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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구속 2

Bollnow 2024. 3. 4. 05:22

5

다음 날 아침 클레어는 자그마한 향기 주머니를 코에 대고 자신의 초토화된 홀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사이사이 흩트려 놓은 향기로운 향조차도 넘쳐 흐르는 실내 변기와 쏟아진 포도주, 더러운 몸에서 나는 냄새들을 감출 수는 없었다. 홀을 깨끗이 청소하려면 몇 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 방을 사람 사는 곳답게 만들려면 그 전에 환기를 시키고 신선한 향초를 한아름 가져다 놓아야 할 것이다. 클레어는 혐오감으로 코에 주름을 지으며 찡그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자고 있는 남자들을 치우기 전까지는 하인들도 홀 청소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님들의 코 고는 소리를 무시하면서 자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걸어가 겨우 현관 계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서 있던 젊은 경비병이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클레어는 향기 주머니를 떨어뜨려 치마 위에서 달랑거리게 했다.

"당신은 개러스 경의 부하인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저는 래널프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당신 눈은 어떻게 그렇게 맑아 보이죠, 래널프? 다른 사람들은 한창 잠에 취해서 깨우려면 굉장한 수고가 들 것 같은데요."

래널프는 미소를 지었다.

"홀에서 아직까지 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니콜라스 경의 부하들입니다. 개러스 경을 따르는 우리들은 모두 일찌감치 일어나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지금 마구간에 있을 겁니다."

"개러스 경의 부하들은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고도 무사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 건가요?"

래널프는 킥킥대며 웃었다.

"헬하운드는 자기 부하가 술에 잔뜩 취해서 아침에 제때 일어나지 못하고 자기 할 일도 못하는 걸 절대 금하고 있지요."

클레어는 그 규칙에 찬성했지만, 래널프의 말이 갑자기 새로운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개러스 경은 거친 주인인가요?"

래널프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명예로운 기사십니다. 제 말은 그분은 자기 밑의 사람이 복종하지 않거나 게으름 피우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행동들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하시거든요."

클레어는 약간 안심했다. 그 경비병은 진지해 보였다.

"난 여기에 거친 주인이 있는 건 참을 수 없어.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대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영리하고 사악한 사람보다는 니콜라스 같은 바보가 훨씬 낫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가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래널프에게 웃어 보였다.

"지난 밤에 특별히 심각한 문제는 없었겠지요?"

래널프는 눈을 끔뻑거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미소에 현기증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을 확 붉히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다친 사람도 없고요?"

"술기운이 떨어지려고 할 때 울리치 경이 두세 사람 머리에 큰 잔을 휘두르려고 한 적은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도 심하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개러스 경은 절대로 피를 보는 일은 없게 하라고 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래널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피는 한 방울도 흘려지지 않았죠."

클레어는 개러스가 자신의 명령을 존중했다는 사실에 흡족했다. 이건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징조였다.

"개러스 경이 고의적으로 니콜라스와 그의 부하들을 고주망태로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그게 이 문제를 다루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영리하군요."

클레어는 더 활짝 웃었다. 시번에서의 그 위험하던 밤마다 자기가 니콜라스에게 써먹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수법이었다. 그녀의 미소가 킥킥거리는 웃음으로 변해 갔다.

"개러스 경은 과연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아주 교활하군요."

래널프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들은 기껏해야 홀 안 가득히 술판을 벌이는 사내들일 뿐이죠.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에겐 하나도 어려운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가을 골턴 시에서 살인 강도들을 다루던 모습을 보셨어야 해요. 그건 정말 볼 만한 광경이었지요. 개러스 경은 우리한테 함정을 파라고 시켰고, 살인자들이 그 속으로 떨어졌을 때 우리는……."

"대단히 신나는 일이었겠군요."

클레어는 재빨리 끼어들어 말을 막았다. 오늘 아침 그녀는 개러스의 피에 굶주린 솜씨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최근까지 폭력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 온 남자와 곧 결혼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급적이면 하고 싶지 않았다. 댈런이 앞마당의 반대편에 있는 부엌에서 나타났다. 그는 막 구어낸 빵을 크게 베어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아씨."

댈런은 클레어를 보자마자 외쳤다. 그는 마지막 남은 빵조각을 입 속으로 밀어 넣고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댈런도 잘 잤어. 아침 식사로 숨이 막히는 일이 없길 바라."

"물론이죠, 아씨."

댈런은 서둘러 입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 튜닉의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쓰윽 문질렀다.

"간밤에는 편히 주무셨나요?"

"잘 잤어, 고마워."

"대단하군요."

댈런은 어둡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씨가 떠난 뒤 홀에서 일어난 끔찍한 소동에서 아씨를 지켜 준 성인들한테 감사 기도를 올려야겠네요."

클레어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끔찍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홀이 오늘 아침 그다지 유쾌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경 정도야 예상했던 일이야."

댈런의 갸름한 얼굴에 엄숙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씨처럼 품위 있고 우아한 숙녀분이라면 틀림없이 그 일에 충격을 받고 공포에 떨었을 겁니다. , 그건 정말이지 지옥 저 깊은 곳에서부터 곧장 솟아올랐다고나 해야 할 광경이었어요."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 정도로 나빴을 리는 없을 텐데."

"아씨는 그곳에 안 계셨잖아요. 그건 성인이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죠."

댈런은 가는 어깨를 곧게 폈다. 그의 두 눈은 분개하여 번뜩거렸다.

"어젯밤의 그 무시무시한 사건이 헬하운드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제가 아씨한테 상기시켜 줘야 합니까?"

"무슨 일인가, 음유 시인?"

개러스가 층계 위로 걸어 올라와 클레어 뒤에 서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건가? 자네라면 시간을 보낼 만한 보다 그럴싸한 일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댈런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흥분으로 인해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다음 순간 그는 냉정을 되찾아 화를 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클레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씨."

", 그래."

클레어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녀는 댈런이 서둘러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곧 자신의 남편이 될 남자를 상대하기 위해 정신적인 무장을 단단히 했다.

자신의 남편.

이 생각에 그녀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좋은 아침이오."

개러스가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클레어는 미소 띤 표정으로 몸을 돌려 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비록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긴장으로 약간 숨이 차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래널프와 이미 이야기를 나눈 후였기 때문에 개러스의 눈에서 니콜라스를 술독에 빠뜨리려 애쓴 지난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에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헬하운드가 마신 술은 대부분 테이블 밑으로 사라진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건 확실히 그녀가 시번 킵에서 사실상의 죄수가 된 것을 깨달았던 그 위험한 첫날밤에 써먹은 수법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날 밤 니콜라스에게 곤드레만드레가 될 정도로 술을 먹인 후 그에게서 빠져 나왔다. 그런 다음 탑의 위층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 올라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클레어는 이후의 3일을 거기서 보내며 니콜라스의 분노와 위협, 그리고 문 위로 쏟아지는 쿵쾅거림을 모두 무시했다. 클레어가 반드시 자신과 결혼해야 된다고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낙담한 니콜라스가 사냥을 떠나 버린 날 오후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그 당시 그녀를 잡아 둔 사람이 헬하운드였다면 아마도 도망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개러스는 오늘 아침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그가 과시한 강하고 매끄러운 힘은 그의 지성과 결단력만큼이나 그 자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가 살아서 그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잠깐 부질없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부친과 오빠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녀는 결코 윅크미어의 개러스와 결혼하는 건 물론이고 그와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절대로 그를 남편감으로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개러스도 상속녀가 아닌 그녀에게 흥미를 갖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한 여성에게 기묘한 술수를 부렸다. 개러스는 밑에 받쳐 입은 진회색 튜닉 위로 회색빛 튜닉을 걸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갑옷은 전혀 입고 있지 않았지만 지옥의 거울은 여전히 그의 허리께에 칼집에 든 채로 채워져 있었다. 크리스털 칼자루는 그 주인의 눈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클레어는 이 칼이 부츠나 튜닉처럼 개러스가 매일 몸에 착용하는 용품의 일부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신중한 시선으로 댈런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신의 음유 시인과는 얘기를 좀 길게 나눠 봐야 할 것 같소."

"댈런한테 악의는 없어요. 그는 나를 걱정해 주는 것뿐이에요."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우리 식구들 중 누구에게도 위협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고 믿어도 되겠죠?"

"당신의 귀염둥이 시인이 몇 가지 예의 범절을 배워 둔다고 해가 되지는 않을 거요. 그는 단순히 당신을 보호하려고만 하는 건 아니오. 내 생각엔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질투라."

클레어의 입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벌어졌다.

"그렇소, 그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소."

클레어는 얼굴을 붉혔다.

"고맙군요. 하지만 사실 난 질투하는 남자들은 겪어 본 경험이 없어요."

"그건 희귀한 병이 아니오. 댈런만 한 나이 때는 많은 남자들이 그런 열병에 걸리니까."

"열병이라고요?"

"사랑의 병 말이오. 그 징후는 아주 쉽사리 알아볼 수 있소. 그 병에 걸리면 젊은이들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변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이의 옷자락이라도 숭배하려고 들지."

"알겠어요."

"댈런은 분명히 자기의 순수하고 젊은 마음을 다 바쳐 당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고 당신의 관심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도 원치 않소."

"확실해요? 난 그의 감정이 그런 강렬한 성질의 것이라곤 눈치 채지 못했는데요."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했다시피, 이건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오. 극복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

클레어는 가슴 밑으로 팔짱을 꼈다.

"당신도 방금 말한 그런 종류의 열병에 걸려 본 적이 있나요?"

"내 인생에도 보답받지 못하는 정열에 정신없이 빠져든 적이 잠깐은 있었소.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했지."

개러스의 눈이 빛났다.

"난 그 정열엔 아무런 이익도 없다고 결론 지었고 곧 그런 고통에 싫증을 냈소. 난 멀리서 숙녀를 숭배하는 일에는 재능이 없소."

"안됐군요."

클레어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개러스가 우아한 사랑과 순수한 열정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그녀는 이 결혼이 그녀에게만큼이나 그에게도 일종의 사업과 같은 성질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도 내가 지금 내 나이에 사랑의 열병 같은 것에 걸릴 거라곤 기대하지 않겠지?"

개러스는 상냥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그의 크리스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그가 다시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그녀의 축 늘어져 있던 정신을 바짝 곤두세웠다. 이 결혼에선 결코 정열적인 연인을 기대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그녀가 바랄 수 있는 건 남편될 사람이 지적인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기회를 포착하기로 했다.

"당신은 농담으로 하는 얘기겠지만 개러스 경, 나는……."

"절대 농담이 아니오."

그녀는 혼란으로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말씀하셨죠?"

"결코 농담삼아 하는 얘기가 아니라고 했소."

그녀는 그 말을 무시했다.

"말도 안 돼요.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당신이 한 마지막 말은 우리의 결혼식이 거행되기 전에 내가 말해 두고 싶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는군요."

"괜찮다면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니콜라스와 그 부하들이 깨어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 좀 있소."

개러스는 앞마당 건너편으로 흘끗 시선을 던지고 한 손을 들어 올려 울리치의 주의를 끌었다.

"하지만 개러스 경, 내가 당신한테 하려는 얘기는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당신의 홀에서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려는 거요."

클레어는 그 말에 마음이 산만해졌다.

"좋아요, 그건 맞는 소리예요. 그럼 당신이 그 일을 맡겠다는 건가요?"

"그럼 그 일밖에 무슨 할 일이 더 있겠소? 이 소동을 일으킨 건 바로 나요."

그녀는 웃음을 삼켰다.

"그래요, 당신이었군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난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정말 관대하고 훌륭한 숙녀시군."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기쁘네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의 토론은 좀 기다려도 될 것 같아요. 오늘 오후 정도면 시간을 낼 수 있겠어요?"

"당신 일이라면 언제라도 시간을 낼 수 있소."

"홀 청소에 매달려 있을 때는 빼고 말이죠?"

"그렇소."

그 순간 마부 한 사람이 거대한 군마 가운데 한 마리를 끌고 앞마당을 가로 질러갔다. 그 짐승의 말발굽이 돌 위에 쩡쩡 울리는 소리를 냈다. 말과 마부 뒤에는 건초가 가득 담긴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따르고 있었다. 괴로운 듯한 신음 소리가 홀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런 젠장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썩어빠질 시끄러운 소리야?"

니콜라스가 개러스 뒤쪽의 그늘진 문가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앞마당을 내다보면서 짧은 수염이 난 뺨 위를 아무 생각 없이 긁어댔다.

", 당신이군 그래, 클레어."

클레어는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악취를 모른 척하려고 애썼다.

"좋은 아침이네요, 니콜라스 경."

"그런가? 난 몰랐는걸."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몸이 좀 불편하신 듯하군요."

"맞소."

니콜라스는 인상을 썼다.

"머리가 꼭 어떤 바보가 창 찌르기 연습 과녁으로 사용한 것처럼 지끈거리오."

"나한테서 동정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클레어는 대꾸했다.

"어젯밤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했으니 당신은 일말의 동정도 받을 자격이 없어요."

니콜라스는 개러스를 간청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축복과 함께 그녀는 자네 걸세. 부디 날 저 아가씨의 날카로운 혀로부터 좀 보호해 주게나."

개러스는 클레어를 흘끗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이제 막 절벽을 따라 상쾌한 산책을 나가려던 참이었소."

"내가요?"

클레어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소."

개러스가 말했다.

"당신이 돌아올 때쯤이면 당신의 홀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을 거요."

클레어는 망설였다.

"어쩌면 산책도 그렇게 나쁜 생각은 아닐 거예요. 아침에는 종종 산책을 하곤 했거든요. 마침마을에 갈 일도 있어요."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은자 베아트리체에게 갖다 주겠다고 약속한 물건을 가져 와야겠군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좋도록 해요."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실례해도 좋소. 거참 시원하게 없어지는군."

클레어는 옆을 지나치면서 그에게 눈을 흘겼다.

"정말이지 니콜라스 경, 당신은 어젯밤 한 행동에 대해 창피한 줄 알아야 해요."

"제발이지 나한테 설교는 하지 마시오."

니콜라스가 말했다.

"어젯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 이 두통이 충분한 벌이 될 거요. 헬하운드, 당신의 선택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윅크미어의 헬하운드가 아니에요."

클레어는 강력하게 말했다.

"내일이면 디자이어의 영주, 개러스 경이 될 거고, 당신도 그에게 그에 걸맞은 존경을 표시해야 해요."

개러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클레어가 마치 괴상하고 낯선 생물이나 되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

니콜라스는 양손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나한테 빽빽거리는 것만 멈춰 준다면 뭐든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를 불러 주겠소, 아가씨."

"난 빽빽거리지 않아요."

클레어는 그의 뒤로 빙 돌아 층계로 향했다.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오."

클레어는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휘어진 층계를 반쯤 올라가다가 그녀는 니콜라스가 남아서 결혼식에 참가할 건지 아닌지 물어 보는 걸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그와 그의 부하들이 하루를 더 보내게 된다면 가엾은 에드거에게 미리 경고를 해주어야 했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그녀는 서둘러 계단을 도로 내려갔다. 그녀는 악취를 풍기며 코를 골고 있는 한 남자를 피해서 그늘진 홀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갔다. 개러스와 니콜라스는 아직도 문가에 서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소리에 발을 멈춘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오, 모든 성스런 것들에 맹세코 난 하루 더 남아 결혼식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소."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녀는 당신 거고 그녀를 갖는 기쁨을 누리길 바라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건 너무 관대한 말이군."

개러스가 말했다.

"그녀가 지참금으로 멋지고 풍요로운 장원을 갖고 있다는 건 사실이고, 나 역시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자네한테 지게 된 걸 조금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있소. 클레어를 부인으로 맞는 남자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곧 알게 될 거요."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개러스가 대꾸했다.

"그렇지. 하지만 오늘 아침 난 그 부분에 관한 한 영원히 감사한다는 걸 고백하고 싶소."

니콜라스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하느님이 똑똑한 여자한테서 날 구해 주셨거든."

"또는 이 특별한 여성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해야겠지."

"문제는 그녀가 어린 소녀였을 적부터 이 장원을 운영해 오고 있다는 거요."

니콜라스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명령하는 데 아주 익숙해졌지. 내 경고하겠는데 헬하운드, 그녀는 자기가 쥔 고삐에 손대는 남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거요."

"그건 그 고삐에 손대는 남자가 누구냐에 달려 있는 거요."

"아니, 당신은 자기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 모르고 있군."

니콜라스는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난 그녀를 얻으려고 교묘한 계획을 하나 실행해 본 적이 있었소."

"그랬소?"

"난 관대한 사람이니 당신한테 내가 직접 하려고 했던 충고 하나를 해주겠소."

"그게 뭐요?"

"일단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나면 그녀한테 씨를 심어 놓을 때까지 낮이고 밤이고 잠자리를 같이 하시오. 그녀가 아이를 뱄다는 확신이 들면 이 섬을 떠날 수 있지."

"떠난다고?"

개러스는 호기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더러 여기서 디자이어나 잘 돌보게 하는 거요. 그건 그녀가 잘 하는 일이니까 문제없지. 당신은 몇 년이고 맘껏 그녀의 혀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보낼 수 있게 되는 거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게 당신이 클레어에게 쓰려고 했던 끝내 주는 계획이란 거요?"

마침내 개러스가 이렇게 물었다.

"그녀에게 아이를 갖게 한 다음 이 섬을 떠난다?"

"그게 효과가 있을 거요.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서 반만이라도 당신이 똑똑하다면 헬하운드, 내 충고를 명심하는 게 좋을 거요."

니콜라스의 말은 가혹한 것이었다. 클레어는 그런 말들이 끼치는 고통이나 당혹감을 무시하는데 지칠 정도가 됐지만, 이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입구 쪽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이로군, 니콜라스."

개러스는 조용히 말했다.

클레어는 약간 표정이 밝아졌다. 미래의 남편이 감싸 주는 소릴 듣는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이보시오, 당신이 클레어를 더 잘 알게 될 기회를 가진 다음에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 따지는 게 나을 거요."

니콜라스가 투덜거렸다.

"저 작은 하피(여자의 얼굴과 몸에 새의 날개를 가진 탐욕스러운 괴물)의 혀에 당할 만큼 당한 후에 시번으로 날 찾아와 피신처를 구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내가 아내한테 도망쳐 피신처를 구한다고 해도 시번 킵에는 절대로 안 갈 거요."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니콜라스는 홀로 돌아가려 했다.

"상관없다면 난 내 부하들을 깨워서 여길 떠날 생각이오."

"떠나기 전에 당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소."

니콜라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 그게 뭐요?"

"클레어가 한달 전 시번 킵에서 가졌던 방문건과 관련된 거요."

"그게 어떻다고?"

"나는 그녀가 거기 머물던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잘 알고 있소.

당신이 그녀를 억지로 붙잡아 두었다는 것도."

"그건 단순히 친구간의 방문이었을 뿐이오. 아가씨한테 직접 물어 보시오."

"내가 아는 한 그건 납치였소. 그래서 정확히 하자면 니콜라스, 그에 따른 응분의 대가가 있을 거요."

클레어는 얼어붙었다.

"하느님 맙소사."

니콜라스는 진심으로 기가 막힌 것 같았다.

"그 방문 건 때문에 나한테 도전하겠다는 거요?"

"오늘은 안 하오. 클레어가 디자이어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고 나 역시 당분간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으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때와 장소를 정해 당신과 이 문제를 해결할거요."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소."

니콜라스는 버럭 화를 냈다.

"그 아가씨한텐 손끝 하나 대지 않았소."

"어젯밤 당신이 풍긴 인상은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어젯밤 그렇게 한 건 당신이 그걸 사실로 믿으면 싸움을 포기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난 이번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소. 생각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난 술에 취해 있었소. 그건 다 술 때문이었지."

"클레어를 납치해서 시번에 4일 동안이나 가둬 놓고선 손도 대지 않았다는 말을 내가 믿어 줄 거라곤 기대하지 마시오."

"당신은 아직 클레어를 잘 모르고 있군, 그렇지 않소?"

니콜라스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맘대로 하라지.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서서 당신과 말다툼을 해야 하는 거지? 당신이 첫날밤을 보내면 저절로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그렇소."

개러스가 말했다.

"그렇게 될 거요."

그의 어투는 자신의 신부가 처녀라는 걸 발견하게 되길 기대조차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클레어는 할 말을 잃었다. 니콜라스가 먼저 한 말들은 상처를 주었지만, 그녀가 명예를 잃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개러스의 침묵의 추측은 그녀를 분노케 했다. 심지어 그는 그녀에게 직접 물어 볼 정도의 예의도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소문을 최종 판결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두 뺨이 달아오르고 위가 뒤틀렸다. 니콜라스에게선 많은 것을 기대해 본 적이 없었지만, 개러스는 이성과 얼마간의 예의를 갖춘 남자라고 믿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분명히 그녀는 잘못 알았던 것이다. 클레어는 그늘진 홀 밖으로 나와 햇빛이 비추는 계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개러스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 방으로 뭘 가지러 간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모두 다 들었어요."

클레어는 니콜라스는 완전히 무시하고 개러스에게 냉정한 시선을 고정시켰다.

"니콜라스 경이 내가 시번에 있는 동안 내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고 한 건 진실이에요."

"그렇소?"

"그래요."

클레어는 아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니콜라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발, 아가씨. 내 불쌍한 머리도 좀 신경을 써 주시오."

클레어는 몸을 빙그르 돌려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성 허미언의 작은 손가락에 걸고 말하건대, 당신의 그 아픈 머리에 대해서 투덜대는 걸 그만둬 주시겠어요? 당신 머리가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 길바닥에 나뒹굴든 말든 난 상관없어요."

니콜라스는 움찔하며 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나 없이 두 분이서 이 즐거운 대화를 계속하도록 이만 물러가야겠소. 난 시번에 있는 내 집으로 떠나겠소. 거기에 도착하면 즉시 성당으로 직행해서 날 이 결합으로부터 지켜 준 데 대해 성인들께 감사 기도를 올릴 거요."

"좋아요. 그렇게 하시죠, 니콜라스 경."

클레어는 그의 비겁한 퇴장에 한층 더 분통이 터졌다.

"그런 거라면 나도 역시 구원받은 셈이죠. 당신이나 개러스 경처럼 고귀하고 의로운 두 기사 분들의 관심을 끌게 된 건 순전히 내 땅과 향수 제조술 덕분이라는 것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니콜라스는 신음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막았다.

"클레어,"

개러스는 상냥하게 말했다.

"이 얘기는 보다 은밀한 장소에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녀는 그에게 몸을 돌렸다.

"누가 듣게 되는지 난 상관없어요. 이 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시번 킵에서 4일을 보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건 대단한 비밀거리도 못 되죠."

개러스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좋소, 아가씨."

"난 당신한테 정열도 헌신도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어떤 맹세를 하면 날 믿어 줄 거라 기대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맹세하건대, 니콜라스 경은 내가 시번에 있는 동안 나와 동침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처녀든 아니든 그건 우리의 결혼에 아무 의미도 없소."

개러스는 달래듯 말했다.

"이 장원에 오기 전부터 난 당신이 시번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소."

"그래서 최악의 경우를 의심했군요, 그렇죠?"

"니콜라스가 당신을 자기 집에 붙잡아 두는 동안 결혼을 강요할 속셈으로 당신을 취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건 당연한 논리일 뿐이오."

"어째서요? 당신이 그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인가요?"

"진정해요."

개러스가 말했다.

"점점 흥분하고 있잖소."

"내가요? 정말 대단하군요."

클레어는 절망으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은 지금 내가 시번의 니콜라스와 나란히 누운 적이 없다는 나의 엄숙한 맹세를 들었어요."

"세상에 대고 당신의 덕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소."

개러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앞마당에 의미 있는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내일 밤이면 당신이 한 말의 증거를 직접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렇지 않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알 수 없을 거예요."

클레어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충격의 침묵이 사람들 위로 내려앉았다. 앞마당을 가로질러 군마를 끌고 가던 마부가 고삐를 홱 젖히는 바람에 큰 종마가 뒷발로 서서 울부짖었다. 개러스는 판독이 불가능한 눈으로 클레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오, 아가씨?"

"그건 당신에게 내 모든 덕성에 관한 한, 무엇에서건 아무런 증거도 줄 용의가 전혀 없다는 소리예요."

옆구리에 늘어뜨려져 있던 클레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리고 그건 개러스 경, 내가 오늘 오후에 의논하겠다고 말한 바 있는 바로 그 주제로 돌아가죠. 우린 그 토론을 지금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듯하군요."

"안 되오, 지금 여기선 그 문제를 다룰 수 없소."

개러스는 차가운 태도로 그녀를 응시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소란을 부리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럼 어때서요? 원래는 전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얘기를 할 의도는 없었다는 건 인정하겠어요."

그녀는 그에게 얼음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존중해 줄 생각이었죠."

"내 자존심이라고?"

"그래요."

클레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당신은 내 홀의 계단에서, 바로 이 자리에 서서 다른 남자와 내 명예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는 것 같지 않더군요.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의 명예를 걱정해 줘야 하죠?"

"클레어, 말이 좀 지나치군."

"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곧 디자이어의 영주가 될 개러스 경, 내 말 잘 들어요.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 다 나의 진심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당신이 원하고 나의 보호자가 주장하듯, 우린 내일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겁니다."

"그렇소, 우린 그렇게 할 거요."

"하지만 우린 내가 당신이 내게 적합한 남편이라고 만족하기 전까지는 이 결혼을 완성하지 않을 거예요."

클레어는 승리에 가득 찬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당신은 자신이 아내로서의 나의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전에는 나와 결혼의 침대를 같이 공유할 수 없을 겁니다."

말다툼을 즐기려 모여든 구경꾼들은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울리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는 번쩍거리는 대머리를 흔들었다. 곁눈질로 클레어는 댈런의 뚱했던 표정이 뭔가 부풀어오르는 듯한 만족감으로 변해 가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어수선한 속삭거림이 개러스의 부하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클레어는 그들이 다시 한번 내기 돈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오늘같이 이런 좋은 구경거릴 보게 되다니, 내 머리가 아플 가치가 있군 그래. 결국 결혼식을 보기 위해 남아 있어야겠는걸."

"난 반대요."

개러스가 말했다.

"부하들을 불러 모아 떠날 준비를 하시오. 당신은 이미 충분히 많은 문제를 일으켰소. 오늘 아침 나에게 더 이상의 슬픔은 준다면 당장 지옥의 거울을 가까이서 구경시켜 주리다."

니콜라스는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항복의 몸짓으로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걱정할 것 없소, 헬하운드. 내 부하들과 난 벌써 시번으로 돌아가는 중이니까. 내 오늘은 당신과 싸울 만한 컨디션이 아니오. 다음 기회라면 모를까."

그는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 위대한 디자이어의 주인님은 그보다 먼저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복수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어서 사라지시오."

"떠나기 전에 한 마디 더 하겠소."

니콜라스가 말했다.

"장차 치를 전쟁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안다면, 당신의 아가씨한테 어디서 그런 비결을 알았느냐고 물어 보시오."

"난 이미 당신한테 충분한 경고를 했소, 니콜라스."

개러스는 칼자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경고하겠소."

"아니, 아니. 그녀에게 레이먼드 드 콜빌에 관해 물어 보시오. 그는 그녀에게 제조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용감한 기사요. 단순한 인간일 뿐인 우리들은 누구도 그와 대적할 희망도 가질 수 없소. 심지어 당신도 마찬가지요, 헬하운드. 이 사람은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도 쓸 줄 아니까."

그리고는 아주 통쾌하게 웃어댔기 때문에 니콜라스는 자기 숨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의 부하들 중 몇 명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의 등뒤에 섰다. 그들도 모두 히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의 아가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면,"

니콜라스는 말을 계속했다.

"설명하라고 날 쳐다보지 말고 레이먼드 드 콜빌을 찾도록 하시오."

동요와 떨림이 클레어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는 개러스와 눈이 마주치자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얻게 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뒤늦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선언을 다시 주어 담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또한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치르려고 하는 전쟁은 처음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더 긴 여정이 될 것 같소."

개러스가 말했다.

클레어를 걱정시킨 건 그의 상냥한 듯한 몇 마디의 말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그가 보여 준

미소였다.

 

 

 

6

"울리치 경은 개러스 경이 미소 지을 때가 가장 위급한 상황이라고 말했어."

시원한 아침 바람이 조애너의 망토를 날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말끔하게 빚어 넘긴 머리에 망토의 모자를 덮어쓰고 걱정스런 눈길로 클레어를 바라다보았다.

"그의 얘기론 헬하운드는 좀처럼 즐거워하지 않고 어쩌다 어떤 상황에서 유쾌해 보일 때에는 아무도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

"개러스 경이 다소 이상한 즐거움을 즐긴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클레어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오렌지색 망토의 모자를 뒤로 젖혀서 느슨하게 빗은 머릿결이 바람에 흐트러지게 놓아두었다.

"울리치 경은 헬하운드가 웃을 때는 뭔가 무시무시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고 하던데."

"그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예요. 울리치 경은 언제나 나쁜 일만 경고해 대는 은자 베아트리체와 좀 비슷한 것 같아요."

클레어는 오렌지와 노란 색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작은 가죽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해 보려는 듯 살짝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특별한 향이 풍기게 만든 향기 주머니를 늘 지니고 있었다.

"울리치 경은 개러스 경의 가장 가까운 친구야. 그는 자기가 수년간 개러스 경을 위해 일해 왔다고 말했어. 하지만 울리치는 헬하운드가 즐거운 듯해 보일 때조차도 신중하게 행동한다고 하던걸."

클레어는 초조하게 조애너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친구는 분명히 불편한 표정으로, 평상시의 침착한 그녀답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불안한 상황이었고 인생에 있어서 이 특별한 순간에 클레어는 이 이상 불안한 마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맑게 유지하고 논리적인 견해로 문제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장원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도 잊지 말아야 했다. 절벽을 따라 마을로 이어지는 산책은 그녀의 복잡한 생각들을 안정시켜 줄 훌륭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비록 이것이 개러스의 제안이긴 했어도, 실제로 매일 아침 이른 산책을 하는 것은 클레어의 습관이었다. 그녀는 단지 산책을 하도록 명령받은 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개러스가 명령하는 일에 익숙하다는 건 분명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보기엔,"

클레어가 말했다.

"당신과 울리치 경은 개러스에 관해 좀 친밀한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요."

조애너는 놀라서 뺨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울리치 경은 굉장히 예의바른 기사분이야. 윌리엄도 그를 아주 좋아하고."

"나도 눈치 챘어요."

조애너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 아침도 윌리엄은 여전히 어제 울리치의 군마를 탔던 일을 얘기하고 있어. 난 내 아들이 군마나 갑옷 같은 것들에 너무 관심을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클레어는 햇빛이 비치는 바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기사에 관해 윌리엄의 관심은 조애너에겐 걱정거리였다.

"당신이 뭘 두려워하는지 이해해요. 하지만 윌리엄과 같은 성격의 소년을 개러스의 군인들과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윌리엄이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쏟도록 감시한다면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

"그래요, 어쩌면요."

그러나 클레어는 어떤 것도 군대의 거칠고 활달한 분위기에 끌리는 소년의 호기심을 퇴색시킬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유일한 오빠를 마상 시합의 유혹에 잃었기 때문에 조애너의 걱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그러나 또한 윌리엄에 대한 조애너의 과잉보호가 어린 소년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클레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신선한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낭떠러지 꼭대기에 융단을 깔 듯 펼쳐져 있는 자주색과 분홍색의 라벤더를 사랑했다. 그녀는 디자이어를 대륙과 갈라놓고 있는 좁은 해협의 건너편을 바라다보았다. 시번 킵의 어두운 탑이 해안가의 작은 마을 뒤로 솟아 있었다. 그 광경에 그녀는 혐오감으로 몸을 떨었다.

"난 개러스 경이 남편감으로 적합한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들어요."

그녀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 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겠죠. 어쩌면 니콜라스 경을 참아내야 하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조애너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당신은 그를 다룰 수는 있었을 거야, 클레어."

"개러스 경도 다룰 수 있게 될 거예요."

클레어는 낙관적으로 말했다.

"그 문제에 관해 너무 확신하진 말아야 할 것 같아."

조애너는 그녀를 면밀히 훑어보았다.

"정말 그가 스스로 적합한 남편임을 증명할 때까지 침대에 들여놓지 않을 작정이야?"

"이미 말했다시피, 그를 알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요. 결혼 침대에 같이 들어가기 전에 내 남편이 될 사람과 어느 정도 상호 이해가 필요해요. 그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울리치 경은 그래 봤자 절대로 아무 소용 없을 거라고 하던걸. 그는 당신이 그런 식으로 헬하운드한테 도전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해.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심정이고."

클레어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개러스 경이야말로 절대로 내 명예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가 당신이 더 이상 처녀가 아닐 거라고 추측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 랑드리의 서스턴 경은 그에게 그 납치 사건과 당신이 어떻게 4일 동안 시번에 머물렀는지에 관한 소문을 말해 줬을 거야."

"서스턴 경이 개러스에게 어떤 소문을 들려 줬든 난 상관 안 해요. 헬하운드는 내게 그 일의 진실 여부를 물어 봤어야 해요. 제멋대로 추측하는 짓 따윈 해선 안 되는 거였어요. 게다가 그는 불쌍한 니콜라스한테 복수를 맹세할 이유도 없어요."

조애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불쌍한 니콜라스라고 부르는군. 지난 달 당신이 시번 킵에서 도망쳐 왔을 당시에는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잖아."

"그는 역겨운 사람이에요. 내가 그와 결혼하지 않게 된 걸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오늘 아침에는 그에게 약간 미안한 감을 느끼는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내가 당신이라면 니콜라스한테 쓸데없이 동정심을 낭비하진 않을 거야."

조애너가 말했다.

"그런 감정은 자신을 위해 아껴 두도록 해. 당신은 헬하운드한테 도전한 사람이니까."

"오늘 아침 개러스에게 결혼 침대에서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말한 게 실수라고 생각하나요?"

"그래, 그건 아주 심각한 실수야. 난 단지 당신이 치를 대가가 너무 비싸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클레어는 조애너와 함께 절벽의 오솔길을 떠나 마을로 걸어 돌아오는 내내 그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마을의 좁은 길은 이미 아침의 소란함으로 붐비고 있었다. 클레어와 조애너가 은자의 거처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은자로부터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클레어는 두 개의 창문 중 하나를 감싸고 있는 돌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베아트리체."

그녀가 은자를 불렀다.

"우리가 당신의 기도를 방해했나요?"

"그래, 하지만 상관없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아가씨."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자연스럽게 주름이 잡힌 베일과 검은색 옷을 입은 베아트리체가 창가에 나타났다. 그녀는 불길한 예언만 하는 50대의 여자치고는 덩치가 큰 편이었다. 10년 전 과부가 된 후 오랫동안 주교에게 수녀가 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 위해 노력한 끝에 그녀는 은자의 생활로 은퇴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아주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방의 두 번째 창문은 교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베아트리체가 기도 때마다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광경을 보고 예배 예식을 따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그녀가 대부분의 시간을 클레어와 조애너가 서 있는 다른 쪽 창문에서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소문이 강물처럼 흘러나온다는 창문이다.

"안녕하세요, 베아트리체."

조애너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못해."

베아트리체는 우울하게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야. 내일은 더 나빠질 거야. 내 말을 잘 들어 디자이어의 클레어, 당신의 결혼식 날은 지옥의 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얼음같이 차가운 회색 연기에 휩싸이게 될 거야."

"믿기 어려운 걸요, 베아트리체."

클레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즘 날씨는 아주 맑고 따뜻하기만 한 걸요. 폭풍이 올 거라는 얘기는 전혀 들어 보지 못했어요. 난 곧 결혼해요.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내 행복을 빌어 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야."

베아트리체는 투덜거렸다.

"내 말을 들어, 아가씨. 헬하운드가 신부를 차지하고 나면 이 아름다운 섬에 격한 죽음이 찾아들 거야."

조애너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베아트리체, 당신은 그런 일을 알 수 없어요."

", 하지만 난 알아. 징조를 봤거든."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징조요?"

베아트리체는 더 가까이 붙어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바르톨로뮤 수사의 유령이 땅 속에서 다시 걸어 나왔어."

조애너는 놀라서 숨이 막혔다.

"베아트리체,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클레어도 대꾸했다.

"당신은 유령을 믿지 않잖아요, 베아트리체."

"난 내가 아는 걸 믿을 뿐이야."

베아트리체는 우겨댔다.

"그리고 난 그 유령을 봤다구."

"불가능해요."

클레어가 말했다.

"날 의심하면 당신이 위험해져, 아가씨. 바르톨로뮤 수사가 이 수도원 벽안에 다시 나타날 때마다 곧 누군가 험하게 죽는다는 건 오랫동안 알려진 얘기야."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베아트리체, 바르톨로뮤 수사와 마우드 수녀 전설은 아무 가치도 없고 아이들한테나 옛날 얘깃거리가 될 뿐이에요. 아이들한테 연장자를 조심하라고 겁주는 데 쓰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닌 얘기잖아요."

"하지만 난 직접 그 유령을 봤다구."

"그게 언제였는데요?"

"지난 밤 자정이 막 지났을 때였어."

베아트리체는 십자가 긋는 흉내를 냈다.

"달빛이 밝았기 때문에 그가 검은색 수도복을 입고 있는 걸 분명히 볼 수 있었지. 두건을 머리 위로 뒤집어써서 살이 하나도 없는 해골 바가지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 그는 누대 앞에 서 있었고 마우드 수녀는 나타나지 않았지. 그는 곧장 문을 지나쳐서 그녀를 찾으러 나섰어."

"밤에는 문이 잠겨 있어요."

클레어는 인내심 있게 말했다.

"그리고 마우드 수녀는 죽은 지 50년도 넘었다구요. 신의 은총이 그녀의 영혼과 함께 하길."

"유령한테는 어떤 문이라도 열리는 법이야."

베아트리체는 단언하듯 말했다.

"분명히 그는 흑마술을 사용해 문을 열었을 거야. 난 그가 마당에 나타나서 정원을 통과해 지나가는 걸 봤지. 그런 다음 사라졌어."

"당신은 아마 자면서 꿈을 꾸고 있었겠지요, 베아트리체."

클레어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바르톨로뮤 수사는 감히 이 수도원 마당으로 들어서지 못할 거예요. 마가렛 수녀 원장님과 맞서야 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수녀 원장님은 고작해야 유령 하나 때문에 성가시게 되는 걸 참지 않으실 걸요."

"농담으로 아는군, 디자이어의 아가씨. 하지만 곧 진실을 알게 될 거야."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와 당신의 결혼은 바르톨로뮤 유령의 잠을 깨웠어. 언제나 그래 왔듯이 죽음이 곧 뒤따를 거야."

"오늘밤 이리로 다시 와서 바르톨로뮤 수사와 길게 얘기를 나눠 봐야겠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오늘 아침 개러스 경과 나눈 대화 같은 것 말이야?"

조애너는 눈썹을 동그랗게 치켜 올리며 물었다.

"미래의 남편에게 했듯이 이 유령에게도 자기 자리를 알려줄 생각인 거야?"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우린 몇 년 동안 장원을 넘보는 남자들의 문제를 그럭저럭 해결하면서 지냈어요. 지금도 귀찮은 남자를 하나 더 다루는 것뿐이에요."

베아트리체는 우울하게 머리를 저었다.

"우리 모두 화를 당하게 돼, 아가씨. 헬하운드는 지옥의 구덩이에 갇혀 있는 악마들을 불러들였어. 바르톨로뮤 수사는 첫 번째일 뿐이야."

"개러스 경이 자기가 통제하지도 못할 유령은 불러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클레어는 허리띠에 매달린 향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여기 이 크림을 받아요, 베아트리체."

"조용히, 그렇게 크게 말하지 말아, 아가씨."

베아트리체는 창문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거리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 다음 클레어의 손가락에서 향기 나는 크림 단지를 잡아채듯 받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겼다.

"내 크림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세속의 유혹에 빠졌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이 마을의 여자들 중 절반이 이걸 사용하거나 내가 만든 다른 크림을 사용해요."

"이봐, 사람들은 아무거나 떠들어대고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야."

베아트리체는 단지를 찬장 위에 잘 올려놓고는 다시 창문으로 되돌아왔다.

", 저기 앤 수녀가 가네요."

조애너는 한 손을 들어 이제 막 누대를 빠져 나온 수녀들 중 한 사람의 주위를 끌려고 했다.

"잠깐 실례할게, 클레어. 새로운 자수 디자인에 관해 그녀와 몇 마디 할 얘기가 있어."

"그러세요."

클레어는 조애너가 앤 수녀와 수다를 떨기 위해 서둘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베아트리체는 조애너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곳까지 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 봐, 클레어 아가씨."

"?"

클레어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일 당신이 파멸을 향해 걸어가기 전에, 내 당신한테 작은 선물 하나와 충고 한 마디 하지."

"난 결혼하는 거지 파멸하는 게 아니에요, 베아트리체."

"여자에겐 그 두 가지 중 선택권이 거의 없을 경우가 많아. 하지만 지금은 여기냐 저기냐 하는 문제가 아니야. 당신의 운명은 부친이 죽던 날 깨끗이 봉해지고 만 거야. 그 일에 대해선 어떻게 달리 방법이 없지."

베아트리체는 창문 사이로 작은 물건을 밀어내었다.

", 그럼 이 닭피가 든 병을 받아."

"닭피라고요."

클레어는 놀라서 유리병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걸 가지고 뭘 하라는 거죠?"

"결혼식 날 밤에 이걸 침대 가까이 숨겨 놔."

베아트리체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헬하운드가 잠에 골아떨어지고 나면 병을 열어서 그 피를 시트 위에 뿌리라구."

"하지만 성 허미언의 이름에 걸고 도대체 왜 그런…… ."

클레어는 자신의 안색이 진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내 미래의 남편은 내가 더 이상 처녀가 아닐까 봐 겁내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내가 아는 한 그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문제지만, 남자들은 생각이 좀 틀리지."

베아트리체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기회를 잡지 않지? 이 방법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고 헬하운드도 화를 내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클레어는 등뒤의 길에서 울려퍼지는 말발굽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개러스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탄탄하게 생긴 종마를 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말은 아니었다. 그는 클레어의 작고 하얀 말도 끌고 오고 있었다.

"성 허미언이시여, 우릴 보호하소서."

베아트리체는 낮게 소곤거렸다.

"헬하운드야. 서둘러, 어서 그 병을 숨기라구."

베아트리체는 열린 창 사이로 손을 뻗쳐 닭피가 든 작은 유리병을 클레어의 허리끈에 매달린 주머니 안으로 떨어뜨렸다.

"베아트리체."

", 결혼 첫날밤에 살아남고 싶거들랑 꼭 내 말대로 해야 해, 아가씨."

"결혼 첫날밤에 살아 남는다라."

기가 막힌 클레어는 은자를 마주 쳐다보았다.

"허미언의 코에 걸고 말하건대, 아무리 당신이 하는 말이라도 이건 너무 지나쳐서 참을 수가 없군요."

"난 바로 아가씨 목숨을 걱정하는 거야. 듣자 하니 아가씨가 남편 될 사람한테 그를 신혼 잠자리에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하던데."

"발 없는 말이 빨리도 가는군요. 그 말을 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당신 말은 개러스 경이 내가 그를 침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날 죽일 거라는 건가요?"

"그는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야."

베아트리체는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는 위험해, 클레어 아가씨. 그의 권리를 부인해서 분노를 사는 일이 없도록 해. 결혼 첫날밤 그를 거절하지 말라구."

"하지만 베아트리체……."

한쪽 눈가로 클레어는 개러스가 말을 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여유롭게 말에서 내렸다.

"만약에 그를 거절하면 그는 당장에 칼을 뽑아 들 거야."

베아트리체의 눈은 음침했다.

"환상 속에서 그를 봤지. 피가 침실에 흘러넘칠 거야. 난 그 피가 아가씨의 피가 될까 봐 겁이 나. 내 충고는 아가씨가 당연히 할 의무를 한 다음에 이 닭피를 쓰라는 거야."

개러스는 클레어가 서 있는 창문을 향해 걸어왔다.

"이 대화에 끼어들어도 되겠소?"

"당신한텐 조금도 재미가 없을 텐데요."

클레어는 결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아트리체가 결혼에 대한 충고를 해주던 참이에요."

"내가 당신이라면, 난 은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결혼에 대한 충고에는 신경 쓰지 않을 거요. 그녀는 그 부분에 관해 아주 제한된 시야밖에 갖고 있지 못할 테니까."

"베아트리체는 단지 도와주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지."

베아트리체가 툴툴거렸다.

"요즘 세상엔 젊은이들한테 충고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도무지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니까."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요."

개러스는 클레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 신부를 가르치는 건 내가 하고 싶은데."

베아트리체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발, 헬하운드, 결혼 첫날밤에 당신의 신부한테 자비를 베풀도록 해요. 그녀에겐 이끌어 줄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 역시 없지. 그는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자기 딸을 보살피지 못했어요.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건, 그건 아가씨 잘못이 아니란 걸 명심해 둬요."

"베아트리체, 제발 그만해요."

클레어는 화가 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의 충고로 그 정도면 충분해요."

"피와 죽음."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은신처 깊은 곳으로 물러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피가 흐르고 격렬한 죽음이 찾아올 거야. 난 그 유령을 봤어."

개러스는 깊은 관심을 갖고는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갈수록 일이 흥미진진해지는군. 내 최후의 라이벌은 유령인 거요?"

클레어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놀리지 말아요. 베아트리체는 상상력이 좀 왕성한 것뿐이에요. 당신은 여기서 뭘 하는 거죠? 니콜라스와 그 부하들이 떠나는 걸 감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울리치가 그 일을 잘 처리할거요. 난 당신을 찾으러 왔소."

"왜요?"

"당신한테 이 장원의 안내를 부탁하려고."

"."

클레어는 거절할 만한 즉각적인 변명거리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이것은 확실히 합리적인 요청이었다.

"하지만 난 가능한 한 빨리 성으로 돌아가 봐야 해요. 내일이 오기 전까지 해 둬야 할 일이 많거든요."

"울리치와 당신의 집사가 모든 걸 다 잘 알아서 할거요. 게다가 난 당신의 친구 조애너가 한창 바쁜 걸 보고 왔거든."

개러스가 말했다.

"이리 와요."

그는 클레어의 팔을 잡아 그녀의 하얀 말 쪽으로 이끌었다.

"난 디자이어를 속속들이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까지 말을 타고 가는 데는 15분이 걸렸다. 가는 도중 내내 침묵이 흘렀다. 클레어는 개러스의 조용하고 표정 없는 얼굴을 몰래 흘끔흘끔 훔쳐보며 그의 기분을 알아내려고 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화를 내고 있지는 않다고 결론지었다. 그녀는 초조해 해야 할지 아니면 감명 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자신을 완벽히 통제하는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향수와 그 조제 분량을 결정하는지 말해 줘요."

개러스는 자신의 말을 멈추게 하고 봄꽃들로 뒤덮인 들판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 세부 사항들을 다 듣고 싶은가요? 지루해질 텐데요."

개러스는 디자이어의 완만한 언덕과 계곡들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꽃들과 풀의 화려한 장관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 속에는 냉정한 소유욕과 날카로운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내가 지루해 하겠소? 난 이 섬의 안전과 보호를 책임질 의무가 있소.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하오."

클레어는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훌륭하군요. 하지만 혹시라도 지루해지면 바로 알려주세요. 전 좋아하는 화제에는 지나치게 열정적이 돼서 말이 많아진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거든요."

그녀는 처음에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알려고 하는지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녀의 일에 관심을 가져 준 남자는 레이먼드 드 콜빌이 유일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개러스가 전혀 지루해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지적인 질문은 베아트리체가 유령과 뽑혀진 칼에 대해 쏟아놓은 헛소리들을 모두 잊게 만들었다.

"그 다음엔 꽃과 풀들을 모아서 제조법대로 말리거나 기름에 재워 두죠."

그녀는 한참 뒤에야 결론을 내렸다.

"기본적인 향유를 만드는 데도 엄청나게 많은 꽃잎이 필요해요."

"그런 기름들은 당신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향수와 비누의 원료가 되는 거요?"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들을 여러 종류의 재료에다 섞어 다른 몰약이나 크림을 만드는 거예요."

"멋진 일이로군."

클레어는 수줍게 웃었다.

"난 제조법에 관한 책을 하나 쓰고 있는데, 이 책에는 디자이어에 가장 이윤을 많이 남겨 준 많은 향수들의 제조법에 관한 지침들이 포함될 거예요."

"당신은 재능이 풍부한 여자요."

개러스의 시선이 진지해져 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 같소."

클레어의 흥분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그 자리를 조심스러움이 대신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기쁘군요."

"말해 봐요, 클레어. 당신은 모든 일을 다 제조법에 따라 하는 거요?"

클레어는 말안장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지금 니콜라스 경이 한 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신이 남편감에 대한 조건을 만들어 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소. 다만 당신이 살아 숨 쉬는 남자를 놓고 그 조건들을 뽑았다는 건 금시초문이었지. 니콜라스 경은 그 이름이 아마 레이먼드 드 콜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클레어는 주저했다.

"그를 아나요?"

"아니오. 하지만 당연히 이 완벽한 기사도와 예의바름의 화신이 누군지 알고 싶소.."

"그는 정확히 완벽하다곤 할 수 없어요."

"어디가 모자랐단 말이오?"

"유부남이었어요."

"."

개러스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소?"

"그분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있었던 건 거의 1년 전 일이에요."

"알겠소."

"그분은 곧 노르망디의 많은 장원을 지참금으로 가져 올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어요. 난 꽃으로 가득 찬 멀찍이 떨어진 이 섬 외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죠."

"그것이 레이먼드 드 콜빌에겐 충분치 못했단 말이오?"

클레어는 깜짝 놀라서 개러스를 쳐다보았다.

"어머어마하게 유복한 상속녀가 가져 올 재산과 이 섬이 어디 상대나 될 수 있나요? 당신이라도 아마 더 나은 결혼 조건을 제시받았다면 여기엔 오지 않았을걸요."

"당신도 선택권이 있었다면 어떤 중매에든 나서지 않았을 테고, 그렇지 않소?"

"맞아요."

"물론 그 경우 당신은 레이먼드 드 콜빌과 결혼했겠지."

클레어는 개러스의 목소리에 담긴 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시번에서는 곧 봄철의 큰 장이 열려요. 바로 그곳에서 우린 몰약과 향수를 팔지요. 부유한 상인들이 런던과 요크에서 찾아와 그것들을 사 가요. 그런 종류의 사업도 알고 싶으세요?"

"나중에 듣기로 합시다. 지금 당장은 당신이 어떻게 콜빌을 만났는지 알고 싶소."

클레어는 한숨을 쉬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친구로, 동료 학자셨어요. 두 분은 2년 전 아버지가 파리에서 열리던 아랍 논문에 관한 강의에 참가하셨을 때 만났지요."

"레이먼드 드 콜빌도 파리에서 공부중이었소?"

"그래요. 비록 기사 수업을 받긴 했지만 레이먼드는 정말로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어요."

"놀랍군."

"그분은 마상 시합이나 전쟁보다는 책과 논문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렇소?"

"당신처럼 그분도 내 몰약과 향수에 큰 호기심을 보여 줄 만큼 관대하셨죠. 정말로 그분과 저는 이 주제를 놓고 몇 시간이고 종종 대화를 나누곤 했어요."

"그래요?"

개러스는 부드럽게 물었다.

"물론 이 화제에 관한 그분의 관심은 순수하게 지적인 것인 반면, 당신의 관심은 보다 실질적인 이유에 기인한다고 할 수는 있지요."

"내 관심이 단순히 상업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하오?"

클레어는 낯을 붉혔다.

"무례하게 굴 마음은 없었어요. 당신의 호기심이 내 향수가 장래 당신 수입의 원천이 될 거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건 당연한 일이죠."

"난 당신한테 빈털터리로 온 게 아니오, 클레어. 물론 땅은 없소. 하지만 가난하진 않지. 부유한 영주들을 위해 무법자를 사냥하는 건 벌이가 아주 좋거든."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점점 꼬여만 갔다. 클레어는 올가미에서 벗어날 길을 하나 발견했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다면 사과하겠어요."

개러스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유령, 이웃에 사는 기사, 불쾌한 애송이 시인, 그리고 지금은 당신이 남편감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과거의 남자까지. 내가 맞서야 할 라이벌 명단에 더 이상 추가할 사람은 없소?"

클레어는 개러스가 다시 한번 자기를 놀리며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불편해졌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분명한 건 당신이 더 이상 나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할 상대는 없다는 거예요. 우리 결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나요?"

"아니지, 완전하게 끝났다곤 볼 수 없소. 아직도 해결을 봐야 할 문제가 더 남아 있소."

"그게 뭐죠?"

"우리의 신혼 첫날밤."

", 그거요."

클레어는 안장 위에서 몸을 곧게 폈다.

"좋아요, 기왕 말을 꺼냈으니 자세한 부분까지 확실히 해 두는 게 좋겠군요."

"그럴거요."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난 오늘 아침 그렇게 서투른 방식으로 그 문제가 거론된 것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서투르다고? 나라면 그걸 서투르다는 표현보단 다른 말을 쓰겠소."

"좋아요, 창피하다고 해 두죠."

클레어는 인상을 썼다.

"나는 보다 은밀하게 그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는 걸 분명히 해 두고 싶어요."

"당신은 오늘 아침 도전장을 냈소. 그것도 집안사람들과 이웃 영주가 모두 보는 앞에서 말이오. 지금쯤 디자이어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신이 남편으로서의 내 권리를 부인했다는 걸 알고 있을 거요."

클레어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이미 말했듯이, 난 그 일을 떠들썩한 소란거리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그건 전적으로 경의 잘못이에요."

"내 잘못이라고?"

"그래요. 당신이 니콜라스에게 한 위협은 내 명예도 모욕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이성을 잃고 전 세상 앞에서 우리 둘만 있을 때 하려던 얘기를 해버렸단 말이군."

클레어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유감스럽게도 난 자신의 성질을 잘 다스리는 그런 능력은 탁월하지 못해요. 당신은 그 방면에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지만요, 개러스 경."

"아가씨의 경우는 경험 부족 탓일지도 모르오."

클레어는 그의 눈과 부딪쳤다.

"경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자신의 성질을 잘 통제하는 법을 익히게 된 거죠?"

"내가 사생아라고 한 말, 기억하오?"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게 자신을 통제하는 경의 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서출은 인생에 있어서 자기에게 남겨진 건 찌꺼기뿐이라는 걸 아주 일찍 배우게 되기 마련이오. 그리고 무엇이건 자기가 쟁취했다고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선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곧 깨닫게 되오. 강한 감정은 사생아에겐 위험할 뿐이오."

"하지만 어째서요? 경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더 힘들게 노력해야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그런 감정을 더 강하게 느꼈던 것뿐이에요."

개러스는 그녀를 기묘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당신은 지각력 있는 여자요. 하지만 현실에서 드러났듯이 이성, 논리, 그리고 결단력이야말로 내게 가장 유용한 무기요. 길들지 않고 통제할 수 없는 정열은 해당이 안 되오."

클레어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고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알겠어요. 경의 성격이야 어떻든 그건 경의 일이겠죠. 하지만 내 성격은 당신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겠어요."

"물론이오."

개러스는 아주 드문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가씨 성격은 내 경우보다 확실히 훨씬 더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키고 있소."

클레어는 언쟁을 포기했다. 그녀에게는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개러스 경,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내가 말하고자 한 건 오늘 아침 당신이 내게 준 모욕에 관한 게 아닙니다."

"오늘 아침 난 당신의 명예에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 보호해 주려 했던 거요."

"좋아요. 어쨌든 난 상처받았어요."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 문젠 일단 접어 두고, 난 우리의 결혼을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전에 우리가 서로를 보다 잘 알게 되길 바란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린 결혼 전의 대개의 남편과 부인이 그러하듯 서로를 잘 알고 있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난 우리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길 원해요. 내 말은 서로 친구가 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레이먼드 드 콜빌과도 친구였소?"

"그래요. 하지만 그건 이 일과는 아무 상관 없어요."

클레어는 점점 기분이 상해 갔다. 이 남자는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하는 덴 선수였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로 돌아가기로 하죠. 창피한 기분이 들게 해드렸다면 사과하겠어요. 하지만 오늘 아침 내가 말한 건 진심이에요. 난 우리의 결혼을 완성시키기 전에 기다리길 원해요. 날 이해하시겠어요?"

개러스는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고개를 돌리고 봄꽃이 만발한 들판을 멀리 바라다보았다.

"당신의 소망은 잘 이해하겠소. 그리고 그 소망도 존중하고."

"잘 됐군요."

클레어는 안도감이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그럼 이제 이 얘기를 더 이상 계속할 필요는 없겠어요."

"하지만 난 당신이 오늘 아침 자기 성질과 혀를 제어하는 데 실패해 야기시킨 문제들을 고려해 봤는지 알고 싶소."

클레어의 안도감이 사라졌다.

"무슨 문제 말예요?"

"당신의 주민들은 당신이 그럴 때까지 날 이 섬의 진정한 새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오늘 아침 당신이 던진 도전장은 디자이어의 영주로서의 내 의무를 수행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끼치게 될 거요."

"아니에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일반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내 권위를 강요할 수는 있소."

개러스는 부분적으로 동의했다.

"결국, 내가 데려온 군인들은 나한테만 충성을 바치고 있고 그들 모두 잘 훈련된 사람들이오. 게다가 이 섬에선 그들만이 유일하게 무장한 군인들이오. 내 명령이 뜻대로 확실히 수행될 수 있도록 만드는 건 그들에겐 별 어려운 일이 아닐거요. 그래도 난 그 방법이 당신의 마음이 들지 어떨지 알고 싶소."

잠시 동안 클레어는 그 거친 위협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분노가 그녀를 덮쳐 왔다.

"개러스 경, 디자이어에선 경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군인을 쓸 필요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 두기 바라요. 나 역시 그런 일은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이곳은 평화로운 땅이고 난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유지할 겁니다."

개러스의 눈은 은과 연기의 빛깔이었다.

"논리와 이성이 장원의 평화는 그 영주와 부인의 다스림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동의하오?"

"물론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주민들이 날 믿고 날 그들의 영주로 인정하게 하려면 그들에게 내가 당신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하오."

클레어는 눈앞에서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인정하기는 죽도록 싫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개러스의 말이 백번 지당했다. 그녀가 다스리는 섬 주민들의 평화와 만족은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더 디자이어의 주인으로서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영리한 올가미로 날 잡았군요, 안 그런가요?"

"아니오."

개러스는 상냥하게 말했다.

"난 단지 당신에게 이 문제에 대한 내 견해를 신중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드리고자 했을 뿐이오. 아가씨처럼 드물게 똑똑한 여성은 불가피한 결론을 이해하리라 믿소."

클레어는 숙녀답지 않게 작게 코방귀를 뀌었다.

"힘보다는 재치를 이용할 줄 아는 남편을 원했던 걸 생각하니, 니콜라스 경이 다루기엔 쉬운 상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개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은 다루기 쉬운 남자를 원했던 거요? 내가 기억하는 한 그런 요구 조건은 당신의 목록엔 들어 있지 않은 것 같던데."

클레어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농담하지 말아요."

"말했지 않소, 난 절대 농담은 안 하오."

"하지만 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가장 약 오르는 방식으로요. 어쨌든 그것도 당장은 흑백을 가릴 만한 문제는 아니죠. 경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는 건 일단 인정하겠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결혼 침대를 같이 쓰는 척만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거예요."

이번에는 개러스의 표정이 신중함을 잃을 차례였다.

"그런 척만 한다고?"

"그래요."

클레어는 자신의 논리에 대만족하여 웃음 띤 얼굴이 되었다.

"침실을 같이 못 쓸 이유는 없다고 봐요."

"내 결정에 동의해 주니 기쁘군."

"하지만,"

클레어는 승리감이 가득 차서 말을 끝맺었다.

"난 우리가 반드시 실제로 한 침대를 써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아가씨, 당신은 마치 법관처럼 논리를 펴는군."

클레어는 그에게 가장 환하고 아름답고 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매일 밤 한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게 될 거예요. 결혼한 여느 남편과 부인처럼요. 하지만 그 침실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오직 우리 둘만의 일일 뿐이죠."

"그 점에 관해서라면,"

개러스는 불길하게 말을 시작했다.

"난 확신이 안 서는데."

클레어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결혼을 완전한 것으로 성사시키기 전에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길 바라느냐 하는 문제는 남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전적으로 우리들만의 비밀이 될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린 둘 다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죠. 나의 백성들은 경이 나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믿을 거고, 나는 또 바라던 대로 당신을 더 알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얻게 될 거예요."

개러스는 어쩔 수 없이 경탄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시번의 니콜라스가 이 결혼에서 빠져 나간 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 그라면 당신한테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완패했을 거요."

 

 

 

7

클레어의 결혼식 날 아침 디자이어를 감싼 은빛 안개는 섬의 모든 사람들에겐 실제적으로 나

쁜 징조로 비춰졌다. 클레어의 목욕과 옷 입는 것을 돕기 위해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던 하녀들 사이에서 염려의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은자가 말하길 오늘은 지옥의 불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로 어둠침침해질 거래요."

한 여자가 작게 소곤거렸다.

"그분 말씀이 맞지 뭐예요."

"이건 단순한 안개일 뿐이야."

클레어가 말했다.

"난 정오나 되야 식장으로 갈 거야."

그녀는 가장 좋은 옷인 청록색의 긴 겉옷이 머리 위로부터 미끄러져 내려오는 동안 참을성 있게 서 있었다. 드레스의 긴 소매들은 살짝 뒤집혀져서 환한 빛깔의 노란 색 안감이 들여다보였다. 가장자리 부분은 노란 색과 하얀 색 비단실로 수를 놓았다.

"난 우리 아가씨 말이 맞다고 믿어요."

유니스는 클레어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집안의 가사일을 맡아 온 하녀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유니스는 클레어의 머리 주위에 은빛 머리 장식을 고정시키고 섬세한 금실 망사를 제자리에 늘어뜨렸다.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유니스."

"그렇게 확신하지 말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침실에서 헬하운드의 권리를 부인하겠다고 위협한 걸 모두가 다 알고 있어요. 장담컨대, 그분은 그런 반항적인 태도를 참아 주진 않을 거예요. 아가씨 생명이 걱정될 뿐이에요."

"어제 아침에 있었던 사소한 말다툼을 얘기하는 거라면, 안심해도 좋아."

클레어는 가볍게 대꾸했다.

"내가 한 위협은 홧김에 나온 말인걸. 개러스 경을 이 장원의 주인으로 받아들였듯이 남편으로도 받아들일 생각이야. 그한테는 벌써 그렇게 말해 놨어."

"성인들에게 축복을."

유니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섬 주민들 모두 그 소릴 들으면 아주 기뻐할 거예요, 아가씨. 정말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 곧 아가씨도 알게 될걸요."

"개러스도 그렇게 말하더군."

클레어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 그렇다면 말이죠."

유니스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는 재빨리 좌우를 둘러보고 다른 하인들이 방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각된 궤짝 안을 살펴보느라 정신없이 바쁜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가까이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거의 소곤거림 정도로 낮추었다.

"오늘밤 아주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경우엔 이걸 사용하세요."

클레어는 유니스가 자기 손 안으로 쑥 밀어 넣어 준 헝겊으로 싼 작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뭔데?"

"쉬잇, 그렇게 크게 말하지 마세요. 이건 닭피가 든 작은 병이랍니다."

", 세상에. 유니스, 당신까지 이러기야?"

", ,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어요.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엎질러진 물이고, 게다가 아가씨 잘못도 아니었는걸요. 그게 니콜라스 경이든 아니면 작년에 아가씨가 마음을 빼앗겼던 그 멋진 기사님이었든 말예요."

"하지만 유니스……."

"문제는 말이죠, 헬하운드처럼 자존심 센 남자는 이런 종류의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자기 부인의 명예가 자신의 명예만큼 오점이 없는 걸 확인하려고 들죠."

"재미있는 생각이군."

클레어는 씁쓸하게 웃었다.

"피로연 석상에서 모두들한테 적어도 내가 내 남편만큼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결혼 침대로 간다는 연설을 꼭 해야 되겠는데."

"이건 농담할 일이 아니에요."

유니스는 나무라는 어조로 말했다.

"오늘밤 손 닿는 곳 가까이에 이 닭피를 보관해 두겠다고 나한테 약속해요. 아침이 오기 전 시트에 이걸 몇 방울 뿌리고 나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개러스 경한테 자신이 동정이라는 걸 나한테 어떻게 증명할 건지 꼭 물어 봐야겠어."

불행히도 회색빛 안개는 결혼식이 거행될 시간이 돼서도 걷히지 않았다. 클레어는 군중들이 늘어선 거리를 따라 천천히 말을 몰고 가면서 모직 망토 사이로 한기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길 양쪽에서 들려 오는 수군거림을 듣고 베아트리체의 재앙에 대한 예언이 온 사방에 퍼져 버린 것을 알았다. 마을 주민, 농부, 수도사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이다.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길에서 나오는 연기가……."

"이 안개는 지옥의 거울에 박힌 크리스털과 똑같은 색깔이라던데."

"헬하운드의 눈 색깔과도 똑같아요. 이건 불길한 징조예요."

"우리 아가씨가 그분한테 대들지 말았어야 했어요."

양조장 주인 앨리스는 클레어가 말을 타고 지나갈 때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분이 부디 오늘밤 침대에서 아가씨를 죽이지 말아야 할 텐데."

클레어는 그런 말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녀는 개러스가 기다리고 있는 교회 정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그녀보다 앞서 교회에 도착해 있었다. 행진 내내 그의 부하들이 동행했고 마을 주민들 모두가 그 광경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 사람은 이런 일에는 아주 솜씨가 좋아' 하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개러스는 자기 마음대로 상대를 놀래키거나 겁을 주거나 감탄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필요할 때는 화려하고 대단히 계산적인 제스처를 활용할 줄 알았다. 공기 중의 한기에도 불구하고 말고삐를 움켜쥔 클레어의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솟았다. 그녀는 개러스의 엄숙하고 주의 깊은 시선과 마주치고는 그를 디자이어의 주인으로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이기를 빌었다. 그녀의 미래와 그녀가 다스리는 사람들의 미래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개러스는 클레어가 자기를 만나기 위해 말을 타고 다가오는 동안 내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그는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클레어를 말안장에서 들어 내리는 동안 그의 거대한 두 손이 그녀의 허리에 강하고 확실하게 둘러졌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는 예식을 주관할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교회의 정문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클레어는 깊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자신의 운명과 디자이어의 운명을 헬하운드와 영원히 잇게 될 맹세의 말을 할 준비를 했다.

한 시간 뒤, 거대한 홀에 모인 많은 군중들 앞에서 울리치는 엄청나게 큰 궤짝을 열었다. 그는 장엄한 예식 분위기를 내며 안에 든 내용물을 들어 올렸다. 다양한 비단의 흔들리는 무지갯빛이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군중들은 그걸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우리의 주군이 새신부가 될 분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울리치는 쩌렁쩌렁 울리는 어투로 말했다.

그는 동방에서 가져 온 길고 사치스러운 옷감들을 하나하나 높이 치켜들었다. 번갯불 같은 진홍빛 비단이 황금색과 은색의 비단들 틈에 섞여 선보였다. 또 값비싼 에메랄드만큼이나 짙은 녹색 비단이 나타났다. 환한 석양빛 같은 노란 색과 오렌지색들이 궤짝에서 넘쳐 흘러나왔다. 이 기막힌 물건들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둥글게 모여들어 헬하운드의 값비싼 예물을 구경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모두 진심으로 감명 받았다. 놀라움의 감탄사가 홀 전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옆의 사람에게 완전히 만족해하며 수군댔다. 그들의 아가씨가 부유한 남자를 선택했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분명히 관대한 사람일 것이다.

비단 다음에는 값비싼 향신료 통들이 줄줄이 나왔다. 사프란, 정향, 육두구, 계피, 생강, 커민, 후추가 차례로 나타났다. 군중은 다시 한번 새로운 영주가 그들의 아가씨에게 보이는 존경심에 감사의 탄성을 질렀다. 클레어는 자신의 영지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모두 대만족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군의 부는 곧 디자이어 섬 전체의 부를 반영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그의 권세와 힘의 영광을 흠뻑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보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개러스의 개인적 부는 섬 주민들이 그의 지배 하에서 번영을 계속 누릴 것이라는 보증이 된다.

"사생아로 태어나긴 했어도 이분은 자기 힘으로 엄청난 재산을 끌어 모았어."

대장장이 존이 농부에게 말했다.

"이건 좋은 징조야."

"아무렴."

농부는 현자인 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분은 우리 땅을 잘 돌봐 주실 게야. 클레어 아가씨가 아주 잘 골랐지 뭐야."

존이 킥킥대며 웃었다.

"누가 골랐다고 분명하게 말할 순 없지. 만약에 나한테 대답해 보라고 한다면 개러스 경이 아가씨가 결정을 내리는 데 어떤 술수를 썼다고 말하겠네."

클레어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기가 그들의 말을 우연히 들었다는 눈치는 내비치지 않았다. 그 말을 완벽하게 반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개러스의 결혼 예물이 모두 다 선보이고 적절한 감탄을 받은 직후, 궤짝 하나가 또 앞으로 끌어내려졌다. 새로운 흥분의 술렁거림이 군중들 틈으로 파문처럼 번져 나갔다. 이 궤짝이 열려지자 엄청난 동전더미가 나타났다. 감탄의 외침이 기쁨의 함성으로 변한 건 그 동전들이 마을 주민에게 주는 선물임이 분명해졌을 때였다.

"당신의 부군은 가난뱅이로 이 결혼을 올리는 건 아닌 것 같군요."

마가렛 수녀 원장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클레어 바로 옆에 서서 개러스의 부하들이 모든 주민들에게 동전을 나눠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요, 그는 윅크미어의 헬하운드로서 벌어 모은 재산을 가지고 왔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그리고 그걸 자랑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요, 그렇죠?"

"위대한 영주라면 자기의 부와 힘을 자랑해야만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남이 그 사실을 알 수 있겠어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도 그는 충분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땅은 전혀 없었죠."

"이젠 그것도 가지게 된 셈이죠."

마가렛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레어, 이 결혼에 만족하세요?"

"이미 끝난 일인 걸요."

클레어는 조용히 대꾸했다.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에요. 결혼 첫날밤이라는 관문이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지요."

"그 점에 대해서라면,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마가렛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제 아침 아가씨가 새로운 영주한테 화를 내고 오늘밤 남편으로서의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협박을 했다는 소문이 떠돌더군요."

"어리석은 반항이었죠."

클레어는 쌀쌀하게 말했다.

"그가 나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말을 좀 했지만 그 뒤 곧 취소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요. 아가씨는 성미가 불 같기 때문에 언제나 영지를 다스리는 것만큼도 자신을 잘 통제하진 못했었지요. 이젠 아가씨도 결혼한 사람이니 전보다는 좀 더 자신의 성질을 누그러뜨릴 줄 알아야 해요."

"알겠어요, 원장님."

'오늘은 하루 종일 자제의 중요성에 관한 훈계를 피할 수 없겠구나' 하고 클레어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남편과 같이 있을 때는 꼭 성질을 누르고 있어야 한답니다."

마가렛은 말을 계속했다.

"개러스 경이 자기 부인의 반항적인 태도를 참지 않을 인물이라는 건 분명해요."

"전 벌써 이런 설교를 많이 들었어요. 어째서 모두들 개러스 경을 다루는 문제에 관해 나에게 설교하려고 하는 거죠?"

"우리들이 당신보다 더 나이 들고 현명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내 말을 명심해요, 클레어. 남편을 뜻대로 주무르고 싶다면 반드시 부드러운 말과 여인의 현명한 방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다."

"잘 알겠어요. 원장님 충고를 명심할게요. 오늘밤 내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실 필요 없어요. 때가 되면 그를 침실로 받아들일 거예요."

마가렛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결혼이란 첫날밤에 남편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 없이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기왕 우리가 좋은 시작을 말하고 있으니, 내 잊기 전에 지금 당신한테 이걸 주겠어요."

클레어는 마가렛이 조심스럽게 싼 작은 꾸러미 하나를 허리띠에 매달린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을 바라다보았다.

"선물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근데 이게 뭐죠?"

"닭피가 든 작은 병이에요."

클레어는 웃느라고 숨이 막힐 뻔했다.

"정말이지 이러다간 닭피에 쓸려 나가겠네요."

"무슨 말이죠?"

"이 사려 깊은 선물을 주신 건 원장님이 처음이 아니랍니다."

클레어는 그 작은 꾸러미를 자신의 허리띠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마워요, 원장님. 내 수집품에 추가하도록 할게요."

"유리병들 중 하나를 오늘밤 꼭 가까이 두도록 해요.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그걸 조금 시트에 뿌리면 만사가 다 잘 될 거예요."

"만약 제가 그런 예방 조치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없지요."

마가렛은 활기차게 말했다.

"당신은 다 큰 여자예요.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지요. 아가씬 이미 열두 살 때부터 이 장원에서 여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 왔어요. 난 레이먼드 드 콜빌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죠. 굳이 내게 말하라면 당신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게 무엇이든 아가씨의 개인적인 일일 뿐이에요."

"고마워요."

클레어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 레이먼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예의바른 기사였어요. 그와 난……."

마가렛은 한 손을 들어 말을 중단시켰다.

"내가 말했듯이, 처녀성 문제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예요. 하지만 남편이란, 특히 개러스 경같이 자긍심 높은 기사는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보려 들지요."

"난 그렇게 보지 않아요. 내 생각에 여자의 지참금이 충분히 많다면 남자들도 그런 사소한 작은 일들은 그냥 넘겨 버릴 수 있다고 봐요."

"내 말을 명심해요, 클레어. 남자들이란, 아무리 그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도, 난 그게 개러스 경이라고 믿지만요, 근본적으로 단순한 동물이랍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그들은 명예가 충족된다고 믿는 한은 언제나 관대하고 예의바르게 굴려고 들지요. 특히 새신부한테는 말예요. 난 아가씨가 남편한테 결혼 첫날밤 그를 만족시킬 만한 선물을 주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결국 아가씨도 다음 날 아침 똑같이 만족하게 될 거예요."

클레어는 자신의 허리띠 주머니 안에 안전하게 보관된 새로운 유리병을 토닥거렸다.

"잊지 말고 오늘 내 명예를 위해 죽어 간 모든 고귀한 닭들을 위해 기도해야겠군요."

"연회 때 당신도 그 중 일부를 먹게 될 거예요."

피로연은 오후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섬의 가장 날씬한 사람부터 가장 뚱뚱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초대받았다. 성 허미언의 수녀들까지도 풍요로운 음식과 술을 즐겼다. 비록 비용을 아끼지 말라고 명하긴 했어도, 클레어는 에드거와 집안의 하인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마련한 성찬에 저도 모르게 감동받았다. 겨자씨로 맛을 내어 공들여 만든 순무와 당근 조림이 테이블로 내어졌다. 속을 가득 채운 오리 고기와 향긋한 수프, 구운 생선, 꿀에 재운 닭고기와 돼지고기 파이가 부엌에서 끊이지 않고 줄줄이 홀로 옮겨졌다. 피로연은 시장 바닥같이 떠들썩하고 원기 왕성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이를 하며 놀았고 남자들은 야한 농담을 즐겼다. 댈런은 작은 북과 하프로 모든 이들을 즐겁게 했다. 윌리엄은 눈에 보이는 접시마다에서 모든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섬을 장악했던 불길한 안개는 맥주와 포도주의 강이 준 효과로 완전히 잊혀졌다. 홀은 신랑 신부를 위해 연거푸 축배를 들이키는 사람들로 미어터질 듯했다.

밖의 마당에 준비된 테이블에도 홀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음식이 차려졌다. 화로들이 대기중의 찬 기운을 모두 몰아냈다. 밤이 깊어 감에 따라 홀에 피워 놓은 모닥불이 이 난장판 위에 따뜻한 황금빛의 불빛을 비추었다. 비록 클레어는 개러스 옆에 앉아 있긴 했지만 소음과 유쾌한 떠들썩함 때문에 새신랑과 대화를 나누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녀는 때때로 강렬한 그의 시선이 그녀를 곁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홀의 맨 끝에 놓아 둔 물시계가 자정을 마악 가리키려고 할 때 조애너가 클레어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제 신혼방으로 올라갈 때가 된 것이다. 술잔을 잡는 클레어의 손가락이 분명한 이유 없이 갑자기 떨렸다. 그녀는 미처 다 마시지 않은 술잔을 아주 천천히 내려놓고 개러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했다.

"이제 나의 신부께서 홀을 떠나실 시간이 됐다고 보는데."

"맞아요. 그런 것 같군요."

클레어는 방금 자신을 엄습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밤 무서워할 건 아무것도 없으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되새겼다. 기다리면서 떨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제 개러스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그것에 대해 논박을 하지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서로 합의를 본 셈이다. , 연인이 되기 전에 우선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연인. 이 단어가 클레어의 머리 속에서 울렸다. 그녀는 개러스가 해주었던 키스를 상기했다. 그러자 곧 온몸이 따뜻해졌다. 개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음소리와 떠들썩한 얘깃소리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모든 시선들이 하나같이 주 테이블로 향했고 쥐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클레어는 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녀가 개러스와 맺은 거래에서 그녀의 몫을 실행에 옮길 때였다. 그녀는 기꺼이 신랑을 받아들이는 신부인 척하면서 신혼방으로 가야만 한다. 개러스는 자신의 은잔을 높이 치켜들고 클레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미소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가 먼저, 그 다음이 연인이다. 헬하운드는 믿을 만해.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는 거래에서 자신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신부를 위해 한 잔 듭시다."

개러스는 팽팽한 침묵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잔에서 한 모금 쭈욱 들이켰다. 건배 소리가 홀 안에 울려퍼졌다. 흥이 난 사람들은 술잔으로 테이블을 두드려댔다. 개러스는 잔을 내려놓고 지옥의 거울을 칼집에서 뽑아 들었다. 처음 도착하던 날처럼 칼을 높이 치켜들자 불빛을 받아 강철이 번쩍번쩍 빛났다. 흥분하여 소곤거리는 소리들이 홀 안에 파문처럼 퍼져 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아가씨와 결혼한 나는 복이 많은 남자요."

개러스의 목소리는 커다란 방의 가장 먼 구석까지 울려 나갔다.

동감이라는 외침 소리가 청중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클레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헬하운드는 정말로 장엄한 제스처를 연출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들어 보시오, 디자이어의 주민 여러분."

개러스가 말했다.

"오늘밤 이곳에 모인 여러분 모두를, 내 인생에서 한 번도 불명예로 더럽힌 적 없는 이 칼을 이 여성의 손에 건네주는 데 있어 증인으로 삼고자 하니, 잘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이제 나의 아내요. 나의 칼을 손에 잡은 것과 같이 이제 그녀는 나의 명예를 그 손 안에 쥐고 있는 겁니다."

"맞아요, 맞습니다."

다시 한번 열렬한 환호성과 외침 소리가 돌벽에 메아리쳐 돌아왔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술잔과 나이프 밑동을 테이블에 대고 두드렸다. 개러스는 칼을 반대로 돌려서 손잡이가 앞으로 가게 해 클레어에게 내밀었다.

"내가 부인에게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오."

천둥 같은 찬성의 고함 소리들 때문에 클레어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홀 안이 쥐죽을 듯이 조용하다 해도 자기가 과연 무슨 말이건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개러스의 과장되게 기사다운 제스처는, 비록 그것이 군중을 대상으로 한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무거운 칼을 받아 들고 일어섰다. 다시 한번 더 홀 안이 기대에 가득 찬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클레어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나름대로 준비한 공식적인 제스처를 쓸 준비를 했다. 그녀는 두 줄로 늘어놓은 테이블 사이의 복도를 따라 즉시 앞으로 나온 윌리엄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는 마른 꽃과 풀로 만든 큼지막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나의 주군이시여,"

클레어가 말했다.

"오늘 당신이 우리에게 가져 온 명예와 힘에 대한 교환으로, 나는 우리의 아름다운 섬의 재산을 보호하고 유지할 의무와 권리를 넘겨 드리겠습니다."

윌리엄은 무릎을 꿇고 마른 라벤더, 로즈메리, 장미, 쑥으로 된 향기로운 꽃다발을 클레어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어 개러스에게 건네주었다. 개러스는 향기 나는 섬의 상징물인 꽃과 풀의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눈을 치켜들었을 때 클레어는 그의 강렬한 시선에 아찔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 섬과, 이 섬의 주민들, 그리고 그 주인 아가씨를 내 생명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전력을 다해 지킬 것입니다."

개러스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맹세했다.

클레어는 그의 강한 얼굴에서 흔들림 없는 약속을 보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는 아직 소원한 상태지만, 이 섬만은 적임자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율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선택을 제대로 했군요."

"당신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 거요."

클레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마치 이 홀 안에 그녀와 개러스 단둘만이 남겨진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보이지 않는 끈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가 먼저다. 클레어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와 개러스가 연인이 되는 건 아직 너무 빠른 일이다. 너무 빠르다. 그들은 이제야 겨우 서로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조애너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클레어에게 다가왔다. 그 움직임 때문에 클레어는 자신이 빠져 있던 마법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제 홀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군중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눈치챈 클레어는 무거운 칼을 꼭 움켜쥐고 개러스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제부터 신혼방에서 나의 남편을 맞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클레어는 매우 또렷하게 말했다. 군중들은 만세 소리를 외쳐댔고 술잔들이 치켜 올려졌다. 개러스도 다시 한번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한시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길 바라오. 정원사인 당신은 어떤 풀들은 오그라들고 말라 갈 때가 가장 효능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요. 물론 줄기가 강하고 완전히 꼿꼿할 때가 전성기인 다른 종류들도 있소. 내가 오늘밤 당신에게 선사하려고 하는 건 바로 후자요."

웃음소리가 홀을 뒤흔들었다.

그가 한 말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됨에 따라 클레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농담은 않는다고 우기는 사람치곤 경은 비상한 도약을 하시는군요."

그녀는 투덜거렸다.

", 결혼이란 원래 비상한 사건이잖소."

조애너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서둘러야 해."

그녀는 초조하게 잡아당겼다.

클레어는 그녀에게 이끌려 가면서 개러스에게 뭔가 말하는 듯한 눈길을 던졌다.

"내 말을 믿어 주시오."

개러스는 그녀의 뒤에 대고 외쳤다.

"내가 가진 거라곤 그것뿐이니까."

클레어와 조애너가 계단 쪽으로 가는 동안 더 큰 웃음 소리가 그들을 뒤따랐다.

"이걸 받아요."

조애너는 클레어에게 속삭였다.

"이걸 감춰 두고 개러스나 다른 누구도 눈치 채게 해선 안 돼요."

클레어의 손가락이 또 한 번 작은 물체에 닿았다.

"내가 뭔지 맞춰 볼게요, 닭피죠?"

"맞아요. 아침이 오기 전 몇 방울 뿌려 두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여자들 서너 명이 그들 뒤로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낄낄거리며 우르르 침실로 몰려 들어가 신부의 잠자리를 준비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클레어의 옷이 벗겨지고 아름답게 수놓인 고운 리넨으로 만든 길고 헐렁한 웃옷이 머리 위로부터 씌워져 입혀졌다. 그리고 그녀는 달콤한 향내가 풍기는 침대에 푹 파묻혔다.

", 어디 봐요, 우리 예쁜 아가씨."

유니스는 클레어의 머리를 빗질하면서 말했다. 그녀는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닭피를 잊지 말아요."

"절대로 잊지 않을게."

조애너는 문으로 가서 나무에 귀를 갖다 댔다.

"개러스 경과 그 부하들이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요."

"신랑들이란 언제나 보채기 마련이지."

아그네스는 침대 측면으로 다가갔다.

"아가씨의 늙은 유모로서 내가 크는 걸 도운 처녀한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는 게 내 권리예요. 내일이면 난 이 침대에서 일어난 여자를 만나게 되겠죠."

"서둘러요."

조애너가 말했다.

"그들이 거의 다 왔어요."

남자들의 목소리와 유쾌한 고함 소리가 복도 아래로 메아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시중 드는 소녀들은 벽난로 근처의 테이블 위에 놓아 둔 두 개의 잔에다 재빨리 포도주를 부었다. 유니스는 눈에서 눈물방울을 찍어내며 온화하게 웃었다. 모든 이의 신경이 문에 집중되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그네스가 침대 위로 몸을 기울였다.

", 어서 이걸 받아요, 아가씨."

그녀는 작은 물체 하나를 클레어의 손 안으로 꽉 밀어 넣었다. 체념하는 기분으로 클레어는 또 다른 작은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고마워요, 아그네스. 당신의 사려 깊은 행동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쉬잇!"

아그네스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엿듣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꼭 아침이 오기 전에 몇 방울을 시트에 떨어뜨려야 돼요. 그럼 모든 일이 다 잘 될 테니까."

"하지만 아그네스……."

"이건 그저 요긴한 예방 조치일 뿐이에요."

아그네스는 침대를 정리하는 척 부산을 떨었다.

"아가씨도 나만큼 나이를 먹게 되면 때로는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해 약간의 속임수가 필요하다는 걸 배우게 될 거예요. 특히 남자의 명예가 걸린 문제는 더 그렇지요."

클레어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울리치와 다른 남자들이 개러스를 침실로 밀어 넣었다. 하녀들은 비명을 질렀다.

"여기 아가씨의 새낭군이 오셨습니다."

울리치는 클레어를 향해 장난조로 깊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들자 그가 음란한 웃음을 지으며 히죽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 주군은 오늘밤 여기 칼 연습을 하러 오셨지요. 이분이 오늘밤 어떤 훌륭한 솜씨를 보일지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우린 윅크미어의 헬하운드가 나긋나긋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남자들은 다시 한번 떠들썩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애너와 다른 여자들이 그들을 방 밖으로 밀어냈다. 일이 분이 지나서야 방은 조용해졌고 문도 꼭 닫혔다. 마침내 클레어와 개러스는 단둘이 남게 되었다. 클레어는 개러스의 눈과 마주치자 하얀 리넨 시트를 가슴 있는 데까지 꼭 끌어 잡아당겼다. 그는 그녀가 향기나는 리넨 베개에 기대어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 나타난 소유욕에 클레어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개러스가 짧고 팽팽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는 뭔가를 묻는 듯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내 칼은?"

"저기요."

클레어는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창가 옆 의자 위에 있어요."

", 그렇군. 안전하게 잘 있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개러스는 창가의 의자로 가서 칼을 가져 오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방을 가로질러 벽난로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갔다. 그는 포도주가 가득 든 잔들을 집어 들고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클레어는 자기가 너무 꼭 시트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주먹의 관절 부분이 하얗게 변해 있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하나씩 꼭 쥐고 있던 손가락을 풀고 무언가 자연스럽게 할 만한 말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결국 지금이 진짜 신혼 초야는 아닌 것이다.

"일이 다 잘 끝나서 정말 기뻐요."

클레어는 이불을 옆으로 젖히고 네 기둥짜리 거대한 침대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개러스는 그녀가 침실용 긴 옷을 집어 들고 재빨리 어깨에 걸치는 것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클레어는 한쪽 손으로는 옷자락을 목부분까지 꼭 틀어쥐고 우정어린 미소처럼 보이길 바라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결혼식이란 언제나 귀찮은 행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나요?"

"내가 어찌 알겠소?"

개러스는 그녀에게 잔 하나를 건네며 그녀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이전에는 결혼해 본 적이 없는데."

클레어는 얼굴을 붉혔다.

"그래요, 물론 그렇죠."

그녀는 그의 손에서 포도주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거의 하루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였다. 까닭 모를 이유 때문에 그녀는 너무 긴장해서 연회를 즐길 수 없었다.

"정말이지, 오늘밤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픈 거나 아닌지 몰라요."

"어쩌면 당신도 오늘밤 내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걸 느끼는지도 모르지."

개러스는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 그런 다음 그는 클레어의 손가락에서 잔을 거둬 갔다. 그는 두 개의 작은 잔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개러스 경?"

클레어는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져 약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경도 불안한 감정을 느꼈나요?"

"그렇소."

"우리 둘 다 민트 차를 마시는 게 좋겠군요."

그녀는 무엇이든 바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위가 안 좋을 때는 그 차가 아주 좋거든요. 하인을 좀 불러야겠어요."

"아니오. 내가 훨씬 괜찮은 치료법을 알고 있소."

개러스는 그녀를 부드럽게, 그러나 가차없이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녀가 몸을 벌벌 떨며 기대 서서 여전히 침실용 겉옷을 마치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켜쥐고 있을 때 그는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다.

 

 

 

8

개러스는 클레어가 놀라서 떠는 모습을 꾸밈없이 그대로 내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녀의 입술을 누르며 그녀와 처음 키스했던 때와 같은 식으로 반응해 주길 기다렸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첫날 오후, 그녀의 정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할 일이라곤 그녀가 세워 놓은 논리의 방어벽이 무너지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흥분하여 반쯤 질식할 듯한 신음 소리를 작게 내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안도감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아내가 될 것이다. 윅크미어의 사생아에게 마침내 신부가 생겼다 그리고 미래도.

그녀의 입은 처음엔 망설이는 듯하다가 다음 순간 그의 입술 아래서 감미롭고 부드럽게 느슨해졌다. 개러스는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눈에 나타난 여성 특유의 호기심을 잘못 읽지도 않았고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에 내포된 의미를 잘못 판단하지도 않았다. 수년 동안 그를 무법자 사냥꾼으로서 살아 남을 수 있게 지탱해 준 행운은 이 꽃섬의 주인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는 데도 따라왔다. 그는 이 결혼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다.

클레어는 기대에 찬 신음을 작게 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개러스도 신음 소리를 냈다. 그는 하루 종일 반쯤 발기된 상태의 고통을 참아 왔다. 이제 그는 완전히 발기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애타게 갈구했다. 드디어 아내를 차지할 때가 온 것이다.

개러스는 클레어가 떨면서 자신에게 몸을 바짝 붙이는 것을 느꼈다.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충동에 거의 넘어갈 뻔했지만 그는 억지로 그걸 참아 넘겼다. 지금은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친분 관계가 우정으로 무르익어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던 클레어의 모든 어리석은 말들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것이었음이 분명해졌다.

클레어는 그 자신만큼이나 오늘밤의 즐거움을 맛보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개러스는 안심하는 동시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 그 앞에는 또다른 전투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이제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클레어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시번의 니콜라스에 대한 클레어의 혐오감이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과거 그녀의 성행위 경험에 관해서는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어의 달콤하고 갈망하는 듯한 입술은 그녀와 니콜라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이 이런 행위에 대해 그녀에게 혐오감을 안겨 주진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남녀 사이의 상호간 즐거움이 어떤 건지 가르쳐 준 건 어쩌면 레이먼드 드 콜빌일지도 모른다. 그게 누구든, 개러스는 그 상대에게 특별히 감사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윅크미어 경."

클레어의 목소리는 개러스의 입술에 눌려 숨막힐 듯한 한숨 소리처럼 들렸다. 그의 가슴에 기댄 그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팔이 천천히 그의 목에 감겼다.

"분명히 우린 아직은 이런 식으로 키스해선 안 되지만, 그렇지만 난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의 고백에 개러스는 온몸의 피가 혈관에서 날뛰는 것만 같았다. 둔탁한 심장 고동 소리가 그의 군마의 말발굽 소리처럼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그의 온몸이 클레어의 상냥한 항복의 약속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로 이끌어 가야 할 겁 많고 순진한 처녀가 아니라 이미 준비되고 정열에 불타는 여성인 것이다.

"나 역시 아직은 이 키스를 멈출 의사가 없다고 확신해도 좋소."

개러스는 양쪽 엄지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면서 벌어졌다. 발갛게 달아올라 빛을 발하는 그녀의 두 뺨은 그의 손 안에서 따뜻했다. 그녀의 두 눈은 풀려나길 기다리는 여인의 비밀스런 정열을 간직한 신비로운 에메랄드빛이었다. 클레어에게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 준 자가 니콜라스가 아니라면, 그럼 그녀가 그토록 기사의 모범으로 떠받들고 있는 레이먼드 드 콜빌일 가능성이 많다. 그의 영혼에 저주 있으라.

둘 중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궁금했다. 아니면 그녀는 둘 다 애인으로 삼았을까? 그 순간 개러스는 유쾌하게 미지의 라이벌들에게 지옥의 거울 맛을 보여 주고픈 기분이었다. 니콜라스를 만나고 나서 개러스는 그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레이먼드 드 콜빌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한 번도 도전에서 물러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더욱 깊이 키스했다. 클레어가 다른 남자의 팔에 안겨 누워 있던 사실을 자신이 탓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동정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한술 더 떠서 사생아 신분이다. 그녀만한 지위의 아가씨보다 더 한 걸 바랄 형편이 못 된다.

클레어는 스물셋의 젊은 아가씨로 자기 고집이 있고 오랫동안 장원의 운영을 책임져 왔다. 그녀는 또한 매우 호기심 많고 눈에 띄게 지적인 여성으로 결혼은 한 번도 염두에 둬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여자는 잘생긴 젊은 기사가 앞에 나타났을 때 금단의 열매를 맛보는 것을 꺼리지 않는 법이다. 개러스는 자신이 예전에는 한 번도 이처럼 칼로 찌르는 듯한 쓰라린 질투의 아픔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질투라고?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갑자기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클레어에게서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은 영롱한 빛과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이지."

개러스가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그건 이제 문제가 되질 않소. 오늘밤부터 당신은 내 거요. 당신은 나의 부인이자 장래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거요. 니콜라스와 레이먼드 드 콜빌, 그리고 내 앞에 있던 모든 남자들을 깡그리 잊게 만들어 주겠소."

그녀의 이마가 모르겠단 표정을 지으며 한 군데로 모아졌다.

"내가 왜 니콜라스와 레이먼드를 잊길 원해야 하죠?

하나는 이웃이고 또 하나는 친구였는데요."

"이제 됐소. 오늘밤 두 번 다시 그 사람들 이름은 꺼내지 말아요."

개러스는 다시 한번 키스로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그녀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그것은 무슨 항의나 아니면 적어도 언쟁을 벌이려는 말처럼 들렸다. 개러스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벌이고 그 속으로 혀를 깊숙이 집어넣었다.

클레어는 다시 기묘하고 뒤틀린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의 목에 두른 팔을 꽉 조이며 자신의 혀를 그의 혀에 갖다 댔다.

개러스는 거의 숨쉴 틈 없이 그녀의 혀를 빨아대며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그녀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갈망이 그를 몰아대고 있었다. 그는 하얀 리넨 시트 위로 무겁게 몸을 낮추고 클레어를 잡았다.

"윅크미어 경."

"쉬잇."

그는 한쪽 다리를 그녀의 허벅지 위로 얹었다. 자신의 육중한 체중과 그녀의 가냘픈 체격을 생각하여 그는 자신의 한쪽 팔에 무게를 실으면서 그녀 위에 기대듯 누웠다.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합시다. 지금은 당신에게 키스만 하고 싶소."

"."

이마를 찌푸리고 있던 의혹이 그녀의 눈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그의 뺨으로 손끝을 가져갔다.

"좋아요, 단순히 키스만 하는 걸로는 해로울 게 없겠지요?"

"전혀 없소. 또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오늘밤 나를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레이스가 달린 베개에 흐르듯 넘실대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는 그 안에 한 손을 넣고 그 비단 같은 머릿결을 손가락에 감았다. 그는 그것을 코로 가져 와 깊이 향기를 들이마셨다.

"당신에게선 꽃 냄새가 나오. 꼭 이 섬 도처에 널린 꽃들 같소."

"경도 그 향기에 차차 익숙해지리라고 믿어요."

"물론이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우아한 목선을 따라 조금씩 깨물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러리라 믿소."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젖히고 입술을 더 밑으로 내려 그녀의 부풀어 오른 젖가슴에 이르렀다. 그녀가 숨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가슴은 하얀 리넨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윅크미어."

"내 이름은 개러스요."

그녀는 경탄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녀의 피부는 오늘 그가 결혼 예물로 선사했던 값비싼 비단보다도 더 섬세했다.

"개러스."

그녀는 숨찬 듯한 소리를 냈다.

"키스만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 온몸 구석구석에 다 하고 싶소."

그녀의 작은 젖가슴의 순결하고 완전한 곡선은 개러스가 지금껏 보아 온 광경 중 가장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우아하게 수놓인 잠옷의 목선 밑에 감추어져 있는 젖꼭지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무르익은 작은 꽃봉오리의 윤곽선은 깨끗이 드러났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그것을 어루만지면서 그 모양을 감상했다.

"개러스."

클레어는 그 애무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은 마치 그를 멀찍이 밀어내려는 듯이 그의 어깨를 꽉 잡고 있었다.

"이건 건전한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경은 키스에는 해로울 게 없다고 말했고 나도 동의했어요. 하지만 이건 너무 지나쳐요."

"키스를 원하오, 부인?"

그는 잠옷의 앞자락에 있는 끈을 능숙하게 풀었다.

"바라는 대로 키스해 주리다, 백번이든 천 번이든."

"개러스."

그녀는 부질없이 그의 큰 손만 두드렸다.

"난 그런 생각이……."

"좋소, 아무 생각도 말아요. 오늘밤은 말이오. 나 역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녀의 장밋빛 젖꼭지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황홀해 보였다. 클레어의 젖가슴을 우아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이 왕관들은 단단하고 약속으로 가득했다. 개러스는 그 중 하나에 입술을 갖다 대고 이로 물고 가볍게 빨았다. 클레어가 보인 반응은 작은 비명 소리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어깨 속으로 파고들었다.

", 세상에. 이걸 키스라고 하나요?"

"물론이오. 비록 이쪽은 꿀과 아몬드로 만든 신주를 마시는 기분에 가깝지만."

"당신은……."

클레어는 잇기 어려운 듯했다. 그녀는 그에게 꽉 매달렸다.

"진실을 말하는 건가요?"

"절대적으로 진실이오."

개러스는 레이먼드 드 콜빌이 그녀가 선사하는 또다른 빼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어치울 때 그녀의 젖가슴을 맛보는 절차는 거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순간 그의 라이벌들은 틀림없이 클레어를 유혹할 때 급히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콜라스는 강제 결혼을 할 속셈이었다.

레이먼드의 경우는 아마 훨씬 더 위험한 사건이었으리라. 그는 그 순간 자기가 청혼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서두르느라 그는 부주의하고 서투르게 일을 치른 건지도 모른다.

개러스는 클레어의 젖무덤 사이의 골짜기에 입을 맞추며 남편으로서 갖는 커다란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언제든 결혼 침대 안에서 자기 부인을 유혹할 수 있는 법이다.

개러스는 더 아래쪽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천천히 목표를 향해 여행하며 그는 잠옷을 양옆으로 벌렸다. 클레어의 여성 특유의 냄새는 그녀가 만든 장미나 라벤더 향수보다도 더 황홀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에게 반응했고 그 사실이 그에게 또다른 욕망의 파도를 밀어 보냈다.

"윅크미어 경, 개러스."

클레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한테 더 이상 키스해선 안 돼요. 내 감각이 바람 속의 벌들처럼 산산이 흩어질까 두려워."

"나 역시 그렇소."

개러스는 머리를 들어 그녀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손을 미끄러뜨려 넣으면서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건 어떤 식으로든 해석될 수 있는 몸짓이었다.

"제발요."

"알았소, 내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해주리다. 새벽이 오기 전 두 사람 모두 잊게 될 거요."

그는 밑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손으로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따라 움직였다.

"누굴 잊는다고요? …… , 개러스. 이러는 게 현명한 것 같진 않아요. 난 당신이 걱정돼요."

그는 그녀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또 자세히 물어 볼 생각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개러스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의 따뜻하고 축축한 곳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클레어는 그의 손길 아래서 몸이 뻣뻣이 굳어 버렸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몇 초 동안 숨을 멈췄다. 그녀의 짧은 손톱이 그의 어깨를 너무 깊이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침이면 상처가 남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 생각이 그를 기쁘게 했다.

개러스는 느리게, 천천히 부드럽게 탐색해 들어갔다. 그가 원하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때까지. 마치 무성하고도 연약한 꽃의 잎사귀들을 헤치듯 부드럽게 꿀을 잔뜩 머금은 살을 양쪽으로 갈랐다. 자신의 이슬로 촉촉해진 보석을 그의 손가락이 어루만지는 순간 클레어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는 계속했다. 극도로 조심스럽게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문지르다가 어르고 잡아당기고 눌러댔다. 클레어는 더 이상 반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개러스는 그녀가 이제 자신이 선사한 쾌락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몸을 떨며 꼬다가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그런 열정으로 그의 행위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에게 큰 만족을 주었다. 그가 만들어 놓은 성적 황홀감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다시 머리를 낮추어 자기가 완전히 각성시켜 놓은 팽팽하고 작은 꽃봉오리에 키스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깨닫는 순간, 그녀는 마치 번개에 맞은 것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개러스는 그 불꽃을 본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더니 충격의 탄성이 고음으로 터져 나왔다. 여성의 발견과 무한한 경이로움의 비명이었다. 개러스는 클레어가 옛날 애인들의 손에서 무엇을 경험했든, 자신이 해방되는 즐거움은 배우지 못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반응은 그가 감히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녀는 절정에 달해 몸을 떨었다. 개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오감에 마술을 건 신비로운 요정이었다. 그녀가 빠르게 해방되어 가는 모습에 그는 문자 그대로 매료되었다. 그녀는 바람 속의 꽃송이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개러스는 뜨거운 만족감이 내부에서 확 솟아오르자 거의 사정할 뻔했다. 내일 아침이면 니콜라스와 레이먼드 드 콜빌 두 사람 다 클레어에겐 멀고 희미한 과거의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개러스, 개러스."

클레어는 숨을 헐떡였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새벽이 오기 전에 수없이 반복해야 할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소."

그는 그녀가 축 늘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마지막 미세한 떨림이 사그라들자, 개러스는 뼈가 없는 듯한 클레어의 몸에서 빠져 나와 다시 한번 팔꿈치에 체중을 실었다. 그는 그녀의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방금 겪은 엄청난 경험 때문에 할 말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녀의 눈에 드러난 감정의 유희는 황홀한 것이었다. 혼란, 경이로움, 감탄, 즐거움, 호기심, 그리고 여성 특유의 감정 모두가 하나로 합쳐져 그녀에게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녀가 할 말을 잃은 모습을 보는 건 개러스로선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미소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개러스는 그렇게 불편한 상태만 아니라면 그 순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지옥의 거울의 강철만큼이나 엄격하고 굴복을 모르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 칼날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이제 막 불이 붙었고 오늘밤 그의 허리춤에서 활활 타오르는 그 불길을 끌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는 클레어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옷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벨트를 풀 때 성급함으로 손이 흔들렸다. 마침내 그는 무거운 가죽 허리띠를 옆으로 던져 놓았다.

"당신도…… 당신도 나와 같은 걸 느꼈나요?"

클레어가 물었다. 이렇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약하고 숨차게 들렸다.

"아직은 아니오. 곧 나도 똑같은 걸 느끼게 되겠지만."

개러스는 겉의 튜닉을 잡아당겨 벗었다.

"그럼 아직 그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단 소린가요?"

그는 무릎 위에 반대쪽 발목을 올려놓고 가죽 부츠를 잡아당겨 벗었다.

"걱정할 것 없소. 내가 당신의 비단 칼집에 들어가면 나 역시 그 해방감을 곧 느끼게 될 거요."

그의 입술 한쪽 끝이 다시 위로 비틀어 올라갔다.

"그렇지 않으면, 물론 당신도 그 특별한 순간에 자신만의 쾌락에 사로잡혀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지."

클레어는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정말이지, 이 결혼이란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혼란스러워요."

"우리가 함께 그걸 알아냅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이런 젠장."

개러스의 손은 아직도 다른 쪽 부츠에 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클레어를 응시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난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강한 감정을 느끼게 해줄 줄은 몰랐어요."

클레어는 눈가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치우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또 당신이 그런 유혹을 할 줄도 몰랐고요."

"클레어, 니콜라스나 콜빌이 어떤 연인이었는진 몰라도 내가 당신한테 약속할 수 있는 건……."

"레이먼드 드 콜빌은 내 연인이 아니었어요."

클레어는 풀어진 옷자락의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흐트러진 시트 위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시번의 니콜라스도 마찬가지구요. 아무도 그 사실을 안 믿는 것 같긴 하지만요. 모두들 내가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개러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진정해요, 클레어. 당신의 순수함을 나한테 확신시킬 필요는 없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당신 말이 옳아요."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더 이상 이런 문제로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어요."

"그럼 됐소.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

"사실, 내 처녀성 문제는 이렇다 저렇다 따질만한 건 아니에요."

"맞소.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

"그래서 진실을 말하자면 말이죠."

그녀는 약간 지나치다 싶게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난 적어도 이 침대에 당신만큼은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로 왔다는 거예요."

개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그럴 테지."

"확실히 어떤 남자도 자기 신부한테 그 이상 바랄 순 없을걸요."

개러스는 갑자기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급히 시선을 던졌다.

"화제를 바꾸는 게 좋겠소."

"그래요. 그러는 게 좋겠네요."

클레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한 쪽 손을 내밀고 살짝 그의 팔을 만졌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우리들이 서로 처녀나 총각이냐 하는 문제는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렇죠?"

"그렇소."

개러스는 달리 할 말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는 무엇에 대해서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자기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일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말이죠."

클레어는 쾌활하게 말을 계속했다.

"내가 방금 당신과 같은 남자와 접촉을 가졌을 땐 육체적 욕망이 몹시 강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거예요."

개러스는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 같은 사람?"

"경은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가 분명해요."

"당신도 굉장한 정열을 촉발시키는 여자인 게 분명하오."

"나도 이 일에 관련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그에게 대답했다.

"잘 됐군. 그럼 우린 그만큼 서로 쌓아올린 거요."

그는 마룻바닥에 두 번째 부츠를 떨어뜨리고 일어서서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생각에 잠겨 얼굴을 찡그렸다.

"이 무섭게 타오르는 힘이 당신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에 우리가 확실히 이걸 통제해야만 해요."

개러스는 튜닉을 머리 위로 반쯤 당겨 벗으려는 찰나였다. 그는 순간 행동을 멈추고 3초 동안 망설인 뒤에 천천히 쥐고 있던 옷자락을 풀어 놓았다. 회색 튜닉이 다시 그의 몸 위로 흘러 떨어졌다.

"금방 뭐라고 했소?"

그는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깊은 생각에 잠긴 양 진지해졌다.

"당신을 보호하려면 우리가 아주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나를 무엇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거요?"

그는 이제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쳐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지만 무섭다기보다는 놀란 것 같았다.

"당신, 소리를 지르고 있잖아요?"

"아니오, 부인."

그는 이빨 사이로 말했다.

"아직은 아니오. 하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결국 더 확실한 증거가 될 뿐이에요."

"무엇에 대한 증거란 말이오?"

"욕망의 힘에 대한 증거요."

그녀는 상냥하게 이해하겠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경의 따뜻한 성격 때문에 우리의 이해에 관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는 게 확실해요."

"내가?"

"그래요. 당신의 부인이자, 앞으로 커져 갈 우리의 우정을 위해 난 당신이 꼭 이 거대한 유혹에 대항해 싸우는 걸 도와야겠어요. 결국 경의 명예가 위기에 처해 있는 셈이죠."

개러스는 자기가 긴 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혹시 마신 술잔의 수를 잊어버린 건 아닌가 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그는 한 번도 술에 취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술취한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오늘밤 당신과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게 내 명예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뜻이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 정열이 그 손아귀에 당신을 붙잡아 우리의 이해를 잊게 만든 것을 깨달으면 당신 기분이 얼마나 비참할지 잘 알아요."

"지옥불에 맹세코 부인, 난 지금 내 귀로 듣고 있는 말을 못 믿겠소. 그 망할 이해에 관한 소린 잊어버리시오. 우린 그런 소린 한 적이 없소."

그녀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랬어요. 우린 이 결혼을 완성시키기 전에 친구가 되기로 동의했잖아요."

"아니, 그 점에 대해선 동의한 적 없소."

그는 한 단어단어마다 지극히 정성을 기울여 또박또박 발음했다.

"당신이 혼자서 그 바보스런 계획을 말한 것뿐이지. 내 동의는 구하지도 않았소. 게다가 나 역시 동의한 적 없고."

"확실히 당신도 우리가 오늘밤 욕망에 굴복한다면 우정과 신의에 근거한 결혼 생활을 이룰 기회를 망가뜨리게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개러스는 분노의 고삐를 움켜쥐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저지시켰다.

"이건 내가 여지껏 들어 본 말 중 가장 엉터리요."

"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소."

그녀는 충격 받은 표정이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우정과 믿음이 자라나길 원치 않나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그렇게 될 거요."

그는 그녀의 논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릴 만한 방법을 이리저리 찾았다.

"날 믿소, 클레어?"

"믿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경은 날 믿지 않는군요."

"그건 사실이 아니오."

"내가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한 적 없다는 말을 믿지 않잖아요. 내가 다른 남자와 누운 적이 없다고 그렇게 여러 번 말했는데도 말예요."

"난 당신이 처녀든 아니든 그건 문제가 안 된다고도 말했소. 난 과거는 신경 쓰지 않소. 오직 미래만이 중요할 뿐이지."

"매우 훌륭하신 분이시군요, 윅크미어 경. 하지만 믿음의 토대 위에 미래를 건설하지 않는 한 우린 만족스런 미래를 가질 수 없어요."

그녀는 그에게 불쾌한 듯한 시선을 고정시켰다.

"경은 지금 날 믿고 있지 않아요. 인정하시죠, 내가 당신한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젠장. 부인, 당신의 처녀성은 당신만의 문제일 뿐이오."

"그 문제에 관한 경의 개화된 태도에는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게 정말 문제가 되는 건 아닌가요?"

그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푹 집어넣었다.

"꼭 늪에 빠지는 기분이군."

"윅크미어 경, 난 우리 서로가 결혼 생활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를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확신해요."

그는 그녀의 눈 속에 드러난 자존심과 상처를 보았고 그 순간 갑자기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어떤 남자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믿어 온 그가 어리석었다. 클레어는 그런 일에 관해선 그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클레어는 너무도 자존심이 세고 대담하기 때문에 무엇에 대해서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여자였다. 만족감이 그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난 이런 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순결한 아내가 주어진 이상 이 행복한 운명을 거부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난 그 말을 믿소."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 의혹에 찬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지금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욕망 탓이겠지요. 그 유혹은 당신에게 내가 원할 만한 말만 하라고 가르치고 있을 테니까요."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갑작스런 키스에 그녀가 보인 반응을 떠올렸다. 그것은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소, 당신을 몹시 원하오. 하지만 난 완전한 욕망의 노예가 될 정도로 허약하진 않소. 그건 나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 만한 힘은 없소. 당신이 순결한 몸이라고 말한다면 난 그 말을 믿소, 클레어."

클레어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비틀었다.

"내가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믿어도 좋소. 내가 당신을 믿듯 당신도 날 믿도록 해야 하오."

"좋아요."

그러나 그녀는 의심이 풀리지 않은 듯이 보였다.

"날 믿는 거요, 그렇지?"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다니?"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클레어, 방금 전에 당신은 날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소?"

"오늘밤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뭐라고 단정 짓기 힘들군요."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우리의 원래 계획을 실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원래 계획이라니?"

"우리 서로가 상대방의 전폭적이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이 결혼을 완성하는 걸 미뤄 두기로 해요."

개러스는 잠깐 눈을 감았다.

"신이여, 내게 힘을 주소서."

"분명히 그러실 거예요, 개러스."

클레어는 그에게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침대 밑에 오늘밤 당신이 사용할 간이침대가 있어요."

그는 그녀가 부산하게 침대 가장자리로 옮겨 가더니 밑으로 몸을 기울여 간이침대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을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요?"

그녀는 얼굴 앞으로 흘러 내려온 긴 머리카락들 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쓸 간이침대를 꺼내는 거예요."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

"난 이 망할 침대에서 내 아내, 당신과 같이 잘 거요."

그녀는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나셨군요."

"화라고? 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개러스는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몸을 빙글 돌리고 창가의 의자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개러스?"

그는 지옥의 거울을 움켜쥐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윅크미어 경."

클레어는 그의 손에 쥐어진 칼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목으로 올라갔다. 개러스는 칼을 높이 쳐들더니 다음 순간 칼날을 침대 위로 내리쳤다. 정확히 중간이었다. 클레어는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곧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칼날 아래쪽을 응시했다. 효과적으로 거대한 침대를 반으로 나눠 놓고 있는 칼이 불빛 속에서 번뜩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결혼 생활의 시작이 이런 거라면,"

개러스는 악다문 이 사이로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지옥의 거울이 오늘밤 우리들과 한 침대에 들 거요. 그것이 당신을 내 손에서 보호하겠지."

"경의 칼을 우리들 사이에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클레어는 소곤거리듯 말했다.

"두려워 말아요. 당신은 여기 당신 쪽 침대에서 안전하게 잘 수 있을 거고 난 다른 쪽 반을 차지할거요."

"하지만 간이침대는……."

"그 망할 간이침대에선 안 잘 거요. 내겐 우리의 침대 반을 차지할 권리가 있소, 부인."

"내가 간이침대를 쓰는 게 좋겠군요."

"아니, 당신도 나와 함께 이 침대를 써야 하오. 내 자제력의 증거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소? 좋소, 이제 그걸 보여 주리다. 날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거들랑 아침에 부디 내게 일러주시오."

클레어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러스는 그녀를 무시하고 나머지 옷들을 벗어 한쪽으로 던졌다. 그는 여전히 발기한 자신의 몸을 보는 순간 그녀가 작고 숨 막힌 듯한 탄성을 발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를 무시하는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그녀가 순결한 몸이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면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충격 받은 눈길이 그에게 진실을 일러주었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판단 착오와 서툴게 처리한 상황에 대해 언젠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도 나무랄 처지가 못 된다. 개러스는 세 걸음에 방을 가로 질러가 불을 살폈다. 그런 다음 다시 방을 가로질러 돌아와 닫혀진 침대 커튼을 홱 잡아당기고 클레어 옆의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지옥의 거울은 욕망에 대한 강철 철책으로서 그 둘 사이에 누워 있었다. 사방은 매우 어두웠다. 커튼이 죽어 가는 잿빛의 불빛을 가렸다. 개러스는 머리 뒤로 팔베개를 하고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는 허리에서 통증을 느끼며 자기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났다. 오늘밤은 아주 긴 밤이 될 것이다.

"개러스?"

클레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이오?"

"베아트리체의 예언 중 일부가 실현됐다는 생각이 금방 들었어요."

"무슨 예언 말이오?"

"당신이 신혼 방에서 칼을 뽑을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랬어요."

"최근의 내 운세를 생각해 보면, 이걸 가지고 다니면서 우연히 내 목을 따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오."

 

 

 

9

클레어는 새벽이 오기 바로 전에 깨어났다. 마음속엔 후회로 가득했다. 그녀는 큰 침대 속에 자기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가 어젯밤 일을 몹시 엉망으로 망쳐 놓았다는 저항할 수 없는 확신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혹시 자기가 그토록 바라오던 남편과의 따뜻하고 사랑스런 우정을 이룰 기회를 영영 놓쳐 버린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다.

사랑스런.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원해 오던 것임을 클레어는 깨달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녀는 단단하게 이루어진 우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할 거라고 스스로 확신해 왔었다. 그러나 어젯밤 그녀는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개러스는 오늘 아침 그녀에게 절대로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 버린 일이다. 그녀는 그를 화나게 했고 그 과정에서 틀림없이 그녀가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관계에서 적어도 몇 단계는 뒤로 후퇴시킨 게 분명했다. 그녀의 고집스런 자존심과 거만한 믿음이 스스로를 이 혼란 속으로 빠뜨린 것이다. 이건 그녀보다 나이 들고 현명한 사람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데서 온 결과라고 그녀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베아트리체부터 자신의 늙은 유모 아그네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녀에게 결혼 첫날밤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라고 충고했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손상을 복구하고 어젯밤에는 그토록 고집스레 부수려 했던 것을 다시 지으려 애써야 한다. 침대 커튼의 반대쪽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 클레어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개러스?"

"결혼식 다음 날 아침치고는 일어나는 게 너무 빠르오. 더 자도록 해요, 클레어."

그녀는 그가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옷을 입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커튼의 갈라진 틈을 통해 그녀는 침대로 향하는 그의 알몸을 잠깐 스치듯 볼 수 있었다. 이 광경이 그녀에게 감미로운 한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지난밤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녀는 자기가 늘씬하고 마른 고양이같이 민첩한 체형을 좋아하고, 거대한 군마 같은 타입은 싫어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젯밤 개러스의 나체를 본 후, 곧 마음을 바꿨다. 그녀는 자기가 예전에 믿었던 것처럼 큰 체격의 남편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의 특정한 신체 부위의 크기가 약간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전체적인 생각이 흔들리는 건 아니었다. 크기는 뇌의 크기가 작은 남자일 경우에만 문제가 되는 거라고 클레어는 확신했다. 개러스의 경우처럼 높은 지능과 자제력의 축복을 받은 남자의 경우, 신체적 크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클레어는 개러스가 키스와 손가락으로 그녀에게 일으켰던 그 온몸이 부서질 것 같던 쾌감을 상기했다. 그는 시번의 니콜라스 같은 멍청이도 아니고 투박한 촌뜨기도 아니었다. 그는 여자에게 기꺼이 인내심을 발휘하려는 남자였다. 또한 개러스가 레이먼드처럼 그녀에게 시를 지어 바치거나 불멸의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레이먼드처럼 그녀를 고의로 속이려 들진 않았다. 커튼의 반대쪽에서 부드럽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클레어는 몸을 뒤척이고 이불을 뒤로 밀

쳐서 베개에 기대어 앉았다. 여기에 하루 종일 숨어 지낼 순 없는 일이다. 그녀는 한쪽 손을 밖으로 꺼내 조심스럽게 뭉쳐진 이불 위를 더듬었다. 지옥의 거울이 없어졌다. 분명히 무사히 제 칼집 속으로 들어갔으리라. 클레어는 개러스가 칼을 휘둘러 침대를 반으로 나누던 장면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부터는 그 칼을 볼 때마다, 아마 평생 그러겠지만, 결혼 첫날밤의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어떤 남자들은 그녀가 어젯밤 야기시켰던 그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또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개러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격노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의 화를 잘 다스릴 줄 알았다. 그녀는 육체적 힘에 자제력도 손색 없는 남자와 결혼한 것이다. 클레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언젠가는 그를 대면하고 사과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 할 일이나 의무를 뒤로 미루는 건 그녀의 방식이 아니다.

"개러스, 어젯밤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얼마나 유감스러워하는지 알려 드리고 싶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의 어조는 너무 냉랭하고 건조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과의 말을 계속했다.

"내가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못했다는 건 잘 알아요. 어제 말했듯이 내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서야 내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일처리를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거예요."

"그 말은, 육체적 정열의 즐거움이 믿음과 우정이라는 지적 장난감보다 더 재미있단 뜻이오?"

", 아니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난 아직도 우리의 결혼 생활이 믿음과 우정에 기반을 뒀으면 해요. , 오늘 아침엔 내가 어젯밤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뿐이에요."

개러스는 아무런 경고도 없이 커튼을 옆으로 홱 젖혔다.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클레어는 그가 바지는 입었지만 아직 맨발인 것을 발견했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작은 물체를 움켜쥐고 있었다.

"어젯밤 당신의 새 남편과의 사이에 얼마간의 믿음을 쌓았단 소리를 하려는 거요?"

그는 다소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가 일부러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저했다. 이런 생각이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기품 있는 태도로 말했다.

"다시 시작했으면 해요. 난 경에게 적합한 아내가 되어 이 결혼을 완성할 준비가 돼 있어요."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오."

"난 당신에게 여러 가지를 맡기겠어요, 개러스."

그녀는 방과 그 너머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려고 손을 휘저었다.

"당신에게 이 장원의 보호를 맡기겠어요. 내 백성들에 대한 당신의 책임을 다해 주길 원해요. 난 경이 현명하고 관대한 주인이 되리라 믿어요."

"그게 전부요?"

그녀는 그에게 기대에 부푼 미소를 지었다.

"시작하기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그렇소, 하지만 난 더 많은 걸 갖고 싶소, 부인."

그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젯밤 몇 시간 동안 그 생각을 해 봤어요."

그녀는 그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우리들의 미래를 생각하느라 거의 밤을 새웠지. 그래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됐고 오늘 아침 당신의 사과도 그 결론을 바꾸진 못하오."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결론을 내렸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모든 면에서, 특히 남편으로서 날 믿는다고 확신하게 될 때까지 밤마다 이 칼이 우리 둘 사이에 있게 될 거요."

"난 당신을 믿어요."

"아니, 당신은 날 믿지 않소. 어젯밤 당신은 내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소."

클레어의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를 잘못 판단하셨군요."

"정말이오?"

"그래요, 그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해선 사과하겠어요. 난 당신이 욕망에 압도된 나머지 우리들의 약속에 관한 건 기억해 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당신이 자신의 정열을 확실히 통

제할 수 있으며 절대로 그것들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어요."

"어찌 됐든, 당신의 사고방식이 우리 모두를 복잡한 문제로 옭아 넣었소. 이 문제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이제 완전히 깬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서 옷을 입는 게 좋겠소."

"개러스, 우리 얘기 좀 더 해요."

"아니오, 오늘 아침에는 이 어리석은 대화를 더 계속할 기분이 아니오."

"아직도 어젯밤 제 행동에 화가 많이 나 있는 거죠?"

그는 그녀에게 침대에서 비키라는 몸짓을 했다.

"일어서요, 부인. 이미 말했듯이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합시다."

여전히 그녀는 망설였다.

"개러스, 어젯밤보다 더 기분이 상한 건가요? 당신이 그렇게 큰 즐거움을 준 뒤에도 내가 당신을 거부했다고 믿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죠?"

"내가 직접 들어내기 전에 부디 그 침대에서 비켜 주시겠소?"

클레어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침대에서 서둘러 나가야 하죠?"

개러스는 무언가를 하려고 단단히 작정을 하긴 했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 같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둘이 함께 아침 일찍 절벽으로 산책 나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소."

클레어의 얼굴이 즉시 밝아졌다.

"좋은 생각이에요. 난 아침 산책을 좋아해요."

"옷을 든든하게 입도록 해요."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개는 걷혔지만 공기는 아직 차가우니까."

", 그렇게 하죠."

클레어는 재빨리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그녀는 개러스에게 화사한 미소를 던지고 서둘러 옆의 옷방으로 갔다. 그녀는 옷장 서랍 중 하나를 열고 따뜻한 겉옷을 집으려 하다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겉옷을 거머쥐고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되돌아왔다.

"개러스, 산책보다 말을 타는 게 어떨까요? 어제 우리의 승마가 난 무척…… 세상에 맙소사."

그녀는 충격을 받아 화를 버럭 냈다.

"대체 뭘 하는 거예요?"

개러스는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려놓고 작은 병 안에 든 내용물을 시트 위에 쏟고 있었다. 그는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본 무엇이 그를 놀라게 했음이 분명했다.

"진정해요, 클레어. 당신을 위해 이러는 거요."

"나를 위해서라고요?"

개러스가 들고 있는 병을 가리키는 클레어의 손가락은 분노의 힘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병 속에 든 건 닭피가 틀림없겠죠?"

"클레어, 내 말을 들어 봐요."

"당신은 시트에 닭피를 뿌리고 있는 거로군요."

"그렇소, 이게 그거에 대한 적당한 대체물이라고 들었는데……. , 그건 당신도 알거요."

그녀는 앞가슴 밑으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걸 뭣에 쓰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윅크미어 경."

"클레어, 시트를 갈러 오는 하인은 우리의 신혼 초야의 증거를 찾을 거요. 리넨 위에 혈흔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소문이 오늘 오후쯤이면 전 섬에 다 퍼질 거요. 당신도 그걸 잘 알 거요."

"그래서 당신은 남자로서의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이건가요?"

"이런 젠장,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의 명예요. 난 어떤 인간이든 결혼 시트에 어째서 피가 보이지 않나 하고 제멋대로 상상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말이오."

"! 절대로 그 말은 못 믿겠는데요. 당신이 걱정하는 건 자신의 명예예요. 결혼 전에 다른 사람에게 몸을 줘 버린 신부를 얻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걸 못 참겠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지금 내 자존심이라고 믿는 거요?"

그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그쳤다.

"맞아요. 정확히 바로 그게 내가 믿는 거예요."

클레어는 쿵쾅거리며 방의 건너편으로 가로 질러가서 침대 밑에서 작은 상자를 끌어냈다. 그것은 결혼식 날 받았던 닭피가 든 작은 유리병들을 모두 감춰 둔 상자였다. 개러스는 그녀가 상자 뚜껑을 홱 열어젖히는 모양을 눈살을 찌푸린 채 지켜보았다.

"뭘 하는 거요?"

"시트에 피를 뿌리고 싶어 했죠?"

그녀는 몸을 곧게 폈다. 두 손에는 병들을 가득 들고 있었다.

"이제 시트에 피를 뿌리게 될 거예요. 진심으로 말하지만, 세상 남자 모두가 바라는 피를 모두 확실히 뿌리게 해 드리죠."

그는 그녀가 침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 클레어, 당신 지금 분노로 이성을 잃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내 머리는 아주 멀쩡하다구요."

그녀는 차갑지만 달콤한 웃음을 지어 보인 다음 큰 침대로 기어 올라가 그 중간에 버티고 섰다.

"사실, 감히 말하건대 지금 이 순간보다 내 머리가 더 맑아 본 적은 없어요."

그는 그녀가 안고 있는 병들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지금 당신이 벌이려는 일을 우리 두 사람이 다 후회하게 될 거라는 회의가 생길까?"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면서 클레어는 첫 번째 병마개를 따고 그것을 높이 쳐들었다.

"보세요, 내 정절을 의심한 건 당신만이 아니었어요."

"당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소, 클레어. 난 단지 소문에서 당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뿐이오."

"이럴 수가. 어젯밤 날 믿는다고 했던 말은 전부 진심이 아니었군요. 당신도 훌륭한 사람들과 같은 의견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만족하게 될 거예요. 이건 은둔자 베아트리체가 고맙게도 선물해 준 닭피랍니다."

클레어는 병의 입구가 아래로 향하도록 뒤집어 내용물을 시트 위로 쏟아 부었다. 병 속에 거의 이틀이나 재워 둔 닭피는 짙게 응어리가 져 있었기 때문에 하얀 리넨 중간에 더러운 불그스름한 갈색의 웅덩이를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개러스가 신중하게 여기 저기 흩뿌려 놓았던 붉은 핏자국을 모두 지워 버렸다.

개러스는 그 흉측한 핏덩어리를 본 다음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다 끝났소?"

"천만에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 걸요."

클레어는 두 번째 병을 골라 개러스가 잘 볼 수 있도록 높이 쳐들었다.

"이건 마가렛 수녀 원장님이 친절하게도 건네주신 닭피입니다. 이건 아주 순결한 닭한테서 뽑았을 거라고 확신해요. 처녀 닭이었겠죠, 아마."

클레어는 화려한 동작으로 두 번째 병을 거꾸로 들었다. 검붉은 피가 시트 위로 흘러넘치며 무시무시한 얼룩이 더해졌다.

"나의 좋은 벗, 조애너로부터."

클레어는 세 번째 병을 비웠다.

"나의 충직한 하녀, 유니스로부터."

그녀는 병에 든 내용물을 비우면서 우울하게 웃었다. 더 많은 피가 리넨 위로 부어졌다.

"그리고 끝으로, 그러나 절대로 그 양은 적지 않죠. 나의 유모 아그네스의 헌신의 증거입니다."

마지막 병을 거꾸로 들어 피를 시트 위로 의기양양하게 쏟아 붓는 동안에도 클레어의 분노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는 개러스를 반항적인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당신의 명예를 만족시키기엔 충분한 양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개러스는 침대를 흠뻑 적신 엄청난 양의 무시무시한 피 웅덩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이 뭘 완성시키고 싶어 한 건지 잘 모르겠소, 부인.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오. 아무도 이 시트를 어젯밤 내가 처녀와 같이 한 잠자리의 증거라고 여기진 않을 거라는 점이오."

"그럼 어떻게들 생각할까요?"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생각하겠지."

", 맙소사."

클레어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끔찍한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현실이 번개처럼 되돌아왔다. 그녀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침대 중간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개러스와 마주 쳐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성 허미언의 성스런 머리에 대고 말하건대,"

클레어는 중얼거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람?"

개러스의 투명한 회색 눈이 유쾌하게 빛을 발했다.

"이건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헬하운드. 이건 재앙이에요. 이 엄청난 피를 뭐라고 설명하죠?"

개러스의 미소가 소리 없는 웃음으로 번졌다.

"개러스, 날 좀 도와줘요. 정말이지……."

그는 드디어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다시 화가 치민 클레어는 허브 향기가 나는 베개 하나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 그것은 개러스의 넓은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다. 클레어는 두 번째 베개를 집어 들었다. 개러스의 킥킥거리던 웃음이 목청이 쩌렁쩌렁 울리는 큰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대로, 쏟아지는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클레어는 앞가슴에 베개를 꼭 움켜쥐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웃음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걸 깨달았다. 유쾌한 웃음소리는 돌벽에 부딪쳐 다시 튕겨나와 방 안 전체에 메아리쳤다. 이제 개러스는 팔짱 꼈던 팔을 풀고는 한 손으로 침대 기둥을 붙잡고 등을 구부린 채 마구 웃어댔다. 클레어는 한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개러스? 당신 괜찮아요?"

그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넓은 양어깨는 웃느라고 심하게 들먹거렸다.

클레어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정도로 우스운 일은 아니에요."

또 다른 폭소가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조용히 해요."

클레어는 초조한 듯 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가 듣겠어요."

개러스는 팔뚝을 침대 기둥에 기대고 서서 껄껄 웃어댔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개러스가 몸을 흔들며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반갑고 기뻤다.

"그렇게 즐겁게 봐주니 기쁘군요."

그녀가 말했다.

"내 명예를 위해 죽었던 닭들도 모두 당신처럼 즐거워할지 모르겠어요."

"그렇진 않을 거요."

개러스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즐거워할 리가 없잖소. 하지만 당신이 지금처럼 이렇게 재미있는 고민에 빠져 있는 걸 본다면 아마 그 문제에 대해 훨씬 기분이 나아지긴 할거요. 틀림없이 그 불쌍한 닭들은 확실하게 복수를 한 셈이오."

클레어는 신음 소리를 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 이건 끔찍한 상황이에요. 모두가 다 이 일을 두고 수군댈 거예요. 난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디자이어의 여주인은 아주 색다른 침대 취향을 갖고 있다고들 하겠지."

클레어는 그에게 눈썹을 찌푸렸다.

"이번 일엔 당신도 나만큼이나 관련돼 있다는 걸 상기시켜 드리고 싶군요."

"맞소."

"아마 사람들은 어젯밤 당신이 내게 뭔가 대단히 끔찍한 짓을 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 일로 그들은 당신을 비난할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내 생각엔 이 시트를 바꾸는 사람은 이걸 보자마자 닭피가 많이 뿌려졌다는 걸 곧장 알아볼 거요."

클레어는 신음 소리를 냈다.

"모두들 내가 서투르게 처녀라는 증거를 꾸미려다 실패했다고 여기겠죠?"

"바로 그거요. 십중팔구 그럴 테지. 이런 종류의 일은 말이오, 인생의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신중함과 자제력이 성공의 필수 요건인 거요."

클레어는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녀는 무릎을 세워 한쪽 팔꿈치를 그 위에 올려놓은 다음 손바닥으로 턱을 받쳤다. 뚱한 표정으로 그녀는 침대 위의 난장판을 바라보았다.

"내가 완벽한 멍청이로 보이겠지요?"

클레어가 말했다.

개러스의 웃음은 소리 없는 미소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그렇소. 이 일은 아마 우리 백성들한테 앞으로 몇 달 동안 신나는 화젯거리가 될 거요. 어쩌면 몇 년이 될지도 모르지."

"성 허미언……."

개러스가 한 손을 들었다.

"부디 그녀의 성스런 머리에 대곤 맹세하지 마시오. 그 외엔 뭐든 좋소."

"허미언의 성스런 눈썹에 맹세코,"

클레어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 내 생애 중 가장 수치스런 순간이에요."

"아니오. 난 당신이 오늘 저녁 홀 안 가득히 들어선 사람들과 대면하게 될 때가 바로 그 순간이 될 거라 생각하오."

클레어는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뜨끔했다.

"우린 이제 어떻게 하죠?"

개러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우리?"

"이건 당신 잘못이에요."

그녀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전부 다요. 당신이 날 화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개러스는 놀라울 정도로 상냥하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당신한테 남편으로서의 나의 많은 장점들을 증명해 보여야겠군."

클레어는 손바닥에서 턱을 들었다.

"무슨 뜻이에요? 뭘 어쩌실려구요?"

"다른 상황 조작을 하나 더 만들 참이오."

개러스는 옷방으로 걸어갔다.

"잠깐 실례하겠소. 곧 돌아오리다."

"거기서 뭘 하는 거예요?"

클레어가 외쳤다.

"참고 기다려요, 부인. , 이제 갑니다. 이거면 충분하겠군."

클레어는 개러스가 옷방에서 나오는 것을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는 한 손에 커다란 걸레를 들고 방을 가로질러 침대로 다가왔다.

"우선, 지나치게 많은 닭피를 좀 닦아내야겠소."

그는 낡은 걸레로 걸레질을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저 엄청난 얼룩이 없어지지 않을 텐데요."

클레어가 말했다.

"맞소."

개러스는 흠뻑 젖은 걸레를 둥글게 돌돌 말았다.

"그래도 적어도 이 흔적이 닭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잡은 도살장처럼 보이진 않을 거요. 이제 사람의 피로 만들어질 만한 붉은 혈흔으로 보이잖소."

"그렇게 생각해요?"

클레어는 회의적이었다.

"난 기껏해야 작은 얼룩이 좀 남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건 너무 끔찍해요."

"그 말이 맞긴 하오."

개러스는 자신의 개인 소지품을 넣어 두는 상자를 열고는 캔버스 자루를 잡아당겨 그 안에 젖은 걸레를 떨어뜨렸다.

"절벽으로 산책 나갔을 때 이 증거물을 처리합시다."

"그거 아주 좋은 계획이군요."

클레어는 잠깐 기뻐하다가 다음 순간 다시 걱정이 되었다.

"아직도 시트에 남아 있는 이 어마어마한 얼룩은 어떻게 할 참이세요?"

"사람들이 몇 마디씩 하게 되겠지."

개러스는 상자 안쪽을 더듬거렸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그럴싸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말이오. 그들은 아마 내가 짐승처럼 당신을 다뤘다고 상상할거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공평치 못해요."

"고맙소, 나의 좋은 평판을 위해 아내답게 신경써 준 데 대해 감사하오."

"천만에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개러스는 상자에서 몸을 쭉 폈다. 그는 지극히 사악해 보이는 작은 단검 하나를 들고 있었다

"결혼 시트를 더럽힌 엄청난 양의 피를 설명할 변명거리를 하나 더 만들 생각이오."

클레어는 공포에 질려 단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베아트리체의 예언이 생각났다. 피가 흐를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곧 알게 될 거요."

개러스는 난로로 다가가서 몸을 웅크리고 지난 밤 타다 남은 불길을 추슬렀다.

"예전에 아랍의 물리학자가 쓴 어떤 논문을 읽은 적이 있소. 그는 외과 수술을 하기 전에는 칼을 반드시 불로 달궈야 한다고 했지."

"개러스."

클레어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

"진정해요, 부인. 당신은 조금도 해치지 않을 테니까."

"절대 그런 일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클레어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날 듯이 방을 가로 질러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개러스는 불길에서 칼을 들어 올려 자신의 팔뚝에 민첩하고 깨끗한 솜씨로 일직선을 그었다. 얇게 베인 상처를 따라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클레어는 경악하며 입으로 손을 가져 갔다.

"성 허미언이시여."

신음처럼 나온 클레어의 목소리에 개러스는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 없소, 클레어. 이건 아주 사소한 긁힌 상처일 뿐이니까. 이보다 더 지독한 경우도 많았소."

", 개러스."

"옷방으로 가서 내가 붕대로 쓸 만한 깨끗한 사각 리넨을 좀 갖다 줬으면 감사하겠소."

", 개러스."

"커다란 사각 리넨,"

개러스가 덧붙였다.

"그것이 빨래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도 모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컸으면 좋겠소."

", 개러스."

"시트 외에 다른 곳에도 피를 흘리기 전에 서둘러 줄 수 없겠소?"

클레어는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마비 상태에서 퍼뜩 깨어났다. 그녀는 몸을 날려 옷방으로 미친 듯이 달려 들어갔다. 그녀는 선반에서 약초로 만든 치료 연고 단지와 붕대를 거머쥐고 서둘러 개러스가 기다리고 있는 침대로 돌아왔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죠?"

그녀는 그의 팔에서 피를 닦아내면서 울먹이듯 말했다.

"사람들한텐 뭐라고 할 건가요?"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칼로 사소한 사고를 냈다고 할 참이오."

그녀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았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하나요?"

"우리 둘이 똑같은 얘길 하면 믿어 줄 거요."

개러스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선 당신이 얘기에 군더더기를 붙이려고 한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바꾸려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둬야겠소. 다른 무엇보다도 솔직함의 발작에 사로잡혀 진실을 고백해선 안 되오. 내가 모든 걸 알아서 할 거니까, 잘 알아듣겠소?"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들었고 곧 그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알겠어요."

"잘 됐군."

"끔찍하네요."

그녀는 그의 상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위해 이런 짓을 하진 말았어야 했어요."

"별거 아니오."

"아니에요. 이건 너무 심해요."

클레어는 연고를 베인 상처에 발랐다.

"날 위해 이 정도로 고귀하고, 용감하며 기사다운 행동을 해준 사람은 여지껏 아무도 없었어요."

개러스는 자신의 팔을 치료하는 그녀를 지켜보며 입술의 한쪽 끝이 올라갔다.

"당신의 남편으로서 난 내 아내한테 도움이 됐다는 게 그저 기쁠 뿐이오."

"당신은 너무 관대한 분이세요."

클레어는 그의 상처를 깨끗한 리넨으로 조심스럽게 감았다.

"영원히 당신한테 빚을 졌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요?"

"생각나면 말해 주리다."

개러스가 말했다.

 

 

 

10

울리치는 위로 말아 올린 개러스의 회색 튜닉 아래 명백하게 드러난 하얀 리넨 붕대를 곰곰이 살펴보았다.

"단검이란 위험한 물건입니다."

"맞아."

개러스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짚고 앞에 펼쳐진 디자이어 섬의 지형도를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걸 그리느라 꽤 수고했군, 울리치."

"감사합니다."

울리치의 입이 한쪽으로 올라갔다.

"지난 3일 동안 제가 관찰한 걸 토대로 다소 급하게 준비한 것이죠. 섬에 좀 더 익숙해지는 대로 더 보완할 생각입니다."

"난 만족하네. 이 지도는 섬의 수비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거야."

"오늘 아침 이 성을 휩쓸고 있는 소문으로 판단해 보건대, 먼저 부인한테 방어할 준비를 해두는 게 현명할 것 같은데요."

개러스는 양피지 지도에서 눈을 들어 부하를 쳐다보았다.

"그건 사고였어, 울리치."

"뭐라고 하시든 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신부한테 단검으로 몇 가지 재주를 보여 주면서 즐겁게 해주고 있었지. 그러다 그 망할 물건이 미끄러진 거야."

"단검을 가지고 재주를 피웠다라."

울리치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결혼 침실에서 말이죠."

"그래."

"사고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죠."

"맞아."

"여기 디자이어에선 침실에서 단검을 갖고 노는 게 관습입니까?"

울리치는 정중하게 물었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남편들한텐 종종 있는 일이지."

"칼에 부주의하게 사고를 당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모습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내가 결혼할 줄도 몰랐잖나."

"그래요, 그건 사실입니다."

"무슨 일이건 처음이란 게 있는 법이야, 울리치."

"오늘 아침 이른 새벽부터 신혼방에서 들려왔다는 그 웃음소리도 역시 그걸로 설명이 가능하겠죠?"

"웃음소리?"

개러스는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자의 웃음소립니다. 적어도 소문상으로는 그렇단 말입니다. 꽤나 오래 지속됐다고 하던데요. 침실 밖의 홀에 있던 하녀 둘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집안 하인들은 수군거리길 좋아하지."

그는 지도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웃음소리에 관한 건 전혀 모르십니까?"

울리치가 다시 물었다.

"모르는 일이야."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으시죠?"

개러스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디자이어의 대부분은 높은 절벽이 자연적인 방패막이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그렇습니다."

"배를 해안에 갖다 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마을 항구뿐이고."

"맞습니다. 하지만 섬 측면을 따라 작은 내포 두 군데를 발견했는데 이곳에선 시번 쪽으로 해협을 건너다볼 수 있더군요."

울리치는 검지로 그 지점을 가리켰다.

"그 중에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있나?"

울리치는 지도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작은 고깃배 정도라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절벽 위로 기어오르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무장한 군인들을 절대로 그리로 데려올 순 없죠. 그쪽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을 궁지로 몰아 쓰러뜨리는 건 작은 일일 경우가 종종 있지."

울리치의 눈에 만족스런 빛이 나타났다.

"단검처럼 작은 일 말입니까?"

"맞아. 섬에 다른 흥미로운 특색은 없나?"

"윌리엄은 관찰력이 뛰어난 아입니다. 그 내포들 중 한 곳 근처의 절벽 안에 동굴이 몇 개 있다고 하더군요."

개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이나 무기를 그 안에 숨길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기껏해야 몇 시간이 고작이죠. 윌리엄 말로는 조수가 밀려들면 동굴이 바닷물로 차오른답니다."

"좋아."

개러스는 지도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이 성 문제로 돌아가 보기로 하지. 낡은 목재로 된 벽은 약하고 여기 저기 삐걱거리는 곳이 많아. 꼭 수리해 둬야겠어."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겁니다. 디자이어는 한 번도 침략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전망은 없으니까요."

"모든 예방 조치를 취해 두는 편이 좋아."

"맞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렇죠. 분명히 침대에서만은 예외인 것 같지만요."

개러스는 인상을 썼다.

"낡은 벽은 돌로 된 새 벽으로 교체했으면 하네."

"그렇게 하려면 석공을 고용해야 합니다. 디자이어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시번에서 몇 명 고용하도록 하지. 가능한 한 빨리 그리로 사람을 보내 일을 처리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개러스는 마지막으로 지도를 보았다.

"자연 요새라. 우리가 오게 된 곳은 좋은 땅이야, 울리치."

그는 양피지를 둘둘 말았다.

"멋진 곳이야."

"오늘 아침 신혼방 시트에 아주 커다란 혈흔이 있었다던데,"

울리치가 중얼거렸다.

"누구든 결혼 첫날밤의 정상적인 행위 이후에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컸다고들 하더군요."

"내 단검이 낸 상처에서 떨어진 피가 그 부분을 더 크게 만들었지. 재수 없게도 꼭 도살된 닭처럼 피가 흘러내리더군."

울리치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개러스, 당신과 난 10년 이상 친형제처럼 지내 왔습니다. 나한테는 진실을 말해 줘도 됩니다."

"무슨 진실?"

"단검으로 일어난 작은 사건에 대한 것 말입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새색시가 당신의 성행위에 반발해서 단검으로 몸을 보호하려 했다는 얘기가 사실입니까?"

개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소문이 그렇게 났던가?"

"떠도는 소문 중에 하나입니다."

울리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다른 얘기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니죠. 내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런 소문들을 모두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개러스는 매우 침착하게 친구의 번뜩이는 시선을 마주 대했다.

"난 사실을 말했네. 그건 사고였어."

"이봐요, 난 당신의 오랜 동료라구요. 난 당신이 어떻게 무기를 다루는지 알아요. 침대에서 재주를 부리다가 우연히 자기 팔에 상처를 입혔단 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고 기대하진 마십시오."

"자네도 말했다시피, 사고란 언제든 일어나는 법이야."

개러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특히 결혼 침대에선 더 그렇지."

울리치는 다시 한번 나지막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런 걸로 해 둡시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개러스의 대답을 가로막았다.

"들어와."

그는 소리 높여 말했다. 육중한 나무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면서 근심으로 가득한, 그러나 단호한 윌리엄과 댈런의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영주님."

윌리엄이 말했다. 그는 한쪽 손에 작은 고기 파이를 들고 있었다.

"안녕."

개러스는 고기 파이에 시선을 던졌다.

윌리엄은 서둘러 파이를 뒤로 숨기고 불편한 듯이 댈런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이는 연장자 동료로부터 어떤 말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댈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아났고 손가락은 옷자락을 잡았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영주님, 우린 당신에게 말을 하러 왔어요."

그는 울리치를 보며 말했다.

"우리끼리만 있었으면 하는데요."

개러스는 댈런을 자세히 보았다. 이 음유 시인은 분명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확실히 이 대면에서 도망치려 하진 않았다. 개러스의 경험으로 볼 때 젊은이의 연약한 용기를 그 정도까지 강화시킬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여자다.

"이 대화는 클레어 아가씨에 관한 것 같은데, 맞나?"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댈런은 몇 차례 아주 빨리 눈을 깜박였다.

"맞아요, 그렇습니다."

윌리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개러스를 올려다보았다.

"어젯밤 영주님이 아가씨를 해치려 했기 때문에 아가씨가 칼로 영주님 팔에 상처를 냈다는 게 사실이에요?"

개러스는 둘둘 만 양피지를 가볍게 허벅지에 대고 두드렸다.

"아가씨가 그렇게 말하더냐?"

"아니에요."

윌리엄은 허둥지둥 말했다.

"아가씨는……."

"아가씨는 사고였다고 하셨습니다."

댈런이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아가씨는 영주님이 솜씨 좋게 칼로 묘기를 부려 즐겁게 해주려다가 칼이 미끄러지면서 팔을 베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럼 자넨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난 영주님이 아가씨를 덮쳤기 때문에 아가씨는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가씨는 종종 덩치 크고 거만하며 잘난 체하는 기사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아가씨는 그런 사람들은 멍청이에다 예의도 없고 시인의 영혼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셨죠."

울리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볍게 가리고 기침을 했다. 개러스는 댈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네는 내 상처에 대해서 아가씨가 한 해명을 의심하는 건가?"

댈런의 두 손이 꽉 주먹지어졌다. 그의 두 눈은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그대로 비춰 주고 있었지만 뒤로 물러나려 하진 않았다.

"아가씨는 진실을 말하면 우리가 놀랄까 봐 걱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명한 거라고 믿어요. 윌리엄과 나를 보호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죠."

"무엇한테서?"

개러스가 물었다.

"영주님한테서요."

윌리엄이 도와주듯 말했다.

"댈런은 우리가 이렇게 찾아와서 영주님한테 말하는 건 목숨이 위태로운 짓이라고 했어요. 또 영주님이 엄청 화를 낼 테지만 우린 클레어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한다고도요."

개러스는 양피지 지도를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뒤로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방은 갈수록 점점 조용해졌다.

"난 화나지 않았어."

마침내 그가 말했다.

윌리엄은 크게 한숨을 내쉰 다음 히죽 웃었다.

"전 영주님이 화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즉시 뒤에 숨겼던 파이를 앞으로 꺼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전 댈런한테 영주님이 어젯밤 아가씨를 해치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어요."

"믿어 주니 고맙구나."

개러스가 말했다.

"넌 어째서 내가 너의 아가씨를 해치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윌리엄은 입에 든 것을 씹었다.

"아가씨한테서 이상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아가씨는 평상시처럼 기분이 좋았어요. 심지어 지금 아가씬 오후에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작업실에 계세요."

"훌륭한 추리력이로구나, 윌리엄."

울리치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윌리엄은 의기양양해 했다.

"클레어 아가씨는 내가 아주 똑똑하대요."

"네 말이 맞다."

개러스가 말했다.

"난 어젯밤 너의 아가씨를 조금도 해치지 않았어."

그는 댈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우리의 음유 시인은 분명히 동의하지 않는 것 같군. 댈런, 자넨 뭘 하고 싶은 건가? 결투로 내게 도전하려는 건가?"

댈런은 벼락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결투요?"

그가 날카롭게 외쳤다.

"안 될 거 있나?"

개러스는 댈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숙녀의 명예가 걸린 일에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보통이지. 댈런, 자네는 칼과 단검 중 어느 쪽이 좋은가?"

댈런은 마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영주님, 저는…… 제 말은 아가씨는 제가 영주님과 싸우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선 클레어한테 상의할 필요가 없어."

개러스가 말했다.

"이건 남자들만의 문제야, 그렇지 않은가?"

", 글쎄요……."

"나는 칼을 더 좋아하는 편이지."

개러스는 슬픈 듯이 자신의 팔에 감긴 붕대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자네도 보다시피, 단검에는 솜씨가 좀 부족해서 말이야. 알려진 대로 사고가 좀 있었거든."

댈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절 놀리시는군요."

"내가 말인가?"

"전 영주님한텐 도전할 수 없어요."

댈런은 빠른 속도로 말했다.

"전 단칼에 죽고 말 거예요."

"자네의 뜻은 잘 알았네."

개러스가 말했다.

"내가 단검에 서투른 것보다 자네가 칼에 더 서투른 게 분명하군. 우린 서로 그런 단점들은 고쳐야겠어."

댈런의 표정은 독수리가 자기한테 달려드는 걸 본 토끼와 똑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난 이 섬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부하를 거느리고 오지 않았지."

개러스는 계속 말했다.

"나를 섬기던 사람들이 모두 정원사가 되려고 무법자 사냥이라는 매력적인 일을 포기한 건 아니야. 내 하인 브래드퍼드조차 여기 디자이어로 날 따라와 시중 드는 걸 마다했지."

"무법자를 사냥하는 건 아주 신날 것 같아요."

윌리엄이 갈망하듯이 말했다.

"아니야. 사실 다른 사업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다른 직업보다 훨씬 더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개러스가 말했다.

"또 능력만 있다면 보수도 좋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향수 만드는 사업도 그건 마찬가지지."

"."

그러나 윌리엄은 그 두 가지 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일이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끄는 건 디자이어의 재정적인 측면이 아니란다."

개러스는 말을 계속했다.

"그건 클레어 아가씨의 일이지. 내 임무는 이 땅과 여기 사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야. 잘 지키려면 이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워 둬야 하지."

"클레어 아가씨는 기사와 무장한 남자는 주변에 두기에 굉장히 혐오스런 종족이라고 하던데요."

윌리엄이 말했다.

"그래요."

댈런은 이제 약간 용감해진 듯했다.

"클레어 아가씨는 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들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분은 오빠인 에드먼드도 마상 시합에 대한 바보스런 애착 때문에 죽었다고 하셨어요. 그런 일을 추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고 또 그런 걸 좇아다니는 남자들은 몽땅 다 머리가 좀 모자란 거라고 했어요."

울리치는 댈런과 윌리엄에게 차갑고 세련된 미소를 던졌다.

"너희들의 아가씨는 싸우는 남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구나. 하지만 그분도 빈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땅과 백성들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고 믿을 만한 남편을 고른 거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요."

댈런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개러스는 울리치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건 그들 두 사람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오늘 아침 개러스는 누구든 그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울리치가 말했다.

"클레어 아가씨도 칼을 쓸 줄 아는 남자를 어느 정도 필요로 한 것만은 사실이지."

윌리엄이 파이를 또 한 입 먹었다.

"우리 엄마는 클레어 아가씨가 항상 다른 것보다도 자기 백성들에 대한 의무를 우선시한다고 했어요."

"클레어 아가씨가 우리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건 너무 불쌍한 일이에요."

댈런이 반항적으로 말했다.

"그건 옳지 않아요."

"그만하면 됐다."

개러스가 조용히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야. 내게 남겨진 일은 내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이제 난 그 일을 하려고 한다."

댈런이 비꼬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이죠?"

"내가 말했듯이 이 섬을 지키려면 각 집마다 신체 건강한 남자들은 누구나 다 적절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윌리엄은 파이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이 섬에는 영주님하고 영주님의 무장한 부하들 말고는 특별히 건강한 남자는 없어요."

"제대로 봤다, 윌리엄."

개러스가 말했다.

"그럼 너는 어떻지? 지금 열 살 정돈가?"

"맞아요."

"그럼 기사 수업을 시작할 나이가 지났구나. 내가 네 나이 때는 벌써 정기적으로 창과 칼 연습을 하곤 했었단다."

"내가요? 기사가 된다구요?"

윌리엄은 깜짝 놀라 먹던 고기 파이가 그만 목에 걸리고 말았다.

"안 돼요, 영주님. 그건 불가능해요."

윌리엄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울리치는 방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서 윌리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미래의 기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일 중 첫 번째는 음식을 목에 걸리게 하지 않고 삼키는 거야."

윌리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몇 번 콜록거리다가 겨우 나아져서 파이를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도 몇 차례 숨을 헉헉거렸다.

"클레어 아가씨하고 우리 엄마는 절대로 내가 기사 수업을 받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지?"

개러스가 물었다.

"난 약하니까요."

댈런은 개러스에게 눈을 흘겼다.

"그 말이 맞아요. 그분들은 절대로 윌리엄이 그런 일을 배우게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클레어와 조애너는 윌리엄의 훈련에 직접 신경쓸 필요가 없어. 그런 문제들은 내 소관이니까."

개러스는 댈런을 주시했다.

"음유 시인, 자네는 어떤가? 자네의 수업 진도는 어디까지 왔지?"

"?"

"하프를 집어 들고 자기 군주의 마누라와 바람 피는 기사들에 대한 짜증나는 발라드를 짓기 전에 유용한 기술을 좀 배워 뒀나?"

댈런은 크게 놀란 눈치였다.

"제 전주인은 학자였습니다."

"학자라고?"

"그렇습니다."

댈런의 눈이 마치 숨을 곳을 찾는 것처럼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날 기른 건 자기 공부를 돕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는 훈련받은 기사였나?"

개러스가 물었다.

", 아주 위대한 기사였죠. 십자군 전쟁에도 나간 걸요. 하지만 그분은 내게 기사 훈련을 시키는 건 쓸모없다고 했어요."

댈런의 입술이 떨렸다.

"내가 꼴사나운 약골이기 때문에 그런 건 받을 수 없다나요."

"자넨 그 학자의 집에서 자란 건가?"

"."

댈런은 소매 뒷부분으로 이마에 배어나온 땀을 닦았다.

"자네 아버지가 그 학자의 성으로 자넬 보낸 건가?"

개러스는 탐문을 계속했다.

"우리 아버지는 제가 있다는 것도 몰라요."

댈런은 팔을 옆으로 축 늘어뜨렸다.

"전 아버지 이름도 몰라요. 사생아니까요."

개러스는 댈런의 강렬하고 고뇌에 찬 시선과 마주치며 이 젊은이의 분노뿐만 아니라 그의 두려움의 깊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네와 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군."

댈런은 분명히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주인님은 아버지의 이름은 알잖아요. 랑드리의 서스턴 경은 훌륭한 분이십니다. 난 나를 낳게 만든 사람이 마상 경기에 참가하러 가던 길이었단 것밖엔 아무것도 몰라요. 그는 들판에 혼자 있는 우리 어머니를 발견하곤 강간해서 날 배게 해 놓고 떠나 버렸죠. 제 갈 길로 가버리곤 두 번 다시 어머니와 날 보러 돌아오지 않았어요."

"자네만 그런 불유쾌한 사건의 산물인 건 아니야."

개러스가 말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자네 나름대로 살 길을 개척해야 하네. 적어도 자넨 자네가 이루는 모든 것이 직접 자기 손으로 얻어지는 거라는 걸 아는 만족감은 가지게 될 거야. 칼을 다룰 줄 아는 것이 사생아에겐 유용한 일이라는 걸 곧 깨닫게 될 걸세."

"난 음유 시인이나 아니면 학자로 살아갈 생각입니다."

댈런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머리를 박살내거나 다른 사람의 전쟁에 참가하는 따위의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개러스는 울리치와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 아가씨의 군인에 대한 형편 없는 의견이 섬 전체를 물들인 것 같군 그래."

울리치에게 잠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렇군요."

"아가씨가 생각을 바꾸게 만들어야겠는걸."

"영주님이 쓸모 있는 분이란 걸 증명할 방법을 찾게 될 겁니다."

울리치가 말했다.

"언제나 그래 오셨으니까요."

개러스는 댈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자네의 모친이 바로 자네가 말한 그 학자의 집에서 자라도록 자넬 그리로 보낸 건가?"

댈런은 머리를 저었다. 쫓기는 듯한 표정이 그의 눈에 다시 나타났다.

"우리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셨어요. 절대로 절 멀리 보내실 분이 아니죠. 하지만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 후 얼마 안 돼서 이모가 날 제 주인한테 팔았어요. 아니, 내 말은 전주인이요."

개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모가 자네를 그한테 팔았다고?"

"그래요."

댈런의 입술이 팽팽해졌다.

"그가 이모한테 동전 몇 닢을 건네주었어요. 그는 건강하고 똑똑한 남자 아이가 필요하다고 했죠. 자기 보조로 숙련시킬 만한 그런 아이요."

"이 학자란 사람은……."

개러스는 천천히 말했다.

"가혹한 주인이었나?"

댈런은 마치 채찍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그는…… 그는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어요."

"자네가 여기 디자이어에 있는 건 바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지?"

개러스는 조용히 물었다.

"아니에요."

댈런의 표정은 이제 공포에 질린 그것이었다.

"아니에요, 전 도망치지 않았어요. 전 언제나 주인님의 명령에 복종했어요."

그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언제나 그랬죠.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만족할 줄을 몰랐어요, 한 번도요. 난 최선을 다했지만 그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없었죠.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없었어요."

윌리엄이 어색하게 댈런의 팔을 잡았다.

"클레어 아가씨가 한 말을 기억해, 댈런."

"그래."

댈런은 몇 차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에 다시 초점이 살아났다.

"클레어 아가씨가 뭐라고 했지?"

개러스가 물었다.

댈런은 인상을 썼다. 그의 눈에서 이제 두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가씨는 댈런한테 이제 댈런은 안전하다고 했어요."

윌리엄이 설명했다.

"댈런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걱정만 많았지요."

"그건 사실이 아니야."

댈런이 불만의 소리를 냈다.

"아니, 사실이야."

윌리엄은 다시 개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엾은 댈런은 아주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어요. 한 번은 내가 모퉁이를 돌아 클레어 아가씨 서재 밖에 있는 홀에서 그를 놀라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거의 기절할 뻔했지요. 그렇지, 댈런?"

"더 이상 말하지 마."

댈런은 몸을 홱 돌리며 윌리엄에게 화를 냈다.

"그걸로 충분해. 내 건강 문제는 개러스 경한텐 조금도 관심 없는 일이야."

"아니, 그건 내가 신경쓸 일이다."

개러스가 말했다.

"내 명령을 듣는 모든 군인들의 건강 문제처럼 말이다. 건강한 남자만이 자기 임무를 훌륭히 해내는 법이지."

"제 건강은 아주 좋아요."

댈런은 노골적으로 반항심을 드러내며 턱을 치켜 올렸다.

"게다가 전 주인님 명령을 받지도 않습니다."

"아니, 자넨 윌리엄처럼 내 관할이야."

개러스는 테이블에서 몸을 곧게 폈다.

"우리가 할 첫 번째 일은 자네들을 훈련시키는 걸세. 울리치, 이 두 미래의 기사들을 아래층으로 데리고 내려가 마당에 나가서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게. 윌리엄과 댈런은 즉시 무기로 연습을 시작해야 돼."

"알겠습니다, 영주님."

울리치가 대답했다. 그는 윌리엄을 보고 씨익 웃었다.

"준비됐나, 젊은이?"

윌리엄은 황홀한 표정이었다.

"내가 칼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단다."

울리치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 윌리엄의 머리카락을 흩으러 놓았다.

"그리고 무기 관리하는 법과 좋은 군마 다루는 법, 자신의 성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되지. 그런 것들을 배우게 돼서 기쁘냐?"

"물론이죠."

윌리엄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너무 기뻐요."

"그럼, 이리 오너라."

울리치는 댈런에게 눈길을 던졌다.

"시인, 자네도 마찬가지야."

"아니오, 나한테 그런 일을 배우라고 강요할 순 없을걸요."

댈런은 개러스에게 절망적인 시선을 던졌다.

"클레어 아가씨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윌리엄의 눈에서 환희의 기쁨이 약간 사라졌다.

"그 말이 맞아요. 클레어 아가씨는 절대로 우리가 기사 수업 받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클레어 아가씨는 이 섬을 지킬 수 있는 남편을 원했다."

개러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구했지. 난 아가씨가 내 임무를 이행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일 거라고 믿는다."

"클레어, 정말 괜찮아?"

조애너는 한 다발씩 끈으로 묶고 있던 라벤더와 민트 꽃에서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물론 괜찮고말고요."

클레어는 까치발로 서서 건조시키기 위해 신선한 꽃다발을 하나 더 거꾸로 매달았다. 그녀와 조애너가 일하고 있는 창고는 작업실 중 하나였다. 이곳은 말리기 위한 꽃과 향초 다발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라벤더나 민트 같은 수많은 꽃들이 여기서 말려졌다. 이 과정이 끝나면 그것들은 신중하게 클레어의 제조법에 따라 향수로 제조된다. 말린 꽃과 향초로 만든 몇 가지 복잡한 혼합물은 리넨 향 주머니를 채우는 데 사용되곤 했다. 다른 것들은 뚜껑 달린 작은 단지에 들어가 방에 상쾌한 향기를 더해 주게 된다. 또 다른 것들은 기름과 꿀을 섞어서 향수와 로션, 향유를 만든다. 클레어는 건조 창고를 좋아했다. 그녀는 종종 정원을 거닐 듯 이 창고를 끝에서 끝까지 걸어 다니며 차례로 향기를 맡곤 했다. 그녀는 향기로운 꽃들 중간에 눈을 감고 서서 마치 댈런이 시를 짓듯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향수들을 만들어 내는 걸 좋아했다. 이 창고의 맨 끝에는 아주 커다란 상자가 하나 있고 그 안에는 말린 꽃들과 이파리들이 커다란 묶음으로 묶여 있었다. 그것들은 클레어의 제조법에 따라 섞어 놓은 것이었다.

오늘 그 상자는 장미와 쑥, 라벤더, 민트, 로즈메리의 말린 꽃잎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클레어는 향기를 정하려면 육계피 기름을 섞어야 할지 아니면 소구근 기름을 섞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조제법을 궁리하느라 한참 정신이 없었다. 일단 만들어진 물건들은 정교하게 수놓인 수백 개의 작은 주머니에 채워지게 된다. 향기로운 주머니들은 며칠 내로 지금 준비중인 새 비누들과 함께 시번의 봄시장에 선을 보일 예정이었다. 거기서 이것들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상인들한테 팔릴 것이다.

"난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어."

조애너가 말했다.

"왜요?"

클레어는 라벤더 다발 하나를 더 건조용 고리에 매달았다.

"홀에는 아침 내내 소문이 떠돌았어. 지금쯤은 아마 온 마을로 다 번졌을걸."

"사람들이 모두들 내 결혼 첫날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클레어는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얘길 내놓고 하고 싶진 않군요. 그런 건 남편과 아내만의 은밀한 문제예요."

"클레어, 결혼식 다음 날 아침에 신랑이 팔에 붕대를 두르고 나타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야."

조애너는 그녀에게 격분한 시선을 던졌다.

"어젯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사고였어요."

"정말로 그가 안으려는 걸 막으려다가 헬하운드의 단검을 사용한 거야?"

"아니에요.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소문 내용이 그런가 보죠?"

클레어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조애너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아내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결혼식 날 밤 자기 남편을 찌르는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구.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안 그랬다니까요."

"개러스 경은 당신한테 아마 무척 화를 냈을 거야."

조애너는 몸을 떨었다.

"그가 당신을 때린 대도 당연하지."

그녀는 순간 깜짝 놀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면 실제로 때렸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말아요, 조애너. 내가 얻어맞은 것처럼 보여요?"

"아니."

"내가 그런 취급받고도 참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하지만 그는 아주 큰 남자야, 클레어. 당신보다 훨씬 크다구."

"내가 과거에도 덩치 큰 남자들한테서 성공적으로 나 자신을 잘 지켜 왔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렇긴 해. 그래도 개러스 경은 니콜라스 같은 바보가 아니야."

"내가 가장 고맙게 여기는 부분이죠."

클레어는 어깨 너머로 건네다 보았다.

"조애너, 어젯밤 난 내 남편의 단검을 휘두르지 않았어요. 그럴 필요도 없었고요. 개러스 경은 가장 기사답게 처신했으니까요."

클레어는 개러스가 자기를 스캔들로부터 지켜 주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팔에 상처를 냈던 기억을 떠올리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느 누구도 지금껏 그녀를 위해 그토록 신사다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레이먼드 드 콜빌조차 그러지 못했다. 오늘 개러스가 야비한 추측과 소문의 표적이 된 것은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의 고귀한 행동을 놓고 볼 때 훨씬 더 대접을 받아야 마땅했다. 불행히도 그걸 조애너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였다 이거지."

조애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요."

"용서해 줘, 클레어. 하지만 난 도저히 믿기 어렵군."

"내 말을 못 믿겠으면 개러스 경한테 직접 물어 봐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설사 정말로 물어 본다고 해도 그분도 당신처럼 그 얘기가 맞다고 우겨댈 게 뻔해.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신들 둘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한통속인 것 같더군."

조애너 말이 맞다. 지금 이 순간 클레어가 깨달았던 것보다 훨씬 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어찌 됐든,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개러스는 클레어를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자기에게 가깝게 끌어오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들은 함께 하나의 비밀을 공유했다. 가장 은밀한 비밀이었다. 그건 어젯밤 개러스가 그녀를 애무하던 것만큼이나 은밀했다. 클레어는 라벤더와 장미 다발을 쥔 한 손을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고는 일렬로 천장에 늘어뜨린 꽃과 향초 다발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를 위해 자신의 팔을 벨 때 개러스는 분명 자기가 무얼 하려는지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모든 것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그런 행동들이 그녀의 감정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조차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신중하게 계산된 행동을 하는 데는 천부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특별한 행위가 용감한 행동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이건 그가 계획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개러스는 그녀가 결혼식 날 받았던 닭 피가 든 병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직접 그것을 신혼방에 갖고 들어온 것이다. 이 역시 계산된 행동이다. 그것도 지극히 잘 계산된 계획이었다. 어젯밤 그가 정말로 염두에 뒀던 건 누구의 명예일까? 클레어는 궁금했다. 그의 명예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명예였을까? 그녀는 아직도 헬하운드의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성 허미언의 코에 맹세코 정말 모르겠어."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든 게 위험스러울 정도로 혼란 투성이었다. 조애너는 건조 창고의 열린 문 밖을 힐금 쳐다보았다.

", 윌리엄 이네. 마구간으로 가는 것 같군. 클레어, 저 애가 요새는 개러스 경의 부하들하고 너무 자주 어울리는 것 같아. 정말 걱정스러워."

"알아요, 조애너. 하지만 난 뭐 대단히 해로운 일은 아니라고 봐요."

"댈런도 함께 있네. 저 애들이 뭘 하려는 걸까?"

"나도 전혀 모르겠는데요."

"하느님 맙소사."

조애너는 라벤더를 옆으로 던져 버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애너, 무슨 일이에요?"

"래널프와 울리치 경이 윌리엄과 댈런에게 방패를 줬어."

조애너는 문가에 서서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나무칼도 줬어. 클레어, 내가 보기엔 저 애들한테 칼 싸움을 가르치려는 것 같아."

"진정해요, 조애너. 울리치와 래널프는 무기들을 구경만 좀 시키려는 것뿐일 거예요. 윌리엄이 그런 일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잖아요."

"당신의 음유 시인은 그렇지 않잖아. 헌데 그도 저기에 있다고."

"정말이에요?"

클레어는 손을 쓱쓱 문지르고 창고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햇빛이 쏟아지는 앞마당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윌리엄과 댈런이 어정쩡하게 나무 방패와 칼을 쥐고 서 있었다. 윌리엄은 한창 신이 난 것처럼 보였고, 댈런은 화나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클레어는 개러스가 홀에서 걸어 나와 그 수업을 지켜보려는 모습을 발견했다. 래널프가 자기 방패를 치켜 올리고 윌리엄에게 뭐라고 말하자 윌리엄은 선뜻 나무칼을 들어 올리더니 래널프의 방패를 향해 힘차게 내리쳤다. 조애너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빙글 몸을 돌리고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개러스 경이 윌리엄과 댈런에게 무기 연습을 하라고 명령했을 거야. 당신이 당장 못하게 막아야 해. 제발 부탁이야."

"그다지 해롭진 않을 것 같은데요, 조애너."

""내 아들은 저런 연습을 하기엔 너무 연약하단 말이야. 당신이 즉시 그만두게 해야 해."

"..."

"클레어, 어떻게 좀 해봐. 당신이 이 성의 주인이 잖아. 그들에게 이 위험한 장난을 멈추라고 명령해."

클레어는 개러스를 힐금 쳐다보았다. 그녀는 전체적인 상황이 자기 손 밖으로 벗어나고 있다는

불쾌한 의심이 왈칵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결심을 강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자각이었다. 나는 디자이어의 주인이다. 여기서 명령을 내리는 건 바로 나다.

"래널프와 울리치에게 즉시 말하겠어요."

클레어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성큼성큼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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