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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유혹(Surrender My Love) 3

Bollnow 2024. 3. 4. 05:57

28

결혼식을 기다리는 또 다른 이는 그 식을 주관할 사제였다. 그러나 사제 앞에 나타난 이는 세릭의 어머니였고, 기다림의 시간은 조금 더 계속되었다. 브렌나는 세릭에게 어떻게 에리카가 희생을 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비록 '희생'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런데 갑자기 브렌나는 지독하게 화를 냈고 세릭이 그 이유를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럴 수 없어."

그녀가 사납게 노려보는 것은 에리카의 쇠사슬이었지만 화살은 세릭에게 돌아갔다.

"당장 이것들을 없애도록 해. 나중에 어떻게 하든 그건 네 마음이야. 넌 이 결혼을 위해 그녀의 승낙을 얻었어. 너도 역시 동의했다. 네가 족쇄를 차지 않는다면 그녀도 안 하는 거야."

세릭은 크게 당황했지만 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부끄러움과 나무라시는 어머니에 대한 약간의 원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말없이 어머니에게 열쇠를 건네고 혼자서 홀로 내려갔다.

"고마워요."

에리카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브렌나는 족쇄를 풀기 전 답답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마워하지 마라, 곧 다시 차게 될 거야. 내 아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빨리 깨닫기 바랄 뿐이란다. 빨리 깨달을수록 두 사람 다 행복해질 테니까."

에리카는 행복이란 말이 자꾸만 목에 걸렸다.

"전 진정으로 결혼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브렌나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누구도 진심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단다, 얘야. 세릭이 네게 대답을 얻기 위해 무슨 말을 했던, 우선은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덕분에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잖니."

그러나 에리카는 자신이 많은 목숨들을 구한 순교자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오빠가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면……. 아니, 그녀는 두려움에 질려 미워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만든, 마구간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기 있다."

브렌나는 마지막 족쇄를 풀고는 일어나며, 세 개 전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가 가운을 가져올 동안 이것들을 없애 버려라. 이곳 여자들 중 내 딸의 키가 너와 가장 비슷할 거라며 준비해 준 것이 있어."

에리카는 혼란스러워졌다. 크리스텐은 결혼식을 위해 자신의 옷가지를 내놓았고, 그의 어머닌 족쇄를 당신 손으로 풀어 주셨다. 결혼이 가져다 줄 새로운 가족들, 환영받지 못할 존재이지만 그녀도 그들과 함께 가족이라는 지위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후에도 이런 친절이 계속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브렌나는 딸의 침실로 내려가는 동안 그녀를 혼자 놔두었다. 그리고 에리카의 손에는 쇠사슬이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처럼 자유로웠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족쇄에서 풀려났지만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더 큰 덫이 그녀를 묶을 터이다.

그녀는 세릭의 방으로 돌아왔다. 걸을 수 있는 만큼 마음껏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러나 손에 든 쇠사슬을 어디에 둘까 두리번거리는 에리카는 생각 끝에 창가로 걸어가 밖을 향해 쇠사슬을 힘껏 던졌다. 집에서 납치된 후로 처음 기쁨을 맛보았다.

"내 생각엔 이 정도면 될 것 같구나."

에리카가 뒤를 돌아보자 브렌나의 팔에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드레스가 들려 있는 게 보였다.

한쪽 소매에서 어깨 부분까지는 그녀의 눈동자 색만큼이나 푸른 하늘색 고리들로 꾸며져 있고, 다른 쪽 어깨에는 소매가 없는 짙은 푸른색 벨벳 가운이었다. 양쪽으로 터져 있는 곳과 가장자리와 보디스까지는 은색 리본이 두텁게 덧대어져 화려함을 더해 주었다. 커다란 무늬의 은색 실크 테두리를 가진 머리 장식은 무척 섬세해 밝은 빛의 파란색으로 한가운데의 사파이어를 은이 감싸는 모양으로 세공된 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에리카에게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결혼식에 적당한 것은 아니지만, 잘 차려입는 편이 좋을 거야. 색슨 왕께서 직접 널 신랑에게 에스코트하겠다는구나."

이 촌극의 총 연출자이니 안 될 것도 없지……. 에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렌나의 재촉으로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며 놀랍게도 그녀의 시중까지 받았다. 세릭의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를 곱게 빗겨 투명한 베일을 씌워 주고 혈색을 돌게 하려고 그녀의 뺨을 매만져 주었다.

에리카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으나 말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복수심이 덜한 아들로 키우셨다면……."

브렌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난 복수심이 강한 아들들을 키우지 않았단다. 네가 그걸 깨닫는다면 둘 사이의 전쟁은 끝이 날 거야."

에리카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 일어난 일 중 어느 하나도 이치에 맞는 게 없었다. 세릭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자신과 결혼하려 들었고, 그들의 가족은…….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궁정 귀부인들의 차림을 보고는 자신에게 아름다운 가운을 골라 준 브렌나에게 다시 한 번 감사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보기 흉한 하녀의 옷을 입히고 쇠사슬로 묶으려 했던 세릭에겐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참견이 아니었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참지 못할 굴욕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도 세릭은 전혀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한순간 에리카의 차림새에 깜짝 놀랐지만 곧 가면 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잘도 감추었다.

그는 뜰의 작은 예배당 계단에서 그녀를 당당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세릭 곁에 서 있는 사제에 의해 두 사람의 결혼식이 엄숙하게 거행될 찰나였다.

웨섹스의 왕은 그녀를 진짜로 에스코트했을 뿐만 아니라 말을 걸어 와 에리카를 놀라게 했다.

"당신은 이곳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라오, 에리카 양."

귓전에 들리는 데인 어에 그녀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일생동안 데인 족과 수도 없이 접촉했을 테니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에리카를 놀라게 한 건 그와 세릭이 비슷한 또래라는 것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마저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 왕인 줄도 몰랐을 뻔했다.

지금 대답을 해야 한다면 서로 무안해질 것 같아 에리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더구나 남의 기분을 신경 써 행동할 만큼의 여유가 그녀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결혼식은 무척이나 빨리 끝났다. 사실, 세릭이 결혼해야 한다고 말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남편과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에리카는 자신이 무엇에 동의한 건지를 깨달았다. 만약 그렇게 서두르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에겐 이제 남편이 생겼다. 에리카는 생각할수록 목을 조이는 느낌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어지는 축하 만찬은 에리카에게 공식적인 놀림처럼 느껴졌다. 그녀도 세릭도 축하를 받거나 기뻐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신혼부부에게 던져지는 걸쭉한 농담과 장난을 잘도 참아 냈다. 그곳에 모인 사람 중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그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에리카가 이상하게 느낄 만큼 세릭의 가족들은 흥겨워하고 있었다. 세릭을 무척이나 아끼는 이들이 말이다. 모든 걸 분위기 탓으로 돌렸다. 사실 세릭조차 그녀처럼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들은 오늘의 이 황당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이 치러진 이 결혼을 그가 정말 즐겁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세릭은 웃고 있는 그들을 위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이리라.

세릭은 또 한 잔의 에일을 비웠다. 그는 내부에서 끓고 있는 감정의 동요를 애써 잊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무시하는 일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에게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기 전까지 옆에 앉을 수 없다고 했지만 지금 그녀는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를 남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편과 주인님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고, 모두들 그렇게 믿겠지만, 그녀만이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세릭은 이제껏 원하는 여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었다. 에리카라는 여자를 제외하면.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녀가 되었고 확실히 그의 소유였다. 그런데 한 시간 전만 해도 자신의 노예였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자신의 아내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것에 동의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복수를 잊겠다는 약속은 하지는 않았다. 나는 복수할 것이다. 세릭은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젠장할! 그의 복수심은 오늘 같은 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리카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만큼 불행해 보였다. 세릭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비참해 보일수록 그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불쾌해졌다.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 날이었다. 신부들은 그날 누구보다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신부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최소한 에리카는 손님들을 위해 행복한 체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세릭은 사납게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건 장례식이 아냐. 불편하면 방의 네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지만 에리카의 얼굴은 귀 밑까지 붉어졌다. 그리고 누가 들었다고 해도 그녀가 돌아가야 할 '자리'가 세릭의 방 한쪽 구석의 바닥인 것을 아는 이는 단지 몇 명뿐이었다. 에리카는 그곳이 여전히 자신의 잠자리인 데 안심해야 했다. 그는 그들의 거래를 지킬 것이다. 그런데 왜 창피하고 또 다른 감정이 날 괴롭히는 걸까?

에리카는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그 다른 감정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았다. 오딘 신이여 도와주소서! 그녀는 자신이 내건 조건에 실망하고 있었다. 비록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의 정열이 두려웠다.

'그를 사랑하게 될 거야.'

크리스텐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게다가 그를 미워할 만한 이유가 그녀에겐 충분치 못했다. 세릭은 노력했지만, 수치는 일시적이었고 또, 금세 잊혀졌다.

'그는 여태까지 여자를 해친 적이 없어.'

사실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오늘 그녀를 위협한 것은 속임수였을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홀에서 떠나도 좋다는 그의 허락이 무척 반가웠다. 그가 없는 곳에서라면 좀 더 생각이 맑아지겠지. 그리고 그녀는 뜻밖에 감시를 받지 않았다. 이 결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도 그녀에게 그의 아내로서 약간의 자유가 허용되었나 보다. 그리고 그 망할 쇠사슬이 없어졌으니…….

침실로 들어섰을 때 세릭의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쇠사슬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쇠사슬이 정확히 그의, 그녀의 것인 줄을 아는 사람이 가져다 놓았으리라. 세릭은 아마 그녀의 공공연한 도전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쇠사슬은 다시 창문 밖으로 날아갔고 처음에 던졌을 때처럼 그녀는 기뻤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결혼식 날 침실 바닥에서 자야 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29

크리스텐은 이야기를 하자는 요청을 보낸 후 성벽에서 서서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라느 날은 아직도 자신이 우월한 입장이라고 믿고 있어 무례하기 짝이 없게 굴었다. 크리스텐이 이를 갈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그의 생각이 깨어지는 순간 만끽하게 될 기쁨 때문이었다.

로이스의 참을성은 이미 바닥이 나 버렸다. 한 시간 동안 그는 세 번이나 성벽을 오르락내리락 했고, 네 번째 성벽을 올랐을 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크리스텐을 끌어내리려 안달했다.

어머닌 데인 어를 모르니 성벽에 오르지 않았지만 아버진 그녀 옆에 서 계셨다. 몇 마디 말을 전하는 이 일을 아버지가 대신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나 고대해 온 일이라, 크리스텐은 그 재미를 아버지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릭, 그 술주정뱅이는 어제 그렇게 마셔 댔으니 아직도 자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젯밤 로이스와 이바르가 그를 그의 방으로 안고 간 후, 만약 첫날밤의 행사가 치러졌다면 정말 기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라그날이 알 턱이 없겠지.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사랑스런 여동생이 간밤에 결혼을 했고, 남편과 잠자리까지 같이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화가 났다손 치더라도 이 결혼을 뒤집진 못할 터였다. 물론 그가 나타난다면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튜르게이스는 혼자 나타나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로 라그날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길 전했다. 다행이라면 말을 전하는 거인이 머쓱한 듯한 표정이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텐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터지기 직전인 화를 간신히 누르며 품위를 지켰다.

한마디 말로 그 오만함에 복수할 수 있으리라.

"시간 낭비를 하는 사람은 라그날 경이로군요. 내가 논의하고 싶은 건 그의 여동생이 가지게 된 새로운 지위라고 전해요."

크리스텐은 튜르게이스의 말이 죽을 듯이 달려가 라그날이 온힘을 다해 올 시간만큼만 기다리겠다고 거인에게 을렀다. 만약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에리카에 관한 소식은 아주 한참이 지나고서야 알게 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크리스텐은 튜르게이스의 말을 동정했다. 그 속도로 저 정도의 무게를 이겨내다니. 그러나 그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고 정말 잠깐 후에 라그날과 함께 돌아왔다.

"이제야 네가 왜 튜르게이스 삼 미터를 거인이라고 하는지 알겠구나. 넌 그를 동정해야만 해. 그는 명령대로 하는 것뿐이야."

게릭이 그녀 옆에서 말했다.

"그래서요?"

"그는 영주의 동생을 걱정하지만 정작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아무런 결정권도 없다는 거지."

"난 튜르게이스가 손을 약간만 비틀어 사람의 목을 꺽어 죽이는 걸 직접 봤어요. 그 후론 그에겐 어떤 동정심도 가져지지 않아요."

게릭은 그녀의 익살스러운 말투에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널 화나게 만든 사람은 그가 아니잖니."

크리스텐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기회가 온다면 사과해야겠죠. 만약 그 사람 가까이 갈 용기가 생기다면요. 딱 한 번 그럴 려고 해봤어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에요. 난 여기 성벽 위에 있고 그가 저 아래에 있는 걸로도 충분히 가까……."

라그날이 도착하여 그녀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크리스텐 부인, 무슨 일이요? 짧게 하시오."

라그날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녀는 그가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얘야, 넌 속삭이고 있다."

"저도 알아요."

라그날이 서 있는 곳에선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크게 말하시오, 부인!"

크리스텐은 마치 고함을 지를 사람처럼 손을 입가에 댔지만 다시 속삭였다.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그가 목소리가 크고 듣는 것에 불편이 없다 해서 제가 소리를 지를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에요."

게릭은 웃음을 숨기기 위해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래쪽에서는 라그날이 귀에다 손을 대고 열심히 들으려 애썼지만 들릴 턱이 없었다. 그는 두 번 더 재촉했지만 연신 움직이는 그녀의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화가 나기 시작한 라그날은 성벽 바로 아래에까지 말을 몰아왔다.

"이젠 잘 들리오, 크리스텐 부인."

그녀는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그에게 웃어 보였다.

", 라그날 경. 와 주셔서 고맙군요. 어쨌든, 우리가 이야기한 뒤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소. 내 동생을 풀어 주기로 결정한 거요?"

불쾌한 잘난 척이었다.

크리스텐은 아직도 생글거렸다.

"아뇨, 하지만 당신은 안전하게 성으로 들어 올 수 있어요. 물론 환영해요."

"내가 거절했을 때와 달라진 거라도 있소?"

"물론이죠. 우린 사돈 관계니까요."

그가 의미를 깨닫고 숨을 급히 들이키고 성질을 폭발하는 데는 눈 깜짝할 만큼의 시간밖엔 안 걸렸다.

"뭘 한 거지? 그 남자와 억지로 결혼하게 한 거라면……."

"그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여전히 유쾌한 말투로 라그날의 말을 자랐다.

"내가 보기엔 에리카는 상당히 자발적이었어요. 그러나 당신이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직접 확인해 보세요."

"어디에 있소?"

"아직 자고 있어요."

그의 얼굴색이 울그락불그락 했다. 크리스텐은 더 약을 올렸다.

"어제가 당신 여동생과 내 오빠가 서로에게 반한 날이란 걸 내가 깜박하고 말았네요."

"댁이 말한 건 그의 복수뿐이었소."

"정말 대단한 복수 아닌가요? 그녀가 사랑에 빠지다니. 불행히도, 그 역시 그렇게 되었지만."

"거짓말이야!"

"사실, 그대가 도착하기 전의 일이지만 우리 어머닌 그들이 함께 있는 걸 보셨어요. 두 사람 다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다는군요."

"둘 다? 당신은 당신 오빠가 반대한다고 날 믿게 만……."

그는 너무도 화가 나 말을 채 끝낼 수가 없었다.

'내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고 저 여잘 목조를 거야. 기필코.'

"여동생과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길 나누어 봐요, 라그날 경. 그녀가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고 내 올케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어젯밤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렸고 피로연도 열렸죠. 어쩜……, 들렸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는 마치 그녀를 조각낼 것처럼 노려보았다.

"에리카가 내 허락 없이 결혼할 리가 없소."

라그날을 분노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왕의 허락, 사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당신의 허락이 필요치 않았어요."

라그날은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에 담긴 암시를 이해하곤 새하얗게 변했다.

"색슨 왕이 이곳에 있는데 말하지 않았단 말이요?"

크리스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분이 이곳에 있는 것과 이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죠."

상관이 없어? 그는 웨섹스의 왕을 포위하고 있었다. 만약 굿스럼이 들었다면……, 노발대발했겠지. 그리고 그는 여기 있는 여우에게 그것을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텐은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정확히 읽어내고 말을 이었다.

"알프레드 왕은 오늘 떠날 예정이세요. 우리의 두 국왕께서 현재 좋은 관계이니, 제가 이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시지 않고 안전하게 통과하실 수 있도록 보증하죠."

"물론, 아무 때나 떠나도 되오."

라그날은 안도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경이 들어와 직접 확인시켜 드리는 게 어때요. 반복하지만, 우리의 새로운 관계로 경은 안전해요.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럽다면 경이 여동생을 만나는 동안 내 동생 톤랄이 경의 야영지에 가 있겠다고 자원했어요. 내 자신을 인질로 내놓을 수도 있죠. 하지만 내 남편은 질투가 심해 바이킹들이 많은 곳에 날 보내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하겠어요, 라그날 해롤드슨?"

"성문을 여시오, 크리스텐 부인."

 

30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서 말해 보렴."

오누이간의 뜨거운 포옹이 끝나자 라그날은 동생을 다그쳤다.

"오빠는 날 혼자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에리카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오빠를 웃기고 싶었던 계획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두 사람만이 있을 수 있도록 배려 받았다. 에리카는 오빠가 왔단 말을 듣자 마자 그에게로 달려왔다. 자신의 남편에 대한 생각에 정신을 온통 빼앗겨 있던 터라 오빠를 만날 수 있으리란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러니 그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그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라그날을 다시 보게 되다니. 에리카는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었다. 다시는 오빠를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초췌해진 모습의 오빠에게 어떻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그를 안심시켜야만 했다. 에리카는 오빠를 위해 그에게 한 번도 하지 않은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두 남매는 의자에 함께 앉았다. 에리카는 오빠의 손을 잡고 가능한 최대로 설득력 있게 말했다.

"강요받은 게 아니에요."

"에리카……."

"아니, 내 말을 들어봐요. 많은 걸 고려했어요. 오빠는 동맹을 강화하길 바랐고 이 결혼으로 가능하게 되었어요. 그의 매제는 전사이자 이곳의 영주이며, 색슨 왕과는 친구 지간이죠.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아주 부유한 상인이에요. 삼촌은 노르웨이에서 강력한 족장의 지위를 누리죠. 그도 바이킹 전사들로 된 많은 부하들을 거느려요. 오빠, 동맹으로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거예요."

"그것 때문에 널 희생시키진 않을 거다."

"알아요. 그리고 난 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어요. 이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면, 거절했을 거예요."

프레야 여신이여, 왜 진담인 양 들리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대신 그냥 믿어 주지 않는 걸까요? 에리카는 오빠가 의아해 하는 것에 대해 곧 해답을 얻었다.

"튜르게이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 주었다. 그 남자는 널 해치려고 데려왔어."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난……."

그녀는 인정해야 하는 자신이 쑥스럽기 때문이라고 믿기를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난 그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왜지?"

너무나 솔직한 질문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거의 웃음을 머금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여자라면 절대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아직 못 만나 보았죠?"

"만나……?"

라그날이 으르렁거렸다.

"난 작년의 전투에서 그 작자의 목숨을 구해 줬어."

그녀의 표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변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가 데인 족과 함께 싸웠단 말이에요?"

"아니. 색슨 족 편이었어. 투구를 쓰고 있었고 데인 어로 말하더구나. 난 확신했어, 결국 틀렸지만. 심지어 그의 검은 머릴 보고는 싸움터에서 끌어내 상처를 붕대로 감아 주기도 했단다. 난 계속 그를 데인 인으로 생각했지. 그는 그렇게 놔두었고. 어제 다시 보기 전까지 난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어제.

세릭은 어제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자신의 오빠임을 알았으면서도 계속 위협했단 말인가? 그럼 그것도 허세였을까?

그녀가 막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어제의 허풍이 그 전과는 조금 달랐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포로와 아내라는 차이겠지. 만약 그녀의 오빠가 결투를 고집해야 할만큼 모든 것을 알아 버린다면, 세릭은 그 결투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라그날의 신장은 백팔십 센티미터로 세릭에 비한다면 한참 작았다. 세릭과 튜르게이스가 서 있는 모양새겠지. 결과는 보나마나 뻔했다. 에리카는 계속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생의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내가 그 남자를 만난 것과 네 사랑은 무슨 상관이지, 에리카?"

"오빠도 그가 잘생겼다는 건 인정해야 해요. 그가 내 옆에 있을 땐 눈을 떼기가 힘들어요. 세릭의 매력은 너무나 강렬했어요."

더함도 모자람도 없는 사실이었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잘생겼다는 이유로 그와 결혼했단 말이냐?"

그녀는 외모만을 따지는 멍청한 인간들이 하는 말처럼 들리는 자신의 핑계가 싫었지만, 라그날에게 '사랑'의 이유로 이보다 더 쉬운 거리를 어떻게 찾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그 점을 강조했고 그 부분만큼은 진실이라 말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론우드에서 처음 그를 볼 때부터 끌렸어요. 때문에 내가 흥분해 화를 냈고 그에게 채찍질을 명령했죠. 오빤 내가 얼마나 후회하는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 오빠 신부감은 찾았어요?"

그는 그녀가 화제를 바꾸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손을 저었다.

"지금 그 생각은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난 아니에요. 만났어요?"

라그날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거지?"

"오빠가 화를 내니 그런 거예요."

에리카는 정색을 했다. 그리고 입에선 아무런 거침없이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내가 없어진 걸 알았으니 오빠가 올 테고, 그리고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라신 줄 알아요. 하지만 오빠, 난 운명처럼 그와 사랑에 빠진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 애도 써 보았지만……, 그도 날 미워하려 했죠. 그게 우리의 사랑을 만들었어요.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 버린 거예요. 생각해 봐요. 복수를 하기 위해 납치했지만 여자에게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가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됐을 때의 절망감을요."

라그날은 떠오르는 상상에 배시시 웃음이 돌았다. 그리고 안도감이 그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꼭 물어 봐야 할 질문이 있었다.

"죄책감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확신하니?"

그래서 그녀는 다시 거짓말을 했다.

"난 용서받았어요. 더 이상 날 괴롭힐 죄의식은 없어요."

그는 한숨을 내쉬기 전에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살폈다.

"정말, 널 그와 함께 이곳에 놔두고 가라는 말이냐?"

이것이 그녀가 가장 하기 힘든 거짓말이었다. 에리카는 너무도 집에 가고 싶었다. 삶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길 얼마나 바라는가. 그녀는 분노와 혼란스러움 그리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끌리는 이 지긋지긋한 놀이에 벌써 지쳤다.

"."

그녀는 이것이 그에게 하는 마지막 거짓말이라고 마음속으로 맹세하며 대답했다.

 

31

세 번째로 흔들 때 세릭은 깨어났다. 그의 손은 즉시 관자놀이로 올라갔다.

"토르 신의 이름으로, 누가 내 머리를 또 친 거야?"

그가 괴로운 듯 신음했다.

"이번엔 오빠 자신과 내 훌륭한 에일에게 고마워 해."

"너니, 크리스텐?"

"눈을 떠 직접 확인하지 그래?"

크리스텐은 냉랭한 목소리로 쏘았다.

"안 그러는 게 낫겠어. 지금도 너무 환해."

크리스텐은 그에게 머리를 저어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게 오빠의 결혼 생활이야?"

또 다른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떻게 잊겠어?"

세릭의 눈은 그제야 슬며시 떠졌다. 아주 살짝 떴지만 동생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평상시 에리카가 있는 구석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비어 있었지만 놀랄 이유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어디에 있지?"

"예배당에서 자기 오빠와 이야기 중이야."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크리스텐에게 무섭게 따졌다.

"그런데 아무도 날 안 깨워?"

세릭은 일어나 앉으려고 했으나 뭔가가 그를 끌어당겼다. 에리카의 쇠사슬이 그의 목을 감고 있었다. 그는 하인 한 명이 뜰에서 발견했다고 그에게 말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났다. 침실로 가져 갈 생각이 없어, 다른 곳에 둘 작정으로 목에 감았던 것 같다.

"오빠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크리스텐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족쇄를 채웠던 몹쓸 사람이 오빠가 아니란 걸 라그날에게 믿게 하려고 에리카 옆에 있을 작정이었다면, 생각만으로 만족해."

세릭은 쇠사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냥 중얼거렸다.

"난 협박하지 않았어."

"그녀의 오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세릭은 쇠사슬을 옆으로 던지고 다시 일어나 앉으려고 손을 움직였다. 뜻하는 만큼 손발은 빨리 움직여 주지 않았다. 숙취 때문인지, 상처를 입고 깨어났던 날처럼 머리는 욱신거렸고, 온몸이 뻐근했다. 그가 느낀 것은 당황 그 자체였다.

"적어도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엿들을 사람은 곁에 두었겠지?"

세릭의 물음에 그녀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겨우 오빠랑 나, 아버지밖에 데인 어를 할 줄 모르는데? 아버지께 오빠를 위해서 그런 부탁을……, 오빠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감히 못해."

"네가 엿들었어야 했어."

"내가? 그 사람의 화를 돋구어 놓을 만큼 돋구어 놓았어. 난 할 만큼 했단 말야. 이젠 오빠를 좋아할걸."

그녀가 소리 높여 말했다.

세릭은 동생을 노려보았다. 크리스텐은 웃느라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동안 그녀가 한 거라곤 그를 위해 빗을 가져다 준 것뿐이었다. 그는 입고 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문가에 이르렀을 때 크리스텐은 과감히 물었다.

"아직도 그녀를 미워해?"

세릭은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또 그걸 묻는 거지?"

크리스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와 결혼했잖아. 내 의견을 묻는다면 복수가 지나친 것 같아."

"상관하지 마, 크리스텐."

그녀는 쯧쯧 혀를 찼다.

"내 집에서 어떤 거만한 까마귀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기쁘게 그렇게 하지."

그는 움찔한 모양으로 돌아섰다.

"난 거만하지 않아."

"난 그녀의 오빠를 말하는 거야, 멍청한 인간. 내 오빠가 아니라."

세릭은 예배당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남매를 발견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소곤거리고 있어 세릭이 얼마간 문가에 귀를 대고 주의를 기울였지만 단 한마디 말도 듣지 못했다. 라그날의 팔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는 그의 어깨에 편히 기대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오빠였다. 그럼에도 세릭은 그의 팔을 에리카에게서 멀찍이 떼놓고 싶었다.

"두 분이 즐거운 재회를 나누셨는지?"

에리카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라그날은 벌떡 일어섰다. 세릭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만으로는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좀처럼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초조해 보였지만 오빠의 안전을 여전히 걱정하는 것 외엔 다른 의미가 없었다.

세릭은 새 검을 가져오느라 대장간에 들렀었다. 그는 칼을 허리에 찼으나 갑옷도 없고, 결혼식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에리카 역시 결혼식 때와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젯밤 방에 어떻게 들어갔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세릭이 그녀가 옷을 입고 잤는지 아니면 벗고 잤는지는 물론 자신이 들어왔을 때 그녀가 방에 있었는지도 기억나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라그날은 완전 무장을 한 채로 윈드허스트에 들어왔다. 물론 지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편안한 몸짓으로 걸으며 세릭에게 무기를 사용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수단으로 검 위에 왼손을 얹어 놓았다. 그렇지만 상황은 언제라도 다시 바뀔 수 있었다.

라그날은 두어 걸음 거리에서 멈춰 섰고 세릭이 그를 보기도 전에 오른쪽 주먹을 휘둘러 매제의 얼굴을 갈겼다. 에리카는 벌떡 일어나며 울부짖었다.

"안 돼……."

그러나 주먹질에도 꿈쩍 않는 세릭의 모습에 에리카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사실, 얼굴이 조금 돌아갔을 뿐, 라그날을 다시 보았을 때 세릭은 웃고 있었다.

이건 너무나 불공평했다. 라그날은 자신의 주먹질에 세릭이 고개를 돌리는 정도로 반응하자 은근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에리카는 남편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 오빠를 향해 세릭이 주먹을 날린다 해도 그녀로선 그를 말릴 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한 걱정 몫이야."

라그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릭에게 말했다.

", 그렇다면 나와 결투할 마음이 없단 뜻인가?"

세릭은 마치 충분히 알아듣겠다는 듯 대답했고, 슬슬 얼굴을 어루만졌다.

"현재로선, 하지만 앞으로 바뀔 수도 있어."

"물론."

세릭의 미소에 라그날은 다시 화가 솟아올랐다.

"알아 둬, 하드래드. 난 에리카의 말을 믿지 않아. 그러나 저 아인 진심으로 이곳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군. 마음에 들진 않지만, 에리카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대신 튜르게이스를 남겨 두겠다. 에리카가 집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그가 데려올 거야. 만약 네가 방해한다면 오딘 신이 가호가 있길 빌어야 될걸."

세릭의 즐거움은 갑자기 생경한 소유욕으로 변했다.

"여기가 이제 그녀의 집이야. 그녀는 웨섹스를 떠날 마음이 없어."

이번에는 라그날이 미소를 지었지만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세릭, 동생은 네 얼굴에 반했다더군. 이봐 사랑은 그 이상이 필요해, 있기라도 한다면 말이지. 여섯 달 뒤 그론우드로 에리카를 데리고 오도록 해. 그때까지 얘가 참아 낸다면 말이지. 그때가 되면 기꺼이 널 내 형제라고 불러 주지."

그는 코웃음을 쳤다. 세릭은 지금 당장 육 개월 뒤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라그날은 모든 걸 인정할 테고 동생 없이 이곳을 떠날 것이다. 죽음의 결투 없이 그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리카가 한 일이지만. 그녀는 세릭이 잘생겼다는 것 이외에 라그날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기뻐할 일도 아니었지만, 세릭은 기뻤다.

라그날은 돌아서서 에리카를 포옹했다. 세릭에겐 그들을 떼어 놓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충동이 다시 일어났다.

오빠에게 질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당황이 섞여 있었다.

"벌써 가는 건 아니죠, 그렇죠?"

"아니다, 에리카. 하지만 부하들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 해. 내일까지 떠나지 않을 테니, 그동안은 함께 보내자."

라그날에 대답에 에리카는 미소로 답했고, 그녀는 무척이나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오빠와 결혼하길 거절한 부유한 상속녀에 대해 더 말해 줘요."

"그녀는 거절했지만, 그녀의 아버진 아냐. 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튜스톤에겐 네가 했던 만큼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해. 하지만, 이따 다시 얘기하자꾸나."

라그날은 이미 튜스톤이 건강하고 다친 팔은 빠른 속도로 낫고 있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론우드에서의 도둑 출현은 울노스의 죽음으로 갑자기 끝이 났다고 말해 주었다. 분명히 튜르게이스가 라그날이 내려야 할 교수형을 대신 해주었고 그녀는 울노스가 그 도둑질에 책임이 있다는 것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왜 그가 그토록 간절히 희생양을 필요로 했는지 이유가 분명해진 셈이었다.

라그날은 자리를 뜨려다 마치 에리카의 미소에 매료된 듯 넋이 빠져 있는 세릭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시선을 알아챈 순간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라그날은 인상을 찡그리며 한마디 덧붙이곤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가 같은 형제자매들은 스무 명이지만 어머니가 같은 남매는 에리카와 나뿐이야. 내 아들을 빼고는 그녀는 내 유일한 가족이자 날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야. 넌 내 허락 없이 걔와 결혼했어. 네가 그녀를 해치면 내가 살려준 네 목숨을 받을 거야."

세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묘한 협박만큼 최후통첩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노골적인 위협엔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에 관한 한 예외였다. 라그날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세릭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라그날은 밖으로 나갔다. 그는 에리카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에리카의 표정이 조심하는 듯 변한 것에 마음이 상했다.

그가 진실을 깨달았을 때 즐겁지도 안도가 되지도 않았다.

"진짜로 그에게 거짓말했단 말인가?"

그녀의 얼굴에서 조심성은 갑자기 사라지고 대신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날 의심했나요? 우리는 거래를 했어요. 당신이 당신 몫을 했으니 나도 똑같이 해야죠."

'거래'라는 말에 세릭은 다소 당황했다. 그러나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그들을 찾아왔다.

에리카가 그를 먼저 보고 기쁨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튜르게이스, 오빠는 당신이 여기 있다고……."

튜르게이스는 다짜고짜 세릭에게 다가가 멱살을 그러쥐었다. 에리카가 숨을 다잡아 쉬기도 전에 세릭은 그의 손길에 바닥에 나가떨어져 기절해 버렸다.

"안 돼요! 해치지 말아요, 튜르게이스."

에리카가 울부짖으며 세릭 옆으로 주저앉았다. 그는 성이 안찬 듯 으르렁거렸다.

"왜 안 돼?"

"그는 우리에게 이미 당할 만큼 당했어요."

"그에게서 고통 받지 않았단 말야?"

"전혀."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네 오빠에게 했듯이 내게 거짓말할 생각일랑은 말아."

에리카는 얼굴을 붉혔다.

"이건 아니에요. 진짜로, 튜르게이스. 그가 한 거라곤 날 창피하게 만든 것과 위협뿐이었어요."

"그래도 그는 복수하려던 거잖아."

"어쩌면, 하지만 당신이 끼어 들 문제가 아니에요. 그는 내 남편이에요."

에리카는 그 상황을 인정했다.

"남편들은 없앨 수 있지."

"생각도 하지 말아요."

세릭이 신음했다. 에리카는 그에게 몸을 숙였다. 그가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내 친구 튜르게이스를 알고 있겠죠?"

에리카는 주저하며 말했다.

세릭은 그녀 뒤에 서 있는 거인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내가 걱정하게 만든 걸로 날 친 건가,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내 아씨께서 끝났다는 군, 지금은."

세릭의 눈은 다시 그녀에게 내려왔다.

"그를 말릴 정도로 현명하군. 우리가 예배당에서 엉망으로 된 뒤 나가면 우리 가족은 물론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에리카는 생긋 웃으며 어깨 너머를 흘낏 보았다.

"봐요, 튜르게이스. 협박뿐이죠?"

튜르게이스와 세릭 둘 다 대답으로 이를 북북 갈았다.

 

32

라그날의 요청으로 두 사람은 왕이 떠난 다음 세릭의 성을 보러 갔다. 에리카는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 방문에 초대받지 못했으며, 함께 가자는 말을 하려고 그들을 찾았을 땐 이미 떠난 후였다.

세릭을 빼앗아 갔다는 원망의 눈초리들이 가득한 성 안을 에리카는 초조한 걸음으로 서성였다.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이는 세릭의 부모들 뿐으로,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여자들이 던지는 따가운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오빠와 세릭이 서로를 죽이기로 작정했다면 그녀로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뿐더러 누가 그들을 말리겠는가.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왔고, 누구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으며 라그날은 떠날 때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그는 남자의 입장에서 세릭의 성에 대해 좋은 점만을 말했다.

"아내가 보기에는 쫓아내고 싶은 싹싹한 노예가 몇 명 있더구나. 그것만 빼고는 내 생각에 넌 아주 잘해 나갈 거야."

라그날이 그녀에게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싹싹하다'란 단어를 찾아냈지만 그의 편안한 기분을 보았을 때 그렇게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다. 오빠는 여자와의 관계 후 항상 저런 얼굴이었어. 에리카는 남편의 얼굴도 찬찬히 살폈지만 언제나처럼 모든 여자들에게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혼자서도 잘 웃었다.

세릭이 그런 여자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그녀가 관심을 가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굴 테고, 그녀의 간섭이 있건 없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특이한 거래가 아니더라도 아내란 남편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정부와 함께 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

에리카는 관습을 깨뜨릴 생각도 없었고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불평을 할 마음도 없었다. 더군다나 사랑해야 할 의무도 그럴 마음도 없었으니 그녀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오빠의 기분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아침나절 그녀가 쏟아 놓은 거짓말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실해지자 점점 화가 치솟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세릭의 불성실함을 탓하진 않겠어.

"그는 참 사람을 재밌게 하더구나, 에리카. , 물론 넌 벌써 알고 있겠지만."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재미있어, 세릭이? 광기 서린 늑대 정도겠지. 관심 없다고.'

야영지에 머물던 튜르게이스는 저녁 만찬에 맞춰 돌아와선 그론우드에서처럼 신하들을 위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의 앞자린 비어 있었고 이곳 사람들은 조심스러워 했다. 심지어 그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은 너무나 긴장한 통에 접시를 두 번이나 깨뜨렸다.

에리카는 당황스러웠다. 색슨 족들은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에도 피했고, 그의 체구는 그런 두려움을 더해 주었다. 게다가 세릭을 향해 계속 인상을 쓰고 있으니……. 미간을 찡그리면 그는 무척이나 사나와 보였다.

튜르게이스는 언제나 고독했다. 그론우드에서도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실제론 무시한다는 의미였다. 누구도 그와 친구가 되려 하질 않았다.

슬프지만 사실, 에리카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는 그를 위해 소년을 시종으로 붙여 주었지만 도망치고 말았고, 또래 사람들과도 일할 수 있도록 해보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자들에게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질 것을 이야기 할 때면 그들은 웃거나 공포에 떨었다. 마흔이 가까운 그에겐 가족과 가정이 필요했다.

이곳 웨섹스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그와 동족인 노르웨이 인도 있었으니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사라졌다. 세릭의 큰 키에 익숙한 이들조차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녀는 남편과 오빠 사이에 앉았다. 라그날을 위해 세릭의 팔은 자주 에리카의 어깨를 감싸며 신부에 대한 남편의 애정을 과시했다. 한 번은 그가 몸을 기대 목에 키스해 오는 통에 그녀가 하나도 고맙게 여기지 않는 가지 가지 즐거운 흥분을 일깨웠다. 에리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않을 거면서.

두 사람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는 동안 그녀는 대화에서 제외되었고, 관심이 없는 주제에 관해서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세릭의 가족들은 라그날을 환영해 주었다. 양쪽 모두에게 매우 불편한 자리였지만 라그날은 즐겁게 음식을 먹었다. 세릭도 분위기를 즐기는 표정이었으며, 그는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어젯밤처럼 에일을 마셔 대지도 않았다. 오직 에리카만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오빠를 위하여 꾹 눌러앉아 있었다.

그녀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세릭은 곧이 듣지도 않을 핑계를 죽 늘어놓으며 따라 일어섰다. 더 놀라운 건 홀을 에스코트해 나가는 동안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싸안고 자신에게 기대도록 했다는 것이다. 라그날을 위한 몸짓이지만 에리카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없는 곳에서조차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인정해야 될 거야. 네 가죽끈 정도라는 걸."

그의, 그들의 침실 문을 열며 세릭은 말을 걸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리카는 화가 나 세릭의 얼굴을 할퀴곤 멋지게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침대 위의 옷가지들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세릭은 뒤로 다가오며 말했다.

"내 여동생은 참 관대하지."

세 벌의 가운들과 각각 짝을 이루는 슈미즈는 자선으로 내던질 만큼 낡은 옷들은 아니었다.

"그녀의 관용은 당신을 위한 거지 나를 위한 게 아니에요."

그녀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아내가 넝마 조각을 입어 당신이 수치당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그게 어떻게 날 창피하게 만든다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에리카는 돌아서서 그의 회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내가 잘못 봤군요. 나도 상관없어요. 이것들은 당신 여동생에게 돌려줘요. 오빠가 내 옷가지들을 보낼 거예요. 하지만 입지 말기를 원한다면 알아서 처리하세요."

"아니면 네가 내 소유물을 처치한 것처럼 그냥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란 말인가?"

에리카의 눈은 쇠사슬을 찾아 방 안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고 그녀 자리인 구석에서 그것을 발견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시는 차지 않겠어요,"

그녀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면 넌 해야 해."

"그럼 싸우게 될 거예요."

그녀가 맹세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잖아, 안 그래?"

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눈을 마주보았다.

"그래요? 난 튜르게이스를 말하는 거예요. 그는 내가 족쇄를 차고 있는 걸 보면 흥분할 게 분명하죠."

세릭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싹 가셨다.

"망할 거인……."

"오늘 일어난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으면 나하고 같이 있는 게 나을걸요. 우리 오빠는 당신 목숨을 구했고 난 튜르게이스를 살려냈죠. 당신과는 다르게, 그 빚을 갚는 데 그는 평생을 바쳤어요."

"나도 당신 오빠에게 빚을 갚았어. 그와의 결투를 거절했어."

그가 으르렁댔다.

"결과는 확실치 않아요. 그러니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죠."

세릭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짐짓 부드럽게 말했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건 내 정열을 일깨우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만들지. 후자를 알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군."

그가 등을 돌려 그녀에게서 멀어지자 전혀 기대하지 않고 관계도 없는 질문이 새된 음성에 실려 나왔다.

"우리 오빠처럼 당신도 노예들과 놀아났나요?"

그는 홱 뒤로 돌았고 아주 잠깐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즐거운 듯, 에리카가 가장 싫어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의 신혼에 대한 환상을 깨라고? 당연히 아니지. 내 연애는 당신 오빠가 떠난 뒤까지 기다릴 수 있어."

에리카는 몸을 돌려 그를 단단히 무시하기로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자리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 정열, 단지 바람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내가 잠시 어떻게 된 걸 거야.

은근히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질투하는 것으로 들었으리라. 그 잘생긴 철면피는 고소해 하고 있겠지.

그녀는 변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녀의 질투보다 호기심이란 걸 설명할 뭔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앞의 벽에다 대고 그녀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정말 안심이군. 이것 챙겨. 입던 말던 상관없지만, 이 옷들을 대신할 옷이 생기기 전에는 크리스텐에게 돌려줄 수 없어. 호의를 무시했다고 생각할 거야."

세릭이 크리스텐의 가운들을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놓았다.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그녀는 맞받아 쳤다.

"우리 거래가 위태롭군, 마녀. 내가 너라면 오늘밤에 더 이상 시험해 보지는 않겠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3

그녀의 이름은 리다였다. 5년 전 싸움을 싫어하고 말을 사육하여 생계를 잇는 순박한 슬라빅 족의 마을에서 그녀는 납치되었다. 습격대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상당수의 여자들을 납치했다. 그리고 그들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팔려 갔고, 그녀는 세 번째 주인이 숨지자 유틀란트 반도의 위쪽인 헤데비 노예 시장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노예 시절, 그녀는 주인을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잘 활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서 말이다. 검은 눈과 곱슬한 검은머리, 터질 듯 관능적인 몸매, 걸음을 옮길 때조차 그녀의 모습은 남자들을 참지 못하게 했다. 리사는 유혹하기 위해 애쓰지조차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원하지 않는 남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녀는 비록 노예이지만 노예로 살지 않았다. 머리가 좋았을 뿐더러 자신이 좋아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하기엔 너무 게을렀다. 그녀의 주인들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들의 아내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권한을 넘기며 뒷전으로 물러났다.

드레스나 보석은 한마디 말로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노예이면서 자신을 위한 노예도 부렸다. 지금까지의 삶은 그녀에게 절대 고역이 아니었다. 다만 주인이 죽게 되면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세 번 다 그래 왔다.

그녀가 고생한 것은 첫 번째 주인의 경우로, 그가 죽고 난 뒤 다시 권한을 되찾은 그의 아내가 노예 시장에 팔려가기 전 리다를 거의 죽을 정도로 때렸었다. 리다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두 번째 주인에겐 아내를 멀리 보내 버리라고 했었다. 그러나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아내에게 명령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세 번째 주인에게선 먼저 자신의 보호책을 마련해 두었다.

그녀는 자유를 원한 적이 없었으며 주인들에게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다. 자유는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리다는 보호받고 사랑 받기를 원했다. 그녀는 남편을 원하지도 않았다. 아내에겐 혐오스러운 의무가 많았다. 가장 소름끼치는 일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무나 책임은 그대로 두고 아내가 누리는 권한만을 강탈하는 쪽이 훨씬 좋았다. 그리고 리다는 웨섹스에서도 예전처럼 자신의 특권을 누린다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경쟁자는 같이 배를 타고 온 두 명의 여자 노예들이었지만 자신의 적수가 될 리는 만무했다. 골다는 건강한 기혼녀 같은 분위기로 꿍꿍 맡은 일이나 하면 적당할 여자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별 특징 없는 갈색 머리였지만 그녀의 눈은 아름다운 황금빛 떡갈나무 색이었다. 그녀의 눈은 그녀가 웃을 때만 빼고는 못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무척 예뻤다. 그러나 그녀는 적어도 서른은 넘어 보였고 힘든 일에 익숙했으며 남자를 어떻게 유혹하는지도 모르는 게 뻔했다.

메그는 반대로 매우 활달한 성격에 남자를 좋아하는 빨강 머리의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였다. 그녀는 화려하게 아름다웠지만, 너무 개성이 뚜렷해, 리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리다는 바이킹 이바르가 주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그녀를 사 왔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그와 관계를 맺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유혹했던 남자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기에 몹시 실망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말이다.

새 주인을 처음 보았을 때 정말이지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세릭 하드래드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잘생긴 바이킹이라니.

두 번째 충격은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골다하고만 집안일과 책임에 대해 의논했다는 점이었다. 리다는 이바르를 구워삶아 하인들을 감독하는 위치를 보장받았지만, 그는 단지 일시적인 것뿐이라고 경고했었다. 세릭은 세 명의 새 노예들을 한 번 힐끗 보고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리다는 기가 죽지는 않았지만, 무척 당황했다. 도착한 후로 그녀는 자기가 해야 일을 남에게 떠넘기며 빈둥거렸다. 세릭이 아무 생각 없이 그녀에게서 골다에게로 넘긴 권한을 다시 돌려받을 때까지는 골다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권한 없는 골다는 양처럼 순했었다. 지금의 그녀는 용과 같았다. 적어도 그녀는 나쁜 용은 아닌 모양인지 리다의 지시로 했던 여분의 일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균등하게 일을 분배했으나, 물론 하녀의 일이라면 다 싫어하는 리다에겐 지겹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퇴보일 뿐이고 그녀가 주인의 침대를 공유하는 순간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그가 홀로 돌아오는 그 즉시였다.

그날 주인과 그의 새 아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리다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세릭의 새 아내는 리다에게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벌써 영주가 아내를 경멸하며, 색슨 왕의 명령으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마음은 정해졌다. 혹 영주가 아내에게 빠져 있다 한들 리다는 자신의 외모와 매력으로 그를 휘어잡지 못할 경우는 상상도 안 했다.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자신감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릭 하드래드 같은 남자와의 관계는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자신의 노예를 만드는 것처럼 자신도 그에게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리다는 그녀를 가졌던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세릭이라면 기꺼이 모험을 감수할 생각이다.

 

34

세릭은 마구간에서 로이스의 종마를 끌고 나왔다. 그의 애마는 그의 자랑이었던 칼처럼 강도 떼에게 빼앗겼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빌어먹을 강도들을 추격하는 자신을 여러 번 상상했었다. 그들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물건들을 되찾기 위해. 어쩌면 새 홀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뒤에…….

그는 윈드허스트를 떠나는 시간을 잘못 잡았다. 뜰은 막 도착한 손님들로 소란스러웠다. 로이스와 크리스텐은 낯선 남자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삐 움직였다. 세릭은 색슨 왕의 측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모르는 얼굴 투성이였다. 남동생들은 서부의 무장한 전사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아버지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에리카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튜르게이스 삼 미터와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에리카의 그림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세릭은 어머니가 저 거인과 나누는 공통 관심사가 무엇인지 매우 궁금했다.

에리카는 그가 남겨 둔 자리, 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어른 옆에 서 있는 아이처럼 보였지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겨우 몇 시간 전에 그녀는 오빠에게 작별을 고했다. 세릭은 그녀가 울음을 터뜨릴까 봐 주의를 딴 곳에 돌릴 작정으로 방으로 끌고 가 짐을 싸라며 을렀다. 세릭은 정말 바보처럼 군 것이다.

그의 사려 깊음은 쌀 짐이 없다며 쏘아 붙이는 에리카의 비난 어린 목소리로 돌아왔다. 세릭은 쇠사슬을 주워들어 그의 트렁크에 집어넣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 뒤부터 에리카는 그의 옆구리에 꽂힌 단검을 노려보았고 그는 이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크리스텐이 그에게 손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함박 웃음을 머금은 동생의 얼굴에서 세릭은 잠시 후 크리스텐이 생각해 낸 장난에 당하거나, 이 많은 손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이 정상을 되찾게 되어 기쁘다는 인사를 듣는 건 아닐지 잠시 염려했다. 물론 전자가 훨씬 유력했지만 말이다.

"내 아들은 오빠가 기다리지 않은 걸 알면 무지 실망할 거야."

크리스텐이 말했다. 아이들은 메간과 함께 라그날의 갑작스런 도착에 대비하여 로이스의 사촌 알덴에게로 보내졌었다.

"금세 올 텐데."

"잠자는 곳만 달라지는 건데, ."

세릭이 동생에게 상기시켰다.

"가족이 여기에 다 있으니, 매일이나 이틀에 한 번씩 올게."

"올케랑 같이?"

세릭은 미간을 찡그리며 동생을 무시하려 했다. 크리스텐의 놀림은 일반적인 여자들이 아닌 특정 인물일 경우 참기가 힘들 만큼 집요했다. 가장 간단한 대응은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난 왕의 신하들이 그와 같이 떠난 줄 알았는데?"

크리스텐은 그의 시선을 따라 로이스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왕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야. 이곳으로 안내 받아 왔는데 왕이 떠났으니, 왕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어야지."

세릭은 그들 중 한사람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저기 가운데 있는 사람은 매우 낯이 익어, 전에 왔었던가?"

"듀르윈 경? 그럴지도 모르지. 로이스가 아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내가 온 뒤로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어."

세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았다고 생각했던 두통이 다시 지끈거렸다.

그는 에리카가 기다리고 있는 홀로 다가갔다. 크리스텐은 그 뒤를 몇 발자국 떨어져 쫓아갔다. 그녀 역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올케가 왜 저러고 있지? 오빠에게 화를 내는 거야? 아님, 윈드허스트를 떠나기 싫대?"

세릭의 유머가 돌아왔다.

"아냐, 그녀는 쇠사슬을 갖고 가는데 불만이……. 아얏!"

크리스텐이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냅다 쳤다.

"왜 그런 거야?"

"웃으면서 말해서야."

크리스텐이 투덜댔다.

"오빤 내가 어떻게……."

"오딘 신이여, 절 구하소서,"

세릭은 동생의 말을 잽싸게 막았다.

"다시 시작하지 마, 동생아. 더 이상 차고 있지 않잖니."

"그렇다고 다시는 채우지 않겠다는 건 아니잖아?"

"만약……."

성문의 동요에 세릭은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아이들과 호위병들이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린 알프레드가 망아지에서 내려 맨 처음 아버지에게 뛰어 가더니, 그 다음엔 할아버지에게 안기고 마지막으로 세릭에게 성벽을 무너뜨릴 기세로 안겼다. 어머니는 맨 마지막이었으나, 크리스텐은 동성의 어른들을 먼저 찾을 나이가 되었음을 십분 이해했다.

세릭은 한동안 웃어 대다가 유모에게 안겨 온 토라가 엄마가 아닌 삼촌에게 먼저 손을 내밀자 더 크게 웃었다. 그는 물론 천사를 거부하지 못해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는 토라 같은 딸이 있었으면 하고 여러 번 바랐다. 세릭은 무심코 에리카를 바라보았지만 순간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해졌다. 아내의 주된 의무는 남편과 교회에 아이를 낳아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기독교인도 아닐 뿐더러, 그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 낸 사람이었다. 그 거래로는 어떤 아이도 생길 수 없다.

"오빠가 떠나게 되는 게 좋은 일인지도 몰라."

은근히 짜증이 난 세릭이 동생의 말을 제대로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 질투하지 마, 크리스텐. 알덴의 아내가 토라를 하도 숨막히게 해 엄마라도 싫은가 봐."

그는 씩 웃어 보였다.

"오빠는 그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난 정말 행운아야."

세릭의 표정이 하도 익살스러워서 그녀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아내가 생겼어도, 전혀. 그리고 그런 점이 에리카에게 문제가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럴 것이다.

세릭은 토라에게 몇 분 동안 키스를 해대, 소녀가 깔깔거리며 기쁨으로 비명을 지르게 만들고는 아이를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에리카에게 오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며 그가 말에 올라타도록 도와주려는 것을 무시했다.

"난 튜르게이스와 같이 타고 가겠어요."

그녀가 굳은 목소리가 말했지만 세릭도 만만치 않았다.

"나와 함께 갈 거요."

"말이 더 없나요?"

"이렇게 짧은 거리를 가는데 많이 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아니면 또 걸어갈 텐가?"

그녀의 눈동자는 그 말에 불꽃이 일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다시는…………."

"자 자, 얘들아. 말다툼은 그만해라. 내 손녀딸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야지."

브렌나가 뒤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크리스텐에게 안겨 있는 토라를 데리고 홀로 들어갔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에리카는 말에 올라탔다. 세릭 역시 달아오른 얼굴로 말에 올랐다. 두 사람 모두 입을 꼭 다문 채 성문으로 향했다. 세릭은 크리스텐에게 고개를 약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튜르게이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쫓았다.

 

에리카는 세릭과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녀가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감정이 자꾸 솟구쳤고 세릭과 그 아기가 같이 있던 장면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아, 그와 관계된 그 어떤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아기. 브렌나가 할머니라고 확인까지 해준 이상 확실했다.

에리카는 새집이 보일 때쯤 침묵을 깨고 망설이며 물었다.

"이번이 당신의 첫 결혼이 아니죠?"

"첫 번째야."

"그럼, 당신 딸을 낳은 사람이 누구죠?"

"무슨 딸?"

"그 아이 말이에요."

"토라 말이야? , 물론 그 아이겠지. 날 닮았어, 안 그래?"

그가 껄껄 웃었다.

"그래요."

에리카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세릭은 웃음이 가득한 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더러 키우라고 할까 봐 걱정이라면 안심해. 제 엄마가 훌륭하게 키우고 있으니까."

"다시 묻겠어요, 누가 엄마죠?"

"내 여동생."

크리스텐? 세릭과 그 꼬마가 그렇게 닮지 않았다면 벌써 깨달았겠지. 에리카는 한바탕 실컷 웃으며 그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는 채 알아채기도 전에 그랬다. 그 바람둥이가 그녀를 놀렸지만 그녀는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그랬길 바랐고 그 생각이 그녀를 놀래켰다. 이 결혼은 그녀가 예상한 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재미있어 하고 있는 질투심을 어떻게든 눌러야 한다. 그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질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35

라그날이 옳았다. 에리카는 새집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크기는 윈드허스트의 반 정도였지만 그 자체로 상당히 커다란 규모였다. 윈드허스트와 똑같은 구조에 2층으로 지어졌고, 침실들도 여러 개였다. 윈드허스트와 다른 거라곤 부엌이 홀 밖에 있다는 정도였다. 덕분에 집 안에 연기가 차는 것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에리카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세릭을 따라온 남자들이 아직 그들의 집을 짓지 못해 잠자는 홀로 사용하는 다른 건물을 비롯해 외부엔 몇 채의 다른 건물들이 있었다.

다 쌓지 못한 성벽이 눈에 띄었는데 목조로 된 외곽 성벽은 쌓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며, 홀 역시도 얼마 전에야 완공된 것 같았다. 그녀가 본 하인들의 수로 미루어 오래 걸리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우연히 세릭의 아버지가 언젠가는 이 목조 성벽을 로이스의 성처럼 석조로 바꾸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사실, 이 성에는 많은 하인들이 있었다. 홀에서 몇 명 안 되는 여자 노예들을 보았을 때 에리카는 그들이 그리 많지 않기를 바랐다.

골다는 보는 순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중년의 여인은 자신과 다른 노예들을 에리카에게 소개했고, 그 뒤로 자신들이 그동안 한 일과 앞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솔직했고, 자신이 남들에게 지시하는 일에 익숙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공손하고 예의를 갖출 줄 알았다.

메그는 성격이 좋은 소녀처럼 보였고, 사실 너무 좋아 보였다. 얼굴에선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에리카가 있는 곳에서는 세릭을 바로 바라보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세릭과 은밀한 관계였다면 그의 아내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리라.

리다는, 이 역시도 라그날-오빠가 말한 여자야, 정말 내치고 싶어지는걸-이 옳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고 요염한 몸짓엔 성적인 매력이 넘쳐 났다. 노골적인 차림새로, 가운은 앞이 활짝 터져 브이 자로 깊게 파져 있는 꼴이란……, 슈미즈는 너무 밑으로 내려가 있어 가슴이 다 드러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세릭과 에리카가 홀로 들어오는 순간 은밀한 유혹을 속삭였다. 그녀는 에리카를 무시하는 듯 호전적인 눈빛으로 잠시 바라본 순간을 제외하곤 계속 세릭을 주시했다.

세릭은 그녀를 전혀 주목하지 않았고 에리카는 아무 관심 없는 얼굴로 있었다. 이바르가 그를 반기러 와 있었다. 세릭은 친구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떠났고, 하녀들을 만나라며 그녀를 홀에 남겨 두었다. 어차피 그녀의 홀이지 않은가.

문제는 그녀에게 얼마만큼의 통솔권이 주어지느냐였다. 그녀가 또다시 그 망할 쇠사슬을 차기라도 한다면 하인들은 그녀의 권한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물론 에리카는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남편과 정상적인 결혼을 한 것처럼 굴 작정이었다.

", 안 돼요. 그 진흙 묻은 부츠를 벗든지 아니면 씻어요. 새로 빤 깔개에 자국을 남겨선 절대 안 돼요."

골다가 갑자기 고함을 치고 있었다.

에리카는 범인이 누군지 뒤돌아보았다가 홀로 들어온 사람은 튜르게이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좀 얼떨떨해졌다. 그는 말들을 마구간에 데려다 놓느라 늦게 왔고, 골다가 잔소리를 해대는 진흙은 아마도 그곳에서 묻었을 것이다.

튜르게이스는 그녀를 굳은 얼굴로 한 번 보더니 시키는 대로 했다. 에리카는 골다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진짜 그에게 명령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 에리카의 기억으론 여지껏 이런 일이 없었다. 맙소사, 기적이 일어난 건 아닐까?

세릭 역시 이 장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려 했으나 에리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친구가 잔소리를 듣는 것을 보고 그가 웃는다면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아 참았다. 왜 이런 문제로 그녀의 기분에 신경을 쓰는지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그가 거의 저질렀을 뻔한 일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인지도 모른다.

그는 새 여자 노예들 중 한 사람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집안일을 책임지게 만들 생각이었고, 그렇게 했었다. 그는 하인들을 감독할 아내가 있었지만, 이 아내에게는 어떤 권한도 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그의 계획상으로는. 지금은 그녀의 직무이자 권한을 뺏은 것에 가책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부재시 그녀가 집안일을 책임지고 하는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 골다는 그녀가 당연히 해낼 것으로 믿었다.

그는 아직도 복수를 원했지만, 윈드허스트에서와는 달리 보다 개인적인 방법을 모색할 생각이었다. 사실, 결혼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계속 분노를 마음속에 간직하기가 힘들었다. 유머 감각이 되살아났고 에리카가 화를 폭발하는 것까지 재미있었다. 세릭은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계속 놀려 댔다.

하녀 한 명에게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가는 에리카를 지켜보던 세릭은 벽 뒤쪽으로 계단을 올렸다면 홀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스커트는 호리호리한 발목과 거의 그의 엉덩이를 감았을 뻔한 그녀의 날씬한 다리를 한 번, 두 번, 살짝 드러내 주었다. 그녀는 정열적인 여인이었다. 그를 제외하고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걸 알고 있을까? 그 생각에 세릭은 은근히 화가 났다.

"복수심으로 결혼한 거야 아니면 저 여자를 갖고 싶은 거야?"

세릭은 이바르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야 비로소 그녀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아내에게 추파를 던진 자신과 그것을 들켜 버려 친구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것이 쑥스러웠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나요?"

에리카는 그 질문에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큰 침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느라 잊었던 자신의 위치를 되찾았다. 다른 가구들은 최근에 헤데비에서 사 온 것이라고 들었다. 하여간 침대는 확연히 영주의 것으로 윈드허스트의 세릭의 방에서는 보지 못했었다. 하인들이 짐마차로 먼저 실어 온 그의 트렁크는 한쪽에 놓여져 있었다. 그 트렁크에는 그녀와 그의 옷들과 망할 쇠사슬이 들어 있었다.

골다는 메그에게 에리카를 방으로 모시라고 말했었다. 리다가 중간에 끼어 들어 자청하고 나섰다. 골다와 메그 두 사람 다 반대하지 않았다. 에리카는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리다 같은 여자는 속셈이 없고서야 절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의 속셈은 추측이 가능했다. 에리카는 그녀에게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무례하구나."

그녀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요. 누가 봐도 다 알 수 있겠어. 그리고 우리는 그가 억지로 당신과 결혼했다는 걸 알죠."

리다는 고양이가 가릉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담하게 말을 계속 이었다.

"그가 억지로? 누가 강요당한 사람이 있……."

에리카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하녀의 술수에 걸려들었음을 깨닫고는 말문이 막혔다. 이 여자와 남편에 대해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리다의 배짱 뒤엔 다른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내 오빠, 라그날이 어제 여기 왔었는데, 그를 봤느냐?"

"아뇨, 세릭을 위해 나 자신을 보호했죠."

에리카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그녀의 두 번째 추측은 완전히 어긋났다. 첫 번째 생각은 정확했지만 그녀의 지위가 확실치 않은 상태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녀는 이 홀의 마님이었다.

"세릭 주인님이라고 해."

리다는 깔깔거리며 허풍을 떨어 댔다.

"곧 깨닫게 될 거예요, 부인. 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를 거고 그는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나와 함께 밤을 보내겠죠."

영주의 아내에게 진실이 아닌 이상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중죄에 속했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리다는 웃으며 문가로 어슬렁거리며 갔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 에리카가 아닌 방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탐욕스러웠다.

"이 방에 있는 동안 잘 지내도록 해요. 하지만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이 방은 내 것이란 걸 알아둬야 할걸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당신 남편이 다 줄 테니까. 의심하지 말아요."

에리카는 의심치 않았다. 이제야 세릭이 그녀를 어떤 방법으로 지금까지 보다 더한 수치를 맛보게 할 것인지 깨달았다.

 

36

세릭은 그들 사이의 거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는 아무리 결심을 다져 보았지만 손을 대지 않은 채로 그녀가 보이는 곳에서 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실을 에리카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망할 매춘부 리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쫓아다니며 귀찮게 했다. 세릭은 정말 다른 여자들에게처럼 웃어 보인 것뿐이었는데. 실제로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리다는 사실이 아니라며 그를 쫓아다니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리다는 매우 아름다운 편이었지만 그가 알고 있는 그런 여자들은 아주 많았다. 그리고 그의 육체는 본능적으로 여자가 지독하게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나, 리다의 머리카락은 벌꿀 색이 아니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북쪽의 나라들과 고향을 연상시키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거였다.

'심장 없는 에리카를 열망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세릭은 자신이 그녀에 대한 갈망을 인정한 날이 언제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분노는 여전했지만 가장 이상한 순간들에 특히, 부드러운 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와의 미래를 곰곰이 생각해 본 지금 누가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 모든 것을 원하는 걸까, 그녀의 부드러운 감정까지?

- 물론 '아니다'. 그녀의 육체면 충분해.

- 집으로 온 후로 날 무시하는 그녀의 행동 때문에 왜 좌절감이 생기는 거지?

일주일이 지난 뒤, 그는 거래를 뻔뻔스럽게 어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중요한 문제부터 처리한 뒤 나머지 문제들을 걱정하기로 했다.

세릭은 밤이 되어 홀이 조용해질 때를 기다렸다. 그는 에리카가 하인들을 깨우려 소리를 지르는 상황이 된다면, 제발이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랐다. 골다는 위층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튜르게이스의 방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막상 2층에 올라 보니 튜르게이스가 아내의 방 밖 침상에서 자고 있었다.

세릭은 이번 주 내내 위층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후로 계속 이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내의 방을 들어가는 데 이 거인을 먼저 거쳐야 한다는 것이 세릭의 짜증을 돋구었다. 그렇다고 등을 돌려 돌아내려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튜르게이스를 깨우려고 부츠 신은 발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날 내 아내와 떨어뜨리려고 생각했다면……."

"진정하시오,"

튜르게이스는 그의 말을 자르며 일어섰다.

"언제나처럼 그녀를 보호하려고 한 것뿐이오. 그녀의 남편이 함께 자겠다면, 그가 그녀를 보호하겠지. 그럼 난 내 방으로 갈 거요."

세릭은 분명한 비난에 웃음이 나왔다.

"누구로부터 그녀를 보호한다는 거야?"

"그녀를 해치려는 누구든지."

세릭은 그 암시에 얼굴을 붉혔다.

"난 그녀를 해친 적이 없어."

"그녀도 그렇다고 하더군, 하지만 신체적인 것 이외의 것도 있소. 당신 어머니는 시간을 주라고 하시더군. 당신과 우리 아가씨 사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그녀는 여기서 행복하지 못하오. 그걸 바꿀 생각이라면 빨리 하시요. 안 그러면……."

그는 협박을 하다 말고 세릭이 좋을 대로 해석하게 놔두고 가 버렸다. 그러나 그는 침상을 챙겨 홀에 있는 방으로 갔다.

기분이 상한 세릭은 걸어가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자기는 믿을 만하다는 건가?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만약 에리카가 거인의 도움을 요청한다면 튜르게이스는 달려 올 것이고, 그는 이미 거인의 주먹맛을 알았다.

더 이상 그 문제로 골치를 썩이지 않고 그는 아내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에리카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잠이 깨어 있었다. 윈드허스트에서 그들이 보냈던 매일 밤마다 그랬던 것처럼 수수한 슈미즈를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세릭은 그녀에게 편안한 잠옷을 입게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옷을 입지 않는 방법도 있어.'

에리카는 그의 출현에 놀란 게 분명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여기는 내 방이 아니었나?"

"미처 몰랐군요. 하지만 당신이 이 방을 쓰겠다면 내가 다른 곳에 가죠."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니, 이 방은 당신도 쓰는 거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집불통처럼 말했다.

"그럼, 이번엔 당신이 바닥에서 자도록 해요. 난 침대에 익숙해졌으니까."

세릭의 입가에 웃음이 비져나왔다. 그녀는 그가 온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고, 그는 즐겁게 설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나도 침대에서 자야겠어. 에리카, 나눠 쓰면 되잖아."

그는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나눠 쓴다니, 무슨 뜻이죠?"

"당신은 한쪽에서 자고 난 다른 쪽에서 잔다는 거지. 그리고 종종 우리가 같이 중앙에 있을 수도 있고."

에리카는 무슨 말인지 즉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잠시 후 숨을 '' 하고 들이켰다.

"아뇨, 절대!"

"당신은 나와 결혼했어."

세릭은 분명히 상기시켰다.

"동시에 거래도 했어요."

그녀는 표독스럽게 쏘았다.

"그 거래는 만족스럽게 끝났어."

에리카의 놀란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난 그랬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자신의 말을 어길 참이에요?"

세릭은 분노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이 여자에게는 뻔뻔스럽게 구는 것도 쉽지 않군.

"잘 기억해 봐, 이 여자야. 그 거래는 '이후에 널 만지지 말라는 것'이었어. 영원히는 분명 아니지. 이후는 우리 결혼식 직후를 말하는 거였고, 난 그 이상을 주었어. 하지만 더 이상은 아냐."

너무나 놀란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내 말을 당신 좋을 대로 해석하는군요."

"아니, 좀 다르게 해석할 뿐야."

"당신은 이걸로 복수하려는 거죠, 인정해요!"

"내가 이러는 이유는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지, 에리카. 심장이 있든 없든, 적어도 우리 사이에 이건 가능해."

"우리가 사랑을 나눈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당신은 내가 여기 와 있는 이유를 잊었군요."

세릭은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튜르게이스는 당신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하더군."

",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의 고귀한 의견으론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날 행복하게 만든다는 거로군요."

그녀의 빈정대는 말투에도 세릭은 웃음이 나왔다.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을 거야, 이 여자야."

에리카는 그가 옳은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리고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세릭은 이번주 내내 그녀의 코밑에서 자신의 정부를 과시해 댔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녀더러 그것을 다 잊고 침대에 누워 아내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건가? 절대…….

에리카는 밤마다 그와 요부 리다가 함께 누워 있는 걸 상상했고, 아침에 그가 들어와 리다를 위해 이 방에서 나가라며 화내는 걸 기다렸었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해서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혹 두 여자와 이 방을 같이 쓰게 하려 한다면…….

그녀는 결론이 떠오르기도 전에 분노로 달아올랐다.

"난 관심 없어요. 당신의 딴 여자에게 가 봐요."

"우리가 결혼한 뒤 다른 여자는 없었어."

설령 그녀가 믿을 수 없다 해도 세릭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만난 뒤로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유혹들을 다 물리치지 않았던가. 순전히 그녀 때문에.

"믿어 주죠."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볼 때마다 그 검은머리의 창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

"난 리다랑 잔 적 없어. 물어 봐, 아니, 그러지 않는 게 좋겠군."

세릭이 말을 고쳤다.

"보나마나 거짓말을 할 거야. 그냥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어."

"!"

두 번째 ''는 그의 화를 돋구었고, 속에도 없는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다른 매춘부는 오늘밤엔 쓸모가 없어. 한 명에 한 달이면 충분하지. 다른 한 명은 이미 딴 사람이 먼저 차지했더군."

"그렇다면 참아요. 하루도 그냥 넘어갈 수 없나요?"

에리카 역시 화를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인정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말이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널 만난 뒤 한 번도 못했는데, 아니, 하루라도 참을 수 없어. 좋든 싫든 난 네 남편이야. 오늘밤은 모든 면에서 내 아내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침대로 들어가. 내가 폭력을 쓰게 하지 마."

세릭은 화가 난 상태에서 여자를 안은 적은 없었고 새롭게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는 여자들을 부드럽게 대했지만, 에리카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먼저 화부터 가라앉혀야 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창가에 다가갔고 달빛에 방은 낮처럼 환했다. 의자 위에 세릭은 한쪽 다리를 올려놓았다. 이 의자에 앉아 그녀는 인생을 얼마나 한탄했을까?

얼마쯤 지난 후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새출발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노력해야 해."

에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에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뒤를 돌아 침대 위에 앉은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베개에 기대 누었다. 세릭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심장은 마구 쿵쾅거렸고, 점점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정열이 그의 온몸을 감싸 돌았다.

그는 주저하며 침대로 걸어갔으며 자신이 그녀의 행동을 오해한 건 아닌지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감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맨처음 여자를 안던 순간조차 긴장하지 않았었는데……, 그는 자신의 긴장감 때문에 그녀가 겁먹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세릭은 침대 옆 촛불을 끄지 않았다. 여러 날 그의 꿈을 독차지해 온 육체를 느끼는 만큼 보고 싶었다. 에리카는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안았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모든 곡선이 그의 몸에 희열을 주었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는 기쁜 나머지 미칠 것 같았고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세릭은 최대한 자제하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말을 꺼내기조차 두려웠다. 그들 사이에 부드러운 대화란 없었다. 그러나 말없이, 분노한 채로 누워 침묵으로 세릭을 무시하는 방법인지, 아님 새로운 시작이라는 그의 말을 받아들인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세릭은 후자이길 바랐다.

에리카는 그가 자신을 안고만 있자 좀 당혹스러웠다. 세릭은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너무나 많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양보하는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 뒤엔 쓰라림이 쌓여 있는데 결혼에 희망을 품는다니, 미친 짓이었다.

고함치는 세릭의 목소리에 묻어 난 분노에서 에리카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가 주장한 오랫동안의 금욕은 그녀의 감정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당신을 원해'란 말은 그녀가 느끼는 것보다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이제껏 그녀의 분노가 감정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으로 분노는 녹아들었고 감정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도 세릭을 원했다. 에리카는 그가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와 함께 밤을 보내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그의 아내로서, 그와 한 침대를 쓸 권리가 있었고, 그의 육체와 친밀해지고 그의 정열을 알아야 하며, 그의 아이들을 가질 특권이 그녀에겐 있었다. 프레야 여신이여, 그녀는 그 권리를 다 원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세릭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를 애무하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의 손은 부드럽게 껴안았던 그녀의 허리에서 등을 지나 엉덩이로 내려갔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리를 들게 한 후 자신의 몸에 꼭 대었다. 에리카는 발과 발목, 무릎으로 옮겨 다니는 그의 손길에 전율했다. 그녀를 자신 위로 올라오게 한 뒤 세릭은 그녀의 등을 전부 만지며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그에게 꼭 닫게 했다.

세릭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흐트러뜨리곤 냄새를 맡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고 입술은 그녀의 입술에 장난치며 귓볼에서 목덜미로 내려갔다. 그녀의 팔, 어깨, 손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가 그녀 위로 올라갔을 때 그녀의 가슴은 활짝 피어나며 그의 손에 꽉 차, 그녀의 첫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옷을 입은 채였고, 그는 아직 그녀에게 키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술의 감촉을 처음으로 알게 되자 그녀는 입술을 뗐다. 그의 배려에 그녀의 감각은 서서히 깨어났고 타오르는 욕구는 한데 모여 폭발했다. 그것은 환희의 키스였고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내맡긴 채 서로 밀고 당기며 그녀의 온몸에 불이 지펴졌다. 그녀는 전부를 원했고 어느 부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어지럽게 했으나 그녀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녀의 온몸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슈미즈는 한 번에 벗겨졌다. 그의 옷들이 벗겨지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녀는 놓치지 않고 드러나는 그의 몸에 끊임없이 키스를 했다. 그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에게 다시 입술을 댔다. 그녀는 지체되는 데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육체를 알아가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단단했고 팔과 다리가 굵었으며 군살이라곤 없는 근육질이었다. 그가 굶주림으로 야위기 전에도 지금과 같았을까? 에리카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욕망으로 부풀어 있는 그의 남성이 드러났을 때 그녀는 처녀로서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욕망이 더 컸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들의 몸이 닿는 부분마다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열었으나 오직 그의 손만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너무도 부드러워 그가 타오르게 한 열기를 달래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시작하여 그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가 그녀와 몸을 합쳤을 때 에리카는 그에 대한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아픔이 있었지만 너무 미세해 미리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눈치 챘다. 그녀는 그의 눈에 잠깐 드러난 놀라움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그대로 안고 깊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몸 속에서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쾌감만이 느껴졌다.

영원인 듯했지만 사실, 잠깐이었다. 그들이 함께 도달한 정점은 찬란하게 빛나고, 환희는 모든 감각을 통해 넘쳐나는 새로운 경험으로 위압되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그의 관능적인 미소가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처음으로 그렇게 웃고 싶어졌다.

 

37

밤은 깊어졌으나 에리카는 잠들 수가 없었다. 남편 옆에 편안히 누워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새출발? 점점 확신이 왔다.

세릭 역시 깨어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누워 있었으며 그녀는 그에게 기댄 채 손으로 세릭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말이 지금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즐거운 분위기를 깰 수 있음을 알았다.

에리카는 세릭이 자신을 여전히 미워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그녀를 원하는 것으로 바뀌었을까?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릭이 진정한 새출발을 원하고, 혹시 그녀에게서 승낙을 얻기 위해 둘러댄 말이라 할지라도 에리카는 정확히 그의 의중을 알고 싶었다. 즐거움을 위해 더 이상 미루어져선 안 되었다. 그러나 세릭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에리카는 주저하며 말문을 열었다.

"정말로 날 마구간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어요?"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화가 난 듯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거머어 쥐고 잡아뜯었다.

"토르 신의 이름으로,"

세릭은 심하게 투덜거렸다.

"거기 누워서 계속 그 생각만 했다면 때려 줘야겠군."

"그럼 무슨 생각을 해야 하죠?"

그녀는 순진하게 물었다.

세릭은 그녀에게 기대며 눕기 전에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시 일깨워 줄까?"

에리카는 그가 멈추도록 손으로 막았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내 질문엔 대답해야 되요."

그는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여자에게라도 그럴 수 없어, 심지어 당신이라도."

바라던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듣게 되니 화가 났다.

"또 다른 속임수예요?"

"좋을 대로 이야기해도 좋아. 결국 전쟁은 피했잖아. 사실 내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 순간부터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었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그만 얘기해요. 안 그럼 충격으로 기절할 것 같으니까."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필요한 경우에도 사과할 줄 모른다는 말인가?"

"나한테는 그래요."

"사과할 게 없었겠지."

에리카는 탁탁 소리가 나도록 베개를 치고는 그에게 등을 돌려 누웠다. 그도 역시 등을 돌렸다. 두 사람 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씩씩거렸다. 정말이지 대단한 새출발이었다.

 

이튿날 에리카가 홀로 내려갔을 때, 그녀는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을 어젯밤을 자기 스스로 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꼭 하지 않았어도 될 질문이었다. 바라던 대답을 얻었지만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들 사이의 적대감을 진정으로 원했는지 에리카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릭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어제는 정열에 이끌렸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를 혐오했다. 세릭은 그녀에게 복수를 원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세릭이 모두 잊은 것일까? 그렇다면 쇠사슬과 굴욕 그리고 가장 끔찍한, 사기쳐서 하게 만든 결혼은?

그녀가 아는 바로는 그녀처럼 그도 정열에 사로잡혔었다는 것과 지금쯤 어젯밤의 방문을 후회하고 있으리란 거였다. 에리카는 어젯밤 일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꼭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새출발에는 자신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은 과거가 그들을 가로막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결혼은 진짜가 되었다. 에리카는 결혼이 가져다주는 꽤 괜찮은 이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고민 거리도 생겨났다. 이점이 가져다 줄 원치 않는 결과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바로 아기였다. 기대에 부풀어 결혼하는 여자들과 그녀는 분명히 다른 처지였다. 세릭과의 강요된 결혼이 아니라, 평범한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 포기하고 살란 말인가.

에리카가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 살아가는 유일한 길은 세릭을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그가 누려야 할 권리를 무시하는 거였다. 물론 그가 다시 침실로 올 때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하기야 리다 같은 여자들이 그를 유혹하는데 그가 왜 그러겠는가?

어쩌면 그녀는 아예 사과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튜르게이스는 자신의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소리를 듣기 위해 문을 열어 놓은 채 무기를 닦는 것으로 그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툴툴거리는 아침 인사를 시작으로 그는 그녀를 따라 홀로 내려왔다. 매일 아침과 똑같았다. 지난밤 세릭이 그녀의 방을 다녀갔음에도 말이다.

늦은 아침 시간 홀은 비어 있었다, 평상시처럼 튜르게이스는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침 식사를 하였다. 에리카는 오늘은 혼자가 싫어서 그들의 관습을 무시하고 합석했다.

"이러지 않는 게 좋아요."

그가 한 말의 전부였다.

에리카는 그 말을 무시했고, 골다가 그녀를 거들어 튜르게이스를 나무랐다.

"그분은 이곳의 마님이에요. 하고 싶은 대로 하실 수 있어요."

비록 사실은 아니었지만, 에리카는 기분이 좋아졌다. 튜르게이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골다가 갈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리카는 손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렸다. 그녀는 골다가 튜르게이스에게 불평과 조롱으로 시비를 거는 것을 눈치 챘고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꽤 당황해 하는 듯했다. 그가 그녀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은 그만의 대응 방식이었다.

그는 에리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투덜댔다.

"저 여잔 마귀 같아."

에리카는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를 놀렸다.

"혹시 저 여자가 당신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유혹하는 거라면."

그는 얼굴을 붉혔다. 에리카는 그녀의 친구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다시 골다를 쫓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에리카의 눈은 크게 떠졌다.

'내가 옳을지도 몰라!'

튜르게이스를 대신해 골다의 마음을 떠본다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골다와 튜르게이스 모두 적당한 행동들이 아니었다. 정말 원한다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겠지.

그에게 식사가 끝나 갈 때 에리카가 그에게 물었다.

"세릭이 오늘 아침에 어디에 있는지 알아?"

"성벽을 쌓고 있어요."

에리카는 자신의 눈치 없음을 탓했다. 세릭은 윈드허스트에 가지 않을 땐 성벽을 쌓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가 계획한 홀 완공 축하 만찬을 외곽 성벽이 완성될 때까지 연기하고 있었다. 벽이 올라가는 속도로 봐서 만찬은 다음주 중에 치러질 것이다.

그녀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정확치 않았고 또,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므로 기다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곳의 전사나 하인들 모두 최대한으로 빨리 성벽이 끝나길 고대했다. 사실, 모두 그 일에 매달려 있었다. 튜르게이스조차 그가 볼 수 있도록 그녀를 홀 밖에 있게 했다.

그녀는 세릭이 그곳에 있으면 날씨가 덥다며 자주 자리를 피했다. 오후가 되면 남자들은 윗도리를 벗었다. 가슴을 들어낸 사람이 열 명 이상이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세릭의 벗은 가슴만이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어젯밤 그녀가 쉽게 굴복한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기도 전에 이미 자극되어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 벌거벗은 남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에리카는 부담 없이 남편을 찾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태도에 따라 조용히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간밤에 화를 낸 일을 두고 사과 할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물론 그가 후회하는 기색이라면 에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참이었다. 그럼, 결국 오늘은 어제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만일 리다와 세릭이 밤을 보낸다면 에리카는 웃으며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갈 것을 알기에 그녀는 튜르게이스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세릭은 찾기 쉬웠다. 뜰 중앙에 세워질 성문 근처에서 다른 남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로이스가 보내 준 건축가가 한 명 있었고, 세릭을 돕-그것도 도움이라면-는 사람이 하나 더 보였다. 리다가 하고 있는 게 도움이 되는 일이야?

세릭은 성문 틀에 몸을 숙이고 망치질을 하고 있었고 옆에 있는 여자에게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일까? 그녀도 그에게 몸을 숙여, 사실 그의 엉덩이에 기대서서 그의 등과 어깨를 연신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에리카에게는 몸과 손으로 세릭을 애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의 에리카였다면 그냥 등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 홀로 감정을 삭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조용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또 한번 그녀의 방어벽를 무너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세릭은 한 여자로 만족할 줄 모르는 사내였다. 아내와도 잠자리를 같이 했고 그러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녀의 고함소리에 사람들은 손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멍한 눈빛이 그녀를 향해 왔다. 에리카는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홀로 뛰어갔다. 칼이든 도끼든 저 나쁜 자식에게 휘두르고 그를 벽에 못 박아 주리라.

"에리카!"

세릭이 뒤쫓아 오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점점 가까이서 들리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에리카는 홀로 들어섰다. 튜르게이스의 도끼를 손에 넣으려고 찾았지만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그에게 잡힐 것 같았다. 빌어먹을 다리는 길어서. 홀을 재빨리 살폈지만 마땅한 무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훨씬 가까운 곳에서 부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아직 빈 손이었다. 더군다나 튜르게이스와 그녀가 식사를 마친 식탁을 빼고는 모든 테이블은 깨끗했다.

그녀는 그 식탁으로 다가가 그것을 사이에 두고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포리지(오트밀에 우유 또는 물을 넣어 만든 죽)가 담긴 그릇과 먹고 남긴 빵과 치즈, 숟가락, 소금 그릇 따위를 세릭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저 길다란 의자를 들 수만 있다면…….

세릭은 용케 날아오는 것들을 피했지만 크리스털 소금 그릇 세례는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튀어 나간 포리지 방울 몇 개도 말이다. 웃음이 터질 만큼 재미있는 그의 모습이었지만, 화가 난 에리카의 눈엔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세릭은 얼굴로 '정신이 나간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소리치 듯 물었다.

"에리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내가요?"

그녀도 맞받아 쳤다.

에리카는 또 던질 게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막 던지려는 찰나에 세릭은 테이블을 뛰어 넘어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댔다. 소금은 좀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회백색의 소금가루가 잔뜩 붙어 있었다.

그들 근처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흔들지 마."

두 사람 다 튜르게이스가 팔짱을 낀 채로 확실히 참견하려는 준비를 하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세릭이 그에게 물었다.

"그녀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봤나?"

튜르게이스가 못 봤을 리 없었다.

"손을 떼시오."

세릭은 짜증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를 놔 주었다. 그녀는 그를 한대 치려고 주먹을 휘둘렀으나 그의 어깨밖에 닿지 않았다. 그는 다치지도 않았고 소금만 더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짓이지, 에리카?"

세릭이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바이킹! 혐오스런 거짓말쟁이. 당신 같은 호색한이 제대로 되먹으려면 여든 살은 넘어야 할 거야."

에리카는 화가 나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는 무슨 거짓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호색한이라는 말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어안이 벙벙해졌다.

"질투하는 건가?"

"메스꺼워."

에리카는 질세라 쏘아붙였다.

"당신은 질투하는 거야."

그는 갑자기 씩 웃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잤던지 난 상관 안 해요. 하지만 절대 날 그 숫자에 포함시킨 뒤 전처럼 굴 순 없어요. 이건 질투가 아냐. 당신 아내로서 절대 참을 수 없는 거란 걸 명심해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자제력이 남아 있다면 지금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 것이다. 그러나 세릭의 집안은 여자들이 남편을 휘두르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세릭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권리 운운하는 것이 좋게 여겨졌다. 그녀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화를 내고 있었다. 에리카는 질투하는 것이었다.

세릭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신이 질투하는 게 아니라 단지 정나미가 떨어진다니까 물어 보겠는데 그 이유가 뭐지?"

"어릿광대처럼 얼간이 짓을 해놓고 나한테 물어요? 난 장님이 아니에요."

", 저 여자?"

"그래요, 저 여자. 저 여자가 이 지붕 아래 있는 한 난 오빠에게 돌아가겠어요."

"아니, 그럴 수 없어."

"그럼, 그녀를 쫓아내요!"

세릭은 벌써 그러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리다가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계속 성가시게 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체했다.

"나쁜 생각은 아냐. 부하들 중 누가 리다를 가지고 싶은지 알아보지. 그러나 그녀를 비싸게 주고 사 왔거든. 몸값을 지불하려 할지 의문이야."

"그럼 값을 내려요."

아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당신 질투 때문에 날더러 손해를 보라고?"

"…… 질투하는 게…… 아니……"

"내가 값을 치르지."

이바르가 끼어 들었다. 그는 정말로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홀에 몰려온 사람들은 이바르 같은 재치를 소유하지 못했다. 마구 웃어 대며, 낄낄거리고, 서로의 등을 쳐 댔다. 도롤프는 너무 심하게 웃어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아야 했다.

에리카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는지는 몰라도 속마음을 들켜 버렸다. 더구나 그녀의 남편은 결코 성실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이 문제가 재미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전혀 안 그랬다.

그녀는 그와 이바르가 리다의 몸값을 가지고 옥신각신할 때 살짝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갈 때 리다를 보았다. 그녀는 분명 그 일을 열심히 지켜보며 자신이 말다툼의 원인이라는 것에 즐거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팔린다고 실망하거나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에리카는 자신이 리다의 입장이라면 무척 달랐을 것이라는 것을 절망하며 깨달았다. 세릭이 자신을 없애려 한다면 에리카는 망연자실해질 것이다. 프레야 여신이여, 그의 여동생이 경고한 대로 나는 어떻게 남편과의 사랑에 빠진 것일까?

 

38

세릭은 먼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아내를 찾아 나섰다. 그녀는 부엌에서 저녁 만찬의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은밀한 식사를 준비하려고 아까 부엌에 잠깐 들렸었고 이미 말안장에 모두 실어 놓았다.

그리고 거인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튜르게이스에게 그의 의도를 충분히 설명했다.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에리카가 세릭과 같이 있는 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건은 아침에 일어났었지만 아직도 세릭은 소금에 덮여 있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는 씻지 않았다. 하나는 아내에게 계속 그 일을 상기시키며 즐기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녀에게 수영을 하자면 핑계가 필요했다. 그녀를 위해 그는 변명을 할 생각이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그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에리카는 아직 진정이 안 된 채였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유리한 것은 그녀가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뒤라, 땀에 젖지는 않았지만 몹시 더울 거란 거였다. 더위 역시 그의 편이었다. 그러나 장담만은 할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의 아내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말이 통하리라고 자신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어쩌면 묻지 않는 쪽을 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냥 그녀를 끌고 가 호수에 던져 버리는 게 낳을 것도 같았다. 그녀가 수영을 하고 싶은지는 뒤에 물어도 된다.

그의 장난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성공하려면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에리카의 방심을 틈타 그녀가 말다툼을 벌리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세릭은 에리카를 문가로 오게 하고, 오자 마자 말했다.

"따라와."

그러고는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꼼짝도 안 했다.

"어딜요?"

그는 그녀를 데려가려고 다시 돌아와야 했고, 이번엔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야 했다.

"말을 타고 갈 거야."

그녀는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식사가……."

"기다릴 수 있어."

에리카를 말 위에 던지 듯 안장에 앉혔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찡그려져 있었지만 그 뒤에 올라탄 세릭은 그녀를 달랬다.

"싫지 않을 거야, 에리카.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었어. 그러니까 당신도 긴장을 풀어 봐."

그녀는 멀지 않은 작은 호수 가로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호수에 도착했을 때 세릭은 그녀를 집어던지는 것보다 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먼저 내려 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황혼으로 하늘은 곱게 물이 들어 활짝 핀 야생화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으며, 주위는 조용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해질녘을 택했다.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그녀와 수영할 수 있다면, 그녀가 좀 덜 부끄러워하길 바라는 그의 배려였다.

"크리스텐도 여기를 좋아해. 로이스와 자주 오지. 또 우리 부모님들도 웨섹스에 오시면 이곳에 곧잘 오시지."

에리카는 그의 부모가 호수에서 같이 수영하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 덕에 긴장이 풀렸다.

"왜 우리가 여기 온 거죠?"

세릭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화가 풀릴 거야. 화를 풀라는 명령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더운 하루를 보낸 후라면 수영도 즐거운 일이지."

세릭은 그녀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옷을 입은 채 물 속에 뛰어 들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잠시 동안 멍하니 물살을 가르고 있는 자신의 남편을 바라만 보았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흔들자 기슭에 있는 그녀에게까지 물방울이 튀었다. 그는 물 속에서 아이처럼 웃고 장난치며 노닐었고, 에리카는 그가 보지 않을 때만 참고 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물은 정말 유혹적으로 보였지만 그녀는 수영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와 함께 수영한다면 그를 용서하게 되는 테고 그는 쉽게 오늘 일을 잊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의 소유자가 바뀌었을 뿐 리다는 이바르와 함께 그들 곁에 계속 머물 것이니 그녀가 고마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에리카는 그가 왜 즐거워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그녀가 한 행동에, 다른 남자들이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친구들과 부하들 앞에서 일어난 일이니 설사 자신을 때린다 해도 에리카의 처지에선 할 말이 없었다. 튜르게이스가 있다는 게 아침나절 내가 무사했던 이유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에리카는 아직도 화가 나 있었지만 웃고 있는 세릭은 더 이해가 안 되었다. 아침에 일어난 일을 두고 그의 친구들이 웃어댄 것은 이해 할 수 있었다. 세상의 남편들이란 언제나 불성실하지 않는가. 세릭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겠지만 그녀의 질투를 두고 세릭이 즐거워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옷을 벗기 시작할 때도 여전히 에리카는 세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튜닉과, 각반, 레깅스, 부츠, 전부다 기슭에 있는 그녀 앞으로 벗어 던졌다. 하늘은 깜깜했고 그는 물 속 깊숙이 있어 그녀는 눈을 돌려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직은. 그러나 그녀가 생각한 대로였다. 세릭에 관한 한 그녀는 그의 모든 행동을 의심부터 하고 특히 그의 매력을 그녀에게 발휘할 때는 더 그랬다. 그리고 그의 미소도. 그의 미소는 제일 수상했다.

망할 바이킹. 그는 딴 남자들과 왜 다른 걸까? 왜 그는 꼭 그렇게 자극적일까?

- 그는 여태까지 여자를 해친 적이 없어.

- 아니, 그를 사랑하는 여자들은 다 바보들이야.

"혼자 수영하니 별로 재미가 없군."

그가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럼 당신이 여자를 잘못 데려온 것 같군요."

에리카는 최대한 냉정을 발휘했다.

"여자는 제대로 데려왔어."

그의 대답으로 그녀가 부정해 온 뭔가가 그녀 안에서 달아오르고 있었다. 점점 확실해지는 자신의 감정에 그녀는 그의 매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어졌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려고 태어난 남자였다.

'그가 한 말은 어느 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안 돼.'

에리카는 꽃 사이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세릭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를 물속으로 들어오게 해보았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씻고 있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타올랐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오늘은 아냐, 우리는 여기서 먹을 거니까. 배가 고프면 먼저 먹어. 내 안장 주머니에 먹을 만한 게 있을 거야."

에리카는 거절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게다가 그녀는 그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너무 낭만적이었다. 바람은 따뜻했고 꽃향기는 바람결을 타고 이곳을 꽉 채웠으며, 물결은 잔잔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은밀했다. 너무나.

그녀는 생각을 쫓으려 음식을 챙겨 왔고, 와인을 발견하고는 꿀꺽꿀꺽 마셔 댔다. 그러나 그녀가 바란 대로 긴장이 풀어지긴커녕 더 심란해졌다. 세릭이 물 밖으로 걸어나올 때 눈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보름달은 구름 사이에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와인을 마시기 전에 그녀는 이 사태를 미리 짐작을 했어야 하지만, 지금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신의 선물 같은 장대한 이교도인 남편뿐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를 만지고 싶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에리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어 났는지 깨닫고는 벌떡 일어났다. 무의식중에 와인을 담은 포대를 그녀는 무기처럼 움켜쥐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손도 대지 않았지만 에리카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렸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계속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간 감기들 거예요."

"여분의 옷이 있을 거요."

"그럼 빨리 갈아입어요."

"오늘 처음으로 시원해졌어. 이곳엔 우리 말고는 없다오. 당신은 날 거부하는군. 당신은 내 옷이 아니더라도 나와 친숙하잖소."

세릭의 말에 그녀는 정색하고 있는 자신이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요."

에리카는 겸연쩍게 대답했다.

깊게 울려 나오는 그의 웃음엔 장난스러움과 즐거움이 함께 배어 났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즈음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위로 미끄러져 왔고 그녀를 자신의 젖은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소리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머리는 빙빙 돌았다.

"뭐가 두렵지, 데인 족? 내가 당신을 느끼게 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 느낌 때문이야."

세릭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둘 다요!'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한쪽 손은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고 그녀의 슈미즈와 가운에 아랑곳없이 다른 한 손은 배를 지나 그녀의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그리고 입술은 그녀의 목을 지나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호수 건너편에서는, 로이스가 기슭에서 뒷걸음치며 아내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입에다 손가락을 댔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말을 먼저 본 것이 다행이군. 내 생각엔 당신 오빠가 우리를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군."

"그렇다면……?"

", 정확히."

"그럼 당신이 옳았네요. 세릭은 어떤 신념으로도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나 봐요."

로이스는 크리스텐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

"난 그가 그의 아내와 같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도롤프가 와서 떠벌인,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에 대한 세릭의 반응으로 봐선 확인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 오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몰라요."

"지금으로선 알고 있다고 해야겠군."

호수 끝 쪽에서 즐거운 사람은 브렌나였고, 게릭은 적어도 오늘밤은 호수에서 몸을 식힐 수 없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윈드허스트의 주변 마을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수영을 하려던 로이스와 크리스텐과는 달리 브렌나와 게릭은 성에서 곧장 이리로 왔었다. 덕분에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호수로 다가와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각자 세릭의 말은 보았다.

게릭이 브렌나가 안장에 올라타는 것을 도우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어떻소, 저 아이들이 빨리 돌아갈지도 모르니, 우리가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만약 쟤가 당신을 닮았다면, 내 사랑……"

"잊어버려,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요'라고 하지 마. 우리에게 믿게 한 것보다 아내를 더 좋아하는지 알아볼 작정이니까."

브렌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39

세릭은 꿈에서 깨며 일어났고, 잠시 후 벌떡 일어나 앉으며 에리카를 깨웠다. 여러 번 그를 괴롭힌 꿈이었지만 오늘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긴 처음이었다. 심지어 또다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두통이 되살아났다.

"무슨 일이에요?"

에리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 듀르윈 경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어."

"누구요?"

세릭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대답은 '가족들과 이야기를 해야 돼'가 전부였다.

그녀는 눈이 떠졌다.

"지금은 한밤중이에요."

에리카는 새로운 사실인 양 그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는 이미 옷을 입었다.

"기다릴 수 없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 방을 나가는 데 변명은 필요 없어요. 그냥 가요."

그러나 세릭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대신 에리카는 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만족해야 했다.

"내가 아는 여자 중 당신처럼 의심 많은 여자는 처음이야."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쏘아붙였다.

"아니, 그럴 이유는 전혀 없어. 네 의견과는 반대로, 친애하는 아내여, 난 거짓말을 하는 버릇은 없어. 내가 리다에게 관심이 없고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라고는 내게서 떨어뜨릴 때뿐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날 믿어야 해. 내가 여태까지 너무 많은 여자들을 알고 있어서 그 이름을 다 댈 수 없다고 하면 그것도 믿어야 해. 그런데 왜 내가 그 많은 여자들 중 리다 하나 때문에 거짓말하겠어?"

"왜냐하면 당신이 결혼했기 때문이죠."

세릭은 그녀를 오랫동안 쳐다보더니 성난 투로 말했다.

"옷 입어."

"왜요?"

"당신도 나랑 같이 가야 하기 때문이지. 심각하게 당신을 끈을 묶어 데리고 다닐 걸 고려해야겠어. 그럼 토르 신의 이름으로, 더 이상 내가 하지도 않을 일들로 괴롭히지는 않겠지."

세릭의 위협과 그의 흥분된 말투에 에리카는 더 이상 말다툼 따위로 시간을 끌지 않고 따라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재빨리 옷을 입고 세릭이 기다리고 있는 안뜰로 내려갔다. 그러나 한 마리의 말이 기다리는 것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난 당신 마구간을 봤어요, 세릭. 말이 꽤 많던데, 왜 난 혼자서 말을 탈 수 없죠?"

마침내 그가 웃음을 지었다.

"난 호색한이야, 기억나? 호색한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부하는 여자를 품에 두길 좋아하지."

"난 아부하지 않아요."

그녀는 코웃음 정도로 대꾸했지만 소리 내고 싶어졌다.

에리카는 오빠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세릭은 함께 있기에 너무도 재밌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즐겁게 하며 그 관능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호수에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침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또다시 사랑을 나누었다. 분명히, 그는 그녀와 새출발을 할 의향이 있거나 새로운 여자의 진기함을 즐기는 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랑하게 만든 후 그가 할지도 모르는 복수가 그녀를 괴롭혔다. 그럴 경우 그에겐 또 다른 무기가 생기는 셈이었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맞설 생각이었다. 에리카는 그에게 더 깊이 빠져들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그녀가 이미 발견한 감정들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침대로 데려 가고 싶을 때마다 그녀를 유혹해야 하는 것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결국엔 포기하고 다른 여자에게 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담담해질 수 있으리라.

윈드허스트에 도착한 때는 날이 밝기 몇 시간이나 전이었다. 세릭은 가족 전부를 깨우려던 마음을 바꿔 로이스만을 불렀다. 그들의 말소리로 홀에서 자는 하인들을 깨우지 않도록 세릭은 그의 옛날 방에서 로이스를 기다렸다. 로이스가 방으로 들어오자 초 몇 개에 불이 붙여졌다.

"결국 여기가 더 좋다고 결정했나?"

로이스는 거의 신음 소리에 가깝게 말을 했다. 세릭은 처음으로 야유조로 받지 않았다.

"자네를 깨워서 미안하지만 난 이게 시급한 문제일 것 같아."

로이스의 표정은 그 순간 심각하게 변했다.

"말해 봐."

"내가 홀로 내려왔던 날, 한 남자가 낯이 익어 보였어. 하지만 그 남자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안 나더군. 크리스텐은 그 사람이 듀르윈 경이라고 말해 줬지만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어."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근처에 살지 않지만, 난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어. 듀르윈은 78년 전까지 궁정을 들락거렸지. 아내가 죽고 난 뒤로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어. 그리고 장남을 궁정에 남겨 두었지. 내가 기억하기론 에드레드는 데인 족과의 작년 전투에서 전사했을 걸세. 자네가 다친 걸 본 자야. 에드레드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 어쩜 자네가 기억하는 건 그일 수도 있어."

"아냐, 난 늙은이를 보았고, 얼마 전이었어. 강도떼에게 기습당한 바로 그날이었어. 내가 쓰러지기 직전에 듀르윈이 사제를 죽이는 걸 목격했어."

"자네가 착각하는 거야."

"아니, 오늘도 기습당하는 꿈을 꿨어. 듀르윈이며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어. 그날 내가 제대로 본 사람은 그 자뿐이었어. 심지어 그가 도둑치고는 좋은 옷을 입었던 것까지 기억나."

로이스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느님 맙소사, 자네 이게 뭘 의미하는 줄 아나?"

"그래. 그들은 도둑이 아니었어. 왕의 신하들을 공격해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된 음모이지. 내가 자네한테 물어야 할 건 이 일을 왕에게 언제 말하느냐는 거야. 내가 그 남자를 죽이기 전 아니면 후."

주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로이스의 입술은 삐죽거렸다.

"처남이 그럴 기회가 생길지 의심스럽군. 알프레드는 이 일을 스스로 처리하려 할거야. 하지만 자네가 옳다는 게 확실하다면 듀르윈은 교수형 감이야."

"난 거의 죽을 뻔했어, 로이스. 그리고 몇 주 동안의 고통은 절대 잊지 못해. 그것에 책임이 있는 자와 싸우는 만족감을 갖고 싶어."

"그래, 장인과 장모, 그리고 내 아내도 그럴 거야. 이봐 친구, 이 일을 바이킹 식으로 처리하려면 자넨 줄서서 기다려야 할걸. 하지만 자넨 지금 웨섹스에 살고 있고 우리는 엄격한 법이 있어. 그러니 왕이 하는 대로 놔두게. 어쨌든 그 범죄 역시 그를 겨냥한 것이니까."

세릭은 작게, 결코 찬성이라고 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으나 로이스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알프레드 왕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아. 쉬펜함의 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을 다시 들를 걸세. 지금 전령을 보내야겠군."

세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급하게 달려온 일이 신속하게 처리되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그는 윈드허스트에서 듀르윈을 본 날 기억을 해냈다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라며 짜증을 냈다. 그러나 기습 공격은 거의 잊혀졌고 고통과 에리카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는 이것들도 곧 잊혀지기를 바랐다.

로이스는 문가에서 멈춰 말했다.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지. 어떤 때는 알프레드가 빨리 움직이지만 안 그럴 때도 있거든. 이건 물론 안 그러겠지만, 그가 내일 도착하면 즉시 자네를 보길 원할 거야."

"알겠네."

"그럼 더 자게. 나도 전령을 보내고 그럴 생각이니까."

에리카는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비록 한마디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조용히 앉아 있었다. 로이스와 세릭이 셀틱 어로 대화를 나눴으므로 그녀는 일부러 제외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불편을 세릭이 앵글로색슨 어를 배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겠다면 에리카가 셀틱 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보다는 언어를 빨리 배우니까.

"이제 가도 되나요?"

드디어 그의 주의를 끌며 그녀가 말했다. 세릭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순간 놀라는 것 같았다.

"아니, 왕이 올 때까지 우리는 여기 있을 거요."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당신, 왕의 일에 관여할 건가요?"

세릭은 한밤중에 그들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그녀에게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라고 조르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라면 이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그는 대략적으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끝냈다.

"며칠 동안 이곳에서 지내야 하오."

그리고 그는 결혼 전 그들이 같이 쓰던 방을 둘러보고 씩 웃었다.

"바닥에서 잘 거요, 아니면 침대에서 잘 거요?"

그녀는 즉시 얼굴을 찡그렸다.

"하나도 안 웃겨요."

"당신이 바닥을 선택해 우리가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면 그렇게 될걸."

그녀의 입은 잔뜩 벌어졌다가 다시 꽉 다물었다.

"내일을 의미하는 거죠?"

그의 입은 더욱 길게 찢어졌다.

"사실, 그 말이 나오니까……."

그녀는 너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어…… 벌써 두 번이나……."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진짜, 에리카"

그 관능적인 미소가 돌아왔다.

"당신 남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군."

그러나 그녀는 차차 깨닫고 있는 중이며, 프레야 여신이여, 어떤 때는 매우 즐거웠다.

 

40

윈드허스트의 정찰대가 다음날 오후에 왕이 오고 있다는 말을 전해 왔고, 로이스는 말을 타고 나가 그를 맞이했다. 말을 타고 의논할 때는 단둘일 때가 훨씬 좋았으므로 그는 혼자 갔다. 또한 그는 왕이 세릭을 대면하기 전,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 알프레드 왕이 측근들을 뒤로 하고 몇 명의 근위대와 이렇게 빨리 온 것으로도 그가 이 일을 크게 여긴다는 걸 말해 주지만.

"이번 방문 때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는데……."

알프레드가 말문을 열었다. 로이스는 주춤했다.

"제 처남은 이곳을 항상 흥미진진하게 합니다."

알프레드는 그 야유를 약간의 웃음으로 받아들이고 문제의 핵심으로 접어들었다.

"자네 처남이 한 고발은 엄청난 거요. 물론, 듀르윈 경은 그의 고발 자를 대면해야지."

"그럼 그가 부인했습니까?"

"아직은 모르네,"

알프레드가 말했다.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 좋을 성 싶더군. 그리고 그에게 먼저 같이 가자고 말해 의심을 품게 만들 수는 없었네. 놀라게 된다면 변명을 고민할 겨를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자네 처남이 갑자기 말을 꺼내는 게 제일 좋은 방법 같더군."

"아주 좋아할 것 같군요. 하지만 그는 동시에 듀르윈에게 결투를 신청할 겁니다."

"안 돼, 경이 그건 막아야 해."

로이스는 그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수를 결심한 바이킹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알프레드는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 두고 계속 말을 이었다.

"왜 듀르윈이 이 일을 저질렀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네. 물론 그는 데인 족을 자네만큼 증오해. 그의 하나뿐인 자식을 그들에게 잃었거든. 하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로이스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기습은 데인 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전하께 아니, 전하의 평화 강화 계획에 반기를 든 겁니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자네가 그 일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왜 듀르윈이 방해를 했는지에 논리적인 원인을 알게 될 거야."

로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계십니까?"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어. 신부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듀르윈의 이웃인 상속녀로, 그의 아들 에드레드와 결혼할 아가씨였다네. 만약 그 젊은이가 죽지만 않았다면……."

로이스가 알프레드를 대변하여 말했다.

"듀르윈 경은 선왕이신 폐하의 형만큼 폐하를 알지 못합니다. 그는 폐하께서 일개 영주를 배려하기보다는 평화 조약을 신경 쓸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물론 그는 틀렸지. 그 상속녀를 데인 족과 결혼시키는 것은 듀르윈 같은 이들에게 다시 전쟁을 하게 만드는 일인데, 평화를 강화하는 게 아니지. 그가 불만이 있었다면 내게 먼저 왔어야 했어. 그 상속녀를 대신할 아가씨들은 많아. 그러나 그는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살인을 저질렀어. 자네 처남이 옳다면 말야."

", 그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알프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옳은 것이 아닌지 겁이 나는군. 별로 기대되지 않는 불쾌한 일이야. 듀르윈은 다음 사절단이 보내질 때를 알기 위해 궁으로 왔어. 그리고 이 일을 알기 전에 사절단이 출발했다면 그는 다시 공격했을 걸세. 다수의 부하를 데리고 궁에 왔다는 보고를 들었지만 깊이 생각해 보진 않았지."

"얼마나 많이 데리고 왔습니까?"

"사절단 규모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숫자지. 그들은 근처에서 야영을 하더군. 거의 궁에 가까워져서 주변의 독사들을 의심하는데 느슨해졌어."

"폐하께서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알프레드 왕은 아직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변명할 수 없네. 데인 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신하들이 죽었어. 그러니 듀르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평화 계획에 반기를 들겠지. 확실한 건 그가 도착한 후 백일하에 드러나겠지. 난 진심으로 이 일을 원하지 않아. 자네 아내가 그렇게 앤리아 동부까지 빨리 갔다 오다니, 난 아마 다섯 배나 아니면 열 배는 더 걸렸을걸."

가볍게 말을 끝마치자 두 사람 다 약간은 마음이 편해졌고 세릭에게 확인할 몇 가지 사항 이외에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왕은 세릭에게 듀르윈의 심문 뒤 그에게 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처벌은 군주의 몫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렇게 말을 이어 세릭의 마음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증거 없이 자네와 그의 진술이 맞서는 것으로 되면 결투를 허락하지."

그러자 세릭의 마음이 풀렸다.

남자들이 의논하고 있는 동안 크리스텐은 사람들이 들이닥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에리카는 그녀를 돕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였다. 윈드허스트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였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곧 깨달았다.

크리스텐이 빌려준 드레스들은 에리카의 생각대로 세릭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실, 크리스텐의 모친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딸보다 훨씬 더 적대적이었지만 이유는 달랐다.

그러나 에리카는 전처럼 상황을 굴종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에는 그녀의 죄책감이 대항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비난을 받을 수 없었고 이제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의 가족들이 고집한 일이었다.

훈제실에서 둘만이 있는 기회가 생기자 그녀는 시누의 냉담한 태도에 주저하지 않고 맞섰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직도 날 미워한다면 왜 이 결혼을 말리지 않았죠?"

크리스텐은 방심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대답하는 말투는 아직도 굳은 채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난 엄밀하게 말해서…… 당신을 싫어하는 건 아냐. 그러나 당신이 오빠에게 한 짓은 용서할 수 없을 거 같아. 시간이 지나면 세릭은 그러겠지만, 적어도 여자들에 관한 한 그는 항상 그랬으니까.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그때 우리 오빠가 있었다면 세릭이 채찍질 대신 교수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난 그가 모욕으로 초래한 일에 죄의식을 느끼는 데 질렸어요. 프레야 여신의 이름으로 난 그를 풀어 주려고 변명들을 말해 주었건만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너무나 의심스러운 진실만을 주장했죠. 결국 스스로 죄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때는 무척 의심스러워 보였으니까."

"다 끝났어?"

크리스텐이 쌀쌀맞게 물었다. 에리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보통 때처럼 내 말은 차이가 없지만."

"그가 다 나았으니 그 채찍으로 맞은 것 때문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그토록 고통 받고 있었는데 당신이 악의적으로 웃었다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요?"

"부인하려 하지 마, 에리카. 그는 여러 번 나에게 말했어."

그리고 크리스텐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그의 말을 되풀이 해주었다.

"오빠는, '나의 고통을 즐거워했어. 그녀의 웃음소리를 난 절대 잊을 수 없어'라고 하더군."

에리카는 숨이 막혔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난 심문할 때 웃은 적이 없어요. 튜르게이스에게 물어 봐요. 그는 그곳에 있었어요."

"난 심문이라고 하지 않았어. 세릭은 채찍질할 때라고 하더군."

"하지만 난 그때 거기 있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죠. 내 조카가 팔만 다치지 않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난 막으려 했지만 조카한테 가야만 했어요. 난 당신이 올 때까지 그를 보지도 못했다고요."

에리카는 울부짖었다.

"당신 오빠가 그렇다고 하더군. 하지만 내가 세릭 대신 당신을 믿을 까닭이 없잖아. 상황이 다르다면 세릭과 말해.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 때문에? 그는 내가 뭐라고 하던 날 안 믿어요. 당신이 날 못 믿는 것보다 더. 하지만 말해 줘서 고맙군요. 내가 얼마나 악녀인지 깨달았으니까."

에리카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조소가 나왔다. 그녀는 당황하여 생각에 잠긴 크리스텐을 혼자 놔두고 홀로 돌아갔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거야. 물론 그건 에리카야. 하지만 눈동자에 담겨 있는 분노며, 그녀의 말은 왜 이토록이나 결백하게 들리는 걸까?'

크리스텐은 이튿날 세릭이 아내에 대해 불평을 해대지 않았다면 전날의 일을 다 잊으려 했었다. 에리카는 크리스텐과의 대화를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고, 세릭은 그녀가 무슨 일엔가 화가 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세릭은 아내에게서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방에서 다급히 나오다 복도에서 크리스텐과 거의 부딪칠 뻔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당황함을 터뜨리며 물었다.

"내가 이미 그녀가 나한테 한 걸 용서했는데 에리카는 아직도 그 작은 모욕 하나하나에 원한을 품고 있나 봐. 넌 어느 쪽이 더 심한 거 같니?"

"말해 줬어?"

크리스텐이 물었다.

"?"

"오빠가 용서했다는 거."

그 질문은 그를 당황하게 했다.

"행동으로 보여 줬지. 새롭게 시작하자고 했어. 말해 봤자 싸움만 하게 될 걸 꼭 말해야 해? 그 여잔 여전히 날 미워해. 그녀는 내가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하지 않아."

"그게 언제야?"

"뭐가?"

"올케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거."

홀로 내려가며 세릭은 그녀에게 그만 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에일 통으로 그를 데리고 가 두 잔을 따르고는 근처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해 봐."

그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뭘 말하라는 거니? 그녀는 나한테 말도 안 해."

크리스텐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떤 남편들은 그걸 더 좋아하는데."

"다른 때나 놀려, 크리스텐.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냐."

"알겠어. 하지만 이상한 건 두 사람이 결혼하고도 어떻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지 않았나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제외하더라도."

그런 뒤 크리스텐은 에리카가 계단을 내려와 그들 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세릭에게 경고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물었다.

"올케는 오빠가 그론우드에 있을 때 웃었던 걸 기억 못한다는 거 알아?"

그가 콧방귀를 꼈다.

"그녀가 부인한다고 해도 탓하지 않아. 여자잖아, 그런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 부정하는 것 외에 무얼 하겠어?"

에리카는 이 말에 그 자리에 우뚝 섰고 크리스텐은 당황하긴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태도니까 그녀가 오빠에게 말을 안 하지. 하지만 그녀의 웃음소리가 오빠를 격분하게 해 복수를 결심하게 했다며, 기억하고 있는 걸 다시 말해 줘."

세릭의 얼굴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난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단 말야. 하지만 그녀가 모욕이라고 한 걸 기억해 냈어. 그건 모욕도 아니고 그런 마음도 없었어. 난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야. 네가 그곳에 있길 바랐지만 넌 있을 리가 없었고, 대신 그녀가 있더군. 머리가 계속 아팠고, 시야는 흐렸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내가 어디에 있고 왜 족쇄를 차고 있는지 알았다가 다음 순간에는 기억이 안 났어. 난 그녀에게 침대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녀가 좋다면 그녀 것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지. 난 모욕한 게 아냐. 여자들이 항상 나한테 원하는 건 그거였는걸. 그때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어."

크리스텐은 올케의 상처받은 듯한 표정과 마치 그녀 위로 기둥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뛰어 갈 것은 예상치 못했다. 어느 쪽의 책임이든 거짓이 끝나기를 얼마나 그녀가 바라는 지와는 상관없이 두 사람에게 속임수를 쓴 것이 부끄러워졌다.

크리스텐은 세릭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꺼내지 않기로 작정했다. 에리카가 아는 것도 끔찍하니까.

 

41

에리카는 왕의 측근들이 도착해 북적거리지만 않았다면 성문을 지나 윈드허스트를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성벽 쪽으로 물러나 길을 비켜 주었다. 차가운 돌 벽에 기댄 채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주위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눈물을 참았다. 사라져 가던 죄책감은 되살아나 그녀를 갈가리 찢어 댔다.

'모욕할 의도가 아니었어. 그는 도움의 대가라고만 생각했던 거야.'

세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프레야 여신이여, 모든 것이 다 실수였고, 고열과 상처가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왜 보지 못했을까? 화를 내고 그를 더 해치는 것 대신 그를 도왔어야 했는데. 그리고 왜 그는 그녀가 그의 고통을 보고 웃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세릭은 그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난 네가 다시는 웃지 못하게 할거야'라고 했던 그의 말을 에리카는 똑똑히 기억했다.

에리카는 무언가 뜻이 있으리라 짐작했었는데,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세릭이 고열 때문에 그녀의 웃음소리를 상상하고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걸까?

'심장 없는 에리카.'

그가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면……. 진실이 아니라고 어떻게 그를 설득해야 하나.

"거기 있는 너."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랐다.

"알프레드 왕 옆에 있는 셀틱 인은 누구지?"

거만한 목소리. 남을 무시하는 데 익숙한 사람인가 보다. 그는 왕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양쪽에 한 사람씩 거느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말들, 짐마차들이 그녀 앞에 잔뜩 몰려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려고 발꿈치를 들었다.

그러나 '셀틱 인'이라는 묘사에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내 남편, 세릭. 축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는 반은 셀틱 인이고 반은 순수한 노르웨이 인예요."

"너는 양쪽 다 데인 족이냐?"

마치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욕을 들은 것처럼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기엔 너무 무디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노르웨이 인이에요,"

벽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가 말했다.

"이곳에 데인 족은 나뿐이에요."

그들에게 똑같이 무례하게 굴며 그녀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즉시 잊었다. 그녀는 이 붐비는 곳에서 어서 빠져나가야 했고 어디로 갈지 결정했다. 그러나 세릭이 안뜰에 있어 어디로 가든지 쉽게 눈에 뛸 것이다. 결국 그녀는 성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듀르윈 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성문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걸."

그는 옆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그덴을 찾아서 저 여자를 미행하라고 해. 부하들을 더 데리고 가도 되지만 절대 여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뭐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알드윈을 보내겠다고 해."

첫 번째 남자가 윈드허스트에 듀르윈과 같이 온 세 명을 찾아갔다. 듀르윈과 같이 있던 알드윈은 물었다.

"영주님, 뭐 수상한 거라도?"

"알프레드와 같이 있는 저 흑발의 바이킹을 알아보지 못하겠나? 지난달에 우리가 죽게 남겨 두고 왔으면 기억을 해야지. 오그덴은 그의 칼을 아직도 차고 있어."

"왕의 사절단 중 한 명이요? 아닐 겁니다, 혹시 쌍둥이일 수도?"

알드윈은 숨을 들이마셨다.

"알프레드가 서쪽의 일을 대충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와 죽었어야 할 놈과 함께 서 있을 때? 그렇지 않아."

"그럼 우리는 당장 떠……."

"바보처럼 굴지 마. 내가 고발당할 거라면 반드시 알아야 해. 그렇게 된다면 분명 저 바이킹일 거야. 그러니까 내가 명령하기 전에 내게 다가오지도 말아. 자넨 저 여자를 이용해 그 남자가 고발을 철회하게 해. 여자를 어디다 숨길지 알지?"

"물론입니다."

듀르윈이 끄덕였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무슨 일인지 알게 되겠지. 자네는 숨어서 듣도록 하게. 여자가 필요할지는 자네가 판단할 수 있을 거야. 믿어도 되겠지?"

"."

"좋아.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갈까?"

듀르윈은 걸어가기 시작하다가 마치 잊었던 걸 생각해 낸 듯이 뒤돌아 말했다.

", 알드윈, 만약 오늘 오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면 그 여자를 죽이도록 해."

 

듀르윈은 군중들 사이로 들어가 왕에게 다가서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눈에 띄게 했다. 그의 추측대로, 눈에 띄자마자 왕과 바이킹은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의 말과 자신의 주장을 제외하면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바이킹이었다. 결국, 왕이 누구를 믿겠는가?

그가 예상했던 대로 상황은 전개되었다. 다만 로이스 경이 색슨 어를 할 줄 모르는 바이킹의 말을 통역했고 듀르윈은 자신이 셀틱 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듀르윈의 예상대로 그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물론 그는 부인했다. 그는 박수갈채를 받을 만하게, 못 믿겠다는 듯 격분하는 척했다. 알프레드의 인상은 누구를 믿어야 될지 모르겠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결국, 증거가 없지 않은가.

그가 예상치 못한 점은 성미 급한 젊은이가 그를 한 대 쳐 쓰러지게 한 것이었다. 그는 로이스의 설명을 들었다.

"당신의 부인으로 그를 거짓말쟁이가 되었죠, 듀르윈 경. 그 이유로 세릭 하드래드는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군. 난 이런 이교도와 싸워야 할……."

"당신은 내 처남에 대해 말하는 거요. 그러니 입 조심하시오. 아니면 내 결투 신청까지 받아야 할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당신 아들의 결혼 상대였던 숙녀와 데인 족과의 결혼을 막으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난 그를 더 믿고 있는 입장이오. 당신이 폐하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난 알지도 못했어. 이보게, 최근에 궁정에 합류하기 전까지 난 아무것도 몰랐네."

"경의 말대로.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다릅니다. 이제 결투를 치러야 하니 누가 진실을 말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소?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 나겠소? 확언하건대,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을 거요."

듀르윈은 초조해 하며 떨기 시작했다.

"받아들이지, 허나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 시간이 필요해. 난 더 이상 젊지 않아."

로이스는 튜르게이스와 게릭이 콧방귀를 끼는 것을 확실히 들었다. 두 사람은 아직 마흔도 안 된 듀르윈보다 나이가 많았다. 듀르윈의 붉어진 얼굴이 그 역시도 콧방귀 소리를 들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자는 알프레드 왕이었다.

"지금부터 세 시간 뒤에 결투는 시작될 것이다. 듀르윈 경은 그 동안 다른 일을 해도 좋다. 단 내 허락 없이 윈드허스트를 떠나서는 안 돼. 그리고 이 결투 대신 몸값을 지불할 수도 없다. 그 시간 동안 자백이 없을 경우 결투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42

"아씨,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에리카는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다 고개를 돌려 기슭 위에서 서 있는 짧은 머리의 무장한 전사를 보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윈드허스트에는 많은 전사들이 있었고, 그녀가 아는 사람들이라곤 그론우드에서 같이 온 이들이 전부였다.

"누구인가?"

"오그덴입니다, 아씨. 남편께서 결투를 신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결투 전에 아씨를 보길 원하십니다. 사방으로 부하들을 보내……."

"누구랑 싸우죠? 그 도둑으로 변장했다는 듀르윈 경인가요?"

그녀는 기슭을 바삐 오르느라 이를 앙다물며 긴장한 턱과 불길하게 눈을 빛내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듀르윈 경입니다. 빨리 가시려면 저와 함께 말을 타시죠."

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빨리 가? 그녀의 심장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윈드허스트까지 뛰어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먼저 말 옆에 와 오그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그들 옆에 서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이미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를 찾았다고 알리러 가는 것이 분명했다.

"서둘러요!"

에리카는 그녀를 에스코트하려고 남은 두 명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도움 없이 말에 오르려 했다.

그녀가 채 오르기도 전에 밑에서 그녀를 밀어 올렸고 뒤로 오그덴이 올라탔다. 그들은 즉시 출발하였고, 질주하는 말은 그들의 긴급함을 알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너무 흥분해 있었다. 왜 세릭이 결투를 하기 전에 만나길 원했을까? 그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그가 드디어 그토록 그녀가 듣기 원했던 말을 할 것인가? 아니면 너무 늦어 버렸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카는 그들이 윈드허스트로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싸우는 거지? 성 안이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오그덴에게 물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대답은 그뿐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의 야영지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숲 한가운데에서 결투를 벌이는 것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으면 알게 될 터이고, 그들은 너무 빨리 달려 야영지에 도착한 것은 겨우 몇 분만이었다.

말이 갑자기 멈춰 에리카는 안장에서 떨어 질 뻔했으나 다음 순간 말 그대로 밑으로 던져져 땅에 있던 다른 남자가 그녀를 잡았다. 그녀가 균형을 잡자 마자 그의 무례함을 꾸짖으려 했지만, 오그덴이 쏟아 내는 명령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자를 묶은 뒤 구덩이에 밀어 넣어라. 다 팠겠지?"

"거의 다 됐습니다."

에리카를 잡았던 남자가 계속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그 정도면 됐어. 여자니까 그렇게 깊이 팔 필요 없어. 누가 지나가다 여자를 발견하면 안 돼. 즉시 처리해."

오그덴이 말했다.

에리카는 그녀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 날 속인 건가?"

그녀는 오그덴을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을 찾으라고 보낸 건 맞아. 하지만 네 남편이 결투를 철회하지 않으면, 넌 죽은 목숨이야."

"당신의 영주가 그렇게 비열한 인간이라면 어째서 일대 일 결투도 두려워한단 말이에요?"

"이 봐, 농담하나? 네 남편은 거인이라고 들었어. 그리고 주변에 바이킹 전사들이 많다더군. 그런 놈과 결투하는 사람은 바보야."

분노에 몸을 떨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말에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홀로 내려올 때 튜르게이스의 방에 들려 그에게 알리지 않은 것과 윈드허스트를 혼자서 나왔고 쉽게 속아 납치 자를 따라 이곳에 오게 된 것 모두가 그녀의 잘못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던질 구덩이를 서둘러 파게 하는 꼴이 되었으니. 구덩이라니! 오딘 신이여 그녀를 도우소서. 에리카는 그론우드의 지하감옥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땅을 판 것은 아닌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제할 말을 마친 오그덴은 비열한 영주에게 시킨 대로 그녀를 납치했음을 전하러 윈드허스트로 말을 향했다. 그리고 에리카는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나무들이 서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는 파낸 흔적을 없애려 바구니에 흙을 담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구덩이는 일 미터 정도의 깊이에 육십 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였다. 옆에는 같은 크기의 나무 널빤지가 보였다. 아마 구덩이 위에 널빤지를 덮고 잔디를 얹는다면, 구덩이가 있다거나 그 아래 사람이 가두어져 있으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 같았다.

"들었나?"

"."

땅 속에 엉덩이 깊이까지 몸을 빠뜨리고 서서 구덩이를 파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그럼 여길 빨리 뜨자고."

에리카를 붙잡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

"재갈로 쓸 밧줄이 필요해."

에리카는 떨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야영지에는 스무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고, 이 상황에서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했다.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그녀는 구덩이 속에서 죽게 될 터였다.

"야영하는 곳마다 구덩이를 파나요?"

에리카는 목죄여 오는 공포를 잊으려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남자는 그녀에게 절망의 말을 더할 뿐이었다.

"항상. 우리는 그것의 유리한 점을 알아. 누구도 절대 찾지 못해."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빨리 팔 수 있었죠? 오늘 아침에야 겨우 도착했으면서."

"우리가 저번 주에 잠깐 들렸을 때부터 시작했어. 듀르윈 경이 알프레드를 찾아왔을 때 너희 성에……."

'그때는 끝낼 시간이 없었겠지. 이런 빌어먹을.'

"이젠 끝냈지만, 당신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을 납치하나요?"

그는 머리를 저었다.

"보통 때는 우리가 숨기 위해서야. 이 정도 구덩이면 남자도 완벽하게 숨을 수 있지. 오후쯤 되면 추격자는 흔적도 찾을 수 없어."

"용감한 영주의 지도 아래 당신들은 도둑질과 살인까지 저지르는군요. 이제는 내가 구덩이에 들어가게 생겼구요."

그녀의 빈정거림은 결국 그 남자를 화를 나게 만들었고 그는 밧줄을 들고 온 사람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재갈을 물려!"

그녀를 묶었을 때처럼 재빨리 끝났다. 입 안에 천이 들어오고 묶이기 전에 그녀는 간신히 소리지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땅으로 밀쳐져 다리가 가슴에 닿도록 앉혀졌고, 그런 뒤 다시 묶였다. 팔을 옆구리에서 뗄 수 없을 만큼 바짝 묶은 뒤 그들은 그녀의 손을 등 뒤로 돌려 다시 한 번 묶었다. 화가 난 남자는 다른 녀석들에겐 이렇게까지 묶지는 않았다는 말로 그녀의 신경을 돋우었다.

에리카는 곧 구덩이 떨어뜨려졌고 그 위로 널빤지가 덮히더니 잔디가 씌워졌다. 더 이상 햇빛이 들어오지 않자 다른 공포가 밀려왔다. 공기는 탁하고 흙냄새가 코를 찔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점점 한기가 몰려오자 에리카는 불안과 공포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얼마나 됐을까? 만약 결투를 신청했다면 그 즉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릭이 취소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녀는 수단이었지만 무슨 소용이람? 그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할 수 없었던 복수를 듀르윈에게 해댈 것이 분명했다. 그는 복수를 원하지 않았는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선택은 뻔했다. 먼저 그의 명예를 되찾은 후,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아내를 찾겠지.

그녀는 세릭이 진짜로 그럴까 봐 너무 두려웠다. 에리카는 희망을 포기했다. 그리고 듀르윈이 다른 협박을 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그녀의 목을 자르기 위해 구덩이에서 그녀를 꺼내면? 탈출할 방도가 전혀 없는 그녀를 이곳에 그대로 두고 떠나 끝내 발견되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더 잔인하리라. 이 구덩이는 그녀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잘 알았다.

 

43

"그녀를 찾을 수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조금 뒤의 결투를 기대하며 홀 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듀르윈을 노려보며 앉아 있던 세릭이 물었다.

'듀르윈, 앞으로 살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다 찾아 본 건가?"

"전부 다."

튜르게이스가 대답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튜르게이스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이 세릭을 공포로 몰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자네는 그녀의 그림자잖나. 내가 모를 땐 자네라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항상 알아야지."

"방에서 나가는 걸 내게 말하지 않았소. 오늘 아침 나절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세릭의 커진 목소리가 로이스와 크리스텐의 주의를 끌었고 크리스텐이 물었다.

"오늘 홀로 내려온 뒤, 그녀를 본 적 있어?"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잠깐 봤어. 뜰로 가고 있더군."

그리고 그녀는 튜르게이스에게 물었다.

"세릭의 성을 살펴보았어요? 그곳으로 갈 수도 있어요."

"윈드허스트를 혼자 나갔을 리가 없소. 그렇게 멍청하진 않죠."

튜르게이스는 그럴 리가 없다면 완강히 부정했다.

"그녀가 당황해서……. 정신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크리스텐이 망설이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당황한단 말이죠?"

튜르게이스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녀는 항상 화를 내."

에리카가 있을 곳을 짐작하고 안심된 세릭은 크리스텐이 말을 꺼내기 전에 말했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르겠어?"

그리고는 로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성으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있는지 확인해 주겠어? 그녀가 안전하다고 확인되기 전까진 듀르윈과의 결투에 집중할 수 없어."

"이곳으로 다시 데려 오길 바래?"

"일찍 떠났다면 내가 결투하는 것을 모를 수도 있지. 말해 줘도 상관은 없지만 이곳에 올지는 그녀가 결정할 문제야. 관심이 없다면 억지로 보게 하고 싶지는……."

"하느님 맙소사, 제발 우리를 웃기지 말아 줘. 자네도 알잖나. 그녀는 당연히 이곳으로 올 걸세."

로이스가 웃으면서 끼어 들었다.

크리스텐의 양심이 그녀를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에리카가 떠난 이유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으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인 하나가 큰소리로 로이스를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가 그들 앞에 섰을 때 숨을 몰아쉬며 두려운 듯 말한 것은 크리스텐이 아는 것과 연관이 없었다. 그때는.

세릭만이 로이스 앞으로 온 전갈을 알아듣지 못했다. 엄숙한 표정의 얼굴들이 그를 바라보자 물었다.

"뭐야?"

로이스가 대답했다.

"전갈은 자네에게 온 거야. 하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을걸."

"말해 봐."

"아내를 다시 보고 싶으면 듀르윈을 고발한 것을 실수라며 자네의 주장을 번복하라는 군. 왕은 이 사실을 몰라야 하고."

세릭은 한 손으로 하인의 멱살을 잡고는 들어 올렸다.

"누가 이 전갈을 전했지?"

로이스는 색슨 어로 다시 물었고, 하인이 덜덜 떨며 한 대답을 듣고는 세릭에게 말했다.

"그를 놔 줘. 그는 누구인지 몰라. 누군가 뒤에서 다가와 말을 하고는 사람들 사이로 자신을 떠밀었다는군. 돌아보았을 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대."

"하지만 누가 보냈는지 뻔한잖나."

세릭은 말을 하고는 홀 쪽으로 걸어갔다.

로이스가 쫓아와서 그의 팔을 잡았지만 옆으로 밀쳐졌다. 듀르윈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일어났지만 아무 생각은 없었다. 세릭은 그의 목을 두 손으로 잡고 졸랐다. 그를 듀르윈에게 떼어 내는 데 다섯 명이 달라붙어야 했고 그는 그 다섯 명을 뿌리칠 동안만 그를 놔 주었다. 그리고 다시 멱살을 잡으려 했다.

듀르윈에게 다가가는 세릭을 막은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정신차려라. 뭐가 그리 급한 거니?"

게릭이 다그쳤다.

"이 자가 에리카를 납치했어요. 내가 결투를 철회하고 왕에게 실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죽이겠다고 위협해 왔어요."

세릭이 화를 참지 못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성을 떠난 적이 없잖아?"

게릭은 다시 물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할 부하들은 많으니까."

그제서야 듀르윈이 거의 울부짖었다.

"이 이교도가 이번에 뭐라고 날 모함하는 거지?"

세릭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게릭은 알아듣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 아들과의 결투를 받아들여야 할 거요. 왜냐하면 내 며느리를 납치하는 것으로 당신이 죄를 스스로 증명한 셈이니까. 그것 때문에 내 아들이 결투를 철회한다면 내가 신청하지."

듀르윈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전부 들을 정도로 가까이 있던 알프레드 왕을 겁먹은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함을 쳤다.

"이건 다 모함이야. 만약 바이킹의 아내가 납치되었다면 그건 내 명령이 아냐."

그때 로이스는 세릭을 잡아 홀 쪽으로 밀었다.

"그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저잔 죽으면서도 무죄를 주장할 거야. 하지만 자넨 바보같이 그를 공격해 녀석에게 빌미를 준 셈이야. 성문부터 닫아. 그놈의 부하가 누구이든 당장 떠나려 할 테니까."

로이스가 낮게 말했다.

세릭은 로이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성문 쪽으로 달려갔고 로이스가 뒤따랐다. 그러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튜르게이스가 그의 말과 커다란 도끼를 챙겨 들고 앞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가슴이 아닌 머리로 행동하는군. 어서 가. 부하들을 모아 수색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내 부하들만 따를걸세."

로이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듀르윈의 심복들이 성 안에 남아 있으니 에리카를 구하는 것 외엔 서두를 게 없었다. 그러나 세릭이 계속 서둘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고맙군."

세릭은 튜르게이스가 다가오자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거인은 제할 말만 할뿐이었다.

"당신은 지금 제대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감정적이요. 그놈이 아씨가 있는 곳을 말했소?"

"아니. 분명 이 근처에 놈들의 야영지가 있을 거야. 내가 아는 건 그뿐이야. 로이스가 부하들을 풀어 찾을 거야. 누구든지 야영지를 먼저 찾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를 부르러 올 거야."

세릭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오. 내가 직접 찾아봐야겠소."

두 사람 다 말 위에 올라타면서 튜르게이스가 말했다.

"그럼 같이 가지."

 

44

야영지는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 나무들이 많아 위장이 손 쉬었을 텐데도 그들은 숨지 않았다. 이곳은 왕의 일행들이 온 방향인 윈드허스트의 서쪽으로 누군가 찾기를 원했다면 제일 먼저 닥칠 곳이었다.

튜르게이스는 먼저 발견하고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뒤쫓던 세릭이 에리카를 구출하려는 초조한 마음에 그를 앞질러 나갔다. 야영지에 있던 사람들은 달려오는 두 사람을 보고는 싸울 태세를 갖추며 칼을 뽑아 들었다. 바이킹의 체구에도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숫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에 이길 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세릭과 튜르게이스는 그들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급한 것은 에리카를 찾는 것이지 비겁한 듀르윈의 부하들의 목숨이나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세릭은 야영지에 숨겨져 있을 에리카를 찾아보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칼뿐이었다. 그리고 시체들이 쌓여만 갔다.

세릭은 자신과 똑같은 숫자의 남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튜르게이스에게 소리쳤다.

"적어도 한 놈은 살려 둬.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해."

"댁이나 그렇게 하시오. 피에 굶주린 내 도끼는 어중간이란 없으니까."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세릭은 그를 공격하던 나머지 세 명 중 두 명을 단칼에 해치웠다. 나머지 한 녀석은 자신만 살아 있는 것을 깨닫고는 뒤로 슬슬 꽁무니를 뺐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한 채.

"그녀가 어디 있는지 말하면 살려주겠다."

그 남자는 세릭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도망을 치려 했지만 그의 동료 시체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필요하다면 그를 마구 패서라도 대답을 들을 작정이던 세릭은 그를 잡으려고 재빨리 다가갔지만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릭이 그를 뒤집었을 때 남자의 이마 한 가운데 두꺼운 철퇴가 박혀 있었다. 더 이상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세릭은 즉시 튜르게이스 쪽을 바라보았으나 거인은 이미 자신의 몫을 다 끝내고 그 거대한 도끼에 묻은 피를 앞에 누워 있는 죽은 이의 가슴에 닦고 있었다. 세릭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의 심장은 칼싸움을 할 때보다 더 빨리 뛰었다. 에리카는 이곳에 없었다. 그들밖에는 아무도. 그녀를 숨겨 두었을 만한 마차도 없었다.

그는 신음하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며 튜르게이스에게도 살피라고 외쳤다. 몇 분 뒤, 그는 희망을 버린 채 땅에 무릎을 꿇었고 공포와 분노가 그의 배 속을 쥐어뜯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갈망은 눈덩이처럼 커져 갔고 이제는 두렵기까지 했다. 그녀에 대해 느끼는 그의 감정들은 다 엄청났지만 지금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도대체 당신을 어떻게 한 거지?"

세릭은 하늘에다 소리를 질렀다.

에리카는 세릭의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녀가 밧줄을 뒤틀어 움직이자 어깨와 머리의 흙이 떨어졌다. 벌레들이 그녀 위로 기어다녔다. 이름을 모르는 벌레였지만 그 때문에 목이 쓰라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소리를 질렀지만 힘이 빠져 더 이상 소리칠 수가 없었다. 재갈이 물린 입에선 머리 위의 나무판자와 잔디를 뚫을 만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세릭은 그녀를 구하려고 여기에 있었지만 그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가십시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소."

튜르게이스는 세릭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어디로 가잔 말야? 여기에 있는 게 분명해. 어딜 찾아야 하지?"

세릭에게선 짐승의 울부짖음이 쏟아졌다.

"듀르윈은 아무것도 실토하지 않을 거요. 하지만 윈드허스트에는 그 혼자가 아니요. 전령을 찾아내 그에게 대답을 들어야 하오. 입을 열지 않으면 목을 분질러 놓겠어."

그들은 윈드허스트로 올 때와 똑같은 속도로 되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로이스를 만났다. 세릭이 로이스에게 말했다.

"야영지는 찾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 그러니까 자네 부하들이 계속 찾아보게 해."

"어디를 가겠다는 건가?"

"찾으러 다니는 것보다 어디에 숨겼는지 알아내는 게 빨라."

"듀르윈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걸. 그의 유일한 희망은 무죄를 주장하다가 죽는 것뿐이야."

로이스는 확신할 수 없어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전한 하인은 알겠지. 아직은 윈드허스트에 있을 테니, 튜르게이스가 자백을 얻어낼 거야."

세릭은 우겼다.

"튜르게이스를 전갈을 전한 이 앞에 세우면 그자는 심장마비로 죽을 거야."

로이스는 꼭 농담이라고는 할 수 없는 투로 말했다.

세릭은 튜르게이스를 위해 다시 노르웨이 어로 말해 주었다. 거인은 툴툴거릴 뿐이었다. 세릭이 로이스에게 말을 건넬 때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있었다.

"대답을 알아낼 거야, 어떻게든. 자네는 내 곁에서 통역을 해줘야겠어. 내가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을 때 듀르윈의 부하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면 난 벌써 에리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을 거야. 그녀석은 도망을 쳐 결국 죽고 말았어."

그들이 윈드허스트에 도착해 뜰로 들어갔을 땐, 아침보다 두 배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홀 근처에서 듀르윈은 양쪽에 경호원 한 명씩을 두고 서 있었다. 세릭이 그쪽으로 말을 몰고 가자 경호원들은 경고의 표시로 칼자루로 손을 옮겼다.

"알프레드 왕은 그의 죄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아, 세릭. 왕이 해결하도록 둬."

세릭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 작자는 왕 몫이야. 무슨 일이야?"

로이스 역시 전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아내를 큰소리로 찾았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가 달려왔다.

"그녀를 찾았어요?"

크리스텐이 먼저 물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크리스텐이 재빨리 대답했다.

"듀르윈이 부하들을 데려왔다면, 알프레드 왕은 그들이 누군지 알길 원해요. 하지만 그들이 포기하지 않아 한 사람씩 가려내고 있는 중이에요. 저쪽에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벌써 왕의 사람으로 가려진 사람들이에요. 아직 판가름이 안 난 사람들은 왕의 편임을 증명해야 해요."

"얼마나 더 걸릴까?"

"지금 막 시작했어요. 이미 가려진 사람들은 저쪽으로 보낼 거예요."

그녀는 뜰 먼곳을 가리켰다.

"우리 하인들도 가려내고 있었어요. 당신이 이제 왔으니 도와줘야 해요."

"이럴 필요가 없어."

로이스가 말하며 군중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세릭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기, 가죽 조끼를 입고 있는 놈.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듀르윈이 지난 주에 왔었을 때 그와 같이 있었어. 나에게 일 분만 줘, 그럼 다 찾아낼 테니."

세릭이 남자를 바라보더니 그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저 놈이 내 칼을 가지고 있어."

"확실한 증거로군. 묻기부터 할 텐가 아니면 먼저 어디를 부러뜨리기부터 할 건가?"

그들은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목숨은 살려 준다고 해. 에리카만 찾으면 피 한방울도 흘릴 필요가 없어. 내 칼 역시 가져도 돼."

세릭이 대답했다. 로이스는 싱긋 웃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더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자네 언제부터 그녀를 사랑했나?"

"오딘 신만이 아시겠지."

세릭은 한숨을 쉬었다.

오그덴은 병사가 계속 밀어 대자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왕이 직접 왕실의 시종들을 비롯해 영주들과 귀부인들을 가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가려진 영주들과 귀부인들은 자신의 하인들과 신하들을 가려냈다. 남겨진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벌써 한 재수 없는 도둑은 왕의 근위대에게 끌려갔다.

그는 공포로 인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고,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증명할 길이 없었다. 저 젠장할 마녀 크리스텐이 증거를 대라고 제안을 해 아무리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더군다나 바이킹이 로이스 영주와 함께 돌아온 것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발견하곤 점점 다가오자 두려움은 금세 공포로 변해 갔다. 이제 끝장이었다. 그는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지난달에 시작한 일을 이제야 마치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처음에 임무를 철저히 해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였다.

'저 바이킹은 일행들과 함께 죽어야 했어. 지금 내 손으로 그를 처리하리라.'

오그덴은 세릭이 바로 앞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칼을 뽑아 세릭의 칼로 그를 공격했다. 바이킹을 의도적으로 모욕할 작정으로, 그 자는 자신의 칼에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세릭은 오그덴의 첫 번째 칼놀림을 피하고서 칼을 뽑아 들었다. 오그덴은 계속 칼을 휘둘렀지만 그때마다 세릭의 칼이 막아냈다.

"포기해라. 그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 말하면 살려 주지."

로이스 영주가 그에게 소리쳤다.

오그덴은 공격을 멈추지 않으며 소리쳤다.

"거짓말 마. 그가 날 죽이지 않는다면 왕이 날 죽일 거야.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 내가 망할 데인 족을 도와줄 것 같은가? 그녀는 너희들 코밑에 있지만 절대 찾을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릭의 칼자루가 그의 머리를 쳤다.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로이스는 그의 검을 뺏어 세릭에게 내밀었다.

"정말 현명한 짓이군. 놈은 에리카가 어디 있는지 실토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정신을 차리면 다시 물어 보기로 하지. 하지만 더 알아 낼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군."

"알아냈어요?"

튜르게이스와 크리스텐이 다가오면서 그녀가 물었다.

"우리 코 아래 있지만 절대 찾을 수 없을 거라고만 했어. 그게 실마리야."

"우리 코 아래라면 여기이거나 아니면 너무 가까워 발이 걸려 넘어지는 곳일 수도 있어요. 모든 창고며, 궤짝, 심지어는 에일 통까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보게 했어요. 그녀는 성에는 없어요."

크리스텐이 말했다.

"그녀가 뭐라고 하는 거요?"

튜르게이스는 세릭에게 물었다.

세릭은 그를 위해 실마리까지 설명해 주고는 아무리 힘들어도 색슨 어를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텐은 그의 짜증에 웃으며 노르웨이 어로 말하자, 대화에서 소외되는 사람은 로이스로 바뀌었다.

"윈드허스트를 제외하면 성 주변밖에 안 남아요. 야영지가 어디 있었죠?"

크리스텐이 물었다.

"숲 근처"

"그렇다면 동굴을 찾았는지도 몰라요."

"아니면 구덩이던가."

세릭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론우드의 지하감옥은 사방이 꽉 막힌 곳이었어."

"처음엔 그냥 구덩이였소. 이 근처에 그런 곳이 있소?"

튜르게이스가 물었다.

"내가 알기론 없어."

세릭이 대답했다.

"그들이 파지 않았을까?"

크리스텐이 큰소리로 말했다.

처음에 세릭과 튜르게이스는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이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45

구덩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시체들을 치우고 땅을 살피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리고 야영지 바깥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잔디가 덮인 구덩이를 튜르게이스가 찾아냈다. 그리고 세릭이 에리카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었고, 그 모습에 놀라기는 튜르게이스나 세릭 모두 마찬가지였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그녀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야 했다. 결국 튜르게이스가 세릭의 발을 잡아 몸을 굽힐 수 있게 해 두 사람을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다행히, 그에게는 무척 쉬운 일이었다.

땅에 내려놓기 전, 그녀의 의식이 돌아와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릭은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그녀를 묶고 있던 모든 밧줄을 끊으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당신이 무사하다니, 신들이여 감사합니다. 당신 괜찮아? 만약 그 놈들이 당신을 해쳤다면 내 그놈들을 다시 죽일 거요. 한 놈씩. , 당신을 너무 사랑해.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없어. 이번처럼 다시 혼자 가 버리면 맹세하건대 다시 쇠사슬을 채우겠어."

그들 뒤에서 튜르게이스가 헛기침을 했다.

"밧줄과 재갈을 풀어 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요."

세릭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도감으로 그는 거의 실없이 지껄여 댔다. 그리고 에리카는 재갈 사이로 황급하게 말하려는 중이었다.

그는 두 번 만에 재갈을 끊었다. 그녀의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재갈을 풀기가 무섭게 재빨리 옷을 잡아당겼다.

"도와줘요."

그녀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벗겨 줘요!"

"?"

"내 옷! 벌레가 우글거려요!"

그녀의 새된 비명에 세릭은 서둘러 옷을 벗겨 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옷 속엔 두 마리의 벌레가 있었지만 에리카는 연신 온몸을 찰싹찰싹 때리며 긁어 댔다. 세릭은 그녀를 안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내 머리!"

에리카가 진정하고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는 침착하게 달래며 그녀의 손이 갈 수 없는 곳을 살펴 주었다.

비로소 자신이 안전하다는 걸 알았을 때 에리카는 세릭에게 쓰러져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렸다. 세릭도 그제서야 그녀가 나체란 걸 알았다. 그가 튜르게이스를 바라보았을 때 거인은 그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땅에 주저앉아 에리카의 옷들을 안팎으로 샅샅이 살펴 벌레를 없애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바이킹 거인이 앉아 여자 옷에서 벌레를 잡고 있는 모습이라니. 세릭은 웃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늘 튜르게이스는 평생 동안 벗이 될 이의 우정을 얻어낸 셈이었다.

에리카가 옷을 다시 입자 그녀에 구출과 자신을 발견한 것에 정신이 돌아왔다.

"당신 나 때문에 결투를 취소했어요?"

그녀는 얼떨떨해 하며 세릭에게 물었다.

그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분했다.

"내가 흥분하지만 않았어도 결투를 할 수 있었는데."

"듀르윈을 맨손으로 공격했어."

튜르게이스가 덧붙였다.

"그들이 날 죽이려고 아무도 보내지 않았어요?"

"튜르게이스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성문을 닫았지."

그녀는 거인에게 걸어가 그를 안았다.

"항상 당신을 신뢰할 수 있어요, 친구."

"언제나."

"내가 혼자 몰래 나왔다고 그리 오랫동안 화내지 않을 거죠?"

"그리 오랜 아냐."

세릭은 조심스럽게 그들을 갈라놓고 에리카를 독점하려는 듯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에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얼버무리듯 변명했다.

"윈드허스트로 빨리 돌아가야 해."

튜르게이스는 그냥 큰소리로 웃었다. 세릭은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윈드허스트로 돌아갈 때, 여분의 말이 있음에도 세릭은 그녀가 자신과 함께 말을 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그럴지 의심스러웠다.

세릭의 가족 전원이 성문 근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이스가 듀르윈의 나머지 부하들을 골라내, 뜰은 이제 조용했다. 듀르윈의 부하들은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다.

"저 사람이 듀르윈이에요?"

에리카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를 알아?"

"당신과 알프레드 왕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당신이 누군지 물었어요. 하지만 자신을 밝히지는 않더군요. 그땐 내가 당황하고 있어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죠."

세릭은 기억이 나자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을 바보처럼 행동하게 만든 그 당황에 대해서 내게 이야기를 해야 돼."

", 그래야 해요."

그녀는 그에게 전혀 당황해 하지 않으며 약속했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았는데 날 어떻게 찾았죠?"

"크리스텐이 짐작해 냈어."

에리카는 시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크리스텐이 마주 미소 지었다. 침묵의 사과가 전해졌고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친구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제 그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세릭의 마지막 말이 모두를 놀래켰다.

"우리가 이곳으로 온 건 에리카가 무사하다고 알리려는 거였어요. 우린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를 잃을 뻔한 것을 극복하려면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그전까지는 그녀를 내 눈앞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이 없으니까 당분간 저희를 볼 수 없을 겁니다. 진심으로, 오늘같이 충격적인 날에서 내 자신을 회복시켜야 해요. 제 생각엔 침실에서 적어도 일 주일은 나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세릭이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으면서 말을 해 에리카의 얼굴은 활활 타올랐다. 게릭과 로이스는 폭소를 터뜨렸다. 브렌나는 그들을 놀려 댔다.

"만일을 위해 내가 동행해야겠구나. 휴식을 하는 동안 네가 제대로 보살핌을 받는지."

"제 정신이 온전하길 원하신다면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농담이 몇 번 더 오고갔고 에리카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으나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성에 튜르게이스와 함께 도착하자 그 고요는 다시 깨졌고 골다는 그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이번엔 피로 부츠를 더럽혔군요."

골다는 코웃음을 쳤다.

"깨끗이 좀 할 수 없나요, 바이킹? 아니면 날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요?"

튜르게이스는 여느 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골다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번쩍 들어 어깨에 걸머졌다. 그리고 마치 비명을 지르며 그의 등을 마구 때리는 여자가 없는 것처럼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무슨 조치를 해야 할까?"

세릭이 에리카에게 물었다.

에리카는 화들짝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를 웃게 만드는 일이 그에겐 심각한 일인 모양이었다.

"아니, 방해 안 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요. 튜르게이스가 그녀를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해치진 않을 거예요."

세릭이 씩 웃었다.

", 그런 거군."

"난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럴 필요도 없지."

"당신이 저런 식으로 날 유혹해도 절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그녀는 빨리 그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런 충동을 느끼면 당신이 이미 허락했다는 것을 명심하지요."

그가 과장되게 실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 해야 할 것 같아."

세릭은 몸을 숙여 그녀를 들어 어깨에 멨다. 그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몸부림을 치지도 않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

"이럴 필요 없어요."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애무하였다.

"하지만 내가 즐거운 걸."

에리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실은 곧 밝혀질 테고,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남편의 팔에 안긴 것이 아닌 어깨에 짊어진 채로 그들의 침실로 향하는 중이었지만 상당히 낭만적이었다. 그들이 튜르게이스의 침실을 지나갈 때, 즐거운 웃음소리만이 들렸다. 에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친구의 일을 기뻐하면서 혼자 미소 지었다.

침실에 들어선 세릭은 에리카를 바로 서게 한 뒤, 즉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시범해 보였다. 그녀의 생각은 그와 몸이 겹쳐지고 그의 손길을 느끼자 까맣게 잊혀졌다. 그녀는 그의 키스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가운을 벗기려 했을 때 그녀는 손으로 그를 막았다.

세릭의 한쪽 눈썹이 의문으로 올라갔으나 에리카는 갑자기 부끄러워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어떻게든 그가 틀린 것이라고 그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가 그녀를 구덩이에서 꺼낼 때 자신이 분명히 들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리카는 그가 인정할지 분명치 않았다. 그 빌어먹을 벌레들 때문에 그녀는 너무도 격앙되어 있어서 그가 하는 말에 열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질문으로 모든 게 명백해질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물었다.

"당신 아까 날 사랑한다고 했나요?"

"내가? 기억이 안 나는걸."

"그럼 내가 착각했나 보군요."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선을 따라 내려갔다.

"혹시 당신이 그 말을 듣고 싶은 거 아냐?"

약간 몸이 굳어졌다.

"당신이 말한 것이 아니라면 난 절대 듣고 싶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계속 날 놀릴 생각이라면,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난……."

그녀가 으르렁거렸다.

"나한테 또 소금을 뿌리려고?"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는 정말 구제 불능이다. 그녀에게는 그토록 중요한 일에 심각해 질 수 없다니.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세릭이 가만히 있는 것을 에리카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혼란스러워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본 그녀는 웃음을 갑자기 멈췄다.

"왜 그래요?"

"틀려, 당신 웃음소리. 내가 기억과 달라. 다시 한 번 웃어 봐."

그녀는 무슨 말인지 담박에 알아들었다. 그들은 결국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녀가 바라지 않아도.

"억지로 웃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갑자기 에리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제발, 에리카. 당신은 몰라."

"아뇨, 난 알아요. 당신은 내 웃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건 당신 열 때문이죠, 세릭. 당신이 헛소리를 들은 거예요. 난 당신이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 그곳에 있지도 않았어요. 다른 일로 딴 곳에 있어야 했죠. 튜르게이스에게 물어 보세요."

세릭이 무릎을 꿇고 그녀의 다리를 감싸 안기 전에 에리카는 그의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보았다.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하는 소리에 그녀의 가슴은 찢어졌다.

"아니, 일어나요. 열 때문에 당신이 헛소리를 들은 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왜 말해 주지 않았어?"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죠. 어제야 당신 여동생이 말해 주었어요."

"내가 그렇게 당신에게 심하게 대했는데 어떻게 날 용서할 수가 있지?"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노력했죠, 세릭. 당신은 복수를 하지 않았어요. 날 해칠 수가 없었어요."

"난 당신에게 족쇄를 채웠어."

"내 죄책감이 그 족쇄를 견디게 했죠. 저항하고 싶은 마음보다 그게 더 컸어요."

"당신을 굴욕스럽게 만들었어."

", 그랬죠, 하지만 당신이 보상하게 될 거예요."

"아무 거나. 말만 해."

"아니, 당신이 말해요. 날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서 겁이 날 정도야."

에리카는 목이 메었고 그의 말로 환희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죄의식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자 그녀 역시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남자예요. 당신은 날 미워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죠. 당신은 나에게 고통을 주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당신의 천성이 당신을 실패하게 한 건 미안하지만 대신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대범한 남자를 내게 주었어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해요, 세릭. 그러니까 다시는 나에게 용서를 빌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니까."

세릭은 갑자기 씩 웃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가 숨이 막혀 비명을 지를 때까지 세게 껴안았다.

"우리는 어울리는 한 쌍이야, 서로에게 미안한 게 많지만 당신과 난 너무 행복해. 당신은 지금 우리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큰소리로 웃었고 에리카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물론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앞으로의 그녀의 인생은 웃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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