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태평천국(太平天國)

1. 태평천국은 사교 집단인가?

2. 태평천국의 군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3. 태평천국(太平天國) 북벌군의 총사령관은 누구인가?

4. 우화대전투(雨花臺戰鬪) : 태평군과 청군의 가장 치열한 전투

5. 태평천국의 보물은 금용전 아래에 묻혀 있는가?

6. 태평천국 옥새(玉璽)의 수수께끼

7. 태평천국과 객가(客家)

8. 태평천국의 개명벽(改名癖)

9. 태평천국의 장수들 : 강골에서 약골로...

10.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11. 태평천국과 영국군함

12. 태평천국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13. 태평천국의 외교실패

14. 태평천국의 실패 후 해외로 도망친 사람들

15. 태평천국의 천경보위전

16. 홍수전의 진면목

17. 홍수전(洪秀全)과 여인들

18. 홍수전(洪秀全)의 개인숭배

19. 태평천국 홍수전(洪秀全)의 사망원인

20. 홍대전(洪大全) : 청나라 조정의 흠차대신이 날조한 '홍수전의 동생'

21. 홍선교(洪宣橋) : 태평천국의 대표적인 여장수

22. 홍선교(洪宣嬌) : 태평천국의 가장 유명한 허구의 여인

23. 홍선교(洪宣嬌) : 홍수전의 여동생

24. 호설암(胡雪巖) : 어떻게 갑부가 되고 어떻게 망했는가?

 

 

 

1. 태평천국은 사교 집단인가?

: 인민망

 

반세기 동안, 태평천국은 대륙에서 현학(顯學)이었다. 많은 태평군과 관련한 이야기는 모두가 흥미를 느끼는 핫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이래, 여러 가지 이유로 점점 관심이 옅어지게 된다.

최근 천진백화 문예출판사에서 책을 한 권 발간했는데, <태평잡설>이라는 제목이다. 책에서는 35편의 짧은 글을 모았는데, 그 내용은 모두 태평천국 역사를 검토 내지 평가하는 것이다. 작자인 반욱란(潘旭瀾) 선생은 책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얘기한다.

"홍수전을 우두머리로 하는 태평군은 두령들이 미신을 이용하여 일으키고 발전시킨 반란조직이다. 그들의 교의, 교규, 계율은 반란참가자들을 정신에서 물질까지 엄격히 통제할 분아니라, 일체의 가능한 퇴로를 차단했다. 그것의 목적은 홍수전 개인이 천하를 점유하고, 그 개인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홍씨 종교는 기독교의 외피를 입고, 천부 상제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중국노예주와 봉건제왕의 썩어빠진 사상, 규칙으로 그의 지배하에 있는 군민에게 극히 잔혹한 착취와 통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정치적 사교이다. 홍수전의 반란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나, 중국사회의 대 혼란, 대 파괴, 대 후퇴를 대가로 치른다. 수백만에 달하는 군민의 생명과 선혈을 대가로 치른다. 중국이 근대의 마지막 기회를 잃고 장기간 제국주의의 도마 위에서 어육으로 되는 대가를 치른다. 특히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영웅사시로서 사람들에게 인간 천당으로 향하는 금빛 찬란한 대도라고 했다는 점이다."

비록 과거에 우리는 오랫동안 태평천국을 높이 받들고 미화할 때, 국내외의 일부 학자들은 일찌기 의문과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다만, 이처럼 철저하게 부정적인 의견은 이전에 본 적이 없다. 이런 주장이 나오자, 마치 일석격기천중랑(一石擊起千重浪)처럼 남북각지 신문잡지에서 속속 글을 싣는데,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보완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농민의거'를 공격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형형색색 가지각색이었다. 이 논쟁은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여, 조화의 여지가 없을 듯했다. 만일 태평천국이 혁명이라면, 그것은 역사를 전진시킨 것이다. 그러면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만일 태평천국이 사교라면 그것은 동란과 파괴를 조성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역사의 진상을 탐색하여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평천국 자체가 스스로 답을 내놓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쉽게도 백여 년 이래, 우리는 태평천국에 대하여 항상 안개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우리는 신해혁명을 전후하여서부터 계속하여 태평천국을 높이 평가하고 미화해왔다. 오늘날까지 발전하다보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태평천국에 대한 인상이 진정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 하에서,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되어, 비록 진실한 증거를 내놓더라도 사람들을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태평천국이 본래의 면목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일대 난제라 아니할 수 없다.

 

태평천국의 역사는 왜 모호한가?

시간이 흐른 역사는 전해지는 말이 진실이 아닌 경우가 있다. 세월이 오래 흐르게 되면 파묻혀서 아무도 무르는 경우도 있다. 다만 태평천국처럼 짧은 십여 년의 역사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수정되어 고위금용(古爲今用)되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가장 먼저, 태평천국의 역사를 빌어 '고위금용'한 사람은 손중산 선생이다. 그는 당시에 공개적으로 동맹회원, 혁명지사들에게 태평천국을 선전하고, 홍수전을 선전하여 이를 통해 백성들의 기운을 불러일으켜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는 먼저 '2의 홍수전'으로 자처했다. 그러므로 모두 '홍수전'으로 그를 부른다. 그는 다시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을 '민족영웅', '노혁명당'이라고 추켜세운다. 1902, 그는 재일유학생 유성우(劉成禹)에게 자료를 수집하여 태평천국의 역사를 쓰라고 격려한다. 1904년에 책으로 만들어지는데, 제목은 <태평천국전사(太平天國戰史)>이다. 손중산 선생이 서문을 써준다. 그리고 일본 동경 조국잡지사에서 출판하도록 해준다. 작자는 한공(漢公)이라는 필명을 쓴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누락한 곳이 너무 많아서 사학적 가치는 별로 없다. 그러나 가치 있는 점은 공개적으로 반청을 부르짖고, 혁명을 호소한 데 있다.

주의할 점은 손중산 선생은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홍조(洪朝)의 망국은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전의 일이다. 전장위적(典章偉績)은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 손중산은 태평천국의 사서와 전장제도가 모조리 불에 타 없어지고,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태평천국 자체의 사료는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홍수전이 어떤 사람인지, 태평천국이 추진한 것이 어떤 제도인지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가 홍수전을 숭상할 것은 그저 그가 '포의출신으로 삼척검을 들고, 오랑캐를 몰아냈다"는 것뿐이다.

손중산의 창도 하에, 혁명당인은 태평천국의 역사를 반청으로 선전하고, 한때 유행을 하게 된다.

혁명당인들은 혁명을 선전하기 위하여, 조정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최대한 태평천국을 높이 평가하고, 홍수전을 높이 받들었다. 한 가지만 취했을 뿐 나머지는 묻지도 않았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당시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장태염이 쓴 <축만가(逐滿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지옥침침이백년(地獄沉沉二百年), 홀우천왕홍수전(忽遇天王洪秀全), 만인도왕열하변(滿人逃往熱河邊), 증국번래주한간(曾國藩來做漢奸), 홍가살진한가망(洪家殺盡漢家亡), 의구호손작제왕(依舊猢猻作帝王), 아금고구권형제(我今苦口勸兄弟), 요파사구심리기(要把死仇心裏記)"(지옥에 빠져 산지 이백년/돌연 천왕 홍수전이 나타났다/만주족들은 열하까지 도망을 친다/그런데 증국번이라는 매국노가 나타나서/홍씨 집안을 다 죽이고, 한족은 망한다/여전히 원숭이(만주족 오랑캐를 지칭)가 황제로 있다/나는 형제들에게 쓴 입으로 권하니/원수를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이런 통속적이고 알아듣기 쉬운 가서는 하층인민들을 분기시켜 반청운동에 가담하게 하는데 큰 작용을 한다. 이런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맞는지 여부까지는 돌볼 겨를이 없었다.

손중산 선생이 일찍이 태평천국을 높이 평가한 사실로 인하여, 그 영향이 미쳐, 국공양당에서는 태평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대세로 된다. 국민당은 태평천국의 여러 지도자들이 민족혁명의 영웅이라고 생각했고, 공산당은 태평천국의 여러 지도자들이 농민의거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1949년 이전에 국민당정부는 태평천국을 혁명으로 보았고 혁명선배로 여겼다. 그동안 비록 잡음도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증국번의 '평란'을 숭상하고, <증문정공가서>가 유행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정식 장소에서는 태평천국이 폄하되지 않았다. 1949년 이후, 신중국은 금전의거의 인물을 영웅인물, 긍정적 인물로 평가하여 그저 칭송했을 뿐 비판할 수 없었다. 이것은 학술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십년 겁난(문혁)이전에, 모두 혁명에 공로가 있는 영웅은 마땅히 숭상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십년 겁난 중에 사인방은 홍수전을 숭상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준에 이른다. 그들은 홍수전이 진리의 화신이고 그가 한 모든 일은 정확한 것이라고 보았고,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태평천국에서 홍수전 외에 양수청은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가이고, 위창휘는 혁명진영에 섞여 들어온 계급의 적이었으며, 석달개는 분열주의자이고, 이수성 충왕은 충성스럽지 못한 대반도였으므로 모조리 죽여 마땅한 인물들이다. 마치 홍수전이라는 고가과인을 제외하고 태평천국 내에는 좋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처럼. 물극필반(物極必反)인 법이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사람들의 극단적인 반감을 산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새로 생각해보게 된다. 설마 역사상 정말 이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사인방이 타도된 후, 태평천국역사연구가 새로 시작될 때, 들리는 것은 이미 청일색의 칭송하는 소리가 아니었고, 각양각색의 '잡음'이 전후로 나타나게 된다.

19795, 남경에서 태평천국사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태평천국도 봉건정권이며, 그 봉건독재의 정도는 청왕조보다 심했다고 말한다.

19813, 광주에서 거행된 태평천국기의130주년학술세미나에서 어떤 사람이 태평천국에서 실행한 것은 노예제도이며 상층은 특권을 누리고, 하층에는 평균을 중시했다고 말한다.

19818, 사천 석면(石棉)에서 거행된 태평천국기의130주년학술세미나에서, 많은 논문은 석달개에 관한 것인데, 석달개가 떠난 데에는 홍수전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하였다.

19833, 남경에서 거행된 태평천국건도천경130주년학술세미나에서 어떤 논문에서는 태평천국의 <천조전무제도>는 공개적으로 노예제를 실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인민은 자유가 전혀 없고, 생산은 발전될 수 없으므로, 역사는 반드시 후퇴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각종 회의에서 태평천국에 대한 비판의견은 점차 증가한다. 가장 대표적인 부정적 의견은 공개적으로 발표된 풍우란(馮友蘭) 교수에 대한 방문기였다. 풍우란 선생은 태평천국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얘기한다. 그는 말했다. "내가 태평천국을 부정하는 것은 태평천국에서 신권정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중국을 통일하였더라면, 중구그이 역사는 암흑시대로 후퇴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 지적한다. "누군가 말했다. 태평천국이 건립한 것은 농민정권이라고. 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맞지 않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농민정권을 건립해본 적이 없다." 그는 또한 말한다. "태평천국을 부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증국번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증국번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면 반드시 태평천국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의 두 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륙 사학계에서 태평천국에 대한 견해가 점점 변화하는 것과 비슷하게, 대만의 사학계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태평천국역사의 기록은 왜 심각하게 사실을 반영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러한 몇 가지 원인 때문일 것이다:

1. 백여 년 동안, 많은 정치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태평천국을 계속 높이 평가해왔고,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태평천국의 역사를 선전했다. 항상 한 가지 점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왔다.

2. 사학계는 원래 사실대로 글을 쓰고, 진리를 추구하며,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밝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정치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었다. 혹은 비록 말을 하더라도 중시되지 못했다.

3. 일반 군중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다. 그래서 책만을 믿었고, 와전되며, 가짜가 진짜로 행세했다.

최근 이십여 년 동안 상황은 약간 바뀌게 된다. 태평천국에 대한 비판, 질책의 목소리가 이미 없다가 생겨나고, 적다가 많아진다. 그 이유는 학문을 하는 환경이 비교적 관용적이 되고, 점차 대외학술교류가 전개되며, 특히 양안(대륙-대만)의 학술교류가 나타나서 서로 절차탁마하는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태평천국역사의 진상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리한 점이라면, 최근 들어 연이어 진귀한 사료가 일부 발견되었는데, 해외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민간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들 사료는 태평천국역사의 진상을 드러내는데 유력한 증거가 된다. 손중산 선생이 예전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탔다"고 했던 태평천국의 전장제도의 절대다수는 이미 발견되었다.

학자로서 마르크스는 10년도 안 되는 시간 내에 태평천국에 대하여 전혀 다른 견해를 나타낸다는 것이 바로 명확한 사례이다.

1853년 마르크스는 태평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한다. 그리고 뜨거운 희망을 건다. 이후 동방에 완전히 참신한 새나라가 설립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국제평술(1)>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공고한 제국은 8년 동안 영국 부르조아의 대량의 인화포(印花布)의 영향 하에 이미 사회변혁의 직전에 처해 있다. 이번 변혁은 반드시 이 국가의 문명에 극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만일 우리 유럽의 반동분자가 얼마 후의 장래에 아시아로 도망쳐서, 마지막에 만리장성에 도착하고,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보루의 대문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아마도 이런 글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화공화국

자유, 평등, 박애

 

그러나 태평천국은 너무나 무능했다. 그리하여 그는 실망하게 된다. 1862, 그가 태평천국에서 각종 폭정을 시행하는 것을 알고 난 후,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조교체이외에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이 민중에게 준 당황함은 옛 통치자들에게 준 당황함보다 더욱 심했다. 그들의 모든 사명은 마치 추악하기 그지없는 파괴로 정체와 부패에 맞섰다. 이런 파괴는 조그만큼의 건설적인 점도 없다."

"확실히, 태평군은 바로 중국인의 환상이 묘사하는 그 마귀의 화신이다. 다만, 중국에만 이런 마귀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마귀는 정체된 사회생활의 산물이다."

 

홍수전의 역사작용

홍수전에 대한 연구에서 중점은 그의 나중의 행위, 그와 태평천국 이 대사건과의 관계이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태평천국의 지도자이다. 또한 그는 태평천국의 개국지군이며, 망국지군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이것은 그 중에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주로 홍수전이 개국에 공로가 정말 있느냐 없느냐와 그리고 망국에 책임을 져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먼저 홍수전이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 분야의 검토는 비교적 쉽다. 왜냐하면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천경의 내분이후, 홍수전은 "()도 짐이 하고, 군사(軍師)도 짐이 한다" 한때 아주 기분이 좋아진다. 다만 곧이어 손발이 흩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군정대권은 과거에 양수청이 계속 맡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찾아서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데, 다시 외성인(外姓人)을 중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친척인 홍인발(洪仁發), 홍인달(洪仁達) 그리고 그의 심복인 간신 몽득은(蒙得恩) 등의 사람을 기용한다. 그래서 국사를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이후 그의 당제(堂弟) 홍인간(洪仁玕)이 그에게로 와서, 나라를 흥하게 할 대계를 내놓는다. <자정신편(資政新編)>. 홍수전은 아주 기뻐하며 즉시 중용하여, 정충군사(精忠軍師)에 임명한다. 다만 국가대사를 토론할 때, 그는 봉건적 특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신정을 추진하려는 건의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얼마 후 홍인간은 냉대를 받는다. 진옥성(陳玉成), 이수성(李秀成)등 장수들은 바깥에서 고전을 하며, 위기국면을 막아내기 위해서 애를 뜨고 있는데, 홍수전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한다. 걸핏하면 크게 욕하고, 징벌하여 사람들은 기운이 빠지게 된다. 남경이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한데도 그는 홍인발, 홍인간이 부정부패하고 돈을 뜯어내고, 양식을 독점하여 국난재(國難財)를 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될 지경에 처하자, 이수성은 '성을 포기하고 떠난다.' 홍수전은 크게 화를 내면서, "짐의 병사는 물보다 많다. 짐의 강산은 그대가 받쳐주지 않아도, 누군가 받쳐준다."등등. 홍수전의 이런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는 모조리 고증이 가능하다.

 

그가 개국지군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이수성자술>의 내용을 보자.

"남왕 풍운산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분명하다. 앞의 여섯 명 가운데, 나라를 세우기로 계획을 세운 것은 남왕의 계책이다. 앞에 일을 한 사람은 모두 남왕이다."

당시 태평군의 전군의 상하는 모두 알고 있었다. 개국영웅은 '풍운산'이다. 풍운산의 격려가 없으면, 홍수전은 살기 힘든 광동북부(월북)과 광서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홍수전이 신심을 잃고 광동으로 돌아가려 할 때, 풍운산은 혼자서 자형산으로 가서 근거지를 개척한다. 근거지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출 때까지, 홍수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형산에서의 활동은 전도의 방식으로 진행한다. 당시 소지주 왕작신(王作新)이 계평현에 고발을 해서 그들이 도모불궤(圖謀不軌)한다고 하여, 계평현에서는 풍운산등을 체포한다. 풍운산은 전도라고 변명하여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편전쟁이후, 영국인은 전도의 특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도로 엄호하면서 근거지를 마련한다. 풍운산은 멀리 광주에서 일찍이 교회업무를 한 적이 있는 홍수전을 교주로 추대하고 군중에 대하여 상제교의 신비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관청에 대하여, 광동의 교회를 뒤 배경으로 끌어들여 안전을 획책한다. 풍운산은 책략적인 고려에서 홍수전을 교주로 받든다. 그것은 정확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홍수전이라는 지도자는 그저 우상의 역할만 했다. 그가 진정으로 지도할 필요는 없었다. 금전의거이전에, 홍수전은 깊이 숨어서 드러나지 않는다. 군중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당시 지도자층의 서열은 이렇다: 홍수전은 천상의 그리스도를 큰형으로 삼는다. 그 자신은 하나님의 둘째아들이 되어, 1인자가 된다. 풍운산은 하나님의 셋째 아들로, 2인자가 된다; 양수청은 하나님의 넷째 아들로 3인자가 된다....이런 순서로 내려간다.

금전의거에서 영안건국까지, 중간에 8개월의 고전을 겪는다. 지도자층의 상황에 변화가 발생한다. 전쟁이 빈번하여 군사제일로 되는 것이다. 군중을 장악할 수 있는 현지의 실력파 양수청, 소조귀의 지위가 상승한다. 광동에서 온 홍수전, 풍운산의 지위는 하락한다. 홍수전의 교주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풍운산은 양보하여 4인자로 내려간다. 양수청, 소조귀는 2인자, 3인자로 올라간다. 그리고 양수청이 군사대권을 총괄한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간 후, 홍수전은 깊은 궁궐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부귀에 만족한다. 조회에 참석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국군의 기본적인 업무조차도 하지 않는다. 청나라 측의 정보보고서인 <적정회찬>에 따르면, "홍수전이라는 사람은 기실 존재하지 않는다. 경축일에 대전에 앉아있는 것은 단지 허수아비뿐이다."

풍운산이 대국을 지탱하던 시대에 홍수전은 우상이었다. 양수청이 대권을 장악한 시대에, 홍수전은 더더욱 허수아비로 하락한다. 비양발호하던 양수청은 홍수전의 무능함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홍수전을 그저 허수아비, 하나의 도구로 대했다. 조그만큼도 존중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천부하범의 명의를 빌어 홍수전의 약점을 질책하기도 하고, 엉덩이를 때리려고 하다가, 백관이 나서서 간청하자, 비로소 '사면'해준다. 홍수전은 양수청에 대하여 원한이 깊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허수아비로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1856년 여름, 암중으로 양수청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과 연락하여, 돌연 급습하는 수단을 써서 양수청의 일가족을 살해한다. 그리고 2만여 명이 연좌되어 온 천경성이 암흑에 빠진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계속하여 홍수전을 농민의거의 지도자로 떠받들고, 중국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의거의 지도자라고 받들어 모신다. 그렇다면, 홍수전 자신은 농민의거를 어떻게 보았을까? 1844-1845, 풍운산이 농민의거의 근거지를 마련하느라고 애쓰고 있을 때, 홍수전은 광동의 고향집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시문을 지었다. 그중에 <백정가(百正歌)>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숭정피사(崇正辟邪), 거악종선(去惡從善)하라고 했는데, , 정을 숭상하고 사를 피하며, 악을 제거하고 선을 따르라고 했다. 노래에서 황소(黃巢), 이틈(李闖, 이자성을 가리킴 틈왕)을 사악하다고 하였다.

홍수전의 사생활도 문제점이 있다. 만일 필부라면 사생활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대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홍수전의 사생활은 심각하게 태평천국의 대국에 영향을 미쳤으니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봉건제왕으로서 여색을 밝히고 널리 비빈을 두는 것은 원래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홍수전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첫째, 의거 초기에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때도 여인을 가득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비빈학대는 거의 인간성을 상실할 정도가 되었다. 태평천국의 "지준반행(旨准頒行)"된 정식 관서 <천부시> 116을 보라.

"천형 예수는 석두각 아래에서 하범하여 성지를 내렸다: 천사가 말하기를 부다소심(咐多小嬸)이 조그만큼이라도 나의 친동생을 싫어하거나 태만히 하면, 운중설비(雲中雪飛)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형이 하범한 시간은 금전의거 후 6일째 되는 날이다. 장소는 금전에서 십여리 떨어진 석두각(石頭脚)이며, 하범 때 소조귀의 입을 빌어서 한 말이다: '부다'(이렇게 많은) 소심(홍수전의 처들을 가리킴)ㅣ 조그만큼이라도 친동생(홍수전을 가리킴)을 싫어하거나 태만히 하면, '운중설'(칼을 가리키는 은어)이 날아간다.(칼이 날아간다는 것은 죽인다는 뜻임).

천경의 궁중생활에서 홍수전은 비빈을 가축처럼 여겼다. 걸핏하면 때리고, 죽였다. 궁중생활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태평천국에서 '지준반행'된 관서 <천부시>17,18에서 후비에 대한 내용을 보자: "모시는데 경건하고 성의 있지 않으면 첫째로 맞을 이유이고; 고개를 빳빳이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둘째로 맞을 이유이고, 눈을 들어 남편을 보면 셋째로 맞을 이유이고, 천왕에게 묻는데 경건하고 성의 있지 않으면 넷째로 맞아야할 이유이며, 성격이 조급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다섯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말하는데 큰소리로 하면 여섯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부르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일곱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짓지 않으면 여덟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 아홉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말하는데 침착하지 않으면 열째로 맞아야할 이유이다.

홍수전의 후비에 대한 학대는 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종 혹형을 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태평천국대사전에는 "보나미(煲糯米)" 조에 이런 말이 있다. 천왕은 비빈을 징벌할 때 쓴 혹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일설에는 유황으로 불을 붙여 점천등(點天燈)한다. , <어제천자조>에는 '음란외설하면 유황으로 너를 태워버린다'는 말이 있다. <천부시> 490에는 '몸에서 냄새가 나...면 유황으로 태운다'는 말이 있다. 일설에는 수형자를 묶어서 큰 솥의 물 가운데 꿇어앉게 한 다음, 약한 불로 천천히 데워서 수온을 올린다. 엉덩이 살이 다 익어서 죽을 때까지 삶는다." 십여 년 동안, 홍수전은 일부 간신을 통하여 천진한 소녀들을 그녀들의 부모의 수중에서 빼앗아 온다. 천왕부의 깊은 궁전에 가두어 놓고 음락을 즐겼다. 그녀들이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혹은 홍수전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얻어맞거나, 죽거나(죽는 것은 비교적 행운이다), 천천히 혹형을 받아서 불에 타 죽거나 물에 삶겨져 죽는다.

 

태평천국의 실질은 무엇인가?

태평천국은 도대체 혁명인가 아니면 사교인가? 이것은 간단하게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십여 년간 발생한 사정의 발전변화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사교만 언급하고, 정상종교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정상종교는 교리의 구속을 받고, '반란'의 온상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어떤 특수한 상황 하에서, 정상종교의 기구도 사교에 이용될 수 있다. 역사상, 농민의거 혹은 유민거사는 종교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동한말의 황건적과 태평도, 송나라 때의 방랍과 마니교, 명나라 때의 주원장과 명교, 청나라 때의 각지에서 거사한 백련교 등등. 그 원인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봉건사회에서, 백성들은 당을 조직하여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고, 집회결사의 자유도 없었다. 그저 종교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종교이건, 토착종교이건 외래종교이건 다 이용할 수 있었다. 대체로 처음에는 종교 활동을 빌어서 활동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점차 사교활동으로 변모한다. 태평천국은 바로 그러하다. 홍수전, 풍운산은 처음에 기독교의 엄호 하에, 발전기회를 찾는다. 동시에 기독교 교리를 이용하여 상제교를 창제한다. 나중에 그들은 양수청, 소조귀의 역량과 결합하여, 천부, 천형하범 등 신귀부신(神鬼附身)의 황당한 일을 승인한다. 당연히 말 그대로 사교가 된 것이다.

고금중외에 모두 사교는 있다. 이천 년 전에 중국에서 토착적으로 나타난 사교, 20세기 미국, 일본의 신형 사교, 명목은 서로 다르고,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각각의 개성은 있다. 다만, 고금중외의 각종 사교는 필연적인 공통점이 있어 정상종교와 구별된다. 이 공통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정상 종교는 교도가 교리를 준수하고, 선을 행하도록 요구한다. 종교신앙에서 정신적인 안위를 얻도록 한다. 위협을 하거나 각종 재해를 가지고 교도를 협박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도들에게 헛된 약속을 하지도 않는다. 사교는 항상 세계종말을 가지고 사람을 겁준다. 그리고 신도들은 재난을 피하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한다. 태평천국은 바로 계속하여 이런 약속을 한다. 입교하면 소천당, 대천당에 갈 수 있고, 입교하지 않으면 살아서는 '뱀과 호랑이에게 물리고' 죽어서는 지옥에 빠질 것이라고 하였다.

2) 사교는 모두 신격화한다. 특히 교주가 하늘의 뜻을 알고, 천신과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떠벌린다. 태평천국은 홍수천이 천상에서 파견되어 세계만국의 유일한 진짜군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광서지방의 '강동(降僮)' 미신습속으로 천부가 양수청의 몸에 붙어서 말을 할 수 있고, 천형은 소조귀의 몸에 붙어서 말을 할 수 있다고 고취시킨다.

3) 사교는 모두 재물을 긁어모은다. 정상종교는 공개적으로 모금하거나 경비의 조달처가 있다. 삭는 반드시 스스로 활동경비를 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고, 발전할 수가 없다. 태평천국은 입교하는 사람에게 모든 재물을 바치도록 하였는데, 가장 철저했다.

4) 정상적인 종교는 종교 직업자에 대하여만 교리를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일반신도들에게는 강제하지 않는다. 많은 종교 활동은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사교는 반공개된 비밀조직으로 자신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입교자를 엄격히 통제한다. 태평천국은 군민을 나누지 않고, 전민개병이었다. 입교자는 모두 '성병(聖兵)'이 된다. 교리는 10관의 천조를 군율로 하며 내부통제가 엄격한 정도는 공전절후라 할 수 있다.

5) 또 하나의 괴이한 현상은 고금중외의 사교에 특유한 것이고 정상종교에는 절대로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주가 음란하다는 것이다. 젊은 여신도는 모두 그들의 제물이 된다. 사교는 심신 두 방면에서 모두 엄격하게 모든 신도를 통제하므로, 교주에게 여신도에 대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홍수전, 양수청은 여러 처첩을 두었는데, 심지어 천부천형의 성지를 근거로 하였다. 이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기준으로 평가해보자면, 태평천국은 말 그대로 사교이다. 그렇다면, 태평천국을 바로 사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중에는 예를 들어 개국공신인 풍운산, 석달개, 그리고 이후에 열정을 가지고 참가한 홍인간은 모두 태평천국이 사교조직으로 타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큰 노력을 했고, 일을 바로잡아 태평천국이 정상궤도로 되돌아오게 하려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한을 품고 죽게 된다.

여대 농민의거 혹은 유민거사는 대부분 사교를 이용했다. 사교는 파괴의 역량이다. 구왕조를 전복시키는 데는 그것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건설의 역량은 아니다. 신왕조를 건립할 때는 그것이 필요 없다. 그러므로 비교적 총명한 지도자는 초보적인 승리를 거둔 후, 사교와는 결연히 선을 긋는다. 지식분자를 중용하여 정상적인 신왕조를 건립하여 장치구안(長治久安)을 꾀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10여 년간의 짧은 역사를 보면, 여러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교에 의존하여 거사를 하였다.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고 부득불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발전하면서 여러 번 사교를 포기하고 정상궤도로 들어설 기회가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왕조교체를 하여 신왕조를 건립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사농공상이 각각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적인 길을 걸어 오래된 동방에서 새로운 정치를 펼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하고, 현대의 신국가를 건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회를 한번 잃고 나니 다시 오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태평천국를 바로 사교라고 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풍운산, 석달개, 홍인간과 같은 인인지사(仁人志士)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천수만의 자발적으로 구국구민을 위하여 분투하고 희생한 군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우롱당하고 생명을 대가로 내놓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질책할 수가 없다. 진정 질책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폭군, 야심가, 간신, 주구이다. 그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역사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인들이 다시는 전철을 밟지 않도록. 여러 번 생각해보아도 필자는 태평천국을 '유산된 혁명', '실패한 의거'라고 부르고 싶다. 장기간 연속되다가 결국은 멸망한 사교집단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2. 태평천국의 군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 도단방(陶短房)

 

 

금전기의(金田起義)를 얘기하자면, "내토지쟁(來土之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배상제회(拜上帝會)"단방(團方, 團營의 암어이다. 에서 땄다)"이 절대기밀에서 반공개로 바뀌는 순간이고, 규모가 큰 '내토계투(來土械鬪)'가 발발한 것이다.

소위 ""는 객가(客家)를 가리키고, ""는 광서(廣西) 원적의 한족, 장족등을 가키킨다.

광서는 계북(桂北)의 전주(全州), 흥안(興安), 자원(資源)과 계서북(桂西北)의 봉산(鳳山)4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주현(府州縣)에는 모두 객가인이 분포했다. 배상제회의 활동이 집중된 계중(桂中), 계동(桂東)일대는 청나라 때의 강희, 건륭기간동안 광동 가응주(嘉應州)등지에서 이주해오고 복건 영화 석벽동에서 기원한 객가족이 위주였다.

두 족군 간의 갈등은 지방정부의 잘못된 조치로 집단분쟁으로 비화한다. 결국은 태평천국의 운동으로까지 발전한다. 청나라정부에 있어서, 이것은 반성해야할 심각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강도(鋼刀)를 휘두르며 먹거리를 다투는 '이류(異類)'

객가인은 농경기술이 '토인'들보다 선진적일 뿐 아니라, 힘들게 일하고 잘 참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어쨌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고 현지는 평지가 적고, 산지가 많은 척박한 곳이다. 비옥하고 경작하기 좋은 평지는 기본적으로 '토인'들이 모두 점거하고 있었다. 객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고, 가시밭이 우거진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일찌감치 '토인'들에게 쫓겨난 요족, 묘족등과 함께 살았다(현지의 요족의 산가에는 "관청에서 평지를 차지하고, 한족들이 언덕을 차지한다. 요인들은 산골짜기로 쫓겨났네"라는 가사도 있다).

이들 산간지구는 비록 개간할 분지, 평탄한 곳이 있기는 해도, 지형이 열악하고 토질이 척박했다. 어떤 곳은 교통이 불편하여 '송아지를 짊어지고' 올라야 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곳은 송아지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송아지가 자라서 황소가 되면 농사에 쓴다. 이들 황소는 죽을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객가인들은 힘든 것을 잘 참고, 농사를 잘 짓고 남녀모두 농지에서 일하는 전통을 살려, 몇 대인의 노력을 거쳐, 황무지를 하나하나 개간하여 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상업도 겸업하고, 목탄도 만들고, 양식도 하며 기타 부업을 했다. 그중 일부는 부유해져서 산을 내려가, 토인의 전답을 사고, 더욱 살기 편한 곳에서 더욱 편안한 생활을 구한다.

이렇게 되니, 그들은 원래의 주인 '토인'들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토인'들이 보기에, 이들 '내인'들은 분수를 지켜 자신의 고향에 머무르지 않고, 광서로 와서 먹거리를 찾았다. 이것만해도 분수를 지키지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왔으면, 산골짜기에 그냥 죽어라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들과는 정부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 우물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는다)했으면 될 텐데, 지금 이들 '외인'들은 자신들이 돈을 좀 벌었다고 자신들의 땅으로 내려와서 농지를 다투고, 집을 다투고, 마을을 다투고, 묘지까지 다툰다. 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 '토인'들은 '향규민약(鄕規民約)'을 만들어 '내인'들에게 전답을 팔지 못하게 한다. 이런 방법으로 객가인들의 발전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바람이 새지 않는 담장은 없는 법이다. 일부 몰락한 '토인'들은 고가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객가인에게 토지, 주택을 판다. 이것은 자주 현지의 족장, 호족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리하여' 향규민약'으로 처벌하고 심지어 내토 양족의 충돌까지 벌어진다.

"내인""토인"간에 또 하나 자주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는 '종교'였다.

속담에 "월속호귀(越俗好鬼, 광동지방의 풍속은 귀신을 좋아한다)"라는 말도 있다. 화남일대의 중국인들은 자고이래로 신앙 ,길흉화복을 중시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신령에게 의탁하고, 기원했다. 광서로 이사 온 객가인들은 전통적인 조상숭배 외에 마찬가지로 각지의 신명의 보우를 희망했다.

다만 광서에도 마찬가지로 '신선이 곳곳에 있다.' 무술나술(巫術儺術, 나술은 역귀를 쫓는 것)이 아주 유행하는 곳이다. 계중, 계동일대는 청나라 때 잡묘(雜廟)가 곳곳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갖가지 신명은 대부분 현지화 된 신선이다. 비록 그들 중 많은 경우는 사실 '외지인'이지만(예를 들어, 뇌신의 원래 성은 진씨로 광동 해강사람이다. '반왕'은 중원전설에 개천벽지의 반고이다), '종교해석권'은 일찌감치 '토인'의 수중에 있었다. '내인'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토인'은 자주 '신선술'을 써서 제사를 지냈고, '신령부체'등 수단을 빌어 객가인들을 현지신명숭배체제에서 당당하게 배제시켰다. 혹은 이 기회를 빌어서 큰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자연히 내토충돌의 도화선이 된다. 도광30년의 '내토지쟁'이전에, 하현(賀縣)에서 규모가 적지 않은 내토계투가 발발한 적이 있다. 원인은 바로 묘회에서 내토 양족 간에 '화등(花燈)'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벌어진 시비였다.

사실상, '월동객가(광동성 동부의 객가)'가 계중(광서중부)로 들어온 초기에, 내토양족간에는 그다지 격렬한 충돌이 없었다. 갈수록 치열해진 것은 첫째, 사람은 많아지는데, 땅은 적다는 것이다. 척박한 계중은 금방 직접적인 이해충돌로 발전한다. 둘째, 아편전쟁 후, 대량의 광동실업유민, 산병유용이 광서로 들어와서 살 길을 찾으려 했다. 전쟁배상금으로 은값이 오르고, 세금이 과중했다. 원래 팍팍한 생존조건이 더욱 무너지게 된다. 내토양족의 생존압력은 더욱 강화된다. 1849년 광서는 큰 가뭄이 든다. 계중의 많은 곳에서는 낱알 한 톨도 거두지 못한다. 다음해에는 다시 대규모의 전염병이 발생한다. 계중의 백성들에게는 설상가상이었다. 게다가 상로(商路)도 단절되고, 비적이 들끓었다. 각지의 천지회 폭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관청은 다시 원래의 세금외에 추가세금까지 거두었다. '내인''토인'은 부득이 생존을 위하여 한 톨이라도 식량을 더 차지해야 했다. 강도를 휘두르며 먹거리를 두고 싸우는 '이류'가 되었다.

 

귀현(貴縣), 민감한 지방

"내토지쟁"의 발발지는 광서 귀현이다.

도광30, 1850년 음력 팔월, 광서 귀현의 동북에 있는 태허라는 객가족 마을에서 우연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우연한 작은 사건이 결국은 수백개의 마을을 석권하고 수만호의 내토촌민이 관련되는 대계투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된다.

원래, 대허에 한 객가족 부자가 있었다. 이름은 온아옥(溫亞玉)이다. 난세에 의식에 걱정이 없고 생활을 풍족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온씨부자는 첩을 하나 들이고자 했는데, 그가 마음에 든 여자는 하필이면 이웃동네 '토가'집안의 아가씨였다. 마음이 동한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지 않고 후한 선물을 가지고 여자의 집으로 가서 혼인을 청한다.

'토인'은 집안이 가난했다. 가난하면 뜻을 세울 수 없다. 무슨 '내토'를 따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채례를 기꺼이 받았고 혼인을 응낙한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일찌감치 다른 '토인'에게 딸을 주기로 약속을 한 바 있었다. 그 미래의 시댁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는 분노하여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그 집을 찾아와 따진다. 그 아가씨의 혼인을 물리라고 핍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 집에서는 이미 온씨 네에서 보내온 채례를 절반이상 써버렸다. 대허로 가서 온씨에게 얘기했더니 온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혼인을 물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채례로 보낸 것은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토인'은 지두사(地頭蛇)라는 점을 내세워 사람도 많다는 점에 의존하여 혼인도 물리고, 돈도 돌려주지 않겠다고 한다. 온씨집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인' 동족들을 끌어모아서 죽어라고, "돈을 주든지, 아가씨를 보내든지' 하라고 협상의 마지노선을 제시한다. 원래 쌍방이 모두 한가지씩을 잘못했으므로, 각자 한 걸음씩 양보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양쪽은 모두 체면과 이익 때문에 서로 조금만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양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족을 끌어들여서 도움을 구했다. 결국 혼인은 성사되지도 못하고, 팔월이십팔일 대계투가 발발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계투가 발발하기 전에 항상 "견관(見官)"의 과도기가 있었다. 쌍방은 모두 관청을 찾아가서 얘기를 했다. 만일 관청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서 잘 조정해주고, 공정하게 처리해주었다면, 아마도 완화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현도 좋고 심주부도 좋고, 양족의 분쟁에 대하여 못들은 척했다. 어떤 지방관은 "주먹이 센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싸우라는 말이 아닌가?

 

지방관은 왜 일을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가?

원래, 청나라 때 지방관은 평가가 엄격했다. 만일 관할구역 내에서 난리가 일어나고, 사람이 죽으면, 지방관은 모두 엄중한 처분을 받는다. 그래서 각급 문무 관리는 모두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저 그럭저럭 넘길 수 있으면 넘기는 것이다. 당시 지방에 비적이 많아서 많은 군관들이 비명에 죽었다. 제독 민정봉은 책임을 질까봐 겁내어, 전사한 군관을 모조리 '병사'한 것으로 처리했다. 광서순무 정조침은 더더욱 '분식'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찍이 부하관리들에게 정중하게 말한 바 있다. 상부에 '비적상황'에 대하여 보고하는 것 같은 재미없는 짓은 하지 말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부현의 하급관리들도 내토쟁투같은 일에 관여해서 골치 아프고자 하지 않았다.

그 외에, 지방관은 또 다른 고려도 있었다.

현지 지방관은 모두 외성인이다. 다만 그들은 대부분 '토인'에게 편향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토인'들은 현지에서 살고 있으며 내력을 잘 알아서 단속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내인'은 외성과 관계가 밀접했다. 당시 계중, 계동남에는 '회비(會匪)', '정비(艇匪)'등 수륙의 반청 무장세력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광동출신이었다. 그리고 현지 객가와 친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비록 내토양족은 모두 "당비(堂匪, 천지회)"이지만, '내인'이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광동에서 온 광마(廣馬)의 전투력은 본토의 '토마(土馬)'보다 훨씬 강했다). 지금 내토 쌍방이 대치하고, '토인''내인'보다 몇 배가 많다. 만일 계투를 방임한다면, 승부는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하면 '비적을 제거하는' 돈과 힘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객가인들은 서로 도우는 전통이 있다. 그리고 전투를 잘하고 용맹했다. 계투가 일단 발발하면, 대허 부근의 많은 객가촌은 한꺼번에 나선다. 그리고 함께 뭉쳐서 싸우므로, 일시에 '토인'들이 어쩔줄 모르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자, '토인'의 사람이 많다는 장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들의 구원병은 비록 늦게 오지만, 사람 수는 훨씬 많았다. 마찬가지로 '토비', '고비'(분명 '토마'일 것임)등을 불러서 싸움에 가담시킨다. 한 달여가 지난 후, '토인'들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많은 객가촌은 함락되고, 객가인들은 대거 피살된다. 살륙을 피한 남녀노소는 할 수 없이 집과 땅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쳐서 목숨을 건져야 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토인'들은 곳곳에 방화하고, 함락된 객가촌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도록. 다시는 자신들과 땅을 놓고 싸울 수 없도록.

이렇게 패배한 '내인'들은 무리를 이루어 계평(桂平)방향으로 도주한다. 마침 병마를 모으고 있던 자형산의 배상제회 진중에 들어간다. 이것이 1850년 음력 10월 초사흘의 일이다. 이때 금전기의의 첫 번째 전투 평님화주산인촌 전투를 벌인지 이틀이 지난 때였다.

 

광동 천지회의 골간이 광서로 들어오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내토지쟁에서 '내인''토인'은 각각 '외부지원세력'을 끌어 모았다. 처음에는 관청에 의존하고자 했지만, 이어서 약속이나 한 듯이 천지회에 도움을 구했다.

광동은 원래 천지회활동의 중심 지대였다. 광서는 강희, 옹정, 건륭을 거치면서 천지회활동의 기록이 거의 없었다. 가경12(1807)에 광동에서 대규모의 '징판양비(懲辦洋匪)"(밀수단속을 이유로 해금을 강화한 것)활동을 벌인다. 많은 광동의 천지회 골간은 수,륙 양로를 거쳐 광서로 들어온다. 서강, 심강 유역의 광활한 지역에 흩어진다. 아편전쟁 때, 청왕조는 대량의 병용, 수군을 모집하여 광동 각지에 배치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대거 내보낸다. 전후에 광동의 경제가 불경기여서 일부 사람은 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천지회에 대량으로 가입하거나(병용, 수군에도 원래 천지회 비밀당구가 있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원래부터 천지회 인물이다), 강도약탈로 살아갔다.

도광26(1836), 광동천지회의 '정비'는 먼저 광서로 들어갈 생각을 가진다. 그들은 일 년 내내 수상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광동광서를 오가는 수로를 잘 알았다. 광서는 광동만큼 부유하지 않지만, 상업왕래가 빈번하고, 살아가기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뿐 아니라, 광동의 청군은 적지 않은 규모의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서는 지방단련만으로 수면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비'에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그들의 선박은 '파산정'으로 배가 단단하고 편평하며 양쪽에 여러 개의 노가 있어서, 젓기에 편리하고 가볍다. 물이 깊은 주강에서는 청나라수군의 전선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서의 내하에서는 단련의 작은 배를 상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비'의 구성은 복잡했다. 그러나 골간은 광동 조경부 학산현에서 온 사람들이고, 학산의 객가인이 위주이다. 학산객가는 강희연간에 월동 혜주, 조주부에 소속된 각 주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광서 계중의 객가의 발원지인 가응주는 바로 그후 옹정10(1732), 광동총독 악미달의 건의에 의해, 혜주부에서 흥녕, 장락을 분리하고, 조주부에서 정향, 평원, 진평을 분리할 때 건립한 직예부이다. , 학산객가와 계중객가는 마찬가지로 석벽동-가응주체계이다. 단지 이주시기가 조금 빨랐을 뿐이다. 그들의 사투리와 가응주객가는 대동소이했다. '정비'의 두령 임문병(任文炳), 대두양(大頭羊, 張釗), 대잉어(大鯉魚, 田芳)등은 모두 학산객가이다. 객가의 '한식구' 전통이 있어, '정비'는 광서에서 금방 본거지를 마련하고, 심주, 오주, 유주 각부의 강에서 활약을 시작한다.

약간 후, 광동 육로 천지회무리들이 양광의 접경지인 흠주, 빈주등지에서 광서로 들어온다. 그리고 신속히 '정비'와 하나로 뭉친다. 그들 중 핵심인물 진만(秦晩), 이사창(李士昌), 이사규(李士葵, 광동 흠주 사람)등은 모두 객가였다. '반은 광동인, 반은 광서인'이라는 편리를 이용하여, 양광의 접경지의 깊은 산에 본거지를 마련한다. 이들 육로의 광동 천지회무리는 '회비'라고 부르고 속칭 '광마'이다. 한 무리의 인원수는 많지 않다. 단지 몇십명 몇 백명이다. 다만 대다수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장병이다. 전투력이 아주 강했다. 그중의 일부 '회비'는 수륙을 겸했다. '정비'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장가상(張家祥, 나중에 청나라명장이 되는 장국량, 광동 고요객가임), 나아왕(羅亞旺, 나중에 태평천국의 명장 나대강이 됨, 광동 게양객가) 등이 있다.

1848, 서광진은 양광총독의 직위를 이어받는다. 그가 보기에, 비록 양광은 모두 자신의 관할구역이지만 광동은 교통이 편리하고 조정의 이목이 많았다. 치안을 잘못하면 결과가 심각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광서는 산 멀고 물 먼 곳이다. 약간 혼란스러워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명을 내려 광동에 전선을 추가로 모집하고, 조주, 흠주, 혜주, 염주의 각부에 단련을 크게 늘이고, 관병을 추가 파견하여 수륙양로에서 천지회 '회비' '정비'를 광서로 쫓아낸다. 이렇게 이웃으로 쫓아 보내는 방식으로 광동은 잠시 평정을 찾는다. 그러나 광서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신사(紳士)도 천지회 두령이다.

광동에서 광서로 들어온 '회비', '정비'는 원래 광서로 출장 온 셈이다. 기지는 여전히 광동에 두었다. 광서에서 성공한 후에는 통상적으로 모두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관청에 의탁하여 관청에 투항한다. 또 다른 무리는 광서에서 현지의 땅을 놓고 싸운다. 이런 상황 하에서, 자기사람인 광서 내인들이 전투를 벌이면서 도와달라고 하자 호소력이 생긴 것이다. 1844년부터 광서 빈주, 상주, 귀현의 여러 내토계투에 모두 '회비' '정비'가 개입한다. 1850년 대계투에도 그들은 당연히 참가했다.

광동본토의 천지회는 가경1591810)에 옹녕현에서 시작한다. 우두머리 심혜평(沈惠平)등의 구호, 회규는 모두 광동에서 전래되어온 구초본(舊抄本)이다. 설사 본토 천지회라고 하더라도, 최초에는 광동에서 발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광서 천지회는 점차 자신의 특징을 갖추게 된다. 하나는 본토화, 비밀화이다. 왕왕 '비적', 단련과 구분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신사, 연총(練總)이지만, 실제로는 천지회두령이다. 둘은 당구화(堂口化)이다. ''을 반공개 조직으로 하고 마찬가지로 ''을 명호로 하는 현지의 일부 무장세력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관방에서는 '당비'로 칭했다. '광마'에 비하여, '당비'의 생존능력은 더욱 강했다. 그러나 전투력은 훨씬 약했다.

원래 '당비''광마'는 모두 천지회의 일가이다. 피차간에 적지 않은 협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정비"중 일찍이 "토마" 이천보(광서 계평 구협촌 사람)가 있었다. "토마""진아귀(장족, 무선동향 하평령촌 사람)은 광서의 각지를 전전할 때 진만 등 '광마'의 호응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천지회에 대한 진압을 속속 강화하면서, 광동, 호남, 귀주의 천지회가 대거 광서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적지 않은 '당비'의 홍문형제정은 고향을 보위하자는 본토감정에 압도했다. 많은 ''은 내토계투 가운데 중립적인 입장에서 관망한다. 최종적으로는 '토인'의 진영에 가담해서, '내인' 및 객가인동포인 '광마'형제와 적이 된다.

'당비'는 토착이고 가족을 데리고 다녀 행동이 불편했다. 그리고 전투력이 원래부터 '광마'만 못했다. 이것이 바로 <태평천국기의기>에서 말하는 "토인"은 설사 '비도'와 결합해도 첫 싸움에서 지는 현상이 발생한 이유이다.

그러나 '당비'가 계속 집결하면서, 인원수의 우세가 점차 작용을 나타낸다. 결국 전투력은 강하지만 인원수가 적은 '광마'는 더 이상 객가를 보호할 수 없게 되고, '내인'과 함께 패전한다. '광마'의 광서에서의 전성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함풍5(1855) 광주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실패한 이문무, 진개 등의 부대가 광서로 물러나서, 심주부등지에 '대성국(大成國)'을 건립할 때 비로소 재기한다.

실패한 '광마'는 어디로 갔는가? 금전기의를 전후하여, 적지 않은 천지회 무리가 태평군에 가입한다. 예를 들어, 나아왕, 범연득, 소삼낭, 변삼난, 양원청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인원은 청군에 투항한다. 혹은 태평군에 먼저 들어왔다가 다시 청군에 투항한다. 예를 들어, 장쇠, 전방, 관지 등이 그들이다. 비록 기록상으로 그들이 귀현의 내토지쟁에 참가했었다는 내용은 없지만, 이를 통하여 추정해볼 수 있다. 내토지쟁에서 패배한 '광마'는 광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광서에 자리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위에서 얘기한 두 가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내토지쟁으로 격화된 양광의 천지회 갈등은 태평천국 건국 후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태평군이 영안주에 들어간 후, 성안의 장병 가운데 많은 수는 광동 흠주, 귀선에서 온 객가인, 구천지회 무리 그리고 호남에서 패퇴해온 천지회 인원이다. 성 밖에서 청군의 포위공격을 돕는 '장용'중에도 적지 않은 홍두건을 쓴 원래의 광서천지회 인원이 있었다.

당연히,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다. 청군의 진영에도 광동인, 객가인이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동관 관성적의 심주지부 장경언이 광동에서 모집한 '동용'에는 광동인들일 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광동 객가인이다. 청군에 투항한 장쇠등도 포위공격에 참가한다. 다만 이들의 '지원'은 믿을만하지 못했다. 장쇠 등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최종적으로 청군 측에 의하여 숙청된다. '동용'의 제1300명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반기를 든다. 새로 모집한 3000명도 자주 포위된 성내에서 양식, 유황(화약제조에 쓰임)을 밀수했다. 많은 지방지에서는 이를 나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객가인''우리가 남이가' 식의 정서는 설사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전쟁터에서라 할지라도 여전히 미묘한 효과를 발휘했다.

 

'자기사람'의 하나님

귀현 내토지쟁의 발발지인 대허의 이웃마을인 사곡촌은 바로 홍수전의 표친(表親)인 사곡 왕가의 거주지이다. 홍수전, 풍운산이 광서에 도착한 후 처음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비록 왕가는 배상제회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고, 양수청, 소조귀를 당해내지 못했지만, 홍수전과의 친척관계로 인하여, 철저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상당한 실력과 영향력을 보유했다. 대허의 서쪽, 귀현의 서북부에는 배상제회의 주요활동구역인 용산이 있다. 석달개, 진일강등 배상제회의 핵심인물이 모두 용산일대의 부호이거나 광부의 우두머리였다.

배상제회는 원래 반공개적으로 활동했다. "사람들마다 홍선생을 알았다." "홍선생"의 표친이 이웃이고, 객가의 '자기사람'인 대허 '내인'은 당연히 배상제회에 대하여 낯설지 않았다. 1849년 여름, 홍수전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배상제회에 "앞으로 전염병이 도는데, 신자들은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라는 예언을 퍼트리게 한다. 다음해 연초에 과연 말한대로 자형산 지구에 전염병이 돈다. 죽은 사람이 가장 적은 곳이 전심, 화뢰 이수는 바로 배상제회 신도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비록 이것은 우연의 결과이기는 하지만(배상제회의 예언은 원래 군중들에게 가산을 버리고 의거에 참가하도록 독려하기 위한 것이고, 배상제회의 신도들 중에도 죽은 사람이 적은 것은 홍수전이 의술을 알았을 뿐 아니라, 배상제회 내에 이준창, 하조원등 원래 군의출신이 있었던 것과도 관련 있다), 다만 비상시기에 배상제회의 명성과 신비성은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객가인은 똘똘 뭉쳐서 계투가 벌어지면 주변의 동족들을 끌어 모아서 전투를 벌였다. 지척으로 가까운 사곡촌도 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귀현의 동북, 서북의 객가마을도 모두 참가했을 것이다. 배상제회의 핵심무리와 수뇌는 절대다수가 객가인이다. 홍수전의 표친은 계투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치대로라면, 배상제회는 절대로 수수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대다수의 기록을 보면, 내토계투의 초기에 배상제회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기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

비록 이에 대하여 많은 논자들은 배상제회가 좌산관호투(坐山觀虎鬪) 한 중요한 증거로 보지만, 소조귀가 말한, "요귀와 요귀가 서로 싸워서 둘 다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내토지쟁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소조귀는 단련과 같은 류를 '외소(外小)', '외인'으로 보았고, 관병과 같은 류만을 '()'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 말은 대허계투가 개시되기 전인 사월 이십이일에 했다. 분명 청군과 당시에 활약하던 '회비'의 교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홍수전은 일찌감치 천지회를 폄하하고 배척했었기 때문이다) 계투가 시작된 후, 소조귀는 반복하여 '인내", "양인삼척(讓人三尺)"을 강조하고 무장자위를 주장한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무리를 모아 '내인'을 도와주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금전의 '단방'은 이미 시작되었고, 양수청의 병이 아직 호전되지 않아서, 소조귀는 새로 일을 만들어 기의를 일으키고 건국을 하는 일에 지장을 받고 싶어하지 않았었다.

사곡 왕가를 주변화시킨 "주당사건"은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록 소조귀는 왕가와의 권력투쟁이 일찌감치 1849년초에 격화되었지만, 여러번의 교전을 거쳐 이미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다만, <천형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경술(1850)년 팔월 이십일, 소조귀는 "귀현의 형제들이 주당의 사람들에게 유혹될까봐 우려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신경을 써서 하범하여" 은혜와 위엄을 같이 보였다. 이때 왕가는 일찌감치 권력핵심에서 밀려났다. 옛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게 무엇 때문일까? 경술년 팔월은 바로 대허의 내토계투가 시작된 시기이다. 대허는 사곡촌에 이웃한 마을이다. 소위 "주당유혹"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웃의 정과 객가인의 전통으로 사곡왕가가 귀현의 다른 객가인과 연합하여 도와주려고 하다가, 소조귀를 불쾌하게 만들어 저지한 것이 아닐까.

다만, 이렇게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태도는 금방 풀린다. 구월 초십일, "천형"은 말한다. "팔방에서 일어나고, 일어나면 다시 식지 않는다. 싸워야 한다." 십오일에는 다시 지시한다. "만일 '외소'가 침입하면 그들과 죽어라 싸워도 좋다." 이를 전후하여 <천형성지>는 여러번 계속하여 배상제회 신도와 '외소'간의 교전에 관한 기록이다. 그중 적지 않은 부분은 확실히 '내토지쟁'의 흔적이 있다.

확실히, 같은 객가인이 많은 배상제회의 신도들 가운데, 눈이 벌개져서 벌이는 내토쟁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세를 점한 '토인''내인'을 학살할 때, 절대로 같은 객가이며 무기를 들고 무리를 이룬 배상제회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배상제회가 싸우지 않으려 해도, '외소'들이 달려들었을 것이고, '양인삼척(삼척을 양보하다)'을 해도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십월이 되자 40여 일간 악전고투를 벌인 내토계투는 마침내 토인의 승리로 끝난다. 집에서 쫓겨나고, 갈 곳이 없는 내인은 이때 퇴로가 없었다. 같은 일족이며 계투후기에 이들을 도왔으며, 사람이 많은 배상제회로 몰려간다. 그곳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배상제회는 군영과 대오를 나누고, 계율을 지켰다. 이때 '내인'에게 그것이 무슨 장애는 아니었다. 현지의 '신선'계통에서 주변화 되었던 그들이 당연히 그들이 보기에 객가 '자기사람'이 데려온 하나님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이들 객가인들의 가입으로 배상제회는 설중송탄(雪中送炭), 여호첨익(如虎添翼)이 된다.

<심주부지>의 기록에 따르면, 배상제회는 원래 겨우 수백 명이었는데, '내인'중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조리 투신하면서 삼천여명이 된다. 배상제회의 명성이 크게 떨쳐진다. 만일 '내인'이 오지 않았다면, 태평군의 기의는 아마도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기재는 확실히 과장된 점이 있다.

그러나, '내인'들은 이미 돌아갈 고향이 모두 파괴되었으니, 뒤돌아볼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배상제회의 핵심과 동족이고 전투경험도 있다. 그들은 핵심역량으로 성장한다. 금전기의후 태평군의 전투력에 미친 공헌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태평천국(太平天國) 북벌군의 총사령관은 누구인가?

 

태평천국의 난 때, 18535월에 태평천국은 남경(태평천국에서는 天京으로 불렀다)을 점령하여 도읍으로 정한 후에 약2만 명의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북벌을 감행하였다. 양주(揚州)에서 출발하여 곧장 북경으로 향하여, 청나라의 봉건통치를 철저히 파괴하고, 신생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북벌군은 청나라 군대의 방어벽을 물리치고, 안휘북부, 하남을 지나 황하를 넘고 산서로 들어가 청나라 조정을 위협하였다. 산서에서 나와 직예(하북성)을 들어와서 천진 바로 아래까지 진출하였고, 당시의 함풍제는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열하(피서산장)로 도망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규모의 부대로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갔고, 후속부대의 지원을 못하여 모든 장병이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그런데, 이 북벌군과 관련하여서는 누가 총사령관이었는지에 대하여 이론이 있다. 당시 북벌군의 주요한 장군은 이개방(李開芳), 임봉상(林鳳祥), 길문원(吉文元), 주석곤(朱錫琨), 황익운(黃益芸) 등이었고, 이들 중 총사령관은 이개방이나 임봉상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개방과 임봉상 중 누가 총사령관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제대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원인의 하나는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이개방과 임봉상의 순서가 기록마다 일정치 않다는 점이다. 곽정이의 <<태평천국사사일지>>, <<금릉잡기>>, <<기보평적기략>>등의 기록에서는 이개방이 임봉상보다 앞에 기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보평적기략>>에는 ", 월비 홍수전, 양수청등이 강녕을 침입하고 진강, 양주를 함락시키고, 위승상(僞丞相, 가짜 승상이라는 말로 태평천국의 승상직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임) 이개방, 임봉상, 길문원 등이 강을 건너, 포구로부터 안휘, 하남의 두개 성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고 하고 있다. 함풍제 때의 <<동화속록>>, <<대경당일초>>등에는 반대로 임봉상을 이개방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경당일초>>에서는 "..강을 건넌 도적 5명을 붙잡았다...심문을 하니, 적의 두목 임모등이 양주에서 배를 타고 포구에 이르렀는데...약 만여 명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료에서는 양자의 이름 순서를 왔다 갔다 하면서 기록하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누가 선임이고 총사령관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원인의 두 번째는 두 사람의 관직이나 지위가 거의 비슷하여, 아래위를 가리기 힘들고, 누구든지 총사령관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현재 역사학계는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하나의 의견은 임봉상이 북벌군의 총사령관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벌군이 태평천국 계축 3516일 주선진에서 남경에 보낸 전황보고에서 첫 번째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 임봉상이고, 그 후에 이개방, 길문원, 주석곤의 순서라는 것이다. 또한 계축 34월에 양수청이 북벌군에게 보낸 고유(誥諭)에서도 마찬가지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 임봉상과 동시에 체포된 장군 구금(歐錦), 진아부(陳亞夫)등의 자술서에서도 "임봉상이 이개방에게 명하여 고당주를 공격하게 하였다.."는 내용과 "4월에 나는 임봉상, 이개방, 길문왕의 3명의 승상과 황하를 건너..."라는 글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공식문서에 기재된 순서에서 임봉상이 빠르므로 임봉상이 총사령관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의견은 북벌군의 총사령관은 이개방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이수성이 지은 천조십오(天朝十誤, 태평천국의 10가지 잘못이라는 의미)의 첫 번째 3가지를 "하나의 최대 잘못은 동왕이 이개방, 임봉상에게 북벌을 명하였는데 패망의 큰 잘못이었고, 하나의 잘못은 이개방, 임봉상의 북벌 실패 후, 승상 증립창, 진사보, 허십팔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는데, 임청에서 패한 것이고, 하나는 정입창 등이 임청에서 패배한 후, 이개방, 임봉상을 구하지 못하고, 연왕 진일창이 다시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갔으나, 서성 양가점에서 패배한 것이다"라고 하여 세 번이나 이개방을 임봉상보다 앞에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태평천국의 정권을 장악했던 홍인한이 쓴 자술서에서도 역시 이개방을 임봉상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임술12년 태평천국이 북벌군의 장수들을 왕에 봉하는데, 이개방은 "전전춘계전찰천군정천부조강청왕합천세"이고, 임봉상은 "전전춘계전찰천군정천부조강구왕협천세"이다. 그런데, 관직의 서열로 보면 이개방이 임봉상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자료의 기재는 모두 정확하고 믿을만한데, 왜 서로 모순되는지에 대하여는 잘 알 수가 없다. 이개방과 임봉상의 두 사람 중 누가 총사령관인지에 대한 것도 역시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4. 우화대전투(雨花臺戰鬪) : 태평군과 청군의 가장 치열한 전투

: 자주군(煮酒君)

 

 

1851, 태평천국운동이 흥기하여 일시에 중국의 절반을 차지한다. 청저우의 남방 수개 성의 통치는 곤란에 빠진다. 일시에 태평군이 북상하여, 호남으로 들어가고, 호북을 빼앗고, 무창에서 장강을 내려가, 안경을 함락시키고, 남경을 점령한다. 이제 북경에 있는 함풍제가 놀라자빠질 지경이 된다.

태평군은 그 후에 북벌(北伐)과 서정(西征)을 나란히 벌여 청나라조정 내부에서는 태평군을 호랑이 보듯 두려워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 않았다. 농민의 계급성이 금방 드러난다. 천경의 거대한 재물을 눈앞에 두고, 여러 왕들은 최고통치권을 쟁탈하는 내부투쟁을 벌인다. 이 사건이 바로, "천경변란(天京變亂)"이다.

이에 대하여 양계초 선생은 저작 <이홍장전>에서 이렇게 평론한 바 있다: 이때의 태평천국은 전성기에서 꺾여서 쇠퇴하고, 골짜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만일 이 때 청군이 기회를 틈타 반격했다면, 이 변란은 아마도 6,7년 일찍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청군은 태평군보다도 부패했다. 그 후 쌍방은 대치단계로 접어든다. 증국번의 상군(湘軍)은 점차 태평군에 항거하는 주력으로 성장한다. 1860년 강남대영이 두 번째로 함락된 후, 청정부는 증국번의 상군에 의존하는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이때의 증국번은 거대한 임무를 눈앞에 두고, 강소, 절강 전장을 열기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강소와 절강의 경제적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청군이 충분한 군수물자를 조달받고, 태평군의 식량공급을 단절시키려면 반드시 강소와 절강을 차지해야 했다. 그래서 증국번은 이홍장과 좌종당에게 각각 회군(淮軍)과 초군(楚軍)을 이끌고 강소와 절강으로 가서 태평군을 소탕하도록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홍장의 부대인 회군이다.

회군은 상군의 모체에서 잉태된 것이다. 이홍장은 합비 고향에서 현지 민단을 거두어 무창으로 간다. 증국번이 훈련을 시킨다. 증국번은 일부 상군을 회군에 편입시킨다. 무기장비, 식량공급에서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회군의 전투력은 신속히 상승하고, 청군내의 실력 있는 부대로 성장한다.

동치원년(1862) 이월, 회군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합쳐서 8천 인마였다. 28, 상해 쪽에서 빌린 여객선이 도착한다. 이홍장은 대군을 3로로 나누어 상해로 향한다. 30, 이홍장의 전군은 상해에 도착한다. 서양인과의 교류에서의 편의를 위하여, 이홍장은 서리강소순무에 임명된다.

이홍장이 도착한 처음에, 태평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상승군에게 송강남부의 금산위와 봉현현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한다. 회군부대는 송강동남의 남회현으로 진격한다. 상승군은 태평군을 만난 후, 현지에서 태평군의 맹공을 받는다. 중과부적이어서 처지가 아주 어려워진다.

이 때, 정학계(程學啓)가 이끄는 부대가 태평군을 공격하여 상승군을 구해낸다. 상해에서 태평군을 대파하고 남회의 수비군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유명전(劉銘傳)은 그 후 남회를 굳게 지키며 태평군을 물리친다. 이때 정학계는 신교에 주둔하고 있었고, 태평군 주력의 공격을 받아 처지가 곤란해진다.

그러자 이홍장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원해준다. 쌍방은 병력을 합쳐서 태평군을 격파한다. 이 전투에서 태평군은 깜짝 놀라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송강, 청포, 광복, 당교부근의 태평군은 차례로 철수하고 상해포위망은 풀리게 된다.

그러나 이 때 국면은 돌연 바뀌어 청군에 불리하게 된다. 원래 이 때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전이 군대를 이끌고 남경교외의 우화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남경에 거대한 위협이 된다. 다만 1862년 여름, 돌연 강남지역에 전염병이 퍼진다. 일시에 증국전의 군대내부에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이 늘어나 전투력이 대폭 약화된다. 이수성은 이를 보고, 군대를 이끌고 청군대영을 공격한다.

그리고 태평군의 또 다른 대장 이개현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증국전의 대군을 포위 섬멸하도록 명령한다. 이때 증국전은 겨우 3만여 명이고, 군대 내에는 환자가 많았다.

그러나 태평군은 이때 성 밖에 20여만 대군이 있었다. 성안에도 10여만 명이 더 있었다. 그리고 장비도 양호하고 식량도 충분했다. 전쟁의 결과는 거의 결정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의문의 여지없이 이는 청군과 태평군 간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이때 증국번은 매우 초조해서 급히 각로의 상군을 모아서 구원을 보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때 각지의 상군은 모두 당면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일시에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이는 당연히 미리 계획한 군사행동이었다. 이수성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청군과 혈전을 벌였다. 강남대영을 집어삼키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청군은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적개심을 품고 병구를 이끌고 태평군과 혈전을 벌인다. 쌍방은 남경 성밖에서 벌인 혈전은 근 2개월에 달했다. 가만 태평군은 이 궁지에 몰린 청군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때 이홍장과 좌종당은 차례로 구내를 이끌고 이수성 대군의 주둔지를 괴롭혔다. 이수성은 자신의 대본영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여, 십월에 황급히 철수한다. 우화대전투는 이렇게 끝이 난다.

우화대전투는 태평군 장수들이 죽는 것을 겁내고 사병들은 목숨을 아낀다는 점을 확실히 드러냈다. 근대의 한 저명한 학자는 이렇게 평론했다: "설사 이수성이 열 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때는 태평군의 이런 부패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도시를 포위한 채 공격하는 태평천국군

 

 

5. 태평천국의 보물은 금용전 아래에 묻혀 있는가?

: 진녕준

 

천왕부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천경의 서화원 석주

 

1864, 상군(湘軍)이 천경(天京, 현재의 남경)을 함락시킨 후, 모두 불태워버리고, 부녀자를 간음하고, 이것저것 모두 약탈했으며, 전 남경성을 3일간 노략했다. 땅 위에 있는 재물은 모두 거둬갔다고 볼 수 있다. "수년동안 중국과 외국에 홍수전의 부는 금과 은이 바다와 같고, 백가지 재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하였으며, 더 많은 보물을 지하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증국전(曾國荃, 증국번의 동생)은 이수성(李秀成)을 엄히 문초했고, 증국번(曾國藩, 상군의 지도자)도 막료를 보내서 이수성을 심문했다. 심문한 것 중의 한 가지는 "성안의 땅굴속의 금은을 몇 군데 지적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있다. 이수성은 자술서에서 증국번에게 답변했는데, 그의 자술서에는 매우 교모하고 완곡하게 쓰면서 결론적으로 "국고에는 금, , 쌀이 없고" "집안에도 금, 은이 없다"고 쓰면서 증국번의 추궁을 막았다.

남경이 함락될 때, 남경성의 구호는 "반조각의 헤어진 베()라고 남겨서 요괴(당시 태평군이 청나라군대를 능멸하여 부르던 말)들이 쓰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군은 여전히 당시에 전해지는 바와 같이 천경에는 금과 은이 바다처럼 많을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있었고, 성이 함락된 후, 상군은 도처에서 땅을 팠다. 바로 증국번이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공공연히 "금을 묻은 장소를 발굴한다"고 썼다. 그 후에 남경의 민간에는 태평천국의 지하금고가 있다는 소문이 여전히 있었다. 장로와 왕두부가 부자가 된 이야기들이 그런 것들이다. 신해혁명이후에 어떤 군벌은 태평천국의 지하금고를 발굴해서 부자가 되었다. 여러 가지 현상으로 볼 때, 천경성에는 지하금고가 있었던 것 같다. 태평천국은 남경에서 10년을 있었는데, 계속하여 홍수전이 지하창고를 만들어 금, , 재물을 숨겼다는 전설이 돌았다. 남경성을 공격하던 상군은 이 전설을 그대로 믿었다. 성을 함락시킬 때, 상군은 사방에서 지하창고를 발굴하기 위해 땅을 팠고, 증국번은 일찍이 공고를 내서 "적의 지하금고를 발굴한 자는 관청에 보고하라, 어기는 자는 죄로 다스리겠다"고 한 바 있다. 상군이 성에 들어온 후 증구(曾九, 증국전이 아홉째 동생이므로 증구라고 불렀다)는 지하금고의 전설을 듣는다. 그의 부대는 먼저 천왕부에 들어갔고, 소문에 의하면 증국전은 홍수전의 지하금고의 보물을 캐서 자기가 챙겼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천조궁전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청나라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홍수전의 지하금고에는 비취서과가 있는데, 이것은 원명원에서 나온 것이고, 위에는 갈라진 흔적이 있고, 검은 반점이 있으며 붉은 색을 띄고 있고, 선명하고 매끄러웠으며 모두 천연적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보배는 나중에 증국전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태평천국은 잔혹한 전투를 위하여, 모든 공사재산을 모아서 "성고(聖庫, , 국고)에 쌓아두었고,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은 성고에서 통일적으로 배급하였다. 백성들이 금1냥 또는 은5냥 이상을 사사로이 숨기고 있으면 바로 사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태평천국의 재부를 중앙 집중이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지하창고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성고" 제도는 태평천국후기에 "천경사변"이 있은 후에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수성이 형을 받기 전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 때 비록 성고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홍수전의 사금고였고, 태평천국의 공금고는 아니었다. 홍수전과 양수정은 형벌과 법으로써 각 곳의 금, , 쌀을 긁어모았다" 이것은 천경사변 후에는 태평천국의 정권은 홍씨 적계들이 장악하고, 성고의 재부는 이미 홍수전의 사금고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전이 천경에 들어온 후에는 군중과 유리되어 깊은 궁궐에서 살면서 10년간 바깥을 나오지 않았으며, 그의 직접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천왕부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성의 왕들에 대하여 의심이 많았었다. 천왕부는 그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안전감을 느끼는 곳이었으며, 만일 지하금고가 있었다면 바로 천조궁전지하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홍수전이 천조궁전을 만들 때, 전국의 모든 재산을 들이부었고, 각지의 보물을 뺏어 와서 궁내에 두었다. 다른 왕부들도 각각 금고를 두었다. <<송호수필>>의 기재에 따르면 "남경성의 4개의 왕부 및 지하금고는 모두 이미 수색하여 약탈해서 비어버렸다" 비록 천조궁전의 지하금고에 대한 기록은 없고, 증국번도 동치제에 대한 보고에서 천왕부의 지하금고에 대한 일을 부인하였다. 그가 조정에 보고할 때에는 2매의 "옥새"1매의 "금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재에 의하면 "증국번의 태부인은 3월초에 금릉에서 호남으로 돌아왔는데, 호송하는 배가 약 210개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옮겼을 까? 금은재보였을까 아니면 다른 중요한 물건이었을까.

당시 상군이 천왕구를 수색한 것은 매우 세심하게 하였다. 심지어 비밀리에 천왕부내에 묻혀졌던 홍수전의 사체까지도 발굴해내었고, 시체를 태웠을 정도이다. 지하금고는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실 천왕부는 전부 불태워진 것은 아니었고, 적지 않은 건물이 남아 있었다. 핵심건물인 금룡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백 년 동안 아무도 그 지하를 조사한 적은 없다. 금룡전의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천조궁전의 지하에는 금을 감추고 있을까? 이것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6. 태평천국 옥새(玉璽)의 수수께끼

 

태평천국옥새와 관련하여 전국각지에서 사기사건이 연속하여 발생하고 있다. 1864718일 청나라 군대는 태평천국의 도성 천경(강소성 남경시)을 함락시켰고, 대량의 태평천국과 관련한 문헌은 전란 중에 불에 타버렸다. 천왕 홍수전의 천왕옥새는 이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

중국 역사 박물관 안에 진열된 '천왕옥새'는 무수한 전란을 거쳐 기적적으로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천왕옥새'를 둘러싼 진위문제는 사학계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최고지도자였다. 역대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도 무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을 원했다. 그러나 역대제왕들과 달랐던 점은, 천왕홍수전은 금(), (), ()으로 된 세 개의 서로 다른 천왕옥새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홍수전의 금인(金印)은 백여 냥이 되는 황금으로 만든 것인데 위에 "태평천국만세금새(太平天國萬歲金璽)라고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사방에는 정교한 도안과 꽃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금인의 지위는 천왕의 세 개의 옥새 중에서 가장 높았고 평상시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18647, 천경성이 함락될 때, 태평천국의 장사들은 금새를 지니고 포위를 뚫으려 애썼다. 강서에 있던 간왕(干王) 홍인헌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망돌파에 실패하고, 금새는 상군(湘軍)의 두목이자 청나라조정의 양강 총독이었던 증국번의 손에 들어간다.

천왕의 금새를 손에 넣자, 증국번은 귀한 보물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즉시 금새를 사람을 시켜 북경으로 보낸다. 그리고 양궁 황태후와 동치제에게 보고한다. 이후 금새는 자금성의 군기처에 보관되어 왔다. 군기처는 방비가 엄밀하여 친왕이나 귀족들 또는 대신들도 군기처에 근무하지 않으면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1년 후에 이 금새는 기적처럼 실종되어, 전체 청나라 조정은 한 번 진통을 겪는다.

양궁황태후는 즉시 수석군기대신인 공친왕 혁흔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하게 한다. 2개월여의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전혀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혁흔은 북경성내의 금은 장신구를 다루는 점포, 골동품상을 뒤졌는데, 마침내 동사(東四) 부근의 한 장신구점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원래 군기장경(軍機章京)인 사롱아(薩隆兒)가 금인을 훔쳐내서, 장신구점에 녹여서 금조(金條) 10개로 녹여달라고 하였고, 하나당 무게가 11냥이었다. 조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2개의 금조는 사롱아에 의하여 팔려버렸고, 나머지 8개는 청나라 조정이 회수하였다. 진귀한 태평천국의 천왕금새는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천왕 홍수전의 목새는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천왕 홍수전의 목새는 3()으로 네모났으며, 사방에 용무늬를 새겼다고 한다. 중간에는 "지준(旨準)"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목새의 도장면은 도안내용은 금새와 비슷했고, 도장문구도 통속적이며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고, 장중하고 대범했다.

목새는 천왕 홍수전이 일상적으로 신하들의 상소문을 결재할 때 쓰였다. 현존하는 태평천국의 정식 반포한 문헌인 <<천조서(天條書)>>, <<예제(禮制)>>등의 십여 종의 문서의 첫 번째 페이지에, 모두 이 목새의 "지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그러나 목새의 원본은 1864년 천경함락 후 계속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

1975년이 되어서, 남경 첨원로(瞻園路) 173번지에 거주하는 주민이 옛 집을 수리하다가, 지붕천장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나무도장을 발견한다. 1982년 문화재 조사 시 주민은 목새를 정부에 기증했다. 중국의 저명한 사학가인 나이강 선생의 감정을 거쳐 이 목새가 바로 100여 년간 잃어버렸던 홍수전의 목새라고 확인하였다.

나이강 선생의 조사와 추단에 따르면, 목새를 발견한 원래의 남경 첨원로 173번지는 일찍이 태평천국의 관료기구인 "책서아(柵書衙)"의 소재지이다. 이 목새는 아마도 1864년 천경 함락 시에 당시 책서아의 관리가 청나라군대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붕의 천정에 숨겨두어서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본다. 지금 이 도장은 남경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이 옥새이다. 이 옥새는 청백옥으로 만들었고, 옥새의 손잡이의 양측은 모두 단봉조양(丹鳳朝陽)의 무늬를 하고 있으며, 옥새의 사방은 용두마리, 봉두마리가 새겨져 있다. 길이와 넓이는 모두 20센티미터이며, 청나라 때 황제의 어느 옥새보다 크다.

"태평옥새"의 도장에는 1144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인문(印文)은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장기간 태평천국사를 연구한 사람들 사이에는 세 가지 견해로 나뉘며, 아직도 정설이 정립되지 않았다.

첫째, 사흥요(謝興堯) 선생은 <<태평천국사회정치사상>>이라는 책에서 고증하여 말하기를 "태평옥새"의 글은 천지회의 "요평(腰平)"을 본떠 만든 것이다. "요평"의 격식에 따르면 도장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태평옥새, 천부상제, 은화집목, 천왕홍일, 천형기독, 구세유주, 주왕흥독, 팔세만세, 진주귀복, 영정건곤, 영석천록"

둘째, 나이강(羅爾綱) 선생은 만일 이렇게 읽으면 태평천국의 존비차서(尊卑次序)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천왕홍일''천형기독'보다 위에 놓으면, 천부(天父), 천형(天兄), 천왕(天王)의 서열을 뒤집는 것이 된다고 본다. 홍수전이 옥새에서 공공연히 자신을 천형 그리스도보다 위에 놓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셋째, 홍콩중문대학 간교수는 천부, 천형, 천왕의 순서에 주의하여 그가 채택한 방식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식이다. 다만, "은화집녹"이라는 문구를 "팔위만세"보다 뒤에 집어넣었는지는 간선생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천왕 홍수전의 옥새는 읽은 순서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이 옥새에 대하여는 계속하여 학자들이 증국번의 위조품으로 의심하여 왔다. 주요한 이유는 이렇다.

첫째, 옥새의 크기와 관련 자료에서 기재한 '팔촌견방(八寸見方)'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육촌견방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 천왕 홍수전은 태평천국을 상제천국으로 개명하여 조서를 반포하였데, 이 때 도장도 모두 이에 맞추어 수정하라고 하였는데, 이 옥새는 여전히 '태평옥새'라는 글자로 되어 있어서, 천왕의 조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셋째, 천왕 홍수전의 금새와 '지준'인은 옥새의 변방에 있는 도안은 용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꼬리가 위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옥새는 정반대로 용의 머리가 위를 향하고, 꼬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다.

넷째, 금새의 '()'자는 모두 엄격히 천왕조서의 피휘(避諱) 규정에 따라 만들었고, 윗면의 횡획은 아래보다 길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옥새의 "()" 자는 글자가 비교적 난잡하게 쓰여져 있고, 어떤 "()"자는 위쪽 획이 아래쪽 획보다 짧다.

저명한 사학자 나이강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 태평천국은 청나라 군대와 격렬하게 전투하는 과정에서 옥새의 인기(印記)가 너무 쉽게 위조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천왕의 옥새를 찍은 조서나 다른 왕의 명령의 경우에 도장을 찍는 동시에 비밀암호를 추가하였고, 당사자들이 친필로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암호는 친필은 위조가 도장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수성의 자술서에서도 "투항십요"중의 하나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중당(증국번)에게 요구하여 글을 내릴 때에는 나에게 주어서 나의 글을 쓴 후에 가도록 하였다. 글만 있으면 도장은 믿지 않는다. 지금 도장을 쓰는 자는 내 군영에 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이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중당에 위조하여 그들을 유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천조에서 글에 도작을 찍을 때는 나의 친필과 비밀번호가 없으면 장수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수성의 말에 비추어보면, 태평천국의 내부에 특히 군대에서는 문건이 오고갈 때, 친서밀호(親書密號, 친히 글을 쓰고 비밀번호를 쓴다)가 문건에 찍은 도장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천왕옥새'의 진실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청나라군대가 천경을 함락시킬 때, 일찍이 성내에서 대규모의 도살이 이루어지고 천왕부를 불에 태웠는데, '천왕옥새'가 이러한 과정에서 훼손되었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성을 의심하는 측에서도 유력한 증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천왕옥새'는 확실히 이전의 전통적인 옥새와는 다르다. 그것은 옥새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7. 태평천국과 객가(客家)

: 도단방(陶短房)

 

 

객가 마을과 토루 : 토루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단 하나의 문만 갖췄다.

 

인민영웅기념비의 한백옥부조(漢白玉浮雕)의 두 번째 것이 바로 '금전기의(金田起義)"이다. 그 안에 그려진 것은 "금전(金田)의 각 민족군중이 떨쳐 일어나 태평군 의거에 참가했다"는 화면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전기의가 발발한 1850년에, 금전촌에는 소수민족은 한 집도 살고 있지 않았다.

왕경성, 가문남 선행이 1978, 1980년에 두 번 금전을 방문하여 얻은 자료에 따르면, 금전촌은 최초에 확실히 요족(瑤族) 부락이었다. 그러나 북송 인종연간에 적청(狄靑)이 농지고(儂智高)를 토벌하면서, 한족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하다. 금전촌에 기록된 최초의 시조는 하관룡(何官龍)이다. 그는 적청을 따라 광서로 왔고, 나중에 광서에 남아서 개간을 한 절강출신의 군인이다. 하씨는 아들이 없었다. 그의 부하인 사()씨 성의 인물이 데릴사위로 들어온다. 나중에 그는 원래의 성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하여 금전촌에서 가장 최초이자 최대의 가족은 사씨 성이 된다. 금전기의당시에 사씨는 약 300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두 번째로 큰 가족은 황()씨들이다. 조상은 광동 고요이고, 청나라 강희 연간에 '삼번의 난' 이후 이주해 온 것이다.; ()씨는 세 번째로 큰 가족이다. 그들은 명나라말기에 금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외부에서 온 객가족이다. 금전기의 때, , , 두 성씨는 모두 100여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의거 후 위씨 일족들은 모조리 태평군을 따라 원정에 나서다. 한 집안도 남아있지 않는다. 나중에 태평천국의 난이 실패한 후, 안휘 선성에 정착한 위준(韋俊)의 후손들이 고향으로 성묘를 온 적은 있지만, 금전으로 이주해오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위씨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이주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건국 전에, 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중 위창휘(韋昌輝)가 장족(壯族)이라는 것도 있다. 광서통지관은 당시에 이렇게 선전했다. 건국 후 광서에서 태평천국문사조사단을 조직하여 금전을 방문하는데, 거기서 '위창휘는 장족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리하여 한때는 이 주장이 공식문서에 당당히 기록되기도 하였고, '태평천국운동은 다민족의 반제반봉건의거'라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증거는 문제가 있다. 최초에 '장족설'을 취했던 나이강(羅爾綱) 선생도 1942년에 <<위씨종보>>를 보니, 그 안에 위씨는 확실히 객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장족설'이라는 근거는 위창휘가 장족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경성 등이 고찰했을 때 발견한 바에 따르면, 광서의 다민족 산지에서는 가족 중에 소수민족친척이 있어 소수민족언어를 할 줄 아는 객가인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 위씨가 장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론이 불충분했다. 족보나 현지에 전해지는 말 등이 더욱 믿을만하다.

일찍이 '소수민족지도자'로 알려진 사람은 여럿이다. 태평천국지도자중 양수청(楊秀淸)은 묘족(苗族)이라고 일컬어지고, 담소광은 요족이라고 일컬어지고, 노육은 장족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양수청은 나중에 조상이 광동 가응주(광동 매주)에서 온 객가인이라고 밝혀졌고, 담소광은 담씨 가보에 의하여 광동 남해리 수촌 흥의방에서 왔고, 강희연간에 5대조 담기가 광동에서 광서 평남현으로 이주해왔으며, 객가인이라고 밝혀진다. 일찍이 '장족혁명열사'로 일컬어지던 노육은 현지인의 회고에 따르면, '금전에서 온 객가 말을 할 줄 아는 객가인'이라는 것이다. 윗대 때 자형산 고항충의 데릴사위로 왔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풍운산의 계평현 아문에서 소송할 때의 소송서류에 따르면, 풍운산은 노육을 '사촌형'이라고 칭했다. 아마도 사촌형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노육이 장족이었다면 광동 객가인출신인 풍운산이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태평군의 핵심수뇌는 모조리 객가인이라는 것이다.

홍수전의 시조는 북송의 명신 홍매(洪邁), 강서 상요에서 광동 화현까지 흘러들어간 객가이다; 상제회의 창시자인 풍운산은 광동 객가이다. 석달개도 객가인으로, 조적은 광동 화평현이다. 진일강은 귀현의 객가인이다. 호이광은 조적이 강서 임강으로, 유명한 객가의 거족이다. 이들 이외에 임봉상은 광동 게양사람이고, 몽득은, 이수성, 진옥성, 황문금, 황옥곤, 종방례, 뇌문광....등등 초기의 행적을 고증할 수 있는 태평천국의 우두머리들은 모조리 객가인이다. 이외에 상제회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곡 왕씨, 대충 증씨도 모조리 객가인이다. 태평천국의 초시 7()중에서 소조귀(蕭朝貴)의 민족이 불명확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광서 혹은 광동의 객가인들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최초의 조직자인 풍운산은 혼자서 광서의 산지로 들어간다. 그는 객가인이다. 객가 말을 할 줄 안다. 그러므로 처음에 접촉하고 의지했던 사람은 거의 모두 객가인들인 것이다. 그는 글 선생을 하고 일을 했는데, 그를 고용한 사람은 모조리 객가인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해서, 그가 자리 잡도록 해준 고림사 증씨 집안도 객가이다. 그가 상제회를 만들 때 의지한 노육, 증운정 등도 모두 객가이다. 고향을 떠나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종족이라는 당시의 습관에 따르면, 초기의 핵심인물이 모조리 객가라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태평천국은 종교색채의 운동이다. 광서는 토착종교가 발달하고, 온갖 신선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들 신선은 많은 경우 '토신선(土神仙)'이라고 불린다. 객가인들은 왕왕 배척받고, 종교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상제교는 '참사유정(斬邪留正)', '제사신(除邪神)'등의 구호를 내세웠는데, 객관적으로 말하면 소수민족의 '토신선'을 타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객가인들은 안위와 의지가 되었다. 홍수전이 금전, 자형과 평남 등지에서, 장족의 유삼저묘, 다민족혼함신앙의 감왕묘, 묘족의 반왕묘를 깨부수고 낯선 상제로 이를 대체하려 했다. 이는 확실히 객가인들의 호응과 공명을 얻어낼 수 있었다.

상제교가 전파된 지역은 대부분 막 개간된 산촌, 광구이다. 이들 지방은 객가인들이 어쩔 수 없이 쫓겨 와서 개간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힘들게 일하면서 고생을 하고 있었고, 자기 집안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온 집안을 이끌고 태평천국의 난에 가담하는 모험행위를 할 수 있었다. 객가의 부녀들은 원래부터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들이고 모두 전족을 하지 않았다. 의거 후에 고향을 떠나는데 별다른 부담이 없었다.

홍수전 등은 내평천국을 객가인왕국으로 만들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왕장차형친이친목공증복음서>>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일찍이 홍세만이라는 신도에게 준 부채에 쓴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진주위왕사사공(眞主爲王事事公), 객가본지총상동(客家本地總相同)". 소조귀는 계평, 귀현 등지의 객가인과 토착 한족, 묘족, 장족이 민족갈등으로 싸움을 벌이고 그 싸움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을 때, '천형'의 말을 빌려 싸움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한다. 이 싸움은 '요마가 요마를 죽이는(妖殺妖)'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발전은 왕왕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투쟁에서 패한 객가인들은 속속 금전으로 투신하고, 소수민족과 토착한인들로 이루어진 "장용묘련(壯勇苗練)"은 태평천국초기에 광서 경내에서 가장 완간항 적()중 하나가 된다.

당연히 많은 객가인들은 태평천국에 반대하는 편에 섰다. 예를 들어 최초로 풍운산을 체포하고 나중에 상제회에 놀라서 깊은 산으로 도망쳐 병사했다고 하는 왕작신, 왕대작 형제는 바로 청나라 건륭연간에 이주해온 객가이다. 이수성의 주장에 따르면, 지식이 있고 돈이 있는 객가인들 중에서 상제회나 금전기의에 참가한 사람은 적다고 한다. 돈이 있던 증씨 집안은 비록 상제회에는 참가했으나, 대부분은 금전기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태평천국을 간단히 '객가왕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소수민족이 태평천국과는 절연하였는가? 그것도 아니다.

위창휘, 석달개의 모계는 장족혈통이 있다. 천경, 소주를 방문했던 외국인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적지 않은 고급 장수의 호위대는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묘족청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태평천국이 일어난 근본원인은 경제가 붕괴되고 관료통치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객가인들이나 다른 토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태평천국의 의거가 일어날 때, 동시에 같은 지역 안에서 소수민족의 의거도 같이 일어난다. 장족의 이문채, 황정봉, 요족의 뇌재호 등이 그들이다. 이들 의거의 참여자들 중 일부는 실패 후 태평천국에 가담한다. 일부는 석달개가 광서로 돌아올 때까지 끝까지 따른다. 예를 들어 황정봉은 태평군 익전의 예부대중승 주봉기를 군사로 삼았다. 이문체는 직접 석달개 부대에 가입하여, 태평천국 친천연에 임명되고, 그의 민족혼성부대는 1872년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이때는 이미 천경이 함락된 지 8년이 지난 후였다. 태평천국은 객가인을 핵심으로 하여 시작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싸운 사람은 소수민족 장수였다.

 

 

8. 태평천국의 개명벽(改名癖)

: 도단방(陶短房)

 

명나라말기 섬서의 농민의거를 보면, 최초의 두령들은 거의 모두 가명을 썼다. 무슨 점등자(點燈子), 부점니(不霑泥), 사탑천(?), 혁리안(革裏眼)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이들이 비록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처자식은 여전히 고향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과 이름을 숨기는 것은 가족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태평군은 가족들이 모두 군대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천무, 천형(天父, 天兄)이 반드시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그들은 선배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따위의 일은 벌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태평천국의 사람들은 위로는 홍수전부터 아래로는 보통병사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고치는 것이 유행이었다.

홍수전의 이름은 그의 아들에 따르면, 하늘이 내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원래 홍인곤(洪仁坤)이고 자는 화수(火秀)이다 전도를 시작했을 때 천부의 뜻에 따라 홍수전으로 개명한다. 이것은 바로 상제의 이름이 야화화(爺火華, 여호와)”이기 때문에, ‘()’자를 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홍수전이라는 이름을 탁자(拆字)하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중에 금전의거 때, 상제도 탁자게임을 즐기 바 있다. 그리하여, “삼성고조일출천(三星高照日出天)”이니, “삼팔입일(三八卄一), 화내옥식(禾乃玉食), 인좌일토(人坐一土), 작이민극(作爾民極)”이라는 얘기를 만들어냈다.

삼팔입일이십이라는 뜻이다. (), (), 이십(, ), ()은 바로 ()’자를 파자한 것이다.

화내옥식의 화내(禾乃)는 수()자를 파자한 것이다.

인좌일토;의 인(), (), ()는 전()자를 파자한 것이다.

결국, 홍수전이 그대 백성들의 가장 높은 자리즉 황제에 오른다는 뜻이다.

이 방식은 아주 유용했다. 홍수전은 마지막까지 매일 귀찮아하지도 않고, 이런 글자를 가지고 새로운 수수께끼를 만들어내곤 했다.

홍수전은 이름을 하나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상제는 그에게 이름을 바꾸도록 하면서 당부했다. 어떤 때는 홍수라고 부르고, 어떤 때는 홍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청나라 측의 조사를 회피하기 위함이다. 나중에 천왕이 되었을 때는 홍일(洪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바로 태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수전의 심복부하, 대장들 중에서도 이름을 바꾼 사람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북왕 위창휘(韋昌輝)와 동생 위지준(韋志俊)의 원래 이름은 위정(韋正), 위준(韋俊)이었다; 대장 이내방(李來芳)의 원래 이름은 이개방(李開芳)이었다. 명의 이준량(李俊良)의 본명은 이준창(李俊昌)이었다. 영왕 진옥성(陳玉成)은 원래 진비성(陳丕成), 답천예 설지원(薛之元)의 본명은 설소(薛小)였다.

그중 어떤 사람은 한번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충왕 이수성(李秀成)은 원래 이이문(李以文)이었는데 수성(壽成)으로 바꾸었다가, 최종적으로 이수성으로 바꾼 것이다. 찬왕 몽득은(蒙得恩)은 원래 이름이 몽상승(蒙上昇)이었는데, 득천(得天)으로 개명했다가 나중에 득은으로 다시 개명한다. 주왕 뇌세취(賴世就)는 본명이 뇌구(賴九)인데 세국(世國)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세취로 바꾼다.

태평천국에는 왜 개명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그들이 개명하는 데에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일까?

가장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피휘(避諱)’이다.

봉건시대에는 피휘가 있었는데, 제왕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름이 두 글자이면, 두 글자를 연이어서 쓸 수는 없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피휘에 대한 애호는 불가사의한 지경에 이른다. 천부, 천형의 이름, 홍수전 부자 및 동사남북익의 오왕의 이름을 모두 피휘해야 했다. 그리고 보기 좋지 않은 글자들 예를 들어 축(), (, 해치다의 와 발음이 같음)등도 쓸 수가 없었다. ‘()’, ()‘등과 같이 위엄을 나타내는 글자도 쓸 수가 없다. 이렇게 하다 보니 성()들도 부득이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씨는 중국내에서 세손가락안에 드는 대성이고, 홍수전의 사촌형의 집안도 왕씨 집안인데, ‘이라는 글자를 쓸 수 없게 함에 따라, 왕씨는 모조리 성을 바꾸어 왕() 혹은 황()으로 하였다. 태평천국의 경내에서는 왕씨 성을 가진 자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홍수전은 일반 백성들이 씨 성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안휘사람 홍용해(洪容海)가 태평천국에 가담하여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자신의 성을 ()’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하는데, 그때 첫 번째로 한 일도 바로 자신의 성을 원래대로 회복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뇌세국이 뇌세취로 바꾸게 된 것이나 몽득천이 몽득은으로 바꾸게 된 것도 바로 ’ ‘과 같은 글자를 피휘하기 위함이다. 이준창이 이준량으로 바꾼 것은 바로 북왕 위창휘 때문이다. 이개방이 이래방으로 바꾼 것은 바로 익왕의 이름이 석달개(石達開)였기 때문이다.

몽득은의 몇 차례의 개명을 보면, 처음에는 상제(上帝)때문에 상승득천으로 바꾸었다. 그 후에 황천의 천자 때문에 다시 득은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태평천국의 피휘문화는 점점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일도 있다. 후기에 천경의 난이 일어나고 석달개가 떠나면서, , 개와 같은 원래 피휘되던 글자는 해금되었다. 그리하여 이준창, 이개방 등은 본명을 회복하게 된다. 홍수전의 아들인 홍천증(洪天曾)이 태어나면서 ()’씨성의 장수 증천호, 증천양, 증수원 등은 할 수 없이 영()씨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우아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바꾼 것이다.

태평천국은 하층에서 일어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불리는 이름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천지회 출신의 나아왕(羅亞旺), 철장(鐵匠)출신의 뇌구, 좀도둑출신의 설소, 소금밀매업자출신의 손취(孫臭. 나중에 孫魁文으로 개명함)는 나중에 고급관리가 된 후에 그에 걸 맞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고쳤다. 어떤 사람은 이름이 있기는 하나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바꾼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이문이 이수성을 바꾼 것은 개략 이런 사례라고 할 것이다.

많은 왕조의 황제들은 사성(賜姓), 사명(賜名)을 좋아했다. 홍수전도 예외는 아니다. 진비성이 진옥성이 된 것이나, 이수성(李壽成)이 이수성(李秀成)이 된 것은 바로 그의 걸작이다. 특히 이수성의 ()’는 자신의 이름에 들어있는 글자이다. 원래 양수청(楊秀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쓸 수 없는 글자였다. 이는 천하인들에게 이수성을 특별히 중시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태평천국은 초기에 결혼을 금지했고, 기혼남녀도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고독한 장수들은 곳곳에서 아이들을 얻어서 의제(義弟)나 양자로 삼았다. 일부 식구가 단촐한 장수들 예를 들어 양수청 같은 경우는 이런 방식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이렇게 하여 개명한 인물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보왕 양보청(楊輔淸)10여명은 모두 명의상으로 양수청의 동생들이다. 사실 이들은 양수청이 양씨 성을 준 핵심장수들인 것이다. 양보청의 원래 이름은 양금생(楊金生)인데, 나중에 양수청을 의형으로 모시면서 이름도 자연히 O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이들 양자, 의제들 중에는 원래 같은 성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비왕 전계인의 의제인 전수인은 본명이 주수창이다. 성과 이름을 한꺼번에 바꾼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원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이 외자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왕망은 두자 이름은 우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전국에 모두 외자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을 내린다(그 영향으로 동한 및 삼국시대의 인물들이 모두 외자이다). 흉노족 선우까지도 1글자의 이름으로 고칠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천년이 흐른 후에 태평천국은 두 글자 이름이 제대로 된 이름이고, 외자 이름은 안 된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원래 외자였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두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위정, 위준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일찍이 삼원리 항영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는 천지회의 노장 주춘(周春)은 태평천국에 들어온 후 주춘지(周春之)로 개명한다. 염군의 수령인 공득(龔得), 장룡(張龍)은 태평천국에서 공득수(龔得樹), 장원륭(張元隆)이 된다.

고위 장수만 이러한 것이 아니다. 하급병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하급병졸들도 피휘를 해야 했지만, 어떤 경우는 자신조차도 자신의 이름이 바뀐 줄을 모르는 경우까지 있었다. 예를 들어, 상주태평군의 병사 중에 용각(龍角)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은 쓸 수 없는 글자였다. 그리하여 그를 명부에 올릴 때는 융곽(隆郭)으로 올린다.

 

 

9. 태평천국의 장수들 : 강골에서 약골로...

: 정만군(程萬軍)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태평천국의 기원은 "배상제회(拜上帝會)"로 태평군(太平軍)이 된다. 태평군의 전성기에는 '백만대군'이라 불리었다. 비록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최소한 수십만은 되었을 것이다.

이 대군은 태평천국을 따라 1850년에 '건국'되고, 1864년에 '망국'한다. 그들은 중국역사상 짧지만 휘황한 시절을 남긴다. 그러나 그들의 휘황한 역사는 태평천국처럼 수명이 길지 못했다. 기껏해야 5년간 영광을 누렸을 뿐이다.

태평군은 초기에 전투력이 아주 강했다. 그래서 증국번은 '연전연패'한다. 나중에 '연전연패'하던 증국번이 태평군에 대하여 파죽지세로 공격한다. 이것은 증국번이 태평군을 이겼다기보다도, 태평군 자신의 전투력이 심각하게 하락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간단히 전투력이 하락했다는 말로 그 심층적인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다. 태평군사를 읽어보면, 이런 기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군대의 초기 장수들은 아주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웠다. 그러나 후기의 장수들은 대부분 약골들이었다.

전기의 장수는 남왕 풍운산, 서왕 소조귀를 대표로 하는데, 그들은 하나하나 사병들보다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총사령관이었다. 전주전투에서 풍운산은 청나라군의 포에 맞아서, 사망한다. 장사전투는 태평천국의 첫 번째 큰 싸움이었는데, 앞장서서 싸웠던 소조귀는 공성 때 전사한다.

그동안 태평군에는 북벌군도 있었다. 임봉상, 이개방, 길문원이 이끌었다. 2만의 무리를 이끌고 청나라의 직예까지 밀고 올라간다. 한때는 천진에까지 도달했다. 나중에 고군(孤軍)으로 적진에 너무 깊이 들어가, 뒤를 받쳐주는 부대가 없다보니 전멸하고 만다. 그러나 '직도황룡'의 기세는 청나라의 고관대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장수들의 태도였다. 길문원은 전사하고, 임봉상, 이개방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그들의 강골은 상대방조차도 경탄할 정도였다. 승거린친(僧格林沁)은 이 북벌군이 "혹은 공격하고 혹은 방어하면서, 태연자약하며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의 태평군에 강골인 장수는 보기 힘들었다. 영왕 진옥성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약골이다. 가장 풍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홍수전이 가장 믿었던 충왕 이수성이다. 후주 홍천부귀가 포로로 잡힌 후에도 삶을 구걸했다.

후인들은 태평군의 전투력이 하락한 원인을 분석할 때, 대부분은 '천경사변'때문이라고 본다. 태평군 내부에서 권력쟁탈전이 벌어지고, 심각한 부패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이 물론 주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그 외에, 또 하나의 거대한 암류가 흘러 전군에 만연했다.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앙의 파탄이다. 태평군은 종교로 일어났다. 당초 이 군대에 가입한 것은 개인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자도 있었지만, 역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상제교를 신앙했기 때문이다. , 태평군은 초기에 신앙집단이었다. 신양의 힘이 뒤를 받쳐주었다. 그러다보니,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던 청군이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후기에 그들은 이익집단으로 전락한다. 집단내부의 권력투쟁,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하나하나가 권력의 야수가 된다.

홍수전, 양수청의 이 '우두머리'들은 입으로는 형제들을 위하여 이상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하면서, 실제행위는 자잘한 성공에 만족하고 놀고 즐기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소천당'에서 놀았다. 홍수전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시위도 모두 여자였다. 태평군의 보통병사들은 부부가 동거하는 것도 범죄였다.

동왕 양수청은 천부(天父)의 화신이다. 그런데, 천왕 홍수전은 양수청을 도륙한다. 천부도 그의 권력욕을 제한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직접적으로 전군이 신앙파탄을 불러온다.

형제들은 꿈에서 깨어났다. 천부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 천당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우리와 무관하다.

꿈에서 깨어난 태평군 장병들이 자신과 관계없는 이상 국가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서 희생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군심이 흩어지고, 장병들이 각자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게 된 것이 당연하다. 나중에 이홍장에 의하여 북양수사제독에 임명된 정여창은 바로 이때 태평천국의 중간급 장수였다. 그는 태평군이 이미 옛날 같지 않아서 큰일을 이룰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이 태평군에 남아있어 봐야 앞날이 암담하다고 생각하여, 상군에 투항한다. 그 후 다시 회군으로 옮기고 이홍장의 인정을 받는다.

태평군은 상승의 군대, 정의의 군대에서 철저히 명실상부한 오합지졸로 바뀐다. 중간 장수에서 하급병사까지 부닥치면 바로 무너져 버린다. 천경이 무너진 후, 모조리 절개를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며, 앞 다투어 자백하고 꼬리를 흔드는 추태를 보이게 된다.

 

 

10.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 혁련발발(赫連勃勃)

 

185691(함풍683, 태평천국 병진 6726). 깊은 밤. 남경성. 동왕 양수청의 부저(府邸).

북왕 위창휘(韋昌輝)는 수하 3천여명을 이끌고 홍수전(洪秀全)의 밀명을 받아, 밤을 달려, 진성용(陳成瑢, 나중에 영왕이 되는 진옥성의 숙부)의 내응 하에, "천경"의 남문으로 잠입한다. 일행은 말을 달려 동왕 양수청의 거처로부터 수백미터지점에 이르자, 위창휘는 따르던 수하들에게 말에서 내리게 한 후, 수백 명으로 나누고, 그 자신도 100여명을 이끌고 동왕부로 향한다.

수문장은 오는 사람이 북왕이고, 또한 위창휘의 수중에는 천왕부에서 발급한 영패가 있었으므로 긴급한 군사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여 즉시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위창휘의 수하들은 즉시 밀고 들어갔고, 칼을 몇번 휘두르자, 동왕부의 수십 명 수문 병사들은 모두 객가 고향사람들에 의하여 목이 잘려나갔다.

대문에서의 소란스러움을 들고, 동왕 양수청은 급히 수하로 하여금 등을 들게 하고, 침상에서 일으키기 싫은 몸을 일으켰다. 며칠 동안 승전보가 계속 날아들었고, 태평천국군의 적수인 향영도가 화가 나서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양수청은 아주 자부심을 느꼈다. 어제 밤에는 몇 잔의 서양포도주를 마시고, 상품 아편을 몇번 들이마셨더니, 아주 편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깨고 나니 영 불쾌했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무리 군정이 급박하기로서는 어찌 감히 본왕 구천세(금방 만세가 될 예정임)의 꿈을 깨운단 말인가."

양수청의 침실은 매우 넓었다. 200평방미터가량 되었다. 대침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내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남목(楠木)가구가 놓여 있었고, 곳곳에 기진이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기이한 것의 하나는 동왕의 침상을 둘러싼 몇 두의 진주로 엮어서 만든 주장(珠帳)이었다. 이것은 천왕 홍수전도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양도 똑같은데, 다만 위에 큰 야명주 한 개가 더 박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거목향목상인데, 사방에는 아주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로 어항을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에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여러 개의 컨 백수정유리로 벽을 만들고 가운데 물을 넣어서 수백 마리의 진귀한 금붕어를 기르고 있었다. 큰 촛불이 비치자, 어항과 진주장은 번쩍거리고 있었으며, 사방으로 빛을 뿜었다.

동왕은 평소에 위세를 부리기 좋아했다. 12명의 절색미인들로 "전선(傳宣)"을 삼아, 자기의 좌우에 두었다. 북왕이 배알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이 여자들로 하여금 가장 빠른 속도로 신발과 옷을 갈아입히게 하였고, 침전의 앞으로 가서 북왕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북왕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살기등등했고, 온 몸에 핏자국이었으며, 오자마자 바로 칼을 뽑아서 휘둘렀고, 12명의 미녀는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으며, 선혈은 전내외의 누런 비단을 적셨다.

동왕 양수청은 문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히 처다보려고 했다. 두 발을 막 땅에 닿자, 주렴을 들치고 들어서는 자는 바로 평소에는 자기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던 북왕 위창휘였고, 얼굴에는 분노의 빛을 띠고 있었다.

양수청이 소리도 지르기 전에, 칼은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위창휘는 한 걸음을 내디디어서 동왕의 머리카락을 잡고, 칼을 꺼내서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동왕 양수청의 수급이 잡혀 있었다.

북왕 위창휘는 길게 탄식을 한 다음에, 동왕 양수청의 수급을 어항 속에 던져넣었다. 무수한 촛불과 경태랑 유리등 아래에서 동왕 양수청의 수급은 어항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선혈이 뿜어져 나오면서 점점 거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의 표정을 가리게 되었다.

홍수전과 풍운산을 태평천국의 이론적인 지도자라고 한다면, 진정한 중요시기에 일을 성공시킨 것은 바로 '이론''실천'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며, 그가 바로 동왕 양수청이었다. 금전촌(金田村)에서 무창, 무창에서 남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청나라의 강남강북대군을 물리치기까지 이 양수청은 절대적으로 태평천국의 실질적인 의미에서 최고지휘자였다.

1848년에서 1856년까지, 8년간 양수청은 "천부(天父)"의 하범(下凡)을 빌어 하늘을 대신하여 "전언(傳言)"한 것이 거의 30차례나 되었고, 절대다수는 위급한 시기에 벌떡 일어나서 군심과 민심을 안정시키곤 하였다. "전언"의 내용은 방대하고 잡다하다. 종교적인 것도 있고, 군사적인 것도 있으며, 정치적인 것도 있고, 문화적인 것도 있다. 심지어 천부의 명의로 배신자, 범죄자를 잡아낸 것도 있다. 특히, 태평천국이 '천경'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양수청의 '전언'은 태평천국의 사업에 아주 큰 역할을 해냈다.

양수청이 처음으로 "천부(天父)"의 혼이 몸에 붙어 "전언"을 하게 된 것은 184833일이었다. 당시, 자형산일대의 군중을 모아서 조직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양수청은 처음으로 바로 이런 신비스러운 일을 벌인 것이다. 만일 그가 경제가 발달한 강남지역이나 직예 지역에서 이런 짓을 벌였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문화가 낙후한 광서지역에서 특히 심주지역에서 이런 일을 벌이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숭배했다. 심주일대에는 오랫동안 일종의 어린아이에 신 내림 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하고, 음양의 두 세계를 오갈수 있다고 하였다. 객가인의 정신적 고향인 가응(매주)에도 원래 비슷한 의식이 있었다. 객가 말로는 "낙동(落童)" 또는 "낙낭(落娘)"이라고 불렀다.

심주지방에는 여러 신이 성행하여,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선 불교 등의 신을 믿었다. 불교를 믿는 사람, 도교를 믿는 사람, 유교를 믿는 사람, 성황을 믿는 사람, 들판의 신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홍수전과 풍운산은 처음에 여러 곳에서 묘와 신상을 파괴하였는데, 이는 현지 사람의 반발을 불러왔다. 일시간에 상제회는 모든 사람의 욕을 먹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양수청은 머리가 있었다. 그는 아주 총명하였다. 그래서 '신 내림'의 형식을 빌려, 더욱 간단하고, 더욱 원시적이고 더욱 편리하게 현지인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천부(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

"상제회" 자체가 정통기독교는 아니므로, 아무도 양수청의 신 내림의 비밀을 들춰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여 양수청은 창조적으로 다신론의 외투를 이용하여, 일신론의 기독교관념을 집어넣은 것이다. 최종목적은 자신들이 창조한 상제회가 성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 내림은 광서일대에서는 무당이나 유랑의사, 노인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양수청은 갖은 머리를 짜내서 '천부'로부터의 신 내림을 자신이 독점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야 홍수전을 비롯한 사람들도 그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기 ㄸ때문이다. 그가 '천부의 말을 전한 날'은 나중에 태평천국의 법정공휴일인 야강절(爺降節)이 된다. 원래 태평천국의 법정공휴일은 6일뿐인데 그 중의 하나이다.

양수청의 '전언'의 효력은 처음에 크게 성공했다. 풍운산은 계평현 정부에 갖혀 있었고, 홍수전은 광서에 없을 때었다. 그리하여 상제회는 거의 소멸할 지경에 처했다. 양수청은 소조귀를 끌어들여 2인극으로 "천부(하느님)"와 천형(예수)"이 세상에 함께 내려온 것처럼 연기했다. 우매한 민중은 바로 믿었다.

양수청은 위급한 시기에 민중의 마음을 붙들었을 뿐 아니라, 유일신인 '상제'에 대한 절대성을 선양했다. 이어서 홍수전의 대체 불가능한 '교주'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 때의 양수청은 단번에 '천부'로 변신하여 '각자 너희들 주인을 위하여 진짜 도를 행하고, 천부를 믿고 절대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동시에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필요에 응하여, 양수청의 '전언'은 여러 가지 특색을 띄게 된다. 공자맹자를 공격해야 할 때는 그는 "천부가 하강하여 사악함을 없애고 정의를 바로세우려한다"고 하고, 공자맹자사상을 이용해야 할 때는 "군주는 신하를 예의로 대하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 대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록 그 자신은 어릴 때 영양실조로 한쪽 눈을 실명했지만, 양수청은 '천부'의 신분으로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신 병을 앓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병을 얻은 것마저도 자신의 고상함에 이용하는 것을 보면 그는 천부적인 혁명선동가이다.

태평군이 강성해지면서, 양수청의 "천부하범"은 갈수록 권위성과 강제성을 갖게 되었다. 왕왕 '천부'의 이름으로 재판하고, 살인하고, 모마분시하기도 하고, 천등을 켜기도 하여, 상제회의 사람들에게는 경외하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심지어 1851년의 영안반란 때에는 양수청이 '천부'의 혼을 빌어서 주석능에 대하여 심판한다. 이런 것들은 태평천국의 병사들로 하여금 곳곳에 천부(하느님)가 존재한다고 믿게 하였고, 못하는 것이 없다고 믿게 하였다. 그래서 이처럼 큰 정신적인 역량이 지탱해주므로, 태평군은 초기에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제를 따라서 요마를 척결하러 가는 것이므로 천하무적이었다.

천왕 홍수전에게 있어서도, 양수청의 '천부전언'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1851년 그는 동향에서 왕을 칭했다. 바로 양수청이 '천부'를 대신하여 말을 전한 것이다.

"나는 너희 주인을 내려 보내서 천왕이 되게 하였다. 그가 내리는 명은 하늘의 명이니 너희들은 반드시 따르라. 너희들은 진심으로 주인을 받들고 왕을 돌보아라. 대담하게 방자해서는 안 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하여, 상제회의 무리들(홍수전을 포함하여)은 모두 양수청의 한 사건을 보고 믿게 되는데 바로 1851년 연말의 한 가지 사건이다. 당시 청나라의 장관 오란태(烏蘭泰)는 광주에서 부도통으로 있었는데, 적지 않은 서양의 물건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보내어 가짜로 태평군에 투항하였다. 서신을 보내고 예물을 태평군의 군영에 보냈다.

양수청은 서신을 찢어서 보고, 예물이 뭔지를 살펴오더니, 그 안에 뭔가 낌새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오란태가 보내온 물건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즉시, 눈을 깔았다가 다시 쓰면서 '천부'의 말투로 "이 안에는 폭약이 있으니 여러 사람은 조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군사들이 오란태의 예물을 군영바깥으로 들고나가 도랑에 버렸는데, 역시 폭발성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튕긴 쇳조각 때문에 풍운산의 어깨의 살이 한점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홍수전등 다른 사람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이 일이 있고난 후, 홍교주 까지도 양수청을 '천부'로 대하게 된다.

이러한 장난의 효과는 아주 컸다. 양수청은 마음속으로 득의했고, 그 이후의 모든 입법이나 제도를 만들 때 '천부'의 입을 빌어 원하는 대로 했다. 점차, 양수청은 '전언'을 통하여 자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동왕이 우리 형제자매를 때리는 것도 우리를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형제자매를 죽이는 것도 우리를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서운 말이다. 누구를 죽이는 것이 그 누구를 잘되게 하는 것이라니. 어쨌든 하늘의 법은 공정하고, 천부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모두 하늘의 뜻인 것이다.

남경에 도착한 후, 양수청의 하늘을 대신한 '전언'은 그의 특권을 만들고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홍수전의 둘째형인 홍인달(洪仁達) 조차도 그는 '천부'의 이름을 빌려 이 '황형'을 두들겨팰 수있게 되었다.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등은 모두 두려워했고, 매번 양수청이 '공연'할 때마다 바닥에 엎드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땀을 얼굴 가득히 흘리곤 했다. 동왕이 '천부'의 이름을 빌어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1855년에 반포된 <<행군총요>>에는 양수청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거의 '천부'의 지위로 올려놓게 된다. 양수청은 그 자신을 거의 '태어나자마자 깨달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양수청은 자신은 2인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1853년 말, 홍수전은 후궁을 가혹하게 때리게 되는데, 양수청이 이를 보고 참지 못했다. 그래서 '천부'의 혼이 들어온 것처럼 하여, 홍수전의 행위를 비난했다. 천왕 홍수전은 할 수 없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반드시 형제들과 상의한 후 처리하겠다"는 말을 하게 만든다.

오래지 않아. 군중의 한 백성이 호기심으로 홍수전의 군장안으로 들어갔다가, 야간에 홍수전과 후궁들이 노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홍수전에게 발각된 후 그는 바로 묶여져서 목이 잘렸다. 양수청은 이에 대하여도 불만을 가지고, '천부'로 변신하여 홍수전을 책망했다.

"너는 형제와 함께 강산을 얻었으면서, 살인의 큰일을 왜 넷째동생과 상의하지 않는가. 이는 중죄를 받아 마땅하다"

, '천부'는 양수청의 손을 빌려 홍수전의 엉덩이를 때리겠다는 것이었다.

홍수전은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하고, 매를 맞겠다고 한다. 북왕, 익왕등이 나서서 무릎을 꿇고 천왕을 대신하여 매를 맞겠다고 간청한다. 자기의 목적이 달성된 것을 보고 양수청은 그제서야 손을 거둔다. 청나라의 관리는 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릇 옛날에 반역하는 자들은 말로에 신하에게 제압당하거나, 찬탈당하거나, 묶이거나, 살해당한 자들은 많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매를 맞겠다고 하고서도 여전히 왕의 지위에 있던 것은 황당한 어린애 장난이다. 정말 개미떼들보다 못하다"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태평천국의 일체의 군국대권은 양수청 일인의 손에 장악된다. 그저, 동전상서 후겸방, 이수춘등만이 계획에 참여할 뿐이었다. 모든 자잘한 일까지도 동왕부에 보고된 후에 집행되었다.

가난한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면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양수청은 본인이 높이 앉았을 뿐 아니라, 외출할 때도 크게 떠들었다. 매번 따르는 사람이 천여 명이고, 성대한 의장행렬을 이끌었다. 제일 앞에는 "동룡"이라는 글을 써서 길을 열었다. 양수청 본인은 50인이 매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양수청의 종교적인 직함은 아주 기괴했다. 권위사(勸慰師), 성신풍(聖神風)이었다. 요즘의 게임개발자들은 온갖 이상한 이름을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는데, 사실 태평천국의 관직서류를 뒤적여보면, 그 위에는 온갖 재미있고 이상한 이름들이 많다. 대부분은 지금 게임들에 그대로 써도 될 정도이다.

태평군이 청나라의 강북대영, 강남대영을 무찌른 후, 양수청은 완전히 자기의 업적에 도취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구천세"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역시 '천부'가 내려온 것처럼 하여 홍수전을 불러서 여러 신하들 앞에서 훈시를 내린다. "너와 동왕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 동왕이 큰 공로가 있는데 왜 그냥 구천세에 머물러 있는가."

홍수전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음속으로 불만이 많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양수청의 밑바닥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자기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았다. 할 수 없이 "동왕이 강산을 얻었으니, 당연히 만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천부"는 한걸음 더 나갔다.

"동세자(양수청의 아들)도 왜 천세에 머물러 있는가."

홍수전은 "동왕이 이미 만세가 되었으니 세자도 역시 만세가 되어야지요. 후손대대로 모두 만세가 되어야지요" 천부는 가가대소를 하고 "그러면 좋다. 나는 천당으로 돌아가겠노라"라고 하였다.

홍수전도 머리를 굴렸다. 즉석에서 양수청을 '만세'에 봉하지 않고, 이 일은 융중하게 하여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다음 달 즉 923일에(함풍6825, 태평천국병진6817) 양수청의 생일 때 정식으로 만세에 봉하기로 하였다.

양수청은 매우 기뻐했고, 그래서 바로 홍수전에게 말했다. "내가 만세가 되면, 당신은 당연히 만만세가 되어야지요" 홍수전도 기뻐하는 척하였고,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태평천국의 제도상으로 양수청이 스스로 '만세'가 되려한 것이 대역무도한 일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태평천국은 홍수전과 양수청이 만든 새로운 것이었다. 이전의 중국사회의 윤리도덕과는 많이 달랐다. 각왕조에 만세는 원래 딱 1명씩이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에는 "()"가 다섯이고, "만세(萬歲)"가 여덟 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인정한 것은 "천부상제(天父上帝)"만이 "()"를 쓸 수 있으므로, 처음으로 의거를 일으킨 여섯 명은 모두 "()"으로 칭했다.

이는 홍수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여섯 왕 중에서 홍수전의 천왕(天王)이 제일이었다. 양수청은 비록 제2이지만, 다른 제왕을 통제했다. 나머지 4왕은 각각 자기의 땅을 관할했다. 상제회의 규칙에 따르면, '천왕'과 다른 다섯 왕과는 형제관계였다.(단지 서왕 소소귀는 황제의 사위 신분이었다).

그래서 5왕은 홍수전을 "이형(二兄)"이라고 칭하고(큰형은 예수이다), 그를 성상이나 주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홍수전은 양수청을 청포(淸胞)라고 불렀고, 석달개는 달포(達胞), 위창휘는 정포(正胞)라고 불렀다. 그들 몇 사람이 식사를 할 때도 함께 연회에 앉아서 식사했다.

태평천국의 오주(五主)는 바로 천부 "상주황상제(上主皇上帝)", 예수 "구세주(救世主)", 홍수전 "진성주(眞聖主)",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 "유주(幼主)", 양수청의 "속병주(贖病主)"가 그것이다. 이런 이론에 따르면, 양수청이 '만세'라고 부른다고 하여 그것이 참월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위 태평천국의 8명의 만세는 태평옥새에 나타나 있다. 그 위에 "팔위만세(八位萬歲), 은화인집(恩和仁輯), 영정건곤(永定乾坤), 영석천록(永錫天祿)"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여덟 만세는 바로 상제, 예수, 홍수전, 홍수전의 아들 홍귀천복외에 홍수전의 또 다른 두 아들인 홍천광, 홍천명, 그리고 양수청과 소조귀를 가리킨다.

그리고 1852년의 <<천조서(天條書)>>에서는 "상제를 천성부로 찬미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찬미하며, 성신풍을 성령으로 찬미하며, 삼위일체의 진신을 찬미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성신풍""성령"은 동왕 양수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로써 그의 상제교내에서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홍수전도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동왕은 상제의 아끼는 아들이다. 천형 및 짐과 같은 어미의 소생이다. 셋은 모두 일맥의 친인이다"

그의 노력으로 양수청은 죽기 전에 "삼수일주(三帥一主)"의 지위에 오르는데, 바로 화내수(禾乃帥), 권위사, 좌보정군사(左輔正軍師), 속병주를 가리킨다.

이로써 볼 때, 양수청이 스스로 '만세'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만만세'인 홍수전을 몰아낼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런 야심이 있었다면, 양수청은 자신이 장악한 권력과 '천부'의 말을 이용하여, 직접 홍수전을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간편했다.

당시 '천경'의 실제상황을 보면, 군권을 장악한 동왕이 천왕을 죽이는 것은 쉬웠겠지만, 구중궁궐에 들어앉은 천왕이 동왕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양수청의 개인적인 욕심이 팽창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천왕을 시해하려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상징이자 부호였다. 그를 죽여 버린다면, 전체 태평천국의 이론기초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주 총명했던 양수청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11. 태평천국과 영국군함

: 살소(薩蘇)

 

승상은 춘하추동으로 나뉘고, 부부는 같이 잘 수 없으며, 홍수전의 정식 후비는 팔십여명이다...태평천국의 혁명을 교육받을 때면 이런 역사라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태평천국은 당시 서양인들과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태평군내에는 금발벽안의 '양장(洋將)"이 적지 않았다. 청나라의 저명한 고용군인 "양창대"의 지휘관인 Ward가 죽은 후, 두 번째 지휘관인 H. A. Burgevine는 부대를 이끌고 태평군에 투항했다.

태평군에 참가한 "양장"은 대부분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모험가였다. 태평군이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홍수전이 의거 시에 '배상제교'의 명의로 하였으므로, 태평군은 외국인을 자신들의 '양형제'라고 여겨 아주 열정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태평군내에 일본인은 전혀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중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양인들은 정말 태평천국이 중국에 기독교 국가를 건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이 정권과 접촉해보고 나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18546, 영국의 군함 향미사호(響尾蛇號)와 명하호(冥河號)는 태평천국이 지배하는 난징에 도착한다. 그들은 세상과 단절된 태평천국정권과 모종의 연락을 하거나 혹은 그 허실을 탐색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태평천국은 일반적으로 서양형제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그러나 대포를 장착하고 온 이들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광동광서에서 왔기 때문에, 영국인이 호문을 포격하고 아편을 강제 판매한 것에 대하여 매우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상륙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외교적인 측면에서 태평천국은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집정하고 있던 동왕 양수청은 여전히 이들을 서양형제로 보고 서면으로 교류했다. 그러나 그가 서신에서 제기한 일부 내용은 방문한 향미사호의 선장인 Arther Mellersh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영국해군대장이 되는 Mellersh의 일기를 보면 양수청이 제기한 문제를 하나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Does God write verse(하나님이 시를 쓰는가?)"였다.

양수청은 태평천국에서 일류의 외교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서신을 보고 영국인들은 철저히 깨닫는다. 상대방은 소위 기독교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쌍방은 거의 대화의 기초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방문이후, 영국 측에서는 청정부와 태평천국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실제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청정부에 기울어졌다는 말이다)

쌍방 간의 서신대화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태평천국으로 특수사명을 집행하기 위하여 온 영국의 향미사호는 세계해군사상 기념할만한 유명군함중 하나이다.

난징을 방문한 향미사호는 이 이름으로 명명된 네 번째 영국해군군함이었다. 이 배는 1843년에 항해를 시작했고, 배수량은 890톤이며, 길이는 56미터, 220마력이며, 12문의 대표를 장착했고, 항속은 10노트이다. 만일 성능과 규모로 본다면 이 배는 평범하다. 범선시대에도 그보다 훨씬 큰 군함을 영국인들은 만들어냈다.

향미사호가 유명해진 것은 하나의 시합 때문이다.

18453, 런던교외의 템즈강 입구에서, 영국해군부는 두 척의 군함 "향미사호""알리크토"호 간에 재미있는 경기를 벌인다. 동력이 비슷한 두 척의 선박은 선미를 서로 묶고, 신호를 받은 후 전속력으로 항해했다. 비록 처음에는 쌍방이 비슷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전자가 우세를 보였다. 후자가 선미를 앞으로 하고 약 2.5노트의 속도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영국인들이 참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람이라면 신체를 단련하지만, 군함도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기실 이번 경기의 배후는 선박설계상의 기술혁명이 있었다.

최초의 윤선은 오늘 날과 많이 달랐다. 특히 그들의 추진 장치가 그렇다. 최초의 윤선인 클라이먼트호는 두 줄의 증기기관이 추진하는 노였다. 사람들이 젓는 배를 모방하여 전진한 것이다. 진정 실용적인 초기 윤선은 명륜식 추진기를 사용했다.

명륜은 두 개의 거대한 수차모양의 회전바퀴이다. 일반적으로 배의 양측에 장착한다(어떤 경우는 선미에 장착하기도 한다). 보일러에 불을 붙여, 명륜이 구른다. 물을 저어 배에 추진력을 주는 것이다.

이런 추진방식은 중국의 송나라 때 있었다. 우윤문은 채석대전에서 금나라의 황제 완안량과 싸울 때, 사용한 것이 바로 명륜선이다. 다만 증기기관이 없을 뿐이다.

명륜이 추진하는 배는 외관이 보기 좋다. 운전하기 쉬웠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첫째, 명륜 그 자체가 무게가 많이 나간다. 추진효율이 높지 않다. 둘째, 명륜은 체적이 크다. 현의 측면의 위치가 분명하다. 군함의 동력장치로서는 쉽게 파괴될 수 있다. 셋째, 명륜선은 해상상황이 열악한 지역에서는 사용하기 적절하지 않다. 자주 한쪽 명륜이 수면에서 공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추진방식으로 명륜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들이 찾은 방법은 나선형 노이다.

나선형노의 원리는 중국의 노()와 관련 있다고 한다(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전문가 중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가보다 하면 된다). 또한 나사못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이것은 외관상 보아서 그럴 듯하다). 어쨌든 계산을 거쳐 이론적으로 명륜에 비하여 우수한 추진방식으로 증명되었다. 향미사호는 바로 영국해군이 나선형 노를 추진방식으로 사용한 군함의 비조중 하나이다. 그것은 1843년에서 1845년의 사이에 서로 다른 나선형노를 바꾸어 장착한 바 있다. 그렇게 하면서 가장 효율적인 설계를 골랐다.

나선형 노는 물속에 숨겨진다. 추진효율도 명륜보다 좋다. 그러나 이를 보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물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특히 영국해군부의 원로들은 그러했다.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 것인가?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시험을 하는 것이다. 소위 사실이 웅변보다 낫다. 당호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쇠구슬을 떨어뜨리고서야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믿었다. 이런 선전효과가 가장 좋은 것이다.

향미사호와 알리크토호의 경기는 이런 하나의 실험이었다. 왜냐하면 양척의 동력과 톤수가 비슷하고, 추진방식만 달랐기 때문이다. 향미사호는 나선형 노를 사용했고, 알리크토호는 명륜을 사용한다.

시험의 결과는 나선형 노가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그 후, 세계의 대다수 해군함정은 나선형노의 추진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군함은 우리가 오늘날 보는 모양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원래 평범하였던 향미사호는 이로 인하여 역사책에 기록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배가 태평천국을 방문한 것과 같은 기괴한 경력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기실, 향미사호를 난징으로 보내어 태평천국을 방문하게 한 것은 기술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 이것은 장강이 내하에 속하고, 향미사호는 일반적으로 바다에서 항해하기로 설계된 군함이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장강의 수계조건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내하를 항해할 수 있는 군함을 보내어 이번 임무를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온당했다. 통상적인 조건하에서 이런 내하의 포함은 명륜으로 추진하는 선박이다. 예를 들어 태평군의 비래복래호(飛來復來號)이다.

비록 추진효율 등 방면에서 명륜선은 나선형노선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의 분야에서는 더 낫다. 그것은 바로 내하(內河)에서이다. 이것은 명륜선은 흘수선이 낮고, 동작이 신축성 있으며, 좌우의 두 개 명륜은 심지어 반대방향으로 회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최소의 회전반경을 확보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나선형노 배는 내하에서 쉽게 나선형 노가 바닥에 닿아서 파괴되는 등의 사고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미국의 미시시피강이든, 일본의 비파호이건, 각국의 내하 내호에는 대량의 명륜선이 항행하고 있다. 열국의 이후 '장강포함'중에도 명륜선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영국인은 왜 향미사호를 보내고 명륜선을 난징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당시의 자료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영국인들은 혹시 돛도 보이지 않고, 노도 보이지 않는 괴이한 배를 몰고 가면 태평천국을 놀라게 해줄 수는 없을까? 태평군이 이런 논리적으로 말도 되지 않는 배를 몰고 가면 분명히 놀라자빠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혹시 잉카인들이 스페인인들에게 그랬듯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신하를 자처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영국인들이 중국의 상황을 너무나 몰랐다고밖에 할 수 없다. 배상제교의 성원으로서, 태평천국의 형제들은 모두 도창불입(刀槍不入), 백일참귀(白日斬鬼)의 연극을 보았다. 운이 좋으면 하나님이 하강한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냥 돛과 노가 없이 움직이는 배? 이런 자잘한 신통력은 동왕 북왕이 콩을 던져서 병사를 만드는 것이나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우는 재주와 비교하면 정말 별 것이 아닌 것이다.

 

 

12. 태평천국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 독차일인(獨此一人)

 

곧 구정이 된다.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어릴 때 TV드라마를 보면 항상 이렇게 묻기를 좋아했다: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요?"

이걸 알고 나서 드라마를 보면 아주 보기 쉬웠다. 중간에 한두 편을 빼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어쨌든 거기서 착한 사람은 착한 일만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일만 저지르기 때문이다. 이 원칙만 알고 나면 드라마의 어느 편부터 보기 시작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이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부친이 불만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이나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생각해보니 맞다. 그래서 그 후에는 그렇게 묻지 않게 되었다.

아쉽게도 이처럼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분은 여전히 역사연구 분야에서 완강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역사연구의 황당한 논리를 주도하고 있다. 중국역사에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만 있다. 이 논리에서 추론해보면,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악에 반대하는 것은 바로 절대적인 선이 된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된다는 것과 유사하다. 소위 태평천국혁명운동의 결론도 이에 다름 아니다.

나는 <<왜 항전사를 학습해야하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대당을 반대한 것이 안사의 난이다, 홍수전(洪秀全)과 양수청(楊秀淸)이 반대한 것은 부패한 대청왕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홍양(洪楊)의 난이 아니라 태평천국혁명운동인 것이다. 청왕조가 나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반대한 것은 좋은 것이다. 이런 황당한 논리는 태평천국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

태평천국의 탄생은 청나라말기 서방자본의 침입으로 인하여 국내 산업에서 대량의 실업인구가 발생한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 재난과 청나라정부의 부실한 구제조치가 겹치면서, 홍양 두 사람이 기회를 틈타서 일어날 수 있었다. 태평천국사건에 관하여, 당시의 사람들 중에는 좋게 말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그에 대해 칭찬이 자자하다. 이런 기괴한 현상은 중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소위 "일체의 역사는 당대사(當代史)"로 보기 때문이다. 좌경사학자들의 사전 속에는 모든 농민반란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태평천국은 당연히 혁명운동이 된다. 그 이치대로라면, 국민당은 자산계급을 대표한다. 홍수전, 양수청에게 좋게 얘기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홍수전이 광동사람이고, 손중산(孫中山)과 같은 고향사람이다. 손중산 본인도 그가 혁명을 이끌게 된 것은 홍수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홍수전 본인은 손중산의 선구자인 것이다. 손중산이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홍수전은 국민당에서 인정을 받는다. 국민당내에서도 홍수전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사에게 아부하는 것일 뿐이다. 부하들이 윗사람의 뜻에 따라 연극을 하는 것이니 엄정한 역사학의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근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하나의 정권을 혁명정권으로 보느냐 아니냐는 먼저 토지문제에 대한 태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의 정권이 정상적인지 아닌지를 따지자면, 그들의 지식인에 대한 태도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두가지 표준을 가지고 소위 태평천국을 한번 검토해보자.

 

태평천국은 중국역사상 첫 번째의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정권이었다.

중국의 현재 중학교과서에서는 태평천국이 중국근대의 첫 번째 농민정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태평천국이 중국역사상 첫 번째 정교합일의 정권이라는 점이다. 공전(空前)일 뿐 아니라 아마도 절후(絶後)일 것이다. ,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태평천국의 건국이론기초는 홍수전의 배상제교(拜上帝敎)와 양수청의 천부하범(天父下凡)이다. 홍수전의 이론은 사람은 모두 상제(上帝)가 필요하고, 상제를 신앙해야 한다. 홍수전은 바로 상제의 아들이다. 모두 그를 옹호해야 한다. 양수청은 바로 천부하범(하느님 아버지가 땅에 내려옴)의 화신이다. 매번 양수청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그는 비정상적인 모양을 가정하면서, 바로 천부가 그의 몸에 붙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명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권은 정권과 교권이 합일되어 있다. 종교는 정권을 위하여 이론기초를 제공하고, 정권은 종교에 현실권력이 보장을 제공한다. 중국역사상, 이런 경우는 없었다. 진시황 때부터, 중국의 정권은 법가학설, 도가학설, 유가학설을 차례로 정치지도사상으로 삼았다. 한 번도 황제본인이 학설창시자인 적은 없었다. 이것이 처음이다.

둘째는, 중국의 봉건정권은 비록 한 가지 정치지도사상에 고정되어 있더라도, 이 하나의 사상은 종교의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다른 사상이 민간에 존재하는 것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유가, 불가, 도가는 항상 병렬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정권은 다른 사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각한 반지성적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경서(經書)를 훼손시키고, 사람들에게 홍수전이 만든 많은 선전소책자만을 읽도록 강요하였다. 지식인들은 자연히 첫 번째 타격대상이 된다. 이런 세뇌행위는 비록 중국 역대왕조 때에도 명시적으로 혹은 암암리에 존재하여 왔지만, 이처럼 직접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진행한 것은 역시 처음이다.

셋째는 모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은 금욕을 주장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임의로 동거할 수 없었고, 남관(男館)과 여관(女館)으로 나누어 거주시켰다. 태평천국의 군대가 도착하는 곳에서 사병들의 강간행위가 발생하면 즉시 참수했다.

그러나 고위층에 대하여 여인은 거의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다. 홍수전 본인은 처가 88명이었다. 함풍제보다 70여명이 더 많았다. 여인만 무제한으로 공급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원 예를 들면 토목공사등도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양수청이 타는 가마는 수교(水轎)이다. 가마의 벽에는 물을 가득 채워서, 여름에 들어가면 아주 시원했다. ()의 사방에는 각종 기진이보를 가득 채웠다. 홍수전이 타는 것은 83명이 드는 가마이다. 함풍제의 가마보다 훨씬 컸다.

홍수전과 부인의 관계도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었다. 노예와 노예주의 관계였다. 그는 이들 노예 같은 부인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500수의 시를 썼다. 그걸 한번 읽어보면 관계를 분명히 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태평천국을 숭상하고 있다. 태평천국이 무슨 남녀평등이어서, 봉건사회보다 진보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다른 것은 말하지 않겠다. 단 한마디만 하겠다. 태평천국에서 남녀는 확실히 평등하게 함께 노예가 되었다. 시골무지렁이가 황제가 되면 사실 모두 이렇다. 안 믿는다고? 현재 졸부가 된 메이라오반(탄광주)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태평천국의 토지제도를 보자. 이 측면에서도 무슨 혁신은 없다. 그들은 이자성의 "틈왕을 맞이하자, 틈왕이 오면 양식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헛소리뿐인 구호와 마찬가지로, <<천조전무제도>>는 그저 이론에 불과하다. 한 번도 현실에서 실행된 적이 없다.

이와 반대로, 진옥성과 이수성은 안휘, 강서 등지에서 대청황조의 세수(稅收)제도와 마찬가지의 제도를 실행했다. 그리고 수도 남경에서 홍수전이 실행한 것은 공유제였다. 사유재산은 허용하지 않았다. 모두 재산을 국가에 바쳐야 하는데, 이 국가는 당연히 홍수전을 말한다.

많은 사학자들이 태평천국의 공유제에 진보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 맞다. 사실 중국은 역사상 계속하여 공유제였다. 천하의 재산은 모두 국가의 것이었다.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이 국가는 당연히 황제를 말한다. 태평천국이 토지제도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혁신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농민반란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운동은 살인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었다. 중국유사이래로, 미친듯한 살육은 농민반란의 필수과목이다. 태평천국의 살육에는 민족갈등도 포함되어 있다. 매번 하나의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그곳의 만주귀족은 반드시 온가족이 참살 당했다.

당연히, 청나라입관초기에 만주족들도 많은 한족을 죽였다. 현재 수십만의 만주족을 죽인다고 해도 그다지 과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많은 한족 지식인들도 배상제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태평천국은 수십 년간 지속되었는데, 중국에서는 3000여만이 죽었다. 항일전쟁과 비슷한 수준의 인명피해를 보였다.

다시 홍수전 본인의 반란 동기를 보자. 그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화가 나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어릴 때 같이 놀던 풍운산(馮雲山)과 함께 여러 곳에서 사람을 끌어 모아, 적합한 시기를 잡아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는 천하백성을 고통에서 구해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좋은 생활을 즐기고 황제노릇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가 남경을 수도로 정한 것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태평천국과 대청왕조간의 14년간의 투쟁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전략적 의미에서, 태평천국은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었다. 전략적인 배치라는 것은 아예 말할 것도 없다. 홍수전이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그저 임봉상과 이개방 두 사람으로 하여금 2만 명을 이끌고 북상하게 하였을 뿐이다.

이게 장난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나중에 청나라의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에 의하여 남경이 겹겹이 포위된다. 홍수전의 수도는 항항 만청의 창끝에 있었다. 천하를 얻으려면, 사회각계각층의 역량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태평천국이 누구의 지지를 받았는가? 증국번, 이홍장은 지식인의 대표이다. 그들은 태평천국의 반대편에 섰다. 와드(Fredrick Townsend Ward, 華爾)와 고든(Charles.George. Gorden, 戈登)은 서양인의 대표인데, 그들도 반대표를 던졌다. 여기에 태평천국은 천하를 얻기도 전에 자기의 내부인들에게 칼을 들이대어 원기를 크게 상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태평천국이 성공했더라면, 중국은 그저 절름발이 황제를 하나 더 두었을 뿐일 것이다. 태평천국의 구조로 보면, 그 정권은 만청정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몇 단계 수준이 떨어진다. 만청정부의 봉건전제는 2000여년의 발전을 거쳐 자연발육형이다. 태평천국의 봉건전제는 시골무지렁이들이 임시로 만든 것이어서 수준이 형편없었다. 태평천국과 만청정부의 투쟁은 개가 개를 서로 물고 물어뜯는 투쟁일 분이다. 쌍방은 모두 좋은 것들이 아니다.

모두 만청정부가 부패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 마디 물어보자. 만청이 그렇게 부패했다면, 태평천국은 왜 그것을 소멸시키지 못했는가? 답은 오직 하나이다: 태평천국은 더욱 부패했다. 역사는 공평하다. 만일 태평천국운동의 성격을 규정하자면, 나는 한마디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난장판

 

 

13. 태평천국의 외교실패

: 정흠남(丁鑫南)

 

청나라 동치(同治)3(1864), 천경의 장강에는 소슬한 한풍이 불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태평천국운동의 실패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러 가지이다. 필자는 천조(天朝, 여기서 '천조'는 태평천국을 가리킨다)의 외교 분야에서의 실책을 3가지 방면에서 분석하고, 천조의 외교사상, 외교노력 및 홍인간(洪仁玕)의 외교주장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검토해보고, 외교실패의 원인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의견을 내고자 한다.

 

1) 일방적인 외교사상

태평천국과 서방열강은 모두 하느님을 신봉하므로, 천조는 처음부터 서양인들을 형제로 보았다. 그들의 침략행동과 실질은 인식해지 못했고, 그들에 대하여 당연히 가져야할 경계심도 가지지 않았다.

1853, 동왕 양수청이 영국공사 Sir George Bonham에 보낸 고유(誥諭)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 해외의 영국국민이 만 리를 멀다않고 와서 우리나라에 귀순하니 천조의 장사병졸은 극력 환영한다. 하늘의 천부 천형도 너희의 충성과 의리를 칭찬할 것이다. 이에 특별히 명을 내리노니: 너희 영국 오랑캐들이 너희 인민을 데리고 자유롭게 출입하며 마음대로 드나들고, 우리 천조의 군대를 도와 요적을 섬멸하든지, 아니면 평상시대로 상업을 경영하든지 하고 싶은대로 하라. 너희들이 우리를 따라 천왕을 잘 모시고, 공을 세워 천부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기를 깊이 바란다."

이 고유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마음대로 드나들게(自由出入, 隨意進退)"하도록 하고, "상업을 경영하는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라(經營商業, 悉聽其便)". 이는 당시의 역사적 여건 하에서 자연경제를 위주로 한 태평천국에게는 아무런 좋은 점이 없었다. 그저 열강의 경제문화 침투에 유리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국가주권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태평천국운동 후기에 접어들면서, 열강은 갈수록 공개적으로 청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병력을 파견하여 태평군 '소탕을 협조'한다. 그러나 천조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서양인들을 그들과 "함께 하느님과 예수를 신봉하고, 하나의 종교를 서로 전하니, 허가손해(虛假損害)의 생각이 없다. "의리와 우의가 돈독한 것이 한 집안과 같다" 열강이 중립을 지켜줄 것을 강력하게 희망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도와줄 것이라는 망상을 품었다. 이는 천조의 지도자들의 광적인 종교 열정로 인하여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이다. 같은 종교를 믿는 열강에 환상을 품었으나 나중의 국세의 발전상황을 보면, 이는 태평천국의 일방적인 바램일 뿐이었다.

 

2) 철저하게 실패한 상해외교

1860년 태평천국과 서방열강은 상해문제를 두고 일련의 외교활동을 벌이는데, 이는 천조의 외교상의 우매와 무지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186071, 태평군이 상해에 접근하는데, 상해는 통상항구의 지위를 지녀서 태평천국이 약간의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천조의 집권자(정치적으로는 홍인간, 군사적으로는 이수성)는 시종 상해를 공격하여 점령할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고, 희망을 평화협상에 걸었다.

관건적인 실수는 협상대상의 선택에 있었다. 태평천국의 집권자들은 두 명의 외국선교사를 협상대상으로 삼는다. 다만, 이 두 사람은 서방 각국의 공식대표자격을 아예 갖추지 못했다. 천조의 지도자들은 그러나 두 선교사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그리고 이수성(李秀成)은 가마를 타고 대군을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상해 성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포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배신기의(背信棄義)"했다고 크게 욕한다. 사실상, 서방각국은 근본적으로 여하한 공식대표자격을 가진 외교관도 태평천국과 여하한 구두 혹은 서면합의를 달성한 바 없고, 천조군대가 상해로 진입하도록 동의한 바 없다. 그리고 유일하게 공식대표자격을 갖춘 각국의 주 상해영사는 태평천국 측과 상해문제에 대하여 여하한 실질적인 협상도 거부했다. 그저 태평천국측은 현실을 직면하고자 하지 않을 뿐이었다.

또 다른 치명적인 착오는 근본적인 것이다. 당시의 국제적인 환경을 보면, 태평천국은 처음부터 상해를 건드리려 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상해는 서방열강의 재중국 이익이 집중된 곳이었고, 상해를 건드리는 것은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상해는 태평천국 자체에 대하여 전략적 가치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상해를 건드린 것은 열강들이 공개적으로 청나라정부를 도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할 수 있도록 하는 핑계를 만들어주었다. 이는 당시 입장이 곤란했던 태평천국에 더욱 불리한 국제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바로 모가기(茅家琦)선생이 말한 바와 같다:

"(태평천국)의 더욱 주요한 잘못은 그들이 청왕조와 외국자본주의침략자간에 장기적으로 존재하고 해결할 수 없었던 모순을 이용하여, 양자가 결탁하여 자신에 반대하는 것을 저지하고, 외국자본주의세력이 오랫동안 중립정책을 집행하도록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점에서 역량을 집중하여 주요적수인 청반동 왕조를 타격했다면, 양쪽에서 적을 맞이하는 국면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해낼 수 없었다면, 이는 스스로 양면에서 적을 맞이하는 처지에 빠지게 만들었고, 이 잘못은 다시 상해진공문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3) 비극인물 - 홍인간

홍인간은 역사가들이 태평천국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선진적인 외교사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얘기되어진다. 확실히, 그는 대외정책의 어떤 분야에서 그의 선배들보다 확실히 어느 정도 진보되었다.

그는 1859년 소위 "유원(柔遠)"정책을 제기한다. "무릇 외국인들은 기예가 정교하고, 국법이 넓고 깊다. 마땅히 먼저 그와 통상을 허락하여야 하나, 다만 한지(旱地)로 마음대로 진입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백성들이 그들을 기이하게 여겨서 뜻밖의 사고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인간이전의 태평천국의 집권자들은 통상의 잠정보류를 주장했다. 여기서 홍인간의 정책은 자유통상이었다. 이는 서방국가의 지지를 쟁취하는데 일정한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그 외에, 그는 또한 "목사 등 기예를 가르치는 사람을 불러들여 우리 백성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 그들이 나라를 위하여 정책을 바치도록 해야 하고, 국법을 비방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 뜻은 바로 비록 자유통상을 허용하기는 하되, 외국인들이 중국내정에 간섭하거나, 중국법률을 위반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진보한 것이다.

중국과 외국의 예절과 관습의 차이문제에 대하여, 홍인간이전의 집권자들은 서방사절이 태평천국을 방문했을 대 천조의 예의를 사용하도록 요구하였었다. 이는 여러 가지 불편을 초래했다. 그러나 홍인간은 "구동존이(求同存異)"의 방침에 기하여, "너희는 가볍게 꿇지 않고, 우리는 가볍게 나가지 않는다. 각자 그 예를 지키는 것이 양쪽이 모두 이익되는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홍인간이 집권한 시간이 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대외주장은 <자정신편>의 약간의 중요내용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의 후기에 효과적으로 관철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비록 태평천국의 외교정책에 일부 개선을 가하지만, 그러나 부족한 점도 여전히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저작 <자정신편>에서 중국을 "중지(中地), 만지(滿地), 몽고지(蒙古地), 전장(前藏), 후장(後藏)"으로 나누고, 통일된 한 나라로 보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의 협소한 민족관을 엿볼 수 있고, 주권관념이 박약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외에, 그는 다른 태평천국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열광에 좌우되었다. 서방 각국은 천조와 신앙이 같아서 '형제지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열강의 침입에 대하여 경계를 늦추었다. 설사 나중에 자신의 '서양형제'에 상처를 깊이 입게 되고, 이로 인하여 외교사상에서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서방열강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고, 태평천국이 실패한 원인을 '서양형제'의 배신기의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상해문제의 외교실패에 대하여, 홍인간도 미룰 수 없는 책임이 있다. 태평천국의 유일한 근대선진외교사상을 지닌 인물로서, 상해사무에서의 표현은 무지하고 멍청했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홍인간은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몇 안 되는 외부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지닌 인물이며, 근대개혁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 정책은 당시의 사회 환경 하에서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가 없었다. 외교 분야에서 확실히 어느 정도 태평천국과 서방국가의 교류를 촉진시켰고, 그의 전기의 외교노력은 실질을 중시하는 것이었지만, 시운이 따르지 않고, 천조 자체의 한계성으로 실패하고 만다. 홍인간은 피살되기 전에 태평천국의 실패원인을 이렇게 썼다: "우리 왕조의 화환의 근원을 말하자면, 서양인들이 요적을 도운 일이다...다만 만일 양인이 적군을 도우지 않았으면, 우리를 장기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다. 다만 요군이 서양인을 매수하여 우리 군을 공격하여, 우리 왕조는 연속하여 성을 빼앗기고 연전연패한다. 우리 군은 막을 수가 없었고, 말일이 도래하게 되었다." 후인들이 보기에, 태평천국실패의 '화환의 근원'을 서양인의 배신으로 돌린 것은 너무 편파적이다. 이는 확실히 태평천국 자신의 내부적 원인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홍인간이 참혹한 대가를 치른 후에 그의 외교사상에 대한 마지막 결론이다.

 

4) 태평천국 외교실패의 원인분석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해보면, 태평천국의 외교는 왜 실패로 끝났을까?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외교사상의 일방성, 외교활동의 우매와 무지 그리고 외교주장의 실제를 고려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외교활동의 여러 가지 실책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태평천국과 서방열강간의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근본모순이다;

첫째, 태평천국은 중국의 독립주권을 견지하였는데, 이는 서방열강의 식민이익과 근본적인 충돌이 존재했다; 둘째, 태평천국은 아편금지입장을 확실히 했는데, 당시 서방은 아편무역에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정상상업무역의 이득을 훨씬 초월했다. 이 두 가지 모순은 태평천국의 정치이익과 경제이익에서 모두 서방열강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는 서방이 태평천국을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태평천국외교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표시하지 않는다. 천조는 서방의 중립을 쟁취할 기회가 있었고, 최소한 청왕조를 돕지 않게 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상 그들은 한번 해낸 적이 있다. 이 가능성이 존재하는 원인은 첫째, 태평천국 자체가 신속히 발전하여, 서방열강이 그들의 역량을 가볍게 볼 수가 없었다. 부득이 그들과 적이 되었을 때의 결과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태평천국의 정치, 경제정책은 청왕조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악의가 없는 외국인들에게 환영하는 태도를 취했다, 서방과 상업무역을 진행하는데 대하여 아주 적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만일 태평천국이 정권탈취에 성공하면, 서방은 아편무역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대외무역관계를 건립할 수 있었다. 이는 장기적 이익에 부합된다.

다만, 바로 태평천국의 영국친구가 말한 것처럼, 만일 태평천국이 단기간 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면, 서방은 그 세력을 꺼리고, 장기적인 상업이익의 필요에 따라, 아마도 중립을 취했을 것이고, 앉아서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마치 나중에 서방이 국민정부북벌을 대하던 태도와 같다). 다만, 태평천국 자체의 내분 및 여러가지 의사결정의 실책으로 인하여 갈수록 승리에 가까워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형세는 오히려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태평천국의 적수인 청왕조는 "차사조초(借師助剿, 군대를 빌려서 소탕에 도움을 받다)"의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서방이 태평천국진압을 도와주는데 대한 조건으로 제시한 교환요구를 받아들인다. 이러헥 되자, 서방의 정책은 전면적으로 청왕조에 기우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은 외교적으로 철저히 실패한 것은 당연히 외교활동의 실패에 원인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발전의 한계성으로 열강들이 철저히 실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4. 태평천국의 실패 후 해외로 도망친 사람들

 

태평천국의 난이 실패한 후, 관련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어떤 사람은 해외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해외로 도피했는가? 여기서의 해외는 홍콩, 마카오 및 동남아, 미국등지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곳들은 모두 청나라의 관할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광동에 인접한 홍콩은 태평군 장사들이 도망하기 가장 이상적인 장소이며 교두보이다. 일찍이 천경에서 내분이 있을 때부터 문무에 능했던 뇌한영(賴漢英)은 내분을 보고, 태평천국에 신뢰를 잃고, 남경을 빠져나와 홍콩에서 여러 해 동안 거주하다가 20세기 초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약간 전설적인 색채를 띄고 있어 다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 천경함락 후, 확실히 일부 태평천국의 인물들이 홍콩으로 간 것은 사실이다. 현재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일찍이 수군사령관을 지냈던 삼왕(森王) 후유전(侯裕田)이 있다. 그는 몰래 무기와 양식을 태평군의 장주의 잔당들에게 제공하였고, 겉으로는 금성태점이라는 가게를 열었다. 나중에 그는 홍콩에 숨은 다른 태평군의 인물과 함께 광주로 인도되어 살해당하였다.

간우문(簡又文)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홍콩에 피난한 자들 중에는 홍수전의 조카 세 명이 있다고 한다. 낭왕(琅王) 홍괴원(洪魁元)은 칼을 가는 일을 하며 스스로를 숨겼고, 나중에 경찰이 되는 홍소윤(洪紹允)은 처음에는 물고기를 파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구룡에 광제당 약국을 차린다. 영왕(瑛王) 홍춘괴(洪春魁)는 홍콩으로 도망친 후 이름을 홍화(洪和)로 바꾸고, 쿠바로 가서 새똥을 파는 노동자가 된다. 나중에 홍콩에 돌아와서 의사로 지내고, 나중에 신해혁명 때 "대명순천국(大明順天國)"을 건립하는 홍전복(洪全福)이 바로 그이다.

상술한 것은 이름 있는 지도자급의 인물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해외로 도망친 사람들에 대하여는 문자기록이나 구두전설이 점차 사라져서 그들의 사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적지 않은 태평군의 구성원들은 미국으로 갔다. 이것은 미국이 서부를 개간할 때 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한 것과 관련된다. 19세기중엽에 유럽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수 천 수 만의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영국의 소령으로 "상승군"을 이끌었던 고든은 소주를 함락시킨 후, 태평군의 포로를 해외 영국식민지인 기아나로 보내 노동자로 삼았다. 그렇다면, 태평군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누가 있는가? 홍인(洪仁)의 장남이면서 영어로 회화가 가능한 홍규원(洪葵元)은 천경이 함락된 후 광동 부해로 도망쳐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노동자가 되고 나중에 남미의 영국령 기아나까지 간다. 광동 화현기념관의 조사에 따르면, 홍인의 후예로 미국에 확실히 그런 사람이 있다. 남미주 서인도제도의 마티니크로 간 태평천국의 장령 중에는 국민당 원로인 진우인(陳友仁)의 부친도 있었다.

주의할 것은, 근대중국은 이미 봉쇄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태평군의 장령들은 실패 후에 대륙에서 살 수 없게 되자, 해외로 도망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각종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제약으로 여기에서 든 각종 주장들은 그저 언어일 뿐이고, 또한 오랜 시간이 흘러서 후세들이 조사하거나 회고한 것이거나 억측, 추리, 편집한 것도 있을 것이다. 왜 태평군 장사들의 해외도망에 대하여 이렇게 여러 가지의 얘기가 전해지는 것일까? 홍콩이나 해외로 도망친 태평군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15. 태평천국의 천경보위전

: 도단방(陶短房)

 

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한 것은 계호(癸好, 癸丑. 태평천국은 ''''로 고쳤다) 3년 이월 십오일(청나라 함풍 3텬 이월 십일일, 1863320)의 일이다. 남경은 천경으로 이름이 고쳐져서 태평천국의 수도가 되는 것은 9일후의 일이다. 비록 천경이 태평천국의 수도로 정해진 후 2일 만에 광서에서 남경까지 추격해온 흠차대신 향영(向榮)의 부대가 성 아래에 도착하고, 성의 동쪽 효령 위에 강남대영(江南大營)을 세운다. 그후 1860녀까지, 천경성의 대부분시간은 청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1853331일부터 1856620일까지, 1857716일부터 186056일까지). 다만 청군은 시종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임술(壬戌) 12년 사월초오일(청함풍 12420, 1852518) 상군의 부사령관, 청나라 강소포정사 증국전이 안휘 서량산에서 양자강을 건너 남진한다. 신속히 당도, 무호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사월 십삼일 강녕 판교, 말릉관, 삼차하를 취한다. 417, 상군 수군장령,시랑 팽옥린은 천경성 서강변두관, 강심주, 포포주를 점령한다. 전선이 천경성 밖 진회하 입구에 정박하고, 호성하의 입강처를 봉쇄한다. 증국전 부대는 천경성내문외의 우화대에 군영을 설치한다. 천경성은 다시 청군에 포위되기 시작한다.

이번에 증국전 부대의 진군은 처음에 청군측도 좋게 보지 않았다. 신중한 증국번은 처음에 여러번 증국전에게 명령을 내려 잠시 철군하라고 하였다. 여러 청군장수들이 보기에, 천경성의 방어는 견고했고, 홍수전은 군사에 능했고, 강소남부, 절강북부는 완전히 태평천국의 천하였다. 이수성, 이세현, 양포청 등 100만 대군이라고 칭하는 태평군이 있었다. 증국전은 고군(孤軍)으로 깊이 쳐들어갔으므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불구하고 온전하게 빠져나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도박을 건 상군이 천경성 바깥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마침내 갑자 146월 초육일(청 동치3616, 1864719) 마침내 천경을 함락시켰다.

그렇다면, "불파지성(不破之城)"이라고 불리던 천경이 어떻게 함락된 것일까?

"고주(孤注)"는 외롭지 않았다.

승리자인 상군은 태평전투이후 요란스럽게 비석을 세우고 책을 쓰는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증국전의 사적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그가 고군으로 깊이 쳐들어간 힘들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처음으로 천경성 아래까지 온 고군은 겉으로 보기에 확실히 '외로워' 보였다. 증국전 부대는 원래 40개 영을 지휘했고, 만여 명의 육군이 있었다. 그러나 병력을 나누는 바람이 진정 천경성의 아래에 도착한 것은 단지 15개 영 7500명이었다. 겨우 7500명으로 안으로는 수만이라고 얘기하는 천경의 수비군과 싸우면서, 동시에 밖으로는 백만이라는 강소절강의 태평군과 맞서야 했다. 확실히 단박(單薄)해 보였다.

다만 실제로 이 고군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이 해 이월, 증국번은 천경성에 대한 전략적 대포위망을 배치하기 시작한다. 북에서 남으로 모두 8로의 대군을 배치한다. 강북 이속의 부대는 영주(부양)을 경략하고, 다륭아부대는 여주로 진군하여 강북을 제어하고, 강남 포초 부대는 강서에서 안휘남부로 들어간다, 좌종당 부대는 구주에서 절강남부로 들어갔다, 이홍장 부대인 회군은 배를 타고 상해로 간 후, 현지의 청군과 합쳐서 양인이 훈련, 지휘하는 서양총 부대(나중의 상승군)과 합쳐서 강소남부로 반격해 들어갔다. 장운란 부대는 안휘남부 무원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전략총예비부대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증국번이 직접 지휘하고 배치한 병력이다. 각성의 총독, 순무, 제진이 통수하는 청군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들 청군들중에도 전투력이 약하지 않은 부대가 있었다(예를 들어 강북의 원갑삼, 이세충, 도흥아 부대, 진강의 풍자재 부대등), 양강총독, 흠차대신으로서 증국번은 마찬가지로 이들 부대에 대한 지휘권이 있었다. 이 몇 로의 청군은 다륭아 부대가 섬서에서 변란이 돌연 발생하여 조정에 의해 긴급하게 돌아간 외에, 나머지 각 부대는 모두 기한에 맞추어 도착했고, 전략적으로 천경에 대한 원거리 대포위망을 형성하고, 강소, 절강, 안휘 각지의 태평군을 견제했다.

전술 각도에서도, 증국전의 형세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엉망이지 않았다.

사실상 천경성 아래에 도착한 것은 증국번 8로진군중 3로였다. 증국전 부대의 선봉 15개 영은 단지 그중의 1로이다. 이외에 증정간(曾貞干)의 부대 5000, 팽옥린의 수군 84000명이 있어 총병력이 16500명에 달한다. 천경성의 수비군은 비록 수만이라고 하지만, 많은 수가 비전투요원이고, 전투할 수 있는 자는 일만 명가량이었다. 상군의 병력과 실제로 비슷했다. 그러나 상군은 수군의 강점이 있었고, 강하수도를 장악했다. 식량운반선을 군영까지 운송하는 외에, 병력, 양식, 군수물자의 보급도 아주 편리했다. 실제로 이미 반객위주(反客爲主)의 유리한 형세를 점거한 것이다.

 

우화대(雨花臺) 전투

임술 124월말, 홍수전은 연속 3()의 조서를 내린다. 상해교외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던 이수성에게 돌아와서 지원하라고 명한다. 5,6월간, 이수성은 두 번 소주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천경의 포위망을 풀기 위한 배치를 시작한다. 구월 초이틀(함풍 12년 윤팔월 이십사일, 18621013, 태평군은 증국번부대의 진영을 공격한다. 1125, 상군을 44일간 포위 공격했지만, 포위망을 푸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이 전투에서 태평군은 14명의 왕을 집중시킨다(충왕 이수성, 시왕 이세현, 호왕 진곤서, 납왕 곡영관, 모왕 담소광, 청왕 진병문, 효왕 호정문, 내왕 육순덕, 수왕 범여증, 양왕 유관방, 봉왕 고륭현, 도왕 황문금, 상왕 진반무, 보왕 막사규, 항왕 당정재). 병력은 증국번이 조정에 보고한 과장된 수치로는 60만이다. 다만 증씨 형제가 사적으로 주고받은 서신에 따르면 "십여만"이다. 당시 태평군이 주장하는 수치이다. 태평군은 원래 "이천오백을 만이라 칭하는" 4배 통계 관례가 있다. 이런 관례에 따라 계산하면 실제 포위망을 풀기 위한 전투에 투이된 태평군은 최대한 6만여 명이다. 그리고 이세현, 진곤서, 황문금의 부대는 모두 포위망의 바깥에서 견제작전을 벌였으므로, 실제 우화대전투에 투입한 병력은 더욱 적었다. 당연히, 이번 전투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허수'가 관례처럼 그렇게 크지 않았을 수는 있다. 이뿐 아니라, 이들 태평군은 여러 계통에 나뉘어 속해 있고, 이수성은 그저 큰 방향에서만 지휘를 했고, 마음대로 모든 참전부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뿐 아니라, 태평군의 군수물자조달시스템은 각자 따로 해결했다. 강소, 절강, 안휘 각지의 태평군은 왕왕 원래의 주둔지에서 원거리 보급을 했다. 내선작전처럼 보이지만, 내선작전의 편리는 전혀 누리지 못했다.

태평군의 장비는 서면으로 보기에는 비교적 좋다. 증국전은 일찍이 증국번에게 서신을 보내어 태평군이 강소, 절강에서 얻은 모든 서양총은 "모조리 이곳에 있다" 안경전투의 태평군보다 '열배, 백배'이다. 그리고 '서양 개화 대포'등 장비가 있었다. 다만 이들 무기의 출처는 복잡했다. 대량의 밀수한 서양총, 서양대포는 짝퉁제품 혹은 열악한 제품이 있었다. 서양 장교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부인에 대한 위협이 적에 대한 것보다 더욱 컸다." 그리고 태평군은 군수에서 능력이 부족했다. 배치된 화약의 초석함량이 크고 유황함량이 적었다. 이는 심각하게 총포의 사거리, 위력과 정확도에 영향을 미쳤다.

상군은 요지를 점거하고, 물자보충에 편리했다. 개전 때 이미 이만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개전 후에는 계속하여 양주 도흥아 부대 52500, 무호 왕가승 부대 상군 84000, 그리고 증국번이 직접 안경에서 보낸 400명이 있어, 총병력이 3만 명이상이었다. 그리고 모든 병력은 장강변에서 삼차하구 그리고 우화대까지 일렬로 늘어서 관건인 보급라인을 장악했다. 강대한 수군은 장강, 진회하를 점거하여 우세를 유지했고, 태평군이 상군의 보급선을 포위공격하거나 절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기장비방면에서 상군은 비교적 약했다. 화기는 많은 것이 구식이고 서양총은 비교적 적었다. 화포도 구식 국산동철포였다, 그리고 개화탄을 발사하는 서양식 야전포, 그리고 성벽을 훼손할 능력이 있는 서양의 대구경 캐논포, 포탄은 없었다. 다만, 상군의 장비는 제식화되었고, 완벽한 물자조달체계를 갖추었다. 같은 총포라고 상군의 표준화된 화약으로 총탄, 포탄을 발사하여, 보다 멀리 쏘고, 보다 정확하게 쏘았다. 태평군은 비록 "서양총, 서양포가 나방처럼 모였지만" 실제 살상력은 보는 것처럼 무섭지 않았다.

44일에 걸친 전투과정에서 태평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동로를 공격하는 전법을 쓴다. 여러 번 상군의 제1차 방어진지를 함락시켰다. 전술적으로 참호약진, 지도(地道)공격, 탄막전이엄호 저자세 포복전진 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선한 전법을 써서 이러한 효과를 거둔다.

상군은 지리우세, 물자조달, 수군의 3대우세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후로 여러 겹으로 배치된 공세를 구축한다. 그리고 수비를 위주로 하여, 기회를 보아 반격하는 온건한 전법을 채택한다. 점차 태평군의 전투력과 예기를 소모시켜 버린다.

이 전투에서 상군의 전사, 전상자는 3,5천명에 달한다. 게다가 전염병이 돌아서, 가장 힘든 때는 '환자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원기를 크게 상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보급라인이 잘 유지되어, 군수물자가 적시에 도착하고, 새로운 병력이 계속 충원되었다. 전투력은 금방 회복된다. 태평군은 공격 측이므로 사상자는 상군보다 훨씬 많았다. 다만 전투 자체로 말하자면 패전하지는 않았다. 지구전을 펼칠 수 없었던 주요원인은 지휘계통이 문란하고, 군대구성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전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참전군대의 후방은 각로 청군에 의해 포위하거나 잠력되었다. 나머지 각로는 물자조달압력에 힘들어 하고 있어, 장기간 원정을 지원하기는 어려웠다.

 

우화대를 점령하고, 성외 거점을 장악하다.

우화대 전투 후, 태평천국방면에서는 엄중한 전략적인 의견차이가 나타난다. 의견차이의 쌍방은 천왕 홍수전과 총사령관 이수성이다.

기실, 적의 상황이 심각하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하여는 쌍방의 분석이 일치했다. 홍수전과 이수성은 모두 인정했다. 태평군의 군수조달능력이 안되어 대병력을 천경선 밖에서 장기간 전투를 벌일 수가 없다고. 그리고 상군은 이미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여 속전속결로 궤멸시킬 수 없다고, 다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에 대하여 쌍방의 의견 차이는 아주 컸다.

홍수전의 주장은 "진북공남(進北攻南)"이었다. 즉 이수성의 전군이 도강하여 북상하고, 양회(兩淮)의 사이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양초를 수집하여 당시 한중과 하남, 안휘 변방 일대에서 활동하던 태평군 진득재, 마융화 등의 부대와 회합하여 함께 남하하여 포위망을 뚫은 것이었다. 이수성은 그러나 다르게 주장한다. 강소남부, 절강북부의 태평군을 원래의 주둔지로 돌려보내고, 먼저 침범한 이홍장, 좌종당 등 각로 청군을 격패시키고. 다시 병력을 되돌려 천경성 아래로 오며, 천경방면에서는 계속 성벽과 성 밖의 거점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전략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진북공남"은 청나라조정의 핵심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조정은 반드시 증국번에게 북방을 신경 쓰도록 명령할 것이다. 효과적으로 천병성 아래의 병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 그리고 진, 마 두 부대의 병력은 웅후하고, 전투력도 약하지 않다. 일단 회합하면 실력이 크게 늘 것이다. 다만 이 전략의 최대 폐단은 당시 양회가 염란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일찌감치 적지천리(赤地千里)이고, 현지 지방 관리는 견벽청야의 경험이 풍부하여, 태평군의 대병력은 작전시 식량위기에 부닥친다. "근본을 돌아본다"는 것은 강소, 절강기지가 지나치게 일찍 침색되는 것을 말을 수 있고, 태평천국이 비교적 장기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만 병력분산은 쉽지만, 다시 합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우화대전투이전에 천왕은 엄격히 조서를 내린 바 있다. 이수성이 열심히 노력하여, 각로인마를 모으는데 4개월을 시간을 들였다. 이때 강소, 절강의 상황은 이미 심각하여 더욱 어려웠다. 두 가지를 비교 형량해보면, '진북공남'의 리스크는 확실히 더욱 크다. 그리고 홍수전과 이수성이 싸운 결과 태평군은 이 리스크가 더욱 큰 방안을 선택하게 된다.

'진북공남'1862년 초부터, 다음해 9월말에 끝나기까지 태평군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배고픔과 추위로 외부에서 전투하는 과정에서 수만의 정예병사만 잃는다. 이로 인하여 천경성 밖의 상군에 대규모 공격전투를 벌일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홍수전이든 이수성이든 모두 천경성 수비군의 방어능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계개(癸開, , 癸亥, 태평천국은 '''개로 고쳤다) 13년 오월 초하루 날 (청 동치2년 사월 이십칠일, 1863613), 증국전 부대의 한장(悍將) 소부사(蕭浮泗), 이신전(李臣典)등은 기병으로 우화대 요새를 기습한다. 요새를 수비하는 장수는 홍수전의 조카인 대왕(對王) 홍춘원(洪春元)이었다. 홍춘원은 홍씨 친족 중에서 전투를 잘하는 편에 속했고, 일찌기 전공을 세운 바 있다. 다만 그는 강북에서 막 전근해오고, 소홀히 하는 바람에 우화대는 손쉽게 격파된다. 상군은 이 전투에서 겨우 1명이 죽었을 뿐이다. 상군은 승리를 틈타 확장한다. 우화대 이북의 여러 군영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문(취보문, 지금의 중화문) 바깥까지 밀고 들어간다. 천경성과는 장간교(長干橋)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우화대의 함락은 홍수전과 성내의 태평군을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그들은 아직 강북에 있는 이수성 부대에게 돌아와서 지원해달라고 명령한다. 그 결과 이수성 부대는 불어난 강물에 막혀서, 손실이 아주 컸다. 상군의 수군 양악빈 부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월 십팔일(청 동치2년 오월 십오일, 1863630) 천경성의 북쪽, 대강의 위에 있는 가장 중요한 장벽 구보주(九洑洲)를 점령한다. 그 이전에 하관(下關), 연자기(燕子磯)등도 차례로 함락된다. 이제 태평군의 장강방어선은 중관난강기의 몇 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았고, 천경성은 거의 완전하게 포위된다.

이때 천경성 밖에는 태평군이 여전히 동남으로 말릉관에서 영화진까지, 서남의 강동교 박망진등의 거점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로가 단절되어, 보급이 불편했고, 성내의 군수물자도 이미 고갈되었다. 상군은 수로를 장악한 후, 성의 남쪽 육로의 태평군 거점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오월 이십일일 장간교를 점령하고 남문밖에 군영을 설치한다. 칠월 삼십일일과 팔월 십이일, 전후로 천경 동남, 서남의 쇄월상방교, 강동교를 점령한다. 구월, 상군의 지원군 주홍장등이 도착한다. 여닝어 박망진, 상방문, 고교문, 쌍교문, 말릉관, 중화교를 점령한다. 10월 초나흘(청 동치2년 십월 초육일, 18631116) 순화, 해계, 융도, 호숙, 삼차진도 상군에 점령당한다. 9일후 상군은 효릉위에 진주한다. 이때부터 태평문 밖의 천보성, 지보성이 태평군의 수중에 있고, 성북의 신책, 금천 두 문이 중관과 현무호의 엄호로 청군이 완전히 봉쇄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상군은 이미 천경 11개 성문의 아래까지 밀고 들어왔다.

 

천경성의 고주(孤注)

이때 천경성은 하나의 고성(孤城)이 되어 버린다.

"상승군"의 도움 하에 서양 총과 서양대포를 장비한 이홍장 부대의 회군(淮軍)이 강소남부를 소탕하기 시작한다. 좌종당 부대의 상군(湘軍)이 절강에서 계속 승리한다. 소주, 무석, 단양, 항주, 상주, 가흥 등의 성이 1863년 말에서 1864년 초에 차례로 함락된다. 천경성 바깥의 백리 범위 내에 자금산 제3봉의 천보성(天保城)과 태평문밖 용박자의 지보성(地保城) 외에 태평군의 요새는 이미 없어졌다.

강소절강 기지가 차례로 함락된 후에도, 태평군의 이수성, 이세현, 양보청, 황문금등 부대는 강남에 여전히 수십만이 남아 있었다. 다만 호주(湖州), 광덕(廣德)의 두 거점을 제외하고, 이미 이정도 수량의 군대와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이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사기가 저하된 장병들을 일찌감치 적의 천지로 변한 천경의 포위를 풀도록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이수성은 그저 혼자서 천경성으로 들어가서 성의 방어를 지휘하고, 이세현은 강남 태평군 주력을 이끌고 강서로 가서 양식을 취하고, 황문금등의 부대를 남겨서 호주, 광덕을 지키게 하는 외에 천경을 호응할 힘은 없었다. 강북에는 태평군 진득재, 마융화 등의 부대에 의탁해온 염군(捻軍)이 있어 말로는 이십만이라고 하였다. 한중에서 남하하여 천경을 구하러 온다. 그러나 몇 로의 청군이 호북, 하남, 안휘의 접경지역에서 저지하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상, 당시의 전장형세로 보면, 이들 태평군이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회전의 결과는 우화대의 전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터였다.

태평군 수성병력은 만여 명이라고 하였지만, 이때 싸울 수 있는 자는 3,4천에 불과했다. 십일월 초팔일(청 동치2년 십일월 초십일, 18631220) 이수성이 천경으로 돌아온 후 성내의 총사령관이 된다.

이때, 증국전 부대의 상군은 이미 50000명으로 증원되었다. 군수물자의 조달은 더욱 잘 이루어졌고, 장비도 대거 개선된다. 그리고 성벽아래까지 진격해 들어가서 성을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된다.

계개 13년 십일월 초삼일(청 동치2년 십일월 초오일, 18631215), 상군은 제1차로 천경 성벽을 공격한다. 혈지공성 폭파법으로, 성 북쪽 신책문 부근의 성벽 십여 장을 무너뜨린다. 상군 선봉은 용감하게 성에 오르나, 태평군에 격퇴된다. 사상이 참중했다.

갑자14년 정월 십칠일(청 동치3년 정월 이십일일, 1864228), 이수성은 결사대를 이끌고 조양문을 돌파하여 효릉위의 상군대영을 기습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상군 주홍장, 무명랑 부대는 이 기회를 틈타 천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십일, 상군은 신책문, 금천문의 두 문에 진주하는 외에, 이제 천경성 13개의 성문은 모조리 둘러싸인다. 천경성은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상군은 천경성을 여러 번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방향을 바꾸어 봉쇄하면서 수로를 중점적으로 봉쇄한다. 상하의 민선(民船)은 삼일에 1번 통행하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상군수군이 포선으로 호송한다; 녹영(綠營) 계통의 홍단선(紅單船)은 양식을 밀수하여 천경성내에 공급하는 주요경로였다. 상군은 각종 수단을 써서, 홍단선을 천경의 강에서 몰아낸다. 이제 또 다른 밀수통로인 외국상선과 전함이 있지만, 상군이 저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고가로 매수하는 방법을 서서 미리 상, 하류의 외국선박의 양식을 모조리 사버린다. 이런 방법은 효과를 발휘한다. 원래 양식이 부족했던 천경성내는 곤경에 빠진다. 홍수전은 이수성의 '성을 버리고 떠나자'는 포위망돌파건의를 거절하고, 전체 성에 "첨로(甛露, 즉 들풀)"를 먹어서 배고픔을 이기자고 명령하며, 그 스스로 시행한다. 그러나 들풀을 먹다보니 오공중독(蜈蚣中毒. 지네중독)으로 병이 위급해진다. 사월 이십일(청동치3년 사월 이십팔일, 186462) 홍수전이 병사한다.

이십사일,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이 즉위한다. 그리고 성의 방어계통을 개조하여, 여섯 주수(主帥)가 전체 성의 방어를 책임진다(대주수 이수성, 부주수 기왕 황금애, 동방주수 사왕 오여효, 서방주수 대왕 황정충, 남방주수 유봉량, 북방주수 양왕 길경원).

오월 21(청 동치3년 오월 삼십일, 186473), 천경성 밖의 최후요새 지보성이 상군에 함락 당한다. 이때부터 중관(中關)외에 천경성 밖에는 이미 태평군거점이 없어진다. 상군은 밤낮으로 동,북 양쪽에서 지도(地道)를 파고, 여러 곳에 폭약을 터트려 성벽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중 금천문 일대의 유연첩 부대는 3개를 판다. 신책문 이북의 장시일부대는 2개를 팠고, 신책문 정면의 주남규 부대는 6개나 팠다.

태평군의 수비 장수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노장들이다.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 그들은 옹청(甕聽), 월성(月城) 축성, 지도(地道)를 파는 방법등을 채용하여 대부분의 지도를 이런 방법으로 파괴했다. 오월 십칠일, 신책문의 지도 1개가 폭발하나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6월 초사일, 신책문 부근의 또 다른 지도가 성벽에 구멍을 하나 낸다, 다믄 구멍으로 쳐들어가던 청군결사대는 수비군의 화약을 맞아 모조리 타죽는다. 상군은 연일 맹공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사상자가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명장 진만승, 왕소의, 곽붕정, 웅조거, 웅조사, 장지무, 주역재, 주이승 등이 모조리 전사한다.

그러나 지보성의 함락은 국면을 더욱 악화시켰다. 지보상의 지세가 건너편의 남경성벽보다 높아서, 청군이 지보상 위에 대포를 걸어놓고 밤낮으로 성안을 포격했다. 그래서 수비군은 성벽 위에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벽에 가까이 다가와서 지도를 파는 청군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육월 초오일 밤, 사태가 위급해졌다는 것을 안 이수성이 결사대 수백명을 뽑아서, 태펑문, 조양문의 두 문으로 치고 들어가서, 상군지도를 파괴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육월 초육일(청 동치36월 십육일, 1864719), 태평문 밖의 용발자지도에서 폭약이 폭발한다. 상군이 물밀듯이 몰려 들어간다. 태평군은 비록 용감하게 응전했지만, 이미 강노지말(强弩之末)이다. 전투가 저녁에 이르자, 각 성문은 모두 상군에 점령된다. 성 밖의 중관도 함락된다. 이수성은 수천 명을 이끌고 유천왕을 옹호하여, 상군이 무너뜨린 용발자 성벽 구명으로 변장하고 포위망을 돌파한다. 이수성은 포위망 돌파 후 좋은 말을 유천왕에게 넘겨주어 일행에서 떨어지게 된다. 방산에서 포로가 된 후 증국번에게 처형당한다. 유천왕은 광덕까지 도망쳤고, 나중에 홍인간, 황문금 부대 등을 따라 강서로 들어간다. 강서의 석성에서 패배하여 죽는다.

 

공견지난(攻堅之難)

상군의 천경공격전투는 전후로 22개월이 걸렸다. 사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성내의 수비군을 전멸시키지도 못했다. 유천왕이라는 이 '적의 괴수'가 포위망을 돌파하도록 했다. 견고한 성을 공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어려웠던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태평군 방면에서 성안의 병력은 많지 않았다. 주민, 가족들이 3만에 불과했다. 전투병은 최후에 겨우 3,4천에 불과했다. 다만 사람이 적다는 것은 소모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첨로'를 먹는 상황 하에서도 어렵게 오랫동안 버텨낼 수 있었다. 태평군 자신은 성내의 영성에 보리를 심고, '청황 십여 리'에 달한다. 부분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성안에 비록 병력이 많지 않았지만, 명장들이 많고, 총사령관 이수성은 명망이 있었다. 그래서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휘하의 오여효, 길경원, 황금애 등도 모두 한 방면의 재능이 있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싸우니, 청군도 일시에 어쩔 수가 없었다.

둘째, 남경성벽은 '천하제일명성'이라 불리었다. 성 밖의 거점을 처음에는 태평군이 많이 장악하고 있었다. 상군은 성 밖을 청소하는데 많은 시간, 병력을 소모하여 성을 함락시킬 시기를 놓친다.

상군측면에서는 병력이 가장 많을 때 오만에 불과했다. "사십 리 반"이라는 남경성을 포위공격하기에는 확실히 적은 숫자였다.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중형공성포가 없었고, 대량 살상력을 지닌 서양 유탄포도 화력으로 직접 성을 격파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을 들여서 혈지공성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태평군도 마찬가지로 이런 전통적인 공성기술에 능하기 때문에 혈지공성을 방어하는데 기술이 있었다. 그러므로 상군이 여러 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다. 성밖의 거점을 모조리 점거하고, 성 밖의 고지를 점령하고 나서야 겨우 난관을 넘기게 된다.

그러나 상군의 물자조달체계는 완비되었고, 총사령관 증국번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느긋하고 온건하게 싸웠다. 취한 방법은 먼저 전략적인 대포위를 완성하고, 다시 외곽을 소탕하고, 성안의 보급로를 절단한 후, 마지막으로 공성을 하는 전법이었다. 비록 시간은 많이 걸렸고, 대가를 치렀지만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청군이 화력으로 성을 함락시킬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회군의 병력은 이미 1507만 명으로 늘어났고 전부 서양 총으로 무장했으며, 중국국적의 서양인장수 필립 피넬(Philip Pinel, 중국명 畢乃爾)이 사령관으로 배속되어 있고, 캐논포와 유탄포를 갖춘 '필내이 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상군이 오랫동안 공성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청나라조정은 이미 회군 14000명과 필내이 포대를 지원하도록 명하였다. 증국전 등 상군장수는 '이년동안 고생한 것을 남에게 넘길까" 우려해서, 대가를 따지지 않고 강공을 해서, 회군, 포대가 도착하기 전에 천경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것은 청하제일명성 남경이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전투방법에 의해 함락된 경우이다; 1911년 신해혁명 때 강소절강 연합군이 청군이 지키는 남경성을 포위 공격한다. 먼저 천보성을 점령하고 그 후에 천보성에 신식 유탄포를 설치하여 성내의 부귀산, 북극각 등 고지를 포격한다. 독전하던 청군대장 왕유굉이 포탄에 맞아 죽는다. 그리하여 수비 군사들은 투지를 상실하고 성을 열고 도주한다. 신해전투 때부터, 남경성의 공방전은 진정한 현대전쟁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16. 홍수전의 진면목

: 반욱란(潘旭瀾)

 

 

홍수전(洪秀全 1814-1864): 본명은 홍인곤(洪仁坤)이고 아명은 화수(火秀)이며, 광동 화현 사람이다. 부친은 홍경양(洪鏡揚)이고, 집안에 전답과 재산이 조금 있었다.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조건이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홍수전에게는 형이 두 명 있었는데, 그가 유일하게 글을 읽은 사람이었고, 집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7살 때 현지의 사숙에서 글을 배웠고, 14살 때 동생(童生)이 된다. 이후 연속 4번 합계 17년간 수재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그가 계속 낙방하던 때로부터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의 기간 동안 여러번 사숙에서 선생을 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글과 문화적 기초지식을 가르쳤는데, 이는 당시에 상당히 많은 동생들이 종사하던 무고정직업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수입은 보통농민보다 좋을 것도 없었고 ,단지 신분이 다를 뿐이다.

이외에 당시 3명의 광서사람들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원래 무뢰한이고, 매일 도박을 했으며, 여러 번 도망쳤다. 아편과 서양물건을 운송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았다. 광동광서와 호남의 변경을 활보하면서 상인들로부터 커미션을 받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능성이 비교적 큰 것은 18444월 풍운산(馮雲山)"출유천하(出遊天下)"를 한 이후의 일일 것이다. 자주 도박을 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상인들을 위하여 아편, 서양물건을 운송해주고 커미션을 받아서 활동경비로 삼았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홍수전이 나중에 성공하고 난 후에 자신과 극소수 동료들은 절대로 이 같은 자랑스럽지 못한 경력을 말할리가 없다. 배상제회와 태평군의 내에서도 아무도 이를 들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수성공사>>에도 홍수전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몰랐거나, 단지 사숙의 선생만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이 3명의 광동인이 제공한 자료는 사실로 증명되지도 날조로 입증되지도 못하고 있다.

1837, 홍수전이 세 번째로 과거에 낙방한다. 이는 스스로 뜻을 높이 가지고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로서는 정신적 심리적인 타격이 매우 컸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큰 병에 걸린다. "7일간 생과 사를 오가다가 정신이 들고난 후에 '하늘의 말(天話)'을 하게 된다. 이번 병에 대하여, 특히 혼이 하늘을 갔다 온 것에 대하여는 그 자신과 풍운산등이 말한 것이므로 문제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몇 가지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쇼를 해서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 것이다. 둘은 내심으로 아주 복잡하게 고민하고 투쟁했다. 셋은 강렬한 자극이 극도의 정신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넷은 정신은 맑지만 미친 생각과 몽환의 심리활동으로 인한 것이다. 다섯은 어떻게 미신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지를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번 큰 병 이후 성격도 확실히 바뀐다. 그러나 정신병자가 되지는 않는다. 약을 쓰지 않고도 나았고, 다른 사람이 돌봐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1842, 그는 네 번째로 과거에 응시하나 또 낙방한다. 함께 낙방한 친구(혹은 사촌동생) 풍운산은 과거시험에 대한 극도의 불만에서 그리고, 점성술로 봤을 때, 홍수전은 '기이한 상'을 가지고 있고, '왕자의 풍모'가 있었으므로 그를 부추겨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풍운산은 그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병이 들었을 때의 생각이나 환상과 맞는 것이라고 부추겨, 더 이상 과거를 칠 생각을 포기한다.

홍수전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후, 바로 상제가 그를 "태평천왕대도군전(太平天王大道君全)"에 봉했다고 하면서, 그를 때로는 "홍수(洪秀)"로 때로는 "홍전(洪全)"으로 때로는 "홍수전(洪秀全)"으로 부르게 했다.

이때부터 홍인곤, 홍화수는 홍수전으로 개명한다. 이번 개명은 아주 신경을 쓴 것이다. "수전(秀全)"을 나누면 "화내인왕(禾乃人王)"이 되는데, 이는 "(, )가 곧() 사람의() ()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에 급제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는 것이다. 반란은 사람의 왕이 되기 위한 것이다. 왕이 되면, '자신이 과거를 열어 천하의 선비를 뽑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손에 천지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미운 놈들을 다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반란, 보복보다 더 큰 것은 점유와 향유였다. 모든 것을 점유하고, 세상의 보물이 다 내것이 되는 것이다.

홍수전을 교주로 한 배상제회교의 창립은 그 주요한 사상이론을 양아발(梁阿發)이 편저한 통속 포교서 <<권세양언(勸世良言)>>에 두고 있다. 이것은 전면적이거나 계통적인 기독교교의 소개서가 아니라, 수시로 중국 전통 관념을 인용하여 <<성경>>을 인증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언급하는 신학지식 예를 들어, 하느님은 전능하다거나, 예수는 구원한다거나, 하느님이 유일신이라거나, 우상숭배를 금지한다거나, 천당은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고 지옥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등등의 내용은 들어있다.

이는 홍수전과 풍운산에 의하여 빌려 사용되고, 계속 발효했다. 나중에 천왕부 앞에 있던 말도 안되는 세계지도를 보면, 홍수전이 이때 서방과 세계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그는 '서방에서 진리를 찾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바로 <<권세양언>>에 나오는 약간의 신학지식이다.

이를 기초로 계속 그의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고 새로운 내용을 삽입하여, 그를 교주로 한 배상제회를 창립한다. 미신제조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신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이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탈취하여 지상의 천국을 만들고자 한다. 이 과정을 보면, 홍수전이 창조한 배상제회교는 정치적 사교에 가깝다:

첫째, 구세주가 강림하여 전국 및 전 세계를 다스린다고 선전했다. 세계의 모든 사교우두머리는 구세주로 자처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권을 탈취하거나 전국, 전 세계를 통치하는 것을 직접적인 내용으로 선전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니다. 홍수전은 이를 아주 명확하게 핵심내용으로 삼았다. 그는 "천상지존노인이 이미 전 세계의 사람이 나에게 속하도록 명을 내렸다. 세상의 만 가지 보물이 모우 내 것이다" 그는 천부천형의 명을 받아, 강림하여 인신합일(人神合一)"만국독일진주(萬國獨一眞主)'가 되었다고 하였다.

둘째, 세계말세론과 반란관료론을 결합했다. 왜 구세주가 필요한가? 세상에 말일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교의 공통된 논조이다. 18505, 그는 말세론을 구체화하여, 상제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도광30(1850)에 내가 대재앙을 내린 것이다. 신앙이 굳건한 자는 구함을 받을 것이오, 믿지 않는 자는 전염병에 걸릴 것이다. 밭이 있어도 경작하는 자가 없을 것이오, 집이 있어도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그러나, "매일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고, 천재도 비켜갈 것이다" 1851년이 되어, 영안에서 돌파할 때,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수표를 남발한다. 열심히 싸우는 자는 "크면 승상, 점검, 지휘, 장군, 시위를 받고 최소한 군사직을 받으며 대대로 세습하게 될 것이다"

셋째, 언행이 무당화되었고, 군민들에게 무조건 복종을 요구한다. 홍수전은 상제가 그에게 보검, 인수(印綏, 도장끈)와 같은 것을 내렸다고 주장하는데서 시작하여 계속하여 옥새에 자칭 "홍일"이라고 하면서 천하를 비추는 밝은 해이므로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양수청, 소조귀는 그의 미신선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선후로 무당스타일의 천부강림, 천형강림을 시도한다. 이 두 사람이 죽은 후에 홍수전은 아무런 제약도 없이 마음대로 '하늘의 말'을 내릴 수 있었다. 심지어 '하늘은 있으나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도 한다. 그리고 자주 그는 '하늘의 뜻'에 따라 시를 짓고 그것을 아황비단에 써서 깃발로 만들어 건다. 이런 행동은 스스로 신화를 만드는 것이며, 태평군의 군관에 대한 정신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참가자들을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홍수전은 미신선전을 통하여 신도들에게 정신적인 통제를 가하는 외에, 일련의 규칙, 조치를 통하여, 인신, 가족, 재물까지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반란초기에, 그는 입회자들에게 가산을 바치도록 요구했고, 전답가옥을 팔아서, 현금으로 바꾸어 '공고(公庫)'에 입금하도록 하였다. 팔지 못한 가옥은 불태워버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가담하면 전 가족이 가담하여 서로 인질이 되고, 퇴로가 없어서 모두 강물을 건너버린 졸이 되는 것이다(중국 장기에서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가지 못함). 오래지 않아, 지방을 하나 점령할 때마다, '도리를 전파'하는 방법으로 살아있고 도망치지 않은 백성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 태평군에 편입시켰는데, 이는 철저한 공갈협박에 의한 것이다.

편입된 후, 재산을 전부 내놓지 않거나, 사사로이 은자 5냥 이상을 숨기고 있으면, '사심을 품고 있으니, 요마이고, 죄가 극대하다'고 하였다. 21일이 지나도록 천조를 외우지 못하거나, 두 차례에 걸쳐 아무런 이유 없이 '도리를 전파'하는데 참가하지 않으면 중대한 범죄로 취급되었다. 무조건복종을 하지 않거나, 도구로 길들여지지 않거나, 엉뚱한 소리를 지꺼리면 모두 요마의 마음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妖心未化).

이를 참지 못하고 밤중에 도망치는 것을 "삼경(三更)"이라고 하였다. 천조, 명령에 위반하는 것은 "변요(變妖)"라고 하였다. 이상의 각종 죄명에 대한 처벌은 모두 참수(斬首)였다.

다른 여러 가지 천조, 금률을 어기는 행위 즉, 부부동숙, 점검/지휘이상의 관교를 만나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 것, 모여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 사사로이 군사를 논하는 것,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 변발을 하는 것...등은 모두 참수에 처하는 범외이다. '반반통요(反叛通妖)'는 특히 '점천등(點天燈)", "오마분시(五馬分屍)'의 극형에 처했다. 전면적이고 엄격한 통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정과 재물도 없게 하고, 사상 감정도 없게 하며, 인신사유도 없게 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없는 도구로 만들었다.

다섯째, 대량의 처녀를 개인적인 성도구로 삼았다. 홍수전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도 처첩이 여럿 있었다. 작은 영안성을 점령하고 나서는 이미 36명이었다. 남경으로 들어가서 매번 생일이나 은혜를 입으면 미녀 6명씩을 바쳤다. 매년 봄이 되면 천경의 13개 문 입구에서 홍수전을 위하여 미녀를 선발했다. 심지어 아예 규정으로, "모든 소부미녀는 천왕이 쓰도록 준비한다"고 적었다.

태평군이 패망할 때, 천왕의 처첩은 88(일설에는 108)이 있었다. 궁중에 너비가 8척에 이르는 큰 침대가 있었는데, 뭐에 쓰는 것인지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홍수전은 처첩이 너무 많다보니 이름을 다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처첩을 단속하는 <<천부시>>를 수백 수 지어서 그녀들에게 외우게 하였다. 이들 양가집 규수들은 그의 성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홍수전은 황제와 사교교주의 부녀에 대한 유린이 극치에 이른다.

 

 

17. 홍수전(洪秀全)과 여인들

: 미상

 

홍수전이 앉았던 황금 옥좌

 

홍수전은 도광23(1843)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한 때로부터 "천하의 남자들은 모두 형제뻘이고, 천하의 여자들은 모두 자매뻘이다"라는 평등사상을 들고 나와서, 농촌의 가난한 부녀들이 많이 참가했다.

광서 계평현 붕애산 지구에는 양운교(楊雲嬌)를 두령으로 하여 많은 부녀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홍수전은 또한 "사람을 한 명 죽이는 것은 내 아비를 죽이는 것과 같이 처리하고, 여인을 한 명 간음하면, 내 처를 간음한 것과 같이 처리 하겠다"는 말도 한 적이 있다.

이리하여 태평천국의 난 초기에는 태평군내에 부녀들로만 구성된 여군이 있었다. 이들은 남자들과 함께 용감하게 전투에 참가했고, 무한까지 밀고 올라올 때까지만 하여도 남녀는 모두 같이 직위를 받고 같이 관리를 지냈다.

남경을 함락시킨 후, 태평군이 동쪽으로 향할 때도 여군은 여전히 선봉에 섰다. 여장군 소삼랑(蘇三娘)은 일찍이 여군을 이끌고 진강성(鎭江城)을 앞장서서 점령한 바 있다. 당시 소삼랑과 그녀가 이끌던 여군을 찬양한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팔백여병도적각(八百女兵都赤脚) 팔백명의 여자병사들은 모두 맨발인데

만금찰고주여풍(蠻衿扎褲走如風) 오랑캐 옷에 바지는 묶고 바람처럼 달린다.

 

그러나 자그마한 승리를 얻은 후 홍수전은 이미 강산의 절반은 손에 넣었고,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문을 닫아걸고 태평천자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차지한 지역의 여인들을 그의 노리개로 삼고자 하였다.

남경을 함락시키기 전 17일 전에 홍수전은 무호(蕪湖)의 강위에서 돌연 남자와 여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조서를 내린다. "여자는 안의 일을 처리하고, 바깥일에 대하여는 간여하지 말라" 그리고 네 가지 "참불사(斬不赦, 무조건 참하며 용서가 없다)"에 해당하는 죄를 만들어 신변의 부녀들이 외부와 연락을 끊도록 하였다.

남경을 함락시킨 후, 천왕을 따르는 부녀들은 모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게 되었으며, 천왕부에 한번 들어가면 바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하게 되었다.

홍수전은 일찌감치 후궁을 가득 둔 제왕의 궁정생활을 그리워하였다. 그가 배상제회를 창립할 때, 스스로 하늘에 "정월궁낭낭(正月宮娘娘)"이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의 처는 "우정월궁(又正月宮)"이라고 불렀다. 금전기의(金田起義) , 그는 이미 비()를 열다섯이나 두고 있었다.

1년 후 광서의 영안에서 포위전을 벌일 때, 홍수전에게는 이미 36명의 여인이 있었다. 광서를 얻고, 호남 도주에 도착했을 때, 현지의 공생이 헌납한 미녀 4명을 받아들였다. 무창을 점령한 후, 홍수전은 첫 번째 후궁선발(選妃)을 통해서 민간여자 중 자색(姿色)이 뛰어난 60명을 뽑았다.

남경에 도착한 후, 홍수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을 거느렸는가? 태평천국이 실패한 후, <<강남춘몽필기>>라는 책에 따르면 왕후낭낭은 그 밑에 애낭(愛娘), 희낭(嬉娘), 묘녀(妙女), 교녀(嬌女)16등급의 총 208명이 있었다고 한다. 24명의 왕비(王妃)에게는 각각 차녀(姹女), 원녀(元女)7개 등급의 총 960명이 있었다고 한다. 양자를 합하면 모두 1,169명이 된다.

이상의 여인들은 모두 후궁에 속하여 홍수전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인들이었다. 천왕부에는 환관을 두지 아니하여 여러 가지 잡일을 하는 여관(女官)이 있었다. 2품관 60명이 각각 여사 20명을 두었으므로 합계 1200명이다. 각종 사람을 다 합치면 모두 2300여명의 부녀들이 천왕부에서 홍수전 한 사람을 모셨다는 것이 된다.

홍수전이 모두 얼마나 많은 여인을 가졌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천왕부에는 2,3천명의 미녀들이 있었는데, 남자는 홍수전 1 명이 살았다. 그리고 이들 미녀들은 모두 홍수전을 모시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고대의 군왕이 삼천궁녀를 둔다는 것과 비슷했다. 미시적으로 보면, 홍수전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18641025일 강서 석성황산에서 포로로 잡혀서 쓴 진술서를 보면, 앞부분에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나온다.

"현재 나이는 16세이고, 노천왕이 나의 부친이다. 그는 88명의 모후를 두었고, 내가 9살 때 4명의 처를 주었다..."

이것이 아마도 믿을만한 기록일 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호색하기로 유명했던 함풍제도 겨우 18명의 비빈만을 두었으므로, 홍수전에는 미치지 못한다.

홍수전이 41세 때 남경에 들어가서, 52세 때 자결할 때까지 미녀들만으로 둘러싸인 천왕부에서 11년을 보냈고, 천경의 성문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전투를 지휘한 적도 없고, 조정의 일에 대하여 물어본 적도 없다.

그 당시 그는 장년이었고, 체격이 건장하였는데, 11년 동안 겨우 25편의 조서만을 내려 보냈다. 그리고 함풍4년부터 함풍8(1854-1848)까지는 비어있다. 5년간 단 1편의 조서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이 동안 그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비빈낭낭'들과 술 마시고 시를 짓고 놀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홍수전은 글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았다. 그가 지었다는 소위 "부시(賦詩)"는 그저 말나오는대로 쓴 것에 불과하다. 함풍7(1857)에 태평천국에서 인쇄하여 발행한 "관서(官書)"중의 하나인 <<천부시(天父詩)>>에 수록된 500수의 시를 보면, 대부분이 홍수전이 천경에 진입한 초기 3년 동안 궁중생활을 하면서 후궁들에게 보라고 쓴 남자와 남편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비빈, 여관들은 아침마다 천왕을 위하여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머리칼을 다듬으며, 주인의 고민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 주인이 존엄이 높고 바르게 지켜지면, 강산에서 영원히 위엄을 누릴 수 있다", 그 후에 천왕에게 문안인사를 해야 한다: "아침마다 옷을 입고 종을 울리며, 종소리는 태양을 향해야 하고, 후전은 이때 함께 모여서 문안인사를 하고, 전전의 문이 열리면 햇볕을 받는다":

이어서 금연(金輦)이 천왕을 따라 어원에서 놀게 된다.

"어원 내에서 노는 것은 정말 즐겁다. 백 가지 새가 노래 불러 가마 소리와 어울린다."

그리고 천왕에게 차와 가래침 뱉는 통을 올린다.

"차를 바칠 때는 바르게 해야 한다. 침 뱉는 통을 제대로 받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이런 시들을 보더라도, 홍수전의 위엄과 황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 할 것이다. 그가 4번이나 과거를 보았음에도 합격하지 못한 원인도 쉽게 알 수 있다.

남경에 온 천왕 홍수전은 처음에는 광서에서 그를 따라온 옛날 여인들의 거칠고 더러운 점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떤 여인이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듣고는 바로 시를 지어 질책했다.

"아름다운 여인의 가는 목소리가 귀한 것이다. 어찌 개가 짖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느뇨?"

어떤 여인이 이빨을 닦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릴 줄 모르는 것을 보고는 그는 아주 심하게 이를 놀렸다.

"주인을 따라 오르지 못하면 영원히 오르지 못하고, 영원히 태양을 볼 수 없다. 얼굴은 튀어나와 시커멓고 몸에서는 악취가 난다. 입에서는 유황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홍수전은 거리낌 없이 새 여자를 좋아하고 옛 여인을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치니 마음속이 즐거워진다. 복 있는 낭낭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눈을 마주치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재수 없는 낭낭은 때려죽여 마땅하다"

그의 재수 없는 낭낭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벌할 지도 규정했다.

"모시는데 경건하지 않으면 맞아야 하는 첫 번째이고, 고개를 빳빳이 하고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맞아야 하는 두 번째이고, 눈을 들어 주군, 남편을 바로 쳐다보는 것은 맞아야 하는 세 번째이고, 천왕에게 경건하지 못하게 물어보는 것이 맞아야 하는 네 번째이고, 기가 바르지 못한 것이 맞아야 하는 다섯 번째이고, 말을 큰 소리로 하는 것이 맞아야 하는 여섯 번째이고, 입이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는 것이 맞아야 하는 일곱 번째이고,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 맞아야 하는 여덟 번째이고, 눈을 좌우로 돌리는 것이 맞아야 하는 아홉 번째이고, 말하는 것이 침착하지 못한 것이 맞아야 하는 열 번째이다"

이외에 또 하나의 기괴한 규정이 있다.

"주군을 쳐다볼 때는 어깨까지 보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가슴 앞을 보는 것이다; 감히 눈을 위로 드는 것은 왕을 태만히 한 것이고 하늘을 태만히 한 것이다"

부녀들이 형벌을 받을 때, 억울하더라도 변명해서는 안 된다. 그저 때리는 대로 맞아야 하고, 그렇지 않았다가는 처벌이 배가된다.

"때리면 잘못을 아는 것은 한 죄이고, 때려도 잘못을 모르는 것은 두 죄이다. 한 죄는 맞음으로써 소멸되지만, 두 죄는 설하(雪下)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여기서 설하라 함은 "도하(刀下)"의 태평천국식 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최소한 3명의 여인이 천왕부에서 처벌받을 때 억울하다고 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다가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는 죽을 때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홍수전에게까지 대들었다가 결국 오마분시의 혹형을 당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있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온 이후에, 가장 먼저 동왕 양수청의 명령을 받아, 주민들은 "군영을 따를 사람은 군영으로, 군영을 따르지 않을 사람들은 각자 민가로 복귀"했다. 나중에 북왕 위창휘가 병이 든 양수청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는데, 일체의 공상업을 몰수하고, 남녀를 분리 거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남자들은 군영에 들어가 병사가 되고, 부녀들은 여관에 들어가 노동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당시 천경에는 토목공사를 많이 일으켰는데, 부녀들은 모두 천왕부의 건축에 참가했다. 천왕부 주위의 높은 담장은 2장 높이로 4척 너비였다. 성벽의 위에는 갈라진 도자기조각을 추가했고, 성 밖에는 붙잡혀온 부녀들이 도랑을 팠으며, 어떤 사람은 집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이 점을 보더라도 홍수전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평군이 민심을 얻어 남경을 점령하였다가, 민심을 잃어 민중들이 대거 떠나게 되는 데까지 겨우 몇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태평군이 성에 진입하기 전에, 남경에는 원래 80만이 살았는데, 봄에 태평군이 들어온 후 9개월 만에, 등기인구를 조사해보니 15만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노약자인 남자가 4만 명, 부녀가 11만 명이었다. 홍수전이 스스로 "작은 천당"이라고 부른 천경이, 사실은 인간지옥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야에서 가장 강력히 요구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시급했던 문제는 부녀문제였다. 홍수전이 수천수만의 부녀를 동원해서, 집을 짓고, 도랑을 파고, 성벽을 만드는데, 비바람이 불거나 한설이 내려도 계속되었으며,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비등했다.

당시 천경성내에, ()이하 일반백성들까지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집안가족들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남영과 여관에 나뉘어 거주했고, 일부는 천왕부에 붙잡혀 와서 일을 했다. 특히 천왕부에서 일을 하게 되면 영원히 헤어진 것이고 다시 만날 기약은 없었다.

천경의 내분이후에도 홍수전은 여전히 오른팔 왼팔에 미녀를 끼고 살았고, 생활은 극히 추잡했다. 함풍11(1861) 태평군이 강소절강을 들어왔을 때, 홍수전은 다시 이수성으로부터 받은 천경의 3천 미녀 중에서 180명을 뽑아 천왕부에 편입시켰다.

바로 이해에 50세도 되지 아니한 홍수전은 마침내 마지막 "짐명유주사조서(朕命幼主寫詔書)"의 성지를 내린다. 이리하여 나이는 13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부친에게 황음함은 그대로 배운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된다.

홍수전은 천왕부의 미녀들 틈에서 11년을 지냈고, 동치3(1864)까지 살았다. 그가 52세 되어서, 마침내 증국전의 상군(湘軍)의 대포소리와 미녀들의 원망성을 들으면서, 부득이 그의 수천미녀를 놔두고 자결하게 된다. 그가 죽은 지 48일후에 천경은 함락되고, 태평천국은 멸망한다. 그의 아들은 포로로 잡혀서 결국 능치처참 당하게 된다.

 

 

18. 홍수전(洪秀全)의 개인숭배

 

개인숭배는 인류문명탄생이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역사현상이다. 그것은 영웅인물의 신성화이며, 자기의 희망, 감정, 경모를 모두 숭배대상에게 바치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숭배주체의 "자아포기의 과정"이다. 개인숭배는 사회군중이 공동으로 참여하며, 때로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참여하기도 한다. 숭배대상은 왕왕 일체의 수단을 사용하여 숭배자의 자신에 대한 경건과 신앙을 공고히 하고 강화하며, 일종의 종교역량과 비슷한 자신의 카리스마를 형성한다.

홍수전 및 그의 추종자들은 태평천국의 운동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개인숭배를 진행했다. 이는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고, 응집력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운동의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홍수전은 중국유교정통문화와 민간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은 전통적인 엘리트이고 농후한 제왕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과거를 열어 천하의 선비를 모으리라"는 권력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새로운 정권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홍수전과 추종자들은 상제교를 창립하는 외에,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세우고 선전하는데도 주력했다.

첫째, 홍수전등은 진명천자의 신화를 만들었다. 태평천국운동초기에, 홍수전은 자신을 주원장 이후의 진명천자라고 비유했다. 그리고 황상제의 둘째아들이라고 했다.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와 세상을 구원한다고 했다. 양수청등은 현지의 무술을 이용하여 홍수전은 진명천자로 세상에 내려왔다고 선전했다.

광서민중들은 미신의 전통이 강해서, 홍수전을 신격화하는 전설은 그들이 있던 마을과 태평군내에서 매우 성행했다. 홍수전에 대한 신화는 모두 홍수전과 그의 추종자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신화를 만들고 전파한 목적은 홍수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고, 이로써 민중으로 하여금 받들고 숭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둘째, 의전(儀典)을 제정하고, 상징부호를 사용하여 홍수전의 권위를 세웠다. 인류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징부호와 의식은 사회인정과 사회동원방식의 하나이다. 그들은 족속, 단체와 지역의 동질감을 통합하고 공고히 하는 기능을 한다. 부호는 표현하는 것이면서 도구이다. 권위를 표현하는 동시에 권위를 재창조한다. 그래서 정치조작과정에서 부호와 의식의 사회기능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홍수전등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상징부호를 어떻게 이용하여 새로운 권위에 대한 숭배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알았다. 복식 중에서의 상징부호는 사람들의 정치와 문화 관념을 대표한다. 태평천국은 이 측면에서 옷을 다 바꾸어 버렸다. 다른 측면으로 전통 제왕복식 중에서 권위의 상징인 용은 승계했다.

이외에 태평천국은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부호를 사용했는데, "태양"을 이용한 숭배와 선전이다. 기독교는 태양숭배를 금지한다. 그러나 태양은 중국전통문화에서 위력과 만물생장의 근원을 상징한다. 또한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수전은 기독교의 교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태양신으로 봉하고, 용포에도 태양을 수놓았다. 자기가 거주하는 궁전을 "태양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징부호는 중국농민의 신앙관습과 맞아떨어졌고, 홍수전에 대한 개인권위를 나타내는데 유효하게 사용되었다.

홍수전등은 각종 의식을 통하여 권위의 인정과 숭배를 받았다. 문화인류학은 의식을 상징적이고, 연출적인 전체적인 행위방식으로 정의한다. 질서를 강화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운동 초기에 제왕의전을 이용하여 이미 '성가(聖駕)'등의 용어를 썼고, 등극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각종 번잡한 예의를 제정하였다: 대신들이 천왕을 배알할 때는 반드시 '만세'를 외쳐야 했고, 금룡전에서 군신은 같이 연회를 베풀지 않으며, 여러 왕들만이 천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매년 각종 기념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등극기념, 생일경축 등이다. 홍수전은 특히 생일축하의식을 중시했는데, 그 중에는 천부에 감사하는 의식도 포함된다.

이로써 자기는 상제의 둘째아들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홍수전이 깊은 구중궁궐에 있으면서,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는데, 이 의식의 중요성과 신비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주었다. 실제로 정치의식은 일종의 권력의 실천이다. 그것은 사회구성원에 대하여 정치적인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셋째, 시간과 공간에서 홍수전에 대한 숭배를 조성한다. 1851323, 홍수전은 정식으로 천왕에 등극하였다. 323일은 바로 기독교의 부활절이다. 홍수전은 고의로 등극일을 부활절로 정한 것이며, 천부가 정해주었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자기의 지위를 드높이고, 왕권신수의 신비적인 색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홍수전은 이 날을 '등극절'로 지정했고, 자기의 생일도 기념일로 지정했다. 홍수전은 스스로 명절을 만들어갔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명절인 부활절, 성탄절은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하게 기독교의 전통적인 명절을 몰랐던 것이라기보다는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목적은 자기가 제정한 시간의 부호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시간의 조성으로 자기를 신화하고 민중들이 자기를 숭배하도록 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시간이 사회성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정치권력의 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홍수전은 웅장한 '천조궁전'을 만듦으로써, 자기의 권위와 권력의 공간을 과시했다. 천조궁전의 규모가 거대한데, 전체공간배치를 천왕의 의지와 권위를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바깥은 태양성, 안은 금룡성" 궁궐의 경비는 삼엄했다. 이 규모가 거대하고, 기세가 웅장한 궁전건축물은 홍수전의 만세군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민중들을 천조궁전과 그가 전해주는 권위에 경탄하고 굴복했다. 홍수전에 대하여는 자연히 경외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넷째, 전통매체의 선전을 통하여 개인숭배를 진행했다. 홍수전은 조서, 포고, 공문, 회시문제 등을 반포하는 형식으로 개인숭배를 선전했다. 조서 중에서 홍수전은 여러 차례 자기는 "천부상제진명천자"라고 하였고, "천하의 사람은 모두 짐을 먹고, 짐을 입으라"고 했다. 완전히 태평천국을 자기 일인의 가산으로 표현했다.

보통민중이 그를 숭배하게 하기 위하여, 홍수전은 <<삼자경>><<유학시>>의 교재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이를 통하여 자기의 권위를 드높였고,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도록 하였다. "사람만이 잘못을 저지르고, 하늘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신하는 잘못을 저지르지만, 군주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외에, 홍수전은 전통제왕의 피휘제도를 활용하여 그와 관련 있는 글자를 전용글자로 정한다.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성을 고쳐야 했다. 예를 들어 왕()씨는 왕()이나 황()씨로 고쳐야 했다. 이러한 자신을 신격화하는 방법은 이미 역대의 황제의 수준을 훨씬 초과하였다.

홍수전이 개인숭배를 조장하는 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부하들의 공동노력이다. 풍운산, 양수청등은 홍수전의 초기개인숭배를 만들어갈 때 아주 중요한 역할들을 한다. 이로써 홍수전은 농민들에게서 금방 광범위한 지지와 숭배를 받게 되고, 민중들은 홍수전이 하늘로부터 권력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의 홍수전 개인숭배는 민중을 동원하고, 참여시키고 상제회의 응집력을 배가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태평군이 북상하는 과정에서, 남경에 수도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모두 사회심리적인 기초를 형성하였다.

다만, 바로 이러한 개인숭배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아와 주체를 포기하고 절대적으로 맹종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갈수록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홍수전은 과도하게 개인숭배를 추진했다. 그러나, 권력욕망이 강했던 양수청등은 '천부하범'을 이용하여 종교상으로 홍수전보다 높은 권력과 지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개인숭배운동은 필연적으로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배척하게 되는데 이것이 태평천국에서도 재현되었다. "천경사변"이라는 역사적인 비극은 바로 홍수전과 그의 추종자들이 개인숭배를 추진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이로써 볼 때, 태평천국운동의 최종실패원인을 검토할 때는 홍수전에 대한 개인숭배라는 요소는 반드시 고려해야할 중요한 점이다.

 

 

19. 태평천국 홍수전(洪秀全)의 사망원인

 

청나라 동치3427(양력 186461), 태평천국의 수도인 천경(天京, 지금의 남경)은 청나라 군대의 포위공격 하에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태평천국의 두목인 홍수전이 천경성내의 천왕부(天王府)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그런데, 그의 사망원인에 대하여는 사학계에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대체로 1960년 이전까지는 홍수전은 자살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었다.

이수성(李秀成)은 태평천국의 후기에 중요한 장수였다. 홍수전이 사망했을 때, 그는 천경에서 천경방어전을 지휘하였으므로 천왕부의 상황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증국번(曾國藩)이 발간한 <<이수성자술(李秀成自述)>>에는 홍수전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천왕(홍수전)은 이 때 조급해하고 매일 고민했다. 427일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라고 적었다.

<<홍인간자술(洪仁간자술)>>에서도 후반부에 "천왕의 자살은 전 국면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태평천국의 적수였던 상군의 두목인 증국번이 같은 해 623(양력 726)에 올린 글에서 "역도의 괴수 홍수전은 실제로는 올해 5월 사이에 관군이 맹공을 가할 때, 독을 마시고 죽었습니다"라고 적었다. 77일에도 다시 글을 올렸다.

"적의 궁녀는 도주의 황씨 성의 여자인데, 바로 자기 손으로 역적의 시신을 묻었다고 합니다. 신이 친히 신문하여 진술을 얻어낸 바에 의하면, 홍수전은 생전에 여러 해 동안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았다고 하며, 427일 관군이 공격을 맹렬히 하자, 독을 마시고 자살했으며, 몰래 묻고 장례식을 지내지 않았습니다. 성안의 여러 적군들과 성 밖의 관병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서 10여일 후부터 선포하였습니다."

이상의 자료에 근거하여, 대다수의 사학자들도 홍수전은 음독자살한 것으로 생각했다.

곽정이도 홍수전의 죽음에 대하여 "음독자살이라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라고 적었다. 간우문은 <<태평천국전사>>에서 홍수전의 자살은 "사실"이라고 적었다. 나이강은 <<태평천국사고>>에서 이수성자술에 근거하여 홍수전은 419(양력 186461)에 음독 사망하였다고 적었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들 중에서도 홍수전의 자살설에 대하여는 약간의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 초에, 증국번의 집안에 100여년이나 감추어져 있던 <<상향증팔본당. 이수성친공수적>>이 영인본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홍수전이 병으로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이 때, 개략 3월이 끝나갈 쯤, 4월이 막 시작할 때인데, 이 때 나는 동문성의 위에 있었다. 천왕은 이 때 병세가 심히 위중했다. 421일에 사망했다."

"이 사람은 병에 대하여 약을 먹지 않았고, 병을 그대로 놔두었다. 약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먹지도 않았다. 그래서 421일 사망했다....천왕의 병은 감로병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약을 먹지 않았으므로 사망하였다"

학자들은 이 기술이 믿을만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증국번이 간행한 <<이수성자술>>은 증국번이 고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증국번의 막료인 조열문은 <<능정거사일기>>에서 77일자에 "중당(증국번)이 나에게 이수성의 진술서를 보게 하였고, 고친다음 군기처에 보내었다. 저녁쯤에야 끝났다".

증국번은 이수성의 진술원고를 군기처에 보낼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수성의 진술은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정은 명확하다. 군기처에 초록하여 보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증국번이 내놓은 이수성자술서는 수정을 거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증국번이 이전에 두 번이나 글을 올리면서 홍수전이 자살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수성 자술서도 그에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홍인간자술>>의 후분부분에서 홍수전이 자살했다고 했는데, 후반부분은 다른 사람이 번역하여 내놓았고, 원고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외부인이 번역할 때 이수성자술의 판각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주의할 점은 <<홍인간자술>>의 원고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금년 419, 나의 주공인 노천왕이 와병(臥病) 20여일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

이러한 말은 믿을만하다. 유천왕 홍천귀복의 자술에서도 "금년 419, 노천왕이 병사했다. 24일 여러 신하들이 나를 등극시켰다" 조열문의 <<능정거사일기>>56일자에서도 "정탐한 소식에 의하면 역적수괴 홍수전이 이미 428일 병사했다고 한다."

<<이수성친공수적>>이 영인본으로 나온 이후에는 병사설이 통설로 자리 잡았다.

 

 

20. 홍대전(洪大全) : 청나라 조정의 흠차대신이 날조한 '홍수전의 동생'

: 이자지(李子遲)

 

초량(焦亮)이 포로로 잡힌 후, 금방 그는 호남 천지회(天地會)의 성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새상아(賽尙阿)는 원래 영안(永安)을 지키는데 실패하여 함풍제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그에게 주모자를 체포해오라고 명령한다. 만일 체포하지 못하면 엄히 처벌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 대동산(大峒山)에서 다시 4명의 총병(總兵)이 전사하고 청군은 일패도지한다. 이렇게 되니 총사령관인 그는 더욱 죄책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새상아는 막료이자 호부원외랑인 정수존(丁守存)과 비밀리에 상의한 후, 초량을 홍수전의 형제인 소위 '천덕왕(天德王)' 홍대전이라고 하기로 한다. 그리고 정수존은 <홍대전전(洪大全傳)>을 쓴다. 새상아는 초량을 북경으로 압송하는 도중에 다시 홍대전이 함풍황제에게 올리는 <진정파적표(陳情破賊表)>를 날조한다. 초량은 북경으로 압송된 후, 금방 처형된다.

당시, 청정부의 어떤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홍대전은 태평군의 중요지도자가 아니다. 총사령관이 영안주에서 포위당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죄를 피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이다. 함풍제도 이런 견해에 동의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초량이 체포된 후 일부러 신비스러운 척 하면서 스스로 천덕왕 홍대전이며, 홍수전의 형제이고 나란히 만세(萬歲)로 불리었으며, 양수청(楊秀淸)은 그들 형제의 신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새상아는 대동산에서 참패하면서 패배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의 투항을 허용하고 공을 세워 죄를 면하려 한 것이다. 홍대전도 협력에 동의하고 장편의 진술서를 쓴다. 그리고 새상아는 초량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그 후, 홍대전은 북경으로 압송되는데 도중에 하남성 신양을 지날 때, 비로소 그는 이번에 북경에 가면 흉다길소(凶多吉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상함풍황제표문>을 쓰게 된다. 정수존은 이를 허용하나, 조건은 홍대전이 이전의 진술을 뒤집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 황제에게 올리는 표에서는 내용이 더욱 거창했다. 그는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여, 자신은 병법을 읽어서 장악하고 있으며, 병서를 가지고 있는 광세기재라고 적었다. 또한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탐관오리에 반대하는 것이지 황제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조정에는 계속 충성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태평천국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을 상대할 재지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만일 사형에 처하지 않고 기용해주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초량은 여전히 처형당한다.

초량이라는 사람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가 태평천국에 투신할 때도 이 이름을 썼다. 홍대전은 새상아 등이 날조해낸 것이다. 최소한 그가 포로로 잡힌 후에 바꾼 이름이다.

초량의 본명은 초옥창(焦玉昌)이다. 그는 제갈량의 병법을 가장 존경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량()으로 바꾸었다.

초량의 형제와 처도 호남 천지회 회원이다.

그의 큰 동생 초옥명(焦玉明)<흥녕초씨족보>에 따르면 일찍이 장사 악록서원에서 공부한 선비이다. 1852년 호남 침주(郴州)에서 태평군에 참가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천경 궁전에 걸어놓은 대련(對聯):"용비구오(龍飛九五), 중개요순지천(重開堯舜之天); 호분삼천(虎賁三千), 직저유연지지(直抵幽燕之地)"가 그의 글이라고 한다.

그의 둘째동생 초옥정(焦玉晶), 즉 초삼(焦三)은 초량이 떠난 후, 초량의 처인 허월계(許月桂)"초군당(招軍堂)의 두령이 된다. 1855, 광동 천지회 홍건군과 서로 호응하여 두 사람은 깃발을 들고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허월계가 대원수(大元帥)가 되고, 초삼은 삼성군사(三省軍師)가 된다. 다음해에 실패하고 두 사람은 가화현 아문으로 찾아가서 투항한다. 그 후에 장사로 끌려가서 처형당한다.

 

 

21. 홍선교(洪宣橋) : 태평천국의 대표적인 여장수

 

홍선교는 광동 화현(花縣, 지금의 화도구) 복원수촌(福源水村) 사람이다. 원명은 양운교(楊雲嬌)로 홍수전은 그녀를 "천부"의 딸로 생각했기에 여동생으로 여겨 선교로 개명시켰다. 서왕 소조귀(蕭朝貴)의 아내이기도 한 그녀의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태평천국 창건 및 성장 과정 중에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 그녀는 홍수전과 소조귀의 유능한 조수였었다. 야사의 기재에 따르면 그녀는 천경사변(天京事變)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홍선교는 중국역사상 수많은 전기 색채가 충만한 여성의 한 명이다

 

태평천국의 흥기

아편전쟁 이후 청 조정의 부패무능은 나날이 심해져가 부단히 서구 열강에게 핍박당해 땅을 떼어주고 돈을 배상하며 통상 구안(口岸)을 개방해 광대한 인민의 머리 위에 날로 무거운 부담을 지워 구주(九州) 대지에 원성이 진동한다. 결국 아편전쟁이 끝난 지 8년 후, 홍수전을 위수로 한 태평군이 광서 금전에서 기의했는데 목표는 부패한 청 조정을 뒤집는 것으로 민심이 순응하는 정황 하에 태평군의 세력은 나날이 확장하여 함풍 원년에 영안을 공점한 후 태평천국을 세운다. 함풍 3년에는 남경까지 탈취해 정식으로 기업(基業)을 다진다.

관계 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홍수전이 1847년 자형산에 갔을 때 홍선교는 일찍이 꿈에 상제를 봤다고 공언하며 그녀가 "10년 후 누군가 여기에 교인으로 와 상제를 모신다면 너는 받들어 따라야 한다(十年后有人来此教人拜上帝汝当遵从)"는 계시를 받았다고 알려주자 홍수전도 마침 그해 꿈을 꿨다고 자칭하며 상제의 차자와 사자 신분으로 "세인을 구제함(拯求世人)"을 개시한 터라서 두 사람의 몽화(夢話)가 즉시 합치돼 홍수전의 위망에 대해 자연히 커다란 도움을 준다. 홍선교는 홍수전의 누이동생이 됐으면서도 양수청, 소조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 때문에 일시간에 상제회의 핵심인물이 돼 여회중(女會衆)들 중에 영향력이 아주 커진다. 그래서 홍수전 등은 일찍이 "남자는 풍운산을 배우고, 여자는 홍선교를 배워 그녀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男学冯云山女学杨宣娇把她列为楷模)"라고 호소했다

 

소조귀에게 시집가다

도광 30, 즉 서기 1851년에 상제회의 교도는 이미 수 만명으로 발전했는데 홍수전은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봐 금전촌에서 태평군의 기호를 세우고 태평천국을 건립한다. 그리고 홍수전은 자칭 천왕이라 하고,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운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에 봉한다. 더욱이 이 봉함을 받은 왕들에게 모두 양수청의 절제를 받도록 시킨다. 홍선교는 오빠인 홍수전의 주재로 소조귀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소조귀가 장사성 포위 공방전 중 죽자 홍선교는 순식간에 과부가 되고 만다.

 

양수청을 암살하다

함풍 3, 즉 서기 1854년에 태평군은 남경을 함락하고 이곳을 태평천국의 성도로 정하여 천경으로 개명한다. 홍수전은 명을 내려 군영을 따라 온 여권(女眷)을 집중시켜 건립한 "여영(女營)""여관(女館)"으로 고치고 동왕 양수청에게 총관을 겸임케 하며 홍선교는 감찰을 맡긴다.

이때 홍수전은 이미 정색(情色) 속에 탐닉해 태평천국의 군정대권은 사실상 동왕 양수청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양수청이 천경에서 대권을 독람하자 천왕 홍수전과 허다한 태평천국 장령이 그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다홍선교는 세태 인심을 정확히 봐 반양(反楊) 세력들과 연합한 동시에 홍수전을 부추겨 북왕 위창휘에게 밀조를 내려 천경으로 돌아오게 해 대사를 공동으로 꾀하게 한다. 북왕은 안휘 전지(戰地)에서 총총히 천경으로 돌아갔는데 이 기간에 홍선교는 태도를 크게 바꿔 주도적으로 동왕부에 들어가 양수청에게 특별히 다정함을 표현했다. 양수청은 홍선교의 이런 태도가 뜻밖이라서 무척 기뻐하며 그녀에게 이전에 품은 원한을 따지지 않고 홍선교의 제의를 수용해 스스로 나서서 북왕을 위한 성대한 세진(洗塵宴) 연다. 그리하여 세상을 진동케 한 "천경사변"이 이로부터 대막(大幕)을 열어제낀다

 

천경사변

185692, 동왕부 안에서 크게 열린 연석(筵席) . 위창휘가 병력을 이끌고 동왕부를 피로 물들여 양수청 이하 2만 태평군 장령이 모조리 그들의 칼 아래 죽고 만다. 석달개가 이 소식을 듣고 천경에 돌아와 위창휘가 무고한 사람들을 남살한 것을 질책한다. 이에 위창휘 역시 석달개를 죽이고 싶어 한다. 석달개가 성에 줄을 매달아 타고 내려가 도망치자 그날 밤 위창휘는 익왕부를 피로 물들여 석달개의 가권(家眷) 및 익왕부 안의 인원 전부를 모조리 남김없이 죽여 버리고 만다. 이어 홍수전이 조서를 내려 석달 개를 지명 수배한다. 석달개는 안휘로 도망가 거병하여 위창휘의 난을 평정했는데 결국 서진 도중 대도하를 건너는 전역 중에 패하여 죽는다.

"천경사변" 이후 태평천국의 원기는 크게 상하여 결국 제왕(諸王) 중 단지 충왕 이수성만 남는다. 동치 3, 즉 서기 18647월에 청군은 끝내 천경성을 공파함으로써 우렁찬 태평천국은 종결을 선고한다.

 

 

최후

홍선교의 귀숙(歸宿)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야사들에는 그녀가 천경의 난 중에 난군(難軍)에 피살되고 말았다고 한다. 홍수전이 내란을 평정해 양수청, 위창휘를 죽인 동시에 내친김에 이 능력이 매우 큰 "어매(御妹)"도 해치웠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도 한다. 또다른 야사들에서는 홍선교가 청군이 천경을 함락했을 때 전사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천경이 함락된 그날 홍선교가 민부(民婦)로 변장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따라 상해로 가 나중에 서양 선교사를 동반해 미국으로 멀리 떠났다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병원을 개업해 살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인물 평가

태평천국 일방(一方)의 가장 이름 난 여장의 하나로서 서왕비 홍선교는 태평천국의 창건 및 성장 과정 중 매우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홍수전과 소조귀에게는 아주 힘이 되는 조수이기도 했다. 그녀는 또 직접 동왕 양수청 모살을 획책했다. 홍선교는 중국 역사상 수많은 전설적인 색채가 짙은 여성의 한 명이다

 

일화, 전고(逸事典故)

 

옷을 벗고 전장에 뛰어들다

홍선교는 군중에서 소왕낭(蕭王娘), 천왕의 누이라 칭한 서오아 소조귀의 아내였다나이 30살도 안 됐을 때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졌고, 효용(驍勇)이 비범해 여병 수 백명 중에서 싸움을 잘하여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소왕낭 및 여병은 모두 광서 출신으로 깊이 홍수전의 교리를 따르며 매 전투마다 앞서 천제를 모셨다. 홍선교는 옅은 화장을 하고 출진해 쌍칼을 휘두르며 가는 곳마다 위풍늠름했다. 진홍색 말(絳馬)을 타고 허리에는 '흰색 털로 짠 융단(白氍毹)'을 두르며 장신에 피부가 희며 의군(衣裙) 사이가 청호색(靑皓色)이었다. 바람을 맞으면서 손목을 휘둘러 여군을 지휘했고 적삼에 시끄러운 소리를 달고 다녀 바라보면 '하늘의 사람(天人)'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 휘하의 여병들은 모두 비단 깃발과 은색 방패를 들고 있었다홍선교는 전투를 즐겼는데 이 소왕낭은 여자 옷을 벗고 말에 타 만청군을 휘젓고 다녔다. 내복(內服)은 살구 빛 명주(杏黃綢)였고 칼을 휘두르는 솜씨가 신속하며 옷 색깔은 은은히 환상스러워 청군은 매양 그녀를 볼 때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신세의 수수께끼

"해의상진(解衣上陣)"의 소왕낭은 20세기 80년대에 문전(文典)에 들어갔는데 나이강 등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홍선교" 역시 홍수전의 친여동생이 아님을 고증해냈다. 그녀의 원래 성은 황() 혹은 양()이었다가 나중에 다시 성을 양, 이름은 운교로 고친 거였다. 그리고 홍수전이 소조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에야 그녀와 의남매를 맺고 "홍선교(洪先嬌)"로 고쳐 부른 거였다. 객가 말 중에 "()""()"과 동음이어서 홍선교(洪先嬌)는 홍선교(洪宣嬌)로 불리게 된 거였다.

이런 발견에 근거해 전문가들은 홍선교와 유관한 전설과 야사가 모두 거짓이라고 여긴다. 절대 다수의 홍선교와 유관한 기술은 모두 다른 유명한 태평천국 여장 소삼낭(蘇三娘)의 사적이 잘못 와전된 소치라고 여긴다. 나이강 선생 같은 전문가 등은 심지어 홍선교가 바로 소삼낭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유는 "()"는 광동어에 속하는데 보통어인 "()"와 음이 같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사실 "소삼낭(蘇三娘)"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유전의 과정 중 누군가 또 "()" 위에 한 획을 더 붙어 그녀를 "소왕낭(蘇王娘)"이라 부르게 된거라고 했다. 하지만 설령 홍선교가 기실 양운교라 하더라도 그녀가 서왕비란 점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홍선교는 태평천국 초기에 매우 높은 위신을 보유하고 있었다여기서 중요한 건 그녀가 영용선전할 뿐만 아니라 모든 여교도의 수령이란 점이다. 그럼 어째서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원인을 연구해보면 원래 야사 중 홍선교의 용감선전을 썼으면서도 음탕하고 질투하길 좋아하는 천성이 있다고 여겨서였다. 이유는 홍선교가 소조귀 사후 동왕 양수청과 사통했기 때문이었다. 천경으로 진입한 뒤 양수청은 나날이 발호해 홍선교에 대해서도 갈수록 담담해져 당시 신과(新科여장원 부선상(傅善祥)에게 미련을 뒀다. 홍선교는 이에 분노해 북왕 위창휘에게 몸을 맡기고 그와 천왕을 선동해 정변을 일으켜 양수청과 부선상을 죽여 버렸다.

어떤 필기 중에는 심지어 생생하게 양수청과 부선상이 함께 같은 방에 있을 때 피살됐다고까지 말한다. 일후(事后) 홍선교는 동왕부에 들어가 부선상의 혈육이 모호한 시체에 증오스러운 말투로 "요망한 계집종, 네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妖婢亦有今日)" 운운했다고까지 한다. 이 기술은 여러 유명한 야사인 능선청(凌善淸)태평천국 야사, 사개학(謝介鶴)금릉계갑기사략(今陵癸甲紀事略), 왕곤(汪堃)순비수문록(盾鼻隨聞綠), 심무량(沈懋良)강남춘몽엄필기(江南春夢奄筆記등등에서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세절(細節) 서로 어긋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줄거리(情節)은 비슷하다

 

광동 북대문인 영남령(영남 제일의 이라 하여 平石鎭으로도 칭함)의 점장대(点將臺)에 우뚝 서 있는 홍선교의 조상(彫像) 

 

 

 

22. 홍선교(洪宣嬌) : 태평천국의 가장 유명한 허구의 여인

: 도단방(陶短房)

 

홍선교(洪宣嬌)를 얘기하자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다. 태평천국의 맹아에서 멸망까지, 20년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그녀 서왕낭(西王娘)이 아닐까?

일부 태평천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의 묘사를 보면, 홍수전의 친여동생인 홍선교는 무예가 고강할 뿐 아니라 대의를 알아서,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단결시켰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소조귀(蕭朝貴)에게 시집가고, 나중에 홍수전, 양수청 및 석달개의 안정과 화합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쌍칼을 잘 썼고, 신술(神術)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홍수전, 풍운산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청나라의 맹장을 죽이고, 서양의 병사를 죽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평천국을 사교로 보고 반역으로 보고, 대청을 정통으로 보는 문인들에게도, 홍선교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먼저 예쁜 얼굴을 무기로 하여 무지몽매한 농민들을 입교시켰고, 다시 미색으로 홍수전, 양수청, 위창휘, 석달개의 사이를 오갔다. 홍수전은 그녀의 매력으로 천하를 얻는데 큰 도움을 받았고, 그녀의 홍안화수로 나라가 흔들리기도 했다.

또 일부의 사람들, 예를 들어 유명한 극작가인 양한생 선생은 홍선교를 아주 복잡한 여성으로 그렸다: 어떤 때에는 질투로 이성을 상실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본성을 깨달아 두뇌가 아주 맑기도 하다.

치켜세우는 것도 좋고 깍아내리는 것도 좋다. 어쨌든 문인들이 쓴 홍선교는 모두 무예가 고강하고, 능력이 뛰어난 여강자, 여영웅이며, 부끄럽지않은 태평천국의 여자제일인이다.

그런데, 기괴한 것은 홍선교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은 청말민초, 즉 태평천국이 멸망한 30여년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녀를 여장군, 여영웅으로 묘사한 것은 1902년 황소배가 광동의 <<소년보>>에 연재한 <<홍수전연의(洪秀全演義)>>이다. 그리고 그녀를 최초로 구미호로 묘사한 것은 약간 뒤에 채동번이 쓴 <<청사연의(淸史演義)>>이다. 나중에 그녀에 대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묘사는 거의 모두 이 두 권의 책에 나오는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일찌기 일부 사학계의 선배들이 지적한 바 있다. 태평천국시대에 청나라측의 기록에 '홍선교'라는 사람에 대하여는 털끝만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홍선교는 철두철미한 허구의 인물이라고 얘기한다.

 

홍선교라는 사람이 존재했는가?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홍선교는 사실 홍수전의 친여동생이 아예 아니다. 홍수전에게는 두 명의 누나와 동부이모의 여동생이 하나 있다. 그러나 금전의거전날인 1850년에야 홍수전의 모친과 처는 광서로 왔다(혹은 아예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홍선교는 광서 토착인이다. 일설에는 광서 계평 자형산 사람이라고 하고, 일설에는 광서 귀현 사곡촌 사람이라고 한다. 부친은 왕정권(王政權)이라고 하는데, 마치 홍수전의 4촌인 사곡(賜谷)의 왕씨(王氏) 후손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녀는 홍수전과 4촌 형제자매 관계에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홍선교는 당연히 '왕선교'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홍씨로 부르는가?

사실 그녀는 처음에는 ''씨로 성을 고치지 않고, ()씨로 고쳤었다. 원래 석탄을 굽던 양수청과 소조귀는 모두 한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그리하여 둘은 서로 연합하여 의형제가 되었다. 방법은 양수청이 소조귀의 처인 왕선교를 여동생으로 삼는 것이다. 왕선교는 그리하여 '양선교'가 된다. 나중에 홍수전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선교는 홍수전의 신격화에 상제의 친딸이 되어, 예수, 홍수전, 양수청등의 친여동생이 되는 것이다. 거의 이때, 그녀는 양선교에서 홍선교로 변신한다. 소조귀도 거의 이때부터 '상제의 사위'로 변신한다.

'거의'라는 것은 쓰여져 있는 제1차 자료에는 모두 '홍선교'라는 이름에 제대로 쓰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선교성홍(宣嬌姓洪)'나 그녀의 '천왕매자(天王妹子)'라는 신분에서 추단해낸 것이다. 그러나 상제교의 방식에 따르면, 양수청, 위창휘, 풍운산, 석달개 등이 모두 홍수전의 상제와 관련이 되지만, 모두 성을 ''으로 고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선교가 성을 고칠 이유는 없는 듯하다. 이것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만일 홍선교가 양씨나 홍씨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더라도, 계속하여 '왕선교'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홍수전은 일반사람들이 왕()이라는 성을 쓰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홍선교의 부친은 성을 황()으로 바꾼다. 홍선교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면 아마도 '황선교'가 되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홍선교의 부친인 황정권의 이름에 나오는 3글자이다. 이것은 모두 피휘하여 고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씨성을 황으로 고친 것 이외에도 홍수전의 전()은 모조리 천(), (?) 혹은 권()으로 바꾸게 했다. 위정(韋正, 위창휘의 이름)'()자는 모조리 정()으로 바꾸게 했다. 아마도 '황정권'의 본명은 '왕전정(王全正)'일 수도 있다.

 

홍선교는 제1차 사료에서 정말 찾아볼 수 없는가?

사실 찾아볼 수 있다.

<<이수성자술>>에 소조귀에 대하여 얘기할 때, '천황의 여동생이 그에게 시집가서 처가 되었다'라는 문구가 있다. 비록 홍선교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분명하지 않게 쓴 기록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홍선교가 홍수전의 친여동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천경(남경)에 거주한 바 있는 장여남은 <<금릉성난기략>>에서, 소조귀를 '제서(?)'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처가 천부의 여섯 째 딸이라는 것이다. 비록 성도 이름도 적어놓지 않았지만, 사실을 이수성보다는 분명하게 적었다.

홍수전의 당제(堂弟)인 홍인간(洪仁?)1853년에 홍콩에 있을 때, 스웨덴 사람인 한산문에게 태평군에 대한 적지 않은 이야기를 구술한 바 있다. 거기에 '남자는 풍운산을 배우고, 여자는 양운교(楊雲嬌)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양운교'는 바로 소조귀의 처라는 것이다. 바로 홍선교이다.

1932, 소일산 선생은 영국 런던에서 태평천국에서 1857년에 발간한 <<천부시(天父詩)>>를 발견한다.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수의 시는 <<천부하범교도선교고(天父下凡敎導先嬌姑)>>이다. 여기의 '선교고'는 분명히 홍선교일 것이다.

최근 들어 국외에서 발견된 <<천형성지(天兄聖旨)>>에도 여러 번 소조귀가 천형하범하여 교훈을 내리고, '서왕낭'을 억압하는 내용 및 '서왕낭'의 육신의 부친인 황정권을 억압하는 내용이 있다. 이 서왕낭은 자연히 홍선교이다. 왜냐하면 '천부의 딸'만이 '육신의 부친'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부친, 하늘의 부친은 상제이다)

이상을 보면 홍선교가 믿을만한 사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기록에는 '홍선교'라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양운교'라는 말이 나왔을까? 어떤 전문가에 따르면, 풍운산의 이름을 피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운교(雲嬌)'라고 불러야 하는데, '선교'로 이름을 바꾼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믿을 바가 못된다. 왜냐하면 홍인간의 구술은 홍콩에 있을 때이므로 이미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아예 태평천국의 피휘를 몰랐고, '운교'라는 것은 한산문이 영문으로 주석해놓은 것이므로 아마도 와전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先嬌)'에 대하여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홍선교는 원래 홍선교(洪先嬌)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와전되어 선교(宣嬌)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책을 인쇄하는 자의 오타라는 것이다.(태평천국의 책이나 문건에는 오탈자가 많다). 셋째는 홍선교가 이때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고(先嬌姑)"라고 하여 죽은 자에 대한 존중을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홍선교는 도대체 어떤 일을 했는가?

홍선교의 사적에 대하여 한산문의 기록에 따르면, 주로 홍수전이 1847년 자형산에 도착했을 때, 10년 전에 상제를 꿈에 나타나서 그녀에게, "10년 후에 누군가 이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상제를 모시게 하면, 너는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고, 홍수전도 스스로 그해에 꿈을 꾸어서 상제의 둘째아들 신분 및 사자의 신분으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한 바 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꿈속에서 본건이 우연히 들어맞았다. 이는 홍수전의 명망을 더욱 높여주는 작용을 했다. 홍선교는 바로 홍수전의 친척이고, 양수청 소조귀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졸지에 그녀는 상제교의 핵심인물로 떠오른다. '천부의 여섯째 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여자신도들 사이에 영향력이 아주 컸다. 그리하여 홍수전은 '남자는 풍운산을 배우고, 여자는 양운교를 배워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따라야할 모범이 된다.

그런데,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홍선교는 금방 '너무 잘난 체 하고' '말을 함부로 한다'는 죄명으로 양수청, 소조귀에 의하여 처리된다. 양수청은 천부하범으로 소조귀에게 수권하여 홍선교에게 60대의 곤장을 치도록 한다. 소조귀도 천형하범을 빌어, '여자는 양선교를 배워라'는 문구를 '여자는 호구매(胡九妹)를 배워라'고 바꾼다. 이때부터 홍선교는 거의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다. , 그 후에 그녀가 전쟁터에서 여장군이 되었다든지, 각 왕부에서 비구름을 내렸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허구의 각색이다. 태평군에 진정한 여병은 없었다. 홍선교라는 싸울 줄이나 아는지도 모르는 가정주부가 어찌 수백 명의 여병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갈 수 있었겠는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양수청과 소조귀는 자신의 의여동생, 부인에게 이렇게 심하게 대하였을까?

아마도, 홍선교의 친가가 사곡왕씨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수청, 소조귀는 홍수전의 사촌에게서 권한을 빼앗아오려고 사곡왕씨에 탄압을 가했고, 홍선교도 그 화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홍선교가 '꿈에 상제를 보았다'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나중에 여러 번 같은 짓을 벌이다가 같은 방식으로 먹고사는 양수청, 소조귀에게 제지를 당한 것일 수도 있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모두 금전의거의 전날, 양수청, 소조귀는 다른 천부의 말을 전한다는 가짜 요마들과 치열하게 투쟁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홍선교가 이런 짓을 했음에도 곤장 60대만 쳤다면 그것은 많이 봐준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홍선교가 여자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 즉 질투를 했을 수도 있다. 소조귀는 당시에 이미 적지 않은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료를 보면 소조귀, 양수청은 홍수전을 도와주기도 하고, 위창휘의 첩을 다스리는 어록도 냈다. 홍선교는 아마도 성질을 냈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외부에 말하기 힘드니 그저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하였을 것이다.

 

홍선교의 애인

100여 년 동안 사람들은 홍선교를 위하여 애인을 많이 찾아주었다. 양수청, 석달개, 임봉상....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사료를 보면, 소조귀는 봉건부권사상이 아주 농후했던 농민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홍선교가 바람을 피우려고 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소조귀가 죽은 후에 홍수전은 '남자는 남행, 여자는 여행'으로 보냈다. 남녀를 격리시킨 것이다. 여기에 홍수전은 소조귀보다도 더욱 봉건적이다. 홍선교는 아마도 남자를 만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무슨 애인을 두겠는가?

 

홍선교의 최후

홍선교의 최후에 대하여, 전설은 아주 많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뇌한영과 함께 태평천국이 멸망한 후 홍콩에서 편안히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천경이 함락될 때 영웅적으로 희생되거나 자살했다고 한다. 이것들은 모두 허무맹랑한 말이다. 뇌한영은 1853년말에 이미 죽었다. 자연히 1846년에 홍선교와 홍콩으로 갈 수가 없다. 유천왕 홍천귀복이 포위망을 뚫고 호주로 도망치면서, 일부 여자친척들을 데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홍선교의 아들인 소유화(蕭有和)는 홍천귀복을 따라 호주로 갔다. 며칠 후에 호주에서 병사한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행방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만일 홍선교가 1864년 천경함락 시까지 살았더라면, 그녀는 분명히 성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혹은 전리품으로 입성한 상군들에게 붙잡혀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857녀에 태평천국에서 공식적으로 내놓은 글에 '선교고'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이전에 저세상으로 갔기 때문일 것이다.

 

 

23. 홍선교(洪宣嬌) : 홍수전의 여동생

 

태평천국의 내분의 주요한 원인은 여러 해 동안 집적된 내부모순과 부패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분의 도화선은 한 여인의 질투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천왕 홍수전(洪秀全)의 여동생인 홍선교였다.

홍선교는 태평천국의 여장군이고, 홍수전의 동부이모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용모가 단정하고 예뻤을 뿐 아니라, 무공도 뛰어났고, 특히 창법이 아주 뛰어나, 태평천국에서 전투에 능한 여장군이었다.

홍수전의 부친인 홍국유(洪國遊)는 모두 세 명의 부인을 두고, 삼남 일녀를 두었는데, 홍수전과 홍선교는 각각 둘째부인과 셋째부인의 소생이었다. 홍국유가 죽은 후, 집안은 점차 몰락했고, 자녀들을 각자 먹고살 길을 찾아 나섰다. 홍수전은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후 상제회(上帝會)에 가입하였고, 나중에 교주로 추대되었다. 홍선교는 유랑예인의 극단에 가입하여, 사방을 다니면서 매예(賣藝)로 생업을 유지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남편인 소조귀(蕭朝貴)를 알게 되었고, 결혼한 후에는 소씨 집안에서 살았다. 얼마 되지 않아 부부는 홍수전의 상제회에 가입하고, 태평천국의 혁명에 가담한다.

홍선교는 자신의 조건을 이용하여, 오빠의 혁명 사업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 그녀는 먼저 많은 부자들로 하여금 혁명에 참가하도록 하는데, 양수청(楊秀淸), 위창휘(韋昌輝)등이 모두 그녀의 격려하여, 만관의 자산을 들고 홍수전의 혁명군에 참가하였다.

 

홍선교에 관계된 사건 중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상제회조직에 가입한 후, 홍수전은 여동생이 영리하고 사람들과 잘 사귀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바깥으로 보내서 소식을 정탐하게 하였다. 홍선교는 확실히 오빠를 실망시키지 않고, 자기의 뛰어난 용모를 활용하여 술집이나 차루에 드나들면서 일부 지방 관리들과 관계를 맺고, 거기서 적지 않은 가치있는 정보를 얻어냈다. 홍선교가 바깥은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면서 자주 소씨 집안에 들렀는데, 거기서 소씨 집안에 자주 놀러오던 양사룡(楊嗣龍)을 알게 된다. 양사룡은 계평지방의 대지주였다. 소씨 집안에서 신분이 분명하지 않은 여자 손님인 홍선교가 자주 빛나는 눈빛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동하게 되며, 그녀에게 자주 눈빛을 주게 된다. 이렇게 하다가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되고, 홍선교는 그와 함께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였다. 양사룡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다녔는데, 점점 두 사람은 한 쌍의 애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미 상제회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남편 소조귀가 집으로 돌아왔다가 홍선교와 양사룡이 일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였다. 일시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홍선교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있는 말 없는 말을 다하여 변명하였다. 양사룡은 이 때야 비로소 홍선교가 대명이 자자한 홍수전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알았고,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듣게 되었다. 소조귀는 홍선교의 신분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눈앞의 정적은 자기 집안의 잘 아는 손님이었으므로 바로 안면을 몰수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이리저리 얘기하다가 마지막으로 붕화산의 교주 홍수전에게 일처리를 맡기자고 결정하였다.

홍수전이 결정한 것은 양사룡이 소조귀에게 면전에서 사죄하고, 소조귀는 용서해주라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사룡은 자연스럽게 상제회에 가입하게 된다. 양사룡으로 말하자면,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담량으로 남북을 다니면서 서양물건을 팔았고, 만관의 재산을 모았을 뿐아니라, 풍부한 경험과 견식을 지니고 있었다. 홍수전은 그가 기재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매우 중시하였다. 양사룡은 자기가 홍수전과 한마음으로 협력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름을 홍수전에서 따서 양수청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직위가 올라 상제회의 제2인자가 되었다.

그와 홍선교의 일은 비록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금전기의후에 태평천국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홍수전은 스스로 천왕이라고 칭하고,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운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에 봉하였다.

태평천국은 점차 북으로 확장하며, 계림, 유주를 통과하여 호남경내에 들어섰다. 태평천국은 청나라 관병의 결사적인 저지와 포위공격을 받았다. 비록 여러 번 위험에 처했으나 여러 장수의 지휘하에 위기를 벗어났다. 전쟁에서 병력의 손실이 컸다. 그러나 조정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이 계속 가담하여 태평군의 세력은 갈수록 강대해졌다. 사의도구의 격전에서 남왕 풍운산이 포를 맞아 사망하였고, 장사성을 포위 공격할 때는 서왕 소조귀가 전쟁통에 사망했다. 이로써 홍선교는 과부가 되었다.

남편을 잃은 홍선교는 비록 마음이 아팠지만, 곧 전투에 몰두하며 슬픔을 가렸다. 천경(남경)에 진입한 후에 모든 것은 안정되었다. 홍선교는 혼자서 서왕부에 거주했다. 비록 비단옷에 좋은 음식을 먹지만 고독은 피하기 힘들었다. 하루종일 아무 일없이 지내다 보니 그녀는 서양전도사를 찾아서 서양의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녀의 총명함으로 금방 고명한 의술을 익혔고, 병을 치료해주며 세월을 보냈다.

이 때 양수청은 바쁜 와중에서도 옛날의 애인 홍선교를 잊지 않았다. 소조귀가 장사에서 전사한 후, 홍선교는 주인 없는 꽃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 중이라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양수청은 모든 힘을 다하여 홍선교에 대하여 애정공세를 펼쳤다. 홍선교는 이미 이름난 의사가 되어 있었다. 양수청은 진맥을 이유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동왕부로 불렀다. 홍선교는 이 때 마음이 공허하였으므로 자신을 위로해줄 남자가 필요하였다. 양수청이 옛정을 잊지 않고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하자, 그녀는 식었던 사랑이 다시 불타올랐다.

양수청과 홍선교는 태평천국에서 모두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현재 그들은 옛 사랑을 되살리고 있으니, 자연히 사람들이 뒤에서 말이 많았다. 그리고 호사가들은 이 얘기를 홍수전에게까지 전했다. 홍수전은 속으로 생각해본 후에 여동생을 이용하여 동왕을 끌어들이고 견제하는 것이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공표했다. “천왕과 동왕은 모두 천부의 아들이다. 천왕의 여동생은 바로 동왕의 여동생이다. 형제자매간에 친하게 지내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왕래를 자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상하게 볼 것은 없다이렇게 되자, 홍선교와 양수정의 관계는 천왕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홍선교는 이후에는 양수청과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중간에 제3자가 끼어들어 그녀의 꿈을 깨트려 버렸다. 그 여인은 부선상(傅善祥)이다. 부선상은 원래 남경성의 재녀였고, 아주 아름다웠다. 태평천국이 남경에 들어온 후에 그녀는 태평천국의 여자과거의 장원이었고, 동왕부에서 일했다. 부선상은 남국의 아름다운 미모에 강남여자의 부드러움을 겸하고 있으며 매일 양수청의 곁에서 일을 했다. 자연히 양수청의 마음이 동하였고, 그의 사랑은 점점 부선상에게로 옮아갔다. 자연히 홍선교에게는 소홀하게 되었다. 홍선교는 화가 나서,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선상은 아주 총명한 여자였고, 여기에 양수청이 막후에서 도와주어, 매번 홍선교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홍선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홍수전에게 고발했다. 태평천국의 장군중에서는 일부다처가 많았고, 천경에 들어온 후에, 홍수전은 자기의 신변에 많은 미녀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이 이런 일로 질투를 느끼는 것에 대하여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적당히 구슬려서 돌려보냈다.

호승심이 강한 홍선교는 이것으로 끝내지 않고 자기만의 수단을 사용해서 양심 없는 양수청에게 교훈을 내리기로 했다. 당시 양수청은 천경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많은 태평천국의 장수들이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홍선교는 인심의 향방을 보고는 중간에서 연락해서 양수청 반대세력을 결집했다. 그 중에는 천후(天后)의 남동생인 뇌한영(賴漢英) 부승상,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 전전승상(殿前丞相) 나경수(羅瓊樹)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왕의 세력이 강대하여, 이 사람들로서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홍선교는 홍수전에게 양수청의 대권을 회수하도록 계속 권하였다. 이 때 마침 천왕 홍수전은 동왕 양수청이 스스로 만세(萬歲)”라고 칭하는데 대하여 마음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여동생등의 말을 들은 후 동왕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북왕 위창휘에게 밀서를 보내어 동왕을 제거하는데 착수했다.

북왕 위창휘는 안휘전쟁터에서 급히 천경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홍선교는 이전의 태도를 버리고, 동왕부를 적극적으로 드나들었다. 그리고 양수청에 대하여 매우 다정하게 대했다. 양수청은 망외의 기쁨으로 그녀가 예전의 문제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북왕이 천경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홍선교는 양수청에게 그를 위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줄 것을 제안했고, 양수청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날, 동왕부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손님들은 태평천국의 거의 모든 남경의 장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홍선교의 배치에 따라, 뇌한영은 만 명 이상의 병사를 동왕부의 사방에 매복시켰고, 나경수, 진일강, 위창휘 등은 모두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였다. 술이 한참 올랐을 때, 모두 웃고 떠들고 기분이 고조되었다. 홍선교는 몰래 위창휘에게 눈짓을 했으며, 위창휘는 술잔을 내려놓고, 휘릭 몸을 일으켰다. 동왕부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허리에서 칼을 번개처럼 뽑아들고, 동왕 양수청의 가슴을 찔러버렸다. 힘을 많이 주어서 칼끝이 등뒤로 나왔을 정도였다.

이러자, 동왕부는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뇌한영은 매복병사를 지휘하여 동왕부로 들어왔다. 동왕부의 친병은 칼을 뽑아 저항하였고, 쌍방은 하루를 꼬박 싸웠다. 동왕부의 세력이 철저하게 궤멸된 후에 동왕부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다. 전투 중에 진일강은 불행히 사망하였다.

여기서부터, 태평천국의 내부투쟁은 정식으로 서막을 열었다. 이어서, 위창휘는 석달개 집안의 노소를 죽였고, 천왕은 다시 위창휘를 죽여서 익왕을 끌어들였다. 익왕은 그러나 천왕 홍수전을 떠나버린다. 이런 내부의 상호간의 살해과정을 거쳐 태평천국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고, 나중에는 여러 왕 중에서 겨우 충왕 이수성만 남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 지탱하기는 힘들었다. 동치66, 청나라 군대는 마침내 천경성을 함락시킨다. 일세를 풍미했던 태평천국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천경이 함락된 날에, 홍선교는 민부로 변장하고 빠져나가 난민들 틈에 섞여서 상해로 가고, 나중에 서양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일대에서 의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24. 호설암(胡雪巖) : 어떻게 갑부가 되고 어떻게 망했는가?

: 단목사향(端木賜香)

 

 

호광용(胡光鏞), ()는 설암(雪巖), 휘주(徽州) 적계현(績溪縣) 사람.

어려서는 집안이 가난해서 겨우 2년간 서당에서 공부를 했을 뿐이다. 8살 때 남의 일을 도와주고 소를 봐주었다. 13살 때 주운 돈을 자신이 갖지 않고 돌려주면서 돈의 주인이자 대부잡량행(大阜雜糧行)의 주인 눈에 들어서 그곳의 학도(學徒)가 된다. 15살 때, 병이 든 금화(金華) 객상을 도와주어 상대방의 마음에 들어 금화로 가서 화태행(火腿行)의 학도가 된다. 이곳에서 호설암은 처음으로 은표(銀票)를 보고 마음속으로 부러워한다. 전장(錢莊)의 학도가 되려면 계산도 빨라야 하고, 주판도 잘 써야 하고, 글자로 잘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열심히 배운다. 19살 때 원하는 대로 항주의 부강전장(阜康錢莊)에 들어갈 수 있었다. 4년후, 그는 학도(學徒)에서 포가(跑街)로 승진하고, 반년 후에는 다시 출점(出店)이 된다. 주인이 그를 장반(掌盤, 사장)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그는 거절한다. 원래의 장반이 아직도 일을 할 수 있고, 자신은 바깥을 다니면서 '출점'(업무)하는 것이 전장의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27살때, 주인이 임종하면서 친구들과 장반을 불러 모은 다음 전체 전장을 호설암에게 넘겨준다.

25살 때, 즉 그가 출점으로 있을 때, 호설암은 일생에서 귀인을 만난다. 즉 낙척서생 왕유령(王有齡)이다. 호설암은 개인적으로 자신이 회수한 불량대출금 은자 500냥을 왕유령에게 주어 북경에 가서 관직을 구해보게 한다. 왕유령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북경에 가서 자신의 어릴때 놀이친구로 강서학정(江西學政)이 된 하계청(何桂淸)을 만난다. 하계청은 같은과에 진사가 된 절강순무(浙江巡撫) 황종한(黃宗漢)에게 편지를 써주고, 왕유령에게 5천 냥 은자도 준다. 왕유령은 돌아온 후 황종한을 찾아가서 서신을 주고, 돈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왕유령은 호설암의 말을 듣고 다시 돈도 갖다 준다. 그러자 즉시 관직을 얻는다. 해운국(海運局) 좌판(坐辦). 그후 왕유령은 계속 승진한다. 해운국 좌판에서 호주지부(湖州知府) 다시 절강순무까지. 그리고 호설암에게는 삼품의 후보도(侯補道)의 관직을 준다. 두 사람은 교분이 두터웠고, 관상이 결탁하여 한 사람은 관직에서 발전하고, 한 사람은 돈을 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다. 1861, 태평군이 항주를 포위 공격한다. 왕유령은 2만 냥 은표를 호설암에게 주며 두 가지 일을 요청한다. 첫째는 원병을 청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양식을 운송하라는 것이다. 호설암이 양식을 운송해왔을 때, 왕유령은 항주성을 잃고 자결한 상태였다. 호설암은 잠시 상해로 피신한다. 이때는 증국번의 추천으로 좌종당이 절강순무로 온다. 좌종당이 절강으로 진입할 때 양식이 부족했는데, 호설암이 마침 설중송탄(雪中送炭)하여 왕유령이 당초에 주었던 2만 냥 은표뿐 아니라, 2만석의 양식까지 운송해온 것이다. 좌종당은 즉시 그를 괄목상대한다. '공금인 은표를 돌려주는 것이면 되었다. 네가 운송해온 양식으로는 네 관직을 주는 것으로 하겠다. 호설암이 바로 대답한다. '저는 일을 할 줄 알지, 관리는 할 줄 모릅니다." 좌종당은 그 말을 닫고 활짝 웃는다. 원래 이 말은 호설암이 얻어들은 말로, 좌종당 본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생신조라고 한다. 이어서 좌종당은 호설암에게 남아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한다. 두 사람은 얘기하면 할수록 뜻이 맞았다. 큰 나무의 아래에 있으면 그늘이 있어 시원하다는 말이 있다. 왕유령이라는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하늘이 호설암에게 다시 좌종당이라는 큰 나무를 내려준 것이다. 호설암의 담략, 능력과 호쾌한 사람됨은 좌종당이 한번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했다. 두 사람이 결탁하자 좌종당에게는 능력있는 군수물자조달책임자를 얻은 것이 된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좌종당은 민절총독으로 승진한다. 호설암에게는 드넓은 사업의 무대가 있었다. 사업은 갈수록 커진다. 만일 좌종당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다고 한다면, 호설암은 위로는 국가를 돕고 아래로는 서민을 도왔으며 중간에서는 장사할 때는 자신을 위해서 했다. 그는 좌종당을 도와서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상첩군(常捷軍)을 조직하고,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그는 항주가 수복된 후 의장(義葬)을 거행하고, 태평군의 잔존세력을 거두었으며,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다. 그는 홍정상인(紅頂商人, 좌종당은 섬감총독으로 가기 전에 호설암의 관직을 3품에서 2품의 포정사로 올려주었고, 홍정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으로 불리었고, 부유하기는 왕이나 제후에 부럽지 않았으며. 재산이 천만을 헤아렸다. 명분 있는 부인만 12명이었고, 아래의 분호, 상호 중에서 이름 없는 여인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966, 좌종당이 섬감총독이 되고, 1년 후 다시 명을 받아 흠차대신이 되어 독판섬감군무가 되어 서념군과 섬감회란을 토벌한다. 그 후에 다시 명을 받아 흠차대신 독판신강군무가 되어 12년의 공을 들여 신강을 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상해에서 서정전운국 총판으로 있던 호설암의 공로가 뒷받침되었다. 군량을 공급해주었을 뿐아니라, 심지어 의약문제도 모두 호설암이 해결해주었다. 좌종당의 병사는 신강에 진입하자 기후가 맞지 않았다. 호설암은 설기약창(雪記藥廠)을 열어 무상으로 사병들에게 약을 공급해주고, 남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공급해준다(나중에 호경여당(胡慶餘堂)으로 바뀌는데, 남에는 경여당 북에는 동인당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청의 국정과 특색에서 호설암이 없었더라면, 좌종당의 일련의 성공과 신강수복은 없었을 것이다. 좌종당이 서부정벌에서 돌아오자 조정에서 2등각정후, 1등경기도위에 봉해지고 황마괘를 하사한다. 내각대학사의 신분으로 군기처에 들어간다. 그는 조정에 올린 글에서 여러 번 호설암을 칭찬했다: "상인들 중에서 기남자이다. 사람이 비록 상인출신이지만 호협의 기개가 있다.", "급공호의(急公好義)", "심명대의(深明大義)", "실은 전선에서 싸우는 장수들과 다를 바 없다" 등등. 어쨌든 좌종당이 이끌어주어, 호설암은 서태후를 만난다. 서태후는 기뻐하며 강소, 강서, 절강, 복건 4개성의 세수대리권을 부강전장에 내린다. 그 외에 좌종당은 홋ㄹ암에게 황마괘를 하사하도록 하고, 호설암의 모친에게는 1품고명부인에 봉해지도록 한다.

 

상인이 이 정도에 이르면 더 잘 나갈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높은 곳에 있으면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상인에게는 보장이 없다. 상인이 관리와 결탁하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보장책일 뿐이다. 먼저 좌종당이 총애를 잃는다. 그는 호남사람의 고집 센 기질이 있어 확실히 전쟁터에는 적합하지만, 행정중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양강총독으로 밀려난다. 나중에 좌종당도 어느 정도 알았다. 호설암이 자신을 위하여 외국에서 돈을 빌리고, 군수물자를 조달해주면서 중간에서 커미션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호설암에 대한 호감이 점차 줄어든다. 이와 동시에, 호설암의 사업도 최대한 확장된다. 그는 서양인과 싸워서 생사시장을 독점하는데 1천여만 냥의 은자를 들인다. 담보인으로 회풍은행(HSBC)에서 400만냥 은자의 대출을 받는다. 1차 상환기일이 도래했고, 각성에서는 자신이 분담한 금액을 상해로 송금했다. 그러나 좌종당의 정치적 적수인 이홍장은 자신의 수하인 회계(淮係) 관리를 시켜 그 돈을 동결시킨다. 호설암이 예전에 커미션을 받은 사실이 회계 관리에 의하여 서태후에게 보고된다. 서태후는 대노하여 배로 배상받고 엄히 처벌하도록 명령한다. 중국 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금융시장은 돌변한다. 호설암이 각지에 설치한 부강전장은 인출사태가 벌어진다. 호설암의 상업제국은 돌연 붕괴하고 호설암은 일패도지한다. 비록 그러하긴 했지만, 그는 마무리를 비교적 깔끔하게 한다. 첫째, 직접 부도를 선언하지 않고, 자산을 청산한다. 예금자를 3등급으로 나누어 제1등은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원금과 이자를 모두 상환한다. 2등은 돈이 있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들로 역시 원금과 이자를 보낸다. 3등은 중산층고객들에게는 갚아주지 못한다. 둘째, 첩들에게는 1인당 수백 냥의 은자를 주어서 내보낸다. 호설암의 집을 떠나서라도 중등이상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셋째, 형부상서, 흠차대신 문욱(文煜)이 와서 가산을 몰수한다. 호설암은 군수물자 유용죄로 경성에 끌려간다. 비록 공친왕 등이 그를 위하여 애를 써주었지만, 대국은 이미 결정되었다. 호설암은 겨우 몸만 풀려나서 3개월 후 집으로 돌아온다. 호경여당도 남는데, 문욱이 넘겨받아 관리했다.

1885, 좌종당이 죽고, 문욱도 죽는다. 서태후는 각로 상소문의 압력으로 호설암을 참형에 처할 준비를 한다. 관청도 인간적이었다. 고의로 공문절차를 늦추어 공문서가 항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호설암이 하루 전에 사망했다. 그때는 188511월로 향년 62세이다. 그를 마지막까지 따른 아홉째부인은 호설암의 장례식을 마친 후 목을 매어 자결한다. 그저 늙은 모친만 남는다. 예전에 호설암의 집 앞을 지날 때면 관리들도 가마에서 내리고 말에서 내려야 했던 1품고명부인인 호설암의 모친.

백가강단에서 호설암을 얘기했던 증사강(曾仕强)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천도기만(天道忌滿), 인도기전(人道忌全)".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그저 사정의 일면이다. 사정이 또 다른 면이 아마도 더욱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제도의 완비와 보장이다. 한 마리로 말해서, 중국 상인은 제도의 안전이 없다. 그저 안전을 인사(人事)에 의탁한다. 그러나 인사라는 것은 자신의 원이능 제외하고도 통제 불가능한 정치와 관료사회가 있다. 어느 정도 제도에 희생된다. 더더구나 좌종당, 이홍장의 상, 회 두 계파의 싸움에 희생된 측면이 있다. 그 외에 금융과 시장 자체의 원인도 있다.

호설암의 모친은 호설암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들아. 맨날 돈 버는 데만 골몰하지 말아라.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뭐하려고 그러느냐."

이 말은 확실히 의미심장하다. 돈이라는 것은 일시의 부귀영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은 가져다 주지 못한다. 중국의 상인은 오늘날까지도, 관상결탁의 길을 걷는다. 역시 제도적인 보장이나 최소한의 안전감도 없는 것이다.

저장성 항저우의 호설암 고택