍고도 위험스러웠던 것이다.
"어이 무주 댁, 그리 숨맥히게 생각허지 말소.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시."
감골 댁이 힘겨웁게 입을 뗐다.
"글안허먼 어쩔 것이오. 그간에 혼자서 생각허고 또 생각혀도 그 방도밖에 없당게라. 아그덜 아베가 집으로 찾아 들었다가넌 잽혀서 죽을 것이고, 아베가 탈 없이 살자면 딴 디로 떠야 허는디, 어채피 여그서 못살 신세가 됐응게 지가 찾아나스는 것이 낫겄능게라."
무주 댁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아니시, 그 타는 속 아는디, 그리혀서는 안되네. 산이 한둘이 아니고, 산 하나에 골이 또 한둘이 아닌디 어느 산 어느 골에 있는지 알고 찾아 나설 것잉가. 의병이 한자리에 앉어서 도 닦는 시님도 아닌디 말이시. 기둘리소, 그가에 멫 년 세월도 참고 기둘림서 살았는디, 쬐깨만 더 기둘리소. 올 때가 되면 만복이 아부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식구덜 델로 올 것이네. 만복이 아부지가 어디 예삿사람이간디. 기연시 데로 올 것이네. 근디 그때 자네고 새끼덜이 없어보소. 만복이 아부지가 어찌되겄능가. 여자넌 뿌리 실헌 나무가 돼야 허는 법이시. 남자가 날개 돋친 새로 멫십년 떠돌다가도 소리 소문 없이 들이 닥치면 그간에 건사헌 자식덜 내뵈고 편안헌 잠자리 피게 여자넌 실헌 나무가 돼야 허는 법이여. 남정네가 헐일 없이 타관얼 떠돌아도 그리해야 허는 법인디 만복이 아부지야 더 말헐 것이 머 있간디. 안 그런가?"
감골 댁의 말은 간곡하면서도 무게가 실려 있었다. 말이 없는 무주 댁의 고개가 시나브로 수그러들고 있었다.
"아줌니, 아줌니 속 답답헌 것이야 다 아는디, 어쩌겄소, 기둘린 짐에 쬐깨 더 기둘려야제."
보름이가 무주 댁의 손을 잡았다.
"그려, 자네겉은 사람도 사는디 나가 너무 호강시러서 그리 생각헌것인갑네. 어쨌그나 엄니 말씸이 맞제."
잠겨드는 소리로 말하며 무주 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낡은 치마 위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대근이는 슬그머니 윗방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흐린 관솔불빛에 그의 그림자가 유난히 크게 방을 채웠다.
"무신 다른 소식언 없능가?"
감골 댁은 무주 댁의 기분을 바꾸게 하려고 일삼아 물었다.
"그 머시라드냐, 토지조사 어쩌고 허는 소문이 자꼬 불어나는 것 말고넌 벨 소식이 없구만이라."
무주 댁이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이, 그 토지 머시라고 해쌓는 것이 무신 소리라등가?"
"지도 잘 모르겄구만이라. 왜놈덜이 땅얼 어찌헐라는 것갑인디, 아줌니나 우리 집겉이 땅이 한 뙈기도 없는 사람덜이야 근심 안혀도 될 일인 상싶구만요."
"이, 집도 절도 없는 거렁뱅이가 신간 편케 불귀경 허는 심이로구만."
감골 댁이 스산하게 웃었고, 옆에서 수국이가 킥 터지는 웃음을 막느라고 입을 가렸다. 보름이가 수국이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무주 댁은 사탕봉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감골 댁은 그 손놀림에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는 무주 댁의 마음이 실려 있는 것을 느꼈다.
"어이 무주 댁, 인자 가보소. 밤도 늦고 아그덜도 기둘리네. 보름이야 메칠 있을 것잉게."
"글먼 그리헐께라?"
무주 댁은 곧 보자기의 네 귀를 모아 손아귀에 몰아 잡았다.
"자네 덕에 우리 새끼덜이 생일 만났네. 담에넌 이러덜 말소 이."
무주 댁은 방을 나서며 보름이에게 재차 인사를 잊지 않았다. 보름이가 가운데 눕고 어머니와 수국이가 양쪽에 누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보름이와 수국이는 이불 속에서 손을 잡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아무도 말 이 없었다. 마당을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추웠고, 문풍지 떠는 소리가 슬픈 울음처럼 애절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친정은 그리움이었고, 와 서보면 친정은 슬픔이었다. 보름이는 지향 없는 슬픔으로 양쪽 관자놀이께가 젖어 내리는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아침햇살이 퍼지기를 기다려 보름이는 집을 나섰다. 들녘 멀리로 묽은 안개가 가라앉아 있었다. 햇살에 밀려 스러져가고 있는 안개였다. 보름이는 들녘안개가 산골안개에 비해 싱겁다고 생각했다. 들녘의 안개는 들녘을 닮아 그저 아늑하고 잔잔하면서 부드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산골의 안개는 산줄기줄기를 휘감고 싸안고 돌며 뭉클거리고 꿈틀거리고 뒤엉키며 요동쳤다. 거칠고 억센 산을 닮은 모습이었다. 들녘안개가 치마귀 얌전하게 여민 정갈한 여자라면 산골안개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름이는 문득 산골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보름이는 햇살이 퍼지고 있는 들길을 재게 걸었다. 오월이가 마음에 쓰여 일찌감치 길을 잡은 것이다. 오월이가 학모가지가 되도록 오빠를 기다리다 못해 시집을 간 것을 생각하면 언제나 죄스러움이 앞섰다. 보름이는 신작로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상에나...... 저 쌀섬덜 잠 보소...... 태산이 따로 없네........."
줄줄이 잇댄 달구지들이 쌀섬들을 가득가득 싣고 지나가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 채 보름이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달구지들은 군산쪽으로 더디게 굴러가고 있었다. 쌀섬들이 군산으로 실려 가는 것을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처녀 적부터 보아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쌀이 실려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 철렁하는 놀라움과 걱정이 일어나고는 했다. 쌀을 그렇게 일본으로 실어내니 쌀은 귀해지고 쌀값은 오르고, 가난한 사람들은 쌀을 구경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면서 장리변은 높아지고, 부자들은 날이 갈수록 자꾸만 배꼽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었다.
"다 배곯아 죽겄네.....다 배곯아 죽겄어......"
보름이는 가슴이 내려않는 시름에 묻혀 달구지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연상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려, 이려!"
"이려, 요 잡놈에 소!"
달구지꾼들이 소리치며 소들의 엉덩짝을 갈겨대고 있었다. 목을 있는대로 늘여 밴 소들은 입으로는 끈끈한 침을 질질 흘리고 코로는 뜨거운 김을 훅훅 내뿜으며 달구지들을 끌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 내뿜는 콧김이 허연 것처럼 땀으로 맥질된 소들의 등판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찌 될랑고......어찌 될랑고......"
보름이는 가라앉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신작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보름이는 오월이네 동네 당산나무를 지나며 걸음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오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월이는 눈에 띄게 잘 생기지는 않았어도 수더분하게 항시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떠오르는 것은 우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괴질로 남편을 잃고 나서 울 때의 얼굴이었다. 오월이는 처녀 적에 웃던 얼굴을 시집가면서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더니 남편과 아이를 잃고 나서는 우는 얼굴로 변하고 말았다. 샘 옆을 지나려던 보름이는 방망이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추운 아침부터 누가 빨래를 하나 싶은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그런데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여자가 바로 오월이였다.
"아이고, 오월아!"
보름이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소리치며 샘으로 내달았다.
"잉? 누, 누구여........"
갑작스러움에 놀란 오월이는 보름이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나여, 나, 보름이."
보름이는 마치 아이들처럼 깡충거리기까지 하며 자기 가슴을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샘가에 아무도 없어서 처녀적의 몸짓이 나오고 있었다.
"보름아, 니가 어쩐 일이여!"
오월이가 울음을 터뜨리듯 하며 방망이를 내던졌다. 둘이는 손을 마주 잡았다.
"니 미쳤냐. 이 추운 날 아침보톰 빨래럴 허고 나스게."
보름이는 쏘아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오월이의 손이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이다.
"괜찮혀. 샘물이야 냇물보담 뜨신게."
오월이가 눈을 떨구었다. 어린 시동생들 많은 오월이의 고달픈 시집살이 아픔이 거기 있었다.
"무신 소리냐. 햇발이 쫙 퍼진 한낮에 허먼 손이 훨썩 덜 시리제. 삼동 아침 햇발에 비허먼 한낮 햇발이야 솜이불 아니디냐."
보름이는 마구 혀를 차며 오월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벌겋게 얼부푼데다가 거친 손등은 갈가리 터서 실피를 물고 있었다.
"그리 신간이 편허먼 좋겄제. 한낮에넌 또 딴일이 있응게.........."
오월이는 슬픔인 듯 괴로움인 듯 쓸쓸하게 웃으며 손을 뒤로 감추었다.
"이 멍청이 가시네야, 일얼 앞뒤로 바꾸먼 될 것 아니겄어."
보름이의 입에서는 처녀 때 속상하면 쓰던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 내 맘대로 된다냐."
오월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글먼, 느그 시엄씨가 시집살이 시키고 나스는 것이여!"
보름이는 가시 돋친 눈으로 남의 시어머니를 거침없이 <시엄씨>라고 불러대고 있었다.
"다 나 팔자가 쪼그랑 팔자라서 그렇제."
오월이는 빨랫돌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니 시집살이가 안 맵다고 헌 것언 거짓말이었는갑네?"
보름이도 오월이 앞에 마주 앉았다.
"글씨.......맘이 변헌 것이겄제. 서방 죽은 것언 돌담 허물어진 것이고, 시아부님 시상 뜨신 것언 짚단 넘어간 것 아니라고.이래저래 바람 막아 줄 사람 없응게 내신세가 요 꼬라지제."
"시아부님이 시상 뜨셨다고?"
보름이의 눈이 커졌다. 눈물이 그렁해진 오월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시엄씨가 먼첨 죽어야는디 잘못됐다는 말이 곧 목을 넘어오는 것을 보름이는 간신히 참아냈다. 홀시아버지에게 살뜰한 정을 받으며 사는 자신의 처지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나 그냥 팍 죽었으먼 쓰겄다."
오월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씻고는 빨래를 끌어당겼다.
"그 무신 넋 나간 소리여."
보름이가 오월이의 팔을 붙들었다.
"넋 나가기넌 .........나가 서방이 있기럴 허냐 새끼가 있기럴 허냐. 그도저도 아니먼 시엄씨가 살붙게 허기럴 허냐. 나가 이시퍼런 나이에 머럴 바래고 살아지겄냐. 애초에 글른 팔자 죽어서나 고쳐얄 것 아니여."
"이 미친 가시네야, 니만 팔자가 글르고나넌 팔자가 늘어졌냐. 서방없기로넌 니나 나나 똑겉은 팔자여."
"음마, 그런 소리 말어 사람이 죽어도 값이 다 달른 법이여. 사내꼭지가 얼매나 못나고 짜잔허먼 괴질얼 못 이기고 죽었을끄나. 왜놈덜 손에 죽었음사 평상 원수갚음 헐 맘으로나 살고, 어디서나 자랑삼음서 살제. 이년 팔자넌 죽도 밥도 아니여."
오월이는 빨래를 마구 문질러대고 있었다. 보름이는 그런 오월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상한 얼굴이며, 여기저기 꿰맨 자리가 있는 낡은 입성이며가 가엾고 측은했다. 보름이는 빨래 통에서 옷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니 시방 머허냐!"
오월이가 소스라치며 소리 질렀다.
"가시네야, 간 떨어지겄다."
보름이가 눈을 흘기며 소매를 걷었다.
"안돼야, 냅둬, 냅둬!"
오월이는 빨래를 잡아채려고 들었다.
"니 어찌 이러냐. 니허고 나허고 넘넘이냐? 우리넌 동무여. 근디 니 허는 일 손끝 맺고 앉어서 귀경만 헐끄나? 니넌 그럴 심판이여?"
정색을 한 보름이의 말에 오월이는 아랫입술을 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입언저리며 볼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둘이는 한동안 말없이 빨래만 했다.
"시집살이 말고 무신 속상허는 일 또 없냐?"
보름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없제 머......."
오월이는 고개를 저었다. 보름이는 오월이가 사진결혼 이야기를 일부러 피한다는 것을 알았다. 속 깊은 오월이다웠다. 보름이는 그 이야기를 덮기로 했다. 꺼내보았자 오월이만 상처 나게 하고 아프게 할 부질없음이었다.
"뜨신 밥 한 끄니도 못해 묵고......."
"아니여, 이리 만내보는 것이 질이제"
보름이는 빨래 통을 받쳐 오월이의 머리에 이어주며 설움의 덩이를 삼켰다.
"맘 강단지게 묵어."
보름이는 오월이의 등에다 대고 애타게 말했다. 빨래 통을 힘겨웁게 이고 가는 오월이의 좁은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25.지반 다지기
"면장님 나리, 불르셨는게라우."
사무실로 들어선 장칠문이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그는 일진회원 제복이 아닌 순사제복에 긴 칼을 차고 있었다.
"불렀으니 왔겄제에?"
백종두는 목을 외로 꼰 채 장칠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꼬리를 길게 꼬아올리고 있었다. 그는 말꼬리를 꼬아올리는 것처럼 콧수염 끝을 배배틀어 위로 솟기게 하는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야아, 무신 급헌 일이......"
장칠문은 자지끝이 찌릿 울리도록 강한 긴장을 느끼며 말을 얼버무렸다. 면장님의 말꼬리가 꼬여 올라가는 것은 화가 났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표시여서 그는 오금이 조였던 것이다.
"요새 낮잠 자고 댕기는겨 술타령허고 댕기는겨?"
백종두는 여전히 본 체도 안하며 말을 던지고 있었다.
"저어...... 열성으로 일허고 있는디요."
장칠문은 더욱 기죽어들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백종두의 꼬인 심중을 빨리 파악해야 했고, 그가 치고 있는 그물에 걸려 들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열성으로 일얼 혀어? 고런 표 안 나는 열성이면 순사복 벗고 느그 아부지 밑이서 장사나 배우는 것이 낫덜 않겄냐?"
장칠문은 그때서야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야아, 면장님 나리가 시키신 일언 날마동 발샅에서 불이 나게 열성으로 허고 있구만이라우."
"체, 말언 청산유수시. 열성으로 허는디도 안직꺼정 아무 소식이 없어!"
백종두는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뒷말을 큰소리로 외치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 장칠문은 흠칫 놀라며 더 빳빳한 부동자세가 되었고, 백종두는 싸늘한 눈으로 겁먹은 장칠문을 노려보았다.
"자네 똑똑허니 정신 채리고 들어. 나가 저번 참에도 말했디끼 그 일언 황해도 나 평안도서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그것이여. 여그 전라도, 전라도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일이란 말이여. 자네도 전라도 놈잉게 전라도 물건덜이 얼매나 찔기고 독허고 맵고 짜운지 잘 알겄제? 어찌서 조선팔도 다 빼놓고 동학당 놈덜이 해필허고 전라도 땅서 질로 먼첨 일어나고, 질로 많이 일어났을끄나? 그적에 뒤질 만치 뒤지고 빙신이 될 만치 됐으먼 기가 죽고 정얼 띠얄 것 아니겄어. 근디 그것이 아니여. 아, 보호조약얼 맺은께 벌떼겉이 일어나는 그 화적떼덜얼 자네도 똑똑허니 봤제? 그놈으 의병인지 화적뗀지도 한 번 일어나기 시작헝게 다른 도허고넌 달르게 이 놈에 전라도 땅에서넌 갈수록 불붙디끼 허지 안했냔 말이여. 그 질기고 독헌 것이 전라도 놈덜 심뽀여. 통감부서 남한 대토벌로 전라도 땅얼 그리씨게 닦달얼 안혔음사 지끔도 두 다리 뻗고 편헌 잠 못잘 것 아니겄어! 근디 말이여, 화적떼가 많이 죽었다고 히서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요 맵고 짜운 전라도 것덜이 또 때가 오기럴 기둘림서 죽은디끼 숨었다 그것이여. 고런 놈덜얼 쏙쏙 뽑아내란 말이여. 고런 놈덜 씨럴 몰리란 것이 총독부 엄명이여, 엄명!"
백종두는 또 책상을 내려쳤다.
백종두가 말하는 <그 일>이란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된 것을 계기로 황해도 일대의 민족주의자들을 총검거하게 된 <105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빌미삼아 총독부에서 반일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색출 명령을 전국에 걸쳐 내려놓고 있었다.
"자네 평상얼 순사보로만 있다가 늙어죽을 생각언 아니겄제?"
"야아......"
"글먼 공얼 세와야 혀, 공얼!"
"야아 알겄구만요, 면장님 나리."
장칠문이 오른쪽 다리를 옆으로 들었다가 착 붙이며 기운차게 외쳤다. 구둣발을 어찌나 세게 갖다 붙였는지 마룻장이 울렸다. 장칠문이 꼬박꼬박 <면장님 나리>라고 호칭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그건 백종두가 면장으로 부임하면서 결정한 공식호칭이었다. 백종두는 그냥 면장님으로서는 셈이 차지 않아 며칠을 고심했던 것이다. 면장님어른. 면장님 양반. 면장님 어르신...... 아무래도 어색해서 면장 어른·면장 양반·면장 어르신 해놓고 보니 또 <님>자가 빠지는 것이 아까웠다. 그래서 사또 나리에서 <나리>를 떼다가 <면장님 나리>로 결정한 것이었다.
"나가 자네럴 어찌서 내 밑으로 딜고 왔고, 자네 출세가 누구 손에 달린지 알고 있겄제?"
백종두는 다시 콧수염을 비비꼬아 올리며 거만을 떨었다.
"야아, 명념하고 있구만이라우."
장칠문은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아이고 하시모토 상, 어서 오십시오."
백종두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무슨 용무요?"
하시모토가 장칠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니오, 다 끝났소. 어서 앉으시오."
백종두는 손을 내저으며 하시모토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정신 똑똑히 차리고 우리 면에서는 반일배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색출해."
장칠문을 향해 유창한 일본말로 소리쳤다. 그건 일부러 하시모토에게 내보이는 시위였다.
"백 면장은 역시 대일본제국의 충직한 신민이오. 백 면장 같은 사람 몇 천 명만 있으면 총독부가 마음을 놓은 텐데 말이오. 반일배 놈들은 색출이 잘되고 있소?"
장칠문이 사무실을 나가자 하시모토가 의자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매일 독려를 하고 있습니다. 제놈들이 아무리 몸을 감춰도 다 찾아내고 말 겁니다. 내가 면장으로 있는 한 그런 놈들은 반드시 씨를 말리고 말겠어요."
백종두는 두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양쪽으로 쓰다듬어 올리며 큰소리를 쳤다.
"다 알겠지만 숨은 놈들을 찾아내는 비밀정보망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오. 관리 일인당 끄나풀을 열 명씩 확보하라는 지시는 다 완료되었소?"
"거의 다 돼가고 있지요."
"그것도 신중하고 철저하게 해나가야 됩니다. 일로전쟁에서 내가 경험한 바로는 끄나풀 속에 오히려 적의 스파이가 숨어드는 위험도 있어요. 열 명 중에 그런 놈이 하나만 있으면 나머지 아홉은 있으나마나가 됩니다. 이 점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하시모토는 자못 타이르는 어조였다.
"물론 그래야겠지요."
백종두는 아니꼬움을 느끼면서도 짐짓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하지 마시오"
하고 쏘아대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가 군산부에서 더욱 힘이 막강해진 쓰지무라와 친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살펴보고 생각해 보아도 그의 정체는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논 수매는 잘되고 있나요?"
백종두는 담배를 권하며 하시모토의 일에 먼저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글세 말이오. 그게 뜻 같지가 않아요. 돈뭉치를 보고는 팔듯 팔 듯 하다가는 며칠이 지나면 안 팔겠다고 얼굴을 돌리고는 한단 말이오. 그게 다 의병 놈들이 논을 팔아먹는 건 나라를 팔아먹는 거라고 선동해댄 결과요."
하시모토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시모토 상,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의병 놈들이 그러기도 했고, 원래 조선 놈들이란, 아니 논 몇 마지기씩 가지고 농사나 지어먹는 천한 것들이란 겉으로는 순한 척, 굽실거리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래서 동학단 난리도 일어나고, 의병인지 화적뗀지도 일어나게 된단 말이오. 아랫것들이 앗싸리하지 않고 엉큼하다는 걸 잊지 마시오."
백종두는 내 말이 어떠냐는 듯 하시모토를 빤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맞소, 백 면장 말이 맞소. 남자들도 그렇지만 여자들이 특히 더 심해요.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은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슬슬 옆걸음질을 치며 사람을 피하는데, 힐끗힐끗 볼 것은 다 보면서 얌전한 척은 또 다 한단 말이오. 헌데 이쪽에서는 머릿수건에 가려 여자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지 않소. 그나저나 논을 빨리빨리 사들여야 할 텐데 참."
하시모토는 짭짭 입맛을 다셨다.
"면장 힘으로 마구잡이로 내리누를 수도 없고, 참 곤란하군요."
백종두는 슬며시 발뺌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시모토가 논을 많이 확보해야 하는 건 자신에게 지워진 짐이기도 했던 것이다.
"헌데 말이오, 논을 적게 가진 사람들보다도 더 문제가 논을 많이 가진 부자들이오. 부자들 중에서도 거 김 참봉이라는 사람 있잖소. 그자는 아주 고약한 인물이오."
하시모토는 얼굴을 잔뜩 구겨 붙였다. 주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반드르르하게 젊은 얼굴인 하시모토가 콧잔등과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얼굴을 구기는 것은 몹시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해 있다는 표시였다. 그가 찾아온 용건이 바로 김 참봉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백종두는 마음을 다잡았다.
"김 참봉이 하시모토 상한테 뭘 잘못한 일이 있나요?"
"글세 아주 고약한 일이 생겼소. 그 작자가 논을 파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들이고 있단 말이오. 그건 분명 내 일을 방해하는 건데, 제놈이 제 돈으로 하는 짓이니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할 노릇이고, 참 야단났단 말이오."
"하, 김 참봉이 그러던가요?"
백종두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간 소리에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놈이 논을 사들이면서 지껄인다는 소리가 더 가관이오.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제 일본세상이 됐으니 일본부자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만 하면 망할 염려는 없다고 한다는 거요. 제법 눈치까지 빠른 놈이니 더 고약하단 말이오. 아주 골칫거리를 만났소."
"글세, 그놈을 그거 어쩐다?"
백종두는 일부러 <그놈>이란 말을 쓰며 하시모토의 편을 드는 척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김 참봉에게 썩 괜찮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김 참봉이란 자는 자신이 면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찾아와 인사를 하면서 쌀 쉰 섬까지 넌지시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 중인으로서 이방의 자리에서 뛰어올라 면장이 되면서 족보 있는 양반한테 받은 최초의 인사였고 최초의 뇌물이었다. 그때의 그 통쾌하고 황홀한 기분이란 형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황홀하고 기막힌 기분은 여자하고 알몸놀이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양반한테 인사와 뇌물을 받는 기분이란 그것보다 몇 갑절 기막혔던 것이다. 그런 승리감과 황홀감을 맛보게 해준 김 참봉이 미울 까닭이 없었다.
"그게 눈을 찔러대는 가신데, 그놈을 어떻게 좀 해버리는 수가 없겠소?"
하시모토가 마침내 속셈을 드러냈다.
"그놈이 고약하긴 고약한데 어떤 좋은 수가 있을까?"
백종두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 면장! 최소한 죽산면 일대의 논은 다 내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는 이 하시모토의 계획은 잊지 않고 있겠지요."
하시모토의 목소리는 쇳소리를 내며 백종두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아,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그 중대한 일을 꿈에라도 잊을 리가 있나요."
백종두도 눈을 똑바로 뜨고 짱짱한 목소리로 하시모토에게 응수했다. 그러나 그의 등줄기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눈치가 예사가 아닌 하시모토에게 자신의 내심을 들켰을까봐 가슴이 섬뜩했던 것이다. 하시모토의 말은 노골적인 공갈이고 협박이었다. 젊은 놈의 그 방자함은 순전히 쓰지무라를 업고 있어서 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쓰지무라의 손에 달려 있는 한 하시모토는 상전이었다. 죽산면의 논들을 무슨 수를 써서든 하시모토의 것이 되게 하라는 것은 쓰지무라가 내린 어길 수 없는 명령이었다. 손톱 밑에 이 한 마리를 놓고 잉끄려 죽여 버리듯 백종두는 김 참봉을 마음에서 미련 없이 지워버렸다.
"백 면장, 내 말 똑똑히 들어두시오. 내가 최근 몇 년 동안에 억울하고 또 억울한 일이 뭔지 아시오? 군산에서 제일 가까운 옥구군 일대의 평야, 그다음으로 가까운 대야면 일대의 평야, 그리고 그다음인 만경면 일대의 평야, 그리고 그 밑으로 이어진 진봉면 성덕면 일대의 평야를 다 놓치고 여기 죽산면까지 밀려 내려왔다는 사실이오. 물론 내가 한 발 늦게 조선 땅에 왔기 때문에 그리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런데도 난 억울한 심정을 버릴 수가 없소. 그 억울함을 풀자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 죽산면 일대의 논은 전부 내 손아귀에 넣어야 되겠다 그 말이오. 백 면장은 바로 죽산 면장이오. 돈으로 해결이 안되는 것은 그다음부터 면장이 능력 발휘를 해야 한다 그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으시겠소?"
하시모토는 찬바람 도는 웃음을 입가에 문 채 백종두를 노려보듯 하고 있었다.
"당연하지요. 서로 의논해서 좋은 방안을 강구해 나갑시다."
백종두의 반들거리는 눈이 간사스럽게 웃고 있었다.
"좋소,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그까짓 놈 하나쯤 죽산면에서 몰아내기는 어렵지 않을 거요."
하시모토는 입술을 야무지게 훔쳤다.
"아니, 몰아내요?"
백종두는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놀랄 것 없소, 지금 내 심정을 말한 것뿐이니까."
매끈한 것 같으면서도 깐깐해 보이는 하시모토의 얼굴이 더욱 냉정해 보였다. 백종두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저놈이 대체 뭘 해먹고 산 놈인가. 젊은 놈이 돈은 또 어디서 났고. 저놈 욕심이나 말하는 뽄새가 사람 여럿 잡을 놈이라니까.
백종두는 이런 생각을 또 하면 마음을 사리고 있었다. 자신이 관청 물을 먹어오면서 잇속을 챙기고 이런저런 고비를 넘기고 하느라고 별의별 꾀를 다 부려보고 술수를 쓰고는 했지만 어느 사람을 아예 뿌리 뽑아 딴 곳으로 내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김 참봉을 막아낼 무슨 좋은 방도를 생각한 게 있나요?"
백종두는 하시모토가 묻기 전에 먼저 넌지시 말을 꺼냈다. 하시모토의 생각을 알아낼 겸 그의 생각에 의지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갈 속셈이었다.
"그것보다 먼저 할 말이 있소. 다름이 아니라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요."
하시모토는 생각을 간추리려는 것인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백종두는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될 거라는 통고만 받고 있었지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하시모토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백 면장은 토지조사사업에 관해서 뭘 좀 아는 게 있소?"
"알 리가 있나요. 상부에서 아직 아무 하달도 없는데요."
"됐어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고...... 그보다 중요한 건 토지조사사업이 머잖아 실시될 거라는 사실이오. 그게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가 될 거요."
하시모토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우리......?
백종두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 <우리>라는 말에 자신도 포함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네 일본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하고 아리송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그간에 호구조사는 다 끝냈다고 했지요?"
"예, 완료됐지요."
"그럼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기 전에 미리 해둘 중요한 일이 한 가지가 있소. 그게 뭔고 하니, 우리 죽산면의 농지경작 실태요. 다시 말해 누가 몇 마지기 논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오."
"그거야 예전부터 해놓은 게 군청에 다 있지요."
"아하 백 면장, 어찌 그리 말뜻을 못 알아 듣소. 이제 세상이 달라져 면단위 중심의 행정을 해나가는데 군청이 무슨 소용이 있소. 그리고 논밭은 끝없이 계속 사고팔고 해서 주인이 바뀌고 있는데 예전의 문서를 어디다 써먹겠소. 더구나 조선관청의 문서라는 건 엉성하기 짝이 없소. 그러니까 죽산면의 실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 조사할 필요가 있단 말이오."
"그게 토지조사사업과 중복되는 일 아니겠소?"
"어허, 백 면장이 이렇게 답답할 때도 다 있나. 아니지, 토지조사사업이 뭔지를 몰라서 그렇겠군.“
하시모토는 신경질을 내려다가 자제하고는
"백 면장, 법이 다 만들어지면 그게 중복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우선은 내가 시키는 일만 하시오."
그는 마치 쓰지무라처럼 명령조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백종두는 그 기세에 밀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말이오, 김 참봉을 제외한 지주들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두어 명 골라내 백 면장의 심복으로 만들어두는 게 좋겠소. 물론 나한테도 소개시키고 말이오."
"그렇게 하지요."
"김 참봉이란 사람은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될 인물이오. 그자의 손발을 묶으려면 아주 신중해야하니까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하시모토는 담배연기를 훅 내뿜으며 일어섰다. 그의 매끈한 얼굴이 싸늘했다.
장칠문은 밤을 틈타 마을 마을을 돌고 있었다. 순사복을 벗어버린 한복 차림이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한 변장이었지만 몸에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움직이지도 않았다. 밤에 활동할 때에는 언제나 기운 세고 싸움에 이골난 심복 하나를 데리고 다녔다. 힘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의병들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칠문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의병들이 끈질기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먹을 것이며 입을 것이며 잠자리를 대주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장칠문은 자신과 선을 대고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돈 없애가면서도 결국 주모에게 속아 저승객이 된 털보 방태수와 똥통에 기어들어 목숨은 겨우 부지했으나 똥독이 올라 비실거리는 빈대코 김봉구의 신세를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홍산리 외리의 강서방은 미리 연락해 둔대로 주막이 멀지 않은 입석 거리에 먼저 나와 있었다.
"오래 기둘렸소?"
장칠문이 불쑥 물었다.
"아이고, 붕알이 다 얼어붙어 부렀소."
양쪽 소매 속에 손을 서로 엇갈리게 넣은 강서방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붕알이 얼어붙어 부렀으먼 발꾸락언 어찌 됐을랑고? 주막에 술 한 잔 허로 가라고 혔등마 섭허게 되았네."
"아이고 맞소, 붕알 노골노골허니 녹힐 뜨끈뜨끈헌 주막집 아랫목 코앞에다 두고 요런 한데서 만내자고 헌 것이 머시다요. 내 발꾸락이야 걱정 말고 주막으로 가기나 헙시다."
강서방은 순진하게도 장칠문의 오기 받친 말을 거꾸로 알아듣고 있었다. 상대방의 얼굴표정을 알아볼 수 없도록 사방이 어둡기도 했다.
"강서방, 정신 나갔소. 사람 눈 조심허란 말 또 까묵어부렀소?"
장칠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모가지가 두 개가 아님사 추와도 정신채레야제."
장칠문의 옆에 선 사내가 내뱉었다.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알겠어라."
강 서방의 황급한 대꾸였다.
"강 서방, 못된 놈들 찾아냈소?"
"눈에 아무리 불키고 찾아도 의병언 얼찐도 안허능마요."
"어허, 의병만 찾으란 것이 아니랑게로."
장칠문의 목소리가 다시 거세졌다.
"아, 의병이 그림자도 안 비친게 의병허고 내통허는 사람도 없다 그 말 아니겠소."
강서방의 목소리도 퉁명스러워졌다.
"요런 답답허기넌."
신경질이 확 솟기는 것을 장칠문은 애써 눌러 참으며,
"강 서방, 내 말 잘 들으시오. 의병이나 의병하고 내통허는 인종덜만 찾아내란 것이 아니란 말이오. 긍게 무신 말이냐면, 일본이고 일본사람 욕해댐스로 나라 찾자고 사람덜 맘에 살살 바람 일게 허는 놈덜, 총독부고 관청이 허는 일 마땅찮애 험스로 몰르고 있는 사람들헌티꺼정 알리는 놈덜얼 다 찾아내라 그 말이오. 알아듣겄소?"
그는 말주변을 다 짜내 설명했다.
"야아......"
강 서방의 대답에는 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칠문의 말대로 하자면 찾아내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철든 동네남자들이 다 거기에 해당되었다. 아니, 여자들도 걸핏하면 총독부며 일본사람들을 욕해댔던 것이다.
"강 서방, 대답이 어찌 그리 맥아리가 없소, 저녁밥 안 묵었소."
장칠문이 쏴질렀다.
"야아, 죽 한 그럭 묵은 속에 날꺼정 추와논께 영 죽겄소."
강 서방은 얼른 둘러 붙였다.
"강 서방, 사시장철 쌀밥만 묵고 살기럴 바래면 나가 시키는 일만 똑바라지게 잘해 내란 말이오. ㅁ놈만 잘 찍어내면 논 열 마지기 얻기야 오뉴월 풋감 줍기니께, 알아듣소?"
"야아!"
강 서방의 대답에는 금방 기운이 넘쳤다. 장칠문이 어둠 속에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런 놈덜얼 찾아내먼 당장에 나헌티 연락허시오."
"그러제라."
"날 추운디 고상혔소. 요것으로 가다가 주막서 목이나 축이시오."
장칠문은 강 서방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이리 안허셔도 되는디......"
강 서방은 어물어물 돈을 받았다.
며칠이 지나 신세호의 집은 순사들에게 기습을 당했다. 신세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방문이 열어젖혀져서야 소스라쳤다. 그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신세호, 나왓!"
순사 하나가 조선말로 외쳤다. 그건 장칠문이었다. 그는 긴 칼 대신 총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얼굴에 핏기가 가시긴 했지만 신세호는 똑바로 앉아 말을 받았다. 방안의 아이들이 겁에 질려 저희들끼리 몸을 붙이며 웅크러들었다. 그 중에 방대근이도 끼여 있었다.
"무신 일인지넌 주재소에 가먼 알 것이고, 얼렁 나왓!"
그러나 장칠문은 상대방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소리를 치면서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아이들이 방구석으로 밀렸다.
"이 무슨 짓이오, 사람을 잡아가려거든 먼저 연유를 밝혀야지."
신세호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여자처럼 연약하게 생긴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역연했고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죄진 놈이 머시가 잘났다고 주딩이 까고 지랄이여, 얼렁 나가!"
장칠문이 개머리판으로 신세호의 등을 떠밀었다.
"기다리시오. 의관을 갖출 것이니."
신세호는 책장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헹, 양반 찌끄레기라고 이 다급헌 판에도 의관타령이여? 죄인잉게 맨 상툿바람이 격에 맞을 것인디. 잡새끼, 얼렁 나가!"
징칠문은 구둣발로 신세호의 허리를 사정없이 내질렀다. 신세호는 비명을 토하며 몸이 휘청 꺾였다. 툇마루에 곤두박이는 것을 가까스로 모면한 신세호는 버선발로 토방에 내려섰다.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순사가 그의 팔을 뒤로 꺾어 쇠고랑을 채웠다.
"씨부랄 놈, 누구 앞이서 양반타령이고 의관타령이여."
총을 옆구리에 기대세운 장칠문은 손바닥에 침을 튀겨 맞문 질러대며 신세호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보부상 아들로 천시당하고 살아오며 쌓인 양반에 대한 적개심을 그렇게 풀고 있었다.
"빨리 방안을 검색해."
일본순사가 장칠문에게 명령했다.
"하이!"
장칠문은 자기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일본순사에게 잽싸게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장칠문은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의 공부방답게 값나가는 장식가구 같은 것은 없고 책들과 신문지가 쌓여 있을 뿐이었다. 장칠문은 구둣발로 저벅거리고 다니며 책들을 뒤졌다. 열서너 명의 아이들은 두 패로 갈려 방구석에 몰려서 장칠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움찔거렸다. 장칠문의 구둣발에 종이에 적힌 글씨들이 마구 밟히고 있었다. 종이에 뭇으로 쓴 글씨들은 한문이 아니고 한글이었다.
"다 찾았습니다."
장칠문이 방을 나서며 일본순사에게 보고했다. 그의 손에는 서너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틀림없이 다 찾았나?"
"옛, 틀림없습니다."
장칠문은 토방으로 뛰어내리며 득의만면해 있었다.
"어디 보자."
책은 장칠문의 손에서 일본순사에게로 넘겨졌다. 신세호는 옆눈길로 책들을 일별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됐다. 가자!"
일본순사가 걸음을 떼어놓았다.
"얼렁 걸어!"
장칠문이 신세호의 등을 떠밀었다.
"여보오......"
그때까지 굳어져 있던 신세호의 아내가 잦아드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선상니임......"
아이들이 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며 울음 섞인 소리로 외쳤다.
"개자석, 조선 놈이!"
아이들 뒤에서 방대근은 입술을 앙다물고 서 있었다. 고샅에서 순사 일행과 마주치는 동네사람들은 황급히 길을 비켜서고는 했다. 신세호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잡혀가는 것이 겁나거나 기가 꺾여서가 아니었다. 맨상투에 동저고릿바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민망하고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상투를 틀어 올린 다음부터 의관을 갖추지 않고서는 문밖을 나서본 적이 없었다. 그런 법도에 어긋나고 품격없는 짓이란 가상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신세호는 아이들의 서투른 붓글씨를 보아주다가 옷을 버릴까봐 의관을 갖추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마저 짓밟아버리는 왜놈들의 횡포에 새로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신세호는 마을을 벗어나면서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왜놈들에 대한 분노와는 다르게 가슴에는 두려움이 차 있었다. 그 두려움은 뜨거운 것 같기도 했고 매운 것 같기도 하면서 가슴을 쿵쿵 울려대고 있었다. 숨을 몇번이고 들이켰지만 두려움은 가라앉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죄인 취급을 당해 잡혀가는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세호는 송수익을 생각해 냈다. 죽기를 작정하고 나선 그의 용맹이 새삼 부러웠다. 굽힐 줄 모르는 그의 강인함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왜놈들에게 잡혀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의병대장이 한 일에 비하면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설마 이놈들이 죽이기야 하겠는가...... 신세호는 멀고 먼 들녘 끝을 응시하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주재소에 도착하자마자 신세호는 주재소장 앞으로 끌려갔다.
"네놈이 바로 신세혼가!"
소장이 몸을 발딱 일으키며 팔을 내뻗쳤다. 그의 쭉 뻗은 검지손가락은 상대방의 눈을 파내기라도 할 것처럼 신세호의 눈을 겨누고 있었다. 신세호는 눈에다 힘을 모았다. 상대방은 왜놈답게 몸집이 작았다. 그러나 눈만은 매섭고 독기가 서려 있었다. 신세호는 그 눈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놈이 감히 누굴 쏘아봐! 반항하는 거야."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싸리회초리가 신세호의 옆얼굴을 후려쳤다. 신세호는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울컥 솟기는 비명을 깨물었다. 그러나 고개는 자신도 모르게 떨구어졌다.
"이놈도 이거 악질이구만. 이쪽으로 바닥에 꿇어앉혀."
통변 노릇을 겸하고 있는 장칠문에게 소장이 명령했다. 신세호는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져 소장의 의자 옆 마룻바닥에 꿇어앉혀졌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묻는 말에 순순히 답해. 괜히 골병 들지 말고."
소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신세호는 그 차가운 소리가 목에 감기는 걸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신세호, 너 신민회 소속이지."
소장이 의자를 뒤로 빼며 물었다.
신민회......? 어디서 들은 이름 같았다. 그러나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다. 신세호는 고개를 들었다.
"신민회요......?"
"이놈아, 모르는 척하니 말엇! 신민회 소속이 맞지."
소장의 눈이 독을 내뿜었다.
"아닙니다. 신민회가 뭡니까?"
"닥쳐, 이자식아"
소장이 구두코로 신세호의 무릎을 내질렀다.
"아이쿠!"
신세호의 무릎 꿇은 몸이 들썩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그 순간 신세호는 신민회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엄살 떨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실토해. 네놈이 실토하게 하는 고문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소장은 담배연기를 신세호의 얼굴에 훅 내뿜고는,
"너 신민회원이지!"
버럭 소리쳤다.
"아니라니까요."
신세호는 자기에게 씌우려는 올가미를 피하려는 듯 고개까지 내저었다. 신민회원으로 잘못 얽혀 들었다가는 꼼짝없이 감옥살이를 할 판이었다.
"이 자식, 죽고 싶어!"
소장은 벌떡 일어나며 신세호의 배를 걷어찼다. 신세호는 숨이 컥 막히는 걸 느꼈다. 뱃속이 뒤집히고 찢어지는 통증에 휘말리며 머리를 마룻바닥에 쿵 찧었다. 정신이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었다.
"이 자식아, 엄살 떨지 말고 똑바로 앉어."
신세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이빨을 맞갈았다. 그러면서 고문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일깨웠다. 신민회는 총독의 암살 음모를 도모했다고 하여 그 회원들이 전국적으로 검거되고 있었다. 신세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뱃속이 비비 틀리고 꼬이는 아픔 때문에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얼렁 일어나."
장칠문이 신세호의 어깨를 잡아챘다.
"너 신민회원이지, 그렇지?"
소장이 신세호 앞으로 얼굴을 디밀며 다그쳤다.
"아니오, 난 신민회가 뭔지도 모르오."
흐릿하게 보이는 소장의 얼굴을 의식하며 신세호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 새끼가 정말! 빨리 토해내."
소장의 주먹이 신세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신세호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가 되돌아왔다. 왼쪽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저 신민회원이 틀림없지."
"아니오"
턱까지 흘러내린 피가 방울져 떨어지며 신세호의 흰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증거가 있는데도 아니야? 저 죽고 싶지 않으면 바른 대로 대."
"증거를 보이시오."
"봐라, 이거다."
소장이 무언가를 신세호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건 신채호의 소설집《성웅 이순신》과 《을지문덕》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증거요?"
그 억지에 신세호는 그만 비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런 일종의 자신감이기도 했다.
"이자식이 누굴 바보로 아나! 이놈아, 바로 이 신채호란 놈이 신민회 간부고, 그놈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이런 불온한 책을 써서 신민회 비밀조직을 통해 배포했고, 네놈은 서당을 벌여놓고 앉아 아이들한테 이 불온서적을 읽혀 조선독립의 불온사상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반일사상을 주입시켰단 말이야. 이래도 거짓말을 하겠나!"
신세호는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은 영락없이 신민회 회원이었다. 그러나 신채호라는 분이 신민회 간부라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오, 난 신민회가 뭔지도 모르고, 그 책은 장터에서 산 거요."
신세호는 코피가 번진 입으로 부르짖었다.
"그래? 그럼 이 책이 총독부령으로 정해진 금서라는 것도 몰랐나?"
"그렇소."
신세호는 책을 빌린 사실을 숨긴 것처럼 판금조처도 모르는 척했다.
"그렇겠지, 다 그렇게 말하게 돼 있으니까. 네놈들이 아직 초장이라 우리 일본경찰의 조직이 어떤지 모르고 까부는 거야. 신민회? 그까짓 건 곧 일망타진이야."
소장은 코웃음을 치며 책을 책상 위에 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놈도 보기보단 독종이야. 때리면 우리 힘만 들고 소리질러대는 것 듣기 싫으니까 밖으로 끌어내다가 자백할 때까지 찬물 퍼부어."
소장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신세호는 주재소 뒤뜰로 끌려나갔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어스름을 타고 추위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신세호는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에 묶였다. 신세호를 묶은 두 일본순사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 물통을 든 장칠문이 나타났다.
"대가리서부터 퍼부어."
순사 하나가 장칠문에게 턱짓을 했다. 장칠문은 물통을 불끈 들어올렸다. 그리고 신세호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빨리 또 떠와."
순사가 담배연기를 풀풀 날리며 말했다. 장칠문이 부산하게 사라졌다. 신세호는 막힌 숨을 토해냈다. 찬물을 뒤집어쓴 순간 머리를 친 것은 죽음이었다. 그는 캄캄한 절망에 빠졌다.
"얼어 뒤지기 전에 입 열어."
장칠문이 두 번째 물통을 뒤집으며 내뱉었다. 신세호는 또다시 죽음을 느꼈다. 장칠문이 찬물을 퍼부어댈 때마다 점점 더 신명이 오르고 있었다. 몸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독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실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는 기대에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저놈이 제대로 입을 열기만 하면 내 팔자는 핀다. 저놈이 입을 열기만 하면 그때는 줄줄이 고구마캐기가 아닌가. 그리 되면 순사보를 면하고 정식 순사가 되는 것이야 하루아침이다. 정식 순사가 되기만 하면......
이런 생각을 하면 장칠문은 가슴이 설레다 못해 벌떡거렸다. 어떻게 해서든 정식 순사만 되면 백종두의 그늘에서 벗어날 작정이었다. 우선 자신의 신분을 빤히 알고 있는 백종두의 천대와 멸시가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군산에 비해 손바닥만한 면단위 촌구석이 싱겁고 지루해 살맛이 나지 않았다. 정식 순사가 되어 옮겨갈 목적지는 군산이었다. 군산은 시끌벅적하게 돌아가는 도시인데다가 돈이 흥청거리는 데가 수두룩했고, 일진회에서 거느렸던 졸개들이 부두에서부터 쫙 퍼져 있는 그곳에서 순사질을 해먹는다는 것은 면장이 따로 부러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니가 군산바닥서 순사질얼 하먼 이 애비가 날개 다는 것 아니겄냐. 어쨌그나 간에 죽산면에 가서 그놈으 순사보에 보자럴 탁 띠내게 공얼 세와라. 니가 보자만 띠내고 정식으로 순사만 됨사 군산으로 오는 것이야 이 애비가 요렇타께 해낼 것잉게. 니도 알지냐? 애비헌티 그만헌 심 있는 거."
장칠문은 아버지의 말에 더 힘을 얻어가며 물통이 무거울 줄을 몰랐다.
한편 신세호의 아내 김씨의 연락을 받은 신씨문중에서는 여기저기 사람을 띄워 저녁 무렵에 문중회의를 열었다.
"이얘기럴 다 들어본즉 세호조카가 주재소로 붙들려간 연유가 확연하지가 않소이다. 왜놈덜이 연유럴 말허지 안했고, 무신 책얼 압수해 갔다는 것으로 보아 서당을 열어 공부를 가르치면서 무신 잘못이 생긴 것 아닌가 싶소이다. 이 일얼 어찌했으면 좋을란지 말씸덜 나눠보십시다."
흰 수염이 근엄한 좌장의 말이었다.
"진중허고 얌전헌 세호조카가 주재소로 잽혀갈 만치 잘못헌 일이 없을 것인디요?"
"글씨요, 그리 장담허기도 에로울 것잉마요. 살림도 넉넉허덜 못헌 처지에 뜸금없이 서당을 채린 것보톰 이상시러왔는디요. 서당서도 진서보담도 언문얼 더 많이 갤친다넌 소문도 나돌든디, 혹여 그 사람이 합방되고 나서 생각을 달리 묵은 것이 아닐랑가요?"
"안직 젊은 나이닝게 망국한얼 풀자는 생각으로 서당을 채랬는지도 모를 일이오. 그러다봉게 우국의 언사가 왜놈덜 귀에 죄로 잽히게 되고......"
"자아, 시방 우리가 헐 일언 세호조카가 무신 죄럴 졌는지 갑론을박헐 것이 아니외다. 왜놈덜 행투로 보아 사람얼 잡아가면 차근히 죄럴 따지기 전에 매질보톰 해댈 것인즉, 우리가 시급히 헐 일은 잽혀간 사람을 어찌 빼낼 것인지 그 방 도를 찾는 것이라 생각되오이다."
좌장이 흰 수염을 쓰다듬어 내리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예, 지당하신 말씸입니다. 그렁게로 이번 일언 세호조카가 진 죄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왜놈덜이 우리 문중 사람얼 잡어간 것이 문제로구만요. 왜놈덜이 감히 어디라고 우리 고령 신씨 문중사람헌티 즈그 맘대로 쇠고랑얼 채우고 그럴 법이 있능가요. 이것은 우리 고령 신씨 문중의 위신과 체면얼 깎는 일이니 문중이 전부 들고일어나야 헐 일이라고 생각허느만요."
"그 말이 맞구만요. 주재소 놈덜이 고령 신씨 무서운 것얼 알게 해야 될 것이구만요."
"두말헐 것 있능가요. 왜놈덜이 섣부르게 우리 문중 사람덜헌티 소 못대게 초장에 버르장머리럴 잡아놔야 헐 일이구만요."
그 시각에 얼음덩이가 된 신세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흩어진 머리카락들이며 옷끝마다에는 실고드름이 맺히고, 살얼음이 낀 그의 얼굴은 파랗게 죽어 있었다.
"요런 지독헌 놈이 끝꺼정 입얼 안 열고 정신이 나가부네."
울상이 된 장칠문은 물통을 걷어찼다.
"헤이 꼬쓰까이, 빨리 끈 풀어. 이러다가 죽이면 큰일 난다. 빨리 해, 빨리."
일본순사가 장칠문을 다그쳤다.
"씨부랄놈 지랄허고 자빠졌네. 니나 나나 순사복 입고 칼 차기넌 매일반인디 다른 존 말 다 두고 꼬쓰까이가 머시여, 꼬쓰까이가. 잡녀러새끼, 셋바닥얼 탁 짤라불라."
장칠문은 물을 정신없이 퍼다붓고도 자백을 받아내지 못해 성질이 돋아 있던 판에 <꼬쓰까이(심부름꾼)>라고 업신여김까지 당하게 되자 그만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 조선말로 마구 욕을 퍼대고 있었다.
"이봐, 지금 나한테 욕하는 거지!"
일본순사가 장칠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장칠문은 아차 싶었다. 자신이 한 말에 <꼬쓰까이>란 말이 섞여 있었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순사님한테 욕할 리가 있나요. 저놈한테 욕했지요. 이 자식아, 니가 자백을 안하니까 나까지 꼬쓰까이라고 무시당한다고 욕을 한 거지요"
장칠문은 웃음까지 지어가며 능청스럽게 둘러 붙였다.
"욕한다고 기절한 놈이 알아 듣기나 해. 빨리 끈 풀어 안으로 옮겨."
일본순사는 미심쩍은 눈초리이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끈을 풀었지만 온몸이 얼어붙은 신세호는 나무토막이나 다름없었다. 장칠문이 업고 일본순사가 옆에서 붙들고 해서 신세호는 주재소 안으로 옮겨졌다.
"빨리 옷 벗겨서 숙직실로 옮겨. 이러다가 죽이면 정말 큰일이야, 큰일."
뻣뻣하게 굳은 신세호를 책상 위에 누이며 일본순사가 서둘러댔다.
"아니, 이거 왜 이래. 죽었어 살았어?"
난로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순사가 눈을 휘둥글하게 뜨며 달겨 들었다.
"기절했네, 기절."
"자백은?"
"안했네."
"자백도 못 받고 이 지경을 만들면 어쩌나. 이러다가 죽는다는 걸 자네도 알잖 나. 자백도 못 받고 죽이면 어찌 되는지 알아? 양반 잘못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 잊어버렸나?"
"아 글세 내가 딴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저놈이 이 꼴을 만들어놨지 뭔가. 같은 조선 놈이 더한다니까."
"시끄럽네, 다 자네 잘못이야."
그들은 신세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옷도 얼고 몸도 얼어서 옷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을 낑낑거려 옷을 다 벗겨냈다. 그리고 신세호를 숙직실로 옮겨다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정신이 깨날 때까지 팔다리를 주물러."
순사 하나가 장칠문에게 명령했다.
"나 아직 저녁밥도 안 먹었소."
장칠문이 아니꼽다는 듯 내쏘았다.
"누구는 저녁밥 먹은 줄 아나. 저러다가 죽이면 네놈은 어찌 되는지 알기나 해."
순사가 눈을 부릅떴다.
"나야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오."
장칠문은 그냥 돌아서려다가 순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 말을 분명하게 했다.
재수 없게 죽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잔소리 말고 빨리 주무르기나 해!"
순사가 소리치고 돌아섰다.
"좆겉은 놈덜. 시킬 때넌 은제고 겁난게 떠넴기는 것언 머시여. 왜놈덜도 겁 많고 간이 콩알만헌 것이 알고 보먼 좆도 아니랑게. 몸집도 보잘것이 없고 좆대감지도 우리보담 작은디, 근디 어찌서 저것덜이 조선얼 집어묵어 부렀을꼬? 모를 일이랑게, 모를 일이여......"
신세호의 팔다리를 주무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장칠문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담배를 빨아대며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신세호 새벽녘에 정신이 깨어났다. 심한 오한으로 턱이 덜덜거리고 정신이 쏙쏙 아리면서 푸들푸들 떨렸다. 그는 떨리는 것을 막으려고 몸을 오그리며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 순간 마음이 환해지면서 목이 메었다. 몸이 얼어붙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 가며 느꼈던 절망이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기쁨도 잠시일 뿐이었다. 그는 곧 고문의 공포에 짓눌리고 말았다. 신세호는 몸을 바짝 오그려 팔로 다리를 감았다. 그는 맨살이 닿는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 왈칵 수치심이 끼쳤다. 자신이 왜 벌거숭이로 누워 있는가를 신세호는 한참 추리를 한 다음 알아냈다. 왜놈들 앞에 벌거숭이가 된 치욕을 그는 신음으로 앓았다.
신씨 문중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주재소로 몰려들었다. 앞으로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서고 뒤에는 젊은 사람들이 받친 그들은 50여 명을 헤아렸다. 그들 중에 단발을 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갓도래가 넓은 양반 갓에 거의가 비단두루마기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들의 외모는 뼈대 있는 양반인 신씨 문중의 위세와 권위가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죽산면에 사는 신씨들만이 아니었다. 밤사이에 이웃 김제와 진봉 · 성덕 면에 연락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눈에 힘이 모아지고 입이 꾹 다물린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들의 이글거리고 있는 기세는 조그만 주재소 하나쯤 곧 떠넘겨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놈들아, 당장 신세호럴 내놔라!"
어제 문중회의를 주재했던 흰 수염의 노인이 호령했다. 주재소 소장은 뒤늦게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주재소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색다른 사람들을 보고 그만 기가 질렸다. 상투머리에 수건을 두른 농부들은 많이 보았지만 큰 갓에 비단옷을 입은 양반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조선양반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조선 5백년의 지배층인 동시에 현재의 지주들이고 현실세력이다. 각 지방마다 문벌을 이루고 사는 그들은 특히 양반이라는 자기네 신분에 대한 긍지와 자만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 그 위신과 콧대를 잘못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긴 문벌의 위신이 손상되거나 권위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면 즉각적으로 집단행동을 감행한다. 그 저항은 간단하지가 않다. 그 영향이 곧 아래 계층으로 퍼져 한 지역 전체가 저항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양반과 그 아래 계층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양반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양반을 존경하고 우대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건 곧 애증의 관계인데, 어쨌거나 양반들이 평민이나 상민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양반들은 적대의 대상이 아니라 타협과 회유의 대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지배의 성패는 양반계층을 어떻게 회유하고, 얼마나 능란하게 타협해 나가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양반을 대함에 있어서는 첫째 예절을 잘 지켜야 하며 둘째......>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에 오사카에서 교육받았던 내용이 빠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내가 일을 잘못 저지른 것인가...... 소장은 작은 체구를 바르르 떨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일은 이미 저질러진 것이었다. 그리고 물증도 확보되어 있었다. 만약 신민회 회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판금서적을 학동들에게 읽어준 것만으로도 반일사상을 고취시킨 범행으로 얼마든지 몰 수 있었다. 조선양반 놈들에게 위신과 체면이 있다면 대일본제국의 순사에게도 위신과 체면이 있다. 소장은 이런 생각과 함께 전의를 가다듬었다. 이번 사건에서 명분 없이 밀리게 되면 이 고장에서 소장 노릇 제대로 해먹기는 틀려버린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갖감했던 것이다.
"자아, 흥분들 하지 마시고 내 얘기를 들어보시오. 우리가 신세호를 체포한 것은 개인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신씨라는 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조선양반들의 높은 지체를 존중하고 고상한 체통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치안책임을 맡은 입장에서 양반이 저지른 범행까지 묵과할 수는 없다 그겁니다. 법 앞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경찰은 신세호를 무작정 체포한 것이 아니라 그라 범행을 저지른 물증을 토대로 신중하게 체포한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집단으로 오신 것은 그런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혹시 신씨 집안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 경찰은 어디까지나 물증에 의한 정당한 범행수사를 할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이런 집단 행위는 경찰업무를 방해하는 죄가 되고, 여러분이 해산을 하지 않으면 막강한 경찰력이 동원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나는 여러분의 대표에게 불증을 보이고 범행을 설명할 용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을 끊은 소장은 웃음기 서린 부드러운 얼굴로 모여선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작은 체구에 비해 그의 언행은 다부지고 여유만만 했다. 그의 양쪽 옆에는 부하들이 집총자세로 서 있었다. 모여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앞에 선 노장층들이 낮은 소리로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소장은 여전히 호의적인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소이다. 우리 세 사람이 물증을 보고, 신세호도 만나보도록 허겄소."
흰 수염의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른 두 노인이 뒤따라 앞으로 나섰다.
"예, 그렇게 하지요. 그럼 저 사람들을 해산시켜 주시오."
소장이 턱짓으로 나머지 사람들을 가리켰다.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려 그는 스스로의 능력에 적이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안 될 일이오. 우리 눈으로 다 똑똑허니 볼 때꺼정언 해산얼 못하외다."
흰 수염의 노인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나를 아니, 우리 경찰을 못 믿겠다는 거요?"
소장은 발끈 화를 내며 목청을 높였다. 그는 사탕 핥듯 즐기고 있던 만족감이 산산이 깨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 사람덜이 해산얼 안 헌다고 해서 난동얼 부릴 것이 아닌즉 우리가 할 일얼 못헐 것이 없소. 더군다나 당신네 경찰이 당당헌 바에야 더 말헐 것이 없지가 않소이까."
흰 수염의 노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근엄함으로 소장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소장은 그만 난감해지고 말았다. 되받아칠 말이 없었다. 다 이긴 싸움인 줄 알았는데 싸움은 비로소 시작이었던 것이다. 양반이란 것이 결코 허울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소장은 쓴 입맛을 다셨다.
"좋소, 세 사람만 들어오시오."
소장은 옆에 차고 있는 칼을 일부러 소리 나게 흔들어대며 돌아섰다. 세 노장이 소장의 뒤를 따라 주재소로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 짝을 지으며 웅성거렸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추위를 타고 있었다.
"이게 바로 물증이오."
소장은 자기 책상서랍에서 책을 꺼내 책상 위에 던지듯 했다. 주재소 안으로 들어온 소장의 태도는 표변해 있었다. 노장 두 사람이 서둘러 책을 한 권씩 집어 들었다.
"아니, 이건 이야기책 아니오?"
흰 수염의 노인이 의아스럽게 소장을 건너다보았다.
"이야기책이라도 그냥 이야기책이 아니니까 문제요."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겄소. 조선 사람이 쓴 이야기책얼 조선 사람이 본 것이 머시가 죄가 된다는 것이오?"
흰 수염의 노인의 눈에는 노여움이 드러났다.
"모르는 소리 마시오. 그 책을 쓴 신채호라는 자는 반일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간부로 체포령이 내려져 있고, 그자는 그 책들을 반일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썼단 말이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그 책들을 금서로 정했는데 신세호는 그 조처를 어기고 학동들에게 그 책들을 읽어주면서 반일사상을 주입시키고 조선독립을 선동했단 말이오. 신세호가 반일 비밀단체인 신민회 회원이 아니고서는 그런 범법행위를 자행할 리가 없소. 이래도 할 말이 있소!"
소장의 자신만만한 말이었다. 세 노장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람의 속이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됐으니 모두 물러가시오."
소장은 수세에 몰린 적을 숨 돌릴 겨를 없이 몰아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오, 일이 다 안 끝났소. 이런 일언 한쪽 말만 들어서 될 일이 아니오. 우리가 당자헌티 직접 확인헐 것이니 신세호를 만나게 해주시오."
또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걸고 드는 것이었다. 소장은 그만 울화통이 터졌다.
"수사가 다 안 끝났으니 범인은 만날 수가 없소. 그만 돌아가시오."
"좋소이다. 그리 식언얼 허면 우리도 해산이고 머고 못허는 것이오."
흰 수염의 노인이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다른 두 노인도 의자를 하나씩 끌어다가 앉았다. 수세에 몰린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소장은 반격을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만 급할 뿐 그들을 물리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세 노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밖에는 50여 명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의자를 차지하고 앉은 배짱 앞에서 총을 들이대는 강압적인 방법이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당장 나가시오! 수사가 끝나기 전에는 범인 면회를 시키지 않는 게 원칙이오."
소장은 구둣발로 마룻장을 구르며 스스로의 기세를 돋우었다.
"신세호를 대면시키겠다는 약조넌 왜 했소. 약조럴 지키시오."
꼿꼿하게 앉은 흰 수염의 노인은 소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소장은 자신의 경솔을 후회했다. 처음에 물증 확인만으로 못을 박아야 했던 것이다. 양반떼거리들의 기습을 모면할 생각만 앞서 상대방의 말을 소홀하게 받아넘긴 것이 불찰이었다. 신세호를 그들과 대면시킬 수 없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신세호는 보나마나 그들 앞에서 자신이 신민회 회원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고, 둘째 신세호의 몰골은 고문당한 흔적이 너무나 뚜렷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장 문제인 것은 수사에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고문을 한 흔적이었다. 신세호의 고문당한 꼴을 보게 되면 저렇듯 위세당당한 양반떼거리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그것을 트집 잡아 말썽을 일으킬 것이 너무나 뻔했다.
"당신들, 수사방해가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알아!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나가라니까."
소장은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치며 문 쪽으로 팔을 뻗쳤다. 그의 얼굴은 험상궂게 구겨져 있었고, 눈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좋소이다, 약조넌 당신네가 깨고서 우리보고 죄인이라? 어디 당신네 맘대로 해보시오."
흰 수염의 노인은 기색이 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수염을 쓰다듬어 내리며 앉음새가 더 단단해졌다. 소장은 소리를 칠 때마다 자꾸 더 밀리는 것을 느끼면 초조해지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기분 나쁜 큰 갓을 쓴 양반떼거리들이 마치 무슨 성벽처럼 완강하게 느껴졌다. 일단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하자 그들을 물리칠 묘안은 더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들을 공포를 쏴대서 해산시켜?
소장은 어금니를 맞물며 이 생각을 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소장님, 전화 왔습니다. 면장님이십니다."
부동자세가 된 일본순사가 두 손으로 수화기를 받들어 올렸다. 면단위에 전화라야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통하는 것이 전부였다. 두 기관은 가깝게 붙어 있으면서도 행정과 치안의 업무협조를 위해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 소장은 전혀 달갑잖은 기분으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닌데다가, 턱없이 거드름을 피우는 백종두라는 위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무인 한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보세요, 주재소장입니다."
"아, 나 면장이오. 별일 없나요?"
마뜩찮은 소장의 목소리에 비해 백종두의 목소리는 탄력적으로 밝았다.
"예, 별일 없어요."
소장은 직감적으로 이자가 무슨 냄새를 맡았나 생각하면서도 시침을 뗐다.
"아니, 근동 신가란 신가는 다 모여들어 주재소를 둘러싸고 야단난 판인데도 별일이 없단 말이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백종두의 말은 날카로운 대꼬챙이가 되어 여지없이 소장의 귀청을 찌르고 있었다.
이런 약삭빠른 놈이 어느새 알았나 그래. 이럴 줄 알았더라면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는 게 나았을 건데......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장은 짜증과 함께 오기가 솟아올랐다.
"그까짓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소."
"아, 그거야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소장이 책임져야 할 소관업무니까. 헌데 한 가지만 분명하게 말하겠소. 다른 게 아니라 범인으로 잡아온 놈을 쉽게 풀어줘선 안 된다는 거요. 철저하게 수사를 해주시오. 우리 면에서 반일배 놈들을 근절시키는 것은 내 책임이기도 하니까."
전화가 끊겨버렸다. 소장은 느닷없이 면상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울화가 치솟기면서 욕이 터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같은 조선 놈인 장칠문 앞에서 면장을 욕해대는 건 뻔한 덫에 차이는 어리석음이었다. 장칠문은 백종두와 끈이 이어져 있는 사이였고, 아무리 조선 놈이라고 하더라도 면장은 면장이었다. 면장은 뜻하지 않은 복병이었다. 만약 양반떼거리들을 무마하기 위해 범인을 적당히 풀어주려고 해도 풀어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답답하단 해결책이 이제 아주 암담하게 막힌 것이었다. 소장은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그어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깥에 있는 사람덜 춥소이다. 어서 사람얼 만나게 허시오."
흰 수염의 노인이 묵직한 어조로 다시 소장을 밀어대고 있었다.
"시끄럽소. 내 할 말은 다 했으니 어디 당신들 멋대로 해보시오. 그땐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소장은 꽥 소리를 지르면 옆에 차고 있던 칼을 반쯤 뽑았다가 도로 넣었다. 그 재빠른 동작에 쇠끼리 갈리고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고 싸늘했다.
"머시라고? 눈치럴 보아허니 사람얼 우리 앞에 내놓지 못헐 만치 매질얼 헌 모냥이구나. 어디 봐라, 우리 멋대로 헐 것이니!"
흰 소염의 노인이 마침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언성을 높였다. 그 얼굴에 노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편 백종두는 면사무소 직원 두 명을 주재소 쪽에 내보내놓고 사태가 악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면장님, 면장님 나리, 야단났구만이라우. 신씨 문중 사람덜이 전부 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디 순사덜이 원체로 수가 작응게 밀리고 있구만요."
사무실로 뛰어든 한 직원의 숨 가쁜 보고였다.
"순사덜이 밀린다고?"
백종두는 속으로 고소해하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일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야아, 순사덜이 총얼 못 쏜게 총이야 앞 가로막는 작대기구만요."
"알었네, 물러스소."
백종두는 건성으로 옷을 털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탕 총소리가 울렸다. 백종두는 주춤 멈춰 섰다. 공포인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총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사정이 아무리 다급하다 해도 소장이 바보가 아닌 바에야 진짜 사격은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재소롤 발길을 서둘렀다. 백종두의 예상대로 그건 공포였다. 주재소에서는 신씨 문중 사람들과 순사들이 팽팽하게 대치해 있었다. 신씨 문중 사람들은 주재소로 밀고 들어가다 멈춘 상태였고, 살기 품은 순사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물러스시오, 물러서. 면장님 나리 나오시는디 물러서."
면직원이 소리를 높이며 사람들을 헤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길을 틔우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면직원이 양반들을 양쪽으로 가르며 내놓는 길을 따라 백종두는 냉엄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그는 양쪽에서 자신에게로 쏠리고 있는 양반들의 눈길을 충분히 의식하는 만큼 냉정하게 묵살하고 있었다. 그는 더없이 당당하고 의연해 보였다.
"예에, 나 면장이오. 내가 보기로 일이 이리 돼서넌 좋을 것이 없소. 일얼 순리로 따지면 아무리 죄럴 졌어도 좋게 푸는 방도가 있소. 헌디 이리 완력으로 대허면 양반 체면도 깎이고 일도 고약허니 꼬이는 법이오. 나넌 면장으로 이 일이 좋게 풀리기럴 바래고 있소. 또 면장 권한으로 쉽게 풀 수도 있소. 허니 그쪽서도 그리 바래는 맘이 있으면 대표럴 뽑아 면장실로 오시오."
백종두는 신씨 문중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주재소를 나가버렸다. 그는 주재 소장하고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그는 주재소장보다 높아 보였다.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주재소장은 잠시 멍한 얼굴이다가 백종두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자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신씨 문중 사람들 사이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끼리끼리 의견을 주고받느라고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다덜 사담얼 중지허시오. 잠시 중지럴 모으도록 허겄소."
흰 수염의 노인이 목청을 높였다. 햇발이 퍼지기는 했으나 날씨는 여전히 매웠다. 추위 속에서 신씨 문중 사람들은 언 몸을 추슬러가며 새로 의견들을 모았다. 범절에 따라 나이 많은 축들이 입을 열었고 젊은 축들은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공론은 면장을 중재자로 삼자는 것으로 낙찰되었다. 그 이유는 신세호가 총독부령을 어긴 것이 분명한 이상 법망을 피할 도리가 없고, 더 우격다짐으로 나가다가 신세호에게 감옥살이 고생을 시키느니 이 정도에서 면장을 이용해 일을 무마하자는 목적이었다. 일이 그렇게 해결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신씨 문중의 위력은 과시된 것이라는 데에 그들은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아까의 세 노인이 다시 면장을 만나기로 했다. 신씨 문중 사람들은 면장인 백가가 자기네들보다 지체 낮은 중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체념하 고 있었고,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오셨구만요. 일로 앉으시오."
백종두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정중하고 친절하게 세 노인을 맞아들였다. 그런데 세 노인의 얼굴은 굳어진 것도 같고 불쾌한 것도 같고 떫은 것도 같고 제각각이었다.
"이리 지럴 찾어언 것으로 어러신덜 맘얼 다 아니께 이얘기가 길어질 것도 없구만요. 딱 짤라 이얘기럴 허자면 잽혀온 사람얼 이것저것 죄럴 따지지 말로 속히 풀어내는 것 아닐랑가요?"
백종두는 일부러 <지럴 찾어언>이라고 못을 박고는 상대방들의 맘 속에 든 말을 먼저 해버렸다. 그의 반들거리는 눈은 유난히 더 빛을 내며 세 노인을 차례차례 겨누고 있었다.
"요지넌 그렇소."
흰 수염 노인의 더딘 대꾸였다.
"그러면 됐구만요. 잽혀온 사람 죄가 얼매나 크든지 간에 나헌티 하로만 여유럴 주먼 낼 이맘때 딱 풀려나게 허겄구만요. 지금 당장 에로운 것언 주재소장 맘얼 돌릴 궁리럴 혀야 헝게요. 어찌 생각허시능가요?"
세 노인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눈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 말얼 어찌 믿소?"
"신씨 문중에 거짓말히서 면장자리 지대로 지키겄능게라?"
백종두는 계속해서 그들의 급소만 골라가며 찌르고 있었다. 세 노인은 다시 눈길을 주고받았다.
"소장이 매질얼 헌 모냥인디, 더는 몸 상허게 해서는 안될 것이오."
"하먼이요. 인자보톰 터럭끝도 못 다치게 허겄구만이라."
"긴말 안컸소. 내일이오."
흰 수염의 노인이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두 노인이 뒤따라 일어났다.
"안심 허고 가서 쉬시씨요. 진작에 나가 알었으면 요런 고상덜 안혔어도 될 것 인디......"
백종두는 또 예절바른 태도로 세 노인을 사무실 밖에까지 배웅했다. 흰 수염의 노인이 걸음을 옮기며 가늘고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느라고 수염에 감싸인 입술이 달싹이고 있었다. 노인의 걸음걸 이는 갑자기 무겁고 지쳐 보였다.
"으하하하하...... 어허허허허......"
뒷짐을 진 백종두는 배를 앞으로 내밀어가며 마구 웃어젖히고 있었다.
이놈들아, 네까짓 것들이 양반이면 별 수 있느냐. 결국 날 찾아와 머리를 숙이지 않았느냐. 뭐, 함안 조가는 말똥구멍에서 나와도 양반이고, 고령 신가는 돼지우리에서 낳아도 양반이라고? 더러운 놈들, 왜 개씹에서는 나왔다고 안했냐. 이놈들아, 이제 까불지 말어라. 이 아전 출신 백가한테 네놈들은 존댈를 썼어. 이제 양반이 뒤바뀐 세상이고, 네놈들은 갈수록 보잘것없이 될 테니까 어디 두고 봐라. 내가 네놈들이 이뻐서 편드는 줄 아냐. 네놈들은 이제 내 주먹 안에 든 밥이야. 네놈들이 일단 은혜를 입었으니 앞으로 두고두고 갚아야 해.
백종두는 난생 처음으로 통쾌한 승리감을 맛보고 있었다. 웃음소리 속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 소장이오. 저것들이 그냥 돌아가고 있소. 어떻게 했길래 그렇소?"
"뭐 놀랄 것 없소. 거 범인이나 더 때리지 말고, 이따가 점심이나 함께합시다. 내가 한턱내겠소."
백종두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26.번뇌의 불
산골에 얼음이 풀리면서 돌돌거리는 개울물소리가 날로 낭랑해지고 있었다. 아침이면 골짜기마다 피어나는 안개도 젖빛으로 짙었고, 산들은 밝은 기운을 띄면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도 맑고 싱그러운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하늘빛도 아늑해졌고 땅 색도 포근해졌다. 봄은 하늘에서도 내리고 땅에서도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안직 물이 찬디..."
홍씨는 치마를 여미고 앉으며 개울물에 손을 담갔다.
"이, 보살님. 물이 차운지 암스로 멀라고 손얼 잠그고 그런당게라."
빨래를 주무르고 있던 아기중이 반가운 얼굴에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시님 손 시런디 지가 허먼 어쩌겄소."
홍씨의 조심스러운 말이다.
"아니구만이라우. 중이 속인헌티 옷언 얻어입어도 중 빨래럴 속인헌티 멫기는 법이 아닌디요. 중이 지 빨래 지가 허는 것도 수행잉게요."
빨래를 움켜잡은 아기 중은 정색을 하고 도라질을 했다.
"똑 큰 시님이 말씸허시는 것 겉으요."
홍씨는 쿡 웃으며 눈 흘김 하듯 아기 중을 쳐다보았다. 그 야릇하게 고운 눈매에 정이 담뿍 들어 있었다.
"큰 시님이 항시 귀 아프게 허시는 말씸잉게라."
아기 중은 고개를 움츠리고 어깨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무허는 것도 수행, 비질 걸레질도 수행, 밥 허는 것도 수행, 궂은 일언 다 수행이니 절 인심도 참 야박허요."
홍씨는 아기 중이 그지없이 짠한 생각이 들어 나오는 대로 말을 해버렸다.
"그러이 아니구만요. 수행질이 구만리 첩첩산중인디 그런 겉수행얼 이겨야 속수행도 지대로 닦게 되고, 그담에 중생제도럴 헐 수 있게 되닝게요."
"참말로, 달통헌 법사님 법문이 따로 없소."
홍씨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는,
"시님, 이 중생얼 제도 잠 혀주시오"
하며 조금 가까이 다가앉았다.
"아이고메, 지가 무신 시님언 시님이어라. 행자 중에서도 질로 끝에 매달린 풋행잔디요."
아기 중은 깜짝 놀라며 물러나 않았다.
"아니, 시님보고 에로운 독경 허라는 것도 아니고, 번뇌 삭일 법어 내리라는 것도 아닝게 걱정 안 해도 되능마요. 나가 살짝 알라고 허는 일이 있는디 그것만 말해 주먼 되겄소."
주위를 빠르게 살피는 홍씨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있었다.
"고것이 무신 일인디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아기중이 홍씨를 쳐다보며 맑은 눈을 깜박거렸다.
"저어......"
홍씨는 다시 뒤쪽을 살피며 저고리 섶을 여몄다. 망설임이 드러나고 있는 얼굴에 발그레한 기가 돌았다. 아기 중은 그 얼굴이 무슨 꽃처럼 곱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우리 어머니가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저어...... 여그 기시든 의병대장님 말이오, 그 어런이 어디로 가셨능가 아시오?"
홍씨는 더 얼굴이 붉어지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고것얼 알면 보살님 맘이 제도가 되는게라?"
아기 중이 쌔액 웃으며 앞으로 다가앉았다. 아기 중의 그 묘한 웃음과 찌르듯 하는 말이 자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홍씨는 그만 당황했다.
"긍게 머시냐...... 몸이 성허덜 안허셨는디...... 걱정시럽고 히서......"
홍씨는 어색스럽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아기 중이 너무 영특해서 탈이라고 생각하며.
"어쩌제라? 지도 잘 몰르는디요. 지팽이 안 짚어도 되게 다리가 낫자 다른 의병덜허고 곧 떠났는디, 어디로 간다는 말언 없었구만요. 지가 물어봉게 쩌그 저 산만 손꾸락질 허드랑게요."
홍씨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근디 두 달 전인가, 아칙에 마당얼 씨는디 누가 앞얼 딱 막고 스드랑게라. 아, 올려다봉게 그 의병대장님이등마요. 얼매나 반갑든지......."
아기 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음마, 무신 일로 오셨등가요?"
홍씨의 마음은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그냥 지내가기 섭해 발길 허셨담스로 하룻밤 무고 뜨셨구만이라우."
따스한 봄볕을 등에 받고 앉은 아기 중은 홍씨의 기색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언제 또 오신단 말씸 없으셨소?"
홍씨의 눈가장자리에 수심이 어렸다.
"야아, 인연이 남았으먼 또 만내자고 허셨구만이라우."
"시님 생각에넌 또 오실 것 겉으요?"
"하먼이요, 그 어런이야 천년장순디요."
"천년장수?"
"야아, 그 어런 별호구만이라우. 무신 일이 있어도 왜놈덜 손에 안 죽는다고."
"오시면 언제나 오실랑가......"
홍씨는 눈길을 떨구며 가느다란 소리로 중얼거렸다. 눈 가장자리에 어렸던 수심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기중은 보살님의 고운 얼굴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 싫었다. 예쁜 꽃이 시들어버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 어런헌티 무신 전헐 이얘기가 있으신게라? 글로 적어주시면 지가 잘 간수혔다가 영축 없이 전헐 것인디요."
아기 중은 눈길을 떨군 홍씨의 얼굴을 올려다보듯 고개를 갸웃하게 틀어 올리며 말했다. 홍씨가 아기 중을 바라보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저었다. 나뭇가지 그림자가 엷게 내려앉은 그 얼굴이 더욱 쓸쓸해졌다. 아기중은 개울물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달았다. 보살님하고 의병대장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의병대장님이 어느 산골에 있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아기 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그때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공허 시님이 있구만요, 공허 시님!"
아기 중은 밑도 끝도 없이 소리쳤다. 그 기쁨에 넘친 소리가 어찌나 크고 카랑했던지 홍씨는 가슴에 손을 댈 만큼 놀랐다.
"공허 시님......?"
"야아, 공허 시님도 의병인디 여그 자주 오시능마요 공허 시님헌티 부탁허먼 그 어런얼 만내실 수 있구만이라."
아기 중의 기분을 따라 홍씨의 얼굴을 밝아지는 듯싶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아니오, 장허신 일 허시넌 분네덜인디 그래서넌 못쓰요."
홍씨는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기 중의 얼굴에서 생기가 걷히며 침울해졌다.
"목이 타면 물얼 묵어야 허고 배가 고프면 밥얼 묵어야 허는 것 아닝게라. 만내고 잡은 사람언 만내야제 참는다고 참아지간디요. 맘에 지옥만 생기제. 메칠 있으면 공허 시님이 오실란지도 몰르는구만요."
"시님......"
홍씨는 그만 아기 중을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런 자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회오리쳤던 것이다. 그러나 아기중의 먹물 옷이 앞을 가로막아 팔을 뻗칠 수가 없었다.
"시님, 지가 괜헌 이얘기럴 꺼냈구만요. 다 잊어불고 딴 재미진 이얘기나 헙시다."
홍씨는 상긋 웃어 보이며 아기 중 앞에 놓인 빨래를 얼른 집어 들었다. 아기중이 빨래를 뺏으려고 허둥거렸다.
"중생이 시주헐라는 것잉게 시님언 옆이서 재미진 절집 이애기나 허랑게요."
홍씨는 빨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돌 위에 꼭 눌러 잡고 앉아서 아기 중을 달래듯이 말했다.
"절집에 무신 재미진 이얘기가 있간디요. 맨날 목탁 치고 염불이나 외는 것이 일인디라."
아기중은 더 빨래를 뺏을 생각은 하지 않고 넓은 바위 위를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해맑은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옥빛 구슬이 도르륵 구르는 듯한 새소리가 말고 곱게 울려왔다.
"참, 그 이얘기가 있다."
아기중이 눈을 반짝 뜨며 손뼉을 쳤다. 홍씨가 빨래를 주무르며 어서 이야기를 하라는 듯 방긋 웃었다.
"작년에 보살님이 새북마동 탑돌이럴 안허셨능게라. 그적에 그 어런이 멀쩍이서 보살님 탑돌이 허능 것얼 보고 있드랑게요. 그려서 지가, 어찌 여거 기신가요 혔등마 그 어런 답이, 목탁소리럴 듣고 있소 허드랑게요. 그려서 지가, 목탁소리넌 귀로 듣는 것이제 눈으로 보는 것이간디요? 허고 찔렀구만요. 긍게 그 어런이 헛웃음얼 치드만이라."
"아니, 그런 일이 있었소?"
홍씨는 소스라치며 빨래 주무르던 손을 뚝 멈추고 아기 중을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홍씨는 가슴에서 화끈하게 불길이 이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숯으로만 가득 채웠던 가슴에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일고 있었다. 그 뜨거움은 정신을 아련하게 하고 혼곤하게 하면서 점점 더 가열되고 있었다.
"하먼이요. 그러고 나서 그 어런이 글얼 지어 보살님헌티 보낸 것이구만이라."
눈을 내리감은 홍씨는 손으로 가슴을 꼭 누르고 있었다. 현기증도 아니고 황홀감도 아닌 야릇한 힘에 휘둘리면서 정신이 아슴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홍씨는 아기 중의 말을 멀리 스치는 소리로 놓치고 있었다.
"아니, 어지럼증이 잠 일어서......"
홍씨는 더디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눈에는 안개가 낀 것도 같았고 어스름이 낀 것도 같았다.
"찬물 맨지닝게 어지럽제라. 그 빨래 이리 줏씨요."
아기 중이 잽싸게 빨래를 뺏으려고 들었다. 아기중은 몸을 발딱 일으키며 빨래를 뒤로 감추었다.
"옷 젖겄소. 중생 시주럴 그리 퇴허먼 부처님이 나무래싱마요."
"억지 시주 받으먼 부처님이 노허시오."
아기 중의 지체 없는 화답에 홍씨는 박하 잎 씹는 기분을 느끼며 환하게 웃었다.
"1년간에 몸만 크신 것이 아니라 맘도 많이 크셨소. 물 묻힌 손 부끄럽게 맨들지 말고 얼렁 이리 주시랑게라."
홍씨는 정 깊은 눈길로 아기 중을 어루만지듯 하며 손을 내밀었다.
"치이, 보살님언 참말로 관음보살 현신인갑소. 양반임스로도 새끼 중 빨래꺼정 꼭 혀줄라고 야단이고."
아기중은 귀엽게 눈흘김을 하며 감추었던 빨래를 내밀었다.
"부처님 앞에 양반 상놈이 어디 있당게라. 다 똑같은 무리중생이제."
홍씨는 빨래를 받으며 아기중의 눈흘김을 맞받아 눈을 흘겼다. 마음의 시름과 그늘이 다 씻기고 걷히는 걸 느끼며.
"보살님, 요분에넌 메칠 불공이신디요?"
아기중이 홍씨 옆에 붙어 앉으며 물었다.
"삼칠일 불공 디릴란디요."
홍씨는 빨래를 박박 문질러대며 대답했다.
"삼칠일? 와아, 글먼 되았다.!"
아기 중이 갑자기 소리쳤다.
"이 중생 간떨어지겄소"
홍씨는 영문 모르고 아기 중에게 고개를 돌렸다.
"봇씨오, 보살님이 그리 오래 불공 디리고 기시넌 동안에 그 어런얼 만내게 된 당게라. 지넌 그리 긴 불공인지 몰르고 걱정혔구만이라우."
"아이고 누가 듣겄소."
홍씨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홍씨는 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건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이고 부끄러움이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가슴을 압박해 왔다. 그러나 가슴에 쌓여가는 번뇌의 숯덩이를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숯덩이들이 재로 사위어지려면 불이 붙어야 했다. 그런데 그 불씨는 절에 있었다. 다시 절에 찾아가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고 시부모님은 그 거짓말에 속아 삼칠일재의 행보를 갖추어주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석달 열흘 백일재를 허락받고 싶었지만 그건 말을 꺼낼 수 없는 욕심일 뿐이었다. 삼칠일재를 올리며 스무하루 동안 절에 머무르면 인연의 끈이 이어지지 않으랴 하는 애타는 기대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핏줄 하나도 없는 청상며느리에서 삼일칠재를 허락한 시부모님의 마음도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의 거짓말이 그만큼 야무지고 야멸찼다고 해야 옳았다. 어찌 그리 될 수 있었는지, 그건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부모님에게 죄가 되는 줄 알면서도 다스려지지 않는 날개 돋친 마음이었다.
홍씨는 마음의 괴로움을 짜내듯 빨래를 힘껏 쥐어짰다. 힘을 쓰느라고 아랫입술을 문 이빨들이 가지런하게 드러났다. 옆에 쪼그려 앉은 아기중은 천진스럽게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가 다 졌는지 모르겄소."
홍씨는 시원스럽게 빨래를 털어댔다.
"먹물꺼정 다 빠져버렀는디라."
아기 중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참, 시님언 어찌 그리 말끝마동 도통한 대사님 겉으요."
홍씨는 빨래를 건네며 귀엽고 대견한 아기 중을 또 끌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치이, 큰 시님언 맨날 밥충이 잠충이 멈충이라고 야단이신디요?"
아기 중은 빨래를 받아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홍씨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참말로 삼칠재제라?"
홍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좋고 존 거!"
아기 중은 두 팔을 뻗쳐 올리며 외쳤다. 그리고 빨래를 휘둘러대며 달리기 시작했다. 홍씨는 아기 중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봄기운처럼 활기차게 달리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외로움이었다, 홍씨는 아기 중이 바로 자신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집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려고 했던 것도, 시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도 사무쳐 오는 외로움을 어찌할 수 없어서였다.
부처님, 이런 마음이 다 죄업이 아니오니까......어찌하면 좋습니까....
홍씨는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떨구었다. 부처님 앞에 합장을 하기 조차 무섭고 두려웠다. 법당에 들어 합장을 하고 고개를 약간만 들어도 마주치게 되는 부처님의 눈. 감길 듯 가늘게 뜬 그 눈은 참으로 자비롭고 인자하면서도 또 얼마나 매섭고도 무서웠던가. 모든 것을 두루 살피고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것 같은 그 눈앞에서 무섭고 두려워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거짓된 마음 죄된 마음을 지닌 탓이었다. 부처님의 눈은 중생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젯밤 예불에서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았다. 부처님의 눈길을 일부러 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차마 그 분을 만나게 해주소서 할 수가 없어서, 이년의 가슴에서 번뇌를 몰아내 주소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원 자체가 거짓이었던 것이다.
홍씨는 괴로움을 씹으며 개울을 따라 올라갔다. 얼마를 걷지 않아 홍씨는 몸을 움츠렸다. 그릇을 씻다가 그분과 마주쳤던 자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저 무심하게 옮긴 발길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분이 걸어 내려왔던 자취를 밟아 걷고 있었던 것이다. 홍씨는 가슴 두근대는 박동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1년 동안 밤마다 보았던 정경이다. 그런데 틀린 것이 한가지 있었다. 자신은 있는데 그 분의 모습이 없는 것이었다. 홍씨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때, 아기 중에게 편지를 받았을 때만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한 가닥 위로의 고마움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 개울가에서 맞닥뜨리는 순간 그 이름 모를 사람은 가슴을 뒤엎고 정신을 뒤흔들고 온몸을 저리게 만들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 사람은 그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로 가슴을 박차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남편을 남자로 받아들였던 다음 남자로 느끼게 된 최초의 사람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산을 내려가면서 다스리려고 했다. 시집을 나섰을 때의 마음처럼 빛은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시집에 들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산에 멀어질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출렁거리고 헝클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밤마다 꿈에서 그분을 만났다. 아니, 밤마다 그 꿈을 꾸려고 애썼다. 잠자리에 들면 으레껏 눈을 감고 그날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 생생한 기억을 음미하며 꿈이 꾸어지기를 바라고는 했다. 그러다보니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은 차츰 색이 바래가고 시집은 나날이 감옥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꿈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생시에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꿈에서는 벌어지고는 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날과 다름없이 그냥 만나는 꿈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엉뚱한 꿈을 꾸게 되었다. 자신이 그 사람을 부축하고 한정 없이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다음부터 꿈은 자꾸 변하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손을 잡히게 되었고,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는 그 사람을 따라 의병이 되기도 했고 그 사람이 의병을 그만두고 단둘이 어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집을 짓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는 그만 그 사람하고 한 몸이 되고 말았다. 그 꿈을 꾸면서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 그 꿈을 꾸고 나서부터 꿈은 점점 더 진하고 야하게 변해 갔다. 그러면서 나날이 팍팍해지고 세상살이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시집이 답답한 옥살이로 느껴지는가 하면 불현듯 절로 내달아가고 싶은 휘말리기도 했다.
"문단속 잘허고 자그라."
밤마다 시어머니가 하는 이 말이 진저리쳐지게 싫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니 밤마동 무신 꿈얼 그리 험허니 꾸길래 그리 소리럴 질러쌓냐."
어느 날 시어머니가 갑자기 내놓은 말이었다.
"벨 꿈 아닌디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얼굴을 숙이며 어물거려 넘겼다.
"몸이 허해졌는갑다. 약얼 잠 묵어야 쓰것다. 수절하고 산다는 것이 몸이 너무 실해도 에롭고, 몸이 너무 허헤도 에로운 일이니라. 몸이 실허면 탈이 생기고 몸이 허허면 득병얼 허닝게"
"아니구만요, 지 몸언 안 허헌디요."
약을 먹으면 꿈을 더 진하게 꾸게 되고, 꿈이 진해지면 소리를 더 크게 지르게 될까봐 무서워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다. 시어머니 앞에서 자리를 피하고 나서도 가슴의 요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잘못 질러 행여 그 꿈을 들키지나 않았는지, 속마음을 의심받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조바심이 일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절 중에 자식 없고 시부모 없는 수절이 질로 에롭고, 그담이 자식은 있어도 시부모 없는 수절이고 또 그담이 자식 없이 시부모 뫼신 수절이고, 그 끝이 자식 키움서 시부모 뫼시는 수절이니라. 허나 당자가 당허는 맘고상이야 다 똑같다고 헌다. 열녀문 하나 스자면 삼층장에 피묻은 솜이 가득 차야 헌다는 말이 안 있디냐. 그러자니 송곳으로 찔러댄 허벅지가 어찌 됐겄냐. 맘 강단지게 묵어라."
남편의 사십구재를 지내고 나서 시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말뜻을 잘 몰랐었다. 수절은 당연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1년 상을 보내며 마음 허전함이 넓어져 갔고, 2년 상을 지내며 외로움을 커져가는 것을 느꼈고, 3년 상을 치르게 되면서 송곳이 왜 필요한지를 알 것 같았는데 그만 그 남자와 맞닥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약도 소양이 없는갑다. 니럴 소리 질르게 허는 그 험헌 꿈이 머시냐?"
어느 날 시어머니가 또 말을 꺼냈다.
"예에.......아무리 생각해도 요상허구만요. 밤마동 그이가 험헌 모양얼허고 찾아오는디.........극락왕생얼 못혔는지 어쩐지......"
미리 준비했던 거짓말도 아니었다.
"머시여! 동녕이가 험헌 꼴을 허고 밤마동 찾어와"
오히려 소스라친 것은 시어머니였다.
"안 되겄다. 무당굿이라도 혀야제."
시어머니는 서둘러 무당굿을 벌였다. 그것이 무슨 효험이 있을 리 없었다. 시어머니에게 그토록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마음은 무당굿에 맞서 그 꿈을 놓치지 않으려고 단단히 도사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독한 마음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꿈을 꿀 때마다 가슴이 타다 만 그리움은 숯덩이로 쌓여가고, 그리움은 사무침이 되어 밤마다 마음은 절로 달음박질쳐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몸은 축나가고 살맛을 잃게 되었다.
"안 될 일이다. 사자넌 저승으로 가야제 이승으로 찾아오는 것언 변괴다. 요분 제사에 삼칠일 불공얼 올리도록 허거라."
마침내 시아버지가 내린 결정이었다. 홍씨는 봄기운 자욱하게 어린 산줄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 거센 바다에 겹겹이 파도가 일 듯 수없이 많은 산들은 겹으로 겹으로 파도를 일구며 출렁이고 있었다. 홍씨의 마음은 그 산줄기들을 지향 없이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으로 밀려드는 것은 막막함뿐이다. 산이 그리도 많은 만큼 골짜기도 많은 것인데 그 사람이 어느 골짜기에 있는 것인지.......막막함은 서러움으로 복받쳐 올랐다.
홍씨는 아침저녁으로 불전에 합장을 하는 시간이 괴로웠다. 그건 어디까지나 남편의 극락왕생을 비는 불공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전혀 딴마음을 품고 부처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건 부처님께 죄짓고, 죽은 남편에게 죄 짓고, 스님에게 죄 짓는 일이었다.
스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성으로 염불을 하고 목탁을 쳤다. 그 염불 소리는 부처님의 꾸지람으로 들리고 그 목탁소리는 부처님의 매질로 느껴졌다. 너무 죄가 커지는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자고 스스로를 나무라고 욕도 하고 다짐도 했다. 그러면 마음이 돌려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합장을 풀고 법당을 벗어나면 나음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눈길은 겹겹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를 더듬고 있었다.
마음은 제 것이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묘하고도 얄궂은 것이었다. 그 미친 마음하고 싸우기에도 지쳐 있었다. 뜻대로 안 되는 미친 마음을 고쳐달라고 큰스님께 모든 걸 실토할까도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이 그 마음을 가로막았다. 한마음 속에 마음이 도대체 몇 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불전에 엉뚱한 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으며 홍씨는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했다.
부처님, 부처님, 이것이 필시 인연일진대 꼭 만나게 해 주십시오. 오다가다 옷자락이 스침도 인연이고, 먼 산자락을 돌아가는 여인의 옷깃을 보는 것도 인연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온데 저는 글발을 받은 다음 대면하여 눈 마주치고 마음 헝클어진 사이가 아니옵니까. 세상에는 남정네도 많고 절도 많습니다. 하온데 어찌하여 하필이면 그 남자를 이 절에서 만나게 되었습니까. 그건 혹시 부처님의 뜻으로 만남이 지어진 것은 아니옵니까. 저는 제가 남다르게 음녀의 피를 타고나고 탕녀의 피를 타고 난 것이 아닌가 수없이 제 살을 꼬집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오나 제가 남편을 두고 이런 음심을 품었다면 의당 음녀고 탕녀로 벌을 받아 마땅하겠지요. 다 아시듯 저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몸입니다. 스물한 살 나이를 붙들어 맬 기둥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찌 하오리까, 이 몸 가없이 여기시어 그분을 꼭 만나게 하여 주십소사.
이런 기구와 함께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공허 시님, 공허 시님, 어디 가시다가 인자 오시는 게라. 이제나 오실끄나 저제나 오실끄나 날마동 눈이 빠지게 기둘렀는디요."
아기 중은 공허에게 매달리며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놈이 배곯은 강아지 쥔 보고 날뛰데끼 어째 이리 소란아냐, 딴 때 넌 물 한 사발 떠오라 해도 주딩이보톰 십리나 내밀든 놈이."
공허가 휘적휘적 걸어가며 내던진 말이었다. 공허의 뒤에는 총을 든 네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네 사람 중에 한 발 앞장서서 걷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철도공사장에서 도망쳐 나온 손판석이었다.
"시님 그것이 아니고라, 긴허게 디릴 말씸이 있는디요."
아기 중은 공허를 올려다보고 종종걸음을 치며 말하고 있었다.
"어디 왜놈토벌대라도 진얼 쳤드냐."
걸음을 멈추지 않는 공허의 대꾸는 퉁명스럽기만 했다.
"그보담도 휠썩 더 중헌 일이구만이라우."
아기 중의 목소리가 카랑하게 울렸다. 그 목소리는 공허를 붙들어 세우려는 오기가 받쳐 있었다.
"머시여?"
공허가 걸음을 멈추며 아기 중을 내려다보았다. 아기중이 쌔액 웃고 있었다.
"이놈아, 어여 말혀!"
"저어...... 어떤 보살님이 천넌장수님얼 만내보고 잡아허는디요."
"이놈아, 니 시방 꿈꾸고 있냐."
공허의 큰 주먹이 아기 중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아이고메, 머리빡 깨지네."
아기중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잡으며 엄살을 떨고는,
"시님언 말도 차근허니 안 들어보고 어째 사람얼 패고 그러요. 시님만 의병질허는지 아시오. 그 보살님 냄편도 의병 허다 죽었단 말이오. 그라고 시님언 중생제도 허는 몸인디 중생이 바래는 것 안 들어주먼 무신 중이당게라."
아기중은 다시 걷기 시작한 공허 옆을 졸졸 따라가며 카랑카랑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고것이 무신 소리여?"
공허가 의심쩍어 하는 얼굴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긍게로 지 이애기 차근허니 다 들어도란 말이오."
아기중은 입을 쑥 내밀며 공허를 치올려보았다. 한 손으로는 알밤 먹은 자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려, 얼렁 주지 시님 뵙고 올 거싱게."
보살의 남편이 의병으로 죽었다는 말이 공허의 마음을 붙들었던 것이다. 공허와 단둘이 앉은 아기 중은 송수익이 한 일이며 홍씨에 대한 것까지 아는 것은 다 이야기했다.
"긍게로 시님이 천년장수님헌티 이얘기히서 보살님허고 만내게 헐 수 있제라?"
"글씨, 인자 와서 어찌서 만낼라고 허는지, 절로 중헌 것이 빠졌는디?"
공허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아, 고것이야 서로 만내갖고 보살님이 장수남헌티 헐 이얘기제라."
아기 중은 마음 다급하게 쏟아놓았다.
"요런 쥐방울만헌 것이, 니넌 너무 눈치 싸고 되바라진 것이 탈이여."
공허는 또 아기 중의 까까머리에 알밤을 먹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니임, 어쩔라요오!"
아기중은 방을 나가는 공허의 뒤에다 대고 애타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공허한테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 무정함에 아기중은 그만 울음이 솟구쳤다. 공허는 주지승과 함께 자리하고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것이며 의병의 장래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ㄸ에 아기중에게 들은 보살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소승으로서넌 어찌하는 것이 좋을란지 잘 모르겄구먼요. 시님 생각엔 어떠신가요."
주지승은 느리게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공허는 부처님을 흉내 낸 반쯤 뜬 눈으로 주지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지승의 입은 점점 더 굳게 다물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동백기름 등잔이 가물가물 타고 있는 방안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쌓였다.
"내 생각으로넌 그 보살이 무신 똑별난 이얘기럴 전헐 것이 있어서 만낼라는 것 같지가 않소. 그저 만내볼라는 마음인 것이제."
주지승이 공허를 건네다 보며 아무 어감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글먼 청상 가심에 도진 상사기로구만이라?"
공허의 거침없는 말이었다. 주지승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어째야 좋을랑가요?"
"그것이 설법으로 다스려지는 것도 아니고 염송으로도 꺼지지 않는 병중에 병인 번뇌의 불이오. 마음 따로 몸 따로 일어나는 병이니 몸얼 없애지 않는 한 마음도 잡아먹는 병이 그것이라 어쩌는 방도가 있겄소. 출가해 법문에 든 몸덜도 그 병앓이로 진창길 걷는 허송세월을 허는 법인디 젊디나 젊은 중생 육신 지녔으니 다른 방도가 있을 리 있겄소. 만내게 다리럴 놓으시오."
주지승의 담담한 말이었다.
"송 대장이 퇴헐란지도 모르는디요?"
"보시허라 이르시오."
주지승의 어조가 약간 달라졌다.
"그 보살이 미색이든가요?"
공허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주지승은 그저 빙긋이 웃었다.
"그 보살이 사람 보는 눈도 솔찬허구만요. 소승이 더 젊은디도 송 대장얼 맘에 둔 것 봉게로, 송 대장이야 참말로 나무랠 디가 없는 분이구만요. 인물 헌출하고 학식 높은디다가 생각 똑바르고 맘 강직허고 정꺼지 두터우니 더 보탤 것이 없구만요. 근디 처자가 있는 몸에다가 곧 만주로 뜰 몸이니 그 보살 가심에 붙은 씨언허니 꺼주기넌 에로운 일이 겄는디요."
"세상인연이 어찌 다 고르기럴 바래겄소. 인연이야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즉 남녀인연은 더 기묘한 밥이오. 제 번뇌넌 결국 제가 다스릴 길밖게 없소."
주지승은 다시 눈을 내리감으며 홍씨가 왜 탈상 때보다 날을 더 길게 잡아 불공을 드리려고 왔는지 뒤늦게 헤아리고 있었다.
"시님께서넌 몰른칙끼 허실랑가요?"
"그리허능 것이 도리 아니겠소. 당자가 의지해 오지 않는 일에 먼첨 나스는 것도 간섭이고, 여인네가 감출라는 부끄럼얼 건디라는 것도 맘에 상채기 내주는 죄업이니."
"알겄구만이요. 좌우당간 송 대장이 맘보시에 육보시꺼정 잘허는 날에넌 원효 대사가 따로 없겄구만이라."
공허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꿈지럭거리는 몸짓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공허를 실눈으로 바라보며 주지승은 잔잔하게 웃기만 했다.
"소승 이만 물러갈망마요. 편히 유허시게라우."
공허가 가볍게 합장을 하고 돌아섰다.
"인연언 번뇌네 시작이지만 번뇌가 무서와 인연얼 피헐 까닭이야 없는 밥이오. 한번 설킨 인연언 피헐라고 피해지는 것이 아닌 법잉게."
주지승의 독백 같은 말이었다. 문고리를 잡고 잠깐 멈춘 듯했던 공허는 아무 대꾸 없이 방문을 밀치고 나갔다. 아기 중은 잠이 깨자마자 공허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의병들과 함께 떠나버린 것이었다. 아기 중은 너무 허망하고 난감하여 마루에 털퍽 주저앉고 말았다.
"잠도 안 자고 쌈에 미쳐갖고..... 땡초여, 순 땡초여."
아기 중은 볼멘소리를 내며 짚신발로 댓돌을 차대고 있었다. 천년장수님을 꼭 모셔오겠다는 다짐을 받아두고 싶었는데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저녁밥만 먹고 나면 쏟아지는 잠을 견뎌내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고, 보살님한테 자신 있게 해줄 말이 없어서 속이 타고 있었다. 아기중은 홍씨를 살살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규모가 크지 않은 절에서 그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날로 포근해지고 아련해지고 싱그러워지는 봄기운을 따라 홍씨가 방을 지키지 않고 여기저기 거닐고 다녀서 아기 중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홍씨와 마주치고는 했다
"보살님, 순천 선암사 뒷간 이얘기 들어보셨는게라?"
"보살님 구례 화엄사 북 치는 중놈 이얘기 들어보셨는게라?"
아기 중은 제가 먼저 이런 식으로 말을 걸고는 했다. 그때마다 홍씨는 아기 중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지 이얘기 들어봇시오. 순천이라 조계산에 선암사라고 허는 크고 큰 절이 있는디 예로보톰 법통이 실해 글공부 허는 대중이 많아서 평소에 2천명이고, 날이 풀려 천지사방서 행각 나슨 스님네덜이 뫼들먼 절 대중이 3천도 되고 4천도 됐당마요. 긍께로 쌀 씻는 물이 50리럴 흘러갔겄제라. 근디 그 많은 대중이 묵는 것도 묵는 것이고 싸는 것도 또 골머리 아픈 일이였당마요 그려서 뒷갈얼 무작스럽게 크게 서서 져서 칸얼 수십 개럴 맨들었더니, 거그서 똥얼 누먼 1년 뒤에 쩌어 아래서 찰팍 허는 소리가 난다능마요. 뒷간에 어칫게나 높으든지 말이어라."
"거그 머시냐, 지리산 자락에 화엄사라고 허는 무지허게 큰 절이 있는디, 절이 큰게로 북도 커서 아그덜 백 명이 들어갈 만치 큰북이 있당마요. 근디 그 북얼 도맡어 치는 중놈이 기운이 씨기가 황소 기운인디 미런허기넌 절밥 10년에 그 짧은 반애심경도 윌 줄 모르는 돌대그빡이드랑마요. 긍게 천상 그 북치기로 타고난 중놈이제라. 그 중놈이 기운이 씬 대신에 끄니 때마동 한말 밥얼 묵어댄당마요. 하로에 세말 밥 묵고 북얼 처대는디 그 북소리가 얼매나 크든지 지리산 아흔아홉 골얼 다 울리고 천왕봉 산신령님 귀꺼정 울리드랑마요. 신령님언 그 심진 북소리럴 들음서 기분이 좋아라 하시다가 북소리가 끝나먼 꼭 상얼 찡그리고 돌아앉음서 고이연 놈 허셨당게라. 어지 그런지 아시오? 그 미련한 중놈이 북얼 치니라고 심이 들어서 끝장에넌 꼭 방구 대포럴 쏴질렀구만아라. 세말 밥 묵고 쏴질르는 방구가 어찌케나 씨고 독허든지 신령님헌티꺼정 퍼진 것이제라."
아기 중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홍씨는 입을 가리고 웃어댔다. 아기 중은 홍씨가 밝게 웃는 것을 보며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 내기에 마음 무거워 지고는 했다. 그렇게 진땀 흘리며 이레째가 되었다. 모습을 나타낸 것은 천년장수가 아니라 공허했다. 아기 중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어쩐 일이당가요, 시님?"
아기 중은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공허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이놈아, 비질 나무질이나 잘헐 일이제 니가 이째 이 야단이여."
퉁명스럽게 내쏘는 공허의 주먹이 올라가는 듯 싶자 아기 중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쏘아댔다.
"불제잔께 중생제도 헐라고 그요."
"아이고, 저 주딩이. 절밥 헛믹인 것이 아닝게 다행허다."
공허가 고개를 젖히며 껄껄거렸다.
"아이고메, 사람 생지옥에 빠쳐놓고 머시가 그리 좋으요."
입을 앙 다문 아기중이 숨을 씩씩 불어댔다.
"불제자 나으리, 중생이 생지옥에 들고나는 것언 다 지 맘으로 허는 것이제 이 중놈 잘못이 아니오이다."
공허는 높은 사람에게 아뢰듯 허리까지 굽히는 것처럼 하더니,
"떼엑끼놈, 젖비린내 나는 놈이 어런덜 일에 눈 팔지 말고 불경이나 한 지라도 더 외와라."
고약하게 눈을 꼬느며 호통을 쳤다.
"그거시 아닌디요..... 보살님이 하도 안됐어서 ...... 영판 맘씨 존 보살님....."
공허의 기세에 눌린 아기 중은 울음 가득한 입술을 삐쭉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놈아, 천년장수님언 쩌어 만주로 떠나부렸다."
공허는 이 말을 내던지고는 돌아섰다. 아기 중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내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다. 아기 중은 소르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맞물었다. 소리는 참을 수 있었지만 눈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손등으로 자꾸 눈물을 닦아 냈다. 흐린 눈앞에 보살님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날마다 먼 산을 한정도 없이 비리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보살님에게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보살님이 그 말을 듣고 얼마다 상심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가슴 조이고 겁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보살님이 떠날 때까지 어디로 피할 데도 없었다. 다른 절이 어디 있는지만 알아도 주지스님 몰래 행각을 떠나버리고 싶었다.
"어째 혼자시오?"
주지승이 공허의 합장인사를 받으며 의심 담긴 눈길을 보냈다. 공허는 멀뚱하게 주지승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겄다는 허능 것이오?"
연이어지는 주지승의 물음에 공허는 씩 웃었다.
"송 장군이 고런 졸부도 아니고 또 그리 막된 배은망덕헌 인종도 아니구만이라."
"무신 소리요?"
주지승이 의아해했다.
"송 장군언 청상 상사기에 맘보시 못헐 만치 속이 좁덜 않고, 시님 덕으로 몸얼 건사헌 사람이 시님 뜻얼 외면헐 리가 없구만이라우.'
"......"
주지승은 공허만 바라보고 있었다.
"만주로 뜰 급헌 일 끝내놓고 금세 뒤띠라오기로 혔구만요."
"기어이 만주로 떠?"
주지승의 얼굴에 그늘이 서리더니,
"공허도?"
하며 얼굴이 착잡하게 변했다.
"소승언 뒷일얼 생각히서 우선 남아 있기로 뜻얼 모았구만요."
"나라럴 기연시 되찾기년 찾아야 헐 일인디...... 그 방도가 무언고......"
주지승은 소리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먼 산줄기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저녁밥만 먹으면 잠에 곯아떨어지는 아기 중은 밤이 깊도록 잠이 들지 못하고 뒷치락거렸다. 걱정이 커가는 마음에 밤 깊은 풍경소리만 유난히 슬프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가늘고 외롭고 슬픈 소리가 마치 보살님의 울음소리 같기만 했다. 만주...... 만주가 어달까...... 만주가 얼마나 멀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기중은 잠이 들었다. 아기중은 밤새도록 길고 긴 꿈을 꾸었다. 보살남과 함께 만주를 찾아 가는 꿈이었다. 산을 수 없이 넘고 넘었다. 그런데 불쑥불쑥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공허 스님이었다. 어찌어찌 피해 도망을 치고 나면 얼마 가지 않아 막아서고는 했다.
"어이 새끼 중, 영판 부지런허시 잉."
개울로 낯을 씻으러 나가던 공허가 알은체를 했다. 비질을 하고 있던 아기 중은 쩨져라 하고 눈을 흘겨댔다.
한편 송수익은 남아있는 의병들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공허의 대원 여섯까지 합해 모두 서른넷이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슬프고도 서운한 날입니다. 여러 가지로 사정이 여의치 못해 우리 의병대는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치도 슬퍼하거나 서운해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병을 해산하고 헤어진다고 해서 의병활동을 영영 끝내고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한번 의병으로 나선 우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의병정신으로 싸워야 하고, 우리는 기필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헤어지는 것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한 임시방편이고, 다시 만나기 위한 준비고 약조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이제 조선 천지는 왜놈들의 총칼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의병대들이 새 싸움터를 찾아 만주 땅으로 옮겨 가다가 거의가 중도에서 왜병들의 총칼에 참살 당했습니다. 황해도 평안도 의병대들이 당한 일입니다. 형편이 그러한데 우리가 이 전라도 땅에서부터 총들을 들고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무사하게 넘어가기란 지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 궁리 끝에 내린 결정이 일단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선 처자식이나 가족을 만나 새 생활을 꾸리십시오. 물론 왜놈들의 눈을 피해 고향을 떠서 새 고장으로 옮겨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겨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의병투쟁을 한 여러분들은 그런 어려움쯤 능히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또한 왜놈들에게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고비를 다 같이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간에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의병싸움으로 수없이 죽어간 대원들을 생각하며 언제 어디서나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러고 다시 만나 싸울 날을 기약합시다."
송수익의 어조에는 비장감이 어렸고, 대원들의 얼굴에도 비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송수익이 말을 마쳤지만 대원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중에 총을 든 것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포수출신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총은 모두 공허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여러분, 이제 그만 일어들 나시오"
송수익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슬픈 빛이 역연했고, 침통한 목소리에는 물기가 스며 있었다.
"우리 그냥 작별허기 서럽고 지랄 같은디 속 풀고 맘 다지게 다항께 노래나 한 자락허고 뜨는 것이 어쩌것소!"
지삼출의 걸찍한 외침이었다.
"이, 그것 좋겠구만 좋아."
"맞아 자알 생각혔구만"
"근디, 다 아는 노래가 머시가 있을랑고?"
"아, 머시기넌 머시여. 천지간에 다 아는 노래사 아리랑타령 아니드라고."
손판석이 불끈 일어서며 말했다.
"그려, 그려. 아리랑이 딱 좋네. 한사람씩 돌아감스로 가락얼 믹이기로 허는 것이여. 모다 얼렁얼렁 일어나드라고."
지삼출이 몸을 일으키며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 대원들 모두가 다투듯 몸을 세웠다.
"여러분, 기왕 노래를 하는 참에 우리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송수익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것 참말로 좋구만이라, 대장님."
지삼출이 목메는 소리로 외쳤다.
"그려, 좋고 말고"
"아, 얼렁 어깨덜 엮드라고 잉."
대원들은 서로서로 어깨를 엮어나가며 동그라미를 그렸다. 서른네 사람이 어깨동무한 커다란 동그라미가 이루어졌다.
"나보톰 왼짝으로 돌아감서 지각각 가락얼 믹이넌 것잉게 그리덜 알더라고 잉. 짜아, 시작얼 하는디이!"
지삼출이 어깨를 흔들며 발을 굴렀다.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김제 만경 아리랑이 굵은 목소리들에 실려 산골을 울리기 시작했다.
남녀간에 작별이제 의병이 무신 작별
죽어서나 작별잉게 맘 변치덜 말세나
눈을 꼭 감은 지삼출이 목에 핏줄이 돋도록 엮어낸 노랫말이었다.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맘이사 변할 건가 어찌 만낸 우리라고
세월이 수상허니 만낼 기약 그 언젠고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밤이 들면 낮이 오고 겨울뒤엔 봄이 오네
세월얼 걱정 말소 작별이면 상면이네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세월아 네월아 가지럴 말아라
이내몸 늙어지면 어찌 의병 헐거나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작별도 서럽고 기약도 서러우네
서러움이 첩첩이니 통곡이 태산일세
다섯 사람 째로 노랫말이 이어지면서 그들의 가락은 서럽고 구성지면서도 컬컬하고 어기차게 어우러지고 있었고, 엮어진 어깨 어깨가 가락을 따라 덩실거리며 커다란 동그라미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려내고 있는 동그라미는 동네마다 솟아 있는 당산나무의 풍성한 모습을 닮아 있었다. 당산나무는 하늘 뜻을 받들어 땅에 내리고, 땅의 바람을 받들어 하늘에 올리는 고결한 일을 해낸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 전체를 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당산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농사일을 시작하게 될 때, 절기 따라 오는 명절 때마다, 풍년의 흥겨움이나 가뭄의 근심이 생길 때마다, 괴질이 돌거나 어느 집이 흉사를 당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농사일을 시작하며 풍년을 기원 할 때에는 고사터가 되었고, 명절 때마다 모여 흥겨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춤과 노래를 즐길 때면 잔치마당이 되었고, 풍년을 감사하고 가뭄을 거둬주기를 빌 때는 제단이 되었고, 마을에 길흉사가 생길 때면 회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뙤약볕 내리쬐는 한여름이면 노인네들의 휴식처나 낮잠터였고, 조무래기들이게는 사시장철 놀이터였다. 어쩌다가 마을의 화목을 깨뜨리는 다툼이 벌어지거나 음행을 저지른 여자가 생겨나면 그때는 재판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산나무 아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이게 될 때에는 아무래도 풍년이 들거나 명절 때였다. 그때는 어김없이 흥겨웁게 풍물이 잡혀 사람들의 신명을 돋우었고, 풍물 잡힌 마당에 술이 곁들여지니 춤과 노래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축은 자연스레 손에 손을 맞잡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아가고, 춤을 추는 축은 동그라미 안에서 더덩실 더리덩실 풍물과 노랫가락에 실려 맘껏 춤추며 제각기 새가 되어 날았다. 그 잔치마당에서 농사의 고달픔도 녹아내리고, 가난의 시름도 풀려 내리고, 속 깊은 근심도 삭아 내렸다. 당산나무의 풍성한 둥근 숲은 하늘의 모양이었고, 그 아래서 손에 손잡고 동그라미 그리며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서로서로 마음을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서로 다투었던 일, 서로 질시했던 일, 서로 미워했던 일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앞으로 화목하고 다정하게 둥글둥글 살아가자고 말없이 속에서 다짐하는 것이다. 그럴 때 부르는 아리랑은 슬프거나 구성진 가락이 아니었다. 절로 어깨가 들썩거리고 엉덩이가 씰룩거리도록 밝고 빠르고 경쾌한 가락으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아리랑은 때와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가락을 달리해 가며 부를 수 있는 신통한 노래였고, 장소와 사연에 따라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제각기 가사를 엮어가면서 새록새록 신명을 돋우어나갈 수 있는 가상한 노래였다. 그리고 차례로 돌아가며 가사를 엮어낼 때면 논마지기가 더 있고 없고, 집칸이 더 크고 작고, 인물이 더 잘나고 못나고 간에 아무런 차등도 별로 없었다.
야박허요 대장님 나도 딜고 가주씨요
왜놈천지 이세상에 어디서 살라허요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신작로 복판은 넓어야 좋고
큰애기 보지는 좁아야 좋네
이 엉뚱하게 튀어나온 가사에 모두가 와아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리고 모두의 어깨춤에는 더 신명이 올랐다.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큰애기 수바늘은 가늘수록 좋고
총각놈 자지는 굵을수록 좋다
"어허, 얼씨구!"
"저리 절씨구!"
"조옴도 조옷타!"
제꺽 이어진 화답에 추임새 또한 왁자하고 요란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번들번들 땀이 내배고 있었고, 동그라미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몸짓들에는 신 내린 듯한 신명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매듭에서도 어깨동무는 풀리지 않았다.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우리집 서방님언 명태잡이럴 갔는데
바람아 강풍아 석달열흘만 붙어라
"옛끼 순 못된 년!"
"저런 개잡년 보소!"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잡년아 썩을년아 지랄발광 말어라
하늘님이 용왕님이 나를 살펴주신다
"그려,그려"
"어절씨구 자알헌다!"
노랫말 잇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랑가락을 합창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지칠 줄을 몰랐고, 온몸에 실려 꿈틀거리고 출렁이는 신명도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송수익은 새 노랫말이 이어질 때마다 대원 한사람, 한사람을 새롭게 마음에 담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조금씩 있을 뿐 모두가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압록강이고 두만강을 건너가지 못하는 것이 한없이 아쉬웠다. 그런데 그 둘 중에 양반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또는 마음에 걸렸다. 양반보다는 평민이나 상민이 휠씬 더 많은 탓이라서 그런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이유였다. 양반층이 망치고 팔아먹은 나라를 평민이나 상민이 되찾겠다고 싸움터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송수익은 다시 그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느덧 자신의 차례가 와 있었다.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나라를 되찾는 건 하늘의 뜻일세
자나깨나 나라걱정 맘 변치들 말세나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랑이 났네으으
아리랑 응 어어 응 아르랑이 났네
송수익을 끝으로 한바탕 노래판이 막을 내렸다. 그들은 어깨동무를 풀었다. 그들은 땀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모두 송수익에게 눈길을 모았다. 그들의 눈은 묘한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꼭 다시 만납시다. 그때까지 몸 보존들 잘 하시기 바랍니다. 자아,그럼........"
송수익이 지삼출의 손을 잡았다.
"대장님!...."
지삼출이 울컥 울음을 토하듯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면서 손은 송수익의 손을 으스러져라 맞잡고 있었다.
"그간에 애썼소. 몸 보존 잘하시오."
"대장님도 무병무사 허시게라."
고개를 든 지삼출의 눈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송수익은 그다음에 손판석의 손을 잡았다.
"그간에 남들보다 고생이 곱절로 많았소. 공사장에서 도망쳐 나와 다시 부대를 찾아온 그 용맹을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오. 몸 보존이 제일이오."
"황감허구만요. 대장님도 몸 보존 잘 허셔야 되는구만이라우."
목이 맨 손판석의 눈에도 눈물이 잡히고 있었다. 송수익은 대원들 한사람, 한사람의 손을 차례로 잡으며 작별을 해나갔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다 자신의 몸 같기만 했다.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겨온 그들에게서 혈육에 못지않은 뜨거운 정이 얽혀 있었다. 그들은 이제 산을 내려가 왜놈들의 눈을 피해 세상으로 숨어들 것이었다. 그들과 끈을 연결시켜 놓았지만 얼마나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두셋씩 짝지어 사방으로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문 송수익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송수익은 대원들의 모습이 다 사라진 다음에도 한 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온갖 기억들이 회한으로 쌓이는 무게에 눌려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과 헤어지는 허전함만큼 회한의 무게는 컸다.
"그것도 풀고 떠야 할 업보구만요. 대원덜 해산시킨 담에 한분 걸음허시는 것이 좋겄는디요."
공허의 말이 발길 돌리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송수익은 눈을 감았다.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스치듯 한번 보았을 뿐 더 마음에 담지 않은 여인이었다. 그저 조신한 몸가짐에 함초롬한 인상이었다는 느낌뿐이었다. 한 가지 선명한 것이 있다면 탑돌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허의 말마따나 그 여인과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면 마음보시로 어떤 매듭을 지어야만 홀가분할 것 갈았다. 끝도 없고 한도 없는 삼천대천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일어남과 스러짐, 맺어짐과 흩어짐이 그 어느 것 하나도 우연인 것이 없다고 깨달은 자 석가모니는 가르치고 있었다. 그 인연의 필요성으로 하자면 그 여인을 만날 때 진정의 위로를 앞세웠듯이 헤어질 때도 진실한 위로의 마음을 지니고 인연의 매듭을 짓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송수익은 대원들을 따라 풀려 나가고 있는 마음의 가닥들을 거두어 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이고메, 대, 대장님!"
마른 솔가지를 꺾어 모으고 있던 아기 중이 먼저 송수익을 알아보고 비탈을 뛰어내렸다.
"아이고, 운봉 아니신가."
송수익도 반가움에 소리쳤다.
"안직 만주 안가셨구만요!"
"응, 곧 가야지."
아기 중과 송수익은 손을 마주 잡았다. 자기를 속인 공허에게 땡초 땡초 왕땡초라고 욕을 떠대고 싶었지만 아기 중은 쉽게 참아냈다. 공허에게 속은 분함보다는 천년장수가 나타난 반가움이 훨씬 컸던 것이다.
"대장님언 생불이시구만이라."
아기 중이 불쑥 말했다.
"생불?"
송수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아, 보살님이 대장님얼 만내고 잡아 눈이 빠지고 목이 늘어지는 판에 이리 딱 오셨으니 보살님 맘이 어쩌겄는가요. 근심 걱정 싹 가시고 생지옥서 벗어나게 됐응게 보살님헌티야 대장님이 생불이시제라."
"아이고, 이런, 이런!"
송수익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무지기가 차돌 같은 아기 중의 말이 너무 갸륵하고 얄미워 번쩍 안아주고 싶었지만 명색이 출가한 몸으로 중 행색을 갖추고 있으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짐이라 여기지 말고 만내보시오. 인생사 부질없다고 허나 그것이야 무한계 속에서 볼적에 그러헌 것이고, 숨 쉴 때마동 희로애락이 얼크러지고 설크러지는 인생 육십 고해로 보면 인생사는 또 부질없지가 않소이다. 다 인연이라 헐밖에 없으니 그리 헤아려주시오."
눈을 반쯤 내려감은 주지승의 말은 잔잔하면서도 무거웠다.
"예, 제가 위로를 하겠다고 설익은 글발을 보낸 것이 화근이 된 듯합니다."
송수익은 일의 발단과 책임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아, 화근이라니요. 그리 생각지 마시고 인연의 바다에서 이 물결 저 물결이 자연스리 얽힌 것이라 생각허시랑게요."
"예, 알겠습니다. 하온데, ......어찌 상면을 해야 하는 것인지........"
송수익은 주저하던 말을 얼버무렸다.
"예, 소승도 몰르는 일로 덮고 있구만요. 글발 전허디끼 그리허시는 것이 쉴허고 편허덜 않을란지요."
주지승이 송수익에게 눈길을 보내며 잔잔하게 웃었다.
"아, 예예....."
송수익은 그때서야 아기 중을 앞장세우는 손쉽고 자연스러운 방법을 깨우쳤다.
"보시가 과허먼 발밑이 지옥인지라 아시게라 잉."
공허가 걸찍하게 걸친 말이었다.
"보살님 어디 계시는지 아나?"
"야아, 쩌그 뒷산서 쑥 캐시능마요. 지럴 따라오시씨요."
송수익이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기 중은 신바람 나게 앞장섰다.
"보살님, 보살니임, 오셨구만이라우."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며 아기 중이 목청껏 외쳐대고 있었다.
"운봉, 운봉, 경내서 소란 피운다고 부처님이 노하시겠는데."
송수익은 민망해서 아기 중의 외침을 붙들려고 했다.
"보살님, 보살니임, 어디 기시요오. 천년장수님이 오셨당께라우우."
아기 중은 송수익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더 큰소리로 외쳐대며 다람쥐처럼 민첩하게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양지바른 마른 풀섶 사이에서 파릇파릇 돋아 오르고 있는 쑥을 뜯던 홍씨는 문득 손길을 멈추었다. 먼 산울림처럼 들려오는 맑은 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보살님, 보살니이임, 어디 기신당가요오. 천년장수님 오셨당게요오."
꿈결에 들은 소리도 아니었고 잘못 들은 소리도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아기 중의 목소리였다. 홍씨는 가슴에서 불길이 확 일어나는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의 탄력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온몸으로 퍼지는 전율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보살님, 여그 기시능마요. 천년장수님이 오셨당게라."
아기 중이 숨을 쌕쌕거리며 말했다. 홍씨는 가벼운 현기증이 스러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 순간 홍씨는 소스라치고 말았다. 밤마다 꿈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바로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로 대면을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너무 당황한 홍씨는 그만 등 돌아섰다. 홍씨의 두 손은 낭자머리를 더듬고 있었다.
"운봉, 애썼어. 이따가 재미난 의병 이야기를 해줄게."
송수익은 아기 중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야아, 재미진 이얘기 밤새 히주씨요. 잉."
아기 중은 재빨리 홍씨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는 송수익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 돌아섰다. 송수익은 더 없이 말이 궁색하여 멀리로 눈길을 보냈다. 첫 마디를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지 막연하고 난처할 뿐이었다.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웠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였다. 여인은 등 돌아선 채로 움직임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낭자머리를 더듬고 있던 두 손이 앞으로 모아져 있었다. 담배연기가 푸르게 흩어져 가고, 봄기운 그윽한 창공에 맑은 새소리가 뿌려지고 있었다. 송수익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마땅한 말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이 만나기를 원했지만 말을 먼저 꺼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런 남자의 역할이 그리도 곤혹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꺼내 이야기를 엮어가지 않고서는 여인은 끝내 몸을 돌려세우지 못할 것이었다. 곰방대에서는 더 연기가 나오지 않고 담뱃진 끓는 소리만 뿌지직거렸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간에 벌써 1년 세월이 흘러갔군요."
송수익은 이렇게 말하며 몇 걸음을 옮겼다. 여인이 몸을 돌리지 않아도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인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의 고개가 더 수그러들었다. 붉은 기운 감도는 여인의 귓볼에 부끄러움이 꽃빛으로 돋아있었다. 수그린 목의 끝자리에 가지런한 잔머리털이며, 해맑게 꿰비치는 듯 발그레하게 돋아 오르는 생기이며가 그대로 앳된 모습이었다. 그 청순함을 짓누르듯 하고 있는 낭자머리가 위압스럽고도 서럽게 느껴졌다. 그 낭자머리는 여인의 일생을 옭아매는 어찌할 수 없는 올가미였다. 과부가 되기는 너무 앳된 나이였고, 그 올가미를 벗어나기란 규범이 너무 엄중했다. 송수익은 괴로움을 씹으며 숨을 돌이켰다. 세상의 물결이 험악하다 보니 청상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병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도처에서 생긴 청상들이 얼마나 될 것인지 그 수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죄로 그 여자들은 일생을 빼앗긴 셈이었다. 며칠 전에 잠깐 만난 아내의 말이 쟁쟁하게 올려왔다.
"지넌 어찌 살어야 허능가요."
아내의 이 절박한 한마디 앞에서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손을 잡아주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송수익은 여인의 고개를 들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저는 내일 곧 만주로 떠납니다."
"네에?"
그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홍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여기선 더 이상 의병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 된 형편이라 새 방도를 찾아나서는 길이지요."
여인에게는 굳이 필요한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서로 쑥스러움을 면하고 여인이 말문을 열게 하기 위해 송수익은 일부러 그 말을 했다.
"만주로....... 그 먼 만주로......."
낮게 중얼거리는 홍씨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치는 듯하더니,
"만주로 가시면 새 방도가 생기능가요."
조심성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말은 분명했다. 눈길도 송수익의 옆얼굴로 향하고 있었다.
"예, 일찍 만주로 건너간 함경도 평안도 의병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며 잘 싸우고 있습니다."
송수익은 부드럽게 말하며 여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송수익은 엷게 웃었고, 홍씨는 잠시 고정시켰던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러나 홍씨는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떨구어진 눈길을 따라 가비얍게 내리덮인 눈꺼풀이 파르르 잔 여울을 일으키며 떨리고 있었다. 송수익은 가슴이 요동하는 것을 느꼈다. 도도록한 눈꺼풀의 빠른 떨림은 너무 육감적이었고, 그 떨림이 바로 여인의 심장의 떨림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느낌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 뜨거운 듯한 떨림의 파장은 큰 물결로 변해 자신의 가슴을 쳐오고 있었다.
"하오면 앞날얼 나라 찾는 디에 바치신단 말씸이신가요?"
홍씨는 눈길을 들어 송수익을 바라보았다.
"예, 그것이 장부의 바른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송수익은 여인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여인이 눈을 내려떴을 때와 바로 떴을 때의 그 얼굴의 느낌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눈을 내려뜨고 있을 때는 그저 곱상하고 안온한 느낌의 생김새였다. 그런데 눈을 바로 뜨자 곱상함은 화사한 생기를 품었고 안온함은 묘한 슬픈 기색으로 변해 있었다. 눈을 내려떴을 때가 반쯤 열린 꽃망울이라고 한다면 눈을 바로 떴을 때는 활짝 핀 꽃송이였다. 사람의 눈이 얼굴에 자리 잡은 이목구비 중에서 제일 중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듯 생김새의 느낌을 현저하게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전에 없던 느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송수익은 더 마땅히 할 말이 없었고, 홍씨는 많은 말을 간추리지 못하고 있었다. 송수익은 다시 담배를 피울까 하다가 그만두고 가는 솔가지 하나를 꺾었다. 그리고는 솔잎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여리게 풍기는 솔향기를 맡으며 송수익은 인연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그 깊고 오묘한 세계는 알 듯 하면서도 미궁이었다.
"불교는 믿으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송수익은 솔가지를 입에 물었다.
"예예, 어려서보톰......."
홍씨는 솔가지 끝을 잘글잘근 씹고 있는 송수익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부처님 말씀을 잘 아시겠군요."
"......"
홍씨의 눈길은 먼데를 바라보고 있는 송수익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연을 맺지 말라 하셨지요. 인연은 괴로운 것이니, 원수는 만나서 괴롭고, 그리운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라고요."
홍씨는 그만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무섭게 가슴을 쳤던 것이다.
풀꾹 풀꾹 푸풀꾹 풀꾹
어디선가 풀꾹새가 울고 있었다. 쉰 듯하면서도 애절하고 슬픈 소리였다. 임 그리워 울다 울다 목이 쉬고, 피를 토해 제 피를 되마셔 잠긴 목을 틔워 다시 운다는 새였다.
"저를 만난 일이 없었던 것으로 잊으십시오, 어차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송수익은 씹고 있던 솔가지를 무심하게 마른 풀섶 위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발길을 돌렸다.
"해가 기울었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송수익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홍씨는 송수익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홍씨는 그가 떨구고 간 솔가지를 집어 들었다. 풀꾹새는 석양빛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