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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1

Bollnow 2024. 3. 4. 06:28

아리랑

조정래

 

1. 역부의 길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싶었다. 그 푸르름 속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채 멀고 작은 점으로 찍혀 있었다. 그런데 그 넓은 들은 한낮의 생기를 잃고 야릇한 적요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초록빛 싱그러움을 뒤덮으며 들판에는 갯내음 짙은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거칠게 휘도는 바람을 앞세우고 탁한 회색빛 구름이 바다 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시꺼먼 먹구름은 하늘을 금방금방 삼켰다. 그리고 그 두껍고 칙칙한 구름덩이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꿈틀대고 뒤척이며 뭉클뭉클 커져가고 있었다. 순간순간 그 형상이 변하고 있는 먹구름은 무슨 살아있는 괴물처럼 흉물스럽기도 했고, 무슨 액운을 품고 있는 것처럼 음산하기도 했다. 그 구름떼는 성난 짐승들의 무리가 내달아오는 것 같은가 하면, 총칼을 든 도둑패들이 아우성치며 몰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먼 바다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먹장구름 아래로 퍼져 내리고 있는 안개구름에 휘감겨 바다는 하늘보다 먼저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바다는 구름보다 앞질러 몰려오고 있는 바람에 자신의 흔적을 실어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에서 유난히 진하게 풍기는 갯내음이 그것이었다. 먹구름의 험상궂은 기세만큼 바람결도 거칠고 드셌다. 바람은 넓은 들녘을 거칠 것 없이 휩쓸어대고 있었다. 바람이 휩쓸 때마다 벼들은 초록 빛 몸을 옆으로 누이며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벼들은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았다. 허리가 반으로 휘어지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서로서로 의지해 가며 용케도 다시 허리를 세우고는 했다. 그 슬기로움은 험한 기세로 몰려오고 있는 먹구름도 그다지 두려워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거친 바람과 한께 끈끈한 갯내음을 들이켜며 세 사람이 들판 가운데를 부산하게 걷고 있었다.

"요상시러라. 해필허고 하늘꺼정 저리 고은지 모를 일이시."

앞선 두 남자를 따라가느라고 잰걸음 질을 치며 여자는 겁 실린 눈길로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서너 걸음 앞서고 있는 두 남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빠른 걸음만 옮겨놓고 있었다. 여자는 똑같은 말을 벌써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두 남자한테서는 한마디의 대꾸도 건너오지 않았다. 여자는 꾀죄죄한 삼베치마를 끌어올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왼 손에는 짚신 한 짝이 들려 있었다. 장정들의 빠른 걸음을 따르다보니 코가 헐거워진 짚신짝이 자꾸만 벗어져 아예 벗어들었던 것이다.

"어이 삼출이, 비구름이 저리 심허니 몰키는디, 비가 와도 엄청시리 안 오겄는가? 갯내도 요리 진허고."

여자는 답답한 속을 더는 참지 못하여 삼출이를 부르고 말았다. 그러나 차마 아들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생이별의 멀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말 못할 심사를 헤아렸던 것이다.

"야아, 한줄금 퍼붓어도 되게 퍼붓을 상싶구만이라우."

한 남자가 바람소리를 이기려는 듯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은 것처럼 그 대꾸도 건성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으면 어쩌까? 행길도 아니고 뱃길인디."

여자는 남자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말을 꺼내자 여지껏 눌러왔던 불안감과 조바심이 일시에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아참 아줌니넌 걱정도 팔짜요. 바람아 강풍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 허고 빌어야 쓸 판 아닌감요, 시방?"

삼출이란 남자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며 더디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옳여, 자네 말이 공자님 말씸이시. 그리 돼야 우리 영근이가 안 떠나제. 인자 보니 우리 영근이럴 하늘이 옵는갑네. 안 그런가?"

여자의 말에는 생기가 돌았다.

"아이고메 엄니, 배곯은 속에 바람만 차는디 헛기운 빠지게 말 그만 허시요. 바람이고 강풍이 석달 열흘이 아니라 삼년 열달이 분다고 무신 소양이 있다요. 왜놈돈 20원 받아묵은 목심인디 인자 백정놈헌티 고삐잽힌 소 신세요. 공연시리 헛생각 묵지 말란게라."

방영근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그러나 마음은 그 반대였다.

"그려, 그려. 느그 아부지가 야속허고 그놈에 돈이 원수제, 돈이......"

여자는 금방 풀이 죽으며 고개를 맥없이 끄덕거렸다. 잔주름 많은 꺼칠한 얼굴에 울음이 번지고 있었다.

"다 와 가는구만. 비 퍼붓기 전에 얼렁 걷드라고."

지삼출은 옹색스러움을 면하려는 듯 걸음을 빨리 다잡기 시작했다. 그들 세 사람은 걸어도 걸어도 끝도 한정도 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을 걷기에 지쳐 있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은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 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호남평야 안에서도 김제, 만경 벌은 특히나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고 있는 곳이었다. 눈길이 아스라해지고 숨길이 아득해지도록 넓은 그 벌판이 보기에 너무 지루하고 허허로울까 보아 조물주는 조화를 부린 것일까. 들녘 이곳저곳에 띄엄띄엄 야산들은 앉혀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야산이라는 것들은 경사가 그지없이 완만하고 몸피도 작아서 산이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 높직한 둔덕이라고나 해야 옳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솟은 것이라고는 없는 벌판에서는 그나마 산인 것을 뽐내고 그 체모도 갖추어야겠다는 듯 야산들은 어김없이 소나무를 키워내 산다운 치장을 하고 있었다. 넓기만 한 벌판에서 그런 야산들은 풍광으로서 그럴듯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그 야산들은 모둠모둠 마을들을 품고 있었다. 그 언제부터인가 벌판을 논으로 일구어 목숨줄을 이어온 사람들은 야산에 의지해 드센 바람을 막고 햇볕을 도탑게 받으면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일찍이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선각의 위업을 홀로 세우고서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왕에게 죽임을 당한 김정호 선생은 대동여지도를 엮어내기 위해 반도땅 전체를 일곱 차례 이상 샅샅이 답사하면서 호남평야에 발을 디딜 때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벌에 무릎 꿇고 이마 대어 고마움의 절을 올렸다는 것이다. 그분은 험산준령이 반도 땅의 칠할을 넘게 차지하고 앉은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 척박한 땅에 다행히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거기서 나는 곡식으로 이 땅의 목숨 칠할이 먹고 산다는 것도 알았으므로 그렇게 절을 올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삼년 전부터 그 들녘에서 해괴한 일이 해가 바뀔수록 심해져 금년 들어서는 날이 날마다 논 사고 파는 일이 꼬리를 잇대고 있었다. 저승에서 새 주인이 누구인지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김정호 선생은 이승에는 들릴 리 없는 통곡을 또 외롭게 하는지도 모른 일이었다.

"아줌니, 군산 다 왔소. 심 파허지라?"

지삼출이가 뒤돌아보며 비식 웃었다.

"아니시, 비 피해서 다행시럽구만."

감골 댁은 얼른 허리를 추슬러 세우며 응답했다. 점심을 굶은 채 오십 리 길을 걸어오느라고 지칠 대로 지쳐 절로 허리가 접혔던 것이다.

"잡것, 누가 왜놈덜 안마당 아니라고 헐성불러 안통에 들어서기도 전에 저 방정맞은 것이 얼찐대고 지랄이랑가."

지삼출이 역정을 내며 앞을 가로질러 가는 인력거를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러나 인력거는 일본인들이 자칭 세계적인 발명품이라고 뽐내는 물건답게 침 튀는 것 정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삐까닥거리며 가볍게 굴러가고 있었다. <게다>라는 나무신이 그렇듯 인력거라는 것도 일본사람들이 꼭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물건 중의 하나였다.

"성님, 입조심 허시요. 왜놈덜이 왜놈이란 말언 더 잘 알아듣는다니께."

방영근이 쓴웃음을 지었다.

"참 탈난 시상이여. 삼사 년 새에 군산은 왜산이 되야불고, 징게 맹갱 들판도 하로가 다르게 왜놈덜 판이 돼가는디, 요러다가 조선천지가 왜놈덜 차지 되는 것 아닌지 몰르겄다?"

지삼출이 방영근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상 판세 돌아가는 꼬라지가 아매 그리 될란지도 몰르요. 올봄에 아라사허고 전쟁에서 이기기 시작허자 왜놈덜이 기세 펄펄해서 군대만 몰리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정신없이 몰려 든답디다. 그나저나 나야 뜨는 몸인게 알 바 아니오."

방영근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났다.

"그리만 됨사 막판 보는 것이제!"

지삼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두꺼운 입술이 꾹 다물려들었다.

"성님, 무신 소리가 그러요!"

방영근이 우뚝 멈춰서며 내질렀다. 그 태도며 목소리가 기를 세우고 있었다.

"어찌 그려?"

그 서슬에 지삼출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무심결에 내뱉은 자신의 말을 그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걷는 데만 허덕거리고 있다가 두 사람이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뒤따라 걸음을 멈춘 감골 댁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들과 지삼출을 번갈아 보며 맥이 풀린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성님, 여차허면 또 그때맨치로 나스겄다 그것이요?"

지삼출을 쏘아보고 있는 방영근의 눈길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아녀, 아녀. 그냥 나온 소리여. 나가 미쳤간디 그러겄냐. 얼렁 회산지 사무손지나 찾어가자, 비 퍼붓겄다."

무슨 큰 흠집을 잘못 내보인 것처럼 지삼출은 과장된 손짓을 해가며 딴전을 피우고 들었다.

"무슨 소리덜이여, 시방?"

이상한 낌새를 챈 감골 댁이 끼어들었다. 그때 빗방울이 후둑후둑 듣기 시작했다. 멀리서 천둥 구르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기연시 비가 오는구만. 얼렁 가드라고."

지삼출은 이때다 싶어 서둘러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성님, 내 말 똑똑허니 들어보시요. 그때 나서갖고 된 일이 머시가 있소. 아까움 목심들만 엄칭이 죽이 안혔소."

방영근은 지삼출 옆으로 바짝 다붙으며 말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알어, 알어. 헛바람이 샌 것이라닝게."

방영근의 고집을 아는 지삼출은 이거 잘못 걸렸다 싶어 그의 말을 막으려고 팔을 내저었다.

"속 뻔헌 거짓말 마시요. 그런 생각 맘에 담지 않았음사 어찌 그런 말이 그리 쉴케 쑥 나와진다요. 그 일로 그리 쌩고생험스로 숨어사는 처지에 맘속에다가넌 안직도 관솔불 피우고 있습디여?"

"어서 답답허시. 사내자석 오기가 남아서 한마디 뱉은 것이제. 딴맘언 없어. 나 관솔불은 새로 짚불도 안 피우고 사니 안심혀, 안심."

빗줄기 속에서 지삼출은 방영근을 향해 헤벌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성님, 정신 똑똑허니 채려야 쓰요. 그때 왜놈 군대허고 요새 왜놈 군대허고는 하늘허고 땅 차이단 말이오. 그때도 져부렀는디 인자야 더 말헐 것 있겄소. 허고, 성님언 인자 총각이 아니고 애기덜 아부지란 말이오, 아부지!"

방영근은 얼굴에 맺혀오는 빗방울들을 큰 손바닥으로 와락 훔쳐내며 <아부지>에다가 힘을 넣었다. 괜히 자식들 나 같은 신세 만들지 마시오. 하는 말이 곧 터지려고 했지만 꾹 눌러 참았던 것이다. 그 말이 너무 야박스러운 것 같았고, 더욱이 뒤따라오는 어머니가 들으면 망자인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되어 어머니 가슴에 새 못을 치는 일이었던 것이다.

"말수 적은 자네가 그리 말을 질게 허는 맘 내 다 알아묵어. 자네 말대로 내 약조허겄네."

지삼출은 침통한 얼굴을 비에 적시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방영근의 괴로운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때 나서지만 않았더라면 갚을 길 없는 빚을 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왜놈 돈의 올가미에 걸려 부모형제와 생이별해야 하는 길도 떠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부모형제와 생이별해야 하는 길도 떠나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 왜놈들한테 잃고, 자신마저 왜놈들 손아귀에 틀어 잡히게 된 그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지는 더 말할 것조차 없었던 것이다. 금강포구의 왼쪽을 따라 해변으로 이어지고 있는 군산은 온통 왜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곧게 뻗은 새로 난 길들이며, 그 길을 따라 새로 지어진 높고 낮은 집들이 하나같이 일본식이었다. 예로부터 조선 사람들의 초가집은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개항이 되면서 일본사람들은 그 비워둔 해변가를 다 차지했던 것이다. 2층 건물이 많은 해변 쪽에서 대륙식민회사를 찾아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한자로 쓴 나무간판 앞에 섰을 때 그들 세 사람의 삼베옷은 비에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방영근이 보퉁이를 바꿔들며 머뭇거렸다. 감골 댁은 아들 뒤로 붙어서며 몸을 오그렸다. 그 눈치를 채고 지삼출은 앞으로 나서며 문을 옆으로 밀어댔다. 먹구름이 비를 쏟아내고 있는 바깥 날씨 탓인지 사무실 않은 침침했다. 지삼출은 그 어스름이 눈에 설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거 누구여!"

거만스런 말투가 날아왔다. 지삼출은 귀에 거슬리는 말투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그 말이 왜놈말이 아니라 조선말인 것에 우선 반가움을 느꼈다.

"저그 머시냐, 죽산면에서 방영근이가 왔는디요."

지삼출은 목에 힘을 넣어 말했다.

"그려 방영근이, 어째 이리 늦었어."

네댓 사람 중에서 한 사내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때서야 지삼출은 그 사내가 장칠문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를 보자 비위부터 상했다. <역부>라니 이민자를 모집한다고 왜놈을 앞세우고 동네마다 헤집고 다니는 그놈은 터무니없이 위세를 부리며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 같았던 것이다.

"당신이야 뒤로 빠지고, 거그 방영근이, 욜로 들어와."

장칠문이 손가락을 까딱거려 지시했다. 지삼출은 뒤로 물러서며 방영근을 앞으로 세웠다.

"방영근이 어여 들어오고, 됐으니 딴사람들은 가보시오."

장칠문은 방영근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문을 드르륵 닫았다.

"아이고메, 이 무신 일이여!"

감골 댁이 소리치며 후다닥 내달았다. 그녀는 닫히고 있는 문에 매달렸다. 문은 반쯤 닫히다가 말았다.

"이 노인네 어째 이려!"

장칠문이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요리 허망허니 이별허라니, 안될 일이여, 안돼야."

감골 댁은 두 손으로 문을 꽉 틀어잡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여그꺼지 바래다줬으면 됐제 이별은 따로 또 무슨 이별이오. 날 저물기 전에 집에나 얼렁 가보시오."

장칠문은 매정하게 말하며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감골 댁이 어쩌나 꽉 붙들고 있었던지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는 좍좍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입을 꾹 다문 방영근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신 새 날아가는 소리여. 고런 것이야 우리가 다 알어서 착착 헐 건게 말 씹히지 말고 고만 가시오."

장칠문은 또 문을 닫으려고 했다.

"이보시오, 나가 한말 물읍시다. 돈언 언제 건네오는 것이다요?"

지삼출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 그야 사람이 배에 딱 올르고 나면 그날로 영축없이 줄 것이요."

넌 뭐냐는 듯 장칠문이 지삼출의 위아래를 훑으며 대꾸했다.

"아니, 사람이 여그 당도혔으먼 지금 당장 내놔야 이치가 안 맞소"

", 이치 따지자고 뎀비시는감?"

장칠문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치고는,

"돈얼 줬는디 배 타기 전에 내빼불면 누구 존 일 시키라고?"

그는 제 돈이라도 주는 것처럼 거만을 떨었다. 사람 의심하고 드는 왜놈의 행투에 지삼출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꾹 눌러 참았다. 성질대로 화를 터뜨려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고, 그만하면 영근이나 감골 댁이 꺼내기 옹색한 말을 대신한 것으로 족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줌니, 섭혀도 여그서 이별허시제라. 배야 비가 잽혀야 뜰 것이고 우리야 갈 길이 또 멀잖은게라."

지삼출은 감골 댁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니, 그리허시요. 동상덜이 기둘리는디 얼렁 집으로 가야 안되것소."

방영근은 이때다 싶어 얼른 말을 받았다. 순간 감골 댁의 눈이 동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까지 문을 틀어잡고 있던 두 손이 스르르 풀렸다.

"그려, 언제 갈라져도 갈라져야 헐 일인디......"

몸을 바로잡은 감골 댁은 아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뱃길 수만리라는디, 이리 갈라지면 은제나 만내질거나."

금방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엄니, 나 돈벌어 올 때꺼정 몸 성하게 지내야 허요 이."

방영근이 고개를 깊이 숙여 절했다.

"되았구만."

장칠문이 문을 탁 닫아버렸다. 감골 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까지 참고 있었던 통곡이 터져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어금니를 맞물며 복받치는 설움을 참아냈다. 자신의 울음소리가 아들에게 들리게 해서 아들의 심사를 더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먼 길 떠나는 사람 뒤에서 여자가 소리 내어 우는 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줌니, 기운 채리시오. 갈 길이 먼디."

지삼출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감골 댁의 여윈 어깨를 감싸 잡았다.

"그려, 가야제."

감골 댁은 걷잡기 어려운 속울음을 애써 누르며,

"어찌 저리 야박헌 사람도 다 있으까."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저것이 즈그 애비보톰 아주 틀려묵은 종자들이구만이라."

지삼출은 영근이와 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너무 서운해 있던 참이었다.

"애비넌 멀 해묵는디?"

감골 댁이 눈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보부상 해쳐묵다가 어찌 목돈얼 잡어 여그 군산에다가 터잡고 앉은 놈이다요."

"아이고 무셔라, 보부상"

감골 댁은 안색이 달라지며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지삼출이나 감골 댁이 보부상에 대해 똑같이 거부감을 나타내는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그때 갑오년에 수많은 농민들이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해서 들고일어났고, 공주까지 쳐올라간 농민군들이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싸우다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농민군들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섬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먼저 산으로 들어간 농민군들부터 뒤쫓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서 수없이 많은 농민군들을 죽이게 한 것이 바로 보부상들이었다. 등짐을 지고 산길을 따라 이쪽 지방과 저쪽 지방을 문지방 넘듯 넘나드는 보부상들은 산길을 샅샅이 아는데다가, 산속의 정보 또한 신속하게 잘 탐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산을 타는 발까지 포수 뺨치게 빨라서 그런 길잡이로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인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돈 십 전을 보고 물밑으로 50리를 간다는 그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단 말 고소한 말은 물론이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기가 예사였다. 그런 생활이 골수에 박힌 그들은 돈이 생기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한편 돈 많은 사람들이나 권력 있는 사람들은 값진 물건을 사들여 큰 이윤을 보장해 주었으므로 보부상들은 언제나 그들의 편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가난한 농민들이란 아예 눈에 차지 않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농민들이 전쟁을 일으켜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이 혼비백산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장사가 잘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농민군이 어서 망하기를 바라고 있다가 일본군에서 돈까지 주며 길안내를 맡기자 신바람이 나서 길잡이로 나섰던 것이다. 어쩌면 보부상들은 농민전쟁 초기에 전주감영의 관군 편을 들어 자그마치 8백 명이 패거리를 지어 나섰다가 황토현에서 농민군에게 참패당해 줄행랑쳤던 그 앙갚음까지 해대는 기분으로 길잡이에 더 신명을 올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농민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농민들은 누구나 부상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부상들은 농민전쟁 때만 그런 행악질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나라를 외세로부터 막고 근대화시키려는 대중운동단체인 독립협회에 맞서 그들은 어용폭력단체인 황국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자체 폭력부대인 봉군을 만들어가지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자체 폭력부대인 봉군을 만들어가지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폭행을 가했다. 그런 몇 년 뒤에는 또 일본에 합병통치를 해달라고 애원하는 이용구와 송병준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일진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보부상 자석 티내니라고 또 왜놈 앞잽이로구만. 그만 가보드라고."

감골 댁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먼저 빗줄기 속으로 나섰다.

"영근이가 맘도 굳고 몸도 실허니 잘 지내다가 돈 벌어갖고 올 거구만이라."

지삼출은 감골 댁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모르겄네. 맨날 배곯켜 키워갖고......"

감골 댁의 목이 잠겨버렸다. 빗줄기와 비안개로 가득 찬 벌판은 그 넓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감골 댁은 비를 있는 대로 다 맞으며 가는 것이 차라리 좋았다. 몸을 내맡기고 비를 맞다보니 뜨거운 가슴도 식는 것 같았고, 서러움도 씻겨 내리는 것 같았으며, 맘놓고 눈물을 쏟아도 펴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불안감만은 온몸이 물구덩이가 되도록 비를 맞아도 가라앉지도 가시지도 않았다. 20원에 생때같은 자식을 팔아먹은 것만 같고, 아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갈수록 가슴에 잠겨들고 있었다. 그냥 2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 돈을 받고 바다 건너 수만리 밖 미국인지 하와인지 하는 땅까지 아들을 보내기에는 너무 하찮은 돈이었다. 다달이 새끼를 치며 무섭게 불어나는 빚돈만 아니었더라면 아들을 그 어딘지도 모를 땅으로 절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덜얼 배 태와보내고 빚얼 씻든지, 그것이 싫으면 딸얼 나한테 내놓든지, 좌우지간 양단간에 하나로 결정얼 내려. 나도 참는 것에 한도가 있제, 요번에넌 아조 뿌리럴 뽑고 말 참이여."

빚쟁이 김가는 밤낮으로 찾아와 닦달을 해댔다. 그는 시퍼런 기세로 사람을 몰아대느니 한편으로 다 큰 딸자식을 음기 서린 눈으로 흘낏거리고 는 했다. 그때마다 딸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만 같아 몸서리를 쳤던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넌 길바닥에 금뎅이가 굴러댕기는 천구이요, 천국. 허고, 하와이라는 땅언 겨울이란 것이 없이 사시사철 선들선들해 일허기가 아조 편허고 거저 묵기요. 여그보담 반에 반도 심이 안 든다 그 말이오. 그러니 선금 착 받아 빚 깨끔허니 꺼불고, 몇 년 돈벌이 편허게 해갖고 와서 배 내밀고 살면 얼매나 좋겄소. 여그서 골빠지게 일해 봤자 앞길 캄캄허고, 빚은

빚대로 불어나 집구석 쫄딱 망허는 수밖에 더 있겄소."

때맞춰 역부를 모집한다는 왜놈과 함께 장칠문이가 드나들며 바람을 넣는 말이었다. 아무리 반편이라 하더라도 빚쟁이 김가는 장칠문이네를 사이에 끼워 넣어 빚을 손쉽게 받으려는 속셈이었고, 장칠문이네는 김가의 빚을 이용해 역부를 모집하려는 것이었다. 감골 댁은 나날이 목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이었다. 아들을 타국으로 보내지 않으려면 딸을 김가의 소실로 빼앗겨야 했고, 딸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바다 건너로 보내야 하는 막다른 형편이었던 것이다.

"보시오 예, 이 일얼 어째야 좋단게라."

감골 댁은 바위가 얹힌 가슴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말을 원망스럽게 토해내고는 했다. 저 세상으로 간 남편에게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농민군으로 나섰던 남편이 2년 만에 병든 몸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저 살아온 것만을 감지덕지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동학당을 잡아 죽이는 판국이라 남편 돌아온 것을 쉬쉬해 가며 밤 봇짐을 싸면서도 생기가 났었다. 그리고 타향살이의 어려움에다가 남편의 병수발까지 겹쳤지만 그다지 힘드는 줄 모르고 살아냈던 것이다. 남편이 장하다는 생각뿐이어서 그저 병수발을 지성껏 했다. 그러나 남편의 병은 지성만으로 나을 병이 아니었다. 병이 자꾸만 깊어져 약값을 대느라고 빚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정성을 바쳤지만 남편은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남편이 떠난 빈자리에 남은 것은 10원이 다 차가는 빚뿐이었다. 그 빚이 달마다 해마다 불어나서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목을 조여 오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엄니, 별수가 없소. 나가 없으면 몰라도, 보름이 신세를 망칠 수야 있겄는 게라."

마침내 아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감골 댁은 그저 눈물만 떨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8원 갚고, 남는 2원으로는 보름이 시집이나 보내시요. 엄니 혼자서 동상들 살리자면 입얼 하나라도 줄여야 쓸 것 아니겄는 게라."

아들이 집을 나서기 전에 한 말이었다. 그 속 깊은 말에 감골 댁은 가슴이 미어졌다. 아들은 장가를 가서 새살림을 꾸려야 할 스무 살 나이에 엉뚱하게 집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은 누구나 한사코 피하는 길이었다. 비는 이틀 만에 개었다. 방영근 일행은 곧 배를 타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넷이었다. 그들은 비가 오는 동안 사무실에 꼬박 갇혀 지내야 했다. 잠도 사무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잤고, 밥도 시켜다 주는 것을 먹어야 했다. 그들은 밤에나 겨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히 배르 타게 된 사정들을 알게 되었다.

"술 취헌 짐에 주먹질얼 좀 혔는디, 그것이 탈이 될지 누가 알았드라요. 내 원 참 기가 맥혀서, 사람얼 팬 죄럴 졌으니, 옥살이럴 허겄느냐 역부로 나가겄느냐, 둘 중에 하나럴 고르라는 것 아니겄소. 그러니 어쩌겄소."

첫 번째 남자의 사연이었다.

"주먹질이나 허고 이리 됐으니 덜 억울허겄소. 나넌 아무 잘못헌 것도 없이 관에 미움 사서 이 꼴이 됐소. 헌 일이 있다면야 4년 전에 그 지독헌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을 적에 군청쌀 풀어내라고 동네 사람덜 앞장섰든 것뿐인디. 그때보톰 미운 털이 백혀 갖고 걸핏허면 의심얼 받아오다가 요번에 당헌 것이요. 니는 여차허면 무신 일 저질를 못 믿을 놈인 게 역부로 나가든지, 그리 안허겄으면 온 집안이 딴 고장으로 멀리 뜨라는 것이었소."

두 번째 남자의 곡절이었다.

"나넌 함밑천 잡을라고 나슨 참이요. 사람덜언 늙으나 젊으나 집 떠나기 무서와 벌벌 떰서 배럴 안 탈라고 허는디, 영영 못 오는 것도 아니겄고, 몇 년 고상히서 돈벌어 오는 것인디, 그리 일허기 편코 돈벌이 수얼헌 땅얼 안 찾아가면 어디로 가겄소."

세 번째 남자의 생기 도는 말이었다. 방영근은 마지못해서 맨끝으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니기럴, 셋이가 억지 춘향이 된 것인다, 암만 생각혀도 요 일이 요상허덜 않소? 왜놈덜이 나서서 역부럴 모집허는 것도 그렇고, 관청것덜이 왜놈덜 편얼 들어 억지로 역부 맨드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모르는 무신 수작이 있는 것 아니겄쏘?"

두 번째 남자의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몰르겄소. 관천것덜이야 항시 우리 백성 편이 아니고 왜놈덜 편이었은 게."

첫 번째 남자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참 별 의심 다 허고 그러요. 사람덜이 지 탯줄 묻은 땅 떠나면 금세 죽는 것으로 알고 뒤로 빠지기만 허니 관에서 나스는 것 아니겄소. 우리야 돈만 벌어오면 됐제, 사람얼 의심허자면 끝도 한도 없는 일이요."

세 번째 남자가 자신 있게 말했다. 방영근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말에 끼여들지 않고 이틀을 보냈다. 물론 마음속에는 20원의 돈을 내놓고 사람을 모집하는 왜놈들에 대한 의심스러움과, 정말 돈을 벌어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알 수 없는 땅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엉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말을 한다고 풀리고 가셔질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아, 배를 타기 전에 여그다가 손도장얼 하나씩 찍어."

장칠문이 종이 한 장에 한 사람씩의 손도장을 눌러나갔다. 방영근은 장칠문에게 세 번째로 손목을 잡혔다.

"요것이 멋이다요. 알고나 찍읍시다."

방영근은 장칠문이 끌어당기는 손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방영근으로서는 종이에 가득 적힌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겨우 읽어낼 수 있는 한글은 한 자도 없었던 것이다.

"머시여? 건방구지게."

장칠문이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건너편의 일본사람이 깜짝 놀라며 뭐라고 내쏘았다. 장칠문이 떠듬거리며 일본사람에게 몇마디 했다. 그러자 일본사람은 고개를 홱 돌려 방영근을 꼬나보았다. 방영근은 눈길을 피했다. 일본사람은 다시 무슨 말인가를 했다.

"여건 일 잘허겄다는 계약서란 것이여. 인자 되았어?"

장칠문이 끌어당기는 대로 방영근은 종이 위에 손도장을 눌렀다. 그들은 곧 부두로 나가 배를 탔다.

"아니, 여런 손바닥만헌 배로 수만 리럴 간다 그것이오?"

세 번째 남자가 뱃전에서 엉덩이를 뒤로 뺐다.

"말도 많으네. 인천서 큰 배로 갈아탈 것이여."

장칠문이 그 남자의 등을 밀었다. 감골 댁은 아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지삼출한테서 전해 들었다. 날이 걷히는 대로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 말을 듣자 한정없이 허물어내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모를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기는 남편이 숨을 거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약도 소용이 없어지고, 남편의 목숨이 시나브로 사그라들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숨이 멎게 되자 세상의 끝이 눈앞에 맞닥뜨렸던 것이다. 남편이 대들보면 다들은 서까래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남편이 없는 집안의 장남이어서 그러는 것일까. 아들도 대들보였다는 것을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찬바람이 휘도는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아줌니, 어찌 지내시는감요."

한쪽 어깨에 지게를 걸친 지삼출이 사립을 들어섰다.

", 어여 와.“

마루기둥에 시름없이 기대앉았던 감골 댁은 무겁게 등을 뗐다. 풀려버린 눈이 사람을 제대로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간에 돈 가져왔든 게라."

지삼출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 아니여."

감골 댁은 여전히 힘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것 안되겄는디."

지삼출은 혼잣말을 하며 지게를 벗고는,

"아줌니, 오늘이 영근이 떠난 지 나흘째요. 배 타면 딱 준다든 돈이 이적지 안 왔는디 이리 태평치고 앉었을 일이 아니구만이라"

하며 마루에 걸터앉는 그의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났다.

"나흘? 금세 그리 됐는가"

감골 댁이 눈을 껌벅이며 중얼거렸다.

"아줌니, 정신채리씨요. 이러다가넌 장가놈헌티 돈 띠믹힐 것이오."

"머시여? 그 돈이 워쩐 돈인디!"

감골 댁이 펄쩍 뛰듯 했다. 비로소 그녀의 눈이 팽팽해져 있었다.

"이적지 안 온 돈인디 앉어서넌 못 받으요. 장가 놈얼 찾아가야 허요."

"나가 그간에 넋이 빠져 있었는디, 그 말 듣고 봉게 그렇구마. 당장 나서야겄네."

감골 댁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줌니가 일차 찾아가 보시게라. 그래 일이 잘 안 풀리면 나도 나스겄소."

"그려, 그려. 매여사는 몸인디 쥔집 눈치가 있제. 아여 갈 생각 말어."

감골 댁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슴살이하는 몸으로 지난번에 군산 걸음을 한 것도 더없이 고맙고 미안했던 것이다. 속 깊은 의리를 지닌 지삼출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그녀는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감골 댁은 더위를 무릅쓰며 다시 대륙식민회사를 찾아나섰다. 푸르른 색깔이 넘실거리는 시원스러움과는 달리 뙤약볕 내리쬐는 무더운 들녘길을 혼자 걷기는 너무 지루하고 팍팍했다.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노래를 읊조리며 걷고 있었다. 무언가 서러움이 서리고 애절함이 사무치는 느릿한 가락은 끝날 줄을 모른 채 길고 긴 들녘처럼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새애야아 새애야아아 파아라앙새애야아 노옥두우우밭에에 아안지마라아아 노옥두우꼬옻치이이 떠러어어지며어언 청포오오자앙수우우 울고오오 가안다아> 녹두장군이 사형을 당하자 여인네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남몰래 불리어지고 있는 노래였다. 그건 정봉준 장군에 대한 애도가이면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들에 대한 망부가였고, 이기지 못한 싸움에 대한 비원가였다. 감골 댁은 그 노래를 끝없이 되풀이하며 앞서 가버린 남편을 만나고 있었고, 언제 돌아올지 모를 아들 걱정을 삭이고 있었다. 그러다보면 들녘길도 별로 힘겨웁지 않게 뒤로 뒤로 밀려나갔다.

"돈이요? 김 참봉헌티 준 지 오래요."

장칠문의 엉뚱한 말이었다.

"무신 소리여?"

감골 댁의 얼굴이 푸득 떨렸다.

"김 참봉이 빚 받을 돈이라고 혀서 그리 넘겨줬다 그 말이오."

"그 돈에서 2원은 우리 돈이여!"

감골 댁의 외침은 마치 울음 같았다.

"나야 모른게 거그 가서 받든지 말든지 허면 될 것 아니여."

장칠문이 얼굴을 구기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감골 댁은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 참봉이 왜 20원을 다 받아갔을까. 그리고 어째서 2원은 돌려주지 않은 것일까. 그간에 빚이 또 불어났는가. 며칠 사이에 그랬을 리가 없었다. 혹시 빚돈 계산을 잘못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에 몰리며 감골 댁은 짚신을 끌고 사무실을 나섰다. 무거운 다리를 터덕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빚돈 계산을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몇 번이고 맞춰본 계산이었다. 김가가 딴 맘을 묵는구나! 감골 댁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감골 댁은 부르르 떨었다. 그 돈이 어쩐 돈이라고. , 2원이면 보통 논 반마지기 값이었다. 그런 돈을 생짜로 묵을라고! 감골 댁은 전신에 힘이 뻗쳤다. 다시 집을 향해, 아니 김 참봉을 찾아서 군산으로 올 때보다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거 무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여. 나가 받은 돈언 딱 18원이여, 18, 딴소리 허덜 말어."

김 참봉의 노기 띤 말이었다.

"아이고메, 이리 되면 누구 말이 옳단가요."

감골 댁은 발을 굴렀다.

"사람얼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시방."

김 참봉이 쥘부채로 마루를 내리쳤다. 감골 댁은 꼭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김 참봉을 닦달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 참봉의 서슬 앞에서 더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장가 놈의 말에 의심이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김 참봉이란 인종도 돈 앞에서넌 못 믿을 물건인디요. 그려도 장가 놈이 더 의심이 가는구만이라."

지삼출이 골똘한 생각 끝에 한 말이었다.

"그놈이 돈 욕심이 동해서 그렸으면, 그 돈 띠이는 것이 아닐랑가 몰라?"

감골 댁은 분함 반, 근심 반이 섞인 마음으로 지삼출을 바라보았다.

"택도 없소. 그 돈 생짜로 묵을라다가는 지놈 목이 째질 것이요. 아줌니도 맘 단단허니 묵어야 허요."

"맘이야 철통인디 돈이 그놈 수중에 안 있다고. 그놈이 나쁜 맘 묵은디다가 왜놈꺼정 옆에 끼고 있으니, 무신 존 방도가 없으까?"

"요것이 말이요, 양쪽얼 한 분썩만 만내갖고넌 누구 말이 진짠지 모르덜 않은감요. 그러니 장가놈얼 한분 더 찾아가서 꼼짝못허게 잡아채야 허는구만이라. 그것이 먼고 허니, 그놈이 또 이십 원얼 다 김 참봉 줬다고 허면, 그렇다면 당장 김 참봉얼 대면허자고 들이대란 말이요."

", 그리허면 지놈도 꼼짝얼 못허겄구먼. 참말로 자네가 용허시."

감골 댁의 얼굴은 금방 꽃이라도 피듯이 밝아졌다. 감골 댁은 다음날 다시 점심도 굶어가며 군산 50리 길을 허덕거렸다.

"허참 땁땁허시. 틀림없이 김 참봉이 20원얼 챙겨갔다 그 말이요."

장칠문은 기색 하나 변하지 않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되ㅇ어. 서로 이리저리 거짓말 해대는디, 당장 김 참봉 대면허러 가드라고!"

감골 댁은 장칠문의 소매를 틀어잡았다.

"뭐시여?"

장칠문은 기세 좋게 코웃음을 치더니,

"나야 바쁜 몸잉게 아수운 사람이 그 영감얼 이리 딜고 와!"

하며 팔을 휙 뿌리쳤다. 그 바람에 감골 댁은 잡고 있던 소매를 놓치며 곧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러는 틈을 타서 장칠문은 길을 건너지르고 있었다.

"이눔아, 내빼지 말고 내 돈 내라!"

감골 댁은 치마를 거머잡으며 뒤쫓았다.

그때 장칠문이 획 돌아섰다.

"따라오지 말엇. 더 따라오면 목얼 확 비틀어뿔 것잉게."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살벌하게 내뱉었다. 곧 목을 죌 것 같은 기세에 감골 댁은 더 움직이지 못했다. 감골 댁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모래밭이고 뺄밭이었다.

"안되겄구만이라. 내일 당장 나랑 갑시다."

지삼출이 곰방대에 담배를 마구 우겨넣으며 말했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삼출과의 다음날 군산 행보는 헛걸음이 되고 말았다. 장칠문이 역부 모집을 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감골 댁은 지삼출에게 미안함을 느끼기에 앞서 휘둘리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몸이 뜨거워지면서 전신 마디마디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병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이 삭아가며 그동안 몇백리 길을 정신없이 오락가락했던 게 탈이었다. 지삼출에게 끌리다시피 집에 돌아온 감골 댁은 며칠을 꼬박 앓아 눕고 말았다.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시리고 저린 몸살이었다.

"엄니, 이러다가 큰탈나겄네. 아무리 아까와도 그 돈 받을 생각 잊어불소."

딸 보름이의 눈물 머금은 말이었다.

"어찌 그럴 수야 있다냐. 그 돈이 어쩐 돈인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감골 댁은 그 돈을 떼먹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하고 쓰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삼출이 서둘러 감골 댁은 또 군산으로 나갔다. 어느덧 아들이 떠난 유월이 가고 칠월도 며칠이 지나 있었다.

"당신이 먼디 말이 그리 많여. 그려, 못 주겄다면 어쩌겄어."

"머시여!"

지삼출이 외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장칠문을 들이받았다. 장칠문은 얼굴을 감싼 채 나뒹굴어졌다. 그때서야 감골 댁은 지삼출을 붙들고 늘어졌다.

"정신 나갔는가, 자네. 이려서넌 안 되는 몸 아니여."

감골 댁이 숨 가쁘게 말했다.

"냅두씨요. 저런 인간 말종언 없애뿌러야 허요."

지삼출은 앞으로 내달으려고만 했다. 장칠문은 정신이라도 아뜩해졌는지 그대로 쓰러진 채였다. 그런데 코에서 흐르는 피로 입언저리는 피범벅이었다.

"안돼야, 그까짓 2원 갖고 어찌 이려. 이적지 공딜이고 산 것이 물거품 돼야. 여그서 참어, 참어야 혀."

지삼출에게 매달린 감골 댁은 애가 달아 미칠 지경이었다. 장가 놈이 어서 일어나 도망을 쳤으면 싶었다. 언제나 묵직하다가도 한번 성질이 났다 하면 불 같고, 그 뚝심 또한 황소인 지삼출이었다. 그리고 몇 년을 아슬아슬하게 숨어 살아온 공력을 그까짓 2원 돈으로 망가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번 들이받아 장가 놈의 코피를 터져놓은 것으로 2원을 떼먹히는 분풀이를 삼으면 되었다.

"저런 인종얼, 저것얼 그냥"

지삼출의 이빨 사이에서 갈리는 말이었다. 그는 감골 댁의 말로 솟구치는 감정에 겨우 올가미를 걸었던 것이다.

"니 사람얼 쳤어. 따라와, 따라와! 니넌 인자 죽었다, 따라와!"

언제 일어났는지 장칠문은 한 손으로 피가 흐르는 코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연상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대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야이 잡새끼야, 돈얼 주겄다면 열 분이라도 따라가겄다. 돈 내놓고 말혀, 요런 도적놈아."

지삼출이 곧 쫓아갈 듯이 하며 목청을 돋우었다.

"아서, 아서, 가덜 말어. 2원언 인자 저놈 것이여."

아직도 지삼출의 옷을 붙든 채 감골 댁이 한 말이었다.

"그려, 돈 줄팅게 따라와. 돈 사무실에 있응게 따라와."

코피가 멎지 않아 장칠문의 일본군복 같은 옷의 앞섶은 피가 여러 개의 줄을 그어 내리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그런 장칠문의 꼴에 눈길을 모았다.

"오냐, 돈얼 주겄다고. 돈만 줌사 느그 사무실 아니라 주재소라도 가겄다."

지삼출의 맞대거리에 감골 댁은 질색을 했다.

"고것이 무신 소리여. 저 못된 놈이 돈얼 줄라는 것이 아니여. 그리 꾀어갖고 분풀이 헐라는 것이제. 따라가서넌 안돼야."

감골 댁의 다급한 말에 지삼출은 열적게 웃었다. 자신은 이미 장칠문의 검은 속셈을 알고 있었던 것인데 감골 댁까지 그런 눈치를 챈 것을 알게 되자 그만 민망해졌던 것이다.

"돈이야 저놈 묵으라고 혔으니 우리넌 인자 여그서 얼렁 뜨드라고."

감골 댁이 지삼출을 잡아끌었다.

"박치기 한 방으로 돈 2원얼 작파허기는 너무 섭헌디요."

지삼출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짭짭 입맛을 다셨다.

"아니시, 아니여. 애시당초 우리 돈이 아니었든 것이네. 저놈이 첨보톰 띠묵자 허고 시커먼 맘보로 뎀빈 것잉게."

"참말로 날강도가 따로 없구만이라. 근디, 보름이 시집언 어쩐다요?"

"걱정 말소. 우리 겉은 사람덜이 언제라고 돈 갖고 시집 보냈드랑가."

감골 댁이 비로소 웃음 지었다. 지삼출도 씁쓰레하게 웃었다.

"가세, 집으로."

감골 댁의 말에 지삼출도 걸음을 떼어놓았다.

"이놈아, 어째 안 따라오고 어디로 가냐. 따라와, 잡녀러 새끼야."

뒤에서 들려오는 장칠문의 외침이었다.

"더런 놈에 새끼. 시상 망쪼여."

지삼출이 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감골 댁은 먼지로 범벅된 짚신발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아이쯔뎃스.(저놈이오)"

장칠문은 두 헌병에게 지삼출을 손가락질했다. 헌병 둘은 민첩하게 지삼출을 양쪽에서 붙들었다. 그리고 쇠고랑을 채웠다. 지삼출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고, 감골 댁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꼬!(가자)"

헌병 하나가 지삼출을 돌려세웠다.

"아이고 왜놈이 어째 조선사람얼 잡아가냐."

마침내 감골 댁이 부르짖었다. 군사경찰훈령에 의해 1904년인 금년 7월부터 이땅의 치안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감골 댁이 알 리 없었던 것이다.

 

 

2. 철도공사장 일꾼

지삼출은 쇠고랑을 찬 채 판자바닥에 꿇어앉혀졌다. 그리고 무작정 매타작을 당하기 시작했다.

"고나야로, 기미가 부레이까!(이새끼, 네가 왈패냐)"

헌병은 싸리회초리를 휘두를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어떤 대답을 원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매질에 제 신명을 살리기 위한 장단 맞추기였고, 제 기운을 돋우기 위한 기합 넣기였다.

"아이쿠쿠쿠"

싸리회초리가 몸을 휘감을 때마다 지삼출이 토하는 비명은 그 장단과 기합에 맞추는 화답이 되었다. 질기고 낭창낭창한 싸리회초리가 장정의 기운에 실려 몸을 휘감을 때마다 그 아픔의 고통은 혹독하게 맵고 사무쳤다. 회초리가 한차례씩 떨어질 때마다 살이 죽죽 찢어져 나가는 것 같았고, 그 아픔은 불에 달군 쇠줄이 감겨 있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쏙쏙거리며 속살을 파고들었다. 그런 아픔이 겹쳐지면서 계속 회초리를 맞다보면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고, 전신은 아리고 쓰린 아픔으로 들떠 올랐다. 그리고 매질을 당하면서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은 천하의 바보라는 것을 지삼출은 익히 알고 있었다. 곤장 맞으며 엄살 부려 미움 사는 죄인은 없어도 매 아픔 참아내다 매 두 벌 버는 충신은 있다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것이다. 매 앞에 장사 없는 바에야 왜놈한테 맞는 것이 아니꼽고 더럽다 하더라도 괜히 아픔을 참아내다 왜놈 성질을 돋워 매벌이를 할 필요가 없다고 작정한 지삼출은 매가 떨어질 때마다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 비명에 숨 자지러들고 피가 타드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안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을 제지당해 밖에 혼자 서 있는 감골 댁은 지삼출의 비명이 터질 때마다 몸을 조여뜨리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야 이놈아, 니가 먼디 조섬사람얼 이리 패냐! 나럴 우리 관가로 보내라."

스무 대 가까이 매질을 당한 지삼출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소리질렀다.

"나니!(뭐라고)"

헌병이 내려치려던 회초리를 멈추며 지삼출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이 일본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헌병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물음에 한 사내가 책상에서 벌떡 일어서며 지삼출의 말을 일본말로 바꾸었다.

"부레이나 야스.(건방진 놈)"

입가에 비웃음을 문 헌병은 지삼출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회초리로 제 가죽장화를 톡톡 쳤다.

"이놈아 똑똑히 들어라. 이 달부터 조선 땅의 치안은 모두 우리 일본군이 맡게 되었다. 그게 바로 너희 임금님이 결정한 사항이라 그 말이야. 알아듣겠어, 이 자식아!"

헌병은 구둣발로 지삼출의 무릎을 냅다 걷어찼다. 지삼출은 숨이 컥 막히는 걸 느끼며 옆으로 나뒹굴어졌다. 그는 무릎이 부러져 버린 것 같은 혹심한 통증에 휘말리면서 통변의 입을 통해 헌병의 말을 듣고 있었다. 머시라고! 임금님이 그런 결정얼 내렸다고? 낙담과 함께 지삼출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의 머리가 마룻장에 부딪쳐 쿵 소리를 냈다. 그리 되면 인자 나라가 망해뿐 것 아니여! 헌병덜이 조선사람덜얼 즈그 맘대로 다루게 되었으면 갑오년 그때보담 훨썩 심해진 판 아니라고. 대관절 임금이란 것이 이 나라 임금이여 왜놈덜 편드는 임금이여. 임금이 그러니 층층이 외놈덜 눈치보고 편들고 혀서 백성들만 골병들제. 인자 나라가 끝장나 부렀구만. 눈을 내리감은 지삼출은 어금니를 뿌리가 아프도록 맞물었다. 그의 눈앞에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황토현싸움, 전주성 입성, 공주싸움의 피바다, 산속의 도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머슴살이의 은신생활, 그는 또 땅을 치고 싶은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푸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전주성을 차지한 기세 그대로 <한양 입경>을 감행했어야만 되었던 것이다. 녹두장군을 하늘이듯 우러르면서도 그 대목에서는 원망스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생각만 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슴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어이, 일어나. 조사 받아야제."

통변이 지삼출의 허벅지를 절벅거렸다. 지삼출은 더디게 눈을 떴다. 그러면서 그는 쉽게 풀려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왜놈들 손에 치안권인지 사람 다루는 권한인지가 넘어간 판국에 아무리 조선 놈이라고 하더라도 왜놈회사 앞잡이를 들이받았으니 아무래도 가재는 게 편일 거라 싶었던 것이다.

"이보시오, 아까 그 아줌니가 바깥에 있을 것인디, 그냥 집으로 가라고 잠 일러주시겄소."

지삼출은 몸을 일으키며 통변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알겄소."

통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삼출은 헌병 책상 앞으로 끌려가 앉혀졌다. 그는 그때서야 장칠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매질을 당하는 사이에 그놈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봅시다, 저 사람 오늘 풀려나기는 글렀응게 얼렁 집에나 가보시오."

문을 빠꼼히 열고 겨우 고개만 내민 통변이 감골 댁에게 말했다.

"아이고메, 글먼 은제나 나온당게라?"

감골 댁의 검고 주름 많은 얼굴은 온통 울음이었다.

"모르겄소. 나야 말만 엎었다 뒤집었다 허는 사람잉게."

통변은 고개를 끌어당기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

"봇씨요, 때리지만 말아주시게라우"

감골 댁이 다급하게 한 말의 대꾸는 쾅 문 닫히는 소리였다. 지삼출은 사실대로 말을 다 했다.

"돈은 돈이고 폭행은 폭행이야. 돈을 받으려면 우리 주재소에 고발해서 법으로 해야지, 넌 폭행을 가했으니 폭행범이라 그 말이야. 폭행범은 가차 없이 처벌이다."

지삼출이 통변을 통해서 들은 헌병의 말이었다. 그것으로 조사는 끝이 났다. 지삼출은 유치장으로 끌려가 갇혔다.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유치장에는 두 남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으로 가 몸을 부렸다. 아직도 등짝이며 어깻죽지가 아리고 얼얼했다. 그는 무릎을 세워 팔짱을 끼고 얼굴을 묻었다. 치안권이 일본군대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갑오년 뒤로 해가 바뀔수록 나라가 일본사람들 세상으로 변해 오기는 했었다. 일본군들은 농민군을 거의 다 잡아먹고 기세등등하던 판에 또 청국과 싸워 이겨 독판을 치게 되었다. 그래서 저지른 첫 번째 일이 궁궐을 불태우고 왕비를 죽인 것이었다. 그 다음에 벌인 짓이 측량이라는 것을 해대면서 전봇대를 수없이 세우는 일이었다. 그 이상한 짓과 함께 들어선 것이 우체국이었다. 물론 우체국에는 바다를 건너온 일본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체국 직원이라는 자들은 조선말을 다 알아듣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떠듬거리며 말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 점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한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예사로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더러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수상쩍게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우체국에는 그 자리에 앉아서 한양이고 부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화라는 것이 가설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말이 바로 전봇대에 이어진 그 가는 줄을 타고 오가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런 도깨비장난 같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목포에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이 몰려든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걸 개항이라고 했는데, 갑오년에서 3년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군산도 개항이 되어 왜놈들이 날마다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군산에만 붙어 사는 것이 아니었다. 군산에다 연상 새집들을 지어대는가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김제, 만경 들판을 휘젓고 다니며 돈을 풀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논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그런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양과 부산 사이에 철도라는 것이 놓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 쇠길이 놓이면 부산에서 한양까지 천릿길을 하루면 갈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아라사하고 싸움을 시작하면서 일본군대가 군산이며 목포에 내려 사방으로 옮겨갔다는 말이 들렸다. 사실 군산에도 일본군대들이 부쩍 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치안권을 뺏기 위한 준비였다는 것을 그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나라가 망했다는 생각이 한층 분명해졌다.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지삼출은 밤을 밝혔다.

"어이, 지삼출."

그는 후딱 고개를 들었다.

"이리 나와."

철창 밖에서 손짓을 하고 있는 건 어제의 통변이었다. 바싹 탄 목에서 먼지냄새가 나는 걸 느끼며 지삼출은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이자 등짝이며 어깻죽지에 박혔던 아픔이 잠을 깬 것처럼 새롭게 쏙쏙거리고 결렸다. 아침이 아직 일렀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삼출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절로 앉어."

통변이 책상에 앉으며 맞은편 걸상을 턱짓했다. 지삼출은 시키는 대로 걸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어쩌, 갇혀서 살아볼 만혀?"

통변이 궐련갑을 꺼내며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굳이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어서 지삼출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의 두꺼운 입술이 어 두껍게 보였다.

", 물으면 답얼 혀."

통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개돼지가 아닌디 갇혀 살 만허겄소."

지삼출은 뚱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코끝으로 스며드는 담배연기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말이야 지대로 허네. 담배 생각이 나는가부시?"

통변이 눈끝으로 지삼출을 흘기더니 궐련갑을 내밀었다. 지삼출은 통변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아 얼렁 뽑아."

통변은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고, 지삼출은 왼손을 오른팔에 받치며 담배 한 개비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통변은 지체 없이 성냥을 칙 그어 내미는 것이 아닌가. 지삼출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한편 고마움을 느꼈다. 서둘러 담배를 성냥불에 들이댔다. 그런데 성냥불이 픽 꺼지고 말았다.

"어허 요런 촌사람, 궐련얼 빨아야제 콧바람얼 내불면 어쩌는 것이여. 요것이 성냥이제 부싯깃이 아니시."

통변이 성냥개비를 던지며 혀를 찼다. 지삼출은 그때서야 자신이 당황해 숨을 들이쉬기 위해서 내쉰 숨이 너무 셌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서투른 짓에 그는 문득 창피스러움을 느꼈다. 사실 일본사람들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한 궐련이라는 말이담배는 아무나 입에 대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성냥으로 매번 담뱃불을 붙인다는 것이 서툴 수밖에 없었다. 통변은 다시 성냥을 그었다. 지삼출은 일단 숨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담배를 빨았다. 담배연기를 들이켜자 입 안에 침이 돌면서 배고픔과 목마름이 다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지삼출이, 갇히는 것이 심들다고 혔제?"

지삼출을 빤히 쳐다보며 자리를 고쳐 앉은 통변은,

"하룻밤 갇히고 나서 그리 말허면 되간디. 자네가 헌 짓언 짧어서 1년은 옥살이럴 혀얄 것인디"

하고는 담배연기를 푸욱 내뿜었다.

"아아니, 그것이 무신 소리랑게라? 박치기 한 방 믹였다고 그리 독허게 사람 잡는 법이 어딨다요. 어지께 매타작 당헌 것만으로도 나가 박치기헌 것 열 배넌 갚았을 것이오."

지삼출은 담배 맛을 싹 잃고 대들었다.

"그것이야 자네 생각이고, 자네넌 걸려도 되게 걸린 것이여. 헌병대가 치안얼 맡고 시범얼 보일라고 허는 참에 걸린디다가, 또 나제가 박치기 헌 사람이 누구냐 그것이여. 장칠문이도 나나 한가지로 통변인 심인디, 통변헌티 폭행 가허는 것언 일본사람헌티 폭행허는 것이나 똑같이 취급혀서 처벌하게 되야 있다 그것이여. 그러니 자네넌 이중으로 고약허게 걸렸으니 감옥살이가 1년이 넘을지도 모를 일이제."

치미는 울분을 누르려고 지삼출은 담배만 거푸 빨아댔다.

"근디, 나가 같은 조선사람 처지에서 보드라도 박치기 한 방으로 그리 오래 감옥살이허기넌 억울헌 일이고"

지삼출은 눈을 치켜떴다. 아까부터 통변의 친절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 속셈이 나온다 싶었던 것이다.

"머시냐, 나가 미리서 살짝 혀주는 소린디, 그리 억울허게 감옥살이 안허고 여그서 풀려날 길이 딱 한 가지가 있구만."

여기서 일단 말을 끝낸 통변은 허리를 펴며 지삼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눈을 치켜뜬 지삼출은 통변을 노려보듯 하고 있었다. 그런대로 되었으려면 그 방법이 무엇이냐며 달아 매달려야 하는 것이었다. 통변의 기색은 금방 달라지고 말았다. 눈치 빠르게 생긴 세모진 얼굴에 냉기가 파르르 깃을 세우고 있었다.

"건방구지게, 감옥살이럴 대로 혀보겄다 그것이여? 망대로 혀."

눈꼬리에 독을 묻힌 통변은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속 모르는 소리 말랑게요. 나넌 똥구녕이 째지게 가난헌 머심이란 말이요."

지삼출이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었다.

"머시라고?"

통변이 주춤하더니,

"허면, 시방 나가 허는 말얼 뒷돈얼 내놔라 허는 소리로 들었다 그것이여?"

그는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그것 말고 무신 딴소리가 있겄소?"

이렇게 말하면서도 지삼출은 잘못 짚었나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참말로 건방구지시. 사람얼 멀로 보고 그런 느자구없는 생각얼 혔제, 인자 나헌티 매타작얼 당해야 쓰겄구만."

말과는 다르게 통변의 얼굴은 거의 다 풀려 있었다. 지삼출은 자신이 헛짚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가 잘못 생각헌 모양인디, 무신 방도가 있는 게라?"

그러나 지삼출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통변은 어디까지나 왜놈들의 편일뿐이었던 것이다.

"해롭지 않을 것잉게 나 말 똑똑허니 듣고 잘 생각혀."

통변은 다시 책상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조 딱 잘라서 간단허게 말허겄는디, 감옥살이럴 허것느냐, 철도공사장 일꾼으로 나가겄느냐, 둘 중에 하나럴 골르라 그것이여. 일꾼으로 나가겄다면 나가 잘 말혀서 더 고상 안허고 풀려나게 혀줄 참인게."

그는 빠르게 말을 해치웠다. 지삼출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 뜻밖의 말이었던 것이다. 그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은 방영근이었다. 영근이가 그랬듯 자신도 막다른 길 앞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앞에 놓인 길이 너무 암담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징역살이는 물론이고, 사람을 짐승처럼 부린다고 일찍부터 소문이 나 있는 철도공사장으로 끌려간다는 것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째 말이 없어. 징역살이럴 허겄다 그것이여?"

통변이 코를 씰룩하며 다그쳤다.

"쫴깨 생각혀 보겄소."

"그려, 생각허는 것 존디, 질게 생각헐 짬언 없어. 이따가 헌병 앞에서 욕묵고 맞어감서 맘 정허는 것보담이야 지끔 딱 정해 불고, 헌병헌티넌 나가 이얘기해 불면 일이 훨썩 쉴헐 것인디?"

통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연기를 폴폴 날렸다. 지삼출은 통변의 꼴이 보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개자석, 왜놈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간사시럽게 생각해 주는 척허는 꼬라지라니. 그는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 통변의 면상을 들이받고 줄행랑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처자식을 둔 채로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애써서 자신이 처한 입장이 영근이가 처했던 입장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자신은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아니었고, 또 철도공사가 끝나는 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해도 그는 장칠문이를 들이받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공사장으로 가기로 헌다면 말이오, 한 가지 약조헐 것이 있소"

지삼출은 통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에 힘을 주었다.

", 그것이 먼디?"

통변이 반색을 했다.

"장칠문이 놈헌티 그 돈 2원얼 받아주시오"

"아먼, 그것이야 쉰 일이제, 약조허지."

통변의 기세좋은 대꾸였다.

"이따가 헌병이 약조해야 허요."

"좋제, 뜨끈헌 국밥 한 그럭 묵겄어?"

통변의 목소리는 은근했다.

"안 묵겄소, 배불르요."

지삼출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통변은 더 권하지 않고 고개를 문 쪽으로 꼬아돌렸다. 그의 입술에는 비웃음이 물려 있었다. 미련헌 놈, 고집통머리는 있어서. 밥 안 묵으면 니놈 배만 고팠지 별수있냐. 내야 돈 굳어서 좋다. 이놈아, 정신 똑똑허니 채려라. 뼈다구 하나 실허게 타고나서 기운깨나 쓰게 생겼다만 대가리가 둔해 세상 어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박치기나 허고 나대다가는 니놈 전정도 고생발이 훤허다. 니놈 같은 것들이 아침저녁으로 변허는 세상에서 어찌 살아갈란지 땁땁하다. 통변은 가래를 돋워올리다 말고 제물에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윗사람들이 싫어하는 짓이었던 것이다.

"! 아주 자알했군, 잘 생각했어. 징역 안 살아서 좋고, 조선백성이 조선을 위해 가설하는 철도공사에서 일하면 충성해서 좋고. , 돈을 받아달라고? 그까짓 건 염려 말어. 내 말 한마디면 제깍이니까."

일본헌병이 더없이 흡족해하며 지삼출에게 한 말이었다. 지삼출은 하루나마 집에 묵어가기를 바랐지만 주재소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마땅히 있을 데가 없어 유치장에 들어앉아 하루 해를 보냈다. 그는 저녁밥을 먹으면서야 왜 공사장으로 빨리 보내지 않는지를 알았다. 일꾼들을 더 모아 내일쯤 공사장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일꾼을 더 모으는 것이지 사방에서 무슨 트집 잡을 만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우격다짐으로 공사장 일꾼을 만들고 있다는 것쯤 눈치 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삼출은 다음날 점심나절이 지나 감골 댁을 따라온 아내를 잠시 만나볼 수 있었다.

"우리 일로 자네가 이 무신 횡액이여. 그 철길공사가 지옥이 따로 없다는 소문이든디. 이 일얼 어째야 쓸꼬."

울상이 된 감골 댁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 옆에서 지삼출의 아내 무주 댁은 눈물만 찍어내고 있었다.

"지 아무리 지옥이라도 징역살잉 보담이야 안 낫겄는 게라. 아무 걱정 말고, 아줌니넌 돈이나 야물딱지게 받아 챙겨야 허요 이. 그래야 나가 허는 고상이 헛고상 안 되제."

지삼출은 집에 가서 전하고 싶었던 그 말을 몇 번이고 다짐했다. 지삼출은 다른 여섯 명과 함께 오후에 주재소를 떠났다. 어디인지 모를 공사장으로 끌려가는 동안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가고 싶어 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이틀이 지난 해질녘에 공사장에 당도했다. 산이 첩첩한 그 공사장이 영동과 추풍령 사이라는 것을 안 것은 저녁밥을 먹고 나서였다.

"일이 지옥살이라든디, 참말로 그러요?"

지삼출의 일행 중에 한 사람이 옆의 남자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렇지유. 저리 험한 산을 깎아내서 철길을 놓자니 여북허겄어유."

어눌한 듯 들리는 충청도 말이었다.

"어디다 써묵자고 저 험헌 산에다가 철길얼 까니라고 왜놈덜언 이 지랄발광이여. 말끝마동 우리 조선 사람얼 위허는 일이라는디, 우리가 좋아지는 것이 머시가 있을랑가?"

다름 남자가 푸념하듯 말했다.

"아이고 말도 마소. 괭이가 쥐 생각해 주는 거 봤능교? 마 그리 생각하믄 딱 맞을낍니더."

경상도 남자의 코웃음이었다. 그 정수리를 찌르는 말이 마음에 들어 지삼출은 경상도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공사가 끝날라면 얼매나 남었는지 혹여 아시요?"

", 잘은 모리고 소문으로 들으니께네 다른 데는 얼추 다 돼가고, 여게가 난공사라 제일로 늦는다 안캅니꺼. 본시로 철도공사라카는기 털길이 지내가는 구역은 그 땅 사람들이 나서서 부역하기로 된 긴데, 여게가 첩첩산중이라 사람은 얼매 안 사제, 공사는 하기 심드제 하니께네 평지에 맞촤서 공사를 끝낼라꼬 이리 충청도고 경상도고 전라도고 안 개리고 사람들을 강

제로 끌어다가 일 시키묵는 것 아닌교. 우짜든 올해 안 넘길기라카는데, 누가 알겠는교."

전후 사정에 대해 꽤나 가닥이 잡혀 있는 경상도 남자의 말이었다.

"이거 참, 드럽게 왜놈 종질이시."

지삼출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삼년 전부터인가 경부선 철도공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었다. 철도공사로 멀쩡한 논밭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고 했고, 논밭이 적은 어떤 사람들은 철길에 다 먹혀버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고도 했다. 그래도 나라가 하는 일이라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소문은 공사장 인부들에 대해서였다. 철길이 지나가는 동네마다 사람이 부역을 나서야 하는데, 농사철이고 뭐고 가리지를 않고, 일손이 모자라는 집에서는 노인이나 아이들까지도 공사장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사장은 일본사람들이 도맡고 있었고 그 뒤에는 관가가 버티고 있어서 사람들은 부역을 필할 길이 없다고 했다. 부역을 안 나가는 사람은 관가에 붙들려가 매질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형편이 그리 되니 일본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을 공사장으로 끌어내는 데 더 기승을 부리고, 공사장에서는 십장들이 매질을 하기가 예사라고 했다. 지삼출은 그런 풍문들을 들으며 마음이 상하면서도 철도공사가 몇 백 리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철도공사장으로 끌려오고 보니 심란하기만 해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삼출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먼 별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모기가 앵앵거리며 날다가 목이나 장딴지에 달라붙어도 내버려두었다. 잠자리라는 것이 시늉뿐이었다. 이슬을 받치려고 포장을 쳤고 땅바닥에는 거적을 깔아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모기는 쫓으나마나였다.

"보소, 잠이 안 오는기요?"

아까의 경상도 남자가 돌아누웠다.

"집 떠나서 그런지, 어째 그렁마요."

지삼출은 팔베개를 고쳤다.

"그럴끼요마는, 여게가 이리 산 많고 허술해 뵌다꼬 딴맘 묵지 마소. 왜놈들이 목마다 보초를 서고, 무신 일 있다카믄 막 총질을 해삐리요."

경상도 남자의 숨결 낮춘 말이었다.

"사람헌티 그러혀요?"

지삼출은 자신도 모르게 돌아누웠다.

"말해 머하능교. 한 달이 됐는강, 한 사람이 총 맞고 즉사해삐리소."

"쳐죽일 놈덜"

"시상이 요상시리 변허니 우리 겉은 쭉징이 백성들이 우짜겄는기요. 재수 없이 잽히온 것, 맺 달 고생 참아내서 무사허니 집 찾아가는 기 상수 아니겠능교."

"그러겄지요, 그러겄지요."

지삼출은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만 자이소. 해뜨기 전에 눈떠야 허지 않는교."

경상도 남자가 몸을 바로 누였다. 지삼출은 잠을 자보려고 팔베개를 풀어 두 팔 사이네 얼굴을 묻었다. 기우는 국력과는 반대로 나라이름만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해인 1898년 황제는 결국 경부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허가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4년 전에 벌써 일본은 저희들 독단으로 서울과 인천 그리고 서울과 부산 사이에 군용전선 가설공사를 했던 것이다. 그때 임금은 왕가를 지키고, 대신들은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해 농민군 진압을 일본에게 부탁하고 있었던 처지라서 그 위법행위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군용>이 농민군을 다 없앤 다음에도 철거되지 않고 오히려 우체국 시설로 둔갑해 더욱 확장되었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일본이 우체국을 장악한 것은 곧 반도땅 전체가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버린 것을 뜻했다. 우체국을 통해 전국의 정보가 샅샅이 한성으로 집결 되었던 것이다. 우체국이 파발마보다 편리한 신식제도인 줄만 알았지, 그런 음흉한 조직인 줄은 까맣게 모른 채 황제와 정부는 또 경부철도 부설권까지 일본의 손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철도는 조선의 발전을 위해 놓는 것이다. 빨리빨리 일을 나와라."

"말보다 열 배 빠른 철도를 놓으면 조선은 금방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꾸물대지 말고 빨리 일들 나와."

통변을 앞세운 일본사람들이 동네마다 외치고 다니는 소리였다. 19007월에 한강철교를 준공하고 11월에 경인철도를 개통시킨 일본사람들은 다음해 8월부터 경부선 철도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4년 동안 부역이 강행되면서 철도공사는 이제 연말 완공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공사장에 부역을 나다니는 사람들조차 왜 굳이 철도를 놓아야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조선을 위해서라는 일본사람들의 말은 아예 믿지를 않았고, 걸어다니는 고생 면하고 살기 편해진다는 것도 그들로서는 거의 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농사를 지으며 한마을에 대대로 붙박여 살아온 그들로서는 기껏 멀리 나간다는 것이 사방 이삼십 리 안팎의 장나들이가 전부였다. 그리고 더 큰맘을 먹으면 1년에 한번쯤 산천 구경을 겸해 절 구경을 나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평소에는 마을의 이웃들을 오가고, 명절이면 이웃마을을 넘나드는 정도로 살아왔지만 아무런 불편도 갑갑증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또 처가고 친정이고 거의 가 사오십 리 안팎으로 두루두루 엮어져 있어서 멀리 갈 만한 데가 없고, 한양을 한번쯤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마음에 담아두는 것으로 더 고와지는 막연한 바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막상 한양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어서 한양 구경은 그냥귀동냥으로 때우는 처지였다. 그런 그들에게 철도공사는 부역의 고통만 주는 원성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철도공사가 아니라 온갖 잡세들을 하루빨리 없애주는 것이었다. 갑오년 농민군이 들고 일어나자 주춤해졌던 잡세는 농민군이 자취를 감추면서 앙갚음이라도 하듯 다시 되살아났고, 관의 닦달도 전과 다름없이 극성스러웠던 것이다. 이것저것 이름붙인 잡세가 서른 가지가 넘었는데, 애를 낳았다고 출산세, 사람이 죽었다고 출상세를 물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군수 떠난다고 송별세, 군수 새로 왔다고 부임세, 관청 출입했다고 문지방세, 타작했다고 타작세, 술 빚었다고 탁주세, 길쌈철이라고 길쌈세, 돼지 새끼 쳤다고 양돈세, 그 이름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떤 입 거친 사람은, 요런 도적놈들아 월경했다고 월경세, 밤일했다고 홀레세는 왜 안 붙이냐며 분통을 터뜨렸고, 어떤 싱거운 사람들은 방귀를 뽀오옹 뀌고는, 이놈아 소리 내지 말고 나와라. 방구세 물린다. 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왜 그렇게 극성을 떨어대며 철도를 놓는 것인지 몹시 궁금해 했다. 분명 제 놈들의 이익 때문에 그런다는 것까지는 짐작했는데, 그 속셈이 무엇인지를 시원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 궁금증은 갈수록 커지면서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확실하게 아는 사실이 한 가지는 있었다. 철도가 놓이게 되면 더욱 빠르게 일본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 될 거라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일본인들의 기세가 자꾸 커져가는 세상을 원하지 않았고, 그런 세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람들은 몇 년 전에 겪어본 일로 일본사람들이 어떤 인종들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고, 그래서 전혀 믿지도 않게 되었다. 갑오년에 농민군을 잡으러 나선 일본군들은 농민군이나 그 가족, 또는 협조자들을 죽일 때는 일삼아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작두에 목자르기, 배 갈라 창자널기, 음부에 독사 넣기, 대창으로 눈 찌르기 같은 짓을 자행했다. 그런가 하면 목이 잘린 머리통을 수십 개씩 자루에 넣고 다니며 마을마다 전시를 했고, 소금에 절인 귀를 수백 개씩 쏟아놓기도 했었다. 감골 댁은 지삼출의 당부대로 이틀이 지나 주재소로 통변을 찾아갔다.

", 그 돈 2원 말이다요? 받기는 틀려부렀소."

통변이 짜증스럽게 내쏜 말이었다.

"아니 무신 소리다요?"

감골 댁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 참 성가시시. 그 지삼출인가 사출인가가 박치기럴 너무 씨게 혀서 장칠문이 콧등에 금이 가부렀소. 그러니 그 돈언 치료비로 들어갔다 그 말이오"

"아이고메 시상에"

감골 댁은 곧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나 바쁘요. 그리 알고 가보시오."

"저어, 2원이면 큰돈인디 그 돈이......"

"어허! 더 헐 말 있으면 장칠문이럴 찾아가든지 말든지 알아 허시오."

감골 댁은 돌아섰다. ‘그려, 첨보톰 우리 돈이 아니었든 것이여.’ 감골 댁은 마음을 닫았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끝나 통변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지삼출은 레일 운반 조였다. 공사장에는 여러 개의 조가 편성되어 있었다. 흙 파기 조, 흙 나르기 조, 둔덕 쌓기 조, 둔덕다지기 조, 자갈 만들기 조, 자갈 나르기 조, 침목운반 조, 바위등짐 조 같은 것은 전부 조선 사람들로 짜여져 있었다. 그리고 암반폭파 조, 침목배치 조, 레일설치 조 같은 것은 거의가 일본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앞의 것은 기운을 써서 해야 하는 일이었고, 뒤의 것은 주로 입과 손짓으로 하는 소위 기술자들이었다. 기운을 써야 하는 일들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것이 레일운반이었다. 쇳덩어리의 무게에다가 길이 또한 길어서 기운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운은 기운대로 쓰면서 그 나름의 요령을 터득해야만 했다. 그 이중으로 힘 드는 일에 새로 끌려온 사람들은 무조건 투입되었다. 레일운반은 여덟 명이 한 조였다. 여덟 명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레일을 네 등분해서 목도질을 하는 것이었다. 신참들은 한 한조에 한두 명씩 배치되었다. 그들은 눈치껏 재주껏 기운 쓰는 요령을 익혀야 했다. 무론 조장이며 고참들이 미리 요령을 설명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언에 지나지 않았다. 목도질이 지게질이 아닌 바에야 아무리 농사일이 몸에 익은 사람이라 해도 서너 차례의 실수는 하게 마련이었다.

"빌어묵을, 나도 목도질얼 더러 혀봤다만 요놈에 것은 못해 묵겄네. 잡것이 돼지 자지맨키로 질기만 질어갖고 사람 애믹인단 말이시."

두어 번 실수를 하고 있는 힘을 다 써가며 첫 번째 레일을 옮기고 난 지삼출이 땀을 훔치며 투덜거린 말이었다. 그 말에 조원들 모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꼭 힘이 들어서만 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로 조원들을 더 힘들게 만든 미안한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돼지자지넌 질어도 새끼나 까제. 요 잡녀러 것은 워디다가 써묵겄어."

나주가 고향이라는 조장이 땀 닦은 수건을 목에 걸치며 말을 받았다.

"그려도 그만허문 잘허느만유."

충청도 남자 오장수가 말을 거들었다.

"저 어깨를 좀 보소. 내사 마 첨에 딱 봤을 직에 기운 잘 쓸 끼라꼬 안심했는 기라요."

경상도 남자 강기호가 맞장구를 쳤다. 잠자리배치가 곧 작업배치라는 것을 아침에야 알게 된 지삼출은 신참답게 조원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며 통성명을 청했던 것이다. 지삼출은 레일을 네댓 차례 옮긴 다음부터야 겨우겨우 목도소리에 끼어들 수 있었다. 목도소리는 앞뒤 네 사람씩 나뉘어 힘의 균형을 잡고 발을 맞추기 위해 반복하는 가락이었다.

"어얼럴러-"

앞의 네 사람이 선창했고

"어야데야-"

뒤의 네 사람이 화답했다. 그러면서 여덟 사람은 서로 팽팽히 힘을 쓰며 소리에 맞춰 발을 떼어 놓는 것이다.

"어허덜러-"

달라진 두 번째의 소리였고

"얼라데야-"

발걸음을 빠르게 하는 화답이었다. 그러나 지삼출은 처음 몇 차례는 그 쉬운 소리를 따라할 자신이 없었다. 몸은 한쪽으로만 쏠리지, 어깨에는 힘이 안 받치지, 다리는 버팅겨야지, 그러면서 발을 맞춰걸어야지, 길은 울퉁불퉁하다가 비탈이 나오다가 하지, 소리를 딸라하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목도소리는 서로 힘을 고르게 잡고 발을 맞추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막히는 데 없이 흐르는 소리를 따라서 하다보면 일신명이 우러나 힘드는 것도 덜 수 있었다. 레일운반에는 하루 책임량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따로 쉬는 시간이 없었다. 레일을 옮겨놓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이 휴식시간이었다. 그때도 느릿거릴 수가 없었다.

"거기, 뭘 꾸물거려. 빨리 움직여, 빨리."

움직임이 조금만 느리다 싶으면 십장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외쳐댔던 것이다.

"저것얼 왜놈덜이 맨든 것 아니겄소?"

점심을 먹고 나서 담배를 피우며 지삼출은 턱짓으로 레일을 가리켰다.

"그럴 낍니더."

강기호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석덜, 벨 기술얼 다 부리네."

"어데 왜놈들 기술이 저것만잉교. 총도 기선도 다 맹근다카든데요."

"차암, 우리넌 멀허는 것인지."

지삼출은 푹 한숨을 쉬었다.

"대장쟁이가 낫이나 맹그고 괭이나 맹그라서 땅이나 파묵제 별수 있는교."

강기호가 지삼출의 옆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한 말이었다.

"그러니 왜놈덜 밥 되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지삼출은 곰방대를 작은 돌에다가 짜증스럽게 두들겼다.

"맞소, 우에 것들이 정신 못 채리고 왜놈들허고 똥창 맞대고 돌아가이 나라 꼴이 될 택이 있겄능교."

그 느닷없는 말에 지삼출은 고개를 후딱 돌렸다. 그 야무진 말에서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지삼출과 강기호의 눈길이 마주쳤다.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의 눈이 무슨 말인가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입가에는 실바람처럼 엷은 웃음이 내밀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러요?"

지삼출이 빠르게 하늘을 눈짓했다. 입술이 말려들도록 입을 꾹 다문 강기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삼출이 하늘을 눈짓한 것은 <인내천>을 믿느냐는 것이었고, 그건 곧 갑오년 출병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가우요. 어지께보톰 어째 좀 달부다 싶드만이라."

강기호도 조심스럽게 말하며 지삼출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으스러져라고 맞잡았다. 그들은 뜨거운 그 무엇이 팔을 타고 올라 가슴에서 휘도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갑오년에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그들에게는 죄인의 굴레가 씌워져 있었고, 그들의 죄명은 <반역도배>였다. 사실 농민군은 부리가 뽑힌 것이 아니었다. 급한 형세를 피해 자취를 숨기고 있다가 5년 전에 영학당으로 뭉쳐져 다시 일어났고, 다음해는 또다시 활빈당으로 모습을 바꾸어 삼남지방 곳곳에서 세력을 떨쳤던 것이다. 그때마다 관군과 일본군은 한통속이 되어 그들에게 총질을 했었다.

"조심허고 지냅시다 이."

지삼출이 땅바닥에 닿는 소리로 말했다. 강기호가 눈으로 응답했다. 여기저기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오후의 일 시작을 독촉하는 종소리였다. 일제히 조별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삼출은 레일을 부려놓고 돌아가면서 또 자갈 만들기 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쪽에는 거의 여자들과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남자들이 등짐으로 날라 온 큼직큼직한 돌들을 쇠망치로 잘게 깨는 일을 하고 있었다. 침목과 침목 사이에 채울 돌이었다. 철도공사장 일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수월하다고 해서 여자와 아이들이 배치된 것이었다. 그러나 돌깨는 일이 여자나 아이들에게 쉬운 일일 리 없었다. 그런데 심장이 악쓰는 소리가 다른 데보다는 그쪽에서 유난히 자주 들리고 있었다.

"맘 씨리도 못 본 칙하이소."

강기호가 옆을 지나치며 말했다.

"십장놈언 어째 저리 소리럴 질러쌓소."

지삼출은 엄지손가락으로 양쪽 콧구멍을 번갈아 막아가며 코를 풀었다.

"아매 저 사람들 중에 얼추 반은 점심을 굶었을끼요. 그래 기운이 빠져 일손이 처지니께네 십장놈이 저리 악다구 쓰는 것 아닝교."

"밥얼 굶다니, 무신 소리요?"

", 지씨는 안죽 몰르구마. 보소, 우리야 명색이 장정일꾼으로 뽑힌다꼬 선하품 나는 일당이라도 받지만도 저 사람들이야 이 근동에서 부역나온 신세라 아무것도 몬 받는 기라요."

"아니, 그런 불공평헌 일이 어딨소. 왜놈덜 이거 참말로 안 되겄소."

"그기 아이오, 들어보소, 이 공사라카는 기 당초에는 다 돈 써서 인부 사갖고 허게 돼 있든 기라요. 헌데 왜놈들허고 우리 관가허고 짜갖고 그 돈을 갈라 묵는 판이라요. 그라고 관가는 뒤에서 부역 안 나가는 사람 잡아다가 곤장을 쳐대고."

"저런 죽일 놈덜 봤는가!"

지삼출의 목소리가 커졌다.

"보소, 참으소. 저게 어디 하로이틀 된 일인교. 벌시러 4년인데."

지삼출은 온몸에 맥이 풀리고 있었다. 산들은 서로 업고 업히며 줄기를 이루어 뻗어가고 있었다. 높은 산줄기는 그 높이만큼 또 다른 가지 줄기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산봉우리들은 층을 이루고 겹을 이루며 출렁거리듯 솟아 있었다. 그 소백산맥 줄기를 뚫는 철도공사는 산과 산 사이로 트인 가장 낮은 평지를 찾아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지형이란 묘한 것이어서 산이 아무리 많은 곳이라도 낮은 산줄기들 사이로는 작으나마 평지가 있게 마련이고, 실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며, 남향 산자락에는 마을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평지는 물론이고 경사 완만한 산자락은 논이며 밭으로 일구어져 있었다. 땅이 좁은 산골답게 산과 산을 감돌고 휘돌며 이어지는 길도 자칫 그 자취가 지워질 만큼 가늘고 좁았다. 그런데 철도공사를 편하게 하자고 덤비니 그나마 좁은 논밭이 사정없이 망가지고 있었다. 논밭이 철길 밑에 묻혀들어 산골사람들은 날벼락을 맞듯 생계가 막막해지는 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사장에 부역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산골의 공사는 역시 평지와는 달라 어느 지점에서는 낮은 산줄기를 무질러가느라고 발파작업을 해야 했고, 또 어떤 지점에서는 그것마저 불가능해 굴을 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니 산자락을 끊어내는 일 정도는 예사였다. 야산마저 피해가는 평야지대의 공사에 비하면 몇 십 배 힘이 드는 공사였다. 그러나 왜놈들은 입이나 놀리고 손가락이나 까딱거릴 분 그 어려운 일은 전부 조선 사람들이 몸을 던져 해내고 있었다. 공사장 일은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되어 긴 여름해가 지고 어둠살이 내려서야 끝이 났다. 사람의 눈으로 무엇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시간 동안은 꼬박 노동으로 채워야 했던 것이다. 지삼출은 누군가가 깨워서야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눈앞에서 강기호가 비식 웃고 있었다. 지삼출은 몸이 묵지그리한 것을 느끼며 윗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구구......"

그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신음을 물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의 몸은 달팽이처럼 말려 있었다.

"아플 끼구만. 그기 목도질 몸살 아닌교."

강기호 지삼출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이이고, 요거 사람 죽겄소."

옆구리를 붙안은 지삼출의 잦아진 소리였다.

"전신이 안 아픈 디가 없을 기요. 한 사날 일로 풀어야 될 일몸살이라요."

지삼출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 여기저기가 결리고 시큰거려 절로 신음이 입에 물렸다. 그는 걸으면서도 연상 아이구구 하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갈비뼈는 갈비뼈대로 결리고, 어깨는 어깨대로 쑤시고, 목 줄기는 목 줄기대로 욱신거리고, 무릎은 무릎대로 시큰거리고, 뱃가죽은 뱃가죽대로 뻑적지근하고, 몸 어디든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으쩌요, 삭신이 각단지게 녹아내릴 것인디?"

조장 한상우가 지삼출을 빤히 들여다보듯 하며 장난스런 웃음을 입가에

바르고 있었다.

"아이고, 말도 마시게라우."

지삼출은 고개를 내둘렀다.

"지씨 몸살 풀리고로 그 목도소리 한바탕 허는 기 우짜겄는기요?"

강기호의 말이었다.

"하먼, 쌈빡허니 혀서 몸 풀어줘야제 잉."

한상우가 손바닥에 퉤퉤 침을 튀겼다. 모두는 조장을 따라 제자리를 잡았다.

"짜아, 가는디이- 한나, , "

조장의 구령에 맞춰 모두는 불끈 기운을 썼다. 지삼출은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온갖 아픔이 한꺼번에 솟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어얼럴러, 어야데야."

목도소리가 모두의 발을 이끌었다.

"어허덜러, 얼라데야."

"가세가세, 고향가세."

갑자기 바뀌는 목도소리에 지삼출은 어리둥절해졌다.

<부모형제, 상봉가세, 철도공사, 지옥살이, 누굴위해, 골빠지나, 묻지마라, 뻔헌대답, 왜놈발에, 발통달기, 어얼덜러, 어야데야>

지삼출은 정신이 번쩍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나 아프던 몸도 아픈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뜻밖의 목도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더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일곱 명의 목도꾼들은 언제 그런 목소리를 냈냐는 듯 본래의 소리를 주고받으며 발을 맞추고 있었다. 지삼출은 건성으로 목소리를 맞추며 그 처음 들은 가사 내용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가사는 한번 들었을 뿐인데도 머리에 또렷이 박혀왔던 것이다. 지삼출은 그 아귀가 딱 맞게 짜인 가사 내용에 놀랐지만 특히 <왜놈발에 발통달기>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철도공사에 대해 구구하게 많은 말들을 다 덮어버리는 알짜배기 한마디였던 것이다. 그 목도소리를 십장들이 들었으면 모두가 채찍질깨나 당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까 그 소리, 누가 맨든 것이다요?"

레일을 부리기가 바쁘게 지삼출은 땀을 닦을 생각도 않고 강기호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구 한 사람이 맹근 기 아이고 우리가 서로서로 맘 합치갖고 맹근 것 아닌교. 우째, 맘에 드는교?"

강기호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 뿌리며 싱긋 웃었다.

"참말이제 기맥히요. 우리 맘얼 쏙 뽑아 엮어논 것이, 춘향전서 춘향이가 태형 맞는 대목보담 낫소."

"와따메, 누가 전라도사람 아니라고 헐성불러 춘향전 들고 나오고 그래싼당가. 근디 고것이 경상도사람 앞에서넌 헛방구랑께. 경상도사람이 소리럴 알기럴 혀, 소리럴 모르니 춘향이가 임 그리는 그 기맥힌 대목대목을 알기럴 혀. 소귀에 경 읽기로 다 소양 없는 일이시."

같은 전라도이면서도 그 지역이 남북으로 서로 달라 말투까지 사뭇 다른 조장 한상우가 두 사람의 말에 끼어들었다.

"! 그러기도 하겄구만이라."

지삼출이 문득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구구절절이 다 좋은디, 그중에서도 왜놈발에 발통달기가 질로 사람 가심얼 치요."

그는 정식을 하고 말했다.

"얼려, 이 사람이 아조 용헌 점쟁이시. 그 대목이 바로 이 강씨가 진 것이로구만. 소리 몰르는 사람치고 솔찬허덜 안혀?"

"아아, 그 대목얼 강씨가......"

지삼출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강기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 별거 아닌기라요. 생각대로 짜 맞촤 본기지."

강기호는 쑥스럽게 웃으며,

"뻐떡 가입시더. 십장이 보문 또 악다구 쓸 긴데"

하며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지삼출은 강기호의 말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 그의 말은 어디까지나 겸손이었다. 철도공사가 <왜놈발에 발통달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이 예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도 그동안 왜놈들이 왜 철도공사를 하는지에 대해 이모저모 생각해 왔었지만 그렇게 꼭 찍어내듯이 야무진 생각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까 그 목도소리럴 다른 조들도 다 부르고 있는게라?"

지삼출은 강기호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먼저 조장에게 물었다.

"워디 그러크롬 되간디. 우리 조만 살쩍허니 불르고 그러는 것이제."

한상우가 눈을 끔벅였다. 지삼출은 한동안 걷다가 강기호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왜놈덜이 발통 달았다 허면 조선 천지럴 갈기고 댕길 참인디, 그리 되면 시상이 어찌 되겄소?"

그는 강기호가 또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기 참 난린기라요. 왜놈들이 철도 놓는 거는 조선 땅은 완전허게 즈그 거 맹글자는 수작 아닌교. 그보다 먼저 개항이라캐서 부산이다 인천이다 원산이다 목포다, 조선 땅 삥삥 돌아감서로 즈그 배들 대기 존 데 골라서 발판 맹글어놓고 그담으로 철도를 놓는긴데, 두고 보소, 이눔에 철도가 조선 땅 근기 다 뽈고 조선사람 피 다 뽈아내는 홈통 될 끼니."

강기호의 침통한 말이었다. 지삼출은 또 충격을 받았다. 자신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니, 강씨는 그런 것얼 어찌 그리 다 훤허니 알고 있으시오?"

강기호는 억세게 뻗친 산줄기로 먼 눈길을 보냈다.

"그리 앞길얼 훤히 내다보는 사람 누구다요? 여그 있소?"

지삼출은 그런 사람을 당장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어데, 내가 잘 아는 분인데, 학식이 높으고 세상 이치를 점쟁이맹크로 뚫어보시는 분이라요."

지삼출은 양반에 대한 깊은 반감으로 말투가 꼬이고 있었다.

"하모, 양반 중에 된 양반이라요. 대쪽 성질에 나라 걱정도 진심으로 하고, 종들헌테 땅 갈라줘서 살게 맹글기도 안했능교."

"! 참말로 귀헌 양반이시. 그런 양반만 있음사 시상이 요 꼬라지가 안 되았을 것인디. 한번 만내보고 싶으요."

이제 지삼출은 말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양반 중에도 백에 하나는 그런 분이 있지예. 우찌 살다보믄 만내질란 지도 몰르는 일 아니겠능교."

강기호가 지삼출을 그윽이 쳐다보았다. 그들은 다시 레일이 쌓인 곳까지 다다라 있었다. 날씨는 아침부터 푹푹 쪄대고 있었다. 산골에 갇힌 더위 속에서 공사장의 고달픈 노동은 열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산골에 갇힌 더위 속에서 공사장의 고달픈 노동은 열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연장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감도 다른 여러 가지 음향으로 뒤섞이고, 십장들의 목쉰 외침이 서로 다투듯 심해지고, 그들이 위협적으로 휘둘러대는 가죽채찍의 허공 가르는 소리가 섬뜩섬뜩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장의 구령에 맞추어 다시 기운을 불끈 썼다. 지삼출은 또 입을 딱 벌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온갖 통증들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 목도소리는 첫행보를 수월하게 해주기는 했어도 통증을 덜어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목도소리에 맞추어진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게 흔들리는 듯 출렁이는 듯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느리기는 해도 중간에서 멈추는 법이란 없었다. 목도소리에 따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걸음걸이로 목적지를 향해 갈 뿐이었다. 중간에서 쉬게 되면 다시 기운 쓰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갈 만들기 조의 작업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망치들이 돌을 두들기는 소리들이며 자갈을 퍼 담는 소리들이 소란스럽게 섞이고 있었다.

"이봐, 정말 꾸물거릴 거야. 맛을 봐야 알겠어!"

이런 외침과 함께 채찍이 허공을 휘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들린 것은 채찍끝이 제 몸을 치며 허공을 찢는 그 싸늘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비명이었다. 채찍이 사람의 몸을 휘감은 것이었다. 지삼출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사람의 비명이었다. 지삼출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남자가 채찍에 맞아 고꾸라지고 있었고, 그 바람에 등에 진 망태기에서 자갈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영감탱이, 빨리 일어나 빨리!"

허공을 휘돈 채찍은 다시 쓰러진 남자의 어깻죽지를 물고 들었다. 그 남자는 신음소리를 내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얼굴이 깡마른 노인이었다. , , 조선 놈이 저런 노인네럴! 지삼출은 감정이 뒤집히고 있었다. 그는 목도소리도 따라서 하지 않았고 발걸음도 흐트러져 있었다.

"뒤에 누구여! 헛발질 허는 것이."

목도소리에 섞여 터져나온 조장의 고함이었다. 지삼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는 조장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로 발걸음을 바로잡으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그의 신경은 채찍질당한 노인한테서 완전히 거두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행이 십장은 채찍질을 더 하지 않았고, 노인은 손을 맞부비며 허리를 굽실거리고 있었다. 돌을 깨거나 자갈 짐을 지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은 십장의 위세에 눌려 일손들만 부지런히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무숲 짙푸른 산속 그 어디에선가 풀꾹새가 철 늦은 울음을 풀꾹풀꾹 울고 있었고, 따가워지기 시작한 햇살만이 산골 가득 넘치고 있었다. 한번 마음이 흔들려버린 지삼출은 다른 일곱 사람에게 끌리다시피 겨우 목적지에 다다랐다.

"지씨, 공연시 헛눈 폴지 말어!"

조장 한상우가 언짢은 기색을 역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머시냐...... 같은 조선 사람얼 조선 놈이 매질허는 것도 머시헌디, 젊은 놈이 노인네럴 그리 무작시럽게 패는 법이 어디 있당게라."

지삼출은 조장의 태도가 마땅찮아 하고 싶은 말을 굳이 누르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그 장면을 보고도 못 본 척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분이 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먼, 앞으로 자꼬 헛눈 폴아 딴 사람덜 심이 곱쟁이로 들게 맹글겄다 그것이여, 시방?"

조장이 눈꼬리를 치세웠다. 지삼출은 그때서야 조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조장의 말은 그런 일에 관심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저 조원들이 힘든 것을 타박하고 있었다. 그 문제라면 자신도 할 말이 없었다.

"딴사람덜 심들게 헌 것언 미안시럽게 되았소. 다들 양해혀 주시게라우."

지삼출은 조원들을 둘러보며 겸손을 보였다. 강기호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다름 사람들은 눈으로 괜찮다는 말은 대신하고 있었다.

"지씨 맘얼 몰라서 허는 소리가 아닝께로 그리 알아두씨요. 여그 와서 그런 꼴 첨 보니께로 속 뒤집히는 것인디, 다 참어야제 워쩔 것이여. 뒤로는 권세 없고 앞으로는 총 잡은 눔덜 앞에서 우리가 워쩌겄냔 말이여.“

얼굴을 일그러뜨린 조장이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삼출은 때 전 삼베옷에 땀이 밴 조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가입시더. 담배나 한대 피고 다 잊아뿌리소."

강기호가 쌈지를 내밀었다.

"모르겄소, 잊어불기는 너무 속 씨리는 일이오. 그 나이에 부역 끌려 나와 돌짐 지는 것도 어디헌디 매타작꺼정 당허니, 요것이 어디 사람 사는 시상인 게라."

지삼출은 쌈지에 곰방대를 밀어넣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조장 말대로 우짜겄능교. 사방팔방이 맥히서 무신 수가 없는 기라요"

"조장도...... 믿소?"

지삼출은 눈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통 내색이 없는데...... 눈치럴 살피봐도 냄새가 안 나는 기라요."

"사람이 여우상은 아닌디, 나주라 허면 그때 기세가 아조 무서왔소. 헌디, 뒷짐 지고 구경만 혔을랑가?"

지삼출이 곰방대를 입에 물며 고개르 갸웃거렸다.

"조심하이소, 잘못 말 냈다카믄 우리가 이 골짝서 귀신 될 끼요. 여게가 못 믿을 데라요."

강기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디, 매타작언 자주 허요?"

지삼출은 말을 돌렸다.

"대중이 없는데...... 사나흘거리로 벌어지는 일 아닌교."

지삼출은 걸음을 잠깐 멈추고 부싯돌을 쳤다. 부싯깃에 불이 붙으며 파르스름한 연기와 함께 쑥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부싯깃 반을 강기호에게 건넸다.

"지기럴, 목도질보담 매타작 당허는 꼴 못 본 칙허기가 더 심들게 생겨묵었소"

지삼출이 담배를 뻑뻑 빨아대며 살껍게 두꺼운 엄지손가락으로 부싯깃을 꾹꾹 눌렀다.

"매타작 당허는 것이야 죽는 것에 비하믄 그래도 할애비라요. 어데 개죽음이 따로 있는교. 여게서 죽는 기 개죽음이지."

강기호는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 사람이 죽기도 허요?"

"말도 마이소. 내 여게 와서 석달 간에 네 사람이 죽어 나갔구마는."

"무신 일로 넷썩이나 죽소?"

"사고당헌 기지요."

"맨날 남포 터치는 소리 안 듣는교? 날아오는 돌에 맞어죽고, 굴르는 돌에 치여 죽고, 무너지는 돌에 깔려죽고, 흙데미 허물어져 묻혀죽고, 침묵데미 무너져 치여죽고, 어데 죽는 기 한두 가진교."

강기호는 머리를 저었다.

"죽은 사람언 어찌 돼요? 무신 뒤방책이라도 세와주요?"

"무신 소리 하요. 그런 기 없으니께네 개죽음이라 카는 기제."

강기호가 허전하게 웃었다.

"죽일 놈덜......"

지삼출은 상투머리를 득득 긁어댔다. 멀리서 종소리가 땔랑땔랑 다급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외침도 길게 들려왔다. 잠시 후에 폭음이 진동했다. 그 폭음은 산골짜기를 뒤흔들며 산줄기를 타고 겹겹의 메아리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폭음은 연달아 터져 올랐다. 한사코 곧게만 뻗으려는 철도를 위해 어느 산이 또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3. 일본말을 배워라.

칠월의 한낮 더위는 후끈후끈하고 끈적끈적했다. 그늘에 피해 있어도 열기는 후끈거렸고, 부채질을 해도 살갗은 끈적거렸다. 더운 기운에서 좀 심할 정도로 끈적임이 묻어나는 것은 바닥 가까운 데다 바람기가 전혀 없는 탓이었다. 바다가 남쪽으로 트이지 않고 서쪽으로 붙어 있어서 여름은 언제나 끈적거리는 더위를 면할 수 없는 땅이었다.

"어허, 기왕에 부채질얼 헐라면 잠 씨언허게 혀. 그리 설렁설렁 말고."

맨발에 모시바지를 무릎가지 걷어 올리고 앉아 밥을 먹던 백종두는 옆에 앉은 여자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의 좁장한 얼굴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참 야박허기도 허시요. 저 마당에 감잎은 그만두고 풀잎 한나 까딱 안 허는 이 염천에 팔 늘어지게 부채질 허는 사람도 쬐깨 생각헐 줄 알아 보시게라우."

여자가 눈을 흘겼다.

"말이야 덕유산 칡넝쿨이시. 말허디끼 부채질이나 활활 혀, 활활."

기생년이 시건방지게 사람대접 받겄다고 턱쪼가리 놀리네. 백종두는 이런 생각으로 말을 사정없이 내질렀다.

"아무리 활활 아니라 훨훨 부쳐대도 이리 바람 한 점 없으니 무신 소양이 있당게라."

아이고 잡것, 안 더울라면 뜨거운 밥이나 묵지 말고, 뜨거운 밥이나 묵지 말고, 뜨거운 밥 쳐묵을라면 덥다고나 말 것이제. 옥향이는 옥향이대로 입 밖으로 내쏘고 싶은 말을 참느라고 입술이 뿌루퉁해져 부채를 약간 폭넓게 흔들었다.

"어째 말버르장머리가 이려. 여그가 시방 기생집이여 관청이여."

백종두는 밥을 씹다 말고 옥향이를 쏘아보았다. 좁장한 얼굴에는 화가 돋아 있었고 눈꺼풀 얇은 작은 눈은 고약해져 있었다.

"아이 장난이구만이라. 화내시며 지가 무색해져 불지요 이."

옥향이는 금방 눈웃음을 지으며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방정맞을 정도로 빠르게 부채질을 해댔다. 아이고 참, 아전 놈 신세에 양반 흉내 내니라고 이 염천 대낮에 뜨거운 밥 묵는 꼬라지에, 아전권세 지닌 사내꼭지라고 큰소리는 또 벽력이시. 아이고 이년에 기생팔자. 옥향이는 속으로 욕을 해대며 목을 타내리는 땀을 손가락 등으로 씻어 올렸다.

"느그가 요리 보배운 것 없이 기생질 해묵다가넌 쪽박 찰 날이 낼모레라는 것얼 알어야 헐 거이다."

백종두는 숟가락을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놓고는 밥상을 밀쳐버렸다.

"고것이 무신 말씸이시다요?"

옥향이는 부채질을 좀 더 세게 하며 백종두 옆으로 다가앉았다. 그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관가에서 기생에 대한 무슨 법을 바꾸게 되는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무신 말언 무신 말. 눈앞에서 뻔허니 일어나는 일도 안 보고 살어? 이 군산 땅에 밀려드는 가이샤덜이 안 뵈냔 말이여. 그 여자덜이 얼매나 사근사근허고 나긋나긋헌지 알기나 혀. 나도......"

"가이샤? 그것이 왜년기생이란 말이다요?"

옥향이는 다급하게 물었다.

", 요 버르장머리 없는 것. 어른 말씸 하시는디 중간에서 토막치고 드는 것 어디서 배웠냐!"

백종두는 벌컥 화를 냈다. 옥향이는 그때서야 자신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고 잘못혔구만이라우. 용서 허시씨요."

옥향이는 이제 다른 생각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말허리를 자른 건 분명 잘못한 짓이었던 것이다.

"방구 나온 담에 냄새 막기냐. 내가 일본말이 활달허게 통허게 될 때 꺼정은 그냥저냥 여그럴 댕길라고 혔는디 인자 낼부텀 당장 이 집구석 발을 끊어야겄다."

백종두는 화가 난 김에 <내일 당장>이라고 말을 바꾸게 되었다.

"아이고 무신 섭헌 말씸얼 그리허신당게라. 다시는 실수 안허고 하늘로 모실랑마요."

옥향이는 교태를 부려 보이면서도, 흥 왜년기생들이 왜놈들 받을라고 오는 것이제 니놈 같은 것들 보고 온다디야, 비위가 상하고 있었다.

"허고, 니 아까 가이샤럴 왜년기생이라고 허든디, 말 그리허덜 말어."

"왜년보고 왜년이라고 허는디......"

"어허! 요새는 동학당 놈덜이 설치든 시상이 아니여. 시상이 달라진 것얼 알아야제. 왜놈이 아니고 일본사람이나 일본인이고, 왜년이 아니라 일본여자나 일녀여."

백종두는 눈을 부라렸다. 언제나 윤기 반질거리는 그의 눈은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눈이 변한 것을 보고 옥향이는 그가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알겄구만요, 잘못혔어라. 무식헌 이년이 멀 알아야제라. 왜놈보고 왜놈이라고 허고 왜년보고 왜년이라고 허는 것이 옳은 것인지만 알았구만요. 이 무식헌 년이 인자 배왔응게 다시는 그리 안헐 것이구만요."

옥향이는 달고 신 눈웃음을 쳐대며 다급하게 비위를 발라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왜놈, 왜년을 곱씹어대는 오기를 부렸다. 왜놈들 세상이 되어간다고 금방 왜놈들 편을 들고 나서는 그 간사스러움이 역겨웠고, 더군다나 자기네를 왜년기생들하고 비료해서 얕잡아보는 데는 그만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참말로 잘못혔다고 생각허고 허는 소린겨?"

백종두는 그 반들반들한 눈으로 옥향이를 노려보았다.

"하먼이요.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허겄는 게라. 더우신디 화 푸시씨요."

옥향이는 큰 눈동자를 사르르 굴리고 물기 머금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어 교태를 부리며 부채를 팔랑팔랑 부쳐댔다. 아이고, 속옷 바람으로 네 활개 퍼지르고 누웠어도 사람이 못살 판인디 어쩌자고 이 뻘건 대낮에 찾아들어 사람얼 이리 떠죽게 맨드냐, 이 웬수야. 속으로는 욕을 퍼대고 있었다.

"기생이야 원체로 배운 것 없이 몸 팔고 목소리 팔아 살아가는 천헌 신세라 세상 돌아가는 깊은 속이야 알아볼 도리가 없는 눈뜬 봉사겄제, 하먼. 그런 신세먼 나 겉은 사람 옆이서 눈치껏 배우기나 혀야 앞날얼 어찌 살아갈 것 아니겄냐."

백종두는 금방 누그러져 옥향이를 측은한 듯 쳐다보았다.

"그렇제라. 많이 배울랑게 많이 좀 갤차주시씨요."

옥향이는 여전히 눈웃음을 살살 피워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욕이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날도 더운디 저놈이 점점 천불이 일게 허네. 이놈아, 나도 사람인디 꼭 똥이야 된장이야 허고 찍어묵어 봐야 속이 씨언허겄냐. 기생년이 천하면 사또고 얀반들 똥구녕이나 핥는 아전 놈언 귀허디야.

"내 일러두는 것이니 옥향이 니도 어서어서 일본말이나 배워둬라."

백종두는 내뻗고 있던 다리를 접으며 점잖은 척 말하고는 끄윽 트림을 돋워 올렸다.

"그것이 무신 소리다요?"

"어허, 시키는 대로 허면 됐제 또 사족얼 달아."

백종두는 좁장한 얼굴을 엄한 기색으로 꾸미며 옥향이를 꾸짖었다.

"이 무식헌 것이 무신 말인지 못 알아묵겄구만요. 조단조단 말씸해 주셔야제라."

옥향이는 백종두 옆으로 살짝 다가앉았다. 그녀는 사실 기생도 일본말을 배워야 할 정도로 일본세상이 되어가나 싶어 신경이 쓰이기도 했던 것이다.

"긴말헐 것 없고, 앞으로넌 일본사람들 시상이여. 일본말 몰라갖고넌 기생질도 못해묵는다 그것이제."

"몰르겄소, 왜말, 아니 저어...... 일본말 배우기 전에 굶어죽지나 않을란지. 어르신 같은 분이 그 머시냐 가이샨지 일본기생헌티 반해 그짝으로 찾어갈 작정 딱 허고 기시는 판이니."

옥향이는 일부러 가시를 박았다.

"모르는 소리 허덜 말어. 가이샤허고 느그허고는 천양지차여. 그 행실 짓짓이 간이 살살 녹아내리고 발꾸락꺼정 간질간질허게 맨든단 말이여. 나가 아직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렇제 말만 지대로 통혔다 허면 같은 돈 내고 멀라고 요런 집구석에 오겄냐. 고것덜이 그냥도 그리 사람얼 녹이는디 이불 속에서야 더 말헐 것 있겄냐."

백종두는 눈을 사를 내려감은 채 옥향이가 노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눈치코치 없이 입을 놀리고 있었다.

"아니, 밤일 허는디 말로 허드랑게라?"

옥향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내쏘고 말았다. 아무리 기생이라지만 여자의 한 가닥 마음 때문에 그녀는 더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신 소리여?"

백종두가 눈을 번쩍 떴다.

"나도 들어서 아는디, 왜년덜 그것언 전부가 밑으로 처졌다고 헙디다."

옥향이는 내친김에 마구 내질러버렸다. 덥게 만든 분풀이가지 싸잡아서 하는 셈이었다.

"그것언 또 무신 소리여?"

옥향이의 돌변에 백종두는 눈을 멀뚱하게 뜨고 있었다.

"천하에 한량이 그리 쉬운 소리도 못 알아묵소?"

내 말이 옳은가 그른가는 그리 좋아하는 왜년 기생허고 밤일얼 혀보면 알 것 아니겄소."

옥향이는 부채로 방바닥을 치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몸짓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눈치 빠른 백종두는 옥향이가 왜 그리 토라졌는지를 얼른 알아차렸다. 저것도 계집이라고 시앗다툼을 벌이네그려. 그는 코웃음을 치는 한편으로 비록 기생의 시앗다툼이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간 소리는 이랬다.

"나가 어떤 가이샤허고 정 맞춘다 헌들 옥향이 니야 안 보겄느냐. 아무 걱정 말거라."

백종두의 빠른 눈치는 엉뚱하게 헛짚어 등 가렵다니까 허벅지 긁고 있는 참이었다. 백종두의 그 엉뚱한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옥향이는 다시 내쏘았다.

"아이고 약초는 그만두고 배추 한나라도 지 고장 것을 묵어야 지 맛도 나고 살로도 간답디다. 바다 건너온 왜년 것이 얼매나 좋은지 맘대로 미쳐봇시요. 눈도 코도 없는 것으로 밑으로 처진 구녕 찾다가 헛김만 다빠질 것인게."

옥향이는 몸을 발딱 일으켰다. 눈치볼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해대버리자 가슴에 찾던 더위가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어허 버르장머리 없기넌! 어른이 니는 그대로 보겄다 허고 한마디 혔으면 됐제 자리럴 차고 일어나기넌. 앉아서 다리나 주물러."

백종두는 거머잡은 옥향이의 치마를 잡아끌었다. 옥향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계속 딴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꼴이 보기 싫은데 이제 또 다리까지 주무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색이 관리였다. 그의 성질을 잘못 긁었다가는 기생 신세 그나마 쪽박신세 되기는 하루아침이었다. 아이고 기생 년 팔자에 뜨신밥 찬밥 개릴 수 있드냐. 옥향이는 눈앞의 사정에 밀리며 도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짜아, 배도 살사 꺼져 내리는 참인게 다리를 꼭꼭 주물러라."

백종두는 대베개를 끌어당기며 눈을 찡긋했다. 옥향이는 그 눈에 서린 음기를 보자 그만 소름이 끼쳤다. 다른 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전부터도 무슨 정이 따로 있어서 몸을 섞어온 처지는 아니었다. 그저 흔한 기생방의 놀음이었다. 그렇지만 그 음기를 보고 소름이 끼치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서 씨어언허게 주물러."

백종두는 화문석 위에 벌렁 눕더니,

"나가 옥향이보고 어서 일본 말얼 배우라고 허는 것은 다 자네럴 위해서시. 자네도 인자 기생 환갑나이가 다 차가는디 일본말이나 척척 잘혀야 아랫것덜 거느림서 이 바닥에서 어른 노릇 해묵어질 것 아니겄어. 앞으로야 일본말 못해서는 누구고 간에 사람 행세 못허고 살 것인게로"

그는 타이르듯 가르치듯 점잖게 말했다.

"내가 동냥아치가 되든지 말든지 왜놈 말 죽어도 안 배울라요."

화가 치솟은 옥향이는 백종두의 다리를 마구 쥐어뜯듯이 거칠게 주물러댔다.

"아니, 어째 이려!"

"나가 시방 몇살인디 기생 환갑나이 찾고 그러요!"

옥향이는 입술을 깨물며 백종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 안직은 시물둘이라 그것이제?"

백종두는 화가 난 까닭을 알았다는 듯 허허대고 웃으며 윗몸을 눕히고는

"세월은 유수라 시물다섯꺼지 3년은 눈 깜짝헐 촌각이여. 시물둘 나이도 이팔청춘으로 보톰 꼽자면 시든 꽃이요 쉔 죽순이여."

그는 시조라도 읊듯 가락을 넣고 있었다.

"하이고, 서러라. 남자 나이 사십은 오월 나비고 첫배 황소제라이."

옥향이는 오금을 박고는,

"그러덜 마씨요. 기생년 나이 시물다섯은 환갑인지 몰라도 여자 나이 시물다섯은 만개헌 작약이요. 흐드러진 수국이란 것이나 알아두시게라. 남정네덜이 이팔청춘 찾아쌓는디, 그 나이에 그것덜이 몸이 지대로 피기럴 혔소, 또 그 풋것덜이 밤일 묘리럴 알기나 허요 당장에 그 풋것덜이나 찾아갔시요."

옥향이는 백종두의 다리를 떠다밀며 몸을 일으켜버렸다.

"요런 버르장머리 없이.."

백종두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옥향이의 치마 깃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옥향이가 솜씨 날렵하게 치마 깃을 낚아 돌리는 바람에 그는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그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당장 이리 안 올 것이여!"

그는 고함을 질렀다. 다리를 주무름에 따라 서서히 기분을 내려고 했던 것이 깨져버리자 화가 머리꼭지까지 솟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생 년이 감히 어디라고 다리를 떠다 민 것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천헌 기생이라고 그리 막 대허는 법이 아니오. 나야 논개 겉은 절개도 없고 춘향이 겉은 정절도 없소마는 관기 법도가 어떤 것인지넌 알고 있소. 시상이 망쪼가 드니라고 관기 법도고 머시고 다 깨지고 무너지는 판이라도 사람얼 그리 대허는 법이 아니오. 이년이야 다된 년잉게 왜년 기생얼 찾어가든지 젊은 년덜얼 찾어가든지 당장 나가씨요."

옥향이는 대청으로 나서며 칼칼하게 쏘아대고 있었다.

"옥향아 이년아, 니가 나럴 이리 대허면 어찌 되는지 몰라서 이러냐."

백종두는 옥향이년의 뻗대는 꼴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묘하게 귀엽기도 해서 생각과는 다르게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이놈에 기생 질 안 허면 그만 아니겄소. 맘대로 혀봇시요."

건넌방으로 들어간 옥향이는 문을 탕 닫아버렸다. 백종두는 그만 머쓱해져 버렸다. 그리고 가라앉으려던 화가 다시 치밀기 시작했다. 저것이 내 말을 안 들어? 그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그러자 새롭게 화가 머리꼭지를 치받고 올랐다. 그는 무시당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치떨려했다. 아전으로 평생을 살아오며 관상과 양반들에게 끝없이 굽실거리고 비위 맞추면서도 무시는 무시대로 당하는 것이 뼈에 사무쳤던 것이다. 학식으로나 머리로나 양반을 못 당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아전이라는 피를 잘못 타고나서 당하는 수모고 한이었다. 그 울분을 자신보다 더 아랫것들이나 기생방에서 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생 년한테 면전에서 무시를 당한 것이었다.

"야이 옥향이년아, 당장 이리 못 나오냐."

그는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러나 닫힌 옥향이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대신 눈이 휘둥그레진 할멈이 부엌에서 달려나왔다.

"이년아, 당장 못 나와!"

그는 놋재떨이를 집어 옥향이의 방을 향해 내던졌다. 그는 할멈을 보자 창피스러운 생각으로 그만 화가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청 가운데쯤에 떨어진 놋재떨이는 요란스런 소리를 내고는 데굴데굴 굴러 토방으로 떨어지며 더 시끄러운 쇳소리를 냈다. 그러나 여전히 옥향이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 저년이, 저년이! 백종두는 울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었다.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 쫓아가 저년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채 대청바닥에 패대기를 쳐 직신직신 밟아야 했다. 그러나 할멈이 보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에도 자신에게 미칠 손해를 빠르게 계산했다. 기생집에서 기생을 두들긴 소문이 관가에 들어가게 되면...... 체면도 말이 아니고 피해도 입게 될 터였다. 그는 곧 냉정해졌다.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옥향이년을 몰아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백종두는 숨을 고르고 나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코지에 걸린 옷을 하나씩 내려 꿰입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혔제. 한 년허고 오래 구녕 맞추다가는 지집이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는 말얼 지켰어야 허는 것인디. 근디, 저년 것이 예삿것이었어야제. 어디 그것만 찰떡이었는감. 코피리는 얼매나 잘 불고, 남자 호시 태우는 바닥 기술은 또 얼매나 좋고. 그러니 정신얼 채릴 수가 있었어야제. 저년이 시방 저리 콧대 세우고 뻗대는 것도 지년 기술이 넘보담 낫고, 나가 지년헌티 빠진 것얼 알기 땀새여. 허나 지년 기술이 지아무리 좋아도 오늘로 끝장이여. 백종두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마루로 나섰다.

"옥향이 니 소원때로 혀줄 거이다"

백종두는 드림줄을 붙들고 댓돌로 발을 내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 거동이며 무게 실린 음성이며가 조금 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흡사 격을 갖춘 양반이었다. 그러나 옥향이는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건 백종두의 기대를 조각조각 깨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엄포에 옥향이가 쪼르르 달려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배웅을 받고 오늘 일을 그냥 덮으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년 군수 앞에서도 이럴 것인가! 그의 뿌리 깊은 열등감이 마침내 독사대가리처럼 곤두섰다. 그는 치솟는 감정을 신음과 함께 입 안에 사리 물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익혀온 감정처리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삭여지는 것이 아니라 익혀온 감정처리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삭여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졌다. 그런 다음 무슨 방법으로든 앙갚음을 하지 않고는 그는 가슴에 새긴 각인을 결코 지운 일이 없었다.

"편히 살펴 가시게라우."

잔뜩 주눅 든 할멈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자네도 옥향이년 수발 곧 끝내게 될 것이네."

그가 할멈의 굽힌 등에다 내던지 말이었다. 소스라쳐 놀란 할멈은 백종두의 꼿꼿한 뒷모습을 넋 나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백종두는 옥향이의 목을 보기 좋게 비틀어버릴 궁리를 하며 더운 줄도 모르고 땡볕 속을 걷고 있었다. 구슬 옥자 옥향이가 아니라 돌 석자 석향이를 만들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절정의 쾌락을 색정에다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자신을 신분적으로 무시한 자들에 대한 앙갚음에 성공했을 때의 보복감이었다. 사또고 그 어떤 양반이고 간에 한번 마음속에 점찍었다 하면 무슨 수로든 앙갚음을 하지 않고 넘긴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런 오기를 품고 있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이방들이 비슷했다. 그는 그 보복의 쾌감으로 중인의 열등감을 이겨냈고, 양반에 대한 열망을 위무했던 것이다.

"이방 어른, 이방 어른......"

한 남자가 고개를 꾸벅거리며 알은체를 했지만 백종두는 자기 생각에 빠져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방 어른, 안녕허신게라우?"

그 남자는 굳이 백종두의 코앞에다 제 얼굴을 디밀었다.

"? 으 그려, 자넨가."

백종두는 그때서야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영 무덤덤했다.

"무신 근심 있으신게라?"

"아니시."

"워디 가시는감요?"

"그려. 자네 일 보소."

백종두는 냉정한 것도 거만한 것도 아니었다. 지극히 무표정하게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그건 관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는 특유의 거드름이고 감정 위장술이었다. 한껏 반가움을 드러냈던 그 남자는 백종두의 그런 태도에 그만 무색해져서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백종두 같은 사람을 우연히 마주친 기회에 한번이라도 더 알은체를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관청에 있는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고 친해져서 손해될 일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급변하는 군산바닥에 파고들어 잡화상을 벌여놓고 있는 장칠문의 아버지 장덕풍이었다. 장덕풍이 옆걸음질 쳐 멀어진 다음에야 백종두는 갈 데가 마땅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찌감치 사무를 마치고 나올 때는 그럴듯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옥향이년과 구름을 두둥실 타는 그 기막힌 맛을 즐기거나, 그것을 끝내고 전신이 노골노골 풀리는 꿀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 그 잠에서 깨어나 꿀물 한 사발을 마신 다음 땡볕이 한풀 꺾인 석양을 밟아 일어학원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계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기생년 나이 시물다섯은 환갑인지 몰라도 여자 나이 시물다섯은 만개헌 작약이요, 흐드러진 수국이란 것이나 알아두시게라."

그의 귀에서 되살아나는 옥향이의 목소리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풋것덜이 밤일 묘리럴 알기나 허요. 당장에 그 풋것덜이나 찾아갔시요."

또 들리는 소리였다. 그는 끄으음 된 신음을 입에 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옥향이년의 말은 틀리는 데가 없었다. 노인보고 어서 죽으라고 하고, 병신보고 병신이라고 흉보고, 여자보고 못생겼다고 하는 것이 세 가지 큰 악담이라고 했다. 그런데 스물두 살밖에 안된 옥향이에게 늙어 쓸모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뒤늦게 후회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했던 말은 여자를 못생겼다고 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말이 왜 나왔더란 말인가. 스스로에게 불리한 말은 농담으로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기억을 더듬었다. 사단은 곧 일본말 배우는 것 때문이었다. 옥향이에게 일찌감치 일본말을 배우라고 권했던 것은 순전히 옥향이의 장래를 위해서였다. 그 필요성을 설명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생 환갑나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형편이 그리 되었던 것인지 자신이 어리석게도 스스로에게 불리한 말을 했을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다시금 확인하고 있었다. 가만있거라......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옥향이 고것이 아주 맹랑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기생질 해먹는 주제에 일본사람을 턱없이 싫어했던 것이다.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는 일본말을 배우라고 권한 일도 없었고, 일본기생을 입에 올린 것처럼 일본사람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꺼낸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옥향이의 속이 어떤 것인지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애비 놈이 동학당 아니었을랑가?...... 백종두의 머리는 순간적으로 비약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랜 관리생활의 버릇이었다. 그의 머리는 한동안 옥향이의 아버지를 동학당이라고 단정해 놓고 옥향이가 기생이 된 사정과 그 맹랑한 생각과를 엮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일어학원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나 공부가 시작되기는 아직도 이른 시각이었다. 그는 난감해져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서쪽으로 꽤나 기울기는 했지만 해거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을 더 있어야 했다. 어디서 그 공백을 때워야 할지 막연해졌다. 문득 옥향이년이 아쉬워졌다. 비릿하면서도 싱싱한 살 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코를 벌렁거렸다. 탄력 좋은 탱탱한 젖가슴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것은 역시 제 말마따나 만개한 작약이요 흐드러진 수국이었다. 아니, 그냥 작약이나 수국이 아니라 활짝활짝 웃는 작약이었고 소리쳐 홀리는 수국이었다. 그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다시 찾아갈 입장도 아니어서 그는 크음크음 헛기침을 해대며 옥향이의 생각을 털어냈다. 옥향이의 생각에서 벗어난 그의 눈에는 나날이 변하고 있는 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며칠 사이에 얼마나 또 변했는지 그는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는 그 구경을 일종의 재미로 삼고 있었다. 그는 구경을 할 때마다 몸에서 생기가 나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거기에 대처해야 할 새로운 기대와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새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그는 오래 전부터 주시해 왔던 것이다. 백종두는 쥘 부채 든 손을 기세 좋게 치켜들었다.

"어이, 인력거!"

그는 쥘부채를 쫙 펼치며 큰소리로 인력거를 불렀다.

"워디로 가시남유?"

인력거꾼이 땀으로 맥질된 얼굴을 때 전 수건으로 훔치며 물었다. 그의 느릿한 말투는 전라도 것이 아니었다.

"어디 사람인고?"

백종두는 인력거꾼이 포구 건너편 장항 어디쯤에선가 왔으리라고 짐작하며 한껏 근엄하게 물었다.

"야아, 저어그 장항이 집인디유."

인력거꾼은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허리를 굽실거렸다.

"장항에서 무얼 했든고?"

"야아, 농사를 지었구먼유."

"농사라, 인력거 끌기가 농사 짓기보담 살기가 나슨가?"

백종두는 인력거에 한 발을 올려놓으며 또 하나의 세태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지유. 땅 못 가진 농사꾼 신세라 새 일거리 찾아 고향을 뜨기는 혔지유. 그려두 인력거꾼 놀이로 밥 묵고 살기는 넘에 땅 부치는 것보담 나슬 것이 하나도 없구먼유."

인력거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백종두는 인력거가 출렁거리도록 자리에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저쪽 해관으로 한 바쿠 돌아 여그꺼정 대여."

백종두는 몸을 뒤로 맘 놓고 부리며 명령했다. 그는 분명 <명령>했던 것이다. 인력거꾼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천한 것들이었고, 그는 인력거를 탕 때마다 가마에서 받아왔던 모멸감을 맘껏 풀고 있었다. 그가 관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창피스러움과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사또 행차 때 사또는 가마를 타고 가는데 자신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꼴을 수많은 사람에게 내보이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인력거가 생긴 다음부터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그 분풀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력거라는 것은 참 묘해서 사람이 뒤로 몸을 부릴수록 끌기도 좋고 빨리 달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타는 사람의 자리가 편안할 뿐만 아니라 자연히 배를 내밀게 되는 앉음새가 아주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역시 인력거는 세계적인 발명품이라며 그는 더없이 흡족한 마음으로 애용하고 있었다. 그는 맘놓고 허리를 뒤로 젖히고 턱을 끌어당기고 앉아 쥘부채를 할랑거렸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그는 인력거의 흔들거림을 즐기며 길 양족으로 새로 들어선 일본식 건물들을 살펴나가고 있었다. 그는 일본식 집에 반한 지 이미 오래였다. 한 일자로만 된 한옥에 비해 일본식 집은 마루를 중심으로 방과 부엌 같은 것들이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주 그럴듯했던 것이다. 변소가 따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 좋았고, 특히나 좋은 것은 목욕탕이었다. 집집마다 목욕탕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하고도 기막혔던 것이다. 거기다가 2층집에 이르면 그는 그만 넋을 놓았다. 높은 2층집에 떡 버티고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기분 달뜨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돈만 있으면 아무나 2층집에 살 수 있다니...... 그는 일본사람들의 세상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 다다미라는 것이었다. 여름에는 그런대로 괜찮겠는데 겨울에 그 위에서 자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찮은 일이었다. 온돌의 그 뜨끈뜨끈함이 없이는 겨울추위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모르는 방법 하나를 이미 고안해 놓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일본식으로 하되 방바닥만 온돌을 놓자는 것이었다. 그는 인력거에 의젓하게 앉아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결코 편하지가 않았다. 날이 날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번화해지고 있는 이쪽의 땅을 무슨 방법으로 수중에 넣을 수 없을까를 또 궁리하는 탓이었다.

"그건 경매장에서 결정하는 것이오. 최고가격을 부르면 되는 것 아니오?"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의 속편한 말이었다.

"아하, 그것이야 누가 모르겄소. 그리 헐라도 낙찰이 안되니 허는 소리 아니오. 내 섭섭잖게 인사헐 것이니 어찌 좀 일이 되게 혀주시오."

"거류지가 한정이 돼나서......"

"그러니 부탁서는 것 아니겄소."

"어디 두고 봅시다."

"아이고 다음 경매 때는 꼭 좀 되게 혀주시오. 자아, 이 잔 받으시고......"

쓰지무라는 수만 날름날름 얻어 마셨지 경매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무슨 수르르 써서든지 낙찰은 일본사람들이 독차지하고 말았다. 그 대목에서 그들은 <왜놈>이라고 그의 감정은 뒤틀려 올랐다. 그러나 그는 거류지 낙찰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몸이 다는 것은 경매가 한차례씩 지나갈 때마다 땅이 줄어들면서 낙찰가는 계속 치솟고 있는 점이었다. 그 땅값만 생각하면 그는 가슴이 벌떡거려 곧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개항이 되고 해변가로 각국 거류지가 정해지고 일본과 중국 영사관에서 그 땅값으로 나라에 낸 돈은 평당 30전이었다. 그것도 일시불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이자만 내고 원금은 그 땅을 경매에 부쳐 거류지 시설자금을 확보한 다음에 갚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거류민들이 폭증하면서 경매가 치열해지게 되자 땅값은 평당 10원에서 20원으로 뛰고 20원에서 40원으로 뛰는 판국이 벌어졌다. 지난 경매에서 55원까지 치솟을 것을 보고 그는 숨이 막혔던 것이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가격이 고정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평당 100원가지도 올라가리라는 소문이었다. 결국 평당 원금 30전씩을 갚은 일본영사관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군산이 각국 거류지로 되어 있었지만 그건 명목뿐이었다. 중국영사관이 소유한 땅은 일본영사관 땅의 십분의 일도 안 되었고, 중국영사관은 각국 거류지회에도 아예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류지의 모든 권한과 이권은 일본영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땅값이 더 오르기 전에...... 백종두는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땅을 확보할 수 있는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를 어떻게 해서든 회유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 방법이 막막했던 것이다. 그녀석은 술로도 돈으로도 넘어가지 않는 고약한 놈이었다.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의 관청과 은행 같은 것들이 들어서고 있는 금강 포구 쪽 해변을 돌아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백종두는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속가지 더부룩해진 것 같은 기분으로 인력거에서 내렸다. 그는 옷차림을 단속하고 일어학원으로 천천히 발을 떼어놓았다. 학원은 공부가 시작되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차츰 변하고 있었다. 선생을 따라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는 열댓 명의 학생들 중에 분명 자신의 아들을 없었던 것이다. 요런 빌어묵을 자석이 참말로 말얼 안 듣네! 그는 아랫입술을 물며 주먹을 부르쥐었다. 눈앞에 있으면 당장 면상을 박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종두는 숨을 씩씩거리며 문을 열려다가 돌아서려다가 종잡지를 못하고 있었다. 공부를 하러 들어가자니 당장 아들놈을 찾아나서야 될 것 같았고, 아들놈을 찾아 나서자니 어디로 갈 것인지 막연한데다가 공부를 하루 빼먹는 것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는 몇번을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아들놈을 여에 앉혀놓지 않고서는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오늘 아주 요절을 내고 말겠다고 벼르며 좁은 낭하를 걸어나왔다. 뒤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일본말소리가 그의 울화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학원을 나선 백종두는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는 푸우 소리 나게 울화를 토해냈다. 아들놈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어느 술집에서 계집을 끼고 낮술을 퍼마시고 있는지, 어떤 잡스런 놈들과 어디서 투전판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학원에 얼굴을 내민 놈이 집에 붙어 있을 리 만무였다. 이놈에 새끼가 사람이 될라는 것이여 웬수가 될라는 것이여. 백종두는 또 하늘을 향해 울화를 내뿜었다. 그는 아들이 자기보다는 큰 인물이 되기를 못내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자꾸 금이 가고 있는 것만 같아 속이 끓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들놈은 어려서부터 글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고 덜렁거리며 나돌기만 좋아했다. 글공부에 맛을 들이지 못했으면 눈치나 빠르고 약기나 해야 할 텐데 그렇지도 못했다. 세상은 나날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세상은 나날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세상의 변화는 일본세가 예상보다 빠르게 커져가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전에 벌써 노비제도를 없애면 빠르게 커져가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전에 벌써 노비제도를 없애면서 세상의 밑바닥이 한차례 흔들렸고, 동학당들이 날뛴 2년 뒤에는 백정을 면천하여 갓을 쓰도록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그 두 가지 변고는 아주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아랫것들이 고개를 치켜들게 만들어 준 것인 반면에 그만큼 윗사람들의 위세가 기울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나라의 지엄한 힘이 아랫것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중죄였던 것이다. 노비의 사슬에서 풀려난 것들이 농군으로 변했고, 그것들이 다시 동학이라는 해괴한 물을 먹고 동학당으로 변해 세상을 뒤집겠다고 낫이며 도끼를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동학당 중에서 싸움에 앞장을 섰던 포악한 것들은 거의가 노비 출신이었다. 결국 나라가 한 발 물러선 까닭에 갑오난리가 일어났고, 그 난리가 일어나자 나라는 다시 두 발 물러나게 되어 백정 같은 천하고 천한 인종들한테까지 갓을 씌워주고 말았던 것이다. 아랫것들 힘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세상이 허물어지게 만든 것이 그 두 가지 변고였던 것이다. 세상이 그리 되니 몇대를 벼슬살이 못해 족보만 끌어안고 배를 곯던 한심한 양반들이 이방 자리를 탐내고 드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 세태 속에서 일본 세는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일본세가 휘돌면서 세상의 변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그건 첫째가 조선관직의 허약해짐이었고, 둘째가 족보가 아닌 돈이 말하는 세상이 되어갔고, 셋째가 일본 세를 거역하지 말고 업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들에게도 일본어학원을 다니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놈은 배돌기만 하면서 아비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었다.

"이놈에 새끼가 지 에미럴 닮아서 그 꼬라지여."

백종두는 성질 사납게 쥘부채를 평치며 내뱉었다. 그리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인력거를 향해 외쳐댔다.

"어이, 인력거! 인력거!"

인력거가 집에 가까워질수록 백종두의 부채질은 빨라지고 있었다. 그만

큼 감정이 뜨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 열어라. 어여 문 열어!"

그는 있는 대로 고함을 지르며 대문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아이고 어르신, 인자 오시는 게라."

머리에 수건을 동인 머슴이 황급한 몸집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저리 물러서라."

백종두는 머슴의 어깨를 떠다 밀었다. 머슴은 비척비척 물러섰다.

"어쩐 일이시게라?"

의아한 얼굴을 한 그의 아내가 서둘러 댓돌로 내려서고 있었다.

"남일이 놈 어딨어!"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나갔는디요."

"나가기넌 어디로 나가."

"일본말 배우로 간다고라."

"시끄럿! 새끼럴 어찌 단속허고 사는겨. 이 모지란 예펜네야!"

백종두는 쥘부채 든 손을 치켜 올렸다. 곧 아내를 후려칠 기세였다.

"아이고메 다 큰 자석인디......"

그의 아내는 두 팔을 모아들고 그 뒤에 목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백종두의 아내는 남편이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다 알아차렸다. 그녀는 대꾸할 말이 없어서 계속 뒷걸음질 쳐 남편과 멀어지려고 했다.

"그놈에 새끼럴 당장 찾아와. 다리몽댕이럴 분질러놓게 당장 찾아오라고!"

백종두는 쥘부채 끝으로 아내를 겨누며 소리 질렀다. 그의 아내는 잔득 움츠린 채 고개만 빠르게 끄덕였다.

"에잇 빌어묵을 그, ......"

백종두는 혀끝까지 다 밀려나온 말을 되잡아 삼키며 쥘부채로 허벅지를 쳤다. 그가 삼킨 말은, 그년이 재수 없이 나대 일진 더럽게 됐다 였다. 그의 아내는 문간에 주눅 들어 서 있는 머슴을 손짓으로 불렀다. 머슴은 백종두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어여 나가 서방님 찾어보소."

그녀의 숨죽인 목소리였다.

"야아."

머슴이 몸을 돌려세웠다.

"어이, 쉽게 찾는다고 금방 딜고 오지는 말소."

"야아."

주춤했다가 몸을 되돌리는 머슴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스쳐갔다. 머슴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그녀는 아래채로 눈길을 돌렸다. 얼굴을 내비치지도 못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학원인지 서당인지로 안 가고 또 어디로 가서 이 난리판 굿인고, 나럴 빼박지나 말았어얄 것 아니여."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되어 아들의 외모는 자신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넓적한 바탕에서부터 눈, , 입까지가 정말이지 떡판에 찍어낸 듯했던 것이다. 너무 안타까워 굳이 찾아내자면 남편을 닮은 데는 귀 정도였다. 외모가 남편을 닮지 않았으면 성질이라도 남편을 닮았어야 했다. 영리하고 찬찬하고 부지런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남편을 닮았더라면 이런 말썽이 일어날 리도 없었다. 성질마저 자신을 닮아, 아니 남편은 자신을 닮았다고 매양 타박했었지만 성질은 누구를 닮았는지 그저 무사태평이고 건들거렸다. 자신의 성질도 남편 쪽이면 쪽이었지 아들 쪽은 아니었던 것이다. 외모가 자신을 빼박은 죄로 아들이 무슨 잘못만 저질렀다 하면 남편은 자신까지 싸잡아서 몰아대고 윽박질렀다. 그 시집살이도 여간 분하고 서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야단을 맞고 풀죽어 있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내가 잠결에 어떤 딴 남자한테 당해서 저걸 낳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녀는 손수 꿀물을 타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 손에는 물 축인 수건도 들었다. 문지방을 조심스럽게 넘어서던 그녀는 주춤했다. 남편은 그 사이에 벌써 네활개를 벌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하르르 내쉬며 가만가만 방을 나왔다. 남편은 좀 남달라서 아무리 속상하는 일이 있어도 자자 마음먹으면 자는 사람이었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방 세상을 엎을 것처럼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한숨 자고 나면 아들에 대한 화도 많이 풀릴 것이라서 그녀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머슴은 혼자 들어왔다. 머슴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그녀는 손짓으로 제지했다. 들으나마나 못 찾았다는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머슴을 내보낼 때도 남편의 불호령을 따르는 척한 시늉이었지 찾아오리라는 기대는 없었던 것이다. 아들은 밥 때가 겨워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놈의 새끼가 사람 노릇얼 지대로 헐란지 몰라. 시상은 정신없이 핑핑 돌아가는 판인디."

색다른 반찬이 서너 가지나 더 오른 밥상을 받은 남편의 말이었다. 그 색다른 반찬은 며느리의 눈치 빠름이었다.

"그것이 애비 맘얼 안직 다 몰라서 그러요. 지도 곧 알아채리게 될 것잉마요."

그녀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편은 더는 말이 없었다. 저녁을 마친 남편이 담배 한대를 피우고 있는데 아들이 돌아왔다.

"너 이놈 남일아, 당장 이리 오니라!"

백종두는 담뱃대로 놋재떨이를 내리쳤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리고 버선발로 댓돌 아래까지 달려 내려와 아들을 붙들었다.

"아이고 워디럴 댕기다가 인자 와. 일본말 배우로 안 갔다고 생판 난리가 났었는디. 아부지 화가 가라앉었응게 그저 잘못혔다고, 낼보톰언 영축없이 허겄다고 말씸디려. 알겄어?"

그녀는 억누른 소리로 숨 가쁘게 말했다.

"지길, 조선 놈이 왜놈말언 멋났다고 배우고 그려라."

백남일의 뚱한 대꾸였다.

"아이고메, 아부지 듣겄다."

그녀가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질색을 했다. 그 옆에서 백남일의 아내는 남편을 눈이 째지게 흘기고 있었다.

"아 이놈아 멀혀. 당장 들어와!"

이런 외침과 함께 또 놋재떨이가 요란하게 울렸다.

"얼렁 들어가, 얼렁."

그녀는 아들의 등을 밀었다.

"어무님도 얼렁 들어가시지요."

며느리가 다급하게 말을 끼워넣었다.

", 속 태우지 말어라."

그녀는 며느리에게 눈짓하고 서둘러 아들의 앞장을 섰다.

"너 이놈, 이짝으로 앉어라."

백종두는 방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꼬나보며 긴 담뱃대로 방바닥을 톡톡톡톡 두들겼다. 방정맞을 정도로 빠르게 방바닥을 두들겨대는 담뱃대 끝에서는 담배연기 대신 새로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그의 성미가 폴폴 묻어나고 있었다. 백남일은 슬금슬금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담뱃대와 거리를 두고 윗목에 미적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는 사이에 담뱃대로 두들긴 자리는 그의 어머니가 차지했다. 그는 전에 담뱃대로 한두 번 머리통을 맞은 게 아니어서 미리 사이를 벌리는 것이었다.

"너 이놈, 일본말 배우로는 안 오고 어디럴 싸돌아댕기냐!"

백종두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맞추어 담뱃대로 놋재떨이를 힘껏 내리쳤다. 학원의 교실을 들여다보던 때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저어, 활동사진이 새로 들어와서 그걸 보니라고요."

눈을 힐끔거리며 백남일은 빠르게 대답했다.

"활동사진? 노름헌 것이 아니고?"

아들을 쏘아보고 있는 백종두의 눈은 더욱 반질거리는 빛을 내고 있었다. 아들이 술을 마시지 않아 일단 감정이 잡혔던 그는 활동사진이란 말에 감정이 풀리고 있었다.

"노름얼 혔음사 이리 일찍허니 들어와지간디요."

백남일은 아버지의 성질에 불이 붙지 않은 것을 눈치 채고 살아났다 싶어 고개를 좀더 쳐들고 대꾸했다.

"활동사진 제목이 머시여?"

백종두는 추궁을 늦추지 않았다.

"제목이야 일본말이라 모르겄고, 그 이얘기넌 거 머시냐, 사무라이란가 허는 사람덜이 싸우는 것이었구만이라."

백남일의 고개는 바로 들려 있었다.

"이놈아, 활동사진얼 보드라도 제목이 머신지 알고 봐얄 것 아니여. 그러자면 학원 공부보톰 먼첨 열성으로 혀야제."

백종두는 이제 감정이 완전히 풀린 것만이 아니라 아들이 기특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비록 학원공부를 빼먹기는 했지만 그 시간에 술도 안 마시고 노름도 안하고 활동사진을 보았다는 것은 썩 마음에 드는 일이었던 것이다. 일본사람들의 깊은 속을 알려면 활동사진을 자주 보아야 한다고 그는 진작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다. 활동사진이란 그 희한한 물건은 보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그것을 보다보면 일본사람들의 생활을 이모저모 소상하게 알 수가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무슨 마음을 먹고 사는지를 손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돈값을 톡톡히 뽑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활동사진 보는 것을 점잖지 못한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그는 비웃었다.

", 왜 대답이 없어."

백종두는 담뱃대로 방바닥을 쳤다.

"예에, 알겄구만이라우."

마음 놓고 있던 흠칫 놀라며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지기럴 그까짓 제목 몇자 알자고 성가시게 왜놈말 배우고 그려? 활동사진이야 왜놈 말 몰라도 변사가 있응게 재미지게만 보는디, 투덜거리고 있었다.

"니 그간에 활동사진을 얼매나 봤냐?"

백종두는 앉음새를 고치며 담배통에다 담배를 재기 시작했다.

"저어...... 들어온 것언 다 봤는디요."

백남일은 아버지의 말뜻을 선뜻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려......"

백종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니 활동사진이 들어온 지 몇 년이나 되는지 아냐?"

아들을 건너다보며 묻고 있었다.

"금메요...... 한 이삼년 됐는갑는디요."

백남일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

"이놈아, 내 그럴 줄 알었다. 정신 채려, 5년이다 5."

백종두는 끌끌 혀를 찼다. 아이고 영감탱이, 기억 한분 총총허시. 그까짓 걸 알아서 뭐하느냐고 생각하는 백남일은 배고픔을 심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니가 그런 것도 몰르고 활동사진얼 보기만 허니 지대로 봤을 리가 있겄냐."

아들을 쳐다보는 백종두의 눈길이 다시 꼬이고 있었다. 그러나 백남일은 아버지의 말이 이상하기만 해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이놈아, 활동사진이란 것언 그냥 움직기리는 사진이나 보고 변사 놈이 새살 까는 소리나 듣는 것이 아니여. 그리 봐서넌 백 개럴 봐도 돈만 없애제 아무 이문이 없는 것이여. 일본사람덜이 무신 생각얼 허고 사는지, 사람얼 어찌 대허는지, 중허게 생각허는 것이 무엇인지, 머를 좋아허고 머를 싫어허는지, 여자넌 어찌 다루는지, 그런 것얼 세세허게 볼 줄 알어야 헌다 그것이여. 활동사진에서 그런 것얼 미리미리 다 배와두면 앞으로 일본 사람덜 대허기가 그만치 쉴허고, 넘덜보담 빨르게 친해지고, 신용도 더 많이 받을 것 아니냐 그 말이여. 무신 말인지 알아듣겄어?"

백종두는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백남일은 처음 듣는 그 말이 알듯 말듯해서 선뜻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 알아듣겄어?"

백종두의 목소리가 커졌다.

"예에, 알겄구만요."

"그려, 애비 말 명념허고 앞으로넌 건숭으로 보지 말고 찬찬허니 세세허게 보란 말이여. 허고, 일본말 배우는 것은 어쩔 심판이여?"

백종두는 새롭게 아들을 꼬나보았다.

"저어...... 일본말이 영판 요상시럽고 허기가 에로운디 안 배우면 안 될랑가요? 사람덜이 다 배우는 것도 아닌디 먼첨 배우니라고 사서 고생헐 것 머 있간디요."

말이 나온 김에 속말을 다 해버리자고 백남일은 큰 용기를 냈던 것이다.

"이놈아, 머시 어쩌고 어쩌!"

백종두는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며 입에 물었던 담뱃대를 치켜들었다.

"아이고 참말로 말로 허시시요. 메누리가 바깥에 있소."

그의 아내가 울상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렸고, 백남일은 잽싸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저런 넋 빠진 놈이 저거, 시방 말이라고 허는겨? 이적지 애비가 혀온 말얼 어디로 듣고 인자 와서 저런 새 날아가는 소리여, 저놈이."

백종두는 며느리가 밖에 있다는 말에 걸려 성질대로 담뱃대를 휘둘러 대지 못하고 소리만 질러댔다.

"일본말 배우기가 쉽기야 허겄소. 그러니 왈기지만 말고 조단조단 알아듣게 말로 허시시요."

그녀는 애원하다시피 말하고 있었다.

"그려, 이놈아 똑바라지게 앉어서 애비 말 똑똑허니 들어."

백종두는 아들을 노려보며 앉음새를 고치고는,

"이것이 내놓고 헐 소리는 아니다만, 이 조선천지가 일본 사람덜 손에 전부 잽힐 날이 낼모레다."

그는 마치 무슨 선언이라도 하듯이 결연하게 말했다. 따라서 그 얼굴도 진진하다 못해 엄숙하게까지 보였다. 참말로 저 무신 새 날아가는 소리여. 꼭 왜놈덜이 조선얼 집어묵기 바래는 것맨치로 말허네? 백남일은 너무 어이가 없어 아버지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이놈아, 그리 놀래덜 말어. 이 애비가 누구여. 시상 돌아가는 것 내다보는 디는 아무도 못 당허는 점쟁이여. 시상이 그리 변허면 어째야 되겄냐 그것이다!"

백종두는 아들에게 눈길을 박은 채 또 담뱃대로 방바닥을 쳤다.

"지금보톰 일본말얼 배워둬야 헌다 그것이다. 니놈언 아까 사서 고생헌다고 혔는디, 이놈아 두 눈구녕언 가죽이 모지래서 뚫어논 구녕이 아닌 게 눈구녕얼 크게 뜨고 앞얼 똑똑허니 내다봐. 니보담 한 발 앞서 일본 말얼 배운 사람덜이 어찌허고 있는지 똑똑허니 보란 말이여. 다 통변자리 차지혀서 권세 부리기 시작허지 안혔냔 말이여. 그런디도 사서 고생이냐 이놈아. 니넌 한 발 늦었다는 것얼 알아야 혀!"

백종두는 말을 멈추고 담배통에다 담배를 우겨넣었다.

"아부지 말씸 명념혀. 다 니 전정 위해 허시는 말씸인디."

그녀는 아들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그녀는 남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시집와서 지금까지 세상 파란이 적지 않았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때마다 앞을 빈틈없이 내다보고 눈치 빠르게 처신해 한 번도 몸을 다치거나 집안을 흔들리게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파란 중에서도 제일 큰 파란은 뭐니 뭐니 해도 동학당들이 일으킨 난리였다. 그때 사또란 사또는 다 추풍낙엽이었고, 재산 많은 양반들도 꽁지에 불붙은 장끼 신세였다. 그러니 이방들이라고 해서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얼마나 신묘하게 처신을 했던지 동학당에서 세운 집강소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동학당들이 망하기 시작하자 다시 동헌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남편이 그런 고비마다 어떻게 처신을 하는지 그 깊은 속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 숨막히는 파란 속에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비를 무사하게 넘기는 남편의 기막힌 재주에 탄복할 뿐이었다.

"이놈아, 이 미련허고 답답헌 놈아. 니 눈으로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눈뜬 봉사면 이 애비가 앞길 열어주는 대로나 열성으로 따라와얄 것 아니겄어."

백종두는 담배연기를 푸욱 내뿜고는 한심스럽다는 듯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그 눈길을 받으며 백남일을 오로지 배고픈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전부터 가지고 있는 분명한 생각은, 장자로서 아버지가 모아놓은 재산을 상속받기만 해도 평생을 떵떵거리며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그런 힘든 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그 생각을 아버지 앞에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놈아 또 말헌다만 앞으로넌 일본 말얼 못해 갖고는 입신이고 출세고 권세고 재산이고 하나도 손에 잽히지 않고 앞길이 콱콱 맥히게 된다. 일본 말얼 몰라서는 사람새끼 노릇얼 못혀. 그러니 어쨋그나 일본 말얼 배워야 혀, 일본말을. 어쩔래, 앞으로넌 열성으로 허겄냐!"

백종두는 말끝에다 힘을 넣었다.

", 열성으로 허겄구만이라우."

백남일은 이제 끝났구나 싶어 기운 좋게 대답했다.

"그려, 니 전정 훤히 열리게 헐라면 넘 허는 것 곱쟁이로 열성얼 부려야 혀. 니넌 이 집 장손이고, 니 나이도 인자 열여덟이나 되ㅇ어., 장가도 들었으니 가장 노릇얼 혀얄 것 아니냔 말이여. 이 애비가 니 나이 적에넌......"

아이고 사람 미치겄네. 또 골백번 들은 똑같은 소리 시작이시. 백남일은 그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휘말렸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아버지의 입에서 <이 애비가 니 나이 적에넌>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가 살아온 내력으로 결국 자기 자랑이었는데, 너무 많이 들어서 줄줄 외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눈치 빠르고 똑똑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대목만은 영 멍청이고 바보였다. 그는 이런 때야말로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가 지금꺼정 사또라는 것얼 열다섯이 넘게 보아왔다마는......"

아버지가 이야기에 취해 있는 틈을 타 백남일을 어머니에게 배가 고파죽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보시오 영감, 이 집 장손 배곯아 죽소."

그녀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어느 때 없이 나긋한 소리로 말했다.

", 그러냐."

백종두는 이야기가 끊긴 것이 아쉬운 듯 짭짭 입맛을 다시고는,

"니가 한 발 늦었다는 것얼 유념허고 앞으러넌 열성으로 혀야 혀."

엄한 얼굴로 다짐을 놓았다. 백종두는 일어학원이 생긴 초장에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몇 년 전에 학원에 밀어 넣었더라면 나이가 어려 우격다짐이 한결 수월하게 먹혀들었을 것이고, 여자나 술, 노름 같은 것을 알기 전이라 공부도 좀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기회를 놓치고 장가부터 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실수치고는 어이없는 실수를 한 셈이라 그 손해를 만회하려고 자신의 마음은 바쁜데 아들놈이 도무지 뒤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학원은 개항이 되면서 뒤따라 생겼던 것이다. 그 학원만 나오면 급료 좋고 권세 잡을 수 있는 일자리가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학원은 일차적으로 개항장마다 들어섰고, 그 다음에 큰 도시로 퍼져나갔다. 1900년에 11개였던 것이 4년 뒤에는 30개가 넘게 불어나 있었다.

 

 

4. 거미줄

장덕풍의 잡화상에는 아침햇살과 함께 더위가 밀려들고 있었다. 가게에는 잡화상이란 이름 그대로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바닥에서부터 벽면까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 많은 물건들은 한눈에 가게가 번성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 거의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 것들이었다.

"아부지, 아무리 생각혀도 앞길이 벨로 가망이 없구만요. 귀신이 붙어야 굿판을 벌이고 꽹과리가 있어야 풍물얼 치더라고 이민 가겄다고 나스는 사람이 있어야 회사가 될 것 아닌감요. 헌디 날이 갈수록 사람 구허기가 에로와진단게라. 억지로 그물 쳐 잡는 것도 하루이틀이제, 이 동네 저 동네 싸돌아댕기니라고 고상만 죽사리치고 되는 일언 없구만요. 이리 나가다가넌 회사가 문 닫을 판인디, 아부지가 어디 존 자리 잠 구해 줘야겄소."

스무 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탕을 한쪽 볼에 문 장칠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사탕이라는 것이 호도 알만큼 커서 그의 왼쪽 볼은 보기 흉할 정도로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만들어내기 시작한 사탕 맛에 홀린 그는 가게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사탕부터 입에 집어넣었다.

"그려, 나도 그 일이 가망 없다는 것얼 눈치 채고는 있었는디, 그려도 그리 다급허니 자리 옮길 망언 묵지 말어라. 돈벌이보담도 그 일이 더 중헌게."

장덕풍은 느리게 흔들던 부채질을 멈추며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무언가를 일깨우고 있었다.

"아는디요. 그 일도 인자 더 헐 것이 없는 상 싶은디요. 그간에 아무리 눈에 불얼 키고 찾아도 그것덜이 새로 패럴 짜는 티는 안 나드랑게요. 동학당언 인자 씨가 몰라 분 것이 틀림없구만이라."

"이놈아, 누가 듣겄다. 그 소리넌 입에 올리덜 말란게로."

장덕풍은 질겁을 하며 빈 주먹질을 했다. 그리고 가게 밖을 바르게 휘둘러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은 텁수룩한 외모와는 달리 예리하게 빛났다.

"아부지넌 참말로, 겁도 많소."

장칠문은 마땅찮은 얼굴로 사탕을 으석으석 깨물어댔다.

"이놈아, 주딩이 놀리지 말고 정신 채려. 그런 일언 쥐도 새도 몰라야 허고, 여자라고 생긴 것언 느그 엄니도 알아서넌 안된다고 헌 말 잊어부렀냐."

장덕풍이 아들을 누려보며 억누른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아이고 또 저 소리. 아부지 앞이라 헌 말이제 나도 여그 나갔다 허면 독헌 놈이랑게요."

장칠문이 눈을 고약하게 떴다.

"이놈아, 니가 아무리 독허고 똑똑허다 혀도 이 애비 눈에넌 안직도 설었응게 꺼들대지 말어."

장덕풍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이 애비 생각으로넌 말이여, 그것덜이 안직도 씨가 모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여. 사오년 전에 다시 들고일어나기 전에도 생각 짜른 사람덜언 그리 말혔다. 근디 그것덜언 죽은디끼 숨죽이고 있다가 눈 깜짝헐 새에 그리 한 덩어리가 돼서 일어났든 것이란 말이여. 그것덜이 평소에 서로 선얼 다 대고 있지 않았음사 어찌 그리 일시에 일어날 수가 있었겄냐. 그런디 말이여, 그때 그놈덜이 다 잽혀 죽었드라냐? 그것이 아니여. 살아난 것덜이 더 많혀. 그러허면 그 살아난 것덜이 어디로 갔겄냐? 하늘로 솟았을끄나, 땅으로 꺼졌을끄나. 다 숨어서 살고 있다 그것이여. 그것덜이 숨죽이고 살문서 허는 짓이 머시겄냐. 또 때가 오면 일어날라고 서로서로 선얼 대고 있다 그 말이여. 바로 그것얼 찾아내야 허는겨."

그는 입가에 침 찌꺼기가 끼도록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그것덜도 기죽고 정떨어져 인자 그런 생각 안 묵는 것 아니겠소?"

장칠문은 제 아버지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꽤나 싫증난 얼굴로 불쑥 말했다.

"이놈아, 그것이 아니여. 그것덜언 그냥 사람이 아니라닌게. 즈그가 바로 하늘이라고 허는 그 못된 독얼 품고 즈그덜이 믿는 시상얼 맨들 때 꺼정 싸우겄다고 맘 묵은 땅벌 겉은 물건들이여."

"독허면 머헌다요. 즈그덜 시상이 되기 전에 일본 사람덜 시상이 되고 있는 판인디. 싸우면 또 죽기나 허제."

장칠문은 아가리가 큰 사탕병의 뚜껑을 열고 사탕 하나를 꺼내 익숙한 솜씨로 입 안에 던져 넣었다.

"이놈아, 속 댈이는디 사탕 그만 묵어."

장덕풍은 버럭 소리 질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사 잇속 따지는 것이 골수에 박힌 그로서는 사탕을 하나가 아닌 두 개째 먹는 것은 영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는 장칠문의 입술이 비틀리고 있었다. 아이고 말이야 번듯허시. 지 새끼가 묵는 것도 아까와서. 그는 아버지의 속이 더 쓰리라고 사탕을 마구 씹어댔다.

"요런 멍청헌 놈아, 니가 한나만 알고 둘은 몰르는 것이여. 그것덜언 원체로 일본사람덜얼 원수로 대허는디, 이리 일본시상이 되야가니 그것덜이 또 들고일어날 채비럴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여. 그려서 일본사람덜이 그것얼 미리 방비헐라고 우리 겉은 사람 골라서 역부러 일 맡긴 것 아니냔 말이여. 이려도 못 알아묵어?"

"그리 생각허면 그러기도 헌디요......"

장칠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러 말 헐 것이 없다. 니가 어디서고 그것 한나만 알아냈다 허면 니가 좋아허는 자리넌 어디라도 갈 수가 있는겨."

장덕풍의 목소리는 들뜨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아들은 물론이고 자신도 한몫을 잡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어찌 믿는 게라?"

"어허, 잔말 말고 어서 찾아내기만 혀. 그담이야 이 애비가 다 알아서 헐 것잉게. 이 애비가 손해보는 짓 허는 것 봤냐."

장덕풍은 자신있게 못을 쳤다.

"죽어라고 애럴 썼는디도 못 찾아내면 어쩌고라?"

"머시여?"

장덕풍은 그만 맥이 풀려 어깨를 늘어뜨려 버렸다.

"지끔꺼정 헌 고생도 얼맨디 앞으로 도 고상혀 갖고도 못 찾아내면 공염불만 허고 헛세월만 보내는 것 아니랑가요."

장칠문이는 따지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들을 쳐다보고 있는 장덕풍은 아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마구잡이로 밀어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지금까지 헛고생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한 가닥을 잡고 그렇게 움직인 덕에 가게는 번창해 왔던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든 못 찾아내든 여기서 그 일을 중단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라는 것은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과 아주 안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시늉이라도 하면서 성과가 없는 것은 별문제가 없는데 아주 중단을 해버리면 그 영향이 바로 가게에 미치게 되어 있었다.

"그려, 니가 앞보톰 내다보고 가망없는 일 미리 그만두자 허는 생각이

있는 갑는디, 그것도 틀린 생각은 아니여. 허나 공도 세우지 못허고 니가 좋아허는 주재소로 자리 옮길라는 것은 택도 없는 일이고, 당장 그 일얼 허기 싫으면 니가 갈 존 자리가 한나 있기넌 있다."

장덕풍은 여기서 말을 끊고 곰방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어떤 자린디요?"

장칠문은 금방 반색을 했다.

", 마침 사탕공장서 사람얼 한나 구해 도라는 것이여."

장덕풍은 곰방대에 담배를 담으며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아부지, 정신 나갔는 게라."

장칠문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가 추접시럽게 사탕공장 일꾼으로 일헐라고 그 고상혀 감서 일본말 배운지 아시오."

아버지 앞인데도 소리를 지르는 그의 얼굴에는 불량기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온냐, 니놈 속이 그리 뒤집어져야제. 그런 성깔머리 없고서야 사내자석이 아니제. 장덕풍은 자신의 예상이 적중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어째 그러 이놈아, 사탕공장서 일허면 사탕 배터지게 묵어서 좋고, 사탕 맨드는 기술 배와갖고 니도 공장 채리면 돈벌이 잘돼 좋고, 이중으로 좋은 일인디."

장덕풍은 계속 능청을 떨어대며 부싯돌을 치고 있었다. 선반에 성냥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지만 그의 눈에 그것은 팔 때만 보이는 물건일 뿐이었다.

"아부지나 그리혀서 돈벌이 더 많이 허시요. 나넌 죽으나 사나 권세보톰 잡고 볼 것잉게라."

장칠문이는 숨을 씩씩거렸다.

"말이야 존디 무신 재주로 그리혀."

장덕풍은 계속해서 아들의 성질을 긁어대고 있었다.

", 그 잡새끼덜얼 찾아내면 될 것 아니겄소."

마침내 장칠문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니가진 것이 아무리 잘났다고 까불어도 이 애비 손바닥서 노는 강아지여. 장덕풍은 기분이 너무 흡족해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눈깔사탕이나 한나 더 묵어라."

장덕풍의 입에서 나간 소리였다.

"안 묵을라요."

장칠문은 화가 난 얼굴로 가게를 뛰쳐나가며 내쏘았다.

"아먼, 맘 그리 강단지게 묵고 그것덜얼 꼭 찾아내야 혀. 그래야 니 전정 열리고 이 애비 장서 번차허고 그러제."

곰방대를 입에 문 장덕풍은 땅바닥을 퍽퍽 내지르며 멀어지고 있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사탕공장에는 작은아들을 들여보내기로 마음 정하고 있었다. 장덕풍은 사탕공장이 번창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라는 한편으로 배도 살살 아파오고 있는 참이었다. 작은 몸집에 인물도 못난 가이호가 3년 앉을 것 같은 헌집을 빌려 든데다 일도 내외가 단둘이 했기 때문에 그 형상이 너무 초라해 공장이니 뭐니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사탕이며 과자들이 만들어져 나왔던 것이다. 과자도 과자였지만 사탕의 그 단맛은 아이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고 어른들까지 좋아했다. 특히 살림이 여유 있는 집 여자들이 사탕을 즐겼던 것이다. 한번 사탕 맛을 들인 아이들은 병에 사탕을 채워 넣기 바쁘게 했고, 가이호는 눈에 띄게 돈을 벌어갔다. 번듯하게 공장을 새로 지었고, 직공들도 쓰기 시작했다. 직공들이 자꾸 늘어가면서 가이호의 못난 얼굴에도 살이 붙어 허여멀쑥해졌다. 사탕이 널리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생겨났다. <눈깔사탕>이 그것이었다. 그 크기가 황소눈깔만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아메다마>라는 일본이름은 대개 어른들이 썼고, <눈깔사탕>이란 이름은 주로 아이들이 썼다. 그런데 사탕 때문에 골탕을 먹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엿장수들이었다.

"이놈들아, 사탕만 묵지 말고 엿도 사묵어."

엿장수들은 사탕을 우물거리는 아이들에게 하소연인지 꾸짖음인지 모를 소리를 하고는 했다.

", 사탕이 더 맛있는디요."

"그려, 사탕이 훨썩 더 맛나당게라."

아이들의 거침없는 대꾸였다.

"아자씨넌 엿이 더 맛난디?"

엿장수들은 억지를 써보기도 했다.

"히히, 아자씨넌 멍텅구리다."

"맞어, 아자씨넌 바보여."

"뗏끼놈덜!"

키들거리던 아이들은 놀라 흩어지고, 엿장수에게는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된 공허감만 남았다.

"사탕얼 묵으면 못써. 고것언 왜놈덜 것이여. 조선 사람언 조선 엿얼 묵어야 혀."

더러 어떤 엿장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로 엿장수를 올려다보며 사탕을 맛있게 빨아댈 뿐이었다.

"어허 참, 왜놈 등쌀에 우리 밥 굶어죽게 생겼네그려. 사탕 맨드는 왜놈얼 몰아내든지, 왜놈사탕 팔고 앉었는 가게덜얼 다 때레부시든지 양단간에 한나는 해야제 요것 안 되겄구만."

어떤 엿장수는 가게 앞을 지나가며 일삼아 큰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장덕풍은 엿장수보다 더 큰소리로 헛기침을 해댔다. 이놈들아 느그도 인자 한시상 지내간 것이여. 느그놈덜도 혓바닥이 있응게 엿맛허고 사탕 맛이 어찌 달븐지 다 알 것이다. 텁터그리허게 단 엿 맛허고 쌈빡허니 단 사탕 맛허고 대기나 헐 것이냐. 느그덜 참말로 굶어 죽기 전에 어서 엿장시 때레치워야 헐 것이다. 사람덜이 갈수록 사탕 맛에 인백이면 느그야 필경 굶어죽게 생겨 있응게로. 장덕풍은 코웃음을 쳐댔던 것이다. 그는 작은아들을 사탕공장에 들여보내 빨리 기술자를 만들어가지고 자기도 사탕공장을 차릴 욕심이 부쩍 동하고 있었다. 큰아들과 아야기를 하다보니 퍼뜩 잡힌 그 생각은 생각할수록 신통하고 가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성님, 그간에 무고허신게라우?"

"성님, 편안허신게라."

건장한 두 남자가 가게로 들어서며 인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크지 않은 등짐을 진 보부상이었다.

"어이, 어서들 오소. 기둘리고 있었네."

장덕풍이 반색을 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간에 물건덜이 더 는 것 아닌 게라?"

수염 더부룩한 첫번째 사내가 가게 안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묻고 자시고 헐 것 머 있어. 딱 보니 가게가 터져 나가는구마. 우리 성님 신수도 더 훤해지고."

콧잔등이 꺼진 두번째 사내가 볼품없는 코를 벌름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물건이 늘기넌, 그 타령이 그 타령이제. 어서 짐들이나 벗고 앉어서 숨보톰 도리소, 이 사람덜아."

장덕풍은 가게의 물건이 늘었다는 말에는 그저 범상한 척하고 먼저 짐을 벗게 하는 그들 나름의 인사치레를 하며 두 사람을 향해 부채를 넓게 부쳤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그냥 겉치레 인사만이 아닌 것을 아는 그는 속으로 묘한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넌 시상에서 질로 부러운 사람이 성님이요."

텁석부리가 등짐을 벗으며 말했다.

"우리야 은제나 이리 터잡고 앉아질라는지 원."

빈대코도 등짐을 벗으며 가는 한숨을 지어냈다. 장덕풍은 잽싸게 그 기회를 감고 들었다.

"무신 소리덜이여, 어디 사람팔자가 따로 있간디. 누구든지 시상 판세 돌아가는 것 보고 눈치빨르게 처신허면 앞길이 쉽게 열리는 것이제. 어쩐가 자네덜, 무신 소식 있는가?"

장덕풍은 두 사람을 빠르게 훑었다.

"난장맞을 내 팔자 필 운대가 안 맞는지 어쩌는지 눈이야 빠져라 허고 찾아도 그놈덜 움직기리는 짓언 안 뵌당게요."

빈대코가 쓴 입맛을 다셨다.

"성님 말대로 팔자 한분 삼빡허니 고쳐볼라고 호랭이눈에 불키디끼 허고 댕기는디도 안직 그놈덜 꼬랑댕이럴 못 잡었구만요. 당장 성님 만내기는 면목 없어도 눈에 불키고 댕기다보면 그것덜얼 잡아챌 날이 있겄지라 이."

텁석부리는 빈대코와는 다르게 자못 자신감을 내보였다.

"고것 참, 요분에도 헛걸음이시......"

장덕풍은 실망감으로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마땅찮은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것덜이 즈그덜 심이 다 보태진 걸 알고 인자 다시 일어날 생각언 안 허는 것 아니겄능게라?"

빈대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머시여? , , 모지래는 소리 허고는. 아 그놈덜이 누군디 그런 얼빠진 소리럴 허고 앉았어, 시방. 그런 소리 헐라면 내 앞에 오덜 말어!"

장덕풍은 부채 든 손으로 삿대질을 해대며 결기를 세우고 있었다. 기대가 무너져 화가 괴어오르던 판에 화풀이할 건덕지를 잡은 것이었다.

"아이고 성님, 고정허시게라. 봉구가 자리 잡고 앉을 맘언 간절허고, 맡은 일언 안 풀리고 허니 속이 답답혀서 헌 소리 아닌 게라. 잊어부리시요."

텁석부리가 눈치 빠르게 변명하고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빈대코에게 눈짓으로 나무라고 있었다. 장덕풍의 성질을 거슬렀다가는 당장에 필요한 물건을 못 받아갈 판이었다. 동학당인지 무엇인지가 다시 패거리 모으는 것을 찾아내 팔자 고치는 것은 그다음 일이고 우선 급한 것은 장사 잘되는 일본물건을 받아가는 일이었다.

"무신 소리여. 말허는 투가 그 일 작파허겄다는 것인디. 작파허겄으면 혀. 그것으로 나허고넌 손 끊는 것잉게."

장덕풍은 화난 얼굴을 풀지 않은 채 냉정하게 잘랐다.

"아니구만이라, 성님. 저 태수 말대로 속이 하도 답답혀서 헌 소리제 그놈덜얼 찾겄다는 지 망언 돌뎅이구만요. 지 가심얼 팍 쪼개서 맘얼 보일 수가 없으니 요것얼 어쩌제라?"

빈대코 김봉구는 허리까지 굽실거리며 눙치고 들었다.

"자네, 그것이 참말이여!"

장덕풍은 눈째 사납게 김봉구를 쏘아보았다.

"두말허겄소, 누구 앞이라고. 이놈도 명색이 등짐살이로 15년이 다 차가요."

김봉구는 제 가슴을 퍽퍽 쳐 보였다.

"알었응게 말 멋대로 내뱉덜 말어. 말이란 것언 묘혀서 속에 없는 말도 자꼬 허다보면 맘이 그 말얼 따라가게 되는 법이여."

장덕풍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아, 조심허겄구만이라우."

김봉구는 안도의 숨을 가늘게 흘렸다.

"자네덜 나가 일러준 대로 화전 허는 사람덜 속에 끈 달아놓은겨?"

장덕풍은 두 사람의 허라도 찌르듯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하먼이라. 진작에 중허다 싶은 질목얼 여럿 골라서 공얼 딜이고 있구만요. 그 공딜이는 비용도 솔찬허당게라."

텁석부리 방태수의 대답이었다.

"그 푼돈 쓰는 것 아까와허덜 말어. 한바탕 팔자 고치는 일 허자는디 맨입으로 되는 것이 아닌게로. 그적에 나가 그 일얼 성사시키니라고 없앤 돈이 쌀 열섬 값이였단 말이여."

장덕풍은 그들이 비용 많이 든다는 것을 빙자하여 물건 값을 깎으려고 들까봐 미리 담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김봉구와 방태수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방태수가 모른 체하라는 눈짓을 빠르게 했다. 두 사람은 장덕풍의 말에서 그전에 쌀 다섯 섬 값이었던 것이 느닷없이 쌀 열섬 값으로 둔갑하는 것을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덕풍은 말막음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그들이 주고받는 눈짓 말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디 말이여, 화전 허는 사람이라고 혀서 다 믿어서넌 큰일 날 것이네. 살아남은 그놈덜 중에 몸 피해서 화전 부쳐묵는 놈덜이 솔찬히 있응게로. 사람 잘못 골랐다가넌......"

장덕풍은 여기서 문득 말을 끊었다가는,

"돈만 헛쓰는 일인 것이여."

어물어물 말을 끝냈다. 그러나 그가 당황해서 삼켜버린 말은 따로 있었다. <......일이 되기 전에 목심 날아가는 것이여.> 그가 삼킨 말이었다. 그때 일본군의 길잡이로 나섰거나 정탐원 노릇을 맡았던 보부상들은 화전민으로 가장한 동학당의 손에 적잖이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런 위험을 입 밖에 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성과 없는 그 일에 싫증을 느끼는 눈치인데 그런 말까지 해서 더 마음 변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려서 우리도 눈치껏 믿을 만헌 사람들로 골라내니라고 애는 썼구만이라."

방태수가 곰방대를 꺼내며 말했다.

"잘혔어. 어쨌그나 그런 일 허자면 혼자서넌 못허는 법이여. 내가 공을 세운 것도 순전히 화전 허는 사람덜허고 끈이 잘 엮어진 덕이였응게. 허고, 그런 일언 맘 다급허니 묵어서넌 되는 일이 아니로구만. 맘 묵직허니 묵고 끈허게 참고 기둘리면 덫에 멧돼지 거리디끼 착 일이 되는 날이 오는 법이제. 그리 알고 맘 급허게 묵지덜 말어."

장덕풍은 그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 끝내고자 했다.

"우리 일로 맘이 급헌 것보담이야 빈손으로 성님 대면허기가 옹색시러서 그러는 것이구만이라."

김봉구가 주저앉은 콧등을 찡그리며 어색스럽게 웃었다.

"말이야 바로 말이제 그 일이 이리 안 풀려서넌 우리가 장사해 묵기도 자꼬 에로와질 것이로구만. 그 사람덜이 원허는 일언 한나도 못해 줌서 우리가 좋아허는 물건만 골라서 빼주라고 부탁허니 그 사람덜이 좋아헐리가 있겄어. 나가 새중간서 날이 갈수록 처지가 고약해진단 말이시."

장덕풍은 거래에 앞서 다시 자기에게 유리한 망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또한 거짓말이 아니었고 과장도 아니었다. 손이 빠른 물건들을 많이 받아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일을 정탐해 내겠다는 조건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님 처지가 고약해지는 것이야 다 알 만허요. 그려서 이번에넌 우리가 성님 체면 좀 세와디릴라고 장만헌 것이 있구만요."

방태수는 장덕풍이 쳐놓은 망을 걷어내듯이 자신 있는 어조였다.

"고것이 머신디?"

장덕풍은 금방 관심을 드러냈다.

"금이오."

방태수의 표정없는 대꾸였다.

"금이라고? 얼매나 되는디?"

장덕풍은 감정을 감추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금이라는 말에 벌써 감정은 들뜨고 있었다.

"얼매나 나갈란지넌 달아봐야 안되겄소? 금이야 고구매가 아닌게 저울눈 한 금이 다 중헌디."

방태수는 느긋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려, 그려. 어여 내놓기나 혀보소."

장덕풍은 흔들린 감정을 다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 땅에서 나는 물건 중에서 일본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금이었던 것이다. 방태수는 바지 끈을 풀고 속에 매단 조그만 주머니를 꺼냈다. 거기서 나온 것은 굵은 금가락지 두 개였다.

"! 자네 용허시."

장덕풍은 방태수의 손바닥 위에 놓인 금가락지를 낚아채듯 했다.

"살다보면 그럴 때도 있어야제라."

김봉구가 거기에 자기 몫도 있다는 듯 말을 받았다.

"요것이 한 사람 손꾸락에 끼었든 것인갑는디?"

장덕풍은 연상 손목을 까딱거려 손바닥에 올려놓은 금가락지 두 개의 무게를 가늠질하며 방태수와 김봉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가 물건을 수중에 넣게 된 경위를 따져묻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어허 참, 장물이야 아닌게 걱정 마시게라. 그런 물건 갖고 성님허고 거래헐 우리요."

방태수가 불쾌하다는 듯 수염 더부룩한 턱을 두툼한 손바닥으로 거칠게 훔쳤다.

"무신 소리여. 당당허니 우리 물건허고 거래헌 것이디."

김봉구가 옆에서 펄쩍 뛰었다.

"믿기로 허제."

장덕풍은 금가락지 두 개를 손아귀에 꼭 쥐었다. 지난번에 두 사람이 떼 간 물건 값이 소매금으로 아무리 높게 쳐도 금가락지 하나 값도 못 된다는 것을 굳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금가락지가 장물이 아닌 이상 어떤 물건을 얼마에 처분하느냐는 자신이 간섭할 대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열 곱의 이문을 남기든 절반으로 손해는 보든 그것은 그들이 부리는 요령이요 그들이 알아서 할 재수였던 것이다.

"얼렁 달아보고 값이나 톡톡허니 쳐주씨요."

김봉구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값도 값이고, 요분에넌 우리가 원허는 물건으로만 줘야 쓰겄소."

방태수가 밀어붙이고 있었다. 물건을 거래할 때는 부자지간에라도 인정사정없다는 그들의 본색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어이, 자네덜 원허는 대로 다 혀줌세. 기둘리소, 저울 내올랑게."

장덕풍은 더없이 부드럽게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가게 뒷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갔다.

"요런 노름판 열 분만 걸리면 우리도 터잡고 앉을 것인디 말이여."

김봉구가 뒷문 쪽을 힐끗하며 방태수에게 속삭였다.

"어허, 그놈에 입 좀 놀리덜 말어."

방태수가 면박을 주었다.

"그놈에 동학당 잡기가 하도 에로운게 허는 소리 아닌감."

"그려도 헐 소리가 따로 있제."

방태수는 몸을 일으키더니 오징어발 하나를 쭉 찢어 입에 물었다.

"좌우간 우리넌 은제나 요런 가게 잡고 앉어서 신선놀음 혀보게 될랑고. 참말로 등짐 신세 면허기 에로우네 이."

김봉구는 기지개를 켜며 목소리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방태수는 오징어발을 우물거리며 가게 안의 물건들을 찬찬히 훑어나가고 있었다. 등짐을 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생활을 해가며 보부상들은 누구나 한곳에 터잡고 앉아 장사하기를 큰 소망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터를 잡고 앉은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큰 거상이 될 꿈을 품게 마련이었다.

"짜아아, 자네덜 날도 더운디 먼 질 오니라고 목이 컬컬허겄제."

큰소리로 말하며 가게로 들어서는 장덕풍의 손에는 술상이 들려 있었다. 방태수와 김봉구의 눈길이 마주쳤다.

"어여 목보톰 축이드라고."

장덕풍이 술상을 좁은 마루에다가 놓았다. 그의 얼굴은 벙글거리고 있었다.

"성님, 이러덜 맙시다. 거래넌 거래고 술언 술이요."

방태수가 버티고 서서 말했다.

"하먼이요. 거래 끝내고 술언 우리가 사겄소. 저울보톰 내놓으시오."

김봉구도 술상을 밀치며 일어났다. 그런 두 사람의 얼굴은 차가웠다.

"이 사람덜아, 나가 요런 술 한 잔으로 어찌헐라는 것이 아니여. 자네덜이 장사 잘해 왔응게 그냥 한잔헐라는 것이제. 사람 맘을 그리도 몰라?"

장덕풍은 완연히 당황하고 있었다.

"어떤 거래고 거래 전에 술 묵는 법 아니란 것 몰라서 이런당가요?"

방태수의 냉정한 말이었다.

"허허허허...... 자네덜이 아주 야물딱진 상사꾼으로 틀잽혔네그랴. 나럴 막 갤치고 드니. 되얏네, 되얏어. 어허허허......"

장덕풍은 두 사람의 완강함에 결국 밀리고 말았다. 그의 헛웃음이 공허하게 가게 안에 흩어지고 있었다.

"자네덜이 안 마시겄다면 나나 한잔 마시고 보세."

장덕풍은 호리병에서 술을 따랐다. 술은 사발을 넘칠 듯 찰랑찰랑하게 차올랐다. 그는 여유있는 몸짓으로 사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술을 꿀꺽꿀꺽 마셔댔다. 술이 넘어갈 때마다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오르내렸다. 방태수는 그 모습을 외면했고 김봉구는 침을 삼키고 있었다.

"어 크으으, 거참 씨어언허다!"

장덕풍은 소반에다 사발을 소리 나게 놓으며 유난히 큰소리를 냈다. 그의 그런 모습은 퍽 남자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건 때아닌 술상을 내온 자신의 행위에 대한 면구스러움을 덮으려는 허풍이었고 그냥 밀리기만 해서 거래를 불리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오기이기도 했다.

"자아, 요리덜 앉소. 거래 시작허세."

손등으로 입술가에 묻은 술을 씩 문지른 장덕풍은 술상을 거칠게 옆으로 밀쳐버렸다. 그의 얼굴은 이제 술상을 가지고 나올 때의 얼굴이 아니었다. 벙글거리던 웃음은 싹 가시고 살얼음 끼듯한 냉정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집에서 가지고 나오겠다던 저울을 그는 정작 옆에 놓인 돈궤에서 꺼냈다. 앙증맞게 작은 저울이 저울 집에서 나오자 세 사람의 눈빛은 일시에 달라졌다. 저울추가 저울대에 달리고 금가락지 두 개가 저울판에 올려졌다. 머리를 조아린 세 사람은 숨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저울이 들리면서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저울추가 좌우로 움직임에 따라 저울대가 민감하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여섯 개의 눈들은 저울추 끈이 닿는 저울눈을 따라 예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울대가 수평을 이룰 듯 말듯 했다. 그때였다. 투박한 손가락 두 개가 저울추 끈을 붙들었다.

"석 돈쭝 반이시."

마침내 침묵을 깨는 소리였다. 물론 저울질을 맡은 장덕풍의 말이었다.

"아니여, 그 손꾸락 치워. 손꾸락 치우고 저울만 빤듯허게 들어, 빤듯허게."

저울을 노려본 채 김봉구가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가 외치는 말은 완전한 반말이었다.

"어허, 그런 저울질이 어딨소, 손꾸락 띠내고 점잖허니 헙씨다, 우리."

김봉구와 다르게 방태수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수염 더부룩한 얼굴은 김봉구의 흥분된 얼굴과는 달리 험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왜덜 이려, 저울대가 팽팽헌 것 아까 다 봤잖은감!"

장덕풍의 버럭 소리질렀다.

"보기는 멀 봐. 볼라고 허는디 잡아부렀제. 저울대가 우로 솟았어, 우로"

김봉구가 몸을 들썩거리며 팔을 뻗쳐 하늘을 찔러대고 있었다.

"넉 돈쭝으로 쳐받은 물건얼 석 돈쭝 반으로 저울질허는 법도 있소. 저울질얼 나가 한번 혀봅시다."

방태수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머시가 어찌고 어쩌! 니가 저울질얼 허겄다고? 포목장시보고 잣내 내노라는 법 있고 쌀장시보고 됫박 내노라는 법도 있다디냐! 옛끼 순 못배와묵은 상것같으니라고. 저울 내노라는 것 보니께 나허고 끝장 보겄다는 것인디, 되얏어, , 가부러! 오늘로 끝장이여!"

장덕풍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저울을 엎어버렸다. 그 바람에 금가락지 두 개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김봉구가 허겁지겁 금가락지를 덮쳐잡았다. 그러는 사이에 장덕풍과 방태수는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있는 대로 힘이 모아진 두 사람의 눈은 서로를 잡아 먹을듯 독기를 내뿜고 있었다. 금가락지를 집어든 김봉구는 사태의 급박함을 깨달았다. 어차피 쌀장수 됫박 속여먹고 포목장수 눈금 속여먹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아이고 성님, 넉 똔쭝짜리럴 석 돈쭝 반이라고 허니 그리 된 것 아닌 게라. 더도 말고 두 눈금만 더 쳐주시요."

김봉구는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이며 웃음 지었다.

", 손꾸락에 끼고 닳아진 것언 안 생각혀? 넉 돈쭝으로 쳐받은 것덜이 반편이제. 한 눈금 더 쳐주겄어. 그리 못허겄으면 당장 딴사람 찾아가."

장덕풍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이고 성님, 너무 야박허시요. 우리넌 멀 냄겨묵으라고 그러요. 한 눈금만 더 쳐주랑게라."

김봉구는 이렇게 말하며 방태수에게 눈길을 보냈다. 입술을 응등물고 있는 방태수의 얼굴에서는 분이 끓고 있었다.

"일없어. 나한티 자네덜만 있는 것이 아닝게로."

장덕풍은 카악 가래를 돋워 올리며 등을 돌려 가게 밖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되면 싸움은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배짱놀음에서 방태수네는 밀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김봉구는 꺼진 콧잔등을 찡그리며 방태수에게 눈짓을 해댔다. 방태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토해냈다.

"좋소, 거래 막음헙시다."

고개를 바로 세우며 방태수가 한 말이었다. 뒷짐을 지고 선 장덕풍은 만족스런 웃음을 빙그레 피워내며 등 뒤에서 들리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아 머허고 있소. 거래 막음허자는디."

김봉구가 빽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 경쾌함이 실려 있었다.

"어허, 집 무너지겄네."

장덕풍은 마지못한 척 몸을 돌려세웠다. 세 사람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이 어째 이리 푹푹 쪄대고 지랄발광이여."

김봉구는 술 마실 변명이라도 하듯 투덜거리며 술을 퀄퀄 따랐다.

"눈금 한나 갖고 기 세울 일이 아니고 어쨌그나 팔자 고칠라면 그놈덜 패거리 짜는 것이나 어서 찾아내도록 혀."

장덕풍은 저울을 저울 집에 챙겨넣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깨를 늘어뜨린 방태수는 가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김봉구는 정신없이 술 사발을 기울이고 있었다.

"요분참에 원허는 물건언 머시여?"

장덕풍은 저울을 넣고 돈궤에 자물통을 채우며 말을 꺼냈다.

"아까 말헌 대로 딴 물건 섞지 말고 광목에다 분허고 구루무만 주시요"

방태수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 알짜배기로만 골라내네."

장덕풍이 떨떠름하게 웃었다.

"요분에야 금 갖고 온 턱얼 톡톡허니 쳐줘얄 것 아니겄소. 성님도 일본사람 앞에 금 내놓고 큰소리침스로 그런 물건 쉬케 구헐 것잉게."

김봉구가 일 돌아가는 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장덕풍의 앞을 막고 들었다.

"어찌 그래 보드라고."

장덕풍은 이 대목에서까지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거래란 큰 이익을 보았으면 작은 이익에는 미련을 깨끗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거래는 배짱놀음이면서 눈치싸움이고 체면 살리기였다.

"보잘것없이 툭툭헌 무명베 앞에서 광목이 잘 믹히는 것이야 당연지산디, 분허구 구루무도 그리 잘 팔리네그려. 기생년덜이 분허고 구루무만 발라대는감?"

장덕풍은 따로 마련해 놓은 나무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내며 말하고 있었다.

"성님도 참 답답허시요. 여자가 어디 기생 년덜뿐이오. 기생 말고도 밥술이나 뜨는 집 여자덜이 얼매나 많은게라."

김봉구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생 년덜이나 한량덜헌티 이쁘게 보일라고 구루무 발라대고 분칠 해대고 허제 여염집 여자덜이 멋났다고 구루무칠이고 분칠이여. 시상이 변해 가니 다 화냥년덜이 될라능가."

"참말로 성님언 시상 헛살았소. 여자란 것이 어디 기생만 이쁘게 보일라고 허등게라? 살림이 궁해서 그렇제 여자라고 생긴 것은 전부가 구루무칠 허고 분칠 혀서 이쁘게 보일라고 헌다 그 말이요. 성님언 이 나이꺼정 어찌 그리 뻔헌 것도 몰르고 사요."

"허기사 그려, 지집이란 다 그런 물건덜이제. 어쨌그나 우리 살판났네."

장덕풍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판은 인자 시작이요. 분보담 구루무럴 발라본 여자덜이 더 환장얼 허요."

김봉구는 신바람이 나고 있었다. 구루무는 <크림>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여러 말 헐 것 없어. 금만 자꼬 갖고 와. 허면 원허는 물건이야 얼매든지 뒷댈 것잉게."

장덕풍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금 자꼬 내주고 그런 물건 정신없이 사딜이다가 이 땅 금뎅이 다 일본 사람덜 손으로 넘어가는 것 아니겄소?"

방태수가 뚱하게 내놓은 말이었다.

"별 걱정 다 허네. 우리넌 돈만 벌면 되는 것이여."

장덕풍은 팔까지 내저으며 방태수의 말을 지체없이 막았다.

"쟈넌 뜸금 없이 무신 소리여. 자아, 술이나 한잔 묵고, 담에도 또 금 구해 올 생각이나 혀."

김봉구는 방태수에게 눈짓을 하며 술잔에 술을 부었다.

"말이 그렇다 그것이제 금이 어찌 되든 내가 알 바 아니로구만."

방태수는 입맛을 다시며 술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들이 그득하게 쌓이는 것을 보며 기분이 풀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광목언 앞으로도 잘 나오겄소 어쩌겄소? 광목이 지롤 중헌디."

김봉구는 방태수에게 술사발을 건네며 눈길을 장덕풍에게 보내고 있었다.

"나만 믿고 금만 자꼬 갖고 와. 허면 자네덜 금세 부자 맨글어줄팅게."

장덕풍은 헤벌쭉하게 웃었다.

"근디, 광목 등쌀에 우리 굶어죽게 생겼다고 장터마동 촌예펜네덜허고 무명베 장시덜허고가 야단이로구만이라. 그것덜이 우리럴 똑 눈에 백힌 가시맨치로 보는디, 사실이제 무명베 장시덜이 파리만 날리는 것이 표가 나고, 그리 되니 촌 예펜네덜이 들고 나온 무명베럴 팔아 넴길 디가 없어지고, 팔아넴긴다 혀도 장이 슬 때마동 값은 똥값으로 처져내리고, 그 죽는 소리가 그냥 죽는 소리가 아니랑게라."

김봉구의 말하는 품은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신명이 나고 있었다.

"그런 것이 다 시상 변해 가는 디서 오는 당연헌 징조 아니드라고? 광목이 나돌기 시작헌 것이 발서 몇 년이라고 지금꺼정 무명베 붙들고 앉어서 밥 빌어묵겄다는 장사꾼덜언 반편이 중에 상반편이덜이여. 고런 물건덜언 다 우리 밥이구만. 두고 보드라고, 앞으로넌 점점 더 광목이 판얼치게 될 것잉게. 사람이라고 눈얼 가졌으면 그 맨질맨질허고 보들보들헌 광목허고, 그 꺼끌꺼끌허고 거칠거칠헌 무명베허고 대기나 헐 것이여. 광목이 입기 좋고 보기 존디다가 질기기도 더 질기제, 거그다가 값이 많이 비싼 것도 아니제. 그러니 누가 무명베 입을라고 허겄냔 말이야."

장덕풍은 제물에 흥이 돋아 올라 얼굴까지 상기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겉이 등짐이나 지는 것돌도 밥 굶을 날이 곧 닥칠란지도 몰를 일이로구만."

방태수가 김치를 씹으며 또 불쑥 내놓은 말이었다.

"무신 소리여, 시방?"

물건을 세기 시작하던 장덕풍이 얼른 고개를 도렸고, 김봉구는 멍한 얼굴로 방태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철도란가 철길이란가가 다돼가고 있는 모냥인디, 그것이 다 맨들어졌다 허면 빨르기도 헌디다가 기운도 엄청이 씨서 짐도 무지허게 많이 날른다고 안 그럽디여. 그리 되면 그놈이 우리 밥통 채가는 것이 아니겄냐 그 말이오."

"어허 참, 나는 또 무신 소리라고. 한양 무섭당게로 수원 북문에서보톰 기는 격이고, 백리 밖 천둥소리에 안마당 석류나무에 베락칠까 더는 꼴이시. 걱정허덜 말어 철도야 부산서 한양꺼지 외길인 것이여. 철길이 수십가닥, 수백가닥으로 퍼지면 몰라도 그 외가닥 갖고넌 자네 평상 밥통 안 뺏길 것잉게 두 다리 쭉 뻗고 자소."

장덕풍은 코웃음을 흘렸다.

"쟈넌 가끔가다가 생뚱헌 소리 잘혀."

김봉구는 괜히 놀랐다는 듯 혀를 차고는,

"성님, 오늘 저녁에 술 걸찍허니 한판 안 사실라요?"

그는 장덕풍에게 눈웃음을 치고 들었다. 장덕풍은 못 들은 척 다시 물건을 세기 시작했다.

"성님, 어쩌시라요? 맘 변해 부렀능게라?"

", 있는 술이나 먼첨 마셔."

장덕풍이 쏴질렀다.

"군산에 일본기생집이 좋다는 소문이 짜허든디, 성님언 가봤소?"

"미쳤다냐, 기둥뿌리 빠질라고"

"일본기생덜이 아조 찰방지고 간이 사리살짝 녹게 맨근다든디, 나넌 은제나 그런 디 가서 술얼 원없이 묵어볼꼬."

"하이고, 돈 벌기 전에 못되게 쓸 궁리보톰 허고 앉었네. 정신 채려, 기생방서 양반살림 녹아내리는 것 몰라서 이려."

장덕풍은 팔꿉으로 김봉구의 등짝을 질러댔다.

"냅두씨요, 꿈구는디 어디 돈 드요."

방태수가 곰방대를 물며 피식 웃었다.

"기둘려, 술 반 말 살 거싱게."

장덕풍이 기세 좋게 말했다.

폭넓은 금강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만조를 이루고 있는 포구는 더욱 넓어 보였다. 만조를 따라 서쪽으로 열려 있는 바다도 한결 넓게 펼쳐져 멀고 가까운 섬들을 더욱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심해 섬들은 썰물 때는 커져 보이고 밀물 때는 작아져 바다에 안긴 듯이 보였다. 포구 건너편으로는 산줄기 하나가 열서너 개의 그만그만한 봉우리들을 이루어내며 해변 쪽으로 ㅃ어가고 있었다. 그 산줄기가 끝나는 어름에 꽤 큰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충남 장항이었다. 충남 장항과 전북 군산은 서로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먼 사이였다. 포구가 가로놓여 뱃길이 아니고서는 오갈 수가 없는 탓이었다. 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을 때 군산 쪽에서 바라다보면 건너편의 낮춤한 산줄기는 바닷물에 그대로 비쳐드는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섬들을 품고 서쪽으로 펼쳐진 바다, 아슴하게 멀고 긴 수평선, 그리고 그 산줄기는 서로 어우러져 그지없이 아담하고 고운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그 풍광은 어느 때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머물게 하는 힘을 지녔지만 특히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치장할 때는 따로 있었다. 물안개가 잠포록이 끼었을 때, 노을이 낭자하게 불붙었을 때, 달이 한적하게 기울 때가 그때였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나는 이른 아침이면 그 풍광은 그지없이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은 비가 내리는 대로 애상적이었고, 눈이 내리는 날은 눈이 내리는 대로 허무적이었다. 그리고 산줄기는 끊긴 듯 이어진 듯하며 동쪽으로 어미줄기를 찾아 뻗어가고 있었는데, 그 오른쪽으로는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져 나갔다. 바다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그 벌판 가운데로 기다란 몸짓을 굽이굽이 흘러내린 금강이 제 몸을 바다에 풀어 맡기는 지점에서 오른쪽 포구에 장항이 자리 잡았고 왼쪽 포구로 군산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군산이 바다를 넓게 안고 있어서 예로부터 항구로 긴요하게 쓰였고, 수군 초소도 자리잡아 오게 되었다. 일본이 군산을 개항시킨 까닭도 거기 있는데다가, 군산은 또 광대한 곡창지대를 뒤로 거느리듯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깃을 세우고 몰려드는 밀물이 남성이라면 잔잔하게 빠져나가는 썰물은 여성이었다. 바다의 힘은 금강을 백 리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래서 금강 하구 백 리와 거기에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개울가에는 소금기를 먹고 사는 바다갈대가 무성하게 피어올랐다. 무성한 갈대숲 밑은 으레 뻘밭이었고, 거기서는 바닷게며 바닷지렁이 같은 것들이 곰살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그 갈대숲은 푸른빛 엷게 감도는 하이얀 꽃들을 탐스럽게 피워내 꽃의 바다를 이루었고, 바람결 따라 물결지어 내는 그 하이얀 꽃바다는 일대 장관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갈대숲은 멀고 먼 길을 날아온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런데 밀물을 따라 금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썰물을 타고 내려오는 배들이 개항과 함께 부쩍 늘어가고 있었다. 금강 양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이는 일본사람들의 배였다. 몸집이 호리호리한 사내 하나가 새로 쌓아올리고 있는 돌둑 위에서 담배를 피우며 포구를 두루두루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눈길은 금강 하구에 고정되었다. 배 서너 척이 아스라하게 보였다. 그 거리가 너무 멀어 배들이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내려오고 있는 것인지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래, 부지런히들 오르내려라. 그래서 우리 소비제품을 될 수 있는 데로 많이 실어다가 팔고 그 대신 조선의 금이고 은이고 쌀을 많이많이 실어가거라. 이 땅은 여러모로 쓸 만하다. 금도 많이 나고, 쌀도 좋고, 경치도 좋다. 골치 아픈 것은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별문제는 아니다. 그 사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꽁초를 튕겼다. 실오라기 같은 푸른 연기를 흩날리며 담배꽁초는 긴 포물선을 그리면서 바닷물로 빠져들었다. 담배꽁초를 따라 눈길을 옮기던 사내는 몸을 돌려세웠다. 몸집처럼 사내의 얼굴은 군살없이 매끈했다. 단정하게 생긴 약간 긴듯한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기가 어려 보였다. 미남은 아니면서도 양순하고 차분하게 생겨 인상이 좋아 보였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큰길까지 나온 사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아자씨, 하야가와 아자씨이."

세 아이들이 길을 건너 뛰어오며 외치고 있었다.

"옳아, 너희들 어디 있었냐."

팔을 들어올려 아이들을 반기는 그 사내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분명한 조선 말이었다. 그 말은 아주 유창했다.

"아자씨, 발써 우체국에 가시능게라우?"

세 아이 중에 눈 큰 아이가 물었다.

"오늘은 너희들이 늦게 와서 놀 시간이 없구나. 자아, 사탕들이나 받아라."

그 사내는 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것을 꺼냈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는 것은 눈깔사탕이었다.

"아자씨, 저짝에서 쌈 구경 허니라고 늦었구만요."

눈 큰 아이가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싸움? 누구하고 싸우는데. 일본사람하고 조선 사람하고 싸워?"

사내는 금방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아아니요. 조선 사람찌리 싸운마요."

", 그러면 됐다. 아저씨는 바빠서 가야겠다. 내일 또 만나자."

사내는 세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이 더없이 부드럽고 정이 흘러넘쳤다. 발 굵은 설탕이 묻은 큼지막한 사탕을 하나씩 손바닥에 올려놓은 아이들은 그지없이 흐뭇한 얼굴로 사내를 향해 꾸버꾸벅 절을 했다. 그 사내는 걸음을 빨리 하면서 조선 사람끼리 싸운다는 것에 다시 안도하고 있었다. 개항지에서 일본사람들과 조선 사람들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에 인천에서는 수백 명이 집단으로 충돌을 일으켜 사상자가 20명이나 생겼고, 그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부산에서도 집단충돌이 벌어져 부상자를 냈던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주먹다짐이 오가는 것은 수없이 많은 형편이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싸움이 벌어졌다 하면 십중팔구 조선 것들이 이겼던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몸집이 더 크고 기운이 센 조선 것들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 것들이 영 만만찮다는 경계심을 그는 또 새롭게 하고 있었다.

"아 할머니, 많이 팔았어요?"

얼마를 걷던 사내는 좌판을 벌여놓고 앉아 있는 여자노인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선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또 정겨운 웃음이 피어났다.

", 누구라고. 하야가와상 말고야 일본사람덜이 누가 엿얼 좋아해야제."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노인네는 약간 비굴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좌판에는 굽어지고 휘어진 엿가락들이 수무 개 남짓 놓여 있었다.

", 걱정 마세요. 엿 맛을 알게 되면 차츰 많이 사먹게 될 겁니다. 할머니, 10전 어치만 주세요."

사내는 연상 웃으며 돈을 내밀었다.

"아이고 고마운 거. 만낼 때마동 엿얼 팔아주시니 원......"

여자노인네는 메마른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으며 두 손을 받쳐 돈을 받았다.

"동네사람들은 다 별일 없이 잘 지내지요?"

사내는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저 그리덜 살구만이라우."

여자노인네는 목판본 한문이 찍힌 한지에 엿가락을 싸느라고 손길이 바빴다.

"청년들은 별일없이 농사일 잘들 하고 있나요?"

"하먼이요. 강아지손도 빌려야 허는 질로 바쁜 농사 철인디요."

"다른 동네사람들하고 모이고 그러는 일은 없나요?"

"농사철에 모여 놀다가 어런덜헌티 몽딩이 찜질 당헐라고라?"

여자노인네가 아첨기 역연한 웃음을 히죽 웃어 보이며 히죽 웃어 보이며 엿 뭉치를 내밀었다.

"많이 파세요, 할머니."

사내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깍듯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고마우요, 고마워."

여자노인네는 사내의 뒤에 대고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시상에나 저리 맘씨 좋고 착헌 사람이 또 있으까. 꼬박꼬박 동네사람덜 안부꺼정 물으니, 저런 예절바른 사람이 조선사람 중에 어디 있어. 일본사람이 다 저 사람만 같음사 조선 땅에 많이 올수록 좋제. 공자님 아덜이 따로 없당게. 여자노인네는 넘치게 흡족한 마음으로 멀어져 가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장님, 주재소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사내가 목포우체국 군산출장소의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직원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보고했다.

"누구였소?"

"주재소장이셨습니다"

"용건은?"

"전화 좀 걸어주십사구요.?"

두 사람의 모습은 흡사 군인 같았다. 그런데 직원의 인상도 소장이라는 사내와 비슷하게 부드럽고 착해 보였다. 소장 하야가와는 바로 전화기를 돌렸다. 곧 주재소장과 통화가 되었다.

"아 소장님, 무슨 색다른 정보가 없나 해서요. 궁금해서 전화 걸었었지요."

주재소장의 탄력 있는 목소리였다.

", 제 쪽에서는 별일 없습니다."

하야가와의 나직한 그러나 긴장된 대꾸였다. 내가 혹시 놓친 정보가 있는 것인가.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인가. 하야가와의 머리는 순간적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소장님이 암암리에 임무수행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 잘 압니다. 그런데 앞으로 더욱 치밀하게 정보 수집을 해주기 바랍니다."

", , ......"

상대방의 의중이 아직 간파되지 않아 하야가와는 형식적인 대답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 성급한 질문이나 어설픈 대꾸는 자기 결함을 노출시키거나 값을 떨어뜨리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에에 또, 지금 시점에서 명확하게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금명간 상황의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일층 정보망을 강화하고, 활동을 민활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 그렇습니까."

이 대목에서도 하야가와는 <상황변화>가 어떤 것인지 묻기를 자제했다. 괜히 그런 것을 물어 주재소장의 위치를 높여줄 필요가 없었고, 또 주재소장이 스스로 높다고 자만하게 만들어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영사관과 직통하는 관계이고 한양의 정보본부와 직결된 조직이지 주재소장과는 상하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주재소와는 대등한 협조관계일 뿐이었다. 주재소장이 알고 있는 <상황변화>라면 영사관을 통해 몇 시간 차이가 나지 않아 알게 될 터였다. 그리고 정보의 치밀도에 있어서도 주재소장보다 는 영사관 쪽이 훨씬 더 앞서 있게 마련이었다. 영사관이 두뇌라면 주재소는 팔다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에에 또오, 그래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니 그리 알아두십시오."

", 잘 알았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하야가와는 정중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엷은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주재소장의 어조가 무척 서먹하고 떨떠름하게 변했던 것이다. 그건 그가 전화를 건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를 기분 좋게 해주었을면 <상황변화>가 무엇이냐고 물었어야 했던 것이다. 하야가와는 담배를 빼 물며 책상에 가 앉았다.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건 정보원의 기본 행동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보원은 상부조직의 지휘와 하달을 받고 행동하는 것이지 불필요한 사항을 먼저 상부에 알아보는 행위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상황변화>가 어떤 것일지를 추리해 보았다. 제일 감으로 잡히는 것이 <정치적 변화>였다. 그 생각을 제쳐놓고 다른 생각을 해보았지만 별로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정치적 변화-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치안권의 장악보다 한층 더 강화된 어떤 통치방법의 등장일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어서 그런 날이 와야지. 그런 날을 위해 내가 바친 노력이 벌써 몇 년 째인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를 깨물어가며 조선 놈들처럼 조선말을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조선에 상륙하기 전에 본국에서 미리 배웠던 조선말은 조선 놈들에게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었던가. 그러면서도 조선 것들은 저희들 말을 하는 일본사람에게 아주 호감을 가졌었지.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조선 것들은 퍽 단순한 데도 많아. 예의 만 잘 지키고 겸손하기만 하면 일단은 안심하고 믿어주는 것도 참 묘하고도 편해. 물론 내가 인상이 좋게 생긴 것도 큰 몫을 했지만 말야. 체신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상 좋은 사람들만 골라내 정보교육을 시키고 조선반도에 파견시켰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기막힌 현명함이었어. 체신과 정보의 이중 업무가 고달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조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는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었지. 조선 땅에 발을 붙이고 어쨌든 말을 많이 배운 것은 아이들하고 친한 덕이었지. 그것들은 사탕 한 개씩만 사주면 그저 신바람 나게 종알거려댔으니까. 이것저것 묻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를 얻을 때도 많았으니, 그렇게 좋은 일거양득이 어디 또 있는가. 어쨌거나 이 반도 땅을 어서 송두리째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 그날은 언제인가! 그는 담배를 질끈 씹으며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는 자취도 없고 싸늘한 냉기만 가득 차 있었다.

"소장님, 전화 왔습니다. 영사관입니다."

"! 그래."

하야가와는 소스라쳐 몸을 일으켰다.

", 쓰지무라요, 오늘 밤 바쁩니까?"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마침 잘됐소. 의논할 일이 있으니 우리 집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 알겠습니다."

하야가와의 마음은 아까 주재소장과 전화를 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무런 잡념 없이 지시를 받을 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하야가와는 만족스러운 기본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주재소장에게 상황변화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고 현명한 일이었던가를 음미하고 있었다.

"우편물 배달하고 오겠습니다."

직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시오. 많소?"

하야가와는 의자에 몸을 부렸다.

"보통 때와 비슷합니다."

"조선 사람들 편지는 늘지 않았소?"

조선 사람들 편지는 손수 다 뜯어보기 때문에 그들의 우체국 이용이 어느 정도 늘어나고 있는지 환히 알면서도 그는 일부러 묻고 있었다. 직원의 근무태도 파악이었다.

", 별로 늘지 않습니다. 우리 일본인들과 비교해 보면 여전히 일할 정도밖에 안됩니다. 조선 사람들, 아니 양반이란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지금까지도 머슴이나 일꾼을 시켜 몇십리씩 걸어서 편지를 전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 상관할 것 없소. 아직도 미개해서 그런 거요. 그리고 양반들은 양반답게 얌전하니까 그렇게 오가는 편지 내용도 별문제가 없소. 다녀오시오."

", 다녀오겠습니다."

직원이 바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하야가와는 구두를 신은 채 다리를 책상 위로 내뻗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양치성이, 어디 있냐."

"야아, 여그 있는디요."

저쪽 구석의 작은 책상에 없는 듯이 머리를 웅크려 박고 안장 있던 소년이 황급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뭘하고 있나?"

하야가와는 눈을 내리감은 체 묻고 있었다.

"야아, 일본말 공부허고 있었구만요."

소년은 하야가와 쪽으로 뛰듯이 하며 대답하고 있었다. 빡빡 깎은 동그란 머리통이 유난히 커 보였다.

"그래,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루빨리 내가 너한테 조선말로 얘기하지 않게 해야지. 그게 은혜 갚는 일이야."

"야아, 그리허겄구만요."

하야가와 옆에 두 손을 모아잡고 선 소년은 고개를 꾸뻑 했다. 열서너 살쯤 나 보였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눈이 또릿또릿한 게 꽤나 총명해 보였다.

"여기 어깨 좀 주물러라."

"야아."

소년은 지체 없이 하야가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병세는 좀 어떠시냐?"

하야가와는 일부러 또 묻고 있었다.

"야아, 소장님 덕분에 그만허시구만요."

소년의 얼굴에는 황송해하는 빛이 역연하게 드러나며 작은 손을 쫙 펴 꽁꽁 힘을 써가며 주물러나갔다. 그 하는 품이 꽤나 익숙해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라는 표가 금방 났다.

"그래, 빨리 나셔야 할 텐데......"

하야가와의 어조에는 아주 인정미가 넘치고 있었다. 더 무슨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거리는 소년의 얼굴에는 황송해하는 빛이 더욱 진해졌다. 하야가와는 단순하게 병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자리를 마련해 준 자신의 은혜를 소년에게 계속 일깨우는 것이었고 또한 자신의 인정스러움을 소년에게 확인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 먼 앞날을 내다보고 올가미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최면술이었다. 많은 형제, 병든 홀어머니, 밥을 굶주리는 가난, 소년의 총명함...... 그는 소년을 골라낸 자신의 안목에 한껏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있는 하야가와는 그지없이 시원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소년의 콧등이며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야가와는 어느덧 가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쓰지무라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에에 또, 지금 밝힐 수는 없지만 다음 달에 모종의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단행될 것이오. 우리는 지금부터 거기에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하오. 다시 말하면 그 정치적 변화를 계기로 조선 놈들의 조직적 반발이 야기될지도 모른다 그것이오. 우리는 그런 사태에 대비해 사전에 그 부리부터 근절시켜야 하오. 그러자면 우리의 모든 조직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최대한으로 작동시켜야 할 것이오. 이번에 단행되는 일이 무사하게 돼야만 또 다음 단계의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되는 거요. 어떻소, 소장이 움직이고 있는 조직은."

쓰지무라는 어느 때 없이 심각한 얼굴로 하야가와를 주시했다. 하야가와는 자신이 예상했던 정치상황의 변화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예감할 수 있었다.

", 제 조직은 아무 이상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시대로 앞으로 더욱 강화시켜 활동을 극대화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야가와는 머리를 숙여 보였다.

"좋소, 하야가와 소장은 지금까지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책무를 충실히 수행해 왔소. 앞으로도 분투해 주시오. 그러면 천황폐하의 은혜가 내려질 것이오."

"하이!"

하야가와는 밤길을 혼자 걸으며 가슴을 흔드는 흥분을 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날은 마침내 오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장덕풍을 위시한 자신의 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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