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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구속 1

Bollnow 2024. 3. 4. 05:19

아름다운 구속

Jayne Ann Krentz

 

프롤로그.

"디자이어의 클레어가 아직도 처녀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랑드리의 영주 서스턴 남작이 말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난 네가 그것을 모른 체 넘기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개러스는 그의 아버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미래의 신붓감이 이미 다른 남자와 부정을 저질렀다는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은 사실상 감지할 수가 없었다. 다만 포도주 잔을 든 그의 손가락에 약간 더 힘이 들어갔을 뿐이었다. 혼자서 세상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생아로서, 그는 감정을 감춰야 하는 일을 많이 겪어 왔었다. 사실, 그는 그것에 재주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감정을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지을 정도였다.

"그녀가 상속녀 라고 했나요?"

개러스는 억지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려 했다.

"그녀가 땅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래."

"그렇다면, 그녀는 아내 자격이 충분합니다."

개러스는 간단하게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옳았다. 그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개러스는 자신의 소유지를 얻기 위해서 신부의 정절에 관한 문제라든가, 다른 그 비슷한 부족함은 모른 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의 땅. 그 약속된 단어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가 속한 장소, 한 사생아가 나타나는 것을 관대하게 받아들여 줄 곳, 칼을 잘 다룬다고 해서 잠시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를 환영해 줄 장소. 그는 난로 앞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개러스는 서른 한 살이었고 절대 다시는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운명이 가져 다 주는 기회는 어떤 것이든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남자였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었다.

"그녀는 이제 디자이어 섬의 실제적인 상속녀지."

서스턴은 정교하게 처리된 은 제 컵에서 포도주를 조금씩 들이켰다. 그리고 난로에서 타고 있는 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의 아버지, 험프리 경은 여행을 좋아했고 땅을 경작하는 것보다 지적인 연구에 더 관심이 많았지.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몇 달 전, 스페인 여행 도중 죽었다는 소식이 내게 전달되었다. 강도에게 살해되었다는 구나."

"남자 상속인은 없나요?"

"그래. 2년 전에, 험프리의 외아들 에드먼드는 마상 시합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지. , 클레어가 유일하게 남아 있으니 그녀가 그 땅을 물려받을 거다."

"그리고 아버지는 험프리 경의 주군으로서 그의 딸의 후견자예요. 그녀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결혼할 거예요."

서스턴의 입이 실룩거렸다.

"그 일만이 남아 있지."

개러스는 아버지가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항상 심각했고 자연스런 본성을 억눌러 왔기 때문에 그렇게 즐거워하지 못했다. 그는 남의 농담에 희미한 웃음조차 표현하지 못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크게 웃길 수 있는 농담도 할 줄 몰랐다. 웃지 않는 표정은 그가 굉장히 무자비한 남자라는 그의 명성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특별히 웃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즐거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 개러스는 난로에서 나오는 불빛에 비치는 아버지의 날씬하고 우아한 옆 모습을 응시했다. 서스턴은 오십대 중반이었다. 숱이 많고 짙은 그의 머리칼에는 간간이 흰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단순히 서스턴이 헨리 2세가 아끼는 귀족으로 그로 인해 휘두르는 권력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스턴의 잘생긴 용모와 여자들이 매력을 느끼는 매너 때문이었다.

서스턴의 여자를 유혹하는 기술은 전설적이었다. 남부에 있는 귀족 가문의 막내딸인 개러스의 어머니도 그가 정복한 많은 여자들 중 한명이었다. 개러스가 아는 바로는, 그가 아버지의 유일한 불륜의 씨앗이었다. 서스턴은 자신의 서출에 대해 의무를 다했다. 그는 처음부터 개러스를 인정했다. 개러스는 여덟 살까지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 동안 서스턴은 개러스와 그의 어머니가 살던 조용한 저택에 자주 찾아왔었다. 그러나 개러스가 귀족의 아들이라면 기사도를 훈련 받으러 가야 하는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수녀가 되겠다고 말했다. 맹렬한 논쟁이 있었다. 개러스는 그때의 격노한 아버지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의지는 강했고 마침내 아버지를 이겼다. 서스턴은 개러스의 어머니에게 수도 회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지참금을 제공해 주었다. 서스턴은 자신의 서자를 벡워스 성으로 데려왔다. 그는 자신의 적자들이나 상속인인 사이먼과 똑같은 관심과 노력으로 개러스에게도 기사가 되는 교육을 시켰다. 아름답고 냉정하며 자존심 강한 서스턴의 아내, 로리스는 그 상황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항상 깊이 느끼며, 어머니와 함께 하던 명상적인 분위기를 몹시 그리워했던 개러스는 창과 칼을 다루는 훈련에 모든 정력을 다 쏟아 부었다. 완벽함을 향한 갈망으로 그는 끝없이 연습을 했다. 훈련을 하지 않을 때는 고독한 지방 수도원의 도서관을 찾아갔다. 사서, 앤드루 수사가 그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읽어댔다. 17세가 되었을 때쯤, 개러스는 다양한 과목에 폭 넓게 교양을 쌓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어나 아라비아어로 된 수학이나 광학에 관한 논문에 심취했다. 그리고 4대 기본 요소, , , 공기, 불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천체와 빛, 물리적 현상에 대한 플라톤의 논리에 매력을 느꼈다. 개러스의 학문적 관심은 결코 실질적이지는 않았지만 기사로서,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늘리는 데 실리적인 도움을 주었다. 무법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이나 배반한 기사를 찾아내는 데 놀라운 명성을 얻게 된 그는 특별히 그 일에 매료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소유의 땅을 갖고자 하는 욕망은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의 주군, 아버지만이 그가 토지를 소유한 기사가 될 수 있도록 그에게 영지를 줄 수 있었다. 4일 전, 개러스는 벡워스 성으로 돌아오라는 서스턴의 소환장을 받았다. 오늘 밤 그는 그의 가장 커다란 바람이 막 이루어지려는 찰나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더럽혀진 오점을 가진 한 여자를 그의 아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열망하는 것을 얻는 것에 비하면 작은 대가에 불과했다. 개러스는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디자이어의 상속녀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그가 물었다.

"내가 알기로 클레어는 스물 셋 일거다."

서스턴이 말했다. 개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건가요?"

"그녀는 결혼하는 걸 그리 바라지 않는다고 들었다."

서스턴이 말했다.

"어떤 여자들은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너도 알겠지만, 네 엄마 같은 여자가 그렇지."

"어머니가 날 낳으신 후에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는 생각 지 않아요."

개러스는 중립적인 어조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것은 오래 된 고통으로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고통을 숨기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받아 줄 수녀원을 찾은 것은 행운이었죠."

"그 점에 관해서는 네가 틀렸다."

서스턴은 팔꿈치를 조각된 나무 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놓고 턱 밑을 긴 손가락으로 받쳤다.

"내가 준 지참금 덕택에 넌 네 엄마가 수녀원에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겠지. 사실, 비중이 있는 종교 단체들이 그녀를 얻기 위해 경쟁을 했다."

그의 입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곧 모든 것이 다 그녀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게다."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 였다. 그는 아주 가끔 어머니를 만났다. 그러나 어머니와 정기적으로 서신을 교환했고 서스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주 똑똑했고 얕잡아 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사실 그의 아버지만큼 똑똑했다. 개러스는 다시 본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레이디 클레어는 외모가 형편없나요?"

"내가 알기로는 그렇지 않다. 아이였을 때 이후로 난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꽤 괜찮은 아이였지. 그녀가 꼭 미인이 되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주 못생기거나 볼품없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서스턴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녀의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냐?"

"아니 요."

개러스는 난로를 응시했다.

"저는 오직 그녀의 땅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전 왜 그녀가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이유를 찾고 있을 뿐이에요."

서스턴은 그만두라는 제스처로 한 손을 내저었다. 그가 입은 튜닉의 소매에서 황금 빛 자수가 절묘하게 불빛을 받아 빛났다.

"내가 말한 대로, 어떤 여자들은 한가지 이유나 혹은 다른 이유로 결혼 생활에 대해 그리 욕망이 없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 들어도 클레어는 분명 그런 여자다. 단지 그녀는 이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 일에 동의한 게다."

"자신의 재산을 위해서?"

"그래, 디자이어 섬은 잡아먹기 좋게 살이 오른 새와도 같지.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거다. 그녀는 이미 자기 이웃인 시번의 니콜라스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했다. 게다가 런던으로 가는 무역 선을 약탈하려는 일당도 있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과 영지를 지켜 줄 남편이 필요한 거군요. 그리고 아버지는 디자이어가 아버지에게 계속 이익을 줄 것을 바라고 있고요."

"그렇다. 그 섬 자체는 그리 크지 않지. 그 땅은 일정량의 울 생산과 곡식에 의존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영지의 실제적인 재산의 바탕은 아니지."

서스턴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정교하게 수가 놓여진 작은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이것이 디자이어에 큰 수입을 제공하는 거다."

그는 개러스에게 작은 주머니를 던졌다. 개러스는 가볍게 그 작은 주머니를 받았다. 꽃과 허브의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는 주머니를 코에 대고 강하고 미묘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신기하게 관능적인 욕구를 끌어내는 자극적인 향기였다. 그는 또 한 번 킁킁거렸다.

"향수인가요?"

"그래, 그 섬의 꽃과 허브다. 시장에는 다양한 크림과 향수들도 나가지."

개러스는 손에 들고 있는 향기 나는 작은 주머니를 보았다.

"그래서 제가 정원사가 되어야 합니까?"

서스턴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에게 변화를 가져 다 줄 거다."

", 그렇겠네요. 전 정원을 돌보는 일은 잘 모르거든요. 하지만 필요한 건 다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넌 언제나 이해가 빠르구나, 어떤 주제에서도."

개러스는 그 말은 무시했다.

"그래서 디자이어의 상속녀는 자신의 엄청난 화원을 보호해 줄 남자와 결혼하려는 거군요. 그리고 전 제 소유의 땅이 필요하고요. 그녀와 제 거래는 성사될 거 같아요."

"아마도."

개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여지가 있나요?"

서스턴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가 짧고 커다란 웃음으로 바뀌었다.

"경쟁률이 심할까 걱정이다."

"무슨 경쟁이요?"

"시번의 니콜라스, 클레어의 제일 가까운 이웃 말이다. 그도 내 밑에 있는 기사다. 그는 그 동안 디자이어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내가 디자이어의 상속녀가 처녀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주요 이유는 그 때문이지."

"그가 그녀를 농락했나요?"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니콜라스가 지난 달에 그녀를 납치해서 한 4일간 시번에 가둬 두었다고 한다."

"자기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기 위해서요?"

"그래,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지."

개러스는 그 새로운 사실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그 이야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미혼의 상속녀를 납치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즉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순결을 잃고 이름이 더럽혀진 후에도 결혼을 거절하는 만용을 부리는 여자는 없었다.

"무척 평범하지 않은 여자네요."

"그래, 그녀는 자기 주인이 될 남자에 대해 아주 특별한 요구 사항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서스턴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 감 요구 사항을 내게 보내 왔다. 그녀는 완벽하게 자신의 요구 사항과 일치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 한단다."

"얼어 죽을, 남편 감 요구 사항?"

개러스가 투덜거렸다.

"정말 웃기는 일이네요? 제게 말씀하시지 않은 게 또 있나요?"

"그녀는 아주 상세하게 요구 사항을 써서 보냈다. 여기 있다. 직접 보아라."

서스턴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접힌 양피지를 집어 들어 개러스에게 건네주었다. 개러스는 개봉된 봉함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장미꽃 문양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글씨체로 써 내려간 인사말을 재빨리 읽었다. 그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면서 남편 감 요구 사항을 상세히 설명한 부분에 다다랐다.

<군주님, 전 남편을 구하라는 당신의 바람과 요구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유감스럽게도 결혼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 아주 진지하게 그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디자이어는 매우 외진 곳입니다. 전 이웃인 니콜라스 경을 제외하면 부근에 마땅한 남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전 정중하게 군주님이 제게 서너 사람 정도 적당한 남편감을 추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 그들 중에서 남편을 고를 것입니다.

군주님이 남편 후보자를 고르는 일을 돕기 위해서 전 자격 요건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요구 사항을 준비했습니다. 군주님, 분명히 당신은 이 땅에 관심이 있으실 겁니다. 전 이 땅이 완벽하게 보호 받기를 군주님 또한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에서 미래의 디자이어의 영주는 소수지만 강한 군인들을 지휘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기사여야만 합니다. 이 섬에는 훈련된 군인들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몇 명을 함께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덧붙입니다. 군주님이 이해하시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아주 자세히 차근차근 나열하겠습니다. 첫 번째, 신체적 조건에 있어, 미래의 디자이어의 영주는 전체적으로 적당히 균형을 이루는 몸과 키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제가 본 바로는 너무 큰 사람은 목적을 이루는 데 재치와 학식보다는 짐승 같은 힘에 의존하려 합니다. 전 물리적인 힘으로 압도하려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군주님이 저를 위한 선택을 하실 때 신체 치수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 주십시오. 두 번째, 제 미래의 주인은 유쾌한 기질에 명랑한 표정과 예의가 바른 남자여야만 합니다. 제가 우울하거나 비열한 성격의 사람에게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전 제 남편이 잘 웃는 사람이며 함께 섬에서의 소박한 생활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제 남편이 책을 읽고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학식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필수 요건입니다. 전 그와 많은 대화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특히 안에서 함께 지낼 시간이 많은 겨울철에는 더 말입니다. 전 이 세 가지 요구 사항이 지극히 평범한 것이며 정확하게 전달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군주님이 아는 사람 중에서 후보를 선택할 때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군주님이 편하신 때에 조속히 제게 적당한 사람들을 보내 주십시오. 전 가능한 한 빨리 선택을 할 것이며 곧바로 제 결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디자이어에서 47>개러스는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눈에서 짓궂은 즐거움의 기색을 발견했다.

"그녀가 어떻게 완벽한 남편 요구 사항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서스턴은 싱글싱글 웃었다.

"몇몇 음유 시인의 로맨틱한 노래에서 그것들을 뽑아 낸 것은 아닌가 싶다. 너도 알잖니. 그들은 사악한 마법사를 죽이고 자기의 여자에게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는 용기 있는 영웅들을 주로 다루지 않더냐."

"보통 다른 남자의 여자기도 하지요."

개러스가 중얼거렸다.

"영웅은 군주가 되지요. 그래요, 저도 말씀하시는 그런 유형의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전 그런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굉장히 좋아한다."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 였다.

"얼마나 많은 후보자들을 보내실 거죠, 군주님?"

"난 어느 정도까지는 여자들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난 그녀가 두 명 중에서 선택하도록 할 것이다."

개러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서너 명이 아니고요?"

"그래, 내 경험에 의하면 한 여자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을 주면 꼭 문제가 생긴다."

"두 명의 구혼자라면 저하고 다른 사람이 되겠네요."

"그래."

"누굴 저와 경쟁하게 하실 거죠?"

서스턴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번의 니콜라스 경이다. 행운을 빈다, 아들아. 그녀의 요구 사항은 간단하다. 그렇지 않느냐? 그녀의 요구 사항은 평범한 크기에 잘 웃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지."

개러스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돌려 주었다.

"그녀는 운이 좋네요, 그렇죠? 전 그녀가 말한 요구 사항에 한가지는 일치해요. 전 글을 읽을 수는 있으니까요."

 

 

 

1.

첫 번째 구혼자가 디자이어 섬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클레어에게 전해진 것은 그녀가 성 허미언의 수녀 원장인 마가렛과 함께 수녀원 정원에 있을 때였다.

"굉장한 대부대가 왔어요, 클레어 아씨. 지금 마을 쪽으로 오고 있어요."

윌리엄이 외쳤다. 클레어는 원장과 장미에서 기름을 짜내는 가장 좋은 방법에 관한 상세한 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잠깐 실례할게요."

그녀는 마가렛 원장에게 말했다.

"좋도록 해요."

마가렛은 풍채가 좋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검정 색 베네딕트 식 의관의 두건이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와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이목구비를 감싸고 있었다.

"이건 중대한 사건이니까요."

클레어는 고개를 돌려 윌리엄이 몹시 흥분하여 수녀원의 누다락 근처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생강 건포도가 든 주머니를 그녀를 향해 흔들어댔다. 포동포동한 몸집에 갈색 머리카락, 검은 눈을 지닌 열 살의 사내아이는 활발한 호기심과,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열정을 고루 배합한 둥글둥글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이와 아이의 엄마 조애너 부인은 디자이어 섬에서 살고자 3년 전에 찾아왔다. 클레어는 그 두 사람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녀 자신의 가족들은 점점 그 수가 줄어들더니 지금은 이 세상에 그녀를 제외하곤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클레어는 윌리엄, 조애너와 상당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누가 오고 있니, 윌리엄?"

클레어는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다. 그녀를 제외하고 디자이어 섬 주민들은 모두 이날이 오기를 몇 주 동안이나 고대해 왔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디자이어 섬의 새로운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에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남편에 대한 선택권은 있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의 위치에 있는 다른 많은 여성들이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분에 넘치는 권리였다.

"이번에 오는 사람이 서스턴 경이 보냈다던 구혼자 중에서 첫 번째 후보예요."

윌리엄은 생강 건포도를 한줌 제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사람들 말로는 굉장히 힘이 센 기사일 거라고 하던 대요, 클레어 아씨. 그는 근사하게 무장한 대부대를 거느리고 온대요. 난 그 부대랑 말들과 짐들을 모두 육지에서 우리 섬으로 실어 오는 데 시번에 있는 배들을 절반이나 썼다고 하는 대장장이 존의 말을 들었어요."

클레어는 호기심이 일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녀는 때가 되면 이 문제에 대해선 침착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을 졸이게 되었다.

"대부대라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

윌리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들의 갑옷이 반사해 내는 햇빛이 너무 강해서 클레어 아씨의 눈이 부실지도 몰라요."

아이는 다시 두 주먹 분의 건포도를 더 삼켰다.

"게다가 말들도 아주 커요. 존이 그러는데, 특히 그 중에 한 마리는 근사한 회색 종마로, 그 말의 말발굽이 한번 지나간 곳은 땅이 다 흔들린대요."

"하지만 많은 기사들이나 무장한 군대를 요청한 적은 없어."

클레어가 말했다.

"디자이어에 필요한 건 우리를 지켜 줄 소수의 남자들이야. 도대체 나한테 그 거추장스러운 대부대를 데리고 뭘 어쩌란 말이야? 그 말들도 마찬가지야. 남자들과 말들은 너도 알다시피 엄청나게 많이 먹어 치운다고."

"짜증내지 말아요, 클레어."

마가렛이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어린 윌리엄 한 테 무장한 대부대란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대와는 그 개념이 아주 다르니까요. 지금까지 그 애가 본 무장 군대는 시번에 있는 니콜라스 경의 작은 부대가 고작일 뿐이에요."

"원장님 말이 맞을 것 같네요."

클레어는 허리띠의 사슬에 걸려 있던 향기로운 향 주머니를 들어 올려 장미와 향초가 뒤섞인, 위로를 주는 듯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 향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게 많은 남자들과 말들을 먹인다는 건 결국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 될 거예요. 성 허미언의 이름에 걸고 말하건대, 난 그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아요. 게다가 이번은 그 많은 후보자들 가운데 겨우 첫 번째일 뿐이에요."

"진정해요, 클레어."

마가렛이 말했다.

"아마 항구에서 내린 무리는 한 사람 이상의 구혼자일 거예요. 구혼자 서너 명이 한꺼번에 도착한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그 많은 사람들과 말이 나타난 것도 설명이 될걸요."

클레어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맞아요, 그럴 거예요."

그녀가 작은 향 주머니를 떨어뜨리자 그것은 다시 한번 그녀의 치맛자락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구혼자들이 한꺼번에 온 거예요. 만약 그들이 각자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온 거라면 많은 군인들과 말이 왔다는 게 설명되는군요."

"맞아요."

또 다른 생각이 동시에 클레어의 뇌리를 스치며 그녀의 순간적인 안도감을 즉시 앗아가 버렸다.

"그들이 부디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들을 모두 먹이려면 어마어마한 경비가 들 거예요."

"당신한테 그만한 돈은 있어요, 클레어."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 중요하다곤 볼 수 없겠지만 말이죠."

마가렛의 눈이 반짝거렸다.

"일단 후보자들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수행원과 하인들을 데리고 곧 떠나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허미언의 성스러운 발가락에 맹세코 말하건대, 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음식이나 볏짚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도록 아주 빨리 선택을 해버리겠어요."

"현명한 생각이에요."

마가렛은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이런, 클레어. 그렇게도 걱정이 돼요?"

"아니 요, 절대로 아니에요."

클레어는 거짓말을 했다.

"그냥 귀찮은 일을 빨리 처리해 버리고 싶을 뿐이에요. 해야 할 일도 있고요. 난 남편 고르는 일 따위에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순 없어요. 서스턴 경이 내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후보자들만 보냈을 거라 믿어요."

"나도 그랬으리라 믿어요."

마가렛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이 편지에 그렇게 자세히 써 놓았으니까요."

"그래요."

클레어는 디자이어의 새로운 영주에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되는 요구 조건들을 작성하느라 몇 시간이나 허비했다. 그 전에는 자기가 어째서 남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를 설명하는 그럴 듯한 이유들을 짜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마가렛이 자신에게 가르쳤던 온갖 기술들, 수사학, 논리학, 토론의 기술과 같은 것들을 총동원해야 했다. 결혼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서스턴 경에게 그럴싸한 변명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클레어는 논리적으로 훌륭하게 잘 짜여진 이론을 처음에는 조애너에게, 그 다음엔 마가렛 수녀 원장에게 연습해 본 다음에야 양피지에 옮겨 적었다. 그녀가 이런 짓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동정심을 느낀 두 여자는 신중하게 가다듬은 변명들은 차례차례로 검토해 보고 비평과 조언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녀의 부친이 사망한 후 처음 몇 달 동안 클레어는 자신이 확신하는 바대로, 논리적이며 절대적이고 우아하게 잘 짜여진 난공불락의 결혼 거부론을 나름대로 다듬어 왔으나, 그것은 디자이어 섬이 안전했을 때의 얘기였다. 그 몇 달이 지난 후, 재난이 닥쳤던 것이다. 육지에 살고 있던 그녀의 이웃, 시번의 니콜라스 경이 그녀가 시번을 잠깐 방문했을 때 유괴해 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니콜라스 경이 그녀의 육체적인 연약함에 대해 명명백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모든 희망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에게 미칠 듯이 화가 난 클레어는 그곳에서의 그의 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녀의 억지스러운 체류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결국 니콜라스 경은 그녀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고백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때가 너무 늦었다. 그 지역에서 늘어가는 도적들의 약탈 중에서도 유괴는 그 역사가 오래된 악질적인 죄악이었다. 클레어는 서스턴 경이 이 소문을 듣게 되는 건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녀가 디자이어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지을 것이고, 즉시 본인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사건으로 분노와 좌절을 동시에 경험한 클레어로서는 서스턴 경이 그러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려는 것을 전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그의 입장이라고 해도 그녀 역시 똑같은 일을 했을 테니까. 그가 디자이어 섬의 주군으로서 갖는 이익은 상당히 많고 탄탄한 것이라 절대로 모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클레어 역시 향수를 보호하는 백성들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순 없었다. 조만간 도둑 떼가 습격하면 반드시 누군가 죽게 될 터였다. 사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디자이어의 백성들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었다. 클레어가 12살 때 죽은 그녀의 모친은 그녀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그녀에게 장원의 아가씨가 하고 싶어할 만한 일들보다도, 다스리는 백성들과 그들을 지탱 시켜 주는 영지의 보호 문제를 선행 조건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항상 가르쳐 왔다. 비록 자신이 디자이어를 기름지고 윤택한 영지로 만들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훈련 받는 전사들은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클레어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디자이어에는 근위대도, 남아 있는 무장 군대도 없었다. 한때 있었던 몇 안 되는 병사들도 수년 전에 다 떠나 버렸다. 그 중 몇 명은 그녀의 오라버니인 에드먼드를 따라 마상 시합에 나갔지만 그가 살해된 후에도 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디자이어는 그다지 흥미로운 장소는 못 되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마상 시합의 경쟁이나 십자군에 참가하는 데서 얻어지는 이익이나 영광을 추구하기 마련인 젊은 기사와 지주가 살기엔 이곳은 너무 적적했다. 디자이어에 살던 마지막 두 명의 병사들은 클레어의 부친, 험프리 경과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그녀의 부친이 타계했다는 소식만 인편으로 전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주군이 죽었기 때문에 충성의 서약에서 자유로워졌던 것이다. 그들은 남쪽에서 새 주인을 찾았다고 한다. 클레어로선 어떻게 해야 믿을 만한 군인을 얻을 수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을 훈련시키고 통제하는 방법은 더욱더 알 수 없었다. 서스턴 경으로부터 첫 번째 경고 편지가 도착한 것은 6주 전이었다. 편지는 한결같이 험프리 경의 죽음에 대한 심심한 애도의 정을 표하는 정중한 말로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디자이어의 수비를 걱정하는 언급도 확실히 암시되어 있었다. 두 번째 편지는 클레어가 결혼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기분이 몹시 상하긴 했지만 클레어 역시 동일한 결정을 내렸다. 결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클레어는 자신이 어떤 의무를 수행할 때는 늘 상 그래 왔던 것처럼 똑같이 행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평상시 버릇대로 그녀는 이 상황도 자기 방식대로 풀어 나갔다. 만약 남편이라는 골치 아픈 짐을 질 수밖에 없다면,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조건을 걸겠노라고 그녀는 조애너와 마가렛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들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어요, 클레어 아씨."

윌리엄이 성문 누다락 쪽에서 외쳤다. 클레어는 수녀원 정원의 고운 검은 흙을 손바닥에서 털어냈다.

"이만 실례하겠어요. 돌아가서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남쪽에서 온 이 멋진 기사 분들은 분명히 융숭한 환대를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요."

마가렛이 말했다.

"당신이 이 결혼을 유쾌한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지는 않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부디 미소를 짓는 시늉이라도 하세요. 후보자들은 세 명 내지는 네 명 정도일 거라는 걸 명심해요. 당신은 꽤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클레어는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선생님을 곁눈질로 살피듯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윌리엄 이나 근처의 성문에 있는 잡역부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서스턴 경이 보내 온 그 서너 명의 구혼자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요?"

"글쎄요, 그땐 아마도 당신의 선택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한지, 아니면 디자이어의 주인을 선택하는 데 유난히 까다롭게 구는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결혼을 피하기 위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 볼 수밖에요."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리고 마가렛에게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장님은 항상 현실적이고 솔직하게 말하시는군요. 원장님한텐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어요."

"내 경험으로 볼 때 현실적이고 솔직한 논리를 펴는 여자는, 특히 자기 자신과의 논쟁에서 그럴 때는 보편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루는 게 더 많다는 게 사실이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장님한테서 많은 것을 배우는 거예요."

클레어는 어깨를 똑바로 폈다.

"난 앞으로도 계속해서 원장님의 현명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겠어요."

"어머니가 계셨다면 당신을 자랑스러워 했을 거예요, 클레어."

클레어는 마가렛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둘 다 험프리 경이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는 일에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세속적인 문제들은 자기 아내에게, 그리고 나중엔 딸에게 떠넘겨 버리고, 자신은 혼자만의 학문적 연구와 실험을 추구했던 것이다. 수녀원 벽과 접해 있는 또 다른 거리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감탄과 흥분에 고조된 목소리들은 마을 주민들이 새로 도착한 손님들을 보러 모여듦에 따라 더욱 커져 갔다. 윌리엄은 손 위의 생강 건포도 한 움큼을 허리띠에 늘어뜨린 주머니에 쓸어 넣고 서둘러 벽에 기대어 있는 낮은 벤치 위로 올라갔다. 클레어는 아이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챘지만 너무 늦었다.

"윌리엄, 그 벽 위로는 절대로 올라가면 안돼. 네 어머니가 뭐라고 하실지 너도 알고 있겠지?"

"걱정 마세요. 난 떨어지지 않아요. 그저 기사들과 그들이 타고 온 큰 말들을 보고 싶을 뿐이에요."

윌리엄은 벤치의 맨 위로 올라가더니 통통한 몸집을 흔들어대며 돌 벽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작은 소리를 내며 마가렛과 걱정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윌리엄의 과잉보호 어머니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아마 발작을 일으켰을 것이다. 조애너는 윌리엄이 섬세한 아이기 때문에 위험한 일은 뭐든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조애너는 지금 여기에 없어요."

마치 클레어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마가렛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니 당신도 그냥 모른 척해 줘요."

"윌리엄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조애너가 절대로 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언젠간 그녀도 저 애를 싸고 도는 짓을 그만둬야 해요."

마가렛은 이젠 달관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여 보였다.

"만약 그녀가 어미 닭이 병아리를 감싸듯 윌리엄 한 테 집착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면, 저 앤 겁 많고 소심한 비만 청년이 되고 말 거예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아무도 조애너가 윌리엄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난할 순 없어요."

클레어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윌리엄뿐이에요. 조애너 한 텐 유일한 아들마저 위험한 일로 잃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죠."

"그들이 보여요."

윌리엄이 벽 위에 한쪽 다리를 걸쳤다.

"벌써 거리에 들어섰어요."

아이는 눈 위에 손으로 챙을 만들어서 봄의 내리쬐는 햇빛을 가렸다.

"큰 회색 말이 제일 앞에 있어요. 그 말을 타고 있는 기사는 그 말만큼이나 덩치가 크네요."

클레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요구한 건 적당한 키와 몸집의 사람인데."

"그는 빛나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어요."

윌리엄이 외쳤다.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방패를 들었는데 그건 마치 태양 속의 커다란 거울처럼 반짝거려요."

"커다란 거울이라고?"

호기심이 발동한 클레어는 직접 새로 온 손님들을 보기 위해 정원 길을 따라 서둘러 앞으로 갔다.

"굉장히 이상해요. 이 기사가 가진 건 뭐든지 다 은색이거나 회색이에요. 그가 입고 있는 옷하고 말의 장신구들도 회색이에요. 마치 사람과 말이 온통 은과 연기에 휩싸인 것 같다고요."

"은과 연기?"

클레어는 윌리엄을 올려다보았다.

"네 상상력은 갈수록 도가 지나치는구나."

"사실인 걸요, 맹세해도 좋아요."

윌리엄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에 정말로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순간적으로 클레어는 호기심이 생겼다.

"이 연기와 은의 기사가 도대체 얼마나 크다는 거지?"

"아주, 아주 많이 커요."

윌리엄은 벽 위에 걸터앉아 이렇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 기사 바로 뒤에 오는 사람도 그만큼 크고요."

"그렇게 말해선 전혀 알 수가 없어."

클레어는 대문으로 가서 밖의 거리를 슬쩍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는 흥분한 마을 군중들로 막혀 버렸다. 새로 온 손님들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디자이어에 도착한 기마 부대의 장관을 보려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장장이 존, 통 만드는 로버트, 술 빚는 앨리스, 그리고 세 명의 근육질의 농부들이 클레어의 시야를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보다 키가 컸다.

"이 회색 기사의 덩치 문제로 너무 놀라지 않도록 주의해요."

마가렛이 클레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녀의 두 눈은 즐거운 빛을 띠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우린 윌리엄이 세상 일에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해서 생각해야 해요. 말 등에 탄 기사라면 누구라도 그 애가 보기엔 거대해 보일 거예요. 그들을 그렇게 커 보이게 만드는 건 순전히 갑옷 때문일 거예요."

",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나 역시 이 회색 기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걸요."

클레어는 벤치에서 돌담 꼭대기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윌리엄, 내 손을 잡아 줘."

윌리엄은 자기가 보고 있던 광경에서 시선을 밑으로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클레어 아씨도 나처럼 여기에 앉으시려고요?"

"그래, 여기 이대로 있으면 이 섬에서 내가 이 침략자들을 맨 꼴찌로 보는 사람이 되고 말 거야."

클레어는 기다란 스커트 자락을 들어 올리고 벤치 위로 발을 올렸다. 마가렛이 찬성하지 않는다는 듯이 작게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정말이지, 클레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에요. 만약에 구혼자 중 누군가가 당신이 동네의 왈가닥 처녀처럼 벽 위에 올라 타고 있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망신스러울지 한번 생각해 봐요. 그는 나중에 홀에서 당신을 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아무도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걸 눈치 채진 못할 거예요. 소리로 봐선 우리의 손님들은 마을 사람들한테 쇼를 구경 시키는 데 아주 열중해 있는 것 같으니까요. 난 그냥 직접 그 쇼를 보려는 것뿐인 걸요."

클레어는 벽의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부드러운 가죽 신발의 코로 더듬어 벽돌의 갈라진 틈을 찾아내 디딘 다음 몸을 위로 끌어당겨 윌리엄의 옆으로 올랐다.

"조심하세요, 아씨."

윌리엄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팔을 잡았다.

"걱정 마."

클레어는 다리를 하나씩 차례로 넓은 돌담 위에 걸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스물 두셋 된 노처녀일진 몰라도, 아직 담 정도는 오를 수 있다고."

그녀는 담 위에 올라앉아 치마를 가지런히 정리하면서 윌리엄에게 씩 웃어 보였다.

", 잘 봤지? 나도 해냈어. 그럼, 은과 연기로 된 기사는 어디 있지?"

"길 맨 위쪽이에요."

윌리엄은 항구 쪽을 가리켰다.

"천둥같이 울리는 말발굽 소리 좀 들어 보세요. 마치 바다에서 으르렁대며 불어오는 태풍 소리 같아요."

"확실히 이 정도면 죽은 사람도 깨우고 남겠다."

클레어는 외투의 모자를 뒤로 젖히고 좁은 거리의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둥같이 우르르 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이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대감에 점차 조용해졌다. 그 순간 클레어는 은과 연기로 치장된 그 기사와 종마를 보았다. 그녀는 숨을 멈췄으며 윌리엄의 경외심이 갑자기 이해되었다. 사람과 말 모두가 엄청난 폭풍을 이루는 요소들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바람, , 번개가 그대로 인간화된 듯했다.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냉혹한 회색 빛 분노가 일단 일기 시작하면 그 앞에 놓인 모든 것을 파괴시켜 버리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은과 연기의 기사의 모습은 거리에 나온 다른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클레어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구혼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에 따라 절망적인 기분이 그녀의 위장을 움켜쥐었다. 너무 크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나치게 커. 너무 위험해. 절대로 이 사람은 아니야. 회색의 기사는 다른 일곱 명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다가왔다. 이 그룹은 무장하고 말을 탄 기사들과 한두 명의 하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클레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거대한 회색의 기사 뒤를 따르는 전사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껏 군인을 볼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이 강하고 뛰어난 병사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지도자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회색과 갈색, 검은 색의 우울한 색깔은 그들을 보다 충성스런 부하로 보이게 만들었다. 새로운 방문객들은 이제 아주 가까운 곳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좁은 길을 꽉 메웠다. 수많은 깃발이 산들바람에 휘날렸으며 클레어는 강철 갑옷이 가죽 위에서 빛을 내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구와 갑옷이 함께 리듬에 맞추어 움직였다. 무거운 발굽의 말들은 거대한 전쟁의 엔진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느리게 시종일관 보조를 맞춰 움직였다. 이런 일사불란함이 그들의 강함을 한층 강조하면서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 모두가 장관을 볼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 클레어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놀라워하며 이 이상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을의 은자가 거처하는 작은 돌방에서부터 시작하여 군중을 가로질러 낮은 속삭임들이 물결처럼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눈치 챘다. 기사들에게 매료된 클레어는 처음에는 그 낮은 웅얼거림을 무시했다.

그러나 속삭임은 갈수록 커져 가더니 마침내 그녀의 주의를 끌고야 말았다.

"뭐라고 들 하는 거지, 윌리엄."

"몰라요. 무슨 사냥개에 대한 얘길 하는 것 같은데요."

클레어는 어깨너머로 지하 석실로 시선을 던졌다. 지하 석실은 수녀원 벽 안에 지어져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은자가 되기로 결심한 10년 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왔다. 그녀가 추종하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녀는 결코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전문적인 은자로서 베아트리체는 원래는 기도와 명상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게끔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마을의 가십에 더 열중했다. 낮에는 거의 모두가 그녀의 창가를 지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한테는 한 번도 얘깃거리가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언을 구했다. 누군가 일부러 찾아오면 베아트리체는 마치 젖 짜는 소녀가 암소를 다루듯이 상대를 다뤘다. 그녀는 방문객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쥐어 짜냈다. 베아트리체는 또한 때때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창문을 찾아오는 모든 방문객들에게 아주 열렬하게 조언을 해주곤 했다. 누가 일부러 부탁한 일이 없는데도 먼저 나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녀는 불길한 예언을 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재난과 불운을 경고하는 데도 민첩했다. 가끔씩 그녀의 예언이 맞을 때도 있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 거죠?"

마가렛이 클레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클레어는 점점 더 커지는 속삭임들에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윌리엄은 무슨 사냥개에 관한 얘기라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은자가 처음 말을 시작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게 낫겠네요."

마가렛이 말했다.

"들어 보세요."

윌리엄이 끼어 들었다.

"무슨 말인지 이제 알아들을 수 있을 거예요."

웅성거림이 마을 사람들이라는 바다를 타고 앞으로 돌진해 왔다. 그것은 주로 헬하운드라는 말이었다.

"헬하운드."

"그가 남쪽 어떤 지방에서 온 헬하운드 라는 소문이 있다는 구만. 그곳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윅크미어의 헬하운드 말인가?"

", 맞아. 바로 그거야, 윅크미어. 그는 윅크미어의 헬하운드로 유명하지. 지옥의 거울이라는 이름의 큰 칼을 차고 다닌다는 군."

"왜 그 칼을 지옥의 거울이라고 부른다지?"

"상대가 그 칼날 아래서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이 지옥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대."

윌리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말에 몸을 벌벌 떨면서 아이는 즉시 주머니로 손을 뻗어 생강 건포도를 또 한 주먹 꺼냈다.

"들으셨죠, 클레어 아씨?"

그는 건포도를 한입 가득 입에 문 채 말했다.

"윅크미어의 헬하운드 래요."

"그래."

클레어는 새로 온 방문객들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군중 속에서 몇 사람이 십자가를 긋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나 그의 위엄에 눌린 흥분된 기색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들한테 아까 보다 더 마음을 뺏긴 것처럼 보였다. 클레어는 자기 백성들이 열망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명성으로 치장된 영주를 얻게 될 경우 자신들이 받을 후광을 꿈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생을 거기에 목매지만 않는다면 명성이란 분명 건전하고 좋은 거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윅크미어의 헬하운드 라니."

윌리엄은 기도자나 성스러운 영감에 사로잡힌 사람한테나 해당될 만한 경건한 존경심을 품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분명히 아주아주 훌륭한 기사일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건."

클레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는 거야.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무슨 다른 사람들이요?"

클레어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말 탄 사람들을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았다.

"난 적어도 세 명의 기사 중에서 남편 감을 선택하게 되어 있단다. 지금 온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의 부하인 것처럼 보이는걸."

", 글쎄요. 이 윅크미어의 헬하운드 라는 사람은 세 사람을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큰데요."

윌리엄은 퍽이나 만족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딴 사람들은 필요 없다고요."

클레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헬하운드가 그 정도로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확실히 무시무시해 보이긴 했다. 그는 그녀가 요청한 것 같은 적당한 체구의 남자는 아니었다. 회색의 기사와 그의 부하들은 이제 거의 그녀 앞에까지 다다랐다. 누가 뭐라고 하든 어쨌든 간에 새로 온 방문객들은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다른 구혼자들도 이와 같은 강인함과 파워를 보여 줄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녀는 이 비상한 광경에 푹 사로잡힌 나머지 군중들 사이에서 일어난 또 다른 속삭임의 파도를 놓칠 뻔했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디자이어의 여 주인으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화젯거리로 삼는 일에는 익숙해졌다. 세상사가 다 그런 법이기 때문이었다. 마가렛은 그녀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클레어, 지금 바로 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담 위에 그렇게 계속 앉아 있으면 이 멋진 기사 분을 제때 적절한 예의를 갖춰 맞을 수 없게 될 거예요."

"벌써 너무 늦었어요."

클레어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말소리와 말발굽의 소음에 지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거리를 통과하려면 저 사람들이 내 앞을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해산할 때까지 난 여기 갇힌 셈이죠. 손님을 맞는 일은 조애너와 다른 하인들이 해야 할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가렛이 꾸짖으며 말했다.

"조애너와 하인들은 장래의 디자이어 영주가 기대하고 있을 만한 환대를 할 수 없을 거예요. 클레어는 머리를 돌려 마가렛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 하지만 이 회색의 기사가 장래에 디자이어 영주가 될지 안 될지는 누가 알아요? 사실, 난 그럴 리는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직접 목격한 광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사람은 절대로 정상적인 체격이 아니 예요."

"체격이란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마가렛이 웅얼거렸다. 천둥같이 울리던 말발굽 소리와 마구들의 덜거덕거리는 소음이 갑자기 멈췄다. 윌리엄이 깜짝 놀라며 헉 하고 내는 소리와 군중들의 머리 위로 갑자기 떨어진 숨죽임은 클레어로 하여금 머리를 홱 되돌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장중한 걸음으로 천천히 마을 중앙을 통과하며 행진하던 기마 부대가 갑자기 거리 한복판에서 완전히 멈춰 서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앉아 있는 돌담 바로 앞이었다. 클레어는 회색의 기사가 자기를 곧바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거북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첫 번째 본능은 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정원 속으로 현명하게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이 난관에 용감하게 맞서야 할 형편이었다. 순간 클레어는 흙먼지가 얼룩덜룩 묻은 자신의 옷과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민감하게 인식되었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담의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확실히 그가 보고 있는 게 그녀일 리는 없다. 그가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회색 기사의 주의를 끌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담 위에 걸터앉아 다른 마을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장관을 구경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회색과 연기의 기사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순간 동안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자 기묘한 정적이 그 광경을 덮쳤다. 그녀에겐 지금껏 계속 불어오던 산들바람조차 멈춰 버린 듯 느껴졌다. 수녀원 정원의 나뭇잎들도 꼼짝 않고 늘어져 있었다. 말 한마디, 심지어 깃발이 휘날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클레어는 강철의 투구 안에 들어 있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어두운 눈을 들여다보며, 이 윅크미어의 헬하운드가 제발 자기를 마을 사람 중 하나로 생각해 주기를 열심히 기도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명령을 받은 것처럼 거대한 회색 종마가 수녀원 담장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 짐승이 나가는 앞길에 서있던 사람들은 순간 옆으로 녹아 들듯 물러나며 활짝 길을 내어 주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곧장 클레어 한 테로 쏠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아씨."

윌리엄이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그가 아씨를 알아봤나 봐요."

"우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담 위에 놓인 클레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내가 누군지도 몰라."

윌리엄은 뭔가 다른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거구의 전투 마가 클레어 바로 앞에 멈추어 서는 순간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회색 기사의 시선은 그녀의 시선과 수평을 이루었다. 클레어는 총명하고 웃음기 없는 그의 두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흐릿한 수정 빛깔이었다. 냉정하고 주도 면밀한 지성이 수정의 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순간 회색 기사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레어는 숨을 멈추고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현명한 방법을 필사적으로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녀는 한 번도 이와 같이 난처한 지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저는 디자이어의 여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기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클레어는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왜 자기가 그 목소리에 그렇게 이상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그 목소리는 그와 잘 어울렸다. 그것은 저음의, 잘 통제된 힘으로 진동하는 꽉 찬 목소리였다. 그녀는 손가락이 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돌담을 꽉 움켜잡았다. 그런 다음 턱을 높이 들고 어깨를 바로 폈다. 장원의 여 주인으로서 그녀는 그 지위에 걸맞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그녀가 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게 생긴 남자와 마주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제가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윅크미어의 개러스 입니다."

클레어는 소곤거리던 소리들을 떠올렸다. 윅크미어의 헬하운드랬지.

"당신한테는 다른 이름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나를 일컫는 이름들은 많지만 그런 이름에 전부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 속에는 분명한 경고의 뜻이 담겨 있었다. 클레어는 예의라는 안전지대로 복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약간 고개를 숙였다.

"디자이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개러스 경. 오늘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훌륭한 여흥에 마을 전체를 대신해서 감사 드리겠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선 이와 같은 장관을 즐길 기회가 불행히도 드물었답니다."

"지금까지의 것으로 만족하신다니 기쁘네요. 이 후에 행해질 여흥에도 그와 같은 즐거움을 만끽하실 걸로 믿습니다."

개러스는 말고삐를 늦추고 갑옷을 두른 손을 들어 올려 투구를 벗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거나 클레어가 눈치 챌 만한 어떤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햇빛에 번쩍번쩍 빛나는 투구를 옆으로 치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다른 한 기사가 즉시 앞으로 나오더니 개러스의 손에서 투구를 받아 들고 뒤로 물러나 다른 전사들의 열에 합류했다. 클레어는 이제는 호기심을 숨기는 대신 완전히 드러내 놓고 개러스를 꼼꼼히 관찰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비난을 받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결국 그도 그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려고 파견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가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에 만족해 하는 것을 깨닫고 새삼 놀랐다. 그는 확실히 너무 큰 체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 눈에 띠는 단점은 인사를 하고 난 지금에는 그 전처럼 그렇게 놀라운 것으로 비춰지진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몸의 크기와 한눈에도 알 수 있는 신체적 막강함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동물적인 힘에만 의존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내부의 뭔가가 그녀에게 일러준 것이다. 윅크미어의 개러스는 분명 단련된 기사로 전투라는 피비린내 나는 기술을 훌륭히 연마하긴 했지만, 머리가 텅 빈 바보는 아니었다. 클레어는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덥수룩한 그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햇살이 빛났다. 그의 강력한 돌과 같은 형상에는 클레어에게 무언가 그녀의 사랑하는 섬을 보호하고 있는 거대한 절벽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번뜩이는 지성에도 불구하고 클레어는 그가 무자비하고 고집 센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싸워서 쟁취해 온 남자였다. 클레어가 그를 관찰하는 동안 그도 그녀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녀의 세세한 관찰에 반감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조용히, 마치 자신은 그 판결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태도로 인내심 있게 그녀의 판결을 기다릴 뿐이었다. 순간 갑자기 그녀는 그가 이미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녀의 결정과 결론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목표를 쟁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자 걱정이 되었다. 윅크미어의 헬하운드는 일단 한번 목표를 정하고 나면 쉽게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선 그에 못지않게 단호한 사람이야. 클레어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열 두 살이 되던 해부터 이 섬의 모든 것은 그녀의 의지대로였다.

"어떻소?"

마침내 개러스가 말했다.

"미래의 남편이 마음에 드오?"

미래의 남편이라고? 클레어는 놀라서 눈만 깜박거렸다. 그녀는 웃어야 좋을지 아니면 그의 이 기가 막힌 오만함을 꾸짖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예의를 지키기로 결심했지만 어디까지나 분명히 차가운 미소를 유지한 상태였다.

"그건 말할 수 없겠네요."

클레어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 지위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전부 만난 게 아니니까요."

"뭔가 잘못 알고 있소. 나와 시번의 니콜라스 경이 전부요."

클레어의 입술이 놀라서 벌어졌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적어도 서너 명의 기사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요청했는걸요."

"인생에서 언제나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오, 그렇지 않소?"

"하지만 당신은 내 요구 조건 중 어느 것 하나에도 맞질 않아요."

클레어는 재빨리 맞받아쳤다.

"무례하게 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경은 제가 원하는 체격이 절대로 아니에요. 게다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전쟁터 쪽에 훨씬 더 잘 어울릴 것처럼 보이는 걸요."

그녀는 무서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리자면, 전 당신이 유쾌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인상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체격에 대해선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소. 내가 전쟁에 잘 훈련됐다는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당신한테 맹세코, 난 평화롭고 조용한 인생을 추구하오. 내 성품에 대해 말하자면, 누구도 속단할 순 없는 일 아니겠소? 사람이란 충분히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아니오?"

"그 점에 대해선 하나도 확실히 아는 바가 없어요."

클레어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난 알 수 있소."

"글쎄요, 그렇다면 대단한 일이네요.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든 변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게 내 경험에서 얻은 가르침이오."

"그런 일에 관해서 라면 나보다 더 정통한 사람은 없어요."

클레어는 차갑게 말했다.

"경한텐 제가 심술궂게 보일 테지요. 경은 먼 길을 와서 멋진 쇼를 보여주셨습니다. 실망시켜 드리고 싶진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디자이어의 영주라는 지위에 절대로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동행하신 분들과 같이 타고 온 배에 그대로 올라타 여기를 떠나는 게 최선의 길일 것 같습니다만."

"이런, 클레어 아가씨, 난 아주 오래 이 기회를 기다려 왔고 또 아주 먼 길을 왔소. 여기서 내 미래에 대한 권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오. 떠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소."

"하지만 난 절대로..."

순간 사람들의 두려움에 찬 작은 경악이 뒤따랐다. 마치 마법에 의한 것인 양 개러스의 손에 그의 칼이 뽑혀 나타났다. 그 신속하고 무시무시한 움직임에 군중들은 차례로 숨을 죽였다. 클레어는 하던 말을 멈춰야 했다. 그녀의 두 눈도 크게 벌어졌다. 개러스가 칼날을 위로 치켜들자 햇살이 강철 위에서 춤추며 번뜩였다. 다시 한번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극도의 정적 속으로 얼어붙어 버린 듯했다. 간신히 그 마법을 깨뜨린 것은 어린 윌리엄이었다.

"우리 아씨를 다치게 하지 말아요."

그는 개러스에게 악을 쳤다.

"그런 짓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마을 사람들은 칼집에서 빠져 나온 칼을 보고 그랬던 것처럼 윌리엄의 대담함에 멍해졌다.

"조용히 해, 윌리엄."

클레어가 속삭이듯 말했다. 개러스는 윌리엄을 쳐다보았다.

"아주 용감하구나, 꼬마야. 지옥의 거울을 보는 순간 두려움에 도망쳐 버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윌리엄이 공포로 얼어붙은 건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는 단호히 결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개러스를 노려보았다.

"아씨를 해치지 말아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개러스가 계속 말했다.

"네 아씨의 미래의 남편으로서 내가 올 때까지 이렇게 아씨를 지켜 준 용감한 보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아주 기쁘구나. 너한테 빚을 진 셈이다."

윌리엄의 얼굴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개러스는 다시 한번 번개같이 신속한 몸놀림으로 칼을 뒤집었다. 그는 칼날을 앞으로 쭉 뻗었다가 클레어를 향해서 분명한 충성과 존경의 몸짓으로 곧추세웠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그녀가 그 무기를 잡아 주기를 기다렸다. 놀라움의 술렁거림이 군중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클레어도 그 소리를 들었다. 윌리엄이 또 그한테 반한 것도 느껴졌다. 대기 중에는 기대에 찬 긴장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칼을 거절한다는 건 위험한 행동이다. 개러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또 그의 부하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칼을 받아들인다면 개러스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청혼이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믿게 할 근거를 주게 되는 셈이다. 이건 하나의 덫이었다. 클레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보다 세련된 방법인 동시에 확실한 덫이었다. 출구가 오직 두 개뿐인 올가미, 게다가 그 두 가지 모두 위험천만한 올가미였다. 그리고 이 덫은 매우 신중하게 놓여졌다. 처음부터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육체적 힘뿐만 아니라 머리도 함께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레어는 똑바로 세워진 윤기 나는 강철을 내려다보았다. 칼자루 끝에 바위 덩어리같이 커다란 수정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구름 같은 회색의 돌은 보이지 않는 불길에서 솟아오르는 은빛 연기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불현듯 클레어는 이 칼이 어떻게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 이해가 됐다. 칼자루에 박힌 수정에서 지옥으로 통하는 거울을 연상하는 건 그다지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개러스의 침착한 시선과 마주치자 희뿌연 수정이 그의 눈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덫에서 빠져 나올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클레어는 사용 가능한 두 개의 선택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천천히 그녀는 손을 뻗어 치켜 올려진 칼을 잡았다. 무기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그것을 잡으려면 양손을 모두 사용해야 했다. 기쁨에 찬 커다란 함성이 군중들로부터 터져 나왔다. 윌리엄도 빙그레 웃었다. 환호성이 대기를 가득 채웠다. 말에 탄 기사들이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방패에 부딪치게 하자 갑옷과 그것들의 소리가 요란하게 쨍그랑거렸다. 클레어는 개러스를 쳐다보며 마치 디자이어의 높은 절벽에서 막 발을 뗀 것 같은 기분에 젖어 들었다. 개러스는 갑옷으로 뒤덮인 큼 지 막한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 올리더니 돌담 위에서 끌어 내렸다. 클레어의 주위에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큰 칼을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기가 지옥 개 앞에 안전하게 앉혀진 것을 인식했다. 나무 기둥 같은 갑옷 두른 팔 하나가 그녀를 안정감 있게 받치고 있었다.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고 개러스의 두 눈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클레어는 어째서 자기가 아직도 추락하는 느낌이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개러스가 한쪽 손을 올리더니 기사 한 사람을 손짓해 불렀다. 굳은 표정의 전사가 앞으로 말을 몰아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울리치."

개러스는 즐거움에 들떠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군중들의 소음 위로 부하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돋우었다.

"이 아가씨의 고귀한 보호자를 그의 훌륭한 봉사에 어울리는 예의를 차려 호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울리치는 타고 있는 말을 돌담 쪽에 가깝게 접근시킨 다음 두 팔을 뻗어 윌리엄의 허리를 잡았다. 그는 소년을 담에서 들어내려 자신의 안장에 앉혔다. 클레어는 윌리엄이 타고 있는 말이 거대한 군마들과 함께 군중을 헤치고 나가는 동안 아이의 눈동자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개러스가 지금 막 평생을 바칠 충성스런 추종자를 하나 거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클레어는 윅크미어의 헬하운드가 회색 군마를 타고 붐 비는 거리를 뚫고 지나가는 동안 자신의 백성들이 외치는 환호성을 들을 수 있었다. 어깨 뒤로 눈을 돌려보니 마가렛이 성문의 누다락 입구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녀원 원장은 기분 좋게 손을 흔들었다. 클레어는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자신이 빠진 교묘하게 장치된 올가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2.

"지옥의 거울을 그 숙녀한테 내민 건 멋진 행동이었습니다."

울리치는 개러스가 커다란 목욕통 안에서 비누질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답지 않은 짓이었어요."

"자네는 내가 멋진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개러스는 두 눈에서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밀어내며 믿음직한 친구를 쳐다보았다. 울리치는 쿠션을 넣은 창가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완전히 벗겨진 대머리 위에서 햇빛이 빛났다. 개러스 보다 여섯 살 연상인, 경험이 풍부한 기사 울리치는 우람한 근육질의 사나이로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 서스턴 경은 개러스가 열여섯 살이 된 때 울리치를 개러스의 현명하고 훌륭한 조언자로 고용했었다. 연장자는 사려 깊은 스승이자 뛰어난 전사였다. 그는 개러스가 기사 작위를 받는 자리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람교로 개종한 반역도들이 서스턴 영지의 일부 촌락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곧 그들과 격렬한 충돌을 하게 되었다. 울리치와 개러스는 그때부터 함께 싸웠다. 그들의 연합은 우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믿음과 상호 존중이라는 단단한 뒷받침을 근거로 했다. 개러스는 처음부터 울리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관계는 점차적으로 스승과 학생의 관계에서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는 프로들의 관계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이제 명령을 내리는 것은 개러스 였다. 단단하게 잘 훈련된 사내들을 주위로 끌어 모아 그들을 수준 높은 막강한 군대로 만든 것은 개러스 였다. 재력 있는 고용주를 선택하여 언제, 어떻게 부하들의 군사력을 팔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개러스 였다. 그는 지도자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나 그것은 랑드리의 서스턴과 그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한테 자연스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개러스에게는 명령하고자 하는 의지가 흡사 숨 쉬는 행위처럼 너무나 당연한 하나의 본능과 같이 내재되어 있었다. 울리치는 지도자의 지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는 아무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자들에게만 충성을 맹세했고, 그가 충성을 바친 주군은 변함없는 헌신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4년 전 울리치는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울리치는 서스턴을 비롯한 그 누구보다도 개러스를 잘 알았다. 그는 개러스가 전에는 한 번도 지옥의 거울을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영주든, 아니면 그 부인에게든지 줘 본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정중하고 인상 깊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울리치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었다.

"당신한테는 그런 행동들이 언제나 영리한 덫을 감추는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것은 당신으로서도 보기 드문 일인 건 사실입니다."

"상황이 드문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것 역시 하나의 덫에 지나지 않을 테지요? 그 아가씨가 꼼짝없이 결국은 지옥의 거울을 받을 수밖에 없게 했으니까요."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약 그분이 칼날을 당신께 향하고 그대로 찔러 버렸다면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녀는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네. 사실 그보다 더 위험한 건 혹시라도 그녀가 칼을 거절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지."

개러스는 향기로운 비누를 코끝까지 들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킁킁거렸다.

"이곳 디자이어에 있는 모든 것에선 무슨 꽃 향기 같은 게 나는 것 같지 않나?"

"이 섬은 전체가 하나의 정원입니다. 장담하지만 마을의 도랑에서도 향기가 날 겁니다."

"아마 어떤 통로를 통해 바다로 연결돼 있는 것 같아."

개러스는 생각에 잠긴 듯 이마를 찌푸렸다.

"쓰레기는 분명 조수에 같이 씻겨 나가는 게 틀림없어. 여기 홀의 변소도 그런 비슷한 안배 때문에 깨끗이 비어 있고. 아주 흥미로운 일일세."

"늘 상 그랬듯이 독특한 발명품에 대한 당신의 호기심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울리치는 뒤쪽의 열려진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봄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만약 그녀가 칼을 거절했더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그건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칼을 잡았어."

"그리곤 그녀의 운명을 봉했다, 이게 당신이 믿는 겁니까? 난 그 점에 대해선 확신이 없군요. 그저 디자이어의 여 주인은 영리한 분일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당신이 내게 한말을 종합해 보면, 이곳을 이렇게 윤택하고 풍요롭게 유지해 온 주인공은 바로 그분이더군요."

"그래, 모친은 그녀에게 향수 제조의 비법을 전수했지. 그녀의 오빠는 말할 것도 없이 일생을 마상 시합에서 마상 시합으로 전전하다가 결국은 죽어 버렸고. 부친은 학자였는데, 자기 영지를 가꾸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더군. 스페인에서 아라비아 논문을 번역하면서 시간을 보내길 더 좋아했으니까."

울리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이 그분과 만나지 못한 게 유감이로군요. 두 분이서 서로 토론할 게 많았을 텐데."

"맞아."

개러스는 갑자기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는 걸 느꼈다.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그는 무법자들을 사냥하는 일에서 손을 떼고 그의 첫사랑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바로 클레어의 아버지가 수집했던 것과 같은 서적과 필사본에 파묻힌 보물들을 사냥하는 일이 그것이다. 꼿꼿이 서서 마른 수건으로 손을 뻗는 그의 커다란 체구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끔찍하군. 나한테서 꼭 피어 오르는 장미꽃 같은 냄새가 나는데."

울리치가 소리 없이 씩 웃었다.

"아마 새 애인이라면 그 냄새를 좋아할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수녀원 담벼락 위에 앉아 있던 그 말괄량이가 디자이어의 여주인이라는 걸 알아보신 겁니까?"

개러스는 한쪽 손으로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다른 한 손으론 그만두자는 손짓을 했다.

"나이가 꼭 그 정도일 거라는 건 확실했지. 게다가 그 중에선 제일 옷을 잘 차려 입고 있었거든."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자신감과 위엄도 갖추고 있었지. 난 그녀가 아직 수녀가 되지 않은 수녀원의 예비 수녀거나, 아니면 장원의 여 주인일 거라고 직감했네. 그저 난 여주인 쪽에 도박을 건 것 뿐이야."

개러스는 클레어를 처음 보던 순간을 회상했다. 말 위에 올라앉은 위치에서 그는 그녀가 돌담 위로 기어올라 앉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녹색 드레스와 외투를 걸친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목 부분과 모자의 가장자리, 그리고 그녀가 입은 튜닉의 소매에는 넓은 허리띠와 마찬가지로 노랑색과 오렌지색의 수가 놓아져 있었다. 허리띠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와 여성다운 허벅지를 강조하면서 엉덩이 아래쪽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개러스에게는 돌담 위의 여인이 섬 전체를 카펫으로 깐 듯이 뒤덮고 있는 장미와 라벤더의 들판처럼 신선하고 선명한 봄의 화신으로 보였다. 그녀의 기다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좁은 머리 장식과 섬세한 작은 리넨 조각으로 느슨하게 묶인 채 햇빛 속에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의를 붙잡아 못박게 만든 것은 바로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두드러지게 선이 가는 얼굴은 바로 곁에 앉은 소년의 얼굴처럼 거칠 것 없는 호기심과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관대하면서도 확고한 긍지가 얼굴 표정에서 번뜩였고, 그것은 바로 명령하는 데 익숙한 여성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커다란 녹색 눈에는 신중함이 깃들여 있었다. 무법자들을 사냥하면서 보낸 수년의 가르침의 산물인 그 자신의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썰미는 그런 신중한 표정을 한번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사실 눈이야말로 그녀가 진짜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주었다. 돌담 위의 잘 차려 입은 숙녀는 자신의 영지를 침범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매우 개인적인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개러스는 담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곧장 상대하기로 결심하던 순간 자기가 일부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수녀원 정원 속으로 도망치지는 않을까 하고 약간은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여성 특유의 오만함을 지나칠 정도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뒤로 후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그는 그녀의 옷에 묻은 진흙을 발견하고는 이건 좋은 징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디자이어의 여 주인은 자기 손을 더럽히는 걸 못 참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옷을 입으면서 그는 방안의 돌 벽을 따뜻하게 하는 커다란 태피스트리에 눈길을 던졌다. 디자이어의 소득의 원천인 꽃과 향초는 이 섬 어디에서나 공통된 주제라는 걸 그는 눈치 챘다. 심지어 아름답게 짜여진 벽걸이 장식들에 조차 정원 풍경이 묘사되어 있었다. 이곳은 향기로운 꽃들과 푸르른 풀이 자라는 땅이었다. 윅크미어의 헬하운드가 이 아름답고 달콤한 향내 나는 고장에 찾아 들어 이곳을 자기 집으로 만들겠다고 달려들리라고는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디자이어가 꽤 만족스러웠다. 이 섬에는 그 동안 자기가 찾아오던 뭔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다란 가죽 허리띠를 엉덩이 위로 꽉 조여 맨 다음 그는 돌 벽의 좁은 창문들 가운데 하나를 향해 맨발로 천천히 걸어갔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산들바람이 클레어의 머리카락을 연상시켰다. 개러스는 그녀를 앞에 태우고 마을을 통과해 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내내 그녀의 짙은 머리카락 냄새를 들이마셨다. 꽃향기가 함께 뒤섞이긴 했으나 그녀 특유의 달콤하고 매혹적인 냄새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 냄새가 개러스를 사로잡았다. 그녀에게선 그가 이제껏 만나 본 여인들과는 다른 냄새가 났다. 미묘하면서도 도취 시키는 듯한 향기가 그의 다리에 눌려지는 그녀의 둥그스름한 엉덩이 감촉과 어우러져 개러스의 내부에 있는 뭔가를 건드렸다. 간절하고 강력한 갈망이 그는 내부에서 깨어났다. 그 갈망의 원시적인 힘을 회상하자 얼굴이 찡그려지고 턱은 꽉 다물어졌다. 그 갈망이 경계선 안쪽에 확실히 머물러 있도록 잘 감시해야 했다.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순간 울리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서 첫눈에 디자이어의 여 주인을 알아봤단 말입니까?"

그는 번쩍거리는 머리를 심술궂게 경탄한다는 듯이 흔들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늘 상 그랬듯이, 갖춰진 사실들로부터 유추하여 정답을 도출해 내는 데는 빠르시더군요."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네."

개러스는 부드러운 가죽 부츠를 신기 위해 높은 의자 위로 걸터앉았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지. 난 자네도 그 유괴 사건에 대한 얘길 들었는지 궁금한데?"

"별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어젯밤에 난 시번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패거리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내가 듣게 된 제일 재미있는 얘기는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모두가, 특히 니콜라스 경과 그의 전가족, 아가씨 본인까지도 유괴 같은 건 없었다고 우긴다는 겁니다."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추측만 할 뿐이다 이거지. 한 숙녀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

"그렇습니다. 소문의 요지는 이겁니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니콜라스 경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나흘이나 머물렀답니다."

"그런 후에 그가 결혼을 신청했나?"

"신청했지요. 하지만 그 숙녀가 거절했답니다."

울리치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런 상황 하에선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당신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물론이지. 대개 여자들은 불가피한 일 앞에서는 항복하기 마련인데."

만족감이 개러스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의 미래의 신부는 뻔뻔스러운 협박에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종류의 용기를 높이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말이다.

"핑계거리의 하나로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보호자인 랑드리의 서스턴 경이 그녀에게 남편 감을 고르는 걸 허용하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우리 아버지한테 편지를 써서 신랑 후보들을 골라 달라고 부탁한 건 바로 그 무렵이고."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신부를 차지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왜 신신당부했는지도 그걸로 설명이 되는군."

개러스는 잠깐 그 일을 회상했다.

"아버지는 니콜라스가 또다시 디자이어에 손을 대려고 할까 봐 걱정하셨네."

"두 번째 유괴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겁니다."

울리치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호기심에서 묻는 겁니다만, 니콜라스 경에 대해선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지금으로선 아무 대안도 없어. 클레어가 그를 유괴나 강간죄로 기꺼이 고발할 거라고는 기대 안 하네."

"그녀도 지켜야 할 명예라는 걸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개러스 경. 그 숙녀 분은 당신한테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해줘서 고맙다고 하진 않을걸요."

"난 지금 다른 걱정거리도 많네. 니콜라스 건은 나중에 처리할 생각이야."

시번의 니콜라스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개러스가 선택하는 장소와 시간에 치러질 것이다. 윅크미어의 헬하운드는 가혹한 복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곤 했지만 항상 금방 승리를 쟁취하곤 했다. 그도 신중히 지켜야 할 명예가 있었다. 울리치는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 다음 그 너머를 내다보았다. 홀 주위를 두르고 있는 오래된 목재 방벽 너머로 펼쳐져 있는 꽃밭들이 보였다. 그는 꽃 냄새가 가득한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당신이 차지하려고 하는 이곳은 정말이지 괴상한 고장입니다."

울리치가 말했다.

"거기다 여주인도 괴상하죠. 나머지 집안 식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말이 맞아. 클레어에게 그 소년은 도대체 어떤 존재지?"

"윌리엄 말입니까?"

울리치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원기왕성 한 아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운동을 좀 해야 할 것 같더군요. 단 케이크와 푸딩을 좋아해요."

"그래."

"그 애와 모친인 조애너 부인은 둘 다 이 성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애너 부인은 과부입니다."

개러스는 울리치를 흘끗 보았다.

"조애너 부인한텐 그 아이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진 게 없다는 건가?"

"남편이 성지에서 벌일 모험에 쓸 돈을 모으려고 북쪽에 있는 땅을 비롯해서 가진 걸 몽땅 팔아 버린 모양입니다. 그는 결국 거기서 죽었답니다. 조애너 부인과 윌리엄 한 텐 한 푼도 남기지 않고요."

"그래서 조애너 부인은 디자이어를 찾아와 아들과 같이 이 성에서 살게 되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울리치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 당신의 아가씨가 그런 문제에 대해선 아주 마음이 약한 것 같다는 인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분이 살 집을 마련해 준 건 조애너 부인과 그 아들뿐만이 아닙니다. 외모로 보건대 벌써 몇 년 전에 갈아치웠어야 할 늙은 집사나 아직도 여기에 살고 있는 늙은 유모도 마찬가집니다. 분명히 그들에겐 달리 갈 데가 없었을 겁니다."

"그밖에 다른 뜨내기는 없나?"

울리치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윌리엄은 두 달 전에 젊은 음유 시인 하나가 성에 나타났다고 말했죠. 클레어 아가씨는 그도 역시 받아들였답니다. 그 음유 시인은 틀림없이 오늘 저녁 우리를 즐겁게 해줄 겁니다. 윌리엄은 클레어 아가씨가 사랑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개러스는 남편감에 관한 클레어의 조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난 그게 아주 두렵군."

"음유 시인의 이름은 댈런 입니다. 윌리엄은 그 서정 시인이 새 여 주인을 열렬히 신봉한다고 말했죠."

"시인들이란 늘 상 그런 식이지."

개러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들이 유괴와 바람 피우기에 관한 바보 같은 노래들을 부를 때면 정말 구역질이 나."

"여자들은 그런 발라드를 좋아합니다."

"여기선 그런 노래들이 불리지 않을 걸세."

개러스는 조용히 말했다.

"시인이라는 댈런 한 테 그렇게 일러 두도록."

"알겠습니다."

울리치가 창문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리기 전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치아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개러스는 친구가 제대로 감추지 못한 웃는 낯을 못 본 척했다. 평소와 같이 그는 울리치가 그 정도로 몹시 즐거워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척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개러스가 자신의 명령이 그대로 수행되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깨끗이 씻고 새 옷을 입은 개러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다시 나의 미래의 부인한테 선을 보일 시간이군. 그녀와 난 의논할 게 많아."

"정원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개러스는 어깨 뒤로 돌아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지?"

"여기서 그분이 보이니까요."

울리치는 열린 창문을 통해 아래를 응시했다. 여전히 그의 얇은 입술 가에 미소가 남아 있었다.

"아가씨는 충성스런 집안사람들한테 뭔가 말하고 있어요. 틀림없이 성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지시를 내리는 걸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성은 지금 공격 받고 있지 않아."

"친구여, 그건 의견의 문제입니다. 내게는 당신의 아가씨가 포위 공격에 버틸 준비를 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요."

"날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로군. 전투는 끝났고 내가 이겼는걸."

"저로선 그 점에 대해선 전혀 확신이 안 섭니다."

울리치는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리 없는 웃음은 킥킥거리는 웃음으로 바뀌더니 급기야는 폭소로 변했다. 개러스는 울리치가 즐겁게 생각하는 게 무언지 추측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과 말들이 쉴 곳은 다 제대로 정해졌나요?"

클레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정원에 모여 선 집안사람들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달리 갈 곳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녀의 짜맞춘 가족들은 사과나무 아래의 돌 벤치에 앉아 있거나 근처에 서있었다. 진짜 군마에 생전 처음 올라타 본 흥분으로 아직도 얼굴이 상기된 채인 윌리엄은 그의 어머니 조애너와 열정에 젖어 사는 비쩍 마른 시인 사이의 벤치 위에 자리를 잡았다. 성의 오랜 집사인 에드거는 벤치 끝에 서있었으며 그의 표정은 굉장히 불편한 듯 보였다. 그로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집의 집사로서 그는 집안을 꾸려 나간다는 매일의 임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손님들을 먹이는 데 필요한 방대한 양의 음식들을 부엌에 확실히 준비시켜야 할 사람이 바로 그였다. 또한 하인들이 목욕물을 준비하고 옷을 정리하고 이불 세탁하는 일을 하도록 감독하는 것도 그의 책임이었다. 이 모두가 지독히 귀찮은 일이야. 클레어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 대부대에 대응할 수 있을지 에드거가 걱정스러웠다. 비록 충직하고 근면하긴 했어도 그는 이미 일흔의 나이였고, 더구나 세월은 그의 뼈마디와 청각을 점령하고 있었다. 에드거가 그녀의 질문에 반응을 보이지 않자 클레어는 한숨을 쉬고 보다 큰 목소리로 다시 말해야 했다.

"이 사람들과 말들 모두를 재울 곳은 준비됐나요, 에드거?"

", . 물론 입죠, 아씨. 확실히 그렇게 했습니다."

에드거는 구부정한 어깨를 똑바로 펴고 이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썼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내줄 방을 다 찾아냈다는 게 놀랍군요. 내가 그들 중 누구라도 내 방이나 층계에서 자고 있는 걸 보게 될 염려는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아씨."

에드거는 열성적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군인들한테 줄 방은 충분했습니다. 방이 부족한 사람들한테는 2층 방을 내주었고요. 나머지 사람들은 홀이나 마구간에 있는 짚자리에서 자게 했습니다. 모든 게 다 적절하게 조치되었답니다."

"진정해, 클레어."

조애너는 하고 있던 뜨개질 감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모든 게 다 잘 되고 있어."

조애너는 클레어 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그녀는 금빛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푸른 색 눈동자에 섬세한 이목구비를 갖춘 아름다운 여자였다. 열 다섯 살에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시집 간 조애너는 곧 과부가 되었고 돈 한푼 없이 달랑 아들 하나만 남겨지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3년 전 클레어의 집 문턱에 도착하여 자신의 어머니와 클레어의 모친이 예전에 가까운 친구였다는 사실에 근거, 매우 먼 친분 관계를 주장했다. 클레어는 조애너와 윌리엄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조애너는 즉시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발휘하여 디자이어의 수입에 공헌하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조애너의 재능을 재빨리 알아보았다. 클레어의 말린 꽃과 향초 판매 수익은, 그것들을 조애너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정교하게 수 놓여진 작은 주머니와 가방에 담아 팔게 된 덕분에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되었다. 수요가 너무 늘어났기 때문에 조애너는 마을의 부녀자 몇 명에게 수놓는 기술을 가르쳐야 했다. 성 허미언 수녀원의 수녀 몇 사람도 그녀의 감독 아래 일을 하면서 클레어의 향 제품의 일부에 사용할 우아한 주머니들을 만들게 되었다.

"에드거, 요리사더러 오늘 밤 음식들을 파란색이나 진홍색, 노란 색 같은 걸로 물들이려는 온갖 유혹에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고 말해 두세요."

클레어는 뒷짐을 지고 자갈 돌이 깔린 샛길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그녀가 특별한 날에는 요리를 얼마나 갖가지 색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지 당신도 잘 알 거예요."

"압니다 요, 아씨. 요리사는 그게 손님들한테 좋은 인상을 준다고 말하고 있지요."

"개러스 경과 그 무리들한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특별히 애쓸 필요는 없다고 봐요."

클레어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도, 난 파란 색이나 주홍색으로 된 음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도 노란 색은 예쁘잖아."

조애너가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 헬렌 대수녀 원장님이 방문했을 때, 그분은 연회 음식들이 모두 노란 색으로 된 걸 보고 무척 감동 받았지."

"그건 대수녀 원장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한 거였어요. 덩치 큰 한 떼의 기사들과 그 하인들한테 시달리는 건 전혀 다른 일이죠. 허미언의 성스러운 샌들에 대고 말하건대, 난 절대로 오늘 밤 식탁을 모두 노란 색으로 물들이는 데 엄청난 양의 사프란 향미료를 낭비하진 않을 거예요."

"당신한테 그 정도 비용을 댈 만한 여유는 있어, 클레어."

조애너는 조용조용히 말했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에드거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요리사한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클레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담을 두른 정원은 그녀에겐 보통 즐거움과 평온의 장소였다. 꽃과 향초의 화단은 정성스레 가꾸어져 다채롭고 애태우는 듯한 향기를 만들어 냈다. 보통 화단 사이의 샛길을 따라 걷는 건 황홀하고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보이지 않는 향기의 나라를 산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클레어의 섬세하게 다듬어진 후각은 이러한 경험에서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곤 개러스 경, 그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에게 나던, 꽃 향기와는 전혀 거리가 먼 매우 불안정하고 남성적인 냄새뿐이었다. 세속적인 땀냄새, 가죽냄새, 말 냄새, 모직과 강철, 개러스가 뒤집어 쓴 길거리의 흙먼지 냄새들 개러스 그 자신의 냄새가 흠뻑 배어 있었다. 마을에서 같이 말을 타고 오는 동안, 클레어는 그 향기에 휩싸였고 그녀는 자기가 절대 그 냄새를 잊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개러스는 제대로 된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를 떠올리자 그녀의 코가 경련을 일으켰다. 확실히 그에게선 달콤한 향기 따윈 나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어의 코의 반응은 그녀가 새로운 향수 제조를 위해 향초와 향료, 꽃잎들을 제대로 맞게 섞어 넣었을 때 느꼈던 성취감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거기에는 완성, 확신의 느낌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심지어 그녀가 한때 사랑한 바 있던 레이먼드 드 콜빌에게서도 그렇게 제대로 된 냄새는 나지 않았었다.

"지옥의 거울은 정말 그렇게 무겁나요?"

윌리엄은 열망하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헬하운드가 아씨한테 홀의 정문까지 오는 동안 내내 그 칼을 들고 오게 허락하는 걸 봤어요. 울리치 경은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어요."

"정말 그렇게 말했니?"

클레어가 물었다.

"울리치 경은 헬하운드가 한 번도 이 세상 누구한테도 그 칼을 내준 적이 없다고 했어요."

윌리엄은 계속하여 말했다.

"전체 마을 사람 앞에서 행진 도중에 누군가에게 그걸 들고 가게 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요."

"나한테 칼을 들고 가게 허락한 게 아니야."

클레어는 불평하며 말했다.

"그렇게 하게끔 강요한 거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 그는 성에 도착할 때까지 내 손에서 그 칼을 가져 가는 걸 거부했어. 난 그렇게 값진 보물이 흙먼지 속으로 떨어지게 할 순 없었다고."

조애너는 이마를 움찔해 보였지만 하고 있던 바느질에서 눈을 떼진 않고는 물었다.

"클레어, 왜 그가 단순히 칼을 칼집에 도로 넣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내가 자기 앞에 앉아 있으니까 그걸 칼집에 다시 집어넣을 수 없다고 우겼어요. 그리고 나를 그 짐승 등에서 내려 주는 것도 거절했고요. 그렇게 하는 건 기사답지 못한 짓이라 나요. 온갖 음모와 책략을 가지고 날 꼼짝없이 붙잡고 있는 상황에서 세련된 예의범절을 논하다니, 정말 오만한 사람이더군요."

조애너는 입술을 오므렸다.

"개러스 경은 어떤 종류의 대담함이든 부족하지 않게 두루 갖추고 있다는 게 내 막연한 인상인데."

"울리치 경은 헬하운드가 남부에서 스무 명이나 되는 강도 살인자들을 죽인 굉장히 훌륭한 기사라고 말했어요."

윌리엄이 말했다.

"울리치 경은 그가 아씨한테 지옥의 거울을 들고 가게 허락한 건 대단한 경의를 보인 거라고 했어요."

"나한텐 별 필요 없는 경의였어."

클레어가 말했다. 그녀는 어째서 개러스가 성에 도착할 때까지 칼을 도로 거둬 가는 걸 거절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길가에 죽 늘어선 모든 사람들, 양치기에서 세탁 일을 하는 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디자이어의 여 주인이 헬하운드의 위대한 칼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하도록 만들길 원했던 것이다. 그래, 헬하운드는 내게 대단한 경의를 표한 게 아니야. 이 모든 건 교묘하게 계산된 행위일 뿐이다.

"전 그가 아씨한테 큰 경의를 표했다곤 믿지 않습니다."

댈런은 열성적으로 강하게 단언했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아가씨를 조롱했습니다."

클레어는 자신의 새로운 음유 시인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겨우 열여섯 살의 초췌한 모습의 젊은이로, 예기치 못한 소리가 갑자기 난다거나 누가 목소리만 높여 말해도 쉽게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우연히 누군가와 부딪치기라도 하면 그는 공포에 찌든 산토끼마냥 펄쩍 뛰어오르거나 얼어붙어 버렸다. 그가 내적인 평온함을 찾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순간은 자기가 만든 사랑 노래들을 부를 때였다. 그의 여윈 체격은 디자이어에 도착한 이래로 조금씩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클레어는 그가 성에 나타난 첫날 보였던 두렵고 쫓기는 듯한 표정을 찾아볼 수 있었다. 댈런은 자기가 음유 시인 자리를 찾고 있노라고 말했었다. 클레어는 그를 한번 보고는 이 젊은이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그건 결코 유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를 받아들였다. 클레어는 댈런의 열정적인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날 조롱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글쎄요, 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댈런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는 잔인한 살인자처럼 보여요.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윅크미어의 헬하운드라고 부르진 않을 겁니다."

클레어는 화가 나서 몸을 홱 돌렸다.

"어리석은 별명만 가지곤 많은 걸 알아낼 수 없는 법이야."

"난 그게 바보 같다곤 생각 안 하는데요."

윌리엄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울리치 경이 말하길 그는 그가 죽인 무법자들 때문에 그 별명을 얻게 된 거래요."

"그렇게 놀라지 마, 클레어."

조애너가 말했다.

"이 결혼을 앞두고 네가 많이 불안해 한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서스턴 경이 너의 요구 조건에 그렇게 맞지 않는 후보자를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어."

"바로 그 부분에 대해서 난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걸요."

클레어가 말했다.

그때 자갈이 깔린 샛길을 가로질러 아주 거대한 그림자가 바로 그녀 앞에 곧장 드리워졌다. 마치 마법에 의해 소환된 것인 양 개러스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는 높은 울타리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 곧바로 그녀 앞에 나타날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았다. 그런 거구의 사나이가 그렇게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성 허미언의 작은 손가락에 대고 말하건대 윅크미어 경, 당신이 날 놀라게 했어요. 그렇게 갑자기 덤불 뒤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셨어야죠."

"미안하오, 안녕 하시오."

개러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여기 정원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는 아직도 사과나무 아래 모여 있는 작은 무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윌리엄 군은 이제 알겠고, 윌리엄 옆에 앉아 계신 부인과 당신의 다른 가솔들한테도 소개 시켜 주지 않겠소?"

"좋아요."

클레어는 뻣뻣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소개의 말을 술술 늘어놓았다. 조애너는 흥미롭게 개러스를 관찰했다.

"디자이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부인."

개러스는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여기서 누군가가 날 환영한다는 걸 아는 건 좋은 일이죠.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의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는 지만 신경 써야 할 테니까요."

클레어는 얼굴을 붉히고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댈런에게 빠른 손짓을 해보였다.

"디자이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댈런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는 반감이 어린 표정이었으나 현명하게도 예의 바른 말을 잊지는 않았다. 개러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반갑다, 네 노래가 기대되는군. 음악에 관한 한 내게는 특별히 좋아하는 분야가 있다는 걸 지금 알려줘야겠는데."

"그렇습니까?"

"그래, 난 자기 남편 외의 기사들과 바람난 부인네에 관한 사랑 노래는 질색이야."

댈런은 발끈했다.

"클레어 아씨는 숙녀와 헌신적인 기사의 사랑 노래를 좋아하십니다. 아씨는 그런 노래들을 무척 즐기고 계시죠."

"정말인가?"

개러스는 놀랐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활처럼 치켜 올렸다. 클레어는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양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사랑 노래들이 기독교국들의 가장 세련된 궁중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고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나는 최신의 유행을 따르는 게 필요하지도 않고 편리하지도 않다고 보오."

개러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사과나무 밑의 작은 무리에게 냉정하고 침착한 시선을 던졌다.

"아가씨와 전 이쯤에서 실례하겠소. 우리끼리 조용히 할말이 좀 있어서요."

"그렇게 하시죠."

조애너는 일어서서 개러스를 보고 미소 지었다.

"저녁 식사 때 뵙도록 하죠. 이리 오렴, 윌리엄."

윌리엄은 벤치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아이는 개러스를 보고 씩 웃어 보였다.

"지옥의 거울은 아주 무겁나요, 개러스 경?"

"그렇단다."

"나도 그걸 들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조애너는 엄한 얼굴로 아이를 노려보았다.

"절대로 안 된다, 윌리엄. 그런 일은 생각도 하지 말아. 칼은 지극히 위험하고 아주 무거운 물건이야. 넌 그런 무기에 손 대기엔 너무 여려."

윌리엄은 풀이 죽은 표정이 되었다. 개러스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너도 분명 칼 하나 정도는 들 수 있을 거다, 윌리엄."

윌리엄의 얼굴이 밝아졌다.

"울리치 경한테 칼을 좀 시험해 봐도 되느냐고 물어 보지 그러니?"

개러스가 이렇게 제안했다.

"그의 칼도 지옥의 거울만큼 무겁단다."

"정말 요?"

윌리엄은 이 얘기에 호기심이 일어난 듯 보였다.

"바로 가서 부탁해 볼래요."

조애너가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건 절대 현명하지 못한 짓이야."

"안심해도 될 겁니다, 부인."

개러스가 말했다.

"울리치 경은 이런 일에 아주 경험이 많아요. 절대로 윌리엄이 다치는 일은 없게 할 겁니다."

"정말로 안전할 거라고 확신하세요?"

"그럼 요. ,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부인, 전 클레어 아가씨와 얘길 좀 했으면 합니다만."

조애너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며 망설였다. 그러나 망설임은 곧바로 예의의 승리로 끝났다.

"용서하세요, 무례하게 굴 마음은 없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아들의 뒤를 쫓아 떠났다. 클레어는 난처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뜨는 동안 초조하게 발끝으로 땅을 탁탁 두드렸다. 댈런은 클레어에게 살피는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리고 부정적인 몸짓으로 짧게 머리를 한번 내저었다. 댈런이 이 불편한 상황에서 섣불리 영웅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젊은 시인이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와 싸워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정원에 그들 단둘만 남게 되자, 클레어는 몸을 돌려 개러스를 마주 보았다. 그에게선 더 이상 땀과 강철 냄새가 풍기지 않았지만, 그가 방금 사용한 장미 향 비누도 그 냄새, 그토록 제대로 된 냄새로 느껴지던 개러스 본인의 냄새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가 갑옷과 투구를 벗어 버렸어도 전보다 더 체구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그토록 거대하고도 무시무시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체격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큰 체격이 위협적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로부터 방사되는 무언가 다른 것, 우월감과 지성의 오로라와 관련된 그 무엇이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위험한 적이 되거나, 아니면 아주 강력하고 충직한 친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남자는 도대체 어떤 타입의 연인이 될까? 도발적이고도 몹시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 질문이 그녀에게 혼란을 주었다. 자신의 이상한 기분을 숨기기 위해 클레어는 재빨리 돌로 된 벤치 위에 주저앉았다.

"제 하인들이 여러분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주 편안하오."

개러스는 두어 번 코를 킁킁거렸다.

"지금 당장은 장미 향을 맡는 것 같지만, 이 향기는 곧 없어지겠지."

클레어는 이를 꽉 물었다. 그녀는 그가 불평하는지, 농담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향기에 관한 의견을 말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장미 향기 비누는 가장 수익률이 높은 제품이에요. 비법은 제가 개발한 것이죠. 우린 봄에 시번의 시장으로 찾아오는 런던 상인들한테 많은 양을 내다 팔아요."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 목욕물에 대해 존경심이 더욱 우러나고 있소."

"그러실 겁니다."

그녀는 휘둘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와 의논하실 일이 있으실 테죠?"

"그렇소, 우리 결혼 얘기를 해야겠소."

클레어는 속이 뜨끔했지만 놀란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게 제일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매우 단도직입적이시군요."

그는 약간 놀란 것처럼 보였다.

"얘기를 질질 끌어 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소."

"저도 마찬가지예요. 좋아요, 솔직하게 말씀 드리죠. 다른 사람들 눈에 당신이 제 유일한 구혼자인 것처럼 보이려는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 당신의 기대가 비현실적인 것임을 다시 한번 말씀 드려야겠군요."

"이런."

개러스는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비현실적인 건 바로 당신의 기대요. 난 당신이 서스턴 경한테 보낸 편지를 읽었소. 당신이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과 결혼하고자 한다는 게 분명히 보이더군. 안됐지만 완벽함보다는 좀 떨어지는 쪽으로 양보해서 결정해야 하오."

그녀는 턱을 치켜 올렸다.

"지금 제 요구 조건에 맞는 남자는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린 둘 다 충분히 나이를 먹었고 결혼은 현실적인 문제라는 걸 인정할 정도로 충분히 현명하다고 생각하오. 시인들이 그 바보 같은 발라드에서 울거먹는 열정 같은 것은 없소."

클레어는 아주 힘있게 두 손을 맞잡아 쥐었다.

"결혼 문제에 대해서라면 날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 주세요. 난 그저 내 경우엔 이게 희망 사항이 아니라 의무의 문제라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내가 남편감에 대한 조건을 제시했을 땐 내가 그렇게 많은 걸 요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한테서도 좋은 점을 충분히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거요."

클레어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계시는 건가요?"

"내가 제시할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소. 내가 당신의 요구 조건 중 상당수를 충족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녀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경은 체격 문제부터 벌써 내 요구 조건과 어긋나는데요."

"내 체격에 관해서 라면, 이전에도 말했다 시 피 나로서도 전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소. 하지만 어떤 일을 달성하는 데 체격에 의존하는 일은 없다는 건 확실히 말할 수 있소."

클레어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여자답게 코웃음을 쳤다.

"사실이오. 가능하다면 근육보단 머리를 더 사용하길 즐기는 편이오."

"그럼 솔직히 말씀 드리죠. 난 이 섬의 주인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원해요. 디자이어는 한 번도 폭력이란 걸 겪은 적이 없습니다. 난 앞으로도 만사를 그런 방향으로 유지해 나갈 생각이고요. 전쟁으로 벌이를 하는 남편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전쟁이나 폭력을 좋아하지 않소."

클레어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지금 내게 말하려는 건가요? 끔찍한 이름이 달린 칼을 지니고 다니는 당신이요? 살인자와 도둑의 파괴자라는 명성을 지닌 당신이?"

"그런 문제들에 아무 관심도 없다고 말하진 않았소. 결국 난 전사의 기술을 발휘해서 세상에서 내 길을 개척해 왔으니까. 그것들은 내 밥벌이 도구일 뿐이오."

"요점을 맞추셨군요."

"하지만 난 폭력에는 싫증이 났소. 난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찾고 있소."

클레어는 짐짓 회의적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는 말이군요. 경의 경력을 고려한다면요."

"내 경력 문제에 있어선 그다지 선택권이 없었소."

개러스가 말했다.

"당신은 안 그랬소?"

"아니 요, 하지만 그건..."

"당신의 두 번째 요구 조건으로 넘어가면 편지에서 당신은 부드러운 용모와 원만한 성격을 가진 남자를 원한다고 썼소."

그녀는 기가 막혀서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신 스스로 자신이 부드러운 용모를 가졌다고 생각하시나 요?"

"아니, 내 용모가 부드러운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말을 들어온 건 인정하오. 하지만 난 확실히 원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소."

"한 순간이라도 그 말은 못 믿겠어요."

"그건 사실이오. 나를 아는 사람들 중 누구한테든 물어 봐도 좋소. 울리치 경한테 물어 보시오. 그는 몇 년 동안 나와 같이 다녔으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온순한 성격의 남자라고 말해줄 거요. 난 갑자기 난폭하게 화를 내거나 못된 성질을 부리는 일은 없소."

웃는다거나 유쾌하게 구는 일도 역시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클레어는 그의 수정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좋아요, 어떤 의미에선 당신이 원만한 성격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건 인정할게요. 비록 그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거랑은 아주 거리가 멀겠지만요."

"동의한다고? 여기서 발전이 좀 있군."

개러스는 팔을 뻗어 올려 사과나무 가지 하나를 움켜잡았다.

", 그럼 계속해서 당신의 마지막 요구 조건에 대해선데, 나도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드리겠소."

클레어는 뭔가 새로운 전술이 없을까 하고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충분해요, 당신이 내 요구 조건을 아주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 중의 극히 일부에 부합된다는 걸 인정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당신 쪽이 내건 조건은 어떤가요? 확실히 당신도 부인 감을 고르는 데 특정한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내 요구 사항 말이오?"

개러스는 이 질문이 뜻밖이라는 듯 반응했다.

"내가 아내감한테 요구하는 건 간단하오. 난 당신이 그것을 모두 만족시킬 거라고 믿소."

"그건 내가 땅과 향수 사업의 비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요? 그게 당신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결정하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세요. 우린 이곳 디자이어에서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대개의 경우 지독히 지루하지요. 당신은 분명 훌륭한 영주들의 성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에 길이 들어져 있는 사람일 겁니다."

"난 그런 파티 없이도 지낼 수 있소. 그런 것들에서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하오."

"경은 틀림없이 모험으로 가득한 신나는 생활을 해왔을 거예요."

클레어는 우겨댔다.

"꽃이나 가꾸고 향수나 만드는 일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겠어요?"

"그렇소, 그럴 거요."

개러스는 은근히 만족해 하며 말했다.

"이건 당신 같은 명성을 지닌 사람에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에요."

"이곳 디자이어에서 난 내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오."

클레어는 그의 합리적인 주장에 참을성을 잃어버렸다.

"그게 정확히 뭐죠?"

"영지, 내 소유의 성, 그리고 내게 가정을 선사할 여자."

개러스는 몸을 굽혀 마치 그녀가 가벼운 물건인 양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내게 그 모든 것을 줄 수 있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내게 매우 소중한 존재인 거요. 내가 당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당신이 내게서 달아나게 내버려 두리라고도 생각하지 말고."

"하지만..."

개러스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 덮으며 그녀의 항의를 조용히 만들어 버렸다.

 

 

 

3.

개러스는 그녀에게 키스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행위를 하기엔 당연히 너무 일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자신의 행동이 유발시킬 모든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좀처럼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는 짓을 했다. 충동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오른 새로운 굶주림에 굴복했다. 그녀는 이제 곧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다. 그녀를 맛보고자 하는 욕망은 수녀원 돌담 위에서 처음 그녀를 안아 내리던 그 순간부터 그의 내부에서 조용히 그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신혼의 침상에서 그를 기다릴 온기는 어떤 것인지 돌연 무척 궁금해졌다. 그와 같은 질문에 답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어 보였다. 결혼은 클레어에게 있어선 의무의 문제였다. 그녀는 분명 향수를 조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일에 접근했을 것이다. 이상적인 자격 조건을 작성한 다음, 각 남편 후보의 성격이나 인격 같은 것을 낱낱이 파헤쳐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성은 개러스에게 욕망에 관한한 이 디자이어의 여 주인에게선 그리 많은 걸 기대할 수 없을 것임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부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어느 한구석은, 꽃으로 뒤덮인 이 섬에서 환영 받을 수 있기를 몹시 갈망하고 있었다. 앞으로 클레어와 함께 보내야 할 긴 세월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개러스는 차가운 침대 안에서 그 세월을 보내지 않게 되길 바랐다.

그녀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두려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개러스는 안심했다.

적어도 시번의 니콜라스와의 경험 덕분에 그녀는 욕망을 겁내거나 그것에 반감을 느끼지는 않게 된 듯했다. 어쩌면 그녀는 니콜라스에게 강간당했다기보단 그의 유혹에 넘어갔던 건지도 모른다.혹은 자신의 이웃에게 어느 정도 애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니콜라스와 4일을 즐기긴 했어도 욕망과는 무관한 어떤 별개의 이유로 인해 그와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 추측에 개러스는 다소 기분이 나빠졌다. 클레어는 처음에는 그의 품속에 뻣뻣하게 안겨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이상한 실망감이 그의 내부에서 치밀어올랐다. 이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봄의 기운은 단지 착각이었을까? 만약 그녀의 혈관 속에 얼음이 들어 있다면 그는 겨울처럼 추운 침대를 견뎌내야 할 운명인 것이다. 그게 문제가 돼선 안 되겠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문제였다. 불행히도, 이건 중요한 일이었다. 다음 순간 클레어가 약간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작고 여린 소리를 내더니 그의 입술 밑에서 자신의 입술의 힘을 뺐다. 개러스는 자신의 감각이 처음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클레어에게 키스하는 것은 꽃잎에 키스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에게선 신선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꽃잎 안쪽에는 깊숙이 숨겨진 꿀이 있었다. 개러스는 그것을 발견하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혀가 그녀의 혀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뒤로 빼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더 가까이 몸을 기댔다. 분명히 개러스만큼이나 자신들의 미래에 무엇이 있을까 무척 궁금한 듯한 태도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그의 머리카락 밑의 목 뒤를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는 그의 입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피어나는 정열의 숨 막힐 듯한 작은 한숨이었다. 개러스의 몸 전체가 효능 있는 만병통치약에 적셔진 것처럼 반응했다. 욕망의 파도가 용솟음치며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그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고 매우 유혹적이었다. 개러스는 한 모금만 살짝 맛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지만, 꽃 속의 꿀은 너무도 황홀했다. 그걸 모두 마셔 버리고픈 욕망이 그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제심을 파괴하려고 위협했다. 그는 양손으로 감싸듯 그녀의 얼굴을 받치고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단단한 작은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홀 벽에 걸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태피스트리처럼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몸의 곡선을 따라 훑어 내려갔다. 마음 설레는 미래에의 약속이 여기 클레어의 부드러운 가슴 곡선과 나팔꽃 모양으로 벌어진 엉덩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쑤시는 듯한 갈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놓인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클레어의 손가락들이 작은 나비들처럼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의 아랫입술에 자신의 혀끝을 갖다 대었다. 개러스는 여름 과일처럼 둥글고 무르익은 그녀의 가슴이 자신의 가슴 위로 눌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잘생기고 늠름한 아들들을 낳아 줄거요."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말했다.

그녀는 약간 얼굴을 찌푸린 채 뒤로 몸을 뺐다.

"딸도 아마 한두 명쯤은요."

그 말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 있었다.

"좋소."

그는 그녀의 척추를 마치 자신의 자랑스러운 군마를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그 어머니만큼 아름답고 지적인 딸들을 가지는 것도 좋은 일이오."

그녀는 마치 그의 영혼까지 꿰뚫어보려는 듯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내게서 아이들을 얻게 될 거라곤 보장 못하겠어요. 그 애들이 아들인 건 더더욱이요. 어떤 여자도 그런 약속은 할 수 없어요."

"내가 원하는 보장, 그것도 당신에게서 확실히 원하는 것은 부인, 당신이 내게 선사하는 아이는 내 혈통이 될 거라는 맹세요."

그녀의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가 처음에는 충격으로, 그 다음 순간에는 분노로 인해 커졌다. 그녀는 몸을 억지로 비틀어 그의 품속에서 빠져 나오며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어떻게 감히 내가 그런 일로 당신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죠?"

그녀는 맹렬한 기세로 외쳤다.

"그렇다면,"

클레어는 마치 마음속의 의혹이 해결된 듯 활기차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우린 기사답지 못한 기사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 거로군요.

이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고 있고요."

그녀는 몸을 홱 돌리고는 정원의 샛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당신과 내가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될수록, 안됐지만 난 당신이 내 남편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이상도 하지?"

개러스는 뒷짐을 지고 그녀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난 방금 그 정반대로 생각했는데. 우리의 관계가 깊어지면 질수록, 당신은 내게 가장 만족스런 아내가 될 거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네요, 기사님."

클레어는 기분 나쁜 듯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정이 어떻든, 우리가 이 이상 일을 진전시키기 전에 서스턴 경한테 편지를 써서 지금 이 상황에서 의심스러운 몇 가지 문제에 대해 확실히 물어 봐야겠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말하는 거요?"

"우선, 난 지금까지 이 섬에 도착한 구혼자가 당신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요."

"난 이미 당신의 선택은 시번의 니콜라스와 나에게만으로 국한되어 있다고 말했소. 다른 구혼자는 없소."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신랑 후보로 적합한 다른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당신은 단지 섬에 맨 처음 도착한 것뿐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디자이어를 향해 오고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내가 여기 오는 도중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방문 목적이 달성될 희망은 없다고 설득

했는지도 모르지."

"글쎄요."

그녀의 양미간이 좁혀졌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아니면, 그들의 목적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데 실패해서 그냥 간단하게 모조리 없애 버렸는지도 모르고."

개러스는 도와주기라도 하려는 양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전혀 유쾌하지 못한 얘기로군요, 기사님."

"이 얘긴 이만하면 됐소."

개러스는 웃옷 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접혀진 양피지 문서를 끄집어 냈다.

"당신의 계획을 진행시키기 전에 먼저 서스턴 경한테서 온 이 편지를 읽어 보는 게 좋을 거요."

클레어는 잠시 신중하게 편지를 쳐다본 후에 그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봉인부분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천천히 그것을 뜯었다. 편지를 읽어 가는 동안 그녀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클레어가 편지를 다 읽는 동안 개러스는 깨끗하게 정돈된 꽃밭과 조심스럽게 선을 두른 정원을 살펴보았다. 서스턴의 편지 내용은 훤히 알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개러스가 있는 자리에서 편지를 적게 했던 것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난 클레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여겨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클레어도 읽는 일에 분명 잘 숙달되어 있었다.

"이건 정말 믿기 어렵군요."

클레어는 첫 번째 문단을 서둘러 읽으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서스턴 경은 당신이 자기가 찾을 수 있는 최고의 후보자라고 하고 있어요. 그분은 당신만이 니콜라스 경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데요."

"나도 당신한테 그렇게 말했소."

"내가 당신이라면 그걸 자랑하진 않겠어요. 니콜라스는 품격 있는 기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내가 듣기론 그는 칼솜씨가 좋고 주군한텐 충성스런 사람이라고 하던대."

개러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것들이 서스턴 경에게는 최고 관심사요."

"서스턴 경은 그런 단순한 재능에 쉽게 만족할 수 있겠죠. 그분이 미래의 디자이어의 주인과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요."

"나도 그 말엔 동의하오."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편지에 집중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허미언의 팔꿈치에 맹세코, 이건 정말 말도 안 돼요."

클레어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서스턴 경은 당신이 자신의 큰아들이라는군요."

"맞소."

"그럴 리 없어요. 랑드리의 서스턴 경이 자신의 후계자를 나 같은 사람과 결혼시키려 한다는 걸 내가 믿을 거라곤 기대하지 마세요."

개러스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당신한테 뭔가 문제가 있소?"

"물론,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서스턴 경의 후계자라면 헨리 왕의 총애를 받는 가문의 빼어난 상속녀와 멋진 결합을 하게 돼 있을 거예요. 그런 훌륭한 여자라면 어마어마한 부와 굉장한 재산을 지참금으로 가져 가겠죠. 나한테는 작은 장원 하나뿐인데 그나마 그것도 서스턴 경한테 이미 묶여 있는 형편이에요."

"이해를 못하는군."

"난 아주 분명히 잘 이해하고 있어요."

클레어의 목소리가 새로운 분노로 울렸다.

"당신은 지금 날 속이려 하고 있어요."

이 비난에 그는 기분이 상했다.

"아니오, 난 당신을 속이려는 게 아니오."

"날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당신이 정말로 서스턴 경의 후계자라면, 그분은 이런 작은 장원을 물려주진 않을 거예요."

"이봐요……."

"그리고 어째서 서스턴 경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당신이 다른 엄청난 재산과 근사한 성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데 하필 먼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거죠?"

"내가 랑드리의 서스턴 경의 큰아들이라는 건 사실이오."

개러스는 이를 꽉 다물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는 아니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난 적자가 아닌 서출이오."

개러스는 진실을 모두 알게 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툭 터놓고 말해서, 난 서스턴 경의 후레자식인 셈이오."

클레어는 잠깐 동안 할 말을 잊었다.

"."

그는 그녀가 놀랐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자기가 곧 후레자식과 결혼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아마 이해가 갈 거요."

"그래요, 이제 이해가 되네요. 그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분명 디자이어를 상속 재산으로서 받게 되겠군요."

클레어는 그를 노려본 다음 편지 위로 고개를 숙였다.

"이건 너무 지나쳐요. 당신 아버지는 내가 즉시 결혼해야 하며 당신을 선택하길 바란다고 쓰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시번의 니콜라스를 디자이어의 새로운 주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시네요."

"서스턴 경은 이 일을 가장 빨리 결말짓고 싶어 한다고 내가 말했잖소."

개러스는 중립적인 태도로 말했다.

"아버지는 이 섬에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다는 걸 알고 무척이나 놀라셨소."

"……."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분은 아주 최근까지도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모르셨소. 분명히 그 슬픈 소식을 전하는 당신의 편지가 몇 달 동안 지체된 게 틀림없소."

", , 그거라면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어서요."

클레어는 침착하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얼마 동안은 슬픔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그랬을 거요."

"그리고 나선, 겨우 기운을 차렸을 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고요."

"그것도 당연하고."

"그런 다음에 내가 깨달은 사실은 시기가 겨울이라는 거예요."

클레어는 쾌활하게 말했다.

"난 길이 얼음과 눈으로 뒤덮였을 테니 지나갈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결국 난 다음 해 이른 봄까지 기다렸다가 서스턴 경에게 소식을 알리는 게 최선이라고 결정했어요."

개러스는 거의 웃을 뻔했다.

"그리고 길이 녹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결혼을 피할 방법을 찾아냈겠군."

클레어는 그에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소. 그래서 우린 지금 새 길을 향해 앞으로 나가야 하는 거고."

"우리라고요?"

"그렇소. 내일 결혼식을 올리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소, 그렇지 않소?"

"불가능해요."

절망이 클레어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렸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어요."

"확실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그리고 당신도 그걸 잘 알고 있고. 필요한 건 신부를 부르는 것뿐……."

"여기 디자이어엔 신부님이 안 계세요."

클레어가 재빨리 말했다.

"시번에 가면 한 분 구할 수 있을 거요. 증인들 앞에서 맹세를 해버리면 그뿐이오."

"하지만 결혼에는 준비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아요."

클레어는 저항을 시도했다.

"제대로 된 예식을 마련해야 해요. 집사는 벌써 당신 부하들이 먹고 쉴 곳을 마련하느라고 무척 바빠요. 마을 사람 모두를 접대할 피로연과 결혼식을 준비하려면 그에게 몇 주일은 필요할걸요."

"일단 당신이 선택만 하고 나면 모든 게 일사천리로 금방 끝날 거라고 믿소. 기껏해야 하루이틀이면 되겠지."

개러스는 양보하듯 말했다.

"꼭 평생 한 번도 그런 행사를 치러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클레어는 고고한 자세로 경멸하듯 말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양의 빵을 구워야 해요. 물고기도 잡아야 하고, 닭털도 뽑아야 해요. 소스를 준비하고, 포도주와 맥주도 사와야 하고요. 시번으로 사람을 보내 그런 물건들을 사오게 시켜야 할걸요."

개러스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에 섰다.

"난 그런 준비 하나 없이도 전투를 잘 치러 왔소. 하지만 이번엔 내가 좀 참아 보기로 하겠소."

"얼마나요?"

"이제 그 점에 대해서 흥정할 땐가? 난 사업에 재능이 있는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거로군. 좋소. 내 조건은 간단하오. 당신이 결혼을 결정하고 준비하는데 하루를 주겠소."

"단 하루요?"

"그렇소, 하루 종일. 정확히 내일 하루 전체를 주겠소. 나도 꽤 관대해진 기분이 드는 걸."

"그걸 관대함이라고 부르나요?"

"물론이오. 피로연에 질 나쁜 술과 묵은 빵밖에 내놓을 게 없대도 우린 내일 모레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요, 알겠소?"

"기사님, 난 그렇게 거만한 명령을 고분고분 듣는 당신 부하가 아니에요."

"나 역시 당신 하인도 아니고, 당신 변덕이나 맞춰 주면서 알랑대는 애송이 음유 시인도 아니오."

개러스는 조용히 말했다.

"시번의 니콜라스와 결혼할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그 기분 나쁜 저능아하곤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곧 당신의 남편이자 이 장원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난 내가 디자이어의 여주인이며 이 지위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것만 기억할 거예요.

개러스는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클레어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게 마음에 들었지만,

는 자신의 만족감을 내비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내가 당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건 믿어도 좋소. 하지만 진실은 피할 수 없는 거요. 서스턴 경은 당신에게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라고 명령했소."

클레어는 서스턴의 편지를 손바닥에 탁탁 두드리며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개러스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오는 길에 다른 구혼자들과 만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이 편지도 스스로 쓴 게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나요?"

"그건 서스턴 경의 봉인이오. 당신도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봉인은 훔치거나 복사해서 나쁜 짓에 사용할 수도 있어요."

클레어의 표정이 밝아졌다.

"맞아, 내가 왜 바로 그걸 생각 못했을까. 이 봉인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아요. 서스턴 경한테 당장 이 괴상한 편지를 직접 썼는지 물어 봐야겠어요."

개러스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설사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확실히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봐요……."

"당신 아버지한테 답장을 받는 데는 분명히 여러 날, 아니 어쩌면 몇 주가 걸릴지도 몰라요. 물론 애석한 일이겠지만, 우린 그분한테서 이 편지가 진짜라는 확인을 받을 때까진 남편감 고르기를 미뤄야 할 것 같군요."

"젠장할."

그녀의 눈이 순진함을 가장하며 빛났지만 그것이 그 밑에 도사린 교활함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내가 성급하게 행동할 경우에 발생하게 될 골치 아픈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개러스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매우 가까이 머리를 기울여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댔다.

"포기해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편지는 진짜요. 당신의 주군인 내 아버지는 당신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안전하게 결혼하길 바라고 있소. 이 올가미에서 빠져 나갈 길은 없소. 어서 가서 우리의 결혼 피로연이나 준비하시오. 시번의 니콜라스와 결혼하기 싫다면 말이오……."

"절대로 그와는 결혼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내일 모레, 당신은 내 신부가 되는 거요."

클레어는 긴장된 몇 초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바삭하는 소리에 개러스는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편지를 손아귀 안에서 구기는 것을 보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클레어는 빙글 몸을 돌려 그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녀는 정원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뒤로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았다. 개러스는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울리치를 찾아 자리를 뜰 때까지 오랫동안 잘 가꾸어진 정원을 관찰했다. 클레어는 자신의 서재를 피난처로 찾았다. 그곳은 정원이나 향수를 조제해 내는 작업실처럼 그녀가 보통 평화를 발견하는 장소였다. 햇빛이 잘 드는 이 방의 벽은 정원의 광경을 담은 태피스트리로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었다. 공기에는 꺾어서 말린 꽃을 담은 섬세한 꽃항아리에서 풍기는 여러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 에드먼드가 죽고 곧이어 부친이 스페인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며칠 동안 클레어는 바로 이 방에서 위로와 편안함을 찾곤 했다. 몇 달 전 수많은 문제들로부터 정신을 돌리고 싶은 마음에서 그녀는 책쓰기 작업을 시작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많은 복잡한 향수 제조법을 글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 작업은 그녀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앞에 펜과 양피지를 놓고 앉아서 책에 집중해 보려고 애썼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세 번의 서투른 시도 끝에 노력을 포기하고 깃펜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녀는 우울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입술 위에 남겨진 개러스의 감촉을 생각했다. 그의 키스는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니콜라스가 그녀를 시번 킵으로 납치했던 지난 달 그녀에게 강제로 행사했던 축축하고 불쾌한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니콜라스의 포옹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싫었다. 그가 자신의 거대한 몸에 그녀를 밀착시켰을 때 그녀는 그의 부풀어오른 남성뿐만 아니라 그의 냄새에도 거부감을 일으켰다. 물론 문제의 일부는 니콜라스가 목욕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역겹게 한 건 단순히 땀과 먼지 냄새만은 아니었다. 그건 뭔가 니콜라스 자신의 개인적이고도 지극히 독특한 남성의 체취 때문이었다. 클레어는 자기가 그 냄새를 평생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만지며 개러스의 체취를 찾아 깊게 숨을 들이켰다.

"클레어?"

조애너가 문턱에서 양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찮아?"

"? , 그래요. 난 괜찮아요, 조애너."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그냥 뭘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혹시 개러스 경 아니야?"

"달리 누구겠어요?"

클레어는 창가의 높은 의자로 조애너를 손짓해 불렀다.

"그가 서스턴 경의 아들이라는 걸 당신은 알았나요?"

"그래, 방금 홀의 층계에서 울리치 경한테 들었어."

조애너는 살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서스턴 경의 서자야."

"하지만 그래도 아들이에요."

클레어는 펜대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내가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서스턴 경이 이 장원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

조애너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분이 이 장원을 다스릴 새 주인의 충성을 분명히 해 두고 싶어 한다는 건 확실해. 혈연으로 자신과 연결된 남자와 당신이 결혼하게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뭐가 있겠어?"

"충분히 그럴 듯한 얘기예요."

클레어는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서스턴 경은 니콜라스 경과 개러스 경보다 더 내 요구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대요."

"정말?"

"개인적으로 나 역시 그분이 최선을 다했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하네요."

"남자들은 그런 문제에 있어선 굉장히 현실적이 되는 법인데."

조애너가 중얼거렸다.

"적어도 당신한텐 선택권이라도 줬잖아."

"이런 건 선택권이랄 것도 없어요."

조애너는 매정하게도 킥킥대며 웃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괜찮은 편이야."

클레어는 주춤했다. 열다섯 나이의 조애너에겐 남편감에 대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혼 생활이 아주 불행했나요, 조애너?"

"토머스 경은 다른 남자들보다 더 낫지도 나쁘지도 않았어."

조애너는 철학적인 투로 말했다.

"그분은 나한테나 윌리엄한테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군 적은 없으니까."

"그건 문제라고 보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아."

조애너가 반박했다.

"토머스 경을 사랑한 적이 있나요?"

조애너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내로서 마땅히 남편에게 그래야 하듯 나도 그분을 존경했지만 사랑한 건 아니야."

클레어는 책상 위에 가볍게 펜대를 두드렸다.

"헬렌 대수녀 원장님은 지난 번 편지에서 좋은 남자는 결혼 후에 자기 부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게 한다고 하셨어요."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클레어, 헬렌 대수녀 원장님이 결혼에 대해 아는 게 뭐지?"

"그래요, 요점을 말하셨어요."

클레어는 소중한 책들과 논문들이 늘어서 있는 책장을 곁눈질했다.

그 중 두 권은 어머니의 소유였다. 다른 일부는 클레어가 향수 제조에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구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아버지의 것이었다. 클레어의 아버지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새로운 책들을 가지고 왔고, 그들 중 일부는 마을의 수도원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손수 사본을 뜬 책은 거의 판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그가 죽기 바로 전에 클레어에게 배달되어 왔다. 커다랗고 무거운 책들 중 한 권은 향초에 관한 것으로, 헬렌 대수녀 원장이 지은 것이었다. 클레어는 남부의 수도원에서 복사본 한 권을 구입했다. 그녀는 헬렌 대수녀 원장의 논문에 쓰여진 글자 하나하나를 숙독했다. 헬렌의 저서에 매우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대담하게도 그 대수녀 원장에게 직접 편지를 썼고, 놀랍게도 대수녀 원장은 답장을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두 여성 사이의 서신 왕래는 꽃과 허브에 관한 서로의 관심에 의해 나날이 빈번해지다가 지난해 내내 꽃을 피었다. 지난 가을 클레어는 헬렌 대수녀 원장이 디자이어로 짧은 방문을 하겠노라고 했을 때 몹시 감명 받았으며 기뻐했다. 대수녀 원장은 홀보다는 성 허미언 수녀원에 주로 머물렀으며, 클레어와는 매일 밤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몇 시간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화젯거리를 가지고 대화를 했다. 그러나 조애너의 말이 옳았다. 헬렌 대수녀 원장이 아무리 비길 바 없이 현명하고 배운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아내가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결혼 생활의 내밀한 측면까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클레어는 조애너에게 던질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며 펜대 끝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토머스 경한테 한 번이라도 어떤, , 따뜻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있나요, 조애너?"

조애너는 이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어떤 여자든 결혼 침대에서 정열을 발견하진 못해, 클레어. 그걸 찾지도 않고. 정열이란 건 하찮은 거지. 여자란 그것보단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이유들 때문에 결혼을 하는 거야."

"하긴 나도 그건 아주 뼈저리게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결혼 침대에선 어떤 따스한 감정을 발견하고 싶다고 그녀는 동경하듯 생각했다. 그리고 개러스의 키스가 자신의 입술 위에서 불타오르던 순간, 어쩌면 그런 감정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녀는 의아했다. 개러스는 클레어가 남편감의 조건으로서 요구했던 그 어떤 것에도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자기가 그의 포옹에 그렇게 반응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애너는 말했다.

"토머스는 나보다 서른 살이나 위였고, 새신부에 대해 조금의 인내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 우리의 결혼 첫날밤은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그러하듯, 유쾌하진 않았지만 참을 만했어. 어떻게든 그날이 지나고 나면 다 잘 된 거지. 그 후로 난 그 일에 익숙해지게 됐고 당신도 그렇게 될 거야."

클레어는 신음 소리를 냈다.

"나한테 용기를 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건 잘 알아요, 조애너. 하지만 소용이 없는 것 같군요."

"자신의 의무에 대해 불평하는 건 당신답지 않아, 클레어."

"이유 없이 불평하는 게 아니에요. 개러스 경은 실제로 내일 모레 결혼식을 올리게 준비하라

고 명령했어요. 서스턴 경의 편지는 그가 그렇게 우겨도 좋다고 인정하고 있고요."

"대체 뭘 기대한 거지?"

조애너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놀랄 일도 아니라고 봐."

"그렇지 않아요."

클레어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서 섰다.

"내게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 순간 내가 열렬히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는데."

"그 시간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니콜라스 경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조여 오고 있어. 지난번에 향수 배 두 척을 도적떼한테 빼앗긴 후엔 디자이어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주인이 필요하다고 당신 자신도 말했잖아."

"확실히 그러긴 했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평생 동안 내 식탁과 침대에서 내가 참고 견딜 수 있는 남편이에요."

클레어의 내부에서 묘한 아픔이 솟아올랐다. 평생 동안이라.

"도대체 개러스 경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뭐지?"

"그게 문제예요."

클레어는 속삭이듯 말했다.

"난 그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난 이제 겨우 막 그를 만났을 뿐이에요.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알게 된 건 그가 내 요구 조건에서 겨우 한 가지만 맞는다는 거예요. 확실히 글은 읽을 수 있더군요."

"그건 대단한 일이야."

"시간이 더 필요해요, 조애너."

"그걸로 뭘 어쩌려고? 처음부터 당신은 사랑도 충족시킬 수 있는 결혼을 계약하진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당신 같은 입장에서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여자는 많지 않아."

"맞아요. 하지만 난 우정과 공동 관심사라는 즐거움에 바탕을 둔 그런 결혼을 원했어요."

클레어는 뭔가를 생각하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마 그건 너무 지나친 바람이었나 봐요. 그래도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뭐?"

조애너는 불안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그런 표정은 좋지 않아, 클레어. 또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군, 그렇지? 당신은 새로운 향수를 만들어 낼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계획을 꾸미고 있어. 그런 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 이번 경우엔 그렇게 연금술사같이 영리하게 머리를 돌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지금 생각난 건대, 만약에 내가 개러스 경한테 그 자신도 시간을 좀 더 가져야 한다고 설득시킨다면 일을 좀 연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애너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뭘 위한 시간?"

"그가 디자이어의 주인으로서 여기에 눌러앉는데 정말 만족할지 않을지를 깨닫기 위한 시간이요."

클레어는 목욕에 사용한 장미 향내나는 비누에 대한 개러스의 신중하고 무감각한 태도를 회상했다.

"난 그가 이 꽃섬의 주인이 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많이 생각했다곤 안 믿어요."

"살인자와 무법자들과 싸우며 살아온 남자가 정원사가 되는 건 좀 어리석은 일이라고 결정하기를 바라는 거야?"

"가능한 일이에요."

조애너는 머리를 저었다.

"꼭 그렇다고 볼 순 없어. 지금 개러스 경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풍요로운 영지의 주인이 되는 일뿐이야."

"좀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내가 그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요?"

클레어는 별안간 자신의 새로운 생각에 흥이 나서 몸을 홱 돌렸다.

"개러스는 똑똑한 남자예요. 행동하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고 잘 계획하는 그런 사람이죠."

"확신해?"

", 그럼요 절대적으로요."

클레어는 서슴없이 자신의 분석에 대해 확신했다.

"만약에 이 결혼 문제를 오랫동안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내가 그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난 내가 원하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그 시간을 어떻게 쓸 생각인데?"

"우선, 그를 잘 알게 되는 거예요."

클레어는 말했다.

"그건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고 하더라고 유용한 일일걸요. 적어도 그와 함께 침실을 같이 써야 하기 전에 내 남편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두 번째로는, 만약 평생 개러스 경한테 내 인생을 속박시키는 건 참을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내 계획은 이 문제에서 빠져 나갈 기회를 주게 될 거예요."

"소용없을 거야, 클레어. 내가 알게 된 바로는, 헬하운드는 결혼하길 몹시 원하고 있어. 그는 즉시 신부와 새 영지를 갖고 싶어해."

"하지만 어쩌면 그걸 잠깐 유보하도록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가 디자이어의 주인 자리를 원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다른 후보자는 찾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당신은 남자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어, 클레어. 날 믿어. 당신 계획은 희망이 없어."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클레어는 우겨댔다.

"현재 헬하운드가 이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는 내가 이 형편없는 선택권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만약 그가 이 문제를 더 신중히 검토할 때까지 내가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게 된다면, 그는 기꺼이 결혼을 연기할지도 몰라요."

"가망 없는 얘기로군."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세요, 조애너?"

클레어는 멀리서 들려 오는 말발굽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창가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조애너가 물었다.

"남자들 몇 명이 마을 쪽에서 이리로 다가오고 있어요."

클레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의 흙먼지 구름을 살폈다. 눈에 익은 노란색 깃발 하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 안 돼."

"클레어?"

"성 허미언의 옷에 걸고 말하건대, 난 이 남자보다 더 나쁜 순간에 나타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는 정말로 멍청이야."

"누굴 말하는 거지?"

"니콜라스 경."

", 이런. 절대로 안 될 말이야."

조애너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둘러 창가로 다가왔다. 말 등에 올라탄 무리를 보는 순간 그녀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건 정말 난처한 일이 되겠군."

"그 정도면 다행이게요."

"개러스 경이 유괴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그가 어떻게 알겠어요?"

클레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일에 대해선 완전히 함구령을 내렸어요. 난 다른 사람들한텐 내가 시번 킵에 자진해서 방문했던 거라고 납득시켰어요. 그리고 서스턴 경한테 쓴 편지에서도 그 얘긴 언급하지 않았고요. 개러스는 그 일에 대해선 알지 못해요."

"당신 말이 맞길 바라."

조애너는 회의적으로 말했다.

"자기 신부가 다른 남자한테 강간당했었다는 걸 윅크미어의 헬하운드가 조금이라도 눈치 채게 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야."

클레어에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유괴 당했었던 걸 알게 되면 그가 혹시 청혼을 취소할까요?"

조애너는 기가 막혔다.

"클레어……."

"강간당한 신부는 개러스 경의 취향에 맞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는 사생아치곤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니까요."

클레어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니면 바로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요."

조애너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아. 개러스 경이 그런 최악의 경우를 의심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 나부터도 그 일은 묻어 뒀음 좋겠어."

"흐음."

클레어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뭘 하려는 거지?"

조애너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손님들을 맞으려 가는 거예요, 물론. 다른 뭐가 있겠어요?"

"클레어, 부디 지나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온통 경고에다 무시무시한 예언만 하는 게 꼭 은자 베아트리체처럼 굴기 시작하는군요."

클레어는 그녀에게 재빠르고 확신에 찬 미소를 던졌다.

"초조해 하지 말아요. 이 체스 게임에서 다음 말을 놓기 전에 충분히 생각할 테니까요."

그녀는 서둘러 문을 빠져 나가 돌계단을 날 듯이 내려와 홀로 들어갔다. 그곳은 혼란과 경악이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에드거는 깊은 수심으로 얼굴에 잔뜩 주름을 지우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니콜라스 경과 그분의 개인 기사들이 오셔서 벌써 안뜰에 당도해 계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 먼저 그 사람들이 어째서 아무 예고도 없이 시번에서 왔는지 알아내야 해요. 그런 다음에는 초대해서 잠자리를 제공해 줘야겠죠."

"잠자리를요?"

에드거는 그 말에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방은 벌써 손님들로 꽉 찼는걸요. 더 이상 여유가 없습니다."

"홀에 대충 잠자리를 더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클레어는 홀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 계단 위에 멈추어 섰다. 안뜰은 홀보다 더 붐볐다. 새로운 방문객들이 말에서 내릴 때마다 말을 끌어가기 위해 마구간에서 마부들이 달려 나왔다. 개러스의 부하 몇 명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경계의 빛을 띠고 손을 칼자루 가까이에 갖다 대었다. 그때 큰 덩치의 익숙한 모습이 투구를 벗으며 말에서 내렸다.

"안녕하시오, 클레어."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안뜰에 쩌렁쩌렁 울렸다.

클레어는 신음 소리를 냈다.

모래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시번의 니콜라스는 못생긴 남자는 아니었다. 클레어는 그의 생김새가 거친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여자들은 그의 두툼한 목과 울퉁불퉁한 가슴, 팽팽한 허벅지를 매력적으로 여기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번은 하녀 한 명이 낄낄거리며 니콜라스의 남성이 그의 다른 신체 부위처럼 잘 발달되어 있노라고 털어놓는 소릴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클레어는 그 말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서 오시지요, 니콜라스 경."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오실 줄은 몰랐어요."

"추격이 시작됐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렸소."

니콜라스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손으로 투구를 탁 하고 쳤다.

"난 원래 이런 신나는 사냥을 즐겨 왔으니까."

"무슨 사냥이라고요?"

클레어는 그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죠?"

"당신이 마침내 구석에 몰려 억지로 남편을 고르게 됐다는 소릴 들었소."

"그럴 리가요."

"더군다나 믿을 만한 소식통한테 청혼자 하나가 디자이어에 도착했다는 소리도 들었소."

니콜라스는 킬킬거렸다.

"이름도 모르는 놈이 멋대로 들판을 차지하게 놔둘 순 없지."

"이건 사냥이 아니고 나도 땅끝까지 쫓기다 잡히고 마는 힘없는 짐승이 아니에요. 이 문제에 관해선 내 쪽에 선택권이 있어요."

니콜라스는 킬킬거렸다.

"그래서 벌써 선택했다는 거요?"

"아니, 아직은요."

"아주 잘 했군. 그럼 너무 늦은 건 아니로군. 나도 추적에 참여하기로 하지."

"아가씨가 농담을 하는 거요."

개러스가 클레어 뒤에 나타났다. 그는 계단 꼭대기에 거만한 모습으로 서서 한 손을 가볍게 지옥의 거울의 칼자루 위에 갖다 대었다.

"사냥은 끝났소."

"당신은 누구요?"

니콜라스가 다그치듯 물었다.

"윅크미어의 개러스요."

"사람들이 헬하운드라고 부르는 자로군."

니콜라스는 히죽거렸다.

"당신 소문은 들어 봤소이다."

"그렇소?"

"악마한테나 어울릴 만한 명성을 가지고 계시더군. 당신도 여기 숙녀분한테 구혼하러 온 거요?"

"아가씨는 아직 남편감을 고르지 않은 것처럼 구는데 재미를 붙인 모양이오. 구혼이라는 이 재미있는 놀이를 더 즐겨 보겠다는데 누가 그걸 비난할 수 있겠소? 허나 사실 이 일은 벌써 결정된 거요. 그녀의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구혼자는 나뿐이니까."

"꼭 그렇다곤 할 수 없죠."

클레어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두 남자가 자신은 없는 듯 구는 모양이 불쾌했다. 그들 사이에서 그녀는 그들이 봄 햇살을 거의 가로막아 자기가 그늘 속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개러스의 말에 니콜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레어 아가씨가 남편을 고르는 데 확실히 까다로운 조건들을 걸었다는 건 잘 알고 있소. 나 역시 그녀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고르는 건 원치 않소."

"당신이 그 일로 걱정할 필요는 없소."

개러스가 말했다.

"난 해야겠소."

니콜라스는 다시 클레어에게 주의를 돌렸다.

"우린 몇 년 동안 친구이자 이웃으로 잘 지내 왔지요, 아가씨?"

"수년간 이웃으로 지내 온 건 사실이에요."

클레어가 대답했다.

", 바로 그 친밀한 관계 때문에 당신이 장차 남편감으로 선택할 사람이

이 결혼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 확실히 해 둘 의무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오."

니콜라스는 능글맞게 웃었다.

"결혼 첫날 밤 놀라게 해선 안 되니까."

클레어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개러스와 니콜라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위험한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이 아름다운 섬에서는 그 동안 어떤 종류의 폭력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그 순간 클레어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 상황을 몰고 가기 위해선 나름대로 대충 짜놓았던 계획을 일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개러스와 니콜라스를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4

저녁 만찬석상에서 클레어가 우려하던 위태로운 상황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개러스와 니콜라스 중간의 주인석에 앉은 그녀는 꼭 지난 해 추수 시장에서 보았던 줄타기 곡예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개의 막대기 사이로 팽팽하게 걸린 줄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도, 심사가 잔뜩 뒤틀린 기사들로 가득한 방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보다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갈등이 표면화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홀 안에서 점차 차오르는 불길한 전조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같은 테이블에 자리한 두 남자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적대감의 노골적인 반영이었다. 개러스와 니콜라스의 부하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분쟁의 기회라도 줄여 보려는 노력으로 클레어는 그들을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도록 안배했다. 전사들을 갈라 놓은 그 짧은 거리가 적대감이 폭발할 경우 유용한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야채는 이제 더 이상 없는 거요?"

니콜라스가 테이블 위에 여기저기 흩어 놓은 앵초꽃 사이에 놓여진 새로운 음식 접시들을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 집에서 토끼니 사슴이니 하는 걸 먹던 때보다 확실히 야채를 더 많이 먹고 있군."

"우리는 신선한 채소를 매우 좋아하죠."

클레어는 단호하게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은 굴 요리를 더 좋아하시는 모양이죠? 요리사가 아몬드와 생강을 곁들인 굴 요리를 준비 중이니 곧 모두 함께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니콜라스는 눈을 낮게 내리 깔더니 졸린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은 분명 그녀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려는 속셈이겠지만 실제로는 그가 테이블에서 곧 잠에 골아떨어질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당신이 직접 그 나긋나긋한 손가락으로 먹여 준다면 훨씬 더 그 굴 요리를 즐길 수 있을 거요, 클레어."

클레어는 이를 꽉 다물면서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손님에게 특별히 음식을 대접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니콜라스를 그런 식으로 환대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니콜라스를 특별한 손님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지독히 혐오스러운 인간이었다. 또한 개러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이 모두가 남편감 고르기 때문에 생긴 소동이다. 예전의 디자이어의 삶은 무척 평화롭고 단순한 것이었다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제 자신은 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클레어가 말했다.

"하지만 경께서는 부디 원하는 만큼 즐겨 주시기 바라요. 야채를 넣은 수프도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향신료를 듬뿍 넣어 양념한 것입니다. 맛이 정말 좋죠."

"그래,"

니콜라스는 굴을 한 줌 퍼 올려 입에다 쑤셔 넣었다.

"당신은 언제나 훌륭한 식탁을 준비하더군."

그는 굴을 한 입 가득 넣은 채로 말했다.

"게다가 당신은 그 중에서도 제일 먹음직스런 요리이고."

"과찬이에요."

클레어는 다소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에게 신사답게 굴라는 무언의 애원을 했다. 니콜라스가 그녀의 눈에 담긴 애원을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무런 표시도 내비치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아주 많은 일들을 빠른 속도로 잊어버리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건 큰 컵으로 술을 몇 잔 들이킨 후부터 그렇게 되었다.

"오늘밤 이렇게 당신 집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당신을 보니,"

니콜라스는 느릿느릿하게 도발적인 어조로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한 달 전에 시번 킵에서 내 옆에 앉아 있던 당신 모습이 생각나는 데."

그는 굴을 한 입 더 삼키느라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난 그 당시 당신이 내 집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소."

클레어는 왼쪽에서 개러스가 자기 자리에서 약간 몸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녀는 겁이 났다. 그녀의 스푼이 그릇 가장자리에 부딪쳐 크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방문은 유쾌한 것이었고 경은 관대한 주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속해 있는 곳은 이곳이죠."

"그리고 앞으로 머물게 될 곳이기도 하고."

개러스가 매우 상냥하게 말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곁눈질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그 치명적인 부드러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빈정거리고 도발적이 되면 될수록 개러스의 반응은 갈수록 공손해지는 듯했다. 클레어는 개러스의 소름 끼칠 듯한 공손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자신만이 알아챈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명백한 위협 상태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미련한 바보 니콜라스는 분명 그렇지 못했다. 클레어가 보기엔 개러스의 온화한 말씨는 그를 한층 대담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개러스가 고의적으로 니콜라스에게 미끼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양념한 고기 덩어리를 나이프로 자르던 개러스의 눈이 클레어와 마주쳤다. 그는 미소를 짓지는 않았다. 이 인간은 절대 웃을 줄 몰랐다. 하지만 이것이 그로선 가장 유쾌한 기분에 근접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어떤 표정이 서려 있었다. 윅크미어의 지옥개는 스스로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어는 수프가 든 그릇을 그의 머리 위로 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모두들 음악을 듣는 게 어떨까요?"

클레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기다란 테이블의 한쪽 끝에 뾰로통해 있는 댈런을 쳐다보았다.

"우리에게 즐거운 노래 한 곡 불러 주지 않겠어, 댈런?"

댈런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큰 절을 올렸다.

"분부대로 하죠."

그는 하프를 집어 들고 친숙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그것이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것을 알아채고 안심했다. 댈런은 디자이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녀를 위해 이 곡을 지었다. 제목은 '열쇠'이다.

 

아가씨의 미소는 여름날 밤

달빛과 별빛같이 환하게 빛나네.

그녀의 눈동자는 부드러운 녹색의

에메랄드, 그녀의 얼굴은 맑고

깨끗한 냇물처럼 순수하다네.

오늘밤 난 열쇠를 취하리.

그녀가 내게 준 그 열쇠를.

 

"옳거니, 열쇠라."

니콜라스는 큰 잔을 탁자 위에 내려치며 내뱉었다.

"열쇠를 가져 와."

클레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옳거니, 열쇠라."

이미 자신의 주인보다 더 술에 만취한 니콜라스의 건장한 부하 한 사람이 나이프로 들고 있던 큰 잔을 탕탕 두들겼다.

"그래, 넌 그 열쇠로 뭘 할 작정이냐?"

시번 출신의 사람들이 댈런에게 노래를 재촉하면서 잔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진동을 했다.

니콜라스가 히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포도주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내게 준 열쇠는 그녀의 방 열쇠.

그녀는 그곳에서 반갑게 날 환대하리.

"반갑게, 반갑게라."

야유조로 낄낄거리며 노래를 따라하던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소리쳤다.

그런 보물을 혼자만 숨겨 놓다니,

그건 그녀 남편의 지나친 처사지.

난 내 목숨을 걸고라도 오늘밤

그녀의 창으로 숨어들리라.

창가의 커튼을 가르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리라.

니콜라스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쾅 때렸다. 컵과 접시들이 달그락거렸다.

", 이런. 아가씨의 침대로 올라간단 말이지. 그건 확실히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어."

그는 클레어를 심술궂은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클레어는 난처한 표정으로 조애너를 쳐다보았고 조애너는 대신 울리치에게 초조한 시선을 돌렸다. 울리치는 마치 어떤 신호를 기다리듯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개러스를 응시했다.

 

그녀의 허벅지는 희고 매끄러우며, 둥글고 부드럽다네.

그 사이에 누운 나는

나의 열쇠를 기다리는 금빛 대문을 보게 되리니.

 

"맞다, 맞아, 열쇠야."

니콜라스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클레어는 눈가로 개러스가 테이블을 장식한 섬세한 노란 앵초꽃 한 송이를 집어 드는 것을 보았다. 그의 큼지막한 손에 들린 꽃망울은 지극히 작고 가냘퍼 보였다. 천천히 그는 꽃잎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숨을 멈췄다. 군인들로부터 또 다른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클레어는 개러스의 손에 들린 앵초꽃에 붙들렸던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댈런에게 노래를 멈추라고 신호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못 본 척했다. 댈런은 반항적으로 하프를 켜댔다. 니콜라스는 의자에 앉은 채 길게 기지개를 폈다.

"지루해 보이는군, 헬하운드. 무슨 일인가? 이 음유 시인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나?"

"천만에."

개러스는 분명 그 섬세함에 매혹된 듯이 계속해서 앵초꽃의 꽃잎을 쓰다듬었다.

클레어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댈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댈런, 괜찮다면 다른 노래를 불러 주렴. 봄꽃을 대상으로 직접 작곡한 곡도 좋아."

"하지만 '열쇠'는 아씨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잖아요."

댈런은 반항했다.

"맞아. 하지만 오늘밤은 다른 노래가 듣고 싶어."

아주 잠깐 동안 그녀는 댈런이 반항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꽃을 주제로 한 다른 노래를 켜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에드거에게 어서 더 많은 음식과 술을 내오라는 눈짓을 했다. 집사는 뻣뻣한 관절로 고생하는 나이 든 사람치곤 놀랄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도 무르익어 가는 험악한 분위기를 눈치 채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다. 조애너가 안도하는 모습이 눈이 띄었다. 클레어는 그녀가 울리치에게 희미한 미소를 던지고 울리치는 자신의 접시에서 음식 한 점을 상냥하게 그녀에게 권하는 모습을 보았다. 놀랍게도 조애너는 자신에게 권해진 음식을 받아 먹으며 예쁘게 낯을 붉혔다. 한창 장난에 몰두해 있던 어린아이가 짓궂은 장난이 절정이 이르기도 전에 중단되게 되었을 때처럼 니콜라스는 쀼루퉁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개러스는 앵초꽃을 한 옆으로 치우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자신의 와인잔을 침착하게 들어 올렸다.

"당신의 음유 시인의 노래는 즐겁게 들었소, 클레어."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요."

클레어는 그에게 짜증스런 미소를 던졌다. 그녀는 예의바른 태도를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었다. 니콜라스와 마찬가지로 개러스에게도 똑같이 염증이 났다. 니콜라스는 테이블 위에 술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저 노래는 마음에 들지 않는군. 봄꽃에 관한 저 헛소리들은 몽땅 다 멍청하고 지루할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시오?"

개러스는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건 보다 세련된 노래를 즐길 만한 재치가 부족한 탓일거요."

니콜라스는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지금 나한테 머리가 모자란다고 말하는 거요?"

"그렇소. 클레어가 다른 구혼자를 찾는 것도 분명 그 때문일 테지. 그녀는 영리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을 남편감으로 원한다고 아주 분명히 말했으니까."

니콜라스는 분노로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의 눈에선 앞뒤를 재지 않고 덤빌 듯한 사나운 빛이 이글거렸다.

"클레어는 다른 노래를 더 좋아한다고 내 장담하겠소. 안 그렇소, 클레어?"

클레어는 저녁 만찬을 끝내고 모두를 잠자리로 보낼 구실을 찾으려고 애썼다. 누가 자기를 도와 불을 지르거나 성을 포위하는 일 따위를 저질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전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 다 좋아요."

필사적으로 그녀는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그 무화과 그릇을 좀 건네주시겠습니까, 니콜라스 경?"

"기꺼이 건네 드리겠소."

니콜라스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내 당신을 위해 하나 골라 주리다."

그릇을 건네주는 대신 그는 자신의 짧고 뭉툭한 손가락으로 직접 열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계피와 꿀을 섞어 놓은 그릇에 넣어 적신 다음 클레어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니콜라스의 손톱 밑에 낀 때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뭔가를 계속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개러스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상황이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되어 간다고 그녀는 화가 나서 생각했다. 여긴 그녀의 집이고 그녀가 주인이다. 이곳을 이 덩치 크고 거만한 남자들 중 누구한테도 넘겨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니콜라스에게 차갑게 웃어 보인 다음 그의 손가락에 들린 열매를 받아 전혀 입도 대지 않은 채 자기 접시에 내려놓았다.

"생각을 바꿨어요. 오늘 저녁은 벌써 충분히 먹은 것 같아요."

"날 실망시키는군, 클레어."

니콜라스가 말했다.

"지난 날 시번에 있는 내 집에서 묵을 때는 이보다 훨씬 식욕이 좋았는데."

그는 말을 멈추고 낄낄거렸다.

"열매만 잘 먹은 건 아니지."

클레어는 분명히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기억이 안 나는데요."

", 난 기억이 잘 나는데."

니콜라스가 말했다.

"우리가 함께 나눈 그 유혹적인 식사를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당신의 지극히 왕성한 식욕을 내가 충족시켜 줬을 때 당신이 만족해 하던 기억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추억이지. 당신도 그 달콤한 만족감을 잊은 건 아니겠지?"

"절 놀리시는군요, 니콜라스 경."

어두운 불안감이 몰려드는 것을 예감하면서 클레어가 말했다. 불행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모든 희망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당장 그만두세요.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그래?"

니콜라스는 눈으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가 정말로 신경 쓰고 있는 쪽은 개러스였다.

"난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확실히 당신은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지. 사실 난 당신이 시번으로 다시 돌아가서 함께 맛있는 음식을 즐기게 되길 고대하고 있소."

니콜라스의 말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는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조애너는 초조하게 스푼을 놀렸고 울리치는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개러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개러스는 무화과 열매를 하나 집어 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얘기를 하면 좋겠어요."

클레어는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난 우리가 같이 먹었던 음식을 회상하는 쪽이 더 좋은데."

니콜라스는 클레어가 접시 위에 내려놓았던 꿀에 적신 열매를 다시 가져 왔다. 그는 그것을 혀로 핥으며 크게 쩝쩝거리는 소리를 냈다.

개러스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말했다.

"클레어 아가씨는 화제를 바꿔 달라고 부탁했소. 재미가 없는 모양인데, 나도 역시 마찬가지요."

니콜라스는 키득거렸다.

"당신이 재미있든 없든 그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오?"

"내가 신경 쓰는 건 아가씨가 원하는 것뿐이오. 그건 경한테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요."

클레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황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술에 잔뜩 취하게 만들어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포도주를 좀 더 드시겠어요?"

니콜라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개러스에게 고정시킨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나보다 클레어를 더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거요, 헬하운드?"

"물론이오."

"꽤 의심스러운걸. 벌써 태생이 좋은 기사의 손길을 맛본 뒤인데, 어째서 그녀가 잡종한테 방 열쇠를 줘야 한다는 거요?"

충격의 침묵이 납덩어리처럼 방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클레어는 조애너의 눈이 이 모욕적인 말에 한껏 커지는 것을 보았다. 울리치는 그녀의 옆에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댈런은 하프의 현을 더듬거렸다. 그는 연주를 멈추고 마치 숨을 장소라도 찾는 것처럼 방안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에드거는 현관 앞에 포도주 병을 든 채 어쩔 줄 몰라하며 클레어를 바라보고 멈춰 서 있었다

침묵을 깨기 위해 클레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이제 그만하시죠, 니콜라스 경. 경은 취했어요."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취한 건 아니오."

개러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동의하오."

니콜라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허나 당신은 어떻소, 헬하운드? 당신은 아직도 멀쩡히 제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소?"

"물론. 난 언제나 정신을 잃은 적이 없소. 그걸 안다면 당신도 좀 더 처신을 조심해야 할 거요."

"클레어 아가씨는 우리 둘 중에서 더 나은 남편감을 고르는 데 약간 곤란해 하는 것 같은데."

니콜라스의 윙윙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우리가 그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게 어떨까 싶소. 여기서 지금 당장 말이오."

"어떤 식으로 말이오?"

개러스는 온화하게 물었다.

"디자이어의 아가씨를 차지하려고 체스 게임이라도 벌여야 할까? 좋소, 그건 아주 합당한 방법인 것 같소."

클레어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눈앞의 팽팽한 위기감을 잊어버렸다.

"체스 게임이라고요? 날 차지하려고?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니콜라스는 심술궂게 웃었다.

"그래,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거요, 헬하운드? 정말 기사답지 못하구먼."

"체스는 위트와 지성을 요하는 게임이오. 니콜라스 경한테는 대단히 불리하지."

개러스는 인정했다.

"이런 제길, 이건 위트 문제가 아니야."

니콜라스가 소리 지르며 말했다.

"당신은 클레어를 차지하는 데 체스 게임이나 벌이자는 말로 그녀를 모독한 거요."

클레어는 잠깐 눈을 감고 성 허미언에게 격렬한 기도를 했다.

"그럼 우리가 어떤 게임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요?"

개러스가 물었다.

"결투로 승부를 내지, 여기서 지금 당장."

"좋소."

개러스는 자기가 처음 한 제안만큼이나 그 제안에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기는 당신이 고르시오."

클레어는 다시 벌떡 일어섰다.

"멍청한 짓거리는 이걸로 충분해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손이 떨리는 걸 막기 위해 양손을 테이블 위에 고정시키고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방안을 훑어보았다.

"오늘 내 집에서 먹고 마시는 모든 사람들은 잘 들으세요. 나도 남편감 고르기 같은 이 바보스런 짓에 한몫 했다는 건 알아요. 그러나 랑드리의 서스턴 경은 내가 직접 남편을 골라도 좋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일을 매듭 지으려고 해요."

흥미에 가득 찬 웅성거림이 방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남자들은 옆의 친구에게 속삭이며 이 새로운 사건의 결과를 놓고 서둘러 내기를 걸었다.

"나의 용감하고 고귀한 구혼자들은 게임을 하고 싶어 하시죠."

클레어는 통렬하게 말했다.

"좋아요. 원하시는 대로 게임을 하도록 하죠. 하지만 경기는 내가 고를 거고 나만이 유일한 선수가 될 겁니다."

개러스의 희뿌연한 크리스털 눈동자는 클레어의 얼굴에서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능글맞게 웃었다.

"아무래도 윅크미어의 개러스 경과 시번의 니콜라스 경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클레어는 차례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나보다 더 운 좋은 여자는 없겠죠?"

방안을 가득 메운 군중들 사이에서 동의한다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클레어의 목소리에 담긴 냉소를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노란 색 앵초 꽃다발 가운데 한 송이를 집어 들더니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높이 치켜들었다.

"이제부터 이 꽃에서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겠습니다. 그러면서 용감한 두 남자분의 이름을 번갈아서 부르도록 하죠. 맹세컨대, 전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려지는 분과 결혼을 할 겁니다."

니콜라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런 맙소사, 클레어. 이렇게 중요한 선택을 그런 엉터리 같은 방법으로 해선 안 되오."

그녀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이건 경이 제안한 결투보다 더 엉터리도 아니고 더 피를 보는 것도 아니에요."

"너무 심하군."

개러스는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오?"

"물론이죠."

클레어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앵초꽃 더미에서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개러스 경."

흥분된 술렁거림이 군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내기돈이 더 많이 걸렸다.

개러스의 시선이 재빨리 앵초꽃으로 옮겨졌다. 몇 초 동안 그것을 집중해 관찰한 후 그는 대단히 만족스런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니콜라스 경."

클레어는 두 번째 꽃잎을 뜯어내어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니콜라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꽃을 노려보았다.

"남편을 이런 식으로 고르다니 어리석은 짓이야."

"바보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받을 땐 그 선택도 바보 같은 식으로밖엔 못하는 거예요." 클레어는 부드럽게 웃으며 꽃잎을 하나 더 떼어냈다.

"개러스 경."

앵초꽃에는 이제 꽃잎이 두 장밖에 남지 않았다.

클레어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꽃잎을 떼어냈다.

"니콜라스 경."

누가 승자가 될지 깨닫게 됨에 따라 군중들 틈에서 당혹스런 숨죽임과 승리의 환성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클레어는 앵초꽃을 들어 올리며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꽃잎을 내보였다. 그녀는 꽃줄기에서 그것을 잔인하게 떼어냈다.

"윅크미어의 개러스 경."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각자의 술잔을 두들겨댐에 따라 천둥처럼 시끄러운 소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니콜라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런 제기랄, 도대체 지금 뭘 하는 거요?"

"이 성의 주인이 되실 분을 선택하는 거예요."

클레어는 아리따운 자태로 빙글 몸을 돌려 개러스에게 꽃잎이 다 떨어진 앵초꽃 줄기를 건네주었다.

"환영합니다. 부디 경이 방금 얻게 된 것에 만족하시길."

"이런 젠장할!"

니콜라스는 벌떡 일어섰다.

"나는 절대로 만족 못해. 이런 식으로 남편을 뽑을 순 없어."

"다 끝난 얘기예요. 난 랑드리의 서스턴 경이 시킨 대로 내 선택을 했을 뿐이에요."

클레어는 테이블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어요. 제 방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이 기쁨 때문에 많이 지친 것 같아요."

"젠장할!"

니콜라스가 소리쳤다.

"난 이건 못 참겠소."

"당신은 이 일에 대해 더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요."

클레어는 턱을 치켜들었다.

"시번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으니, 오늘밤은 이곳에서 묵도록 하시죠. 준비는 다 되어 있어요."

그녀는 스커트를 살짝 치켜들고 테이블을 돌아 나왔다. 조애너가 재빨리 일어나 그녀를 따랐다. 클레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첫 번째 계단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니콜라스와 개러스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뒤돌아보았다.

"떠나기 전에 여러분,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개러스의 눈과 마주쳤다.

"이 점을 알아 두세요, 미래의 낭군님. 이 섬에서는 한 번도 폭력이 행사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요. 난 오늘밤 더 이상의 난동은 용납하지 않겠어요. 잘 알아들으셨겠지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개러스는 다정하게 대꾸했다.

"만약 아침이 오기 전 이 홀 안에 피가 뿌려지는 일이 생긴다면,"

클레어는 이를 악물고 말을 계속했다.

"맹세하건대, 당신들 중 어느 누구와 결혼하는 대신 난 수녀가 되겠어요."

더 많은 쑥덕거림과 추측들이 군중들을 휩쓸었다. 니콜라스는 갑자기 교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클레어는 그런 니콜라스를 경멸하듯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개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혹시라도 이 성에 내가 없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 들어 두세요. 만약 내가 수녀원에 들어가는 날엔 난 절대 빈 손으론 떠나지 않을 거예요. 향수 제조의 모든 비법을 몽땅 싸가지고 갈 겁니다. 그건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나의 지참금이 될 테죠."

다시 한번 숨죽인 침묵이 홀 안에 내려앉으면서 그 말의 효과가 즉시 느껴졌다. 이 섬에 사는 그 누구도 디자이어의 수입이 클레어의 향수 제조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비법 없이는 꽃이나 향초밭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요점을 분명히 전달한 데 만족한 클레어는 개러스를 보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개러스 경, 당신의 첫 번째 임무는 이 홀 안에서 평화를 지키는 일이에요. 장차 내 향수에서 나오는 이익을 같이 누리려면 반드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 일을 완수해야 해요. 그럼 안녕히들 주무세요."

그녀는 근처의 테이블 위에서 타고 있던 기름 램프를 집어 올린 후 홱 몸을 돌려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을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그 뒤를 조애너가 바짝 따랐다.

", 이런 맙소사. 어쩌면 그런 변덕스런 방법으로 그렇게 중요한 선택을 할 수가 있지?"

조애너는 클레어의 걸음을 쫓아오느라 숨을 헐떡거렸다.

"이긴 사람이 니콜라스 경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당신은 지난 날 그 일이 일어난 뒤부터 그를 경멸해 왔잖아. 스스로 세상 다른 남자와 다 결혼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는 결코 결혼하지 않겠노라고 했잖아."

"니콜라스 경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어요. 난 꽃에서 잎을 따내기 전부터 누가 이 섬의 주인이 될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클레어는 2층에 도착해 자신의 침실을 향해 난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앵초꽃에는 애당초 다섯 개의 꽃잎밖에 없어요."

"하지만 어떤 이름이 맨 나중에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조애너의 이마가 환하게 밝아졌다.

", 알았어. 이름 부르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꽃잎을 세서 다 계산해 놨던 거로군."

"맞아요."

클레어는 육중한 나무로 된 문을 열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위에 램프를 내려놓은 다음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향기로 충만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난 답을 알고 있었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벌써 한 시간 전부터 알고 있었죠."

조애너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럼 어째서 앵초꽃을 가지고 그런 우스운 연극을 꾸민 거지?"

클레어는 손가락으로 창문틀을 톡톡 두드렸다.

"난 두 남자 모두한테 화가 났지만 특히 개러스가 더 괘씸했어요. 니콜라스는 툭 터놓고 말하자면, 그냥 니콜라스일 뿐이에요. 그의 머리론 얼간이밖에 될 수 없죠."

"그럼 개러스 경은?"

클레어의 입이 꼭 다물어졌다.

"개러스 경은 확실히 높은 지능과 상식을 겸비하고 있어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협박과 폭력도 기꺼이 사용할 거라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했어요."

조애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

"그래요. 댈런이 '열쇠'를 연주할 때 그가 꽃을 가지고 장난치는 걸 보지 못했나요?"

"그건 단지 꽃일 뿐이잖아, 클레어. 도대체 왜 그런 손짓을 협박하는 거라고 생각한 거지?"

"뭐라고 설명하긴 곤란해요. 나를 놀라게 한 건 그가 꽃잎을 쓰다듬는 어떤 방식이에요."

클레어는 달빛이 비치는 바다를 아무 생각 없이 내다보았다.

"그는 내게 자기가 상냥할 수도 있고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었어요."

조애너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게 그의 의도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그가 자신에 대한 아주 비열한 명성을 만들어 냈고 그걸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만약 그가 이 성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면 여기선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해요. 난 이 디자이어에서 어떤 폭력도 원치 않으니까요."

"클레어, 그는 폭력에는 아주 익숙한 남자야. 필요하다고 생각할 땐 언제든 폭력적인 수단을 쓰는 게 그에겐 자연스러운 일일거야."

"맞아요. 필요하다면 그는 폭력을 휘두를 거예요."

클레어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난 그가 폭력 행위를 즐긴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는 자기가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내게 밝혔어요. 그걸로 좀 점수를 딴 셈이죠. 만약 아래층에서 아무 문제없이 오늘밤을 무사히 보내게 된다면, 난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두 시간 뒤 울리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개러스를 보고 씨익 웃었다.

"이 성의 주인으로서 첫 번째 임무를 훌륭히 마친 것을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솔직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사히 오늘밤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죠.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은 지옥의 거울을 다루듯 재치 또한 자유자재로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니콜라스와 그 패거리들을 설득해서 술에 취해 만사를 잊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녀석들은 나의 숙녀 분께서 홀을 떠날 때 이미 한창 취해 있었으니까."

개러스는 초조한 듯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건 그로선 드문 일이었다.

"보초들은 잘 안배해 놓았나?"

"물론입니다. 니콜라스 부하들 중 누구라도 새벽이 되기 전에 눈을 뜨면 다시 술 한 잔을 받

게 돼 있지요."

"니콜라스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푹 자고 있죠. 당신과 한 술 시합에서 당신을 이기려고 기를 쓴 덕분이지요."

울리치는 쿡쿡대며 웃었다.

"당신의 라이벌과 벌인 그 무혈의 전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물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당신이 마시는 것처럼 한 그 술들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죠?"

"니콜라스가 머리를 돌렸을 때 그것들을 몽땅 테이블 밑으로 부어 버렸지."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울리치의 입술이 아래로 비뚤어졌다.

"클레어 아가씨의 손님들이 내일 아침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더부룩한 속으로 일어나면 홀은 절대로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겠는데요. 그래도 피는 없을 겁니다."

"바로 그게 중요한 거지."

개러스는 양쪽 입가를 자꾸만 잡아당기는 묘한 자극을 느꼈다. 그는 거의 히죽거리고 있었다.

"내 아가씨의 소원은 그녀가 나한테 시집 올 때까지 가능한 한 지켜질 걸세.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은 안 하게 하고 싶으니까."

"당신은 운명이 한 송이 꽃의 연약한 꽃잎과 한 여성의 변덕으로 결정 지어진 남자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즐거워하시는군요."

"내 미래가 재수에 의해 결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

고 볼 수도 없지."

"클레어 아가씨가 선택을 하는 데 쓰는 도구를 보았을 때는 당신도 니콜라스만큼이나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러스는 창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돌로 된 창턱을 손으로 쓸었다.

"그녀가 첫 번째 꽃잎을 따면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난 내가 이기리란 걸 알았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지. 꽃에 관한 그녀의 지식으로 볼 때, 그녀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거야."

울리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개러스는 댈런이 외설스런 발라드 곡을 도전적으로 연주할 때 살펴본 앵초꽃을 떠올렸다.

"노란 앵초꽃에는 꽃잎이 다섯 장밖에 없었어. 아니면 적어도 오늘밤 테이블 위를 장식했던 꽃들에는 다섯 장밖에 달려 있지 않았던가."

"!"

울리치는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꽃잎이 홀수일 경우, 클레어 아가씨가 처음 시작하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 이름이 마지막으로 불려지는 이름이 되는 거군요."

"맞았어."

"어째서 그녀가 일부러 그런 작은 연극을 꾸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당신을 선택했다고 선포하고 일을 마무리 짓지 않았을까요?"

개러스는 마침내 입가에 맴돌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거만하다는 걸 알아본 거야. 그녀가 내게 가르침을 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가르침이라뇨?"

"그녀는 내가 니콜라스 경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주길 원했던 거지. 그건 내가 더 나은 선택이었다는 걸 증명할 임무가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그녀 나름대로의 방식이었어."

울리치는 극히 조심스럽게 개러스의 입가에 생긴 굴곡을 바라보았다.

"이 일이 즐거우십니까?"

개러스는 이 문제를 좀 더 꼼꼼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것 같군."

울리치는 맹세하듯 말했다.

"당신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건 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과장하는군."

"아니, 내 기억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우리 두 사람이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간발의 차이로 벗어나곤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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