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보다 깊은 사랑 3
구름이 잔뜩 낀 후덥지근하고 숨막이는 정오였다. 하지만 토라하의 중역 열 사람은 값비싼 여름 양복을 빠짐없이 갖춰 입고 싱가폴의 명소 레이플 호텔 바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잡담하고 있었다. 그 위로 거대한 선풍기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검은 피부의 웨이터들이 흰 상하의 붉은 장식 허리띠를 매고 페즈 모자를 쓴 차림으로 음료수 쟁반를 날랐다. '페일핸드 아이러브'의 피아노 연자가 배경으로 깔렸다.
마조리는 '사자'의 도시에 실망했다. 이국적이고 동양적인 것을 기대했던 바람과 달리 호화 고층 호텔들과 상점들, 홀리헉 크레즌트나 스프링필드 레인 같은 이름의 중심가는 그녀의 짜증을 유발시켰다. 심지어 이 유명한 호텔도 식민지 시대의 원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웃기게도 영국인들은 이 먼 이국땅에 그 족적을 확연하게 남긴 것이다. 그녀는 아직 푸른 잔디에서 펼쳐지는 크리켓 게임을 못했지만 곧 보게 되리란 것을 확신했다.
구 시가를 구경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주최 측은 그들을 호화스런 나이트 클럽으로만 끌고 다녔고 대부분의 사업 모임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항구가 내다보이는, 현대적인 고층 건물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지금 여기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이유는, 전적으로 분위기 있는 곳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간청에 대한 부응이었지만 그녀의 원뜻과 거리가 먼 곳이었다.
요시 토하라는 해미쉬보다 작고 살색도 더 짙었지만, 그들은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해미쉬는 처음에 더듬거렸지만 점점 가속이 붙어 나중에는 유년기의 언어를 꽤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조리를 존중하여 가끔 영어로 말했다. 지난 사흘 동안 마조리는 거래를 성사시키고픈 열망을 어떻게든 전달하려고 노력했지만 해미쉬를 거쳐 들어오는 반응은 속상할 만큼 미미했다. 토하라 상은 성공의 규모를 축소하고 이윤을 내지 못했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확장 계획에 굼뜬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해미쉬의 향후 권리마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 가지 일치점에 도달했다. 이제 때가 됐다. 그들은 외삼촌의 선의와 관리 능력을 원했다. 그분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되 만전의 경계태세를 취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죠사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듯 만들어낸 그 조치 중의 일부가 싱가폴에 발효되기 직전이었다. 그 유명한 불가사의가 과연 실전에 통할까? 마조리는 그 확인을 기다릴 수 없었다. 5일 전 마조리는 죠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계획과 함께 일본어를 못하는 악조건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그의 협력을 부탁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죠는 적당한 인물을 찾아냈다. 마델라인 로빈슨 영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아였고 극동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계약 및 사업 분야의 신진 변호사였다. 런던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지만 2개국어에 능통한 그녀는, 마조리가 토하라와 동업으로 발족할 계획인 새 위스키 수출 회사의 벌률 및 영업 고문으로 글렌티란의 이익을 대표하기도 했다.
"놀라지 마."
죠가 경악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유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요. 그리고 마조리, 제발 이번만은 날 믿어요."
참 이상한 말도 다 있지 그녀는 항상 그를 믿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토하라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델라인 로빈슨 양을 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생명체가 지성을 갖출 수 있을까? 저렇게 완전무결한 맵시의 소유자가 거울을 보는 것 이외에 다른일을 할 시간이 있을까? 만델라인이 편안한 자세로 좌중에 소개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햇빛이 그녀의 섬세한 윤곽을 샅샅이 비췄다. 그녀는 36시간의 여행이 아니라 방금 패션쇼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 초하라 상의 추론적이고 빈틈없는 눈초리에 엉큼한 기미가 엿보일 정도였다. 어림없을걸. 마조리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의 눈에 집요하고 만만찮게 보이는 로빈슨 양이 남자들에게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이상했다. 마조리는 그녀를 글렌티란의 '동서 관계 보좌관'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감시견'이라는 묘사가 더 정확했다.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회의실로 향했다. 해미쉬는 로빈슨양의 팔을 잡았지만 그의 걸음새가 묘하게 딱딱했다. 그제야 마조리는 그가 분노를 겨우 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남자들은 로빈슨 양이 앉을 자리를 놓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해미쉬의 눈치를 봤고, 그 장본인은 마조리에게 당황과 수치가 담긴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로빈슨 양에게 말했다.
"마델라인, 내 옆에 앉는 편이 좋겠어요. 신사 여러분, 저는 일본어를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과 직접 협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단점을 보충하기 위해 마델라인 로빈슨 양을 여기 모셔왔습니다. 마델라인, 통역을 부탁해요."
"그럴 필요 없소."
토하라 상은 불편한 내색을 보이며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우리의 현재 상황과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명확하지 못한 부분은 로빈슨 양이 통역해 드릴 겁니다. 우리는 본국에서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어요. 카메론 일가는 해미쉬를 증류소 경영에서 밀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스코틀랜드인의 유산으로 여겨졌던 것을 반 일본인이 갖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해미쉬는 맞서 싸우고 있고, 저는 그와 운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백 만 파운드의 재산을 그에게 투자했습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해미쉬는 공장과 생산. 관리 및 품질 관리에 이르는 모든 분야를 책임지고 저는 영업을 맞게 될겁니다. 우리는 글렌티란 위스키의 동양 수출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은 한가족이고, 우리는 가족 내에서 사업을 벌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못다한 말을 청중의 상상에 맡겼다.
"여러분이 글렌티란에 3백만 달러를 투자하신다면, 그 대가로 글렌너드는 토하라 상과 공동으로 독립된 동양 무역회사를 설립할 것입니다. 저는 글렌너드보다 이 수출 회사에 돈을 내고 사주의 50%를 갖겠습니다. 그리고 토하라 상의 투자금은 글렌너드가 동양에 원액 위스키를 수출할 때까지 소요되는 자금수입의 기간 동안 회사의 운영 자금으로 소요될 것입니다."
그녀는 글렌너드 12년산 고급 위스키의 생산 및 영업으로 발생될 이익과 함께, 그 과정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5년산 싼 위스키를 판촉 함으로써 올릴 단기 이익 수치까지 낱낱이 거론하며 말을 맺었다. 그녀의 발표가 끝나자 회의가 돌연 중단되었다. 그녀가 토하라 상과 임원들에게 붙인 별명인, 톰 코블리 삼촌과 그 일당들은 해미쉬와 사적인 모임을 갖고 싶어했다. 토하라 상은 미안한 표정으로 여성들을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했다.
"해미쉬는 여덟 살 때 이곳을 떠나서 편지도 한 장 보내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요. 우리는 그가 동양에 등을 돌렸다고 생각했소. 그가 일본인 핏줄을 부끄러워한다고 단정했던 거요. 그가 사별한 부모님에 대한 불행한 기억에 등을 돌렸을지는 모르지만."
마조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부친의 사업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득권이에요. 그리고 해미쉬가 먼 외국 땅의 적대감 어린 환경에서 홀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토하라 상?"
적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몸 둘 바 몰라 하는 톰 코블리 삼촌을 남겨 두고 마조리는 로빈슨 양과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날 부끄럽게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가 있소? 그때 당신이 자신의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당신은 아부 험악하고 적대적이었고, 너무......"
해미쉬가 그녀에게 돌아섰고, 그녀는 그 눈에 담기 호소를 정면으로 보았다. 그녀 역시 첫 번째 부부싸움에 가슴 아팠다.
"너무 뭐요?"
그녀가 담담하게 물었다.
"너무 승리에만 집착해 있었소. 난 그런 사람을 싫어해요."
마조리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은 약해질 때가 아니었다.
"당신이 날 대화에 끼워 주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진행 상황에 대해 주거나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게 일본식에요."
"아내가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남편의 사업에 투자하는 것도 일본식인가요"
"난 돌아가는 형편을 알고 싶어요. 왜 그러면 안 되나요? 난 그 값을 치르고 있는데요. 게다가 이건 내 생각이었고 당신이 일을 유리하게 끌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웠어요."
"고맙구려! 그 마음을 똑똑히 보여줘서."
"미안해요, 해미쉬. 하지만 이 거래에 당신 목숨이 달렸는데도 가끔 당신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예요."
"당신이 그 '감시견'을 불러들이는 통에 우리가 그들을 불신한다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났어요."
"잘됐네요! 나는 그들을 믿지 않아요. 18년 동안 당신은 한 장의 대차대조표도, 한 푼의 이익도 못 받았잖아요. 하지만 이제부터 마델라인이 그들을 감시할 거예요. 그녀는 굉장히 유능하니까 그들이 다시는 당신을 속이지 못할 거예요."
"그들은 가족이야. 토하라 상은 거의 눈물을 글썽였어."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려운 법이에요. 그들이 당신들을 이 곤란에서 구해낼 만큼 충분히 마음을 쓰고 있는지 한번 보자고요. 우리는 자선을 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도 이 거래에서 충분한 이윤을 뽑아낼 거예요. 믿음은 시간에 걸친 행동 위에서 싹트는 거예요. 그들이 신뢰를 받고 싶다면 지금부터 믿을 만한 일을 하라고 하세요. 난 당신을 위해 그것을 보여줄 거예요. 그것도 무료로!"
"마조리, 당신은 어디서 자랐기에 이렇게 강하지?"
"거칠고 모진, 사회라는 학교에서요."
"마조리, 난 당신과 싸울 수 없어요. 당신을 사랑하오."
그는 그녀를 다정하게 껴안았다. 마조리는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며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싱가폴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간 다음에 허물어질 것 같았다. 싱가폴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간 다음에 허물어질 시간은 많아. 지금은 이성이 필요해. 해미쉬는 여전히 위로를 원했다.
"마조리,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해 봤어요? 베아트리스 숙모님이 글렌티란에 주식을 팔면 어떻게 할 거요? 당신은 이미 발을 깊이 들여놓았는데, 이 여행에 로빈슨이란 여자의 수수료까지......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는 거요?"
"우리는 글렌티란과 막서 싸우고 승리를 거둘 테니까요."
"때때로 난 내 행운이 믿어지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처럼 날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게 되었을까? 그리고 실패할 경우, 내가 당신에게 이 사랑을 무슨 수로 보상할 수 있겠소?"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나를 믿으세요."
잠시 그들은 창가에 나란히 서서 어두워져 가는 만을 바라보았다. 불빛 하나가 반짝였고 그 뒤를 따라 또 하나가 켜졌다. 곧이어 모든 상판에 불이 들어왔고 항구는 불야성을 이뤘다.
"너무 아름다워."
해미쉬는 그녀를 꼭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조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로버트의 패배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로버트. 지금부터 당신과 나의 대결이 시작된 거야. 라나는 생득권을 되찾게 되고, 당신은 우리 모녀를 버린 그 날을 후회하게 될거야. 돌연한 얘기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왜 그래요, 여보? 무슨 문제라도 있소?"
해미쉬가 입술을 그녀의 것에 대고 비통함을 걷어냈다.
"해미쉬, 난 사랑받고 싶어요. 제발 날 안아 주세요. 나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너무 강한 남자야.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데려갔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원했다.
라나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모습에 리즈의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마조리와 라나 사이의 강한 유대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나가 손녀가 아니라 친딸이었다면 난 저 아이를 키웠을까?"
"엄마는 어디 있어? 난 엄마가 보고 싶어?"
라나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리즈를 보며 칭얼거렸다.
"말해줬잖니. 엄마는 싱가폴에 있어. 내가 지구본에서 그곳을 보여줬지? 할아버지가 도시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니? 엄마는 금방 집에 오실 거야. 그리고 네가 착하게 선물을 사 오실 거야."
"그런데 왜 전화도 안 해? 엄마는 항상 나에게 전화했는데."
"곧 전화가 올 거야. 하지만 워낙 멀어서 돈이 많이 드나 보지. 이제 그만 울고 착하게 굴어야지."
"난 울지 않았어. 울지 않았단 말야."
라나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두 뺨을 타고 계속 흘러내리고 짭짭한 눈물 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으로 입을 막고 눈까풀을 힘차게 감았다가 뜨자 그림책이 또렷이 보였다. 난 울기에는 너무 컸어. 네 살 반이나 먹었으니 벌써 다 자란 아이야.
"기운을 내렴."
할머니가 말했다.
"안젤라가 오후에 놀러 올 거야. 어때 좋지?"
라나는 안젤라를 굉장히 싫어했지만 그녀는 겁많은 '아기'였다. 지금으로선 유일한 놀이 상대처럼 보였다.
"언제 오는데?"
"점심 먹고 나서. 멀지 않았단다."
라나가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은 딱 두 종류였다. 현재, 아니면 까마득한 과거나 미래였다. 주로 지금, 점심인 양고기와 강낭콩, 그레이비 소스가 곁들여진 매쉬드 포테이드를 먹고 싶지 않았다. 지난 2개월 동안 포동포동한 햐얀 양들이 천진난만하게 들판을 뛰어다녔고 모두들 예쁘다고 칭찬해놓고 지금은 그 고기를 먹다니. 어른들은 정말 웃겨. 라나는 어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예외였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웠고, 그 초록 눈과 빨간 머리카락만 생각해도 라나는 울고 싶었다.
안젤라는 토끼처럼 생겼다. 거의 항상 핏발이 서 있는 눈, 핑크빛 살결, 흰색에 가까운 머리털 등. 거미와 딱정벌레를 비롯한 기어 다니는 모든 생명체를 무서워했고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재미없는 상대였다. 그녀는 라나보다 생일이 빠른데도 훨씬 작고 바싹 말랐다.
그녀의 할머니인 로즈 부인은 할머니와 차를 마시며 카드놀이를 즐겼다. 소위 '차 시간'에 할머니들은 맥주 한두 잔과 호두를, 아이들은 레모네이드와 케이크를 즐겼다. 가끔 할아버지도 한몫 끼었지만, 로즈 부인과 마음이 맞지 않기 때문에 채소밭에서 일을 하는 게 보통 이었다. 오늘 안젤라는 제 엄마가 짜 줬다는 핑크색 드레스를 입었다. 치맛단에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역겨운 것이었다. 그녀는 그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계속 치마 주름을 폈다. 움직일 때마다 소리 나는 얇은 금속 팔찌를 끼고 있었다. 안젤라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으스대기를 좋아했지만, 라나는 그런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스냅 카드놀이에서 안젤라는 라나를 못 당했다. 잠시 후 라나가 소리 질렀다.
"스냅! 스냅! 스냅!"
그리고 까르르르 웃었다.
"라나,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안젤라는 조용한데 왜 너만 소리를 지르니?"
할머니가 부엌 쪽에서 소리쳤다."
"그거야 얘가 한 번도 못 이겼으니까 그렇지요."
라나가 말대꾸를 했다. 안젤라의 눈에 질투심이 어렸다. 한쪽만 계속 이기는 게임에 두 소녀는 지루해졌다.
"산책하러 나갈래? 할아버지가 뭘 하시나 보러 가자."
라나가 제안했다.
"그네를 타자. 네가 날 밀어줘."
"좋아."
"둘 다 코트를 입어야 한다."
할머니가 소리쳤다. 안젤라의 옷은 하얀 털이 복슬복슬 나 있었지만 너무 작았기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아이들이 너무 빨리 자라요."
로즈 부인이 불평했다.
"글쎄 말이에요."
라나는 식기실 아래쪽에 박힌 못에서 겉옷을 내려 얼른 입고, 로즈 부인이 안젤라의 옷 단추를 채워 주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옷을 더럽히지 말아라."
로즈부인은 달려나가는 아이들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문이 닫혔고, 두 소녀는 안개에 감싸인 호수 쪽을 바로 보았다. 톡톡 첫 빗방울과 함께 언 땅을 갈구는 할아버지의 삽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순간 그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옥수수 부대를 이고 터벅 터벅 걸어왔다. 숨은 하얀 구름이 되고, 뺨과 코는 추위로 빨개졌다. 멀리서 패디가 짖었다.
"오리 먹이를 주러 가는 길인데 너희들도 같이 갈 테냐?"
"아뇨, 저기는 어두워졌잖아요."
안젤라가 투털거렸다.
라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그네를 타자."
두 소녀는 쥐 죽은 듯 가만히 할아버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리들이 작고 흰 덩어리가 되어 우르르 그에게 몰려갔다.
"저놈들이 옥수수 한 자루를 다 먹니?"
"그럼. 얼마나 탐욕스러운데."
"하디 씨가 일요일 정찬 거리로 오리 한 마리 줄 지 모른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
라나는 숨을 멈추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마 할아버지가! 아냐,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러지 못하게 할 거야.
"아냐. 할아버지는 너희에게 오리를 주지 않으실 거야. 우리도 안 먹는걸. 저건 우리의 애완동물이야.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빠 오리야."
안젤라는 새침하게 그네 의자의 먼지를 떨고 사뿐하게 앉았다.
"밀어"
라나는 그녀의 소심한 성격을 감안해서 살살 밀었다.
"아까 너희 아빠라고 했니? 너에게는 아빠가 없어. 난 우리 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말을 들었어. 이곳으로 입양된 너는 행운아래."
"나도 입양됐다는 것을 알아. 그래도 나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있어."
'입양'이란 단어는 그녀에게 안정감과 우월감을 주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넌 입양의 뜻도 모르는구나."
"아냐, 난 알아."
"한번 말해 봐."
라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그 뜻을 말해줄게. 그건 너에게 부모님이 없어서 고아원에 버려졌다는 뜻이야. 넌 오랫동안 고아원에 있었을 거야. 난 알아. 왜냐하면 엄마가 낡은 옷을 그곳에 갖다 주셨을 때, 거기 아이들은 돌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가진 게 없다고 하셨어. 넌 너희 진짜 엄마와 아빠를 본 적이 없지?"
라나는 넋이 빠진 듯 그네를 밀었다. 그녀의 시선은 호수에 구원이 있는 양 그곳에 못 박혔다.
"해미쉬가 나의 진짜 아빠라고 했어."
"바보같이! 해미쉬 아저씨가 네 진짜 아빠라면, 왜 네 이름이 라나 카메론이 아니니? 너희 엄마도 네 진짜 엄마가 아냐. 그저 널 돌봐 주는 사람이야."
라나는 있는 힘껏 그네를 밀기 시작했다.
"멈춰! 너무 높아!"
안젤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라나는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안젤라가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그네 줄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드러났다. 빠르게 뒤로 돌아온 그네를 미처 피하지 못한 라나는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벌떡 일어나 팔을 쭉 내밀고 앞으로 돌진한 힘으로 그네를 밀었다. 안젤라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그네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숨넘어가게 울부짖으며 축축한 진흙 위를 굴렀다. 처음에 그네는 라나의 머리위를 스쳤지만, 그녀가 두려움과 분노에 젖어 엉거주춤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돌아온 그네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았다. 그녀의 우는소리에 할머니가 별채에서 달려 나왔다.
"이런, 우리 불쌍한 것, 무슨 일이니?'
로즈 부인이 손녀딸을 품에 안고 시퍼렇게 혹이 난 이마를 살폈다.
"쟤가 그네를 너무 높게 밀어서 내가 떨어졌어요. 난 다시는 여기 안 올래요."
안젤라는 헉헉거리며 고자질했다. 라나는 신발만 뚫어지게 주시했다. 앞으로 다가올 처벌보다 더 무서운 두려움이 마음속에 도사렸다. 엄마는 나의 진짜 엄마가 아니라니.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럼, 누가 진짜 엄마일까? 왜 나를 버렸을까? 닭똥 같은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벌로 차도 주지 않고 라나를 방에 머물도록 명했다. 그녀는 살그머니 방에서 나와 층계참에 서서 로즈 부인의 말을 들었다.
"당신은 저 버려진 아이를 데려오 날, 화를 불러들인 거예요. 저런 아이들의 진짜 실체를 누가 알아요. 다들 이유가 있어서 버려진 거예요. 부모들이나 저 아이들에게 결점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요. 보통 사람들이 왜 제 자식을 버리겠어요? 뭔가 잘못된 게 있으니까 그런 거라구요. 당신은 앞으로 저 아이 때문에 고생깨나 할 걸요. 내 말을 새겨들어요."
라나는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지만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손녀를 옹호하며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방은 안전하고 전과 다름없이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당연히 그녀가 누려야 될 것이 아니라 엄마의 선물이었다. 조만간 안젤라의 낡은 코트가 고아들에게 주어진다. 하더라고 그것이 원래 그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침대에 누워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라나는 밤의 공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오리들은 여우와 로즈 부인처럼 탐욕스런 인간의 먹이가 되겠지. 다람쥐와 새들은 올해 겨울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게 될지도 몰라. 사슴은 인간의 놀이로 총에 맞을 테고, 예쁜 양들은 도살되어 먹혀질 거야. 이상하게도 그것들과 그녀는 똑같은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로버트는 어렸을 때 딴판이야. 로라는 의붓아들이 포리지를 먹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수줍음 많고 따듯하고 다정했던 어린 소년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녀는 항상 애정에 목말라했던 소년의 욕구에 부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초연하고 냉정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로버트의 증오에 타당한 이유나 정당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시작부터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왔다. 그녀의 유일한 죄는 그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 그녀가 아름다운 집을 잡동사니와 지저분한 애완동물들로 가득 채우고 자식들을 마구 뛰어다니게 했던, 그 무른 여자가 아니어서 신에게 감사드릴 일이다. 그녀는 이 저택과 가족에게 규율과 가치를 심어 주려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로버트는 그녀의 실패작이었다. 그녀는 그를 비판적으로 살폈다. 아침상에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는 꼴이라니. 턱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너무 짧게 자른 그의 눈동자는 냉철하게 빛났다. 특히 그녀를 볼 때 그는 포리지에서 설탕 대신 소금을 처먹는 진짜 스코틀랜드 야만인이다. 계란과 베이컨. 푸딩과 콩팥 요리를 먹어 치우는 그 식욕에 그녀의 속이 메스꺼워졌다.
담배를 한 대 피웠으면 딱 좋겠지만 로버트는 식당에서 끽연을 금지시켰다. 물론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녀는 고백해야 할 말이 있었고, 지금이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아침상에 나오지 않았으리라. 최근에 로버트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상태였다. 스포츠나 그린피스 활동, 또는 야생 동물 보호 계획 등 이 집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뭐, 증류소는 그의 수많은 전문경영인을 통해 훌륭하게 경영되고 있었지만. 로버트는 로라에게 발산되는 긴장과 심란함을 눈치챘다. 계모가 이른 아침 시간에 일어나야 할 만큼 심각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점점 추악해지는군. 그는 될 수 있으면 그녀의 허물어지는 얼굴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피부는 자갈밭을 연상시켰다. 연상시켰고 심술궂은 눈은 축 늘어진 살에 반쯤 파묻혔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로버트, 오늘 신문에 너의 글렌너드 인수 실패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실렸더구나."
"그건 모함입니다. 저는 증류소를 영국인 양조업자들에게 하기 위한 계획을 베아트리스 카메론에게 제의했습니다. 흠잡을 데 없이 이성적인 제의였어요. 베아트리스는 증류소를 스코틀랜드의 손으로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했어. 카메론 가문이 맞서 싸웠지만, 그 일본인 투자 덕분에 살았어."
"잘 됐어요."
"네 생각만큼 일이 간단하지 않아."
로버트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얼굴을 살폈다. 그 죄책감 어린 표정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작은 구슬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충혈된 눈이 걱정스러운 듯, 아침 식사를 거드는 가정부 톰슨 부인을 노려보았다.
"할 말이 있으시다면 어서 하세요."
"톰슨 부인, 커리를 더 갖다 주시겠어요?"
가정부가 식당을 나가자마자 로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카메론 일족의 절반은 후계자인 해미쉬를 내쫓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내부 분열이 생겼어. 그의 삼촌 앤드류 카메론은 친구 죠 에스킨릉 영업이사로 임명하여 주주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어."
에스킨은 앤드류와 나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렸다.
"그 마키아벨리적인 사업 술수를 알면 알수록 더욱 걱정되는군요. 아무래도 회사 일에서 손을 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밖에 더 할 말이 있으세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안돼, 기다리거라! 넌 이해를 못 했구나. 언론이 그 꼬투리를 냄새 맡고 몇 배나 부풀었어. 신문마다 우리를 모함하는 기사들로 가득 찼다."
"지금 당장 손 쓸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는 앤드류 카메론과 접촉하지 마세요. 그는 내가 특히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당신은 그 엉큼한 음모로 우리 얼굴에 먹칠을 했어요."
로라는 분노의 탄성과 함께 식당을 나갔다.
로버트의 식욕이 싹 달아났다. 그는 접시를 옆으로 치우고 커피를 마셨다. 모든 종류의 술책이나 이중 거래는 질색이었다. 인간의 거짓말하고 속이는 능력에 혐오감을 느낀 그는 자연과 야생동물에게 매료되었다. 자연은 깨끗하고 솔직하고 순수했다. 오직 생존에의 욕구가 존재할 뿐 악의나 사기는 없었다. 그는 변호사를 시켜 로라가 증류소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생명은 빠른 속도로 꺼져 가고 있었다. 그분이 돌아가시면, 로라를 두 번 다시 글렌티란 증류소에 들여놓지 않으리라. 그는 신문을 집어 들고 경제면의 표제를 살폈다. 기사를 읽다 보니, 카메론 가의 새 안주인이 막후에서 증류소를 살린 실력자임이 드러났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역사는 항상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글렌티란은 야비한 농간과 술수를 부린 대가를 치렀지만, 저는 그들에게 이미 획득한 글렌너드 주식을 갖고 있으리란 충고하겠습니다. 그들이 최근에 글렌너드 증류소에 쏟은 돈보다 더 많은 배당금을 받게 될 테니까요. 우리의 새로운 아시아 영업 회사는 글렌티란의 미국 및 유럽시장에 맞서 경쟁할 것입니다. 그러니 몸조심하세요."
로버트는 신문을 던져 버렸다. 새로운 카메론 부인은 건방지고 뻔뻔스러웠다. 마치 마조리처럼. 갑자기 그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열망과 함께 박탈감이 솟았다.
마조리는 일찌감치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몸매의 선을 드러내는, 디오르의 실크 드레스에 맞춰 커다란 흑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를 달았다. 몇몇 사업상의 지인을 초대한 첫 만찬 파티에 죠와 베로니크도 오기로 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아침에 웨스턴 군도로 긴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죠의 말에 따르면 그들 부부는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에 이번 휴가를 통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모색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녀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문을 읽었다. '글렌너드 증류소, 인수에 박차를 가하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기사를 읽었다. 6개월 전 그들이 공동 회사 설립 서류에 토하라의 서명을 받아 온 이래, 경제와 언론계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토하라는 향후 5년 동안 최소한 3백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고, 그 첫 신호탄으로 올해 백만 달러를 지원했다. 글렌러드의 아시아 영업은 예상 이상으로 순항이었고, 토하라는 크게 기뻐하며 위스키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올해 백만달러를 더 투자할 생각이었다. 후에 인버 아시아 사는 미국으로 시장을 확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은행 융자금의 이자를 갚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과 실수입이 들어오기까지 최소한 5년 동안 글렌너드의 위태로운 경영 사정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에 인수한 로우랜드의 작은 정류소 덕분에 고품질의 원액 위스키를 토하라 상에게 공급할 수 있으리라.
인터폰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맙소사, 벌써 일곱 시야?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라나가 인터폰을 받고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현관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죠의 최신 자동차인 은회색 롤스로이스가 현관 계단 아래 섰다. 마조리는 허둥지둥 마중하러 나갔다. 죠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라나를 덥석 안고 한 바퀴 돌렸다. 하지만 그 행동은 실수였다. 베로니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기 때문이다. 라나는 그에게 찰싹 붙어 깔깔거리며 양손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 선물을 찾았다. 결국 그가 고개를 흔들며 야옹거리는 장난감 고양이를 꺼냈다.
"고마워요, 조. 정말 생각이 깊으시네요."
마조리는 대책이 없다는 듯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조와 베로니크 부부에게 침울한 분위기를 차가운 오로라처럼 풍겼다. 그녀는 두 사람 모두에게 키스하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마조리, 아주 행복해 보이는데."
죠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비참해 보였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주일 전에 런던에서 그와 함께 한 간단한 점심으로 충분치 않아. 베로니크는 금속 장식이 달린 멋진 검정색 드레스를 갖춰 입었다. 그녀는 거실 문간에 서서 오만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정리가 덜 되었군요?"
그녀는 섹시한 프랑스 억양으로 거드름피웠다.
"다 끝났어요."
마조리는 차갑게 대답했다. 베로니크는 집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평균보다 넓고 거실은 크고 푹신푹신한 긴 의자와 꽃, 양탄자와 쿠션으로 장식되었다. 하지만 책과 잡지. 신문들이 탁자 위에 수북했고 소파는 고양이 털투성이었으며 새 위스키 라벨 디자인이 널려 있었다. 어휴! 정리한다는 것을 깜박 잊었네. 쿠션과 장남감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새롭게 한 식구가 된 늙은 고양이 스카시가 편안한 의자에서 졸고 있었다. 라나의 인형들이 벽난로 앞을 뒹굴었다.
"저놈을 어디서 데려왔소?"
죠가 고양이를 가리켰다.
"그냥 눌러앉았어요. 창문으로 식료품 실에 들어왔다가 현행범으로 잡혔는데 통 가질 않아요. 저놈이 티비와 싸우는 통에 엄마는 질색을 하세요."
"영리한 고양이로군! 보통 드센 놈이 아니겠는걸. 저 찢긴 귀와 상처 자국 좀 봐, 싸움깨나 했겠어. 이름을 지어 줬소?"
"프라이드예요. 난 냄새를 참을 수 없었지만 해미쉬가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는 자기가 예민하지 않다는 걸 몰라요."
그녀는 작게 덧붙였다.
"그에게 말하면 안 돼요."
"라나는 좋아 보이는데."
"네. 저 아이는 해미쉬와 단짝이에요."
그녀는 베로티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이곳을 좋아한답니다. 전에 와본 적이 없지요? 참 안타깝네요. 우리는 주일을 런던 아파트에서 주말을 이곳에서 지내요. 일이 끊이질 않아요."
베로티크는 창가로 다가가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지루하고 불행한 표정은 해미쉬를 발견한 순간 눈 녹은 듯 사라졌다. 그는 허리에 수건 한 장만 감은 맨몸으로 호수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어떤 그리스 조각도 그보다 더 우아하고 남성적이지 못하리라. 베로니크는 먹이를 앞에 둔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그 황금빛 육체를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해미쉬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아, 안녕하세요, 베로니크, 그리고 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난 오늘 늦게까지 일해서 수영으로 피로를 풀어야 했어요."
그는 창문 아래에 서서 베로니크에게 윙크했고 베로니크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오고 간 거지? 마조리는 불같은 질투를 느꼈다.
"다른 손님들을 몇 시에 오기로 했소?"
해미쉬가 소리쳤다.
"30분 내로요. 서두르세요! 저녁은 8시 30분이에요."
"거기에서 음료수를 할 거요?"
"서재에서 할까 해요. 그리고 식당으로 갈 거예요."
"잘 생각했소."
그가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 왔다.
죠는 백만장자가 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브라이언 퍼니하우의 '트랜짓' CD를 샀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는 얼른 곡을 틀고 음악 감상에 심취했다. 해미쉬는 거실로 들어와 베로니크를 한쪽 긴 의자로 이끌었다. 그들은 고개를 맞대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가끔 숨죽인 웃음을 터뜨렸다. 마조리는 뚱하게 앉아 있었다. 흥! 그의 변화는 놀라웠다. 이제 더 이상 풀죽은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발을 질질 끄는 대신 똑바로 서서 힘차게 걸었고 여성에게 스스럼없이 대했다. 지금 그를 향한 욕망이 속았다. 그녀는 위안을 바라며 그에게 눈을 떼지 않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베로니크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 새로운 오페어 인 스웨덴 출신 그레타가 나타났다. 라나는 해미쉬에게 달려가 안겼다.
"날 사악한 마녀로부터 구해 주세요."
"버릇없이 굴지 말아라, 라나."
마조리가 야단쳤다.
"내가 너라면 그녀를 얼른 따라가겠다."
그레타가 아이에게 밤인사를 시키자 죠가 농을 걸었다.
"정말 대단한 미녀야!"
"누구? 그녀? 난 몰랐는데."
"아, 마조리. 지금 농담하는 거요? 그녀는 틀림없는 할리우드의 여배우감이야."
마조리는 전율을 느꼈다. 왜 그레타의 미모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리고 왜 해미쉬에게 마음을 놓았을까? 그녀는 그레타의 꿀 같은 금발과 커다란 푸른 눈동자, 나긋나긋한 몸매를 주의 깊게 살폈다. 죠의 취향에 딱 들어맞아. 하지만 해미쉬에게는? 갑자기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적으로 보였다. 손님들이 속속 들이닥치자, 마조리는 불안을 지워 버리고 여주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24명의 손님에게 만찬을 베풀기는 처음이었지만 놀랍게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지방 연회 업자들이 만찬 30분 전에 음식을 가져왔다. 시중 준비를 갖춘 웨이터들과 긴 떡갈나무 식탁, 펄럭거리는 촛불과 불을 지핀 벽난로 등 식당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잠시 후 그레타가 자리를 함께 했고 죠는 좌석을 재배치하여 그녀를 옆에 앉혔다. 저 뻔뻔스런 배짱하곤! 마조리는 화가 났지만 공석에서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죠는 온정성을 그레타에게 쏟았다. 마조리는 무시당한 베로니크에게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저 프랑스 여자는 처음부터 돈만 밝혔고 그걸 충분히 향유했다. 죠는 특허 낸 벽돌 청소 아교를 전 세계에서 상품화시켜 떼돈을 벌었고 증권 거래로도 한몫 잡았다. 그들은 템스강 옆에 거대한 저택을 마련했지만 그곳에 머무는 대신 제트족의 족적을 따랐다. 스키, 런던 사교계 행사, 사냥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일류 연주회를 쫒아 다녔다. 그리고 집에 머무르는 동안 유명 인사들과 파티를 즐겼다. 그가 그런 생활을 어떻게 견딜까? 조심스럽게 그를 살펴본 그녀는 그가 참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만찬이 반쯤 진행되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그레타가 문득 창문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손님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에서 라나가 한 손으로 발판을 잡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해미쉬가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달려가 창문을 열고 라나를 잡았다.
"이제 손을 놔라. 내가 널 잡았어."
라나는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발판을 놓았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마조리가 안도의 눈물을 터뜨렸다. 라나는 엄마의 목에 팔을 감고 진정시키려 했다.
"엄마 아빠가 날 잡을 줄 알았어요."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 비난에 찬 시선을 그레타에게 던지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항상 날 가둬 놔요. 난 그게 싫어."
"그녀가 누구니, 혹시 마녀?"
해미쉬가 물었다.
그레타가 분노를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라나를 침실로 데려갈게요."
"내가 라나에게 이야기책을 읽어 주겠소."
죠도 얼른 따라 일어나며 덧붙였다.
"금방 돌아오겠소.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지 말아요."
흥, 저 두 사람은 라나의 방에 있는 동화책을 다 읽을걸. 마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11시가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떠난 다음에야 죠가 겸연쩍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레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코냑에 잔뜩 취한 베로니크가 의자에 몸을 던지고 눈물을 터뜨렸다.
"내가 원한 것은 이게 아냐! 죠는 음악과 발명품에만 마음을 쏟아요. 그에게는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 마조리, 난 당신이 부러워한다는 게 믿어져요?"
죠는 음악 소리를 높여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베로니크를 봤다. 그가 아내에 대한 마음을 이미 접었구나. 마조리는 그를 곁눈질하며 낌새를 눈치챘다.
"우리가 휴가를 같이 지내봐야 별 소용없을 거요. 그냥 관두는 게 어떻소? 런던으로 돌아가서 변호사를 만나러 갑시다."
그가 차갑게 제안했다. 베로니크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짐을 꾸려 떠날 준비를 마친 베로니크가 비극적인 표정으로 홀에 멈추어 섰다.
"잘 있어요, 해미쉬."
그다음에 마조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송구영신이라. 죠는 나중에 큰코다칠 거야."
해미쉬가 깜짝 놀라 한마디 했다.
"이게 웬 난리람. 우리의 첫 번째 만찬 파티가 엉망이 되었어요."
"음식은 맛있었소."
해미쉬가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라나는 왜 위험한 짓을 자꾸 하는 걸까? 꼭 우리를 시험하는 것처럼 말이오. 저 아이는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고, 구해 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해. 죠는 빨리 작업을 마감 짓고 발판을 치워야 해. 그리고 내일 당장 라나의 방 창문에 철책을 설치하고 자물쇠를 없애 버리겠소. 다시는 그레타가 아리를 가두지 못하게 말이오. 아무래도 당신이 그녀를 내보내야 할 것 같소. 그녀는 아이를 맡기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냐."
그 순간 그녀는 해미쉬가 그레타의 미모에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아침에 그녀가 자진해서 사표를 낼 거예요.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녀와 죠는 다른 계획을 세웠을걸요."
데릭 올리버는 항상 마조리 하디를 경계했다. 그녀는 영리하고 초능력에 가까운 직관을 타고났지만 장미처럼 가시투성이였다. 조금 무시를 당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반격에 나섰다. 또한 그가 만난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기도 했다. 다른 시대였다면 저 불꽃 같은 머리칼, 흠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커다란 초록 눈동자로 전설적인 미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요즘은 다들 가수나 영화배우들에게 정신이 팔려 진짜 미인을 못 알아본단 말야. 저 미모가 일 중도자 카메론 부인에 의해 썩고 있어. 올리버는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는 평소처럼 정시에 나타났다. 최근 동양에서 구입한 듯한 암록색 실크 드레스 위에 잘 어울린 모든 초록색과 검정색 줄무늬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그에게 감사함을 표한 적이 없었다. 적다고 할 수 없는 수고비를 즉각 지불한 것으로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의 과도한 사업적인 열의에 호기심을 품어 왔던 그는 오늘 작은 술책을 부렸다.
"어서 앉으십시오, 카메론 부인. 커리를 하시겠습니까? "
그는 비서를 불렀다.
"저, 당신의 숙적 로버트 맥라렌이 죽음의 사자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실종되었답니다. 마르가리타에서 솔라노까지 현지 경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카메론 부인은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과 함께 앉은 채로 기절했다. 눈이 감겼고 창백한 얼굴에 진땀이 솟았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 올리버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부축했다. 그는 비서에서 찬물을 가져오라고 소리 질렀다. 잠시 후 그녀가 물을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실종되었다가 몇 시간 불시착했지만, 다행히 그 주변에 관광지로 개발 중이던 인디언 부락이 있었답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밀림을 살리기 위한 회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몇 해 전에 그린피스에 가입했거든요."
올리버는 흥미진진하게 고객을 주시했다. 그래, 사업 이상이었구나. 그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그는 두 번째 방문을 상기했다. 그 당시 그녀의 태도가 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글렌티란의 회장 로버트 맥라렌의 사생활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해 주세요."
그녀는 거만하게 말했다.
"저는 개인 탐정이 아니라 사업 조사관입니다. 때문에 사업과 관계되지 않은 일은 제 영역 밖입니다."
"그의 사생활은 우리 회사의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가령 맥라렌 씨가 셀비 양조 그룹의 의식과 결혼을 한다거나, 심장 발작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이 부친이 최근에 돌아가겠으니 요즘은 맥라렌 씨가 아니라 로버트 경입니다. 보고서는 당신의 부근이 아니라 당신에게만 올려야 되겠지요?"
"당연해요. 재가 당신의 고객이잖아요."
그녀의 톡 쏘는 말과 달리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모습에 발끈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을 끼며 반격할 시간을 벌었다.
"당신은 그럴 듯한 직함을 갖고 있지만, 우리 동네에선 스파이를 스파이라고 불러요. 돈을 받는 이상 누구를, 혹은 뭘 염탐질하든 상관없잖아요?"
이 여자가 감히! 그는 당시의 분노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미 예전에 그녀를 용서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잘 됐군요! 그럼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로버트 경은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습니다. 초기 몇 년 동안 어려운 고비를 넘긴 지금은 그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동양 시장을 공략하는 것처럼 그분은 미국을 장악했어요. 믿을 만한 경영인들 덕택에 본인은 사업보다 취미에 없는 일로 생각하는지, 지난 3년동안 주로 해외의 환경 문제에 전념했습니다."
"좋아요."
그녀는 아마존 인디언에 대한 책과 작은 시집을 출산했습니다. 요즈음 '내셔널 지오 그래픽'지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지난봄 24시간 백로 보호팀을 조직했고 하이랜드 숲의 늑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는 로버트가 조직했던 '환경' 보호 계획 목록을 쭉 읽었다.
"카메론 부인, 이제 사업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이것은 글렌티란의 다음 시즌 광고 계획입니다. 가히 혁명적이지 않습니까? 이 안을 염두에 두시고 부인 회사에의 광고 계획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말할 나위 없이 이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고 서류철을 챙겼다. 그리고 쇼핑보다 심각한 일은 없다는 듯 가벼운 태도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20년만 젊었다면 그녀를 어떻게 해봤을 텐데."
올리버는 바보처럼 넋을 잃었다. 마조리는 빛나는 태양의 온기를 즐기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해미쉬가 런던에 도착했을까? 그럴 거야. 그녀는 충동적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시 런던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을 때 해미쉬가 응답했다.
"여보, 당신이 상경해서 정말 기뻐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나도 당신이 보고 싶었소. 5분 전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더군. 다들 식사를 하러 간 모양이야."
"난 나이트 브릿지의 '굿엇스"에서 죠와 점심을 하기로 했어요. 우리와 합석하시는 게 어때요?"
"글쎄"
"부탁이에요, 해미쉬"
"그럼 좋소, 금방 갈 테니까 내 몫으로 가벼운 음식을 시켜놔요."
죠는 신수가 좋아보였다. 항상 앞서가는 패션 감각과 더불어 장발과 가무잡잡한 살색으로 여전히 두드러졌다. 오늘은 암녹색 셔츠와 멋진 양복 조끼를 갖춰 입고 있었다. 옷이 잘 어울리긴 했지만 약간 체중이 불어 보였다. 그는 한껏 들떠 있었다.
"이혼이 매듭되는 즉시 그레타와 나는 결혼하기로 했소. 축하해요."
죠가 말했다.
"축하해요. 그때가 언제일까요?"
그녀는 이미 반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다음 달 경에."
"맙소사, 불가능해요."
"우리 부부는 영국에서 결혼하지 않았소. 난 멍텅구리가 아니었거든."
"결혼할 때 이혼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인가요? 그 결혼이 오래가지 못한 것도 당연하네요."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니잖소? 뭐, 대부분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그럼 이번에는요?"
"이번은 진짜요, 마조리."
그는 눈을 빛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은 생전 처음 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인버레이드 장원에서 결혼 피로연을 열 수 있을까? 난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데."
"물론이에요, 죠."
그녀는 죠를 위해 한 번이라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그에게 너무 많이 받아만 오지 않았던가. 그녀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여전히 현금에 쪼들리는 통에 장원의 반을 폐쇄해 놓고 정기적으로 청소했다. 전에 빛을 보지 못했던 큰 무도회장을 제 시간 내에 장식할 수 있을 거야. 완벽한 피로연이 될걸. 그리고 5월에 다섯 살이 된 라나를 좋아할 거야. 죠는 다음 10분 동안 그레타의 미모와 현명함을 칭찬했다. 마조리와 두 달 동안 함께 생활했던 그 그레타와 동일인물일까? 그녀가 바뀐걸. 아니면 본바탕이 드러난 걸까? 해미쉬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여보, 여기예요."
그녀는 행복감에 전율하며 얼굴을 들어 키스를 기다렸다.
"좀 말라 보이는군, 해미쉬, 여전히 등산을 하나?"
죠가 말했다.
"마음만큼 자주는 못가요. 워낙 집에 미녀들이 많아서."
그는 마조리의 옆자리에 앉으며 농담조로 받아넘겼다.
"참! 마조리. 이것을 잊을 뻔했군."
죠가 대봉투 안에서 서류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나중에 ...... 봐요, 죠."
"지금 검토해 치웁시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1주일 전 죠에게 사람을 시켜 그렌티란의 미국 확장 계획과 판매업자의 재정상태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물밑공작을 싫어하는 해미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터였다.
"조금 있다가요. 당신 쪽 사람의 솜씨가 빠르군요."
"이번에는 특히 쉬웠소. 그가 그곳에서 일하는 여자를 알고 있었거든. 여기 그들의 다음 시즌 영업 전략이 있소. 이 서류가 해미쉬의 삼촌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보안을 철저히 해요."
"두말하면 잔소리예요."
그녀는 해미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잠깐만."
해미쉬가 끼어들었다.
"왜 이럴 필요가 있지? 우리 일은 잘되어 가고 있잖소. 두 회사가 공존할 수 있을 만큼 시장은 넉넉해."
"해미쉬, 전쟁을 기도 시작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에요."
마조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그들이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했으니, 이제 우리가 그럴 차례예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우리가 글렌티란을 차지하게 될 거예요. 약속드리겠어요. 이건 시간 문제라구요"
그는 그녀에게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호랑이 마누라! 당신은 복수할 능력도, 자신의 것을 지킬 능력도 충분히 갖췄소. 하지만 마조리, 글렌티란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은 품지 말아요. 이건 사업이오. 앤드류 삼촌이 비열하게 행동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업은 사업이라오. 인수나 합병은 일어나는 일이니, 당신은 상처 받고 모욕감을 느낄 필요는 없소. 여보, 사업에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아요."
"그럼요."
그녀는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배가 고팠는데."
웨이터가 참새와 샐러드를 들고 오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죠는 교활한 즐거움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장난꾸러기처럼 그의 입술에 불가해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해미쉬는 그 문제를 다시 꺼내지 않았고 그녀는 이 일이 곧 잊혀지리라 확신했다.
아름다운 가을 오후 하이랜드 게임이 지방 스포츠 클럽의 경기장에서 펼쳐졌다. 마조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각종 시합과 경연을 지켜봤다. 시선이 딸에게 닿자, 그녀의 안에서 자부심과 만족감이 솟았다. 라나는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 마조리가 염원해왔던 그 자리에 있었다. 믿지 못할 만큼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현금 압박 속에서도 카메론가는 차근차근 성장해갔다. 손대는 것마다 유리하게 돌아갔고, 그녀의 꿈이 실현된 것 이외에 생각지도 않은 보너스가 생겼다. 그녀는 해미쉬와 까무러칠 만큼 행복했다. 이유가 뭘까? 이것이 사랑일까? 그녀의 시선에 아름답고 용감하며 감수성이 강한 남자가 잡힐 때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슴이 뻐근하게 졸아들었다. 가끔 그녀는 온 세상을 새롭게 하고 눈에 덥힌 깍지를 벗겨내는 묘한 힘에 사로잡혀 평범 속에 빛나는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했다. 가끔 영혼 깊은 곳까지 열병에 걸린 기분이었다. 사랑이 그녀에게 방출되어 만나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들었고 그녀 역시 그들을 사랑했다. 사랑해서 해미쉬와 결혼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를 사랑했고 깊은 충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여기에 해미쉬와 그녀가 있었다. 이제 결혼 1주년을 맞은 그들은 진짜 한 가족처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안정되었다. 저쪽에 아빠와 엄마는 나란히 앉아 공작새처럼 자랑스럽게 손녀딸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나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새 카메론 킬트를 자랑했다. 6세 이하 스코틀랜드 전통 무용 경연의 우승에 도전하는 중이었다. 서서히 그녀는 행복한 상념에서 벗어났다. 우체국장인 쥬디 애플스웨이트가 왜 저렇게 잘난 척하며 무대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을까?
"신사 숙녀 여러분, 깜짝 놀랄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부드럽고 노래하는 듯한 인버네스 억양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로버트 맥란렌 경께서 이곳에 도착했어요. 그분은 최근에 세계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전력투구해 오셨습니다."
군중의 박수 소리에 그녀는 말을 끊었다.
"영광스럽게도 오늘 경연 우승자들에게 포상을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로버트 경."
마조리는 숨죽여 욕을 퍼부었다. 당장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로버트가 훤히 보이는 연단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모자 창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로버트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공포에 질렸다. 그가 라나 하디의 이름을 부르고, 그 숱 많은 검정 고수머리와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 그의 얼굴에 떠오를 표정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리고 로버트가 알아차린다면 해미쉬 역시 그럴 것이다. 그녀는 회람된 수상 명단을 쥐고 남몰래 '하디' 활자 부분을 박박 긁어 '타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통할 거야. 그다음 사람들 틈을 헤치고 연단에서 내려가 부모님 뒤쪽으로 돌아갔다. 해미쉬의 깜짝 놀란 표정은 상처받은 것으로 바뀌었다. 수상자들이 속속 호명되었다. 예년과 다름없이 글렌너드의 관리인 빌리 맥킨토쉬가 원목 던지기 부문에서 우승했고 몇몇 타자수들이 무용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하느님! 드디어 차례가 되었다. 로버트가 바뀐 이름을 읽느라 애를 쓰는 통에 순조롭던 진행의 흐름이 깨졌다. 그리고 익히 잘 알고, 한때 사랑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나 타비."
"내 이름을 잘못 불렀어."
라나는 잔뜩 분노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가, 어서 가렴......"
마조리가 딸의 등을 앞으로 밀었다.
"어서 가봐. 그가 널 부르잖니. 서두리지 않으면 너 대신 딴 사람이 받을 거야. 네 이름은 신경 쓰지 마."
라나가 계단을 뛰어오르자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킬트 치마와 레이스 블라우스 그리고 검정색 조끼를 갖춰 입은 아이는 인형처럼 깜찍했다. 로버트는 아이를 번쩍 들고 한 바퀴 돌리고 나서 양 뺨에 키스를 한 다음에야 상을 건넸다. 군중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로버트가 딸을 안은 모습을 보자, 마조리의 가슴이 터져 버릴 듯 아팠다. 원래 저렇게 되었어야 옳았는데.
"이제 내려가렴."
로버트가 라나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내 이름을 불렀어요. 난 타비가 아니요."
여기저기에서 껄껄 웃는 소리와 감탄사가 일렁거렸다. 로버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그럼, 네 이름이 뭐니?"
"엄마, 라나를 데리고 오세요."
마조리가 간청했다. 엄마가 소리 질렀다.
"얘야, 이리 돌아오너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의자에 발을 찍힌 패디용크가 크게 짖었다. 라나가 서둘러 돌아왔고 로버트는 다음 수상자를 호명했다. 이제 파이프 연주 차례였다. 갑자기 마조리는 사람들 너머로 로버트를 째려봤다. 그가 우리를 봤을까? 파이프 악단이 경기장을 한 바퀴 돌자 군중은 그 음악과 북소리, 그리고 일사불란한 행진에 이끌려갔다. 이만하면 충분해.
"엄마, 해미쉬를 데려오세요, 부탁이에요. 내가 아프다고 하세요. 제발 그를 데려오세요."
그녀는 라나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왜 집에 가는 거야?"
라나가 투덜거렸다.
"엄마, 난 가고 싶지 않아. 그네뛰기는 어떻게 해? 아직 아이스크림도 못 먹었잖아? 엄마가 약속해 놓구......"
즐거운 하루가 망쳐졌다. 해미쉬는 우울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양팔을 잡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라나가 오늘은 화를 내며 조부모에게 달려갔다. 심지어 패디용크 마저 풀이 죽어 다리를 절뚝거렸다.
"해미쉬,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마조리가 그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그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표현하는 것은 당신답지 않은데. 왜 하필이면 오늘 이러는 거지?"
"그러면 안 되나요?"
그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횡설수설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녀가 말을 진정했다.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했지만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알았다는 뜻이에요."
"고맙소."
그는 우거지상으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가 더 그럴 듯한 말을 찾으려 애쓰는 순간 라나가 다시 달려왔다. 그들은 차에 도착했고, 이제 변명할 기회를 놓쳤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사타구니에 친밀한 통증을 느끼고 서둘러 윗층으로 올라갔다. 이 불편함은 월경을 의미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부부의 노력에도 불구라고 아직 임신이 되지 않다니. 그들은 만족스런 성생활을 영위했고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이가 서지 않는 걸까? 그녀는 해미쉬의 아기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러면 그들의 행복이 완벽하게 될 것 같았다.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이유는 음식이나 치장 등 축제 준비에 막중한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야. 다음 달에는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1주일 후 마조리는 런던의 개인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대기실 안은 임산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몇 가지 검사를 거친 후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담당 의사와 면담했다.
"당신의 일상생활에 대해 말해보세요."
자비로운 눈매를 한 여의사 팻 매티슨이 말했다.
"정신없이 바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런던에서 지내고, 금요일 오후에 남편과 함께 인버네스에서 주말을 보내요. 그곳에서 승마. 원예. 하이킹 등으로 시간을 보내요. 토요일 밤마다 지방 호텔에서 춤을 추거나 몇몇 지인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열어요. 또는 부모님들을 모시고 마을을 나가 외식을 해요. 토요일 아침나절은 항상 증류소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주중에는요?"
"힘에 부치는 일과지만 감수할 가치는 있어요. 월요일 아침 일찍 난 비행기를 타고 상경해요. 해미쉬는 가끔 스코틀랜드에도 있고, 런던에서 지내기도 해요. 금요일에는 런던 아파트를 정리하거나 몸치장을 하곤 하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켄싱턴에 위치한 글렌너드 영업본부에서 보내요. 해미쉬가 곁에 있을 때 점심시간에 쇼핑을 해서 퇴근후 음식을 만들어요. 너무 피곤해서 베개에 머리가 닫자 마자 잠에 골아 떨어지기 일쑤랍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나누지 못하겠군요?"
"아니에요."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해미쉬가 보통 새벽 5, 6시경에 저를 깨워요. 그 후에 시간에 쫓겨 샤워와 출근 준비를 초특급으로 해야 해요. 어머! 선생님께서 제 생활을 속속들이 다 아셨네요."
그녀는 글렌너드 영업부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역할을 축소해서 전했다. 사실상 회사를 운영하다시피 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전문가에게 상담을 의뢰했다. 죠 역시 많은 도움을 줬다. 그녀도 자신의 업무량이 많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일을 사랑했다.
"꽉 짜여진 일정으로 육체적인 피로 이외에 정신적인 긴장감에 시달리겠군요?"
"그런 셈이에요."
"네, 알만 합니다. 카메론 부인, 당신은 육체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스트레스 상태에 있어요. 일을 줄이고 주중에 휴식과 수면시간을 늘이도록 하세요. 그리고 몇 달만 더 기다려 보세요. 그러고도 6개월이나 1년 후에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남편과 함께 오세요. 부인은 건강하고 이미 한 자리를 두셨으니 걱정을 하시기에는 시기상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후계자를 낳아야 해요. 몇 명의 아기를 낳아야만 남아를 얻을 수 있잖겠어요? 그러니 지금 임신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매티슨 의사는 동정적으로 미소 지었다.
"우리는 도움 없이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카메론 부인."
인생은 엿 같아. 마조리는 눈물 자국을 닦으며 택시를 잡았다. 이 세상 무엇보다 임신을 두려워 했을 때는 한 번에 덜컥 아이가 들어섰는데 지금처럼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다니. 엄마는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기겠지. 켈트족의 후예답게 엄마는 온갖 미신을 신봉하였고, 악마가 어둠 속에 숨어 방심 상태를 노린다고 믿었다. 즉, 승승장구는 몰락을 낳고 자만심은 문제를 부른다는 식이었다. 행운을 지키는 길 입 다물고 자중하는 방법이 최고이며, 알이 부화하기 전에 병아리 수를 세지 말라고 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자비로우신 주님의 사랑을 청했지만, 그 외에는 고대의 심술 맞은 잡신들을 공경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더했다. 하지만 진짜 그런 존재들이 있을까?
"기운 내, 마조리. 아니면 스톤헨지에 살아 있는 재물을 받칠래?"
그녀는 자위했다.
한 달 후 죠의 이혼이 매듭지어졌다. 10월 하순 어느 날 오후 4시, 그와 그레타는 카메론 일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버네스 등기소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고 인버레이드 장원으로 향한 차량 행렬과 자욱한 먼지 틈에 껴서 생각했다. 라나는 주름이 잔뜩 잡힌 핑크색 화관동자 드레스를 입고 깡총거렸고 아빠가 만든 화관을 성급하게 벗어 던졌다. 꽃으로 뒤덮인 무도회장은 아름다웠다. 바닥은 티끌 하나 없이 반들거렸고 식탁을 방 외곽 쪽에 집결되어 중앙에서 춤출 수 있도록 배치했으며 식탁 사이에는 빠짐없이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흥겹게 춤추고 축사와 건배를 즐기며, 다섯 가지 코스의 요리를 먹었다. 엄마는 임시 직원을 고용하여 직접 요리와 서비스를 총괄 지휘했다.
"엄마는 연회 사업으로 한 재산 모을 수 있을 거예요."
마조리가 부엌으로 들어가 말을 건넸다.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퍼머한 엄마의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난 안돼, 샥시. 재주는 모르겠지만 야심이 부족하거든. 그게 너와 차이점이란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마조리는 '샥시'라는 표현을 심사숙고했다. 엄마가 몇몇 현지 친구분들에게 여기 사투리를 배웠나봐.
"곧 우리와 어울리실 거지요? 밤새도록 여기에 계시면 안 돼요. 아셨어요?"
"그래, 곧 가마."
"오늘 끝내주게 보이시는데요."
마조리가 농담을 걸었다. 하지만 엄마는 귀담아듣는 대신 브랜디 소스를 맛보고 약간 찌푸렸다. 마조리는 서둘러 무도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레타는 후광을 발하는 것 같았다. 플레어 스커트와 진주 장식이 달린 상의가 한 벌인 흰색 정장은 그녀의 매력을 한껏 빛내 주었다. 금발을 어깨 위에 가지런히 늘어뜨리고, 투명한 피부를 죠의 선물인 값비싼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치장한 터였다. 흥청거리는 무도장을 가로지를 때 마조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다. 본능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해미쉬의 시선을 포착해냈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 몇 주동안 그는 서먹하고 종잡을 수 없이 행동했다. 이제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가서 달구경을 합시다."
청명하고 선선한 밤이었지만 멀리 구름이 몰려왔다. 낙엽 밟히는 소리와 함께 촉촉한 대지와 신선한 잔디 내음이 풍겼다. 숲에 걸린 달이 온 세상을 신비로운 천상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조리는 고개를 그의 가슴에 기대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러다가 진저리를 치며 그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자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뭐가 잘못되었나? 당신은 승리감을 느껴야 마땅해 평소처럼 놀라울 만한 성공을 거뒀잖소."
"네, 그래요."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소."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저......"
그녀는 한숨을 쉬고 그의 뺨에 키스했다.
"음, 우리도 이럴 걸 그랬어요. 오렌지 꽃. 신부 들러리. 색종이 등등 결혼식을 제대로 할 걸 그랬나 봐요."
"당신이 성대한 결혼식을 원치 않았잖소. 내가 사정을 했건만 당신은 반대했어."
"네. 그 당시에 난 낭만적이지 않았거든요. 당신이 나을 많이 바꿔 놓았어요."
그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하게 물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나를 사랑에 빠뜨렸어요."
"그럼, 처음에는?"
초조하게 그녀는 그이 팔을 어루만졌다. 어서 이 밤이 지나고 잠자리에서 사랑을 나눴으면 좋으련만.
"처음에 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어요. 이제 당신은 나에게 온 세상을 의미해요."
"우리가 결혼할 무렵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물고 늘어졌다. 묘한 전율이 그녀를 관통했다.
"추워요. 그만 안으로 들어가요."
"안돼.'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강철 수갑 같았다.
"우리는 안에 있어야 해요. 어서요, 해미쉬"
"안돼. 여기 있어요. 왜 나와 결혼했소, 마조리?"
"이 바보."
그녀는 짐짓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야 수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온 이유 때문이죠. 사랑 말이에요."
그녀는 거짓말을 증오하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나에게 청혼했으니까, 당신이 나를 필요로 했으니까, 그리고 난 당신이 도전을 이기길 바랬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이겼어요. 이만하면 됐어요?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는 불안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손에서 팔을 뺐다.
"당신은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군. 뭘 두려워하는 거지?"
그는 그녀를 더 가까이 잡아당겼다. 잠깐 그의 뺨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쉬었지만, 곧 그는 한숨을 쉬고 그녀를 위로 밀어냈다. 그리고 계단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상처받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재빨리 허리를 숙인 그녀는 그의 뺨과 이마 그리고 턱에 가벼운 키스를 쏟아부었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당신은 날 이용했어."
해미쉬는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글렌티란에 대한 당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왔소. 사업적인 범위를 초월한 승리에 대한 그 집착을 말이오. 그래서 조사를 해봤소. 당신은 로버트 맥라렌을 망하게 하려는 수단을 얻기 위해 나와 결혼할 거야. 그는 라나의 아버지로서 당신들 두 사람을 내버렸어.“
그녀는 그에게 매달렸다.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이 순간이 드디어 왔구나. 거가 발각되
었다는 부끄러움은 해미쉬의 상처에 대한 비통함에 비하면 새발에 피였다. 그는 그녀에게 인생의 등불이자 삶의 모든 것이었다.
"해미쉬"
그녀가 간청했다.
"우리가 함께 이룬 모든 것을 생각해 보세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생각하세요. 우리가 거둔 성공을 잊지 마세요. 난 예전에 신께 이렇게 약속드렸어요. 제 사랑은 저를 사랑하는 남자의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남은 사랑을 다 바치고 그를 돌보고, 그의 가문과 사업을 일으키고, 그를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절대로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테니, 저를 도와주소서"
"하지만 지금 난 상처를 입었소. 그걸 모르겠소? 사랑이 아니라 이용당했음을 안 지금, 지난날 아름다웠던 사랑의 순간들을 고쳐 써야 한단 말이오. 당신은 로버트를 공격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글렌너드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다리를 벌린 거야."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절대로 복수가 아니에요. 라나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서였어요. 이해 못 하시겠어요? 난 항상 당신을 내 방식대로 사랑해왔어요. 당신은 나에게 절실한 사랑을 가르쳐줬어요. 그게 전부예요."
그는 고개를 돌리고 미소지었다. 가슴이 찢어질 만큼 슬픈 미소였고 그의 뺨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알고 있고. 지금은......"
"왜 현재에 만족할 수 없는 거죠?"
그러나 그녀의 애원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 그의 등 너머로 달빛에 젖은 검은 호수와 더불어 미풍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가 보였다. 해미쉬의 세계는 저 달처럼 차가웠다. 냉담하고 초연하게 세상을 흑과 백, 선과 악으로 이분하는 그의 눈에 그녀는 성녀나 악마여야 옳았다. 그리고 그녀는 제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이 날 이용했던 고통을 참을 수 없소.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사랑 때문에 행했다고 믿게 했고, 난 당신처럼 아름답고 영리한 여자가 나에게 빠졌다고 생각하며 황홀경에 빠졌고. 게다가 당신은 모든 재산을 던져 내 사업을 구하기까지 했소. 정말 대단한 도박이었소. 난 당신의 사랑과 충성과 용기를 경외했소. 그리고 ...... 난 당신에게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고, 마조리. 당신은 사람을 조종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오. 그리고 당신과 라나를 보아왔소. 왜 당신과 장인 장모님은 라나를 입양했다고 거짓말을 했지?"
"이해하실 텐데요. 라나는 사생아라는 치욕을 당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정말 그 아이를 입양했고, 그녀가 이민 간 먼 친척의 딸이라는 거짓말을 지어내셨어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편이 더 좋아요."
"아냐, 마조리 그렇지 않소. 당신은 라나에게 진실을 고백해야 하오. 당신은 당신 자신마저 조종하니? 나에게 솔직해질 수 없는 거요? 나를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쇄뇌한 것은 아니오? 그도 아니면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기회를 포착한 거요?"
"난 당신에게 저항할 수 없었어요. 기억하시잖아요? 제발, 해미쉬, 당신과 나를 처벌하는 짓은 그만하세요.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어요."
"당신에게는 아니었소."
"하지만 우리는 잘살아왔잖아요?"
"그래, 당신의 계획은 잘 들어맞았소. 그리고 당신은 힘든 노력에 대한 보너스까지 얻었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으니."
"그래서요....? 내 사랑이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나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아니! 당신은 최고야, 마조리. 난 일의 내막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소. 그저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확신했었소. 그러다가 지난달 레스토랑에서 죠의 눈에서 진실을 읽었소. 그는 슬프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더군. 그다음에 하이랜드 게임에서 당신의 돌발적인 행동에 난 뒷조사를 시켰던 거요. 그래, 이 모든 것이 당신의 공이었어. 당신은 스스로를 팔아 이것을 얻었던 거요. 마조리, 난 혼자 생각하고 싶소."
손에 잡힐 듯 선명한 두려움이 수의처럼 그녀를 에워쌌다. 꿈을 꾸는 것처럼 그녀는 무도회장으로 돌아와 춤추고 이야기하고 파티를 준다던데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지옥이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어. 하지만 왜 끝없는 어둠의 나락 속에 빠진 기분이 드는 걸까?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어왔다. 창문 밖으로 먹구름이 달을 가리는 광경을 본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첫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다. 그녀는 도착해 힘껏 외쳤다.
"해미쉬, 해미쉬"
나무들이 신음했고 바람은 그녀를 날려 버릴 듯 기세를 더했으며 비가 본격적으로 내렸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안은 텅 비어있었다. 해미쉬가 돌아올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거는 과거야."
그녀는 중얼거리고 몸을 말린 후 파티에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밤 동안 해미쉬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해미쉬는 어두운 밤을 헤치고 인버네스 공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등잔 장비를 꾸려왔다. 그녀에게 도망쳐야 해. 남편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고, 그의 결혼은 사업적인 전략으로 변질되었다. 그녀는 겉과 속이 다른 여자였다. 그는 이 넓은 세상에서 그녀만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유일한 사람으로 생각해왔다.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생각이었다. 평생 그의 것을 빼앗으려는 가족들에게 시달려온 그는 마조리만은 다르다고 상상했었다. 파산 일보 직전인 증류소와 다 쓰러져가는 저택 등.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시점에서도 그는 그녀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고, 그녀는 그 도구를 갈고 닦아 날카롭게 연마했다. 얼마나 인내심 많은 여자인가. 그 얼마나 강한 의지와 결단력인가. 그녀의 마지막 애원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가 머무른다면, 그녀는 그에게 억지로 잊게 만들도록,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고, 처음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고 설득시킬 것이다. 그녀는 그를 지배하는 힘을 지녔고, 지금 당장 그는 그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자와 여자의 주도권 싸움과 추한 현실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한군데였다. 하늘에 맞닿는 선봉의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마조리는 그로부터 닷새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전화만 기다렸다. 해미쉬가 나를 그리워할 거야. 암, 그렇고말고, 곧 전화를 걸어야 올 거야. 그렇게 매초 매분을 자위했지만 시시각각으로 덮쳐오는 불길한 예감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버네스의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해미쉬가 스위스에서 등반 중 실족해서 사망했으니, 마조리에게 시체를 확인하고 본국으로 데려오라는 연락이었다.
장례식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마조리의 귀에는 해미쉬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당신이 최고야, 마조리. 그래, 당신은 날 사랑하지만 이용해 왔던 거야. 당신은 자신을 팔아서 이 모든 것을 손에 넣었소."
청명한 햇살 속에서 그녀는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그의 말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리라. 그녀는 방어적으로 눈 만 깜박거리며 서서 과거 속에서 못 박혔다. 닷새 전, 마조리는 스위스 가서 해미쉬의 시체를 확인했다. 한 젊은 경찰이 그녀를 영안실로 안내해 냉동칸의 긴 서랍을 열고 수의를 제쳤다. 해미쉬의 만신창이 된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미래의 약속으로 저 상처를 씻고 과거를 묻고 싶었다. 절망에 무릎에 꿇고 여전히 너무나 사랑하는 저 육체에 매달려 영원히 놔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은 논의의 여지가 없었다.
"해미쉬 칼륨 토하라 카메론의 시체가 맞습니까?"
담당 경찰이 프랑스어로 물었다. 슬픔과 죄책감과 아울러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비현실성에 몸이 굳은 그녀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 해미쉬,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죠? 이 참담한 마지막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마디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그가 단 5분만 살아 돌아와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면 이별을 참을 수 있으련만. 마조리는 절망한 채 교회 밖에 서 있었다. 문득 엄마가 그녀의 팔을 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바바라가 다른 쪽 팔을 부축했다. 그들은 다 함께 장지로 향했다. 라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칭얼거리더니 결국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집에 보내버리겠다는 엄마의 엄포에 질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라나의 슬픔에 마조리의 죄책감이 더 짙어졌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이 말이 무슨 뜻일까? 그녀는 땅속으로 내려지는 해미쉬의 관을 무표정하게 보며 곰곰이 상념에 잠겼다. 해미쉬의 영혼이 이 자리에 있을까? 그는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추억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회사 접수계에서 겸연쩍게 웃던 해미쉬.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이자 사랑으로 눈을 빛내던 해미쉬. 라나를 등에 업고 아빠와 다트놀이를 하던 해미쉬. 그때 그녀가 사랑에 빠졌던 걸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얼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1초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그녀의 생각은 광속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다. 표현은 달랐지만 그 내용은 오직 한가지였다. 해미쉬가 산에서 실족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몸을 던졌을까? 왜 몸에 줄을 매지 않았을까? 알 방법이 묘연한 이 질문들은 그녀를 평생동안 따라다니며 고무하리라.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두꺼운 검은 베일 속에서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유감이에요."
"감사합니다. 베아트리스 숙모님."
마조리가 속삭였다. 노부인은 지팡이를 짚고 차로 향했다. 더 이상 서로 나눌 말이 없었다. 죤 에스킨이 앤드류 삼촌과 그이 아들 이안과 함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저 악당이 삼총사들이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어."
그녀는 바바라에게 소리죽여 말했다.
입관이 끝나자 다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물기어린 시야에 커다란 그림자가 뛰어 들어옴과 동시 억센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유감이오, 마조리."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는 앤드류 삼촌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표정에는 걱정과 염려의 빛이 어려 있었다.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그녀는 여리게 미소지었다.
"해미쉬는 아슬아슬한 삶을 좋아했소. 산이 아니었다면 술이 그를 죽였을 거요."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장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악의적인 모함이에요.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더 이상 은요."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조리, 이런 때에 당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지만, 가능한 한 빨리 인버레이드 장원에서 개인 소지품을 꾸려나가 주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그 의기양양한 푸른 눈 속에서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좋아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이제 내가 적합한 후계자요. 우리 일을 질질 끌지 맙시다. 난 이런 슬픔을 겪은 당신에서 소송을 걸고 싶지 않소."
그는 해미쉬의 무덤 쪽을 가리켰다.
"아니에요."
말도 안 돼! 미쳤어!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힘들게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모든 재산을 증류소와 저택에 투자했다. 가진 것 모두를.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그녀는 아빠가 앤드류를 밀쳐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나쁜 놈! 썩 꺼지지 않으면 네 콧잔등을 모두 뭉개줄 게다. 여기서 없어져...... 당장. 널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그녀에서 몰아닥쳤다. 수치심. 분노. 죄책감에 이어 아빠에 대한 따뜻한 감정. 그리고 공포가 찾아왔다. 아빠가 앤드류의 말을 들었을까? 그녀는 앞으로 쓰러졌다. 바바라의 비명소리가 들여왔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어두워졌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너무 이상했다. 그래, 나도 죽어가는구나. 제발 그랬으면. 그녀는 아빠의 손을 쥔 채 집에서 정신을 차렸다.
"얘야! 얘야!"
그녀는 비탄의 눈물을 감추려고 눈을 감았다.
"용기를 내라. 그래야 내 딸이지."
아빠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내가 이 비극을 견디도록 곁에 있어 주마. 마음을 굳게 먹어."
"아빠, 아빠......"
그녀는 목에 걸린 커다란 혹덩어리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아빠의 눈에서 분노나 후회의 기운일 찾았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사랑만이 빛났다.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가족이 아니다만 언제나 우리가 네 뒤에 있다. 마지야, 해미쉬는 좋은 남자였고 우리 모두 그를 추모한다만은 너에게는 아직 라나와 우리가 있잖니. 넌 혼자가 아니야. 이 점을 명심해라. 내 딸아."
아빠가 그녀의 손을 꼭 쥐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런 아빠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나를 사랑하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돈이 뭔데? 돈은 중요하지 않아. 당신은 더 이상 돈에 의지해서 살 수 없어. 포기해 당신은 알거지가 됐어."
죠의 목소리였다.
마조리는 귀를 막으려 했다. 현실을 마주 대하기가 두려워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이 앤드류를 죽이든가 저택을 폭파하는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 얼마 동안 잃고 있었을까?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난날이 길고 비통스러운 단 하루 동안의 일처럼 느껴졌다. 베로니크에게 막대한 위자료를 지급한 지금도 변함없이 백만장자인 죠는 돈이 하찮다는 등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속에서 악에 받친 분노가 솟구쳤다.
"돈 때문에 아니에요. 하느님 맙소사! 돈 때문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아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일어나 앉는 모습을 보니 반갑군. 그래, 그럼 무엇 때문이오?"
"해미쉬요!"
그의 이름이 다시 뜨거운 눈물을 자아냈다. 그녀의 얼굴과 눈은 아파서 울 수도 없을 만큼 퉁퉁 부어 있었다.
"최소한 우선순위는 알고 있군."
밉살스런 죠! 하지만 그를 째려본 그녀는 그것이 허세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의 입가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고 눈가는 퀭했으며, 체중도 줄은 모습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카메론 가의 신탁에 대해 아세요? 장원을 비워줘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해요."
"내가 평생 번 돈이 전부 증류소와 이 집에 투자되었어요. 그리고 부모님의 도버 집에 말이에요. 아빠는 정원과 오리들을 사랑하신단 말이에요. 난 가진 것을 모두 긁어모은 데다 빚까지 져서 한 재산 날려버렸다구요. 게다가 아빠의 건강이 최근에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으실 거예요."
"돈이야 다시 벌면 돼."
"돈 때문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곳은 우리 집이에요.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예요. 어서 가버려요. 날 혼자 있게 내버려 둬요."
하지만 지금까지 이 저택에 들인 공보다 앞으로 계획해두었던 수영장과 해미쉬의 당구실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철부지 아이처럼 그녀는 베개 아래에 고개를 박았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돼! 난 당신이 지금 뭘 애도하는지 당신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했으면 해."
"해미쉬예요."
"그렇다면 이 저택과 아빠의 정원, 증류소에 투자된 당신 돈을 전부 잊을 수 있고? 왜냐하면 그건 단지 돈이기 때문이야. 가장 애도할 가치가 도대체 없는 것이라구. 당신이 벌어들인 돈 이외에 25년이란 세월에 대해 할 말이 없소?"
"나가라니까요."
"마조리, 내 말을 들어. 우리는 영혼이 깃든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지닌 영혼이야. 그래서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소. 사랑은 죽음을 극복하는 법이오. 해미쉬는 여전히 존재하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그리고 드디어 당신을 이해했을 거요. 이제 당신이 그를 전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없소."
"입 다물어요, 죠. 당신은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구요."
이 순간 그녀는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거요."
그가 말을 계속 잇자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삶의 지혜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다음에 오는 것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한편 기쁨과 슬픔 또한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며 그 급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에 있소. 변화는 인생에서 유일한 불변의 진리야. 마조리, 1년 전에 당신은 복수와 거짓과 기만을 바탕으로 일련의 행동을 실행에 옮겼소. 선하지 않은 동기가 부메랑처럼 당신에게 돌아온 거야 당연하지. 그야말로 사필귀정이며 당연한 응보가 아니겠소? 희생을 자처한 자는 반드시 구원받고, 이기적인 자는 그렇지 못한 거야. 당신은 그릇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배웠잖소? 그 은총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다는 거예요" 다른 여자의 얼굴이 더 예쁘다는 이유로 아내를 차버린 주제에!"
"그리고 난 그녀에게 버림을 받게 생겼소. 그녀는 날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여인을 다시 만나고 있소. 그는 그보다 젊고 잘 생겼고, 두 사람은 내 돈으로 행복하게 살 계획을 세웠어."
"흥,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성미 고약하게 굴지 말아요.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당신에게 바바라와 휴가를 가라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소. 그녀는 당신이 회복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더군. 라나도 데려갔어요. 그 아이 안색이 영 좋지 않더군. 그동안 난 일류 변호사를 고용해서 한 푼이라도 건져보겠소. 앤드류 카메론은 인버 아시아사에 손댈 수 없소. 그리고 내가 빨리 행동한다면 글렌너드의 재산을 인버 아시아 쪽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거요. 증류소에 투자한 당신 돈을 사채로 돌려받을 테니, 큰 손해를 보지는 않을 거요. 나에게 당신 변호사의 연락처를 알려줘요."
마조리는 그의 제안에 대해 궁리했다.
"이제야 당신이 쓸만한 말을 하는군요. 난 여기에서 요양을 하겠어요.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요. 당신이 날 도와주겠다니 정말 고마워요. 죠, 아까 당신 말은 진심이었겠지만 지금으로선 도움이 안 돼요."
그녀는 자기혐오의 지옥에 빠졌다는 진실을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바바라는 마조리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차 한 잔이 친구의 유일한 청이었기에 하루 종일 차만 끓였다. 우려낸 차를 잔에 따를 때가 되어서야 죠가 오늘 아침에 떠났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런데 3인분을 끓이다니, 젠장! 쟁반을 마조리의 침실로 가져간 그녀는 친구의 모습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마조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남의 옷을 얻어 입은 것처럼 초췌하고 눈 밑에 시꺼먼 그늘이 진데다 끊임없이 편두통과 구토에 시달렸다. 그러나 슬픔에 망연자실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집스럽게 바바라의 부축을 거절했다.
"넌 죽은 사람을 그만 놔줘야 해, 마조리."
바바라는 찻잔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청상과부가 된 사람이 어디 너뿐이니? 네 앞날이 창창하게 남았잖니. 라나를 키우면서 잘 살아야지.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세월이 약이라고들 하잖아."
마조리는 고개를 돌리고 차를 마셨다. 해미쉬를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보고 싶은 와중에도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반쯤 돌아버린 심정을 친구에게 설명하랴? 그녀는 해미쉬를 이용했고, 그는 그 사실을 알아낸 충격으로 죽음을 택했다. 요리조리 생각해 봐도 사고든 자살이든 용서할 수 없었다. 슬픔이 어떨 수가 몰아간 자리에 진한 외로움이 남았다. 뭐라 저의할 수 없는 상실감이 가슴을 쳤다.
"넌 이 집을 빨리 떠나선 안 돼. 나중에 후회할 거야. 일단 건강이 좋아질 때까지 한자리를 지키도록 해."
바바라의 다정한 언행에 마조리는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죠는 아직도 피신탁인들에게 별채를 장원에서 분리시켜 그녀의 부모가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우리 부모님 귀에 들어가선 안 된다."
그녀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바바라. 형편이 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 처음에 난 해미쉬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를 이용했어. 내 평생의 소원이 있다면 라나에게 로버트가 거둬간 것을 해미쉬로 하여금 다시 찾아오게 하려 했던 거야. 해미쉬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난 그를 이용했어. 글렌너드는 내 손에 로버트와 싸울 무기를 쥐어줬고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 하지만 그것은 정당한 거래처럼 보였어. 난 해미쉬의 증류소를 회생시켰어. 백만 파운드도 넘는 돈을 이 저택과 사업에 쏟아부었고, 그를 외삼촌 토하라 상과 화해시켰어. 그리고 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 버렸어. 난 너무 행복했단다. 그래서 바보처럼 방어벽을 낮추고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거야."
"아!"
바바라가 말했다.
"넌 이해하겠지? 그는 상처를 받고 크게 화를 냈어. 그리고 우리는 대판 싸웠단다. 그는 모든 기억을 수정해야만 한다고 했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늘상 해왔듯이 산으로 도망을 갔고 거기에서 실족한 거야. 아니면......그 내막을 누가 알겠니? 분명한 것은 내가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뿐이야."
"아냐, 그렇지 않아. 어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킬 수 없어.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하거나 이혼하거나 바람을 피울 수 있었어. 또한 한동안 산에 틀어박혀서 너에게 벌을 줄 수 있었지. 그는 그 방법을 염두에 두었을 거야."
"하지만 더 최악인 부분이 있단다. 난 로버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느껴. 이제 그의 죄는 더 무거워진 거야.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줄 아니? 단순히 해미쉬를 잃었다는 슬픔 때문이 아니야. 참을 수 없는 나의 죄책감 때문도 아니야. 로버트를 망쳐놓고 라나를 위해 글렌티란을 손에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글렌너드를 잃었기 때문이란다. 그 생각에 너무 원통해서 미칠 것만 같아."
"아, 마조리! 정말 안됐구나."
바바라는 글렌너드를 잃었다는 마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세히 추궁하지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마조리가 말해주겠지.
"넌 증오심을 흘려버려야 해. 네가 망쳐놓고 싶은 대상은 로버트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마조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 다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녀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바바라는 울고 싶었다.
그날 이후 마조리는 더욱 자신의 껍질 속에 틀어박혔다. 바바라가 아무리 외출을 권해도 그녀는 전화기 옆을 떠나지 않았다.
"난 죠와 연락해야만 해. 현 상황이 유동적이거든. 피신탁인들은 우리 측 요구에 수긍을 하지만 신탁에 묶여 있는 모양이야.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난 일단 확신을 가진 다음에 부모님께 이사에 관한 알을 꺼내고 싶어."
바바라는 마조리의 공포를 눈치챘다.
다음 며칠이 지루할 만큼 느리게 흘러갔고, 마조리는 씁쓸한 게 정원과 집 주변을 산책했다. 바바라의 크리스마스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로 보였다.
12월의 세 번째 금요일, 두 여자는 일어나 장원이 눈으로 뒤덮혔음을 발견했다. 마조리가 창문을 열었을 때, 지난날의 기쁨이 송곳이 되어 마음을 찔렀다. 정말 아름다운 날들이었어. 라나를 바바라에게 맡겨둔 그녀는 숲속과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그 속에서 한 가닥 논리를 찾으려 애썼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그렇게 정열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말이 될까? 로보트에 대한 기억은 너무도 생생하여 손을 뻗으면 그가 만져질 것 같았다. 그의 반짝이는 눈과 검은 머리카락, 장난기 어린 미소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 후에 해미쉬를 사랑하게 됐지만 결국 그들을 모두 잃었다. 최근에 그녀는 마음속에 도사린 해미쉬에 대한 깊은 분노를 알아차렸다. 그가 어떻게 우리 두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그는 인생을 망쳐 놨어. 아름다운 추억과 기억들은 빛이 바랬지만 로버트에 대한 증오심만은 전보다 더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녀의 일용하는 양식은 증오였다. 그 순간 증오와 악마는 동의어이며 그녀가 악의 유혹에 빠졌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검은 수렁을 방황하는 카멜론처럼 그 수렁만큼, 어두운 밤만큼, 그녀가 키워온 증오만큼 검게 물들었다. 그녀의 인생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악이란 뭘까? 사랑이나 선의 부재일까? 아니면 사랑을 빼앗긴 무방비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찾아드는 강력한 힘일까? 그리고 악은 스스로를 돌본다던데? 갑자기 증유소를 잃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운명적인 비장함에 빠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될 거야."
"어디 갔다 왔니?"
바바라의 얼굴에 안도감과 분노가 교차했다.
"너를 찾아서 안가본데가 없어. 너희 부모님은 30분 전에 오셨단다. 함께 저녁을 하기로 했잖아. 죠가 잠시 후면 곧 도착할 거야."
엄마가 성심성의껏 준비한, 마조리가 좋아하는 카레를 넣은 양고기 파이와 크림을 먹으라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좀처럼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바바라는 홀로 대화를 이어가려고 고군분투했다. 죠가 마조리를 한 켠으로 데려가서 속삭였다.
"미안해, 이제 모든 게 끝났소. 난 최선을 다했지만 앤드류가 별채를 원하고 있소. 두 달이라는 시한을 얻었으니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겠소."
"알았어요. 그동안 애써줘서 고마워요. 죠"
"그 외의 소득은 나쁘지 않았소.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충동적으로 마조리는 몸을 돌려 바바라를 보았다. 친구에게 방출되는 친절함과 동정이 겨울날의 따뜻한 코트처럼 그녀를 감쌌다. 그 눈빛 속에서 마조리는 벌거벗은듯한 수치감을 맛보고 심하게 진저리를 쳤다. 아빠가 벌떡 일어나더니 창문을 닫았다.
"얘야, 이번에는 입덧이 심하구나. 출산일은 언제니?"
묘한 침묵이 깔리는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괜찮니? 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어."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임신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난감한 심정으로 충격 어린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 보았다. 부모님이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해미쉬에 대한 비통함을 임신 초기 증상으로 이해하시다니. 월경이 조금 늦춰졌을 뿐인데.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죠의 결혼식 며칠 전이었던가. 아냐, 2주일 전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해미쉬가 죽기 2주일 전에 마지막 달거리를 했어. 그녀와 죠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바보"
그는 중얼거린 다음 웃기 시작했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처음에는 부드럽던 웃음이 점점 요란해 졌다. 뱃속의 아기는 남아가 분명할 거야. 난 이제 살았구나. 그녀는 이 아기가 사랑 속에 잉태되었음을 감사하며 두 손으로 복부를 껴안았다.
마조리는 짜증스런 몸짓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알래스데어는 어디 있지?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이 그녀의 서재 창문 밖에서 '엄마'하고 불렀다.
"알래스데어, 너 또 문제를 일으켰지?'
아들의 모습에 그녀의 숨이 막혔다. 그는 11살짜리 다른 또래보다 훨씬 잘 생겼고 키도 큰 데다 당당한 자신감마저 풍겼다. 외할머니의 하트 형 얼굴과 미소, 할아버지의 높은 광대뼈, 해미쉬의 아름답고 동양적인 눈매 등 온 가족을 한 군데씩 닮았다. 그리고 해미쉬의 초연함과 강인한 성격도 물려받았다. 그래, 이 아이는 특별하지만 천사와는 거리가 멀어. 마조리는 아들에게 상을 찌푸려 보았다. 그는 고집 세고 영리한 장난꾸러기였지만 친절하고 다정했다. 특히 동물들에게 그리고 지금 그의 표정은 돌기둥에 붙들어 맨 늙고 굶주린 당나귀만큼 완고했다.
"네가 저놈을 훔쳤구나."
그녀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당나귀를 손가락질했다.
"경찰로부터 전화가 왔어. 집시들이 고소할 생각이래. 넌 이제 어쩔래?"
그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눈빛만으로 살인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아이야.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항의했다.
"생명 법보다 우위예요. 어떻게 한 생명체가 다른 존재에게 소유될 수 있죠? 생명은 그 자신의 것이에요."
"네가 나중에 법률을 바꾸렴. 하지만 지금은 저 당나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 빨리."
"엄마가 한번 돌려주라고 하신다면 당장 그렇게 할게요, 네?"
시험대에 오른 기분으로 마조리는 이른 6월의 햇살 속으로 나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털이 반쯤 빠진 당나귀가 고개를 힘없이 떨군 모양새를 훑어 보았다.
"이 녀석을 라나의 암말 주위에 얼씬도 못 하게 해라."
어휴!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한번 뱉은 말을 돌이킬 수 없었다.
"녀석이 아니라 아가씨예요."
그때 반쯤 취한 한 패거리가 어슬렁거리며 진입로를 따라 들어왔다.
마조리는 위협감을 느꼈다.
"네가 대문을 열어 놨니?"
그녀가 아들에게 투덜거렸다.
"죄송해요."
"넌 이 아가씨를 데리고 가는 편이 좋겠구나."
"싫어요!"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싸구려 맥주와 땀과 찌든 담배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다.
알래스데어가 당나귀 고삐를 쥐고 마조리의 앞으로 나섰다.
"충고하겠는데, 이 당나귀에게 손대지 마세요. 지금 경찰과 동물 보호소 직원들이 오는 중이에요."
알래스데어가 당나귀 고삐를 쥐고 마조리의 앞으로 나섰다.
"충고하겠는데, 이 당나귀에게 손대지 마세요. 지금 경찰과 동물 보호소 직원들이 오는 중이에요."
"어쭈, 이 꼬마야. 저리 비키지 않으면 한대 믿을 줄 알아."
왈칵 겁이 난 마조리가 얼른 아들의 앞으로 나섰다. 집시들이 어정쩡하게 뒷걸음질 쳤다.
"여보세요. 저 당나귀만 주신다면 더 이상 아무 말 않겠수다."
마조리는 망설였다. 이 문제는 동물 보호소 소관이야. 일단 당나귀를 저들에게 돌려주고 당국에 전화를 거는 편이 좋겠다. 그녀가 아들에게 고삐를 달라고 손을 내밀자, 알래스데어는 고개를 흔들며 애원하는 눈초리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뜨끔했다.
"얼마나 원해요."
마조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패거리 중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그녀의 약점을 포착하고 알래스데어를 가리켰다.
"5백 파운드를 내지 않으면 저 꼬마를 도둑으로 신고하겠수."
거래는 재빨리 이루어졌다.
"엄마가 바가지를 쓰신 거예요."
알래스데어는 패거리의 뒤통수에 대고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저 당나귀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돈을 낸 거야. 넌 정원 일을 위해 돈을 갚아야 해."
그녀가 윽박질렀다. 그녀는 부모로서의 권위를 조금이나마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문제는 아들을 벌주기보다 사랑을 받고 싶은데 있었다. 라나와는 이런 문제가 없었는데.
"엄마가 뭐라고 하시든 난 동물 보호소에 전화하겠어요. 그곳에는 더 나쁜 취급을 받는 당나귀들이 많이 있어요."
"정말 부끄러운 일이구나."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우선 당나귀를 수의사에게 데려가라."
그녀는 서둘러 서재로 가면서 어깨너머로 소리 질렀다.
"카메론 부인이십니까? "
"네, 그런데요."
"휴 로스입니다."
라나의 교장 선생님이다! 웬일이실까?
"라나의 학업에 대해 전화 드렸습니다. 즉시 만나 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로스는 장황한 인사말을 늘어놓은 다음에야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라나는 전 과목에서 우등을 놓친 적이 없어요. 그런 딸이 공부를 등한시한단 말이에요?"
"아닙니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은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조롱기가 담겨 있었다.
"내일 미국 출장이 잡혀 있으니까 돌아와서......"
"카메론 부인,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연락조차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저런! 알겠어요. 내일 아침 10시 어떠세요?"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라나는 영리하고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동시에 반항적이고 고집 세고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종종 교사들과 마찰을 빚었다. 마조리는 라나가 술에 취한 학우들을 6층 침실까지 하나씩 옮겨 놓은 다음에 사감 선생에게 다들 식중독에 걸렸다고 둘러댔던 기억에 미소를 지었다. 사감 선생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의사를 불렀고 집단 급성 알코올 중독증으로 판명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적 문제는 없었다. 라나의 학업 성적은 완벽에 가까웠다. 찜찜한 기분으로 마조리는 증류소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편을 변경했다.
벨이 끊이지 않고 울렸다. 겨우 잠에서 깬 마조리가 자명종 시계를 껐다. 10시에 라나의 학교로 가려면 최소한 6시 30분에 집을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파리한 얼굴과 코에서 입가로 이어진 긴 주름. '웃음선'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웃음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피부는 아직 젊고 매끄러웠지만 자세히 보면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녀는 36살 치고 젊어 보였다. 아마 해미쉬가 죽고 난 뒤 11년 동안 감정적인 진공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이리라. 그날 이후 그녀의 성숙은 멈추었고 진정한 사랑도, 삶도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겉에서 보기에 그녀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아버지 없는 자식들에게 양친 부모의 역할을 다하는 동시에 증류소까지 경영하는 용감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그녀는 특별한 마약, 즉 일에 중독되었다. 그리고 여느 중독자들처럼 성공과 복수에 맹목적으로 집착했고 마취 효과가 사라지면 칠면조처럼 마음이 허했다.
팩스 없이는 아이들과 휴가를 보낼 수 없을 정도였다. 밤마다 그녀는 홍콩이나 미국의 영업 담당과 통화했고 여러 시간에 걸쳐 계획을 짰다. 글렌너드 영업 사무실에는 해가 지지 않았고 괴롭히고 구슬릴 사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손을 댈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라나였다. 그녀는 라나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사고하도록 키웠다. 가끔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맙소사, 내가 빈둥거리고 있네. 그녀는 서둘러 옷을 입고 커피를 마셨다. 졸라에게 운전사 젠킨스 씨를 대기시키도록 시켰다. 미국 출장 탓으로 알래스데어는 어젯밤 외가댁에서 잤다. 차가 별채에 도착하자, 마침 대문이 열리고 패디용크의 후임인, 라브라도와 아이리쉬 울프 하운드 잡종 앵거스가 밖으로 뛰어나와 아침 공기를 맡고 호수 쪽을 바라봤다.
"금방 돌아오겠어요."
그녀는 문간에서 서성거렸다. 묘한 열마에 사로잡힌 그녀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거실의 온기와 훈훈함과 더불어 아침 냄새를 맡았다. 금잔화 화분은 식탁 위에, 민트를 심은 여러 개의 컵은 창턱에 놓여 있었다. 복실복실한 새끼 고양이 티비 2세가 의자 위에 앉아 엄마의 요리하는 동작을 지켜봤다. 알래스데어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계란. 베이컨. 소시지. 콩팥과 간이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다. 저렇게 왕성한 식욕은 생전 처음이야. 그녀는 그를 금쪽처럼 사랑했지만 그 표현을 삼갔다. 아들이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다녀오겠소. 다들 잘 있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알래스데어가 고개를 들고 싱긋 미소 지었다. 그는 달려와 힘차게 엄마를 안았다.
"다녀오세요, 엄마. 라나 누나에게 내 인사와 함께 열심히 공부하라고 전해주세요."
"아주 근사해 보이는구나. 새 프랑스 옷이니?"
엄마가 샤넬 정장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특히 어떠세요?"
"좋아지신 것 같더라."
"하지만 꼭 병원에 가세요. 네?"
"네 아버지가 역정을 낼 거야."
"내가 서두르지 않으면 젠키스 씨가 알애스데어를 학교에 늦게 데려다주겠네요."
"아침 예배를 빼먹으면 지옥에 빠져요."
그는 능글거렸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들은 아침을 목느라고 정신없었다. 저 아이는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까?
"가장 나쁜 일부터 말해주세요. 라나가 무슨 짓을 했지요?"
마조리가 말했다. 로스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을 펴 보였다.
"카메론 부인, 제가 학부형에게 이런 불평을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라나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요. 지나치게 성실합니다. 저, 커피를 좀 하시겠습니까?"
비서가 쟁반을 가지고 들어오자. 마조리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이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중요한 출장과 열 건의 약속을 뒤로 미뤘단 말인가? 그녀는 약이 올랐다.
"그녀는 최우등상을 받게 될 겁니다."
그는 그녀의 분노를 감지한 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가 빽빽한 수업 일정에 일본어까지 의무적으로 들었을 때 걱정을 금치 못했지만, 그 학과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더군요."
"의미가 아니라 내 제안이었어요."
"라나는 체력적으로 벅찬 학습량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하루종일 공부만 하고 있어요. 심지어 우리가 기숙사의 침실 전기를 차단할 정도예요. 그래서 밤마다 화장실에서 공부를 하다 발각되었습니다. 사흘 전에는 일본어 교과서를 베고 화장실 바닥에서 잠들어 있더군요."
그는 그가 막힌다는 듯 덧붙였다.
"당연히 심한 독감에 걸렸습니다."
마조리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교장의 비판적인 어조를 무시했다.
"부인께서는 따님이 비범함을 지향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가문의 성취욕을 물려받은 모양이에요."
"혹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그녀는 입양아이지요?"
"무의미한 사실이에요. 그녀는 나의 유일한 딸이고 아쉬운 것 없이 컸어요."
"그래서 더 분담을 느끼는 겁니다."
"부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마조리는 끓어오르는 성질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죄책감 어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요. 나는 라나를 사랑하고 그 아이는 최선이라 생각하는 바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어요."
"카메론 부인, 헌신적인 데다 사업계의 거물인 어머니 밑에서 누리는 호화스런 생활이 우연해 의해 얻어졌다는 사실이 열일곱 살짜리 소녀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라나는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기에 부인을 실망시켜 드릴 수 없는 겁니다."
"끔찍한 거짓말이에요."
마조리는 자제심을 잃어갔다.
"라나는 그렇지 않아요. 그 아이는 영리하고 재기발랄하고 다정해요. 한 번도 입양한 티를 내지 않았어요. 왜 그래야 하겠어요? 그래 봤자 무슨 차이가 생기나요? 라나는 실질적인 가정주부예요."
"열일곱 살에? 아직 어린 나이가 아닙니까?"
"그럼요! 하지만 제 동생 알래스데어를 키우다시피 했어요."
"난 항상 일을 했으니까 나는 ...... 우리는 ......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물론 우리 어머니가 옆에 계셨어요."
"알겠습니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카메론 부인, 저는 재량껏 따님을 정신과 의사에게 진찰시켰습니다. 라나가 생모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글을 들어보세요."
마조리는 비현실감에 빠져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 씨는 파일을 펼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기가 막혀! 완전히 미쳤어! 하지만 라나에게는 충분히 현실적이었다. 다시 한번 몸속에서 치솟는 공포감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내가 사랑하는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다음은 라나의 작문입니다."
그가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난 우리 엄마를 신데렐라의 동화 속에 나오는 착한 요정 같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빛나는 푸른 눈과 금발의 부드럽고 다정한 분, 내 문제에 항상 귀를 기울여주시는 분, 피크닉을 좋아하고 우리와 함께 있어 주시는 분.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든 만큼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의 생모는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계실 테니 꼭 그분을 찾아내겠다. 우리 엄마는 다정하지만 사업가 타입은 아닐 것이다. 아마 보육원이나 병원에서 일하시거나 수녀로서 불쌍한 아이들을 돌보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만 하세요."
마조리는 손가방 속에서 휴지를 찾았다.
"환자의 신뢰를 배반하는 짓은 주제넘어요. 그리고 내가 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유감이로군요. 난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여왕이기를 바랬어요. 사람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법이에요."
"카메론 부인,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부인의 생활 방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의 협조를 빌어 라나를 도우려는 것뿐입니다. 부인께서 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고 설명하세요. 그 아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라나는 알고 있어요. 그 아이는 내가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가령, 알래스데어는 체육밖에 잘하는 과목이 없지만 난 그 아이를 사랑해요. 교장 선생님은 핵심을 완전히 빗나가신 거예요."
"그럴까요?"
"내 딸은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가능한 한 빨리 나의 사업상 부담을 덜어 주고 싶어 해요."
"라나는 알래스데어를 당신의 '친자식'으로 지칭했습니다.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한 번도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말이에요."
그는 중간 빨간 밑줄이 쳐진 작문지를 들어 보였다.
"그 아이는 당신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겁니다. 그 작은 어깨 위에 무거운 보은의 짐을 지고 있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고아원에서 ......"
"그만 하세요. 라나는 고아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수로 알겠어요? 그 아이의 친부모는 우리의 먼 친척으로 이민 갔고 내가 우리 부모님의 보증을 받아 그 아이를 입양했어요. 예전에 한번 그 아이가 왜 성이 나와 같고 제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우리 어머니가 전부 설명해 주셨어요......"
마조리는 당시 직접 대답을 회피하고 엄마에게 떠맡겼던 기억에 말을 얼버무렸다. 엄마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
"당시 라나는 여섯 살이었고 전부 잊어버렸을 거예요. 그녀는 내 딸이에요."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카메론 부인,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그 아이에게 부인보다 더 잘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 주님!
"하지만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그가 다시 파일을 넘겼다. 저 망할 파일을 불태워 버려야 해.
"가끔 우리 엄마가 나에게 가정을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그러면 소름이 끼치고 밤에 악몽에 시달린다. 난 엄마에게 나의 감사함을 보여줘야 한다. 모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아, 그만 하세요. 제발 그만 하세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라나는 친부모을 찾겠다는 각오가 대단합니다."
"네? 맙소사. 안돼요."
마조리는 죄책감으로 속이 불편해졌다.
"내가 금지시키겠어요. 난 그 아이의 유일한 엄마예요. 이 문제는 이것으로 마치기로 해요. 어떻게든 라나에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가보겠어요. 다른 약속이 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여기에 1초도 더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녀가 용기를 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문제였다. 내 딸이 사심 없는 기만을 힘들어하는 마당에 진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할까?
"정말 화창하구나. 피크닉에 딱 좋은 날씨야. 얘들아, 피크닉을 가자꾸나."
마조리가 아침상에서 자식들에게 말했다. 라나가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첫 주말이었다. 7월 초의 날씨는 쾌청했다.
"피크닉이요......?"
아이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합창했다.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특히 라나의
표정에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크고 표정이 풍부한 그 눈동자는 의심의 구름으로 어두웠다. 라나는 그녀의 바람 이상이었다. 얼굴형은 여전히 가기 졌지만 넓은 이마와 두툼한 갈색 눈썹이 오밀조밀한 눈코입과 섬세한 조화를 이뤘다. 마조리는 딸의 성격을 망칠까 봐 라나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삼갔다.
"다른 가족들이 다 하는 거잖니?"
마조리가 명랑하게 반문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호수나 보트도 없고 시중들 하녀도 두지 못했어요."
알애스데어가 투덜거렸다.
"또, 별채가 딸린 숲도 갖지 못했죠"
라나가 동생에게 장단을 맞췄다.
"또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할머니도."
항상 현실적인 알래스데어가 지적했다.
"그리고 우리처럼 마음 내킬 때마다 스페인이나 프랑스 혹은 코르시카로 가지 못해요. 뭐, 그들은 작은 아파트에서 살며 외식을 손꼽아 기다릴 거예요. 오호라, 통재라."
마조리는 딸을 의심스럽게 훔쳐보았다. 저 아이가 정신과 의사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우리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졸라가 피크닉 음식을 싸고 있으니까 10시 떠나자."
"좋아."
아이들이 공포의 합창을 했다.
"내가 확인하는 편이 낫겠어."
라나는 숨 가쁘게 말하고 마조리는 말리기도 전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저 아이가 심부름꾼 기분을 느끼진 않을까? 마조리는 서둘러 딸의 뒤를 쫓았다.
"넌 하녀가 아니야, 라나. 내 일은 내가 할게."
라나는 그녀답지 않게 의자에 몸을 던지고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했기에?"
라나는 그녀답지 않게 의자에 몸을 던지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요. 엄마는 질투심 많은 암사자처럼 영역을 지켜요. 이 집에서 유일한 여자가 되고 싶으신 거지요? 그러니 내가 항상 어린아이로 머무를 수밖에요. 심지어 나에게 피크닉 준비조차 맡기지 않잖아요?"
"맙소사."
충격을 받은 마조리가 부엌 의자에 주저앉았다. 라나는 막무가내로 피크닉 가방을 비우고 다시 싸기 시작했다. 마조리는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네가 우리를 위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랬던 거야. 정말이야. 내가 절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무조건적으로 말야. 그 '무조건적'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겠지?"
"엄마, 관두세요. 내가 몇 살로 보이세요? 열 살?"
마조리는 포기했다.
"나중에 차에서 보자."
대책 없는 무능력자가 된 기분으로 마조리는 장부 정리를 끝내고 모자와 신발을 찾았다. 그녀는 그것들을 큰 가방에 쑤셔 넣고 바삐 홀로 내려갔다.
"앵거스가 마실 물을 잊으셨죠?"
알래스데어는 현관문 앞에서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앵거스는 남아서 집을 지켜야 해."
"그럼 난 빠질래요."
"저놈을 내 차에 태우자는 말이니?"
"그럼 녀석을 뛰게 만들 생각이에요?"
맙소사! 그녀는 앵거스가 깔고 앉을 수건을 찾으러 갔다. 젠킨스씨에게 낡은 차를 줘서 휴가를 보냈던 결정이 후회스러웠다. 남은 차라고는 그녀가 아끼는 게 재규어뿐이었다. 그들이 차에 오르자마자 개는 흥분해서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 어떤 것도 녀석이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앵거스의 짖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마조리는 북쪽 도로를 타고 달리며 적당한 곳을 물색했지만 마땅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후, 앵거스가 발버둥을 치자 그녀는 그만 포기했다. 그리고 허허벌판에서 서 있는 나무 아래 차를 세웠다. 그녀는 버드나무와 시냇물과 풀이 우거진 초원을 상상했지만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와 알래스데어는 피크닉 바구니를, 라나는 방수 깔개를 날랐다. 큰 파리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녔고, 그들의 발은 축축한 땅에 빠져들었으며 이상한 냄새마저 풍겼다. 곧 마조리는 땀에 흠뻑 젖고 팔이 아팠다. 꽤 한적한 곳에 이르자. 그녀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재미있지?"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
"배고파요."
알래스데어가 대답했다.
라나는 너무 바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깔개 위에 접시. 나이프와 포크 등으로 척척 상을 차렸다. 마조리는 라나가 포도주까지 챙겼음을 알아차렸다. 뭐 안될 것도 없지.
"건배하자."
몇 분 후, 마조리는 라나가 건넨 잔을 받으며 말했다.
"나도 맛을 볼게요."
알래스데어가 졸랐다.
"그러렴. 라나, 동생에게도 좀 줘라."
그는 포도주를 한입에 꿀꺽 마시고 잔을 내밀었다. 파리들이 음식에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동안 파리들이 연합 편대가 저공비행을 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알래스데어는 포도주 감별사 흉내를 낸 다음에 왕성한 식욕을 발휘하여 손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갑자기 그가 막 베어 물었던 소시지 샌드위치에 딸려 큰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파리를 삼켰어. 파리를 삼켰다구."
그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넌 죽었다."
라나가 놀렸다. 그리고 알래스데어가 나무 뒤에서 '컥컥'거리며 토하는 소리에 맞춰 라나는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댔다.
"파리를 삼킨 한 아줌마가 살았더래요......"
"정말 재미있지?"
마조리는 샐러드를 먹으며 흥을 맞췄다.
"최소한 한 가족 같기는 하네요."
하나가 소리 죽여 중얼거렸다. 마조리는 복부를 강타하는 듯한 공격에 발끈 화를 냈다.
"그래, 내가 고약한 계모처럼 보이겠지."
말을 마친 순간 그녀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라나는 공포에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피크닉을 나왔군요."
"다시 피크닉 말이 나오면 난 십리 밖으로 도망갈 거야."
알래스데어는 모녀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에게 합류했다.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내용은 비밀인 둘 알았어요."
라나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마조리는 딸의 분노 앞에 기가 죽었다.
"미안하구나.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이번 경우에 그는 학교 정신과 의사이고 너에게 관심이 있어서......"
갑자기 라나가 마조리에게 달려들어 꼭 안았다.
"됐어요. 엄마, 초조해하지 마세요. 엄마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신 거예요. 난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결혼한다 해도 엄마는 영순위에요. 항상요. 하지만 어딘가에 나를 낳아주신 분이 살아 계세요. 예전에 할머니가 그분은 먼 친척이고 연락이 끊겼다고 말해주셨어요. 난 생모를 찾아내서 날 버린 이유를 알아내야 해요. 엄마는 내 마음을 이해하시죠? 유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난 생물 시간에 배웠어요. 한 인간의 90%는 유전 인자에 의해 결정돼요. 내 생모는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몰라요. 나는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알아야 한다구요. 엄마, 내 말을 들어보세요. 엄마는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주었잖아요? 그러니 뿌리를 찾도록 도와주세요.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에요."
마조리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넌 너무 어려. 그리고 네 양친 부모 중 어느 쪽도 선천적인 결함을 지니지 않았어. 둘 다 근면 성실하고 우수했어. 네가 스물한 살이 되면 내가 도와줄게, 맹세해."
"제 자식을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비범할 수 있죠?"
라나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신호일까? 지금이 모든 것을 고백할 때 야. 문득 한 발의 총성이 대기를 갈랐다. 몇 초 후 여러 발이 그 뒤를 따랐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들이 깜짝 놀라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세 발의 총성이 더 났다.
"앵거스는 어디 있죠?"
알래스데어가 소리쳤다. 파리 떼는 잊혀졌다.
"앵거스, 앵거스! 이리 와, 어서."
그가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더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또 울려 퍼졌다.
"녀석이 양을 쫓았나 봐요."
라나가 불길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녀석을 쏘아 죽일 거예요. 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요."
세 사람은 음식을 내팽개치고 개를 부르며 총성이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앵거스가 덤불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쫓기든 여우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눈을 희번덕거렸다. 녀석은 피와 진흙투성이였다. 마조리가 헐떡거리며 개를 잡았다. 라나는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 모두 진정해요. 어휴 여자들이란! 이건 앵거스의 피가 아니에요."
알래스데어가 소리 질렀다.
"다른 동물의 피예요. 양을 공격한 거예요. 다들 저쪽으로 뛰어요. 도로로 통할 거예요."
그들은 흙탕물을 튀기며 도로와 차가 있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달렸지만, 오래지 않아 길을 잃고 적과 파리의 영역에서 헤맸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마침내 도로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로와 그들 사이를 가시철조망이 가로막았다.
"어서 가요, 별거 아니라구요. 겁쟁이처럼 굴지 말아요."
알래스데어가 철조망을 기어올라 펄쩍 뛰어내리다가 도랑 속을 굴렀다. 앵거스는 미친 듯이 짖으며 아래쪽 작은 개구멍을 통해 겨우 빠져나갔다. 라나 역시 철조망을 기어 올라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얏' 소리와 함께 그녀는 무릎을 비비며 일어섰다.
"괜찮니, 라나?"
"네, 괜찮아요. 엄마, 빨리 오세요."
마조리는 기중에 매달려 더 높은 철조망을 잡으려고 바둥거렸다. 이걸 어떻게 넘지? 그때 뒤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알래스데어가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그녀 쪽으로 들려왔다.
"엄마, 저 사람들에게 잡히면 경찰이 앵거스를 사살할 거예요. 어서 오세요."
저 아이가 걱정하는 쪽이 엄마야. 아니면 앵거스야? 그녀는 끝까지 기어 올라간 다음에 균형을 잃었다. 그녀가 가시철조망에 얼굴을 박기 일보 직전, 라나가 재빨리 몸을 날려 철조망 위에 납작 드러누웠다. 마조리는 딸의 몸 위로 떨어졌다.
"맙소사, 라나 왜 이런 짓을 했니?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라나를 일으켜 세웠다. 뻔한 질문을 왜 물었을까? 그녀는 휴지로 딸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줬다. 그들은 도로를 따라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갔다.
"누가 물으면, 산보를 하는 중이라고 대답하기예요."
알래스데어가 우울하게 말했다.
"흥, 그래. 우리가 산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겠지."
라나는 그들의 더러워지고 찢어진 옷을 가리켰다. 마조리는 라나와 앵거스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핏자국에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그들은 웃기 시작했다. 마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마음을 놓고 노래 불렀다.
"파리를 삼킨 소년이 살았더래요......."
"파리를 삼키자니 어리석기도 하지.
'"그 소년은 곧 죽을 거야."
알래스데어의 소프라노가 장단을 맞췄다. 그들은 즉흥 노래를 지어 부르며 차에 도착한 다음 병원으로 갔다. 라나는 상처를 꿰매고 파상풍 주사를 맞았다. 그다음 라나는 뿌리에 대한 말을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고, 마조리는 그 문제가 향후 몇 년 동안 덮어지기를 바랬다.
재수 없는 일은 항상 그렇듯이 사전 예고도 없이 세 번이나 연거푸 들이닥쳤다. 세 번의 재난을 겪은 후 리즈 하디는 음울한 만족감을 느꼈다. 변덕스러운 운명 속에서 검증받아온 그녀의 미신적인 믿음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처음에 라나가 고양이를 치어죽였다. 그녀는 엄마의 허락을 받고, 마조리는 자식들 버릇을 망쳐 놨어. 낡은 자동차를 차고에서 후진시키려다 뒤따라온 티비를 치였다. 라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티비를 간호했고 나중에 숲속에 묻어 주었다. 알래스데어 십자가를 만들어 세웠다.
"할머니, 난 다시는 운전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티비는 정말 예쁜 고양이었고 나를 믿었어요. 그렇게 똑똑한 고양이는 세상에 둘도 없을 거예요. 아, 내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리즈는 특정한 고양이에게 과도한 애정을 쏟지 않는 요령을 경험으로 익혔다. 어쨌든 라나와 알래스데어가 너무 애통해하는 통에 리즈는 고양이를 구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두 번째 재난은 첫 번째 불행의 빛을 퇴색시킬 만큼 충격적이었다. 늙은 베아트리스 숙모가 죽었다. 방학인데도 마조리가 뉴욕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두 아이들이 그녀와 함께 식사하던 어느 날 아침 그 비보가 전해졌다. 전화를 받은 리즈는 상념에 잠겼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야. 베아트리스 숙모는 아흔다섯 살이었고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말라비틀어진 몸이었다.
"내 말을 명심해라."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정신이 말짱하셨어. 너희들은 그분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해."
차를 마시던 남편이 신문을 옆으로 치우며 동의했다.
"그녀는 머리를 좋은 쪽으로 쓰셨어. 여보, 마조리에게 연락해요. 그 아이가 장례식에 참가해야지."
리즈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재난이 연거푸 두 번이나! 아직 세 번째가 기회를 노리는 마당에 마조리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해도 될까? 그러다가 비행기 사고라고 나면? 두려움에 사지가 얼어붙었고 손에 있던 마말레이드 병이 식탁을 거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중에 그녀와 아이들은 사방으로 튀긴 진득진득한 파편을 닦았다. 이것으로 세 번째 재난의 액땜이 됐을까? 어림없어! 사소한 사고에 불과한걸. 다음에 뭐가 올까? 그들이 설거지와 청소를 할 때 남편은 모이주머니를 나룻배에 싣고 호수 한가운데로 갔다. 서서히 그의 오리섬은 해안선이 침식되고 있었다. 잠시 후 섬 쪽에서 그의 비명이 들여왔다.
"사고가 틀림없어요."
알래스데어가 말했다.
"들어보세요. 할아버지가 구조를 요청하고 있어요."
그리고 소년은 총알 같이 달려나가 셔츠를 벗어 던지고 호수에 뛰어들었다. 알래스데어의 수영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리즈는 얼굴을 찡그리며 남편을 보았다. 왜 바닥에 누워있을까? 동생 뒤를 열심히 따라간 리즈는 알래스데어와 함께 할아버지를 나룻배로 들어 옮겼다. 그는 모이주머니를 거칠게 부리다 디스크에 걸렸다. 마침 젠킨스 씨가 외출 중이었으므로 라나가 차를 몰고 할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셔갔다. 나중에 남편이 자리에 눕고 아이들이 동물 보호소로 다른 고양이를 구하러 가자 리즈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재난은 세 번 연거푸 찾아와요."
그녀는 남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훨씬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었어요. 이제야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네요."
그녀는 침착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마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뉴욕은 마조리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그녀는 힘과 우아함을 겸비한 마천루, 현격한 대조를 이룬 수직과 수평선의 이 도시를 사랑했다. 맨하탄을 걷고 있노라면 예외 없이 그녀의 안에서 활기가 솟았다. 런던의 거리는 영원성과 함께 정체된 국가의 고즈넉함을 풍겼지만 뉴욕은 바쁘게 활보하는 사람들도 살아 숨 쉬고 약동했다.
마조리는 유일하게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피부로 느꼈다. 이곳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나 그것을 느끼고 실천하고 표현하고 먹고 자고 마셨다. 그 모습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광채가 포착되었다. 모든 시민들은 나름대로 국가가 지향할 최선의 목표에 대하여 결정 내리고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세계 어느 곳도 이런 주인의식과 애정과 책임감에 필적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고층 호텔 방의 창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정신적으로 미국에 동화된 자신에게 슬쩍 고소를 지었다. 탁자 위에 메모지가 얹어있었다. '긴급. 오시 토하라의 사무실로 연락 바람. 즉시 내사 요망"
그녀가 토하라 상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 오긴 했지만 왜 지금 만나자는 걸까? 데이트 약속이 있는데. 가족의 귀에 소문이 들어갈 위험이 희박한 여기 뉴욕이 그녀는 연인을 두었다. 그는 스물아홉 살의 경솔하고 오만하고 막무가내인 동시에 정열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탈리아계의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카를로 로사피오는 글렌너드의 미국 판매업자였다. 그런 중책을 맡기기에는 젊은 나이였지만 지금까지 일을 잘해왔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토하라 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5번가에 위치한 인버 아시아의 영업 사무실은 호텔에서 도보로 5분 거리였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마조리는 홀로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대도시의 위험에 대한 경고와 달리 이 거리는 안전하고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오늘의 습도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힘들 정도였다. 거리는 반쯤 비어 있었다. 능력이 있는 이들은 시원한 장소로 8월 휴가를 떠났다. 텅 빈 주차장은 눈에 낯설었다. 지금은 뉴욕 방문의 적기가 아니었지만 토하라 상의 소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이맘때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인상적인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까지 오른뒤 유리 회전문을 열고 인버 아시아의 로비에 들어섰다. 그녀는 그곳에 잠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토하라 상이 옳았어. 그들은 실내 장식을 놓고 오랫동안 혈전을 벌였다. 그녀는 밝은 일본풍의 장식을 원했지만 그가 완강히 반대했다.
"일본은 좋은 위스키를 생산하지 못하오."
그리고 의자의 덧천은 모두 맥킨토쉬 타탄으로 결정되었다.
"하필이면 왜 맥킨토쉬예요?"
"유일하게 조화로운 타탄이니까"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녀는 연두색 카펫과 베이지색 커튼이 그 바랜 듯한 가을 색상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벽에는 스코틀랜드 풍경화가 걸렸고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날씬한 스코틀랜드 풍경화가 걸렸고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날씬한 스코틀랜드 아가씨가 접수계를 지켰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카메론 부인."
그녀는 부드러운 인버네스 억양으로 말했다.
요시 토하라의 사무실은 로비와 완전히 달랐다. 온통 흰색과 베이지색 천지였다. 죠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공간에 집착했다. 왜냐하면 그의 모국은 너무 협소했기 때문이다. 토하라 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본식으로 절했다. 그리고 영국식으로 악수하고 프랑스식으로 그녀의 양 볼에 키스했다.
"대단한 환영이네요, 토하라 상."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국제적이지? 실수할 리 없는 방법이오. 마조리, 앉아서 술을 한잔합시다."
"나는 많이 마시고 싶지 않아요."
"왜, 당신이 얼큰하게 취한 모습은 너무 영구인 답고 항상 객쩍은 소리로 날 웃게 만들잖소."
그는 그녀에게 술을 조금 따라 주고 자신의 몫을 따른 다음 단번에 마셔 버렸다. 그녀 역시 그의 선례를 따랐다. 그녀는 그에게 다음 잔을 받으며 천천히 마시기로 작정했다.
"당신은 내 기분을 풀어 준 다음에 결정타를 먹이려는 거군요. 난 당신을 너무 잘 알아요."
그녀가 부드럽게 불평했다.
"어서 용건을 털어놓으세요."
"우선 당신 잔부터 채운 다음에. 자, 옛날을 위해 건배합시다. 당신은 점점 아름다워지는구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성이오."
그때서야 그녀는 그 결정타가 여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임을 눈치챘다. 토하라 상은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가 무슨 짓을 했죠?"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심령술사로군 좋소. 마조리. 용기를 잃지 말아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인은 구한 행동은 분별 있었지만 그 선택이 잘못되었소. 로사피오에게서 손을 떼도록 해요.“
"그런 말을 하시는 타당한 이유가 있겠죠?"
"물론 이로. 그는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당신을 이용하고 있소."
그의 검은 눈동자가 돌처럼 냉혹해졌다. 그는 그녀를 외면했다
"왜 내 뒤를 염탐하셨죠? 그걸 어떻게 알아내셨어요?"
"말을 하려던 참이었소?"
마조리는 술을 마시며 이 정보를 소화 시켰다. 왠지 가슴이 아팠다. 이게 뭘까? 그녀는 카를로를 원했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이 아픔은 사업적인 배신 때문일까?
"우선 사업 면부터 설명해 주세요."
토하라 상은 웃었다.
"당신이 그걸 먼저 거론할 줄 알았소. 로사피오는 심한 자금 압박을 받고 있고. 탐욕스런 인간이다 그렇듯이 그는 불성실했소. 당신과의 계약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을 갖지 못하자 그는 완전히 독립된 회사를 하나 설립하고 글렌티란 측과 접촉하여 그들의 미국 판매권을 따냈소. 로사피오는 그들에게 당신과의 거래에 대해 거짓말을 했으리라 확인하는 바이오. 그렇지 않았으면 글렌티란이 그의 제의에 응할 리 없소 ...... 글렌티란의 전임 판매업자 아믹스는 빠른 확장 계획을 거부하고 보수적이고 점진적인 운영을 선호해 왔소. 하지만 전임자의 죽음으로 본사 경영자는 더 많은 이윤을 찾아왔고 로사피로는 그것을 약속한 거요.'
토하라는 말을 계속했다.
"로사피오는 현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오늘 밤 당신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할 거요. 당신이 여느 마흔을 앞둔 여자처럼 절망적으로 그를 원하고 한밑천 대리라 생각했겠지."
"그걸 전부 어떻게 아세요?"
그녀는 애써 상한 자존심을 감추었다.
"그는 내 동포에게 사기 친 적이 있소. 사실 그녀에게 청혼했소. 어리석게도 그는 내 밑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정보를 빼돌리고 있다고 생각하오. 물론 그녀는 내가 허락한 정보만 그에게 제공해왔소. 기운 내요. 내가 그 녀석을 위한 좋은 계획을 세워두었소. 장기적이지만 만족도가 높은 계획이오. 오늘 밤 그에게 대부분의 주식을 자식들 신탁으로 설정해놓았기 때문에 거금을 구할 수 없다고 사실대로 말해요. 그리고 나의 결정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말로 그를 나에게 보내요. 그다음에 그를 차버리는 거요."
마조리는 웃기 시작했다. 위협받지 않은 안전 때문일까? 아니면 토하라 상의 교활한 계획 때문일까? 그러나 곧 그녀의 웃음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마조리,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리고 매우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돈을 요구할 거요. 여기 내 말을 입증할 사진이 있소."
그는 봉투를 건넸다. 그녀가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청혼해 왔던 믿음직한 연인이 아름다운 흑발 미녀와 뒤엉켜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그의 어깨가 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등에 군살이 끼기 시작했다. 로사피오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황갈색 눈, 반지르르한 흑발과 완벽한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봉투을 내려놓았다.
"이 사진을 어떻게 입수하셨어요?"
"그녀가 준비했소."
그는 봉투를 서류 분쇄기에 집어넣었다.
"과거는 과거요. 함께 저녁을 들겠소?"
"오늘은 안돼요, 토하라 상, 하지만 내일 연락 드릴게요."
그녀는 천천히 호텔로 돌아가며 카를로를 '과거'의 영역 속으로 추방했다. 그의 젊음 속에서 코앞으로 다가온 마흔이란 나이를 망각하다니. 엄마로부터 베아트리스 숙모의 사망을 알리는 전화를 받을 즈음, 로사피오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단결된 가족의 화합을 과시하며 그들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장례식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네 명의 조사와 긴 설교로 구성된 장례식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문에 일렬로 서서 조문객들과 악수를 나눌 일만 남았다. 제자리에 선 마조리는 베아트리스 숙모와 마지막 만남을 상기했다.
"당신은 주주들에게 했던 약속을 잘 지켰어요, 마조리."
노부인이 말했다.
"십 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현실화했고 항상 제때 배당금을 지급했어요.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이에요. 베아트리스 숙모님, 최근에야 우리는 긴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그녀는 말을 흐리며 재빨리 속셈을 했다.
"11년인가요?" 아니, 12년 동안 악전고투했어요. 하지만 그럴 가치는 있었어요."
"아주 잘 했어요."
노부인은 그녀의 팔을 다독거렸다.
"그런데 당신은 인버 아시아 주식을 가족 신탁으로 돌려놓고, 라나를 대주주로 만들었더군요. 한편 당신 몫은 아무것도 없던데 왜 그랬나요?"
"글렌너드를 제 소유물로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게다가 두 자식 중에서 한 아이는 거지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이미 저는 충분히 가졌어요."
"네, 그 심정 알만해요."
베아트리스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빈틈없는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 모습을 모노라니 마조리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난 그램피안 은행의 주식과 저택을 당신 아들 알래스데어에게 남겼어요. 그 아이는 내가 존경하는 제 할아버지와 닮았어요. 게다가 나는 자식을 두지 못했으니 그가 유일한 선택이에요. 내가 죽은 후 당신은 알래스데어가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은행 이사회의 회장으로 임명될 거예요. 여러 이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우리 변호사 마크 백스터예요. 그리고 내가 크게 신임하는 당신 친구 죠 시걸을 중추적인 이사로 선임할 거예요. 그가 라나를 위한 신탁을 설정했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나름대로의 정보원이 있어요."
"숙모님은 정보원을 둘 필요가 없어요. 그냥 제게 물어보시기만 하면 돼요."
마조리는 아주 드물게 애정을 드러내며 노 부인의 앙상한 손을 부여잡았다.
"나 역시 라나에게 신탁금을 약간 남겼어요. 그 외의 재산 전부와 은행은 알래스데어가 물려 받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개인적인 부가 아니라 거대한 권력을 갖게 될 거예요. 부디 그 힘을 현명하게 쓰도록 해요."
노부인의 말이 마조리의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관이 교회 밖으로 운반되었다. 로다 맥다렌은 교회 문 옆에 일렬로 쭉 늘어서서 문상객과 인사를 나누는 카메론 일가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저 말처럼 긴 얼굴들 좀 봐! 그들은 늙은 베아트리스 카메론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척하지만 사실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려왔을 거야. 이제 저쪽 벽에 서 있는 얼빠진 소년이 엄청나 갑부가 되었다던데. 소년은 검정색 정장이 불편한지 안절부절못하며 손으로 셔츠 칼라를 늘였다.
그 옆에 선 키 큰 소녀가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왠지 눈에 많이 익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궁리했다. 한창때로구나. 로다는 소녀의 젊음과 보기 드물게 초롱초롱한 갈색 눈을 질투했다. 아, 젊음은 가능한 빨리 통과해야 할 재난이었지만 요즘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떠올랐다. 저 소녀는 신세대의 일원이자 주요 도시에 저택을 둔 유럽의 시민이다. 저 의상이 그녀의 개성을 반영했다. 로다는 한눈에 검정색 맥스마라 치마, 에스카다 블라우스와 챨스 쥬르당 신발을 알아보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이로군. 하긴 벼락부자들에게 뭘 바라겠어?
그녀는 은행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카메론 부인 쪽으로 다가갔다. 로다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과거의 적으로 알고 있었다. 글렌너드를 살리고 불쌍한 앤드류 카메론의 밥상에 재를 뿌린 장본인이었다. 사업적인 능력을 타고났지만 하찮은 집안 출신이라 들었다. 그녀는 카메론 부인을 더 잘 보려고 까치발로 섰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데다 검정색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초조해진 로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반자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녀는 항상 혼자라는 사실에 지쳤다. 빌어먹을 로버트, 그녀는 속으로 화를 냈다. 그는 벨리세의 원숭이를 구한 납시고 여행을 떠나버렸다. 사실상 탈출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를 싫어했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메론 부인은 악수를 받는 대신 베일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로다의 눈이 로버트의 옛 연인. 도버 여자의 초록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로다는 숨을 들이키며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순간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환각을 일으키고 있는 걸까? 자선 파티에서 봤던 여자가 아닐까? 하지만 그때 검정색 모자에 가려진 빨강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화장도 흠잡을 데 없었다. 세련된 태도와 완벽한 옷매무새까지 갖췄다.
"다시 만났군요. 맥라렌 부인. 그리고 이번에도 슬픈 만남이네요."
과거의 환영이 말을 했다.
"이제 우리가 최종회에 돌입한 것 같군요."
하지만 그녀일 리가 없어. 억양이 틀려. 로다는 거의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밖으로 나갔다. 햇살에 앞이 안 보이는 순간, 먼 옛날 티란 장원을 찾아왔던 마조리 하디의 모습과 억양이 떠올랐다.
"당신의 잔인함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날이 곧 올 거예요. 그게 세상 이치예요."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오랫동안 준비해왔을까......? 로다는 발을 헛딛고 나뒹굴었다. 무릎이 아팠지만 수치심이 더 컸다. 사람들이 달려와서 그녀를 부축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녀는 피 맺힌 무릎과 찢긴 스타킹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거듭 말했다. 완전히 늙은 바보가 된 기분으로 그녀는 부축을 받으면서 차로 갔다. 차 안에 앉아 느린 속도로 도로를 따라 달릴 때 로다는 과거를 회상했다. 내가 그 처녀를 잘못 봤구나. 하지만 가족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했어. 그런 여자는 절대로 ......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세계에 입성했고 완벽한 승리를 얻어냈으며 이제 인정받았다. 로다는 뼛속까지 두려워졌다.
로버트의 회계사 바트 쇼는 지난 20년 동안 성공을 거듭했고 번창했다. 이제 그의 회사는 건물의 한 층을 다 차지했지만 그의 사무실은 예전 그대로였다. 로버트가 드물게 방문할 때마다 변함없는 모습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의 존재는 다른 것의 빛바래게 하고 공간을 꽉 채웠다.
"아, 로버트."
바트가 그를 반겼다.
"와 주어서 감사합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베아트리스 카메론이 죽었어요."
"알고 있소. 내가 벨리세에 가지 않았더라면 장례식에 참가했을 거요. 당신은 다녀왔소?"
"아니오. 하지만 맥라렌 부인이 참석하셨습니다."
"잘 됐구려. 그런데 무슨 문제요?"
"그램피안 은행 건입니다. 해미쉬 카메론의 아들 알래스데어가 은행을 상속받았어요."
"음, 알겠소. 하지만 우리는 지난 5세기 동안 그램피안 은행과 거래를 해왔소."
"알래스데어 카메론은 열한 살이기 때문에 그의 모친이 은행 회장으로 선임 되었습니다."
"적절치 못한 조치로군. 은행 경영은 일류 전문인의 손에 맡겨야지. 하지만 우리 쪽에서 가타부타할 문제는 아니잖소?"
바트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모친이 저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굳이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분께서 은행 회장 카메론 부인이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다는 듯한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1977년 글렌너드 인수 건의 실패와 관계가 있답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글렌너드와 거북한 관계에 빠진 적은 딱 한 번으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오? 우리의 신용도는 우수하니 만 약 그램피안 은행에서 자금 대출을 거절한다면 다른 은행과 거래를 트면 그뿐 이잖소."
"그럼, 다음은 당신 따님에 관한 문제입니다. 최근 사생아의 친부에 대한 법률이 개정될 전망입니다. 법은 급변하는 현대사회 조류를 따라가지 못해요. 하지만 여전히 친모만이 자식이 친부를 아는 관습법을 근간으로 합니다."
바트는 입술을 축이고서 말을 합니다.
"오늘날 아버지의 권리가 점점 확대되는 추세이므로 조만간 친부가 사생아에 대한 권리를 약간이나마 갖게 될 겁니다.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사안이지만 꼭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1973년에 자식을 입양시킨 친부로서 아이의 소재는 물론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나눴잖소."
로버트가 말을 끊었다.
"네, 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수녀원은 아이의 최고의 이익을 보호하는 규정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 원장 수녀님께 마조리 하디의 장녀를 위한 신탁을 설립하고 싶다는 방향으로 접근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아이가 당신 자식이라는 주장은 많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우리가 신탁인을 지정하는 문제를 막을 방법이 없거든요."
"좋은 생각이오."
"수녀원은 아이의 소재를 맥박으로 수소문할 겁니다. 그리고 연락이 끝내 되지 않는다 해도, 당신 따님이 신탁을 수령하는 연령이 되면 직접 당신에게 연락할 거예요. 아마 그녀는 친부를 모르고 있겠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 당신을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겠지."
로버트는 한숨을 쉬었다.
"로버트, 여기 관련 서류에 서명하세요. 이제 당신이 오지에서 행방불명이 된다 해도 유언장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싸우는 악몽을 꾸지 않겠군요. 어떤 누구도 이 신탁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겁니다."
다음 10분 동안 로버트는 방대한 서류에 서명했다. 그 일이 다 끝났을 때 그는 바보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난 딸을 영원히 보지 못할 거야. 이제 현실을 인정할 때가 됐어.
내가 누구일까? 난 어떤 사람일까? 라나는 그녀의 실체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친구들은 연애하고 성적인 힘을 발견하고 사랑을 찾으며 어른으로 변모하는 동안, 라나는 암울한 자기 의심의 수렁에서 뒹굴었다. 진정한 나 자신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다른 사람과 사귈 수 있겠어?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모르면서 무슨 방법으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지? 그녀는 충격에 빠져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이식된 나무였다. 왜 생모는 나를 버렸을까? 그러나 왠지 그 얼굴도 모르는 여인을 욕할 수 없었다. 산 안드레아의 균열처럼 내 안에 숨어 발병을 기다리는 남모를 인자때문에 나를 버렸을까? 내가 광기나 치명적인 질환처럼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유전 인자를 갖고 있을까? 그녀는 걸어 다니는 폭탄 같은 심정이었다. 비밀리에 의사의 진찰을 받고 모든 검사를 다 해 봤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창녀였을까? 그것은 상상이었다. 청년들이 추파를 던질 때마다 그녀는 매춘부처럼 보인다고 상상했다. 데이트 신청을 받으면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남자들이 사냥개처럼 그녀의 유전적인 바람기를 냄새 맡은 게 분명해. 그들이 주변을 얼쩡거리고 사랑을 구하고 그녀를 좋아하는 척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야. 가장 친한 친구인 바르셀로나 출신 스페인 처녀가 어느 날 그녀를 점심에 불러 내 간곡하게 설득했다.
"남자들은 너보고 동성연애자래. 네가 남자를 싫어한다는 거야."
그녀는 포도주를 마시며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심지어 네가 나에게 수작을 걸었느냐고 묻더라. 내가 그들에게 넌 공부 때문에 바쁘다고 말해 주었어. 하지만 라나야, 넌 약간 맹목적이지 않니? 오늘 밤 나와 함께 춤추러 가는 게 그렇게 나쁜 거니? 거기에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 올 거야. 네 마음에 들걸."
라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험을 잘 봐야 해.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란다. 얼마 전 우리 어머니는 여왕님께 '경'의 칭호를 하사받았어. 영국 수출 진흥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으신 거야. 상상이 가니? 이제 마조리 경이란 말야. 난 죽어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랍니다. 난 빨리 어머니의 일에 돕고 싶어. 사실, 그 세계에 합류하는 날을 열망하고 있어. 내가 어머니와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나 같은 가족을 둔 사람에게는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게 중요하단다. 이해하겠니?"
"하지만 라나, 넌 항상 좋은 성적을 받았잖니.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한 거야. 그리고 네가 너희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니? 엄마들이란 목덜미의 통증과도 같은 존재들이야. 그런데 넌 어머니를 신성한 제단 위에 모셔 놓았어. 대체 그 이유가 뭐야? 넌 네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해. 넌 지금 사는 게 아니라 공부만 하고 있어."
라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부만 하고 쉬지 않았다간 고리타분하게 될 거야."
친구의 의도는 좋았지만, 그날 이후 라나는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녀는 끔찍한 결점 목록에 '동성연애자'를 첨가했다.
엄마가 날 입양해서 가족과 동생과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집을 주셨으니 난 정말 행운아야. 그러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평생 공부해도 모자랐다. 그러나 분노도 존재했다. 왜 내가 거부를 당했을까? 무엇 때문에 한 가족이라는 일체감 대신 이질감을 느껴야 하지? 그녀는 엄마의 사업과 더불어 훗날 알래스데어를 돕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법률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2년 만에 학위를 딸 수 있는 버킹햄 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은 런던에서 가까웠고 그녀는 종종 죠와 함께 주말을 보냈다. 그 역시 두 번째 이혼 이후 외로웠기 때문에 항상 그녀를 환영했다.
1월 버킹엄 대학에 도착했을 때 대지는 서리와 눈으로 덮였고 헐벗은 나무들은 추했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추웠다. 부정한 봄은 믿을 수 없는 고통을 수반했다.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 갓 태어난 새끼 새, 엄마를 따라다니는 새끼 양이 왠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세상에 괴리감을 느낀 그녀는 악에 바쳐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여름에 찾아왔고 그녀는 어느덧 꽃이 만발하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영국의 신록에 둘러싸였다. 거부당한 분노는 예전보다 더 커졌다. 그녀는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와 책에 파묻혔다. 너무, 너무 심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연에 버림받았다. 그녀는 '입양'의 뜻을 깨닫기 전에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안젤라의 폭로와 함께 그녀의 세상은 뒤집혔고 나중에 훨씬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녀는 엄마의 새아기를 질투한 나머지, 어느 날 아침 유모차를 끌고 호수로 갔다. 그저 예쁜 옷만 망쳐 놓고 싶었을 뿐 아기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즉각 달려와 진흙투성이가 된 알래스데어를 구해 집으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어 떨었다.
"내가 너라면, 질투심을 버리고 착하게 굴 거야. 다시 알래스데어에게 손을 댔단 봐라. 그 즉시 고아원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그리고 그녀는 다시 철부지 어린애가 될 수 없었다.
발명품과 음악에도 불구하고 죠는 고독했다. 그는 라나와 지난 부활절 휴가를 스페인에서 보냈고 초조하게 다음 방학을 손 꼽아 기다렸다. 그는 행선지를 놓고 고민하던 중 어느 날 밤 무작위로 지구본의 한 지점을 찍었다. 그렇게 뽑힌 곳이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였지만, 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만 포기했다. 마침내 세이셀로 결정하고 요트와 선장 및 선원을 고용했다.
그가 라나와 약속한 날 이틀 전에 현지에 도착해 보니, 그 선원의 정체는 선장의 여자 친구이자 요리사였다. 요트는 본섬 마헤의 중심 도시 빅토리아의 한 클럽에 정박해 있었다. 이틀 후 죠는 빅토리아 공항에서 오후 7시 도착 예정이었던 모리셔스 출발 비행 편을 기다렸다. 비행기는 벌써 여섯 시간째 연착이었다. 드디어 라나가 승객들 틈에 껴서 나오자 죠는 그녀가 충격 상태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퀭한 눈매, 하얗게 질린 얼굴, 꼭 다물어진 입술 등 그녀는 희희낙락한 휴가객들 틈에서 외계인처럼 보였다. 라나는 그의 품에 달려들어 더위와 지루한 연착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알겠다. 네 꼴을 좀 봐! 너에겐 휴가가 절실히 필요해."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죠 삼촌, 시험을 망쳤어요. 난 너무 화가 나요.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믿어지지 않아요."
그녀의 하소연이 쏟아졌다.
"난 졸업 시험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졌어요. 한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로 비틀거리며 시험을 쳤어요. 꼭 좀비처럼요. 난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순간 머리가 멍해지더라구요. 뭐라고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분명히 횡설수설했을 거예요."
그녀는 평온을 유지했지만 택시에 오르자마자 죠의 품에 안겨 눈물을 터뜨렸다. 서서히 라나는 그 재난에서 회복되었다. 따뜻한 바람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일광욕을 하며 잠을 자거나 죠와 함께 수영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노클링을 즐겼다. 마법 같은 나날이야. 죠는 라나가 예날 행복했던 아이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날, 그들은 마헤에 정박했고 선원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다음만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투숙했다. 라나가 만에서 스토클링하는 틈을 타서 죠는 버킹엄 대학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졸업 시험을 2등으로 시험을 2등으로 통과하고 학위를 받았다. 어리석은 소녀! 라나 본인만 빼고 모두들 그녀가 잘 해내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그녀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라나는 기뻐서 길길이 뛰었다. 그녀는 물장구를 치며 그를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들은 물개처럼 장난하고 웃었다.
그날 밤, 죠는 그녀를 해산물 식당으로 데려갔다. 라나는 가재의 마지막 살까지 파먹으며 시원한 포르투갈 포도주를 과음했다.
"죠 삼촌, 고마워요."
"뭐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이렇게 재미있는 휴가는 생전 처음이었어."
"지금 휴가 이야기가 아니 잖아요. 삼촌은 항상 제 기분을 좋게 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진심으로 저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네가 유아복을 입고 요람을 기어 다닐 때부터 난 항상 그래 왔어. 나에게는 딸이 없잖니, 라나. 넌 내 딸 같은 존재야. 오래전에 네 엄마와 내가 함께 일했을 때, 네가 내 딸이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약간 있었어. 법적으로 말이다. 난 너를 매우 사랑하고 앞으로도 영원할 거야."
그는 웨이터에게 포도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녀의 잔을 채우며 그는 뒤로 기대앉아 그녀를 살폈다. 휴가는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한 달 전에 공항에서 비실거리던 젊은 아가씨와 딴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에게 어두운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라나, 고민을 털어놓으렴. 무슨 문제가 생겼지?"
"삼촌이 저를 휴가에 초대한 게 그 때문인가요? 엄마가 삼촌에게 직접 부탁하겠어요?"
그녀는 즉각 방어 태세를 갖췄다.
"아니야. 난 외로웠고 항상 네가 그리웠단다. 차라리 딸로 입양할 걸 그랬어."
"다시 한번 그 '입양'이란 단어를 꺼내시면, 이 포도주를 끼얹을 거예요."
마조리는 눈물을 꾹 참고 엄포를 놓았다. 갑자기 오늘 밤이 지겹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그게 네 대답이구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니, 아니면 너무 가슴 아파서 못하겠니?"
"할 수 있어요. 엄마는 내 생모를 알고 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내가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말씀해 주시지 않을 거예요. 난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어요. 지금 지옥을 헤매는 기분이라구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앞으로 전진할 수 없어요."
죠는 한숨을 쉬었다.
"네 엄마가 사실을 밝히는 쉽지 않을 거야. 넌 수색을 중지할 만큼 엄마를 사랑하지 않니?"
"물론 엄마를 사랑하지만, 이 일은 엄마에 대한 내 감정과 아무 상관없어요. 꼭 줄타기를 하는 것같아요."
"넌 인버 아시아의 주식 절반을 상속받게 될 거야. 네가 알래스데어처럼 부자가 되도록 네 엄마가 배려했어. 스물다섯 살이 되는 해에 주식을 상속받게 될 거야. 이런데도 마조리가 너의 뿌리가 되지 못한다는 거니?"
라나는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에 오랫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엄마다워요. 그분은 너무 친절하시지만 그래서 ...... 난 더 죄책감을 느껴요."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난 다른 둥지에 끼어든 뻐꾸기니까요. 원래 내 자리가 아니니까요. 조, 삼촌, 이해하시겠죠?"
"맙소사!"
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래스데어는 열한 살 때부터 증류소와 사랑에 빠졌다. 그 이후 그는 좋은 위스키를 제조하는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하에 시간이 날 때마다 글렌너드에서 일했다. 유명한 장인 짐 루더포드는 그에게 차근차근 비법을 전수했다.
마조리는 아들의 정열을 약간이나마 이해했다. 해미쉬가 죽은 다음 그녀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런던의 영업 사무실을 증류소로 이전했고, 여러 해에 걸쳐 독특한 토탄 냄새와 순수한 물 냄새가 혼합된 미묘한 향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알애스데어가 땀을 흘리며 삽으로 토탄을 떠서 아궁이에 넣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1월 초인데도 그는 티셔츠 한장과 반바지. 고무장화 차림이었다. 정말 건장한 아이야. 마조리는 듬직해지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큰 갈색 눈동자는 대개 애정으로 반짝거렸지만 차갑고 냉정해질 수 있었다. 지금 결이 고운 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로 흘러내렸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피부는 아직 맑고 깨끗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해미쉬의 것이었지만 성질은 그녀를 빼다 박았다. 조용하고 겸손한 모습이 양처럼 온순한 인상을 풍겼지만 잔인한 광경을 목격하면 용맹스런 바이킹으로 변신했다. 오늘 그는 위스키 발효 냄새 속에서 긴장을 풀고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춥지 않니?"
알래스데어는 고개를 들고 짐짓 상을 찌푸렸다.
"훨훨 타는 아궁이 앞에서요? 지금 농담하세요?"
"사장님 자제분은 드문 소질을 타고났어요. 언젠가 세계 최고의 위스키를 생산하게 될 겁니다."
짐이 소리쳤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알래스데어와 짐에게 손을 흔들고 서둘러 거대한 백조의 목 모양을 한 구리증류기와 첫 번째 저장고를 지나쳤다. 저 안에서 5천 통의 위스키가 조용히 성숙되고 있었다. 상품이 되기 위한 마지막 공정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려 있었다. 특히 짐은 '중간감별'을 하는 특별한 시기를 귀신처럼 집어냄으로써 최고급 위스키 제조에 달인 경지에 올랐다. 그가 이미 은퇴할 나이를 훨씬 넘었기 때문에 마조리는 고민이었다.
그녀는 다음 몇 시간을 회계사와 보냈다. 모두 좋은 소식뿐이었다. 그들의 상담이 거의 끝났을 무렵 비서가 미국에서 요시 토하라 상의 전화가 왔다고 알렸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10시에? 그가 이 시간에 전화한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이 분명했다. 토하라 상은 평소처럼 곧장 본론을 꺼냈다.
"마조리, 전에 카를로 로사피오란 친구에 대해 내렸던 결정에 대해 기억하고 있소?"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불쌍하게도 내가 오판을 했소. 그는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거금을 쥐어 줘야 했소. 내 말을 이해하겠지?"
"그럼요."
"그가 남미 포도주에 깊이 손을 댔지만 미국에서 판매가 신통치 않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난 조종 끈을 잡아당겼소. 어리석은 놈, 여자 친구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 그는 파산했소. 문제는 그 재난이 우리 경쟁자 글렌티란 위스키 측에 가장 불리한 시점에 일어났다는 거요. 카를로가 최근에 받은 글렌티란의 뉴욕 주식과 다량의 위스키 상품들이 모두 압류당했소."
갑자기 그녀의 입술이 말랐다. 그 오랜 세월 후에야.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구나. 그녀는 항상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그 정확한 시기와 방법은 모호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그녀에게 적을 휘어잡을 운과 힘이 돌아왔다.
"마조리, 이제 글렌타란은 곤란한 처지에 빠졌소. 로사피오는 6백만 달러의 미수금을 모두 빚졌소. 게다가 올해 생산량의 65%가 이미 미국으로 선적되었거든. 새로운 판매업자와 계약하고 재정상의 손실을 메우는데 엄청난 돈이 들어갈 거요. 같은 금융인으로 말하건대 그들은 최악의 위기에 봉착했소. 그러니 당신도 즉시 대출을 중지하고 인수 제의를 해요. 1977년에 그들이 글렌너드에 제의했던 것과 비슷한 조건의 거래를 하라고 제안하는 바이오."
마조리는 호흡 곤란을 느꼈다. 팽팽한 끈으로 가슴이 졸리고, 목에 혹이 생겨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듣고 있소, 마조리?"
"물론이에요."
"그들이 자금난에 처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요. 당신이 그들의 돈주머니를 잡고 있는 동안 난 그들의 시장을 장악하겠소. 평균 생산량의 네 배를 선적해 줄 수 있겠소?"
"13년산 원액 위스키는 불가능하지만 혼합주와 8년산은 가능해요. 토하라 상, 수고하세요."
5분 후, 그녀는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은행장 제임스 리틀우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임스, 마조리예요. 방금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어요. 우리의 최대 고객 중 하나인 글렌티란이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했어요."
"대단히 심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카메론 부인."
리툴우드는 점잖은 어조로 반대했다.
"그들은 매우 건실하게 운영해 왔어요. 아마 판매업자 쪽이 곤경에 빠졌겠죠."
"그보다 더 심각해요. 글렌티란은 조만간 대출을 요구할 테지만 우리는 그런 모험을 할 수 없어요. 아예 담보를 차압해야 해요. 일단 장부를 살펴 그들의 담보를 현금으로 환산한 다음 글렌티란의 차용금을 알려주세요. 참, 담보에 현시세를 적용해선 안 돼요. 오늘 오후 3시에 봐요."
한참 후에야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상해라. 좋은 소식이 나쁜 것만큼 신체 각 기관에 충격을 주다니. 승리감은 절정의 순간처럼 맥박을 증가시키고 시력과 청력을 높였으며 사정없이 떨게 만들었다. 그녀는 온 세상과 함께 커다란 맷돌에 갈려 터무니없는 혼합물이 된 기분이었다.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실수가 그를 재난으로 몰아넣었다. 로버트는 무덤덤한 얼굴로 서류를 보았지만 책상 맞은편의 바트는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파산했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았습니다."
바트는 억지로 말을 꺼냈다.
"우선 위스키를 로우랜드의 제조업체에 파는 겁니다. 그러면 한동안 현상 유지를 할겁니다. 그리고 향후 몇 년에 걸쳐 천천히 확장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점을 유념하세요. 당신이 선친으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았을 때처럼 긴 세월이 소요될 겁니다. 게다가 재정이나 영업 면에서 볼 때 다시 미국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만큼 충분한 기반을 쌓으려면 더 많은 시간이 들 거예요. 그때쯤 글렌너드는 아성을 구축했을 테니 그만큼 시장확보가 어려울 겁니다. 둘째 방법은 이 방법이 훨씬 좋습니다. 합병 제의에 응하는 겁니다. 글렌너드도 그 점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주식을 사서 당신을 쫓아낼 수도 있지만 그런 방법은 일부 주주들의 반발을 살 수 있어요. 그러나 그쪽의 배당금은 매우 많고 제 때에 나와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시간이 필요하오. 그러니 당신이 그들을 만나 시간을 벌어 와요. 난 가지 않는 편이 좋겠소. 내가 부도를 낸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리란 점을 강조해요. 그들에게 거짓말로 설득할 테니 2개월 동안 임금과 대여료 등 기본 지출 비용을 대부해 달라고 해요. 그동안 우리는 자구책을 찾아봅시다."
로버트는 쓸쓸하게 말을 맺었다.
그는 글렌티란을 딸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런데"
바트는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이런 말을 꺼내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원장 수녀님이 또한 당신 친딸의 행방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입니다."
"그게 우리가 패배에 항거해야 할 이유요. 난 싸워야 할 목적이 필요하오."
로버트는 슬픈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마조리는 글렌너드 증류소 사무실 창문 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벌써 30분째 기다렸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라나가 자리를 비우기만 기다렸다. 이 만남은 은밀히 이루어 져야 해. 하지만 나중에 이 특별한 승리를 라나와 함께 나누어야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21년 전의 그 운명적인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춥고 비참한 심정으로 뱃속의 아이를 위해 로버트의 집으로 찾아가 선처를 구걸했다. 당시 그녀를 매정하게 쫓아냈던 그 여자가 지금 애걸하러 찾아왔다. 그러나 헛수고야. 운명은 이렇게 돌고 도는구나. 그 뱃속의 아이가 이제 그녀의 가까운 동반자가 되었다. 라나는 남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지난 몇 달 동안 그녀의 비서로 일했다. 딸은 빨리 배웠고, 글렌너드의 영업 전략에 대해 회사의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마조리 고개를 들었다. 처음 라나의 창백하고 피곤한 안색을 발견했다. 내가 저 아이를 너무 밀어붙였구나 하지만 라나는 강했고 힘든 노동을 이겨냈다. 그녀는 딸에게 자부심을 느꼈다. 라나는 마조리가 저 나이 때 갖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지녔다. 자신감, 세련된 매너, 나무랄 데 없는 교육 등 누구든 첫눈에 그녀를 '상류 인사'라고 알아볼 것이다. 게다가 사업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라나야, 이리 와서 이 기사를 보렴. 사실 내가 이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단다. 언론 매체는 제대로 이용하면 소중한 사업사의 무기가 될 수 있어. 절대로 언론을 적으로 만들어선 안 돼."
'글렌너드의 글렌티란 인수 제의는 주주 및 투자가를 구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라나는 옆의 마조리를 의식하며 기사를 읽었다. 엄마의 긴장과 즐거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흥분한 엄마는 처음이었다.
"아주 좋은데요."
그녀는 뒤로 물러나 엄마를 자세히 보았다.
"즐거워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세요? 무슨 일이에요?"
엄마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사업 이상의 이유가 있단다. 일종의 복수라고나 할까. 이 오랜 싸움은 너와 긴밀한 관련이 있단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오래지 않아 모든 전말을 이야기해줄게."
그녀는 딸을 꼭 안았다. 라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는 애정 표현을 집에서만 했는데. 호기심이 끓어 올랐다.
"커피를 두 잔 부탁해 놨어요. 엄마. 하지만 왜 내가 여기에 있어선 안 돼요?"
"좀 참으렴. 곧 알게 될 거야. 그 오랜 세월 후에야 드디어 끝이 나는구나."
엄마는 창문과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정말 이상해! 충동적으로 라나는 책상으로 돌아가 윗서랍을 반쯤 열어 놓고 테이프 레코더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늦은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달려갔다.
로다 맥라렌은 글렌너드 회장실의 문간에 서서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돈 잔치를 했군. 카메론 부인은 자신을 여왕으로 아나? 하지만 최근에 '경' 칭호를 하사받았지. 이 실내 장식은 그녀의 신분 상승에 대한 환상을 여실히 보여주는군. 전체가 이중 유리창으로 된 서쪽 벽으로 공원이 내다보였다. 아름다운 베이지색 대리석이 깔린 바닥에서 미열이 느껴졌다. 창문 앞에 푸른 카펫이 딱 한점 깔렸고 밝은색 나무로 된 가구들은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카메론 부인은 값비싼 터너의 작품 앞에 서 있었다. 이제 확실해졌다. 바로 그녀야! 로버트의 창녀! 틀림없었다.
"다시 뵙게 되서 기뻐요, 맥라렌 부인."
카메론 부인은 옛친구를 대하듯 반갑게 말을 건넸다.
"커피를 드시겠어요?"
그녀는 은제 주전자를 들고 섬세한 본차이나 잔에 커피를 따랐다.
"올해 겨울은 춥네요. 바닥 난방 장치를 깔길 잘했어요. 너무 더우시면 말씀하세요."
그녀는 차갑고 침착하게 미소지었다.
"당신은 개인적인 복수극을 당장 멈춰야 해요."
로다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리고 수고스럽겠지만 당신의 진정한 적을 평가해요. 그건 로버트가 아니라 바로 나예요!“
"맥라렌 부인? 복수극? 적이라뇨?"
"내 말뜻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신은 글렌티란을 파산의 궁지로 몰아넣었어요. 은행의 힘을 개인적인 복수의 도구로 남용하고 있어요. 이런 짓은 당신에게 좋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일도 잊지 않아요. 당신이 우리를 파산시킨다면 스코틀랜드 투자자들이 거래 은행을 바꿀 거예요. 당신 아들의 은행을 망치고 싶어요?"
"맥란렌 부인, 귀사는 극도의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어요. 그리고 더 이상 과도한 융자를 상쇄시킬 만한 담보를 제공하지 못해요."
"내가 당신에게 속을 줄 알아요? 내 말을 똑똑히 들어요. 카메론 부인. 맥라렌 가문은 여섯 세대에 걸쳐 그램 피안 은행과 거래를 해 왔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죠? 이건 명예에 대한 문제예요. 여섯 세대 동안 유지된 좋은 관계를 일시적인 재정난을 이유로 매정하게 끊어버리진 못해요. 사람들이 당신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겠어요? 불쌍한 베아트리스 카메론의 돈을 이용해서 파렴치한 목표를 달성했다고들 할 거예요."
"맥라렌 부인,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딸의 생득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어요.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난 내 딸에게 친부의 신분을 밝히고 그 아이의 정당한 유산. 글렌티란을 돌려줄 거예요. 그게 바로 내 계획이에요."
로다는 충격을 받았다. 순간 장례식에서 봤던 젊은 아가씨가 떠올랐다. 그래서 눈에 익었구나. 로버트의 딸이야! 카메론 부인은 아이를 입양시키지 않았어. 그녀가 거짓말을 한 거야.
"이곳을 찾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맥라렌 부인? 특별히 하실 말씀이라도?"
로다는 폭발 직전에 이른 분노를 참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왜 내가 한 짓으로 로버트가 벌을 받아야 하죠?"
"난 로버트 경을 벌주는 게 아니에요. 그램피안 은행이 저당권을 유실 처분한 이유는 글렌티란이 적절한 사업상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귀사는 미국 판매업자를 통해 막대한 손해를 입었어요. 글렌너드의 인수 제의를 거절한다면 은행은 부득이 담보를 차압할 수밖에 없어요. 이 순간부터 당신의 개인적인 구좌는 몰수되었습니다. 이만, 안녕히 가세요."
분개한 로다가 벌떡 일어났다.
"베아트리스 카메론이 무덤에서 돌아누울 거야. 넌 은행을 네 것인 양 행세하는구나. 로버트에게 차이고도 여지껏 정신을 못 차렸군?"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네가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킨다면 네 딸은 글레티란을 손에 넣지 못할 거야. 눈곱만큼도 어림없어. 나 역시 채권자이니만큼 너보다 먼저 장원을 팔아치울 거야. 결국 네 딸마저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될 거야."
로다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카메론 부인이 약해지는 기미를 보였다. 그녀는 21년 전 저 여인의 가련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으며 분노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지금 또는 다시 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며 분노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지금 또는 다시 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며 로다는 협박이 먹혀들었음을 알았다. 카메론 부인은 펜을 만지작거렸다.
"은행에 다른 담보 목록을 제출하세요. 그러면 향후 몇 달 동안 부인의 지출 기한을 연장해 드릴 겁니다."
승리감이 치솟았다. 로다는 적의 약점을 발견했다. 바로 그녀의 딸이었다.
"그만 나가 주세요."
마조리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로다는 팔꿈치를 잡혀 문까지 안내되었다.
"넌 잔인하고 탐욕스러워졌구나. 하지만 승패를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일러."
"21년 전에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시네요. 기억나세요, 맥라렌 부인?"
마조리는 잔인하게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로다의 지으며 로다의 면전에 대고 문을 닫았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 라나는 엄마에게 팔꿈치를 잡혀 문간에 서 있는 한 노부인을 보았다. 맙소사! 엄마가 부인을 거의 밀다시피 하네! 라나는 멈춰 서서 숨을 죽였다. 멀리서도 두 여인 사이에 흐르는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저 부인을 어디선가 봤는데? 아, 베아트리스 숙모님의 장례식에서 나자빠졌던 맥라렌 부인이다. 갑자기 라나는 테이프를 듣고 싶어 좀이 쑤셨다.
라나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잠깐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진짜 엄마였어. 마침내 내 생모를 찾아낸 기쁨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은 가장 행복한 날이야. 하지만 왜 이렇게 슬플까? 그녀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얼른 휴지와 선글라스를 찾아들고 혼자만의 장소를 찾았다. 아무도 그녀를 버린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는 멋진 분인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악한 짓을 했다. 아무 관련 없는 기억들이 마음 속에서 맹렬했다. 주로 다른 사람 주변을 서성거리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알래스데어를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왜냐고? 그는 엄마의 친자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지는 동시에 수많은 감정이 요동을 쳤다. 어깨가 가벼워진 대신 분노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나에게 본질적인 소속감을 박탈하다니! 엄마는 진실을 말해주었어야 했어. 입안이 썼다. 생전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비판 의식이 싹텄고 압도적인 분노에 이성이 달아났다. 순간 발이 미끌어졌다. 그때서야 그녀는 강둑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추위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는 땅바닥에 앉아 혼란스런 감정을 정리했다. 엄마는 결점을 가진 인간이었어. 보호 천사와 거리가 먼 분이었어. 갑자기 라나는 참을 수 없는 상실감에 오열을 터뜨렸다. 한참 후에야 도로 쪽에서 한 노 부인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내가 도와줄까요? 샥시, 추운 날에 코트도 입지 않고 그런 곳에 앉아 있다간 감기에 걸릴 거예요. 봐요, 비가 내리고 있잖아요. 어서 이쪽으로 올라와요."
"싫어요. 저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여기에 얼마나 있었지? 그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를 떠났다. 눈물을 훔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사랑하고 신뢰해왔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저 무정하고 사악한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해왔던 지난날이 수치스러웠다. 이 일의 주범은 엄마였다. 가증스런 사기극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넌덜머리가 났다. 사생아가 창피하다는 이유로 그런 짓을 하다니! 그녀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잃은 채 비를 맞으며 정처 없이 걸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노부인이 경찰에 연락을 한 덕분에 그녀는 경찰의 호위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심한 독감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3주일 동안 폐렴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분노는 전보다 더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반격을 가하려면 분노어린 힘이 필요했다. 가족들의 정성 어린 간호를 무시한 채 그녀는 알래스데어에게만 사실을 고백하고 복수 계획을 짰다. 그리고 일단 계획이 세워지자 그녀는 즉각 실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라나는 재갈이 물려진 어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 질주했다. 외출이 허용된 지 삼 일째 되는 날 그녀는 지방 신문사의 편집장실에서 아침나절을 보내며 엄마에게 첫 번째 타격을 가했다. 즉 여론전쟁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자동차 운전은 분노를 발산하는 방법이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운전대를 놓치는 바람에 차가 도로 밖으로 벗어나 마른 풀잎을 뭉개며 언덕으로 질주했다. 그녀는 운전대와 씨름을 한 끝에야 겨우 차를 도로로 돌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그녀는 숨 가쁘게 중얼거렸다. 속력을 늦추고 싶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차와 그녀는 혼연일체가 되어 사납게 날뛰었다.
20분 후, 그녀는 인버레이드 장원의 진입로를 따라 달렸다. 알래스데어는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영하의 기온 속에서 수영하는 짓은 동생다워. 그녀가 호숫가에 서서 손을 흔들자 알래스데어가 물 밖으로 나왔다. 터질 듯한 생명력이 그에게 오로라처럼 방출되었다. 그녀는 알래스데어 곁에 있으면 더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사내가 다 되었네. 그녀는 남몰래 동생을 훔쳐보며 생각했다. 그의 다리는 길고 탄탄했으며 어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잘 생겼지만 무딘 청년이 될 거야. 얘가 날 도와줄까? 내가 그동안 동생에게 쏟은 정성을 그 누가 알랴.
"알래스데어, 난 너의 도움이 필요해."
그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가 내 아버지의 공장을 차압하려는 중이야. 그러면 그분은 큰 타격을 입으실 거야. 난 그냥 수수방관할 수 없어. 이번에는 안 된다구, 알레스데어. 날 도와줄 사람은 오직 너밖에 없어. 지금까지 너에게 한 번도 부탁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 이렇게 사정할게."
그녀의 절망적인 목소리에 알래스데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큰 갈색 눈동자 속에 간절한 호소와 함께 일말의 흥분이 엿보였다. 그는 수건을 어깨에 두르며 추위를 참으려 했다.
"어머니는 은행의 힘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 있어. 내 평생 어머니는 날 사랑의 보금자리에 끼어든 침입차처럼 느끼게 해놓고, 지금에 와서 내 유산을 빼앗아 나에게 돌려주고 싶어 해. 내 선물로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나와 내 아버지의 것이야. 어머니의 것이 아니란 말이야."
알래스데어는 열네 살짜리의 모든 이성을 총동원하여 문제의 요점을 포착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하지만 사랑의 보금자리에 끼어든 침입자 기분은 그저 누나만의 느낌으로 판명되었잖아. 그건 사실이 아니라구. 누나는 입양아가 아니었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야? 이해를 못 하겠는걸. 우린 모든 다른 아버지를 두었지만 엄마는 똑같잖아. 그 사실이 나와 누나에게 어떤 차이가 있지."
"네가 그 차이를 모른다는 게 문제야."
그녀는 샐쭉하니 쏘아붙였다."
알래스데어는 바람을 피하려고 덤불을 등지고 돌덩어리 위에 앉았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추위에 손발이 꼽았지만 자신의 문제에 푹 빠진 라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내가 설명해 주지."
라나가 말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이야. 넌 입양아의 심정이나 외부인이 서글픔, 그리고 가장과 식구들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인식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거야.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봤자, 내 기분은 변하지 않는다구.
"이제야 난 뿌리를 발견했어. 진짜 뿌리를 말야! 알래스데어, 내가 그걸 얼마나 원해왔는지 넌 모를 거야. 난 소송을 걸어서라도 아버지에게 친자로 인정을 받고야 말 테야."
그녀는 당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제발 내 기분을 이해해줘, 알래스데어. 엄마는 나에게 소속감을 박탈하셨어."
"그건 엄마가 잘못하신 거야."
알래스데어는 반역자가 된 기분이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해. 그리고 내 말을 들어봐.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런 거야."
그녀는 자세히 설명했다.
누나의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 알래스데어는 '난 그렇게 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느 한 편을 들 수 없었다. 그는 엄마와 누나,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했다. 게다가 은행에 달려가서 엄마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하다니? 엄마는 회장일 뿐 아니라 머리 회전이 빠른 분이다. 아마 우리를 비웃으실걸. 하지만 누나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좋아.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죠 삼촌에게 말씀드려야 해."
"좋아. 제발 서둘러. 내가 젠킨스에게 은행에 데려다 달라고 할게. 그다음에 난 에딘버러로 갈 거야. 오늘 밤에 아버지의 성대한 사교 행사가 열리거든. 그야말로 언론에 공포하기에 완벽한 시기야. 알래스데어, 서둘러서 준비해. 난 짐을 싸러 가야겠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씀드리지?"
"어머니에게......? 아, 네 마음대로 말씀드리렴."
"누나는 친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알래스데어는 이성적으로 반박했다.
"엄마가 누나를 키워왔어. 우리를 위해서 뭐든지 다 해주셨다구. 후회할 짓은 하지 마......"
하지만 라나는 이미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다 똑같다니깐......"
그가 중얼거렸다.
오후 3시경에 두 대의 전화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마침 죠는 새로운 열광거리인 플룻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 못해 CD 플레이어를 끄고 핸드폰을 받았다. 글램피안 은행장 제임스 리틀우드였다. 죠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긴급 사태임을 눈치챘다.
"죠, 문제가 생겼습니다."
리틀우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지금 당장 이곳으로 와주셔야겠어요. 은행과 증류소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가정의 불화를 일으킬만한 문입니다. 카메론 일가를 진짜 단란한 가정으로 알았던 저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무슨 문입니까?"
"그동안 카메론 부인의 지시하에 글렌티란에 당좌 대월을 줄여왔습니다. 그런데 알래스데어 도련님이 라나와 함께 여기에 와서 모친이 은행을 이용하여 글렌티란에 사적인 복수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셨어요."
죠는 복부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제분들이 카메론 부인에 대한 그렇게 강경한 태도를 취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두 분은 글렌티란에 대한 은행 결정을 안건으로 비상 주주총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라나는 로버트 경이 친부라고 주장하더군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전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죠는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극비에 붙여야 합니다."
"그럼요. 라나는 그녀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데요. 이미 언론에 사실을 폭로했답니다."
"맙소사!."
그 아이가 제 어미에게서 교활한 술책을 배웠구나.
"그 스캔들로 은행과 글렌너드는 말할 것도 없고 글렌티란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당신은 은행 이사이자 집안의 친구로서 지금 당장 이곳에 와 주시길 바랍니다."
"내일 아침 9시 30분에 봅시다."
그리고 1분 후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라나였다.
"이미 리틀우드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라나."
죠는 분노를 자제하며 말했다.
"네가 어머니에게 해를 입히려 한다면 내 도움은 기대하지 말아라. 넌 정도를 지나쳤어. 가정의 불화는 가족 간에 해결해야 해. 언론 매체를 찾아간 네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어. 그런 짓을 저지른 마당에 화해할 희망은 아예 버려라. 네 어머니는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 9시 30분에 은행에서 만나자. 널 개인적으로 만날 생각은 없다. 너에게 정말 실망했다. 라나."
라나가 전화기를 내동댕이치기 전에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한숨을 쉬고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마조리의 책임이 분명한 사안에 대한 가족의 반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그녀에게 전화를 할까? 아니야, 직접 얼굴을 보며 말하는 편이 좋을 거야. 최선을 다해야지.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자! 그는 신문사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라나 하디의 이야기를 기사화하는 경우 소송을 불사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20여 분에 걸친 통화가 끝날 즈음, 편집장은 기사를 로버트 경과 마조리에게 팩스로 송고하여 확인 절차를 밟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만하면 최소한 시간을 번 셈이었다. 죠는 대중에게 빙하기의 도래를 경고했지만 무시당한 후, 사태에 임박한 부상자들에게 도움을 요청당한 심정이었다.
오후 내내 마조리는 따돌림을 당했다. 라나는 말 한마디 없이 퇴원하고 집에서 알래스데어를 만난 다음에 감감무소식이었다. 알래스데어에게 누이의 행방을 캐어물으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뒤늦게서야 친구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젠킨스의 차를 타고 집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중에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말했다. 왜 그녀가 아니라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을까? 왜 자식들이 그녀는 피할까? 그리고 라나가 입원 기간 중 적대적으로 행동한 이유가 뭘까? 애초에 비를 맞으며 강둑에 앉아 있어야 했던 이유는? 지난 한 달 동안 그녀는 라나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려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마조리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최근에 라나는 공공연하게 반감을 표출했다. 그저 성장의 고통스런 한 과정에 불과한 걸까? 오후 여섯 시가 되자 그녀는 속상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래서 향수 비누를 푼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스카치위스키를 마시며 소설책을 읽었다. 살이 에일듯한 추위 밤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물에서 목욕하는 기분은 그만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자식들의 행동을 분석했지만 역시 별 소득이 없었다. 욕조에서 나올 즈음 그녀는 춥기보다 두려웠다. 푹신한 벨벳 가운으로 몸을 감싼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를 끓였다. 막 서재를 지날 때 안에서 팩스 수신음이 들여왔다. 그녀는 불을 켜고 팩스 용지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지방 신문사였다.
어머, 이상해라! 부인, 우리는 다음 기사를 내일자 석간신문에 게재하려 합니다. 따님 라나 하디와의 인터뷰를 그대로 인용한 본 기사에 만일 반박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자정 이내에 팩스를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조리는 다음 장을 넘길 수 없었다.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그녀는 계속 읽어나갔다. 글렌티란 증유소 및 그램피안 은행의 회장 마조리 카메론은, 아들 알래스데어가 소유한 증류소의 경쟁자 글렌티란 증류소에 대부를 거절함으로써 위스키 전쟁의 막판에 승리를 거두었다. 본 조치는 시기적절하게도 글렌티란의 미국 판매사 로사피오 홀링 사의 파산에 이어 행해졌다. 5백만 달러어치의 글렌티란 12년산 원액 위스키는 유욕의 채무자에게 압류당했고 조만간 경매에 부쳐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헐값에 팔리리란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최근의 전개호 14년간에 걸친 위스키 전쟁은 결론을 맺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은 위스키를 생산하는 글렌티란은 그램피안 은행이 대부를 회수하는 작금에 위스키와 판매사의 손실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극히 의문이다. 그렌티란의 수출사 인버 아시아는 미국과 일본에 영업망을 구축했으므로 빠르게 글렌티란의 시장을 잠식할 것이다. 이제 글렌티란을 살릴 방법은 지적밖에 없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라나 카메론(20세)은 자신이 마조리 카메론 부인과 그렌티란의 사장 로버트 맥라렌 경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주장하며 부친의 사업을 구할 기적을 찾고 있다. 그녀는 글렌티란의 숙성 중인 위스키를 팔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런던의 유명한 주식 중개인과 손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금융계에 있다. 우선 정부 당국은 은행이 금권력을 휘둘러 경쟁 회사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둘째, 은행의 힘을 빌어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다는 발상은 그 도덕적인 측면을 차치해 두고 미래의 고객 관계에 큰 파급 효과를 끼치게 될 것이다. 글램피안 은행장 제임스 리틀우드 씨의 말을 빌자면 은행주 알래스데어 카메론(14세)은 소위 '위스키 전쟁'에 대한 모친의 접근 방식에 '큰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램피안 은행이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는가? 정말 은행이 카메론 부인의 경쟁자를 말살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다음 목표는 누가 될 것인가? 부인이 건축업이나 조선업, 혹은 소매업에 관심이 없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은행의 주주들은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리라고 믿는다.
마조리는 팩스 용지를 휴지통에 쳐넣었다.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녀는 헐떡거리며 밖으로 달려 나왔다. 난 저주를 받았어. 로버트가 날 버렸고 해미쉬도 그랬어. 그리고 이제 아이들마저. 어떻게 내 속으로 난 자식들이 나에게 등을 돌릴 수 있지? 난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했어. 어떻게 내 자식들이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달이 교교한 빛을 발했고 올빼미 한 마리가 숲에서 울었다. 바람이 스산하게 나무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마조리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공허감에 휩싸인 그녀는 망연히 어두운 호수를 바라보았다.
마조리는 충분히 마음을 가다듬은 후 신문사에 팩스를 보냈다. 여저히 가운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워드 프로세서 화상에 뜬 답변을 마지막으로 검토했다. 잔인할 만큼 솔직한 내용이었다. 네, 저는 글렌너드 위스키 회장으로 글렌티란 측에 대부를 중지하도록 권고했습니다.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서 그와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날 위스키 업계에서 쌓은 충분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렌티란의 위험한 상태를 누구보다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글렌티란은 어떤 자구책을 마련한다 해도 미국 시장의 패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결국 큰 손실만 입고 대부분의 시장을 경쟁 업체들에게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중소 업체로 전락하고, 손해를 메꾸기 위해 많은 빚을 지게 되겠지요. 그래서 글렌너드는 인수를 제의했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들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라나는? 딸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는 몇 분 동안 숙고한 다음 타자를 쳤다.
귀사의 기사에 실린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본건에 대해 제 변호사가 연락을 드릴 겁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은행장 리틀우드였다. 평소처럼 그는 본란만 말했다.
"마조리, 내일 아침 9시 30분에 이사회가 열립니다. 죠 시걸이 오늘 밤 비행기를 탔을 겁니다."
그래, 죠가 오고있는 중이구나. 그녀는 지난 몇 시간 동안 그에게 연락하려 했었다.
"이번 가족의 위기에 대하여 심심한 유감을 표하고 우리 모두 당신을 지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런데 신문사에 연락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쪽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취했어요."
그녀가 그의 말을 잘랐다.
"잘하셨습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여러 부장들과 긴급회의를 한 결과 우리는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글렌티란에 더 이상 재정적인 모험을 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결정을 고수할 것이며 신문에 성명서를 낼 생각입니다."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아, 아니에요......제임스......잠깐만 기다리세요! 난 당장 은행 및 증류소의 회장직을 사임하겠어요. 오늘 밤 당신에게 사임 서류 팩스로 보내겠어요. 마땅한 사람을 찾을 때까지죠 시걸이 도와줄 거예요."
"안돼요, 마조리. 서둘러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심정은 상상이 가지만....."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거대한 무도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라나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최소한 1야드 두께의 오래된 나무 바닥은 오목하게 수 세기 동안 닳은 자국이 패였고, 벽마다 묵직한 초상화들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가까이 서 있는 로버트 맥라렌 경을 발견하자, 라나의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즐거운 모습으로 술을 마시며 장신의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 마리아로 구나. 서른한 살 된 저 여성은 로버트 경의 계모 로다에게 며느리로 낙점되어 경의 아내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는 친부의 결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음료수를 마시며 그를 남몰래 관찰했다. 듬직한 체구에 퀼트가 잘 어울렸다. 이미 무수히 많은 사진을 보았지만 전부 실물보다 못했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칼과 강렬한 갈색 눈, 힘찬 용모와 근육질 몸매는 고대 스코틀랜드 전사를 연상시켰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활력으로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겉보기에 우아하고 양같이 온순해 보였지만 그속에 내재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독립된 생명체처럼 반짝이는 저 눈이 무한한 인내심을 갖고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정적인 외관 속에 약동하는 기민함은 오랫동안 오지를 탐험했던 소득이리라. 웬지 그의 강인함과 고집스런 모습에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어떻게 어머니가 저런 남자보다 사업 면에서 월등할 수 있겠어? 하지만 어머니도 만만찮은 분이야. 인내심 있고 교활하게 복수 계획을 세웠고, 해미쉬를 비롯한 글렌너드와 은행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조종해왔어. 심지어 알래스데어마저 어머니의 전쟁에 끌어들였어. 한순간 자의식이 그녀를 강타했다. 그녀의 뿌리는 저 두 명의 영리하고 고집 세고 가차 없고 특별한 부모님에게 있었다. 그들의 유전자가 그녀의 것이며, 그들의 피가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그들의 두뇌와 교활함을 지녔고 저 두 사람의 합작품이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아버지를 원했다. 우울하고 슬프면서 행복이 교차된 심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아버지를 어머니로부터 구해 드리고 싶었다. 라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였다. 계획에 없었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은 충동에 따랐다. 저분의 책상을 만져보고, 저분의 사무실을 두 눈으로 보고, 저분의 침실을 통해 일상을 알고 싶었다. 그녀는 살그머니 무도회장을 빠져나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세상에서 자식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일이 또 있을까? 마조리는 책상 앞에 앉아 고개를 박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따져보았다. 왜 아이들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을까? 그 오랜 세월동안 그들을 위해 노력해왔건만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라나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왔다. 여우를 보고 감탄하던 모습, 처음 승마를 하던 의젓한 태도, 패디용크가 죽었을 때 슬퍼하는 얼굴 등. 딸은 큰 위안을 주었다. 그런데 왜? 라나가 가시철조망 위로 몸을 던져 그녀를 받쳐주었던 때가 떠올랐다. 라나는 항상 엄마를 사랑해왔다. 이제 가슴의 상처가 육체적인 아픔이 되어 복부를 찔렀다.
"난 글렌티란을 이겼어."
그녀는 소리 내어 말했다.
"이제 시간 문제야. 그 모든 게 라나를 위해서였는데, 그 아이는 그의 편을 들었어. 왜?"
"어떻게 제 아버지에 대한 것을 알아냈을까? 그녀는 지저분하게 싸움을 걸어왔어. 하지만 내가 이빨과 손톱까지 동원해 싸우는 법만 가르쳤으니...... 그래, 난 그 아이를 자랑스러워 해야해."
마조리는 쓰레기통에서 내버린 팩스 용지를 다시 주웠다. 라나에 대해 뭐라고 쓰여져 있었더라?
'......부친의 사업을 구할 기적을 찾고 있다......'
"미쳤구나. 기적은 없어, 라나. 넌 너무 늦었어."
지난 3주일 동안 요시 토하라 상은 발 빠르게 글렌티란의 미국은 관로를 장악했고 악의적인 보도를 접한 글렌티란의 채권자들은 일제히 투자금 반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난주 그 회계사가 리틀우드에게 직원 임금만이라도 대출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을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서재를 서성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물론 내가 이길 거야. 라나는 정보도 힘도 경험도 없어.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해. 오래전부터 천천히 조여 들어간 덫이 표적의 숨통을 결정적으로 끊어놓으려는 찰나에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 아버지는 패배할 거야. 그다음에 내가 라나에게 글렌티란를 쟁반 위에 받쳐줄 테야."
그녀는 시니컬한 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항상 꿈꾸어 왔던 것처럼 내 딸은 제 아비의 유산을 받게 될 거야. 하지만 반드시 날 통해서 이루어져야 해."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았다. 딸의 동기는 짐작할 만했다. 진짜 이유가 명백해져 가자, 마조리는 그동안 딸의 존재를 부인해왔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사실 냉대는 차가운 샤워만큼이나 충격적이다. 하지만 라나만 그런 대접을 받은 게 아니었다. 난 복수에만 집착한 나머지 누가 상처를 받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어. 죠, 해미쉬, 내 자식들, 그리고 나 자신마저 속였다. 라나를 위한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 왔던 거야.
창가로 간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 가보았다.
"내가 이긴다면, 내 딸은 나처럼 증오하는 법을 배우게 될까?"
참담한 분노에 입이 말랐다. 마조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소리쳤다.
"안돼! 내가 천벌을 받고 있구나."
일요일 주일 학교에서 배운 교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너에게 벌을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유유상종이라고 내가 증오와 복수에 이끌린 거야.'
한가지 생각이 혼란에 가득한 배반의 밤을 뒤덮은 안개를 관통했다.
'라나는 이겨야만 해! 난 그라나를 패배시키기에는 너무 그 애를 사랑해.'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날 무수한 적과 대결을 앞두었을 때처럼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자신의 마키아벨리적인 음모를 뛰어넘는 것을 짜내야만 했다.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춥고 온몸이 뻐근했다. 그녀는 각종 증명서와 신탁 서류가 보관된 금고를 열었다.
갓 스무 살이 된 라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는 날 백만장자가 될 것이다.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한 다음 그녀는 라나에게 간단한 편지를 썼다.
네 주식을 글렌티란의 제2차 담보로 잡히거라. 은행은 그 제의를 받아들일 거야. 그리고 개별적인 브랜드를 유지하며 글렌티란 위스키 수출을 글렌너드 측에 귀속시킨다면, 글렌티란은 오래지 않아 경기를 회복할 거야. 행운을 빈다. 널 사랑해.
그녀는 서류와 편지를 커다란 봉투에 넣고 그 위에'라나 하디에게 속달로 배달할 것'이라고 메모한 뒤 '우편 접수' 바구니에 넣었다. 내일 아침에 배달부가 수거해가겠지. 한 가지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그녀는 죠와 리틀우드에게 각각 편지를 써서 팩스로 송고했다.
"마조리."
죠의 목소리였다.
"내가 오늘 밤 그곳에 갈 거요. 막 떠나려는 순간에 당신의 팩스를 받았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전화를 끊지 말고 내 말을 들어요. 라나는 환상적인 소원에 푹 빠져 있는 거요. 글렌티란 위스키를 글렌너드 측에서 매각할 가능성은 희박해. 그리고 그 애는 제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
"뭐요?"
마조리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오늘 밤 라나는 그와 결판을 하겠다며 에딘버러로 갔어. 소송을 걸겠다고 위협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을 생각인 듯하오. 최근에 발생된 비슷한 건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모양이야. 30분 전에 알래스데어가 나에게 전화하여 모든 사정을 다 털어놨소. 그는 친구네 집에 있는데 오랫동안 뿌리를 알고 싶어 했던 누이가 문전 박대를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이 대단하더군."
"하느님 맙소사......"
"마조리, 당신 생각과 달리 아이들은 당신에게 반감을 가진 게 아니오. 라나가 당신과 알래스데어에게 등을 돌린 거야."
"안돼!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그 순간 그녀는 그 옛날 로라에게 당했던 모멸감을 또렷이 기억해 냈다.
"난 라나를 찾아야 해요. 고마워요. 죠."
그녀는 위층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었다. 라나를 찾아서 주식을 줘야 해. 어린 딸을 원치 않았던 그가 지금 와서 그 아이를 원할까? 하지만 라나는 그곳에 사정을 하러 간 게 아니었다. 그녀만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 이번은 전과 사정이 달랐다.
달은 구름이 가리웠고 자욱한 밤안개로 시계가 선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60마일이 속도로 모퉁이를 돌았다. 아직 기회는 있어.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손에 쥐가 날 정도였다. 인버네스를 5마일 앞둔 어두운 숲속에서 뭔가 뛰어나왔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차를 오른쪽으로 트는 순간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는 생명체의 뿔과 반짝이는 눈, 공포로 허옇게 드러난 이빨이 얼핏 보였다. 그 아름다운 생물은 차와 충돌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전광석화와 같은 공포의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난 너무 많은 이에게 상처를 줬어. 그녀는 힘차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대를 왼쪽으로 틀었다. 차가 썰매를 타듯 옆으로 미끄러질 때 그 우아한 동물이 차 옆을 지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발굽 소리, 찢어지는 듯한 타이어 마찰음과 더불어 그녀의 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거대한 진동과 맞물렸다. 그리고 그녀는 쓰려졌다......그녀는 로버트와 함께 도버 절벽을 걷고 있었다. 그녀가 풀 위에 눕자 그가 그녀에게 몸을 겹쳐 왔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위로 가을 햇살이 후광처럼 빛났다. 엄마가 수녀원 육아실의 아기 침대에서 라나를 들어 올렸다.
"우리 아기, 이제 집에 가자."
해미쉬가 카메라를 든 그녀에게 수줍게 웃어 보이며 바위 위를 오르고 있었다. 해미쉬, 아 사랑하는 해미쉬,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건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바보였어요. 스쳐 지나가는 영상들! 그리고 또 다른 시대의 모습들이 언뜻 보였다.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이야! 그리고 그녀도 그곳도 있었다. 그 명멸하는 광경들은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다. 꼭 수정처럼 맑은 호수에 파문이 일어나 온갖 퇴적물과 지난날의 실수가 남긴 파편들이 그녀 주변에 쌓이는 것 같았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던 나는 누구일까? 그녀는 반쯤 열린 문을 통하여 마조리 하디의 육신을 볼 수 있었다. 그다음에 거대한 사랑의 밀물이 그녀를 채웠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생명력과 강력한 힘과 큰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시공을 떠다녔다.
오후 10시. 서재에서 고다 맥라렌은 의붓아들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렸다.
"넌 존경을 가지고 우리 손님을 접대해야 해."
그녀는 성질을 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손님들입니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더욱 주의 깊게 아들을 살폈다. 아, 저 완고한 표정은 정말 지긋지긋해. 그의 얼굴은 침울한 초상처럼 굳어 있었다. 저런 표정의 그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급박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니?"
"어머니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저는 돈 때문에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그야말로 좋은 거래잖니? 그녀는 명예를, 너는 돈을 갖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는 후계자가 필요해."
로버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다시 시도했다.
"그녀는 너를 사랑해. 다들 네가 오늘 밤 청혼하길 고대하고 있어."
"왜요? 어머니가 끊임없이 그녀를 나에게 밀어붙였기 때문에요? 제가 과연 결혼을 하게 될지 의문이군요. 하지만 만약 한다 해도 돈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저는 글렌너드의 제의를 수락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겁니다."
그의 말은 그녀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평생이 걸릴 거야. 그리고 우리는 다시 가난해질 테지 향후 20년 동안. 넌 항상 그래왔듯이 체면을 위해 실리를 저버리는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글렌티란은 우리 가문이 증류소예요. 그러니 앞으로도......"
노크 소리가 그의 말을 방해했다. 집사가 서재로 들어왔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로버트는 놀란 눈으로 집사를 보았다. 평소 벤자민의 무표정한 얼굴에 생생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주인님 침실에서 젊은 아가씨를 발견했습니다. 경찰에 연락을 하기전에 주인님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아가씨는 성난 암고양이 같더군요."
"이곳으로 데려와요."
로버트가 말했다.
"자요. 난 여기 있어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우와! 로버트는 당당하게 서재로 들어서는 젊은 아가씨를 보며 생각했다. 새까만 눈동자의 극적인 생김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저 드레스 좀 봐! 온몸에서 멜로 드라마적인 분위기가 발산되었다. 복수의 천사 역에 도취했군. 저 여자가 누굴까? 그녀는 경비원의 손을 떨쳐 버렸다.
"내가 변호사로서 경고하겠는데, 지금 당장 이 건달들이 내 몸에 손을 떼지 않으면 고소하겠어요."
그녀의 호령에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그녀가 기절하기 일보 직전임을 알아차렸다.
"내가 당신을 만난 적이 있소? 전에 본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당신 얼굴이 낯익군. 혹시 TV에 출연하는 배우요?"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집고 그 얼굴과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날 아셔야 마땅해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그건 전적으로 당신 잘못이에요."
이 말이 무슨 뜻이지? 로버트의 심장이 박동을 멈췄다. 지난 몇 년 동안 협잡꾼들을 수없이 경험했지만, 희망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여기 테이프 레코드를 가져 왔어요. 일단 들어보고 경찰을 부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지며 말했다. 그리고 로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이 테이프의 내용을 짐작하실 거예요. 맥라렌 부인. 이 안에는 어제 글램피안 은행에서 당신이 우리 어머니 카메론 부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담겨 있어요."
로버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당신 어머니가 카메론 부인이라고 했소? 인수 건 때문에 여기에 왔다면 헛걸음을 한 거요. 그 제의는 거절하겠소."
그런데 계모가 글램피안 은행에서 뭘 하셨지?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죄책감을 발견했다. 그녀가 그를 배반할 작당을 한 것일까? 어린 아가씨가 책상 위의 테이프 레코더를 작동하자 어렴풋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로버트는 귀를 의심했다.
"맥라렌 부인. 난 오랜 세월 동안 딸의 생득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어요.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난 내 딸에게 친부의 신분을 밝히고 그 아이의 정당한 유산을 돌려줄 거예요. 그게 바로 내 계획이에요."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는 카메론 부인을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가 어린 아가씨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이 뭐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잠겨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마조리 하디예요."
"그리고 네 이름은?"
"라나 하디."
로버트는 경악한 나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그래, 얘는 내 딸이야. 나를 꼭 빼닮았잖아. 입양된 게 아니었구나. 그는 이미 낭비되어 버린 지난 세월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마조리가 그 유명한 마조리이자, 나의 냉혹한 적이었구나. 이제서야 소위 '위스키 전쟁'의 전모가 이해되었다. 그는 애매모호하게 로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내내 알고 있었을까......?
"다음 대화가 더 이어져요."
그의 딸이 등을 돌리고 테이프 레코더를 감았다. 로버트는 방을 가로질러 가서 기계를 껐다.
"나중에 듣기로 하자. 네가 마조리 하디의 딸이라면, 내 딸이 틀림없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난 네가 입양된 줄 알았었어. 그동안 내 변호사가 너를 찾았단다."
라나는 뒤로 물러서서 턱을 바짝 들어 올렸다.
"난 당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로서 나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걸 거예요."
로버트는 눈물 어린 눈으로 딸의 표정을 살폈다.
"얘야, 난 너를 오랫동안 찾았어. 넌 어떤 누구도 고소할 필요가 없어. 어리석은 것! 그냥 나에게 오기만 하면 돼."
왈칵 딸을 가슴에 안은 로버트는 마조리와 한때 그들의 열렬한 사랑을 떠올렸다. 그의 자식을 내버린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이제 그녀가 아예 용서받을 짓을 저지르지 않았음이 판명되었다.
"용서할 수 없구나! 라나, 어떻게 네 어머니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니?"
로버트는 신문사에 팩스로 보낸 기사를 훑어보며 노발대발했다. 라나는 도가 지나쳤음을 알았다. 꼭 환희와 맹목적인 공포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추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의 각본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즉각적인 인정이나 사랑 대신 싸움. 냉대. 말다툼을 예상했었다. 지금 아버지 좀 봐! 어휴, 아버지가 꼭 좋은 존재만은 아니구나. 몇 분 전만 해도 애정으로 빛나던 눈동자 싸늘한 분노로 식어있었다.
"우리의 사생활을 언론에 공표할 필요가 있었니? 네가 네 어머니나 나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구나."
"어머니는 나를 입양아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미워요."
"빼앗겨? 아, 라나. 넌 아직 배워야 할 게 많구나. 테이프를 다시 틀고 네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여봐."
"흥, 이미 외울 정도예요."
그녀는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돌아섰지만 아버지가 그녀의 팔을 잡고 테이프 레코드 쪽으로 밀어붙였다.
"빨리 틀어!"
그녀는 울먹이며 레코더를 작동시켰다. 다시 한번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로버트가 흘러나왔다.
"네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니? 어리석었던 내가 그녀에게 우리 집안에 부족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녀는 너까지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너에게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왔어. 이제 내가 절 찾은 이상 네가 걱정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네 엄마야."
아버지의 호소력 담긴 목소리가 방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이성적인 논리는 차가운 칼날과도 같았다. 라나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그녀는 잘못을 선선히 시인했다. 어머니가 베푼 사랑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고 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 엄마.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요?"
그녀가 속삭였다. 순간 갑자기 춥고 구역질이 났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재난이 임박했다는 감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닌 심한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항상 그녀와 엄마는 본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에게 나쁜 일이 생겼구나.
"절대로 안 돼요."
그녀가 소리 질렀다.
"뭔가가 잘못되었어요? 즉시 인버네스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내가 널 데려다주마."
아버지가 대답했다.
"눈을 뜨세요. 엄마! 눈을 떠요! 제발, 엄마, 부탁이에요. 엄마를 사랑해요."
그 목소리가 계속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한 여인을 에워쌌다. 그녀는 코를 찡긋거렸다. 라나가 가장 좋아하는 샤넬 NO 5야. 얼굴을 간지럽히는 딸의 뜨거운 숨결과 고수머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에게 말을 하세요. 엄마."
라나의 권위적인 어조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마조리는 순순히 눈을 뜨고 딸의 걱정스런 두 눈이 안도감으로 밝아지는 모습을 보았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마조리는 손을 들어 올려 머리 붕대를 만졌다. 이게 뭐지? 그때 사고를 당한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눈을 감으며 그녀는 달콤한 수면 속으로 빠져들려 했지만 딸이 그녀를 방해했다.
"엄마! 나에게 말을 하세요!"
"난 괜찮아, 라나. 정말이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니?"
"하루 반 동안이에요. 엄마, 제 말을 들어보세요. 난 엄마를 사랑해요. 알래스데어가 곧 이곳에 올 거예요. 걔도 엄마를 사랑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어요."
그녀는 말 한마디에 진심을 담아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발음했다.
"괜찮아, 라나."
라나가 붕대를 쓰다듬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 난 엄마를 용서했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나의 뭘 용서했다는 거지? 소처럼 열심히 일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주고 네 버릇을 망쳐놓은 점? 너를 최고급 학교를 보내고 진학시킬 돈을 벌었던 것? 아니면 내가 누리지 못한 모든 특혜를 너에게 보장했던 사실? 네가 나에게 등을 돌렸을 때 잠자코 있었던 점? 기가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중 최악의 고통은 너의 공개적인 선전포고였어. 그러나 그녀는 짧은 한마디로 말을 마쳤다.
"너무 피곤하구나."
"내 말을 듣고 계세요. 엄마? 난 엄마를 용서했어요."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용기를 내라고 부추겼다.
"나의 뭘 용서했다는 거니?"
아! 말이 너무 험악하게 튀어나왔어. 지금은 정면 대결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날 입양아라고 믿게 했던 것이죠. 내가 완전히 용서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마조리는 솟구치는 분노에 앉으려고 버둥거렸다.
"아!"
그녀는 고통으로 헐떡거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라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니? 지금 같지 않은 시대였어. 예전 사람들의 가치관은 지금과 딴판이었어."
"그리고 엄마가 매일 일만 하고 우리 곁에 있어 주지 않았던 것도 용서했어요."
"너희들에게는 할머니가 있었잖니."
"난 엄마를 원했어요."
라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라나, 그만 울어. 나에게는 꿈이 있었단다. 너를 네가 속산 사회에 되돌려 놓고 내 자존심도 살리기 위해서 너에게 유산을 되찾아주고 싶었어. 난 이류 시민 취급에 상처를 받았었단다......"
"알아요. 아빠가 말씀해주셨어요. 난 이제 엄마를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엄마의 편지도..."
잇지 못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엄마가 제안하신 데로 하겠어요. 이제 엄마가 나에게 최선을 다하셨음을 깨달았어요. 아버지 덕분에 사태를 바로 볼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지금 가고 안 계시지만 여기에서 밤을 새우셨어요. 며칠 전 계모 로라가 예전에 엄마가 임신했다고 썼던 편지를 아버지에게 건네주셨어요. 아버지는 훨씬 후에야 엄마의 임신 사실을 알고 수녀원에 찾아가 내가 입양되었다 말을 들으셨대요. 그 이후 그의 변호사가 내 행방을 찾으려고 애써 왔대요. 참 이상하지요? 우리는 어젯밤에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평생동안 아버지를 알고 지낸 기분이에요."
마조리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밖의 풍경에 정신을 집중했다. 키 큰 나무에서 한 마리 새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분노와 슬픔과 후회로 뒤섞인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라나를 옆에 앉혀두고 자기 연민에 빠질 수는 없었다. 저 아이는 그녀의 말이 비수가 되어 어미의 가슴을 찌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딸은 너무 어렸다. 그리고 나도 널 용서했단다. 그러나 마조리는 너무 현명하기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난 자고 싶구나."
"난 언제나 엄마를 사랑해왔어요. 그럴 거예요. 내 말을 믿으시지요? 그런데 아빠가 병문안을 와도 되는지 알고 싶으시대요."
마조리는 꾹 참았다가, 라나가 떠난 후에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정오경에 엄마가 오셨다. 마조리를 동정해야 할지, 책망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다는 듯 혼란되고 걱정스런 기미가 역력했다.
"엄마, 오실 필요는 없었어요."
마조리는 죄책감을 느끼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곧 집에 가게 될 거예요."
"간호사의 말로는 내일 퇴원해도 된다더라. 내가 책을 몇 권 가져왔어."
엄마는 죽는 그 날까지 감정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리라. 최우선의 화제 대신 채소밭과 거기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나와 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다 해결되었어요."
마조리가 불쑥 물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하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았어요. 언론에서 우리의 사생활을 까발리는 통에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어. 우리는 공들여 라나를 입양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해 왔잖니.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야. 정말 우리가 그 아이를 입양했으니 말이야, 네 아빠와 나는 그 아이에게 마음을 쏟았단다. 넌 아이 버릇을 망쳐놨어요. 내가 너라면, 너라면 라나를 그렇게 쉽게 용서하진 못했을 거다. 짐짓 상처받지 않은 척하지 말아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정신이 없었으면 칠흑 같은 야밤에 도로를 질주하다 차를 나무에 들이받았겠니. 그런데 자동차 보험은 들어놨겠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사랑해요.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리즈는 휴지로 눈가를 닦았다.
"네가 일을 잘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너의 혹 덩어리라고 생각해왔단다...... 우리가 무거운 짐 덩어리였지? 네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몰라."
"아, 엄마! 난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릴 거예요. 두 분은 서로 사랑하시면서 잘 살아 오졌잖아요.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의도가 뭐예요? 돈?"
엄마가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화제를 바꾸었다.
"너의 그 로버트가 찾아왔더구나. 키이스로 이사했으니, 필요한 일 생기면 연락하래. 흥, 우리는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왔어. 그는 저택에서 살고 싶은 것 같더라. 계모가 가구까지 몽땅 싸가지고 프랑스로 갈 거래. 그가 뻔뻔스럽게도 자기 딸을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기에, 내가 한 미디 해줬다. 그 아기는 우리 딸이니 언감생심 꿈도 굳이 말아요! 하고. 전형적인 속물 같으니! 세상이 저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봐. 해미쉬와는 격이 다르더라. 아빠는 해미쉬를 아끼셨어. 아니, 우리 모두 그랬었......"
그녀는 말끝을 흐렸지만 짧은 웃음으로 우울함을 씻어버렸다.
"남자들 속은 너무 뻔히 들여다보여서 웃겨. 로버트가 나에게 꽃을 가져왔더구나. 커다란 아이리스 꽃다발이었어. 그는 너를 다시 되찾으려는 거야. 하지만 마조리, 그를 섣불리 믿지 말아라. 전에 너를 버렸던 남자야. 그 꽃을 여기로 가져올까 하다가 네 침실에 꽂아놓았다. 네가 퇴원할 때까지 싱싱하게 피어있을 거야."
"고마워요. 엄마."
마조리가 엄마의 손을 꼭 잡았지만 엄마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리고 다시 딸의 손을 잡아 마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지, 맞지? 다른 집 식구들은 노상 서로 껴안더라. 아랫마을 턴불 부인만 해도 항상 딸들의 뺨에 키스를 하더구나.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잘하셨어요."
마조리가 일어나려다가 두통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간호사를 부르마."
"아니, 됐어요."
그녀는 엄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꼭 껴안은 다음 뺨에 키스를 했다. 엄마에게 향수와 비누, 그리고 친밀한 냄새가 풍겼다.
"기자들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어."
엄마가 마조리에게 말했다.
"그들도 그게 직업이니 어쩔 수 없겠지. 우리는 그냥 무시해 버렸단다. 그리고 라나에 대해서 말인데. 그 아이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네가 베푼 해동을 말해줬을 때 난 그만 울어 버렸단다. 네가 건강을 되찾는 즉시 라나는 미국으로 가서 요시 토하라상과 두 회사의 영업을 합병시킬 거래. 로버트도 동의했단다. 그 아이가 그의 후계자이니만큼 양측의 유산을 통합할 대의명분이 선다나. 어휴, 라나가 주식에 손을 댄 지금 그 아이를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구나. 전보다 더 대장 노릇을 하려고 들어요. 네가 취한 조치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네, 엄마. 라나가 날 필요로 할 때마다 내가 곁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요시 토하라 상과 로버트도 있잖아요. 나중에는 알래스데어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거예요. 그러니 잘못될 수가 없어요."
"네가 좋아 보이니, 난 이만 가보마. 난 병원을 참을 수가 없어. 여기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거든. 아빠가 병문안을 오지 못해서 미안하시대. 새 감자밭에 거름을 주셔야 했단다."
"그럼요. 아빠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내가 알래스데어를 데리고 왔어. 그 아이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무 오래 데리고 있지 말아라. 다시 학교로 데려다줘야 해. 아, 그리고 로버트가 이걸 전해 달라더라."
그녀는 봉투 하나를 마조리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알래스데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레스데어, 너를 사랑해. 난 앞으로 부주의하게 운전하지 않을 거야. 날 용서하거라."
"엄마, 죄송해요.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냐, 네가 잘한 거야. 내가 잘못했어. 나중에 네가 나이가 들었을 때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때까지 ......"
"아, 엄마."
알래스데어가 침대로 달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젖어 간헐적으로 간간이 흘러나왔다.
"이번 일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어요. 난 엄마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전에는 엄마가 실수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난 일만 해왔어. 하지만 앞으로 오랫동안 쉴 생각이란다. 내가 곧 집으로 돌아갈게. 나를 꼭 안아주고 학교로 돌아가거라."
그가 떠나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21년 전의 편지에 그녀는 숨이 막혔다.
사랑하는 마조리,
난 이번 일을 내 입장에서 충실하게 기록해봤소. 우리의 그늘진 삶에 한 줄기 빛이 비췄다고 할 수 있겠지. 난 당신을 이해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던 나 자신을 영원히 용서할 수 없소.
마음을 다하여
로버트
추신 : 난 '사랑'이란 말로 당신을 모욕하지 않겠소. 당신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었소.
나머지는 그저 역할에 불과했다. 그녀는 여러 번 다시 읽은 다음에야 잠들었다. 훨씬 나중에 눈을 떴을 때 온 방안에 튜울립과 다알리아, 그리고 장미와 바이올렛이 가득했다. 라나의 선물이었다. 그 아이가 꽃집을 몽땅 사들인 모양이야.
다음날 오후 4시경에 마조리는 퇴원하기로 결심했다. 꼭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옷을 입고 운전사 젠키스와 로버트의 키이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당신을 데리러 가겠소. 아직 몸이 좋지 않은 당신이 운전하길 바라지 않소."
보기 드물게 강압적인 말이네. 그녀는 비판적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 온몸이 짜릿해졌다. 그녀는 깊고 풍부하며 관능적인 약속에 가득 찼던 그 목소리를 잊고 있었다.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야. 그녀는 엄하게 자신을 책망했다.
"운전사가 데리러 올 거예요. 그리고 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난 그쪽으로 가고 싶어요.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녀가 다섯 시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 로버트가 작고 예쁘장한 주택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차를 보자 그는 그 특유의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구나. 아니, 예전과 똑같아. 그저 더 성숙하고 쌓였을 따름이지.
"당신은 변함이 없구려."
그는 차에서 내리는 그녀에게 정중히 말했다.
내 주름을 좀 보세요.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로버트."
사랑과 관용으로 빛나는 그의 눈이 그녀에게 과거를 되돌렸다.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자신을 추스렸다. 내가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난 떠나야 해. 이 남자는 나를 떨게 만드는 힘을 지녔어. 우스꽝스럽게도! 난 십 대 소녀가 아니야.
"당신 운전사를 돌려보내요. 내가 나중에 당신을 데려다주겠소."
"지금 그 말을 각서로 써 주실래요?“
그녀는 신경질적인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젠킨스씨.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내가 키이스의 친구와 같이 있다고 어머니께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그는 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로버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과거의 깜부기가 불리 훨훨 타오른 동시에 그녀는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었다. 우리 사이의 일은 다 과거지사야. 그 점을 명심해. 이 바보야.
그녀는 천정이 높고 벽난로가 지펴진 아늑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봐요."
로버트가 말했다. 두 사람이 미처 앉기도 전이었다. 그녀는 그의 조급함에 당황했다. 난 당신이 오만하고 고집 세고 속물이고 못 믿을 바보라는 말을 하러 왔어요. 그리고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나는 라나가 우리 사이에서 괴로워할까 봐 걱정이에요. 그 아이를 위해서 우리는 원한과 비통함을 묻어 버려야 해요. 우리의 불화는 백년 전쟁처럼 지루하게 질질 끌어왔어요. 누가 알겠어요? 먼 훗날 우리가 친구 사이가 될지 말이에요."
"오늘 밤 그 우정에 불을 지피길 바라는 바요."
그녀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고통스럽고 긴 침묵이 흘렀다.
"사랑이 그대의 원수로군."
로버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라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하겠지? 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소. 당신은 아주 잘 해냈소......"
"당신 딸을 잘 키웠다는 말인가요? 그만두세요! 엄마에게 이미 들었어요. 나에게 감사하지 마세요. 로버트. 그런 모욕이에요.
"사실이오! 그녀는 매우 영리하고 의지가 강한 아가씨지만, 당신이 애 버릇을 망쳐놓았더구먼. 당신과 균형을 이룰 어머니가 계셔서 정말 다행스런 일이오...... 그리고 라나를 버리지 않고 키워줘서 고맙소."
그는 그녀를 강렬하게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단 한 가지 유감이 있고. 왜 20년 동안 나에게 내 딸의 존재를 부인해왔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로버트, 나를 믿어야 할 때 왜 로다의 말을 믿었나요?"
"당신 계모가 내 편지를 훔쳤으리라고 내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난 당신을 만나러 갔었어요."
"당신이 나를 믿었다면 계속 연락을 했었을 거요."
"당신이 나를 믿었다면 로다의 말을 믿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믿었다면......"
"그만 하세요."
그녀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작은 방안을 서성거렸다.
"이러지 말아요. 무의미한 일이에요. 그리고 해미쉬와 결혼했을 때 나는 그에게 당신과 나 사이의 일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나중에 그가 그 사실을 알고....."
그녀의 입에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매우 상처를 받고 등산을 갔었어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와 싸우기 위해 그와 결혼 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냈소?
"그만 하세요."
"그를 사랑했었소?"
"네, 하지만 사랑은 너무 늦게 찾아왔어요. 난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요."
"왜 당신은 심하게 상처를 받은 상태였소. 그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반격을 가했던 거요."
"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라나를 볼 때마다 날 떠올렸겠지. 그런데도 그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있소. 그 사실에서 뭔가 잡히는 게 없소?"
그녀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낯 뜨거울 만큼 은밀했다. 그녀는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 이상 그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광고 지면을 팔 때 써먹었던 식으로 그는 침묵을 이용하고 있구나. 난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손님들에게 진땀을 흘리게 했지. 그들이 침묵을 깨는 유일한 길은 '좋소'라는 대답뿐이었어.
"지금 나에게 뭘 팔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팔아?"
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나 자신이오."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경악했다.
"참 이상하군요. 라나는 몰랐는데도 당신처럼 말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요. 예전에 당신이 속상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긁어 올렸던 기억이 나요? 그 아이가 그래요. 그 외에도 부지기수예요. 정말 이상해요. 꼭 당신이 우리 곁에 있었던 것처럼 말에요."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신은 그 아이를 더 많이 사랑했겠지. 우리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한번 시도해 보고 싶소. 당신이 며칠 이곳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소? 당신 부모님이 알래스데어를 돌보실 수 있을 거야. 내일 식료품을 사오기로 하고, 오늘 밤은 외식을 합시다. 이 주변에 토끼 파이을 맛있게 하는 식당이 있소."
"엉터리!"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에 머무르겠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파고들었고 그의 눈은 한가지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가 예상치 못했던 그 메시지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에 온 게 실수였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아직 유감이 많아요."
"유감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을 정정당당하게 위스키 전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오. 당신이 생각을 바꾼 이유는 라나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우선순위를 아는 지각이 있음을 알게 되었소. 하지만 난 오시 토하라가 카를로의 파산에 관여했음을 알고 있소."
"난 사업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손을 뗐어요."
그녀는 죄책감과 후회를 느꼈다.
"마조리, 우리는 원한으로 갚든가 아니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소. 그리고......아, 제발 울지 말아요. 내 사랑. 당신은 그저 반감을 버리고 날 만나주면 돼. 난 가족을 되찾고 싶소."
그는 그녀의 목덜미와 입술에 키스했다. 사랑으로 빛나는 그의 갈색 눈동자를 바로 보며 마조리는 짧은 열정적이었던 젊은 날을 상기했다.
"정말 슬퍼요."
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날이 점점 줄어드는데 우리의 불행은 오히려 강해지니 말이에요."
"최근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이유를 찾아봤소. 난 당신이 나에게 미치는 힘을 두려워했던 것 같소. 난 사랑하는 것이 두려웠던 거야."
"그리고 난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꼈어요. 우리는 잘 어울리는 패배자 한 쌍이었어요."
그는 허스키하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요. 로버트"
"아니, 당신이 틀렸소. 우리는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하오. 최소한 저녁이라고 먹고 가요."
그는 나와 똑같아. 나도 저런 방법을 써먹었었지. 그는 나에게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약한 부분을 계속 물고 늘어지겠지. 내가 바보라면 함께 저녁을 먹을 거야.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계약서에 서명하게 될 거야. 그런데 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까?
"아 그래요? 저녁, 좋지요. 난 정말 배가 고팠어요. 단, 송아지 고기는 안 돼요."
"돼지고기도."
"토끼고기도."
"그리고 '파테 드 포와그라'도 그곳의 '다르네 드 소몽 그렐레오 브르'는 별미요."
"하지만 난 선택의 문을 열어놓겠어요."
"당신 같은 여자에게 그밖에 뭘 기대하겠소."
그들은 떳떳하게 레스토랑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 이별의 세월이 그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풀어졌다. 그녀는 그의 유머 감각을 즐겼고 곧 웃음을 터뜨리게 되었다. 과거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신뢰에 가득 찬 사랑을 나누었다. 20 몇 년 전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던 짜릿한 쾌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자극적이면서도 편안한 행위였다. 한껏 만족감과 충족감에 빠진 마조리는 로버트의 따뜻한 가슴에 안긴 채 그의 리드미컬한 숨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
"마조리 하디. 이제 널 용서할 수 있어. 그리고 널 믿기 시작했어. 넌 마침내 네가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 변해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